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나라 도성(都城)의 문수사리 금상(金像)의 인연. 송나라 동양(東陽)의 동상(銅像)이 땅에서 나온 인연. 송나라 포중(浦中)에서 금상(金像)의 광명이 나타났다가 이내 나온 인연. 송나라 강릉(江陵) 상명택(上明澤)에서의 금상의 인연. 송나라 형주(荊州)의 벽화상(壁畵像)이 바르자 곧 나타난 인연. 송나라 강릉(江陵) 지강(支江)에서 금상에 맹세한 인연. 송나라 상주(湘州) 동순(桐楯)이 감응이 통해 불광(佛光)을 지은 인연. 제(齊)나라 번우(番禺)의 석상이 불을 만나 가볍게 들린 인연. 제나라 팽성(彭城)의 금상에 땀이 나서 징조를 나타낸 인연. 제나라 양도(楊都)의 관음금상(觀音金像)의 인연. 양(梁)나라 형주(荊州) 우전왕(優塡王) 전단상(栴檀像)의 인연. 양나라 양도(楊都) 광택사(光宅寺) 금상의 인연. 양나라 고조(高祖) 등신(等身) 금은상의 인연. 원위(元魏) 정주(定州)의 금관음상과 『고왕경(高王經)』의 인연. 진(陳)나라 중운전(重雲殿)의 병상(幷像)이 바다로 날아 들어간 인연. 주(周)나라 진주(晋州) 영석사(靈石寺) 석상의 인연. 주나라 의주(宜州) 북산(北山) 철광(鐵磺) 석상의 인연. 주나라 양주(襄州) 현산(峴山)의 화엄행상(華嚴行像)의 인연. 수(隋)나라 장주(蔣州) 흥황사(興皇寺)의 불탄 상을 옮긴 인연.
수나라 경사(京師) 일엄사(日嚴寺)의 서석(瑞石) 그림자의 인연. 수나라 형주(邢州) 사하사(沙河寺) 사면상(四面像)의 인연. 수나라 옹주(雍主) 응관사(凝觀寺) 석가 협저상(釋迦夾紵像)의 인연. 당(唐)나라 방주(防州)에서 석상이 산에서 나온 인연. 당나라 간주(簡州)의 부처님 발자국에서 신광(神光)이 비친 인연. 당나라 양주(涼州) 산에서 나온 석문(石文)에 불자(佛字)가 있는 인연. 당나라 유주(渝州) 상사사(相思寺)의 불적(佛跡)에서 돌이 나온 인연. 당나라 순주(循州) 영감사(靈龕寺) 불적(佛跡)의 인연. 당나라 옹주(雍州) 이대안(李大安)이 금동상에게 구원받은 인연. 당나라 유주(幽州) 어양현(漁陽縣)의 실화(失火)에 상이 무너지지 않은 인연. 당나라 병주(幷州) 동자사(童子寺)의 대상(大像)이 광명을 놓아 상서를 나타낸 인연. 당나라 서경(西京) 청선사(淸禪寺)에서 금상을 훔친 인연. 당나라 무주(撫州)와 담주(潭州) 행상(行像) 등의 인연. 당나라 옹주(雍州)와 남전(藍田)의 금상이 돌 속에서 나온 인연. 당나라 옹주(雍州) 호현(鄠縣)의 금상이 예수(澧水)에서 나온 인연. 당나라 심주산(沁州山)의 석상이 방광(放光)하여 골짜기를 비춘 인연. 당나라 익주(益州) 법취사(法聚寺)에서 지장보살을 그린 인연. 당나라 형주(荊州)의 서상(瑞像) 그림이 방광(放光)한 인연. 당나라 대주(代州) 오대산(五臺山)의 상이 변현(變現)하여 소리를 낸 인연.
ⓛ 송(宋)나라 도성(都城)의 문수사리 금상(金像)의 인연 송(宋)나라 원가(元嘉) 2년에 유식지(劉式之)는 문수보살의 금상을 만들어 놓고 조석으로 예배했는데, 얼마 뒤에 갑자기 그것을 잃어버렸다. 몹시 슬퍼하면서 기도하기를 밤낮을 게으르지 않았다. 5년을 지낸 어느 날 저녁에 그 불좌(佛座)에서 광명이 나와 용마루까지 뻗치었다. 식지는 곧 향을 사르고 상장(牀帳)을 털고 닦다가 그 보살상이 엄연히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② 송나라 동양(東陽)의 동상(銅像)이 땅에서 나온 인연 송(宋)나라 원가(元嘉) 12년이다. 유원지(留元之)는 동양(東陽)의 장산(長山) 사람이다. 그는 모시 농사로 직업을 삼았으므로 늘 화전(火田)을 일구었다. 한번은 어떤 자리의 우거진 풀이 타지 않아서 오랫동안 이상히 여기면서도 개간하지 않았다. 그 뒤에 시험삼아 그 자리를 조금 파다가 구리쇠 좌상(坐像)을 얻었다. 높이는 3촌쯤 되었다. 곧 그 땅을 조사해 보았으나 옛날의 도읍터도 아니어서 그 유래를 알 수 없었다.
③ 송나라 포중(浦中)에서 금상(金像)의 광명이 나타났다가 이내 나온 인연 송나라 원가(元嘉) 14년이었다. 손언증(孫彦曾)은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었다. 그의 첩 왕혜칭(王慧稱)은 젊어서부터 부처님을 믿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욱 독실했다.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외우고 있다가 문득 개펄에 온갖 빛깔이 있음을 보고 사람을 시켜 그 자리를 파게 했다. 깊이 2척쯤 밑에서 한 금상을 얻었는데 광부(光趺)까지 합해 높이는 2척 1촌이었다. 그 광부에 새겨져 있기를 “건무(建武) 6년 경자(庚子)에 관사 도인(官寺道人) 법신승행(法新僧行)이 지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곧 장식을 더했다.
④ 송나라 강릉(江陵) 상명택(上明澤)에서의 금상의 인연 송(宋)나라 원가(元嘉) 15년에 나순(羅順)은 평서부장(平西府將)이 되어 상명(上明)에서 수자리를 살고 있었다. 12월에 배를 늪에 놓았다. 그 친구들이 매와 꿩이 함께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불이 나서 들을 다 태우는데 오직 3장쯤의 우거진 풀만이 타지 않았다. 그래서 풀을 헤치고 찾다가 금보살 좌상(坐像)을 얻었다. 광부까지 높이가 1척이요, 만든 기술이 특히 묘했다. 그 때 정양령(定襄令)은 그것을 도둑이 숨겨 둔 것이라 하였으나, 그 경계 안에서는 불상을 잃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거두어 두고 공양했다.
⑤ 송나라 형주(荊州)의 벽화상(壁畵像)이 바르자 곧 나타난 인연 송(宋)나라 위군(衛軍) 임천(臨川)의 강왕(康王)은 형주(荊州) 성 안에 있었다. 그는 초당 세 칸을 짓고 불상을 공양하면서 초당 벽에 보살상을 많이 그려 놓았다. 형양(衡陽)의 문왕(文王)이 수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초당을 폐하여 재실로 만들고 그 보살상을 모두 진흙으로 발랐다. 그러나 흙이 마르면 곧 다 떨어지고 화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또 발라도 또 그러했다. 문왕은 부처를 믿지도 않거니와 그것을 우연이라 하여 더 두텁게 흙을 발랐으나 보살은 더욱 밝게 나타나 늘어서 있었다. 왕은 옛 벽을 다 헐고 새로 수선하게 했다. 오래지 않아 왕은 병에 걸려 눈만 감으면 모든 상이 완연히 눈에 가득 나타났다. 이리하여 그 집을 폐하여 거기 살지 않고 도리어 재강(齋講)을 일삼았다.
⑥ 송나라의 강릉(江陵) 지강(支江)에서 금상에 맹세한 인연 송나라 원가(元嘉) 때 강릉(江陵) 지강(支江)에 사는 장승정(張僧定)의 누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불법을 받들면서 출가하기로 뜻을 세우고 항상 작은 금불상에 공양하는 것으로 앞길의 도움을 삼았다. 부모는 결혼을 재촉했으나 맹세코 듣지 않았으므로 가만히 병씨(邴氏)에게 허락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전연 몰랐는데 고안(羔鴈)이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피 울부짖으면서 듣지 않고 불상 앞에 향을 사르고는 땅에 엎드려 그대로 죽었다. 그러자 이 불상이 금빛 광명을 놓아 온 마을에 가득했다. 부모 형제들은 그 통감(通感)에 놀라 혼인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장씨와 병씨 두 집은 곧 불교를 크게 믿어 공경하고 승정은 그 때문에 출가했다. 송의 승상(丞相) 남군왕(南郡王) 진협(鎭陜)은 그의 살던 집에 정사(精舍)를 세웠다. ⑦ 송나라의 상주(湘州) 동순(桐楯)이 감응이 통해 불광(佛光)을 지은 인연 송나라 태시(泰始) 때 동해(東海)의 하경숙(何敬叔)은 젊어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상주 자사(湘州刺史) 유온감현(劉韞監縣)을 따라갔다가 전단나무를 얻어 그것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광택이 나지 않아 몹시 애를 썼지만 끝내 되지 않았다. 책상에 기대어 깊이 생각하는데 어렴풋한 꿈길에 어떤 사문이 누더기옷에 석장(錫杖)을 들고 와서 말하였다. “전단나무는 거칠어서 쓸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현(縣) 뒤에 있는 하씨(何氏) 집의 동순(桐楯)을 쓰면 될 것이다. 그가 아무리 아끼더라도 정성으로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꿈을 깨어 좌우에 물었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래서 곧 그것을 사려고 했다. 하씨는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매우 소중히 여기므로 혹 누구에게 빼앗길까 하여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명부(明府)님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사시려 하십니까?” 경숙은 사실대로 말했다. 하씨가 존경하고 기뻐하여 그것을 주었으므로 광택을 낼 수가 있었다. 그 뒤에 그는 상부직성(湘府直省)이 되었다. 어느 날 밤 꿈에 그 불상이 말하였다. “쥐가 내 발을 갉는다.” 이튿날 아침에 급히 집에 돌아가 그 불상을 보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⑧ 제(齊)나라 번우(番禺)의 석상이 불을 만나 가볍게 들린 인연 제(齊)나라 건원(建元) 때이다. 번우(番禺)의 비야리 정사(毘耶離精舍)에 옛날부터 부남국(扶南國)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형상은 매우 괴상하고 7ㆍ80인이라야 들 수 있었다. 이 절은 띠집인데 어느날 불이 번져 오고 그 띠집은 바람받이에 있었다. 집이 연기에 싸이고 불꽃이 이미 붙어버렸다. 비구니 십여 인은 서로 바라보면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 중에서 못내 안타까워하는 서너 명이 시험삼아 석상을 들어 보았더니 거뜬히 들리면서 균석(鈞石)의 무게도 없었다. 불상은 옮겨지고 절은 다 타버렸다. 그 상에는 늘 신광(神光)이 있었는데 주부(州部)의 난리 때에는 눈물과 땀이 온몸을 적셨으므로 영남(嶺南)에서는 그것을 상후(常候)로 삼았다. 그 뒤에 광주 자사(廣州刺史) 유준표(劉悛表)가 그것을 수도(首都)에서 내 보냈는데 지금은 아마 옛날의 장주사(蔣州寺)에 있을 것이다.
⑨ 제나라 팽성(彭城)의 금상에 땀이 나서 징조를 나타낸 인연 송나라 서주 자사(徐州刺史) 왕중덕(王仲德)은 팽성(彭城)의 송왕사(宋王寺)에서 1장 8척의 금상을 만들었다. 상호(相好)가 장엄하여 강호(江湖)에서는 제일 묘하였다. 북방 국경에서 도적이 일어나 혹은 스님에게까지 미쳤으므로 그 금상은 곧 땀을 흘렸다. 그 땀방울의 많고 적음은 곧 난리의 크고 작음이었으며 그로써 난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고을 사람들은 그것을 상후(常候)로 삼았다. 제나라 건원(建元) 초년에 그 금상이 또 땀을 흘리더니 그 해 겨울에 위(魏)나라가 회상(淮上)을 침범했다. 그 때 곤주(袞州)의 여러 고을이 남부(南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대강 모았으나 매우 많았다. 그들은 사문(沙門)을 구박하여 방어를 도우라고 했다. 위나라 군사는 그 진영을 무찔러 모두 패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위대(魏臺)에 무고하여 승려들이 난리를 도왔다 하였으므로 승려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그 때 불상은 크게 땀을 흘려 온 법당이 다 젖었다. 위나라 서주 자사(徐州刺史) 양왕(梁王)은 불법을 정성껏 받들었다. 그는 절에 와서 친히 사람을 시켜 비단 수건으로 불상을 닦았다. 그러나 닦으면 또 흘러 그치지 않았고 수십 인이 번갈아 닦았으나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양왕은 이에 향을 사르며 예배하고 수건을 잡고는 빌었다. “이 스님들은 죄가 없습니다. 맹세코 제가 보호할 것이므로 반드시 죄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조그만 정성에 감응이 있으시거든 부디 닦는 대로 곧 그쳐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손수 닦았다. 과연 손으로 닦자마자 눈물은 곧 말랐다. 양왕은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고, 나라에서는 명령을 내려 다 용서를 받았다.
