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문수사리동자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 공경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오직 바라옵건대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는 저에게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수순하여 활동하심을 설하옵소서. 세존 여래께서는 대비로써 여러 가지 근기를 위하여 무엇으로써 상(相)을 삼으시고, 무엇으로써 인(因)을 삼으시며, 무엇으로써 연(緣)을 삼으시고, 어디에 머무십니까?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바라오니 저에게 구족하게 설하시고 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로 현증하시는 사업을 설해 주시옵소서.” 이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동자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도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깊은 뜻을 질문하는구나. 잘 듣고 이를 잘 생각하여라. 내가 마땅히 너에게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대비해문(大悲海門)의 한 방울 물과 같은 상을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선남자여, 일체 여래께서 모든 중생에게 가지시는 대비는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대비는 언제나 항상하며 끊어짐도 없고 언제나 움직임도 없느니라. 이미 무량한 아승기겁에 원만한 모든 공덕을 쌓아 모으고 원만히 하였기 때문에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언제나 일체의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모두 다 호념하시고 섭수하시는 까닭이니라. 여래의 대비는 무량하고 가없으며 끝이 없고, 깊고 깊어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견고하며 이익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이것은 언어로써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선남자여, 비유하면 여래의 대보리를 얻음과 같이 모든 중생에게 대비심을 일으킴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무엇을 여래의 보리를 얻었다고 하는가? 선남자여, 부처님의 보리를 얻는 것은 근본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느니라.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머무는 곳인가? 신견(身見)이 근본이고 망상이 머무는 곳이니라. 신견과 망상과 보리는 평등한 까닭에 보리는 근본이 없으며 머무는 곳이 없다고 설하느니라. 이 뜻에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보리를 증득하시느니라. 일체 중생들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근본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여실하게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하여 여래께서는 널리 인연 있는 중생들에게 대비를 일으키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적정(寂靜)하고 친근적정(親近寂靜)하느니라. 적정이라고 말함은 안을 가리키고, 친근적정이란 곧 밖을 가리킨다. 무슨 까닭인가? 눈이 공하면 나도 공하며[我空] 나의 것[我所]도 역시 공하느니라. 성품이 이와 같은 까닭에 적정이라 이름하느니라. 귀도 공하며, 코도 공하며, 혀도 공하며, 몸도 공하며, 뜻도 공하며 나도 공하며, 나의 것도 역시 공하느니라. 성품이 이와 같은 까닭에 적정이라 하느니라. 눈이 공함으로 말미암아 색의 경계가 일어나지 않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친근적정이라 이름하느니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 공하므로 소리와 향과 맛과 닿음과 법의 경계가 일어나지 않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친근적정이라 이름하느니라. 이와 같이 적정하고 친근적정함을 중생은 알지 못하므로 이를 알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의 본성은 청정광명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마음의 실다운 성품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청정이라 하는가? 성품은 합해지는 것이 없는 까닭에 마치 허공의 성품이 청정함과도 같으니라. 또한 허공의 모습이 없음과도 같기 때문이며, 또한 허공의 성품이 평등함과 같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보리를 이름하여 가장 지극한 청정광명이라 하느니라. 이 깨끗한 광명은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 객진번뇌에 덮여 있는 까닭에 중생들로 하여금 여실하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를 따라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취하고 버림[取捨]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생사의 언덕을 버리고 뒤얽힌 폭류를 끊고서 저 언덕에 도달함을 취사라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제일의제(第一義諦)에 깊이 들어가 이 언덕을 보지 않고 저 언덕도 보지 않느니라. 일체법에서 이것과 저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는 취사가 없다고 하느니라. 범부가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줄을 모르므로 그에게 이를 알게 하고자 하여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무상(無相)이고 또한 관찰(觀察)도 없느니라. 