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4_0339_c_01L종경록 제60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무릇 이 3성(性)의 법은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일 이것이 동일하다 말하면, 불합(不合)에서 이르되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이것은 있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이것은 없다”고 했으며, 만일 이것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또 이르되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어서 이른바 성품이 없다[無性]”고 했다.
【답】 이 3성의 법문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비밀한 뜻에서 말씀한 바라, 모든 식(識)의 일어난 곳이면 교의 그물[敎綱]이 근거되는 까닭이니, 만일 그에 즉(卽)하고 그를 취한다면 모두가 무릇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에 떨어지고, 만일 그를 여의고 그를 버린다면 다 같이 거룩한 지혜의 문을 잃게 되리라.
그런 까닭에 장법사(藏法師)는 화엄종(華嚴宗)에 의하여 3성의 같고 다름의 뜻을 해석하였다.
“1의 원성실성의 진여에는 두 가지 뜻이 있나니, 첫째는 변하지 않음[不變]이요, 둘째는 인연을 따름[隨緣]이다.
2의 의타기성에도 두 가지 뜻이 있나니, 첫째는 있음과 비슷함[似有]이요, 둘째는 성품이 없음[無性]이다.
3의 변계소집성에도 두 가지 뜻이 있나니, 첫째는 뜻에서는 있음[情有]이요, 진리에서는 없음[理無]이다.
진여의 변하지 않음과 의타기성의 성품의 없음과 변계소집성의 진리에서는 없음으로 말미암으니 이 세 가지로 말미암아 3성은 한 동아리이며, 또 진여의 인연을 따름과 의타기성의 있는 바 비슷한 것과 변계소집성의 뜻에서 있음의 이 세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또한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참됨은 허망의 끝을 겸하고 끝은 참된 근원에 사무침을 구하여 성품과 모양은 융통하여 막힘도 없고 거리낌도 없다.
【문】 의타기성은 있음과 비슷함은 어찌 변계소집성에서의 뜻에서는 있는 것과 같겠는가.
【답】 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다름이 없다. 첫째는 저 변계소집성에서의 집착이 진실과 비슷하기 때문에 다름이 없는 법이요, 둘째는 만일 변계소집성을 여읜다면 비슷함과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 안의 인연을 따름 역시 그러하여 집착한 바가 없음으로써 인연을 따름도 없기 때문이다.
또 3성에는 각각 두 가지의 뜻은 있되 서로가 어기지 않기 때문에 다름의 성질은 없다.
또한 원성실성 같은 것은 비록 인연을 따르면서 염오(染汚)와 청정(淸淨)을 이룬다 하더라도 항상 제 성품[自性]의 청정함을 잃지 않으며 다만 제 성품의 청정함 만을 잃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능히 인연을 따르면서 염오와 청정을 이룬다.
마치 밝은 거울이 염오와 청정을 나타내면서도 항상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잃지 않는 것과 같아서 거울의 밝고 깨끗함만을 잃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염오와 청정한 모양을 나타낼 수 있나니, 염오와 청정을 나타냄으로써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알며 거움이 밝고 깨끗함으로써 염오와 청정을 나타낼 줄 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뜻은 바로 하나의 성품일 뿐이다.
비록 청정한 법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거울의 밝음을 더하지 않고, 비록 염오의 법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거울의 깨끗함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역시 이로 말미암아서 도리어 거울의 밝고 깨끗함을 나타내나니, 진여 또한 그리하여 동요하지 않는 성품의 청정이 염오와 청정을 이룰 뿐만 아니라 역시 염오와 청정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성품의 청정을 나타내며, 염오와 청정을 파괴하지 아니하고 성품의 청정을 밝힐 뿐만 아니라 역시 성품의 청정으로 말미암아 염오와 청정을 이룬다. 이 때문에 두 가지 뜻은 전체가 서로 거두어져서 하나의 성품이요 둘이 없거늘, 어찌 서로가 어기겠는가.
의타기성의 성품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있음과 비슷함이 이루어지게 되고 있음과 비슷함이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성품이 없다. 이는 곧 성품이 없으면서 곧 인연이요, 인연은 곧 성품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
변계소집성 중에서는, 비록 또 뜻에 당하여 집착과 일치하게 있음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러나 도리에서는 마침내 이것은 없다.
없는 곳에서 멋대로 있다고 헤아리기 때문이니, 마치 말뚝에 대해 멋대로 귀신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과 같다.
이제 이미 멋대로 헤아린 것이라 도리에서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나니, 그러므로 둘이 없고 하나의 성품일 뿐이다.
【문】 진여 이것은 있는 것인가.
【답】 아니다. 인연을 따르되 변하지 않기[隨緣不變] 때문에 공이요, 진여는 허망한 생각을 여의기 때문이다.
【문】 진여 이것은 없는 것인가.
【답】 아니다. 변하지 않되 인연을 따르기[不變隨緣] 때문이요, 공하지 않기 때문이요, 성인의 지혜로 행한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문】 진여 이것이 또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것인가.
【답】 아니다. 두 성질이 없기 때문이요, 서로가 어김을 여의기 때문이다.
【문】 진여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답】 법을 갖추었기 때문이요, 쓸모없는 의론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 의타기경 이것은 있는 것인가.
【답】 아니다. 연기(緣起)는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관(觀)에 나아가 버리기 때문이요, 원성실성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문】 의타기성 이것은 없는 것인가.
【답】 아니다. 성품이 없이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요, 능히 생김이 없음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며, 변계소집성과는 다르기 때문이요, 이것은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문】 의타기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답】 아니다. 두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서로가 어김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문】 의타기성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답】 아니다. 뜻이 많은 문[多義門]이 있기 때문이요, 쓸모없는 의론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문】 변계소집성 이것은 있는 것인가.
【답】 아니다. 도리에서는 없기 때문이요, 체성과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문】 변계소성 이것은 없는 것인가.
【답】 아니다. 뜻[情]에서는 있기 때문이요, 모양 없음의 관[無相觀]의 경계이기 때문이며, 진리를 능히 가리기 때문이다.
【문】 변계소집성 이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답】 아니다. 두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문】 변계소집성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인가.
【답】 아니다. 집착하는 성질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는 집착을 도와주면서 말해 마쳤고, 이제는 집착이 허물이 되는 것을 말하겠다.
만일 진여가 한결같이 이는 있는 것이라 헤아린다면 두 가지의 허물이 있나니, 첫째는 인연을 따르지 아니하며, 둘째는 요인(了因)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문】 교(敎)에서 이르되, “진여는 응연(凝然)하여 항상하다”고 했으므로, 이미 인연을 따르지 않거늘 어찌 이것이 허물인가.
【답】 성인께서 “진여는 응연하다”고 말한 것의 설명은 바로 인연을 따라 염오와 청정이 이룩될 때에, 항상 염오와 청정을 지으면서도 자체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것이 곧 무상[無常]함과 다르지 않은 항상함이므로 이름 하여 불사의한 항상함[不思議常]이라고 한다. 모든 법을 짓지 않으면서 뜻[情]에서 이른바 응연함과 같다는 말이 아니며, 무상함과 다르지 않은 항상함이라 뜻의 밖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름하여 진여의 항상함[眞如常]이라고 한다.
경에서 이르되, “물들지 않으면서도 물이 듦은 항상함이 무상함이 된다 함을 밝히는 것이요, 물들면서도 물이 들지 않음은 무상함을 지을 때에도 항상함을 잃지 않는다고 함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항상함과 다르지 않은 무상이기 때문에 진여는 무상하다고 설명한다.
경에서 이르되, “여래장(如來藏)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원인을 주면서 다 함께 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또 의타기성 이것은 생멸하는 법이라 역시 항상함과 다르지 않는 무상함과 무상함과 다르지 않은 항상함이 있게 된다.
모든 연기(緣起)의 무상한 법은 곧 제 성품이 없어야 비로소 연기를 이루나니, 그러므로 항상하는 성품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무상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르되,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이것이 무상하다는 뜻이다”고 하였나니, 이것이 곧 항상함과 다르지 않으면서 무상함을 이루는 것이다.
또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이것이 곧 성품이 없는 것이니, 소멸이 아닌 연기라야 비로소 성품이 없다고 말하며 이것이 바로 무상함과 다르지 않은 항상함의 것이다.
경에서 이르되, “물질이 곧 공이요 물질이 소멸된 공이 아니다”고 했다.
또 중생이 곧 열반이라 다시는 소멸하지 아니한다.
