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39_0391_b_01L법원주림 제14권
039_0391_b_01L法苑珠林卷第十四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西明寺沙門釋道世撰 趙

6. 경불편 ②
039_0391_b_02L敬佛篇第六 之二
(3) 관불부 ②
039_0391_b_03L觀佛部感應緣之餘
039_0391_c_02L
감응연(感應緣)

송(宋)나라 도성(都城)의 문수사리 금상(金像)의 인연.
송나라 동양(東陽)의 동상(銅像)이 땅에서 나온 인연.
송나라 포중(浦中)에서 금상(金像)의 광명이 나타났다가 이내 나온 인연.
송나라 강릉(江陵) 상명택(上明澤)에서의 금상의 인연.
송나라 형주(荊州)의 벽화상(壁畵像)이 바르자 곧 나타난 인연.
송나라 강릉(江陵) 지강(支江)에서 금상에 맹세한 인연.
송나라 상주(湘州) 동순(桐楯)이 감응이 통해 불광(佛光)을 지은 인연.
제(齊)나라 번우(番禺)의 석상이 불을 만나 가볍게 들린 인연.
제나라 팽성(彭城)의 금상에 땀이 나서 징조를 나타낸 인연.
제나라 양도(楊都)의 관음금상(觀音金像)의 인연.
양(梁)나라 형주(荊州) 우전왕(優塡王) 전단상(栴檀像)의 인연.
양나라 양도(楊都) 광택사(光宅寺) 금상의 인연.
양나라 고조(高祖) 등신(等身) 금은상의 인연.
원위(元魏) 정주(定州)의 금관음상과 『고왕경(高王經)』의 인연.
진(陳)나라 중운전(重雲殿)의 병상(幷像)이 바다로 날아 들어간 인연.
주(周)나라 진주(晋州) 영석사(靈石寺) 석상의 인연.
주나라 의주(宜州) 북산(北山) 철광(鐵磺) 석상의 인연.
주나라 양주(襄州) 현산(峴山)의 화엄행상(華嚴行像)의 인연.
수(隋)나라 장주(蔣州) 흥황사(興皇寺)의 불탄 상을 옮긴 인연.
수나라 경사(京師) 일엄사(日嚴寺)의 서석(瑞石) 그림자의 인연.
수나라 형주(邢州) 사하사(沙河寺) 사면상(四面像)의 인연.
수나라 옹주(雍主) 응관사(凝觀寺) 석가 협저상(釋迦夾紵像)의 인연.
당(唐)나라 방주(防州)에서 석상이 산에서 나온 인연.
당나라 간주(簡州)의 부처님 발자국에서 신광(神光)이 비친 인연.
당나라 양주(涼州) 산에서 나온 석문(石文)에 불자(佛字)가 있는 인연.
당나라 유주(渝州) 상사사(相思寺)의 불적(佛跡)에서 돌이 나온 인연.
당나라 순주(循州) 영감사(靈龕寺) 불적(佛跡)의 인연.
당나라 옹주(雍州) 이대안(李大安)이 금동상에게 구원받은 인연.
당나라 유주(幽州) 어양현(漁陽縣)의 실화(失火)에 상이 무너지지 않은 인연.
당나라 병주(幷州) 동자사(童子寺)의 대상(大像)이 광명을 놓아 상서를 나타낸 인연.
당나라 서경(西京) 청선사(淸禪寺)에서 금상을 훔친 인연.
당나라 무주(撫州)와 담주(潭州) 행상(行像) 등의 인연.
당나라 옹주(雍州)와 남전(藍田)의 금상이 돌 속에서 나온 인연.
당나라 옹주(雍州) 호현(鄠縣)의 금상이 예수(澧水)에서 나온 인연.
당나라 심주산(沁州山)의 석상이 방광(放光)하여 골짜기를 비춘 인연.
당나라 익주(益州) 법취사(法聚寺)에서 지장보살을 그린 인연.
당나라 형주(荊州)의 서상(瑞像) 그림이 방광(放光)한 인연.
당나라 대주(代州) 오대산(五臺山)의 상이 변현(變現)하여 소리를 낸 인연.

ⓛ 송(宋)나라 도성(都城)의 문수사리 금상(金像)의 인연
송(宋)나라 원가(元嘉) 2년에 유식지(劉式之)는 문수보살의 금상을 만들어 놓고 조석으로 예배했는데, 얼마 뒤에 갑자기 그것을 잃어버렸다. 몹시 슬퍼하면서 기도하기를 밤낮을 게으르지 않았다. 5년을 지낸 어느 날 저녁에 그 불좌(佛座)에서 광명이 나와 용마루까지 뻗치었다. 식지는 곧 향을 사르고 상장(牀帳)을 털고 닦다가 그 보살상이 엄연히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② 송나라 동양(東陽)의 동상(銅像)이 땅에서 나온 인연
송(宋)나라 원가(元嘉) 12년이다. 유원지(留元之)는 동양(東陽)의 장산(長山) 사람이다. 그는 모시 농사로 직업을 삼았으므로 늘 화전(火田)을 일구었다. 한번은 어떤 자리의 우거진 풀이 타지 않아서 오랫동안 이상히 여기면서도 개간하지 않았다. 그 뒤에 시험삼아 그 자리를 조금 파다가 구리쇠 좌상(坐像)을 얻었다. 높이는 3촌쯤 되었다. 곧 그 땅을 조사해 보았으나 옛날의 도읍터도 아니어서 그 유래를 알 수 없었다.

③ 송나라 포중(浦中)에서 금상(金像)의 광명이 나타났다가 이내 나온 인연
송나라 원가(元嘉) 14년이었다. 손언증(孫彦曾)은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었다. 그의 첩 왕혜칭(王慧稱)은 젊어서부터 부처님을 믿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욱 독실했다.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외우고 있다가 문득 개펄에 온갖 빛깔이 있음을 보고 사람을 시켜 그 자리를 파게 했다.
깊이 2척쯤 밑에서 한 금상을 얻었는데 광부(光趺)까지 합해 높이는 2척 1촌이었다. 그 광부에 새겨져 있기를 “건무(建武) 6년 경자(庚子)에 관사 도인(官寺道人) 법신승행(法新僧行)이 지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곧 장식을 더했다.

④ 송나라 강릉(江陵) 상명택(上明澤)에서의 금상의 인연
송(宋)나라 원가(元嘉) 15년에 나순(羅順)은 평서부장(平西府將)이 되어 상명(上明)에서 수자리를 살고 있었다. 12월에 배를 늪에 놓았다. 그 친구들이 매와 꿩이 함께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불이 나서 들을 다 태우는데 오직 3장쯤의 우거진 풀만이 타지 않았다. 그래서 풀을 헤치고 찾다가 금보살 좌상(坐像)을 얻었다.
광부까지 높이가 1척이요, 만든 기술이 특히 묘했다. 그 때 정양령(定襄令)은 그것을 도둑이 숨겨 둔 것이라 하였으나, 그 경계 안에서는 불상을 잃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거두어 두고 공양했다.

⑤ 송나라 형주(荊州)의 벽화상(壁畵像)이 바르자 곧 나타난 인연
송(宋)나라 위군(衛軍) 임천(臨川)의 강왕(康王)은 형주(荊州) 성 안에 있었다. 그는 초당 세 칸을 짓고 불상을 공양하면서 초당 벽에 보살상을 많이 그려 놓았다. 형양(衡陽)의 문왕(文王)이 수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초당을 폐하여 재실로 만들고 그 보살상을 모두 진흙으로 발랐다. 그러나 흙이 마르면 곧 다 떨어지고 화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또 발라도 또 그러했다. 문왕은 부처를 믿지도 않거니와 그것을 우연이라 하여 더 두텁게 흙을 발랐으나 보살은 더욱 밝게 나타나 늘어서 있었다. 왕은 옛 벽을 다 헐고 새로 수선하게 했다. 오래지 않아 왕은 병에 걸려 눈만 감으면 모든 상이 완연히 눈에 가득 나타났다. 이리하여 그 집을 폐하여 거기 살지 않고 도리어 재강(齋講)을 일삼았다.

⑥ 송나라의 강릉(江陵) 지강(支江)에서 금상에 맹세한 인연
송나라 원가(元嘉) 때 강릉(江陵) 지강(支江)에 사는 장승정(張僧定)의 누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불법을 받들면서 출가하기로 뜻을 세우고 항상 작은 금불상에 공양하는 것으로 앞길의 도움을 삼았다. 부모는 결혼을 재촉했으나 맹세코 듣지 않았으므로 가만히 병씨(邴氏)에게 허락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전연 몰랐는데 고안(羔鴈)이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피 울부짖으면서 듣지 않고 불상 앞에 향을 사르고는 땅에 엎드려 그대로 죽었다. 그러자 이 불상이 금빛 광명을 놓아 온 마을에 가득했다. 부모 형제들은 그 통감(通感)에 놀라 혼인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장씨와 병씨 두 집은 곧 불교를 크게 믿어 공경하고 승정은 그 때문에 출가했다. 송의 승상(丞相) 남군왕(南郡王) 진협(鎭陜)은 그의 살던 집에 정사(精舍)를 세웠다.
⑦ 송나라의 상주(湘州) 동순(桐楯)이 감응이 통해 불광(佛光)을 지은 인연
송나라 태시(泰始) 때 동해(東海)의 하경숙(何敬叔)은 젊어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상주 자사(湘州刺史) 유온감현(劉韞監縣)을 따라갔다가 전단나무를 얻어 그것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광택이 나지 않아 몹시 애를 썼지만 끝내 되지 않았다. 책상에 기대어 깊이 생각하는데 어렴풋한 꿈길에 어떤 사문이 누더기옷에 석장(錫杖)을 들고 와서 말하였다.
“전단나무는 거칠어서 쓸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현(縣) 뒤에 있는 하씨(何氏) 집의 동순(桐楯)을 쓰면 될 것이다. 그가 아무리 아끼더라도 정성으로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깨어 좌우에 물었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래서 곧 그것을 사려고 했다. 하씨는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매우 소중히 여기므로 혹 누구에게 빼앗길까 하여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명부(明府)님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사시려 하십니까?”
경숙은 사실대로 말했다. 하씨가 존경하고 기뻐하여 그것을 주었으므로 광택을 낼 수가 있었다. 그 뒤에 그는 상부직성(湘府直省)이 되었다. 어느 날 밤 꿈에 그 불상이 말하였다.
“쥐가 내 발을 갉는다.”
이튿날 아침에 급히 집에 돌아가 그 불상을 보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⑧ 제(齊)나라 번우(番禺)의 석상이 불을 만나 가볍게 들린 인연
제(齊)나라 건원(建元) 때이다. 번우(番禺)의 비야리 정사(毘耶離精舍)에 옛날부터 부남국(扶南國)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형상은 매우 괴상하고 7ㆍ80인이라야 들 수 있었다. 이 절은 띠집인데 어느날 불이 번져 오고 그 띠집은 바람받이에 있었다. 집이 연기에 싸이고 불꽃이 이미 붙어버렸다. 비구니 십여 인은 서로 바라보면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 중에서 못내 안타까워하는 서너 명이 시험삼아 석상을 들어 보았더니 거뜬히 들리면서 균석(鈞石)의 무게도 없었다. 불상은 옮겨지고 절은 다 타버렸다. 그 상에는 늘 신광(神光)이 있었는데 주부(州部)의 난리 때에는 눈물과 땀이 온몸을 적셨으므로 영남(嶺南)에서는 그것을 상후(常候)로 삼았다. 그 뒤에 광주 자사(廣州刺史) 유준표(劉悛表)가 그것을 수도(首都)에서 내 보냈는데 지금은 아마 옛날의 장주사(蔣州寺)에 있을 것이다.

⑨ 제나라 팽성(彭城)의 금상에 땀이 나서 징조를 나타낸 인연
송나라 서주 자사(徐州刺史) 왕중덕(王仲德)은 팽성(彭城)의 송왕사(宋王寺)에서 1장 8척의 금상을 만들었다. 상호(相好)가 장엄하여 강호(江湖)에서는 제일 묘하였다. 북방 국경에서 도적이 일어나 혹은 스님에게까지 미쳤으므로 그 금상은 곧 땀을 흘렸다. 그 땀방울의 많고 적음은 곧 난리의 크고 작음이었으며 그로써 난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고을 사람들은 그것을 상후(常候)로 삼았다.
제나라 건원(建元) 초년에 그 금상이 또 땀을 흘리더니 그 해 겨울에 위(魏)나라가 회상(淮上)을 침범했다. 그 때 곤주(袞州)의 여러 고을이 남부(南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대강 모았으나 매우 많았다. 그들은 사문(沙門)을 구박하여 방어를 도우라고 했다. 위나라 군사는 그 진영을 무찔러 모두 패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위대(魏臺)에 무고하여 승려들이 난리를 도왔다 하였으므로 승려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그 때 불상은 크게 땀을 흘려 온 법당이 다 젖었다.
위나라 서주 자사(徐州刺史) 양왕(梁王)은 불법을 정성껏 받들었다. 그는 절에 와서 친히 사람을 시켜 비단 수건으로 불상을 닦았다. 그러나 닦으면 또 흘러 그치지 않았고 수십 인이 번갈아 닦았으나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양왕은 이에 향을 사르며 예배하고 수건을 잡고는 빌었다.
“이 스님들은 죄가 없습니다. 맹세코 제가 보호할 것이므로 반드시 죄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조그만 정성에 감응이 있으시거든 부디 닦는 대로 곧 그쳐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손수 닦았다. 과연 손으로 닦자마자 눈물은 곧 말랐다. 양왕은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고, 나라에서는 명령을 내려 다 용서를 받았다.

제나라 양도(楊都)의 관음금상(觀音金像)의 인연
제(齊)나라 건원(建元) 초년에 태원(太原)의 왕염(王琰)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교지(交阯)의 현 법사(賢法師)에게서 5계(戒)를 받았다. 법사는 그에게 관음(觀音)의 금상(金像)을 공양하게 하였으므로 그는 그것을 받들고 양도(楊都)로 돌아와 남간사(南澗寺)에 기탁하였다. 왕염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금상이 그 자리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이상히 여겨 곧 남간사로 달려가 그 금상을 모시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남간사에서는 십여 구(軀)의 불상을 잃었는데 도적들이 그것을 훔쳐 가서 그것을 녹여 돈을 만들려고 했다.
송(宋)나라 대명(大明) 7년 추석에 그 관음상은 3척 쯤의 광명을 놓아 찬란한 그 금빛을 온 집안 사람이 다 보았다. 그 뒤에 이 금상을 다보사(多寶寺)에 기탁했다. 왕염이 형초(荊楚)로 간 지 거의 10년이 되자 그 금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양도로 돌아와 꿈을 꾸는데 그 금산은 전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여러 작은 불상 중에서도 분명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절에 갔더니 과연 그 꿈과 같았으므로 그것을 모시고 돌아왔으니, 때는 건원(建元) 원년 7월 13일이다. 그래서 왕염은 그 『명상기(冥祥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관음상을 항상 공양하는 것은 반드시 영원한 진량(津梁)이 될 것을 바라서이다. 그 일을 돌이켜보면 깊은 감회가 있다. 직접 본 징험에 의하여 이 기록을 엮어 만든다. 대체로 가까운 정(情)에 밝게 접하려면 그 의상(儀像)만한 것이 없으니 상서로운 징험이 대개는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경전에 ‘녹이고 깎고 그리고 수놓아 형상과 같이 된 것은 다 능히 행동하고 광명을 놓는다’ 하였다. 지금의 서역의 석가와 미륵의 그 두 상(像)은 그 빛남이 진신(眞身)과 같으니 그것은 상(相)이 잘 되었기 때문인가? 지금 동하(東夏)가 우러러보는 불상의 신묘한 영험이 극히 현저한 것도, 그 때의 중생들이 모임으로 인해 그 느낀 바를 목석(木石)에 의탁하였기 때문이니, 그 신비하고 이상함을 보는 것은 반드시 그 용모가 좋아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라앉은 돌이 깊은 데서 뜨는 것은 실로 민오(閩吳)의 교화를 열어주었고, 오랜 금이 액(液)을 쏟는 것은 그로써 팽송(彭宋)의 화(禍)를 면한 것이다. 그 이외에도 번거로운 방법을 가려 보임은 구차하고 힐난하기 어려우리니, 보편된 이치를 따르면 실로 스스로 돌아와 따를 것이다. 이것은 저 경탑이 효험을 나타낸 것과 그 뜻이 같은 것이다. 일은 특수한 것을 꿰지 않은 것이니 그러므로 그 끝을 잇는 것이다.”

양(梁)나라 형주(荊州) 우전왕(優塡王) 전단상(栴檀像)의 인연
양조(梁祖) 무제(武帝)는 천감(天鑒) 원년 정월 8일에 단상(檀像)이 그 나라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 영을 내려 그것을 맞이해 오라 하였다. 『불유천축기(佛遊天竺記)』 및 쌍권(雙卷) 『우전왕경(優塡王經)』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께서 천상에 올라가 한 여름 동안 그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셨다. 왕과 신하들은 모두 부처님이 뵙고 싶었다. 그래서 우전국왕은 32명의 장인(匠人)을 시켜 전단나무를 가지고 가서 목건련에게 신통의 힘으로 천상에 가서 부처님 초상을 그려 오라고 청했다. 목건련은 그들의 청을 따라 부처님 초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그 초상의 좌고(坐高)는 5척인데 기원정사에서 지금까지 공양하고 있다.”
무제는 이 불상을 청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결승장군(決勝將軍) 학건(郝騫)과 사문화(謝文華) 등 80인이 명령을 받고 천축으로 가서 이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불상을 청하였다. 사위국왕(舍衛國王)은 말하였다.
“이 중천(中天)의 정상(正像)이 변방에 갈 수 없다.”
이에 32명의 장인(匠人)을 시켜 다시 자색 전단나무에 새기되, 한 사람이 한 상(相)을 그리게 했다. 묘시(卯時)에 시작하여 오시(午時)에 모두 마치니, 상호가 원만하고 그 정수리에서 광명을 놓으며 보슬비가 내리고 또 이상한 향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전왕경』에는 “진신(眞身)은 숨고 다음에 제2상이 나타나 중생들을 위해 크게 이익이 되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학건 등이 제2상을 지고 수만 리를 갈 때 온갖 난관을 겪은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또 큰 바다를 건너면서 풍파를 무릅쓰고 물결을 따라 산에 이르렀을 때는 양식마저 떨어졌다. 데리고 가던 사람과 또 전송하던 사람도 죽는 자가 많았다. 온갖 맹수를 만나 일심으로 염불할 때 그 불상 뒤에서 병기 소리가 들리고 또 종소리가 들렸다. 어떤 스님이 바위 곁의 나무 밑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학건은 올라가 지고 있던 불상을 그 스님 앞에 놓았다. 스님은 일어나 불상에 예배하고 학건 등은 그 스님에게 예배했다. 스님은 이들에게 물병을 주어 마시게 하여 이들을 배부르게 하였다. 스님이 말했다.
“이 불상은 삼먁삼불타입니다. 여기서 저곳으로 가면 금비라왕(金毘羅王)이 큰 불사를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그날 밤에 그들은 꿈에 신(神)을 보고 이튿날 새벽에 함께 그것을 그렸다. 천감 10년 4월 5일에 학건 등은 양도(楊都)에 도착했다. 무제와 모든 관리들은 도보로 40리를 걸어 나와 그들을 맞이해 태극전(太極殿)으로 돌아가서 재를 베풀어 사람들을 제도하고 사형수들을 풀어 주었고 살생을 금하였다. 그리고 활과 칼과 창 등을 버리고 연화탑 머리를 만들었다. 무제는 이로 말미암아 채식만 하고 욕망을 끊었다. 그는 태청(太淸) 3년 5월에 죽고 상동왕(湘東王)이 강릉(江陵)에서 즉위하여 호를 원승성(元承聖)이라 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양도에서 위의 불상을 맞이해 형도(荊都)로 와서 승광전(承光殿)에 모시고 공양했다. 뒤에 양(梁)나라 대정(大定) 8년에는 성북(城北)의 정릉(靜陵)에 대명사(大明寺)를 짓고 지금까지 이 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전해 베껴 국내에 유포했다 한다.

