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4_0190_a_01L종경록 제33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대저 도(道)는 닦을 만한 것이 없고 법은 물을 만한 것이 없다. 겨우 큰 뜻을 깨치기만 하면 만 가지 일이 다 함께 쉬는 것이므로 이르기를 “말 길이 끊어졌고 마음의 가는 것도 소멸했다”고 이미 종경(宗鏡)에서 말했거늘, 어찌 몸ㆍ계율ㆍ마음ㆍ지혜에 관한 글을 자세히 인용하는가.『법화경』의 말처럼 “삼장의 학자[三藏學者]조차도 오히려 가까이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미 대승의 경교(經敎)에 위반되었거늘, 무엇으로 후학(後學)이 믿음의 문을 이룰 것인가?
【답】 경에서 배척한 삼장의 학자는 바로 이것이 소승의 계율ㆍ선정ㆍ지혜로서 계율은 몸과 입만을 지니면서 4주(住)의 가지와 잎의 병든 싹을 끊을 뿐이요, 선정은 형상이 죽은 나무와 같아져서 밖에 나타나는 위의의 묘한 작용을 끊으며, 지혜는 편공(偏空)을 증득할 뿐 중도(中道)의 공하지 않은 원만한 도리를 잃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가 좋아하는 법으로서 열등한 교법에 떨어진다 하여 정명(淨名)에게 꾸지람을 당한 것이니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다.
지금 이 원종(圓宗)의 선정과 지혜는 오히려 대승 초교(初敎)의 무상(無相)의 공과 대승 별교(別敎)의 편원(偏圓)의 도리와도 동일하지 않거늘, 어찌 삼장의 회단(灰斷)의 선정과 지혜로써 논하겠는가?
이 『종경록』의 계율ㆍ선정ㆍ지혜는 하나의 사항과 하나의 행위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모두가 법계에 들어가 그지없는 덕을 갖춘 것이니, 바로 그지없는 종취(宗趣)요 성기법문(性起法門)이며 걸림이 없이 원만히 통하고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마치 거울에는 형상이 있으면서 조그마한 부스러기조차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그 속에는 보든 형상이 갖추어져 있되 공일 뿐 아무것도 없으면서 미묘한 청정 법신이 서른두 가지 몸매로 갖추어져 있다”고 함과 같다.
관화상(觀和尙)이 이르기를 “범부와 성인이 서로 통하여 범부 마음에 즉(卽)하면서 부처 마음을 보며, 본체[理]와 현상[事]을 쌍으로 수행하여 본래 지혜[本慧]에 의지하면서 부처 지혜[佛智]를 구한다”고 했다.
고덕(古德)이 해석하기를, “선종(禪宗)에서 뜻을 잃은 무리는 본체를 집착하고 현상에 미혹되어 이르기를 ‘성품은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거늘 어찌 닦아서 구하겠는가? 망정(妄情)을 없애야만 곧 참 부처가 저절로 나타난다’고 하고 교법을 배우는 무리는 현상을 집착하고 본체에 미혹되었거늘, 어찌 본체의 법을 쉬지않고 닦아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그를 합하면 둘 다 아름답고 그를 여의면 두 가지가 상(傷)하나니, 본체의 행[理行]을 쌍으로 닦음으로써 원묘(圓妙)함을 나타낸다.
마음을 쉬고 생각을 끊음을 본체의 행이라 하고, 공(功)을 일으켜 유(有)에 간섭함을 현상의 행[事行]이라고 한다.
본래 지혜에 의한다 함은 본각의 지혜[本覺智]이니, 이것은 원인의 지혜[因智]로서 이것이 환히 밝아 어둡지 않음을 지혜라 하며 앞의 본체의 행을 이루면 망정이 없어지면서 본체가 나타난다.
부처 지혜를 구한다 함은 곧 장애가 없는 해탈의 지혜[解脫智]이다. 이것은 결과의 지혜[果智]로서 원만하게 밝아지고 결단하는 것에서 보아 지혜가 되며 앞의 현상의 행을 이루면 행이 일어나면서 결과를 이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체성(體性)이 같기 때문에 의지하게 되는 까닭이요, 상용(相用)이 다르기 때문에 구하게 되는 까닭이니, 상용을 구할 뿐이요 체성을 구하지는 않는다. 앞의 망정이 없어지는 본체의 행은 바로 물든 연기[染綠起]가 일어남으로써 상용을 이룩한다”고 하였다.

무상종(無相宗)에서 이르기를 “위와 같은 설명으로는 상용은 그럴 수 있다. 다만 본래 지혜에 의지하면 망정이 없어지고 상용이 저절로 나타남은 본래 구족하기 때문이거늘, 어찌 특히 그렇게 현상의 행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고, 원종(圓宗)에서 이르기를 “성품의 도리는 본래 구족한지라 망정이 없어지는 때에 염분(染分)의 상용만 제거되어 저절로 참 체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만일 현상의 행이 없이 거기서 정분(淨分)의 상용이 일어난다면 생기게 되는 까닭은 없다. 마치 금(金)으로 된 것 안에는 비록 여러 가지의 그릇이 있다 해도 광석(礦石)을 제거하면 금만이 나타날 뿐인 것과 같다. 만일 공을 들여 만들지 않으면 그 그릇으로 될 까닭이 없거늘, 어찌 금에서 광석을 뽑아낸 뒤에 만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그릇이 될 수 있겠는가?
만일 망정이 없어지면 현상의 행을 빌리지 않는다. 부처님은 모두 닦게 하였거늘, 어찌 배우는 이들을 부질없이 수고롭게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8지(地)에서는 이미 생각을 여의는지라 부처님은 바야흐로 현상의 행을 일으키도록 권한 것이니, 생각을 여읨으로 말미암아 다 마치지 않았음을 알겠다.
그런 까닭에 경의 게송에서 이르되 “법성(法性)은 진상(眞常)이라 심념(心念)을 여의나니/2승도 이것을 얻을 수 있다/이 때문에 세존이 되는 것 아니요/매우 깊은 무애지(無礙智)만으로써 되네”라고 했나니, 이것은 모두 이 현상의 행을 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결과의 부처는 성품[性]과 모양[相]이 구족하여야 하고 원인의 수행은 반드시 본체와 현상을 쌍으로 닦아야 하나니, 본래 지혜에 의지함은 마치 금을 얻는 것과 같고 본체의 행을 닦음은 마치 광석을 버리는 것과 같으며 현상의 행을 닦음은 마치 만드는 것과 같고 부처 지혜를 구함은 마치 그릇이 이룩되는 것과 같다.
또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이르되 “만일 선(禪)에 집착한 이면 본래 지혜의 성품에 의하여 지음도 없고 수행도 없어서 거울은 본래 스스로 밝은지라 떨지도 않고 닦지도 않으며, 만일 법(法)에 집착한 이면 현상의 행을 일으켜 의타(依他)의 훌륭한 인연을 구함으로써 자기의 덕을 이룩하기를 바라거니와 다 같이 치우친 집착이 되기 때문에 쌍으로 행할 것을 말한다”고 했다.
본래 지혜에 의한다 함은 본체에서 보면 샘이 없는 지혜 성품이 본래 구족하기 때문이요, 부처 지혜를 구한다 함은 현상에서 보면 구할 것 없는 가운데서 내가 짐짓 그것을 구한다.
마음의 거울은 본래 깨끗하나 오랫동안 진로(塵勞)에 가리워졌고 항하 모래만큼의 성덕(性德)은 진사(塵沙)의 번뇌에 함께 묻혔다. 이 때문에 법성(法性)을 수순하여 탐욕 등이 없이 단(檀) 등의 여섯 가지 바라밀을 닦아야 하나니, 때문에 모든 부처는 이미 증득하였거니와 나는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
또 본체는 현상을 장애하지 않나니 구함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요, 현상은 본체를 장애하지 않나니 구하여도 구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닦으면 닦지만 곧 닦음이 없어서 참으로 닦는 것이 된다.
위와 같이 본말(本末)을 열어 보이고 빠뜨림이 없으면 본체가 구비하고 행이 두루하며 원인이 원만하고 결과가 원만하나니, 그의 수레는 높고도 넓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또 종이 많으면서 모시고 호위하여야 비로소 이 1승에 들어가서 종경(宗鏡)에 돌아간다.
만일 초심(初心)에 들어가면 모름지기 진공(眞空)에 명합되어야 하나니, 오직 심행(心行)에 있을 뿐이요 입으로 설명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걸음마다 힘이 붙고 생각마다 상응함은,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은 영영 딴 생각이 끊어진 것과 같다. 만일 간절한 뜻이 아니라면 어찌 장부라고 일컫겠는가’ 헛된 말이 있을 뿐이면 마침내 자신을 속이는 것이리라.
마치 천태(天台) 습득(拾得)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동쪽의 햇볕에 바닷물이 맑아지고
물이 맑아지자 다시 밑이 보이며
신령한 근원은 법의 샘[法泉]에 흐르는데
물을 베는 칼은 흔적조차 없구나.

나는 보건대 어리석은 사람은
등불 심지로 수미산을 괴고
한 치의 나무로 큰 바다를 삶으며
발로는 대지(大地)의 돌을 말살하려 한다.

모래를 찌면 밥되는 일 없거니와
벽돌을 갈면 거울이 된다.
말로써 먹는 것은 배부르지 않나니
바로 힘을 써서 행해야 한다.

마음이 넓고 큰 대장부요
의젓하고 6척(尺)의 키 큰 선비가
억울하게 죽어서 무덤 속에 있으니
가석(可惜)토다, 외로이 선 그 푯말이여.

방거사(龐居士)의 시에서 이르되 “경을 읽으면 뜻을 이해해야 하고/뜻을 알면 곧 수행해야 하나니/만일 요의의 학[了義學]에 의하면/이내 열반의 성(城)에 들거니와/만일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많이 보았어도 소경보다 못하느니라.
글을 찾으면서 땅을 널리 점령하여/마음의 소로 갈려 하지 않으면/밭마다 온통 풀이 났을 뿐이거늘/먹는 벼가 어디서 나게 될 건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심행(心行)에 있어야 인(忍)의 힘이 성취되리라.
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인(生忍)이요, 둘째는 법인(法忍)이다. 만일 법인에서라면 관행(觀行)이 쉬이 성취되고 유심(唯心)을 알기 때문에 안과 밖이 평등하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법인이라 함은 안의 6정(情)에 집착하지 않고 밖의 6진(塵)을 받아들이지 않나니, 이 둘에서 분별을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의 모양[相]은 바깥과 같고 바깥 모양도 안과 같나니, 두 모양은 다 같이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하나의 모양이기 때문이요 인연이 합하기 때문이요 그것은 실로 공이기 때문이요 온갖 법 모양은 언제나 청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온갖 법 모양은 언제나 청정하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의 도[一道]를 같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화엄소(華嚴疏)』에서 이르되 “하나의 도가 매우 깊다 함은 1승이라고도 이름하나니, 부처와 부처가 다 같은 하나의 참 도(道)이기 때문이요 부처와 부처가 타는 법은 심성(心性)을 같이 관하고 만행(萬行)으로 같이 닦아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시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도가 된다”고 했다.
