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一]에서 셋[三]이 생기고, 셋이 전전(展轉)하여 여섯[六]이 생긴다. 여섯[六]에서 둘[二]이 생기고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기며,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
여섯에서 셋이 있고, 이 셋에서 다시 셋이 있다. 셋에서 넷이 생기고,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
셋에서 하나가 생기고, 저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기니, 그 가운데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
열두 가지의 차별을 지혜로운 사람은 공(空)이라고 설하는데, 연생지(緣生支)의 힘 때문이니 마땅히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
무지(無知)와 업(業)ㆍ식(識), 명색(名色)ㆍ근(根)ㆍ세 가지 화합(和合:觸)과 앎[知:受]ㆍ갈[渴:愛]ㆍ취(取)와 모임[集:有]ㆍ나옴[出:生]ㆍ무르익음[熟:老]ㆍ차종(次終; 死)과
첫 번째와 여덟 번째ㆍ아홉 번째는 번뇌이고, 두 번째와 열 번째는 업(業)이며, 나머지 일곱은 모두 고(苦)이니, 이 세 가지에 열두 가지 법이 포함된다.
처음의 둘은 과거이고, 뒤의 둘은 미래이고, 나머지 여덟은 현재이니, 이것을 삼시법(三時法)이라고 한다.
번뇌의 업은 그 과보[報]를 받으며 과보는 또 번뇌를 일으킨다. 번뇌는 또 업을 생기게 하고 또 업을 말미암아서 과보가 있다.
번뇌를 여의면 어찌 업이 있겠으며, 업을 여의었는데 어찌 과보가 있겠는가. 과보가 없으면 번뇌를 여읜 것이니, 이 셋이 각각 적멸한 것이다.
오지(五支)의 원인이 결과를 낳으니 이름하여 번뇌업이라 한다. 칠지(七支)로써 결과를 삼으니 일곱 가지의 괴로움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원인[因]은 공(空)으로서 결과[果]가 없고 결과 가운데에는 또한 원인이 없다. 원인 가운데 또한 원인이 없고 결과 가운데 또한 결과도 없으니, 지혜로운 자는 공과 상응한다.
세간의 네 가지 지(支)는 인과 과가 합치하는 까닭에 있고 번뇌업(煩惱業)의 과와 결합하면 마땅히 여섯 부분이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유(有)의 마디[節]가 포함되기 때문에 두 개의 마디와 세 가지 요약[略]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섞여 마디를 이루므로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둘과 둘과 셋과 셋과 둘, 괴로움의 시기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짓는 자[作者]와 장계(藏界) 경계(境界), 전생(轉生)과 흘러감[流行]이다.
미혹(迷惑)ㆍ발기(發起)의 결과와 등류과(等流果)의 둘이 되는 것은 근(根) 중에서 하나ㆍ하나ㆍ셋ㆍ둘과 상응한다.
열뇌과(熱惱果)ㆍ빈핍과(貧乏果)와 전출과(轉出果)ㆍ진류과(津流果)는 남은 부분의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과 상응한다.
여기에 있는 열두 가지는 화합하는 까닭에 연생(緣生)이니 중생도 없고 명(命)도 없고 공(空)하여 없음을 지혜[慧]로써 안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고, 무아(無我)ㆍ무아(無我) 중에1) 이 네 가지의 무지(無知)의 공이다. 나머지 지(支)도 또한 마찬가지다.
단멸[斷]과 상주[常]의 두 극단[二邊]을 여의면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니 만약 이것을 깨달아 성취하면 그 깨달음의 주체[覺體]가 바로 모든 부처이다.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대중들에게 무아(無我)를 설했으니, 일찍이 『성유경(城喩經)』에서 도사(導師)는 이 뜻을 설했다.
『가전연경(迦栴延經)』에서는 정견(正見) 및 공견(空見)을 설하고 『파라우나경(破邏遇拏經)』에서도 또한 수승한 공[殊勝空]에 대해 설하셨다.
연생(緣生)을 만약 올바로 알면 그 앎[知]은 공과 상응하며 연생을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저 공도 알지 못한다.
