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저 경계와 식(識)을 다 함께 버리면 중생계(衆生界)가 공하거늘, 모든 부처는 마침내 어떤 법을 얻게 되는가? 【답】 온갖 범부들은 식으로 인하여 경계를 대(對)하면서 생사하는 가운데서 허망한 집착을 내어 상(常) 등의 네 가지 뒤바뀜[四倒]을 일으키고, 2승 사람들은 열반 가운데서 허망한 해탈을 구하면서 무상(無常) 등의 네 가지 뒤바뀜을 일으키며, 모든 부처ㆍ여래는 경계와 식이 다 함께 공함으로 인하여 여덟 가지 뒤바뀜[八倒]을 능히 여의고 참된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의 네 가지 바라밀을 성취한다. 『보성론(寶性論)』에서 이르되 “두 가지 법에 의하여 여래의 법신(法身)은 정(淨)의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본래 제 성품의 청정함[本來自性淸淨]이니, 모양이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때를 여의어 청정함[離垢淸淨]이니, 모양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여래의 법신은 아(我)의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모든 외도의 치우침을 멀리 떠남이니, 허망한 아(我)의 쓸모없는 의론을 떠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든 성문(聲聞)의 치우침을 멀리 여읨이니, 아의 쓸모없는 의론을 떠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여래의 법신은 낙(樂)의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온갖 고통을 멀리 떠남이요, 둘째는 온갖 번뇌 습기를 멀리 떠난다.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여래의 법신은 상(常)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소멸하지 않음[不滅]이니, 온갖 유위(有爲)의 행으로 단견(斷見)의 치우침을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취하지 않음[不取]이니, 무위(無爲)의 열반으로 상견(常見)의 치우침을 여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승만경(勝鬘經)』에서 이르되 “세존은 모든 행의 무상은 바로 단견이요 정견(正見)이 아닌 것으로 보았고, 열반의 상(常)은 바로 상견이요 정견이 아닌 것으로 보셨나니, 허망한 생각이요 소견이기 때문에 이렇게 보셨다. 그런 까닭에 여래는 4덕(德)인 열반의 비밀한 갈무리를 증득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문】 경에서 “모든 행의 무상은 바로 단견이요 정견이 아닌 것으로 보았고, 열반의 상은 바로 상견이요 정견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말씀하였다면, 어떻게 교법 가운데서 혹은 무아(無我)를 말하고 또는 아(我)를 말하기도 하셨거늘, 어찌 서로가 어긋난 것이 아닌가? 【답】 대저 상과 무상과 아와 무아를 말한 것은 형상과 말의 자취일 뿐이요 모두가 방편이다. 그런 까닭에 『조론(肇論)』에서 이르되 “보살은 상(常)을 헤아리는 가운데서 상이 아닌[非常] 교법을 연설했다. 부처님이 처음 세간에 출현하여 원만한 상의 묘한 문[圓常之妙門]과 참 아의 불성[眞我之佛性]을 말씀하려다가 온갖 외도들이 모두가 신아(神我)를 허망하게 집착하여 시방 세계에 두루 상견을 일으키게 되겠으므로, 만일 참된 상ㆍ락ㆍ아ㆍ정을 말하면 함부로 삿된 견해를 낼까 두렵고 또한 일시에 허망한 티끌을 털어버리기 위하여 무상(無常)ㆍ무락(無樂)ㆍ무아(無我)ㆍ무정(無淨)이라 하셨다. 또 2승과 권가(權假)의 보살은 모든 부처의 비밀한 뜻을 모르고 방편의 문에 집착하여 바쁘게 증득을 취하면서 모두가 무아의 이치에 머물러 마지막을 삼으므로, 세존은 또 그 통달하지 못함을 가엾이 여기어 마침내 자세하게 상ㆍ락ㆍ아ㆍ정을 말씀하셨다. 만일 이 마지막의 말씀에서 진아(眞我)의 불성을 분명히 보아 사람이거나 나무거나 벌레거나 티끌이 분명하여 미혹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중도(中道)에도 머무르지 않겠거늘, 어찌 다시 상ㆍ무상과 아ㆍ무아의 두 소견에 어지러워지겠는가. 혹여 비록 상ㆍ락ㆍ아ㆍ정의 이름을 들었다 하더라도 상ㆍ락ㆍ아ㆍ정이라는 견해만 지을 뿐 말을 따라 소견을 내어 자기의 참 마음을 어둡게 한다면 아와 무아의 약이 도리어 아와 무아의 명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진아는 설명하기 어려워서 증득하지 않으면 분명해지지 않는다. 마치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두 사람의 친한 벗이 있었다. 한 분은 왕자였고 한 분은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왕래하고 있었다. 이때 그 가난한 사람은 이 왕자가 가진 아주 좋은 칼을 보고 마음속에서 탐을 내고 있었다. 왕자는 뒷날에 그 칼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 있었다. 이때 가난한 사람은 뒤에 남의 집에서 묵고 있으면서 잠을 자다가 잠꼬대로 ‘칼, 칼’ 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로 붙잡아갔다. 그때 왕은 물었다. ‘네가 말한 칼이란 어디서 얻었느냐?’ 이 사람은 위의 일들을 왕에게 자세히 말하고 왕에게 대답하였다. ‘왕께서 이제 설령 저의 몸을 베어 죽이고 손발을 찢어발기면서 칼을 얻으려 하셔도 실로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신(臣)과 왕자는 평소에 친한 사이었는지라 한 곳에 같이 있으면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감히 짚거나 대지도 않았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고의로 가져 오겠습니까.’ 왕은 다시 물었다. ‘네가 그때 본 칼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더냐?’ 대답하였다. ‘암양의 뿔 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듣고서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는 마음대로 가거라. 근심할 것도 없다. 나의 창고 안에서 도무지 그런 칼은 없다. 더구나 네가 왕자 곁에서 본 것이라니 말할 나위도 없다.’ 이때 왕은 이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전에 그와 같은 칼을 보았었던가?’ 이 말을 마치면서 세상을 떴다. 이윽고 다른 왕자가 자리를 이어받고 왕이 되어서는 다시 물었다. ‘그대들은 전에 관청의 창고 안에서 그런 칼을 보았었던가?’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신들도 일찍이 보았었습니다.’ 다시 물었다.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던고?’ 대답하였다. ‘대왕이여, 암양의 뿔과 같았습니다.’ 왕은 “나의 창고 안의 어디에 이런 모양의 칼이 있겠구나”라고 하고, 차례로 네 분의 왕이 모두 검사하며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그런 지 몇 해 후에 먼저 도망갔던 왕자가 다른 나라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이 칼을 보았던가?’ 대답하였다. ‘대왕이시여, 신 등은 모두가 보았습니다.’ 다시 물었다.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던고?’ 대답하였다. ‘대왕이시여, 그 색깔의 맑고 깨끗하기가 마치 우발라꽃[優鉢羅花]과 같았습니다.’ 다시 어떤 이는 대답하기를, ‘형상이 양의 뿔과 같았습니다’ 하고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그 색깔의 붉기가 마치 불더미와 같았습니다’고 하고, 다시 어떤 이는 대답하기를,‘마치 검은 뱀과 같았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때 왕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들은 모두가 다 내 칼의 진실한 모양은 보지 못하였구료.’ 선남자여,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세간에 출현하여 아(我)의 참 모습을 말하고 말한 뒤에는 버리고 가는 것은 비유하면 왕자가 맑고 좋은 칼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도망간 것과 같으니라. 범부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하되 ‘모두 아(我)가 있다’ 아가 있다‘고 함은, 마치 저 가난한 사람이 남의 집에 묵고 있을 때 잠꼬대로 ‘칼ㆍ칼’이라고 한 것과 같으며, 성문과 연각이 중생들에게 묻되 ‘아에는 어떤 형상이 있는가?’ 하면 대답하기를, ‘내가 아의 형상을 보았더니, 크기가 마치 엄지손가락만큼 했습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쌀 톨만큼 했습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피 씨[稗子]만큼 했습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아의 형상은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데, 환하기가 마치 해와 같습니다’고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아의 형상을 모르는 것은 비유하면 여러 신하들이 칼의 형상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아의 법을 말하면 범부들은 모르고서 갖가지로 분별하며 아의 형상을 망령되이 짓는 것은 마치 칼의 형상을 물을 때 ‘양의 뿔 같았습니다’고 대답하면서 여러 범부들이 차례로 계속하여 삿된 소견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런 모든 삿된 소견을 끊기 위하여 여래가 시현(示現)으로 무아를 말한 것은, 비유하면 왕자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되 ‘나의 창고 안에는 이런 칼이 없느니라’고 함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오늘날 여래가 말씀하는 진아는 이름이 불성이니, 이와 같은 불성은 우리 불법 중에서 비유하면 마치 깨끗한 칼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만일 어떤 범부가 잘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위없는 불법을 수순하는 이요, 만일 잘 분별하고 수순하면서 널리 펴 말하면 이들이야말로 바로 보살의 모습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평등한 공문(空門)에 한 마음의 큰 뜻은 벌써 좋고 싫음에 끝이 없고 범부와 성인에 다 함께 원만하거늘, 어째서 은혜를 받는 데에 차별이 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같지 아니한가? 