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0_0576_a_01L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1)
040_0576_a_01L大宋新譯三藏聖教序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 지음
040_0576_a_02L大宗神功聖德文武皇帝製



위대하구나,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헤매는 중생들을 교화해 인도하시고, 으뜸가는 성품을 널리 드날리셨도다. 넓고 크고 성대한 언변이여, 뛰어나고 훌륭한 자도 그 뜻을 궁구하지 못하는구나. 정밀하고 은미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여, 용렬하고 우둔한 자가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랴.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현묘한 진공(眞空)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비유는 끝이 없네.
040_0576_a_03L大矣哉我佛之教也化導群迷闡揚宗性廣博宏辯英彦莫能究其旨微妙說庸愚豈可度其源義理幽玄眞空莫測包括萬象譬喩無垠
법 그물[法網]의 벼릿줄을 모아 끝이 없는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사생(四生)을 고해에서 건지고자 삼장(三藏)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풀어주셨다.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추위와 더위를 이뤘으니, 크게는 선과 악을 말씀하셨고, 세밀하게는 항하의 모래알에 빗대야 할 정도네. 다 서술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온갖 일들을 마치 상법(像法)2)을 엿보듯이 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육정(六情)3)을 벗어나 길이 존재하고 천겁이 지나도록 오래갈 만한 것이며, 마치 수미산이 겨자씨에 담기 듯 여래께서 끝없는 세계에서 걸림이 없으신 것이다.
040_0576_a_07L綜法網之紀綱演無際之正教拔四生於苦海譯三藏之祕言天地變化乎陰日月盈虧乎寒暑大則說諸善惡細則比於恒沙含識萬端弗可盡述若窺像法如影隨形離六情以長存歷千劫而可久須彌納藏於芥子來坦蕩於無邊
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자 법이 동토에 전해졌고, 오묘한 이치를 선양하시자 대중이 돌아갈 길을 순순히 따랐으니, 피안(彼岸)은 보리요 애욕의 강은 생멸이라, 오탁의 악취(惡趣)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삼업(三業)의 길에서 빠진 자들을 건지셨다. 세상에 드리운 경은 궁구하기 어렵지만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영원히 태평하도다. 설산(雪山)의 패엽(貝葉)4)이 눈부신 은대(銀臺)와 같고, 세월의 연라(煙蘿)5)가 저 멀리 향계(香界)6)를 일으켰지만 높고 우뚝하여 측량하는 자가 드물고, 멀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도(道)를 깨달은 십성(十聖)7)과 덕(德)을 갖춘 삼현(三賢)8)께서 지극한 도를 건원(乾元)9)에서 일으키고 온갖 오묘함을 태역(太易)10)에서 낳아 무성한 생명체들을 총괄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빛을 비추었으며, 저 시시비비를 단절하고 이 몽매함을 깨우쳤던 것이다.
040_0576_a_14L達磨西來法傳東土宣揚妙理順從指歸彼岸菩提愛河生滅用行於五濁惡趣拯溺於三業途中經垂世以難窮道無私而永泰雪山貝葉若銀臺之耀目歲月煙蘿起香界之自遠巍巍穻測杳杳難名所以道資十聖德被三賢至道起於乾元衆妙生乎太易摠繁形類竅鑿昏明絕彼是非開茲蒙昧
040_0576_b_01L서역의 법사 천식재(天息災) 등11)은 항상 사인(四忍)12)을 지니며 삼승(三乘)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들이니, 불경13)의 참된 말씀을 번역하여 인간과 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었다. 이는 꽃망울이 거듭 터진 것이요, 국운이 창성할 때를 만난 것이니, 문장(文章)에서 오성(五聲)14)을 윤택하게 하였고, 풍율(風律)15)에서 사시(四始)16)를 드러냈다. 당당한 행동거지에 온화하고 아름답도다. 광대한 세월 어둠에 빠졌던 세계가 다시 밝아 현묘한 문이 환하게 드러났으며, 궤범이자 두루한 광명인 오묘한 법이 청정한 세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040_0576_a_22L有西域法師天息災等常持四忍早悟三乘貝葉之眞詮續人天之聖教芳猷重運偶昌時潤五聲於文章暢四始於風律堂堂容止穆穆輝華曠劫而昏墊重明玄門昭顯軌範而彌光妙淨界騰音
유정을 이롭게 하여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고, 장애를 만드는 일 없이 병들고 지친 자들을 모두 구제하였으며,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며 만물 밖으로 광대하게 노닐고, 부드러움으로 탐학한 자들을 조복해 어리석음을 씻고 깨우쳐 주었다. 소승의 성문(聲聞)을 연설하여 그 위의에 합하고 대승의 정각(正覺)을 논하여 그 성품을 정립하자, 모든 생명체들이 깨달아 복을 받았고, 삼장의 교법에서 결락된 것들이 다시 흥성하였다.
040_0576_b_06L利益有情俱登覺岸成鄣礙救諸疲羸冥昧慈悲浩汗物柔伏貪很啓滌昏愚演小乘聲聞合其儀論大乘正覺立其性含靈悟而蒙福藏教缺而重興
허깨비에 홀려 길을 잃은 것이니, 화택(火宅)17)은 심오한 비유로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런 가르침을 시설하셨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에 “선념(善念)이 생기면 한량없는 복이 남몰래 찾아오고, 악업(惡業)이 일어나면 인연 따라 모두 타락한다”18)는 말씀으로 사부대중을 길들이고 시방세계에서 보살행을 쌓았다. 금륜왕[金輪]19)에게 꽃비를 쏟아 붓고 대궐에서 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보호하였으니, 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20)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홍수도 휩쓸지 못하리라. 맑고 고요해 담담한 것이 원만하고 밝으며 청정한 지혜요, 성품이 공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망상으로부터 해탈하는 인연이니, 이로써 마음의 밭에서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우주에서 청량을 얻을 수 있으리라.
040_0576_b_10L幻化迷途宅深喩雖設其教不知者多善念生而無量潛臻惡業興而隨緣皆墯調御四衆積行十方澍華雨於金輪恒沙於玉闕有頂之風不可壞無際之水弗能漂澄寂湛然圓明淸淨之智慧性空無染妄想解脫之因緣以離煩惱於心田可以得淸涼於宇
짐은 부끄럽게도 박학하지도 못하고 석전(釋典)21)에 능통하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문을 써서 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이겠는가? 반딧불이나 횃불과 같아 찬란한 태양과 견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작은 소라로 바다를 측량하려다 그 깊은 연원을 끝내 밝히지 못하는 자일 따름이로다!
040_0576_b_18L朕慚非博學釋典微閑豈堪序文以示來者如縻螢爝火不足比之於皎日將微蠡量海未能窮盡於深淵者哉


