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구나,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헤매는 중생들을 교화해 인도하시고, 으뜸가는 성품을 널리 드날리셨도다. 넓고 크고 성대한 언변이여, 뛰어나고 훌륭한 자도 그 뜻을 궁구하지 못하는구나. 정밀하고 은미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여, 용렬하고 우둔한 자가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랴.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현묘한 진공(眞空)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비유는 끝이 없네. 법 그물[法網]의 벼릿줄을 모아 끝이 없는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사생(四生)을 고해에서 건지고자 삼장(三藏)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풀어주셨다.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추위와 더위를 이뤘으니, 크게는 선과 악을 말씀하셨고, 세밀하게는 항하의 모래알에 빗대야 할 정도네. 다 서술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온갖 일들을 마치 상법(像法)2)을 엿보듯이 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육정(六情)3)을 벗어나 길이 존재하고 천겁이 지나도록 오래갈 만한 것이며, 마치 수미산이 겨자씨에 담기 듯 여래께서 끝없는 세계에서 걸림이 없으신 것이다.
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자 법이 동토에 전해졌고, 오묘한 이치를 선양하시자 대중이 돌아갈 길을 순순히 따랐으니, 피안(彼岸)은 보리요 애욕의 강은 생멸이라, 오탁의 악취(惡趣)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삼업(三業)의 길에서 빠진 자들을 건지셨다. 세상에 드리운 경은 궁구하기 어렵지만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영원히 태평하도다. 설산(雪山)의 패엽(貝葉)4)이 눈부신 은대(銀臺)와 같고, 세월의 연라(煙蘿)5)가 저 멀리 향계(香界)6)를 일으켰지만 높고 우뚝하여 측량하는 자가 드물고, 멀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도(道)를 깨달은 십성(十聖)7)과 덕(德)을 갖춘 삼현(三賢)8)께서 지극한 도를 건원(乾元)9)에서 일으키고 온갖 오묘함을 태역(太易)10)에서 낳아 무성한 생명체들을 총괄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빛을 비추었으며, 저 시시비비를 단절하고 이 몽매함을 깨우쳤던 것이다.
040_0369_a_02L서역의 법사 천식재(天息災) 등11)은 항상 사인(四忍)12)을 지니며 삼승(三乘)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들이니, 불경의 참된 말씀을 번역하여 인간과 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었다. 이는 꽃다운 지혜가 거듭 열린 것이요, 국운이 창성할 때를 만난 것이니, 문장(文章)에서 오성(五聲)13)을 윤택하게 하였고, 풍율(風律)14)에서 사시(四始)15)를 드러냈다. 당당한 행동거지에 온화하고 아름답도다. 광대한 세월 어둠에 빠졌던 세계가 다시 밝아 현묘한 문이 환하게 드러났으며, 궤범이자 두루한 광명인 오묘한 법이 청정한 세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유정을 이롭게 하여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고, 장애를 만드는 일 없이 병들고 지친 자들을 모두 구제하였으며,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며 만물 밖으로 광대하게 노닐고, 부드러움으로 탐학한 자들을 조복해 어리석음을 씻고 깨우쳐 주었다. 소승의 성문(聲聞)을 연설하여 그 위의에 합하고 대승의 정각(正覺)을 논하여 그 성품을 정립하자, 모든 생명체들이 깨달아 복을 받았고, 삼장의 교법에서 결락된 것들이 다시 흥성하였다.