【답】 만 가지 일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가 부르며, 유심(唯心)의 한 진리는 이지러짐이 없다. 좋아하고 싫어함은 자기 생각에서 생길 뿐이거늘, 과보가 어찌 다른 이로부터 되겠는가. 전오 법사(傳奧法師)가 이르되 “속에 나쁜 업이 있으면 바깥으로 삿된 악마를 느끼고, 만일 속에서 착한 마음을 일으키면 바깥에서 모든 부처님을 만날 뿐이니, 이야말로 선악은 제 몸에 있을지언정 남으로 말미암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서시(西施)는 강(江)을 사랑하고 못생긴 여인은 거울을 싫어하나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로다. 또한 군자(君子)조차도 오히려 제 몸에 돌이켜 구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만일 이 말을 깊이 믿으면 마음이 비고 생각이 끊어져서 단번에 법공(法空)에 들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어떤 중생에게 선근(善根)의 힘이 없으면 모든 악마와 외도와 귀신에게 홀리게 된다. 만일 앉아 있는 동안에 두려운 형상이 나타나거나 혹은 단정한 남자ㆍ여자 등의 모양이 나타나면 유심의 경계만을 생각해야 하리니, 그러면 사라지면서 끝내 괴롭히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으로도 성인이란 바른 이인 줄 알겠다. 마음이 바르면 곧 성인이기 때문에, “마음이 바르면 삿됨을 피할 수 있나니,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똑바로 떠 있으면 풀과 나무에 삿된 그림자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이 마음이 바로 범부와 성인의 집이요 감관과 경계의 근원이다. 다만 범부는 집착하여 아뢰야(阿賴耶)의 식만을 지어서 생사하는 고뇌의 원인을 이루고, 성인은 통달하여 여래장(如來藏)의 마음만이 되어서 열반하는 상락(常樂)의 결과를 받는다. 만일 아뢰야식이라 하면 이름은 있되 본체는 없는데 망정(妄情)으로 있는 것[有]에 집착한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이니, 성인을 증득하게 될 적에 그 이름은 이내 버려진다. 만일 여래장심이라 하면 이름도 있고 본체도 있나니, 본래 있는 것이요 집착이 아니기 때문이요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금으로 고리를 만들면 고리 형상은 구멍이 나지만 금의 본체는 드러나는 것처럼, 여래장이 아뢰야가 되면 아뢰야 형상은 구멍이 나지만 여래장의 성품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지금의 중생들은 망정을 따라 집착함이 중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아뢰야를 잘못 인정하면서 여래장이 있음을 믿지 아니한다.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업신여길뿐더러 다른 사람까지 헐어 없앤다. 법을 비방하는 허물은 이보다 더 큰 허물이 없다. 생각생각마다 여래 법계의 성품에 어둡고 걸음걸음마다 중생 업과(業果)의 원인을 지으며 나쁜 업은 나날이 새롭고 고통의 인연은 그지없으며 안온한 데서 쇠뇌(衰惱)의 마음을 내고 해탈 가운데서 얽매임의 결과를 이룬다. 입은 불길이 일고 목구멍은 바늘만큼 한 몸을 받아서는 겁(劫)을 지내면서 불에 굶주려 몸을 태우고 털이 있고 뿔이 난 몸이 되어서는 눈에 띄는 데마다 그물에 얽히며 혹은 무간 지옥에 떨어지면 심한 고통을 안아 언제나 불 수레바퀴에 있기도 하고 혹은 아수라 궁전에 나면 싸움을 일으켜 항상 칼의 비를 맞기도 하며 혹은 잠시 인간에 와 나면 찰나마다 8고(苦)에 삶아지기도 하고 혹은 천궁에 가 나면 빠르게도 5쇠(衰)에 떨어지기도 한다. 3장(障)에 길이 빠지고 4마(魔)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모두가 여래장의 마음을 모른 탓으로 유식(唯識)의 묘한 성품을 잃고는 인자한 참 아버지를 등지고 딴 지방에 가서 품팔이를 하며 큰 지혜 있는 임금을 버리고 남의 나라에 가 의지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는 놀라면서 불집(火宅)으로 들어가고 조사(祖師)는 일부러 서토(西土)에서 와서는 참으로 돌아갈 곳을 지시하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바른 소견을 보이는 데도 보지 않나니, 도무지 장식(藏識)의 훈습된 곳이 끝없이 단단하여 집착하는 망정이 두터워져서 마치 만 겹으로 덮힌 얼음 낭떠러지 같고 의심의 뿌리가 깊어져서 마치 천 겹으로 감싼 캄캄한 방과 같다. 이제 깊고 오묘함을 널리 찾고 글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천 성인의 은미한 말씀을 화회(和會)하고 백가(百家)의 비밀한 설명을 통달하여, 한 법도 따르지 않음이 없으면 효의(孝義)의 문을 능히 이루고 한 생각도 온화하지 않음이 없으면 다툼 없는 도(道)가 모두 되리니, 그러면 6입(入)의 빈 더미에는 마침내 사람이 없을 것이요 5음(陰)의 집 안이 텅 비면서 고요해지리라. 그러므로 안으로는 하는 일이 없고 밖으로는 의지하는 데가 없으리니, 밖으로 의지하는 데가 없으면 만 가지의 존재가 얽맬 수 없고 안으로 하는 일이 없으면 천 갈래 생각이 내달을 수 없다. 마침내는 부처 곁의 땅이 고요해지면서 하나의 티끌마다 어지럽힘이 끊어지고 법의 국토가 바로 잡아져서 하나의 지경마다 항복하지 않음이 없으리니, 가위 천성(天性)에 계합되면 이 때에는 다시는 다른 종성이 없고 부자(父子)가 결정되면 오늘에는 오직 우리 가풍(家風) 뿐이리라. 『앙굴마라경(鴦堀魔羅經)』에서 이르되 “항상 인간 천상의 온갖 쾌락을 받고 집안이 뛰어나서 모두가 다 구족한 것은 온갖 중생들에게 모두 항상 머무는 여래장이 있음을 듣고 알기 때문이며, 내지 만일 그 중생이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다섯 갈래[五趣] 안에서 뼈마디가 완전하지 못하고 생사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으면 이것은 여래장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문】 다만 한 마음을 환히 알고 모든 법을 구하지 않으며 삼보(三寶)를 이어 흥하게 하면서 자기도 수행하고 남도 교화하면 원만한 묘각(妙覺)의 지위를 얻는 것인가? 【답】 마음을 깨달아 바뀜이 없으면 부처의 지견(知見)이 열리리니, 부처의 지견이 열리면 깊숙한 데도 보지 않음이 없다. 둘이 아닌 형상은 부처 눈으로 보는 바요, 하나의 진실한 도(道)는 부처 지혜로 아는 바다. 법계의 끝을 비추어 다하고 참 근원의 밑을 꿰뚫어 위로는 모든 부처를 이루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함은 이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나니, 자기와 남이 다같이 이롭다. 대저 바르게 수행하려 하는 이가 종경(宗鏡)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가 삿된 수행에 떨어져 혹은 권소(權小)에 걸리게도 된다. 이 종경의 바른 이치는 과거 시방의 온갖 부처님이 이것을 원만히 닦아서 이미 이루었고,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현재 이루고 있으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장차 이룰 것이다. 과거의 온갖 보살이 이미 배웠고, 현재의 온갖 보살이 현재 배우고 있으며, 미래의 온갖 보살이 장차 배울 것이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 밝히되 “모름지기 먼저 진여의 법을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석벽(石壁)의 초(鈔)에서 이르되 “온갖 수행의 문은 모두가 진여로부터 일어나게 되나니, 이것이 수행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진여가 흐르는 수행이 아니면 진여에 계합됨이 없거늘, 어떻게 진여에 계합되는 수행이 진여로부터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야말로 이 믿음은 법 중의 근본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만 가지 인연이 일어난 바는 진여에서 일어나고 모인 인연이 들어간 바도 진여에 들어간다. 보살의 발심은 먼저 진여를 생각하고, 보살이 믿음을 일으킴에도 먼저 진여를 믿으며, 보살이 행하는 일 또한 진여에 계합한다. 또 물었다. 어떻게 이 믿음이 진여의 형상인가? 답하였다. 온갖 법을 믿지 않는 이 믿음이 진여의 형상이니, 진여의 이치 안에는 본래 모든 법이 없다. 