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三世)의 적묵주(寂黙主)2)에게 귀의하오니 연생(緣生)3)의 바른 법어(法語)를 널리 알리신 이여 만약 모든 법이 연기[緣生]을 떠난 것임을 안다면 지은 바 법의 작용을 이와 같이 떠나리.
유(有)4)와 무(無)5)의 두 치우친 견해를 떠난 지혜로운 자는 의지하는 바가 없고 아주 깊어 소연(所緣)이 없으니 연기[緣生]의 의미가 성립하네.
만약 법이 비존재[無性]의 성품이라면 곧 온갖 과실(過失)이 발생하네.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도리 그대로 법의 존재의 성품[有性]을 살펴야 하리.
만약 존재의 성품[有性]을 실체로서 얻으려 한다면 어리석은 자의 분별과 같네. 비존재의 성품[無性]은 곧 원인이 없는 것인데 해탈의 의미가 어찌 성립하리오.
존재의 성품이라 말할 수 없고 비존재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잘 이해하면 큰 지혜로써 도리에 맞게 말하는 것이리라
열반(涅盤)6)과 생사(生死)가 다른 성품이라 관찰하지 말라. 열반(涅盤)7)과 생사의 두 성품에 차별이 있지 않네.
생사(生死)와 열반(涅盤)8) 두 가지는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만약 삶과 죽음을 잘 이해하면 이것이 곧 열반(涅盤)9)이라네. 그 발생의 성품이 존재한다[有性]는 [분별을] 깨부수었으니 소멸에 대한 분별 역시 그러하리라. 허깨비가 만든 일처럼 소멸은 현전(現前)하나 실체[實]로서 없네.
만약 소멸에 허물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유위(有爲)임을 알아야 하리. 현재의 법 조차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또한 괴멸의 법을 알 수 있으리오.
그 오온[諸蘊]은 소멸하지 않으며 번뇌[染]가 다하면 열반이니 만약 소멸의 성품을 잘 안다면 그는 곧 해탈을 얻으리라.
만약 발생의 법과 소멸의 법 둘을 얻을 수 없으리니 바른 지혜로써 관찰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발생하는 것이네.
법의 적정함을 본다면 모든 작용하는 것 역시 그러하네. 이 가장 뛰어난 법을 알면 법의 지혜를 얻음이 끝이 없으리.
연생(緣生)의 성품[性]을 볼 수 있다는 이 주장은 무견(無見)이 아니니 여기의 미묘한 성품[性]은 연생의 분별이 아니네. 불정각(佛正覺)께서 말씀하시길 존재는 무인(無因)이 아니라 하셨네. 만약 번뇌의 근원이 다하면 윤회의 형상을 깨부술 수 있으리라.
모든 법의 결정된 작용에 작용이 있고 취착이 있다고 본다면 전후(前後)의 시간을 어찌하여 인연(因緣)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는가.
어떻게 앞서 이미 발생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다시 다르게 변화하리. 그러므로 전후의 시간은 마치 보여지는 세간의 허깨비와 같네.
어떻게 허깨비가 발생할 수 있으며 어찌 집착할 것이 있으리오. 어리석은 자는 환영 속에서 허깨비를 찾아 실재(實在)라 여기네.
앞의 시점이 나중의 시점이 아니라는 집착의 소견 때문에 버리지 못하네. 지혜로운 자는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꿰뚫어 보고 마치 환영ㆍ불꽃ㆍ그림자와 같다 하네.
만약 발생은 소멸이 아니라 하면 이것은 유위의 분별이네. 그 연생(緣生)의 바퀴가 굴러도 나타나는 것이 없네 또한 이미 발생한 것[已生]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未生]의 그 자성(自性)에는 발생이 없네. 만약 자성(自性)에 발생이 없다면 발생이란 이름이 어찌 성립하리오.
원인이 적정하면 법이 다 소진될 것이니 이 소진은 성립할 수 없으리. 만약 자성(自性)의 소진[盡]이 없다면 소진이란 말이 어찌 성립하리오.
