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평등한 참 마음은 중생과 부처의 지혜라, 비록 그렇게 똑같이 지녔다 하더라도, 믿고 앎[信解]을 내기 어렵고 대개가 의심을 품고서 원만하게 증득하는 이가 적다. 벽지불(辟支佛)의 영리한 지혜와 사리불(舍利佛)의 상근(上根)에서 불퇴위(不退位) 안의 모든 대보살에 이르기까지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도 그 근원을 측량할 수 없다. 교묘한 변재로 묘하게 통하여도 그 끝을 알지 못하니, 다시금 교리를 천명하여 확실히 지시해서 큰 뜻이 눈앞에 드러나고 적은 의심까지도 뜻 자리[意地]에서 끊어지게 하라. 【답】 자세하고 간략한 교법과 차전(遮詮)ㆍ표전(表詮)이 비록 열고 닫음에 같지 아니하고 전체와 개별에 다름이 있다손 쳐도, 그러나 모두가 유심(唯心)의 뜻을 나타내고 끝내는 식(識) 밖에는 글이 없나니, 증득에는 항하 모래만큼 많거늘 어찌 한 둘뿐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가는 적멸(寂滅)을 앎에는 방편을 쓴 힘 때문이니 갖가지의 도(道)를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로 불승(佛乘)을 위함일세.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나도 지금은 역시 그러하며 중생들을 안온하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의 법문으로써 불도를 펴 보이느니라.
해석하여 보자. 첫째 적멸을 안다 함은, 진여의 한 마음은 이는 본래부터 적멸한 것이요 윤회(輪廻)하며 생멸하는 소멸이 아니며 관행(觀行)으로 다스림의 소멸이 아니기 때문에, 첫째가는 것[第一]이라 한다. 한 마음의 적멸한 가운데는 곧 펴서 드날릴 만한 법도 없고 세울 만한 도도 없지만, 아직 모르는 이를 위하여 방편을 쓰는 대자비의 힘 때문이다. 비록 갖가지의 따로따로의 문과 다른 길을 말한다 하더라도, 만일 엄히 예우하면서 논하면 한 마음인 불승에 돌아갈 것을 지시한 것뿐이니, 다시는 딴 일이 없다. 지금 나도 그와 같다 함은, 지금의 나와 시방의 부처님들께서는 똑같이 이 법을 증득한 것이므로 모두가 다 그와 같다는 것이며, 이로써 모든 유정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3승(乘)과 5성(性)의 갖가지 법문을 보이면서 유심의 불도를 펴며 드날린다. 능가경(楞伽經)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셨다. ‘몸과 살림과 기세간(器世間) 등의 모두는 바로 장식(藏識)의 영상(影像)이라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두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저 여러 어리석은 범부들은 나서 머무르고 소멸된다는 두 소견 안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 중에서 망령되이 있다, 없다는 분별을 내느니라. 대혜야, 그대는 이런 이치에 대해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또 입능가경(入楞伽經)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갖가지가 마음 따라 구르나 마음일 뿐이요 딴 법이 아니니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가 생기고 마음이 소멸하면 갖가지가 소멸한다.
중생들은 망령되이 분별하면서 물건이 없는 데서 물건을 보나니 아무 뜻이 없고 이 마음뿐이라 분별이 없으면 해탈하게 된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지위도 없고 모든 진리도 없으며 국토도 없고 화신불(化身佛)도 없고 벽지불도 없고 성문(聲聞)도 없나니 이 마음의 분별뿐이니라.
사람의 몸과 그리고 5음(陰)과 모든 인연과 작은 티끌이며 훌륭한 성품까지 자재로 짓나니 이 마음의 분별뿐이니라.
마음은 온갖 곳에 두루 미치고 온갖 처소는 모두가 마음인데 마음으로 잘 관찰하지 않나니 심성(心性)에는 모든 모양이 없느니라.
화엄경(華嚴經)의 게송에 이르되, “온갖 지방의 바다 가운데서/중생의 마음과 생각에 의해 머무른다”고 했고, 또 이르되 “온갖 법계에 벌어져 있는 바는 모두가 마음과 생각 끝의 삼매(三昧)에 머무른 줄 알라”고 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이르되, “비유컨대, 길이 잘든 말이 스스로 그림자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그림자는 제 몸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와 같아서 1승에 믿고 들어서 길이 잘 든 사람은 온갖 두려운 경계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나니, 그 경계가 자기 마음에서 나왔음을 알기 때문이다”고 했다.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계경(契經)에서 ‘삼계(三界)는 유식이다’라고 말씀했고, 또 ‘소연(所緣)은 유식(唯識)에서 나타나는 바다’고 말씀했다. 또 ‘모든 법은 모두가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했고, 또 ‘유정은 마음에 따라 때가 끼고 청정해진다’고 말씀했다. 또 ‘네 가지 지혜[四智]를 성취한 보살은 잘 따르면서 유식이라는 경계가 없음에 깨쳐 든다’고 말씀했다. 또 게송에, ‘심(心)ㆍ의식(意識)ㆍ소연은/모두가 제 성품을 여의지 않나니/ 때문에 나는 온갖 것이/식이 있을 뿐 딴 것이 없다고 말한다’고 말씀했나니, 이 성인의 교법 등에서 정성껏 증명한 것은 하나만이 아니다”고 했다. 해석에 이르되, “또 소연은 유식에서 나타나는 바라고 말씀했다 함은, 그대는 식 바깥의 소연이라고 하나 나는 ‘바로 이것을 안의 식 위에서 나타나는 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세친(世親)은 ‘식의 소연은 유식에서 나타나는 바라고 하며, 또한 부처님께서 자씨(慈氏)에게 말씀하시기를 ≺조그마한 법조차도 없나니, 능취(能取)의 조그마한 법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법이 생길 때에는 연기(緣起)의 힘이 클 뿐이다. 곧 하나의 바탕 위에서 두 가지 영상(影像)이 생기지만 다시 서로서로 바라본다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나니, 모든 심심소(心心所)는 연기로 말미암은 힘이라 그 성질은 당연히 그러하여 이와 같이 하면서 생기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심ㆍ의식ㆍ소연은 모두가 제 성품을 여의는 것이 아니라고 함은, 제 성품은 곧 자기 마음의 법이다. 혹은 본체[理體]로서 곧 뜻의 의지할 바[所依] 본래의 현상[事]이니, 제8식은 심이요 제7식은 의식이요 나머지 여섯의 식은 소연이지만 모두가 자기 마음이 경계가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이런 이치 때문에, 나는 ≺온갖 유위와 무위는 모두가 식이 있을 뿐이요, 그 밖의 것은 없다≻고 말하노니, 실로 마음 밖에 경계는 없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에, 무릇 듣고 봄이 있는 것은 모두가 자기의 마음에서 생기며 실로 하나의 법도 정(情)에 당하여서 자체가 있어 독립한 것이 없고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며 모두가 생각을 좇아서 이루어지고 생사와 열반이 다 함께 허황한 꿈과 같은 줄 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에 이르되, “그때,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비구들이 오지 못하고 있나이다. 