【문】 참 마음은 항상 머물러서 온갖 처소에 두루하다면 곧 만법(萬法)이 모두가 참된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사계절[四時]의 생멸이 있는가?
【답】 참 마음을 환히 알면 동요하지 않기 때문에 만법은 변천하지 않나니, 곧 항상 머무른다는 이치이다.
만일 만법이 변천하고 사라짐을 본다면 모두 이것은 허망한 마음이니, 온갖 경계는 마음만으로 허망하게 동요한다. 마음이 만일 일어나지 않으면 바깥 대경은 본래가 공이니 식(識)으로부터 변천하기 때문이다. 만일 심식(心識)을 떠나면 오히려 한 법조차도 항상 머무름이 없거든 하물며 만법의 변천이 있겠는가?
【문】 지금 실제로 보건대, 만물의 형상은 성하다가 쇠하고 계절의 경치는 새 것이 와서 묵은 것을 대신한 데 어떻게 미세하게 헤치고 벗기고 하여야 변천하지 않는 뜻을 분명하게 보는가?
【답】 견성(見性)하여야만 저절로 의심이 끊어진다. 내 일찍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이치를 추궁하건대, 『불천론(不遷論)』에서 이르되 “회오리바람이 큰 산을 쓰러뜨리는 데도 항상 고요하고 강물이 다투어 쏟아지는 데도 흐르지 않으며, 아지랑이가 떠다니면서 치는 데도 움직이지 않고 해와 달이 하늘을 다니는 데도 돌지는 않는다”고 했다.
소(疏)에서 이르되 “앞의 바람이 뒤의 바람이 아니므로 큰 산을 쓰러뜨리는 데도 항상 고요하고 앞의 물이 뒤의 물이 아니므로 다투어 쏟아지는 데도 흐르지 않으며 앞의 기(氣)가 뒤의 기가 아니므로 떠다니면서 치는 데도 움직이지 않고 앞의 해가 뒤의 해가 아니므로 하늘을 다니는 데도 돌지 않는다”고 했다.
초(鈔)에서 이르되 “그러나 자체(自體)는 찰나찰나마다 동일하지 않나니, 첫 한 찰나가 일어날 때는 둘째 번의 찰나일 때가 아니다. 내지 맨 나중에 불어서 산에 닿았을 때는 맨 처음 바람이 일어난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앞 찰나일 때의 바람의 자체가 반드시 그로부터 와서 그 산에 불린 것이 없다.
또한 산은 처음 움직였을 때로부터 땅에 거꾸로 눕게 될 때까지의 그 산 자체는 찰나찰나마다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처음 한 찰나에 움직일 때는 둘째 번의 찰나에 움직일 때가 아니며, 내지 최후의 땅에 닿았을 때는 처음 움직였을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처음 움직인 산의 자체가 반드시 그로부터 와서 땅에 닿을 때까지라는 것이 없다. 이 모두는 바람이 이르지도 않았고 사악이 땅에 닿지도 않았다. 비록 회오리바람이 큰 사을 쓰러뜨렸다 하더라도 일찍이 움직인 일조차 없다”고 했다.
이 네 가지 물건을 세간에서는 변천하여 이동한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아무리 산악을 거꾸러뜨리고 하늘을 지난다 하더라도 모두는 서로가 알거나 서로가 이를 것도 아니며 찰나찰나마다 스스로 머물면서 저마다 변천하지 않는다.
또 세간에서 요소[大]라 일컬으면 4대(大)보다 더한 것이 없고 4대 중에서는 풍륜(風輪)보다 뛰어난 것은 없나니, 그 성품을 추구하면 본래부터 실로 움직임이 없다.
『의해(義海)』에서 이르되 “움직임[動]과 고요함[寂]을 살펴보면 티끌이 바람에 따라 나부끼게 되면 것이 움직임이요, 고요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고요함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요할 때는 움직임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연유하나니, 곧 온전히 움직임으로써 고요함이 이루어진다. 지금의 움직일 때는 고요함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연유하나니, 곧 온전히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온전히 체(體)와 상(相)으로 이루어지나니, 이 때문에 움직일 때가 바로 고요함이요 고요할 때가 바로 움직임이다.
또한 바람은 본래 움직이지 않되 모든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만일 먼저 움직임이 있다면 자체를 잃는 것이라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이 바람이 법계에 두루함을 살펴보건대, 잔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고요하여 형상이 없다. 이 움직이는 연유를 추구하면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또 비밀한 방 속에서와 같아서, 만일 ‘바람이 없다’고 하면 인연을 만나면 이내 생긴다. 그러므로 알라. 풍대(風大)의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은 모든 인연에 속한다.
만일 바깥의 시방 허공중에서 설령 사람으로 인하여 털지 않는다 하여도 혹은 스스로 일어날 때는 역시 용이거나 귀신이 한 일이기도 하나니, 귀신은 음(陰)에 속하며 해가 지면 바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내지 겁초(劫初)와 겁말(劫末)에 이루게 하고 무너뜨리는 바람은 다 같이 중생의 업감(業感)으로 인해서이니 세간에는 하나의 법도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음이 없다.
인연이 모이면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진다. 만일 자연(自然)으로 생긴다면 다만 항상 생기고 있음[常生]에 합당하거늘, 어찌 긴급과 완만함이 일정하지 않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함이 없게 되는가, 그러므로 알라.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또 모든 인연을 추구하면 화합으로 현상을 이루되 저마다 화합이 있지도 않고 또한 인연도 없나니, 인연 속에서는 다 함께 자성(自性)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움직일 뿐이나 도리어 자기 마음을 추구하면 마음 또한 움직이지도 않나니,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처소를 얻을 수가 없다.
곧 모두가 참 성품으로부터 일으키되 참 성품은 곧 일으키지 않는 것인 줄 알아야 비로소 심성(心性)은 4대의 성품에 두루함을 보아 자체는 진공(眞空)에 합하고 성품은 동정(動靜)이 없으며, 모양[相]으로 인하여 움직임이 나타나고 움직임으로 인하여 고요함에 상대되며 움직임의 모양이 이미 없으면 고요함의 경계 또한 소멸한다.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되 “성품의 바람은 진공이요, 성품의 공이 참된 바람이다”고 했다.
또 변천하지 않음의 종(宗)이거늘, 어찌 동요하는 경계를 여의겠는가. 남이 없음[無生]의 뜻은 생멸의 문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이르되 “인연으로 생기게 되는 이치/이 이치는 소멸이요 생김이 아니며/모든 생멸을 없애는 이치/이 이치는 생김이요 소멸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일으킴은 항상 일으키지 아니하고 일으키지 아니함은 항상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이 통달하면 단(斷)과 상(常)에 떨어지지 않고 한 마음의 변천하지 않는 이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선덕(先德)이 이르되 “대저 만물의 성품은 차별이 없어서 깨치면 곧 진리요 진리는 곧 변하지 않으며, 만물은 스스로 잔잔하여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은 봉(封)해졌거늘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서 망령되이 움직임을 삼고 있다.
도의 체[道體]는 깊고 묵묵하며 말의 길[語路]은 오묘하고 은밀하여 날마다 쓰면서도 모르는 것이니, 만물은 변천하지 않는다.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일컬어 물(物)이라 하나 물의 자체는 저마다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변천하지 않는다고 한다. 변천하지 않기 때문에 무리를 따라 잔잔하고 깨끗하며, 물건이기 때문에 네 가지 형상[四像]과 함께 하면서 서로 의지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남도 없고 나지도 않으며 형상도 없고 형상으로 되지도 않으며, 성품[性]과 모양[相]에 처하면서 하나를 지키는 이이니, 그것이 변천하지 않는 논거(論據)가 된다.
그런 까닭에 『불천론(不遷論)』에서 이르되 “여래는, 뭇 망정(妄情)에 걸려 있기 때문에 곧 방언(方言)으로 미혹을 밝히되 둘이 없는 진심(眞心)을 타고 하나가 아닌 특수한 교법을 토(吐)하셨으니, 차별되면서도 다를 수 없는 것이 그 성인의 말씀일 뿐이로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씀하되 변천하지 않는다는 이름이 있고 세속을 교도하되 유동(流動)한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비록 천 갈래 길로 다르게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모이고 돌아가는 데는 같은 데로 이르게 된다. 그러나 글을 요구하는 이는 변천하지 않는다 함을 들으면 ‘옛날의 물건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고, 유동함을 듣는 이는 ‘지금의 물건이 옛날에 이를 수 있다”고 하나니, 이미 예와 지금을 말하면서 변천하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갔음[往]을 말하나 반드시 가지 않아 예와 지금이 항상 존재함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은 까닭이요, 지났음[去]을 일컬으나 반드시는 지나지 않은 것이니, 지금이 옛날에 이르게 되지 않음은 그것이 오지 않은 까닭이다. 오지 않기 때문에 예와 이제에 빨리 내닫지 않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뭇 전적(典籍)의 다른 글과 백가(百家)가 달리 말한 것이 진실로 그 계회(契會)를 얻거늘, 어찌 문언(文言)으로 미혹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한 바의 머무름을 나는 갔다고 말하고 사람들의 말한 바의 갔음을 나는 머무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고 머무름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것은 하나로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바른 말은 반대인 것 같으니 믿을 이가 누구겠느냐’고 했으니, 이 말씀에는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옛날을 지금에서 구하면서 ‘그것은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나 나는 지금을 옛날에서 구하면서 그것이 가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이 만일 옛날로 갔다면 옛날에는 지금이 있어야 하고, 옛날이 만일 지금에 왔다면 지금에 옛날이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은 옛날이 없으므로 오지 않았음을 알겠고 옛날에는 지금이 없으므로 가지 않았음을 알겠다.
옛날에는 지금이 가지 않았고 지금 역시 옛날에 가지 않았으니, 그 일은 각기의 성품으로 머물러 있거늘 무슨 물건이 있으면서 가고 올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4상(像)이 바뀌고 바람이 내달으며 선기(旋機)가 옮아가고 번개가 치는 때에 뜻을 얻은 이가 터럭만큼이라도 알면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바꿔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래의 공(功)은 만세(萬歲)에 흐르면서도 항상 존재하고, 도(道)는 백 겁(劫)에 통하면서도 더욱 공고하며, 산을 이룸에는 첫 삼태기를 빌려 완성되고 먼 길도 첫 걸음에 의탁하여 도달하게 되나니, 과연 공업(功業)은 후폐(朽廢)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업은 후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옛날에 있었다 하더라도 변화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옮겨가지 않으며 옮겨가지 않기 때문에 잔잔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3재(災)로 두루 다스리는데도 행업(行業)은 잔잔하다’고 하였으니, 진실한 말씀이로다. 왜냐하면 대저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되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는 되며,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오는지라 원인인 옛날은 소멸되지 않고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는지라 원인은 지금에 오지 않기 때문이니, 소멸되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 변천하지 않음이 증명되게 된다. 다시 어째서 가고 머무름에 헷갈리겠으며, 움직임과 고요함 사이에서 망설이겠는가?