제나라 양도(楊都)의 관음금상(觀音金像)의 인연 제(齊)나라 건원(建元) 초년에 태원(太原)의 왕염(王琰)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교지(交阯)의 현 법사(賢法師)에게서 5계(戒)를 받았다. 법사는 그에게 관음(觀音)의 금상(金像)을 공양하게 하였으므로 그는 그것을 받들고 양도(楊都)로 돌아와 남간사(南澗寺)에 기탁하였다. 왕염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금상이 그 자리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이상히 여겨 곧 남간사로 달려가 그 금상을 모시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남간사에서는 십여 구(軀)의 불상을 잃었는데 도적들이 그것을 훔쳐 가서 그것을 녹여 돈을 만들려고 했다. 송(宋)나라 대명(大明) 7년 추석에 그 관음상은 3척 쯤의 광명을 놓아 찬란한 그 금빛을 온 집안 사람이 다 보았다. 그 뒤에 이 금상을 다보사(多寶寺)에 기탁했다. 왕염이 형초(荊楚)로 간 지 거의 10년이 되자 그 금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양도로 돌아와 꿈을 꾸는데 그 금산은 전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여러 작은 불상 중에서도 분명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절에 갔더니 과연 그 꿈과 같았으므로 그것을 모시고 돌아왔으니, 때는 건원(建元) 원년 7월 13일이다. 그래서 왕염은 그 『명상기(冥祥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관음상을 항상 공양하는 것은 반드시 영원한 진량(津梁)이 될 것을 바라서이다. 그 일을 돌이켜보면 깊은 감회가 있다. 직접 본 징험에 의하여 이 기록을 엮어 만든다. 대체로 가까운 정(情)에 밝게 접하려면 그 의상(儀像)만한 것이 없으니 상서로운 징험이 대개는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경전에 ‘녹이고 깎고 그리고 수놓아 형상과 같이 된 것은 다 능히 행동하고 광명을 놓는다’ 하였다. 지금의 서역의 석가와 미륵의 그 두 상(像)은 그 빛남이 진신(眞身)과 같으니 그것은 상(相)이 잘 되었기 때문인가? 지금 동하(東夏)가 우러러보는 불상의 신묘한 영험이 극히 현저한 것도, 그 때의 중생들이 모임으로 인해 그 느낀 바를 목석(木石)에 의탁하였기 때문이니, 그 신비하고 이상함을 보는 것은 반드시 그 용모가 좋아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라앉은 돌이 깊은 데서 뜨는 것은 실로 민오(閩吳)의 교화를 열어주었고, 오랜 금이 액(液)을 쏟는 것은 그로써 팽송(彭宋)의 화(禍)를 면한 것이다. 그 이외에도 번거로운 방법을 가려 보임은 구차하고 힐난하기 어려우리니, 보편된 이치를 따르면 실로 스스로 돌아와 따를 것이다. 이것은 저 경탑이 효험을 나타낸 것과 그 뜻이 같은 것이다. 일은 특수한 것을 꿰지 않은 것이니 그러므로 그 끝을 잇는 것이다.”
양(梁)나라 형주(荊州) 우전왕(優塡王) 전단상(栴檀像)의 인연 양조(梁祖) 무제(武帝)는 천감(天鑒) 원년 정월 8일에 단상(檀像)이 그 나라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 영을 내려 그것을 맞이해 오라 하였다. 『불유천축기(佛遊天竺記)』 및 쌍권(雙卷) 『우전왕경(優塡王經)』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께서 천상에 올라가 한 여름 동안 그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셨다. 왕과 신하들은 모두 부처님이 뵙고 싶었다. 그래서 우전국왕은 32명의 장인(匠人)을 시켜 전단나무를 가지고 가서 목건련에게 신통의 힘으로 천상에 가서 부처님 초상을 그려 오라고 청했다. 목건련은 그들의 청을 따라 부처님 초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그 초상의 좌고(坐高)는 5척인데 기원정사에서 지금까지 공양하고 있다.” 무제는 이 불상을 청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결승장군(決勝將軍) 학건(郝騫)과 사문화(謝文華) 등 80인이 명령을 받고 천축으로 가서 이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불상을 청하였다. 사위국왕(舍衛國王)은 말하였다. “이 중천(中天)의 정상(正像)이 변방에 갈 수 없다.” 이에 32명의 장인(匠人)을 시켜 다시 자색 전단나무에 새기되, 한 사람이 한 상(相)을 그리게 했다. 묘시(卯時)에 시작하여 오시(午時)에 모두 마치니, 상호가 원만하고 그 정수리에서 광명을 놓으며 보슬비가 내리고 또 이상한 향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전왕경』에는 “진신(眞身)은 숨고 다음에 제2상이 나타나 중생들을 위해 크게 이익이 되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학건 등이 제2상을 지고 수만 리를 갈 때 온갖 난관을 겪은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또 큰 바다를 건너면서 풍파를 무릅쓰고 물결을 따라 산에 이르렀을 때는 양식마저 떨어졌다. 데리고 가던 사람과 또 전송하던 사람도 죽는 자가 많았다. 온갖 맹수를 만나 일심으로 염불할 때 그 불상 뒤에서 병기 소리가 들리고 또 종소리가 들렸다. 어떤 스님이 바위 곁의 나무 밑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학건은 올라가 지고 있던 불상을 그 스님 앞에 놓았다. 스님은 일어나 불상에 예배하고 학건 등은 그 스님에게 예배했다. 스님은 이들에게 물병을 주어 마시게 하여 이들을 배부르게 하였다. 스님이 말했다. “이 불상은 삼먁삼불타입니다. 여기서 저곳으로 가면 금비라왕(金毘羅王)이 큰 불사를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그날 밤에 그들은 꿈에 신(神)을 보고 이튿날 새벽에 함께 그것을 그렸다. 천감 10년 4월 5일에 학건 등은 양도(楊都)에 도착했다. 무제와 모든 관리들은 도보로 40리를 걸어 나와 그들을 맞이해 태극전(太極殿)으로 돌아가서 재를 베풀어 사람들을 제도하고 사형수들을 풀어 주었고 살생을 금하였다. 그리고 활과 칼과 창 등을 버리고 연화탑 머리를 만들었다. 무제는 이로 말미암아 채식만 하고 욕망을 끊었다. 그는 태청(太淸) 3년 5월에 죽고 상동왕(湘東王)이 강릉(江陵)에서 즉위하여 호를 원승성(元承聖)이라 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양도에서 위의 불상을 맞이해 형도(荊都)로 와서 승광전(承光殿)에 모시고 공양했다. 뒤에 양(梁)나라 대정(大定) 8년에는 성북(城北)의 정릉(靜陵)에 대명사(大明寺)를 짓고 지금까지 이 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전해 베껴 국내에 유포했다 한다.
양나라 양도(楊都) 광택사(光宅寺) 금상의 인연 양조(梁祖)는 천감(天鑒) 초년에 그 본택(本宅)에 광택사(光宅寺)를 짓고 1장 8척의 금상을 만들었다. 그림 모양을 다 마치니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상(像)을 주조하기 시작할 때 구리쇠가 모자랄까 걱정하여 처음에는 왕에게 청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어떤 사자(使者)가 구리쇠 15수레를 가지고 왔다 하였다. 명령을 받들어 절에 보내서 즉시 녹여 만들었는데 한 번 달구어서 다 이루었다. 나라 안에서 제일이었는데 매우 높고 큰 듯하여 시험삼아 재어 보았더니 그 키가 2장 2척이었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주상이 다 이루어졌는데 본래 모양을 고치지 않게 하고 또 계속할 구리쇠도 이미 다 써 버렸다. 다시 그 분량을 재어 보았더니 4척이 더 불었다. 그래서 명령하기를, “처음부터 구리쇠를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리 되었느냐? 어찌 진상(眞相)이 응감하지 않고서야 홀로 신기(神奇)를 나타내겠는가? 화부(華趺)를 새겨 붙여 영지(靈誌)를 만들게 하라” 해서 이 사실을 자세히 발 밑에 새기니, 지금도 그대로 있다. 양조는 그 아버지를 위해 종산(鐘山)에 대애경사(大愛敬寺)를 지었다. 그러나 큰 불상의 신상(神相)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이름이 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다른 데서 기록한 것과 같다. 양(梁)나라의 불상은 신기한 일을 나타냄이 많았다. 염현(剡縣)의 큰 석상은 원래 송(宋)나라 초년에 지은 것으로서 어떤 왕이 만든 것이다. 처음에 담광 선사(曇光禪師)가 북방에서 와서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고요히 살 만한 곳을 찾다가 이 산이 수려한 것을 보고 곧 산꼭대기에 조그만 초당을 얽었다. 그러자 하늘 음악이 공중에서 말하였다. “여기는 부처님의 땅인데 어째서 소채밭이 있는가?” 담광은 이 말을 듣고 남쪽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옮기고 뒤에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여러 해가 되도록 이루지 못했다. 양나라 건안년(建安年)에 이르러 왕이 병을 앓아 꿈을 꾸었다. “저 영현의 석상을 발견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 그래서 승우 율사(僧祐律師)를 청해 그 산에 가서 규모와 형상을 보았다. 먼저 만든 것이 너무 천박하고 비루한 것을 꺼렸으나 은정의 실마리를 끊지 못했다. 밤에 갑자기 산이 무너져 2백 인을 덮치고 그 속에서 불상이 나와 목 이하는 그대로 돌 속에 있었다. 이에 떠 있는 돌을 들어내고 밑에 이르자 불상이 그대로 있었다. 전부를 다 치우고 완전히 상이 드러났으니 이것은 그 참 상이 원래 돌 속에 있었던 것으로서, 힘을 들여 파헤쳤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양나라 태자 사인(舍人) 유협(劉勰)이 그 불상 앞에 비를 세웠다.
양나라 고조(高祖) 등신(等身) 금은상의 인연 양조(梁祖)는 왕위에 오른 뒤에 불교를 숭상하고 노종(老宗)을 폐지하여 매양 고승(高僧)들을 불러와 깊은 뜻을 이야기했다. 또 등신(等身)의 금은 불상 두 구(軀)를 만들어 중운전(重雲殿)에 모시고 50여 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고 섬겼다. 겨울과 여름에도 돌을 밟으면서 여섯 때[時]를 거르지 않으니 발로 밟은 돌에는 열 발가락의 무늬가 나타났다. 드디어 죽어 왕위가 끝나게 되자 후경(候景)이 왕위를 빼앗은 뒤에도 불상에는 여전히 공양했다. 태위왕(太尉王) 승변(僧辯)이 후경을 죽이고 대성(臺城)을 수복(修復)했다. 마침 원제(元帝)가 강릉(江陵)을 함락시켜 강남에는 주인이 없었다. 승변은 가만히 제(齊)나라와 통하여 정양후(貞陽候) 소연명(蕭淵明)을 맞아들여 임금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강좌(江左)는 안정되지 못해 이해(利害)가 상충했다. 승변은 그 사위 두감(杜龕)을 보내어 궁궐을 맡아 호위하게 했다. 두감은 성질이 흉하고 완고하여 뒤를 보지 않고 금은 두 불상을 부수어 창을 만들려 했다. 먼저 수십 인을 시켜 삼휴각(三休閣)에 올라가 불상의 목을 깨게 했다. 망치와 끌을 들려고 하자 두 상은 동시에 그들을 노려 보았다. 그들의 팔은 떨어진 듯 들 수 없었고 벙어리가 되고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을 잃었고, 두감도 그러했다. 한참 있다 깨어났으나 마치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퍼렇게 부었고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무서운 물건이 자꾸 와서 때리는 것만이 보였다. 그들은 고통 받아 신음하면서 온몸이 문드러져 피고름을 흘리며 가죽이 뚫리고 뼈가 드러나 죽었다. 이것은 근래의 일로서 도속(道俗)이 다 아는 것이다.
원위(元魏) 정주(定州)의 금관음상과 『고왕경(高王經)』의 인연 원위(元魏)의 천평(天平) 때 정주(定州)의 막사(幕士) 손경덕(孫敬德)은 북방 변경을 지키면서 관음금강을 만들었다. 해를 채우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는 항상 예배하고 섬겼다. 그 뒤에 강도 사건이 생겨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구금되어 고문을 견디지 못했다. 억울하게 죄를 받고 사형이 선고 되어 다음 날 집행하게 되었다. 그날 밤에 그는 참회하고 예배하면서 눈물이 비오듯 했다. 그리고 아뢰었다. “나는 과거에 남을 억울하게 함으로써 지금 억울한 죄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다 속죄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리고 또 원하옵나니…….” 이 말을 마치고 어렴풋이 꿈 속에서 한 사문을 보았다. 그는 말하였다. “『관세음구생경(觀世音救生經)』을 외워라. 그 경에 있는 부처님 이름을 천 번 외우면 고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경덕은 깨어 일어나 앉아 그 말을 생각해 보았으나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분명했다. 새벽이 거의 되어 1백 번을 채웠다. 유사(有司)에게 결박되어 형장으로 가면서도 외우고 또 외워 형을 집행하려 할 때는 천 번을 채웠다. 유사는 칼을 들고 내리쳤다. 그러나 칼은 세 동강이 나고 몸은 끄떡없었다. 칼을 바꾸어 또 쳤다. 이렇게 세 번을 거듭했으나 칼은 여전히 세 동강이 났다. 집행인들은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위에 아뢰었다. 승상 고환(高歡)이 이 사실을 글로 올려 그는 드디어 죽음을 면하였다. 임금은 영을 내려 이 경을 베껴 세상에 전하게 하니 이것이 이른바 지금의 『고왕관세음경(高王觀世音經)』인 것이다. 경덕은 방면되어 돌아와 재를 베풀고 그 은혜를 갚았다. 방에 있는 상을 내어와 그 목을 보았더니 세 번의 칼 흔적이 있었다. 그 고을 친구들이 다 같이 보고 그 통감(通感)을 감탄했다. [이상은 『제지(齊志)』 및 『정이(旌異)』 등의 기록에 나온다.]
