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질문이 있다. 만약 모든 현상이 소멸하고 또 중생이 소멸하면 응당 분별이 없겠는가?
041_0140_b_05L又復有問:若諸行滅及衆生滅,應無分別邪?
그러므로 게송에서 대답하여 말한다.
041_0140_b_07L故頌荅言:
【論】그 모든 현상에는 소멸이 없으니 이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리오. 중생도 또한 소멸이 없으니 다시 어떻게 있을 수 있으리오.
041_0140_b_08L彼諸行無滅, 此云何可有?
衆生亦無滅, 復云何可有。
【釋】만약 법이 항상하다면 곧 만들어지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조금도 법이 소멸하는 일이 없다. 왜냐 하면 법이 항상하기 때문이다. 만약 항상하지 않고 전적으로 소멸하는 법이라면 이러한 것은 있지 않으며, 또 어떻게 소멸하겠는가? 만약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이 함께 말할 수 없다면 곧 잘못이 없다. 이것을 응당 잘 생각하여 간택하여야 한다.
혹시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체가 도리어 다른 의미를 이루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만약 법이 소멸할 수 있다면, 어찌하여 항상함이 있지 않겠는가? 만약 혹시 없다고 말한다면, 곧 법의 성품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것은 이에 단멸을 이룬다. 그러므로 만약 있거나 만약 없거나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혹은 어떤 사람이 말한다. 말하는 바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여래가 언전(言詮)을 그쳐 소멸시킨 것이다. 이 중에 다시 취하는 것이 있는가, 취하는 것이 없는가? 만약 취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항상하지 않겠으며, 만약 취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곧 단멸을 이룬다. 만약 다시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는 얻은 바가 있는 법이라, 여기에서 서로 어긋나므로 능히 부정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한다. 모든 결박과 해탈은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가 자체가 있어 상속하여 유전할 때 모든 현상이 없지 않아, 탐욕 등이 생기할 때 그 원인법이 따라서 있게 된다. 이것을 곧 결박이라고 이름하는데, 태어남과 죽음 중에서 오고 가는 모든 자를 결박한다. 또 혹은 탐욕 등을 결박이라 이름하는데, 출세간의 지혜가 생길 때에 탐욕 등이 그쳐 소멸하는 것을 곧 해탈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다시는 모든 취(趣)에서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
【論】모든 현상에는 생하고 소멸하는 법이 있지만 결박도 없고 또한 해탈도 없다. 결박과 해탈에 만약 만드는 자가 있다면 곧 결박과 해탈은 생기지 않으리라.
041_0140_c_12L諸行生滅法, 無縛亦無解。
縛解若有作, 卽縛解不生。
【釋】모든 현상의 자체가 상속하여 파괴되어 소멸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자체가 없어 결박이 있을 수 없다. 밖의 지(地) 등의 자체와는 필경에 서로 어긋나므로, 이것에 곧 해탈이 없다. 또 혹은 단멸하는 법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단멸할 때에 얻는 것이 있다면, 곧 결박과 해탈의 모습 둘은 상태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결박도 없고 역시 또한 해탈도 없다.
【論】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만약 이미 생한 법이 결박과 해탈이 있다면, 그와 같은 결박과 해탈의 둘은 화합하지 않는다. 만약 생할 때에 또 다시 성품이 없다고 말한다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결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항상하다면 곧 만들어지지 않는다.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면 곧 항상하지 않고, 또한 항상하지 않음이 없어 현전에서 파괴되어 소멸한다.
중생을 결박할 수 있다면 그 결박은 곧 자체가 있으리라. 결박하는 법이 있어도 그가 만약 없다면, 조달(調達)1)이 결박하는 것과 같으리라.
041_0141_a_11L有衆生可縛, 彼縛卽有體;
縛法彼若無, 如調達所縛。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041_0141_a_13L復次,頌言:
【論】만약 먼저 그 결박이 있다면 그 결박은 능히 육신을 결박하리라. 지금은 이미 결박되는 일이 없으니 거래품(去來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41_0141_a_14L若先有其縛, 彼縛能縛身;
今旣無所縛, 如去來品說。
【釋】이 중에는 능히 취착을 받는 자가 있지 않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마땅히 결박하는 법을 얻을 수 없다.
041_0141_a_16L釋曰:此中不有能受取者,以不有故,卽應無有縛法可得。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041_0141_a_18L復次,頌言:
【論】이미 결박된 것은 곧 결박되지 않으며 아직 결박되지 않은 것도 또한 결박되지 않는다. 이미 결박된 것과 아직 결박되지 않은 것을 여의고, 결박될 때에도 또한 결박되지 않는다.
