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무릇 조사(祖師)와 부처의 바른 뜻은 본래 하나의 마음을 나타냄인데, 하필 교(敎) 중에서 다시 5음(陰)ㆍ18계(界)를 말하는가. 【답】 허망한 마음을 따르면서 허망한 경계를 깨뜨리는 것이니, 인공(人空)을 나타내어 다른 고집을 제거한다. 그리고 다른 문(門)을 말하여 법의 해탈을 이룸에는 일정한 법이 없기 때문에, 그를 이름하여 아뇩보리(阿耨菩提)라고 한다. 병이 나으면 약이 소용없음은 마치 뗏목에 비유한[筏喩] 법조차도 오히려 버려야 함과 같다. 식론(識論)에서 물었다. “아함(阿含)이 있음으로써 증험하여 안다고 하였기 때문이니, 만일 심식(心識)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여 바깥 경계를 보는 것이요 빛깔[色] 등의 바깥 경계로부터 안식(眼識) 등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슨 이치 때문에 여래는 눈ㆍ빛깔 등 12입(入)의 종류를 말씀하셨는가. 그러므로 빛깔ㆍ냄새ㆍ맛 등의 바깥 경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겠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게송으로 말했다. “빛깔 등의 모든 입(入)을 설명하심은/중생들을 잘 교화하기 위해서이니/앞 사람이 법을 받음에 의하여/중생을 교화함이 있다고 말한다.” “여래는 저 심업(心業)이 상속하며 끊어지지 않음에 의하여, 이 때문에 ‘중생을 교화하는 중생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나[我]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壽者]도 없으며 인연의 화합으로 모든 법의 생김이 있을 뿐이다’라고도 말씀하셨다. 여래께서 이렇게 색입(色入) 등을 말씀함은 앞 사람으로 하여금 법을 얻어 받게 하기 위해서이나 저 앞 사람이 아직 인연의 모든 법의 체성이 공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 실로 빛깔ㆍ냄새ㆍ맛 등의 바깥 모든 경계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물었다. “만일 실로 색입 등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 경 가운데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대답하기를, 게송으로 말하였다. “저 본래 마음의 지혜에 의하여/식(識)의 허망으로 바깥 경계를 취한다.” “이 때문에 여래는 내입(內入)과 외입(外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비롯함이 없는 심ㆍ의ㆍ식(心意識) 등의 종자에 의하여 바뀌고 변하여서 허망하게 저 빛깔ㆍ냄새ㆍ맛 등의 바깥 모든 경계를 본 것이니, 이 때문에 여래는 이 허망한 두 가지 법에 의하여 짐짓 이런 설명을 한 것이다. 첫째는 본식종자(本識種子)요, 둘째는 허망한 바깥 경계 등이니, 이 두 가지 법에 의하여 여래는 안입(眼入)ㆍ색입 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문】 이와 같은 게송에 의한 설명은 무슨 공덕과 이익이 있는가. 【답】 게송으로 말하겠다.
허망하여 진실이 없음을 살피면 이렇게 하여 아공(我空)에 들어가며 모든 법의 다름을 살피고 알면 모든 법의 나 없음에 들어가느니라.
성문(聲聞)들로 하여금 저 6근(根)과 6진(塵)으로 인하여 여섯 가지 식[六種識]을 내는 것이요 하나의 법도 진실로 깨닫는 것이 없고 하나의 법도 진실로 보는 것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며, 중생들을 잘 교화하기 위해서이니, 이런 관찰을 지으면 인공(人空)과 무아공(無我空)에 들어간다. 모든 법의 다름[異]을 관찰한다 함은, 보살이 ‘실로 빛깔 등의 바깥 대경은 하나의 법도 볼 수 있는 것이 없고, 또한 실로 하나의 접촉으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면 인연인 모든 법의 체성이 공함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며, 저 허망한 분별을 막기 위하여 ‘빛깔 등의 온갖 모든 법은 필경에는 공무(空無)하다’고 말하는 것이요 말이 없는 곳[無言處]은 모두가 다 공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말이 없는 곳이라 함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행하는 곳이니, 이와 같은 데는 진식(眞識)이 있을 뿐이요 다시는 그 밖의 식이 없다. 이렇게 분별하고 관찰할 수 없으면 식(識)의 공에 들어가고, 이와 같이 식에 의하여 ‘온갖 모든 법의 나 없음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요, 한결같이 진식인 나를 비방한다는 것이 아니며, ‘불성(佛性)의 실아(實我)도 없다’고 말을 한다. 또 여래는 방편을 점점 중생들로 하여금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들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내식(內識)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식은 내식으로서 취할 만한 것이 없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공ㆍ법공을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이치 때문에 ‘이 마음은 저 마음에서 저 마음은 이 마음을 안다’고 허망하게 분별한다. 변중변(辯中邊)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식이 생기어 변화로 뜻[義]과 같아지고 유정(有情)과 나와 요별(了別)과 같아지되 이 경계는 실로 있는 것 아니고 경계가 없으므로 식은 없다.
