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4_0354_b_01L종경록 제63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4의 작용이 일정하지 않다는 힐난[作用不定難]에서는 그 안에서 세 가지 힐난이 나누어진다.
첫째의 힐난에서 이르기를, “또 무슨 이유이기에, 눈병을 앓는 이가 보게 되는 머리칼과 쉬파리 등은 곧 머리칼과 쉬파리 등의 실제 작용이 없거니와, 그 밖에 눈병을 앓지 않는 이가 보게 되는 머리칼과 쉬파리 등의 물건은 바로 실제 작용이 없지 않나니, 그대 대승들이 모두가 이는 유식이라고 인정했다면 모름지기 일시에 실제의 작용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서 일시에 실제의 작용이 없다면 이제는 이미 같지가 않거늘, 잘 모르겠지마는 어느 것이 바로 유식인가”고 한다.
둘째의 힐난에서 이르기를, “또 무슨 이유이기에. 유정이 꿈속에서 얻게 되는 음식ㆍ칼ㆍ막대기ㆍ독약ㆍ의복 등은 실제의 작용이 없다가, 깨어나서 만일 얻게 되면 실제의 작용이 있는 것인가”고 한다.
셋째의 힐난에서 이르기를, “또 무슨 이유이기에, 심향성(尋香城) 등은 곧 실제의 작용이 없는데 그 밖에 벽돌과 흙으로 만든 성들은 실제의 작용이 있는 것인가”고 한다.
논주(論主)는 앞의 네 가지 힐난에 대해 30유식론송(唯識論頌)을 인용하여 대답하기를, “처소의 일정함과 시기의 일정함은 꿈과 같고/몸의 일정하지 않음은 마치 아귀가/똑 같이 고름 강물 등을 봄과 같으며/꿈에 있던 작용이 상실됨과 같다”고 하리니, 만일 이 게송에 의하여 앞의 네 가지 힐난을 대답하면 족할 것이다.
첫째, 앞의 처소가 일정하다는 힐난에 달한다면, 논주(論主)는 이르되 “그대는 도리어, 유정들이 꿈속에서 때로는 마을과 동산이 있고 혹은 남자거나 여자 등의 물건을 보기도하며, 한 곳에 그대로 안정하게 있으면서도 그 유정은 꿈꾸는 마음에서 때로는 딴 처소를 반연하고 딴 처소에서는 앞의 마음과 동산 등의 물건을 보지 못하는 일을 인정하는가. 곧 꿈속의 마음이 일정하지 않다면, 그대는 이것이 통틀어 유식이라고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고 한다.
경부(經部)에서는 대답하기를, “우리 종(宗)에서는 꿈속에서 비록 꿈의 경계인 처소가 일정하다 하더라도, 꿈속의 마음이 일정하지 않고 유정을 여의지 않았다면 꿈속의 마음은 모두가 이는 유식이다”고 한다.
논주는 이르되, “내가 깼을 때의 경계와 물질도 역시 그러하여, 비록 산의 처소가 길이 정해져[長定] 있더라도 그 유정이 능히 반연하는 마음은 일정하지 않는지라 모두가 현재의 마음을 여의지 않나니, 통틀어 이것은 유식이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종(宗)에서는 깨어났을 때 보게 되는 경계와 물질은 이것은 존재[有]의 법이라, 결정코 이것은 유식이다”고 하는 종(宗실)에 있어서, 인(因)은 “경계인 처소는 일정하더라도 마음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요, 유(喩)는 “그대의 종에서 꿈속의 경계가 모두 유식인 것과 같다”이다.
둘째, 앞의 시기가 일정하다는 힐난을 대답한다면, 논주는 이르되 “만일 유정들이 꿈속에서 보게 되는 마음과 동산 등의 물건을 그 꿈속의 마음에서도 반연할 때면 이것은 유식일 수 있거니와, 만일 반연하지 않을 때면 유식이 아니어야 한다”고 한다.
경부(經部)에서 대답하기를, “우리의 꿈속에서의 경계는, 꿈속의 마음이 반연할 때에도 역시 이는 유식이요 꿈속의 마음이 반연하지 않을 때에도 꿈속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지라 역시 이는 유식이다”고 한다.
논주는 이르되, “내가 깨어났을 때의 경계와 물질도 역시 그러하여, 내가 이제 오랜 동안에 남쪽 산을 반연하여도 산이 마음을 여의지 않는지라 이는 유식이며, 때로 산을 반연하는 마음이 비록 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현재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지라 역시 이는 유식이다”고 한다.
게송에서 말한 “처소의 일정함과 시기의 일정함은 꿈과 같다”고 한 이 한 글귀로는, 앞의 두 가지 힐난에 대답이 된다.
셋째, 몸이 일정하지 않다는 힐난에서, 논주는 이르되 “그대의 경부(經部)에서는 도리어, 여러 아귀(餓鬼)들이 같이 한 곳에 있으면서 그 중의 셋 또는 다섯이 입이 같은 자들이라 똑 같이 고름의 강물로 일정하게 보거나 또 자기 업력(業力)에 따라 보게 되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며, 곧 같이 한 곳에 있으면서도 어떤 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로 보기도 하고 어떤 자는 더러운 찌꺼기로 보기도 하며 어떤 자는 사람이 몽둥이를 잡고 못 오게 막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을 인정하는가. 이와 같이 아귀들은 한 곳에 같이 있으면서도 그 반 수는 경계의 일정한 것을 보고 그 반 수는 저마다 다르게 보기도 하나니, 그대는 통틀어 이 아귀의 유식임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고 한다.
대답하기를, “비록 보는 것이 같고 다름이 있다 하더라도 아귀의 자기 업식(業識)의 변한 바를 여의지 않으므로, 모두가 이는 유식이다”고 한다.
논주는 이르되, “우리 종(宗)의 유식도 역시 그러하여, 비록 한 무리는 눈병이 난 이들이라 보는 것이 저마다 다르고 한 무리는 눈병이 없는 이들이라 보는 것이 곧 같다 하더라도, 이 두 무리의 유정들의 식의 변한 바를 여의지 않는지라, 모두가 이는 유식이다”고 한다.
게송에서 말한, “몸이 일정하지 않음은 마치 아귀가/똑 같이 고름 강물 등을 봄과 같다”고 하는 이 두 글귀의 게송으로, 이 하나의 힐난을 대답한다.
성유식론보생론(成唯識寶生論)의 게송에서, “몸의 일정하지 아니함은 아귀와 같다”고 함은, 실은 이 강물은 맑아서 그 외에 다른 경계가 없는데도 그러나 모든 아귀들은 모두가 다 똑 같이 고름이 가득차서 흐르는 것으로 보되 한 번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며, 그러나 이곳에는 실로 조금도 피고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언덕에 넘치면서 흐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실지 경계로서 결정코 하나에 속한 것도 없고 도리로 보아서도 결정코 성립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이것은 곧 물질 등을 보는 마음인 줄 알아야 한다. 비록 그 외의 경계가 없고 결정되지 않은 성질이라 하더라도 몸에서 경계가 없도록 막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곧 그것에 경계가 있는 원인이 성립되므로 일정하지 않다는 허물이 있게 된다.
경계가 없는 처소에서 역시 여러 몸이 있으면서 다 같이 일정하지 않게 보거늘, 어떻게 실로 고름의 강물이 흐르는 일이 없겠는가.
그러나 모든 아귀들이 다르게 보게 되지 않음은 그의 동업(同業)으로 말미암아 이런 지위를 느끼면서 모두가 같이 고름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며, 인색했던 업이 성숙되면 똑 같이 이런 고통을 보게 되다.
옛날의 동업으로 말미암아 저마다 훈습된 자체(自體)가 이때에 다르게 성숙되면서 다 나란히 앞에 나타나서 그 여러 유정들은 동일하게 이런 일을 보는 것이니, 실은 바깥 경계는 없되 생각과 기억 때문이다.
그런 도리에 준한다면 인자함도 역시 이와 같나니, 공동으로 지어서 있게 될 훈습이 성숙된 때에는 문득 따로따로의 모양이 없이 물질 등의 상분(相分)은 식으로부터 생긴다.
