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_0434_c_02L 한(漢)나라 『법본내전(法本內傳)』의 경험(經驗) 진(晋)나라 거사 정덕진(丁德眞) 진나라 거사 주민(周閔) 진나라 거사 동길(董吉) 진나라 거사 주당(周璫) 진나라 거사 사부(謝敷) 진나라 사문 석도안(釋道安) 진나라 사문 석승정(釋僧靜) 위(魏)나라 사문 주사행(朱士行) 위나라 사문 석지담(釋志湛) 위나라 사문 오후사승(五候寺僧) 위나라 태화(太和) 때의 내엄관(內閹官) 송(宋)나라 사문 석혜엄(釋慧嚴) 송나라 비구니 석지통(釋智通) 송나라 사문 석혜경(釋慧慶) 제(齊)나라 사문 석혜보(釋慧寶) 양(梁)나라 거사 하규(何規) 주(周)나라 고조(高祖) 무제(武帝) 진(陳)나라 양주(楊州)의 엄공(嚴恭) 수(隋)나라 양주(楊州)의 스님(이름 모름) 수나라 사문 석혜의(釋慧意) 수나라 사문 석법장(釋法藏) 수나라 사문 객승(客僧)(이름 모름) 당(唐)나라 사문 석지원(釋智苑) 당나라 사문 석도적(釋道積) 당나라 석유속(釋遺俗) 당나라 교남(郊南)의 사가서 사(史呵誓) 당나라 융주령(隆州令) 호원궤(狐元軌) 당나라 익주(益州)의 서생(書生) 순씨(荀氏) 당나라 사문 석담운(釋曇韻) 당나라 도수사자(都水使者) 소장(蘇長) 당나라 부인(夫人) 두로씨(豆盧氏) 당나라 형주 사마(邢州司馬) 유검(柳儉) 당나라 수주인(遂州人) 조문신(趙文信) 당나라 봉주 현승(蓬州縣丞) 유필(劉弼) 당나라 낙주인(洛州人) 가도선(賈道羨) 당나라 오군인(吳郡人) 육회소(陸懷素) 당나라 하내사마(河內司馬) 교경(喬卿)
당나라 평주인(平州人) 손수(孫壽) 당나라 정주(鄭州)의 이건(李虔) 당나라 조주(曹州) 제음현(濟陰縣)의 경험.
① 한(漢)나라 『법본내전(法本內傳)』의 경험 한나라 『법본내전(法本內傳)』에서 말하였다. 한나라 명제(明帝)는 채암(蔡愔)ㆍ진경(秦景)ㆍ왕준(王遵) 등 16인을 보내어 천축국(天竺國)으로 가서 마등(摩騰)ㆍ법란(法蘭) 등과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맞이해 돌아왔다. 명제는 그들에게 물었다.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나오셨는데 왜 그 교화가 여기에 미치지 않는가?” 마등이 대답했다. “천축의 가비라위국(迦毘羅衛國)은 삼천대천세계와 백억 일월(日月)의 중심입니다. 3세(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 거기서 나셨고, 내지 하늘과 용과 사람과 귀신으로서 원행(願行)의 힘이 있는 것은 다 거기 나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모두 도를 깨칩니다. 그러나 다른 곳의 승려들은 인연의 느낌이 없으므로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거기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거기 가시지 않는다고는 하나 광상(光相)이 미치는 곳이면 5백 년 혹은 천 년 혹은 2천 년 뒤에는 성인이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거기 가서 교화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명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또 한나라 영평(永平) 14년 1월 1일에 이르러 5악(岳)의 모든 도사(道士) 690인은 새해 조회(朝會)에 들어가 글을 올려 서역(西域)의 불도(佛道)와 그 우열을 시험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명제(明帝)는 상서령(尙書令) 손상인(孫庠引)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달 15일에 모두 모여 백마사(白馬寺) 남문에 3단(檀)을 세워라. 즉 5악(岳) 8산(山)의 모든 도사들은 경 369권을 가지고 와서 서단(西壇)에 두고 27가(家)의 제자서(諸子書) 235권은 중단에 두고 전식 백신(奠食百神)은 동단에 두라.” 그리고 명제는 행전(行殿)을 절 문 서쪽에 두고 부처님의 사리(舍利)와 경전을 거두었다. 도사들은 3단을 둘러싸고 섶에 불을 붙였다. 도경(道經)에까지 불이 붙으려고 하자 도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임금님은 사교(邪敎)를 믿어 현풍(玄風)이 계통을 잃게 되는구나.” 경전을 단 위에 늘어놓고 불로 시험해 그 진위(眞僞)를 분별하기 위해 곧 불을 놓자 경전이 모두 재로 변했다. 도사들은 서로 돌아보고 얼굴빛이 변하면서, 어떤 이는 하늘에 오르고 땅 속으로 들어가려고 갖가지 주술(呪術)을 부렸으나 모두 되지 않았으므로 크게 부끄러워하여 항복했다. 태부 장연(張衍)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지금 시험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서역의 불법을 따라 머리를 깎으라.” 그러나 외도 저선신(褚善信) 등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고 남악 도사(南岳道士) 비숙재(費叔才) 등은 한탄하며 죽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사리는 5색 광명을 놓으며 공중에 올라가 일산처럼 해를 가리고 대중을 비추며, 마등 법사는 몸을 솟구쳐 높이 날면서 신통이 자재하였다. 그 때 하늘은 보배꽃을 내려 일찍이 없었던 일을 보였으며 법란 법사는 대중을 위해 설법하여 듣지 못한 이들을 교화했다. 그 때 사공(司空) 유준(劉峻)과 경사(京師)의 관리들과 후궁(後宮)의 부인들과 5악의 모든 도사, 여혜통(呂慧通) 등 천여 인은 모두 출가하기를 청하자 임금은 허락했다. 그리고 모두 10사(寺)를 세워 성밖의 7사에는 비구를 있게 하고 성안의 3사에는 비구니를 있게 했다. 그 뒤에 드디어 불법을 널리 일으키고 절을 더욱 많이 세워 지금까지 이르렀다. [이 한 가지 증험은 한나라 『법본내전(法本內傳)』에 나온다.]
② 진(晋)나라 거사 정덕진(丁德眞) 진(晋)나라 제음(濟陰) 정승(丁承)의 자(字)는 덕진(德眞)이니, 건안(建安) 때 응음령(凝陰令)이 되었다. 그 때 북계(北界)에 사는 어떤 백성의 아내는 밖의 우물에 나가 물을 긷고 있었다. 코가 길고 눈이 깊은 어떤 호인(胡人)이 우물을 지나다가 이 여자에게 물을 청해 마시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이 여자는 곧 배가 매우 아파 부르짖다가 조금 뒤에 문득 일어나 앉아 호어(胡語)로 지휘(指麾)하는 것을 읍 안의 수십 집이 다 같이 보았다. 이 여자가 붓과 종이를 찾으면서 무엇을 쓰려고 하자, 붓을 주니 받아서 호서(胡書)를 썼다. 가로 쓴 글은 혹은 을(乙)과 같고 혹은 사(巳)와 같았다. 다섯 장을 다 쓰고는 땅에 던지면서 사람들에게 읽어 보라 했으나 그 고을에서는 읽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10여 세 되는 아이가 있었는데, 이 여자는 이 아이가 읽을 것이라 지목하고, 아이는 그 글을 호어로 읽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으나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여자는 아이에게 일어나서 춤을 추라 하였다. 아이는 곧 일어나 손과 발을 맞추어 한참 동안 춤을 추었다. 이 사실을 덕진도 알게 되었다. 덕진은 여자와 아이를 불러 물어 보았으나, 그들은 멍청히 있으면서 그들이 한 일을 깨닫지 못했다. 덕진은 이 사실을 실험하기 위해 곧 사람을 시켜 그 글을 가지고 아래 절에 내려가 늙은 호인(胡人)에게 보였다. 호인은 크게 놀라면서 말하였다. “불경 중간을 잊어버리고 길이 멀어 찾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입으로 외웠으나 완전하지 못했더니, 이것이 바로 그 책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베껴 두었다.
