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 조정[四朝]의 분부에 따라서 번역한 경(經)ㆍ논(論) 및 염송법(念誦法)과 아울러 편찬한 소(䟽)ㆍ기(記)ㆍ비문(碑文)ㆍ표(表)ㆍ록(錄)ㆍ문집[集] 등은 모두 343권이다. 아울러 목록도 345권이 있다. 그 가운데 경ㆍ논 및 염송법은 193권이고, 경ㆍ논의 소의(䟽義 :주석)는 64권이며, 정원(貞元) 연간에 새로 모은 고금의 제령(制令)과 비문ㆍ표(表)ㆍ기(記) 등은 86권이다.[아울러 목록이 89권이다.]
162권의 경ㆍ논 및 염송법
현종조(玄宗朝, 712~742) 때 금강지(金剛智) 삼장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증직1)된 스님으로, 시호는 대홍교(大弘敎) 삼장이다. 이 화상이 번역한 경ㆍ논 가운데 이미 목록에 들어간 것은 모두 1부(部) 4권이다.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법(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法) 4권 모두 81장[紙][이것도 경이라고 한다.] 위의 책은 이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들어가 있으므로 지금 여기 계산한 책 가운데에는 들어 있지 않다. 현종(玄宗) 시대에 번역한 경 가운데 잃어버렸거나 누락되어 고금의 목록에 아직 들어가 있지 아니한 것이 모두 5부 6권이다. 대위력오추슬마명왕경(大威力烏樞瑟摩明王經) 3권 35장 예적금강설신통대만다라니법술령요문(穢跡金剛說神通大滿陁羅尼法術靈要門) 1권 5장 예적금강법금백변법(穢跡金剛法禁百變法) 1권 3장 이상 3부 5권은 모두 북천축국(北天竺國) 삼장 사문(沙門) 아질달산(阿質達霰), 당나라 말로 무능승장(無能勝將)이 번역한 것이다. 보편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普遍智藏般若波羅蜜多心經) 1권 2장 위의 책은 개원(開元) 26년(738)에 동천축국(東天竺國) 삼장 사문 법월(法月)이 번역하였고, 사문 이언(利言)이 범어의 번역을 붓으로 받아썼다. 지금 그것이 광택사(光宅寺)에 현존하고 있는데, 한림원[翰林]에서 천자의 조서를 기다리면서 혹 그 경본을 반야경부 용자호질(龍字號帙)2) 가운데 끼워 넣은 것 같다. 금강정경유가수습비로자나삼마지법(金剛頂經瑜伽修習毗盧遮那三摩地法) 1권 15장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신주본(千手千眼觀世音菩薩大身呪本) 1권 2장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주본(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陁羅尼呪本) 1권 3장 부동사자다라니비밀법(不動使者陁羅尼秘密法) 1권 11장 이상 4부 총 4권은 남천축국의 삼장 사문 발일라보리(跋日囉菩提)[당나라말로 번역하면 금강지(金剛智)이다.]가 번역하였고, 사문 지장(智藏)이 붓으로 받아썼다. 지장스님은 후에 호(號)를 따라 이름을 아목거발절라(阿目佉跋折羅)[당나라말로 번역하면 불공금강(不空金剛)이다.]라고 고쳤으며, 단지 불공(不空)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다.
지장이 받아쓴 책은 모두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작성된 목록에 편입되어 있다. 금강지 삼장은 개원(開元) 29년(741) 8월 15일에 동도(東都:洛陽)의 광복사(廣福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자세한 것은 행적의 기록[行記]과 탑명(塔銘)에 밝혀져 있다. 위에서 말한 8부의 책은 모두 1책 10권이다. 대종(代宗)조 대력 연간(766~779)에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3)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삼장이 주청(奏請)4)하여 현종(玄宗)ㆍ숙종(肅宗) 및 지금의 폐하 이래로 삼조(三朝)에 걸쳐 번역한 경은 모두 77부 총 101권 및 목록(目錄)만 모아 놓은 1권이 있다.
금강정유가진실대교왕경(金剛頂瑜伽眞實大敎王經) 3권 43장 금강정유가반야이취경(金剛頂瑜伽般若理趣經) 1권 8장 관자재보살수기경(觀自在菩薩授記經) 1권 13장 유가염주경(瑜伽念珠經) 1권 2장 기특불정경(奇特佛頂經)은 3권 68장 관자재보살최승명왕심경(觀自在菩薩最勝明王心經) 1권 22장 이상 6부 총 11권은 함께 제1질(帙)이다. 금강정유가문수사리보살경(金剛頂瑜伽文殊師利菩薩經) 1권 2장 아리다라아로력경(阿唎多羅阿魯力經) 1권 21장 보현행원찬(普賢行願讚) 1권 5장 지장보살문법신찬(地藏菩薩問法身讚) 1권 5장 출생무변문경(出生無邊門經) 1권 10장 대길상천녀경(大吉祥天女經) 1권 7장 저리삼매야경(底哩三昧耶經) 1권 14장 십일면관자재보살경(十一面觀自在菩薩經) 3권 24장 이상 8부 총 10권은 함께 제2질이다. 길상천녀십이명호경(吉祥天女十二名號經) 1권 2장 금강정유가십팔회지귀(金剛頂瑜伽十八會指歸) 1권 9장 금강정유가삼십칠존분별성위법문(金剛頂瑜伽三十七尊分別聖位法門) 1권이며, [서문과 아울러] 13장 보리장소설일자정륜왕경(菩提場所說一字頂輪王經) 5권 78장 보협경(寶篋經) 1권 6장 금강수명다라니경(金剛壽命陁羅尼經) 1권 2장 이상 6부 총 10권은 함께 제3질이다. 대공작명왕경(大孔雀明王經) 3권 50장 대운청우경(大雲請雨經) 2권 14장 우보다라니경(雨寶陁羅尼經) 1권 5장 양우리동녀경(蘘麌利童女經) 1권 4장 도간유경(稻簳喩經) 1권 8장 대보광박루각경(大寶廣愽樓閣經) 3권 45장 이상 6부 총 11권은 제4질이다. 보리장장엄경(菩提場莊嚴經) 1권 22장 제일체질병다라니경(除一切疾病陁羅尼經) 1권 1장 능정일체안다라니경(能淨一切眼陁羅尼經) 1권 2장 시염구아귀다라니경(施焰口餓鬼陁羅尼經) 1권 4장 삼십오불명경(三十五佛名經) 1권 2장 팔대보살만다라경(八大菩薩曼茶羅經) 1권 3장 엽의관자재보살다라니경(葉衣觀自在菩薩陁羅尼經) 1권 8장 가리제모경(訶利帝母經)5) 1권 3장 비사문천왕경(毗沙門天王經) 1권 4장 관자재보살설보현다라니경(觀自在菩薩說普賢陁羅尼經) 1권 7장 이상 10부 총 10권은 제5질이다. 문수문자모품경(文殊問字母品經) 1권 3장[경의 제목에서는 “문수문자모품제십사(文殊問字母品第十四)이다”라고 하였다.] 금강정연화부심염송법(金剛頂蓮花部心念誦法) 1권 33장 금강정유가천수천안관자재염송법(金剛頂瑜伽千手千眼觀自在念誦法) 1권 28장 무량수여래염송의궤(無量壽如來念誦儀軌) 1권 12장 아촉여래염송법(阿閦如來念誦法) 1권 10장 불정존승염송법(佛頂尊勝念誦法) 1권 8장 금강정승초유가보현보살염송법(金剛頂勝初瑜伽普賢菩薩念誦法) 1권 13장 금강왕보살염송법(金剛王菩薩念誦法) 1권 12장 보현금강살타염송법(普賢金剛薩埵念誦法) 1권 12장 금강정유가오비밀수행의궤(金剛頂瑜伽五秘密修行儀軌) 1권 12장 이상 10부 총 10권은 함께 제6질이다. 금강수명염송법(金剛壽命念誦法) 1권 3장 일자정륜왕유가경(一字頂輪王瑜伽經) 1권 6장 일자불정륜왕염송의궤(一字佛頂輪王念誦儀軌) 1권 12장 인왕반야염송법(仁王般若念誦法) 1권 15장 여의륜염송법(如意輪念誦法) 1권 8장 대허공장보살염송법(大虛空藏菩薩念誦法) 1권 5장 유가연화부염송법(瑜伽蓮花部念誦法) 1권 7장 성관자재보살심진언관행의궤(聖觀自在菩薩心眞言觀行儀軌) 1권 6장 관자재다라유가염송법(觀自在多羅瑜伽念誦法) 1권 13장 감로군다리유가염송법(甘露軍吒利瑜伽念誦法) 1권 18장 이상 10부 총 10권은 함께 제7질이다. 화엄입법계품사십이자관문(花嚴入法界品四十二字觀門) 1권 6장 문수찬법신례(文殊讚法身禮) 1권 3장 수보리심계의(受菩提心戒儀) 1권 3장 금강정유가삼십칠존례(金剛頂瑜伽三十七尊禮) 1권 4장 반야이취경석(般若理趣經釋) 2권 32장 대만다라십칠존석(大曼茶羅十七尊釋) 1권 3장 금강정유가호마의(金剛頂瑜伽護摩儀) 1권 8장 도부다라니목(都部陁羅尼目) 1권 4장 대승연생론(大乘緣生論)은 1권 10장 칠구지불모다라니경(七俱胝佛母陁羅尼經) 1권 19장 이상 10부 총 11권은 함께 제8질이다. 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虛空藏菩薩所問經) 8권 107장 위 1부 8권은 함께 제9질이다. 인왕경(仁王經) 2권 [임금이 쓴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35장 밀엄경(密嚴經) 3권 [임금이 쓴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51장 인왕염송의궤(仁王念誦儀軌) 1권 19장 인왕경소(仁王經䟽) 3권[ 이 소는 두루 아래에 있는 소(䟽)ㆍ기(記)의 책[帙]속에 들어가 있다.]
