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근원을 단번에 깨치면 보배 광이 열리고 숨음 드러남의 신령한 자취는 참 모습을 내며 혼자 가고 혼자 앉되 늘 뛰어나나니 백억의 화신(化身)은 수량도 없네.
설사 꽉 막혀 허공에 찼다 해도 볼 적에 작은 티끌 모양도 보이지 않으니 우습다 물건이 ≺공≻이라 비교할 것 없고 이에서 뱉는 명주(明珠) 빛이 번쩍거리며 평소에 보고 말을 하되 불가사의하고 한 마디로 종(宗)을 표시하면 그 말 끝에 만난다.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에서 말했다.
만법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기나니 생기고 생김이 끝없이 있으면 오고 가며 억울하게 허탕만 치리라. 도를 닦는 사람에게 말을 전하노니 ≺공≻에서는 생기고 존재에선 안 생긴다 만일 이 이치 통달할 수 있으면 꼼짝 않고도 깊은 구덩이서 나오리라.
한산자(漢山子)의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남아 대장부야 일을 짓거든 소홀하게 하지 말라 곧장 철썩 같은 마음 지니어 보리(菩提)의 길을 바로 취하라.
삿된 길은 가서는 안 되며 가게 되면 반드시 모진 고통 있으리라 부처의 과위도 구할 필요 없나니 심왕(心王)인 주인을 알고 취하라.
나찬(懶瓚)화상은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질없이 참 부처를 구하지 말라 참 부처는 볼 수 없는 것 묘한 성품이요 신령한 대[靈臺]거늘 어찌 수련의 영향을 받으랴.
마음 이것은 일 없는 마음이요 얼굴은 어머니가 낳은 얼굴이니 겁의 돌[劫石]은 움직일 수 있지만 이 속에 것은 고치거나 변함이 없네.
나에게 한 마디의 말씀이 있는데 생각이 끊기고 반연을 잊었으며 교묘한 말로도 얻지 못하나니 마음으로써만 전할 뿐이네.
다시 한 마디의 말이 있으니 곧장 일러 주는 것만 못하며 털끝보다도 가늘고 크기는 방소가 없어 본래부터 뚜렷이 이루어져서 아무런 손질을 빌리지 않네.
등등(騰騰)화상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도를 닦되 도는 닦을 것이 없고 법을 묻되 법은 물을 것이 없다 미혹한 사람은 물질과 ≺공≻을 모르지만 깨달은 이에겐 본래 거슬림과 좇음이 없네.
8만 4천 가지 법문의 지극한 이치가 마음에 있나니 번뇌 그것은 바로 보리요 깨끗한 꽃은 흙탕에서 난다 자기 집 성읍(城邑)을 알려 할지언정 부질없이 딴 고을을 쏘다니지 말라.
고승(高僧) 석법희(釋法喜)가 임종(臨終) 때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3계(界)는 허망하며 이 한 마음일 뿐이다”고 하고, 단정히 앉아서 갔다. 고승 석영윤(釋靈潤)이 이르되, “바깥 대경의 삿된 고집을 버리고 뜻 속 말의 분별[意言分別]을 얻으며, 유식(唯識)의 생각을 버리고 참된 법계를 얻을지니, 먼저 모양 없음을 관하여 바깥 대경의 모양을 버리고 나중에 생김 없음을 관하여 유식의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또, 일찍이 도반(道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유람하고 있었는데, 들에서 난 불이 사방으로 타 들어오자 다른 이들은 다 흩어지며 달아났지마는 영윤스님만은 편안히 가는 것이 마치 늘 다니던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여러 권속들에게 말하기를, “마음 밖에는 불이 없고 불은 실로 자기의 마음이다. 불에서 도망할 수는 있으나 불을 면하려 할 것은 없나니, 불은 습기 있는데 이르면 저절로 사그라지느니라”고 했다. 고승 석법공(釋法空)은 오대산(五臺山)의 깊숙한 데로 들어가 살면서 매양 청아한 소리로 부르기를, ‘공선(空禪)아’ 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한 번만이 아니었다. 그 뒤부터 법공은 그것이 자기 마음의 경계임을 알고 법을 버려 없애자 마침내 편안하고 고요하여졌다. 처음은 선(禪)으로써 닦고 나중에는 대경의 장애를 다스리다가 드디어는 대승을 배워 모양을 여의었고, 따라 배우는 이들에게도 다 같이 이로써 가르쳤으며, 법으로써 친한 이를 삼고 법으로써 벗을 삼았다. 고승 석정매(釋靖邁)는 임종할 때에 이르기를, “마음은 도(道)의 밖이 아니고 행은 말 앞에 있도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앉아서 갔다. 고승 석통달(釋通達)은, 나무로 흙덩이를 때리다가 흙덩이가 부서지면서 형상이 소멸되는 이런 변화를 보고서 탁 틔어 마음의 자취를 크게 깨쳤다. 고승 석전명(釋轉明)은, 무릇 묻는 학자(學者)가 있으면 언제나 평등한 마음일 뿐인 한 법에 뜻을 두어서 받들게 했다. 고승 석도영(釋道英)은, 물에 들어가거나 눈 위에 누워 있으면서도 추워하는 고통이 없었고 이렇게 일을 따라 법으로 대(對)하면서 마음대로 자재하였으나 고난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진실로 유식의 뜻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을 환히 꿰뚫어 알았거늘, 바깥일인 물질이 어찌 장애가 되었겠는가. 기신론(起信論)을 강하다가 심진여문(心眞如門)의 대목에 이르자 갑작스럽게 정(定)에 들었다. 고승 석도세(釋道世)가 이르되, “부지런하고 용맹스럽게 참회하는 이는 비록 도리에 의지할 줄은 알았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마음의 허망한 동요임을 알고 앞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 경에서 이르되, ‘마치 고운 비단 천 근(斤)이라도 진금 한 량(兩)보다는 못하다’고 했나니, 마음을 힘써 관하는 것이 곧 죄를 힘써 소멸시킨다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고 했다. 복타(伏陁)선사가 이르되, “교(敎)를 빌려서 종(宗)을 밝히되, 종생은 동일한 참 성품이요 범부와 성인은 한 길이라는 것을 깊이 믿고 굳게 머물러 옮아가지 않으면서 다른 교법을 따르지 아니하면, 도(道)와 더불어 명합되고 고요하여지면서 함이 없어지리니, 진리에 든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고승 석지통(釋智通)이 이르되, “만일 대승을 찾고 가까이하면서 바른 관(觀)을 닦는 이가 작은 티끌만큼의 본제(本際)를 살피고 한 생각의 첫 근원을 헤아린다면 문득 가시나무가 무상하다는 음성을 퍼뜨리고 올빼미가 심히 깊은 법을 설할 수 있으리니, 시방의 정토도 반드시 여기서는 더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고승 석담수(釋曇遂)가 늘 말하기를, “삼계는 허망하고 이 한 마음일 뿐이다. 바깥 경계를 따라 구하면 아직 깨치지도 못하고 쉬기도 어려우리라”고 했다. 고승 해탈(解脫)화상은 화엄(華嚴)에 의하여 불광관(佛光觀)을 짓고 있는데, 청명한 달밤에 광명 가운데서 갑자기 변화한 부처님이 나타나면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님들 비밀하고 심히 깊은 법을 오랜 겁에 수행타가 이제야 얻었나니 사람이 이 법문을 열고 밝힌다면 온갖 부처님들 모두 따라 기뻐하리라.
해탈화상은 예배하고는 물었다. “이 법문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겠나이까.” 변화한 부처님은 마침내 몸을 숨기며 보이지 않으면서 공중에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방편의 지혜로 등불을 삼아 마음의 경계를 비추어 보나니 진실한 법을 알고자 하면 온갖 것이 보이는 바 없을 것이다.