공에 대하여 만약 아만(慢)을 일으키면 온(蘊)에 대해 싫어하지 않으니 그러나 악취공(惡趣空)이라 이름하면 곧 연생의 뜻을 미혹하는 것이다.
연생에 미혹하지 않는 까닭에 아만[慢]을 여의어서 저 공을 알고 그리고 온(蘊)을 싫어하는 까닭에 업과(業果)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다.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겨나니 또한 이 공에 반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을 반연하여 반드시 이것이(업보의 수용) 있는 것이니 업보의 수용(受用)이 갖춰진다.
십이지(十二支)의 차별은 앞에서 이미 연생이라 설했다. 그것은 번뇌ㆍ업ㆍ고의 셋 가운데 법대로 포섭된다.
세 가지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일곱이 생기며 일곱에서 다시 셋이 생기니 이와 같이 바퀴처럼 돌고 돈다.
인과로 인해 생기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공한 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연을 빌려서 번뇌가 생기고 연을 빌려서 또한 업이 생기며 연을 빌려 또한 과보가 생기니 하나라도 연 없이 생긴 것은 없다.
송(誦)ㆍ등(燈)ㆍ인(印)ㆍ경(鏡), 음(音)ㆍ일광(日光)ㆍ종자(種子)ㆍ초(醋) 그리고 오온은 계속하여 이전하지 않나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 두 가지를 관해야 한다.
연생삼십론 본송을 마친다. 『연생삼십론』을 나는 마땅히 순서에 따라 차례로 해석할 것이다.
하나에서 셋이 생기고, 셋이 전전(展轉)하여 여섯이 생긴다. 여섯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기며,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
‘하나에서 셋이 생긴다’는 것은 소위 무지를 말한다. 이 무지는 무명이라고도 말한다. 고ㆍ집ㆍ멸ㆍ도를 깨달아 알지[覺知] 못하는 까닭에 무지라 하고, 무지에 의하는 까닭에 곧 유복(有福)ㆍ비복(非福)ㆍ부동(不動)으로 이른바 세 가지 행이 있게 된다. 아울러 신행(身行)ㆍ구행(口行)ㆍ심행(心行) 등이 그로부터 전전하여 생겨난다. ‘셋이 전전하여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삼행(三行)으로부터 육식신(六識身)이 생기는 것으로서 소위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이다. ‘여섯에서 둘이 생긴다’는 것은 저 육식신이 전전하여 두 가지를 생기게 하는 것으로 소위 명색(名色)이다. ‘둘에서 다시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명과 색의 두 가지가 전전하여 육처를 생기게 하는 것으로 소위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이다. ‘여섯에서 또 여섯이 생긴다’는 것은 저 육처가 전전하여 육촉을 생기게 하는 것으로 소위 안촉(眼觸)ㆍ이촉(耳觸)ㆍ비촉(鼻觸)ㆍ설촉(舌觸)ㆍ신촉(身觸)ㆍ의촉(意觸)이다.
여섯에서 셋이 생기고, 이 셋에서 또 셋이 생긴다. 셋에서 또 넷이 생기고,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
‘여섯에서 셋이 생긴다’는 것은 저 육촉으로부터 전전하여 삼수(三受)가 생겨나는 것으로 소위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이 셋에서 또 셋이 있다’는 것은 다시 이 세 가지 수(受)가 전전하여 세 가지 애착[愛]이 생겨나는 것으로 소위 욕애(欲愛)ㆍ유애(有愛)ㆍ무유애(無有愛)이다. ‘셋에서 또 넷이 생긴다’는 것은 저 세 가지 애착으로부터 전전하여 네 가지 취(取)가 생겨나는 것으로 소위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넷에서 또 셋이 생긴다’는 것은 저 네 가지 취가 전전하여 세 가지 유(有)가 생기는 것으로 소위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셋에서 하나가 생기고, 그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긴다. 그 가운데에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
‘셋에서 하나가 생긴다’고 하는 것은 저 세 가지 유(有)를 연생(緣生)으로 지어서 앞으로 한 가지의 생(生)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에서 또 일곱이 생긴다’는 것은 한 가지로부터 마땅히 노(老)ㆍ사(死)ㆍ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뇌(惱) 등의 일곱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 모든 고(苦)가 있다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여 다 거두셨다’는 것은 이 과정이 무명에서 시작하여 고(苦)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한량없는 갖가지 괴로움이 여기에 포섭된다고 간략하게 설하신 것이다.