‘변화로 뜻과 같아진다’함은 빛깔 등의 모든 경계와 같은 성질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변화로 유정과 같아진다’고 함은 자기와 다른 이 몸의 다섯 감관과 같은 성질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며, ‘변화로 나와 같아진다’고 함은 염오(染汚)의 말나(末那)와 나의 어리석음 따위가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며, ‘변화로 요별과 같아진다’고 함은 그 밖의 모든 6식의 요별(了別)하는 모양은 거칠기 때문이다. 이 경계는 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은, 뜻[義]과 같고 모양과 같은 것은 행상(行相)이 없기 때문에 나와 같고 요별과 같은 것은 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경계가 없기 때문에 식이 없다’함은, 취할 바[所取]의 뜻ㆍ유정ㆍ나ㆍ요별 등의 네 경계가 없기 때문이요, 능히 취함[能取]의 모든 식 또한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큰 근기[大根]로서 단번에 깨치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오히려 하나도 얻지 못하거든 하물며 여럿을 말하겠는가. 왜냐하면 여럿을 고집하기 때문이요 하나를 앎에 헷갈렸기 때문이다. 깨침과 여럿을 미혹한 것에서, 중간 근기[中根]에서는 마침내 음(陰)ㆍ처(處)ㆍ계(界)가 열리는 것에 동일하지 않음이 있다. 만일 마음이 미혹되면서 빛깔이 미혹되지 아니하면 그 수(數)는 5음이 되고, 만일 빛깔이 미혹되면서 마음이 미혹되지 아니하면 그 수는 12처가 되며, 만일 마음과 빛깔이 모두 미혹되면 그 수는 18계가 되지만, 만일 참된 마음의 신령되게 아는 성질을 똑바로 보면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며 법도 아니고 수도 아니다. 그 밖의 능전(能詮)의 교법을 모두 이 교묘한 문으로서 근기의 알맞음에 맞추어서 깨뜨림[破]과 세움[立]을 널리 펴 말하는 것이니, 진공(眞空)의 이치를 나타내려면 먼저 환유(幻有)의 실마리를 밝히고서 마지막에는 한마음[一心]의 바다에 귀착할 것을 지시한다. 【문】 세간법의 5온(蘊)인 몸 가운데서 어떠한 견해(見解)를 지으면 외도(外道)라는 뜻이 성립되고, 어떻게 통달하면 불법이라는 뜻이 성립되는가. 【답】 외도가, 모든 법인 인연으로 화합되어 모든 온(蘊)이 이루어지고 무릇 시행하는 바는 모두 이 식음(識陰)임을 요달하지 못하고서 문득 5온 위에서 실아(實我)가 있다고 고집하고 수용(受用)하고 자재(自在)함을 신주(神主)라 하면 이것이 외도라는 뜻이다. 만일 안과 밖이 화합된 인연으로 이루어지고 유식(唯識)의 변한 바로 경계와 같이 나타난 바이며 곧 제8식이 맡아 지니고 끊이지 않는지라 있는 것 같이 상속된다 함을 분명하게 알면 이것은 불법이라는 뜻이다. 외도는 모르기 때문에 실유라 여기면서, 성품 없는[無性]이치에 미혹되고 몸이라는 소견[身見]의 어리석음을 고집한다. 【문】 앞에서 5음ㆍ6입ㆍ18계ㆍ7대성(大性)을 깨뜨렸으므로 식(識)이라는 뜻은 전혀 없는데 어떻게 유식임을 건립하는가. 【답】 첫째, 경계를 보내 버리기 위해서 식을 세운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식으로 인하지 아니하면 무엇으로써 경계란 것을 세우며, 만일 식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무엇으로서 경계를 보내 버릴 것인가. 둘째, 망상(妄想)이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뜻[名義]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허망이 없다면 진실을 나타낼 수 없고, 만일 진실이 없다면 미혹[惑]을 깨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깨뜨리고 세우는 것은 나에게 있되, 물듦과 깨끗함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 삼무성론(三無性論)에서 이르되, 지금 이 의타성(依他性)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립의 도리[成立道理]를 설명한다. 이 성질은 언설(言說)로써만이 체성을 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설에는 반드시 의지할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의지하지 않고 산란한 식[亂識]의 품류로 명언(名言)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지할 바 품류가 벌써 없는데 설명할 바 명언이 있다면 성립될 수 없으며, 만일 그렇다면 두 가지의 성질이 없다. 두 가지 성질이 없기 때문에 미혹의 품류가 없고 미혹의 품류가 없기 때문에 두 허물이 있다. 첫째는 공용(功用)으로 말미암지 않고 저절로 해탈하는 것이요, 둘째는 생사와 열반이 나타날 수 없다. 이 두 가지 허물이 없기 때문에 결정코 의타성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이 성질이 있기 때문에 세속 이치[世諦]가 성립된다. 만일 세속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참된 이치[眞諦]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속 이치의 성품 없음을 알기 때문에 참된 이치가 성립되지만, 만일 두 이치가 없다고 여긴다면 삿된 악취공(惡取空)이요 바른 도리를 잘 통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참된 이치의 근본[本]이 없다면 무엇으로 세속 이치의 자취[跡]를 드리우겠는가. 근본과 자취가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불가사의한 점에서는 하나이다. 마치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근본과 자취를 널리 해석하였는데, 여섯 가지로 근본의 것을 삼음과 같다. 진리의 근본 그것이 곧 실상(實相)이니 하나의 구경도(究竟道)이며, 자취란 모든 법의 실상을 제외한 그 밖의 갖가지를 모두 자취라고 한다. 또 본체[理]와 현상[事]을 모두 근본이라고 하며, 본체를 말하고 현상을 말하는 것은 모두 교법[敎]의 자취라 한다. 또 본체와 현상의 교법은 모두 근본이 되며, 교법을 받아 수행함을 자취라고 한다. 마치 사람이 처소에 의지하면 행적(行迹)이 있고 행적을 찾으면 처소를 얻게 됨과 같다. 또 행(行)으로는 체성[體]을 중험할 수 있어서 그 체성은 근본이 되며, 체성에 의지하여 작용을 일으키므로 작용은 자취가 된다. 또 진실[實]은 체성과 작용을 얻으므로 근본이라 하고, 방편[權]은 체성과 작용을 베풀므로 자취라 한다. 또 오늘에 나타낸 바의 것은 근본이 되고, 먼저부터 이미 말했던 것은 자취가 되나니, 이 여섯 가지의 뜻에 결부시켜 근본과 자취를 밝힌다. 1은, 또 본체와 현상[理事]에 결부시켜 근본과 자취를 밝힌다. 머무름이 없는[無住] 근본으로부터 온갖 법을 세우는 것이니, 머무름이 없는 이치 그것이 곧 근본일 때는 실상의 참된 이치[眞諦]요, 온갖 법 그것이 곧 근본일 때는 삼라만상의 세속 이치[俗諦]이다. 실상의 참된 근본으로 말미암아 세속의 자취를 드리우고 세속의 자취를 찾으면 곧 참된 근본이 나타나므로 근본과 자취가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불가사의함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온갖 법이 공하여 여실(如實)한 모습임을 관찰하면 인연으로 있을 뿐이요 뒤바뀜으로부터 생긴다”고 하였다. 2는 이치와 교법[理敎]으로 근본과 자취를 밝힌다. 바로 그것이 근본일 때에 비추는 바의 두 이치[二諦]는 다 함께 말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근본이라 하며, 옛날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한 그것이 곧 두 이치의 교법이므로 그 교법을 자취라 한다. 만일 두 이치의 근본이 없다면 두 가지 교법이 없을 것이요, 만일 교법인 자취가 없다면 어찌 이치인 근본으로 나타내겠는가. 근본과 자취가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 불가사의함은 동일하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 법은 보일 수가 없어서 말[言詞]과 모양은 적멸(寂滅)이로되 방편의 힘 때문에 다섯 비구를 위해 설하셨네.
