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岐州) 기산현(岐山縣) 화양향(華陽鄕) 왕장촌(王莊村)의 풍현사(馮玄嗣)란 사람은 선천적으로 성품이 거칠고 사나와 조금도 불법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외사촌형이 그곳에 사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동도(東都)에서 그곳에 와서 사리를 갈무리하여 봉안하고자 하였으나 현사(玄嗣)는 그곳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의 외사촌형은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사리가 있는 곳에 이르러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사(玄嗣)는 성을 내며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만약 사리에 공덕이 있다면 집안에 있는 불상(佛像)에도 또한 공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곧 불상을 갖고와 이를 불사르며 "어떤 영험이 있는지 두고보자"라고 하였다. 외사촌형이 불을 껐는데 이미 불상의 하반신은 불에 타버린 뒤였다. 이때 현사(玄嗣)는 곧 갑자기 뒤로 넘어져 기절했다가 얼마 후에 깨어나서 말하기를, "홀연히 한 곳에 이르렀는데 아마도 지옥인 듯하였다. 큰 새가 날아와서 나의 눈동자를 파먹고 내 살을 씹어먹었고 큰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불에 몸이 타고 불에 달군 무쇠도장을 몸에 찍는 등 곤욕을 겪었다"라고 하면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니 눈썹과 수염이 모두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는 하늘과 땅에 전연 정기와 광명이 없어 암흑천지같이 보였다. 친척과 권속들이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그대 스스로가 죄를 지었으니 아무도 그 죄 갚음을 해 줄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 현사(玄嗣)는 정신과 의식이 사람들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다만 말하기를 "불길이 나의 심장을 태우고 있다"라고 하면서 동서로 달리며 달아나기만 하고 또는 누구에게 잡혀 따귀를 맞는 모습을 하며 목놓아 통곡하기도 하고, 또는 "참회하라, 참회하라"라고 외치며 밤이나 낮이나 달아나기만 하면서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였다. 2월13일이 되자 친족 권속들이 곧 탑이 있는 곳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경읍(京邑)의 큰 스님인 행건법사(行虔法師) 등 백여 명의 스님이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게 되었고, 이에 배상관(裵尙官)ㆍ 비구니 등 수백 명과 속가의 선비 5,6천명이 함께 보는 가운데서 현사(玄嗣)는 오체투지로 사리 앞에 마주하여 소리내어 울면서 참회하기를 사리를 믿지 아니한 죄와, 또 비구니들의 청정한 행을 범하고 여러 스님들을 때리고 욕하며 스님들의 과일을 훔쳐먹은 죄 등을 참회하였다. 이렇게 참회한 후부터는 잠을 자도 꿈이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 부처님의 정골(頂骨)사리는 나라에서 값진 보배로 이를 보상하여 거두어들였는데 보배의 값을 잠시 평가해 보니 4천필에 해당한다고 하여 마침내 그 숫자대로 변방에서 짠 비단으로 이를 보상하고 정골사리는 지금 내전(內殿)에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여섯 번째로 과주(瓜州)성의 동쪽에 있는 옛 사리탑의 터라고 하는 것은 곧 주나라 때의 아육왕사(阿育王寺)이다. 불교를 폐지한 후에 비록 수나라 때 불법을 다시 일으켰다고 하나 다시 그곳에 사원을 설치하지는 아니하였고, 지금은 사장(寺莊)494)이 되었으며, 탑에는 탑을 덮고 있는 전각이 있고, 동서로 낭무(廊廡)495)가 서 있고, 주위는 빙 둘러 담장이 쌓여 있는데 때때로 방광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서 선비ㆍ 속인들이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 도인ㆍ 속인들이 이곳에 자며 재를 올리고 집회를 열어 복덕을 빌고 관청이나 개인의 계급의 상하를 막논하고 빌고 기원을 올리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 일곱 번재로 사주(沙州) 성안에 있는 지금은 폐사가 된 옛 대승사(大乘寺)의 탑이라 하는 것은 주나라 때의 옛 절인데 탑의 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는 아육왕이 세운 본탑이면 어떤 재난이나 화(禍)가 있기만하면 많이 이곳에 와서 구원을 구한다고 한다. 여덟 번째로 낙양(洛陽)의 옛 도읍지에 있는 탑이라 하는 것은 낙양성 서쪽 6리에 있는 옛 백마사(白馬寺)의 남쪽 1리쯤 되는 곳에 있는 옛 탑터를 말한다. 속가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것도 아육왕이 세운 사리탑이라 하는데 아마도 가섭마등(迦葉摩騰)496)이 갖고온 것으로 마(魔)를 항복받고 정도에 통하게 한 까닭에 탑을 세워 이것이 진신사리라고 전하여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홉 번째로 양주(凉州)의 고장탑(姑藏塔)이라 하는 것은 여러 전하는 말을 점검한 바에 의하면 모두가 이르기를 "고장(姑藏)497)에는 아육왕이 세운 탑이 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고장은 군(郡)의 이름이고 지금은 현(縣)이 되어 주(州)에 속하고 있다. 한서(漢書)에 보면 하서(河西)에 사군(四郡)을 두었는데 곧 장액(張掖)ㆍ고장(姑藏)ㆍ주천(酒泉)ㆍ돈황(燉煌)이 그 곳이다. 그러나 탑은 어디에 있었는지 아직 자세히 모르고 있다. 열 번 째로 감주(甘州)의 산단탑(刪丹塔)이라 하는 것은 지금의 이름은 현(縣)으로 표시되고 있다. 감주(甘州)의 동쪽 120리에 위치하며 현성(縣城)의 동쪽은 약수(弱水)498)가 흐르고 있고 북쪽은 큰 길이 나있는데 그 옆에 있는 흙으로 된 언덕이 그 곳이다. 속전(俗傳)에 의하면 이것이 아육왕이 세운 탑이라 하나 다만 옛 터만 남아 있고 황폐한 지가 지극히 오래된 곳이다. 아마도 이곳이 고장탑(姑藏塔)이 아닌가 생각된다. 열한 번째로 진주(晋州)의 북쪽 곽산(藿山)의 남쪽 언덕에 있는 큰 흙탑이라 하는 것은 원근의 도인ㆍ속인들이 모두 이것이 아육왕이 세운 탑이라 칭하고 있는데 내가 일찍이 그곳에 가보니 지대가 높고 우뚝하여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경관이 멀리 높은 곳까지 보였는데 이것이 옛 탑자리라고 가르쳐 주었으나 거기서 마을 ㆍ 부락 등은 드물고 멀었다. 열두 번째로 대주(代州)성 동쪽에 있는 옛 탑을 속전(俗傳)에 이것이 아육왕사 자리라고 하나 북방 안문(雁門)지방의 지지(地志)를 상고해 보니 주나라 때는 이곳이 북쪽 오랑캐의 땅이였다. 그런 까닭에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북쪽 사나운 오랑캐들에게 쫓겨 태원에 이르렀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북방은 말[馬]이 많은 고을이라 옛 성곽이나 큰 무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것은 북쪽 오랑캐가 갖고 있던 것이 아니며 분명히 본래 서하(西河)499)사람들의 소유였는데 오랑캐에게 침략을 당해 오랑캐 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태원(太原)에 이르렀다"라고 말한 것이다. 열세 번째로 익주(益州)500)의 성곽 아래에 있는 복감사(福感寺)의 옛 탑이라 하는 것은 고을 외곽 아래의 성의 서쪽에 있으며 본 이름은 대석탑(大石塔)이라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는 귀신들이 아육왕의 분부를 받들고 서산(서산)에서 큰 바위를 갖고 와서 탑의 기반을 삼았고 사리는 그 안에 있다" 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탑을 대석탑(大石塔)이라 한 것이다. 수(隨)나라때 촉(蜀)의 왕수(王秀)란 사람이 이곳 정낙(井絡)에 진(鎭)을 만들고 다스렸을 때 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이 바위를 뚫고 파보게 하였으나 오로지 한덩어리의 바위일 뿐이였다. 