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4_0256_c_01L종경록 제44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대저 만일 마음과 부처를 말하면서 성종(性宗)만을 제창한다면 하나를 들어서 모두를 포섭한 것이 되거늘, 다른 뜻은 논하지 않고 이제 어찌 이미 진술했던 교(敎)를 저버리고 종(宗)을 미혹하게 하는가?
【답】 대저 지극한 교[至敎]를 논함은 모두가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이니, 위로부터 받은 것은 지시하지 않음이 없다.
마치 충국사(忠國師)가 임종할 적에 학인(學人)이 스님에게 한 마디를 청하자 스님이 말하되 “교(敎)에 명문이 있으므로 그에 의지하면서 수행하면 곧 폐단이 없으리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함과 같다.
이와 같이 은근하고 진실하게 부촉했거늘, 어찌 자기 소견에 국집하면서 상만심(上慢心)을 내겠는가? 끝내 망령되이 여래의 위없는 감로(甘露)와 불가사의하며 대자비하고 소중한 금구(金口)로 펴 말씀하신 생각하기 어려운 거룩한 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말한 바와 같이 ‘그에 의지하면서 수행한다’고 함은, 무엇에 의지하라는 취지냐 하면, 이것은 문자의 어귀(語句)에 의지하면서 행해서도 안되고 이것은 뜻 길[義路]의 도리에 의지하면서 행해서도 안 되며, 곧장 몸소 그 종지를 깨쳐야 하고 맹랑(孟浪)한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만일 반드시 믿어 든 이면 똑똑하게 스스로 알 것이거늘, 어찌 다른 이의 설명을 바라겠는가. 매우 깊은 법을 들을 때면 마치 맑은 바람이 귀를 스치는 것 같으리라.
여기서는 다만 성품에 어두워서 문자를 따르는 이를 위하여 임시 언전(言詮)의 방편으로 열어 보일 뿐이다.
곧장 6근(根)의 나투는 작용이 항상 머물러서 생멸하는 성품이 없다는 것과 부처와는 다름이 없고 몸소 증득하면 앎이 나타나서 분명해지고 미혹됨이 없어서 언어를 따라 굴리게 됨을 면하고 경계를 좇아 흐리게 되지않는 다는 것을 가리켜 지시하고 있다.
이제 6근 가운데서는 보고 듣는 두 가지 성품이 가장 원만하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맨 먼저 시험해 보라. 빨리 원통(圓通)에 들어가서 종경(宗鏡)으로 같이 돌아가리라.
또 성품을 본다[見性]는 것은 보게 되는 그 때에 그것이 바로 자기 성품이다. 성품은 온갖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에 성품으로써 다시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이니, 분명하게 드러나서 털끝만치도 숨어 있지 않다.
고교(古敎)에서 이르되 “마니전(摩尼殿)에 네 구석이 있는데, 한 구석은 언제나 드러내 있다”고 하였다.
조사(祖師)가 이르되 “눈으로 광명을 내쏘아 산하(山河)와 대지(大地)를 비춰 부순다”고 했다.
또 노래에서 이르되 “눈[眼]에 응대할 때는 마치 천개의 해와 같아/만상(萬像)은 그림자와 바탕을 못 피하네/범부는 일찍이 보지 못했을 뿐이거늘/어찌 자기를 업신여기면서 꺾여 물러나겠는가”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얼굴 모습은 비록 어린아이이기도 하고 늙기도 하나 보는 성품[見性]은 일찍이 이지러진 일이 없고 밝음과 어두움은 스스로 가고 오기도 하나 신령한 빛[靈光]은 끝내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생멸하는 것 가운데서 생멸하지 않는 성품을 가리켜 내어야 비로소 빈궁한 아들의 옷 속 보배와 전륜왕의 상투 속 구슬과 가난한 여인의 방 안의 금덩이가 바로 여래장(如來藏) 속의 물건임을 알겠거늘, 어찌 높이 윗성인에게만 미루고 자신은 못난 범부로 낮추는 것인가.
한결같이 바깥을 구하면서 안으로 살피지 못하면 여러 겁 동안의 공이 헛되고 자기 신령을 저버리는 것이니 부질없이 수행하는 문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래의 참 성품을 잃게 된다.
그런 까닭에,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볼 적에 이것이 너의 것이고 나의 것이 아니라면, 봄[見]의 성품이 두루하였거니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찌 너의 참 성품이 너에게 성품이 되기를 참되지 못하였으리라 의심하여 나에게 물어 진실임을 구하려 하느냐?’ ”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라. 밝고 어둠은 서로가 틀리지만 이것을 돌릴 수 있는 법이로되 진여의 묘한 성품은 옮겨가지 않는 문이다. 만일 물건을 따르면서 보면 크고 작게 있는 데에 국집하고, 만일 성품에 결부시켜 보면 그릇 꼴의 모나고 둥근 것이 끊어지리라.
성품을 보면 바로 여래가 되어 한 털끝에서 시방의 보배 세계를 건립하고 물건을 따르면 곧 범부가 되어 참 공 속을 향해 6취(趣)의 감옥을 나투게 한다. 변하고 바뀜은 사람에게 있되 하나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으며 미혹과 깨침은 자기를 말미암되 변천하지 않는다.
마치 경에서 이르되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전일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가전연(迦栴延)과 비라지자(毘羅胝子)를 만났사온데 모두 말하기를 ≺이 몸이 죽은 뒤에 아주 없어져 버린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더이다. 제가 이제 부처님을 만났사오나 아직도 의혹이 없지 아니하오니, 어떻게 떨쳐 드러내면 이 마음이 생멸하지 않는 경지를 증득하오리까. 지금 이 대중으로서 번뇌[漏]가 있는 이들은 모두 듣고 싶어 하나이다.’
부처님이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몸이 현존하므로 지금 묻겠습니다. 당신의 이 육신이 금강과 같아서 항상 머물러 있고 죽지 않으리라 여깁니까. 또는 변하여 없어지리라 여깁니까?’
‘세존이시여, 이 육신은 마침내 변하여 소멸될 것이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당신은 일찍이 소멸된 적이 없거늘 어떻게 소멸될 것을 아십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이 무상하게 변해가는 몸인지라 비록 아직은 소멸된 적이 없사오나 저는 눈앞에서 생각생각마다 변천하고 늘 새로이 달라지는 것이 마치 불이 스러져 재가 되듯이 점점 늙고 있음을 보나이다. 이렇게 쉴 새 없이 늙어가므로 이 몸은 결정코 소멸될 것을 아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합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지금 이미 노쇠하였거니와 얼굴은 아이일 적과 어떠합니까?’
‘세존이시여, 제가 어렸을 적에는 피부가 윤택하였사오며 점점 장성해서는 혈기(血氣)가 왕성하더니 지금은 늙어서 쇠진하였으며, 형색은 초췌하고 정신은 혼미하여 머리털은 백발이 되고 낯은 쭈그러져서 앞날이 멀지 않았사온데 어떻게 젊었을 때와 비교할 수 있사오리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당신의 얼굴은 갑자기 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남몰래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제가 진실로 깨닫지는 못하오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이렇게 늙었나이다. 그 까닭을 말하오면, 제 나이 20세 적에는 젊었다고는 하나 10세 적보다는 늙었고 30세 적에는 20세 적보다 늙었으며, 지금은 62세인데 50세 적을 생각하오면 무척 건강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조금씩 조금씩 몰래 변천한 것이 이렇게 엄청나게 늙었사온데 그동안 변하고 바뀐 것을 10년씩 잡아 말씀하였거니와 만일 자세하게 생각하오면 그 변천하는 것이 어찌 10년 20년뿐이겠나이까. 실은 해마다 변하였으며 어찌 해마다 뿐이겠나이까. 실은 달마다 변하였으며 어찌 달마다 뿐이오리까. 실은 날마다 변하였사오니, 곰곰 생각하오면 찰나찰나마다 머물러 있지 못한 것이며 이 몸이 마지막에는 변하여 소멸될 것을 아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당신이 변천하여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보고 당신이 소멸될 것을 안다고 하였거니와, 역시 소멸되는 때에 그대의 몸 가운데에 소멸하지 않는 것이 있는 줄을 압니까?’
바사닉왕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참으로 모르고 있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당신에게 생멸하지 않는 성품을 보여 주리다. 대왕의 나이 몇 살 적에 항하수(恒河水)를 보았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제가 난 지 세살 적에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기바천(耆婆天)에게 갔을 적에 그 물을 건너게 되어 그 때에 항하수인 줄 알았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말대로 20세 적은 10세 적보다 늙었고 지금 60이 넘도록 날로 달로 해로 때로 찰나찰나마다 변천하였다 하거니와 3세 적에 이 물을 보던 것과 13세 적에 보던 것은 그 물이 어떻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3세 적과 꼭 같아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사오며, 지금 62세지만 역시 다름이 없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대가 지금 머리가 세고 얼굴이 쭈그러졌음을 서러워하는데, 얼굴은 어렸을 적부터 쭈그러졌거니와 지금에 항하수를 보는 것도 어려서 항하를 보던 것보다 늙어졌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대왕의 얼굴은 쭈그러졌을망정 보는 정기(精氣)는 성질이 쭈그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쭈그러지는 것은 변하려니와 쭈그러지지 않은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며, 변하는 것은 소멸하려니와 변하지 않는 것은 원래 생멸이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그 가운데서 당신의 생사를 받으리라 하여 오히려 말가리(末伽梨)들이 말하는 ≺이 몸이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진다≻는 말을 되풀이 합니까?’
왕이 이 말을 듣고는 몸이 죽은 뒤에도 이 생(生)을 버리고 다른 생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고, 여러 대중들과 함께 날뛰듯 기뻐하면서 전에 있지 못했던 일을 얻었다”고 함과 같다.
또 마치 중생의 여덟 가지 식(識) 가운데서 앞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 등의 다섯 가지 감관과 제8식(識)은 다 함께 현량(現量)을 반연하고 모든 법의 제 성품을 얻으면서 온갖 명언(名言)을 띠지 않으며 또 두 가지의 계탁분별(計度分別)과 수념분별(隨念分別)이 없고 곧 눈앞에 생멸하지 않거니와, 제6식과 제7식의 두 개의 식은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의 두 가지에 떨어지고 계탁분별과 수념분별을 갖추어서 곧 생각생각마다 언제나 생멸하며 또한 생멸하는 가운데서 생멸하지 않는 성품이 있다.
이상의 경문(經文)은 바로 사왕(闍王)이 제시한 의심으로 인하여 외도의 단견(斷見)에 붙여서 부순 것이니, 이 방편이 있으면 생멸함과 생멸하지 않음의 두 가지의 성품을 분별한다.
만일 단견ㆍ상견에 집착하지 않고 성품을 본 사람이면 8식의 심왕(心王)이 참 성품과 동일하여 모두가 실상(實相)이요 생멸이 없으리라.
마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물질[色]이 생길 때에 공이 생길 뿐이요, 물질이 소멸할 때에 공이 소멸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과 같다.
『중관론(中觀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물건은 인연으로부터 생김이 없고/물건은 인연으로부터 소멸됨이 없으며/생김은 모든 인연으로 생길 뿐이요/소멸은 모든 인연으로 소멸될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만법은 이미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았고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 공하지 않음 또한 생기지도 않고 공 역시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온갖 법이 바로 공하지 않다면 곧 생김이 없고 제 성품인 공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인연을 따르면서 모든 환유(幻有)를 이루기 때문이며, 만일 온갖 법이 바로 공이라면 역시 생김이 없고 자체가 없기 때문에 생김의 모양이 없으며 이미 생김이 없는지라 역시 소멸함도 없다.
마치 논(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결과는 공하지 않고 생기지 않으며/결과는 공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나니/결과가 공하지 않기 때문에/생기지도 않고 또한 소멸하지도 않네.
결과는 공하기 때문에 생기지 않고/결과는 공하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나니/결과는 바로 공이기 때문에/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네”라고 함과 같나니, 다만 마음을 따라 나타날 뿐이요 마침내는 생김이 없다.
마치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아, 내가 항상 말하기를, ≺물질과 마음과 모든 인연과 마음의 부리는 바[所使]와 여러 반연할 바[所緣] 법들이 오직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지 않더냐. 너의 몸과 마음이 모두 묘하게 밝고 진정(眞情)한 묘한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거늘, 어떻게 너희들은 본래 묘하고 원묘(圓妙)한 밝은 마음과 보배로이 밝은 묘한 성품을 잃고 깨침 속의 미혹을 잘못 아느냐.
어두워져서 공이 되었으면 공과 어두워짐 안에서 어둠이 맺히어 물질이 되며, 물질이 망상과 섞이어 생각[想]과 모양[相]을 몸이라 하고, 연(緣)을 쌓아서 안에서 흔들리며 밖으로 나아가 내닫는 흐리고 어지러운 모양을 심성(心性)이라 하느니라.
한번 미혹되어 마음이라 하고는 반드시 미혹되어 색신(色身) 안에 있다 하고, 이 색신과 밖에 있는 산ㆍ강물ㆍ허공ㆍ대지가 모두 묘하게 밝은 참 마음속 물건임을 알지 못하나니, 마치 맑디 맑은 백천의 큰 바다를 버리고 한 뜬 거품을 잘못 알아 조수(潮水)의 전체라 하면서 큰 바다[瀛渤]을 다하였다는 것과 같다. 너희들은 곧 미혹된 가운데서도 갑절 더한 사람이라 내가 손을 드리운 것과 차별이 없나니, 여래는 이런 이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 하느니라’ ”고 함과 같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봄의 성품[見性]은 두루하고 잔잔하여 마치 거울과 같아서 언제나 밝고 허공과 같아서 동요하지 않으며, 삼라만상이 스스로 분리되어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되 하나의 성품은 일찍이 갔다 왔다 하는 일이 없어서 다만 생멸하는 인연을 따라 이 묘하게 밝은 성품에 끼쳐 줄 뿐이다.