3은 교법과 수행[敎行]에 결부시켜 근본과 자취를 밝힌다. 맨 처음에 옛 부처님의 교법을 받아 근본으로 삼았다면 수행의 원인으로 결과에 이르는 행이 있었다. 교법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설명하면서 수행을 일으키게 되었고, 수행으로 말미암아 교법을 알면서 진리가 나타나게 되었으므로, 근본과 자취가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불가사의함은 동일하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모습이니 부처님 제자가 도를 행하고 나면 오는 세상에서는 성불하느니라.
4는 체성과 작용[體用]에 결부시켜 근본과 자취를 밝힌다. 옛날 맨 처음의 수행으로 진리에 결합함으로 말미암아 법신(法身)을 증득함이 근본이 되고, 처음에 법신인 근본을 얻었기 때문에 체성과 다름 아닌 응신(應身)의 작용을 일으킨 것이요 응신으로 말미암아 법신이 나타나게 되었다. 근본과 자취는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 불가사의함은 동일하다. 경에서 이르되, “나는 성불해서부터 오랜 동안 이와 같이 방편만으로 중생을 교화했느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5는 방편과 진실[權實]에 결부시켜 근본과 자취를 밝힌다. 진실이란, 맨 처음부터 오랫동안에 실로 법신ㆍ응신의 두 몸을 얻었으므로 모두가 근본이라 하며, 중간에 자주자주 생(生)을 부르짖고 멸(滅)을 부르짖으면서 갖가지로 방편의 법신ㆍ응신의 두 몸을 베풀었기 때문에 자취라고 한다. 처음에 얻은 법신ㆍ응신인 근본이 아니면 중간의 법신ㆍ응신인 자취가 없을 것이니, 자취로 말미암아 근본을 나타낸다. 근본과 자취가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 불가사의함은 동일하다. 경에서 이르되, “이것은 나의 방편이거니와 모든 부처님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6은 현재와 과거[今已]에 결부시켜 근본과 자취를 논한다. 앞에서부터 모든 교법으로 이미 말한 본체와 현상[理事:그 一]으로부터 방편과 진실[權實:그 五]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것은 자취이며, 지금 경에서 말씀하신 오랜 동안의 본체와 현상으로부터 방편과 진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은 근본이라고 한다. 지금에 밝힌 바 오랜 동안의 근본이 아니면 이미 말씀했던 자취가 없으리라. 이미 말했던 자취가 아니라면 어찌 지금의 근본이 나타나겠는가. 근본과 자취가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불가사의함은 동일하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 법이 오래된 후에야/반드시 진실을 말씀해야 했다.” 【문】 세간에는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한 하나의 법도 없지만, 몇 가지 인연이 갖추어져서 만법(萬法)을 내는 것인가. 【답】 일찍이 마음 이외의 법은 없되 마음에게 연(緣)이 되어 주나니, 이것은 자기 마음에서 생기면서 도리어 마음에게 모양[相]이 되어 줄 뿐이다. 의해(義海)에서 이르되, “연기(緣起)를 밝힌다고 함은 마치 대경[塵]을 보는 때에 대경 이것은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되 곧 자기 마음에 연이 되어 주나니, 연이 앞에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법이 비로소 생기기 때문에 연기의 법이라고 한다”고 했다. 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겨나고 인연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나니 곧 대경을 알면 체성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
이제 인연임과 인연이 아님을 깨치면 생기되 미묘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다만 연기의 체성이 고요하여 생기되 항상 생기지 않을 뿐이니, 체성이 인연 따라 생기지 않거나 항상 생김을 요달하는 이와 같은 소견이면 진실한 지견(知見)이라고 한다. 무엇을 진실한 지견이라 하느냐 하면, 만일 인연을 보면서 그 체성을 보지 못하면 이것은 곧 상견(常見)이요, 만일 체성을 보면서도 인연을 보지 못하면 이것은 곧 단견(斷見)이다. 이제 인연으로부터 성품[性]을 보면 상견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참 성품 중에서 인연이 생기면 단견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진실한 지견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인연의 행상을 널리 밝히는 것이니, 현상[事]으로 인하면서 본체[理]가 나타나므로 본체로 하여금 외롭지 않게 하고, 본체로 인하여서 현상이 성립되므로 현상으로 하여금 융즉(融卽)하게 한다. 그러나 경론(經論)에서 세속 이치를 따라 세운 바를 보면, 네 가지 인연으로 안팎이 임시로 성립됨이 있어서 행상(行相)이 없지도 않다. 1은 인연(因緣)이다. 논(論)에서 이르되, “첫째는 인연이니, 유위(有爲)의 법이 제 결과를 직접 이룩하는 것이다. 이 체성에는 둘이 있나니, 1은 종자(種子)요, 2는 현행(現行)이다.” 해석에서 이르되, “온갖 번뇌의 종자가 가행(加行)의 지혜를 입어서 꺾어 조복하고 나면 영원히 현행하는 작용을 냄이 없나니, 비록 이 종자가 인연의 법이기는 하나 현행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또 마음의 종자를 가지고 물질의 현행을 보는 것 같은 것도 역시 인연이라 하지 않거니와, 만일 마음의 종자가 마음의 현행을 내고 물질의 종자가 물질의 현행을 내는 등은 이 모두가 인연이니, 이것은 새 것과 본래 것의 두 가지 종자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2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여덟의 현식(現識)과 그 심소(心所)의 앞생각[聚]이 뒷생각에 제 종류로 사이를 뜨게 하지 않고 평등하면서 길을 터서 인도하여 그로 하여금 틀림없이 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해석에서 이르되, “여덟의 현식과 심소라 함은, 연(緣)을 내는 자체로서 견분(見分)과 자증분(自證分)일 뿐이니, 이 연의 자체를 통틀어 현식이라 한다. 색종자(色種子)와 불상응종자(不相應種子)를 간별(簡別)하며, 무위(無爲)는 이 연의 성품이 아니다. 논에서 설명한 등무간연은 온갖 심심소(心心所) 만에 국한되는 설명이니, 앞에 난 생각이 없어지면서 길을 터놓아 뒷생각을 껴잡아 들이기 때문이다. 개(開)란 피해 준다는 뜻이요 그곳에서 함께한다는 뜻이며, 도(導)란 불러 인도한다는 뜻이니, 곧 앞생각이 그곳을 피해 없어지면서 뒷 법을 불러 인도하여 나게 하는 것이다. 