진(陳)나라 중운전(重雲殿)의 병상(幷像)이 바다로 날아 들어간 인연 진(陳)나라 무제(武帝)가 죽고 그 형의 아들 천(蒨)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 숙부의 장례를 치르려고 상여를 만들려 하였으나 나라를 처음 세워 안정이 되지 않아 일을 시작할 겨를이 없었다. 옛날 양무제(梁武帝)가 중운전(重雲殿)을 세우고 그 안에 불상은 그대로 있었다. 천은 그 중운전의 불상 장막과 진주 패물을 가지고 장례를 장식하고자 했다. 일꾼들은 이미 풍족해 사방에서 모두 왔다. 그런데 구름 기운이 어리어 불전을 둘러쌌는데 다른 곳은 맑아 구름 한 점 없었다. 백성들이 괴상히 여겨 모두 다투어 가서 보았다. 잠깐 사이에 큰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맹렬해 흐르는 불꽃과 빛이 아래 위에서 마주 닿았다. 갑자기 보니 중운전의 두 불상은 우뚝 서고 4부 신장(神將)과 또 보좌(寶座)가 동시에 날아 올라 연기와 불에 싸여 멀리 사라졌다. 그것을 보는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귀의하고 믿었다. 비가 갠 뒤에 그곳을 보니 오직 주추만이 남아 있었다. 한 달쯤 뒤에 어떤 사람이 동주(東州)에서 와서 말하였다. “그 날에 불전과 불상이 허공에 올라 바다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지금도 바다를 바라보는 이는 가끔 그것을 본다.” 또 위씨(魏氏)의 낙경(洛京) 영녕사(永寧寺)탑이 땅에서 천 척쯤 올라 하늘에 뜨는데 그 형상이 거의 같았다. 어떤 사람은 동해에서 가끔 그 자취를 본다고 했다.
주(周)나라 진주(晋州) 영석사(靈石寺) 석상의 인연 북제(北齊)의 말년에 진주(晋州) 영석사(靈石寺)의 사문 승호(僧護)는 도를 지키면서, 마음은 정직하나 슬기의 업을 구하지 않고 1장의 석상(石像)을 만들기를 원하므로 모두 그의 허풍 떠는 말을 괴상히 여겼다. 그 뒤에 그는 절 북쪽 골짜기에서 1장 8척이 될 만한 누운 돌을 보았다. 그리하여 석공(石工)을 시켜 불상 만들기를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나 얼굴과 배는 거의 마쳤으나 등은 그대로 땅에 붙어 있었다. 여섯 수레로 끈질기게 들어 보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더니 밤새 스스로 뒤쳤다. 그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곧 일을 시작해 마치고 불당에 옮겨 놓았다. 진주가 함락되는 날에 그 불상은 땀을 흘려 땅을 적셨다. 주(周)나라 군사는 국경 안에 들어와 먼저 절을 태웠다. 이 불상도 화재를 입었으나 빛은 조금도 변치 않고 두 손가락만이 상했다. 그 뒤에 그것을 넘어뜨리려고 사람과 소 60이 끌었으나 끝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아무도 모르는 이승(異僧)이 와서 나무와 기왓장으로 흙을 섞고 포개어 그것을 두르더니 잠깐 사이에 일을 마치고 간 곳이 없었다. 그 뒤에 불상은 신심이 있는 이의 꿈에 와서 말하였다. “내 손가락이 아프다.” 그는 꿈에서 깨어 곧 손가락을 보수했다. 수나라가 건국하니 전처럼 회복했다. 그리고 개황(開皇) 15년에 번기와 일산을 훔친 자가 있었다. 그의 꿈에 1장 8척 되는 사람이 방에 들어와 그를 꾸짖었다. 그는 부끄럽고 두려워 곧 그것을 보냈다. 그 불상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주나라 의주(宜州) 북산(北山) 철광(鐵磺) 석상의 인연 주무(周武)가 건덕(建德) 3년에 불법을 시기하여 그것을 아주 없애버렸으므로 천하가 어두워졌다. 의주(宜州)에 강명(姜明)이란 사람이 있어 일을 감독하러 밤에 다녔다. 의주의 북쪽 1백여 리의 산을 지나가다가 가끔 산 위의 광명을 보고 괴상히 여겨 그곳을 돌아보았다. 누워 있는 돌 모양이 부처님 모양과 같음을 보고 곧 파보았더니 그것은 철광(鐵礦)이었으므로 더 팔 수 없었다. 그 형상은 돌같이 단단하고 높이는 3장쯤이며 갈아서 없애려 했으나 함부로 다치게 하면 안되었기에, 또 밑으로 파 내려가 찾아보니 거기 석부(石趺)가 있고 구멍도 완전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끈덕지게 들어 보았다. 그 불상은 갑자기 흘러내려 구르면서 석부(石趺)의 구멍 위에 우뚝 섰다. 사람들은 신기한 징조라 하여 이 사실을 나라에 아뢰었다. 그리고 천원(天元)이 대를 이어 부처의 해가 장차 빛나려 하였다. 곧 대상(大像) 원년이라 고치고 인해 그곳을 대상사(大像寺)라 하였다. 수조(隋祖)가 국운을 열어서도 이 옛 자취를 소중히 여겨 또 현제사(顯除寺)라 고치고, 그 본래의 곳을 찾아보았으나 사람이 산 곳은 아니었다. 또 큰 돌과 철광도 없었으니 어찌 아육왕의 신력이 내린 감응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당(大唐)도 그 때문에 고치지 않고 정관(貞觀) 말년에는 그 절 서쪽에 궁전을 두어 이름을 옥화(玉華)라 하였다. 그 불상도 옛날에 있던 궁전 동쪽 30리의 동산 안에 있다. 일찍이 태종(太宗)은 거기 가서 예배하였는데 장식이 화려하지 않다 하여 재물을 희사해 장엄하였다. 영휘(永徽) 때에는 궁전을 고쳐 절을 만들고 다시 이름을 옥화사라 했으니 지금 방주(邡州)에 속해 있다. 흐린 날 밤이면 늘 서광을 놓지만 도속들은 항상 보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거나 괴상히 여기지 않았다. 주나라 양주(襄州) 현산(峴山)의 화엄행상(華嚴行像)의 인연 주(周)나라 양주(襄州) 현산(峴山) 화엄사(華嚴寺)의 행상(行像). 옛날부터 그 목상(木像)의 유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 얼굴과 머리는 특히 수려해 한없이 우러러볼 만하며 높이는 5장쯤 되고 그 응보(應報)는 오래되어 다 말할 수 없었다. 주나라 때 불법이 멸하자 어떤 사람이 그 머리를 감추었다가 수나라 개황(開皇) 때 다시 내어 전처럼 장엄하고 좌상(坐像)으로 만들어 노사불(盧舍佛)이라 했다. 그리고 매년 복을 빌면서 귀의처(歸依處)로 삼았다. 수나라 문제(文帝)가 죽을 적에 불상은 두 코에서 콧물이 흘러 가슴을 적셨다. 금박은 벗겨져 일어났으나 콧물이 흘러 광명이 있었으며 바라보면 콧물과 같았다. 정관(貞觀) 23년 4월에 또 콧물이 자꾸 흘러 온 가슴을 한 자쯤 적셨으나 그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뒤에 태종(太宗)이 죽어서야 비로소 그 징조임을 알았다. 6월이 되어 또 콧물이 나와 온 고을이 두려워하면서 무슨 화가 있을 지 몰랐는데, 7월에 이르러 한수(漢水)가 넘쳐 성내로 들어와 깊이가 1장이 넘어 빠져 죽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본사(本寺)에 있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양양의 토속(土俗)에 자식이 적은 사람은 다 가서 기도하여 그 마음을 따라 남녀의 감응을 받았다.]
수(隋)나라 장주(蔣州) 흥황사(興皇寺)의 불탄 상을 옮긴 인연 수(隋)나라 개황(開皇) 때 장주(蔣州) 흥황사(興皇寺)의 불전(佛殿)이 화재를 만났다. 당양(當陽)에 1장 6척인 금동 대상(大像)과 또 두 보살상이 있는데 다 키가 1장 6척이었다. 그는 모대옹(模戴顒)이 지은 바로서 용마루 밑에 있었다. 그 때 불꽃이 크게 왕성했으므로 사람들이 손을 댈 수 없어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대상이 녹게 되자 갑자기 일어나 남쪽으로 한 걸음쯤 옮겼다. 용마루와 들보가 꺾여 내려 앉았으나 불상은 완전했다. 4면의 벽돌과 나무 숯 등은 모두 불상에서 5ㆍ6척쯤 떨어져 있었으면서도 모두 불에 탔으나 금색은 변하지 않았다. 발받침 밑에 새긴 글이 있어 대중은 모두 놀라 감탄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했다. 지금은 옮겨 백마사(白馬寺)에 있는데 새들도 밟는 일이 없다. 당나라 영휘(永徽) 2년에 도적이 이 불상의 구리쇠를 탐하여 톱으로 격자창살을 끊고 그것을 훔쳐 내려다가 그만 손이 끼여 빼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스님이 와서 그 까닭을 물었다. 도적은 말하였다. “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법당 안에서 내 손을 움켜 잡았으므로 빼내지 못했습니다.”
수나라 경사(京師) 일엄사(日嚴寺)의 서석(瑞石) 그림자의 인연 수(隋)나라 서울 일엄사(日嚴寺)의 석영상(石影像)은 그 모양은 여덟 모요, 자석영(紫石英) 빛이며 높이는 8촌이요, 지름은 5촌이며 안팎이 환히 트였다. 옛날 양무제(梁武帝) 태청(太淸) 때에 서역(西域)의 어떤 스님이 가지고 온 것이다. 후경(候景)의 난리를 만나 강주(江州) 여산(廬山)의 서림사(西林寺) 불상의 정수리에 봉안했었다. 수나라 개황(開皇) 10년에 양제(煬帝)가 양월(楊越)을 진압하고 영이(英異)를 두루 수색할 때 강표(江表)의 문기(文記)를 모두 거두어, 그들 기록 중에서 영상전(影像傳)을 얻었다. 그리고 사인(舍人) 왕연수(王延壽)를 시켜 절에 가서 이것을 얻었다. 그리고는 진번(晋蕃)을 맡은 뒤로는 다닐 때에는 항상 옻칠을 한 함에 이것을 넣어 사람과 말을 시켜 받들고 앞서 가게 했다. 그 뒤에 태자가 되어서는 이것을 곡지(曲池)의 일엄사(日嚴寺)에 보내고 그 절에 영을 내렸다. “이것을 본 뒤에는 잘 봉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라.” 그 절은 양제가 지은 것이었다. 대업(大業) 말년에 천하가 들끓었다. 서울 스님들이 항상 와서 이것을 보았고 이 절에 사는 이도 그다지 믿거나 존중하지 않았다. 이 돌 속에 금빛이 번쩍거려 불상인 듯 의심스러웠으므로, 이름 있는 여러 스님들의 말이 동일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말하였다. “그 모양이 분명하여 어두워지는 일이 없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음을 늘 개탄했다. 또 7일 동안 깨끗이 재계한 뒤에는 앞에서 보면 은탑(銀塔)이 보이고 뒤에서 보면 은불(銀佛)이 보였다. 도속들이 함께 보는데도 가끔 같지 않았으니, 혹은 불탑과 보살을 보고 혹은 여러 스님이 늘어앉은 것을 보며 혹은 장막과 일산, 번기와 당기를 보고 혹은 산림과 8부(部)를 보며 혹은 3도(道)의 괴로워하는 상을 보고 혹은 7대(代)의 존망을 보았다. 한 번 보는 동안에도 혹은 가만히 있고 혹은 변화했다. 비록 선악이 번갈아 나타나더라도 상서로운 징조가 많았기 때문에 거기 와서 기도하는 자는 다 앞에 와서 발원하였다.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갈까?” 그러면 그 말에 의해 다 나타났다. 실로 저승의 거울이었다. 정관(貞觀) 6년 7월에 명령을 내려 궁중에 들여 모시고 공양했다.
수나라 형주(邢州) 사하사(沙河寺) 사면상(四面像)의 인연 수(隋)나라 형주(邢州) 사하현사(沙河縣寺)의 사면불(四面佛). 수조(隋祖) 때에 어떤 사람이 산에 들어갔는데, 스님이 불상을 수호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동불(銅佛)의 키는 3척 남짓했다. 그는 이 불상을 달라고 했다. 스님은 허락하고 곧 간 곳이 없었다. 여러 곳에서 이 말을 듣고 모두 와서 잡아 끌었으나 도무지 일으킬 수 없었는데 오직 사하사(沙河寺) 스님만이 와서 끌면 그 손을 따라 절에까지 갔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절 곁에서 금덩이 하나를 얻었는데 그 윗부분이 두 마리 까마귀 형상 같았다. 거기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이 사면불(四面佛)의 본을 떠라.” 그래서 본을 떴는데 뒤에 그 까마귀 형상이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다. 그 절 곁의 연못에서 자주 광명이 나타나 연못물을 빼고 불상을 끌어내었다. 수나라의 후주(後主)가 이 말을 듣고 장인(匠人)을 보내어 그것을 본떠 주조(鑄造)했으나 끝내 결함이 있어서 그만두었다.