그러므로 온갖 조사의 가르침은 모두가 ‘성품을 보고 마음을 알라’는 것을 지시하였으니, 생인(生因)으로부터 낼 바가 아니요 요인(了因)으로부터 알 바일 뿐이다. 모양은 거칠어서 가리기 쉽되 성품은 은밀하여 밝히기 어려우며, 굴림을 따라 있게 되면서도 알지 못하고 비춤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환히 안다.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3혹(惑)의 마음에 끌리고 6진(塵)의 경계에 바뀌어져서 ‘경계 이것이 원래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도리어 주인이 객에게 미혹함을 당한 것이니, 다만 흐름을 따르면서 성품을 얻게 되는 때만이 저절로 미혹됨이 없다.
다시 어떤 이가 이르되 “반야는 심신(心神)에 계합되어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해야만 비로소 은밀하게 부합될 뿐이다”라고 했다.
말의 자취와 현상의 모양으로써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직 들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종(宗)을 드러내고 집착을 깨뜨리는 것이며, 형상을 취하고 마음을 저버리며 망정(妄情)으로 구하고 뜻[意]으로 이해할까 두렵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만일 소상하게 이해하면서 논한다면, 반연을 따라 체성은 묘하고 모양에 즉(卽)하여 항상 진실하다.
또한 바로 모양을 보는 때는 무엇이 모양을 보는 것인가. 6진(塵)은 무디기 때문에 이름은 스스로 붙여지지 않고 모양은 스스로 베풀지 않으며, 6근(根)은 날카롭기 때문에 억지로 저절로 건립되면서 반연하고 상대하게 된다.
만일 경계가 본래 고요하고 식(識)이 스스로 생김 없음을 환히 알면 평등한 진공(眞空)에 들어가며, 비로소 마지막의 보는 성품[見性]이라 일컬을 따름이다. 때문에 이르되 “보는 성품은 두루하거늘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라고 했다.
듣는 성품[聞性]이란, 지금 당장에 듣는 성품에는 세 가지 진실[三眞實]을 갖추고 있다. 문수는 가려내서 실제 증득한지라 알 수 있었고 관음(觀音)은 문에 들어가서 원만하게 통한지라 증험을 세운 것이니, 수행으로부터 얻는 것 아니고 유위(有爲)에 떨어지지 않거늘 어찌 공(功)을 빌려서 이루어지겠는가. 본래부터 그와 같다.
『수능엄경(首楞嚴經)』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고요히 쉬고 있을 때
시방에서 한꺼번에 북을 친다면
열 곳의 소리 일시에 다 듣나니
이를 일러 곧 원진실(圓眞實)이라 하네.

눈으로는 망막이 밖의 빛깔을 못 보고
입도 코도 또한 그러하며
몸으로는 닿임[觸]이 합해야 알고
생각은 어지러워 두서없지만

담벽을 넘어서도 음향을 듣고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어서
5근(根)으론 같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곧 통진실(通眞實)이라 하네.

음성은 움직이고 고요하기도 하여
들음[聞] 속엔 있기도 없기도 하며
소리가 없으면 들음 없다고 하나
실로 들음에는 성품 없는 것

소리가 없을 때도 소멸함이 없고
소리가 있을 때도 생기지 아니하여
생김과 소멸을 다 여의었나니
이것이야말로 상진실(常眞實)이옵니다.

해석하여 보자. 이것은 지금의 일체 중생들이 날마다 쓰고 나타내고 행해지고 하는 듣는 성품에 세 가지의 진실한 이치를 곧이 곧대로 하는 말이니, 첫째는 원진실이요, 둘째는 통진실이며, 셋째는 상진실이다.
첫째 원진실(圓眞實)이라 함은, 듣는 성품은 온갖 처소에 두루한지라 시방의 소리가 때에 상응하게 앞뒤가 있는 것이 아니요 때를 같이하면서 두루하여 낱낱 모두가 제 성품[自性]에서 벗어나지 않음은, 마치 물이 물결을 일으키고 물결은 물을 여의지 않음과 같다.
소리 나는 곳이면 완전히 다 들으며 그 들음의 이외에는 법이 없음 바로 이것이 본래의 들음[本聞]이다. 스스로 원만하게 통한 성품을 갖춘 것이라 거룩한 경지를 증득해야 이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부모가 낳아 주신 귀는/청정하여 흠 있거나 더러움이 없나니/이 항상하는 귀로써/3천 세계의 소리를 듣네”라고 했다.
또 이르되 “이 『법화경』을 지니는 이는/아직은 천이(天耳)를 얻지 못했기는 하나/다만 낳아 주신 귀만으로써도/공덕은 이미 그와 같으니라”고 했다.
둘째 통진실(通眞實)이라 함은, 눈으로 보는 성품은 비록 환히 밝다고는 하나 앞은 볼 수 있되 뒤는 보지 못하고 코ㆍ혀ㆍ몸의 세 감관도 모두가 합해져야 알고 능소(能所)를 인하면서 생기며 뜻으로 아는 감관은 반연하는 바가 일정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마다 옮겨가기 때문에 다섯 가지 감관은 다 같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귀 감관만은 원만하게 통하고 거리낌이 없어서 메아리를 듣는 즈음에는 막히고 거리끼는데도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모두 다 듣고 묘하게 응하는 때에는 간택함이 없는데도 크고 작은 것이 다 함께 구비된다.
때문에 고성(高城) 화상의 노래에서 이르되 “귀에 상응하는 때는 마치 깊은 골짜기와 같아/크고 작은 음성이 부족함이 없네/시방의 쇠와 북이 일시에 울리면/신령한 빛[靈光] 움직이며 언제나 잇따르네”라고 했다.
곧 범부 몸에 있으면서도 줄어들지 않고 성인 몸에 있는데도 더 늘어난 것 아니어서 언제나 나타나고 언제나 통하므로 진로(塵勞)로는 그 신령한 문채를 감출 수가 없고 이은 것도 아니고 끊인 것도 아니므로 하늘 악마가 그 거룩한 광채를 꺾을 수도 없나니, 인연으로 생긴 귀 감관을 파괴하지도 않고 한 신령한 묘한 성품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다.
셋째 상진실(常眞實)이라 함은, 음성의 성품은 움직이거나 고요한 것이라 움직이거나 고요한 것이 음성의 체성이다. 성품은 듣는 가운데서는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서 만일 소리가 없을 때는 듣는 것이 없다고 하나 진실로 듣는 것에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듣는 성품은 항상 존재한다. 만일 듣는 성품이 소리를 따라 소멸된다면 앞의 소리가 소멸된 때에 그 뒤에 나는 소리는 다시는 듣지 못해야 한다. 그러므로 알라. 소리 스스로가 없다 해도 듣는 성품은 소멸한 것 아니요, 소리 스스로가 있다 해도 듣는 성품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 듣는 성품이 생김 없는 것만이 아니라 도리어 소리를 관하는 것 역시 생멸이 없으며,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요 자체는 온전히 없다.
마치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되 “온갖 모든 법은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다”고 함과 같다.
『능엄소초(楞嚴疏鈔)』에서 이르되 “마치 골짜기 안에 소리가 없는 것과 같아서 소리가 없으므로 곧 메아리도 없다. 법계 안에는 모두 소리가 없으며 온갖 소리는 모두가 허망한 마음에서 생기니, 허망한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때에는 모두가 허망한 생각이 없거니와 차별된 마음의 집수(執受)가 있어서 곧 소리가 있다. 4대(大)는 마치 마른 나무와 같아서 곧 본래 소리가 없되 모두가 인연으로 붙잡아 들이기 때문이니, 모든 대보살들은 음성으로써 법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므로 알라. 소리는 본래가 없건마는 모두가 집착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라 망정이 소멸되면 집착도 상실된다. 만법이 본래 텅 비어서 있고 없음이 비었거늘 생멸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의 성품과 여래의 성품은 다름이 없는 것으로 알 것이니, 온갖 세간의 법이 바로 불법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되 “이 법은 법주(法住)의 지위로서 세간의 형상으로 항상 머무름이 마치 교진나(憍陳那)가 소리로 인하여 도를 깨쳐서 묘한 음성이 은밀하고 원만한 것과 같다”고 했다.
고석(古釋)에서 이르되 “만일 능소(能所)가 있으면 네 가지 진리[四諦]를 은밀하게 깨쳤다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으며, 능히 듣는 것과 들을 바를 추구하면 모두가 자기 마음이니, 마음은 바로 본각(本覺)이어서 그 광명은 법계를 원만하게 비추고 시각(始覺)의 지혜 마음도 역시 법계를 원만하게 비추나니, 바로 이것이 소리로 인하여 깨치게 되는 것이라 일체 중생도 이 관(觀)에 의지하여 역시 해탈하게 된다. 만일 소리를 듣되 뜻에 맞고 뜻에 맞지 않다 하여 미움과 사랑을 낸다면 곧 소리에 속박을 당하는 것이니, 다만 마음 바다 속에서 이 소리가 나는 곳을 관할 뿐이다. 마음의 바다는 원래 형상이 없는 것이요, 마음이 비록 소리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소리 또한 형상이 없으며, 형상이 없으면서 곧 온갖 소리 가운데서 해탈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법마다 마음이 아님이 없고 마음마다 법이 되지 않음이 없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통달하면 온갖 모든 법에서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아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다문(多聞)만 배우고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뒤바뀐 원인을 알면서도 참말 뒤바뀜이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 네가 정성된 마음으로 아직 믿지 못할까 해서, 내가 이제 진속(塵俗)의 여러 사실들을 들어서 너의 의혹을 없애겠느니라.”
이때 여래께서 라후라(羅睺羅)를 시키어 종을 한번 치게 하시고 아난에게 물었다.
“네가 지금 듣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하였다.
“저희들이 듣나이다.”
종소리가 스러진 뒤에 부처님이 또 물었다.
“너희들이 지금 듣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하였다.
“듣지 못하나이다.”
이때 라후라가 또 종을 한번 쳤다. 부처님이 또 물었다.
“너희들이 지금 듣느냐?”
아난과 대중이 또 말하였다.
“듣나이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것을 듣는다 하고, 어떤 것을 듣지 못한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다 같이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저희들이 듣는다 하고, 친 지가 오래되어 소리가 스러지고 메아리까지 없어지면 듣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래께서 또 라후라를 시켜 종을 치게 하고 아난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소리가 난다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소리가 나나이다.”
잠깐 있다가 소리가 스러진 뒤에 부처님이 또 물었다.
“너희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대답하였다.
“소리가 없나이다.”
잠깐 뒤에 라후라가 다시 종을 쳤고, 부처님이 또 물었다.
“너희들 지금 소리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하였다.
“소리가 나나이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것을 소리가 난다 하고, 어떤 것을 소리가 없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사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 난다 하고, 친 지가 오래 되어 소리가 스러지고 메아리까지 없어지면 소리가 없다 하나이다.”
부처님이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어째서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대중과 아난이 다 함께 아뢰었다.
“저희들이 어째서 이랬다 저랬다 한다 하시나이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듣느냐’고 물으면 ‘듣는다’고 말하고 내가 ‘소리가 나느냐’고 물으면 네가 ‘소리난다’고 말하여, ‘듣는다’ ‘소리 난다’고 하는 대답이 일정하지 아니한, 이것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냐.
아난아, 소리가 스러지고 메아리가지 없어진 것을 네가 ‘들음이 없다’ 하니, 참으로 들음이 없다면 듣는 성품이 아주 없어져서 말라죽은 나무와 같을 터인데 종을 다시 치는 줄을 어떻게 아느냐. 있는 줄 알고 없는 줄 아는 것은 소리가 스스로 있었다 없었다 한 것일지언정 듣는 성품이야 어떻게 너에게서 있었다 없었다 하겠느냐. 들음이 참으로 없다면 무엇이 없는 줄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듣는 성품 안에서 소리가 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요, 소리가 나고 소리가 없어지는 것을 네가 듣는다고 해서 너의 듣는 성품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 아니니라.
네가 뒤바뀌어서 소리를 의혹하여 들음이라 하는데 항상한 것은 아주 없는 것이라고 미혹한들 무엇이 그리 괴이하다 하겠느냐. 마침내는 움직임과 고요함과 닫음과 막음과 엶과 통한 것을 여의고는 듣는 성품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되느니라.
마치 깊이 잠든 사람이 평상에서 한참 잘 적에 그의 집에 어떤 사람이 다듬이질을 하거나 방아를 찧으면 그 사람이 꿈결에 방망이 소리를 절구 소리를 듣고는 다른 소리로 생각하여, 북을 치거나 종을 치는 것으로 여기면서 꿈속에서 ‘종소리가 어째서 나무 두들기는 소리와 같으냐’ 하다가, 문득 깨어나서 절구 소리인 줄 알고는 집 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꿈을 꾸었는데 이 절구소리를 북소리로 들었다’고 하리라.