041_0141_a_19L已縛卽不縛, 未縛亦不縛,
離已縛未縛, 縛時亦不縛。
【釋】이와 같으므로 이미 결박되는 것도 없고, 아직 결박되지 않은 것도 없으며, 또한 결박되는 때에도 결박하는 법이 최초로 생기하는 것도 없다.
041_0141_a_21L釋曰:由如是故,無已縛,無未縛,亦無縛時,縛法初起。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한다.
是故頌言:
【論】이미 결박되었다면 곧 해탈하지 못하며, 아직 결박되지 않았어도 또한 해탈하지 못한다. 만약 결박 중에 해탈이 있다면 결박과 해탈은 곧 동시이리라.
041_0141_a_23L已縛卽不解, 未縛亦不解。
若縛中有解, 縛解卽同時。
041_0141_b_02L【釋】이렇게 결박 가운데 해탈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결박하는 법에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해탈이 있겠는가? 만약 결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곧 해탈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결박과 해탈이 함께 없다. 그 둘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사람이 말한다. 자아가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해탈을 얻을 수 없다. 만약 모든 집착하는 법이 필경에 그쳐 소멸한다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 만약 그대가 말한 것처럼 자아의 법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에 해탈을 구하는 자가 있으며, 그 해탈의 의미를 마땅히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論】만약 자아가 소멸하여 취착이 없어지면 자신이 열반을 얻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혹시 그에게 집착이 존재하여 도리어 취착에 집착하는 것을 이루리라.
041_0141_b_11L若我滅無取, 我得涅槃者,
此或有彼執, 還成執於取。
【釋】또 어떤 사람이 말한다. 모든 취착의 근본은 자아[我]와 자아의 소유[我所)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자아가 그쳐 소멸하면, 모든 취착은 땔감이 다하여 불타는 것이 소멸하는 것과 같다. 자아가 소멸하면 모든 취착에서 마땅히 열반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일이 있는데, 그 의미도 또한 이러하다. 그들이 말하는 의미는, 자아와 자아의 소유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취착에 집착하고, 그것이 원인이 됨으로 인하여 나머지 취착이 곧 생한다. 그러므로 그는 취착하고 해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論】스스로 능히 마음을 항복하고 다시 능히 다른 일을 섭수한다면 곧 자애로운 마음이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항복의 자체를 말한다.
041_0141_c_04L自能降伏心, 復能攝受佗,
卽有慈愛心, 此說降伏體。
【釋】스스로 항복한다는 것은 몸[身]과 말[語]과 마음[意]의 업(業)이 모든 사악한 행위를 그쳐 버리고, 내지 능히 다른 이를 포섭하고 다른 이를 섭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시와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행위와 자애로운 말을 하는 것이며, 두려움 등에서 구제하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이 작위하는 가운데 좋아하는 법으로 이루어진 것을 자애[慈]라고 이름하는데, 자애는 곧 좋아함[愛]이다. 자애는 유연함으로 자체를 삼는데, 이 유연하다는 의미는 곧 자애에 근접한 모습이며, 일체를 모두 평등하게 이끌어 마음으로 포섭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곧 일체 법의 자신과 다른 것의 종자 및 생겨난 결과로, 심법(心法)에 포섭되며 최승한 것에 소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성립한 결과, 이것은 다시 능히 그 일체법을 포섭한다.
【論】생각과 생각에서 생하는 업이 큰 선인[大仙]2) 말한 업이다. 그 업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차례로 분별하리라.
041_0141_c_15L思及思所生, 大仙所說業彼業有多種, 次第而分別。
【釋】이 분별이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세 가지 업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041_0141_c_17L釋曰:此分別者,謂身語意有三種業。
또 다음에 게송에서 말한다.
041_0141_c_18L復次,頌言:
【論】그가 말한 생각이란 것은 곧 의업(意業)이며, 생각에서 생겨난 것이란 소위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이다.
041_0141_c_19L彼所說思者, 此卽是意業,
從思所生者, 所謂身語業。
041_0142_a_02L【釋】말[語]이란 말에 표현하는 바가 있음을 말한다. 또 다시 따로 몸과 말의 두 업이 있으니, 멀리 여읨[遠離]과 멀리 여의지 않음[不遠離]이다. 멀리 여의지 않음이란 곧 표상(表象)이 없는 것인데, 이 표상이 없음을 다른 곳에서는 멀리 여의지 않음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생각으로 일으킨 선한 업이 내가 지었거나 혹은 내가 짓지 않았거나, 널리 마음 등으로 베푸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밀리 여읨, 혹은 멀리 여의지 않음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이 일어나는 것을 곧 무표업(無表業)3)이라고 말한다.