왜냐하면 기원(祇洹) 안에는 청정무구한 큰 물이 가득찬 것을 보았고 또한 정사(精舎)에는 수목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이런 일 때문에 모두가 오지 못하고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모든 비구들은 물이 없는 데서 물이라는 생각을 내고, 물질[色]이 없는 데서 물질이라는 생각을 내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意]이 없는 데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라는 생각을 내고, 성문과 벽지불이 없는 데서 성문ㆍ벽지불이라는 생각을 내고 있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불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차례로 모든 불국토에 두루 나아가서 신통과 삼매를 지을 것인가. 불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동방의 수없는 세계를 지나고 다시 그렇게 많은 세계의 작은 티끌 수 같은 세계를 지나서는, 그 모든 세계 안에서 이 삼매에 들며, 그 낱낱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공경하고 존중하고 머리 조아려 예경하되 온 몸을 땅에 대고 불법을 청해 물으면서 부처님의 평등을 찬탄하고 부처님들의 광대한 공덕을 칭양하며, 온갖 부처님 처소에 들어가 대비(大悲)에 들고 부처님의 평등하고 걸림이 없는 힘을 얻으며 한 생각 동안에 온갖 부처님 처소에서 미묘한 법을 부지런히 구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해서 열반에 드시기까지의 이러한 모양은 모두 얻는 바가 없으리니, 마치 산란하고 동요한 마음이 반연할 바[所緣]을 요별하되 마음이 일어나되 어느 반연할 바에서 일어난 줄 모르고, 마음이 사라져도 어느 반연할 바가 사라지는 줄 모르는 것처럼, 이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러하여 끝내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다가 열반하신 모양을 분별하지 못하느니라. 불자여, 마치 햇빛 속의 아지랑이가 구름으로부터 생기지 않고 못으로부터도 생기지 않으며 육지에 있지도 않고 물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착한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깨끗한 것도 아니고 흐린 것도 아니며 마시거나 양치질 할 수도 없고 더럽힐 수도 없으며 바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로되 인연 때문에 물 모양을 나타내서 식(識)으로 아는 바나, 멀리서 보면 물과 같은지라 물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만 가까이서 보면 물이 없는지라 생각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이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러하여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한 것과 열반하신 모양을 얻지 못하나니, 부처님들의 모양이 있고 모양이 없는 것은 모두가 생각하는 마음으로 분별하는 바니라. 불자여, 이 삼매의 이름은 청정심신행(淸淨深心行)삼매라고 하나니,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들어가고 나서 그리고 일어나고 나서는 잃지 않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불교만이 마음으로 종(宗)을 삼는 것이 아니고 3교(敎)의 귀착한 바는 모두가 “자기에 돌아가는[反己]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한다. 마치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위령공(衛靈公)이 공자에게 묻기를, ‘과인(寡人)이 국가를 다스리는 이로서 묘당(廟堂) 위에서 삼간다면 정치(政治)니라’고 했는데, 어떻습니까”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옳은 말입니다. 남을 사랑하면 남도 그를 사랑하고 남을 미워하면 남도 그를 미워하나니, 이른바 당장 안의 좁은 방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천하를 아는 이입니다”고 하였으니, 자기에 돌아갈 줄 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일 자기를 바르게 하고서 만물을 좇으면 일마다 돌아가지 아니함이 없거늘, 저절로 가지거나 버림에 생각을 잊고 곱거나 미움에 뜻을 같이 하리라. 그러므로 하나의 마음에서 모양이 없이 저절로 나타난 줄만 분명히 알면, 여섯 갈래[六趣]의 티끌 같은 감옥을 저절로 뛰어나고 나오되 반드시 문을 경유하듯이 도(道)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는 줄 알 것이다. 마치 고덕(古德)이 이르되, “6도(道) 중생들이 이 문으로부터 나왔는데 천 겁(劫)을 지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어찌 그리 애달프냐”고 함과 같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은 불이 탄 집에 드는 것에 놀라고 조사(祖師)는 일부러 서쪽에서 왔으니, 천 성인에 이르기까지 슬퍼하고 한탄하는 것은 모두가 유심(唯心)이 벗어나는 도(道)임을 통달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일 만법이 곧 진여의 한 마음임을 분명히 모르면 모두가 변계소집(遍計所執)이 성립되며, 진여는 모양이 없는 것을 모양이 있다고 보면 모두 이것은 허망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기신론(起信論)에 이르되, “온갖 경계는 망념(妄念)에 의해서 차별이 있을 뿐이니, 만일 생각을 여의면 온갖 경계의 모양이 없다”고 했다. 【문】 여덟의 식[八識]의 제 성품에 행상(行相)과 작용(作用)은 하나인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답】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논(論)에 이르되, “여덟 식의 제 성품을 일정하다고 말할 수 없나니, 행상과 소의(所依)라 연(緣)의 모양이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소멸했을 적에도 나머지 것은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요 능훈(能熏)ㆍ소훈(所熏) 등의 모양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나, 역시 결정코 다른 것도 아니다. 