열두 가지의 차별을 지혜로운 사람은 공(空)이라고 설한다. 연생지(緣生支)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땅히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
‘열두 가지의 차별을 지혜로운 사람은 공이라 설한다’는 것은 이 무지 등의 차별에 열두 가지 지(支)가 있고, 저 일체는 모두 자성이 공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했듯이 오직 공법(空法)일 뿐이니, 공으로부터 공이 생겨나고 법으로부터 법이 생겨나는 것이다. ‘연생지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땅히 열두 가지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차례로 지력(支力)을 낳는 까닭에 저 열두 가지 법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중 미혹(迷惑)의 상(相)인 것이 무명이다. 저 행구처(行句處)2)는 쌓아서 마땅히 상(相)이 있는 것이 바로 행(行)이다. 저 식구처(識句處)는 다음의 생지(生支)를 받아 상을 전변하여 낸 것이 바로 식이다. 저 명색구처(名色句處)는 명신(名身)과 색신(色身)이 화합하는 상이 바로 명색이다. 저 육처구처(六處句處)는 근(根)을 안치하는 상이 바로 육처이다. 저 촉구처(觸句處)는 안(眼)ㆍ색(色)ㆍ식(識)이 함께 모이는 상이 바로 촉이다. 저 수구처(受句處)는 애(愛)ㆍ비애(非愛)의 전도를 수용하는 상이 바로 수이다. 저 애구처(愛句處)는 만족함이 없는 상이 바로 애이다. 저 취구처(取句處)는 집지(執持)ㆍ섭취(攝取)하는 상이 바로 취이다. 저 유구처(有句處)는 명신(名身)ㆍ색신(色身)의 상이 바로 유이다. 저 생구처(生句處)는 온(蘊)이 생기하는 상이 바로 생이다. 저 노구처(老句處)는 성숙의 상이 바로 노이다. 저 사구처(死句處)는 명근(命根)이 단절되는 것이 바로 사이다. 저 수구처(愁句處)는 근심ㆍ고민하는 것이 바로 수이다. 저 탄구처(歎句處)는 소리 내어 한탄하는 것이 바로 탄이다. 저 고구처(苦句處)는 몸이 괴로움을 받는 상이 바로 고이다. 저 우구처(憂句處)는 마음이 괴로움을 받는 상이 바로 우이다. 저 모든 열뇌구처(熱惱句處)는 손해(損害)를 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뇌이다.
무지(無知)와 업(業)ㆍ식(識), 명색(名色)ㆍ근(根)ㆍ세 가지 화합[三和] 영(領)ㆍ갈(渴; 愛) 및 취(取), 집(集)ㆍ출(出)ㆍ숙(熟)ㆍ후변(後邊)과
이 중에서 무지는 무명이다. 업이란 행이고, 식이란 요별(了別)이며, 명색이란 오온의 모임이고, 근은 처(處)이며, 삼화란 촉(觸)이다. 영납(領納)이란 수(受)이고, 갈이란 애(愛)이며, 취란 집지(執持)이다. 수용(受用)이란 유(有)이고, 기(起)란 생(生)이며, 숙이란 노(老)이고, 후변이란 사(死)이다. 또 이것들은 차별을 서로 포섭하므로, 나는 마땅히 차례로 그것을 설할 것이다. 그 중에 번뇌와 업의 차별이 있다.
첫 번째와 여덟 번째, 아홉 번째는 번뇌이고 두 번째와 열 번째는 업(業)이며, 나머지 일곱은 모두 고(苦)이니 셋에 열두 가지 법이 포함된다.
세 가지 번뇌란 무명ㆍ애ㆍ취이며, 두 가지 업은 행ㆍ유이며, 일곱 가지 보(報)는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 등이다. 이 열두 가지 법은 세 종류에 포섭된다. 또 시간[時]에 의한 차별이 있다.