양나라 양도(楊都) 광택사(光宅寺) 금상의 인연
양조(梁祖)는 천감(天鑒) 초년에 그 본택(本宅)에 광택사(光宅寺)를 짓고 1장 8척의 금상을 만들었다. 그림 모양을 다 마치니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상(像)을 주조하기 시작할 때 구리쇠가 모자랄까 걱정하여 처음에는 왕에게 청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어떤 사자(使者)가 구리쇠 15수레를 가지고 왔다 하였다. 명령을 받들어 절에 보내서 즉시 녹여 만들었는데 한 번 달구어서 다 이루었다. 나라 안에서 제일이었는데 매우 높고 큰 듯하여 시험삼아 재어 보았더니 그 키가 2장 2척이었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주상이 다 이루어졌는데 본래 모양을 고치지 않게 하고 또 계속할 구리쇠도 이미 다 써 버렸다. 다시 그 분량을 재어 보았더니 4척이 더 불었다. 그래서 명령하기를, “처음부터 구리쇠를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리 되었느냐? 어찌 진상(眞相)이 응감하지 않고서야 홀로 신기(神奇)를 나타내겠는가? 화부(華趺)를 새겨 붙여 영지(靈誌)를 만들게 하라” 해서 이 사실을 자세히 발 밑에 새기니, 지금도 그대로 있다.
양조는 그 아버지를 위해 종산(鐘山)에 대애경사(大愛敬寺)를 지었다. 그러나 큰 불상의 신상(神相)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이름이 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다른 데서 기록한 것과 같다.
양(梁)나라의 불상은 신기한 일을 나타냄이 많았다. 염현(剡縣)의 큰 석상은 원래 송(宋)나라 초년에 지은 것으로서 어떤 왕이 만든 것이다. 처음에 담광 선사(曇光禪師)가 북방에서 와서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고요히 살 만한 곳을 찾다가 이 산이 수려한 것을 보고 곧 산꼭대기에 조그만 초당을 얽었다. 그러자 하늘 음악이 공중에서 말하였다.
“여기는 부처님의 땅인데 어째서 소채밭이 있는가?”
담광은 이 말을 듣고 남쪽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옮기고 뒤에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여러 해가 되도록 이루지 못했다. 양나라 건안년(建安年)에 이르러 왕이 병을 앓아 꿈을 꾸었다.
“저 영현의 석상을 발견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
그래서 승우 율사(僧祐律師)를 청해 그 산에 가서 규모와 형상을 보았다. 먼저 만든 것이 너무 천박하고 비루한 것을 꺼렸으나 은정의 실마리를 끊지 못했다. 밤에 갑자기 산이 무너져 2백 인을 덮치고 그 속에서 불상이 나와 목 이하는 그대로 돌 속에 있었다. 이에 떠 있는 돌을 들어내고 밑에 이르자 불상이 그대로 있었다. 전부를 다 치우고 완전히 상이 드러났으니 이것은 그 참 상이 원래 돌 속에 있었던 것으로서, 힘을 들여 파헤쳤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양나라 태자 사인(舍人) 유협(劉勰)이 그 불상 앞에 비를 세웠다.

양나라 고조(高祖) 등신(等身) 금은상의 인연
양조(梁祖)는 왕위에 오른 뒤에 불교를 숭상하고 노종(老宗)을 폐지하여 매양 고승(高僧)들을 불러와 깊은 뜻을 이야기했다. 또 등신(等身)의 금은 불상 두 구(軀)를 만들어 중운전(重雲殿)에 모시고 50여 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고 섬겼다. 겨울과 여름에도 돌을 밟으면서 여섯 때[時]를 거르지 않으니 발로 밟은 돌에는 열 발가락의 무늬가 나타났다. 드디어 죽어 왕위가 끝나게 되자 후경(候景)이 왕위를 빼앗은 뒤에도 불상에는 여전히 공양했다. 태위왕(太尉王) 승변(僧辯)이 후경을 죽이고 대성(臺城)을 수복(修復)했다.
마침 원제(元帝)가 강릉(江陵)을 함락시켜 강남에는 주인이 없었다. 승변은 가만히 제(齊)나라와 통하여 정양후(貞陽候) 소연명(蕭淵明)을 맞아들여 임금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강좌(江左)는 안정되지 못해 이해(利害)가 상충했다. 승변은 그 사위 두감(杜龕)을 보내어 궁궐을 맡아 호위하게 했다. 두감은 성질이 흉하고 완고하여 뒤를 보지 않고 금은 두 불상을 부수어 창을 만들려 했다.
먼저 수십 인을 시켜 삼휴각(三休閣)에 올라가 불상의 목을 깨게 했다. 망치와 끌을 들려고 하자 두 상은 동시에 그들을 노려 보았다. 그들의 팔은 떨어진 듯 들 수 없었고 벙어리가 되고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을 잃었고, 두감도 그러했다. 한참 있다 깨어났으나 마치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퍼렇게 부었고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무서운 물건이 자꾸 와서 때리는 것만이 보였다. 그들은 고통 받아 신음하면서 온몸이 문드러져 피고름을 흘리며 가죽이 뚫리고 뼈가 드러나 죽었다. 이것은 근래의 일로서 도속(道俗)이 다 아는 것이다.

원위(元魏) 정주(定州)의 금관음상과 『고왕경(高王經)』의 인연
원위(元魏)의 천평(天平) 때 정주(定州)의 막사(幕士) 손경덕(孫敬德)은 북방 변경을 지키면서 관음금강을 만들었다. 해를 채우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는 항상 예배하고 섬겼다. 그 뒤에 강도 사건이 생겨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구금되어 고문을 견디지 못했다. 억울하게 죄를 받고 사형이 선고 되어 다음 날 집행하게 되었다. 그날 밤에 그는 참회하고 예배하면서 눈물이 비오듯 했다. 그리고 아뢰었다.
“나는 과거에 남을 억울하게 함으로써 지금 억울한 죄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다 속죄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리고 또 원하옵나니…….”
이 말을 마치고 어렴풋이 꿈 속에서 한 사문을 보았다. 그는 말하였다.
“『관세음구생경(觀世音救生經)』을 외워라. 그 경에 있는 부처님 이름을 천 번 외우면 고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경덕은 깨어 일어나 앉아 그 말을 생각해 보았으나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분명했다. 새벽이 거의 되어 1백 번을 채웠다. 유사(有司)에게 결박되어 형장으로 가면서도 외우고 또 외워 형을 집행하려 할 때는 천 번을 채웠다. 유사는 칼을 들고 내리쳤다. 그러나 칼은 세 동강이 나고 몸은 끄떡없었다. 칼을 바꾸어 또 쳤다. 이렇게 세 번을 거듭했으나 칼은 여전히 세 동강이 났다. 집행인들은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위에 아뢰었다. 승상 고환(高歡)이 이 사실을 글로 올려 그는 드디어 죽음을 면하였다. 임금은 영을 내려 이 경을 베껴 세상에 전하게 하니 이것이 이른바 지금의 『고왕관세음경(高王觀世音經)』인 것이다.
경덕은 방면되어 돌아와 재를 베풀고 그 은혜를 갚았다. 방에 있는 상을 내어와 그 목을 보았더니 세 번의 칼 흔적이 있었다. 그 고을 친구들이 다 같이 보고 그 통감(通感)을 감탄했다. [이상은 『제지(齊志)』 및 『정이(旌異)』 등의 기록에 나온다.]

진(陳)나라 중운전(重雲殿)의 병상(幷像)이 바다로 날아 들어간 인연
진(陳)나라 무제(武帝)가 죽고 그 형의 아들 천(蒨)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 숙부의 장례를 치르려고 상여를 만들려 하였으나 나라를 처음 세워 안정이 되지 않아 일을 시작할 겨를이 없었다.
옛날 양무제(梁武帝)가 중운전(重雲殿)을 세우고 그 안에 불상은 그대로 있었다. 천은 그 중운전의 불상 장막과 진주 패물을 가지고 장례를 장식하고자 했다. 일꾼들은 이미 풍족해 사방에서 모두 왔다. 그런데 구름 기운이 어리어 불전을 둘러쌌는데 다른 곳은 맑아 구름 한 점 없었다. 백성들이 괴상히 여겨 모두 다투어 가서 보았다.
잠깐 사이에 큰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맹렬해 흐르는 불꽃과 빛이 아래 위에서 마주 닿았다. 갑자기 보니 중운전의 두 불상은 우뚝 서고 4부 신장(神將)과 또 보좌(寶座)가 동시에 날아 올라 연기와 불에 싸여 멀리 사라졌다. 그것을 보는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귀의하고 믿었다. 비가 갠 뒤에 그곳을 보니 오직 주추만이 남아 있었다.
한 달쯤 뒤에 어떤 사람이 동주(東州)에서 와서 말하였다.
“그 날에 불전과 불상이 허공에 올라 바다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지금도 바다를 바라보는 이는 가끔 그것을 본다.”
또 위씨(魏氏)의 낙경(洛京) 영녕사(永寧寺)탑이 땅에서 천 척쯤 올라 하늘에 뜨는데 그 형상이 거의 같았다. 어떤 사람은 동해에서 가끔 그 자취를 본다고 했다.

주(周)나라 진주(晋州) 영석사(靈石寺) 석상의 인연
북제(北齊)의 말년에 진주(晋州) 영석사(靈石寺)의 사문 승호(僧護)는 도를 지키면서, 마음은 정직하나 슬기의 업을 구하지 않고 1장의 석상(石像)을 만들기를 원하므로 모두 그의 허풍 떠는 말을 괴상히 여겼다. 그 뒤에 그는 절 북쪽 골짜기에서 1장 8척이 될 만한 누운 돌을 보았다. 그리하여 석공(石工)을 시켜 불상 만들기를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나 얼굴과 배는 거의 마쳤으나 등은 그대로 땅에 붙어 있었다. 여섯 수레로 끈질기게 들어 보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더니 밤새 스스로 뒤쳤다. 그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곧 일을 시작해 마치고 불당에 옮겨 놓았다.
진주가 함락되는 날에 그 불상은 땀을 흘려 땅을 적셨다. 주(周)나라 군사는 국경 안에 들어와 먼저 절을 태웠다. 이 불상도 화재를 입었으나 빛은 조금도 변치 않고 두 손가락만이 상했다. 그 뒤에 그것을 넘어뜨리려고 사람과 소 60이 끌었으나 끝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아무도 모르는 이승(異僧)이 와서 나무와 기왓장으로 흙을 섞고 포개어 그것을 두르더니 잠깐 사이에 일을 마치고 간 곳이 없었다. 그 뒤에 불상은 신심이 있는 이의 꿈에 와서 말하였다.
“내 손가락이 아프다.”
그는 꿈에서 깨어 곧 손가락을 보수했다.
수나라가 건국하니 전처럼 회복했다. 그리고 개황(開皇) 15년에 번기와 일산을 훔친 자가 있었다. 그의 꿈에 1장 8척 되는 사람이 방에 들어와 그를 꾸짖었다. 그는 부끄럽고 두려워 곧 그것을 보냈다. 그 불상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주나라 의주(宜州) 북산(北山) 철광(鐵磺) 석상의 인연
주무(周武)가 건덕(建德) 3년에 불법을 시기하여 그것을 아주 없애버렸으므로 천하가 어두워졌다. 의주(宜州)에 강명(姜明)이란 사람이 있어 일을 감독하러 밤에 다녔다. 의주의 북쪽 1백여 리의 산을 지나가다가 가끔 산 위의 광명을 보고 괴상히 여겨 그곳을 돌아보았다. 누워 있는 돌 모양이 부처님 모양과 같음을 보고 곧 파보았더니 그것은 철광(鐵礦)이었으므로 더 팔 수 없었다. 그 형상은 돌같이 단단하고 높이는 3장쯤이며 갈아서 없애려 했으나 함부로 다치게 하면 안되었기에, 또 밑으로 파 내려가 찾아보니 거기 석부(石趺)가 있고 구멍도 완전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끈덕지게 들어 보았다. 그 불상은 갑자기 흘러내려 구르면서 석부(石趺)의 구멍 위에 우뚝 섰다. 사람들은 신기한 징조라 하여 이 사실을 나라에 아뢰었다.
그리고 천원(天元)이 대를 이어 부처의 해가 장차 빛나려 하였다. 곧 대상(大像) 원년이라 고치고 인해 그곳을 대상사(大像寺)라 하였다. 수조(隋祖)가 국운을 열어서도 이 옛 자취를 소중히 여겨 또 현제사(顯除寺)라 고치고, 그 본래의 곳을 찾아보았으나 사람이 산 곳은 아니었다. 또 큰 돌과 철광도 없었으니 어찌 아육왕의 신력이 내린 감응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당(大唐)도 그 때문에 고치지 않고 정관(貞觀) 말년에는 그 절 서쪽에 궁전을 두어 이름을 옥화(玉華)라 하였다. 그 불상도 옛날에 있던 궁전 동쪽 30리의 동산 안에 있다.
일찍이 태종(太宗)은 거기 가서 예배하였는데 장식이 화려하지 않다 하여 재물을 희사해 장엄하였다. 영휘(永徽) 때에는 궁전을 고쳐 절을 만들고 다시 이름을 옥화사라 했으니 지금 방주(邡州)에 속해 있다. 흐린 날 밤이면 늘 서광을 놓지만 도속들은 항상 보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거나 괴상히 여기지 않았다.
주나라 양주(襄州) 현산(峴山)의 화엄행상(華嚴行像)의 인연
주(周)나라 양주(襄州) 현산(峴山) 화엄사(華嚴寺)의 행상(行像). 옛날부터 그 목상(木像)의 유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 얼굴과 머리는 특히 수려해 한없이 우러러볼 만하며 높이는 5장쯤 되고 그 응보(應報)는 오래되어 다 말할 수 없었다.
주나라 때 불법이 멸하자 어떤 사람이 그 머리를 감추었다가 수나라 개황(開皇) 때 다시 내어 전처럼 장엄하고 좌상(坐像)으로 만들어 노사불(盧舍佛)이라 했다. 그리고 매년 복을 빌면서 귀의처(歸依處)로 삼았다.
수나라 문제(文帝)가 죽을 적에 불상은 두 코에서 콧물이 흘러 가슴을 적셨다. 금박은 벗겨져 일어났으나 콧물이 흘러 광명이 있었으며 바라보면 콧물과 같았다.
정관(貞觀) 23년 4월에 또 콧물이 자꾸 흘러 온 가슴을 한 자쯤 적셨으나 그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뒤에 태종(太宗)이 죽어서야 비로소 그 징조임을 알았다. 6월이 되어 또 콧물이 나와 온 고을이 두려워하면서 무슨 화가 있을 지 몰랐는데, 7월에 이르러 한수(漢水)가 넘쳐 성내로 들어와 깊이가 1장이 넘어 빠져 죽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본사(本寺)에 있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양양의 토속(土俗)에 자식이 적은 사람은 다 가서 기도하여 그 마음을 따라 남녀의 감응을 받았다.]

수(隋)나라 장주(蔣州) 흥황사(興皇寺)의 불탄 상을 옮긴 인연
수(隋)나라 개황(開皇) 때 장주(蔣州) 흥황사(興皇寺)의 불전(佛殿)이 화재를 만났다. 당양(當陽)에 1장 6척인 금동 대상(大像)과 또 두 보살상이 있는데 다 키가 1장 6척이었다. 그는 모대옹(模戴顒)이 지은 바로서 용마루 밑에 있었다. 그 때 불꽃이 크게 왕성했으므로 사람들이 손을 댈 수 없어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대상이 녹게 되자 갑자기 일어나 남쪽으로 한 걸음쯤 옮겼다. 용마루와 들보가 꺾여 내려 앉았으나 불상은 완전했다. 4면의 벽돌과 나무 숯 등은 모두 불상에서 5ㆍ6척쯤 떨어져 있었으면서도 모두 불에 탔으나 금색은 변하지 않았다. 발받침 밑에 새긴 글이 있어 대중은 모두 놀라 감탄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했다. 지금은 옮겨 백마사(白馬寺)에 있는데 새들도 밟는 일이 없다.
당나라 영휘(永徽) 2년에 도적이 이 불상의 구리쇠를 탐하여 톱으로 격자창살을 끊고 그것을 훔쳐 내려다가 그만 손이 끼여 빼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스님이 와서 그 까닭을 물었다. 도적은 말하였다.
“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법당 안에서 내 손을 움켜 잡았으므로 빼내지 못했습니다.”

수나라 경사(京師) 일엄사(日嚴寺)의 서석(瑞石) 그림자의 인연
수(隋)나라 서울 일엄사(日嚴寺)의 석영상(石影像)은 그 모양은 여덟 모요, 자석영(紫石英) 빛이며 높이는 8촌이요, 지름은 5촌이며 안팎이 환히 트였다. 옛날 양무제(梁武帝) 태청(太淸) 때에 서역(西域)의 어떤 스님이 가지고 온 것이다. 후경(候景)의 난리를 만나 강주(江州) 여산(廬山)의 서림사(西林寺) 불상의 정수리에 봉안했었다.
수나라 개황(開皇) 10년에 양제(煬帝)가 양월(楊越)을 진압하고 영이(英異)를 두루 수색할 때 강표(江表)의 문기(文記)를 모두 거두어, 그들 기록 중에서 영상전(影像傳)을 얻었다. 그리고 사인(舍人) 왕연수(王延壽)를 시켜 절에 가서 이것을 얻었다. 그리고는 진번(晋蕃)을 맡은 뒤로는 다닐 때에는 항상 옻칠을 한 함에 이것을 넣어 사람과 말을 시켜 받들고 앞서 가게 했다. 그 뒤에 태자가 되어서는 이것을 곡지(曲池)의 일엄사(日嚴寺)에 보내고 그 절에 영을 내렸다.
“이것을 본 뒤에는 잘 봉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라.”
그 절은 양제가 지은 것이었다.
대업(大業) 말년에 천하가 들끓었다. 서울 스님들이 항상 와서 이것을 보았고 이 절에 사는 이도 그다지 믿거나 존중하지 않았다. 이 돌 속에 금빛이 번쩍거려 불상인 듯 의심스러웠으므로, 이름 있는 여러 스님들의 말이 동일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말하였다.
“그 모양이 분명하여 어두워지는 일이 없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음을 늘 개탄했다. 또 7일 동안 깨끗이 재계한 뒤에는 앞에서 보면 은탑(銀塔)이 보이고 뒤에서 보면 은불(銀佛)이 보였다. 도속들이 함께 보는데도 가끔 같지 않았으니, 혹은 불탑과 보살을 보고 혹은 여러 스님이 늘어앉은 것을 보며 혹은 장막과 일산, 번기와 당기를 보고 혹은 산림과 8부(部)를 보며 혹은 3도(道)의 괴로워하는 상을 보고 혹은 7대(代)의 존망을 보았다. 한 번 보는 동안에도 혹은 가만히 있고 혹은 변화했다. 비록 선악이 번갈아 나타나더라도 상서로운 징조가 많았기 때문에 거기 와서 기도하는 자는 다 앞에 와서 발원하였다.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갈까?”
그러면 그 말에 의해 다 나타났다. 실로 저승의 거울이었다.
정관(貞觀) 6년 7월에 명령을 내려 궁중에 들여 모시고 공양했다.

