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4_0523_a_01L종경록 제98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지공(志公)화상이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의 근원을 단번에 깨치면 보배 광이 열리고
숨음 드러남의 신령한 자취는 참 모습을 내며
혼자 가고 혼자 앉되 늘 뛰어나나니
백억의 화신(化身)은 수량도 없네.

설사 꽉 막혀 허공에 찼다 해도
볼 적에 작은 티끌 모양도 보이지 않으니
우습다 물건이 ≺공≻이라 비교할 것 없고
이에서 뱉는 명주(明珠) 빛이 번쩍거리며
평소에 보고 말을 하되 불가사의하고
한 마디로 종(宗)을 표시하면 그 말 끝에 만난다.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에서 말했다.

만법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기나니
생기고 생김이 끝없이 있으면
오고 가며 억울하게 허탕만 치리라.
도를 닦는 사람에게 말을 전하노니
≺공≻에서는 생기고 존재에선 안 생긴다
만일 이 이치 통달할 수 있으면
꼼짝 않고도 깊은 구덩이서 나오리라.

한산자(漢山子)의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남아 대장부야
일을 짓거든 소홀하게 하지 말라
곧장 철썩 같은 마음 지니어
보리(菩提)의 길을 바로 취하라.

삿된 길은 가서는 안 되며
가게 되면 반드시 모진 고통 있으리라
부처의 과위도 구할 필요 없나니
심왕(心王)인 주인을 알고 취하라.

나찬(懶瓚)화상은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질없이 참 부처를 구하지 말라
참 부처는 볼 수 없는 것
묘한 성품이요 신령한 대[靈臺]거늘
어찌 수련의 영향을 받으랴.

마음 이것은 일 없는 마음이요
얼굴은 어머니가 낳은 얼굴이니
겁의 돌[劫石]은 움직일 수 있지만
이 속에 것은 고치거나 변함이 없네.

나에게 한 마디의 말씀이 있는데
생각이 끊기고 반연을 잊었으며
교묘한 말로도 얻지 못하나니
마음으로써만 전할 뿐이네.

다시 한 마디의 말이 있으니
곧장 일러 주는 것만 못하며
털끝보다도 가늘고
크기는 방소가 없어
본래부터 뚜렷이 이루어져서
아무런 손질을 빌리지 않네.

등등(騰騰)화상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도를 닦되 도는 닦을 것이 없고
법을 묻되 법은 물을 것이 없다
미혹한 사람은 물질과 ≺공≻을 모르지만
깨달은 이에겐 본래 거슬림과 좇음이 없네.

8만 4천 가지 법문의
지극한 이치가 마음에 있나니
번뇌 그것은 바로 보리요
깨끗한 꽃은 흙탕에서 난다
자기 집 성읍(城邑)을 알려 할지언정
부질없이 딴 고을을 쏘다니지 말라.

고승(高僧) 석법희(釋法喜)가 임종(臨終) 때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3계(界)는 허망하며 이 한 마음일 뿐이다”고 하고, 단정히 앉아서 갔다.
고승 석영윤(釋靈潤)이 이르되, “바깥 대경의 삿된 고집을 버리고 뜻 속 말의 분별[意言分別]을 얻으며, 유식(唯識)의 생각을 버리고 참된 법계를 얻을지니, 먼저 모양 없음을 관하여 바깥 대경의 모양을 버리고 나중에 생김 없음을 관하여 유식의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또, 일찍이 도반(道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유람하고 있었는데, 들에서 난 불이 사방으로 타 들어오자 다른 이들은 다 흩어지며 달아났지마는 영윤스님만은 편안히 가는 것이 마치 늘 다니던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여러 권속들에게 말하기를, “마음 밖에는 불이 없고 불은 실로 자기의 마음이다. 불에서 도망할 수는 있으나 불을 면하려 할 것은 없나니, 불은 습기 있는데 이르면 저절로 사그라지느니라”고 했다.
고승 석법공(釋法空)은 오대산(五臺山)의 깊숙한 데로 들어가 살면서 매양 청아한 소리로 부르기를, ‘공선(空禪)아’ 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한 번만이 아니었다.
그 뒤부터 법공은 그것이 자기 마음의 경계임을 알고 법을 버려 없애자 마침내 편안하고 고요하여졌다. 처음은 선(禪)으로써 닦고 나중에는 대경의 장애를 다스리다가 드디어는 대승을 배워 모양을 여의었고, 따라 배우는 이들에게도 다 같이 이로써 가르쳤으며, 법으로써 친한 이를 삼고 법으로써 벗을 삼았다.
고승 석정매(釋靖邁)는 임종할 때에 이르기를, “마음은 도(道)의 밖이 아니고 행은 말 앞에 있도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앉아서 갔다.
고승 석통달(釋通達)은, 나무로 흙덩이를 때리다가 흙덩이가 부서지면서 형상이 소멸되는 이런 변화를 보고서 탁 틔어 마음의 자취를 크게 깨쳤다.
고승 석전명(釋轉明)은, 무릇 묻는 학자(學者)가 있으면 언제나 평등한 마음일 뿐인 한 법에 뜻을 두어서 받들게 했다.
고승 석도영(釋道英)은, 물에 들어가거나 눈 위에 누워 있으면서도 추워하는 고통이 없었고 이렇게 일을 따라 법으로 대(對)하면서 마음대로 자재하였으나 고난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진실로 유식의 뜻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을 환히 꿰뚫어 알았거늘, 바깥일인 물질이 어찌 장애가 되었겠는가. 기신론(起信論)을 강하다가 심진여문(心眞如門)의 대목에 이르자 갑작스럽게 정(定)에 들었다.
고승 석도세(釋道世)가 이르되, “부지런하고 용맹스럽게 참회하는 이는 비록 도리에 의지할 줄은 알았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마음의 허망한 동요임을 알고 앞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 경에서 이르되, ‘마치 고운 비단 천 근(斤)이라도 진금 한 량(兩)보다는 못하다’고 했나니, 마음을 힘써 관하는 것이 곧 죄를 힘써 소멸시킨다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고 했다.
복타(伏陁)선사가 이르되, “교(敎)를 빌려서 종(宗)을 밝히되, 종생은 동일한 참 성품이요 범부와 성인은 한 길이라는 것을 깊이 믿고 굳게 머물러 옮아가지 않으면서 다른 교법을 따르지 아니하면, 도(道)와 더불어 명합되고 고요하여지면서 함이 없어지리니, 진리에 든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고승 석지통(釋智通)이 이르되, “만일 대승을 찾고 가까이하면서 바른 관(觀)을 닦는 이가 작은 티끌만큼의 본제(本際)를 살피고 한 생각의 첫 근원을 헤아린다면 문득 가시나무가 무상하다는 음성을 퍼뜨리고 올빼미가 심히 깊은 법을 설할 수 있으리니, 시방의 정토도 반드시 여기서는 더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고승 석담수(釋曇遂)가 늘 말하기를, “삼계는 허망하고 이 한 마음일 뿐이다. 바깥 경계를 따라 구하면 아직 깨치지도 못하고 쉬기도 어려우리라”고 했다.
고승 해탈(解脫)화상은 화엄(華嚴)에 의하여 불광관(佛光觀)을 짓고 있는데, 청명한 달밤에 광명 가운데서 갑자기 변화한 부처님이 나타나면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님들 비밀하고 심히 깊은 법을
오랜 겁에 수행타가 이제야 얻었나니
사람이 이 법문을 열고 밝힌다면
온갖 부처님들 모두 따라 기뻐하리라.

해탈화상은 예배하고는 물었다.
“이 법문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겠나이까.”
변화한 부처님은 마침내 몸을 숨기며 보이지 않으면서 공중에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방편의 지혜로 등불을 삼아
마음의 경계를 비추어 보나니
진실한 법을 알고자 하면
온갖 것이 보이는 바 없을 것이다.