수나라 옹주(雍主) 응관사(凝觀寺) 석가 협저상(釋迦夾紵像)의 인연 수(隋)나라 때 응관사(凝觀寺)의 스님 법경(法慶)은 개황(開皇) 3년에 협저(夾紵)라는 석가(釋迦)의 입상(立像) 한 구(軀)를 조성하였다. 그 높이는 1장 6척인데 아직 다 마치기 전에 법경이 그만 죽고 말았다. 그 날에 또 보창사(寶昌寺)의 스님 대지(大智)가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깨어나 그 절의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염라대왕 앞에 가 보니 법경이 매우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보았습니다. 불상이 염라왕 앞에 오니, 왕이 급히 달려 나와 뜰 밑에 내려가 합장하고 그 불상에 예배했습니다. 이 불상이 왕에게 ‘법경이 나를 만들다가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왜 죽게 했느냐’고 했습니다. 왕이 어떤 사람을 불러 ‘법경이 완전히 죽었느냐’고 묻자 그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고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연잎을 대어 주어 먹게 하여 그 복업을 마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지는 깨어나 그 절의 스님에서 이렇게 말하고 사람을 시켜 응관사에 가서 보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과연 법경이 깨어나 말하는 것이 대지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법경은 깨어난 뒤로는 항상 연잎만을 먹으면서 제일 맛나다 하고 다른 음식을 먹으면 끝내 소화되지 않았다. 그는 이 불상을 완성하고 수년 뒤에 죽었다. 그 불상은 의상(儀相)이 원만하고 자주 광명을 놓았다. 이 절은 폐했지만 그 불상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당(唐)나라 방주(防州)에서 석상이 산에서 나온 인연 당(唐)나라 무덕(武德) 때 방주(邡州) 서남 자오천(慈烏川)에 학적(郝積)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부터 불법을 믿고 공경했다. 사슴떼가 항상 산 위에서 쫓으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겨 사슴들이 머무르는 곳을 파 보았다. 높이 1장 4척쯤 되는 석상(石像)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오천의 어느 마을에 옮겨 지금도 거기 있다. 불상이 나온 뒤로 사슴떼들은 곧 사방으로 흩어졌다. 옛 노인의 전하는 말에 “가섭불 때에 40구를 감추어 두었는데 지금 2구가 나왔지만 남은 것은 그 산 밑에 있고, 그 형상은 지금 옥화사(玉華寺) 동쪽 철광상(鐵礦像)과 같다. 그러나 그 빨간 빛은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당나라 양주(涼州) 산에서 나온 석문(石文)에 불자(佛字)가 있는 인연 당(唐)나라 정관(貞觀) 17년 9월에 양주(涼州) 도독(都督) 이습예(李襲譽)는 국경을 순행하다가 양주 동남 창천현(昌泉縣)의 경계에 이르러 돌에 새긴 글 모두 110자(字)를 보았다. 거기는 “칠불(七佛), 팔보살(八菩薩), 상과(上果), 불전(佛田)” 등의 글자가 있었다. 곧 왕에게 글을 올리고 왕은 명령해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그 올린 글에 말한 것과 같았다. 왕은 빨리 명령하여 양주부에 1년분의 급여를 다시 내리고 죄인들을 모두 사면했다.
당나라 유주(渝州) 상사사(相思寺)의 불적(佛跡)에서 돌이 나온 인연 당(唐)나라 유주(渝州) 서쪽 백 리 상사사(相思寺) 북쪽 석산(石山)에 불적(佛跡) 12개가 있다. 모두 길이는 모두 3척쯤이요, 너비는 1척 1촌이며 깊이는 9촌이고, 그 가운데에 어문(魚文)이 있다. 불당(佛堂)의 북쪽 십 보쯤에 어떤 스님이 살고 있었다. 정관(貞觀) 20년 10월에 절 곁에 샘물 안에서 갑자기 연꽃이 나와 빛은 홍색이요, 꽃술받침을 모두 갖추어 크기는 3척이었다. 얼굴을 들고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가 물에 들어가면 꽃이 되어, 배 타는 나그네들은 오가면서 모두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겼다. 달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때문에 ‘상사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배주(涪州)에도 이 절이 있다. 이 절은 원래 몹시 가난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보시를 얻어 지금은 늘 부유하다.” 옛날 제나라 형주성(荊州城) 동쪽에 있는 천자정(天子井)에서 비단이 나왔다. 그 때 남녀들은 모두 그것을 취해 썼는데 사람의 비단과 다르지 않았으며 한 달을 지나서야 그쳤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나오는 것을 괴이하다 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오균제(吳均齊)의 『춘추(春秋)』와 소성(蕭誠)의 『형남지(荊南志)』에 나온다.]
당나라 순주(循州) 영감사(靈龕寺) 불적(佛跡)의 인연 당(唐)나라 순주(循州) 동북에 있는 흥녕현(興寧縣)의 영감사(靈龕寺) 북쪽에 있는 어떤 돌에 30개의 불적(佛跡)이 있어 큰 것은 5척 이하이다. 순주는 어떤 강 한복판에 있는데 동서는 2백 리요, 남북은 1백 리이다. 영감사는 매우 부유하였다. 근래에 동장(銅藏)을 얻어 그 면이 3척의 화로만하여 1백여 개의 소반을 합한 것과 같았다. 또 그 명(銘)에 이렇게 되어 있었다. “스님이 이것을 얻으면 복이 일고 속인이 이것을 얻으면 화가 닥칠 것이다.” 또 『고전(古傳)』에 말하였다. “진(晋)나라 때에 북방의 스님이 이 산 밑에 살다가, 대홍굴이 있고, 꽃과 열매가 아름답고 무성한데 거기서 하룻밤을 지냈다. 산신(山神)이 괴상히 여겨 그를 두렵게 하려 했으나 그는 끄떡하지 않고 ‘여기는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산의 귀신도 자주 오는 곳이다’ 하였다. 그리고 앞의 돌산을 바라보니 구름 속에 솟아 해를 가렸다. 그래서 거기 올라가다가 밑을 바라보니 너무 멀리 떨어져 거기까지 갈 수 없었다. 흥녕사로 돌아와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송(宋)나라 때에 두 스님도 먼저 스님과 같이 가 보았으나 이루지 못하고, 다시 정진하여 찾아보았다. 그들은 『법화경』을 외우며 계행이 깨끗하여 능히 귀신을 항복받았을 뿐 아니라 그 형상을 보고, 계(戒)를 주어 권속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앞의 벼랑 위를 바라보니 이상한 광채가 1장쯤 떨어져 있고 위 아래가 모두 끊어졌다. 스님은 나무로 다리를 놓고 건너가 보았다. 이상한 발자국 열 개가 있어 그 빛은 사람의 살과 같아 돌에 나타나 있었다.” 정관(貞觀) 3년에 또 한 발자국이 나타나고 광명을 놓아 윤상(輪相)이 구족했다. 지금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다소가 동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감사에 두고 그 기이함을 취했다. 또 그 책을 보면 송나라 때 왕가(王家)에서 과수원을 희사해 절을 만들었으니, 그 옛 집이 지금도 있다.
당나라 옹주(雍州) 이대안(李大安)이 금동상에게 구원받은 인연 당(唐)나라 농서(隴西)의 이대안(李大安)은 공부상서(工部尙書) 대량(大亮)의 형이다. 무덕(武德) 때에 대량이 월주총관(越州總管)이 되었으므로 대안이 서울에서 그 아우에게로 다니러 왔다가 돌아갈 때, 대량은 그 형을 위해 노비 몇 사람을 딸려 보냈다. 대안은 곡주(穀州)의 녹교(鹿橋)에 이르러 여관에서 자게 되었다. 어느 종이 대안을 죽이고자 꾀하여, 그가 깊은 잠에 들기를 기다려 밤이 반이 지난 뒤에 작은 칼로 대안의 목을 찔렀다. 칼이 침상에 박혔으므로 종은 그 칼을 빼지 않고 그대로 달아났다. 대안은 놀라 깨어나 종들을 불렀다. 거기에 관계 없는 종이 들어와 그 칼을 빼려 했다. 대안은 “칼을 빼면 곧 죽을 것이다. 먼저 종이와 붓을 가져 오너라” 하고 무엇이라고 썼다. 현관(縣官)이 와서 칼을 빼고 찔린 곳을 씻고 약을 붙였다. 그리고 대안은 기절했다. 마치 꿈 속 같은데 어떤 물건이 보였다. 길이는 한 자 남짓 하고 너비와 두께는 너더댓 치 되며 모양은 돼지고기 같은 것이 땅에서 두 자쯤 떠올라 방으로 들어와 침구 앞에서 말하였다. “빨리 내 돼지고기를 돌려 달라.” 대안은 말하였다. “나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내게 달라고 하느냐?” 그 때 문 밖에서 어떤 말이 들렸다. “아니다. 잘못이다.” 그 물건은 도로 문 밖으로 나갔다. 대안은 뜰 앞에 있는 연못 물을 보았다. 맑고 얕은 것이 매우 좋았다. 이 못 서쪽 언덕 위에 금불상이 있었다. 높이는 5촌쯤 되는데 차츰 커져 스님으로 변하였고, 매우 깨끗한 새 가사를 입고 있었다. 그 스님은 대안에게 말하였다. “어디 다쳤느냐? 나는 지금 너를 위해 그 고통을 없애 주리라. 너는 회복되거든 집에 돌아가 염불하고 선행을 닦아라.” 곧 손으로 대안의 다친 목을 만지고 떠났다. 그러자 대안은 본래대로 회복하여 그 스님의 뒷모습만 보았다. 붉은 비단으로 가사를 기워 사방 1촌쯤 되는 것이 매우 분명했다. 대안은 다시 깨어났다. 상처도 아프지 않으므로 일어나 앉아 음식도 먹었다. 십수 일이 지나 서울 집의 자제들이 와서 대안을 모시고 집에 돌아갔다. 집안 사람과 친구들이 다 와서 보았다. 대안은 그들에게 상처 입은 사정과 그 불상 본 일을 다 이야기했다. 한 여종이 곁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대안의 집은 초행(初行)입니다.” 대안의 처는 그 여종을 시켜 장인(匠人)을 불러오게 해서 불상을 만들게 했다. 불상을 다 만들고 비단 그림옷을 입히니 불상의 등에 붉은 점 하나가 있었다. 장인을 시켜 그것을 지우라 했으나 장인은 듣지 않고 말하였다. “이 불상을 그대로 두는 것은 낭군님 말씀을 따라 한 것입니다.” 대안은 그 아내와 집안 사람들과 같이 일어나 불상을 보았다. 꿈에서 본 것과 다름이 없이 그 등에 기운 점이 완연하였다. 그래서 그 기이함에 감탄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이 거짓이 아님을 신실하게 알아서 불법을 더욱 숭상해 믿으면서 정성껏 예배하고,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 불법이 동방으로 들어온 뒤로부터 영상(靈像)의 감동이란 이루 다 적을 수 없고 대충의 건수가 이상과 같다. [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당나라 유주(幽州) 어양현(漁陽縣)의 실화(失火)에 상이 무너지지 않은 인연 당(唐)나라 유주(幽州) 어양현(漁陽縣) 무종(無終)의 수성(戍城) 안에 1백여 집이 있었다. 용삭(龍朔) 2년 4월에 수성에 화재가 일어나 문루(門樓)와 인가가 다 재가 되었다. 오직 두 정사(精舍)와 부도(浮圖)와 불감(佛龕) 위의 종이 발[紙簾]과 거친 대발과 불상 등이 타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신기함에 감탄하면서 부처님 힘의 도움이라 했다. 중산랑(中山郞) 여령(餘令)이 벼슬길에 오르자 그의 형 여경(餘慶)과 그 친구 낭장(郎將)과 제군(齊郡)의 인여(因如) 등 사영주(使營州)들이 다 친히 그 일을 보고, 여령을 위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당나라 병주(幷州) 동자사(童子寺)의 대상(大像)이 광명을 놓아 상서를 나타낸 인연 당(唐)나라 병주성(幷州城) 서쪽에 절이 있으니 이름을 동자사(童子寺)라 했다. 거기 큰 불상이 있어 좌고(坐高)가 170여 척이었다. 황제는 불교를 높이 공경하였다. 현경(顯慶) 말년에 병주를 순행하다가 황후와 함께 이 절에 왔다. 또 그 북쪽 골짜기의 개화사(開化寺)에 가서 2백 척 높이의 큰 불상에 예배하고 우러러보며 희귀하다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보배와 재물 ㆍ의복 등을 크게 희사하고 또 모든 비빈(妃嬪) 등 내궁(內宮) 사람들도 각각 보시를 내어, 병주의 장리(長吏) 두궤(竇軌) 등에게 명령하여 빨리 성용(聖容)을 장엄하게 하고 장식하게 하고 불감(佛龕) 앞의 땅을 넓히는 데 힘쓰라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인 용삭(龍朔) 2년 가을 7월에는 내관(內官)이 가사 두 벌을 내어 중사(中使)에게 주어 두 절의 큰 불상에게 보냈다. 동자사의 불상은 가사를 입는 날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색 광명을 놓아 벼랑과 바위들을 두루 비추고 산과 물을 모두 밝혔다. 또 남감(南龕)에 들어가자 작은 부처님들은 전당을 빛내어 수천만 도속들이 다 보았다. 성 안의 귀천(貴賤)들은 모두 이것을 보고 착하게 된 자가 열 집 중에서 7ㆍ8집이었다. 사람이 함께 안다고 하지만 다 잘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당나라 서경(西京) 청선사(淸禪寺)에서 금상을 훔친 인연 당(唐)나라 서경(西京)의 청선사(淸禪寺)에, 전에 순금 불상 한 구(軀)가 있었다. 길이는 1척 4촌이요, 무게는 80냥이니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만든 것이다. 정관(貞觀) 14년에 손덕신(孫德信)이라는 도적이 임금의 옥새(玉璽)를 위조하여 한 고자 총각을 데리고 임금의 명령으로 불상을 가지러 왔다고 사칭했다. 절의 스님들은 임금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고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불상을 주었다. 하룻밤을 자는 동안에 일이 탄로가 났다. 불상의 몸은 불에 녹았고 머리만이 녹지 않았다. 태종(太宗)은 크게 노하여 극형에 처하였다. 덕신은 죽기 전에 벌써 그 몸에 종기가 나서 온몸이 문드러졌다. 절의 스님들은 다시 금을 보태서 불상을 법답게 주성(鑄成)했다. [이상 세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당나라 무주(撫州)와 담주(潭州) 행상(行像) 등의 인연 당(唐)나라 현경(顯慶) 4년에 무주 자사(撫州刺史) 조씨(祖氏)는 날이 몹시 가물어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무주 동산(東山)에서 행상(行像)을 보고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일꾼을 데리고 가서 옮기려 하였지만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이 소문이 퍼져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몰려왔다. 담주(潭州)의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저 절에서 잃어버린 것이 여기 있는가?” 그래서 다니는 길을 찾아보았더니 두 개의 발자국이 나타나 있었다. 각각 길이가 4척이요, 그 거리는 5백 리였다. 자사는 오랫동안 가물었기 때문에 곧 가서 기도하고, 온 고을의 관리와 백성들은 향과 꽃을 가지고 20리쯤 걸어가서 울면서 사정을 고하면서 드리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을 시켜 들어 보았더니 거뜬히 들렸다. 고을의 절로 모셔 올 때에는 길을 따라 구름이 퍼지더니 그날 저녁에 비가 쏟아져 매우 풍족했다. 그 불상은 지금 무주에 있다.