그렇다면 건곤(乾坤)이 거꾸로 엎어져도 고요하지 않다는 말이 없겠고 큰 물이 하늘에까지 불어 넘쳐도 그의 움직임을 말함이 없으리니, 만일 정신을 만물에 즉(卽)한 것에서 계합될 수 있으면 이야말로 멀지 않으면서 알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옛 해석에서 이르되 “먼저 말한 ‘예와 이제는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무르되 서로 오가지 않는다’고 함은 젊을 때와 늙은 때가 동일한 빛깔이 아니고 꼭 젖먹이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때로부터 늙기에 이르기까지 죽 이어짐이 없다는 것이니, 친속(親屬)의 법이 상실되어 아버지도 없고 아들도 없으면서 젖먹이는 아버지가 되어야만 하고 그 밖에 기어 다니는 아이와 늙은이도 분간되지 않아야 한다면 앞의 공(功)은 이내 상실되어 단멸(斷滅)의 허물이 있으리라.
여기서 공업은 흐르고 첫 삼태기와 첫 걸음의 원인과 결과 등은 상속되어 상실되지 않는다. 아주 없지도 않고 항상 하지도 않으며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기 때문에 원만하고 바른 변천하지 않는 이치가 분명하여진다.
‘둘이 없는 진심(眞心)을 타고 하나가 아닌 특수한 교법을 토(吐)한다’고 함은 모든 성인은 한 마음의 바른 종[正宗]에 의지하여 근기에 맞게 차별된 교법의 자취를 연설하나니, 비록 9류(流)와 8교(敎)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변천하지 않는 한 찰나는 이지러짐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천 갈래 길로 다르게 창도(唱導)한다 하더라도 모이고 돌아가는 데는 같은 데로 이른다.
그러나 글을 따르면서 뜻을 미혹한 이는 권문(權門)인 생멸의 말만을 집착하여 세간 모양의 오가는 일을 허망하게 보며 이로 인하여 유동한다고 여겨 경계를 따라 윤회하면서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이 마침내 성품이 없음을 더욱 모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중관론(中觀論)』에서는 3시(時)에 감[去]이 없음을 부수었다. ‘첫째는 이미 갔으면[已去] 감이 없다는 것이니, 가는 법이 이미 사라졌다. 둘째는 아직 가지 못했으면[未去] 감이 없다는 것이니, 가는 법이 아직 싹도 트지 못했다. 셋째는 가는 때[去時]는 감이 없다는 것이니, 지금 가면 머무름이 없다는 것이다. 또 가는 이[去者]와 가는 법[去法]의 두 가지 일은 함께 함이 없다. 만일 가는 이가 없다면 곧 가는 법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다. 가는 이는 바로 사람이요, 법은 사람으로 인하여 이르게 되고 사람을 여의면 법도 없으며 법을 여의면 사람도 없다’ ”고 하였다.
때문에 초(鈔)에서 이르되 “방소를 보면서 그의 가는 것을 아나 가는 이가 방소에 닿지 않는다 함은 3시(時)의 가고 옴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요 변천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마치 사람이 처음 동쪽에 있으면서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으면 아직 가지 않았다고 하며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가지 않은 것을 갔다고 이름붙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만일 한 걸음을 움직여서 본래 섰던 자리를 떠나면 본래 섰던 자리를 반대로 보면서 이미 갔다고 하며, 이미 갔기 때문에 이미 간 것을 갔다고 이름붙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미혹된 사람은 계교를 내면서 이르되 “처소에서 움직이면 가는 것이 있고, 여기서는 가는 때가 있는 것이라 이미 간 것도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가는 때는 간 것이다”라고 한다.
용수(龍樹)는 상대(相待)로 논파하며 이르되 “만일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았음이 있으면 가는 때가 있거니와 만일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았음이 없으면 가는 때가 없다”고 하고,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되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았음을 여의면/가는 때 또한 가는 것이 없네”라고 했다.
마치 양 끝이 짧음으로 인하여 중간의 긺이 있거니와 만일 양 끝의 짧음이 없으면 곧 중간의 긺이 없는 것과 같다.
청목(靑目)은 곧 서로가 반대된 것으로 논파하였다. “왜냐하면 가는 때라 함은 반쯤 가고 반쯤 가지 못했음을 말하여 가는 때라고 하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하나의 법 가운데 두 가지가 있어서 서로 반대된 것에 떨어졌는지라 간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때도 역시 가는 것이 없다”고 하고, 때문에 게송으로 말하되 “이미 갔는지라 가는 것이 없고/아직 가지 않음 역시 가는 것이 없으며/이미 갔고 아직 안 감 여의게 되면/가는 때 또한 가는 것 없네”라고 했다.
마치 한 사람이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가 닿을 적에 그 동쪽에서 서쪽까지를 바라보면 가는 것이 있는 것과도 같다. 때문에 그의 가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걸음과 걸음 안에서는 3시(時)에 가는 것이 없고 그렇다면 가는 법이 없으며 이미 가는 법이 없으면 곧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가는 이가 방소에 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는 이는 사람을 말한다.
이상에서 하나의 경과 하나의 논으로 모두 3시에 가는 것이 없음을 밝혔으며, 표종(標宗)으로 변천하지 않음을 설명했다.
이 오고 가는 인과가 변천하지 않으면 곧 중도(中道)의 여덟 가지 아님[不]이라는 뜻에 계합된다.
마치 논의 게송에서 이르되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으며[不滅]/항상 하지도 않고[不常] 아주 없지도 않으며[不斷]/동일하지도 않고[不一] 다르지도 않으며[不異]/오지도 않고[不來] 가지도 않네[不去].
이 인연을 말할 수 있으면/모든 희론(戱論)』이 잘 없어지나니/나는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함이/모든 설(說) 가운데서 첫째가니라”고 했다.
이제 인과로써 여덟 가지 아님의 이치를 회석(會釋)해 보자. 나지 않는다 함은 마지 20시(時)가 원인이 되고 30시(時)가 결과로 되는 것과 같아서 만일 20을 여의어도 지금의 30이 있다면 남이 있다[有生]고 말할 수 있거니와 만일 20을 여의면 30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론(中論)』에서 이르되 “겁초(劫初)의 곡식을 여의면/지금의 곡식은 얻을 수 없네”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지 않는다.
없어지지도 않으며, 만일 20시가 없어지면 지금의 30시도 있지 않아야 한다.
『중론』에서 이르되 “만일 없어지면 지금의 곡식도 없어야 할 터인데, 실은 곡식이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
항상하지 않는다 함은, 30시에 20시가 없다. 이 때문에 항상하지 않는다.
『중론』에서 이르되 “마치 곡식의 싹이 튼 때에 종자는 변하여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
아주 없지도 않는다 함은, 20으로 인하여 30의 상속함이 있다. 이 때문에 아주 없지도 않다.
『중론』에서 이르되 “곡식으로부터 싹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주 없지도 않다. 만일 아주 없다면 상속되지 않아야 한다.
동일하지 않다 함은, 20은 30과는 동일한 자체가 아니다. 각기의 성품이면서 머무르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다.
『중론』에서 이르되 “마치 곡식은 싹으로 되지도 않고 싹은 곡식으로 되지도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때문에 동일하지도 않다.
다르지도 않다 함은, 20을 여의고는 30이 있지도 않다. 마치 20인의 성(姓)이 장(張)이면 30인도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중론』에서 이르되 “만일 다르다면 무엇 때문에 곡식의 싹과 곡식의 줄기와 곡식의 잎을 분별하겠는가”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다르지 않다.
오지 않는다 함은, 20은 30시에 이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지 않는다.
나가지 않는다 함은, 20시는 바로 그 곳이 저절로 고요하여 다시 나지는 않는다. 때문에 나가지 않는다.
이 이치를 통달하면 온갖 쓸모없는 의론을 여의고 중도(中道)에 계합되나니, 곧 참 진리이다.
이것으로도 참 진리 안에서는 하나의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가고 옴이 있겠는가?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그 때 세존이 그 보살에게 물으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르러서 온 것인가, 이르러서 오지 않은 것인가?’ 유리(琉璃光)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르름 역시 오지 않았고 이르지 않음 역시 오지 않았나이다. 제가 이 이치를 관찰하건대, 도무지 온다는 것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행(行)이 만일 항상하다면 역시 오지 않은 것이요 만일 항상함이 없다면 역시 오는 것이 없나이다. 어떤 사람이 중생의 성품이 있는 것을 보면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이 있거니와, 저는 지금 중생의 정해진 성품을 보지 않거늘 어떻게 오거나 오지 않음이 있다고 말하겠나이까. 교만이 있는 이는 오감이 있음을 보거니와 교만이 없는 이는 오감이 없으며, 잡음[取]의 행이 있는 이는 오감이 있음을 보거니와 잡음의 행이 없는 이는 오감이 없으며, 만일 여래는 마침내 열반한다고 보는 이면 오감이 있거니와 여래는 마침내 열반한다고 보지 않는 이면 오감이 없으며, 불성(佛性)을 듣지 않은 이면 오감이 있거니와 불성을 들은 이면 오감이 없나이다’ ”라고 했다.
『반야등론(般若燈論)』에서 물었다. “ ‘그대는 이미 간 것을 처음 출발이라 하는가,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처음 출발이라 하는가, 가는 때를 처음 출발이라고 하는가?’
‘세 가지 모두가 그렇지 않다. 마치 게송에서 이르되 ≺이미 간 것 안에는 출발이 없고/아직 가지 않은 것도 출발이 없으며/가는 때 안에서도 출발이 없거늘/어디에 출발이 있을 것인가≻’ ”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미 간 것 안에는 출발이 없다 함은, 가는 작용이 거기서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출발이 없다 함은, 아직 가지 않았으면 가는 것이 없으므로 간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가는 때 안에서도 출발이 없다고 함은, 이미 갔거나 아직 가지 않은 것들은 모두가 간다는 이치가 없거늘, 어떻게 가는 때거나 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세 가지는 모두가 처음 출발이란 것이 없다. 이 때문에 게송에서 ‘어디에 출발이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되 “이미 갔음과 아직 가지 않음이 없고/또한 그곳으로 가는 때가 없거늘/가는 것이 없는 법 안에서/무엇 때문에 허망하게 분별하는가”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허망하게 분별한다 함은, 마치 눈에 병든 사람이 허공 가운데서 털과 파리 따위를 보기도 하는 것과 같나니, 모두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되 “이 때문에 가는 것은 성품이 없고/가는 이도 다시 그러하며/가는 때와 모든 법 등은/모두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게송에서 이르되 “아직 소멸되지 않은 법 소멸하지 않았고/이미 소멸된 법도 소멸하지 않았으며/소멸하는 때 또한 소멸되지 않나니/생김이 없거늘 어떻게 소멸하는가”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첫째 글귀는 소멸이 공이기 때문이니, 마치 머무르는 것과 같다. 둘째 글귀는 마치 사람이 이미 죽었으면 다시는 더 죽지 않는 것과 같다. 셋째 글귀는 그것은 이미 소멸한 것과 아직 소멸하지 않는 법을 여의고서 다시 소멸하는 때가 없다면 다 함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반드시 소멸하는 때도 소멸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넷째 글귀의 그 뜻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온갖 모든 법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생김이 없다고 함은 생기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생김이 없는데 소멸이 있다면 그 이치는 옳지 못하나니,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다”고 했다.
