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저 도(道)는 닦을 만한 것이 없고 법은 물을 만한 것이 없다. 겨우 큰 뜻을 깨치기만 하면 만 가지 일이 다 함께 쉬는 것이므로 이르기를 “말 길이 끊어졌고 마음의 가는 것도 소멸했다”고 이미 종경(宗鏡)에서 말했거늘, 어찌 몸ㆍ계율ㆍ마음ㆍ지혜에 관한 글을 자세히 인용하는가.『법화경』의 말처럼 “삼장의 학자[三藏學者]조차도 오히려 가까이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미 대승의 경교(經敎)에 위반되었거늘, 무엇으로 후학(後學)이 믿음의 문을 이룰 것인가? 【답】 경에서 배척한 삼장의 학자는 바로 이것이 소승의 계율ㆍ선정ㆍ지혜로서 계율은 몸과 입만을 지니면서 4주(住)의 가지와 잎의 병든 싹을 끊을 뿐이요, 선정은 형상이 죽은 나무와 같아져서 밖에 나타나는 위의의 묘한 작용을 끊으며, 지혜는 편공(偏空)을 증득할 뿐 중도(中道)의 공하지 않은 원만한 도리를 잃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가 좋아하는 법으로서 열등한 교법에 떨어진다 하여 정명(淨名)에게 꾸지람을 당한 것이니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다. 지금 이 원종(圓宗)의 선정과 지혜는 오히려 대승 초교(初敎)의 무상(無相)의 공과 대승 별교(別敎)의 편원(偏圓)의 도리와도 동일하지 않거늘, 어찌 삼장의 회단(灰斷)의 선정과 지혜로써 논하겠는가? 이 『종경록』의 계율ㆍ선정ㆍ지혜는 하나의 사항과 하나의 행위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모두가 법계에 들어가 그지없는 덕을 갖춘 것이니, 바로 그지없는 종취(宗趣)요 성기법문(性起法門)이며 걸림이 없이 원만히 통하고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마치 거울에는 형상이 있으면서 조그마한 부스러기조차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그 속에는 보든 형상이 갖추어져 있되 공일 뿐 아무것도 없으면서 미묘한 청정 법신이 서른두 가지 몸매로 갖추어져 있다”고 함과 같다. 관화상(觀和尙)이 이르기를 “범부와 성인이 서로 통하여 범부 마음에 즉(卽)하면서 부처 마음을 보며, 본체[理]와 현상[事]을 쌍으로 수행하여 본래 지혜[本慧]에 의지하면서 부처 지혜[佛智]를 구한다”고 했다. 고덕(古德)이 해석하기를, “선종(禪宗)에서 뜻을 잃은 무리는 본체를 집착하고 현상에 미혹되어 이르기를 ‘성품은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거늘 어찌 닦아서 구하겠는가? 망정(妄情)을 없애야만 곧 참 부처가 저절로 나타난다’고 하고 교법을 배우는 무리는 현상을 집착하고 본체에 미혹되었거늘, 어찌 본체의 법을 쉬지않고 닦아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그를 합하면 둘 다 아름답고 그를 여의면 두 가지가 상(傷)하나니, 본체의 행[理行]을 쌍으로 닦음으로써 원묘(圓妙)함을 나타낸다. 마음을 쉬고 생각을 끊음을 본체의 행이라 하고, 공(功)을 일으켜 유(有)에 간섭함을 현상의 행[事行]이라고 한다. 본래 지혜에 의한다 함은 본각의 지혜[本覺智]이니, 이것은 원인의 지혜[因智]로서 이것이 환히 밝아 어둡지 않음을 지혜라 하며 앞의 본체의 행을 이루면 망정이 없어지면서 본체가 나타난다. 부처 지혜를 구한다 함은 곧 장애가 없는 해탈의 지혜[解脫智]이다. 이것은 결과의 지혜[果智]로서 원만하게 밝아지고 결단하는 것에서 보아 지혜가 되며 앞의 현상의 행을 이루면 행이 일어나면서 결과를 이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체성(體性)이 같기 때문에 의지하게 되는 까닭이요, 상용(相用)이 다르기 때문에 구하게 되는 까닭이니, 상용을 구할 뿐이요 체성을 구하지는 않는다. 앞의 망정이 없어지는 본체의 행은 바로 물든 연기[染綠起]가 일어남으로써 상용을 이룩한다”고 하였다.
무상종(無相宗)에서 이르기를 “위와 같은 설명으로는 상용은 그럴 수 있다. 다만 본래 지혜에 의지하면 망정이 없어지고 상용이 저절로 나타남은 본래 구족하기 때문이거늘, 어찌 특히 그렇게 현상의 행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고, 원종(圓宗)에서 이르기를 “성품의 도리는 본래 구족한지라 망정이 없어지는 때에 염분(染分)의 상용만 제거되어 저절로 참 체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만일 현상의 행이 없이 거기서 정분(淨分)의 상용이 일어난다면 생기게 되는 까닭은 없다. 마치 금(金)으로 된 것 안에는 비록 여러 가지의 그릇이 있다 해도 광석(礦石)을 제거하면 금만이 나타날 뿐인 것과 같다. 만일 공을 들여 만들지 않으면 그 그릇으로 될 까닭이 없거늘, 어찌 금에서 광석을 뽑아낸 뒤에 만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그릇이 될 수 있겠는가? 만일 망정이 없어지면 현상의 행을 빌리지 않는다. 부처님은 모두 닦게 하였거늘, 어찌 배우는 이들을 부질없이 수고롭게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8지(地)에서는 이미 생각을 여의는지라 부처님은 바야흐로 현상의 행을 일으키도록 권한 것이니, 생각을 여읨으로 말미암아 다 마치지 않았음을 알겠다. 그런 까닭에 경의 게송에서 이르되 “법성(法性)은 진상(眞常)이라 심념(心念)을 여의나니/2승도 이것을 얻을 수 있다/이 때문에 세존이 되는 것 아니요/매우 깊은 무애지(無礙智)만으로써 되네”라고 했나니, 이것은 모두 이 현상의 행을 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결과의 부처는 성품[性]과 모양[相]이 구족하여야 하고 원인의 수행은 반드시 본체와 현상을 쌍으로 닦아야 하나니, 본래 지혜에 의지함은 마치 금을 얻는 것과 같고 본체의 행을 닦음은 마치 광석을 버리는 것과 같으며 현상의 행을 닦음은 마치 만드는 것과 같고 부처 지혜를 구함은 마치 그릇이 이룩되는 것과 같다. 또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이르되 “만일 선(禪)에 집착한 이면 본래 지혜의 성품에 의하여 지음도 없고 수행도 없어서 거울은 본래 스스로 밝은지라 떨지도 않고 닦지도 않으며, 만일 법(法)에 집착한 이면 현상의 행을 일으켜 의타(依他)의 훌륭한 인연을 구함으로써 자기의 덕을 이룩하기를 바라거니와 다 같이 치우친 집착이 되기 때문에 쌍으로 행할 것을 말한다”고 했다. 본래 지혜에 의한다 함은 본체에서 보면 샘이 없는 지혜 성품이 본래 구족하기 때문이요, 부처 지혜를 구한다 함은 현상에서 보면 구할 것 없는 가운데서 내가 짐짓 그것을 구한다. 마음의 거울은 본래 깨끗하나 오랫동안 진로(塵勞)에 가리워졌고 항하 모래만큼의 성덕(性德)은 진사(塵沙)의 번뇌에 함께 묻혔다. 이 때문에 법성(法性)을 수순하여 탐욕 등이 없이 단(檀) 등의 여섯 가지 바라밀을 닦아야 하나니, 때문에 모든 부처는 이미 증득하였거니와 나는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 또 본체는 현상을 장애하지 않나니 구함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요, 현상은 본체를 장애하지 않나니 구하여도 구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닦으면 닦지만 곧 닦음이 없어서 참으로 닦는 것이 된다. 위와 같이 본말(本末)을 열어 보이고 빠뜨림이 없으면 본체가 구비하고 행이 두루하며 원인이 원만하고 결과가 원만하나니, 그의 수레는 높고도 넓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또 종이 많으면서 모시고 호위하여야 비로소 이 1승에 들어가서 종경(宗鏡)에 돌아간다. 만일 초심(初心)에 들어가면 모름지기 진공(眞空)에 명합되어야 하나니, 오직 심행(心行)에 있을 뿐이요 입으로 설명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걸음마다 힘이 붙고 생각마다 상응함은,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은 영영 딴 생각이 끊어진 것과 같다. 만일 간절한 뜻이 아니라면 어찌 장부라고 일컫겠는가’ 헛된 말이 있을 뿐이면 마침내 자신을 속이는 것이리라. 마치 천태(天台) 습득(拾得)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동쪽의 햇볕에 바닷물이 맑아지고 물이 맑아지자 다시 밑이 보이며 신령한 근원은 법의 샘[法泉]에 흐르는데 물을 베는 칼은 흔적조차 없구나.
나는 보건대 어리석은 사람은 등불 심지로 수미산을 괴고 한 치의 나무로 큰 바다를 삶으며 발로는 대지(大地)의 돌을 말살하려 한다.
모래를 찌면 밥되는 일 없거니와 벽돌을 갈면 거울이 된다. 말로써 먹는 것은 배부르지 않나니 바로 힘을 써서 행해야 한다.
마음이 넓고 큰 대장부요 의젓하고 6척(尺)의 키 큰 선비가 억울하게 죽어서 무덤 속에 있으니 가석(可惜)토다, 외로이 선 그 푯말이여.