처음의 둘은 과거이고 뒤의 둘은 미래이며 나머지 여덟은 현재이니, 이것을 삼시법(三時法)이라 한다.
무명과 행의 처음 두 가지는 과거시이며, 생ㆍ노사의 뒤의 두 가지는 미래시이다.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의 여덟 가지는 현재시이다. 또 이것들은 각각 차례로 서로 생겨난다.
번뇌의 업이 과보를 감응하며 과보는 다시 번뇌를 생기게 한다. 번뇌는 또 업을 생기게 하고 업으로 인해 또 과보가 있게 된다.
번뇌ㆍ업ㆍ과보의 세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저 번뇌로 인하는 까닭에 업이 있고, 업으로 인하는 까닭에 과보가 있다. 또 과보로 인하는 까닭에 번뇌가 있고, 번뇌로 인하는 까닭에 업이 있으며, 업으로 인하는 까닭에 과보가 있다. 【문】‘번뇌가 다함으로 인해 각각 적멸(寂滅)하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무엇인가?
【답】번뇌를 여의었으니 어찌 업이 있겠는가.업을 여의었으니 어찌 과보가 있겠는가,과보가 없으면 번뇌를 여읜 것이니,이 셋이 각각 적멸한 것이다.
만약 그 마음에 번뇌의 오염이 없다면 업이 모이지 않는다. 만약 업을 짓지 않으면 과보를 받지 않고, 만약 과보를 멸한 자라면 번뇌를 낳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 셋은 각각 적멸하다. 또 이것들은 인과의 분(分)이 있다.
다섯 가지[五支]의 원인이 결과를 일으키나니 이름하여 번뇌의 업이라 한다. 칠지(七支)로 결과를 이루니 일곱 가지 괴로움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의 인을 이름하여 번뇌업이라 한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나니, 무명ㆍ행ㆍ애ㆍ취ㆍ유이다. ‘일곱 가지의 과가 전변하여 생긴다’라는 것도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일곱 가지의 괴로움이란 소위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이다. 또 이 인과의 두 가지는 공이다.
원인(因) 가운데 공(空)하므로 결과(果)가 없고 결과 가운데에는 또한 원인이 없다. 원인 가운데 또한 원인은 없고 결과 가운데 또한 결과도 없나니, 지혜로운 자는 공과 상응한다.
만약 여기에서 설하는 원인과 결과 두 가지 중에서 만약 원인이 공하면 결과도 또한 공하고, 결과가 공하면 원인도 또한 공하고,원인이 공하면 원인도 또한 공하고, 결과가 공하면 결과도 또한 공하다. 이 4구와 마땅히 서로 상응해야 한다. 또 여기에도 분별이 있다.
세간의 네 가지 지(支)는 인과가 합치하는 까닭에 있다. 번뇌와 업과 과가 결합하면 육지(六支)가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간의 네 가지 지는 인과가 합치하는 까닭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삼세의 다섯 가지 인(因)과 일곱 가지 과(果)를 설한 것으로서 총체적으로 줄이면 네 가지가 된다. 차례로 네 가지 구분이 있다. 그 중 무명ㆍ행은 과거시의 두 법으로 초분(初分)이 된다.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는 현재시로 제2분이 된다. 애ㆍ취ㆍ유ㆍ역시 현재시로 제3분이 된다. 생ㆍ노사는 미래시의 두 법으로 제4분이 된다. 이것을 네 가지 구분이라 한다. ‘번뇌ㆍ업ㆍ과보와 결합하면 육지가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번뇌와 업과 과보의 세 가지가 결합해 2근(根)이 되면 곧 6분(分)이 된다. 그 가운데 무명에서 수에 이르기까지는 무명이 근이 되고, 애에서 노사에 이르기까지는 애가 근이 된다. 무명근 중에서 무명은 번뇌분이고 행은 업분이며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는 보분(報分)이다. 애근 가운데 애ㆍ취는 번뇌분이고, 유는 업분이고, 생ㆍ노사는 보분이다. 또 마디의 구분과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유(有)의 마디가 포함되기 때문에 두 개의 마디와 세 가지 요약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섞여 마디를 이루므로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 있다.