만일 모든 법이 있는 것이라 보면 바로 모든 법을 믿는 것이요 진여를 믿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일찍이 광대한 보리인 1승 종자의 인연을 심지 않는 이는 갑자기 믿음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조사의 게송에 이르되 “큰 연(緣)은 믿음과 합한다”고 했으니, 혹여 종경에 들어가게 된 이면 이것으로도 작은 연이 아닌 줄 알겠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그때 세존이 대혜(大慧)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승을 섭수(攝受)한 이는 모든 부처님ㆍ보살ㆍ연각ㆍ성문을 섭수하고, 모든 부처님ㆍ보살ㆍ연각ㆍ성문을 섭수한 이는 온갖 중생들을 섭수하며, 온갖 중생들을 섭수한 이는 정법(正法)을 섭수하고, 정법을 섭수한 이는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으며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는 이는 뛰어나게 든 곳을 얻은 줄 분명히 안다. 뛰어나게 든 곳을 얻은 줄 아는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중생을 교화하고 대승을 이룩하게 되어 열 가지 자재한 힘으로 뭇 색상(色像)을 나타내고 중생들의 형상들과 희망과 번뇌의 모든 모양을 통달하여 사실대로[如實] 설법하느니라’ ”고 하셨다. 사실대로라 함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대로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모양이어서 온갖 거짓이 쉬게 되므로 이것을 사실대로라고 한다. 또 이르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제 마음의 현량(現量)을 깨달으면 망상이 나지 않고 안온과 쾌락으로 세상 일이 영원히 쉴 뿐이니라’ ”고 하셨다. 안온하고 쾌락하면 고요하여 묘하고 항상함이요, 세상 일이 영원히 쉬면 반연이 이미 끊어진 것이니, 가위 원만한 보배광을 만나 단번에 희망이 끊어지고 상락(常樂)의 열반에 이르러서 다시는 이를 데가 없다 하리라. 이것은 범부와 성인의 맨 끝이어서 마치 고향에 도달한 것과 같고, 미혹과 깨침의 의지가 되어서 이미 근본을 다하였도다. 『대열반경』에서 이르되 “금강의 보배광은 모자라거나 줄어지는 바가 없다”고 했다. 『화엄경』 게송에서 이르되 “갖가지로 변화하는 한량없는 힘은/온갖 세계의 작은 티끌 수와 같나니/다 마음에서 일어난 줄 요달(了達)하려 하면/보살은 이로써 처음으로 발심하네”라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의 「본제품(本際品)」에서 이르되 “그러므로 본제(本際)는 이름이 없는데 이름이 없는 데서 이름 붙여지고 본제는 형상이 없는데 형상이 없는 데서 이름 붙여졌나니, 이름과 형상이 이미 성립되면 허망한 미혹이 마침내 생겨서 참된 하나의 이치가 가라앉고 도종(道宗)의 일이 숨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름 없는 팽나무가 온갖 것에 두루 통하면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한량의 경계를 지나서 하나의 바탕이요 둘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삼라(森羅)와 만상(萬像)은 하나의 법에 찍혔나니, 바로 본제(本際)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본제의 이치는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하나가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하나의 기운[一氣]을 포함하고 만유(萬有)를 감싸 들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제 성품은 청정하여 하나를 포함하면서 나는 것이로되 그 속에 망상이 없으면 바로 성인이라 한다. 그러나 실제(實際) 안에서는 역시 성인의 법으로서 작은 티끌만큼의 것도 다른 것이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제 성품은 청정하여 하나를 포함하면서 나는 것이로되 그 속에 망상이 있어서 저절로 흐리고 어지러우면 곧 범부라 한다. 그러나 실제 안에서는 역시 범부의 법으로서 작은 티끌만큼의 것도 다른 것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불성은 평등하고 광대하여 한량하기 어려워서 범부와 성인에게도 둘이 아니고 모두에게도 원만하여 풀과 나무에도 다 갖추어지고 땅강아지와 개미에게도 두루하며, 내지 작은 티끌과 터럭까지에도 하나를 포함하면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되 “하나를 분명히 알면, 만 가지 일이 끝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중생은 모두가 하나를 타면서 나기 때문에 ‘1승(乘)’이라고 한다. 만일 미혹하면 다르게 되고, 깨달으면 하나다. 그러므로 이르되 “앞의 생각은 바로 범부요 뒤의 생각은 곧 성인이다”라고 했고 또 이르되 “한 생각이 온갖 법임을 안다”고 했다. 이 때문에, 하나가 곧 온갖 것이요 온갖 것이 곧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하나의 법의 공(功)으로써 만상(萬像)을 이룬다”고 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온갖 것에 만일 마음이 있으면 이내 미혹하고, 온갖 것에 만일 마음이 없으면 이내 시방에 두루 하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가 만 가지로 차별되고 만 가지의 차별이 참된 하나이다. 마치 바다에는 천의 물결이 솟구치되 천의 물결 그대로가 바다인 것과 같나니, 온갖 모두는 다른 것이 없다. 내지 만물은 하나를 포함하면서 생기되 곧 그 만물 역시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근본이 하나이므로 끝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박달나무에는 박달나무 가지가 생기고 참죽나무가 생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시방의 부처님 국토 안에는/오직 1승의 법만이 있네”라고 했다. 1승이란 곧 한 마음이다. 온갖 만유(萬有)와 시방의 허공은 모두가 진여인 한 마음의 종자에서 나타나게 된다. 마치 박달나무에는 박달나무의 가지가 생기고 난초에는 난초의 잎이 난 것과 같나니, 뿌리ㆍ끝ㆍ중간에 이르기까지 다시는 다른 모양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되 “하나가 곧 온갖 것이요, 온갖 것이 곧 하나이다”라고 했다. 만일 이러할 수 있다면 무슨 생각이 끝나지 않겠으며,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마지막이요 원만히 통하리니, 이 밖에 다시는 분명하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면 이치마다 밝지 않음이 없고 일마다 다하지 않음이 없나니, 하나의 법으로써 능히 온갖 법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치 『화엄소(華嚴疏)』에서 이르되 “만일 이 관법(觀法)에 들면 지혜와 마음은 상응한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원인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배우고 결과 이것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며,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알음알이[解]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분위(分位)의 신통은 바로 마음이요 역용(力用)으로 지음도 마음이요, 다투어 일으키는 분별도 마음이요, 결택(決擇)하여 얻게 되는 것도 마음이다. 내지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부처 국토에 나아가는 것도 다 같이 마음이다. 마음 밖에서는 얻을 것이 없거늘, 무엇을 의심하는가? 그러므로 알라. 마음에 때가 끼면 사바(裟婆) 세계가 모양을 나타내고 마음이 깨끗하면 화장(華藏) 세계가 허공을 머금거늘, 빙빙 돌면서 항상 식(識)의 수레바퀴를 일으키고 이리저리 벌리면서 마음의 그물을 여의지 않는구나. 그러므로 해당(海幢)은 고요한 정(定)에서 일어나지 않고 시방 부처 일의 문을 널리 지었고, 선재(善財)는 도량에서 벗어나지 않고 1백 10성(城)의 법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므로 문수(文殊)는 곧 자기 마음의 증득하는 주체[能證]인 미묘한 지혜이다. 선재가 미륵에게 이르러서 한 마음의 부처 과위가 원만해진 뒤에 문수를 보게 되자 인위(因位)가 끝나려 했는데도 마음의 근원을 도로 비추게 하였음은 다시는 다른 것이 없어서이니, 아직도 생각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차 문수를 찾아갔을 때 그의 몸이 보이지 않은 것은 자기 마음의 공한 반야를 환히 알았을 뿐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참으로 문수를 본 것이다. 보현(普賢)은 바로 자기 마음의 증득할 대상[所證]인 법계의 그지없는 묘한 행이다. 선재가 비록 법계를 두루 다니면서 착한 벗들을 참례한다 하더라도, 보현을 볼 적에는 다른 지시를 빌리지 않고 곧 처음 모여 이룩한 곳인 여래의 자리 앞에서 생각을 내며 구하자 생각함에 따라 이내 보였나니, 보현은 여래 앞에서 애초부터 이동이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관하면 이내 희기(希奇)한 모양을 본다는 것을 바로 나타낸 것으로서, 보고 듣고 증득하여 듦은 앞의 형상을 봄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바로 이것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보현의 몸 형상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온갖 곳에 두루 하다. 