③ 진나라 거사 주민(周閔) 진(晋)나라 주민(周閔)은 여남(汝南) 사람으로서 진의 호군장군(護軍將軍)이며 대대로 불법을 받들었다. 소준(蘇峻)의 난리에 도읍 사람들은 다 동서로 흩어졌다. 주민의 집에는 대품(大品) 1부가 있었는데 반폭 8장의 명주에 앞뒤로 그것을 썼다. 또 다른 경전도 몇 푸대 있었는데 대품도 거기 섞여 있었다. 피난가는 혼자 걸음이라 그것을 다 가지고 갈 수 없었고 대품을 더욱 아까워했으나 어느 푸대 속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창졸히 떠나야 할 판이라 푸대 속을 다 뒤질 수 없어서 못내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대품이 갑자기 저절로 튀어 나왔다. 주민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하여 주민은 대대로 그것을 보배로 삼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또 일설에는 말하였다. “주숭(周嵩)의 아내 호모(胡母)씨는 명주에 쓴 대품(大品)을 간직하고 있었다. 명주의 넓이는 5촌인데 대품 1부가 다 거기 써 있었다. 또 사리를 은 항아리에 담아 깊은 상자에 넣고 봉해 두었다. 영가(永嘉)의 난리 때에 호모가 남쪽으로 피난갈 때 그 경전과 사리가 저절로 상자 밖으로 나와 호모는 그것을 가지고 강동(江東)으로 건너갔다. 또 일찍이 화재를 만나 미처 경전을 구해 내지 못했는데 집이 다 타고 재 속에서 그것을 얻었는데 조금도 타지 않고 완전했다.” 회계(會稽)의 왕도자(王道子)가 숭증운(嵩曾雲)에게 가서 그것을 구해 공양하고 그 뒤에 잠깐 동안 신저사(新渚寺)에 두었다. 유경숙(劉敬叔)이 말하였다. “일찍이 나는 이 경전을 보았다. 글자는 깨알 같고 묘하고 잔잔하면서 분명하였다.” 신저사는 지금의 천안(天安)이다. 이 경전은 도승(道僧)에게서 얻었는데 석혜측(釋慧則)이 쓴 것이다. 혹은 “일찍이 간정사(簡靖寺)에 있던 정수(靖守) 비구니가 읽던 것이다”라고 한다.
④ 진나라 거사 동길(董吉) 진(晋)나라 동길(董吉)은 어잠(於潛) 사람이다. 대대로 불법을 받들었으나 동길 때에 와서 더욱 정진하여 항상 재계하고 『수릉엄경(首楞嚴經)』을 외웠다. 마을에 병자가 생기면 곧 동길을 청해 경전을 읽어 병이 낫는 자가 많았다. 그 고을에 사는 하황(何晃)도 불법을 받드는 사람이었다. 함화(咸和) 때에 갑자기 산독병(山毒病)에 걸려 매우 위독했다. 하황의 형은 황급히 달려가 동길을 청했다. 그런데 동길과 하황의 두 집의 거리는 6,70리요 더구나 중간에 큰 시내가 있었다. 5월에 큰 비가 왔는데 하황의 형이 처음 건널 때는 위의 물이 아직 이르지 않아 동길과 약속만 하였다. 그러나 점심때가 되어 산의 물이 갑자기 불어 동길은 건널 수가 없었다. 동길은 헤엄칠 줄도 모르는데 늦게 온 것을 한탄하며 언덕에 한참 앉았다가 내려가려 했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믿음이 곧으므로 기어이 때를 맞추려고 이에 발심하고 맹세하였다. ‘나는 남의 급한 병을 구하기 위해 내 신명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대사께서는 내 정성을 살피소서.’ 그리고 옷을 벗고 경 주머니는 머리에 이고 바로 물에 들어가 그 깊고 얕음을 측량해 보았더니, 물은 목까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건널 때는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언덕에 올라와서 보니 경 주머니가 없어졌다. 매우 한탄하면서 하황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세 번 예참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꾸짖었다.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보니 경 주머니가 높은 자리 위에 놓여 있었다. 동길은 슬퍼하다가 기뻐하면서 집어 보았다. 주머니는 축축히 젖은 것 같았으나 주머니를 열고 경책을 보니 그것은 여전히 마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불법을 받들었다. 동길이 사는 곳의 서북방에 험준한 산이 있었다. 거기에 요망스런 도깨비가 많아 사람들을 해쳤다. 동길은 경계(經戒)의 힘으로 그것을 쳐서 항복받기 위해 그 산 밑의 너댓 이랑의 땅에 손수 나무를 베어 내고 조그만 집을 지었다. 높은 자리를 따로 만들고 거기 앉아 『수릉엄경』을 읽었다. 1백여 일 동안 아주 조용하여 아무 소리도 없었고 백성들의 피해도 그쳤다. 그 뒤에 몇 사람이 동길을 찾아와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동길은 생각했다. ‘이 나그네들은 어잠(於潛) 사람이 아니다. 이런 깊은 산골짝에 무엇하러 왔겠는가? 이것은 귀신이리라.’ 동길은 곧 그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여기서 사는 귀신이 아닌가?” 그들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덕행이 맑고 깨끗하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와서 뵈옵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대대로 이 산을 의탁해 사는데 당신이 와 사시므로 서로 충돌할까 항상 불안합니다. 지금 다시 경계를 만들되 나무를 죽여 그것을 표시하도록 하십시오.” 동길은 말하였다. “나는 한적한 곳을 좋아하고 여기서 경전을 독송하므로 서로 침범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 그대들을 위해 그대들의 도움을 바란다.” 그들도 말하였다. “당신을 믿고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그들은 떠났다. 하룻밤을 지나 전에 나무를 베어낸 사방 밖의 나무들은 다 불에 탄 것처럼 말라 죽었다. 동길은 나이 87세에 죽었다.
⑤ 진나라 거사 주당(周璫) 진(晋)나라 주당(周璫)은 회계염(會稽剡) 사람으로서 대대로 불법을 받들었다. 주당은 16세 때부터 채식(菜食)하면서 재계와 송경을 모두 이루었다. 경을 읽게 되어서는 1개월 동안 내내 재계하기를 마치면 스님을 맞이해 팔관재(八關齋)를 베풀고 향시사(鄕市寺)에 가서 그 스승 축불밀(竺佛密)에게 지법계(支法階)를 청하였다. 축불밀은 그에게 소품(小品)을 가지고 재일(齋日)에 읽게 했다. 그 날에 세 사람은 재에 가면서 소품 가지는 것을 잊어버리고 갔다. 점심을 먹고 경을 읽으려 하다가 비로소 생각이 나서 그는 매우 당황했다. 그런데 주당의 집은 판이촌(阪怡村)에 있어서 절과의 거리가 30리요, 그것을 가지러 보낼 사람도 없었다. 인정(人定)이 되어 향 피우기를 마치고 온 집이 모두 경이 없음을 한탄하고 축불밀은 더욱 부끄러워했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서 소품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주당은 놀랍고 반가워 문을 열고 보았다. 홑 협의를 입은 어떤 소년이 있었다. 전에 못 보던 사람이요, 또 사람이 다닐 때가 아닌지라, 신기한 일이라 생각하고 곧 꿇어앉아 경을 받고 들어와 앉으라 했다. 그러나 소년은 들어오지 않고 말하였다. “오늘밤에 와서 독경을 듣겠습니다.” 그리고 곧 사라지니 향기가 온 집에 가득 찼다. 그 경은 밀경(密經)이었다. 이 경은 전에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굳게 채워 두었던 것인데 다시 보니 자물쇠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을 10여 집이 다 부처님을 받들었고 또 주당을 더욱 애경하였다. 주당은 드디어 출가하여 이름을 담의(曇嶷)라 하고 온갖 경을 외워 20만 자에 이르렀다 한다.
⑥ 진나라 거사 사부(謝敷) 진(晋)나라 사부(謝敷)의 자는 경서(慶緖)이니,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며, 진군 장군(鎭軍將軍) 윤지형(輪之兄)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높은 지조가 있어 동산(東山)에 숨어 살았다. 큰 법을 독실히 받고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수릉엄경(首楞嚴經)』을 손수 썼고 항상 서울의 백마사(白馬寺)에 있었다. 백마사에 화재가 일어나 살림살이와 다른 경은 다 탔지만 이 경만은 지면(紙面)의 바깥 부분만 타고 글자는 모두 그대로 있어 아무 훼손이 없었다. 사부가 죽었을 때는 그 벗들은 모두 그가 도를 얻었다 생각하고, 또 이 경이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그 이상함에 놀랐다.