유(有)가 마디의 기본이 되어 두 개의 마디가 생긴다. 이를테면 유와 생, 두 가지 사이가 첫 번째 마디이다. 행과 식 두 가지 사이가 두 번째 마디이다. 이 두 개의 마디는 모두 업과 과보의 마디이다. 수와 애 중에는 원인과 결과가 함께 섞여 있으므로 세 번째 마디이다. 이 세 개의 마디는 또 네 가지 전체적인 요약[總略]이 있다. 무명ㆍ행의 두 가지는 첫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고, 식ㆍ명ㆍ색ㆍ육입ㆍ촉ㆍ수, 다섯 가지는 두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며, 갈애ㆍ취ㆍ유, 세 가지는 세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고, 생ㆍ노사, 두 가지는 네 번째 전체적인 요약이다. 이것을 세 개의 마디와 네 개의 전체적인 요약이라고 말한다. 또 이런 법 가운데 위시(位時)의 차별이 있다.
둘[二]과 둘과 셋[三]과 셋과 둘로 괴로움의 상태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짓는 자[作者]ㆍ장계(藏界)ㆍ경계(境界)와 전생(轉生)ㆍ유행(流行)이다.
법이란 무명ㆍ행을 설해 두 가지가 되며, 식ㆍ명색ㆍ육처를 설해 세 가지가 되며, 촉ㆍ수를 설해 두 가지가 되며, 애ㆍ취ㆍ유를 설해 세 가지가 된다. 또 둘이란 생ㆍ노사를 설해 두 가지가 된다. 이들 다섯 가지 법이 고통의 지위[苦位] 가운데 작자(作者), 태장(胎藏), 경계(境界), 전생[發轉], 출생(出生)이고 그 가운데서 유행(流行)하는 것이니 숫자대로 알아야 한다. 그 중 무명ㆍ행 두 가지는 고통의 지위 가운데 작자가 된다고 설한다. 식ㆍ명색ㆍ육처의 세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태장으로 삼고, 촉ㆍ수 두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경계로 삼고, 애ㆍ취ㆍ유의 세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발전(發轉)으로 삼고, 생ㆍ노사의 두 가지를 설해 고통의 지위 가운데 유행으로 삼는다. 또 과의 차별이 있다.
미혹과(迷惑果)와 발기과(發起果)와 보과(報果)와 유과(流果)의 둘은 상응하는 근(根) 중에서 하나ㆍ하나ㆍ셋ㆍ두 가지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이것은 무명근과 애근이다. 무명근의 초분에서 미혹과ㆍ발기과ㆍ보과ㆍ등류과(等流)를 이름하여 네 가지 과(果)라 한다. 하나ㆍ하나ㆍ셋ㆍ두 가지로 나뉜 가운데 차례대로 상응해야 한다. 그 가운데에 무명이 미혹과이며, 행이 발기과이며, 식ㆍ명색ㆍ육처가 보과이며, 촉ㆍ수가 등류과이다. 또 나머지 남은 과가 있다.
열뇌과(熱惱果)ㆍ결단과(缺短果)와 전출과(轉出果)ㆍ등류과(等流果)는 남은 부분의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과 상응한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제2 애근분 중에서 열뇌ㆍ결단ㆍ전생ㆍ등류과 등은 숫자의 순서대로 둘ㆍ하나ㆍ하나ㆍ하나의 법에 상응한다. 그 가운데 애ㆍ취는 열뇌과이며, 유는 결단과, 생은 전출과, 노사는 등류과이다. 이와 같이 이것들에는 여덟 가지 과가 있다.
이 열두 가지는 화합하는 까닭에 연생(緣生)한다. 중생도 없고 명(命)도 없으며 공(空)하여 없음을 지혜로써 안다.