그러므로 보안(普眼)보살 등은 백천의 삼매에 들어가서 보현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음은, 생각을 여의면서 정(定)에 들어가고 경계를 싫어하면서 진리를 구한 것일 뿐이니, 이는 티끌티끌마다 문수요 생각생각마다 곧 보현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재 한 사람은 비지(悲智)를 운용하면서 가로로는 시방을 넓히고 원행(願行)을 닦으면서 세로로는 3제(際)를 다하였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원인이 가득차고 결과가 원만하였나니, 한 마음이 본보기가 되어 온갖 것을 모두 거둔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냈다. 보살로서 모든 관행(觀行)을 처음 수행한 사람은 모두가 이 수행을 본받을 것이니, 이 관심을 떠나서는 따로 훌륭한 것이 없다. 내지 6도(度) 만행(萬行)도 만일 자기 마음을 분명히 모르면 모두가 권점(權漸)을 이루어서 결과는 생멸로 돌아가고 과보는 인간 천상에 있으리니, 만일 마음을 운용할 수 있으면 복과 지혜는 그지없으리라.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파괴할 것도 없음을 알아 얻을 수 없는 반야 바라밀을 행하면서,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도로 복된 행을 닦되 복된 행의 첫 문은 먼저 보시를 행한다”고 했다. 보살이 반야 바라밀을 행하면 지혜가 총명하고 영리하여져서 잘 분별하여 복을 베푼다. 보시한 물건은 비록 같다 하더라도 복덕의 많고 적음은 마음의 우열(優劣)에 따르나니, 마치 사리불(舍利弗)이 한 바리의 밥을 부처님께 올리자 부처님은 이내 개에게 주시면서 사리불에게 물으셨다. “네가 밥을 나에게 주었는데 나는 그 밥을 개에게 주었다. 누가 얻는 복이 많겠느냐?” 사리불이 말하였다. “제가 아는 불법의 이치로는 부처님이 개에게 주셔서 얻는 복이 많으오리다”고 했음과 같다. 사리불은 온갖 사람들 중에서 지혜가 맨 위이면서 부처님의 복전(福田)은 맨 첫째간 분인데도 부처님이 개의 나쁜 밭[田]에 보시하여 극히 많이 얻는 복보다는 못하다. 이 때문에 큰 복은 마음으로부터 나고 밭에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사리불의 천 만억 배의 것이라도 부처님 마음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 그대의 설명 같아서는 복전이 미묘하기 때문에 얻는 복이 많다 하는데, 사리불이 부처님께 보시한 것은 큰 복을 얻지 않는 것인가? 【답】 좋은 밭에서는 비록 복을 얻음이 많다 해도, 마음보다는 못하다. 왜냐하면 마음은 안의 주인이요 밭은 바깥의 일이기 때문이다. 『보살본연경(菩薩本緣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보시를 행할 적에 복전은 비록 깨끗하지 않다 하더라도 광대한 마음을 능히 낸다면 과보는 한량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복은 마음으로부터 나고 밭으로 인하여 나오는 것이다. 5백의 아라한을 별청(別請)하는 것은 승차(僧次)에 의하여 한 범부 스님을 청하는 것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평등한 마음으로 쓰는 복은 훌륭하되 취사(取捨)하는 마음으로 쓰는 복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훌륭하고 열등함은 마음으로 말미암거늘 어찌 밭에 있겠는가? 보시하는 법이 그렇다 면 6도 만행 역시 그렇다. 그런 까닭에 청량(淸凉)의 초(鈔)에서 이르되 “원인은 결과의 바다를 겸하고[因該果海] 결과는 원인의 근원에 통한다[果徹因原]. 마지막의 결과는 첫 믿음에서 말미암고 믿음은 근본 지혜[本智]에 의하여 일어나나니, 지금은 근본 지혜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원인으로써 결과가 이루어지고 결과를 거두어 원인에 보낸다. 그러나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유(本有)에서 본 것이니,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성덕(性德)에는 신(信)ㆍ해(解)ㆍ행(行)ㆍ원(願) 등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수기(修起)에서 본 것이니, 본래부터 갖춘 신덕(信德)에 의지하면서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본래부터 갖춘 해덕(解德)에 의지하면서 이해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한 “법성(法性)에는 간탐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단(檀) 바라밀을 수행한다”고 함과 같은 따위이다. 낱낱이 닦아서 일으키는 것은 모두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을 띠면서, 다 함께 결과에 와 닿는다. 무간도(無間道) 중에서는 일시에 단번에 원만해지고, 해탈도(解脫道) 중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통하므로 결과를 얻는다고 한다. 결과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유(本有)이니, 보리와 열반으로서 온갖 불성에는 본각(本覺)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수기(修起)이니, 지금에 증득한 보리로서 비로소 깨쳤기[始覺] 때문이다. 시각은 근본이 같으므로 다시는 시각과 본각의 다름이 없는지라 구경각(究竟覺)이라 하나니, 그렇다면 둘의 결과에는 걸림이 없다. 그러나 이 두 원인이 본래 본각의 바탕 위에서 일어나 온다면 두 원인과 본래의 결과와는 걸림이 없는 것이며, 시각이 이미 본각과 동일하다면 결과는 온전히 두 원인에서와 같다. 그렇다면 두 원인과 결과는 서로가 통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바다를 겸하고 결과는 원인의 근원에 통한다. 또 처음 발심할 적에 문득 정각(正覺)을 이룬 것은 원인이 결과를 겸한 것이요, 비록 불도를 얻기는 했으나 보살행을 버리지 않는 것은 결과가 원인에 통한 것이라고 했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되 “선재(善財)는 한 생각에 발심하자 단번에 능소(能所)가 없었고 3세(世)의 성품을 환히 알매 성품은 예와 이제에 끊어졌으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닫고 보니 본래 그것이 부처라 정각을 이루지도 않고 보리를 증득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몸과 마음의 성품과 모양에 증득하고 닦을 것이 없다면 이룩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본래부터 그와 같은 것이다. 인연 따라 움직이고 고요하면서 있고 없음을 부수지도 아니하며, 행하는 일의 모든 행이 모두가 지혜에서 일어날 뿐이다. 이것이 종경(宗鏡)의 뜻으로서 바로 좋고 교묘한 지혜로써 알 바요 광대한 마음으로써 믿을 바다. 『화엄경』에서 이르되 “온갖 중생들의 갖가지 소연(所緣)을 알면 이것은 한 모양[一相]일 뿐이요 모두가 얻을 수 없나니, 온갖 모든 법은 다 여(如)하고 금강의 좋고 교묘한 지혜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위로는 묘각(妙覺)의 마지막 성인 자리에 이르고, 중간으로는 대권(大權)보살이 수행하는 문에 미치며, 아래로는 맨 밑의 범부가 생사하는 자리에 이른다. 모두가 동일한 마음이라 높낮이가 없되 그를 미혹하면 스스로 떨어지고 깨치면 곧 오르게 되나니, 미혹과 깨침이 다른 것 같으나 참 마음은 바뀜이 없다. 고덕(古德)이 이르되 “방촌(方寸)을 살피지 않고 헛되이 성령(性靈)을 저버리는구나”라고 했고, 또 이르되 “제 몸이 밝지 않으면 이는 공연히 예(例)대로의 물건만을 받는다”고 했다. 이와 같이 깨우쳐 보임은 앞의 기미(機微)를 저버리지 아니하여 왕고(王庫)의 참 칼을 가지고 설산(雪山)의 바른 맛을 얻는 것이니, 증득하고 이해하고 믿어 들은 이는 곧장 보왕(寶王)을 이어받고 보고 듣고 따라 기뻐하는 사람은 부처 종자를 능히 이룰 것이다. 이 은혜는 갚기 어려워서 보통과는 같지 아니하여 티끌과 모래같이 많은 겁(劫)을 다하기까지 어깨에 메고 머리에 인다 해도 역시 한 구절의 은혜조차 갚을 수 없으리라. 먼 옛날에 법을 구하셨던 사람들을 우러러 생각건대, 석가모니 등은 큰 불더미에 몸을 던졌고 깊은 숲 속에서 발을 들고 계셨으며 뼈를 부수고 몸을 쪼개며 가죽을 벗기고 피를 뽑으셨다. 내지 상제(常啼)는 동쪽으로 가 청하고 선재(善財)는 남쪽으로 가 구했으며 약왕(藥王)은 손을 태우고 보명(普明)은 머리를 베였다. 모두가 은혜를 알아 덕을 갚은 사람이요, 법을 위해 몸을 잊은 선비들이다. 이제 권하노니, 후학(後學)들은 은중(殷重)한 마음을 낼지언정 스스로가 업신여기어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지 말라. 【문】 묘하게 밝은 참 마음은 각왕(覺王)의 비밀한 뜻이어서 이치는 비록 원만하여 단박이라 하더라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다시금 교묘한 문을 바라노니, 거듭 장래의 믿음을 증명하십시오. 【답】 앞에서는 법을 인용하여 설명했거니와 이제는 다시 비유를 가지고 이 종경(宗鏡)을 밝히겠다. 한 마음인 이것은 모든 법의 제 성품이니, 마치 하나의 구슬에 8만 4천의 구멍이 있을 때 그 한 구멍에 들어가도 구슬 전체를 거두게 되는 것과 같고, 하나의 달 그림자가 온갖 물에 나타났을 때 낱낱의 그림자는 하늘의 달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백전단(白栴檀)을 조각조각 나누어도 본래의 향기와 다름이 없는 것과 같고, 봄[靑陽]의 영(令)이 곳곳에 퍼져도 봄의 빛은 모두 동일한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법으로 마음을 밝히고 만 가지 인연으로 손바닥을 가리킴에는 분명한 법과 비유로 의심을 거둘 수 있으리라. 【문】 무릇 종(宗)을 제시하여 곧장 바른 뜻을 진술한다 하면서 어째서 비유를 들며 번거로운 글을 자세히 설명할 것 있겠는가? 【답】 아직 단번에 깨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방편이 없을 수 없다. 마치 『방편심론(方便心論)』에서 이르되 “만일 비유에 나아가서 보면, 범부와 성인이 이해를 같이한 연후에야 설명할 수가 있다. 그리고 말은 마음이 동하여 일어난 것이다”고 했다. 