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릇, 한 생각 무명(無明)의 마음이 진여의 바다를 쳐 움직여서 12연기(緣起)를 이루고 생사의 근원을 짓는다. 만일 그것을 분명히 알면 부처의 지혜바다[佛智海]의 물결이 되지만, 그것에 어두우면 나고 죽는 강[生死河]의 여울이 된다. 어떻게 부처의 지혜를 이루고 어떻게 생사를 이루는 것인가. 【답】천진(天眞)한 부처의 지혜는 본래부터 존재하고 망령된 연[妄緣]의 생사는 그 체성이 ≺공≻하다. 비록 두 가지 이름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 다만 첫째가는 이치[第一諦]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을 일컬어 무명이라 한다. 분명히 알지 못하는 소경[所盲] 때문에 혹업(惑業)에 따르는 고통들이 이뤄지고, 무명의 참 성품을 알면 열반의 묘한 마음을 이루다. 만일 어리석어 혹업이 되면 세 가지 길[三道]을 이룬다. 첫째 무명ㆍ욕망[愛]ㆍ잡음[取]의 이것은 번뇌의 길[煩惱道]이요, 둘째 지어감[行]ㆍ존재[有]의 이것은 업의 길[業道]이며, 셋째 의식[識]ㆍ이름과 물질[名色]ㆍ여섯 감관[六入]ㆍ닿임[觸]ㆍ느낌[受]ㆍ태어남[生]ㆍ늙어 죽음[老死]의 이것은 괴로움의 길[苦道]이다. 만일 깨친다면 세 가지 인불성[三因佛性]을 이룬다. 첫째 의식ㆍ이름과 물질ㆍ여섯 감관ㆍ닿임ㆍ느낌ㆍ태어남ㆍ늙어 죽음의 일곱 가지 갈래[七支]는 정인불성(正因佛性)이요, 둘째 무명ㆍ욕망ㆍ잡음의 세 가지 갈래는 요인불성[了因佛性]이다. 이러한 것들의 뜻은 차별되어 같지 않으나 이것은 한 마음이 어리석어 여러 가지로 만들었을 뿐이다. 비록 여러 가지로 나타났을지라도 하나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화엄경(華嚴經)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자야, 이 보살마하살은 다시 생각하기를, ‘3계(界)에 있는 것들은 이 한 마음일 뿐이다. 여래는 여기서 열두 갈래로 분별하여 연설하셨으니, 모두가 하나의 마음에 의지하여 이렇게 세우셨다. 왜냐 하면, 일[事一]에 따라 내는 탐욕과 마음은 함께 생기므로 마음은 곧 의식[識]이요, 일이란 지어감[行]이다. 지어감에 미혹되면 이것이 무명이요, 무명과 마음은 함께 생기므로 이것은 이름과 물질[名色]이다. 이름과 물질이 더욱 자라면 이것이 여섯 감관[六處]이요, 여섯 감관은 세 개로 나누거나 합하면 닿임[觸]이 되며, 닿임과 함께 생기는 이것은 느낌[受]이다. 느낌은 만족해함이 없으므로 이것이 욕망[愛]이요, 욕망은 껴잡으며 버리지 않으므로 이것이 잡음[取]이며, 저 모든 갈래[有支]들이 생기면 이것이 존재[有]요, 존재의 일으키는 바를 태어남[生]이라 하고, 태어나 성숙되면 늙으며[老] 늙어서 무너지면 죽게 된다’고 한다.” 대집경(大集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십이인연은 한 사람의 한 생각 속에 모두 다 갖추어져 있나니, 하나의 경계를 따라 한 생각이 일어난 곳이면 두루 갖추지 아니함이 없다.” 또 마치, 눈으로 빛깔을 보되 분명히 모르면 무명이라 하고, 욕망의 나쁜 일을 내면 지어감이라 하며, 이 중의 마음과 뜻을 의식이라 하고, 물질이 의식과 함께 지어가면 곧 이름과 물질이며, 여섯 가지 처소에서 탐욕을 내면 여섯 감관이라 하고, 물질과 눈이 상대되는 것을 닿임이라 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느낌이라 하고, 물질에 마음이 얽히는 것을 욕망이라 한다. 물질 모양을 생각하면 잡음이라 하고, 물질을 기억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존재라 하며, 마음이 생기면 남이라 하고, 마음이 소멸하면 죽음이라 하는 것과 같다. 나아가, 뜻으로 생각하는 법도 그와 같다. 하루 낮 하룻 밤에 무릇 얼마만큼의 생각을 일으키느냐 하면, 생각생각마다 숱하게 십이인연을 베짜듯 쌓아서 여섯 갈래[六趣]의 끝없는 생사를 이루고 있다. 생사 자체가 없으므로 온전히 이것은 여래장이다. 첫째가는 이치의 마음에서는 어리석고 깨치고 오르고 잠기는 것마저 마침내 얻을 수가 없다. 보행기(輔行記)에서 이르되, “십이인연은 화엄(華嚴)ㆍ대집(大集) 등의 경에서 모두 이르기를 ‘한 생각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고 했고, 무릇 모든 대승(大乘) 경전들에서는 ‘한 생각’이라 한다”고 했나니, 그러한 뜻들이 모두 이와 같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온갖 모든 법을 두루 거두겠는가. 지관(止觀)에서 역시 이르되, “인연의 생김[緣生]은 바로 한 생각의 마음이다”고 했고, 십이문론(十二門論)에서는 묻기를, ‘하나의 마음에 있는 것인가. 다른 마음에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으니, 논(論)에서 묻는 뜻은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의 생각이 마음에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생각이나 다른 생각이 다 같이 옳다. 여러 사람이나 한 사람이나 지금의 한 생각에 모두 다 두루 갖추어져 있다. 여러 사람이나 한 사람이 일으키게 되는 마음은 백계(百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백계는 많은 것이요 한 생각은 하나이지마는, 하나의 여럿은 상즉(相卽)하여 결국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다. 대품(大品)에서도 “온갖 모든 법은 모두 인연(因緣)에 나아가며, 백계의 인연은 한 생가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고 밝혔나니, 그러므로 이 갈래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한 생각에 두루 갖추어져 있다고 이름붙인 것이다. 원(遠) 법사가 이르되, “무명이 지어감을 반연한다[無明緣行]고 함에는 네 가지의 무명이 있다. 첫째 이치에 미혹된[迷理] 무명이니, 그 뜻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통한다. 둘째는 업을 일으키는[發業] 무명이니, 지어감의 앞에 있다. 셋째는 업을 가리는[覆業] 무명이니, 이것은 지어감의 뒤와 의식의 앞에 있다. 넷째는 몸을 받아 나는[受生] 무명이니, 의식과는 때를 같이하기도 하고 혹은 의식의 뒤에 있기도 하다. 과거의 종자인 심식(心識)에서 바라보면 의식의 뒤에 있고 결생(結生)의 심식에서 바라보면 의식과는 동시이다”고 했다. 또 안팎의 모든 법은 모두가 인연을 갖춘다. 마치 도간경(稻稈經)에서 이르되, “그 때, 미륵(彌勒)이 사리불(舍利弗)에게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언제나 십이인연을 보라고 말씀하셨으니, 바로 이것이 법을 보는 것[見法]입니다. 법을 보는 것은 곧 부처님을 뵙는 것이요, 나아가 원인(因)이 있고 조건[緣]이 있나니, 이것을 인연의 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인연의 모습을 간략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이런 원인으로써 이런 결과를 내는 것입니다. 여래께서 세간에 나오신 것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이요, 여래께서 세간에 나오시지 않은 것 역시 인연으로 생기는 법입니다. 성품[性]과 모양[相]은 언제나 머무르되, 거기에는 모든 번뇌가 없으며 마지막에는 여실(如實)하여서 여실하지 않는 것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법이요 뒤바뀜을 여읜 법입니다. 또 십이인연의 법은 두 가지로부터 생깁니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원인이요, 둘째는 결과입니다. 