이것과 진여의 두 가지 뜻은 같나니, 곧 진리와 세속이 쌍으로 원융하여 두 가지이면서도 두 가지가 없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되, “지혜의 장애로 심히 어두워짐은 진리와 속진을 따로따로 고집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진여가 만일 인연을 따르며 염오와 청정을 이루지 않는다면, 염오와 청정 등의 법은 곧 의지할 바가 없고 의지할 바가 없이 있는 법이라 또 상견(常見)에 떨어진다.
또 진여가 만일 있다면 곧 염오와 청정을 따르지 않으리니, 염오와 청정의 모든 법은 이미 자체가 없는지라 진여 또한 따르지 않고 있는 법을 얻지 못하므로 또한 이것은 단견(斷見)이다. 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4구(句)에 집착하는 것도 모두가 단견ㆍ상견에 떨어진다.
만일 의타기성이 있다고 고집하면 이미 자체가 있는지라, 인연을 의뢰하지 않기 때문에 인연 없이 있는 법이므로 이것은 곧 상견이다.
또 집착으로 말미암아 있다면 곧 인연을 의뢰하지 아니하며, 인연을 의뢰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법을 얻지 못하므로 이는 곧 단견이다.
“의타기성 이것은 있다”하는 뜻은 곧 있다 함이 허물이라면, 무엇 때문에 섭론(攝論)에서 이르되 “의타기성은 있는 것”이라고 했는가.
이것은 곧 공과 다르지 않은 존재[有]로서, 인연을 따르며 체성이 없기 때문이요 하나하나의 인연 중에는 짓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연으로 말미암아 지음이 없어야 연기(緣起)가 되나니, 그러므로 존재가 아닌 존재로서 의타기성의 존재가 되나니 이는 곧 움직이지 않는[不動] 진제(眞際)가 모든 법을 건립한 것이다.
만일 의타기성이 말과 같이 있다면 곧 연기가 존재하는 성질이며, 인연이 만일 존재하는 성질이라면 곧 서로가 의뢰하지 않으며, 서로가 의뢰하지 않기 때문에 곧 의타기성을 무너뜨리며, 의타기성을 무너뜨린다면 진실로 존재를 집착하는 까닭이다.
그대가 공에 떨어질까 두려운지라 존재를 세워서 말하지 않으면, 인연으로 일어난 법은 제 성품이 없음을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연기를 무너뜨리고 이내 공의 없는 데로 떨어진다.
또 만일 의타기성이 없다고 집착한다면 역시 두 가지 허물이니, 의타기성 이것이 없는 법이라면 곧 인연으로 일어나는 바도 없고 있는 법을 얻지 못하므로 이는 곧 단견이다.
【문】 만일 연생(緣生)이 공하여 없다고 설명하면 곧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중론(中論)에서 “연생은 필경공(畢竟空)”이라고 널리 설명했는가.
【답】 성인께서 연생이 공이 된다고 말씀한 것은 바로 존재와 다르지 아니한 공이다. 이는 곧 움직이지 않는 연생으로서 실상(實相)의 법을 말씀한 것이다.
만일 연생이 말과 같이 공이라면 곧 연생은 없을 것이요, 연생이 없기 때문에 곧 공에 집착하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그대가 존재에 떨어질까 두려운지라 공을 세워서 말하지 않으면, 성품이 없는 연생을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性空)을 잃기 때문에 도리어 망정(妄情) 안의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청변(淸辯)은 존재를 이루기 위하여 짐짓 존재를 깨뜨렸고, 호법(護法)은 공을 이루기 위하여 짐짓 공을 깨뜨린 것이니, 마치 뜻에 집착함이 없는 이것이 곧 단견의 허물인 것과 같다.
만일 없음의 법이 의타기성이 된다고 설명하면 없음의 법은 인연이 아니니, 인연이 아닌 법은 곧 상견이다. 내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에 집착하는 모두는 단견ㆍ상견의 두 가지 허물을 이룬다.
만일 변계소집성 중에서 집착한 바가 있다고 헤아린다면, 거룩한 지혜로 비추는 이치로서는 공하지 않아야 하리니, 이것이 곧 상견이다.
만일 허망한 집착으로 도리에서는 없다[理無]고 두루 헤아린다면 곧 뜻에서는 있음[情有]을 잃기 때문에 이것은 단견이다. 내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모두도 위와 같은 허물을 갖추게 된다.
위에서는 허물을 도와 주면서 말했고, 이제부터는 덕(德)을 나타내야겠다.
진여 이것은 존재한다는 이치이니, 왜냐하면 미혹과 깨침의 의지할 바이기 때문이요, 공하지 않기 때문이며,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 이것은 공하다는 이치이니, 인연을 따르기 때문이요, 염오와 상대되기 때문이다.
진여 이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뜻이니, 덕을 갖추었기 때문이요, 어김과 좇음이 자재하기 때문이며, 녹아 어울리기 때문이다.
진여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뜻이니,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기 때문이요, 결정코 취하려 해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타기성 이것은 있다는 뜻이니 성품이 없는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타기성 이것은 없다는 뜻이니, 인연으로 이루어지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의타기성 이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이치이니,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의타기성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뜻이니 어느 하나를 취하려 해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 이것은 있다는 뜻이니, 망정에 결부되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 이것은 없다는 뜻이니, 도리에 결부되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 이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뜻이니 이로 말미암아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뜻이니,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집착하면 단견ㆍ상견의 두 허물이 되고, 집착하지 아니하면 성덕(性德)의 문을 이루게 되나니, 망정만을 없앨지언정 법까지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여의지 않고서 진리를 말하면 있음의 본래 끝을 보고, 없음에 두지 않으면서 법을 관하여 없음의 참 근원을 알리니, 그러면 있고 없음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있고 없음에서 있지도 않거늘, 어찌하여 가지고 버림에 생각을 침범하고 단견과 상견에 미혹되겠는가.
이야말로, 셋의 성질이 하나의 성질이라 망정이 있는 데도 이것이 곧 진공(眞空)이며, 하나의 성질이 셋의 성질이라 진여이면서, 능히 연기를 이루리라.
종일토록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아니하여 존재는 공의 근원에 사무치고, 종일토록 공하면서도 공하지 아니하여 공은 존재의 끝을 겸한다.
저절로 한 마음의 의지하는 데 없으면 만법이 다 함께 한가하나니, 경계와 지혜가 상응하고 진리와 수행이 융즉(融卽)하여야 종경(宗鏡)에 들어가 밝고 깨끗하며 티가 없어서, 예와 이제를 꿰뚫어 비추고 그 빛은 온갖 무리를 머금으리라.
【문】 만일 3성을 세우지 않으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 만일 3성이 없다면 범부와 성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큰 인연을 잃어서 단견ㆍ상견의 허물을 이루리라.
섭론(攝論)에서 이르되, “세간 중에서는 분별(分別)과 의타(依他)의 두 법을 여의면 다시는 그 밖의 법이 없다. 아뢰야식(阿賴耶識) 이것은 의타의 성질이요, 나머지의 온갖 법은 분별의 성질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온갖 법을 모두 다 포섭하나니, 삼계(三界)는 식(識)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에서 말씀한 3성의 법이란, 염오의 갈래[染汚分]와 청정의 갈래[淸淨分]이니 그 두 갈래는 의타의 성질에 대한 설명이요, 분별의 성질 이것은 염오의 갈래며, 진실의 성질 이것은 청정의 갈래이다.
마치 금과 흙과 저장의 세 가지가 있어서 가히 볼 수 있음과 같나니, 첫째는 지계(地界)요, 둘째는 흙이며, 셋째는 금이다.
지계 안의 흙에서는 있는 것이 아닌데도 가히 볼 수 있고, 금은 실로 있는데도 가히 볼 수가 없다. 만일 불로 태우면 흙이면 나타나지 않되 금이면 나타난다.
또 지계 안에서 흙의 모양이 나타날 때는 이 허망한 바탕이 나타나고, 금의 체성이 나타날 때는 이 청정한 바탕이 나타나나니, 그러므로 지계에도 두 갈래가 있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음이라, 이 식의 성품[識性]이 아직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의 불에 타지 못했을 적에는 식의 성품 가운데서 허망한 분별의 성질은 나타나지만 청정한 성품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식의 성품이 만일 분별이 없는 지혜의 불에 타게 된다면 식의 성품 가운데서 실유(實有)의 청정한 성품은 나타나지만 허망한 분별의 성질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라. 허망은 진리에 의존하여 일어나면서도 진리를 능히 덮고, 진리는 허망으로 인하여 나타나면서도 허망을 능히 빼앗나니, 진리와 허망은 체성이 없어서 모두 식의 성품에 의지함이 마치 흙과 금이 모두 지계(地界)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섭론(攝論)에서 물었다. “어떻게 하나의 식(識)이 갖가지의 식의 모습인 8종의 식과 11종의 식을 이루게 되는가.”