원가(元嘉) 8년에 하동(河東)의 포판성(蒲阪城)에 큰 화재가 있었다. 불은 강 건너서 날아와 끌 수가 없어 노수(虜戍)의 민가들은 모두 다 타고 오직 절과 탑만이 타지 않았으며, 마을의 작은 집들에 있는 불경과 불상만은 대개 타지 않았다. 혹은 집은 탔으나 재 속에 있는 경만은 타지 않고 전처럼 완전하였으므로 온 성안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감탄하면서 다투어 믿고 공경하였다.[이상 다섯 가지 증험은 다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⑦ 진나라 사문 석도안(釋道安) 동진(東晋)의 효무제(孝武帝) 이전의 일이다. 상산(常山)의 사문 석도안(釋道安)은 석조(石趙)의 난리를 피하여 양양(襄陽)으로 옮겨 갔다. 반야(般若)ㆍ도행(道行)ㆍ밀적(密迹) 등 모든 경을 주해하고, 『석의견해(釋疑甄解)』 20여 권을 지었는데 이치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 하여 이에 맹세하였다. ‘만일 내가 말한 것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면 서상(瑞相)을 보이소서.’ 이에 꿈에 머리는 희고 눈썹이 긴 호도인(胡道人)이 나타나 도안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주해는 특히 도리에 맞다. 나는 열반에 들지 못하고 지금 서역(西域)에 있다. 법을 널리 펴기를 도울 것이니 대대로 음식을 보시하라.” 그 뒤 『십송률(十誦律)』이 이르르자 원공(遠公)이 말하였다. “옛날 화상(和上)이 꿈에 본 사람은 빈두로(賓頭盧)입니다.” 그리하여 자리를 만들고 음식을 보시하니 그것은 영원한 법이 되었다.
⑧ 진나라 사문 석승정(釋僧靜) 서진(西晋) 촉군(蜀郡)의 사문 정승(靜僧)은 어려서 출가하여 고행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촉군의 삼현사(三賢寺)의 주지가 되어 『법화경』을 외웠다. 항상 산중에서 경을 외울 때가 되면 밤마다 감동한 호랑이가 와서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다가 전부 외워 마치면 돌아갔다. 그리고 시를 읊을 때에는 항상 좌우에 네 사람이 모시고 있음을 보았다. 나이는 노쇠했으나 더욱 부지런히 정진하다가 그 업을 마쳤다 한다.
⑨ 위(魏)나라 사문 주사행(朱士行) 전위(前魏)의 폐제(廢帝) 감로(甘露) 5년에 사문 주사행(朱士行)은 『소품경(小品經)』을 강하면서 항상 장구(章句)의 완전하지 못함을 한탄했다. 그 해에 서역(西域)으로 가서 그것을 구해 얻었는데, 어떤 이가 만류하고 동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행은 경을 들고 왕의 뜰에서 말하였다. “이 큰 법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나는 불로 태워 버릴 것이다.” 사행은 곧 『패엽경(貝葉經)』을 불에 던졌다. 그러나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 경은 곧 광명을 놓았다. 온 나라가 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것은 곧 동하(東夏)로 뻗어 갔으니 『방광경(放光經)』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나이 80세에 죽어 법에 의해 화장했으나 시체가 무너지지 않아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그래서 주문을 외웠다. “만일 참으로 도를 얻었으면 이 몸이 응당 무너질 것이다.” 그러자 그 소리를 따라 곧 사라졌다. 이에 사리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위나라 사문 석지담(釋志湛) 후위(後魏) 말년의 제주(濟州)의 석지담(釋志湛)은 태산(太山)의 북쪽 인두산(人頭山)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함초사(銜草寺)에 있었다. 일을 줄이고 말이 적으며 사람과 새들이 어지럽히지 않고 항상 『법화경』을 외웠는데, 사람들은 그 본래의 업을 알지 못했다. 그가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신승(神僧) 보지(寶誌)는 양무제(楊武帝)에게 말하였다. “북방 함초사에 있는 수다원(須陀洹)의 성승(聖僧)이 오늘 멸도했습니다.” 지담이 죽을 때는 아무 괴로움 없이 죽었다. 두 손에 각각 한 손가락씩 펴고 있었다. 어떤 범승(梵僧)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초과(初果:수다원)를 얻은 사람이다.” 다시 산중에 장사지내려고 뒤에 파보았더니 혀만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곧 탑을 세워 그것을 표하였다. 그 탑은 지금도 있다. 새나 짐승들이 그것을 밟거나 더럽히지 않았다.
위나라 사문 오후사승(五候寺僧) 후위(後魏)의 범양(范陽)에 있는 오후사(五候寺)의 스님(이름은 모른다)은 『법화경』 외우는 것을 일상의 업으로 삼았다. 처음에 죽자 우선 언덕 밑에 염했다가 뒤에 다시 장사했다. 뼈는 다 말랐으나 혀만은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옹주(雍州)의 어떤 스님도 『법화경』을 외웠다. 백록산(白鹿山)에 숨어 살 때는 어떤 동자가 항상 시봉하는 영험이 있었고, 그가 죽자 그 시체를 바위 밑에 두었는데, 다른 뼈는 다 말랐으나 그 혀만은 썩지 않았다. 제(齊)나라 무릉(武陵) 때 병동간(並東看)의 산인(山人)은 흙을 파다가 누렇고 흰 것을 보았고, 또 어떤 물건을 보았는데 그 형상은 두 입술 같고 그 안에서 신선한 빨간 혀를 보았다.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은 도인과 속인들에게 물었다. 사문 법상(法尙)이 말하였다. “그것은 『법화경』을 외우는 사람의 혀입니다. 『법화경』을 외우는 사람은 6근(根)이 썩지 않습니다. 그것은 『법화경』을 천 번 외운 징험입니다.” 그리하여 임금은 『법화경』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그것을 둘러싸고 그 경을 외우게 했다. 막 소리를 내자마자 그 혀는 움직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털이 곤두섰다.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은 돌함에 그것을 넣어 봉했다. [이상 여섯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과 또 『잡록기(雜錄記)』에 나온다.]
위나라 태화(太和) 때의 내엄관(內閹官) 후위(後魏)의 고조(高祖) 태화(太和) 때 대경(大京) 안의 엄관(閹官)은 자신이 불구자임을 한탄하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 산에 들어가 수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허락하니 그는 『화엄경』을 가지고 가서 밤낮으로 읽으면서 쉬지 않고 참회했다. 한 여름이 차지 않은 6월 말에 수염이 나면서 장부의 상을 얻었다. 임금에게 글을 올리니, 임금은 그를 크게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다 『화엄경』을 공경하고 예전보다 더 그를 존중하였다. [이것은 『후군소정이기(候君素旌異記)』에 나온다.] 송(宋)나라 사문 석혜엄(釋慧嚴) 송(宋)나라 석혜엄(釋慧嚴)은 경사(京師) 동안사(東安寺)의 스님이다. 이치와 생각이 두루 통하고 견해는 도속(道俗)의 본이 되었다. 일찍부터 『대열반경』이 너무 방대한 것을 꺼려 그것을 줄여 두어 권으로 만들고 다시 두세 통을 베껴 동호(同好)들에게 보였다. 잠이 어렴풋이 들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2장이 넘고 형체와 기운이 크고 씩씩했다. 그는 말하였다. “거룩한 『열반경』은 모든 경전의 근본인데, 왜 그대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함부로 가감(加減)하는가?” 혜엄은 한탄하며 이해하지 못했으나 한번 낸 마음이라 구차히 많이 알기를 구했다. 이튿날 밤에 막 자려는데 또 그 사람이 나타나 매우 성난 얼굴로 말하였다. “허물을 짓고 고칠 줄 알면 그것은 허물이 아니다. 어제는 일부러 와서 그처럼 말했는데 그래도 듣지 않는가? 이 경전은 행해질 리 없고 또 그대도 화를 입을 것이다.” 혜엄은 놀라 깨어나 어쩔 줄을 몰랐다. 아침이 되자, 곧 친구들에게 달려가 그것을 찾아와서는 모두 불에 살라버렸다. 이것은 진외 정사(塵外精舍)의 석도엄(釋道儼)이 듣고 이야기한 것이다.
송나라 비구니 석지통(釋智通) 송(宋)나라 비구니 석지통(釋智通)은 경사(京師) 간정사(簡靜寺)의 비구니다. 나이는 젊고 얼굴은 묘하나 도를 독실히 믿지 않았다. 원가(元嘉) 9년에 그 스승이 죽자 그는 도를 버렸다. 그리고 위군(魏郡) 양서보(梁犀甫)의 첩으로 들어가 한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7세 때 집이 가난해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없었다. 지통이 비구니 때에 가졌던, 『무량수경』과 『법화경』 등을 쓴 명주를 마르고 다듬이질을 하여 옷을 만들어 그 아이에게 입혔다. 1년이 지나 아이는 병을 얻어 흐리멍텅하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온몸이 부어 마치 불에 데인 것 같았다. 또한 가늘고 흰 벌레가 나와 하루 한 되를 넘게 버렸으며 고통에 못 이겨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항상 공중에서 말하였다. “경전을 헐어 옷을 만들었으므로 그런 심한 과보를 받는다.” 아이는 10여 일이 지나 죽었다. [이상 두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송나라 사문 석혜경(釋慧慶) 송(宋)나라 여산사(廬山寺)의 석혜경(釋慧慶)은 광릉(廣陵) 사람이다. 집을 나와 여산사에 있으면서 경과 율을 배워 통하고 계행이 청정했다. 『법화경』과 『십지경』과 『사익경(思益經)』과 『유마경』을 밤마다 외울 때 항상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튀기면서 찬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일찍이 소뢰(小雷)에서 풍파를 만나 배가 침몰하려 하자 혜경은 쉬지 않고 경만 외웠다. 물결 속에 있는 배를 어떤 사람이 끄는 것 같더니 어느 새 배는 언덕에 닿았다. 그는 더욱 정진했다. 송(宋)나라 원가(元嘉) 말년에 죽으니 나이는 62세였다.
