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0_0381_a_01L보리심이상론(菩提心離相論)


용수(龍樹) 지음
시호(施護) 한역
이인혜 번역


일체의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내 이제 보리심의 의미를 간략히 설하면서
저 보리심에 지극정성으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씩씩하고 용감한 군사가 훌륭한 병장기를 잡는 것처럼
내가 보리심을 설명하는 뜻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저 대보리심이란 모든 부처님이신 세존과 대보살들이 다 이 보리심을 원인으로 삼아서 발했기 때문이니, 내가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취한 것이라서 보리도량[菩提場]에 앉아 정각(正覺)의 과(果)를 성취하기까지 이 마음은 견고하다. 또 이 보리심은 모든 보살의 총지행문(摠持行門)으로서 이와 같이 관상(觀想)하고 이와 같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보리심을 찬탄하는 이유는 모든 중생들에게 윤회의 고통을 그치게 하고자 함이다. 구제 받지[得度] 못한 자를 빠짐없이 구제케 하고, 해탈하지 못한 자들을 해탈케 하고, 편안함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편안함을 얻게 하고, 열반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열반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또 이렇게 뛰어난 원력을 원만히 하기 위함이요, 자기 모습[自相]의 올바른 바탕[正體]의 인(因)을 세우기 위함이요, 제일의(第一義)인 진실관(眞實觀)에 들기 위함이다. 저 보리심은 무생(無生)이 자기 모습[自相]이니, 이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 보리심이란 일체의 성품을 여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그렇다면 어떻게 그 모든 성품을 여의었다는 말인가?
【답】온(蘊)ㆍ처(處)ㆍ계(界)는 갖가지 취하고 버리는 법을 여의어서 아(我)가 없으며 평등하다. 자심(自心)이란 본래 생하지 않으니,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무엇을 아(我)라고 하는가?
온(蘊) 등으로 표현되어 마쳤지만 분별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체가 없다. 그러므로 보리심을 항상 깨달아 마친 자라면 즉각 모든 법의 공상(空相)에 능히 안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항상 저 보리심을 깨달아 마친 자는 비심(悲心)으로 관하기 때문에 대비(大悲)를 체로 삼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온갖 온(蘊) 속에서도 아상(我相)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외도들은 상응(相應)하지 않는 행을 일으켜서 상(相)에 집착해 분별하면서 갖가지 온에는 무상(無常)하지 않은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저 아상이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이 맡아 지니고[任持] 있는 진실한 성품 가운데는 항상하다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무상(無常)한 것도 아니다. 아(我)의 온(蘊) 속에서는 명칭도 오히려 실답지 않은데, 하물며 그에 따르는 작용[作]이나 갖가지 분별을 실제로 있다고 하겠는가? 만일 어떤 자가 한 법, 나아가 갖가지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자는 세간의 마음이 구르면서 세간의 행을 따르는 것이라서 저 상응하지 않는 것을 항상하는 행상(行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성품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안이다 바깥이다 분별할 수 없으니, 저 능히 집착하는 마음일 뿐이지 무슨 원인[因]이 있겠는가? 말하자면 능히 여의질 못하고 세간의 모습[相]을 따르는 것이다. 원인이든 모습이든 이 두 가지에는 구별이 없다. 이들은 항상하지도 않고 능히 집착하지도 않으니 심성이란 항상하다고 집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저 성품의 무상은 항상이다.
만일 저 성품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저 성품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며 무엇으로부터 나와서 아(我) 등의 모습을 갖게 되는가? 만일 세간을 여읜다면 온 속에 즉(卽)해서도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 온(蘊)1) 외에 처(處)2)와 계(界)3)를 깨달아 마치는 것도 마찬가지라서 취하고 버리는 두 가지 법이 성립할 수 없다.
여기서 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한다. 이를 오온(五蘊)이라 하며 모든 성문들이 이 가운데서 배웠다. 그런데 색은 물거품과도 같고, 수는 물 위에 뜬 거품과도 같고, 상은 아지랑이와도 같고, 행은 파초와도 같고, 식은 허깨비를 만들어내는 마술사와도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오온의 의미는 복덕과 지혜 양쪽을 갖추신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들을 위해 응하는 대로 설하신 것이다.
색온(色蘊)에 대해서 이제 그 특성을 간략히 제시하자면, 사대(四大)의 종자와 저 사대의 종자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색온이 되는 걸 설했지만, 색이 아닌 것, 즉 나머지 수ㆍ상ㆍ행 세 가지는 여러 가르침에서 설한 대로 알아야 하나니, 식온(識蘊)이나 행온, 상온에 대해서는 앞으로 설명하겠다.
위에서 말하는 처(處)란 내부의 안(眼) 등의 처소와 외부의 색(色) 등의 처소를 말하니, 이를 12처라 한다.
위에서 말하는 계(界)란 안근(眼根) 등의 계와 안식(眼識) 등의 계와 색(色) 등의 경계를 말하니, 이를 18계라 한다.