【답】 의타기성을 나타내려 하면 세 가지 성질이 갖추어져 있다. 하나의 식이 종자로부터 나는 이것은 의타요, 갖가지 모습이 있는 이것은 분별(分別)이며, 분별은 실로 아무 것도 없는지라 이것은 진실한 성질이다.
하나의 식은 하나의 본식(本識)을 말하나니, 본식이 변하고 달라지면서 여럿의 식이 되기 때문이다.
【문】 3성의 행상(行相)에는 가정[假]이 있고 진실[實]이 있어서 뜻으로서는 나눌 수가 있거늘, 어째서 또 세 가지의 성품 없음[三無性]을 말하고 그리고 온갖 법은 모두가 제 성품이 없다고 하는가.
【답】 논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로 이 3성에 의해
저 3무성(無性)이 성립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비밀한 뜻으로
온갖 법은 성품이 없다고 말씀했네.

처음은 곧 모양[相]의 성품 없음이요
그 다음은 자연(自然)의 성품 없음이며
마지막은 앞의 변계소집성의
나[我]와 법(法)의 성품을 여윔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법은 으뜸가는 이치[勝義]이니
또한 이것은 바로진여인지라
언제나 여(如)한 그 성품이기 때문에
곧 유식(唯識)의 진실한 성품일세.

곧 이 앞에서 말한 3성에 의하여 저 뒤에서 세운 세 가지 성품 없음을 설명한 것이니, 바로 모양ㆍ생김[生]ㆍ으뜸가는 이치의 성품 없음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비밀한 뜻으로 ‘온갖 법은 모두가 제 성품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나, 성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밀한 뜻과 말씀으로 분명한 이치가 아님을 드러냈나니, 뒤의 두 성질의 것은 비록 체성은 없는 것이 아니어서 있다손 치더라도 어리석은 범부는 그것에 대해 더욱 더 실제로 이와 법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망령되이 집착하므로, 이것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
이 집착을 제거하기 위하여 부처 불세존은 있거나 없는 것에 대해 통틀어 성품이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어떻게 이것에 의해서 저 세 가지를 세우느냐 하면, 이 처음의 변계소집성에 의해서는 모양의 성품 없음[相無性]을 세운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체성이 마침내 없음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기 때문이다.
다음 의타기성에서는 생김의 성품 없음[生無性]을 세운 것이니, 이는 마치 허망한 일처럼 뭇 인연을 의탁하여 생기고 마치 자연의 성품을 망령되이 집착함과 같기 때문에 가정하여 성품이 없다고 말한 것이며, 성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의 원성실성에 의해서는 으뜸가는 뜻에 성품이 없음[勝義無性]을 세운 것이니, 곧 으뜸가는 이치는 앞의 변계소집의 나와 법의 성품을 여읨으로 말미암아 가정하여 성품이 없다고 말한 것이며, 성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큰 허공이 비록 뭇 물질을 두루 채운다 하더라도 이 뭇 물질은 성품이 없이 나타나게 됨과 같다.
내지 계경 중에서 설명된 성품이 없다는 말은 극히 분명한 이치가 아니므로, 지혜 있는 이들은 그것에 의하여 온통 온갖 법을 부정하면서 도무지 제 성품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해심밀경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양ㆍ생김ㆍ으뜸가는 이치의 제 성품이 없음을
이와 같이 나는 다 이미 보였나니
만일 부처의 이 비밀한 뜻 모르면
바른 도[正道]를 파괴하여 나아갈 수 없으리라.

모양이란 바로 변계소집성이요, 생김이란 바로 의타기성이며, 으뜸가는 뜻이란 바로 원성실성이다.
제 성품이 없다 함은, 이 세 가지 성품 위에서는 모두가 망령되이 나와 법을 집착하거나 자연의 제 성품을 제 나름으로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부처님의 비밀한 뜻을 모르고서 3성 위에서 세 가지 성품 없음을 말하면서 외도와 소승의 아집(我執)을 깨뜨리며 곧 보리와 열반을 부정하고 원성실성에 의하여 모두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바른 도를 잃고 무너뜨린지라 나아가 이를 수가 없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성품에 세 가지 성품이 없다 함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에서는 역시 없지 아니하고 다만 변계소집성의 허망된 고집인 나와 법에서만이 없기 때문에 성품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3성은 끝이 없고 어느 하나에서 전부 흡수하며, 진실과 허망은 서로서로 융화하고 성품과 모양은 걸림이 없다.
여래의 일대시교(一代時敎)의 항하 모래같이 많은 뜻의 문의 비밀한 뜻이 온통 3성의 문 안에 있어서 진리와 세속과 근본과 끝이 일시에 모두 흡수되나니, 유식의 바른 도리를 나타냄으로써 다시는 다른 바퀴자국은 없다.
의타기성 이것은 유식의 체성으로서, 의타기로부터 분별을 일으키면 이것이 곧 변계소집성이요, 의타기로부터 진실을 깨치면 이것이 곧 원성실성이니, 분별로 말미암아 1분(分)은 생사를 이루고 진실로 말미암아 1분은 열반을 이룬다.
분별하는 성품의 공함을 분명히 알면 곧 생사가 열반을 이루고, 진실한 성품의 존재[有]에 미혹하면 곧 열반이 생사를 이루나니, 모두가 이는 하나의 법이거늘 망정을 따라 뜻을 드러내며 셋을 이룬다.
3은 3이 아니면서 1의 도리가 원만하고 1은 1이 아니면서 3의 성품이 갖추어졌으며, 마르고 펴되 잃지 아니하고 숨고 나타나되 언제나 여여(如如)하며, 1도 아니고 3도 아닌지라 성품과 모양은 진실의 땅[實地]에서 없애고 3이면서 1인지라 차례의 항포[行布]는 뜻의 하늘[義天]에서 빛나나니, 요점을 추려서 돌아갈 바로는 이 종지(宗旨)보다도 우선한 것이 없다.
【문】 세 가지 능변(能變)의 모양은 이미 자세하게 진술했거니와, 소변(所變)의 모양은 어떻게 펼 것인가.
【답】 세 가지 능변은 이숙식(異熟識)과 사량식(思量識)과 요별경식(了別鏡識)이니, 이것이 능변의 자체(自體)이다. 소변이란 곧 견분(見分)ㆍ상분(相分)의 2분(分)으로서, 이것은 자체 부분에서의 변할 바이기 때문이요 이것은 자체 부분에서의 작용이기 때문에, 자체는 이 2분의 의지할 바임을 말한다.
식론(識論)에서 이르되, “어떻게 식에 의한 소변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가정하여 나와 법은 따로 진실한 존재가 아니라고 설명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온갖 것은 오직 식이 있을 뿐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 모든 식은 바뀌고 변하여
분별(分別)하고 분별한 바[所分別]이어서
이로 말미암아 그것은 다 없나니
때문에 온갖 것은 유식이니라.

이 모든 식이란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능변을 말하며, 그리고 저 심소(心所)는 모두가 능히 변하여 견분ㆍ삼분의 2분과 비슷해지므로 바뀌고 변한다고 이름 붙이어 소변의 견분이라 한다. 이를 말하여 분별이라 함은 모양을 능히 취하기[能取] 때문이요, 소변의 상분을 분별할 바라고 함은 취할 바[所取]를 보기 때문이다.
이 올바른 이치로 말미암아 저 진실한 나와 법은 식의 소변을 여의어서 모두가 결정코 있는 것은 아니니, 능히 취함과 취할 바를 여의면 따로 물건이 없기 때문이요, 진실한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님은 두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유위(有爲)과 무위(無爲)가 진실이거나 가정이거나 간에 모두가 식을 여의지 않나니, 식의 진실한 물건을 막고 여의게 된다는 말일 뿐이요 식을 여의지 않는 심소법(心所法) 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은 바뀌고 변한다[轉變] 함은, 모든 안의 식[內識]이 바뀌어서 나와 법의 바깥 경계 모양과 비슷해지는 것으로 이렇게 능히 바뀌고 변함이 나타나는 것을 곧 분별이라 한다. 허망한 분별을 세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곧 삼계(三界)의 마음과 심소로 이 집착하게 되는 경계를 이름하여 분별할 바라 하나니[所分別] 곧 진실로 나와 법의 성품이라고 망령되이 집착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분별은 바깥 경계의 변화로써 비슷하게 하는 가정의 나와 법의 모양이요, 저 분별할 바는 진실의 나와 법의 성품이니, 결정코 모두가 없음은 앞에서 교리(敎理)를 인용하여 이미 자세히 깨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것은 식이 있을 뿐이니, 허망한 분별은 극성(極成)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식의 법을 막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았기 때문에 진여 등 역시 성품이 있을 뿐이며, 이로 말미암아 더함[增]과 줄어짐[減]의 두 치우침을 멀리 여의면 유식(唯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중도(中道)에 계합된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 모든 식이 바뀌고 변한다 함은, 바뀌고 변한다[轉變]는 이것은 고쳐지고 옮아진다[改轉]는 뜻이어서 하나의 식의 체성이 고쳐지고 옮아져서 두 가지의 모양이 되어 생기면서 자체와는 달라진다는 것이니, 곧 견분은 능히 취함의 작용이 있고 상분은 질애(質礙)의 작용이 있다. 식의 자체가 바뀜으로 말미암아 능히 취함이 생기고 질애가 있기 때문에 소변의 견분을 이름하여 분별이라고 한다.