경에서 ‘여덟의 식은 마치 물과 물결 등에 차별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니, 결정코 다르다면 인과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요 마치 요술같은 일들에는 결정코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식의 차별된 모양은, 도리세속(道理世俗)에 의한 것이요 진승의(眞勝義)가 아니니 진승의 중에서는 마음과 말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게송에, ‘심ㆍ의식의 여덟 가지는/세속이기 때문에 모양에 차별 있되/진승이기 때문에 모양에 차별없나니/모양[相]과 모양할 바[所相]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고 했다. 해석에 이르되, “세 가지 뜻의 해석으로는 일정할 수 없다. 첫째는 행상(行相)이니, 견분(見分)을 말한다. 둘째는 소의(所依)이니, 감관이다. 셋째는 연(緣)이니, 소연(所緣)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뜻의 모양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니, 마치 안식(眼識)으로는 색깔을 보는 것이 행상이 되고, 또한 제8식은 색 등을 변화하는 것이 행상이 됨과 같다. 만일 하나의 식이 소멸되면 그 나머지 일곱의 식 등은 반드시 소멸되지 않은 것이니, 7 이것은 능훈이요, 8 이것은 소훈이며, 또 7 이것은 원인이요, 8 이것은 결과이다. 또한 결정코 다른 것도 아니다 함은, 능가경(楞伽經)에 ‘식은 마치 큰 바닷물과 물결에 차별된 모양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했고, 또 만일 결정코 다르다면 원인과 결과가 아니어야 한다. 다시 서로서로 인과가 되기 때문에 당연히 인과는 결정코 다른 것이 아니니, 마치 보리에서는 콩 싹들이 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온갖 법은 요술 따위와 같기 때문에, 결정코 다른 성품이 없는 줄 알 것이다”고 했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앞에서 설명했던 세 가지 능변(能變)의 모양은 어떠한가. 【답】 이것은 4속제(俗諦) 중의 제2 도리세속(道理世俗)에 의하여 여덟 가지 등이 현상[事]에 따라 차별이 있음을 말한 것이요, 4중진제(重眞諦) 중의 제4 진승의 체는 아니다. 승의제 중에서 만일 8식을 본체[理]로 분별한다면 마음과 말이 모두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모양과 모양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함은, 모양 이것은 곧 능(能)이요 모양할 바 이것은 소(所)로서, 식 위에서 무엇이 능상(能相)과 소상(所相)이 되느냐 하면, 작용은 능상이 되고 체성은 소상이 되며, 혹은 견분(見分)을 능상으로 삼고 상분(相分)을 소상으로 삼기도 하며, 또 7식을 능상으로 삼고 제8식을 소상으로 삼나니, 소상이 이미 없다면 능상도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참된 문의 본체[理]에 들어가면 모두 차별이 없으며, 참된 문 이것은 차별을 막으므로 차별이 없다는 말일 뿐이요, 차별이 없는지라 또한 차별도 없고 차별되지 않음도 없다. 해석하여 보자. 처음의 업식(業識)으로부터는 견분ㆍ상분의 두 문이 일어날 뿐이니, 견분으로 인하여 능이 서고 상분으로 인하여 소가 서며, 능소가 겨우 갖추어지기만 하면 아(我)와 법(法)이 서로 일어나며, 이로부터 유위(有爲)로 인하면서 무위(無爲)가 서고 거짓에 상대하면서 진실을 말하게 되나니, 모두가 정해진 체성이 없어서 있는 것 같되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로 생기는 이름을 오인하여 색(色)은 표시가 있다[有表]로 보면서 공은 표시가 없다[無表]고 집착하며 상대되는 바탕에 대(對)하여 소는 뿔이 있다고 보면서 토끼는 뿔이 없다고 집착하나니, 있음으로써 없음을 막는지라 있음은 결정코 있는 것이 아니요, 없음으로써 있음을 막는지라 없음은 결정코 없는 것이 아닌 줄을 모른다. 만일 8식의 참 마음이 저절로 상대가 끊어졌음을 분명히 알면, 의심이 소멸되면서 능소(能所)의 칡[藤]과 뱀[蛇]이 여기서 아울러 공해지고, 소견이 식어지면서 다스림의 형상[形]과 이름[名]이 거기서 쌍으로 고요해진다. 【문】 마음 밖에 법이 없음은 조사와 부처의 바른 종[正宗]이나, 이제 삼라만상을 눈으로 보건대 처음 배우는 이로서는 알기 어려우니, 상세하게 열어 보이지 않으면 무엇으로 의심을 끊겠는가. 모름지기 묻고 따지고 해서 정진(情塵)의 고집을 깨뜨려야겠다. 【답】 전에 이미 널리 밝혔었다. 이제 거듭 증거를 인용하리라. 유식(唯識)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 법은 식이 바뀌고 변하여 분별하고 분별할 바[所分別]라 이로 말미암아 그것은 모두 없나니 때문에 온갖 것은 유식이니라.
바뀌고 변한다[轉變]고 함은, 곧 여덟 가지의 식이 자증분(自證分)으로부터 바뀌고 변하여 2분(分)과 비슷하게 나타나나니, 곧 변할 바[所變] 견분(見分)은 능히 작용함이 있으므로 본다[見]고 말하고, 변할 바 상분(相分)은 작용할 바가 되므로 모양[相]이라고 한다. 곧 다 함께 자증분을 의지하면서 바뀌는 것이며, 이미 견분ㆍ상분의 2분이 온갖 법을 모두 포섭했는지라 곧 이 2분은 마음의 체성 위로부터 변하여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마음을 떠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분별하고 분별할 바라 함은, 견분 이것은 능히 분별하고 상분 이것은 분별할 바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것은 모두 없다고 함은, 이 견분과 상분의 2분 위에서 망령되이 저 아집(我執)ㆍ법집(法執)의 두 가지 고집에 집착하나 이것은 없는 것이니, 곧 이로 말미암아 견분ㆍ상분의 2분 밖에서 망정(妄情)으로 있다고 집착하며 마음 밖에서는 아집ㆍ법집의 경계는 모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그것은 모두가 없다”고 한다. 때문에 온갖 유식이니라고 함은, 유(唯)는 경계가 있다 함을 막고 식(識)은 마음이 공함을 간별(簡別)하여 두 변견(邊見)의 고집을 제거하면서 중도(中道)에 똑바로 처하게 한다. 곧 유(唯) 자(字)를 가지고 살바다(薩婆多)가 집착하는 마음 밖에 그 진실한 경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막고, 식(識) 자를 가지고는 청변(淸辯) 등이 고집하는 악취공(惡取空)을 가리는 것이니, 곧 공과 존재(空有)의 두 가지 변견을 깨뜨리고 중도에 똑바로 처하게 한다. 그러므로 소(疏)에 이르되, “바깥으로는 삼라만상을 포섭하고 안으로는 능소(能所)가 다 같이 이룩되나니, 4분(分)의 한 마음 도리에 더 뛰어난 것은 없다고 하겠다”고 했다. 또 소승(小乘)의 아홉 가지 힐난[九難]은 “마음 밖에 법이 없다는 유심(唯心)의 뜻”을 힐난한 것이다. 제1은 유식이 되는 까닭[唯識所因]이 힐난이니, 모든 소승의 논사(論師)들은 이르되, “마음을 여의고서 그 바깥에 있는 현재 보이는 색법(色法)은 바로 그 진실한 경계의 소연(所緣)이거늘, 논주(論主)는 무엇 때문에 삼라만상을 다 싸잡아 마음에 돌리면서 전체를 유식이라 하는가. 첫째는 물질과 마음은 다르며, 둘째는 능(能)과 소(所)는 같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이르되, ‘물질인 경계는 능히 반연하는 마음[能縁心]을 끌지 못한다’고 했다. 물질이 마음을 좇는다면 유식일 수 있지만, 뜻에 당하여[常情] 물질 경계는 바깥에서 마음을 헷갈리게 하고 마음은 경계의 헷갈림을 받으므로 유식이라는 이치는 아니다”고 한다. 