어제신계성교서(御製新繼聖教序)22)
040_0576_b_21L御製新繼聖教序
040_0576_c_01L

높고 밝은 것이 처음으로 나뉘자 삼진(三辰)23)이 비로소 차례로 나타났고, 두텁게 실어주는 것이 비로소 안정되자, 만물이 이로써 실마리를 일으켰으니, 맑음과 탁함의 본체가 이미 밝혀진 것이요, 선과 악의 근원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이런 다음에 문물(文物)로 그 가르침을 세우고 바른 법전[正典]으로 그 세속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익의 공은 모두 이치로 돌아간다.
040_0576_b_22L高明肇分三辰方乃序其次厚載初定萬彙於以發乎端淸濁之體旣彰善惡之源是顯然後以文物立其教以正典化其俗利益之功同歸於理於是乎
이렇게 상법(像法)이 서쪽 나라에서 와 진제(眞諦)가 중국에 유포되었지만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진실한 이치는 궁구할 방법이 없고, 구위(九圍)24)를 포괄하는 현묘한 문은 궁구할 수가 없다. 허망한 생각으로 말하자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참된 모습을 나타내자면 터럭 하나에도 원만하니, 광대한 그 가르침을 어찌 기술할 수 있겠는가!
040_0576_c_04L像法來於西國眞諦流於中洞貫千古眞實之理無以窮囊括九圍玄妙之門莫能究言乎妄想五蘊皆空現乃眞容則一毫圓滿大之教豈能紀述者哉
삼가 살피건대,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께서는 법성이 두루 원만하시어 인자함을 널리 베푸셨다. 오랑캐들을 교화하시자 만방(萬邦)이 바큇살처럼 몰려들어 온 백성을 인수(仁壽)의 영역에 올려놓으셨고, 교법을 숭상하시자 사해(四海)가 구름처럼 뒤따라 창생에게 풍요로운 땅을 베푸셨다. 존귀한 경전이 방대함을 보시고는 방편을 시설해 물에 빠진 자들을 구제하셨고, 법계가 광활함을 알시고는 정진을 행하여 나태한 자들을 거두셨다. 이에 아늑한 절을 선택해 저 참된 문서25)들을 교열하고는 천축의 고승들에게 명령하여 패다라(貝多羅)의 부처님 말씀을 번역하게 하셨다.26)
040_0576_c_08L伏睹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法性周圓仁慈普布化蠻貊則萬邦輻湊躋烝民於仁壽之鄕崇教法則四海雲從惠蒼生於富庶之域見尊經之浩汗設方便以救沈淪知法界之恢宏精進而攝懈怠乃擇其邃宇校彼眞命天竺之高僧譯貝多之佛語
상아 붓대가 휘날리며 황금의 글자를 완성하고, 구슬을 엮어 다시 낭함(琅函)에 안치하자27) 용궁(龍宮)의 성스러운 문장28)이 새롭게 탈바꿈하였으니, 취령(鷲嶺)의 필추(苾芻)29)들마저 우러러 감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승(三乘)이 모두 하나로 꿰뚫어지고 사제(四諦)가 함께 원만해졌으니, 고(苦)가 공하다는 참되고 바른 말씀을 완전히 밝히고, 정밀히 연구한 비밀스러운 뜻을 환히 드러냈다. 상(相)을 찬탄하는 상이 바로 진실한 상이고, 공(空)을 논하는 것도 공하여 모조리 공이라 하였으니, 화엄(華嚴)의 이치와 궤도를 같이하고, 금상(金像)30)의 가르침과 규구(規矩)31)가 동일하였다.
040_0576_c_15L管翻成於金字珠編復置於琅函宮之聖藻惟新鷲嶺之苾芻仰歎是三乘共貫四諦同圓盡苦空眞正之言顯祕密精硏之義讚相相乎實論空空乎盡空華嚴之理合軌轍金像之教同規矩
040_0577_a_01L짐은 대업(大業)을 계승하여 삼가 황위에 임했기에 항상 조심하면서 만백성을 어루만지고 매일 긍긍하면서 선황의 훈계를 지켜왔다. 불교경전[釋典]에 대해서는 더구나 정밀하지도 상세하지도 못하니, 진실로 그 그윽하고 심오한 뜻을 어찌 탐색하고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원(譯經院)32)의 서역 승려 법현(法賢)33)이 간절한 글을 올리고 그 뜻을 너무도 열심히 피력하였다. “선황제께서는 참된 교화의 바람을 크게 펼치고 부처님의 뜻을 높이 전하셨으며, 전대의 왕들이 빠뜨린 전적을 흥성시키고 각로(覺路)34)의 무너진 기강을 다시 떨치셨다”고 하면서, 하늘이 이룬 공로를 높이 휘날리고 성황의 글35)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나에게 서문을 지어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해달라고 청하였다.
040_0576_c_21L朕纘嗣丕搆恭臨寶圖常翼翼而撫兆民兢兢而守先訓以至釋典尤未精詳諒其幽深曷能探測有譯經西域僧法賢奏章懇切致意專勤先皇帝大闡眞風高傳佛旨興前王之墜典振覺路之頹綱欲旌天造之功庸用廣聖文之述作請予製序繼聖教焉
성고(聖考)36)께서 승하하시고 추호(追號)37)가 아직 잊히지도 않았는데 정사 밖에 마음을 둘 겨를 어디 있었겠는가? 담제(禫祭)38)를 마치고 이제야 생각이 은미하고 오묘한 곳에 미치게 된 것이다. 어려서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능통한 재주가 본래 부족한 걸 어쩌랴. 법해(法海)의 나루터와 언덕을 어찌 궁구하리오! 공문(空門)의 문턱으로 나아가질 못하니, 대략 대의나마 서술하여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할 따름이다. 소발자국에 고인 빗물이라 태양을 씻는 파도에 빗대기에는 부족하니, 한척짜리 채찍이 어찌 드넓은 하늘의 그림자를 측량할 수 있으랴! 이렇게나마 짧은 서문을 지어 이로써 성인들의 공로를 기록할 따름이다.
040_0577_a_07L聖考上僊追號罔息政事之外何睱經心今已禫除思臻微奧雖幼承慈奈夙乏通才焉窮乎法海之津涯莫造乎空門之閫域略敷大意以徇輿情蹄涔不足擬浴日之波尺箠豈能量昊天之影聊述短序以紀聖功者焉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제1권
040_0577_a_14L佛毋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卷第一


삼보존(三寶尊) 지음
040_0577_a_15L三寶尊菩薩造
대역룡(大域龍) 본론(本論) 지음
040_0577_a_16L大域龍菩薩造本論
시호(施護) 한역
040_0577_a_17L西天譯經三藏朝奉大夫試光祿卿傳法大師賜紫沙門臣 施護 等奉 詔譯


반야바라밀에 귀명하오니
일체 제불을 출생시키는 어머니이시며
그 반야가 훌륭히 의지하는 바[勝所依]가 되어
궁극적으로 집착 없이 모든 번뇌를 씻으리다.
040_0577_a_18L歸命般若波羅蜜
出生一切諸佛母
而彼般若勝所依
畢竟無著滌諸垢

모든 부처가 자성을 여의고 취(趣)하게 하고
중생을 즐거움[喜]과 훌륭함[勝]이 상응하게 하여
주체[能取]와 대상[所取]가 둘 다 없어져
그 중에 상성(常性)이 가히 성립하지 않으리다.
040_0577_a_20L爲諸佛趣自性離
令衆生喜勝相應
能取所取二俱亡
此中常性不可立

그 2취(二取)의 해탈로 말미암은 까닭에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모두 없어지며
일체지(一切智)로부터 출생하여
지(智)로 능히 피안에 도달하는 자에게 머리 숙인다.
040_0577_a_22L由彼二取解脫故
斷見常見悉遣除
從一切智所出生
稽首智能到彼岸
040_0577_b_02L
내가 지금 대역룡(大域龍) 보살이 지은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 중에서 간략하게 그 내용[行相]을 주석하는 것은, 모든 지식이 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뜻을 생각하여 간략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 송에서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040_0577_a_24L我今於彼大域龍菩薩所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中略釋行相爲令諸小智者思念是義可略知故如彼頌言

수승한 지혜[勝慧] 등을 성취하여
무이지(無二智)이신 여래여,
그 중 뜻이 상응하니
그 소리에는 교(敎)와 도(道)의 두 가지가 있다.
040_0577_b_05L勝慧等成就
無二智如來
彼中義相應
彼聲教道二