그러므로 결정코 알아야 한다. 그 외의 경계로 말미암지 않는 식이라야 생기게 되거늘, 어찌 이 동일한 갈래[趣]에 남을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정된 것은 아니다. 저 유정들의 업은 같지만 현실에서 보면 좋은 집과 천한 집에 가 나고 빈부 등의 차이가 있으며, 이렇게 성립은 하되 그 물질 등은 봄에는 차별이 있어야 똑 같이 저 다른 종류를 보면서도 그것 등이 아닌 것으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 무리와 그것과는 같지 않으며 그것 역시 바깥 경계의 힘 때문에 물질 등의 경계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아귀는 비록 동일한 갈래라 하더라도 보는 것도 서로가 다르며 업의 다른 모양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도 역시 그러하나니, 어떤 자는 이글이글한 쇠로 싸서 녹이고 삶고 뿌리고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똥과 오줌이 범람하는 것을 보기도 하나니, 서로가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같은 사람 갈래[人趣]라 하더라도 박복한 사람에게 금으로 된 띠가 나타난 때는 이글이글한 쇠사슬로 보이는지라 가까이하기 어렵기도 하고 혹은 독사가 독을 뽑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니, 그러므로 결정코 알아야 한다. 비록 사람 갈래에 있다 하더라도 역시 똑 같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러한 무리들에게 따로따로 보게 되는 성질이 없다면 그로 말미암아 모두가 같은 무리[同類]라는 업이 있으며, 그러나 그런 무리들에게 동분(同分)의 업이 있으면 동분의 갈래에 가 나거니와, 다시 별업(別業)이 있다면 저마다 차별되게 보나니, 이 한 공능(功能)이 그를 따르는 힘 때문에 그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동일하게 또는 다르게 보이게 한다.
또 이런 이치 때문에 역시 다른 말로 대답해 보면,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다른 갈래의 유정인 아귀와 축생들은 한 처소도 아니어야 하고 다르게 보지도 않아야 하나니, 따로따로 지었던 업이 다르게 성숙되는 성품 때문이다. 이 비록 갈래가 성립되는 업에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똑 같이 보게 되는 업은 도리어 다르지 않음이 있음은, 곧 모든 유정들이 스스로 상속(相續)하는 동안에 그 다른 업의 종자가 있으면서 따르기 때문이니, 그것은 그의 인연에 맡겨서 저마다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에서, 작용의 일정하지 않은 것 안의 세 가지 힐난을 통틀어 대답한다면, 논주가 이르되, “그대의 경부(經部) 등에서는 도리어, 유정들이 꿈속에서 얻게 된 칼ㆍ막대기ㆍ음식 등에는 실지의 작용은 없되 이것이 유식임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고 한다.
대답하기를, “인정한다”고 하면, 또 묻기를 “유정들이 꿈속에서 때로는 유정(遺精)도 하고 오줌을 싸는 일이 있을 때는 실지의 작용이 있는데, 그대는 이것도 유식임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라고 한다. 대답하기를 “인정한다”고 하면, 논주는 이를 예(例)를 들어 대답한다.
“그대가 이미 꿈속에서 실지의 작용이 있고 실지의 작용이 없어도 모두 이것이 유식이라고 인정한다면 곧 우리 종(宗)에서 눈병이 나고 눈병이 나지 않은 이와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과 거짓의 성(城)ㆍ진실한 성인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실지의 작용이 있는 것이요, 또한 그대의 꿈속에서 실지 작용이 있고 실지 작용이 없는 이 모두가 음식임을 알 것이다”
논주는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 종에서 깨어났을 때의 경계와 물질은 이것이 존재의 법이라, 결정코 이것은 유식이다”고 하는 종(宗)에 있어서, 인(因)은 “실지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요, 유(喩)는 “마치 꿈속의 경계요 물질 같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꿈속의 경계와 물질은 이것이 존재의 법이라 유식이 아니어야 한다”고 하는 종(宗)에 있어서, 인(因)은 “실지의 작용이 있고 실지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요, 유(喩)는 “그대가 깨났을 때의 경계와 물질과 같다”고 하리라.
유식의 게송에서 말한, “꿈에서는 있던 작용이 상실됨과 같다”고 하는 이 글귀로는, 위에서 힐난한 경계에 대답한다.
또 모두 하나의 비유로 통틀어서 네 가지의 힐난에 대답하면, 30유식송(唯識頌)에서 이르되 “온갖 것은 마치 지옥과 같아서/똑 같이 모두가 옥졸(獄卒) 등을 보나니/핍박하고 괴롭히는 일을 능히 하므로/네 가지의 이치가 모두 성립된다”고 했다.
만일 세간에서 처소가 일정하고 시기가 일정하고 몸이 일정하지 않고 작용이 일정하지 않는 등의 일이라면, 역시 지옥 안에서 죄를 받는 유정이저마다 벌 받는 일을 보는 것과 같아서, 역시 처소가 일정하고 시기가 일정하고 몸이 일정하지 않고 작용이 일정하지 않은 것도 있나니, 이 모두는 유식이며 다만 이 여러 유정들이 악업의 증상(增上)일 뿐이다.
비록 동일한 옥(獄)이라 하더라도 고통을 받는 때에 보게 되는 구리로 된 개[銅狗]ㆍ쇠로 된 뱀[鐵蛇]ㆍ우두의 옥졸[牛頭獄卒]과 벌 다스리는 기구들이 혹은 같기도 혹은 다르기도 하되, 이러한 고통 주는 기구로 죄인을 괴롭히는 것은 모두가 이 죄인이 지었던 악업의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니, 다 같이 마음 밖에 실지의 구리개 등의 물건은 없다.
지금 세간의 현상계의 법도 역시 그러하여, 만일 죄인이 동일한 옥이 있다면 이것은 총보(總報)로서의 악업의 힘이요, 만일 저마다 따로따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별보[別報]로서의 악업의 힘이다.
제경요집[諸經要集]에서 이르되, “대저 말하자면, 죄의 행[罪行]과 망령된 소견[所見]의 경계에 오염되어 결정코 나와 남을 고집하고 위반과 순종에 집착하여 자기가 다른 이로 하여금 모두가 악업을 이루게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탐욕은 나거나 소멸되지 않아
마음으로 하여금 괴롭게 할 수 없다
만일 사람이 나[我]라는 마음과
얻을 것이 있다는 소견이 있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탐욕이 되나니
장차 지옥에 들어가느니라.

그러므로 마음 밖에는 비록 따로 경계가 없다 하더라도 그 미혹의 망정에 칭합된 강한 소견으로 염오(染汚)를 일으킴은 마치 꿈에서 경계를 보고서 모든 탐냄과 성냄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제 꿈을 칭양하는 이는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며 도리로는 진실이로되 경계가 없다 하나니, 뜻[情]만의 허망된 소견 때문이다.
지도론(智度論)의 설명에, “마치 꿈속에서 좋은 일이 없는데도 좋다고 하고 성낼 일이 없는데도 성을 내며 두려운 일이 없는데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삼계(三界)의 중생도 역시 그러하여 무명(無明)의 잠 때문에 성내지 않아야 하는데도 성을 낸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이 밖에 비록 따로 경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미혹의 뜻과 일치된 허망한 소견으로 염오를 일으키나니, 마음 밖에는 비록 지옥 등의 모양이 없다 하더라도 악업이 이룩되는 때에 허망한 소견으로 고통을 받는다.
마치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서 이르되, “염마라(閻摩羅) 사람은 중생이 아닌데도 죄인이 보고서는 ‘이 중생이 손에 이글이글한 쇠칼을 갖고 있구나’고 하나, 그 지옥 사람들의 악업이 다하여 목숨이 끝난 뒤에는 다시는 염라의 옥졸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생 수에 드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기름에 심지가 다하면 등불이 없는 것처럼, 업이 다하는 것도 그러하여서 다시는 염라의 옥졸을 보지 않는다. 마치 염부제(閻浮提)에 햇빛이 나타나면 어둠이 없는 것처럼, 악업이 다할 때에는 염라의 옥졸도 그와 같아서 중생의 두려워할 만한 형색이 약하게 생긴 눈과 악하게 생긴 입조차도 모두 다 없어진다. 마치 벽화(壁畵)를 부수면 그림도 따라 없어지듯, 악업의 벽화도 그와 같아서 다시는 염라의 옥졸의 두려운 형색을 보지 않는다”고 함과 같다.
이 글로써 증험하건대, 중생이 악업으로 고통을 받아야 할 이는 저절로 그 속에서 망령되이 지옥을 보게 된다.
【문】 지옥을 보는 이면 악졸과 범ㆍ이리 등을 보게 되며, 그 지옥에서 염라왕이 가운데 있으면서 여러 죄인을 판결하는 것을 망령되이 보게 된다면, 이 경계는 있는 것이거늘,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답】 거기서 보는 옥주(獄主) 역시 망령되이 본 것이니, 바로 이 죄인의 악업으로 훈습된 마음이 마음으로 하여금 변하고 달라지게 한 것이어서 없는 가운데서 망령되이 본 것이요, 실로 지옥과 염라왕이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유식론(唯識論)에서 물었다. “지옥 안의 옥주와 까마귀ㆍ개ㆍ양 들이 중생인가, 중생이 아닌가?”
대답했다. “이들은 중생이 아니다.”
물었다. “무슨 이치 때문에, 이들이 중생이 아닌가?”