당나라 옹주(雍州)와 남전(藍田)의 금상이 돌 속에서 나온 인연 당(唐)나라 영휘(永徽) 때에 옹주(雍州) 남전(藍田) 동쪽의 오진사(悟眞寺)는 남전 골짜기의 서쪽 언덕에 있었다. 산의 아름다움과 잘 어울리는 전당은 장엄했다. 불상이 있는 절 북쪽 언덕에 별채를 따로 지으려는데 큰 돌이 가로 놓여 큰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불로 태우고 물을 대어 떠내려 가게 하려 했으나 끝내 되지 않았다. 곧 철주로 때려 깨다가 그 속에서 금불상 한 구를 얻었다. 사면이 다 흠이 없고 천연으로 돌에 싸여 있어서 그 온 곳을 알 수 없었다. 상의 받침도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 인공으로 붙인 것이 아니며 또 무슨 보배로 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높이는 5촌쯤인데 지금 그 절에 있다. 그 해 익주(益州) 광명사(光明寺) 기둥 위에 한 부처님과 한 보살이 나타났다. 깎아도 다시 그 그림자가 나왔다. 처음에 구롱(九隴) 불당에 있던 것을 장사(長史) 장서(張緖)가 대중을 모아 광명사로 옮겼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당나라 옹주(雍州) 호현(鄠縣)의 금상이 예수(澧水)에서 나온 인연 당(唐)나라 옹주(雍州) 호현(鄠縣)의 동쪽이요, 예수(澧水)의 서쪽에 사는 이조곡(李趙曲)에게 금불상이 있었다. 높이는 3척 6촌이요, 불꽃 광명은 4척이며 자주 광명을 놓았다. 금상의 형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극히 위엄이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발받침 위의 명(銘)에 말하였다. “진(秦)나라 건원(建元) 20년 4월 8일에 장안(長安) 중사(中寺)에서 조성했다. 여왕(女王) 혜소(慧韶)는 부처님의 열반을 감응하여 다행히 유상(遺像)을 만나 이로써 몸을 의탁한 나머지 신모(神摸)를 주조(鑄造)합니다. 만일 정성이 지극하다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시방이 다 복을 받게 하소서.” 그 명문(銘文)은 이러하였다. 나는 그것을 얻게 된 인연을 그에게 물었다. 그는 말하였다. “옛날 이교(二敎)를 폐할 때 이것을 예수라인(澧水羅仁)에 감추어 두었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고 또 광명을 놓으면서 촌로(村老)에게 ‘그대는 저 물에 가서 소용돌이 속에서 순수한 모래를 구하라’ 하자 물에서 광명이 나왔다. 그는 곧 가서 소용돌이 속을 파다가 앞의 불상을 얻었다.” 그 때는 아직 주(周)나라 때라 촌가에 감추어 두고 서로 공양하였던 것이다. 조용한 방 안에 있으면서 광명을 놓아 스스로를 비춘다. 지금도 그 마을에 있다.
당나라 심주산(沁州山)의 석상이 방광(放光)하여 골짜기를 비춘 인연 당(唐)나라 용삭(龍朔) 3년 2월에 심주(沁州)에서 나타난 불상은 심주 북쪽 60여 리의 면상현(綿上縣) 경계의 긴 골짜기 벼랑 중턱에 있다. 그 위에는 불감(佛龕)이 있고 그 안에 세 구의 불상이 있다. 가운데 불상이 항상 광명을 놓아 골짜기를 밝게 비추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심주에 알리고 심주에서는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서울의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스님 현수(玄秀)에게 명령하여 사자와 함께 역마를 타고 가서 찾아보라 하였다. 그들은 거기 오를 때 그 광명을 보았다. 불길처럼 날면서 빛났다 꺼졌다 하기를 계속해 끊이지 않았다.
그 때 구름이 불감이 있는 굴에 왔다. 그 광명은 잠깐 숨었다가 구름이 걷히자 나타났다.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알렸다. 임금은 명령하여 그것을 그대로 그리라 했다. 몇 번이나 거듭할 때 광명은 처음과 같았다. 사흘 저녁으로 내리 처음처럼 비추었다. 지금도 광명은 계속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은 빼어난 땅으로서 산림이 울창하고 석감(石龕) 불상의 고적이 매우 많으나 그 시초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서광은 더욱 자주 보였다.
당나라 익주(益州) 법취사(法聚寺)에서 지장보살을 그린 인연 당(唐)나라 익주성(益州城) 밑의 법취사(法聚寺)에서 지장보살을 그렸다. 승상(繩牀)에 앉아 다리를 드리웠는데 높이는 8ㆍ9 촌이다. 이 상은 장승요(張僧繇)의 그림이다. 인덕(麟德) 2년 7월에 이 절 스님이 하나를 모사했는데 광명이 나왔다가 사라짐이 마치 금반지 같았고 본상의 광명과 거의 같았다. 이렇게 계속 모사한 것도 다 광명을 놓았다. 그 해 8월에 임금이 명령하여 하나를 들여와 궁중에서 공양했다. 지금 성 안팎 도속들이 모사해 공양하는 것도 다 광명을 놓는다. 부처님 힘의 헤아릴 수 없음을 참으로 알겠다.[집집마다 하나씩 있으나 다 따로 적지 못한다.]
당나라 간주(簡州)의 부처님 발자국에서 신광(神光)이 비친 인연 당(唐)나라 인덕(麟德) 2년, 간주(簡州) 금수현(金水縣) 북쪽 삼학산(三學山)은 옛날에는 익주(益州)에 속해 있었다. 그 절의 스님 혜욱(慧昱)과 권예득(權例得)은 익주성 밑 공혜사(空慧寺)에 살고 있었다. 인덕 원년에 그 고을의 일로 형주(荊州) 장사사(長沙寺)의 금동불상(金銅佛像) 앞에 가서 지성으로 발원했으니, 그것은 불상을 모사하여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익숙한 장인(匠人) 장정안(張淨眼)을 시켜 법답게 재계하고 6구(軀)를 모사했으나 영감이 없었다. 7구 째에 이르러 오색 광명을 놓아, 절 내외를 밝게 비추어 원근 사람들이 다 보았다. 7일이 지나자 그 광명은 차츰 사라져 도속들의 놀라고 기뻐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혜욱은 이 상을 가지고 장안사(長安寺)로 왔으나 아직 장식을 못했다. 그리고 다시 좌우 시자(侍子) 보살과 성승(聖僧)과 공양 도구를 그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서울의 뛰어난 장인을 시켜 중대(中臺)로 보내고 백관(百官)과 모든 학사들을 시켜 감독하게 하여 『서국지(西國志)』 60권을 그리게 했다. 그림은 40권에 있었다. 혜욱은 따로 좋은 화공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로 가서 범장수(范長壽)라는 장인에 의하여 화상을 장엄하여 도당(都堂)에 두었다. 6월 7일 밤 3경(更)에 첫 상이 오색의 광명을 놓아 당 밖까지 비추었다. 당지기가 일어나 밖에 나가 보았다. 당 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실화(失火)라 생각하고는 놀라워서 외쳤다. 당 안의 당직하는 관리 10인과 병사 30여 인은 날이 더워 모두 몸을 드러내고 잤다. 광명이 두루 몸을 비추어 사람들이 서로 볼 때 모두 옷을 벗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놀라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런데 오직 석회장(石懷藏)이라는 관리만은 평소부터 신심이 없어 다만 바깥 광명만 보았고 몸이 새까맣다고 보았다. 그 광명은 환히 비치다가 아침에야 사라졌다. 석회장은 제 허물을 말하고 자책하면서 정성껏 참회했으나 그래도 광명을 보지 못하고 몸을 비추어서야 밝게 되었다. 관리와 병사들도 이 말을 듣고 광명을 보라고 서로 불러 모두 와서 보았다. 이것을 듣고 본 사람들은 다 발심(發心)하여 일생 동안 재계했다. 모든 관리들은 각각 하나씩 그려 가지고 집에 돌아가 공양했다.[서울의 도속들은 다 알기 때문에 따로 적지 않는다.]
당나라 대주(代州) 오대산(五臺山)의 상이 변현(變現)하여 소리를 낸 인연 당(唐)나라 용삭(龍朔) 원년에 임금은 명령을 내려 회창사(會昌寺)의 스님 회색(會賾)을 시켜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사탑(寺塔)을 수리하게 했다. 그 산은 대주(代州)의 오대현(五臺縣)에 속해 있고 오대(五臺)가 다 갖추어 있는데 중대(中臺)가 제일 높아 눈이 닿는 곳에는 천 리의 강산이 손바닥처럼 다 보인다. 위에는 수천 개의 석탑이 있어 다 벽돌로 쌓았다. 이것은 다 위(魏)나라 고조 사람과 말과 개의 발자국이 있어 금방 밟은 것과 같다. 꼭대기에는 태화천(太華泉)이라는 큰 못이 있고 또 작은 샘물들이 서로 이어 있다. 샘물을 끼고 부도(浮圖) 둘이 있고 그 가운데 문수사리상이 있다. 전(傳)에 말하였다. “문수사리가 5백 선인(仙人)과 함께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설법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도 말하였다. “문수사리는 청량산에서 설법한다.” 이 산은 매우 추워 다른 나무는 나지 않고 오직 소나무만이 골짜기에 솟아 있다. 남쪽에는 청량봉이 있고 산 밑에는 청량부(淸凉府)가 있어 고금의 남은 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중대로부터 동남으로 내려가 30리쯤에 옛날의 대부(大孚) 영취사(靈鷲寺)가 있고 동서에 두 도량이 있어서 불사(佛事)가 다 갖추어져 있다. 옛 노인의 전하는 말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지은 것이라 한다. 남쪽에 두 이랑쯤 되는 화원이 있다. 기이한 꽃들이 섞여 피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한다. 사방에는 나무가 둘러쌌는데 옛 노인에게 물어도 그 근원을 모른다. 매년 첫봄에서 늦가을까지 꽃이 번갈아 피는데 옛부터 도속들이 이 꽃의 기이함을 사랑했다. 인간들이 뿌리를 캐지 않고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다 살지 않는다. 나아가서는 둘러싼 나무 밖으로 옮겨 심어도 살지 않고 반드시 그 울 안에 있어야 마음대로 꽃이 핀다. 실로 문수사리의 감응이요, 대성(大聖)이 나타내는 징조이다. 또 실로 신선들의 옛 집에 둘 것이니 어찌 범부들이 심을 것이겠는가? 또 지극한 정성으로 이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가람(伽藍)과 성승(聖僧)들의 사는 곳을 많이 본다. 혹은 공중에 나는 이도 있고 혹은 시냇가에 있으며 혹은 산이 험한 데 있고 혹은 바윗골에 있다. 혹은 도인이 되고 속인이 되어 범인과 다르지도 않다. 한번 지난 뒤에 다시 찾으면 간 곳을 모른다. 가람과 성승들의 나타나고 사라짐이 한결같지 않으니 성인이 아니면 헤아리기 어렵다. 황제(皇帝)는 용삭(龍朔) 2년 초에 또 회색(會賾)을 시켜 병주(幷州)에 가서 관리들의 인력과 재물을 취하여 묵은 절을 수리하게 했다. 회색은 오대승(五臺丞)과 함께 20여 인을 데리고 바로 오대산으로 갔다. 거기서 석상(石像)이 벼랑 끝에서 몸과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그 곁에 가 보니 그것은 모난 돌이었다. 그는 진신(眞身)을 보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자책(自責)하였다. 오랫동안 한탄하다가 석공(石工)을 시켜 두 탑을 수리하게 하고 문수사리상을 탑 곁으로 옮겼다. 갑자기 종소리가 탑 사이에서 들리는데 방망이로 치는 소리가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상한 향기가 자주 풍겨 오므로 도속들은 모두 일찍이 없던 일이라 감탄했다. 서대(西臺)로 갔는데, 어떤 스님이 말을 타고 동쪽으로 급히 달려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으나 오래 있어도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직접 맞이하러 갔더니 그것은 곧 그루터기로 변했다. 그는 한탄하여 마지 않았으나 상(像)과 상(相)의 감응이 통하여 때때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종소리와 메아리는 계속해 항상 들렸다. 그 산은 사방이 3백 리이다. 동남의 다리는 바로 북악산(北岳山)에 연했고 서북의 다리는 바로 천지(天池)이다. 그 가운데 불광산(佛光山)과 선화산(仙華山)과 왕자탑(王子塔)과 옛 절 여섯이 있다. 해탈 선사(解脫禪師)와 승명 선사(僧明禪師)는 그 남은 자취로서 굴 안에 앉아 있는데 그 몸의 살이 허물어지지 않은 채 10년이 지났으니, 그것은 선정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요, 성현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당나라 형주(荊州)의 서상(瑞像) 그림이 방광(放光)한 인연 대당(大唐) 건봉(建封) 2년 어느 봄에 서명사(西明寺)의 도선 율사(道宣律師)는 한적한 곳을 따라 서울 성남(城南)의 화청궁(華淸宮), 옛날의 정업사(淨業寺)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율사는 쌓은 덕이 높고 그윽하며 변함없이 소박(素朴)함을 지녔다. 갑자기 어떤 천인(天人)이 율사에게 와서 경건히 예배하고 정성껏 문안했다. 율사는 물었다. “단월(檀越)은 어디서 왔는가, 성명은 무엇인가?” 그는 답하였다. “제자의 성은 왕(王)이요, 이름은 당(璫)이라 합니다. 나는 대오(大吳)의 난대(蘭臺)의 신하였습니다. 회사(會師)가 처음 건업(建業)에 갔을 때 손주(孫主)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지금 희유(希有)한 징조를 느끼고 그를 위해 비상(非常)한 사당을 세운 것입니다. 그 때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다 그에게 신령한 힘을 주어 드디어 사리(舍利)를 얻은 것입니다. 오주(吳主)는 손에 구리 병[銅甁]을 들고 구리 쟁반 안에 쏟으니 사리의 충격을 받아 구리 쟁반이 갈라졌습니다. 그 사리는 불로 태워도 망치로 때려도 타거나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감택(闞澤)1)과 장욱(張昱)의 무리도 역시 천인의 도움이 그 몸에 들어가 그 정신을 상쾌하고 영리하게 하여 보답을 알맞게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다 천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보호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습니다. 제자는 남방 천왕(天王) 위장군(韋將軍) 밑에 있는 사자(使者)입니다. 장군은 사무가 매우 많아 3주(洲)의 불법을 옹호하고 싸움이나 위험한 일이 있어도 몸소 가서 타이르고 화해시켜 화남(和南)하게 하였습니다. 큰 욕심이 닥치면 전의 시끄러웠던 일이 오래지 않아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등을 시켜 스승님과 함께 말하게 한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또 어떤 천인이 왔다. 성은 나(羅)씨요, 촉(蜀)나라 사람이었다. 촉나라 말로 율상(律相)을 널리 설명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속인의 예의와 같았고 그 연유를 이야기할 때는 차례가 있었는데, 그만 갑자기 잊어버리기도 했다. 다음에 또 어떤 천인이 말하였다. 