방거사(龐居士)의 시에서 이르되 “경을 읽으면 뜻을 이해해야 하고/뜻을 알면 곧 수행해야 하나니/만일 요의의 학[了義學]에 의하면/이내 열반의 성(城)에 들거니와/만일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많이 보았어도 소경보다 못하느니라. 글을 찾으면서 땅을 널리 점령하여/마음의 소로 갈려 하지 않으면/밭마다 온통 풀이 났을 뿐이거늘/먹는 벼가 어디서 나게 될 건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심행(心行)에 있어야 인(忍)의 힘이 성취되리라. 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인(生忍)이요, 둘째는 법인(法忍)이다. 만일 법인에서라면 관행(觀行)이 쉬이 성취되고 유심(唯心)을 알기 때문에 안과 밖이 평등하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법인이라 함은 안의 6정(情)에 집착하지 않고 밖의 6진(塵)을 받아들이지 않나니, 이 둘에서 분별을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의 모양[相]은 바깥과 같고 바깥 모양도 안과 같나니, 두 모양은 다 같이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하나의 모양이기 때문이요 인연이 합하기 때문이요 그것은 실로 공이기 때문이요 온갖 법 모양은 언제나 청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온갖 법 모양은 언제나 청정하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의 도[一道]를 같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화엄소(華嚴疏)』에서 이르되 “하나의 도가 매우 깊다 함은 1승이라고도 이름하나니, 부처와 부처가 다 같은 하나의 참 도(道)이기 때문이요 부처와 부처가 타는 법은 심성(心性)을 같이 관하고 만행(萬行)으로 같이 닦아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시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도가 된다”고 했다. 【문】 참 마음은 항상 머물러서 온갖 처소에 두루하다면 곧 만법(萬法)이 모두가 참된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사계절[四時]의 생멸이 있는가? 【답】 참 마음을 환히 알면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만법은 변천하지 않나니, 곧 항상 머무른다는 이치이다. 만일 만법이 변천하고 사라짐을 본다면 모두 이것은 허망한 마음이니, 온갖 경계는 마음만으로 허망하게 동요한다. 마음이 만일 일어나지 않으면 바깥 대경은 본래가 공이니 식(識)으로부터 변천하기 때문이다. 만일 심식(心識)을 떠나면 오히려 한 법조차도 항상 머무름이 없거든 하물며 만법의 변천이 있겠는가? 【문】 지금 실제로 보건대, 만물의 형상은 성하다가 쇠하고 계절의 경치는 새 것이 와서 묵은 것을 대신한 데 어떻게 미세하게 헤치고 벗기고 하여야 변천하지 않는 뜻을 분명하게 보는가? 【답】 견성(見性)하여야만 저절로 의심이 끊어진다. 내 일찍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이치를 추궁하건대, 『불천론(不遷論)』에서 이르되 “회오리바람이 큰 산을 쓰러뜨리는 데도 항상 고요하고 강물이 다투어 쏟아지는 데도 흐르지 않으며, 아지랑이가 떠다니면서 치는 데도 움직이지 않고 해와 달이 하늘을 다니는 데도 돌지는 않는다”고 했다. 소(疏)에서 이르되 “앞의 바람이 뒤의 바람이 아니므로 큰 산을 쓰러뜨리는 데도 항상 고요하고 앞의 물이 뒤의 물이 아니므로 다투어 쏟아지는 데도 흐르지 않으며 앞의 기(氣)가 뒤의 기가 아니므로 떠다니면서 치는 데도 움직이지 않고 앞의 해가 뒤의 해가 아니므로 하늘을 다니는 데도 돌지 않는다”고 했다. 초(鈔)에서 이르되 “그러나 자체(自體)는 찰나찰나마다 동일하지 않나니, 첫 한 찰나가 일어날 때는 둘째 번의 찰나일 때가 아니다. 내지 맨 나중에 불어서 산에 닿았을 때는 맨 처음 바람이 일어난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앞 찰나일 때의 바람의 자체가 반드시 그로부터 와서 그 산에 불린 것이 없다. 또한 산은 처음 움직였을 때로부터 땅에 거꾸로 눕게 될 때까지의 그 산 자체는 찰나찰나마다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처음 한 찰나에 움직일 때는 둘째 번의 찰나에 움직일 때가 아니며, 내지 최후의 땅에 닿았을 때는 처음 움직였을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처음 움직인 산의 자체가 반드시 그로부터 와서 땅에 닿을 때까지라는 것이 없다. 이 모두는 바람이 이르지도 않았고 사악이 땅에 닿지도 않았다. 비록 회오리바람이 큰 사을 쓰러뜨렸다 하더라도 일찍이 움직인 일조차 없다”고 했다. 이 네 가지 물건을 세간에서는 변천하여 이동한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아무리 산악을 거꾸러뜨리고 하늘을 지난다 하더라도 모두는 서로가 알거나 서로가 이를 것도 아니며 찰나찰나마다 스스로 머물면서 저마다 변천하지 않는다. 또 세간에서 요소[大]라 일컬으면 4대(大)보다 더한 것이 없고 4대 중에서는 풍륜(風輪)보다 뛰어난 것은 없나니, 그 성품을 추구하면 본래부터 실로 움직임이 없다. 『의해(義海)』에서 이르되 “움직임[動]과 고요함[寂]을 살펴보면 티끌이 바람에 따라 나부끼게 되면 것이 움직임이요, 고요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고요함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요할 때는 움직임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연유하나니, 곧 온전히 움직임으로써 고요함이 이루어진다. 지금의 움직일 때는 고요함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연유하나니, 곧 온전히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온전히 체(體)와 상(相)으로 이루어지나니, 이 때문에 움직일 때가 바로 고요함이요 고요할 때가 바로 움직임이다. 또한 바람은 본래 움직이지 않되 모든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만일 먼저 움직임이 있다면 자체를 잃는 것이라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이 바람이 법계에 두루함을 살펴보건대, 잔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고요하여 형상이 없다. 이 움직이는 연유를 추구하면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또 비밀한 방 속에서와 같아서, 만일 ‘바람이 없다’고 하면 인연을 만나면 이내 생긴다. 그러므로 알라. 풍대(風大)의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은 모든 인연에 속한다. 만일 바깥의 시방 허공중에서 설령 사람으로 인하여 털지 않는다 하여도 혹은 스스로 일어날 때는 역시 용이거나 귀신이 한 일이기도 하나니, 귀신은 음(陰)에 속하며 해가 지면 바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내지 겁초(劫初)와 겁말(劫末)에 이루게 하고 무너뜨리는 바람은 다 같이 중생의 업감(業感)으로 인해서이니 세간에는 하나의 법도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음이 없다. 인연이 모이면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진다. 만일 자연(自然)으로 생긴다면 다만 항상 생기고 있음[常生]에 합당하거늘, 어찌 긴급과 완만함이 일정하지 않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함이 없게 되는가, 그러므로 알라.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또 모든 인연을 추구하면 화합으로 현상을 이루되 저마다 화합이 있지도 않고 또한 인연도 없나니, 인연 속에서는 다 함께 자성(自性)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움직일 뿐이나 도리어 자기 마음을 추구하면 마음 또한 움직이지도 않나니,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처소를 얻을 수가 없다. 곧 모두가 참 성품으로부터 일으키되 참 성품은 곧 일으키지 않는 것인 줄 알아야 비로소 심성(心性)은 4대의 성품에 두루함을 보아 자체는 진공(眞空)에 합하고 성품은 동정(動靜)이 없으며, 모양[相]으로 인하여 움직임이 나타나고 움직임으로 인하여 고요함에 상대되며 움직임의 모양이 이미 없으면 고요함의 경계 또한 소멸한다.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되 “성품의 바람은 진공이요, 성품의 공이 참된 바람이다”고 했다. 또 변천하지 않음의 종(宗)이거늘, 어찌 동요하는 경계를 여의겠는가. 남이 없음[無生]의 뜻은 생멸의 문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이르되 “인연으로 생기게 되는 이치/이 이치는 소멸이요 생김이 아니며/모든 생멸을 없애는 이치/이 이치는 생김이요 소멸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일으킴은 항상 일으키지 아니하고 일으키지 아니함은 항상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이 통달하면 단(斷)과 상(常)에 떨어지지 않고 한 마음의 변천하지 않는 이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선덕(先德)이 이르되 “대저 만물의 성품은 차별이 없어서 깨치면 곧 진리요 진리는 곧 변하지 않으며, 만물은 스스로 잔잔하여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은 봉(封)해졌거늘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서 망령되이 움직임을 삼고 있다. 