수나라 형주(邢州) 사하사(沙河寺) 사면상(四面像)의 인연
수(隋)나라 형주(邢州) 사하현사(沙河縣寺)의 사면불(四面佛).
수조(隋祖) 때에 어떤 사람이 산에 들어갔는데, 스님이 불상을 수호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동불(銅佛)의 키는 3척 남짓했다. 그는 이 불상을 달라고 했다. 스님은 허락하고 곧 간 곳이 없었다. 여러 곳에서 이 말을 듣고 모두 와서 잡아 끌었으나 도무지 일으킬 수 없었는데 오직 사하사(沙河寺) 스님만이 와서 끌면 그 손을 따라 절에까지 갔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절 곁에서 금덩이 하나를 얻었는데 그 윗부분이 두 마리 까마귀 형상 같았다. 거기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이 사면불(四面佛)의 본을 떠라.”
그래서 본을 떴는데 뒤에 그 까마귀 형상이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다.
그 절 곁의 연못에서 자주 광명이 나타나 연못물을 빼고 불상을 끌어내었다. 수나라의 후주(後主)가 이 말을 듣고 장인(匠人)을 보내어 그것을 본떠 주조(鑄造)했으나 끝내 결함이 있어서 그만두었다.

수나라 옹주(雍主) 응관사(凝觀寺) 석가 협저상(釋迦夾紵像)의 인연
수(隋)나라 때 응관사(凝觀寺)의 스님 법경(法慶)은 개황(開皇) 3년에 협저(夾紵)라는 석가(釋迦)의 입상(立像) 한 구(軀)를 조성하였다. 그 높이는 1장 6척인데 아직 다 마치기 전에 법경이 그만 죽고 말았다. 그 날에 또 보창사(寶昌寺)의 스님 대지(大智)가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깨어나 그 절의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염라대왕 앞에 가 보니 법경이 매우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보았습니다. 불상이 염라왕 앞에 오니, 왕이 급히 달려 나와 뜰 밑에 내려가 합장하고 그 불상에 예배했습니다. 이 불상이 왕에게 ‘법경이 나를 만들다가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왜 죽게 했느냐’고 했습니다. 왕이 어떤 사람을 불러 ‘법경이 완전히 죽었느냐’고 묻자 그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고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연잎을 대어 주어 먹게 하여 그 복업을 마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지는 깨어나 그 절의 스님에서 이렇게 말하고 사람을 시켜 응관사에 가서 보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과연 법경이 깨어나 말하는 것이 대지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법경은 깨어난 뒤로는 항상 연잎만을 먹으면서 제일 맛나다 하고 다른 음식을 먹으면 끝내 소화되지 않았다. 그는 이 불상을 완성하고 수년 뒤에 죽었다. 그 불상은 의상(儀相)이 원만하고 자주 광명을 놓았다. 이 절은 폐했지만 그 불상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당(唐)나라 방주(防州)에서 석상이 산에서 나온 인연
당(唐)나라 무덕(武德) 때 방주(邡州) 서남 자오천(慈烏川)에 학적(郝積)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부터 불법을 믿고 공경했다. 사슴떼가 항상 산 위에서 쫓으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겨 사슴들이 머무르는 곳을 파 보았다. 높이 1장 4척쯤 되는 석상(石像)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오천의 어느 마을에 옮겨 지금도 거기 있다. 불상이 나온 뒤로 사슴떼들은 곧 사방으로 흩어졌다. 옛 노인의 전하는 말에 “가섭불 때에 40구를 감추어 두었는데 지금 2구가 나왔지만 남은 것은 그 산 밑에 있고, 그 형상은 지금 옥화사(玉華寺) 동쪽 철광상(鐵礦像)과 같다. 그러나 그 빨간 빛은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당나라 양주(涼州) 산에서 나온 석문(石文)에 불자(佛字)가 있는 인연
당(唐)나라 정관(貞觀) 17년 9월에 양주(涼州) 도독(都督) 이습예(李襲譽)는 국경을 순행하다가 양주 동남 창천현(昌泉縣)의 경계에 이르러 돌에 새긴 글 모두 110자(字)를 보았다. 거기는 “칠불(七佛), 팔보살(八菩薩), 상과(上果), 불전(佛田)” 등의 글자가 있었다. 곧 왕에게 글을 올리고 왕은 명령해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그 올린 글에 말한 것과 같았다. 왕은 빨리 명령하여 양주부에 1년분의 급여를 다시 내리고 죄인들을 모두 사면했다.

당나라 유주(渝州) 상사사(相思寺)의 불적(佛跡)에서 돌이 나온 인연
당(唐)나라 유주(渝州) 서쪽 백 리 상사사(相思寺) 북쪽 석산(石山)에 불적(佛跡) 12개가 있다. 모두 길이는 모두 3척쯤이요, 너비는 1척 1촌이며 깊이는 9촌이고, 그 가운데에 어문(魚文)이 있다. 불당(佛堂)의 북쪽 십 보쯤에 어떤 스님이 살고 있었다.
정관(貞觀) 20년 10월에 절 곁에 샘물 안에서 갑자기 연꽃이 나와 빛은 홍색이요, 꽃술받침을 모두 갖추어 크기는 3척이었다. 얼굴을 들고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가 물에 들어가면 꽃이 되어, 배 타는 나그네들은 오가면서 모두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겼다. 달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때문에 ‘상사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배주(涪州)에도 이 절이 있다. 이 절은 원래 몹시 가난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보시를 얻어 지금은 늘 부유하다.”
옛날 제나라 형주성(荊州城) 동쪽에 있는 천자정(天子井)에서 비단이 나왔다. 그 때 남녀들은 모두 그것을 취해 썼는데 사람의 비단과 다르지 않았으며 한 달을 지나서야 그쳤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나오는 것을 괴이하다 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오균제(吳均齊)의 『춘추(春秋)』와 소성(蕭誠)의 『형남지(荊南志)』에 나온다.]

당나라 순주(循州) 영감사(靈龕寺) 불적(佛跡)의 인연
당(唐)나라 순주(循州) 동북에 있는 흥녕현(興寧縣)의 영감사(靈龕寺) 북쪽에 있는 어떤 돌에 30개의 불적(佛跡)이 있어 큰 것은 5척 이하이다. 순주는 어떤 강 한복판에 있는데 동서는 2백 리요, 남북은 1백 리이다. 영감사는 매우 부유하였다. 근래에 동장(銅藏)을 얻어 그 면이 3척의 화로만하여 1백여 개의 소반을 합한 것과 같았다. 또 그 명(銘)에 이렇게 되어 있었다.
“스님이 이것을 얻으면 복이 일고 속인이 이것을 얻으면 화가 닥칠 것이다.”
또 『고전(古傳)』에 말하였다.
“진(晋)나라 때에 북방의 스님이 이 산 밑에 살다가, 대홍굴이 있고, 꽃과 열매가 아름답고 무성한데 거기서 하룻밤을 지냈다. 산신(山神)이 괴상히 여겨 그를 두렵게 하려 했으나 그는 끄떡하지 않고 ‘여기는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산의 귀신도 자주 오는 곳이다’ 하였다. 그리고 앞의 돌산을 바라보니 구름 속에 솟아 해를 가렸다. 그래서 거기 올라가다가 밑을 바라보니 너무 멀리 떨어져 거기까지 갈 수 없었다. 흥녕사로 돌아와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송(宋)나라 때에 두 스님도 먼저 스님과 같이 가 보았으나 이루지 못하고, 다시 정진하여 찾아보았다. 그들은 『법화경』을 외우며 계행이 깨끗하여 능히 귀신을 항복받았을 뿐 아니라 그 형상을 보고, 계(戒)를 주어 권속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앞의 벼랑 위를 바라보니 이상한 광채가 1장쯤 떨어져 있고 위 아래가 모두 끊어졌다. 스님은 나무로 다리를 놓고 건너가 보았다. 이상한 발자국 열 개가 있어 그 빛은 사람의 살과 같아 돌에 나타나 있었다.”
정관(貞觀) 3년에 또 한 발자국이 나타나고 광명을 놓아 윤상(輪相)이 구족했다. 지금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다소가 동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감사에 두고 그 기이함을 취했다.
또 그 책을 보면 송나라 때 왕가(王家)에서 과수원을 희사해 절을 만들었으니, 그 옛 집이 지금도 있다.

당나라 옹주(雍州) 이대안(李大安)이 금동상에게 구원받은 인연
당(唐)나라 농서(隴西)의 이대안(李大安)은 공부상서(工部尙書) 대량(大亮)의 형이다. 무덕(武德) 때에 대량이 월주총관(越州總管)이 되었으므로 대안이 서울에서 그 아우에게로 다니러 왔다가 돌아갈 때, 대량은 그 형을 위해 노비 몇 사람을 딸려 보냈다. 대안은 곡주(穀州)의 녹교(鹿橋)에 이르러 여관에서 자게 되었다. 어느 종이 대안을 죽이고자 꾀하여, 그가 깊은 잠에 들기를 기다려 밤이 반이 지난 뒤에 작은 칼로 대안의 목을 찔렀다. 칼이 침상에 박혔으므로 종은 그 칼을 빼지 않고 그대로 달아났다. 대안은 놀라 깨어나 종들을 불렀다. 거기에 관계 없는 종이 들어와 그 칼을 빼려 했다. 대안은 “칼을 빼면 곧 죽을 것이다. 먼저 종이와 붓을 가져 오너라” 하고 무엇이라고 썼다. 현관(縣官)이 와서 칼을 빼고 찔린 곳을 씻고 약을 붙였다. 그리고 대안은 기절했다. 마치 꿈 속 같은데 어떤 물건이 보였다. 길이는 한 자 남짓 하고 너비와 두께는 너더댓 치 되며 모양은 돼지고기 같은 것이 땅에서 두 자쯤 떠올라 방으로 들어와 침구 앞에서 말하였다.
“빨리 내 돼지고기를 돌려 달라.”
대안은 말하였다.
“나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내게 달라고 하느냐?”
그 때 문 밖에서 어떤 말이 들렸다.
“아니다. 잘못이다.”
그 물건은 도로 문 밖으로 나갔다. 대안은 뜰 앞에 있는 연못 물을 보았다. 맑고 얕은 것이 매우 좋았다. 이 못 서쪽 언덕 위에 금불상이 있었다. 높이는 5촌쯤 되는데 차츰 커져 스님으로 변하였고, 매우 깨끗한 새 가사를 입고 있었다. 그 스님은 대안에게 말하였다.
“어디 다쳤느냐? 나는 지금 너를 위해 그 고통을 없애 주리라. 너는 회복되거든 집에 돌아가 염불하고 선행을 닦아라.”
곧 손으로 대안의 다친 목을 만지고 떠났다. 그러자 대안은 본래대로 회복하여 그 스님의 뒷모습만 보았다. 붉은 비단으로 가사를 기워 사방 1촌쯤 되는 것이 매우 분명했다. 대안은 다시 깨어났다. 상처도 아프지 않으므로 일어나 앉아 음식도 먹었다.
십수 일이 지나 서울 집의 자제들이 와서 대안을 모시고 집에 돌아갔다. 집안 사람과 친구들이 다 와서 보았다. 대안은 그들에게 상처 입은 사정과 그 불상 본 일을 다 이야기했다. 한 여종이 곁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대안의 집은 초행(初行)입니다.”
대안의 처는 그 여종을 시켜 장인(匠人)을 불러오게 해서 불상을 만들게 했다. 불상을 다 만들고 비단 그림옷을 입히니 불상의 등에 붉은 점 하나가 있었다. 장인을 시켜 그것을 지우라 했으나 장인은 듣지 않고 말하였다.
“이 불상을 그대로 두는 것은 낭군님 말씀을 따라 한 것입니다.”
대안은 그 아내와 집안 사람들과 같이 일어나 불상을 보았다. 꿈에서 본 것과 다름이 없이 그 등에 기운 점이 완연하였다. 그래서 그 기이함에 감탄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이 거짓이 아님을 신실하게 알아서 불법을 더욱 숭상해 믿으면서 정성껏 예배하고,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 불법이 동방으로 들어온 뒤로부터 영상(靈像)의 감동이란 이루 다 적을 수 없고 대충의 건수가 이상과 같다. [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당나라 유주(幽州) 어양현(漁陽縣)의 실화(失火)에 상이 무너지지 않은 인연
당(唐)나라 유주(幽州) 어양현(漁陽縣) 무종(無終)의 수성(戍城) 안에 1백여 집이 있었다. 용삭(龍朔) 2년 4월에 수성에 화재가 일어나 문루(門樓)와 인가가 다 재가 되었다. 오직 두 정사(精舍)와 부도(浮圖)와 불감(佛龕) 위의 종이 발[紙簾]과 거친 대발과 불상 등이 타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신기함에 감탄하면서 부처님 힘의 도움이라 했다.
중산랑(中山郞) 여령(餘令)이 벼슬길에 오르자 그의 형 여경(餘慶)과 그 친구 낭장(郎將)과 제군(齊郡)의 인여(因如) 등 사영주(使營州)들이 다 친히 그 일을 보고, 여령을 위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당나라 병주(幷州) 동자사(童子寺)의 대상(大像)이 광명을 놓아 상서를 나타낸 인연
당(唐)나라 병주성(幷州城) 서쪽에 절이 있으니 이름을 동자사(童子寺)라 했다. 거기 큰 불상이 있어 좌고(坐高)가 170여 척이었다. 황제는 불교를 높이 공경하였다. 현경(顯慶) 말년에 병주를 순행하다가 황후와 함께 이 절에 왔다. 또 그 북쪽 골짜기의 개화사(開化寺)에 가서 2백 척 높이의 큰 불상에 예배하고 우러러보며 희귀하다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보배와 재물 ㆍ의복 등을 크게 희사하고 또 모든 비빈(妃嬪) 등 내궁(內宮) 사람들도 각각 보시를 내어, 병주의 장리(長吏) 두궤(竇軌) 등에게 명령하여 빨리 성용(聖容)을 장엄하게 하고 장식하게 하고 불감(佛龕) 앞의 땅을 넓히는 데 힘쓰라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인 용삭(龍朔) 2년 가을 7월에는 내관(內官)이 가사 두 벌을 내어 중사(中使)에게 주어 두 절의 큰 불상에게 보냈다. 동자사의 불상은 가사를 입는 날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색 광명을 놓아 벼랑과 바위들을 두루 비추고 산과 물을 모두 밝혔다. 또 남감(南龕)에 들어가자 작은 부처님들은 전당을 빛내어 수천만 도속들이 다 보았다. 성 안의 귀천(貴賤)들은 모두 이것을 보고 착하게 된 자가 열 집 중에서 7ㆍ8집이었다. 사람이 함께 안다고 하지만 다 잘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당나라 서경(西京) 청선사(淸禪寺)에서 금상을 훔친 인연
당(唐)나라 서경(西京)의 청선사(淸禪寺)에, 전에 순금 불상 한 구(軀)가 있었다. 길이는 1척 4촌이요, 무게는 80냥이니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만든 것이다.
정관(貞觀) 14년에 손덕신(孫德信)이라는 도적이 임금의 옥새(玉璽)를 위조하여 한 고자 총각을 데리고 임금의 명령으로 불상을 가지러 왔다고 사칭했다. 절의 스님들은 임금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고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불상을 주었다. 하룻밤을 자는 동안에 일이 탄로가 났다. 불상의 몸은 불에 녹았고 머리만이 녹지 않았다. 태종(太宗)은 크게 노하여 극형에 처하였다. 덕신은 죽기 전에 벌써 그 몸에 종기가 나서 온몸이 문드러졌다. 절의 스님들은 다시 금을 보태서 불상을 법답게 주성(鑄成)했다. [이상 세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당나라 무주(撫州)와 담주(潭州) 행상(行像) 등의 인연
당(唐)나라 현경(顯慶) 4년에 무주 자사(撫州刺史) 조씨(祖氏)는 날이 몹시 가물어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무주 동산(東山)에서 행상(行像)을 보고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일꾼을 데리고 가서 옮기려 하였지만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이 소문이 퍼져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몰려왔다. 담주(潭州)의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저 절에서 잃어버린 것이 여기 있는가?”
그래서 다니는 길을 찾아보았더니 두 개의 발자국이 나타나 있었다. 각각 길이가 4척이요, 그 거리는 5백 리였다. 자사는 오랫동안 가물었기 때문에 곧 가서 기도하고, 온 고을의 관리와 백성들은 향과 꽃을 가지고 20리쯤 걸어가서 울면서 사정을 고하면서 드리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을 시켜 들어 보았더니 거뜬히 들렸다. 고을의 절로 모셔 올 때에는 길을 따라 구름이 퍼지더니 그날 저녁에 비가 쏟아져 매우 풍족했다. 그 불상은 지금 무주에 있다.

당나라 옹주(雍州)와 남전(藍田)의 금상이 돌 속에서 나온 인연
당(唐)나라 영휘(永徽) 때에 옹주(雍州) 남전(藍田) 동쪽의 오진사(悟眞寺)는 남전 골짜기의 서쪽 언덕에 있었다. 산의 아름다움과 잘 어울리는 전당은 장엄했다. 불상이 있는 절 북쪽 언덕에 별채를 따로 지으려는데 큰 돌이 가로 놓여 큰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불로 태우고 물을 대어 떠내려 가게 하려 했으나 끝내 되지 않았다. 곧 철주로 때려 깨다가 그 속에서 금불상 한 구를 얻었다. 사면이 다 흠이 없고 천연으로 돌에 싸여 있어서 그 온 곳을 알 수 없었다. 상의 받침도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 인공으로 붙인 것이 아니며 또 무슨 보배로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높이는 5촌쯤인데 지금 그 절에 있다.
그 해 익주(益州) 광명사(光明寺) 기둥 위에 한 부처님과 한 보살이 나타났다. 깎아도 다시 그 그림자가 나왔다.
처음에 구롱(九隴) 불당에 있던 것을 장사(長史) 장서(張緖)가 대중을 모아 광명사로 옮겼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당나라 옹주(雍州) 호현(鄠縣)의 금상이 예수(澧水)에서 나온 인연
당(唐)나라 옹주(雍州) 호현(鄠縣)의 동쪽이요, 예수(澧水)의 서쪽에 사는 이조곡(李趙曲)에게 금불상이 있었다. 높이는 3척 6촌이요, 불꽃 광명은 4척이며 자주 광명을 놓았다. 금상의 형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극히 위엄이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발받침 위의 명(銘)에 말하였다.
“진(秦)나라 건원(建元) 20년 4월 8일에 장안(長安) 중사(中寺)에서 조성했다. 여왕(女王) 혜소(慧韶)는 부처님의 열반을 감응하여 다행히 유상(遺像)을 만나 이로써 몸을 의탁한 나머지 신모(神摸)를 주조(鑄造)합니다. 만일 정성이 지극하다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시방이 다 복을 받게 하소서.”
그 명문(銘文)은 이러하였다. 나는 그것을 얻게 된 인연을 그에게 물었다. 그는 말하였다.
“옛날 이교(二敎)를 폐할 때 이것을 예수라인(澧水羅仁)에 감추어 두었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고 또 광명을 놓으면서 촌로(村老)에게 ‘그대는 저 물에 가서 소용돌이 속에서 순수한 모래를 구하라’ 하자 물에서 광명이 나왔다. 그는 곧 가서 소용돌이 속을 파다가 앞의 불상을 얻었다.”
그 때는 아직 주(周)나라 때라 촌가에 감추어 두고 서로 공양하였던 것이다. 조용한 방 안에 있으면서 광명을 놓아 스스로를 비춘다. 지금도 그 마을에 있다.

