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_0001_a_01L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제1권 상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
지엄(智儼) 지음 박서연 번역
이 경은 본래 외국에 모두 10만 게송이 있었다. 예전에 진(晋)나라의 도인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于闐國)에서 이 3만 6천 게송을 얻었다. 진나라 의희(義熙) 14년 세차(歲次)1)는 순화(鶉火, 418)로서 3월 10일에 양주(楊州) 사사공사(謝司空寺)에서 천축의 선사 불도발타라(佛度跋陀羅)가 손수 범어로 된 경문을 가지고 오랑캐 말[胡音]2)을 진(晉)나라 말로 번역하였고, 사문 석법업(釋法業)이 직접 따라 써 주었다. 그때에 오군내사(吳郡內史) 맹의(猛顗)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가 단월(檀越)이 되었다. 원희(元熙) 2년(420) 6월 10일에 이르러 호본(胡本)의 번역을 끝냈고, 태송(太宋) 영초(永初) 2년 신유년(辛酉年: 421) 12월 28일에 교감을 마쳤다. 이제 경문의 뜻을 나누어서 판석(判釋)하는데 다섯 문(門)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성인이 기틀에 임하여 덕으로 헤아려 유치(由致)함을 찬탄한 것이며, 둘째는 장섭(藏攝)의 분제(分齊)3)를 밝힌 것이며, 셋째는 가르침 아래서 소전(所詮)의 종취(宗趣)와 능전(能詮)의 교체(敎體)를 변별한 것이며, 넷째는 경의 제목을 해석한 것이며, 다섯째는 경문을 나누어 해석한 것이다. 1. 탄성임기덕량유치(歎成臨機德量由致)
첫째, 성인이 기틀에 임해서 덕으로 헤아려 유치함을 찬탄한다는 것은 위대한 성인이신 여래께서 처음 현묘한 자취를 깨달으시고서 머묾 없음[無住]의 경지에서 법륜을 굴리신 이래로 신령스럽고 오묘한 적멸(寂滅)을 융통하시어 그 뜻이 보리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능히 지나간 과거에 도의 종자를 심을 수 있었고, 무아(無我)에 선업(善業)을 쌓았으며, 금강보다 바른 지혜를 발하여 여여(如如)함이 불꽃처럼 또렷한 것이다. 따라서 망령된 상념을 잘라 내지 않고도 하늘을 날며, 허물이 나타나는 신령스런 거울을 맑히지 않아도 뚜렷이 밝으며, 등각이 맑고 깊으며, 아(我)와 정(淨)은 적멸의 처소에 이르러 숨지 않고 자취를 모으며, 상(常)과 낙(樂)은 어느 곳인들 베풀지 않음이 없으며, 생사와 열반을 가지런하고 평탄하게 똑같이 관(觀)하며 덕을 갖추어 원만히 통하고, 대지혜는 장애가 없으며, 해탈의 방편은 그 오묘함이 지극히 그러한 것이다.
2. 명장섭분제(明藏攝分齊)
둘째, 장섭(藏攝)의 분제를 밝힌다는 것은 이 현묘한 적멸이 어찌 말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다만 대비로써 교훈의 방도를 드리울 뿐 사사로이 숨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연(緣)에 따라 설하여 법문이 하나가 아니고 가르침의 차별이 티끌이나 모래와 같음에 이른 것이니, 어찌 제한된 안목을 용납하겠는가? 만약 이를 기준으로 해서 변별하자면 한결같이 시종(始終)을 교화하는 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점교(漸敎)라 하고, 두 번째는 돈교(頓敎)라 하고, 세 번째는 원교(圓敎)라 한다. 첫 번째 문에서는 점(漸) 안의 소전(所詮)이 세 가지이기 때문에 가르침[敎]도 세 가지가 되고, 소위(所爲)의 두 가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가르침도 두 가지가 된다. 세 가지라고 말한 것에서 첫째는 수다라(修多羅)라고 하는데 한역하면 선(線)이라 하고 또 경(經)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선으로는 꽃을 꿸 수 있고, 경은 잡아 묶을 수 있으니, 뜻의 쓰임새가 서로 비슷하다. 다만 중국에서는 경이라는 이름만 중시하고 선이라는 명칭은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번역도 그 소중히 여기는 것을 좇았기 때문에 선이라는 이름은 폐기하고 경이라는 명목만을 두었다. 성인의 말씀[言敎]에 비유하여 능히 법상(法相)을 꿰뚫어서 어떤 차이나 잘못이 없게 함으로써 법을 영구히 머물도록 한 것은 경과 선이 서로 비슷하다. 이것은 비유로부터 명칭을 세운 것이니, 곧 정의 가르침[定敎]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는 비나야(毘那耶)인데 한역하면 멸(滅)이라 한다. 몸과 입과 뜻으로써 악한 분소행(焚燒行)을 하는 것은 뜻이 불이 타는 것과 같은데 계(戒)가 능히 멸할 수 있기 때문에 멸이라고 부른다. 이는 공능(功能)으로부터 명목을 드러낸 것이다. 가르침은 소전(所詮)으로부터 또한 멸이라 이름하기도 하니, 곧 계의 가르침[戒敎]을 설명한 것이다. 셋째는 아비달마(阿毘達摩)인데 한역하면 무비법(無比法)이라 하고, 또한 대법(對法)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능히 번뇌와 분별의 법상(法相)을 타파해서 분별함이 없는 지혜를 가장 수승(殊勝)한 것으로 삼으니, 다시 이것과 능히 견줄만한 법이 없기 때문에 무비법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이 없는 것으로부터 명칭을 얻은 것이다. 가르침은 소전(所詮)으로부터 또한 무비법이라 이름하기도 하니, 이는 곧 혜의 가르침[慧敎]을 설명한 것이다. 대법이라 이름한 것은 아비(阿毘)는 능히 대하는 지혜[能對智]이고 달마(達摩)는 대하는 바 경계의 법[所對境法]이니, 곧 경계로써 명칭을 세운 것이다. 이 뒤의 2장(藏)도 모두 소전으로부터 명칭을 얻은 것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섭론(攝論)』에서는 “세 종류의 수학(修學)을 설하기 위하여 개별적으로 수다라를 세우고, 계에 의지하고 마음에 의지한 배움을 이루기 위한 까닭에 비나야를 세웠다”고 말했는가? 이 문장으로써 증험해보면 경(經)은 세 행을 설명하고 계(戒)는 두 행을 설명하며 혜(慧)는 한 행을 설명한 것이다. 【답】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극성문(剋性門)이고, 둘째는 겸정문(兼正門)이다. 극성문은 앞서의 설과 같다. 겸정문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본말(本末)의 뜻이니, 경이 본교(本敎)가 되고 나머지 둘은 차례대로 말(末)이다. 둘은 겸정문이니, 경에서 정(定)이 정(正)이 되고 계(戒)와 혜(慧)는 겸(兼)이다. 율(律)과 논(論)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준거하면 알 수 있다. 이 경이 곧 수다라의 장섭(藏攝)이다. ‘소위(所爲)가 두 가지이기 때문에 가르침도 곧 두 가지가 된다’는 것은 근기에 예리하고 둔함이 있고 법에 깊고 얕음이 있으므로 성문의 둔한 근기를 기준으로 해서 분별의 성품에 나아가 3장(藏)을 세우면 성문의 행법(行法)을 이루기 때문이고, 보살의 예리한 근기를 위해서는 무분별 등 3무성(無性)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3장을 세우면 보살의 행법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문】경에서 ‘모든 연각(緣覺)을 위해서 인연의 관법(觀法)을 설한다’고 한 것은 곧 연각에도 가르침이 있는데 어째서 장(藏)을 세우지 않는가? 【답】『보요경(普曜經)』에 의거하면 삼승의 가르침이 곧 3장을 세운 것이다. 이제 『섭론』과 『지지(地持:地持論)』 등에 의거하면 단지 가르침에 가탁(假託)해서 성문장(聲聞藏)에 즉입(卽入)한 것이기 때문에 세우지 않은 것이다. 이를 두 가지 뜻으로 밝히겠다. 첫째는 성문의 성문이다. 이 사람은 본래 성문의 도를 구해서 4제(諦)를 관하기를 즐기다가 이제야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제법을 만나서 도를 얻은 것이다. 먼저 종성(種性)이 있는 상태에서 지금 다시 음성을 듣기 때문에 성문의 성문이라 말하는 것이다. 가령 경에서 “성문을 구하는 자에게 여래께서는 4진제법(眞諦法)을 설하신다”고 하였는데, 이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둘째는 연각(緣覺)의 성문이다. 먼저는 연각의 도를 구하다가 지금에야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연의 교법(敎法)을 만난 것이다. 가령 경에서 “연각을 구하는 자에게 여래께서는 12인연법(因緣法)을 설하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나아가서 논한 것이다. 첫째의 뜻은 총상(總相)으로 법을 아는 것이며, 나중의 뜻은 별상(別相)으로 법을 아는 것이니, 예리하고 둔함이 비록 다를지라도 똑같이 소과(小果)를 기약하므로 총체적으로 1장(藏)이 된다. 만약 최상의 예리한 근기가 부처님 없는 세상에 나와서 스스로 인연을 깨달아 도과(道果)를 얻는다면 행은 있되 가르침이 없으니 이에 의거해서 폐기한다. 『보요경』에 의거해서 이교(理敎)를 조망하면 다르다. 성문에 나아가면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첫째는 성품에 집착한 가르침과 성품을 깨뜨림을 따르는 등이다. 모든 부(部)에 집착한 가르침과 성품을 깨뜨리는 가르침이란 것은 법공(法空)을 분별하여 알고 똑같이 4제(諦)에 의거해서 소과(小果)에 다다르기 때문에 동일하게 성문장에 들어간다. 둘째, 보살장 안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먼저 대법(大法)을 익히고 나중에 물러나서 소승에 들어갔다가 지금 다시 대법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설하기를, “먼저 소승을 닦고 익혀서 배운 자를 제외하고 내가 지금 역시 이 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점입(漸入)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둘은 오래도록 대승을 익혀서 이제 처음으로 부처님을 보면 능히 돈(頓)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설하기를, “혹 어떤 중생이 세세생생 항상 나의 교화를 받다가 처음으로 내 몸을 보고 내가 설한 바를 들으면 곧 모두 믿고 받아 지녀서 여래의 지혜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경이 바로 대승의 가르침의 섭수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돈교의 섭수라는 것은 아래 경문에서 “만약 중생이 하열(下劣)해서 그 마음이 가라앉은[厭沒] 자라면 성문의 도를 보여서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시 어떤 중생이 모든 근(根)이 다소나마 밝고 예리하여 인연법을 즐기면 그를 위해 벽지불을 설하고, 만약 어떤 사람의 근기가 밝고 예리하여 중생을 요익케 하고 대자비심이 있으면 그를 위해 보살도를 설하고, 만약 위없는 마음[無上心]이 있어서 결정코 대사(大事)를 즐겨하면 그를 위해 불신(佛身)을 보이고 한량없는 불법을 설한다”고 하였으니, 이 경문을 통해서 일승과 돈교의 삼승에 차별이 있음을 증명해 아는 것이다. 또 진제의 『섭론』에 의거하면 하나라는 것은 일승이고 둘이란 것은 삼승이고 셋이란 것은 소승이다. 【문】돈오(頓悟)와 일승은 어떻게 다른가? 【답】이것 역시 정해지지 않았다. 어떤 이는 다르지 않다 하고, 어떤 이는 지혜와 가르침을 기준해서 다르다고 한다. 또 하나는 얕고 하나는 깊다. 일승장(一乘藏)이 바로 아래의 10장(藏)이니, 서로 섭수하여 준거하라. 셋째, 원교(圓敎)라고 말한 것은 상달(上達)한 자로서 부처님 경계에 나누어 오르는 자를 위해서 해탈 구경(解脫究竟)의 법문을 설하는 것이니, 불사(佛事)을 원만히 충족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경은 곧 돈교와 원교의 두 교(敎)에 섭수되는 것이다. 원교가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은 가령 아래의 경문에서 ‘큰 바다를 인(因)해서 10보산(寶山)이 있다’는 등과 같으니 준거하라. 【문】이 경이 어째서 이상의 삼승의 분별과 섭수4)를 통틀은 것인가? 【답】이 경의 종지가 동교(同敎)와 별교(別敎) 두 교의 삼승 경계와 견문과 수행 등을 통틀기 때문이다. 가령 『법화경』에서는 삼계 가운데서 세 수레로 여러 자식들을 인도하여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 노지(露地)에서 따로 큰 소수레를 주고 있으니, 이러한 두 가르침은 똑같이 삼계에 있으면서 견문(見聞)의 경계가 된다. 또 성문 등이 궁자(窮子)가 된 것은 바로 인도를 받음[所引]이다. 그러므로 소승의 밖에 따로 삼승이 있어서 상호간에 서로 인도하여 주(主)와 반(伴)으로 종지를 이룸을 아는 것이다. 장섭(藏攝)의 분제를 마친다.
3. 변교하소전종취급능전교체(辨敎下所詮宗趣及能詮敎 體)
셋째, 가르침 아래에서 설명한 바[所詮]의 종취를 해석한다는 것은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총체적인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것이다. 총체적인 것은 인과연기(因果緣起)의 이실(理實)이 종취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것에는 네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교(敎)와 의(義)의 상대(相對)로써 종취를 변별하는 것이며, 둘째는 경계와 행이며, 셋째는 이(理)와 사(事)이며, 넷째는 인(因)과 과(果)이다. 교(敎)는 종(宗)이 되고 의(義)는 취(趣)가 되며, 경계는 종이 되고 행은 취가 되며, 사(事)는 종이 되고 이(理)는 취가 되며, 인(因)은 종이 되고 과(果)는 취가 된다. 다음으로 ‘능전(能詮)의 교체(敎體)’란 것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뜻은 실제 음성의 명미구(名味句)이고, 두 번째 뜻은 비슷한 음성의 명미구이고, 세 번째 뜻은 비슷하지 않은 음성의 명미구이고, 네 번째 뜻은 오직 식(識)뿐인 음성의 명미구이고, 다섯 번째 뜻은 진여(眞如) 음성의 명미구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일체의 법은 모두 여(如)이다”라고 하였다.
4. 석경제목(釋經題目)
넷째, 경의 제목을 해석한다는 것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이란 것에서, 대(大)는 이른바 체(體)ㆍ상(相)ㆍ용(用)이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평등해서 늘거나 줄지 않는 체(體)와 성품의 공덕을 구족한 상(相)과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과를 낳는 용(用)이기 때문이다. 방(方)이란 것은 이치가 올바르고 잘못되지 않은 것이다. 광(廣)이란 것은 법문의 이수(理數)와 덕을 갖춤이 그 변제(邊際)를 다하는 것이다. 불(佛)이란 것은 각(覺)이니, 이것은 10불(佛)과 3신불(身佛)에 통한다. 화(華)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과(果)를 모은 화(華)이니 과와 더불어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생사가 도구(道具)가 되는 등과 나아가 인위(因位)의 선근 등과 같은 것이다. 둘은 과(果)를 장엄한 화(華)이니 과와 더불어 동시(同時)이다. 마치 7정화(淨華) 등과 만과위(滿果位)의 모든 덕과 같은 것이니, 수생(修生)과 본유(本有)가 서로 장엄함을 알 수 있다. 엄(嚴)이란 장식하는 것이다. 또 대(大)라고 말한 것은 뛰어나고 궁극적인 것을 모두 지목하여 표방한 것이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크고 뛰어나고 높고 넓은 것은 동일한 체(體)이나 이름이 다른 것이다. 승지(乘旨)의 길이 풍부하고 삼라(參羅)에 밖이 없음을 대본(大本)이라고 말하니,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방(方)이라 말한 것은 원만히 통하는 이치가 처소마다 착하지 않음이 없고 연(緣)에 접촉할 때마다 순응해서 사물을 가리지 않고서 베풀기 때문에 방이라 말한 것이다. 광(廣)이라 말한 것은 비었으나 그윽하고, 은미하지만 고원하며, 깊으면서도 넓은 것을 광이라고 한 것이다. 불(佛)이라 말한 것은 중국의 바른 음으로는 불타(佛陀)라고 하며, 한역하면 각자(覺者)라고 칭한다. 궁극의 근원을 환히 통달하고 속진(俗塵)의 습기를 영원히 없애며, 품고 있는 밝음이 홀로 빛나면서 그 빛이 대야(大夜)를 밝힘으로써 온갖 미혹한 이를 계도(啓導)하여 스스로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므로 불타라고 말한다. 화엄(華嚴)이라 말한 것은 이것이 법신의 행과 덕의 아름다움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체(體)는 참으로 없는 것[眞無]이 아니어서 그 묘(妙)함을 드러내고 공(功)은 궁극적으로 없는 것[極無]이 아니어서 그 뛰어남을 나타내니, 상호간에 밝게 발(發)함으로써 그 뜻이 모두 초절(超絶)하여 자체가 원만히 통하고 뛰어나게 묘함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온갖 채색의 진기한 보배가 금안(金顔)을 섬세하게 장식해서 그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비할 바가 없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 비유에 나아가서 명칭을 표(標)하므로 화엄이라 말한 것이다. 경(經)이라는 것은 참되고 청정한 가르침과 항상된 원칙을 가르치고 의론하는 것이니, 경문이 이치의 씨줄[理緯]을 언전해서 행심(行心)을 드러내기 때문에 경이라 말하는 것이다. 세간의 정안(淨眼)이란 것은 이른바 시간 속의 기(器) 등의 3세간이며, 아울러 비유할 수 있는 상(相)이다. 또 체용의 차별이므로 세간을 나타내고, 걸림도 없고 오염도 없는 것을 정안(淨眼: 청정한 눈)에 비유한 것이다. 또한 여래께서 아직 세간에 나오지 않으셔서 잘 이끌어 줌이 없기 때문에 장님과 같고, 부처님께서 이제 세간에 나오셔서 자타(自他)의 청정함을 나타낸 것을 밝은 눈[明眼]에 비유했을 뿐이다. 세간의 정안이라 말한 것은, 이는 응당 서(序)라고 이름 붙여야 하는데, 다만 지금의 시운[時會]은 모두 부처님의 온갖 바다의 수(數)에 뛰어나게 유입(流入)하여 덕이 청정한 영역에 머물고 티끌에 물들지 않는 바이며, 스스로의 천진(天眞)을 내어 진실로 유위(有爲)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원만한 도인 연기의 묘함을 드러내는 데 의탁함으로써 생사를 버리지 않고도 오염이 없어서 사(事)에 나아감을 명목으로 삼기 때문에 “세간의 정안은 측량하기가 어려우니, 비유가 아니면 밝히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형상[狀]을 본뜨더라도 만약 눈의 안팎이 함께 청정한 가운데 맑고 사무침을 나타낸다면 색상(色像)의 삼라(參羅)가 모두 하나의 운(運)에 속하여 작은 것도 없고 큰 것도 없고 멂도 없고 가까움도 없어서 서로 방애(妨礙)하지 않기 때문에 눈과 같은 데 준거하고 비교하여 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래의 게송에서 “세간의 청정함은 마치 눈과 같다”고 찬탄한 것이니, 그 뜻인즉 성인의 말씀도 그러함을 나타낸 것이다. 품(品)이란 것은 언어의 이치가 균등하고 격식의 부류[格類]가 서로 따르는 것을 품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경에는 34품이 있는데, 이 품이 그것을 꿰어서 첫머리에 있기 때문에 첫째라고 칭한 것이다. 경의 모든 절목과 종요(宗要)의 정황의 지취(旨趣)를 여기서 밝히기 때문에 『대방광불화엄경』이라 말한 것이다.
5. 본문해석(隨文解釋)
다섯째, 경문에 따라 해석한다는 것에서 처음은 가르침의 분제(分齊)를 총체적으로 간추린 것이다. 다음은 개별적으로 경문의 분제를 해석한 것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삿됨을 대(對)하여 올바름을 드러냄으로써 그 분제를 밝힌 것이며, 둘째는 소전(所詮)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그 분제를 밝힌 것이다. 첫째, 삿됨을 대한 것에 네 가지 문이 있다. 하나는 연(緣)을 기준으로 해서 삿됨을 변별한 것이니, 가령 8시(時)에는 마땅히 말하지 않는 등이다. 둘은 업을 기준으로 해서 삿됨을 변별한 것이니, 가령 명예와 이익을 구해서 스스로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하면서 세상에 있는 것을 즐기는 등이다. 셋은 미혹을 기준으로 해서 삿됨을 밝힌 것이니, 들어서 짓고 들어서 이해함으로써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나아가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 등이다. 넷은 시종(始終)을 기준으로 해서 삿됨을 변별한 것이니, 가령 경에서 “8대(大) 선인(善人) 등은 당연히 착하지 못함을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 소전(所詮)에 나아감을 기준으로 해서 분제를 밝힌 것은 대략 열 가지 문이 있다. 하나는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이니, 이 중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敎)와 의(義)가 구족한 것이며, 둘째는 이(理)와 사(事)가 구족한 것이며, 셋째는 해(解)와 행(行)이 구족한 것이며, 넷째는 인(因)과 과(果)가 구족한 것이며, 다섯째는 인(人)과 법(法)이 구족한 것이며, 여섯째는 분제와 경계의 지위가 구족한 것이며, 일곱째는 스승과 제자, 법(法)과 지(智)가 구족한 것이며, 여덟째는 주(主)와 반(伴), 의(依)와 정(正)이 구족한 것이며, 아홉째는 역(逆)과 순(順), 체(體)와 용(用)의 자재함이 구족한 것이며, 열째는 중생의 근기와 욕망에 따라 시현(示現)함이 구족한 것이다. 이 열 가지 문은 상응하여 전후(前後)가 없다. 둘은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다. 이 중에도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비유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위의 것을 준거할 수 있다. 셋은 비밀은 현구성문(祕密隱顯俱成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연(緣)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위의 것을 준거할 수 있다. 넷은 미세상용안린문(微細相容安立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상(相)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거할 수 있다. 다섯은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세(世)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거할 수 있다. 여섯은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세(世)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거할 수 있다. 일곱은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이(理)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거할 수 있다. 여덟은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용(用)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거할 수 있고, 또한 성품에 의거할 수도 있다. 아홉은 유심회전선성문(唯心迴轉善成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마음[心]을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거할 수 있다. 열은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이다. 이 역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뜻이 지(智)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준거할 수 있다. 이상의 열 가지 문은 그 현묘함이 모두 개별적이고 다르다. 만약 교의(敎義)의 분제가 이와 더불어 상응한다면 곧 일승 원교 및 돈교의 법문이다. 만약 모든 교의의 분제가 이와 더불어 상응해서 구족하지 않는다면 곧 삼승의 점교에 섭수되는 것이다. 나머지 뜻은 아래의 천왕(天王) 등의 법문(法門)에 의지하여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다. ‘경문에 따라 해석한다’는 것은, 처음은 여덟 가지 가르침[敎]을 간략히 들어 상호간에 이루는 것을 밝히고 아울러 3교(敎)의 상(相)을 기준으로 해서 그 차례를 밝히며, 다음은 경문에 따라 해석한다. 그 여덟 가지 가르침이란, 첫째는 일승과 삼승의 분제이고, 둘째는 진(眞)의 감응이며, 셋째는 삼승을 돌이켜서 일승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넷째는 공(空)과 유(有)이며, 다섯째는 범부와 성인이 서로 말미암는 것이고, 여섯째는 상(常)과 무상(無常)이며, 일곱째는 삼승의 동행(同行)이며, 여덟째는 법의 삿되고 바름을 변별하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 뜻은 상하가 모두 통하는 것이다. 광설(廣說)과 약설(略說)이 서로 따르면서 근본과 지말의 두 가지 상(相)을 성취하니, 마땅히 준거해서 생각할 수 있다. ‘3교(敎)의 상(相)을 기준으로 해서 이룬다’는 것은, 이른바 처음으로 도수(道樹, 보리수)에서 모든 대행(大行)을 위하여 종지의 근본이 되는 이치를 한결같이 곧바로 진술하였으니, 방정(方正)하고 드넓은 법륜은 그 지취(旨趣)가 깊고 현묘해서 다시 빙자함[由藉]이 없는 것으로써 돈(頓)을 삼은 것이다. 점(漸)이라 말한 것은 처음 익히는 자를 위해 방편을 시설한 것이니, 삼승을 개발하여 이끌어 제접하는 교화이다. 처음은 미미하나 나중에는 드러나니,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로 이르면서 차례대로 서로 타고서 저 언덕[彼岸]으로 오르기 때문에 점이라고 칭한다. 원교(圓敎)라고 말한 것은 상달(上達)한 자로서 부처님 경계에 나누어 오르는 자를 위해서 여래의 해탈 법문을 설한 것이니, 구경의 궁극적인 종지와 지극한 과행(果行)이 불사(佛事)를 만족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말하는 것이다. 가령 실다움으로써 궁진(窮盡)하면 가지런하여 둘이 없음에 취향하고 동등하게 한 맛[一味]이어서 구경에는 나머지가 없으니,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대치(對治)하는 공용(功用)이 같지 않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서 그 깊고 얕음이 다르고, 말로 분류할 때 세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 차례라는 것은, 일승 요의(了義)의 실다운 설명에 나아가서 대치하는 방편과 행문(行門)의 차별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 가지로 요약해서 차례를 밝힌다. 첫째는 방편의 닦는 상[修相]으로 연기 자류(自類)의 인행(因行)을 대치하는 것에 의거해서 3교(敎)를 밝히는 것이니, 점교는 처음에 있고 돈교는 중간이며 원교는 나중이다. 세 가지의 뜻은 점교로부터 설한 것이니, 처음의 점교로써 믿음을 낳고, 다음의 돈교로써 행(行)을 성취하며, 다음의 원교로써 체용(體用)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실제의 연기 자체의 인행(因行)을 기준으로 해서 때[時]를 밝힌다면 돈교가 처음이고 점교는 다음이며 원교는 나중이니, 처음에 돈교를 보임으로써 수행하게 하고, 다음은 점교를 보임으로써 사물을 드러내며, 나중은 원교를 보임으로써 과덕(果德)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만일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법계의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장애도 없는 연기 자체의 아주 깊고 비밀스러운 과도(果道)의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곧 처음은 원교이고 다음이 돈교이며 나중은 점교이다. 그 까닭은 바로 충허(沖虛)한 종지는 현상(玄想)을 남기지 않고, 원만한 도는 시작하는 문[始門]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事)가 비록 가까우나 먼 데에 이르고, 상(相)이 비록 드러나나 은밀한 데에 이르니, 얕음이 지극히 깊음에 이르러 바야흐로 궁진(窮盡)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원교를 보여서 보고 듣게 하고, 다음은 돈교를 드러내어 따라 기뻐하게 하며, 나중에는 점교의 계위(階位)를 변별하여 덕을 나타내어 믿음의 행[信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교를 기준으로 해서 세 가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지취(旨趣)를 논한다면, 여래 법신의 위없는 깨달음[菩提]과 지극한 원도(圓道)를 올바르게 밝혀서 궁극의 실상에 계합하고, 덕이 깊은 바다에 가득 차고 뜻이 진실한 근본에서 흥기하여 후제(後際)를 드러내어 밝힌 것이다. 과(果)를 말하는 것은 얻음이 없는 데서 드러나고, 인(因)을 논하는 것은 발(發)함이 없는 데서 나타나므로 모양[相]이 없는 모양[相]이다. 그 뜻[趣]의 그윽하고 미묘함이 응결하여 태허와 같아서 지취가 이름과 모양[名相]을 끊었으니, “지극한 도는 말이 없으나 현묘한 전적(典籍)은 두루 퍼져 있고, 진실한 용모[眞容]는 상(像)이 없으나 묘상(妙相)이 갖춰져 장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고 부처님의 행하는 바를 갖추어서 덕의 드러남이 남달리 아름다워 세간을 초월하였다. 그러므로 경의 첫머리를 불화엄(佛華嚴)의 칭호로써 일관한 것은 당연히 지남(旨南)5)의 설명인 것이니 종(宗)의 요체가 여기에 있다. ‘경문에 따라 해석한다’는 것은 이 1부(部)의 가르침을 크게 나누면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서분(序分)ㆍ정종분(正宗分)ㆍ유통분(流通分)이다. 만약 요간(料簡)을 세운다면 그 8회(會)에 따라서 열 가지 뜻의 구별이 있으니, 나머지는 준거해서 알 수 있다. 이 경의 1부(部)는 모두 7처(處) 8회(會)가 있으니, 사람 중에서 세 곳, 천상에서 네 곳이므로 7처라 이름하고, 보광(普光)의 회상이 거듭 있어서 8회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단계적인 법이 되기 때문에 7이나 8이 있을 뿐이다. 이 7처 8회의 경문의 상(相)이 동일하지 않음이 없으니, 대략 열 가지 문으로 분별하겠다. 8회 안에 나아가서 첫째로 부처님을 밝힌 까닭은 부처님은 교화의 주체[化主]이니 이제 사물을 섭수(攝受)함에 반드시 화주를 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처음에 밝힌 것이다. 둘째, 대성인의 설법은 의탁하는 바가 있어서 다음으로 처소를 변별한 것이다. 셋째, 섭수하여 교화함[攝化]에 일삼은 바가 있어서 다음으로 보살을 밝힌 것이다. 넷째, 기(器)가 비록 구족되더라도 청하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설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으로 의심을 내는 것이다. 다섯째, 법의 윤택함이 가없어서 다음으로 새로운 대중이 모인 것을 변별한 것이다. 여섯째, 미묘한 법을 살피지 않고서는 즉하여 설[卽說]할 수가 없어서 다음으로 정에 들어감[入定]을 변별한 것이다. 일곱째, 법의 뛰어남을 변별하고자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를 밝힌 것이다. 여덟째, 법의 시종(始終)과 분제를 드러내니 다음으로 나옴[出]과 나오지 않음[不出]의 차이를 밝힌 것이다. 아홉째, 뛰어난 법을 이미 폈기에 다음으로 법의 이익을 밝혔으니, 이 때문에 대지가 흔들리고 꽃비가 내리는 등을 변별한 것이다. 열째, 그러나 공용(功用)이 이미 드러나서 교화가 치우치거나 국한되지 않으며, 시방이 가지런히 굴러서 그 계합(契合)이 헛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으로 회상의 평등을 매듭지어서 증명과 서술의 성취를 드러냄을 변별한 것이다. 이 열 가지는 만약 꽃비가 내리는 것 등을 여의면 곧 15가지가 있으니, 꽃을 뿌리고, 향을 태우고, 광명을 놓고, 음악을 연주하고, 보배를 비처럼 내리는 다섯 가지를 섭수해서 하나로 삼는다. 지금은 모두 섭수하여 열 가지가 있을 뿐이다. 둘째, 회상을 대해서 유(有)와 무(無)를 해석한 것이다. 7처(處)의 부처님은 3신(身) 중에서 어떤 부처님인가? 이를 이해하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국한된 것[局]이고, 또 하나는 전체적인 것[通]이다. 국한된다는 것은 8회가 다함께 소견(小見)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보신(報身)이다. 【문】이미 보신이고 화신이 아니라면 어째서 처(處)는 아래와 더불어 동일한 것인가? 【답】이는 화신을 우선해서 말세에 유입(流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의 처소에 의탁함으로써 변별한 것이다. 【문】만약 세간에 의탁했다면 어째서 경에서는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는가? 【답】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화신에 의탁해서 보신을 드러낸 것이니, 즉 8회가 이에 해당된다. 둘째는 보신에 의탁해서 화신을 드러낸 것이니, 즉 색구경(色究竟)이 이에 해당된다. 욕계가 화신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상(相)이 화신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지금은 교의(敎意)를 논했을 뿐이다. 전체적이라는 것은 3신을 갖추고 있어서 하나하나 서로 이루는 것이며, 또 보현이 경문에서 “내 몸 안에 존재하여 장애가 없다”고 말한 것이며, 또 화장세계의 바다를 변별한 것이며, 또 도수(道樹) 등에 의탁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이것은 삼승을 기준으로 변별한 것이니, 만약 일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아래의 10불(佛)이 모두 통틀어 있는 것이다. 경문을 세 가지로 나눈다는 것은 서(序)ㆍ정(正)ㆍ유통(流通)이다. 서(序)라는 것은 방편의 상(相)이고, 정(正)이란 것은 설체(說體)의 상이며, 유통은 진용(津用)의 상이다. 이 「정안품(淨眼品)」은 서(序)이고, 「노사나품(盧舍那品)」 이하는 올바른 종지를 변별한 것이며, 경전이 모두 전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통은 없다. 이를 아는 이유는 『대론(大論)』에서 “부사의경(不思議經)은 10만 게송이 있는데, 여기선 오직 3만 6천 게송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또한 유통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중생심미진(衆生心微塵)’ 이하의 경문이 이에 해당된다. 다만 용수(龍樹)보살이 사(事) 등의 처소를 모은 것이 10만인데, 이를 준거해서 생략했기 때문에 부족할 뿐이다. 만약 경문의 뜻으로부터 나눈다면 경문에 이르러서 개별적으로 변별할 뿐이다.