그는 성이 비(費)씨로서 예의는 앞의 사람과 같았다. “나는 가섭불 때에 초천(初天)에 나서 위(韋)장군 밑에 있습니다. 모든 천인들은 탐욕에 취했으나 나는 전생의 원력으로 하늘 욕심에 빠지지 않고 청정한 범행(梵行)으로 비니(毘尼)를 매우 공경하였습니다. 위장군은 동진(童眞)의 범행으로 천상의 애욕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한 왕 밑에 8장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왕 밑의 32장군은 네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출가인을 보호합니다. 네 천하 가운데서 북천의 1주(洲)만은 불법이 조금 있고 다른 세 천하는 불법이 크게 성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도 금계를 많이 범하고 법다운 일은 적습니다. 동서 천하 사람들은 지혜가 적고 번뇌가 많아 교화시키기 어렵고 남방 천하만은 번뇌는 많으나 교화시켜 선을 따르게 하여 조복(調伏)하기 쉽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왕에게 친히 부촉(付囑)을 주시고 또 수호하여 악마의 장난을 받지 않게 하라 하시면서 ‘만일 너희가 수호하지 않아 파계(破戒)하면 누가 내 교법을 행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훈계를 감히 행하지 않을 수 없어 파계하는 자를 보더라도 가엾이 여겨 그를 보호하고, 한 가지 선을 행하는 것을 보고는 만 가지 죄를 허물하지 않으며 일에 평등하여 결함을 잊어 버리고 지난 실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 인간의 악취가 위로 허공 세계의 40만 리까지 풍기나, 모든 하늘은 청정하기 때문에 모두 그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법을 보호하라는 부처님의 부촉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도 그들과 같이 있으므로 모든 하늘이 감히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장군(韋將軍)은 32장군 가운데서 가장 불법을 잘 보호하고 널리 폅니다. 많은 마자(魔子)와 마녀들이 비구를 희롱할 때 도력(道力)이 약한 자는 모두 그 유혹을 당하지만 장군은 빨리 달려가 그 근기를 따라 그것들을 다 제거해 줍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닥치면 그들은 사천왕에게로 가야 합니다. 왕은 그들을 보고 다 일어나 위장군을 위해 동진행(童眞行)을 닦습니다. 그것은 정법을 수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는 성질이 계율을 좋아합니다. 여래께서 평생 만드신 비니(毘尼)는 모두 한자리에 앉아서 듣고 받는 계법입니다.” 그 계율 가운데 잘 모르는 것을 물으면 모두 해결해 주었다. 그런데 이 동화(東華) 삼보(三寶)에는 본래 산과 바다가 많아 수석(水石)이 많이 나타난다. 다만 그것이 신령하다 하여 공경할 뿐이요, 그 원인을 찾으면 어떻게 할 지 모르므로 그래서 그 뜻을 물었다. 우선 희미한 그 상(相)을 이치로 묶지만 지니거나 관찰하는 일이 없으므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선사감통기(宣師感通記)』에서 천인(天人)에게 물었다. “익주(益州) 성도(成都)의 다보불(多寶佛) 석상(石像)은 언제 땅에서 솟아났는가?” 답하였다.
“촉도(蜀都)는 원래 청성산(靑城山) 위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성도는 대해(大海)의 땅입니다. 옛날 가섭불 때에 어떤 사람이 서이하(西耳河)에서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다보불의 전신상(全身相)을 본 것으로서 서이하의 취산사(鷲山寺)에 있던 것을 성도(成都)의 무역상이 그것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금의 다보사(多寶寺)는 해신(海神)에 밟히어 배가 뒤집힌 자리입니다. 처음에 그 상을 취한 사람은 언덕 위에서 노는 해신을 보고 그것을 산토끼라 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그 해신은 성을 내어 배를 뒤엎었는데 사람과 석상이 모두 한 배에 실린 채 물에 빠졌습니다. 그 다보불상은 옛날에는 취두산(鷲頭山) 절에 있었는데 그 옛 터가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탑이 있고 항상 광명이 있어서 저 국토를 향하게 했습니다. 길이 낭주(郎州)를 지나게 되는데 크고 작은 탑을 다 셀 수 없었으며 3천여 리를 지나서야 비로소 서이하에 이릅니다. 이 강은 크고 넓어 혹은 1백 리, 혹은 5백 리이며 그 가운데에는 산주(山洲)가 있고 또 옛 절도 있으며 불상은 그대로 있는데 거기 사는 스님은 없습니다. 경전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때로 종소리가 들리고 백성은 번창하며 매년 두 때로 고탑(古塔)에 공양합니다. 탑은 계단(戒壇)과 같고 3중(重)의 섬돌이 있으며 그 위에는 엎어 놓은 가마솥과 같은 것이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다만 신총(神冢)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항상 광명을 놓으며 사람들은 소채 음식으로 거기 제사하여 복을 빕니다. 그 땅은 서북으로 준주(嶲州)까지 2천여 리이며 천축(天竺)이 멀지 않다는 말을 듣고 가끔 거기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이 이하는 생략함.] 진(晋)나라 때에 어떤 스님이 여기서 토분(土墳)을 보고 헐어 버리면 또 생겨 끝내 편편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뒤에 그것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괴상히 여겨 1장쯤 깊이 파 내려가다가 불상과 사람 뼈가 배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해골의 팔과 다리가 다 굵고 커서 지금 사람보다 여러 배가 되었으니, 그것은 즉 가섭불 때 염부제 사람의 수명이 2만 세 때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감겁(減劫)이라 수명이 짧고 사람이 적으니 그것은 당연한 이치요, 괴상하다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불상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무리 끌어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제자가 노인으로 변하여 지휘하자 비로소 편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불법이 멸하여 잠깐 숨었다가 수(隋)나라 때에 불법이 다시 일어나자 그것은 다시 나왔습니다. 촉나라 사람들은 다만 그것이 땅에서 나온 것만을 알고 그 근원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 화부(花趺)에 다보(多寶)라는 글자가 있었으므로 그 때문에 다보불이라 하고 또 다보사라 했습니다.” 또 물었다. “다보라는 글자는 바로 예서(隸書)로서 망한 진(秦)나라 때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가섭불 때에 이미 신주(神州)의 글이 있었는가?” 답하였다. “망한 진(秦)나라 이사(李斯)의 예서는 근대(近代)이지만 예서가 일어난 것은 멀리 옛 부처 때이니, 지금 남주(南洲) 사면의 천여 주의 장엄에 보이며 염부주 1방 백여 국은 그 문자와 언어가 지금의 당(唐)나라와 같습니다. 다만 바닷길이 멀어 자칫하면 수십만 리라, 그 중역(重譯)이 전해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으로 하여금 주주(株柱)2)를 봉수(封守)하게 한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스님은 듣지 않으셨습니까? 양(梁)나라 고야왕(顧野王)은 대학(大學)의 태부(太傅)이니 자원(字源)을 두루 찾아도 출몰(出沒)이 일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옥편(玉篇)』의 서(序)에 말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춘신군(春申君)의 무덤을 파다가 그 명문(銘文)을 얻었는데 그것은 다 예서였다.’ 춘신으로 말하면 주무(周武)의 육국(六國)과 동시이니 예서로 말하면 병탄(倂呑)한 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전서[篆]ㆍ예서[隸] 등 모든 글은 아직도 까마득한 때이었으니 어찌 가섭불 때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역사는 그 귀와 눈으로 듣고 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 물었다. “지금 서경성(西京城) 서쪽의 고사토대(高四土臺)는 속언(俗諺)에 창힐(蒼頡)이 글을 만들던 대(臺)라고 하는데, 어떻게 예서가 고대에 이미 있었겠는가?” 답하였다. “창힐이 이 대 위에 흙을 더해 대를 만든 것과 새[鳥] 발자국을 관찰했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창힐의 전기(傳記)에 대해 이 땅에서 그 근원을 아는 사람이 드물어, 혹은 그를 황제(黃帝)의 신하라 하고 혹은 고대의 제왕이라 합니다. 새 발자국의 글이란 때로 변하는 한 가지 이치로서 지금은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수고롭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어떤 천인이 있었다. 그는 성이 육(陸)씨요, 이름은 현창(玄暢)이었다. 그가 와서 율사를 뵙고 말하였다. “제자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에 초천(初天)에 나서 살았습니다. 본래 나는 가섭불 때의 천인으로 교화 활동을 하기 위해 주나라 때에 잠깐 나타났습니다. 물으신 고사토대(高四土臺)란 본래 가섭불이 여기서 제3회 설법으로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목왕 때에 이르러 문수사리와 목건련이 와서 교화할 때, 목왕이 그들을 따랐으니 이른바 열자(列子)의 화인(化人)이 바로 이것입니다. 화인은 목왕을 가르쳤습니다. 고사대는 가섭불이 설법한 곳이므로, 삼회(三會)의 도량을 만들었습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 때에 이르러 부풍(扶風)에서 한 석불(石佛)을 얻었으나 목공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마굿간에 버려서 이 상을 더럽혔습니다. 불상을 보호하는 신(神)은 화를 내어 목공을 병으로 앓게 했습니다. 목 공은 또 꿈에 상제(上帝)에게 지독한 꾸중을 듣고 깨어나 그 시신(侍臣) 유여(由余)에게 물었습니다. 유여는 답하였습니다. ‘신(臣)이 듣건대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에 어떤 화인(化人)이 이 나라에 왔는데 그것이 불신(佛神)이라 합니다. 목왕은 이를 믿고 종남산(終南山)에 중천대(中天臺)를 지어, 높이는 천여 척이었는데 그 터가 지금도 있습니다. 창힐대(蒼頡臺)에 신묘(神廟)를 짓고 이름을 삼회도량(三會道場)이라 했으니 목공께서 지금 병을 앓으심이 혹 그 부처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목공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유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근자에 한 돌사람을 얻었다. 그 의관(衣冠)은, 지금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굿간에 버렸는데 이것이 바로 그 불신이 아니겠는가?’ 유여는 이 말을 듣고 곧 가서 보고 와서 말하였다. ‘이것은 참 불신입니다.’ 목공은 석상을 도로 가져와 목욕시킨 뒤에 청정한 곳에 안치하였습니다. 석상은 이내 광명을 놓았습니다. 목공은 또 신이 분노했다 생각하고 더욱 두려워하여 3생(牲)을 잡아 제사하자 선신(善神)들이 받들어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목공이 또 겁이 나서 유여에게 물었습니다. 유여는 대답하였습니다. ‘신(臣)은 듣건대 불신은 정결하여 주육(酒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생물의 목숨을 사랑하고 소중히 하기를 외아들같이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바치는 공양은 향을 사르는 것뿐이요, 그에게 드리는 제물은 떡이나 과일 뿐입니다.’ 목공은 크게 기뻐하여 불상을 짓는 데 있어서 공인(工人)을 쓰지 않으려고 유여에게 물었습니다. 유여는 말하였습니다. ‘옛날 목왕(穆王)이 절을 짓는 데는 반드시 공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사대(高四臺)의 남쪽 마을에 있는 왕안(王安)이라는 노인을 청했습니다. 그 나이는 180세였습니다. ‘일찍이 삼회(三會)의 도량을 사람이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은 지금 늙어서 지을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 북쪽에 네 형제가 있어서 일찍이 도량에서 여러 공인들을 위해 같이 일했습니다. 그들을 청해서 함께 짓도록 하십시오.’ 그의 말에 의해 한 구리로 지으니 상호가 원만했습니다. 목공은 크게 기뻐하여 그들에게 큰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얻고 또 그것을 지은 공덕으로 그 토대 위에 높이 3백 척의 중각(重閣)을 지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고사대(高四臺) 혹은 고사루(高四樓)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성이 고씨요, 큰 형의 이름이 사(四)였기 때문입니다. 혹은 큰 형의 이름을 취해 고사라고 했다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또 물었다. “목련과 사리불은 부처님께서 계실 때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두터운 대우를 받았겠는가?” 답하였다. “이름이 같은 여섯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목련은 대목련(大目蓮)이 아닙니다. 우문(宇文)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문수사리가 범승(梵僧)으로 변하여 이 땅에 놀러 와서 말하였습니다. 가섭불의 설법한 곳과 문수사리가 사는 곳에 예배하고자 하는데 거기는 청량산(淸凉山)이라 합니다. 도인이나 속인에게 다 물어 보아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때 지맹(智猛)이라는 법사는 나이 겨우 18세로서 범승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까닭으로 그 두 성인의 자취가 여기 있는 줄 아십니까?’ 