이상의 온ㆍ처ㆍ계는 갖가지 취하고 버림을 여의고 방향도 없고 구분도 없어서 분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분별을 통해 이것들을 본다면 옳지 않다. 분별을 일으킴에 따라서 즉각 집착이 있게 되니, 그렇다면 어떻게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상응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의 모습으로 바깥을 보는 뜻이 있다면, 마땅히 알라, 이것은 지혜가 파괴되어 구르는 것으로서 뜻[意]이 색(色)을 길이 기르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이와 같이 색과 뜻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예컨대 파리몰라야가(波哩沒囉惹迦)4) 등의 외도들은 갖가지 다른 견해를 따라 세 가지로 분별을 일으키는데 이는 옳지 않다. 가령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을 만났음에도 그가 당했던 일은 실제의 행상(行相)이 아닌 것과 같고, 또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난 행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말하자면 식(識)의 광명이 취하고 버리는 상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식법(識法)이 이와 같다면, 바깥이라는 의미[外義]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바깥이라는 의미가 없다. 마땅히 알지니, 일체의 색상(色相)으로 표현된 것은 자기 식의 광명이 색상으로 비춘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환술로 만든 환상이나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또는 건달바(乾闥婆)의 성(城)을 보고는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지혜가 없는 자들이 어리석게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색 등을 실제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온갖 지혜 없는 사람이 어리석고 집착하는 마음으로 색(色) 등을 실답다고 관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서 이 아집(我執)을 말미암아 이 마음이 따라서 전변[轉]하는 것이다. 앞서 온처계의 뜻을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색상 등이) 저 갖가지 분위(分位)와 차별을 여의었음을 알아야 한다. 오직 마음의 분위에 따라 시설(施設)한 것이므로 갖가지 상이란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이치에 대한 논증은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5)
【문】앞서 질문했던 오온(五蘊)에서 식(識)은 무엇을 자상(自相)으로 삼는가?
【답】심(心)에 대한 이치를 설한 바와 같이 식도 그러하다. 부처님이신 세존께서는 항상 일체가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너무나 깊어서 어리석은 자들은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아상을 공(空)할 수 있다면 즉시 이 마음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분별을 일으키는 자는 삿된 가르침 때문이니, 저들이 세운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여실한 이치를 얻은 자는 법무아(法無我)를 보니, 이것이 바로 대승에서 말하는 법무아의 이치다. 자심은 본래(本來)라서 생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생하는 바를 두는데 따라서 역시 평등하다. 자심의 증상(增上)6)으로 진실한 이치에 들어가니, 유가(瑜伽)의 방편[行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알아야 하나니, 여기서 저것[彼:自心]이 뒤의 것[後:所生]에게 의지[所依]가 되어주되 실체가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청정한 마음의 현행(現行)이라고 한다.
과거의 법을 따져보면 과거란 실체가 없다. 미래의 법을 따져본다면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법을 따져본다면 현재란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세 중에 어디에 머물겠는가? 마치 군대나 수풀 등이 (독립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병정과 다수의 나무로 이루어진 사례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에도 아상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저 식(識) 역시 소의(所依)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을 이와 같이 본다면 적운(赤雲)이 빠른 속도로 흩어져 소멸하듯 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만일 법이 있다면 그것은 사유[思]로부터 나타난 것임[所現]을 알아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도 마찬가지다. 갖가지 유정의 무리는 과거든 미래든 법 그대로[法爾如是]이니, 마치 큰 바다가 갖가지 물줄기의 종착지가 되듯이 아뢰야식이 (모든 식에서) 근거[所依]가 되는 것도 그러하다. 만일 이렇게 저 식을 관하는 자가 있다면 분별심을 내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저들 각각에 대해 여실하게 안다면 저들 각각의 명칭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저들 갖가지에 대해 각각 사물의 성품[物性]을 안다면, 그 각각에 대해서는 딱 맞게[稱]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설함을 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결정적인 말[決定語]이다. 그러므로 제법 역시 결정적으로 생하여 일체 사(事)에서 구르는데 따라 성취되는데, 능지(能知)와 소지(所知) 두 가지로 차별이 된다. 그런데 소지가 없다면 능지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두 가지가 모두 실답지 않은데 법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心]이라고 한 것은 단지 이름일 뿐이며, 저 이름 역시 개별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단지 표현일 뿐이기 때문에 저 명칭의 자성 역시 성립할 수 없다. 이런 이치에서 지혜로운 자라면 응당 보리심의 자성도 허깨비 같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한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 중간에서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취할 만한 법도 없고 버릴 만한 법도 없으며, 모양[形色]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색깔[顯色]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남자나 여자의 모습도 황문(黃門)7)의 모습도 아니어서 그 어떤 색상(色相)에도 머물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법이란 아무것도 없으니, 눈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평등함을 관찰하신다. 