마치 바르게 움직이는 바람과 같다고 했을 때, 온갖 범부들은 바람이 움직인 것으로 알기 때문에 곧 틀림없이 분명하게 알게 되면 마음이 경조(輕躁)해지거니와 만일 모르면 비유로 될 수가 없다. 【문】 무엇 때문에 바른 뜻만을 설명하지 않고 비유로 설명하는가? 【답】 무릇 비유로 설명하는 것은 바른 뜻을 밝히기 위해서다. 또 이르되 “무릇 뜻을 세우려 하면 네 가지의 지견(知見)에 의하여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첫째는 눈앞에서 보는 것[現見]이요, 둘째는 비교로 추측하여 아는 것[比知]이요, 셋째는 비유로써 아는 것[以喩知]이요, 넷째는 경의 교법에 따르는 것[隨經敎]이다”라고 했다. 또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지혜로운 이는 비유로써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바른 해석으로 분명해짐을 취할 뿐이요, 법의 설명과 비유의 설명을 논한 것이 아니다. 만일 도를 깨치면 한낱 말 끊어짐[絶言]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모두가 종(宗)을 제시하고 도(道)를 부르짖는 말이요, 미묘함을 다하고 근원을 궁구하는 설명이다. 마치 만 구절의 근거 없는 말은 한 구절의 묘한 이치보다 못하고, 천 개의 생선 눈은 직경(直徑) 한 치의 명주(明珠)보다 못한 것과 같다. 대저 한 구절의 묘한 이치라 함은, 곧 종경(宗鏡)의 말이다. 이 말은 설명할 수 없으면서 스스로 통하고, 이해할 수 없으면서 저절로 풀린다. 그런 까닭에 이르되 “좋은 말은 설명하지 않고, 설명하는 말은 좋지 않다”라고 했다. 【문】 부처님의 대지(大旨)에는 돈점(頓漸)의 교(敎)를 열었고, 선문(禪門)에는 남북(南北)의 종(宗)으로 나뉘었다. 지금 여기서 드날리는 것은 무슨 종파의 교에 의하였는가? 【답】 여기서는 성품을 보고 마음을 밝히는 것을 논하였고, 자세히 종으로 나누었거나 교를 가르지는 않았다. 단순히 단번에 깨쳐서 원만히 닦는 것에 곧장 들기를 제시하면서도, 역시 통발과 올가미를 여의고서 해탈을 구하지도 않았고 끝내 문자(文字)에 집착하면서 본종(本宗)을 미혹하지도 않았다. 만일 교(敎)에 의한다면 이는 화엄(華嚴)이어서 1심(心)의 광대한 글을 바로 보였고, 만일 종(宗)에 의한다면 곧 달마(達磨)이어서 중생의 심성(心性)의 뜻을 곧장 나타냈다. 마치 종밀(宗密)선사가 3종(宗)과 3교(敎)를 세워서 선교(禪敎)를 서로 맞춰 해석하고 한 동아리로 융통하게 함과 같다. 선종의 3종이란, 첫째는 허망을 쉬고 마음을 닦는 종[息妄修心宗]이요, 둘째는 없어지고 끊어져서 붙여 있음이 없는 종[泯絶無奇宗]이며, 셋째는 심성을 곧장 나타내는 종[直顯心性宗]이다. 교종의 세 가지란, 첫째는 비밀한 뜻으로 성품에 의하여 모양을 설명하는 교[密意依性說相敎]요, 둘째는 비밀한 뜻으로 모양을 부수고 성품을 나타내는 교[密意破相顯性敎]며, 셋째는 참 마음이 곧 성품임을 나타내 보이는 교[顯示眞心卽性敎]이다. 먼저 선종을 서술하겠다. 첫째의 식망수심종이란, ‘중생에게는 비록 본래부터 불성이 있기는 하나 비롯함이 무명(無明)에 덮이어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하거니와, 모든 부처는 이미 망상(妄想)이 끊어졌기 때문에 성품을 똑똑히 보고 생사에서 벗어나 신통이 자재하다.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의 공용(功用)이 같지 않음은 바깥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각각 분한(分限)이 있기 때문이니, 모름지기 경계를 저버리고 마음을 관하면서 망념(妄念)을 쉬어 없애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이 다하면 이내 깨달으면서 아지 못한 바가 없음은 마치 거울에 먼지가 껴서 어둡다가 먼지가 벗겨지면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나니, 모름지기 선관(善觀)을 닦아 시끄러움을 멀리 여의며 숨을 고르고 몸을 조화하여 마음을 한 경계에 쏟아 평등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의 민절무기종이란, ‘범부ㆍ성인 등의 법은 모두가 꿈과 눈어림와 같아서 도무지 있는 것이 없고 본래부터 비고 고요하여 지금 처음으로 없는 것이 아니면서 곧이 없는 줄 통달하는 지혜 또한 얻을 수 없다. 평등한 법계는 부처와 중생이 없고, 법계 또한 이것은 붙인 이름이다. 마음이 이미 있지 않거늘, 누가 법계를 말하겠는가? 닦을 것도 없고 닦지도 않으며 부처도 없고 부처가 되지도 않는다. 설령 한 법의 뛰어난 열반이 있기는 하나 나는 역시 꿈 또는 눈어림라고 설명함은 거리낄 만한 법이 없고 지을 만한 부처도 없기 때문이다. 무릇 하는 일이 있는 것은 모두 미혹과 허망이니, 마치 본래부터 일이 없음을 분명히 통달하여 마음에 붙이는 데가 없어야 비로소 뒤바뀜을 면하고 그제야 해탈이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셋째의 직현심성종이란 ‘온갖 모든 법은 존재[有]거나 공이거나 간에 모두 참 성품일 뿐이어서 모양도 없고 함도 없으며, 체성은 온갖 것이 아니어서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그러나 체성에 즉한 작용이라 범부도 될 수 있고 성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는 심성을 지시하는 것에 다시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르되, ≺지금 말하고 동작하고 탐내고 성내고 인자하고 참고 선악을 짓고는 괴로움과 즐거움 등을 받는 것이 바로 너의 불성이요, 이것이 곧 부처라 이것을 제외하고 따로 부처가 없는 것이니, 마침내 이것이 천진(天眞)이요, 자연(自然)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일으켜 도를 닦을 수도 없고 이 마음이 그대로 도이며 성품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되, 다만 때를 따르고 곳에 따라서 일을 쉬고 정신을 기르면 저절로 신묘(神妙)해지나니, 이것이 참된 깨침이다≻고 한다. 둘째는 이르되, ≺모든 법은 꿈과 같고 모든 성인은 설명이 같으며, 망념은 본래부터 고요하고 티끌의 경계는 본래부터 공하다. 본래 공한 마음은 신령하게 알고 어둡지 않나니, 바로 이것이 공하고 고요한 앎[知]이요 이것이 너의 참 성품이다. 미혹하거나 깨치거나 그대로 마음을 본래부터 스스로 알아서 인연을 빌어서 나지도 아니하고 경계로 인하여 일으키지도 아니한다. 앎의 한 글자는 뭇 묘한 문이어서 만일 이 공하고 고요한 앎을 단번에 깨치면 앎 또한 생각도 없고 형상도 없거늘 어느 것이 아상(我相)이요 인상(人相)이겠는가? 모든 모양의 공함을 깨달으면 마음 스스로가 생각이 없고 그것을 깨달으면 곧 수행의 묘한 문이 없나니, 여기에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이 위의 두 가지 설명은 모두가 모양을 모아서 성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동일한 종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부처님의 교(敎)가 세 가지이다. 첫째의 밀의의 성실상교란, 부처님은 ‘삼계와 6도(道)는 모두 참 성품의 모양이다’라고 하셨으나, 다만 중생들이 성품에 미혹해서 일으킬 뿐이요 따로 자체가 없기 때문에 ‘성품에 의하여’라고 한다. 그러나 근기가 무딘 이는 본래부터 깨치기가 어렵고 짐짓 다른 이의 소견과 경계 모양을 따르는지라 설법으로 점점 제도하게 되기 때문에, ‘모양을 설명한다’고 하며, 설명으로 아직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한 뜻으로’라고 한다. 이 한 가지 가르침에는 스스로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인간 천상의 인과의 교[人天因果敎]이니, 선악의 업보를 말하여 인과를 알게 한다. 둘째는 미혹을 끊고 고통을 없애는 교[斷惑滅苦敎]이니, 삼계가 편안함이 없어서 모두가 마치 불집[火宅]의 고통과 같다는 것을 말하여 업혹(業惑)의 쌓임[集]을 끊고 도(道)를 닦아 사라짐[滅] 등을 증득하게 한다. 셋째는 식을 가지고 경계를 깨뜨리는 교[將識破境敎]이니, 위에서 말한 생멸 등의 법은 진여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다만 각기 이 중생들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원래 여덟 가지의 식이 있을 뿐이며 그 중에서도 제8식은 바로 그의 근본인데, 감관 있는 몸과 기세계(器世界)의 종자를 단번에 변현(變現)하여 7식을 전생(轉生)하며 저마다 제 몫의 소연(所緣)을 변현하는 것이니, 이 8식 외에는 도무지 진실한 법이 없다고 한다. 【문】 어떻게 변하는가? 【답】 아(我)와 법(法)의 분별은 훈습(熏習)의 힘 때문이니, 모든 식이 생길 때에 변하여 아와 법은 같은데 6식과 7식의 두 식이 무명에 덮였기 때문에 이 집착으로 인하여 진실한 아와 법으로 된다. 마치 꿈을 근심하던 이가 꿈을 근심하는 힘 때문에 마음에 여러 가지 바깥 경계의 모양이 나타난 것 같은데 꿈을 꿀 때는 집착으로 진실하게 존재하는 바깥 물건이었으나 깨어나야 비로소 꿈에서만 변했던 것으로 알게 되는 것처럼, 아(我)의 이 몸 모양과 바깥 세계 역시 그와 같아서 유식(唯識)으로 변한 바라 미혹하였기 때문에 집착으로 아와 모든 경계가 있었지만 깨치고 나면 본래 아와 법이 없고 심식(心識)이 있었을 뿐이다. 마침내 이 2공(空)의 지혜에 의지하여 유식(唯識觀)과 6도(度)ㆍ4섭(攝) 등의 행을 닦아 점점 번뇌(煩惱障)의 두 장애를 끊어 조복하고 2공에서 나타나게 되는 진여를 증득하면 10지(地)가 원만하여 점차로 8식(識)은 4지보리(智菩提)를 이루고 진여는 장애가 다하여 법성신(法性身)의 큰 열반의 과위를 이룩한다. 이 셋째의 장식파경교는 선문(禪門)의 식망수심종과 서로가 부합되며, 바깥 경계가 모두 공임을 알기 때문에 바깥 경계의 현상을 닦지 않고 허망을 쉬고 마음을 닦을 뿐이니, 아와 법의 허망을 쉬고 유식의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다. 둘째의 밀의파상현성교란, 진실에 의거하여 뜻을 분명히 알면 허망한 집착은 본래부터 공하여 다시는 부술 것이 없다. 