이상 경전에 대하여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 삼장사문(三藏沙門)인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스님이 아뢰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선사(先師)이신 대홍교(大弘敎) 삼장화상을 받들어 섬겨오기를 24년 동안 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 스님에게서 유가(瑜伽 : 密敎)의 법문을 받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오천축국[五天]을 돌아다니다가 아직 전수 받지 못한 법문과 여러 경ㆍ논을 찾아 구하여 다시 그것을 거듭 배우고 익혔습니다. 무릇 그곳에서 얻은 범본(梵本) 유가진언(瑜伽眞言)으로 된 경ㆍ논 5백 여부를 얻어서 이를 받들어 국가를 위하여 성인의 말씀을 소상하게 번역하여 널리 복되게 하였습니다. 천보(天寶) 5년(746) 그곳을 떠나 상도(上都)에 이르러 현종(玄宗, 712~755)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러자 황제께서 자애로운 명[恩命]을 내려 내전(內殿)에 관정도량(灌頂道場)6)을 건립하여 갖고 온 범어경전을 모두 번역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숙종황제(肅宗皇帝, 756~762)께서 하늘의 뜻을 물려받아 성인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자, 특별히 윤지(綸旨)를 받들어 내도량(內道場)에 호마법[護摩]과 관정법(灌頂法)을 건립하였습니다. 다시 나라를 위하여 경전을 번역하여 황제의 중생교화[皇化]를 도왔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두 성제(聖帝)의 자애로운 칙령을 받들어 선대 삼장의 모든 범어의 글을 찾아보고, 그 중에 문맥이 끊어졌거나 탈락한 것이 있으면 곧 수정하여 보완하고, 그 중에 번역하지 않은 것은 계속 번역할 수 있도록 주청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황운(皇運)을 이어받으시어 크게 함령(含靈 :중생)들을 비호하시고 널리 복전을 여시니, 거듭 해와 달이 밝아지고 그 은혜의 물결은 먼 곳까지 덮었습니다. 또한 법의 비[法雨]는 두루 내려서 천하[四海]의 마음이 편안[宅心]하고 만방(萬方)이 번성[興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의 부촉하심이 성군(聖君)에게 있다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되었습니다. 불공(不空)은 두터운 은택을 받아 영화와 은총[榮幸]이 실로 깊습니다. 간절히 스스로 생각해 보니 무엇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는 길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선대 황제들는 성제(聖制)7)를 받들어 정밀하고 미묘한 말씀[微言]을 밝히기를 명하셨는데, 다시 폐하의 자애로운 명을 받아 선대제왕들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번역본을 보내 크게 중생들을 제도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사시(四時)8)에 간절히 정진한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아직 갚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지런히 밤낮으로 진언(眞言)과 대승 경전들을 자세히 번역하여 보잘것없는 미미한 효력이 있기를 바라며, 위로는 황도(皇道)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 동안 번역한 『금강정유가법문(金剛頂瑜伽法門)』은 성불의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단번에 범부의 경계를 뛰어넘어 피안(彼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밖의 부(部)의 진언과 여러 부처님의 방편은 서로가 같지 않지만, 번역한 대승 경전들은 모두가 위로 나라를 도와 재난과 위험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들의 운행은 어그러지지 않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게 내리고, 부처님의 힘을 우러러 믿게 되어 국가를 돕게 될 것입니다. 찬집(纂集)을 전후해서 번역을 마친 것은 개원 (開元) 연간에서부터 대력(大曆) 6년(771)에 이르기까지 모두 101권 77부와 서문과 목록 1권이 있습니다. 이를 받아쓴 스님과 속인의 이름을 써 넣어 이미 끝냈습니다. 이에 삼가 황제폐하의 탄신[降誕]하신 날에 인연하여 삼가 갖추어 받들어 진상하나이다. 진언의 복을 얻어 길이 성궁(聖躬 : 천자의 몸)을 수호하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대승의 위력은 길이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아직 번역하지 못한 범본 경전 가운데 오직 나라의 복을 호지(護持)하고 생령(生靈)들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경이 있으면 계속 번역하겠습니다. 이루 헤아리지 못할 지극히 정성스러운 칙지(勅旨 : 천자의 명령)에 의하여 아뢰옵나이다.” 이어 이 경전들을 조정의 안 밖으로 널리 베풀고 모두를 일체경(一切經) 목록에 편입하게 하였다. 대력(大曆) 7년(772) 1월 16일, 사도겸중서령(司徒兼中書令) 신(臣) 자의(子儀)가 선포하였다. 그리고 중서시랑(中書侍郎) 평장사(平章事) 신 원재(元載)가 받들었으며, 중서사인(中書舍人)이 칙지를 받들고, 위와 같은 칙명이 이르자 이를 받들어 봉행하였다. 대력 7년 1월 10일, 시중문하시랑(侍中門下侍郎) 평장사(平章事) 왕진(王縉)이 급사중(給事中) 사부(祠部)에서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삼장에게 통지하였다. 첩(牒)에는 위와 같은 칙지를 받들게 하였고, 첩이 이르자 칙지대로 첩(牒)을 실행했다. 대력 7년 2월 9일, 금사(今史) 황보(皇甫)가 통첩을 온전히 하였으니, 주사(主事)는 유의(劉意)이며, 판관(判官)은 원외랑(員外郎) 왕수(王遂)이다. 지난 대력 6년(771) 10월 12일,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 삼장 사문 대광지불공이 표(表)를 올렸다. 그 달 22일에 이르러 중사(中使) 이헌성(李憲誠)이 칙지를 받들어 선포하였고, 불공 삼장에게 비단과 명주 등 모두 8백 필을 하사하였다. 경을 함께 번역한 열 사람의 대덕(大德)들에게는 각각 비단 30필을 하사하였다. 이때 대덕들은 이튿날에 감사드리는 글을 올렸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문 잠진(潛眞) 등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이달 22일에 중사 이헌성(李憲誠)이 이곳에 이르러 받들고 온 성지(聖旨)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번역한 열 사람의 대덕들에게 각각 비단 30필을 하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잠진은 아뢰옵나이다. 가르침을 드리우신 분은 법왕(法王)이시며, 법왕은 삼계(三界)의 왕으로서 자취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행하신 분은 인주(人主:임금)이시며, 사해의 주인으로서 불교를 유포하고 전하셨습니다. 법왕이 아니었다면 사구(四句)의 글을 들을 길이 없었고, 폐하가 아니었다면 일승(一乘)의 진리를 천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보응원성(寶應元聖)이신 문무황제폐하(文武皇帝陛下)께서는 도가 천지와 합하여서 그 은혜가 초목에까지 미쳤습니다. 법륜을 굴려 팔극[極]9)을 부리고 관정(灌頂)10)을 높이 행하시며[稱尊], 자비로운 방편의 문을 멀리까지 미치게 하시니, 곧 부처님 법을 널리 펼치는[弘宣] 지위를 부촉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번역된 『인왕경(仁王經)』ㆍ『허공장보살소문경(虛空藏菩薩所問經)』ㆍ『밀엄경(密嚴經)』 등 80부의 경전은 모두가 원음(圓音 : 부처의 말씀)의 지극한 가르침이고 보배로운 세계[寶界]의 참 말씀[眞詮]입니다. 그러므로 감도 없고 옴도 없어 몸이 바로[卽身] 곧 상주(常住)의 몸이 되며, 멸하지도 아니하고 생하지도 아니하여 모든 부처님이 곧 자기 마음속의 부처입니다. 허공을 가리키며 보배의 창고[庫藏]라고 하여 색상(色相)의 장엄함을 나타냈고, 유가(瑜伽:密敎)의 무궁함을 펼쳐서 진언이 다함이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재능과 행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고 선정(禪定)과 지혜가 서로 융합되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오묘한 종지를 발양하고 깊숙한 비밀을 널리 펼 수 있었겠습니까? 대광지불공(大廣智不空) 삼장께서는 두 나라 말에 능통하시고 행이 삼밀(三密)11)에 통하시며, 정만여래(淨滿如來)의 가지(加持)12)의 힘을 얻고, 보응명주(寶應明主 : 文武皇帝)의 널리 보호[弘護]의 인연을 입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치와 논리가 밝게 드러나고 문구가 환히 밝혀졌습니다. 잠진(潛眞) 등은 영산(靈山)의 미세한 먼지이며 기수(祇樹)13)의 작은 나뭇잎 같은 존재로서 지식과 아는 것이 거칠고 비속하며, 학문과 재주가 용렬하고 천박합니다. 그러나 요행히 하늘의 돌보심을 입어 외람되게 경을 번역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의 힘을 이어받고 엎드려 가피를 입고 칭찬과 은혜로 엮어 만드는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어리석고 눈 먼 소경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고맙고 위안됨을 알 것이옵니다. 그런데 하물며 위로 하늘의 자비와 계합하여 조정의 안팎에 선포함을 허락하셨고, 이어 비단을 하사하시어 어리석고 서툰 솜씨를 빛나게 하여 주심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모든 법문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반갑고 다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 위에 받들고 어깨 위에 짊어지는 감격을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이 지극합니다. 삼가 중사 이헌성에게 부쳐 감사하다는 내용의 표(表)를 받들어 아뢰옵나이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 6년 10월 23일, 경전을 번역한 대덕 대흥선사(大興善寺) 상좌(上座) 사문 잠진 등이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批]을 내려 말하기를 “스님들의 도행은 정밀하고 깊으며, 지혜와 식견은 넓고 멀다. 삼승(三乘)의 깊은 뜻과 천대(千代)에 남긴 책들을 번역하고 유행시켜 집과 나라를 이롭게 하고 제도하였기에 부족하게나마 명을 내렸는데, 번거롭게 그 은혜를 감사하기에 이르렀구나.”라고 하였다. 이때는 대력 6년 10월 12일이었다. 표를 올려 진정하고 요청한 글은 목록에 들어가 있다. 이때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그 표를 모두 다 살펴보고, 앞서와 같이 분부하였으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서 존중하면서 그 표에 회답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화상께서는 일찍이 선대조정을 섬기면서 널리 미묘한 교리[妙敎]를 천양하고, 이 경전[貝葉]을 펴서 널리 미혹한 세상[迷津]에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짐(朕)은 큰 계책을 이어받고, 그 슬기로운 종지를 공손히 받들었다. 화상께서는 다시 상세한 번역을 더하여 지금 권축(卷軸)을 끝 마쳐서, 길이 생령들을 제도하였으니, 깊이 기뻐하고 찬탄할 만한 일이다. 그 동안 번역된 경전은 조정의 안팎으로 펴고 일체경의 목록에 넣는 것이 좋겠다.” 이때 대광지불공 삼장은 이미 묵제(墨制:글로 된 制令)의 은총을 입었고 다시 유행시키라는 명이 있자, 뛸 듯이 두려워하며 삼가 표(表)를 올려 사례의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사문(沙門)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중사(中使) 이헌성(李憲誠)이 성지(聖旨)를 받들어 선포하고 새로 번역한 경전의 목록을 보내라 하였습니다. 일도(一道)에 명령하여 경전을 진상하는 표로 이에 회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도(一道)에 칙명을 내려 이를 조정의 안팎에 시행하도록 특별히 명령하시고, 이어 이를 일체경목록에 넣게 하셨습니다. 이 칙지를 공경히 받들고 뛸 듯이 기뻐 기쁨과 은혜를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참으로 황송하여 다시 감탄하고 다시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법왕의 부촉을 받들어 사람들 마음속의 소원을 채워 주셨으며, 보현보살의 비밀도장[密印]을 지니시고 천자(天子)의 바른 가르침[正敎]을 유행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협진(浹辰)14)의 사이에 팔방(八方)에 태양같은 지혜를 밝히셨으며, 짧은 사이에 있어서도 크나큰 혜택을 만물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이는 곧 천하의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이온데 하물며 불공(不空)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공이 성전을 번역한 지가 40여 년이나 되었는데, 삼조(三朝) 이래로 편찬하여 엮은 공덕은 그 뜻이 불교를 펴서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왕실을 돕고 아래로는 생령들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어찌 하루아침에 오래 간직하고 있던 마음의 소원이 가득 채워질 줄이야 생각하였겠습니까? 성은은 광대하여 여러 겁이 지나도 갚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다시 특별히 아직 번역되지 못한 범어본의 경전을 번역하도록 허락해주시니 기쁨과 슬픔이 갑절로 불어나게 됩니다. 감히 마음껏 힘을 다하여 성지를 받들어 지녀 계속해서 번역하여 진봉(進封)15)하겠습니다. 가슴에 품는 은혜가 지극하여 기쁘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중사 이헌성에 인연하여 표를 받들어 아뢰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부끄러워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大曆) 7년 1월 27일,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 삼장 사문 대광지불공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批答)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상은 오래전에 보리(菩提)를 증득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든 사람이며, 번역된 경ㆍ논은 모두 정미한 종지를 통찰한 글이다. 이에 이 책의 시행을 명하고, 그 지혜의 비춤을 전하여 나라 안에 두루 보여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게 하였다. 아직 자비의 배가 빛나지도 아니하였는데 번거롭게 진사(陳謝)16)를 받기에 이르렀구나.” 표를 올려 감사를 마치자 다시 윤언(綸言 : 임금의 말)을 받들어 『대성문수사리보살불찰공덕장엄경(大聖文殊師利菩薩佛刹功德莊嚴經)』을 번역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번역하여 권축(卷軸)을 만들어 표(表)를 지어 진상하였다.
대성문수사리보살불찰공덕장엄경(大聖文殊師利菩薩佛刹功德莊嚴經) 1부 3권 51장
위 경은 불공(不空)이 먼저 윤지(綸旨)를 받들어 번역하게 하였다. “황제의 은혜가 간곡하여 모두 이미 갖추어져있었기에, 당음(唐音)과 범어(梵語)를 참조ㆍ비교하여 말과 발음을 상세히 정하고, 년(年)ㆍ월(月)과 장소를 붓으로 받아써 내용을 증명하였으며, 승려와 속인의 이름도 모두 책 안에 기록하였습니다. 문수보살의 사적과 연기(緣起)와 근원의 유래는 처음 발심하였을 때부터 시작하여 정각(正覺)을 이루었을 때까지 정토를 장엄하신 일이 이 경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모두 부처님의 이론과 바탕, 보살들의 수행문[行門]ㆍ법계의 유정(有情)ㆍ무생(無生)의 실상을 분명하게 표시되었습니다. 그 공덕은 광대하여 다른 경에서는 거의 그 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 수승한 인연이 위로 성조(聖祚 : 천자의 자리)를 돕기를 바라옵고, 이를 온 나라 안에 널리 보여서 생명들을 복되게 하여 주시길 엎드려 비나이다. 특별히 바라옵건대 천은(天恩)이 옳다고 생각되시는 곳에 새로 문수원(文殊院)을 설치하시어 큰 절에는 일곱 명의 승려, 작은 절에는 세 명의 승려를 파견하여 이 문수원 안에서 오래도록 나라를 위하여 이 경을 강(講)하여 밝히고 외워 익히게 하여, 빠진 것이 있으면 계속 채워 넣도록 하십시오. 이는 법등(法燈)이 계속 밝혀져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 신령한 신(神)과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누군들 기뻐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행히 전륜왕[輪王]이 탄신하신 날에 하늘세계와 인간세계가 함께 기뻐하고 기쁘게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크나큰 복이 위로 산과 같이 오랜 수명을 더하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원컨대 법의 강물이 성인의 바다에 더해지게 하소서. 삼가 장계(狀啓)17)를 올려 진술하여 진상하며 아뢰옵나이다. 만약 천은으로 이를 윤허하신다면 묵칙(墨勅:붓으로 쓴 勅命)을 내려 주시기 바라나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칙명으로 대력 8년 10월 13일의 특진시 홍로경 삼장사문 대광지 불공스님의 올린 표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그 달 그 날에는 삼장화상이 일찍이 도량안에 있었는데 칙명으로 삼장화상에게 비단ㆍ채단ㆍ명주 등 모두 700필을 하사하였고, 함께 경을 번역한 대덕인 잠진(潛眞) 등 열 명의 스님에게는 각각 비단 30필을 하사하여 선물을 충분히 베풀었다.
묘법연화경왕유가관지의궤(妙法蓮花經王瑜伽觀智儀軌)』 1권 25장 위 경은 전에 『인왕경(仁王經)』ㆍ『밀엄경(密嚴經)』과 통틀어 모두 5부, 합계 10권인데, 함께 10질(秩)로 엮었다.