마음의 자성이 있건 없건 간에 평등한 법 가운데서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말해진 성품[性]이란 명칭의 분별이기 때문에 분별을 여읜다면 마음과 성품이 모두 공하다. 만일 분별이 있어서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명칭을 설해서 공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깨닫는 주체[能覺]도 없고 깨달을 경계[所覺]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보리심을 이렇게 관할 수 있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만일 능각과 소각이 있다면 보리심은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어떠한 상(相)도 없고 또한 생함도 없다. 말로서 표현할 수 없지만[非語言道] 능히 찬탄할 만한 것이다. 또 보리심이란 허공과 같다. 마음과 허공은 다 같이 두 모습이 없다. 이는 마음의 공함과 공의 지혜가 평등하다는 말이니, 부처님과 부처님의 신통이자 부처님과 부처님의 차이가 없다. 모든 부처님께서 삼세에 걸쳐 하시는 일이 모두 보리계(菩提界)에 머무는 가운데 갈무리[攝藏]되어 있다. 비록 저 모든 법을 다 갈무리하고 있으나 항상 고요[寂靜]하면서도 또한 항상 관찰한다. 무상한 법은 환술로 만들어낸 환영[幻化]과도 같아서 보리계에 갈무리 되는 것이 아니니, 삼유(三有:삼계의 유정)를 조복하여 공에 머무는 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생하지 않음(無生) 이것을 공이라 하며, 일체에 아(我)가 없음[無我]을 역시 공이라 한다. 만일 무생과 저 무아로써 관(觀)하여 공이 된다고 한다면, 이 관은 성립할 수 없다. 물듦이나 청정함 두 가지로 분별하는 즉시 단견(斷見)과 상견(相見) 두 가지 견해의 상(相)을 이룬다. 만일 지혜로 저 공을 관한다고 말하더라도 이 공 역시 개별적인 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갖가지 소연(所緣)을 여의고 허공의 상(相)에 머문다. 만일 허공이 머물 곳이라고 관한다면, 이 가운데는 공도 있고 성품도 있어서 두 가지 명칭으로 차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을 아는 자는 마치 세간에서 한 번의 포효로 모든 짐승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자처럼 공이라는 한마디에 온갖 말이 고요해지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곳곳마다 항상 적멸이며 모든 것이 다 공함을 안다.
또한 식법(識法)은 무상하며 법은 무상으로부터 생한다. 저 무상의 성품[無常性]이 바로 보리심이니, 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만일 무상의 성품이 바로 보리심이라면 보리를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마음의 평등일 터이니, 저 공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라고 설하지도 않는데 공을 집착[取]하는 마음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본래의 자성인 진실의 일체가 보리심의 뜻을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물에는 자성이 없음을 알아야 하니, 자성 없는 성품[無自性性]이 바로 여기서 설하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만일 아(我)와 법(法)을 여읜다면 즉각 마음은 머물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법도 아니고 모든 법도 아니며, 각각 자기 성품이되 자기 성품을 여읜다. 마치 세간의 설탕이나 꿀이 단맛을 자성으로 삼는다든가 불이 뜨거움을 자성으로 삼는 경우와 같다. 저 모든 법은 공하며 자성 역시 그러하다. 저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한 것도 단멸하는 것도 아니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여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무명(無明)이 시초가 되고 늙고 죽음이 마지막이 되면서 온갖 연생법(緣生法)이 성립된다. 이는 마치 꿈이나 허깨비와 같아서 그 체가 실답지 않다. 이렇게 해서 일명 십이지륜(十二支輪)이라고도 이름하는 십이지의 법을 설한다. 저 생사의 문을 계속해서 뱅뱅 돌아다니는 중에도 실제로는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따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며, 삼업(三業)의 행에 따라 받는 과보의 차별도 없다. 이렇게 윤회하는 가운데 연생법을 깨달으면 갖가지 경계의 문을 당장에 여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이는 (연생법의) 행상이 아니라서 정인(正因)을 파괴하지 않고 온(蘊)의 소생이기 때문이며, 윤회를 마친 뒤에는 더 이상 그러한 행상이 없기 때문이며, 일체(一切)를 지니는 바가 없이 공공(空空)에서 생하기 때문이다. 법과 법이 평등한 가운데 인을 지어 과를 받는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 갖가지 모든 법은 부류의 모임[聚類]에서 생기니, 북을 치면 북소리가 나고 보리를 심으면 싹이 생하듯이, 모든 법이 자기 부류에서 생하는 이치도 마찬가지로서 허깨비나 꿈처럼 연생(緣生)으로 나타난 것이다. 모든 법은 인으로 생하지만 생함이 없으니, 인마다 계속 따져보아도 스스로 공한데 어디서 생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모든 법은 생함이 없으며 생함 없는 이것을 공이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온을 설할 때 오온의 성품이 평등함을 설한 것처럼, 저 모든 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염(念)해야 한다. 만일 공을 설함이 있다면 진실 그대로 설해서 설하는 공의 체(體) 역시 단멸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단멸이 아닌 체 가운데에는 실(實) 역시 얻을 수 없다. 체를 설할 때 공이라고 하는 것처럼, 공 역시 체가 없다. 만일 실(實)이 없음을 요달한다면 짓는 자[作者]가 항상하지 않는다. 갖가지 번뇌의 업이 모이고 쌓인 것이 체가 되었으니, 이 업 역시 마음으로부터 생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만일 머묾이 없다면 업이란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보리를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은 적정(寂靜)의 성품이니, 저 적정한 마음으로 포착[取]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 있는 자라면 실답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니, 저들은 진실[實]을 보기 때문에 해탈을 얻는다.