그리하여 곧 이어 바위의 이음새 부분을 찾아 개울가까지 찾아 보았으나 바위끝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어느날 비바람이 몹시 칠 때 어떤 사람이 이 바위 옆에서 돌 한 조각을 뚫어 얻어 이를 갖고 나와보니 이는 곧 예석(䃜石)501)이란 보석이었으며 세상에 드물게 있는 보석이었다. 수(隨)나라 초기에 도선(道詵)율사란 스님이 있었는데 이 고적을 보고 그 위에 9급(九級)의 나무로 만든 부도탑[渟屠]을 세웠는데 지금도 익주에 남아 있다. 가뭄이 들어 강물이 마르면 그 해에는 벼슬아치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되었는데 반드시 이 탑에서 제사를 지내며 기원을 하면 보응이 있으며 특히 조짐의 감응이 뚜렷한 까닭에 이곳들 또한 복감사(福感寺)라 이름지은 것이다. 나도 한번 그 곳에 가 보았는데 참으로 사람들의 말과 같았다. 근래에 와서 한 도둑이 탑 위의 방울을 훔쳐서 세 번째 계단을 내려오려 하다가 그곳에 신(神)이 있어 "노두기(櫨枓起)502)를 쳐들어 그것으로 도둑의 가슴 속을 누르니 도둑은 이 나무에 눌려 꼼짝 못하고 절에 있는 스님들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쳐서 스님들이 이 기둥을 치우자 비로소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휘원년(永徽元年, 650)에 왕안자(王顔子)란 사람이 있었는데 도둑질로 유명하였다. 이 도둑이 밤에 탑꼭대기[相輪]에 올라가 박산향로(博山香爐)503)를 취하여 탑을 내려와 층계의 밑바닥에 이르자 탑의 두 기둥이 홀연히 도적을 양편의 기둥 사이에 끼워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점점 일이 다급해지고 곤란해지는데 한 인도스님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크게 '도둑이야'라고 소리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곧 몇 번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니 절의 스님들이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구출하여 비로소 기둥 사이에서 몸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정관(貞觀)504) 초에 땅이 크게 진동하여 이 탑이 흔들려 곧 꺾어져 넘어지려 하였다. 이때 탑 테두리 아래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데 홀연히 보니 네 명의 신(神)이 모습은 탑의 크기만큼 큰 키를 하고 있었는데 각기 등으로 탑의 사면(四面)을 받쳐 지탱하고 있었으며 탑은 등에 기대었다가 도 기울어졌다가 하다가 끝내 넘어지는 일은 면하게 되었다. 도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극히 성품이 호탕하고 쓰임새가 좋은 사람이었으며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이 사람이 전의 노반(露盤)505)이 원래 작고 짧아 탑 모습에 걸맞지 아니한 것을 보고 곧 삼백냥(三百兩)의 돈을 희사하여 여러 신도들과 함게 다시 노반을 만들고 다 만들어지자 탑 아래에 깔아 놓으니 복분화(覆盆花)가 필 무렵이 되자 향기가 자욱히 퍼져 마치 땅 속에서 구름이 솟아오르듯하여 그 남은 꽃냄새가 성읍(城邑)에 까지 흘러와 열흘이 지난 뒤에야 멎었다. 열네 번째로 익주(益州)의 진원사(晉源寺) 탑이라 하는 것은 재주의 서남쪽 백리 남짓한 곳에 있는 절이며 지금은 그 절을 등중사(等衆寺)라 부르나 본 이름은 대석사(大石寺)며 근본 인연은 대략 앞에서 말한 대석탑과 같다. 여러 옛 탑을 찾아보면 그 모습이 같지 아니하니 이것은 일을 맡았던 귀신들의 마음에 각기 즐기는 모습이 있어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느냐? 촉(蜀)506)에 있는 세 개의 탑을 고찰해 보면 다 같이 돌 두껑으로 덮고 있는 점은 같으나 다른 모습은 일정한 기준이 없다. 익주의 북쪽 백리 지점에 있는 낙현(雒縣)의 탑은 현성(縣城)의 북쪽 외곽에 있는 보흥사(寶興寺)란 절 안에 있으며 본 이름은 대석탑(大石塔)이다. 그 기단(基壇)의 모습은 앞에서 말한 대석탑과 같으며 수나라 초기에 천축(天竺)의 스님 담마굴차(曇摩掘叉)란 분이 멀리 동하(東夏)507) 땅에 이르러 아육왕탑(阿育王塔)에 참례하고 촉(蜀)에 있는 세 탑 이야기를 듣고 또 그곳을 찾아가 예배를 드렸는데 낙현(雒縣) 대석사(大石寺)의 탑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경하게 탑을 섬기는 일을 끝내고 성도(成都)로 가고자 하여 양여역(兩女驛)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막 잠을 청하려 하는데 좌우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에 굴차(掘叉)가 말하기를, "너는 누구냐! 함부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가"라고 하니 공중에서 대응하여 말하기를, "열두 신왕(神王)이 있어 본국(本國)에서 와서 스님이 있는 곳에서 스님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곧 성도(成都)의 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며 스님과 이별의 말씀을 드릴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굴차스님이 다시 말하기를, "기왕 멀리까지 나를 보낼 수 있었다면 왜 모습을 나타내지 아니하는가"라고 하였더니 신(神)들은 곧 모습을 나타냈다. 굴차스님은 사람됨이 그림을 잘 그리는 스님이라 곧 하나하나 신의 모습을 그렸으며 두루 모습을 다 그리자 신들은 형체를 숨겼다. 그리하여 성도에 이르게 되자 대석탑에 참례를 마치니 도선(道詵)율사가 곧 그림에 근거하여 신상(神像)을 나무에 새겨 십이신상으로 삼고 탑아래 장엄하게 장식하였으며 지금도 아직 볼 수 있다고 한다. 익주성(益州城)의 성곽아래에 있는 법성사(法成寺)의 스님 도탁(道卓)은 유명한 스님이다. 대업(大業, 650) 연간의 초기에 낙현(雒縣)의 사탑(寺塔)은 아무도 지붕을 수축하는 사람이 없어 겨우 아랫 기단만 남아 있었다. 이에 도탁스님은 곧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화주(化主)가 되어 나무부도[木淨屠]을 만들어 장식을 갖추었다. 이 탑은 용이 수호하며 용은 탑의 서남 모서리에 있는 연못 안에 살고 있으며 때로 모습을 나타낸다. 탑 옆에는 세 개의 못이 있고 아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그 곳에 세 마리의 용이 살고 있으며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못가에 가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정관 13년(639)에 세 마리의 용이 크게 싸워 우레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물과 불이 바꾸어 가며 하늘을 날았다. 오래된 후에야 고요해 졌는데 탑은 본래의 모습대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용의 털을 주웠는데 길이가 석 자 가량이나 되고 빛깔은 노랗고 붉은 색이 사랑스러웠다. 열다섯 번재로 정주(鄭州)508) 기화사(起化寺)탑이라 하는 것은 정주의 서남쪽 백여리 가량되는 밀현(密縣)의 경계에 있으며 현의 동남 15리에 있다. 동쪽에는 큰 시냇물이 흐르고 서쪽은 숭산(崇山)이며 남족은 귀산(歸山)이며 북쪽에는 또 시냇물이 흐른다. 사원의 넓이는 동서가 5,60보(步), 남북도 그만한 넓이며 탑은 동남쪽 모서리에 있고, 그 북쪽은 절로 이어져 사방이 열 다섯 발자욱 가량이 된다. 그 사탑은 기단은 진흙땅 위에 있고 서쪽면으로는 대여섯 개의 샘이 있고, 남쪽면으로도 역시 샘이 있으며, 모두가 둥글고 네모난 모습으로 구멍의 둘레는 석자 가량이나 되며, 땅속에서 샘물이 치솟아 끓어오르며 흘러넘쳐서 시냇물을 이루고 멀고 가까운 논밭에 물길을 대어주고 있다. 샘 위에는 모두 잣나무 기둥을 내려서 샘을 안치하고 흙탕물 위에 숯과 모래 석회(石灰)를 깔아놓고 다음에는 거듭 진흙을 메꾸어 가장 윗 부분은 크고 네모난 돌 길이가 여덟자 가량이나 되는 침상(寢牀)과 같은 돌을 짜 엮어서 이를 깔아 놓았다. 사면(四面)의 허리 부분은 가늘고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며 깊이는 다섯 치 가량의 무쇠로 굳혀 놓았다. 