무엇이 무상인가? 이른바 안식(眼識)이 얻을 바 없는 까닭이니라. 무엇을 관찰이 없다고 하는가? 안식이 색을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이식(耳識)도 얻을 바 없으므로 무상(無相)이라 이름하며, 이식이 소리를 분별함도 없으므로 관찰이 없다고 이름하느니라. 비식(鼻識)도 얻을 바 없으므로 무상이라 이름하며, 비식이 향기를 분별함이 없으므로 관찰이 없다고 이름하느니라. 설식(舌識)도 얻을 바 없으므로 무상이라 이름하며, 설식이 맛을 분별함도 없으므로 관찰이 없다고 이름하느니라. 신식(身識)도 얻을 바 없으므로 무상이라 이름하며, 신식이 접촉을 분별함도 없으므로 관찰이 없다고 이름하느니라. 의식(意識)도 얻을 바 없으므로 무상이라 이름하며, 의식도 법(法)을 분별함이 없으므로 관찰이 없다고 이름하느니라. 이와 같이 상도 없고 관찰도 없는 것이 성자의 경계이니라. 삼계를 초월한 까닭에 범부와 소인이 알 바가 아니니라. 그것을 실답게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과거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며 미래도 아닌 까닭에 3제(際)가 평등하며 3륜(輪:身ㆍ口ㆍ意 3業)을 단절하였느니라. 무엇을 3륜을 단절하였다고 하는가? 저 과거심(過去心)은 일어나지 않았고, 저 미래식(未來識)은 행함이 없는 까닭이며, 이 현재의(現在意)는 작용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심의식은 머무는 바가 없느니라. 무엇을 삼제평등(三際平等)이라 하는가? 과거의 일은 헤아릴 수 없으며, 미래의 식은 나타내 보일 수가 없으며, 현재의 뜻은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심히 깊어서 3제가 평등하며 3륜이 청정하나 중생은 알지 못하므로 그에게 실다웁게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몸이 없으며, 보리는 행하는 것이 없느니라. 무엇이 몸이 없음인가? 이른바 안식으로 알 수 없는 까닭이며, 이와 같이 이식과 비식과 설식과 신식과 의식으로도 알 수 없는 까닭이니라. 무엇이 행하는 것이 없음인가?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또한 머묾도 없는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행하는 것이 없다고 설하며 3상(相)을 멀리 떠나 있느니라. 행하는 것이 없는 모습과 같이 행하는 것이 있는 모습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법의 성품이 이와 같은 까닭이니라. 무성(無性)의 성품과 이 성품도 무(無)가 아니다. 이 둘은 둘이 아니며 이것이 보리의 성품이니라. 이와 같이 몸이 없음과 행하는 것이 없는 모습을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깨달아 알게 하고자 여래께서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부서지지 않으며 증득한 자취도 없느니라. 무엇이 증득이고 부서지지 않음인가? 이른바 진여(眞如)는 증득한 바의 자취인데, 머무는 곳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법계는 증득한 바이나 근본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실제(實際)는 증득한 바이나 움직임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공문(空門)은 증득한 바이나 얻을 것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무상(無相)은 증득한 바이나 분별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무원(無願)은 증득한 바이나 구할 수가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무중생(無衆生)은 증득한 바이나 본성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허공(虛空)은 증득한 바이나 취할 수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무생(無生)은 증득한 바이나 사라지지 않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행하는 것이 없음[無爲]은 증득한 바이나 온갖 행하는 것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보리는 증득한 바이나 적정과 친근적정에 말미암아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열반은 증득한 바이나 본래 생겨남이 없으므로 부서질 수가 없느니라. 이와 같은 증득한 자취와 부서질 수가 없음을 중생은 알지 못하므로 이를 깨닫게 하고자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몸으로 얻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몸으로는 알지 못하며 마음은 환상과 같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바르게 아는 것을 보리를 얻었다고 하느니라. 세제(世諦)에 수순하여 보리가 있다고 설하느니라. 마땅히 알라. 보리의 체는 얻을 수 없으며 설하는 자도 없느니라. 무엇을 얻을 수 없는가? 만약 몸이거나 마음이거나, 이치이거나 이치가 아니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거나, 참되거나 허망한 등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무엇을 설할 수 없다 하는가? 일체의 모든 법의 갖가지 방편으로도 이 보리를 나타내어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적은 부분이라도 법에 머물고자 하지만 머묾이 없는 까닭이니라. 이것은 문자나 언설의 경계가 아니니라.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머무는 곳이 없으며 가히 설할 수도 없느니라. 보리도 역시 이와 같아 머물 수 없고 설할 수 없느니라.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실답게 일체 모든 법이 다 설할 수 없음을 관찰하시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법 가운데에는 언어가 없으며 모든 언어 가운데에도 역시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묘법을 일체 중생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그들을 깨달아 알게 하고자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취할 수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느니라. 