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술의부(述意部) 대개 지인(至人)의 감응은 상대를 향해 달려간다. 색상(色相)과 광명은 감로(甘露)의 윤기에 덕을 떨치고 그림과 영상은 지는 해의 운수에 교화를 남긴다. 그러므로 도리천에 잠시 떨어져 있을 때, 전단나무로 성인의 얼굴을 조각했거늘, 하물며 견고(堅固)하고 긴 어둠 속이라서 누가 그 옛날의 마음을 잊겠는가? 그러므로 서역(西域)에서 근원을 내자 우전왕(優塡王)이 그 처음을 시작했고, 동방으로 가르침을 옮기자 한(漢)의 명제(明帝)가 그 처음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장인(匠人)이 뒤를 이으니, 이에 법신(法身)을 뒤쫓아 온갖 보배를 다 갖추었다. 금석과 주옥의 장식과 토목과 수화(繡畵)의 모습에 그 마음과 솜씨를 다하니, 이로써 그 묘함을 보이었다. 옛날 진(晋)나라 때의 스님들이 창조한 것은 그 빛이 끊어졌으나 송나라ㆍ제나라의 왕들이 지은 것은 날로 새롭다. 모두를 기록하지 못하면 혹 그 근원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이제 그 뛰어난 것을 적어 모범을 보이고 이익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염불부(念佛部) 큰 성인에게는 평등한 상(相)이 있고 그 제자에게는 칭양하는 덕이 있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다 같이 흙탕의 탁한 데서 나왔고, 3신(身)의 정각(正覺)님은 다 함께 연대(蓮臺) 위에 앉으셨다. 무슨 상(相)이 나 생각을 따라 모두 이익을 얻나니, 이른바 처음에 출가하고 나중에 정각을 이룸과 그 중간에 도수(道樹) 밑에서 악마를 항복받고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하실 때까지이니, 그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광명은 빛난다. 신색(身色)이 청정하니 그것은 녹인 금과 같고, 얼굴이 단엄하니 마치 보름달과 같다. 치아는 흰 마노와 눈과 같고 머리털은 빛나는 소라고둥 같으며 눈은 푸른 연꽃과 같고 눈썹은 푸른 버들과 같다. 8음(音)은 메아리가 맑고 만상(萬像)은 온화하며 5안(眼)은 밝게 트였고 6통(通)은 멀리 나부낀다. 현하(懸河)와 같은 변설은 잇따라 쏟아져 상대에게로 향한다. 3점(點)1)을 원만히 하여 몸(身)을 이루고 5분(分)2)을 갖추어 본체가 되며, 권실(權實)을 겸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진응(眞應)을 따라 사람을 교화한다. 혹은 광대한 자비의 바람을 떨치고 흡족한 법의 비를 뿌린다. 몸의 밭을 잘 적시어 곧 위없는 싹을 내고 마음의 나무가 이미 무성해 곧 마르지 않은 잎을 우거지게 한다. 오지 않는 상(相)으로 오고, 보지 않는 상으로 본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응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시방의 10억 중생이 모두 내리 모시기를 원하고 삼천대천세계가 다 친히 받듦을 얻는다. 복밭에 길이 심고 공양을 널리 일으키며 삿됨과 착각의 뿌리를 뽑고 탐욕과 분노의 근본을 뺀다. 부처를 생각하는 씨앗을 잘 닦아 부처를 보는 열매를 얻는다. 그러므로 『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누가 산란한 마음이라도 저 탑묘(塔廟)에 들어가 나무불(南無佛)이라 한 번 부르면 그들 모두 다 불도 이루리.
또 『비유경(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국왕이 그 아버지를 죽이고 제가 왕이 되었다. 어떤 아라한이 그 국왕이 오래지 않아 목숨을 마칠 것을 알았다. 그 남은 목숨이 7일에 불과하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아비지옥에 떨어져 1겁 동안 고통을 받을 것임을 알았다. 이 아라한은 곧 국왕을 찾아가 ‘지극한 마음으로 나무불이라 외우되 7일 동안 끊지 말라’고 권했다. 그리고 떠나면서도 다시 ‘부디 잊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리하여 왕은 합장하고 일심으로 외우되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7일이 되어 그는 목숨을 마치고 그 혼이 아비지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전에 염불한 힘으로 지옥 문앞에 가서 그것이 지옥임을 알고는 곧 큰 소리로 ‘나무불’이라 외웠다. 지옥 안의 죄인들도 이 소리를 듣고 모두 한꺼번에 ‘나무불’이라 외웠다. 지옥의 사나운 불이 즉시 다 꺼지고 그들은 모두 해탈하여 인간에 태어났다. 그 뒤에 이 아라한은 다시 설법하여 그들을 다 수다원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름으로써 얻는 공덕은 무량 무변하여 비유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관불삼매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계실 때, 부처님께서는 그 부왕(父王)과 대중을 위해 『관불삼매경』을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32상(相)과 80종호(種好)가 있고 몸은 순금빛이며 광명이 무량하다. 이때 그 아래 자리에 5백 명 석자(釋子)들이 있었다. 그들은 죄장(罪障)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색신(色身)이 마치 회색으로 바짝 여윈 바라문같이 보였다. 그리하여 울부짖으며 제 손으로 머리털을 뽑고 온몸을 땅에 던져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안시키면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울지 말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이야기하리라. 과거에 비바시(毘波尸)라는 부처님이 계셨다. 그 분이 열반하신 뒤 상법(像法) 동안에 일월덕(日月德)이라는 한 장자(長者)가 있었고 그에게 5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총명하여 지혜가 많고 무엇에나 다 익숙했다. 그 아버지 장자는 삼보(三寶)를 믿고 공경하면서 모든 아들을 위해 항상 불법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들은 사견(邪見)으로 도무지 신심이 없었다. 뒤에 그들은 다 중병에 걸렸다. 장자는 그들 앞에 가서 눈물을 머금고 합장하여 말하였다. ≺너희들은 사견으로 불법을 믿지 않았다. 이제 무상(無常)의 칼이 너희들 몸을 벤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비바시라는 부처님이 계신다. 너희들은 그 명호를 불러라.≻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아버지가 말을 공경하였으므로 ‘나무불’ 하고 불렀다. 그는 또 법과 승(僧)을 부르라고 시켰다. 그들은 그대로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목숨을 마친 뒤에는 부처님을 부른 힘으로 사천왕이 되었다. 그러나 천상의 수명이 다해서는 예전의 사견 때문에 다시 지옥에 떨어졌다. 옥졸(獄卒)인 나찰이 뜨거운 쇠꼬챙이로 그 눈을 찔러 빼었다. 이런 고통을 받을 때 그들을 옛날에 아버지가 가르치시던, 부처님을 부르라던 말을 생각하였다. 그 인연으로 그들은 지옥에서 나와 인간에 났다. 그러나 빈궁하고 하천하였다. 그 뒤에 시기불(式棄佛)이 세상에 나오셔서 그들은 또 그 때를 만났으나 그 명호만 듣고 얼굴은 직접 보지 못했었고 그 뒤에 수엽불(隨葉佛)ㆍ구루진불(拘樓秦佛)ㆍ구나함불(拘那含佛)ㆍ가섭불(迦葉佛)도 다 그 명호만 듣고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6불의 명호만이라도 들었기 때문에 지금 나와 함께 이 석종에 난 것이다. 내 몸은 단엄하여 염부금과 같은데 너희들은 회색으로 바짝 여윈 바라문으로 본다. 그것은 다 전생의 그 사건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과거 부처님의 이름과 너희들 아버지와 내 이름과 또 미륵불의 이름을 부르고는 예배하여라. 그리고 대중과 대덕(大德)과 여러 스님을 향해 온몸을 땅에 던지고 그 사견의 죄를 드러내 놓고 참회하여라. 그들은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참회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몸의 금색이 수미산과 같음을 보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지금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와 무량한 광명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다 수다원을 얻어 부처님에게 출가하기를 청하고 또 아라한을 얻었다. 그리하여 3명(明) 6통(通)과 8해탈(解脫)을 갖추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멸도한 뒤에 만일 누가 내 이름을 부르거나 ≺나무불 하면 그가 얻는 복덕은 무량 무변하리라.’” 또 『관불삼매경』에서 말하였다. “오랜 옛날에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셨다. 그 분이 멸도하신 뒤에 한 왕자가 있었으니 이름을 금당(金幢)이라 하였다. 그는 교만하고 사견(邪見)이 있어 불법을 믿지 않았다. 정자재(定自在)라는 비구가 그 왕자에게 말하였다. ‘이 세상에 불상(佛像)이 있습니다. 온갖 보배로 장식하여 극히 위할 만합니다. 잠깐 저 탑(塔)에 들어가 불상을 보십시오.’ 왕자는 곧 비구를 따라 들어가, 불상의 상호를 보고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불상도 단엄하기가 이러한데 하물며 부처님의 진신(眞身)이겠습니까?’ 비구는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불상을 보고도 예배하지 못하겠다면 합장하고 나무불이라 부르십시오.’ 그리하여 왕자는 곧 합장하고 나무불 하고 불렀다. 궁중에 돌아와서도 그 탑 안의 불상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새벽 꿈에 불상이 보였다. 그는 꿈을 깨고는 기뻐하여 그 사견을 버리고 삼보(三寶)에 귀의하였다. 한 번 탑에 들어가 부처님을 부른 선근으로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 9백만억 나유타 부처님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매우 깊은 염불(念佛)삼매를 얻었으며 그 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이 앞에 나타나 그에게 기별을 주었다. 그 뒤에는 백만 아승기겁을 지내도록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았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매우 깊은 수릉엄정(首楞嚴定)을 얻은 것이다. 옛날의 그 왕자는 지금의 저 재수(財首)보살이니,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염불을 배워야 하느니라.”