이와 같이 무명이 처음이고 노사가 끝인 이 열두 가지는 화합이 수승[勝]한 까닭에 각각 연생하니,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공하여 없음을 지혜로써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중 ‘중생이 없다’는 것은 견고하지 않은 까닭이며,‘수명이 없다’는 것은 무아로써인 까닭이며, ‘공’하여 없다는 것은 짓는 자가 없는 까닭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고, 무아(無我)ㆍ무아중(無我中) 이 네 가지는 무지(無知)의 공이고 나머지 지(支)도 또한 마찬가지다.
무지는 무아이다. 이 가운데 무지는 아소(我所; 나의 것)가 없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무아 가운데 무지는 없다. 네 가지 무지ㆍ무아소 가운데 또한 무지의 공도 없다. 네 가지가 차례로 무지의 공인 것처럼 이와 같이 행 등의 나머지 지(支)도 또한 모두 공이니,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한다.
단멸[斷]과 상주[常]의 두 극단[二邊]을 여의면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니 만약 이것을 깨달아 성취하면 그 깨달음의 주체가 바로 모든 부처이다.
유(有)는 상(常)에 대한 집착이고, 무(無)는 단(斷)에 대한 집착이다. 이 두 극단으로부터 연(緣)이 생기는 까닭에 저것이 생긴다. 저 모든 유 가운데서 두 극단을 여의면 중도에 부합하는 것이니, 만약 이 뜻을 모르면 곧 모든 외도가 두 극단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으면 곧 일체의 모든 부처라서 부처님처럼 세간에서 능히 성취할 수 있지만, 다른 자는 아니다.
깨닫고 나서 대중들에게 성선(聖仙)은 무아를 설했다. 일찍이 『성유경(城喩經)』에서 도사(導師)는 이 뜻을 설했다.
세존은 이 중도를 깨달았다. 깨닫고 나서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음을 설하셨다. “너희들 비구는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소위 ‘나’ㆍ‘내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범부나 별로 배우지 못한 부류는 가짜의 시설(施設)을 따른다. 또 비구가 나와 내 것을 일으킬 때 고가 생겨나며, 없앴을 때 고가 멸한다.” 『성유경』 가운데서 도사가 이미 그 뜻을 설한 바와 같다.
『가전연경(迦栴延經)』에 정견(正見) 및 공견(空見)을 설하고 『파라구나경(破邏具拏經)』에 또한 수승한 공(空)에 대해 설한다.
이들 세 가지 경과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상을 세존께서는 이미 널리 설하셨다.
연생(緣生)을 만약 올바로 알면 그 앎[知]은 공과 상응하며 연생을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저 공도 알지 못한다.
앞에서 연생을 설했듯이, 만약 정지(正知)가 있으면 차이가 없음을 아는 것인데, 다시 무엇을 알겠는가. 소위 공에 대한 앎이다. ‘연생을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연생에 대하여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그 공에 대하여 능히 이해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니, 그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공에 대하여 만약 만(慢)을 일으키면 곧 온(蘊)을 싫어하지 않고 만약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면 연생의 뜻을 미혹한다.
‘공에 대하여 만약 만을 일으키면 곧 온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약 공에 대한 아만심을 일으키면 곧 오온을 싫어해 여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면, 연생의 뜻을 미혹한다’는 것은 가령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이 연생의 뜻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 가지 견해에서 어떠한 견해를 따라서 취할 것인가. 첫째는 단견, 둘째는 상견, 셋째는 자재화어(自在化語; 자재하게 변화하는 말), 넷째는 일체숙업작(一切宿業作; 일체가 숙세의 업이 지은 것임)이다.
연생에 미혹하지 않는 까닭에 그는 만(慢)을 여의고 공을 안다. 그리고 온을 싫어하는 까닭에 업과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다.
‘연생에 미혹하지 않는 까닭에, 그는 만을 여의고 공을 안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것처럼 각각의 연생 가운데서 만약 미혹된 마음이 없고 아울러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만을 여읜다면, 그러면 능히 법대로 공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온을 싫어하는 까닭에, 업과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온 가운데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까닭에 세간의 윤회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온을 싫어해 여의는 까닭에 업과의 상속에 대해 전도되지 않고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이 뜻은 무엇인가.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기니, 이것을 반연하지 않음이 없다. 연이 공하므로 반드시 이러한 업보의 수용(受用)이 있게 된다.