제(齊)나라 사문 석혜보(釋慧寶) 제(齊)나라 태원(太原)의 석혜보(釋慧寶)는 그 씨족(氏族)은 알 수 없다. 2백여 권의 경전을 다 외워 덕우(德優) 등 선달(先達)들과 다 친한 사이였다. 제나라 무평(武平) 3년에 여럿을 따라 업(鄴)으로 가다가 애주(艾州)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 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 해가 저물어 바위 밑에서 잤다. 방은 사람이 사는 것 같았으나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혜보는 방 앞에 단정히 앉아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뻗은 가지에 경쇠가 달렸는데 땅에서 10척 남짓했다. 밤이 2경(更)쯤 되어 풀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와 말하였다. “이 방에 무슨 속인 냄새가 이렇게 나는가?” 혜보는 공손히 그 동안의 사정을 다 말하고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그는 혜보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성(姓)이 나라를 다스립니까?” 혜보는 답하였다. “성은 고씨(高氏)요, 나라 이름은 제(齊)입니다.” 혜보는 물었다. “존사(尊師)는 이 산에 계신 지 얼마나 됩니까?” 그는 말하였다. “나는 후한(後漢) 때 여기 왔습니다. 장로(長老)는 어떤 경을 읽으십니까?” 혜보는 자기가 많은 경을 읽은 것을 믿고 자못 자랑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수도하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무슨 경을 듣고 싶어하십니까? 내가 외우겠습니다.” 혜보는 말하였다. “『화엄경』을 듣고싶습니다.” 그는 말하였다. “소승이 젊을 때 외우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 외우니, 그 소리는 세상에서 듣던 바가 아니었다. 다시 다른 경을 외우게 하였더니 모두 그러했다. 혜보는 놀라고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어떻게 그 많은 경전을 그렇게 빨리 다 외우십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당신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나는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대개 어떤 물건에도 생각을 잊은 자는 그와 내가 자유로운 것입니다.” 혜보는 그가 신인(神人)임을 알고 거기 머무르기를 간절히 청했다. 그는 말하였다. “나라에서 이익을 위해 당신을 부르는데 어떻게 당신 혼자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아직 정루(情累)를 버리지 못했으니 여기 있더라도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거기서 떠났다. 혜보는 그의 간 곳을 찾아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혜보는 스스로 자신의 사람됨을 꾸짖었다. 뒤에 업에 이르러 이것을 이야기했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에 나온다.]
양(梁)나라 거사 하규(何規) 양(梁)나라 광주(廣州) 남해군(南海郡) 사람 하규(何規)는 미년(未年) 10월, 즉 천감(天鑒) 14년 10월 23일에 예장(豫章) 호익산(胡翼山)에 약을 캐러 갔다. 다행히 방탕한 자식이나 쫓겨난 신하가 아니요, 이에 신선을 찾고 은사(隱士)를 부르는 사람과 같아서, 산봉우리를 10여 리쯤 오르자 무엇이 오는 듯 불안했다. 굽은 길을 돌려고 먼저 맑은 시내를 경계하니, 혹은 흐르지 않는 물과 같으며, 조금 맑게 흐르다가 이내 큰 물이 흘러내리므로 옷을 걷어 올리려고 했다. 아직 걷어 올리기 전에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문득 보니 시내 저쪽에서 어떤 어른 한 사람이 하규를 보고 말하였다. “물을 건너지 말라.” 이에 하규는 곧 멈추었다. 그의 낯빛은 푸르고 신을 벗은 맨발이며, 나이는 8,90세나 되어 얼굴은 주름투성이며, 아랫수염은 길이가 5,6촌이요, 윗수염은 아랫수염의 반쯤 되고, 눈썹 털은 밑을 덮어 그 길이는 2,3촌으로서 바람을 따라 나부끼며 입술은 새빨갛고 말소리는 맑았다. 손톱은 노랗고 손가락털도 길어 2,3촌이나 되었다. 베옷 밑에 붉은 열반의(涅槃衣)를 입었는데 그 스님은 손에 들었던 책 한 권을 하규에게 던져 주었다. 하규는 그것을 받고 멀리서 바라보면서 세 번 절하였다. 그는 하규에게 말하였다. “그 경전을 건안왕(建安王)에게 전하라.” 겸해서 왕의 성명을 달하였다. “그 경전을 가지고 가거든 삼칠재(三七齋)를 베풀어야 한다. 재하는 법을 모르거든 하림사(下林寺)의 부공(副公)에게 물어 보라. 부법사(副法師)는 계행이 정갈하며 담박하고 무위(無爲)하여 욕심을 버리고 호천(豪賤)에 평등하며 채식으로 만족하고 선정을 게을리하지 않느니라.” 그리고 곧 떠나, 10여 보쯤 가서는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하규는 그 책을 펴 보았다. 책 이름은 『해인삼매경(海印三昧經)』이었다. 그 경의 뜻은 지극하였으니, 즉 법신(法身)은 상(相)이 없음을 그 본체로 삼아 이치는 백비(百非)를 뛰어나고 뜻은 명상(名相)을 뛰어넘었으며, 고요함은 법상(法相)과 같고 묘함은 진여(眞如)와 같았다. 그 슬기의 비춤을 말하면 이 이치는 온전한 인(印)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마음이 고요함에 합하나니, 그러므로 삼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양(梁)나라 승우 율사(僧祐律師)의 『홍명집록(弘明集錄)』에 나온다.]
주(周)나라 고조(高祖) 무제(武帝) 주조(周祖)가 불법을 없애어 경전이 모두 재가 되었다. 그 뒤 어느 해에 공중에서 갑자기 버섯만한 것이 5,6개가 나타나더니, 허공에 날아올라 보이지 않고 여전히 한 덩이가 되어 바람을 따라 아래 위로 나부꼈다. 조정 대신들은 서서 멀리 바라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오랜 뒤에 그것은 흙담 위에 떨어졌다. 그것은 곧 『대품경(大品經)』 13권이었다.