태원(太原)화상이 이르되, “무릇 발심하여 도에 들고자 하면 먼저 자기의 본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자기의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것과 같나니, 사자왕이 아니다. 선지식이 곧장 마음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지금 말을 하는 것이 너의 마음이니, 거동하고 하는 일이 이 누구겠느냐. 이것을 제외하면 다시는 따로 마음이 없다. 만일 따로 있다고 한다면 마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찾는 것과 같다.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청정함을 믿으면 곧 참 모습[實相]이 생긴다’고 했다. 또 경에서 이르되, ‘의지함 없는 이것이 부처의 어머니요 부처는 없는 곳에서 생긴다’고 했다”고 했다.
천황(天皇) 화상이 이르되, “지금의 몸과 마음 그대로가 성품일 뿐이니, 몸과 마음은 얻을 수도 없고 곧 삼계도 얻을 수가 없다. 또한 성품이 있고 성품이 없음은 모두 다 얻을 수 없으며 부처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나니, 마음도 ≺공≻하고 삼계도 모두 ≺공≻하다.
요점을 들어 말하건대, 삼계의 안팎에서부터 개미의 꿈틀거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티끌 안에 있으며, 저것과 이것들이 모두 다 같다. 하나하나가 다 그와 같되 저마다 서로가 방애하지 아니하며, 온갖 법문의 천 가지 만 종류가 다만 성품 보는 것만을 밝혔을 뿐이요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다”고 했다.
흥선(興善)화상이 이르되, “위로부터 조사와 부처가 서로 하나의 마음을 전하였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印)을 찍은 것이요 그 밖의 법은 전하지 않았다.
초조(初祖)가 곧장 말한 것은, 마치 용이 물을 토하면 나라에 이르고, 나루가 가득 차면 강물에 이르고, 이리하여 큰 바다까지 이르게 됨과 같나니, 용은 바로 물의 근원이다.
지금 이후의 학인들은 한 마음의 법을 서로서로 전하는 것 이것이 다 간요(簡要)한 설명임을 알면서, 마음이라 할적에는 따로 부처를 찾지 말 것이요 부처일 때에는 마음을 구하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믿는다면 이 사람의 온갖 하는 말은 법 바퀴를 굴리는 것이요 ,만일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온갖 하는 말은 다 방등(方等)의 대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성품 밖에서 보리를 얻는데 마치 모래를 짜며 기름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했나니, 이것이 기름이 되는 바른 인[正因]이 아니다”고 했다.
옹(顒)선사가 문답을 두면서 “물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중생이 곧 불성이요 불성이 곧 중생이다≻고 하셨는데, 시기를 달리하므로써 청정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비정(非情)도 역시 중생인가.’
대답했다. ‘경에 이르되, 문수가 금색녀(金色女)에게 물었다. ≺그대 몸에도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가 있는가.> 여인이 대답했다. ≺나의 몸에도 5음ㆍ12입ㆍ18계가 있습니다≻고 했다.
범망경(梵網經)에서 이르되, ≺온갖 땅과 물은 바로 나의 전생 몸이요, 온갖 불과 바람은 바로 나의 본체다≻고 했다. 또 의보(依報)ㆍ정보(正報)의 두 몸은 서로서로가 의지하여 성립된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온갖 법의 모양이 없는 이것이 곧 부처의 참 본체다≻고 했고, 경에서는 ≺만일 신령한 지혜의 마음 이것이 항상 한 물질이요, 이것이 망그러지는 무상한 것이다고 헤아리면 곧 외도의 단견(斷見)ㆍ상견(常見)이다≻고 했다. 화엄에서도 ≺중생 경계가 곧 부처의 경계요 부처의 경계가 곧 법 경계이니, 법 경계 이외에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고 했다.
또한 만법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본체는 언제나 같다. 만일 같아지는 체성과 작용에서 헷갈리지 아니하면 항상 둘이 없나니, 둘이 없다는 종지는 대개 세간을 벗어나는 요긴한 나루이어서 한 생각과 상응하여 범부와 동떨어지지 않고 성인이 된다’”고 했다.
와륜(臥輪)선사가 이르되, “그 심성을 살피건대 잔잔하기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본래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않거늘, 어찌 거두며 누르겠는가. 다만 마음이 일어나는 것만을 깨달아서 곧 안을 향하여 마음 근원을 도리켜 비추어라. 근본도 없고 곧 나는 데도 없으며 나는 데가 없기 때문에 곧 고요하여져서 모양도 없고 함도 없다”고 했다.
남천(南泉)화상이 이르되, “연등불(燃燈佛)도 말씀하여 마쳤다. 만일 마음으로 생각하여 모든 법을 출생하는 것이라면 거짓이 합치고 모인 것이라 그것은 다 진실하지 않다. 왜냐 하면, 마음조차도 없나니 어디서 출생하겠는가. 만일 모든 법을 취한다면 마치 허공을 분별하는 것과 같고 마치 사람이 소리를 가져다 상자 안에다 놓아두는 것과도 같으며 마치 그물에다 공기를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지금에 일여(一如)의 이치만을 알아 곧장 수행하여라”고 했고 또 이르되, “한량없는 겁 동안에 성품은 변하지 않았던 것만을 알라. 그것이 곧 수행이니라”고 했다.
분주(汾州) 무업(無業)화상이, 처음마조(馬祖)에게 물었다.
“3승의 지극한 이치를 대강이나마 연구도 하다가 늘 선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다’고 함을 듣고는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지시하여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곧 그대의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요 다시는 다른 물건이 없다. 알지 못했을 때는 미혹된 것이요 알았을 때에는 깨친 것이니, 역시 손이 주먹이 되고 주먹이 손이 되는 것과 같느니라.”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와서 은밀하게 전한 심인(心印)입니까.”
“대덕이여, 지금은 시끄러우니 잠시 갔다가 다른 때에 오라”고 하였으므로, 한 발을 문지방에 막 걸치는데 조사가 말했다.
“대덕이여, 얼른 머리를 돌려 보라”고 하고는 조사가 “이것이 무엇인가”고 하자, 마침내 크게 환히 깨쳤다.
도제(徒弟)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사께서 이 땅에 와서 중생들을 관찰했더니 대승의 근성이 있었으므로 오직 심인만을 전하여 그대들 여러 사람의 헷갈려 있는 뜻에 도장을 친 것이다.
그것을 얻었다면 범부와 성인이니 어리석다거나 지혜롭다고 논하지 않겠지만, 많이 빈 것은 적게 찬 것만은 못하다.
대장부들아, 곧장 쉬어버리는 것이 좋느니라. 단번에 만 가지 인연을 쉬면, 생사의 흐름이 끊어져서 통상의 격식을 멀리 벗어나 신령한 광명이 홀로 비추고 물건들에 구애 받지 아니하며 우뚝 뛰어나 당당하게 3계를 홀로 거닐겠거늘, 하필 키가 한 길 여섯 자가 되어 자마(紫磨) 금빛으로 빛나고 목에 원광(圓光)을 차며 혀 몸매가 길고 넓을 것이 있겠는가.
만일 빛깔로 나를 본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설사 권속의 장엄이 있다 해도 구하지 않는데 저절로 이른 것이며, 산하(山河)ㆍ대지(大地)는 눈빛을 장애하지 않고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쳐서 큰 총지(摠持)를 얻으리라”고 했다.
또 임종 때에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의 보고 듣고 알고 깨닫는 성품은 허공과 수명이 같다. 마치 금강과 같아서 파괴할 수 없지만, 온갖 모든 법은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아서 진실한 것이 없다. 경에서 이르되,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둘은 곧 진실이 아니다’고 했다”고 하고, 말을 마치면서 갑작스럽게 갔다.
진각(眞覺)대사가 이르되, “무릇 심성은 신령하게 통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의 근원은 둘이 없으며, 진여는 생각이 끊어져서 반연하거나 헤아리는 생각이 다르지 않다.
미혹된 소견이 분주히 내달리나 끝가지 추궁하면 하나의 고요함 뿐이요, 신령스런 근원은 형상이 아니나 그를 비추면 천 가지로 차별된다. 천 가지 차별이 같지 않으므로 법안(法眼)이란 이름이 저절로 붙여지고, 하나의 고요함은 다른 것이 아니므로 혜안(慧眼)이란 이름이 있게 되며, 이(理)와 양(量)이 함께 사라지므로 불안(佛眼)의 공덕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이치[三諦]가 한 경계이어서 법신의 이치는 항상 청정하고, 세 가지 지혜[三智]가 한 마음이므로 반야의 광명이 항상 비치며, 경계와 지혜가 명합하므로 해탈의 감응이 근기를 따르고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므로 원이(圓伊)의 도가 현묘하게 모인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다. 세 가지 덕[三德]의 묘한 성품이 뚜렷하여 어긋남이 없고, 한 마음이 깊고 넓어서 생각하기 어렵거늘 어찌 벗어남에서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에 즉(卽)하여 도를 구하는 이는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는 것이라 하겠다”고 했다.
신수(神秀)화상이 이르되, “온갖 비정(非情)은 이 마음이 똑같이 나타나기 때문이요 더러움과 깨끗함은 마음을 따라 바뀜이 있기 때문이요 그 밖의 성품은 반드시 연(緣)에 의지하여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모두 제 성품이 없는지라 ≺공≻과 존재[有]가 함께하지 아니한다.
곧 유정(有情)이 막 있을 때에는 비정은 반드시 ≺공≻하기 때문이요 다른 것이 곧 자기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다른 것의 성품이 없는 것을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이니, 곧 유정이 닦고 증득하는 이것은 비정의 닦고 증득한 것이다.
경에 이르되, ‘그 몸은 두루하고 평등하여 참된 법계이다’고 했나니, 이미 법계가 평등하면 비정의 문은 ≺공≻이로되 이것은 부처이기 때문이다.
또 비정이 막 있을 때는 유정은 반드시 ≺공≻하기 때문이요 자기는 곧 다른 이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자기의 성품 없는 것을 다른 것이 만들었기 때문이니, 곧 비정의 닦음도 없고 증득도 없는 이것은 유정의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 것이다. 선재(善財)가 누각을 보았을 적에 법계에 두루한지라 유정의 문은 ≺공≻이로되 완전한 하나의 누각이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되, ‘중생이 온갖 세계를 어기지 아니하고 세계도 모든 중생을 어기지 아니한다’고 했나니, 비록 있고 없음이 때를 같이한다고 말하나 모양을 나누면 이것이 있다”고 했다.
수조(隋朝) 명(命)대사의 융심론(融心論)에 이르되, “원만한 근기가 교(敎)를 대하면 교마다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고 본체[理]의 마음이 현상[事]을 간섭하면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다.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거늘 어찌하여 산란하면서 안정되지 아니하겠는가. 산란함마다 안정되지 아니함이 없다면 안정됨과 산란함이 둘 다 없어지고,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기 때문에 현상과 본체는 다 함께 끊어진다.
또한, 비록 두 치우침을 여읜다 하더라도 치우침이 있어서 여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은 4구(句)가 없어지므로 실로 글귀로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곳은 그윽하고 오묘하여 마음이 융화(融和)해야 알 수 있다. 만일 마음으로써 마음이 융화하면 마음이 융화한 것 아니니, 마음은 언제나 여실(如實)하거늘, 어찌 융화할 바리요, 실로 마음이라 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융화함을 말하는 것이다”고 했다.
지달(智達)선사의 심경송(心境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계가 성립되면 마음이 문득 있고
마음이 없으면 경계가 안 생긴다
만일 마음으로 경계 얽어맨다면
마음과 경계는 둘 다 장님된다.

경계와 마음이 제 각기 머무르면
마음과 경계 성품 언제나 청정하며
경계 깨치면 마음 일어남 없고
마음 헷갈리면 경계 함께 행하여진다.

만일 헷갈리면 마음이 경계지어
마음과 경계는 제멋대로 산란하며
경계를 깨치면 마음 원래 청정하여
마음과 경계 본래가 청정함을 알리라.

마음을 알게 되면 경계 성품이 없고
경계를 환히 알면 마음에 형상 없다
경계 비면 마음이 고요하디 고요하고
마음으로 비추면 경계는 차디차다.

감천(甘泉)화상이 이르되, “무릇 발심하여 도에 들고자 하면 먼저 자기의 본심을 알아야 하나니, 마음이란 만법과 중생의 근본이요 삼세의 모든 부처님ㆍ조사와 12부경(部經)의 종(宗)이다. 비록 관찰할 때 그의 형상을 보지는 못하나 응용이 자재하고 하는 일마다 걸림이 없으며 환히 꿰뚫리어 분명하고 또렷또렷하여 다름이 없다.
만일 알지 못한 이면 믿음으로 우선을 삼을지니, 믿는다면 무엇을 믿는가. 마음 이것이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비롯함이 없는 무명(無明)으로 바퀴 돌 듯 생사하면서 4생(生)과 6도(道)에 갖가지 형상을 받는 것은 다만 자기 마음만이 부처임을 감히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마음을 알면 마음 밖에는 다시는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는 따로 마음이 없다. 또한 거동하고 하는 일이 다시 누구이겠는가. 이 마음을 제외하면 다시는 따로의 마음이 없다. 만일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곧 연야달다(演若達多)로서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 것과도 같으리라. 천경만론(千經萬論)이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연유함일 뿐이지만, 만일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분명히 안다면 온갖 것이 임시로 붙인 거짓 이름뿐이거늘 하물며 다시 3유(有)가 있겠는가. 곧 밝은 거울은 얼굴을 비출 수 있고 대승은 마음을 환히 나타낼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르되, “경전을 구하고 부처를 찾는 것은 진리로 마음을 살피는 것보다는 못하다. 만일 자기 마음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다고 살필 수 있으면, 본래부터 스스로 있는 것을 닦을 필요도 없으며 경전으로 인하여 얻지 않거늘 어찌하여 알게 되겠는가.
경에 이르되, ‘수다라교(修多羅敎)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했나니, 만일 달을 보았다면 가리킨 바를 분명히 안 것이다. 만일 이렇게 알았다면 한생각과 상응하여 곧 부처라고 한다”고 했다.
보안(普眼)대사가 이르되, “큰 도[大道]는 공허하고 넓되 하나의 참 마음일 뿐이니, 선이나 악이나 생각치 말라. 신령하고 맑아 물건으로서 표시되거늘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고 했다.
위산(潙山)화상이 이르되, “안팎의 모든 법은 모두가 진실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변화로 생기며 그것은 다 임시 붙인 이름인 줄 알아서 그의 법 성품에 맡겨 두루 흐르면서 끊지도 말고 잇지도 말라”고 했다.
임제(臨濟)화상이 이르되, “지금의 여러분은 옛 성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그대들은 또한 어떤 것이 모자라겠는가. 6도(道)의 신령한 빛은 일찍이 쉬었다 일어났다 함이 없다. 만일 이러할 수 있으면 이것은 일생 동안 일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조사와 부처와 구별되지 않으려면 바깥을 향해 내닫거나 구하지만 말라.
그대들의 한 생각의 청정한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법신불이요, 그대들의 한 생각의 분별이 없는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보신불이여, 그대들의 한 생각의 차별된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화신불이니, 이 세 가지 몸 그것이 곧 오늘 눈앞에서 법을 듣는 사람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명목[名]과 언구[言]이며, 분명히 아는 이것이 빛[光]과 그림자[影]이다.
대덕들이여, 반드시 빛과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부처의 근원이요 이것이 온갖 도 무리의 돌아갈 집이다. 그대의 4대(大)ㆍ6근(根)과 허공은 법을 듣거나 법을 설할 줄 모른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겠는가. 뚜렷한 자리에서 외로이 밝으면서도 모양이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그런 까닭에,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5음인 몸 밭 안을 향하면 무위 진인(無爲眞人)이 있다. 당당하게 드러나서 실 터럭만큼도 사이가 없거늘 어찌 알지 못하는가.
대덕들이여,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되 10방을 꿰뚫으며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고 하나니, 본래 이는 하나의 정밀한 광명이로되 분류하면 여섯 가지로 화합을 이룬다. 마음이 만일 나지 아니하면 어느 곳이나 해탈이니라”고 했다.
관계(灌溪)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5음 산중의 옛 불당(佛堂)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가 밤낮 원만한 빛을 낸다
이 속을 환히 알면 같음과 다름도 아니어서
이것이 곧 화엄(華嚴)의 변시방(遍十方)이니라.