그런데 저 보리심이란 최상의 진실이다. 이 진실한 이치를 공, 또는 진여, 실제(實際)라고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모습을 갖지 않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만일 이러한 공의 이치를 요달하지 못한다면 그는 해탈할 분수가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는 윤회하는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자인데, 윤회하는 자는 여섯 갈래의 길[六趣]에 떠돌아다니게 된다. 지혜 있는 자라면 저 보리심과 공이 상응함을 여실하게 관한다. 이렇게 관해야 비로소 남을 이롭게 하는 지혜를 성취하여 걸림과 집착이 없으니, 이를 두고 부처님의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자라고 한다. 그들은 항상 비심(悲心)으로 중생들의 부모나 친지들이 맹렬한 번뇌의 불길에 타서 생사에 윤회하는 갖가지 모습을 두루 관하고는 고통을 받을 것 같으면 응당 대신해서 고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즐거움을 누릴 것 같으면 응당 널리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세간에서 좋아할 만한 과보와 싫어할 만한 과보, 선한 길과 악한 길, 이로운 일과 이롭지 않는 일 등을 관찰하고는 중생을 따라 구르지만, 모든 중생이 본래 얻을 수 없고 지혜의 차별에 따라 갖가지 상을 일으킬 뿐이다. 범천이나 제석이나 세간을 보호하는 천[護世天] 등 하늘의 존재든 인간이든 그 모두가 세간의 모습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지옥ㆍ아귀ㆍ축생 등 여러 갈래에 있는 모든 중생의 한량없이 많은 종류의 색상을 관찰하는데, 이러한 중생들은 아무 이익도 없는 고통에 항상 굴려지면서 배고픔과 목마름에 핍박을 받고 서로 죽이고 서로 잡아먹으니, 이 때문에 고통의 과보가 무너지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선한 길[善趣]이나 악한 길[惡趣]에 있는 모든 중생의 업보가 자상(自相)이 이와 같음을 능히 관찰하신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서 방편의 마음을 일으켜서 중생을 잘 돌보아 괴로움을 벗어나도록 한다. 모든 보살은 이로 말미암아 대비심을 근본으로 삼고 저 중생을 소연의 경계[所緣境]로 삼는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일체 선정의 즐거운 맛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얻는 과보를 구하지도 않는다. 성문의 지위를 넘어서서 중생을 버리지 않고, 이타행(利他行)을 닦아서 대보리심을 일으키고, 대보리의 싹을 내서 부처의 보리의 과(果)를 구하고, 대비심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관한다. 끝없이 넓은 아비지옥에서는 갖가지 업이 원인이 되어 고통의 과보가 돌고 도는데, 이렇게 갖가지 죄로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보살은 비심(悲心)을 가지고 대신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갖가지 고통은 갖가지 모습을 갖는데, 이 모습들은 실다움이 있지 않다고 설하지만 실다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공을 요달해 안다면 즉시 이 법을 알아서 온갖 업과(業果)를 따라 그대로 행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기 때문에 용맹한 마음을 일으켜 생사의 흙탕에 들어간다. 그러나 생사에 처해도 물듦이 없으니, 마치 흙탕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연꽃과 같다. 대비(大悲)를 체로 삼아서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공의 지혜로 관하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방편의 힘을 써서 왕궁에 태어나는 모습과, 성을 넘어 출가하고 고행을 통해 도를 닦는 모습과, 보리도량에 앉아 정등각을 이루는 모습과, 신통력을 보여 모든 마의 군대를 물리치는 모습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대법륜(大法輪)을 굴리는 모습과, 삼도(三道)의 보배계단을 나타내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갖가지 교화하는 모습을 일으키는 것과, 세간법에 따라 대열반(大涅盤)에 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갖가지 색상을 나타내는데, 혹은 범천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제석이 되기도 하면서 천(天)이든 인간이든 갖가지 모습을 따라 전전[轉]한다. 이렇게 갖가지로 모든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니, 이 때문에 세상을 구하시는 스승[導師]이라고 이름한다. 이런 것들은 다 모든 부처와 보살이 대비의 원력으로 세간을 조복해서 상응하는 뛰어난 행에 안주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회 속에서 물러나거나 게으르지 않고 일승(一乘) 가운데서 이승(二乘)의 법을 설하는 것이다. 일승이든 이승이든 모두 진실한 뜻이다. 성문의 보리이든 부처의 보리이든 지혜의 몸[智身]은 한 모습[一相]이며 삼매도 일체(一體)이다. 비록 설한 바가 있다 해도 설하면서 설함이 아니니, 간혹 갖가지 모습을 설하는 일이 있는 까닭은 단지 모든 중생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만일 중생이 이익을 얻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복과 지혜에 있어서 평등하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실제로 머물 만한 두 가지 모습이 없다. 만일 상(相)에 머묾이 있다면 바로 종자(種子)가 되는데, 저 종자의 상은 자기 부류의 모임[聚類]의 소생이니, 이 때문에 생사의 싹과 줄기를 자라나게 한다. 이는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항상 설하신 바와 같다. 저 세간의 갖가지 행상(行相)을 타파하는 것은 단지 중생을 위해 갖가지 방편을 쓰는 것일 뿐 실제로 타파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분별을 여읜다면 이 이치[義]는 매우 깊은 것인데, 매우 깊은 이치 가운데는 두 모습이 없다. 비록 타파함이 있다고 설하기는 하나 이 역시 타파함이 아니다. 공한 법에는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법은 자성의 진실을 맡아 지니고[任持] 있다.