아난아, 이 사람이 꿈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고요하고 열고 닫고 트이고 막힌 것을 기억하겠느냐마는, 몸은 비록 잠을 자기는 하나 듣는 성품은 혼미하지 않은 것이니, 비록 네 형체가 다하여 목숨이 죽은들 이 성품이야 어찌 소멸되겠느냐’ ”라고 하셨다.
『능엄소(楞嚴疏)』에서 이르되 “종을 쳐서 진실과 허망을 가린다면 듣는 성품에 즉하면서 진실이어야 하고 소리 대경에 의거하면서 허망을 가린다. 만일 소리로 인하여 들음이 있다면 이 들음은 소리를 여의지 않았고, 만일 소리를 여의고 들음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참된 들음이다. 이 들음은 소리를 여의지 않으면서 다만 이 소리에 합하고 이 소리에 합하지 않을 뿐이다.
만일 참된 듣는 성품이라면 마치 물이 소리를 소멸시키지 않음과 같고 바람이 물에 쳐서 물결을 이루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듣는 모양은 있되 소리는 일어나지 않고, 듣는 모양이 이내 없는데도 듣는 성품은 소멸되지 않는다. 성품이 소멸되지 않는지라 소리가 왔다 갔다 하면 듣는 형상이 있는 듯함은, 마치 물이 소멸되지 않은지라 바람이 움직이는 때에는 물결 모양이 있는 것과 같고, 빛깔의 참 성질은 시방 지경에 두루한지라 마음을 따라 느껴 나타내면 빛깔 형상이 있는 것과 같나니, 이 듣는 성품도 역시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자체가 항상하는 듣는 성품을 잘못 알고서 도리어 소리가 났다 없어졌다 하는 듣는 형상을 따른다면 마침내는 칭찬을 들으면서 기쁨을 내고 비방을 들으면서 성을 내는 것이니, 본래의 들음[本聞]에 미혹하였기 때문이요 소리를 따라 유전(流轉)하기 때문이다.
문수가 이르되 “중생들은 본래의 들음에 미혹되어 소리를 따르기 때문에 유전하느니라. 아난이여, 비록 많이 기억하고 있기는 하나 삿된 생각에 떨어짐을 면치 못하겠거늘, 어찌 침몰하는 곳에서 흐름을 돌린 것이 아니면 허망 없음을 얻게 되겠는가”라고 했다.
또 이르되 “그대의 뒤바뀐 듣는 기관[倒聞機] 돌려서/도리어 제 성품 듣는 것을 들으면/그 성품 위없는 도를 이루리니/원만하게 통함이 실로 이러하느니라”고 했다.
이와 같이 소리로써 들음을 삼는다면 마음을 저버리고 경계를 따르는 것이거늘, 어찌 이것이 뒤바뀐 들음의 기관이 아니겠는가. 만일 소리로 유전함이 있음을 돌려서 본래의 들음이 허망이 없는 것에 회복할 수 있다면, 이것이 제 성품을 도리어 듣는 것이니, 근본을 얻고 근원에 돌아가서 안으로는 가리는 감관이 사라지고 밖으로는 티끌의 경계가 소멸한다. 능소(能所)가 이미 벗어난지라 본각(本覺)의 도가 이루어지고 고요히 비추면서 원만하게 통함이 진실로 이와 같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빛깔과 소리를 따르면서 허망하게 유전(流轉)하고 일찍이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하고 항상한 것인 줄은 깨닫지 못해서 항상한 것은 따르지 않고 생멸하는 것만 쫓아다니므로 세세생생에 섞여 물들면서 유전하거니와, 만일 생멸함을 버리고 진상(眞常)을 수호하면 항상하는 빛[常光]이 앞에 나타나서 감관[根]ㆍ대경[塵]ㆍ의식[識]이 즉시에 녹아떨어지리라. 모양을 생각함[想相]은 허망한 티끌이요 식정(識情)은 더러운 때이니, 두 가지를 다 함께 멀리 여의면 너의 법눈[法眼]이 바로 맑고 밝아지리니, 어찌 위없는 지각(知覺)을 이루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듣는 성품을 환히 알면 이내 정각(正覺)을 이루리니, 이때에는 마음과 경계가 쌍으로 원융하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다 함께 없어진다.
마치 관음(觀音)이 말한 “그 부처님이 저를 가르쳐 주시어 문(聞)ㆍ사(思)ㆍ수(修)로부터 삼마지(三摩地)에 들라 하셨으므로 처음에 들음[聞] 가운데서 유(流:法流)에 들어가 소(所:聲塵)를 벗어나고, 소와 들어감이 이미 고요하매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모양이 똑똑하게 생기지 않았으며, 이와 같이 점점 더 나아가서 들음과 들을 바[所聞]가 다하여지고 들음이 다함도 머물러 있지 아니하여 깨달음과 깨달을 바[所覺]가 공하였으며, 공하였다는 깨달음이 극히 원만하여 공과 공할 바[所空]가 소멸하여지고 남과 없어짐이 이미 소멸하매 적멸(寂滅)이 앞에 나타나더니, 홀연히 세간과 출세간을 뛰어나 시방이 원만하게 밝아지면서 두 가지의 아주 훌륭함을 얻었으니, 첫째는 위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본래 묘하게 깨달은 마음[本妙覺心]과 합하여 부처ㆍ여래와 더불어 인자한 힘[慈力]이 동일하여졌고, 둘째는 아래로 시방의 일체 6도(道) 중생과 합하여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가엾이 여김[悲]과 우러름[仰]이 동일하여졌나이다”고 함과 같아지리라.
그러므로 처음 듣는 성품으로부터 들어갔을 적에는 먼저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한 소리의 경계가 없어지고 다음에는 능문(能聞)과 소문(所聞)의 마음이 없어지며, 이미 마음과 경계가 다 같이 없어졌는지라 또 마음과 경계가 없고 능각(能覺)ㆍ소각(所覺)의 지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면 깨달음과 지혜가 다 함께 공하여짐 또한 공해져야 비로소 원각(圓覺)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르되 “공하였다는 깨달음이 극히 원만하여 공과 공할 바가 소멸하였다”고 하나니, 비로소 생멸하는 근원이 다하여지고 적멸하면서 본래 묘하게 깨달은 마음의 경지에 도달한다.
마치 『기신론(起身論)』에서 이르되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망념(妄念)으로 말미암으면서 차별이 있나니, 만일 망념을 여의면 경계의 차별된 형상이 없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망념이 공해지면서 감관과 경계가 사라지고, 식(識)의 생각이 소멸되면서 티끌의 때가 가라앉는다. 그러면 법눈이 즉시에 맑고 밝아지면서 항상하는 광명이 원만하게 단박 나타나나니, 보거나 듣는 본래의 성품이 그러한지라 모든 감관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여섯의 자재한 왕[自在王]이 언제나 청정해진다”고 했다.
또 『수능엄경(首楞嚴經)』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감관이 근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감관이 해탈을 이룬다.
보고 들음은 허환한 눈병 같고
삼계(三界)란 것 허공의 꽃과 같나니
들음이 회복되고 눈병이 제거되면
티끌은 스러지고 깨달음이 청정해진다.

깨끗함이 지극하여 빛이 환하고
고요하게 비추어 허공을 삼킬 제
돌아와서 세간을 살펴보아라.
마치 꿈 속의 일과 같으리.

다만 아직 깨치기 전에 물듦과 깨끗함 가운데서 한 터럭만큼이라도 보고 들음에서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삼계의 광명 없는 기나긴 밤의 나고 죽는 꿈 속에 있을 뿐이니, 겨우 성품을 보게 되면 문득 깨달음이 같아지고 그 뒤에는 스스로가 깨닫고 남을 깨치게 하기 때문에 부처라고 한다.
또 이 자기 마음이라는 성품은 온갖 처소에 두루하여 처소마다 들어갈 수 있고 보거나 들음에서 뿐만이 아니니, 혹은 뜻[意]이 냄새의 경계를 녹이면서 원통(圓通)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마음이 대경을 열면서 법인(法忍)을 증득하기도 하며, 혹은 물의 관[水觀]에 들어가면서 성품을 통달하기도 하고, 혹은 바람의 힘을 살피면서 종(宗)을 깨치기도 한다. 혹은 쑤시고 아픈 것을 몰래 살피면서 순전히 몸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마음의 끝없음을 환히 알면서 부처의 지견[佛知見]에 들기도 하며, 혹은 따뜻한 접촉을 관하면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기도 하고, 혹은 법음(法音)을 연설하면서 악마를 항복 받기도 한다.
이렇게 크게 깨치는 때를 당해서는 끝내 하나의 경계만으로 생길 수 있거나 한 마디 말만으로 붙잡을 수 있거나 한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만 성품에 미혹되어 글을 따르면서 마음을 저버리고 도를 구하는 이를 위하여 언설을 빌려서 자기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할 뿐이니, 이로부터는 한결같이 안으로 관하면서 글을 버리고 진리를 궁구한다면, 이야말로 어찌 언어로 인하여 도를 깨치고 교(敎)를 의뢰하여 종(宗)을 밝힌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는 이익이 있으며, 마침내는 처음 발심하여 배우는 이에게는 진실로 돌아갈 바가 있게 하면서 바깥으로 내달아 구하는 것을 쉬고 자기를 돌이켜 반성하여 바로 심성을 비추게 하면, 단번에 자기를 보아 똑똑하게 마음이 밝아짐은 마치 제호(醍醐)를 바로 마시고 보배 창고를 친히 여는 것과 같아지나니 그제야 언설을 따르는 허물을 깨치고 자기를 저버린 허물을 깊이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므로 아난 등은 세존으로 인하여 제 성품을 깨친 뒤에야 스스로 경하하면서 “억 겁 동안 뒤바뀐 나의 생각 녹이어/아승기 겁 겪지 않고 법신(法身) 얻게 되었네”라고 했다.
그러므로 번뇌가 동요하지 않는 현재의 몸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이니, 조사와 부처의 말씀과 가르침은 이렇게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
이 넓고 크고 그지없는 법의 이익을 위하여 그 때문에 전문(全文)에 부처님 말씀을 갖춰 인용하여 증명을 삼은 것이거늘, 어떻게 도리어 자기를 저버리는 말이 있고 글이라는 비방을 논하겠는가.
만일 마음을 관하여 안으로 증득하지 않는 법사ㆍ율사ㆍ선사 등에게는 저마다 열 가지씩의 허물이 있다.
마치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에서 이르되 “세 스승들은 불법을 파괴하므로 요약하면 저마다 열 가지씩의 허물이 있다.
첫 번째, 법사(法師)에게 있는 열 가지 허물이란, 첫째 바깥으로 글의 해석만을 구하면서 내관(內觀)으로 마음을 닦지 않는다. 석론(釋論)』에서 이르되, ‘논의가 있는데도 지혜가 없으므로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둘째는 경전을 잘 이해하여 다툼을 쉬고 도에 나아가지 않으면서 자기만을 고집하고 남을 그르다 하며 젠체하고 뽐내면서 마음의 괴로움과 쌓임[苦集]을 볼 줄 모른다. 셋째는 남기신 부촉을 따르지 않고 염처(念處)에 의하여 도를 닦지 않으며 목차(木叉)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으므로 부처의 제자가 아니다. 넷째는 경에서 이르되, ‘선정이 아니면 지혜롭지 않고 치우친 지혜는 선정이 아니어서 하나의 날개요 하나의 수레바퀴거늘, 어찌 멀리 운반할 수 있겠는’라고 했다. 다섯째는 법은 본래부터 말함이 없으면서 말하는 내용은 이름과 이익을 탐내면서 널리 펴는 것이거늘, 어떻게 성인의 거룩한 뜻에 계합되겠느냐.
여섯째는 귀로 듣고서는 입으로 내보낸 것이거늘, 어찌 자기에게 이롭겠느냐. 경에서 이르되, ‘마치 사람이 남의 보배를 세면서 자기 것은 반전푼도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일곱째는 실행이 없으면서 펴서 말한 것이거늘 어떻게 다른 이를 이롭게 하겠느냐. 여덟째는 또 우유에 물을 많이 탄 도(道)가 없는 가르침이므로 그 가르침은 후생(後生)들을 그르친다. 아홉째는 사부대중들은 참된 법의 이익을 잃고 더욱더 인정만이 경박해진다. 열째는 불법을 빛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 불법을 파괴하고 있다.
선사(禪師)에게 있는 열 가지 허물이란, 첫째 경에서 이르되, ‘아련야(阿練若)라는 이름을 붙이고 누더기 옷을 입고는 조용한 데 있으면서 스스로 ≺참된 도를 행한다≻고 말을 하나 우리들의 허물을 말하기만 좋아한다’고 했다. 둘째는 행을 뽐내고 남을 업신여기면서 계취견(戒取見)과 괴로움과 쌓임의 번뇌를 모른다. 셋째는 지혜가 없이 닦은 선정이라, 소경의 선정이어서 눈이 없거늘 어찌 생사를 벗어나겠느냐. 넷째는 남기신 부촉을 따르지 않고 염처에 의지하여 도를 닦지 않으며 목차에 의지하여 머무르지 않으므로 부처의 제자가 아니다. 다섯째는 지혜가 없는 선정이라 대개가 귀정(鬼定)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살아서는 불법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귀신 갈래에 떨어진다.
여섯째는 이름과 이익을 위한 좌선이라 마치 선제라(扇提羅)처럼 죽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일곱째는 설령 선정을 증득한다 하여도 장수천(長壽天)의 재난에 떨어진다. 여덟째는 마치 우유에 물을 탄 것과 같은 선교(禪敎)를 배우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라 3도(塗)의 종자를 잇게 한다. 아홉째는 사부대중들은 참된 법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더욱더 인정만이 경박하여진다. 열째는 삼보(三寶)를 빛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시 불법을 파괴하고 있다.