근간에 어떤 사람이 시험삼아 돌 하나를 발굴해 보았더니 그 아래에는 석회가 깔려 있었고 잣나무로 된 둘레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둘레 하나를 뽑아내 보니 길이가 삼장(三丈)이나 되고 지름이 넉자나 되는 것이 보였다. 처음부터 전륜왕(轉輪王)이 탑을 표출시킨 신비한 공덕의 힘이 아니고는 어떻게 이와 같은 기초와 구조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서 지금까지 그 짝을 찾아볼 수 없는 구조물이다. 지금은 그 위에 삼중탑(三重塔)을 얹어 놓았는데 탑의 남쪽에는 큰 샘이 솟아 끓어오르며 성난 듯 고동치지만 물소리는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신의 조화로 이룬 것이 아니겠느냐? 유주(幽州)509)에 도엄(道嚴)이란 스님이 있는데 속성(俗性)은 이씨(李氏)다. 모습이 지극히 기위(奇偉)하고 본래 수양제가 지은 네 곳의 도량에 들어갔다가 후에 속복(俗服)을 따르게 되었으며 올해 나이가 백 다섯 살이다. 그는 홀로 깊은 산중에 살고 있는데 해마다 칠일날이 되면 이 탑 위에 와서 힘을 다하여 공양을 올린다. 도엄은 그곳의 샘물이 치솟아 홀로 쏟아지며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물을 잘 다루는 깜둥이 한 사람을 보내서 샘속에 들어가 물의 근원을 찾아보게 하였으나 오직 돌기둥만 줄지어 서있는 것만 보이고 그 끝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그 가운데 보탑(寶塔)이 있어 높이가 석 자 가량 되었는데 홀로 공중에 서있고 사면(四面)은 물로 둘러싸여 응어리진 듯이 머물고 있었으나 끝내 탑이 있는 곳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샘의 근원시초를 상고해 보아도 아무도 그 유래를 추측할 수 없었으며 시속(時俗)에서 전하는 말로는 아육왕이 세운 것이라 한다. 수나라 고조황제 이래로 사탑(寺塔)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절 남쪽은 귀산(歸山)이고 절 서쪽은 숭산(崇山)이며 절은 시냇물 가운데 있어서 땅이 지극히 더럽고 낮다. 매년 두 산에서 큰 물이 내려와 항상 동쪽으로 쏟아져 흐르면서 절의 북쪽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비로소 동쪽으로 흘러간다. 물이 넘치면 절은 위치가 높아지고 물이 줄어들면 절의 위치는 낮아져서 예전부터 지금까지 물속에 빠지는 꼴을 당하지는 아니하였다. 샘물이 처음 구멍에서 나올 때는 물 무늬가 연꽃모양을 이루고 흘러내려가 편편한 반석을 치면서 물결은 지극히 고요하고 물 속의 모래와 돌은 녹색이 선명하다. 나라에서 절의 위치가 요충(要衝)지에 해당되는 것을 보고 이곳에 이궁(離宮)510)을 짓고자 하여 그 곳을 찾아가 보니 탑이 있기에 곧 탑을 남쪽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그 기단이 단단하여 마침내 그 일을 그만 두게되었다. 근간에 어떤 스님이 탑 남쪽에서 밤에 좌선을 하다가 이 탑을 바라보니 광명이 빼어나게 기이하였다고 한다. 열여섯 번재로 회주(懷州) 묘락사(妙樂寺) 탑이라 하는 것은 회주 동쪽 무섭현(武涉縣)의 서쪽 7리에 있는 묘락사(妙樂寺)의 경내에 있으며 현재도 다섯 층의 하얀 부도탑이 있으며 사방이 약15보(步) 가량이며 모두가 돌을 세워 섬돌을 엮었고 돌의 길이는 다섯 자이며 넓이는 세 치로서 아래에서부터 물고기 비늘처럼 포개져서 덮였으며 지극히 구조가 세밀하다. 도인ㆍ속인 할 것 없이 눈으로 이것을 본 사람은 모두 놀라고 의아하며 귀신의 작품이 아닌가 의심하며 그 아래 바닥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지 측량할 수 없다. 고을의 고노(古老)들이 전하기로는 이 탑은 땅 속에서 솟아 올랐으며 아래에는 큰 물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도 그 진위(眞僞)를 소상하게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자사(刺史)511)가 있었는데 스님들이 지나치게 사실을 과장해서 허풍을 더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사람을 시켜 탑 옆에 파보고 그 아래 샘의 원천에까지 이르도록 파보라고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그 기반의 끝은 다 파보지 못하였다. 열일곱 번재로 병주(幷州) 자성(子城) 동쪽에 있는 정명사(淨明寺) 탑이라 하는 것은 본래는 아육왕이 세운 탑이라 불리워 왔다. 이 곳에는 스님이 머물고 있었는데 당나라 초기때부터 스님들이 흩어지고 절이 비게 되자 비구니들이 이곳에 거처하겠다고 청하였다. 내가 가서 탑에 관하여 물어 보았더니 전연 탑의 자취는 없고 다만 빈 이름만 남아있어 마침내 그 근본을 잃게 되었다. 열여덟 번째로 병주(幷州)의 대곡유사(大谷褕社)의 탑이라 하는 것은 지금은 현의 성곽 아래에 있는 육왕사 안에 있다. 현재도 스님이 살고 있고 그 가운데 작은 탑이 있는데 예전부터 전해 오기를 이것이 본탑이라 하지만 역시 아직까지 기이한 모습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열아홉 번째로 위주(魏州)의 임치(臨菑)에 있는 탑은 지금은 비구니가 주지하며 임치현의 서북쪽 30리 거리에 있는데 본 이름은 사리사(舍利寺)다. 그 탑은 현재도 남아있고 탑의 세 곳 가장자리는 물이 있고 오직 서쪽으로만 길이 열려 있다. 그 구성은 돌로 엮은 것이며 물 빝바닥에서 위로 솟아 연꽃이 삼면에 가득하고 못물은 맑고 깊어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기를 겁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리의 진탑은 물속 빈 공간 가운데 있으며 마치 정주(鄭州)에 있는 사리탑과 같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은 기주(冀州)의 대도독부(大都督府)로 바뀌었다. 스무 번째로 신주(神州)512)의 산과 늪에 갈무리된 진귀하고 기이한 신비한 보물들을 뒤섞어 밝혀 보면 위에서 열거한 아육왕사의 여러 탑 가운데 물속에 가라앉고 숨겨져서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탑도 그 무리가 하나 둘이 아니다. 그 내용은 다음에 열거하는 바와 같다. 창주(滄州)513) 장하(長河) 가운데 있는 탑은 아육왕이 세운 탑이라 일컬어지니 그 이름이 헛되게 붙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찌 골탑만 그렇겠느냐? 신령한 상(像)도 또한 헛된 소문만은 아니다. 오주(吳州) ㆍ 의주(宜州) ㆍ 양주(涼州)의 세 고을에서는 모두 산중에 불상이 나타났고 교북(郊北)의 속산(屬山)에서도 근간에 다시 부처님이 나타났다. 어리석은 속인들은 허망한 거짓말이라고 비방하니 알지어다! 이는 비방하는 사람이 허망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지 사람들을 보게 하기 위해 아름다운 거짓 상을 만들었겠는가? 산중에는 삼장(三丈)의 석불(石佛)이 갈무리되고 있는데 다만 비방하는 사람은 이것이 깊은 우물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어찌 구해(九海)의 천지(天池)를 알겠는가? 재주(齋州) ㆍ 임읍현(臨邑縣)의 동쪽에 벽돌로 구축된 탑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지공화상(誌公和尙)이 영조(營造)한 것으로 사면에 돌짐승이 새겨져 있으며 그 돌짐승들은 날새고 사나워 몹시 두렵다. 주(周)가 불법을 멸하였을 때 백 사람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으나 끝내 그 자리를 벗어나게 할 수 없었고, 또한 힘쓴 사람들에게 손상만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에 그대로 있다고 한다. 고려(高麗)514) 요동성(遼東城) 옆에 있는 탑은 고을의 늙은이들이 전하기를, 지나간 옛날 고구려에 성왕(聖王)이 나타나 국경지대를 순행하다가 차례로 이 성에 이르니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 그곳을 찾아가니 구름 속에 한 스님이 석장(錫杖)을 잡고 머물러 서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곳에 이르자 문득 사라지고 먼 곳에서 보면 도로 나타나 보였다. 그 옆에 삼중(三重)의 흙 탑이 있었는데 윗 부분은 솥을 엎어 놓은듯 하였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몰라 다시 그 곳에 가서 스님을 찾았으나 오직 황량한 풀더미만 있었다. 