진(陳)나라 양주(楊州)의 엄공(嚴恭) 진(陳)나라 양주(楊州)의 엄공(嚴恭)은 본래 천주(泉州) 사람이다. 집은 부자였으나 형제가 없었으므로 그 부모는 그를 못내 사랑하여 그의 말이면 다 들어 주었다. 진나라 태건(太建) 초년에 엄공은 약관(弱冠)으로서 부모에게 청해 5만 전(錢)을 가지고 장사하러 양주로 간다 하므로 부모는 허락하였다. 엄공은 돈을 배에 싣고 내려가다가 양주에서 몇십 리 떨어진 강에서 자라를 한 배 가득 싣고 장에 팔러 가는 사람을 만났다. 엄공은 그 자라들이 장차 죽을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사려고 자라 주인에게 말하였다. “내게 5만 전이 있소. 그 자라를 사겠소.” 자라 주인은 기뻐하면서 돈을 받고 자라를 주고 떠났다. 엄공은 그 자라를 다 강물 속에 놓아 주고 빈 배로 양주로 갔다. 그 자라 주인은 엄공과 헤어져 10여 리를 가다가 배가 침몰해 죽었다. 이 날 엄공의 부모는 집에 있었다. 저녁 때에 새까만 옷을 입은 나그네 50인이 엄공 집에서 기숙하고 5만 전을 엄공 부모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당신네 아들 엄공이 양주에서 이 돈을 부쳐 보냈습니다. 한 번 세어 보십시오.” 아버지는 괴상히 여기고 놀라 엄공이 죽었는지 물었다. 그들은 말하였다. “아들은 무사합니다. 돈이 필요 없다면서 부쳐 보냈을 뿐입니다.” 엄공의 아버지는 그것을 받아 챙겨 보았다. 돈은 조금 젖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만류해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하직하고 떠났다. 그 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엄공은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는 매우 기뻐하면서 돈을 부친 사정을 물었다. 엄공은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부모는 그 나그네들의 형상과 돈을 주던 달과 날을 설명하니, 바로 그 자라를 사던 날이었다. 그래서 그 50명의 나그네가 다 팔린 자라임을 알았다. 부모는 놀라고 감탄하여 함께 양주로 가서 정사(精舍)를 짓고 오로지 『법화경』을 베꼈다. 그리고 양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더욱 부유해져 방사를 크게 늘려 경을 베끼는 방으로 만들어 장엄하고 청정하게 하였다. 또 공급이 풍요하여 서생(書生)이 항상 수십 인이었다. 양주의 도속들이 다 그를 존중하고 공경하여 그의 호를 엄법화(嚴法華)라 했다. 일찍이 그 친지들의 경의 돈 1만 전을 빌려 달라 해서 엄공은 부득이 주었다. 그들은 받은 돈을 배에 싣고 돌아가다가 중간에 배가 기울자 그 돈들이 저절로 물에 떨어졌다. 배는 침몰하였으나 사람은 빠지지 않았다. 이 날 엄공이 돈 창고에 들어가 보니 1만 전이 물에서 갓 나온 것처럼 젖어 있어서 매우 괴상히 여겼다. 뒤에 돈을 빌려 준 사람을 보고 비로소 그 젖은 것은 빌려 준 돈임을 알았다. 또 어떤 상인(商人)이 궁정호(宮亭湖)에 이르러 신묘(神廟)에 제사의 술과 음식을 올렸다. 그날 밤 꿈에 그 물건들을 돌려보내면서 말하였다. “당신은 나를 위해 이 돈을 저 엄법화님께 바쳐 경전 비용에 쓰게 하십시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신에게 올린 물건들은 그대로 있었다. 이에 상인은 감탄하고 그것을 엄공에게 바치고 더욱 후하게 보시했다. 그 뒤에 엄공이 시장에 가서 종이를 사려 했으나 돈이 모자랐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돈 3천 전을 엄공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당신 종이 값에 보태 쓰십시오.” 말을 마치자 사람은 간 곳이 없고 돈만 남아 있었다. 이런 괴이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개황(開皇) 말년에 엄공은 죽고 그 자손들이 업을 계승했다. 수(隋)나라 말년에 도적들은 강도(江都)로 가면서 서로 약속하고 엄법화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자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때문에 그 집을 보전하고 그들은 지금까지 경 베끼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 고을 사람들이 다 보고 서울 사람들도 다 알았다.[위의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수(隋)나라 양주(楊州)의 스님(이름 모름) 수(隋)나라 개황(開皇) 초년에 양주(楊州)의 어떤 스님(그 이름은 모른다.)은 『열반경』을 내리 외우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기주(岐州) 동산(東山) 아랫마을에 사는 어떤 사미(沙彌)는 『관음경』을 잘 외웠다. 그 둘은 다 갑자기 죽었으나 심장 밑은 따뜻했다. 그들은 염라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미는 금으로 만든 높은 자리에 앉아 큰 존경을 받았고, 『열반경』을 외우는 스님은 은으로 만든 높은 자리에 앉아 그다지 존경을 받지 못했다. 문초를 마친 그들은 아직 남은 목숨이 있어 함께 풀려나 돌아왔다. 저 『열반경』을 지송한 스님은 그가 외우는 경전의 양이 많은 것을 믿고 마음이 몹시 좋지 못했다. 그는 사미승이 사는 곳을 물어서 알아 두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하직하고 각각 깨어났다. 스님은 남방에서 기주로 가서 사미승을 찾아 그 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사미승은 말하였다. “나는 경을 외울 때는 옷을 갈아 입고 깨끗한 곳에서 향을 사르고 축원한 뒤에 비로소 경을 외웁니다. 이 법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이요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스님은 말하였다. “나는 죄가 깊다. 『열반경』을 외울 때에도 위의를 갖추지 않고 몸과 입이 깨끗하지 못했으니 구제함을 잊었을 뿐이다. 옛 사람의 말에, ‘많은 악이 적은 선보다 못하다’고 하더니 이제 그 징험을 얻었다.” 그리고는 과거를 뉘우치면서 돌아왔다.
수나라 사문 석혜의(釋慧意) 수(隋)나라 양주(襄州) 경공사(景空寺)의 석혜의(釋慧意)는 속성(俗性)은 이씨(李氏)이니 임원(臨原) 사람이다. 그는 남방 양흥(梁興)의 선성산(仙城山)으로 가서 혜명(慧命)과 같은 스님 밑에서 마음을 연구하고 오로지 선정을 닦았다. 뒤에 경공사로 와서 총(聰) 스님의 옛 방에서 공부 할 때 항상 아무 일도 없이 밤낮 등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떤 고을 사람이 그를 믿지 않고 별원(別院)으로 청해 백일 동안 도를 행하게 하고는 밤마다 가만히 가서 엿보았다. 그 선실(禪室)이 크게 밝은 것을 온 집 사람이 다 함께 보았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을 믿고 다 귀의하여 계를 받았다. 개황(開皇) 초년에 죽을 때는 미리 그것을 알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또 양양(襄陽) 개황(開皇)의 법영 선사(法永禪師)는 죽으려 할 때 7일 동안 음악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향기가 절에 가득하더니 이내 앉아 죽었다. 그래서 산개산(繖蓋山)으로 보내 한 데에 앉혀 두었다. 그 절의 전율사(全律師)가 그 시체 곁으로 가서 말하였다. “신명(神明)을 그대로 두시오. 7일이 차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기일이 되자 아주 죽었다. 시체를 법영의 곁으로 보냈더니, 법영의 시체는 그 자리에서 변해 버렸다. 또 잠아사리(岑阿闍梨)의 성은 양씨(楊氏)요 임원(臨原) 사람이다. 산개산(傘蓋山) 서쪽 샘물 곁에 송경당(誦經堂)을 짓고 『금광명경(金光明經)』을 외울 때마다 사천왕이 와서 듣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는 경전을 외우면 하나도 잊지 않아 모두 3천여 권을 외웠다. 베옷을 입고 걸식하여 발우에 남은 것은 가지고 와서 방안의 쥐를 먹였으므로 1백여 마리의 쥐가 다 길들여져 모두 다투어 그에게로 왔다. 혹 병든 쥐가 있으면 잠 스님은 손으로 만져 다 낫게 했다. 뜻을 같이한 사문 지효(智曉)와 더불어 선도(禪徒)를 불러모으고 스스로 속인들을 교화시키며 선학(禪學)을 가르쳤다. 죽을 날을 알고는 급히 태(汰) 선사를 불러 부촉(付囑)하고 불전에 올라가 부처님께 예배하고 하직하면서 온 절의 스님들이 모두 기뻐하기를 빌었다. 선거사(禪居寺)에서 큰 재가 있던 날 태 선사에게 말하였다. “도솔천에 가서 『반야경』을 들으련다.” 태 스님이 말하였다. “먼저 가십시오. 나는 7일 뒤에 가겠습니다.” 그날 밤 3경(更)에 그는 앉아 죽었다. 4경(更)에 이르러 식신(識神)이 온 절에 있었다. 절에서 10리 밖인 태 선사의 책상 앞에 가니 낮처럼 환하였다. 잠 선사는 말하였다. “새벽에 멀리 가려고 하직하러 왔습니다.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태 선사는 3중(重)의 문 밖까지 전송하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걸터앉자 갑자기 도로 어두워졌다. 제자를 불러 물었다. “내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는가?” 불을 들고 두루 비추어 보았으나 세 문은 다 닫혀 있었으며 비로소 새벽임을 깨달았다. 정신의 힘은 출입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곧 사람을 보내어 결과를 물어 보았더니 이미 갔다고 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태 선사는 아무 병 없이 앉아 죽었다. 그 해골은 완전하여 흠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이 같이 있으면 그 일을 분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에 나온다.]