당나라 심주산(沁州山)의 석상이 방광(放光)하여 골짜기를 비춘 인연
당(唐)나라 용삭(龍朔) 3년 2월에 심주(沁州)에서 나타난 불상은 심주 북쪽 60여 리의 면상현(綿上縣) 경계의 긴 골짜기 벼랑 중턱에 있다. 그 위에는 불감(佛龕)이 있고 그 안에 세 구의 불상이 있다. 가운데 불상이 항상 광명을 놓아 골짜기를 밝게 비추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심주에 알리고 심주에서는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서울의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스님 현수(玄秀)에게 명령하여 사자와 함께 역마를 타고 가서 찾아보라 하였다. 그들은 거기 오를 때 그 광명을 보았다. 불길처럼 날면서 빛났다 꺼졌다 하기를 계속해 끊이지 않았다.
그 때 구름이 불감이 있는 굴에 왔다. 그 광명은 잠깐 숨었다가 구름이 걷히자 나타났다.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알렸다. 임금은 명령하여 그것을 그대로 그리라 했다. 몇 번이나 거듭할 때 광명은 처음과 같았다. 사흘 저녁으로 내리 처음처럼 비추었다. 지금도 광명은 계속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은 빼어난 땅으로서 산림이 울창하고 석감(石龕) 불상의 고적이 매우 많으나 그 시초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서광은 더욱 자주 보였다.

당나라 익주(益州) 법취사(法聚寺)에서 지장보살을 그린 인연
당(唐)나라 익주성(益州城) 밑의 법취사(法聚寺)에서 지장보살을 그렸다. 승상(繩牀)에 앉아 다리를 드리웠는데 높이는 8ㆍ9 촌이다. 이 상은 장승요(張僧繇)의 그림이다. 인덕(麟德) 2년 7월에 이 절 스님이 하나를 모사했는데 광명이 나왔다가 사라짐이 마치 금반지 같았고 본상의 광명과 거의 같았다. 이렇게 계속 모사한 것도 다 광명을 놓았다. 그 해 8월에 임금이 명령하여 하나를 들여와 궁중에서 공양했다. 지금 성 안팎 도속들이 모사해 공양하는 것도 다 광명을 놓는다. 부처님 힘의 헤아릴 수 없음을 참으로 알겠다.[집집마다 하나씩 있으나 다 따로 적지 못한다.]

당나라 간주(簡州)의 부처님 발자국에서 신광(神光)이 비친 인연
당(唐)나라 인덕(麟德) 2년, 간주(簡州) 금수현(金水縣) 북쪽 삼학산(三學山)은 옛날에는 익주(益州)에 속해 있었다. 그 절의 스님 혜욱(慧昱)과 권예득(權例得)은 익주성 밑 공혜사(空慧寺)에 살고 있었다. 인덕 원년에 그 고을의 일로 형주(荊州) 장사사(長沙寺)의 금동불상(金銅佛像) 앞에 가서 지성으로 발원했으니, 그것은 불상을 모사하여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익숙한 장인(匠人) 장정안(張淨眼)을 시켜 법답게 재계하고 6구(軀)를 모사했으나 영감이 없었다. 7구 째에 이르러 오색 광명을 놓아, 절 내외를 밝게 비추어 원근 사람들이 다 보았다. 7일이 지나자 그 광명은 차츰 사라져 도속들의 놀라고 기뻐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혜욱은 이 상을 가지고 장안사(長安寺)로 왔으나 아직 장식을 못했다. 그리고 다시 좌우 시자(侍子) 보살과 성승(聖僧)과 공양 도구를 그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서울의 뛰어난 장인을 시켜 중대(中臺)로 보내고 백관(百官)과 모든 학사들을 시켜 감독하게 하여 『서국지(西國志)』 60권을 그리게 했다. 그림은 40권에 있었다.
혜욱은 따로 좋은 화공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로 가서 범장수(范長壽)라는 장인에 의하여 화상을 장엄하여 도당(都堂)에 두었다. 6월 7일 밤 3경(更)에 첫 상이 오색의 광명을 놓아 당 밖까지 비추었다. 당지기가 일어나 밖에 나가 보았다. 당 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실화(失火)라 생각하고는 놀라워서 외쳤다. 당 안의 당직하는 관리 10인과 병사 30여 인은 날이 더워 모두 몸을 드러내고 잤다. 광명이 두루 몸을 비추어 사람들이 서로 볼 때 모두 옷을 벗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놀라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런데 오직 석회장(石懷藏)이라는 관리만은 평소부터 신심이 없어 다만 바깥 광명만 보았고 몸이 새까맣다고 보았다. 그 광명은 환히 비치다가 아침에야 사라졌다. 석회장은 제 허물을 말하고 자책하면서 정성껏 참회했으나 그래도 광명을 보지 못하고 몸을 비추어서야 밝게 되었다. 관리와 병사들도 이 말을 듣고 광명을 보라고 서로 불러 모두 와서 보았다. 이것을 듣고 본 사람들은 다 발심(發心)하여 일생 동안 재계했다. 모든 관리들은 각각 하나씩 그려 가지고 집에 돌아가 공양했다.[서울의 도속들은 다 알기 때문에 따로 적지 않는다.]

