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마역경(魔逆經)』은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을 조사해보니 이 경은 단역(單譯) 경이고 국본(國本)과 거란본[丹本]의 두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가 없으나 송나라 본[宋本]은 저 두 본과 문장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반드시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른데 어느 것이 진본(眞本) 『마역경(魔逆經)』인지 알 수 없다. 지금 송나라 장경을 검토해보니 이것은 완전히 나중에 나오는 염함(念凾) 가운데 있는 『문수사리회과경(文殊師利悔過經)』이다. 송나라 장경에서 착란을 일으켜 『마역경(魔逆經)』이라고 이름붙이고 중복해서 여기에 편입시켰다. 그러므로 지금 송나라 본을 삭제하고 국본과 거란본을 취해서 진본(眞本) 『마역경(魔逆經)』으로 삼는다. 후현(後賢)이 지금 삭제한 경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청컨대 염함(念凾) 가운데에 있는 『문수사리회과경(文殊師利悔過經)』을 보라. 바로 이 경이다. 지금 구본인 송나라 장경을 보는 사람을 위해서 다음에 정경을 모두 수록한다.219)
18-2. 『불설마역경』 (서진(西晉) 삼장(三藏) 축법호(竺法護) 역220))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대비구 대중 1천 2백 5십인과 셀 수 없이 많은 마하보살과 욕행천(欲行天)과 모든 색행천(色行天)과 정거천인(淨居天人)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그 자리에 모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無數]의 대중 권속들에게 겹으로 둘러싸여 경법(經法)을 말씀하셨다. 그때 대광(大光)이라는 한 천자(天子)가 좌중에 있으면서 문수사리보살을 보익하고 따르면서 모시고 있었다. 이에 대광천자가 문수사리에게 여쭈었다. “모든 보살 대중에게 마사(魔事)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을 마사라고 합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했다. “업을 일으켜 작위하는 것이 있으면 마사가 되는 것이니, 만약에 무엇을 얻고 취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 빼앗기를 원하면 마사가 되고, 가령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 의식하고 사념하고 구하고 바라는 모든 집착이 마사가 된다. 또한 그대[仁者]여, 보살행에 치우치게 집착하여 지극한 도를 이루고자 하면 마사가 되는 것이니, 마음이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一心]ㆍ지혜에 치우쳐 의지하면 마사가 되고, 보시를 식(識)으로 사념하고, 지계를 허망하게 생각하며, 인욕을 감수하고, 정진을 게을리 하며, 선정에 치우치고, 지혜만을 전적으로 사유하면 마사가 된다. 또한 그대여, 마음이 한가롭게 거처하면서 수행함을 즐겨서 관법을 얻으려 하면 마사가 되는 것이니, 만약에 홀로 거처하면서 생각이 명예와 공덕을 절제하고 제한하는 데 만족하여 그친다면 마사가 되는 것이고, 공하여 아무 것도 없음[空無]을 수행하고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에 의지하여 수행하지 않고 방일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언교(言敎)에만 머물러 안주한다면 마사가 된다. 그대여, 가령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사념하여 마음이 받는 데만 가 있고, 견문념지(見聞念知)의 경험적인 지식으로 경전을 분별하면 모두 마사(魔事)가 된다.” 대광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그 마사는 어디에 머물러 집착하여 머무릅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했다. “정진(精進)에 집착하여 머문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정진에 집착하여 머무릅니까?” 문수가 답하였다. “정진하는 사람은 모든 마사가 쉽게 그 틈을 엿본다. 만약 게으르다면 저 악마 파순인들 어찌해보겠는가.”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정진하면서도 응하지 않는다고 합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보살은 가령 나 자신이 정진한다고 잘못 헤아려 말할지라도 수응(受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정진하면서 수응할 것이 있다고 잘못 헤아린다면 세간에 의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여, ‘정진을 알고자 한다면 수행한 것에 평등하게 따르라’라고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라. 평등하게 정진하기 때문에 ‘평등하게 정진하여 수응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미 수응할 것이 없으면 방일함도 없어진다. 그대여, 가령 눈[眼]이 나아갈 곳이 없어서 색(色)으로 천류(遷流)하여 행하지 않음을 평등정진(平等精進)이라 하며, 귀[耳]가 나아갈 곳이 없어서 음성(音聲)으로 천류하여 행하지 않음을 평등정진이라 하고, 코[鼻]가 나아갈 곳이 없어서 온갖 향기로 천류하여 행하지 않고, 혀[舌]가 나아갈 곳이 없어서 모든 맛에 천류하여 행하지 않고, 몸[身]이 나아갈 곳이 없어서 부드러운 촉감으로 천류하여 행하지 않고, 뜻[意]이 나아갈 곳이 없어서 모든 법으로 천류하여 행하지 않음을 평등정진(平等精進)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대여, 가령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서 중생의 애욕과 번뇌의 때[垢穢]를 끊어서 제거하면 이를 보살이 행하는 평등정진이라고 하고, 삼계에서 행함이 없이 삼계 중생의 치우쳐 집착하고 있는 번뇌의 근심을 구제한다면 이를 보살이 행하는 평등정진이라고 한다.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한다는 생각없이 사은(四恩)을 닦아서 모든 간탐(慳貪)을 섭수하고, 지계[禁戒]를 행하면서도 지계를 행한 나는 생각없이 모든 악을 범한 중생의 부류를 섭수하며, 인욕을 행하면서도 인욕한다는 생각없이 성내는 백성[人民]대중을 모두 섭수하고, 정진을 행하면서도 정진을 행한다는 생각없이 모든 게으른 사람을 섭수하고, 선정을 행하면서도 행한다는 생각없이 어지러운 생각을 모두 섭수하고, 지혜를 행하면서도 행한다는 생각없이 모든 사악한 지혜를 섭수하면 이것을 보살이 행하는 평등정진(平等精進)이라고 한다.” 문수사리보살이 다시 대광천자에게 말하였다. “모든 법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空無] 지혜의 행을 밝게 깨달아서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사념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공을 행하여 정진하면서도 모든 견해에 노닐며 모든 견해를 관찰하면서도 소견이 없고, 삿된 견해를 모두 관하면서도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떠나지 않으니 이를 공을 수행함[行空]이라고 한다.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견해가 곧바로 공한 것이니, 견해가 공하기 때문에 (공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마저도 공하다는 뜻에서) 공공(空空)이라고 말한다. 이 공공(空空)을 연유하기 떄문에 공(空)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공 때문에 모든 법이 모두 공하니 가령 이러한 지혜를 환하게 깨달아 분명하게 알면서도 자신을 크게 여기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평등정진(平等精進)이라고 한다. 또한 천자여, 보살은 이 ‘생각에 집착함이 없음’을 수행하면서도 무상(無想)이라고 사념하지 않아서 모든 사념과 함께 노닌다. 온갖 사념을 버리지도 않고 사념하지도 않아서, 사념하면서 무상(無想)이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사념하여 모든 상념(想念)에 평등하다. 만약에 모든 상념을 밝게 깨달아 설령 이러한 지혜가 있다 해도, 지혜가 있다고 하여 교만하지 않은 사람은 방일하게 즐김이 없으니, 이것이 보살의 정진행(精進行)이다.” 문수사리가 다시 대광천자에게 말하였다. “무원(無願)을 행함에,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과 뜻을 두어 바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원했던 것과 그 갈래[趣]대로 생긴 것을 행하지 않으며, 이미 모든 견해를 여의고, 두 가지 (원하는 것과 마음을 따라 생긴 것) 버리기를 빠르게 흐르는 물과 같이 하고, 몸이 있다고 하는 것과 나[我]는 없다고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처음과 끝, 생사를 평등하게 제거하여 이와 같은 정진을 잘 수행한다면 이를 보살의 평등정진(平等精進) 이라고 한다.” 