039_0383_b_02L가만히 듣건대 법왕의 법력은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고 대자 대비의 소리는 유정천(有頂天)보다 높다. 근기를 따라 비를 두루 내리니 가득히 낀 짙은 구름이요, 만물에 부딪쳐 평등하게 보니 환하게 밝은 거울과 같다. 그러므로 금용(金容)이 자취를 나타내니 드디어 항성(恒星)이 빛남을 숨기고 월애(月愛)로 광명을 펴니 새벽 햇빛이 빛을 감춘다. 8음(音)을 내자마자 니건(尼揵)들의 바퀴가 어지럽고 7변(辯)을 잠깐 펴자 부나(富那)의 깃대가 쓰러진다. 그러므로 그 위신의 존중함과 이익의 크고 깊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수희(隨喜)하며 보고 듣기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모든 수행하는 이들은 항상 부처님을 관(觀)하라. 마음에 그 묘한 색상을 두되 눈 앞에 대한 듯하고 뜻으로 그 빛나는 거동을 생각하되 바로 지척에 계신 듯하라. 비록 법신(法身)은 둘이 없으나 응함을 따라서는 셋이라 말하나니, 상대에게로 달려가 두루 유도함에는 여기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우선 경전을 적고 다음에 영험을 말하리라. 이 이외에 다하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 글에 다 있다. 또 『관불삼매경』에서 말하였다. “오랜 옛날 무량한 세상 전에 보위덕상왕(寶威德上王)이라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다. 그 때 어떤 비구가 9명의 제자를 데리고 불탑에 가서 불상에 예배했다. 그 중의 어떤 불상이 장엄하고 뛰어나 관할 만했다. 그들은 예배를 마치고 자세히 바라보면서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그 뒤에 목숨을 마치고 그들은 다 동방의 보위덕상왕불 국토에 나되, 큰 연꽃 속에 가부하고 앉아 홀연히 화생(化生)하였다. 그 뒤에 그들은 항상 부처님을 만나게 되어 거기서 범행을 깨끗이 수행하여 염불삼매 바다를 얻고 그 삼매를 얻고는 부처님의 기별을 받았다. 그리하여 시방에서 각각 부처가 되었으니 동방의 선덕불(善德佛)은 바로 그 스승인 비구이다. 그리고 그 9명의 제자는 9방(方)의 부처가 되었다. 이른바 동남방에는 무우덕불(無優德佛)이요, 남방에는 전단덕불(栴檀德佛)이며, 서남방에는 보시불(寶施佛)이요, 서방에는 무량명불(無量明佛)이며, 서북방에는 화덕불(華德佛)이요, 북방에는 상덕불(相德佛)이며, 동북방에는 삼승행불(三乘行佛)이요, 상방에 광중덕불(廣衆德佛)이며, 하방에는 명덕불(明德佛)이다. 이런 10불은 다 과거에 탑에 예배하고 불상을 관하고 한 게송으로 찬탄했기 때문에 지금 시방에서 각각 성불한 것이다.” 또 『관불삼매경』에서 말하였다.
“오랜 옛날에 공왕(空王)이라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다. 그분이 열반하신 뒤에, 네 비구가 동학(同學)이 되어 불법을 익혔으나 번뇌가 마음을 덮어 불법의 보배 창고를 굳게 지닐 수 없어서, 악업을 많이 짓고 장차 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공중에서 소리가 있어 그들에게 말하였다. ‘공왕여래는 열반하여 그대들의 범한 죄를 구원할 이가 없다고 하나 그대는 지금 저 탑에 들어가 불상을 보아라.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공중의 이 소리를 듣고 탑에 들어가 불상 눈썹 사이의 백호상(白毫相)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그 광명과 색상이 지금의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부처님, 대인(大人)의 상으로 저의 죄를 소멸시켜 주소서.’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마치 태산이 무너지듯 온몸을 땅에 던져 모든 죄를 참회하였다. 그리하여 불탑에 들어가 불상의 백호상을 보고 참회한 인연으로 그들은 그 뒤에 80억 아승기겁 동안 악도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생(生)마다 항상 시방의 부처님을 뵙고 거기서 매우 깊은 염불삼매를 받아 지녔으며, 삼매를 얻으면 시방 부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 기별을 주셨으므로 지금 다 성불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의 묘희(妙喜)국토에는 아촉불(阿閦佛)께서 계시니 그는 곧 이 첫째 비구요, 남방의 환희(歡喜)국토에는 보상불(寶相佛)이 계시니 그는 곧 이 둘째 비구요, 서방의 극락(極樂)국토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계시니 그는 곧 이 셋째 비구요, 북방의 연화장엄(蓮華莊嚴)국토에는 미묘성불(微妙聲佛)이 계시니 그는 곧 이 넷째 비구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부디 이렇게 불상을 자주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 『가섭경』에서 말하였다. “오랜 옛날 아승기겁 전에 광명(光明)이라는 부처님께서 계셨다. 그분이 열반하신 뒤에 대정진(大精進)이라는 보살이 있었는데, 나이 16세였다. 바라문 종족으로서 단정하기 견줄 데 없었다. 어떤 비구가 흰 모포에 불상을 그려 대정진에게 주었다. 대정진은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여래의 형상조차 이처럼 묘하고 좋거늘, 하물며 그 진신(眞身)이겠는가? 나도 미래에 이런 묘한 몸이 되리라.’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집에 있으면 이런 몸을 얻기 어렵다.’ 곧 그 부모에게 출가하기를 청하였다. 부모는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 늙었고 아들이래야 너뿐인데 너마저 출가하면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그는 부모님께 아뢰었다.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나는 오늘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리에 앉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맹세하고 하루 내지 엿새째가 되었다. 부모와 친구와 8만 4천의 채녀(婇女)들은 동시에 슬피 울면서 대정진에게 예배하고 출가를 허락했다. 그는 출가하게 되자 곧 불상을 모시고 산에 들어가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고 그 화상앞에 가부하고 앉아 일심으로 여래와 다르지 않은 이 화상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불상이란 깨닫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도 다 이와 같아서 상(相)이 없고 상을 떠나 그 체성(體性)이 공적(空寂)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관(觀)하면서 밤낮을 지내는 동안 5통(通)을 성취하고 무량한 무애(無礙)의 변재를 얻고 보광(普光)삼매를 얻어 큰 광명을 갖추었다. 깨끗한 천안(天眼)으로 동방의 아승기 부처님을 보고 깨끗한 천이(天耳)로 부처님의 설법을 다 들으면서 7일 동안 지혜를 음식으로 삼았다. 모든 하늘은 꽃을 뿌려 그에게 공양했다. 그는 산에서 나와 촌락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설법했다. 2만 중생은 보리심을 내었고 무량한 아승기 사람은 성문과 연각의 공덕에 머물렀으며 부모ㆍ친척ㆍ권속들은 다 물러나지 않는 최상의 보리에 머물렀다. 부처님께서는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옛날의 그 대정진보살은 곧 지금의 나다. 불상을 관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부처가 된 것이다. 누구나 이렇게 관을 배우면 미래에 반드시 최상의 도를 얻을 것이다.’”
감응연(感應緣)[대략 쉬흔세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법이 동한(東漢)으로 옮겨 오고 교(敎)가 남오(南吳)로 흘러 들어옴으로부터 불상과 영상(靈祥)이 나라마다 가득했다. 그러나 여러 기록은 적고 있고 없음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영험의 자취는 대개가 다름이 없다. 지금은 차례를 따라 배열하면서도 가끔은 연대로 나누었다. 왜냐 하면 혹 상(像)은 진(陳)ㆍ진(晋)의 시대인데 역(曆)으로는 수(隋)ㆍ당(唐)으로 표하였고 교화는 사람에게 있으나 자취는 의복(倚伏)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차(銓次)를 얻지 못하고 인연에 의해 분별해 모으는 것이다. [이 권에서는 15개의 인연이다.]