대답했다. “상응(相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섯 가지의 뜻이 있어서 그 지옥의 옥주와 까마귀ㆍ개 들은 중생이 아니라는 것이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마치 지옥 안의 죄 있는 중생들이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처럼, 지옥의 주인들이 만일 중생들이라면 역시 이렇게 갖가지 고통을 받아야 할 터인데, 그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갖가지 고통을 받지 않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둘째는, 지옥의 주인들이 중생들이라면 서로서로가 죽이고 해치며 이들이 죄인이요 이들은 주인이라고 분별할 수가 없을 터인데, 실은 같이 서로가 살해하지도 않고 이들이 죄인이요 이들이 옥주임을 분별할 수 있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셋째는, 지옥의 주인들이 중생들이라면 형체와 힘들로써 서로서로를 죽이고 해치면서 죄 받는 사람에게만 치우치게 두렵게 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실로 죄인에게만 치우치게 두렵게 하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넷째는, 그 지옥 땅은 언제나 이글거리는 쇠와 지옥 주인들도 중생들이라면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을 터인데, 어떻게 그 죄 받는 사람들만을 해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로 그 죄받는 사람들만을 해치고 있으니, 이런 이치 때문에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다섯째는, 지옥의 주인들이 중생이라면 죄 받을 사람이 아니면 그 지옥 안에 가 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실은 그 지옥 안에 와 나 있으니, 이런 이치 때문에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이것은 무슨 이치 때문이냐 하면, 그 지옥 안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은 5역(逆) 등의 모든 악한 죄업을 지었는지라 그 안에 가 났거니와, 지옥의 주인들은 악업을 짓지 않았거늘 어떻게 거기에 가 나겠는가.
이러한 다섯 가지의 이치들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었다. “만일 그 옥주들이 중생이 아니라면 죄업도 짓지 않아서 그 곳에 나지 않았을 것이거늘, 어떻게 하늘 안에서는 축생들이 있을 수 있는가. 이는 무슨 이치 때문이냐 하면, 마치 그 안에 갖가지 새들과 여러 축생들은 그 곳에 나 있는 것과 같나니, 지옥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고 축생과 아귀의 갖가지 중생들이 그 곳에서 주인이 되게 하고 있는가.”
대답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축생들은 하늘 안에 가 나지만/지옥에서는 그렇지 않나니/천상에 가 있는 축생들은/축생으로서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
이 게송에서는 무슨 뜻을 밝히고 있느냐 하면, 저 축생들이 천상에 가 나는 것은 그들이 천상의 기세간(器世間)에서의 조그마한 업이 있어서이니, 이 때문에 그 기세간 중에서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저 지옥의 주인과 까마귀ㆍ개들은 모든 고통을 받지 않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저 지옥 안에서는 죄 받는 중생들을 제외하고는 진실한 주인과 까마귀ㆍ개 따위는 없다”고 했다.
또 보생론(寶生論)에서 이르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차별된 몸을 얻으면 지옥에서 고통 주는 기구로도 받게 됨이 같지 않나니, 혹은 활활 타는 불에서도 업력(業力) 때문에 이내 타는 고통이 없게 된다”고 했다.
이야말로, 착한 벗[善友]이 아니면, 누가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무릇 이 은밀한 벗으로서 성품이 착한 사람은 해치는 위험한 말은 하지 않고 언제나 이익을 생각하게 되나니, 그가 타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짐짓 이런 말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는 성립(成立)을 돕는 뜻으로서 바로 이것이 착한 벗이라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로 말미암아 그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나락가[那落迦] 아닌 것을 성립하려 하는 뜻에서다.
이제 다시 말하자면, 그 업력으로 말미암아 “큰 불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곧 참으로 유식이란 이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실지의 불은 없고 다만 업력으로 제 성품[自性]만을 무너뜨린다면 반드시 이런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문득 이 불의 제 성품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이 성립된다.
그러나 참 성품[實性]이 있다는 것이 이 종(宗)에서 인정하는 바다. 만일 이 식(識)의 나타난 모양을 인정하면서 현상의 자체가 원래 없다 하면 이것은 “업력 때문에 불이 없다”는 이것이 마땅한 도리가 되겠거니와, 그 먼저 지었던 업의 제한(制限) 때문에 만일 이와 다르다면 저 증상업(增上業)으로 초래된 과보가 벌써 나타나 거기에 있거늘 어떻게 보지 않겠는가. 마치 지혜 없는 이가 불을 끄고자 하면서 다시 소(酥)를 부어대는 것과 같다.
이제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더욱 더 광명이 치성하여 이 뭇 도리로 말미암아 나락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것들을 증명한 것이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으로 나타난 바요 바른 진리는 차이가 없는 줄 알 것이다.
마치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의 관불심품(觀佛心品)에서 이르되, “이때 부처님 마음은 마치 붉은 연못과 같았고 그 연꽃 잎 사이에는 8만 4천의 백색 광명들이 있었으며 그 광명이 다섯 길[五道] 중생들을 두루 비추었고 이 광명이 나올 때는 고통 받는 중생들이 모두 다 나타나 보였으니, 이른바 고통 받는 곳인 아비지옥(阿鼻地獄)의 18소(小) 지옥과 18한(寒) 지옥과 5백억의 도림(刀林)지옥들까지였다”고 함과 같다.
【문】 만일 중생의 악한 업의 마음으로 느끼면 지옥의 일이 나타난 것은 이치로 보아 그럴 수 있거니와 부처 마음[佛心]을 관하는 때에도 어째서 순수하게 지옥이 나타나는가.
【답】 이것은 요약하여 두 가지의 뜻의 있다. 첫째는 본체[理]에 결부시켜 관찰하건대, 부처의 심성(心性)은 본래 법계를 포함한지라 하나의 티끌마다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고 하나의 법마다 꿰뚫지 아니함이 없다.
둘째는 현상[事]에 결부시켜 관찰하건대, 부처는 중생 구제하는 것만을 뜻으로 삼아서 중생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지라 지옥의 지경도 전혀 이것은 부처의 마음이며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운용하여 끊임없이 몸을 같이 한다.
그런 까닭에 관불심품(觀佛心品)에 이르되 “부처님이 천왕(天王)에게 말씀하셨다. ‘부처 마음의 광명이 비출 바를 알고자 할진댄, 언제나 이와 같은 끊임없이 구제함이 없는 모든 고통 받는 중생들을 비추고, 부처 마음의 반연할 바[所緣]는 언제나 이들의 극악한 중생들을 반연하나니, 부처 마음의 힘으로 스스로 장엄하기 때문에 산수(算數)의 겁(劫)을 지나도록 그 죄인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내게 하느니라.’
내지 그 때 세존이 이 말씀을 할 적에 부처 마음의 힘은 열 가지 백색 광명을 놓았으니, 부처 마음으로부터 나와서 그 광명은 시방 세계를 두루 비추는데 낱낱 광명 안에는 한량없는 화신불(化身佛)이 보배 연꽃 위에 계셨다.
때에 모인 대중들은, 부처님의 광명을 마치 파리(玻璃)의 물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마치 우유(牛乳)와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하며, 모든 화신불이 부처님의 가슴으로부터 나와서 부처님의 배꼽으로 들어가 부처님 마음 사이를 노닐면서 큰 보배 배를 타고 다섯 갈래[五道]에서 죄 받는 사람들의 처소로 가는 것을 보기도 하고, 낱낱 죄인들은 모든 화신불을 마치 자기의 부모와 선우처럼 친한 이가 되어서 점점 자기들을 위해 출세간법(出世間法)을 설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때 공중에서는 큰 음성으로 모든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제 부처님 마음을 관해야 합니다. 모든 부처님 마음이란 이는 대자(大慈)이니, 대자의 반연할 바는 고통 받는 중생을 반연합니다. 또한, 다음에는 대희(大喜)를 행하나니, 모든 중생이 안온하고 낙(樂)을 받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기쁨을 내되 마치 자기의 것과 다름이 없이 여깁니다. 기쁨을 내고 난 뒤에는 다음에 사법(捨法)을 행하나니, 이 모든 중생들은 오고 가는 모양이 없고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생깁니다. 마음의 생각에서 생긴다 함은, 인연(因緣)의 화합을 가정하자면 마음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마음의 생각은 마치 어지러이 생기는 꽃이 뒤바뀜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은 생각으로부터 일어나고 즐거움도 생각으로부터 생기며, 마음은 마치 파초(芭蕉) 속이 텅 빈 것과 같습니다’고 하셨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은 경에서의 열 가지 비유와 같거니와, 이 관을 지을 때는 몸과 마음이 보이지 아니하고 온갖 법은 똑 같이 여실(如實)한 성품으로 보이나니, 이것을 보살의 몸[身]ㆍ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이라 한다. 이 법으로 인하여 37의 조보리문(助菩提分)을 널리 닦되, 만일 증득을 취하면 이것은 성문(聲聞)의 법이요 증득을 취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보살의법이다.