지(智)바라밀다가 바로 보리심이다. 보리심이란 일체의 견해를 제거함이다. 그러므로 몸과 말과 마음 모두가 무상한 법이라고 함은 단지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 공이라고 말한 것은 공이면서도 단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유(有)라고 말한 것은 유이면서도 항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어서 다 머묾 없는 열반[無住涅槃)에 안주한다. 부처님이신 세존께서는 모두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심(悲心)이 낳은 한량없는 복의 덩어리,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고 진실한 공의 이치[最上眞實空理)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위신(威神)에서 나온 것으로서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행을 성취한 것이다.
내 이제 저 일체의 성품에 머리를 숙여 절하며, 내 항상 저 보리심을 존경하리라. 이제껏 칭송하고 찬탄한 부처 종자가 끊이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세간에 영원히 머무시기를 발원한다. 보리심이란 대승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니, 나는 이 보리심에 안주해서 바르게 생각하리라.
또한 보리심이란 평등하게 이끄는 마음[等引心:삼매]8)에 머물러서 방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만일 이 보리심을 깨닫는다면 생사가 평등하여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행을 성취한다. 또한 보리심이란 갖가지 견해의 상(相)을 떠난 무분별지(無分別智)9)가 진실하게 구르는轉]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보리심을 일으키니, 그들이 얻는 복덩이는 한량없고 끝이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한 찰나 사이에 보리심을 관상(觀想)하면, 그가 얻는 복덩어리는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보리심이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보리심이라는 보배는 청정하여 물듦이 없으며, 가장 크고 가장 뛰어나며 가장 높고 으뜸가는 것이다. 그래서 능히 파괴할 수도 없고 파괴되지도 않아서 진실로 견고하며, 번뇌 등 모든 마(魔)를 파괴하고 갖가지 보살의 보현행원(普賢行願)을 가득 채운다. 또한 보리심이란 일체 법이 돌아갈 곳[所歸趣]이다. 설해진 진실은 모든 희론을 여의었으니, 이것이 바로 청정한 보현의 행문으로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내가 칭찬하고 찬탄한 보리심은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올바로 설하셨으니,
보리심은 가장 존귀하고 수승한 것이라
얻어지는 복덩이는 한량이 없네.

내 이 복을 중생에게 베푸노니
삼유(三有)의 바다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널리 기원하네.
이치 그대로, 사실 그대로 칭찬하고 찬탄하였으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공부할지어다.