문수사리가 다시 대광천자에게 말하였다. “보살은 항상 평등으로써 지혜와 수행할 것이 없이 수행한다. 훌륭한 방편을 밝게 깨달아 모든 중생의 공덕의 근본을 섭수한다. 지혜를 분별함은 무아(無我)ㆍ무인(無人)ㆍ무수(無壽)ㆍ무명(無命)이니 곧 훌륭한 방편으로 정진하여 모든 중생을 개화(開化)하는 것이다. 성인의 밝은 지혜에 통달함은 모든 법에 호응함도 호응하지 않음도 없고 깨끗함도 깨끗하지 않음도 없으며, 훌륭한 방편을 밝게 깨달음이란 정진하여 모든 정법을 섭수하는 것이다. 일체의 지혜에 나아감은 파괴되지 않는 법계를 모두 끝까지 아는 것이며, 훌륭한 방편을 끝까지 아는 것은 이루다 셀 수 없는[無央數]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지혜에 통달함은 성스러운 무위법(無爲法)에 나아가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밝게 아는 것은 모든 문자교(文字敎)의 갖가지 다른 점을 밝게 아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러움은 불신(佛身)을 수행하여 번뇌가 없음[無穿漏]을 통달하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앎이란 32대인(大人)의 상이 곧 스스로 장엄되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러움은 가열 모든 생사(生死)에 나지 않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앎이란 곧 생각하는 것이 항상 중생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러움은 공(空)과 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수행하며, 훌륭한 방편을 밝게 아는 것은 62소견과 중다한 망상의 집착과 욕구를 제거하고 끊을 것을 선양하며, 지혜가 성스러움은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여 6신통에 이르도록 돕고 권하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하는 것은, 신통변화로 구제하는 것이며, 지혜가 성스러움은 정진해 모든 쌓임[陰]과 갖가지 쇠퇴의 고난을 보지 않게 하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은 모든 종류의 음(陰)과 입(入)을 붙들어 지키며, 지혜가 성스러움은 열반(涅槃) 본성의 청정함을 따라서 닦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은 위 없는 참된 도리를 모든 중생을 위해여 개화(開化)하고 이끌어 마땅히 수행케 하며, 지혜의 성스러움을 이른바 혜안(慧眼)을 얻어 보는 것이 끌이 없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은 천안(天眼)으로 모든 집착하는 이들을 교화하며, 지혜의 성스러움은 모든 법을 정진수행 할 것이 없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은 문자로 널리 베풀고 설법을 베풀며, 지혜의 성스러움은 제법의 의미가 나아가는 바를 분별하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은 여실한 변재혜(辯才慧)를 선양하며, 지혜의 성스러움은 모든 근기가 각각 다르고 마음이 똑같지 않음을 환히 아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응하는 대로 설법하며, 지혜의 성스러움은 8만 4천의 모든 행을 통달하여 식별하는 것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는 것은 일체 중생을 위하여 8만 4천 모든 품(品)의 법장(法藏)을 선양하고 가르켜 보이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이 평등한 업을 정진하는 행이니라.” 문수사리가 이 평등정진을 분별하여 말하고, 모인 대중에게 보여주니, 그때 8천 천자는 위 없는 올바른 진리의 뜻을 깊이 일으키고, 5백 천자는 무생법인[無所從生法忍]을 얻었다. 부처님께서 곧 문수사리에게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그대가 흔쾌히 이 모든 보살들의 모든 평등한 행을 말하였도다.” 이때 대광(大光)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여래께서 칭찬하시니 뛸 듯이 기쁘십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그대의 믿음은 어떠한가. 가령 사람을 교화하였다면 교화 받는 이를 칭찬할 뿐이니, 교화하는 이가 어찌 뛸 듯이 기뻐하겠는가?” 대광이 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화하는 이는 집착하는 것도 없고 또한 받아들이는 것도 없습니다.”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그렇다. 모든 법은 자연스런 모습이어서 모두 허깨비와 같고, 여래의 모습도 또한 이와 같은데, 내가 무슨 까닭으로 뛸 듯이 기뻐하겠는가. 비유하자면 마치 메아리가 모든 선악의 소리에 달려있는 것도 없고 또한 받아들이는 것도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제법도 또한 이와 같은데, 오히려 메아리가 본래 모두 다 청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래와 문수도 청정함이 이와 같나니, 내가 무슨 까닭으로 뛸 듯이 기뻐하겠는가.” 대광이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는 그대를 칭찬하셨습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그 선양하는 것에 있어서 지혜만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여래께서 칭찬하셨다. 모든 말에 있어서 걱정과 슬픔을 품지 않고, 또한 더하고 감소함이 없고, 모든 중생에 대해서 중생이란 생각이 없으며, 모든 법에 대해서도 법에 대한 생각이 없고, 열반에 뜻을 두고 생사(生死)로 대치(對治)하여 수행하면, 마사를 확연히 깨달아 불도의 업을 깨닫고, 마사에서 진제를 깨닫는 것이다. 불법과 마사를 분별하여 마사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법에도 의지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행하는 자는 여래의 찬탄을 받는다.” 또 문수사리께 물었다. “그대여! 이와 같은 법을 받들어 행하였기 때문에 여래께서 찬탄하신 것입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그 평등한 이는 끝내 치우침이 없다.” 또 물었다. “그 평등한 이는 치우치지 않으십니까?” 답하였다. “평등한 이는 모든 거스리는[逆] 것에도 평등하고, 또한 나에게도 평등하다. 모든 사대(四大)에도 평등하고, 또한 소견에도 평등하다. 내가 평등한 것도 또한 이와 같으며, 모든 것이 평등하고, 네 가지 전도 된 것도 평등한 것과 같이, 나의 평등도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순조롭지 않아 어긋나는 일과 얻으려고 하는 것에도 평등하므로 나의 평등도 이와 같다. 생사(生死)에 평등한 것과 같이 본제(本際)에 평등하고, 행의 근원에 평등한 것과 같이 생사의 근본과 열반의 근본이 평등하며, 이 때문에 분제의 평등함과 같다고 한다. 본제기 평등하기 때문에 내가 평등하고, 이미 내가 평등하므로 또한 무명(無明)ㆍ은애(恩愛)의 근본이 평등하며, 무명(無明)ㆍ은애(恩愛)의 근본이 평등한 것과 같이 또한, 해탈(解脫)의 근본이 평등하고, 해탈의 근본이 평등하기 때문에 또한 탐욕[貧婬], 성냄[瞋恚], 어리석음[愚癡]도 평등하며, 이로써 삼독[三垢]이 평등하기 때문에, 또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에 평등하기 하며, 이미 이 삼해탈에 평등하기 때문에 또한 유위(有爲)의 근본이 평등하며, 유위(有爲)의 근본이 평등하기 때문에 무위의 근본도 평등하며, 무위(無爲)의 근본에 평등하기 때문에 문수가 평등한 것도 이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대광이여, 이 평등함으로써 모든 법에도 평등한다. 내가 지금 선양하고, 연설하다가 부처님께 찬탄을 받은 것을 설명하겠다. 모든 법은 다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아서 허공은 평등하여 치우침이 없는 것과 같다. 허공은 수(數)도 없으며, 하고자하는 것도 없다. 그대들이 여기에 나아가서 들어가려 하기 때문에 여래가 이렇게 찬탄하셨다.” 대광이 또 물었다. “어찌하여 착하다는 법[善哉法]과 착하지 않다는 법[無善哉法]을 말씀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보살이 진실한 뜻으로부터 원(願)이 나오면 착하다고 하고, 아첨하여 솔직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방탕하다면 착하지 않다고 한다. 