석두(石頭)화상이 이르되, “그대들 마음의 본체는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항상한 것도 아니다. 성품은 더럽거나 청정한 것도 아니고 잔잔하여 원만하며 범부와 성인에게도 똑같고 응용에는 끝이 없나니, 3계(界)와 여섯 갈래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날 뿐이요 물 속의 달과 거울 속의 형상에 생멸이 있겠는가. 그대들이 그를 알 수 있으면 구비하지 않는 바가 없다. 모든 성인들이 인간에 오셔서 모범을 드리우고 널리 근거 없는 말들을 진술한 까닭은, 대개가 법신의 본래 고요함을 나타내어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려 할 뿐이니라”고 했다.
황벽(黃蘗)화상이 이르되,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한 마음을 전한 것은 곧장 모든 중생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가리킨 것이니, 수행을 빌릴 것도 없고 다만 이제 자기 마음을 알고 자기 본래 성품을 볼 뿐이요 따로 법을 구하지 말 것이다.
어떻게 자기 마음 그대로가 여(如)임을 알 것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다. 만일 말을 하지 아니하면 작용하지도 아니한다. 마음의 본체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실로 모양이 없고 또한 방소도 없으며 또한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고 했다.
또 이르되, “한 마음만을 깨치면 다시는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으며 이것이 곧 참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의 한 마음은 다른 것이 없나니, 이 말 끝에 스스로가 본래 법을 인정한 것이 더 낫다. 이 법이 곧 마음이요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이 마음이 곧 법이요 법 밖에는 마음이 없다”고 했다.
단하(丹霞)화상이 이르되, “그대들이 보호하고 있는 한 신령한 물건은 그대들이 조작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그대들이 기록하여 아득하게 얻은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 자리는 부처도 없고 열반도 없으며 닦아야 할 도도 없고 증득해야 할 법도 없다. 도는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거늘 다시 무슨 법을 닦겠는가. 이것만이요 그 밖의 광명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큰 도니라”고 했다.
수료(水潦)화상이 이르되, “만일 하나의 법을 말한다면, 10방의 부처님들께서 하나의 법 안에 거두어 들고 백천 가지 묘한 문은 한 털끝 위에 있으며 천 성인이 같은 길이어서 결정코 구별되지 아니하고 10방을 널리 비춤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나니, 마음 자리가 밝아지면 온갖 일이 모두 다 간파(看破)된다. 위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이니, 본래의 마음 이것이 곧 법이다”고 했다.
앙산(仰山)화상이 이르되, “자기 마음이 모양이 없어 마치 허공과 같음을 단번에 깨치고는 그 근원에 붙여 밝혀 내라. 곧 본래 마음은 항하 모래만큼 많은 묘한 작용을 갖추어서 따로 지니는 바도 없고 따로 벌려 선 것도 없으며 그것이 본래의 자리요 그것이 본래 땅이다”고 했다.
대전(大顚)화상이 이르되, “노승이 왕년에 석두(石頭)화상을 뵈었더니 물었다. ‘무엇이 그대의 마음인가.’ 대답하기를 ‘말하는 이 놈입니다.’ 선사가 할(喝)을 하여 내쫓으므로, 며칠 지난 뒤에 도리어 물었다. ‘먼저번에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이것을 제외하고 어느 것이 이 마음입니까.’ ‘양미동목(揚眉動目)의 온갖 일을 제외하고 곧장 마음을 가져 오너라.’ ‘가져 올 만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대가 먼저 와서는 마음이 있다더니, 어찌 하여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고, 마음이 없다면 모두 비방하는 것이니라’고 하시기에, 나는 이때 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서 곧 대답하기를 ‘저로 하여금 양미동목의 온갖 일을 없애게 하셨으므로 화상께서도 없애버려야 하십니다.’ ‘나는 이미 없애버렸느니라.’ ‘화상에게 가져다 보였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가져다 보인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화상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대의 일과는 상관없느니라.’ ‘본래 물건이 없는 것입니까.’ ‘그대에게도 물건이 없느니라.’ ‘이미 물건이 없다면 곧 참된 물건입니다.’ ‘참된 물건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그대 마음의 현량(現量)의 뜻은 그와 같느니라. 모름지기 크게 수호하고 지녀야 하느니라’고 했다”고 했다.
삼평(三平)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보고 듣는 것은 보고 듣는 것 아니요
그대에게 바칠 수 있는 다른 성색(聲色)도 없다
이 속에서 만일 알면 모두 일이 없나니
체성과 작용은 나눔과 나누지 않음에 방해함 없다.

또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음은 본래 인(因)이 아니요
그 체성 오묘하여 허망과 진실 끊어졌고
모양 보며 어리석은 탐애 내지 아니하면
환히 밝아 이는 완전히 석가의 몸일세.