능히 모양을 취한다 함은, 앞의 소변 중에서 소변의 견분을 이름하여 분별이라 하며, 이것은 의타기성으로서 소변에서 의타기의 상분을 능히 취하기 때문이다.
갖가지 변계소집성의 분별을 일으키는 이 식의 체성은 소변의 작용이요 능히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이라 하며, 그 식의 체성은 소변에서 의타기성의 상분이다.
집착하게 되는 상분과 비슷하다 함은 이름하여 분별할 바[所分別]이며 이것은 앞의 견분의 추할 바의 모양을 분별하기 때문이니, 식의 자체가 능히 반연한다[能緣]하여 분별이라 하는 말은 아니다.
분별의 소견을 일으킨다 함은 식의 작용이니, 상분과 견분이 다 함께 스스로가 증지(證知)함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미 식의 법을 막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진여 등도 이는 성품이 있을 뿐이다고 함은, 식의 법을 막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다는 말일 뿐이다.
진여와 심소는 역시 식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체성은 모두 있지만, 여기 이 자리에서는 식을 막거나 여의기만 하면 분별할 바[所分別]로서 존재하고, 식을 막지도 않고 여의지도 아니하면 진여 등은 존재하나니, 이치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 뜻에는 이미 능변(能變)으로서의 분별하는 식과 소변(所變)으로서의 경계는 다른 것을 의지하는 상분이 있는지라, 분별할 바의 마음 이외의 진실한 법 등은 결정코 모두 없나니, 진여와 심소 등의 법이 있을 뿐이요 모두 식을 여의지 않아도 아는 진실로 존재한다.
더함과 줄어짐의 두 치우침을 멀리 여읜다 함은, 마음 밖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더욱 더함의 치우침을 제거하고, 허망한 마음 등이 있기 때문에 줄고 덜어짐과 치우침을 여읜다.
줄고 덜어짐의 치우침을 여의기 때문에 없음을 부정하여 마치 공과 같다는 청변(淸辯) 등의 설명을 제거시키고, 더욱 더함의 치우침을 여의기 때문에 마음 밖에 법이 있다는 모든 소승의 고집을 제거시키면, 오직 식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중도에 계합되나니, 치우친 고집이 없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 여러 논사(論師)들의 설명한 바로는 통틀어 4분(分)의 뜻이 있다. 1은 상분(相分)이요, 2는 견분(見分)이요, 3은 자증분(自證分)이요, 4는 증자증분(證自證分)이다.
상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한 모양[實相]을 이름하여 상(相)이라 하나니, 체성이 바로 진여이며 이것은 진실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계의 모양[境相]을 이름하여 상이라 하나니, 감관과 마음이 함께 하면서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형태 있는 모양[相狀]을 이름하여 상이라 하나니, 여기에는 유위법의 형태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며,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에 다 통하고 이 식(識)만의 변할 바이다. 넷째는 뜻의 모양[義相]을 이름하여 상이라 하나니, 곧 능전(能詮) 아래서의 소전(所詮)의 뜻이다.
상분은, 바로 위의 네 가지 모양 가운데서 뒤의 세 가지 모양만을 취하면서 상분의 모양을 삼는다.
또 상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식이 단번에 변할 바가 바로 본질(本質)이다. 둘째는 식 등이 반연할 경계는 영상의 반연[影緣]만을 변화시키며 본질은 얻지 못한다.
2의 견분에서는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되, “스스로 반연할 바[所緣]에서 요별(了別)하는 작용이 있다”고 했다.
이 견분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지하며 보는지라[證見] 견(見)이라 하나니, 곧 세 가지 근본지(根本智)로서 견분이 그것이다. 둘째는 비추어 주는지라[照燭] 견이라 하나니, 이는 감관과 마음이 다 함께 비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능히 반연하는지라[能緣] 견이라 하나니, 곧 안의 삼분[內三分]이 같이 공통하게 능히 반연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생각하여 아는지라[念解] 견이라 하나니, 생각하여 소전(所詮)의 뜻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추측하는지라[推度] 견이라 하나니, 곧 비량(比量)의 마음으로 온갖 경계를 추측하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견(見) 가운데서 다섯 가지 형상 있는 감관과 안의 2분(分)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가 견분에 소속된다.
3은 자증분이니, 친히 증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견분이 상분을 반연하는 데에 어긋나지 않았는가를 잘 증명하기 때문이다.
4는 증자증분이니, 제3의 자증분이 견분을 반연하는 데에 어긋나지 않았는가를 친히 증명하기 때문이다. 증명할 곳으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이 4분의 이치는 통틀어 거울로써 비유하나니, 거울은 마치 자증분과 같고, 거울의 밝은 것은 마치 견분과 같으며, 거울의 형상은 마치 상분과 같고, 거울의 뒷 자루는 마치 증자증분과 같다.
이 4분은 네 분의 논자들이 뜻을 세우고 있다. 제1은 안혜(安慧)보살이 자증분의 1분을 세웠다.
식론(識論)에서 이르되, “이 자증분은 인연으로부터 나는 바다”고 했나니, 이것은 의타기(依他起)이기 때문에 짐짓 말하여 있다[有]고 한다. 견분ㆍ상분의 2분은 인연으로부터 나지 아니하며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망령되이 집착하면서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2분은 뜻에서는 있되[情有] 도리에서는 없다[理無]. 자증분만이 이는 의타기성이니, 종자가 있어서 나는 것이라 이는 진실로 있기 때문이다.
견분ㆍ상분의 2분은 다시는 변하여 생김이 없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이 두 가지도 이는 없으며, 없는지라 없는 것과 같다.
만일 호법(護法)보살에 준한다면, 바로 이것은 “있는 것이로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나니, 견분ㆍ상분의 2분은 체성이 있으면서 변화로 생기지만 아집과 법집의 두 가지는 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안혜는 능가경(能伽經)을 인용하여 이르되, “삼계(三界)의 샘이 있는[有漏] 심심소(心心所)는 모두가 이는 허망한 분별로 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8식의 견분ㆍ상분의 2분은 모두가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집착에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증분의 1분만이 있고 이것은 의타기성이니, 이것은 진실로 있기 때문이다.
밀엄경(密嚴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어리석은 범부들이 분별할 바의/바깥 경계는 실로 모두 없지만/습기(習氣)로 마음을 흐리게 한지라/그러므로 그와 서로 비슷하게 구르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이 어리석은 범부는 실로 자증분만을 의지하여 그 위에서 변계소집의 망정을 일으켜 변화로 체성이 없는 2분과 비슷하게 나타내나, 본디 진실한 이치로서는 2분은 그 진실한 체성이 없다. 다만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허망한 집착임을 분명히 모르고서 진실을 삼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논에서 이르되 “범부는 있다고 집착하고 성인은 없음을 통달한다”고 했다.
【문】 만일 상분ㆍ견분의 이 2분의 가정[假]이라 한다면, 마치 대지와 산하와 같은 것은 상분에 흡수되어 현재 보이는 것으로 이는 진실이거늘, 어떻게 가정이라 말하는가.
【답】 비록 보이는 산하 등이 이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원래 이는 허망한 집착에서 있는 바깥의 산하와 대지 등이다. 진실한 이치에서 논한다면, 모두가 자증분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아 집착한지라
마음은 바깥 경계와 비슷하게 구르는 것
저 보이는 것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마음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알라. 자증분을 여의고서 그 밖에 실로 견분ㆍ상분의 2분은 없다는 것이다.
제2는, 난타(難陁) 논사는 2분을 세우면서 유식을 이룬 것이다. 처음 종(宗)으로 표시한 것은 “곧 온갖 마음의 생김은 모두가 견분ㆍ상분의 2분에 있다”는 것이다.