태원(太原)화상이 이르되, “무릇 발심하여 도에 들고자 하면 먼저 자기의 본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자기의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것과 같나니, 사자왕이 아니다. 선지식이 곧장 마음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지금 말을 하는 것이 너의 마음이니, 거동하고 하는 일이 이 누구겠느냐. 이것을 제외하면 다시는 따로 마음이 없다. 만일 따로 있다고 한다면 마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찾는 것과 같다.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청정함을 믿으면 곧 참 모습[實相]이 생긴다’고 했다. 또 경에서 이르되, ‘의지함 없는 이것이 부처의 어머니요 부처는 없는 곳에서 생긴다’고 했다”고 했다. 천황(天皇) 화상이 이르되, “지금의 몸과 마음 그대로가 성품일 뿐이니, 몸과 마음은 얻을 수도 없고 곧 삼계도 얻을 수가 없다. 또한 성품이 있고 성품이 없음은 모두 다 얻을 수 없으며 부처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나니, 마음도 ≺공≻하고 삼계도 모두 ≺공≻하다. 요점을 들어 말하건대, 삼계의 안팎에서부터 개미의 꿈틀거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티끌 안에 있으며, 저것과 이것들이 모두 다 같다. 하나하나가 다 그와 같되 저마다 서로가 방애하지 아니하며, 온갖 법문의 천 가지 만 종류가 다만 성품 보는 것만을 밝혔을 뿐이요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다”고 했다. 흥선(興善)화상이 이르되, “위로부터 조사와 부처가 서로 하나의 마음을 전하였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印)을 찍은 것이요 그 밖의 법은 전하지 않았다. 초조(初祖)가 곧장 말한 것은, 마치 용이 물을 토하면 나라에 이르고, 나루가 가득 차면 강물에 이르고, 이리하여 큰 바다까지 이르게 됨과 같나니, 용은 바로 물의 근원이다. 지금 이후의 학인들은 한 마음의 법을 서로서로 전하는 것 이것이 다 간요(簡要)한 설명임을 알면서, 마음이라 할적에는 따로 부처를 찾지 말 것이요 부처일 때에는 마음을 구하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믿는다면 이 사람의 온갖 하는 말은 법 바퀴를 굴리는 것이요 ,만일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온갖 하는 말은 다 방등(方等)의 대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성품 밖에서 보리를 얻는데 마치 모래를 짜며 기름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했나니, 이것이 기름이 되는 바른 인[正因]이 아니다”고 했다. 옹(顒)선사가 문답을 두면서 “물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중생이 곧 불성이요 불성이 곧 중생이다≻고 하셨는데, 시기를 달리하므로써 청정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비정(非情)도 역시 중생인가.’ 대답했다. ‘경에 이르되, 문수가 금색녀(金色女)에게 물었다. ≺그대 몸에도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가 있는가.> 여인이 대답했다. ≺나의 몸에도 5음ㆍ12입ㆍ18계가 있습니다≻고 했다. 범망경(梵網經)에서 이르되, ≺온갖 땅과 물은 바로 나의 전생 몸이요, 온갖 불과 바람은 바로 나의 본체다≻고 했다. 또 의보(依報)ㆍ정보(正報)의 두 몸은 서로서로가 의지하여 성립된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온갖 법의 모양이 없는 이것이 곧 부처의 참 본체다≻고 했고, 경에서는 ≺만일 신령한 지혜의 마음 이것이 항상 한 물질이요, 이것이 망그러지는 무상한 것이다고 헤아리면 곧 외도의 단견(斷見)ㆍ상견(常見)이다≻고 했다. 화엄에서도 ≺중생 경계가 곧 부처의 경계요 부처의 경계가 곧 법 경계이니, 법 경계 이외에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고 했다. 또한 만법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본체는 언제나 같다. 만일 같아지는 체성과 작용에서 헷갈리지 아니하면 항상 둘이 없나니, 둘이 없다는 종지는 대개 세간을 벗어나는 요긴한 나루이어서 한 생각과 상응하여 범부와 동떨어지지 않고 성인이 된다’”고 했다. 와륜(臥輪)선사가 이르되, “그 심성을 살피건대 잔잔하기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본래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않거늘, 어찌 거두며 누르겠는가. 다만 마음이 일어나는 것만을 깨달아서 곧 안을 향하여 마음 근원을 도리켜 비추어라. 근본도 없고 곧 나는 데도 없으며 나는 데가 없기 때문에 곧 고요하여져서 모양도 없고 함도 없다”고 했다. 남천(南泉)화상이 이르되, “연등불(燃燈佛)도 말씀하여 마쳤다. 만일 마음으로 생각하여 모든 법을 출생하는 것이라면 거짓이 합치고 모인 것이라 그것은 다 진실하지 않다. 왜냐 하면, 마음조차도 없나니 어디서 출생하겠는가. 만일 모든 법을 취한다면 마치 허공을 분별하는 것과 같고 마치 사람이 소리를 가져다 상자 안에다 놓아두는 것과도 같으며 마치 그물에다 공기를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지금에 일여(一如)의 이치만을 알아 곧장 수행하여라”고 했고 또 이르되, “한량없는 겁 동안에 성품은 변하지 않았던 것만을 알라. 그것이 곧 수행이니라”고 했다. 분주(汾州) 무업(無業)화상이, 처음마조(馬祖)에게 물었다. “3승의 지극한 이치를 대강이나마 연구도 하다가 늘 선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다’고 함을 듣고는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지시하여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곧 그대의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요 다시는 다른 물건이 없다. 알지 못했을 때는 미혹된 것이요 알았을 때에는 깨친 것이니, 역시 손이 주먹이 되고 주먹이 손이 되는 것과 같느니라.”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와서 은밀하게 전한 심인(心印)입니까.” “대덕이여, 지금은 시끄러우니 잠시 갔다가 다른 때에 오라”고 하였으므로, 한 발을 문지방에 막 걸치는데 조사가 말했다. “대덕이여, 얼른 머리를 돌려 보라”고 하고는 조사가 “이것이 무엇인가”고 하자, 마침내 크게 환히 깨쳤다. 도제(徒弟)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사께서 이 땅에 와서 중생들을 관찰했더니 대승의 근성이 있었으므로 오직 심인만을 전하여 그대들 여러 사람의 헷갈려 있는 뜻에 도장을 친 것이다. 그것을 얻었다면 범부와 성인이니 어리석다거나 지혜롭다고 논하지 않겠지만, 많이 빈 것은 적게 찬 것만은 못하다. 대장부들아, 곧장 쉬어버리는 것이 좋느니라. 단번에 만 가지 인연을 쉬면, 생사의 흐름이 끊어져서 통상의 격식을 멀리 벗어나 신령한 광명이 홀로 비추고 물건들에 구애 받지 아니하며 우뚝 뛰어나 당당하게 3계를 홀로 거닐겠거늘, 하필 키가 한 길 여섯 자가 되어 자마(紫磨) 금빛으로 빛나고 목에 원광(圓光)을 차며 혀 몸매가 길고 넓을 것이 있겠는가. 만일 빛깔로 나를 본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설사 권속의 장엄이 있다 해도 구하지 않는데 저절로 이른 것이며, 산하(山河)ㆍ대지(大地)는 눈빛을 장애하지 않고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쳐서 큰 총지(摠持)를 얻으리라”고 했다. 또 임종 때에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의 보고 듣고 알고 깨닫는 성품은 허공과 수명이 같다. 마치 금강과 같아서 파괴할 수 없지만, 온갖 모든 법은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아서 진실한 것이 없다. 경에서 이르되,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둘은 곧 진실이 아니다’고 했다”고 하고, 말을 마치면서 갑작스럽게 갔다. 진각(眞覺)대사가 이르되, “무릇 심성은 신령하게 통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의 근원은 둘이 없으며, 진여는 생각이 끊어져서 반연하거나 헤아리는 생각이 다르지 않다. 미혹된 소견이 분주히 내달리나 끝가지 추궁하면 하나의 고요함 뿐이요, 신령스런 근원은 형상이 아니나 그를 비추면 천 가지로 차별된다. 천 가지 차별이 같지 않으므로 법안(法眼)이란 이름이 저절로 붙여지고, 하나의 고요함은 다른 것이 아니므로 혜안(慧眼)이란 이름이 있게 되며, 이(理)와 양(量)이 함께 사라지므로 불안(佛眼)의 공덕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이치[三諦]가 한 경계이어서 법신의 이치는 항상 청정하고, 세 가지 지혜[三智]가 한 마음이므로 반야의 광명이 항상 비치며, 경계와 지혜가 명합하므로 해탈의 감응이 근기를 따르고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므로 원이(圓伊)의 도가 현묘하게 모인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다. 