040_0381_a_01L大宋新譯三藏聖教序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製大矣哉我佛之教也化導群迷闡揚宗性廣博宏辯英彦莫能究其旨微妙說庸愚豈可度其源義理幽玄眞空莫測包括萬象譬喩無垠綜法綱之紀綱演無際之正教拔四生於苦海譯三藏之祕言天地變化乎陰日月盈虧乎寒暑大則說諸善惡細則比於恒沙含識萬端弗可盡述若窺像法如影隨形離六情以長存歷千劫而可久須彌納藏於芥子來坦蕩於無邊達磨西來法傳東土宣揚妙理順從指歸彼岸菩提愛河生滅用行於五濁惡趣拯溺於三業途中經垂世以難窮道無私而永泰雪山貝葉若銀臺之耀目歲月煙蘿起香界之自遠巍巍罕測杳杳難名所以道資十聖德被三賢至道起於乾元衆妙生乎太易摠繁形類竅鑿昏明絕彼是非開茲蒙昩有西域法師天息災等常持四忍早悟三乘貝葉之眞詮續人天之聖教芳猷重運偶昌時潤五聲於文章暢四始於風律堂堂容止穆穆輝華曠劫而昏墊重明玄門昭顯軌範而彌光妙淨界騰音利益有情俱登覺岸成障礙救諸疲羸冥昧慈悲浩汗物柔伏貪很啓滌昏愚演小乘聲聞合其儀論大乘正覺立其性含靈悟而蒙福藏教缺而重興幻化迷途宅深喩雖設其教不知者多善念生而無量潛臻惡業興而隨緣皆墯調御四衆積行十方澍花雨於金輪恒沙於玉闕有頂之風不可壞無際之水弗能漂澄寂湛然圓明淸淨之智慧性空無染妄想解脫之因緣以離煩惱於心田可以得淸涼於宇朕慚非博學釋典微閑豈堪序文以示來者如縻螢爝火不足比之於皎日將微蠡量海未能窮盡於深淵者哉繼作聖教序御製高明肇分三辰方乃序其次厚載初定萬彙於以發乎端淸濁之體旣彰善惡之源是顯然後以文物立其教以正典化其俗利益之功同歸於理於是乎像法來於西國眞諦流於中洞貫千古眞實之理無以窮囊括九圍玄妙之門莫能究言乎妄想五蘊皆空現乃眞容則一毫圓滿大之教豈能紀述者哉伏睹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法性周圓仁慈普布化蠻貊則萬邦輻湊躋蒸民於仁壽之鄕崇教法則四海雲從惠蒼生於富庶之域見尊經之浩汗設方便以救沈淪知法界之恢宏行精進而攝懈怠乃擇其邃宇挍彼眞命天竺之高僧譯貝多之佛語管翻成於金字珠編復置於琅函宮之聖藻惟新鷲嶺之苾芻仰歎是三乘共貫四諦同圓盡苦空眞正之言顯秘密精硏之義讚相相乎實論空空乎盡空華嚴之理合軌轍金像之教同規矩朕纘嗣丕搆恭臨寶圖常翼翼而撫兆民兢兢而守先訓以至釋典尤未精詳諒其幽深曷能探測有譯經西域僧法賢奏章懇切致意專勤先皇帝大闡眞風高傳佛旨興前王之墜典振覺路之頹綱欲旌天造之功庸用廣聖文之述作請予製序繼聖教焉聖考上僊追號罔息政事之外何暇經心今已禫除思臻微奧雖幼承慈奈夙乏通才焉窮乎法海之津涯莫造乎空門之閫域略敷大意以徇輿情蹄涔不足擬浴日之波尺箠豈能量昊天之影聊述短序以紀聖功者焉菩提心離相論龍樹菩薩造西天譯經三藏朝奉大夫試光祿卿傳法大師賜紫臣施護奉 詔譯歸命一切佛我今略說菩提心義誠頂禮彼菩提心如勇健軍執勝器其義亦然而彼大菩提心所有諸佛世尊諸菩薩摩訶薩皆因發是菩提心故我發菩提心亦如是所成乃至坐菩提場成正覺果是心堅固此菩提心是諸菩薩㧾持行門如是觀想如是發生我今讚說菩提心者爲令一切衆生息輪廻苦未得度者普令得度未解脫者令得解脫未安隱者令得安隱未涅盤者令得涅槃爲欲圓滿如是勝願故安立自相正體因故入第一義眞實觀故彼菩提心無生自相是故今說所言菩提心離一切性問曰此中云何離一切荅謂蘊處界離諸取捨法無我平自心本來不生自性空故此中云何謂我蘊等有所表了而分別心現前無體是故若常覺了菩提心者能安住諸法空相又復常所覺了彼菩提心以悲心觀大悲爲體由如是於諸蘊中無我相可得有諸外道起非相應行執相分別謂諸蘊有無常法而實非彼我相可得諸法任持眞實性中不可執常亦非無常我蘊中名尚無實況復有作及諸分若言有一法乃至有諸法作此說世閒心轉隨世閒行彼非相應常行相此義不然是故當知諸法無若內若外不可分別彼能執心有何因謂不能離隨世閒相若因若是二無別此卽非常亦非能執知心性不可執常是故彼性無常是若知彼性是無常者當何所作何所生取我等相若離世間卽於蘊無有障礙若處若界覺了亦然捨二法卽不可得此中言蘊者謂色此說爲五蘊諸聲聞人於是中學復次當知色如聚沫受如浮泡想如陽焰行如芭蕉識如幻士此五蘊義佛二足尊爲諸菩薩如應宣說所言色蘊者今略示其相謂四大種及彼所造說爲色蘊彼非色者謂卽所餘受行三諸教應知識蘊行想如下當說此中言處者謂內眼等處外色等處此說爲十二處此中言界者謂眼根等界眼識等界色等境界此說爲十八界如是蘊處界離諸取捨無方無分不可分別別見者是義不然隨起分別卽有所彼復云何而得相應若有一相外義者當知此爲破智所轉意長養是義云何應知如是非一非異諸外道波哩沒囉惹迦等隨諸異見起三分別是義不然如人夢中造殺害事而彼所作無實行相又如人夢居最上處而彼亦非殊勝行相此義云何謂識光明破取捨相故識法如是外義何有是故諸法無有外義知一切色相所表自識光明色相照耀如人見彼幻化