견분과 상분의 2분은 바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두 가지 반연이다. 만일 상분으로 마음을 이끌음이 벗으면 마음의 법은 나게 되는 까닭이 없나니, 만일 능연의 견분이 없으면 누가 소연인 상분이 있음을 알겠는가. 곧 경계가 있고 마음 등이 있음으로써 유식을 이루는 것이다.
견분은 능변(能變)이 되고 상분은 바로 소변(所變)이니, 능소(能所)가 이루어짐에는 모름지기 2분을 갖추어야 한다.
견분과 상분은 바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니, 때로는 독영경(獨影境)을 반연하여 곧 같은 종자로 나기도 하고, 때로는 대질경(帶質境)을 반연하여 곧 다른 종자로 나기도 하나니, 종자로부터 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은 아니다. 만일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부처님도 몸과 국토 등의 갖가지 영상을 나타내지 않아야 한다.
안혜(安慧)는 도리어 힐난한다. “그대가 만일 상분을 세운다면, 어찌 마음 밖에 경계가 있지 않겠는가. 무엇을 유식이라 하는가.”
난타는 말한다. “견분 이것은 능연이요, 상분 이것은 소연이다. 소연을 껴잡아 능연을 좇는 것이니, 도로 이것은 유식이다.
또 그대가 만일 상분이 없다고 말한다면, 세우는 바 1분으로는 유식이 성립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안혜는 상분을 집착하며 ‘이것은 망정으로 있는 것’이라 하지만, 곧 제8식의 소연인 식 안이 상분의 종자요 이것이 상분의 소속이며 곧 종자 이것은 자증분의 현행을 능히 내고 인연과는 친한 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종자인 상분 이것이 망정(妄情)이라 한다면, 나서 현행(現行)할 바 자증분 역시 이것이 망정임을 왜 방해하겠는가. 종자식(種子識)을 어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자증분 이것이 망정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능히 내는 종자 역시 진실한 존재요, 곧 원인과 결과도 모두 진실이며, 상분을 증지[證]하는 이것도 진실한 존재이다.
이미 상분이 있는지라 곧 견분이 있고 능소(能所)가 이미 이룩된지라 곧 2분이 이룩되어 유식이 서게 된다.
또 다섯의 감관 이것이 제8의 상분이니, 만일 상분이면 이것은 변계소집성이거늘, 어찌 변계소집성의 감관이 있어서 다섯의 식[五識]을 발생할 수 있는가.
안혜는 이르되, “다섯의 감관을 의뢰하지 않고 다섯의 식을 발생한다. 다섯의 식은 다 같이 종자로부터 생긴다”고 한다.
【문】 만일 감관을 의뢰하지 않고 발생하며 종자로부터만이 생긴다면, 그대는 다섯의 식의 종자 이것은 제8의 상분으로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
【답】 인정한다. 이것은 제8의 상분이다.
따진다. “이미 그렇다면, 곧 종자 이것은 변계소집이요, 능히 내는 다섯의 식도 역시 변계소집이다.”
안혜는 말을 막으면서, ‘종자는 바로 제8식 위에서의 기분(氣分)일 뿐이니, 내서 현행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종자라 이름붙인 것이라 이것은 습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므로 진실이 아니다’라고 한다.
또 따진다. ‘모든 성인의 교법에서는 종자로부터 나는 것이면 진실이라 하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성립되면 과정이라 하거늘, 어찌 자정의 종자가 진실의 현행을 냄이 있겠는가. 만일 이것이 가정의 종자라면 어떻게 자기의 과보를 친히 갖겠는가.
만일 종자 이것이 가정법이라면 원인 중의 제8식은 인연으로 변한다는 뜻이 성립되지 아니하며, 만일 인연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면 곧 온갖 것에 위반된다’고 하면, 안혜는 더 말을 막지 못하리라.
이미 능소(能所)의 인연이 있다면 모두가 이는 진실이요, 의타기성이라면 곧 견분ㆍ상분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진실임을 인용하여 증거를 댄다면, 밀엄경(密嚴經)에서 이르되 “온갖 것에는 깨달음[覺]이 있을 뿐/깨달을 바[所覺]의 뜻은 모두가 없으며/능히 깨달음[能覺]과 깨달을 바 갈래는/저마다 저절로 구르느니라”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온갖 것에는 깨달음이 있을 뿐이라 함은 곧 유식(唯識)이라는 것이요, 깨달을 바의 뜻은 모두가 없다 함은 곧 마음 이외에 망령되이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경계는 없다는 것이다. 능히 깨달음과 깨달을 바 갈래라 함은 능히 깨달음 이것은 의타기성의 진실로서 견분이고 깨달을 바 이것은 의타기성의 진실로서 상분이라는 것이요, 저마다 저절로 구른다 함은 견분은 마음의 종자로부터 생기고 상분은 상분의 종자로부터 생긴다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2분을 세워야 유식이 비로소 성립된다.
서로 어김을 회통(會通)한다 함에서, 안혜는 따지면서 이르되 “만일 그렇다면, 앞에서 설명했던 밀엄경(密嚴經)과 능가경(楞伽經)의 두 글은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한다.
바르게 회통한다면, 앞에서 설명했던 경문은 바로 1분을 증명한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 밖에서 실로 아법(我法)이 있다고 집착하는 등을 막는 것일 뿐이요 또한 상분은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함도 막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제3은, 진나(陳那)보살은 3분(分)을 세우면서 앞이 논사들을 그르다 한다. 안혜는 1분을 세웠으나 그것은 체성만 있으면서 작용이 없으며, 난타는 견분ㆍ상분의 2분을 세웠으나 작용만이 있으면서 체성이 없으므로, 모두가 다 부족하다고 한다.
세운 이론이란, 양과(量果)의 뜻을 세운다. 논에서 이르되, “능량(能量)과 소량(所量)과 양과는 따로따로이다”고 했기 때문이다.
상분과 견분은 반드시 의지할 바 체성이 있기 때문에, 상분은 소량이 되고 견분은 능량이 되지만, 곧 반드시 자증분으로 증명을 한다면 이것은 양과이어야 한다.
비유컨대, 마치 자[尺]로 비단을 잴 때에, 비단은 소량이 되고 재는 사람은 능량이 되며 숫자를 기억하는 지혜는 양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견분이 상분을 반연하되 그릇되지 아니함은 모두가 자증분으로 말미암아 결과를 짓기 때문이다.
지금 안식(眼識)의 견분이 청색을 반연할 때에 결정코 황색을 반연하지 아니함은, 마치 견분이 전에 보지 못했던 경계를 반연하면서 갑자기 황색의 경계를 반연했을 적에 결정코 청색을 반연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자증분이 없다면 곧 견분으로는 스스로 기억할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3분을 세워야 되는 줄 알 것이다.
만일 자증분이 없다면 곧 상분ㆍ견분 역시 없다. 만일 2분이 있다고 말한다면 졀정코 자증분도 있어야 한다.
자증분은 비유하면 소의 머리와 같고 두 뿔은 상분ㆍ견분의 2분에 비유된다.
집량론(集量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경계와 비슷한 모양은 소량이요/모양을 능히 취함[能取]은 자증분이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경계의 비슷한 모양이 소량이라 함은 곧 상분은 바깥 경계와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요, 모양을 능히 취함이 자증분이라 함은 모양을 능히 취한다는 이것은 곧 견분이니 상분을 능히 취하기 때문이며, 자증분 이것이 곧 체성이다”고 했다는 것이다.
제4는, 호법(護法)보살은 4분(分)을 세운다. 종(宗)으로 세운 것으로는, 심심소(心心所)를 만일 미세하게 분별한다면 4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운 이론이란, 만일 제4분이 없으면 어느 법을 가져서 제3분의 양과가 되어 주는가. 그대 진나가 세운 3분이란 견분은 능량으로 경계를 요별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곧 자증분을 가져서는 양과가 되지만, 그대의 자증분 또한 능량으로 경계를 비춤이 있기 때문에 어느 법을 가져서 능량의 자증분의 양과가 되어 주겠는가. 모름지기 제4의 증자분을 가져서 제3분의 양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증거를 인용하건대, 밀엄경(密嚴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중생의 마음은 두 성품이어서/안과 바깥의 온갖 갈래이니/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함[能取]의 얽음[纏]으로/갖가지의 서로 다름을 보느니라”고 했다.
마음의 두 성품이라 함은, 바로 안[內]의 2분의 한 성품이 되고 견분ㆍ상분의 2분은 둘째 성품이 되므로, 곧 마음과 경계의 안과 바깥의 두 성품이다.