인연으로 새기는 법에도 두 가지의 법이 있으니, 안의 인연[內因緣]이 있고 바깥 인연[外因緣]이 있습니다. 바깥 인연의 법은 무엇으로부터 생기느냐 하면, 마치 종자가 싹을 내고 싹으로부터 잎을 내며 잎으로부터 마디를 내고 마디로부터 줄기를 내며 줄기로부터 이삭을 내고 이삭으로부터 꽃을 내며 꽃으로부터 열매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종자가 없으면 그 때문에 싹이 없고, 또한 꽃과 열매가 없습니다. 종자가 있기 때문에 싹이 나고, 또한 꽃이 있기 때문에 열매가 생깁니다. 그러면서도, 종자는 ‘내가 싹을 낸다’고 생각하지 않고, 싹도 ‘나는 종자로부터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꽃도 ‘내가 열매를 낸다’고 생각하지 않고, 열매도 ‘나는 꽃으로부터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로 종자는 싹을 낸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바깥 인으로 생기는 법[外因生法]이라 하느냐 하면, 이른바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ㆍ허공[空]ㆍ때[時]입니다. 땅은 단단하게 유지하고 물은 축축하게 적시며 불은 익게 하고 바람은 일으키며 허공은 장애하지 아니하고 또 시절(時節)을 빌어서 기후가 어울리며 변화합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져야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여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만물은 생기지 않는 것이니, 땅ㆍ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때의 여섯 가지 연이 조화되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기 때문에 만물은 생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 역시 ‘내가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물도 ‘내가 적시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불도 ‘내가 익히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바람도 ‘내가 일으키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허공도 ‘내가 장애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때도 ‘내가 생장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자 역시 ‘내가 여섯 가지 연으로부터 싹을 돋게 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싹도 ‘나는 그러한 여러 조건으로부터 났다’고 말하지 않으니, 비록 그러한 여러 조건으로부터 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은 뭇 인연의 화합에서 나게 됩니다. 싹 역시 자기로부터 난 것이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합하여서 난 것도 아니요 자재천(自在天)으로부터 난 법도 아니며, 시절과 장소로부터 난 것도 아니요 본래의 성품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며 까닭 없이 난 것도 아니니, 이것을 생기는 법의 차례[生法次第]라고 하며, 이와 같은 것이 바깥 연으로 생기는 법입니다. 다섯 가지의 일 때문에, 아주 없지도 아니하고[不斷] 항상한 것도 아닌 줄[非常]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저기로 가지도 아니함은 마치 싹과 종자는 적으나 열매는 많은 것과 같으며, 서로 비슷하게 상속하면서 다른 물건을 내지 않습니다. 어째서 아주 없지 않은 것입니까. 종자와 싹과 뿌리와 줄기로부터 차례로 상속하기 때문에 아주 없지 않습니다. 어째서 항상한 것이 아닙니까. 싹ㆍ줄기ㆍ꽃ㆍ열매는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종자가 없어지지 않으면서 뒤에 싹이 나기도 하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면서 싹이 다시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연의 법으로 싹이 생기면서 종자는 없어져서 차례대로 생기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 아닙니다. 종자와 싹은 각각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저곳으로 가지 아니하며, 종자는 적지만 열매는 많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는 줄 알아야 하리니, 이것을 종자는 적지만 열매는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종자는 다른 열매를 내지 않기 때문에 서로 비슷하게 상속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로 바깥 연의 모든 법은 생기게 됩니다. 안의 인연법에서는 두 가지로부터 생깁니다. 무엇이 인(因)이 되느냐 하면, 무명으로부터 늙어 죽음까지입니다. 무명이 사라지면 지어감이 사라지고, 나아가 태어남이 사라지기 때문에 늙어 죽음이 사라집니다. 무명으로 인해 지어감이 있고, 나아가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어 죽음이 있습니다. 무명은 ‘내가 지어감을 낸다’고 말하지 않고, 지어감도 ‘내가 무명으로부터 났다’고 말하지 않으며, 나아가 늙어 죽음 역시 ‘내가 무명으로부터 생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로 무명이 있으면 지어감이 있고 태어남이 있으면 늙어 죽음도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안의 인[內因]이 차례로 생기는 법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안의 연[內緣]으로 생기는 법이라 하느냐 하면, 땅의 요소[地界]ㆍ물의 요소[水界]ㆍ불의 요소[火界]ㆍ바람의 요소[風界]ㆍ허공의 요소[空界]ㆍ의식의 요소[識界]의 여섯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무엇을 땅이라 하느냐 하면, 단단하게 유지되게 하는 것을 땅의 요소라 합니다. 무엇을 물이라 하느냐 하면, 축축하게 적시는 것을 물의 요소라 합니다. 무엇을 불이라 하느냐 하면, 익게 하는 것을 불의 요소라 합니다. 무엇을 바람이라 하느냐 하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숨을 바람의 요소라 합니다. 무엇을 허공이라 하느냐 하면, 장애함이 없는 것을 허공의 요소라 합니다. 무엇을 의식이라 하느냐 하면, 네 가지 음[四陰]과 다섯 식[五識]을 이름[名]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한 의식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법이 화합된 것을 몸이라 하고 유루(有漏)의 마음을 의식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음을 5정(情)이라 하고 감관[根]을 물질[色]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연[六緣]들을 몸이라 합니다. 