그리하여 그 곳을 한 길 정도 파보니 그 속에서 지팡이와 신발이 발견되었다. 다시 더 깊이 파서 명(銘)을 얻었는데 위에 범어(梵語)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모시고 있던 신하가 이 글자를 알아보았는데 이것이 불탑(佛塔)이라 하였다. 임금이 다시 자세히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한(漢)나라에는 이것이 있는데 그 이름은 포도(蒲圖)515)라 한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 칠층(七層)의 목탑을 세웠다. 그 후 불법이 비로소 이곳에 이르게 되자 탑의 처음과 끝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높이가 줄었고 목탑은 썩어 허물어졌으나 이것은 아육왕이 세운 탑에 속하는 탑으로 온 염부제주(閻浮提州)516)에 간 곳마다 탑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된다. 일본[倭]은 이 염부제주 밖 큰 바다 가운데 있으며 회계(會稽)땅과의 거리가 만여리(萬餘里)나 된다. 그 곳에 회승(會承)이란 이름이 있어서 수나라 대 이 땅에 와서 여러 가지 학문[子ㆍ 史ㆍ 統] 및 기술ㆍ 예문(藝文)을 배웠는데 어느 일에나 막히지 아니하는 일이 없었다. 무덕(武德) 연간517)의 말까지도 아직 그 사람은 경읍(京邑)에 남아 있다가 정관(貞觀) 5년(631)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물어보기를 “그대의 나라는 어두운 골짜기 동쪽 구석진 곳에 있어서 불법이 늦게 그곳에 이르렀다. 그 곳에도 이미 그 이전에 아육왕의 조화가 미쳤는지 모르겠도다”라고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문자로 말한 것은 없어서 근거를 두고 말씀드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사적을 증험해 보면 곧 귀착하는 곳은 아육왕에게 돌아간다. 왜 그런가? 어떤 사람이 토지를 발굴하다가 왕왕 옛 탑의 노반(露盤)이나 부처님의 여러 가지 위의 모습을 발굴하는 일이 있는 까닭에 본래부터 불법이 그 곳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익주(益州)성 남쪽에 있는 공혜사(空慧寺)의 금장(金藏)이라 하는 것은 절에 큰 구멍이 있는데 그 곳이 금장이다. 근간에 한 도사(道士)가 있어 일찍부터 그 곳에 갈무리된 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곳에 와서 자리잡고 절을 지키는 신(神)을 수호하면서 빌었다. 이에 신이 그 구멍에 들어가서 두 되[二升]의 금싸라기를 취하라고 하였다. 그는 신의 말에 따라 곧 구멍 속에 들어갔으나 오직 땅밑에 금단지가 줄줄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만 보일 뿐 그 가장자리를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절의 스님은 아무도 감히 그곳에 침입할 수 없다는 것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옹주(雍州)518) 위남현(渭南縣)의 남산 도재곡(倒犲谷)의 절벽 위에 거꾸로 매달린 돌에 글이 새겨져 있다. 바위모습이 넘어진 이리와 같다고 하여 그로 인해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그 골짜기에 바위가 있고 바위에 부처님의 얼굴상이 있기에 역시 이곳을 상곡(像谷)이라 부른다. 고노(古老)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 한 인도스님이 이곳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이 골짜기에 부처님의 얼굴상을 한 산이 있고 그곳에 과거칠불(七佛)의 감(龕)519)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칠불이 일찍이 이 골짜기에 오셔서 설법하였는데 개울안에 치자꽃이 있어 그것을 항상 공양한 곳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한다. 근간 영휘(營徽) 연간(650-655)에 남산 용지사(龍池寺)의 스님인 지적(智積)이 이 소문을 듣고 그 곳을 찾아가 골자기에 이르니 향 냄새가 났으나 어느 곳에서 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에 몹시 의아하게 생각하여 혹 향냄새가 개울안 모래에서 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곧 모래를 헤치고 보니 마치 잔디뿌리 모양 같은 것이 모래흙 사이에 끼여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풀은 향기가 매우 그윽하기에 물에 뿌리의 흙을 털어내고 씻어 보니 온 개울 안이 모두 향기로 가득하였다. 상주(相州)의 대자사(大慈寺)는 당나라 초기에 불에 탔다. 내가 그곳에 가서 불탄 유래를 물었더니 그 곳 스님이 이르기를 수(隨)의 대업(大業) 말년(616년)에 뭇 도적들이 서로 이 곳에 자리잡았고 절은 삼작대(三爵臺)의 서쪽 갈구산(葛屨山) 위에 있었는데 네 고을이 도적들에게 투항해 왔다. 이에 도적들은 성을 쌓고 굳게 이곳을 지켜 사람과 물건이 성안에 모여들어 한 척의 땅도 빈 곳이 없었다. 탑의 위 아래에도 겹겹이 사람들이 들어와 모두 가득하였고, 그 안에서의 더럽고 오염된 꼴은 보고 들을 수 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도적들이 평정되고 사람들이 나가자 똥ㆍ 오줌 등 더러운 물건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지만 절의 스님은 이것을 막고 제거할 만한 힘이 없없다. 그런데 홀연히 불길이 일어나 탑을 모조리 다 태우고 오직 동남쪽 모서리만 남게 되었다. 이에 나라의 태자(太子)가 깊이 생각하기를, "불상이 있는 불전이 남아 있을 수 있었으니 이는 불의 청정함으로 그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다 한다. 이 탑은 수(隨)의 고종황제가 손수칙명을 내려 설치한 탑이다. 처음 수나라의 운기가 시작될 즈음 천하 사람들의 민심이 아직 수나라로 붙지 아니하였을 때 오국공(吳國公)으로 있던 울형(蔚逈)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북주(北周)의 주신(柱臣)520)으로서 하북지방을 진압하여 그 곳을 지키면서 옛 도읍지를 다스렸는데, 이때 양씨(楊氏)521)가 나라를 도모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허락할 수 없는 점이 있어 그날로 곧 군병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수 황제의 명령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한 번 그곳에 들이닥치니 큰 진지가 모조리 꺾이고 와해되며, 그때 잡아들인 포로만도 백만명에 가까웠다. 이 수많은 포로들을 모두 이 절의 북쪽 유예원(遊豫園) 가운데 모아 놓고 이튿날 아침에 목을 잘라버리게 하였다. 이 유예원의 담장에는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놓아주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어 곧 목을 자르려 하니 그때까지 아직도 육십여만 명의 포로가 남아 있었다. 이 포로들을 모두 장하(漳河)의 강기슭에서 목 잘랐는데 시체가 물속에 흘러들어 강물이 시체 때문에 흐르지 못하고 피의 강물이 한달 동안 계속되면서 밤마다 귀신이 통곡하여 슬픈 원한이 사람의 간장을 끊어놓았다. 이 사건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이번 한번의 주살(誅殺)에는 매우 잘못되고 외람된 점이 있었다. 역적은 울형(蔚逈) 한 사람에 지나지 아니하여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가 몰아 세우는 일을 당한 것일 따름이다. 당시에 이를 측은하게 생각한 사람들도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었지만 나라가 처음 섰으니 천기(天機)를 엿보느라 이들을 놓아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예원(遊豫園)의 남쪽 갈구산(葛屨山) 위에 대자사(大慈寺)를 세워 삼작대(三爵臺)를 열어 그 곳에 절을 영조(영조)하여 하루 여섯 차례 예불할 때 한 번 절을 더하여 이 유예원 안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절이 이룩되고 스님이 주지하여 칙명에 의하여 예배하고 불경을 외우니 원한의 통곡소리가 한 때 완전히 끊어졌다.