1) 서품(序品)6) 서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증신(證信)을 밝힌 것이고, 둘째 ‘천왕설공(天王設供)’ 등의 이하는 발하여 일으킨 서(序)를 밝힌 것이다. 증신(證信)의 서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두 구(句)의 네 글자는 이 증신에 국한된 것이고, 두 번째 ‘한 때[一時]’ 이하는 뜻에 둘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서 하나의 뜻을 기준으로 했을 뿐이다. 또한 두 구의 뜻은 1부(部)를 통틀면서도 경문은 국한되어 있고, 처음의 ‘한 때’ 이하는 경문을 통틀면서도 뜻은 국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을 기준으로 하면 곧 여섯 구가 있다. 첫째는 ‘이와 같이[如是]이고, 둘째는 ‘나는 들었다[我聞]’이며, 셋째는 ‘한 때[一時]’이고, 넷째는 부처님이며, 다섯째는 ‘머무르는 곳[住處]’이고, 여섯째는 ‘똑같이 듣는 무리[同聞衆]’이다. 처음의 ‘여시(如是)’에 대한 해석은 뭇 성인의 이(理)의 가르침과 경문의 뜻이 상응하기 때문이요, 또한 내가 전하는 경문의 뜻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인의 교의요, 또한 믿고 따르는 언사일 뿐이다. ‘아문(我聞)’은 알 수 있다. ‘일시(一時)’라는 것은 근기에 수여해서 서로 감응하는 때이다. 시(時)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평등시(平等時)이니, 말하자면 침체하거나 들뜨는 전도(顚倒)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화합시(和合時)이니, 말하자면 능문(能聞)과 정문(正聞)을 듣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법륜을 굴리는 시[轉法輪時]이니, 말하자면 올바로 설하고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처(處)라는 것은 말하자면 마갈제(摩竭提)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이다. 이곳은 대성(大聖)께서 의탁하신 곳인데, 하나에 존재함으로써 일체에 존재함을 해석한다. 국(國)은 전체적인 곳이고, 장(場)은 국한된 곳이니, 한역하면 ‘해로움이 없는 나라[無害國]’이다. 적멸은 장애를 여읜 원만한 과(果)와 청정하고 적정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으로 성취했다’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도를 얻은 시초이니, 처음 7일의 시기이다. 둘은 세간에 나타난 시초이니, 법을 설한 두 번째 7일의 때이다. 이는 남으로 하여금 도를 성취한 시초를 알게 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두 구는 의(依)와 정(正)을 총체적으로 열어서 종지를 세운 것이고, 둘은 개별적으로 변별한 것이다. 개별적인 것 안에서도 둘로 나누니, 첫째는 의보(依報)를 해석한 것이며, 둘째 ‘여래께서 이곳에 처하시어’ 이하는 정보(正報)를 변별한 것이다. 첫째는 곧 기세간(器世間)인데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도량의 땅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그 보리수[其菩提樹]’ 이하는 도수(道樹)를 변별한 것이며, 셋째 ‘불가사의(不可思議)’ 아래는 사자좌를 밝힌 것이다. 이러한 뜻을 세운 이유는 땅은 행이 머무는 근본이 되며, 수(樹)는 온갖 덕의 건립이 되고, 좌(座: 법좌)는 이익을 섭수하는 쓰임새[用]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의 장(場) 중에 세 자구(子句)가 있다. 첫째 도량의 체(體)가 장엄이 구족되었음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부처님의 신력[佛神力]’ 이하는 과덕이 의지하여 성취됨을 밝힌 것이며, 셋째 ‘한량없는 선근[無量善根]’ 이하는 그 인행(因行)을 낸 것이다. 첫 번째 체(體)의 경문에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총체적으로 체를 변별한 것이고, 둘째 ‘온갖 뒤섞인 보화(衆雜寶華)’ 아래의 여섯 구는 자리(自利)의 덕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 ‘다함 없는 보배가 비처럼 내린다[利自他德]’ 이하의 둘은 자리이타의 덕이다. 자리의 여섯 구 중에서 처음의 한 구는 미묘함과 원만함의 청정이다. 다음의 한 구는 덕을 갖춘 청정함이며, 다음의 한 구는 색상(色相)의 청정함이며, 다음의 한 구는 고현(高顯)의 청정함이며, 다음의 한 구는 권속의 청정함이며, 다음의 한 구는 은영(隱暎)의 청정함이다. 이타(利他)의 두 구 안에서 처음은 진용(津用)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한 구는 복윤(覆潤)의 청정함이니, 이 두 구는 자타에 다 통한다. 다음 ‘부처님의 신력’ 이하의 두 번째 자구(子句) 가운데 세 구가 있다. 첫째는 정토를 변화시켜서 대지를 넓게[廣博] 함을 밝힌 것이고, 둘째 ‘광명이 널리 비춘다[光明普照]’ 이하는 덕의 공용이며, 셋째 ‘일체의 기이하고 특별한 묘한 보배가 쌓여 있다[一切奇特妙寶積]’ 등은 체(體)가 온갖 덕을 섭수한 것이다. 도수(道樹)의 경문에 나아가면 두 자구가 있다. 첫째는 아홉 구가 있으니 나무의 체[樹體]의 장엄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 ‘부처님의 신력’ 이하는 과덕이 의지하여 성취됨을 변별한 것이다. 첫째의 경문을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는 나무의 체(體)가 높고 수승해서 능히 그늘을 드리움을 밝힌 것이고, 둘째 ‘청정한 유리[淸淨瑠璃]’ 이하의 다섯 구는 장엄을 올바로 변별한 것이며, 셋째 ‘나무의 광명이 널리 비춘다[樹光普照]’ 이하의 세 구는 이타의 공용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3업(業)이 있는데, 처음은 의(意)이고 다음은 신(身)이고 그 다음은 구(口)이다. 법좌[坐]의 경문은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법좌의 체(體)가 정(情)으로 헤아림을 초월했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 ‘온갖 묘한 보화[衆妙寶華]’ 이하는 장엄을 올바로 변별한 것이며, 셋째 ‘흐르는 광명이 구름과 같다[流光如雲]’ 이하는 이타(利他)의 공용을 변별한 것인데, 역시 3업이 있으니 처음은 신(身)이고 다음은 의(意)이고 나중은 구(口)이다. 넷째 ‘여래의 광명이 넘어선다[如來光明踰]’ 등의 이하에서 위는 과(果)이고 아래는 가(加)인데 다섯 구가 있다. 하나는 그늘을 드리움[蔭覆]의 뛰어남이며, 둘은 감화의 뛰어남이며, 셋은 걸림 없음의 뛰어남이며, 넷은 빠르고 두루 함의 뛰어남이며, 다섯은 덕을 갖춤의 뛰어남이다. 다섯째 ‘한량없는 온갖 보배’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지어 이룬 것이다. 둘째, 정보(正報)를 변별하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여래의 처소 등을 총체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다음 ‘삼세를 요달한다[了三世]’ 이하는 개별적으로 변별한 것이다. 두 번째의 개별적으로 해석한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신을 밝힌 것이고, 둘째 ‘그 몸이 일체의 도량에 두루 앉는다[其身遍坐一切道場]’ 이하는 보신을 밝힌 것이며, 셋째 ‘다 능히 일체의 온갖 회상을 두루 나타낼 수 있다[悉能普現一切衆會]’ 이하는 그 화신을 밝힌 것이다. 이는 삼승을 기준으로 해서 경문을 판별한 것이다. 만약 일승에 의지한다면 이 가운데 곧 10불의 체(體)와 덕(德)과 용(用)을 갖추니, 이를 준거해서 사유해 섭수하라. 첫 번째인 법신의 경문에 세 구가 있다. 처음은 신업(身業)의 덕을 변별한 것인데 두 구가 있으며, 둘째 ‘묘한 음성이 두루 이른다[妙音遍至]’ 이하의 두 구는 구업(口業)의 덕을 밝힌 것이며, 셋째 ‘평등한 법상(法相)’ 이하의 세 구는 의업(意業)의 덕을 변별한 것이다. 두 번째인 보신의 경문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몸의 공용[身用]을 변별한 것에 네 구가 있다. 하나는 법좌의 분제이고, 둘은 근행(根行)을 아는 것이며, 셋은 미혹하여 물듦[惑染]을 제거하는 것이고, 넷은 덕을 낳는 것이다. 둘째 ‘삼세의 지혜 바다 광명을 널리 놓는다[普放三世智海光明]’ 이하의 세 구는 구업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 ‘역무외(力無畏)’ 이하의 한 구는 그 의업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는 화신을 변별한 경문이다. 첫째 신업에 세 구가 있고, 둘째 ‘일체를 요달한다’ 이하의 두 구는 의업이며, 셋째 ‘일체 광명’ 이하의 두 구는 구업이다. 구업의 경문에 나아가서 둘로 나누면, 처음은 광명을 놓아 능히 모든 뜻을 널리 나타냄을 변별하는 것이며, 다음의 ‘모든 불세계[諸佛世界]’ 이하는 이익의 분제를 변별한 것이다. 여섯째,7) ‘똑같이 듣는 무리[同聞衆]’이다. 즉 중생세간의 경문은 대중의 원만한 모임을 밝힌 것인데, 여기서는 두 가지 문을 지어서 변별한다. 하나는 모든 회상의 유(有)와 무(無)가 동일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둘은 경문에 의거하여 해석한 것이다. 유와 무는 둘로 나누니, 하나는 대소(大小)이고 둘은 잡류(雜類)이다. 대소라는 것은 7처의 회상은 모두 대(大)이고, 제8은 소(小)에 통한다. 그 까닭은 전자는 돈교 대승의 체(體)를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제8은 법계에 들어가기 위해 널리 소승을 섭수하여 대승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인력(人力)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잡류라는 것은 전자도 하나뿐이고 후자도 하나뿐이니, 잡류인 신왕(神王)의 명칭을 열거하고 나머지는 생략해서 열거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전자는 우러러 닦아 믿어서 비로소8) 법계에 칭합하는 사람이 신해하는 만행의 모양[信解萬行相]을 표시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법계에 칭합하여 법계를 섭수하는 사람이 닦아 들어가는 덕의 원만한 모양[修入德滿相]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열반경』에서는 온갖 유(類)를 섭수함이 많은데 여기서는 적은 것인가? 【답】전자는 성숙함을 조망하기 때문에 멀리 설했고, 여기서는 시초를 기준으로 해서 가깝게 논하였으니, 이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초위(初位)를 잡은 것이 분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소(小) 이하는 통하지 않는 것이며, 나머지는 아래에서 변별한 것과 같다. 둘째,9) 경문을 해석한 것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여래 법신의 정토가 34대중을 섭수함을 나열한10) 것이며, 둘째 ‘이때 부처님의 사자좌에서[爾時於佛師子座]’ 이하는 다시 법신정토의 방편력으로써 하나의 대중을 섭수해서 일으킨 것이니, 처음과 끝을 합쳐서 35대중이 있다. 처음은 대중의 명칭을 대략 열거한 것이며, 둘은 명칭을 열거하여 덕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둘로 나누니, 첫째 보살 등을 변별하여 무위(無爲)의 연(緣)으로 모인 대중을 밝힌 것이며, 둘째 모든 신(神) 등은 유위(有爲)의 연으로 모인 대중을 밝힌 것이다. 아래에서 명칭을 열거하고 덕을 찬탄한 것은 준거하면 알 수 있다. 첫째, 보살 대중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수(數)를 든 것이다. 둘째는 보살의 명칭을 열거한 것인데 여기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변별한 것이며, 다음은 매듭지음이며, 세 번째는 덕을 찬탄한 것이다. ‘더불어 함께[與俱]’라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부처님과 더불어 함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설하는 것이고, 둘째 ‘전법(傳法)에서 더불어 함께’는 그와 더불어 함께 듣는 것이다. 보(普)라는 것은 덕이 법계에 충만한 것을 보라 말하고, 지극히 순응하고 부드럽게 조화하는 것을 현(賢)이라 말하니,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 보살의 명칭을 밝힌 것이다. 잡(雜)이라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아래에 나오는 거침과 세밀함[麤細] 등의 잡다한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 대중이 아래에 나오는 8회상의 서(序)를 통해서 많은 종류의 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알 수 있다. 셋째,11) 덕을 찬탄한 경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둘째 ‘모든 바라밀[諸波羅蜜]’ 이하는 자분(自分)의 덕을 개별적으로 찬탄한 것이며, 셋째 ‘위없는 지와 원[無上智願]’ 이하는 능히 타분(他分)의 덕에 들어가는 것을 개별적으로 변별한 것이고, 넷째 ‘다 모든 부처님을 얻는다[悉得諸佛]’ 이하는 보현의 행원(行願)과 자재한 섭화(攝化)를 변별한 것이다. 총체적인 경문은 둘로 나눈다. 첫째 ‘모두가 선우(善友)이다’라는 것은 사람의 뛰어남을 드러낸 것이며, 노사나(盧舍那)라는 것은 한역하면 광박엄정(廣博嚴淨)이다. 둘째, 자분(自分)을 변별한 경문에 세 자구(子句)가 있다. 하나는 자리행(自利行)을 밝힌 것이고, 둘의 ‘변재의 큰 바다[辯才大海]’ 이하는 이타행이며, 셋의 ‘한 지에 머문다[住於一地]’ 이하는 행을 통해 지위가 성립함을 밝힘으로써 섭수하는 바의 분제를 변별한 것이다. ‘한 지(地)에 머무는 것이 일체의 모든 지 등을 널리 섭수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행상(行相)의 차례가 마지막으로 궁극의 실제 자체에까지 이르는 것에 나아가서 논한 것이다. 요약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 처음이 있기 때문에 능히 나중을 낳는 것이며 종국에는 만족하기 때문에 섭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둘째, 비록 처음 시작[初始]이라 하더라도 모든 지(地)에서 행하는 바를 모두 능히 행함으로써 모든 법이 차이가 없기 때문에 섭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취된 행은 다만 자분(自分)의 지위에 있을 뿐이며, 상하우열은 단지 밝음과 어두움을 차이로 삼을 뿐이다. 셋째, 다만 처음 시작이 곧 일체 모든 지(地)의 공덕을 섭수하기 때문에 섭수라 이름한다. 넷째, 처음과 나중으로써 일컫지 않기 때문에 섭수라 이름한다. 다만 이 처음 시작이 그대로 끝이기 때문에 섭수라 이름한다. 자리(自利)에 나아가선 세 가지로 나누는데, 이른바 총(總)과 정(正)과 조(助)이다. 이타(利他)의 경문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하나는 구업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하나는 신업이며, 그 다음 ‘세 가지를 훌륭히 안다[三善知]’ 이하는 의업이다. 이 중 첫째는 근기를 아는 것이고, 둘째는 이법(理法)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사법(事法)을 아는 것이다. 셋째, 타분(他分)의 경문에는 네 구가 있다. 첫째는 자리의 다섯 구를 밝힌 것이니, 하나는 원(願)을 얻은 것이고, 둘은 가르침[敎]을 얻은 것이며, 셋은 과법(果法)을 얻은 것이고, 넷은 지위의 덕[位德]을 얻은 것이며, 다섯은 정(定)을 얻은 것이다. 둘째 ‘중생의 바다에서[於衆生海]’ 이하는 이타의 두 구이니, 처음은 건립한 것이고 다음은 해석한 것이다. 셋째 ‘훌륭히 들어간다[善入]’ 이하의 두 구는 법신에 훌륭히 들어가는 것이니, 처음은 건립한 것이고 다음은 해석한 것이다. 넷째 ‘두루 유행한다[遍遊]’ 이하의 두 구는 물(物)을 위해 정토를 출생하는 것이니,12) 처음은 세계해(世界海)이고 다음은 국토해(國土海)이다. 넷째, 보현원행의 경문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의 삼세 방편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공양을 변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현의 원(願)을 얻는 것이고, 넷째는 중생을 섭수해서 지혜와 덕을 성취하는 것이니, 역시 물(物)을 대해서 뛰어남을 섭수하는 것이라 하겠다. 유위의 연(緣)이 모인 경문에 나아가선 33대중이 있는데,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서 명칭을 열거한 까닭은 행에 나아감이 더욱 미세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이 모든 대중은 어느 땅 안에서 머무는가? 【답】이 대중의 한 몸[一身]은 4토(土) 가운데 3토(土)인 화토(化土) 중의 1분(分)에 머무니, 이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 아래의 부처님을 찬탄한 경문은 위로부터 아래를 향해 열거했는가?’라는 것은 존위(尊位)의 차례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처음의 역사중(力士衆)은 세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수(數)를 든 것이고, 둘은 명칭을 열거한 것이며, 셋은 덕을 찬탄한 것이다. 덕을 찬탄한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인 것이고, 둘째는 다섯 구의 구별로서 하나는 원(願)을 갖추는 문이고, 둘은 덕을 갖추는 문이며, 셋은 정(定)을 갖추는 문이고, 넷은 신력(神力)을 갖추는 문이며, 다섯은 해탈을 갖추는 문이니, 곧 자리의 덕이다. 셋째 ‘일체 중생에 처해서[處一切衆生]’ 이하의 두 구는 이타이다. 나머지 대중은 명칭을 열거한 것이고, 덕을 찬탄함은 알 수 있다. 가루라(迦樓羅)라는 것은 금시조이고, 긴나라(緊那羅)는 한역하면 의신(疑神)인데 음악을 연주한다. 마후라가(摩睺羅迦)는 한역하면 망신(蟒神)이고, 야마(夜摩)라는 것은 한역하면 시천(時天)인데 또한 묘선(妙善)이라고도 이름한다. 도솔(兜率)이란 것은 한역하면 지족(知足)이고, 대범(大梵)이란 것은 이것이 새롭게 욕망의 오염을 여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마혜수라(摩醯首羅)는 한역하면 대자재천(大自在天)이다. 경문은 세 가지가 있는데 앞의 두 가지는 알 수 있다. 덕을 찬탄하는 경문에 나아가선 네 가지 단락이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찬탄하는 것이고, 둘째 ‘일체 중생에서[於一切衆生]’ 이하는 이타를 개별적으로 찬탄한 것이며, 셋째 ‘한량없는 묘색[無量妙色]’ 이하는 자리를 찬탄한 것이고, 넷째 ‘부처님의 자태와 용모를 보는[覩佛姿顔]’에서 나아가 ‘그 까닭은 무엇인가[所以者何]’ 이하는 사(事)를 인해서 두 가지 용(用)이 이루어지는 이유를 변별한 것이다. 셋째의 자리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은 법신의 신업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10력 중에서[於十力中]’ 이하는 의업을 밝힌 것이며, ‘일체 중생에 처해서[處一切衆]’ 이하는 구업이다. 이 경문에 다섯 구가 있으니, 전전(展轉)해서 알 수 있다. 넷째의 이유[所以]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의거한 바를 밝힌 것이고, 둘은 이유를 변별한 것이다. 이유 가운데 처음은 물음이고 다음은 대답이다. 대답의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의거하는 바의 연(緣)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모든 여래에게[於諸如來]’ 이하는 연에 의거해서 행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각각 아래를 따라서 개별적으로 성취한 바를 매듭 지은 것이니, 공(功)을 미루어 보면 부처님에게 있다. 둘째의 경문 속에 여섯 자구(子句)가 있다. 첫째 신위(信位)에 있음은 부처님께서 중생의 선근을 섭수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해위(解位)로 인도해서 들어가기 때문이며, 셋째는 부처님께서 증위(證位) 이상을 섭수해서 들어가기 때문이고, 넷째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 것으로부터[從逮得無量功德]’ 이하는 8지(地) 이상의 공용이 없는 세력을 얻음을 밝힌 것이며, 다섯째 ‘모두 다 성취한다[皆悉成就]’ 이하는 10지 이상의 보현원행(普賢願行)을 변별한 것이고, 여섯째 ‘보살의 행하는 바[菩薩所行]’ 이하는 개별적으로 성취한 바를 매듭 지은 것이다. 셋째의 ‘공(功)을 매듭 지음은 부처님에게 있다’는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매듭 지음이고, 둘째는 여래의 지혜 광명이 널리 비춤을 올바로 추궁(推窮)하는 것이며, 셋째는 인(因)을 성취하게 되어 해탈력을 타고 불과(佛果)의 바다에 들어가서 몸소 말미암는 바를 변별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문에 대해 자재한 성취를 얻어서 이미 행이 원만함을 술회하는 것이니, 이 또한 네 구가 전전(展轉)하면서 변별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한 경문의 18중(衆) 안에 나아가니, 이는 다만 위에서 숨고 드러남[隱顯]을 간략히 했기 때문에 열여덟을 밝힌 것인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선해(善海) 등이 각기 하나의 법문에서 자재함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열여덟 번째의 보현보살이 일체 법문에서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 이 중에서 연기의 누관(樓觀)을 기준으로 하여 동생(同生)과 이생(異生)의 덕문(德門)의 분제를 드러내었으니, 마땅히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앞의 열일곱은 이생이라 할 수 있고, 나중의 제18 보현보살은 동생이다. 이생에 나아가면 경문이 열일곱이 있는데, 처음의 선해(善海) 안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법문자재를 드는 것이 곧 의업(意業)으로 공양을 행하는 것이며, 왕의 몸인[王身] 현재가 곧 신업 공양이다. 둘째 ‘게송을 설한다[說偈]’ 이하는 구업 공양을 변별한 것이고, 게찬문(偈讚文)은 여래의 3업이 법계에 가득한 작용임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그 중에서 처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3업이 세간에서 뛰어남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둘째 ‘일체 세간의 중생이 있다[有一切世間衆生]’ 이하의 여섯 게송은 3업이 세간에 있으면서 뛰어난 덕용(德用)을 일으키는 것이며, 다음 ‘여래의 묘색신[如來妙色身]’ 이하의 두 게송은 신업을 개별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다음 ‘여래의 음성은 걸림이 없다[如來音聲無礙]’ 이하의 두 게송은 구업을 개별적으로 찬탄한 것이며, 다음 ‘일체 시방의 가없는 부처님[一切十方無邊佛]’ 이하의 두 게송은 부처님의 의업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인(因)을 들어서 해석하여 이룬 것이다. 두 번째 낙업광천(樂業光天)의 게송은 부처님의 적(寂)과 용(用)이 쌍으로 행(行)하는 덕을 찬탄한 것인데,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열여섯 게송은 개별적으로 든 것이며, 셋째 ‘헤아릴 수 없고 한량없는 겁[無數無量劫]’ 이하의 두 게송은 인(因)을 들어서 맺어 이룬 것이다. 3선(禪)에는 7천(天)이 있고 청정한 지혜에는 스물두 게송이 있는데, 총체적으로 여래 신업의 공능(功能)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법신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보신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화신을 찬탄한 것이고, 그 다음의 네 게송은 여래의 자비공덕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2선(禪)에는 10천(天)이 있는데, 스무 게송은 부처님의 대방편행과 증득한 법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총체적으로 부처님의 방편행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법문으로 섭수하여 교화함[攝化]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8상(相)의 성도 교화를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인(因)을 들어서 맺어 이룬 것이다. 초선(初禪)은 10천(天)이 있는데, 게송 안의 열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적용(寂用)이 걸림 없이 자재한 덕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의 신업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의 구업이 걸림 없음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의 의업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3업의 가없음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타화(他化) 10천(天)의 송문(頌文)13)에 20게송이 있는데, 부처님의 후득지(後得智)의 공용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네 게송은 법신이 널리 이롭게 하여 선을 낳고 악을 멸하는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의 구업의 공용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의업의 공용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능히 악을 멸하고 선을 낳음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다음에 네 게송은 부처님께서 기틀에 응함이 자재한데도 높다고 하는 마음[高心]이 없음을 찬탄한 것이다. 화락(化樂) 1014)천에는 스무 게송이 있는데, 부처님의 3신(身)의 덕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법신의 덕용(德用)이 자재함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은 열네 게송은 보신을 찬탄한 것이다. 열네 게송 중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의 구업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신업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의 본인(本因)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섭수하시는 것이 자재함을 찬탄한 것이다. 도솔천은 8천(天)이 있는데, 송(頌) 중에서 16게송은 부처님께서 법계에 두루 하시면서 법을 설하시는 것이 자재함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덕용이 걸림 없음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중생의 세 가지 장애를 없애시는 덕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께서 능히 중생을 이루시어 행하시는 이익이 헛되지 않음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대중이 원만히 모여 성인의 섭수하는 힘을 드러냄을 찬탄한 것이다. 야마(夜摩) 10천의 송 가운데 16게송은 부처님의 3업의 공덕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덟 게송은 의업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구업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신업이다. 도리천(忉利天)에는 10천이 있고 송은 20게송이 있는데, 삼세 부처님의 권(權)과 실(實)의 보리지문(菩提智門)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이 성인을 만나는 연(緣)이 됨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여덟 게송은 부처님의 방편이 사물에 미침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뛰어난 지혜의 몸[智身]을 이루시어 닦아 들어가는 자로 하여금 뛰어난 이익을 성취하게 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을 염해서 세 가지 장애를 소멸하기를 맺어 권유하는 것이니, 곧 혹장(惑障)15)의 업보일 뿐이다. 일천(日天)에는 10천이 있는데, 송 중의 22게송은 부처님의 지일(智日)의 공덕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12게송은 부처님의 온갖 덕의 장엄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여덟 게송은 부처님의 뛰어난 지혜의 선교(善巧)를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법의 깊고 넓음을 찬탄한 것이다. 월천(月天)에는 10천이 있는데, 송 중의 16게송은 부처님께서 어리석음의 어둠[癡闇]16) 가운데에서 지혜로 가르치는 광명을 놓아 그 관행(觀行)을 성취함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열 게송은 부처님의 지혜 광명[智光]17)이 중생을 이롭게 하여 증득을 성취함으로써 마음이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음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광명의 지혜를 놓아 상(相)을 굴려 가르침을 보여서 그 정관(正觀)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다음 아래의 건달바(乾闥婆) 등의 4중(衆)은 곧 사천왕에 해당되니, 거느리는 바에 따라서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만약 주(主)의 명칭을 따른다면 『대론(大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천(東方天)의 명칭은 제두뢰타(提頭賴吒)로서 한역하면 치국(治國)이다. 2부(部)의 귀신을 거느리니, 첫째는 건달바라 이름하고, 둘째는 비사사(毘舍闍)라 칭한다. 남방천(南方天)의 명칭은 비루륵차(毘樓勒叉)로서 한역하면 증장(增長)이다. 2부의 귀신을 거느리니, 첫째는 구반다(鳩槃茶)라 이름하고, 둘째는 벽려다(薜荔多)라 칭한다. 서방천의 명칭은 비루박차(毘樓搏叉)로서 한역하면 잡어(雜語)이다. 2부의 귀신을 거느리니, 첫째는 모든 용(龍)이고, 둘째는 부다나(富多那)이다. 북방천(北方天)의 명칭은 비사문(毘沙門)으로서 한역하면 다문(多聞)이다. 2부의 귀신을 거느리니, 첫째는 야차(夜叉)이고, 둘째는 나찰(羅刹)이다.”18) 이 거느려지는 것들이 곧 경전 가운데 8부 귀신이니, 이는 곧 28천(天) 중의 1천이다. 동방천에 10천이 있으니, 이른바 지국천(持國天)19) 등이다. 송에는 스무 게송이 있는데 자비의 방편으로 법사(法事)의 정토를 제시함으로써 이타(利他)의 이익을 성취함을 총체적으로 변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섭수하셔서 법신을 보게 하심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에 있는 여덟 게송은 부처님께서 정토에 계시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과(果)를 얻게 하심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에 있는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처소에 따라서 사물을 이익되게 하심을 찬탄한 것이다. 