또 보생론(寶生論)에서 이르되, “시기[時]와 처소의 일정함[處定]은 마치 꿈과 같다고 함에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마음의 혹란(惑亂)으로 말미암아 마침내는 시기가 일정하고 처소가 일정하다는 알음알이[解]를 낸다’고 했거니와, 그러나 꿈속에서는 그 실지 경계로서 결정코 얻을 만한 것이 없다. 때문에 세간에서 다 같이 인정하고 있거늘 어떻게 이것을 가져서 그 밖의 결정된 일에 비교하여 허물을 지을 것인가.
내지 그 때에 저 꿈속에서는 실로 그 시기와 처소의 결정된 모양이 없고 마음에 있다 함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어느 게송에서 ‘만일 밤에 잠을 자다가/해가 북쪽에서 떠오름을 보면/꿈의 시기와 처소가 서로 틀리거늘/어떻게 결정된 마음이 있겠는가’고 함과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이 꿈꾸는 마음이야 무슨 기이함이 있겠는가. 큰 공이 있는 사업을 경영하되 바깥 형상을 빌리지 않으면서도 능히 교묘하게 그 장엄함과 수려한 것으로 구성하기도 하며, 혹은 높은 담이 아홉 길[仞]이고 높은 용마루가 10장(丈)이며 푸른 줄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붉은 꽃이 반짝거림을 보기도 하나니 장인(匠人)의 지극한 생각으로도 꾸미지 못한다.
만일 다른 이에게 이러한 힐난을 말한다면 그는 이런 허물이 없으리니, 바깥 물질의 공력(功力)을 빌리지 않고 일으키기 때문이요 다만 종자와 성숙으로 말미암아 식(識을 의뢰하여 반연을 삼으므로 곧 이때의 의식(意識)에 나타날 뿐이다. 또 일찍이 어느 경론에서도 저 꿈속에서 그와 다른 물질을 낸다고 설명된 것은 본 일이 없다 ”고 했다.
백법초(百法鈔)에서 이르되 “논주(論主)가 말하기를, ‘마치 꿈속에서 여인과 성교하여 정수를 흘리고, 꿈에 뱀에 물리어 기절하면서 땀을 흘리며 마음이 미혹되는 것과 같은 것은, 비록 실지의 경계는 없다하더라도 실지의 작용은 있나니 이것은 유식인가, 아닌가.’
경부(經部에서 대답하기를, ‘그것은 유식이다’
논주가 이르되 ‘그대가 이미 꿈속에서 실지의 작용이 있거나 실지의 작용이 없거나 간에 모두가 유식이라 인정한다면, 바로 우리 종(宗)에서의 꿈속에서 현재 가림[眩瞖]을 깨닫는 것과 가리지 아니한 것과 가짜의 성[假城]ㆍ진짜의 성[實城]인 이 세 가지가 실지의 작용이 있고 실지의 작용이 없음은, 마치 그대의 꿈속에서도 역시 유식인 것과 같다’고 한다.
논주는 입량(立量)하며 이르되, “가림[瞖]이 있고 가림이 없는 따위는 바로 존재하는 법[有法]이라, 작용이 있고 작용이 없는 그 이치 역시 성립된다[宗]. 실지의 경계가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에[因], 꿈속의 염오(染汚) 등과 같다[喩]”고 했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되 “마치 꿈에서 작용이 있음을 손상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제3은 성인의 교법과는 서로 어긋난다는 힐난[聖敎相違難]을 밝히는 것이니, 소승이 뜻을 힐난하며 이르되, “논주(論主)가 만일 모든 것은 유식이요 마음 이외에는 실지 경계가 없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세존은 아함경(阿含經)에서 12처(處)가 있다고 설명하셨는가. 만일 모든 것이 유식이라면, 세존께서는 다만 의처(意處)와 법처(法處)에 합하여 설명하셨을 터인데 곧 합하지 않고 10색처(色處)가 있음을 설명하셨다. 지금 세존께서 12처가 있음을 설명하셨는지라 의처ㆍ법처를 여의고 그 밖에 따로 10색처가 있음을 분명히 알겠으니, 이것은 마음 밖에 존재한 것이거늘 어찌하여 온갖 모두가 유식이라고 말하는가.”
논주의 대답 가운데서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가정으로 하는 대답[假答]이요, 둘째는 바른 말의 대답[正答]이며, 셋째는 비유로 하는 대답[喩答]이다.
처음의 가정으로 하는 대답에서는 30유식송(唯識頌)을 인용하여 이르되, “식(識)은 제 종자로부터 생겨서/경계 모양과 비슷하게 구르며/내처(內處)와 외처(外處)를 이루기 위하여/부처님은 그것을 10이라고 말씀했다”고 한다.
식은 제 종자로부터 생긴다 함은, 곧 다섯의 식[五識]의 자증분(自證分)이 현행(現行)하여 저마다 다섯 식의 제 종자로부터 생긴다는 것이니, 장차 다섯 식의 제 종자는 다섯의 감관[五根]으로 된다.
경계 모양과 비슷하게 구른다 함은, 곧 다섯 식의 자증분이 제 종자로부터 생긴 뒤에는 능히 변화하여 2분(分)과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니, 그 소변(所變)의 견분(見分)을 다섯의 식이라 하고, 소변의 상분(相分)은 바깥 경계와 비슷하게 나타나므로 다섯 경계[五境]라고 한다.
그 진실한 감관과 경계의 10처(處)는 모두가 식을 여의지 않으므로 역시 이는 유식이다. 이것은 가정으로 다섯 식의 종자를 가져서 다섯의 감관을 삼는 것으로 경부[經部]의 논사(論師)에서 대답한 것이니, 경부에서는 종자가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종자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어찌 식을 여의고서 존재한다고 집착하지 않겠는가.
【답】 그는 종자가 전(前)6식 중에 있으면서 지닌다고 인정하므로, 역시 이는 식을 여의고서는 존재하지 아니한다.
논주가 이르되, “그 소변의 상분은 바깥 다섯의 경계와 비슷하므로 역시 식을 여의지 아니하며, 능변(能變)이 없는 다섯의 식의 종자는 곧 다섯의 감관인지라 역시 식을 여의고서는 존재하지 않나니, 비록 안과 밖의 10처로 나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이는 유식이다”고 한다.
부처님은 그것을 10이라고 말씀했다고 함은, 부처님의 비밀한 뜻으로 외도들이 몸을 일합상(一合相)의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마침내 말이 없는[無言] 법에서 억지로 분별하여 감관과 대경의 10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크고도 훌륭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유식론(唯識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이 교법에 의하여/삭취취(數取趣)의 무아(無我)에 능히 들어간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만일 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곧 이 부처님이 말씀한 감관과 대경의 10처라는 교문(敎文)에 의하여 이내 관(觀)을 짓되, ‘나는 지난 한량없는 겁(劫) 동안에 악혜(惡慧)로 추구하여 어리석고 헷갈리면서 망령되이 자기와 남의 몸은 일합상의 아(我)라고 집착하였나니, 이로 인하여 생사에 빠졌다. 이제 교관(敎觀)에 의하건대, 자기와 다른 이의 몸은 감관과 대경의 10처가 있으면서 그 몸을 이루었을 뿐이니, 낱낱 처(處) 안에는 도무지 주재(主宰)와 자재(自在)와 상일(常一) 등의 작용이 없거늘 어찌 일찍이 아가 있겠는가’고 한다”고 했다.
이로 인하여, 이내 무아(無我)의 이치에 깨쳐 들어서 아공관(我空觀)을 이루나니, 이것은 바로 대승이 가정으로 다섯의 종자를 가져서 다섯의 감관을 삼아 가정으로 소승에게 대답한 것이다.
소승은 또 힐난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다섯 대경의 상분의 색(色)도 이것은 다섯 식의 변한 바이기 때문에 그대의 종(宗)과 같을 수 있어서 이 유식은 그 본질(本質)인 다섯 경계의 물질이니, 모르겠는데 이것은 어느 식의 유식인가. 이를테면, 다섯의 식과 제6은 모두가 친하지 않은 인연[不親緣]인 본질의 다섯 경계라 곧 이것이 본질인 다섯 경계면, 어찌 마음을 여의고서 그 밖에 존재한 것이 아니겠으며, 어째서 유식이 성립되겠는가”고 한다.
이런 질문 때문에, 이 논주는 둘째에서 바른 대답을 한다.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되, “식에 의하여 변한 바요 별도로 진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것은 대승의 자기 종(宗)에 의한 바른 해답이다. 곧 이미 건립된 제8식에 결부시키면 분명히 알게 된다. 이미 논주가 말한 ‘다섯 대경[五塵]의 본질인 물질이 바로 제8식의 친한 상분’이라면, 상분이 제8식을 여의지 않으므로 역시 이는 유식이다”고 했다.