도의 체[道體]는 깊고 묵묵하며 말의 길[語路]은 오묘하고 은밀하여 날마다 쓰면서도 모르는 것이니, 만물은 변천하지 않는다.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일컬어 물(物)이라 하나 물의 자체는 저마다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변천하지 않는다고 한다. 변천하지 않기 때문에 무리를 따라 잔잔하고 깨끗하며, 물건이기 때문에 네 가지 형상[四像]과 함께 하면서 서로 의지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남도 없고 나지도 않으며 형상도 없고 형상으로 되지도 않으며, 성품[性]과 모양[相]에 처하면서 하나를 지키는 이이니, 그것이 변천하지 않는 논거(論據)가 된다. 그런 까닭에 『불천론(不遷論)』에서 이르되 “여래는, 뭇 망정(妄情)에 걸려 있기 때문에 곧 방언(方言)으로 미혹을 밝히되 둘이 없는 진심(眞心)을 타고 하나가 아닌 특수한 교법을 토(吐)하셨으니, 차별되면서도 다를 수 없는 것이 그 성인의 말씀일 뿐이로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씀하되 변천하지 않는다는 이름이 있고 세속을 교도하되 유동(流動)한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비록 천 갈래 길로 다르게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모이고 돌아가는 데는 같은 데로 이르게 된다. 그러나 글을 요구하는 이는 변천하지 않는다 함을 들으면 ‘옛날의 물건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고, 유동함을 듣는 이는 ‘지금의 물건이 옛날에 이를 수 있다”고 하나니, 이미 예와 지금을 말하면서 변천하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갔음[往]을 말하나 반드시 가지 않아 예와 지금이 항상 존재함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은 까닭이요, 지났음[去]을 일컬으나 반드시는 지나지 않은 것이니, 지금이 옛날에 이르게 되지 않음은 그것이 오지 않은 까닭이다. 오지 않기 때문에 예와 이제에 빨리 내닫지 않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뭇 전적(典籍)의 다른 글과 백가(百家)가 달리 말한 것이 진실로 그 계회(契會)를 얻거늘, 어찌 문언(文言)으로 미혹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한 바의 머무름을 나는 갔다고 말하고 사람들의 말한 바의 갔음을 나는 머무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고 머무름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것은 하나로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바른 말은 반대인 것 같으니 믿을 이가 누구겠느냐’고 했으니, 이 말씀에는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옛날을 지금에서 구하면서 ‘그것은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나 나는 지금을 옛날에서 구하면서 그것이 가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이 만일 옛날로 갔다면 옛날에는 지금이 있어야 하고, 옛날이 만일 지금에 왔다면 지금에 옛날이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은 옛날이 없으므로 오지 않았음을 알겠고 옛날에는 지금이 없으므로 가지 않았음을 알겠다. 옛날에는 지금이 가지 않았고 지금 역시 옛날에 가지 않았으니, 그 일은 각기의 성품으로 머물러 있거늘 무슨 물건이 있으면서 가고 올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4상(像)이 바뀌고 바람이 내달으며 선기(旋機)가 옮아가고 번개가 치는 때에 뜻을 얻은 이가 터럭만큼이라도 알면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바꿔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래의 공(功)은 만세(萬歲)에 흐르면서도 항상 존재하고, 도(道)는 백 겁(劫)에 통하면서도 더욱 공고하며, 산을 이룸에는 첫 삼태기를 빌려 완성되고 먼 길도 첫 걸음에 의탁하여 도달하게 되나니, 과연 공업(功業)은 후폐(朽廢)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업은 후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옛날에 있었다 하더라도 변화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옮겨가지 않으며 옮겨가지 않기 때문에 잔잔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3재(災)로 두루 다스리는데도 행업(行業)은 잔잔하다’고 하였으니, 진실한 말씀이로다. 왜냐하면 대저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되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는 되며,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오는지라 원인인 옛날은 소멸되지 않고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는지라 원인은 지금에 오지 않기 때문이니, 소멸되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 변천하지 않음이 증명되게 된다. 다시 어째서 가고 머무름에 헷갈리겠으며, 움직임과 고요함 사이에서 망설이겠는가? 그렇다면 건곤(乾坤)이 거꾸로 엎어져도 고요하지 않다는 말이 없겠고 큰 물이 하늘에까지 불어 넘쳐도 그의 움직임을 말함이 없으리니, 만일 정신을 만물에 즉(卽)한 것에서 계합될 수 있으면 이야말로 멀지 않으면서 알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옛 해석에서 이르되 “먼저 말한 ‘예와 이제는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무르되 서로 오가지 않는다’고 함은 젊을 때와 늙은 때가 동일한 빛깔이 아니고 꼭 젖먹이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때로부터 늙기에 이르기까지 죽 이어짐이 없다는 것이니, 친속(親屬)의 법이 상실되어 아버지도 없고 아들도 없으면서 젖먹이는 아버지가 되어야만 하고 그 밖에 기어 다니는 아이와 늙은이도 분간되지 않아야 한다면 앞의 공(功)은 이내 상실되어 단멸(斷滅)의 허물이 있으리라. 여기서 공업은 흐르고 첫 삼태기와 첫 걸음의 원인과 결과 등은 상속되어 상실되지 않는다. 아주 없지도 않고 항상 하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기 때문에 원만하고 바른 변천하지 않는 이치가 분명하여진다. ‘둘이 없는 진심(眞心)을 타고 하나가 아닌 특수한 교법을 토(吐)한다’고 함은 모든 성인은 한 마음의 바른 종[正宗]에 의지하여 근기에 맞게 차별된 교법의 자취를 연설하나니, 비록 9류(流)와 8교(敎)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변천하지 않는 한 찰나는 이지러짐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천 갈래 길로 다르게 창도(唱導)한다 하더라도 모이고 돌아가는 데는 같은 데로 이른다. 그러나 글을 따르면서 뜻을 미혹한 이는 권문(權門)인 생멸의 말만을 집착하여 세간 모양의 오가는 일을 허망하게 보며 이로 인하여 유동한다고 여겨 경계를 따라 윤회하면서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이 마침내 성품이 없음을 더욱 모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중관론(中觀論)』에서는 3시(時)에 감[去]이 없음을 부수었다. ‘첫째는 이미 갔으면[已去] 감이 없다는 것이니, 가는 법이 이미 사라졌다. 둘째는 아직 가지 못했으면[未去] 감이 없다는 것이니, 가는 법이 아직 싹도 트지 못했다. 셋째는 가는 때[去時]는 감이 없다는 것이니, 지금 가면 머무름이 없다는 것이다. 또 가는 이[去者]와 가는 법[去法]의 두 가지 일은 함께 함이 없다. 만일 가는 이가 없다면 곧 가는 법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다. 가는 이는 바로 사람이요, 법은 사람으로 인하여 이르게 되고 사람을 여의면 법도 없으며 법을 여의면 사람도 없다’ ”고 하였다. 