안국(安國)화상이 이르되, “경전에서 ‘머무는 바 없으면서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했다.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은 빛깔에 머무르지도 않고 소리에 머무르지도 아니하며 미혹에 머무르지도 않고 깨침에 머무르지도 아니하며 체성에 머무르지도 않고 작용에 머무르지도 않으면서 그 마음을 낸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온갖 처소에서 한 마음임을 드러낸 것이니, 만일 선(善)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내면 곧 선이 나타나고 만일 악(惡)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내면 곧 악이 나타나면 본래 마음은 곧 숨어 없어진다. 만일 머무는 데가 없으면 10방 세계가 이 한 마음일 뿐이니, 진실로 바람이 번기를 움직이지 않는 것이요 이 마음이 움직이는 줄 알 것이다.
어떤 단월(檀越)이 물었다. ‘화상은 남종(南宗)이십니까, 북종(北宗)이십니까.’ 대답했다. ‘나는 남종도 북종도 아니며, 마음을 종(宗)으로 하느니라.’ ‘화상은 일찍이 교(敎)를 보셨습니까.’ ‘나는 교를 본 일이 없지만, 만일 마음을 안다면 온갖 교를 다 보아 마친 것이다.’
학인(學人)이 물었다. ‘무엇을 이름하여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고 하십니까.’ ‘비유하면, 마치 밤에 꿈을 꾸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만일 몸이 평상 위에서 편안히 잠을 자되 전혀 근심이나 기쁨이 없음을 알면 바로 그것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는 것이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부처가 된다고 들으면 곧 기뻐하고 지옥에 든다고 들으면 곧 근심을 한다면, 마음의 부처를 통달하지 못한지라 보리 평상 위에 편안히 잠을 자면서도 망녕되이 근심이나 기쁨을 내게 된다‘고 했다”고 했다.
귀종(歸宗)화상이 이르되, “마음 이것이 부처요 철저한 성품일 뿐이니, 산하(山河)ㆍ대지도 한 법으로 환히 나타난 바다. 이는 크고 신령한 주문(呪文)이어서 진실하여 거짓이 아니며,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의 근원이요 보리의 근본 뼈다. 부처란 어느 것인가. 지금 말하는 그것이요 다시는 따로 사람이 없다.
경에 이르되, ‘마치 하나의 빛깔이 중생의 소견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온갖 법도 하나의 법일 뿐이나 처소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고 했다”고 했다.
대비(大悲)화상이 이르되, “자기의 심성이 만법을 포함했음을 알고 끝내 따로 구하지 아니하면 생각 생각마다 공부가 참 모습[實相]에 들지만, 만일 이런 이치를 보지 못한다면 여러 겁 동안 고통에 얽매이면서 역시 공부는 없다”고 했다.
초당(草堂)화상이 이르되, “무릇 제석의 그물[帝網]을 아직 펴지 못했으면 천 개의 영락(瓔珞)을 어찌 볼 것이며 큰 벼리를 갑자기 올려야 만 개의 눈금이 저절로 열리나니, 마음과 부처를 쌍으로 비춤이 관(觀)이요 마음과 부처가 둘 다 없어짐이 지(止)이다. 선정과 지혜가 균등해졌으면 어느 마음인들 부처가 아니겠으며 어느 부처인들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부처가 이미 그러하면 만 가지 경계와 온갖 반연이 삼매 아님이 없다”고 했다.
백장 혜해(百丈慧海)화상이 불을 헤치면서 위산영우(潙山靈祐)에게 보이자 이로 인하여 단번에 깨쳤으므로, 백장이 이에 말했다. “이것이 잠깐 동안의 지름길이니라. 경에서 이르되, ‘불성을 보고자 하면 인연의 시절[因緣時節]을 관찰하여야 한다’고 했다. 시절이 이르게 되면 마치 미혹에서 홀연히 깨친 것 같고 잊었던 것이 갑자기 기억나는 것과 같나니, 비로소 옛 길을 살피면서 자기 물건을 다른 이로부터 얻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가 이르되 ‘깨치고 나면 아직 깨치지 못했을 때와 같아지고 마음이 없어서 법이 없음을 얻나니, 이것이 허망이 없고 범부와 성인의 평등한 마음일 뿐이니, 본래의 마음 법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진다’고 했나니, 지금 그대가 그렇게 되었으므로 잘 스스로가 수호하고 지녀라”고 했다.
또 광어(廣語)가 물었다. “보았습니까.” 대답했다. “보았느니라.” 또 물었다. “보게 되면 어떠합니까.” 대답했다. “보게 되어도 둘이 없느니라. 이미 둘이 없다고 한다면 보는 것으로써 보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니, 만일 보았다면 다시 보게 되었을 때에 앞의 보는 것이 그것이겠는가. 뒤의 보는 것이 그것이겠는가. 경에서 이르되, ‘보는 것을 보게 될 때의 그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되, ‘보는 법을 행하지도 않고 듣는 법을 행하지도 않고 깨닫는 법을 행하지도 않으면, 모든 부처님은 빨리 수기(授記)를 주신다’고 했다”고 했다.
또 이르되,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라 비추는 작용은 보살에 속하며, 자기 마음이 바로 주인이요 재상이라 비추는 작용은 객(客)에 속하나니, 마치 물결에서 물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만유(萬有)를 비춤으로써 공(功)이 드러나지만, 만일 고요한 비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면 오묘한 뜻이 저절로 예와 이제를 꿰뚫는다. 마치 ‘신령하여 비추는 공이 없으면 지극한 공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함과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지금 곧바로 깨쳐 알려고 하면, 다만 사람[人]과 법(法)이 모두 없어지고 모두 끊어지고 모두 ≺공≻할 뿐이다”고 했다.
반산(盤山)화상이 이르되, “큰 도[大道]에는 중간도 없거늘 다시 무엇이 앞과 뒤이겠는가. 긴 허공에는 자취가 끊어졌거늘 무엇으로 그를 헤아리겠는가. 허공이 그러하므로 도(道)라 한들 어찌 말로 하겠는가. 마음의 달은 외로이 둥글고 광명은 삼라만상을 머금되 광명이 경계를 비춘 것도 아니고 경계 또한 존재한 것 아니니, 광명과 경계가 모두 없어지거늘 다시 이것은 어떤 물건인가.
마치 칼을 허공에다 던져 휘둘러낸다 해도 미친다, 미치지 않는다를 논할 것도 없는 것과 같아서, 이야말로 허공에 바퀴도 자취가 없고 칼날도 이지러지지 않는다. 만일 이렇게 마음과 마음에 앎이 없을 수 있으면, 사람이 그대로 부처요 부처 그대로가 사람이니, 사람과 부처에 다름이 없어야 비로소 도(道)가 된다”고 했다.
대매(大梅)화상이 처음 마조(馬祖)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대답했다. “바로 그대의 마음이니라.” “어떤 것이 법입니까.” “역시 그대의 마음이니라.” “조사께선 뜻이 없습니까.” “그대는 자기 마음만을 알라. 법마다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리라”고 했다.
뒤에 대매산(大梅山)에 머무르면서 대중에게 이렇게 말하되, “그대들 여러분은 각자가 마음을 밝혀서 근본을 통달하여야 한다. 그 끝을 좇지 말고 그 근본만을 얻으면 그 끝은 저절로 이르게 된다. 그대들은 그 근본을 얻고자 하면 그대들의 마음만을 알아라. 이 마음은 원래가 온갖 세간과 출세간 법의 근본이며, 다만 마음을 온갖 선악에 붙여서 내지 말 것이니, 곧 만법은 스스로 여여(如如)함을 알 것이다.
그때에, 어떤 학인이 물었다. ‘마음 밖에는 따로 법이 없습니까.’ 대답했다. ‘조사와 부처가 바로 그대의 마음인 뿐이니, 마음 이것은 만법의 근본이거늘 어찌 따로 법이 있어서 마음을 능가하겠는가’”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마치 6조(祖)가 이르되, “선과 악을 모두 헤아리지 않으면 저절로 마음의 본체에 들게 되어 잔잔하고 항상 고요하여 미묘한 작용이 항하 모래만큼 많나니, 모든 부처는 바로 지극히 선한 맨 끝이요 중생은 바로 지극히 악한 맨 끝이다”고 말함과 같나니, 선악은 모든 법을 모두 거두어 있다. 그러므로 이르되, “만일 헤아리지 아니하면 온전히 마음의 본체로 돌아간다”고 했나니, 작은 터럭만큼의 법이 있기만 하면 이것은 다 헤아리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마치 한산자(漢山子)의 게송에서 이르되, “온갖 기틀 모두가 자취 없어져야 비로소 본래의 사람을 본다”고 함과 같나니, 없어진다[泯]는 한 글자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 밖에는 원래 하나의 법도 없고 마음일 뿐이므로 마치 골짜기에서 자기의 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오고 거울에서 나의 형상을 비치는 것과 같다.
다만 중생이 가슴에 울리는 마음의 기능을 통달하지 못하여 차별된 앞의 대경을 세움은 마치 허공 꽃이 일어났다 소멸하는 것과 같고, 그지없는 망상을 조립(組立)함은 마치 불길과 물이 달리고 타오르는 것과 같나니,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없애고 끊게 할 뿐이다. 만일 마음의 체성에 들어간다면 비록 잔잔하다고 하기는 하나 아주 없는 데로 떨어지지는 아니하고 저절로 체성으로부터 작용을 일으켜 두루함이 항하 모래만큼 많다.
또 대매(大梅)가 이르되, “이 마음 법문인 진여의 묘한 이치는 더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않으면서 갖가지 방편으로 잘 응용하나니, 모두 이 성품은 본래가 구족하여 생기지도 아니하고 소멸하지도 않는 줄 알아야 삼세의 온갖 작용을 능히 안다.
그런 까닭에, 이르되 ‘나의 관(觀)이 오래고 머나 마치 오늘과 같아서, 언제나 그 속에 있으면서 거닐고 앉고 눕는다’고 한다”고 했다.
암두(巖頭)화상이 이르되, “삼계(界) 안에서 있고 없음은 자기만이 아는 것이요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다. 다만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알기만 하면 의지함도 없고 신령하여 광대한 자리라고 부른다. 만일 법이 있고 조사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대를 끝끝내 속이는 것이니, 다만 마음[方寸] 안을 살펴보라. 멀디 멀고 밝디 밝아지리니, 욕심이 없고 의지함이 없기만 하면 곧 결단하여 마치게 되리라”고 했다.
고성(高城)화상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양이 없는 마음이 나 움직이고 빛나서
소리에 응하고 빛깔에 응하며 방소 따라 비춘다
방소에 있기는 하나 방소에 있지 않고
저절로 높고 낮으면서 모두가 미묘하네.

찾으면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면서
불꽃 광명 훨훨 이는데 어디서 일어날까
다만 지금의 것 전혀 이는 마음이니
마음으로 마음 밝히는 마음 다시 그렇다.

방소에 안 있는데 어디서 찾을꼬
운용하되 자취 없고 자국도 없구나
지금 분명히 찾는 사람 알 것이요
아침 내내 부질없이 따로 구하지 말라.

부지런히 배우면서 총림(叢林) 가까이 하고
병든 눈을 가지고서 꽃부리로 알지 마라
설교(說敎)로는 본래 무상의 도리[無相理] 궁구하되
널리 읽으면 원래 마음 알지 못하네.
마음을 알고 경계를 알라
마음을 알고 경계 알면 선하(禪河)가 고요하고
만일 경계 환히 알면 마음 아는 것이니
만법은 다 건달바성(乾達婆城)의 그림자 같네.

천경(千頃)화상이 이르되, “모든 중생인 나귀ㆍ노새ㆍ코끼리ㆍ말ㆍ지네ㆍ그리마와 10악(惡)ㆍ5역(逆)ㆍ무명ㆍ망념ㆍ탐냄ㆍ성냄 등의 분명하지 못한 법은 다 같이 여래장(如來藏) 가운데서 나타나나니, 본래 이것이 부처이다. 다만 중생들이 끝없는 겁으로부터 갑자기 한 생각을 일으켜 이로부터 분주하게 헤매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해 오셔서 감관이 소멸하고 모든 분별이 단졀되어 한 생각과 상응하면 문득 뛰어나 바르게 깨닫게 하심이거늘, 어찌 다른 이들로 하여금 많이 알고 많이 이해하여 몸과 마음을 요란케 하심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보리의 광명이 나타나지 못하지만 그대들은 이제 보고ㆍ듣고ㆍ알고ㆍ깨닫는 것만을 끊고 물건인 경계 위에서 분별을 내지 말라. 그때그때 맞춰서 옷 입고 밥을 먹는 평상의 마음[平常心]이 도이니, 이 법이야 말로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학인이 물었다. ‘화상은 밤이 되어 등불이 없을 때에는 어떠하십니까.’ 선사 ‘도를 깨친 사람은 언제나 광명이 앞에 나타나거늘 무슨 밤과 낮이 있겠는가.’ ‘어찌하여 화상의 광명을 보지 못합니까.’ ‘무슨 눈으로 보려고 하는가.’ ‘세간 사람과 동일한 현재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선사는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르되, ‘애달프다. 모든 중생들은 감관과 대경이 서로 간섭하여 끝없는 때로부터 도둑을 잘못 알아 아들을 삼고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칼과 쇠사슬을 차고 있다. 그대가 눈을 가지고 보고 의식으로 분별하면서 불도를 구하려는 것은 바로 본래의 마음을 저버리고 생각을 따라 유전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얼굴을 마주 대고서도 멀리 떨어져 있느니라’고” 했다.
유정(惟政)화상이 이르되, “옛 성인과 지금의 성인의 그 이치는 똑같다. 옛날의 해와 오늘날의 해는 비추어도 둘이 다 따뜻해지지 않고 옛날의 바람과 오늘날의 바람은 두드려도 둘이 다 움직임이 없지마는, 한 방울의 물은 이를 적시고 큰 바다의 물도 이를 적신다”고 했다.
또 게송으로 말했다.

한 생각 동안에 마음을 얻으면
세 가지 세계를 단번에 뛰어넘고
보되 볼 바가 없으면
탐냄ㆍ성냄이 없어진다.

우두산(牛頭山)의 충(忠)화상에게 학인이 물었다. “무릇 도에 들어간 이는 어떻게 마음을 씁니까.” 대답했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생기지 않으므로 이제에 소멸하는 것도 없다. 그대는 다만 마음에 맡겨 자재하면서 제지하지 말아야 한다. 곧장 보고 곧장 듣고 곧장 오고 곧장 가며, 모름지기 행하되 그대로 행해야 하고 머무르되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곧 참된 도니라. 경에서 이르되, ‘연기(緣起) 이것이 도량이니, 사실대로 알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또 물었다. “도를 닦으면서 어떤 방편을 지으면 해탈을 할 수 있게 됩니까.” 대답했다. “부처를 구하는 사람은 방편을 짓지 않는다. 마음 근원을 단번에 알고 불성을 분명히 보는 그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니, 허망도 아니요 진실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되, ‘곧 바로 방편을 버리고 위없는 도만을 설명한다’고 했다.”
“진여의 미묘한 법은 도리와 지혜가 아주 깊은데 천식(淺識)한 무리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대는 부처님을 비방하지 말라.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모든 법은 깊은 것도 아니고 얕은 것도 아닌데,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하고서 심히 깊다고 말을 한다. 만일 보았을 때에는 눈에 부딪치는 것마다 모두가 다 미묘하거늘, 무엇 때문에 높이 추앙하면서 보살을 따로 성인으로 붙이는가. 마치 생공(生公)이 말한 ‘지혜가 깊다고 말할 것 아니니, 물건은 지혜보다 깊을 뿐이다’고 함과 같다. 이것은 미치지 못했음을 슬퍼하는 말일 뿐이다. 그대는 법을 간택하지 말고 가지거나 버리거나 하는 마음도 갖지 말라. 그러므로 ‘법은 견줄 데가 없다’고 했나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무릇, 경이란 몸과 마음으로 이치를 삼는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몸은 바른 법의 광이요 마음은 장애 없는 등불이니, 모든 법을 환히 비춤을 중생을 제도함이라고 한다’고 했다”고 했다.
협산(夾山)화상이 이르되, “눈앞에는 법이 없되 뜻은 눈앞에 있나니, 이는 눈앞의 법이 되지 않고 귀와 눈의 이를 바도 아니다”고 했다.
대안(大安)화상이 이르되, “그대들의 각자의 몸 속에는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가 있다. 눈으로는 빛을 내쏘아 산하 대지를 비추고 귀로는 빛을 내쏘아 온갖 선악의 음성을 받아들이나니, 여섯 가지 문에서 밤이나 낮이나 항상 광명을 내쏘므로 방광삼매(放光三昧)라고도 한다.
그대들 스스로는 알지 못하나 4대(大)의 몸 속에 있으면서 안팎으로 붙들고 유지하여 두 다리나 어금니가 기울지 않게 하고 큰 짐을 진 이가 돌 두 개를 얻어 지고 외나무다리 위를 통과하면서도 그를 땅에 넘어뜨리지 않게 하는 그것이 또한 무엇일까. 그대들이 찾는다 해도 털끝만큼도 볼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지공(志公)이 이르되 ‘안팎으로 찾아봐도 모두가 없다가, 경계 위에서 하는 일에는 모두 크게 있구나’고 했다”고 했다.
장사(長沙)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심히 깊고 심히 깊구나
법계와 사람 몸은 이것이 몸이니
미혹된 이 마음 헷갈려서 뭇 세계를 삼지만
깨쳤을 땐 세계 바다 그것이 진심(眞心)일세
몸과 세계 두 대경은 원래가 실상(實相)이라
분명하게 통달함을 지음(知音)이라 일컫네.