셋째에서 비유로 대답한다 함은, 곧 논주는 비유를 들어서 “세존이 12처(處)를 건립한 까닭”을 소승에게 대답한다.
유식론에서 이르되, “마치 단견(斷見)을 막으면서 상속하는 유정을 해설하는 것과 같나니, 다만 이것은 부처님이 비밀한 뜻으로 중생의 일합상(一合相)의 아(我)를 깨뜨리기 위해 가정으로 12처의 이름을 말씀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12처의 법에는 도무지 아가 없음을 관하여 아공(我空)에 들게 한다.
다음에는 유식에 의하여, 온갖 모든 법 위에는 모두가 진실한 궤지(軌持)와 승성(勝性) 등의 작용을 관하여 법집(法執)을 없애고 나면 법공(法空)을 이룩한다”고 했다.
소승은 힐난하기를, “이미 모든 법에는 모두 진실한 궤지와 자재(自在)한 승성 등의 작용이 없어서 법공의 관을 이룩한다면, 바로 이것이 유식의 체성이거니 어찌 또한 공하지 않겠는가”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제4는 유식은 공을 이룩한다는 힐난이 성립된다.
논주는 대답하되, “유식의 체성은 곧 공하지 않나니, 집착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앞에서 공하지 않나니, 집착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앞에서 공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그 온갖 법 위에서 허망한 마음으로 진실한 궤지와 승성의 작용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 공일 뿐이니,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법 이것이 바로 공이요 집착을 여읜 유식의 체성이 공한 것은 아니다.
곧 근본지(根本智)로 진여를 바르게 증득할 적에는 말을 여의고 형상조차 끊어진지라 그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온갖 아(我)와 법(法)은 모두가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며, 이 지위 안에서는 근본지만이 있고 진리와 명합되면서 능소(能所)가 분별되지 아니한다. 이 식의 체성 또한 공하여 세속 이치[俗諦]가 없고 세속 이치가 없기 때문에 참된 이치[眞諦] 또한 없나니, 참된 이치와 세속 이치는 서로가 의지하면서 건립되기 때문이다”고 한다.
유식론에서 이르되, “두 가지 진리[二諦]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악취공(惡取空)이니, 모든 부처님은 ‘다스릴 수 없는 이’라고 설명한다”고 했다.
제5는 물질 모양[色相]은 마음이 아니라는 힐난이니, 유식론에서 이르되 “만일 모든 색처(色處) 또한 식이 체성이 된다면, 무슨 일로 물질 모양과는 비슷하지 않게 하나의 종류를 나타내고 견고하게 머물러 상속하면서 구르는가”고 했다.
소승은 뜻을 힐난하되, “만일 온갖 바깥 물질이 모두가 마음으로 체성을 삼는지라 마음의 자증분(自證分)으로 말미암아 변화하여 능히 취함[能取]과 비슷하여짐을 견분[見分]이라 하고, 변화하여 취할 수 있음[可取]과 비슷하여짐을 상분(相分)이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변할 바[所變]의 물질 모양은 이내 나타나고 그 능히 변함[能變]의 마음은 바로 나타나지 않는가.
또 바깥 물질이 마음으로 체성을 삼는다면 무엇 때문에 변할 물질은 곧 하나의 종류로 상속하면서 구르는가. 또한 바깥 물질인 산하(山河)와 대지(大地) 등도 천 년ㆍ만 년 동안 한결같은 종류요 다시 변해짐이 없을뿐더러 상속하면서 끊어지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머무르거니와, 유정이라면 능히 변하는 마음이 이내 변해지면서 일정하지 않을뿐더러 오랜 동안 머무르지도 못한다.
이제 바깥 물질은 이미 속마음과는 같지 않은지라, 마음을 여의고서 바깥의 진실한 물질이 있음을 분명히 알겠거늘 어째서 온갖 모두가 유식이라고 말하는가”고 한다.
대답하기를, “유식론에서 이르되,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세력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고 했나니, 이것은 다만 온갖 유정들이 끝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앞뒤로 서로 갈마들며 명언으로 허망하게 훈습하여 ‘마음 밖에서 굳게 머물러 상속한다’는 등의 알음알이를 지닌지라, 이런 세력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양이 나타난 것이요 이것은 진실로 마음 밖에 견고한 물질 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외인(外人)이 또 물었다. “이미 유식이라 한다면, 유정들은 왜 변화하여 바깥 물질과 비슷하게 되면서 나타날 필요가 있는가”
【답】 유식론에서 이르되, “이것이 만일 응(應)함도 없고 뒤바뀜도 없다면서 섞여 물듦[雜染]도 없고 청정한 법도 없으리니, 그러므로 모든 식이 변화하여 물질과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논주는 이르되, “일체 유정들에게 만일 변화하여 바깥 물질과 비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물듦과 깨끗한 법이 없으리라. 또한 일체 범부도 먼저 물질 등의 모든 경계에 헷갈렸음으로 말미암아 뒤바뀌고 망령되이 고집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섞여 물듦이 나게 되고 섞여 물듦의 체성은 2장(障)에 즉(卽)한다.
그대와 외인 들이 만일 식이 변화하여 바깥 물질과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유정들은 뒤바뀜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뒤바뀜과 허망한 고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섞여 물듦의 번뇌가 나지 않을 것이요, 섞여 물듦이 나지 않는다면 청정한 법이 무엇으로 인하여 존재하겠는가”고 한다.
그런 까닭에 섭론(攝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어지러운 모양[亂相]과 어지러운 체성[亂體]은/색식(色識)이요 그리고 색식이 아님을/인정해야 하리니/만일 없다면 그 밖의 것도 없다”고 했다.
어지러운 모양이라고 함은 변할 바 물질의 모양이요 어지러운 체성이라 함은 능히 변하는 마음의 체성이며, 색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함은 곧 앞에서 변할 바의 어지러운 모양이요, 그리고 색식이 아니라 함은, 곧 앞에서 변하는 마음인 이 체성이며, 만일 없다면 그 밖의 것도 없다 함은 만일 변할 바에서 바깥 물질의 경계와 비슷하게 어지러운 모양으로 됨이 없다면 역시 능히 변하는 식의 체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변화하여 바깥 경계와 비슷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런 까닭에 모든 물질은 모두가 마음을 여의지 아니하며 모두가 이는 유식이다.
제6은 현량은 종에 어긋난다는 힐난[現量違宗難]이니, 유식론에서 이르되 “물질 등의 바깥 경계는 분명하여 현실로 증험하고 현량(現量)으로 얻는 바라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안다”고 했다.
소승은 뜻을 힐난하되, “바깥의 다섯 가지 물질의 대경은 분명히 다섯의 식이 현실로 증험하고 이것은 현량으로 얻는 바라 대승ㆍ소승에서 모두 다 같이 극성(極成)이거늘, 무엇 때문에 없다고 부정하면서 온갖 것이 유식이라 하는가”고 한다.
【문】 30유식론(唯識論) 중에서도 역시 이런 힐난이 있나니, “모든 법은 양(量)으로 말미암아 있고 없음을 바르게 정한지라 온갖 양 가운데서는 현량이 으뜸이거늘, 만일 바깥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이런 깨달음이 있어서 내가 지금 이와 같은 경계를 현실로 증험하겠는가”고 했다.
뜻을 말하면, “논주가 만일 바깥의 건실한 경계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다섯의 식이 현량으로 바깥의 다섯 대경을 취하겠는가.
만일 이것이 비량(比量)이거나 비량(非量)이거나 제 나름대로 일으킨 것이거나 제 나름대로 분별하면서 역시 생각으로 헤아려 낼 바의 상분(相分)을 구상한다면 마음을 여의지 않는 것이라 유식이 성립될 수 있거니와, 지금의 다섯의 식은 벌써 현량으로 바깥의 진실한 다섯의 대경을 얻었거늘 무엇 때문에 또한 모두가 유식이라고 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답】 유식론에서 이르되, “현량으로 증험할 때는 바깥이라고 집착하지 않거니와, 그 나중 뜻이 분별하면서 망령되이 바깥이라는 생각을 낸다”고 했다.
논주는 이르되, “현량의 다섯의 식이 다섯의 대경을 막 반연할 때에는 법의 제 성품을 얻으면서 명언(名言)도 띠지 않고 헤아리는 마음도 없으며 분별도 내지 않고 바깥이라고 집착하지 않지만, 다만 그 나중 생각[後念]의 분별의식(分別意識)이 망령되이 분별을 내어 바깥이라 집착하면서 진실한 경계가 있다”고 말한다.
【문】 소승도 현량의 마음속에서는 바깥이라 집착하지 아니함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아니하는가.
【답】 인정한다.