‘업이 반연을 지어 계속 생기니, 이것을 반연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번뇌의 업보가 앞에서 설한 것처럼 그가 이와 같은 선업과 불선업으로써 중생을 밀어내어 옆 또는 위와 아래로 상속해 생겨난다. 만약 이 업이 아니라면 연을 짓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업을 짓지 않더라도 과보를 받고, 업을 지어도 곧 없어진다. ‘연이 공하므로 반드시 이러한 업보의 수용(受用)이 있게 된다.’는 것은, 만약 이것들 선ㆍ불선업으로부터 과보의 수용이 있으면 자성은 공한 것이다. 본래 ‘나’가 없으니 연을 지어 발생하더라도 그 성품은 공이란 걸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뜻을 지금 다시 간략히 설한다.
열두 가지의 차별이 연으로 생김은 이미 앞에서 설하였다. 저 번뇌와 업과 괴로움의 셋 가운데 법대로[如法] 포섭된다.
무명이 처음이고, 노사가 끝이니, 이 열두 가지 연생의 차별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 중 셋은 번뇌이고, 둘은 업 , 일곱은 괴로움으로서 모두 포섭된다.
세 가지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일곱이 생기며 일곱에서 다시 셋이 생기니 이와 같이 바퀴처럼 돌고 돈다.
무명ㆍ애ㆍ취의 세 가지로부터 생기는 것이 생ㆍ유의 두 가지이다. 그 둘로부터 생기는 것이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의 일곱 가지이다. 그 일곱 가지로부터 앞에서 설한 것처럼 또 세 종류가 생긴다. 그 셋에 또 둘이 있고, 다시 일곱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두 종류는 차례대로 끊이지 않으면서 마치 바퀴처럼 돌고 돈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공한 법(空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는 모든 세간에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서 무명 ㆍ행ㆍ애ㆍ취ㆍ유의 다섯 가지를 원인이라 하고,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의 일곱 가지를 결과라 한다. 이것들이 있는 보편적인 세간, 즉 아(我), 중생, 수(壽), 생자(生者), 장부(丈夫), 인(人), 작자(作者)와 같은 것들은 분별하면 오직 허망할 뿐이란 걸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는 오직 공한 법(空法)에서 다시 공한 법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는 것은 자성의 공함 가운데 거짓 이름뿐인 번뇌와 업과 과이니, 오직 공한 거짓 이름만이 있어서 번뇌와 업과 과의 법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뜻이다.
연을 빌려서 번뇌가 생기고 연을 빌려서 또한 업이 생긴다. 연을 빌려 또한 과보가 생긴다. 하나라도 연이 아닌 것은 없다.
만약 번뇌가 있으면 곧 갖가지 무량의 업이 있게 되고, 그 갖가지 업에서 생긴 과보가 있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공통의 연[共緣]을 인한다는 걸 마땅히 알아야 하니, 하나의 법이라도 인연이 없는 것은 없다. 또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금 다시 비유를 설한다.
송(誦)ㆍ등(燈)ㆍ인(印)ㆍ경(鏡)ㆍ음(音) 일광(日光)ㆍ종자(種子)ㆍ초(醋)ㆍ온(蘊)이 그리고 오온은 계속하여 이전하지 않나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 두 가지를 관해야 한다.