중생을 위하여 불쌍히 여김을 버리지 않는다면 착하다고 하고 만일 인자(仁慈)함을 품지 않고 중생을 침해할 생각을 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중생을 가엾고 불쌍히 여기면 착하고 하고, 성냄을 품어 인욕을 여의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만일 혼란하지 않아 계율을 따르고, 이미 지은 죄는 스스로 드러내어 감추지 아니하면 곧 착하다고 하고, 잘못을 은폐하여 드러내지 않으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나쁜 점을 보고, 고칠 수 있다면 착하다고 하고, 가령 다른 사람의 흠과 모자람을 찾아내려 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만약 돌이킬 줄 알아 은혜를 갚고 마음으로 침해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효순(孝順)과 인(仁)을 행하나 착하다고 하고 돌이킴이 없어 마음에 항상 해칠 생각을 품고, 돌이킴을 어긋나게 하여 효순을 받들지 않고 은혜를 갚을 줄 모르면 곧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불법을 듣고서 깊이 따르고 닦는다면 착하다고 하고, 만일 경전을 듣고도 공경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계율을 받들어 행하여 일찍이 빠뜨림이 없다면 착하다고 하고 ,만일 계율을 받고도 순종치 않고 어기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항상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거처하여 그 마음 적정하다면 착하다고 하고, 만일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여 스스로 방자하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한가한 곳에 처하여 몸과 목숨을 놓고 애착하거나 한을 표하지 않으면 착하다고 하고, 가령 자기의 몸과 목숨을 탐애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사현성(四賢聖)의 행을 닦아 만족함에 그치고 절제할 줄을 안다면 착하다고 하고, 물러남과 나아감을 알지 못하고 요구하는 것이 많고, 악한 일을 좋아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여리더라도 인욕 할 수 있다면 착하다고 하고, 만일 침해하려는 마음이 여러 사람에게 향하면 곧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욕심을 스스로 조절하여 제한한다면 착하다고 하고, 사람됨이 느려서 힘 써 삼가지 못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목숨을 바쳐 귀의할 곳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착하다고 하고, 본래 귀의할 곳이 있었는데도 버리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위의(威儀)를 밝게 깨닫고, 예절을 바르게 하며, 지극하고도 정성스럽게 행하며, 하는 것이 말과 같이 마음과 행위가 서로 일치한다면 착하다고 하고, 모든 세간을 속이고 미혹시킨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정법을 수호하고 훌륭한 경전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다면 착하다고 하고, 경전의 가르침을 비방하고, 올바른 이치를 어긴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가령 들은 경전을 비방치 않고, 비록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을지라도, 법을 선양하고 바라는 것이 없다면 착하다고 하고, 경법(經法)을 아끼고 사랑할지라도 스스로를 스승이라고 칭하면서 경법(經法)을 설하여 항상 망상을 품으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방편으로 중생을 개화하면 착하다고 하고, 중생을 보호하지 않고, 방편이 없으며, 네 가지 은혜[四恩]를 행하지 않으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육바라밀을 닦아 끝없이 사모하고 구한다면 착하다고 하고, 만일 육바라밀을 버린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지혜를 닦아 스스로 성스러운 진리에 이르면 착하다고 하고, 뽐내면서 스스로 방자하고 교만하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십선(十善)을 받들어 행하고, 큰 도를 어기지 않으면 착하다고 하고, 멋대로 희롱하고, 스스로 방자하여 십악(十惡)을 행하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악(惡)을 버릴 수 있다면 착하다고 하고, 모든 악(惡)에 순종하여 그른 법을 섬긴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는다. 대광이여, 출가법을 알려고 하면서 전도되어 행을 따르지 않는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으며,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좋아하고 구족하여, 성취한다면 착하다고 한다. 억지로 높은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잡된 구절과 세간의 이야기를 하여 세속을 따라 세속과 같이 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으며, 만약 보살이 간직한 경전을 얻어 익히고 행하여 사자좌에 올라 불법을 시연하면 착하다고 한다. 계율을 헐뜯고 신도들의 보시를 받는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으며, 계율을 청정하고도 맑게 받들어 모든 공양을 받는다면 착하다 한다. 뽐내고 스스로 존대하며, 경법(經法)을 시샘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공경하며, 거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품지 않고 타인의 덕을 찬탄하면 착하다고 한다. 보살을 질시하고, 그 고결한 행을 미워한다면 착하다고 하지 않으며, 보살을 보면 공경하기를 마치 부처님과 같이 한다면 착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광이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이를 끊어버리고 멀리하여, 큰 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면 모두 착하다고 하지 않으며, 여래가 가르치는 것을 순종하여 따른다면 착하다고 하노라.” 대광이 또 물었다. “무슨 까닭에 모든 법을 착하다고 찬탄하는데 법에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이 있다고 합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나는 모든 법에 있어서 착함도 행하지 않고 착하지 않음도 행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다 합치될 것도 없고, 또한 ‘나’라고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선법(善法)과 더불어 합치되지 않았습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나는 선법과도 악법과도 모두 합치되지 않았다. 왜 그러한가? 잘못 헤아려 집착하면 유위(有爲)라고 하고, 집착하지 않으면 무위(無爲)라고 하며, 무상(無常)을 잘못 헤아리는 자는 또한 유위(有爲)라고 하고, 몸[身]이 있다고 잘못 헤아리는 자는 본래 없는 것을 확연히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극한 덕과 또한 유위(有爲)로써 ‘나[吾我]’가 있다고 잘못 헤아립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가령 내가 유위(有爲)에 집착하여 몸[身]과 내가 있다고 한다면 곧 두려움에 떨어진다.” 또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당신께서는 유위법(有爲法)에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대답하셨다. “가령 유위법을 보아 구경을 성취하고도 영원히 멸진(滅盡)이 없다면 나는 두려워한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유위법을 보지 않고서도 성취하십니까?” 대답하셨다. “나는 일찍이 무위법을 보지 않고도 성취하였는데, 하물며 유위법을 보고서 성취하겠는가.” 또 문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작위함[爲]이 있습니까, 작위함이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나는 작위함이 있는 것도 작위함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왜 그러한가. 가령 작위함이 있다면 어리석은 범부와 같고, 작위함이 없다면 성문(聲聞)ㆍ연각(緣覺)과 같게 된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가령 당신은 유위도 무위도 아니라면서, 어째서 지금 나에게 이 가르침을 지니라고 하십니까?” 