【문】 대승과는 무엇이 구별되는가.
【답】 유식경(唯識經)에서 이르되, “만일 대승이라면 곧 다섯의 식과 동시의식(同時意識)은 모두 현량이므로 바깥이라고 집착하지 않거니와, 만일 소승종이라면 곧 이 다섯의 식만으로 바깥이라고 집착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논주는 이르되, “그대 소승에서 이미 다섯의 식이 경계를 반연하되 이것은 현량으로서 바깥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함을 인정한다면, 현량의 마음속에는 모두 바깥 경계는 없으므로 이것은 유식임을 분명히 알겠다”고 한다.
외인이 또 물었다. “그 다섯 식의 반연할 바[所緣]가 현량의 다섯 대경이라면, 진실인 것인가. 거짓인 것인가.”
【답】 그것은 진실이다.
힐난한다. “만일 그렇다면, 바로 이것은 마음을 여의고서 그 밖에 진실한 다섯의 대경이 있는 것이거늘, 어째서 유식이라 하는가.”
【답】 다섯의 식이 다섯의 대경을 반연할 때에 비록 이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다섯 식의 변한 바요 자기 식의 상분은 다섯의 식을 여의지 않으므로 모두 유식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서 이르되 “그러므로 현량의 경계 이것은 자기의 상분이요 식이 변한 바이기 때문에 역시 있는 것이라 설명하거니와, 의식(意識)이 집착한 바깥의 진실한 물질 등은 망령된 고집으로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없는 것이라 설명한다”고 했다.
뜻을 말하면, “다섯의 식에는 저마다 4분(分)이 있어서 그 다섯의 대경 이것은 다섯의 식이 친한 상분이며, 다섯의 식의 자증분으로 말미암아 변화하여 물질 등과 비슷한 상분의 경계가 나타나므로, 그 상분은 또 견분을 여의지 않는지라 모두가 이는 유식이다. 만일 뒤에 분별의식이 일어날 때면 망령되이 마음 밖에 그 진실한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는지라 여기서는 곧 없나니, 경계의 체성과 칭합(稱合)하지 않으면서 알기 때문이다”고 한다.
【문】 다섯의 식 중에서 성냄[瞋] 등의 번뇌가 일어날 때에는 본질(本質)과 칭합하지 않거늘, 어째서 이것이 현량뿐이라고 하는가.
【답】 비록 본질과는 칭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분과는 칭합하므로 역시 현량이니 마음에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제6의 의식과 상응한 성냄일 때, 만일 집착과 때를 함께하는 상분이면 본질은 모두가 칭합하지 않거니와, 만일 집착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일으키는 때에는 곧 다섯의 식과 동일하다.
【문】 무엇 때문에 다섯의 식은 집착함이 없는가.
【답】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의 둘이 다 통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없다.
그러므로 다섯의 식이 현량으로, 경계를 반연하되 바깥이라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모두 이는 유식인 줄 알 것이다.
또 소승에서는 한데 합쳐 하나의 힐난을 펴나니, “만일 유식이요 바깥 경계가 없다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갖가지의 마음이 나게 되는가. 이미 경계가 없이 마음을 끌어낸다면 곧 허망한 마음은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일어나는가. 아직 마음이 없는 경계가 있지 못하고, 일찍이 경계가 없는 마음은 없다”고 한다.
【답】 논(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일체종식(一體種識)으로 말미암아/이렇고 이렇게 변해지나니/차츰차츰 바뀌는 힘 때문에/그 여러 가지의 분별이 생긴다”고 했다.
일체종식이라 함은 바로 제8식이니, 이 식은 온갖 유위(有爲)의 법 종자를 지니기 때문이다. 곧 일체 종자는 저마다 스스로가 결과의 차별된 공능(功能)을 낼 수 있으므로 일체종식이라고 한다.
공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행(現行)을 공능이라 하나니, 곧 보리 곡식 따위의 종자가 싹을 낼 수 있는 공능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둘째는 제8식 중의 종자를 공능이라 하나니, 현행의 공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일체종식이란 본식(本識) 중의 종자 공능으로서 온갖 유위의 물질과 마음[色心] 등의 법을 낼 수 있는 것만을 취하나니, 곧 물질은 소연(所緣)이 되고 마음은 바로 능연(能緣)이다. 곧 물질인 이 경계는 마음을 여의지 않는지라 이것은 유식이며, 바로 이 마음과 경계는 본식 중에서 생긴 것이거늘 어째서 바깥 경계를 필요로 하면서 생기게 되겠는가.
이렇고 이렇게 변해진다 함은, 이와 같은 8식은 종자로부터 생기며 바로 이것이 8식의 자증분으로서 바뀌고 변하면서 견분과 상분을 일으키나니, 상분은 견분을 여의지 않는지라 이것은 유식이다.
차츰차츰 바뀌는 힘 때문이라 함은, 곧 그 밖의 인연도 이 차츰차츰 바뀌는 힘이니, 심법(心法)은 네 가지 인연으로 생기고[四緣生] 색법(色法)에는 두 가지 인연이 생긴다[二緣起]는 것이다.
그 여러 가지의 분별이 생긴다고 함은 곧 그 견분과 상분 위에서의 망령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바깥에 진실한 아(我)와 법(法) 등이 있다는 분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본식 중의 종자로 말미암아서만 모든 식이 생기는 것이요 바깥의 허망한 경계를 빌리지 않으면서 역시 나게 되나니, 그러므로 온갖 모두는 유식인 줄 알 것이다.
또 유식론에서 이르되, “물었다. ‘그대가 아까 말한 것과 같아서, 안의 식[內識]이 있을 뿐이요 바깥의 경계[外境界]는 없다. 그렇다면, 안의 식은 취할 수 있는 것인가, 취할 수 없는 것인가. 만일 취할 수 있다면 물질ㆍ냄새 등의 바깥의 모든 경계와 같은 것이요, 취할 수 없다면 이것은 없는 법이거늘 어떻게 안의 식이 있을 뿐이요 바깥의 경계는 없다고 말하는가.’
대답했다. ‘여래는 방편을 써서 점점 중생들로 하여금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안의 식이 있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안의 식으로서 취할 만한 것은 없다. 만일 그와 같지 않다면, 아공과 법공을 말씀하실 수가 없다. 이런 이치 때문에, 허망한 분별로서 이 마음으로 저 마음을 알고 저 마음으로 이 마음을 안다.’