동한(東漢)의 낙양(雒陽)에서 석가상(釋迦像)을 그린 인연. 남오(南吳)의 건업(建業)에서 금상(金像)이 땅에서 나온 인연. 서진(西晋)의 오군(吳郡)에서 석상(石像)이 강에 뜬 인연. 서진의 태산(泰山) 일곱 나라에서 금상(金像)의 상서로운 인연. 동진(東晋)의 양도(楊都)에서 금상이 물가에서 나온 인연. 동진의 양양(襄陽)에서 금상이 산에 논 인연. 동진의 형주(荊州)에서 금상이 멀리서 내려온 인연. 동진의 오흥(吳興)에서 금상이 물에서 나온 인연. 동진의 회계(會稽)에서 목상(木像)이 향기를 내 상서로운 인연. 동진의 오군(吳郡)에서 금상이 진(眞)을 전한 인연. 동진의 동액문(東掖門)에서 금상이 땅에 나온 인연. 동진의 여산(廬山)에서 문수(文殊) 금상의 인연.
원위(元魏)의 양주(涼州) 석상산(石像山)에서 가사가 나온 인연. 북량(北涼)의 하남왕(河南王)이 남쪽 언덕에 소상(塑像)한 인연. 북량의 저거(沮渠)에서 1장 6척의 석상이 나타난 인연.
ⓛ 동한(東漢)의 낙양(雒陽)에서 석가상(釋迦像)을 그린 인연 남제(南薺) 왕염(王琰)의 『명상기(冥祥記)』에서 말하였다.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신인(神人)을 보았다. 키는 2장(丈)이요 몸은 황금색이며 목에는 일광(日光)을 띠었다. 명제는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가 답하였다. ‘서방에 신인이 있으니 이름은 불(佛)이라 하는데 폐하(陛下)가 꿈에 보신 형상과 같습니다. 혹 그가 아닙니까?’ 그리하여 곧 사자를 천축(天竺)에 보내어 그 경상(經像)을 베끼게 하고 중하(中夏)라 표하고 천자와 왕후(王候)들이 모두 공경하고 섬겼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다 두려워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처음에 사자 채암(蔡愔)이 서역(西域)의 사문 가섭마등(迦葉摩騰) 등을 데리고 우전왕이 그린 석가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명제는 그것을 매우 소중히 여겼으니 꿈에서 본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공(畵工)을 보내어 여러 개를 그려 가지고 와서 남궁(南宮)의 청량대(淸凉臺) 즉 고양문(高陽門)의 현절수릉(顯節壽陵) 위에 모시고 공양했다. 또 백마사(白馬寺)의 벽에 천승만기(千乘萬騎)가 탑을 세 번 도는 그림을 그리니 여러 책에 실린 것과 같다.
② 남오(南吳)의 건업(建業)에서 금상(金像)이 땅에서 나온 인연 오(吳)나라 때 건업(建業)의 후원(後園) 평지에서 금상(金像) 한 구(軀)를 얻어 그 근원을 캐어 보았다. 이른바 주(周)나라 초년에 서역의 아육왕이 지은 것으로 강부(江府)에 묻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진(秦)ㆍ한(漢)ㆍ위(魏)로부터 불법이 남으로 온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불상을 얻어 땅에 묻었겠는가? 손호(孫皓)가 그것을 얻었으나 그는 원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고 변소 곁에 두고 병주(屛籌)를 잡게 했다. 4월 8일이 되어 손호는 장난으로 말하였다. ‘오늘은 8일인데 부처를 목욕시키는 날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머리에 오줌을 누었다. 그러자 곧 음부(陰部)에 종기가 생겨 몹시 아팠다. 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태사(太史)는 점을 치고 말하였다.
‘큰 신성(神聖)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신기(神祇)에 두루 제사했으나 모두 아무 효험이 없었다. 궁중의 시녀로서 본래부터 부처님을 믿는 이가 있었다. 그녀는 말하였다. ‘부처님은 큰 신인(神人)이십니다. 폐하께서 아까 더럽혔으니 빨리 비십시오.’ 손호는 그 말을 믿고 베개에 엎드려 귀의하고 간절히 참회했다. 조금 있다가 고통은 조금 나았다. 그리하여 마차를 보내 사문 승회(僧會)를 맞이해 오게 하고 궁중에 들어가 향탕(香湯)으로 불상을 씻고 간절히 참회했다. 그리고 건업사(建鄴寺)에서 공덕을 널리 닦았더니 병은 차츰 나았다.
③ 서진(西晋)의 오군(吳郡)에서 석상(石像)이 강에 뜬 인연 서진(西晋)의 민제(愍帝) 건흥(建興) 원년에 오군(吳郡) 오현(吳縣) 송강(松江) 호독(滬瀆) 어귀에 어부들이 모였는데 바다 가운데서 어떤 두 사람이 물 위에 떠서 노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해신(海神)이라 의심하고 무당을 불러 빈 뒤에 희생(犧牲)을 준비하여 맞이하러 갔다. 그러나 풍랑이 매우 심하므로 그들은 겁이 나서 돌아왔다. 또 어떤 오두미도(五㪷米道)3)인 황로(黃老)의 무리들은 말하였다. “그는 내 스승입니다.” 그리하여 함께 갔으나 풍랑은 여전했다. 오현의 주응(朱膺)은 부처님을 받드는 거사(居士)로서 이 말을 듣고 찬탄하였다. “장차 대각(大覺)님이 강림하시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깨끗이 재계한 뒤에 동녕사(東寧寺)의 백니(帛尼)와 신자 몇 사람과 함께 호독 어귀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리고 그것을 맞이하려 했다. 이에 풍파가 그치고 바다에 떠 있던 두 사람은 조수를 따라 포구로 들어왔다. 가까이 올수록 차츰 분명해져 비로소 그것이 석상(石像)임을 알았다. 손으로 받들어 건지려 하였으나 인력으로는 할 수 없었다. 미심쩍으나마 시험삼아 들어 보니 가벼이 일으켜져 수레에 실었다. 통현사(通玄寺)에 돌아와서 그 석상의 등에 새긴 것을 보니 ‘하나는 유위요 하나는 가섭’이라 했다. 왕의 시대는 알 수 없으나 글씨는 분명했다. 높이는 7척이었다. 법좌(法座)를 마련하고 두 석상을 봉안하려 했으나 수십 인이 들어도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아뢰어 청했더니 문득 일으킬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들리어 귀의하는 관리와 백성들이 열 집에 아홉 집은 되었다. 사문 석법개(釋法開)가 서역에서 와서 경전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동방에 두 석상과 아육왕의 탑이 있어서 그것에 공양하고 예배하는 이는 여러 겁의 죄를 제거할 수 있다.” 또 『별전(別傳)』에 말하였다. “천축의 사문 12인이 불상을 오군으로 보냈는데 그 상은 물에 떠서 빠지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다. 조정에 글을 올렸더니 오군에 두라 명령하였다.” [이상은 『고승전(高僧傳)』과 『정이기(旌異記)』 등에 나온다.]
④ 서진의 태산(泰山) 일곱 나라에서 금상(金像)의 상서로운 인연 서진(西晋)의 태산(泰山) 금여곡(金與谷)의 낭공사(朗公寺). 옛날 중원(中原)이 난리를 만나 영가년(永嘉年)에 그 통어(通御)를 잘못했다. 사문 석승랑(釋僧朗)이 있는 산에는 항상 구름이 끼여 있었다. 세상에서는 그 징조를 이상히 여겼다. 위엄스런 소리가 멀리 떨쳐 천하가 다 알고 들었다. 이 때에 주인이 없어 영웅들이 판을 쳤다. 7국의 종묘(宗廟)에서 공경하고 복을 빌었다. 모든 나라에서 금동상(金銅像)과 또 보물을 보내었다. 승랑은 삼가 예를 다해 섬기면서 늘 상서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한 당(堂)에 있는데 창문이 항상 열려 있으나 새들도 가까이 오지 않고 더러움도 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상하다고 감탄하는데 그 절은 지금 350년이 다 되어간다.