내지 ‘그대는 소멸을 말하는가’라 함은, 자체의 소멸이 있다는 것인가, 자체의 소멸이 없다는 것인가. 둘 다 옳지 못하다.
마치 게송에서 이르되 “법에 만일 자체가 있다고 하면/있은즉 소멸하는 모양이 없으리라”고 함과 같다.
해석에서 이르되 “서로가 반대이기 때문이니, 마치 물과 불과도 같다. 이 때문에 게송에서 이르기를 ‘한 법에 있음과 없음이 있나니/이치로선 그렇지 않아야 하리라’ ”고 했다.
다시 게송에서 이르되 “법에 만일 자체가 없다고 하면/소멸이 있음 또한 옳지 않나니/마치 둘째 번의 머리가 없으면/그를 끊는다고 말할 수 없음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미 오고 가는 법이 없다면 역시 머무르고 그치는 때도 없다. 법으로 인하여 때를 밝히고 역시 때로 인하여 법을 설명할 터인데 법이 이미 없거늘, 때인들 어찌 성립되겠는가?
마치 『중관론(中觀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때의 머무름을 얻을 수 없으면/때의 감 또한 얻을 수 없으며/때를 만일 얻을 수 없다고 하면/어떻게 때의 형상을 말하리오.
만물로 인하여 때가 있다면/만물을 여읠 적엔 어찌 때가 있으리/만물조차 오히려 아무것도 없거든/하물며 때가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위와 같은 인증(引證)은 곧장 세간을 지칭한 것이어서 모두가 현상에 즉(卽)하여 진리를 말하고 범부로부터 도(道)를 보는 것이니, 눈앞에서 실제로 증득하면 의심이 끊어질 수 있다”라고 했다.
가는 법이 이미 그러하므로, 6취(趣)에 윤회함과 사계절에 새 것으로 대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변천하지 않고 항상 머무르는 한 마음의 도(道)이다.
“그렇다면 뭇 전적의 다른 글과 백가(百家)의 다른 학설은 진실로 그 계회(契會)를 얻거늘, 어찌 글과 말로써 미혹시킬 수 있겠는가” 함은, 만일 만법은 나의 한 마음일 뿐임을 통달하면 이 심성(心性)을 관하는 것조차도 일찍이 나는 일이 없거늘, 어떻게 없어짐을 말하겠으며 오히려 고요함도 얻지 못하거늘 어떻게 움직임을 말하겠는가?
마치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이 때 여래는 대중 가운데서 5륜지(輪指)를 구부렸다 펴시고 다시 구부리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무엇을 보았느냐?’아난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보배롭고 수레바퀴 몸매의 손바닥을 대중 가운데서 폈다 구부렸다 하시는 것을 보았나이다.’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손이 대중 가운데서 폈다 구부렸다 하는 것을 보았다 하니 내 손이 폈다 구부렸다 하였느냐, 너의 견(見)이 폈다 구부렸다 하였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대중 가운데서 보배 손을 폈다 구부렸다 하셨으므로, 저는 여래의 손이 폈다 구부렸다 하신 것을 보았을 뿐 저의 견은 폈거나 구부렸거나 함이 아니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어느 것이 움직이고 어느 것이 고요하였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부처님 손이 가만히 있지 않으셨고 저의 견은 오히려 고요하다는 것조차도 없거늘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할 것은 무엇이옵니까?’ 부처님께서 ‘그러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내지 ‘어째서 너희들이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삼고 움직이는 것을 경계로 삼아서, 처음부터 나중까지 찰나 찰나마다 나고 없어지면서 참 성품은 잃어버리고 뒤바뀌게 일을 행하며, 물건을 내 몸인 줄 잘못 알고서 이 안을 윤회하며 유전(流轉)을 스스로 취하느냐?’ ”라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견(見)의 성품은 변천하지 않고 진리는 법계에 두루한 데 물건이 내 몸인 줄 잘못 안 탓으로 깨달음을 저버리고 경계에 합해 있을 뿐이니, 만일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삼고 움직이는 것을 경계로 삼는다면 뒤바뀌게 일을 행하면서 참 성품을 잃어버릴 것이다.
경계는 실로 변천하지 않는데 마음이 망령되이 요동할 뿐이니, 가위 구름이 달리면 달이 움직이고 배가 가면 언덕이 옮아간다 하리라.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되 “갔음[往]을 말하나 반드시는 가지 아니하여 예와 이제가 항상 존재함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까닭이요, 지나갔음[去]을 일컬으나 반드시 지나가지 않은 것이니, 지금이 옛날에 이르게 되지 않음은 그것이 오지 않는 까닭이다. 오지 않기 때문에 예와 이제에 빨리 내닫지 아니하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각기의 성품으로 한 세상에 머무른다”고 했다.
이야말로 이 법과 법이 각각 진여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라 한 물건도 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일찍이 한 찰나도 잠시를 머무는 일이 없고 모두 서로가 기다리지 않았거늘 어찌 변천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렇게 통달할 수 있으면 자기 눈이 원만하게 밝아지겠거늘, 어찌 있는 듯한 허망한 경계와 한 시기의 다른 학설로써 나를 미혹되게 하겠는가.
또 옛 해석에서 말한, “백가(百家)의 다른 학설과, 어찌 글과 말로 미혹되게 하겠는가”라고 함은, 바로 3교(敎)에서 미혹되지 않고 각각 그 종(宗)을 세울 것을 밝힌다.
유교(儒敎)에서는 27가(家)가 있으며, 만일 5상(常)의 도리에 계합되면 곧 미혹됨이 없다. 황로(黃老)에서는 25가(家)가 있으며, 만일 허무(虛無)에 계합되면 역시 미혹됨이 없다. 석도(釋道)에서는 12분교(分敎)가 있으며, 만일 본 마음을 분명히 알면 역시 미혹됨이 없다.
그렇다면 3교가 비록 다르기는 하나 법계로 그를 거둔다면 따로 근원이 없다. 만일 공자 노자 두 교의 백씨(百氏) 9류(流)를 총괄해서 말한다면 법계를 여의지 않음은 마치 백 개의 시냇물이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며, 만일 불교의 원종(圓宗)인 1승의 미묘한 뜻을 구별해서 말한다면 백가(百家)는 마치 반딧불과 같거늘 어찌 거대한 조명(照明)과 같겠는가? 마치 큰 바닷물은 백 개의 시냇물로 돌아가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면 4상(像)이 바뀌고 바람이 내달으며 선기(旋機)가 옮아가고 번개가 치는 때에 뜻을 얻은 이가 작은 털만큼이라도 알면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바꿔지지 않는다” 함은, 다음과 같다. 4상은 사계절[四時]이요, 선기라 함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이 비록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며 북두가 바뀌고 7성이 옮기며 번개가 치고 바람이 내달아 찰나 동안도 머무르지 않기는 하나, 만일 뜻을 얻은 이가 한 마음의 터럭만큼 되는 작은 비밀한 뜻을 환히 알면 성품을 보면서 요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되 원인으로 인하여 결과가 된다” 함은, 마치 높은 산을 만들 때 처음의 한 삼태기 흙을 덮는 것이 원인이 되어 곧장 흙이 쌓이면서 산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처음의 한 삼태기 흙이 비록 아직은 다 산을 만들지는 못하고 처음 것이 뒤에까지 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소멸되지는 않는다.
또 마침내는 이 한 삼태기의 흙으로 인하여 산이 이룩되기 때문에 이르되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되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된다”고 한다.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되는지라 원인인 옛날은 소멸되지 않고 결과는 원인과 함께 하지 않는지라 원인은 지금에 오지 않는다.
소멸되지 않고 오지 않으면, 변천하지 않는다는 이치가 분명하다.
또 마치 천 리의 먼 길을 갈 때 첫 걸음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다. 비록 아직은 이내 도착 못하고 결과는 원인을 함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온전히 첫 걸음으로 인하여 천 리의 길에 도달될 수 있다면 원인으로 인하면서 결과가 있다.
때문에 이르되 “산을 이룸에는 첫 삼태기를 빌려 완성되고, 먼 길로 첫 걸음에 의탁하여 도달하게 된다”고 했다.
또 처음에 한 생각의 보리인 착한 마음의 원인을 내어 마침내는 위없는 묘각(妙覺)의 결과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곧 최초의 한 생각은 없어지지 않으며, 만일 처음의 한 생각이 벌써 소멸되었다면 부처의 결과를 이룰 수 없다.
때문에 이르되 “여래의 공(功)은 만세(萬歲)에 흐르면서도 항상 존재하고 도(道)는 백 겁에 통하면서도 더욱 공고하다”고 했다.
공은 소멸되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이루어지고 업은 이룩되나니, 원인은 헛되지 않고 일은 버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법은 다 함께 변천하지 않는 줄 알겠거늘, 어찌 움직임과 고요함의 사이에서 망설이겠는가.
만일 경계에 접촉하면서 종(宗)을 밝히고 정신을 물건에 즉한 것에 계합된다면, 마치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엎어지며 바닷물이 끓고 산이 무너진다 하여도 오히려 움직임과 고요함의 조짐조차도 보지 않겠거든, 하물며 그 밖의 허깨비와 그림자며 메아리겠는가.
【문】 온갖 진리와 범속 등의 법은 모양이 있고 작용이 있고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거늘, 어떻게 한결같이 관심(觀心)하는 것만으로 풀이하는가?
【답】 만일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찰하지 않으면 불법의 대지(大旨)를 잃게 되리니, 모든 성인을 높이 추구하고 앙모하면서 닦아 나아가지 않으면 억울하게 괴로움에 빠져 있으면서 자기에 대한 본분(本分)을 끊음이 마치 관심으로 도에 나아간 이를 본받지 않음과 같고 마치 돌을 안고 못에 빠져 드는 것과 같다.
밤 길 가는 이가 촛불을 버리면 부처의 지혜 바다에서 죽게 됨이 틀림없고 열반의 성(城)을 향해 짐짓 발붙이기조차 어려우리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가 교(敎)를 일으킨 연유로서 오직 온갖 중생에게 불성(佛性)과 대반열반(大般涅槃)과 일심(一心)의 비밀한 장(藏)을 말씀했을 뿐이니, 범부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모두가 그 안에 들어간다.
마치 세존께서 “이 대반열반은 바로 시방의 모든 부처가 몸과 목숨을 놓아버린 곳으로서 제자들을 편안히 두어 그 안에 모두 들게 하셨으니, 나도 스스로 그 안에 머무른다. 왜냐하면 자기의 심성을 깨닫기 때문에 불성이라 하고, 성기(性起)의 샘이 없는 공덕을 따르면서 자신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는 법 이익이 그지없기 때문에 장(藏)이라 하며, 믿기 어렵고 알기조차 어렵기 때문에 비밀(秘密)이라 하고, 법성(法性)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나니, 가히 한량없는 법 보배가 나오는 데라 하리라. 마치 네 개의 대해(大海)는 온갖 만법이 의지할 곳이 됨과 같고 마치 시방의 허공과 같나니, 만일 그를 만나지 못하여 법 이익을 크게 잃는 이가 잠시라도 들으면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신 것과 같다. 또 마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중에서 칭찬한 바와 같다.