율사(律師)에게 있는 열 가지 허물이란, 첫째는 바깥 계율만을 집착하여 안의 계율을 모르기 때문에 정명(淨名)의 꾸지람을 받는다. 둘째는 계율의 명상(名相)에 집착하여 다투고 꾀하고 시비하면서 마음의 괴로움과 쌓임을 볼 줄 모른다. 셋째는 계율ㆍ선정ㆍ지혜를 겸하여 서로가 도와야 도에 나아갈 수 있는데, 계율만으로는 지혜도 아니고 선정도 아니거늘 어떻게 도에 나아갈 수 있겠느냐. 넷째는 명예를 넓히기에만 있고 뜻이 도에 있지 못하므로 결과는 3악도에 떨어진다. 다섯째는 남기신 부촉을 따르지 않고 염처에 의하여 도를 닦지 않으며 목차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머무른다.
여섯째는 계율의 방편에 집착하여 조그마한 교(敎)로써 바른 이치를 삼으면서 큰 도를 장애한다. 일곱째는 스승마다 계율에 집착하면서 넓히는 것이 같지 않으면 우유에 물을 많이 타게 된다. 여덟째는 성인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전하여 주는지라 후생들에게 잘못 누(累)를 끼친다. 아홉째는 사부대중들은 참된 법에 적시지 못하고 더욱이 인정만이 경박하여진다. 열째는 삼보를 빛낼 수 없을 뿐만이 아니요 이에 불법을 파괴하고 있다”고 함과 같다.
이러므로 알라. 만일 마음을 관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큰 허물을 갖추게 된다.
마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보살마하살이 만일 나라 안의 시주들의 헛된 밥을 먹지 않으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또 『보량경(寶梁經)』에서 이르되 “만일 대승의 불법을 배우는 이면 시주의 음식을 받되 마치 수미산과 같고 시주의 의복을 받되 대지(大地)까지 갈 수 있거니와, 만일 배우지 않은 이로서 아직 스님의 수에도 들지 못한 이면 시방에 침을 뱉을 만한 땅도 없다”고 했다.
『유마경(維摩經)』에서 또한 이르되 “배움을 공경하기 스승과 같이하라. 겨우 배울 마음을 일으키기만 하면 곧 인간과 천상을 위한 분수가 있다”고 했나니, 혹시 종경(宗鏡)의 한 글귀를 듣기만 하여도 반드시 부처 되는 것은 의심이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만일 이 법을 듣는 이 있으면/하나도 성불하지 않는 이 없나니/다만 아직 듣지 못한 이와/어두워서 믿지 않은 사람만은 제외된다”고 했다.
만일 벌써 들은 이라면 모두가 전생에 지은 인연이라 이미 옷 속에 구슬을 받은 것이요 일찍이 부처의 모임에 친근한 이이니, 방일하지 말고 모름지기 헤치고 찾고 해야 한다. 문득 인연이 어긋나게 되면 텅 비어서 얻게 됨이 없으리라.
그런 까닭에, 『유가론(瑜伽論)』에서 이르되 “느슨해지지 않고 수행을 더하는 가운데서 또 이렇게 용맹스럽게 정진하면서 ‘나는 이제 반드시 증득해야겠으며, 증득해야 할 것에 느슨해지지 않아야겠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여러 가지의 횡사(橫死)하는 인연이 있나니, 이른바 몸속에서 혹은 바람이거나 혹은 열이거나 혹은 담(痰)이 발동하기도 하고, 혹은 먹은 음식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몸속에 멈춰 있기도 하며, 혹은 오래된 묵은 병이 있기도 하고, 혹은 바깥의 뱀ㆍ전갈ㆍ그리마ㆍ지네 따위의 나쁜 독충들에게 물리기도 하며, 혹은 사람인 듯 사람 아닌 것들에게 놀라기도 하여 이로 인하여 일찍 죽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러 횡사하는 것들에 대해 항상 생각하면서 무상하다는 생각을 닦으며 방일하지 않는다.
이렇게 방일하지 않으면서 항상 생각하기를, ‘나의 수명이 만일 다시 7일 동안이거나 6일 동안ㆍ5일ㆍ4일ㆍ3일ㆍ2일ㆍ1일ㆍ한 시간ㆍ반 시간ㆍ잠깐 동안이라도 살아 있게 되거나 혹은 한 식경(食頃)이거나 혹은 숨을 들이쉬어서 내쉬기까지 혹은 내쉬어서부터 들이쉬기까지 그렇게 살아 있는 동안까지는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부지런히 힘쓰면서 뜻을 짓고 유가(瑜伽)를 닦아 익히되 그 동안에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나는 결정코 많이 시행하여야겠다’고 하나니, 이와 같은 것을 느슨해지지 않고 수행을 더하는 것이라 한다”고 했다.
【문】 의학(義學)은 대개가 듣고 읽기를 좋아하고 선종(禪宗)은 오직 내관(內觀)에 순일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교문(敎門)ㆍ관문(觀門)의 두 문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된다. 만일 마음만을 관하면서 교를 찾지 않으면 어둠에 빠져서 오만의 어리석음만을 더하고, 만일 교(敎)만을 찾으면서 마음을 관하지 않으면 자신만을 고집하여 남의 보물을 센다는 비방을 받는 것이니, 통달하지 못한 이들은 서로서로 시비를 하고 있다. 이제 종경(宗鏡)으로 널리 찾고 조사가 가르친 뜻이 풍족하니, 미세하게 열고 분석하여 깊은 의심을 결단해 주기 바란다.
【답】 교문과 관문은 밝히기가 어렵되 네 귀절로 분간해야 한다. 말한 것과 같아서, 첫째는 교설의 문[敎門]은 도리의 문[理門]이 아니니, 교설은 통하는 주체[能通]이고 도리는 통할 대상[所通]이어서 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도리의 문은 교설의 문이 아니니, 나의 들음[聞]으로 해탈하는 것 안에는 언설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설의 문이 곧 도리의 문이니, 문자가 곧 해탈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도리의 문이 곧 교설의 문이니, 해탈이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또 문(門)과 교(敎)를 배대하면서 네 구절로 분별한다. 첫째는 교를 얻고 문을 얻지 못한 것이니, 문자법사(文字法師)가 그것이다. 둘째는 문을 얻고 교를 얻지 못한 것이니, 관혜선사(觀慧禪師)가 그것이다. 셋째는 문도 얻고 교도 얻은 것이니, 문혜법사(聞慧法師)가 그것이다. 넷째는 문과 교를 모두 얻지 못한 것이니, 가명의 아련야[假名阿練若]가 그것이다.
또는 방편의 글을 따르면 권교(權敎)에 집착하여 실교(實敎)를 해치고 만일 원돈(圓頓)의 교를 통달하면 실교를 환히 알면서 권교를 연다.
권교에 집착하면 교문ㆍ관문이 두 쪽으로 분리되고, 실교를 환히 알면 인(人)과 법(法)이 하나의 뜻이 된다.
인과 법이 하나의 뜻이면 경계와 지혜가 다 함께 명합하고 교문ㆍ관문이 두 쪽으로 분리되면 신(信)과 법(法)이 쌍으로 나타난다.
신과 법이 쌍으로 나타나면 관(觀)이 있고 들음[聞]이 있으며, 경계와 지혜가 다 함께 명합하면 안도 없고 바깥도 없는 것이니, 이야말로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에 따라서 이러한 열음[開]과 막음[遮]이 있다.
만일 뜻의 원융한 데에 나아가 스스로 취함과 버림이 없으면 경계마다 도(道)에 합하므로 신행(信行)은 법행(法行)의 근기와 같아지고, 생각마다 종(宗)에 귀착되므로 교문은 관문의 뜻과 평등해진다.
이러하면 한 마음도 비출 만한 것이 없거늘 누가 관문에 집착하며, 한 법도 들을 만한 것이 없거늘 누가 교도(敎道)를 논하겠는가. 바야흐로 종경으로 들어가면 이것과 상응하리니, 이 문을 아직 통달하지 못하면 끝내 간격이 생기고 거리끼게 된다.
또한 교(敎) 안에서는 두 가지의 수행하는 사람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나니, 첫째는 바로 신행이요, 둘째는 바로 법행이다.
살바다(薩婆多)에서는, “이 두 사람의 지위는 견도(見道)에 있으며, 들음으로 인하여 들어간 이면 바로 법행이 된다”고 밝혔다.
담무덕(曇無德)이 이르되 “지위는 방편(方便)에 있으며, 스스로 보는 법이 적고 들음에 의뢰하는 힘이 많으면 뒷날에 반드시 법을 들어서 깨치게 되어야 하므로 신행이라고 하며, 들음에 의뢰하는 힘이 적고 스스로 보는 법이 많으면 뒷날에 반드시 생각으로 깨치게 되어야 하므로 법행이라고 한다”고 했다.
『지관(止觀)』에서 이르되 “만일 영리함과 둔함으로 논한다면 법행은 영리하나니 안에서 스스로 법을 관하기 때문이며, 신행은 둔하나니 다른 것을 의뢰하여 듣기 때문이다. 또 신행은 영리하나니 하나를 듣고 이내 깨치기 때문이요, 법행은 둔하나니 법을 차례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혹은 다 같이 영리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둔하기도 하나니, 신행인(信行人)의 문혜(聞慧)는 영리하고 수혜(修慧)는 둔하며, 법행인(法行人)의 수혜는 영리하고 문혜는 둔하다”고 했다.
이상에서 세 스승의 말한 바를 요약하였거니와, 자연히 치우치게 집착할 수는 없고 관심(觀心)과 교도(敎道)는 반드시 듣고 배우는 것과 좌선에 의거한다.
이제 만일 한 마음을 얻어 만 가지 삿된 것이 소멸하면 어느 마음인들 교(敎)가 아니겠으며, 만일 하나를 듣고 천을 깨쳐서 큰 총지(總持)를 얻게 되면 어느 교인들 마음이 아니겠는가. ‘어느 교인들 마음이 아니겠는가’라 하면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어느 마음인들 교가 아니겠는가’라 하면 법 밖에는 없다.
다시 지자 대사(智者大師)의 대법(對法)으로 수행하는 두 사람의 것에 결부시켜서 보면 지관(止觀)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니, 4실단(悉檀)의 뜻을 따라 기의(機宜)에 맞게 하여 다 함께 도에 들게 한다.
대사는 물었다. “그대는 정혜(定慧)에 뜻을 둔다 하는 데, 어떤 것인가?”
그 사람이 말하되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건대, 선지식(善知識)이란 마치 달빛이 차츰차츰 둥글게 됨과 같고 또 마치 사다리를 오르면 점차로 더 높아지는 것과 같이 교묘하게 해설하여 사람 마음으로 하여금 도의 큰 인연을 얻어서 뜻이 기쁘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시게 하여 마치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르는 듯이 하는 이이다”고 하면 이런 이가 곧 신행인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말하되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건대, 밝은 거울이 움직이지 않으면 색상(色傷)은 저절로 분명해지고 깨끗한 물에 물결이 없으면 고기와 돌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처럼 기꺼이 악각(惡覺)을 버림을 마치 무거운 짐을 버리듯 한다”고 하면 이런 이가 곧 법행인인 줄 알아야 한다.
이미 근성(根性)을 알면 한 사람에게 여덟 번 마음을 안정시킨다.
“아 선남자야, 한량없는 겁 동안 미치고 산란의 독을 마시면서 5진(塵)에 내닫고 삼계(三界)에 오르락내리락함은, 마치 맹렬한 바람이 도라솜[兜羅綿]으로 만든 깃대 장식에 불고 이글이글하게 달은 솥에 볶은 콩이 튀어 오르듯 고뇌에서 시달리고 있거늘, 어찌 마음으로 근본을 통달하여 하나로써 그의 뜻을 쉬지 않는가. 뜻이 만일 하나로 된다면 모슨 일인들 이룩되지 않겠는가. 뜻이 만일 하나로 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룩되지 않겠는가. 괴로움과 쌓임[苦集]에서 하나를 얻으면 윤회하지 않고 무명에서 하나를 얻으면 지어감[行]에 이르지 않아 늙어 죽음[老死]에까지도 이르지 않아서, 큰 나무를 꺾어 부러뜨리면 그것으로 끝나는지라 새로 나지 않듯이 여덟 가지 해진 것[八弊]에서 하나를 얻으면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가나니, 이것만이 유쾌한 일이니라”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여러 가지 비유로 지(止)를 널리 찬탄하면서 그의 뜻을 기쁘게 하는, 이것을 원하고 구함[樂欲]을 따르며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隨樂欲以止安心]고 한다.