【論】만약 마음에 상속이 있다면 마음의 법[心法]은 곧 드러나 전이할 것이고, 과보가 만약 마음을 여읜다면 상속이 전이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041_0142_b_07L若心有相續, 心法卽現轉。
果若離於心, 無相續可轉。
【論】마음으로부터 상속이 있으며 상속으로부터 과보가 있다. 업이 먼저이고 과보가 나중이어서 단별도 아니고 또한 상주도 아니다.
041_0142_b_09L從心有相續, 從相續有果。
業先而果後, 不斷亦不常。
【釋】말하는 바 비유는 차례로 마땅히 알 것이다. 이것은 또 어찌하여 그러한가?
041_0142_b_11L釋曰:所說喩者,次第應知。此復云何?
그러므로 아래의 게송에서 말한다.
041_0142_b_12L故下頌言:
【論】법을 구하는 방편은 열 가지 백업도(白業道)4)이며,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다섯 가지 욕망의 수승한 과보를 얻게 한다.
041_0142_b_13L求法方便者, 是十白業道,
此世及佗世, 得五欲勝果。
【釋】법은 마음의 종자의 차별에 의지하여 수행하고, 지님의 원인이 법의 방편이 되어 십선도(十善道)를 얻어 과보의 법을 성취한다. 이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 것이다. 만약 업과 과보 등이 합하지 않는다면, 이 중에는 또한 법을 구하는 방편이 없다. 어찌하여 세존은 과보의 법이 있다고 설하였는가?
【論】만약 그대의 설명과 같이 차례로 분별한다면 그에게는 과실이 생기며 그 과실은 많고도 또 클 것이다.
041_0142_b_20L若如汝所說, 次第而分別,
彼有過失生, 其過多復大。
041_0142_c_02L【釋】이 중에서의 분별은 성립되는 바가 있지 않으며, 내지 과실을 생한다. 나는 이제 대략 그 방량(方量)을 나타내 보겠다. 장차 어떤 사람이 있어 지옥에 떨어질 원인을 심었는데, 마음이 상속하므로 만약 능히 그가 선취(善趣)에 태어나게 되는 이런 도리는 있을 수 없다. 선취에 날 원인을 심고 악취(惡趣)에 태어나게 되는 것도 또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영마([寧+頁]摩)의 종자와 싹 등을 심어 상속하여도 곧 암몰라과(菴沒羅果)5)를 생할 수 없으며, 혹은 암마라 종자를 심어도 또한 영마의 열매를 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다른 법의 자체는 각각 마음의 모습으로, 일체의 취(趣)의 부류는 자체적으로 원인이 있어 선하고 선하지 않은 업과 화합하여 성립되며, 역능을 분별하여 성품이 있음을 표출한다. 이 표출된 원인과 결과는 생하지 않는다. 마치 욕계(欲界)에 계박된 마음이 능히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 및 무루계(無漏界)6)의 마음을 일으키고, 내지 무루계의 마음이 능히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마음을 일으키는 이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선 등의 모든 법의 설명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커다란 과실이 있다. 이 중에는 이렇게 분별하는 도리가 없다.
【論】지금 나는 다시 이것을 말하여 바른 이치에 따라서 분별하니, 제불과 연각과 성문 등이 찬탄하여 설한 바이다.
041_0142_c_14L今我復說此, 順正理分別,
諸佛及緣覺, 聲聞等讚說。
【論】유실하지 않는 것은 계약서와 같고, 업(業)은 짊어져야 할 재물과 같다. 계(界)의 분별에는 네 가지가 있으며 그 모두의 자성은 무기(無記)7)이다.
041_0142_c_16L不失如契書, 業如所負財,
界分別有四, 皆自性無記。
【釋】비유하면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서 빚을 받고자 할 때, 먼저 계약서를 얻어내면 여러 곳을 돌아다녀도 그 채권이 산실되지 않는다. 그 후 이자가 전진되어도 전부 다시 되돌아온다. 왜냐 하면 계약서가 있기 때문에 적용되어 과보가 성립되어, 다시는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업도 또한 이와 같아 모든 상사한 업, 말하자면 욕계의 업은 욕계에 계박되고, 내지 무루계(無漏界)의 업은 무루계에 계박되어, 선을 지은 자는 다섯 가지 업을 갖는다.