“부처님이 가섭(迦葉)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미묘한 『대반열반경』은, 온갖 법의 보배 창고이니, 마치 큰 바다는 바로 뭇 보배의 창고인 것처럼 이 『열반경』 또한 그와 같아서 이는 온갖 글자 뜻의 비밀 창고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수미산은 뭇 약의 근본인 것처럼, 이경 또한 그와 같아서 이는 보살계(菩薩戒)의 근본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허공은 바로 온갖 물건의 머무르는 데인 것처럼, 이 경 또한 그와 같아서 이는 온갖 착한 법이 머무는 곳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맹렬한 바람은 묶어 맬 수 없는 것처럼, 온갖 보살행의 이 경 또한 그와 같아서 온갖 번뇌와 나쁜 법에 얽매이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금강(金剛)은 파괴할 이가 없는 것처럼, 이 경 또한 그러해서 비록 외도와 나쁘고 삿된 사람이 있을지라도 파괴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항하의 모래는 셀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처럼, 이 경의 뜻 또한 그와 같아서 셀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선남자여, 이 경전이 모든 보살에게 법의 당기가 됨은 마치 제석(帝釋)의 당기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이 경은 바로 열반의 성에 나아가는 상인 우두머리[商主]로서 마치 큰 길잡이가 상인들을 이끌고 큰 바다로 나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이 경이 모든 보살들을 위해 법의 광명이 될 수 있음은 마치 세상의 해와 달이 모든 어둠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이 경이 병들어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아주 좋은 약이 되어 줌은 마치 설산(雪山) 안의 미묘한 약이 뭇 병을 고칠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이 경이 일천제의 지팡이가 될 수 있음은 마치 약한 사람이 그를 잡고 일어나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내지 선남자여. 이 경은 바로 금강으로 된 날카로운 도끼여서 온갖 번뇌의 큰 나무를 벨 수 있고, 이는 날카로운 칼이어서 습기(習氣)를 능히 쪼개며, 이는 용맹스런 분이라 악마를 꺾어 뜨릴 수 있고, 이는 지혜의 불이라 번뇌의 나무를 불사르며, 이는 인연장(因緣藏)이라 벽지불을 내고, 이는 문장(聞藏)이라 성문인을 내느니라.
이는 온갖 하늘들의 눈이요, 이는 온갖 사람들의 바른 길이며, 이는 온갖 짐승들이 의지하는 데요, 이는 아귀가 해탈하는 곳이며, 이는 지옥의 위없는 어른이요, 이는 온갖 시방 중생의 위없는 그릇이며, 이는 시방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의 부모이니라.”
이것으로도 이 한 마음의 총지(摠持)요 열반이요 비밀의 장(藏)을 환히 알면, 위와 같이 칭찬하신 뭇 덕이 돌아갈 데요 있게 되는 한 털만큼의 공도 진여의 그지없는 이치에 따라 함은 법계와 같아지고 복은 허공과 같아져서 모두가 보리의 지음 없는 묘한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줄 알겠다.
만일 이 뜻을 깨치지 못하면, 설령 닦아 나아감이 있다 해도 유위(有爲)만 이룰 뿐 마침내는 도를 얻지 못하며, 오랜 겁(劫)을 지나면서 애써 수행하여도 졸도(拙度)의 문만 이룰 뿐이요 끝내 훌륭한 과보의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사리불(舍利弗)의 제자 라빈주(羅頻周) 비구와 같다. 그가 계를 지니면서 정진하다가 엿새 동안을 걸식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이레 만에는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도를 같이 닦던 어떤 이가 걸식을 해다가 주었더니 새가 이내 채어 가버렸다. 이때 사리불은 목건련(目犍連)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큰 신통력으로 이 음식을 수호하여 그가 먹을 수 있게 하십시오.’ 이때 목련이 음식을 가지고 가서 주자 막 입으로 들어가려는데 진흙으로 변해버렸다. 또 사리불이 걸식하여 가져다 주었더니 입이 저절로 다물어져버렸다. 최후에 부처님이 오셔서 밥을 그에게 주자, 부처님의 복덕의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그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비구는 다 먹고 나서 마음에 기쁨을 내면서 갑절 믿고 공경하였다. 부처님은 비구에게 ‘유위의 법은 모두가 괴로움의 모양이니라’고 하시고, 그를 위해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시자 이내 비구는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리어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1승의 복을 믿으면 그 복은 진여와 같고 네 글귀의 공(功)을 지니면 그 공은 대각(大覺)과 같다.
그런 까닭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의 성품[性]ㆍ제 성품[自性品]ㆍ첫째가는 이치 마음[第一義心]이니, 성품ㆍ제 성품ㆍ첫째가는 이치 마음으로써는 여래의 세간과 출세간의 상상법(上上法)인 참 마음의 덕을 성취하며, 첫째가는 이치 마음으로써는 마침내 세간과 출세간의 보리를 얻는 훌륭한 과보의 복을 얻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문】 만법이 유식(唯識)이라면 모든 식(識) 가운데서 어느 식이 구경(究竟)인가?
【답】 아마라식(阿摩羅識)이어서 여기의 말로는 무구정식(無垢淨識)이라고 하며, 변하여 달라짐도 없고 구경이 된다.
『삼무성론(三無性論)』에서 이르되 “식의 여여함[如如]이라 함은, 온갖 변천하는 법은 이 식뿐임을 말한다. 이 식에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여여함이라 한다.
첫째는 거두어 뒤바뀜이 없는 것이니, 12입(入) 등의 온갖 법은 이 식일 뿐이요 어지러운 식을 여의고서 그 밖에 따로 다른 법이 없다.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식에 속하며, 이 이치는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거두어 뒤바뀜이 없는 여여함이라고 한다.
둘째는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것이니, 이 어지러운 식은 바로 분별(分別)과 의타(依他)로서 대경과 같은 식으로 나타나게 됨을 밝힌다. 분별의 성품이 영원히 없기 때문에 의타의 성품 역시 있지 아니하여 이 두 가지는 아무 것도 없나니, 바로 이것이 아마라식이다. 이 식이 있을 뿐이요 홀로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기 때문에 여여함이라 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온갖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는 유식을 지나가지 않나니, 이것이 여량경계(如量境界)이다. 이 유식은 바깥 경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되 바깥 경계는 이미 없는지라 유식 또한 없다. 경계는 모양이 없고 식은 남[生]이 없나니, 이것이 온갖 법의 평등으로서 통틀어 여리(如理)이기 때문이다. 여리와 여량의 두 문(門)에 온갖 성품과 모양이 모두 거두어지나니, 식 모양은 묘유(妙有)라 이는 여량문이요 식 성품은 진공(眞空)이라 이는 여리문이다. 만일 여리와 여량이 둘 다 소멸되면 참 성품일 뿐이다”라고 했다.
또 아마라식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연(所緣)이니 이는 진여이다. 둘째는 본각(本覺)이니 곧 진여지(眞如智)이다. 능연(能緣)은 곧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요, 소연은 곧 공여래장(空如來藏)이다.
『십이문론(十二門論)』에서는 “유식의 진실을 밝히고 온갖 법은 정식(淨識)이 있을 뿐 능의(能疑)도 없음”을 설명하였다.
유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방편(方便)이니, 먼저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을 뿐이요 그 밖의 경계는 없다고 관하면서 현재에 경계와 지혜의 두 공을 얻어 허망한 식[妄識]을 다 없애고 나면 방편유식이라고 한다.
둘째는 정관유식(正觀唯識)이니, 나고 죽는 허망한 식심(識心)과 경계의 형상을 모조리 없애면 온갖 모든 것의 청정한 것도 다하여 아마라식의 청정한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문】 만법이 유식이면 부처님도 식에 머무르는가?
【답】 아뢰야라면 여기 말로 장식(藏識)이니 온갖 잡염품(雜染品)의 법을 능히 간직해서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요, 아견(我見)과 아애(我愛) 등의 집장(執藏)은 스스로가 내아(內我)로 여기기 때문이니, 이 이름은 범부의 유학(有學)에만 있을 뿐이며 아타나(阿陀那)는 여기의 이름으로 집지(執持)이니 종자와 색신의 감관을 붙잡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온갖 자리에 다 통한다.
아집(我執)이 없어지면 곧 아뢰야를 버리면서 아타나라 하는데 무루(無漏)의 종자를 지닌다. 그러면 허망한 마음은 바로 소멸되고 참 마음이 나타나게 되며, 여기서 부처는 무구정식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소멸하면 생사가 다하나니, 바로 이것은 허망한 마음의 소멸이요 마음의 자체가 소멸된 것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다시 분별심(分別心)의 생멸하는 모양에는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첫째는 거친 것[麤]이니 상응심(相應心)을 말한다. 둘째는 미세한 것[細]이니 불상응심(不相應心)을 말한다.
거친 것 중에서 거친 것은 범부의 지혜의 경계요, 거친 것 중에서 미세한 것과 미세한 것 중에서의 거친 것은 보살의 지혜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형상은 모두가 무명(無明)이 훈습(熏習)한 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나니, 인 이것은 불각(不覺)이요 연 이것은 허망한 경계[妄境]이다. 인이 소멸하면 연이 소멸하며, 연이 소멸하기 때문에 상응심이 소멸하고 인이 소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이 소멸한다.
【문】 만일 마음이 소멸하면 어떻게 상속되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떻게 소멸한다고 말하는가?
【답】 실로 그렇기는 하다. 지금 소멸이라 말한 것은 마음의 모양이 소멸될 뿐이요 마음의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은 바람으로 인해서 움직임의 모양이 있고 바람이 소멸하기 때문에 움직임의 모양은 이내 소멸하되 물 자체가 소멸된 것이 아님과 같다. 만일 물이 소멸한다면 움직임의 모양은 소멸되어야 하리니, 소의(所依)도 없고 능의(能依)도 없기 때문이다. 물의 자체는 소멸되지 않으므로 움직임의 모양은 상속된다.
중생 역시 그러해서 무명의 힘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동요의 모양은 이내 소멸하되 마음의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만일 마음이 소멸된다면 중생은 끊어질 것이니, 소의도 없고 능의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 자체는 소멸되지 않으므로 동요의 모양은 계속된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논에서는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의 두 가지 마음과 경계는 모두가 무명이 훈습한 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인에 의하고 연에 의하나니, 인 이것은 불각이요 연 이것은 허망한 경계이다’ 함은, 다만 불각의 제 마음만이 허망하게 바깥 경계를 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알라. 경계는 제 성품이 없어서 마음을 따르면서 나고 화합하면서 일어난다. 때문에 이르되 ‘마음이 나면 곧 법이 나고 인이 소멸하면 연이 소멸한다’고 한다.