능히 취함의 얽음이라 함은 바로 능히 반연함의 거친 움직임[麤動]이니 이는 능연(能緣)의 견분이요, 취할 바의 얽음이라 함은 바로 이것이 상박(相縛)과 소연박(所緣縛)이다.
갖가지의 서로 다름을 본다 함은, 견분은 3량(量)에 다 통하므로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갖가지의 서로 다름을 본다는 것이니, 앞의 두 논사는 전혀 바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세 번째 논사 진나의 3분은 체성과 작용이 있는 듯 하지만, 만일 성립되는 양(量)에서라면 중도(中道)의 이치에서 아직은 부족하므로 다시금 제4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상분이 소량이 되고 견분이 능량이 되면 곧 자증분을 가져서 양과를 삼겠지마는, 만일 견분을 가져서 소량으로 삼고 자증분으로 능량을 삼는다면 다시금 어느 법을 가져서 양과를 삼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증자증분을 가져서 양과를 삼아야 만족한 것이다.
견분의 바깥 인연은 비고 성글어서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의 둘에 다 통하기 때문에 곧 견분은 자증분이 양과가 되는 것을 취하지 않지만, 안의 2분은 현량(現量)일 뿐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양과가 되어도 잘못이 없다.
무릇 양과가 되기 위해서면 모름지기 이는 현량이라야 양과가 되겠지만,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은 결정코 양과가 되지 못한다.
비유하면 마치 보증인(保證人)이 되는 것과도 같다. 반드시 인정이 두텁고 정직한 사람이라야 보증이 될 수 있고, 만일 허하고 실답지 못한 사람이면 감히 보증인으로는 될 수가 없다.
또 앞의 다섯의 식과 제8의 견분은 비록 이것이 현량이라고는 하더라도, 바깥의 반연인지라 곧 양과는 아니다. 무릇 양과라면 안의 인연이라야 양과가 된다.
또 제7식은 비록 이것이 안의 반연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비량(非量)인지라 역시 양과는 될 수가 없다.
무릇 양과가 되는 데는 두 가지 뜻이 갖추어진다. 첫째는 현량이요, 둘째는 안의 반연이다.
또 결과 중에서 뒤에 얻는 견분은 비록 이것이 현량이라 하더라도, 안에서 반연할 때에 영상의 인연[影緣]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양과는 아니니, 모름지기 세 가지의 뜻을 갖추어야 한다.
또 결과 중의 근본지(根本智)인 견분은 비록 친히 진여를 증득하고 영상을 변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양과는 아니니, 곧 마음의 본체를 갖추어야 한다.
모름지기 네 가지 이치를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현량이요, 둘째는 안에서의 반연이요, 셋째는 영상을 변화하지 아니함이요, 넷째는 이 마음의 본체이니, 그래야 양과가 된다.
또 논에서 이르되, “이와 같은 4분은 혹은 껴잡아 셋이 되기도 하나니 제4가 자증분을 껴잡아 들이기 때문이요, 혹은 껴잡아 둘이 되기도 하나니 뒤의 셋은 다 같이 능연(能緣)의 성질이기 때문에 모두가 견분에 속한다”고 했다.
여기서 본다[見]고 함은 바로 능연의 뜻으로서 혹은 껴잡아 하나가 되기도 하나니, 체성에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이르되, “제 마음으로 말미암아 집착하는지라/마음은 바깥의 경계와 비슷하게 구른다/저 보이는 것 있는 것이 아니니/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하느니라.
이와 같이 곳곳에서 한 마음 뿐임을 설명하였나니, 이 한 마음이란 말 또한 심소를 껴잡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와 같이 곳곳에서 한 마음뿐임을 설명한다 함은 바깥의 경계는 없기 때문이니, 한 마음이 있을 뿐인지라 안에서 집착하기 때문에 바깥 경계와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요, 결정코 바깥의 경계는 없다.
자기 마음이 있음을 인정하고 마음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통틀어 하나의 식이라 하며, 심소법(心所法)과 심상응법(心相應法)과 색법(色法)은 마음으로 변화한 바요, 진여는 식의 진실한 성품이니, 또 모두가 식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다 같이 유식이라 한다.
또 청량기(淸凉記)에서 논(論)을 인용하여 제4의 증자증분을 해석하되 “만일 이것이 없다면 무엇이 제3을 증명하겠는가. 마음 갈래[心分]는 이미 같은지라 모두가 증명하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해석하여 보자. 견분 이것은 마음 갈래라 자증분이 있어야 하고, 자증분 이것도 마음 갈래라 제4의 증명이 있어야 한다.
논에서 또 이르되, “자증분은 결과가 없어야 하나니, 모든 능량이란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견분 이것은 능량이라 자증분의 결과가 있어야 하고, 스스로 견분을 증명하고 헤아리는 것도 제4의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가 말을 못하게 할까 두려워서 이르되, “도리어 견분으로써 제3의 결과를 삼는다”고 하기 때문에, 다음의 논에서 이르되, “견분 이것은 제3의 결과가 아니어야 한다. 견분이 때로는 비량(非量)에 속하기 때문이니, 이로 말미암아 견분은 제3을 증명하지 아니하며, 증명하는 그 자체는 반드시 현량이기 때문이다.
또 뜻은, 견분은 3량(量)에 다 통한다는 것을 밝힌다. 3량이라 함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이다.
곧 견분이 상분을 반연할 때에 혹 이것은 비량(非量)이기도 한지라 비량의 법은 현량의 결과가 될 수 없다. 혹은 견분이 상분을 반연하는 이것이 비량(比量)과 자증분을 반연하는 데서 또 이것이 현량이기도 함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자증분 이것은 마음 자체라 비량(比量)이 비량(非量)과 함께 하면서도 결과가 될 수 있지마는, 견분은 마음 자체가 아닌지라 자증분과 함께 하면서도 그 양과(量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견분은 제3을 증명할 수가 없나니, 증명하는 자체란 반드시 현량이기 때문이다. 제3ㆍ4분은 이미 이것이 현량인지라, 때문에 서로가 증명할 수 있다.
무무궁실의(無無窮失意)에서 이르되, “만일 견분으로써 능량을 삼는다면, 다만 3분만으로써도 만족하게 된다”고 했나니, 만일 견분으로 소량(所量)을 삼는다면 반드시 제4가 양과가 되어야 한다.
만일 통상으로 든 비유라면, 비단은 마치 소량과 같고, 자는 마치 능량과 같으며, 지혜는 마치 양과와 같나니, 이것은 자증분이다. 만일 자를 부린 바가 된다면 지혜로써도 능히 부리는 것이 되지만 무슨 물건으로써야 지혜이겠는가.
곧 이것은 사람에게서 마치 증자증분과 같아서, 사람이라야 지혜를 쓸 수 있고 지혜라야 사람을 부릴 수 있기 때문에 다시금 증명할 수가 있다.
또한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서, 거울의 형상은 상분이 되고, 거울의 밝음은 견분이 되며, 거울의 앞면은 마치 자증분과 같고, 거울의 뒷면은 마치 증자증분과 같다.
앞면은 뒷면에 의지하고 뒷면은 또 앞면에 의지하기 때문에 서로서로가 증명할 수 있으며, 또한 구리로써 증자증분을 삼을 수도 있나니, 거울은 구리에 의지하고 구리는 거울에 의지한다.