여기에서 ‘수승한 지혜[勝慧] 등’이라고 한 것은 곧 지혜에 입각하여 피안에 이른다는 것이다. 수승한 지혜란 이른바 문혜(聞慧)와 사혜(思慧) 등의 지혜를 말한다. 안(岸)은 언덕이고, 이른다는 것은 가서 도달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청정한 묘혜(妙慧)로 인해 능히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마땅히 물어야 한다.
040_0577_b_07L此言勝慧等卽慧彼岸到勝慧謂聞思等慧岸者邊岸到者往而得到謂由淸淨妙慧能到彼岸此中應問

묻노니 어떠한 사람이 능히 이르는가?
답하기를 모든 보살이라 하였다.
040_0577_b_10L何人能到謂諸菩薩

그들은 무엇을 성취시키는가? 바로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한다. 성취란 이루어낸다는 뜻이니, 이와 같이 과성(果性)은 증상의요(增上意樂)를 이루어내는 까닭이다. 8천 송 반야교(般若敎) 등을 열어 보이며 설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반야바라밀다의 성취라고 말한다. 반야바라밀다의 소리에 있어서는 이루어지는 바가 없는 까닭이다.
040_0577_b_11L彼何所成就卽般若波羅蜜多成就成就者辦義如是果性增上意樂所成辦故如八千頌般若教等開示演說是謂般若波羅蜜多成就非於般若波羅蜜多聲中有所成故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그 성취를 설하는가? 송에서 '무이지(無二智)'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무이'란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을 이름 하는 것이다. 이 지(智)가 무이(無二)인 것을 무이지라 이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하는 이 속의 뜻은 반야바라밀다는 주관[能取]과 객관[所取]을 떠나기에 무이지라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지를 성취하는 까닭이다. 만약 혹여 그 색 등의 경계 가운데 대상의 상에 집착하게 되면 그 주관인 마음은 무이지에 장애가 있는 것이다.
040_0577_b_16L若爾當以何義說彼成就所以頌言無二智無二無有二相名爲無二是智無二名無二智如是所說此中意者般若波羅蜜多離能取所取卽無二智菩薩成就如是智故若或於彼色等境中著所取相彼能取心於無二智卽有對

묻노니 만약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한다면 왜 지금 여래라고 말하지 않는가?
040_0577_b_23L若諸菩薩如是成就般若波羅蜜多何故今此不言如來
040_0577_c_02L말하자면 여래는 모든 곳에서 제행을 부지런히 닦아 성불을 얻는 까닭에, 논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여래'라고 하였다. '여래'란 그 여래를 말한다. 그란 곧 이 반야바라밀다이다. '여래'란 여실(如實)하게 설하는 까닭에 여래라 이름 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두루 모든 분별의 망(網)을 떠나는 까닭이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이 여래이다. 이 가운데는 둘이 없으며[無二] 또한 분별도 없다[無分別]. 무이[無二]란 여래가 반야바라밀다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반야바라밀다에 나아가지도 않는 것이다. 무엇을 무분별이라 이름 하는가? 이른 바 등불의 빛과 같으니, 이것은 이와 같은 뜻이다.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여실히 알아야 한다. 모든 지자(智者)가 설하는 바는 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40_0577_b_24L謂以如來於一切處勤修諸行得成佛故論自答言如來如來者謂彼如來彼者是般若波羅蜜多如來者如實而說故名如來以彼如是普離一切分別網故般若波羅蜜多卽是如來此中無二亦無分別無二者如來不離般若波羅蜜多亦不卽般若波羅蜜多何名無分別謂如燈光此如是義故應當如實了知如諸智者所說頌言

지(智)는 공을 떠나서는
조그마한 법도 가히 얻는 바가 있지 않으니
여기에서 떠난다는 말의 뜻은
성(性)을 떠나는 것이지 멀리 떠나는 것은 아니다.
040_0577_c_10L非智離於空
有少法可得
此意言離者
性離非遠離

그 두 공[二空]은 식과 달리
조그마한 법이라도 가히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두 무[二無]는 실로 돌고 돌아서
두 아성[二我性]은 성립하지 않는다.
040_0577_c_12L彼二空異識
無少法可著
二無實可轉
二我性不立

이것을 여실상(如實相) 가운데 완전히 증득하여 알기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한다. 이러한 까닭에 주관과 객관이 만약 성(性)이 있다면, 모든 분별에는 의지하는 바가 있다.
040_0577_c_14L由此證知於如實相中世尊如是說是故能知所知若有性者諸分別等有所依止
여기에서 마땅히 묻는다. 만약 반야바라밀다의 무이지를 성취한다면, 어찌하여 송에서 교(敎)와 도(道) 둘을 설하는가? 송에서 '그 중 뜻이 상응하니 그 소리에는 교와 도 둘이 있다'고 답하였다. '그 중'이란 그 소리 중에 있어서 교와 도의 둘을 포함하는 것이다. '뜻이 상응한다'란 말은 차례로 지금 설하겠다.
040_0577_c_17L此應問云若般若波羅蜜多成就無二智者何故頌說教道二頌自荅言彼中義相應彼聲教道彼中於彼聲中含教道二義次第今說
040_0578_a_02L 말하자면 그 교와 도의 두 가지는 반야바라밀다의 뜻과 화합하여 상응한다. '그 소리에 교와 도의 둘이 있다'라는 말에서 '그 소리'란 앞에서 이미 주석한 것과 같다. '교와 도의 둘'이란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의 방편이다. 그 소리 속에 간직하고 있는 까닭에 마치 종자와 같이 간직된 자리에 있으며, 그 뜻도 또한 그러하다.
040_0577_c_21L謂彼所有教道二種與般若波羅蜜多義和合相應彼聲教道二彼聲之言如前已釋教道卽是般若波羅蜜多方便於彼聲中所含藏故猶如種子在含藏位其義亦然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다의 소리는 두 가지 뜻을 설하는데, 첫째는 승상(勝上)이고, 둘째는 종류(種類)이다. 그 승상이란 무이지의 상을 말하고, 그 종류란 두 가지 종류로 교도와 자성이다. 이 두 가지가 화합하고 시설함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널리 설해지고 표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이와 같은 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 중의 말뜻은 32품으로 개연(開演)하여 증가하거나 감소되는 것이 없다. 이 중에서 설한 말씀은 열 가지 분별산란(分別散亂)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또 열여섯 가지 공(空)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시 또 송에서 말하였다.
040_0578_a_03L如是當知般若波羅蜜多聲說二種義一者勝上二者種類勝上者謂無二智相其種類者有二種類卽教道自性由是二種和合施當知乃有宣說表示復由依止如是等故此般若波羅蜜多中所有語開演三十二品無增無減此中所說爲遣十種分別散亂又復顯示十六種空復次頌曰

의지(依止) 및 작용(作用)으로
사업(事業)이 동일하게 수(修)를 일으키며
상(相)과 죄(罪)를 분별하고
칭찬(稱讚)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040_0578_a_11L依止及作用
事業同起修
分別相及罪
稱讚如次說

그 송에서와 같이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의지ㆍ작용ㆍ사업ㆍ상(相)ㆍ죄ㆍ칭찬 등이다. 이것들이 무엇인지를 지금 차례로 설한다.
040_0578_a_13L如彼頌中有其六種所謂依止作用事業稱讚等此中云何次第今
'의지'라고 말하는 것은 불세존으로, 최초로 지(智)를 설하여 그로 말미암아 이처럼 의지할 바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깊고 깊은 법문을 능히 상속하여 연설하였으니, 수보리와 같은 자들은 그 능히 말할 바가 아니다. 능히 이와 같기에 화합하여 의지하는 것이다.
040_0578_a_16L所言依止謂佛世尊最初說智彼如是所依止故所有甚深法門而能相續演說非須菩提等彼能說者能爲如是和合依止