앞생각이 뒷생각에[前聚於後]라고 함은, 때를 한꺼번에 하는 것과 뒷생각이 앞생각의 연이 된다는 뜻을 간별(簡別)하므로 길을 터서 인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종류[自類]라 함은 다른 식(識)이 연(緣)이 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며, 사이를 뜨게 하지 않는다[無間]고 함은 비록 앞생각이 사이를 뜨게 함이 없이 뒷생각의 연이 된다 하더라도 그 중간 사이에는 반드시 간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님을 나타낸다. 평등하면서 길을 터서 인도한다[等而開導]고 함은, 연(緣)을 나타내는 뜻으로서 그로 하여금 결정코 나서 이 내 뒤의 결과가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니, 비록 오랜 세월을 겪어서 마치 8만 겁(劫)을 지냈다고 하더라도 앞의 안식(眼識)을 뒤에서 볼 때는 역시 이것의 연이 되어서 그 뒤의 결과가 당연히 꼭 생겨야 되기 때문이다. 곧 아라한이 무여의 열반(無餘依涅槃)에 들려는 최후의 마음을 간별(簡別)하므로 결과가 꼭 생김이 없기 때문에 이 연이 아니며, 비록 길을 열어 주는 뜻은 있다고 하더라도 인도하는 힘은 없기 때문이다. 【문】 심왕과 심소는 벌써 같은 제 종류가 아님은 마치 여덟 가지 식이 언제나 한꺼번에 운전하되 체성과 작용이 저마다 다른 것과 같거늘, 어떻게 함께 생기는데도 뒷 것에서 보면 다 같이 서로서로 연(緣)의 뜻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답】 논에서 이르되, “심왕과 심소는 비록 항상 다 함께 운전하다 하더라도 상응하기 때문에 화합하여 하나와 같으므로 시설(施設)할 수도 없고 따로 떨어져서 다르기 때문에 서로서로 등무간연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화합하여 하나와 같다 함은, 동일한 소연(所緣) 및 동일한 의지[依]이며, 동일한 때에 움직이고 동일한 성질에 속하며, 따로 떨어질 수 없어서 그로 하여금 다르게 하거니와, 동일하지 않은 여덟 식의 행상(行相)인 소연 및 의지는 저마다 같지 않기 때문에 서로서로 등무간연이 되지 아니한다. 또 다만 무여열반에 들어가려는 이만은 제외되며, 그 밖의 온갖 심심소는 모두가 등무간연이니, 힘과 작용이 가지런하고 제 종류로 사이를 뜨게 함이 없기 때문이다. 3은 소연연(所緣緣)이다. 만일 법이 있으면 제 몸 모양을 수반한[帶] 마음이 혹은 상응하여 생각하기도 하고 의탁하기도 한다. 이 체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친(親)이요, 둘째는 소(疎)다. 만일 능연(能緣)의 체성과 서로가 여의지 아니하면 이 견분(見分) 등이 안에서 생각하고 의탁하게 되므로 그것이 친소연연(親所緣緣)인 줄 알아야 한다. 만일 능연의 체성과는 비록 서로가 여읜다 하더라도 바탕[質]이 되어 일으킬 수 있어서 안으로 생각하고 의탁하게 되면, 그것이 소소연연(疎所緣緣)인 줄 알아야 한다. 친소연연은 능연이 모두 있되 안에서 생각하고 의탁할 바를 여의면 반드시 생기지 않는 까닭이며, 소소연연은 능연이 혹은 있기도 하며 바깥에서 생각하고 의탁한 바를 여의어도 역시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풀이해서 말하겠다. ‘만일 법이 있으면’이라고 함은 제 나름으로 분별한 것[遍計所執]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별로 된 것은 체성이 없어서 능연의 식을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의 연이 아니다. 연이란 반드시 이것이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依他]이며, 지금 여기서는 반드시 체성이 있어야 연이다.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고 함은 능히 반연하는[能緣] 마음 등이 이 물질 등의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수반한다[帶]고 함은 소지하여 수반한다[挾帶]는 뜻이며, 모양[相]이라 함은 체성의 모양이요 형상의 뜻이 아니다. 바로 지혜 등이 생길 때는 진여(眞如)의 체성 모양을 소지하여 수반하며 일어나므로 진여와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다. 만일 소연(所緣)인 그 몸을 수반하면서 경계 모양을 삼는다면, 이것은 소연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양을 체성이라 한다면 곧 동시에 심심소의 체성과 모양이 있는 것이므로 역시 마음이 소지하여 수반하면서 모양이 있는 것이니, 분리된 뜻이면서 혹은 체성의 모양이란 뜻이기도 하다. 진여 또한 모양이라고 하므로 모양이 없는 모양[無相之相]이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이르되 “모두가 동일한 모양이니, 이른바 없음[無]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친소연연이라 함은 만일 견분(見分) 등의 체성과 서로가 여의지 않은 것이라면 다른 식이 변한 바와 여덟의 식으로부터 각각 소연의 다름을 간별(簡別)하며, 이 견분은 안에서 생각하고 의탁한 것일 뿐이므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로서, 곧 식이 변한 바[識所變]를 안에서 생각하고 의탁한 바라 한다. 둘째는 무위(無爲)로서 진여의 체성은 식을 여의지 않으므로 생각하고 의탁한 바라고 한다. 곧 자증분(自證分)이 견분 등을 반연하는 것과 같아서, 다 같이 이러한 예(例)는 친소연연을 설명한다. 소소연연과 능연의 마음은 서로가 법을 여읜다는 것이니, 곧 다른 식이 변한 바와 제 몸속에서 별도의 식이 변한 바가 서로 기대면서 본질을 삼는 것이 그것이다. 또 친소연연이란 견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제 몸 모양을 수반하며, 이 친소연연은 그 중에서 영상(影像)인 상분(相分)이라 이것은 본질의 모양을 수반하기 때문에 소연(所緣)이라 한다. 또 친소연연은 능연의 마음일 뿐이지만, 모두가 안에서 생각하고 의탁하는 바의 상분을 여의게 되면 온갖 마음 등은 반드시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대승(大乘) 중에서 만일 없는 법을 반영한다면 마음이 생기지 아니한다. 소소연연은 능연의 법이 혹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므로 이것은 마음 밖의 법이기 때문이다. 마치 실아(實我)의 법을 고집하는 것과 같아서 비록 본질은 없지만 그 법을 여의어도 마음은 역시 생기기 때문이다. 또 관소연연론(觀所緣緣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안 물질은 마치 밖에서 나타남과 같아서 식의 소연연이 되나니 그 모양은 식에 있고 식을 내는 것이 인정이기 때문이다.