남방천에 10천이 있으니, 송에 20게송이 있는데 부처님의 자비 법문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대비(大悲)로 고통을 참고서 중생을 조복하심을 찬탄한 것이다. 다음의 14게송은 부처님의 비덕(悲德)이 시방에 두루 해서 용(用)이 상(相)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12게송은 자비의 상(相)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용(用)이 상을 여읨을 변별한 것이다. 서방천에 10천이 있으니, 송에 20게송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자비로 이익을 주시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법희(法喜)를 얻게 하심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자비의 힘[悲力]이 중생을 구원함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께서 생사에 있는 자를 법의 바다[法海]에 들어가게 하심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고통 속에 있는 자로 하여금 그 정토를 얻게 한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정토에 계시면서 묘법의 바다를 설하여 법의 공양을 이룬 것이 마치 수미산 같은 장경(藏經)을 설한 것과 같음을 찬탄한 것이다. 용보(龍報)에 다섯 가지 형상이 있다. 첫째 선주(善住)용은 코끼리 형상이고, 둘째 난타(難陀)용은 뱀의 형상이며, 셋째 아나바달(阿那婆達)용은 말의 형상이고, 넷째 바루나(婆樓那)용은 물고기 형상이며, 다섯째 마나소바제(摩那蘇婆帝)용은 또한 마나사(摩那斯)라고도 하는데 두꺼비 형상이다. 형상을 변화하는 것은 율(律)에 설한 대로인데, 각기 형상을 취하고 있는 용을 거느린다. 북방천의 야차는 경첩(輕捷)이니, 송 중에 16게송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고통을 뽑아 내기 위해서 세간에 계심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여덟 게송은 부처님의 평등한 자덕(慈德)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지신(智身)과 법신이 중생을 섭수해서 정도(正道)로 나아감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인(因)을 들어서 맺어 이룬 것이다. 위의 33중(衆) 가운데 귀왕(鬼王)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8부(部) 중에서 오직 긴나라용과 비사사뿐인데, 이는 축생이다. 다만 야차와 나찰이 힘이 크기 때문에 귀(鬼)의 명칭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다섯은 모두 귀이다. 금강역사(金剛力士)에 열이 있다. 송 중에는 20게송이 있는데 부처님 법신의 3업이 파괴하기 어려움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신업(身業)이 자재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구업(口業)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여덟 게송은 부처님의 의업(意業)을 찬탄한 것이다. 이상의 모든 유(類)는 형상[像]은 열등함을 나타내지만 그 체(體)는 뛰어나다. 그러므로 『대집(大集)』에서는 “모든 부처님들께서 모든 보살에게 말씀하시길 ‘그대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처소에 가고 싶다면 당연히 범왕(梵王) 등을 나타내서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고 말하였으니, 이 때문에 아는 것이다. 또 이 화장(華藏)세계에 어찌 이 실류(實類)만이 있겠는가? 뜻인즉 『섭론』과 같다. 다음은 제18의 보살중(菩薩衆)이 게송을 설해서 부처님을 찬탄함을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오직 보현만을 열거할 뿐 나머지 명칭을 열거하지 않은 것은 이것의 형상이 도위(道位)에 머물고 덕이 보문(普門)을 표방해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칭을 열거해서 덕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은 게송이 3업의 공양을 나타낸 것이니, 위와 아래 두 중(衆)의 긴 행이 덕을 찬탄함을 알 수 있다. 이 경의 가열(家列)은 당시의 문장이 아니다. 긴 행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이른바[所謂]’ 이하는 개별적인 것이다. 총체적인 경문을 둘로 나누면 처음은 자분(自分)의 덕이고, 다음의 ‘능히 여래에 들어가서[能入如來]’ 이하는 타분(他分)의 덕에 들어간 것이다. 개별적인 경문을 둘로 나누면, 앞의 여덟 가지 법문은 앞의 자분을 넓힌 것이고, 나중의 두 가지 법문은 앞의 타분을 넓힌 것이다. 또 이 다섯은 10구(句)에 대한 것이다. 둘째, 두 자리이타[自他利]의 게송 중에서 20게송은 그 뜻을 여섯으로 나눈다. 처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처소와 권속이 청정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불국토의 주(主)가 청정함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 반은 이익이 원만하고 청정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에 있는 일곱 게송 반은 교화의 덕용[化用]이 원만하고 청정함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의 과위(果位)가 뛰어나게 원만하고 청정함을 찬탄한 것이고, 나중의 네 게송은 체용(體用)이 청정함을 찬탄한 것이다. 일곱 게송에 나아가서 처음의 세 게송 반은 부처님의 신업이 청정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구업이 청정한 것이며, 다음의 ‘일체 삼세(一切三世)’ 이하의 한20) 게송은 부처님의 의업이 청정함을 변별한 것이다. 나중의 네 게송의 경문은 둘로 나눈다. 처음의 한 게송은 법신의 체(體)가 청정함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 세 게송은 용(用)이 청정함이니, 곧 3업의 용이 그대로 셋이 될 뿐이다. 이 중에서 보현의 분제(分齊)를 해석하는 데는 8문(門)으로써 인다라를 밝히니, 가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이(理)이고, 둘째는 토(土)이며, 셋째는 신(身)이고, 넷째는 교(敎)이며, 다섯째는 법(法)이고, 여섯째는 행(行)이며, 일곱째는 시(時)이고, 여덟째는 사(事)이다. 사(事)는 곧 티끌[塵] 등이다. 일반적으로 대의를 논한다면 경문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다만 사습(使習) 번뇌의 염업(染業)과 보(報)만이 있어 모두 범부의 경계에 들어가며, 밖으로부터는 성인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聖) 중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이(理)와 양(量)의 두 법이다. 이 두 가지에는 각기 두 법이 있는데, 인다라망 경계는 곧 이(理) 가운데 양(量)이고 아울러 양 가운데 1분(分)일 뿐이니, 이는 생각해서 준거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래의 큰 단락 두 번째에서는 움직이지 않고도 대중을 모으는 것이니, 이상의 모든 대중이 반드시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니나, 다만 동체의 섭수를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에 이것이 있을 뿐이다. 또 과위(果位)가 인법(因法)을 갖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중에 나아가서 8자단(子段)이 있다. 첫째, 출처를 밝힌 것이니, 말하자면 사자좌와 누관(樓觀)의 옆이다. 둘째, 수(數)를 드는 것이다. 셋째, 열 가지 명칭을 열거하는 것이니, 잡다한 명칭을 열거하는 까닭은 늘어나고 미미해지는 많은 유(類)의 법을 설함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넷째 ‘모든 공양을 시설해서[設諸供養]’ 이하는 공양구[供具]를 열거한 것이다. 다섯째 ‘모두가 크게 기뻐했다[皆大歡]’ 이하는 부처님을 올바르게 공양하는 것이다. 여섯째, 방위를 따라서 앉는 것이다. 일곱째 ‘그 보살 등[彼菩薩等]’ 이하는 덕을 찬탄한 것이다. 여덟째, 게송을 설해서 부처님을 찬탄한 것이다. 앞의 지(地)는 총체적이고, 여기의 누관(樓觀)은 개별적으로 머무는 것이다. 공양구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꽃을 뿌리는 것과 향을 태우는 것과 광명을 놓는 것과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보배를 비처럼 내리는 것이다. 덕을 찬탄함에 나아가면 10구가 있다. 첫째는 자분(自分)의 인행문(因行門)이고, 둘째는 승진(勝進)하여 증득할 때 타분(他分)에 의심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참된 부처님의 경계 가운데 다함 없는 변재(辯才)이고, 넷째는 부처님의 의업을 얻어서 부사의한 작용을 이루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문(普門)의 경계를 얻어서 부처님의 신업이 널리 나타나는 것이고, 여섯째는 모두 다 능히 삼세의 지지(智地)에 들어감을 총체적으로 설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상(常)과 무상(無常), 두 가지 열반(涅槃)과 인력(因力)의 구족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여덟째는 방편이 청정한 열반이며, 아홉째는 스스로 청정한 항상하는 과(果)의 인(因)이며, 열째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어서 법공양의 행을 성취하는 것이다. 송찬(頌讚)에는 19게송이 있어서 네 가지로 나누는데, 부처님의 3업과 도수(道樹)에 앉아 자재한 덕을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세 게송은 부처님의 의업의 용(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열 게송은 몸이 수왕(樹王)에 있으면서 자재함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구업이 자재함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법좌의 장엄과 대용(大用)의 자재함을 찬탄한 것이다. 다음으로 아래의 세 번째는 모든 왕이 공양의 행을 일으킨다고 해도 역시 가능하다. 둘째,21) 발하여 일으키는 서(序)는 그 가운데 나아가서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은 부처님의 신력이 대지를 진동하는 것 등이다. 동(動)이라 말한 것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변동(遍動)이라는 것은 사방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며, 등변동(等遍動)이란 것은 8방이 움직이는 것이니, 여기서는 18동(動)을 해석해서 대론(大論)을 내놓은 것이다. 소리를 내고[吼] 깨닫게 하고[覺] 은은한 소리를 내는 것[震]은 소리이고, 나머지는 빛깔[色]이다. 아래의 경문에 여섯 가지 움직임[動]이 있으니, 즉 동쪽에서 솟구치고 서쪽에서 가라앉는 등이 이에 해당된다. 모든 경에는 다른 움직임이 있으나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못하니, 준거해서 생각하여 섭수하라. 둘째는 공양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고, 셋째 ‘이 세계 안에서 부처님께서 도량에 앉으시어[此世界中佛坐道場]’ 이하는 얻은 바의 업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두 번째로 경문을 네 가지로 나누는데, 첫째는 총체적인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것이며, 셋째는 매듭 지음이고, 넷째는 나머지 방향과 동등함이다. 모든 왕이 업을 얻는22)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이 왕을 올바르게 찬탄한 것이고, 둘은 나머지 세계와 동등한 것이다. 올바르게 찬탄한 경문에 나아가면 여섯 구가 있는데, 앞의 세 구는 자리(自利)이고, 다음의 한 구는 이타(利他)이며, 다음의 두 구는 자타(自他)의 행이 원만함을 이루어서 승분(勝分)에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의 하나는 각기 즐기는 바에 따라 들어가게 되는 법과 능히 들어가는 방편을 총체적으로 설한 법문이고, 둘째 관심(觀心)을 증득해 일으킴에 의지해서 환희를 낳는 법문이며, 셋째 방편의 대치법을 개별적으로 설한 것이고, 넷째 모든 방편을 통달해서 용맹하게 이타(利他)하는 법문이며, 다섯째 여래 지위의 경계가 승분(勝分)에 이미 들어간 것이고, 여섯째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한량없는 법의 바다[法海]가 모두 이미 바라밀[度]을 얻은 것이다. 매듭 짓는 경문의 두 가지 뜻은 알 수 있다. 「정안품(淨眼品)」의 해석을 마친다. 총체적으로는 네 가지 ‘이해를 내는 법[生解法]’이 있어서 아래의 경문을 일으켰는데, 넷을 깨뜨리는 것[破四]을 건립해서 선교번의(善巧翻依) 등에 답한 것은 제외하였다. 첫째는 차제문(次第門)이니 형상으로 이해를 취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총별문(總別門)이니 6상(相) 등과 같이 모양[相]을 좇아서 실제[實]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셋째는 섭취문(攝取門)이니 말에 의거해서 뜻을 섭수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넷째는 예성문(例聲門)이니 일곱 가지 비슷한 소리로 경문에 유례해서 뜻을 취하기 때문이다.
2) 노사나불품(盧舍那佛品) ① 이로부터 이하는 올바른 종지[正宗]를 바르게 밝힌 것인데, 경문은 네 가지 문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명칭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는 온 뜻[來意]이며, 셋째는 종취(宗趣)를 밝힌 것이고, 넷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첫째, 명칭을 해석한 것에서 노사나는 한역하면 광박엄정(廣博嚴淨)이다. 【문】이 품은 의보(依報)를 변별한 것인데 어째서 주(主)를 좇아서 명칭을 붙였는가? 【답】이 땅은 주(主)와 더불어 의거하는 바가 되니, 정보(正報)가 강하기 때문에 사람을 들어서 땅을 드러낸 것이다. 둘째, 온 뜻이란 것은 어째서 이 품이 온 것인가? 이미 대중이 모이고 나서 그 다음에 드러낸 바의 법을 밝혔기 때문이다. 셋째, 종취를 변별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이고, 둘은 법이다. 사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능가(能加)와 소가(所加)인데 각기 체(體)ㆍ상(相)ㆍ용(用)이 있다. 아래의 모든 회상은 가지런히 하나인데 처소와 회상을 기준해서 차이를 나눴을 뿐이다. 능가(能加)의 체(體)라는 것은 내증(內證)의 법과 지혜로써 체를 삼고, 7일 간의 사유와 경희(慶喜)로써 덕의 상(相)을 드러내며, 설(說)을 가(加)하는 것을 용(用)으로 삼는 것이다. 소가(所加)로 돕는 화인(化人)의 체(體)라는 것은 정(定)에 들어가는 것을 체(體)로 삼고, 가(加)를 입는 것을 상(相)으로 삼으며, 설(說)을 일으키는 것을 용(用)으로 삼는 것이다. 나머지 회상의 오르고 내림과 우수하고 열등함은 준거하면 이해할 수 있다. 법이란 것은 네 가지 정토를 이 회상의 종지로 삼으며, 또 법계와 세계해를 종지로 삼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법은 진여로써 체(體)를 삼고, 개별적인 덕을 상(相)으로 삼으며, 사물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용(用)으로 삼는다. 넷째, 경문을 나누어 해석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회상을 대하는 것이고, 둘은 품을 따르는 것이다. 이 「노사나품」은 과(果)는 넓은데 인(因)은 간략하기 때문에 과덕(果德)에 속한다. 다음 「명호품」 이하는 인(因)은 넓지만 과는 간략하기 때문에 인행(因行)을 판별한다. 다시 따로 판별하는 것이 있으니, 제2회상의 첫 해석과 같다. 두 번째 품에 나아가서 나눈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광각(光覺) 등에 이르러서는 ‘과(果)를 들어 즐거움을 권함으로써 믿음을 낳는 것’이 도래하는 분(分)이다. 둘째, 「명난품(明難品)」 이하는 ‘인(因)을 닦아 과(果)에 계합함으로써 이해를 낳음’을 밝히는 분(分)이다. 셋째, 「이세간품」 이하는 ‘연(緣)에 의지하여 행을 닦음으로써 덕을 성취함’을 변별하는 분(分)이다. ‘반드시 그러한 까닭[所以須爾者]’이란 것은 선근(善根)이 엷고 적어서 신심(信心)을 발하기 어려운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 품 안에서 부처님께서 보현을 가(加)하셔서 정토의 의과(依果)를 설하고, 제2회상 안에서 문수가 힘을 이어받아 부처님의 3업을 설함으로써 그 정보(正報)를 밝히니, 이 뛰어난 의(依)와 정(正)으로써 신심을 일으키고 이미 신심을 일으키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법을 설해서 이해를 일으키도록 하기 때문이다. 「명난품」 이하는 행상(行相)을 널리 변별해서 의(依)를 권한 것이니, 이미 법을 보는 것이 명백하면 그 다음에 반드시 행을 일으킴에 의지해서 얻는 바가 있는 데 돌아가기를 권유하기 때문이다. 「이세간품」 이하는 연(緣)에 의지해서 덕을 성취함을 밝힌 분(分)이니, 역시 회상에 의거해서 경문을 나누어 정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다. 또 『영락경』에 의지하여 “제1회상은 세계해와 법계해를 밝힌 것이고, 제2회상은 정토를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경에 의지해서 판별한 것이다. 너무나 묘하도다, 경문에 이런 뜻이 있음이여! 깊이 생각하고 가려내서 경문에 이르러 반드시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인증(引證)이란 것은 가령 『유마경(維摩經)』에서 「불국품(佛國品)」이 먼저 있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품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첫째는 총체적으로 통틀어 해석한 것이며, 둘째는 개별적으로 경문을 기준해서 변별한 것이다. 처음의 총체적인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전(能詮)의 가르침이고, 둘째는 소전(所詮)의 법이며, 셋째는 소전의 의(義)인데,23) 그 법의 뜻은 정해지지 않았다. 자세히는 마흔 가지 걸림 없는 변재 등 중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둘째, 개별적으로 경문을 기준해서 변별한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대중이 염(念)을 낳아서 의심을 늘어놓은 것이고, 두 번째 ‘이 때 세존께서 모든 보살의 마음을 아시고[爾時世尊知諸菩薩心]’ 이하는 그 답의 상(相)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청문(請問)을 인(因)해서 여덟 회상을 요간(料簡)24)한 것인데, 청문이 동일하지 않다. 즉 10【문】중에서 네 번째이니, 여기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有)와 무(無)를 변별한 것이고, 둘째는 법문의 자세함과 간략함, 먼저와 나중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질문하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균등치 않음을 변별한 것이다. 첫째의 유와 무라는 것은 처음의 2회(會)와 나중의 3회의 처음에 질문이 있는 것이다. 이유라는 것은 처음은 인과의 두 가지 법을 통틀어 질문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이유라는 것은 다시 행법(行法)의 처음을 묻기 때문이다. 나중의 세 번째 이유는 수행 가운데 동이(同異)를 묻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경문을 대해서 변별한 것이다. 다음 경문에 의거해서 의문을 해석한 것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은 긴 행이고, 나중은 게송이다. 긴 행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능히 질문하는 사람이 염(念)을 일으킴을 드는 것이고, 둘째 ‘하등(何等)’ 이하는 올바로 청한 것이며, 셋째 ‘오직 원하건대[唯願]’ 이하는 청(請)을 매듭 지은 것이다. 청 가운데 23구(句)의 질문이 있는 것과 또 부처님께서 서두를 지어서 14구를 이룬 것은 둘로 나눈다. 처음의 21구는 과법(果法)을 얻음을 물은 것이고, 다음 ‘일체의 보살[一切菩薩]’ 이하는 인법(因法)을 물어서 과(果)의 경문에 나아간 것이다. 아래의 5해(海)와 10지(智)의 답문(答文)에 준거하면 5자단(子段)이 있다. 처음의 12구는 3신(身)의 과체(果體)의 차별을 밝힌 것이며, 또 만약 일승에 의지한다면 체(體)에 즉한 것이 덕용(德用)이니, 나머지는 준거하라. 다음 세계해의 한 구는 정토의 의과(依果)를 변별한 것이고, 셋째 중생해(衆生海)의 한 구는 교화 받는 중생을 변별한 것이며, 넷째 법계 방편의 한 구는 중생을 교화하는 법약(法藥)을 변별한 것이고, 다섯째 ‘불해(佛海)’ 이하의 여섯 구는 과덕(果德)의 섭수하여 교화함[攝化]과 작용의 뜻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의 열두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네 구는 법신의 덕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불력(佛力)’ 이하의 다섯 구는 보신불의 덕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 ‘불안(佛眼)’ 이하의 세 구는 화신의 덕을 밝힌 것이다. 이는 삼승을 기준으로 해서 경문을 정했을 뿐이다. 불지(佛地)라는 것은 과위(果位)가 온갖 덕을 낳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경계라는 것은 나누고 국한하는 것이다. 불지(佛持)라는 것은 법신이 온갖 덕을 지니는 것이며, 불행(佛行)이라는 것은 행업(行業)이다. 화신의 경문에서 눈ㆍ귀 등은 신업을 변별한 것이고, 부처님의 광명음(光明音)25) 등은 구업을 변별한 것이며, 부처님의 지해(智海)는 의업을 변별한 것이다. 불해(佛海) 이하의 여섯 구인 화용(化用)의 경문에 나아가면, 처음의 세 구는 보신불의 화용을 변별한 것이고, 나중의 세 구는 화신불의 작용을 변별한 것이다. 인(因)의 질문에 나아가서는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일체 보살이 수행하는 바의 바다라는 것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 대승심(大乘心) 등은 지(地) 이전의 믿음과 즐거움 등의 종류가 인(因)이 됨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 ‘모든 도(度)를 출생한다’ 이하는 지(地) 위의 행을 변별한 것이니, 곧 10도(度)26)를 섭수한다. 바라밀은 곧 6바라밀이고, 원(願)은 곧 원방편(願方便)이며, 지(智)는 곧 역지(力智)이다. 송(頌)하는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인데 열여덟 게송이 있다. 게송은 『지론(地論)』에 준거했으니, 이것을 구업이라 이름한다. 그 속에 나아가서는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청함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열한 게송 반은 앞의 청하는 경문을 노래한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앞의 것을 매듭 지음을 노래한 것이다. 앞의 여섯 게송의 청하는 경문 안에서는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한 구는 자리(自利)의 덕이 원만한 것이고, 다음의 세 구는 이타(利他)가 원만한 것이며, 나중의 두 구는 근기(根器)가 즐겨 듣는 것이다. 열한 구에 나아가서는 교묘히 생략했기 때문에 두루 다할 수가 없으니, 처음의 여덟 게송은 3신(身)의 열두 구를 노래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세계해 이하의 세 구를 노래한 것이며, 다음의 두 구는 앞의 불해 등의 여섯 구와 인행(因行) 등의 두 구를 노래한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답상(答相)을 밝힌 것’의 경문은 일곱 가지로 나눈다. 첫째 광명을 놓아 대중을 모은 것을 변별해서 그 서분(序分)을 밝힌 것이고, 둘째 ‘이 때 보현이 곧 정장정(淨藏定)에 들어가서’ 이하는 삼매분(三昧分)이며, 셋째 ‘보현이 정(定)에 들어가서’ 이하는 가분(加分)을 변별한 것이고, 넷째 ‘대중이 똑같은 음성으로’ 이하는 청분(請分)이며, 다섯째 ‘이 때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이어받아서’ 이하는 본분(本分)을 밝힌 것이고, 여섯째 ‘이 때 보현이 정(定)으로부터’ 이하는 기분(起分)을 변별한 것이며, 일곱째 ‘이 때 보현보살이 대중을 기쁘게 하고자’ 이하는 그 설분(說分)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을 둘로 나눈다. 첫째는 널리 모아서 의(儀)를 설하는 것이고, 둘째 ‘이와 같은 사천하(四天下)’ 이하는 평등을 통틀어 매듭 지은 것이다. 첫째의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광명을 놓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을 모으는 것이며, 셋째는 대중에게 보여서 법을 설하는 자를 알게 하는 것이고, 넷째 ‘거기에 연꽃이 피는데’ 이하는 의칙(儀則)을 드러내서 설한 것이다. 다음으로 광명을 놓은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상(相)을 나타내서 실(實)을 표현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신심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 경문의 두 가지 뜻은 아래의 회상을 통틀었을 뿐이다. 이 첫 광명을 놓음으로 인(因)하여 곧 모든 회상의 광명을 놓는 것과 대중을 모으는 것과 게송의 세 가지 뜻이 동일치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곧 열 가지 중에서 다섯 번째이다. 대중을 모으고 게송을 설하고 경문을 대한 것은 모든 회상의 서(序) 안에서 해행(解行)의 법과 덕위(德位)의 깊고 얕음이 동일치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다만 제6ㆍ제7ㆍ제8의 세 회상은 광명을 놓아서 대중을 모으지 않는다. 제6회상이 광명을 놓지 않은 이유는 일반적으로 광명을 놓은 것은 오고 가는 대중의 모임 등을 나타낸 것인데 지(地) 이전의 세간이기 때문에 갔다가 돌아옴이 있으며, 지(地) 위에서는 증체(增體)가 무루(無漏)로서 그 성품을 다하는지라 다른 처소에 존재하는 무리를 섭수할 만한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가(加)함으로써 깊은 방편의 설(說)을 드러낼 수는 있다. 제7과 제8회상이 광명을 놓지 않는 것은 광명을 일으키는 것이 본래 대중을 모아 법을 밝힘을 드러내는 것인데, 나중의 두 법은 이미 먼저 드러났으나 지금은 수행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저 제8회상의 정설(正說) 중에서 광명을 놓은 것은 과덕으로 거두어 이익되게 하는 분제를 밝히기 위한 것이지 대중을 모으기 위함이 아니다. 또 제7회상의 증(證)과 행(行)의 경계는 법만이 오직 상응할 뿐이니, 이는 믿음은 사(事)를 능히 증명하여 성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변별한 것이기 때문에 광명과 대중을 모으는 일이 없는 것이다. 또 첫 회상의 광명은 대중을 모아서 경(經)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의 「광각품(光覺品)」27)은 의거하는 법의 깊고 얕음을 드러낸 것이니 아래에도 통하면서 준칙이 된다. 셋째, 제3회상 이후는 3회상의 광명이 해당되는 지위에서 이(理)의 분제를 얻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또 제6회상에서 광명을 놓은 것과 대중을 모으는 것이 둘 다 없음을 질문한 것은 무루(無漏) 덕의 지위는 사(事)로써는 밝힐 수가 없음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광명을 놓은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 면문(面門)은 신업이고, 둘째 광명 중에서 음성을 일으켜서 게송을 설하는 것은 구업이다. 연화장해(蓮花藏海)의 인(因)은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광명을 가(加)해야 비로소 볼 수 있다. 면문(面門)에서 광명을 놓은 까닭은 올바로 가르침의 길을 향하여 널리 설함을 입기 때문이다. 면문이라 말한 것은 얼굴의 바른 용모이지 다른 입구가 아니다. 하나하나의 치아로써 한 것은 능히 상대하여 의지하니 성취해서 공(功)이 건립됨을 나타낸 것이다. 광명을 놓은 경문에 나아가서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지하는 바를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10문을 총체적으로 열거한 것이고, 셋째 ‘여시 등(如是等)’ 이하는 광명의 권속행(眷屬行)을 낸 것이며, 넷째 ‘나중의 하나하나의 광명’ 이하는 용(用)을 변별한 것이고, 다섯째는 광명의 섭익(攝益)을 드러낸 것이다. 광명의 10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여섯 문은 법신의 정보상(正報相)이고, 다음의 두 문은 정토의 의상(依相)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두 문은 섭화(攝化)의 상을 밝힌 것이다. 경문의 19게송은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열 게송은 부처님의 덕과 행이 능히 훌륭하게 깨달음[覺]을 열어 줌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일곱 게송은 도사(導師)를 찾아뵙고 공양을 일으키길 권유해서 부처님의 처소에 가는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의 덕용(德用) 안에서 진리의 바다[諦海]를 증득하여 물(物)의 뛰어난 욕망을 낳음을 거듭 찬탄한 것이다. 두 번째,28) 새로운 대중을 모으는 경문에 나아가서 먼저는 모든 회상의 유(有)와 무(無)를 밝힌 것이고, 둘째는 경문의 유와 무를 차례로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첫째는 유와 무이고, 둘째는 도래한 처소의 멀고 가까움이며, 셋째는 본래 처소의 부처님 명호와 보살의 명칭이 같지 않은 것이고, 넷째는 공양의 많고 적음이다. 첫째의 유와 무라는 것은 오직 타화천(他化天)에서만 10지(地)를 설하는 것이다. 아울러 중회(重會)의 이 둘은 새로운 대중이 없고, 네 가지 뜻을 가진 대중이 모인 것이다. 첫째는 섭수한 바의 기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법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며, 셋째는 공양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고, 넷째는 대중이 원만히 모임을 밝힌 것이니, 이 같은 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제8회상이 정해진 뒤에 모인 것은 지식(知識)의 방편 선교(善巧)가 자타(自他)로 하여금 법계에 들어가도록 함을 나타낸 것이지 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타용(他用)을 섭수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스스로의 뜻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대중이 모인 것은 법을 증명하는 것이 될 뿐이다. 