“또 선남자야, 마치 대단히 가물어서 강물과 못이 다 마르고 온갖 풀이 바짝 타고 온 곡식이 타 죽었을 때 사가라왕(沙伽羅王)이 7일 동안 구름을 이루어 사방에 비를 퍼부어서 대지가 흠씬 젖게 하면 온갖 종자들이 모두 싹이 트고 온갖 뿌리와 줄기가 모두 나며 온갖 가지와 잎이 모두 무성해지고 온갖 꽃과 열매가 모두 피고 여는 것처럼, 사람도 이와 같아서 산란과 방일 때문에 내야할 선행을 다시 내지 못하고 이미 냈던 선행조차도 도리어 잃어버린다. 선정(禪定)의 강물도 마르고 도품(道品)의 나무도 죽었으며 온갖 선행도 바짝 타고 백 가지 복도 앙상해져서 원인인 꽃과 도(道)인 결과가 다시 성숙되지 못하다가, 만일 조용한 숲에서 뜻을 한결같이 하여 안에서는 나오지 않고 바깥에선 들어오지 아니하면 고요한 구름이 이는 것이요 모든 선정이 일어남은 바로 이것이 비를 내리는 것이니, 공덕이 우거진 숲에서 난(煖)ㆍ정(頂)의 방편과 안(眼)ㆍ지(智)ㆍ명(明)ㆍ각(角)과 신인(信忍)ㆍ순인(順忍)ㆍ무생인(無生忍)ㆍ적멸인(寂滅忍)과 위없는 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얻게 된다”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그침을 널리 찬탄하며 그 선근(善根)을 나게 하는 이것을 편의를 따라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隨便宜以止安心]고 한다.
“또 선남자야, 대저 산란한 마음이란 악한 것 중에서도 악하여, 마치 갈고리 없는 취한 코끼리가 꽃 핀 못을 짓밟아 버리고 코뚜레를 한 낙타가 도리어 짐을 거꾸러뜨리며 번갯불보다 빠르고 독사보다 독하며 다섯 번을 겹쳐서 가리고 먼지가 빛나는 신령에 자욱하게 기며 가까운 눈썹과 먼 하늘은 모두 다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가, 만일 선정을 잘 닦으면 마치 밀실(密室) 안의 등불이 아주 캄캄했던 것을 깨뜨리고 금으로 만든 창칼에 껍데기를 긁어버리면 투명한 빛이 환해지며 한 손가락ㆍ두 손가락ㆍ세 손가락을 모두 뚜렷이 알고 많이 내린 비로 떠들썩한 먼지를 적시며 큰 선정으로 미치고 방일한 것을 고요히 할 수 있는 것과 같아서, 그침은 산란을 능히 깨뜨리고 허망이 소멸된다”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그침을 널리 찬탄하여 그 졸음과 산란을 깨뜨리는 이것을 다스리며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對治以止安心]고 한다.
“또 선남자야, 마음이 만일 선정에 있으면 세간의 생멸하는 법 모양[法相]을 알 수 있고 출세간의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법 모양도 안다. 여래는 도를 이루고서도 오히려 선정을 즐기시거든, 하물며 모든 범부들로서 선정 있는 사람이겠는가. 마치 밤에 번갯불을 보고 이내 길을 보게 되는 것과 같으며, 수없는 억(億)의 분명한 악을 깨뜨리고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 이루게 된다”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그침을 널리 찬탄하며 이내 진여에 계합하는, 이것을 첫째가는 이치를 따르며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隨第一義以止安心]고 한다.
그 사람이 말하되 “나는 적멸(寂滅)을 들으면 도무지 생각으로 들어오지 않다가도 분별을 들으면 듣고 받음에 싫증이 안 난다”고 하면, 곧 그를 위하여 말해야 하리니 “세 가지 악(惡)이 불에 활활 타고 낙타와 당나귀의 중한 고초며 아귀의 굶주림은 고통이라 하지 않거니와, 어리석어 들음이 없어서 방향과 장소를 알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고통이다. 들음이 많아서 분별하는 즐거움과 법을 보는 데서 생기는 기쁨의 즐거움과 선으로 악을 쳐 없애는 즐거움과 집착이 없는 아라한이 바로 으뜸가는 즐거움이라 한다.
많이들은 사람으로부터 감로(甘露)를 듣는 즐거움은 마치 그 가르침으로 자세히 살펴 길을 알면 구덩이를 멀리 피하면서 돌지 않고 곧바로 가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관(觀)을 널리 찬탄하며 그의 뜻을 기쁘게 하는, 이것을 원하고 구함을 따르며 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隨樂欲以觀安心]고 한다.
“또 선남자야, 달이 뜨면 연꽃이 피고 해가 나면 일을 하며 장사꾼은 주인을 따라야 하고 채색으로 그리는 그림은 아교가 필요하며 날기와는 불에 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소경이 길잡이를 못 만나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수행에 관지(觀智)가 없는 것도 역시 그러하나니, 일체종지는 관으로 근본을 삼아 한량없는 공덕으로 장엄하게 된다”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관을 널리 찬탄하며 그의 공덕을 내게 하는, 이것을 편의를 따르며 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對治以觀安心]고 한다.
“또 선남자야, 우물 속의 7보(寶)와 어두운 방 안에 있는 병과 화분은 반드시 햇빛을 기다려야 하고 해가 나온 뒤라야 모두 명료하게 되는 것처럼, 모름지기 지혜의 눈으로 모든 법의 진실을 살펴 알아야 하며, 온갖 모든 법안에서는 모두 평등의 관[等觀]으로써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는 것이 으뜸가는 조명(照明)이 된다”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관을 널리 찬탄하며 깨쳐서 알게 하는, 이것을 첫째가는 이치를 따르며 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第一義以觀安心]고 한다.
이와 같이 여덟 번을 신행인을 위하여 마음 안정시키는 것을 설명한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마음 쉬는 것을 좋아하므로 잠잠하고 다시 잠잠하며 덜고 또 덜면서 마침내는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러 분별을 좋아하지 않으며, 앉아서 내닫는 것이 이익 없는 일이다”고 하면 이는 곧 법행의 근성이므로 그들 위하여 지(止)를 말해야 한다. 그대는 밖으로 찾지 말고 안으로 하나를 지키기만 하라. 반연으로 깨닫고 이리저리 옮아가는 것은 모두가 허망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마치 불바퀴[火輪]를 돌리다가 손을 그치면 중지하고 세차게 치던 파도도 바람이 고요해지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되, ‘무엇을 반연이라 하느냐 하면 삼계(三界)가 있음을 말하고, 무엇을 반연을 쉰다고 하느냐 하면 마음으로 얻는 바가 없음을 말한다’고 했고 『서응경(瑞應經)』에서 이르되, ‘그 한 마음을 얻게 되면 온갖 삿됨이 소멸한다’고 했으며, 용수(龍樹)가 이르되, ‘진실한 법은 뒤바뀌지 않는지라 생각하는 관으로 이미 제거되면 언어의 법이 모두 소멸되고 한량없는 중죄가 없어지며 청정한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나니, 이런 높고 묘한 사람이면 반야를 능히 본다’고 했다.
대저 산중의 깊고 고요한 것은 신선들도 칭찬한 바이거늘, 하물며 열반의 맑고 고요함을 성현들로서 존숭함이겠는가. 『불화경(佛話經)』에서 이르되, ‘비구들이 마을에 있으면서 몸과 입으로 부지런히 힘쓴다 해도 모든 부처는 다 함께 근심하거니와, 비구들이 산에 있으면서 일을 쉬고 편히 누워 있다 해도 모든 부처는 다 기뻐한다. 하물며 다시 가부하고 앉아 손을 올려놓고 입을 다물고 혀를 입천장에다 대고는 고요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근원에다 한결같이 집중시킴이겠는가. 법계가 온통 고요하거늘 어찌 요긴한 도가 아니겠는가? 이것만이 귀한 것이요 그 밖의 것은 미칠 수가 없다’고 했다”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여러 가지 비유로 지(止)를 널리 찬탄하면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이것을 원하고 구함을 따르며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한다.
그 사람이 말하되 “나는 법 모양을 관하여도 다만 어지러움과 동요만이 더하면서 착한 법은 밝아지지 않는다”고 하면, 그를 위하여 지를 해설해야 한다. 지(止)는 법계의 편편하고 바른 좋은 밭이거늘, 무슨 법인들 갖춰지지 않겠는가. 지로 반연을 버리는 바로 이것이 보시오, 지의 체성은 악한 것이 아니므로 바로 이것이 계율이며, 지의 체성은 동요하지 않는지라 바로 이것이 인욕이요 지는 사이에 섞인 것이 없으므로 바로 이것이 정진이며, 지는 바로 선정이요 지의 법도 없고 지라는 것도 없는지라 바로 이것이 슬기다. 지로 인하여 지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닌 것을 알므로 바로 이것이 방편이요 하나의 지가 온갖 지인지라 바로 이것이 원(願)이며, 지는 욕망을 그치고 지는 소견을 그치게 하므로 바로 이것이 힘이요 이 지는 부처의 지와 같아서 둘도 없고 구별도 없으므로 바로 이것이 비밀광이다. 지에 편안히 있기만 하면 무엇 때문에 따로 모든 법을 닦겠는가”라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선근을 생기게 하는, 이것이 편의를 따르며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한다.
또 말하되 “나는 법 모양을 관하여도 산란과 졸음이 제거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를 위하여 “지는 크게 공능이 있다. 지 이것은 벽처럼 우뚝 머물러 있기 때문에 8풍(風)의 나쁜 생각이 들어갈 수가 없고, 지 이것은 청정한 물이라 탐음(貪婬)의 여덟 가지 뒤바뀜을 쓸어 없앰이 마치 아침 이슬이 볕이 나면 말라버리는 것과 같으며, 지 이것은 큰 자비라 원수와 친한 이를 다같이 가엾이 여기고 성냄을 깨뜨리며, 지 이것은 크고 밝은 주문이라 어리석음과 의심이 모두 보내지고, 지 이것이 곧 부처라 도의 장애를 부셔 없앰은 마치 아가타약(阿伽陀藥)이 온갖 병을 두루 치료하는 것과 같고 마치 훌륭한 의사가 마른 이를 살지게 하고 죽은 이를 일어나게 함과 같다”고 해설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그로 하여금 악을 깨뜨리게 하는, 이것을 다스리며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한다.
그 사람이 말하되 “내가 관찰하는 때에도 깨칠 수가 없다”고 하면, 그를 위하여 지를 해설해야 한다. “지는 곧 체성이 진실이라 비추면서 항상 고요하고, 지는 곧 인연을 따르는지라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춘다. 지는 곧 그치지 않고 지는 쌍으로 부정하고 쌍으로 긍정하며, 지는 곧 부처의 어머니요 지는 곧 부처의 아버지며 또한 아버지이기도 하고 어머니이기도 하다. 지는 곧 부처의 스승이요 부처의 몸이며 부처의 눈이요 부처의 상호(相好)며 부처의 광이요 부처의 머무는 데이니, 어느 것인들 갖추지 않았고 어느 것인들 제거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교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지를 널리 찬탄하는, 이것은 첫째가는 이치를 쓰며 지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 사람이 말하되 “지의 상태는 잠기고 고요하여 나로서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 그를 위하여 관으로 추구하고 찾는 도리를 해설해야 한다. “7각(覺) 중에는 택각지(擇覺支)가 있고 8정도(正道) 중에는 정견(正見)이 있으며 6도(度) 중에는 반야(般若)가 있어서 법문 가운데서는 주가 되어 이끌며, 부처가 되고 바르게 깨닫고 크게 깨닫고 두루 깨닫는 것까지 모두 이것은 관혜(觀慧)의 다른 이름인 것이니, 관혜가 가장 높고 미묘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 널리 찬탄하는 이것은 원하고 구함에 따르며 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만일 부지런히 관을 닦아 믿음ㆍ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을 내면 병을 알고 약을 알아서 교화하는 길이요 큰 행이라 뭇 선행이 두루 모이리니, 이 관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는 이것은 편의를 따르며 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관은 어둠을 깨뜨리고 길을 비추며 원한을 제거하고 보배를 얻으며 삿된 산을 기울이고 욕망 바다를 말리는 것이니, 모두 관의 힘이다”고 하는 이것은 다스림을 따르며 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만일 법을 관할 때에 능소(能所)를 얻지 못하고 마음이 탁 트이면서 몽롱한 것이 열리려 하면 다만 부지런히 관으로 열어 보이고 깨쳐 들어야만 한다”고 하는, 이것은 첫째가는 이치를 쓰며 관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여덟 번 법행인을 위하여 마음 안정시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다시 사람의 근기는 일정하지 아니하여 때로는 전환(轉換)되기도 한다. 살바다(薩婆多)에서는 밝히되 “둔한 이가 전환하여 영리한 이로 된다”고 했으며, 『성론(成論)』에서는 밝히되 “자주자주 익히면 영리해진다”고 했다.
여기서 밝히거니와, 중생의 심행(心行)은 정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잠깐 동안은 둔하고 잠깐 동안은 영리함이 저절로 그렇게 운용되어서 근기의 전환과도 관련된 것이 아니고 자주 익히지도 않는다. 어떤 이는 관을 짓는데도 사무치지 않다가 들음으로 인하여 이내 깨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오랫동안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다가 잠깐 동안의 생각으로 이내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시 근기를 전환하여 마음 안정시키는 것을 논하게 된다. 만일 법행(法行)이 전환하여 신행(信行)으로 되면 그 근기를 따라 전환한 것이라 여덟 번 실단(悉檀)으로써 가르치며 마음을 안정시키며, 가령 신행이 전환하여 법행으로 되는 것도 역시 근기를 따라 전환한 것이라 여덟 번 실단으로써 가르치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이런 뜻을 얻게 되면 자세함과 간략함을 자재하게 설명하게 되며, 전환과 전환하지 않음을 합하면 32종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있다.
스스로의 행[自行]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함은 이 마음을 관찰할 적에 어느 것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니, 만일 허망을 쉬고 생각의 모양이 고요하게 하려 함은 바로 법행을 원하는 것[樂法行]이요, 만일 들어서 무명의 밑까지 사무치려 하면 이것은 신행을 원하는 것[樂信行]이다.