陽焰乾闥婆城以爲實諸無智人以愚執心觀色等亦復如是由此我執是心隨轉先所說蘊處界義應知離彼諸分差唯心分位所施設故而種種相唯心所現此義成就如成唯識說此中問言前說五蘊識云何自相如說心義識亦如是如佛世尊常作是說應知一切唯心所現此義甚深諸愚癡者不能了故不見眞實是故若能空其我相卽於是心不生分別起分別者謂邪教故彼所建立是義不成如實義者見法無我是大乘中法無我義自心本來而不生故隨有所生亦復平等自心增上入眞實義瑜伽行門所出生故此中應知彼後所依而無實體此卽名爲淨心現行若過去法過去無實若未來法未來未至若現在法現在不住於三世中當云何住如軍林等多法成故應知識者是無我相彼識亦非爲所依故若於諸法如是見已猶如赤雲速疾散滅是故當知若法有者從思所現阿賴耶識亦復如是諸有情類若來若去法爾如是譬如大海衆流所歸阿賴耶識所依亦然若有如是觀彼識者卽不可有分別心生若彼各各如實知者而彼彼名復云何說若彼各各知諸物性卽彼各各不能稱說作此說者是決定語是故諸法亦決定生於一切事隨轉成就能知所知是二差別所知若無能知何立二俱無實法云何得是故應知所言心者而但有名彼名亦復無別可得但以表了彼名自性亦不可得以是義故者應當觀菩提心自性如幻若內若外及二中閒求不可得無法可取法可捨非形色可見非顯色可表男女相非黃門相不於一切色相中無法可見非眼境界唯一切佛觀察平等若心自性若無自性平等法云何得見所言性者名分別故離分別心性俱空若有分別可見心此中云何說名爲空是故應知無能覺無所覺若能如是觀菩提心見如來若有能覺及有所覺而菩提心不可成立是故無相亦復無生語言道而能稱讚又菩提心者猶如虛空心與虛空俱無二相此說心空空智平等佛佛神通佛佛無異所有諸佛三世事業一切皆住菩提界中之所攝藏雖所攝藏彼一切法而常寂靜亦復觀察是無常法猶如幻化非所攝藏調伏三有住空法故一切無生此說爲空一切無我亦說爲空若以無生及彼無我觀爲空者是觀不成若染若淨二種分別卽成斷常二種見相若言以智觀彼空者是空亦復無別有體是故菩提心離諸所令全緣住虛空相若觀虛空爲所住者是卽應有空有性二名差別故知者猶如世閒師子一吼群獸皆怖空一言衆語皆寂故知處處常寂彼皆空又復識法是無常法從無生彼無常性卽菩提心此說空義亦不相違若無常性卽菩提心者若愛菩提是心平等而亦不說愛樂彼空取空之心當云何得當知本來自性眞實一切成就菩提心義又復知物無自性無自性性是此說義此說者是心云何若離我法卽心住此非一法亦非諸法各各自性而性離如世糖蜜甜爲自性又如者熱爲自性彼諸法空自性亦然彼法性非常非斷非得非離以是義故無明爲初老死爲後諸緣生法之所成立猶如夢幻體亦無實由此爲十二支法卽此亦名十二支輪偱轉彼生死門中而實無我無別生無三業行果報差別若於是中了生法卽能出離諸境界門彼非行相不壞正因蘊所生故輪廻後邊非行相故一切無持空空生故法法平等造因受果是佛所說所有諸法聚類所生如擊鼓有聲如殖麥生芽法聚類其義亦然如幻如夢緣生所諸法因生而亦無生因因自空何所生是故應知諸法無生卽此無生說名爲空如說五蘊蘊性平等一切法亦如是念若有說空如眞實而所說空體亦非斷非斷體中實亦不可得說體爲空空亦無體若了無實作者無常諸煩惱業積集爲體是業亦復從心所生心若無住業云何得如快樂心是寂靜性彼寂靜心而不可取諸有智者能實觀察彼見實故而得解脫又菩提心者最上眞此眞實義說名爲空亦名眞如名實際是卽無相第一義諦若不了知如是空義當知彼非解脫分者輪廻中是大愚癡輪廻行人六趣流若有智者能如實觀彼菩提心空相應如是觀已乃能成就利他智無礙無著是卽知恩報佛恩者以悲心普觀衆生父母眷屬有種種煩惱猛火常所燒燃使諸衆生輪廻生死如所受苦念當代受如和合念當普施復觀世閒愛非愛果趣惡趣饒益不饒益隨衆生轉而諸衆生本來無得隨智差別起種種相所有梵王帝釋護世天等若天若人一切不離世閒相故又復觀察所有地獄餓鬼畜生是諸趣中一切衆生無量無數種類色相不饒益苦常所隨轉飢渴所逼互相殺害互相食噉因如是故不壞苦果諸佛菩薩如實能觀善趣惡趣一切衆生諸業報事自相如是如所觀已起方便心善護衆生令離諸垢諸菩薩由此以大悲而爲根本以彼衆生爲所緣境故諸菩薩不著一切禪定樂味不求自利所得果報過聲聞地不捨衆生修利他行發大菩提心生大菩提芽求佛菩提果以大悲心觀衆生苦鼻地獄廣闊無邊隨諸業因苦報輪此種種罪受種種苦菩薩悲心念欲代受此種種苦有種種相說無有亦非無實若了知空卽知此法諸業果如是順行是故諸菩薩爲欲救度諸衆生故起勇猛心入生死泥雖處生死而無染著猶如蓮華淸淨無染大悲爲體不捨衆生空智所觀不離煩惱是故菩薩以方便力示生王宮踰城出家苦行修道坐菩提場成等正覺現神通力破諸魔軍爲度衆生轉大法輪現三道寶階從天下起諸化相隨順世閒入大涅盤其中閒現諸色相或作梵王或爲帝若天若人隨諸相轉如是種種示現諸相是故得名救世導師此等皆是諸佛菩薩大悲願力調伏世閒令安住相應勝行是故於輪廻中生退倦從一乘中說二乘法一