어찌하여 취할 수 없으며, 어찌하여 의지할 곳도 없는가? 여래께서는 실답게 법을 지견(知見)하시는 까닭이니라. 이른바 눈은 얻을 것이 없으므로 취할 수 없으며, 색은 얻을 수 없으므로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귀는 얻을 수 없으므로 취할 수 없으며, 소리는 얻을 수 없으므로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코는 얻을 수 없으므로 취할 수 없으며 향기는 얻을 수 없으므로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혀는 얻을 수 없으므로 취할 수 없으며, 맛은 얻을 수 없으므로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몸은 얻을 수 없으므로 취할 수 없으며, 촉감은 얻을 수 없으므로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뜻은 얻을 수 없으므로 취할 수 없으며 법은 얻을 수 없으므로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취함도 없고 의지함도 없으므로 보리에서 현정등각(現正等覺)하시어 눈에서 취할 색이 없고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식(識)도 의지할 바가 없느니라. 귀가 취함이 없고 소리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식도 의지할 바가 없느니라. 코가 취함이 없고 향기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식도 의지할 바가 없느니라. 혀가 취함이 없고 맛이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식도 의지할 바가 없느니라. 몸이 취함이 없고 향기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식도 의지할 바가 없느니라. 뜻이 취함이 없고 법이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식도 의지할 바가 없느니라. 의지할 바 없으므로 식도 머무는 곳이 없느니라. 일체 중생들이 허망하게 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고 집착하는데, 어찌하여 중생의 식심(識心)이 머무는 곳인가?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느니라. 이른바 색온(色蘊)과 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이니라. 곧 이것이 중생의 식이 머무는 곳이니라. 여래께서는 중생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머무는 곳이 없고 궁극에는 머물 때[際]도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만, 일체 중생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이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자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라고 말하는 것은 체성이 공함을 이름이니 체가 공하므로 보리도 공하며 체가 공하므로 일체법도 공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그 체가 공함을 아시고 일체법에서 현정등각하시느니라. 이러한 뜻이므로 공으로써 깨닫지 아니하시며 공에서 깨달으시느니라. 이것을 바로 일삼보리지(一三菩提智)라 이름하느니라. 이른바 공과 보리는 결코 둘이 아니며, 공과 보리는 분별할 수 없느니라. 일체법도 역시 이와 같이 둘이 아니며 둘의 상이 없느니라. 일체의 온갖 법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명칭도 없고 상도 없으며 행함도 없고, 또한 행하는 바와 취향(趣向)하는 바도 없느니라. 말하거나 설함도 없으며 집착함도 취함도 없느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공이라 하느니라. 제일의제(第一義諦) 가운데에서는 공도 역시 얻을 수 없으며 단지 언설만 있을 따름이어서 허공을 설함과 같으니라. 다만 공이라고 말할지라도 공은 언어적인 경계가 아니니라. 이와 같이 공을 설하는 것은 가히 설할 수 없다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문에 들어간다고 하며, 이른바 일체법은 명자(名字)가 있지 않느니라. 이름이 없지만 억지로 이름하여 설한 것이니라. 이와 같은 명자는 일체법에서 머무는 곳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현상에 따라서 거짓으로 그 명상을 세웠지만 상의 본성은 공하느니라. 무엇을 따라서 명칭을 세웠는가?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실다운 지혜로써 일체법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아시는가? 본래 생함이 없고 나옴이 없으며, 일어나고 멸함이 없음과 장애 없고 걸리는 것 없으며, 상이 없고 함이 없음을 아시고, 심의식을 여의어서 명자가 없으며 음성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시고 해탈을 얻으시느니라. 이와 같은 해탈은 얽혀져 있는 것도, 풀어진 것도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성품은 평등한 까닭이니라. 모든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이것을 실답게 깨닫고 알게 하기 위하여서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와 허공은 평등하느니라. 그 허공은 평등함도 평등하지 않음도 없으며, 보리도 역시 평등함도 평등하지 않음도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러 가지 법은 실답게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는 까닭에 일체의 법은 평등함도 평등하지 않음도 없느니라.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평등함도 평등하지 않음도 없음을 실답게 지견하시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에서 현등정각하시느니라. 