이 참 성품은 인연 따라 미묘히 작용하여 영원히 끊어지지도 아니하며, 또 부수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한 무리의 중생들이 허망한 모양에 집착하고 진여의 실성(實性)을 장애하여 오묘하게 깨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은 잠시 착함과 악함ㆍ더러움과 깨끗함의 성품과 모양의 온갖 것을 가리지 않고 부술 것을 꾸짖으셨을 뿐이다. 참 성품과 미묘한 작용은 없지 않는 데도 잠시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비밀한 뜻’이라고 한다. 또 뜻은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있고 말은 모양을 부수되, 뜻이 말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한다. 이 교의 설명은, 앞의 교 안의 소변(所變)의 경계가 이미 모두 허망한지라 능변(能變)의 식(識)인들 어찌 홀로 진실하겠는가? 마음과 경계가 서로서로 공에 의지하면서도 있는 것 같고 또한 마음은 외로이 일어나지 않고 경계에 의탁하여야 나며, 경계도 스스로 나지 않고 마음으로 말미암아서 나타난다. 마음은 그대로되 경계가 물러가면 경계는 사라지고 마음은 공하나니, 모두가 뭇 인연을 빌며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음이 없고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나니, 이 때문에 공 가운데서는 5음(陰)과 6근(根)과 인연(因緣)과 4제(諦)가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생사와 열반은 평등하여 마치 눈어림과 같다. 이 교는 선문(禪門)의 민절무기종과 온전히 같다. 셋째의 현시진심즉성교란, 자기 마음이 바로 참 성품임을 곧장 보이는 것이요 현상에 결합시키면서 보이지도 않으며 현상을 부수면서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곧 성품’이라고 하며, 이것은 방편이 되지도 않는 은밀한 뜻이기 때문에 ‘보인다’고 한다. 이 교의 설명은, 온갖 중생에게는 모두가 본래부터 비고 고요한 참 마음이 있어서 비롯함이 없는 본래부터 성품 스스로가 청정하여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아니하고 똑똑하게 언제나 안다.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항상 머물러 소멸하지 않으므로 불성이라 하고 여래장이라고도 하며 심지(心地)라고도 하나니 달마(達磨)의 전한 바가 바로 이 마음이다. 【문】 이미 성품 스스로가 똑똑하고 똑똑하게 언제나 안다면, 어째서 모든 부처의 열어 보임을 바라는가? 【답】 이 앎[知]이라고 한 것은 증득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뜻으로 참 성품을 설명하면 허공과 목석(木石)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앎’이라고 한다. 경계를 반연하여 분별하는 식(識) 같은 것이 아니고 본체를 비추어 분명히 통달하는 지혜 같은 것이 아니며 바로 이것은 진여의 성품으로서 저절로 언제나 아는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진여란 자체가 진실하게 안다”고 했고, 『화엄경』에서 이르되 “진여가 비추어 밝힘이 성품이 된다”고 했으며, 또 「문명품(問明品)」의 설명에서는 “지혜[智]와 앎[知]은 다르다. 지혜는 성인에 국한되고 범부에게는 통하지 아니하며, 앎은 곧 범부와 성인에게 모두가 있고 이지(理智)에 다 통한다”고 했다. 각수(覺首) 등의 모든 보살이 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 경계의 지혜이며, 어떤 것이 부처 경계의 앎입니까.” 문수는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모든 부처 지혜는 자재로와서/세 세상에 거리낀 바 없으며/이와 같은 지혜의 경계는/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고 했으며, 또 게송으로 이르되 “식(識)으로 능히 알 바가 아니요/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며/그 성품은 본래부터 청정하여/모든 중생에게 열어 보인다”고 했다. 본래부터 청정하여 장애 끊을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곧 중생들에게 본래부터 모두가 있다는 것을 알겠으며, 다만 미혹에 가려져서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 중에 “열어 보이어 청정함을 얻게 한다”고 했고, 바로 이것은 『보성론(寶性論)』 중의 “때를 여의어 청정하다”는 것이다. 이 마음은 비록 제 성품이 청정하다 하더라도 마침내 깨치고 닦아야 마지막을 얻게 된다. 경론(經論)에서 밝힌 바로는, 두 가지의 청정함과 두 가지의 해탈이 있다. 혹은 때를 여의고서 청정함과 해탈을 얻게 될 뿐이기 때문에 선문(禪門)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을 헐뜯기도 하며, 혹은 제 성품은 청정하고 해탈했음을 알 뿐이기 때문에 교(敎)의 행상을 가벼이 여기어 계율을 지니고 좌선하고 조복하는 등의 행을 배척하면서 반드시 제 성품이 청정하고 제 성품이 해탈했음을 단번에 깨치고서 점차로 닦아 때를 여의어 청정하고 장애를 여의어 해탈할 수 있게 되어야 원만한 청정함과 마지막 해탈을 이루어 몸이거나 마음이거나 간에 막히고 걸리는 바가 없으면 석가불과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경에서 묻되 “어떤 것이 부처 경계의 지혜인가?”라고 한 것은 증득하여 깨치는 지혜를 물은 것이요, “어떤 것이 부처 경계의 앎인가?”라고 한 것은 본래부터 있는 참 마음을 물은 것이다. 지혜를 대답하면서 “모든 부처 지혜는 자재하여/세 세상에 거리낀 바 없다”고 했고, 앎을 대답하면서 “식으로 능히 알 바가 아니요/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다”라고 했다. 식(識) 이것은 분별이요 분별은 참 앎이 아니며 생각이 없어야 볼 뿐이다. 또 만일 지혜로 증득하면 곧 소전(所詮)의 경계에 속하며, 참 앎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일으켜 마음을 비춤은 곧 참 앎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경계가 아니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현묘(玄妙)함이 되며, 모아 일으킴으로써 마음이라 하고 마음을 일으켜서 보면 곧 망상이기 때문에 참 앎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 앎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비춤을 버리며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졌다. 북종(北宗)이 마음을 본[看心]지라 이는 참 뜻을 잃었나니, 만일 볼 만한 것이 있으면 바로 그것이 경계이다.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되 “앎은 무너짐 있는 것이 있고 앎은 부서짐 없는 것이 없다. 참으로 아는 앎은 있고 없음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했다. 이미 있고 없음을 헤아리지 않는지라 곧 제 성품으로 분별이 없는 앎이다. 그러므로 이 참 마음은 자체의 앎이니, 곧 반연이 없는 마음이요 뜻 지음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항상 알며 있고 없음에 간섭한 것 아니고 영원히 능소(能所)를 초월했다고 했다. 수남(水南) 화상이 이르되 “체성에 즉(卽)한 작용을 앎이라 하고, 작용에 즉한 체성은 고요함이 된다. 마치 등불에 즉할 때는 바로 그것이 빛이요 빛에 즉할 때는 바로 이것이 등불인 것과 같다. 등불은 체성이 되고 빛은 작용이 되나니, 둘이 없으면서 둘이다”고 했다. 또 이르되 “앎[知]의 한 글자는 뭇 묘함의 문이니, 이와 같이 열어 보이는 신령하게 아는 마음은 바로 이것이 참 성품이요 부처와 다름이 없다”고 했다. 때문에 참 마음이 곧 성품임을 나타내 현시진심즉성교라고 하며, 선문의 셋째의 진현심성종과 온전히 같다. 이미 마명(馬鳴)이 마음을 표지하여 마음으로 삼고, 문수(文殊)가 앎을 가리어 참 본체로 삼았나니, 무엇 때문에 모양을 깨뜨리는 무리는 다만 고요히 사라짐[寂滅]이라고만 하고 진여가 모양을 말하는 집임이 인정되지 아니하고 범부가 성인과 다르다고 집착하여 곧 부처임을 인정하지 않는가. 이제 교에서 보아 판정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서역(西域)에서 마음을 전하되 “대부분이 경론(經論)을 겸하며 두 갈래 길이 없다” 했다. 다만 이 방법에 마음이 미혹하고 글에 집착하여 체성이라 하기 때문에 달마(達磨)는 교묘하게 글을 간택하여 마음을 전하되, 그 이름[마음이 바로 이름이다.]을 표지로 들고 묵묵히 그 체성[앎은 마음이다.]을 보이면서 벽을 보며[壁觀] 모든 반연을 끊게 하고 모든 반연이 끊어진 때에 비유했다. 【문】 아주 없어지는 것[斷滅]이 아닌가? 【답】 비록 모든 생각을 끊었다 하더라도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 무슨 증험으로 아주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는가? 【답】 똑똑하고 똑똑하게 스스로 아는 것이라 말로는 미칠 수가 없다. 조사(祖師)는 이내 인가(印可)하며 이르되 “이것만이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만일 대답한 바가 계합되지 않으면 이내 차전(遮詮)으로 모든 것이 아니라[非] 하면서 다시 관찰하게 할 뿐이며, 마침내는 다른 이가 먼저 말한 앎의 글자와도 함께하지 않고 곧장 다른 이를 상대하여 스스로 깨쳐야 비로소 진실임을 증험한다. 이것이 몸소 그 체성을 증험한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인가하고 다른 의심을 끊게 한다. 때문에 ‘묵묵히 심인(心印)을 전한다’고 한다. 묵묵히라 한 말은 앎의 글자에 잠잠할 뿐이요 온통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6대(代)가 서로 전하면서 모두 이렇게 했다. 