허깨비에 홀려 길을 잃은 것이니, 화택(火宅)16)은 심오한 비유로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런 가르침을 시설하셨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에 “선념(善念)이 생기면 한량없는 복이 남몰래 찾아오고, 악업(惡業)이 일어나면 인연 따라 모두 타락한다.”17)는 말씀으로 사부대중을 길들이고 시방세계에서 보살행을 쌓았다. 금륜왕[金輪]18)에게 꽃비를 쏟아 붓고 대궐에서 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보호하였으니, 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19)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홍수도 휩쓸지 못하리라. 맑고 고요해 담담한 것이 원만하고 밝으며 청정한 지혜요, 성품이 공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망상으로부터 해탈하는 인연이니, 이로써 마음의 밭에서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우주에서 청량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짐은 부끄럽게도 박학하지도 못하고 석전(釋典)20)에 능통하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문을 써서 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이겠는가? 반딧불이나 횃불과 같아 찬란한 태양과 견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작은 소라로 바다를 측량하려다 그 깊은 연원을 끝내 밝히지 못하는 자일 따름이로다!
040_0369_b_02L 높고 밝은 것이 처음으로 나뉘자 삼진(三辰)22)이 비로소 차례로 나타났고, 두텁게 실어주는 것이 비로소 안정되자, 만물이 이로써 실마리를 일으켰으니, 맑음과 탁함의 본체가 이미 밝혀진 것이요, 선과 악의 근원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이런 다음에 문물(文物)로 그 가르침을 세우고 바른 법전[正典]으로 그 세속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익의 공은 모두 이치로 돌아간다.
이렇게 상법(像法)이 서쪽 나라에서 와 진제(眞諦)가 중국에 유포되었지만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진실한 이치는 궁구할 방법이 없고, 구위(九圍)23)를 포괄하는 현묘한 문은 궁구할 수가 없다. 허망한 생각으로 말하자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참된 모습을 나타내자면 터럭 하나에도 원만하니, 광대한 그 가르침을 어찌 기술할 수 있겠는가!
존귀한 경전이 방대함을 보시고는 방편을 시설해 물에 빠진 자들을 구제하셨고, 법계가 광활함을 아시고는 정진을 행하여 나태한 자들을 거두셨다. 이에 아늑한 절을 선택해 저 참된 문서24)들을 교열하고는 천축의 고승들에게 명령하여 패다라(貝多羅)의 부처님 말씀을 번역하게 하셨다.25) 상아 붓대가 휘날리며 황금의 글자를 완성하고, 구슬을 엮어 다시 낭함(琅函)에 안치하자26) 용궁(龍宮)의 성스러운 문장27)이 새롭게 탈바꿈하였으니, 취령(鷲嶺)의 필추(苾芻)28)들마저 우러러 감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승(三乘)이 모두 하나로 꿰뚫어지고 사제(四諦)가 함께 원만해졌으니, 고(苦)가 공하다는 참되고 바른 말씀을 완전히 밝히고, 정밀히 연구한 비밀스러운 뜻을 환히 드러냈다. 상(相)을 찬탄하는 상이 바로 진실한 상이고, 공(空)을 논하는 것도 공하여 모조리 공이라 하였으니, 화엄(華嚴)의 이치와 궤도를 같이하고, 금상(金像)29)의 가르침과 규구(規矩)30)가 동일하였다.
040_0369_c_02L짐은 대업(大業)을 계승하여 삼가 황위에 임했기에 항상 조심하면서 만백성을 어루만지고 매일 긍긍하면서 선황의 훈계를 지켜왔다. 불교경전[釋典]에 대해서는 더구나 정밀하지도 상세하지도 못하니, 진실로 그 그윽하고 심오한 뜻을 어찌 탐색하고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원(譯經院)31)의 서역 승려 법현(法賢)32)이 간절한 글을 올리고 그 뜻을 너무도 열심히 피력하였다. “선황제께서는 참된 교화의 바람을 크게 펼치고 부처님의 뜻을 높이 전하셨으며, 전대의 왕들이 빠뜨린 전적을 흥성시키고 각로(覺路)33)의 무너진 기강을 다시 떨치셨다.”고 하면서, 하늘이 이룬 공로를 높이 휘날리고 성황의 글34)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나에게 서문을 지어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해달라고 청하였다.