묻노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지(智)의 상은 무엇인가?
040_0578_a_20L佛所說智相云何
040_0578_b_02L답하기를 부처님께서 『팔천송반야경』에서 최초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수보리야, 너의 요설(樂說)에 따라서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일으키리라.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와 같이 출생 등은 이와 같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건립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셨다. 그 수보리는 곧 능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널리 설하고, 더욱이 장애가 없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설하는 모든 뜻은 그 경 가운데 제1품에서 설하는 까닭이다.
040_0578_a_21L如佛於『八千頌般若經』初作如是言須菩提隨汝樂說諸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多應當發起如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多出生等爲由如是佛威神力所建立故彼須菩提乃能如是宣說般若波羅蜜多而無鄣礙此中如是所說諸義說彼經中第一品故
'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증상(增上)의 작용으로, 이른바 부처님께서는 지(智)를 설하시어 증상시키시는 까닭이다. 이 법을 설하기 위해 설(說)을 일으키는 작용은 곧 보살 등 대중의 작용 순서가 이와 같은 까닭이다. 따라서 곧 능히 이 법을 일으키고 널리 설한다.
040_0578_b_05L所言作用卽增上作用謂佛說智爲增上故爲說此法起說作用卽菩薩等衆作用次第由如是故乃能發起宣說此法
'사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행위[所作]의 사업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일어나고,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이와 같이 안주한다. 이러한 까닭에 부지런히 수(修)를 일으키고, 열 가지 분별산란법을 없애고, 그리고 차례로 열여섯 가지의 공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78_b_09L所言事業謂卽所作事業如是發由此般若波羅蜜多教如是安住是故勤勇起修除遣十種分別散亂及次第分別十六種空如是應知
'상(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타낸다[標表]는 뜻이다. 또 상은 형상(形相)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만약 보살이 이 반야바라밀다의 법문을 쓸 때나 읽을 때 어떤 사람이 의심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마군의 일[魔事] 등의 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퇴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보살의 상이다.
040_0578_b_13L所言標表爲義又相卽形相中云何謂若菩薩於此般若波羅蜜多法門若書時若讀時或有人等起疑心者當知皆是魔事等相若不退是菩薩相
'죄'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을 훼방하거나, 정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혹은 반야바라밀다에 대해 나쁜 마음[毒想]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두 죄의 과보를 부르는 것이다.
040_0578_b_18L所言謂於此法作鄣難事及謗正法等或於般若波羅蜜多而生毒此等皆是感招罪報
040_0578_c_02L'칭찬'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위 과(果)를 칭찬하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채움으로써 보시를 한다 해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수지하는 자의 복은 그것을 능가한다. 이 중 또 어떠한 뜻을 설하여 의지로 삼는가?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040_0578_b_21L所言稱讚謂稱讚果如經云若有人以滿三千大千世界七寶持用布若人於此般若波羅蜜多受持等其福勝彼此中復說何義而爲依故有頌言

믿음을 갖추는 것을 체로 삼아
스승과 제자가 서로 증설(證說)하고
설하는 때와 설하는 장소 등으로
자량(自量)의 성취를 얻는다.
040_0578_c_03L具信以爲體
師資互證說
說時說處等
得自量成就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믿음을 갖춘다'는 말에서 '믿음'이란 이른바 신심(信心)이 청정한 것이다. 모든 보살은 그 믿음에 의지하는 까닭에 깊고 깊은 가르침에 있어 능히 승해(勝解)를 일으킨다. 그 믿음이 있는 까닭에 이름하여 믿음을 갖춘다고 하고,. 그 믿음을 갖추었기 때문에 능히 체가 되는 것이다. '체'란 신체이다. 비유하면 몸이 있는 것이 원인이 되어 곧 능히 계속하여 제행(諸行)을 닦는 것과 같다. 믿음의 뜻도 또한 그러하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증설한다'는 말은 이른바 세존대사가 이 법을 널리 설하고, 보살 등의 제자도 또한 각기 널리 설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설하고 나서 마땅히 표시하는 것이다. '설하는 때와 설하는 장소'라는 말에서, '때'란 이른바 화합하여 짓는 것으로 설하는 때를 표시한다. 각별히 결정하여 얻는 것이 장소의 의미를 인지(印持)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78_c_05L此中云何所言具信等者信謂信心淸淨謂諸菩薩由彼信故於甚深教能生勝解彼信有故名爲具信彼信具故而能爲體體謂身體譬如有身爲因乃能相續修作諸行信義亦然所言師資互證說謂世尊大師宣說此法菩薩等資亦各宣說如是說如應表示所言說時說處等所謂和合所作表示說時各別決定印持所得處義應知

묻노니 그 설법하는 자는 마땅히 어떠한 뜻을 얻는가?
040_0578_c_15L彼說法者當得何義
송 자체에서 답하기를 '자량의 성취를 얻는다'고 말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자(自)'란 자기라는 뜻이다. '양(量)'이란 자량, 곧 스스로 얻는 바의 양과 서로 다르지 않는 까닭이다. '성취'란 이루어낸다는 뜻이니, 설법은 설하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루어내는 까닭이다. 그 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40_0578_c_16L頌自答言得自量成就義云何者己義謂自量自所得量無相違故成就者成辦義謂說法諸所說事悉成辦故如彼頌言

설법하는 자는 마땅히
세간이 때[時]와 장소[處]의 둘임을 알아야 하니
설하는 자는 증득과 동일한 경지[同證]를 갖고
그 후에 양(量)과 같은 것을 얻는다.
040_0578_c_19L說法者應知
世閒時處二
說者有同證
然後得如量

이것은 무슨 말인가? '설법하는 자'라는 것은 설법하는 사람을 말한다. '세간은 때와 장소의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세간상에 있어 먼저 마땅히 설하는 때와 설하는 장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뒤에 지(智)에 의지해 이치에 맞게 설하는 것이다.
040_0578_c_21L此中云何所言說法者謂說法人閒時處二謂於世閒相中先當了知說時說處然後依智如理而說
040_0579_a_02L묻노니 이것은 무엇을 설하는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설하는 자는 증득과 동일한 경지[同證]를 갖는다'고 말하였으니, 이른바 동증화합(同證和合)의 설이 있는 까닭이다.
040_0578_c_24L此何等說頌自荅言說者有同證有同證和合說故

묻노니 무엇이 '양과 같은 것을 얻는다'는 것인가?
답하기를 이른 바 이 진실의 언량(言量)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설하는 때와 장소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또 어떠한 뜻으로 32품을 인가하는가? 그 까닭을 송에서 말한다.
040_0579_a_03L云何得如量所謂得此眞實言量非今所說時處等義此中復以何義印可三十二品故有頌言

모든 여시집(如是集)과
아문(我聞) 등의 말씀은
여시의(如是義)와 화합하니
최상이 삼십이(三十二)이다.
040_0579_a_06L一切如是集
我聞等所說
和合如是義
最上三十二