세 가지 덕[三德]의 묘한 성품이 뚜렷하여 어긋남이 없고, 한 마음이 깊고 넓어서 생각하기 어렵거늘 어찌 벗어남에서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에 즉(卽)하여 도를 구하는 이는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는 것이라 하겠다”고 했다. 신수(神秀)화상이 이르되, “온갖 비정(非情)은 이 마음이 똑같이 나타나기 때문이요 더러움과 깨끗함은 마음을 따라 바뀜이 있기 때문이요 그 밖의 성품은 반드시 연(緣)에 의지하여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모두 제 성품이 없는지라 ≺공≻과 존재[有]가 함께하지 아니한다. 곧 유정(有情)이 막 있을 때에는 비정은 반드시 ≺공≻하기 때문이요 다른 것이 곧 자기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다른 것의 성품이 없는 것을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이니, 곧 유정이 닦고 증득하는 이것은 비정의 닦고 증득한 것이다. 경에 이르되, ‘그 몸은 두루하고 평등하여 참된 법계이다’고 했나니, 이미 법계가 평등하면 비정의 문은 ≺공≻이로되 이것은 부처이기 때문이다. 또 비정이 막 있을 때는 유정은 반드시 ≺공≻하기 때문이요 자기는 곧 다른 이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자기의 성품 없는 것을 다른 것이 만들었기 때문이니, 곧 비정의 닦음도 없고 증득도 없는 이것은 유정의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 것이다. 선재(善財)가 누각을 보았을 적에 법계에 두루한지라 유정의 문은 ≺공≻이로되 완전한 하나의 누각이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되, ‘중생이 온갖 세계를 어기지 아니하고 세계도 모든 중생을 어기지 아니한다’고 했나니, 비록 있고 없음이 때를 같이한다고 말하나 모양을 나누면 이것이 있다”고 했다. 수조(隋朝) 명(命)대사의 융심론(融心論)에 이르되, “원만한 근기가 교(敎)를 대하면 교마다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고 본체[理]의 마음이 현상[事]을 간섭하면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다.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거늘 어찌하여 산란하면서 안정되지 아니하겠는가. 산란함마다 안정되지 아니함이 없다면 안정됨과 산란함이 둘 다 없어지고,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기 때문에 현상과 본체는 다 함께 끊어진다. 또한, 비록 두 치우침을 여읜다 하더라도 치우침이 있어서 여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은 4구(句)가 없어지므로 실로 글귀로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곳은 그윽하고 오묘하여 마음이 융화(融和)해야 알 수 있다. 만일 마음으로써 마음이 융화하면 마음이 융화한 것 아니니, 마음은 언제나 여실(如實)하거늘, 어찌 융화할 바리요, 실로 마음이라 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융화함을 말하는 것이다”고 했다. 지달(智達)선사의 심경송(心境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계가 성립되면 마음이 문득 있고 마음이 없으면 경계가 안 생긴다 만일 마음으로 경계 얽어맨다면 마음과 경계는 둘 다 장님된다.
경계와 마음이 제 각기 머무르면 마음과 경계 성품 언제나 청정하며 경계 깨치면 마음 일어남 없고 마음 헷갈리면 경계 함께 행하여진다.
만일 헷갈리면 마음이 경계지어 마음과 경계는 제멋대로 산란하며 경계를 깨치면 마음 원래 청정하여 마음과 경계 본래가 청정함을 알리라.
마음을 알게 되면 경계 성품이 없고 경계를 환히 알면 마음에 형상 없다 경계 비면 마음이 고요하디 고요하고 마음으로 비추면 경계는 차디차다.
감천(甘泉)화상이 이르되, “무릇 발심하여 도에 들고자 하면 먼저 자기의 본심을 알아야 하나니, 마음이란 만법과 중생의 근본이요 삼세의 모든 부처님ㆍ조사와 12부경(部經)의 종(宗)이다. 비록 관찰할 때 그의 형상을 보지는 못하나 응용이 자재하고 하는 일마다 걸림이 없으며 환히 꿰뚫리어 분명하고 또렷또렷하여 다름이 없다. 만일 알지 못한 이면 믿음으로 우선을 삼을지니, 믿는다면 무엇을 믿는가. 마음 이것이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비롯함이 없는 무명(無明)으로 바퀴 돌 듯 생사하면서 4생(生)과 6도(道)에 갖가지 형상을 받는 것은 다만 자기 마음만이 부처임을 감히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마음을 알면 마음 밖에는 다시는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는 따로 마음이 없다. 또한 거동하고 하는 일이 다시 누구이겠는가. 이 마음을 제외하면 다시는 따로의 마음이 없다. 만일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곧 연야달다(演若達多)로서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 것과도 같으리라. 천경만론(千經萬論)이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연유함일 뿐이지만, 만일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분명히 안다면 온갖 것이 임시로 붙인 거짓 이름뿐이거늘 하물며 다시 3유(有)가 있겠는가. 곧 밝은 거울은 얼굴을 비출 수 있고 대승은 마음을 환히 나타낼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르되, “경전을 구하고 부처를 찾는 것은 진리로 마음을 살피는 것보다는 못하다. 만일 자기 마음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다고 살필 수 있으면, 본래부터 스스로 있는 것을 닦을 필요도 없으며 경전으로 인하여 얻지 않거늘 어찌하여 알게 되겠는가. 경에 이르되, ‘수다라교(修多羅敎)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했나니, 만일 달을 보았다면 가리킨 바를 분명히 안 것이다. 만일 이렇게 알았다면 한생각과 상응하여 곧 부처라고 한다”고 했다. 보안(普眼)대사가 이르되, “큰 도[大道]는 공허하고 넓되 하나의 참 마음일 뿐이니, 선이나 악이나 생각치 말라. 신령하고 맑아 물건으로서 표시되거늘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고 했다. 위산(潙山)화상이 이르되, “안팎의 모든 법은 모두가 진실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변화로 생기며 그것은 다 임시 붙인 이름인 줄 알아서 그의 법 성품에 맡겨 두루 흐르면서 끊지도 말고 잇지도 말라”고 했다. 임제(臨濟)화상이 이르되, “지금의 여러분은 옛 성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그대들은 또한 어떤 것이 모자라겠는가. 6도(道)의 신령한 빛은 일찍이 쉬었다 일어났다 함이 없다. 만일 이러할 수 있으면 이것은 일생 동안 일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조사와 부처와 구별되지 않으려면 바깥을 향해 내닫거나 구하지만 말라. 그대들의 한 생각의 청정한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법신불이요, 그대들의 한 생각의 분별이 없는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보신불이여, 그대들의 한 생각의 차별된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화신불이니, 이 세 가지 몸 그것이 곧 오늘 눈앞에서 법을 듣는 사람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명목[名]과 언구[言]이며, 분명히 아는 이것이 빛[光]과 그림자[影]이다. 대덕들이여, 반드시 빛과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부처의 근원이요 이것이 온갖 도 무리의 돌아갈 집이다. 그대의 4대(大)ㆍ6근(根)과 허공은 법을 듣거나 법을 설할 줄 모른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겠는가. 뚜렷한 자리에서 외로이 밝으면서도 모양이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그런 까닭에,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5음인 몸 밭 안을 향하면 무위 진인(無爲眞人)이 있다. 당당하게 드러나서 실 터럭만큼도 사이가 없거늘 어찌 알지 못하는가. 대덕들이여,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되 10방을 꿰뚫으며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고 하나니, 본래 이는 하나의 정밀한 광명이로되 분류하면 여섯 가지로 화합을 이룬다. 마음이 만일 나지 아니하면 어느 곳이나 해탈이니라”고 했다. 관계(灌溪)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5음 산중의 옛 불당(佛堂)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가 밤낮 원만한 빛을 낸다 이 속을 환히 알면 같음과 다름도 아니어서 이것이 곧 화엄(華嚴)의 변시방(遍十方)이니라.