만일 여섯 가지 연이 갖추어져서 줄어듦이 없으면 곧 몸이 되는 것이요, 이 연이 만일 줄어들면 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땅도 ‘내가 굳게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물도 ‘내가 축축하게 적시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불도 ‘내가 성숙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허공도 ‘내가 장애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의식도 ‘내가 살아 자라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물도 ‘나는 그러한 여러 연으로부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만일 이런 여섯 가지 연이 없으면 몸 또한 생기지 않습니다. 땅 역시 ≺나≻[我]도 없고 사람[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명(壽命)도 없으며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며 남자 아닌 것도 아니고 여자 아닌 것도 아니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물ㆍ불ㆍ바람과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모두가 ≺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으며, 나아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무명이라 합니까. 무명이란 여섯 가지 세계[六界]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ㆍ무더기라는 생각ㆍ항상하다는 생각ㆍ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ㆍ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내거나, 속으로 즐겁다는 생각ㆍ중생이라는 생각ㆍ수명이라는 생각ㆍ사람이라는 생각ㆍ≺나≻라는 생각ㆍ내 것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을 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감정 가운데서도 탐내거나 성내는 생각을 내니, 지어감 역시 그와 같습니다. 온갖 가정으로 붙인 이름[假名]의 법을 따라 집착하는 것을 의식이라 하고, 네 가지 음(陰)을 이름이라 하며, 색음(色陰)을 물질이라 하니, 이것을 이름과 물질[名色]이라 합니다. 이름과 물질이 더욱 자라서 여섯 감관을 내고, 여섯 감관이 더욱 자라서 닿임을 내며, 닿임이 더욱 자라서 느낌을 내고, 느낌이 더욱 자라서 욕망을 내며, 욕망이 더욱 자라서 잡음을 내고, 잡음이 더욱 자라서 존재를 내며, 존재가 더욱 자라기 때문에 다음 생의 다섯 가지 음을 내어 태어남이 되고, 태어남이 더욱 자라고 바뀌면 늙음이라 하며, 수음(受陰)이 망가져 없어지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고, 질투와 열을 내기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한다[憂悲苦惱]고 합니다. 다섯 감정[五情]을 거스르고 해치는 것을 몸의 고통이라 하고, 뜻이 상쾌하지 못하면 마음의 고통이라 합니다. 또한 마치 고운 달이 뜬 달이 뜬 하늘은 땅에서 사만 이천 유순이나 떨어져 있고, 물은 아래서 흐르고 달은 위에서 빛날 적에 밝은 모습은 비록 하나이기는 하나 그림자는 뭇 물 위에 나타나는데 그 달의 체는 내려오지도 않고 물의 바탕도 올라가지도 않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중생은 이 세상으로부터 뒷세상으로 가지도 아니하며 뒷 세상으로부터 다시 이 세상으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업과(業果)의 인연이 있으면 보응(報應)은 줄어들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마치 달은 움직이지 않되 그림자는 뭇 흐름에 나타나는 것과 같고 의식은 가지를 않되 몸은 여섯 갈래로 나누어짐과 같다. 비록 지음이 없는 바라 하더라도 업의 과보는 분명하게 나타나나니, 다만 인연으로 생김[緣生]을 다르므로, 어그러지지 않는 법이 그러할 뿐이다. 또 유덕녀소문대승경(有德女所問大乘經)에서 이르되, “그때, 유덕 바라문 여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무명은 안에 있는 것이옵니까. 밖에 있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두 아니다.’ 유덕 여인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일 안과 밖에 다 무명이 없다면, 어떻게 무명이 지어감[行]을 반연함이 세상으로 온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유덕 여인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명의 행상(行相)이란 실로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무명의 제 성품은 허망한 분별에서 생기는 것이요 진실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뒤바뀜에서 생기는 것이요 진여의 이치(如理)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유덕 여인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렇다면 무명이란 것이 없는데 어째서 모든 지어감이 일어나 나고 죽는 가운데서 모든 고통의 과보를 받게 됨이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마치 나무에 뿌리가 없으면 가지나 잎ㆍ꽃ㆍ열매 등의 물건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무명에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지어감 등의 일어남이 결정코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유덕 여인아,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결국에는 ≺공≻이거늘, 범부가 어리석고 미혹하여 ,≺공≻의 이치를 듣지 못하며 설령 듣더라도 지혜가 없기 때문에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로 말미암아 갖가지 모든 업을 갖추어 지으며, 이미 뭇 업이 있는지라 모든 존재[有]가 생기고 모든 존재 중에서 갖가지 고통을 갖추어 받는다. 첫째가는 이치[第一義諦]에서는 모든 업이 없고 모든 존재가 없으나 업으로부터 갖가지의 괴로운 일들이 생긴다. 유덕 여인아, 여래ㆍ응ㆍ정등각(如來應正等覺)이 세간을 따르면서 널리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을 연설함은 첫째가는 이치를 깨쳐 알게 하기 위해서니라. 유덕 여인아, 첫째가는 이치라 함은 역시 세간을 따르면서 지어진 이름이니라. 왜냐 하면, 진실한 이치 가운데서는 능히 깨달음[能覺]과 깨달을 바[所覺]의 온갖 모두를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유덕 여인아, 비유하면 모든 부처님이 변화로 사람을 만들고 이 변화로 된 사람이 다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변화로 만든다면 그 변화로 된 사람이 거짓이요 진실이 아닌지라 변화로 만든 물건들도 진실한 일이 아닌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은 바 모든 업이 거짓이요 진실이 아닌지라 업으로부터 생김이 있는 것도 진실한 일이 아니다.