새로 번역한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은 예전에 영태(永泰) 원년(元年:765)에 장계를 올려 청한 경이며, 『인왕경』을 범협(梵夾:불교의 경문)에 의거하여, 다시 옛 글을 번역하기를 바라서 만들어진 경전이다. 위는 흥선사(興善寺)의 삼장사문 불공(不空)이 주청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상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부처님의 묘지(妙旨)는 그 지혜가 생령들에게 두루 미쳤으며, 『인왕보경(仁王寶經)』은 그 내용이 나라를 수호하는 일을 숭상한 것입니다. 전대에 번역한 것은 아직 논리가 융통되지 못하였고 미묘한 말씀을 윤색(潤色)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이 일은 밝은 성군(聖君)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보응원성 문무황제께옵서는 슬기로운 문장으로 천운을 열고, 깊고 밝으신 생각으로 시의 적절하게 펼쳤습니다. 이에 널리 진언(眞言 : 부처의 말씀)을 드러내어 밝히고, 상교(像敎 : 佛敎)를 널리 세상에 드날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자의 덕[皇風]을 멀리 떨치게 되었고, 불일(佛日)이 다시 밝아졌습니다. 늘 모든 어리석은 백성[黎元]들을 위하여 부처님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외우게[講誦]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인왕경』은 범협(梵夾)에 의거하여 옛 글을 다시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패엽(貝葉 : 經典)의 말이 영원히 빠지고 생략된 것이 없게 되었고, 부처님 말씀[金口]이 다시 더욱 소상하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어 청하옵건대 승(僧) 회감(懷感)ㆍ비석(飛錫)ㆍ자린(子隣)ㆍ건종(建宗)ㆍ귀성(歸性)ㆍ의숭(義崇)ㆍ도액(道液)ㆍ양분(良賁)ㆍ잠진(潛眞)ㆍ응진(應眞)ㆍ혜령(慧靈)ㆍ법숭(法崇)ㆍ초오(超悟)ㆍ혜정(慧靜)ㆍ원적(圓寂)ㆍ도휴(道休) 등을 내도량[內道場]에서 함께 번역하게 하옵소서. 복덕으로 덕 있는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聖代]을 돕고 은택이 생령들에게 미치게 하여 원수와 도둑이 길이 사라지고 온 나라 안이 더욱 화목[允穆]해져서 이것이 오랫동안[曠劫] 전해지게 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구호 받음이 진실로 깊을 것입니다.” 이에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는 사부(祠部)에 통첩하였다. 칙명을 받들어 마땅히 통첩이 이르는 대로 옛 통첩에 준하여 칙명을 시행하게 하라고 하였다. 영태(永泰) 원년(元年:765) 4월 2일자 통첩은 다음과 같다. “중서시랑(中書侍郎) 동(同) 평장사(平章事) 두홍점(杜鴻漸), 중서시랑 동 평장사 원재(元載), 황문시랑(黃門侍郎) 동 평장사 왕진(王縉),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사(李使), 검교(檢校) 우복야(右僕射) 평장사사(平章事使) 검교(檢挍), 좌복야(左僕射) 평장사사(平章事使) 중서령(中書令) 곽자의(郭子儀)가 상서사부(尙書祠部)에 통첩한다. ‘『인왕경』은 범협에 의거하여 옛 문장을 흥선사(興善寺)의 사문 불공이 다시 번역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통첩을 받든 중서문하에서는 칙명의 통첩이 위와 같았다. 그러므로 통첩이 이르자 칙명대로 예전 통첩에 준하여 영태(永泰) 원년 4월 4일에 사관(史官) 장제(張濟)가 통첩하게 하고, 주사(主事) 양헌(楊獻)과 낭중(郎中) 최의(崔漪)가 은지(恩旨)를 널리 반포하였다. 이에 경성(京城)의 의학(義學) 대덕인 양분(良賁) 등과 한림학사(翰林學士) 상구(常裘) 등에게 명하여 대명궁(大明宮) 남쪽 도원(桃園)에서 『인왕경』을 소상하게 번역하게 하고 아울러 『밀엄경(密嚴經)』 등을 교정하게 하였다. 4월 15일에 이르러 번역이 끝나니 이를 진상하였다. 이에 성군의 자비로 서문을 지어 그 제(題)한 글이 경의 첫머리에 있다. 이 경은 내궁에서만 펼쳐 열람되었고 아직 중외에는 선포되지 아니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의 대덕들은 감로수가 내리기를 간절히 생각하길 목마른 사람이 마실 것을 생각하듯 하여 표를 지어 위에 진술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승여(乘如) 등은 말씀드립니다. 승여 등이 듣기로는 해와 달이 우주[六合]를 운행하면 그 비춤을 구하는 것은 모든 생령이며, 비와 이슬이 하늘[九霄]에서 드리워지면 적셔 주기를 바라는 것은 초목이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하늘과 땅이 덮어 주고 실어주는 데는 차별이 없고 길러 주고 키워 주는 데는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기도 긴 바람에 안일할 수 있고 개구리와 파리도 큰 바다에 놀 수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보응원성 문무황제 폐하께옵서는 경사로움을 진겁(塵劫 : 무수히 긴 시간)에 이었고, 믿음을 하사(河沙 : 무수히 많은 수)세계에 심어 위엄이 마구니의 세계를 거두어 드리시고, 명성이 불찰(佛刹 : 극락 정토)에 유포되었습니다. 보위(寶位)의 중하신 자리에서 보게(寶偈 : 부처님 말씀)의 미묘함을 숭상하시고, 금륜(金輪)18)의 존귀한 자리에서 금구(金口 :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높게 하셨습니다. 백왕천제(百王千帝)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같은 해에 그 덕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승여(乘如) 등은 요행히 창성한 시운을 만나서 현문(玄門)을 두드려 몸담게 되었습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부처님의 게송을 노래하고 외움(諷誦)으로써 황제의 은택에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엎드려 듣자옵건대, 요즘 은지(恩旨)를 내려 불공(不空)삼장 및 의학(義學) 사문들에게 청하시어 『인왕반야바라밀다경(仁王般若波羅密多經)』을 다시 번역하게 하여, 교리가 아울러 드러나고 성상(性相)이 두루 완만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경이 용궁(龍宮) 속에 봉함(封緘)되어 아직 녹원정사(鹿苑精舍)에는 반포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승(僧)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청하고 아뢰옵나이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하늘의 자비로써 이 법보를 보여 주시고 아울러 경에 근거하여 100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고 함께 문구의 맛을 베풀어 요망한 기운을 없애고자 하나이다. 저의 정성은 그러하옵나이다. 오직 성지(聖旨)로 재가하여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정성에 넘쳐 간절히 목마른 심정을 이루 다할 수 없어서 삼가 우은대문(右銀臺門 : 궁의 대문)을 찾아가 표를 받들어 진정하고 청하며 아뢰옵나이다. 천자의 위엄을 가볍게 여기고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엎드려 깊이 몸을 떨며 분수에 넘치는 말씀을 삼가 드렸습니다. 영태(永泰) 원년(元年) 8월 8일 대안국사(大安國寺) 상좌(上座) 임단대덕(臨壇大德) 승여 등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가 비답을 내렸다. “『인왕진경(仁王眞經)』은 이치가 정밀하고 내용이 깊숙하여 그 교화가 현겁(賢劫)에 유포되어 창생(蒼生)에게 복과 이익이 되었고, 스님들은 이 경이 널리 퍼져 국토의 안녕을 돕는 것을 원하였다. 개강(開講)을 청한 일은 적당한 때에 은지(恩旨)가 있을 것이다. 23일을 취하여 자성사(資聖寺)와 서명사(西明寺) 등 두 절에 함께 백고좌를 설치하고 100명의 법사들을 초청하여 『인왕경』을 강의하게 하라. 아울러 100명의 대덕이 『밀엄경』 등을 돌려가면서 읽게 하고, 향화(香花)ㆍ음식ㆍ고악(鼓樂)ㆍ현가(絃歌) 등은 모두 유사(有司)에게서 내보낼 것이니 빠지고 모자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 시절이 가을비가 내리는 때에 속하여 자욱한 장마 비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주청하여 다시 날짜를 연기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주청을 받들어 두 절의 백고좌는 먼저 23일에 경을 봉영[迎]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마땅히 장마로 날짜를 옮겨 26일에 이르러 경을 봉영하여 개강하였다. 그 동안 여러 소관 관청에서 제공한 물품 등은 사람에게 알려 계산해서 모아 고친 날짜에 준하여 절에 갖고 오게 하였다. 영태 원년 8월 22일에 좌감문위장군(左監門衛將軍) 지성사(知省事) 유청담(劉淸潭)이 기일을 고친 것을 선포하였는데, 그날 아침이 되자 하늘의 비가 아직 개이지 아니하여 은지(恩旨)로 다시 9월 1일로 연기되었다. 이날 양가(兩街)의 대덕들은 번(幡)과 꽃과 당(幢)으로 덮인 보배수레를 장엄하여 청결하게 준비하고 태상사(太常司)에서는 음악을 제공하고, 이원(梨園:宮內의 樂工들의 居所)과 장내(仗內:內宮儀仗隊) 및 두 교방(敎妨:左街ㆍ右街의 僧團)의 스님들이 은대문(銀臺門:奏狀을 접수하는 곳)에 이르러 온갖 놀이와 주악이 대단하였다. 이때 관군용사(觀軍容使 : 관직이름)와 처치신책군병마사(處置神策軍兵馬事)를 겸한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와 아울러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과 지내시성사(知內侍省事)와 내비룡구(內飛龍廐)ㆍ궁전(弓箭) 등의 사도들과 상주국(上柱國) 빙익군(憑翊郡) 개국공(開國公) 어조은(魚朝恩)이 여섯 군사(軍使)와 더불어 천룡팔부와 귀신의 모습을 하고 새 경을 호송하여 대내(大內)에서 나왔다. 그 경이 마침 대내에서 나올 무렵 채색구름이 공중에 떠올라 찬란하고 아름답고 기이한 서상이 밝게 나타났다. 사시(巳時)ㆍ오시(午時)가 되어 두 절에서 경을 여니 만백성들이 기쁜 마음이 되었고 상서로운 구름은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 승려와 속인들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예사롭지 않은 경사를 보게 되었다. 이에 사문 불공이 표를 올려 천자의 은덕에 감사를 드리며 말하였다. “사문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불공은 전대의 수행자[修者]보다 도가 모자라고, 지난날의 현철한 스님에 비하여 학문이 모자라는데도, 외람되게 폐하의 부름[綸詔]을 받아 진경(眞經)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봄날에 얼음을 밟는 것과도 같고 마치 계곡의 맑은 물[泉谷]에 임한 것 같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폐하께서는 혜일(慧日 : 밝은 지혜)을 펼쳐서 자비의 구름을 그윽이 내리시고, 슬기로운 생각[睿思]을 바람같이 일으키어 용장옥윤(龍章玉潤)19)의 문장으로 몸소 서문을 지으시어 대천세계를 밝게 빛내셨습니다. 법우(法雨)가 구천(九天)에 흐르게 하고 백좌(百座)에 승당(勝幢)을 세우시니, 그 위의용지(威儀容止)20)가 완연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내려오실 때 선비들과 서민들이 나란히 가득 모여듦과 같으며, 파사국(波斯國:페르샤) 사람들이 왕사성(王舍城)에 예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경사스런 구름이 서상을 드리우고 맑은 기운이 공중에 떠올라서, 족히 크게 폐하의 태평성대를 나타내어 스스로 가없는 도움을 주셨습니다. 머리 위에 받들고 등에 지는 지극한 은덕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를 받들어 경축의 말씀을 진술하여 아뢰옵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환희에 넘치며 삼가 말씀드리나이다. 영태(永泰) 원년 9월 2일 대흥선사(大興善寺) 사문 불공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화상께서는 멀리 연궁(蓮宮)에서 친히 패엽경(貝葉經)을 봉함하고 현묘한 가르침을 널리 펴서 창생들을 제도하여 이롭게 하였다. 번역이 성취되자 천인(天人)이 함께 모이고, 삼추(三秋)21)의 화창한 빛이 밝고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나니, 참 진리[眞乘]를 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하고 미묘한 이치와 계합하게 하였다. 얼마 전 지도와 깨우침에 인연하여 일찍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는데, 이 정성스러운 마음이 감응(感應)하는 기적을 보게 되니 더욱 머리 위에 받들고 공경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이때 좌우의 여섯 군사(軍使)들도 이 경사스러운 구름을 목도하고 역시 표를 진술하여 받들어 하례[奉賀]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신(臣) 선지(仙智) 등은 말씀드립니다. 어제 새로 번역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을 삼가 영접함에 경사스러운 구름이 감응해서 나타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서기는 오색을 나타냈고 그 채색은 온 하늘에 흩어졌습니다. 혜일(慧日)이22) 둘러싸여 더욱 선명하였으며 상서로운 바람이 일어나서 성스러움을 표시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대도(大道)로 만물의 의지처가 되게 하고 지극한 덕으로 만방에 임하시니, 그 정성이 신령에 감응하여 여기에 내려온 것입니다. 