석두(石頭)화상이 이르되, “그대들 마음의 본체는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항상한 것도 아니다. 성품은 더럽거나 청정한 것도 아니고 잔잔하여 원만하며 범부와 성인에게도 똑같고 응용에는 끝이 없나니, 3계(界)와 여섯 갈래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날 뿐이요 물 속의 달과 거울 속의 형상에 생멸이 있겠는가. 그대들이 그를 알 수 있으면 구비하지 않는 바가 없다. 모든 성인들이 인간에 오셔서 모범을 드리우고 널리 근거 없는 말들을 진술한 까닭은, 대개가 법신의 본래 고요함을 나타내어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려 할 뿐이니라”고 했다. 황벽(黃蘗)화상이 이르되,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한 마음을 전한 것은 곧장 모든 중생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가리킨 것이니, 수행을 빌릴 것도 없고 다만 이제 자기 마음을 알고 자기 본래 성품을 볼 뿐이요 따로 법을 구하지 말 것이다. 어떻게 자기 마음 그대로가 여(如)임을 알 것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다. 만일 말을 하지 아니하면 작용하지도 아니한다. 마음의 본체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실로 모양이 없고 또한 방소도 없으며 또한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고 했다. 또 이르되, “한 마음만을 깨치면 다시는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으며 이것이 곧 참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의 한 마음은 다른 것이 없나니, 이 말 끝에 스스로가 본래 법을 인정한 것이 더 낫다. 이 법이 곧 마음이요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이 마음이 곧 법이요 법 밖에는 마음이 없다”고 했다. 단하(丹霞)화상이 이르되, “그대들이 보호하고 있는 한 신령한 물건은 그대들이 조작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그대들이 기록하여 아득하게 얻은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 자리는 부처도 없고 열반도 없으며 닦아야 할 도도 없고 증득해야 할 법도 없다. 도는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거늘 다시 무슨 법을 닦겠는가. 이것만이요 그 밖의 광명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큰 도니라”고 했다. 수료(水潦)화상이 이르되, “만일 하나의 법을 말한다면, 10방의 부처님들께서 하나의 법 안에 거두어 들고 백천 가지 묘한 문은 한 털끝 위에 있으며 천 성인이 같은 길이어서 결정코 구별되지 아니하고 10방을 널리 비춤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나니, 마음 자리가 밝아지면 온갖 일이 모두 다 간파(看破)된다. 위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이니, 본래의 마음 이것이 곧 법이다”고 했다. 앙산(仰山)화상이 이르되, “자기 마음이 모양이 없어 마치 허공과 같음을 단번에 깨치고는 그 근원에 붙여 밝혀 내라. 곧 본래 마음은 항하 모래만큼 많은 묘한 작용을 갖추어서 따로 지니는 바도 없고 따로 벌려 선 것도 없으며 그것이 본래의 자리요 그것이 본래 땅이다”고 했다. 대전(大顚)화상이 이르되, “노승이 왕년에 석두(石頭)화상을 뵈었더니 물었다. ‘무엇이 그대의 마음인가.’ 대답하기를 ‘말하는 이 놈입니다.’ 선사가 할(喝)을 하여 내쫓으므로, 며칠 지난 뒤에 도리어 물었다. ‘먼저번에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이것을 제외하고 어느 것이 이 마음입니까.’ ‘양미동목(揚眉動目)의 온갖 일을 제외하고 곧장 마음을 가져 오너라.’ ‘가져 올 만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대가 먼저 와서는 마음이 있다더니, 어찌 하여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고, 마음이 없다면 모두 비방하는 것이니라’고 하시기에, 나는 이때 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서 곧 대답하기를 ‘저로 하여금 양미동목의 온갖 일을 없애게 하셨으므로 화상께서도 없애버려야 하십니다.’ ‘나는 이미 없애버렸느니라.’ ‘화상에게 가져다 보였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가져다 보인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화상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대의 일과는 상관없느니라.’ ‘본래 물건이 없는 것입니까.’ ‘그대에게도 물건이 없느니라.’ ‘이미 물건이 없다면 곧 참된 물건입니다.’ ‘참된 물건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그대 마음의 현량(現量)의 뜻은 그와 같느니라. 모름지기 크게 수호하고 지녀야 하느니라’고 했다”고 했다. 삼평(三平)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보고 듣는 것은 보고 듣는 것 아니요 그대에게 바칠 수 있는 다른 성색(聲色)도 없다 이 속에서 만일 알면 모두 일이 없나니 체성과 작용은 나눔과 나누지 않음에 방해함 없다.
또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음은 본래 인(因)이 아니요 그 체성 오묘하여 허망과 진실 끊어졌고 모양 보며 어리석은 탐애 내지 아니하면 환히 밝아 이는 완전히 석가의 몸일세.
안국(安國)화상이 이르되, “경전에서 ‘머무는 바 없으면서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했다.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은 빛깔에 머무르지도 않고 소리에 머무르지도 아니하며 미혹에 머무르지도 않고 깨침에 머무르지도 아니하며 체성에 머무르지도 않고 작용에 머무르지도 않으면서 그 마음을 낸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온갖 처소에서 한 마음임을 드러낸 것이니, 만일 선(善)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내면 곧 선이 나타나고 만일 악(惡)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내면 곧 악이 나타나면 본래 마음은 곧 숨어 없어진다. 만일 머무는 데가 없으면 10방 세계가 이 한 마음일 뿐이니, 진실로 바람이 번기를 움직이지 않는 것이요 이 마음이 움직이는 줄 알 것이다. 어떤 단월(檀越)이 물었다. ‘화상은 남종(南宗)이십니까, 북종(北宗)이십니까.’ 대답했다. ‘나는 남종도 북종도 아니며, 마음을 종(宗)으로 하느니라.’ ‘화상은 일찍이 교(敎)를 보셨습니까.’ ‘나는 교를 본 일이 없지만, 만일 마음을 안다면 온갖 교를 다 보아 마친 것이다.’ 학인(學人)이 물었다. ‘무엇을 이름하여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다고 하십니까.’ ‘비유하면, 마치 밤에 꿈을 꾸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만일 몸이 평상 위에서 편안히 잠을 자되 전혀 근심이나 기쁨이 없음을 알면 바로 그것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는 것이니라. 지금 어떤 사람이 부처가 된다고 들으면 곧 기뻐하고 지옥에 든다고 들으면 곧 근심을 한다면, 마음의 부처를 통달하지 못한지라 보리 평상 위에 편안히 잠을 자면서도 망녕되이 근심이나 기쁨을 내게 된다‘고 했다”고 했다. 귀종(歸宗)화상이 이르되, “마음 이것이 부처요 철저한 성품일 뿐이니, 산하(山河)ㆍ대지도 한 법으로 환히 나타난 바다. 이는 크고 신령한 주문(呪文)이어서 진실하여 거짓이 아니며,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의 근원이요 보리의 근본 뼈다. 부처란 어느 것인가. 지금 말하는 그것이요 다시는 따로 사람이 없다. 경에 이르되, ‘마치 하나의 빛깔이 중생의 소견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온갖 법도 하나의 법일 뿐이나 처소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고 했다”고 했다. 