60-3. 진단신주불사리감통록(振旦[震壇]神州佛舍利感通錄) 본래 위대한 성인은 방편을 도모하여 모든 중생을 통틀어 제도함을 근본으로 삼으시나 얼굴 모습과 광명은 혹 인연따라 감추시고 남기시는 그늘은 진실로 받들 만한 것이 있다. 그런 까닭에 구시(拘尸)522)를 섬기고자 하시어 속인의 교화로부터 금강정(金剛定)523)에 들어가시고 이 금강의 몸을 부수시어 복덕이 하늘과 인간세계를 덮게 하셨고 그 공덕은 바다와 육지에 흘러 넘쳤다. 그리하여 심지어 치아(齒牙)ㆍ 손톱ㆍ 머리카락 등의 것들과 정수리의 덮개뼈ㆍ 눈의 눈동자 따위와 옷ㆍ 발우ㆍ 물병ㆍ 지팡이 같은 도구, 앉아 있던 곳, 발로 밟으신 자취에 이르기까지 두루 중천(中天)에 가득하였으나 그 공덕이 동하(東夏) 땅까지 미친 자취는 드물다. 그러나 치아와 머리카락 ㆍ 불골(佛骨)은 대때로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들리고 눈으로 보고 직접 듣기도 하였다. 예전에 아육왕(阿育王)의 당속에 묻힌 탑이 몇 번 눈 앞에 나타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치우쳐 감응하고, 구별해서 감응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기연을 다라 도 나타나곤 하였다. 그리하여 한(漢) 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일이 없던 시대가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영골(靈骨)이라 일컬어지는 만큼 어떤 일로 인해서 이를 구할 수는 없는 일이며 인연에 맡겨 거론할 따름이며 오직 이를 공경함으로써 그 공덕을 공통적으로 불법을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게 할 수 있을 다름이다. 또한 신비한 광명을 거론하여 불법에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감응시켜 옥을 다듬듯 부지런한 노력정진의 힘을 빌려 염원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지난날의 전설을 찾아보고 이로써 현실로 나타난 상서가 세상에 미치게 하려 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이 서문을 엮어서 이 글을 펼쳐보는 사람에게 불문(佛門)의 큰 골격을 알게 하고 만년 뒤까지도 먼지 속에 묻혀두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나라 『법본내전(法本內傳)』에 이르기를 명제(明帝)가 불법(佛法)을 널리 펴고 절을 세우고 스님에게 도첩을 주니 오악(五嶽)에 자리잡은 도관(道觀)의 모든 도사들이 스님들과 도술을 비교시험하여 어느 교가 다른 교만 못할 경우 경을 불사르게 하여달라고 청구하여 신통력의 변화로 증험하게 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경이 불을 다라 변화하자 은몰(隱沒)하여 아무도 펼치는 사람이 없는데도 재주를 다하여 스스로 대중 앞에 느낌이 와 닿게 하고 이에 도사 장연(張衍)이 세속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열게 하였다. 반면 이때 인도에서 갖고 온 사리는 오색의 광명을 뻗어내면서 곧바로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서 빙빙 돌며 하늘을 덮는 듯하였고 그 빛남이 햇볕을 가렸다. 또 아라한인 마등(摩騰)524)스님은 몸을 솟구쳐 높이 하늘로 날아올라 자유자재로 신통력의 변화를 일으키고 하늘에서는 보배꽃비를 내려 부처님과 스님의 머리 위에 뿌렸으며 또한 하늘에서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이 번화한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신심을 느끼게 되었다. 위(魏)의 명제(明帝) 때 낙양(洛陽)의 성 안에는 본래 세 곳의 절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궁성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하여 긴 장대 끝에 깃발을 매놓을 대마다 그 펄럭이는 것이 궁중 안에서도 보여서 황제는 이를 싫어하여 곧 절을 허물고 파괴하여 제거하려 하였다. 이 때 이 절에는 외국의 스님이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곧 금쟁반에 물을 가득히 담고 그 안에 사리를 담으니 오색의 광명을 뿜어내면서 불꽃처럼 치솟아 끊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황제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무릇 신(神)의 공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느냐?"라고 하고 곧 길 동쪽에 둘레가 백 간짜리나 되는 집을 지어 이름을 관불도정사(官佛圖精舍)라 하였다 한다. 삼국시대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적오(赤烏) 4년(241)에 스님인 강승회(康僧會)525)가 강남 땅에 절을 창설하여 불상을 설치하여 행도(행도)하니 오나라 사람들이 괴이한 요물(妖物)이라 생각하고 그 현황을 글로 써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에 손권(孫權)이 승회(僧會)를 불러 묻기를 "부처님에게 무슨 신령함이 있느냐?"라고 하니 승회가 대답하기를, "부처님은 신령한 자취를 숨기셨지만 유골과 사리는 아무 곳에서나 기연에 응하여 나타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어 두 사람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계속되었다. 손권: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승회: “신비한 자취에 감통하려면 기원하고 구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손권: “만약 사리를 얻는다면 곧 그것을 위하여 절을 일으켜 세우겠다.” 그리하여 21일이 지나서 마침내 사리를 얻어 병 안에 담아 아침 일찍 손권에게 올리니 광명이 궁전을 비추었다. 손권이 병을 손에 잡고 구리쟁반에 사리를 쏟아 부으니 사리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구리쟁반을 들이받자 구리쟁반이 산산히 부서졌다. 이에 손권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면서 "세상에 드물게 있는 상서(祥瑞)로다"라고 하였다. 이에 승회는 한발 더 나아가 말하기를 "부처님의 영골(靈骨)은 금강석으로 쳐도 부서지지 아니하며 겁화(劫火)에도 타지 아니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손권은 곧 힘센 사람을 시켜 이를 치게 하니 망치와 다딤돌이 모두 움푹 패였지만 사리는 손상되지 아니하고 광명이 사방을 쏘며 사람들의 눈에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또 손권이 불에 태우게 하였으나 곧 광명이 치솟아 위로 올라가서 큰 연꽃모양을 만들었다. 이에 손권은 마침내 신심이 일어나서 곧 그 사리를 위하여 건초사(建初寺)란 절을 짓고 그가 머물던 곳의 이름을 불타리(佛他里)라 바꾸었다. 손호(孫皓)526)는 가혹한 정치를 하여 곧 불법을 막고 제거하며 경전을 불사르고 탑을 허물고자 하였는데 그런 손호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조금만 잠시 느긋한 시간을 빌려주시고 참으로 신비한 영험이 없다면 그때 스님을 죽이고 불법을 제거해도 늦지 아니합니다"라고 하니 손호가 이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승회(僧會)를 불러들여 말하기를, "만약 영험이 눈 앞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면 그대를 도와 불교를 일으키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장차 도(道)는 폐기될 것이고 사람은 죽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승회가 말하기를, "도는 인연으로 응하며 감응하면 반드시 통합니다. 만약 조금 느긋하게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아마도 신비한 효험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손호는 사흘의 기한을 주었다. 이 때 스님과 대중 백여 명이 함께 절에 모였는데 손호는 병력을 풀어 절을 에워싸고 이어 큰 벼슬아치들도 모두 그곳에 이르러 기한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게 하니 사람에 따라 혹 영험이 없을가 두려워해서 먼저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람도 있었다. 이때 승회는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부처님이 사리를 남겨 두신 것은 오직 지금같은 대가 있기 때문이다. 