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0_0457_c_01L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용수(龍樹) 지음
송(宋) 서천(西天) 역경삼장(譯經三藏)1) 시호(施護) 한역


삼세(三世)의 적묵주(寂黙主)2)에게 귀의하오니
연생(緣生)3)의 바른 법어(法語)를 널리 알리신 이여
만약 모든 법이 연기[緣生]을 떠난 것임을 안다면
지은 바 법의 작용을 이와 같이 떠나리.

유(有)4)와 무(無)5)의 두 치우친 견해를 떠난
지혜로운 자는 의지하는 바가 없고
아주 깊어 소연(所緣)이 없으니
연기[緣生]의 의미가 성립하네.

만약 법이 비존재[無性]의 성품이라면
곧 온갖 과실(過失)이 발생하네.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도리 그대로
법의 존재의 성품[有性]을 살펴야 하리.

만약 존재의 성품[有性]을 실체로서 얻으려 한다면
어리석은 자의 분별과 같네.
비존재의 성품[無性]은 곧 원인이 없는 것인데
해탈의 의미가 어찌 성립하리오.

존재의 성품이라 말할 수 없고
비존재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잘 이해하면
큰 지혜로써 도리에 맞게 말하는 것이리라

열반(涅盤)6)과 생사(生死)가
다른 성품이라 관찰하지 말라.
열반(涅盤)7)과 생사의
두 성품에 차별이 있지 않네.

생사(生死)와 열반(涅盤)8)
두 가지는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만약 삶과 죽음을 잘 이해하면
이것이 곧 열반(涅盤)9)이라네.
그 발생의 성품이 존재한다[有性]는 [분별을] 깨부수었으니
소멸에 대한 분별 역시 그러하리라.
허깨비가 만든 일처럼
소멸은 현전(現前)하나 실체[實]로서 없네.

만약 소멸에 허물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유위(有爲)임을 알아야 하리.
현재의 법 조차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또한 괴멸의 법을 알 수 있으리오.

그 오온[諸蘊]은 소멸하지 않으며
번뇌[染]가 다하면 열반이니
만약 소멸의 성품을 잘 안다면
그는 곧 해탈을 얻으리라.

만약 발생의 법과 소멸의 법
둘을 얻을 수 없으리니
바른 지혜로써 관찰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발생하는 것이네.

법의 적정함을 본다면
모든 작용하는 것 역시 그러하네.
이 가장 뛰어난 법을 알면
법의 지혜를 얻음이 끝이 없으리.

연생(緣生)의 성품[性]을 볼 수 있다는
이 주장은 무견(無見)이 아니니
여기의 미묘한 성품[性]은
연생의 분별이 아니네.
불정각(佛正覺)께서 말씀하시길
존재는 무인(無因)이 아니라 하셨네.
만약 번뇌의 근원이 다하면
윤회의 형상을 깨부술 수 있으리라.

모든 법의 결정된 작용에
작용이 있고 취착이 있다고 본다면
전후(前後)의 시간을 어찌하여
인연(因緣)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는가.

어떻게 앞서 이미 발생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다시 다르게 변화하리.
그러므로 전후의 시간은
마치 보여지는 세간의 허깨비와 같네.

어떻게 허깨비가 발생할 수 있으며
어찌 집착할 것이 있으리오.
어리석은 자는 환영 속에서
허깨비를 찾아 실재(實在)라 여기네.

앞의 시점이 나중의 시점이 아니라는
집착의 소견 때문에 버리지 못하네.
지혜로운 자는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꿰뚫어 보고
마치 환영ㆍ불꽃ㆍ그림자와 같다 하네.

만약 발생은 소멸이 아니라 하면
이것은 유위의 분별이네.
그 연생(緣生)의 바퀴가
굴러도 나타나는 것이 없네
또한 이미 발생한 것[已生]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未生]의
그 자성(自性)에는 발생이 없네.
만약 자성(自性)에 발생이 없다면
발생이란 이름이 어찌 성립하리오.