논주는 이르되, “이것은 바깥 편에서 본 물질 경계일 뿐이니, 첫째 이 온갖 유정들은 마음을 반연하며 변한다. 둘째 이 온갖 유정들은 마음으로 지니는 바가 근본이요 모두가 마음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포섭하여 음식으로 돌아간다. 십지경(十地經)과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삼계(三界)는 유심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뜻을 말하자면, 삼계의 법은 이 마음만의 변할 바요 마음을 여의고는 그 밖에 다시는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아집ㆍ법집을 막기 위해서 망정으로 있다고 집착한 것일 뿐인지라 자체에서 보면 전혀 없고, 안의 마음만이 있기 때문에 유심이라고 한다”고 했다. 【문】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두 세계는 바깥의 기(器)의 물질 경계가 있어서 이것은 마음의 변화 때문이라 하여 유심이라 한다 하겠으나, 무색계천(無色界天)과 같은 데는 안의 마음만이 있고 바깥의 물질 경계가 없거늘 어째서 꼭 유심이라 해야 되겠으며, 어찌 상부극성과(相扶極成過)가 성립되지 않겠는가. 【답】 물질 경계만을 말할 뿐이 아니고 마음을 떠나지 않아야 유심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무색계천에서 탐냄 등으로 취하는 능취(能取)의 마음을 막기 때문이요, 무색계의 유정들 역시 공 등의 경계를 탐내어 그 망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색계도 역시 유심이라고 한다. 만일 무루(無漏)를 얻었을 때에 그것이 출세간의 무루의 색(色) 등이라면 이것은 출세간의 무루의 심심소인 유식이라 역시 유심이니, 때문에 “삼계가 유심이라”고 한다. 해심밀경(解心密經)에 이르되, “또 소연(所緣)은 유식에서 나타난 바다”라고 했으니, 곧 모든 소연의 경계는 이 식만의 변할 바요 다시는 바깥 법이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자씨(慈氏)보살에게 이르되, “조그마한 법조차 없나니, 능취(能取)의 조그마한 법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능가경(楞伽經)에 또 말씀하기를, “모든 법은 모두가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고, 무구칭경(無垢稱經)에 또 말씀하기를 “유정은 마음에 따라 때가 끼거나 청정해진다”고 했다. 또 초(鈔)에서 유식이 되는 까닭[唯識所因]을 해석하면서 네 가지 도리를 세웠나니, 곧 네 가지 비량(比量)이다. 제1의 비량의 성립은 다섯 대경[五塵]의 상분의 색(色)은 모두 이는 다섯 식의 친한 소연연[親所緣緣]이라 그 유식이라는 이치가 성립된다. 제2 성립은, 제6식과 어둡게[闇] 성립한 제7식ㆍ제8식의 두 식은 모두가 자기를 반연하는 친한 상분이어서 식을 떠나지 않나니, 이것도 유식이라는 이치가 성립된다. 제3은 전체[總]의 성립이니, 온갖 친한 상분을 마음의 체성을 여의지 않는지라 음식이 성립한다. 제4 성립은, 온갖 성근 소연연[疎所緣緣]의 경계는 모두가 마음을 떠나지 않는지라 유식이 성립된다. 제1 성립에서, 다섯 대경의 상분은 모두가 다섯의 식을 여의지 않는다 함은, 하나의 식의 상분이 성립되기만 해도 식을 여의지 않는지라 그 나머지 네 가지 식도 이에 준하여 짓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극성(極成)의 안식(眼識)은 바로 존재[有]의 법이라 결정코 친하지 않은 연[不親緣]이어서 자기 식의 색[自識色]을 떠난다”고 하는 이 종(宗)에 있어 “극성의 5식(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포섭하기 때문에 인(因) 그 나머지 극성의 4식과 같다[喩]”고 한다. 장차 비량(比量)을 해석하는 데는 나누어 두 가지가 된다. 첫째는 이름을 해석[釋名]하고 허물을 간택[揀過]하며, 다음에는 간략하게 문답(問答)을 편다. 처음 종(宗)의 앞 토막의 진술[前陳]에서 ‘극성’이라 함은, 곧 양종(兩宗)의 불극성(不極成)의 안식을 간택한다. 마치 대승종 중에서 타방불(他方佛)의 안식과 불(佛)의 무루 안식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소승에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또한 간택하여 취하지도 아니하며, 만일 소승종 중에서 부처님의 이 유루(有漏)의 안식과 최후신(最後身)보살의 염오(染汚)의 안식을 고집하지만 곧 대승에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또한 그를 간별하여야 함과 같다. 곧 양종에게서 서로 인정하지 않는 이것이 불극성(不極成)의 법이며, 여기서 양종에는 서로가 인정하는 극성의 안식만을 취해야 종(宗)이 성립되기 때문에, 앞 토막의 진술에서 ‘극성의 안식’이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일 극성으로 양종의 간별에 이르지 않는다면, 곧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 앞 토막 진술에서는 문득 자타일분소별불극성과(自他一分所別不極成果)가 있게 되고, 인(因) 중에서도 자타일분소의불성과(自他一分所依不成過)를 범하게 되나니, 앞 토막의 진실에서 극성의 안식의 소의(所依)가 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극성’이라는 두 글자를 두고서 뒤 토막의 진술[後陳]에서 “결정코 친하지 않은 연은 자기 식의 색을 여읜다”고 하는 종(宗)의 것과 간별하는 것이니, 이것은 안식의 상분만을 여읜 그 밖에 있게 되는 본질색(本質色)과 그 나머지 4진(塵)이다. 안식만을 여읜다 하면 모두가 친하지 않은 연이라, 만일 입론자(入論者)와 대적자(對敵者)가 다 같이 다툰다면 본질만을 다투게 되나니, 만일 대승인 자기 종(宗)에서라면 안식의 친한 상분의 색이 성립된다. 【문】 무엇 때문에, “결정코 친한 연[親緣]은 자기 식의 색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능별불극성과(能別不極成過)를 범할까 두렵기 때문이니, 소승은 “색은 안식을 여의지 아니한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의 인(因)에서 “극성의 5식 중에서 어느 하나가 포섭하기 때문에”라고 함은, 인에서 극성을 말하면서 또한 불극성의 5식을 간별하는 것이니, 만일 극성과 간별을 말하지 않으면서 공연히 “5식 중에서 어느 하나가 포섭한다”고 말하면, 곧 이는 자타일분수일불성과(自他一分隨一不成過)를 범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인(因)에 ‘극성’이란 말을 두고서 간택하게 된다. 유(喩)에 “나머지 주성의 4식과 같다”고 함은, 유에서 극성을 말하면서 역시 불극성의 법도 간택한다. 만일 극성이라 함을 두지 않는다면, 일분능립소립불극성과(一分能立所立不極成果)를 범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극성을 두면서 간별함을 말한다. 이미 상분의 색이 성립되어 안식을 여의지 않는지라 그 밖의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 등도 모두 이에 준하여 성립되나니, 모두가 나머지 4식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유식(唯識)의 게송에 이르되, “극성의 안식 등은/5식의 어느 하나가 포섭하기 때문에/마치 그 나머지 친하지 않은 연이/자기 식의 색 등을 여의지 않음과 같다”고 했다. 