성고(聖考)35)께서 승하하시고 추호(追號)36)가 아직 잊히지도 않았는데 정사 밖에 마음을 둘 겨를 어디 있었겠는가? 담제(禫祭)37)를 마치고 이제야 생각이 은미하고 오묘한 곳에 미치게 된 것이다. 어려서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능통한 재주가 본래 부족한 걸 어쩌랴. 법해(法海)의 나루터와 언덕을 어찌 궁구하리오! 공문(空門)의 문턱으로 나아가질 못하니, 대략 대의나마 서술하여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할 따름이다. 소발자국에 고인 빗물이라 태양을 씻는 파도에 빗대기에는 부족하니, 한척짜리 채찍이 어찌 드넓은 하늘의 그림자를 측량할 수 있으랴! 이렇게나마 짧은 서문을 지어 이로써 성인들의 공로를 기록할 따름이다.
모든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모든 법의 창고[法藏]에 귀명합니다. 일체의 지혜와 광대하고 매우 깊은 이치에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040_0369_c_19L歸命一切佛。 歸命諸法藏。 頂禮一切智, 廣大甚深理。
나는 지금 보상(寶上)이라는 논을 짓는데, 이것은 모든 법 가운데에서 최상이며 진실하고 결정적으로 수승함이라는 뜻이다.
040_0369_c_21L我今造論,名曰寶上,是諸法中最上眞實,決定勝義。
논하여 말한다. 사람과 하늘 및 유정류(有情類)들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어리석음과 어둠을 원인으로 한다. 언어로 말하는 도(道)는 악으로 나아가는 근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체 지혜의 청정한 법계에 기쁘게 들어간다면, 이러한 까닭으로 광명이라 불리는 부처님께 귀명하는 것이다.
040_0370_a_02L이 중에서 무엇을, 아(我) 등의 성(性)과 일체의 인(因)을 떠난다고 말하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 번뇌의 업은 잡염 등의 법을 생하지만, 처음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실체도 없다. 비록 생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꿈이나 허깨비와 같으며, 꿈이나 허깨비 같기 때문에 분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모두 연으로부터 생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연생(緣生)의 뜻 가운데에서 모든 법과 모든 사물의 성품은 공이며, 공이어서 자성이 없다고 밝혀 설하셨다. 그리고 또한 그 가운데에는 실체가 없다는 생각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청정한 아뢰야식은 비록 받는 바가 있을지라도 집착하는 바가 없다. 이 뜻은 심히 깊고 광대하다. 모든 경의 가르침에서 모두 이와 같이 설한다.
그러므로 법 가운데에 실유인 성품[實有性]은 없다는 것에 대해 『법집경(法集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일 법이 실유(實有)라고 하든가, 실유가 아니라고 하든가, 자성이 있다고 하든가, 자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 둘은 허깨비나 비유 등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모든 법은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가운데 설한 것과 같이, 만일 참으로 성품이 없다고 한다면, 성품이 없는 것은 공(空)을 말하며, 공은 곧 끊어짐을 이룬다. 만일 참으로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성품은 항상하게 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공과 공 아님을 다르다고 말하며, 공과 공아님을 떠나 얻을 것이 없다. 마치 밝음과 어둠의 둘은 서로 합해질 수 없는 것이며, 어둠을 떠나고 밝음을 떠나면 모두 얻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서 설한 바는 밝음은 어둠이 무엇을 떠나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둘은 서로 합해질 수 없는 것이며, 지혜를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 또한 얻을 것이 없다. 지혜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닌 이 둘의 중간이라는 나의 생각[想]도 모두 공(空)이다. 그 일체의 법은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또한 중간도 없다. 취할 수 있는 법도 없고 버릴 수 있는 법도 없다.”