대답하였다. “비유 하자면, 요술쟁이가 법을 지니게 하는 것도 그와 같다. 대광천자 그대의 의향은 어떠한가? 여래의 신식(神識)은 어느 곳에 머무르는가. 색(色)에 머무르는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또 물었다. “수[痛癢]와 생각과 생사(生死)의 의식에 머무르는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또 물었다. “삼계(三界)에 머무르는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또 물었다. “유위나 무위에 머무르는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또 물었다. “그렇다면 여래의 신식(神識)은 어느 곳에 머무르는가?” “문수시여, 여래신식은 영원히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대답하여 말씀하였다. “여래신식이 머무는 곳이 없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의 머무는 곳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또 문수께 물었다. “당신은, 바로 이 여래이십니까?” 대답하셨다. “천자여, 여래는 옴[來]도 감[去]도 없고, 주선(周旋)함도 없나니, 내가 온 곳도 이와 같다. 이런 까닭에 내가 온 곳도 여래와 같고 여래가 오신 곳도 또한 나와 같다. 이러한 까닭에 나도 여래가 되는 것이며, 여래가 머무르는 것과 같이 나도 또한 머문다 이러한 까닭에 나도 여래가 되는 것이고, 여래도 ‘본래가 없다’는 까닭에 문수사리도 또한 근본이 없어서 ‘근본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나도 여래가 된다.” 또 문수께 물었다. “근본이 없는 것이라면 마땅히 무엇을 좇아 구하리까?” 대답하였다. “천자여, 그 근본이 없는 것이란 마땅히 62견 가운데에서 구한다.” 또 물었다. “62견은 마땅히 어디에서 구합니까?” 대답하였다. “여래의 해탈 가운데서 구하며 성냄이 없는 데서 구하는 것이다.” 또 물었다. “여래의 해탈과 성냄을 품지 않는 것은 마땅히 어디에서 구합니까?” 답하였다. “중생의 뜻[志]과 행(行) 가운데서 구한다.” 또 물었다. “중생의 뜻과 행은 마땅히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답하였다.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 가운데서 구한다.” 또 물었다.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는 어디에서 구합니까?” 답하였다. “마땅히 중생의 모든 근기가 각각 다른 근본을 분별하는 데서 구해야 하는 것이니라.” 또 물었다. “문수사리시여, 지금 설하신 것을 알지 못하겠사오니, 그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분별하지 못하고, 마땅히 놀랍기만 합니다.” 답하였다. “여래의 지혜를 분별할 수 없다.” 또 물었다. “무슨 까닭입니까?” 답하였다. “여래의 지혜는 걸림도 없고, 또한 생각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말도 있지 않으며, 또한 행할 것도 없고 심의식(心意識)도 없으며, 교법을 떠나 있고, 이러한 까닭에 알 수 있는 이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다.” 또 물었다. “만일 여래의 지혜를 분별할 수 없다면 모든 성문승들은 어떻게 환히 깨달았다고 하며, 무슨 까닭에 보살은 불퇴전(不退轉)의 지위를 얻을 수 있나이까?” 답하였다. “천자여, 여래 지진(至眞)은 훌륭한 방편을 때에 따라 펼쳐보이시지만 그 지혜란 문자에 있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속에서는 불이 나오지 않고, 나무를 마찰시켜야 불을 얻으며, 또한 화경(火鏡)을 비춰야 불이 나오는 것과도 같다. 여래는 이렇듯 위신력이 성스러우며, 진리가 끝이 없어, 본래 없는 지혜를 광대하게 분별하시고 말씀하시지만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를 알 수 없다.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는 모든 ‘어리석다, 어둡다, 초목이다’라고 분별하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불태워 없앤다고 하는가. 즉 도품법(道品法)인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끝없음을 연설하기 때문이니라.” 또 물었다. “문수시여, 초목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또한 질병도 없다면 무엇 때문에 또 그것을 말씀합니까?” 답하여 말하였다. “말하는 것이 연기분(緣起分)도 없고, 비방함도 없으며, 합(合)하는 것도 없고, 흩어지는 것도 없으며, 선포하는 것이 생사도 말하지 않고, 열반의 가르침도 없으며, 제거할 것도, 끊을 것도 없으며, 증과(證果)에 나아감도 없고, 수행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귀의할 것도 없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적정하고 요긴한 말이기 때문이니라.” 천자가 보답하여 말하였다. “미치기 어렵고, 미치기 어려워 일찍이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문수사리시여, 지금 미묘하고, 거룩하여, 끝이 없는 지혜가 이렇듯 뛰어나고, 특이한데 저 마왕 파순(波旬)이 여기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지 않겠습니까?” 마침 이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왕 파순이 나타나 큰 구름과 비를 일으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는 널리 모든 대중이 모여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그때 모인 이들은 각자 속으로 ‘어떤 소리가 이렇게 흘러나오는가’라고 생각했다. 이때 세존은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어찌 마왕 파순이 행패 부리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문수사리께서 대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천중천(天中天)이시여.” 문수사리께서 즉시 삼매(三昧)에 들어 마왕 파순이 저절로 결박을 당해서 땅에 떨어지게 했다. 그는 부르짖으며 원망하며 성내고 꾸짖듯이 말했다. “문수사리시여! 지금 어찌 쇠사슬로 나의 몸을 묶어놓습니까?” 문수사리가 답하였다. “쯧쯧 딱하구나, 마왕 파순이여, 견고하여 풀기 어려운 속박이 이보다 더함도 있는데도 그대가 당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무엇이 견고한 속박인가. ‘나’라는 전도 된 생각과 은애(恩愛)와 모든 사견(邪見)과 인연의 속박을 말함이니, 그대는 항상 이러한 쇠사슬에 속박되어 있음에도 스스로 깨닫지를 못하는구나.” 마왕 파순이 또다시 여쭈었다. “바라옵건대, 용서하시어 벗어나게 하시옵소서.”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마땅히 불사(佛事)를 짓는다면 내가 그대를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하겠노라.”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제가 불법을 방해한 일도, 파괴한 일도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불사를 하라고 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마왕 파순이여, 만일 불사를 한다면 보살의 변화하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가령 여래가 불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마왕 파순이 불사를 한다면 이는 기특한 일이 될 것이다.” 이때 문수사리는 그 자리에서 삼매에 들어 마왕 파순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모습과 같이 변하여 32상으로 그 몸을 장엄하고 사자좌에 앉아 지혜와 변재로써 부처님같이 말을 하도록 하셨다. “물어보고 싶은 모든 중생은 모든 의심하는 바를 마음대로 말한다면, 대답하여 주겠노라.” 그때 대가섭(大迦葉)이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비구의 수행에 무엇이 속박이 되는가.” 마왕 파순이 곧 대답하였다. “뜻을 적정케 하는 데는 내가 선정에 들었다고 억측하고, 유상(有想)ㆍ무상(無想)의 생각에는 공(空)의 생각으로 주를 삼으려 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헐어버리는 데는 무상의 생각으로 주요를 삼으려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키는 데는 무원(無願)의 생각으로 제어하려 하며, 모든 원이 품어진 데는 열반의 생각으로 제어하려 하고, 무위법을 구하는 데는 생사의 생각을 헐어버리려 한다면, 이것이 수행하는 비구의 속박이 된다. 