다음에서는 문답을 펴리라. [1문(問)] 종의(宗依)는 양쪽 다 같이 인정한 것이어야 한다. 이제부터 뒤에서, 간택하면서 입론자가 “친하지 않은 연은 자기의 식의 색을 여읜다”고 말하므로, 대적자[敵者]는 “친한 연은 자기식의 본질색(本質色)을 떠난다”고 인정한 것이거늘 어째서 극성을 말하는가. 【답】 소승 역시 “안식과 친하지 않은 연인 나머지 네 가지 대경[四塵]은 안식을 여의지 아니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며, 다만 다른 종[他宗]으로 하여금 “친하지 않은 연은 자기 식의 색을 여읨이 있다”고 인정하게 할 뿐이니, 이것이 곧 종의(宗依)의 극성이다. [2문] 다른 종에서는 이미 “나머지 네 가지 대경은 안식과는 친하지 않은 연이다”고 인정했는지라, 뒤의 종(宗)과 합치된 것이니, 이것은 상부(相扶)거늘 어찌 종(宗)의 다툼이 성립되겠는가. 【답】 여기서 다투는 바는, 다만 색진(色塵)의 본질을 취하기만 하면 눈과는 친하지 않은 연이라 서로서로가 차별되며 자기를 좇으면서 다른 이를 어기는 것이라, 바로 종체(宗體)가 성립된다. 소승이 비록 색진의 본질이 안식을 여읜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친한 연이며, 여기서는 친하지 않은 연을 말하거늘 어찌 종(宗)의 다툼이 아니겠는가. [3문] 종(宗)에서 다투는 바 이 안식은 친하지 않은 연인 본질의 색이며, 동유(同喩)의 “나머지 4식(識)과 같다”고 하는 나머지 4식은 친하지 않은 연인 나머지 4진(塵)일 뿐이거늘, 어찌 서로가 비슷할 수 있겠는가. 【답】 나머지 4식 이것은 유의(喩依)요 저마다 친하지 않은 연이 자기 식의 법을 여읨이 있는 것은 바로 유체(喩體)이니, 여기서는 유체를 취하고 유의를 취하지 아니한다. 역시 마치 “소리는 무상(無常)하다”의 종(宗)에 있어, 동유(同喩)는 “병(甁)과 같다”고 할 때에, 소리와 병의 다름이 있는 것은 분별하지 말아야 하고 소리와 병에서 저마다 무상하다는 뜻의 비슷함이 있는 것만을 취하여 인(因) 등으로 삼는 것과 같다. 제2의 도리로써 성립한 제6식과 어둡게 성립하는 7ㆍ8의 두 식이라 함은, 예를 들면 “극성의 나머지 식은 이는 존재의 법이라, 역시 친하지 않은 연이어서 자기 식의 법을 여읜다”고 하는 종(宗)에 있어, 인(因)은 “이것은 식의 성품이기 때문에”요, 동유(同喩)는 “극성의 5식과 같다”는 것이다. 해석에서 이르되, “종(宗)의 앞 토막의 진술에서 말한 ‘극성’은 역시 불극성과 간별한 것이니, 만일 극성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자타일분소별불극성과(自他一分所別不極成過)를 범하고 만일 6ㆍ6ㆍ8식이 존재의 법이 된다고 말하면서 다른 이가 7ㆍ8의 두 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타일분소별불극성과(他一分所別不極成過)를 범하며, 만일 의식(意識)만을 세우면서 존재의 법이라 한다면 인(因) 중에서 곧 부정과(不定過)를 범하고, 다른 이가 7ㆍ8의 두 식을 가져서 이유(異喩)를 삼게 된다면 전의 예(龋)에서 공중자부정과(共中自不定過)를 범한다. 여기서는 통틀어서 그 밖에 따로따로 제6식을 취하면서 그 뜻은 7식ㆍ8식까지 겸하는 것이라, 곧 어둡게 설립하면서 7식ㆍ8식을 성취한다고 말할 뿐이다. 나머지 식 가운데서, 뒤 토막의 진술[後陳]에서 말한 “역시 친하지 않은 연은 자기 식의 법을 여읜다”고 함은, 역시란 같다[同]는 것으로서, 앞의 “극성의 5식은 친하지 않은 연이어서 자기 식의 모든 법을 여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인(因)에서 “이것은 식(識)의 성품이기 때문에”라 함은 곧 5식 이것이 식의 성품과 같기 때문이요, 유(喩)에서 “극성의 5식과 같다”고 함은 곧 같은 5식은 역시 친하지 않은 연이어서 자기 식을 여의기 때문이니, 곧 “친한 연[親緣]은 자기 식의 법을 떠나지 않는다”고 함이 벌써 성립되었음을 분명히 알겠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친한 소연연(所緣緣)의 경계는 모두가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것이 유식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나머지 식도 식이기 때문에 마치 안식 등과 같나니, 역시 친하지 않은 연은 자기의 모든 법을 여읜다”고 했다. 제3의 도리로 설립한, 전육식(前六識)의 친한 소연연의 상분은 모두가 마음 체성[心體]에 돌아간다고 함의 ‘마음 체성’이라 함은 곧 자증분(自証分)이다. 그러나 비록 견분 또한 자증분에 의지하면서 바뀐다 하더라도, 여기서 상분만을 세운다면 견분도 함께 인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6식의 친한 소연연은 이것은 존재의 법이라, 결정코 6식의 체성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종(宗)에 있어, “견분ㆍ상분의 2분 중에서 어느 하나가 포섭하기 때문에”가 인(因)이요, “저 능연(能緣)의 견분과 같다”고 할 때에, 소승은 견분이 마음 체성을 여의지 않음은 인정하기 때문에 취하여 동유(同喩)를 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이 친한 소연연은 결정코 이것을 여의지 아니하며, 둘은 어느 하나이기 때문에 마치 저 능연과 같다”고 했다. 제4의 도리로 성립한 온갖 성근 소연연의 경계는 모두가 마음을 여의지 않는지라 이것이 그 유식인 것이니, 곧 제8식의 상분이 전6식을 바라보면서 성근 소연연이라 한다. 소승은 제8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근[疎] 소연연이라고만 한다. 예를 들면, “온갖 자기 식이 소연을 따르는 이것은 존재의 법이라, 결정코 아(我)의 능연하는 마음과 심소(心所)를 여의지 않는다”고 하는 종(宗)에 있어서, 인(因)은 “이것은 소연(所緣)의 법이기 때문에”요, 동유(同喩)는 “상응(相應)하는 법과 같다”고 할 때에, 해석하여 보자. 이 예(例)의 뒤 토막 진술에서, “결정코 아의 능연을 여의지 않는다”함은 온갖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소연의 법만은 결정코 아의 능연하는 식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니, 만일 위 토막 진술에서 아의 능연을 말하지 않았다면 일분상부(一分相扶)의 허물을 범한다. 말하자면, 소승도 타심지(他心智)의 소연인 경계는 능연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상부과(相扶過)와 간별하기 위해서, 마침내 ‘아의 능연’이라 말하여 곧 다른 이의 능연과 간별한다. 동유(同喩)에 ‘상응하는 법과 같다’고 함은 바로 앞에서부터 이미 성립된 친한 상분이 그것이니, 모두가 소연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소연의 법이기 때문에 상응하는 법과 같나니, 결정코 마음과 심소를 여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我)와 법(法)은 있는 것이 아니고 공(空)과 식(識)은 없는 것도 아니므로 있음도 여의고 없음도 여의어서 중도(中道)에 계합한다. 이로 말미암아 자존(慈尊)께서는 중도를 해설하는 두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허망한 분별이 있되 이 두 가지에서는 도무지 없으며 이 가운데서는 공이 있을 뿐이요 그것에서도 이것은 있다.
때문에 온갖 법을 말하지만 공도 아니고 공하지 않음도 아니니 있고 없음과 있기 때문에 이러한 중도에 계합되느니라.