여기에서 '모든 여시(如是)' 등이라는 말에서 '모든'이란 남김이 없다는 뜻이다. 무엇이 남김 없다는 것인가? 이른 바 여시의 취집(聚集)과 아문(我聞) 등의 취집으로, 여시란 여시소작(如是所作) 또는 여시차법(如是此法)을 말한다. '아문 등'이라는 말에서 '아'란 자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문'이란 설법을 듣는 것으로 곧 이 법을 듣는다는 말이다. 이 중의 총체적인 뜻은 여시나 혹은 아(我)나 혹은 문(聞) 등이 총체적으로 모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여시아문(如是我聞) 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040_0579_a_08L此言一切如是等者一切者普盡義何等普盡謂如是聚集我聞等聚集如是謂如是所作如是此法所言我聞等者自相所成謂聽聞卽聽聞此法此中摠意若如是若我若聞等摠聚而成故云如是我聞等

묻노니 ‘등’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을 취하는가?
답하노니 ‘등’이란 때와 장소를 똑같이 포섭하는 말이다. '설한다'는 말에서 '설'은 말씀하여 보이는[說示]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저 여시아문 등의 말씀을 설하신 것이다. '여시의와 화합하니'라는 말은 이른바 저 설하는 자가 지었거나 짓지 않았거나 간에 그것들을 화합하여 처음부터 차례로 널리 이와 같은 최상의 뜻을 설하는 까닭이다. '최상'이란 최극승상(最極勝上)으로, 그 언설의 체는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040_0579_a_14L所云等者等取何義等者等攝時處所言說者說謂說示是故此中說彼如是我聞等所言和合如是義謂彼說者若作若非作彼等和合從初次第宣說如是最上義故最上最極勝上彼言說體者謂言詮故

묻노니 이것은 무엇을 설한 것인가?
송에서는 스스로 답하여 '최상이 삼십이(三十二)'라고 말하였다. '삼십이'란 수량을 결정한 것으로, 이른바 여시를 설하는 숫자 중이란 뜻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설한 것에는 감소(減少)란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79_a_20L此何所說頌自答言最上三十二三十二者數量決定謂說如是數中義故是故當知此中所說亦無減少
040_0579_b_02L
묻노니 『십만송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여러 종류의 공을 설하였으며, 이 『팔천송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열여섯 가지 공(空)을 설하였다. 그 설하는 바는 어떻게 동일한가? 이 의문이 있기 때문에 송에서는 말한다.
040_0579_a_23L『十萬頌般若波羅蜜多經』中說多種空此『八千頌般若波羅蜜多經』中說十六空與彼所說如何齊等爲有此疑故頌止言

16상(相)을 분별하니
그 차례와 같이 공(空)하고
8천 송 중에 설하여
다른 방편설을 요지(了知)한다.
040_0579_b_04L分別十六相
空如其次第
八千頌中說
了異方便說

여기에서 '분별'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갖가지 분류로 구별하는 까닭에 이름 하여 분별이라 한 것이다. 또 분별이란 곧 종류라는 뜻이다. 그 종류란 종종성(種種性)의 뜻이다. 이 말은 무엇을 분별한다는 것인가? 이른바 공(空)을 분별한다는 말이다. 어떠한 공을 분별하는 것인가? 바로 열여섯 가지 공이다. 열여섯이란 수로 나눈 것이다.
040_0579_b_06L此言分別等者重重分類所區別故名爲分別又分別者卽種類義彼種類者種種性義此中何所分別謂分別空分別何等空卽十六空十六者數之分限
여기서 설하는 열여섯 가지 공과 그 십만송반야경에서 설하는 뜻은 서로 같다. 송에서 '8천 송 중에 설한다'고 한 것은, 곧 『팔천송반야경』에서 설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설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그 차례와 같이'라고 말한 것이다. '차례와 같이'란 넘어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떠한 법이 넘어서지 않는 것인가? 이른바 공이라는 말을 설하는 것이다. 그 까닭에 다음 송에서 '다른 방편설을 요지한다'고 말하였다.
040_0579_b_11L此說十六空與彼『十萬頌般若經』中所說義自齊等頌云八千頌中說是卽『八千頌般若經』中所彼如何說是故頌言如其次第次者不過越義何法不過越謂說空之聲故下頌言了異方便說
그 뜻은 무엇인가? '다른'이란 별이법(別異法)이니 그 별이법 가운데에 그 방편을 취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 '설'이란 다른 방편을 설하는 것이다. '요지한다'란 완전히 아는 것으로, 응당 이와 같이 분별하여 완전히 안다는 말이다. 이른바 이 다른 방편을 요지하고 분별하여 공을 설하는 것이다. 또다시 송에서 말한다.
040_0579_b_16L其義云異者謂別異法於彼別異法中取其方便是故說者異方便說了者了應當如是分別了知所謂了知此異方便分別說空復次頌言

지금 이 8천 송은
설한 뜻 그대로 감소할 것이 없으니
원하는 바에 따라 송을 생략한 것이
여시의(如是義)의 말씀과 같다.
040_0579_b_20L今此八千頌
如說義無減
隨所樂頌略
如是義如說

여기에서 지금 이 '8천 송'이라 말하는 것은 법을 가리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감소할 것이 없다'는 것은 결여되거나 감소하는 것이 없는 뜻이다. 무엇이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른바 '설한 바 그대로라는 뜻'이다. 즉 그 설하는 바의 뜻이 스스로 원만한 것이다.
040_0579_b_22L此言今此八千頌指法應知謂無缺減何等無減謂如說義卽如其所說義自圓滿
040_0579_c_02L
묻노니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이 설에서 왜 송을 생략하는가?"
040_0579_c_02L或有問云中所說何故頌略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원하는 바에 따라 송을 생략한다'고 말했다. 지금 여기에서 단지 8천 송만 설한 것은 그 듣는 사람[聽者]에게 가장 뛰어난 의요[最勝意樂]에 마땅히 일치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송을 생략한 것이다. '생략[略]'이란 소략(少略)하다는 말이다. '여시의라는 설과 같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또 무엇을 말한 것인가? 송에서는 '설과 같다'고 말하였다. '설과 같다'는 말은 곧 그 언설과 같다는 뜻이다.
040_0579_c_03L頌自荅言隨所樂頌略今此但說八千頌者爲彼聽者最勝意樂所宜聞故是故頌略略謂少略所言如是義如說謂卽如是所說之義彼復云何頌言如說如說謂如其言說
이와 같은 설을 이치에 맞게 성취하는 것이니, 반야바라밀다의 법 가운데 뜻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연(軟)ㆍ중(中)ㆍ상품(上品)과 근성으로 욕(欲)에 따라 받아들이니, 이러한 까닭에 세존은 이 원인에 기인하여 줄여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설한 것이다. 그 순서에 따라 다른 방편을 써서 열여섯 가지의 공을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설을 드러내고 나타내 보인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040_0579_c_08L如是所說如理成就非般若波羅蜜多法中義有差別爲耎中上品所有根性隨欲攝受故世尊由此因故少略說此般若波羅蜜多如其次第以異方便說十六如是所說顯明開示復次頌言

보살의 아(我)는 보이지 않으니
이 말씀은 실로 적묵(寂默)하며
능히 6근[內諸事]을 받는
그것을 곧 공(空)이라 설한다.
040_0579_c_13L菩薩我不見
此說實寂默
能受內諸事
彼說卽爲空