수나라 사문 석법장(釋法藏) 수(隋)나라 부주(鄜州) 보실사(寶室寺)의 사문 법장(法藏)은 계행이 깨끗하고 밝으며 성질이 정직하였다. 개황(開皇) 13년에 낙교현(洛交縣) 위천성(韋川城)에 절을 지었다. 불전은 정묘하고 승방은 화려하며 불상과 번기를 다 원만히 만들었다. 대업(大業) 5년에 왕명을 받고 융병사(融倂寺)의 탑을 그 고을의 큰 절로 보낼 때 파괴한 사람이 있었다. 법장 스님은 그것을 보수하고 법당을 지어 안치했다. 겸해서 일체의 경전을 만들고 이미 8백 권을 썼다. 그 고을에 좋은 솜씨와 붓과 종이가 없음을 염려하여 서울의 옛 월애사(月愛寺)에 가서 손수 썼다. 무덕(武德) 2년 윤 2월에 20여 일 동안 병을 앓았다. 어떤 사람이 푸른 색 좋은 옷을 입고 높은 누각에 앉아 손에 경책을 들고 법장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출세한 뒤로 크게 공덕을 지어 다 정묘하지만 오직 삼보(三寶)의 물건을 함부로 조금 썼으므로 무량한 죄를 지었다. 내가 지금 가진 이것은 『금강반야경』이다. 그대가 스스로 한 권을 만들면 그대가 삼보의 물건을 씀으로써 지은 죄를 다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법장 스님은 그 말이 떨어지자 곧 만들겠다고 답하였다. 법장은 비록 다른 경은 많이 썼으나 『금강반야경』은 쓰지 못했으므로 말하였다. “병만 나으면 감히 명령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미 제자들을 많이 깨우쳤으며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에게 있는 3의(衣)와 물병과 발우와 편단(偏袒)ㆍ기지(祇支) 등을 다 대덕(大德)과 제자들에게 주었다. 또 『금강반야경』 1백 권을 만들었고, 15일이 지나지 않아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는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고 경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서방(西方)에 나게 되고 3도(塗)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나라 사문 객승(客僧)(이름 모름) 수(隋)나라 대업(大業) 때 어떤 객승(客僧)이 태산묘(太山廟)에 가서 자기를 청했다. 사당지기는 말하였다. “여기는 딴 집이 없고 오직 신묘(神廟)뿐이니, 그 처마 밑이면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여기 와서 자는 사람은 다 죽습니다.” 객승이 말하였다. “상관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허락하고 그 처마 밑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객승은 밤이 되자 단정히 앉아 경을 외웠다. 1경(更)쯤 되었을 때 패옥(佩玉)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신(神)이 나와 객승에게 예배했다. 객승은 신에게 말하였다. “들으니, 여기서 자는 사람은 많이 죽는다는데, 왜 단월(檀越)을 해쳤는가? 바라노니 보호하라.” 신은 말하였다. “죽은 사람들은 내가 여기 오자 내 소리를 듣고 그 때문에 겁을 내어 죽은 것이요, 내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객승은 곧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물었다. “들으니, 세상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태산이 귀신을 다스린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신은 말하였다. “내가 박복해서 그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하러 먼저 죽은 이를 보고자 하십니까?” 객승은 말했다. “나와 같이 공부하던 두 스님이 먼저 죽었다. 그들이 보고 싶구나.” 신은 그들의 이름을 물어 알고는 말하였다. “한 사람은 이미 인간에 났고, 한 사람은 지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중해 불러올 수 없습니다. 스님이 직접 가서 보십시오.” 객승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곧 일어나 나갔다. 오래지 않아 한 곳에 이르러 지옥 불이 타면서 불꽃이 왕성한 것을 보았다. 신은 객승을 데리고 한 원(院)에 들어갔다. 멀리서 보니 어떤 사람이 불 속에서 울부짖으며 말을 하지 못하고 형체는 변해 알아 볼 수 없으며 피와 살이 타는 냄새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신은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스님은 더 보시고 싶지 않습니까?” 객승은 보기가 민망하여 나가자고 했다. 이윽고 사당으로 와서 다시 신과 앉자마자 물었다. “저 동학(同學)을 구출하고자 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가?” 신은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을 베끼면 곧 면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신은 떠나고 객승은 본 자리로 왔다. 아침에 사당지기가 와서 객승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객승은 그 동안의 일을 다 이야기했다. 그리고 곧 『법화경』 1부를 베껴 경은 이루어지고 장엄도 다 마쳤다. 객승은 경을 가지고 또 사당으로 가서 잤다. 그날 밤에 그 신은 먼저처럼 와서 기뻐하고 예배하여 위로하고 다시 온 뜻을 물었다. 객승이 사정을 이야기하자, 신은 말하였다. “스님이 그를 위해 경을 베낀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 경 제목을 쓸 때 그는 이미 여기서 벗어나 다시 인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불결하여 그 경을 둘 수 없습니다. 스님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절에 보내십시오.” 말을 마치고 한참 만에 새벽이 되어 신은 하직하고 떠났다. 객승은 그 경을 절에 보냈다. 이 이야기는 항주(杭州)의 별가(別駕) 장덕(張德)의 말로서, 전에 연주(兗州)를 맡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자세히 안 것이다.
당(唐)나라 사문 석지원(釋智苑) 당(唐)나라 유주(幽州)의 사문 석지원(釋智苑)은 정진하고 학식이 있었다. 대업(大業) 때 돌에다 일체 경장(經藏)을 만들어 법이 멸할 때를 대비(對備)하기로 발심하였다. 그래서 유주의 서산을 바위를 파서 석실(石室)을 만들고 곧 네 벽(壁)을 갈아 거기에 경을 썼다. 또 따로 모난 돌을 갈아 경을 써서 모든 석실에 간직하고 한 석실마다 돌로 문을 만들어 막고 쇠를 녹여 다시 봉했다. 그 때 수양제(隋煬帝)는 탁군(𣵠郡)으로 행차했다. 내사시랑(內史恃郞) 소우(蕭瑀)는 황후(皇后)의 동생으로서 불법을 독실히 믿었으므로 이 사실을 황후에게 아뢰었다. 황후는 비단 천 필과 돈과 재물을 보시하여 이 일을 도와 이루게 했다. 소우가 비단 5백 필을 보시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이 말을 듣고 모두 다투어 보시했으므로 지원은 이것을 얻어 그 일을 성공시켰다. 지원은 또 장이들이 이미 많고 도인과 속인들이 다투어 모여 오기 때문에 그 바위 앞에 목불당(木佛堂)과 식당과 침실을 지으려고 했으나 목와(木瓦)를 마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또 일을 경영하는 비용이 많이 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폭우가 쏟아지고 벼락이 산을 때렸다. 이튿날 아침에는 날이 개었다. 산 밑에는 큰 나무들과 소나무ㆍ잣나무 수천 주가 물에 떠내려가다가 길가에 쌓여 있었다. 산동에는 목재가 적어 소나무ㆍ잣나무는 더욱 귀한 것이므로 도인과 속인들은 놀랐으나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 자취를 찾아보고, 그것이 멀리 서쪽에서 산과 벼랑이 무너져 나무들이 물에 떠서 거기까지 온 것임을 알았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탄복하면서 말하였다. “스스로의 복의 힘이 아니면 누가 신의 도움을 얻겠는가?” 지원은 이에 장인을 시켜 쓸 만한 나무를 가리고 나머지는 고을과 마을에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모두 기뻐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불당 짓는 일을 도와 잠깐 사이에 다 이루어지되 그 계획대로 되었다. 지원이 만든 돌경전은 일곱 석실에 가득 찼다. 그는 정관(貞觀) 13년에 죽고 그 제자들이 그 사업을 계승했다. 전중 승상(殿中丞相) 이현장(李玄獎)과 대리승(大理丞) 채선명(采宣明) 등이 다 임(臨)을 위해 이야기한 것을 19년에 임이 임금을 따라 유주에 가서 그 고을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보았더니, 이 사실이 꼭 같아서 거짓이 아니었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당나라 사문 석도적(釋道積) 당(唐)나라 석도적(釋道積)은 정관(貞觀) 초년에 익주(益州)의 복성사(福成寺)에 있으면서 『열반경』을 외울 때는 옷을 깨끗이 하고 목욕하는 것을 떳떳한 법으로 삼았다. 자비로 널리 구제하고 그 깊은 마음을 견고히 하였다. 5월에 죽으니 불꽃 같은 더위가 몹시 뜨거웠는데도 그 시체가 썩지 않고 1백여 일 동안 가부하고 앉은 것이 처음과 같았다. 그래서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기뻐하고 감탄했다.[일명 도색(道賾)이라 한다.]
당나라 석도유(釋道裕)1) 당나라 석도유(釋道裕)는 어디 사는지 모르지만 예천산(醴泉山) 밑을 돌아다니면서 『법화경』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아 수천 번에 이르렀다. 정관(貞觀) 때 병으로 죽게 되어 그 친구 혜확(慧廓) 선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법화경』을 외우면서 영험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내가 선도(善道)에 나서 혀가 썩지 않거든, 매장을 하되 10년 뒤에 파 보십시오. 만일 혀가 썩어 없어졌으면 경전 외운 공이 없는 증거요, 혀가 본래대로 있거든 그것을 위해 탑을 세워 속인들로 하여금 믿고 공경하게 하십시오.” 이 말을 마치자 죽었다. 11년 만에 그 말대로 파보았다. 살은 다 썩어 없어졌으나 혀만은 썩지 않았다. 온 고을 남녀들이 모두 우러러 공경하였다. 이리하여 그 혀를 함에 넣고 감곡(甘谷) 언덕 위에 탑을 세웠다.
당나라 교남(郊南)의 사가서(史呵誓) 당(唐)나라 교남(郊南) 복수(福水) 북쪽에 있는 사촌(史村)의 사가서(史呵誓)는 『법화경』을 외웠다. 영사(令史)가 되었는데, 그는 가거나 오거나 물을 건너거나 할 때 말을 타지 않았으니, 그것은 ‘일체를 가엾이 여긴다’는 경전의 말에 의해서였다. 병으로 그 고을에서 죽자 향기가 온 마을에 가득했으므로,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놀라고 괴상히 여겼으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었다. 그가 죽은 지 10년 뒤에 그 아내가 또 죽어, 합장하려고 그 무덤을 팠더니 그 혀가 산 때와 같았다. 이에 거두어 장사하고 여럿 중에서 표하였다.
