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6_1109_c_01L대승연생론(大乘緣生論)


울능가(鬱楞迦) 지음
불공(不空) 한역
권영대 번역


하나[一]에서 셋[三]이 생기고,
셋이 전전(展轉)하여 여섯[六]이 생긴다.
여섯[六]에서 둘[二]이 생기고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기며,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

여섯에서 셋이 있고,
이 셋에서 다시 셋이 있다.
셋에서 넷이 생기고,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

셋에서 하나가 생기고,
저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기니,
그 가운데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

열두 가지의 차별을
지혜로운 사람은 공(空)이라고 설하는데,
연생지(緣生支)의 힘 때문이니
마땅히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

무지(無知)와 업(業)ㆍ식(識),
명색(名色)ㆍ근(根)ㆍ세 가지 화합(和合:觸)과
앎[知:受]ㆍ갈[渴:愛]ㆍ취(取)와
모임[集:有]ㆍ나옴[出:生]ㆍ무르익음[熟:老]ㆍ차종(次終; 死)과

첫 번째와 여덟 번째ㆍ아홉 번째는 번뇌이고,
두 번째와 열 번째는 업(業)이며,
나머지 일곱은 모두 고(苦)이니,
이 세 가지에 열두 가지 법이 포함된다.

처음의 둘은 과거이고,
뒤의 둘은 미래이고,
나머지 여덟은 현재이니,
이것을 삼시법(三時法)이라고 한다.

번뇌의 업은 그 과보[報]를 받으며
과보는 또 번뇌를 일으킨다.
번뇌는 또 업을 생기게 하고
또 업을 말미암아서 과보가 있다.

번뇌를 여의면 어찌 업이 있겠으며,
업을 여의었는데 어찌 과보가 있겠는가.
과보가 없으면 번뇌를 여읜 것이니,
이 셋이 각각 적멸한 것이다.

오지(五支)의 원인이 결과를 낳으니
이름하여 번뇌업이라 한다.
칠지(七支)로써 결과를 삼으니
일곱 가지의 괴로움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원인[因]은 공(空)으로서 결과[果]가 없고
결과 가운데에는 또한 원인이 없다.
원인 가운데 또한 원인이 없고
결과 가운데 또한 결과도 없으니,
지혜로운 자는 공과 상응한다.

세간의 네 가지 지(支)는
인과 과가 합치하는 까닭에 있고
번뇌업(煩惱業)의 과와 결합하면
마땅히 여섯 부분이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유(有)의 마디[節]가 포함되기 때문에
두 개의 마디와 세 가지 요약[略]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섞여 마디를 이루므로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둘과 둘과 셋과 셋과 둘,
괴로움의 시기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짓는 자[作者]와 장계(藏界)
경계(境界), 전생(轉生)과 흘러감[流行]이다.

미혹(迷惑)ㆍ발기(發起)의 결과와
등류과(等流果)의 둘이 되는 것은
근(根) 중에서
하나ㆍ하나ㆍ셋ㆍ둘과 상응한다.

열뇌과(熱惱果)ㆍ빈핍과(貧乏果)와
전출과(轉出果)ㆍ진류과(津流果)는
남은 부분의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과 상응한다.

여기에 있는 열두 가지는
화합하는 까닭에 연생(緣生)이니
중생도 없고 명(命)도 없고
공(空)하여 없음을 지혜[慧]로써 안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고,
무아(無我)ㆍ무아(無我) 중에1)
이 네 가지의 무지(無知)의 공이다.
나머지 지(支)도 또한 마찬가지다.

단멸[斷]과 상주[常]의 두 극단[二邊]을 여의면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니
만약 이것을 깨달아 성취하면
그 깨달음의 주체[覺體]가 바로 모든 부처이다.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대중들에게
무아(無我)를 설했으니,
일찍이 『성유경(城喩經)』에서
도사(導師)는 이 뜻을 설했다.

『가전연경(迦栴延經)』에서는
정견(正見) 및 공견(空見)을 설하고
『파라우나경(破邏遇拏經)』에서도
또한 수승한 공[殊勝空]에 대해 설하셨다.

연생(緣生)을 만약 올바로 알면
그 앎[知]은 공과 상응하며
연생을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저 공도 알지 못한다.

공에 대하여 만약 아만(慢)을 일으키면
온(蘊)에 대해 싫어하지 않으니
그러나 악취공(惡趣空)이라 이름하면
곧 연생의 뜻을 미혹하는 것이다.

연생에 미혹하지 않는 까닭에
아만[慢]을 여의어서 저 공을 알고
그리고 온(蘊)을 싫어하는 까닭에
업과(業果)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다.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겨나니
또한 이 공에 반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을 반연하여 반드시 이것이(업보의 수용) 있는 것이니
업보의 수용(受用)이 갖춰진다.

십이지(十二支)의 차별은 앞에서
이미 연생이라 설했다.
그것은 번뇌ㆍ업ㆍ고의 셋 가운데
법대로 포섭된다.

세 가지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일곱이 생기며
일곱에서 다시 셋이 생기니
이와 같이 바퀴처럼 돌고 돈다.

인과로 인해 생기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공한 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연을 빌려서 번뇌가 생기고
연을 빌려서 또한 업이 생기며
연을 빌려 또한 과보가 생기니
하나라도 연 없이 생긴 것은 없다.

송(誦)ㆍ등(燈)ㆍ인(印)ㆍ경(鏡),
음(音)ㆍ일광(日光)ㆍ종자(種子)ㆍ초(醋)
그리고 오온은 계속하여 이전하지 않나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 두 가지를 관해야 한다.

연생삼십론 본송을 마친다.
『연생삼십론』을 나는 마땅히 순서에 따라 차례로 해석할 것이다.

