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7_0161_a_01L석화엄교분기원통초 제1권
(釋華嚴敎分記圓通鈔)


균여(均如) 지음
김두진 번역


【釋】 이 글을 해석하면 대략 다섯 개의 부문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에서는 장주(章主)1)의 인연(因緣)과 행장(行狀)을 밝혔고, 두 번째에서는 글을 지은 인연과 순서를 밝혔고, 세 번째에서는 근본취지[宗趣]를 밝혔고, 네 번째에서는 장(章)의 이름을 해석하였고, 다섯 번째에서는 글을 따라서 해석하였다[入文解釋].2)

1. 장주(章主)의 인연과 행장을 밝힘

【釋】 첫 번째에서 말한 인연은 염조은(閻朝隱)이 지은 비(碑)3)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전(傳)4)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2. 글을 지은 인연과 순서를 밝힘

【釋】 두 번째에서 말한 글을 지은 인연과 순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는 인연을 밝혔고 그 다음에는 순서를 밝혔다. 처음의 것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에서는 통틀어서 밝혔고[總辨] 두 번째에서는 개별적으로 밝혔다[別辨].
통틀어 밝힌 것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앞선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가운데 가장 가까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니, 이 때문에 ‘의상 대덕에게 보낸 편지[寄相德書]’5)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만 지엄(智儼) 화상6)의 장소(章疏)가 뜻은 풍부하지만 문장이 간략해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취입(趣入)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삼가 화상(和尙)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지취(旨趣)를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장소(章疏)를 지어서 스승의 뜻을 널리 폈으니, 이것이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그 다음은 멀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으니, 이 때문에 『탐현기(探玄記)』의 「귀경청가게(歸敬請加偈)」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의 등불을 전함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집경(大集經)』에서는 “가령 경전을 머리에 이고 진겁(塵劫)을 지나고 몸이 상좌(牀座)가 되어 삼천(三千)7)에 가득하여도, 부처님의 법을 전하여 뭇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필경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질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오직 자기를 이롭게 하고 또한 남을 이롭게 하면서[自利利他]8) 설한대로 수행하여야만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될 뿐이다.
두 번째, 미래를 이롭게 한다는 것은, 「청가게(請加偈)」에서 “널리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두 번째 개별적으로 밝힌 것으로는 「화엄전(華嚴傳)」에서 “ 『화엄강목(華嚴綱目)』 1권, 『화엄현의장(華嚴玄義章)』 1권, 『화엄교분기(華嚴敎分記)』 3권과 위에서 나열한 대장소(大章疏) 이외에 다른 사람의 물음을 따라서 뜻에 따라 설한 것을 기록해 책을 만들었다”고 한 것이니, 이것이 이 글을 지은 개별적인 인연이다.
【문】 다른 사람의 물음을 따랐다고 하였는데, 누가 물은 것인가?
【답】 법상인(法相人)9)이 물은 것이다. 이른바 법상인이 『화엄경(華嚴經)』과 그 밖의 대승(大乘)을 판석(敎釋)하여 모두 한 맛[一味]의 대승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주(章主)는 교(敎)에서 다섯 가지로 나누고, 종(宗)에서 열 가지를 열어서 제5 원교(圓敎), 제10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써 이 경전을 융합하고 섭수하였다. 이때 법상인(法相人)은 이러한 의미를 밝히기 어려웠으므로 질문에 답한 것을 기록해서 책으로 만들었고, 글을 지은 순서는 따로 밝혔다.

3. 근본 취지[宗趣]를 밝힘

【釋】 세 번째로 근본 취지[宗趣]를 밝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물음에 답한 것을 종(宗:근본 종지)으로 하고 해인(海印)을 연 것을 취(趣)10)로 하였다. 또한 이 두 가지를 종(宗)으로 하고 성해(性海)11)를 나타낸 것을 취(趣)로 하였다. 또한 종(宗)은 위와 같고, 뒤에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일승교(一乘敎)의 의미를 잘 이해하도록 한 것을 취(趣)로 하였다. 또한 5교(敎)12)를 나누고 10종(宗)13)을 연 것을 종(宗)으로 하고, 하나를 이룬 한 가지 맛으로서 둘이 없는 곳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취(趣)로 하였다.