때문에 초(鈔)에서 이르되 “방소를 보면서 그의 가는 것을 아나 가는 이가 방소에 닿지 않는다 함은 3시(時)의 가고 옴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요 변천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마치 사람이 처음 동쪽에 있으면서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으면 아직 가지 않았다고 하며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가지 않은 것을 갔다고 이름붙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만일 한 걸음을 움직여서 본래 섰던 자리를 떠나면 본래 섰던 자리를 반대로 보면서 이미 갔다고 하며, 이미 갔기 때문에 이미 간 것을 갔다고 이름붙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미혹된 사람은 계교를 내면서 이르되 “처소에서 움직이면 가는 것이 있고, 여기서는 가는 때가 있는 것이라 이미 간 것도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가는 때는 간 것이다”라고 한다. 용수(龍樹)는 상대(相待)로 논파하며 이르되 “만일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았음이 있으면 가는 때가 있거니와 만일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았음이 없으면 가는 때가 없다”고 하고,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되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았음을 여의면/가는 때 또한 가는 것이 없네”라고 했다. 마치 양 끝이 짧음으로 인하여 중간의 긺이 있거니와 만일 양 끝의 짧음이 없으면 곧 중간의 긺이 없는 것과 같다. 청목(靑目)은 곧 서로가 반대된 것으로 논파하였다. “왜냐하면 가는 때라 함은 반쯤 가고 반쯤 가지 못했음을 말하여 가는 때라고 하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하나의 법 가운데 두 가지가 있어서 서로 반대된 것에 떨어졌는지라 간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때도 역시 가는 것이 없다”고 하고,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되 “이미 갔는지라 가는 것이 없고/아직 가지 않음 역시 가는 것이 없으며/이미 갔고 아직 안 감 여의게 되면/가는 때 또한 가는 것 없네”라고 했다. 마치 한 사람이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가 닿을 적에 그 동쪽에서 서쪽까지를 바라보면 가는 것이 있는 것과도 같다. 때문에 그의 가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걸음과 걸음 안에서는 3시(時)에 가는 것이 없고 그렇다면 가는 법이 없으며 이미 가는 법이 없으면 곧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가는 이가 방소에 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는 이는 사람을 말한다. 이상에서 하나의 경과 하나의 논으로 모두 3시에 가는 것이 없음을 밝혔으며, 표종(標宗)으로 변천하지 않음을 설명했다. 이 오고 가는 인과가 변천하지 않으면 곧 중도(中道)의 여덟 가지 아님[不]이라는 뜻에 계합된다. 마치 논의 게송에서 이르되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으며[不滅]/항상 하지도 않고[不常] 아주 없지도 않으며[不斷]/동일하지도 않고[不一] 다르지도 않으며[不異]/오지도 않고[不來] 가지도 않네[不去]. 이 인연을 말할 수 있으면/모든 희론(戱論)』이 잘 없어지나니/나는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함이/모든 설(說) 가운데서 첫째가니라”고 했다. 이제 인과로써 여덟 가지 아님의 이치를 회석(會釋)해 보자. 나지 않는다 함은 마지 20시(時)가 원인이 되고 30시(時)가 결과로 되는 것과 같아서 만일 20을 여의어도 지금의 30이 있다면 남이 있다[有生]고 말할 수 있거니와 만일 20을 여의면 30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론(中論)』에서 이르되 “겁초(劫初)의 곡식을 여의면/지금의 곡식은 얻을 수 없네”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지 않는다. 없어지지도 않으며, 만일 20시가 없어지면 지금의 30시도 있지 않아야 한다. 『중론』에서 이르되 “만일 없어지면 지금의 곡식도 없어야 할 터인데, 실은 곡식이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 항상하지 않는다 함은, 30시에 20시가 없다. 이 때문에 항상하지 않는다. 『중론』에서 이르되 “마치 곡식의 싹이 튼 때에 종자는 변하여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 아주 없지도 않는다 함은, 20으로 인하여 30의 상속함이 있다. 이 때문에 아주 없지도 않다. 『중론』에서 이르되 “곡식으로부터 싹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주 없지도 않다. 만일 아주 없다면 상속되지 않아야 한다. 동일하지 않다 함은, 20은 30과는 동일한 자체가 아니다. 각기의 성품이면서 머무르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다. 『중론』에서 이르되 “마치 곡식은 싹으로 되지도 않고 싹은 곡식으로 되지도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동일하지도 않다. 다르지도 않다 함은, 20을 여의고는 30이 있지도 않다. 마치 20인의 성(姓)이 장(張)이면 30인도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중론』에서 이르되 “만일 다르다면 무엇 때문에 곡식의 싹과 곡식의 줄기와 곡식의 잎을 분별하겠는가”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다르지 않다. 오지 않는다 함은, 20은 30시에 이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지 않는다. 나가지 않는다 함은, 20시는 바로 그 곳이 저절로 고요하여 다시 나지는 않는다. 때문에 나가지 않는다. 이 이치를 통달하면 온갖 쓸모없는 의론을 여의고 중도(中道)에 계합되나니, 곧 참 진리이다. 이것으로도 참 진리 안에서는 하나의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가고 옴이 있겠는가?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그 때 세존이 그 보살에게 물으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르러서 온 것인가, 이르러서 오지 않은 것인가?’ 유리(琉璃光)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르름 역시 오지 않았고 이르지 않음 역시 오지 않았나이다. 제가 이 이치를 관찰하건대, 도무지 온다는 것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행(行)이 만일 항상하다면 역시 오지 않은 것이요 만일 항상함이 없다면 역시 오는 것이 없나이다. 어떤 사람이 중생의 성품이 있는 것을 보면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이 있거니와, 저는 지금 중생의 정해진 성품을 보지 않거늘 어떻게 오거나 오지 않음이 있다고 말하겠나이까. 교만이 있는 이는 오감이 있음을 보거니와 교만이 없는 이는 오감이 없으며, 잡음[取]의 행이 있는 이는 오감이 있음을 보거니와 잡음의 행이 없는 이는 오감이 없으며, 만일 여래는 마침내 열반한다고 보는 이면 오감이 있거니와 여래는 마침내 열반한다고 보지 않는 이면 오감이 없으며, 불성(佛性)을 듣지 않은 이면 오감이 있거니와 불성을 들은 이면 오감이 없나이다’ ”라고 했다. 『반야등론(般若燈論)』에서 물었다. “ ‘그대는 이미 간 것을 처음 출발이라 하는가,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처음 출발이라 하는가, 가는 때를 처음 출발이라고 하는가?’ ‘세 가지 모두가 그렇지 않다. 마치 게송에서 이르되 ≺이미 간 것 안에는 출발이 없고/아직 가지 않은 것도 출발이 없으며/가는 때 안에서도 출발이 없거늘/어디에 출발이 있을 것인가≻’ ”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미 간 것 안에는 출발이 없다 함은, 가는 작용이 거기서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출발이 없다 함은, 아직 가지 않았으면 가는 것이 없으므로 간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가는 때 안에서도 출발이 없다고 함은,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은 것들은 모두가 간다는 이치가 없거늘, 어떻게 가는 때거나 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세 가지는 모두가 처음 출발이란 것이 없다. 