【論】만약 괴로움을 보는 때8)에 단절한다면 그것에는 곧 잘못이 있다. 상사한 업이 있기 때문에 단절한다면 곧 업을 파괴한다.
041_0143_a_07L若見苦時斷, 彼卽有過失,
有相似業故, 斷卽壞於業。
【釋】만약 괴로움을 볼 때 단절한다면, 이와 같으면 다른 경우에도 차례로 전체가 얽혀버리고, 그리고 또 선(善)은 불선(不善)이 되고, 불선은 선이 된다. 이와 같으면 곧 잘못이 있게 된다. 만약 그 선하지 않은 모든 업과 법 등이 그 지위에서 그쳐버릴 때, 그 소실되지 않은 법은 곧 서로 어긋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한(阿羅漢)은 견도에서 단절하고, 수다원(須陀洹) 사람은 과보를 지나고 나서 단절한다.
그 무상한 업은 설사 파괴됨이 있다 해도, 항상한 법에서 일어나는 것이 마치 계약서가 그에게 존재하듯 작용하여 업에 자체가 있어 유실되지 않아, 종자를 만나면 과보가 있게 되어 소멸함을 나타내고 성립됨을 나타낸다. 업도(業道)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소멸하지 않는다. 그 선하지 않은 법을 아라한은 견도에서 단절하고, 수다원은 과보를 이루고 나서 단절한다.
【論】서로 비슷한 모든 법은 모든 업에 계박됨이 있다. 모든 계(界)에서 하나의 법이 생하며 하나의 업으로부터 하나의 법이 일어난다.
041_0143_a_20L一切相似法, 諸業有繫屬,
諸界一法生, 一業一法起。
041_0143_b_02L【釋】그 계박된 모든 선 등의 업은 모든 과보 등을 대치하지 못한다. 욕계의 것은 욕계에 계박되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 및 무루계는 각 계에 계박된다. 그런데 그것을 대치하는데 닦아야 할 모든 계(戒)는 그 업을 단절하는 것에 연유한다. 유루업(有漏業)이 일어나는 것은 계박되지 않음이 없다. 마치 생각할 때 동시에 일어나는 모든 상념이 근본적인 법이 되듯이, 그 파괴되지 않는 업은 분량이 있는 것처럼 얻게 된다.
이제 간략히 살펴보면, 모든 어리석은 이생(異生)9)들은 삼계 속에서 일체에 계박되고, 부처님과 모든 성문들은 욕계에 계박된다. 사계(四界)10) 중에서 색(色)이면 계박이 있으니 말하자면 욕계를 제외하고, 무색(無色)이면 계박이 있으니 오직 무색계뿐이다. 이와 같이 욕계와 색계의 두 세계는 계박되고, 무루계(無漏界)는 계박되지 않으니 그 두 세계의 업이 다하였기 때문이다.
계(戒)를 대치하는데 체(體)가 없으면 무색이 있지 않다. 계의 체에서 일어나는 업의 작용은 얻을 수 있으나, 업이 실제로 생하는 일이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 가지 법을 보고 처음 업을 일으킬 때부터 그것이 소실되지 않을 때까지, 이 업은 함께 일어나 모두 두 가지를 갖춘다. 이른바 누(漏)11)와 무루(無漏)12)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적으로 모두 업의 과보가 있다.
【論】모든 두 가지 업은 현재로서 항상한 성품이 없지 않으니, 머물러 과보를 지날 때까지 이와 같이 도리어 다시 생한다.
041_0143_b_14L所有三種業, 現非無常性,
住至度果已, 如是還復生。
【論】혹은 생명이 종결됨에 이르러 소멸하고 혹은 과보를 지남에 이르러 소멸한다. 이것은 무루의 분별이며 그 모습도 또한 무루이다.
041_0143_b_16L或至命終滅, 或至度果滅,
此無漏分別, 彼相亦無漏。
【釋】과보를 지난다는 것은, 말하자면 증득에 이를 때 무엇을 단절하기 때문에 증득할 때 단절하는가? 이른바 계박된 것이 소멸하고 유루(有漏)의 성숙된 것이 소멸한다. 이러한 분별은 모두 근사한 모습이다. 이로 인하기 때문에 그 소실되지 않는 법이 존재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갖가지 세계에 태어나게 하여, 장소ㆍ분량ㆍ모습ㆍ괴로움과 즐거움 등에 따라 법이 차별되고 분별되어 업과 과보가 있게 된다. 이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041_0143_c_02L【論】비록 공(空)이라도 또한 단절되지 않고 나고 죽음도 또한 항상하지 않다.