4. 제명(題名)

【記】14) 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 권 제1
당(唐) 대천복사(大薦福寺) 사문 법장(法藏) 지음
【釋】 네 번째로 제목의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른 제목의 이름[正題名]이고, 두 번째는 의거한 곳과 지은 사람의 이름이다. 첫째의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의거한 근본 가르침이고, 두 번째는 능석장명(能釋章名)이다. 첫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화엄일승(華嚴一乘)은 의거한 근본 가르침이고, 교분기(敎分記)는 능석장명(能釋章名)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화엄(華嚴)은 의거한 근본 가르침이고, 일승(一乘)의 아래는 능석장명(能釋章名)이다”라고 하였다. 첫 번 째의 뜻은 화엄일승(華嚴一乘)은 아래를 간략히 한 것이니, 이른바 『법화경』의 일승(一乘)과 『해심밀경』의 일승(一乘) 등을 간략히 한 것이요, 『교분기(敎分記)』는 위의 것을 간략히 한 것이니 이른바 증분(證分)을 간략히 한 것이다.
【문】 만약 증분(證分)을 간략히 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아래 글에서는 성해(性海)의 과분(果分)15)과 구경과증(究竟果證)을 함께 논하였는가?
【답】 이것은 교분(敎分)이 의거한 바이기 때문에 함께 들었을 뿐이다.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서 일승(一乘)은 의거한 근본 가르침이고 법계도(法界圖)는 능석장명(能釋章名)이니, 지금의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뒷사람의 뜻이라는 것은 불경의 제목에 일승(一乘)이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일승이라는 말은 능히 해석에 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와 『화엄지귀장(華嚴旨歸章)』 등에서는 오직 화엄만을 취하여 의거하였다.
이제 뒤의 뜻에 따라서 해석하면, 중권(中卷)의 제목에서 말한 『화엄경중일승입교분제의기(華嚴經中一乘立敎分齊義記)』는 중(中)자가 이미 능의(能依)16)와 소의(所依)17)를 벌려놓은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일승법계도』는 무엇이 소의(所依)이고 무엇이 능의(能依)인가?
【답】 다만 능의(能依)를 기준으로 해서 이름을 세웠을 뿐이다. 그 글의 아래에서 말하기를, “일승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은 『화엄경』과 『십지론(十地論)』에 의거해서 원교(圓敎)의 종요(宗要)를 표현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로 인해 무릇 모든 장소(章疏)가 이름을 얻은 것이 같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다만 능히 해석함[能釋]을 기준으로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능히 해석함과 해석된 것 전체를 기준으로 하였으니, 이처럼 한결같지 않은 것은 지은 사람의 선교방편(善巧方便)18)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거한 근본 가르침에서 고덕(古德)은 “불경(佛經)의 제목에서 세 종류의 이름을 세웠으니, 첫 번째는 『대방광화엄비로자나소설경(大方廣華嚴毗盧遮那所說經)』이고, 두 번째는 『대방광화엄보현보살소설경(大方廣華嚴普賢菩薩所說經)』이며, 세 번째는 『대방광화엄제보살수행경(大方廣華嚴諸菩薩修行經)』이다”라고 하였다.
【문】 이 세 종류의 이름이 어느 장소(章疏)에 의지해서 세워졌는지를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답】 『수현소(搜玄疏)』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통설(通說)로 가르침을 일으켜서 행하는 것에 열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본원(本願)을 이루기 때문에 『제불본원경(諸佛本願經)』이라 이름을 짓고 이것을 표준으로 삼은 것이며, 두 번째는 보살(菩薩)의 본원이기 때문에 알 수 있으며, 세 번째는 시기(時機)19)를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뜻에 의거해서 이 세 가지의 이름을 세운 것이다.
장주(章主)의 본소(本疏)에 있는 교기소인(敎起所因; 가르침을 일으키게 된 원인)에서 두 가지 원력(願力)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여래의 본원력(本願力)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신력(神力) 때문에 일체의 찰토[刹] 중에서 법륜(法輪)을 굴린다”고 말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보현(普賢) 보살의 원력(願力)의 음성이 일체 세계해(一切世界海)에 두루 가득하다”고 한 것이니, 이것에 의지하여 처음 두 가지 불경의 이름을 세웠으며, 기감(機感)20)에 의지하여 세 번째의 이름을 임시로 세웠다.
『강목장(綱目章)』에서 말하기를, “원력(願力) 때문이라는 것은 교화의 주체[化主]와 교화를 돕는 것[助化]과 교화의 대상[所化]이라는 세 방면에 각각 원력(願力)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의거하는 것이다.
【문】 장소(章疏)에서는 원력(願力)이라고 말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고인(古人)이 설한 것이라 말하는가?