전에도 이미 영험이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해서 어찌 사람들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한에 맞추어 사리를 얻게 되었고 곧 이것을 손호에게 진상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부처님의 금강의 골분(骨賁)으로써, 백균(百鈞)527)의 절구방망이로 내리 대려도 끝내 부서지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손호(孫皓)가 말하기를, "금석(金石)도 갈고 다듬을 수 있는데 마른 뼈다귀가 부서지지 아니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스님들이 얼굴을 맞대고 사람을 속인다면 오직 빨리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고 곧 무쇠다듬잇돌 위에 놓고 쇠방망이로 이를 치게 하니 쇠방망이와 무쇠다듬잇돌은 움푹 패였으나 사리는 옛 모습 그대로 있었다. 또 맑은 물로 이를 시험해보니 사리에서 오색 광명을 뿜어 올리면서 흩어져 온 궁전을 환하게 밝혔다. 이에 손호가 마침내 기꺼이 승복하고 마음을 고쳐 교화에 응하였다 한다. 진(晉)나라 초기(256-)에 축장서(竺長舒)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전에부터 사리가 있어 이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의 아들을 스님이 되게 하였다. 그 스님의 이름은 법현(法顯)이라 하였는데 늘 환속하고자 하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리란 것은 사석(沙石)에 지나지 아니한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사리를 물속에 던지니 오색이 세 번이나 맴돌며 광명이 몇자나 높이 치솟았다. 이에 그는 마침내 환속하지 아니하였다. 그후 아비인 장서가 죽은 뒤에 다시 도로 환속할 생각이 일어나자 곧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끝내 스님이 되었으며 사리를 강하(江夏)의 탑 속에 안치하였다. 진(晉)의 대흥(大興) 연간(318) 잠동왕(潛蕫汪) 지방에서는 목상(木像)을 믿고 숭상하였는데 어느날 밤에 목상에서 광명이 뻗어나는 일이 었었고, 그 후 목상옆에서 무엇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있어 가서 보니 곧 사리가 물 속에서 떴다가 가라앉곤 하면서 오색의 광명이 휘황하게 빛나면서 좌우로 세 바퀴를 맴돌며 갔다. 그 후 스님인 법항(法恒)이란 사람이 이를 보니 멀리서 네 다섯 개의 광명이 일어나면서 법항의 품 속에 들어왔다. 이에 법항이 말하기를, "만약 나로 하여금 절을 세우게 하시려거든 다시 한 번 그 위력의 신통력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더니 도 한번 그의 눈앞에 빛남이 나타났다. 이에 곧 법항은 절과 탑을 세웠고 잠주(潛州) 지방에서 불법에 들어오는 사람이 하루에 몇십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다. 진(晉)의 대흥(大興) 연간에 북쪽 사람들이 광능(廣陵) 땅에 흘러들어 흩어지는 수효가 하루에도 몇천 명이나 있었으며 이 가운데 사리를 갖고 온 사람이 작은 사찰을 세우고 깃발장대를 세웠는데 사리에서 뻗어나온 광명이 장대 끝까지 이르게 되어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고을 사람들의 신심에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진나라 함화(咸和) 연간(326-331)에 북쪽 스님인 안법개(安法開)란 사람이 여항(餘杭)528) 땅에 이르러 절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땅도 없고 돈도 없어 손수 엽전(葉錢) 꾸러미를 꼬아 이를 팔아서 몇 해를 모아 삼만 냥의 돈을 벌어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그는 늘 돈꾸러미를 꼬는 일로 밑천을 삼았는데 사찰을 세우고자 하여도 사리가 없었다. 이때 나유(羅幼)란 사람이 있었는데 선대 때부터 사리를 갖고 있었다. 이에 법개(法開)가 이를 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 법개스님이 절에 이르러 예불을 하게 되었을 때 나유의 사리주머니가 이미 자기의 자리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곧 나유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나유가 뒤따라 와서 이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법개스님과 함께 사우(寺宇)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진(晉)의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건안(建安) 태수 맹경(孟景)이 찰맹사(刹孟寺)란 절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저녁에 머리맡에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기에 보니 사리 삼매(三枚)가 있었다. 맹경이 사찰을 세운 후 원가(元嘉) 16년(439) 유월달에 사리에서 광명이 뻗어나와 위아래로 비추기를 일곱 밤을 계속 한 후 멈추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았다 한다. 진(晉)나라 의흥(義興) 원년529)에 한 임읍(林邑)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한 과의 사리를 갖고 있었으며 재를 올리는 날마다 방광이 있었다. 스님인 혜수(慧邃)란 사람이 광주자사(廣州刺史)ㆍ 조규(刁逵)를 따라 남방에 있을 때 그 방광하는 모습을 공경하여 이를 청하려 하자 아직 말도 하기 전에 사리가 스스로 둘로 나누어졌다. 이에 조규는 장간사(長干寺)의 탑상의 모양을 본따서 탑을 세우고자 하니 절의 주승(主僧)이 고집하여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랬더니 그 스님의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가 몇 장(丈)이나 되었다. 그가 스님에게 말하기를 "불상을 베풀고 인도하는 일은 귀중한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인색하게 구느냐? 분명히 알리노니 장간사의 탑상을 본따는 일을 들어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탑이 이루어지자 조규는 사리를 부처님의 육계(肉髻) 안에 붙여 두었다. 서방에서 온 여러 불상 가운데 방광하는 불상이 많은 것은 사리를 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6년(429)에 가도인(賈道人)이 형주(荊州)지방에 가서 분명히 부용(芙溶) 꽃이 핀 것을 보고 조금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꽃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찾아보니 한 과의 사리를 얻게 되었는데 흰 빛이 진주와 같고 불꽃같이 빛나 대들보를 비추었다. 그는 이를 공경하여 상자 안에 받들어 담아서 집 벽에 매달아 놓았다. 그랬더니 집안 사람들이 보니 늘 불가의 스님이 외부에서 들어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뒤어올라 책상위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이 집에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는데 모르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소홀히 대하였더니 곧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알리기를, "이곳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이 있어 모든 성인들이 찾아와 공경하는 곳인데 너는 왜 나쁜 일을 행하느냐?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다시 세상에 나오면 비구니의 종이 될 것인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이 꿈을 꾸고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문둥병에 걸려서 죽었다. 그 후 사리가 당에 기울어지자 그 곳에 여덟 송이의 연꽃이 생겨나서 육십 일이 지난 뒤에야 말랐고 한 해 남짓 이것이 소실되었는데 그 간 곳을 모른다. 전송(前宋)의 원가 8년(431) 회계(會稽) 땅의 안천재(安千載)란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이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었다. 어느날 밤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나가보니 붉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문안으로 재목을 운반하여 쌓고 있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관청에서 시켜 부처님의 부도(浮屠)를 만들라고 하였다"라고 하고는 홀연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이튿날 다른 집의 재(齊)에 갔다가 밥 위에서 한 과의 사리를 얻었는데 자금색(紫金色)을 띠고 있었고 방망이로 쳐도 부서지지 아니하였고 물로 시험해보니 광명이 일어나 사방을 비추었다. 그는 곧 스스로 받들어 공경하게 되었는데 항상 기이한 향기가 있었다. 그후 어느 날 사리를 집어내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다가 홀연히 사리를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두루 모든 곳을 찾아보다가 반나절만에야 겨우 도로 찾게 되었다. 