허망한 분별이 있다 함은 곧 삼계(三界)에는 허망한 분별심이 있다는 것이요, 이 두 가지에서 도무지 없다 함은 능취(能取)ㆍ소취(所取)와 아집(我執)ㆍ법집(法執)의 모양이 없다는 것이니, 이 허망한 마음 위에서는 모두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공이 있을 뿐이라 함은 이 허망한 마음 가운데서는 진여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바로 공의 성품이요 공에 의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에도 이것은 있다고 함의 그것[彼]이란 그 공한 성품 안이요, 또 이것이 있다고 함은 역시 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식이 있다는 것으로서 곧 허망한 분별이 이것은 세속 이치[世俗諦]이기 때문이니, 이 세속 이치 가운데서도 참된 이치[眞諦]의 공한 성품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온갖 법을 말한다 함은 곧 유위와 무위의 두 가지 법 이것이 온갖 법이다.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 함의 공한 것도 아니라[非空] 함은,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과 공의 성품은 곧 의타기(依他起)와 원성실(圓成實) 이것에도 있기 때문에 공한 것도 아니라 하나니, 두 가지 진리[二諦]가 있기 때문이다.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非不空]함은, 능취ㆍ소취와 아집ㆍ법집의 두 모양 이것이 공이라는 것이니,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다. 있고 없음과 있기 때문이라 함의 있음[有]은 허망한 분별은 있기 때문이요, 없음[無]은 능취ㆍ소취와 아집ㆍ법집이 없기 때문이며, 있기 때문이라 함은 허망한 분별 중에는 진공(眞空)이 있기 때문이요 진공 중에도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도에 계합된다 함은 한결같이 공[一向空]이라 하는 청변(淸辯) 등과 같은 것이 아니요, 한결같이 있다[一向有] 하는 소승 등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도라 하며, 두가지 진리가 있음이 청변과도 같지 않고 능취ㆍ소취와 아ㆍ법이 없음이 소승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 또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의 설명에, “보살이 4지(智)를 성취하고는 따르면서 유식의 경계 없음에 깨쳐 들어간다”고 했나니, 바로 이것이 지전(地前)의 소보살이다. 비록 아직은 유식의 도리를 증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설명에 의지하고 지상(地上)보살이 네 가지 유식의 지혜를 성취함을 보고서, 마침내는 유루관(有漏觀)에 들어가 저 10지(地)보살이 변화로 대지(大地)로 황금을 만들고 긴 강물을 휘저어 소락(酥酪)을 만들어 고기와 쌀이 산더미같이 변화되는 일들을 자세히 관한다. 이 소보살이 관에 들어가 관하고난 뒤에 생각하기를, “이와 같이 진짜 금은 등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모두가 10지보살의 능변(能變)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 것이며, 다시는 바깥의 경계는 없다고 하나니, 이렇게 관하고 나서는 역시 따르면서 참 유식의 도리에 깨쳐 들어간다. 마치 승론(勝論) 조사(祖師)와 같이 6구(句)의 뜻을 지키기 위하여 몸을 변화하여 큰 돌이 된 것과 같나니, 이것은 진실한 작용이 있는지라 만일 결정코 진실한 경계라 하면 마음대로 몸의 경계를 변화하여 돌이 된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문】 대지를 변화하여 황금을 만듦과 같은 때에는 땅이 없어지면서 금의 요소가 생기는 것인가, 그 땅이 바뀌어 금이 되는 것인가. 【답】 유식경(唯識經)에 이르되, “불보살은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대원경지(大圓鏡智)와 이숙식(異熟識)에 매어서 땅의 요소는 일어나지 않고 금의 요소가 생겨서 나타나게 하나니, 이것을 증상(增上)으로 삼아 중생들로 하여금 땅이 소멸되고 금이 생기게 함을 변화라고 하는 것이요, 땅이 바뀌면서 금이 되지는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섭론(攝論)에 이르되, “관행(觀行)을 증상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식이 변화하게 한다”고 했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로서 이와 같은 대열반을 수행하는 이는 흙을 보면 금이 되고 금을 보면 흙이 되며 땅이 물 형상으로 되고 물이 땅 형상으로 되어 뜻대로 성취하되 허망이 없으며, 진실한 중생을 중생이 아니라고 보고 중생이 아닌 것을 진실한 중생이라고 보며 모두가 뜻대로 이루어지되 허망이 없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태교(台敎)에 이르되, “모든 물건 중의 온갖 모두는 바뀔 수 있는 이치가 있음은, 마치 승호(僧護)가 몸이 평상과 병(甁)으로 되는 것을 본 것과 같은 따위이다”고 했다. 색법(色法) 모두는 느낌을 따라 나타나되 물질[色]은 정해진 체성이 없고 마음을 따라 변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나니, 이 도리는 원래 여래장[如來藏] 중의 불가사의한 법이다. 마음을 따라 취착[取著]하여 바깥 것도 이루고 작은 것도 이루지만, 그대들이 행하는 이 보살도(菩薩道)는 평등한 법계라 방촌(方寸)도 이지러짐이 없다. 네 가지 음식의 지혜[唯識智]라 함은, 1의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이니, 네 종류의 유정들은 저마다 능히 반연[能緣]하는 식이 다르다. 식이 이미 서로 어긋난다면 그 소변(所變) 상분(相分) 역시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곧 하늘이 보면 이것은 보배로 장엄된 땅이고, 고기가 보면 이것은 굴로 된 집이며, 사람이 보면 이것은 맑고 시원한 물이고, 아귀가 보면 고름으로 된 강물이요 훨훨 타는 불인 것이니, 이 네 가지 유정들의 능변(能變)의식은 저마다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소변의 경계 역시 서로가 어긋나게 된다. 상(相)이라 함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모양이 아니고 이것은 상분의 모양일 뿐이니, 네 가지 유정들이 먼저 지었던 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똑같이 하나의 처소에서 저마다 상분을 변화하되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상위한 식의 모양[相違識相]이라고 한다. 지혜[智]라 함은 바로 이것은 10지보살이 능히 반연하는 지혜이니, 지혜로 저 네 가지 유정들의 자기 업식(業識)으로 변하게 되는 상분은 같지 않고 다시는 마음 밖에 따로 네 가지 경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구(舊)에 이르되, “하나의 경계가 네 가지 마음이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르지 않다. 【문】 어째서 바르지 않은가. 【답】 만일 한 경계라 한다면, 모르겠지만 꼭 이것은 어느 경계인가. 만일 네 가지 유정의 소변 상분을 떠난 그밖에 따로 다시 한 경계가 있다면 곧 이 마음의 밖에 법이 있는 것이다. 【문】 그 네 가지 유정들은 저마다 상분을 변화하는 것인가, 본질(本質)도 구별되는 것인가. 【답】 네 가지 유정은 업(業)의 뛰어난 힘으로 말미암아 그 제8의 소변의 상분도 구별된다. 만일 이 제8의 상분을 가지고 네 가지 유정들의 전6식을 바라보며 설명한다면, 곧 본질이 되기 때문이요 상분과 본질은 모두가 구별되기 때문에, 다시는 바깥의 경계는 없고 식이 있을 뿐임을 안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첫째의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는 하나의 처소에서 아귀ㆍ사람ㆍ하늘 들이 업의 차별에 따라 보는 바가 각각 다르다”고 하였으니, 경계가 만일 진실이라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당(唐) 3장(藏)이 이르되, “경계는 반드시 하나는 아니다”고 했기 때문에, 네 가지 유정들의 소변 상분은 네 가지 유정들의 능변의 마음에 따라 경계 또한 네 가지가 성립되나니, 한 처소에 대한 이해에 차별이 성립됨은 식이 있을 뿐임을 증명하는 것인 줄 알 수 있다. 