대비(大悲)화상이 이르되, “자기의 심성이 만법을 포함했음을 알고 끝내 따로 구하지 아니하면 생각 생각마다 공부가 참 모습[實相]에 들지만, 만일 이런 이치를 보지 못한다면 여러 겁 동안 고통에 얽매이면서 역시 공부는 없다”고 했다. 초당(草堂)화상이 이르되, “무릇 제석의 그물[帝網]을 아직 펴지 못했으면 천 개의 영락(瓔珞)을 어찌 볼 것이며 큰 벼리를 갑자기 올려야 만 개의 눈금이 저절로 열리나니, 마음과 부처를 쌍으로 비춤이 관(觀)이요 마음과 부처가 둘 다 없어짐이 지(止)이다. 선정과 지혜가 균등해졌으면 어느 마음인들 부처가 아니겠으며 어느 부처인들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부처가 이미 그러하면 만 가지 경계와 온갖 반연이 삼매 아님이 없다”고 했다. 백장 혜해(百丈慧海)화상이 불을 헤치면서 위산영우(潙山靈祐)에게 보이자 이로 인하여 단번에 깨쳤으므로, 백장이 이에 말했다. “이것이 잠깐 동안의 지름길이니라. 경에서 이르되, ‘불성을 보고자 하면 인연의 시절[因緣時節]을 관찰하여야 한다’고 했다. 시절이 이르게 되면 마치 미혹에서 홀연히 깨친 것 같고 잊었던 것이 갑자기 기억나는 것과 같나니, 비로소 옛 길을 살피면서 자기 물건을 다른 이로부터 얻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가 이르되 ‘깨치고 나면 아직 깨치지 못했을 때와 같아지고 마음이 없어서 법이 없음을 얻나니, 이것이 허망이 없고 범부와 성인의 평등한 마음일 뿐이니, 본래의 마음 법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진다’고 했나니, 지금 그대가 그렇게 되었으므로 잘 스스로가 수호하고 지녀라”고 했다. 또 광어(廣語)가 물었다. “보았습니까.” 대답했다. “보았느니라.” 또 물었다. “보게 되면 어떠합니까.” 대답했다. “보게 되어도 둘이 없느니라. 이미 둘이 없다고 한다면 보는 것으로써 보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니, 만일 보았다면 다시 보게 되었을 때에 앞의 보는 것이 그것이겠는가. 뒤의 보는 것이 그것이겠는가. 경에서 이르되, ‘보는 것을 보게 될 때의 그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되, ‘보는 법을 행하지도 않고 듣는 법을 행하지도 않고 깨닫는 법을 행하지도 않으면, 모든 부처님은 빨리 수기(授記)를 주신다’고 했다”고 했다. 또 이르되,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라 비추는 작용은 보살에 속하며, 자기 마음이 바로 주인이요 재상이라 비추는 작용은 객(客)에 속하나니, 마치 물결에서 물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만유(萬有)를 비춤으로써 공(功)이 드러나지만, 만일 고요한 비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면 오묘한 뜻이 저절로 예와 이제를 꿰뚫는다. 마치 ‘신령하여 비추는 공이 없으면 지극한 공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함과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지금 곧바로 깨쳐 알려고 하면, 다만 사람[人]과 법(法)이 모두 없어지고 모두 끊어지고 모두 ≺공≻할 뿐이다”고 했다. 반산(盤山)화상이 이르되, “큰 도[大道]에는 중간도 없거늘 다시 무엇이 앞과 뒤이겠는가. 긴 허공에는 자취가 끊어졌거늘 무엇으로 그를 헤아리겠는가. 허공이 그러하므로 도(道)라 한들 어찌 말로 하겠는가. 마음의 달은 외로이 둥글고 광명은 삼라만상을 머금되 광명이 경계를 비춘 것도 아니고 경계 또한 존재한 것 아니니, 광명과 경계가 모두 없어지거늘 다시 이것은 어떤 물건인가. 마치 칼을 허공에다 던져 휘둘러낸다 해도 미친다, 미치지 않는다를 논할 것도 없는 것과 같아서, 이야말로 허공에 바퀴도 자취가 없고 칼날도 이지러지지 않는다. 만일 이렇게 마음과 마음에 앎이 없을 수 있으면, 사람이 그대로 부처요 부처 그대로가 사람이니, 사람과 부처에 다름이 없어야 비로소 도(道)가 된다”고 했다. 대매(大梅)화상이 처음 마조(馬祖)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대답했다. “바로 그대의 마음이니라.” “어떤 것이 법입니까.” “역시 그대의 마음이니라.” “조사께선 뜻이 없습니까.” “그대는 자기 마음만을 알라. 법마다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리라”고 했다. 뒤에 대매산(大梅山)에 머무르면서 대중에게 이렇게 말하되, “그대들 여러분은 각자가 마음을 밝혀서 근본을 통달하여야 한다. 그 끝을 좇지 말고 그 근본만을 얻으면 그 끝은 저절로 이르게 된다. 그대들은 그 근본을 얻고자 하면 그대들의 마음만을 알아라. 이 마음은 원래가 온갖 세간과 출세간 법의 근본이며, 다만 마음을 온갖 선악에 붙여서 내지 말 것이니, 곧 만법은 스스로 여여(如如)함을 알 것이다. 그때에, 어떤 학인이 물었다. ‘마음 밖에는 따로 법이 없습니까.’ 대답했다. ‘조사와 부처가 바로 그대의 마음인 뿐이니, 마음 이것은 만법의 근본이거늘 어찌 따로 법이 있어서 마음을 능가하겠는가’”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마치 6조(祖)가 이르되, “선과 악을 모두 헤아리지 않으면 저절로 마음의 본체에 들게 되어 잔잔하고 항상 고요하여 미묘한 작용이 항하 모래만큼 많나니, 모든 부처는 바로 지극히 선한 맨 끝이요 중생은 바로 지극히 악한 맨 끝이다”고 말함과 같나니, 선악은 모든 법을 모두 거두어 있다. 그러므로 이르되, “만일 헤아리지 아니하면 온전히 마음의 본체로 돌아간다”고 했나니, 작은 터럭만큼의 법이 있기만 하면 이것은 다 헤아리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마치 한산자(漢山子)의 게송에서 이르되, “온갖 기틀 모두가 자취 없어져야 비로소 본래의 사람을 본다”고 함과 같나니, 없어진다[泯]는 한 글자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 밖에는 원래 하나의 법도 없고 마음일 뿐이므로 마치 골짜기에서 자기의 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오고 거울에서 나의 형상을 비치는 것과 같다. 다만 중생이 가슴에 울리는 마음의 기능을 통달하지 못하여 차별된 앞의 대경을 세움은 마치 허공 꽃이 일어났다 소멸하는 것과 같고, 그지없는 망상을 조립(組立)함은 마치 불길과 물이 달리고 타오르는 것과 같나니,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없애고 끊게 할 뿐이다. 만일 마음의 체성에 들어간다면 비록 잔잔하다고 하기는 하나 아주 없는 데로 떨어지지는 아니하고 저절로 체성으로부터 작용을 일으켜 두루함이 항하 모래만큼 많다. 또 대매(大梅)가 이르되, “이 마음 법문인 진여의 묘한 이치는 더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않으면서 갖가지 방편으로 잘 응용하나니, 모두 이 성품은 본래가 구족하여 생기지도 아니하고 소멸하지도 않는 줄 알아야 삼세의 온갖 작용을 능히 안다. 그런 까닭에, 이르되 ‘나의 관(觀)이 오래고 머나 마치 오늘과 같아서, 언제나 그 속에 있으면서 거닐고 앉고 눕는다’고 한다”고 했다. 암두(巖頭)화상이 이르되, “삼계(界) 안에서 있고 없음은 자기만이 아는 것이요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다. 다만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알기만 하면 의지함도 없고 신령하여 광대한 자리라고 부른다. 만일 법이 있고 조사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대를 끝끝내 속이는 것이니, 다만 마음[方寸] 안을 살펴보라. 멀디 멀고 밝디 밝아지리니, 욕심이 없고 의지함이 없기만 하면 곧 결단하여 마치게 되리라”고 했다. 고성(高城)화상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양이 없는 마음이 나 움직이고 빛나서 소리에 응하고 빛깔에 응하며 방소 따라 비춘다 방소에 있기는 하나 방소에 있지 않고 저절로 높고 낮으면서 모두가 미묘하네.
찾으면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면서 불꽃 광명 훨훨 이는데 어디서 일어날까 다만 지금의 것 전혀 이는 마음이니 마음으로 마음 밝히는 마음 다시 그렇다.
방소에 안 있는데 어디서 찾을꼬 운용하되 자취 없고 자국도 없구나 지금 분명히 찾는 사람 알 것이요 아침 내내 부질없이 따로 구하지 말라.
부지런히 배우면서 총림(叢林) 가까이 하고 병든 눈을 가지고서 꽃부리로 알지 마라 설교(說敎)로는 본래 무상의 도리[無相理] 궁구하되 널리 읽으면 원래 마음 알지 못하네. 마음을 알고 경계를 알라 마음을 알고 경계 알면 선하(禪河)가 고요하고 만일 경계 환히 알면 마음 아는 것이니 만법은 다 건달바성(乾達婆城)의 그림자 같네.