하나에서 셋이 생기고,
셋이 전전(展轉)하여 여섯이 생긴다.
여섯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기며,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

‘하나에서 셋이 생긴다’는 것은 소위 무지를 말한다. 이 무지는 무명이라고도 말한다. 고ㆍ집ㆍ멸ㆍ도를 깨달아 알지[覺知] 못하는 까닭에 무지라 하고, 무지에 의하는 까닭에 곧 유복(有福)ㆍ비복(非福)ㆍ부동(不動)으로 이른바 세 가지 행이 있게 된다. 아울러 신행(身行)ㆍ구행(口行)ㆍ심행(心行) 등이 그로부터 전전하여 생겨난다. ‘셋이 전전하여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삼행(三行)으로부터 육식신(六識身)이 생기는 것으로서 소위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이다. ‘여섯에서 둘이 생긴다’는 것은 저 육식신이 전전하여 두 가지를 생기게 하는 것으로 소위 명색(名色)이다.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명과 색의 두 가지가 전전하여 육처를 생기게 하는 것으로 소위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이다.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저 육처가 전전하여 육촉을 생기게 하는 것으로 소위 안촉(眼觸)ㆍ이촉(耳觸)ㆍ비촉(鼻觸)ㆍ설촉(舌觸)ㆍ신촉(身觸)ㆍ의촉(意觸)이다.

여섯에서 셋이 생기고,
이 셋에서 또 셋이 생긴다.
셋에서 또 넷이 생기고,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

‘여섯에서 셋이 생긴다’는 것은 저 육촉으로부터 전전하여 삼수(三受)가 생겨나는 것으로 소위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이 셋에서 또 셋이 있다’는 것은 다시 이 세 가지 수(受)가 전전하여 세 가지 애착[愛]이 생겨나는 것으로 소위 욕애(欲愛)ㆍ유애(有愛)ㆍ무유애(無有愛)이다. ‘셋에서 또 넷이 생긴다’는 것은 저 세 가지 애착으로부터 전전하여 네 가지 취(取)가 생겨나는 것으로 소위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는 것은 저 네 가지 취가 전전하여 세 가지 유(有)가 생기는 것으로 소위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셋에서 하나가 생기고,
그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긴다.
그 가운데에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

‘셋에서 하나가 생긴다’고 하는 것은 저 세 가지 유(有)를 연생(緣生)으로 지어서 앞으로 한 가지의 생(生)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긴다’는 것은 한 가지로부터 마땅히 노(老)ㆍ사(死)ㆍ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뇌(惱) 등의 일곱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는 것은 이 과정이 무명에서 시작하여 고(苦)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한량없는 갖가지 괴로움이 여기에 포섭된다고 간략하게 설하신 것이다.

열두 가지의 차별을 지혜로운 사람은
공(空)이라고 설한다.
연생지(緣生支)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땅히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

‘열두 가지의 차별을 지혜로운 사람은 공이라 설한다’는 것은 이 무지 등의 차별에 열두 가지 지(支)가 있고, 저 일체는 모두 자성이 공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했듯이 오직 공법(空法)일 뿐이니, 공으로부터 공이 생겨나고 법으로부터 법이 생겨나는 것이다. ‘연생지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땅히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차례로 지력(支力)을 낳는 까닭에 저 열두 가지 법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중 미혹(迷惑)의 상(相)인 것이 무명이다. 저 행구처(行句處)2)는 쌓아서 마땅히 상(相)이 있는 것이 바로 행(行)이다. 저 식구처(識句處)는 다음의 생지(生支)를 받아 상을 전변하여 낸 것이 바로 식이다. 저 명색구처(名色句處)는 명신(名身)과 색신(色身)이 화합하는 상이 바로 명색이다. 저 육처구처(六處句處)는 근(根)을 안치하는 상이 바로 육처이다. 저 촉구처(觸句處)는 안(眼)ㆍ색(色)ㆍ식(識)이 함께 모이는 상이 바로 촉이다. 저 수구처(受句處)는 애(愛)ㆍ비애(非愛)의 전도를 수용하는 상이 바로 수이다. 저 애구처(愛句處)는 만족함이 없는 상이 바로 애이다. 저 취구처(取句處)는 집지(執持)ㆍ섭취(攝取)하는 상이 바로 취이다. 저 유구처(有句處)는 명신(名身)ㆍ색신(色身)의 상이 바로 유이다. 저 생구처(生句處)는 온(蘊)이 생기하는 상이 바로 생이다. 저 노구처(老句處)는 성숙의 상이 바로 노이다. 저 사구처(死句處)는 명근(命根)이 단절되는 것이 바로 사이다. 저 수구처(愁句處)는 근심ㆍ고민하는 것이 바로 수이다. 저 탄구처(歎句處)는 소리 내어 한탄하는 것이 바로 탄이다. 저 고구처(苦句處)는 몸이 괴로움을 받는 상이 바로 고이다. 저 우구처(憂句處)는 마음이 괴로움을 받는 상이 바로 우이다. 저 모든 열뇌구처(熱惱句處)는 손해(損害)를 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뇌이다.

무지(無知)와 업(業)ㆍ식(識),
명색(名色)ㆍ근(根)ㆍ세 가지 화합[三和]
영(領)ㆍ갈(渴; 愛) 및 취(取),
집(集)ㆍ출(出)ㆍ숙(熟)ㆍ후변(後邊)과

이 중에서 무지는 무명이다. 업이란 행이고, 식이란 요별(了別)이며, 명색이란 오온의 모임이고, 근은 처(處)이며, 삼화란 촉(觸)이다. 영납(領納)이란 수(受)이고, 갈이란 애(愛)이며, 취란 집지(執持)이다. 수용(受用)이란 유(有)이고, 기(起)란 생(生)이며, 숙이란 노(老)이고, 후변이란 사(死)이다.
또 이것들은 차별을 서로 포섭하므로, 나는 마땅히 차례로 그것을 설할 것이다. 그 중에 번뇌와 업의 차별이 있다.