신 등은 분수에 넘치게 시위(侍衛)의 직책을 맡아 오랫동안 순조롭게 근무하는[淳風]하는 은택을 입다가, 몸소 이 정상(禎祥)을 보고 그 경사스럽고 기쁜 일[慶幸]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삼가 우은대문(右銀臺門)에 나아가 표를 받들어 축하의 말씀을 진술하며 아뢰옵나이다. 신 선지(仙智) 등은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영태(永泰) 원년 9월 2일 특진(特進) 우룡무군(右龍武軍) 대장군 지군사(知軍事) 상주국(上柱國) 서국공(徐國公) 신 유선지(劉仙智) 등은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불이(不二)의 문은 일찍 전해져 비장(秘藏)되었는데 다시 그 뜻을 베푸니 그 말이 널리 유포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장차 패엽경의 글을 널리 베풀어 연궁(蓮宮)의 모임을 열자, 하늘에 서색이 떠오르고 해는 아름답고 경사스러운 구름이 일어났다. 신통한 현상을 나타내고, 그 길한 징조[瑞應]를 들어냄은 아마도 평화의 조짐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경하하고 위안이 되는 마음은 같으며 축하하는 마음은 알고 있다.” 이때 초하룻날부터 보름날까지 두 절에서는 경을 강의하고 하루 두 때 경문을 외면서 걷는 일[行道]을 하였다. 음식ㆍ차[茶]ㆍ약은 모두 소관 관청에서 나왔으며, 육률(六律)23)과 오음(五音)24)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16일에 이르러 서명사(西明寺)에서 재(齋)를 산회하였다. 이때 고악현가(鼓樂絃歌)와 온갖 놀이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서명사에서 강론을 마치고 표를 받들어 하례[奉賀]의 뜻을 진술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서명사의 상좌 사문 회감(懷感) 등은 말씀드립니다. 특별히 은명을 받들고 백좌(百座)의 강론을 열어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을 강의하여, 오늘로서 경을 두루 한 차례 강의하고 재를 마련하여 기쁘게 행사를 끝냈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생령들은 손뼉치고 뛸 듯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천지를 다시 창조하시어 밝으심이 일월과 같사옵니다. 옷을 입는 여가에도 거듭 진경을 번역하시니, 황제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함께 한 진리로 돌아갔고, 당나라 말과 범어가 다른 지방 말로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꽃을 꿴 것 같은 게송을 갖추어 듣게 되고, 등불을 전하는 스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금승(金繩:帝王의 宮殿)의 경계에 미륵불이 하생하고, 옥경(王京 : 皇都) 가운데 전륜왕(轉輪王)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가을 하늘 아름다운 경관 속에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도 곧 이루어지고, 오색구름이 공중에 떠오르니, 요망한 기운은 반드시 다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황제는 지극한 성인이시고 부처님의 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니, 법은 항하사세계를 적셔 주시어 천하는 매우 행복하나이다. 저희 회감 등은 분수에 넘치게 부처님이 설법한 곳[祇樹]에 사니, 가슴이 뛰는 기쁨이 끝이 없습니다. 머리를 조아려 향을 사르나 어느 섬돌에 올라가 은혜를 보답하겠습니까? 그 공덕을 헤아려 별장(別狀)에 봉해서 진상하나이다. 삼가 표를 받들고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참으로 반갑고 참으로 기뻐서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영태 원년 9월 15일 서명사(西明寺) 상좌 사문 회감 등이 표를 진상하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스님들은 진경을 펴고 진술하여 미묘한 뜻을 널리 드려내었다. 어진 목숨들을 더욱 번성하게 하고 생령들을 구호하였다. 법회가 이미 끝났다니 마땅히 함께 경하하라.” 당시 복고회은(僕固懷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천은(天恩)을 저버리고 멀리 영무(靈武)에서 오랑캐들을 모아 합쳐서, 경양(涇陽)지방을 근거로 국토를 침탈하고 능멸하였다. 이에 서명사(西明寺) 백좌(百座)의 대덕법사들이 함께 자성사[資聖]로 가서 칙명을 받들었다. 먼저 서명사의 백고좌의 법사 대덕들이 나란히 자성사의 불전을 찾아가 나라를 위하여 경을 전달하면서 걷는 일을 하였다. 그 자성사의 백고좌 법사 가운데서 양분(良賁) 등 50좌의 법사들이 전에 한 그대로 『인왕반야호국경』과 『밀엄경』 등을 강설하여 두루 창생들에게 미치게 하였다. 그 때 경성(京城)의 여러 사찰과 도관의 승려들과 도사 등은 모두 하루 두 때에 각기 있는 곳에서 경을 읽으면서 걷는 일을 하였다. 이어 삼강(三綱)에 명령하여 일을 마친 승려들은 오로지 경을 점검하고 교열[檢校]하는 일만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는 오로지 수행에 힘쓰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소홀히 하고 태만히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원종(李元琮)ㆍ가명관(賈明觀) 등이 전담하여 구당(句當:담당자)을 맡아보았다. 그리하여 영태 원년 9월 17일에 고품(高品)ㆍ이희일(李希逸)이 이를 선포하였다. 그 때 양가(兩街)의 대덕들과 백고좌의 법사들은 칙명에 따라 모두 자성사에 모여서 두 때에 강론하고 읊고 두 번 법좌에 올라 경을 읽으면서 걷는 일을 하였다. 그것은 오시(午時)와 해가 저물 때의 두 때이다. 이때 음악을 올려 베푼 것은 처음과 다르지 아니하였고, 밤이 된 후에는 모두가 큰 강당 안에 모여서 대중들이 다 함께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칭념(稱念)하면서 나라를 위하고 집안을 위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없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경성의 사찰과 도관에서의 전경ㆍ염송도 역시 그러하였다. 당시 제사관내하중(制使關內河中) 부원수(副元帥) 사도(司徒) 겸(兼) 중서령(中書令) 상주국(上柱國) 분양군왕(汾陽郡王) 곽자의(郭子儀)가 장절(杖節 : 命令書)을 가지고 출병하였다. 친히 군대의 규율을 총괄하여 황제가 사는 땅을 출발하여 저 경양(涇陽) 땅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황제의 위엄에 기대고 그 위력을 믿었으며, 또 이 경의 힘에 힘입었다. 양군이 교대로 진(陣)을 벌리고 멀리서 서로 바라보았는데, 징과 북 소리가 일어나자 칼과 창이 눈발처럼 날렸다. 이때 분양왕은 홀로 말을 타고 곧바로 앞으로 나가 우뚝 군대 앞에 서서 감격 어리게 “회은(懷恩)아, 물러가라”는 한마디 말을 하였다. 그러자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이 각자 서로 공격하여 열흘 사이에 왕국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로써 『인왕호국반야진경』은 성심(聖心)과 불심(佛心)으로 백성을 자식처럼 기르며 그 뜻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후에 군대를 거두어들여 규율을 정돈하여 군사의 위세를 떨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친히 황제의 얼굴을 대하고 특별한 하사의 선물을 받았다. 황제는 자성사의 백고좌도량에 칙명을 내려 윤 10월 22일을 취해서 무차재(無遮齋)를 마련하여 이로써 경하하여 마치게 하였다. 이날 절 남쪽 문밖에 도량을 가설하니, 정일방(正一坊)에 동서 두 거리가 다 가득하였다. 빛나는 천막이 구름같이 펼쳐지고 깃발과 꽃이 하늘에 가득하고 아름다웠다. 부처님의 존용(尊容 : 얼굴)은 환연히 빛나서 그 광명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비추었다. 스님들의 공양이 끝나자 육악(六樂)이 다투어 베풀어지고 온갖 놀이로 장소를 가득히 메웠으며 하루해가 다하도록 노래와 나팔을 불었다. 경성의 대덕들에게는 각각 30냥을 선물로 주었고, 불공삼장(不空三藏)에게는 9백 필의 명주ㆍ무명ㆍ비단ㆍ채단을 하사하였으며, 시자와 소승(小僧)들에게는 각각 50필의 옷감을 하사하였다. 또한 특별한 은지를 내려 자성사의 강당에 이름을 하사하여 ‘영태선법지당(永泰善法之堂)’이라 부르게 하였으니, 이는 곧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전해질 고사(故事)다. 국경지대의 오랑캐가 경내로 침입하였을 때부터 밤으로 승도들을 모아 이 강당 안에서 함께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염송케 하였더니 몇 달이 차지 아니하여 과연 태평한 세월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성인의 힘과 경의 위력으로 이 복된 감응을 얻게 된 것이다. 경을 번역한 백고좌의 스님에게는 선물로 진귀한 재물이 하사되었다. 불법이 동방에 흘러 들어온 이래 이날보다 더 나은 날은 없었다. 11월 1일에 이르자 은지(恩旨)가 뒤이어 이르렀다. 즉 불공삼장화상에게 칙서를 내려 이르렀다. “고(故) 금강삼장(金剛三藏)은 하늘에서 받은 자품이 빼어나고 특별하였으며, 기품이 깊고 온화[冲和]하고, 지식은 사생(四生)을 통찰(洞察)하였으며, 마음은 육도(六度)25)에 근거하였다. 이에 멀리 서역에서 석장(錫杖)을 짚고 동쪽 땅에 오셔서 맑고 깨끗한 행실[梵行]은 몸에 두루 갖추었고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였다. 깨달음의 꽃은 밖을 비추었고 지혜의 횃불은 안을 밝혀서 미혹한 중생들을 인도하고, 원적(圓寂)한 경지를 증통(證通)하여 은밀하게 법인(法印)을 전하고 열반을 시은(示隱)하셨다. 의발만 공연히 남아 있고 목소리와 모습은 길이 저 세상으로 가셨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능히 후세에 드리워질 수 있다.” 예법[禮]에는 종말을 장식하는 제도가 있다. 마땅히 아름다운 이름을 표창하여, 영광된 추증과 일치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직위를 추증하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이어 “대홍교삼장(大弘敎三藏)”이란 법호를 하사하였다. 같은 날 또 큰 은지가 내려 다시 칙서가 불공법사에서 내려졌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스님은 연궁(蓮宮)의 석종(釋種)이요, 향계(香界)의 도사(導師)로다. 성품은 진여로 표시되고, 학문은 비장(秘藏)에 정통하였다. 감원(紺園:寺刹)의 미묘한 뜻을 이어받고, 사의(四依)26)를 개시(開示)하였고, 금구(金口)의 미묘한 말씀을 번역하여 육취(六趣 : 六道)의 진량(津梁 : 나루터의 다리)을 만들었다. 몸에 불교의 경문[梵夾]을 지니고 멀리 유사(流沙)를 건너와서, 전한 등불은 더욱 밝았고 감로법(甘露法)은 깊게 중생들을 적셔 주었다. 불난 집[火宅:欲界]에 자비의 구름을 흩뿌렸고, 어두운 길에 지혜의 태양을 드높였다. 얼마 전에 몸소 수승한 인과의 넓은 뜻과 방편을 물어보고 영구히 의망(疑網 : 疑心)을 끊게 되어 나의 지혜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비록 진세(塵世 : 俗世)를 벗어난 마음이라, 모두들 명예와 벼슬을 사양한다 하였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포상하고 숭앙하는 규정은 현철한 사람을 정표하는 법이다. 그렇게 하여 아름다운 명에 응하게 하고 이로써 조정의 법과 일치하게 하는 것이니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의 벼슬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 이어 ‘대광지불공삼장(大廣智不空三藏)’이란 법호를 하사하였다. 이에 대하여 불공삼장은 말하였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어머니가 자식으로 인해서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은 속가 예법의 불변의 규칙이나, 스승으로 인해서 제자가 명예를 얻는 일은 불문(佛門)에서는 거의 없는 일입니다. 공손히 영광된 명을 받고 기쁨과 두려운 감회로 머리 위에 받들고 두려워하며 표(表)를 올려 감사를 표시합니다.” 그 표는 다음과 같다. “삼장사문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이달 초하룻날 지으신 석명[錫]을 받들어 보니, 돌아가신 대화상 금강삼장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벼슬을 하사하시고, 이어 ‘대홍교삼장(大弘敎三藏)’이란 법호를 하사하셨으며, 나 불공에게는 ‘특진시(特進試) 홍로경(鴻臚卿)’이란 벼슬과 이어 ‘대광지불공삼장’이란 법호를 하사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한번 내리면 그 흐름이 뿌리와 잎을 적셔 주었고, 둥근 호광[圓毫]이 아름다움을 발하면 비춤이 유명(幽明 : 저승과 이승)의 세계에 미쳤습니다. 머리 위로 받드니 어쩔 줄을 몰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합니다. 불공은 참으로 환희에 넘치며 처연하고 또 두렵습니다. 불공은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십호(十號)는 덕을 표시하는 특별한 호칭이며, 조정의 구경(九卿)27)은 코끼리가 강물을 건너가는 무거운 위치라 하였습니다. 돌아가신 대화상께서는 불법의 전통을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하는 일에 흡족하시었으니, 참으로 이것으로 그 남기신 유교와 공적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공의 문도는 선사의 뒤를 잇기만 했는데, 부끄럽고 헛되게 함께 크나 큰 사사로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치 연(燕)나라의 돌이 형산의 옥과 뒤섞여 빛나는 것과 같고, 제(齊)나라의 대나무 장대로 함부로 상강의 퉁소를 불어대는 것과도 같습니다. 