안에서 식이 변한 바의 물질로 소연연을 삼는 것은 바로 의타(依他)의 성질로서 체성이 있는 법이기 때문이요, 마음을 반연하지 않은 그 밖의 고집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논에서 이르되, “보고 의탁하면 그것이 생기되 그 모양을 수반하고 일어난다”고 하였다. 보고 의탁하면 그것이 생긴다는 것이 바로 연(緣)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날 때는 그 모양을 수반하여 일어나므로 소연(所緣)이라 한다. 수반한다[帶]는 것은 소지하고 수반하여[扶帶] 꽉 달라 붙는다는 뜻이다. 백법(百法)에서 말하였다. “호법(護法)이 이 소연을 밝혔다. ‘견분ㆍ상분과 같되 일정한 상분이 없음은 본지(本智)로서 진여의 체성을 친히 증득하여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요 진여의 체성과 명합하기 때문이니, 곧 형상이 없는 모양이요 곧 체성의 모양이 있는 모양일 뿐이다. 곧 소지하여 수반한다[挾帶]는 뜻 역시 소연연이다.” 힐난했다. ‘만일 견분이 있다면 곧 분별하는 모양이 있거늘, 어째서 분별의 모양이 없는 것이라 하는가.’ 또 이르되, ‘능히 취함[能取]은 없는가’라고 하였다. 대답했다. ‘비록 견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분별은 없으며, 또 능히 취함이 없는 바른 지혜는 진여를 반연하여 체성의 모양의 연(緣)에 친히 수반하여 곁붙기 때문에 다시는 형상이 없는 모양이라고 설명한다. 상분이 없는 것을 능히 취함이 없다고 함은, 곧 분별하는 허망한 고집으로는 실로 능히 취함이 없기 때문이지만 내분(內分)에서는 능연(能緣)의 견분이 없지 않다.’ 또 힐난했다. ‘만일 상분이 없다고 한다면, 소연연론(所緣緣論)에서 이르되 그것에 의하여 생기되 그의 모양을 수반하기 때문에 소연의 모양이라고 한다고 했다. 만일 진여의 상분이 없다면 곧 소연은 없다.’ 호법이 이르되, ‘역시 소연연의 뜻은 없다. 비록 견분ㆍ상분이라 하더라도 진여의 모양을 수반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면 일어나되 여의지 않기 때문이요, 곧 본지(本智)의 견분은 진여의 체성의 모양을 친히 수반하고 곁붙어서 일어나기 때문에 소연연이라 한다. 마치 자증분(自證分)이 견분을 친히 수반하는 것이므로 소연연이라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리해야 된다. 실로 변대(變帶)라는 뜻이 없고 소지하고 수반하는[挾帶] 것만이 있을 뿐이면 소연연이라 하기 때문에 후득지(後得智)의 분별과 함께하며, 만일 상분이 변한 반연이라면 친히 증득할 것이 아니므로 곧 후득지와 같아서 분별이 있어야 하지만 이미 후득지와 다르므로 곧 견분은 있되 상분은 없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또 온갖 견분은 모두가 경계의 모양을 소지하고 수반했다는 뜻이 있는 것이니, 상분으로 말미암아 견분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곧 소지하고 수반한다는 뜻이다. 여의지 않음[不離]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의 상분이니, 스스로 능변(能變)하는 식에서 보면 혈맥(血脈)이 서로 통하므로 마치 부자(父子)와 같기 때문에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둘째는 진여 등의 경계는 비록 식의 변화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식 등의 실체(實體)이기 때문에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고 했다. 【문】 소연연론(所緣緣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안 물질[內色]은 바깥에서 나타남과 같아서 식의 소연연이 되는 것이니 저 모양이 식에 있고 식을 낼 수 있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깥 경계가 비록 없다손 치더라도 안의 물질이 있어서 바깥 경계와 비슷하게 나타나므로 소연연이 된다. 이미 바깥 모양이 식에 있으면 이것이 곧 함께 일어나는 것이요 모양이 있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또 식을 낼 수 있고 식의 연(緣)이 될 수 있는가. 【답】 마치 안식(眼識) 등이 저 모양을 수반하고 일어나는 것과 같아서, 비록 때를 같이한다 하더라도 앞뒤에 장애하지 않으면서 차츰차츰 서로가 관련하며 소연연의 도리를 이룬다. 논(論)에서 물었다. “이 안의 경계 모양은 식을 떠나지 않거늘, 어째서 함께 일어나고 식의 연이 될 수 있는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결정코 서로가 따르기 때문에 때를 함께하면서도 연이 되나니 앞의 것이 뒤의 연이 되기도 함은 그의 공능(功能)을 이끌기 때문이다.