‘고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심(唯心)의 뜻만을 분명히 알면 저절로 만법은 언제나 공허하므로 보고 들을 때마다 다 생멸없는 도[無生之道]를 따를 것이요, 무릇 관계되는 움직임들은 다 얻음 없는 문[無得之門]으로 돌아가리라. 【문】이 열두 갈래를 어째서 연생(緣生)이라 하며, 도 연기(緣起)라고도 하는가. 【답】주재함[主宰]과 짓는 이[作者]와 받는 이[受者]가 없고 제 작용이 없으므로 자재할 수 없다. 원인[因]으로부터 생기고 뭇 조건[緣]을 의탁해서 구르며 본래 없으면서 있고 있게 된 뒤에는 흩어져 사라진다. 법(法)만으로 드러난 바가 능히 받고[能潤] 받을 바[所潤]로 상속하는 법에 떨어지므로, 연생이라고 한다. 논(論)에서 이르되, “번뇌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모든 갈래[趣] 안에 나아가 자주자주 나고 죽고 하므로 연기라 한다”고 했다. 또 원인을 연기라 하고 결과를 연생이라 한다. 【문】한 생각 무명의 마음이 십이유지를 일으키는데, 자기가 내는 것인가, 남이 내는 것인가, 함께 내는 것인가, 까닭 없이 내는 것인가. 【답】연기는 매우 깊은 것이라 그 네 가지 구절에 해당되지 않는다. 헤아려서 분명히 알면 한 마음이 그윽하고 고요하지만, 어리석으면 여섯 갈래로 바퀴 돌 듯 한다. 허망한 것도 아니고 진실한 것도 아니며 항상 하지도 않고 아주 없어지지도 않는다. 만일 이것이 허망한 것이라면 허망함을 얻을 수 없고, 이것이 진실한 것이라면 또 헤매고[流轉] 있으며, 만일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이라면 상속하면서 항상 생기고 이것이 항상한 것이라면 생각생각마다 일어났다 사라지고 한다. 그런 까닭에, 생기되 능히 생김이 없어서 정해진 성질도 없다. 불성론(佛性論)에서 이르되, “또 온갖 법에는 자성이 없다. 왜냐 하면, 인연에 의지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불은 다른 것에 의지하면서 생기는 것이요 땔나무를 떠나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반딧불과도 같다. 만일 불에 제 성품이 있다면 땔나무를 여의고도 공중에 저절로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잡집론(雜集論)에서 이르되, “모든 인연하여 일어난[緣起] 법이 비록 찰나마다 이루어졌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머무른다고 할 수 있고, 비록 작용하는 연[作用緣]이 없더라도 공능의 연[功能緣]이 있다 할 수 있으며, 비록 정(情)이 있는 것을 여의었더라도 정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비록 짓는 이가 없다 하더라도 모든 업과(業果)는 파괴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매우 깊은 업과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며 비록 안으로 짓는 이가 없더라도 업을 지어서 과보를 받는 이숙(異熟)은 있다. 또 모든 연기의 법에는 차별이 있다. 뭇 연(緣)을 기다려서 생기기 때문에 자기가 짓는 것이 아니고, 비록 뭇 연이 있다 하더라도 종자가 없으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남이 짓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모두 작용이 없기 때문에 함께 짓는 것도 아니고, 종자와 뭇 연에는 모두 공능이 있기 때문에 까닭 없이 짓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것은 바로 세속의 연기의 문에서 본 것이나, 만일 여실(如實)하게 설명한다면 오히려 하나의 법이라도 이것은 연이라거나 연이 아니다 라고 보지 않거늘, 하물며 열 두 가지겠는가. 담연 존자(湛然尊者)가 이르되, “물질[色] 모양을 보지 않으면 이런 지어감[行]의 갈래가 사라지고, 물질의 인연을 보지 않으면 이런 무명(無明)이 사라지며, 물질의 바탕을 보지 않으면 이런 의식[識]ㆍ이름과 물질[名色]ㆍ여섯 감관[六入]ㆍ닿임[觸]ㆍ느낌[受]이 사라지고, 물질의 생김을 보지 않으면 이런 욕망[愛]ㆍ잡음[取]ㆍ존재[有]ㆍ태어남[生]이 사라지며, 물질의 소명을 보지 않으면 이런 늙어 죽음[老死]이 사라진다. 한 모양도 보지 않으면 이런 십이인연의 ≺공≻(空)을 보지 않으며, 보는 것을 보지 않으면 인연의 가(假)를 보지 않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모두 없어지고 두 진리가 모두 사라지면 역시 중(中)도 보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인연을 분명히 알리라”고 했나니, 만일 이런 예(例)로써 한다면 온갖 법을 보는 것도 그러하리라. 【문】만 가지 경계의 무명과 한 마음의 법성(法性)은 하나인가, 둘인가. 만일 이것이 하나라면 더럽다[染] 깨끗하다[淨] 하는 두 이름으로 나눈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만일 이것이 둘이라면 어째서 교(敎) 중에서 무명 그대로 법성이라고 설명하는가. 【답】체성은 하나인지라 이것이 진실한 이름이요, 둘이라 하면 이는 거짓된 법이다. 정(情)으로 인하여 진실을 세우고 지혜로써 정을 밝힌다. 지혜 스스로가 진리를 분별하되 원래 동요하지 아니한다. 반드시 같다고 할 수 없음은 세속의 이치를 파괴하지 않으려는 때문이요, 반드시 다르다고 할 수 없음은 참된 이치를 상실하지 않기 위한 배려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되, “명(明)과 무명(無明)을 어리석은 사람은 둘로 삼으나 지혜로운 이는 분명히 통달했으므로 그 성품을 하나로 본다. 둘이 아닌 성품 그것이 곧 참 성품[實性]이다”고 했다. 고덕(古德)이 10법계(法界)에 결부시켜 해석하며 이르되, “어리석은 사람이란 아홉 세계[九界]의 어리석은 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양을 취하면서 온갖 법을 보므로 비친다. 마치 추운 골짜기에 천 년 동안 얼어 있는 딱딱한 얼음은 일찍이 물로 된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이는 부처 세계[佛界]의 지혜이다. 원만하게 관행(觀行)하는 사람은 부처 눈[佛眼]을 뜬 분이라 똑 같이 옛 부처님을 보게 된다. 원만한 눈으로 보게 되는 무명은 원래가 청정한 법성이니, 마치 태양이 항상 비추는 바닷물에는 일찍이 얼음이 된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얼음과 물의 성품은 하나이나 인연 따라 둘로 된다. 하나는 성품을 지키면서 항상 스스로 인연을 따른다. 비록 인연을 따르기는 하나 제 성품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법성과 무명이 어째서 꼭 하나이며, 또는 어째서 꼭 다르다고만 말하겠는가. 그렇다면, 현상[事]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체성을 잃는지라 그것은 함께한 것도 아니고 나누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품을 지키면서도 인연에 맡긴지라 또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했다. 【문】3계(界)의 첫 원인(因)은 네 가지 생겨남[四生]이 처음이다. 밑둥치와 끝을 궁구하지 못하고 근본 원인도 말하지 못한다. 장자(壯子)와 노자(老子)는 이를 지적하여 자연(自然)이라 했고,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이를 이름하여 혼돈(混沌)이라 했다. 맨 처음에 일어난 곳을 어떻게 가리켜 인도하겠는가. 