영예가 살아있는 사람과 돌아가신 분에게 아울러 미쳤으며, 총애가 스승과 제자에게 함께 미쳤습니다. 다만 폐하의 명령을 받들고 두렵고 놀라서 우러러보고 말씀드리려 해도 얼굴이 붉어져 부끄럽습니다. 하물며 출가하여 삭발하고 먹물 옷 입은[落彩] 스님은 본래 영욕을 잊고 깨끗한 정성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스님된 사람의 일반적인 법규입니다. 폐하께옵서는 널리 금륜(金輪)을 움직이시어, 간곡히 와력(瓦礫)28)을 거두어 궁중의 금원(禁苑:御苑)에서 편안하게 선(禪)을 하게 하시고, 포숭(褒崇)29)하여 특별하게 예우를 하셨습니다. 비록 산을 업을 만한 힘은 없지만 가까운 손님에게 발자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사례[高謝]는 법의 흐름을 기울게 하고, 욕심이 적은 맑은 자취에 오점(汚點)을 찍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 번 사양하는 말을 주청하여 구중궁궐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이는 저의 간곡한 정성을 깊이 비추어 보시길 바란 것이지, 어찌 확고한 불발의 의지로 말씀드린 것이겠습니까? 양이 모는 수레에 탄 어린아이를 부끄럽게도 ‘광지(廣智)’라 하시니 그저 망연하옵고, 사슴이 노니는 정원에 사는 낮은 재질을 지닌 사람을 ‘홍로경(鴻臚卿)’에 임명하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감격하여 머리 위에 받드는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를 받들어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황공하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영태 원년 11월 5일 특진시 홍로경 대광지불공삼장 대흥선사 사문 불공이 표를 진상하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화상께서는 도를 쌍림(悉林)30)에서 은밀하게 받았고, 공부는 바른 깨달음[正覺]을 뛰어넘었다. 멀리 천축국에서 오셔서 부처님 말씀[眞言]을 포교하였다. 그래서 얼마 전에 귀의하여 친히 부처님의 부촉을 받을 수 있었다. 포숭(褒崇)의 법은 예의로서 벼슬을 내리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수(印綬)31)의 영예를 더하게 하고, 스승과 제자 간의 공경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아울러 우러러 받들어 증직(贈職)을 내려고 추증하여 영광의 뜻이 표명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왕진경(仁王眞經)』이 번역되자 바로 그것을 목록에 편입하여 주기를 청하였고, 이에 다시 『문수불찰공덕장엄경(文殊佛刹功德莊嚴經)』을 진상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해에 이르기까지 번역한 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강정승초유가경중약출대락금강살타염송의궤(金剛頂勝初瑜伽經中略出大樂金剛薩埵念誦儀軌) 1권 11장 대락금강살타수행성취의궤(大樂金剛薩埵修行成就儀軌) 1권 15장 대약차녀환희모병애자성취법(大藥叉女歡喜母幷愛子成就法) 1권 12장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경(普遍光明大隨求陁羅尼經) 2권 32장 금강정초승삼계경설문수오자진언승상(金剛頂超勝三界經說文殊五字眞言勝相) 1권 3장 오자다라니송(五字陁羅尼頌) 1권 8장 성염만덕가위노왕입성대신험염송법(聖閻曼德迦威怒王立成大神驗念誦法) 1권 8장 문수사리보살근본대교왕금시조왕품(文殊師利菩薩根本大敎王金翅鳥王品) 1권 1장 불공견삭비로자나불대관정광진언(不空羂索毗盧遮那佛大灌頂光眞言) 1권 2장 이상 9부 모두 10권의 경ㆍ법은 함께 제11책으로 엮었다. 성가니분노금강동자보살성취의궤경(聖迦抳忿怒金剛童子菩薩成就儀軌經) 3권 48장 대위노오추삽마성취의궤(大威怒烏蒭澁摩32)成就儀軌) 1권 10장 불설마리지천경(佛說摩利支天33)經) 1권 4장 금강정경일자정륜왕성불의궤(金剛頂經一字頂輪王成佛儀軌) 1권 8장 불위우진왕설왕법정논경(佛爲優塡王說王法政論經) 1권 9장 대방광여래장경(大方廣如來藏經) 1권 18장 불설일계존다라니경(佛說一髻尊陁羅尼經) 1권 14장 속질입험마혜수라천설가루라아미사법(速疾立驗摩醯首羅天說迦婁羅34)阿尾奢35)法) 1권 6장 이상 8부 경ㆍ법 모두 10권은 함께 제12질이다. 대일경략섭염송수행법(大日經略攝念誦隨行法) 1권[또한 『오지략염송용행법(五支略念誦容行法)』이라고도 한다.] 2장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략시칠지염송수행법(大毗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略示七支念誦隨行法) 1권 3장 목환경(木槵經) 1권 1장 문수오자염송법(文殊五字念誦法) 1권[제명에는 “『금강정경유가문수사리보살의궤공양법(金剛頂經瑜伽文殊師利菩薩儀軌供養法)』이라”고 하였다.] 7장인데, 범자(梵字)를 포함하면 14장이다. 만수실리동자보살오자유가법(曼殊室利童子菩薩五字瑜伽法) 1권 및 범자(梵字) 2장 금강정항삼세대의궤(金剛頂降三世大儀軌) 1권[또한 『관자재심진언일체여래연화대만다라품(觀自在心眞言一切如來蓮花大曼茶羅品)』이라고도 한다.] 4장 문수사리보살급제선소설길흉시일선악수요경(文殊師利菩薩及諸仙所說吉凶時日善惡宿曜經) 2권[상권은 전에 번역되었고, 하권은 나중에 번역되었다. 서문이 있고 모두 40장이다.] 『금강정경관자재왕여래수행법(金剛頂經觀自在王如來修行法)』 1권 6장 『금강정유가중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론(金剛頂瑜伽中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論)』 1권[또한 『유가총지교문설보리심관행수지의(瑜伽摠持敎門說菩提心觀行修持儀)』라고도 한다.] 7장 이상 9부 경ㆍ논ㆍ법 모두 10권은 함께 제13질이다. 유가금강정경석자모품(瑜伽金剛頂經釋字母品) 1권 2장 수습반야바라밀보살관행염송의(修習般若波羅蜜菩薩觀行念誦儀) 1권 7장 인왕반야다라니석(仁王般若陁羅尼釋) 1권 7장 성취대비관자재연화부유가염송법문(成就大悲觀自在蓮花部瑜伽念誦法門) 1권[또한 『관자재대비성취유가(觀自在大悲成就瑜伽)』라고도 한다.] 12장 대공작명왕화상단장의궤(大孔雀明王畫像壇場儀軌) 1권 4장 여(餘) 금강수광명관정경최승입인성무동존대위노왕염송의궤법품(金剛手光明灌頂經最勝立印聖無動尊大威怒王念誦儀軌法品) 1권 11장 말리지제바화만경(末利支提婆花鬘經) 1권 11장 대성천환희쌍신비나야가법(大聖天歡喜雙身毗那夜伽法) 1권 3장 관자재보살여의륜유가(觀自在菩薩如意輪瑜伽) 1권 9장 금륜왕불정략염송법(金輪王佛頂略念誦法) 1권 3장 금강정유가항삼세성취극심밀문(金剛頂瑜伽降三世成就極深密門) 1권 3장 이상 11부 경ㆍ법 모두 11권은 함께 제14질이다.
대광지불공삼장화상의 본래의 법명은 지장(智藏)이다. 호는 불공금강(不空金剛)이다. 범어(梵語)로는 아목거발절라(阿目佉跋折羅)36)라고 한다. 본래 서역 사람이다. 예전에 대홍교금강지삼장화상(大弘敎金剛智三藏和上)을 섬겨 진언을 품수 받고, 24년 동안 제자가 되어 더욱 가르침을 받았다. 대사가 죽은 후에 다시 오천축국을 찾아가 범본 유가(瑜伽)를 모두 자세히 열람하였다. 그 후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다가 제경(帝京:長安)에 이르렀다. 혹은 하서(河西)지방에서 교화하기도 하였고, 혹은 영남(嶺南)지방에서 거처하기도 하였다. 혹은 관내(關內)에 거주하기도 하였고, 혹은 왕궁에서 거처하기도 하면서 먹고 잘 틈도 없이 진경(眞經)을 번역하였다. 천보(天寶) 말년(末年, 755)에 오랑캐가 관내로 침입해 들어와서 붙들려서, 지덕(至德) 2년(757)에 되어서야 경락(京洛:서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때 화상은 친히 성지(聖旨)를 받아 관정사(灌頂師)가 되었는데, 왕비와 공주들이 섬돌에서 내려와서 맞이하고 육궁(六宮)의 권속들이 줄지어 예배하였다. 그 후 삼조(三朝:玄宗ㆍ肅宗ㆍ代宗)에 걸쳐 총애를 받아 항상 도량을 세우고, 그윽하고 미묘한 경전을 상세하게 고증하는 등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내궁에서 번역한 것은 마치는 대로 위로 아뢰었다. 그 가운데 혹 이미 베풀어 행해진 것도 있었고, 혹 아직 궁중 금원[禁]에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그 가운데 이미 얻게 된 것은 앞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모두 기록하였으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은 한마음으로 구하고 찾을 뿐이었다. 화상은 부지런히 힘쓰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세월을 겪어오다가 대력(大曆) 9년(774)에 이르자, 미미한 질병의 증세가 보였다. 이에 제사(制使:宮中에서 파견한 使臣)가 수고롭게 방문하고, 황제는 이름난 의원을 내려 보내어 침과 약을 쓰기를 새벽에서 저녁까지 계속하였다. 그러나 병이 낫지 않자 극히 불안해하여 하늘의 자비가 간곡히 그곳에 임하기를 관봉(官封)37)으로 칙서를 내렸다. “ 대도(大道)가 행하는 것은 다른 모습으로 같이 합치된다. 이것은 임금된 사람의 지극한 도리이며. 모두가 정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번뇌를 막아 주는 안식의 성[化城]에서는 모두 같은 이치인데 어찌 유(儒)ㆍ불[釋]의 길이 다르겠는가? 그런 까닭에 전대의 제왕들도 숭봉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으며, 법의 가르침을 널리 밝히는 것은 시대와 더불어 같이 행해져야 한다. 특진시 홍로경 대흥선사 삼장사문 대광지 불공스님은 나의 종사(宗師)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의 배[舟]의 노[檝]이다. 그는 삼학(三學)을 초월하여 깨달았고, 앉아서는 보는 것[見取]에서 벗어났으며, 만행을 닦아 지녔다. 항상 변화하고 멸하는 것[化滅]을 보여주었고, 계율을 잡고도 속박되지 않았으며, 계율을 수호하는 것으로 위의를 삼았다. 그는 계속해서 거룩한 가르침의 뜻을 밝혀오면서 임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지난날 선조(先朝) 때 일찍이 도의 요체[道要]를 듣고, 부촉을 받아 맡게 되면서 항상 귀의하였다. 늘 경전을 손에 잡고 내전에서 법을 열게 되면 앞자리에 앉아 책상에 기대 교서(膠序:學校)의 예와 같게 하였다. 그의 도풍에 순응하는 것은 공동산[崆峒]38)에서의 물음에 비유할 수 있었다. 묘음(妙音)은 원만하게 설명하고, 밀행(密行)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물음을 당하여 그것에 대해 혹 설명할 때에는 시작과 끝을 모두 밝혀서, 어지럽고 잘못된 것[昏妄]을 씻어 없애고, 마귀와 원수를 조복(調伏)시켰다. 또한 천인(天人)은 도문(度門)에서 마음을 씻게 되고, 용과 귀신은 신인(神印)의 직책을 받았다. 진실로 기(氣)로써 질병을 소멸하였고, 복덕으로 경사스러운 일[吉祥]을 이루게 하였다. 참으로 생각하면 우리들을 널리 이롭게 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나만을 이롭게 한 것에 그치겠는가? 일찍이 명하여 벼슬을 내려 그것으로 두터운 예의를 표시한 일이 있으나, 스승에게서 얻은 것이 많았고 도를 맛봄이 더욱 깊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서 억지로 이름 지어 이전의 뜻을 밝혀 두고자 한다. 무릇 오묘한 세계에는 장엄한 땅이 있고, 내품(內品)에는 과지(果地)가 다르다. 덕을 숭상하는 마음을 근본에 두고, 공경함은 시대의 법전에 따르겠다. 스님에게 개부의동삼자(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내린다. 이어 숙국공(肅國公)에 봉하고, 식읍(食邑) 3,000호를 내리며,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하라. 대력(大曆) 9년(774) 6월 11일.” 삼장화상은 다시 은총을 입어 관봉(官封)이 새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력은 더욱 미약해져서 황제를 알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5일에 이르러 표를 올려 하직을 고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불공은 말씀드립니다. 불공은 어려서 선사(先師)를 섬겨 이미 24년이 지났으며, 일찍이 황제의 은택을 받아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유가(瑜伽)의 법문을 펴, 여러 성군(聖君)의 은혜로운 돌보심[恩眄]을 받았습니다. 폐하께옵서 제왕의 자리에 임어(臨御)하시게 되면서 각별한 사은(私恩)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황합(黃閤)39)을 내리시어 거기에서 한가하게 거주하게 하였고, 자미(紫微:天帝의 궁궐)에서 내려오셔서 도를 물으셨습니다. 쌓인 은혜가 중첩되면서 세월이 이어져 왔습니다. 비록 다시 간절하게 정진한다 하더라도 어찌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슬과 번갯불은 머물기 어렵고, 물풀과 버들은 쇠하기 쉽습니다. 한 번 베개에 엎드리게 되면, 봄부터 여름까지 폐하의 깊은 돌보심으로 존문(存問:안부의 물음)이 두 번, 세 번 거듭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사(中使)와 명의(名醫)가 도로에서 서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고황(膏肓)의 병40)은 비록 침과 약을 쓴다 해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또한 생멸하는 육체를 어찌 연연하고 아낀다 하여 튼튼해질 수 있겠습니까? 문득 어젯밤 이후로 갑자기 기력이 더욱 쇠약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이란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라,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려 하고, 마음과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습니다. 