여기에서 '보리살타(菩提薩)' 등이라고 한 것은 보리와 살타를 말하는데, 이것이 곧 보리살타이다. 보리란 무이지(無二智)를 말하고 살타란 곧 보리를 구하는 자인데, 이 살타를 보리살타라 이름 하는 것이다. 즉 그 보리살타의 아(我)는 가히 보이지 않고, 또한 얻어지지 않는다. 아(我)란 자기란 뜻이다. '이 설은 실로 적묵하다'라고 말한 것에서 '이'란 여시의 뜻이다. '설'이란 언설을 말한다. '실로'란 진실이니, 곧 승의제(勝義諦)이다. '적묵'이란 곧 이 세존으로, 이른바 불세존의 신(身)ㆍ어(語)ㆍ의업(意業)은 모두 적묵과 상응하는 까닭이다.
040_0579_c_15L此言菩提薩埵等者菩提及薩埵卽是菩提薩埵菩提者謂無二智卽求菩提者而此薩埵名菩提薩卽彼菩提薩埵我不可見亦不可者己義所言此說實寂默者如是義謂言說眞實卽勝義諦寂默者卽是世尊謂佛世尊身語意業皆相應寂默故
040_0580_a_02L 이와 같은 설은 부처님의 위신력의 가지(加持)로 말미암는 까닭에 수보리로 하여금 능히 여기에서 이 말을 설하게 한 것이다. '그것을 곧 공이라 설한다'한 말에서, '그'란 바로 저 세존이다. '설한다'란 말로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불세존이 설하는 이것을 공이라 한다. 어떠한 법을 설하는 것을 공이라 하는가? 그래서 송에서는 '능히 6근[內諸事]을 받는'이라고 말한 것이다. '내제사(內諸事)'란 이른바 안(眼) 등의 내육근처(內六根處)를 말하는 것이다.
040_0579_c_23L如是等說由佛威神所加持故令須菩提能於此中說是語義所言彼說卽爲空等者者卽彼世尊謂說示謂佛世尊說此爲空說何法爲空所以頌言受內諸事內諸事所謂眼等內六根處名內諸事
저 어리석은 자는 실재로 집착하는 까닭에, 세존은 그 내사가 모두 공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새로이 발심한 보살도 그 가운데에 실제 자성이 있다고 분별한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내(內)는 궁극적으로 공이라고 설한다. 또 다음의 송에서 말한다.
040_0580_a_06L以彼愚夫執實受世尊說彼內事皆空又新發意菩薩於中分別有實自性如是等言內空竟復次頌言

색(色)과 그리고 색의 자성
이 말씀도 또한 공이니
이것들 6처[外諸處]는
받는 바의 부분에 모두 머무른다.
040_0580_a_09L色及色自性
此說亦復空
此等外諸處
所受分皆止

여기에서 '색과 색의 자성' 등이라 말한 것은 색성(色聲) 등의 외육경처(外六境處)를 말한다. 또 '색'이란 바로 이 색처(色處)이다. '색의 자성'이란 말에서 색은 자색(自色)으로, 만일 상(相)을 갖는 것이라면 그 상은 불생(不生)이며, 불생인 까닭에 곧 자성은 공인 것이다. 그런데 그 자성은 또한 가히 파괴되지 않는다. 비유하면 사람의 뿔과 같은 까닭이니,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설'이라 말한 것은 이 여시설ㆍ여시 등의 말을 가리킨다. 다시 또 이 가운데서 세존께서는 모두를 머무르게 한다[止]. 머무른다는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040_0580_a_11L此言色及色自性等者謂色聲等外六境處又色者卽是色處所言色自色謂自色如所有相彼相不生以不生故卽自性空然彼自性亦不可壞譬如人角其義應知所言此說謂此如是說如是等言復次此中世尊皆止止者不作義

묻노니 어떠한 법에 머무르는가?
송에서는 말하기를 '이것들 6처[外諸處]'라고 하였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외제처(外諸處)란 이른바 색 등의 경계 바깥의 모든 분위(分位)로 이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생[異生]은 실체와 같이 소수성(所受性)이 있다고 집착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이 말의 뜻이 머무른다. 이와 같은 말씀은 바깥 대상이 공한 경지[外空竟]를 설한 것이다. 그 송에서 말하는 대로 후에 다시 공을 설하겠다.
040_0580_a_18L止何法邪頌自荅言此等外諸處此復云何諸處者謂色等境外諸分位皆悉無而彼異生執有如是實所受性故此中止此語義如是等言說外空復說後空如彼頌言
색 등의 상(相)은 그 몸이
안주하거나 상을 떠나니
언급한 뜻에 따라 볼 것 같으면
그 안[內]에는 실상이 없다.
040_0580_a_23L色等相彼身
安住及相離
向義若彼見
彼內卽無實
040_0580_b_02L
여기에서 이 '색 등의 상은 그 몸'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안팎의 두 가지 색처[二色處], 이것이 곧 그 몸이다. '안주'라고 말한 것은 곧 기세간(器世間)이 각기 특별히 의지하여 안주하는 까닭에 안주라 이름 하는 것이다. '상(相)'이란 장부의 32종상을 말한다. '떠난다'고 하는 것은 그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이 모두 남김없이 떠나는 까닭이다. 떠난다는 것이 곧 공의 뜻이다. '언급한 뜻에 따라'라는 말에서 '언급한'이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며, 이미 지나갔다는 말은 언급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떠한 법을 언급했다는 것인가? 앞의 게송에서 '색 등의 상'이라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이른바 만약 이와 같이 내외의 색처가 모두 남김없이 상이 없다면, 곧 그것이 이와 같은 공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소리의 뜻을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80_b_02L此言色等相彼身此中云何是彼所謂內外二色處是卽彼身所言安住卽是器世間各別依止安住故名安住所言謂三十二大士表相所言彼如上說皆悉離故離卽空義所言向義向謂已往往之義名爲向義何等法是向義上頌言色等相此復云何謂若如是內外色處皆悉無相卽彼如是了知空義如是聲義是故應知
지금 이 송 가운데 먼저 세 가지 공을 설하니, 이른바 내외공(內外空)과 대공(大空)과 상공(相空)이다. 그 다음에 공공(空空)을 설한다. 송에서 '만약 그것을 볼 것 같으면 그 안에는 실상이 없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만약'이란 곧 '만약 그렇다면'의 뜻이다. 공지(空智)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란 곧 그 몸 등을 말한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뜻이다. 아는 것은 곧 완전히 아는 것이다. 이 말 중에서 뜻은 공지(空智)를 알며, 경(境)이 공한 것을 알고 나서란 뜻이다. 곧 이 공지는 안에 실상이 없고 더욱이 있는 바도 없으니, 어찌 하물며 다른 법으로서 의지(依止)할 성질이 있겠는가? 이 구절에서는 이와 같이 공공(空空)을 완전히 설한하며, 이 가운데 또 자성의 공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040_0580_b_12L今此頌中先說三種空所謂內外空大空相空次說空空如頌所言若彼見彼內卽無實卽若所有義謂所有空智卽彼身等知義知卽了知此中意者謂知空智了境空已卽此空智於內無實而無所有何況餘法有依止性此句如是說空空竟此中復說自性空如彼頌言

그 안의 모든 것은 공성(空性)이며
자성도 또한 공이니
모든 식상(識相)의 종류[種]에 대해
나는 곧 비지(悲智)를 일으킨다.
040_0580_b_20L彼諸內空性
自性亦復空
所有識相種
卽起我悲智
040_0580_c_02L
여기에서 '그 안의 모든 것은 공성이며' 등의 말은 곧 모든 내제처(內諸處)의 공성을 이어서 여기에서 말한 것이다. '자성도 또한 공이다'라는 말에서 '자성'이란 종성(種性)이라는 뜻이다. 그것에 의해 이와 같이 식상(識相) 등이 나타난다. '모든 식상의 종류'라는 말은 모든 만약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가운데 식상이라거나 식성(識性)이라거나 하는 것들의 종성은 곧 나의 자비의 지[悲智]로부터 생긴다. '비(悲)'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게 하는 것이다. '지'란 법상(法相)을 가려낸다는 것이다. 비와 같은 것이나 혹은 지와 같은 것 등을 비지라고 한다. '나[我]'란 자상(自相)이아는 뜻이다. 곧 자신이 소유한 비와 지의 두 가지를 말한다. 이 뜻은 총체적으로 내식처(內識處) 등의 자성이 공함을 설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두 가지의 공의 뜻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40_0580_b_22L此言彼諸內空性等者謂卽所有內諸處空性相續此說所言自性亦復自性種性義由彼如是顯明識相等所言所有識相種所有若所有義此中若識相若識性彼等種性卽我悲智生欲令他苦得離散故卽擇法相若悲等若智是謂悲智自相義卽自所有悲智二種此意摠說內識處等自性空故復次後說二種空義如彼頌言