이 까닭에 그 가운데 평등하다거나 평등하지 않다고 설할 법이 없음을 일체법에서 실답게 아시느니라. 무엇을 아시는가? 일체법이 근본이 없으며 생함도 멸함도 없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없어서 지금 이미 있더라도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과 그것이 생함이 없다는 것과 또한 멸함이 없다는 것을 아시느니라. 이와 같이 생함과 멸함은 인연을 따라서 생하고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느니라. 이 가운데에 가히 펼칠 만한 법은 결코 없느니라. 여래께서는 생사의 길고도 멀며 위험한 길을 끊으시려고 이와 같은 실다운 법을 설하시느니라. 일체 중생들이 생사의 길이 끊어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또한 법성이 평등함을 모르므로 이들을 실답게 알고 깨치게 하려고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의 증득한 바는 바로 여여(如如)1)이니라. 보리가 여여함과 같이 색(色)도 또한 이와 같아서 제일의(第一義)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느니라. 보리가 여여함과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여여 하며, 또한 가깝지도 멀지도 않느니라. 보리가 여여함과 같이 지계(地界)에서도 여여하며, 수계(水界)와 화계(火界)와 풍계(風界)도 여여하며, 또한 가깝지도 멀지도 않느니라. 보리가 여여함과 같이 안계(眼界)와 색계(色界)와 안식계(眼識界)까지도 여여하며, 또한 가깝지도 멀지도 않느니라. 보리가 여여함과 같이 이계(耳界)와 성계(聲界)와 이식계(耳識界)도 여여하며, 나아가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意識界)까지도 여여하며, 또한 가깝지도 멀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은 제온(諸蘊)과 계(界)ㆍ처(處) 등과 일체의 모든 법이 여여함에서 멀지 않느니라. 여래께서는 여여를 칭하여 일체법을 아시느니라. 이 까닭에 현전하시어 등정각을 이루시느니라. 성(性)과 상(相)에서 등정각하시는 까닭에 현재와 같이 과거와 미래에서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아니하였고, 과거는 아직 지나지 아니하였으며, 현재는 적정하니라. 이와 같이 평등함이 바로 보리를 진실하게 증득한 바이니라. 이와 같이 증득한 한 법도 일체법과 다르지 아니하며, 일체법도 한 법과 다르지 아니하니라. 실로 이 가운데에는 하나이거나 둘이거나 다시 많은 법을 갖추어도 얻을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증득한 바를 범부 중생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내가 마땅히 깨닫게 하리라’고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무상(無相)이어서 모든 상에 잘 들어가느니라. 무엇을 상이라 하고 무엇을 무상이라 하는가? 이 가운데 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처음으로 일체의 선법을 일으킴과 같고,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일체법이 모두 얻을 수 없음이니라. 또한 상이라고 하는 것은 머무름 없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며, 무상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상삼매해탈이니라. 또한 상이란 심심소법(心心所法)으로 일체의 선법을 헤아리고 관찰하는 것이요, 무상이란 헤아리는 것을 초월하여 식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니라. 또한 상이란 유위법(有爲法)에서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요, 무상이란 무위법(無爲法)에서 현증하여 상응함이라. 이와 같이 깊고 깊은 상과 무상의 문을 범부는 알지 못하므로 내가 마땅히 깨닫게 하리라. 이 까닭에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무루(無漏)이며 번뇌온(煩惱蘊)이 없느니라. 이 가운데 무엇을 누(漏)라 하며, 무엇을 무루(無漏)라 하는가? 누(漏)2)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와 견루(見漏)이니라. 이 네 가지 누를 모두 멀리 여읜 것을 무루라고 하느니라. 무엇을 번뇌온이 없다고 하는가? 네 가지의 번뇌온(煩惱蘊)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욕온(欲蘊)3)을 멀리 여의었으며, 사견온(邪見蘊)4)을 멀리 여의었으며, 아견온(我見蘊)5)을 멀리 여의었으며, 계금취온(戒禁取蘊)6)을 멀리 여의었느니라. 이 네 가지 번뇌는 모두 무명의 어둠에 덮여 있으며, 지혜의 눈이 없어 보지 못하느니라. 탐욕하며 갈망하여 말라 애태우며 쌓아 모아 건립하므로 온(蘊)이라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러한 아견 등 번뇌의 근본이 없으며 본래 청정함을 아시고, 또한 수순하시어 중생들이 청정함을 아시느니라. 만약 내가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여 둘이 아니고 두 가지 모습이 없느니라. 이 두 가지 모습이 없는 것이 바로 생함이 없다는 뜻이니라. 이 생함이 없다는 뜻은 바로 멸함이 없다는 뜻이니라. 이 멸함이 없다는 뜻 가운데에서는 심의식(心意識)7)이 평등하여 모두 다 움직이지 않으며, 이 심의식이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는 분별이 생겨나지 않느니라. 만약 분별한다면 곧 생사의 법이 생겨나게 되며, 만약 분별하지 않는다면 해탈의 법이 생겨나리라. 만약 해탈의 법이 생겨나면 곧 무명이 일어나지 않으며, 무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12유지(有支)8)가 생하지 않느니라. 만약 12유지가 생기지 않으면 곧 생함이 없으며, 생함이 없으면 바로 해탈이니라. 만약 해탈하면 곧 요의(了義)이며, 요의인즉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니라. 무엇을 제일의제라고 하는가? 이른바 무아(無我)이니라. 만약 무아이면 곧 설할 수 없으며, 설할 수 없으면 이것은 바로 인연이 화합한 뜻이니라. 