첫 번째와 여덟 번째, 아홉 번째는 번뇌이고
두 번째와 열 번째는 업(業)이며,
나머지 일곱은 모두 고(苦)이니
셋에 열두 가지 법이 포함된다.

세 가지 번뇌란 무명ㆍ애ㆍ취이며, 두 가지 업은 행ㆍ유이며, 일곱 가지 보(報)는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 등이다. 이 열두 가지 법은 세 종류에 포섭된다.
또 시간[時]에 의한 차별이 있다.

처음의 둘은 과거이고
뒤의 둘은 미래이며
나머지 여덟은 현재이니,
이것을 삼시법(三時法)이라 한다.

무명과 행의 처음 두 가지는 과거시이며, 생ㆍ노사의 뒤의 두 가지는 미래시이다.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의 여덟 가지는 현재시이다.
또 이것들은 각각 차례로 서로 생겨난다.

번뇌의 업이 과보를 감응하며
과보는 다시 번뇌를 생기게 한다.
번뇌는 또 업을 생기게 하고
업으로 인해 또 과보가 있게 된다.

번뇌ㆍ업ㆍ과보의 세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저 번뇌로 인하는 까닭에 업이 있고, 업으로 인하는 까닭에 과보가 있다. 또 과보로 인하는 까닭에 번뇌가 있고, 번뇌로 인하는 까닭에 업이 있으며, 업으로 인하는 까닭에 과보가 있다.
【문】‘번뇌가 다함으로 인해 각각 적멸(寂滅)하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무엇인가?

【답】번뇌를 여의었으니 어찌 업이 있겠는가.업을 여의었으니 어찌 과보가 있겠는가,과보가 없으면 번뇌를 여읜 것이니,이 셋이 각각 적멸한 것이다.

만약 그 마음에 번뇌의 오염이 없다면 업이 모이지 않는다. 만약 업을 짓지 않으면 과보를 받지 않고, 만약 과보를 멸한 자라면 번뇌를 낳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 셋은 각각 적멸하다.
또 이것들은 인과의 분(分)이 있다.

다섯 가지[五支]의 원인이 결과를 일으키나니
이름하여 번뇌의 업이라 한다.
칠지(七支)로 결과를 이루니
일곱 가지 괴로움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의 인을 이름하여 번뇌업이라 한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나니, 무명ㆍ행ㆍ애ㆍ취ㆍ유이다. ‘일곱 가지의 과가 전변하여 생긴다’라는 것도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일곱 가지의 괴로움이란 소위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이다.
또 이 인과의 두 가지는 공이다.

원인(因) 가운데 공(空)하므로 결과(果)가 없고
결과 가운데에는 또한 원인이 없다.
원인 가운데 또한 원인은 없고
결과 가운데 또한 결과도 없나니,
지혜로운 자는 공과 상응한다.

만약 여기에서 설하는 원인과 결과 두 가지 중에서 만약 원인이 공하면 결과도 또한 공하고, 결과가 공하면 원인도 또한 공하고,원인이 공하면 원인도 또한 공하고, 결과가 공하면 결과도 또한 공하다. 이 4구와 마땅히 서로 상응해야 한다.
또 여기에도 분별이 있다.

세간의 네 가지 지(支)는
인과가 합치하는 까닭에 있다.
번뇌와 업과 과가 결합하면
육지(六支)가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간의 네 가지 지는 인과가 합치하는 까닭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삼세의 다섯 가지 인(因)과 일곱 가지 과(果)를 설한 것으로서 총체적으로 줄이면 네 가지가 된다. 차례로 네 가지 구분이 있다. 그 중 무명ㆍ행은 과거시의 두 법으로 초분(初分)이 된다.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는 현재시로 제2분이 된다. 애ㆍ취ㆍ유ㆍ역시 현재시로 제3분이 된다. 생ㆍ노사는 미래시의 두 법으로 제4분이 된다. 이것을 네 가지 구분이라 한다. ‘번뇌ㆍ업ㆍ과보와 결합하면 육지가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번뇌와 업과 과보의 세 가지가 결합해 2근(根)이 되면 곧 6분(分)이 된다. 그 가운데 무명에서 수에 이르기까지는 무명이 근이 되고, 애에서 노사에 이르기까지는 애가 근이 된다. 무명근 중에서 무명은 번뇌분이고 행은 업분이며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는 보분(報分)이다. 애근 가운데 애ㆍ취는 번뇌분이고, 유는 업분이고, 생ㆍ노사는 보분이다.
또 마디의 구분과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유(有)의 마디가 포함되기 때문에
두 개의 마디와 세 가지 요약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섞여 마디를 이루므로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유(有)가 마디의 기본이 되어 두 개의 마디가 생긴다. 이를테면 유와 생, 두 가지 사이가 첫 번째 마디이다. 행과 식 두 가지 사이가 두 번째 마디이다. 이 두 개의 마디는 모두 업과 과보의 마디이다. 수와 애 중에는 원인과 결과가 함께 섞여 있으므로 세 번째 마디이다. 이 세 개의 마디는 또 네 가지 전체적인 요약[總略]이 있다. 무명ㆍ행의 두 가지는 첫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고, 식ㆍ명ㆍ색ㆍ육입ㆍ촉ㆍ수, 다섯 가지는 두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며, 갈애ㆍ취ㆍ유, 세 가지는 세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고, 생ㆍ노사, 두 가지는 네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다. 이것을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라고 말한다.
또 이런 법 가운데 위시(位時)의 차별이 있다.