乘乘皆眞實義若聲聞菩提若佛菩智身一相三摩地一體雖有所說是說非說或有說爲種種相者但爲引導諸衆生故若衆生得利而佛菩提福智平等而實無有二相可住有住相卽爲種子彼種子相聚類所是故增長生死芽莖如佛世尊常所宣說破彼世閒種種行相但爲衆作諸方便而實非破若離分別義甚深甚深義中無有二相雖說有此亦非破於空法中無有二相法任持自性眞實智波羅蜜多是卽菩提心菩提心者除一切見是故當知諸身語心是無常法但爲衆生利益故此中言空空而非斷此中說有亦不常是故無有生死亦無涅而悉安住無住涅盤諸佛世尊咸作是說悲心所生無量福聚彼卽最上眞實空理諸佛威神之所出生利他二行成就我今頂禮彼一切我常尊敬彼菩提心願所稱讚佛種不斷諸佛世尊常住世閒而菩提心者大乘中最勝我於此心安住正又菩提心者住等引心從方便生若了是心生死平等自利利他二行成就又菩提心者離諸見相無分別智眞實而轉諸有智者發菩提心獲福聚無量無邊又復若人於一剎那閒觀想菩提心彼獲福聚不可稱以菩提心非稱量故又菩提心寶淸淨無染最大最勝最上第一不能非所壞眞實堅固能破煩惱等一切魔滿諸菩薩普賢行願又菩提心是一切法之所歸趣所說眞實諸戲論是卽淸淨普賢行門離一切此如是說我所稱讚菩提心 如二足尊正所說而菩提心最尊勝 所獲福聚亦無量我以此福施衆生 普願速超三有海如理如實所稱揚 智者應當如是學菩提心離相論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온(蘊)이란 색 등의 일체법이 모이고 쌓임[積聚]을 뜻한다. 일체 행을 구족하게 섭지(攝持)한다는 뜻에서 온이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갖가지 번뇌를 증장시키는 공능을 갖는다는 뜻에서, 또한 유소위(有所爲)로서 파괴되고 멸한다는 뜻에서 온이라는 개념을 쓴다.
  2. 2)처(處)는 갖가지 심심소(心心所)가 생하고 자라나는[生長] 문(門)이라는 뜻이다. 이밖에 방편(方便)ㆍ화합(和合)ㆍ의지가 되어주는 곳[所依止], 거주하는 곳[居住處] 등이라는 뜻에서 처라는 개념을 쓴다.
  3. 3)계(界)란 종자(種子)ㆍ본성(本性)ㆍ종성(種性)ㆍ미세(微細)ㆍ임지(任持)를 말하며, 일체법의 종자, 즉 아뢰야식(阿賴耶識) 가운데 제법의 종자를 말한다. 계는 인(因)이 되기 때문이며, 자상(自相)을 집지(執持)하는 공능을 갖기 때문이며, 인과(因果)의 성(性)을 집지하는 공능을 갖기 때문이다.
  4. 4)파리저라구가(波哩咀羅惹迦)ㆍ반리벌라다가(般利伐羅惹迦)ㆍ반리벌라작가(般利伐羅勺迦)ㆍ파리파라사가(簸利婆羅闍迦)라고도 한다. 외도의 하나로서 출가외도이다.
  5. 5)이 논을 용수보살이 지었다고 하나 『성유식론』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유식론』 이후에 다른 사람이 지어서 용수보살의 이름을 가탁했다고 볼 수 있다.
  6. 6)증상(增上)이란 어떤 법에 대해 도와주거나 막지 않는 방식으로 특수한 작용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7. 7)Paṇḍaka(半擇迦)의 한역어로서 남근(男根)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8. 8)등인심(等引心)이란 삼매[三摩惛多]를 뜻한다. 혼침(呬沈)과 도거(掉擧)를 동시에 떠나 마음이 평정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에서 ‘등(等)’이라 하며, 정(定)을 닦은 힘에 의해 이끌려지므로 ‘인(引)’이라고 한다.
  9. 9)심심소(心心所)가 경(境)을 대하여 그 상(相)을 취하는 것을 분별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유분별을 떠난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범부는 미망(迷妄) 때문에 진여(眞如)를 볼 수 없는데, 초견도위(初見道位)의 보살은 일체법의 진여를 연(緣)으로 해서 능소(能所)를 초월한 평등한 무분별지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