원인이 적정하면 법이 다 소진될 것이니
이 소진은 성립할 수 없으리.
만약 자성(自性)의 소진[盡]이 없다면
소진이란 말이 어찌 성립하리오.

한치의 법도 발생하는 일이 없고
한치의 법도 소멸하지 않으니
그 발생과 소멸의 두 도리는
사태에 따라 의미에 따라 나타나네.

발생을 알면 소멸을 알고
소멸을 알면 무상(無常)을 아리니
무상의 성품을 만약 안다면
모든 법을 어찌 얻지 못하리.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발생하니
발생을 떠난 것[離]10)이고 소멸을 떠난 것이네.
마치 저 언덕에 도달한 자가
큰 바다를 보는 일과 같네.

만약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생(異生)11)은 자아[我]의 성품에 집착하네.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에 관한 전도망상은
온갖 잘못을 일으키네.

모든 법은 무상(無常)하며
고(苦)이고 공(空)이며 무아(無我)이니
여기에서 법의 여읨을 보면
지혜에 의해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꿰뚫어보네.

머묾도 없고 소연(所緣)도 없고
감관도 없으니 또한 성립하지 못하리.
무명(無明)의 종자에서 발생하고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시간을 여의었네.

어리석음의 극악한 성(城)은
마치 파초와 같이 실체가 없고
건달바(乾闥婆)의 성처럼
모두 세간의 허깨비에 의해 보이는 것이네.

이 세계의 범왕(梵王)이 처음
부처님의 여실(如實)한 바른 말씀을 하고
나중에 여러 성인들이 망집 없이
말하였으나 역시 차별이 없네.

세간은 어리석음에 가리워져
애욕은 상속하고 유전(流轉)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애욕을 잘 알아
평등하게 잘 말하네.

처음 모든 법의 존재를 말할 경우
존재에 대해 실체의 성품을 구하지만
나중에는 성품 또한 없음을 구하면
집착이 없이 존재를 여읜 것이네.

만약 여읨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듣는 대로 곧 집착이 생길 것이네.
지은 복덕(福德)의 업을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깨뜨리네.

앞서 평등하게 말한 대로
그 모두 업들은 진실하나
자성을 만약 잘 안다면
이것은 곧 (六道의)12) 발생이 없다는 것이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의한 것이며
잘 선양한 그대로이니
바로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의 법이네.

사대종(四大種) 따위와 의식[識]을
말씀하신 것 모두 평등하니
그 지혜를 증득할 때
허망도 없고 분별도 없네.
이 하나라도 여실(如實)하다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이라 하셨으나
이는 가장 뛰어난 것이며 망집이 없는 것이니
지혜가 없으면 하면 분별이네.

만약 마음이 산란하여
여러 마귀들과 더불어 편리함을 짓는 것이네.
여실하게 잘못을 버리면
여기에는 발생이 없으리

이와 같이 무명(無明)의 인연을
부처님께서 세간을 위해 말씀하셨네.
만약 세간에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무생(無生)이 되는가.

만약 무명(無明)이 소멸한다면
이미 소멸했으니 발생이 아니네.
발생과 소멸이란 이름에 서로 위배되니
무지(無智)에 의해 분별이 일어나네.

원인이 있으면 발생이 있고
인연이 없으면 머뭄도 없네
인연을 떠나 존재의 성품이 있으면
이 존재 역시 어찌 성립하리오.

머묾의 성품을 취할 수 있으면
존재의 발생과 머묾을 말할 수 있네.
여기서 의심이 더 많아져
말하길 이 법이 머물 수 있다고 하네.
만약 보리를 증득할 수 있다면
어디나 상주한다는 말이나
만약 머묾의 성질을 가히 취할 수 있다면
이 말은 도리어 발생이 있다는 것이네.

만약 법이 실체로서 있다고 말하면
무지(無智)에 의해 이 말을 한 것이네.
만약 법에 장소가 있다고 한다면
취하여도 역시 성립할 수 없네.