멀리 성조(聖朝)를 떠나려니 연모하는 정을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불공은 지금 나이가 중수(中壽)41)를 넘었으니, 요절하였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난날 남해를 건너 오천축국을 두루 유행하면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찾아보고, 해득하지 못하였던 것을 익혀, 거기에서 얻은 금강정유가(金剛頂瑜伽) 십만 게송과 여러 부의 진언 및 경ㆍ논 등 50여만 게송을 모두 번역하여, 조금이나마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 숙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홀연히 생애가 이미 다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불공이 한탄을 하는 이유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모든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내려, 아래로는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쫓아가십니다. 불공은 저번에 『대성문수불찰경(大聖文殊佛刹經)』을 진상하였는데, 성정(聖情)으로 조정의 안팎에 배포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시어 임종의 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황가(皇家)의 복을 기원하옵고 만겁에 길상이 많기를 기원하오니 실로 이것은 스님된 사람의 생사의 영화와 행복[榮幸]이옵니다. 오고(五鈷)42)의 금강령저(金剛鈴杵)는 선사께서 전하신 물건이며, 아울러 은반자(銀盤子)ㆍ보리자(菩提子)ㆍ수정염주(水晶念珠) 및 합자(合子)를 모두 표에 따라 삼가 진봉(進奉)하나이다. 종이를 대하니 슬픈 눈물이 어지럽게 흐르고, 길이 성대(聖代)를 떠나게 되니 지극한 연모의 정을 이루 다할 수 없습니다. 삼가 감사(監使) 이헌성(李憲誠)에게 표를 받들어 올려 이별의 말씀을 진술하여 아뢰옵나이다. 사문 불공은 참으로 슬프고 참으로 그립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 9년 6월 15일, 개부의동삼사 숙국공 삼장사문 대광지불공이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회답하였다. “화상께서는 수행이 십지(十地) 보살43)의 경지에 올랐고, 오천축국에서 오셔서 유가(瑜伽)44)를 펼쳐 베푸시고, 불교의 경문[梵夾]을 널리 알리었다. 만 리를 두루 돌아다니시고, 삼조(三朝)를 거치시면서 빛나게 성인의 말씀을 번역하였고, 친히 스승의 뒤를 이어 그 업을 물려받았다. 문(文)이 왕성한 때[下武之興運]를 만나 전날의 법등을 계승하고 이어받아 넓은 보살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위하였다. 병이 낫지 않았다기에 위문을 한 바 있으나 큰 슬픔은 더욱 깊었다. 소청한 대로 조치함이 마땅하다.” 그때 개부의동 삼사시 홍로경 숙국공 대광지불공삼장화상은 표를 올려 진정하기를 “성은에 눈물이 드리워집니다.”라고 하였다. 묵제(墨制)가 문득 내려와 청원한 일이 모두 화상의 말씀대로 되니 정성과 예의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 에 한마음으로 관행(觀行)45)하며 오른쪽 겨드랑이를 바닥에 대고 발을 포개어 누워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발을 굴리며 통곡하고, 중사(中使)가 황제에게 아뢰니, 성상께서는 조정의 정무를 3일 동안 철수하고 매우 깊이 슬퍼하셨다. 이에 중사를 내려 보내 승람(僧藍)46)을 찾아가 대중문도들에게 위문을 베풀게 하였다. 이어 명주 300필ㆍ포목 300단(端)ㆍ백미(白米)와 경미(粳米) 각각 5수레ㆍ백면(白麵)도 5수레ㆍ땔감나무 10수레ㆍ기름 7섬ㆍ숯 3수레를 부조하였다. 또한 창고에 찾아보게 하여 준비가 없거나 없다고 아뢰는 물건이 있으면 곧 별도로 지급해 보내게 하였다. 그달 28일에 이르러 내시(內侍) 위수종(韋守宗)에게 명령하여, 명주 752필을 보내서 선사의 영탑(靈塔)을 조성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10월 5일이 되자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였으니, 천자의 돌봄이 특별히 깊었었다. 또한 시호(諡號)를 내리고,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그런 까닭에 진여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촉함에는 인연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호칭을 높이는 것이다. 그 고사(故事)를 따라야 하나 그 가운데는 혹 억지로 지은 이름도 있다. 돌아가신 개부의동 삼사시 홍로경 숙국공 대흥선사 삼장 대광지 불공스님은, 덕이 성하고 도가 높아 내가 스승으로 우러러본 사람이다. 마음에 은밀하게 법인(法印)을 갈무리하고, 행은 제도와 불문[度門]을 초월하였다. 정미한 설법을 할 때에는 광대하고 무상(無相)하였다. 한 번의 비로 적셔 주신 것이 뭇 중생들에게 두루 미쳤고, 전해 주신 밝은 부처님의 말씀[百燈]은 두루 정각을 밝혔다. 뜻과 취지[義趣]에 두루 통달하였고, 유교ㆍ도교에도 널리 통하여 성인의 뜻과 딱 들어맞아 합치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앞자리에서 그의 도풍에 순응하였다. 자비의 배는 머물지 못하고, 대들보 나무는 허물어졌다. 아름다운 음성이 영원히 멀어졌으니, 큰 슬픔은 매우 깊다. 도를 논하는 관리들은 스님의 장례를 예에 따라 엄수하라.” 이어 시호를 더하였는데, 드러난 이름과 실제[名實]에 부응하게 하기 위하여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고, 이에 시호를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大辯正廣智不空三藏和上)이라 내렸다. 6일 계묘일(癸卯日)에 장의를 진설(陳設)하고, 성 남쪽에 신주를 옮겨[遷神] 다비공양을 하게 되었다. 황제는 내급사(內給事) 유선학(劉仙鶴)을 파견하여 향다(香茶)의 전(奠)47)을 올리고, 고(故) 대변정광지삼장화상의 영가에 공손히 제사를 올렸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생각하오면 영가께서는, 지식이 훤히 밝고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일찍 범행을 심어 나면서부터 좋은 인연을 쌓았다. 또한 오천축국에서 우뚝 빼어나서 만 리를 두루 다녔다. 마음에 쌓은 것은 바다에 갈무리한 것과 같았고, 중국과 오랑캐의 말에 능통하였다. 경전을 새겨 경(經)을 전하고, 유가(瑜伽)의 가르침을 베풀어, 억조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하였고, 삼조(三朝)에 출입하였다. 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는 평등하여 자취가 없다. 열반은 항상 고요하여 성인들이 함께 귀의하는 곳이다. 범향(梵香)으로 목욕하고 화(化)하여 돌아가셨다. 나는 얼마 전에 요의경(了義經)을 받들어 모시고 예를 갖추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다. 영결하는 날 아침 슬픔이 깊어 향과 차[茶]를 갖추어 제사를 올리오니 영이 있다면 이를 비추어 보소서.” 이날 재신(宰臣)ㆍ중귀(中貴:官中貴族)ㆍ신책육군어사(神策六軍御史)ㆍ대부(大夫)ㆍ경조대윤(京兆大尹)ㆍ상서(尙書)ㆍ복야(僕射)ㆍ시랑(侍郎)ㆍ열경(列卿)ㆍ제위장군(諸衛將軍)들은 각기 재물을 갖추어 제사[奠祭]를 올렸고 그 나머지 승려와 속인들의 조문은 다 말할 수가 없다. 7일 새벽에는 다시 표를 올려 사례의 말씀을 진술하였다. “초토(草土)48) 사문 혜랑 등은 말씀드리옵나이다. 어제 6일 선사를 다비하던 저녁, 자비의 성자[聖慈]이신 황제폐하께서 애도하시어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시고, 이어 시호를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이라 내리셨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나라의 예로써 장례를 베푸시어, 그 은총은 장지로 가는 길[神道]을 빛나게 하셨으며, 삼공(三公)이 보내신 조의도 옛 법장(法章)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화상이라는 칭호는 선대의 경전에는 실려 있지 아니한 호칭입니다. 이로써 높은 하늘의 은택이 강과 바다에 물을 대주어 윤택하게 함이 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승길의 혼령은 해와 달의 은택을 입어 아래세계를 비추어볼 것입니다. 그날 모인 모든 제자 수천 명은 슬픔과 감격 속에 성은을 받들고 이를 갚을 길이 없어, 삼가 중사(中使) 이헌성(李憲誠)에게 부쳐 표를 받들어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옵고 아뢰옵나이다. 사문 혜랑 등은 참으로 황공하옵고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대력 9년 7월 7일 대흥선사 초토사문 혜랑 등이 표를 올립니다.” 이에 대하여 보응원성 문무황제는 비답(批答)을 내려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오천축국에서 자취를 일으켜 만 리를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정법을 널리 베푸시어 중생들을 구제하고 깨닫게 하시다가, 열반에 드시어 영구불변의 나라로 돌아가셨다. 그 행적을 살펴 시호를 내려 높이는 일은 예경(禮經)에 있는 일인데, 번거롭게 사은하였도다.” 같은 날 다시 칙령을 내려, 승 혜랑 등을 오로지 사원의 일을 검교(檢校)하는 직책을 맡아보게 하고, 아울러 후학들을 교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품계를 높일 만한 사람이나, 뜻이 계합하는 사람 가운데 차례가 된 사람은 주청하였다. 그날 다시 칙서를 내려 승 혜승(慧勝)에게 말하였다. “화상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대는 특히 화상의 생각과 뜻을 얻은 사람이었다. 지금 들으니 그대는 탑소(塔所)에서 향화를 사르며 탑소를 지키고 있다고 하는구나. 예전에 화상의 옆에서 보현염송법(普賢念誦法)을 받아 나와 함께 그것을 존중하며 힘써 닦기를 3년 동안 하였다. 3년이 지난 후에 곧 찾아와 나와 마주앉아 보현염송법[本尊法]을 함께 상량(商量)하였다. 그대가 요청한 일은 그대로 시행하도록 맡기겠다.” 이날 다비의 불이 꺼진 뒤 유골을 거두었는데, 몸체와 정수리 가운데에 모두 사리가 있었다. 그 광명이 아름답고 청정하여 유리와 같이 밝게 빛났다. 이 사실을 모두 위로 아뢰니, 성정(聖情 : 皇帝)은 이를 애도하여 내궁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도량에 안치하게 하였다. 15일이 되자 또 담당자에게 칙명을 내려서 서울의 모든 사찰과 도관에서 공덕을 닦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우용무군대장군(右龍武軍大將軍) 지군사(知軍事) 상주국(上柱國) 양국공(涼國公) 이원종(李元琮)을 시켜, 고(故) 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의 탑소를 다듬어 조성[修造]하는 일을 잠시 정지시키고, 따로 좋은 땅을 골라서 탑을 다듬어 조성하게 하였다. 8월 28일에 이르자 다시 이원종에게 칙명을 내려 말하였다. “고 대변정삼장화상의 다비에서 얻은 사리는, 해당 사원에 사리탑 셋을 조성하여 안치하고, 탑이 세워지면 큰 비(碑)를 건립하라”고 하였다. 이 비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풍익현(馮翊縣) 개국공(開國公) 엄영(嚴郢)이 비문을 지었고, 은청광녹대부(銀靑光祿大夫) 팽왕부(彭王傅) 상주국(上柱國) 회계군(會稽郡) 개국공(開國公) 서호(徐浩)가 글씨를 썼다. 이상의 사적을 논평한다면, 예전부터 고승석덕(高僧碩德)에 대한 은총과 특수한 은전은, 살아있을 때는 영화로웠지만 죽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변정삼장화상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살아서는 받은 은총이 두텁고, 삼조(三朝)에 걸쳐 황제를 섬겨서 공경[卿]의 열에 서는 벼슬이 내려졌고, 품계는 특진을 더하였다. 그 후 병석에 눕게 되자 위문이 이어졌고, 중사(中使)와 명의(名醫)가 아침ㆍ저녁으로 서로 이어 찾아갔으며, 특별히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의 벼슬을 더하여 숙국공(肅國公)에 봉해졌다.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되자 황제는 더욱 크게 슬퍼하여 3일 동안 조정의 일을 그만두었다. 하사한 부조도 매우 넉넉하였으며, 사공(司空)의 벼슬을 추증하고, 대변정(大辯正)이란 시호를 내리고, 이어 화상(和上)이라 불렀다. 이러한 일은 선고(先古)에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성 밖에서 다비하고, 절 안에 탑을 세우는 일도 몇 일 몇 달이 되지 아니하여 모두 이루어졌다. 아울러 큰 비를 세워 그 덕행을 기념하였다. 이러한 일은 고금에 다시없는 영광이며, 승려의 무리 가운데 첫 번째로 뛰어난 영광이었다. 아상(亞相:宰相의 다음가는 자리)이 비문을 짓고, 왕부(王傅:왕의 스승)가 글씨를 썼으니, 이는 곧 만대에 영원히 전할 일이다. 여기에서 기술한 것은 그 대강만을 들어 간략하게 하였다. 만약 구체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증사공대변정광지삼장표제집(贈司空大辯正廣智三藏表制集)』 가운데 갖추어 자세하게 설한 내용과 같다. 금상폐하인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의 조정에서 번역한 경은 다음과 같다.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 10권 160장 대화엄장자문불나라연력경(大花嚴長者問佛那羅延力經) 1권 2장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1권 2장 이상 3부 경 모두 12권은 함께 1질이다.