당나라 대주(代州) 오대산(五臺山)의 상이 변현(變現)하여 소리를 낸 인연
당(唐)나라 용삭(龍朔) 원년에 임금은 명령을 내려 회창사(會昌寺)의 스님 회색(會賾)을 시켜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사탑(寺塔)을 수리하게 했다.
그 산은 대주(代州)의 오대현(五臺縣)에 속해 있고 오대(五臺)가 다 갖추어 있는데 중대(中臺)가 제일 높아 눈이 닿는 곳에는 천 리의 강산이 손바닥처럼 다 보인다. 위에는 수천 개의 석탑이 있어 다 벽돌로 쌓았다. 이것은 다 위(魏)나라 고조 사람과 말과 개의 발자국이 있어 금방 밟은 것과 같다.
꼭대기에는 태화천(太華泉)이라는 큰 못이 있고 또 작은 샘물들이 서로 이어 있다. 샘물을 끼고 부도(浮圖) 둘이 있고 그 가운데 문수사리상이 있다. 전(傳)에 말하였다.
“문수사리가 5백 선인(仙人)과 함께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설법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도 말하였다.
“문수사리는 청량산에서 설법한다.”
이 산은 매우 추워 다른 나무는 나지 않고 오직 소나무만이 골짜기에 솟아 있다. 남쪽에는 청량봉이 있고 산 밑에는 청량부(淸凉府)가 있어 고금의 남은 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중대로부터 동남으로 내려가 30리쯤에 옛날의 대부(大孚) 영취사(靈鷲寺)가 있고 동서에 두 도량이 있어서 불사(佛事)가 다 갖추어져 있다. 옛 노인의 전하는 말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지은 것이라 한다.
남쪽에 두 이랑쯤 되는 화원이 있다. 기이한 꽃들이 섞여 피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한다. 사방에는 나무가 둘러쌌는데 옛 노인에게 물어도 그 근원을 모른다. 매년 첫봄에서 늦가을까지 꽃이 번갈아 피는데 옛부터 도속들이 이 꽃의 기이함을 사랑했다. 인간들이 뿌리를 캐지 않고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다 살지 않는다. 나아가서는 둘러싼 나무 밖으로 옮겨 심어도 살지 않고 반드시 그 울 안에 있어야 마음대로 꽃이 핀다. 실로 문수사리의 감응이요, 대성(大聖)이 나타내는 징조이다. 또 실로 신선들의 옛 집에 둘 것이니 어찌 범부들이 심을 것이겠는가?
또 지극한 정성으로 이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가람(伽藍)과 성승(聖僧)들의 사는 곳을 많이 본다. 혹은 공중에 나는 이도 있고 혹은 시냇가에 있으며 혹은 산이 험한 데 있고 혹은 바윗골에 있다. 혹은 도인이 되고 속인이 되어 범인과 다르지도 않다. 한번 지난 뒤에 다시 찾으면 간 곳을 모른다. 가람과 성승들의 나타나고 사라짐이 한결같지 않으니 성인이 아니면 헤아리기 어렵다.
황제(皇帝)는 용삭(龍朔) 2년 초에 또 회색(會賾)을 시켜 병주(幷州)에 가서 관리들의 인력과 재물을 취하여 묵은 절을 수리하게 했다. 회색은 오대승(五臺丞)과 함께 20여 인을 데리고 바로 오대산으로 갔다. 거기서 석상(石像)이 벼랑 끝에서 몸과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그 곁에 가 보니 그것은 모난 돌이었다. 그는 진신(眞身)을 보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자책(自責)하였다. 오랫동안 한탄하다가 석공(石工)을 시켜 두 탑을 수리하게 하고 문수사리상을 탑 곁으로 옮겼다. 갑자기 종소리가 탑 사이에서 들리는데 방망이로 치는 소리가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상한 향기가 자주 풍겨 오므로 도속들은 모두 일찍이 없던 일이라 감탄했다.
서대(西臺)로 갔는데, 어떤 스님이 말을 타고 동쪽으로 급히 달려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으나 오래 있어도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직접 맞이하러 갔더니 그것은 곧 그루터기로 변했다. 그는 한탄하여 마지 않았으나 상(像)과 상(相)의 감응이 통하여 때때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종소리와 메아리는 계속해 항상 들렸다.
그 산은 사방이 3백 리이다. 동남의 다리는 바로 북악산(北岳山)에 연했고 서북의 다리는 바로 천지(天池)이다. 그 가운데 불광산(佛光山)과 선화산(仙華山)과 왕자탑(王子塔)과 옛 절 여섯이 있다. 해탈 선사(解脫禪師)와 승명 선사(僧明禪師)는 그 남은 자취로서 굴 안에 앉아 있는데 그 몸의 살이 허물어지지 않은 채 10년이 지났으니, 그것은 선정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요, 성현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당나라 형주(荊州)의 서상(瑞像) 그림이 방광(放光)한 인연
대당(大唐) 건봉(建封) 2년 어느 봄에 서명사(西明寺)의 도선 율사(道宣律師)는 한적한 곳을 따라 서울 성남(城南)의 화청궁(華淸宮), 옛날의 정업사(淨業寺)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율사는 쌓은 덕이 높고 그윽하며 변함없이 소박(素朴)함을 지녔다. 갑자기 어떤 천인(天人)이 율사에게 와서 경건히 예배하고 정성껏 문안했다. 율사는 물었다.
“단월(檀越)은 어디서 왔는가, 성명은 무엇인가?”
그는 답하였다.
“제자의 성은 왕(王)이요, 이름은 당(璫)이라 합니다. 나는 대오(大吳)의 난대(蘭臺)의 신하였습니다. 회사(會師)가 처음 건업(建業)에 갔을 때 손주(孫主)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지금 희유(希有)한 징조를 느끼고 그를 위해 비상(非常)한 사당을 세운 것입니다.
그 때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다 그에게 신령한 힘을 주어 드디어 사리(舍利)를 얻은 것입니다. 오주(吳主)는 손에 구리 병[銅甁]을 들고 구리 쟁반 안에 쏟으니 사리의 충격을 받아 구리 쟁반이 갈라졌습니다. 그 사리는 불로 태워도 망치로 때려도 타거나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감택(闞澤)1)과 장욱(張昱)의 무리도 역시 천인의 도움이 그 몸에 들어가 그 정신을 상쾌하고 영리하게 하여 보답을 알맞게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다 천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보호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습니다.
제자는 남방 천왕(天王) 위장군(韋將軍) 밑에 있는 사자(使者)입니다. 장군은 사무가 매우 많아 3주(洲)의 불법을 옹호하고 싸움이나 위험한 일이 있어도 몸소 가서 타이르고 화해시켜 화남(和南)하게 하였습니다. 큰 욕심이 닥치면 전의 시끄러웠던 일이 오래지 않아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등을 시켜 스승님과 함께 말하게 한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또 어떤 천인이 왔다. 성은 나(羅)씨요, 촉(蜀)나라 사람이었다. 촉나라 말로 율상(律相)을 널리 설명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속인의 예의와 같았고 그 연유를 이야기할 때는 차례가 있었는데, 그만 갑자기 잊어버리기도 했다. 다음에 또 어떤 천인이 말하였다. 그는 성이 비(費)씨로서 예의는 앞의 사람과 같았다.
“나는 가섭불 때에 초천(初天)에 나서 위(韋)장군 밑에 있습니다. 모든 천인들은 탐욕에 취했으나 나는 전생의 원력으로 하늘 욕심에 빠지지 않고 청정한 범행(梵行)으로 비니(毘尼)를 매우 공경하였습니다. 위장군은 동진(童眞)의 범행으로 천상의 애욕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한 왕 밑에 8장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왕 밑의 32장군은 네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출가인을 보호합니다. 네 천하 가운데서 북천의 1주(洲)만은 불법이 조금 있고 다른 세 천하는 불법이 크게 성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도 금계를 많이 범하고 법다운 일은 적습니다. 동서 천하 사람들은 지혜가 적고 번뇌가 많아 교화시키기 어렵고 남방 천하만은 번뇌는 많으나 교화시켜 선을 따르게 하여 조복(調伏)하기 쉽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왕에게 친히 부촉(付囑)을 주시고 또 수호하여 악마의 장난을 받지 않게 하라 하시면서 ‘만일 너희가 수호하지 않아 파계(破戒)하면 누가 내 교법을 행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훈계를 감히 행하지 않을 수 없어 파계하는 자를 보더라도 가엾이 여겨 그를 보호하고, 한 가지 선을 행하는 것을 보고는 만 가지 죄를 허물하지 않으며 일에 평등하여 결함을 잊어 버리고 지난 실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 인간의 악취가 위로 허공 세계의 40만 리까지 풍기나, 모든 하늘은 청정하기 때문에 모두 그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법을 보호하라는 부처님의 부촉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도 그들과 같이 있으므로 모든 하늘이 감히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장군(韋將軍)은 32장군 가운데서 가장 불법을 잘 보호하고 널리 폅니다. 많은 마자(魔子)와 마녀들이 비구를 희롱할 때 도력(道力)이 약한 자는 모두 그 유혹을 당하지만 장군은 빨리 달려가 그 근기를 따라 그것들을 다 제거해 줍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닥치면 그들은 사천왕에게로 가야 합니다. 왕은 그들을 보고 다 일어나 위장군을 위해 동진행(童眞行)을 닦습니다. 그것은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는 성질이 계율을 좋아합니다. 여래께서 평생 만드신 비니(毘尼)는 모두 한자리에 앉아서 듣고 받는 계법입니다.”
그 계율 가운데 잘 모르는 것을 물으면 모두 해결해 주었다. 그런데 이 동화(東華) 삼보(三寶)에는 본래 산과 바다가 많아 수석(水石)이 많이 나타난다. 다만 그것이 신령하다 하여 공경할 뿐이요, 그 원인을 찾으면 어떻게 할 지 모르므로 그래서 그 뜻을 물었다. 우선 희미한 그 상(相)을 이치로 묶지만 지니거나 관찰하는 일이 없으므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선사감통기(宣師感通記)』에서 천인(天人)에게 물었다.
“익주(益州) 성도(成都)의 다보불(多寶佛) 석상(石像)은 언제 땅에서 솟아났는가?”
답하였다.
“촉도(蜀都)는 원래 청성산(靑城山) 위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성도는 대해(大海)의 땅입니다. 옛날 가섭불 때에 어떤 사람이 서이하(西耳河)에서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다보불의 전신상(全身相)을 본 것으로서 서이하의 취산사(鷲山寺)에 있던 것을 성도(成都)의 무역상이 그것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금의 다보사(多寶寺)는 해신(海神)에 밟히어 배가 뒤집힌 자리입니다.
처음에 그 상을 취한 사람은 언덕 위에서 노는 해신을 보고 그것을 산토끼라 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그 해신은 성을 내어 배를 뒤엎었는데 사람과 석상이 모두 한 배에 실린 채 물에 빠졌습니다. 그 다보불상은 옛날에는 취두산(鷲頭山) 절에 있었는데 그 옛 터가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탑이 있고 항상 광명이 있어서 저 국토를 향하게 했습니다. 길이 낭주(郎州)를 지나게 되는데 크고 작은 탑을 다 셀 수 없었으며 3천여 리를 지나서야 비로소 서이하에 이릅니다. 이 강은 크고 넓어 혹은 1백 리, 혹은 5백 리이며 그 가운데에는 산주(山洲)가 있고 또 옛 절도 있으며 불상은 그대로 있는데 거기 사는 스님은 없습니다. 경전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때로 종소리가 들리고 백성은 번창하며 매년 두 때로 고탑(古塔)에 공양합니다. 탑은 계단(戒壇)과 같고 3중(重)의 섬돌이 있으며 그 위에는 엎어 놓은 가마솥과 같은 것이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다만 신총(神冢)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항상 광명을 놓으며 사람들은 소채 음식으로 거기 제사하여 복을 빕니다. 그 땅은 서북으로 준주(嶲州)까지 2천여 리이며 천축(天竺)이 멀지 않다는 말을 듣고 가끔 거기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이 이하는 생략함.]
진(晋)나라 때에 어떤 스님이 여기서 토분(土墳)을 보고 헐어 버리면 또 생겨 끝내 편편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뒤에 그것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괴상히 여겨 1장쯤 깊이 파 내려가다가 불상과 사람 뼈가 배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해골의 팔과 다리가 다 굵고 커서 지금 사람보다 여러 배가 되었으니, 그것은 즉 가섭불 때 염부제 사람의 수명이 2만 세 때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감겁(減劫)이라 수명이 짧고 사람이 적으니 그것은 당연한 이치요, 괴상하다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불상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무리 끌어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제자가 노인으로 변하여 지휘하자 비로소 편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불법이 멸하여 잠깐 숨었다가 수(隋)나라 때에 불법이 다시 일어나자 그것은 다시 나왔습니다. 촉나라 사람들은 다만 그것이 땅에서 나온 것만을 알고 그 근원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 화부(花趺)에 다보(多寶)라는 글자가 있었으므로 그 때문에 다보불이라 하고 또 다보사라 했습니다.”
또 물었다.
“다보라는 글자는 바로 예서(隸書)로서 망한 진(秦)나라 때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가섭불 때에 이미 신주(神州)의 글이 있었는가?”
답하였다.
“망한 진(秦)나라 이사(李斯)의 예서는 근대(近代)이지만 예서가 일어난 것은 멀리 옛 부처 때이니, 지금 남주(南洲) 사면의 천여 주의 장엄에 보이며 염부주 1방 백여 국은 그 문자와 언어가 지금의 당(唐)나라와 같습니다. 다만 바닷길이 멀어 자칫하면 수십만 리라, 그 중역(重譯)이 전해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으로 하여금 주주(株柱)2)를 봉수(封守)하게 한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스님은 듣지 않으셨습니까? 양(梁)나라 고야왕(顧野王)은 대학(大學)의 태부(太傅)이니 자원(字源)을 두루 찾아도 출몰(出沒)이 일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옥편(玉篇)』의 서(序)에 말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춘신군(春申君)의 무덤을 파다가 그 명문(銘文)을 얻었는데 그것은 다 예서였다.’
춘신으로 말하면 주무(周武)의 육국(六國)과 동시이니 예서로 말하면 병탄(倂呑)한 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전서[篆]ㆍ예서[隸] 등 모든 글은 아직도 까마득한 때이었으니 어찌 가섭불 때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역사는 그 귀와 눈으로 듣고 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 물었다.
“지금 서경성(西京城) 서쪽의 고사토대(高四土臺)는 속언(俗諺)에 창힐(蒼頡)이 글을 만들던 대(臺)라고 하는데, 어떻게 예서가 고대에 이미 있었겠는가?”
답하였다.
“창힐이 이 대 위에 흙을 더해 대를 만든 것과 새[鳥] 발자국을 관찰했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창힐의 전기(傳記)에 대해 이 땅에서 그 근원을 아는 사람이 드물어, 혹은 그를 황제(黃帝)의 신하라 하고 혹은 고대의 제왕이라 합니다. 새 발자국의 글이란 때로 변하는 한 가지 이치로서 지금은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수고롭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어떤 천인이 있었다. 그는 성이 육(陸)씨요, 이름은 현창(玄暢)이었다. 그가 와서 율사를 뵙고 말하였다.
“제자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에 초천(初天)에 나서 살았습니다. 본래 나는 가섭불 때의 천인으로 교화 활동을 하기 위해 주나라 때에 잠깐 나타났습니다. 물으신 고사토대(高四土臺)란 본래 가섭불이 여기서 제3회 설법으로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목왕 때에 이르러 문수사리와 목건련이 와서 교화할 때, 목왕이 그들을 따랐으니 이른바 열자(列子)의 화인(化人)이 바로 이것입니다. 화인은 목왕을 가르쳤습니다.
고사대는 가섭불이 설법한 곳이므로, 삼회(三會)의 도량을 만들었습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 때에 이르러 부풍(扶風)에서 한 석불(石佛)을 얻었으나 목공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마굿간에 버려서 이 상을 더럽혔습니다. 불상을 보호하는 신(神)은 화를 내어 목공을 병으로 앓게 했습니다. 목 공은 또 꿈에 상제(上帝)에게 지독한 꾸중을 듣고 깨어나 그 시신(侍臣) 유여(由余)에게 물었습니다. 유여는 답하였습니다.
‘신(臣)이 듣건대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에 어떤 화인(化人)이 이 나라에 왔는데 그것이 불신(佛神)이라 합니다. 목왕은 이를 믿고 종남산(終南山)에 중천대(中天臺)를 지어, 높이는 천여 척이었는데 그 터가 지금도 있습니다. 창힐대(蒼頡臺)에 신묘(神廟)를 짓고 이름을 삼회도량(三會道場)이라 했으니 목공께서 지금 병을 앓으심이 혹 그 부처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목공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유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근자에 한 돌사람을 얻었다. 그 의관(衣冠)은, 지금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굿간에 버렸는데 이것이 바로 그 불신이 아니겠는가?’
유여는 이 말을 듣고 곧 가서 보고 와서 말하였다.
‘이것은 참 불신입니다.’