또 학인이 물었다. “온 법계의 중생들이 마음을 알면 맨 처음에 무엇으로부터 있는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성품의 자리에선 심왕(心王)이 생기고
마음은 만법의 스승이 되나니
마음도 소멸하고 마음의 스승도 소멸해야
비로소 여여(如如)에 계합될 수 있다.

용아(龍牙)화상이 이르되, “무릇 도를 닦는다는 것은, 바로 권하고 달래는 말이요 인도하는 말이다. 위로부터 법과 사람은 없고, 다만 이것을 서로 이어받으면서 갖가지 방편으로 그들을 위해 설명하고 뜻을 내는 것은 자기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일 뿐이니, 마지막에는 얻을 수 있는 법도 없고 닦을 수 있는 도도 없기 때문에 ‘보리의 도는 자연이다’고 했다.
이제 법이라 하면, 이는 궤지(軌持)라는 이름이다. 도(道)는 바로 중생의 체성이어서 세계가 있기 전에도 벌써 이 성품은 있었고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 성품은 소멸하지 않았으므로 흐름을 따르는 성품이라고 부르며, 언제나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허공과 같은지라 세간의 모양으로 항상 머무른다고 부른다. 또한 이름을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도 하고 본제(本際)라고도 하고 심왕(心王)이라고도 하고 진여해탈(眞如解脫)이라고도 하고 보살열반(菩薩涅槃)이라고도 하다.
백천 가지의 다른 이름도 모두 이는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비록 많은 이름이 있기는 하나 많은 체성은 없고 많은 이름이 모였으면서도 체성은 오직 하나이며 온갖 이치가 모였으면서도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만일 자기 마음을 알면 근원에 돌아가 뜻을 얻는다고 하나니, 마치 사람이 여러 흐름의 물을 얻고자 하면 큰 바다 속을 향해서만이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만법의 모양을 알고자 하면 마음 속을 향해야만이 계합된다. 오묘한 이치를 알게 되면 온 체성이 진리요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타나는 바다”고 했다.
덕산(德山)화상이 이르되, “만일 한 티끌이나 한 법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대는 그와 함께 집착하고 앎을 내므로 모두가 하늘 악마거나 외도에 떨어진다. 다만 이 신령하고 ≺공≻한 것은, 오히려 작은 티끌만큼의 것도 얻을 만한 것이 없어서 곳곳마다 청정하고 환히 통달하며 겉과 속이 맑게 사무쳤을 뿐이다”고 했다.
또 이르되, “그대들은 거룩함[聖]을 사랑하지도 말라. 거룩함은 바로 ≺공≻이라는 이름이어서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 다만 이것은 번쩍거리고 신령하고 ≺공≻하며 걸림 없고 자재하기만 하되, 장엄하게 닦아 증득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법을 전하면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우두(牛頭) 아래의 불굴(佛窟)화상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한 문수(文殊)가 말한 것이 10방 문수가 일시에 말한 것이요, 한 부처님의 열반이 모든 부처님들께서 다 함께 하는 열반이라고 함을 믿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인가. 물질[色]의 근본을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었다. ‘물질의 성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이것이 근본인 것인가.’
대답했다. ‘이것은 관(觀)에 머무르는 말이요 현상[事]에 즉하여 근본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현상에 즉하여 본다면 그대의 나고 늙고 병드는 몸과 무명ㆍ탐냄ㆍ성냄 등의 이것이 물질의 근본일 뿐이니, 현상 밖에는 본체[理]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물질의 근본을 알면 곧 온 10방의 물질과 같으므로 하나의 설명이 온갖 설명이요 한 열반이 온갖 열반이라고 하나니, 물질 자체에는 성품이 없되 성품이 포함되지 아니함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비록 범부와 같기는 하나 범부가 아니요 범부가 되지도 못하고 범부를 부술 수도 없나니, 따로 뛰어난 것이 있어서 마음 밖에 있다고 한다면 곧 악마의 그물에 떨어진다. 내 이제 스스로 몸과 마음이 실상이요 부처가 된다고 관찰하는 것이 곧 10방 부처님들과 행이 같고 증득이 같은 것이라고 본다.
물었다. ‘부처님 몸은 샘이 없는 계율과 선정으로 5음(陰)을 쪼여 닦으므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감히 의심하지 않지만, 대품경(大品經)에서 ≺중생은 착하지 못한 5음의 몸이지만, 역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고 함과 같은 것은 심히 사람들을 놀라고 의심되게 합니다.’
대답했다. ‘만일 중생의 5음 바깥을 향해 따로 모든 부처님들의 해탈이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중생이 자기 성품을 분명히 알기만 하면 본래부터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거늘, 누가 속박하고 누가 해탈하겠으며 어찌하여 다시 속박과 해탈의 다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물었다. ‘경에서 이르되, ≺중생과 부처는 평등하다≻고 했으므로 속박이나 해탈이 없겠거늘 어찌하여 6도(道) 중생들은 헤매면서 해탈하지 못합니까.’
대답했다. ‘중생은 물질과 마음이 청정함을 모르고 망상을 하고 뒤바뀌는지라 해탈하지 못한다. 만일 사람과 법이 항상 ≺공≻한 줄 알면 그 중에서 실로 속박과 해탈이란 없다.’
물었다. ‘무슨 관(觀)을 지으면서 참회를 해야 마지막 죽을 적에 업(業)에 끌림을 면하겠습니까.’
대답했다. ‘그대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행한 바와 말씀한 것이 내가 오늘에 행하는 바와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깊이 믿어야 한다. 성불을 해서도 오히려 열반의 모양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중간되는 죄와 복의 허망한 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바른 앎 바른 소견이요 진실한 수행이며 진실한 참회이니,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서 이 관을 잃지만 않으면 마지막 죽을 때에도 바른 기억을 잃지 않으리라’”고 했다.
불굴(佛窟) 아래의 운거(雲居)화상이 심경불이편(心境不二篇)에서 이르되, “세간ㆍ출세간은 모두 자기의 한 생각인 허망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나니,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기만 하면 온갖 형상이 나누어지고 한 생각이 생기므로 문득 마음과 경계를 이룬다. 만일 마음과 경계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생각이 있어서 볼 수 있게 되겠는가. 볼 바[所見]의 생각이 있는지라 또 능히 보는[能見] 마음이 있게 된다. 장차 생각 그대로가 경계요 보는 것 그대로가 마음임을 알면, 볼 바의 생각은 색온(色蘊)이 되고 능히 보는 마음은 4온(蘊)이 된다.
경에 이르되, ‘5온 이것이 세간이요 한 생각이 5온을 갖춘다’고 했나니, 하나하나의 온 가운데는 다 5온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는 여럿을 장애하지 않고 여럿은 하나를 장애하지 않게 된다. 그런 까닭에, 마음과 경계는 서로가 통하여 서로서로 손님도 되고 주인도 된다.
경에 이르되, ‘경계와 지혜가 서로서로 엇갈리며 겹치고 겹쳐서 그지없다’고 한 이것이 곧 한 티끌이 법계의 낱낱의 법을 포함하여 모두 두루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한 생각의 동요는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진동한다는 것으로 보고, 자기의 한 생각이 항상 안정함은 곧 6도 중생이 모두 항상 안정하다는 것으로 보라. 만일 진실로 한 생각의 체성을 알면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진동한다는 것으로 보고, 자기의 한 생각이 항상 안정함은 곧 6도 중생이 모두 항상 안정하다는 것으로 보라. 만일 진실로 한 생각의 체성을 알면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항상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리니, 한 생각이 헷갈린 탓으로 곧 경계와 지혜는 호(胡)나라와 월(越)나라다”고 했다.
대주(大珠)화상이 이르되, “심성은 형상이 없으나 그것이 곧 미묘한 법신(法身)이요, 심성의 본체는 ≺공≻하나 그것이 곧 허공의 그지없는 몸이며, 장엄함을 보이고 행하는 그것이 곧 공덕의 법신이니, 이 법신은 바로 만가지 변화의 근본이요 처소에 따라 이름 붙여지며 지혜의 작용이 그지없으므로 이것이 무진장(無盡藏)이다.
물었다. ‘어느 것이 법신입니까.’ 대답했다. ‘마음은 항하 모래같은 온갖 법을 내기 때문에 법 집의 몸[法家之身]이라고 한다. 경에서 이르되, ≺한 생각인 마음 티끌 안에서, 항하 모래같은 게송을 연출한다≻고 했나니,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한다.’
‘진실한 법과 허환한 법에는 저마다 종성(種姓)이 있습니까.’ ‘불법에는 종성이 없고 물건에 응하면서 나타난다. 만일 마음이 진실하면 모두가 진실하지만, 한 법이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있으면 진실함의 이치는 원만하지 아니하다. 만일 마음이 허환하면 모두가 허환하지만, 한 법이라도 허환하지 않음이 있으면 허환한 법에는 안정함이 있다. 만일 마음이 ≺공≻하면 모두가 ≺공≻하지만, 한 법이라도 ≺공≻하지 않음이 있으면 ≺공≻의 이치는 원만하지가 않다.
미혹되었을 적에는 사람이 법을 따르지만, 깨치고 나면 법이 사람을 따른다. 삼라만상은 ≺공≻에 이르러서 끝나고 백 개 시내의 흐름은 바다에 이르러서 끝나며 온갖 성현은 부처에 이르러서 끝나고 십이부경(十二部經)과 오부비니(五部毘尼)와 사위타론(四圍陁論)은 마음에 이르러서 끝나는 것이다. 마음 이것은 총지(摠持)의 합친 집이요 만법의 근원이며 또한 이것은 큰 지혜 광이요 머무름이 없는 열반이다. 백천 가지의 이름은 다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고 했다.
먼저의 동산(洞山)화상의 심단결(心丹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약이 있으니 그 이름은 심단(心丹)이다
번뇌화로 속에서 해를 두고 불리었다
그의 변하지 않는 태(胎) 안의 빛깔을 아느냐
빛나는 광명이 대천(大千)에 두루하다.