이는 반야삼장(般若三藏)이 계속해서 번역하였다. 『역경도기(譯經圖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예전 진(秦)나라의 임금 요씨(姚氏)때에 연리수(連理樹)49)가 조정의 뜰에 돋아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구자국(龜玆國)50)에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서량(西涼)땅을 밟고 입공(入貢)하였다.” 지금 우리의 황제께서는 슬기롭고 명철하시며, 합만과(合蔓苽)51)가 황제의 정원[御苑]에 돋아나자, 계빈국(罽賓國)에서 용상대덕(龍象大德)52)들이 남해로 배를 타고 우리 조정을 찾아왔다. 이들은 손에 범어로 된 경전과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을 지니고 있었다. 대신이 이 소식을 듣고 아뢰니, 황제가 그 말을 믿고 분부를 내려 유사(有司)들에게 맡겨서, 석덕들을 뽑아서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면서 번역하게 하였다. 번역이 끝나고 나서 황제에게 아뢴 이는, 곧 반야삼장법사(般若三藏法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법사의 범어 이름은 반자야(般刺若)이며,[당나라 말은 지혜(智慧)라고 한다.] 북천축의 경계에 있는 가필시국(迦畢試國) 사람이다.[계빈국(罽賓國)사람이라고 한 것은 와전된 말이다.] 성씨는 교답마(喬答摩)이다.[구담(瞿曇)이라고 말한 것은 와전된 옳지 못한 말이다.] 그는 총명하고 이해가 빨랐는데, 이는 하늘이 빌려 준 재주다. 7살 때 발심하여 양친을 모시는 일을 어기고 삼보에 귀의하였다. 당시 그는 조복군(調伏軍)이라는 대덕에게 의지하여 네 『아함경』의 10만 게송을 외우고, 『아비달마(阿毗達磨)』 2만 게송도 외웠다. 여가(餘暇)에는 또 스승을 따라 가습밀(迦濕蜜 : 罽賓國)에 갔다. 20세가 되자 구족계를 받고 살바다(薩婆多)53)의 4만에 가까운 게송을 외웠고, 아울러 『구사론(俱舍論)』의 2만 8천 게송도 외웠다. 아울러 그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毗婆沙論)』의 뜻을 7년 동안 전수받았다. 이 나라에서는 소승을 배우고 익히고, 그의 나이 23세가 되자 중천축(中天竺)의 나란타사(那爛陁寺)를 찾아가 대승의 경전을 받아 배웠다. 그리하여 『유식(唯識)』ㆍ『유가(瑜伽)』ㆍ『중변(中邊)』 등의 논과 또한 『성명론(聲明論)』과 『금강경』ㆍ『인명론(因明論)』ㆍ『의명론(醫明論)』ㆍ『공율론(公律論)』 등 모두를 지호(智護)ㆍ진우(進友)ㆍ지우(智友) 등 3대 논사에 의지하여 배웠다. 그때 곧 석존이 입멸하신 곳[雙林]에서부터 8탑 사이를 유행하면서 우러러보고 예배드리기를 18년 동안 계속하였다. 당시 남천축국에는 아직까지도 명장(明藏)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곧 그곳으로 가서 아직 듣지 못한 경전을 물어서 받았다. 그때 관정사(灌頂師)가 있었는데 이름이 법칭(法稱)이다. 그로부터 유가(瑜伽)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만다라(曼茶羅) 삼밀호신(三密護身)의 5부의 계인(契印)54)을 전수받았다. 이와 같이 이어 받들어 숭상하기를 1년이 경과하자, 3천 5백여 게송을 외우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지나(支那:中國)는 큰 나라며, 문수보살이 그 가운데 계시다는 말을 듣고, 동쪽 대당국(大唐國)을 찾아가 맹세코 불교를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가면서 험한 파도를 만났다. 거의 광주(廣州)에 이르렀을 때, 배가 바람에 나부끼어 도로 물러나 집사자국(執師子國:스리랑카)의 동쪽 기슭에 이르렀다. 다시 비용과 식량[資糧]을 모으고, 배를 견고하게 수리하여 남해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여러 나라를 거치기를 22년 동안 하였다. 거의 광주부(廣州府)에 이르게 되었을 무렵, 바람에 배가 파손되어, 떴다 가라앉기를 몇 번 거듭하였다. 처음 5경 때부터 시작한 바람은 해 뜰 무렵이 되자 조용하였다. 배는 혹 표류하기도 하고, 혹 가라앉기도 하였는데 순풍을 만난 것에 힘입어 육지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니고 온 자재(資財)와 범협(梵夾) 경ㆍ논 등은 이 액난을 만나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닷가에 이르러 보니, 그것들은 이미 해안 가 흰 모래사장 안 큰 대나무 통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완연히 신이 있는 것과 같았다. 그는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이로써 『대승이취육바라밀경(大乘理趣六波羅蜜經)』은 대당국(大唐國)에 본래 인연이 깊은 경전임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 길을 가기를 반 달만에 비로소 광주에 도달하였다. 건중(建中) 3년(782)에 이르러 상국(上國)에 이르렀다. 그는 정원(貞元) 2년(786)에 고향 친구들을 방문하여 만나보았는데, 신책십장(神策十將) 나호심(羅好心)은 곧 반야삼장의 외삼촌의 아들이다. 슬픔과 기쁨으로 서로를 위로하였으며, 곧 집안에 이르러 친족 간의 정을 나누었다. 마침내 그 집에 머물러 공양받게 되었다. 그는 이미 삼보를 믿고 존중하였기에 불경을 번역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진사(大秦寺)의 파사(波斯)55) 출신의 스님인 경정(景淨)과 더불어 호본(胡本)56)에 의거하여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 7권 번역을 완성하였다. 당시 반야삼장은 호어(胡語)에 숙달하지 못하였고, 또한 당나라말도 미처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경정(景淨)스님은 범어를 알지 못하였고, 또한 아직 불교에 밝지 못하였다. 비록 불경을 전역(傳譯)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절반의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헛된 이름만 훔치기를 도모하거나, 복리(福利)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표(表)를 올려 아뢴 것은 그것이 세상에 유행되기를 바라는 생각에서였다. 성상께서는 지혜가 총명하시고 문장에 밝으셨으며, 불교경전을 진실로 공경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번역한 책을 살펴보니 이치에 어둡고 문장은 엉성했다. 또한 무릇 석씨(釋氏)의 가람과 대진(大秦)의 승사(僧寺)는 거주하는 장소가 이미 다르고, 수행하는 법도 전혀 다르다. 경정(景淨)은 마땅히 미시하(彌尸訶)57)의 가르침을 전하고, 사문인 불자들은 불경을 널리 밝힌다. 교법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함부로 교섭해서는 안된다. 정(正)과 사(邪)는 그 류가 다르며, 경수[涇]와 위수[渭]는 물이 흘러가는 방향이 다르다. 만약 강령에 있는 것을 망라하려면 조리가 있고 어지럽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천인(天人)이 우러러보고 사부대중이 귀의할 곳을 알게 된다. 황제는 유사(有司 : 관리)에게 분부하여 곧 제령(制令)으로 말하였다. “중서문하(中書門下) 왕희천(王希遷)에게 칙첩(勅牒)58)을 내려 칙명을 받들게 하라. 불교는 깊고 미묘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였다. 불법은 모두 범본에 인연하여 중화(中華)에 가피를 입게 되었다. 마땅히 왕희천은 유사들과 더불어 번역할 수 있는 모든 스님을 선발하여 서명사(西明寺)에서 다시 번역하게 하고 번역이 끝나면 아뢰게 하라.” 칙첩(勅牒)이 이르니 칙명에 준하여 시행하였다. 정원(貞元) 4년 4월 19일에 칙명을 내렸으며, 다시 칙첩(勅牒)을 사부(祠部)에 내려 칙명에 준하게 함이 또한 그와 같았다. 이 칙첩(勅牒)을 경성의 여러 사찰의 대덕들에게 돌리고, 계빈국(罽賓國)의 삼장(三藏) 사문 반야스님에게 범어본을 번역하게 하였다. 이에 한림원(翰林院)의 대소관(待詔官)과 광택사(光宅寺)의 사문 이언(利言)이 범어를 번역하고, 서명사의 사문 원조(圓照)가 붓으로 받아썼으며, 자성사(資聖寺)의 사문 도액(道液)과 서명사의 사문 양수(良秀)와 장엄사의 사문 원조(圓照)가 나란히 윤문을 하였고, 자은사(慈恩寺)의 사문 응진(應眞)과 예천사(醴泉寺)의 사문 초오(超悟)와 광택사의 사문 도안(道岸)과 서명사의 사문 변공(䛒空)이 나란히 함께 증의(證義)하였다. 6월 8일부터 경의 제목을 짓고자해서, 가서(街西)의 공덕사(功德使) 겸 구당(句當:담당자) 우신책군사(右神策軍使) 영막사(營幕使) 원종흥(元從興)ㆍ원원종(元元從)과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감문위장군(行右監門衛將軍) 지내시성사(知內侍省事) 상주국(上柱國) 대원현(大原縣) 개국백(開國伯) 왕희천(王希遷)에게 칙명을 내려, 친히 윤지(綸旨)를 받들고, 봉천정난공신(奉天定難功臣)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행우신책군대장군(行右神策軍大將軍) 지군사검교(知軍事檢校) 공부상서(工部尙書)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무도군왕(武都郡王) 맹섭(孟涉)과 보응공신(寶應功臣) 원종(元從)과 표기대장군 행우신책군대장군(行右神策軍大將軍) 지군사(知軍事)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정융군왕(靜戎郡王) 식(食) 실봉(實封) 오천호(五千戶) 마유린(馬有麟) 등과 더불어 범본 경을 봉송하게 하였다. 이때 육률(六律)59) 오성(五聲)60)과 팔음(八音)61) 이 합운(合韻)하였고, 사부대중이 운집하여 노래와 범패소리가 뒤섞이어 요란하였으며, 퉁소와 풍악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고, 북과 종소리가 땅을 진동시켰다. 저 금원(禁苑)의 문턱을 출발하여 방림문(芳林門)을 나서니, 수레와 말이 수도(首都)의 거리에 가득하였고, 선비와 여인들로 주변 거리에 가득차고 넘쳤다. 서명사에 들어가 진경을 번역하게 되니, 같은 날 돈 1천문(文)ㆍ차(茶) 30천(釧)ㆍ향(香) 일대합(一大合)이 은사(恩賜)되어 이것으로 역경원의 공양에 충당하게 하였다. 경의 제목을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이라 이름 하였다. 그 후 날과 달이 지나도록 위의 두 스님이 경을 번역하여, 10월 중순에 글을 번역하는 것이 두루 끝났다. 11월 15일에 이르자 베껴 쓰는 일도 다시 끝났다. 28일에는 위의를 크게 갖추고 비단수레와 음악을 마련하여, 광범보(光範甫) 광순문(光順門)에 들어가 표를 엮어 위에 아뢰고 새 경전을 진상하였다. 그 글은 10권이며, 품(品)도 역시 10품으로 나누었다. 그 후 두 번, 세 번 칙지가 내려 오가며 노고를 위문하였다. 이어 금원(禁苑)62)에서 재식(齋食 : 음식)을 베풀고, 반야법사에게 명주 100필과 겨울옷 1벌을 더불어 하사하였다. 나머지 열 사람 각각에게는 명주 50필과 옷 1벌을 하사하였으며, 검교(檢校)를 담당한 두 사람 각각에게는 명주 30필과 옷 1벌을 하사하였다. 이렇게 충분하게 베풀었다. 삼장법사 반야는 이 하사품을 공경하여 높이 받들고 부끄럽고 황송해하며, 곧 이때에 표를 올려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반야는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저는 계빈국에서 태어나, 14세에 고향을 떠나 남쪽 천축국을 돌아다니면서, 깨우치지 못한 것을 듣기를 20여 년 간하였습니다. 또한 성지의 자취를 순례하여 쌍림과 8탑을 왕래하였고, 대승ㆍ소승을 배워 사은(四恩)63)에 보답코자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멀리 중국 땅을 사모하여, 이에 이곳을 찾아와 우러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온 범협(梵夾) 경전은, 중국에는 아직 전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늘 받들어 올리려고 생각은 하였으나 진헌(進獻)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외사촌 형인 우신책십장(右神策十將) 신평군왕(新平郡王) 나호심(羅好心)이 몸소 융위군(戎衛軍)에 참여한 인연으로 인하여, 마침내 더불어 폐하께 아뢸[奏聞]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스러운 폐하께 들리게 하였으니, 실로 이는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폐하께옵서는 불교를 숭상하시고 대승을 믿고 받아들이시어, 승도들에게 명하여 번역하도록 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승려인 저의 간절한 소원은 이것을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맹세코 이 명령을 받들어 정밀하게 번역하여서, 위로 폐하의 은혜[皇祚]에 보답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광순문(光順聞)을 찾아가 표를 받들어 감사의 말씀을 진술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사문 승 반야는 참으로 황송하옵고 참으로 두렵습니다.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정원(貞元) 4년 11월 28일 계빈국 사문 반야는 표를 올리나이다.” 이에 대하여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唐 德宗皇帝)는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스님은 일찍 증원(證源)을 찾아가 일찍이 비장(秘藏)을 자세히 보고, 서역 땅을 주유하면서 대승을 차례로 찾아보고, 심지(心地)에 잠긴 말씀을 얻었으니, 이는 부처님의 묘행이다. 