법에는 발생이 없고 자아도 없네.
지혜에 의해 진실한 성품을 깨달으니
영원과 무상(無常) 등의 형상은
모두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견해이네

만약 존재들의 성품[多性]13)이 성립한다면
실체의 속성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것이네.
그 어찌 이
영원 등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으리.

만약 한 존재 성품[一性]14)이 성립한다면
욕망하는 바가 물 속에 달과 같으니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모두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네.

욕심과 성냄의 법은 아주 중하니
이로 인해 견해와 집착을 일으키네.
쟁론(諍論)하여
여읨의 성품을 잘 세워 실체라 집착하네.

그 원인이 여러 견해들을 일으키고
견해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네.
만약 이것을 바로 알면
견해도 번뇌도 다 없어지리니

법은 무상(無常)하나
연생(緣生) 때문에 나타남을 알아야 하네.
연생에도 역시 발생이 없나니
이것이 가장 높은 진실한 말씀이네.

중생의 삿되고 허망한 지혜는
진실함이 없어 실체에 대한 망상을 말하고
다른 사람과 쟁론을 일으켜
스스로 전도된 행위를 하네.

자신의 주장을 세울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의 주장은 어찌 있겠는가.
자신의 주장과 다른 사람의 주장 모두 없으니
지혜로써 쟁론이 없음을 알아야 하리.

한치의 법이라도 의지한다면
번뇌가 마치 독사와 같겠지만
만약 고요함도 없고 움직임도 없으면
마음은 의지하는 곳이 없으리니

번뇌는 마치 독사와 같아서
아주 중한 잘못을 일으키리니
번뇌의 독으로 뒤덮였는데
어찌 모든 마음을 볼 수 있겠는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그림자를 보고
그 망집 때문에 실재한다는 망상을 일으키듯이
세간의 속박 역시 그러하네.
지혜는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네.

성품은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혜안[智眼]의 경계가 아니네.
큰 지혜에는 본래
미세한 경계의 형상조차 일어나지 않네 .

물질에 집착하면 범부라 하고
탐욕을 여의면 소승의 성인이나
물질의 자성(自性)을 잘 이해하면
이를 가장 높은 지혜라 하네.

모든 선법(善法)에 집착하는 것이
마치 욕심의 전도 망상을 여읜 듯하나
허깨비 사람을 본 뒤에
(허깨비의) 작용을 떠나 실체를 구하는 것과 같네.

이 주장이 오류임을 알라.
존재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네.
번뇌가 성립하지 못하고
성품의 빛이 삿된 지혜를 깨부수리라.

지혜는 오염[染]과 청정[淸淨]을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청정에도 의지하지 않네
곧 의지함이 있으면 곧 오염됨도 있으니
그 청정함이 다시 오류를 발생시키네.

극악한 번뇌의 법이
만약 자성(自性)의 여읨을 본다면
곧 마음에 동요가 없어
생사의 바다를 건널 것이네.

이 선법(善法)의 감로는
큰 자비에서 발생하며
여래의 말씀에 의지하므로
주장과 분별이 없네.

여기서의 이렇게 어려운 것을 말하였으니
지혜로운 사람의 견해에 따르면 성취하리라.
지혜로운 자는 수순문(隨順門)에 의해 꿰뚫어보니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대비(大悲)에서 나온 것이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을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여리(如理)에 따라 꿰뚫어볼 것이니
향하는 곳마다 이 믿음을 내어
그 중생을 구제하여 괴로움을 여의게 하라.