불생하며 또한 불멸하니
유정(有情)은 이것들을 분명히 하여
유정의 생사욕(生死欲)을
그는 말씀하시길 공이라 하였다.
040_0580_c_09L不生亦不滅
有情此等明
有情生死欲
彼說卽爲空

여기에서 말하는 '불생 또 불멸' 등의 4구송(句頌) 문장은, 두 가지 공을 뜻하는 복합어[合釋]이다. '불생'이라 말한 것은 그 『팔천송반야경』 중에서 불생을 설하여 이것의 그침과 그 생겨남을 설하고 있다. 이 뜻은 본래 불생의 성질이란 뜻이다. 생이 만약 성이 없다면 멸도 또한 성이 없다. 그 앞서의 성이 불생이라면, 후의 성도 또한 불멸이다.
040_0580_c_11L此言不生亦不滅等四句頌文此中合釋二種空義所言不生彼『八千頌般若經』中說不生言此止其生中意者謂本來不生性生若無性亦無性彼前性不生後性亦不滅

묻노니 이것들은 무엇인가?
040_0580_c_16L此等云何
그 까닭에 송에서 답하여 '유정'이라 말한 것이다. '유정'이란 곧 5온(蘊)의 신명(身命)이니, '유'란 그 물성(物性)을 갖는 것이며 '정'이란 스스로 만든 바의 성질이다. 화합하여 말하는 까닭에 유정이라 한다. '분명히 한다'는 것은 밝게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 뜻은 유정이라거나 혹은 생사라거나 하는 것이 그 두 가지 모두가 공이라는 것을 밝게 드러낸다는 말이다. 더욱이 모든 유정에게는 변제(邊際)가 없으니, 여기에서 죽지만 다시 태어나 6취(趣)를 순환하며, 다함이 없이 생사를 윤회한다. 이 '생사'란 곧 윤회로, 이와 같은 내용이 유정이 곧 생사라는 뜻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80_c_17L故頌荅言有情有情者卽五蘊身命謂有彼物性謂自所作性和合而言故曰有情謂顯明此中意說若有情若生死彼二皆空是義顯明而諸有情無有邊際死此生彼六趣循環無有窮盡輪轉生死此生死者卽是輪迴如是行相有情卽生死釋義應知

묻노니 이것은 누구의 설인가?
此何人說邪
040_0581_a_02L송에서 답하기를 '그'라고 하였다. '그'란 곧 그 여래인데, 진실을 설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설하는가? 이른바 공을 설하니, 곧 유정과 생사의 두 가지가 공인 까닭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성(無性)으로 이 속에서도 또한 떠나는데, 만약 그것을 무성이라 집착하면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왜 송에서 '욕(欲)'이라 말했는가? '욕'이란 낙욕(樂欲)의 뜻이다. 말하자면 바로 유정과 생사의 두 가지 욕인데, 만약 이와 같다면 욕의 대상[所欲]은 필경 이와 같이 진실이다. 이와 같은 말들은 두 가지 공의 뜻을 설하는 것이니, 이른바 필경공(畢竟空)이며, 무제공(無際空)이다.
040_0580_c_24L荅言彼者卽彼如來眞實說故何所說所謂說空卽有情生死二種空故然彼無性此中亦離如執彼無此亦不然若爾何故頌言者樂欲義謂卽有情生死二欲若如是所欲畢竟彼如是眞實如是等言說二種空義謂畢竟空無際空

묻노니 무엇을 무제(無際)라 이름 하는가?
답하노니 무제란 이른바 처음이 없는 것이니, 첫 부분이 없는 것이다. 이 무제로 공을 설하는 까닭에 무제공이라 이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생사의 선제(先際)는 가히 표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또 후에 공을 설하는데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040_0581_a_08L名無際無際者謂無有初際及無初此無際說空故名無際空如佛所言生死先際不可表示故復說後空如彼頌言

불법(佛法)은 볼 수 없으며
보살법도 또한 그러하니
이것들은 설한 바와 같이
그 10력(力) 등도 공하다.
040_0581_a_12L佛法不可見
菩薩法亦然
此等如所說
空彼十力等

여기 '불법은 볼 수 없다' 등의 말에서 '불법'이란 곧 제불의 법으로, 이른바 18불공법(不共法)과 10력(力) 등의 법이다. 이와 같은 법은 청정묘혜(淸淨妙慧)로써 관하더라도 볼 수 없고 또한 얻을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분별은 더욱이 대애(對碍)가 된다. '보살법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곧 제보살법을 말하니, 이른바 보시 등 모든 바라밀다의 갖가지 행상으로, 진실지(眞實智)에 들어 이치대로 관하더라도 또한 보이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들은 설한 바와 같이 그 10력 등도 공하다'라는 말에서 '이것들은'이란 이른바 이 이와 같은 가르침을 말한다. '설한 바와 같이'란 곧 그 설한 바와 같은 것을 말한다.
040_0581_a_14L此言佛法不可見等者佛法者卽諸佛法所謂十八不共十力等法如是之法以淸淨妙慧觀不可見亦不可彼如是故所有分別而爲對礙菩薩法亦然卽諸菩薩法所謂布施等諸波羅蜜多種種行相入眞實智如理而觀亦無所見所言此等如所說空彼十力等者謂此如是等教如所說者卽如其所說
040_0581_b_02L
묻노니 여기에서는 어떠한 법을 설한 것인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그 10력 등'이라 말하였다. 앞에서 분명히 밝힌 10력 등의 법을 가리킨다. '등'이라 말한 것은 18불공법을 모두 포함한다는 말이다.
040_0581_a_23L此說何等法頌自荅言彼十力等上所明十力等法所言等攝十八不共法

묻노니 이 법은 무엇을 설하는 것인가?
답하노니 이른바 공을 설하는 것이다. 공이란 자상(自相)을 떠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이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설한 후에 또 공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040_0581_b_03L又問此法何所說邪謂說空空者自相離故此中如是等說一切法空竟復說後空如彼頌言

별별 소유(所有)의 법
이것을 변계(徧計)의 성(性)이라 설하니
그것은 승의(勝義)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을 이와 같이 설한다.
040_0581_b_05L別別所有法
此說徧計性
彼勝義非有
諸法如是說

여기에서 '별별 소유의 법, 이것을 변계의 성이라 설한다' 등의 말은 이 변계성을 파(破)하는 것이다. '별별(別別)'이란 곧 각각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변계성인 까닭이다. '변계'란 집착하여 취한다의 뜻이다. 무슨 법을 집착하여 취하는가? 바로 색 등의 법이다. '이것'이란 이와 같다는 뜻이다. '설한다'는 것은 언설을 말한다. 여기의 총체적인 의미는 이른바 각별의 모든 법은 승의제 중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그것은 승의로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을 이와 같이 설한다'고 말한 것이다. '승의로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승의제 가운데 자성이 없는 까닭이다.
040_0581_b_07L此言別別所有法此說徧計性等者此破徧計性別別者卽各各義謂此所有徧計性故徧計者取著義取著何法卽色等法如是義謂言此中摠意謂各別諸法勝義諦中彼非有故是故頌言彼勝義非有法如是說勝義非有卽勝義諦中無自性故