이를 널리 알리기를 기약하고, 현문을 널리 열고자 멀리서 진문(眞文)을 등에 지고 이를 중국에 와서 전하였다. 지나온 길은 만 리나 먼 곳인데, 고난을 견디어 수도[京師]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유풍을 드높였으며, 다시 마등(摩騰)의 발자취를 이었다. 정성스럽고 간절한 말씀을 돌아보니, 나는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에 도류(道流)들에게 명하여 번역을 더하게 하여 이 상법(上法)이 이로써 길이 유행되게 하리라. 표의 문장을 살펴보니 번거롭게 사은을 진술하였구나.” 같은 날 역경의 시주인 반야삼장의 외사촌형 우신책마군십장(右神策馬軍十將) 봉천정난공신(奉天定難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檢校) 태자첨사(太子詹事) 상주국(上柱國) 신평군왕(新平郡王) 신(臣) 나호심(羅好心)이 표를 올려 감사드리며 말하였다. “나호심은 말씀드립니다. 아우인 계빈국 사문 승 반야가 먼저 진상한 대승이취(大乘理趣)의 범협(梵夾) 『육바라밀다경(六波羅蜜多經)』은 금년 4월 19일자 칙지를 엎드려 받들고 왕희천(王希遷)에게 도행이 있는 스님을 정선하여 서명사에서 번역하여 지금 경질(經秩)이 이미 끝난 것에 대해 신은 매우 반갑고 기쁩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옵니다. 신이 듣건대 주나라 때 별빛을 숨겨 한나라 황제의 꿈에 광명을 나타냄으로써 비로소 신령한 서상(瑞相)이 인간세계에 감응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밝은 임금에게 맡겨서 인도하고 교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두 번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불법을 펼쳐 베푸시었고, 거듭 진종(眞宗)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옵서는 은택이 나라 안팎에 미치시고, 은혜가 생령들을 덮으시며, 성교(聲敎 : 황제의 가르침)가 먼 곳까지 통하여, 행함이 없어도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의 외사촌동생은 14세에 고향을 떠나 뜻이 치류(緇流:僧流)를 사모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먼저 진상한 경본을 상고해 보니, 범협의 대승이취(大乘理趣)를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불교를 믿고 숭상하시어 특별히 이를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부지런히 번역의 일을 그치지 않아 지금 경질이 마무리되었음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번(幡 : 標旗)과 꽃을 하사하시고, 또 다시 번역하게 하시니 미천한 승려로서는 다행한 일이고, 그 총애에 놀라 깊이 엎드립니다. 신의 집안은 서쪽 오랑캐로서 중국에 살 수 있게 되었고, 명예롭게도 대궐을 경비하고 임금을 호위[戎禁]하는데 참여하여, 그 영광이 저의 집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서로 기뻐하였으나 실로 천지에 부끄럽습니다. 승려가 된 사람이 무슨 공덕이 있었기에 다시 위곡(委曲)한 큰 은혜를 입었겠습니까? 원컨대 신은 그 뜻을 받들어 닦고 간직하여 복덕이 폐하의 은혜[皇祚]에 보답하게 된다면 다행이옵나이다. 맹세코 죽음으로써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저 기쁘고 기뻐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굴리는 지극함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삼가 광순문(光順門)를 찾아가 표를 받들어 진사(陳謝)함으로써 아뢰옵나이다. 신 나호심은 참으로 황송하고 참으로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면서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신문무황제는 비답을 내려 이르렀다. “경의 외사촌 동생은 일찍 대승을 깨달아, 멀리 서방에서 상국(上國)으로 내유(來遊)하여 육근(六根)의 깊은 뜻을 선포하고, 쌍수(雙樹)의 부처님 말씀을 베풀었다. 지금은 그의 정성으로 그가 베푼 것이 흠모하고 존중되고 있다. 이에 이를 번역하게 하여 유행(流行)할 수 있게 하였다. 경은 일찍부터 충성심과 정성스런 마음이 가득하여 금위(禁衛)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표소(表䟽)를 살펴보니 그 품고 있는 마음이 모두 나타나 있으며 감사하는 바를 알겠다.” 12월 2일에 이르자 장군 왕희천(王希遷)에게 선포하여 예천사(醴泉寺)의 승려 사유(思惟)에게 칙명을 받들게 하고, 사원에 선포하여 계빈국에서 진상한 범어 본 『육바라밀다경』과 승려 반야를 편안하게 모시게 하였다. 그 후 또 23일에 이르러 우신책군판관(右神策軍判官) 내알자감(內謁者監) 풍국청(馮國淸)에게 칙명을 내려, 하사품을 계빈국 승려 반야가 있는 사원에 보내게 하였다. 팔척상(八尺床) 3장(張), 각종 협첩(夾帖) 및 석갈(席褐), 관절욕(官絶褥)ㆍ백서단(白樨氈), 흰 천의 수건[白副手巾] 2장, 구리 물병[銅水甁] 1개, 무쇠냄비[鐵鍋] 2개, 서말들이 솥[三斗釜] 1개, 백자공기[白瓷椀] 10개, 다병[𣗪甁] 1개, 이불[蒲團] 1채, 새차[新𣗪] 20통 및 차를 가는 맷돌[𣗪碾子] 1벌이다.다 (𣗪=木*茶) 또한 경을 진상한 날, 은지를 받들어 다시 번역한 『육바라밀경』 가운데 진언과 계인(契印) 법문은, 당음과 범어를 서로 대조해서 진상해 오라고 하였다. 정원(貞元) 5년 2월 4일에 이르러 베껴 쓰는 일이 끝나게 되어, 사문 양수(良秀) 등과 더불어 진상하게 되었다. 이에 은총의 칙명이 내려 다(𣗪 30천(釧)이 하사되었다. 또한 『육바라밀경』의 번역을 끝낸 날 다시 『대화엄장자문불나라연력경(大華嚴長者問佛那羅延力經)』 1권 나머지 1장 정도를 번역하였다. 그해 12월 15일에 교정ㆍ필사가 끝났으나 아직 진상하지 못하였다. 이제 목록에 따라 진봉(進奉)하게 되었다. 5월 4일에 이르러 어제(御製) 『육바라밀경』의 서문이 완성되어 이를 경의 첫머리에 실어 올리고, 천복사(千福寺)와 장경사(章敬寺)에 칙지를 내려 각 경 1본을 하사하여 돌려가며 읽고 유행시키게 하였다. 이때 장경사와 천복사의 유아(惟雅)와 지유(智柔) 두 스님이 표를 엮어 감사의 뜻을 아뢰니 황제는 이에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이 경이 나온 이래로 아직 중국 땅에 전해지지 아니하였다. 모름지기 범본은 서방에서 온 것이어야, 종지의 근원을 상고하여 깨달음의 뜻에 지극히 부합할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번역하여 유행하도록 하였다. 스님들은 법문을 경건하게 받들고 세상에 안주(安住)하게 하여 불법(佛法)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한 지 오래되었다. 경을 모으고 더 보태어 베껴서 절에 두게 하였다. 이 진문(眞文)은 영구히 널리 유포시키기 바란다. 표의 문장을 살펴보니 번거롭게 감사하였구나.” 6년(780) 6월 23일에 이르러 사문 반야는 그가 있는 사원의 암라과(菴羅菓)64) 250개를 진상하니 칙명을 받들어 명주 10필이 하사되었다. 7월 15일에 이르러 다시 명주 50필과 겨울옷 5벌이 하사되었고, 이어 반야에게 칙지를 내려 반야를 북천축국의 가습밀국(迦濕蜜國)의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17일에 이르자 다시 봄옷 1벌이 하사되었고, 아울러 제자 두 사람 각각에게는 명주 30필과 겨울옷 4벌이 하사되었다. 22일 우은대문(右銀臺門)에서 반야를 인도하여 삼전(三殿)에 들어오게 하여 황제와 대면하고 중서문하(中書門下)의 칙첩을 받게 하였다. 24일 장안을 떠나 장락역(長樂驛)에서 잤다. 25일에 다시 칙지가 내려 계빈국에서 범협 『육바라밀경』을 진상한 사문 반야에게 ‘반야삼장’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시고, 이어 자색(紫色) 옷을 하사하였다. 27일 뒤이어 온 사신에게 이 고별의 칙서[告牒]와 아울러 온갖 약물 10근을 보내왔다. 마땅히 명령서[領取]가 도착하니, “스님들 잘 가시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출발하여 길을 회골(廻鶻)의 북쪽 정진(庭鎭)의 서쪽 대식국(大食國)으로 취해서 천축으로 향하였다. 당시 반야삼장법사의 나이는 57세였다. 또한 반야삼장이 제령(制令)을 받들기 전에 천복사(千福寺)의 대덕 지유(智柔)는 다시 거듭 『반야심경』을 번역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서번(西蕃)에 사신의 사명을 받들게 되자 미처 진봉할 여가가 없었다. 이에 8월 11일에 이르러 표를 수반하여 아뢰니, 이 경의 「서분(序分)」과 「유통분(流通分)」이 구족하게 되었다. 그 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사문 지유(智柔)는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인의 지혜는 넓고 깊어서 널리 베풀어 줌으로써 더욱 넓어지고, 진리의 근원은 극히 묘하여 말과 모양을 빌려야 비로소 전달됩니다. 이 경은 곧 뭇 성사(聖師)의 대종(大宗)이옵고, 뭇 경전의 근본 모체입니다. 지난날 사문 현장(玄奘)이 이미 번역하여 유행시켰는데, 비록 뜻이 원만하여 남김이 없었으나, 문장이 처음부터 이지러진 곳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계빈국의 승 반야를 만나서 친히 범어의 문장을 보고 그로 인하여 그것을 전하여 통하게[傳通] 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다시 불법을 돕는 일을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취암정사(鷲巖精舍)에서 진실로 부처님 말씀[金言]을 알게 되었고, 염송하는 사람은 의문이 제거되어 진정한 도풍이 다시 멀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옵서는, 친히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시어 선(善)한 일이면 따르지 아니하시는 것이 없고, 도가 생령(生靈)들에게 두루 미쳐 교화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유(智柔)는 법도가 없고 용렬하며 비천하오나, 문득 어리석은 정성을 바쳐 천자의 덕[皇風]을 보좌하기를 바라고, 성수(聖壽 : 임금의 수명)를 돕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천감(天鑑 : 하늘 거울)을 드리우셔서 이 금문(金文)을 열람하시어 만약 혹 따를 만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를 조정의 안팎에 반포하도록 선포하여 주시옵기를 청하나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미혹된 중생과 사문들에게 매우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정성[丹誠]을 끝까지 다하고 지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표에 부쳐 진술하여 진상하면서 아뢰옵나이다. 사문 지유는 참으로 황송하옵고 참으로 두려워 죽을죄를 무릅쓰고 삼가 말씀드리옵나이다.” 이에 대하여 성신문무황제는 비답을 내려 말하였다. “『반야심경』은 대승의 비지(秘旨)이다. 얼마 전에 현장스님이 번역한 것은 문자와 뜻이 이미 두루 갖추어졌으나, 그 첫머리와 뒤따른 부분에서 혹 아직 소상하게 갖추어지지 못한 곳이 있었다. 근자에 계빈국의 스님 반야가 중국을 찾아옴으로 인하여 유문(遺文)을 전하게 되니, 도움 되기에 충분하였다. 스님이 진술하여 청[陳請]한 일은 깊이 나의 마음과 일치한다. 지금 보내 온 상주문대로 진경을 널리 보급하겠다.” 이때 반야삼장은 왕명을 받고 북천축국에 사신으로 나가 있었다. 태원(太原) 쪽으로 길을 취하여 가다가, 진무(振武)땅을 경유하여 회골(廻鶻)국에 들어가 유행(遊行)하게 되었다. 그 동안 모래사막의 이역 땅에서 두루 산천을 밟고 지나갔으며, 더위와 추위가 오고 갔으나,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불법을 잘 받들었다. 약 2주년이 되어갈 무렵에 태원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곧 정원 8년(792) 3월이었다. 그 달 8일에 공첩(公牒 : 公文)이 내려와서 4월 상순에 상도(上都 :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칙사(勅使)를 보내 위문하고, 자색(紫色)의 가사를 하사하였으며, 예천사(醴泉寺)의 옛 사원에 돌아가 편안하게 쉬게 하였다. 여기서 내가 서술한 것은, 대략 그 사유만을 들어 말한 것이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자세한 내용은 『반야삼장속역도기(般若三藏續譯圖紀)』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다. 이상의 내용을 논평해 본다면, 불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오면서부터, 고승들이 뒤를 이어 이 땅을 찾아와 함께 번역하여 전한 것이 첫 번째 업적이며 최고의 업적이고, 뜻을 풀이하고 현오한 이치를 참구[參]하여, 소(䟽)ㆍ기(記)를 전해하고 천양한 일이 그 다음 업적인데, 지금 여기서 말한 반야삼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른바 그는 스승을 찾아서 인도로 갔으며, 배움은 오명(五明)65)을 궁구하였고, 멀리 끝없이 넓은 바다[滄波]를 건너서 삼장을 유통시켰다. 동ㆍ서ㆍ남ㆍ북을 돌아다닌 발자취는 표주박과 오이[瓠瓜]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어찌 오직 석씨(釋氏)의 진정한 승려일 뿐이었겠는가? 또한 응당 초빙해야할 상사(上士 : 菩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