이 내용은 아주 깊고 또한 넓고 크니
나는 훌륭한 이타행을 위해 찬탄하노라.
큰 지혜의 말씀대로 이미 잘 말했으니
자신과 남의 어리석음을 모두 잘 깨부수었어라.
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이미 깨부수었고
여여(如如)하게 지은 바는 악마의 장애를 여의었으니
이로 인해 선취문(善趣門)을 잘 여니
모든 해탈의 일은 어찌 잃을 수 있겠는가.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자가 생천(生天)에 난다는 말은
기필코 진실한 글이니
설사 파계(破戒)했어도 바른 마음에 머문다면
비록 계를 훼손했어도 견해를 훼손한 것이 아니네.

종자의 성장은 무의(無義)한 것이 아니니
내용의 이로움을 보았기에 널리 베푸는 것이니
대비(大悲)로써 바른 원인을 삼지 않았다면
지혜로운 이가 어찌 생법(生法)에 대해 욕심을 내었겠는가.
040_0457_c_01L大宋新譯三藏聖教序 六十頌如理論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製大矣哉我佛之教也化導群迷闡揚宗性廣博宏辯英彦莫能究其旨微妙說庸愚豈可度其源義理幽玄眞空莫測包括萬象譬喩無垠綜法網之紀綱演無際之正教拔四生於苦海譯三藏之祕言天地變化乎陰日月盈虧乎寒暑大則說諸善惡細則比於恒沙含識萬端弗可盡述若窺像法如影隨形離六情以長存歷千劫而可久須彌納藏於芥子來坦蕩於無邊達磨西來法傳東土宣揚妙理順從指歸彼岸菩提愛河生滅用行於五濁惡趣拯溺於三業途中經垂世以難窮道無私而永泰雪山貝葉若銀臺之耀目歲月煙蘿起香界之自遠巍巍罕測杳杳難名所以道資十聖德被三賢至道起於乾元衆妙生乎太易摠繁形類竅鑿昏明絕彼是非開茲蒙昧有西域法師天息災等常持四忍早悟三乘貝葉之眞詮續人天之聖教芳猷重運偶昌時潤五聲於文章暢四始於風律堂堂容止穆穆輝華曠劫而昏墊重明玄門昭顯軌範而彌光妙淨界騰音利益有情俱登覺岸成鄣礙救諸疲羸冥昧慈悲浩汗物柔伏貪很啓滌昏愚演小乘聲聞合其儀論大乘正覺立其性含靈悟而蒙福藏教缺而重興幻化迷途宅深喩雖設其教不知者多善念生而無量潛臻惡業興而隨緣皆墯調御四衆積行十方澍華雨於金輪恒沙於玉闕有頂之風不可壞無際之水弗能漂澄寂湛然圓明淸淨之智慧性空無染妄想解脫之因緣以離煩惱於心田可以得淸涼於宇朕慚非博學釋典微閑豈堪序文以示來者如縻螢爝火不足比之於皎日將微蠡量海未能窮盡於深淵者哉繼作聖教序御製高明肇分三辰方乃序其次厚載初定萬彙於以發乎端淸濁之體旣彰善惡之源是顯然後以文物立其教以正典化其俗利益之功同歸於理於是乎像法來於西國眞諦流於中洞貫千古眞實之理無以窮囊括九圍玄妙之門莫能究言乎妄想五蘊皆空現乃眞容則一毫圓滿大之教豈能紀述者哉伏睹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法性周圓仁慈普布化蠻貊則萬邦輻湊躋烝民於仁壽之鄕崇教法則四海雲從惠蒼生於富庶之域見尊經之浩汗設方便以救沈淪知法界之恢宏精進而攝懈怠乃擇其邃宇校彼眞命天竺之高僧譯貝多之佛語管翻成於金字珠編復置於琅函宮之聖藻唯新鷲嶺之苾芻仰歎是三乘共貫四諦同圓盡苦空眞正之言顯祕密精硏之義讚相相乎實論空空乎盡空華嚴之理合軌轍金像之教同規矩朕纘嗣丕搆恭臨寶圖常翼翼而撫兆民兢兢而守先訓以至釋典尤未精詳諒其幽深曷能探測有譯經西域僧法賢奏章懇切致意專勤先皇帝大闡眞風高傳佛旨興前王之墜典振覺路之頹綱欲旌天造之功庸用廣聖文之述作請予製序繼聖教焉聖考上僊追號罔息政事之外何暇經心今已禫除思臻微奧雖幼承慈奈夙乏通才焉窮乎法海之津涯莫造乎空門之閫域略敷大意以徇輿情蹄涔不足擬浴日之波尺箠豈能量昊天之影聊述短序以紀聖功者焉六十頌如理論龍樹菩薩造西天譯經三藏朝奉大夫試光祿卿傳法大師賜紫臣 