천경(千頃)화상이 이르되, “모든 중생인 나귀ㆍ노새ㆍ코끼리ㆍ말ㆍ지네ㆍ그리마와 10악(惡)ㆍ5역(逆)ㆍ무명ㆍ망념ㆍ탐냄ㆍ성냄 등의 분명하지 못한 법은 다 같이 여래장(如來藏) 가운데서 나타나나니, 본래 이것이 부처이다. 다만 중생들이 끝없는 겁으로부터 갑자기 한 생각을 일으켜 이로부터 분주하게 헤매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해 오셔서 감관이 소멸하고 모든 분별이 단졀되어 한 생각과 상응하면 문득 뛰어나 바르게 깨닫게 하심이거늘, 어찌 다른 이들로 하여금 많이 알고 많이 이해하여 몸과 마음을 요란케 하심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보리의 광명이 나타나지 못하지만 그대들은 이제 보고ㆍ듣고ㆍ알고ㆍ깨닫는 것만을 끊고 물건인 경계 위에서 분별을 내지 말라. 그때그때 맞춰서 옷 입고 밥을 먹는 평상의 마음[平常心]이 도이니, 이 법이야 말로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학인이 물었다. ‘화상은 밤이 되어 등불이 없을 때에는 어떠하십니까.’ 선사 ‘도를 깨친 사람은 언제나 광명이 앞에 나타나거늘 무슨 밤과 낮이 있겠는가.’ ‘어찌하여 화상의 광명을 보지 못합니까.’ ‘무슨 눈으로 보려고 하는가.’ ‘세간 사람과 동일한 현재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선사는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르되, ‘애달프다. 모든 중생들은 감관과 대경이 서로 간섭하여 끝없는 때로부터 도둑을 잘못 알아 아들을 삼고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칼과 쇠사슬을 차고 있다. 그대가 눈을 가지고 보고 의식으로 분별하면서 불도를 구하려는 것은 바로 본래의 마음을 저버리고 생각을 따라 유전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얼굴을 마주 대고서도 멀리 떨어져 있느니라’고” 했다. 유정(惟政)화상이 이르되, “옛 성인과 지금의 성인의 그 이치는 똑같다. 옛날의 해와 오늘날의 해는 비추어도 둘이 다 따뜻해지지 않고 옛날의 바람과 오늘날의 바람은 두드려도 둘이 다 움직임이 없지마는, 한 방울의 물은 이를 적시고 큰 바다의 물도 이를 적신다”고 했다. 또 게송으로 말했다.
한 생각 동안에 마음을 얻으면 세 가지 세계를 단번에 뛰어넘고 보되 볼 바가 없으면 탐냄ㆍ성냄이 없어진다.
우두산(牛頭山)의 충(忠)화상에게 학인이 물었다. “무릇 도에 들어간 이는 어떻게 마음을 씁니까.” 대답했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생기지 않으므로 이제에 소멸하는 것도 없다. 그대는 다만 마음에 맡겨 자재하면서 제지하지 말아야 한다. 곧장 보고 곧장 듣고 곧장 오고 곧장 가며, 모름지기 행하되 그대로 행해야 하고 머무르되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곧 참된 도니라. 경에서 이르되, ‘연기(緣起) 이것이 도량이니, 사실대로 알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또 물었다. “도를 닦으면서 어떤 방편을 지으면 해탈을 할 수 있게 됩니까.” 대답했다. “부처를 구하는 사람은 방편을 짓지 않는다. 마음 근원을 단번에 알고 불성을 분명히 보는 그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니, 허망도 아니요 진실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되, ‘곧 바로 방편을 버리고 위없는 도만을 설명한다’고 했다.” “진여의 미묘한 법은 도리와 지혜가 아주 깊은데 천식(淺識)한 무리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대는 부처님을 비방하지 말라.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모든 법은 깊은 것도 아니고 얕은 것도 아닌데,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하고서 심히 깊다고 말을 한다. 만일 보았을 때에는 눈에 부딪치는 것마다 모두가 다 미묘하거늘, 무엇 때문에 높이 추앙하면서 보살을 따로 성인으로 붙이는가. 마치 생공(生公)이 말한 ‘지혜가 깊다고 말할 것 아니니, 물건은 지혜보다 깊을 뿐이다’고 함과 같다. 이것은 미치지 못했음을 슬퍼하는 말일 뿐이다. 그대는 법을 간택하지 말고 가지거나 버리거나 하는 마음도 갖지 말라. 그러므로 ‘법은 견줄 데가 없다’고 했나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무릇, 경이란 몸과 마음으로 이치를 삼는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몸은 바른 법의 광이요 마음은 장애 없는 등불이니, 모든 법을 환히 비춤을 중생을 제도함이라고 한다’고 했다”고 했다. 협산(夾山)화상이 이르되, “눈앞에는 법이 없되 뜻은 눈앞에 있나니, 이는 눈앞의 법이 되지 않고 귀와 눈의 이를 바도 아니다”고 했다. 대안(大安)화상이 이르되, “그대들의 각자의 몸 속에는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가 있다. 눈으로는 빛을 내쏘아 산하 대지를 비추고 귀로는 빛을 내쏘아 온갖 선악의 음성을 받아들이나니, 여섯 가지 문에서 밤이나 낮이나 항상 광명을 내쏘므로 방광삼매(放光三昧)라고도 한다. 그대들 스스로는 알지 못하나 4대(大)의 몸 속에 있으면서 안팎으로 붙들고 유지하여 두 다리나 어금니가 기울지 않게 하고 큰 짐을 진 이가 돌 두 개를 얻어 지고 외나무다리 위를 통과하면서도 그를 땅에 넘어뜨리지 않게 하는 그것이 또한 무엇일까. 그대들이 찾는다 해도 털끝만큼도 볼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지공(志公)이 이르되 ‘안팎으로 찾아봐도 모두가 없다가, 경계 위에서 하는 일에는 모두 크게 있구나’고 했다”고 했다. 장사(長沙)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심히 깊고 심히 깊구나 법계와 사람 몸은 이것이 몸이니 미혹된 이 마음 헷갈려서 뭇 세계를 삼지만 깨쳤을 땐 세계 바다 그것이 진심(眞心)일세 몸과 세계 두 대경은 원래가 실상(實相)이라 분명하게 통달함을 지음(知音)이라 일컫네.
또 학인이 물었다. “온 법계의 중생들이 마음을 알면 맨 처음에 무엇으로부터 있는가.” 게송으로 대답했다. 성품의 자리에선 심왕(心王)이 생기고 마음은 만법의 스승이 되나니 마음도 소멸하고 마음의 스승도 소멸해야 비로소 여여(如如)에 계합될 수 있다.