왜 그러한가, 가섭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굳이 모든 소견을 헐어버리고서 공(空)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공이란, 모든 견해가 공하므로 모든 소견을 버리고서 무상(無想)을 구하는 것이 아니니라. 왜 그러한가. 생각하는 것이 모두 무상이 되므로 굳이 원을 헐어버리고서 무원을 구하는 것이 아니며, 생사를 확연히 깨닫고 나서, 경계를 얻어 열반을 얻는 것은 아니니라. 가섭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열반이란,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집착도 일어나지 않아 모든 것이 다 멸한 것이니, 열반은 본래 청정하고, 일어나는 것이 없으므로 이에 무위법(無爲法)이 된다.” 이 말을 할 때 5백 비구는 마음이 청정함을 얻었다. 그때 수보리께서 모든 비구에게 물었다. “누가 현자(賢者)들을 일깨워 주었는가?” 오백 비구가 말하였다. “저 얻은 바도 없고 정각을 이루지도 못한 이가 우리들을 일깨워 주었다.” 또 물었다. “무엇을 일깨워 주었는가?” 대답하였다. “오지도 않고[不來], 가지도 않으며[不去] 이와 같은 것을 환히 깨우쳐 주었으며, 일어나지도 않고[不起] 멸하지도 않아[不滅] 그 지혜가 항상 머물러[常住] 있습니다.” 이 말을 하자, 2백 비구는 청정한 눈을 얻었다. 그때 수보리께서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비구가 으뜸가는 세존[衆祐]이 된다고 하는가?” 마왕 파순이 즉시 대답하였다. “보시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불법을 따라 믿고 좋아하므로 보시를 받는다. 수보리여, 만약 비구가 보시를 받지도 버리지도 않는다면 그 보시하는 이도 저 비구 보기를 마치 허깨비처럼 여길 것이다. 그 보시를 받는 이도 생각이 그림자와 같이 생겨남도 없고, 또한 받아들임도 없어 마음이 집착할 바도 일어날 바도 없으니, 이는 곧 세간에서 최고의 세존[衆祐]가 된다.” 그때 사리불이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삼매는 산란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극진한 삼매에는 다할 것이 없는 경우에는 모두 다하도록 하며,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못하게 하며, 모든 욕구를 완전히 없애고, 근본과 끝이 청정하여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어리석지 않아서 경과(經過)하지 않고도 모든 법이 청정함을 환히 깨우치고, 평등한 삼매[正受]로 적멸을 수행하여 모든 경과한 것을 관찰하며, 멸진한 삼매와 정수로써 관찰함도 관찰하지 않음도 없고, 또한 소견도 없게 되나니, 이와 같은 삼매는 산람함이 없게 된다.” 대목건련(大目揵連)이 마왕파순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비구가 마음의 자재함을 얻는다고 하는가?”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가령 비구가 모든 법을 환히 깨우쳐서 사람의 마음과 모든 법은 다 해탈의 모양임을 끝까지 참구하고, 모든 법은 다 해탈의 모습임을 설명하되 의지하는 것과 품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알려고 하는 바도 없고, 품어두는 생각도 없으며, 마음에는 색욕(色欲)이 없고, 모든 색심(色心)을 보고도 머무를 생각이 없으며, 모든 법은 처할 곳도 없고, 마음은 획득할 수 없음을 환히 깨달으며, 모든 법은 지니지도 못하고, 마음은 마음을 알지 못함을 환히 깨우친다면 마음은 스스로 청정해진다.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여, 자연히 청정해지고, 법계(法界)도 또한 청정해지며, 다른 인연도 요동하여 구르지 않아서, 현재 목전에서 6신통을 갖추고 4신족을 구족하여 스스로 즐거워한다. 그러므로 비구가 이와 같아야 마음의 자재를 얻는다.” 빈욕문타니불(邠耨文陀尼弗)221)이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비구의 설법(說法)이 청정하다고 하는가?”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가령 비구가 모든 법이 다 끝이 없는 바라밀임을 보고 또 중생의 마음이 각기 다름을 두루 보고서 모두 집착한 것이 없다면, 모든 생각하는 것이 같은 모양이 없는 그 이치를 분별하고 말하여 모든 음성과 언설과 의론을 마치 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이 환히 깨우친다면 모든 법을 관(觀)함도 마치 요술쟁이와 같고 알음알이도 또한 물속의 달과 같이 본다. 만일 모든 번뇌와 생각이 여러 기억에서 일어남을 분별한다면, 법을 받아들임도 없고, 또한 버림도 없어 삼매에 든다. 만약 법을 선포하고, 평등하게 해탈을 얻는다면 곧 네 가지 말재주를 얻어서 마음에 바랄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칭찬하여 의심을 품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타인의 마음도 청정하게 되므로, 본래가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번뇌가 모두 더러움임을 알게 되나 모두 음마(陰魔)를 보아도 모두 고요해지고, 사마(死魔)를 보아도 모두 시종(始終)이 없는 데 머무르며, 천마(天魔)를 보아도 모든 의착(倚(着)된 가르침을 제거하고, 모든 중생의 마음이 청정함도 이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가 이에 널리 법을 보고, 경전을 연설하는 것이다.” 장로[耆年] 우바리(優波離)가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무엇을 비구가 율법(律法)을 받아 지닌다고 하는가?”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모든 법을 환히 깨우쳐 여러 사람을 개화해 줄 수 있고, 여러 가지 죄(罪)의 본제(本際)가 적막함을 알아 망설이는 이를 가르쳐 주며, 혹 비방을 받을지라도 의심하지도 않고, 또한 속에 품어두지도 않으며, 모든 법에 일찍이 마음을 내어, 조어(調御)하지도 않고, 모든 거슬리는 이를 제도할 수 있는데, 하물며 소소한 계율을 범한 이뿐이겠는가. 번뇌를 앎으로써 분별치 못함이 없고, 모든 번뇌를 견고한 요체로써 마음에 품지를 않는다. 여러 애욕(愛欲)은 안팎이 없고 또한 그 사이에도 처해 있지 않으며, 번뇌란 깨달음이 없어 애욕에 떨어짐도 없으며, 또한 부지런히 교화할 것도 없음을 환히 깨우침으로써 욕심도 없고 일어남도 없는데 이르며, 애욕은 마치 구름과 비[雨]처럼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스러운 지혜를 관찰하고, 선포할 것을 환히 깨우침으로써 말하는 것이 마치 바람이 구름을 흩어버리듯 아무것에도 머무를 바가 없다. 번뇌는 물속의 달과 같아서 생각을 반연하여 일어나 그 일어나려는 모양은 다만 어둠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마땅히 지혜로 비추기를 마치 거울로 얼굴을 비추듯이 그 모양이 귀신이나 나찰(羅刹)의 모습과 같음을 살피며, 그 생각에 끌리는 데는 소견 없애기를 관함으로써, 번뇌와 애욕을 버리고, 뭇 더러움을 더하지 않아 곧 공혜(空慧)로써 무상(無相)ㆍ무원(無願)으로 그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으며, 애욕을 이와 같이 환히 깨우친 것이다. 만일 애욕에 집착한다면 중생에게 자비를 일으키지 못하며, 중생은 나[我]도 몸[身]도 없고 또한 모든 나라는 망상도 품지 않는다. 이렇게 관하는 이는 율법을 깊고 진실하게 지닌 것이다.” 그때 존자 5백인이 각기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을 물었으며, 그때마다 마왕 파순은 각각 분별하여 그에 맞게 드러내 주었다. 그때 제천(諸天) 가운데 수심(須深)이라는 천자가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아까 문수사리께서 모든 마사를 강설해 주셨는데 그대가 그 이치를 다시 이야기해줄 수있겠는가? 무엇을 보살의 마사라고 하는가?”