施護 奉 詔譯歸命三世寂默主 宣說緣生正法語若了諸法離緣生 所作法行如是離離有無二邊智者無所依甚深無所緣緣生義成立 若謂法無性 卽生諸過失智者應如理 伺察法有性 若有性實得如愚者分別 無性卽無因 解脫義何立不可說有性 不可說無性 了知性無性大智如理說 涅盤與生死 勿觀別異性非涅盤生死 二性有差別 生死及涅盤二俱無所有 若了知生死 此卽是涅盤破彼生有性 分別滅亦然 如幻所作事滅現前無實 若滅有所壞 知彼是有爲現法尚無得 復何知壞法 彼諸蘊不滅染盡卽涅盤 若了知滅性 彼卽得解脫若生法滅法 二俱不可得 正智所觀察從無明緣生 若見法寂靜 諸所作亦然知此最勝法 獲法智無邊 緣生不可見是義非無見 此中微妙性 非緣生分別佛正覺所說 有說非無因 若盡煩惱源卽破輪迴相 諸法決定行 見有作有取前後際云何 從緣所安立 云何前已生彼後復別轉 故前後邊際 如世幻所見云何幻可生 云何有所著 癡者於幻中求幻而爲實 前際非後際 執見故不捨智觀性無性 如幻焰影像 若謂生非滅是有爲分別 而彼緣生輪 隨轉無所現若已生未生 彼自性無生 若自性無生生名云何得 因寂卽法盡 此盡不可得若自性無盡 盡名云何立 無少法可生無少法可滅 彼生滅二道 隨事隨義現知生卽知滅 知滅知無常 無常性若知不得諸法底 諸法從緣生 雖生卽離滅如到彼岸者 卽見大海事 若自心不了異生執我性 性無性顚倒 卽生諸過失諸法是無常 苦空及無我 此中見法離智觀性無性 無住無所緣 無根亦不立從無明種生 離初中後際 癡闇大惡城如芭蕉不實 如乾闥婆城 皆世幻所見此界梵王初 佛如實正說 後諸聖無妄說亦無差別 世閒癡所闇 愛相續流轉智者了諸愛 而平等善說 初說諸法有於有求實性 後求性亦無 卽無著性離若不知離義 隨聞卽有著 而所作福業凡愚者自破 如先平等說 彼諸業眞實自性若了知 此說卽無生 我如是所說皆依佛言教 如其所宣揚 卽蘊處界法大種等及識 所說皆平等 彼智現證時無妄無分別 此一若如實 佛說爲涅盤此最勝無妄 無智卽分別 若心有散亂與諸魔作便 若如實離過 此卽無所生如是無明緣 佛爲世閒說 若世無分別此云何無生 若無明可滅 滅已卽非生生滅名乖違 無智起分別 有因卽有生無緣卽無住 離緣若有性 此有亦何得若有性可取 卽說有生住 此中疑復多謂有法可住 若菩提可證 卽處處常語若住性可取 此說還有生 若謂法有實無智作是說 若謂法有處 取亦不可得法無生無我 智悟入實性 常無常等相皆由心起見 若成立多性 卽成欲實性彼云何非此 常得生過失 若成立一性所欲如水月 非實非無實 皆由心起見貪瞋法極重 由是生見執 諍論故安立離性而執實 彼因起諸見 見故生煩惱若此正了知 見煩惱俱盡 當知法無常從緣生故現 緣生亦無生 此最上實語衆生邪妄智 無實謂實想 於他諍論興自行顚倒轉 自分不可立 他分云何有自他分俱無 智了無諍論 有少法可依煩惱如毒蛇 若無寂無動 心卽無所依煩惱如毒蛇 生極重過失 煩惱毒所覆云何見諸心 如愚見影像 彼妄生實想世閒縛亦然 慧爲癡所網 性喩如影像非智眼境界 大智本不生 微細境界想著色謂凡夫 離貪卽小聖 了知色自性是爲最上智 若著諸善法 如離貪顚倒猶見幻人已 離所作求體 知此義爲失不觀性無性 煩惱不可得 性光破邪智智離染淸淨 亦無淨可依 有依卽有染彼淨還生過 極惡煩惱法 若見自性離卽心無動亂 得渡生死海 此善法甘露從大悲所生 依如來言宣 無分限分別此中如是難可說 隨智者見卽成就智者隨觀隨順門 如是皆從大悲轉一切法中眞實性 智者隨應如理觀所向由是信得生 拔彼衆生離諸苦此義甚深復廣大 我爲勝利故讚說如大智言今已宣 自他癡闇皆能破破彼癡闇煩惱已 如如所作離魔鄣由是能開善趣門 諸解脫事而何失持淨戒者得生天 此卽決定眞實句設破戒者住正心 雖壞戒而不壞見種子生長非無義 見義利故廣施作不以大悲爲正因 智者何能生法欲六十頌如理論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의 다른 판본에는 송(宋) 서천(西天) 역경삼장(譯經三藏)이라 기술한 것이 있다. 시호(施護) 스님이 송나라에서 역경사업을 했으므로 송 서천 역경삼장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은 번역일 것이다.