이 때문에 게송에서 ‘어디에 출발이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되 “이미 갔음과 아직 가지 않음이 없고/또한 그곳으로 가는 때가 없거늘/가는 것이 없는 법 안에서/무엇 때문에 허망하게 분별하는가”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허망하게 분별한다 함은, 마치 눈에 병든 사람이 허공 가운데서 털과 파리 따위를 보기도 하는 것과 같나니, 모두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되 “이 때문에 가는 것은 성품이 없고/가는 이도 다시 그러하며/가는 때와 모든 법 등은/모두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되 “아직 소멸되지 않은 법 소멸하지 않았고/이미 소멸된 법도 소멸하지 않았으며/소멸하는 때 또한 소멸되지 않나니/생김이 없거늘 어떻게 소멸하는가”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첫째 글귀는 소멸이 공이기 때문이니, 마치 머무르는 것과 같다. 둘째 글귀는 마치 사람이 이미 죽었으면 다시는 더 죽지 않는 것과 같다. 셋째 글귀는 그것은 이미 소멸한 것과 아직 소멸하지 않는 법을 여의고서 다시 소멸하는 때가 없다면 다 함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반드시 소멸하는 때도 소멸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넷째 글귀의 그 뜻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온갖 모든 법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생김이 없다고 함은 생기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생김이 없는데 소멸이 있다면 그 이치는 옳지 못하나니,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다”고 했다. 내지 ‘그대는 소멸을 말하는가’라 함은, 자체의 소멸이 있다는 것인가, 자체의 소멸이 없다는 것인가. 둘 다 옳지 못하다. 마치 게송에서 이르되 “법에 만일 자체가 있다고 하면/있은즉 소멸하는 모양이 없으리라”고 함과 같다. 해석에서 이르되 “서로가 반대이기 때문이니, 마치 물과 불과도 같다. 이 때문에 게송에서 이르기를 ‘한 법에 있음과 없음이 있나니/이치로선 그렇지 않아야 하리라’ ”고 했다. 다시 게송에서 이르되 “법에 만일 자체가 없다고 하면/소멸이 있음 또한 옳지 않나니/마치 둘째 번의 머리가 없으면/그를 끊는다고 말할 수 없음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미 오고 가는 법이 없다면 역시 머무르고 그치는 때도 없다. 법으로 인하여 때를 밝히고 역시 때로 인하여 법을 설명할 터인데 법이 이미 없거늘, 때인들 어찌 성립되겠는가? 마치 『중관론(中觀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때의 머무름을 얻을 수 없으면/때의 감 또한 얻을 수 없으며/때를 만일 얻을 수 없다고 하면/어떻게 때의 형상을 말하리오. 만물로 인하여 때가 있다면/만물을 여읠 적엔 어찌 때가 있으리/만물조차 오히려 아무것도 없거든/하물며 때가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위와 같은 인증(引證)은 곧장 세간을 지칭한 것이어서 모두가 현상에 즉(卽)하여 진리를 말하고 범부로부터 도(道)를 보는 것이니, 눈앞에서 실제로 증득하면 의심이 끊어질 수 있다”라고 했다. 가는 법이 이미 그러하므로, 6취(趣)에 윤회함과 사계절에 새 것으로 대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변천하지 않고 항상 머무르는 한 마음의 도(道)이다. “그렇다면 뭇 전적의 다른 글과 백가(百家)의 다른 학설은 진실로 그 계회(契會)를 얻거늘, 어찌 글과 말로써 미혹시킬 수 있겠는가” 함은, 만일 만법은 나의 한 마음일 뿐임을 통달하면 이 심성(心性)을 관하는 것조차도 일찍이 나는 일이 없거늘, 어떻게 없어짐을 말하겠으며 오히려 고요함도 얻지 못하거늘 어떻게 움직임을 말하겠는가? 마치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이 때 여래는 대중 가운데서 5륜지(輪指)를 구부렸다 펴시고 다시 구부리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무엇을 보았느냐?’아난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보배롭고 수레바퀴 몸매의 손바닥을 대중 가운데서 폈다 구부렸다 하시는 것을 보았나이다.’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손이 대중 가운데서 폈다 구부렸다 하는 것을 보았다 하니 내 손이 폈다 구부렸다 하였느냐, 너의 견(見)이 폈다 구부렸다 하였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대중 가운데서 보배 손을 폈다 구부렸다 하셨으므로, 저는 여래의 손이 폈다 구부렸다 하신 것을 보았을 뿐 저의 견은 폈거나 구부렸거나 함이 아니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어느 것이 움직이고 어느 것이 고요하였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부처님 손이 가만히 있지 않으셨고 저의 견은 오히려 고요하다는 것조차도 없거늘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할 것은 무엇이옵니까?’ 부처님께서 ‘그러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내지 ‘어째서 너희들이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삼고 움직이는 것을 경계로 삼아서, 처음부터 나중까지 찰나 찰나마다 나고 없어지면서 참 성품은 잃어버리고 뒤바뀌게 일을 행하며, 물건을 내 몸인 줄 잘못 알고서 이 안을 윤회하며 유전(流轉)을 스스로 취하느냐?’ ”라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견(見)의 성품은 변천하지 않고 진리는 법계에 두루한 데 물건이 내 몸인 줄 잘못 안 탓으로 깨달음을 저버리고 경계에 합해 있을 뿐이니, 만일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삼고 움직이는 것을 경계로 삼는다면 뒤바뀌게 일을 행하면서 참 성품을 잃어버릴 것이다. 경계는 실로 변천하지 않는데 마음이 망령되이 요동할 뿐이니, 가위 구름이 달리면 달이 움직이고 배가 가면 언덕이 옮아간다 하리라.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되 “갔음[往]을 말하나 반드시는 가지 아니하여 예와 이제가 항상 존재함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까닭이요, 지나갔음[去]을 일컬으나 반드시 지나가지 않은 것이니, 지금이 옛날에 이르게 되지 않음은 그것이 오지 않는 까닭이다. 오지 않기 때문에 예와 이제에 빨리 내닫지 아니하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무른다”고 했다. 이야말로 이 법과 법이 각각 진여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라 한 물건도 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일찍이 한 찰나도 잠시를 머무는 일이 없고 모두 서로가 기다리지 않았거늘 어찌 변천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렇게 통달할 수 있으면 자기 눈이 원만하게 밝아지겠거늘, 어찌 있는 듯한 허망한 경계와 한 시기의 다른 학설로써 나를 미혹되게 하겠는가. 또 옛 해석에서 말한, “백가(百家)의 다른 학설과, 어찌 글과 말로 미혹되게 하겠는가”라고 함은, 바로 3교(敎)에서 미혹되지 않고 각각 그 종(宗)을 세울 것을 밝힌다. 유교(儒敎)에서는 27가(家)가 있으며, 만일 5상(常)의 도리에 계합되면 곧 미혹됨이 없다. 황로(黃老)에서는 25가(家)가 있으며, 만일 허무(虛無)에 계합되면 역시 미혹됨이 없다. 석도(釋道)에서는 12분교(分敎)가 있으며, 만일 본 마음을 분명히 알면 역시 미혹됨이 없다. 그렇다면 3교가 비록 다르기는 하나 법계로 그를 거둔다면 따로 근원이 없다. 만일 공자 노자 두 교의 백씨(百氏) 9류(流)를 총괄해서 말한다면 법계를 여의지 않음은 마치 백 개의 시냇물이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며, 만일 불교의 원종(圓宗)인 1승의 미묘한 뜻을 구별해서 말한다면 백가(百家)는 마치 반딧불과 같거늘 어찌 거대한 조명(照明)과 같겠는가? 