【답】 유정(有情)들의 몸과 국토의 진실한 단서나 원유를 알고자 하면 나의 마음보다 더 우선한 것이 없으며 다시는 다른 법이 없음을 알아라. 마음과 법은 자기 종류끼리 상속하면서 끝없는 때와 세계로 차츰차츰 흘러가되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아니하며 연(緣)을 의지하고 대상[對]에 의거한다. 그것은 기질[氣]도 아니고 품격[禀]도 아니다. 그것은 유식(唯識)이요 유심(唯心)이다. 조론(肇論)의 초(鈔)에서 이르되,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이름이 없다면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이 있다면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했지만, 만일 불교의 뜻으로 말한다면 여래장(如來藏)의 성품이 바뀐 것을 식장(識藏)이라 하는데, 이 식장으로부터 감관인 몸과 기세간(器世間)의 온갖 종자를 변화로 내었다고 하겠다”고 했다. 그 변화의 근본을 추구하건대 곧 여래장의 성품으로 물건의 시초를 삼은 것이다. 생김도 없고 시초도 없는 것이 물건의 성품이며, 생김과 시초는 그 성품 즉 법성을 움직일 수는 없다. 남제심(南齊沈)이 균성론(均聖論)에서 이를 결부시키며 이르되, “그렇다면, 이 천지가 생긴 이래로 오히려 한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융(融) 대사는 “물었다. ‘3계(界)와 4생(生)은 무엇으로 도(道)의 근본을 삼으며, 무엇으로 법의 작용을 삼는가.’ 대답했다. ‘허공을 도의 근본으로 삼고 삼라만상을 법의 작용으로 삼는다.’ 물었다. ‘그 중에서 짓는 이는 누구인가. ‘이 중에는 실로 짓는 이가 없다.’”고 대답했나니, 법계(法界)의 성품은 저절로 생긴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이르되, “착함과 착하지 않은 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로 생기나니, 말하자면 총지(摠持)의 문이요 만법(萬法)의 도읍이다. 광명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곳에는 오히려 그 이름조차도 없다가 생각이 생기려 할 때에 그 영상(影像)이 분리된 듯하나니, 처음에 억지로 알려고 하는 데서부터 점차로 분명히 아는 것이 일어나며 견분(見分)ㆍ상분(相分)으로 나누어지자마자 마음과 경계가 단번에 나타난다‘고 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되, “모두가 각의 밝음[覺明]의 밝게 아는 성품이 앎으로 인하여 모양을 일으키며 허망한 소견으로부터 생기나니, 산(山)ㆍ하(河)ㆍ대지(大地)의 모든 유위(有爲)의 모습이 차례로 옮아 흐르며, 이 허망으로 인하여 마치고 다시 비롯되느니라”고 하셨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 모두는 최초에 한 법계(法界)를 미혹했기 때문에 모르는 결에 생각이 일어나며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이것이 움직임의 모양[動相]이니, 움직임의 모양 이것이 첫 번째의 업식(業識)이다. 아직은 주체[能]ㆍ객체[所]가 분리되지 않은 채, 각의 밝음의 허물이 된다. 이로부터 변하여 주관인 마음[能緣]이 되어 아는 모양이 이루어지며, 이것이 곧 밝게 아는 성품[明了知性]이다. 이것이 두 번째의 견분(見分)이 되는 전식[轉識]이다. 그 뒤에는 견분으로 인하여 상분(相分)이 생기게 된다. 곧 앎으로 인하여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니, 세 번째의 상분이다. 그 뒤에는 견분으로 인하여 상분(相分)이 생기게 된다. 곧 앎으로 인하여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니, 세 번째의 상분이다. 현식(現識)에서 주관[能]과 객관[所]이 겨우 나누어지기만 하면 모두 허망을 이루게 되나니, 왜냐 하면, 견분은 흐린 눈을 내고 상분은 허망한 형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에서, 은밀히 감관과 경계를 상대하여 망녕된 집착을 굳게 낸다. 이로부터 참 성품[眞性]을 막고 열며 맑고 뚜렷함을 나누어 낸다. 안의 집수(執手)를 알고 깨닫는 것에서는 식(識)이 있는 몸을 내고, 바깥의 집착을 여읜 생각의 맑은 데서는 뜻[情]이 없는 국토를 이룬다. 그러면 드디어 거울 속의 형상이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또 생기고 꿈 속의 산하가 마쳤다가 다시 시작하게 된다. 다만 본원(本源)인 성품 바다가 주관 객관을 좇지 않으면서 생기면, 잔잔하고 뚜렷한 광명이 비추면서 항상 고요할 뿐이다. 중생이 성품을 어기고 알지 못하면 본래의 원만한 밝음[明]을 저버리고 밝힐 바[所明]가 있다고 고집하여 허망한 소견을 이룰 뿐이다. 밝음으로 인하여 볼 바[所觀]의 경계를 세우고 객체[所]로 인하여 능히 보는[能觀] 마음을 일으키면 주체와 객체가 서로 생기고 마음과 경계가 상대하면서 인연 따라 성품을 잃고 첫 근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나니, 모르는 결에 티끌같은 많은 겁[劫]을 지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이르되, “각(覺)은 밝힐 바가 아니건만 밝힘으로 인하여 객체[所]를 세우게 되고, 객체가 이미 허망에서 섰으므로 너의 허망한 주체[能]를 내었느니라. 같음[同]과 다름[異]이 없는 가운데서 왕성하게 다름을 이루고 저 다른 바를 다르다 하므로 다름으로 인하여 같음을 세웠으며, 같음과 다름을 밝혀내고서는 이로 인하여 다시 같음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세웠느니라. 이렇게 요란(擾亂)함에 상대하여 피로함이 생기고 피로함이 오래되어 티끌을 발생시켜서 그 모양이 혼탁(渾濁)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티끌 같은 번뇌를 끌어 일으키느니라. 일으키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면 허공이 되나니, 허공은 같고 세계는 다르다. 저 같고 다름이 없는 것이 참으로 유위법(有爲法)이 되느니라. 각의 밝음과 허공의 어둠이 상대하여 요동(搖動)함이 생기나니, 그러므로 풍륜(風輪)이 있어 세계를 붙잡아 지녔느니라. 허공으로 인하여 요동함이 생기고 밝음을 굳혀서 거리낌[礙]이 된다. 저 금보(金寶)는 밝음의 각[明覺]이 굳혀진 것이라, 그러므로 금륜(金輪)이 있어 국토를 보존하고 유지한다. 각(覺)을 굳혀 금보가 되고 밝음을 흔들어 바람이 되어서는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나니, 그러므로 불빛이 있어 변화하는 성품이 되었다. 보배의 밝은 것은 윤택을 내고 불빛은 위로 증발하나니, 그러므로 수륜(水輪)이 있어 시방 세계를 다 적시느니라. 불은 오르고 물을 내려서 서로 일으켜 굳은 것을 성립시키는데 젖은 편으로는 큰 바다가 되고 마른 편으로는 모래 섬이 되었나니, 이런 이치로 큰 바다 안에서는 불빛이 항상 일어나고 모래 섬 안에서는 강물이 항상 흐르느니라. 물의 세력이 불보다 열등하면 엉겨 맺혀서 높은 산이 되나니, 그러므로 산의 돌이 부딪치면 불꽃이 되고 녹으면 물이 되느니라. 흙의 세력이 물보다 열등하면 씻겨져서 풀과 나무가 되나니, 그러므로 수풀이 타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되느니라. 허망이 엇갈려 발생해서는 번갈아 서로 종자가 되나니, 이런 인연으로 세계가 상속하느니라”고 하셨다. 