‘물의 자체는 소멸되지 않으므로 움직임의 모양은 상속된다’ 함은, 이는 참 마음의 자체는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친 것도 아님에 비유한다.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생사의 동요가 일어나되 만일 허망한 바람이 쉬는 때는 마음의 동요한 모양이 이내 소멸되거니와 마음의 자체는 소멸한 것이 아니다. 마음의 자체는 바로 소의요 만법(萬法)은 바로 능의이다. 만일 소의가 없다면 능의는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한 마음의 자체는 뭇 존재하는 것의 의지가 되나니, 마치 하늘이 만상(萬像)의 자체가 된 것과 같다.
또 본식(本識)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허망하게 물들었다[妄染]는 뜻이니, 범부로서 머무는 데다. 둘째는 참되고 깨끗하다[眞淨]는 뜻이니, 8지(地)로서 머무는 데다. 불지(佛地)에서는 단순히 진여에만 머무르며 무구식(無垢識)이라 할 뿐이다.
【문】 모든 부처는 단순히 진여에만 머무르며 무구식이라 할 뿐이면, 무구정식은 바로 항상 머무는 참 마음인데 모든 부처는 결정코 마음이 있는 것인가, 결정코 마음이 없는 것인가?
【답】 체성에 의거하면, 말로는 4구(句)가 없어지고 뜻으로 백비(百非)가 끊어졌다. 작용에서 보면, 지혜로 능히 밝을 뿐이요 뜻[情]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다.
『화엄경』에서 이르되 “불자야, 여래의 심(心)ㆍ의(意)ㆍ식(識)은 다 함께 얻을 수는 없고 다만 지혜로 한량이 없어야 할 뿐이니, 그것이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했다.
고석(古釋)에서 이르되 “ ‘여래의 심ㆍ의ㆍ식은 다 함께 얻을 수 없다’함은 체성에서 본 차전(遮詮)이며, ‘지혜로 한량이 없어야 할 뿐이니, 그것이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함은 작용에 붙인 표전(表詮)이다”라고 했다.
한 스승이 이르되 “식(識) 등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듦[染]이요, 둘째는 깨끗함[淨]이다. 불지(佛地)에는 번뇌로 물든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없으면서 청정한 갈래의 심왕과 심소가 있나니, 과위(果位) 안에는 지혜가 강하고 식은 약하기 때문이다. 심왕 위에서 물듦이 없음을 나타냄으로써 그 지혜에서 보아 한량없음을 밝히려는 까닭이다. 만일 반드시 심왕ㆍ심소가 없다면 지혜는 어디에 의지하여 서겠는가. 경에서 이르되 ‘여래의 무구식은 바로 청정한 샘이 없는 경계로서, 온갖 장애를 해탈하고 원경지(圓鏡智)와 상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심왕이 있다 함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한 스승은 이르되 “쌓여진 사량(思量) 등이 없다는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 등을 설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무분별지(無分別智)에 나아가서 한량없음을 나타내는지라 마음의 체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이 두 가지 해석은 다 같이 심ㆍ의ㆍ식의 있음을 밝힌다.
또 이르되 “부처의 과위에서는 실로 심ㆍ의ㆍ식과 그 밖의 심법(心法)이 없으므로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니, 큰 지혜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지혜가 한량없기 때문에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말했다. 경에서 이르되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만이 홀로 불지에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고 하였다.
논(論) 중에서는 다섯 가지 법으로 대각(大覺)의 성품을 포섭하여 하나의 진법계(眞法界)와 네 가지의 지보리(智菩提)뿐이며, 다시는 그 밖의 법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설명은 없다 함에서 본 것이다.
만일 앞의 있다는 것에 의하면 너무 불려서 한 말임을 면치 못하리니, 역시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잘 통하지 못했다.
만일 뒤의 없다는 것에 의하면 너무 줄여서 한 말임을 면치 못하리니, 역시 ‘부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하는 말을 잘 통하지 못했다.
이미 ‘여래의 마음인 줄 알라’고 했다면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함을 밝힌 줄 알아야 하며, 또 마음이 벌써 없다면 지혜는 어디서 홀로 서 있겠는가. 역시 열반에 어긋나고 무상(無常)한 식(識)이 소멸되고 항상한 식을 얻게 된다는 이치이다.
만일 있다, 없다의 두 가지 뜻을 함께 취한다면 서로가 어김을 면치 못할 것이요, 만일 서로 없애서 다 함께 부정한다면 어떻게 쓸모없는 의론을 피하겠는가?
만일 뒤의 종(宗)에서 말한, ‘여지일 뿐[唯如智]’이라 한다면 마음은 곧 진성(眞性)이 같기 때문에 ‘여일 뿐[唯如]’이라 하고, 비추는 작용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지일 뿐[唯智]’이라 하거늘, 어찌 마음을 여의고서 그밖에 따로 여(如)가 있겠는가. 이야말로 ‘여일 뿐’은 있다는 것에서 어그러지지 않는다.
앞의 종(宗)에서는 순수한 여의 자체[純如之體]이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이 있고 마음이 이미 여(如)이므로 있다 한들 무슨 잘못이겠는가.
이것으로도 진여에 즉한 있음[卽眞之有]과 있음에 즉한 진여[卽有之眞]의 두 이치가 서로 성립되어 있다 없다가 걸림이 없는지라, 바르게 경의 뜻을 소화한 이인 줄 알겠다.
‘얻을 수 없다’고 함은 마음의 이치가 깊고 오묘해서 말로는 미치지 않기 때문에 차전(遮詮)에 붙여 깊음을 나타내는 것이요, ‘지혜로 여래의 마음인 줄 알 뿐이다’ 함은 심소(心所)에 의탁하여 표전(表詮)에 붙여 깊음을 나타냈거늘 어떻게 깊고 오묘하겠는가.

있다고 말하려 하면 여(如)와 같아서 모양이 끊어지고, 없다고 말하려 하면 깊숙하고 신령하여 다함이 없으며, 그를 정(情)이라 말하려 하면 특수한 물질의 성품이 없고, 정이 없다고 말하려 하면 깊숙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으로 부처 마음은 있음에 즉(卽)하고 없음에 즉하며 심왕에 즉하고 심수에 즉하며, 마음속에 뜻[意]이 있는 것도 아니고 뜻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뜻 속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수가 있지 않는 것도 아니며, 심왕에 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낱낱이 모두가 그러하고 원융하여 걸림이 없음을 알겠다.
『청량기석(淸凉記釋)』에서 이르되 “부처는 마음이 없고 지혜가 있다 하면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성립된다. 심왕은 가장 훌륭한지라 오히려 없다고 하겠거니와, 지혜는 의지할 대상이 없거늘 어찌 홀로 서겠는가? 마치 군주가 없으면 어떻게 신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제 먼저 두 종(宗)을 따로따로 회석(會釋)하고 나중에 두 종을 통틀어 합석(合釋)하겠다.
먼저 법성종(法性宗)의 뜻으로 회석하면, 마음은 곧 여(如)요 지혜는 곧 여지(如智)이니, 마음을 여의면 여가 없다. 그렇다면 여가 있으면 벌써 마음이 있는 줄을 알겠다. 하물며 체성에 즉한 작용을 여지라 하고 작용에 즉한 체성이 바로 진여임이겠는가. 마치 하나의 명주(明珠)와 같아서 명주의 자체가 곧 여요 광명이 곧 여지이거늘 어찌 여(如)가 존재함을 마음에서 없앨 수 있겠는가.
앞의 종(宗)은 순전히 아래와 같다.
법상종(法相宗)의 뜻으로 회석하면, 여에 즉한 있음[卽如之有]이거늘, 있음이 어찌 여와 어그러지겠는가? 마치 거울은 곧 텅 빈 것과 같다. 그렇다면 마음이 있다 해도 허물이 없다. 이것으로도 진여에 즉한 있음인 줄 알겠다.
통틀어 두 종을 회석하면, 진여에 즉한 있음은 바로 법상종이요, 있음에 즉한 진여는 바로 법성종이다. 양쪽은 서로가 여의지 않아야 비로소 걸림이 없는 참 부처 마음이 성립된다.
또 마음속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뜻이 없는 것도 아니라 고 하는 것과, 있는 것도 아니라 하는 이것은 즉하지 않는다[不卽]는 이치로서, 두 모양[相]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아니라 하는 이것은 여의지 않는다[不離]는 이치로서 둘이 없는 자체[體]이기 때문이다.