용아(龍牙)화상이 이르되, “무릇 도를 닦는다는 것은, 바로 권하고 달래는 말이요 인도하는 말이다. 위로부터 법과 사람은 없고, 다만 이것을 서로 이어받으면서 갖가지 방편으로 그들을 위해 설명하고 뜻을 내는 것은 자기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일 뿐이니, 마지막에는 얻을 수 있는 법도 없고 닦을 수 있는 도도 없기 때문에 ‘보리의 도는 자연이다’고 했다. 이제 법이라 하면, 이는 궤지(軌持)라는 이름이다. 도(道)는 바로 중생의 체성이어서 세계가 있기 전에도 벌써 이 성품은 있었고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 성품은 소멸하지 않았으므로 흐름을 따르는 성품이라고 부르며, 언제나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허공과 같은지라 세간의 모양으로 항상 머무른다고 부른다. 또한 이름을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도 하고 본제(本際)라고도 하고 심왕(心王)이라고도 하고 진여해탈(眞如解脫)이라고도 하고 보살열반(菩薩涅槃)이라고도 하다. 백천 가지의 다른 이름도 모두 이는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비록 많은 이름이 있기는 하나 많은 체성은 없고 많은 이름이 모였으면서도 체성은 오직 하나이며 온갖 이치가 모였으면서도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만일 자기 마음을 알면 근원에 돌아가 뜻을 얻는다고 하나니, 마치 사람이 여러 흐름의 물을 얻고자 하면 큰 바다 속을 향해서만이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만법의 모양을 알고자 하면 마음 속을 향해야만이 계합된다. 오묘한 이치를 알게 되면 온 체성이 진리요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타나는 바다”고 했다. 덕산(德山)화상이 이르되, “만일 한 티끌이나 한 법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대는 그와 함께 집착하고 앎을 내므로 모두가 하늘 악마거나 외도에 떨어진다. 다만 이 신령하고 ≺공≻한 것은, 오히려 작은 티끌만큼의 것도 얻을 만한 것이 없어서 곳곳마다 청정하고 환히 통달하며 겉과 속이 맑게 사무쳤을 뿐이다”고 했다. 또 이르되, “그대들은 거룩함[聖]을 사랑하지도 말라. 거룩함은 바로 ≺공≻이라는 이름이어서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 다만 이것은 번쩍거리고 신령하고 ≺공≻하며 걸림 없고 자재하기만 하되, 장엄하게 닦아 증득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법을 전하면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우두(牛頭) 아래의 불굴(佛窟)화상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한 문수(文殊)가 말한 것이 10방 문수가 일시에 말한 것이요, 한 부처님의 열반이 모든 부처님들께서 다 함께 하는 열반이라고 함을 믿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인가. 물질[色]의 근본을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었다. ‘물질의 성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이것이 근본인 것인가.’ 대답했다. ‘이것은 관(觀)에 머무르는 말이요 현상[事]에 즉하여 근본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현상에 즉하여 본다면 그대의 나고 늙고 병드는 몸과 무명ㆍ탐냄ㆍ성냄 등의 이것이 물질의 근본일 뿐이니, 현상 밖에는 본체[理]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물질의 근본을 알면 곧 온 10방의 물질과 같으므로 하나의 설명이 온갖 설명이요 한 열반이 온갖 열반이라고 하나니, 물질 자체에는 성품이 없되 성품이 포함되지 아니함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비록 범부와 같기는 하나 범부가 아니요 범부가 되지도 못하고 범부를 부술 수도 없나니, 따로 뛰어난 것이 있어서 마음 밖에 있다고 한다면 곧 악마의 그물에 떨어진다. 내 이제 스스로 몸과 마음이 실상이요 부처가 된다고 관찰하는 것이 곧 10방 부처님들과 행이 같고 증득이 같은 것이라고 본다. 물었다. ‘부처님 몸은 샘이 없는 계율과 선정으로 5음(陰)을 쪼여 닦으므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감히 의심하지 않지만, 대품경(大品經)에서 ≺중생은 착하지 못한 5음의 몸이지만, 역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고 함과 같은 것은 심히 사람들을 놀라고 의심되게 합니다.’ 대답했다. ‘만일 중생의 5음 바깥을 향해 따로 모든 부처님들의 해탈이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중생이 자기 성품을 분명히 알기만 하면 본래부터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거늘, 누가 속박하고 누가 해탈하겠으며 어찌하여 다시 속박과 해탈의 다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물었다. ‘경에서 이르되, ≺중생과 부처는 평등하다≻고 했으므로 속박이나 해탈이 없겠거늘 어찌하여 6도(道) 중생들은 헤매면서 해탈하지 못합니까.’ 대답했다. ‘중생은 물질과 마음이 청정함을 모르고 망상을 하고 뒤바뀌는지라 해탈하지 못한다. 만일 사람과 법이 항상 ≺공≻한 줄 알면 그 중에서 실로 속박과 해탈이란 없다.’ 물었다. ‘무슨 관(觀)을 지으면서 참회를 해야 마지막 죽을 적에 업(業)에 끌림을 면하겠습니까.’ 대답했다. ‘그대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행한 바와 말씀한 것이 내가 오늘에 행하는 바와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깊이 믿어야 한다. 성불을 해서도 오히려 열반의 모양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중간되는 죄와 복의 허망한 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바른 앎 바른 소견이요 진실한 수행이며 진실한 참회이니,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서 이 관을 잃지만 않으면 마지막 죽을 때에도 바른 기억을 잃지 않으리라’”고 했다. 불굴(佛窟) 아래의 운거(雲居)화상이 심경불이편(心境不二篇)에서 이르되, “세간ㆍ출세간은 모두 자기의 한 생각인 허망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나니,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기만 하면 온갖 형상이 나누어지고 한 생각이 생기므로 문득 마음과 경계를 이룬다. 만일 마음과 경계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생각이 있어서 볼 수 있게 되겠는가. 볼 바[所見]의 생각이 있는지라 또 능히 보는[能見] 마음이 있게 된다. 장차 생각 그대로가 경계요 보는 것 그대로가 마음임을 알면, 볼 바의 생각은 색온(色蘊)이 되고 능히 보는 마음은 4온(蘊)이 된다. 경에 이르되, ‘5온 이것이 세간이요 한 생각이 5온을 갖춘다’고 했나니, 하나하나의 온 가운데는 다 5온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는 여럿을 장애하지 않고 여럿은 하나를 장애하지 않게 된다. 그런 까닭에, 마음과 경계는 서로가 통하여 서로서로 손님도 되고 주인도 된다. 경에 이르되, ‘경계와 지혜가 서로서로 엇갈리며 겹치고 겹쳐서 그지없다’고 한 이것이 곧 한 티끌이 법계의 낱낱의 법을 포함하여 모두 두루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한 생각의 동요는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진동한다는 것으로 보고, 자기의 한 생각이 항상 안정함은 곧 6도 중생이 모두 항상 안정하다는 것으로 보라. 만일 진실로 한 생각의 체성을 알면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진동한다는 것으로 보고, 자기의 한 생각이 항상 안정함은 곧 6도 중생이 모두 항상 안정하다는 것으로 보라. 만일 진실로 한 생각의 체성을 알면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항상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리니, 한 생각이 헷갈린 탓으로 곧 경계와 지혜는 호(胡)나라와 월(越)나라다”고 했다. 대주(大珠)화상이 이르되, “심성은 형상이 없으나 그것이 곧 미묘한 법신(法身)이요, 심성의 본체는 ≺공≻하나 그것이 곧 허공의 그지없는 몸이며, 장엄함을 보이고 행하는 그것이 곧 공덕의 법신이니, 이 법신은 바로 만가지 변화의 근본이요 처소에 따라 이름 붙여지며 지혜의 작용이 그지없으므로 이것이 무진장(無盡藏)이다. 물었다. ‘어느 것이 법신입니까.’ 대답했다. ‘마음은 항하 모래같은 온갖 법을 내기 때문에 법 집의 몸[法家之身]이라고 한다. 경에서 이르되, ≺한 생각인 마음 티끌 안에서, 항하 모래같은 게송을 연출한다≻고 했나니,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한다.’ ‘진실한 법과 허환한 법에는 저마다 종성(種姓)이 있습니까.’ ‘불법에는 종성이 없고 물건에 응하면서 나타난다. 만일 마음이 진실하면 모두가 진실하지만, 한 법이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있으면 진실함의 이치는 원만하지 아니하다. 만일 마음이 허환하면 모두가 허환하지만, 한 법이라도 허환하지 않음이 있으면 허환한 법에는 안정함이 있다. 만일 마음이 ≺공≻하면 모두가 ≺공≻하지만, 한 법이라도 ≺공≻하지 않음이 있으면 ≺공≻의 이치는 원만하지가 않다. 미혹되었을 적에는 사람이 법을 따르지만, 깨치고 나면 법이 사람을 따른다. 삼라만상은 ≺공≻에 이르러서 끝나고 백 개 시내의 흐름은 바다에 이르러서 끝나며 온갖 성현은 부처에 이르러서 끝나고 십이부경(十二部經)과 오부비니(五部毘尼)와 사위타론(四圍陁論)은 마음에 이르러서 끝나는 것이다. 마음 이것은 총지(摠持)의 합친 집이요 만법의 근원이며 또한 이것은 큰 지혜 광이요 머무름이 없는 열반이다. 백천 가지의 이름은 다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고 했다. 먼저의 동산(洞山)화상의 심단결(心丹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약이 있으니 그 이름은 심단(心丹)이다 번뇌화로 속에서 해를 두고 불리었다 그의 변하지 않는 태(胎) 안의 빛깔을 아느냐 빛나는 광명이 대천(大千)에 두루하다.