옛 해석에서 이르되, “각의 밝음과 허공의 어둠이 상대하여 요동함이 생긴다[覺明空昧相待成搖]고 함은, 처음의 망각(妄覺)으로 말미암아 영명(影明)이 분명하지 아니하여 드디어 허공의 어둠을 이룬 것인데, 마치 밝음을 막으면 어둠이 생겨나 두 모양이 서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각의 밝음은 곧 움직이는 모양[動相]이요 허공의 어둠은 곧 고요한 모양[靜相]이니, 하나의 밝음ㆍ하나의 어두움과 하나의 움직임ㆍ하나의 고요함이 찰나마다 서로 생긴다. 이것은 마치 바람과 거센 물결은 상대하면서 쉬지 아니함과 같다. 안에서 처음 일어난 것을 바로 요동(搖動)이라 하며, 밖에서는 곧 풍륜의 세계를 이룬다. 허공의 어두움이 곧 허공이니, 이미 형상이 없는지라 세계라고는 말하지 아니한다. 허공으로 인하여 요동함이 생기고 밝음을 굳혀서 거리낌이 된다[因空生搖堅明立礙]라 함은, 땅의 모양이다. 허공으로 인한 것과 밝음의 다른 것이 상대하여 요동함을 이루고, 요동으로 밝음을 굳힘으로서 거리낌을 이룬다. 마치 태(胎) 안에서 바람을 만나서 곧 딱딱하고 거리끼는 것이 성립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밝힘을 굳히고 붙잡아서 거리낌이 생긴다는 뜻이다. 안에서는 이것이 각의 밝음[覺明]인 굳은 고집이고 밖에서는 곧 금보(金寶)를 이루는 것이다. 때문에 ‘그 금보는 밝음의 각이 굳어진 것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알라. 금보의 성품은 각의 밝음으로 인하여 존재한 것이며 이 때문에 보배들에는 다 광명이 있는 것이다. 소승(小乘)은 업감(業感)만을 알고 이 무슨 인(因)의 종자인 줄은 모르는 것이다. 각을 굳혀 금보가 되고 밝음을 흔들어 바람이 되어서는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나니, 그러므로 불빛이 있어 변화하는 성품이 되었다[堅覺寶成搖明風出風金相摩故有火光爲變化性]고 함은, 각의 성품[覺性]을 굳게 집착하여 곧 금보를 이루었고 밝힐 바[所明]를 요동시켜서 곧 바람을 낸 것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쉬지 않는다 함은,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한다는 뜻이다. 밖에서는 곧 불빛을 이루어 만물을 성숙시키기 때문에 ‘변화하는 성품이 되었다’고 한다. 보배의 밝음은 윤택을 내고 불빛은 위로 증발하나니, 그러므로 수륜(水輪)이 있어 시방 세계를 다 적신다[寶明生潤火光上蒸故有水輪含十方界]고 함은, 보배의 밝은 체성에는 광택이 있는 것이요 불은 뜨거워서 증발하고 물은 흘러내린다는 뜻이다. 또 각의 밝음은 애욕을 내고, 애욕은 윤택한 것이므로 안에서는 곧 애욕의 밝음이요 밖에서는 보배의 윤택을 이루는 것이다. 불의 성질은 위로 증발하고 애욕을 녹이면 물이 된다. 온갖 업의 종자는 애욕이 아니면 생기지 아니하고 온갖 세간은 물이 아니면 거두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4대(大)의 성질은 서로서로가 의지하며 체성을 서로가 여의지 않으며 동일한 허망한 마음이 변화로 일어나기 때문에허공의 꽃은 마음을 떠나지 않는 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망령된 성품은 항상 앞과 뒤로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되 받게 되는 바깥의 모양에서는 낫고 못함이 같지 않다. 애욕의 마음이 많으면 곧 큰 바다를 이루고 고집하는 마음이 많으면 곧 모래섬을 이룬다. 바람의 성품은 젠 체함[慢]을 내고 불의 성품은 성[瞋]을 낸다. 물질[色]에 대해 애욕을 일으키면 모래 섬 안에서 물이 흐르고 애욕을 어기면서 성을 내면 바다 속에서 불이 일어난다. 젠 체함이 더하면서 애욕이 열등하면 엉겨 맺혀서 높은 산이 되고 애욕이 더하면서 젠 체함이 가벼우면 뽑혀 초목이 된다. 성냄ㆍ애욕ㆍ젠 체함의 이 세 가지가 서로 무성하게 퍼지면서 다른 종류로 형상을 이루므로 초목과 산천 등의 여러 가지 차이가 종류가 있게 된다. 먼저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4대(大)가 이루어지고 사대의 성품으로부터 애욕과 젠 체함이 무성하게 자라므로 유정(有情)의 마음을 여의면 다시는 딴 바탕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허망이 엇걸려 발생해서는 서로 번갈아 종자가 된다[交妄發生遞相爲種]’고 한다” 했다. 또 이르되, “부루나(富樓那)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간의 온갖 6근(根)ㆍ6진(塵)ㆍ5음(陰)ㆍ12처(處)ㆍ18계(界) 등이 다 여래장(如來藏)이어서 청정하고 본래 그러하다[本然]고 하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山)ㆍ하(河)ㆍ대지(大地)의 모든 유위(有爲)의 모양이 생겼으며, 차례로 변천하여 마쳤다가 다시 시작합니까’고 했으며, 또 의심하며 이르되, ‘만일 이 묘각(妙覺)의 본래 미묘한 각의 밝음은 여래의 마음에 비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데, 까닭없이 문득 산ㆍ대지의 모든 유위의 모양이 생겼다면, 여래께서는 지금 묘하고 ≺공≻하며 밝은 깨달음[妙空明覺]을 얻으셨는데 산ㆍ하ㆍ대지의 유위인 습루(習漏)가 언제 다시 생기겠습니까’고 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네 말과 같아서 깨끗하고 본래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ㆍ하ㆍ대지가 생겨났느냐. 그리고 너는 언제나 여래가 말하기를 ≺성각(性覺)은 묘하게 밝고, 본각(本覺)은 밝고 묘하니라≻고 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부루나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런 이치를 항상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각(覺)이라 밝음[明]이라 일컫는 것은 성품이 밝은 것을 일컬어 각이라 하느냐, 각이 밝힐 것 없는 것을 일컬어 밝힐 각이라 하느냐.’ 부루나가 말하였다. ‘만일 이 밝힐 것 없는 것을 일컬어 각이라 이름한다면, 밝힐 바[所明]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밝힐 것 없는 것을 각이라 한다면 밝힐 각이 없겠다고 하지만, 객체[所]가 있으면 각이 아니요 객체가 없으면 밝은 것이 아니니, 밝음이 없으면 각의 맑고 밝은 성품[湛明性]이 아니니라. 생각은 반드시 밝건마는 허망하게 밝힐 각이 되었느니라. 각은 밝힐 바가 아니건만 밝힘으로 인하여 객체를 세우게 되고 객체가 이미 허망하게 섰으므로 너의 허망한 주체[能]를 내었다. 같음과 다름이 없는 가운데서 왕성하게 다름을 이루고 저 다른 바를 다르다 하므로 다름으로 인하여 같음을 세웠으며, 같음과 다름을 밝혀내고서는 이로 인하여 다시 같음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세우느니라. 이렇게 요란함에 상대하여 피로함이 생기고 피로함이 오래되어 티끌을 발생시켜서 제 모양이 혼탁해지나니, 이로 말미암아 티끌 같은 번뇌를 끌어 일으키느니라. 일으키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면 허공이 되나니, 허공은 같고 세계는 다른지라 저 같고 다름이 없는 것이 참으로 유위의 법이 된다‘고 하셨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 두 각[二覺]의 이치는 깊숙한 뜻이라 설명하기 어렵다. 만일 지적하여 말하면 모름지기 검은 것과 흰 것을 구분해야겠다. 대략 경론(經論)에서는 두 가지 각이 있다. 첫째는 성각(性覺)이요, 둘째는 본각(本覺)이다. 또 두 가지 반야가 있으니, 첫째는 본각반야(本覺般若)요, 둘째는 시각반야(始覺般若)이다. 또 두 가지 마음이 있으니, 첫째는 제 성품이 깨끗한 마음[自性淸淨心]이요, 둘째는 때를 여읜 깨끗한 마음[離垢淸淨心]이다. 또 두 가지 진여가 있으니, 첫째는 얽힘에 있는 진여[在纏眞如]요, 둘째는 얽힘에서 벗어난 진여[出纏眞如]이다. 