임천왕(臨川王)이 강능(江陵)을 다스릴 때 이 사리를 맞이하여 시험해보니 여러 가지 광명이 섞여서 간간히 뻗어나와 좌사(佐史)와 스님들이 보는 것이 다같지 아니하였다. 이에 왕이 물이 담긴 그릇에 받들고 주문을 외우며 (주문의 종류는 많아서 따로 가려낸 내용과 같다) 주문이 끝나자 곧 소리에 응하여 광명이 뻗어나왔다. 그날 밤에 보니 백 여명의 사람들이 사리를 모신 집 주위를 돌면서 향을 사르고 있었는데 우뚝한 모습이 부처님과 같았다. 날이 밝자 사람들과 사리를 모두 잃어버렸다. 전송(前宋)의 원가 9년(432)에 심양(潯陽)530) 장수원(長須元)의 집에서 팔관제(八關齊)를 마련하였는데 도인ㆍ 속인 수십 명이 보니 불상 앞 꽃위에 얼음과 눈 같은 것이 보여서 가까이 갔더니 사리가 수십 과 있었다. 사리를 얻어 물에 행구니 빛나는 불꽃이 서로 이어졌는데 그 후 마침내 이를 잃어버리고 수십일이 지난 뒤 주방을 열어보니 다시 치아사리가 있어 그것을 얻었고 상자 속에는 흰 모포에 쌓인 사리 십과가 있음을 보았다. 빛나는 불꽃이 하늘에 닿아 여러 곳의 사람들이 함게 와서 이를 보았다. 전송(前宋) 원가 15년(438)에 남군(南郡)에 유응지(劉應之)란 사람이 있었는데 형산(衡山)에 숨어 나라의 부름을 받아도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는 유교의 도를 받들고 불법을 믿지 아니하였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땅에서 몇 장(丈)이나 떨어진 높은 곳에서 말하기를, "너의 의심은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홀연히 깨닫게 되어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지성을 다하여 반 년 동안을 예불하였는데 홀연히 불상의 이마 아래에 자색(紫色)의 광명이 뻗어나오는 것을 보고 서광이 난 자리에서 두 과의 사리를 얻었는데 조개고 쳐도 손상되지 아니하였으며 물에 헹구니 광명이 뻗어났다. 그후 식사 대 이빨 사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 듯하여 토해내니 광명이 있었고 그의 처(妻)도 또 한 과의 사리를 얻어 모두 합하면 다섯 과의 사리를 갖게 되었다. 그 후 도 이것을 잃었다가 곧 이어 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전송(前宋)의 원가 19년(442)에 고평(高平)에 사는 서춘(徐椿)이란 사람은 경을 읽다가 한 과의 사리를 얻고 식사를 하다가 또 한 과의 사리를 얻어 모두 두 과의 사리를 얻어서 은으로 만든 병 속에 담아 두었는데 그 후 사리의 수효가 점점 불어나 마침내 스무 과의 사리가 되게 되었다. 그 후 이 사리는 광능(廣陵)에 보내졌는데 지금 다시 가만히 열어보니 빈 단지 뿐이고 그 동안 서춘이 도읍지에 살다가 홀연히 스스로 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서춘이 후에 불법에서 물러나 믿음을 바꾸게 되자 사리도 모두 잃어 버렸다. 사리는 감응에 의하여 나타나지만 인연을 만난 사람은 매우 많다. 모두가 공경함으로써 얻게 되고 업신여김으로써 잃게 되는 것이다. 사리가 동방에 흘러 들어오면서 아득히 수많은 제왕의 시대를 겪어왔다. 전기에 나오는 사리의 기사는 거의 만에 하나만 기록된 것이며 시대의 모습에 연유하여 같은 사리가 거듭거듭 여러번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결코 기이한 일이 아니다. 부처님이 나타나고 숨는 것은 정성이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가 있어서 사리탑을 일으켜 세운 것은 수나라보다 뛰어난 나라는 없었다. 한 시대의 치화(治化) 가운데서 백여 개 소에서 신비한 서상(瑞祥)이 개발된 것은 여러 전기에 진술되어 있다. 지금 간략히 그 가운데 한 두 가지를 드러내어 수나라와 왕성하던 공덕을 밝혀 보기로 한다. 수(隨)의 고조황제가 예전에 제왕이 되기 전에 한 신비한 비구니가 있어 이름을 지선(智仙)이라 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찾아와서 이르기를 "불법이 곧 멸하려 하고 있다. 모든 신명(神明)들이 지금은 이미 서쪽으로 떠나갔다. 아이야! 너는 마땅히 온 천하의 자애한 아비가 되어 다시 불법을 일으켜야 하며 그렇게 하면 신명들도 다시 이 나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북주(北周)의 임금531)은 과연 불법을 멸망시켰다. 그후 수(隨)가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되자 고조황제는 항상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또 예전에 한 바라문(婆羅門)의 스님이 있었는데 고조황제의 집을 찾아와서 비단에 싼 한 과의 사리를 내놓고 말하기를, "시주는 마음씨가 좋은 까닭에 이것을 남겨두니 공양드리시오"라고 하고 이어 곧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황제는 말하기를, "내가 나라를 일으킨 것은 부처님의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천하에 탑을 세우고 아울러 신비한 비구니의 상을 안치하라"라고 하였다. 도한 경사(京師)의 법계사(法界寺)에 기단이 이어진 부도를 만들고 그 아래에 사리를 봉안하게 하였다. 개황(開皇) 15년(595) 가을의 어느날 밤 신비한 광채가 기단에서부터 위로 치솟아 노반(露盤)위를 맴돌았는데 그 혁혁한 빛이 마치 용광로의 불꽃과 같았으며 열흘 안에 네 번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황제와 인수궁(仁壽宮)과의 인연은 인수(仁壽) 원년(601) 유월 십삼일 예전 어궁(御宮)이었던 인수전(仁壽殿)에서 황제가 탄생한 날에 있던 일에 연유한다. 황제는 이날 지난 일을 생각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고자 여러 스님들을 초청하여 함께 불도를 논의하고 나라 안의 맑고 고요한 곳 서른 곳에 탑을 세우고자 소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우러러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을 생각하니 대자대비로 뭇 중생들을 구호하시고 모든 천한 백성들을 제도하시는 나루터와 교량이 되셨도다. 나는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다시 일으키고 사해(四海)의 백성들과 함께 복업을 닦아 현재와 미래에 모두가 이익되게 할 것을 생각하니 법상을 알고 베풀고 인도할 만한 자격이 있는 30명의 스님을 초청하여 각기 시자(侍者)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관도에 흩어져 여러 고을에 사리를 보내서 탑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모든 고을에 있는 현재의 스님들은 나와 황후와 태자 및 모든 왕궁의 관리와 백성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생령 및 나타난 모든 생령들을 위하여 칠일 동안 도를 행하고 참회하며 계속 사찰에 보시하되 십문(十文)을 한도로 하여 탑을 세우는 비용에 바치고 탑을 세우는 사람은 부역과 병역(兵役)에 충당하지 아니하며 빠르게 창고의 물건을 사용하여 탑을 세우게 하라. 각 지방의 자사(刺史) 이하 모든 관리들은 평상시의 업무를 7일 동안 정지하고 오로지 탑 세우는 일 만을 맡아보아서 다 함게 10월15일 정오가 되면 사리를 함에 넣어 일시에 탑을 일으켜 세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황제는 탑을 일으켜 세우는 날 새벽에 옥홀(玉笏)을 손에 잡고 서울에 있는 대흥전(大興殿)의 서쪽에 서서 불상과 스님 360명을 맞아들여 궁전에 올라가 좌우로 비밀히 세 번 사람들을 헤아려 보았는데 항상 한 사람이 부족하였다. 그러다가 황제는 기이한 모습을 한 스님 한 분을 보았는데 갈색의 가사로 넓적다리를 덮고 있었다. 이에 황제는 죄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놀라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라고 하였는데 행도(行道)를 하게 되자 흩어져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날 황제는 말하기를, "지금 불법이 다시 일어나 사리탑을 세웠으니 반드시 감응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즉 옹주(雍州)의 선유사(仙遊寺)에서는 탑을 세울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탑 안에 내려놓으려 하자 햇빛이 밝게 비추었고 사리를 함에 넣게 되자 구름이 다시 덮였다.
496)가섭마등(迦葉摩騰): ⓢKāśyapa-Mātaga. 불교를 중국에 전한 인도스님으로 축섭마등(竺葉摩騰)ㆍ섭마등(攝摩騰)ㆍ마등이라고도 쓴다. 중인도 사람으로 총명하여 대소승의 경ㆍ율에 정통하였다. 서인도에서 『금광명경』을 강설하여 이름을 드날리고,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사신 채음(蔡愔) 등의 간청으로 67년(영평 10)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중국에 왔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1권을 번역, 이가 곧 중국 역경의 시초이다. 그 뒤 오래지 않아 낙양(洛陽)에서 입적하였다.