이와 같은 인연 화합의 뜻이 바로 일체법의 뜻이니라. 일체법의 뜻은 바로 여래의 뜻이니라. 이러한 뜻이기에 만약 인연 화합의 법을 보면 바로 모든 법을 보는 것이며, 모든 법을 보는 것은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참되게 제일의 가운데에서 보면 세심하게 관찰하여, 보지 못하는 것이 조금도 없느니라. 무엇을 조금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관찰이니라. 관찰하는 마음에 따라서 그 진실을 보는 것을 진실견(眞實見)이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평등함을 아느니라. 이 까닭에 여래께서는 현재에 평등하고 바르게 깨치심은 이것이 무루이고 번뇌온이 없는 것이니라. 범부인 중생들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내가 마땅히 깨닫게 하리라. 이 까닭에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로써 펼치시느니라. 또한 선남자여, 보리는 청정하며 더러움 없고 처소(處所)가 없느니라. 이 가운데 어떠한 법을 청정이라고 하며, 무엇을 더러움이 없다고 하며, 무엇을 처소가 없다고 하는가? 이른바 공(空)은 바로 청정이며, 무상(無相)은 바로 더러움이 없음이며, 무원(無願)은 바로 처소가 없음이니라. 무생(無生)은 바로 청정이며, 무행(無行)은 바로 더러움이 없음이며, 일어남이 없음은 바로 처소가 없음이니라. 여러 가지 법의 본성은 바로 청정이며, 지극한 청정은 바로 더러움 없음이며, 본성의 광명은 바로 처소가 없음이니라. 체를 설할 수 없음은 바로 청정이며, 체를 분별할 수 없음은 바로 더러움 없음이며, 언어를 떠나 고요함은 바로 처소가 없음이니라. 진제(眞諦)는 청정이며, 법성은 더러움이 없으며, 진실한 경계는 처소가 없느니라. 온이 청정함을 알고 경계의 본성을 아는 것이 바로 더러움 없음이며, 멀리 여읨을 알고 들어가는 것이 바로 처소가 없음이니라. 과거를 다 아는 지혜가 청정함을 아는 것이요, 미래에 생함이 없는 지혜를 아는 것이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현재의 법계에서 머무는 곳을 아는 것이 처소가 없음이니라. 이와 같은 등의 청정과 더러움 없음과 처소가 없음의 뜻은 모두 다 하나의 증득한 바 가운데에 들어가느니라. 증득한 바란 곧 적정이며, 적정이란 곧 적멸(寂滅)이며, 적멸이란 곧 친히 증득함이며, 친히 증득함이란 곧 무상(無相)이며, 무상이란 곧 승의제(勝義諦)이며, 승의제란 곧 허공의 모습이니라. 허공의 모습처럼 보리의 모습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보리의 모습처럼 일체법의 모습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일체법처럼 일체의 중생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모든 중생처럼 일체의 불국토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일체의 불국토처럼 대반열반(大般涅槃)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이 까닭에 나는 일체의 모든 법이 바로 열반의 모습이라고 설하느니라. 이 구경인 실제의 모습은 상대할 것이 없으며,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청정하며 본래 더러움이 없고, 본래부터 처소가 없느니라.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갖가지의 색상에서 색상이 없음을 보시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에서 현재에 평등하고 바르게 깨치시느니라. 평등하고 바르게 깨치시고 나서 두루 시방을 살피시며, 모든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함에 머물면서 더러운 것을 일으키고 처소에 집착함을 보시고서 문득 중생들을 위하여 널리 모든 대비를 일으켜 행하시며, 범왕(梵王)이 미래에 정성스레 청함을 생각하시고서 뛰어난 방편으로 법륜을 펼치고자 하시느니라.” 이때 시기대범천왕(尸棄大梵天王)9)이 부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알고 범천의 권속 80억의 천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범궁에서 사라져 여래 앞에 나타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조아리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오직 바라옵나니 세존이시여, 법륜을 굴리소서. 오직 바라옵나니 선서시여, 법륜을 굴리소서.” 그리고는 게송을 읊었다.
여래께서 증득하신 뛰어난 적정은 청정하여 더러움 없는 묘한 광명이라네. 가히 설할 수 없으며 이름도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를 바야흐로 궁구(窮究)하고자 하네.
이것을 위하여 수많은 억 겁을 지나고 난행(難行)하고 고행(苦行)하더라도 다할 수 없음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아견(我見)에 어리석게 집착하고 잠자며 뒤집어진 생각의 중생들이기 때문이니 깨치게 하소서.
이 모임의 중생에게 좋은 이익이 많은 것은 옛적 부처님 계신 곳에서 이미 인(因)10)을 닦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라옵나니 널리 감로문을 여시어 가장 뛰어난 법륜을 굴리셔서 함식(含識:중생)을 이롭게 하소서.
저희들은 마땅히 최상의 법을 깨달아 마군을 남김 없이 부수리니 삿된 길로 인도된 모든 중생들을 여래의 참되고 바른 길에 들게 하소서.
여래의 대비는 가장 높으셔서 일체를 이익되게 하심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지금 천인사(天人師)께 권청하오니 가장 높은 미묘한 법을 펼치옵소서. 구류손불(拘留孫佛)11)께서 펼치신 것처럼 역시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12)부처님과 가섭선서(迦葉善逝)13)께서 법륜을 펼치신 것처럼 지금 세존14)께 이와 같이 펼치시기를 청하옵니다.
비유하면 큰 구름이 감로의 비를 내려서 약초와 풀과 나무가 모두 싹트는 것처럼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의 구름을 일으키시어 두루 생각하기 어려운 묘법의 비를 내리소서.
여래께서 처음으로 사자후를 내시어 반드시 널리 모든 유정들을 해탈시키시니 원하옵건대 그때에 응하여 법수(法水)를 뿌리시어 사람과 하늘의 깊고 간절한 바람을 채워 주소서.