또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둘이 없는 자체가 서로가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요,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두 모양이 파괴되지 않아서 힘과 작용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044_0190_a_01L宗鏡錄卷第三十三 車 慧日永明寺主智覺禪師延壽集夫道無可修法無可問纔悟大旨萬事俱休故云言語道斷心行處滅旣云宗鏡何乃廣引身戒心慧之文法華經云三藏學者尚不許親近旣違大乘之經教何成後學之信門經中所斥三藏學者卽是小乘戒則但持身口斷四住枝葉之病苗定則形同枯木絕現外威儀之妙用慧則唯證偏空中道不空之圓理故稱貧所樂法墮下劣之爲淨名所訶是愚人之法今此圓宗定尚不同大乘初教無相之空及大乘別教圓之理豈與三藏灰斷定慧之所論乎此宗鏡錄戒慧乃至一事一行一皆入法界具無邊德是無盡宗趣性起法門無礙圓通實不思議如台教云如鏡有像瓦礫不現具諸相但空卽無微妙淨法身具相三十二觀和尚云凡聖交徹卽凡心而見佛心雙修依本智而求佛智古德釋云禪宗失意之徒執理迷事云性本具足何假修求但要亡情卽眞佛自現法學之輩執事迷理何須孜孜修習理法合之雙美離之兩傷行雙以彰圓妙休心絕念名理行興功涉有名事行依本智者本覺智此是因智此虛明不昧名智成前理行亡情顯理求佛智者卽無障礙解脫智此是果智約圓明決斷爲智前事行以起行成果故此則體性同故所以依之相用異故所以求之但求相用不求體前亡情理行卽是除染緣起以顯體性功事行卽是發淨緣起以成相用無相宗云如上所說相用可然但依本智情亡則相用自顯以本具故何須特爾起於事行圓宗云性詮本具亡情之時但除染分相用自顯眞體者無事行彼起淨分相用無因得生如金中雖有衆器除鑛但能顯金若不施功造作無因得成其器豈金出鑛已不造不作自然得成於器若亡情則不假事行佛令具修不虛勞學者是以八地已能離念佛勸方令起於事行知由離念不了所以經頌云法性眞常離心念二乘於此亦能得不以此故爲世尊但以甚深無礙智七勸皆是事行故知果佛須性相具足因行必須事理雙修本智如得金修理行如去鑛修事行如造作求佛智如成器也又華嚴演義云若執禪者則依本智性無作無修鏡本自明不拂不瑩若執法者須起事行求依他勝緣以成己德竝爲偏執故辯雙行依本智者約理無漏智性本具足故而求佛智者約事無所求中故求之心鏡本淨久翳塵勞恒沙性德竝埋塵沙煩惱是故須以隨順法性無慳貪等檀等六波羅蜜故諸佛已證我未證故又理不礙事不妨求故事不礙理求無求故若此之修修卽無修爲眞修矣如上開示本末無理備行周因圓果滿可謂其車高廣又多僕從而侍衛之方能入此一乘歸於宗鏡初心入已須冥合眞空唯在心行非從口說直下步步著力念念相應如大死人永絕餘若非懇志曷稱丈夫但有虛言終成自誑如天台拾得頌云東陽海水淸水淸復見底靈源流法泉斫水刀無痕我見頑愚士燈心拄須彌寸樵煮大海足抹大地石蒸砂成飯磨甎將爲鏡說食終不飽直須著力行恢大丈夫堂堂六尺士枉死埋塚下可惜孤標物龐居士詩云讀經須解義解義卽修行若依了義學卽入涅槃城如其不解義多見不如盲尋文廣占地心牛不肯耕田田摠是稻從何處生故知須在心行忍力成就有二種一生忍二法忍若於法忍觀行易成以了唯心故內外平等如大智度論云法忍者於內六情不著於外六塵不受能於此二不作分別何以故內相如外外相如內二相俱不可得故一相故因緣合故其實空故切法相常淸淨故何謂一切法相常淸淨同遵一道故所以華嚴疏云一道甚深者亦名一乘佛佛皆同一眞道故佛所乘同觀心性萬行齊修自始至終更無異徑故爲一眞心常住徧一切處者卽萬法皆眞云何而有四時生滅了眞心不動故萬法不遷卽常住義若見萬法遷謝皆是妄以一切境界唯心妄動心若不起外境本以從識變故若離心識則尚無一法常住豈況有萬法遷移如今現見物像榮枯時景代謝如何微細披剝明見不遷之旨但當見性自斷狐疑余曾推窮似信斯理不遷論云旋嵐偃嶽而常靜江河競注而不野馬漂鼓而不動日月歷天而不周疏云前風非後風故偃嶽而常靜前水非後水競注而不流前氣非後氣故漂鼓而不動日非後日故歷天而不周鈔云然自體念念不同則初一念起時非第二念時乃至最後吹著山時非初起時則無前念風體定從彼吹其山也且山從初動時以至倒臥地時其山自體念念不同則初一念動時非第二念動時乃至最後著地時非初動時則無初山體定從彼來至著地時斯皆風不至嶽不著地雖旋嵐偃嶽未曾動也以此四物世爲遷動然雖則倒嶽歷天皆不相知相到念念自住各各不遷且如世間稱大莫過四四大中動莫越風輪以性推之本實不動如義海云鑑動寂者爲塵隨風飄颺是動然不起是靜而今靜時由動不滅卽全以動成靜也今動時由靜不滅卽全以靜成動也由全體相成是故動時正靜靜時正動亦如風本不動能動諸物若先有動則失自體復更動今觀此風周徧法界湛然不動寂爾無形推此動由皆從緣起且如密室之中云有風風何不動若云無風遇緣卽起或徧法界拂則滿法界生故知風大不動動屬諸若於外十方虛空中設不因人拂或自起亦是龍蜃鬼神所作以鬼神屬陰至晩則風多故乃至劫初劫末成壞之風竝因衆生業感世間無有一法不從緣生緣會則生散則滅若執自然生者只合常生何得緊縵不定動靜無恒故知悉從緣起又推諸緣和合成事各各不有和合亦無緣緣之中俱無自性但是心動反推自心心亦不動以心無形故起處不可得卽知皆從眞性起眞性卽不起方見心性徧四大性體合眞空性無動以因相彰動因動對靜動相旣無靜塵亦故首楞嚴經云性風眞空性空眞風又不遷之宗豈離動搖之境無生之旨匪越生滅之門故金剛三昧經云因緣所生義是義滅非生滅諸生滅義是義生非滅是以起恒不不起恒起如此通達不落斷常可正解一心不遷之義矣如先德云夫物性無差悟卽眞理眞卽不變物自湛然常情所封於不動妄以爲動道體淵默語路玄微日用而不知者物不遷也事像可觀稱之爲物物體各故號不遷不遷故隨流湛然淸淨爲物故與四像而所相依故知無生不生無形不形處性相而守一者其爲不遷論焉所以不遷論云是以如來因群情之所滯卽方言以辯乘莫二之眞心吐不一之殊教乖而不可異者其唯聖言乎故談眞有不遷之稱導俗有流動之說雖復千途異唱會歸同致矣徵文者聞不遷則謂昔物不至今聆流動者而謂今物可至昔旣曰古今而欲遷之者何是以言往不必往古今常存以其不動去不必去謂不從今至古以其不來不來故不馳騁於古今不動故各性住於一世然則群藉殊文百家異說者茍得其會豈文言能惑之哉是以人之所謂住我則言其去人之所謂去我則言其住然則去住雖殊其致一故經云正言似反誰當信者斯言有由矣何者人則求古於今謂其不住吾則求今於知其不去今若至古古應有今古若至今今應有古今而無古以知不來古而無今知不去若古不至今今亦不至古事各性住有何物而可去來然則四像風馳旋機電卷得意毫微雖速而不轉也是以如來功流世而常存道通百劫而彌固成山假就於始脩途託至於初步者果以功業不可朽故功業不可朽故雖在昔而不化不化故不不遷故則湛然矣故經云三災彌淪而行業湛然信其言也何者夫果不俱因因因而因因而果因昔不滅果不俱因因不來今不滅不來則不遷之致明矣復何惑於去留躊躇於動靜之間哉然則乾坤倒覆無謂不洪流滔天無謂其動若能契神於卽物不遠而可知矣古釋云前言古今各性住於一世不相往來者則壯老不同一色定爲嬰無匍匐時乃至老年則無相續失親屬法無父無子應唯嬰兒得父餘則匍匐老年不應有分則前功便失有斷滅過從此便明功始簣初步因果等相續不失不斷不常一不異不來不去故圓正不遷理也乘莫二之眞心吐不一之殊教者諸聖依一心之正逗機演差別之教迹雖九流八教不等不遷一念無虧故云雖千途異唱會歸同致而隨文迷旨者但執權門生滅之言妄見世相去來之事因此以爲流動隨境輪迴不知生死去來畢竟無性所以中觀論破三時無去一已去無去者去法已謝二未去無去者去法未萌三去時無去者正去無住以去者去法二事俱無若無去者卽無去法亦無方所去者卽是人以法因人致離人無有法離法無有人故鈔云觀方知彼去去者不至方者明三時無去來以辯不遷也如人初在東方卓立不動卽名未去未去故未去不得名爲去若動一步離本立處反望本立名已去已去故已去不得名爲去惑人便轉計云動處則有去此中有去時非已去是故去時去龍樹便以相待破云若有已未去則有去時若無已去未去則無去時故偈云離已去未去去時亦無去如因兩邊有中間長若無兩邊短卽無中間長也目卽以相違破何者去時者謂半去半未去名曰去時則一法中有二墮相違去義不成是故去時亦無去故偈云已去無有去未去亦無去離已去未去去時亦無去也如一人從東方行至西方時望其從東至西如似有故言知彼去然步步中三時無去則無去旣無去法卽無去人從此至彼故言去者不至方也去者謂人也已上一經一論皆明三時無去以標宗辯不遷也此來去因果不卽會中道八不意也如論偈云不生亦不不常亦不斷不一亦不異不來亦不去說是因緣善滅諸戲論我稽首禮佛諸說中第一今以因果會釋八不義言不生者如二十時爲因三十時爲果若離二十有今三十可言有生若離二十則三十不可得是故不故中論云離劫初穀今穀不可得是故不不滅者則二十時不無故不滅若二十時今不應有三十時中論云若滅今應無穀而實有穀是故不滅也不常者則三十時二十時是故不常中論云如穀芽時種則變是故不常不斷者因二十有三十相續故不斷中論云如從穀有芽是故不斷若斷不應相續不一者二十不與三十同體各性而住故不一中論云如穀不作芽芽不作穀是故不一不異者不離二十有三十若二十姓張三十不異中論云若異何故分別穀芽穀莖穀葉是故不異不來者二十不至三十時是故不來不出者二十時當處自寂不復更生故不出也達此理者則離一切戲論會中道則眞諦矣是知於眞諦中無一法可豈有去來如大涅槃經云爾時世尊問彼菩薩善男子汝爲到來爲不到來瑠璃光菩薩言世尊到亦不來不到亦不來我觀是義都無有來世尊諸行若常亦復不來若是無常亦無有來若人見有衆生性者有來不來我今不見衆生定性云何當言有來不來憍慢者見有去來無憍慢者則無去來有取行者見有去來無取行者則無去來若見如來畢竟涅槃則有去來不見如來畢竟涅槃則無去來不聞佛性則有去來聞佛性者則無去來般若燈論問汝爲已行名初發爲未行名初發爲行時名初發耶三皆不然如偈已去中無發未去亦無發去時中無發處當有發釋曰已去中無發者謂去作用於彼已謝故未去亦無發者謂未行無去去則不然去時中無發者謂已去未去等皆無去云何可說去時有去如是三種俱無初發是故偈言何處當有發又偈云無已去未去亦無彼去時於無去法中何故妄分別釋云妄分別者如瞖目人於虛空中或見毛髮蠅皆無體故又偈云是故去無性去者亦復去時及諸法一切無所有又偈云未滅法不滅已滅