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천자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의 마사는 스무 가지가 있는데, 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생사를 두려워한 나머지 해탈을 얻으려고 부처님의 정법을 따라 의지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을 바쳐 귀의할지라도 망상이 있으면 곧 마업(魔業)이 되고,(1) 공하여 없음을 관(觀)할지라도 중생이 있다고 보면 마업이 되며,(2) 무위(無爲)를 할지라도 유위(有爲)의 훌륭한 공덕의 근본을 싫어한다면 마업이 되고,(3) 선정과 삼매[正受]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구하지 않아 이미 퇴전했다면 마업이 되며,(4) 법을 선포하더라도 듣는 이를 위하여 크나큰 애민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업이 되고,(5) 모든 계율을 지키고 세존[衆祐]을 공경할지라도 성을 내고 계율을 어기면 마업이 되며,(6) 성문과 연각의 한 가지 깨우침의 도리를 이야기 할지라도 대승법을 물어 크고 세밀한 부분을 분별치 못하면 마업이 되고,(7) 심오한 설법을 받아들일지라도 도법을 싫어하고 잡된 말을 하면 곧 마업이 되며,(8) 바라밀[度無極]을 구할지라도 스스로 보살이라고 칭하면 마업이 되고,(9) 적정하고 담연(淡然)한 일을 묻고 찬탄할지라도 중생을 교화하는 데 권방편(權方便)이 없으면 마업이 되며,(10) 뭇 공덕의 근본을 쌓았을지라도 도의 마음을 친근히 하지 않으면 마업이 되고,(11) 은근히 적관(寂觀)을 수행하되 관하는 것에 중생이 있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면 곧 마업이 되며,(12) 번뇌와 애욕을 끊어 남김이 없게 하고 생사의 언덕을 건널지라도 애욕을 두려워하면 마업이 되고,(13) 지혜를 수행하되 항상 의지하고 구하는 데를 좋아하고 불쌍히 여기는 데에만 의지하면 곧 마업이 되며,(14) 권도방편이 없이 모든 공덕의 근본을 보려고 한다면 곧 마업이 되고,(15) 보살에 감추어진 것을 구하려고 뜻을 두지 않고 세속의 잡다한 말을 좋아하여 그것에만 힘쓴다면 곧 마업이 되며,(16)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 널리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도 성취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곧 마업이 되고,(17) 비록 부유하여 재물이 넉넉하고 호귀(毫貴)하여 위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탐착을 버리지 못하고 널리 들은 이를 받들지 않으면 곧 마업이 되며,(18) 비록 호존(毫尊)ㆍ군자(君子)와 장자[長者]ㆍ제석[釋]ㆍ범천[梵]의 지위가 되었을지라도 큰 법을 익히지 않으면 마업이 되고,(19) 보살과 가까이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성문ㆍ 연각과 서로 알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여 법을 들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방일하고 당돌하게 노닐면 곧 마업이 되나니,(20) 이 스무 가지가 보살의 마사인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마왕 파순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보살의 마사를 호쾌하게 말하였도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살펴 행하여 마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의 큰 도법을 얻고 경전을 강설하여 스무 가지 일을 이룰 것이다. 무엇이 스무 가지인가. 대자(大慈)와,(1) 대비[大哀]와,(2) 생사를 싫어하지 않는 것과,(3) 항상 훌륭한 벗을 만나는 것과,(4) 태어남에 부처님 세계를 만나는 것과,(5) 모든 바라밀을 받는 것과,(6) 모든 보살로 권속을 삼는 것과,(7) 총지(摠持)를 얻는 것과,(8) 변재(辯才)를 구족하는 것과,(9) 5신통의 지혜를 얻는 것과,(10) 아직 만나지 못했던 법을 듣는 것과,(11) 세세생생 태어남에 도의 마음을 항상 품는 것과,(12) 출가하여 사문이 되는 것과,(13) 한가한데 이르러 분주하지 않는 것과,(14) 구경의 가르침을 널리 듣는 것과,(15) 훌륭한 방편과 지혜를 얻는 것과,(16) 중생을 네 가지 은혜로 교화시키는 것과,(17) 정법을 수호하는 것과,(18) 항상 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 것과,(19) 모든 보배를 아끼지 않고,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어 중생에게 향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20) 이 스무 가지로 경전을 얻어 부처님의 대도에 이르니라.” 이때 수심천자는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지금 여래에게 찬탄을 받았으니 유쾌하고 즐겁겠습니다.” 이때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내 몸이 유쾌하고 즐겁지 않으니 마치 남자 귀신(鬼神)이 붙은 것 같으며 지금 말한 것을 헤아려 보건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고, 귀신이 말한 것이오. 이와 같이 그대여, 지금 내가 말한 것은 문수사리께서 일러주신 것이니, 마땅히 나의 말이라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천자가 또 물었다. “지금 그대가 몸을 변화하여 부처님 몸과 같이 되었으니 즐겁지 않은가? 또 상호로 그 몸을 장엄하고, 사자좌에 앉아 경법을 강설하니 즐겁지 아니한가?”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그대들은 내가 상호로 몸을 장엄한 것처럼 보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쇠사슬에 묶인 듯하오.” 천자가 말하였다. “파순이여, 스스로 문수사리께 허물을 뉘우치고 죄를 굴복하여 귀의하면, 문수사리께서 위신력으로 파순 그대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마땅히 죄를 뉘우칠 뿐만 아니라 대승보살 대사(大士)에게 배워야 할 것이오. 왜 그러한가. 보살행을 하는 자는 번뇌와 더러움의 세계를 보지 않지만 성냄을 일으키는 자는 항상 원한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에 마땅히 뉘우치고 스스로 귀의해야 할 것이오.” 천자가 또 물었다. “보살의 인욕은 어떤 종류가 있는가?” 마왕 파순은 대답하였다. “보살의 인욕에는 열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열두 가지인가. 지성(志性)의 인욕흠[하瑕疵]이 없는 것이고,(1) 뜻의 인욕이니 마음에 해칠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며,(2) 아첨하지 않는 인욕이니 중생을 속이지 않음이고,(3) 궁핍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인욕이니 모든 지혜가 빈약해 도에 미치지 못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4) 인욕을 수행함이니 말한 대로 실천하여 퇴전하지 않는 것이고,(5) 공(空)의 인욕이니 모든 망설이는 사견을 여읨이며,(6) 법을 오로지 생각하는 인욕이니 모든 법을 제어하는 것이고,(7) 깊고 미묘한 인욕이니 ‘나’를 잘못 헤아리지 않는 것이며,(8) 법에 유순(柔順)하는 인욕이니 여러 현성(賢聖)의 지혜에 귀의해 나아감이고,(9) 진제(眞諦)의 인욕이니 연기에 어지럽지 않음이며,(10) 착란(錯亂)하지 않는 인욕이니 모든 중생의 마음을 따름이고,(11) 뜻이 일어나지 않는 인욕이니 무생법인[所從法忍]을 얻음이며,(12) 이것이 보살의 열두 가지 인욕이다.” 이때 수심천자는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그대가 지금 스무 가지 일, 또한 열두 가지 인욕을 말하였으니 어찌 뛸 듯이 기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기쁩니다.” 수심천자는 곧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그대여, 마왕 파순의 죄를 용서하여주소서.” 문수는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누가 그대를 묶어 놓았는가?” 대답하였다. “누가 나를 묶어 놓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답하셨다. “마왕 파순이여, 그대가 남에게 묶어 당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묶임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니 모든 어리석은 범부도 이와 같다. 마음이란 본래 모두 청정하여 생각할 것이 없는데 뜻이 집착한다고 생각하므로 무상(無常)을 알지 못하여 항상 있다고 집착하고 고통을 즐겁다고 생각하며, 몸이 없는데도[無身] 몸이 있다고 생각하고, 청정치 못한 것을 청정하다고 생각하며, 색이 없는데도[無色] 색(色)이 있다고 생각하고, 느낌과 생각과 생사와 식이 없는데도 오온[五陰]이 있다고 생각한다. 파순이여, 지금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속박을 무슨 인연으로 벗어나려는가.” 마왕 파순은 또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다시 벗어날 수 없겠습니까?” 대답하였다. “그렇다, 파순이여. 이미 해탈을 얻은 자는 다시 해탈할 것이 없는데 무슨 연유로 해탈을 얻으려 하겠는가. 다만 허망한 생각으로 인해 속박당하다고 하니, 그 번뇌를 제거하면 해탈이라고 한다.” 이때 문수사리가 나타내었던 위신력으로 마왕 파순을 다시 처음과 같게 하셨다. 그때 대가섭(大迦葉)이 마왕 파순에게 물었다. “마왕 파순이여, 불사를 일으켰으므로 이렇게 되었다.” 마왕 파순이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의 경계로 감응된 것이니, 내가 한 걸로 보지 마시오.” 