【답】 노사나불(盧舍那佛)과 보현 보살이 화엄을 설한 것은 과거의 원력(願力)을 말미암았기 때문이며, 교화 받는 중생이 의거해서 수행하는 것도 또한 과거의 원력을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장소(章疏)에서는 과거를 기준으로 해서 원력을 말하였고, 고인(古人)은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설한 바와 수행을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하나의 경전이 이러한 세 종류의 이름으로 되었는가?
【답】 모든 경전은 이름을 얻은 체제와 방식이 같지 않다. 어떤 것은 사람을 기준으로 하였고, 또 어떤 것은 법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또 어떤 것은 비유를 기준으로 하였고, 또 어떤 것은 사람과 법을 둘 다 표제하였으며, 또 어떤 것은 법과 비유를 같이 들었다.
법을 기준으로 한 것에도 또한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어떤 것은 과법(果法)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열반경』과 같은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인법(因法)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십주경(十住經)』과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은 체(體)를 기준으로 하였으니 『반야경』과 같은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용(用)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신족경(神足經)』과 같은 것이다.
사람을 기준으로 한 것에도 또한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어떤 것은 능히 설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무진의보살소설경(無盡意菩薩所說經)』과 같은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사람이 청한 것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사익범왕소문경(思益梵王所問經)』21) 등과 같은 것이다.
이제 이 『화엄경』은 사람과 법을 둘 다 표제하였다. 법과 비유를 같이 거론하여 체(體)와 용(用)을 갖추고, 인(因)이 있고 과(果)가 있으니, 그 이치[理]를 다하고 뜻[義]이 원만하다. 이른바 대방광불(大方廣佛)이라 한 것은 법이고, 화엄이라 말한 것은 비유이다.
법의 입장에서 불(佛)이라는 글자는 사람[人]이며, 대방광(大方廣)은 법이다. 대방광 중에서 대(大)는 체(體)이며 방광(方廣)은 용(用)이다. 어떤 사람은 불(佛)은 과(果)이며 화엄(華嚴)은 인(因)이기 때문에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부처님은 바로 과(果)인데, 다른 경전에 내용이 넘쳤기 때문에 그러한 경전을 간략하게 하고자 고인(古人)이 말을 더하여 『비로자나소설경(毗盧遮那所說經)』이라 하였고, 교화를 돕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보현보살소설경(普賢菩薩所說經)』이라 하였으며, 교화시킬 대상을 기준으로 해서 『제보살수행경(諸菩薩修行經)』이라 하였다.
【문】 이 세 종류의 경(經)으로 3교(敎)22)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차례대로 기준을 삼았다고 말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세 불경은 각각 3교를 갖추었다고 말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오직 돈원(頓圓) 가운데서 세 경전을 세웠다고 말하였다.
처음의 뜻이란 처음의 경전이 과(果)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참된 것이다. 다음의 경전이란 보현 보살이 능히 교화하는 부처님에 대(對)하면 비록 교화를 돕는[助化] 것이지만, 만약 선재(善財)에 대(對)하면 곧바로 능화(能化)23)가 되어서 돈법륜(頓法輪)을 설하니, 이 때문에 이것은 실제(實際)24)인 것이다.
뒤의 경전은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에서 말하기를, “보살이 닦은 바 5위(位)25)의 원만한 인(因)이 10신(身)의 원만한 과(果)를 이룬 것을 설해서 모든 보살로 하여금 이러한 뜻과 법상(法相)을 이해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낮은 지위의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켜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뜻이므로 이것은 수상(修相)이다.
두 번째의 뜻은 화엄경에서 궁실(窮實)ㆍ실제(實際)ㆍ수상(修相)의 3교(敎)를 갖추었기 때문에 교화의 주체(化主)와 교화를 돕는 것과 교화시킬 대상으로 세 경전(經典)을 세웠으니, 이 때문에 하나 하나의 경전마다 3교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 세 번째의 뜻에 따라서 해석하면, 이른바 이 경전은 3교에서 돈교(頓敎)와 원교(圓敎)의 2교와 5교에서 다섯 번째인 원교를 융섭(融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경전은 오직 돈교와 원교[頓圓]인 것이다.
【문】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이 경전에서 3교를 갖추었기 때문에 수행의 상(相)의 점(漸)은 이 경전을 통틀어서 다하였으며, 실제(實際)의 돈(頓)도 또한 이 경전을 다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경전에서 3교를 갖추었다고 할 만한데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비록 그러한 의미도 있으나 아래의 4교26)는 수행의 상(相)의 점(漸)이고, 『화엄경』은 오직 돈(頓)이요 원(圓)이기 때문이다.