논(論)에 이르되, “마치 사람이 보면 더러운 쓰레기가 있는 곳이나 축생들이 보면 훌륭한 음식이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깨끗하고 훌륭한 음식은 모든 하늘들이 보면 악취가 나는 더러운 곳이다”고 했나니, 그러므로 복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고 더러움과 깨끗함이 마음일 뿐이며 업이 저절로 다를지언정 음식에는 거칠고 가늚이 없음을 알 것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비구승들과 함께 계시면서 왕사성(王舍城)을 들어가다가 도중에서 큰 나무를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그 나무 위에 니사단(尼師壇)을 깔고 앉아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가 선정에 들어서 마음이 자재하게 되면 큰 나무를 땅으로 만들어 진짜 땅이 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나무 안에는 땅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물ㆍ불ㆍ바람과 금ㆍ은의 갖가지 보물도 모두 진짜로 되게 한다. 왜냐하면 이 나무 등 안에는 모두가 그 성분이 있기 때문이니라. 또 하나의 미색(美色)이 있을 때, 음탕한 사람이 보면 아름답다고 여기면서 마음에 염착(染着)을 내지만, 부정관(不淨觀)을 닦는 사람은 갖가지 악로(惡露)며 한 곳도 깨끗한 데가 없다고 관찰하게 되며, 부인이 보면 질투하고 성을 내고 미워하여 눈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기느니라. 음탕한 사람이 보게 되면 좋게 여기고, 질투하는 사람이 보게 되면 괴롭게 여기며, 청정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보게 되면 도(道)를 얻고, 관계없는 사람이 보게 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바가 없어서 마치 토목을 보는 것 같이 여기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만일 이 미색이 실로 아름답다면 네 가지 사람들이 보아도 모두가 아름답다고 보아야 되고, 만일 실로 아름답지 못하다면 네 가지 사람들이 보아도 모두가 아름답지 않다고 해야 하리니, 그러므로 곱거나 미움은 마음에 있고 그 밖에서는 정해짐이 없는 줄 알 것이다. 또 물었다. “선정의 힘으로 변화하는 일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만일 진실이라면 어떻게 이 금이 되고 땅이 물이 되겠으며, 만일 거짓이라면 어떻게 성인이면서 진실하지 않은 일을 하는가.” 【답】 모두가 진실이며 성인에게는 거짓이 없나니, 3독(毒)이 이미 뽑혔기 때문이다. 온갖 법은 저마다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땅을 바꾸어 혹은 물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음은 마치 소(酥)와 아교와 납 등의 이것은 땅의 종류로되 불을 만나면 녹고 물이 되면 축축한 모양으로 되며 물이 차가운 것을 만나면 얼음이 되면서 단단한 모양이 되고 돌 즙(汁)은 금이 되며 금이 망가지면 구리가 되거나 혹은 도로 돌이 되는 것처럼, 중생도 그와 같아서 악이 선이 될 수도 있고 선이 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법은 정해진 모양은 없다. 2의 무소연식지(無所緣識智)라 함의 무소연식이라 함은, 바로 이 모든 이생(異生)들이 장차 제6의 홀로 생기는 산의식(散意識)으로부터 과거와 미래의 물속의 달[水月]과 거울 속의 형상[鏡像] 등을 반연하면서 변화로 가정의 상분(相分)을 일으키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의 상분은, 이 중생의 제6식만으로 망령되이 얽어 짜고 두루 헤아리면서 뜻에 당해 변화로 일으키는 것이니, 도무지 마음 밖에는 진실한 경계가 없으므로 소연이 없는 식[無所緣識]이라 한다. 지혜라 함은 이것이 곧 10지보살의 능히 반연(能緣)하는 마음이니, 보살이 이르되, “이들 이생들의 소변인 가정의 상분은 모두가 모든 이생들의 능변의 마음을 여의지 않나니, 이것이 그 유식이다”고 한다. 곧 이런 예(例)로 하면, 온갖 실지의 경계에 있어서도 역시 온갖 유정들의 능히 반연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나니, 마음을 여의고는 그 밖에 다시는 한 물건도 없다. 구(舊)에 이르되, “반연하되 생각을 내지 않음이 없으면 곧 바르지 않다”고 했다. 【문】 어째서 바르지 않는가. 【답】 허공 꽃과 같은 온갖 거짓된 경계를 반연할 때에도 마음은 역시 일어난 것이거늘, 어찌하여 반연하되 생각을 내지 않음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반연하되 체성이 없고, 거짓 경계일 때에도 속마음의 진실한 상분은 마음을 끌어냄이 없지 않나니, 견분에서 보아도 역시 소연연(所緣緣)의 뜻이 성립되어 아직은 마음이 없는 경계가 있지 못하고 경계가 없는 마음은 일찍이 없다. 또 호법(護法)의 4분을 어기지 않으면 유식이라는 이치가 성립되나니, 만일 속마음의 진실한 상분을 여의어 없애면 그 밖에서 얽어 짜고 두루 헤아리면서 고집하는 마음의 경계란 곧 없는 것이다. 당(唐) 3장이 이르되, “경계는 참된 생각으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만 식(識)이 있음을 증명하여 안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둘째, 무소 연식지는 과거와 미래를 반연하는 꿈과 거울 속의 형상 등은 실지로 있는 경계가 아니로되 식은 현실로 있게 되며, 그 경계는 이미 없는지라 그 밖의 것도 그러해야 한다.” 이미 보살이 모든 이생들의 변계소집(遍計所執)의 경계는 모두 이생들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고 관찰했다면, 그 밖의 온갖 실지의 경계도 모두 다 그러한 줄 분명히 알 것이다. 3의 자응무도지(自應無倒智)라 함은 곧 10지보살이 일으키는 지혜이니, 모든 중생들이 망령되이 “자기 몸이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이 된다”고 집착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보살이 이르되, “이것은 범부가 집착하는 마음이요 뒤바뀐 소견일 뿐이어서 망령되이 집착하는 마음을 여의고 없애면 그 외에 그 범부 몸 위에는 실로 상ㆍ락ㆍ아ㆍ정의 경계가 없다”고 하나니, 반드시 있다면 이생들은 수행을 빌리지 않으면서 해탈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망한 식만이 있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셋째, 자응무도지는 어리석은 범부의 지혜로 만일 실제의 경계를 얻는다면, 그는 저절로 뒤바뀜[顚倒] 없음이 성립되어야 하고 공용(功用)을 말미암지 않아도 해탈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4의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라 함은, 첫째 수자재자지전지(隨自在者智轉智)이니, 이것은 곧 보살이 일으키는 지혜로서 스스로 소변(所變)의 경계는 모두 나[我]의 능변(能變)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고 관찰한다. 이것이 그 유식이다. 8지(地) 이후의 보살은 저절로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을 만들고 큰 강을 휘저어서 소락(酥酪)을 만들 수가 있나니, 이 경계는 진지(眞智)를 따라 바뀌면서 변화하는 일로서 모두가 이룩된다. 바뀐다[轉]고 함은 옛 바탕을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니, 곧 대지와 산하의 옛 바탕을 바꾸어서 금과 은이 되게 하여 중생들이 실제로 수용할 수 있고 달구고 두드려서 여러 가지 기구를 다 만들게 된다. 만일 마음을 여의고서 바뀜의 실지 경계가 있다면, 어떻게 산과 강물 등이 보살의 마음을 따라 금은 등의 물건으로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상분과 본질을 모두 다 바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모든 경계는 모두가 보살의 능변의 마음을 떠나지 않으며, 이생(異生)들까지도 역시 불을 변화시켜 물이 되게 하고 낮을 변화시켜 밤이 되게 하며 쇳덩이를 다루어서 황금 등을 만들 수 있나니, 이 모두는 이 경계가 일을 따라 지혜가 바뀌면서 변화로 된 일로서 다 이룩되는 것이므로 역시 이것은 유식이다. 