둘째의 도래한 대중의 멀고 가까움을 변별한 것에서 십ㆍ백ㆍ천 등은 경문과 같고, 나머지 뜻은 경문에 대한 해석이다. 모인 대중에 네 가지 상(相)이 있다. 첫째는 처소의 명칭으로 법상(法相)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명호가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의 명호가 지위의 시종(始終)을 밝히는 것이고, 넷째는 법좌의 명칭이 법을 섭수해서 이용함을 변별한 것이다. 이것은 다만 새로운 대중에 국한된 것이고 나머지는 곧 통틀은 것이다. 시방의 새로운 대중의 경문에 나아가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만한 대중이 여기에 온 것이고, 둘째 ‘여시 등(如是等)’ 이하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며, 셋째 ‘보살이 차례로 앉아[菩薩次第坐) 이하는 각기 이미 얻은 법문을 드러내서 교화의 덕[化德]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고, 넷째 ‘생각 생각 가운데 하나하나의 세계에서[念念中於一一世界]’ 이하는 연기의 역용(力用)이 자재롭게 만물을 교화함[化物]을 밝힌 것이며, 다섯째는 게송을 설함을 밝힌 것이다. 처음 경문의 열[十]은 각기 일곱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처해(處海)이고, 둘째는 불찰(佛刹)이며, 셋째는 부처님의 명호이고, 넷째는 저 보살의 명호가 어떤 부처님의 개각(開覺)이 되는 것이며, 다섯째는 시종(侍從)과 함께 오는 것이고, 여섯째는 공양구[供具]로 부처님을 공양함을 일으키는 것이며, 일곱째는 각기 본래 방위[本方]의 자리에 거처하는 것이다. 둘째29)의 매듭 지은 경문에서 ‘10억 불찰 등에 10억 보살이 온다’는 것은 바로 국토해(國土海)의 체(體)가 동일해서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이 중생토(衆生土)의 명자(名字)가 동일치 않다’는 것은 과덕의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섭익(攝益)과 법을 나타냄이 차별되어서 동일치 않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좌에 다 앉은 것이고, 둘째는 털구멍에서 광명을 내는 것이며, 셋째는 광명 속에서 보살을 내는 것이고, 넷째는 보살의 방편이 모든 티끌에 두루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 불찰이 있는 것이고, 여섯째는 하나하나의 찰(刹) 속에 부처님의 나타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상의 일[實事]이지 교화의 임시방편[化權]이 아니다. 다음 넷째의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화 받는[所化] 중생을 변별하는 것이고, 둘째 ‘몽자재의 법문으로써[以夢自在法門]’ 이하는 능화(能化)의 법을 변별하는 것인데 처음은 변별이고 다음은 매듭 지음이며, 셋째 ‘한 생각 사이에[於一念頃]’ 이하는 교화가 이익을 성취함을 변별한 것이다. 이익을 성취하는 경문에 나아가서는 여섯 구가 있다. 첫째는 인천(人天)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범(內凡)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익이 10과(果)의 향(向)을 성취하는 것이고, 넷째는 이익이 10회향 이후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이익이 7(地) 이후를 얻게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이익이 8지(地)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의 게송의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열 게송은 앞의 시방 보살이 오래도록 뛰어난 행을 닦아서 여기에 임한 것이며, 나중의 열 게송은 앞의 차례의 좌하(坐下)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경문이다. 전자의 열 게송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두 게송은 보살의 자덕(自德)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에 있는 다섯 게송은 능히 생(生)을 뽑아 버려서 고통을 여읨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에 있는 세 게송은 덕의 성취를 말미암기 때문에 능히 시방의 부처님 처소[佛所]를 두루 유행하면서 그 뛰어난 능력[殊能]을 드러낸 것이다. 후자의 열 게송은 상좌(上坐) 이하에서 얻은 바의 법문과 교화의 덕[化德] 등의 경문을 통틀어 노래한 것이다. 나머지 상(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30) 부처님께서 보현에게 설법을 알도록 보이신 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공경히 청하도록 한 것이니, 경문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광명을 놓음이 이익이 되는 뜻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올바르게 광명을 놓은 것이니, 여기에는 다섯 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광명이 비추는 처소를 올바르게 제시한 것이고, 넷째는 발 밑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용(用)을 섭수해서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니, 인과가 서로 융화됨을 드러낸 것이다. 넷째, 연꽃과 보살을 내서 설의(說儀)를 드러낸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장처(場處)에서 연꽃이 나온 것이니, 또한 상륜(相輪)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일곱 구가 있는데, 이는 섭수하여 교화함[攝化]의 분제를 드러낸다. 둘째는 부처님의 미간으로부터 한 큰 보살을 낸 것이니, 사람을 기준해서 가르침[敎]을 나타낸 것이다. 셋째는 게송을 설해서 찬탄한 것이니, 가르침의 분제를 밝힌 것이다. 둘째의 보살을 낸 것에 나아가면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소를 변별한 것이고, 둘째는 나가는 사람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명칭을 열거한 것이고, 넷째는 권속이며, 다섯째는 나가서 공경하며 돌고 난 뒤에 앉는 것이고, 여섯째는 물러나서 앉은 것인데 두 가지가 있으며, 일곱째 ‘성취’ 이하는 나가는 사람의 덕을 찬탄한 것인데 여기에는 네 구가 있다. 셋째의 게송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뛰어난 음성[勝音]으로 여섯 게송을 설한 것은 부처님의 화신이 근기에 응해서 자재함을 찬탄하고 아울러 법의 분제를 나타낸 것이니, 곧 가르치는 음성의 덕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사자염광분신(師子焰光奮迅)이 17게송을 설한 것은 노사나와 보현이 능히 모든 부처님과 동등함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며, 아울러 법륜을 굴리는 상(相)을 변별한 것이니, 곧 가르침의 위의를 드러낸 것이다. 처음의 게송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두 게송은 화신이 법계에 충만해서 앞의 뜻을 현생(現生)함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법을 설함으로써 또한 가르침의 분제를 나타낸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덕을 이룸31)이 사량하기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 분신음(奮迅音)보살의 게송 안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노사나불이 자재하게 법륜을 굴림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열네 게송은 3업을 굴리는 것이 그대로 연(緣)의 갖춤임을 밝힌 것이니, 이는 연을 기준으로 해서 세 가지 법륜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의 반 게송은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이고, 둘째의 반 게송은 법륜의 체(體)를 변별한 것이며, 셋째의 한 행은 감응하는 방향과 처소가 구름[轉]을 따르는 것을 밝힌 것이고, 넷째의 한 행은 위의의 모습[儀32)相]을 밝힌 것이다. 법륜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르침이고, 둘째는 행이며, 셋째는 이(理)이고, 넷째는 사(事)이다. 【문】이 법륜을 굴리는 것과 삼승의 3전(轉)인 12행륜(行輪)은 어떻게 다른가? 【답】이는 다만 1전(轉)으로 그 열 행을 이루었을 뿐이다. 이른바 1전은 다함 없는 전[無盡轉]이니, 자세히는 아래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불본행경(佛本行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기수(箕宿)33)의 달 초 15일 안의 12일 오후에 사람의 그림자가 반을 넘어 이기기 어려울 때 북쪽을 향해 앉으셨다. 그리고는 귀수(鬼宿)와 방수(房宿)의 시각에 청정한 법륜을 굴리셨다.”34) 두 번째에 나아가면 처음의 여섯 게송은 의업의 교화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신업의 교화를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구업의 교화를 변별한 것이다. 또 해석에 일곱 가지가 있다. 처음의 둘은 인과가 교화를 일으키는 분량(分量)을 총체적으로 변별한 것이고, 두 번째의 둘은 신업을 변별한 것이며, 세 번째의 둘은 구업을 밝힌 것이고, 네 번째의 둘은 의업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둘은 몸[身]의 분제를 거듭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둘은 구업을 거듭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둘은 의업을 거듭 변별한 것이다. 둘째,35) 삼매분의 법체(法體)가 곧 불력(佛力)을 공경히 계승하여 가(加)를 받음으로써 발기함을 밝힌 것이니, 이 안에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모든 회상을 기준해서 간추린[料簡] 것이며, 둘은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간추린 것은 넷으로 나누는데, 곧 여섯 번째이다. 첫째, 유무(有無)라는 것은 정(定)에 들어가서 법의 심오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오직 제2회상만은 대하는 바의 기틀이 얕으니, 법이 깊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 방편에 머무는 것은 자위(自位)의 체(體)가 없기 때문에 정(定)에 들어가지 못하니, 법이 기틀의 지위[機位]를 대하기 때문이다. 둘째, 거듭 들어가는 것과 거듭 들어가지 않는 것에서 첫 회상의 뜻은 거듭함이지만 나머지 회상은 없는 것이며, 또한 거듭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으니 이 본분의 정(定)에서 설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래에서 개별적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셋째, 인과의 체(體)가 구별된다는 것은 제1ㆍ제7ㆍ제8은 부처님의 정(定)을 밝힌 것이고, 3ㆍ4ㆍ5ㆍ6은 모두 보살의 정(定)을 변별한 것이다. 왜냐하면 제1은 무구여장(無垢如藏)이 청정한 체(體)가 되기 때문에 정장정(淨藏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7회상은 자리(自利)의 과행(果行)을 성취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화엄정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 말은 교화의 주체[化主]를 조망한 것이다. 만약 행(行)에 나아간 것이라면 화(華)를 인해서 과(果)를 장엄함을 닦기 때문에 처음부터 닦은 것이니, 이 때문에 보광(普光)을 거듭한 것이다. 제8은 법계 해탈이 이타(利他)의 과(果)가 원만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스스로 사자분신정(師子奮迅定)에 들어가신 것이니, 이것 역시 화주(化主)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수행에 나아간다면 사람이 경계를 잡음으로 말미암아 뜻을 세워 입신(立身)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 이 세 회상에서 나타낸 법이 모두 인과를 통틀기 때문에 과(果)의 정(定)에 들어갔을 뿐이고, 중간의 네 회상은 인(因)의 정(定)에 들어간 것이니, 경문을 대해서 바야흐로 해석한 것이다. 넷째, 능히 들어가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은, 일곱 처소의 입정(入定) 중에 앞의 여섯 회상은 보살의 들어감을 밝혀서 분(分)이 이(理)에 계합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뛸 듯이 기뻐하는 인인(因人)을 밝힌 것이다. 제8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정(定)에 들어가신 것은 법계 해탈의 구경 과체(果體)는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궁진(窮盡)함을 밝히기 때문이며, 또한 부처님을 들어서 법제(法際)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을 대하여 모든 사람이 아는 바의 분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니, 나머지 뜻은 아래에서 변별하고 있다. 다음36) 경문에 의거한 해석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보현이 정장정(淨藏定)에 들어감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모든 부처님의 걸림 없음을 비추는 것이니, 이 중에서 지혜로 끊음을 둘로 나눈다. 셋째 ‘여기에서[於此]’ 이하는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정(定)이 균등함을 변별한 것이니, 또한 매듭 지어서 통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37) ‘이 삼매에 들어가서’ 이하는 부처님의 가(加)를 밝힌 것인데 이 경문은 둘로 나눈다. 첫째는 이를 인해서 모든 회상의 가피(加被)의 차별을 간추린[料簡] 것이니, 곧 일곱 번째이다. 둘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간추린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무(有無)를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모든 부처님의 멀고 가까움과 많고 적음의 명자(名字)에 차이가 있음을 변별한 것이다. 첫째의 유무라는 것에서 2ㆍ7ㆍ8회상은 모든 부처님의 가(加)를 밝히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인가? 일반적으로 가피는 과(果)를 섭수한 이익이 아래 지위의 하지(下智)로 하여금 힘을 얻어서 상법(上法)을 설함을 감당케 하고 아울러 승진(勝進)하여 행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기틀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은 그 나아가고 물러섬을 반드시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정(定)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니, 정38)으로 법의 결정적인 깊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 사람이 정에 들어가지 않고 법을 살펴보기 때문에 가(加)하지 않는 것이다. 제7회상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회상의 행소(行所)는 법에 의지한 것이니, 앞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행을 밝힌 것은 거침[麤]과 미세함[細]을 일으켜서 닦는 것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8회상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삼매에 들어가심을 변별한 것이다. 법계 해탈의 과(果)가 크고 두루 하고 원만하고 지극하기 때문에 가(加)함을 빌리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의 명호가 동일하지 않은 것은 덕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39)은 경문에 의거해 해석한 것인데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입[口]으로 변재(辯才)를 주는 것40) 및 가(加)의 소위(所爲)이다. 둘째 ‘이 때 일체 모든 부처님’ 이하는 뜻[意]으로 가(加)하여 지혜[智]를 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셋째 ‘이 때 시방’ 이하는 몸[身]으로 마정(摩頂)을 가(加)하여 그 두려움 없음[無畏]을 주는 것이다. 또한 이 경문을 둘로 나누는데 첫째는 정(定)에 들어감을 변별하기 때문에 가(加)이고, 둘째 ‘이른바’ 이하는 가(加)의 소위(所爲)가 곧 가(加)의 상(相)임을 변별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加)하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몸을 나타내시는 것이고, 둘째 ‘저 모든 여래[彼諸如來]’ 이하는 깊은 정(定)에 들어가서 유력(有力)으로 능히 설함을 찬탄한 것이며, 셋째 ‘이 모두가[是皆]’ 이하는 가(加)의 찬탄이 말미암는 바를 밝힌 것이다. 구가(口加)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누니,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두 구는 자타행의 체(體)를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일곱 구는 이타행의 용(用)을 밝힌 것이다. 의가(意加)를 세 가지로 나누니,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10지(智)를 개별적으로 변별한 것이며, 셋째 ‘왜냐하면[何以故]’ 이하는 해석하여 이룬 것이다. 처음의 10지 경문에서 앞의 셋은 자리(自利)이고, 뒤의 일곱은 이타(利他)이다. 이것은 아래의 10지와 더불어 다분히 동일한 것이니, 까닭인즉 이미 과덕(果德)을 설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지 않으신 것은 뛰어난 과(果)를 나타내서 하인(下因)이 감당해서 극복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보현이 정(定)을 얻기 때문이며, 장자(長子)이기 때문이며, 대중의 으뜸이기 때문이며, 노사나불의 원력 끝까지[願底] 다하기 때문이며, 본원(本願)이기 때문이며, 또 스스로의 선근력(善根力) 때문이다. 아래에 준거하면 여기서 마땅히 마정(摩頂)이 이미 즉시 나왔어야 하는데 지금은 생략해서 나오지 않는다. 아래에서 비로소 나옴을 밝힌 것과 이익의 뜻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인(因)해서 모든 회상의 ‘정(定)에서 나와 법을 설함이 동일치 않음’을 밝힌 것이 곧 여덟 번째이다. 먼저는 정(定)에서 일어남이 동일치 않음을 변별한 것이다. 모든 회상의 설법은 경문을 대해서 바야흐로 변별한다. 제8은 들어감은 있으나 나옴이 없는 것이니, 법계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제2회상은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둘 다 없는 것이다. 첫 회상의 경문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역시 진(眞)과 속(俗)을 쌍으로 관(觀)한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문가(文家)가 서로 착종(錯綜)한 것이다. 나머지 회상은 나가고 들어옴을 갖추었다. 네 번째 단락은 보살이 동일한 음성으로 보현에게 거듭 청하는 것이니, 곧 청분(請分)이다.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약간 긴 행은 뜻을 설하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서 나중의 청하는 경문을 일으키는 것이니, 보현은 오직 자중(自衆)의 청함만을 앞세울 뿐 신구(新舊)가 함께 청하지 않아서 청함이 원만치 않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을 뿐이다. 청함을 읊은 게송은 스무 게송인데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덕의 청함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아래의 두 게송은 청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전자의 경문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처음의 두 게송은 보현이 오래도록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온갖 원행(願行)을 닦았으므로 마땅히 대원(大願)에 의지해서 대중을 위해 즉각 설함을 변별한 것이다. 다음의 네 게송은 보현이 모든 부처님께서 진도(塵道) 가운데 계시면서 동일하게 응해서 시설(示說)하심을 항상 보기 때문에 지금 응해서 설함을 변별한 것이다. 다음의 여섯 게송은 보현이 오래도록 선정의 힘[定力]을 성취하여 기해(器海)를 두루 앎으로 광대하게 설함이 마땅히 저와 똑같이 중생을 위해 설하기 원함을 변별한 것이다. 다음의 네 게송은 보현의 3업이 능히 비와 구름으로써 남을 이롭게 하니, 어찌 설함이 아니겠는가를 변별한 것이다. 다음의 두 게송은 성(性)과 보(報)의 2토(土)가 10력(力)을 닦아 얻은 것임을 올바로 들어서 기틀에 응해 설하길 권유하는 것이다. 아래의 두 게송은 청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오직 10지(地) 안에서만 가(加)와 청(請)을 갖춘다고 한 것은 인증(因證)의 행법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며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 제1권 하
지엄 지음 박서연 번역
2) 노사나불품 ② 다섯째1)는 올바로 근본 종지에 답한 경문인데 크게 둘로 나눈다. 첫째는 5해(海) 등을 관해서 그 본분(本分)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10지(智)가 곧 5해의 지(智)임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이어받음을 밝힘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함을 드러낸 것이며, 둘째는 5해를 올바로 관해서 그 법을 살핀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가르침을 일으키는 소위(所爲)를 통틀어 설하는데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부처님의 본원(本願)을 성취하기 때문에 제불본원경(諸佛本願經)이라 이름하는데 이 경으로 준거하라. 둘째, 보살의 본원을 성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때[時]의 기틀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니, 알 수 있다. 넷째, 말법시대에 보고 듣는 이익이니, 알 수 있다. 다섯째, 본래 갖추고 있는 이(理)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과 인과의 두 행을 닦아서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여섯째, 인(因)과 과(果)의 두 지위의 증가하고 작아짐[增微]이 동일하지 않음을 변별한 것이다. 가령 인 중의 과와 과 중의 인이란 것이 이에 해당되며, 아울러 처음은 거침[麤]이고 다음은 미세함[細]인 것 등을 밝힌 것이다. 일곱째, 행(行)의 지위가 서로 대(對)함을 밝혀서 전체적인 것[通]과 국한된 것[局]을 변별한 것이니, 이는 동시(同時)를 조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덟째, 인과의 행위(行位)가 먼저와 나중, 전체적인 것과 국한된 것이 동일치 않은 것이다. 아홉째, 덕을 닦아서 서로 성취하는 상(相)을 변별한 것이다. 열째, 아함(阿含)의 교륜(敎輪)이 원만하고 청정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과 시사(時事)를 기준으로 해서 참되게 응하는 두 행의 상을 드러낸 것이니, 이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의 경문에 의지하여 탐구하면 8회상에는 통틀어 열 가지 뜻이 있는데, 아래 회상의 경문에 이르면 역시 준거할 수 있다. 만약 멋대로 경문을 취한다면 상(相)의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세계해라는 것은 위의 세계해에 답한 것인데, 정토의 행이 중생이 머무는 처소를 이룸을 위한 것이다. 중생해라는 것은 교화받는 중생이니, 위의 중생해에 답한 것이다. 법계의 업해(業海)라는 것은 업의 작용이니, 아래의 법신을 성취할 뿐이다. 욕락제근해(欲樂諸根海)라는 것은 위에서 나온 인행(因行)의 두 구를 통틀어 답한 것이며, 삼세제불해(三世諸佛海)라는 것은 부처님의 화용(化用)이 광대하고 두루 함을 변별한 것이니, 위에서 나온 3신(身)의 열두 구와 화용 중의 여섯 구에 답한 것인데, 이 여섯 구 역시 위의 제근해(諸根海)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마음의 경계가 다르기 때문에 상(相)으로써 근(根)을 드러냈을 뿐이니, 이 역시 업용(業用)의 바다에 상즉상입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10지(智)라는 것은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고(告)함이고, 둘째는 명칭을 열거한 것이고, 셋째는 사량하기 어려움을 매듭 지은 것이며, 넷째는 설하기를 허락한 것이고, 다섯째는 설하는 뜻[說意]을 밝힌 것이다. 즉 위에서 부처님께서 수여하신 10지(智)가 이제 능히 깊은 법을 드러냄을 찬탄하기 때문이다. ‘또한 약간은 동일치 않음이 있다’는 것은 근기를 대함에 의사(擬似)를 구별하기 때문에 다를 뿐이다. 불자(佛子)라는 것은 다섯 가지 뜻이 있으니, 논(論)과 같다. 10지라는 것은 첫째 세계성패청정지(世界成敗淸淨智)이니, 위에서 나온 과(果)의 질문 중 불세계의 1문(問)에 답한 것이다. 둘째 중생세계기지(衆生世界起智)이니, 위에서 나온 과(果)의 질문 중 교화 받는 중생해의 한 구에 답한 것이다. 셋째 법계지(法界智)이니, 위에서 나온 능화(能化)의 법약(法藥) 한 구에 답한 것이다. 넷째 ‘여래의 자재함’ 이하는 위에서 나온 3신(身)의 덕의 열두 구에 답한 것인데, 이 한 구는 곧 위에서 나온 법신 중 불지(佛地)ㆍ불지(佛持) 등의 세 구에 답한 것이다. 다음은 정전법륜지(淨轉法輪智)이니, 위에서 나온 부처님 행[佛行]의 한 구에 답한 것이다. 다음은 역무외불공법지(力無畏不共法智)이니, 위에서 나온 보불(報佛) 중 불력(佛力)과 불승법(佛勝法)이 나타내 보이는 보리 등의 세 구에 답한 것이다. 다음은 광명찬탄음성지(光明讚歎音聲智)이니, 위에서 나온 부처님 광명의 한 구에 답한 것이다. 다음은 삼종교화지(三種敎化智)이니, 위에서 나온 부처님의 눈과 귀와 부처님의 지해(智海) 등의 3륜(輪)이 교화한 불덕(佛德)에 답한 것이다. 다음은 삼매법문불괴지(三味法門不壞智)이니, 위에서 나온 보불의 삼매에 답한 것인데 과덕의 체(體)를 쓰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답한 것이다. 다음 여래자재지(如來自在智)는 위에서 나온 화용(化用)의 덕 중에서 불해(佛海) 등의 여섯 구에 답한 것이다. 아래의 자세한 경문은 상(相)에 따라서 위의 5해(海)를 준거하여 해석한 것이다. 첫째인 세계해의 10지(智) 중에서 세계성괴지(世界成壞智)는 역시 아래의 자세한 답을 통틀어 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10지는 곧 3세간의 지(智)이니, 첫째는 기세간(器世間)이고, 둘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며,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다. 다음 원전법륜지(願轉法輪智)2)는 앞의 3세간의 행을 설한 것이다. 여섯째, 역무외불공지는 법에 의거해 다스림을 성취한 것인데, 수행의 힘으로 마군을 다스리고, 무외(無畏)로 외도를 다스리고, 불공(不共)으로 이승을 다스린다. 일곱째, 광명음성지는 불사(佛事)를 훌륭하게 성취함으로써 삼보를 찬탄한 것이고, 여덟째 삼종교화지는 삼보를 흥륭(興隆)하여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홉째 삼매법문불괴지는 증지(證智)를 밝힌 것이며, 열째 여래종종자재지(如來種種自在智)는 곧 후득지(後得智)이다. 또 이것은 앞의 1해(海)가 곧 10지를 갖추었음을 설했을 뿐이니, 지(智)와 법이 정(正)과 조(助)로써 각기 서로 이루기 때문이며, 5해가 아래의 3세간에 의지하여 굴러서[轉] 10신(身)을 이루니 법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래의 셋은 설법 들음[說聞]의 어려움을 찬탄해서 매듭 지은 것이다. 넷째,3) ‘나는 마땅히[我當]’ 이하는 힘을 이어 받아서 바야흐로 설하기를 허락함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욕령(欲令)’ 이하는 설하는 의도[說意]를 밝힌 것이다. 또 뜻으로 말하면 부처님의 5해와 10지를 관해서 스스로의 10지를 설하고, 또 인지(因地)의 5해와 10지를 통틀어 관해서 스스로의 10지를 설하니, 이는 설함을 일으킨 방편지(方便智)와 본법(本法)의 시설이 동일치 않기 때문이다. 또 아래의 개별적으로 변별한 경문 중에서 국토[土]를 논한 것은 지혜4)로 익힌 경계[智習境]라 할 수 있으니, 이는 생각해서 준거할 수 있으며, 또한 오직 불지(佛地)만을 논5)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지(地) 이전의 사람이 설한 것은 지혜로 익힌 경계라 할 수 있으며, 지(地) 위의 보살과 과위의 사람이 설한 것은 증득한 것이지 익힌 것이 아니다. 여섯째,6) 기분(起分)의 경문은 둘로 나눈다. 첫째는 이익을 일으킴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털구멍[毛孔]에서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주(主)와 반(伴)의 정(定)을 올바로 일으킨 것인데 두 구가 있다. 하나는 정을 일으킨 것이며, 둘은 본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다. 둘째 ‘일체 삼세의 삼매’ 이하는 정을 일으킨 이익의 공용을 변별한 것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내익(內益)이고, 다음 ‘땅을 움직임[動地]’ 이하는 외사(外事)의 이익으로서 세 가지가 있는데 땅을 움직이는 것과 두 가지 이익이다. 첫째의 공용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이 대중의 이익이고, 다음 ‘여차(如此)’ 이하는 타방(他方)의 이익이다. ‘이 대중의 이익’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定)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안의 방편을 얻는 것이며, 셋째는 밖의 공용으로 지(智)를 변별함을 얻는 것이고, 넷째는 대비의 원행(願行)을 얻는 것이다. 두 번째의 털구멍의 게송은 보현의 덕을 찬탄한 것이다. 