둘[二]과 둘과 셋[三]과 셋과 둘로
괴로움의 상태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짓는 자[作者]ㆍ장계(藏界)ㆍ경계(境界)와
전생(轉生)ㆍ유행(流行)이다.

법이란 무명ㆍ행을 설해 두 가지가 되며, 식ㆍ명색ㆍ육처를 설해 세 가지가 되며, 촉ㆍ수를 설해 두 가지가 되며, 애ㆍ취ㆍ유를 설해 세 가지가 된다. 또 둘이란 생ㆍ노사를 설해 두 가지가 된다. 이들 다섯 가지 법이 고통의 지위[苦位] 가운데 작자(作者), 태장(胎藏), 경계(境界), 전생[發轉], 출생(出生)이고 그 가운데서 유행(流行)하는 것이니 숫자대로 알아야 한다. 그 중 무명ㆍ행 두 가지는 고통의 지위 가운데 작자가 된다고 설한다. 식ㆍ명색ㆍ육처의 세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태장으로 삼고, 촉ㆍ수 두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경계로 삼고, 애ㆍ취ㆍ유의 세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발전(發轉)으로 삼고, 생ㆍ노사의 두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유행으로 삼는다.
또 과의 차별이 있다.

미혹과(迷惑果)와 발기과(發起果)와
보과(報果)와 유과(流果)의 둘은
상응하는 근(根) 중에서
하나ㆍ하나ㆍ셋ㆍ두 가지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이것은 무명근과 애근이다. 무명근의 초분에서 미혹과ㆍ발기과ㆍ보과ㆍ등류과(等流)를 이름하여 네 가지 과(果)라 한다. 하나ㆍ하나ㆍ셋ㆍ두 가지로 나뉜 가운데 차례대로 상응해야 한다. 그 가운데에 무명이 미혹과이며, 행이 발기과이며, 식ㆍ명색ㆍ육처가 보과이며, 촉ㆍ수가 등류과이다.
또 나머지 남은 과가 있다.

열뇌과(熱惱果)ㆍ결단과(缺短果)와
전출과(轉出果)ㆍ등류과(等流果)는
남은 부분의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과 상응한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제2 애근분 중에서 열뇌ㆍ결단ㆍ전생ㆍ등류과 등은 숫자의 순서대로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에 상응한다. 그 가운데 애ㆍ취는 열뇌과이며, 유는 결단과, 생은 전출과, 노사는 등류과이다. 이와 같이 이것들에는 여덟 가지 과가 있다.

이 열두 가지는
화합하는 까닭에 연생(緣生)한다.
중생도 없고 명(命)도 없으며
공(空)하여 없음을 지혜로써 안다.

이와 같이 무명이 처음이고 노사가 끝인 이 열두 가지는 화합이 수승[勝]한 까닭에 각각 연생하니,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공하여 없음을 지혜로써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중 ‘중생이 없다’는 것은 견고하지 않은 까닭이며,‘수명이 없다’는 것은 무아로써인 까닭이며, ‘공’하여 없다는 것은 짓는 자가 없는 까닭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고,
무아(無我)ㆍ무아중(無我中)
이 네 가지는 무지(無知)의 공이고
나머지 지(支)도 또한 마찬가지다.

무지는 무아이다. 이 가운데 무지는 아소(我所; 나의 것)가 없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무아 가운데 무지는 없다. 네 가지 무지ㆍ무아소 가운데 또한 무지의 공도 없다. 네 가지가 차례로 무지의 공인 것처럼 이와 같이 행 등의 나머지 지(支)도 또한 모두 공이니,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한다.

단멸[斷]과 상주[常]의 두 극단[二邊]을 여의면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니
만약 이것을 깨달아 성취하면
그 깨달음의 주체가 바로 모든 부처이다.

유(有)는 상(常)에 대한 집착이고, 무(無)는 단(斷)에 대한 집착이다. 이 두 극단으로부터 연(緣)이 생기는 까닭에 저것이 생긴다. 저 모든 유 가운데서 두 극단을 여의면 중도에 부합하는 것이니, 만약 이 뜻을 모르면 곧 모든 외도가 두 극단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으면 곧 일체의 모든 부처라서 부처님처럼 세간에서 능히 성취할 수 있지만, 다른 자는 아니다.

깨닫고 나서 대중들에게
성선(聖仙)은 무아를 설했다.
일찍이 『성유경(城喩經)』에서
도사(導師)는 이 뜻을 설했다.

세존은 이 중도를 깨달았다. 깨닫고 나서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음을 설하셨다. “너희들 비구는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소위 ‘나’ㆍ‘내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범부나 별로 배우지 못한 부류는 가짜의 시설(施設)을 따른다. 또 비구가 나와 내 것을 일으킬 때 고가 생겨나며, 없앴을 때 고가 멸한다.”
『성유경』 가운데서 도사가 이미 그 뜻을 설한 바와 같다.

『가전연경(迦栴延經)』에
정견(正見) 및 공견(空見)을 설하고
『파라구나경(破邏具拏經)』에
또한 수승한 공(空)에 대해 설한다.

이들 세 가지 경과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상을 세존께서는 이미 널리 설하셨다.

연생(緣生)을 만약 올바로 알면
그 앎[知]은 공과 상응하며
연생을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저 공도 알지 못한다.

앞에서 연생을 설했듯이, 만약 정지(正知)가 있으면 차이가 없음을 아는 것인데, 다시 무엇을 알겠는가. 소위 공에 대한 앎이다. ‘연생을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연생에 대하여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그 공에 대하여 능히 이해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니, 그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공에 대하여 만약 만(慢)을 일으키면
곧 온(蘊)을 싫어하지 않고
만약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면
연생의 뜻을 미혹한다.