044_0339_c_01L宗鏡錄卷第六十 肥 慧日永明寺主智覺禪師延壽集夫此三性法爲當是一是異若道是一不合云依圓是有徧計是無若道是異又云皆同一性所謂無性此三性法門是諸佛密意所說諸識起處教網根由若卽之取之落凡常之見若離之捨之俱失聖智之門以藏法師依華嚴宗釋三性同異義一圓成眞如有二義一不變二隨緣二依他二義似有二無性三徧計所執二義一情有二理由眞如不變依他無性所執理無由此三義故三性一際又約眞如隨緣依他似有執情有由此三義亦無異也是故眞該妄求徹眞原性相融通無障無閡依他似有豈同所執是情有耶由二義故無異也一以彼所執執似爲實故無異法二若離所似無起故眞中隨緣亦爾以無所執無隨緣故又以三性各有二義不相違故無異性且如圓成雖復隨緣成於染淨而恒不失自性淸淨只由不失自性淸淨故能隨緣成染淨也猶如明鏡現於染淨而恒不失鏡之明只由不失鏡明淨故方能現染淨之相現染淨知鏡明淨以鏡明淨知現染淨是故二義唯是一性雖現淨法不增鏡明雖現染不污鏡淨非直不污亦乃由此反現鏡之明淨眞如亦爾非直不動性淨成於染淨乃由成染淨方現性淨非直不壞染淨明於性淨亦乃由性淨故方成染淨是故二義全體相收一性無二豈相違也由依他無性成似有由成似有是故無性此卽無性卽因因緣卽無性是不二法門也所執性中復當情稱執現有然於道理畢竟是無以於無處橫計有故如於杌橫計有鬼今旣橫計明知理無是故無二唯一性也眞如是有耶荅不也隨緣不變故空眞如離妄念故眞如是無耶不也不變隨緣故不空故智所行處故眞如是亦有亦無耶不也無二性故離相違故眞如是非有非無耶具法故離戲論故依他是有耶不也緣起無性故約觀遣故異圓成故依他是無耶不也無性緣起故能現無生故異徧計故是智境故依他是亦有亦無耶無二性故離相違故依他是非有非無不也有多義門故離戲論故徧計是有耶不也理無故無體相故徧計是無不也情有故無相觀境故能翳眞故徧計是亦有亦無耶不也無二性故計是非有非無耶不也所執性成故已上護執竟今執成過者若計眞如一向是有者有二失一不隨緣二不待了因故問教云眞如爲凝然常旣不隨緣豈是過耶聖說眞如爲凝然者此是隨緣成染淨時恒作染淨而不失自體卽是不異無常之常名不思議非謂不作諸法如情所謂之凝然也不異無常之常出於情外故名眞如常經云不染而染明常作無常染而不染明作無常時失常也又不異常之無常故說眞如爲無常經云如來藏受苦樂與因俱若生若滅又依他是生滅法亦得有不異常之無常不異無常之常以諸緣起無常之法卽無自性方成緣起是故不異常性而得無常故云不生滅是無常義此卽不異於常成無常也又諸緣起卽是無性非滅緣起方說無性卽是不異無常之常也經云色卽是空非色滅空衆生卽涅槃不更滅也此與眞如二義同俗雙融二而無二故論云智障甚盲闇眞俗別執故也又眞如若不隨緣成於染淨染淨等法卽無所依無所依有法又墮常也又眞如若有者卽不隨染淨染淨諸法旣無自體眞又不隨不得有法亦是斷也乃至執非有非無等四句皆墮斷常也若依他執有謂已有體不籍緣故無緣有法卽是常也又由執有卽不籍緣不籍緣故不得有法是斷也依他性是有義便有失者何故論云依他性以爲有耶此卽不異空之有從緣無體故一緣中無作者故由緣無作方得緣起是故非有之有爲依他有卽是不動眞際建立諸法若謂依他如言有者卽緣起有性緣若有性卽不相籍不相籍故卽壞依他壞依他者良由執有汝恐墮空立有不不達緣所起法無自性故卽壞緣起便墮空無又若依他執無者亦二失謂依他是無法者卽緣無所起不得有法卽是斷也說緣生爲空無卽墮斷者何故中論廣說緣爲畢竟空耶聖說緣生以爲空者此卽不異有之空也此卽不動緣生說實相法也若謂緣生如言空者卽無緣生緣生無故無空理無空理者良由執空是故汝恐墮有立空不謂不達無性緣生故失性空故還墮情中惡取空也故淸辯爲成有故破於有法爲成空故破於空也如情執無卽是斷過若說無法爲依他者無法非緣非緣之法卽常也乃至執非有非無皆成斷常二患若徧計性中計所執爲有者聖智所照理應不空卽是常也若妄執徧計於理無者卽失情有是斷也乃至非有非無皆具上失上已護今當顯德者眞如是有義何者迷悟所依不空故不壞故眞如是空義隨緣故對染眞如是亦有亦無義具德故違順自在故鎔融故眞如是非有非無義二不二故定取不得故依他是有義無性緣成故依他是無緣成無性故依他是亦有亦無義緣成故無性故依他是非有非無義隨取一不得故徧計是有義約情故徧計是無義約理故計是亦有亦無義由是所執故徧計是非有非無義由所執故故知執則爲斷常二患執成性德之門但除妄情非遣法也是以不離有以談眞見有之本際匪存無而觀法無之眞原則不出有無不在有無何取捨之干懷斷常之所惑乎是則三性一性情有而卽是眞空一性三性眞如而能成緣起終日有而不有有徹空原終日空而不空空該有自然一心無寄萬法俱閑境智相應融卽方入宗鏡瑩淨無瑕照破古今光吞萬彙矣若不立三性有何等過若無三性凡聖不成失大因緣成斷常過攝論云於世間中離分別依他二法更無餘法阿賴耶識是依他性餘一切法是分別性此二法攝一切法皆盡三界唯有識故阿毘達磨經說三性法者染污分淸淨分彼二分於依他性說分別性是染污分眞實性是淸淨分如金土藏有三種可見謂一地界二土三金於地界中土非有而可見金實有而不可見若以火燒土則不現金則顯現復次於地界土相現時是虛妄體現金體現時是淸淨體現是故地界有二分如是如是此識性未爲無分別智火所燒時於識性中虛妄分別性顯現淸淨性不現此識性若爲無分別智火所燒於識性中實有淸淨性顯現虛妄分別性不顯現故知妄依眞起而能覆眞眞因妄顯而能奪妄眞妄無體皆依識性如土與金俱依地界攝論問云何一識成一切種種識相貌八識十一識等欲顯依他性具有三性一識從種子生是依他有種種識相貌是分別分別實無所有是眞實性一識謂一本識本識變異爲諸識故三性行相有假有實義理可分云何復說三無性及云一切法皆無自性論頌云卽依此三性彼三無性故佛密意說一切法無性初卽相無性次無自然性後由遠離前所執我法性此諸法勝義亦卽是眞如常如其性故卽唯識實性卽依此前所說三性立彼後說三種無性謂卽相生勝義無性故佛密意說一切法皆無自性非性全無說密意言顯非了義謂後二性雖體非無而有愚夫於彼增益執實有我法自性此卽名爲徧計所執爲除此執故佛世尊於有及無摠說無性云何依此而立彼三謂依此初徧計所執立相無性由此體性畢竟無有如空華故次依他立生無性此如幻事託衆緣生如妄執自然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依後圓成實立勝義無謂卽勝義由遠離前徧計所執我法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如太虛空雖徧衆色是衆色無性所顯乃至契經中說無性言極了義諸有智者不應依之摠撥諸法都無自性解深密經偈云相生勝義無自性如是我皆已顯示若不知佛此密意失壞正道不能往相者是徧計生者是依他勝義是圓成無自性者於此三性上皆無妄執我法徧計自然之自性故若人不知佛密意於三性上說三無性破外道小乘我執便撥菩提涅槃依圓皆無者卽此人失壞正道不能往至也此言三性三無性不是依圓體亦無但無徧計妄執之我法故名無性也是以三性無際隨一全收眞妄互融性相無礙如來一代時恒沙義門密意摠在三性門中眞俗本末一時收盡以顯唯識正理更無異轍以依他性是唯識體從依他起分別卽是徧計從依悟眞實卽是圓成由分別故一分成生死由眞實故一分成涅槃了分別性空卽生死成涅槃迷眞實性有卽涅槃成生死都是一法隨情顯義成三三非三而一理圓一非一而三性具卷舒不失隱顯常如非一非三性相於實地而三而一耀行布於義天撮要所歸莫先斯旨三能變相已細披陳變之相如何開演 