⑤ 동진(東晋)의 양도(楊都)에서 금상이 물가에서 나온 인연 동진(東晋)이 성제(成帝) 함화(咸和) 때에 단양(丹陽)의 윤고리(尹高悝)는 시궐(市闕)을 왔다 갔다 했다. 후교포(候橋浦)를 지날 때마다 이상한 광명이 나타났다. 아전을 시켜 찾다가 금상 한 구(軀)를 얻으니 그것은 옛날 서역에서 만든 것으로서 그 빛나는 발등이 빠져 없어졌다. 고리는 수레에서 내려 그 금상을 싣고 장간항(長干巷) 어귀에 이르렀을 때 소가 다시는 더 가지 않으려 했다. 고리는 우부를 시켜 소가 가는 대로 맡겨 두라 했더니, 소는 장간사(長干寺)로 달려갔다. 그래서 그 불상을 거기에 봉안했다. 양도(楊都)가 모두 기뻐하면서 권장하고 깨치는 이가 많았다. 그리고 밤중만 되면 그 금상은 갑자기 금색 광명을 놓았다. 연말에 임해현(臨海縣)의 어부 장손세(張孫世)는 바다 위에서 구리쇠 연꽃 받침의 붉은 빛이 떠도는 것을 보고 곧 배를 저어 가서 건져 올려 모두 상대(上臺)로 보냈다. 왕이 시험해 불상 발에 신겨 보게 했더니 흡사 꼭 맞았다. 그 뒤에 서역의 다섯 스님이 석장(錫杖)을 흔들며 고리에게 와서 말하였다. “내가 전에 천축에 놀다가 아육왕의 상(像)을 얻어 업군(鄴郡)에 이르러 난리를 만나 강가에 묻어 두었습니다. 지금 길이 트여 찾아 보았으나 어딘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요새 꿈을 꾸었더니 그 상이 ‘나는 강동(江東)으로 가는 도중에 고리가 주어서 지금은 아육왕사(阿育王寺)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와서 한 번 예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고리는 그들을 데리고 절에 갔다. 다섯 스님은 그것을 보고 감격해 울었고 그 상은 빛을 놓아 당내(堂內)를 비추었으며 그들은 그 상을 돌았다. 그 절의 스님이 말하였다. “본래는 원광(圓光)이 있었는데 지금은 먼 곳에 있습니다. 그것도 곧 올 것입니다.” 다섯 스님은 곧 거기 있으면서 공양했다. 함화(咸和) 원년에 남해(南海) 교주(交州) 합포(合浦)에 구슬 캐는 사람 동종지(蕫宗之)가 늘 바다 밑에서 빛이 떠 올라 오는 것을 보다가 그것을 찾아 얻었다. 이 일을 나라에 알려 간문제(簡文帝)가 이 불상에 맞추었더니 그 구멍도 똑같고 광명 빛깔도 다르지 않았다. 무릇 40년 동안이나 동서에 따로 있다가 그 영감으로 빛나는 받침이 비로소 서로 맞았다. 이 불상의 화대(華臺)에 서역(西域)의 글이 있는데 도속(道俗)들이 모두 와서 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삼장법사 구나발마(求那跋摩)가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옛날의 범서(梵書)인데, 이 불상은 아육왕의 넷째 딸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와관사(瓦官寺)의 사문 혜수(慧邃)가 그것을 묘사하려 했다. 그 절 주지승이 그 금색을 해칠까 두려워하여 혜수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의 방광이 몸을 돌아 서쪽으로 향할 수 있다면 허락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당신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혜수는 지성으로 기도했다. 밤중에 이상한 소리가 있어 문을 열고 보았더니 불상은 큰 광명을 놓으면서 서쪽을 향하고 앉아 있었다. 이에 묘사하기를 허락하고, 그는 수십 구(軀)를 묘사해 여러 곳에 유포했다. 양무제(梁武帝) 때에 칠락천(七樂天)과 두 보살을 거기에 보태었다. 진(陳)나라 영정(永定) 2년에 왕림(王琳)이 강포(江浦)에서 군사를 모아 금릉(金陵)으로 향하려 하므로 무제는 장군을 시켜 강을 거슬러 가게 했다. 군사가 출발할 적에 불상이 자꾸 움직이면서 가만 있지 않았다. 나라에 아뢰어 무제가 조사해 보았더니 사실이었다. 얼마 안 되어 싸움도 하지 않고 왕림의 군사는 다 해산하고 왕림은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났다. 그리하여 그 상류를 크게 평정했으니 그러므로 그 불상이 몸을 움직여 그것을 표한 것이다. 또 천가(天嘉) 때에 동남에서 군사가 일어났으므로 왕은 불상 앞에서 빌었다. “저 흉한 무리들을 물리쳐 주소서.” 말을 마치자 광명이 온 집을 비추었다. 오래지 않아 동양(東陽)ㆍ민월(閩越)들이 크게 평정됐다. 사문 혜효(慧曉)는 장간(長干)의 영수로서 그 교화가 미치는 곳은 다 바람이 불어 가는 듯했다. 이에 중각(重閣)을 세우고 장식을 극치에 이르게 하였는데 올라가 바라보니 눈부시게 만들었다. 지덕(至德)의 초년에 방부(方趺)를 만들어 더하니, 진(晋)나라에서 진(陳)나라까지 5대의 왕과 신하가 모두 귀의하고 공경했다. 몹시 가물 때에는 불상을 궁중에 모시고 제련(帝輦)에 태우고 그 위를 기름을 뿌리면서 비를 빌면 중간에 비가 흠뻑 쏟아졌으므로 언제나 기후를 잃지 않았다. 진(陳)나라의 운수가 다하자 어느덧 거짓 노래가 퍼졌다. 정명(禎明) 2년에 불상 얼굴이 서쪽으로 돌아갔다. 바로 해놓아도 다시 돌아갔다. 이 소문을 듣고 왕은 그것을 태극전(太極殿)으로 맞아들이고 재(齋)를 베풀고 도를 행했다. 그 불상에는 7보의 관(冠)이 있어 주옥으로 장식하여 3두(㪷)의 무게였으며 그 위에 비단 모자는 머리 위에 그대로 있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향을 사르며 빌었다. “만일 나라에 불상사가 있으면 그 보관을 도로 벗어서 그 조짐을 보이소서.” 그리고 보관을 머리에 씌워 두었다. 이튿날 보니 보관은 어제처럼 손에 걸려 있었다. 군신들은 크게 놀라 얼굴빛이 변했다. 그리하여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자 온 나라 사람들은 맨머리에 손을 뒤로 묶고 서쪽으로 옮겨갔으니 불상을 가져오게 하여 궁중에 모시고 공양하면서 몸소 불상을 모시고 서서 명령하였다. “짐(朕)은 늙어서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유사(有司)를 시켜 좌상(坐像)을 만들되 형상은 같게 하고 그 본래 입상(立像)은 흥선사(興善寺)로 보내라.” 좌상이 이루어지자 전(殿)이 커서 당양(當陽)할 수 없으므로 곧 북면에 두었다. 이튿날 보니 그것은 정양(正陽)에 있었다. 대중이 이상히 여겨 도로 북면으로 옮겼다. 이튿날 보니 다시 본래처럼 남면하고 있었다. 대중은 경솔한 생각을 부끄러워하여 사과하였다. 현재에 그것을 복사하는 일이 성행하고 있다.