‘공에 대하여 만약 만을 일으키면 곧 온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약 공에 대한 아만심을 일으키면 곧 오온을 싫어해 여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면, 연생의 뜻을 미혹한다’는 것은 가령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이 연생의 뜻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 가지 견해에서 어떠한 견해를 따라서 취할 것인가. 첫째는 단견, 둘째는 상견, 셋째는 자재화어(自在化語; 자재하게 변화하는 말), 넷째는 일체숙업작(一切宿業作; 일체가 숙세의 업이 지은 것임)이다.

연생에 미혹하지 않는 까닭에
그는 만(慢)을 여의고 공을 안다.
그리고 온을 싫어하는 까닭에
업과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다.

‘연생에 미혹하지 않는 까닭에, 그는 만을 여의고 공을 안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것처럼 각각의 연생 가운데서 만약 미혹된 마음이 없고 아울러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만을 여읜다면, 그러면 능히 법대로 공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온을 싫어하는 까닭에, 업과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온 가운데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까닭에 세간의 윤회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온을 싫어해 여의는 까닭에 업과의 상속에 대해 전도되지 않고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이 뜻은 무엇인가.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기니,
이것을 반연하지 않음이 없다.
연이 공하므로 반드시 이러한
업보의 수용(受用)이 있게 된다.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기니, 이것을 반연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번뇌의 업보가 앞에서 설한 것처럼 그가 이와 같은 선업과 불선업으로써 중생을 밀어내어 옆 또는 위와 아래로 상속해 생겨난다. 만약 이 업이 아니라면 연을 짓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업을 짓지 않더라도 과보를 받고, 업을 지어도 곧 없어진다. ‘연이 공하므로 반드시 이러한 업보의 수용(受用)이 있게 된다.’는 것은, 만약 이것들 선ㆍ불선업으로부터 과보의 수용이 있으면 자성은 공한 것이다. 본래 ‘나’가 없으니 연을 지어 발생하더라도 그 성품은 공이란 걸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뜻을 지금 다시 간략히 설한다.

열두 가지의 차별이
연으로 생김은 이미 앞에서 설하였다.
저 번뇌와 업과 괴로움의
셋 가운데 법대로[如法] 포섭된다.

무명이 처음이고, 노사가 끝이니, 이 열두 가지 연생의 차별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 중 셋은 번뇌이고, 둘은 업 , 일곱은 괴로움으로서 모두 포섭된다.

세 가지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일곱이 생기며
일곱에서 다시 셋이 생기니
이와 같이 바퀴처럼 돌고 돈다.

무명ㆍ애ㆍ취의 세 가지로부터 생기는 것이 생ㆍ유의 두 가지이다. 그 둘로부터 생기는 것이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의 일곱 가지이다. 그 일곱 가지로부터 앞에서 설한 것처럼 또 세 종류가 생긴다. 그 셋에 또 둘이 있고, 다시 일곱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두 종류는 차례대로 끊이지 않으면서 마치 바퀴처럼 돌고 돈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공한 법(空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서 무명 ㆍ행ㆍ애ㆍ취ㆍ유의 다섯 가지를 원인이라 하고,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의 일곱 가지를 결과라 한다. 이것들이 있는 보편적인 세간, 즉 아(我), 중생, 수(壽), 생자(生者), 장부(丈夫), 인(人), 작자(作者)와 같은 것들은 분별하면 오직 허망할 뿐이란 걸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는 오직 공한 법(空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는 것은 자성의 공함 가운데 거짓 이름뿐인 번뇌와 업과 과이니, 오직 공한 거짓 이름만이 있어서 번뇌와 업과 과의 법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뜻이다.

연을 빌려서 번뇌가 생기고
연을 빌려서 또한 업이 생긴다.
연을 빌려 또한 과보가 생긴다.
하나라도 연이 아닌 것은 없다.

만약 번뇌가 있으면 곧 갖가지 무량의 업이 있게 되고, 그 갖가지 업에서 생긴 과보가 있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공통의 연[共緣]을 인한다는 걸 마땅히 알아야 하니, 하나의 법이라도 인연이 없는 것은 없다. 또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금 다시 비유를 설한다.

송(誦)ㆍ등(燈)ㆍ인(印)ㆍ경(鏡)ㆍ음(音)
일광(日光)ㆍ종자(種子)ㆍ초(醋)ㆍ온(蘊)이
그리고 오온은 계속하여 이전하지 않나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 두 가지를 관해야 한다.