묻노니 어떠한 법이 자성이 없는가?
답하노니 이른바 색 등의 모든 법이다. '이와 같이 설한다'는 것은 곧 여기에서 이와 같이 설한다는 것이다.
040_0581_b_15L何法無自性謂色等諸法如是說卽此如是說

묻노니 누가 이와 같이 설하는가?
답하노니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설을 지으신다. 모든 승의의 상이 공인 것을 관한다. 그 상은 곧 이 변계성이며, 공은 단지 주체의 상이 아니다. 승의제 가운데 그 공을 설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하여 승의공(勝義空)을 설하는 것을 마친다.
040_0581_b_16L何人如是說佛作如是說觀彼所有勝義相空彼相卽是徧計性空非唯能取相於勝義諦中說彼空故如是等說勝義空竟

여기에서 이와 같은 말씀의 뜻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주석을 짓는 자는 따로 송을 설하여 말한다.
040_0581_b_20L此如是說義自明顯然造釋者別說頌曰

그것들 변계성은
곳곳에서 모두 집착하나
이와 같은 변계에는
자성이 없다.
040_0581_b_22L彼彼徧計性
處處皆執著
此如是徧計
自性無所有
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卷第一
  1. 1)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이 서문은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982)에 천식재(天息災)가 『성불모경(聖佛母經)』을, 법천(法天)이 『길상지세경(吉祥持世經)』을, 시호(施護)가 『여래장엄경(如來莊嚴經)』을 각각 번역하여 올리자 송나라 태종(太宗)이 이를 치하해 지은 것이다.
  2. 2)상법(像法):부처님의 열반 뒤에 정법(正法)ㆍ상법(像法)ㆍ말법(末法)으로 나누어진 교법의 세 시기 중의 하나이다. 열반 후 500년부터 1000년까지의 시기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은 따르지만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는 시기를 말한다.
  3. 3)육정(六情):육근(六根) 또는 육근이 발생시키는 정식(情識)을 말한다.
  4. 4)설산은 인도, 패엽은 불교경전을 뜻한다.
  5. 5)연라(煙蘿):연하등라(煙霞藤蘿)의 준말로, 안개와 노을이 자욱하고 등나무 여라덩굴이 우거진 곳이라는 뜻이다. 깊은 산이나 은둔처를 의미한다.
  6. 6)향계(香界):향기 자욱한 세계라는 뜻으로, 사찰을 가리키는 말이다.
  7. 7)십성(十聖):10지(地)의 보살을 말한다.
  8. 8)삼현(三賢):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回向)의 위(位)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9. 9)건원(乾元):하늘의 도(道)이며, 천덕(天德)의 시초이다. 『주역』 ≺건괘(乾卦)≻ 단(彖)에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이를 힘입어 비롯되나니, 이에 하늘을 통괄하도다.[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라고 하였다.
  10. 10)태역(太易):기(氣)가 분화되기 이전 최초의 상태이다.
  11. 11)천식재(天息災) 등:역경원에서 번역을 주도했던 천식재(天息災)와 법천(法天)과 시호(施護)를 말한다.
  12. 12)사인(四忍):무생법인(無生法忍)ㆍ무멸인(無滅忍)ㆍ인연인(因緣忍)ㆍ무주인(無住忍)을 말한다. 인(忍)은 인가(忍可)ㆍ안인(安忍)의 뜻으로, 진실을 수긍하고 안주(安住)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13. 13)원문에는 “엽(葉)”으로만 되어 있는데, 경전을 뜻하는 ‘패엽(貝葉)’의 잘못으로 보인다.
  14. 14)오성(五聲):오음(五音)이라고도 한다.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의 다섯 가지 음조를 말한다.
  15. 15)풍율(風律):시나 음악의 운율을 말한다.
  16. 16)사시(四始):사성(四聲)이라고도 한다. 평성(平聲)ㆍ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이니, 사성으로 음운(音韻)의 고저(高低)와 강약(强弱)과 장단(長短)을 구분한다.
  17. 17)화택(火宅):삼계(三界)가 탐욕 등의 번뇌로 어지러운 것을 불타는 집에 비유한 것이 『법화경』 「비유품」에 나온다.
  18. 18)천식재(天息災)가 『분별선악업보경(分別善惡報應經)』을 번역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19. 19)금륜왕[金輪]:4종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중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제왕을 말한다.
  20. 20)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비람풍(毘嵐風)을 말한다. 우주가 파괴되는 시기에 이 바람이 불어 인간세계로부터 위로 색구경천까지 차례로 파괴한다고 한다. 유정천은 색구경천(色究竟天)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가장 마지막에 파괴된다.
  21. 21)석전(釋典):석가의 가르침을 담은 전적, 즉 불교서적을 말한다.
  22. 22)이 서문은 송나라 진종(眞宗)이 함평(咸平) 원년(998)에 법현(法顯) 등에게 내리고, 태종의 성교서(聖教序) 뒤에 붙이게 한 것이다.
  23. 23)삼진(三辰):해와 달과 별의 세 가지를 말한다. 『좌전(左傳)』에 “하늘에는 삼진이 있고, 땅에는 오행이 있다[天有三辰 地有五行]”고 하였다.
  24. 24)구위(九圍):구주(九州)와 같은 말로, 온 천하를 뜻한다.
  25. 25)진문(眞文):천식재를 비롯한 서역승들이 가져온 범어 경전을 말한다.
  26. 26)송 태종은 태평흥국 5년(980)에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 서쪽에다 역경원(譯經院)을 세우고, 천식재(天息災)ㆍ법천(法天)ㆍ시호(施護) 등에게 수집한 범어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27. 27)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어 이를 귀한 상자에 보관했다는 뜻이다. 낭함(琅函)은 천자의 문서를 보관하던 옥으로 만든 함이다.
  28. 28)범어경전의 문장을 말한다. 용수 보살이 용궁의 창고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와 유포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29. 29)인도출신 승려들을 말한다. 취령(鷲嶺)은 영취산 봉우리란 뜻으로, 곧 인도를 의미한다. 필추(苾芻)는 Ⓢbhikkhu의 음역어로, 비구(比丘)라고도 한다.
  30. 30)금상(金像):황금 같은 형상이란 뜻으로 곧 부처님을 지칭한다.
  31. 31)규구(規矩):목수가 사용하는 컴퍼스와 곱자로, 곧 기준ㆍ척도ㆍ법규를 뜻한다.
  32. 32)역경원(譯經院):송 태종이 태평흥국 5년(980)에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에 설치한 번역기관이다. 후에 전법원(傳法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33. 33)법현(法賢):중인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법천(法天)이었는데, 송 태종이 법현(法顯)이란 법명을 하사하였다. 973년(개보 6)에 중국에 와서 천식재(天息災) 등과 함께 평생 역경사업에 종사하였다.
  34. 34)각로(覺路):깨달음의 길, 즉 불교를 뜻한다.
  35. 35)태종이 쓴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를 말한다.
  36. 36)성고(聖考):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칭하는 말이다.
  37. 37)추호(追號):죽은 임금에게 올리는 시호(諡號)를 말한다.
  38. 38)담제(禫祭):죽은 지 만 2년 기일에 지내는 제사가 대상(大祥)이고, 대상을 치른 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가 담제(禫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