마치 큰 바닷물은 백 개의 시냇물로 돌아가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면 4상(像)이 바뀌고 바람이 내달으며 선기(旋機)가 옮아가고 번개가 치는 때에 뜻을 얻은 이가 작은 털만큼이라도 알면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바꿔지지 않는다” 함은, 다음과 같다. 4상은 사계절[四時]이요, 선기라 함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이 비록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며 북두가 바뀌고 7성이 옮기며 번개가 치고 바람이 내달아 찰나 동안도 머무르지 않기는 하나, 만일 뜻을 얻은 이가 한 마음의 터럭만큼 되는 작은 비밀한 뜻을 환히 알면 성품을 보면서 요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되 원인으로 인하여 결과가 된다” 함은, 마치 높은 산을 만들 때 처음의 한 삼태기 흙을 덮는 것이 원인이 되어 곧장 흙이 쌓이면서 산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처음의 한 삼태기 흙이 비록 아직은 다 산을 만들지는 못하고 처음 것이 뒤에까지 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소멸되지는 않는다. 또 마침내는 이 한 삼태기의 흙으로 인하여 산이 이룩되기 때문에 이르되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되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된다”고 한다.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되는지라 원인인 옛날은 소멸되지 않고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는지라 원인은 지금에 오지 않는다. 소멸되지 않고 오지 않으면, 변천하지 않는다는 이치가 분명하다. 또 마치 천 리의 먼 길을 갈 때 첫 걸음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다. 비록 아직은 이내 도착 못하고 결과는 원인을 함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온전히 첫 걸음으로 인하여 천 리의 길에 도달될 수 있다면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있다. 때문에 이르되 “산을 이룸에는 첫 삼태기를 빌려 완성되고, 먼 길로 첫 걸음에 의탁하여 도달하게 된다”고 했다. 또 처음에 한 생각의 보리인 착한 마음의 원인을 내어 마침내는 위없는 묘각(妙覺)의 결과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곧 최초의 한 생각은 없어지지 않으며, 만일 처음의 한 생각이 벌써 소멸되었다면 부처의 결과를 이룰 수 없다. 때문에 이르되 “여래의 공(功)은 만세(萬歲)에 흐르면서도 항상 존재하고 도(道)는 백 겁에 통하면서도 더욱 공고하다”고 했다. 공은 소멸되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이루어지고 업은 이룩되나니, 원인은 헛되지 않고 일은 버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법은 다 함께 변천하지 않는 줄 알겠거늘, 어찌 움직임과 고요함의 사이에서 망설이겠는가. 만일 경계에 접촉하면서 종(宗)을 밝히고 정신을 물건에 즉한 것에 계합된다면, 마치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엎어지며 바닷물이 끓고 산이 무너진다 하여도 오히려 움직임과 고요함의 조짐조차도 보지 않겠거든, 하물며 그 밖의 허깨비와 그림자며 메아리겠는가. 【문】 온갖 진리와 범속 등의 법은 모양이 있고 작용이 있고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거늘, 어떻게 한결같이 관심(觀心)하는 것만으로 풀이하는가? 【답】 만일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지 않으면 불법의 대지(大旨)를 잃게 되리니, 모든 성인을 높이 추구하고 앙모하면서 닦아 나아가지 않으면 억울하게 괴로움에 빠져 있으면서 자기에 대한 본분(本分)을 끊음이 마치 관심으로 도에 나아간 이를 본받지 않음과 같고 마치 돌을 안고 못에 빠져 드는 것과 같다. 밤 길 가는 이가 촛불을 버리면 부처의 지혜 바다에서 죽게 됨이 틀림없고 열반의 성(城)을 향해 짐짓 발붙이기조차 어려우리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가 교(敎)를 일으킨 연유로서 오직 온갖 중생에게 불성(佛性)과 대반열반(大般涅槃)과 일심(一心)의 비밀한 장(藏)을 말씀했을 뿐이니, 범부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모두가 그 안에 들어간다. 마치 세존께서 “이 대반열반은 바로 시방의 모든 부처가 몸과 목숨을 놓아버린 곳으로서 제자들을 편안히 두어 그 안에 모두 들게 하셨으니, 나도 스스로 그 안에 머무른다. 왜냐하면 자기의 심성을 깨닫기 때문에 불성이라 하고, 성기(性起)의 샘이 없는 공덕을 따르면서 자신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는 법 이익이 그지없기 때문에 장(藏)이라 하며, 믿기 어렵고 알기조차 어렵기 때문에 비밀(秘密)이라 하고, 법성(法性)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나니, 가히 한량없는 법 보배가 나오는 데라 하리라. 마치 네 개의 대해(大海)는 온갖 만법이 의지할 곳이 됨과 같고 마치 시방의 허공과 같나니, 만일 그를 만나지 못하여 법 이익을 크게 잃는 이가 잠시라도 들으면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신 것과 같다. 또 마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중에서 칭찬한 바와 같다. “부처님이 가섭(迦葉)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미묘한 『대반열반경』은, 온갖 법의 보배 창고이니, 마치 큰 바다는 바로 뭇 보배의 창고인 것처럼 이 『열반경』 또한 그와 같아서 이는 온갖 글자 뜻의 비밀 창고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수미산은 뭇 약의 근본인 것처럼, 이경 또한 그와 같아서 이는 보살계(菩薩戒)의 근본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허공은 바로 온갖 물건의 머무르는 데인 것처럼, 이 경 또한 그와 같아서 이는 온갖 착한 법이 머무는 곳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맹렬한 바람은 묶어 맬 수 없는 것처럼, 온갖 보살행의 이 경 또한 그와 같아서 온갖 번뇌와 나쁜 법에 얽매이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금강(金剛)은 파괴할 이가 없는 것처럼, 이 경 또한 그러해서 비록 외도와 나쁘고 삿된 사람이 있을지라도 파괴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항하의 모래는 셀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처럼, 이 경의 뜻 또한 그와 같아서 셀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선남자여, 이 경전이 모든 보살에게 법의 당기가 됨은 마치 제석(帝釋)의 당기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이 경은 바로 열반의 성에 나아가는 상인 우두머리[商主]로서 마치 큰 길잡이가 상인들을 이끌고 큰 바다로 나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이 경이 모든 보살들을 위해 법의 광명이 될 수 있음은 마치 세상의 해와 달이 모든 어둠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이 경이 병들어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아주 좋은 약이 되어 줌은 마치 설산(雪山) 안의 미묘한 약이 뭇 병을 고칠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이 경이 일천제의 지팡이가 될 수 있음은 마치 약한 사람이 그를 잡고 일어나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내지 선남자여. 이 경은 바로 금강으로 된 날카로운 도끼여서 온갖 번뇌의 큰 나무를 벨 수 있고, 이는 날카로운 칼이어서 습기(習氣)를 능히 쪼개며, 이는 용맹스런 분이라 악마를 꺾어 뜨릴 수 있고, 이는 지혜의 불이라 번뇌의 나무를 불사르며, 이는 인연장(因緣藏)이라 벽지불을 내고, 이는 문장(聞藏)이라 성문인을 내느니라. 이는 온갖 하늘들의 눈이요, 이는 온갖 사람들의 바른 길이며, 이는 온갖 짐승들이 의지하는 데요, 이는 아귀가 해탈하는 곳이며, 이는 지옥의 위없는 어른이요, 이는 온갖 시방 중생의 위없는 그릇이며, 이는 시방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의 부모이니라.” 이것으로도 이 한 마음의 총지(摠持)요 열반이요 비밀의 장(藏)을 환히 알면, 위와 같이 칭찬하신 뭇 덕이 돌아갈 데요 있게 되는 한 털만큼의 공도 진여의 그지없는 이치에 따라 함은 법계와 같아지고 복은 허공과 같아져서 모두가 보리의 지음 없는 묘한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줄 알겠다. 만일 이 뜻을 깨치지 못하면, 설령 닦아 나아감이 있다 해도 유위(有爲)만 이룰 뿐 마침내는 도를 얻지 못하며, 오랜 겁(劫)을 지나면서 애써 수행하여도 졸도(拙度)의 문만 이룰 뿐이요 끝내 훌륭한 과보의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사리불(舍利弗)의 제자 라빈주(羅頻周) 비구와 같다. 