가령 송(誦)에는 송을 가르치는 자와 송을 배우는 자가 있는데, 가르치는 송이 배우는 사람에게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르친 송은 여전히 안주하기 때문이니, 안주하기 때문에 가르친 송이 상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自不自] 때문이다. 마치 등불이 차례로 생겨날 때 처음의 등불이 이전하는 것도 아니고 두 번째 등불이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님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장[印]과 찍힌 형상[像]의 두 가지, 얼굴[面]과 거울[鏡]의 두 가지, 소리[聲]와 메아리[響]의 두 가지, 햇빛[日]과 불[火]의 두 가지, 씨앗[種子]과 싹[芽]의 두 가지, 식초[酢]와 입 속의 침[舌涎]의 두 가지,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전하는 것도 아니고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인(因) 없이 그 두 가지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온이 상속하여도 첫 번째의 온이 이전하는 것이 아니고, 두 번째 온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인(因)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 오온의 상속이 이전하지 않고 차례로 도달함을 응당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또 외상(外相)과 내상(內相)에 각각 열 가지가 있다는 것을 올바로 관찰하여야 한다. 그 중에 외상의 열 가지란, 첫째는 항상하지 않음[非常], 두 번째는 완전히 끊어짐이 아님[非斷], 세 번째는 이전하는 것이 아님[不移轉], 네 번째는 인과가 서로 매여서 중간이 없음[無中間], 다섯 번째는 앞의 몸이 아님[非彼體], 여섯 번째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님[非別異], 일곱 번째는 짓는 자가 없음[無作者], 여덟 번째는 원인이 없지 않음[非無因], 아홉 번째는 찰나 멸함[刹那滅], 열 번째는 같은 종류의 결과가 함께 묶임[同類果相繫]이다.
저 외부의 모든 종자[外種]는 남김없이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싹이 생겨 나오기 때문에 완전히 끊어짐이 아니다. 종자가 소멸하여 다 없어졌을 때 그 싹은 본래 없었으나 지금 생기기 때문에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저 상속하는 바가 단절됨이 없이 원인과 결과가 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중간(中間)이 없는 것이다. 종자와 싹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앞의 몸이 체(體)는 아니고, 그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인연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짓는 자가 없으며, 종자가 원인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지도 않다. 종자ㆍ싹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 등이 서로 연결되어 서로 생겨나기 때문에 찰나에 멸한다. 달고 시고 짜고 쓰고 맵고 떫은 것은 원인의 차별에 따라 결과가 전변하여 나오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결과가 함께 묶이는 것이다.
그 중 내상의 열 가지란, 첫째는 죽은 오온은 남김없이 멸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다음 생의 오온을 얻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 죽은 오온이 남김없이 없어졌을 때 다음 생의 오온이 본래는 없다가 이제 생기기 때문에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네 번째, 오온이 상속하며 끊어짐이 없고 원인과 결과로 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중간이 없다. 다섯 번째, 죽은 오온과 다음 생의 오온이 다르기 때문에 앞의 몸[彼體]이 아니다. 여섯 번째, 앞의 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지 않다. 일곱 번째, 인연의 화합으로 생겼기 때문에 짓는 자가 없다. 여덟 번째, 번뇌와 업이 원인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지는 않다. 아홉 번째, 가라라(迦羅邏, kalala)ㆍ알부타(頞浮陀, arbuda)ㆍ폐시(箄尸, peśi)ㆍ가나(伽那, ghana)ㆍ발라사거(鉢羅奢佉, praśakhā)ㆍ출태(出胎)ㆍ갓난아기ㆍ어린아이ㆍ청소년ㆍ어른 등으로 전전(展轉)하여 상생하므로 찰나에 멸한다. 열 번째, 선(善)과 불선(不善)의 훈습은 원인의 차별에 따라 결과가 전변하여 나오므로 같은 종류의 결과[同類果]가 함께 묶인다.

또 세 게송이 있다.

마치 등불이 불꽃이 끊임없이 타오르듯이
식신(識身) 또한 마찬가지라서
앞 찰나[先際]와 뒤 찰나[後際]가
모여 쌓임이 없다.

불생(不生)과 유생(有生)은
파괴하여 화합하지 않으며,
생겨난 것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업의 굴림을 짓는다.