경문의 14게송은 곧 가(加)로써 광명을 찬탄한 것인데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여덟 게송은 보현보살의 자재함이 부처님의 근원[源底]을 다함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보현의 응화(應化)와 국토가 중생에게 널리 감응해서 자재하게 뜻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앞의 여덟 게송 중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신업의 자재함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구업의 자재함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의업의 자재함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3업의 자재함이 부처님의 경계를 다함을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일곱째,7) 보살이 대중으로 하여금 기쁨과 공경을 더하도록 한 것이다. 경문은 곧 설분(說分)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중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설(說)의 방편을 수여하는 것이며, 둘째는 올바로 법을 부여하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둘로 나눈다. 처음의 긴 행은 뜻을 거듭 설하고자 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은 올바르게 게송을 설해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 게송의 경문은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째의 열 게송은 부처님을 기준해서 덕용(德用)의 깊고 넓음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보현보살’ 이하의 네 게송은 보현이 능히 널리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 잘 들어감을 밝힌 것이며, 셋째 ‘한량없음’ 이하의 두 게송은 공(功)이 부처님에게 있음을 미루는 것이고, 넷째 ‘일체의 찰토(刹土)’ 이하의 두 게송은 보현이 그 공을 이익 되게 함이 부처님의 뜻에 있음을 해석한 것이며, 다섯째의 두 게송은 덕을 매듭 지어서 듣기를 권유하고, 마땅히 설하기를 허락한 것이다. 첫째의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두 게송은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의 공용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중생계와 법의 사량하기 어려움을 들어서 다시 능히 두루 섭수함으로써 들어가기를 재촉하는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법의 이익을 든 것이다. 둘째의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두 게송은 보현이 훌륭히 들어가는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보현이 사물을 이롭게 하는 뛰어난 능력을 밝힌 것이다. 보안(普眼)이라는 것은 5안(眼)의 자재한 지혜를 갖추기 때문에 보(普)이다. 또 10안(眼)을 갖춘 것이니, 이량(理量) 등의 지혜8)이기 때문에 보(普)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 두 번째는 자세한 경문을 올바로 설한 것이다. 모든 회상에서 능히 설하는 사람[能說人]이 다르다는 것은 「아승기품(阿僧衹品)」과 「소상품(小相品)」의 2품만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하신 것이고, 나머지 품은 다른 사람이 설한 것이다. 『대론(大論)』에 의하면 설(說)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고, 둘째는 제자이며, 셋째는 신선(神仙)이고, 넷째는 모든 하늘[諸天]이며, 다섯째는 변화(變化)이다. 이것은 성명구미(聲名句味)를 의지해서 낸 것이다. 만약 수여함을 조망하면 곧 정(情)과 비정(非情)을 통틀은 것이다. 또 다섯 종류의 설(說)이 있는데 아래의 경문과 같다. 경문에 나아가서는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에 세계의 체상(體相)을 널리 낸 것은 곧 위에 나온 과덕(果德)의 21가지 질문에 답한 것이며, 둘째 ‘이에 지나간 과거에서’ 이하는 위에 나온 두 가지 질문의 인법(因法)에 답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세계의 인연 등 장엄의 열 가지 사의(事義)를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고, 둘째 ‘이 때 보현보살이 분별하고자 해서’ 이하는 이 세계해가 모여 일어나는 인연의 양상[狀相]을 밝힌 것이며, 셋째 ‘법계는 무너뜨릴 수 없다’ 이하는 게송으로써 위의 두 단락 경문을 읊은 것이다. 【문】어째서 본분(本分)은 바다를 관하고 지혜를 설했는데 이 설분(說分)은 지혜를 폐기하고 바다를 설함으로써 갖추어 밝히지 못했는가? 다만 세계해만을 논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이것은 경문을 수립한 것이 다만 신해(信解)의 지(智)를 이룰 뿐 바다의 근원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세계는 지혜를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바다를 설한 것이 곧 지혜이다. 다시 이를 대략이나마 밝힌 것은 서로가 언전(言詮)의 상(相)이 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또 이 설(說)은 이 방편의 상(相)을 말미암기 때문에 곧 지혜인 것이니, 이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처음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열 가지 명칭을 열거한 것이며, 둘째는 열 가지 명칭의 장엄을 총체적으로 열거한 것을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수(數)를 들고 아울러 인증(引證)하는 것이며, 둘째는 열 가지 명칭을 열거하는 것이며, 셋째는 체(體)를 매듭 짓는 것이며, 넷째는 나머지 세계에서 티끌 등의 장엄이 갖추어져 이루어짐을 인용한 것이다. 두 번째의 개별적인 열 가지 중에서 나중의 하나와 처음의 하나는 명칭을 열거했을 뿐 해석하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것인가? 나머지 아홉을 통틀어서 설함을 말미암기 때문인데 지금은 생략하고 밝히지 않는다. 연화세계를 이루고자 해서 무너짐을 생략하고 밝히지 않았으나, 역시 이루어짐이 곧 무너짐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승에 의지하면 정토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성(性)이고, 둘째는 보(報)이며, 셋째는 사(事)이고, 넷째는 화(化)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부(部)의 일승에 의거한다면 단지 두 종류뿐이니, 이른바 세계해와 국토해이다. 혹은 열 종류는 아래에서 구이(瞿夷)가 설한 것과 같다. 이제 이 열 가지 명칭을 갖고서 『섭론(攝論)』의 열여덟 가지 상(相)의 원만하고 청정함을 대하고 동이(同異)를 변별함을 대해서 저 경문이 부처님의 개별적인 주처(住處)를 섭수하면 합계가 열아홉이다. 부처님께서 개별적으로 대보중각(大寶重閣) 위에서 머무시는 것은 이미 밝혔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없는 것이니, 저것은 개별적인 주처(住處)를 논한 것이며, 지금 여기서는 갖추어진 인연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저 인(因)의 원만하고 청정함이 또한 제1 색상(色相)의 청정함과 셋째 양(量)의 원만하고 청정함을 통틀었기 때문에 게송에서는 “온갖 보배가 성취되고 아울러 변제(邊際)가 없다”고 한 것이니, 그러므로 아는 것이다.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긴 행이며, 다음은 게송을 읊은 것인데 모든 게송이 다 마찬가지이다. 긴 행은 네 가지로 나누는데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개별적인 것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신력(神力)이 곧 승진(勝進)하는 힘이고, 섭수하여 성취하는 것이 곧 부처님의 후지(後智)인 것이다. 둘째는 연기의 이치가 그러한 것이며, 셋째는 이 인(因)을 얻는 것이며, 넷째는 행업(行業)의 과(果)가 감응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편적인 행으로 섭수하여 성취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공인(共因)을 얻는 것은 중생을 위해 땅을 취해서 섭수하여 성취하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부처님의 의과(依果)이며, 여덟째는 보편적인 원(願)이 감응하는 것이다. 게송은 20게송인데 경문은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18게송은 광(廣)으로써 약(略)을 나타낸 것이며, 세 번째의 한 게송은 매듭 지은 것이다. 두 번째 주(住) 중에는 30게송 반이 있으니, 처음의 여덟 게송은 땅의 상(相)을 밝힌 것이며, 두 번째의 20게송은 사안주(事安住)의 뜻을 자세히 드러낸 것이며, 세 번째에 있는 두 행 반의 다섯 자(字) 게송은 인다라안주(因阤羅安住)의 상(相)을 드러낸 것이다. 세 번째, 형(形)의 게송 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세 행은 형(形)을 자세히 나타낸 것이며, 둘째 네 자(字)의 게송 이하 여섯 게송은 국토의 인(因)이며, 셋째 ‘일체의 업의 바다[一切業海]’ 이하 여덟 게송 반은 인다라의 머물러 지님[住持]을 변별한 것이다. 네 번째, 체(體) 안의 열 게송은 광(廣)으로써 약(略)을 나타냈으니, 알 수 있다. 다섯 번째, 장엄 중의 20게송도 역시 광으로써 약을 나타냈으니, 알 수 있다. 여섯 번째, 청정의 18게송도 역시 광으로써 약을 나타냈으니, 알 수 있다. 일곱 번째,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심’의 20게송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심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제2는 이익을 자세히 밝힌 것이니,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겁(劫)의 경문은 간략해서 게송이 없다. 다음으로 둘째9)는 세계해를 성립하는 인연의 양상[狀相]을 자세히 열어 보인 것인데, 경문 속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현이 거듭 분별하는 뜻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정토의 인(因)을 밝힌 것인데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시(時)ㆍ연(緣)ㆍ행(行) 등이다. 셋째는 상(相)의 성취를 변별한 것이며, 넷째는 항상 법의 처소를 설함으로써 처소를 매듭 지어 사람에 소속시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사상(事狀)은 자세히 설했고, 나머지 이(理)와 행의 가르침은 간략히 설했지만 사량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의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풍륜(風輪) 위의 향수 바다를 밝힘으로써 본말(本末)이 서로 이룸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향수 바다 위에서’ 이하는 다시 세계성(世界性)을 유지함으로써 거듭 이루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 ‘저 온갖 향수 중에서’ 이하는 다시 위로 향한 12불국(佛國) 등의 일곱 세계성을 유지함으로써 분제의 뜻을 밝힌 것이다. 첫째에 나아가서는 일곱 가지 단락이 있다. 첫째 풍등지(風等地)는 전체로서 근본이며, 둘째 보왕지(寶王地)이며, 셋째 ‘작가라(斫迦羅)가 있는데’ 이하는 보왕(寶王)의 비추어 나타냄이 뜻대로 수용함을 밝힌 것이고, 넷째 ‘대지의 처소’ 이하는 땅 위에 작은 향수 바다 등이 있음을 밝힌 것이며, 다섯째 향하(香河)가 향수의 바다를 두름으로써 이익을 널리 지음을 밝힌 것이고, 여섯째 하(河) 중에 보배 나무의 장엄이 있음을 밝힌 것이며, 일곱째 약간 긴 행이 있어서 하나하나의 경계에 티끌 수효의 장엄이 있는데, 역시 분제를 매듭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제1 풍(風)의 본말 중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람이고, 둘째는 물이고, 셋째는 꽃이고, 넷째는 세계금강(世界金剛)이고, 다섯째는 금강산이다. 바람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첫째는 총체적인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것이며, 셋째는 매듭 지음 등이다. 둘째의 개별적인 것에는 10중(重)의 바람이 있다. 게송의 경문은 20게송인데 단지 용상(用相)만을 밝힐 뿐 유지함은 생략하고 변별하지 않았다. 경문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에 있는 일곱 게송은 머무름[住]을 인해서 장엄을 유지함을 변별한 것이니, 역시 앞의 경문을 읊은 것이다. 다음의 다섯 게송은 부처님의 덕이 시방에 원만하고 두루 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이 땅이 인다라망의 체(體)를 궁진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불사(佛事)가 마음의 자재한 대용(大用)을 따름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보현의 지혜와 행을 갖춤으로써 이 땅을 보고 듣게 됨을 변별한 것이다. 다음 금강지(金剛地)의 경문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배 땅[寶地]이고, 둘째는 땅 위의 바다이며, 셋째는 온갖 보배이고, 넷째는 금강지가 보배를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광명이다. 게송 중에는 열일곱 게송이 있다. 처음의 아홉 게송은 위의 다섯 구를 읊은 것인데 부처님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음의 여덟 게송은 법륜과 부처님께서 시방에 충만해서 두루 하신 것이니, 곧 지용(地用)이다. 아홉 게송 중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위의 원주지(圓珠地)를 읊은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금강지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보장엄(寶莊嚴)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바다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광명을 읊은 것이다. 작가라는 한역하면 윤(輪)이다. 여덟 게송은 두 가지로 나누는데, 처음의 네 게송은 신업의 체(體)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용(用)을 변별한 것이다. 셋째, 10) 마니보왕의 비춤 속에는 다섯 구가 있다. 게송 중에는 스무 게송이 있다. 처음의 세 게송은 땅에 나아감으로써 비춤의 청정함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다섯 게송은 꽃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구름을 읊은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국토[刹]의 장엄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이 세계의 시방 보살이 항상 와서 끊이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아래는 보현행을 닦음으로써 가없는 불찰(佛刹)에 들어가게 됨을 밝힌 것이다. 넷째, 땅 위의 향수 바다를 밝힌 것 중에서 처음의 총체적인 것에는 열네 구가 있고, 개별적인 20게송은 위의 묘한 보배 향 등이 불사(佛事)를 널리 지음을 읊은 것이다. 다섯째, 하(河)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긴 행이 넷이 있으니, 알 수 있다. 게송은 20게송이 있다. 처음의 12게송은 하(河)의 체(體)와 광명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덟 게송은 부처님의 원만하고 지극함과 자재함을 자세히 읊은 것이다. 여섯째, 보배 나무의 경문에는 다섯이 있으니, 알 수 있다. 게송은 네 게송이 있는데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두 게송은 과행(果行)의 자재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인행(因行)의 자재함을 밝힌 것이다. 일곱째, ‘반드시 알라[當知]’ 이하는 세계의 청정장엄과 매듭 지음을 밝힌 것이다. 둘째11)는 바람이 유지하는 향수 바다 위에서 개별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 세계성[不可說佛刹世界性]을 유지하면서 머무는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긴 행이고 다음은 게송이다. 처음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총체적인 것으로써 불찰을 밝힌 것이고, 둘째 ‘혹유(或有)’ 이하는 개별적으로 머묾을 밝힌 것이며, 셋째 ‘혹은 수미(須彌)’ 이하는 세계의 형상을 밝힌 것이다. 게송에는 20게송이 있는데 앞의 긴 행 가운데 두 번째 경문을 읊은 것이다. 처음의 한 게송은 정토의 성(性)과 상(相)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머묾을 간략히 읊은 것이며, 다음의 다섯 게송은 형상의 장엄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업의 깊고 얕음을 기준으로 해서 국토의 우수하고 열등함을 드러냄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우수하고 열등함을 총체적으로 나타내서 깊은 방편에 들어감을 지은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성취를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능히 방편의 공력(功力)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셋째,12) 위로 향하면서 세계를 유지함을 밝힌 경문에는 네 자구(子句)가 있다. 첫째는 위의 향수 바다와 하(河) 등을 거듭 들고 아울러 명칭을 열거하는 것이며, 둘째는 출생한 연꽃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꽃이 유지하는 12불국해(佛國海)의 일곱 가지 세계성을 밝힌 것이며, 넷째 ‘이와 같이’ 이하는 나머지 방위를 매듭 지은 것으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알 수 있다. 만약 아래의 구이(瞿夷)의 경문에 의거한다면 삼천계를 제외하고 밖으로 10세계가 있다. 첫째는 성(性)이고, 둘째는 해(海)이고, 셋째는 윤(輪)이고, 넷째는 원만이고, 다섯째는 분별이고, 여섯째는 선(旋)이고, 일곱째는 전(轉)이고, 여덟째는 연꽃이고, 아홉째는 수미(須彌)이고, 열째는 상(相)이다. 또 뜻으로 말한다면 이 10계(界)는 서로 으뜸이 되고, 나머지 아홉은 장엄으로서 1백 구(句)를 성취한다. 이제 이 세계가 혹은 연꽃이고 혹은 바다라면 나머지는 함께 장엄하는 것이니, 준거해서 생각할 수 있다. 세계가 이루어진 상(相)이 비록 다양하더라도 뜻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미암아서 아는 것이겠는가? 이 경문에 의거하면 다시 찰(刹)의 명칭이 있는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제 하나의 뜻에 의지하면, 이 찰은 위와 같은 모든 상(相)이 아니니, 불찰은 위와 같은 모든 상이 높고 낮은 차별이 없다는 걸 설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부처님에 의거해 처소를 취함으로써 찰이라 이름 붙이고 국토[土]라 이름 붙이는 것이니, 곧 구별과 차이, 높고 낮음이 없는 것이다. 만약 중생을 기준으로 해서 국토를 취한다면, 곧 모든 상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다. 경문에서 ‘항상 법륜을 굴리는 처소’라고 말한 것은 중생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다. 만약 이 해석에 의거한다면 경문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 또 『대론(大論)』 중의 제50권 안에서는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이름하여 1세계라 하는데 일시에 일어나고 일시에 소멸하며, 이처럼 균등한 시방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세계가 1불세계(佛世界)이며, 이 같은 1불세계의 수(數)가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세계가 1불세계해(佛世界海)이며, 이 같은 불세계해의 수가 시방의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세계가 불세계종(佛世界種)이며, 이 같은 세계종이 시방에 한량없는 것을 1불세계라 이름한다. 일체 세계 중에서 이 같은 분(分)을 취하여 1불(佛)이 제도하는 바의 분(分)이라 이름한다”13)라고 하였다.[이상은 삼승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다.] 또 『대경(大經)』 본(本)에는 열 종류의 세계가 있다.14) 첫째 세계성은 동일한 종류라는 뜻이며, 둘째 세계해는 색(色)의 종류가 많다는 뜻이자 다시 깊고 넓다는 뜻이며, 셋째 세계륜(世界輪)은 가지런히 작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넷째 세계원만(世界圓滿)은 덕을 갖추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다섯째 세계분별(世界分別)은 섞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여섯째 세계선(世界旋)은 바르게 돌아간다는 뜻이며, 일곱째 세계전(世界轉)은 옆으로 회전한다[側轉]는 뜻이며, 여덟째 세계연화(世界蓮花)는 활짝 핀다는 뜻이며, 아홉째 세계수미(世界須彌)는 뛰어나고 오묘한 뜻이며, 열째 세계상(世界相)은 형모(形貌)의 뜻이다. 어째서 열 가지를 설했느냐 하면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문】어째서 하나 중에 일체의 국토를 갖추어 봅니까? 【답】수행하는 자가 스스로의 보토(報土)에 거처하면서 각각이 동일치 않고, 중생이 나타낸 세계와 불토(佛土) 등이 저 보토와 흡사함을 부처님께서 섭수하심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고, 나아가 부처님의 경계를 섭수하여 다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문】어째서 『대론(大論)』에서 밝힌 세계해는 이 경과 같지 않은가? 【답】그것은 삼승인을 위하여 방편으로 점진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세 번째는 위의 2대(大) 단락의 경문을 읊은 것인데 일흔 게송이 있다. 크게 나누면 아홉 가지가 된다. 처음의 스무 게송은 위에서 세계해가 이루어지고 무너짐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위의 장엄과 세계에 머묾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열여덟 게송은 청정세계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다섯 게송은 체(體) 세계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다섯 게송은 인연의 세계를 일으켜서 갖춤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형(形) 세계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겁(劫) 세계를 읊은 것이며, 다음의 다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세계를 읊은 것이며, 나머지 일곱 게송은 설(說) 세계를 읊은 것이다. 처음의 20구 안에 나아가서 처음의 열한 게송은 법을 설한 것[法說]이며, 다음의 아홉 게송은 비유를 설한 것[喩說]이다. 또 이 매듭 지음은 염기(染器)세계를 대하여 교락(交絡)함으로써 매듭 지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의 신심(信心)을 이끌어서 위의 법 방편에 들어감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니, 이것에 준거하라. 다음 두 번째의 경문은 과(果)를 얻는 인연을 변별한 것이다. 앞의 23가지 질문에 대한 답 중에서 일체 보살이 수행한 두 가지 질문이 국토의 인[土因]을 논한 것은 경전과 같으니, 알 수 있다. 경문은 넷으로 나눈다. 첫째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과 국토를 드는 것은 인연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 ‘불자야, 저 염광성(焰光城) 중에서’ 이하는 인인(因人)을 변별한 것이니 곧 동자이며, 셋째는 부처님을 보아서 정(定)을 얻음을 밝힌 것이니 곧 자분(自分)의 정인(正因)이 되는 것이다. 넷째 ‘저 부처님께서 멸하신 뒤에’ 이하는 다시 부처님을 보고서 정(定)을 얻음을 밝힌 것이다.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곧 승진(勝進)의 인(因)이 되는 것이다. 이 경문은 인문(因門)의 이교(理敎)와 행사(行事), 인과의 삼세, 자타(自他)의 주(主)와 반(伴), 인법(人法)의 인연, 본생(本生)의 기별(記別), 보현의 법문 등이 갖추어 이루어져 있음을 자세히 밝힌 것이니, 앞을 준거해서 취할 수 있다. 【문】또 이런 것들은 어째서 거듭 게송을 읊지 않았는가? 【답】일반적으로 게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은 것으로 많은 뜻을 섭수하는 것이며, 둘은 다른 시기에 나중에 오는 자를 위해서이다. 이런 등에서 만약 게송을 읊는다면 위의 두 가지 뜻이 없는 것이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구원(久遠)의 겁수(劫數)를 밝힌 것이며, 둘째 ‘이 때 세계가 있으니’ 이하는 국토의 처소를 밝힌 것이며, 셋째 ‘그 때 저 숲 속에’ 이하는 도량에 연화좌[花座]가 있음을 밝힌 것이며, 넷째 ‘백 세(歲)를 지나’ 이하는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심을 밝힌 것이다. 셋째15)의 부처님을 보아서 정(定)을 얻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그 때 저 동자가’ 이하는16) 정(定)을 얻음을 밝힌 것이니,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그 때 보장엄(普莊嚴) 동자가’ 이하는 정(定)의 힘으로 게송을 설한 것이다. 셋째 ‘이 때 선혜왕(善慧王)’ 이하는 왕이 게송을 듣고 기뻐하면서 다시 게송을 설함을 밝힌 것이다. 넷째 ‘이 때 선혜왕’ 이하는 대중에게 부처님의 처소에 가기를 권유함을 밝힌 것이다. 동자의 게송의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기(生起)하는 것이며, 둘째는 올바르게 읊은 것이며, 셋째는 음(音)의 분제를 밝힌 것이다. 게송 중에서 처음의 네 게송은 부처님을 만나서 듣기 어려움을 찬탄한 것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세상을 이롭게 함을 읊은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대중에게 부처님을 뵙고 공양하기를 권유한 것이다. 왕의 아홉 게송 중에서 첫째는 생기(生起)이고, 둘째는 올바르게 게송을 읊은 것이다. 처음의 한 게송은 대중에게 부처님을 찾아뵙기를 총체적으로 권유한 것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공양구[供具]를 장엄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권속과 함께 다같이 부처님을 뵈고 공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넷째17)의 부처님의 처소로 가서 뵙는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부처님의 처소에 가는 것인데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때 여래께서’ 이하는 부처님께서 경전을 설하시는 것이다. 셋째 ‘이 때 동자가’ 이하는 이익 얻음을 밝힌 것이니, 곧 자분(自分) 가운데 승진(勝進)이다. 넷째 ‘이 때 공덕’ 이하는 부처님의 수명을 변별해서 나중에 설하는 경문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18)의 경을 듣고서 정(定)을 얻어 이익을 얻는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정(定)을 얻음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동자가 게송으로 찬탄해서 대중에게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며, 셋째 ‘이 게송을 설할 때’ 이하는 이익의 상(相)을 올바르게 밝힌 것이며, 넷째는 부처님께서 게송을 설하시어 성취를 인(印)침으로써 발심한 자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동자의 열 게송에 나아가서 처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의 법신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부처님께서 오래도록 원행(願行)을 닦아서 이제 대중으로 하여금 보게 함을 밝힌 것이며, 나중의 한 게송은 부처님의 덕을 들어서 보살의 수행을 권유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읊으신 경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세 게송은 동자에게 용맹한 힘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보장엄의 대정진력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수기(授記)인데 부처님을 공양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성불하는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인증으로써 모든 세계를 용맹하게 편력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얻음을 인(因)해서 그 지위를 정한다는 것에서 동자가 첫 번째로 부처님을 본 것은 10신(信) 만심(滿心)의 자분(自分)에 해당되고, 두 번째 법을 듣는 것은 10신 만심의 승진에 해당되며, 세 번째 부처님을 본 것은 해위(解位) 초심(初心)의 자분에 해당되고, 네 번째 법을 들은 것은 해위 초심의 증상(增上)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동자가 얻은 삼매로써 상하의 모든 지위의 경문에 견주어 쓰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간략해서 게송이 없다. ‘어째서 회상을 마치고는 이익을 얻은 자를 밝히지 않았는가?’라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이 경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성도(成道)하시고서 법륜의 체(體)를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인데, 다만 부처님께서 법의 이익을 두시는 것은 나중의 시기에 있는 것이지 즉각적으로 이익 되게 함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마치 해가 처음 떠올라서 먼저 높은 들녘을 비추는 것과 같이 이 여덟 회상이 차례대로 보살을 이익 되게 해서 승진하도록 한 것이 곧 이익이다. 중근기나 하근기는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익의 상(相)을 따로 변별하지 않았을 뿐이다. 첫 회상을 마친다.