당나라 융주령(隆州令) 호원궤(狐元軌) 당나라 정관(貞觀) 5년에 융주(隆州)의 파서현령(巴西縣令) 호원궤(狐元軌)는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법화』ㆍ『금강반야』ㆍ『열반』 등 경을 베끼려 하였으나 스스로는 조사할 길이 없어 상항(上抗) 선사에게 부탁했다. 상항 선사는 절에 있으면서 법답게 재계하고 깨끗이 베껴 책갑에 싸 가지고 기주(岐州)의 시골집으로 돌아와 경전을 집에 두고, 또 노자(老子) 5천 문(文)도 한 곳에 같이 두었다. 갑자기 밖의 불이 번져와 초가가 일시에 재가 되었다. 원궤는 그 때에 빙익현령(憑翊縣令)으로 있었다. 그 집 사람에게 명령하여 재를 헤쳐 금동축(金銅軸)을 찾으라고 했다. 그들이 재를 헤쳐 그 속을 뒤지니 모든 경이 완연히 전처럼 그대로 있어 꾸민 빛깔도 변하지 않았는데 책갑만이 재가 되었다. 또 노자를 찾았더니 그것은 다 재가 되었다. 그것을 본 고을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 하며 감탄했다. 그 『금강반야경』 한 권의 제자(題字)가 새까맣게 탔다. 그 까닭을 알아 보았다. 즉 처음에 경의 제자를 쓸 때, 그 고을 관리가 글씨를 잘 썼는데, 그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 사람으로서 급해서 재계를 행하지 않고 써서 그 제목을 쓰고 그대로 떠났으니, 그 때문에 색깔이 새까맣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지금 살아 있고 그 경전도 그대로 있다. 이 사실은 경사(京師) 서명사(西明寺)의 주신제(主神祭)가 직접 보고 이야기한 것이다.
당나라 사문 석담운(釋曇韻) 당(唐)나라 석담운(釋曇韻) 선사는 정주(定州) 사람이다. 습주(隰州)에 갔다가 나이 70세에 수말(隋末)의 난리를 만나 이석(離石)의 북쪽 천산(天山)에 숨어 살면서 항상 『법화경』을 외웠다. 그 경전을 베끼려 했으나 동지가 없어 여러 해를 지냈다. 갑자기 어떤 서생이 어디서인지 와서 말하였다. “재계하고 경전 베끼는 일을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아침에 밥을 먹고 목욕한 뒤에 깨끗한 옷을 입고 8계(戒)를 받은 뒤에 깨끗한 방에 들어갔다. 입에 전단향을 물어 향을 사르고 번기를 달고 고요히 앉아 경을 베끼기 시작해 저물어서야 방에서 나왔다. 이튿날에도 이렇게 하면서 피곤하다는 말이 없었다. 경을 다 베껴 법답게 선사에게 바치고는 전송을 받으며 문을 나서서 이내 간 곳이 없었으며, 내지 제본까지 모두 바른 법 그대로였다. 선사는 지성으로 수지 독송하였다. 일곱 개의 꾸러미에서 한 꾸러미마다 한 번씩 향수에 손을 씻으면서 잠깐도 그만두지 않았다. 뒤에 오랑캐 도둑의 무리를 만나자 그 경전을 상자에 넣어 높은 바위 위에 두었다. 해를 지나 적은 물러가고 비로소 그것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면서 끝까지 찾다가 바위 밑에서 그것을 발견하였다. 상자가 다 썩어 그것을 헤치고 보았는데, 경은 전처럼 선명하였다.[경사(京師) 서명사(西明寺)의 도선 율사(道宣律師)가 정관(貞觀) 12년에 그 주(州)에 가서 그것을 직접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나라 익주(益州)의 서생(書生) 순씨(荀氏) 당나라 익주(益州) 서북쪽에 있는 신번현(新繁縣) 서쪽 40리쯤에 왕리촌(王李村)이 있다. 수나라 때에 성이 순씨(荀氏)인 서생이 있어서, 그는 여기서 학문을 가르치면서 글을 잘 썼으나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글씨를 가지고자 했으나 끝내 기꺼이 내놓지 않았고 쫓아내어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붓으로 앞 마을 동쪽 하늘에 『금강반야경』을 쓰기 시작해 며칠 뒤에 마치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경은 여러 하늘이 읽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신인(神人)임을 전연 몰랐다. 그 뒤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졌다. 소 먹이는 어린애가 그 경을 쓴 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거기는 비가 오지 않고 그 땅은 한 발[丈]쯤 마른 채 물은 그 밖으로 흘렀다. 비가 갠 뒤에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히 생각했다. 그 뒤에도 비가 내릴 때마다 아이들은 항상 그 자리에 모였으나 옷은 젖지 않았다. 무덕년(武德年)에 어떤 이상한 스님이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자리의 공중에는 『금강반야경』이 있으니 마을 사람들은 더럽히지 마시오. 모든 하늘들은 위에서 일산을 쳐서 이 자리를 덮고 있으니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이 사방 난간 밑으로는 사람이나 짐승의 다님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도 비가 올 때에 그 자리는 그대로 말라 있으므로 재일(齋日)이 올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와 여기에 공양을 차리고 항상 천상의 음악을 듣는다. 애절하고 분명한 그 소리는 귀에 가득하다. [이상의 다섯 가지 증험은 『삼보감통기(三寶感通記)』에 나온다.]
당나라 부인(夫人) 두로씨(豆盧氏) 당나라 두가(竇家)의 대진공(大陣公)의 부인 두로씨(豆盧氏)는 예공관(芮公寬)의 누님이다. 부인은 복을 믿었다. 그러나 『금강반야경』을 외울 때마다 제1권 한 장쯤 남기고는 오랫동안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저녁 때에 머리가 매우 아프고 사지가 편치 못하다가 밤에 누워서는 더욱 심했다. 부인은 생각했다. ‘만일 이대로 죽으면 끝내 경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 마저 외우려 하였으나 촛불이 이미 다 되었다. 부인은 일어나 종을 시켜 불을 켜라 했다. 조금 있다가 종은 돌아와 부엌에도 불이 없다고 했다. 부인은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다른 사람 방의 불을 취하려 했으나 거기도 불이 없었다. 부인은 매우 한탄하다가 갑자기 부엌에 불이 켜진 촛불이 있는 것을 보았다. 뒷뜰에서 내려와 바로 평상 앞으로 갔으나 땅에서 세 자쯤 떨어진 곳의 촛불은 잡은 사람도 없이 밝기는 낮과 같았다. 부인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어느 새 두통도 나아 경을 들고 외웠다. 조금 있다가 집 사람이 부싯돌로 불을 내었다. 그러나 그 촛불을 들고 방에 들어갔으나 그것은 곧 꺼져 버렸다. 그래서 그 밤에 경을 다 외워 마치고, 이로부터는 날마다 다섯 번씩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 뒤에 예공이 죽게 되어 부인은 가 보았다. 예공은 부인에게 말했다. “누님은 경을 외운 복으로 1백 세 장수하다가 죽어서는 좋은 곳에 날 것입니다.” 부인은 80세에 그 집에서 죽었다.
당나라 도수사자(都水使者) 소장(蘇長) 당나라 무덕(武德) 때에 도수사(都水使) 소장(蘇長)은 파주자사(巴州刺使)가 되어 그 가족들을 데리고 부임길을 떠났다. 가릉강(嘉陵江)을 건너다가 중류에서 바람이 일어 배가 침몰하여 남녀 60여 인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런데 항상 『법화경』을 외우는 한 첩이 거기 있었다. 배 안에 물이 들 때 그 첩은 경함을 머리에 이고 죽기로 맹세하고 함께 빠지려 했다. 그래서 첩은 혼자 빠지지 않고 물결을 따라 떠서 잠깐 사이에 언덕에 닿았다. 경함을 이고 나와 열어 보았는데, 그 경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지금도 그 경은 양주에 있으며 그 첩은 시집가서 남의 아내가 되어 더욱 불법을 독실히 믿었다.