가령 송(誦)에는 송을 가르치는 자와 송을 배우는 자가 있는데, 가르치는 송이 배우는 사람에게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르친 송은 여전히 안주하기 때문이니, 안주하기 때문에 가르친 송이 상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自不自] 때문이다. 마치 등불이 차례로 생겨날 때 처음의 등불이 이전하는 것도 아니고 두 번째 등불이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님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장[印]과 찍힌 형상[像]의 두 가지, 얼굴[面]과 거울[鏡]의 두 가지, 소리[聲]와 메아리[響]의 두 가지, 햇빛[日]과 불[火]의 두 가지, 씨앗[種子]과 싹[芽]의 두 가지, 식초[酢]와 입 속의 침[舌涎]의 두 가지,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전하는 것도 아니고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인(因) 없이 그 두 가지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온이 상속하여도 첫 번째의 온이 이전하는 것이 아니고, 두 번째 온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인(因)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 오온의 상속이 이전하지 않고 차례로 도달함을 응당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또 외상(外相)과 내상(內相)에 각각 열 가지가 있다는 것을 올바로 관찰하여야 한다. 그 중에 외상의 열 가지란, 첫째는 항상하지 않음[非常], 두 번째는 완전히 끊어짐이 아님[非斷], 세 번째는 이전하는 것이 아님[不移轉], 네 번째는 인과가 서로 매여서 중간이 없음[無中間], 다섯 번째는 앞의 몸이 아님[非彼體], 여섯 번째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님[非別異], 일곱 번째는 짓는 자가 없음[無作者], 여덟 번째는 원인이 없지 않음[非無因], 아홉 번째는 찰나 멸함[刹那滅], 열 번째는 같은 종류의 결과가 함께 묶임[同類果相繫]이다. 저 외부의 모든 종자[外種]는 남김없이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싹이 생겨 나오기 때문에 완전히 끊어짐이 아니다. 종자가 소멸하여 다 없어졌을 때 그 싹은 본래 없었으나 지금 생기기 때문에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저 상속하는 바가 단절됨이 없이 원인과 결과가 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중간(中間)이 없는 것이다. 종자와 싹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앞의 몸이 체(體)는 아니고, 그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인연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짓는 자가 없으며, 종자가 원인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지도 않다. 종자ㆍ싹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 등이 서로 연결되어 서로 생겨나기 때문에 찰나에 멸한다. 달고 시고 짜고 쓰고 맵고 떫은 것은 원인의 차별에 따라 결과가 전변하여 나오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결과가 함께 묶이는 것이다. 그 중 내상의 열 가지란, 첫째는 죽은 오온은 남김없이 멸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다음 생의 오온을 얻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 죽은 오온이 남김없이 없어졌을 때 다음 생의 오온이 본래는 없다가 이제 생기기 때문에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네 번째, 오온이 상속하며 끊어짐이 없고 원인과 결과로 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중간이 없다. 다섯 번째, 죽은 오온과 다음 생의 오온이 다르기 때문에 앞의 몸[彼體]이 아니다. 여섯 번째, 앞의 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지 않다. 일곱 번째, 인연의 화합으로 생겼기 때문에 짓는 자가 없다. 여덟 번째, 번뇌와 업이 원인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지는 않다. 아홉 번째, 가라라(迦羅邏, kalala)ㆍ알부타(頞浮陀, arbuda)ㆍ폐시(箄尸, peśi)ㆍ가나(伽那, ghana)ㆍ발라사거(鉢羅奢佉, praśakhā)ㆍ출태(出胎)ㆍ갓난아기ㆍ어린아이ㆍ청소년ㆍ어른 등으로 전전(展轉)하여 상생하므로 찰나에 멸한다. 열 번째, 선(善)과 불선(不善)의 훈습은 원인의 차별에 따라 결과가 전변하여 나오므로 같은 종류의 결과[同類果]가 함께 묶인다.
또 세 게송이 있다.
마치 등불이 불꽃이 끊임없이 타오르듯이 식신(識身) 또한 마찬가지라서 앞 찰나[先際]와 뒤 찰나[後際]가 모여 쌓임이 없다.
불생(不生)과 유생(有生)은 파괴하여 화합하지 않으며, 생겨난 것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업의 굴림을 짓는다.
만약 저 연생을 능히 관하여 공을 알고, 만약 저 시설을 안다면 그것이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무명ㆍ행ㆍ애ㆍ취ㆍ유는 집제(集諦)가 되고, 식ㆍ명색ㆍ육처ㆍ촉ㆍ수ㆍ생ㆍ노사는 고제(苦諦)이다. 이 열두 가지에 대한 도제(道諦)란 그것을 멸하게 하여 방편을 증득하는 것으로 소위 염처(念處)ㆍ정근(正勤)ㆍ여의족(如意足)ㆍ근력(根力)ㆍ각지(覺支)각지(覺支)와 팔성도를 팔성도를 도제(道諦)라 이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