만일 이것이 가다연나(迦多演那)가 변화한 궁전과 금은 등이라면 모두가 성취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마음을 여의고는 다시는 진실한 경계가 없는 줄 알 것이다. 논에 이르되, “무릇 금ㆍ은ㆍ궁전 등을 변화한다 함은 이것은 진실[實]의 정과색(定果色)이니, 초지(初地) 이후로부터서야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 만일 자재함[自在]에서 보면 8지 이상의 보살은 모양과 국토에서 모두 자재함을 얻으므로 상품(上品) 선정 마음의 큰 세력이 있는지라 금ㆍ은ㆍ궁전 등을 변화시킴에는 모두가 성취되나니, 마치 변화로 된 금은을 달구고 두드려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어 실제로 수용하게 됨과 같다. 그 변화로 된 금ㆍ는 이것은 진실의 정과색이라 모두가 보살의 속마음을 여의지 않나니, 이것이 그 유식이요 마음 밖에는 경계가 없다. 만일 모든 성문과 지전(地前)의 소보살이라면, 금ㆍ은ㆍ궁전을 변화할 때는 곧 보살이 변화한 금ㆍ은ㆍ궁전에 의탁함을 본질(本質)로 삼나니, 제6식으로 변화한 금은 등은 모두 성취되지 않고 실제의 작용도 없다. 그러나 변화로 된 금과 은 이것은 거짓[假]의 정과색이라 상문과 여러 소보살들의 속마음을 여의지 않았나니, 이것이 그 유식이요 마음 밖에는 경계가 없다. 여기 가다연나의 인연은 바로 성문인지라 아직은 상품의 선정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변화로 된 금ㆍ금이 비록 실제 작용은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안의 식을 여의지 않은지라 마음 이외에는 경계가 없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첫째, 수자재자지전지(隨自在者智轉智)는 이미 마음에 자재함을 증득한 자가 하고자 하는 대로 땅 등을 변화시킨다면 모두가 경계로 된다”고 하였나니, 만일 이것이 실제라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는가. 또 고덕(古德)이 이르되, “색자재심(色自在心)이 생기기 때문에, 마음은 물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산을 옮기고 바다를 엎으며 말을 거꾸로 하고 하늘을 뒤집으며 큰 강을 휘저어서 소락(酥酪)을 만들고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을 만드는 것들이 모두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둘째의 수관찰자지전지(隨觀察者智轉智)라 함은, 무성(無性)보살이 이르되, “모든 성문ㆍ독각ㆍ보살 등이 만일 고관(苦觀)ㆍ공관(空觀) 등을 닦으면서 상응(相應)함을 얻은 이면, 혹 4제관(諦觀)을 짓는 때에 어느 한 법을 관하는 위에서도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 등의 뭇 모양이 환히 나타날 뿐이요 이 모든 법의 체성 위에서 여러 가지 고ㆍ공 등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이 고ㆍ공 등의 뭇 모양이 바로 모든 법의 체성일 뿐이다”고 했다. 이미 무상(無常)의 모양이 성인의 관심(觀心) 위에 있다면,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관심을 여의지 않으면서 있는 줄 알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둘째 수관찰자지전지는 훌륭한 선정과 법을 닦는 관(觀)을 얻은 이가 어느 한 경계를 관하게 되면 뭇 모양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경계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찌 마음을 따르면서 바뀌겠는가. 셋째의 수무분별지전지(隨無分別智轉智)라 함은, 보살이 근본지(根本智)로 진여를 증득할 때에 진여와 경계와 지혜가 명합되고 능소(能所)가 한 모양이 되면, 다시는 분별이 없고 근본지를 여의고는 그 밖에 다시는 따로의 경계가 없어서 곧 경계가 없어서 곧 경계는 참된 지혜를 따라 구르나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한다. 그대 소승이 만일 마음 외에 실제의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면 곧 진여를 증득하는 때에 모든 경계 모양이 어찌하여 앞에 나타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셋째, 수무분별지전지는 진실하게 분별이 없는 지혜를 실제로 증득하면 온갖 경계 모양이 모두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나니, 경계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찌하여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2는 세간 현상은 종과는 어긋난다는 힐난[世事乖宗]이니, 이것은 경부(經部)의 논사(論師)가 힐난한다. “논주(論主)가 만일 안의 식이 있을 뿐이요 마음 이외에는 경계가 없다 한다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는 세간에서 정(情)이 있고 정이 있지 않은 물건들에게 처소가 일정하고[處定], 시기가 일정하고[時定], 몸이 일정하지 않고[身不定], 작용이 일정하지 않는[作用不定] 등이 있는가”고 한다. 이 안에 나아가면 저절로 네 가지 힐난이 있다. 1은 처소가 일정하다는 힐난이요, 2는 시기가 일정하다는 힐난이요, 3은 몸이 일정하지 않다는 힐난이요, 4는 작용이 일정하지 않다는 힐난이다. 1의 힐난에서 말한다. “논주가 만일 모두 이것은 유식이요 마음 이외에는 경계가 없다고 한다면, 세간 사람이 현량(現量)의 식을 가지고 남쪽 산[南山]의 처소를 반연하면 그 식과 산은 다 같이 그 남쪽에 있고 산은 식을 여의지 않으므로 유식이라 말할 수 있지만, 갑자기 현량의 식을 가지고 북쪽을 반연하는 데에는 그 산은 일정하게 남쪽에 있되 반연하는 이의 마음은 옮아와 북쪽 향하는 것을 따르지는 않나니, 이미 북쪽을 반연할 때에 남쪽 산을 반연하는 마음은 나지 않는다면 식을 여의고 그 밖에 진실한 남쪽 산의 경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겠거늘, 이 어찌 유식이 성립되겠는가”라고 한다. 2의 시기가 일정하다는 힐난[時定難]에서 힐난하기를, “만일 남쪽 산을 반연하고 있을 때에 식이 실제로 생기면 산도 마음을 떠나 생기므로 유식의 이치가 성립된다 할 수 있지만 만일 남쪽 산을 반연하지 않을 때면 그 산을 반연하는 마음은 곧 생기지 아니한다. 그러나 산은 있으면서 마음을 따라 소멸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것은 곧 마음을 여의고 경계가 있는 것이거늘 어떻게 유식의 이치가 성립되겠는가”라고 한다. 이 위의 두 가지 힐난은, 모두가 현량의 식을 힐난한 것이요 또한 비량(比量)을 힐난한 것이다. 만일 비량의 마음에 결부시킨다면, 곧 산의 상분(相分) 역시 그 밖의 처소의 마음 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3의 유정의 몸이 일정하지 않다는 힐난[有情身不定難]에서 힐난하기를, “만일 온갖 모두가 유식이라 한다면, 여러 유정들이 같이 한 곳에 있을 때에 그 중의 반(半) 수가 눈병이 든 이들로서 혹은 10인ㆍ혹은 5인이거나 간에 어떤 이는 허공 꽃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머리카락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쉬파리를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혀 물건을 보지 못하기도 하면 이들 모두는 눈병이 든 사람들이라 자기식의 변화로 머리카락ㆍ쉬파리 등의 상분을 일으켰으므로 모두가 눈병이 든 이라는 마음을 여의지 않은지라 이것은 유식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반 수는 눈병이 들지 않은 이들이어서 혹은 10인이거나 혹은 5인이거나 간에 같이 한 곳에 있으면 한 모양의 물건을 보게 되는지라 모두 경계가 같나니, 이미 이것이 하나라면 마음을 여의고 경계가 있어 어찌 유식이 성립되는가를 분명히 알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