⑥ 동진의 양양(襄陽)에서 금상이 산에 논 인연 동진(東晋) 효무제(孝武帝)의 영강(寧康) 3년 4월 8일에 양양(襄陽) 단계사(檀溪寺)의 사문 석도안(釋道安)은 그 성대한 덕이 밝게 드러나고 명성이 세상에 퍼졌다. 곽서정사(郭西精寺)에서 1장 8척의 금동(金銅)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주조(鑄造)하고 이듬해 늦겨울에 장식을 다 마쳤다. 진(晋)나라의 진군장군(鎭軍將軍) 옹주 자사(雍州刺史)인 극회지(郄恢之)는 위양부(莅襄部)의 찬격 복문(贊擊福門)을 세웠다. 그 불상은 밤에 나와 서쪽으로 만산(萬山)에 놀았는데 발자국 하나를 남겼으니 그 무늬가 돌에 박혔다. 그 고을의 도속(道俗)들이 한꺼번에 나와 놀라면서 맞이해 본래 자리에 봉안하고 공양했다. 그 뒤에 저녁에 그것은 절문에 나와 있었다. 대중은 모두 놀라 이상히 여기고 회지는 절 이름을 고쳐 금상사(金像寺)라 했다. 양(梁)나라 보통(普通) 3년 4월 8일에 왕은 명령하여 건흥원(建興苑)에서 금동의 화부(華趺)를 만들었다. 높이는 5척 9촌이요 너비는 9척 8촌이었다. 장엄을 마친 뒤에 강물을 거슬러 보내어 불상의 발을 받들게 하고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니, 유효의(劉孝儀)가 글을 짓고 소자운(蕭子雲)이 글씨를 썼다. 천하에 제일이라 하며 그 비는 현재에도 있다. 불법을 사태(沙汰)한 주무(周武) 때에 이르러, 건덕(健德) 3년 갑오년에 태원공 왕병(太原公王秉)이 양주 자사(襄州刺史)가 되었다. 그 부진장(副鎭將) 상개부장(上開府長) 손철(孫哲)은 본래 불법을 믿지 않았다. 불상에 영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그것을 먼저 파괴해 버리려고 했다. 읍중의 사녀(士女)들과 쫓겨난 승니(僧尼)들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우는데 그 소리가 길을 메웠다. 손철은 도속(道俗)들이 비탄하는 것을 보자 분노가 더욱 치밀어 시종(侍從)들을 보내어 빨리 부셔 버리라 했다. 먼저 백 사람을 시켜 밧줄로 불상의 목을 매어 잡아끌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손철은 잘못해서 그런가 생각하고 끄는 자들을 몽둥이로 각각 1백 번씩 때리면서 먼저처럼 끌고 또 3백인을 더했으나 불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손철은 성이 더욱 나서 또 5백 인을 더해 잡아끌게 하니 비로소 불상은 쓰러지면서 땅을 크게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겁을 내어 떨고 손철은 혼자 기뻐 날뛰면서 곧 부셔 버리게 하고, 시원하다 소리를 질렀다. 이 소식을 자사에서 보고하려고 말을 달려 가다가 겨우 1백 보쯤 가다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벙어리가 되어 직시(直視)하면서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다가 밤이 되어 죽었다. 도속들은 더욱 쾌하다고 외쳤다. 손철이 불상을 부술 때 그 겨드랑이 밑의 드리운 옷 안에는 ‘진태원(晋泰元) 19년 갑오년 월(月) 초하루 비구 도안이 양양(襄陽) 곽서정사(郭西精舍)에서 1장 8척의 금상을 만들었다. 이 상은 갑자(甲子)를 세 번 지나 180년에는 멸할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뒤에 연월을 계산해 보았더니 그 흥폐(興廢)가 다 같았다. 도안 성인의 기록이 거짓이 아님을 참으로 알 수 있다. 지금은 본래 있던 절 이름을 계법사(啓法寺)라 하고 엎어진 돌에 사람들이 판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수(隋)나라가 망할 때에 변방을 굳게 지키던 양양 유수 두로포(竇盧褒)는 변방의 일부를 점령하고 왕세충(王世充)에게 붙었다. 계법사(啓法寺)의 헌법사(憲法師)는 사속(士俗)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두로포에게 여러 번 충고해 당나라에 투항하게 했다. 그러나 두로포는 듣지 않았다. 헌법사는 사속들과 의논하고 내외에 사람을 보내어 가만히 통했다. 드디어 서울서 군사를 내어 양양에 왔다. 두로포가 굳게 지켜 세 번이나 군사가 왔어도 두로포의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뒤에 헌법사의 밀통한 사정을 알고 두로포는 가만히 헌법사를 죽여 버렸다. 헌법사는 죽으면서 그 제자 소부루(蘇富婁)에게 말했다. “나는 너의 아버지와 함께 도안 스님이 만든 금상을 부수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 아직 그 유적(遺迹)을 잇지 못했다. 내가 죽은 뒤에 네가 그것을 만들어라.” 무덕(武德) 4년에 관군(官軍)이 포위해 정세가 급해지자 두로포는 항복하면서 비로소 헌법사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억울하게 죽였으니 얼마나 참혹한가? 이는 나라에 대해 공이 있으나 그것을 알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성이 함락되자 소부루는 조용히 속인 복장으로 변장을 했다. 헌법사에게 있던 가사와 집물(什物)들을 모두 챙기고 그 불상을 모조하려 하였으나 어떤 모습인지 몰랐다. 그러나 곧 한 번 주조한 것이 성공되어 조금도 결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 불상을 만들 때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오얏꽃이 비처럼 내려 온 절 안에 가득했다. 소부루는 성질이 영리하고 재물이 많았다. 그래서 또 그 집에서 금동 미륵불상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10척이 넘었다. 그 뒤 그의 꿈에 헌법사가 불상을 또 만들라 했다. 그래서 법운사(法雲寺)에서 큰 불상을 만드니 높이가 59척이었다. 이 사실은 다른 데서 말한 것과 같다. 옛날 수나라 초년에 진효왕(秦孝王) 준(俊)이 양양을 진압하고, 도안이 만든 불상이 매우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을 보내 그것을 복사하여 장안(長安)의 연흥사(延興寺)에서 그대로 만들었다. 처음 만들던 날 저녁에 또 하늘의 음악소리가 비처럼 내려와 큰 신령스런 상서가 있었다. 그 불상은 지금도 연흥사에 있다.
⑦ 동진의 형주(荊州)에서 금상이 멀리서 내려온 인연 동진(東晋)의 목제(穆帝) 영화(永和) 6년 정미[감장력(勘長曆)에 의하면 3년이다.] 2월 8일 밤에 형주(荊州) 성 북쪽에서 불상이 나타났다. 높이는 7척 5촌이요, 광부(光趺)를 합하면 1장 1척이다.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 영화 5년에 광주(廣州)의 상인(商人)이 짐을 다 풀고 난 뒤에 그 배가 가벼워진 것을 한탄했다. 밤중에 어떤 사람이 배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 가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배는 저절로 무거워져 더 실을 수가 없었다. 그 이상함에 놀랐으나 어쩐 일인 줄 몰랐다. 여러 배들 중에서 제일 빠르기 때문에 항상 앞섰다. 오래지 않아 저궁(渚宮)에 닿아 물가에 겨우 대었다. 밤에 또 어떤 사람이 배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듯 했다. 배는 다시 가벼워졌다. 아까 그 불상이 나타나자 그 징조임을 비로소 알았다. 그 때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이 서협(西陜)을 진압하고 지방 장관이 되어 그 불상을 몸소 섬기니 그 고을이 떠들썩하였다. 온 절의 스님들이 다 다투어 불상을 모시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사(長沙)의 태수(太守) 강릉(江陵) 등준(謄畯)[등사(螣舍)라고도 하였다.]이 영화(永和) 2년에 집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 액자에 고을 이름을 쓰고 도안(道安) 법사(法師)를 받들면서 양주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한 감호(監護)를 청하였다. 도안이 그 제자 담익(曇翼)에게 말하였다. “형초(荊楚)의 사서(士庶)들이 비로소 불법을 믿으려 하는데 그대 아니고는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떠나라.” 담익이 석장(錫杖)을 들고 남방으로 가서 1년 동안에 절은 지었으나 불상을 모시지 못해 늘 한탄하면서 말하였다. “아육왕사(阿育王寺)의 불상이 인연을 따라 유포한다는데 정성만 지극하면 어찌 강림하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그러나 이내 형주성에 불상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고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이 불상은 나의 본래 서원이다. 반드시 우리 장사(長沙)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실로 마음으로 기약할 것이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자 여럿이 모두 말하였다. “반드시 그 말대로 되어 증험이 멀지 않을 것이다.” 담익이 향을 사르고 예배하며 빌고 제자들 세 사람에게 불상을 들게 했다. 불상은 가뿐히 들렸다. 그래서 본사에 안치하고 도속이 모두 기뻐하였다. 진(晋)나라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에 비로소 화부(華趺)를 만들었다. 