“선남자여, 시기범왕이 게송으로 청하고 나자, 나는 이때 범왕의 청을 받아들여 여래의 대비의 나툼을 버리지 않고, 바라내성(波羅奈城)15)의 선인(仙人)이 사는 곳인 시녹림(施鹿林)16)에서 처음으로 위없는 법륜을 굴렸느니라. 만약 사문이거나 바라문이거나 천마범(天魔梵)이거나 일체 세간에서는 굴리지 못하는 법륜을 굴릴 때에 그 무상(無常)의 소리가 널리 삼천대천세계까지 들렸느니라. 이때 아야교진여(阿若礬陣如)17)가 처음으로 법을 듣고 깨쳐서 과를 얻었느니라. 나는 이때 게송을 읊었느니라.
심히 깊어서 가히 설할 수 없는 승의(勝義)는 문자로도 안 되네. 내가 설한, 결과가 없음도 아님[非無果]을 아야교진여가 처음으로 이해하였네.
선남자여, 내가 법륜을 굴릴 때에 또한 한량없고 수없이 많은 중생들이 모두 여래의 유희대비(遊戱大悲)18)에 조복되며, 또한 한량없고 수없이 많은 중생들이 보리심을 발하였느니라. 이 까닭에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를 언제나 펼치시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여래께서 구족하시고 원만히 하신 열여섯 가지의 대비이니라. 언제나 그 가운데 머무르시며 공용(功用)을 빌리지도 않으시고 마음대로 언제나 펼치시느니라. 하나의 중생을 위해서라도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겁을 지나고, 대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으며, 이 중생들이 조복되거나 조복되지 않거나 반드시 조복하여 여래의 바른 법 가운데 머물게 하느니라. 하나의 중생을 위하는 것처럼 일체 중생들을 위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한량없는 겁을 지나도록 지옥의 고통을 받아도 피곤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며, 대비의 마음이 또한 줄어들지 않느니라. 이 까닭에 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에게 베푸시는 대비는 깊고 무거우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승(二乘)의 비(悲)는 피부를 벗김과 같으며, 보살의 비는 살덩어리를 자른 것과 같으나, 여래의 대비는 깊이 골수에 사무치느니라. 또한 부처님의 지혜에 수순하는 것은 성문(聲聞)의 비이며, 모든 중생에게 보리심을 내도록 권하는 것은 보살의 비이며, 장래에 부처가 되리라고 기별하는 것은 여래의 비이니라. 자심(慈心)에 인하여 일으키는 것이 성문의 비이며,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 보살의 비이며, 중생들을 끝까지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 부처님의 대비이니라. 생사를 끊기 바라는 것이 성문의 비이며, 중생들을 제도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이 보살의 비이며, 널리 일체의 생사와 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대비이니라. 그러므로 여래의 대비가 최고이며 존귀하고 뛰어남을 마땅히 알라. 모든 중생들을 조복하시고자 하므로 혹은 일 겁을 지나거나 혹은 다시 백 겁이나 혹은 백천 겁이 지나도록 오래 세간에 머무르며, 구경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지 않으리라. 선남자여, 이에 오랜 아승기겁을 지나서 올 때에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느니라. 전단사(栴檀舍)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ㆍ아라하(阿羅訶)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라 이름하며, 세계의 이름은 유향(有香)이고, 겁의 이름은 최승향(最勝香)이니라. 부처님의 수명은 십육 8만 4천 세이며, 성문 제자의 수가 십육 8만 4천이나 되는 모임이었다. 그 여래의 몸에 있는 모든 털구멍에서는 언제나 묘한 향이 흘러서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채우며, 일체에 널리 퍼져서 온갖 더러움이 없느니라. 담과 집과 나무와 산과 강이 갖가지의 색상으로 모두 향기가 나므로 이 세계를 유향이라고 이름하느니라. 그 가운데의 중생이 그 향을 만나면 3업이 청정해지고 온갖 선을 구족하며 집을 떠나 도를 닦아 4선(禪)19)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이 세계에는 1만의 여래가 끊임없이 출현하며 모두 동일한 명칭인 전단사(栴檀舍)라고 하느니라. 이 까닭에 이 겁의 이름도 최승향이니라. 전단사여래가 부처님의 사업을 행하시고 나서 열반하실 때에 이르러 다시 일체의 사람과 하늘을 초월하는 맑고 묘한 천안으로 두루 중생 가운데 어떤 중생들이 다른 부처님께 조복받으며, 어떤 중생들을 내가 조복해야 할 것인지 관하시느니라. 이에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한 중생이 있음을 보시는데, 과거세에서 일찍이 선근을 심었으며, 대승을 즐겨 들으며 마음에 청정함을 얻었으므로 내가 마땅히 조복하리라. 이 중생은 8만 4천 겁을 지나도록 저 하늘 가운데에 있었으나, 이미 다 보내고 바야흐로 하늘로부터 내려와 인간계에 태어나 오욕(五欲)을 아직 모르며, 대승을 찬탄함을 듣고 문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대보리에서 영원토록 물러서지 않으리라. 이때 전단사여래께서는 방편대비로 두루 관찰하시고 나서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밤에 열반에 들고자 하느니라.’ 문득 대비연민(大悲憐愍)의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들고 나서 열반을 나타내 보였느니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사리를 분포하여 시방의 사람과 하늘이 공경하고 공양하느니라. 