040_0370_b_02L『보적경(寶積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약에 유(有)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첫 번째의 극단[邊]이다. 만약에 무(無)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또 두 번째의 극단이다. 첫 번째나, 두 번째나 그 중간이나 모두 모습[想]이 없어서, 볼 수가 없다.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또한 설할 수가 없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므로 표시할 수 없다. 종류가 없는 법[無種類法]을 거두어 갈무리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극단의 중간[中邊]에 안립하는 것도 없다.”
이 가운데 설한 것은 진실한 말이다. 성품과 성품 없음은 본래 이와 같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참으로 성스러운 진리를 관하는 것이며, 능히 탐욕 등 번뇌와 과실을 떠날 수 있다. 설령 다시 번뇌가 생기하더라도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에서 집착하는 바가 없다. 만약에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곧 여래의 공덕이 모인 몸을 얻어 사자후를 하고 대법륜을 굴려서, 널리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보고 듣게 한다.
『보운경(寶雲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약에 본래 없다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식은 분별을 떠나 이름을 세울 수 없다. 그 승의제의 진리는 언설을 떠난 것이며, 모든 사물의 성품은 실체로 얻을 것이 없다.” 여기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은 결정적인 말씀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뜻은 모든 무지를 깨뜨리는 것이다.
『현애경(現愛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만일 어떤 사물이 공[空]이라고 한다면, 중생의 업보는 마땅히 물듦과 깨끗함이 있어야 한다. 만일 물듦과 깨끗함이 있다면, 지음이 있는 것[有作]이다. 만일 지음이 있다면, 곧 갖가지의 모습들이 세간을 따라 바뀐다. 모습의 바뀜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있음을 본다. 만일 능히 안주하여 전도된 생각[想]이 없다면, 곧 사물의 성품에 따로 실체가 없음을 안다.
여기서 이와 같은 뜻을 자씨(恣氏)보살이 묻자, 세존께서 여실하게 설하신다. 아(我)는 본래 끝이 없으며[無邊], 보리 또한 끝이 없다. 보리가 끝이 없기 때문에 보리는 얻을 수가 없다. 아(我)는 끝이 없기 때문에 보리를 구하는 자도 없으며, 조그마한 법이라도 지혜로써 아는 바가 없다. 오직 모든 부처님의 지혜만이 능히 비추어 아는 것이다. 그 진여법은 곧 성품이 없는 것이며, 성품이 없는 것이 곧 여래이다. 여래란 곧 생함이 없는 성품[無生性]이다.”
만일 진실로 여래를 관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여래의 해탈이 생겨난 것을 관해야 한다. 인(因)으로부터 생하지 않으며, 연(緣)으로부터도 생하지 않는다. 어떤 모습으로 생하는 것도 아니며, 분별로 생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이름과 언설의 차별을 멀리 떠난 것이다. 색의 모습도 아니며, 색의 진여도 아니다. 나아가 식의 모습도 아니며, 식의 진여도 아니다. 어둠도 아니며, 밝음도 아니다. 상즉[卽]한 것도 아니며, 상리[離]한 것도 아니다. 봄[現]도 아니며, 앎[知]도 아니다. 모든 식의 법[識法]을 떠나 요별하는 바도 아니며, 모든 식의 법 가운데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만일 능히 이와 같이 여래를 관한다면, 바른 관[正觀]이라 이름할 것이다. 만일 다르게 관하면, 삿된 관[邪觀]이라 이름한다. 삿되게 관하기 때문에 그것은 여래의 진실을 볼 수 없다. 이 가운데에서 설한 여실한 뜻은 있음을 떠나고 없음도 떠나며, 성품도 아니며 성품이 아님도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진실로 여래를 본다고 한다.”
『무구칭경(無垢稱經)』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화엄경』 중에 한 천자(天子)가 묘길상(妙吉祥)보살에게 묻는 부분이 있다. ‘무엇이 참된 말씀이며 참된 말씀이 아닙니까? 일체의 번뇌는 어떻게 조복합니까?’ 묘길상보살이 대답하였다.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큰 뱀을 보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비록 보지만 독의 해로움을 입지는 않는다. 번뇌가 비록 생하지만 참된 성품이 없다. 성품은 청정하여 스스로 조복한다.’ 이것은 참된 말씀이며, 참되지 않은 말씀이 아니다.