만약 저 연생을
능히 관하여 공을 알고,
만약 저 시설을 안다면
그것이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무명ㆍ행ㆍ애ㆍ취ㆍ유는 집제(集諦)가 되고,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는 고제(苦諦)이다. 이 열두 가지에 대한 도제(道諦)란 그것을 멸하게 하여 방편을 증득하는 것으로 소위 염처(念處)ㆍ정근(正勤)ㆍ여의족(如意足)ㆍ근력(根力)ㆍ각지(覺支)각지(覺支)와 팔성도를 팔성도를 도제(道諦)라 이름한다.
036_1109_c_01L大乘緣生論一卷 聖者鬱楞迦造開府儀同三司特進試鴻臚卿肅國公食邑三千戶賜紫贈司空謚大鑑正號大廣智大興善寺三藏沙門 不空奉 詔譯從一生於三 從三轉生六 六二二更六從六亦生六 從六有於三 此三復有三三復生於四 四復生於三 從三生於一彼一復生七 於中所有苦 牟尼說皆攝十二種差別 智士說爲空 緣生支力故應知十二法 無知與業識 名色根三和領渴及以取 集生熟次終 初八九煩惱第二第十業 餘七皆是苦 三攝十二法初二是過去 後二未來時 餘八是現在此謂三時法 煩惱業感報 報還生煩惱煩惱復生業 亦由業有報 離惱何有業離業何有報 無報則離惱 此三各寂滅五支因生果 名爲煩惱業 七支以爲果七種苦應知 因中空無果 果中亦無因因中亦無因 果中亦無果 智者空相應世中四種支 因果合故有 煩惱業果合應許爲六分 有莭所攝故 二莭及三略因果雜爲莭 三四莭摠略 二三二三二苦位有五法 作者及藏界 境轉生流行迷惑發起果 等流果爲二 相應根分中一一三二分 熱惱缺短果 轉出等流果相應餘分中 二一一一法 此有十二種和合故緣生 無衆生無命 空無慧以知無我無我所 無我無我中 四種無知空餘支亦如是 斷常二邊離 此卽是中道若覺已成就 覺體是諸佛 覺已於衆中聖仙說無我 曾於城喩經 導師說此義迦栴延經說 正見及空見 破邏遇拏經張宿名也亦說殊勝空 緣生若正知 彼知空相應緣生若不知 亦不知彼空 於空若起慢於蘊不生厭 彼名惡趣空 則迷緣生義緣生不迷故 離慢彼知空 及厭於蘊故不迷於業果 業作緣續生 亦非不緣此空緣當有此 業報受用具 十二支差別先已說緣生 彼煩惱業苦 三中如法攝從三生於二 從二生於七 從七復生三有輪如是轉 一切皆因果 從空生於空從法生於法 藉緣生煩惱 藉緣亦生業藉緣亦生報 無一不有緣 誦燈印鏡音日光種子醋 蘊續不移時 智應觀彼二緣生三十論本竟緣生三十論我當隨順次第解釋從一生於三 從三轉生六 六二二更六從六亦生六從一生於三者謂無知此無知者說名無明於苦道中不覺知故名爲無知由故則有福非福不動說名三及身行口行心行等從其轉生三轉生六者從三行生六識身所謂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六二彼六識身轉生二種所謂名色更六者名色二種轉生六處所謂眼耳處鼻處舌處身處意處從六亦生六者從彼六處轉生六觸所謂眼耳觸鼻觸舌觸身觸意觸從六有於三 此三復有三 三復生於四四復生於三從六有於三者從彼六觸轉生三受謂樂受苦受不苦不樂受此三復有三者還從彼等三受轉生三種愛謂欲愛有愛無有愛從三復生於四從彼三種愛轉生四取所謂欲取見取戒禁取我語取從四復生於三從彼四取轉生三有所謂欲有無色有從三生於一 彼一復生七 於中所有苦牟尼說皆攝從三生於一者還以彼等三有作緣當來一種生彼一復生七者還從一當有老惱等七種中所有苦牟尼說皆攝者於中無明爲始苦爲終無量種苦世尊略說皆此所攝十二種差別 智士說爲空 緣生支力故應知十二法十二種差別智士說爲空者此無知等差別有十二支彼一切皆自性空應當知如此所說唯是空法從空生空從法生法由緣生支法故應當知十二法者若以次第生支力故彼十二法如是應知彼中迷惑相者是無彼行句處積集當有相者是行彼識句處次受生支轉出相者是識彼名句處名身色身和合相者是名色彼六處句安置根相者是六處彼觸句處眼色識共聚相者是觸彼受句處愛非愛顚倒受用相者是受彼愛句處無厭足相者是愛彼取句處執持攝取相者是取彼有句處名身色身相者是有彼生句處蘊生起相者是生彼老句處成就相者是老彼死句處命根斷者是死彼愁句處悤遽相者是愁彼歎句處哭聲者是歎苦句處身逼惱相者是苦彼憂句處心逼惱相者是憂彼諸熱惱句處損害相者是惱無知與業識 名色根三和 領渴及以取集出熟後邊於中無知者是無明業者行識者是了別名色五蘊聚根者是處三和者是觸領納者是受渴者是愛取者是執持受用者是有起者是生熟者是老後邊者是死又此等差別相攝我當次第說之中煩惱業差別初八九煩惱 第二第十業 餘七皆是苦三攝十二法三煩惱者無明二業者行報者名色六處老死等十二法三種所攝又時差別初二是過去 後二未來時 餘八是現在此謂三時法無明行初二種過去時生老死後二種未來名色六處有八種現在時又此等各各次第相生煩惱業感報 報還生煩惱 煩惱復生業亦由業有報煩惱業報三種如前所說由彼煩惱故有業由業故有報還由報故有煩由煩惱故有業由業故有報問曰由煩惱盡各各寂滅其義云何荅言離惱何有業 離業何有報 無報則離惱此三各寂滅若其此心無煩惱染則不集業若不作業則不受報若滅報者亦不生煩如是此三各各寂滅又此等有因果分五支因生果 名爲煩惱業 七分以爲果七種苦應知五種因名爲煩惱業者如前所說有是也七種果轉生者如前所說七種苦所謂識名色六處老死是也又此因果二種空因中空無果 果中亦無因 因中亦無因果中亦無果 智者空相應梵本一偈今爲一句矣若此所說因果二種於中若因空果亦空果空因亦空因空因亦空果空果亦空於此四句際當與相應又此更有分別世中四種支 因果合故有 煩惱業果合應許爲六支世中四種支因果合故有者所說三世五種因共七種果摠略爲四種第有四種分於中無明行過去時法爲初分名色六處受現在時爲第二分愛取有亦是現在時爲第三分老死未來時二法爲第四分此謂四種分也煩惱業果結許爲六分者煩惱業報三種結爲二根則爲六分於中無明乃至受以無明爲根愛乃至老死爲愛根無明根中無是煩惱分行是業分名色六處受是報分愛根中愛取是煩惱分有是業分老死是報分又莭分摠略有節所攝故 