그가 계를 지니면서 정진하다가 엿새 동안을 걸식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이레 만에는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도를 같이 닦던 어떤 이가 걸식을 해다가 주었더니 새가 이내 채어 가버렸다. 이때 사리불은 목건련(目犍連)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큰 신통력으로 이 음식을 수호하여 그가 먹을 수 있게 하십시오.’ 이때 목련이 음식을 가지고 가서 주자 막 입으로 들어가려는데 진흙으로 변해버렸다. 또 사리불이 걸식하여 가져다 주었더니 입이 저절로 다물어져버렸다. 최후에 부처님이 오셔서 밥을 그에게 주자, 부처님의 복덕의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그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비구는 다 먹고 나서 마음에 기쁨을 내면서 갑절 믿고 공경하였다. 부처님은 비구에게 ‘유위의 법은 모두가 괴로움의 모양이니라’고 하시고, 그를 위해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시자 이내 비구는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리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1승의 복을 믿으면 그 복은 진여와 같고 네 글귀의 공(功)을 지니면 그 공은 대각(大覺)과 같다. 그런 까닭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의 성품[性]ㆍ제 성품[自性品]ㆍ첫째가는 이치 마음[第一義心]이니, 성품ㆍ제 성품ㆍ첫째가는 이치 마음으로써는 여래의 세간과 출세간의 상상법(上上法)인 참 마음의 덕을 성취하며, 첫째가는 이치 마음으로써는 마침내 세간과 출세간의 보리를 얻는 훌륭한 과보의 복을 얻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문】 만법이 유식(唯識)이라면 모든 식(識) 가운데서 어느 식이 구경(究竟)인가? 【답】 아마라식(阿摩羅識)이어서 여기의 말로는 무구정식(無垢淨識)이라고 하며, 변하여 달라짐도 없고 구경이 된다. 『삼무성론(三無性論)』에서 이르되 “식의 여여함[如如]이라 함은, 온갖 변천하는 법은 이 식뿐임을 말한다. 이 식에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여여함이라 한다. 첫째는 거두어 뒤바뀜이 없는 것이니, 12입(入) 등의 온갖 법은 이 식일 뿐이요 어지러운 식을 여의고서 그 밖에 따로 다른 법이 없다.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식에 속하며, 이 이치는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거두어 뒤바뀜이 없는 여여함이라고 한다. 둘째는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이니, 이 어지러운 식은 바로 분별(分別)과 의타(依他)로서 대경과 같은 식으로 나타나게 됨을 밝힌다. 분별의 성품이 영원히 없기 때문에 의타의 성품 역시 있지 아니하여 이 두 가지는 아무 것도 없나니, 바로 이것이 아마라식이다. 이 식이 있을 뿐이요 홀로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기 때문에 여여함이라 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온갖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는 유식을 지나가지 않나니, 이것이 여량경계(如量境界)이다. 이 유식은 바깥 경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되 바깥 경계는 이미 없는지라 유식 또한 없다. 경계는 모양이 없고 식은 남[生]이 없나니, 이것이 온갖 법의 평등으로서 통틀어 여리(如理)이기 때문이다. 여리와 여량의 두 문(門)에 온갖 성품과 모양이 모두 거두어지나니, 식 모양은 묘유(妙有)라 이는 여량문이요 식 성품은 진공(眞空)이라 이는 여리문이다. 만일 여리와 여량이 둘 다 소멸되면 참 성품일 뿐이다”라고 했다. 또 아마라식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연(所緣)이니 이는 진여이다. 둘째는 본각(本覺)이니 곧 진여지(眞如智)이다. 능연(能緣)은 곧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요, 소연은 곧 공여래장(空如來藏)이다. 『십이문론(十二門論)』에서는 “유식의 진실을 밝히고 온갖 법은 정식(淨識)이 있을 뿐 능의(能疑)도 없음”을 설명하였다. 유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방편(方便)이니, 먼저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을 뿐이요 그 밖의 경계는 없다고 관하면서 현재에 경계와 지혜의 두 공을 얻어 허망한 식[妄識]을 다 없애고 나면 방편유식이라고 한다. 둘째는 정관유식(正觀唯識)이니, 나고 죽는 허망한 식심(識心)과 경계의 형상을 모조리 없애면 온갖 모든 것의 청정한 것도 다하여 아마라식의 청정한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문】 만법이 유식이면 부처님도 식에 머무르는가? 【답】 아뢰야라면 여기 말로 장식(藏識)이니 온갖 잡염품(雜染品)의 법을 능히 간직해서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요, 아견(我見)과 아애(我愛) 등의 집장(執藏)은 스스로가 내아(內我)로 여기기 때문이니, 이 이름은 범부의 유학(有學)에만 있을 뿐이며 아타나(阿陀那)는 여기의 이름으로 집지(執持)이니 종자와 색신의 감관을 붙잡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온갖 자리에 다 통한다. 아집(我執)이 없어지면 곧 아뢰야를 버리면서 아타나라 하는데 무루(無漏)의 종자를 지닌다. 그러면 허망한 마음은 바로 소멸되고 참 마음이 나타나게 되며, 여기서 부처는 무구정식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소멸하면 생사가 다하나니, 바로 이것은 허망한 마음의 소멸이요 마음의 자체가 소멸된 것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다시 분별심(分別心)의 생멸하는 모양에는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첫째는 거친 것[麤]이니 상응심(相應心)을 말한다. 둘째는 미세한 것[細]이니 불상응심(不相應心)을 말한다. 거친 것 중에서 거친 것은 범부의 지혜의 경계요, 거친 것 중에서 미세한 것과 미세한 것 중에서의 거친 것은 보살의 지혜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형상은 모두가 무명(無明)이 훈습(熏習)한 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나니, 인 이것은 불각(不覺)이요 연 이것은 허망한 경계[妄境]이다. 인이 소멸하면 연이 소멸하며, 연이 소멸하기 때문에 상응심이 소멸하고 인이 소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이 소멸한다. 【문】 만일 마음이 소멸하면 어떻게 상속되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떻게 소멸한다고 말하는가? 【답】 실로 그렇기는 하다. 지금 소멸이라 말한 것은 마음의 모양이 소멸될 뿐이요 마음의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은 바람으로 인해서 움직임의 모양이 있고 바람이 소멸하기 때문에 움직임의 모양은 이내 소멸하되 물 자체가 소멸된 것이 아님과 같다. 만일 물이 소멸한다면 움직임의 모양은 소멸되어야 하리니, 소의(所依)도 없고 능의(能依)도 없기 때문이다. 물의 자체는 소멸되지 않으므로 움직임의 모양은 상속된다. 중생 역시 그러해서 무명의 힘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동요의 모양은 이내 소멸하되 마음의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만일 마음이 소멸된다면 중생은 끊어질 것이니, 소의도 없고 능의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 자체는 소멸되지 않으므로 동요의 모양은 계속된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논에서는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의 두 가지 마음과 경계는 모두가 무명이 훈습한 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인에 의하고 연에 의하나니, 인 이것은 불각이요 연 이것은 허망한 경계이다’ 함은, 다만 불각의 제 마음만이 허망하게 바깥 경계를 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알라. 경계는 제 성품이 없어서 마음을 따르면서 나고 화합하면서 일어난다. 때문에 이르되 ‘마음이 나면 곧 법이 나고 인이 소멸하면 연이 소멸한다’고 한다. ‘물의 자체는 소멸되지 않으므로 움직임의 모양은 상속된다’ 함은, 이는 참 마음의 자체는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친 것도 아님에 비유한다.