물었다. ‘또 힐난할 것이 있다. 어떻게 모두 부처ㆍ여래를 알 수 있는가. 이런 이치에 의해서, 물질 등의 온갖 모든 입(入)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물질 등의 모든 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식(識) 등으로써 경계를 취할 수 있다. 이런 이치 때문에, 물질 등의 입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대답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하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여럿도 또한 볼 수 없으며/화합한 것도 볼 수 없나니/그러므로 대경[塵]의 법이란 없다.’ ”
044_0354_b_01L宗鏡錄卷第六十三 輕慧日永明寺主智覺禪師 延壽 集第四作用不定難者於中分出三難第一難復有何因患眩瞖者所見髮蠅等卽無髮蠅等實用餘不患眩瞖者所見髮蠅等物實用非無汝大乘旣許皆是唯識者卽須一時有實作用不然一時無實作用今旣不同未審何者是其唯識第二難云復有何因情於夢中所得飮食刀杖毒藥衣服等卽無實作用及至覺時若得便有實用第三難云復有何因尋香城等卽無實作用餘甎土城便有實作用論主荅前四難引三十唯識論頌云處時定如夢身不定如鬼同見膿河如夢損有用若依此頌荅前四難卽足第一荅前處定難者論主云汝還許有情於夢中有時見有村園或男或女等物在於一處卽定其有情夢心有時便緣餘處餘處便不見前村園等物卽夢心不定汝且摠許是唯識不經部荅云我宗夢中雖夢境處定心不定然不離有情夢心皆是唯識論主云我覺時境色亦復如然雖山處長定其有情能緣心不定然皆不離現心摠是唯識立量我宗覺時所見境色是有法定是唯識爲因云境處定心不定故喩如汝宗夢中之境皆是唯識第二荅前時定難者論主云如有情於夢中所見村園等物其夢心若緣時可是唯識若不緣時應非唯識經部荅云我夢中之境若夢心緣時亦是唯識若夢心有不緣時然不離夢心亦是唯識論主云覺時境色亦復如然我今長時緣南山山不離心是唯識有時緣山心雖不生然不離現亦是唯識頌云處時定如夢此一句荅前二難第三荅身不定難論主云汝經部還許衆多餓鬼同於一處於中有三有五業同之者卽同見膿河定又有三五隨自業力所見不定卽同於一處或有見猛火或有見糞穢或有見人把棒欄隔如是餓鬼同於一處半見境定一半所見各異汝摠許是餓鬼唯識不荅云雖見有同異然不離餓鬼自業識所變皆是唯識論主云我宗唯識亦復如然雖一類悉眩瞖者所見各別有一類不患眩瞖者所見卽同然不離此二類有情識之所皆是唯識頌云身不定如鬼同見膿河等此兩句頌荅此一難成唯識寶生論偈云不定如鬼者實是淸河無外異境然諸餓鬼悉皆同見膿滿而流非唯一睹然於此處實無片許膿血可得何容得有溢岸而流雖無實境決定屬一理定不成此卽應知觀色等雖無外境不決定性於身非有遮卻境無卽彼成立有境之因有不定過於無境處亦有多身共觀不定如何實無膿流之事而諸餓鬼不別觀之由其同業感於此位俱見膿慳悋業熟同見此苦由昔同業各熏自體此時異熟皆竝現前彼多有情同見斯事無外境爲思憶故準其道理仁亦如斯共同造作所有熏習成熟之時便無別相色等相分從識而生是故定知不由外境識方得起豈非許此同一趣生然非決定彼情同業現見有良家賤室貧富等異如是便成見其色等應有差別同彼異類見成非等故知斯類與彼不同彼亦不由外境力故生色等境然諸餓鬼雖同一趣見亦差別由業異相見亦然彼或有見大熱鐵團融煮逬灒或時見有屎尿橫流非相似故雖同人趣薄福之人金帶現時見爲鐵鎖赫熱難近或見是蛇吐其毒火是故定知雖在人趣亦非同見如是類無別見性由其皆有同類之業然由彼類有同分業生同分趣復有別業各別而此一功能隨其力故令彼諸人有同異見復以此義亦荅餘言有說別趣有情鬼傍生應非一處有不別見由別作業異熟性故此雖成趣業有差別同觀之業還有不異諸有情自相續中有其別異業種隨故彼任其緣各得生起第四摠荅作用不定中三難論主云汝經部等還許有情夢中所得刀杖飮食等無實作用是唯識不荅云又問只如有情於夢中有時遺失不淨及失尿等卽有實作用汝亦許是唯識不荅云主例荅汝旣許夢中有實作用及無實作用俱是唯識者卽知我宗患眩瞖及不患者夢中現覺兼假城實城此三般皆是有實作亦如汝夢中有實無實作用皆是唯識主以量成立云我宗覺時境色是有法定是唯識宗因云有實作用故如汝夢中境色然汝夢中境色是有法應非唯識宗因云實無實作用故如汝覺時境色唯識頌云夢損有用此一句荅上難境又都將一喩摠荅四難三十唯識頌云一切如地獄同見獄卒等能爲逼惱事故四義皆成且如世間處定時定身不定作用不定等事亦如地獄中受罪有情各見治罰事亦有處定時定身不定作用不定此皆唯識但是諸有情惡業增雖同一獄然受苦時所見銅狗鐵蛇牛頭獄卒治罰之具或同或異如是苦器逼害罪此皆是罪人自惡業心現竝無心外實銅狗等物今世間事法亦復如然若罪人同一獄者是摠報惡業力若各別受苦者卽是別報惡業力諸經要集云夫云罪行妄見境執定我人取著違順便令自他皆成惡業以經偈云貪欲不生滅不能令心惱若人有我心及有得見者是人爲貪欲將入於地獄是故心外雖無別境稱彼迷情强見起染夢見境起諸貪瞋稱彼夢者謂實不虛理實無境唯情妄見故智度論說如夢中無善事而善無瞋事而瞋無怖事而怖三界衆生亦復如是無明眠故不應瞋而瞋等故知心外雖無別境稱彼迷情妄見起染心外雖無地獄等相惡業成時妄見受苦如正法念經云閻摩羅人非是衆生罪人見之謂是衆生手中執持焰然鐵鉗彼地獄人惡業旣盡命終之後不復見於閻羅獄卒何以故以彼非是衆生數故如油炷盡則無有燈業盡亦爾復見於閻羅獄卒如閻浮提日光旣現則無暗冥惡業盡時閻羅獄卒亦復如是惡眼惡口如衆生相可畏之色皆悉磨滅如破畫壁畫亦隨滅惡業畫壁亦復如是不復見於閻羅獄卒可畏之色以此文證衆生惡業應受苦者自然其中妄見地獄問曰見地獄者見獄卒及虎狼等可使妄見彼地獄處閻羅在中判諸罪人則有此境云何言無荅曰見獄主亦是妄見直是罪人惡業熏心令心變異無中妄見實無地獄閻羅在中又唯識論中問曰地獄中主烏狗羊等爲是衆生非衆生荅曰非是衆生問曰以何義故非是衆生荅曰以不相應故此以何義有五種義彼地獄主及烏狗等非是衆生何等爲五者如地獄中罪衆生等受種種苦地獄主等若是衆生亦應如是受種種苦而彼一向不受如是種種苦惱以是義故彼非衆生二者地獄主等若是衆生應遞相殺害不可分別此是罪人此是主等而實不共遞相殺害得分別此是罪人此是獄主以是義故彼非衆生三者地獄主等若是衆生形體力等應遞相殺害不應偏爲受罪人畏而實偏爲罪人所畏以是義故彼非衆生四者彼地獄地常是熱鐵地獄主等是衆生者不能忍苦何能害彼受罪人而實能害彼受罪人以是義故彼非衆生五者地獄主等若是衆生受罪人不應於彼地獄中生而實生於彼地獄中以是義故彼非衆生此以何義彼地獄中受苦衆生造五逆等諸惡罪業於彼中生地獄主等不造惡業云何生彼以如是等五種義故名不相應問曰若彼主等非是衆生不作罪業不生彼者云何天中得有畜生以何義如彼中有種種鳥諸畜生等生在彼於地獄中何故不爾畜生餓鬼種種雜生令彼爲主荅曰偈言畜生生天中地獄不如以在於天上不受畜生苦此偈明何義畜生等生天上者彼於天上器世間中有少分業是故於彼器世間中受樂果報彼地獄主及烏狗等不受諸苦以是義故彼地獄中無有實主及烏狗等除罪衆生又寶生論云如上所言得差別體地獄苦器不同受之諸猛火由業力故便無燒苦斯則自非善友誰能輒作斯說凡是密友性善之人不論夷險常爲思益爲欲顯其不受燒苦故致斯言然於此時助成立義卽是顯出善友之意其不受彼之苦故意欲成立非那洛迦今復更云由其業力說有大火言不燒者斯則眞成立唯識義由無實火但唯業力能壞自性旣定不受如斯苦故便成此火自性元無有實性是宗所許若也許其是識現相事體元無此由業力故無火斯成應理由其先業爲限劑故若異此者彼增上業所招之果現在彼如何不見如無智者欲求火滅更復澆酥令唯識宗轉益光熾由斯衆理證此非成那洛迦類故知唯心所現正理無差如觀佛三昧海經觀佛心品云是時佛心如紅蓮華蓮華葉間有八萬四千諸白色光其光徧照五道衆生此光出時受苦衆生皆悉出現所謂苦者阿鼻地獄十八小地獄十八寒地獄乃至五百億刀林地獄等若衆生惡業心感現地獄事理卽可然且如觀佛心時云何純現地獄此略有二義一若約理而觀佛之心性本含法界無一塵而不徧一法而不通二若約事而觀佛唯用救苦爲以物心爲心則地獄界全是佛心運無緣慈不間同體所以觀佛心品云佛告天王知佛心光明所照常照如此無間無救諸苦衆