二莭及三略 因果雜爲莭三四莭摠略有莭爲本發起二莭所謂有生兩閒是第一莭識兩閒是第二莭此二莭竝爲業果莭愛中因果共雜第三節此之三莭復爲四種摠略無明行二種是第一摠略名色六處受五種是第二摠略有三種是第三摠略老死二種是第四摠略此謂三莭及四摠略又此等法中位時差別二三二三二 苦位有五法 作者及藏界境轉生流行法者無明行說爲二種名色六處說爲三種受說爲二種有說爲三種又二者生老死說爲二種等五法是苦位中作者胎藏境界轉出生於中流行如數當知於中無明行二種說爲苦位中作者名色六處三種說爲苦位中胎藏受二種說爲苦位中境界有三種說爲苦位中發轉老死二種說爲苦位中流行又果差別迷惑發起果 報流果爲二 相應根分中一一三二分如前所說此無明根及愛根於無明根初分中迷惑發起報等流名四種二數分之道隨其次第與相應於中無明是迷惑果行是發起果名色六處是報果受是等流果復有餘殘果熱惱缺短果 轉出等流果 相應餘分中二一一一法如前所說第二愛根分中熱惱缺短轉生等流果等隨其數分二一一一於此法中當與相應於中愛惱果有是缺短果生是轉出果老死是等流果如是此等則有八果此有十二種 和合故緣生 無衆生無命空無以慧知如是無明古譯無明今無知乃正也爲初老死爲後有十二支和合勝故各各緣生而衆生無壽命空無以慧應知於無衆生者以不牢固故無壽命者無我故空者無作者以無作者故無我無我所 無我無我中 四種無知空餘支亦如是無知是無我此中無知是無我所無我故無我中無無知四種無知無我所中亦無無知空如四種次第無知空如是行等餘支亦皆是空應當知之斷常二邊離 此卽是中道 若覺已成就覺體是諸佛有是常執無是斷執此二邊由此生緣故生彼彼諸有中若離二邊卽契中道若不知此是義則諸外道墮於二邊若覺悟已是則一切諸佛如佛於世閒能成就非餘覺已於衆中 聖仙說無我 曾於城喩經導師說此義彼亦是此中道覺已於諸衆中佛說無我無我所汝等比丘當知謂著我我所愚童凡夫寡聞之類隨假施設中復我及我所比丘生時但苦生滅時但苦滅如城喩經中導師已說義迦旃延經說 正見及空見 破邏具拏經亦說殊勝空此等三經及以餘處如是之相世尊已廣說緣生若正知 彼知空相應 緣生若不知亦不知彼空於前所說緣生若有正知彼知無異彼復何知謂知於空緣生若不知不知空者於此緣生若其不知亦於彼空不能解入應知之於空若起慢 則不厭於蘊 若有彼無見則迷緣生義於空若起慢則不厭若起空慢則於五蘊中不生厭離若有彼無見則迷緣生義者若復由於無見迷此緣生義故則於四種見中隨取何見一者斷見二者常見三者自在化語四者一切宿業作緣生不迷故 離慢彼知空 及厭於蘊故不迷於業果緣生不迷故離慢彼知空者於前所說各各緣生中若無迷心及於執取我我所中若得離慢彼則如法能入於空及厭於蘊故不迷於業果者蘊中執取我我所故則遍世閒輪轉不息於彼蘊中厭離故於業果相續則無顚倒亦不迷惑又此義云何業作緣續生 亦非不緣此 空緣當有此業報受用具業作緣續生亦非不緣此者煩惱業報如前所說彼以如是善不善業遣衆生傍及上下相續而生若非此則不作緣若不然者則不作業受報已作業而失空緣當有此業報受用具者若由此等善不善業有報受自性是空本無有我作緣發生彼性空亦應當知彼義今更略說十二支差別 前已說緣生 彼煩惱業苦三中如法攝無明爲初老死爲後是十二支緣生差別如前所說彼中三是煩惱二是業七是苦皆已攝入從三生於二 從二生於七 從七復生三有輪如是轉無明取三種所生行有二種彼二所生識名色六處老死七支七支中如前所說還生三種彼三復其二更七是故二種次第不斷此之有輪如是轉因果生諸世 無別有衆生 唯是於空法還自生空法因果生諸世無別有衆生者無明有五種名因名色六處死七種名果此等所有普遍世閒若我若衆生若壽若生者若丈夫若人若作是等分別唯虛誑應當知之彼云生唯是於空法還自生空法謂自性空中假名煩惱業果唯有空假名煩惱業果法生此是其義藉緣生煩惱 藉緣亦生業 藉緣亦生報無一不有緣若有煩惱則有種種無量業及種種業所生果報彼皆因共緣應當知之無有一法無因緣者又爲明彼義更說譬喩誦燈印鏡音 日光種子醋 衆續不移轉智應觀彼二如誦有教誦者受誦者所有教誦移轉受誦何故教誦者仍安安故其教誦者亦不相續何以故自不自故如燈次第生非是初燈移轉亦非第無因而生如是印與像二種面與鏡二種音與響二種日與火二種子與芽二種醋與舌唌二種二種此等所有皆不移轉亦非不生亦非無因而生彼二種五蘊相續次第轉初蘊而移轉而第二蘊亦非不生非無因而生智者於此蘊相續次第不移轉應當正觀又內外相應有十皆當知於中外十種者一者非常二者非斷故三者不移轉故四者因果相繫無中間故#五者非彼體故者非別異故七者無作者故八者非無因故九者剎那滅故十者同類果相繫故彼外所有種子滅無餘故常牙出生故非斷種子滅無餘已#其牙本無今有生故不移轉彼所相續無有斷絕因果相繼故無中間種子牙差別故非彼體從出生故非別異因緣和合故無作者種子爲因故無因種子牙莖枝葉花菓等展轉相生故剎那滅甜醋醎苦辛澀隨因差別果轉出故同類果相繫於中內十種者一者死邊蘊滅無餘故非常者得次生支蘊故非斷三者死邊蘊滅無餘已次生支蘊本無今有生故不移轉四者蘊相續無有斷絕因果相繼故無中閒五者死邊次生支蘊差別故非彼體六者從彼出生故別異七者因緣和合故無作者八者煩惱業爲因故非無因九者迦邏羅頞浮陀箄尸伽那奄佉出胎嬰少年長宿等展轉相生故剎那滅十者善不善熏隨因差別果轉出故同類果相繫又有三偈如燈焰轉生 識身亦如是 前際與後際亦無有積集 不生亦有生 破壞不和合所生亦無住 而此作業轉 若於彼緣生而能觀知空 若知彼施設 則契於中道於中無明有是爲集諦六處老死是爲苦諦彼十二支道諦者令彼滅證方便所謂念處正勤如意足根力覺支八聖道爲道諦大乘緣生論一卷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달마급다의 연생론(緣生論)에서는 이 부분의 번역이 “결과로서의 나도 없고 나의 원인[我因]도 없음”으로 되어 있다.
  2. 2)구처(句處)란 이치(理致)`의미(意味)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