수심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그 불사란 마땅히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대답하였다. “마땅히 중생의 애욕 가운데에서 불사를 구해야 한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였다. “중생은 번뇌뿐이기 때문에 애욕을 받아들이나니 가령 애욕이 없다면 불사를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병이 없으면 의사가 필요치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여, 만일 중생이 애욕이 없다면 부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물었다. “부처님은 무슨 일로 세간에 출현하시나이까?” 대답하였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근심이 생겨나기 때문에 부처님은 출현하셨다. 왜 그러한가. 삼계에는 생로병사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세간에 나오신 것이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여래께서는 득도하여 무슨 법을 드러내시고 무엇을 제거합니까?” 대답하였다. “천자여, 여래는 득도하여 법을 일으킴도 없고 멸할 것도 없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시지만 곧 태어나는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시는 것은 이 법을 가설하시기 위하여 세간을 따라 몸을 나타내셨다고 하지만 자연히 본래가 청정하니 곧 평등하여 나타내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문수에게 물었다. “보살은 무슨 뜻을 건립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법을 얻은 것도 없고, 모든 견해와 62가지 미혹한 그물에 속박됨도 없는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본래 청정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내외법(內外法)에 집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어찌 보살이 보시의 주인이라고 하십니까?” 대답하였다. “자신의 번뇌는 버리고 모든 중생의 애욕은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구족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고요한 경계를 분별하여 환히 깨우치고, 모든 중생의 모든 악(惡)을 제거하고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인욕을 구족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을 끝까지 궁구하고 모든 법을 보아 중생의 맺힌 원한과 더러움과 성냄의 고난을 제거하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여 지극한 공덕의 갑옷[鎧]을 입어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정진(精進)을 끝까지 궁구하신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보살이 정진 할 수 있는데 기인하는 모든 법을 모두 보고 무상의 올바른 가르침에 이르며, 중생의 게으른 번뇌를 베어 없애기 위하여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선정(禪定)을 끝까지 다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 모두 청정하고 평등하며 삼매[正受]뿐임에도 모든 중생이 집착하여 일어났음을 보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지혜를 성취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셨다. “모든 행을 하고도 행한 것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방탕한 일을 제거하며, 중생의 머뭇거리는 삿된 소견을 제거하고, 성스러운 지혜를 수행하므로 이에 보살이 지혜를 성취한 것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자(慈)를 행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영원히 모두 다 소멸되는 것임을 보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비(悲)를 행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짓는 것[所作]도 또한 받을 것도 없음을 확연히 알았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기쁘다[喜]고 합니까?” “모든 법에 좋아함을 일으킴도 없고 또한 행하지 않음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보호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에 두 가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진제에 충실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모든 법이 생겨남에 생겨날 것도 없고, 모두 소유할 것도 없음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대사(大士)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중생을 보더라도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거룩한 사람[尊人]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을 보시고 수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또 문수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큰 공의 갑옷을 입는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을 보시고, 모든 법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사홍서원[僧那]222)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인화(仁和)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큰 자비[大哀]를 행하여 중생을 멀리하지도 가까이하지도 않아, 번뇌와 애욕의 집착을 개화(開化)시키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어찌하여 보살은 그치는 것[止]이 언제나 편안하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몸[身]과 입[口]과 마음[心]으로써 남을 번거롭게도 하지 않으며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가르침을 따른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들은 법대로 받들어 행하고 말하는 것이 진제이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여러 중생들의 귀의하여 조복하자가 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오취(五趣) 중생의 말과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 말씀이 파괴되지 않으며, 자기의 마음을 따라 모든 중생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어긋나거나 실수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구족하였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안으로는 스스로 적정하고 밖으로는 노닐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믿음[信]이 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장애 가운데 노닐면서도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굳건한 자비를 행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 파괴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반복(反復)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지었던 공덕의 근본을 일찍이 어긋나거나 잃어버리지 않아서 항상 즐겁게,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조절할 줄 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번뇌의 욕망에 뜻대로 노닐면서 애욕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지족(知足)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성스러운 