497)고장(姑藏): 중국 한(漢)나라 때의 지명으로 지금의 간쑤 성(甘肅省) 우웨이 현(武威縣)에 해당한다. 5호 16국의 전량(前凉), 후량(後凉), 남량(南凉), 북량(北凉)의 수도였다.
498)약수(弱水): 강의 이름으로 지금의 감숙성의 張掖河이다.
499)서하(西夏): 1032년에 티베트계 탕구트 족 탁발씨(拓跋氏)인 이원호가 간쑤(甘肅)와 내몽골의 서부에 세운 나라. 불교가 성하였고 서하 문자를 만드는 따위의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었으나, 1227년에 몽골에게 망하였다.
500)익주(益州): 중국 한나라 때에, 13자사부(刺史部) 가운데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해당하는 곳. 뒤에 성도(成都)를 흔히 이렇게 불렀다.
501)예석(䃜石): 黑色의 아름다운 보석이다.
502)노두기(櫨枓起): 탑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의 끝대들보를 말하낟.
503)박산향로(博山香爐): 산봉우리 모양의 뚜껑이 얹힌 향로인데, 중국 한(漢)나라 등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낙랑 유적에서 주로 출토된다.
504)정관(貞觀): 중국 당나라 태종 때의 연호로 627~649년 사이이다.
505)노반(露盤):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 보통 이 위에 복발(覆鉢)이나 보륜(寶輪)을 올린다.
506)촉(蜀): 쓰촨 성(四川省) 의 옛 이름이다.
507)동하(東夏): 중국 동부 해안 지방을 말한다.
508)정주(鄭州): 중국 허난 성[河南省] 중앙에 있는 도시이다.
509)유주(幽州): 중국 남부 광시좡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중앙에 있는 도시이다. 지구급(地區級) 시(市)로 비한족(非漢族)이 거주하고 있는 광시 중북부 자치현을 포함한 류저우 지구의 행정중심지이다
510)이궁(離宮): 임금이 국도(國都)의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으로 행궁(行宮)이라고도 한다. 피서(避暑)ㆍ피한(避寒)ㆍ요양을 위해 짓거나 경승지(景勝地)에 짓기도 하였지만, 통치력의 효과적인 파급을 위해 지방의 요지에 이궁을 지어 돌아가면서 머물기도 하였다. 《한서(漢書)》에 보면 중국 한(漢)나라 때는 이궁이 300에 이른다 하였고 중국 역대의 통일왕조에서는 특히 이궁을 많이 지었다.
511)자사(刺史): 지방장관을 말한다. 원래 한(漢)나라 때 군(郡)ㆍ국(國)을 감독하기 위하여 각 주(州)에 둔 검찰관이었는데, 행정장관이 아니므로 정위치(定位置) 없이 항상 관내를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직위가 군(郡)의 태수보다 낮았으나 점차 지위가 높아져 한 주(州)의 장관으로서 군사ㆍ민정을 관장하는 군벌(軍閥)로 발전하였다. 당(唐)ㆍ송(宋)나라를 거쳐 명(明)나라 때 폐지되었으나, 후에 지주의 존칭으로 쓰였다.
512)신주(神州): 중국을 가리킨다.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추연(騶衍)이라는 학자가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했는데, 이로 인하여 후세 사람들이 중국을 신주라고 했다.
513)창주(滄州):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남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514)고려(高麗): 고구려를 말한다.
515)포도(蒲圖): ⓢbuddha-stūpa, Ⓟbuddha-thūpa의 잘못된 음사어이다. 불탑(佛塔)을 말하며, 부도(浮圖, 浮屠)ㆍ불도(佛圖)라고도 한다ㆍ
516)염부제주(閻浮提州): ⓢJambu-dvīpa. 염부제비파(閻浮提鞞波)ㆍ섬부주(贍部洲)ㆍ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하는데, 수미사주(須彌四洲)의 하나로 수미산의 남쪽에 있으며 7금산과 대철위산 중간, 짠물 바다에 있는 대주(洲) 이름이다. 예주(穢洲)ㆍ예수성(穢樹城)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염부나무가 번성한 나라란 뜻이며, 승금주(勝金洲)ㆍ호금토(好金土)라 함은 염부단금(閻浮檀金)을 산출하는 나라란 뜻이다.
517)당(唐) 고조(高祖) 때로 618년~626년 사이이다.
518)옹주(雍州): 중국에서, 우(禹)의 구주(九州) 가운데 현재의 산시 성(陝西省), 간쑤 성(甘肅省), 칭하이 성(靑海省)에 있던 행정 구획이다.
519)감(龕): 사리를 담은 함이다.
520)주신(柱臣): 기둥이 되는 중요한 신하를 말한다.
521)양씨(楊氏): 수(隋)나라 고조(高祖)인 양현(楊賢)을 말한다ㆍ
522)구시(拘尸): ⓢKuśinagara, ⓅKusināra. 중인도 옛 왕국의 이름으로 비야리(毘耶利)의 동북쪽에 있다. 또는 구시나계라(拘尸那揭羅)ㆍ구시나갈(拘尸那竭)ㆍ구시나라(拘尸那羅)ㆍ구시나(拘尸那)ㆍ구이나갈(拘夷那竭)ㆍ구시(拘尸ㆍ究施) 등이라고 하며, 번역하여 각성(角城)ㆍ모성(茅城)이라 번역한다. 한 때는 구사발제(拘舍拔提)라 부르고, 말라족(末羅族)이 이곳에서 살았다. 석존께서 이 곳 사라림(沙羅林)에서 열반에 드셨다.
523)금강정(金剛定): 금강이 견고하여 다른 것을 깨뜨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는 선정을 말한다. 금강유정(金剛喩定)ㆍ금강정(金剛定)ㆍ금강삼매(金剛三昧)ㆍ금강심(金剛心)ㆍ정삼매(頂三昧) 등이라고 한다. 이 선정은 성문ㆍ보살들이 수행을 마치고 맨 마지막 번뇌를 끊을 때에 드는 것인데, 소승은 아라한과를 얻기 전에 유정지(有頂地)의 제9품 혹(惑)을 끊는 선정을 말하고, 대승은 제10지 보살이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구생소지장(俱生所知障)과 저절로 일어나는 번뇌장 종자를 한꺼번에 끊고 불지(佛地)에 들어가기 위하여 드는 선정을 말한다. 천태종에서는 등각(等覺) 보살이 원품무명(元品無明)을 끊고 묘각(妙覺)을 증(證)하기 위하여 드는 선정이라고 한다.
524)마등(摩騰): 가섭마등(迦葉摩騰 ⓢKāśyapa-Mātaga)을 말한다.
525)康僧會(강승회): 강거국(康居國) 사람으로 그의 선조는 대대로 인도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장사차 교지(交趾)에 옮겨와서 그를 낳았다. 10세 때에 양친을 여의고 출가하였다. 불법을 선전할 뜻을 품고 247년(오나라 적오 10) 중국 건업(建鄴)에 왔다. 오(吳)나라 임금 손권(孫權)은 그를 위하여 처음으로 절을 짓고 건초사(建初寺)라 이름하였다. 이곳에서 『육도집경(六度集經)』 등 7부 20권을 번역. 또 니원패성(泥洹唄聲)을 전하여 일대의 모범이 되었고, 오나라에 불교가 발전되었다. 280년(천기 4) 입적하였다. 후세에 초화선사(超化禪師)라 이름하였다. 저서는 『법경경주해(法鏡經注解)』ㆍ『도수경주해(道樹經注解)』ㆍ『안반수의경주해(安般守意經注解)』 등이 있다.
526)손호(孫皓): 오나라의 손권의 아들이다.
527)백균(百鈞): 1균은 3천편(千片)에 해당한다.
528)여항(餘杭): 정강성(浙江省)을 말한다.
529)의흥(義興) 원년: 의희(義熙) 원년의 오류로 405년이다.
530)심양(潯陽): 중국 당나라 때 양쯔 강(揚子江) 부근 주장(九江)에 설치하였던 군 및 현으로 현재의 장시 성(江西省) 북쪽에 있다.
531)중국에서 법난을 일으켜 불교를 박해한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560~579)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