[제2회 보광당(普光堂)]
3)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명칭을 해석한 것[釋名]이며, 둘째는 온 뜻[來意]이며, 셋째는 종취(宗趣)이며, 넷째는 경문을 나누어 해석한 것[分文釋]이다. 명칭을 해석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소의 명칭이다. 보(普)란 것은 덕이 두루 한 것이며, 광(光)이란 것은 지혜의 광명이며, 또한 광명이 두루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품의 명칭이다. 명(名)은 곧 통틀은 명칭이며, 호(號)라는 것은 개별적인 호칭이다. 둘째, 온 뜻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회상이 온 뜻이며, 둘째는 품이 온 뜻이다. 어째서 회상이 온 것인가? 먼저는 정토를 들어서 믿는 바의 경계로 삼는 것이며, 다음은 능히 믿는 마음을 변별하기 때문이다. 둘째, 품이 온 뜻이란 것은 먼저는 의거하는 바의 땅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은 땅 중의 교화주체[化主]의 인명(人名)이기 때문이다. 셋째, 종체(宗體)라는 것은 두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둘째는 법을 기준한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교화주체[化主]와 교화를 돕는 이[助化]에 각기 체(體)ㆍ상(相)ㆍ용(用)이 있는 것이다. 경문과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다만 이 회상에 국한한다. 둘째, 법을 기준으로 해서 체(體)를 내는 것은 말하자면 10신(信)의 행법(行法)이며, 나중은 분별에 해당한다. 「명호품」은 교화하는 자비로운 덕[悲德]의 자재한 상(相)으로써 종지를 삼으며, 또한 불국해를 종지로 삼는다고도 할 수 있다. 넷째, 경문을 해석하는 것은 대광 율사(大光律師)에 의지하여 “앞 회상은 보현이 힘을 이어받아서 정토의 의과(依果)를 설한 것이며, 이 회상 이하는 인행(因行)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뜻은 회상으로부터 판별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앞 회상은 과(果)가 자세하고 인(因)은 간략하며, 이 회상은 인은 자세하고 과는 간략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어째서 인(因)이 과(果)와 회상을 같이하는 것인가? 【답】행을 계량(計量)해서 마땅히 구별한 것이다. 지금은 다만 법이 사람에 의지해서 넓혀짐을 나타내기 때문에 동일한 회상에서 분별하지 않은 것이다. 앞의 3품(品)의 정보(正報)에 나아가면 첫째의 「명호품」은 부처님의 신업(身業)을 밝힌 것이고, 둘째의 「사제품(四諦品)」은 부처님의 구업(口業)을 밝힌 것이며, 셋째의 「광명각품」은 부처님의 의업(意業)을 변별한 것이다. 또한 「명호품」은 땅을 나타냄으로써 믿음을 낳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둘째의 「사제품」은 법이 보배임을 밝힌 것이고, 셋째의 「광명각품」은 법의 증가하고 미약해짐[增微]을 나타내서 아래의 궤칙을 이룬 것이다. 「명호품」에 나아가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이 회상의 서(序)를 변별한 것이며, 둘째 ‘이 때 문수사리’ 이하는 그 올바르게 설함[正說]을 밝힌 것이다. 서문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머무는 처소와 부처님의 덕을 밝힌 것이고, 둘째 ‘10불(佛)의 국토와 더불어서’ 이하는 교화를 입는 기틀과 그 교화를 돕는 이[助化]를 변별한 것이며, 셋째 ‘모든 보살이 이렇게 생각했다’ 이하는 청하고자 함을 밝힌 것이고, 넷째 ‘이 때 세존께서는’ 이하는 나머지 방위의 새로운 대중을 모아서 발기(發起)함을 변별한 것이다. 이제 길게 나눔을 기준으로 해서 정하는데 길게 나눔이 여덟 가지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처소와 화주(化主)를 들고 아울러 부처님의 덕을 찬탄함으로써 법의 인연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교화를 입는 기틀을 밝힌 것이고, 셋째는 의심나는 일을 진술함을 밝힌 것이며, 넷째는 새로운 대중을 모음을 변별한 것이고, 다섯째 ‘문수가 ≺즐겁도다≻라고 찬탄하면서’ 이하는 교화의 일[化事]이 너무나 깊어서 땅을 이루는 것이 측량키 어려움을 변별한 것이며, 여섯째 「사제품」 이하는 교법(敎法)이 너무나 깊어 진리의 말[諦言]이 준칙을 시설한 것이며, 일곱째 「광명각품」 이하는 방편을 설하는 것을 허락해서 법의 점차(漸次)를 나타내 그 깊고 얕음을 밝힌 것이고, 여덟째 「명난품(明難品)」 이하는 행의(行儀)를 올바로 진술해서 법의 깊고 얕은 양상[狀相]을 변별한 것이다. 어떤 뜻에서 나무와 당(堂)을 아울러 설했는가? 이 당(堂)이 나무 남쪽에서 처소를 같이함으로써 모든 귀신과 용이 부처님을 위해 짓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처음19)의 덕을 찬탄한 경문에 나아가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득의 성품[證性]을 변별해서 자리(自利)를 밝힌 것이며, 둘째 ‘걸림 없는 길[趣]에 이르러서’ 이하는 이타의 덕을 변별한 것이다. 자리에 다섯 구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이타에도 다섯 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교화를 입는 대중을 열거한 것이니, 이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大)가 소(小)와 다름을 간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시(始)가 종(終)과 다름을 간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신(新)이 구(舊)와 다름을 간별하는 것이고, 넷째는 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덕을 찬탄하는 경문은 열 가지가 있는데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2장문(章門)을 드는 것인데, 2장은 여덟 구가 있으며 네 구는 앞의 1문을 대(對)한 것이다. 둘째는 2자타리(自他利)이다. 셋째, 당시의 대중이 청한 경문에는 44구의 질문이 있다. ‘이 회상에서 위의 지위와 과덕(果德)을 통틀어 물은 까닭’이란 이 회상이 행을 일으키는 시초에서 다시 화주(化主)를 대하고 경문은 다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한 이 불토(佛土)를 물은 것이 세계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의 내용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10가지 질문은 법신의 삼륜과(三輪果)를 변별한 것이니, 곧 믿음을 낳는 경계인 것이며, 곧 선제(先際)의 불법인 것이며, 곧 이 회상에서 답한 것이다. 다음의 ‘열어 보이다’ 이하에 있는 20가지 질문은 중제(中際)의 불법을 변별한 것이며,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이른 이후는 답한 것이다. 다음 ‘부처님의 위없는’ 이하에 있는 14가지 질문은 후제(後際)의 불법을 변별한 것이며, 「소상품(小相品)」을 마친 이후로는 답한 것이다. 대광 율사는 단지 서른세 가지 질문만을 만들었는데, 즉 따라 기뻐함[隨喜] 등의 10구를 합쳐서 총체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선제(先際) 안의 처음 다섯 가지 질문은 「명호품」이 답이고,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은 「사제품」이 답이며, 다음의 한 가지 질문은 「광명각품」이 답이고, 다음의 ‘불찰(佛刹)을 따라서 일으킨다’ 등이란 것은 「명난품」 등의 3품이 답이며, 정각을 성취함을 보이는 것도 역시 「광명각품」이 답이고, 「현수품」에도 답상(答相)이 있으며, 또한 「성기품(性起品)」을 다한 이후에 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제(中際) 안에서 처음의 세 가지와 다섯 번째는 지위의 법[位法]을 질문한 것이며, 네 번째의 10장(藏)과 10원(願) 이하에 있는 다섯 가지는 행법(行法)과 위법(位法)을 질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0원과 10자재 등은 「승도리천품(昇忉利天品)」으로부터 「십지품(十地品)」 끝까지 답한 것이다. 다음 10정(定) 등의 열네 구는 「십명품(十明品)」으로부터 「보살주처품」을 마칠 때까지 답한 것이다. 후제(後際)의 13가지 질문은 「불부사의품(佛不思議品)」에서 「소상품」을 마칠 때까지 답한 것이다. 10원은 「십명품」이 답이고, 10자재 이하는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이 답이고, 10정(頂)은 개별적인 답이 보이지 않으며, 「십인품(十忍品)」은 10정(定)에 대한 답이니 정(定)이 곧 인(忍)인 것이다. 이것은 품(品)을 말미암아서 나누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만약 통틀어서 즉한다면 경문을 대해서 알아야 한다. 네 번째, 새로운 대중을 모으는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모일 수 있음[能集]을 밝힌 것이니, 이 구(句)의 경문은 국한되어 있지만 그 뜻은 아래의 회상에 통한다. 둘째는 모인 바[所集]를 변별한 것이니, 곧 그 상(像)과 같다는 것은 하나는 기(器)의 상(像)과 같은 것이고, 둘은 기(器)가 대하는 경계의 상(像)과 같은 것이다. 상(像)이란 것은 연(緣)이 모인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며, 그림자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그 상(像)처럼 신통력을 나타낸다는 것은 바로 과덕이 원만하고 지극하며, 체(體)의 융섭이 지극히 순조로움으로써 명진(冥津)이 밖이 없고 연(緣)이 존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 능히 그 행을 따라서 개별적인 지위가 다르기 때문에 회상이 서로 응함을 나타낸 것이다. 방광(放光) 이하의 「각품(覺品)」에서 거듭 밝힌 까닭은 이것이 1사(事)로서 두 가지 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문은 두 곳으로 나눈다. 첫째는 대중을 모으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법의 깊고 얕음에 의탁하기 위한 것이며, 셋째는 모인 바를 변별한 것이다. 땅이 색(色)과 동일하다는 것은 공덕이 밖으로 나타남을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지(智)와 동일한 것은 안으로 원(元)을 이해하는 것이다. 보살이 수(首)와 동일한 것은 진행의 시초이다. 법좌가 연꽃과 동일한 것은 장차 과(果)를 이루는 시초인 것이다. 대중을 모으는 등을 먼저 동방으로부터 한 까닭은 개명(開明)의 시초와 생장(生長)의 시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20) 올바르게 경문을 설한 것이다. 만약 길게 나눈다면 이는 곧 다섯 번째인 화주(化主)의 매우 깊음을 찬탄한 것이다. 이 회상에서 정(定)에 들어가지 않은 까닭이란 것은 법체(法體)가 머물지 않아서 기(器)를 따라 동일치 않음을 밝힌 것이다. 만약 뛰어난 기[勝器]를 대하면 법이 깊기 때문에 반드시 살펴야 한다. 지금은 10신(信)의 이해가 열등해서 법의 깊음을 나타내지 못한 것이니, 가(加)함이나 권유함[勸] 등은 이에 준거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수가 3품을 설한 까닭은 평등하고 묘한 혜지(慧智)가 뛰어난 경계에 머물러서 바야흐로 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문수가 이 품을 설한 까닭은 묘혜(妙慧)로 불국해(佛國海)를 잘 통달하기 때문이다. 이 경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중의 희유(希有)함을 찬탄한 것이니, 두 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모든 불자’ 이하는 물은 바의 법을 간략히 거듭 들어서 부사의를 밝힌 것이다. 셋째 ‘왜냐하면’ 이하는 명칭을 열거해서 널리 해석한 것이다. 넷째 ‘이 모두는 여래께서’ 이하는 섭화(攝化)의 이익을 매듭 지어 찬탄한 것이다. 제2에는 10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제3의 경문 내용은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총체적인 내용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따지는 것이고, 둘째는 답한 것이고, 셋째는 거듭 질문한 것이며, 넷째는 거듭 답한 것이다. 이 중에서 처음의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나머지 열여섯은 개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천하에서 열거한 열여섯 구는 교화받는 기틀의 상(相)이 동일치 않고, 증득하여 성취한 명호가 각기 다르다. 이런 등의 명칭은 개별적인 것이지 통틀은 것은 아니며, 이 중에서 올바르게 들은 것은 그 정토를 나타냄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 ‘왜냐하면’의 자세한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누니, 첫째는 따지는 것이고, 둘째는 답하는 것이다. 답하는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이 삼천대천세계의 명호가 동일치 않음을 밝힌 것이며, 둘째 ‘밀훈이라는 국토가 있다[有密訓]’ 이하는 나머지 삼천계를 밝힌 것이며, 셋째 ‘이처럼 동방에서’ 이하는 온 계[盡界]의 명호를 널리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1불토(佛土)의 명칭을 밝힌 것인데, 어찌하여 상하를 취하는가?’ 라는 것은 이 또한 상하가 역시 방향이 없고 옆[傍]으로도 역시 끝[際]이 없는 것으로써 가르침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뜻은 경문과 같다.
4) 사제품(四諦品) 네 가지 문(門)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변별한 것이다. 사(四)라는 것은 수이며, 제(諦)라는 것은 지음이 있거나 지음이 없는 것이니, 성스러운 진리[聖諦]는 실답기[實] 때문이다. 둘째는 온 뜻이다. ‘어째서 왔느냐?’라는 것은 앞에서 화주(化主)를 찬탄하였고, 여기서는 설한 바 교법을 찬탄한 것이다. 어째서 이 회상에서만 밝혔는가? 답하면 이것이 교화의 시초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사람과 법의 깊고 뛰어남을 총체적으로 찬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종지를 변별한 것이다. 이것은 교법의 진리가 실다움이 깊고 깊어 종지가 됨을 찬탄한 것이다. 넷째는 경문을 나누어 해석한 것인데, 이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이 방위에 있는 3천의 제의 이름[諦名]을 간략히 열거한 것이며, 둘째는 시방의 3천의 4제(諦)를 열거한 것이며, 셋째 ‘불자야, 이처럼 사바에서’ 이하는 가없는 계(界)를 널리 변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4제는 두 가지가 있으니, 지음이 있는 것과 지음이 없는 것이다. 이 중에서 경문은 오직 지음이 없는 것만이 진실하여 헛되지 않음을 통틀어 뜻한 것이다. ‘어째서 하나의 제(諦)에 의거하지 않고 4제에 의거해서 준칙을 시설했는가?’라는 것은 아래의 삼승인을 통틀어 함께 하여 견문(見聞)의 경계를 지음으로써 나중에 믿음을 일으켜 도의 연[道緣]에 들어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지음이 있는 것과 지음이 없는 것을 통틀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일승의 공통적인 가르침[共敎]이 되기 때문이다. 일승이 지음이 있으면 곧 공(空)이고 일승이 지음이 없으면 불공(不空)이니, 이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문수가 설한 까닭이란 것은 묘혜로 허(虛)와 실(實)을 잘 통달하기 때문이다. 4제의 뜻을 마친다.
5) 광명각품(光明覺品) 네 가지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밝힌 것이다. 여래께서는 곧 화주(化主)이다. 광(光)이란 것은 지혜의 체(體)이고, 명(明)이란 것은 작용[用]이다. 각(覺)이란 것은 연(緣)에 대한 명철함을 연 것이다. 또한 모든 보살을 깨우친 것이다. 둘째는 온 뜻이다. ‘어째서 왔느냐?’는 것은 장차 설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연 있는 대중을 모으고 아울러 법의 분제를 드러낸 것이다. 셋째는 종(宗)이니, 동법(同法)의 대중을 모으는 것도 역시 법의 증가하고 미약해짐[增微]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사람과 법의 체(體)ㆍ상(相)ㆍ용(用)은 이에 준거하라. 넷째는 경문을 나눠서 해석한 것이다. 이 위의 3품은 모두 아래의 제6회상 이후를 통틀은 것이니, 증미에도 차이가 있으며, 경문은 국한되고 뜻은 통틀은 것이다. 이는 생각해서 준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문에 열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경문은 여섯으로 나눈다. 첫째는 부처님의 양쪽 발에서 광명을 놓은 것이다. 둘째는 광명이 비추는 처소를 밝힌 것이니, 말하자면 이 삼천세(三千世)에서 나온 인과의 소유법에 각기 두 가지 경문이 있는 것이다. 셋째는 분제를 매듭 지은 것이다. 넷째는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보살이 와서 모임을 보는 것이니, 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것에는 보살과 국토[土]와 부처님의 세 경문이 있다. 다섯째는 문수가 게송을 설해서 부처님의 일승을 찬탄한 것이니, 삼승과 소승의 법은 일승의 신법(信法)의 방편이다. 여섯째 ‘이 같은 처소’ 이하는 나머지 방향을 매듭 지어서 분류한 것이다. 나머지 아홉도 마찬가지라서 매듭 짓는 경문은 생략하여 없다. 이로 인해서 모든 회상에서 광명을 놓는 것의 은복(隱伏)과 동이(同異)를 가려내면, 제1회상에서 광명을 놓는 것에 열 가지 뜻이 있음은 경문과 같으니, 곧 법을 증득하는 시초가 된다. 「명호품」은 처음의 신력(神力)으로 대중을 모아서 그 위상(位相)을 나타낸 것이고, 「광각품」은 처음의 상륜(相輪)의 광명으로 신위(信位)가 의거하는 법의 분제를 나타낸 것이며, 다음은 부처님의 신력으로 대중을 모아서 해당되는 지위에서 이루어진 덕을 나타낸 것이니, 이 경에서 신력이라 말한 것은 아직은 반드시 광명을 놓는 것은 아니다. 다음 보살이 게송을 설한 것은 곧 해당되는 회상에서 이해한 이사법(理事法)의 분제를 밝힌 것이니, 이 법은 지위에 의거해서 이루어졌을 뿐이다. 【문】이 처소는 지위를 나타내서 대중을 모은 것인데 어째서 개별의 품은 밝히면서 아래의 네 회상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답】섭화(攝化)의 의거하는 불토(佛土)를 나타내고자 하고, 또 가르침의 제(諦)가 해당되는 지위에 실답게 들어감을 나타내고자 하며, 아울러 아래와 함께 준칙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부처님의 족상륜(足相輪)에서 광명을 놓은 것은 10신(信)이 행족(行足)의 원만한 갖춤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광명을 놓은 분제는 25중(重)이 있다. 처음의 아홉은 개별적으로 열거한 것이며, 나머지는 총체적으로 매듭 지은 것이다. 경문의 상(相)은 경전과 같다. 제2의 경문은 광명의 비춤이 나타내는 것을 변별한 것이니, 알 수 있는 것이다. 제4의 경문 내용에서 문수가 앞에 있고 현수(賢首)가 뒤에 있는 까닭은 지혜가 먼저이고 복이 나중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먼저는 지행(智行)이고 나중은 지위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문수라는 것은 한역하면 묘덕(妙德)이고, 묘혜(妙慧)의 행이다. 또 이 중에서 광각(光覺)은 일시(一時)에 존재하면서도 능히 멀고 가까움을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다. 또 모든 방향에서 운집한 것이 단지 한 사람뿐인데도 대중으로 하여금 다르게 보게 한 것이니, 아직은 반드시 많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모든 방향에서 오고 간다는 것은 오직 당처(當處)의 모임을 보는 것뿐이라서 아직은 반드시 나머지 방향을 보는 것은 아니며, 교왕(交往)이란 것은 또 모든 방향의 광명과 시방을 나타낸 것이며, 소유(所有)라는 것은 모두 당처의 안을 보는 것이다. 아직 치우친 처소를 보지 않는 것은 이것이 보법(報法)으로써 화토(化土)21)의 소유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기틀은 스스로 당처의 자기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며, 모든 사(事)가 마음을 따라서 바른 교화[正化]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개별적인 상(相)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제5의 게송은 경문의 말이 문수를 출현시키는데, 뜻인즉 나머지 10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문수가 설한 이유는 법이 슬기[慧]로부터 나옴을 보이기 때문에 게송에서 ‘반야의 소증(所證)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니, 참된 성품이 초지(初地)의 행과 서로 동일한 것이다. 또한 모두 점점 증가하여 많아질 수 있기 때문에 그 10지와 10보살의 게송을 치우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10명(名)은 수의 원만함을 드러낸 것인데 점점 많아지고 멀어지는 것은 법이 점점 깊어짐을 나타냈을 뿐이다. 크게 나누면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은 상(相)을 취함이 참된 법[眞法]에 맞지 않음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의 여덟 게송은 취함을 여의어서 실다운 법[實法]에 응함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이해하는 자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다. 여덟 게송 중에서 처음의 세 게송은 분별의 성품 없음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의타(依他)의 생기지 않음[不生]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진실의 상(相)을 여읨이니, 또한 여덟 행이 모두 하나의 경계에 의거해서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제 증상(增相)을 변별한 것은 인과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각기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세로로 한 것이고, 둘은 가로로 한 것이다. 인(因)의 세로는 법을 기준으로 해서 청정함을 밝힌 것이고, 가로는 곧 법의 넓고 좁음을 아는 것이다. 과(果)라는 것에서 세로는 곧 자분(自分)이지 타분(他分)이 아니며, 가로는 처소의 많고 적음을 얻은 것이다. 또 아래에서 모인 대중 모두가 덕을 찬탄함은 해당되는 지위의 분제를 아울러 찬탄한 것이다. ‘성취한 바의 지견(知見)’ 이하는 준거할 수 있는 것이다. 제2는 각수(覺首)의 게송의 경문이다. 이 이하의 아홉 게송은 배(倍)나 다를 뿐인데, 선악 등을 알아서 자비의 교화로 사물을 이롭게 함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니, 2지(地)의 계행(戒行)과 서로 같다.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타자를 깨닫게 하셔서 두 변(邊)을 여의게 하심을 밝힌 것이며, 둘째의 네 게송은 보살의 이익이 부처님과 동일함을 밝힌 것이다. 제3은 재수(財首)의 게송이다. 평등한 법재(法財)로써 자량을 성취하여 사물을 이롭게 함을 총체적으로 변별하였으니, 3지(地)와 서로 같으며 후지(後智)의 교류(敎流)는 사물을 이롭게 한다. 경문 중에서 처음의 한 게송은 불덕(佛德)의 성능(性能)이 걸림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아홉 게송은 8상(相)을 요술[幻]로 나타내서 법신을 올바로 설함을 변별한 것이다. 제4는 보수(寶首)의 게송인데, 4지(地)의 섭수함이 없는[無攝] 뜻과 서로 같다. 이것은 비록 얻지는 못했어도 다만 해견(解見)일 뿐이다. 경문의 게송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다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그 무섭(無攝)을 성취하심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스스로 이해한 바와 같이 중생을 이롭게 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비유로써 청정함을 나타낸 것이다. 제5는 덕수(德首)의 게송인데, 5지(地) 중의 상속이 다르지 않은 뜻과 서로 같다. 이는 도에 머물지 않는 자비가 사물을 이롭게 함을 밝힌 것이다. 게송의 경문은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다섯 게송은 보살의 자비가 도에 머물지 않음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상속이 다르지 않은 뜻을 올바로 관(觀)하는 것이며, 다음의 네 게송은 타자로 하여금 진실하고 청정한 경계를 성취하도록 함을 변별한 것이다. 경문은 또 열 가지 평등의 청정함을 얻는데 1행이 1의(義)가 되는 것은 알 수 있다. 제6은 목수(目首)의 게송인데, 6지(地)의 염정(染淨)이 없는 뜻과 서로 같다. 게송의 경문에는 열일곱 게송이 있는데, 네 가지가 된다. 처음의 두 게송은 집착하여 취하는 것이 참부처님[眞佛]을 보지 못함을 변별한 것이니, 곧 잃음을 변별한 것이다. 다음의 네 게송은 여량지(如量智)를 성취한 자가 보불(報佛)을 보게 되는 것이니, 이는 곧 덕(德)일 뿐이다. 다음의 여섯 게송은 정체지(正體智)를 얻는 자가 법신을 봄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다섯 게송은 법의 깊고 미묘함이 이해의 분제[解分齊]를 드러냄을 밝힌 것이다. 또 이 가운데 아래위로 두 가지 경문의 동이(同異)가 있다. 하나는 ‘하나 속의 많음[一中多]’이니, 하나의 수(數) 안에서 열을 보기 때문이며, ‘많음 속의 하나[多中一]’란 것은 열의 수 안에서 하나를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곧 많음[一卽多]’이란 것은 하나의 수가 곧 많음이라서 하나를 보지 않기 때문이며, ‘많음이 곧 하나[多卽一]’라는 것은 많음의 수가 곧 하나라서 많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준거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의22) 사(事)에 즉해서 하나와 많음을 변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사(事)를 달리해서 하나와 많음을 변별한 것이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제7은 진수(進首)의 게송인데, 7지(地) 가운데 갖가지의 법이 구별이나 다름이 없는 뜻과 서로 같다. 게송의 경문은 세 가지이다. 처음의 여섯 게송은 공(空) 가운데 방편지(方便智)와 유(有) 가운데 뛰어난 행[殊勝行]을 변별한 것이니, 곧 덕을 찬탄한 것이다. 다음의 열 게송은 실다운 성품을 관하기를 권해서 방의(方儀)를 이해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의 네 게송은 이(理)와 양(量)의 두 경계에서 뛰어난 법에 들어가게 됨을 밝힌 것이다. 제8은 법수(法首)의 게송인데, 8지의 늘거나 줄어듦이 없는 법계의 뜻과 서로 같다. 경문에서 처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께서 이지(理智)를 성취하시기 때문에 능히 장애를 멸함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부처님의 깊은 법의 이익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열두 게송은 과(果)의 성품을 섭수해서 삼세에 용력(用力)하길 권한 것이다. 두 게송은 하나의 대(對)가 되니, 처음의 하나는 지혜가 법에 들어감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하나는 지혜의 작용을 성취함을 매듭 지은 것이다. 또 길게 나누면 열 가지가 될 뿐이다. 밖은 정토의 섭생(攝生)이고, 안은 그 스스로의 실다움[自實]을 성취한 것이다. 제9는 지수(智首)의 법문인데, 9지의 밝은 대비(大悲)로 남을 이롭게 하는 자재한 지혜와 서로 같다. 게송의 경문 중에서 처음의 두 게송은 의업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16게송은 구업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법의 걸림 없음을 얻기 때문에 대용(大用)이 걸림 없음을 변별한 것이다. 또 처음의 둘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용상(用相)을 자세히 찬탄한 것이다. 제10은 현수(賢首)의 게송인데, 10지의 업이 자재한 후지(後智)의 용(用)과 서로 같다. 게송의 경문에서 처음의 14게송은 업의 자재함을 올바르게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은 비유로써 설명한 것이다. 열네 게송 중에서 처음의 다섯 게송은 실다운 성품을 관해서 의과(依果)의 인(因)을 얻음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아홉 게송은 업의 자재함을 관하기 때문에 정과(正果)의 인(因)을 얻음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다섯 게송의 경문에서 두 행은 체(體)이고 세 행은 용(用)이다. 아홉 게송의 경문 내용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세 게송은 진여관(眞如觀)을 따르기 때문에 보리(菩提)의 과를 얻음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사관(事觀)을 닦기 때문에 법신의 과(果)를 얻은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자비를 닦기 때문에 화신의 과를 얻은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기 때문에 보신의 과를 얻은 것이다. 이 품은 위의 제8 부처님 공덕의 세력과 제10 정각을 성취함을 보임의 두 가지 질문에 답한 것이다. 【문】어째서 증광각(增光覺)을 기준으로 해서 대중을 모았는가? 【답】법에 깊고 얕음이 있고, 행에 증가하고 미약해짐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문은 나중과 더불어 준칙이 되는 것인데 지금은 간략히 모든 지위를 연 것이 22문(門)이 된다. 6도(道)의 인과가 곧 6문이 된다. 성문과 벽지(辟支) 두 사람의 인과를 통틀어 설한 것이 다시 2문이 되는데, 성문과 벽지가 의거하는 부처님께서 저 두 기틀을 위해서 4제[諦]의 가르침과 12인연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니, 곧 부처님을 나눠서 인과 과를 통틀은 것이 다시 2문이 된다. 성문과 연각이 마음을 돌이켜서 대승에 들어가는데 초교(初敎)의 처소에서 인과 과를 통틀은 것이 다시 2문이 된다. 곧바로 나아가는[直進] 초심(初心)의 보살이 인과 과를 통틀은 것은 다시 1문이 된다. 곧바로 나아가는 숙교(熟敎)와 마음을 돌이킨[迴心] 숙교가 인과 과를 통틀은 것이 다시 2문이 된다. 돈교(頓敎)의 인과는 다시 1문이 된다. 우법 성문(愚法聲聞)으로부터 모든 지위를 총체적으로 섭수한 건혜지(乾慧地) 이상의 보살과 부처님은 다시 1문이 된다. 보현의 지위 중에서 신(信) 이상에서부터 10지(地)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과의 보살과 부처님을 통틀은 것은 다시 5문이 된다. 이것은 보현의 아함(阿含)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
6) 명난품(明難品) 다섯 가지 문으로 나누어 구별한다. 첫째는 품의 명칭과 온 뜻[來義]을 해석한 것이다. 명난(明難)이란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기준으로 해서 열 가지 뜻의 깊고 미묘함을 밝혔기 때문이요, 둘째는 말[辭]을 기준으로 해서 어려움을 논하여 뜻의 정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명(明)이란 가르침이고, 난(難)이란 열 가지 뜻이다. 또 명이란 지혜이고, 난이란 도를 논한 것이다. 온 뜻이란 것은 어째서 왔다는 것인가? 대중이 모이고 나서 신(信)의 법이 이해를 성취함을 설하였기 때문에 온 것이니, 나머지 뜻은 알 수 있다. 둘째는 다스리는 바를 낸 것이다. 첫 번째의 성냄은 백 법(百法)의 밝은 문을 가로막는 장애이다. 이 이하는 이해를 낳아서 장애를 끊는 것이니, 일반적으로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믿음을 일으킴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곧 초지에서 사종(使種)을 끊는 것이다. 둘째는 지위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곧 해위(解位)에서 사(使)와 습(習)의 종지를 둘 다 끊은 것이다. 셋째는 행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곧 10신(信)의 원만한 마음[滿心]이 사와 습의 종자 등을 모두 끊은 것이다. 넷째는 실(實)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곧 본래로 끊을 것이 없어서 자체가 청정한 것이다. 준거해서 생각할 수 있다. 【문】미혹을 끊는 모양[斷惑相]은 어떠한가? 【답】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나중도 아닌데, 먼저와 중간과 나중을 취하기 때문에 끊는다고 말한 것이다. 마치 허공과 같으니, 이는 삼승에서 공통으로 배우는 뜻이다. 셋째는 얻은 바를 밝힌 것이니, 백 법의 밝은 문을 얻은 것이다. 만약 행문(行門)을 기준으로 하면 곧 화엄삼매를 얻은 것이다. 넷째는 성취한 바를 변별한 것이니, 그 믿음을 성취한 것이다. 말하자면 열 가지 믿음의 마음[信心]이니, 첫째는 신심이고, 둘째는 염심(念心)이고, 셋째는 정진심(精進心)이고, 넷째는 혜심(慧心)이고, 다섯째는 정심(定心)이고, 여섯째는 불퇴심(不退心)이고, 일곱째는 회향심(廻向心)이고, 여덟째는 호심(護心)이고, 아홉째는 계심(戒心)이고, 열째는 원심(願心)이다. 가령 경문에서 초발심주(初發心住)가 아직 땅에 머물기 전인데도 이 10심(心)의 명자(名字)가 있는 것은 이 마음을 더욱 닦는 것이다. 1겁, 2겁, 3겁, 나아가 초주의 지위[初住位]에 들어가게 되면서 백 법의 밝은 문을 더욱 닦는 것이다. 10심 중에선 마음마다 10이 있기 때문에 백 법을 이루는데 행이 있는 것과 행이 없는 것의 대원(大願)을 항상 발해서 습 종자의 성품[習種性]에 들어가는 가운데서 일체의 원(願)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아래의 경문에 의거하면 140사(事) 위의 행원(行願)이 있고, 『영락경』에 의거하면 24행(行) 가운데서 원(願)을 성취하니 곧 이 품의 종지[宗]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상[別相]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며, 전체적인 뜻은 논한 바와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종(宗)이란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 품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열 가지 깊은 뜻으로써 종을 삼은 것이며, 만약 회상을 기준으로 한다면 곧 10신위(信位)의 법으로써 종을 삼는 것이다. 다섯째, 경문을 변별한 것이다. 올바른 종지의 경문 중에서 위의 것은 과(果)를 들어 즐겨 믿음을 낳기를 권유하는 분[擧果勸樂生信分]을 변별한 것이며, 아래의 두 번째부터는 인(因)을 닦아 과(果)에 계합함으로써 이해를 낳는 분[修因契果生解分]이니, 곧 배울 바의 법이다. 또한 제8은 그 해행(解行)의 의식(儀式)23)을 나타내서 법의 깊고 얕은 양상[狀相]을 변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 「소상품(小相品)」을 마친 이후는 ‘방편으로 대치하여 닦아서 성취하는 인과[方便對治修成因果]’를 밝힌 것이고, 둘째 「보현보살품」 이하 「성기품」을 마칠 때까지는 자체의 인과[自體因果]를 밝힌 것이다. 해석의 뜻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닦아서 성취한다는 것은 듣고 훈습함[聞熏]에 의지해서 수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성기를 닦아서 드러냄[性起修顯]’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본성이 지금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또 원만하고 밝은[圓明] 인과는 실다운 깨달음[實覺]이 중(中)을 발하기 때문이다. 3제(際)를 기준해서 변별하면 이 「명난품」에서 「현수품(賢首品)」까지는 선제(先際)에서 처음 일어남을 밝힌 것이고, 둘째 ‘도리천(忉利天)’ 이하는 중제(中際)에서 훌륭히 닦는 것이며, 셋째 「부사의법품(不思議法品)」에서 「소상품(小相品)」을 마칠 때까지는 마지막으로 후제(後際)에서 나타낸 것이다. 다음은 네 가지 성취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첫째는 아직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함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 ‘도리천’ 이하는 이미 믿어서 해행(解行)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며, 셋째 「십지품」 이하는 이미 들어간 자의 성취이며, 넷째 「부사의품」 이하는 이미 성취한 자가 해탈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준거해서 알 수 있다. 또 닦아서 성취하는 분(分)을 기준으로 해도 좋다. 또 ‘이로부터’ 이하는 모두 서분(序分)이다. 여섯 번째의 한 회상은 그 정종(正宗)이고 앞은 아함이니, 나중에 의증(義證)이라고 이름 붙이기 때문이다. 또 제6회상 중에서 본유(本有)의 닦아 성취하는 체상(體相) 등을 자세히 내놓기 때문에 아는 것이니, 이는 생각해서 준거할 수 있다. 처음 믿음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한 품은 법에 의거해서 이해를 낳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 「정행품(淨行品)」은 이해에 의거해서 행을 성취하는 것이며, 셋째 「현수품」은 행에 의거해 덕을 드러냄으로써 지위를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문답이 열 가지 깊은 뜻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며, 둘째 ‘이 때 사바계(娑婆界)’ 이하는 해행(解行)으로 법계의 원통무애(圓通無礙)에 들어감을 나타낸 것이니, 곧 법의 이익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수가 묻고 대중들이 답하는 것이니, 묘혜(妙慧)가 온갖 행을 인도함을 밝힌 것이다. 둘째는 대중들이 묻고 문수가 답한 것이니, 온갖 행으로써 묘혜를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경문에는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연기(緣起)가 매우 깊은 것이며, 둘째는 교화가 매우 깊은 것이며, 셋째는 업과(業果)가 매우 깊은 것이며, 넷째는 부처님의 설법이 매우 깊은 것이며, 다섯째는 복전(福田)이 매우 깊은 것이며, 여섯째는 바른 가르침[正敎]이 매우 깊은 것이며, 일곱째는 바른 행[正行]이 매우 깊은 것이며, 여덟째는 조도(助道)가 매우 깊은 것이며, 아홉째는 일승이 매우 깊은 것이며, 열째는 부처님의 경계가 매우 깊은 것이다. 