진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때에 은중감(殷仲堪)이 자사(刺史)가 되어 밤중에 절 서문으로 나갔더니 순라군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있어 물어도 답을 하지 않으므로 칼로 쳤더니 금석 소리가 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불상이었습니다.” 칼로 가슴을 쳤으므로 거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계빈(罽賓)의 스님 난타선사(難陀禪師)는 견식이 많았다. 그는 촉(蜀)에서 형주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불상에 예배하고 오랫동안 탄식했다. 담익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답하였다. “근자에 천축에서 이것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이 먼 곳에까지 왔을까?” 그 연월을 따져 보니 모두 꼭 맞았다. 그 불상의 광배(光背)를 보았다. 거기에 ‘아육왕이 만들었다’고 했다. 이 새김을 보고 모두 더욱 공경하고 존중했으니, 담익이 생각을 내어 감응을 얻은 징조였다. 담익이 병이 위독하자 그 불상의 광명이 갑자기 사라졌다. 담익은 말하였다. “불상이 이런 상을 보이니 병이 반드시 낫지 않을 것이다. 그 광명은 다른 곳에 가서 다시 불사를 행할 것이다.” 열흘 만에 담익이 죽었다. 그 뒤에 스님이 광명을 본떠 다시 금상을 만들었다. 송나라 효무제 때에 그 불상은 큰 광명을 놓았으며 강동(江東)의 불법이 한 때에 매우 성했다. 송(宋)나라 명제(明帝) 태시(太始) 말년에 그 불상이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명제가 죽고 그 다음 임금은 난폭하고 방자하다가 곧 송제(宋齊)의 혁명을 만났다. 형주 자사 심유지(沈悠之)는 처음에 불법을 믿지 않고 승니(僧尼)를 사태(沙汰)하였다. 장사(長沙)의 한 절의 천여 명 스님 가운데 속(俗)으로 돌아가야 할 자가 수백 명이 되었으므로 대중이 다 두려워하고 어른과 아이들은 슬피 울었다. 불상은 그 때문에 5일 동안 땀을 흘려 그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침려사(沈呂寺)의 대덕(大德) 스님 현창(玄暢) 법사에게 듣고 찾아가 그 까닭을 물었다. 현창 법사는 답하였다. “성인은 멀어도 근심이 사무치지 않음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단월들의 믿지 않는 마음을 충고하기 위해 이런 징조가 있는 것이다.” 또 물었다. “그것은 어느 경전에서 나온 말입니까?”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나온 말이다.” 유지는 경전을 찾아보고 매우 기뻐하여 곧 사태를 멈췄다. 제(齊)나라 영원(永元) 2년에 진군(鎭軍) 소영주(蕭潁冑)가 양고(梁高)와 형주 자사(荊州刺史) 남강왕(南康王) 보융(寶融)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 불상이 법전 밖에 나가 뜰로 내려가려 했다. 두 스님이 그것을 보고 놀라 법전 안으로 도로 들여 모셨다. 3년 만에 영주는 갑자기 죽고 보융도 왕위에서 쫓겨났고 복은 고조(高祖)에게 돌아왔다. 양(梁)나라 천감(天監) 말년에 절 주지 도악(道岳)이 한 속인과 함께 탑 주위의 풀을 다 매고는 다음 탑문을 열고 보았다. 불상이 나와 감실(龕室)을 돌고 있었다. 도악이 가만히 예배하고 속인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했다. 그리고 법당을 다 열고 보았더니 불상은 여전히 본래 자리에 있었다. 양(梁)나라 파양왕(鄱陽王)이 형주(荊州) 자사가 되어 여러 번 성 안에 들어와 큰 공덕을 세우기를 빌었다. 병이 들게 되어 그를 맞이하려 했으나 아무리 들어도 일어나지 않더니 며칠 안 되어 죽었다. 고조(高祖)는 옛날 형협(荊陜)에 있으면서 일찍부터 간절한 정성을 들여 여러 번 위로 보내어 맞이하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중대통(中大通) 4년 3월에 백마사(白馬寺) 스님 진주서 하사(璡主書何思)를 보내어 멀리 향과 꽃을 가지고 가서 공양하고 간절한 정성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날 밤에 광명을 놓으면서 사자를 따라가는 듯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승접(承接)하자 다시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거듭 뵙고 간절히 빌어 비로소 따라갔다. 사부대중이 그리워하는 정으로 강가까지 전송했다. 23일에 금릉(金陵)에 도착하니 서울서 18리였다. 임금이 몸소 나와 맞이하고 불상은 길에서 광명을 놓아 계속해 끊이지 않았다. 도속들은 기뻐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이라 감탄했다. 3일 동안 궁중에서 정성을 다해 공양했다.[혹은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또 무차대재(無遮大齋)를 베풀었다. 27일에는 대통문(大通門)을 나가 동태사(同泰寺)로 들어갔다. 그날 밤에 불상은 크게 광명을 놓았다. 나라에서 명령해 동태사의 대전(大殿) 동북쪽에 따로 전각을 세웠다. 세간에 양하(兩廈)로 7보장(寶帳)의 자리를 만들고 불상을 봉안했다. 또 금동 보살 2구(軀)를 만들고 산을 쌓고 못을 파고 기이한 나무를 심고 괴이한 돌을 놓았다. 나르는 듯하는 다리와 난간이며 협전(夾殿)에 두 섬돌이었다. 또 구리가마솥 한 쌍을 만들었는데 각각 30섬들이었고 삼면의 중각(重閣)은 춤추듯 영롱했다. 중대동(中大同) 2년 3월에 임금은 동태사로 나가 법회를 열어 설법하게 하고 모든 전각을 돌면서 예배했다. 황혼에 비로소 이 서상전(瑞像殿)에 이르렀다. 임금이 섬돌에 오르자 이 불상은 크게 광명을 놓아 대나무와 산수를 비추어 모두 금색을 만들면서 밤중까지 쉬지 않았다. 동태사가 화재를 만나 모든 당방(堂房)이 다 탔지만 오직 불전만은 그대로 있었다. 태청(太淸) 2년에 불상이 크게 땀을 흘렸다. 그 해 11월에 후경(候景)의 난리가 일어나 대보(大寶) 3년에 평정되었다. 장사사(長沙寺) 스님 법경(法敬) 등이 불상을 맞이해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다시 본사에 봉안했다. 양나라 대정(大定) 7년에 불상이 또 땀을 흘렸다. 이듬해 2월 송나라 선제(宣帝)가 죽었다. 천보(天保) 3년에 장사사에 불이 번져와서 온 절이 불꽃에 쌓였다. 불상을 구하려 했으나 옮길 방법이 없었다. 원래는 그것을 들 때는 1백 사람이 있어야 했으나 그 날은 여섯 사람이 거뜬히 들 수 있었다. 천보 15년에는 명제(明帝)가 불상을 궐내로 모셔 들여 예참(禮懺)하여 명감(冥感)하였다. 23년에 명제가 죽고 다음 임금 소종(蕭琮)이 그 불상을 인수궁(仁壽宮)으로 옮겼는데 또 크게 땀을 흘렸다. 광운(廣運) 2년에 양나라가 망했다. 개황(開皇) 7년에 장사사(長沙寺)의 스님 법천(法蒨) 등이 다시 맞이하여 옛절로 돌아갔다. 개황 5년에 금주 자사(黔州刺史) 전종현(田宗顯)이 절에 와서 예배할 때 불상이 광명을 놓았다. 자사는 발심하여 정북(正北)에 대전(大殿) 13칸과 동서의 협전 9칸을 지었다. 운반될 제목은 형주의 상류 5천여 리에 있었다. 재목을 운반해 강에 띄워 버리면 그것은 형주까지 흘러 와서 저절로 언덕에 닿고 아무리 풍파가 쳐도 끝내 멀리 가지 않았다. 그것을 끌어 올려 절을 지을 때 기둥의 지름은 3척이요 주초의 너비는 8척이니, 이 또한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다. 대전(大殿)은 침향의 휘장을 두르고 가운데는 13개의 보배장막을 치고 모두 금으로 장엄했다. 나아가서는 서까래ㆍ도리ㆍ천장에까지도 모두 보배꽃을 사이사이에 나열하였다. 그 동서의 두 전각에는 불상이 있는데 다 전단향 휘장을 둘렀고 가운데는 보배장막과 꽃횃불이 있어 다 순금으로 되어 크고 화려하기가 천하에 제일이다. 대업(大業) 12년에 불상이 자주 땀을 흘렸다. 그 해에 도적 주찬(朱粲)이 모든 고을을 빼앗고 형주읍에 와서 절 안의 대전(大殿)에 진을 쳤다. 적은 성 북쪽에 높이 올라가 성중으로 활을 내리 쏘므로 유수(留守)는 매우 걱정했다. 밤에는 불화살로 태우므로 성중의 도속들이 모두 슬퍼하고 불상이 없어졌다. 그날 밤에 뜻밖에 불상이 성을 넘어 들어와 보광사(寶光寺) 문 밖에 서 있었다. 우선 불상이 남아 있는 것을 본 성내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적이 다 흩어진 뒤에 보배 불상이 있던 곳은 하나도 타지 않고 불이 번지지 않았다. 지금 그 자리에 법전을 세웠으나 전의 것만 못하다. 위량(僞梁) 소선(蕭銑)의 봉명(鳳鳴) 5년에 위송(僞宋)ㆍ왕양(王楊)ㆍ도생(道生) 등이 절에 와서 예배할 때 불상이 크게 땀을 흘리되 머리에서 비 오듯하면서 종일 그치지 않았다. 그 해 9월에 당나라 군사가 촉강(蜀江)에서 내려왔다. 그 달 20일에 이 절의 법통(法通) 스님이 당나라 운수가 트이기를 바라 한 상서를 구하여 불상을 돌고 도를 행했다. 그날 밤에 불상은 광명을 놓아 법당 안에 가득 찼다가 25일에 이르러 빛이 차츰 사라졌다. 그 날 조군왕(趙君王)의 군사가 성내에 들어왔으니, 이것도 그 경사스러움이 다 같다. 그러므로 광명을 내어 좋은 징조로 삼은 것이다. 그 달이 몹시 가물었는데 재목(宰牧)이 정성을 들여 모두 감응이 있었다. 정관(貞觀) 6년 6월에 크게 가물었다. 도독(都督) 응국공(應國公) 무확(武彠)이 불상을 맞이해 7일 동안 재를 베풀고 도를 행했다. 관료들은 아래 위에서 불상 앞에 서서 일심으로 불상을 바라보았다. 얼마 있다가 구름이 사방으로 퍼지고 비가 마구 쏟아져 그 해는 대풍이었다. 도독은 이에 황금을 희사하여 불상을 다시 짓고 연(輦)과 번기와 꽃 등 모든 장엄을 갖추었다. 그것은 지금 강릉의 장사사에 있다. 또 외국의 동상이 있어 높이가 7척쯤 되는데 옛것과 달라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 도안 법사가 석성(石城)의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보낸 것으로서, 그 제자를 시켜 그 상투에서 사리 한 알을 얻었는데 그것은 빛을 내었다.