또 해혜(海慧)보살이 부사의(不思議) 범천에게 물었다. ‘법은 본래 증험할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법이 있습니까?’
040_0371_a_20L又海慧菩薩問不思議梵天言:‘法本無證,及無所說,云何有佛及諸佛法?’
040_0371_b_02L부사의 범천이 대답하였다. ‘만약에 불ㆍ여래가 세상에 나와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나누어진다면,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다. 본래는 스스로 이와 같으니, 본래 설할 것이 없으며, 또한 증험할 것도 없다. 설할 것이 없기 때문에 들을 것이 없고, 증험할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것도 없다. 단지 번뇌의 업으로 모든 과보의 성품을 생하는 중생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의 대보리심을 끌어들여 생하게 하고, 보살들의 자비심의 경계에 머무르게 한다. 만약에 중생들이 번뇌 등의 성품을 능히 스스로 조복한다면, 모든 행을 가지면서 항상 행하지 않고, 구하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다. 그 번뇌의 성품이 모두 청정하다면, 모든 부처님은 또한 다시 증명할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건달바 성(城)과 같다. 삼계의 모든 법은 식심(識心)으로부터 생한 것이고, 마음이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삼계는 허깨비와 같다. 만약에 하나의 사물이라도 실체가 있다면, 여기에서 허깨비의 비유로써 설한 것은 이치에 상응하지 않을 것이다. 『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설하고 있으며, 위와 같은 모든 뜻을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다.
040_0371_c_02L 만일 이와 같이 설한 것을 보리라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은 이것을 설하여 바로 보리가 되고, 능히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경계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곧 지혜의 장엄[智莊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체지(一切智)를 장엄하지는 않는다. 일체지의 성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리는 생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멸하는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모두 이와 같이 설한다.
또 비유하면 세간의 모든 종자와 능히 생장할 모든 싹과 줄기와 같다. 만일 종자가 없다면 싹과 줄기는 생하지 않는다. 석가보살이 보리장(菩提場)에 앉아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룬, 그 뜻 또한 그러하다. 단지 연(緣)에서 법(法)이 생기할 뿐이기 때문에, 비록 증험한 것이 있을지라도 그 실체는 없다. 이것을 곧 유희신통(遊戱神通)이라 설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밖의 법[外法]은 있지 않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 또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을 떠나서는 진실로 하나의 법도 없다. 만일 식을 떠난다면 법은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능히 마음을 생하면 곧 무생(無生)이며, 만일 법이 생한 법이라면 역시 무생이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생함이 없는 마음 가운데에서 보리의 뜻을 설하신다. 부처님께서 식심(識心)은 능히 보리를 생하며, 또한 식심이 아닌 것이 능히 생하기 때문이라고 설하신다. 무엇 때문인가? 식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자씨보살은 허깨비와 같은 삼마지 가운데 나투어 머무른다. 그러므로 세존은 이 삼마지 가운데에서 그 수기를 주는데, 드러내 보이기 위한 까닭이다. 또한 세존은 무수한 경에서 모든 법은 식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라고 설한다. 생함을 떠나고 멸함도 떠나,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두어 갈무리하는 것도 아니다. 일어나 짓는 것도 아니고 그치어 쉬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하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의 성품은 모두 다 허깨비와 같은데, 하물며 다시 모든 법을 분별한 것에 있어서랴.