경계의 모양과 식은 결정코 서로가 따르기 때문에 비록 때를 함께하면서 일어나고 또한 식의 연이 된다 하더라도, 바깥 모든 법은 이치로 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코 식에 있는 것이요 그 밖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이 감관[根]의 관능과 앞의 경계인 물질은 무시이래로부터 차츰차츰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모든 식은 안의 경계 모양만으로 소연연이 됨은 이치로 보아 잘 성립된다. 【문】 설명한 소지하고 수반함[挾帶]이라는 것이 친소연연(親所緣緣)이라면, 체성[體]을 소지하는 것인가. 작용[用]을 소지하는 것인가. 【답】 4구(句)로 분별해야 된다. 첫째는 체성이 체성을 소지하는 것이니, 곧 자증분(自證分)이 증자증분(證自證分)을 반연하고 증자증분이 도리어 자증분을 반연하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는 작용이 작용을 소지하는 것이다. 곧 여덟 식의 심심소의 견분이 스스로 친한 상분을 반연하는 것이 그것이다. 셋째는 작용이 체성을 소지하는 것이다. 곧 근본지(根本智)의 견분이 진여를 반연하는 것이 그것이다. 넷째는 체성이 작용을 소지하는 것이니, 곧 자증분이 견분을 반연하는 것이 그것이다. 【문】 소연연은 여덟의 식에서 어떻게 친(親)ㆍ소(疎)를 해석하는가. 【답】 백법(百法)에서 이르되, “호법이 해석하되, ‘이제 8식의 심왕과 심소라는 이름의 이 품류에서는 원인이거나 결과이거나간에 소소연연(疎所緣緣)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원인 중의 제8식에서는, 다른 사람의 부진근(扶塵根)과 기세간(器世間)의 경계에 의탁하여 스스로 상분의 연(緣)을 변화하여 서로서로 수용할 수 있으므로 소소연연의 뜻이 잇다. 만일 이것이 자기와 남의 연의 뜻이라면, 다섯 가지 감관과 종자는 서로서로 연을 변화하지 않으므로 곧 소소연연의 뜻은 없다. 또 형상[色]이 있는 세계는 곧 부진근과 기세간이 있어서 서로서로 대경을 붙들 수 있으므로 소소연연이 있으며, 만일 형상이 없는 세계라면 곧 형상으로 붙들거나 의탁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곧 소소연연의 뜻은 없다. 만일 스스로의 제8식이 스스로의 3경(境)을 반연한다면, 친소연연이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는 원인 중에서의 해석이다.만일 부처의 과위 중에 이르면, 제8식이 자기 경계를 반연하고 진여를 반연하고 과거ㆍ미래의 온갖 체성 없는 법을 반연할 때에는 곧 소소연연이 없으며, 만일 다른 부처의 몸과 국토를 반연하되 곧 영상(影像)을 변화하면서 반연하면 역시 소소연의 뜻이 있다. 곧 제8식의 심왕은 자신의 과위 중에서는 소소연연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만일 제8식과 다섯의 심소의 원인ㆍ결과의 자리에서라면 모두가 소소연연이 있다. 제8식의 심왕을 의탁하게 되면 3경이 본질(本質)이 되면서 반연하기 때문이다. 만일 제7식이라면, 논에서 이르되 ‘제7식인 마음이 아직 전의위(轉依位)가 되지 못했으면 이것은 구생(俱生)이기 때문에 반드시 바깥 본질을 붙들며 역시 소소연연이 결정코 있으며, 전의 위에서는 결정코 진여를 반연함이 있는 것이 아니며 바깥의 본질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이 제7식의 유루위(有漏位) 중의 것은 체성 이것이 구생이요 저절로의 것이라 힘이 없으니, 반드시 제8식을 붙들어 바깥 본질을 삼기 때문에 자기 방법으로 영상의 연[影緣]을 변화하기 때문에 결정코 소소연연이 있거니와, 무루위(無漏位)에 결부할 때는 곧 소소연연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만일 제7의 근본지(根本智)와 상응한 마음에서라면 진여를 반연하므로 곧 소소연연이 없지만, 만일 후득지(後得智)로 진여를 반연한다면 곧 소소연연이 있으며, 만일 이 무루의 제7식이 과거ㆍ미래와 모든 체성 없는 법을 반연한다면 모두가 소소연연이 없다’고 했다.” 【문】 무엇 때문에 유루의 제7식은 고집하는 일을 일으키며, 본질을 붙들고 의탁해서 일으켜야 하는가. 무릇 이 고집이라는 것은 구상과 계획에서 나는 바이며, 곧 바깥 본질을 빌려서 일으킨다고 함은 합당치 않다. 【답】 고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억지스런 생각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면서 고집을 일으키는 것이니, 곧 바깥 본질을 의탁하게 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아니함은, 마치 제6식 혼자서 산란한 뜻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둘째는 저절로 고집을 일으키는 것이니, 곧 제7식이 그것이다. 제7식의 심심소 이것은 구생(俱生)이면서 저절로 일으키는 것이라 힘이 없이 일으키므로, 반드시 본질을 빌려서 자기 방법으로 고집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제7의 유루위 중에서는 소소연연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만일 제6식이라면, 이 식은 몸과 마음의 행상(行相)이 날카로운지라 온갖 자리에서 자재하게 운전할 수 있어서 바깥의 본질을 의뢰하게 됨이 혹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므로 소소연연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원인ㆍ결과의 자리에서 모두 자재하게 운전하되 혹은 분별기(分別起)이기도 하고 혹은 구생기(俱生起)이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할 때는 본질에 의뢰하여 일으킴도 있고 본질에 의뢰하지 않고 일으킴도 있음은 반연하는 경계가 가장 넓기 때문이니, 소소연연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아니하다. 앞의 5전식(轉識)은 아직 전의위(轉依位)가 못되었으면 관(觀)이 열등하기 때문에 반드시 바깥의 본질을 의뢰하며 결정코 소소연연이 있으며, 만일 전의위라면 과거ㆍ미래 등을 반연함이 꼭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의 본질도 없기 때문이다. 앞의 5전식의 원인ㆍ결과의 자리에서 모든 감관의 서로서로의 작용에 결부시키면 역시 본질을 의뢰해서 일으켜야 하므로 결정코 소소연연이 있으며, 만일 과위(果位)에 이르렀다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일정하지 아니하다. 