고요함을 즐긴다 함은, 허망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줄을 알아 마음을 쉬면 뭇 허망이 모두 고요하여진다. 만일 앎[知]을 비추려 하면 마음의 근원을 알아야 하리니, 마음의 근원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허공과 같아지는 이것은 원하고 구함을 따르며 스스로의 행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비록 넓어서 마음과 모든 법을 분별한다 하더라도 신심(信心)ㆍ염심(念心)ㆍ정진심(精進心)에서 터럭만큼의 선(善)도 나지 않으면 이내 엉겨 멈추어서 동요하지 말아야 하나니, 모든 선과 공덕은 고요함에서 생기게 된다.
만일 엉겨 멈추었을 적에 더욱더 조용하기만 하고 도무지 인위(忍位)에 나아감이 없으면 마땅히 견주고 헤아리고 다잡으면서 일어나게 해야 한다.
만일 생각생각마다 머무르지 않음이 마치 한혈마(汗血馬)가 빨리 달리는 것과 같으면 이내 지(止)로써 빠르게 동요하는 것을 다스리며, 만일 잠자코 말이 없을 적에 무기(無記)와 잠자는 것과 상응하면 이내 관(觀)을 닦으며 모든 어두움을 깨뜨려야 한다. 지를 닦은 지 오래인데 개발할 수 없으면 이내 관을 닦아야 하되 온갖 법은 거리낌이 없고 다름도 없는 것으로 관하면 조용하고 밝고 영리해지면서 점차로 공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관을 닦은 지 오래인데도 어둠이 제거되지 않으면 다시금 지를 닦아야 하며, 모든 반연하는 생각을 그치고 능(能)도 없고 소(所)도 없으면 나라고 하는 바도 모두가 고요하여져서 장차 공혜(空慧)가 생긴다.
이것이 법행을 스스로 닦는 이를 위하여 여덟 번 교묘하게 차례를 매기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게 하는 것이다.
신행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함은, 어떤 이가 고요한 선정을 들어서 마치 수미산이 8동(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하려 하면 이내 지(止)를 들어야[聞] 하며, 날카로운 관을 들어서 모든 번뇌를 깨뜨림이 마치 햇빛이 어둠을 없애듯 하려 하면 이내 관(觀)을 들어야 하며, 관을 들음이 많아서 마치 햇볕에 싹을 태우듯 하려면 이내 지를 들어서 선정의 물로써 윤택하게 해야 하며, 혹은 선정을 들은 지 오래라 마치 싹이 문드러져서 나지 않은 것과 같게 되면 이내 관을 들어서 바람과 해가 발동하게 되고 착한 법이 앞에 나타나게 해야 한다.
때로는 내달아서 한 생각조차도 멈출 수 없음을 깨달으면 이내 지를 들어서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야 하며, 혹은 아주 흐리멍덩해져서 안개에 덮힌 것처럼 되면 이내 관을 들어서 깊이 든 잠을 깨뜨려야 하며, 혹은 지를 들어서 환히 트이듯 하면 오로지 지만을 들어야 하며, 혹은 관을 들어서 밝고 맑아지면 오로지 관만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신행을 스스로 닦는 이를 위하여 여덟 번 교묘하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법행의 마음이 신행으로 전환되거나 신행의 마음이 법행으로 전환되는 것은 모두가 마땅함에 따라 교묘하게 연구할 것이다.
스스로의 행[自行]에 32종이 있고 남을 교화함[化他]에 역시 32종이 있으므로 합하면 64종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다시 신행과 법행은 고립되지 않고 모름지기 문(聞)과 사(思)로 서로 도와야 한다.
법행인(法行人) 같은 이는 어느 한 글귀를 들음에 따라 봄이 고요하고 잔잔해져서 꿈 같은 허망이 모두 제거되고 도리어 앉아 사유(思惟)하면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또 지(止)를 들은 이후에 다시 생각하면 이내 선정이 생기며, 또 지를 듣고 도리어 사유하면 망념이 모두 부셔지고, 또 지를 들은 이후에 사유하면 환히 밝아지면서 깨치려 해진다.
또 관(觀)을 들은 이후에 다시 생각하면 마음이 크게 기뻐지고, 또 관을 들은 이후에 다시 사유하면 선이 생기고 악이 깨뜨려지면서 깨치려 해지는 따위이니, 앞의 것을 준하여 알아야 된다.
이것은 들음이 적고 사유함이 많다 하여 법행이라 하는 것이요 도무지 법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신행인(信行人)이 단정히 앉아 적멸(寂滅)을 사유하여도 기쁨이 아직 생기지 못할 적에 일어나서 지(止)를 들으면 기쁘고 아주 즐거워지며, 단정히 앉아 선을 생각하여도 선이 발생되지 못할 적에 일어나서 지를 들으면 믿음과 계율과 정진이 갑절 더 불어나며, 단정히 앉아 악을 다스려도 악이 제거되지 못할 적에 일어나서 지를 들으면 산란과 동요가 부서져 없어지며, 단정히 앉아 진리에 즉(卽)하였는데도 진리의 도가 열리지 않을 적에 일어나서 지를 들으면 탁 트이면서 고요함을 깨친다.
이것은 선행이거니와, 앉아 있음이 적고 들음이 많다 하여 도무지 사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는 한결같이 근성(根性)에서만 지은 것이요, 여기서는 서로 근성 돕는 것을 지었다.
서로 돕는 것 안에서 다시 전환과 전환하지 않음을 논하면서 역시 32종의 마음 안정시킴이 있고, 남을 교화하며 서로 돕는 것에도 32종의 마음 안정시킴이 있으므로 합하면 64종이요, 앞의 것과 합하면 1백 28종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대저 마음자리는 안정시키기 어려워서 괴로움을 거스리고 즐거움을 따른다. 여기서는 그의 원한 바를 따르면서 안정시키는 것이니, 마치 중생을 기를 적에 혹은 마시고 먹고 하여 몸에 알맞게 하면서 성명을 보존시키는 것처럼, 법신을 기르는 것도 그러하여 지(止)를 마실 것으로 삼고 관(觀)을 밥으로 삼으며, 약의 법도 두 가지여서 혹은 환약이기도 하고 혹은 가루약[散藥]이기도 하나니, 냉병ㆍ열병을 제거함으로써 무명의 병을 다스리는데 지를 환약으로 삼고 관을 가루약으로 삼는다.
마치 음양(陰陽)의 법과 같아서 양이면 바람과 해요, 음이면 구름과 비다. 비가 많으면 문드러지고 햇볕이 많으면 탄다. 음은 마치 선정과 같고 양은 마치 지혜와 같은데 선정과 지혜에 치우친 이는 모두가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여덟 번 조화할 것이요 귀한 것은 뜻을 얻는 데에 있다.
일종의 선사(禪師)들은 관(觀)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지(止)만을 쓰라 한다. 게송을 인용하여 말하되 “사유하고 사유함은 한갖 사유일 뿐이요/사유하고 사유함은 한갖 괴로움일 뿐이니/사유를 쉬면 바로 그것이 도(道)요/사유가 있으면 끝내 보지 못하네”라고 하였다.
또 일종의 선사들은 지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관만을 하게 한다. 게송을 인용하여 말하되 “지와 지는 한갖 그침일 뿐이요/혼몽하여짐은 다른 까닭 없나니/지를 그치면 바로 그것이 도요/관하고 관하면 진리를 알게 된다”고 하였다.
양쪽 선사는 각각 하나의 문으로부터 들어가서 자기 이익만으로 다른 학자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뜻을 보지 못한다. 한결같이 우유만 먹는지라 음료수도 오히려 얻기 어렵거늘, 하물며 제호(醍醐)이겠는가.
만일 한결같은 알음알이를 짓는다면 부처는 무엇 때문에 해설하셨겠는가. 하늘은 언제나 맑지만은 않고 의사는 가루약만 쓰는 것이 아니며 음식에는 항상 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간에서도 오히려 그렇거늘, 하물며 출세간이겠는가. 여기서는 근기를 따르고 병을 따르면서 전환시킨다.
스스로의 행과 남을 교화하는 것에 64종이요, 또 일심의 지관(一心止觀)에 다시 64종이 있으므로 5백 12종이다.
세 가지 실단(悉檀), 이것은 세간에서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 세간의 의사는 치료하고 나은 뒤에도 다시 병이 생기거니와, 한 가지 실단 이것은 출세간에서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 여래의 치료는 마침내 재발되지 않나니, 세간과 출세간의 법은 서로서로 균평하게 드러난다.
만일 3제(諦)를 여의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곳이 없고, 만일 지관을 여의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법이 없다.
만일 마음이 3제에서 안정되면 한 글귀로서도 이내 족하거니와, 그것이 안정되지 않으면 교묘한 방편을 써서 마음으로 하여금 안정을 얻게 한다.
한 코의 그물로써는 새를 잡을 수 없지만 새를 잡게 되는 것은 그물에서의 한 코일 따름이다.
중생의 심행(心行)은 각각 같지 아니하여, 혹은 여러 사람이 동일한 심행이기도 하고 혹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심행이기도 하다. 마치 한 사람을 위하면 여러 사람에게도 그러한 것과 같고, 마치 여러 사람을 위하면 한 사람에게도 그러한 것과 같다. 모름지기 널리 법 그물의 코를 베풀어서 심행의 새를 잡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세밀하게 해설하여 영리함과 둔함을 가지런히 거두고 나와 남을 겸하여 이롭게 하였으니, 만일 듣는 이 있으면 정수리에다 이고 수행할 것이다.