生佛心所緣常緣此等極惡衆生以佛心力自莊嚴故過筭數劫令彼罪人發菩提心乃至爾時世尊說是語時佛心力放十種白從佛心出其光徧照十方世界一一光中無量化佛乘寶蓮華會大衆見佛光明玻瓈水或見如乳見諸化佛從佛胸出入於佛臍遊佛心間乘大寶船經往五道受罪人一罪人見諸化佛如己父母善友所親漸漸爲說出世間法是時空中有大音聲告諸大衆汝等今者應觀佛心諸佛心者是大慈也大慈所緣緣苦衆生乃至次行大喜諸衆生安隱受樂心生歡喜如己無異旣生喜已次行捨法是諸衆生無來去相從心想心想生者因緣和合假名爲心如此心想猶如狂華從顚倒起苦從想起樂從想生如芭蕉中無堅實廣說如經十譬作是觀時不見身心見一切法同如實性是名菩薩身受心法依因此法廣修三十七助菩提分取證者是聲聞法不取證者是菩薩法又寶生論云處定如夢者有說由心惑亂遂乃便生時處定解然於夢中無其實境決定可故世共許如何將此比餘定事爲作過耶乃至爾時於彼夢中實亦無其時處決定相狀在心由何得知如有頌言若眠於夜裏日北方生參差夢時處如何有定心又云之夢心有何奇異營大功業不假外形而能巧利構茲壯麗或見崇墉九仞飛甍十丈條靃蘼紅華璀璨匠人極思亦未能雕若言於他同斯難者彼無此過不假外色功力起但由種熟仗識爲緣卽於此時意識便現又未曾見有經論說於彼夢中生其別色法鈔云論主言如於夢中與女交會流洩不夢被蛇螫能令悶絕流汗心迷雖無實境而有實作用此是唯識不經部荅云此是唯識論主云汝旣許夢中有實作用無實作用皆是唯識卽我宗夢中現覺眩瞖者不眩瞖者假城實城此三般有實無實作用如汝夢亦是唯識論主立量云有瞖無瞖等是有有用無用其理亦成宗因云許無實境故如夢中染污等所以唯識論云如夢損有用第三明聖教相違難者小乘難意云論主若言一切皆是唯識無心外實境者何故世尊於阿含經中說有十二處若一切皆唯識者世尊只合說意處法處卽不合說有十色處今世尊旣說有十二處者明知離卻意法處外別有十色處是心外有何言一切皆是唯論主荅中分三初假荅二正荅三喩荅假荅引三十唯識頌云識從自種生似境相而轉爲成內外處佛說彼爲十言識從自種生者卽五識自證分現行各從五識自種而將五識自種便爲五根言似境相而轉者卽五識自證分從自種生已而能變似二分其所變見分說名五識所變相分似外境說名五境其實根境十處皆不離識亦是唯識此是假將五識種子爲五根荅經部師以經部許有種子設許有種子豈不執離識有彼許種子在前六識中持亦不離識論主云其所變相分似外五境亦不離識有能變五識種卽五根亦不離識有雖分內外十處然皆是唯識言佛說彼爲十者以佛密意爲破外道執身爲一合相我故遂於無言之法强以言分別說有根塵十處有大勝利故唯識頌云依此教能入數取趣無我爲若有智者卽依此佛說根塵十處教文便作觀云我於無量劫來爲惡慧推求愚癡迷闇妄執自他身爲一合相我因此生死沈今依教觀自他身但有根塵十處以成其於一一處中都無主宰自在常一等用曾有我因此便能悟入無我之理成我空觀此卽大乘假將五種子爲五根假荅小乘也小乘又難云若爾者且如五塵相分色是五識所變故可如汝宗是唯識其本質五境色未審是何識之唯識謂五識及第六皆不親緣本質五境卽此本質五境豈不是離心外何成唯識因此問故便是論主第二正荅唯識論云依識所變非別實有解云此依大乘自宗正解卽約已建立第八識了旣論主五塵本質色此是第八識之親相分相分不離第八識亦是唯識第三喩荅者卽論主擧喩荅小乘世尊建立十二處之所以唯識論云如遮斷見說續有情但是佛密意破於衆生一合相我假說有十二處名令衆生觀十二處法都無有我便入我空次依唯識觀一切諸法之上皆無實軌持勝性等用除法執便成法空小乘難云旣言一切諸法皆無實軌持自在勝性等用成法空觀者此唯識之體豈不亦空因此便成第四唯識成空難論主荅云唯識體卽不空非所執故我前言空者但是空其一切法上妄心執有實軌持勝性等用徧計虛妄之法此卽是空非空離執唯識之體卽如根本智正證如時離言絕相其徧計虛妄一切我法皆不現前於此位中唯有本智與理冥合不分能所識體亦空便無俗諦俗諦無故眞諦亦無俗相依而建立故唯識論云撥無二諦是惡取空諸佛說爲不可治者第五色相非心唯識論云若諸色處亦識爲體何緣不似色顯現一類堅住相續而轉小乘難意云言一切外色皆心爲體由心自證分變似能說名見分變似可取說爲相分者何故所變色相卽顯現其能變心卽不顯現又若外色以心爲體者何故所變色卽一類相續而且如外色山河大地等卽千年萬年一類更無改變又相續不斷得多時住若有情能變心卽有改變不定又不得多時今外色旣不似內心者明知離心有外實色何言一切皆是唯識荅云唯識論云名言熏習勢力起此但由一切有情無始時來前後遞互以名言虛妄熏習作心外堅住相續等解由此勢力有此相現非是眞實有心外堅色等人又問旣言唯識者有情何要變似外色而唯識論云謂此若無應無顚倒便無雜亦無淨法是故諸識變似色現論主云切有情若不變似外色現者便無染淨之法且如一切凡夫由先迷色等諸境顚倒妄執由此雜染便生雜染體卽二障汝外人若不許識變似外色現者卽有情不起顚倒顚倒妄執旣若不起卽雜染煩惱不生雜染旣若不生淨法因何而有所以攝論頌云亂相及亂體應許爲色識及與非色識若無餘亦無言亂相者卽所變色相言亂體者卽能變心應許爲色識者卽前所變亂相及與非色識者卽前變心是體若無餘亦無者若無所似外色境爲亂相者亦無能變之識體知須變似外境現所以諸色皆不離心摠是唯識第六現量違宗難者唯識論云色等外分明現證現量所得寧撥爲無小乘難意且如外五塵色境分明五識現證是現量所得大小乘皆共極成何故撥無言一切唯三十唯識論中亦有此難云諸法由量刊定有無一切量中現量爲勝若無外境寧有此覺我今現證如是境耶意云論主若言無外實境者如何言五識現量取外五塵境是比量非量徧計所起徧計所執强思計度構畫所生相分不離於心可成唯識今五識旣現量得外實五塵境者何故亦言皆是唯唯識論云現量證時不執爲外後意分別妄生外想論主云且如現量五識正緣五塵境時得法自性不帶名言無籌度心不生分別不執爲外但是後念分別意識妄生分便執爲外言有實境且小乘許現量心中不執爲外不與大乘何別唯識鏡云若是大乘卽五識及同時意識皆現量不執爲外若小乘宗卽唯是五識不執爲外論主云汝小乘旣許五識緣境是現量不執爲外者明知現量心中皆無外境是其唯識外人又問云其五識所緣現量五塵境爲實爲假是實難云若爾者卽是離心外有實五塵境何言唯識五識緣五塵境時雖卽是實但是五識之所變自識相分不離五識皆成唯識故唯識論云故現量境是自相分識所變故亦說爲有意識所執外實色等計有故說彼爲無意云五識各有四分其五塵境是五識之親相分由五識自證分變似色等相分境現其相分又不離見分皆是唯若後分別意識起時妄執心外有其實境此卽是無不稱境體而知故且如五識中瞋等煩惱起時不稱本質何言唯是現量雖不稱本質然稱相分亦是現量由心無執其第六意識相應瞋若與執俱時相分質皆不稱若不與執俱起時卽同五識故五識無執由不通比非二量故無執知五識現量緣境不執爲外皆是唯識又小乘都申一難若唯識無外境者由何而得種種心生旣若無境牽生心卽妄心由何而起未有無心境曾無無境心論頌云由一切種識如是如是變以展轉力故彼彼分別生一切種識者卽是第八識此識能持一切有爲之法種故卽一切種子各能自生果差別功能名一切種識功能有二一現行名功能卽似穀麥等種能生芽功能是二第八識中種子名功能有能生現行功能故今言一切種識者但取本識中種子功能能生一切有爲色心等法卽色爲所緣心便是能緣卽色是境不離心是唯識卽此心境但從本識中而生起何要外境而方生如是如是變者是八識從種生卽是八識自證分轉變起見相二分相分不離見分是唯識以展轉力故卽餘緣是展轉力以心法四緣生色法二緣起彼彼分別生者卽由彼見相二分上妄外有實我法等分別而生故知但由本識中種而生諸識不假外妄境而亦得生故知一切皆是唯識又唯識論云問曰如汝向言唯有內識無外境界若爾內識爲可取爲不可取若可取者同色香等外諸境界若不可取者則是無法云何說言唯有內識無外境荅曰如來方便漸令衆生得入我空及法故說有內識而實無有內識可取若不如則不得說我空法空以是義故虛妄分別此心知彼心彼心知此心問曰又復有難何得知諸佛如來依此義故說有色等一切諸入而非實有色等諸入又以識等能取境以是義故不得說言無色等入荅曰偈言彼一非可見多亦不可見和合不可見是故無塵法宗鏡錄卷第六十三音義落干反 煮章與反 逬北諍反散也  灒則旰反式視反 尿奴弔反 倅臧沒反百人爲倅也 炷之戍反特計反迢遰  澆古堯反沃也 玻䧛禾反 瓈力脂反伹雞反膍臍也  墉餘卦反垣也  仞而振反七尺曰仞也 甍莫耕反息委反 蘼文彼反 璀七罪反 璨倉案反私列反 螫尸亦反又呼反反  刊苦寒也定也  畫胡麥反戊申歲分可大藏都監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