또 모든 식의 서로서로의 반연[互緣]이라 함은, 제8식과 앞의 7식은 소연연이 된다. 곧 8식의 상분과 다섯의 식은 소연연이 되고, 제6식은 제8식의 4분(分)을 반연하여 소연연이 되며, 제7식은 제8식의 견분만을 의탁하여 소연연이 되고, 곧 제8식의 4분은 본질이 되며, 곧 앞 7식의 견분은 상분을 변화하여 곧 제8식과 앞 7식을 반연하며 소연연이 된다. 그러므로 제8식은 7식에서는 있으며, 곧 제8식과 앞 7식은 소소연연이 되고, 7식은 제8식에서는 없다. 곧 앞 7식은 제8식과는 소연연이 되지 않는다. 제8식은 앞의 7식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요, 앞 7식에 의탁하여 생기지 않기 때문이며, 오직 자신의 3경(境) 만을 반연하여 소연연이 된다. 또 널리 해석하며 말하였다. “옛 대승사(大乘師)가 세운 소연연의 뜻이란 다음과 같다. 그는 이르기를 ‘만일 법이 있다면, 곧 체성이 있는 본질의 법을 연(緣)이라 한다. 이것은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是帶己相]고 하면, 곧 상분을 소연의 모양이라 하고, 상분과 본질이 합한 설명은 소연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말한 바,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에서 수반할 대(帶) 자(字)는 마음에 속하고, 몸 기(己) 자는 본질에 속하며, 상(相)은 곧 상분이니, 능연(能緣)의 마음이 소연의 경계를 반연할 때에 본질 집[本質家]의 제 몸이 지닌 상분을 수반하고 생기기 때문에 ‘이것은 제 몸 모양을 띤다’고 한다.” 소승(小乘)인 정량부(正量部)의 반야국다(般若鞠多)는 상분을 세우지 않은 논사(論師)인데, 대승을 비방하는 논 7백 게송을 지어서 옛 대승사의 소연연의 뜻을 깨뜨리면서 이르되, “그대가 만일 제 몸 모양[己相] 이것이 상분이라 장차 소연이 된다고 말한다면, 또한 그대의 대승종(大乘宗)에서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로 진여를 반연할 때는 진여의 상분을 수반하고 일으키지 않으리니, 그 진여는 능연의 지혜인 견분에서 보면 소연연의 뜻이 없어야 한다. 반드시 근본지가 진여를 반연하면서도 역시 상분이 있다고 한다면, 곧 그대 자신들이 종(宗)의 온갖 경론에 어긋났거늘 어떻게 회통(會通)하겠는가”라고 했다. 옛 대승사들은 이러한 힐난을 받고도 그 당시에 변명하지 않았으므로 12년 동안이 지나도록 대승의 소연연의 뜻을 변명한 사람이 없었다. 당(唐) 3장(藏)이 변명하되, “우리 종의 대승의 해석으로는 수반한다[帶]고 함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변대변(變帶變)이요, 둘째는 협대변(挾帶變)이다. 만일 변대의 것이면, 곧 본질과 비슷한 제 몸 모양을 변하게 수반하며[變帶]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은 형상의 모양이라 근본지로 하여금 진여를 반연할 때에는 이내 없게 하지만, 만일 협대의 것이라면 이내 있어서 근본지가 진여의 체성 모양을 친히 소지하여 수반하며[挾帶] 반연하는 것이니, 다시는 상분을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소연연이 된다”고 했다. 3장이 이르되, “만일 법이 있다면 곧 진여 이것은 체성이 있는 법이므로 연(緣)이라 하며, 곧 이 진여 이것은 근본지로 생각할 바[所慮]의 곳이다. 단 소연(所緣)이라 한 두 세력이 합친 설명을 소연연이라 한다”고 했다. 소연은 곧 지업석(持業釋)을 반연했고, 또한 여덟 식의 견분이 저마다 자신의 친한 상분을 반연할 때는 모두 이것은 소지하여 수반하는 것처럼, 안의 2분(分)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반연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근본지가 진여를 반연할 때 비록 상분을 변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여의 체성 모양을 친히 소지하여 수반하면서 반연하므로, 역시 소연연이 성립된다. 옛 대승사가 잘못 해석한 소연연의 뜻은, 무릇 소연연의 뜻이란 체성이 있는 법이 연(緣)이요 곧 체성이 있는 법 이것이 능연의 마음으로서 생각할 바의 처소이기 때문에 소연이라 한다. 여기서 옛 대승사들이 진실한 상분만을 가지고서 소연을 삼았다면 너무도 잘못된 것이다. 소연연의 뜻을 바르게 해석하다면, “만일 법이 있다면, 이것은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라는 것이니, 만일 법이 있다면 곧 존재하는 진실한 법이라 거짓된 법과 제 나름으로 분별한 상분으로서 체성이 없는 법을 간별(簡別)하므로 체성이 없는 법은 이 소연으로는 연이 성립되지 않을 뿐이다. 무릇 연(緣)이 된다고 함은, 모름지기 체성이 있는 진실한 법이어야 힘과 작용이 있기 때문에 식(識)을 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니, 곧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 이것은 체성이 있는 법이다. 이것이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고 하면, 수반한다[帶]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변하여 수반한다[變帶]는 것이니, 곧 여덟의 식에 소소연연이 있고 본질 이것은 의탁함이 되며, 이 체성 있는 경계가 본질이 되어 변화하여 본질의 모양과 비슷하게 일어나므로 변하여 수반한다고 한다. 둘째는 소지하여 수반한다[挾帶]는 것이니, 곧 온갖 친소연연의 진실한 상분이 그것이다. 이 상분을 위하여 열 가지가 능연의 마음을 떠나기 때문에 그 능연의 마음은 이 상분을 친히 소지하면서 반연하므로 소지하여 수반한다고 한다. 제 몸 모양[己相]이라 함에도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 변하게 수반하는 소소연연 위에서 설명한다면 곧 변하여 본질과 비슷한 제 몸 모양이다. 제 몸[己]이라 함은 몸[體]이다. 곧 상분이 본질과 비슷한 제 몸이니, 이것은 형상[相狀]의 모양이다. 둘째, 소지하여 수반하는 친소연연 위에서 설명한다면 곧 능연의 마음 위에서 소연인 상분의 제 몸 모양을 친히 소지하여 수반하는 것이니, 이것은 경계 모양[境相]의 모양이다. 