처음에 연기로써 한 까닭은 보살이 처음 배울 때 마땅히 모든 법의 여실(如實)한 인연을 먼저 관해야 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것은 여야(黎耶)가 선(善) 등의 3성(性)과 무위(無爲)를 공통으로 해서 집기(集起)하기 때문이다. 경문 속의 문답은 곧 두 가지가 될 뿐이다. 질문의 내용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고하는 것[總告]이고, 다음은 바른 뜻을 세우는 것[立正義]이며, 셋째는 물음을 아뢰는 것이다. 넷째는 나중의 어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경문과 같으니, 하나의 연기가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緣起相違難]을 공통으로 이룬 것이다. ‘어떤 마음이라야 무분별을 하나의 성품으로 삼는가?’라고 질문한 뜻은 ‘어찌해야 능히 갖가지 일을 성취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성취한다면 마땅히 무분별은 아니다. 둘째, 이미 모든 법이 다 무지(無知)라는 것이니, 소작(所作)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곧 진속(眞俗)의 사(事)가 있는 것이다. 또 해(解)는 단지 하나의 질문일 뿐이고, 나중의 경문은 매듭 지음일 뿐이다. 질문한 경문의 10사(事)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답의 뜻은, 단지 무분별 부주(不住)이기 때문에 능히 온갖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분별을 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문】이미 분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과를 이룬다고 말하는가? 【답】지음에 주체[主]가 없기 때문이니, 반대로 제시하면 볼 수 있을 뿐이다. 게송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한 게송은 청함을 찬탄하고 듣기를 권유함으로써 설함을 허락한 것이다. 둘째의 일곱 게송은 법설(法說)의 비유[譬況]로써 이(理)를 나타낸 것이다. 다음에 있는 세 게송은 저 앞의 법을 대(對)해서 관행(觀行)을 밝힌 것이다. 둘째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다섯 게송은 법을 들어서 위의 질문에 답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집착을 버리고 조복한 것이다. 첫 번째의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다. 머물지 않기 때문에 지음[作]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게송에서 “모든 법은 자재(自在)하지 못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짓는 때[作時]를 아는 것이 알지 못함이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에서 “실(實)을 찾아도 얻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비유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연으로 이루어짐이 서로 이어져 시(時)를 거치는 비유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다음의 한 게송은 연기의 유위(有爲)가 생멸하는 비유이다. 다음의 한 게송은 인연이 솟아올라 부딪쳐서 움직이고 이루어지는 비유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다음의 한 게송은 연기의 체상(體相)이 서로 의지하는 비유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미 분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유전(流轉)한다고 말하는가?’라는 의심이 잠복해 있는데, 이는 게송에서 “눈과 귀를 말미암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시 “이미 자(自)가 없다”고 말했는데 어째서 “상(相)을 나타냄이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하니, 게송에서 “나타내 보이므로 구른다[示現轉]”24)고 말했기 때문이다. 경문에서 서로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정(情)으로 아는 것을 말함이 아니며, 지금 안다고 말한 것은25) 힘[力]26)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두 가지 자(自)가 대(對)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며, 자성(自性)을 쓰는 것이 법을 아는 시초가 된다. 관(觀)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앞의 이(理)를 거듭 든 것이니, 법을 대하여 관(觀)을 변별함으로써 분별무상관(分別無相觀)을 이룬 것이다. 둘째의 한 게송은 의타무생관(依他無生觀)이며, 셋째의 한 게송은 진실의 성품 없음[眞實無性]이다. 각수(覺首)가 설한 까닭은 지각법(智27)覺法)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둘째,28) ‘교화가 매우 깊다’ 중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니, 처음은 질문이고 나중은 답이다. 어떤 뜻에서 온 것인가? 앞의 것은 마음을 섭수해서 이(理)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 뒤는 지혜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재물은 법재(法財)이다. 질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총체적으로 고하는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한 게송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의 열한 게송은 개별적인 것이며, 셋째의 한 게송은 질문을 매듭 지은 것이다. 둘째의 경문에는 열한 구(句)의 상생(相生)이 있다. 질문의 경문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질문의 뜻은 “위에서 설한 바와 같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만약 중생이 성품이 없다면[無性] 어째서 교화라고 말하는가? 만약 교화를 따른다면 마음이 성품 없음에 머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이다. 답은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기(生起)이고, 둘째는 게송의 답이다. 의의(義意)는 다만 경계의 성품 없음을 알기 때문에 비록 연(緣)에 있더라도 곧 비(非)를 취하는 것을 여의니, 단지 무생(無生)이 되기 때문에 교화가 도리어 제시됨을 알 수 있다. 게송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질문한 자를 찬탄함으로써 설하길 허락하여 듣기를 권하는 것이며, 둘째는 바른 뜻을 제시하는 것이다. 바른 뜻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세 게송은 바른 뜻을 총체적으로 보인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관문(觀門)을 기준으로 해서 나타내 보인 것이며, 다음에 있는 두 게송은 숨어 있는 의심을 제거한29) 것이다. 처음의 경문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한 게송은 총체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내신(內身)을 기준으로 해서 관행(觀行)을 보임을 올바르게 밝힌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안으로써 밖을 견주어[類] 중생을 교화함에 취함이 없음을 변별한 것이다. 두 번째의 관문을 기준으로 해서 변별한 것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연은 시작이 없음을 들어서 관할 바의 법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관하기를 권유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모든 법이 무(無)임을 밝힌 것이니, 곧 관(觀)을 기준으로 해서 상(相)을 해석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바로 유식문(唯識門)을 기준으로 해서 보낸 것이다. 세 번째의 숨어 있는 의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미 세간의 법이 본래 그러해서 성품이 없는데, 중생은 어째서 알지 못하는가? 게송에서 “다 허망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법이 무(無)라면 어째서 갖가지로 나타나는가? 게송에서 “연기를 따르기 때문에 이상(異相)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재수(財首)가 설한 까닭은 능히 정법의 재(財)로써 중생에게 베풀기 때문이다. 셋째,30) ‘업과가 매우 깊다’에는 문답에 두 가지가 있다. 경문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고(告)하는 것이고, 둘째는 뜻을 수립하는 것이며, 셋째는 질문하는 것이고, 넷째는 매듭 짓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중을 낳는 것이다. 셋째의 질문하는 경문에는 5대(對) 10구(句)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문의 뜻은 이미 성품에 아소(我所)가 없는데 어째서 고통과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하는가? 만약 고통과 즐거움을 받는다면 어째서 성품이 없다고 설하는 것인가? 이것은 바로 이(理)와 사(事)가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理事相違難]이다. 【문】앞의 연기의 어려움과 어떻게 다른가? 【답】앞의 것은 두 가지 사(事)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답의 뜻은 고통과 즐거움이 그대로 성품의 별도의 체[別體]가 없음이 된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게송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누니, 처음은 법이고 다음은 비유이다. 비유의 경문에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타자에 의거해서 성품을 여의는 비유를 변별한 것이며, 둘째는 연기가 유(有)를 이루는 비유이며, 셋째는 인연이 과(果)를 나타내는 비유이며, 넷째는 연의 과[緣果]가 성품을 여의는 비유이니, 이는 능훈(能熏)을 조망한 것이다. 다섯째는 인(因)의 체(體)에 섞임이 없는 비유이며, 여섯째는 생(生)을 받음에 작위를 여의는 비유이며, 일곱째는 과보에 근본[本]이 없는 비유이며, 여덟째는 승사(勝事)는 근(根)이 없는 비유이다. 이는 용(用)을 조망한 것이니, 또한 서로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아홉째는 유무(有無)가 성품이 동일한 비유이니, 이것은 모두 세간을 무너뜨리지 않고 제일의(第一義)를 설하는 것이다. 보수(寶首)가 설한 까닭은 능히 사(事) 가운데 이(理)를 나타냄으로써 처음으로 귀하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 ‘법을 설하는 것이 매우 깊다’에서 처음은 질문이고 다음은 답이다. 질문의 경문은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두 경문이다. 개별적인 것은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얻게 된 법을 변별한 것이고, 둘째는 10구로써 질문을 올바로 진술한 것이며, 셋째 ‘그러나 법[而法]’ 이하는 매듭 지음이고, 넷째 나중의 어려움을 낳는 경문에는 열 가지 서로 어긋남[相違]이 있는 것이다. 질문의 뜻인즉, 법이 만약 하나가 아니라면 말에 따라 모두 실다울 수 있는 것이며, 법이 만약 말에 응합하지 않으면 가르침이 곧 망령됨이니, 이것이 바로 교의(敎義)가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이다. 답의 뜻인즉, 하나라고 말한 것은 법이 오직 하나뿐이라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31) 또한 하나의 선교(善巧)라 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능히 관통하는 것이며, 온갖 가르침도 곧 하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게송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질문한 자를 찬탄한 것이며, 둘째는 비유를 기준으로 해서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 중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 능히 온갖 기틀[萬機]을 짊어지는 비유를 밝힌 것이며, 둘째는 연(緣)이 대중의 미혹을 소멸하는 비유이며, 셋째는 기(器)에 들어가서 변함이 없는 비유이니, 이는 덕용(德用)을 조망한 것이다. 넷째는 모든 근(根)의 동요를 불식하는 비유이며, 다섯째는 욕망에 응해서 윤택함을 따르는 비유이고, 여섯째는 연(緣)이 온갖 덕을 낳는 비유이고, 일곱째는 오염을 가려내서 청정함으로 가는 비유이고, 여덟째는 사물에 응해서 가버림이 없는 비유이고, 아홉째는 연에 응해서 체(體)에 머무는 비유이다. 덕수(德首)가 설한 까닭은 처음으로 법의 다양한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섯째, ‘복전이 매우 깊다’에서 경문의 상(相)은 앞의 것을 준거하면 알 수 있다. 질문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올바른 뜻을 고(告)해서 드는 것이며, 둘째는 어려움을 이루는 것이다. 어려움 중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고하는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며, 셋째는 매듭 지음이고, 넷째는 나중을 낳는 것이다. 개별적인 것에 10구가 있으니, 문답의 상(相)은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연이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因緣相違難]이다. 게송의 경문에는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연(緣)이 능히 과(果)를 나타내는 비유이며, 둘째는 기틀을 대해서 이해를 따르는 비유이고, 셋째는 임시방편의 교묘함[權巧]으로 기쁘게 하는 비유이며, 넷째는 감응에 응해서 기쁘게 하는 비유이고, 다섯째는 사물의 감응에 형태를 나타내는 비유이며, 여섯째는 연(緣)이 온갖 미혹을 소멸하는 비유이고, 일곱째는 모든 미혹을 대치(對治)하는 비유이니 또한 연의 분제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여덟째는 자비의 정(情)을 널리 입히는 비유이고, 아홉째는 모든 유(有)를 움직여 불식하는 비유이며, 열째는 독(毒)이 세 가지 유(有)32)를 소멸하는 비유이다. 목수(目首)가 설한 까닭은 처음으로 법을 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올바른 가르침이 매우 깊다’의 경문은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질문이고, 다음은 답이다. 질문 중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고한 것이고, 둘째는 올바르게 질문한 것이며, 셋째는 매듭 지음이고, 넷째는 나중을 낳는 것이다. 질문의 경문은 소지(所知)의 10법을 기준으로 해서 질문으로 삼은 것이다. 질문의 뜻은 무엇인가? 만약 가르침을 능히 끊는다면 반드시 나중에 다시 인과를 알아야 비로소 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요컨대 반드시 인과를 알아야 비로소 끊는다면 가르침을 세운 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답의 뜻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아가는 것이고, 둘은 물러서는 것이다. 물러서는 것은 스스로 이익이 없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은 가르침이니, 즉 ‘뛰어난 용(用)이 있음’이다. 위에서 어렵다고 한 것은 바로 교력이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敎力相違難]이다. 게송으로 답한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듣기를 권유함으로써 두 문을 열어 종지를 수립하는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정진을 권유함으로써 교력(敎力)을 밝히는 것이니, 곧 초문(初門)을 대한 것이다. 다음의 여덟 게송은 게으름[懈怠]33)의 과실을 변별해서 위의 두 번째 문을 대한 것이다. 이 경문에서 처음의 첫째는 많이 들음[多聞]의 게으른 비유이고, 둘째는 힘이 없는 것[無力]의 게으른 비유이며, 셋째는 한쪽을 닦는 것[偏34)修]의 게으른 비유이고, 넷째는 거꾸로 닦는 것[倒修]의 게으른 비유이며, 다섯째는 과도하게 구하는 것[過求]의 게으른 비유이고, 여섯째는 적은 방편[少方]의 게으른 비유이고, 일곱째는 적은 방편으로 다스리는 것[少治]의 게으른 비유이고, 여덟째는 무유(無有)에 뜻을 내는 비유이고, 또 나[我]에 집착하여 교만함이 높은 것의 비유이다. 진수(進首)가 설한 까닭은 처음으로 나아가서 능히 뛰어난 덕을 성취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곱째, ‘올바른 행이 매우 깊다’에는 문답에 두 가지 경문이 있다. 질문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고(告)하는 것이고, 다음은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 속에 네 가지가 있는 것은 알 수가 있다. 세 번째에서 진술된 구(句)에 여덟 가지가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질문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인이 설하기를 “설법을 들으면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어찌 법을 들어도 미혹을 끊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미혹은 마음에 의지하니, 마음에 행하는 바가 없으면 도리어 능히 미혹을 끊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성인이 설하는 행과 가르침이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聖說行敎相違難]이라 한다. 답의 뜻인즉, 가르침이 무력한 것이 아니라 다만 취함이 방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총(摠)으로써 듣기를 명하여 간략히 설하는 것이며, 둘째는 비유로써 이룬 것이다. 비유의 경문에는 아홉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다만 잘못을 들어서 덕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는 행을 설하는 것만 못한 비유이며, 둘째는 설함을 따라서 사념을 폐기하는 비유이며, 셋째는 경문을 계교하여 행을 미혹하는 비유이며, 넷째는 스스로 분(分)이 아니라고 일컫는 비유이며, 다섯째는 악업이 장애하는 비유이며, 여섯째는 자설(自說)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유이며, 일곱째는 총지(聰持)의 설을 변별하는 비유이며, 여덟째는 정(正)을 폐기하고 조(助)를 이루는 비유이며, 아홉째는 비(非)를 숨기고 시(是)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법수(法首)가 설한 까닭은 능히 처음으로 삿되지 않고 궤칙이 될 만한 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덟째, ‘조도(助道)가 매우 깊다’는 것은 이 성인의 설(說)을 편벽되게 집착해서 정(正)과 조(助)가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35)이다. 질문의 경문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告)하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뜻을 세우는 것이며, 셋째는 올바로 질문하는 것이고, 넷째는 매듭 짓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중을 낳는 것이다. 답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질문한 자를 찬탄해서 설하기를 허락한 것이니, 이 찬탄한 자는 능(能)ㆍ소(所)를 통틀은 것이다. 둘째는 올바로 답한 것이다. 이 답의 경문은 세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한 게송은 총체적으로 답한 것이고, 다음의 네 게송은 치우친 찬탄의 뜻을 회통한 것이며, 셋째의 네 게송은 정(正)과 조(助)가 서로 이루어짐으로써 뜻을 폐기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부처님의 설(說)을 회통한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인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것인데, 경문의 상(相)은 알 수 있다. 정과 조가 서로 이루어지는 경문은 네 가지가 있는데 알 수 있다. 지수(智首)가 설한 까닭은 능히 처음으로 정과 조를 훌륭히 쓰기 때문이다. 아홉째, ‘일승이 매우 깊다’는 문답에 두 가지 경문이 있다. 질문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고(告)한 것이고, 둘째는 질문한 것이다. 질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올바른 뜻을 세운 것이고, 둘째는 질문한 것이며, 셋째는 매듭 지음이고, 넷째는 나중을 낳는 것이니,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과와 체용이 서로 어긋나는 어려움[因果體用相違難]이다. 답의 뜻은 아불(我佛)의 인과와 체용이 모두 동일한 법인 것이니, 말하자면 법성의 한 가지 법이다. 또한 하나의 광대한 자비 방편의 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다만 중생이 달리 볼 뿐이다. 게송의 경문은 여섯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두 게송은 인과가 다 함께 하나임을 들어서 위의 질문에 답한 것이며, 다음의 두 게송은 스스로의 업으로 각기 달리 봄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부처님을 성취하면 본래 하나라서 따로 정미함과 거침[精麤]이 없는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훌륭히 행하는 자가 보게 됨을 밝힌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부처님의 자재한 업이 사물에 따르고 기틀에 감응함을 밝힌 것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숨어 있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뜻에 세 가지가 있음은 알 수가 있으며, 또한 오직 하나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수(賢首)가 설한 까닭은 성인의 법을 훌륭히 열어서 이치[理]에 따라 중도를 얻기 때문이다. 이상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질문함을 변별한 것이며, 이 이하는 많은 사람이 한 사람에게 질문함을 밝힌 것이니, 곧 열 번째 ‘부처님의 경계가 매우 깊다’인데, 문답에 두 가지 경문이 있다. 질문의 경문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告)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설한 것을 매듭 지음이며, 셋째는 질문을 받은 이가 변재의 덕[辯36)德]으로써 질문에 나아가기를 찬탄한 것이고, 넷째는 올바로 질문한 것이며, 다섯째는 나중의 게송을 낳는 것이다. 이제 질문한 것[所問]에 열한 가지 상(相)이 있는데, 어째서 먼저 문수가 도리어 반대로 힐문하는가? 지금 다만 곧바로 질문하는 것은 수장(首長)의 지위를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열한 가지 질문 내용의 경문은 4중(重)으로 나눈다. 처음의 세 가지는 자리(自利)의 덕이고, 다음의 네 가지는 이타(利他)의 덕이며, 다음의 세 가지는 이익을 받는 중생인데, 또한 이 셋은 능ㆍ소를 통틀은 것이다. 나중의 한 가지는 질문한 것의 광대함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증지(證知)하신 분량의 경계이며, 둘째는 경계의 인(因)을 능히 증득하는 것이며, 셋째는 들어가게 된 처소를 질문한 것이며, 넷째는 부처님의 경계 안에서 얼마만큼의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경계에 따르는[隨順] 지혜이며, 여섯째는 중생에 따라서 설하는 법이며, 일곱째는 여량지(如量智)로 분별하여 아는 것이며, 여덟째는 부처님의 경계는 분별식(分別識)으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어떤 경계 가운데에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경계를 결정적으로 알게 하는가이며, 열째는 지혜가 하등(何等)의 중생심을 비추어서 경계로 삼는가이며, 열한 번째는 경계 중에서 설했듯이 하등의 광대한 뜻이다. 문수가 설한 까닭은 묘혜(妙慧)로 부처님의 경계를 요달함을 시초로 삼기 때문이다. 답의 경문에는 열 가지 게송이 있다. 처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나온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경계에 답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나온 부처님 경계의 인(因)에 답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나온 들어가게 된 경계의 처소에 답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나온 부처님께서 제도하신 것에 답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나온 하등의 부처님 경계에 따른 지혜에 답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나온 부처님 경계의 법은 중생을 따라서 설함에 답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위에서 나온 하등이 부처님께서 아시는 바 경계를 능히 분별하는 지혜의 앎인가에 답한 것이며, 다음의 반 게송은 위에서 부처님의 경계를 인식함에 답한 것이고, 아래의 반 게송은 앞에서 하등이 능히 부처님의 경계를 결정적으로 아는 것인가에 답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앞의 부처님 경계가 광대함에 답한 것이고, 다음의 한 게송은 앞의 경계의 비춤에 답한 것이니, 또한 질문에 의거해 차례대로 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차례대로 두 가지 큰 경문은 이미 신해(信解)를 얻어서 평등무애한 것이 두 상(相)이 없음을 나타내는 뜻임을 밝힌 것이다. 경문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힘을 이어받아서 이 국토[刹]의 무애함을 봄을 밝힌 것이며, 둘째 ‘여시(如是)’ 이하는 나머지 방위를 통틀어서 이익을 얻음을 일제히 보는 것을 견준[類] 것이다.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알 수 있다. 처음의 ‘이 방위의 이익’이란 경문 중에서도 또한 “첫째는 총체적인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것이며, 셋째는 매듭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개별적인 것에서 ‘행한 바의 법과 같다’는 것은 위의 제8 지수(智首)가 변별한 6도(度)의 행법과 같은 것이며, ‘행한 바의 업과 같다’는 것은 위의 제3 보수(寶首)가 변별한 ‘행해진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등’과 같은 것이며, ‘세간의 행과 같다’는 것은 위의 제6 진수(進首)가 변별한 ‘정진으로 속히 나가서 게으름[懈怠]의 어려움을 벗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한 일곱 번째 법수(法首)가 변별한 ‘수행으로 벗어나 여의며[出離] 많이 듣는 것[多聞]으로는 벗어나지 못한다’와 같은 것이며, ‘신행(信行)을 따르는 것’은 위의 제2 재수(財首)가 변별한 ‘신(身)을 따르고 행(行)을 따라서 보는 것이 교화가 됨’을 이름하여 ‘신행(身行)을 따른다’고 하고, ‘근행(根行)을 따른다’는 것은 위의 제4 덕수(德首)가 변별한 ‘불법이 비록 하나이나 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나눠진다’와 같은 것이며, 또한 제5 목수(目首)가 변별한 ‘부처님의 복밭[佛田]이 비록 하나이나 행에 따라 다양하게 나뉜다’와 같은 것이니, 그 행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는 것은 그 행의 과보로 낳게 된 처소에 따르는 것이며, ‘계를 지킴[持戒]과 금계를 범함[毁禁]’이란 것은 위의 제1 각수(覺首)가 변별한 ‘마음의 성품이 비록 하나이나 행에 따라 동일치 않으니, 과보를 받는 것이 각기 달라서 선악 등의 차별이 있다’와 같으며, ‘법의 과보를 설한다[說法果報]’는 것은 위의 제9 현수(賢首)가 변별한 ‘중생의 욕망의 모든 업과 그 과보를 따라 저마다 진실[實]을 보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과보를 설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 앞에서 문수가 변별한 ‘부처님 경계의 법’도 역시 과보를 설한다는 명칭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 이 현현(顯現)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 이(理)를 따르니 이 법이 모두 참되어서 성인의 방편을 이룸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는 법체(法體)가 이(理)에 응하니 공능(功能)의 밝고 청정함으로 일체를 모두 봄을 나타낸 것이다.
7) 정행품(淨行品) 네 가지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변별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살이 수행하는 뛰어나고 오묘한 정행(淨行)의 상(相)을 자세히 했기 때문에 이름하여 「정행품」이라 한 것이다. 또한 정(淨)이라는 것은 덕에 때[垢]가 없기 때문이며, 행(行)이란 체(體)라고 할 수 있다. 또 정(淨)이란 원(願)이고, 행이란 청정한 바[所淨]일 뿐이다. 둘째는 온 뜻이다. 온 까닭은 이해에 의거해서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는 앞은 행이고 다음은 원(願)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모든 원(願)으로써 종지를 삼는 것이다. 넷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인데 이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지수(智首)가 질문하는 것이고, 다음은 문수가 답한 것이다. 지수가 묻고 문수가 답한 까닭은 처음의 원(願)의 상(相)이 미약해서 지(智)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니, 상(相)을 따라서 원을 발하는 것은 묘혜(妙慧)가 아니고선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에서 뜻의 종류를 서로 좇으면 열한 가지 사(事)가 있는데, 총체적으로 나누면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열37) 가지는 자분(自分)의 인상(因相)을 어떻게 묻는가를 말한 것이며, 둘째 ‘옳은 곳을 아는 지혜를 얻으며[得是處智]’38) 이하는 승분(勝分)의 과상(果相)을 질문함을 밝힌 것이다. 처음의 경문 내용에 나아가면 앞의 하나는 복(福)의 인행(因行)이고, 다음의 하나는 복의 과행(果行)이며, 다음의 하나는 지(智)의 인행이고, 다음의 하나는 지(智)의 과행이며, 다음의 하나는 비지(比39)智)의 인행이고, 다음의 하나는 증지(證智)의 과행이며, 다음의 하나는 모든 도(度)40)를 닦아서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다. 처음의 질문에 아홉 가지가 있다. 처음의 세 종류는 3독(毒)을 여의는 것이며, 다음의 하나는 견고해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범부와 같지 않은 것이며, 다음의 하나는 자리(自利)의 성취이고, 다음의 하나는 이타(利他)의 뛰어나고 묘함이니 이는 이승(二乘)과 다른 것이며, 다음의 세 가지는 신위(信位) 전의 가명(假名)보살의 견(見)을 여의는 것이니, 또한 해초(解初)의 세 가지 끊음으로 대치(對治)한다. 다음의 세 가지는 체(體)이고, 나중의 세 가지는 성품을 다스리는 것[性治]이니, 생각하면 곧 알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열 가지 사(事)가 있으며, 세 번째의 질문에도 아홉 가지 사(事)가 있으며, 네 번째의 질문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나머지 경문은 알 수 있다. 두 번째의 과(果) 안의 질문 가운데 승진과(勝進果)의 경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분(果分)에 들어가기 때문에 물(物)의 양육을 받음을 감당하는 것이다. 둘째는 천신(天神) 등의 공경과 수호를 받는 것이다. 셋째는 대비행(大悲行)의 덕을 변별한 것이다. 넷째는 지위의 덕을 변별한 것이다. 두 번째의 문수의 답에 나아가면 답이 다한 것이니, 생각하면 알 수 있다. 하나의 원(願)을 들어서 앞의 많은 질문에 남김없이 답하는 것일 뿐이다.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의 긴 행은 간략히 답한 것이고, 둘째의 게송을 읊은 것은 자세히 답한 것이며, 셋째의 긴 행은 매듭 지음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한 자를 찬탄해서 그 마음에 품은 뜻을 밝게 깨우치는 것인데,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불자야’ 이하는 올바르게 답한 것이다. 답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자리(自利)를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과거ㆍ미래ㆍ현재[去來今]’ 이하는 이타(利他)이고, 셋째 ‘실상을 밝게 요달한다’ 이하는 승진(勝進)의 과행을 밝힌 것인데, 경문에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의 존도(尊道)41)라는 것은 부처님이 하나가 되고, 능히 청하기 때문에 둘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현인(普賢因)의 사람을 대해서 과(果)를 조망하기 때문이다. 또 자리의 도[自利道]가 원만한 것이 처음이 되고, 지금 이타의 덕이 원만한 것이 다음이 될 뿐이다. 둘째는 게송의 경문이니, 처음은 거듭 든 것이고, 다음은 게송을 해석하여 답한 것이다. 원(願)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행 이전이고, 둘은 행 이후이다. 여기서는 행 이후이며, 또한 동시일 수도 있으니 행에 즉(卽)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총체적으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그 견심(見心)을 그대로 전(轉)하는 것이 곧바로 행의 체(體)를 성취하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일을 전구(轉求)하는 것이 저 원(願)의 사(事)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 원(願)에는 열 종류의 형세[勢]가 있다. 첫째는 사(事)를 회통해서 이(理)에 들어가는 것이니, 마치 보살이 집에 있는 것[在家] 등과 같다. 둘째는 인(因)이 과(果)와 동일한 것이니, 마치 ‘만약 대중의 모임[聚會]에 있으면’ 등과 같은 것이다. 셋째는 자(自)가 타(他)와 동일한 것이니, 마치 ‘부끄러움이 없음을 보면’ 등과 같은 것이다. 넷째는 사람이 법과 동일한 것이니, 마치 ‘질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등과 같은 것이다. 다섯째는 물듦[染]이 청정함[淨]과 동일한 것이니, 마치 ‘은혜를 배반하는 사람을 보면’ 등과 같은 것이다. 여섯째는 세간이 출세간과 동일한 것이니, 마치 ‘방사(房舍)에 있는’ 등과 같다. 일곱째는 경계로써 마음을 성취하는 것이니, 마치 ‘만약에 승방(僧房)에 들어가면’ 등과 같은 것이다. 여덟째는 체(體)로써 용(用)을 따르는 것이니, 마치 ‘고행하는 사람을 보면’ 등과 같은 것이며, 아홉째는 상사(相似)함으로써 유(類)를 이루는 것이니, 마치 ‘진귀한 것을 보시할 때는’ 등과 같은 것이며, 열째는 실(實)로써 허(虛)와 동일한 것이니, 마치 ‘만약 기락(伎樂)에 있으면’ 등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준거하라. 게송은 140개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된다. 처음의 열한 게송은 재가 보살의 법이 세간행을 버리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나머지 경문은 출가행을 밝힌 것이니, 이는 유위(有爲)의 행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출가의 경문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처음의 열다섯 게송은 출가의 수계법(受戒法)을 밝힌 것이며, 둘째 ‘만약 방사(房舍)에 들어가면’ 이하의 스무 게송은 머무는 처소에 위의(威儀)의 행법으로 나아감을 변별한 것이고, 셋째 ‘손으로 석장(錫杖)을 잡고’ 이하의 쉰일곱 게송은 도로(道路)의 행법을 밝힌 것이며, 넷째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면’ 이하의 스무 게송은 성읍(城邑)과 마을에 들어가서 걸식하는 행법을 밝힌 것이고, 다섯째 ‘만약 물에 들어갈 때’ 이하의 열일곱 게송은 벗어나 여의는[出離] 수도의 행법을 밝힌 것이다. 원(願)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반드시 기약하고 맹서하는 원(願)이며, 둘째는 행원(行願)이며, 셋째는 자체에 장애가 없는 원이다. 첫째는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올바르게 행을 성취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루어진 것이 참[眞]인 원이다. 즉 6결정(決定)과 성기(性起) 등 일체의 모든 원에 다 세 가지 경문이 있다. 처음의 한 구는 자분(自分)의 경계이고, 다음의 한 구는 중생에 미치는 것이며, 다음의 두 구는 뛰어난 일[勝事]을 섭수해서 동화하는 것이다. 【문】어째서 『영락경』은 이(理)에 들어가는 처소를 대해서 원이 많으며, 이 경은 사(事)를 대해서 원이 많은 것인가? 【답】이 경은 일승을 따르기 때문에 가르침이 사(事)에 있어서 이익이 크며, 『영락경』은 삼승을 따르기 때문에 가르침이 이(理)에 있어서 이익이 곧 많은 것이다. 준거해서 생각하라.