이 네 가지의 이름은 뜻에 따라 다르나 체성은 언제나 같다. 지금 모든 중생들은 다만 성각과 깨끗한 본각과 제 성품이 깨끗한 마음과 얽힘에 있는 진여 등을 갖추고 있을 뿐이므로, 깨끗하고 본연한 가운데서 홀연히 산ㆍ하ㆍ대지가 생기는 것은 얽힘에 있으면서 아직 장애를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요 아직 얽힘에서 벗어난 진여 등을 얻지 못해서이다. 만일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라면 두 각이 모두 원만하고 이미 얽힘에서 벗어난 진여 등을 갖추었으며 허망한 생각인 티끌 번뇌가 없고 영원히 깨끗하고 본연한 데에 계합된지라, 다시는 산ㆍ하ㆍ대지의 모든 유위의 모양 등이 생기지 않는다. 마치 금이 광석에서 나왔으나 끝내 티끌이나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나무가 타서 재가 되었다면 어찌 다시 가지와 잎이 생기겠는가. 이 두 각을 가진지라 이미 확 트여서 의심이 없다. 생각의 묘하게 밝음[性覺妙明]이라 함은, 제 성품의 깨끗한 마음이며, 여래장의 성품이며, 얽힘에 있는 진여 등이니, 본래 성품이 청정하여 번뇌의 물듦을 받지 않으므로 성각이라고 한다”고 했다. 경에서 이르되, “부처님께서 아난(阿難)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렇게 알아야 한다. 유루(有漏) 세계의 십이유생(類生)의 본각인 묘하게 밝은 각의 원만한 심체(心體)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둘도 아니고 다름도 없건마는, 너의 허망된 생각으로 진리에 미혹한 탓에 허물이 되어 어리석음과 애욕이 발생했다. 발생해서는 두루 미혹하기 때문에 허공의 성품이 있게 되었으며, 변화하여 햇갈림이 쉬지 않으면서 세계가 생겼느니라. 이 시방의 작은 티끌 같은 국토가 무루(無漏) 아닌 것은 다 햇갈리고 완악한 망상에서 벌어졌느니라. 저 허공이 너의 마음 속에서 생긴 것이 마치 한 조각 구름이 맑은 허공에서 일어난 것과 같음을 알지니, 하물며 모든 세계가 허공 안에 있는 것이겠느냐. 너희들 한 사람이 참됨을 일으켜서 근원에 돌아가면, 이 시방의 허공이 모두 소멸할 것이거늘 어찌 허공에 있는 국토들이 떨치면서 찢어지지 않겠느냐’고 하셨다“고 했다. 이 경문으로 증험하건대, 곧 범부와 성인은 본래부터 동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니, 이것이 묘하게 밝은 각[妙明覺]이다. 본각이 밝고 묘하다[明妙]고 함은 얽힘에서 벗어난 진여 등이다. 분별없는 지혜[無分別智]로부터 깨달아서 비롯함이 없는 허망한 생각을 다함을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시각(始覺)이 곧 본각이니 근본[本]을 깨친 각이 므로 본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논(論)에서 이르되, “진여문(眞如門)에서는 성각(性覺)이라 하고, 생멸문(生滅門)에서는 본각(本覺)이라 한다”고 했다. 이 성각을 미혹한 데서 허망한 생각이 있고 허망한 생각이 다하면 본각이 성립된다. 성각은 능소(能所)를 좇아서 생기지 아니하고 닦고 증득함[修證]을 빌어서 일어나지도 않지만, 본래부터 스스로 묘하면서 항상 밝기 때문에 ‘성각이 묘히 밝다[性覺妙明]’고 한다. 또 시각반야(始覺般若)로 성각의 묘함을 밝히기 때문에 ‘본각의 밝고 묘함[本覺明妙]이라고도 한다. 또 진여의 성품은 성품 스스로 분명히 알기 때문에 성각이 묘하게 밝은 것이요, 시각의 지혜는 본성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본각의 밝고 묘함이라고 한다. 또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는 네 가지의 각이 있다. 첫째는 청정한 본각[淸淨本覺]이요, 둘째는 염정의 본각[染淨本覺]이며, 셋째는 깨끗한 시각[淸淨始覺]이요, 넷째는 염정의 시각[染淨始覺]이다. 만일 근본[本]ㆍ처음[始]ㆍ밝음[明]ㆍ어둠[昧]의 일을 논한다면 모두가 염정의 각에 의하여 이름이 붙여지지만, 만일 청정한 각이라면 원래부터 어리석음과 지혜가 모두 함께 끊어진다. 미혹과 깨침에서 얻는 바가 아니거늘, 어찌 문구의 이치로 능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경(經)에서는 항상 “진여는 미혹과 깨침의 의지처[迷悟依]가 된다”고 설명하였기 때문에, 마치 삼라만상은 허공에 의지하고 허공은 의지한 바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부루나[滿慈]는 알아차리면서 말하기를 “저는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뜻을 들었습니다”고 한 것이다. 이 두 각의 뜻은, 역시 기신론(起信論)에서 세운 바 한 마음으로 진여문ㆍ생멸문을 분류한 것과 같다. 본래 성품의 청정한 이것이 성각의 뜻이지만, 그 성품 중에서 설명한 본각은 마치 나무 속 불의 성품이 아직 인연을 갖추지 못하면서도 작용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깨치고 난 뒤에 다시 미혹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깨친 때에 비로소 본각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본각을 깨치고 난 뒤에는 다시는 미혹되지 않나니, 모든 부처님이 거듭 범부가 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묻되, “네가 각의 밝음[覺明]이라 일컫는 것은 각의 성품이 스스로 밝은 것을 각의 밝음이라 하느냐”. 각의 체성이 밝지 않는데 밝음을 능히 깨닫는다는 것이냐‘고 하셨다. 부루나의 뜻으로는 반드시 밝힐 바[所明]가 있으면 그의 생각에 그것이 깨달을 바[所覺]가 되지만, 만일 깨달을 바를 밝힘이 없다면 깨달음이나 밝음이라는 이름이 없을 것이요, 다만 깨달음이라고만 일컬을 수 있으면서 밝힐 바가 없기 때문에 “밝힐 바가 없겠나이다”고 했다. 부처님의 뜻은, 성각의 체성은 스스로 밝은 것이니, 능각(能覺)과 밝힐 바를 말미암지 않아야 비로소 각의 밝음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진여 자체에는 큰 지헤 광명[大智慧光明]이라는 뜻과 법계를 두루 비춘다[遍照法界]는 등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한 법계[一法界]에 미혹하기 때문에 억지로 능소(能所)를 나누므로 허망을 이룰 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반드시 밝힐 바를 인해야 각의 밝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남을 인해 성립되는 것이요 자기의 성각이 아니기 때문에 “객체가 있으면 각이 아니다[有所非覺]”라고 했나니, 마치 대경을 반연하여 분별하면서 허망한 마음이 있게 됨과 같다. 대경을 여의면 자체가 없으므로 아주 없다[斷滅]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나니, 본래부터 참된 각[眞覺]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체가 없는 법이 구경(究竟)이 된다고 하면,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법신(法身)은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과 같나니, 그 누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고 증득하겠는가”고 했다. 또 해석에서, “만일 밝힐 것 없는 것을 각이라 한다면, 밝힐 바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각의 체성은 본래부터 밝힐 모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진제(眞諦)를 증득한지라, 실로 밝음은 보지 않으신다. 