답했습니다. ‘진(秦)나라 도성(都城) 남쪽 20리에 창힐이 글을 만든 대(臺)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땅입니다. 모든 사하(沙河)의 남쪽 50리와 청산(靑山)의 북쪽 40리에 그 자리가 있다고도 합니다.’” 또 물었다. “사하와 청산은 어디를 말하는가?” 답하였다. “위수(渭水)와 종남산(終南山)을 말한 것입니다. 이 범승은 위수에서 바로 남으로 멀리 걸어 고사대에 이르러 말하였습니다. ‘여기가 옛 부처님이 설법하신 곳이다.’ 그리하여 지맹 법사는 예배하러 그를 따라갔는데 오래지 않아 그 범승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지맹은 장성하여 이 사실을 태상위경(太常韋卿)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고, 청하여 그 고사대 자리에 본래대로 절을 짓고 주왕(周王)에게 아뢰어 이름을 삼회사(三會寺)라 했습니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때에 이 절을 폐하여 대사(大寺)에 편입시키고 그것을 다시 헐고 보리사(菩提寺)에 편입시켰으니, 지금 서울의 동쪽이요, 시(市)의 서쪽이며, 평강방(平康坊)의 남문과 동쪽 보리사 서당(西堂)인 불수사(佛首寺)가 이 삼회사입니다. 석가여래께서 대가섭을 제도하신 뒤 12년에 이 고사대에 오셔서 그 밑에서 가섭불의 사리를 보았습니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몸소 대하(大夏)에서 놀 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본 옛 탑을 돌려 모시고 예배하고 섬기십시오.’ 왕이 물었습니다. ‘그 탑이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호경(鄗京)의 동남방에 있습니다.’ 서천축국(西天竺國)의 별전(別傳)에 자세히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 사자국(師子國)의 스님은 나이 99세에 제3과(果)의 아나함(阿那含)이 되어, 이 훌륭한 고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몸소 나아가 예배한 뒤에 또 주청하여 북대주(北代州)에 있는 청량산의 문수사리보살이 앉은 자리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역마(驛馬)와 내사(內使)와 제자 보좌관 20여 인을 그에게 주어 가는 곳마다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관리와 제자들은 모두 그 역마를 탔습니다. 오직 노인 한 사람만은 젊어서부터 정성으로 고행하면서 축생을 타지 않았습니다. 대주의 청량산에 이르러서는 팔꿈치로 가고 무릎으로 걸어 중대(中臺)의 불당까지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문수사리의 사당입니다. 밑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30여 리는 걸어야 했습니다. 산의 돌은 단단하고 예리하여 살을 뚫고 뼈를 찔렀으며 피는 안나는데 젖이 7일 동안 흘렀습니다. 온몸을 땅에 던져 얼굴을 땅에 대고는 일어나지도 않고 먹지도 않다가 7일이 지나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기뻐 뛰면서 손가락을 휘두르며 사방 상하 허공에 문수사리보살과 성승(聖僧) 아라한이 모두 보인다 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도인과 속인들 수십 인은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 몸 길이가 몇 리나 되는 큰 이무기 한 마리가 북에서 바로 이 노인을 향해 왔습니다. 어른을 보고 기뻐하면서 법사의 다리를 물고 지나가서는 스님의 형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이 노인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으니, 이런 갖가지 영감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원하던 바를 다 이루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교화를 나타내어 봉안하고 혹은 궁중에서 맞이해 계를 받으며 혹은 여러 산을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율사는 천인에게 물었다.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문수사리는 청량산에서 5백 선인을 거느리고 설법하고 있다 하고, 경전의 명문(明文)에는 특히 문수사리는 이 사바세계에 오래 머무른다 하였다. 사바세계라면 대천(大千)세계의 총칭인데 어째서 이곳에만 치우쳐 있다 하는가?” 그는 답하였다. “문수사리는 부처님의 본래의 스승으로서 인연을 따라 나타나되 그 응변(應變)은 같지가 않습니다. 대사(大士)의 큰 공덕은 사람의 경계가 아니니 함부로 평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청량산에 있는 많은 오대(五臺) 중에 있음을 알고 믿을 뿐입니다. 청량산은 지금은 북대주(北代州)에 속해 있고 서쪽으로 보면 오대현(五臺縣) 청량부(淸凉府)가 있습니다. 황당(皇唐) 때부터 해탈(解脫)이라는 스님이 바위굴 속에서 죽어 30여 년을 있었는데 그 살이 허물어지지 않고 마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여승도 선정에 들어 움직이지 않은 채 여러 해를 지났습니다. 성적(聖迹)이 있는 가람(伽藍)에서 보살과 성승(聖僧)과 선인(仙人)ㆍ선화(仙華) 등을 사람들은 자주 봅니다. 이런 것은 다 별편(別篇)에 자세히 있는 것이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었다. “지금 오대산 중대(中臺)의 동남 30리에 있는 대부(大孚) 영취사(靈鷲寺)의 양당(兩堂)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그대로 있다. 남쪽에는 두 이랑쯤 되는 화원이 있어 사시로 꽃이 피어 그 빛깔이 각각 다르고 사방에는 나무가 둘러 있다. 그 꽃들은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모두 나지 않으나 오직 그 울 안에 심으면 오랫동안 무성하다. 사람들은 연월(年月)을 따져 보아도 그 유래를 알지 못한다. 혹은 한 명제(漢明帝)가 세운 것이라 하고 혹은 위(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심은 것이라 하여 옛 노인들의 전하는 말도 다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말이 사실인가?” 그는 답하였다. “이는 모두가 그 두 임금이 세우고 심은 것입니다. 옛 영계(靈界)는 문수사리가 머무른 곳이었으며, 주 목왕은 거기 절을 짓고 공양했으며, 또 아육왕(阿育王)도 거기 탑을 세웠습니다. 한 명제 초년에 아라한인 마등(摩騰)도 천안(天眼)으로 이 탑을 보고 왕에게 청해 절을 세웠습니다. 그 산 모양이 영취와 같으므로 이름을 대부(大孚)라 했으니 부(孚)란 신(信)입니다. 임금이 불법을 깊이 믿고 절을 세워 사람들에게 불법을 권했기 때문입니다. 원위(元魏)의 효무제(孝文帝)는 북대(北臺)가 멀지 않아 항상 여기 와서 예배하다가 사람과 말이 다닌 발자국이 돌 위에 분명한 것을 보았으니 그 사실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어찌 이 오대 징험뿐이겠습니까? 지금 종남산(終南山)ㆍ태백산(太白山)ㆍ태화산(太華山) 등 오악(五岳)의 명산에도 다 성인이 있으니, 불법을 붙들어 세상에 오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달려가 영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별편(別篇)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번거롭게 말하지 않습니다.” 또 물었다. “지금 양주(涼洲)의 서쪽 반화현(番禾縣)[번(番)의 음은 반(盤)이다.]에서 산이 갈라져 불상이 나왔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가?” 그는 답하였다. “가섭불 때에 이빈(利賓)이라는 보살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산 사람들이 업보를 믿지 않고 살생(殺生)으로 업을 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거기에는 수만 가구가 살되 불법을 존중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 보살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절을 세웠습니다. 대범천왕이 손수 불상을 만들었는데 보살은 신통의 힘으로 그 불상을 참부처와 같이 널리 다니면서 설법하고 교화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도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보이기 위해 손으로 큰 돌을 들어 한 마을을 덮어 버리려 했습니다. 보살이 위엄을 떨쳐 권하고 교화할 때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돌려 부처를 믿고 공경했습니다. 살생하는 모든 기구는 다 연꽃으로 변하고 거리마다 꽃을 심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서상(瑞像)은 비로소 신통의 힘을 거두었습니다. 보살은 또 모든 청신사(淸信士)에게 권해 일곱 절을 짓게 하였으니 남북이 104리요, 동서가 80리로서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습니다. 또 곳곳에 승방(僧房)과 불전(佛殿)을 짓기 시작하여 13년을 지나 비로소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출가한 2만 인은 모두 그 일곱 절에 있었습니다. 3백 년이 지나 그 모든 사람들은 큰 업력(業力)을 나타내어 옛날에 지은 악의 업보를 금세에서 가볍게 받아 지옥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전에 해침을 입은 자는 악취(惡趣)에 있으면서 또 발원하였습니다. ‘나를 해친 저 사람이 성인이 되기 전에 나는 그를 해치리라. 만일 해치지 않으면 악업이 없어져 나는 과보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함께 큰 불을 토해 절과 집을 다 태우므로 저 촌락이 일시에 다 타 없어지고 도둑들이 마음대로 날뛰었습니다. 또 큰 물이 들어 모두 빠져 죽고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습니다. 그 때 산신(山神)은 절이 파괴되기 전에 그 불상을 거두어 멀리 공중에 두었다가 절이 파괴된 뒤에 내려와 석실(石室) 안에 안치하고 공양했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석실이 없어졌습니다. 유(劉) 때에 이르러 살하(薩何) 스님이 그 산에 예배할 때 불상이 나왔던 일을 거슬러 보였습니다. 그 살하의 전신(前身)은 원래 저 이빈 보살로서 몸과 머리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도 별편(別篇)에 있습니다.” 또 물었다. “강표(江表) 용광(龍光)의 서상(瑞像)은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는 라집(羅什)이 가지고 왔다 하고, 어떤 이는 부남(扶南)에서 얻은 것이라 하니 어느 말이 옳은가?” 그는 답하였다. “그것은 라집이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송(宋)나라의 효무제(孝武帝)가 부남을 정벌해 얻은 것입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3백 년에 북천축(北天竺)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인 우바질나(優婆質那)가 신통의 힘으로 가공(加工)하여 3백 년 동안 큰 돌산을 파고 불굴(佛窟)에 안치한 것입니다. 위에서 밑에까지 무릇 5중(重:층)이요 높이는 3백여 척입니다. 미륵보살의 지휘를 청하여 단실(檀室)을 만들고 거기에 둔 것입니다. 『현장사전(玄奘師傳)』에는 백여 채라 했고 『성적기(聖迹記)』에는 ‘높이가 8장이요, 발받침이 8척이며 육재일(六齋日)이면 항상 광명을 놓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처음 만들 때 아라한은 공인(工人)을 데리고 세 번이나 하늘에 올라가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 층에는 우두전단상(牛頭栴檀像)이요, 셋째 층에는 금상(金像)이며, 넷째층에는 옥상(玉像)이요, 다섯째 층에는 동상(銅像)입니다. 범부들이 지금 보는 것은 아래층에 있는 상이요, 위의 네 층은 닫혀 있습니다. 그 석굴에 비추면 사람의 장부가 다 보입니다. 6백 년경에 불내차(佛柰遮)라는 아라한은 태어나자마자 그 어머니가 죽었는데, 어머니는 부남국(扶南國)에 태어났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중한 은혜를 생각하고 위층에서 작은 전단상을 내어 어머니께 공양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양주(楊州)에 나서 출가하여 신흥사(新興寺)에 있으면서 3과(果)를 얻었습니다. 송(宋)나라의 효무제(孝武帝)가 부남국을 정벌해 이 상을 얻은 것도 다 이 아라한의 신통의 힘입니다. 어머니는 그 때까지 살아있으면서 때때로 라부(羅浮)ㆍ천태(天臺) 등 서방의 여러 곳으로 다닙니다. 옛날에 법성 담무갈(法盛曇無竭)이라는 이가 서방(西方)에 다시 갔을 때 어떤 이가 책 5권을 주었는데 거기에 이 상에 대해 간단히 기록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찌 함부로 라집 법사가 이 상을 등에 지고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율사는 또 물었다. “라집 법사가 일생에 번역한 경전을 많은 사람들이 못내 즐겁게 수지하는 것이 더욱 성해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답하였다. “그 사람은 총명하여 대승(大乘)을 잘 압니다. 그 이하 여러 사람이 동시에 번역한 것도 다 1대(代)의 보배입니다. 그러나 전대(前代)와 후대(後代)에 뛰어나고 빛나서 우러러도 미칠 바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깨달은 다음에 부처님께서 남기신 뜻을 얻은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또 물었다. “세상에서 항상 이야기하지만 진(秦)나라 요흥(姚興)에게 소중한 계를 억압당하고 파괴당했다 하는데 어떻게 부처님의 뜻을 얻었다 하겠는가?” 그는 답하였다. “이것은 어두운 범부로서 헤아릴 바가 아니거늘 어찌 꼭 평론해야 하겠습니까? 라집 법사는 그 덕행이 삼현(三賢)의 자리에 있습니다. 