  2. 2)적묵주(寂黙主)는 원래 지긋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어 침묵 속에 있는 우주의 주인이란 뜻이다. 이는 부처님을 이르는 말이다.
  3. 3)여기서 연생(緣生)이란 연기(緣起, pratityasamutpāda)의 의미를 말한다.
  4. 4)유(有)는 산스끄리뜨어 astitva의 한역이다. astitva는 중성명사로서 보통 한역에서 유(有), 유상(有相), 유성(有性) 등으로 한역되었다. 이 말의 의미는 ‘존재’이다.
  5. 5)무(無)는 산스끄리뜨어 nāstiva를 한역한 것이다. nāstiva는 부정어(na)+존재(astiva)가 결합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비존재’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역에서 보통 무성(無性), 무상(無相), 무(無) 등으로 옮겨진 경우가 많다.
  6. 6)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열반(涅盤)이라 되어 있으나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의 다른 판본에는 열반(涅槃)으로 표기되어 있다. 열반(涅盤)보다 열반(涅槃)이 올바른 표기이다.
  7. 7)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열반(涅盤)이라 되어 있으나 열반(涅槃)이 올바른 표기이다.
  8. 8)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열반(涅盤)이라 되어 있으나 열반(涅槃)이 올바른 표기이다.
  9. 9)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열반(涅盤)이라 되어 있으나 열반(涅槃)이 올바른 표기이다.
  10. 10)티벳본과 대조해 볼 때 수(雖)는 리(離)의 오자(誤字)로 추정된다. 티벳본에는 연기(緣起)는 생사(生死)를 초월하고 연기를 보는 자는 생사를 건넌다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수(雖)를 여읠 리(離)로 바꿔 번역한다.
  11. 11)이생(異生)은 중생(衆生)의 다른 이름이다.
  12. 12)티벳본과 비교해 볼때 무생(無生)은 육취(六趣)의 무생(無生)을 의미하므로 ‘육취(六趣)의’라는 말을 삽입하겠다.
  13. 13)다성(多性)은 bhāva의 복수형을 한역한 것이다.
  14. 14)일성(一性)은 bhāva의 단수형을 한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