황제께서 깊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밝은 지혜로 만물을 비추시며 널리 감로로 씻으시어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셨습니다. 불공(不空)은 외람되게도 성은을 입어 번역을 맡게 되어 특히 황제의 명을 받들어 수도의 의학(義學:의론을 배우는 학문) 사문인 양분(良賁) 등 16인을 내도량(內道場:왕실 안의 수행처)에 모이게 하여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과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 등 경전의 번역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불법을 찬탄하고 일으키신 공덕으로 황제께서 깨달음에 이르시고 큰 복을 입으시길 비옵니다. 생각해 보건대 『대성문수사리보살찬불법신경(大聖文殊師利菩薩讚佛法身經)』의 범본(梵本)에 의거하면 마흔한 가지 예가 있는데, 먼저 한 것에 대해 말하자면 단지 열 가지의 예가 있을 뿐이며, 문장이 완비되지 않았고 공덕에 대한 찬탄도 원만하지 않아 성자(聖者)의 간절한 마음[懇誠]이 어긋나고 또 중생들에 대한 수승한 이익이 결여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불공이 먼저 가지고 있던 범본을 함께 갖추어 지금 번역하여 세간에 전해지도록 유포하오니, 널리 이익이 되고 많은 도움이 있기를 바라오며, 나머지 참회의궤(懺悔儀軌) 등은 옛 판본과 같으니 여기에서 다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때는 대당(大唐) 영태(永泰:代宗) 원년(元年, 765) 여름 4월입니다.
대성문수사리보살찬불법신례 (大聖文殊師利菩薩讚佛法身禮)
불공(不空) 한역 김진철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 취봉산(鷲峯山)에서 대비구 대중 2만 5천 인과 함께 계셨다. 이들은 모두 아라한으로 72나유다(那庾多) 구지(俱胝)나 되는 대보살마하살들이었는데, 문수사리보살을 상수로 하였다. 그 때 문수사리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단정히 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하고 나서 합장하고 공경하며 여래를 찬탄하면서 가타(伽他)를 말하였다.
색(色)도 없고 모양도 없으시고 근(根)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으심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가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심은 6입(入)을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삼계를 벗어나 허공과 같이 여기심은 모든 욕심에 물들지 않으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가고 오며 잠들었거나 깨어 있을 때의 모든 위의 가운데에서 항상 적정한 까닭에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가고 옴이 다 평등하고 이미 평등에 머무심은 평등이 허물어지지 않으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모든 무상정(無相定)에 들어 모든 법의 고요함을 보심은 항상 삼매에 계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머묾도 없고 관함도 없으며 법에 대해 자재함을 얻으심은 지혜의 작용이 항상 일정하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6근(根)에 머물지 않으시고 6경(境)에 집착하지 않으심은 항상 한 가지 모습[一相]으로 계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무상(無相) 가운데 들어 모든 번뇌[染]를 끊으심은 명색(名色)을 멀리 여의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유상(有相)에 머물지 않고 또 모든 형상을 여의심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 드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분별하고 사유하지 않으시며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서 머무심은 모든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공(空)과 같이 장식(藏識)이 없고 물듦도 없고 희론(戱論)도 없으심은 3세를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허공에 중간과 끝이 없듯이 모든 부처님 마음도 또한 그러하심은 마음이 허공과 같으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모든 부처님은 허공과 같은 모양이고 허공 또한 모양 없음은 모든 인과를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물에 비친 달이 젖지 않듯이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심은 나[我]라는 생각을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모든 온(蘊)에 머물지 아니하고 처(處)와 계(界)에도 집착하지 않으심은 전도(顚倒)를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항상 법계와 같고 아견(我見)을 모두 다 끊으심은 양극단[二邊]을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모든 색(色)에 머물지 않고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심은 법 아닌 것을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장애가 없는 법을 깨달아 모든 법에 통달함은 악마의 법을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있지도 않고 또 없지도 않고 있고 없음도 얻지 않으심은 모든 말을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아만(我慢)의 깃대를 꺾어 같은 것[一]도 아니고 다른 것[二]도 아닌 것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신(身)ㆍ구(口)ㆍ의(意)를 잃음이 없고 3업(業)이 항상 고요함은 비유를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일체지(一切智)에 항상 머물러 공용 없음을 나투심은 모든 허물을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미묘한 무루(無漏)의 생각으로 한계도 없고 분별도 없으심은 정(情)과 정 아님[非情]이 평등하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마음에 걸림이 없으시니 일체의 마음을 모두 아심은 ‘나다, 남이다’라는 생각에 머무시지 않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걸림도 없고 관함도 없이 항상 걸림 없는 법에 머무심은 모든 마음을 멀리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마음에 항상 반연함이 없고 자성도 얻지 않으심은 평등하여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의지함이 없는 마음으로 모든 국토[刹土]를 다 보심은 모든 유정을 아시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모든 법의 살바야(薩婆若:一切智)가 필경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모든 법은 환(幻)과 같고 환과 같음도 얻지 않으심은 모든 환법(幻法)을 여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부처님은 항상 세간에 계시나 세간법에 물들지 않으심은 세간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일체지(一切智)는 항상 상주하는데 성품도 공하고 경계도 공하며 말도 또한 공한 까닭에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같지도 않고 또 다르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또 멀지도 않으심은 법에 대해 동요하시지 않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일념(一念)에 금강정(金剛定:금강삼매)을 얻고 찰나에 등각(等覺)을 이루심은 그림자 없음을 증득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3세법(世法)에 대하여 모든 방편을 성취하심은 열반에 동요하시지 않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열반은 항상하여 동요하지 않고 이 언덕 도 저 언덕도 없음은 방편을 통달하셨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모양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심도 없고 희롱도 없으심은 있고 없음에 머무시지 않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지혜 있는 곳[智處]은 다 평등하고 고요하여 분별이 없으심은 나와 남이 하나[一相]이기 때문이니 그 관함조차 없음에 예경하나이다.
일체가 평등한 예(禮)에는 예도 없고 예 아닌 것도 없는 것은 하나의 예에도 심식이 두루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니 실상(實相)의 체(體)에 함께 돌아가나이다.
그 때 세존께서 문수사리보살의 말을 찬탄하셨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그대는 지금 여래의 공덕과 모든 법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잘 설하였다. 문수사리여,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유정을 교화하여 벽지불을 이루게 한다고 하더라도 이 공덕에 대해 듣고 일념으로 믿고 아는 사람보다 못한 것이니라. 이는 곧 백천만 배나 훌륭한 것이니라. 이와 같이 전전(展轉)한다 하더라도 찬탄하거나 비유하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자세한 것은 본 경전에서 설하신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