荅三能變謂異熟思量及了別境識此是能變自體所變者卽見二分是自體分之所變故是自體分之用故說自體是二分所依識論云云何應知依識所變假說我法非別實有由斯一切唯有識頌曰是諸識轉變分別所分別由此彼皆故一切唯識是諸識者謂前所說三能變及彼心所皆能變似見相二分立轉變所變見分說名分別取相故所變相分所分別見所取故由此正理彼實我法離識所變皆定非有離能所取無別物故非有實物離二相故是故一切有爲無爲若實若假皆不離識唯言爲遮離識實物非無不離識心所法等或轉變者謂諸內識轉似我法境相現此能轉變卽名分別虛妄分別爲自性故謂卽三界心及心所此所執境名所分卽所妄執實我法性由此分別變似外境假我法相彼所分別實我法性決定皆無引教理已廣破故是故一切皆唯有識虛妄分別有極成故唯旣不遮不離識法故眞如等亦是有性由斯遠離增減二邊唯識義成契會中道釋云是諸識轉變者轉變是改轉謂一識體改轉爲二相起異於自體卽見分有能取之用相分有質礙之用由識自體轉起能取及有礙故所變見分說名分別取相故者前所變中以所變見分名爲分別是依他性能取於所變依他相分故起種種徧計所執分別是此識體所變用能分別故名分別其識體所變依他性相分似所執相分者名所分別是前能分別見分之所取相非謂識自體能緣名爲分別起分別見者識之用也相見俱依自證起故唯旣不遮不離識法故眞如等亦是有性者唯言不遮不離識法眞如及心所者亦不離識故體皆有今此位但遮離識所分別有不遮不離識眞如等有如理應知此意旣有能變分別識及所變境依他相分所分別心外實法等決定皆無唯有眞如心所等法皆不離識亦是實遠離增減二邊者無心外法故除增益邊有虛妄心等故離損減邊離損減邊故除撥無如空淸辯等說離增益邊故除心外有法諸小乘執唯識義成契會中道無偏執故諸師所明摠有四分義一相分二見分三自證分四證自證分相分有四一實相名相卽眞如是眞實相故二境相名相爲能與根心而爲境故三相狀名相此唯有爲法有相狀故通影及質唯是識之所變四義相名相卽能詮下所詮義相分是於上四種相中取後三相而爲相分相又相分有二一識所頓變卽是本質二識等緣境唯變影緣不得本質二見分者唯識論云於自所緣有了別此見分有五類一證見名見卽三根本智見分是二照燭名見此通根心俱有照燭義三能緣名見卽通內三分俱能緣故四念解名見以念解所詮義故五推度名見卽比量心推度一切境故於此五種見中除五色根及內二分餘皆見分所攝三自證分爲能親證自見分緣相分不謬能作證故四證自證分謂能親證第三自證分緣見分不謬故從所證處得名此四分義摠以鏡喩鏡如自證分鏡明如見分鏡像如相分鏡後弝如證自證分此四分有四師立義第一安慧菩薩立一分自證分識論云此自證分從緣所生是依他起故故說爲有相二分不從緣生因徧計心妄執而有如是二分情有理無自證分是依他起性有種子生是實有故相二分是無更變起法二執又是無以無似無若准護法菩薩卽是以有似無見相二分是有體變起法二執是無體故安慧引楞伽經云三界有漏心心所皆是虛妄分別爲自性故故知八識見相二分皆是徧計妄執有故唯有自證一分是依他起性是實有密嚴經偈云愚夫所分別外境實皆無氣擾濁心故似彼而轉故知但是愚夫依實自證分上起徧計妄情變似無體二分現故實二分無其實體但是愚夫不了妄執爲實故所以論云凡夫執有聖者達無若言見二分是假者且如大地山河是相分收現見是實如何言假耶雖見山河等是實元是妄執有外山河大地等理實而論皆不離自證分故所以楞伽經偈云由自心執著心似外境轉彼所見非有是故說唯心故知離自證分外無實見相二分第二難陀論師立二分成唯識者初標宗者卽一切心生有見相二分相二分是能所二緣也若無相分牽心心法無由得生若無能緣見分知有所緣相分耶卽有境有心等成唯識也見分爲能變相分是所變能所得成須具二見分相分是依他起性有時緣獨影境同種生有時緣帶質境卽別種生從種生故非徧計也若不許者諸佛不應現身土等種影像也安慧卻難汝若立相分豈不心外有境何名唯識難陀言見分是能緣相分是所緣攝所從能還是唯識又汝若言無相分則所立一分唯識不成何以故安慧執相分是妄情有卽第八所緣識中相分種子是相分攝卽種子是能生自證現行親因緣法種子相分是妄情者何妨所生現行自證分亦是妄情不違種子識義也若不許自證分是妄情者卽能生種子亦是實有卽因果皆證相分亦是實有旣有相分卽有見分所旣成卽二分成立唯識也又五根是第八識相分若相分是徧計豈有徧計根能發生五識也安慧云不假五根發生五識五識俱自從種子生也若不假根發生但從種子生者汝許五識種子是第八相分不許是第八相分難旣爾卽種子是徧計能生五識亦是徧計也安慧救云種子但是第八識上氣分有生現行功能故假名種子但是習氣之異名非實也難諸聖教從種子生者名實依他立者名假豈有假種子生實現行若是假種子者如何親報自果耶若種子是假法者卽因中第八識因緣變義不成若非因緣變者卽違一切安慧絕救旣有能所二緣者皆是實依他起性者卽知見相是實引證者密嚴經云一切唯有覺所覺義皆無能覺覺分各自然而轉釋云一切唯有覺者卽唯識也所覺義皆無者卽心外妄執實境是無能覺所覺分者能覺是依他實見分所覺是依他實相分各自然而轉者見分從心種子相分從相分種子生起故知須立二分識方成會相違者安慧難云若爾前來密嚴楞伽二文如何通會正會者前來經文不是證一分但遮執心外實有我法等亦不遮相分不離心第三陳那菩薩立三分非前師慧立一分卽但有體而無用難陁立見相二但有用而無體皆互不足立理者謂立量果義論云能量所量量果別故見必有所依體故相分爲所量見分爲能量卽要自證爲證者是量果也喩如尺量絹時絹爲所尺人爲能量記數之智名爲量果今見分緣相分不錯皆由自證分爲作果故今眼識見分緣靑時定不緣黃也如見分緣不曾見忽然緣黃境時卽定不緣靑若無自證分卽見分不能自記憶故知須立三分若無自證分卽相見亦無若言有二分者卽須定有自證分自證分喩如牛頭二角喩相見二分集量論頌云似境相所量能取相自證釋云似境相所量者卽相分似外境現能取相自證者能取相者卽是見分能取相分故自證卽是體也第四護法菩薩立四分立宗者心心所若細分別應有四分立理者若無第四將何法與第三分爲量果耶汝陳那立三分者爲見分有能量了境用故卽將自證分爲量果汝自證分亦有能量照境故卽將何與能量自證分爲量果耶卽須將第四證自證分爲第三分量果也引證密嚴經偈云衆生心二性內外一切分所取能取纏見種種差別心二性者卽是內二分爲一性二分爲第二性卽心境內外二性能取纏者卽是能緣麤動是能緣見分所取纏者卽是相縛所緣縛也見種種差別者見分通三量有此義故言見種種差別前二師皆非全不第三師陳那三分似有體用若成量者於中道理猶未足卽須更立第四分相分爲所見分爲能量卽將自證分爲量果若將見分爲所量自證分爲能量卽更將何法爲量故知將證自證分爲量果方足也見分外緣虛疏通比非二量故卽不取見分爲自證量果內二分唯現量故互爲果無失夫爲量果者須是現量方爲量果比非定非量果如作保證人須是敦直者方爲證若略虛人不能堪爲保證又前五識與第八見分雖是現量以外緣卽非量果夫量果者須內緣故方爲量果又第七識雖是內緣是非量也亦不可爲量果夫爲量果者具二義一現量內緣又果中後得見分雖是現量內緣時影緣故非量果卽須具三義又果中根本智見分雖親證眞如不變影故是心用故非量卽須具心體須具四義一現量二內緣不變影四是心體方爲量果又論云如是四或攝爲三第四攝入自證分故或攝爲二後三俱是能緣性故皆見分攝此言見者是能緣義或攝爲一體無別故如入楞伽經云自心執著心似外境轉彼所見非有是故說唯心如是處處說唯一心此一心言亦攝心所故釋云如是處處唯一心者外境無故有一心內執著故似外境轉定無外境許有自心不離心故摠名一識心所與心相應法心之所變眞如識之實性又皆不離識故竝名唯識又淸涼記引論釋第四證自證分若無此者誰證第三心分旣同應皆證故見分是心分須有自證分自證是心分應有第四證論又云自證分應無有果諸能量者皆有果故釋曰見分是能量須有自證果自證量見分須有第四果恐彼救云卻用見分爲第三果故次論云不應見分是第三果見分或時非量攝故由此見分不證第三自體者必現量故又意明見分通於三量量者謂現量比量非量卽明見緣相時或是非量不可非量法爲現量果或見緣相是於比量及緣自證復是現量故自證是心體與比量非量而爲果見分非心體不得與自證而爲其量果故不得見分證於第三證自體者必現量故第三四分旣是現量故得相無無窮失意云若以見分爲能量但用三分亦得足矣若以見分爲所量必須第四爲量果若通作喩者絹如所量尺如能量智爲量果卽自證分若尺爲所使智爲能使何物用智卽是於人如證自證分人能用智智能使人故能更證亦如明鏡鏡像爲相鏡明爲鏡面如自證鏡背如證自證面依於背復依面故得互證亦可以銅爲證自證鏡依於銅銅依於鏡宗鏡錄卷第六十音義古哀反備也咸也  瑩烏定反 瑕胡如反 彙爲貴反類也 古拜反言警也 撥北末反  耀弋笑反光耀 撮倉括反 靡幼反誤也差也 弝必駕反弓弝  敦都昆反迫也戊申歲分司大藏都監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