8) 현수품(賢首品) 네 가지 문은 앞과 같다. 첫째는 명칭을 변별한 것이다. 10신(信)이 이미 원만한 지위[滿位]42)는 현성(賢聖)의 시초로서 범정(凡頂) 보살 가운데 처음이 되기 때문에 「현수품」이라 말한 것이다. 둘째는 온 뜻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온 것인가? 행이 이미 성립하고 난 다음에 반드시 덕용(德用)으로 지위를 성취함을 널리 찬탄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셋째는 덕을 찬탄함을 종지로 삼은 것이다. 넷째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이 품에는 715게송 반이 있고,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수가 질문한 것이고, 둘째의 707게송 반은 현수가 올바르게 답한 것이며, 셋째는 현수가 설한 것이다. ‘이 품이 끝나는 때’ 이하의 여섯 게송은 경가(經家)가 모든 부처님의 증득하여 성취함[證成]을 드러낸 것이다. 질문의 경문은 두 가지이다. 처음의 긴 행은 경가(經家)가 문수가 질문한 뜻의 상(相)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다음에 있는 두 게송은 앞의 정행(淨行)을 거듭 들어 이 믿음의 인[信因]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로써 올바르게 질문을 청하는 것이다. 처음의 하나는 앞의 것을 매듭 지음이며, 다음의 하나는 나중을 일으킨 것이다. 문수가 질문하고 현수가 답한 까닭은 10신(信)의 지위 가운데에서 원만하게 통하는 덕은 묘혜(妙慧)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깊은 뜻과 청정한 덕은 오직 어진 이[賢]라야 비로소 얻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답을 밝히는 가운데 경문은 네 가지가 있다. 처음의 13게송은 신위(信位)에서 발심한 행상(行相)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고, 둘째 ‘깊은 마음[深心]’ 이하의 519게송 반은 신위의 덕체(德體)와 뛰어난 능력을 자세히 밝힌 것이며, 셋째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다 함께 설하신다[一切諸佛皆共說]’ 이하의 154게송은 설한 바의 뜻[旨]이 깊어서 중생들[群情]이 깨닫지 못함을 비유로써 정황으로 삼음을 밝힌 것이고, 넷째 ‘내가 설한 바처럼 모든 비유는[如我所說諸譬諭]’ 이하의 21게송은 양(量)을 계산해서 발하기를 권유한 것이다. 처음의 총체적인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반 게송은 듣기를 명하고 설하기를 허락한 것이며, 다음의 여섯 게송 반은 자세한 뜻을 듦으로써 간략한 경문을 나타낸 것이고, 다음의 여섯 게송은 발심(發心) 공덕의 행상(行相)을 올바르게 설한 것이다. 둘째의 자세함을 들어서 간략함을 드러낸 경문이다. 처음에 있는 세 게송 반은 설(說)의 분제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자세함이 곧 깊음임을 드러낸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처음의 약설(略說)을 이룬 것이다. 셋째,43) 총체적으로 덕을 찬탄한 경문의 내용은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반 게송은 인ㆍ연의 두 문을 들어서 총체적으로 덕을 찬탄한 것이며, 다음의 한 게송 반은 발심의 연(緣)과 인(因)을 간략히 변별해서 위의 두 가지를 통틀어 변별한 것이다. 다음의 네 게송은 발심의 뜻에 두 가지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니, 처음의 한 게송은 어려운 바를 밝힌 것이며, 다음의 세 게송은 이루어진 바를 변별한 것이다. 이 세 게송 중에서 처음의 한 게송은 두 문을 연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앞의 둘을 해석한 것이다. 둘째의 519게송 반 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132게송은 자분(自分)의 인(因) 속에 보리를 모아 갖춤을 변별한 것이고, 다음의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禪)’ 이하의 305게송은 승진(勝進)의 과(果) 속에 보리를 모아 갖춘 것이며, 셋째 ‘신력이 여기서 자재함을 얻어[神力於此得自在]’ 이하의 81게송은 자타(自他)의 걸림 없음으로 공덕을 성취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은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119게송은 자리(自利)의 차별상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 ‘혹은 어떤 찰토에 부처님이 없으면[或有刹土無有佛]’ 이하에 있는 열네 게송은 이타행의 사(事)이다. 처음의 경문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의 열여덟 게송은 10신 초위(初位)의 상(相)을 밝히고 4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四不壞信]을 밝힌 것이며, 둘째 ‘만약 일체의 부처님을 믿어 공경하면[若信恭敬一切佛]’ 이하에 있는 열 게송은 바로 제2위(位)로서 2지(地)의 상(相)과 동일한 것이며, 셋째 ‘만약 믿음이 견고해서 움직일 수 없다면[若信堅固不可動]’ 이하의 일곱 게송은 제3위를 밝힌 것으로 3지의 상과 동일한 것이며, 넷째 ‘만약 일체의 부처님께서 수호하신 바가 된다면[若爲一切佛所護]’ 이하에 있는 여덟 게송은 제4위를 밝힌 것으로 4지의 상과 동일한 것이며, 다섯째 ‘만약 능히 마하연(摩訶衍:대승)을 구족한다면[若能具足摩訶衍]’ 이하의 아홉 게송은 제5위를 밝힌 것으로 5지의 상과 동일한 것이며, 여섯째 ‘만약 대비심이 견고함을 얻는다면[若得大悲心堅固]’ 이하에 있는 여덟 게송은 제6위를 밝힌 것으로 6지(地)의 대비가 수관(首觀)이 되는 등과 동일한 것이며, 일곱째 ‘만약 일체 중생의 행을 알면[若解一切衆生行]’ 이하의 여덟 게송은 제7위를 밝힌 것으로 7지의 상과 동일한 것이며, 여덟째 ‘만약 능히 네 가지 마군의 도를 뛰어넘는다면[若能超出四魔道]’ 이하의 열아홉 게송은 제8위를 변별한 것으로 8지의 행상(行相)과 동일한 것이며, 아홉째 ‘만약 미묘하고 매우 깊은 법을 설한다면[若說微妙甚深法]’ 이하의 열세 게송은 제9위를 밝힌 것으로 9지의 설법상(說法相)과 동일한 것이며, 열째 ‘만약 법신의 공덕과 지혜를 갖춘다면[若身功德智慧具]’ 이하의 열여덟 게송은 제10위를 변별한 것으로 10지의 상과 동일한 것이다. 초위(初位)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열여섯 게송은 초위의 덕을 변별한 것이며, 둘째 ‘그러므로[是故]’ 이하의 두 게송은 10위(位) 차례의 덕을 통틀어 찬탄한 것이다. 처음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네 게송은 믿는 바의 경계를 변별한 것이며, 둘째에 있는 열두 게송은 믿음의 덕이 선(善)을 낳고 장애를 소멸하는 뜻을 자세히 찬탄한 것이다. 첫 번째인 경계의 경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의 두 게송은 3보(寶)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세 가지 불성(佛性)이다. 만약 믿음이 무너질 수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논(論)에서는 “선근이 희(喜)ㆍ사(捨) 등을 엷게 한다”고 말했는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이것은 일승의 단박에 들어가는 사람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이 종자가 위의 심행위(心行位)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한 이 믿음이 원만한 마음[信滿心]이 한결같이 물러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은 믿음이 원만한 마음에 머무는 행이 10해(解)로서 능히 행을 성취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에서 설을 달리하는 것이니, 이를 준거해서 생각하여 섭수하라. 두 번째의 ‘그러므로’ 이하의 매듭 지음은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하나는 법설(法說)이며, 다음의 하나는 비유이다. 두 번째, 두 가지 자분(自分)의 인행(因行)의 경문이다. 두 번째의 이타(利他) 중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처음의 여덟 게송은 청정한 방편과 8상(相) 성도의 교화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두 게송은 오염 없는 방편의 교화이며, 다음의 한 게송은 대용(大用)의 체(體)를 밝힌 것이고, 다음의 세 게송은 자재함을 매듭지어 찬탄한 것이다. 둘째,44)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禪)’ 이하의 승진(勝進)을 변별한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90게송은 자리(自利)의 행이 불사(佛事)를 만족시킴을 밝힌 것이며, 두 번째 ‘설법의 교훈과 신족[說法敎誡及神足]’ 이하에 있는 215게송은 이타행을 밝힌 것이다. 자리(自利)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의 70게송은 신업(身業)이 공(空)하지 않은 것이고, 둘째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애조띤 난새와 같다[柔軟美聲如哀鸞]’ 이하의 네 게송은 구업(口業)이며, 셋째 ‘중생의 고통과 즐거움ㆍ이익과 이익 없음[衆生苦樂利無利]’ 이하의 열여섯 게송은 의업(意業)이다. 소리에 여덟 종류가 있다는 것은 『범마유경(梵摩喩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45) 첫째는 가장 좋은 소리[最好聲]이니, 그 소리가 청아한 것이 마치 가릉빈가(迦陵頻伽)46) 등과 같다. 둘째는 알기 쉬운 소리[易了聲]이니, 언사를 변별해서 요달하는 것이다. 셋째는 고른 소리[調和聲]이니 그 소리는 낭랑하고 웅대하다. 넷째는 부드러운 소리[柔軟聲]이고, 다섯째는 잘못되지 않는 소리[不誤聲]이며, 여섯째는 여자답지 않은 소리[不女聲]이다. 일곱째는 존중하고 슬기로운 소리[尊慧聲]이니, 말에 겁냄이 없는 것이 마치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같고 뛰어나게 슬기로운 사람과 같아서 말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여덟째는 심원한 소리[深遠聲]이니, 배꼽에서 소리를 발하는 것이 마치 우레가 진동하는 것과 같다. 처음 70게송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열 게송은 신업의 용(用)을 내고 체(體)를 정(定)이라 일컬은 것이며, 다음의 ‘만약 일체의 부처님을 공양하고자 하면[若欲供養一切佛]’ 이하의 34게송은 신업을 올바로 밝힌 것이고, 다음의 ‘일체를 편안히 하고자 하여[欲安一切]’ 이하의 26게송은 모든 법문의 교화를 나타냄을 밝힌 것이니, 또한 곧 지은 바의 사(事)이다. 둘째 ‘승진의 이타(利他)’의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곧 3륜(輪)이다. 처음의 28게송은 신족(神足)의 교화를 밝힌 것이고, 둘째 ‘만약 세간에 정견이 없음을 본다면[若見世間無正見]’ 이하의 아홉 게송은 법륜을 설한 것이고, 셋째 ‘중생을 안온하게 하는[安隱衆生]’ 이하의 178게송은 숙주륜(宿住輪)의 교화이니 곧 억념(憶念)의 교화이다. 이것은 본인(本因)을 기준해서 설한 것이다. 만약 나타난 연(緣)을 조망한다면, 곧 이 기심륜(記心輪)인 것이다. 억념의 경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총체적인 것이고, 다음은 개별적인 것이며, 셋째 ‘이와 같은 등류의[如是等比]’ 이하는 매듭 지음이다. 개별적인 것에 합하여 마흔네 가지 사(事)가 있는데, 각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명칭과 체(體)를 열거한 것이고, 둘째는 광명에 대용(大47)用)이 있는 것이며, 셋째는 본인(本因)을 설한 것이다. 경문 가운데 열 가지 법이 아닌 말[非法語]이 있다는 것은 아래의 논(論)에서 경본(經本)의 열일곱 가지 말로써 열 가지 법이 아닌 말을 삼은 데 의지한 것이다. 말하자면 침해하고 괴롭히는 말[侵惱語]ㆍ거칠고 사나운 말[麤獷語]ㆍ남을 괴롭히는 말[苦他語]ㆍ남을 성내게 하고 한스럽게 하는 말[令他瞋恨語]이니, 이상의 네 가지 말이 하나가 된다. 앞에 나타난 말[現前語]ㆍ앞에 나타나지 않은 말[不現前語]ㆍ비루하고 악한 말[鄙惡語]ㆍ단호하지 못한 말[不斷語]이니, 이상의 네 가지 말이 넷이 된다. 기쁘게 듣지 못하는 말[不喜聞語]ㆍ들어도 기쁘지 않은 말[聞不悅語]이니, 이 두 가지 말은 둘이 된다. 성내면서 괴롭히는 말[瞋惱語]은 하나가 된다. 마음의 불로 능히 태우는 말[心火能燒語]ㆍ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말[心熱惱語]ㆍ사랑하지 않는 말[不愛語]ㆍ즐겁지 않은 말[不樂語]이니, 이상의 네 가지 말은 하나가 된다. 착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무너뜨리고 또한 타인을 무너뜨리는 말이니, 이 두 가지 말은 하나가 된다. 이 열 가지 법이 아닌 말은 다른 일[他事]의 미혹을 낳아서 그 정(定)을 장애한다. 또 『연등경(燃燈經)』에 의거하면 열 가지 법이 아닌 말이 있으니, 첫째는 망령된 말[妄語]이고, 둘째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痛心語]이며, 셋째는 거친 말[麤語]이고, 넷째는 고통스럽고 악한 말[苦惡語]이며, 다섯째는 기쁘지 않은 말[不喜語]이고, 여섯째는 즐겁지 않은 말[不樂語]이며, 일곱째는 사랑스럽지 않은 말[不愛語]이고, 여덟째는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 말[不入心語]이며, 아홉째는 남을 괴롭히는 말[惱他語]이고, 열째는 원한을 맺는 말[結怨語]이다. 매듭 짓는 경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의 네 게송은 법체를 든 것이며, 둘째의 여섯 게송은 이익을 변별한 것이며, 셋째에 있는 일곱 게송은 비유이며, 넷째에 있는 세 게송은 매듭 지어 권유함이니,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에는 81게송이 있으니, 자타의 걸림 없음으로 공덕을 성취함을 밝힌 것인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신력이 여기서 자재로움을 얻는다’ 이하의 17게송은 기세간(器世間)에서 자재로움을 밝힌 것이고, 둘째 ‘동방 세계는 나머지가 있지 않다[東方世界無有餘]’ 이하의 열 게송은 지정각(智正覺)에서 자재로움을 밝힌 것이며, 셋째 ‘안근 가운데에서 정수(正受:삼매)에 들어간다[於眼根中入正受]’ 이하의 54게송은 중생세간에서 자재로움을 밝힌 것이다. 중생세간의 경문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처음에 있는 24게송은 자신(自身)이 선정[定]에 들어감을 밝힌 것이고, 둘째 ‘동자의 몸에서 정수에 들어간다[童子身入正受]’ 이하의 14게송은 남의 몸에서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며, 셋째 ‘하나의 털구멍에서 들어간다[一毛孔入]’ 이하의 네 게송은 자타(自他)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재함을 밝힌 것이고, 넷째 ‘하나의 티끌에서 들어간다[一微塵入]’ 이하의 열 게송은 외부의 4대(大)에서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며, 다섯째 ‘이것의 명칭이[是名]’ 이하의 둘은 다함 없음을 찬탄하면서 매듭 지은 것이다. 자신(自身)의 경문은 열둘인데 들어가면 곧 스물넷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3세간은 우선 하나의 상[一相]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인데, 이치[理]로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보살 자신이 3세간을 짓는 것이며, 둘째는 보살이 3세간의 처소에서 자재로움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위의 경문은 곧 이 두 번째 문이다. 세 번째48)에는 154게송이 있는데, 법지(法旨)가 깊어서 중생들[群情]이 깨우치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비유를 인용해서 답을 유비(類比)한 것이니, 이상은 비로소 기초를 건립함을 올바르게 답한 것이다. 선근 행덕의 뜻이 여기서 드러나니, 지위의 차례로 말한 것이다. 대체로 이는 외범(外凡)이 처음으로 발심(發心)의 행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경문에서 변별한 ‘10지(地)의 마지막에 부처님 경계의 위없는 보리에 들어가서 불사(佛事)를 만족한다’고 한 것과 언상(言狀)이 모순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만일 그 실(實)을 궁구하면 마땅히 일승 통종(通宗)의 행요(行要)이니, 뜻이 참된 근본을 흥기하여 세간을 버리지 않고, 현묘한 근원을 비추어 사무쳐서 법계를 확연히 두루 하며, 그 오묘함은 정(情)의 비천함을 끊고 공(功)은 밖이 없음[無外]에 나타나며, 체(體)는 융섭하지 않음이 없고 행은 존재하지 않음이 없으며, 먼저와 나중이 둘이 아니어서 뜻[旨趣]이 한 맛[一味]에 있다. 그러므로 과(果)는 인(因)과 다른 과는 없고, 인은 과와 다른 인이 없어서 인과의 일컬음은 연(緣)에 맡겨 나타난다. 그 연은 이에 어긋나서 여러 흐름이 똑같이 갈마들고, 기울고 참이 저로부터 나에게 일삼음이 없으니, 그래서 그 배운 바에 의거함으로써 수레바퀴가 나아간 자취를 밝히는 것이다. 공의 이루어짐이 있게 되면서 법이 통하고 행은 국한되며, 사(事)는 상의(常儀)를 나타내는 것이다. 혹은 진(眞)을 비추어 보기 때문에 반드시 분명하고 간략해야 하는 것이니, 원종(圓宗)의 이치는 현묘한 진(眞)을 거울처럼 비추어서 언표(言表)를 훌륭하게 벗어나는 것이라서 사량의 경계가 아니다. 그런데도 얕은 식정(識情)에 걸린다면 지취의 현묘함을 측량하기 어려우니, 도리어 보고 듣는 데서 가르침을 봉(封)하고 설명을 고수하여 정(情)의 미혹을 증대시킨다. 이는 스스로가 정황에 가탁함으로써 그 마음을 요달하도록 비겨서 이끌지[擬導] 않는다면 믿음을 취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비근한 일을 들어서 현묘한 지취를 거울처럼 비출 뿐이다. 경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의 두 게송은 용(龍)ㆍ신(神)ㆍ부처님 등의 부사의한 일을 총체적으로 든 것이며, 다음의 ‘지금 말하려 하나[今說]’ 이하는 비유의 설을 널리 보인 것인데, 20사(事)의 비유가 있다. 첫 번째는 덕행이 깊고 넓은 형상의 비유이고, 두 번째는 실다운 덕이 그릇됨[非]을 여의는 비유이고, 세 번째는 법을 지님이 명료한 비유이고, 네 번째는 변재(辯才)로 기쁘게 하는 비유이고, 다섯 번째는 좋은 수단[善用]으로 기쁘게 하는 비유이고, 여섯 번째는 큰 것을 축소하고 작은 것을 증대하는 비유이고, 일곱 번째는 선정의 공용[定用]이 자재한 비유이고, 여덟 번째는 변화가 자재한 비유이고, 아홉 번째는 뛰어난 공덕과 원수[仇怨]의 비유이고, 열 번째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광대한 비유이고, 열한 번째는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두려움을 없애 주는 비유이고, 열두 번째는 기틀에 따라서 감응하여 나타나는 비유이고, 열세 번째는 행을 섭수함이 자재한 비유이고, 열네 번째는 해탈이 자재한 비유이고, 열다섯 번째는 법을 아는 것이 신속한 비유이고, 열여섯 번째는 걸림 없이 일을 성취하는 비유이고, 열일곱 번째는 법에 순응하면서 기쁘게 하는 비유이고, 열여덟 번째는 명료함이 기틀을 증대하는 비유이고, 열아홉 번째는 아래를 들어서 위를 성취하는 비유이고, 스무 번째는 근원을 궁구함이 자재한 비유이니, ‘마치 내가 모든 비유를 설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네 번째,49) 수행을 발하길 권유한 경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네 게송은 능히 설함[能說]의 어려움을 변별한 것이며, 다음의 일곱 게송은 믿는 자의 어려움을 밝힌 것이다. 다음의 열 게송은 비유를 통해서 5사(事)의 어려움이 있음을 견주고, 뛰어나게 오묘함을 맺어 찬탄한 것이니, 설한 바가 이미 현묘해서 그 참된 지취와 뜻의 흥기함에 계합해서 감응하는 성심(聖心)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세 번째의 여섯 게송은 상서로운 상(相)에 대해 마정(摩頂) 등을 찬탄하여 말함으로써 선을 설하는 것[說善]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다.
1)세차(歲次)는 별자리가 머무는 위치를 말하는데, 12차(次)로 나눈다. 순화는 남방에 있는 별자리 이름으로, 무오년(戊午年)에 해당한다.
2)당시에 중국에서는 중국 본토 이외의 나라는 4이(夷)라고 하여 오랑캐로 여겼다.
3)분한 또는 경계를 말한다.
4)장섭의 문제를 밝히는 데 셋이 있으니, 그 가운데 두 번째이다.
5)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
6)이 소제목은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없으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역자가 보입(補入)하였다.
7)서문의 여섯 구를 해석하는 가운데 여섯 번째이다.
8)고려대장경에는 ‘시(始)’로 되어 있고, 신수대장경에는 ‘여(如)’로 되어 있다.
9)동문중(同聞衆)에 두 문이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10)고려대장경에는 ‘열(列)’로 되어 있고, 신수대장경에는 ‘별(別)’로 되어 있다.
11)보살대중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 보살의 명칭을 열거하는 것을 세으로 나눈 중에 세 번째이다.
12)「세간정안품」의 처음 부분 참조.
13)고려대장경에는 ‘송(頌)’으로 되어 있고, 신수대장경에는 ‘송(誦)’으로 되어 있다.
1014)신수대장경에는 ‘십(十)’자가 없다.
15)신수대장경에는 ‘장(障)’자가 없다.
16)범어로는 moha-tamas. 무명을 말한다. 진실로 어둡기 때문에 어두움이라 한다.
17)지혜는 어두운 무명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광명에 비유한다.
18)『대지도론』에 유사한 내용이 있다 (『대정장』 25, p.443 중 참조).
19)범어로는 Dhṛtarāṣṭra. 치국천(治國天)이라고도 하며, 사천왕의 하나이다. 동방의 수호를 맡은 신이므로 동방천이라고도 한다. 수미산 제4층에 머물고 그 궁전을 현상성(賢上城)이라 한다. 오른손으로 옆구리를 짚고 왼손에 칼을 들고 천의(天衣)로 장식을 한 형상을 하고 있다.
20)신수대장경에는 ‘이(二)’로 되어 있다.
21)서분을 증신서와 발기서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인 발기서이다.
22)고려대장경에는 ‘득(得)’으로 되어 있고, 신수대장경에는 ‘덕(德)’으로 되어 있다.
23)신수대장경에는 ‘삼소전의(三所詮義)’라는 부분이 없다.
24)요간(料揀)ㆍ양간(量簡)ㆍ요견(料見)이라고도 한다. 잘 생각하고 헤아려서 바른 설(說)을 골라내는 것. 여러 관점에서 논구(論究)하는 것, 문답에 의해서 정밀히 논증(論證)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
25)신수대장경에는 ‘음(音)’자가 없다.
26)10바라밀을 말한다.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6바라밀에 방편(方便)ㆍ원(願)ㆍ역(力)ㆍ지(智)의 4가지 바라밀을 더한 것이다.
27)「광명각품(光明覺品)」을 가리킨다. 「광명각품」은 『화엄경』의 구성상 두 번째 회상에 속한다.
23)신수대장경에는 ‘의(儀)’가 ‘의(義)’로, ‘식(式)'이 ‘혹(或)’으로 되어 있다.
24)『화엄경』 원문에는 “시현고유전(示現故有轉)”이라 되어 있다.
25)이 부분의 고려대장경의 원문은 “금언지자(今言知者)”인데, 신수대장경에는 ‘지자(知者)’의 두 글자가 없다.
26)신수대장경에는 ‘유력(有力)’으로 되어 있다.
27)신수대장경에는 ‘지(知)’로 되어 있다.
28)경문의 열 가지 뜻 가운데 두 번째이다.
29)고려대장경에는 ‘거(去)’로 되어 있고, 신수대장경에는 ‘시(示)’로 되어 있어 ‘숨어 있는 의심을 보인다’는 뜻이 된다.
30)경문의 열 가지 뜻 가운데 세 번째이다.
31)균여의 저술과 『법계도기총수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32)유(有)는 산스크리트어 bhava의 한역으로서, 마음을 갖는 생물로서의 생존을 뜻한다. 3유란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를 말하며,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삼계에 있어서 각각의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33)해태(懈怠)란 불도 수행에 있어 게으름을 피우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비달마에서는 심(心)작용 중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가운데 하나이며, 유식에서는 20수번뇌(隨煩惱)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선사(善事)에 있어서 전진하지 않고 게을리 하는 것을 해태라 하였다.
34)신수대장경에는 ‘두루’를 뜻하는 ‘변(遍)’으로 되어 있다. 비슷한 뜻의 ‘편(徧)’자에서 부수의 ‘′’이 마멸된 ‘亻’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판각의 모양으로 보아 원래 ‘亻’으로 쓴 것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엄경』 게송 경문의 뜻으로 보아도 ‘편(偏)’자가 타당할 듯하다.
35)신수대장경에는 ‘난(難)’자가 없다.
36)신수대장경에는 ‘변(辨)’으로 되어 있다.
37) 신수대장경에는 ‘칠(七)’로 되어 있다. 문맥으로 보아 일곱 가지로 보아야 할 것 같다.
38)『화엄경』 원문에는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아는 지혜의 힘을 얻으며[得是處非處智力]’라고 되어 있다.
39)신수대장경에는 ‘법(法)’으로 되어 있다.
40)단(檀:보시)바라밀ㆍ시(尸:지계)바라밀ㆍ찬제(羼提:인욕)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정진)바라밀ㆍ선(禪:선정)바라밀ㆍ반야(般若:지혜)바라밀의 6바라밀과 인자함[慈]ㆍ가엾이 여김[悲]ㆍ기뻐함[喜]ㆍ버림[捨]의 4무량심을 가리킨다.
41)신수대장경에는 ‘도(導)’로 되어 있다.
42)10신(信) 만위(滿位)는 보살의 수행계위 중 10신(信)의 수행이 원만하게 완료된 때로서, 곧 10신의 마지막 위(位)인 원심(願心)을 만족하게 성취하여 그 다음 10주(住)의 첫 번째 위(位)인 발심주위(發心住位)에 나아가게 되는 자리이다.
43)「현수품」의 네 문 가운데 세 번째이다.
44)답을 밝히는 경문 네 가지 중 둘째의 519게송 반을 세 가지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이다.
45)『대정장』 1, p.884 중 참조.
46)산스크리트어 Kalaviṅka의 음역. 가라빈가(歌羅頻伽)ㆍ갈라빈가(羯羅頻迦)ㆍ가비가라(迦毘伽羅)ㆍ가릉빈(迦陵頻)이라고도 하며, 호성(好聲)이라 번역한다. 꿩과 같은 유(類)의 새로, 그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