법 눈이 열리면 털끝만큼 보이나
범부ㆍ성인을 찰나에 변화시킨다
진짜 가짜 알아야 공용(功用)을 이루리니
언제나 단련(鍛鍊)하며 보라.

형상이 없어 모나거나 둥글지 않나니
말 속엔 물건 없되 물건 속에서 말한다
마음 있어 작용하면 참된 작용 어기나
뜻이 없이 선(禪)에 두면 선 아님이 없다.

소멸도 없고 생김도 없되
삼라만상의 모두가 부린다
고을 토지 막론하고 가져오기만 하라
이 화로 속에 들면 옳지 않음이 없다.

한 뜻도 없는 것이 나의 뜻이요
한 지혜도 없는 것이 나의 지혜며
한 맛도 없는 것이 온통 다 기이하다.
빛깔은 안 바뀌나 알기가 어렵고
다시 한 물건도 없는 데서 나타나나니
한 물건으로 다른 것을 억누르지 말라
체성이 진공(眞空)에 계합되면 단련할 것 아니다.

먼저의 조산(曹山)화상이 이르되, “부처와 마음은 담장ㆍ벽ㆍ기와ㆍ조약돌 그것이다는 것은, 또한 성품 자리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본체의 온전한 공[體全功]이라 일컫기도 하며 또한 무정(無情)이 설법을 이해한다고 하기도 한다. 만일 있음[有]을 알아 이 속에서 언변(言辯)이 없는 곳을 얻으면 10방의 국토와 산하 대지와 돌ㆍ벽ㆍ기와ㆍ조약돌ㆍ허공과 허공 아닌 것과 유정ㆍ무정ㆍ풀ㆍ나무며 우거진 숲이 통틀어 하나의 몸이 되리니, 수기를 얻었다[得記]고 부르고 또한 한 글자 법문[一字法門]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총지 법문(摠持法門)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한 티끌 한 생각[一塵念]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같은 길[同轍]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일 이 성품 자리가 있음을 모르면, 모든 부처님의 천 가지 깨우침도 얻을 수 없고 만 가지 비유도 이룩되지 아니한다. 천 성인 만 성인이 모두 이 속에서 나왔음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10방의 박가범(薄伽梵)의 하나의 길인 열반의 문이다’”고 했다.
영변(靈辯)화상이 이르되, “무릇 한 마음은 불가사의하다. 미묘한 이치는 일정한 모양이 없고 그때그때 응하면서 작용하므로 일정하다고 고집할 수가 없다. 경에서 이르되, ‘모든 현인ㆍ성인은 모두가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면서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으므로써 처소 따라 이름이 붙여지나니, 마지막에는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한다’고 했다.
이 마음은 온갖 것을 파괴할 수도 있고 온갖 것을 이룩할 수도 있다. 때문에, ‘온갖 법 이것은 모두 불법이다’고 했고, 마음이 하늘을 만들고 마음이 사람을 만들고 마음이 귀신ㆍ짐승ㆍ지옥 등을 만드는 것이니, 모두가 마음으로 하는 바다. 좋거나 나쁜 것도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고 반드시 생겨야 하는 것도 역시 할 수가 있고 반드시 생기지 않아야 하는 것도 역시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걸림이 없다는 이치이다.
지금의 온갖 하는 일인 가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것도 이것은 마음의 모양일 뿐이니, 마음 모양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참 모습[實相]이라고 하며, 본체는 변동이 없으므로 역시 여래(如來)라고 하다. 여(如)란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없는 것 가운데서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가운데서 없는 것을 나타내므로, 역시 신변(神變)이라 하기도 하고 신통(神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모두가 한 마음의 작용이며, 처소 따라 차별되지만 이치가 많다. 하나 가운데서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음 가운데서 하나를 아나니, 그 서로서로가 나고 일어남을 분명히 알면 장차 두려움 없음을 이루리라.
또 동방에서는 바른 선정에 들었다가 서방에서는 선정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온갖 것이 마음일 뿐임을 환히 알면, 곧 하나의 법도 뜻에 마땅할 것이 없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도 없어지리니, 곧 생사에 두렵지 아니해서 온갖 곳이 모두 해탈이 된다. 때문에 ‘장차 두려움 없음을 이루리라’고 한다.
가령 마음 밖에는 온갖 경계의 법이 있다 해도 역시 갖가지 마음의 허망한 생각인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제 성품도 없고 그 자체는 본래가 ≺공≻하여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고 했다.
먼저의 운거(雲居)화상이 이르되, “불법에 어떠한 여러 일이 있는가. 수행과 증득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마음 이것이 부처인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語] 모를 것은 근심하지 말라. 이러한 일을 얻고자 하면 모름지기 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 무엇을 근심할 것이냐. 만일 이러한 일이라 한다면 어렵지가 않다.
예로부터 선덕(先德)은 순박해서 진리에 맡기고 원래가 재주가 없으므로, 설령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고 물으면, 때로는 ‘단지요 벽돌이요 나무대기니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모두가 중요한가 하면, 원래 다른 이는 근본인 발밑[脚下]이 충실해서 힘이 있는지라 이것이 곧 불가사의한 사람으로서 흙을 쥐어도 금이 될 것이나 만일 이러한 일이 없다면 충분하게 설명해도 더부룩히 난 꽃과 많이 모여 있는 비단과 비슷해서 곧장 ‘나는 방광을 하고 땅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해도 세간에 대해 허물이 없을 것이요 설명을 다하여도 멍청한 사람이라 온통 믿어 받지 않으리니, 원래가 자기의 발 밑이 텅 비었고 힘이 없어서이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운거화상은 물외(物外)의 종사(宗師)로서 이 땅에서는 일곱 번이나 태어나 선지식이 되었으며 도덕이 고매하고 지혜 바다가 깊었으며 큰 자비를 갖추었고 언제나 천의 대중들이 꽉 차 있었다.
대중들에게 말한 “다만 마음 이것이 부처인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 모를 것을 근심하지는 말라”고 한 것은, 지금의 학인들이 한결같이 밖으로만 구하고 대승(大乘)의 말만을 배웠으므로 근본으로 돌아가 안에서 스스로가 마음을 관하여 천진(天眞)의 부처를 분명히 보지 못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이 마음의 부처를 분명히 안다면 곧 저절로의 지혜[自然智]와 스승 없는 지혜[無師智]가 앞에 나타나겠거늘, 어찌하여 번거롭게 밖에서 배울 것인가.
마치 “문으로부터 들어간 이는 보배가 아니다”고 한것과 같고, 또 이르되,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 곧 빈궁하지만 땅으로부터 솟아나오면 도리어 부하고 귀하다”고 했다. 만일 마음 땅으로부터 솟아나온 지혜의 보배라면 어떻게 다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르되, “그지없는 광”이라고 했다.