040_0372_a_02L 만약에 단절과 항상이라는 말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바른 행이 아니며 부처님께서 허락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모든 법이 단절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바르게 상응하는 것이며 견실이라고 한다. 자분(自分)외에는 법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으며, 또한 법은 마음 작용과 대할 것이 없다. 비록 모든 법에서 여러 가지의 구절을 설할지라도, 다만 모든 법에 따라 나타내어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여기서 설한 것은 있음도 떠나고 없음도 떠난 것으로서 깊고 깊은 뜻이다. 모든 부처님은 모두 이러한 미묘한 법을 설하며, 모든 취하여 집착하는 분별을 영원히 떠났다. 이것을 떠나 다시 따로 설하는 것은 없다. 미혹하여 그릇된 자들이 만약에 있음에 집착하면, 곧 선과 악의 세계로 나아가는 두 종의 차별이 있게 된다. 만일 없음에 집착하면, 곧 그러한 생각이 찰나에 생각함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있음에 집착해도 없음에 집착해도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자비심으로써 방편으로 이 뜻을 널리 설한다. 즉, 모든 법은 있음을 떠나고 없음을 떠난다는 이와 같은 설이 최상의 구절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든 법의 진실이라 한다.
법은 집착할 만한 성품이 없으며[無著性], 모두 관한 바가 아니다. 그 집착할만한 성품이 없음은 있음을 떠나고 없음을 떠난다. 만약에 이와 같이 안다면, 이는 큰 지혜를 가진 자이며, 마땅히 허공은 증감이 없으며 분량(分量)도 없고 끝도 없다고 관해야 한다. 곧, 이 허공은 모든 것을 출생하며, 청정한 식심(識心) 또한 이와 같다. 이 마음은 무심(無心)으로서 모든 것을 출생한다. 또한 맑은 마니구슬[摩尼寶]과 같다. 그것은 무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비추어 드러낸다.
만일 밖의 뜻에서 취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 지혜에서도 또한 얻는 것이 없다. 만일 밖의 뜻에서 취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 지혜에서도 또한 생기하는 것이 없다. 만일 식심(識心)이 모든 유의 모습[有相]을 떠난 것을 안다면, 밖의 법이 어떻게 분량(分量)이 있겠는가? 만일 식심이 모든 유의 모습이라고 안다면 밖의 법에 또한 어떻게 분량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밖의 법은 실로 하나의 성품이라도 생기하는 것이 없다. 꿈 등의 법이 실로 작용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모든 법이 이러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상(自相)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모든 법이 저러하다고 말한다면, 저것은 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040_0372_c_02L 만일 능히 번뇌의 성품은 분별심을 떠난 것임을 깨닫는다면, 곧 생사와 열반 둘은 모두 청정하다. 이 청정한 성품이 곧 모든 법의 성품이다. 이 성품은 또한 진여라 이름하기도 하고, 실제라 하기도 하며, 또한 공이라 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성품 가운데에서 더럽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지만, 참된 지혜로 관하면 모두가 평등하다.
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모든 법 가운데 무엇이 무너지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면, 마땅히 “모든 법은 스스로를 인(因)해서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해야 하다.
040_0372_c_05L或有問言:“於一切法中,何者是不壞?”應如是荅:“諸法自因不壞。”
어떻게 해서 무너지지 않는가? 무너지지 않는 인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법이 성품이 있거나 성품이 없거나, 스스로의 성품을 떠나지 않는다. 두 가지 뜻의 끝에서 어떻게 안립할 수 있는가? 만약에 모든 법의 인(因)과 모든 작용이 무너지는 것이 있다면, 모든 곳에서 이치가 상응하지 않는다. 모든 법의 참된 성품이 어떻게 따라서 전전하는가? 즉, 그 참된 성품은 머무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성품이 없는데 어떻게 인(因)이 있는가? 인을 떠나서는 다시 다른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법의 참된 성품은 무너지는 바가 없어 곧 무너진다고 하는 이름 또한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는 차별되는 인의 성품 또한 없다. 그 무너짐과 멸함의 성품은 분위(分位)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진실은 항상 머무르는 성품[常住性]이다. 그 항상 머무르는 성품은 항상함이 없는 성품[無常性]이 아니다. 만약에 참된 성품을 떠나 다른 뜻이 작용한다면, 이치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성품은 역시 감소하지 않으며, 또한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 진실한 성품은 아니다.