044_0256_c_01L宗鏡錄卷第四十四 駕慧日永明寺主智覺禪師 延壽 集夫若談心佛唯唱性宗者則擧一攝諸不論餘義今何背已述教迷宗論至教皆爲未了之人從上稟承無不指示如忠國師臨終之時學人乞師一言師云教有明文而行之卽無累矣吾何言哉如斯殷勤眞實付屬豈局已見生上慢心終不妄斥如來無上甘露不可思議大悲所熏金口所宣難思聖教如云依而行之者且依何旨趣不可是依文字語句而行不可是依義路道理而行直須親悟其宗不可輒生孟浪若決定信入者了了自知何須他說聞甚深法如淸風屆今只爲昧性徇文之者假以言詮方便開直指出六根現用常住無生滅性與佛無親證現知分明無惑免隨言語之所轉逐境界之所流今於六根之中且指見聞二最爲顯現可驗初心疾入圓通同歸宗鏡且見性者當見之時卽是自性以性徧一切處故不可以性更見於性分明顯露絲毫不古教云摩尼殿有四角一角常露祖師云眼門放光照破山河大地又歌云應眼時若千日萬像不能逃影質凡夫只是未曾觀得自輕而退屈是知顏貌雖童耄見性未曾明暗自去來靈光終不昧則是現今生滅指出不生滅性方知窮子衣中寶乃輪王髻裏珠貧女室中金是如來藏中物何假高推極聖自鄙下凡一向外求不能內省抂功多劫違背己靈空滯行門失本眞性所以首楞嚴經云佛告阿難若汝見時是汝非我性周徧非汝而誰云何自疑汝之眞性性汝不眞取我求實故知明暗差別是可還之法眞如妙性乃不遷之門若隨物觀局大小之所在若約性見絕器量之方圓見性卽成如於一毛端建十方之寶剎徇物卽爲凡庶向眞空裏現六趣之狴牢變易在人一性無迷悟由己萬法不遷如經云波斯匿王起立白佛我昔未承諸佛誨勅見迦旃延毘羅胝子咸言此身死後斷滅名爲涅槃我雖値今猶狐疑云何發揮證知此心不生滅地今此大衆諸有漏者咸皆願聞佛告大王身現存今復問汝汝此肉身爲同金剛常住不朽爲復變壞世尊我今此身終從變滅大王汝未曾滅云何知滅世尊我此無常變壞之身雖未曾滅我觀現前念念遷謝新不住如火成灰漸漸消殞殞亡不息決知此身當從滅盡佛言如是大王汝今生齡從衰老顏貌何如童子之時世尊我昔孩孺膚腠潤澤年至長成血氣充滿而今頹齡於衰耄形色枯悴精神昏昧髮白面皺逮將不久如何見比充盛之時佛言大王汝之形容應不頓朽王言世尊變化密移我誠不覺寒暑遷流漸至於此何以故我年二十雖號年少顏貌已老初十年時三十之年又衰二于今六十又過于二觀五十時宛然强壯世尊我見密移雖此殂落其間流易且限十若復令我微細思惟其變寧唯一紀二紀實爲年變豈唯年變亦兼月化何直月化又日遷沈思諦觀剎那剎那念念之間不得停住故知我身終從變滅佛言大王汝見變化遷改不停悟知汝滅亦於滅時知汝身中有不滅耶波斯匿王合掌白佛我實不知我今示汝不生滅性大王汝年幾時見恒河水王言我生三歲慈母攜我謁耆婆天過此流爾時卽知是恒河水佛言大王如汝所說二十之時衰於十歲乃至六十日月歲念念遷變則汝三歲見此河時至年十三其水云何王言如三歲時宛然無異乃至于今年六十二亦無有異佛言汝今自傷髮白面皺其面必定皺於童年則汝今時觀此恒與昔童時觀河之見有童耄不王言不也世尊佛言大王汝面雖皺而此見精性未曾皺者爲變不皺非變變者受滅彼不變者元無生滅云何於中受汝生死而猶引彼末伽梨等都言此身死後全滅王聞是言信知身後捨生趣生與諸大衆踊躍歡喜得未曾又如衆生八識之中前眼耳鼻舌身等五根及第八識俱緣現量得諸法之自性不帶一切名言又無二種計度分別隨念分別現前不生滅若六二識落在比非二量具計度隨念分別卽念念常生滅亦是於生滅中有不生滅性已上經文此是因闍王示寄破外道斷見有此方便分別生滅不生滅二性若不執斷常見性之人則八識心王同一眞性皆是實相無有生滅如大智度論當知色生時但是空生色滅時但是空滅中觀論偈云無物從緣起無物從緣滅起唯諸緣起滅唯諸緣滅故知萬法旣不從緣生亦不非緣生又不空亦不生空亦不生何者若一切法是不空者卽無有生以無自性空方能隨緣成諸幻有若一切法是空者無有生以無自體故無有生相旣無有生亦無有滅如論偈云果不空不生果不空不滅以果不空故不生亦不滅果空故不生果空故不滅以果是空故不生亦不滅但隨心現畢竟無生如首楞嚴經云佛言善男子我常說言色心諸緣及心所使諸所緣法唯心所汝身汝心皆是妙明眞精妙心中所現物云何汝等遺失本妙圓妙明心寶明妙性悟中迷晦昧爲空空晦昧中結暗爲色色雜妄想想相爲身聚緣內搖趣外奔逸昏擾擾以爲心性一迷爲心決定惑爲色身之內不知色身外洎山河虛空大地咸是妙明眞心中物譬如澄淸百千大海棄之唯認一浮漚體目爲全潮窮盡瀛渤汝等卽是迷中倍如我垂手等無差別如來說爲可憐愍者如上所說見性周遍湛然似鏡常明如空不動萬像自分出沒一性未曾往還但隨生滅之緣遺此妙明之性是以一切祖教皆指見性識心不從生因之所生唯從了因之所了相麤易辯性密難明隨轉處而莫知在照時而方了如今不見者皆被三惑心牽六塵境不知境元是我翻成主被客迷但能隨流得性之時自然無惑復有云般若唯以心神契會以心傳心方成密付不可以言迹事相而求者此是爲未入人顯宗破執恐取相背心情求意解故有是說若融會而論則隨緣體妙卽相恒眞且如正見相時是誰見相六塵鈍故名不自立相不自施以六根利故强自建立而爲緣對若能了境本寂識自無則入平等眞空方稱究竟見性耳故云見性周徧非汝而誰聞性者卽今聞性具三眞文殊簡出現證可知觀音入門圓通立驗非從行得不墮有爲豈假功成本來如是楞嚴經偈云譬如人靜居十方俱擊鼓十處一時聞此則圓眞實目非觀障外口鼻亦復然身以合方知心念紛無緖隔垣聽音響邇俱可聞五根所不齊是則通眞實音聲性動靜聞中爲有無無聲號無聞非實聞無性聲無旣無滅聲有亦非生生滅二圓離是則常眞實釋曰此是直說如今一切衆生日用現行聞性三眞實之理一圓眞實二通眞實三常眞實一圓眞實者以聞性徧一切處方聲塵應時無有前後以同時周徧一不出自性如水起波波不離水以聲處全聞聞外無法卽是本聞自具圓通之性非待證聖方有斯事故法華經偈云父母所生耳淨無瑕穢以此常耳聞三千世界聲又云是法華者雖未得天耳但用所生耳功德已如是二通眞實者且眼根見性雖卽洞然觀前而不觀後鼻舌身等三根皆以合中知因能所而生起若意知根所緣不定念念遷移故五根所不齊唯耳根圓通無礙聽響之任隔礙而遠近俱聞妙應之時無揀擇而大小咸備故高城和尚歌云應耳時若幽谷大小音聲無不足十方鐘鼓一時鳴靈光運運常相續則處凡身而不減居聖體而非增常現常通塵勞不能匿其神彩非間非斷魔不能挫其威光不壞緣生之耳根圓具一靈之妙性三常眞實者音聲性動靜者動靜是音聲之體性於聞中似有似無若無聲時號無聞非實聞無性以聞性常在若聞性隨聲塵滅則前聲滅時後聲不合更聞故知聲塵自無聞性非滅聲塵自有聞性非生又非唯聞性無生返觀聲塵亦無生滅以從緣而起自體全無如華嚴論云一切諸法猶如谷楞嚴疏鈔云如谷中無聲無聲卽無響界中皆無聲一切聲皆是妄心妄心不動時皆無妄想以有差別心執受卽有聲四大如枯木卽本無聲皆緣執故諸大菩薩不以音聲聽法是知聲塵本無皆因執有情消執喪萬法本虛有無旣虛生滅何有則知我性與如來性無異一切世間法卽是佛法故經云是法住法位世間相常住如憍陳那因聲悟妙音密圓古釋云若有能所未得名密悟四諦理推能聞及所聞皆是自心心卽是本光明圓照法界始覺智心亦圓照法界是因聲得悟一切衆生依此觀亦得解脫聞聲可意不可意生憎愛便被聲縛但觀心海中是聲出處以心海元無有相心雖含聲聲亦無相無相卽於一切聲中而得解脫知無法不心無心不法如是明達則於一切諸法不合不散無縛無脫矣故佛告阿難學多聞未盡諸漏心中徒知顚倒所因眞倒現前實未能識恐汝誠心由未信伏吾今試將塵俗諸事當除汝疑卽時如來勅羅睺羅擊鐘一聲問阿難言汝今聞不阿難大衆俱言我聞鐘歇無聲佛又問言汝今聞不阿難大衆俱言不聞時羅睺羅又擊一聲佛又問汝今聞不阿難大衆又言俱聞佛問阿難汝云何聞云何不聞阿難大衆俱白佛言聲若擊則我得聞擊久聲消音響雙絕則名無聞如來又勅羅睺羅擊鐘問阿難言爾今聲不阿難言聲少選聲消佛又問言汝今聲阿難大衆荅言無聲又頃羅睺羅更來撞佛又問言爾今聲不阿難大衆俱言有聲佛問阿難汝云何聲云何無聲阿難大衆俱白佛言鐘聲若擊則名有聲擊久聲消音響雙絕則名無聲佛語阿難及諸大衆汝今云何自語矯亂大衆阿難俱時問佛我今云何名爲矯亂佛言我問汝聞汝則言聞又問汝汝則言聲唯聞與聲報荅無定如是云何不名矯亂阿難聲消無響汝說無聞若實無聞性已滅同于枯木鐘聲更擊汝云何知知有知無自是聲塵或無或有豈彼聞性汝有無聞實云無誰知無者是故阿難聲於聞中自有生滅非爲汝聞聲生聲滅令汝聞性爲有爲無汝尚顚倒或聲爲聞何怪昏迷以常爲斷終不應言離諸動靜閉塞開通說聞無性如重睡人眠熟牀枕其家有人於彼睡時擣練舂米其人夢中聞舂擣聲別作他或爲擊鼓或復撞鐘卽於夢時自怪其鐘爲石木響於時忽寤遄知杵音自告家人正夢時惑此舂音將爲鼓響阿難是人夢中豈憶靜搖開閉通塞其形雖寐聞性不昏汝形消命光遷謝此性云何爲汝消滅楞嚴疏云擊鐘以辯眞妄者卽聞性而可眞擧聲塵而辯妄若因聲有聞此聞不離聲若離聲有聞此是眞聞汝今但執隨聲之聞此聞不離於聲只合是聲不合是聞若眞聞性如水不滅聲塵如風鼓水成波故有聞相聲塵不聞相卽無而聞性不滅以性不滅聲塵若還有聞相如水不滅若風動時卽有波相如色眞性徧十方界隨心感現則有色相之聞性亦復如是故知不認自體恒常之聞卻徇聲塵生滅之聞相遂乃聞讚而生喜聞毀而起瞋以迷本聞故隨聲流轉故文殊衆生迷本聞循聲故流轉阿難縱强記免落邪思豈非隨所淪旋流獲無妄又云汝倒聞機返聞聞自性性成無上道圓通實如是如今以聲爲聞背心循境豈不是倒聞之機若能旋聲塵之有流復本聞之無妄是返聞自性得本歸原內滅翳根外消塵境能所旣脫本覺道成寂照圓通眞實如是以佛告阿難以諸衆生從無始來循諸色聲逐念流轉曾不開悟性淨妙常不循所常諸生滅由是生生雜染流轉若棄生滅守於眞常常光現前根塵識心應時消落想相爲識情爲垢二俱遠離則汝法眼應時淸明云何不成無上知覺是以若了聞性卽成正於是心境雙融動靜俱泯如觀音言彼佛教我從聞修入三摩地初於聞中入流亡所入旣寂動靜二相了然不生如是漸增聞所聞盡盡聞不住覺所覺空空覺極圓所空滅生滅旣滅寂滅現前忽然超越世世間十方圓明獲二殊勝一者上合十方諸佛本妙覺心與佛如來同一慈力二者下合十方一切六道衆生與諸衆生同一悲仰以初從聞性入時先亡動靜聲塵之境次亡能聞所聞之心旣心境俱亡又不住無心境及能覺所覺之智則覺智俱空此空亦空方成圓覺故云空覺極圓空所空滅始盡生滅之原到寂滅本妙覺心之地如起信論云切諸法皆由妄念而有差別若離妄念則無境界差別之相故知妄念空而根境謝識想消而塵垢沈則法眼應時淸明常光了然頓見聞本性旣爾諸根所現亦然故經云自在王常淸淨故又首楞嚴經偈云一根旣返原六根成解脫見聞如幻翳三界若空華聞復翳根除塵消覺圓淨淨極光通達寂照含虛空卻來觀世間猶如夢中事但以未覺前於染淨中有一毫見聞取捨之處皆在三界無明長夜生死夢中纔得見性便同覺自覺覺他故名爲佛又此自心之性徧一切處隨處得入非獨見聞或意消香界而入圓通或心開塵境而證法忍或入水觀而達或審風力而悟宗或剌足疼痛而純覺遺或了心無際而入佛知見或觀煖觸而成火光三昧或演法音而降伏魔怨當此大悟之時終不見有一境可生一言可執今只爲迷性徇文背心求道者假以言說指歸自心從此一向內觀捨詮究理斯則豈不是因言悟道藉教明宗爲此之人不無利益遂使初心學者信有所歸便能息外馳求迴光反照頓見自己了了明心如正飮醍醐親開寶藏方悟隨言之失深慚背己之愆故阿難等因世尊開示自性之後發自慶言消我億劫倒想不歷僧祇獲法身故能不動塵勞現身成佛祖佛言教有如是不可思議之力爲是廣大無邊法利故所以具引全文佛語爲證云何反有背己之言論文之誚乎若不觀心內證法律禪師等各有十種過患如像法決疑經云三師破壞佛法略各有十過一法師十過者一但外求文解而不內觀修心釋論有論而無慧所說不應受二不融經息諍趣道但執己非他我慢自高不識見心苦三不遵遺囑不依念處修道不依木叉住佛弟子四經云非禪不慧偏慧不禪一翅一豈能遠運五法本無說說破貪求名利宣寧會聖旨六貴耳入口出何利於己經云如人數他寶自無半錢分無行而宣何利於八又多加水乳無道之教教誤後生九四衆失眞法利轉就澆漓十非但不能光顯佛亦乃破於佛法也禪師十過者一經云假名阿練若納衣在空閑自謂行眞道好說我等過二者恃行陵他不識戒取苦集煩惱無慧修定盲禪無目寧出生死也 