하택(荷澤)에 이르렀을 적에 다른 종(宗)들이 다투어 일어나서 묵계(黙契)를 구하려 했으나 기연(機緣)을 만나지 못했다. 또 달마(達磨)의 실이 매달리듯 하리라는 예언[懸絲之證]을 생각해 보건대[달마는 “나의 법이 제6대(代) 후에는 명맥(命脈)이 실 매달리듯 하리라”고 했다.] 종지(宗旨)가 끊어져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앎의 한 글자가 뭇 묘함의 문이라고 말했다. 【문】 이 마음을 깨친 뒤에는 어떻게 닦게 되는가? 도리어 처음 ‘모양을 말하는 교’에 의하여 그 중에서 좌선하게 되는가? 【답】 만일 흐리멍덩함이 두텁고 무거워서 다잡아 일으키기 어렵거나 들뜸이 맹렬하고 날카로워서 눌러 조복할 수 없거나 탐냄ㆍ성냄이 너무도 왕성하여 접촉되는 경계마다 제어하기 어려우면 곧 앞의 교 중의 갖가지 방편을 써서 병에 따라 조복할 것이나, 만일 번뇌가 얇아서 지혜의 알음이 총명하고 영리하면 이내 이 종[本宗]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한다.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지(止)를 닦는 이는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몸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르게 가져 기식(氣息)의 형색에 의하지 않으며, 내지 마음뿐이라 바깥의 경계는 없다”고 함과 같다. 법구경(法句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만일 모든 삼매를 배우면/이것은 동요하는 것이요 선(禪)이 아니며/마음은 경계를 따라 흐르거늘/어떻게 정(定)이라 이름하겠는가”라고 했다. 곧 멸정(滅定)에서 일어나지 않고 현재 앉아 있는 그 위의로 삼계(三界)에서 반연의 몸과 뜻을 나타내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 교 중에는 하나의 참된 심성으로써 물듦과 깨끗함의 모든 법을 대(對)하면서 온전히 간택하고[全揀] 온전히 거둔다[全收]. 온전히 간택한다 함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해진 체성만으로 신령하게 앎[靈知]을 곧장 지시하는 바로 이것이 심성이요 그 밖에는 모두가 허망이기 때문에, “식(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며 경계도 아니요 지혜도 아니며, 내지 성품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라고 하여, 4구(句)를 여의고 백비(百非)가 끊어진 것이다. 온전히 거둔다 함은, 물들거나 깨끗한 모든 법은 마음 아님이 없건마는 마음이 미혹하였기 때문에 망령되이 혹업(惑業)으로부터 4생(生)과 6도(道)와 뒤섞이고 더러운 국토에 이르기까지 일으키거니와, 마음이 깨쳤기 때문에 체성으로부터 작용이 일어나고 4등(等)과 6도(度)로부터 4변(辯)과 6통(通)과 묘한 몸과 깨끗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나타나지 않는 바가 없다. 이미 이 마음이 모든 법을 나타내기 때문에 법마다 온전히 그대로의 참 마음이다. 마치 사람이 꿈에 나타나게 된 일은 일마다 모두 사람임과 같고, 마치 금으로 만든 그릇이면 그릇마다 모두가 금인 것과 같으며, 마치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는 그림자마다 모두가 거울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되 “온갖 법이 곧 제 마음의 성품임을 알면, 지혜 몸을 성취하고 다른 이로 말미암아 깨치지 아니한다”고 했다. 『기신론』』에서 이르되 “삼계는 거짓이요 마음만으로 짓는 바다. 마음을 여의면 6진(塵)의 경계에서부터 온갖 분별에 이르기까지 없으며, 모두가 분별은 제 마음이라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고 얻을 만한 모양조차도 없다. 그러므로 이르되 온갖 법은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같다고” 했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적멸(寂滅)이란 한 마음을 이름하고, 한 마음이란 여래장을 이름 하거니와, 온갖 취생(趣生)을 두루 일으키고 지으면서 선행을 짓고 악업을 지어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나니, 결과와 원인은 모두 함께 한다”고 했으니, 그러므로 알라. 온갖 것은 마음 아님이 없다. 온전히 간택하는 문[全揀門]은 앞의 제2의 모양을 부수는 교[破相敎]에 포섭되고, 온전히 거두는 문[全收門]은 앞의 제1의 모양을 설명하는 교[說相敎]에 포섭된다. 앞 것을 가지고 이것에서 보면 이는 곧 앞 것과는 아주 다르고, 이것을 가지고 앞 것에서 보면 앞의 것은 이것과는 온전히 같다. 깊은 데는 반드시 얕은 곳을 겸하되, 얕은 곳은 깊은 데까지 닿지 못한다. 깊다 함은, 참 마음의 자체를 곧장 나타내어야 비로소 그 중에서 온갖 것을 간택하고 온갖 것을 거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두고 간택함이 자재하고 성품과 모양에 걸림이 없어야 온갖 것에 모두 머무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분명한 이치[了義]라 할 뿐이다”라고 했다. 위의 세 가지 교는 1대(代) 경론을 다 포섭한 우두머리이며, 세 가지 뜻은 온전히 다르나 하나의 법에는 차별이 없다. 세 가지 뜻 안에서 보면, 제1과 제2는 공과 있음으로 상대하고 제3과 제1은 성품과 모양으로 상대하여 모두가 높아서 보기 쉽거니와, 오직 제2와 제3만은 모양을 부숨[破相]과 성품을 나타냄[顯性]으로 상대가 된다. 강학(講學)하는 이나 참선을 하는 이가 다 함께 미혹해서 이것을 1종(宗)과 1교(敎)로 같이 여기고 모두가 모양을 부숨으로써 참 성품을 삼기 때문에, 이제 공종(空宗)과 성종(性宗)에 열 가지의 다름이 있는 것을 자세히 밝히겠다. 공종은 모양을 부술 뿐이나 성종은 성품을 나타낼 뿐이어서, 권(權)과 실(實)에 다름이 있고 차전(遮詮)과 표전(表詮)이 온전히 다르다. 차전으로써 망정을 배척하고 집착을 깨뜨리는 말을 모두 버릴 수는 없되 표전(表詮)으로는 종(宗)을 나타내는 가르침을 바로 보이고 세우게 된다. 또 근기에 맞춰 유인하는 한 시기의 권점(權漸)의 설명을 으뜸가게 할 수 없되 뒤의 것으로는 성품을 보는 진실한 문을 온전히 제시한다. 위에서와 같이, 교를 가르고 종을 나누면 말은 요약되고 뜻은 풍부하여 가장 뛰어나게 되며, 처음에는 뚜렷하여 넘치지 않고 나중에는 한 맛으로 융통하나니, 뭇 의심을 풀 수 있고 종경(宗鏡)으로 능히 돌아간다. 첫째는 법과 이치[法義]에 진리와 범속이 다르다. 공종에서는 아직 참 성품을 나타내지 못하고 다만, 온갖 차별된 모양만으로써 법을 삼는데 법 이것이 세속 이치[俗諦]이며, 이 모든 법을 비추면 함이 없고 모양이 없고 남이 없고 없어짐이 없음으로 이치를 삼는데 이치 이것이 참된 이치[眞諦]이다. 성종에서는 하나의 참된 성품으로 법을 삼고 공하고 있음 등의 갖가지 차별로 이치를 삼는다. 경에서 이르되 “한량없는 이치라 함은 하나의 법으로부터 생긴다”고 했고, 『화엄경』에서 이르되 “법이란 제 성품을 알고, 이치란 생멸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둘째는 마음과 성품의 두 이름이 다르다. 공종에서는 한결같이 모든 법의 근원을 일컬어 성품이라 하고, 성종에서는 대부분이 모든 법의 근원을 일컬어 마음이라 한다. 『기신론』』에서 이르되 “온갖 모든 법은 본래부터 이 한 마음뿐이다. 진실로 말한 바의 본래 성품은 비고 고요할 뿐만 아니라 저절로 항상 알기 때문에 응당 마음이라 일컬어야 한다”고 했다. 셋째는 성품이란 이름의 두 자체가 다르다. 공종에서는 모든 법의 성품이 없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되, 성종에서는 텅 비고 밝고 항상 머무르면서 공하지 않은 자체를 성품으로 삼는다. 성품이라는 이름은 비록 같다 해도 자체는 다르다. 넷째로 참된 지혜[眞智]와 참된 앎[眞如]이 다르다. 공종에서는 분별로써 앎을 삼고 분별이 없음으로써 지혜를 삼으며 지혜는 깊고 앎은 얕다. 성종에서는 능히 능득[能證]하는 거룩한 이치의 미묘한 슬기로 지혜를 삼고, 이지(理智)를 겸하면서 범부와 성인의 참 성품에 통한 것으로 앎을 삼으며 앎은 다 통하나 지혜는 국한된다. 『화엄경』에서 이르되 “진여의 비추어 밝음이 성품이 된다”고 했다. 『기신론』에서는 이르되 “진여의 자체는 진실하게 안다”고 했다. 다섯째는 아가 있고[有我] 아가 없음[無我]이 다르다. 공종에서는 아가 있음을 허망으로 삼고 아가 없음을 진실로 삼되, 성종에서는 아가 없음을 허망으로 삼고 아가 있음을 진실로 삼는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되 “아가 없음을 생사라 하고, 아를 여래라 한다”고 했다. 여섯째는 차전(遮詮)과 표전(表詮)이 다르다. 차전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표전은 그것이라고 드러낸다. 또 차전이란 그 밖의 것을 간택하여 물리치고, 표전이란 그 자체를 바로 보인다. 여러 경에서 설명한 바와 같아서, 진여의 묘한 성품을 매양 이르되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함도 없으며,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며 성품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다”라고 하는 등이니, 이는 모두 차전으로서 아니라고 부인하고 자취를 없애며 생각을 끊고 정(情)을 떨어 내리는 것이다. 만일 이르되 “알고 보며 깨달아 비추고 신령하게 보며 빛나고 밝고 환하며 의젓하고 고요하다”라고 하는 등은 모두가 표전이다. 만일 알고 보는 등의 자체가 없으면 어느 법이 성품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겠으며, 무슨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겠는가? 반드시 지금 현재 뚜렷하면서 아는 바로 이것이 나의 성품인 줄 인정되어야 비로소 이 앎의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 등을 설명하게 된다. 마치 소금을 말하면서, ‘싱겁지 않다’고 하면 이것은 차전이요, ‘짜다’고 말하면 이것은 표전인 것과 같다. 