한치의 법도 발생하는 일이 없고 한치의 법도 소멸하지 않으니 그 발생과 소멸의 두 도리는 사태에 따라 의미에 따라 나타나네.
발생을 알면 소멸을 알고 소멸을 알면 무상(無常)을 아리니 무상의 성품을 만약 안다면 모든 법을 어찌 얻지 못하리.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발생하니 발생을 떠난 것[離]10)이고 소멸을 떠난 것이네. 마치 저 언덕에 도달한 자가 큰 바다를 보는 일과 같네.
만약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생(異生)11)은 자아[我]의 성품에 집착하네.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에 관한 전도망상은 온갖 잘못을 일으키네.
모든 법은 무상(無常)하며 고(苦)이고 공(空)이며 무아(無我)이니 여기에서 법의 여읨을 보면 지혜에 의해 존재의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꿰뚫어보네.
머묾도 없고 소연(所緣)도 없고 감관도 없으니 또한 성립하지 못하리. 무명(無明)의 종자에서 발생하고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시간을 여의었네.
어리석음의 극악한 성(城)은 마치 파초와 같이 실체가 없고 건달바(乾闥婆)의 성처럼 모두 세간의 허깨비에 의해 보이는 것이네.
이 세계의 범왕(梵王)이 처음 부처님의 여실(如實)한 바른 말씀을 하고 나중에 여러 성인들이 망집 없이 말하였으나 역시 차별이 없네.
세간은 어리석음에 가리워져 애욕은 상속하고 유전(流轉)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애욕을 잘 알아 평등하게 잘 말하네.
처음 모든 법의 존재를 말할 경우 존재에 대해 실체의 성품을 구하지만 나중에는 성품 또한 없음을 구하면 집착이 없이 존재를 여읜 것이네.
만약 여읨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듣는 대로 곧 집착이 생길 것이네. 지은 복덕(福德)의 업을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깨뜨리네.
앞서 평등하게 말한 대로 그 모두 업들은 진실하나 자성을 만약 잘 안다면 이것은 곧 (六道의)12) 발생이 없다는 것이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의한 것이며 잘 선양한 그대로이니 바로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의 법이네.
사대종(四大種) 따위와 의식[識]을 말씀하신 것 모두 평등하니 그 지혜를 증득할 때 허망도 없고 분별도 없네. 이 하나라도 여실(如實)하다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이라 하셨으나 이는 가장 뛰어난 것이며 망집이 없는 것이니 지혜가 없으면 하면 분별이네.
만약 마음이 산란하여 여러 마귀들과 더불어 편리함을 짓는 것이네. 여실하게 잘못을 버리면 여기에는 발생이 없으리
이와 같이 무명(無明)의 인연을 부처님께서 세간을 위해 말씀하셨네. 만약 세간에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무생(無生)이 되는가.
만약 무명(無明)이 소멸한다면 이미 소멸했으니 발생이 아니네. 발생과 소멸이란 이름에 서로 위배되니 무지(無智)에 의해 분별이 일어나네.
원인이 있으면 발생이 있고 인연이 없으면 머뭄도 없네 인연을 떠나 존재의 성품이 있으면 이 존재 역시 어찌 성립하리오.
머묾의 성품을 취할 수 있으면 존재의 발생과 머묾을 말할 수 있네. 여기서 의심이 더 많아져 말하길 이 법이 머물 수 있다고 하네. 만약 보리를 증득할 수 있다면 어디나 상주한다는 말이나 만약 머묾의 성질을 가히 취할 수 있다면 이 말은 도리어 발생이 있다는 것이네.
만약 법이 실체로서 있다고 말하면 무지(無智)에 의해 이 말을 한 것이네. 만약 법에 장소가 있다고 한다면 취하여도 역시 성립할 수 없네.
법에는 발생이 없고 자아도 없네. 지혜에 의해 진실한 성품을 깨달으니 영원과 무상(無常) 등의 형상은 모두 마음에 의해 일어난 견해이네
만약 존재들의 성품[多性]13)이 성립한다면 실체의 속성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것이네. 그 어찌 이 영원 등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으리.
만약 한 존재 성품[一性]14)이 성립한다면 욕망하는 바가 물 속에 달과 같으니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모두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네.