바른 법이 세간에 머무는 것은 8만 4천 세이며, 한량없는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느니라. 순전히 정법(正法)의 한맛으로 사람을 교화하며, 다시 상법(像法)이 유행하는 세간에서는 저 부처님 세존께서 비록 열반을 보이실지라도 그 대비연민삼매의 신통력을 지니시느니라. 다시 세간에서 8만 4천 겁을 머무시나 상호의 몸을 감추시므로 세간에서는 볼 수 없느니라. 8만 4천 겁을 지나고 나서 한 중생으로 비상(非想)에 머무르는 자가 바야흐로 사람 가운데 크게 부유하며 귀한 집안에 태어나 여덟 살이 되면, 그때에 저 여래께서 삼매로부터 일어나 동자의 집에 이르러 상호의 몸을 나타내고 동자의 앞에 머무시느니라. 오직 이 동자와 만 2천의 천자(天子)와 마땅히 조복되는 자가 여래를 보며,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리라. 그때 저 여래께서 먼저 동자를 위하여 대승을 일으키시며, 다시 오욕의 지나친 허물을 연설하시며 말씀하시느니라. ‘선남자여, 오욕의 지나친 악이 심하여 가히 두려울 만하다. 비유하면 높고 큰 다섯 무리의 독사와 같으니라. 한 마리의 독사도 곧 사람을 해치는데, 하물며 다섯 무리이겠는가? 또한 다섯 덩어리의 독약을 쌓아둔 것과 같으니라. 만약 조금만 맛보아도 사람을 해치거늘, 하물며 다섯 덩어리를 먹는 것이겠는가? 이 까닭에 너는 마땅히 탐내고 집착하지 말지어다.’ 이때 동자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그 집의 생활도구와 남자와 여자와 일체의 소유를 보니, 모두가 독사와 같아 깊이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문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깊고 무거운 마음을 발하여 뒤로 물러나지 않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동자의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온갖 선을 구족했음을 아시고 곧 수기(授記)20)를 주시며 모든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 동자는 72아승기겁을 지나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최승보(最勝寶)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라 이름하며 세상에 나타나리라.’ 부처님께서 수기하실 때에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였느니라. 다만 이 동자와 만 2천의 천자가 법기(法器)로써 머무를 만하여 모두 다 들었느니라. 이때 모든 천자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고 이러한 원을 말씀드렸다. ‘저 최승보여래께서 성불하실 때에 저희들도 마땅히 그 불국토에 태어나리다.’ 이때 전단사여래께서 모든 천자에게 마땅히 왕생하게 될 것이며, 저 최승보여래가 너희들 모두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전단사여래께서는 그 보살에게 기별을 주시고 나서 그 다음에 구경의 열반에 드셨고, 일체의 사람과 천(天)이 사리를 공양하였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뜻이기에 일체 여래의 대비는 깊고 무거우며 구족하며 원만하여 모든 성문과 연각의 경계가 아니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은 법문은 능히 너희들로 하여금 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게 할 것이니라. 만약 어떤 중생들이 이 법문을 듣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서사하거나, 나아가 한 글자와 한 구절과 한 게송까지라도 해설해 주고서 얻은 선근은 열반에 들지 않을 때에는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인(因)은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니라.” 여래께서 이 모임 가운데에서 이 대비의 깊은 법문을 설하실 때에, 하나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중생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둘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보살들이 인(忍)에 수순함을 얻고, 셋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보살들이 여래의 16대비를 얻었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관정법인(灌頂法忍)까지도 다 얻었다. 이때 일체의 대중들이 이 법문을 듣고 뛸 듯이 환희하며 청량하고 기뻐서 몸과 마음을 다 기울여서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며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여래이시여, 훌륭하십니다. 선서이시여, 그 뜻을 쾌히 설하셨습니다.” 곧 사람과 하늘의 갖가지 공양구로 공양을 펼치며, 혹은 갖가지 묘한 보배영락과 갖가지 질 좋은 묘한 의복과 갖가지 진귀한 음식과 법복(法服)과 당번과 산개(傘蓋)와 같은 갖가지 공양구로 공경하고 존중하며 부처님께 공양올렸다.
1)정지에 계합하는 이체(理體). 만유제법의 이체는 동일평등하므로 여(如). 여의 뜻이 하나가 아니므로 여여(如如)라 한다.
2)마음이 물건에 끌려다니는 번뇌를 말한다. 번뇌가 있는 것을 유루(有漏), 번뇌가 없는 것을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에 세 가지 누와 네 가지 누가 있다. 첫째 욕루(欲漏)는 욕계의 무명 이외의 모든 번뇌이고, 둘째, 유루(有漏)는 색계와 무색계의 무명 이외의 모든 번뇌이다. 셋째, 무명루(無明漏)는 삼계의 무명이다. 여기에 삼계의 견혹(見惑)인 견루(見漏)를 더한 것이 네 가지 누이다.