다만, 마음의 진실을 얻기만 하고 근본인 발빝이 진실해지기만 한다면, 저절로 나오는 말이 모두가 실상(實相)과 상응하게 되고 그 말끝에 사람의 생사를 구제하며 범부를 변화시켜 성인을 만들고 조약돌을 잡으면 금이 되며 있다고 말해도 되고 없다고 말해도 되어서 구절마다 모두가 언교(言敎)를 이루겠지만, 만일 마음 속이 진실해지지 못했으면 원만한 믿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연히 헛되고 부황한 데에 맡겨 스스로가 속게될 뿐이다. 가령 변설이 종횡 자재해도 미친 지혜[狂慧]만 더 불리고 설령 설법을 하게 되어 하늘꽃이 내린다 해도 돌이 머리를 끄덕이리니, 일이 만일 진실하지 않다면 온통 요망한 허깨비가 되리라.
그런 까닭에, 지공(志公)이 운광(雲光) 법사가 법화경(法華經)을 강할 때 감응으로 하늘꽃이 내리는 것을 보고 이르되, “이것은 교조(齩蚤)의 이치로다”고 했으니, 이야말로 선성(先聖)의 진실한 말씀이다. 실로 후학을 위한 본보기[龜鏡]이니, 뼈 속 깊이 새겨야 하고 큰 띠에 다 적어 두어야 하리라.
이제 두루 찾아서 드날렸으니, 깊이 뜻함이 있으리라.
044_0523_a_01L宗鏡錄卷第九十八 茂慧日永明寺主智覺禪師 延壽 集志公和尚偈云頓悟心原開寶藏隱顯靈蹤現眞相獨行獨坐常巍巍百億化身無數量縱令畐塞滿虛空看時不見微塵相可笑物空無比況口吐明珠光晃晃尋常見說不思一語標宗言下當 龐居士頌云萬法從心起心生萬法生生生不了有來去枉虛寄語修道人空生有不生如能達此理動出深坈 寒山子詩云男兒大丈夫事莫莽鹵徑直鐵石心直取菩提路邪道不用行行之必辛苦不要求佛果識取心王主懶瓚和尚歌云莫謾求眞佛眞佛不可見性及靈臺何曾受熏練心是無事心面是孃生面劫石可移動箇中無改變又云吾有一絕慮忘緣巧說不得只用心傳更有一語無過直與細於毫末大無方所本自圓成勞機杼 騰騰和尚歌云修道道無可修問法法無可問迷人不悟色空達者本無逆八萬四千法門至理不過方寸煩惱正是菩提淨華生於泥糞識取自家城邑莫謾遊他州郡 高僧釋法喜臨遷化時告衆云三界虛妄但是一心端坐而卒 高僧釋靈潤云捨外塵邪執得意言分別捨唯識想得眞法界前觀無相捨外塵相後觀無生捨唯識想又常與法侶登山遊觀野火四合衆竝奔散唯潤安行如常顧陟語諸屬曰心外無火火實自心謂火可逃無由免火及火至潤潛然自斂 高僧釋法空入臺山幽居每有淸聲召曰空禪如是非一自後法空知是自心境界以法遣之遂乃安靜初以禪修終爲對礙遂學大乘離相從所學者竝以此誨之以法爲親以法爲侶 高僧釋靖邁臨終云心非道外行在言前言畢坐蛻高僧釋通達因以木打塊塊破形消旣睹斯變廓然大悟心迹 高僧釋轉明凡有所諮學者常以平等唯心一法志而奉之高僧釋道英入水臥雪而無寒苦如是隨事以法對之縱任自在不以爲難良由唯識之洞曉心腑外事之質豈得礙乎常講起信至心眞如門奄然入定 高僧釋道世云勤勇懺悔者雖知依理須知心妄動遠離前經云譬如㲲花千斤不如眞金一兩喩能觀心强卽滅罪强 伏阤禪師云籍教明深信含生同一眞性凡聖一路堅住不移不隨他教與道冥符寂然無爲名爲理入高僧釋智通云若夫尋近大乘修正觀者微塵之本際許一念之初原便可荊棘播無常之音梟獍說甚深之法十方淨土未必過此矣 高僧釋曇遂每言三界虛妄但是一心追求外境未悟難息 高僧解脫和尚依華嚴作佛光觀於淸宵月夜光中忽見化佛說偈云諸佛秘密甚深法曠劫修行今乃得若人開明此法門一切諸佛皆隨喜脫和尚乃禮拜問云此法門如何開示於人化佛遂隱身不現空中偈荅云方便智爲燈照見心境界欲知眞實法一切無所見太原和尚云夫欲發心入道先須識自本心若不識自本心如狗逐塊非師子王也善知識直指心者卽今語言是汝心擧動施爲更是阿誰除此之外更無別心若言更別有者卽如演若覓頭經云信心淸淨卽生實相經云無依是佛母佛從無處生 天皇和尚云只今身心卽是性身心不可得卽三界不可得乃至有性無性摠不可得無佛無衆無師無弟子心空三界一切摠空以要言三界內外下至螻蟻蠢動之者悉在一塵彼此咸等一一皆如是各各不相妨一切法門千般萬種只明見性更無餘事興善和尚云從上已來祖佛相傳一心之法以心印心不傳餘法初祖指一言以直說如龍吐水至津津滿至河乃至大海龍是水之源以知如今已後學人相傳一心之法是簡要說而喚心時不得別覓佛當佛時不得更求心是以若人信自心是佛此人所有言說當能轉法輪若人不信自心是佛此人所有言說皆是謗方等大乘所以經云性外得菩提譬如壓砂求油不是油正因顒禪師有問涅槃明衆生卽佛性佛性卽衆生但以時異有淨不淨未審非情亦是衆生不經云文殊問金色女汝身有五陰十二入十八界不女言如我身有五陰十二入十八梵網經云一切地水是我先身一切火風是我本體又依正二身互相依立華嚴經云一切法無相是則佛眞體經明若計靈智之心是常色是敗壞無常者則外道斷常之見華嚴明衆生界卽佛界佛界卽法界法界之更無別法乃至萬法雖異其體常同若不迷於所同體用常無有二無二之旨蓋出世之要津一念相應不隔凡成聖矣 臥輪禪師云詳其心性湛若虛空本來不生是亦不滅何須收捺但覺心起卽須向內反照心無有根本卽無生處無生處故心卽寂靜無相無爲 南泉和尚云然燈佛道了也若心想所思出生諸法虛假合集彼皆不實何以故心尚無有何所出生若取諸法猶如分別虛空如人取聲安置篋中亦如吹網欲令氣滿又云如今但會一如之理直下修行又云但會無量劫來性不變卽是修行汾州無業和尚初問馬祖三乘至理粗亦硏常聞禪師卽心是佛實未能了伏願指示馬祖曰卽汝不了底心卽是更無別物不了時是迷了時是悟亦猶手作拳拳作手也又問如何是祖師西來密傳心印祖曰大德正鬧在且去別時來一足始跨門限祖云德便卻迴頭祖云是什麽遂豁然大悟示徒云祖師來此土觀其衆生有大乘根性唯傳心印印汝諸人迷情得之者卽不論凡之與愚之與智多虛不如少實大丈夫兒不如直下休歇去好頓息萬緣截生死流迥出常靈光獨照物類不拘巍巍堂堂三界獨步何必身長丈六紫磨金輝項佩圓光舌相長若以色見我是人行邪道設有眷屬莊嚴不求而自至山河大地不礙眼光一聞千悟獲大摠持又臨終告衆云汝等見聞知覺之與虛空齊壽猶如金剛不可破壞一切諸法如影如響無有實者經云唯此一事實餘二卽非眞言訖奄然而化 眞覺大師云心性靈通動靜之原莫二眞如絕慮緣計之念非殊惑見紛馳窮之則唯一寂靈原不鑑之則乃千差千差不同法眼之名自立一寂非異慧眼之號斯存理量雙消佛眼之功圓著是以三諦一境法身之理恒淸三智一心般若之明常照境智冥合解脫之應機非縱非橫圓伊之道玄會故知三德妙性宛爾無乖一心深廣難思何出要而非路以卽心爲道者可謂尋流而得源矣神秀和尚云一切非情以是心等現故染淨隨心有轉變故無有餘性要依緣故謂緣生之法皆無自性空有不俱卽有情正有時情必空故他卽自故何以故他無性以自作卽有情修證是非情修證也經云其身周普等眞法界旣等法界非情門空全是佛故又非情正有時有情必空故自卽他故何以自無性以他作故卽非情無修無證是有情無修無證也善財觀樓閣時徧周法界情門空全一閣故經云衆生不違一切剎不違一切衆生雖云有無同時分相斯在矣隋朝命大師融心論云圓機對教無教不圓理心涉事無事非理無事非理何亂而不無亂不定則定亂兩亡無事非理故事理雙乃至雖離二邊非有邊而可離言亡四句實無句而可亡此處幽玄融心可會若以心融心非融心矣心常如實何所融也實不立心說融心矣 智達禪師心境頌云境立心便有心無境不生若將心繫境心境兩俱境心各自住心境性恒淸悟境心無起心境共行若迷心作境心境亂縱橫悟境心元淨知心境本淸知心無境性了境心無形境虛心寂寂心照境泠泠 甘泉和尚云欲發心入道先須識自本心心者萬法衆生之本三世諸佛祖十二部經之宗雖卽觀之不見其形應用自在所作無礙洞達分明了了無異若未識者以信爲先信者信何物心是佛無始無明輪迴生死四生六道受種種形只爲不敢認自心是佛若能識自心心外更無別佛佛外無別心乃至擧動施爲更是阿誰除此心外更無別心若言別更有者汝卽是演若達多將頭覓頭亦復如是千經萬論只緣不識自心若了自心本來是佛者一切唯假名況復諸三有則明鏡可以鑑容大乘可以印心又云求經覓佛不如將理勘若勘得自心本自淸淨不須磨瑩本自有不因經得何乃得知經云修多羅教如標月指若復見月了知所標若能如是解者念相應卽名爲佛 普岸大師云大道虛曠唯一眞心善惡勿思神淸物表更復何憂潙山和尚云內外諸法盡知不實從心化生悉是假名任他法性周流莫斷莫絕臨濟和尚云如今諸人與古聖何別你且欠少什麽六道神光未曾間歇若能如是秖是箇一生無事人欲得與祖佛不別但莫向外馳求你一念淸淨光是你屋裏法身佛你一念無分別光是你屋裏報身佛你一念差別光是你屋裏化身佛此三種身卽是今日目前聽法底人此三種是名言明知是光影德且要識取弄光影底人是諸佛本源是一切道流歸舍處你四大六根及虛空不解聽法說法是箇什麽物歷歷地孤明勿箇形段是這箇解說法聽法所以向你道向五陰身田內有無位眞人堂堂顯露無絲髮許間隔何不識取大德心法無形通貫十方在眼曰在耳曰聞本是一精明分成六和合心若不生隨處解脫灌溪和尚偈云五陰山中古佛堂毘盧晝夜放圓光箇中若了非同異是華嚴徧十方 石頭和尚云且汝心體離斷離常性非垢淨湛然圓滿凡聖齊等應用無方三界六道唯自心現水月鏡像有生滅耶汝能知之無所不備諸聖所以降靈垂廣述浮言蓋欲顯法身本寂令歸根耳黃蘖和尚云達磨西來唯傳一心法直下指一切衆生心本來是佛不假修行但今識取自心見自本性莫別求法云何識自心卽如今言語者是汝心若不言語又不作用心體猶如虛空相似實無相貌亦無方所亦不一向是無只是有而不見又云但悟一心更無少法可得此卽眞佛佛與衆生一心更無有不如言下自認取本法此法卽心心外無此心卽法法外無心 丹霞和尚云等保護一靈之物不是汝造作得不是汝詺邈得吾此地無佛無涅槃亦無道可修無法可證道不屬有無更修何法唯此餘光在在處則是大道 水潦和尚云若說一法十方諸佛收入一法中百千妙門在一毛頭千聖同轍決定不別普照十方猶如明鏡心地若明一切事盡皆看破從上已來以心傳心本心卽是法 仰山和尚云頓悟自心無相猶若虛空寄根發明卽本心具恒沙妙用無別所持無別安立卽本地卽本土大顚和尚云老僧往年見石頭和尚問曰那箇是汝心對云言語者是心被師喝出日卻問前日旣不是心除此之外何者是心師云除卻揚眉動目一切之事外直將心來對云無心可來師云汝先來有心何得言無無心盡同謗我時於言下大悟卽對云令某甲除卻揚眉動目一切之事和尚亦須除之師云我除竟對云將示和尚了也師云汝旣將示我心如何對云不異和尚師云關汝事對云本無物師云汝亦無物對云無物卽眞物師云眞物不可得汝心現量意旨如此也大須護持 三平和尚偈云此見聞非見聞無餘聲色可呈君箇中若了渾無事體用無妨分不分又偈云見聞知覺本非因當體虛玄絕妄眞見相不生癡愛業洞然全是釋迦身 安國和尚云經云應無所住而生其心無所住者不住色不住不住迷不住悟不住體不住用而生其心卽是一切處而顯一心若住善生心卽善若住惡生心卽惡現本心卽隱沒若無所住十方世界唯是一心信知風幡不動是心有檀越問和尚是南宗北宗荅云我非南宗北宗心爲宗又問和尚曾看教不荅云不曾看教若識心一切教看竟學人問何名識心見性喩如夜夢見好與惡若知身在牀上安眠全無憂喜卽是識心見性如今有人聞作佛便喜聞入地獄卽憂不達心佛在菩提牀上安眠妄生憂喜 歸宗和尚云卽心是佛徹底唯性山河大地一法所印大神呪眞實不虛是諸佛之本原菩提之根骨佛何者是卽今言下是更無別人經云如一色隨衆生見得種種名一切法唯是一法隨處得名 