욕심과 성냄의 법은 아주 중하니 이로 인해 견해와 집착을 일으키네. 쟁론(諍論)하여 여읨의 성품을 잘 세워 실체라 집착하네.
그 원인이 여러 견해들을 일으키고 견해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네. 만약 이것을 바로 알면 견해도 번뇌도 다 없어지리니
법은 무상(無常)하나 연생(緣生) 때문에 나타남을 알아야 하네. 연생에도 역시 발생이 없나니 이것이 가장 높은 진실한 말씀이네.
중생의 삿되고 허망한 지혜는 진실함이 없어 실체에 대한 망상을 말하고 다른 사람과 쟁론을 일으켜 스스로 전도된 행위를 하네.
자신의 주장을 세울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의 주장은 어찌 있겠는가. 자신의 주장과 다른 사람의 주장 모두 없으니 지혜로써 쟁론이 없음을 알아야 하리.
한치의 법이라도 의지한다면 번뇌가 마치 독사와 같겠지만 만약 고요함도 없고 움직임도 없으면 마음은 의지하는 곳이 없으리니
번뇌는 마치 독사와 같아서 아주 중한 잘못을 일으키리니 번뇌의 독으로 뒤덮였는데 어찌 모든 마음을 볼 수 있겠는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그림자를 보고 그 망집 때문에 실재한다는 망상을 일으키듯이 세간의 속박 역시 그러하네. 지혜는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네.
성품은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혜안[智眼]의 경계가 아니네. 큰 지혜에는 본래 미세한 경계의 형상조차 일어나지 않네 .
물질에 집착하면 범부라 하고 탐욕을 여의면 소승의 성인이나 물질의 자성(自性)을 잘 이해하면 이를 가장 높은 지혜라 하네.
모든 선법(善法)에 집착하는 것이 마치 욕심의 전도 망상을 여읜 듯하나 허깨비 사람을 본 뒤에 (허깨비의) 작용을 떠나 실체를 구하는 것과 같네.
이 주장이 오류임을 알라. 존재 성품과 비존재의 성품을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네. 번뇌가 성립하지 못하고 성품의 빛이 삿된 지혜를 깨부수리라.
지혜는 오염[染]과 청정[淸淨]을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청정에도 의지하지 않네 곧 의지함이 있으면 곧 오염됨도 있으니 그 청정함이 다시 오류를 발생시키네.
극악한 번뇌의 법이 만약 자성(自性)의 여읨을 본다면 곧 마음에 동요가 없어 생사의 바다를 건널 것이네.
이 선법(善法)의 감로는 큰 자비에서 발생하며 여래의 말씀에 의지하므로 주장과 분별이 없네.
여기서의 이렇게 어려운 것을 말하였으니 지혜로운 사람의 견해에 따르면 성취하리라. 지혜로운 자는 수순문(隨順門)에 의해 꿰뚫어보니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대비(大悲)에서 나온 것이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을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여리(如理)에 따라 꿰뚫어볼 것이니 향하는 곳마다 이 믿음을 내어 그 중생을 구제하여 괴로움을 여의게 하라.
이 내용은 아주 깊고 또한 넓고 크니 나는 훌륭한 이타행을 위해 찬탄하노라. 큰 지혜의 말씀대로 이미 잘 말했으니 자신과 남의 어리석음을 모두 잘 깨부수었어라. 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이미 깨부수었고 여여(如如)하게 지은 바는 악마의 장애를 여의었으니 이로 인해 선취문(善趣門)을 잘 여니 모든 해탈의 일은 어찌 잃을 수 있겠는가.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자가 생천(生天)에 난다는 말은 기필코 진실한 글이니 설사 파계(破戒)했어도 바른 마음에 머문다면 비록 계를 훼손했어도 견해를 훼손한 것이 아니네.
종자의 성장은 무의(無義)한 것이 아니니 내용의 이로움을 보았기에 널리 베푸는 것이니 대비(大悲)로써 바른 원인을 삼지 않았다면 지혜로운 이가 어찌 생법(生法)에 대해 욕심을 내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