업과 과보가 소실되지 않는 이 법은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다.
041_0143_b_24L雖空亦不斷, 生死亦不常,
業果報不失, 此法佛所說。
【釋】여기에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업과 과보가 합하여 생하는 세계와 장소 등을 분별하는 상태가 없는 자는, 곧 흐름이 한 가지 성질이든 다른 성질이든 모두 말할 수 없다. 말하는 바 공이라는 것은 곧 아공(我空)13)을 분별하는 것이며, 보특가라(補特伽羅)14)의 상태가 있지 않다. 이것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유(有)도 또한 항상하지 않다. 또 파괴되기 때문에 공이라 이름하며, 공도 또한 단절되지 않는다.
또 나고 죽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소는 종자가 상속되어 먼저의 업을 심어 삼유(三有)를 따라 생하는데, 이것도 또한 항상하지 않다. 번뇌와 업이 다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공이라 이름하는데, 공도 또한 단절되지 않는다. 또한 지난 세상이 아니면 업의 원인이 일어나지 않으며, 이 업은 파괴되지 않아, 업이 있고 과보가 있어 방편으로 원인이 성품이 된다. 이와 같은 법이 있기 때문에 세존은 걸림이 없는 지혜로 방편으로 그 일체의 법을 잘 설하였다.
【論】그대가 분별하여 말한 것은 훌륭하지 않다. 상속하여 업이 생하는 것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자는 게송으로 말한다.
041_0143_c_14L論者言:如汝分別所說不善,以不可分別相續業生故。論者頌言:
【論】모든 업은 본래 생하지 않으며 살피고 헤아려 얻을 수 없다. 업력과 마음이 상속하는 것은 업과 과보의 둘이 모두 파괴된다.
041_0143_c_17L諸業本不生, 非伺察可得,
業力心相續, 業果二俱壞。
【釋】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업에는 파괴됨이 있으니 이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모든 법에 자성이 있지 않다면, 곧 그 자성은 토끼뿔 등과 같다. 또한 업 등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응당 업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참으로 업이 생하는 일이 있다면,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업은 파괴할 수 없다.
041_0144_a_02L【論】만약 업이 본래 생하지 않는다면 업이 어떻게 파괴됨이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파괴되지 않겠는가.
041_0144_a_02L若業本不生, 業云何有壞?
若其有所生, 彼云何不壞?
【釋】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생겨나는 것이 없으므로 업은 파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겨남과 파괴됨이 있다면 곧 있음을 따르고, 만약 생겨남이 없다면 곧 파괴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항상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이고, 업이 생겨나는 상태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반드시 소멸한다면 이 중에서 어떻게 업이 파괴될 수 있으며, 역시 또한 어떻게 과보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먼저 설명한 것처럼 업이 있다면 파괴되지 않고, 이 중에는 또한 업과 과보가 결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결정코 합하는 바가 있다면, 그렇다면 생겨남도 없고 또한 파괴됨도 없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법은 차례로 전부 파괴됨이 없이 모든 법의 갖가지 상태를 생하며,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업이거나 과보거나 둘 다 생하지 않는다.
혹은 어떤 사람이 말한다. 만약 법이 생하지 않는다면, 그 과거와 미래의 모든 사물의 자체도 또한 응당 생하지 않고, 모든 업도 생하지 않을 것에다. 이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논자가 먼저 설명한 것처럼, 업에는 자성이 없어 생하는 법을 세울 수 없다고 하였다. 열반도(涅槃道)를 닦는 자를 청정한 수행에 머무른다 이름하고, 열반도를 여의는 자를 청정한 수행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그런데 혹은 청정한 수행자가 아니라도 열반을 얻을 수도 있고, 청정한 수행자라도 응당 지옥에 떨어질 수토 있다. 이것은 곧 세간법에서 행해지는 것과 서로 어긋나서 파괴된다. 만약 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곧 경작하고 씨 뿌리는 등의 세간법이 파괴된다. 이와 같이 또한 마땅히 지은 죄와 복이 상대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세간에서 어떻게 이 사람은 복을 지은 자이고 저 사람은 죄를 지은 자라고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