부처님의 지혜를 좋아하고 모든 법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만족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가령 세간을 제도할 지혜가 만족할지라도 모든 세간법을 저버리거나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분별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번뇌의 욕망을 보지 않아 중생의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끊어 제거하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이 자재한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생겨나는 것을 보고도 몸에 생겨날 것이 없고, 지혜에 자재하여 번뇌의 욕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널리 들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마땅히 듣지 않을 것은 듣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지극히 고요한 것을 얻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지은 것을 보고 소유할 것도 버릴 것도 없으며, 모든 제어할 것도 또한 생각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행하면서 머문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공행(空行)에서 분별 교화하지 않고, 중생의 마음이 행한 것을 관찰하여 나와 남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은 총지(總持)와 모든 변재를 갖추었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들은 것을 모두 능히 지녀서 중생이 귀의할 곳의 음성과 근원을 분별하여 집착할 것이 없다. 천자여, 그러므로 보살이 총지와 말재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때 대광보살이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누가 마땅히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겠습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이는 선지식을 위하여 보는 것을 장차 보호할 것이고, 또한 전생에 미묘함을 구족하고 훌륭한 공덕의 근본을 기른 이가 확연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또 물었다. “비구는 무엇을 즐겨하며, 지성(志性)은 어떠합니까?” 대답하였다. “미묘한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며 지성은 부드럽고 스스로 자만함을 품지 않는다.”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비구는 스스로 존대(尊大)함을 품지 않는다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가령 비구가 스스로 몸[身]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 자연히 전일(專一)한 대승법(大乘法)을 구할 것이고, 몸을 자연스럽게 확연히 안다면 저절로 자신에 탐착하지 않아서 상대적 차별[二]에 머물지 않나니, 이와 같이 비구가 스스로 존대함을 품지 않는다. 무명(無明)을 버릴 것을 구하여 무명과 애욕, 밝은 해탈에도 뜻을 두지 않고, 밝은 해탈이 저절로 무명임을 환히 깨달으며, 모두 다 근본이 없는 것임을 환히 깨우치나니, 이것이 비구가 스스로 존대함을 품지 않는 것이다.” 문수가 다시 천자에게 말하였다. “가령 비구가 탐욕을 여의면 탐욕의 근본을 알고, 욕심을 여의고 청정하면 탐욕의 근본을 얼며, 근본이 없음을 행하면 성냄의 근본을 여의고, 성냄의 근본을 환히 알아, 성냄을 여의며, 성냄의 근본이 모두 청정하여, 근본과 지말이 깨끗하고 밝아지고, 어리석음을 여의면 어리석음을 환히 알며, 어리석음의 근본을 버리면 어리석음의 근본이 모두 청정하여져 어리석음의 근본조차도 없음을 알게 마련이다. 이것이 비구가 스스로 존대함을 품지 않는 것이다.” 문수사리가 다시 천자에게 말하였다. “가령 비구가 여러 가지 고(苦)를 알지 못하고, 집착을 끊지 못하면 증과(證果)를 이루지 못하니, 모든 집착된 길을 행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확연히 깨우쳐 생기는 것이 없어져서, 사성제에 들게 된다. 가령 고(苦)에 생겨나는 것이 없다면 집착이 없고, 이미 집착이 없다면 곧 멸진(滅盡)도 없는 것이다. 가령 고에 생겨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삿된 길을 걷는 것이 없다.” 그때 마왕 파순은 속으로 근심과 슬픔을 품고 눈물이 비오듯 하면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이 경이 유포되는 곳에는 모든 마왕 파순은 그 틈을 엿보지 못할 것이니, 가령 수지한다면 마사(魔事)를 완전히 끊어버릴 것이다.” 마왕 파순은 이 말을 하고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이때 대광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지금 그대가 강설한 이치를 우리들이 관찰하고 귀의하는데, 가령 어떤 사람이 스스로 존대함을 품지 않는다면 다시 출가하여 배우는 복을 갖추지 않고, 정진하는 업을 행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만일 이 법을 듣고서 두려움을 품고 또한 전수받지 않으면, 여래를 거룩한 스승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이 법을 듣고서 기뻐하면서 마땅히 그 법을 관(觀)한다면 해탈을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보살도 이를 말미암아 법인(法忍)을 얻고, 수기를 받으며, 이 법인으로 인하여 성문ㆍ연각의 지위에 이르노라.” 또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이 경전을 마땅히 무엇이라 이름 할 것이며 어떻게 받들어 행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강한 마왕 파순을 항복시켰으니 마역(魔逆)이라 이름할 것이며 마땅히 받들어 받아 지녀야 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문수사리와 대광천자, 모인 이 모든 대중인 하늘ㆍ용ㆍ귀신과 건달바[揵沓惒]ㆍ아수라[阿須輪]와 세간의 사람들은 경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마역경』은 끝났다.)
220)불설마역경(佛說魔逆經) : ⓢMañjuśrīvikurvāṇaparivarta-sūtra. 1권. 서진(西晋) 시대 289년 축법호(竺法護) 번역. K13-1211~,T15-112a~118a에 수록되어 있다. 이 경의 내용은 부처님이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있을 때 대광 천자(大光天子)가 문수사리에게 마사(魔事)에 대하여 묻자 문수사리가 설하였다. 업(業)을 일으키는 것에 따라 행하는 것이 마사이고, 마사는 정진(精進)함에 따라 멈춘다. 정진은 모든 마(魔)를 위하여 일으키 방편이므로 정진을 하는 자는 평등하게 수행하여야 한다는 등의 가르침을 설한다. 또한 선재법(善哉法)과 비선재법(非善哉法)을 설했다. 수심(須深) 천자에게 보살의 스무 가지의 마사와 열두 가지의 인욕 등을 설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221)빈욕문타니불(邠耨文陀尼弗): ⓢ Pūrṇa Maitrāyaṇiputra, Pūrṇa-maitrāyṇṇīutra, ⓅPuṇṇa-mantāniputta. 통칭하여 부루나(富樓那)라고 한다.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ㆍ부라나매저려야부다라(富羅拏梅低黎夜富多羅)ㆍ부나만타불다라(富那曼陀弗多羅) ㆍ 보랄나매달리니불달라(補剌拏梅呾利尼弗呾羅) 등이라고도 하며, 만원자(滿願子)ㆍ만축자(滿祝子)ㆍ만자자(滿慈子)라고 번역한다. 인도 코살라국 바라문 종족의 출신으로 아버지는 정반왕의 국사이고 부처님과 생년월일이 같다. 대단히 총명하여 어려서 4베다와 5명(明)을 통달하였고, 부처님이 성도하여 녹야원에서 설법하심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과를 얻었다. 변재가 훌륭하여 불제자 중에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고 한다.
222)사흥서원[僧那]: ⓢsaṃnāha. 승나승열(僧那僧涅 saṃnāha-saṃnaddha)의 줄인 말이다. 승나(僧那)는 홍서(弘誓) ㆍ 대서(大誓)라고 번역하고, 승열(僧涅)은 자서(自誓)라고 번역한다. 보살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한다. 즉 스스로 사홍서원을 맹서하는 것이다. 또한 승나는 개(鎧), 승열은 착(著)이라 하여, 갑옷을 입음[被甲]이라고도 하는데, 사홍서원을 갑옷에 비유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