⑧ 동진의 오흥(吳興)에서 금상이 물에서 나온 인연 동진(東晋) 주기(周玘)의 자(字)는 선패(宣佩)이니 의흥양선(義興陽羨) 사람이요, 진(晋)나라 평서 장군(平西將軍) 처(處)의 둘째 아들로서 오흥 태수(吳興太守)가 되었다.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었으나 그 딸이 더욱 독실했다. 그 집 종이 물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금빛이 냇물을 비치며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물을 던져 한 금상(金像)을 얻었다. 높이는 3척 쯤이요 형상은 장엄하며 물에 떠 있으면서 아무리 끌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곧 달려가 주기에게 알리어 주기는 그 딸에게 알렸다. 그래서 배에 태워 그 딸을 보내어 그것을 맞이하게 했다. 딸은 멀리서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예배하고 손으로 당겨 배에 올리고 집에 돌아와 공양했다. 그날 밤에 딸은 꿈에 부처님이 왼쪽 무릎을 앓는 것을 보았다. 깨어나 부처님 무릎을 보았더니 과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곧 금비녀로 그것을 때웠다. 그 뒤에 주기는 그 딸을 오군(吳郡)의 장징(張澄)과 결혼시키고는 직접 불상을 가지고 따라가서 ‘장씨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그 뒤에 딸이 죽었다. 조금 있다가 자색 구름이 내려와 그 딸을 데리고 공중으로 올라가서 멀리 사라졌다. 장징의 증손은 무술로 일을 삼아 손은(孫恩)의 난리를 평정시키고 오랫동안 재계를 폐하고 불상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광명은 아직 집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온 집이 다 참회하고 지성껏 빌었다. 어떤 노파가 불상을 가지고 팔러 왔는데 값이 매우 쌌다. 그것이 먼저의 그 불상임을 알고 값을 주고 사려는데 노파는 간 곳이 없고 불상도 없어졌다. 그 광명은 장씨 집에 있었다고 한다.
⑨ 동진의 회계(會稽)에서 목상(木像)이 향기를 내 상서로운 인연 동진(東晋)의 회계산(會稽山) 북쪽에 있는 영보사(靈寶寺)의 목상(木像)은 징사(徵士)인 초국(譙國) 대규(戴逵)가 만든 것이다. 대규가 중세(中世)에 지은 목상은 대개가 소박하고 서툴러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본래부터 깨끗한 믿음이 있고 또 생각이 정교하여 비로소 새것을 창제해 보려 했다. 그래서 풍만하고 아름다운 위용(威容)을 만들기에 온 심력을 다 기울여 여러 해 만에 이루니, 그것은 동하(東夏)에서 만든 상의 극치로서 이 이상의 상이 일찍이 없었다. 도속(道俗)들이 볼 때 마치 친히 뵙는 것 같았다. 고평(高平)의 극가빈(郄嘉賓)이 향을 들고 주문을 외웠다. “만일 이것이 유상(有常)이면 다시 성안(聖顔)을 뵙겠지만 만일 무상이면 미륵불 앞에서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가 들고 있는 향이 그 손에서 스스로 탔다. 향기로운 연기가 바로 올라가 구름 끝에까지 이르면서 남은 향기가 감돌아 온 절 안에 가득했다. 이리하여 도속들이 모두 감탄했으며 그 상은 지금 월주(越州)의 가상사(嘉祥寺)에 있다.
동진의 오군(吳郡)에서 금상이 진(眞)을 전한 인연 동진(東晋)의 태원(太元) 2년에 사문 지혜(支慧)는 오군(吳郡)의 소령사(紹靈寺)에서 석가모니의 1장 6척의 금상을 만들기로 했다. 절 남쪽에 높이 구멍을 파고 용주(鎔鑄)를 시작했다. 금상이 다 이루어져 옮기려 했다. 밤중의 구름 속에 맑고 밝은 꽃 여섯 송이가 나왔다. 흰빛이 곱게 피어나 사방에 나부끼면서 땅에는 닿지 않고 도로 거두어 위로 올라갔다. 새벽이 되자 연기 같은 흰 구름이 용주(鎔鑄)의 구멍에서 나왔다. 구름 속에서 천천히 구멍을 돌고, 상 앞에 이를 때마다 우러러보고 서성거리면서 마치 귀의하고 공경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맑은 바람과 좋은 경치에 보슬비까지 겹쳐 향기를 더하였다. 불상이 자리에 들자 용은 곧 하늘로 올라갔다. 원가(元嘉) 초년에 징사인 초국(譙國) 대옹(戴顒)은 옛것의 촌스러운 것을 싫어해 새로 불상을 보수했다. 손과 얼굴의 위상(威相)이 진신(眞身)과 같았다. 어깨 이상은 옛것보다 6촌이 짧으며 발다닥은 한 치쯤 깎아 버렸다 한다.
동진의 동액문(東掖門)에서 금상이 땅에 나온 인연 동진(東晋)의 의희(義熙) 원년에 사도(司徒) 왕밀(王謐)은 궁중에 들어가 동액문(東掖門)에 살았다. 어떤 시인(寺人)이 동문에서 오색 광명이 땅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놀라 땅을 팠다가 오래된 동반(銅盤)을 얻었는데 그 반 밑에 금상(金像)이 있었다. 높이는 4척이요 광부(光趺)도 갖추고 있었으니, 이것은 또 손호(孫皓)의 아육왕상(阿育王像)과 같았다. 곧 그것을 받들고 궁중으로 들어갔다. 송조(宋祖)는 원래 불교를 그다지 믿지 않았으나 이 불상을 얻고는 공경하고 기뻐하면서 몸소 예배하고 섬기었다. 이 불상은 본래 와관사(瓦官寺)에 있던 것을 뒤에 용광사(龍光寺)로 옮긴 것이라 한다.
동진의 여산(廬山)에서 문수(文殊) 금상의 인연 동진(東晋) 여산(廬山)의 문수사리보살상(文殊師利菩薩像). 옛날 진(晋)나라의 명신(名臣) 도간(陶侃)의 자는 사행(士行)이다. 건여(建旟) 남해(南海)에 어떤 어부가 저녁마다 바닷가에서 광명을 보고 곧 도간에 알렸다. 도간은 사람을 보내어 찾다가 금상(金像)을 발견했다. 배를 타고 가까이 가서 그 명(銘)을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아육왕이 만든 문수사리보살상이었다. 옛날 전하는 말이 있다. 아육왕이 이 나라를 다스릴 때 귀왕(鬼王)의 감옥 제도를 본떠 그 법이 매우 혹독했다. 문수가 나타나 가마솥 안에 있었다. 불이 왕성하게 일어났으나 물은 맑고 거기에서 푸른 연꽃이 나왔다. 아육왕은 감동하고 깨달아 곧 옥을 헐고는 8만 4천 개의 탑을 만들고 이 수와 같이 상(像)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그 중의 하나이다. 도간은 처음에는 인과(因果)를 잘 믿지 않았으나 이 서상(瑞像)을 보고는 드디어 크게 존중하여 이 상을 무창(武昌)의 한계사(寒溪寺)로 보내었다가 뒤에 형주(荊州)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내어 맞이하게 된 것이다. 보살상이 처음에 수레에 있을 때는 몇 사람이면 들 수 있었는데 지금은 수십 명의 장부를 더 보태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아 다시 하인을 보태고 상여로 끌어 겨우 배에 올릴 수 있었으나 배가 곧 침몰했다. 그래서 도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시 본사로 돌려오기로 하였을 때는 두세 사람이 거뜬히 들 수 있었다. 사문 혜원(慧遠)이 삼가 위의를 갖추어 여산으로 맞아들일 때는 아무 장애도 없었으니, 곧 성령(聖靈)의 감응이 내릴 때는 오직 정해진 사람에게만 인가한다. 그러므로 속담에 “도(陶)는 검웅(劍雄)을 생각하고 상(像)은 신(神)으로 표(標)한다. 구름은 날고 진흙은 머무나니 아득하기 얼마나 먼고”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수(隋)나라 말년에 도적이 일어나 스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름을 모르는 어떤 노승이 그 서상(瑞像) 앞에 와서 하직을 고했다. 상(像)이 말하였다. “당신은 늙었소. 그저 여기 있으시오. 어떻게 이별하겠소.” 노승은 그 말대로 거기 있었다. 그 때 동도충(董道沖)의 도적이 강주(江州)에 침입하여 그 무리들이 산에 들어와 재물을 강요하면서 이 노승을 붙들고 금을 요구했다. 노승은 아무것도 없다 했다. 그들은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 노승은 말하였다. “이대로 타 죽으면 시체가 절을 더럽힐 것이니 절 밖에서 죽이면 어떠냐?” 그러자 그들은 끌고 나와 죽이려 했다. 노승은 말하였다. “내 나이 70세에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저버린 적이 없다. 생각을 바르게 하기를 기다려 목을 빼거든 칼로 쳐라.” 그들은 그러하라고 했다. 노승은 목을 빼어 칼을 받으려 했다. 그들이 곧 내리치자 칼은 도리어 그 심장을 찌르고 칼날이 등으로 나왔다. 도적들은 황급히 달아나 혜원 법사의 무덤에 이르렀다. 그 때 날은 청명한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산처럼 일어나 밑으로 깔리면서 천둥 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드디어 벼락이 치면서 도적 여섯 사람을 죽였다. 강주의 남녀들과 의복과 다른 물건들은 다 산에 숨겨 두었으므로 적들은 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강주 고을만이 모두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그 산의 동림사(東林寺)의 중각(重閣)만이 남아 있다. 무덕(武德) 때에 석문(石門)의 골바람이 불어 중각이 북쪽으로 기울어져 장차 왕(王)이 보시한 공덕이 보람 없이 무너져 버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산승들이 산신(山神)께 기도하여 바람이 그것을 바로 세워 주기를 원하였다. 오래지 않아 큰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와 중각은 다시 전처럼 바로 섰다.