만일 밝음을 보신다면 바로 이것이 밝힐 바이며 이미 밝힐 바가 성립된지라 능각(能覺)이 있을 것이며, 능소의 밝음을 없애야 비로소 묘한 밝음[妙明]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 묘한 밝음은 밝히지 않는 밝음[不明之明]이니, 밝힐 바와 밝힘으로 인하여 비춤[照]을 일으키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에서 이르되, “‘거룩한 지혜[聖智]의 없음[無]과 미혹된 지혜[惑智]의 없음은 다 함께 생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다른 것인가’라고 따지자 이렇게 대답했다. ‘거룩한 지혜의 없음이란 앎이 없음[無知]이요, 미혹된 지혜의 없음이란 없음을 앎[知無]이다. 그 없음은 비록 같다 하더라도 없음의 까닭이 다른 것이다. 왜냐 하면, 무릇 성인의 마음은 비고 고요하여 없음이라고 함의 앎도 없다. 그러므로 앎이 없다고 말해야 하며 없음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미혹된 지혜로는 앎이 있기 때문에 없음이라고 함의 앎이 있다. 그러므로 없음을 안다고 말해야 하고 앎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야의 앎이 없음은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고 했다. 앎이 없다[無知]는 것은 능소(能所)의 앎이 없는 것이며, 알지 못함이 없다는 것은 진여의 제 성품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춤이 있다는 뜻이다. 또, 성인에게는 마음이 없는 마음[無心之心]과 보는 것이 없는 봄[無見之見]이 있을 뿐 범부의 마음이 있고 봄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모두 이는 능소를 분별하여 서로가 생기기 때문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되, “볼 수 없는 것이 똑똑히 보는 것이니라”고 하였고, 화엄경(華嚴經)에서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는 것 없는 것이 바로 보는 것 온갖 법을 능히 보나니 법에서 만일 보는 것 있으면 이것이야말로 보는 것이 없네.
또 이르되, “보살은 모든 법을 다 보면서도 보는 것이 없다”고 했다. 온갖 것을 두루 알면서도 아는 바가 없으면 반야의 앎이 없음은 알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곧 있고 없다[有無]는 앎과 능히 봄과 볼 바에 떨어지지 않을 뿐이니, 이는 도무지 알거나 보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부처님은 다 다섯 눈[五眼]과 세 가지 지혜[三智]와 네 가지 변재[四辯]와 여섯 신통[六通]을 갖추었으며 세 가지 진리[三諦]의 이치가 원만하게 한 마음에 두루 갖추어졌으므로, ≺공≻함과 ≺공≻하지 않음 ≺공≻하지 않음과 ≺공≻하지 않음도 아님을 보지 않아야 실상(實相)과 상응할 뿐이다.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하나하나의 모양마다 모든 본다[見]고 하는 허물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만일 모든 모양에서 항상 실상과 상응한다면 저절로 모든 허물을 널리 여의고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에 계합된다”고 했다. 청정한 참 마음은 분명히 밝고 사무치면서 염착(念著)이 없으므로 현상[事]에 즉(卽)하고 진여[如]에 즉하여 유심(唯心)으로 곧장 나아가면 그것이 곧 모든 부처님이 아는 바의 실상이다. 이것을 여의고 보는 것을 세우면, 다 모든 허물이 되고 만다. 객체가 없으면 밝음이 아니다[無所非明]고 함은, 만일 능각(能覺)의 체성이 반드시 밝힐 바[所明]를 인해야 한다면, 소각(所覺)의 밝음이 없다면 능각의 체성은 곧 밝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체가 없으면 밝음이 아니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각이라 하고 밝음이라 하는 것은 서로 서로 가정으로 세운 것이지 본래부터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거늘, 어찌 제 성품의 원만하고 밝은 각을 이루겠는가. 밝음이 없으면 또 각의 맑고 밝은 성품이 아니다[無明又非覺湛明性]고 함은, 허망한 각[妄覺] 자체에는 맑고 밝은 작용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만일 밝음을 깨닫는 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각의 체성이 스스로 밝은 것이어야겠는가. 그렇다면, 제 성품은 밝은 것이 아니며, 또 각의 맑은 작용도 없기 때문에, ‘밝음이 없으면 또 각의 맑고 밝은 성품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성각이 반드시 밝건마는 허망하게 밝힐 각이 되었다[性覺必明妄爲明覺]고 함은, 허망한 각이 참된 모양에 의탁하였다 함을 해석하는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허망한 각이 처음 일어나자 각의 밝음이 있게 되므로, 성각만을 반연하기만 하면 반드시 참된 밝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허망한 각은 이 성품의 밝음에 의탁하면서 영명(影明)의 각을 일으키고 영상(影像)의 밝음을 고집하며 반연(攀緣)의 각을 일으켜 진실을 헷갈려 영상을 알게 되는 견분(見分)ㆍ상분(相分)의 두 가지로 나누어지나니, 이래서 각이요 밝음[覺明]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각은 밝힐 바가 아니건만 밝힘으로 인하여 객체를 세우게 된다[覺非所明因明立所]고 함은, 무릇 한 참된 각의 체성이 비록 밝다 하더라도 능소를 분류하지 않기 때문에 각은 밝힐 바가 아니며, 영명(影明)으로 말미암아 각을 일으키고 능소가 나누어지기 때문에 이르되 ‘밝힘으로 인하여 객체를 세운다’고 한 것이다. 개체가 이미 허망에서 섰으므로 너의 허망한 주체를 내었으며 같음과 다름이 없는데서 왕성하게 다름을 이룬다[所旣妄立汝妄能無同異中熾然成異]라 함은, 이는 곧 원래 각의 밝음으로 인하여 비춤을 일으키고 객체를 내며, 객체가 서면 비춤의 성품이 드디어 없어지나니, 그렇다면 이 식정(識精)은 원래 밝아서 모든 연(緣)을 능히 내고 버릴 것을 반연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것은 능히 반연하는[能緣] 모양을 따르면서 참 유식(唯識)의 성품을 가리울 뿐이다. 한결같이 능소(能所)가 서로 생김은 마치 바람이 물을 움직이면 물결이 상속하여 맑고 잔잔한 성질이 숨으면서 나타나지 아니한 것과 같다. 이 미혹과 허망으로부터 허공의 성품이 생기고 다시 허공으로 인하여 세계의 형상이 성립됐다. 진공(眞空)의 한 마음이 마침내 같음과 다름이 없는 가운데서 왕성하게 건립되어, 모든 법의 마지막의 다름을 이루었다. 모두가 정상(情想)의 요란함으로 인하여 세간의 티끌이 피로하게 생기고 미망(迷妄)과 혼침(昏沈)으로 허공의 지경을 끌어 일으켰다. 다시 세계의 차별을 분류해서 다른 것을 내고 허공의 청정함을 세워서 같은 것을 내는 것이다. 분별식(分別識) 가운데서 또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음을 세우는 것은 모두가 이 유위의 법이어서 생멸의 인연을 모두 이루나니, 근원을 분명히 통찰하지 못하면 마침내 쓸모없는 의론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