진실한 성품 가운데 어떠한 뜻이 있는가? 이것이 작용하는 바는 차별의 성품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으며, 그 모두는 모든 곳에 항상 두루하다. 또한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 진실한 성품은 아니다. 진실한 성품 가운데에 모습을 어떻게 얻는가? 진실이 아닌 모든 것에서 이것은 어떻게 세우는가? 모든 다른 성품에서 이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러므로 항상함이 없는 성품은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040_0373_a_02L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항상함이 없는 성품은 사물의 성품 중 자기의 종류[自種]로서 전전한다. 종류가 모여 나타난 것은 차별의 인 때문이며, 하고자 하는 것이 인이 되어 생기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모든 항상함이 없는 성품으로 이 가운데에서 결정하여 설하면, 유식(唯識)의 이치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 항상함이 없는 성품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면, 또한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법이 찰나에 생기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라고 하겠는가? 만일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인의 성품이라 하겠는가? 과거와 미래의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두 사물의 성품이 없다. 반드시 실유(實有)로 분별하므로 모든 법이 따라서 흐른다.
그러한 분위(分位)를 따른다면 다시 어떻게 인이 되는가? 즉, 머무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有爲) 중에서 현전하는 현상이 멸하면, 곧 그 뒤의 현상이 돌아와서 다시 생기한다. 앞의 것은 뒤의 것을 끌어들여 생하게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없으며, 뒤의 것은 앞의 것으로부터 생하는 것을 분별할 수 없다.
만일 모든 법이 여기에 얻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이 가운데에서 분별의 인을 일으킨다. 만일 모든 법이 그곳에 얻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그 가운데에서 분별의 인을 일으킨다. 과거와 미래에 머무르지 않는 것 또한 그러하다. 이 가운데 분별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찰나의 법 가운데 무너지는 것이 있다고 설한다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의 끝은 찰나의 법이 아니다. 만일 그 인에서 이와 같이 요지한다면, 앞과 뒤와 중간을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1)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이 서문은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982)에 천식재(天息災)가 『성불모경(聖佛母經)』을, 법천(法天)이 『길상지세경(吉祥持世經)』을, 시호(施護)가 『여래장엄경(如來莊嚴經)』을 각각 번역하여 올리자 송나라 태종(太宗)이 이를 치하해 지은 것이다.
2)상법(像法):부처님의 열반 뒤에 정법(正法)ㆍ상법(像法)ㆍ말법(末法)으로 나누어진 교법의 세 시기 중의 하나이다. 열반 후 500년부터 1000년까지의 시기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은 따르지만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는 시기를 말한다.
3)육정(六情):육근(六根) 또는 육근이 발생시키는 정식(情識)을 말한다.
4)설산은 인도, 패엽은 불교경전을 뜻한다.
5)연라(煙蘿):연하등라(煙霞藤蘿)의 준말로, 안개와 노을이 자욱하고 등나무 여라덩굴이 우거진 곳이라는 뜻이다. 깊은 산이나 은둔처를 의미한다.
6)향계(香界):향기 자욱한 세계라는 뜻으로, 사찰을 가리키는 말이다.
7)십성(十聖):10지(地)의 보살을 말한다.
8)삼현(三賢):10주(住)・10행(行)・10회향(回向)의 위(位)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9)건원(乾元):하늘의 도(道)이며, 천덕(天德)의 시초이다. 『주역』 〈건괘(乾卦)〉 단(彖)에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이를 힘입어 비롯되나니, 이에 하늘을 통괄하도다.[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라고 하였다.
10)태역(太易):기(氣)가 분화되기 이전 최초의 상태이다.