법 눈이 열리면 털끝만큼 보이나 범부ㆍ성인을 찰나에 변화시킨다 진짜 가짜 알아야 공용(功用)을 이루리니 언제나 단련(鍛鍊)하며 보라.
형상이 없어 모나거나 둥글지 않나니 말 속엔 물건 없되 물건 속에서 말한다 마음 있어 작용하면 참된 작용 어기나 뜻이 없이 선(禪)에 두면 선 아님이 없다.
소멸도 없고 생김도 없되 삼라만상의 모두가 부린다 고을 토지 막론하고 가져오기만 하라 이 화로 속에 들면 옳지 않음이 없다.
한 뜻도 없는 것이 나의 뜻이요 한 지혜도 없는 것이 나의 지혜며 한 맛도 없는 것이 온통 다 기이하다. 빛깔은 안 바뀌나 알기가 어렵고 다시 한 물건도 없는 데서 나타나나니 한 물건으로 다른 것을 억누르지 말라 체성이 진공(眞空)에 계합되면 단련할 것 아니다.
먼저의 조산(曹山)화상이 이르되, “부처와 마음은 담장ㆍ벽ㆍ기와ㆍ조약돌 그것이다는 것은, 또한 성품 자리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본체의 온전한 공[體全功]이라 일컫기도 하며 또한 무정(無情)이 설법을 이해한다고 하기도 한다. 만일 있음[有]을 알아 이 속에서 언변(言辯)이 없는 곳을 얻으면 10방의 국토와 산하 대지와 돌ㆍ벽ㆍ기와ㆍ조약돌ㆍ허공과 허공 아닌 것과 유정ㆍ무정ㆍ풀ㆍ나무며 우거진 숲이 통틀어 하나의 몸이 되리니, 수기를 얻었다[得記]고 부르고 또한 한 글자 법문[一字法門]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총지 법문(摠持法門)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한 티끌 한 생각[一塵念]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같은 길[同轍]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일 이 성품 자리가 있음을 모르면, 모든 부처님의 천 가지 깨우침도 얻을 수 없고 만 가지 비유도 이룩되지 아니한다. 천 성인 만 성인이 모두 이 속에서 나왔음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10방의 박가범(薄伽梵)의 하나의 길인 열반의 문이다’”고 했다. 영변(靈辯)화상이 이르되, “무릇 한 마음은 불가사의하다. 미묘한 이치는 일정한 모양이 없고 그때그때 응하면서 작용하므로 일정하다고 고집할 수가 없다. 경에서 이르되, ‘모든 현인ㆍ성인은 모두가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면서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으므로써 처소 따라 이름이 붙여지나니, 마지막에는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한다’고 했다. 이 마음은 온갖 것을 파괴할 수도 있고 온갖 것을 이룩할 수도 있다. 때문에, ‘온갖 법 이것은 모두 불법이다’고 했고, 마음이 하늘을 만들고 마음이 사람을 만들고 마음이 귀신ㆍ짐승ㆍ지옥 등을 만드는 것이니, 모두가 마음으로 하는 바다. 좋거나 나쁜 것도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고 반드시 생겨야 하는 것도 역시 할 수가 있고 반드시 생기지 않아야 하는 것도 역시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걸림이 없다는 이치이다. 지금의 온갖 하는 일인 가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것도 이것은 마음의 모양일 뿐이니, 마음 모양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참 모습[實相]이라고 하며, 본체는 변동이 없으므로 역시 여래(如來)라고 하다. 여(如)란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없는 것 가운데서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가운데서 없는 것을 나타내므로, 역시 신변(神變)이라 하기도 하고 신통(神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모두가 한 마음의 작용이며, 처소 따라 차별되지만 이치가 많다. 하나 가운데서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음 가운데서 하나를 아나니, 그 서로서로가 나고 일어남을 분명히 알면 장차 두려움 없음을 이루리라. 또 동방에서는 바른 선정에 들었다가 서방에서는 선정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온갖 것이 마음일 뿐임을 환히 알면, 곧 하나의 법도 뜻에 마땅할 것이 없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도 없어지리니, 곧 생사에 두렵지 아니해서 온갖 곳이 모두 해탈이 된다. 때문에 ‘장차 두려움 없음을 이루리라’고 한다. 가령 마음 밖에는 온갖 경계의 법이 있다 해도 역시 갖가지 마음의 허망한 생각인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제 성품도 없고 그 자체는 본래가 ≺공≻하여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고 했다. 먼저의 운거(雲居)화상이 이르되, “불법에 어떠한 여러 일이 있는가. 수행과 증득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마음 이것이 부처인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語] 모를 것은 근심하지 말라. 이러한 일을 얻고자 하면 모름지기 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 무엇을 근심할 것이냐. 만일 이러한 일이라 한다면 어렵지가 않다. 예로부터 선덕(先德)은 순박해서 진리에 맡기고 원래가 재주가 없으므로, 설령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고 물으면, 때로는 ‘단지요 벽돌이요 나무대기니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모두가 중요한가 하면, 원래 다른 이는 근본인 발밑[脚下]이 충실해서 힘이 있는지라 이것이 곧 불가사의한 사람으로서 흙을 쥐어도 금이 될 것이나 만일 이러한 일이 없다면 충분하게 설명해도 더부룩히 난 꽃과 많이 모여 있는 비단과 비슷해서 곧장 ‘나는 방광을 하고 땅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해도 세간에 대해 허물이 없을 것이요 설명을 다하여도 멍청한 사람이라 온통 믿어 받지 않으리니, 원래가 자기의 발 밑이 텅 비었고 힘이 없어서이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운거화상은 물외(物外)의 종사(宗師)로서 이 땅에서는 일곱 번이나 태어나 선지식이 되었으며 도덕이 고매하고 지혜 바다가 깊었으며 큰 자비를 갖추었고 언제나 천의 대중들이 꽉 차 있었다. 대중들에게 말한 “다만 마음 이것이 부처인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 모를 것을 근심하지는 말라”고 한 것은, 지금의 학인들이 한결같이 밖으로만 구하고 대승(大乘)의 말만을 배웠으므로 근본으로 돌아가 안에서 스스로가 마음을 관하여 천진(天眞)의 부처를 분명히 보지 못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이 마음의 부처를 분명히 안다면 곧 저절로의 지혜[自然智]와 스승 없는 지혜[無師智]가 앞에 나타나겠거늘, 어찌하여 번거롭게 밖에서 배울 것인가. 마치 “문으로부터 들어간 이는 보배가 아니다”고 한것과 같고, 또 이르되,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 곧 빈궁하지만 땅으로부터 솟아나오면 도리어 부하고 귀하다”고 했다. 만일 마음 땅으로부터 솟아나온 지혜의 보배라면 어떻게 다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르되, “그지없는 광”이라고 했다. 다만, 마음의 진실을 얻기만 하고 근본인 발빝이 진실해지기만 한다면, 저절로 나오는 말이 모두가 실상(實相)과 상응하게 되고 그 말끝에 사람의 생사를 구제하며 범부를 변화시켜 성인을 만들고 조약돌을 잡으면 금이 되며 있다고 말해도 되고 없다고 말해도 되어서 구절마다 모두가 언교(言敎)를 이루겠지만, 만일 마음 속이 진실해지지 못했으면 원만한 믿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연히 헛되고 부황한 데에 맡겨 스스로가 속게될 뿐이다. 가령 변설이 종횡 자재해도 미친 지혜[狂慧]만 더 불리고 설령 설법을 하게 되어 하늘꽃이 내린다 해도 돌이 머리를 끄덕이리니, 일이 만일 진실하지 않다면 온통 요망한 허깨비가 되리라. 그런 까닭에, 지공(志公)이 운광(雲光) 법사가 법화경(法華經)을 강할 때 감응으로 하늘꽃이 내리는 것을 보고 이르되, “이것은 교조(齩蚤)의 이치로다”고 했으니, 이야말로 선성(先聖)의 진실한 말씀이다. 실로 후학을 위한 본보기[龜鏡]이니, 뼈 속 깊이 새겨야 하고 큰 띠에 다 적어 두어야 하리라. 이제 두루 찾아서 드날렸으니, 깊이 뜻함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