당나라 형주 사마(邢州司馬) 유검(柳儉) 당나라 형주 사마(邢州司馬) 유검(柳儉)은 수(隋)나라 대업(大業) 10년에 기주(岐州)의 기양궁감(岐陽宮監)에 임명되었는데, 의녕(義寧) 1년에 이밀래(李密來)의 모함을 당해 끌려가서 대리사(大理寺)에 구금되었다. 유검은 항상 『금강반야경』을 외우면서도 끝의 두 장을 다 외우지 못했다. 그 때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꿈에 어떤 법승이 와서 말하였다. “단월(檀越)은 빨리 그 경을 다 외우면 곧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유검은 곧 꿈에서 깨어나 부지런히 경을 외워 쉬지 않고 이틀을 지냈다. 낮이 되어 갑자기 왕명이 내려 유검을 풀어 놓으라 했다. 그는 곧 조정으로 가서 명령을 받들고 방면되었다. 유검은 또 다른 때 고요한 밤에 방 밖에서 경을 외우다가 3경(更)에 이르러 갑자기 이상한 향내를 맡았다. 그는 향내를 찾아 집 사람에게까지 물으면서 두루 찾아보았으나 끝내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항상 경을 외워 밤낮으로 쉬지 않고 심지어 하루에 5천 번까지 외웠다. 당나라 수주인(遂州人) 조문신(趙文信) 당(唐)나라 수주(遂州) 사람 조문신(趙文信)은 정관(貞觀) 원년에 갑자기 죽었다가 다시 3일 후에 깨어나 말하였다. “처음 죽는 날 어떤 사람에게 붙들려 구박을 받으면서 끌려갔다. 동행 10인이 함께 염라대왕 앞으로 갔다. 그 중에는 스님 한 사람이 있었다. 대왕은 먼저 스님을 불러 물었다. ‘스님은 일생 동안 어떤 공덕을 닦았는가?’
스님은 대답하였다. ‘빈도(貧道)는 일생 동안 오직 『금강반야경』만을 외웠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놀라면서 일어나 합장하고 찬탄했다. ‘착하고 장합니다. 스님이 참으로 『금강반야경』을 외웠으면 하늘에 올랐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릇되이 이곳으로 왔습니까?’ 왕이 이 말을 마치기 전에 갑자기 천상의 옷이 내려와 스님을 인도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다음에 왕은 나를 앞으로 불러 내어 물었다. ‘너는 일생 동안 어떤 공덕을 닦았는가?’ 나는 대답하였다. ‘신(臣)은 일생 동안 불법은 닦지 않고 오직 유신(瘐信)의 『문장집록(文章集錄)』만을 좋아했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그 유신이란 자는 큰 죄인으로서 지금 여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너는 그를 보면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말하였다. ‘그의 문장은 읽었지만 그 사람은 모릅니다.’ 왕은 곧 사람을 시켜 유신을 끌어 내어 나에게 보이게 했다. 이에 거북 한 마리가 나타났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많았다. 거북이 들어가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유신이다. 나는 생시에 글짓기를 좋아하여 함부로 불경과 여러 속서를 인용하여 불법을 비방하면서, 이것은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죄보를 받아 거북의 몸으로 고생하는 것이다’ 하였다.” 문신은 깨어나서 그 친지들에게 이상과 같이 자세히 이야기했다. 수주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벌레와 물고기를 잡았다. 그들은 문신의 말을 들은 뒤로는 서로 경계하여 살생의 업을 아주 끊고 각각 신심을 내어 『금강반야경』을 받들어 지니면서 지금도 끊지 않는다.
당나라 봉주 현승(蓬州縣丞) 유필(劉弼) 당나라 정관(貞觀) 원년에 봉주(蓬州)의 의룡 현승(義龍縣丞) 유필(劉弼)이 전에 강남 현위(江南縣尉)로 있을 때 갑자기 새 한 마리가 유필의 방 앞 나무 위에서 울었다. 그 지방 사람은 말하였다 “이는 악조(惡鳥)로서 상서롭지 못한 소리이니, 이런 새를 만나는 집에는 반드시 그 집 주인이 죽는다.” 유필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생각했다. ‘공덕을 닦아 이 재앙을 물리치고 싶은데 어떤 복이 제일 좋을까?’ 그 날 밤 꿈에 어떤 스님이 와서 『금강반야경』을 특히 찬양하면서 1백 번 외우라고 했다. 그는 스님이 시키는 대로 『반야경』을 백 번 외웠다. 갑자기 큰바람이 동북쪽에서 불어와 새가 앉았던 그 나무를 뽑아 길거리로 멀리 던져 버렸다. 그 나무가 빠진 구덩이는 길이와 너비가 1장 5척이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보니, 바람이 불어온 곳에는 작은 가지와 큰 풀이 모두 바람을 따라 쓰러졌다. 바람이 그치자 전처럼 일어섰다. 그래서 경의 힘이 불가사의함을 알았다.
당나라 낙주인(洛州人) 가도선(賈道羨) 당나라 낙양(洛陽)의 가도선(賈道羨)은 널리 알고 많이 들었으면서 내전(內典:불전)을 더욱 좋아했다. 정관(貞觀) 5년에 청주(靑州)의 사호 참군사(司戶參軍事)가 되었다. 공관(公館)이 비좁아 경전을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노끈으로 책상 두 다리를 매어 집 위에 걸고 경전 60권을 그 안에 두고는, 그 밑에서 앉고 누우면서 부지런히 읽기에 피곤함을 잊었다. 날이 오래되어 노끈이 상해 끊어졌다. 그러나 책상은 그대로 달려 있어 떨어지거나 기울지도 않았다. 이렇게 오래 지난 뒤에 비로소 사람들이 그 끈을 갈았다. 도선이 습주(隰州)의 사호(司戶)가 되어 이 이야기를 했다.
당나라 오군인(吳郡人) 육회소(陸懷素) 당나라 오군(吳郡)의 육회소(陸懷素)는 정관(貞觀) 20년에 화재로 인해 그 집이 다 타고 불이 번져 서재까지 다 탔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함 하나만이 남아 있었는데 경함과 장정은 다 탔으면서 경의 글자만은 타지 않았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다 놀라며 감탄했다. 회소는 고양(高陽) 허인측(許仁則)의 전처의 형이다. 인측이 그 때 직접 보고 그 뒤에 자세히 이야기했다.[이상 일곱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당나라 하내사마(河內司馬) 교경(喬卿) 당나라 때, 전에 대리사직(大理司直)이요, 하내(河內)의 사마(司馬)인 교경(喬卿)은 천성이 순진하고 삼가며 뜻과 행이 있었다. 영휘(永徽) 때 양주(楊州)의 호조(戶曹)가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상주로 있으면서 몸이 매우 수척했으면서도 가슴 위를 찔러 피로써 『금강반야경』 1권을 베꼈다. 얼마 뒤에 그 여막(廬幕) 위에 지초 두 줄기가 나서 9일 동안에 1척 8촌이나 자랐다. 녹색 줄기와 붉은 갓에서 날마다 즙이 한 되씩 나와 사람들이 먹어 보면 그 맛은 꿀처럼 달았다. 베어 내면 또 나와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했다. 교경의 친구 여러 사람이 여령(餘令)에게 이 이야기를 해서 천하 사람들이 다 알았다.
당나라 평주인(平州人) 손수(孫壽) 현경(顯慶) 때 평주(平州) 사람 손수(孫壽)가 바닷가에서 사냥할 때 들불이 일어나 초목이 다 타는데 한 무성한 덤불의 풀만이 타지 않았다. 그는 그 풀 속에 짐승이 있는가 의심하고 불을 놓았으나 끝내 타지 않았다. 그는 매우 괴상히 여겨 그 풀 속을 뒤져 보았다. 거기 『금강반야경』 한 함이 있었고 그 곁에 또 스님의 시체가 있었는데,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불이 번져 붙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에 대해서는 범인으로서 측량할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것은 손수가 직접 이야기한 것이다.
당나라 정주(鄭州)의 이건(李虔) 당나라 농서(隴西)의 이건관(李虔觀)은 지금 정주(鄭州)에 산다. 현경(顯慶) 5년에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몸을 찔러 낸 피로 『금강반야경』 및 『반야심경』 각 1권과 『수원왕생경』 1권을 베꼈다. 밖에 나가 가지고 들어올 때는 몸을 한 번씩 씻었다. 그 뒤에 갑자기 그 집에서 이상한 향기가 진동을 해 이웃 사람들이 모두 가서 그것을 보고 찬탄했다. 중산랑(中山郞) 여령(餘令)이 정주를 지나다가 그 친구들에게서 이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당나라 조주(曹州) 제음현(濟陰縣)의 경험 당나라 조주(曹州) 제음현(濟陰縣)의 서쪽 20리 되는 마을에 정사(精舍)가 있었다. 용삭(龍朔) 2년 10월에 갑자기 들불이 일어나 매우 치성하였으나 정사에 이르러서는 담을 넘어 지나가 버렸다. 이웃 승방과 초막은 모두 타버렸으나 『금강반야경』 한 권만은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것은 조주의 참군사(參軍事) 석문례(席文禮)가 이야기한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