목공은 석상을 도로 가져와 목욕시킨 뒤에 청정한 곳에 안치하였습니다. 석상은 이내 광명을 놓았습니다. 목공은 또 신이 분노했다 생각하고 더욱 두려워하여 3생(牲)을 잡아 제사하자 선신(善神)들이 받들어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목공이 또 겁이 나서 유여에게 물었습니다. 유여는 대답하였습니다.
‘신(臣)은 듣건대 불신은 정결하여 주육(酒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생물의 목숨을 사랑하고 소중히 하기를 외아들같이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바치는 공양은 향을 사르는 것뿐이요, 그에게 드리는 제물은 떡이나 과일 뿐입니다.’
목공은 크게 기뻐하여 불상을 짓는 데 있어서 공인(工人)을 쓰지 않으려고 유여에게 물었습니다. 유여는 말하였습니다.
‘옛날 목왕(穆王)이 절을 짓는 데는 반드시 공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사대(高四臺)의 남쪽 마을에 있는 왕안(王安)이라는 노인을 청했습니다. 그 나이는 180세였습니다.
‘일찍이 삼회(三會)의 도량을 사람이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은 지금 늙어서 지을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 북쪽에 네 형제가 있어서 일찍이 도량에서 여러 공인들을 위해 같이 일했습니다. 그들을 청해서 함께 짓도록 하십시오.’
그의 말에 의해 한 구리로 지으니 상호가 원만했습니다. 목공은 크게 기뻐하여 그들에게 큰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얻고 또 그것을 지은 공덕으로 그 토대 위에 높이 3백 척의 중각(重閣)을 지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고사대(高四臺) 혹은 고사루(高四樓)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성이 고씨요, 큰 형의 이름이 사(四)였기 때문입니다. 혹은 큰 형의 이름을 취해 고사라고 했다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또 물었다.
“목련과 사리불은 부처님께서 계실 때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두터운 대우를 받았겠는가?”
답하였다.
“이름이 같은 여섯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목련은 대목련(大目蓮)이 아닙니다. 우문(宇文)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문수사리가 범승(梵僧)으로 변하여 이 땅에 놀러 와서 말하였습니다.
가섭불의 설법한 곳과 문수사리가 사는 곳에 예배하고자 하는데 거기는 청량산(淸凉山)이라 합니다. 도인이나 속인에게 다 물어 보아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지맹(智猛)이라는 법사는 나이 겨우 18세로서 범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까닭으로 그 두 성인의 자취가 여기 있는 줄 아십니까?’
답했습니다.
‘진(秦)나라 도성(都城) 남쪽 20리에 창힐이 글을 만든 대(臺)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땅입니다.
모든 사하(沙河)의 남쪽 50리와 청산(靑山)의 북쪽 40리에 그 자리가 있다고도 합니다.’”
또 물었다.
“사하와 청산은 어디를 말하는가?”
답하였다.
“위수(渭水)와 종남산(終南山)을 말한 것입니다. 이 범승은 위수에서 바로 남으로 멀리 걸어 고사대에 이르러 말하였습니다.
‘여기가 옛 부처님이 설법하신 곳이다.’
그리하여 지맹 법사는 예배하러 그를 따라갔는데 오래지 않아 그 범승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지맹은 장성하여 이 사실을 태상위경(太常韋卿)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고, 청하여 그 고사대 자리에 본래대로 절을 짓고 주왕(周王)에게 아뢰어 이름을 삼회사(三會寺)라 했습니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때에 이 절을 폐하여 대사(大寺)에 편입시키고 그것을 다시 헐고 보리사(菩提寺)에 편입시켰으니, 지금 서울의 동쪽이요, 시(市)의 서쪽이며, 평강방(平康坊)의 남문과 동쪽 보리사 서당(西堂)인 불수사(佛首寺)가 이 삼회사입니다.
석가여래께서 대가섭을 제도하신 뒤 12년에 이 고사대에 오셔서 그 밑에서 가섭불의 사리를 보았습니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몸소 대하(大夏)에서 놀 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본 옛 탑을 돌려 모시고 예배하고 섬기십시오.’
왕이 물었습니다.
‘그 탑이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호경(鄗京)의 동남방에 있습니다.’
서천축국(西天竺國)의 별전(別傳)에 자세히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 사자국(師子國)의 스님은 나이 99세에 제3과(果)의 아나함(阿那含)이 되어, 이 훌륭한 고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몸소 나아가 예배한 뒤에 또 주청하여 북대주(北代州)에 있는 청량산의 문수사리보살이 앉은 자리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역마(驛馬)와 내사(內使)와 제자 보좌관 20여 인을 그에게 주어 가는 곳마다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관리와 제자들은 모두 그 역마를 탔습니다. 오직 노인 한 사람만은 젊어서부터 정성으로 고행하면서 축생을 타지 않았습니다. 대주의 청량산에 이르러서는 팔꿈치로 가고 무릎으로 걸어 중대(中臺)의 불당까지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문수사리의 사당입니다. 밑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30여 리는 걸어야 했습니다. 산의 돌은 단단하고 예리하여 살을 뚫고 뼈를 찔렀으며 피는 안나는데 젖이 7일 동안 흘렀습니다. 온몸을 땅에 던져 얼굴을 땅에 대고는 일어나지도 않고 먹지도 않다가 7일이 지나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기뻐 뛰면서 손가락을 휘두르며 사방 상하 허공에 문수사리보살과 성승(聖僧) 아라한이 모두 보인다 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도인과 속인들 수십 인은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 몸 길이가 몇 리나 되는 큰 이무기 한 마리가 북에서 바로 이 노인을 향해 왔습니다. 어른을 보고 기뻐하면서 법사의 다리를 물고 지나가서는 스님의 형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이 노인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으니, 이런 갖가지 영감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원하던 바를 다 이루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교화를 나타내어 봉안하고 혹은 궁중에서 맞이해 계를 받으며 혹은 여러 산을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율사는 천인에게 물었다.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문수사리는 청량산에서 5백 선인을 거느리고 설법하고 있다 하고, 경전의 명문(明文)에는 특히 문수사리는 이 사바세계에 오래 머무른다 하였다. 사바세계라면 대천(大千)세계의 총칭인데 어째서 이곳에만 치우쳐 있다 하는가?”
그는 답하였다.
“문수사리는 부처님의 본래의 스승으로서 인연을 따라 나타나되 그 응변(應變)은 같지가 않습니다. 대사(大士)의 큰 공덕은 사람의 경계가 아니니 함부로 평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청량산에 있는 많은 오대(五臺) 중에 있음을 알고 믿을 뿐입니다. 청량산은 지금은 북대주(北代州)에 속해 있고 서쪽으로 보면 오대현(五臺縣) 청량부(淸凉府)가 있습니다.
황당(皇唐) 때부터 해탈(解脫)이라는 스님이 바위굴 속에서 죽어 30여 년을 있었는데 그 살이 허물어지지 않고 마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여승도 선정에 들어 움직이지 않은 채 여러 해를 지났습니다. 성적(聖迹)이 있는 가람(伽藍)에서 보살과 성승(聖僧)과 선인(仙人)ㆍ선화(仙華) 등을 사람들은 자주 봅니다. 이런 것은 다 별편(別篇)에 자세히 있는 것이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었다.
“지금 오대산 중대(中臺)의 동남 30리에 있는 대부(大孚) 영취사(靈鷲寺)의 양당(兩堂)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그대로 있다. 남쪽에는 두 이랑쯤 되는 화원이 있어 사시로 꽃이 피어 그 빛깔이 각각 다르고 사방에는 나무가 둘러 있다. 그 꽃들은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모두 나지 않으나 오직 그 울 안에 심으면 오랫동안 무성하다. 사람들은 연월(年月)을 따져 보아도 그 유래를 알지 못한다. 혹은 한 명제(漢明帝)가 세운 것이라 하고 혹은 위(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심은 것이라 하여 옛 노인들의 전하는 말도 다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말이 사실인가?”
그는 답하였다.
“이는 모두가 그 두 임금이 세우고 심은 것입니다. 옛 영계(靈界)는 문수사리가 머무른 곳이었으며, 주 목왕은 거기 절을 짓고 공양했으며, 또 아육왕(阿育王)도 거기 탑을 세웠습니다. 한 명제 초년에 아라한인 마등(摩騰)도 천안(天眼)으로 이 탑을 보고 왕에게 청해 절을 세웠습니다. 그 산 모양이 영취와 같으므로 이름을 대부(大孚)라 했으니 부(孚)란 신(信)입니다. 임금이 불법을 깊이 믿고 절을 세워 사람들에게 불법을 권했기 때문입니다. 원위(元魏)의 효무제(孝文帝)는 북대(北臺)가 멀지 않아 항상 여기 와서 예배하다가 사람과 말이 다닌 발자국이 돌 위에 분명한 것을 보았으니 그 사실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어찌 이 오대 징험뿐이겠습니까? 지금 종남산(終南山)ㆍ태백산(太白山)ㆍ태화산(太華山) 등 오악(五岳)의 명산에도 다 성인이 있으니, 불법을 붙들어 세상에 오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달려가 영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별편(別篇)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번거롭게 말하지 않습니다.”
또 물었다.
“지금 양주(涼洲)의 서쪽 반화현(番禾縣)[번(番)의 음은 반(盤)이다.]에서 산이 갈라져 불상이 나왔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가?”
그는 답하였다.
“가섭불 때에 이빈(利賓)이라는 보살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산 사람들이 업보를 믿지 않고 살생(殺生)으로 업을 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거기에는 수만 가구가 살되 불법을 존중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 보살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절을 세웠습니다. 대범천왕이 손수 불상을 만들었는데 보살은 신통의 힘으로 그 불상을 참부처와 같이 널리 다니면서 설법하고 교화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도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보이기 위해 손으로 큰 돌을 들어 한 마을을 덮어 버리려 했습니다. 보살이 위엄을 떨쳐 권하고 교화할 때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돌려 부처를 믿고 공경했습니다. 살생하는 모든 기구는 다 연꽃으로 변하고 거리마다 꽃을 심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서상(瑞像)은 비로소 신통의 힘을 거두었습니다.
보살은 또 모든 청신사(淸信士)에게 권해 일곱 절을 짓게 하였으니 남북이 104리요, 동서가 80리로서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습니다. 또 곳곳에 승방(僧房)과 불전(佛殿)을 짓기 시작하여 13년을 지나 비로소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출가한 2만 인은 모두 그 일곱 절에 있었습니다.
3백 년이 지나 그 모든 사람들은 큰 업력(業力)을 나타내어 옛날에 지은 악의 업보를 금세에서 가볍게 받아 지옥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전에 해침을 입은 자는 악취(惡趣)에 있으면서 또 발원하였습니다.
‘나를 해친 저 사람이 성인이 되기 전에 나는 그를 해치리라. 만일 해치지 않으면 악업이 없어져 나는 과보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함께 큰 불을 토해 절과 집을 다 태우므로 저 촌락이 일시에 다 타 없어지고 도둑들이 마음대로 날뛰었습니다. 또 큰 물이 들어 모두 빠져 죽고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습니다. 그 때 산신(山神)은 절이 파괴되기 전에 그 불상을 거두어 멀리 공중에 두었다가 절이 파괴된 뒤에 내려와 석실(石室) 안에 안치하고 공양했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석실이 없어졌습니다. 유(劉) 때에 이르러 살하(薩何) 스님이 그 산에 예배할 때 불상이 나왔던 일을 거슬러 보였습니다. 그 살하의 전신(前身)은 원래 저 이빈 보살로서 몸과 머리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도 별편(別篇)에 있습니다.”
또 물었다.
“강표(江表) 용광(龍光)의 서상(瑞像)은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는 라집(羅什)이 가지고 왔다 하고, 어떤 이는 부남(扶南)에서 얻은 것이라 하니 어느 말이 옳은가?”
그는 답하였다.
“그것은 라집이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송(宋)나라의 효무제(孝武帝)가 부남을 정벌해 얻은 것입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3백 년에 북천축(北天竺)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인 우바질나(優婆質那)가 신통의 힘으로 가공(加工)하여 3백 년 동안 큰 돌산을 파고 불굴(佛窟)에 안치한 것입니다. 위에서 밑에까지 무릇 5중(重:층)이요 높이는 3백여 척입니다. 미륵보살의 지휘를 청하여 단실(檀室)을 만들고 거기에 둔 것입니다. 『현장사전(玄奘師傳)』에는 백여 채라 했고 『성적기(聖迹記)』에는 ‘높이가 8장이요, 발받침이 8척이며 육재일(六齋日)이면 항상 광명을 놓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처음 만들 때 아라한은 공인(工人)을 데리고 세 번이나 하늘에 올라가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 층에는 우두전단상(牛頭栴檀像)이요, 셋째 층에는 금상(金像)이며, 넷째층에는 옥상(玉像)이요, 다섯째 층에는 동상(銅像)입니다.
범부들이 지금 보는 것은 아래층에 있는 상이요, 위의 네 층은 닫혀 있습니다. 그 석굴에 비추면 사람의 장부가 다 보입니다.
6백 년경에 불내차(佛柰遮)라는 아라한은 태어나자마자 그 어머니가 죽었는데, 어머니는 부남국(扶南國)에 태어났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중한 은혜를 생각하고 위층에서 작은 전단상을 내어 어머니께 공양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양주(楊州)에 나서 출가하여 신흥사(新興寺)에 있으면서 3과(果)를 얻었습니다. 송(宋)나라의 효무제(孝武帝)가 부남국을 정벌해 이 상을 얻은 것도 다 이 아라한의 신통의 힘입니다. 어머니는 그 때까지 살아있으면서 때때로 라부(羅浮)ㆍ천태(天臺) 등 서방의 여러 곳으로 다닙니다.
옛날에 법성 담무갈(法盛曇無竭)이라는 이가 서방(西方)에 다시 갔을 때 어떤 이가 책 5권을 주었는데 거기에 이 상에 대해 간단히 기록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찌 함부로 라집 법사가 이 상을 등에 지고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율사는 또 물었다.
“라집 법사가 일생에 번역한 경전을 많은 사람들이 못내 즐겁게 수지하는 것이 더욱 성해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답하였다.
“그 사람은 총명하여 대승(大乘)을 잘 압니다. 그 이하 여러 사람이 동시에 번역한 것도 다 1대(代)의 보배입니다. 그러나 전대(前代)와 후대(後代)에 뛰어나고 빛나서 우러러도 미칠 바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깨달은 다음에 부처님께서 남기신 뜻을 얻은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또 물었다.
“세상에서 항상 이야기하지만 진(秦)나라 요흥(姚興)에게 소중한 계를 억압당하고 파괴당했다 하는데 어떻게 부처님의 뜻을 얻었다 하겠는가?”
그는 답하였다.
“이것은 어두운 범부로서 헤아릴 바가 아니거늘 어찌 꼭 평론해야 하겠습니까? 라집 법사는 그 덕행이 삼현(三賢)의 자리에 있습니다. 어디 있거나 두루 교화하되 번거로운 것은 깎고, 빠진 것은 끼우면서 근기를 따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론(大論) 1부(部)가 10분(分)의 9를 생략했으니 그 이외의 경론은 이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명상(冥祥)과 감응이 여러 대(代)로 더욱 새로우며 성인의 뜻을 깊이 깨달음은 실로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또 문수사리의 지시를 받아 개정하고 정리한 것은 보통에서 뛰어났거늘 어찌 별실(別室)의 비방을 받음으로써 깊은 뜻이 모두 없어졌다 하겠습니까?”
또 물었다.
“방주(防州)의 현제사(顯際寺) 산에서 나온 석상(石像)은 언제 세운 것인가?”
답하였다.
“이것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만든 것입니다. 이 석상이 원래 나온 곳은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절을 지은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아육왕의 넷째 딸이 지은 것이요, 또 불상과 탑을 만들어 여기서 공양했습니다. 그 때 이 절에는 1ㆍ2ㆍ3과(果)를 증득한 사람이 살고 있어서 진상(秦相) 유여(由余)가 항상 와서 받들고 공경했습니다. 옛날 가섭불 때에도 여기에 절을 세웠으니, 이것은 사미승(沙彌僧) 현제(顯際)가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라 현제사라 한 것입니다.”