11)천식재(天息災) 등:역경원에서 번역을 주도했던 천식재(天息災)와 법천(法天)과 시호(施護)를 말한다.
12)사인(四忍):무생법인(無生法忍)・무멸인(無滅忍)・인연인(因緣忍)・무주인(無住忍)을 말한다. 인(忍)은 인가(忍可)・안인(安忍)의 뜻으로, 진실을 수긍하고 안주(安住)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13)오성(五聲):오음(五音)이라고도 한다.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다섯 가지 음조를 말한다.
14)풍율(風律):시나 음악의 운율을 말한다.
15)사시(四始):사성(四聲)이라고도 한다. 평성(平聲)・상성(上聲)・거성(去聲)・입성(入聲)이니, 사성으로 음운(音韻)의 고저(高低)와 강약(强弱)과 장단(長短)을 구분한다.
16)화택(火宅):삼계(三界)가 탐욕 등의 번뇌로 어지러운 것을 불타는 집에 비유한 것이 『법화경』 「비유품」에 나온다.
17)천식재(天息災)가 『분별선악업보경(分別善惡報應經)』을 번역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18)금륜왕[金輪]:4종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중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제왕을 말한다.
19)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비람풍(毘嵐風)을 말한다. 우주가 파괴되는 시기에 이 바람이 불어 인간세계로부터 위로 색구경천까지 차례로 파괴한다고 한다. 유정천은 색구경천(色究竟天)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가장 마지막에 파괴된다.
20)석전(釋典):석가의 가르침을 담은 전적, 즉 불교서적을 말한다.
21)이 서문은 송나라 진종(眞宗)이 함평(咸平) 원년(998)에 법현(法顯) 등에게 내리고, 태종의 성교서(聖教序) 뒤에 붙이게 한 것이다.
22)삼진(三辰):해와 달과 별의 세 가지를 말한다. 『좌전(左傳)』에 “하늘에는 삼진이 있고, 땅에는 오행이 있다[天有三辰 地有五行]”고 하였다.
23)구위(九圍):구주(九州)와 같은 말로, 온 천하를 뜻한다.
24)진문(眞文):천식재를 비롯한 서역승들이 가져온 범어 경전을 말한다.
25)송 태종은 태평흥국 5년(980)에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 서쪽에다 역경원(譯經院)을 세우고, 천식재(天息災)・법천(法天)・시호(施護) 등에게 수집한 범어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26)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어 이를 귀한 상자에 보관했다는 뜻이다. 낭함(琅函)은 천자의 문서를 보관하던 옥으로 만든 함이다.
27)범어경전의 문장을 말한다. 용수 보살이 용궁의 창고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와 유포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28)인도출신 승려들을 말한다. 취령(鷲嶺)은 영취산 봉우리란 뜻으로, 곧 인도를 의미한다. 필추(苾芻)는 Ⓢbhikkhu의 음역어로, 비구(比丘)라고도 한다.
29)금상(金像):황금 같은 형상이란 뜻으로 곧 부처님을 지칭한다.
30)규구(規矩):목수가 사용하는 컴퍼스와 곱자로, 곧 기준・척도・법규를 뜻한다.
31)역경원(譯經院):송 태종이 태평흥국 5년(980)에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에 설치한 번역기관이다. 후에 전법원(傳法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32)법현(法賢):중인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법천(法天)이었는데, 송 태종이 법현(法顯)이란 법명을 하사하였다. 973년(개보 6)에 중국에 와서 천식재(天息災) 등과 함께 평생 역경사업에 종사하였다.
33)각로(覺路):깨달음의 길, 즉 불교를 뜻한다.
34)태종이 쓴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를 말한다.
35)성고(聖考):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칭하는 말이다.
36)추호(追號):죽은 임금에게 올리는 시호(諡號)를 말한다.
37)담제(禫祭):죽은 지 만 2년 기일에 지내는 제사가 대상(大祥)이고, 대상을 치른 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가 담제(禫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