大悲和尚云能知自心性含於萬法終不別求念念功夫入於實相不見是義勤苦累劫亦無功夫草堂和尚云夫帝網未張千瓔焉覿宏綱忽擧萬目自開心佛雙照觀也心佛雙亡止也慧旣均亦何心而不佛何佛而不心心佛旣則萬境萬緣無非三昧也 百丈慧海和尚因撥火示潙山靈祐因茲頓悟百丈乃謂曰此暫時岐路經云欲見佛性當觀因緣時節時節旣至如迷忽悟似忘忽憶方省舊道己物不從他得是故祖師云悟了同未悟無心得無法秖是無虛妄凡聖等心本來心法元自備足是汝今旣爾善自護持又廣語問云見不又問見復如何見無二云無二不以見見於見若見更見爲前見是爲後見是經云見見之時見非是見所以云不行見法不行聞法不行覺法諸佛疾與授又云自心是佛照用屬菩薩自心是主宰照用屬客如波說水照萬有以顯功若能寂不存玄旨自然貫於今古如云神無照功至功常存又云如今欲得驀直悟解但人法俱泯俱絕俱空 盤山和尚云大道無中復誰前後長空絕迹何用量之空旣如是豈言哉心月孤圓光吞萬像光非照境境亦非存光境俱亡復是何物譬如擲劍揮空莫論及之不及斯乃空輪無迹劍刃非虧若能如是心心無知全人卽佛全佛卽人人佛無異始爲道矣 大梅和尚初問馬祖如何是佛卽汝心是如何是法亦汝心是祖無意耶汝但識取自心無法不備後住梅山示衆云汝等諸人應當各自明心達本勿逐其末但得其本其末自至汝等欲得其但識取汝心此心元是一切世間出世間法之根本但心不附一切善惡而生卽知萬法本自如如有學人問心外別無法耶祖佛是汝心生耳心是萬法之本豈別有法過於心耶釋曰如六祖云善惡都莫思量然得入心體湛然常寂妙用恒沙以諸佛是極善邊際衆生是極惡邊際以善惡收盡一切法故云若不思量全歸心體但有微毫之皆是思想心生如寒山子頌云萬機俱泯方見本來人泯之一字未必須泯以心外元無一法所見唯心如谷應自聲鏡寫我像秖謂衆生不達鼓動心機立差別之前塵空華起滅織無邊之妄想似焰水奔騰不復一心本源故令泯絕若入心體雖云湛然不落斷滅自然從體起用周徧恒沙又大梅云此心法門眞如妙理不增不減種種方便善能應用當知摠是此性本來具足不生不滅能知三世一切作用所以云我觀久遠猶若今常在於其中經行及坐臥 巖頭和尚於三界中有無唯自己知更無餘事但識自己本來面目喚作無依神蕩蕩地若道別有法有祖賺汝到底但向方寸中看迥迥明但無欲無依便得決了 高城和尚歌無相心能運耀應聲應色隨方照雖在方而不在方任運高低摠能妙尋無頭復無尾焰光運運從何起只者如今全是心心用明心心復爾不居方何處覓運用無蹤復無迹識取如今明覓人終朝莫謾別求的勤心學近叢林莫將病眼認華鍼說教本窮無相理廣讀元來不識心識取心了取境識心了境禪河靜若能了境便識心萬法都如闥婆影千頃和尚云一切衆生驢騾象馬蜈蚣蚰蜒十惡五逆無明妄念貪瞋不了之法竝從如來藏中顯現本來是佛只爲衆生從無始劫瞥起一念從此奔流迄至今日所以佛出世來令滅意根絕諸分別一念相應便超正豈用教他多知多解擾亂身心所以菩提光明不得發現汝今但能絕得見聞覺知物境上莫生分別隨時著衣喫飯平常心是此法甚難學人問和尚夜後無燈時如何師云悟道之人常光現前有什麽晝夜不見和尚光師云擬將什麽眼見學人人同將現在眼見師彈指云苦哉一切衆生根塵相涉從無始來認賊爲子至于今日被枷鎖汝將眼見意識分別擬求佛道卽是背卻本心逐念流轉如此之人對面隔越惟政和尚云古聖今聖其理齊焉昔日日日日照不兩鮮昔日風今日風鼓無二動滴之水潤焉大海之水潤焉又頌云一念得心頓超三界見無所見貪瞋爛壞牛頭山忠和尚學人問夫入道者如何用心荅曰一切諸法本自不生今則無滅汝但任心自在不須制止直見直聞直來直去須行卽行須住卽住此卽是眞道經云緣起是道知如實故又問令欲修道作何方便而得解脫荅曰求佛之人不作方便頓了心原明見佛性卽心是佛非妄非眞故經云正直捨方便但說無上道又問眞如妙法理智幽深淺識之徒如何得見荅曰汝莫謗佛佛不如是說一切諸法非深非淺汝自不見謂言甚若也見時觸目盡皆微妙何以高推菩薩別立聖人且如生公云非曰智深物深於智此傷不逮之詞耳汝莫揀擇法莫存取捨故云法無有比無相待故夫經者以身心爲義華嚴經云身是正法藏心爲無礙燈了諸法空名曰度衆生 夾山和尚云前無法意在目前不是目前法非耳目之所 大安和尚云汝諸人各自身中有無價大寶從眼門放光照破山河大地耳門放領覽一切善惡音聲六門晝夜常放光明亦名放光三昧汝自不識在四大身中內外扶持不教傾側兩腳牙子大檐得石二檐從獨木橋上過亦不教伊倒地且是什麽汝若覓毫髮卽不可見故志公云內外推尋覓摠境上施爲渾大有 長沙和尚偈云甚深最甚深法界人身便是心迷者迷心爲衆剎悟時剎海是眞心身界二塵元實相明達此號知音又學人問盡法界衆生識心最初從何而有偈荅云性地生心主心爲萬法師心滅心師滅方得契如如 龍牙和尚云夫言修道者此是勸喩之詞接引之語從上已來無法與人只是相承種種方便爲出意旨令識自心究竟無法可得無道可故云菩提道自然今言法者是軌持之名道是衆生體性未有世界早有此性世界壞時此性不滅喚作隨流之性常無變異動靜與虛空齊等喚作世間相常住亦名第一義亦名本際亦名心王亦名眞如解脫亦名菩提涅槃百千異號皆是假名雖有多名而無多體會多名而同一體會萬義而歸一心若識自家本心喚作歸根得旨譬如人欲得諸流水但向大海中求欲識萬法之相但向心中契會會得玄理擧體全眞萬像森羅一法所印 德山和尚云若有一塵一法可與汝執取生解皆落天魔外道只是箇靈尚無纖塵可得處處淸淨光明洞達表裏瑩徹又云汝莫愛聖聖是空名更無別法是箇炟赫靈空無礙自在不是莊嚴修證得從佛至祖皆傳此法而得出離 牛頭下佛窟和尚云若人不信一文殊說十方文殊一時說一佛涅槃一切諸佛俱涅槃何以故不達色根本故了色性無所有是本不此是住觀語非是卽事見根本若卽事見者只汝生老病身及無明婬怒是色根本事外無理故是以若了一色根本卽擧十方色同名爲一說一切說一涅槃一切涅槃當知色體無性性無不包又云雖同凡夫而非凡夫不得凡夫不壞凡夫謂別有殊勝在心外者卽墮魔網我今自觀身心實相作佛卽是見十方佛同行同證處佛身無漏戒定熏修五陰不縛不脫不敢有疑且如大品經云生不善五陰之身亦不縛不脫甚令人驚疑若向衆生五陰外別有諸佛解脫無有是只了衆生自性從本已來無有一法可得誰縛誰脫何得更有縛脫之異經云衆生與佛平等無有縛脫何得六道衆生沈淪得解脫衆生不了色心淸淨妄想顚倒不得解脫若知人法常空其中實無縛脫何觀行懺悔臨終免被業牽汝須深信諸佛所行所說處與我今日所行所說處無別乃至成佛尚不得涅槃相何況中間罪福妄業可得此是眞實正知正見眞實修行眞實懺悔但於行住坐臥不失此觀臨終自然失正念 佛窟下雲居和尚心境不二篇出世間俱不越自一念妄心而有一念纔起萬像分劑一念相生便成心境若非心境何得有念可見旣有所見之念又有能見之心將知念卽是境見卽是心所見之念便成色蘊能見之心便成四蘊經云五蘊是世一念具五蘊一一蘊中皆具五蘊故得一不礙多多不礙一所以心境交通互爲賓主經云境智互相涉入重重無盡卽是一塵含法界一一法皆徧也觀自一念動卽恒沙世界一時振動觀自一念常定卽六道衆生悉皆常定若諦了一念之體卽恒沙世界常現自心由迷一念卽境智胡越 大珠和尚心性無形卽是微妙法身心性體空卽是虛空無邊身示行莊嚴卽是功德法身此法身是萬化之本隨處立名智用無盡是無盡何者是法身心能生恒沙萬法故號法家之身經云一念心塵中演出恒沙偈人自不識眞法幻法各有種性不佛法無種應物而現若心眞也一切皆眞若有一法不眞眞義則不圓若心幻也一切皆幻有一法不是幻幻法則有定若心空也一切皆空若有一法不空空義則不圓迷時人逐悟罷法由人森羅萬像至空而極百川衆流至海而極一切賢聖至佛而極十二部經五部毘尼四圍陀論至心而極心是摠持都院萬法之原亦是大智慧藏無住涅槃百千名號皆是心之異名 先洞山和尚心丹訣云吾有藥號心丹煩惱爐中鍊歲年知伊不變胎中色照耀光明徧大千開法眼睹毫能變凡聖剎那間要知眞假成功用一切時中鍛鍊看無形狀勿方圓言中無物物中有心用卽乖眞用無意安禪無不禪亦無滅亦無起森羅萬像皆驅使不論州土但將入此爐中無不是無一意是吾意無一智是吾智無一味無不異色不變轉難辯更無一物於中現莫將一物制伏他體合眞空非鍛鍊 先曹山和尚云古佛心牆壁瓦礫是者亦喚作性地亦稱體全功亦云無情解說法若知有這裏得無辯處十方國土山河大地石壁瓦礫虛空與非空有情無情草木叢林通爲一身喚作得記亦云一字法門云摠持法門亦云一塵一念亦喚作同轍是性地不知有諸佛千般喩不得萬種況不成千聖萬聖盡從這裏出從來不變異故云十方薄伽梵一路涅槃門 靈辯和尚云夫一心不思議妙義無定相應時而用不可定執經云一切賢聖皆以無爲法而有差別用有差別隨處得名究竟不離自心此心能壞一切能成一切故云一切法皆是佛法作天心作人心作鬼神畜生地獄皆心所爲好惡皆由心要生亦得要不生亦得卽是無礙義只今一切施爲行住坐臥卽是心相相無相故名實相體無變動亦名如來如者不變不異也無中現有有中現無亦曰神變亦曰神通摠是一心之用隨處差別卽多義一中解無量無量中解一了彼互生起當成無所畏又東方入正定西方從定出若了心外無法一切唯心卽無一法當情無有好惡是非卽不怖生死一切處皆是解脫故云當成無所畏縱然心外有一切境法亦從自心妄想因緣而生無有自性其體本空如幻如 先雲居和尚云佛法有什麽多事得卽是但知心是佛莫愁佛不解語欲得如是事還須如是人若是如是人愁箇什麽云如是事卽不難自古先德淳素任眞元來無巧設有人問如何是道或時荅㼾甎木頭作麽皆重元來他根本腳下實有力卽是不思議人把土成金若無如是事饒你說得蔟華蔟錦相似直道我放光動地世間更無過盡說卻了合殺頭人摠不信受元來自家腳下虛無力釋曰雲居和尚乃物外宗師土七生爲善知識道德孤邁智海泓深具大慈悲常盈千衆所示徒云但知心是佛莫愁佛不解語者此爲今時學人一向外求但學大乘之語不能返本內自觀心明見天眞之若了此心佛卽自然智無師之智現前煩外學如云從門入者非寶又云從天降下卽貧窮從地涌出卻富貴若從心地涌出智有何窮盡故云無盡之藏但若得心眞實根腳下諦去自然出語盡與實相相應下救人生死變凡爲聖捉礫成金道有亦得道無亦得句句悉成言教若也心中未諦圓信不成空任虛浮只成自誑直饒辯說縱橫只增狂慧設或說得天華墜石點頭事若不眞摠成妖幻所以志公見雲光法師講法華感天華墜云是齩蚤之義是以先聖誠言實爲後學龜鏡可以刻骨可以書紳今徧搜深有意矣宗鏡錄卷第九十八音義芳逼反道滿也 晃胡廣反明也光也 莽莫補反 鹵郞古反藏旱反 陟竹力反 靖疾郢反立也 邁莫話反遠也往也舒芮反蛻皮也 腑方巨反肺腑也 㲲徒協反細毛布 梟古堯反居度反 曇徒含反雲右 螻落侯反 蟻魚倚反尺尹反 壓烏甲反鎭也 顒魚容反 捺奴曷反手案也苦恊反 汾符分反 巍語韋反 瑩烏定反瑩飾也盧皓反 覿徒歷反見也 賺佇陷反錯也 驢力居反落戈反 蜈五胡反 蚣古紅反 蚰以周反以然反 炟當割反火起也 赫呼格反火色也 ▼(穴/泓)烏宏反水深也五巧反 蚤子皓反狗蚤也 搜所鳩反求也 刻苦德反失人反大帶也戊申歲分司大藏都監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