또 물었다.
“지금의 옥화궁(玉華宮) 남쪽의 단대산(檀臺山) 위에 벽돌탑이 있다. 면들의 넓이는 40보(步)요, 하층은 극히 웅장하며 사면의 석감(石龕) 옆에는 부서진 벽돌이 있고, 또 세 곳에 30여 개의 벽돌 가마가 있다. 그러나 항상 종소리가 들린다.”
그는 답하였다.
“이것은 목왕(穆王)의 절로서 이름을 영산사(靈山寺)라 합니다. 아육왕 때에 왕은 산신(山神)에게 명령하여 여기에 탑을 만들었습니다. 서진(西晋) 말년의 난리에 오호(五胡)가 권세를 부렸을 때, 유요(劉曜)는 경도(京都)의 장안(長安)에서 자주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이 산의 부처님께서 벽돌탑 안에 앉아 유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젊어서부터 술을 마셨다. 너는 색욕(色欲)에 빠지지 말고 간사한 무리는 쫓아내고 충성스런 사람을 써라.’
그러나 유요는 그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 뒤 낙양(洛陽)에서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져 석륵(石勒)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처음에 유요가 꿈에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산에 가서 찾아보았더니, 이 불상이 작은 벽돌탑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꿈과 부합했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탑을 헐고 다시 큰 탑을 세워 높이가 19층이요, 또 극히 장엄한 절을 지어 이름을 법등사(法燈寺)라 하고, 3백 명의 스님이 거기 살았습니다.
유요가 죽은 뒤에 그 절에 있는 43인은 3과(果)를 닦아 얻었습니다. 산신은 그 탑 뒤에 또 절을 짓고 그 3과(果)를 얻은 스님에서 공양했습니다. 신은 태백산(太白山)에 가서 지초(芝草)를 캐어 성승(聖僧)들에게 공양하여 그들은 모두 오래 살았습니다. 그 절은 지금도 있으나 평범한 사람들은 보지 못하며, 그 들리는 종소리는 이 절의 종소리입니다. 그 탑은 유요에게서 연유했으나 그것은 목왕이 절을 세운 곳이며 또 가섭불의 옛 절입니다.
정관(貞觀) 때에 이르러 옥화궁 북쪽 자오천(慈烏川)의 산 위에 사슴이 항상 모여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상히 여겨 그들이 모이는 곳을 1장쯤 깊이 파내려 가다가 석상(石像) 하나를 발견했는데 길이는 1장쯤이요, 지금도 그것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또 물었다.
“형주(荊州)의 전의 대명사(大明寺)에 있는 전단상(栴檀像)에 대해 어떤 이는 우전왕(優塡王)이 지은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본떠 만들어 양조(梁朝)로 가지고 와서 지금 경사(京師)에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그 본래의 것인가?”
그는 답하였다.
“대명사에 있는 것이 그 본상입니다. 양(梁)나라의 고조(高祖)가 죽은 뒤에 그 상이 형주 물가에 왔던 것입니다. 원제(元帝) 승성(承聖) 3년에 주(周)나라가 양나라를 평정하고 그 뒤에 장부와 국보를 거두어 모두 북주(北周)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승진사(僧珍師)가 그 전단상을 방 안에 숨겨 두고 많은 재물을 그 사자에게 뇌물로 줌으로써 전단상은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9년에 문조(文祖)가 유고언(柳顧言)이라는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맞이해 오라 하고 절의 스님이 또 그 상을 구해 형초(荊楚)를 진압하게 했습니다. 고언은 그의 동향 사람이라 그것에 의해 따로 전단나무에 불상을 새겨 가지고 갔습니다. 그 때 진달(眞達)이라는 바라문 장인(匠人)을 시켜 다시 상을 지으니, 이것이 지금 서경(西京)의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상으로서 이것도 매우 영이(靈異)합니다.
본상(本像)은 형주에 있는데 스님이 옻을 칠함으로써 그 상호가 진상(眞像)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본래 만든 지 7일이 되는 부처의 몸에 지금 옻칠을 하여 장년(壯年)의 상이 되었기 때문에 본래와 아주 다르다.]
대명사는 본래 옛 부처가 있던 곳이니 그 영상(靈像)이 북으로 옮겨 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장사(長沙)의 의 법사(義法師)는 천인이 남몰래 칭찬하는 스님입니다. 그는 깨친 바 있어 불상의 옻칠을 벗겨 참모습이 다시 나타나게 했습니다. 신심이 크게 움직여 신령스런 위의를 직접 보고 전단나무를 통채로 만들어 본래에 가공한 것이 없었으며 광부(光趺)는 특히 뛰어났습니다. 상아(象牙)의 조각은 마침내 인공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흥 선사의 상은 낱낱이 본래 것과 다릅니다.”
또 물었다.
“배주(涪州)의 상사사(相思寺) 옆에 고적(古迹)이 많이 있으나 그 새긴 명(銘)의 인연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는 답하였다.
“가섭불 때에 라자명(羅子明)이라는 산신(山神)이 있으니 그는 촉(蜀)나라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계를 지키는 비구로서 파계하는 자를 미워하여 온갖 악원(惡願)을 세웠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큰 악귀(惡鬼)가 되어 저 파계하는 자를 잡아먹으리라.’
그는 이로 인해 몸을 받아 이 산신이 되었습니다. 그 권속이 많고 다스리는 토지는 동서가 5천여 리요, 남북이 2천여 리이며 해마다 만 명 이상을 잡아먹었습니다.
이 산신은 본래 가섭불의 형이었는데 뒤에 그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섭불은 그를 가엾이 여겼기 때문에 일부러 와서 교화하려고 갖가지 신통 변화를 부려 비로소 조복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5계(戒)를 받고 그에 따라 전생 일을 알고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뒤에 그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하여, 가섭불은 자취를 남겼고 아육왕은 그 위에 탑을 세워 지금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산신은 곧 돌 속에 숨고 탑은 백옥(白玉)으로 되었으며 그 산신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성 밑의 절 탑은 아육왕이 만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부촉의(付囑儀)」에 적혀 있습니다.”
또 물었다.
“남해(南海) 순주(循州) 북산과 흥녕현(興寧縣)의 경계에 있는 영감사(靈龕寺)에는 신령스런 고적이 많이 있다.”
답하였다.
“그것은 문수사리 성자(聖者)의 제자가 이 산의 귀신이 되어 악업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문수사리가 그것을 가엾이 여겨, 여기 와서 그를 교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생 일을 알고는 문수사리에게 그 자취를 남기기를 청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항상 예배하고 섬겨 모든 악에서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문수는 자취를 남겼으니 그것이 이것입니다.
정관(貞觀) 3년에 산신은 죽어 도솔천에 났습니다. 따로 한 귀신이 여기 살았으니 이것은 저 옛 산신의 친구입니다. 이것도 악업을 지었습니다. 천상에 난 옛 귀신은 이것을 가엾이 여겨, 내려와서 문수에게 조그만 자취를 나타내어 후래의 귀신을 교화하기를 청했으니 또 정법을 따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산에 나타난 크고 작은 고적은 다 그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부촉의(付囑儀)」에 있습니다.”
또 물었다.
“심주(沁州)의 북산 석굴불(石窟佛)에 항상 광명이 있다. 이 불상은 언제 나왔는가?”
답하였다.
“이 굴은 가섭불과 석가불 두 시대에 다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주(周)나라 목왕(穆王)의 제자가 가섭불의 상을 만들었습니다.”
또 물었다.
“위남(渭南)과 종남(終南) 두 산에 불면산(佛面山)과 칠불간(七佛澗)이 있는 것은…….”
답하였다.
“이것도 앞의 사실과 같습니다. 남산 고곡(庫谷)의 천장(天藏)은 가섭불이 손수 지은 창고입니다. 지금도 13연각(緣覺)이 그 골짜기 안에 살고 있습니다.”
또 물었다.
“이 나라에서 늘 전하는 말에 여기 부처는, 은(殷) 시대와 주(周)나라 소왕(昭王)ㆍ장왕(莊王) 등이 만들었다 하여 그 말들이 일정하지 않은데 어느 말이 옳은가?”
답하였다.
“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제자는 하걸(夏桀) 때에 천상에 나서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또 부처님은 3신(身)이 있어 법(法)ㆍ보(報)의 2신(身)은 범인들이 볼 것이 아니어서 다 등지(登地) 이상을 교화하시고 오직 화신(化身)만은 3천 세계에 두루하여 백억의 석가는 사람들의 감응을 따르므로 전후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혹은 은(殷)나라 말년에도 있고 혹은 주(周)나라 장왕(莊王) 때에도 있지만 모두 대천세계 안에 있으면서 모두가 전후(前後)로 교화를 전하고 상대를 보아 따르는 것이니, 전후가 어찌 일정하겠습니까? 만일 법보(法報)에 의한다면 항상 고요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힐난할 것이 없습니다.”
또 물었다.
“한(漢)나라 땅에서 보는 모든 서상(瑞像)은 다 아육왕의 넷째 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저승 일이 아니지만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 이것은 어떤가?”
답하였다.
“그것은 진실이라 의심할 것 없습니다. 아육왕의 넷째 딸은 그 얼굴이 곱지 못해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고 항상 그 추한 얼굴을 한탄하다가 이에 부처 얼굴을 그려 보았더니 도리어 제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 상호는 사람에서 뛰어나다는데 어째서 내 얼굴과 같을까?’
이런 고민으로 여러 해를 지낸 뒤에, 마침내 부처님의 감응이 있어서 본인 얼굴과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정을 자세히 물어 보았고 그는 제 바람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산의 옥화궁이나 형주ㆍ장사(長沙)ㆍ양도(楊都)ㆍ고리(高悝) 및 경성에서 숭경하는 절의 불상은 다 아육왕의 넷째 딸이 만든 것입니다. 혹 그 광부(光趺)에 쓴 것은 범본(梵本)에 의해 쓴 것인데 한인(韓人)으로는 그 글을 아는 이가 드뭅니다.
아육왕은 그 불상을 가지고 모든 귀신들을 시켜 그 인연의 느낌을 따라 유포하고 깨우치게 하였으므로 지금 보는 불상은 모두 여상입니다. 그 숭경하는 절 땅은 본래 전쟁터입니다. 서진(西晋)이 망할 때 오호(五胡)가 크게 일어나 무기를 휘둘러 서로 죽인 중에서도 이곳이 더했습니다. 지금도 땅을 파면 사람 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무고한 살상은 잔혹하고 비참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귀신들이 불법으로 그들을 위안시켜 그 원혼들로 하여금 선심을 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주(周)나라가 불법을 멸하게 하자 신들도 옮겼다가 수(隋)나라가 불법을 일으키자 다시 거듭 왔습니다.”
또 물었다.
“이 세상에는 저승 일의 영감이 흔히 있다. 정신이 떠나고 몸이 다 썩었는데 어떻게 다시 와서 7일이나 혹은 더 많은 날을 지내면서 산 때와 다름이 없는가?”
답하였다.
“사람은 7식(識)을 타고 났고 식에는 각각 신(神)이 있습니다. 심식(心識)이 주인이 되어 주인은 먼저 떠나더라도 남아 있는 신이 수호하는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5계(戒)의 1계에는 5신(神)이 있으므로 5계이면 곧 25신이 됩니다. 1계를 파괴하면 5신은 떠나가더라도 남은 신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대승(大僧)이 계를 받을 때 계마다 250신(神)이 있으며 계마다 250신이 비구를 호위함을 얻게 됩니다.
만일 한 중한 계를 깨뜨리면 다만 250신만 떠나고 다른 것은 항상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039_0391_b_04L宋都城文殊師利金像緣宋東陽銅像從地出緣宋浦中金像光現乃出緣宋江陵上明澤中金像緣宋荊州壁畫像塗卻現緣宋江陵支江金像誓志緣宋湘州桐楯感通作佛光緣齊番禺石像遇火輕擧緣齊彭城金像汗出表祥緣齊楊都觀音金像緣梁荊州優塡王栴檀像緣梁楊都光宅寺金像緣梁高祖等身金銀像緣元魏定州金觀音像高王經緣陳重雲殿幷像飛入海緣周晉州靈石寺石像緣周宜州北山鐵鑛石像緣周襄州峴山華嚴行像緣隋蔣州興皇寺焚像移緣隋京師日嚴寺瑞石影緣隋邢州沙河寺四面像緣隋雍州凝觀寺釋迦夾紵像緣唐邡州石像出山現緣唐簡州佛迹神光照現緣唐涼州山出石文有佛字緣唐渝州相思寺佛迹出石緣唐偱州靈龕寺佛迹緣唐雍州李大安金銅像感救緣唐幽州漁陽縣失火像不壞緣唐幷州童子寺大像放光現瑞緣唐西京淸禪寺盜金像緣唐撫州及潭州行像等緣唐雍州藍田金像出石中緣唐雍州鄠縣金像出灃水緣唐沁州山石像放光照谷緣唐益州法聚寺畫地藏菩薩緣唐荊州瑞像圖畫放光緣唐代州五臺山像變現出聲緣宋元嘉二年劉式之造文殊金像夕禮拜頃之便失惆悵祈請夙夜匪經于五年昏夕時見佛座有光座至棟式之因燒香拂拭牀帳乃見失像儼然具存宋元嘉十二年留元之東陽長山人家以種苧爲業每燒田墌輒有一處叢草不然經久怪之不復墾伐後試薄掘得銅坐像高三寸許尋撿其地舊非邦邑莫測何來云宋元嘉十四年孫彦曾家世奉佛王慧稱少而信向年大彌篤誦法華輒見浦中有雜色光使人掘深二得金像連光趺高二尺一寸趺銘建武六年歲在庚子官寺道人法新僧行所造卽加磨鎣云宋元嘉十五年羅順爲平西府將在上明十二月放鷹野澤同輩見鷹雉俱落于時火燒野平惟有三丈許叢草不然遂披而覓焉乃得金菩薩坐像通趺高一尺工製殊巧定襄令謂盜者所藏乃符界內無失像者遂收而供之宋衛軍臨川康王在荊州城內築堂三閒供養經像堂壁上多畫菩薩圖及衡陽文王代鎭廢爲眠齋悉加泥治乾輒陁脫畫狀鮮淨再塗猶爾王不信向亦謂偶爾又使濃塗而畫像徹現炳然可列王復令毀故壁悉更繕改不久抱疾閉眼輒見諸像森然滿目於是廢而不居頗事齋講宋元嘉中江陵支江張僧定妹幼而奉法志欲出家常供養小形金像爲前路之資也而父母逼嫁誓志不而密許邴氏女初不知也及羔鴈旣至女悲呼不就燒香伏地取死像遂放金光彌竟一村父兄驚其通感止不嫁之張邴二門因大敬信定爲之出家宋丞相南郡王鎭陜以其居建精舍焉宋泰始中東海何敬叔少而奉法湘州剌史劉韞監縣遇有栴檀製以爲像旣就無光營索甚勤而卒無可獲馮几思之如睡見沙門納衣杖錫來檀非可得麤木不堪惟縣後何家桐楯堪用雖惜之苦求可得寤問左果如言因故求買之何氏曰有楯甚愛患人乞奪曾未示人明府何以得知直求市耶敬叔以事告之何氏敬喜奉以製光後爲湘府直省中夜夢像云鼠齩吾足淸旦疾歸視像然云齊建元中番禺毘耶離精舍舊有扶南國石像莫知其始形甚異常七八十人乃能勝致此寺草茨遇火延及屋在下風煙焰已接尼衆十餘相顧無計中有意不已者試共三四人捧飄然而起曾無鈞石之重像旣移屋亦焚焉每有神光州部兵寇輒淚汗滿體嶺南以爲常候後廣州剌史劉悛表送出都今應在故蔣州寺宋徐州剌史王仲德於彭城宋王寺造丈八金像相好嚴華江右之妙製北境兵起或貽僧像輒流汗啇其多少則難之小大逆可知矣郡人常以候之齊建元初像復流汗其冬魏寇淮上兗州數郡起義南附鳩略甚衆亦驅迫沙門助其顫守魏軍屠其營壘悉欲夷滅表奏魏臺誣以助頃及斬決像大汗殿地流濕徐州剌史梁王奉法勤勤至寺親使以巾帛拭隨拭隨出不已至數十人了眞交手競拭猶不能止王乃燒香禮拜執巾呪曰衆僧無罪誓自營護必不罹禍若幽誠有感當隨拭卽止言已自拭果應手而燥王具事表聞下詔皆見原宥云齊建元初太原王琰者年在幼稚於交阯賢法師所受五戒以觀音金像令供養遂奉還楊都寄南㵎寺琰晝夢像立于座隅意甚異之卽馳還其夕南㵎失像十餘盜毀鑄錢宋大明七年秋夕放光照三尺許金映奪合家同睹後以此像寄多寺琰適荊楚垂將十載不知像處及楊都夢在殿東衆小像內的的分明詰旦造寺如夢便獲於建元元年七月十三日也故琰冥祥記自序云此像常自供養庶必永作津梁循復其事有感深懷沿此徵覿綴成斯記夫鏡近情莫踰儀像瑞驗之發多自是興經云鎔斲圖繢類形相者悉能行動及放光明今西域釋迦彌勒二像輝用若眞蓋得相乎今東夏景摸應極著亦或當年群生因會所感假馮木石以見幽異不必剋由容好而能然也故沈石浮深寔闡閩吳之化塵金瀉液用舒彭宋之禍其餘銓示繁方雖難曲辯率其大抵允歸自從若夫經塔顯效旨證亦同事非殊貫故繼其末梁祖武帝以天鑑元年正月八日檀像入國因發詔募往迎案佛游天竺記及雙卷優塡王經云佛上忉利一夏爲母說法王臣思見優塡國王遣三十二匠及齎栴檀請大目連神力運往令圖佛相旣如所願圖了還返坐高五尺在祇桓寺至今供養帝欲迎請此像時決勝將軍郝騫謝文華等八十人應募往達具狀祈請舍衛王曰此中天正像不可適邊令三十二匠更剋紫檀人圖一相時運手至午便就相好具足而像頂放光降微細雨幷有異香故優塡王經云眞身旣隱次二像現普爲衆生深作利益者是也騫等負第二像行數萬里備歷艱關難以具聞又度大海冒涉風波隨浪至山糧食又盡將人衆及傳送者身多亡歿逢諸猛獸一心念佛乃聞像後有甲冑聲聞鍾聲巖側有僧端坐樹下騫登負像下置其前僧起禮像騫等禮僧授澡鑵令飮竝得飽滿僧曰此像名三藐三佛陁金毘羅王自從至彼大作佛事語頃失之爾夜僉夢見神共圖之至天鑑十年四月五日騫等達于楊都帝與百僚徒行四十里還太極殿建齋度人大赦斷殺絓是弓刀槊等竝作蓮華塔頭帝由此菜蔬斷慾至太淸三年五月崩湘東王在江陵卽位號元承聖遣人從楊都迎上至荊都承光殿供養後梁大定八於城北靜陵造大明寺乃以像歸今現在多有傳寫流被京國云梁祖天鑑初於本宅立光宅寺造丈八金像圖樣旣成不爽分寸臨鑄疑銅不足始欲上請忽有使者領銅十五車至云奉勅送寺便卽鎔瀉一冶卽成冠絕通國唯覺高大試以量之乃長二丈二尺以狀奏聞鑄像已成不改元樣所續送銅用亦俱盡更重審量乃增四尺勅云銅初不送何緣乃爾豈不以眞相應感獨表神奇乎可鐫著華趺以爲靈誌乃具疏而剋于足下於今存焉梁祖爲父於鍾山造大愛敬寺殿大像神相有之故不重顯廣如別記有梁佛像多現神奇剡縣大石像元在宋初有王所造有曇光禪師從北來巡行山川爲幽棲之所見此山崇麗乃於峯頂搆小草室聞天樂空聲此是佛地如何輒有蔬囿耶光聞南移天台後遂繕造爲佛像積經年稔終不能成至梁建安王患降夢能開剡縣石像病可得愈遂請僧祐律師旣至山所規摸形製嫌其先造太爲淺陋恩緖未絕夜忽山崩壓二百餘人其內佛現頸已下猶在石中乃剗鑿浮石至本仍止旣都除訖乃具相焉斯則眞儀素在石中假工除剗故得出現梁太子舍人劉勰製碑於像前耳梁祖登極之後崇重佛教廢絕老宗每引高僧談敍幽旨又造等身金像兩軀於重雲殿晨夕禮事五十許冬夏踏石六時無缺足蹈石處十指文現遂卒窮祚侯景篡位猶存供太尉王僧辯誅景修復臺城會元帝陷於江陵江南無主辯乃通款於迎貞陽侯蕭淵明爲帝江左未定利害相雄辯遣女壻杜龕典衛宮龕性凶頑不見後際欲毀二像爲先令數十人上三休閣令鐫佛項椎鑿始擧二像一時迴顧眄之所遣諸人臂如墮落不自勝擧失瘖如醉杜龕亦爾夂乃醒寤仍被打築徧身靑腫唯見金剛力士可畏之物競來擊之受苦呻吟擧形烘爛膿血交流穿皮露骨而卒此乃近事道俗同知元魏天平中定州募士孫敬德防於北陲造觀音金像年滿將還常加禮後爲劫賊橫引禁於京獄不勝考掠遂妄承罪竝斷死刑明旦行決夜禮拜懺悔淚下如雨啓曰今身被枉當是過去枉他願償債畢誓不重又發大願云云言已少時依俙如夢見一沙門教誦觀世音救生經有佛名令誦千徧得度苦難敬德欻克沖覺起坐緣之了無參錯比至平明滿百徧有司執縛向市且行且誦臨加刑誦滿千徧執刀下斫刀折段不損皮肉易刀又斫凡經三換刃如初監當官人莫不驚異具狀奏承相高歡表請其事遂得免死勅寫此經傳之今所謂高王觀世音經是也敬德放還設齋報願出在防像乃見項上有三刀痕鄕親同睹歎其通感見齊志及旌異等記陳武帝崩兄子蒨立將欲修葬造轀輬車國創新定未遑經始昔梁武帝立重雲殿其中經像竝飾珍寶映奪諸國運雖在陳殿像仍在蒨欲取重雲佛帳珠珮以飾送終人力旣足面齊至但見雲氣擁結流繞佛殿自方左開朗無陰百姓怪焉競往看睹須臾大雨橫澍雷電振擊煙張吻火列雲中流布光焰高下相涉欻見重雲殿影二像峙然四部神王幷寶座一時上騰煙火挾之忽然逝觀者傾國咸歸奉信雨晴之後覆看故處唯礎存焉至後月餘有人從東洲來云於此日見殿影像乘空飛今望海者有時見之又魏氏洛京永寧寺塔去地千尺爲天所震其像略同有人東海時見其迹云北齊末晉州靈石寺沙門僧護守道直心不求慧業願造丈八石像衆僧咸怪其言大後於寺北谷中見有臥石可長丈八乃雇匠就而造佛向經一周面腹粗了而背猶著地以六具拗擧之不動經夜自翻旦視欣然卽就營作移在佛堂晉州陷日像汗流地周兵入境先燒寺塔此像被焚