어디 있거나 두루 교화하되 번거로운 것은 깎고, 빠진 것은 끼우면서 근기를 따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론(大論) 1부(部)가 10분(分)의 9를 생략했으니 그 이외의 경론은 이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명상(冥祥)과 감응이 여러 대(代)로 더욱 새로우며 성인의 뜻을 깊이 깨달음은 실로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또 문수사리의 지시를 받아 개정하고 정리한 것은 보통에서 뛰어났거늘 어찌 별실(別室)의 비방을 받음으로써 깊은 뜻이 모두 없어졌다 하겠습니까?” 또 물었다. “방주(防州)의 현제사(顯際寺) 산에서 나온 석상(石像)은 언제 세운 것인가?” 답하였다. “이것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만든 것입니다. 이 석상이 원래 나온 곳은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절을 지은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아육왕의 넷째 딸이 지은 것이요, 또 불상과 탑을 만들어 여기서 공양했습니다. 그 때 이 절에는 1ㆍ2ㆍ3과(果)를 증득한 사람이 살고 있어서 진상(秦相) 유여(由余)가 항상 와서 받들고 공경했습니다. 옛날 가섭불 때에도 여기에 절을 세웠으니, 이것은 사미승(沙彌僧) 현제(顯際)가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라 현제사라 한 것입니다.” 또 물었다. “지금의 옥화궁(玉華宮) 남쪽의 단대산(檀臺山) 위에 벽돌탑이 있다. 면들의 넓이는 40보(步)요, 하층은 극히 웅장하며 사면의 석감(石龕) 옆에는 부서진 벽돌이 있고, 또 세 곳에 30여 개의 벽돌 가마가 있다. 그러나 항상 종소리가 들린다.” 그는 답하였다. “이것은 목왕(穆王)의 절로서 이름을 영산사(靈山寺)라 합니다. 아육왕 때에 왕은 산신(山神)에게 명령하여 여기에 탑을 만들었습니다. 서진(西晋) 말년의 난리에 오호(五胡)가 권세를 부렸을 때, 유요(劉曜)는 경도(京都)의 장안(長安)에서 자주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이 산의 부처님께서 벽돌탑 안에 앉아 유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젊어서부터 술을 마셨다. 너는 색욕(色欲)에 빠지지 말고 간사한 무리는 쫓아내고 충성스런 사람을 써라.’ 그러나 유요는 그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 뒤 낙양(洛陽)에서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져 석륵(石勒)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처음에 유요가 꿈에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산에 가서 찾아보았더니, 이 불상이 작은 벽돌탑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꿈과 부합했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탑을 헐고 다시 큰 탑을 세워 높이가 19층이요, 또 극히 장엄한 절을 지어 이름을 법등사(法燈寺)라 하고, 3백 명의 스님이 거기 살았습니다. 유요가 죽은 뒤에 그 절에 있는 43인은 3과(果)를 닦아 얻었습니다. 산신은 그 탑 뒤에 또 절을 짓고 그 3과(果)를 얻은 스님에서 공양했습니다. 신은 태백산(太白山)에 가서 지초(芝草)를 캐어 성승(聖僧)들에게 공양하여 그들은 모두 오래 살았습니다. 그 절은 지금도 있으나 평범한 사람들은 보지 못하며, 그 들리는 종소리는 이 절의 종소리입니다. 그 탑은 유요에게서 연유했으나 그것은 목왕이 절을 세운 곳이며 또 가섭불의 옛 절입니다. 정관(貞觀) 때에 이르러 옥화궁 북쪽 자오천(慈烏川)의 산 위에 사슴이 항상 모여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상히 여겨 그들이 모이는 곳을 1장쯤 깊이 파내려 가다가 석상(石像) 하나를 발견했는데 길이는 1장쯤이요, 지금도 그것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또 물었다. “형주(荊州)의 전의 대명사(大明寺)에 있는 전단상(栴檀像)에 대해 어떤 이는 우전왕(優塡王)이 지은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본떠 만들어 양조(梁朝)로 가지고 와서 지금 경사(京師)에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그 본래의 것인가?” 그는 답하였다. “대명사에 있는 것이 그 본상입니다. 양(梁)나라의 고조(高祖)가 죽은 뒤에 그 상이 형주 물가에 왔던 것입니다. 원제(元帝) 승성(承聖) 3년에 주(周)나라가 양나라를 평정하고 그 뒤에 장부와 국보를 거두어 모두 북주(北周)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승진사(僧珍師)가 그 전단상을 방 안에 숨겨 두고 많은 재물을 그 사자에게 뇌물로 줌으로써 전단상은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9년에 문조(文祖)가 유고언(柳顧言)이라는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맞이해 오라 하고 절의 스님이 또 그 상을 구해 형초(荊楚)를 진압하게 했습니다. 고언은 그의 동향 사람이라 그것에 의해 따로 전단나무에 불상을 새겨 가지고 갔습니다. 그 때 진달(眞達)이라는 바라문 장인(匠人)을 시켜 다시 상을 지으니, 이것이 지금 서경(西京)의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상으로서 이것도 매우 영이(靈異)합니다. 본상(本像)은 형주에 있는데 스님이 옻을 칠함으로써 그 상호가 진상(眞像)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본래 만든 지 7일이 되는 부처의 몸에 지금 옻칠을 하여 장년(壯年)의 상이 되었기 때문에 본래와 아주 다르다.] 대명사는 본래 옛 부처가 있던 곳이니 그 영상(靈像)이 북으로 옮겨 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장사(長沙)의 의 법사(義法師)는 천인이 남몰래 칭찬하는 스님입니다. 그는 깨친 바 있어 불상의 옻칠을 벗겨 참모습이 다시 나타나게 했습니다. 신심이 크게 움직여 신령스런 위의를 직접 보고 전단나무를 통채로 만들어 본래에 가공한 것이 없었으며 광부(光趺)는 특히 뛰어났습니다. 상아(象牙)의 조각은 마침내 인공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흥 선사의 상은 낱낱이 본래 것과 다릅니다.” 또 물었다. “배주(涪州)의 상사사(相思寺) 옆에 고적(古迹)이 많이 있으나 그 새긴 명(銘)의 인연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는 답하였다. “가섭불 때에 라자명(羅子明)이라는 산신(山神)이 있으니 그는 촉(蜀)나라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계를 지키는 비구로서 파계하는 자를 미워하여 온갖 악원(惡願)을 세웠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큰 악귀(惡鬼)가 되어 저 파계하는 자를 잡아먹으리라.’ 그는 이로 인해 몸을 받아 이 산신이 되었습니다. 그 권속이 많고 다스리는 토지는 동서가 5천여 리요, 남북이 2천여 리이며 해마다 만 명 이상을 잡아먹었습니다. 이 산신은 본래 가섭불의 형이었는데 뒤에 그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섭불은 그를 가엾이 여겼기 때문에 일부러 와서 교화하려고 갖가지 신통 변화를 부려 비로소 조복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5계(戒)를 받고 그에 따라 전생 일을 알고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뒤에 그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하여, 가섭불은 자취를 남겼고 아육왕은 그 위에 탑을 세워 지금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산신은 곧 돌 속에 숨고 탑은 백옥(白玉)으로 되었으며 그 산신은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성 밑의 절 탑은 아육왕이 만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부촉의(付囑儀)」에 적혀 있습니다.” 또 물었다. “남해(南海) 순주(循州) 북산과 흥녕현(興寧縣)의 경계에 있는 영감사(靈龕寺)에는 신령스런 고적이 많이 있다.” 답하였다. “그것은 문수사리 성자(聖者)의 제자가 이 산의 귀신이 되어 악업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문수사리가 그것을 가엾이 여겨, 여기 와서 그를 교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생 일을 알고는 문수사리에게 그 자취를 남기기를 청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항상 예배하고 섬겨 모든 악에서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문수는 자취를 남겼으니 그것이 이것입니다. 정관(貞觀) 3년에 산신은 죽어 도솔천에 났습니다. 따로 한 귀신이 여기 살았으니 이것은 저 옛 산신의 친구입니다. 이것도 악업을 지었습니다. 천상에 난 옛 귀신은 이것을 가엾이 여겨, 내려와서 문수에게 조그만 자취를 나타내어 후래의 귀신을 교화하기를 청했으니 또 정법을 따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산에 나타난 크고 작은 고적은 다 그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부촉의(付囑儀)」에 있습니다.” 또 물었다. “심주(沁州)의 북산 석굴불(石窟佛)에 항상 광명이 있다. 이 불상은 언제 나왔는가?” 답하였다. “이 굴은 가섭불과 석가불 두 시대에 다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주(周)나라 목왕(穆王)의 제자가 가섭불의 상을 만들었습니다.” 또 물었다. “위남(渭南)과 종남(終南) 두 산에 불면산(佛面山)과 칠불간(七佛澗)이 있는 것은…….” 답하였다. “이것도 앞의 사실과 같습니다. 남산 고곡(庫谷)의 천장(天藏)은 가섭불이 손수 지은 창고입니다. 지금도 13연각(緣覺)이 그 골짜기 안에 살고 있습니다.” 또 물었다. “이 나라에서 늘 전하는 말에 여기 부처는, 은(殷) 시대와 주(周)나라 소왕(昭王)ㆍ장왕(莊王) 등이 만들었다 하여 그 말들이 일정하지 않은데 어느 말이 옳은가?” 답하였다. “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제자는 하걸(夏桀) 때에 천상에 나서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또 부처님은 3신(身)이 있어 법(法)ㆍ보(報)의 2신(身)은 범인들이 볼 것이 아니어서 다 등지(登地) 이상을 교화하시고 오직 화신(化身)만은 3천 세계에 두루하여 백억의 석가는 사람들의 감응을 따르므로 전후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혹은 은(殷)나라 말년에도 있고 혹은 주(周)나라 장왕(莊王) 때에도 있지만 모두 대천세계 안에 있으면서 모두가 전후(前後)로 교화를 전하고 상대를 보아 따르는 것이니, 전후가 어찌 일정하겠습니까? 만일 법보(法報)에 의한다면 항상 고요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힐난할 것이 없습니다.” 또 물었다. “한(漢)나라 땅에서 보는 모든 서상(瑞像)은 다 아육왕의 넷째 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저승 일이 아니지만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 이것은 어떤가?” 답하였다. “그것은 진실이라 의심할 것 없습니다. 아육왕의 넷째 딸은 그 얼굴이 곱지 못해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고 항상 그 추한 얼굴을 한탄하다가 이에 부처 얼굴을 그려 보았더니 도리어 제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 상호는 사람에서 뛰어나다는데 어째서 내 얼굴과 같을까?’ 이런 고민으로 여러 해를 지낸 뒤에, 마침내 부처님의 감응이 있어서 본인 얼굴과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정을 자세히 물어 보았고 그는 제 바람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산의 옥화궁이나 형주ㆍ장사(長沙)ㆍ양도(楊都)ㆍ고리(高悝) 및 경성에서 숭경하는 절의 불상은 다 아육왕의 넷째 딸이 만든 것입니다. 혹 그 광부(光趺)에 쓴 것은 범본(梵本)에 의해 쓴 것인데 한인(韓人)으로는 그 글을 아는 이가 드뭅니다. 아육왕은 그 불상을 가지고 모든 귀신들을 시켜 그 인연의 느낌을 따라 유포하고 깨우치게 하였으므로 지금 보는 불상은 모두 여상입니다. 그 숭경하는 절 땅은 본래 전쟁터입니다. 서진(西晋)이 망할 때 오호(五胡)가 크게 일어나 무기를 휘둘러 서로 죽인 중에서도 이곳이 더했습니다. 지금도 땅을 파면 사람 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무고한 살상은 잔혹하고 비참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귀신들이 불법으로 그들을 위안시켜 그 원혼들로 하여금 선심을 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주(周)나라가 불법을 멸하게 하자 신들도 옮겼다가 수(隋)나라가 불법을 일으키자 다시 거듭 왔습니다.” 또 물었다. “이 세상에는 저승 일의 영감이 흔히 있다. 정신이 떠나고 몸이 다 썩었는데 어떻게 다시 와서 7일이나 혹은 더 많은 날을 지내면서 산 때와 다름이 없는가?” 답하였다. “사람은 7식(識)을 타고 났고 식에는 각각 신(神)이 있습니다. 심식(心識)이 주인이 되어 주인은 먼저 떠나더라도 남아 있는 신이 수호하는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5계(戒)의 1계에는 5신(神)이 있으므로 5계이면 곧 25신이 됩니다. 1계를 파괴하면 5신은 떠나가더라도 남은 신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대승(大僧)이 계를 받을 때 계마다 250신(神)이 있으며 계마다 250신이 비구를 호위함을 얻게 됩니다. 만일 한 중한 계를 깨뜨리면 다만 250신만 떠나고 다른 것은 항상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1)삼국시대 오(吳)나라 산음(山陰)의 사람으로 자(字)는 덕윤(德潤)이다. 집이 가난하여 남의 서사(書士)로 고용되었으나 온갖 전적(典籍)을 깊이 연구하며 통람(通覽)하였고 역수(曆數)에 정통하였다. 그는 뒤에 벼슬이 태자의 태부(太傅)가 되고 조정의 대의(代議)가 되어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항상 감택에게 자문하였다. 조정은 감택의 유학(儒學)ㆍ근로(勤勞)함을 기려 도향후(都鄕候)에 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