3)나는 죽어도 언제나 존재한다는 상견(常見) 또는 유견(有見)과 나는 죽으면 단멸한다는 단견(斷見), 즉 무견(無見)을 말한다.
4)사견(邪見)은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5)살가야견(薩迦耶見)ㆍ유신견(有身見) 또는 신견(身見)이라 하며, 내가 있다고 하는 아견(我見)과 나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아소견(我所見)을 말한다.
6)바르지 않은 계율이나 금제(禁制) 등을 열반에 인도하는 바른 계행이라고 고집하는 것. 예를 들면 우계(牛戒)라고 해서 쇠똥을 먹고 소와 같이 잠자는 것이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라 헤아리고, 또는 단식해서 몸과 마음을 괴롭힘에 의해서 하늘에 태어나는 즐거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7)마음을 셋으로 나눈 것. 심(心)은 범어 citta의 번역으로 질다(質多)라 음역하고 집기(集起)한다는 뜻이다. 의(意)는 범어 manas의 번역으로 말나(末那)라 음역하고, 사량(思量)의 뜻이다. 식(識)은 범어 vijñāna의 번역으로 비야남(毘若南)이라 음역하고 요별(了別)의 뜻이다.
8)중생이 생사계에 윤회하는 인과를 설명한 것.
9)시기불은 과거 7불 가운데 두 번째 부처님이다. 시기불은 과거 장엄겁에 출현한 천불 가운데 999불로서 광상성(光相城)의 왕족으로 출생하였으며, 분다리수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3회에 걸쳐 설법하였는데, 1회에는 10만 명, 2회에는 8만 명, 3회에는 7만 명을 제도하였다고 한다.
10)불과(佛果)를 낳는 인(因), 즉 불도수행을 말한다.
11)이하 과거 7불 가운데 현재 현겁(賢劫)의 4불이 본문에 등장한다. 구류손불은 과거 7불 가운데 제4불로서 안화성(安和城)의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나 시리수(尸利樹) 아래에서 성불하였으며, 1회의 설법으로 4만의 비구를 교화하였다.
12)과거 7불 가운데 제5불. 바라문 가정에서 출생하여 오잠바라수(烏暫婆羅樹) 아래에서 성도하였으며, 1회의 설법으로 3만의 비구를 제도하였다.
13)과거 7불 가운데 제6불. 바라내의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나 니구율나무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1회 설법에서 제자 2만 명을 제도했다고 한다.
14)과거 7불 가운데 제7불. 석가모니불은 가비라성의 왕족으로 출생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였으며, 45년간 수많은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15)범어로는 Vārāṇasī이다. 중인도 항하 유역의 나라 이름. 지금의 베나레스를 중심으로 한 지방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녹야원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6)범어로는 Mṛgadāva이다. 녹야원의 다른 이름. 중부 인도 바라내국의 북쪽 성 밖에 있던 동산으로 지금의 베나레스시의 북쪽 사르나트에 있었다. 석존이 도를 이룬 뒤 다섯 비구를 위하여 처음 설법한 곳이다.
17)범어로는 Ajñāta kauṇḍinya이다. 최초 다섯 비구의 한 사람. 아야는 잘 알았다는 뜻이며, 교진여는 성이다. 이것은 최초에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잘 안 사람임을 나타낸다. 세존께서 처녀가 바치는 우유죽을 드시는 것을 보고 타락하였다고 비난하고 녹야원으로 갔으나, 세존께서 성도하신 뒤 녹야원에 오셔서 설하신 사성제의 법을 듣고 제일 먼저 이해하였다고 한다.
18)여래의 대비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유희신변이라 칭한다. 마치 연극배우가 갖가지로 연기하는 것과 같으므로 유희라 하는 것이다.
19)색계의 네 가지 단계적 경지. 욕계의 어리석음을 초월하여 색계(色界)에 나타나는 네 단계로 된 명상. 정신통일의 네 단계, 네 가지의 심통일(心統一)ㆍ4선천(禪天)이라고도 말한다. 색계(色界) 4선천에 나는 선정. 초선(初禪)은 깨달음과 관(觀)함에 의해 생각이 환희에 차 편안한 경지이며, 2선(禪)은 다시 그 일심을 오로지하여 깨달음과 관(觀)도 사라진 뒤 삼매에 의해 편안한 경지이다. 다시 또 깨달음에 전념하여 모든 성현들이 구하는 희념을 호지하는 것이 3선(禪)이고, 이제 그 고락이 이미 멸하여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청정한 마음의 상태가 4선(禪)이라는 것이다.
20)범어로는 vyākaraṇa이다.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을 받는 것.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미래에는 부처가 되리라고 보증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예언ㆍ인가ㆍ미래의 약속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