원위(元魏)의 양주(涼州) 석상산(石像山)에서 가사가 나온 인연 원위(元魏) 양주(涼州)의 산에서 상(像)이 나왔는데, 태무대연(太武大延) 원년에 이석사문(離石沙門) 유살하(劉薩何)는 승전(僧傳)에 자세히 있다. 그 강 밖으로 두루 여행하면서 무현(鄮縣)의 탑에 예배하고 금릉(金陵)으로 가서 아육왕의 사리탑을 만들었다. 일을 마치려 할 때 양주 서쪽 170리쯤에 있는 번화군(番禾郡)의 경계에서 동북의 어곡산(御谷山)을 바라보고 예배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 살하는 말하였다. “이 산 언덕에 불상이 나올 것이다. 그 영상(靈相)이 완전하면 세상이 즐겁고 나라가 태평할 것이요, 만일 결함이 있으면 세상이 어지럽고 사람들이 괴로울 것이다.” 87년을 지나 정광(定光) 원년에 이르러 큰 바람과 비로 인해 벽력이 일어나면서 산 바위에서 불상이 나왔다. 높이는 1장 8척이요 형상이 단엄한데 오직 머리만이 없었다. 곧 석공(石公)을 시켜 머리를 만들어 얹었는데, 도로 떨어졌다. 위나라의 도가 침체한다는 말이 여기에 맞게 되었다. 주(周)나라 원년에 이르러 양주성 동쪽 7리에 있는 시내의 돌이 갑자기 광명을 내어 그윽한 곳을 비추었으므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상히 여겼는데 그것은 곧 불상의 머리였다. 불상에 얹어 놓았더니 꼭 들어맞았다. 그 몸이 이지러진 채로 있은 지 40여 년이요 몸과 머리가 따로 있은 거리가 2백 리였는데, 옛날에 이지러졌던 상호가 일시에 다시 완전해졌다. 그리하여 등불 광명이 비치어 흐르고 종소리가 메아리를 날렸으나 아무도 그 유래를 몰랐다. 주(周)나라 보정(保定) 원년에 절을 세워 서상사(瑞像寺)라 하였는데 건덕년(建德年)에 그 머리가 또 저절로 떨어졌다. 무제(武帝)는 제왕(齊王)을 시켜 가서 조사해 보고 그 머리를 다시 얹고는 군사를 두어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떨어졌다. 그래서 법이 쇠퇴하고 나라가 망할 징조라 생각하고 다시 붙여 두었다. 이 사실은 주(周)나라의 석도안비(釋道安碑)에 자세히 적혀 있다. 주(周)나라는 비록 불교를 헐었으나 이 불상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개황(開皇) 때는 불법이 유통해 여전히 그 절을 두었다. 대업(大業) 5년에 수양제(隋陽帝)가 서방을 칠 때 직접 가서 몸소 예배하고 이름을 감통도량(感通道場)이라 고쳤으니, 지금도 그 상이 있다. 그림에 의해 본뜨는 자가 많았으나 모두 길거나 짧아서 일정하지 않다.
북량(北涼)의 하남왕(河南王)이 남쪽 언덕에 소상(塑像)한 인연 양주(涼州) 돌벼랑의 소서상(塑瑞像). 옛날 저거(沮渠)의 몽손(蒙遜)이 진(晋)나라 안제(安帝)의 융안(隆安) 원년에 양주를 점거한 지 30여 년이 되었다. 농서(隴西)의 5양(涼)에서 이것이 제일 오래 성하면서 오로지 복업(福業)을 숭상하였다. 그러나 그 국성(國城)과 사탑(寺塔)이 끝내 견고하지 못해 옛부터의 제궁(帝宮)들은 마침내 화재를 만나 다 탔다. 만일 옛날과 같이 다시 세우면 그 공덕이 더욱 클 것이지만 금보배들이 모두 헐리고 도둑맞았다. 이리하여 그 산 끝을 바라보니 오래 갈 만하였으며 양주의 남쪽 1백 리에 연이은 벼랑이 내리뻗어 그 동서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거기 가서 굴을 파고 존의(尊儀)를 모시니 혹은 돌이요 혹은 소(塑)로서 천변만화여서 그것에 예경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놀라고 어리게 하였다. 그 중에 사람만한 어떤 토성승(土聖僧)이 있는데 항상 돌아다니면서 조금도 집에서 편히 쉬는 때가 없었다. 멀리서 보면 다니다가 가까이 가서 보면 곧 멈췄다. 그 안면을 보아도 다니는 형상이었다. 혹 어떤 것은 흙에 늘어섰고 땅에 모여 있어서 그 발자국을 보이다가 사람이 멀어지면 곧 땅을 밟았는데 그 발자국이 축축하고 자꾸 왕래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런 상을 나타내는 것이 지금 1백 년을 지냈다고 거기 사람들은 말한다.
북량의 저거(沮渠)에서 1장 6척의 석상이 나타난 인연 북량(北涼)의 하서왕(河西王) 몽손(蒙遜)은 그 어머니를 위해 1장 6척의 석상(石像)을 만들어 산사(山寺)에 두었다. 그는 본래부터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송(宋)나라 원가(元嘉) 6년에 세자(世子) 흥국(興國)을 보내어 포한(抱罕)을 치다가 대패하고 흥국은 불지(佛氏)에서 죽었다. 몽손은 부처를 섬겨도 영험이 없음을 원망하고 영을 내려 탑사를 헐고 수도인을 쫓아내었다. 그 뒤에 몽손이 양술산(陽述山)으로 갈 때 모든 스님들이 길가에서 기다렸다. 몽손은 바라보고 성을 내어 선 그대로 여러 사람을 베어 죽였다. 그런데 그 때 장사가 절에 들어가 이 불상에 예배하다가 이 불상이 눈물을 마구 흘리는 것을 보았다. 놀라서 돌아와 그대로 이야기했다. 몽손은 이 말을 듣고 그것을 보러 갔다. 절 문에 이르자 온몸이 떨리어 마치 죄를 지은 사람 같아서 좌우 사람을 불러 부축시키고 들어가 보았다. 불상은 마치 샘물처럼 눈물을 흘렸다. 몽손은 머리를 조아려 깊이 사과하고 또 몹시 자책하였다. 그리고 큰 법회를 열어 더욱 정성껏 정진하고 모든 스님을 불러 모아 본 업으로 돌아가게 했다. 몽손의 믿음이 깊고 밝지 못해 치고 죽이고 취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어찌 금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는 성질이 과격하여 개혁을 우선으로 삼아 마음대로 악을 행하면서 못할 짓이 없었다. 처음에는 법참(法讒)을 소중히 여겨 『대열반경』을 번역하고 생사를 같이 하기를 맹세한 사람을 그 뒤에 조그만 분노로 자객(刺客)을 시켜 그를 죽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또 불상을 비방하고 절을 없애며 스님을 죽였으니 한결같이 이 무슨 잔혹한 짓인가? 비록 늦게나마 참회하나 그 허물은 보상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지금 사주(沙州) 동남쪽 30리에 있는 삼위산(三危山)[사흉(四凶)을 귀양보낸 땅이다.]은 벼랑의 높이가 2리인데 불상이 280이 있고 감실(龕室)은 광명을 자주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