四不遵遺囑不依念處修道不依木叉而住非佛弟五無慧之禪多發鬼定生破壞佛法死墮鬼道六名利坐禪如扇提羅死墮地獄七設證得禪卽墮長壽天難八加水乳禪教授學徒紹三塗種子九四衆不霑眞法之潤轉就澆漓十非止不能光顯三寶亦乃破佛法也律師十過者一但執外律不識內戒故被淨名訶二執律名相諍計是非不識見心苦集三然戒慧相資方能進道但律不慧不禪何能進道四弘在名譽志不存道果在三塗五不遵遺囑不依念處修道不依木叉而住六執律方便小教以爲正理而障大道七師師執律不同弘則多加水乳八不依聖教傳誤累後生九四衆不霑眞法轉就澆漓非止不能光顯三寶亦乃破佛法也是知若不觀心具如上之大失如大智度論云菩薩摩訶薩若欲不空食國中之施者當學般若波羅蜜又寶梁經云若學大乘佛法者受施主摶食如須彌山受施主衣可敷大地如不學者若未墮僧數十方無唾地處維摩經亦敬學如師纔起學心便有爲人天之分聞宗鏡一句定成佛無疑故法華經云若有聞是法無一不成佛唯除未聞者盲冥不信若已聞者皆是曩因旣受衣珠曾親佛會不可放逸須志披尋忽遇緣差空無所得以瑜伽論云不緩加行中又能如是勇猛精謂我今定當趣證所應證得不應慢緩以故我有多種橫死因緣所謂身中或風或或痰發動或所飮食不正消化住在身中或宿食病或爲於外蛇蝎蚰蜒百足等類惡毒蟲之所蛆螫或復爲人非人類等之所驚恐因斯夭沒於如是等諸橫死處恒常思修無常想住不放逸由住如是不放逸故恒自思惟我之壽命儻得更經七日六日四日三日二日一日一時半時須臾或經食頃或從入息至於出息或從出息至於入乃至存活經爾所時於佛聖教精勤作意修習瑜伽劑爾所時於佛聖教我當決定多有所作如是名爲不緩加行義學多樂聽讀禪宗唯精內觀然教觀二門闕一不可若但觀心而不尋教墮闇證上慢之愚若但尋教而不觀心受執指數寶之誚有不達者遞相是非今宗鏡廣搜祖教意足請爲微細開扸以決深疑教觀難明須分四句云一教門非理門教是能通理是所通能所異故二理門非教門吾聞解脫之中無有言說故三教門卽理門文字卽解脫故四理門卽教門解脫卽文字故又以門對教四句分一得教不得門文字法師是二得門不得觀慧禪師是三得門復得教聞慧法師是四門教俱不得假名阿練若是又或隨方便之詮則執權害實若達圓頓之教則了實開執權則教觀兩分了實則人法一旨人法一旨則境智俱冥觀兩分則信法雙現法雙現則有觀有聞境智俱冥則無內無外斯乃隨根利鈍有此開遮若能就旨圓融無取捨則塵塵合道信行同法行之機念念歸宗教門等觀門之旨如是則無一心可照誰執觀門無一法可聞孰論教道方入宗鏡與此相應未達斯門終成隔礙且教中具述有二種修行人一是信行二是法行薩婆多明此二人位在見道因聞入者是爲信行思入者是爲法行曇無德云位在方便自見法少憑聞力多後時要須聞法得悟名爲信憑聞力少自見法多後時要須思惟得悟名爲法行止觀云若論利鈍者法行利內自觀法故信行鈍藉他聞故又信行利一聞卽悟故法行鈍歷法觀察故或俱利或俱鈍行人聞慧利修慧鈍法行人修慧利聞慧鈍已上且約三師所說自然不可偏執觀心與教道定據聽學與坐禪今若得一心萬邪滅則何心而非教若一聞千悟獲大摠持何教而非心何教而非心則心外無法何心而非教則法外無心更約智者大師對法行二人以止觀安心隨四悉檀意以逗機宜令入道師卽問言汝於定慧爲志何等其人若言我聞佛說善知識者如月形光漸漸圓又如梯隥漸漸增高巧說轉令心得道大因緣志欣渴飮如犢逐母當知是則信行人若言我聞佛說明鏡若不動色像自分明淨水無波魚石自現欣捨惡覺如棄重檐知是則法行人也旣知根性於一人所八番安心善男子無量劫來飮狂散毒馳逐五昇沈三界猶如猛風吹兜羅毦大熱沸鑊煮豆昇沈從苦至惱從惱至苦何不息心達以一其意意若一者何事不辦苦集得一則不輪迴無明得一不至於行乃至不至老摧折大樹畢故不造新六弊得一則度彼唯此爲快善巧方便種種因緣種種譬喩廣讚於止發悅其情是名隨樂欲以止安心又善男子如天亢旱河池悉乾萬卉燋枯百穀零落娑伽羅王七日構雲四方霔雨大地霑洽一切種子皆萌芽一切根株皆開發一切枝葉皆鬱茂一切華果皆敷榮人亦如以散逸故應生善不復生已生善還退失禪定河乾道品樹滅萬善燋枯百福殘悴華道果不復成熟若能閑林一意內不出不入靜雲興也發諸禪定卽是降雨也功德叢林煖頂方便眼智明覺信忍順忍無生寂滅忍乃至無上菩提悉皆剋獲善巧方便種緣喩廣讚於止生其善根是名隨便宜止安心也又善男子夫散心者惡中之惡無鉤醉象踏壞華池穴鼻駱駝飜倒負馱於掣電毒逾蛇舌重沓五翳埃藹曜靈睫近霄遠俱皆不見若能修定如密室中燈能破巨闇金鎞抉膜空色朗然一指二指三指皆大雨能淹囂塵大定能靜狂逸止能破散虛妄滅矣善巧方便種種緣喩廣讚於止破其睡散是名對治以止安心也又善男子若在定能知世間生滅法相亦知出世不生不滅法相如來成道猶尚樂定況諸凡夫有禪定者如夜見電光卽得見道破無數億洞然之惡乃至得成一切種智善巧方便種種緣喩廣讚於止卽會眞如是名隨第一義止安心也其人若言我聞寂滅都不入懷聞分別聽受無厭卽應爲說三惡燒然駝驢重楚餓鬼飢渴不名爲苦癡闇無聞不識方乃是大苦多聞分別樂見法法喜樂以善攻惡樂無著阿羅漢是名爲最樂從多聞人聞甘露樂如教觀察知道遠離坑埳直去不善巧方便種種緣喩廣讚於觀發悅其情是名隨樂欲以觀安心又善男子月開蓮華日興作務商應隨主彩畫須膠坏不遇火須臾用盲不得導一步不前行無觀智亦復如是一切種智以觀爲根本無量功德之所莊嚴善巧方便種種緣喩廣讚於觀生其功是名隨便宜以觀安心又善男子智者識怨不能害武將有謀能破强敵非風何以卷雲非雲何以遮熱非水何以滅火非火何以除闇析薪之斧解縛之刀豈過智慧善巧方便種種緣喩廣讚於觀使其破惡是名對以觀安心又善男子井中七寶闇室甁盆要待日明日旣出已皆得明了須智慧眼觀知諸法實一切諸法中皆以等觀入般若波羅蜜最爲照明善巧方便種種緣喩#廣讚於令得悟解是名第一義以觀安心如是八番爲信行人說安心也其人若云我樂息心默以復默損之又損之遂至於無爲不樂分坐馳無益此則法行根性當爲說止汝勿外尋但內守一攀覺流動皆從妄生如旋火輪輟手則息洪波鼓怒風靜則澄淨名經云何謂攀緣謂有三界何謂息攀緣#謂心無所瑞應經云其得一心者則萬邪滅矣龍樹實法不顚倒念想觀已除言語法皆滅量衆罪除淸淨心常一如是尊妙人則能見般若夫山中幽寂神仙所讚況涅槃澄靜賢聖尊崇佛話經云比丘在聚身口精勤諸佛咸憂比丘在山息事安臥諸佛皆喜況復結跏束手緘脣結舌思惟寂相心原一止法界洞寂豈非要道唯此爲貴餘不能及善巧方便種種因緣種種譬喩#廣讚於止發悅其心是名隨樂欲以止安心其人若云我觀法相只增紛動善法不明當爲說止止是法界平正良田何法不備止捨攀緣卽是檀止體非卽是戒止體不動卽是忍止無間雜卽是精進止則決定卽是禪止法亦無止者亦無卽是慧因止會非止非不止卽是方便一止一切止卽是願止止愛止止見卽是力此止如佛止無二無別卽是智止具一切法卽是秘藏但安於止何用別修諸法善巧方便種緣喩令生善根卽是隨便宜以止安心也若言我觀法相散睡不除者當爲說止大有能止是壁定八風惡覺不能入止是淨水蕩於貪婬八倒猶如朝露見陽則晞止是大怨親俱愍能破恚怒止是大明呪癡疑皆止卽是佛破除障道如阿伽陁藥徧治一如妙良醫呪枯起死善巧方便種種緣喩令其破惡是名對治以止安心其人若言我觀察時不得開悟當爲說止止卽體眞照而常寂止卽隨緣寂而常照止卽不止止雙遮雙照止卽佛母止卽佛父亦卽父卽母止卽佛師佛身佛眼佛之相好佛藏佛住處何所不具何所不除善巧方便種種緣喩廣讚於是爲第一義以止安心彼人言止狀沈寂非我悅樂當爲說觀推尋道理七覺中有擇覺支八正中有正見六度中有般若於法門中爲主爲導乃至成佛正覺大覺徧覺皆是觀慧異名當知觀慧最爲尊妙如是廣讚爲隨樂欲以觀安心若勤修觀能生信解脫解脫知見知病識藥化道大行衆善普會莫復過觀是爲隨便宜以觀安心觀能破闇能照道能除怨能得寶傾邪山竭愛海皆觀之力是爲隨對治以觀安心若觀法時不得能心慮虛豁朦朧欲開但當勤觀開示悟入是爲用第一義以觀安心是爲八番爲法行人說安心也復次人根不定或時迴薩婆多明轉鈍爲利成論明數習則利乃始終論利鈍不得一時辯也今明衆生心行不定或須臾而鈍須臾而利任運自爾關根轉亦不數習或作觀不徹因聽卽悟久聽不解暫思卽決是故更論轉根安心若法行轉爲信行逐其根轉用八番悉檀而授安心若信行轉成法行亦逐根轉用八番悉檀而授安心得此意廣略自在說之不轉合有三十二安心也自行安心者當察此心欲何所樂若欲息妄令念相寂然是樂法行若樂聽聞徹無明底是樂信行樂寂者知妄從心出息心則衆妄皆靜若欲照知須知心心原不二則一切諸法皆同虛空是爲隨樂欲自行安心其心雖廣分別心及諸法信念精進毫善不生卽當凝停莫動諸善德因靜而生若凝停時彌見沈寂都無進忍當計校籌量策之令起若念念不住如汗馬奔逸卽當以止對治馳蕩若靜默然無記與睡相應卽當修觀破諸昏塞修止旣久不能開發卽應修觀觀一切法無礙無異怗怗明漸覺如空修觀若久闇障不除宜更修止止諸緣念無能無所所我皆寂空慧將生爲自修法行八番善巧布歷令得心安信行安心者或欲聞寂定如須彌不畏八動卽應聽止欲聞利觀破諸煩惱如日除闇卽應聽聽觀多如日燋芽卽應聽止潤以定水聽定淹久如芽爛不生卽應聽觀令風日發使善法現前或時馳覺一念叵住卽應聽以治散心或沈昏濛濛坐霧卽當聽觀破此睡熟或聽止豁豁卽專聽止或聞觀朗朗卽專聽觀是爲自修信行八番巧安心也法行心轉爲信行信行心轉爲法行皆隨其所宜巧鑽硏之自行有三十二化他亦三十合爲六十四安心也復次信法不孤立聞思相資如法行者隨聞一句體寂湛然妄皆遣還坐思惟心生歡喜又聞止已還更思惟卽生禪定又聞於止還卽思惟妄念皆又聞止已還更思惟朗然欲悟又聞觀已還更思惟心大歡喜又聞觀已還更思惟善破惡欲悟等准前可知此乃聽少思多爲法行非都不聽法也信行端坐思惟寂滅欣踊未生起已聞止歡喜甘樂端坐念善不能發起已聞止精進倍更增多端坐治惡惡不能遣起已聞止散動破滅端坐卽眞道不啓起已聞止豁如悟寂是爲信行坐少聞多非都不思惟前作一向根性今作相資根性就相資中復論轉不轉亦有三十二安心化他相資亦有三十二安心合六十合前爲一百二十八安心也夫心地難安違苦順樂今隨其所願逐而安之譬如養生或飮或食適身立命養法身亦爾以止爲飮以觀爲食藥法亦兩或丸或散以除冷熱無明病以止爲丸以觀爲散如陰陽法陽則風日陰則雲雨雨多則爛日多則燋陰如定陽如慧定慧偏者皆不見佛性八番調和貴在得意一種禪師不許作觀唯專用止引偈思思徒自思思思徒自苦息思卽是道思終不睹又一師不許作止專在於觀引偈止止徒自止昏闇無所以止止卽是道觀觀得會理兩師各從一門入以己益教他學者不見意一向服乳漿猶難得況復醍醐一向作解者佛何故種種說耶天不常晴不專散食不恒飯世間尚爾況出世耶今隨根隨病迴轉自行化他有六十四若就三番止觀卽三百八十四又一心止觀復有六十合五百一十二三悉檀是世間安心世醫所治差已復生一悉檀是出世安心如來所治畢竟不發出世法互相成顯若離三諦無安心處若離止觀無安心法若心安於諦一句卽足如其不安巧用方便令心得安目之羅不能得鳥得鳥者羅之一目耳衆生心行各各不同或多人同一心行或一人多種心行如爲一人衆多亦然如爲多人一人亦然須廣施法網之目捕心行之鳥耳如是委細種種安心利鈍齊收自他兼利若有聞者頂戴修行宗鏡錄卷第四十四音義古拜反至也舍也 耄莫報反老耄也 虧去爲反缺也 鄙方美反陋也恥 也邊兮反牢也 匿女力反藏也 胝丁尼反皮厚也 殞干敏反漫也郞丁反年也 孺而遇反小也 腠倉奏反膚腠也 頹杜回反奏醉反憔悴也 皺側救反面皺也 殂昨胡反死也 洎其冀反閏也以盈反大海也 渤蒲沒反 垣胡官反垣牆也 邇兒氏反近也思兗反又思絹反 橦直降反撞打也 矯居夭反詐也 舂書容反市緣反 杵昌與反 澆古堯反 漓呂之反奴朗反久地 痰徒甘反胸上水病也 蝎許蝎反 蚰以周反以然反 蛆七余反虫在肉中也 螫施隻反虫螫毒 隥都鄧反梯也當沒反呵也 眊仍吏反氅㲘也 鬱紆物反 茂莫候反盧各反 駝徒何反駱駝 馱唐佐反負也 沓徒合反重也於蓋反  鎞邊奚反敍鎞 抉於決反抉出也 瞙慕各反目不明也古紅反擊也 埳苦感反埳陷 坏芳杯反 輟陟劣反止也巳也香衣反日氣乾 朦莫紅反 朧盧紅反朦朧 濛莫紅反空濛細雨薄故反捉也丁未歲分司大藏都監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