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생사의 동요가 일어나되 만일 허망한 바람이 쉬는 때는 마음의 동요한 모양이 이내 소멸되거니와 마음의 자체는 소멸한 것이 아니다. 마음의 자체는 바로 소의요 만법(萬法)은 바로 능의이다. 만일 소의가 없다면 능의는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한 마음의 자체는 뭇 존재하는 것의 의지가 되나니, 마치 하늘이 만상(萬像)의 자체가 된 것과 같다. 또 본식(本識)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허망하게 물들었다[妄染]는 뜻이니, 범부로서 머무는 데다. 둘째는 참되고 깨끗하다[眞淨]는 뜻이니, 8지(地)로서 머무는 데다. 불지(佛地)에서는 단순히 진여에만 머무르며 무구식(無垢識)이라 할 뿐이다. 【문】 모든 부처는 단순히 진여에만 머무르며 무구식이라 할 뿐이면, 무구정식은 바로 항상 머무는 참 마음인데 모든 부처는 결정코 마음이 있는 것인가, 결정코 마음이 없는 것인가? 【답】 체성에 의거하면, 말로는 4구(句)가 없어지고 뜻으로 백비(百非)가 끊어졌다. 작용에서 보면, 지혜로 능히 밝을 뿐이요 뜻[情]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다. 『화엄경』에서 이르되 “불자야, 여래의 심(心)ㆍ의(意)ㆍ식(識)은 다 함께 얻을 수는 없고 다만 지혜로 한량이 없어야 할 뿐이니, 그것이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했다. 고석(古釋)에서 이르되 “ ‘여래의 심ㆍ의ㆍ식은 다 함께 얻을 수 없다’함은 체성에서 본 차전(遮詮)이며, ‘지혜로 한량이 없어야 할 뿐이니, 그것이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함은 작용에 붙인 표전(表詮)이다”라고 했다. 한 스승이 이르되 “식(識) 등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듦[染]이요, 둘째는 깨끗함[淨]이다. 불지(佛地)에는 번뇌로 물든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없으면서 청정한 갈래의 심왕과 심소가 있나니, 과위(果位) 안에는 지혜가 강하고 식은 약하기 때문이다. 심왕 위에서 물듦이 없음을 나타냄으로써 그 지혜에서 보아 한량없음을 밝히려는 까닭이다. 만일 반드시 심왕ㆍ심소가 없다면 지혜는 어디에 의지하여 서겠는가. 경에서 이르되 ‘여래의 무구식은 바로 청정한 샘이 없는 경계로서, 온갖 장애를 해탈하고 원경지(圓鏡智)와 상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심왕이 있다 함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한 스승은 이르되 “쌓여진 사량(思量) 등이 없다는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 등을 설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무분별지(無分別智)에 나아가서 한량없음을 나타내는지라 마음의 체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이 두 가지 해석은 다 같이 심ㆍ의ㆍ식의 있음을 밝힌다. 또 이르되 “부처의 과위에서는 실로 심ㆍ의ㆍ식과 그 밖의 심법(心法)이 없으므로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니, 큰 지혜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지혜가 한량없기 때문에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말했다. 경에서 이르되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만이 홀로 불지에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고 하였다. 논(論) 중에서는 다섯 가지 법으로 대각(大覺)의 성품을 포섭하여 하나의 진법계(眞法界)와 네 가지의 지보리(智菩提)뿐이며, 다시는 그 밖의 법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설명은 없다 함에서 본 것이다. 만일 앞의 있다는 것에 의하면 너무 불려서 한 말임을 면치 못하리니, 역시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잘 통하지 못했다. 만일 뒤의 없다는 것에 의하면 너무 줄여서 한 말임을 면치 못하리니, 역시 ‘부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하는 말을 잘 통하지 못했다. 이미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했다면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함을 밝힌 줄 알아야 하며, 또 마음이 벌써 없다면 지혜는 어디서 홀로 서 있겠는가. 역시 열반에 어긋나고 무상(無常)한 식(識)이 소멸되고 항상한 식을 얻게 된다는 이치이다. 만일 있다, 없다의 두 가지 뜻을 함께 취한다면 서로가 어김을 면치 못할 것이요, 만일 서로 없애서 다 함께 부정한다면 어떻게 쓸모없는 의론을 피하겠는가? 만일 뒤의 종(宗)에서 말한, ‘여지일 뿐[唯如智]’이라 한다면 마음은 곧 진성(眞性)이 같기 때문에 ‘여일 뿐[唯如]’이라 하고, 비추는 작용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지일 뿐[唯智]’이라 하거늘, 어찌 마음을 여의고서 그밖에 따로 여(如)가 있겠는가. 이야말로 ‘여일 뿐’은 있다는 것에서 어그러지지 않는다. 앞의 종(宗)에서는 순수한 여의 자체[純如之體]이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이 있고 마음이 이미 여(如)이므로 있다 한들 무슨 잘못이겠는가. 이것으로도 진여에 즉한 있음[卽眞之有]과 있음에 즉한 진여[卽有之眞]의 두 이치가 서로 성립되어 있다 없다가 걸림이 없는지라, 바르게 경의 뜻을 소화한 이인 줄 알겠다. ‘얻을 수 없다’고 함은 마음의 이치가 깊고 오묘해서 말로는 미치지 않기 때문에 차전(遮詮)에 붙여 깊음을 나타내는 것이요, ‘지혜로 여래의 마음인 줄 알 뿐이다’ 함은 심소(心所)에 의탁하여 표전(表詮)에 붙여 깊음을 나타냈거늘 어떻게 깊고 오묘하겠는가.
있다고 말하려 하면 여(如)와 같아서 모양이 끊어지고, 없다고 말하려 하면 깊숙하고 신령하여 다함이 없으며, 그를 정(情)이라 말하려 하면 특수한 물질의 성품이 없고, 정이 없다고 말하려 하면 깊숙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으로 부처 마음은 있음에 즉(卽)하고 없음에 즉하며 심왕에 즉하고 심수에 즉하며, 마음속에 뜻[意]이 있는 것도 아니고 뜻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뜻 속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수가 있지 않는 것도 아니며, 심왕에 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낱낱이 모두가 그러하고 원융하여 걸림이 없음을 알겠다. 『청량기석(淸凉記釋)』에서 이르되 “부처는 마음이 없고 지혜가 있다 하면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성립된다. 심왕은 가장 훌륭한지라 오히려 없다고 하겠거니와, 지혜는 의지할 대상이 없거늘 어찌 홀로 서겠는가? 마치 군주가 없으면 어떻게 신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제 먼저 두 종(宗)을 따로따로 회석(會釋)하고 나중에 두 종을 통틀어 합석(合釋)하겠다. 먼저 법성종(法性宗)의 뜻으로 회석하면, 마음은 곧 여(如)요 지혜는 곧 여지(如智)이니, 마음을 여의면 여가 없다. 그렇다면 여가 있으면 벌써 마음이 있는 줄을 알겠다. 하물며 체성에 즉한 작용을 여지라 하고 작용에 즉한 체성이 바로 진여임이겠는가. 마치 하나의 명주(明珠)와 같아서 명주의 자체가 곧 여요 광명이 곧 여지이거늘 어찌 여(如)가 존재함을 마음에서 없앨 수 있겠는가. 앞의 종(宗)은 순전히 아래와 같다. 법상종(法相宗)의 뜻으로 회석하면, 여에 즉한 있음[卽如之有]이거늘, 있음이 어찌 여와 어그러지겠는가? 마치 거울은 곧 텅 빈 것과 같다. 그렇다면 마음이 있다 해도 허물이 없다. 이것으로도 진여에 즉한 있음인 줄 알겠다. 통틀어 두 종을 회석하면, 진여에 즉한 있음은 바로 법상종이요, 있음에 즉한 진여는 바로 법성종이다. 양쪽은 서로가 여의지 않아야 비로소 걸림이 없는 참 부처 마음이 성립된다. 또 마음속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뜻이 없는 것도 아니라 고 하는 것과, 있는 것도 아니라 하는 이것은 즉하지 않는다[不卽]는 이치로서, 두 모양[相]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아니라 하는 이것은 여의지 않는다[不離]는 이치로서 둘이 없는 자체[體]이기 때문이다. 또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둘이 없는 자체가 서로가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요,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두 모양이 파괴되지 않아서 힘과 작용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