물을 말하면서, ‘마른 것이 아니다’고 하면 이것은 차전이요, ‘축축하다’고 말하면 이것은 표전이다. 공종에서는 차전뿐이요, 성종에서는 차전도 있고 표전도 있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차전으로 하는 말을 깊은 맛이 있다고 하고, 표전으로 하는 말은 얕은 맛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함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내지 온갖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만을 중히 여기나니, 진실로 차전의 아니라는 말을 묘한 것으로 삼으면서 몸소 스스로가 법의 체성을 증험하여 알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다. 또 실로 나의 마음이 허공과도 같지 않고 성품 스스로가 신령하게 안다는 것을 알면, 남으로부터 깨친 것이 아니거늘 어찌 연(緣)을 빌려서 났겠는가? 만일 교를 받는 상대가 세간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 성품 위에서는 오히려 표시한 말씨조차 없거늘, 어찌 차전으로 아니라고 하는 방편의 설명을 하겠는가? 지금 실로 아직 몸소 증득하여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이 다만 보통 일반의 인정에 의하여 뜻으로 안 것을 전한 것만을 본받아 언어 중의 묘한 것을 취하면서 차전으로 부인하고 끊는 글로써 최상의 법칙으로 삼음은 아직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진실한 자리에 있지도 못하면서 한결같이 공에 의탁하여 말을 따라 바뀌게 됨이 요사이에 더욱 성하거니와 막아낼 수가 없다. 만일 상대(上代)의 선현(先賢)으로서 많이 듣고 널리 배워서 교(敎)의 바다에 깊이 들었고 선종(禪宗)을 오묘하게 통달한 이를 의지하지 아니하면, 무엇으로 미세하게 지적하여 진술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화회(和會)하며 하나의 신령한 성품을 드러내어 만법의 근원을 더듬어 열겠는가? 그러므로 요긴한 글을 자세히 기록하여 종경을 같이 밝힌다. 일곱째는 이름을 인정하고 본체를 인정함이 다르다. 불법과 세간의 법은 하나하나가 모두 이름과 본체가 있다. 또한 세간에서 크다고 일컫는 것은 네 가지 물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지론(智論)』에서 이르되 “땅ㆍ물ㆍ불ㆍ바람[地水火風]은 네 가지 물건의 이름이요, 단단하고ㆍ축축하고ㆍ따뜻하고ㆍ움직인다는 이것은 네 가지 물건의 본체이다. 지금 잠시 물을 설명해 보자. 어떤 사람이 묻되 ‘매양 듣건대, 맑히면 이내 맑아지고 휘저으면 이내 흐려지며 저장하면 곧 멈추고 터뜨리면 흐르면서 만물에 물댈 수 있고 더러운 것들을 씻게 된다 하는데, 그것은 어떤 물건인가?[공능(功能)과 뜻의 작용[義用]을 들면서 묻는다.]’라고 하자 대답하되 ‘그것은 물이다[이름을 들어서 대답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을 인정하면서 이미 이해했다고 할 것이나, 지혜로운 이는 다시 묻는다. ‘어떤 것이 바로 물인가?[그 본체[체(體)를 묻는다.]’ 대답하되 ‘축축한 것이 바로 물이다[정해져 있는 본체를 가리킨다.]’라고 한다. 불법도 역시 그러하여 어떤 사람이 묻되 ‘매양 여러 경에서 듣건대, 미혹하면 곧 때가 끼고 깨치면 곧 청정해지며 방종하면 범부요 수행하면 성인이며 세간과 출세간의 온갖 모든 법을 능히 내는 이것은 어떤 물건인가?[이것은 공능과 뜻의 작용을 들어서 묻는다.]’ 대답하되, ‘그것은 마음이다[이름을 들어서 대답한다.]’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을 인정하면서 이미 알았다고 할 것이나, 지혜로운 이는 다시 묻되 ‘어느 것이 마음인가?[그 본체를 묻는다.]’ 대답하되 ‘아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그 본체를 가리킨다.]’라고 한다. 이 한 마디 말은 가장 친밀하고 가장 적실하며, 그 밖의 글자와 그 밖의 설명은 모두가 생소하다. 마치 성품이 아니고 모양도 아니라고 하나, 능히 말할 수 있는 따위는 바로 본체요 연려(緣慮)와 움직이는 작용 등은 바로 마음인 것과 같다. 곧 어째서 다른 이의 묻는 바와 다르겠는가? 이로써 물의 이름과 본체를 미루어 보건대, 이름은 한 글자뿐이요 그 밖의 것은 모두가 뜻의 작용이며, 축축하다는 한 글자는 맑고 흐림 등의 만 가지 작용과 만 가지 뜻 안을 꿰뚫었다. 마음의 이름과 본체도 역시 그러하여 앎[知]의 한 글자는 역시 탐냄ㆍ성냄ㆍ인자함ㆍ참음ㆍ착함ㆍ나쁨ㆍ괴로움ㆍ즐거움 등의 만 가지 작용과 만 가지 뜻을 꿰뚫어 있으므로 곧장 깨쳐 얻어야 한다. 물이란 바로 이름이로되 이것이 물로 되지 아니하고, 축축함은 바로 물이로되 이것이 이름으로 되지는 않으면서 곧 맑음과 흐림과 막힘과 흐름의 이치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 이 예(例)로, 마음이란 바로 이름이로되 이것이 마음으로 되지 아니하고, 앎은 바로 마음이로되 이것이 이름으로는 되지 않으면서 곧 진실과 허망과 선과 악의 이치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 공종과 상종(相宗)에서는 처음 배우는 이와 근기가 얕은 이들을 상대하면서 말에 따라 집착을 낼까 두렵기 때문에 다만 이름만을 표시하면서 차전으로 그것이 아니라고 하며 뜻의 작용을 자세히 하면서 그 뜻을 인용할 뿐이거니와, 성종에서는 오래 전부터 배운 이와 상근(上根)을 상대하면서 말을 잊고 본체를 알게 하기 위하여 한마디 말로 바로 보인다. [달마(達磨)는 이르되 “한 마디 말로 바로 지시하나니, 그것은 앎[知]이라는 글자의 한 마디 말이다”라고 했다. 만일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卽心是佛]라고 말하면 이것은 네 마디 말이다.] 만일 알아들으면 그르치지 않고 몸소 신령하게 아는 성품을 비추고 비로소 본체 위에서 뜻의 작용을 살펴 비추기 때문에 통하지 않음이 없다. 여덟째는 두 가지 이치[二諦]와 세 가지 이치[三諦]가 다르다. 공종에서는 두 가지 이치뿐이거니와, 성종에서는 온갖 성품과 모양 및 자체를 포함하여 통틀어 세 가지 이치가 된다. 연기(緣起)와 빛깔[色] 등의 모든 법이 세속 이치가 되고, 인연은 제 성품이 없고 모든 법은 그대로가 공이라 함이 참된 이치가 되며, 한 참된 마음의 본체는 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로되 능히 공하고 물질일 수 있음이 중도(中道)의 첫째가는 이치이다. 아홉째는 세 성품[三性]에 공하고 있음이 다르다. 공종에서는 있음[有]은 곧 변계(邊計)와 의타(依他)요 공은 곧 원성(圓成)이라 설명하거니와, 성종에서는 곧 세 법에 모두 공과 있음의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 변계에는 곧 망정(妄情)은 있되 진리는 없고, 의타에는 곧 모양은 있되 성품은 없으며, 원성에는 곧 망정은 없고 진리는 있다. 열째는 부처의 덕(德)에 공과 있음이 다르다. 공종에서는 “부처는 공으로 덕을 삼고 적은 법이 없는 것을 보리라 한다”고 말하거니와, 성종에서는 “온갖 모든 부처의 자체에는 모두가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이 있고 10신(身)과 10지(智)와 상호(相好)가 그지없으며, 성품 스스로가 본래부터 존재하고 기연(機緣)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 가지의 다름이 뚜렷하고, 두 가지 문(門)이 환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세 가지 부처의 교에 결합시켜 3종(宗)의 선심(禪心)을 증득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는 선교(禪敎)가 쌍으로 없어지고 불심(佛心)이 같이 고요해지리니, 다 함께 고요해지면 생각생각마다 모두가 부처라 한 생각마다 불심 아님이 없을 것이요 쌍으로 없어지면 구절구절마다 모두가 선(禪)이라고 한 구절마다 선교가 아님이 없으리라. 이렇게 되면, 저절로 ‘없어지고 끊어져서 붙여 있음이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이것은 아집(我執)의 망정을 부수는 것인 줄 알 것이요, ‘허망을 쉬고 마음을 닦는다는 말’을 들으면 이것은 아(我)의 습기를 끊는 것인 줄 알 것이다. 아집의 망정이 부서지면서 참 성품이 나타남에는 곧 없어지고 끊어지는 것이 성품을 나타내는 종(宗)이요, 습기가 다하면서 불도가 이루어짐에는 곧 마음을 닦는 것이 부처를 이루는 행이니, 단박과 점차[頓漸]가 서로서로 나타나고 공과 있음이 서로서로 이룩된다. 만일 이렇게 원만하게 통달할 수 있으면 다른 이를 위해 설법해도 묘한 처방 아님이 없고 다른 이의 말을 들어도 묘한 약 아님이 없으리니, 약과 병은 다만 집착과 통함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이르되 “집착하면 글자마다 종기와 혹이요, 통하면 글월마다 묘한 약이다”라고 했다. 위에서와 같이, 교(敎)에 의지하고 종(宗)에 의지하여 대강 추려서 서로 맞춰서는 종지(宗旨)의 본말(本末)을 들추어내고 법과 뜻의 다름을 열어 가르며 단박과 점차의 이동(異同)을 헤아리고 진실과 허망의 화합을 이루며 차전(遮詮)과 표전(表詮)이 다 말이 되게 하고 권실(權實)의 천심(淺深)을 칭찬하고 폄론(貶論)하면, 가위 교 바다[敎海]의 파랑을 두루 말아서 손바닥 속에 잔잔하게 두고 뜻 하늘[義天]의 별 모양을 떼 지어 모아 환하기가 마치 눈앞과 같으리니, 그러면 단번에 뭇 의심이 풀리고 묘한 뜻이 탁 트이리라. 만일 마음 밖에서 법을 세우고 경계를 세워 싸움의 시작과 끝을 일으키거나 식(識) 위에서 아(我)를 변화하고 인(人)을 변화시켜 이기고 지는 움이 자라게 되면, 드디어는 공을 세워서 있음을 깨뜨리고 있음을 맞아들여 공을 부인하며 교(敎)를 숭상하고 선(禪)을 헐뜯으며 선을 존숭하고 교를 배척하게 되어, 권교(權敎)ㆍ실교(實敎)의 두 길이 언제나 장애의 원인이 되고 성종(性宗)ㆍ상종(相宗)의 두 종(宗)은 영원히 원수의 소견이 되리니, 모두가 지혜 등불의 불길이 짧아지고 마음 거울의 빛이 어두워져서 마침내는 다툼이 없는 문에 들어가 하나의 진실한 길을 밟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