法不滅滅時亦不滅無生何等滅釋曰第一句者以滅空故譬如住第二句者如人已死不復更死第三句者離彼已滅及未滅法更無滅時有俱過故是故定知滅時不滅第四句者其義云何一切諸法皆不生言無生者生相無故無生有滅義則不然如石女兒乃至復次汝言滅者爲有體滅耶爲無體滅耶二俱不然如偈曰法若有體者有則無滅相釋曰以相違故譬如水火由如是故偈曰一法有有無於義不應爾復次法若無體者有滅亦不然如無第二頭可言其斷是以旣無來去之法亦無住止之以因法明時亦因時辯法法旣無有時豈成耶如中觀論偈云時住不可得時去亦叵時若不可得云何說時相因物故有時物何有時物尚無所有何況當有時釋曰上引證直指世間皆卽事辯眞從凡見道前現證可以絕疑去法旣然乃至六趣輪迴四時代謝皆是不遷常住一心之道然則群藉殊文百家異說茍得其會豈文言能惑哉若達萬法唯我一心觀此心性尚未曾生云何說滅尚不得靜云何說動如楞嚴會上卽時如來於大衆中屈五輪指屈已復開開已又屈謂阿難言汝今何見阿難言我見如來百寶輪掌衆中開合佛告阿難汝見我手衆中開合爲是我手有開有合爲復汝見有開有合阿難言世尊寶手衆中開合我見如來手自開合非我見性自開自合佛言誰動誰靜阿難言佛手不住而我見性尚無有靜誰爲無住佛言如是乃至云何汝今以動爲以動爲境從始洎終念念生滅遺失眞性顚倒行事性心失眞認物爲己輪迴是中取流轉故知見性不遷理周法界但是認物爲己背覺合塵若以動爲身以動爲境則顚倒行事性心失眞境實不遷唯心妄動可謂雲駛月運舟行岸移矣故論云是以言往不必往古今常存以其不動稱去不必去謂不從今至古以其不來不來故不馳騁於古今不動故各性住於一世此乃是法法各住眞如之位無有一物往來亦未曾一念暫住不相待豈非不遷乎若能如是通達己眼圓何似有之幻塵一期之異說而能惑我哉又古釋云百家異說豈文言之能惑者此明於三教不惑各立其宗儒有二十七家若契五常之理卽無惑也黃老有二十五家若契虛無亦無惑也釋有十二分教若了本心亦無惑也然則三教雖殊若法界收之則無別原矣若孔老二教百氏九流摠而言之不離法界其猶百川歸於大海若佛教圓宗一乘妙旨別而言之百家猶若螢光寧齊巨照大海不歸百川也然則四像風馳旋機電卷得意毫微雖速而不轉者四像則四時也機者北斗七星也雖寒來暑往斗轉星移轉風馳剎那不住若得意者了於一心毫微之密旨則見性而不動也果不俱因因因而果者譬如爲高山初覆一簣之土爲因直至壘土成山此初一簣土雖未成山初不至後而亦不滅又終因此一簣土成山故云果不俱因因因而果因因而果因不昔滅果不俱因不來今不滅不來則不遷之致明矣如千里之程起於初步雖未卽到果不俱因然全因初步之功能達千里之路則因因而故云成山假就於始簣修途託至於初步又如初發一念菩提善心之因究竟成就無上妙覺之果卽最初一念不亡若初一念已則不能成佛果故云是以如來功流萬世而常存道通百劫而彌固以其不滅不來功成業因不虛棄事不唐捐則知萬法俱不遷矣豈更猶豫於動靜之間哉若能觸境而明宗契神於卽物假使天翻地覆海沸山崩尚不見動靜之兆眹況其餘之幻化影響乎一切眞俗等法有相有用有因有緣云何一向作觀心釋耶若不迴觀自心則失佛法大旨高推諸聖不慕進修枉處沈淪於己絕分如不傚觀心進道者如抱石沈淵行去燭則於佛智海必死無疑向涅槃城故難措足是以十方諸佛起教之由唯說一切衆生佛性大般涅槃一心秘密之藏若凡若悉入其中如世尊言此大般涅槃是十方諸佛放捨身命之處安置諸子悉入其中亦自住其中何者以覺自心性故名爲佛性以從性起無漏功德自行化他法利無盡稱爲藏以難信難知故云秘密以法性幽奧名涅槃可謂無量法寶之所出生猶四大一切萬法之所依處如十方空若不遇之大失法利有暫聞者功德無邊如大般涅槃經中所讚佛告迦葉菩薩善男子如是微妙大涅槃經乃至一切法之寶藏譬如大海是衆寶藏是涅槃經亦復如是卽是一切字義秘藏善男子如須彌山衆藥根本是經亦爾卽是菩薩戒之根本善男子譬如虛空是一切物之所住處是經亦爾卽是一切善法住善男子譬如猛風無能繫縛一切菩薩行是經者亦復如是不爲一切煩惱惡法之所繫縛善男子譬如金剛無能壞者是經亦爾雖有外道惡邪之人不能破壞善男子如恒河沙無能數者如是經義亦復如是無能數善男子是經典者爲諸菩薩而作法幢帝釋幢善男子是經卽是趣涅槃城之商主如大導師引諸商人趣向大海善男子經能爲諸菩薩等作法光明如世日月能破諸暗善男子是經能爲病苦衆生作大良藥如雪山中微妙藥王能治衆病善男子是經能爲一闡提杖猶如羸人因之得起乃至善男子是經卽是金剛利斧能伐一切煩惱大卽是利刀能割習氣卽是勇健能摧魔怨卽是智火焚煩惱薪卽因緣藏出辟支佛是聞藏生聲聞人卽是一切諸天之眼卽是一切人之正道卽是一切畜生依處卽是餓鬼解脫之處卽是地獄無上之尊卽是一切十方衆生無上之器卽是十方過去未來在諸佛之父母也是知了此一心摠持涅槃秘密之藏如上所讚衆德攸歸所有一毫之隨眞如無盡之理力齊法界福等虛空能成就菩提無作妙果若未悟斯旨設有進但成有爲終不得道任經多劫勤苦修行唯成拙度之門終無勝報之事如大智度論如舍利弗弟子羅頻周比丘持戒精進食六日而不能得乃至七日命在不久有同道者乞食持與鳥卽持去舍利弗語目犍汝大神力守護此食令彼得之卽時目連持食往與始欲向口變成爲泥又舍利弗乞食持與而口自合最後佛來持食與之以佛福德無量因緣故令彼得食是比丘食已生歡喜倍加信敬佛告比丘有爲之法皆是苦相爲說四諦卽時比丘漏盡意解得阿羅漢道故知信一乘之福福等眞如持四句之功齊大覺所以楞伽經云佛告大慧此是過去未來現在如來應供等正覺性自性第一義心以性自性第一義心成就如來世間出世間上上法眞心之德以第一義心究竟獲世出世等菩提勝果之福萬法唯識者於諸識中何識究竟唯阿摩羅識云無垢淨識無有變異可爲究竟三無性論識如如者謂一切諸行但唯是識此識二故稱如如一攝無倒者謂十二入等一切諸法但唯是識離亂識外無別餘法故一切諸法皆爲識攝此義決定故稱攝無倒如如二無變異者明此亂識卽是分別依他似塵識所顯由分別性永無故依他性亦不有二無所有卽是阿摩羅識唯有此識獨無變故稱如如又云一切世出世間境不過唯是如量境界此唯識由外境成外境旣無唯識亦無境無相識無生是一切諸法平等通以如理故以理量二門一切性相收盡識相妙有是如量門以識性眞空是如理門若理量雙消則唯眞性又阿摩羅識有二種一所緣卽是眞如二本覺卽眞如智能緣卽不空如來藏所緣卽空如來藏十二門論明唯識眞實辯一切諸法唯有淨識無有能疑亦無所疑唯識有二一方便謂先觀唯有阿賴耶識無餘境界現得境智二空除妄識已名爲方便唯識二正觀唯識遣蕩生死虛妄識心及以境像一切皆淨盡唯有阿摩羅淸淨心也萬法唯識佛住識不阿賴耶此云藏識能藏一切雜染品法令不失故我見愛等執藏以爲自內我故此名唯在異生有學阿陁那此名執持執持種子及色根故此名通一切位我執若亡卽捨賴耶名阿陁那持無漏種則妄心斯滅眞心顯現則佛住無垢淨識故經云心若滅者生死盡卽是妄心滅非心體滅所以起信論云復次分別心生滅相者有二種別一麤謂相應心二細謂不相應心麤中之麤凡夫智境麤中之細及細中之麤菩薩智境此二種相皆由無明熏習力起然依因依緣因是不覺緣是妄境因滅則緣滅緣滅故相應心滅因滅故不相應心滅若心滅者云何相續若相續者云何言滅實然今言滅者但心相滅非心體滅如水因風而有動相以風滅故動相卽滅非水體滅若水滅者動相應斷以無所無能依故以水體不滅動相相續衆生亦以無明力令其心動無明滅故動相卽滅非心體滅若心滅者則衆生斷以無所依能依故以心體不滅心動相續釋曰論明麤細二種心境皆由無明熏習力起然依因依因是不覺緣是妄境者只謂不覺自心妄生外境故知境無自性從心而生和合而起故云心生卽法生因滅則緣滅矣以水體不動相相續者此況眞心自體非動非止無明風起生死動搖若妄風息時心之動相卽滅非心體滅以心體是所依萬法是能依若無所依能依非有故知一心之體爲群有之依猶如太虛作萬像之體又本識有二義一妄染義凡夫所住二眞淨義八地所住地單住眞如但名無垢識諸佛單住眞名無垢識者無垢淨識卽是常住眞心爲復諸佛決定有心決定無心據體則言亡四句意絕百非約用則唯智能明非情所華嚴經云佛子如來心意識俱不可得應以智無量故知如來心古釋云如來心意識俱不可得者約體遮詮也但應以智無量如來心者寄用表詮也一師云識等有一染二淨佛地無有漏染心及心所而有淨分心及心所果位之中智强識劣故於心王上以顯無染約彼智所以明無量若必無王所智依何立經云如來無垢識是淨無漏界解脫一切障圓鏡智相應則有心王明矣一師云以無積集思量等義故說心等叵得就無分別智以顯無量非無心體上之二解俱明心意識有又云佛果實無心意意識及餘心法云不可得唯有大智故言智無量故知如來心經云唯如如及如如智獨存佛地論中五法攝大覺性唯一眞法界及四智菩不言更有餘法此二說約無若依前有免增益亦不能通不可得言若依後無未免損減亦不通能知佛心言旣云知如來心可言無心可知明非無心矣又心旣是無何獨立亦違涅槃滅無常識獲常識義若有無二義雙取未免相違若互泯雙非寧逃戲若後宗言唯如智者以心卽同眞性故曰唯如照用不失故云如智豈離心外而別有是則唯如不乖於有前宗以純如之體有淨心心旣是如有之何失是知卽眞之有與卽有之眞二義相成有無無礙正消經意者言不可得者以心義深玄言不及故寄遮顯深言但以智知如來心者託心所寄表顯云何深玄欲言其有同如絕相欲言其無幽靈不竭欲謂之情無殊色性欲謂無情幽不徹是知佛心卽有卽無卽王卽數心中非有意亦非不有意意中非有心亦非不有心數非依於王亦非不依王一一皆爾圓融無礙淸涼記釋云言佛無心有智成相違過心王最勝尚說爲無智無所依豈當獨立無君主何有臣下今先別會二宗後通合二先會法性宗意云心卽是如智卽如智心無如則知有如已有心矣況卽體之用稱如智卽用之體卽是眞如如一明珠珠體卽明卽如智豈得存如亡於心矣前宗以純如下會法相宗意云卽如之有有豈乖如鏡卽虛則有心無失是知卽眞之有通會二卽眞之有是法相宗卽有之眞是法性宗兩不相離方成無礙眞佛心矣又心中非有意亦復非無意者非有是不卽義二相別故亦非不有是不離義無二體故又非有者以無二體互攝盡故亦非不有者二相不壞力用交徹故宗鏡錄卷第三十三音義昌石反逐也遠也 礫郞擊反小石曰礫也 孜子之反 鑛古猛反金璞也之若反刀斫也 痕戶思反瘢也 拄知庾反指拄 抹草割反抹瑕𢯫也煮仍反 甎職緣反甎瓦也 恢苦迴反大也 龐薄江反比角反 嵐盧含反 偃於幰反偃仰也 蜃時刃反蛟蜃鳩尹反束縛也 縵莫半反 淵烏玄反深也 簣苦怪反籠也直由反 躇直魚反 淊土刀反漫也 匍薄胡反蒱不反 逗田候反逗遛 萌莫耕反萌牙 叵普火反其冀反潤也 駛疏吏反速也 豫羊茹反備光也 眹古引反目童子也乎教反教也丁未歲分司大藏都監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