곧 소소연연에서 본질 집[本質家]의 제 몸 모양을 수반하면서 일어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한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이것이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고 한다면, 잘 모르겠구료. 능연의 마음은 누구 집의 제 몸 모양을 띠면서 반영하는가”라고 한다면, 대답하기를 “만일 소소연연이라면 곧 본질 집의 제 몸 모양이 변하여 수반하면서 반연하지만, 친소연연이라면 곧 상분 집[相分家]의 제 몸 모양을 소지하여 수반하면서 반연한다”고 하리라. 또 소소연연은 바로 형상 모양을 띠므로 큰 본질과 비슷한 모양을 수반하며, 만일 친소연연이라면 곧 경계 모양의 모양을 수반하며, 경계 모양을 친히 수반하면서 반연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르되, “능연인 마음의 제 몸 모양을 수반한다”고 하면, 이 사람은 소연의 뜻을 알고 있지 못하다. 【문】 만일 경계 모양을 친히 소지하여 수반하고 본질과 비슷한 모양을 변하게 하여 수반하면서 일으키어 친(親)ㆍ소(疎)의 두 연이 성립된다고 하면, 곧 바깥 물질의 법도 친ㆍ소의 두 연이 성립되리라. 마치 거울을 가지고 사람을 비출 때에 거울의 면(面) 위에서도 사람의 영상을 친히 소지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영상이 거울 면에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친소연연이 성립되어야 하며, 또 거울 면을 바깥에 있는 사람의 본질에서 보면 소소연연이 이루어져야 한다. 【답】 생각할 바[所慮]를 가지고 간별하겠다. 뜻을 말한다면, 무릇 소연연이 되는 것은 모름지기 능히 생각[能緣慮]하는 법에 대하여 생각할 바이어야 비로소 소연연이라 한다. 지금 거울 면은 벌써 능히 염려하는 법이 아닌지라 곧 거울 속의 사람 그림자와 바깥에 있는 사람의 본질 또한 생각할 바의 법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 생각할 바라는 뜻이 궐(闕)하였으므로 소연연이 성립되지 아니한다. 외인(外人)이 또 힐난한다. “만일 그렇다면, 제6식이 허공의 꽃과 같이 체성이 없는 법을 반연할 때는 생각할 바의 뜻이 있으므로 소연연이 성립되어야겠다. 식 이것이 능히 생각함이 있기 때문이다.” 【답】 의탁할 바[所託]를 가지고 간별하겠다. 뜻을 말하자면, 그 뜻이 체성 없는 법을 반연할 때에 비록 생각할 바의 이치가 있기는 하나 의탁할 바의 이치를 궐한 것이니, 허공의 꽃 등은 체성이 없어서 능연의 마음에서 의탁할 바가 되어 주지 아니한다. 소연(所緣)이 성립되는 것만은 방해하지 않되 연(緣)이 성립되지 아니한다. 이로 말미암아 4구(句)로 분별해야 된다. 첫째는, 생각할 바는 있으나 의탁할 바는 아니다.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고집인 아(我)ㆍ법(法) 등이 그것이다. 체성이 없기 때문에 다만 생각할 바가 될 뿐이요 의탁할 바는 되지 아니한다. 둘째는, 의탁할 바는 있되 생각할 바는 아니다. 곧 거울과 물속에 비치는 사람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의탁할 바는 있으면서 생각할 바는 없다. 거울과 물 등은 능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생각할 바도 있고 의탁할 바도 있는 것이니, 곧 온갖 소연연의 진실한 상분이 그것이다. 넷째는, 생각할 바도 아니고 의탁할 바도 아닌 것이다. 곧 거울과 물이 비치는 것 따위를 제외한 그 밖의 반연되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또 친연(親緣)이라 함은, 바로 바싹 붙는다는 뜻이요 가까이한다는 뜻이니, 곧 상분이 견분을 친하고 바싹 붙어서 가까이하면서 다시는 다른 것으로 분리되거나 간격이 없는 것과 같다. 소연(疎緣)이라 함은 바로 멀리한다는 뜻이니, 서로가 분리되며 사이가 뜨게 되기 때문이다. 곧 본질의 법이 그것이다. 또 친소연연(親所緣緣)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다. 1은 친소연연은 본질과 마음을 좇으면서 변하며 일으키는 것이니, 곧 다섯의 식이 다섯 대경을 반연하는 소연인 상분이 그것이다. 2는 친소연연은 마음을 좇아 변할 뿐이요 본질에 의뢰하여 일으키지 않나니, 곧 제8식이 3경(境)을 반연하는 상분이 그것이다. 3은 친소연연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변하지도 않고 본질로 말미암아 일으키지도 않나니, 곧 근본지(根本智)로 증득한 바 진여가 그것이다. 4는 친소연연이면서 상분이 아닌 것이니, 곧 안의 2분(分)으로 서로서로 반연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은(慈恩)이 이르되, “만일 능연과 함께하면서 체성이 서로 여의지 아니하면 이것은 견분 등이 안에서 생각하고 의탁할 바이니, 그것이 바로 친소연연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만일 능연과 함께한다면 이것은 견분이요, 체성이 서로 여의지 않는다 함은 곧 자증분(自證分)과 함께 체성이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뜻을 말하면, 상분이란 견분의 친소연연이요, 견분이란 자증분의 친소연연이니, 모두가 자증분의 체성을 여의지 아니한다. 이것은 바로 소소연연(疎所緣緣)을 간별(簡別)하는 것으로서, 본질의 법을 능연의 견분에서 보면 여덟의 식을 서로가 여읨에 있기 때문에, 이것도 다른 사람이 변한 바의 상분과 자신의 여덟의 식으로 저마다 변한 바의 상분을 간별하므로 다시 서로서로를 바라보면 모두가 이는 친(親)하지 아니하다. 여기서는 자기 식의 변한 바 상분만을 취하여 친함이라 하며, 능변(能變)의 견분에서 보면 체성이 서로가 여의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 다시는 사이가 뜨거나 장애하는 물건이 없어야 이것이 친함의 이치이다. 이것이 견분 등의 안에서 생각하고 의탁할 바[是見分等內所慮託]라고 한 것에서, 견분 등이라 함은 바로 자증분(自證分)과 제4분[證自證分]과 근본지로 진여를 반연함 따위가 평등하게 취하므로 이 모두는 친소연연이 성립된다. 또한, 상분 이것은 견분 집[家]의 친소연연이고, 견분은 곧 자증분의 친소연연이며, 자증분 이것은 증자증분의 친소연연인 것과 같다. 또 진여 이것은 근본지의 친소연연이며, 또 심심소(心心所)의 연(緣)을 똑같이 취하는 친한 상분 역시 이 친소연연이니, 이 위의 것들은 모두가 소지하여 수반하면서[挾帶] 반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