初不變色唯傷二指後欲倒之人牛六十牽挽不遂忽有異僧咸無識者以瓦木土墼雜壘圍之須臾便了失僧所像後降夢信心者曰吾患指痛人悟而補之隋氏啓運如前開復開皇十五年有盜幡蓋者卽夢丈八人入室責之其賊慚怖而送像今現在周武建德三年猜忌佛法勇意殄滅天下闇冥有宜州姜明者督事夜行經州北百餘里山中行往往常見上山光明怪之因巡行光處見有臥石狀如像形便斲掘尋之乃是鐵鑛不可鏨鑿故其形䃙▼(石+速)高三丈許欲加摩鎣卒不可觸又向下尋乃有石趺穴具足乃共村人以拗擧之其像欻然流下逕趣趺孔卓然峙立衆以爲奇瑞以奏聞徹天元嗣歷佛日將乃改爲大像元年仍以其處爲大像寺隋祖開運重斯故迹又改爲顯除寺討尋其本處非人住又無大石及以鐵鑛豈非育王神力之所降感大唐因之不改貞觀末寺西置宮名曰玉華像仍舊所在宮東三十里苑內太宗嘗往禮事嫌非華飾捨物莊嚴永徽年中改宮立寺還名玉華今屬邡州陰暗之夕每發光瑞道俗常見故不甚驚怪云周襄州峴山華嚴寺行像者古來木莫知其始而面首殊麗瞻仰無已可高五丈許徵應在昔不復具陳周滅法人藏其首隋開皇乃出如前莊嚴以爲坐像號曰盧舍那佛每年祈福以爲歸依之所也隋文將崩鼻涕出沾污懷中金薄剝起涕流有拭之無塵望還如涕貞觀二十三年四月內涕還連出塗漫懷內方圓一尺初未委也及後太宗升遐方知兆見至六月內涕又重出合州同懼不知何禍至七月內漢水汎漲溢入城郭深丈餘淊溺不少今在本寺祈求殷矣襄陽土俗有少子息者皆往祈之隨其本心男女感應隋開皇中蔣州興皇寺佛殿被焚陽丈六金銅大像幷二菩薩俱長丈其摸戴顒所造正當棟下于時火大盛衆人拱手咸共嗟悼大像融忽見欻起移南一步棟梁摧下得全形四面甎木炭皆去像身五六尺許雖被火焚而金色不變趺下有大衆咸駭歎聲滿路今移在白馬鳥雀無踐至唐永徽二年盜者欲利像銅乃鋸窗櫺子斷將欲拔出被夾腕求拔不得脫至曉僧問盜者有一人著白衣在堂內撮手求脫不得云隋京師日嚴寺石影像者其形八楞紫石英色高八寸徑五寸內外映徹昔梁武太淸年中有西域僧將來侯景作亂遂安江州廬山西林寺像頂上隋開皇十年煬帝鎭於楊越廣搜英異江表文記悉摠收集乃於雜記中得影像傳卽令舍人王延壽寺推覓得之自任晉蕃已來每有行往常以烏漆函盛之令人馬捧而前後登儲貳乃送曲池日嚴寺有令當寺看已封鎖勿令外人見之寺卽帝之所造也大業之末天下沸騰京邑僧衆常來瞻睹有住此寺亦未之信以見石中金光晃晃疑似佛像耳仍見名行諸僧互說不同咸言了了分明面目相狀未曾有昧每慨無所又潔齋別懺七日後依前觀之有銀塔後又觀之見有銀佛而道俗同觀往往不同或見佛塔菩薩或見僧衆列坐或見帳蓋幡幢或見山林八部或見三途苦相或見七代存亡一睹觀之閒或定或變雖善惡交現而善相繁焉故來祈者咸前發願作何形來生何處依言爲現信爲幽途之業鏡者也至貞觀六年七月內云正下勅入內供養隋邢州沙河縣寺四面佛者隋祖時有人入山見僧守護此佛銅身高三尺餘便請遂許失僧所在諸處聞之競來引挽都不得起唯沙河寺僧之隨手至寺後人寺側獲金一塊上二烏形銘云擬度四面佛因度之像身上都是烏形後忽失之於寺側瀅中數有光現尋乃漉出隋後王聞工冶鑄擬之卒不成經二百餘日乃成終有缺少遂罷隋時凝觀寺僧法慶開皇三年造紵釋迦立像一軀擧高一丈六尺像功未畢慶身遂卒其日又有寶昌寺僧大智死經三日而便蘇活遂向寺僧說云於閻羅王前見僧法慶甚有憂色少時之閒又見像來王前王走下階合掌禮拜此像像謂王曰法慶造我今仍未畢奈何令死王顧召一人曰法慶合死未荅曰命未合終而食料已盡王曰可給荷葉令終其福業也俄而不見大智蘇活爲寺僧說之乃令於凝觀寺看之須臾之閒遂見法慶蘇活所說與大智不殊慶蘇後常食荷葉以爲佳味及噉餘終不得下像成之後數年乃卒像儀相圓滿屢放光明此寺雖廢其像現存唐武德年中邡州西南慈烏川有郝積者素有信敬見群鹿常在山上逐去還來異之掘鹿所止處得石像一丈四尺許移出川中村內至今見自像出後群鹿因散古老傳云葉佛時所藏有四十軀今雖兩現餘在山隱其形如今玉華東鐵鑛像相不可治雘云唐貞觀十七年九月涼州都督李襲譽因巡境至州東南昌泉縣界有石表文合一百一十字乃有七佛八菩薩上果佛田等字以狀表奏聞有恩勅覆撿如其所奏下於所司令發急詔涼府給復一年罪者赦之唐渝州西百里相思寺北石山有佛迹十二枚皆長三尺許闊一尺一寸九寸中有魚文在佛堂北十餘步見有僧住至貞觀二十年十月忽寺側戒珠泉內出蓮華形如紅色鬚臺具足大如三尺面合擎出如涕入水成華舟旅往還無不歎訝經月不滅相思寺因得名一云涪州亦有寺寺本貧煎由是感施至今常富昔齊荊州城東天子井出錦于時士女取用如人錦不異經月乃歇故知於出不足可見吳均齊春秋蕭誠荊南志說唐偱州東北興寧縣靈龕寺北石上佛迹三十痕大者長五尺以下偱州在一川中東西二百南北百里寺極豐渥近得銅藏面三尺鑪可獲百餘諸盤合等又其銘云僧得福興俗禍至古傳云晉時北僧在此山隱游洪嶺至佛迹處有大石窟華菓美茂遂住經宿山神爲怪怖之心卓不動曰此不可居山鬼數來望前石山陵雲蓋日遂往登之下望懸絕不可彼還興寧說之宋代二僧承前不達勇意覆尋其僧誦法華戒行貞潔能伏神鬼乃至見形受戒爰及家屬望前崖上有異光釆隔一丈許上下俱絕僧以木爲梁度視乃見奇迹十色如人肉現于石上貞觀三年現一迹竝放光明輪相具足今有看者多少不同因置靈龕厥取其異訪其本宋時王家捨果園爲寺卽今古堂尚存焉唐隴西李大安工部尚書大亮之兄武德中大亮任越州摠管大安自京往省之大亮遣奴婢數人從兄至穀州鹿橋宿於逆旅其奴有謀殺大安者候其眠熟夜已過半奴以小劍剌大安項洞之刃著于牀奴因不拔而逃大安驚覺呼奴其不叛者奴婢欲拔刃大安曰拔刃便死可先取紙筆作書畢縣官亦至因爲拔刃洗瘡加藥大安遂絕忽如夢者見一物長尺餘闊厚四五寸形似猪肉去地二尺許從戶入來至牀前其中有語曰急還我猪肉大安曰我不食猪肉緣負汝卽聞戶外有言曰錯非也物卽還從戶出大安仍見庭前有池淸淺可愛池西岸上有金像可高五寸須臾漸大而化成爲僧被袈裟甚新淨語大安曰被傷耶我今爲汝將痛去汝當平復還家念佛修善也因以手摩大安頸瘡而去大安得其形狀見僧背有紅繒補袈裟可方寸甚分明旣而大安覺遂蘇而瘡亦復不痛能起坐食十數日京宅子弟迎至家家人親故來視大安爲說被傷由狀及見像事有一婢在傍聞說因言大安之家初行也安妻使婢詣像工爲造佛像像成以綵畫衣有一點朱污像背上當令工去之不肯仍在形狀如郞君所說大安因與妻及家人共起觀像乃同所見無異背點宛然補處於是歎異信知聖教不虛遂加崇信佛法彌殷禮敬益年不死自佛法東流已來靈像感應者述不能盡略件如前右一驗出冥報記也唐幽州漁陽縣無終戍城內有百許龍朔二年夏四月戍城火災門樓及人家屋宇竝爲煨燼唯二精舍及浮圖幷佛龕上紙簾蘧篨等但有佛像獨不延燎火旣不燒巋然獨存見者莫不嗟異以爲佛力支持中山郞餘令旣任彼官又家兄餘慶交友郞將齊郡因如使營州竝親見其具爲餘令說之唐幷州城西有山寺寺名童子有大坐高一百七十餘尺皇帝崇敬釋教顯慶末年巡幸幷州共 皇后親到此寺及幸北谷開化寺大像高二百尺禮敬瞻睹嗟歎希奇大捨珍寶財物衣服幷諸妃嬪內宮之人竝各捐捨幷勅州官長吏竇軌令速莊嚴備飾聖容幷託龕前地務令寬廣還京之日至龍朔二年秋七月內官出袈裟兩領遣中使馳送二寺大像其童子寺像披袈裟日旦至暮放五色光流照崖巖洞燭山又入南龕小佛赫弈堂殿道俗瞻睹數千萬衆城中貴賤睹此而遷善十室而七八焉衆人共知不言可唐西京淸禪寺先有純金像一軀一尺四寸重八十兩隋文帝之所造貞觀十四年有賊孫德信僞造璽將一閹豎子詐稱勅遣取像寺僧聞奉勅索不敢拒付之經宿事發像身已被鑄破唯頭不銷太宗大怒處以極刑德信未死之閒身已爛壞徧體瘡潰寺僧更加金法鑄成右三驗出冥報拾遺唐顯慶四年撫州剌史祖氏爲亢旱故請祈無效有人於州東山見有行像莫測其由將事移徙鏗然不動風聲扇及遠近同趣有潭州人云彼寺失乃在此耶尋其行路乃現二迹長三尺相去五百里剌史以亢炎旣便往祈請盡州官庶香華步往二十里許泣告情事勤至彌甚使三人捧之飄然應接返還州寺隨路布雲當夕霈下遂以豐足今在撫州唐永徽年雍州藍田東悟眞寺寺居藍谷之西崖製窮山美殿堂嚴整像持寺北隒更修別院大石橫礎甚爲妨礙乃以火燒水沃之令散終無以致便以鐵椎打破中獲金像一軀面無縫天然裹甲不知何來像趺全具非工合作亦不識是何珍寶高五寸許今在山寺其年益州光明柱上有一佛二菩薩現雖削還影出初在九隴佛堂長史張緖以聚衆移入光明今現在唐雍州鄠縣東澧水西李趙曲有金高三尺六寸幷焰光四尺數放光像形露右膊極威嚴余聞往尋見趺上銘云秦建元二十年四月八於長安中寺造女王慧韶感佛泥幸遇遺像是以賴身之餘造鑄神若誠感必應願使十方同福銘文如此問其獲緣云昔廢二教遂藏於灃水羅仁渦中有人岸行聞渦中有亦放光明向村老說便趣水求渦中純沙水出光明便就發掘乃獲前尚在周村家藏隱互相供養在閑堂放光自照今在村中唐龍朔三年春二月沁州像現州北六十餘里在緜上縣界長谷中半崖上有古佛龕中有三鋪石像中央像常放光明照燭林谷村人異之以事聞州遂以達 上上乃勅京師大慈恩寺僧玄秀共使人乘驛往審登到之卽見光明如火流飛出沒然續不有雲至龕窟其光暫隱雲去光便卽馳報勅令圖寫重復依審光還如初頻頻三夕如初照曜至今相傳光仍不斷此處山林勝地鬱茂龕佛像古迹甚多莫委其初睹瑞彌繁唐益州郭下法聚寺畫地藏菩薩坐繩牀垂腳高八九寸本像是張僧繇畫至麟德二年七月當寺僧圖得一本放光乍出乍沒如似金環大同本光如是展轉圖寫出者類皆放光當年八月 勅追一本入宮供養現今京城內外道俗畫者供養竝皆放光信知佛力不可測量家別一本不別引記唐麟德二年簡州金水縣北三學山舊屬益州寺僧慧昱今權例得住益州郭下空慧寺至麟德元年從州故往荊州長沙寺瑞金銅像所至誠發意欲圖寫瑞像供養訪得巧匠張淨眼使潔淨如法已畫得六軀未有靈感至第七軀卽放五色神光洞照內外遠近皆睹經於七日光漸隱滅道俗驚喜不可具述慧昱將此像來入長安未及莊飾幷欲畫左右侍者菩薩聖僧供養具等當時奉勅令京城巧匠至中臺使百官諸學士監看令畫西國志六十卷圖有四十卷慧昱爲外無好手就中臺憑匠范長壽莊畫像在都堂至六月七日夜至三更初像放五色光明徹照堂有守堂人出外起止見堂上火出謂內失火驚走唱噭堂內當直官十幷兵士三十餘爲天熱竝露身光照身人人相見身體赤露驚起具服唯有一官姓石名懷藏素無信但見外光看身純黑光照徹旦方歇其石懷藏發露自責盡誠悔過亦不見光照身得明及諸院官人士等聞喚見光竝來看之聞見之者竝皆發心盡形齋戒諸官人等各畫一本至家供養京城道俗共知故不別引記也唐龍朔元年下 勅令會昌寺僧賾往五臺山修理寺塔其山屬代州五臺縣備有五臺中臺最高目極千里山川如掌上有石塔數千所塼石壘斯竝魏高祖孝文帝所立臺北石上人馬犬迹蹈文如新頂有大池太華泉又有小泉迭相延屬夾泉有二浮圖中有文殊師利像傳云文殊師利與五百仙人往淸涼山說法華嚴經亦云文殊在淸涼山說法此山極寒不生餘樹唯有松林森聳山谷南號淸涼峯山下有淸涼府今遺基見不泯滅從臺東南而下三十里許有古大孚靈鷲寺見有東西二道場佛事備焉古老傳云漢明帝所造南有華園二頃許異華閒發光曜人目四邊樹圍訪問古老不知根每至肇春迄到晩秋華迭開發來道俗愛此華奇人閒無有採根外栽植竝皆不生乃至移出圍樹外栽亦不得生要在圍內任之自發由文殊所感大聖現徵寔置神仙之豈凡人之所植也若有志誠入此山者多見伽藍聖僧所居或有飛空或有緣㵎或居山嶮或在幽巖或道或俗不異凡愚過後尋覓不知去處寺及聖僧出沒不恒非聖靡測皇帝至龍朔二年初又令會賾往幷州取吏力財帛使修故寺賾與五臺幷將二十餘人直詣臺中見石像臨崖搖動身手及至像所乃是方石悽然自責不睹眞身悵恨久之令作工修理二塔幷文殊師利像徒倚塔邊忽聞塔閒鍾聲振發連椎不絕聞異香氛氳屢至道俗咸怪歎未曾又往西臺遙見一僧乘馬東上奔來極急賾與諸人立待其至久而不到就往參迎乃變爲枿恨恨無已然則像相通感有時隱顯鍾響聲氣相續常聞其山方三百里東南腳卽連北嶽山也西北腳卽是天池也中有佛光山仙華山王子塔古寺六所解脫禪師僧明禪師遺蹤坐窟身肉不壞已積十年定力所持聖賢靡測大唐乾封二年仲春之月西明寺道宣律師于時逐靜在京師城南淸宮故淨業寺修道律師積德高遠抱素日夂忽有一天來至律師所致敬申具敍暄涼律師問曰檀越何處字誰耶荅曰弟子姓王名璫是大吳之蘭臺臣也會師初至建業孫主卽未許之今感希有之瑞爲立非常之于時天地神祇咸加靈被於三七日遂感舍利吳主手執銅甁傾銅盤內舍利所衝盤卽破裂乃至火燒鎚試俱不能損闞澤張昱之徒亦是天人護助入其身中令其神爽通敏荅對諧允今竝在天弘護佛法爲事弟子是南天王韋將軍下之使者將軍事務極多擁護三洲之佛法有鬪諍𣣋危之事無不躬往和喩令解令附和南大欲卽至前事擁鬧不久當至具令弟子等共師言不久復有天來云羅氏是蜀人也言作蜀音廣說律相初相見時如俗禮儀敍述緣由多有次第遂有忽忘次又一天云姓費氏禮敬如前云弟子迦葉佛時生在初天在韋將軍下諸天貪欲所醉弟子以宿願力不交天欲淸淨梵行偏敬毘韋將軍童眞梵行不受天欲一王之下有八將軍四王三十二將周四天往還護助諸出家人四天下中天一洲少有佛法餘三天下佛法大然出家之人多犯禁戒少有如法英白東西天下人少黠慧煩惱難化南方一洲雖多犯罪化令從善心易調伏佛臨涅槃親受付囑竝令守護不使魔嬈若不守護如是破戒誰有行我之法教者故佛垂誡不敢不行雖見毀禁愍而護之見行一善萬過不咎事等忘瑕不存往失且人中臭氣上空界四十萬里諸天淸淨無不厭之但以受佛付囑令護佛法尚與人同止諸天不敢不來韋將軍三十二將之中最存弘護多有魔子魔女輕弄比丘道力微者竝爲惑亂將軍棲遑奔應機除翦故有事至須往四王所時王見皆起爲韋將軍修童眞行護正法故弟子性樂戒律如來代所製毘尼竝在座中聽受戒法因問律中諸隱文義無不決滯然此華三寶素有山海水石往往多現但謂其靈而敬之顧訪失由莫知投詣遂因此緣隨而諮請且沈冥之相以理括之未曾持觀不可以語也宣師感通記問天人云益州成都多寶石佛者何代時像從地踊出荅曰宗素蜀都元基靑城山上今之成都大海之地昔迦葉佛時有人於西耳河造之擬多寶佛全身相也在西耳河鷲山寺有成都人往彼興易請像將還至今多寶寺處爲海神踏船所沒初取像人見海神子岸上游謂是山芝卽殺之因爾神瞋覆沒人像俱溺同在一船其多寶舊在鷲頭山寺古基尚在仍有一塔常有光明令向彼土道由郞州過大小不筭三千餘里方西耳河河大闊或百里或五百里中有山洲亦有古寺經像尚存無僧住經同此文時聞鍾聲百姓殷實每年時供養古塔塔如戒壇三重石砌上有覆釜其數極多彼土諸人但言神冢每發光明人以蔬食祭之求其福祚也其地西北去嶲州二千餘里問去天竺非遠往往有至彼者自下云云至晉時有僧於此地見土墳隨出隨除終不可平後見坼開深怪其爾乃深掘丈餘獲像及人骨在船其髏骨肘脛皆麤大數倍過於今人卽迦葉佛時閻浮人壽二萬歲時人也今時劫命促人小固其常然不可怪也出之時牽曳難得弟子化爲老人指揮方便須臾至周滅法暫隱到隋重興更復出之蜀人但知其靈從地而亦不測其根源見其花趺有多寶因遂名焉又名多寶寺又問多寶是其隸書出於亡秦之代如何迦葉佛時已有神州書耶亡秦李斯隸書此乃近代遠承隸書之興興於古佛之世見今南洲四面千有餘洲莊嚴閻浮一方百有餘國文字言音同今唐國但以海路遼遠動數十萬重譯莫傳故使此方封守株柱足怪也師不聞乎梁顧野王大學之太博也周訪字源出沒不定故玉篇序云有開春申君墓得其銘文皆是隸字檢春申是周武六國同時隸文則非吞倂之日也此國篆隸諸書尚有茫昧寧知迦葉佛時之事史非其耳目之所聞見也又問今西京城西高四土臺俗諺云是蒼頡造書臺如何云隸書字古時已有荅云蒼頡於此臺上增土造臺惠暉觀鳥迹者非無其事且蒼頡之傳此土罕知其源或云黃帝之臣或云古帝王也鳥迹之書時變一途今所絕有無益之言不勞述也又有天人姓陸名玄暢來謁律師云弟子是周穆王時生在初天本是迦葉佛時天爲通化故周時暫現所問高四土臺者其本迦葉佛於此第三說法度人至穆王時文殊目連來穆王從之卽列子所謂化人者是也化人示穆王高四臺是迦葉佛法處因造三會道場至秦穆公時扶風獲一石佛穆公不識棄馬坊中穢污此像護像神瞋令公染疾公又游上帝極被責疏覺問侍臣由余便荅云臣聞周穆王時有化人來此土云佛神穆王信之於終南山造中天臺高千餘尺基趾見存又於蒼頡臺造神廟名三會道場公今所患殆非佛爲之耶公聞大怖語由余曰吾近獲一石人衣冠非今所製棄之馬非此是佛神耶由余聞往視之對曰此眞佛神也公取像澡浴安淸淨惠暉處像遂放光公又怖謂神瞋也宰三牲以祭之諸善神等擎棄遠處公又大怖以問由余荅曰臣聞佛神淸潔不進酒肉愛重物命如護一子所有養燒香而已所可祭祀餠菓之屬公大悅欲造佛像絕於工人又問由荅曰昔穆王造寺之側應有工匠遂於高四臺南村內得一老人姓王名安年百八十自云曾於三會道場見人造之臣今年老無力能作所住村北兄弟四人曾於道場內爲諸匠作請追共造依言作之成一銅像相好圓備公悅大賞賚之彼人得財竝造功德於土臺上造重閣高三百尺時人號之高四臺或曰高四樓其人姓高大者名四或曰兄弟四人同立故也或取大兄名以目之故高四之名至今稱也問目連舍利弗佛在已終如何重荅曰同名六人此目連非大目連也至宇文周時文殊師利化爲梵僧來游此土云欲禮拜迦葉佛說法處幷往文殊所住之處名淸涼山徧問道俗無有知者時有智猛法師年始十八反問梵僧何因知有二聖餘迹荅曰在秦都城南二十里有蒼頡造書臺卽其地也又云在沙河南五十里靑山北四十里卽其處也又問沙河靑山是何語荅曰渭水終南山也此僧便從渭水直南而步遠到高四便云此是古佛說法處也智猛法師隨往禮拜不久失梵僧所在智猛長大具爲太常韋卿說之請其臺處依本置寺遂奏周主名三會寺至隋大業廢入大寺因被廢毀配入菩提今京城東市西平康坊南門東菩提寺西堂佛首卽是三會寺佛釋迦如來度大迦葉後十二年中來至此臺其下見有迦葉佛舍利穆身游大夏佛告彼土見有古塔可返禮事王問何方佛荅在鄗京之東南也西天竺國具有別傳去歲長年是師子國僧年九十九夏是三果阿那含人聞斯勝迹躬至禮拜又請奏欲往北代淸涼山文殊師利菩薩坐皇帝聞喜勅給驛馬內使及弟子官佐二十餘人在處供給諸官人弟子竝乘官馬唯長年一人少小已來精誠苦行不乘雜畜旣到代州淸涼山卽肘行膝步而上至中臺佛堂卽是文殊廟堂從下至上可行三十餘山石勁利入肉到骨無血乳出至于七日五體投地布面在土不起不食七日滿已忽起踊躍指揮四方上下空界具見文殊師利菩薩聖僧羅漢從者道俗數十人有見不見復有一蟒蛇身數里從北而來直向長年年見喜銜師腳過變爲僧形諸人怕皆悉四散唯長年一人心不驚動種種靈應不可具述所請遂願還返京都今現化度安置或請內受戒巡歷諸山律師問天人曰自昔相傳文殊在淸涼山領五百仙人說法經中明文殊是夂住娑婆世界菩薩娑婆則大千摠號如何偏在此方荅曰文殊是諸佛之元師隨緣利見應變不同大土大功非人境界不勞評泊但知仰信多歸守在淸涼山五臺之中今屬北代州西見有五臺縣淸涼府皇唐已來有僧名解脫在巖窟亡來三十餘年身肉不壞似如入滅盡復有一尼亦入定不動各經多年聖迹伽藍菩薩聖僧仙人仙華屢屢人見具在別篇豈得不信又問今五臺山中臺之東南三十見有大孚靈鷲寺兩堂隔㵎猶存南華園可二頃許四時發采色類不同四周樹圍人移華栽別處種植皆悉不生唯在圍內方得久榮人究年月莫知來由或云漢明所立或云孝文帝栽植古老相傳互說不同如何爲實荅云俱是二帝所作昔周穆王之時已有佛法此山靈異文殊所居周穆於中造寺供養及阿育王亦依置塔漢明之初摩騰是阿羅漢天眼亦見有塔請帝立寺其山形像似靈鷲名曰大孚者信也由帝深信佛法立寺勸人元魏孝文北臺不遠常來禮謁見人馬行迹石上分明其事可驗豈唯五臺獨驗今終南山太白太華五嶽名山皆有聖人爲住持佛法令法久住有人設供感訃徵應事在別篇不繁此述也又問今涼州西番音盤禾縣山裂像出何代造耶荅云迦葉佛時有利賓菩薩見此山人不信業報以殺害爲業于時住處有數萬家無重佛法者菩薩救之爲立伽藍大梵天王手造像身成以菩薩神力能令如眞佛不異步說法教化諸人雖蒙此道猶故不于時菩薩示行怖畏手擎大石於聚落欲下壓之菩薩揚威勸化諸便欻迴心信敬於佛所有殺具變成蓮華隨有街巷華如種植瑞像方攝神力菩薩又勸諸淸信上令造七南北一百四里東西八十里彌山亘谷處處僧坊佛殿營造經十三年方得成就同時出家者有二萬人七寺住經三百年彼諸人等現業力昔所造惡當世輕受不入地獄所害者在惡趣中又發惡願彼害我者及未成聖我當害之若不加害惡業便盡我無以報共吐大火焚燒寺舍及彼聚落一時焚蕩縱盜得活又以大水漂溺殺之無一得存彼山神寺未破前收取此像遠在空中寺破以後下內石室安置供養年月旣夂石生室滅至劉薩何師禮山逆示像其薩河者前身元是利賓菩薩首別處更在別篇江表龍光瑞像人傳羅什將來言扶南所得如何爲定荅曰此非羅什所得斯乃宋孝武征扶南獲之佛滅後三百年中北天竺大阿羅漢優婆質那以神力加工匠三百年中鑿大石山安置佛窟從上至下凡有五重高三百餘尺請彌勒菩薩指揮作檀室處之玄奘師傳云百餘尺迹記云高八丈足趺八尺六齋日常放光明其初作時羅漢將工人上天三往方成第二牛頭栴檀第三金四玉第五銅像凡夫今見止在下重四重閉石窟映徹見人藏腑第六百年有佛柰遮阿羅漢生已母亡生扶南念母重恩從上重中取小檀像母供養母終生楊州出家住新興寺歸一獲得三果宋孝武征扶南獲此像來都亦是羅漢神力今現在時往羅浮天台西方諸處昔法盛曇無竭者再往西方有傳五卷略述此像何忽云羅什法師背負而來耶宣師因問什師一代所翻之經人多偏樂受持轉盛何耶荅曰其人聰善解大乘以下諸人同時翻譯者竝俊乂一代之寶也絕後光前仰之所不及故其所譯以悟達爲先得佛遺寄之意也又問俗中常論被秦姚興抑破重戒云何得佛意耶荅曰此非悠悠凡所籌度何須評論什師德行位在三賢所在通化刪繁補闕隨機而作故大一部十分略九自餘經論例此可知冥感應歷代彌新深會聖旨罕逢難遇又蒙文殊指授令其刪定特異常倫豈以別室見譏頓亡玄致者也又問邡州顯際寺山出石像者何代所立荅曰像是秦穆公所造像元處是周穆王造寺處也佛去世後王第四女造又造像塔於此供養于此寺有一三果人住中秦相由余常所奉敬往者迦葉佛時亦於此立寺是彼沙彌顯際造也仍將本名以顯寺額又問今玉華宮南檀臺山上有甎塔面別四十步下層極壯四面石龕傍有碎甎又有三十餘窯甎古老莫知何代然每聞鍾聲荅曰此穆王寺也名曰靈山至育王時勅山神於此造西晉末亂五胡控權劉曜京都長安數夢此山佛現在甎塔中坐語曜汝少飮酒莫耽色欲黜去邪佞用忠良曜不能從後於洛陽酒醉落爲石勒所擒初曜因夢所悟令人尋山訪之遂見此像坐小甎塔與夢符同便毀小塔更造大者高一十九幷造寺宇極存壯麗寺名法燈三百僧住之曜沒趙後寺有四十三人修得三果山神於今塔後又造一供三果僧神往太白採取芝草養聖僧皆獲延齡寺今現在凡人不所聞鍾聲卽是寺鍾也其塔本基雖因劉曜仍是穆王立寺之處也是迦葉如來之古寺也至貞觀年中於玉華北慈烏川山上常見群鹿來集其所逐去還來有人異之於鹿集掘深一丈獲一石像長一丈許現今供養又問荊州前大明寺栴檀像者云是優塡王所造依傳從彼摸來將至梁今京師復有何者是本荅曰大明是其本像梁高祖崩像來荊渚至元帝承聖三年周平梁後收簿國寶入北周其檀像者有僧珍師藏隱房內多以財物贈遺使人像遂得停至隋開皇九年文祖遣使人柳顧言往迎寺僧又求像令鎭荊楚顧是鄕人之今別刻檀將往恭旨當時訪匠得一婆羅門僧名眞達爲造卽今西京大興善寺像是也亦甚靈異本像在荊州僧以漆布漫之相好不及眞者本作佛生來七日之身今加布漆乃壯年狀故殊絕異本也大明本是古佛住處靈像不肯北遷故也近有長沙義法師天人冥讚遂悟開發剝除漆布眞容重顯大動信心披覿靈儀全檀所作本無補椄光趺殊異象牙彫刻卒非人工所成興善像身一一乖本又問涪州相思寺側多有古迹篆銘勒之不識其緣此事云何荅曰此迦葉佛時有山神姓羅名子明蜀人也舊是持戒比丘生憎破戒者發諸惡令我死後作大惡鬼噉破戒人願受身作此山神多有眷屬所王土東西五千餘里南北二千餘里噉萬人以上此神本曾爲迦葉佛兄後爲弟子彼佛憐愍故來教化種種神變然始調伏與受五戒隨識宿命因不噉人恐後心變故佛留迹育王於上起塔在山頂神便藏於石中是白玉所作其神現在其郭下寺塔育王所立見付囑儀又問南海偱州北山興寧縣界靈龕多有靈迹此乃文殊聖者弟子此山神多造惡業文殊愍之便來教遂識宿命請爲留迹我常禮事離諸惡文殊爲現今者是也於貞觀三年山神命終生兜率天別有一鬼來居此地卽舊神親家也大造諸惡生天舊神憐之下請文殊爲現小迹以化後神又從正法故今此山大小迹現莫匪有由焉見付囑儀又問沁州北山石窟佛常有光明像出來久近耶荅曰此窟迦葉佛迦佛二時備有往昔周穆王弟子造迦葉佛像又問渭南終南二山有佛面山七佛㵎者荅曰此事同於前南山庫谷天藏是迦葉佛自手所造之藏也今現有十三緣覺在谷內住又問此土常傳有佛是殷時周昭莊王等造互說不同如何取定荅曰皆有所以弟子夏桀時生天具見佛之垂且佛有三身法報二身則非凡見竝化登地以上唯有化身被該三千百億釋迦隨人所感前後不定或在殷末或在魯莊俱在大千之中前後咸傳一化感見隨機前後何定若據法報常自湛然不足難也又問漢地所見諸瑞像多傳育王第四女所造其事匪幽冥難得其實事云何荅曰此實不疑爲育王第四女巳守厥貌非硏久而未出常恨其醜乃圖佛形相還如自身成已發願佛之好挺異於人如何同我之形儀也以苦邀彌經年月後感佛現忽異本形父具問之述其所願今此山玉華州長沙楊都高悝及京城崇敬寺竝是育王第四女造或有書其趺依梵本書漢人讀者罕識其文育王因將此像令諸鬼神隨緣所感流傳開悟今睹像面莫匪女形其崇敬地本是戰場西晉將末有五胡大起兵戈相殺此地特多地下人骨今掘猶得所殺無辜殘害酷濫故諸神攜以鎭之令諸冤魂得生善念周朝滅法神亦徙之隋祖載隆佛還重又問幽冥所感俗中常有神去形朽如何重來或經七日多日如生不異荅曰人稟七識識各有神心識爲主主雖前去餘神守護不足怪也如五戒中一戒五神五戒便有二十五神一戒破五神去餘者仍在如大僧戒戒有二百五十神亦戒戒之中感巳守得二百五十防衛比丘若毀一重戒但二百五十神去餘者常隨法苑珠林卷第十四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삼국시대 오(吳)나라 산음(山陰)의 사람으로 자(字)는 덕윤(德潤)이다. 집이 가난하여 남의 서사(書士)로 고용되었으나 온갖 전적(典籍)을 깊이 연구하며 통람(通覽)하였고 역수(曆數)에 정통하였다. 그는 뒤에 벼슬이 태자의 태부(太傅)가 되고 조정의 대의(代議)가 되어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항상 감택에게 자문하였다. 조정은 감택의 유학(儒學)ㆍ근로(勤勞)함을 기려 도향후(都鄕候)에 봉하였다.
  2. 2)주주(朱柱). 궁궐의 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