【문】 그러나 『화엄경』은 후삼근(後三根)27)을 위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제8근(根)에서 상대한 것이 수행의 상(相)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전에서 3교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답】 이 경전은 비록 후삼근을 위해서 일어났으나 제8근이 이 경전에 들어갈 때에는 제9근과 더불어 실제(實際)의 돈(頓)에 의지하였다. 따라서 수행의 상(相)에 의거하지 않고 오직 돈원(頓圓)에 의지하였을 뿐이다. 이 때문에 제8근의 글에서 말하기를, “3승의 근(根)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별교일승(別敎一乘)에 진입함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문】 일승(一乘)의 요의(了義)를 실제로 설한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방편수상대치문(方便修相對治門)이고, 두 번째는 실제연기문(實際緣起門)이고, 세 번째는 궁실법계문(窮實法界門)이다. 일승의 요의는 『화엄경』이니, 이 경전은 3교를 갖추었다고 할 만한데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답】 일승의 요의는 비록 화엄이지만 권속(眷屬)과 짝하는 뜻에서 함께 수행의 상(相)을 논하였을 뿐이다.
【문】 『지귀장(旨歸章)』에서는 이설(異設) 등의 10경(經) 등을 세웠으며, 대료간(大料簡)에서는 『항본경(恒本經)』 등의 7경을 세웠는데 이것이 모두 의거한 바인가? 아니면 오직 『약본경(略本經)』만이 의거한 바인가?
【답】 물은 것과 같이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문】 무엇 때문에 항본경 등을 의거하는 바가 되었는가?
【답】 『지귀장』28)에서 말하였다.
“‘이 설한 바에 준하여 화엄을 설하는 법회에서 모두가 요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떻게 이 일부(一部)의 경전의 가르침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하근기의 열등한 중생을 위하여 다함이 없이 설하는 가운데에서 이러한 것들을 대략 취하여 결집(結集)하고 유통(流通)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부의 경전이 있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그것을 보고 듣게 해서 방편으로 끌어들이니, 제한이 없는 것이 마치 창문의 틈으로 관찰해서 제한이 없는 허공을 보는 것과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속의 도리(道理)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이 일부의 경전을 관찰해서 가없는 법해(法海)를 보는 것이다. 또 경문이 바로 이 일부의 경전인 것은 가없는 겁해(劫海)를 설한 것이니, 결통문(結通文)으로써 분제(分際)29)가 없기 때문에 하나를 설한 것이 곧바로 일체(一切)를 설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청량(淸凉)의 소(疏)에 나오는 전연무궁(展演無窮; 무궁을 펼침)의 단락에서 말하기를, “처음 가장 청정한 법계[最淸淨法界]에서는 이(理)와 지(智)의 두 개 부문으로 나누고서 이(理)는 체(體)와 용(用)을 열어서 대방광(大方廣)이라 하였고, 지(智)는 인과(因果)를 열어서 불화엄(佛華嚴)이라고 하였다. 또 이 조목을 전개하여 처음의 모임[初會]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또 “이 법회를 전개해서 뒤의 여덟 가지를 완성하였으며, 또한 이 9회(會)를 전개하여 시방(十方)에 두루 미치게 했다”고 하였다.
「권섭상진(卷攝相盡)」의 단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뒤에 점진적인 거둠[漸卷]을 따른 것은 9회를 벗어나지 않았고, 9회는 초회(初會)를 여의지 않았으며, 초회는 총제(總題)를 여의지 않았고, 총제는 이(理)와 지(智)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청정법계(淸淨法界)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극종무진(極從無盡)에서 일자무자(一字無字)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엄성해(華嚴性海)를 모두 다 융섭[攝盡]하여 남음이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항본경』 등을 통틀어서 소의(所依; 근거)로 삼은 것이며, 지금은 오직 『약본경(略本經)』을 해석하여 소의로 삼았다.
【문】 만약 그렇다면 『지귀장(旨歸章)』과 청량(淸凉)의 글은 어떻게 회통하는 것인가?
【답】 저 장(章)의 의미는 『약본경』을 볼 때 뜻은 같으나 달리 시설한 것을 똑같이 설해서 평등하게 갖춘 것이니, 창문의 틈으로 관찰해서 가없는 허공을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약본경』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시설을 달리해도 똑같이 설한 것 등도 통하는 것이며, 소의(所依)의 펼치고 거두는 것도 사량하기 어렵다는 뜻도 또한 이와 같이 회통한 것이다. 만약 『약본경』에 의거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통로가 없다는 것도 이와 같은 뜻이니, 그러므로 오직 『약본경』이 소의(所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십권소(二十卷疏)』의 끝에서 말하기를, “위에서 『약본경』의 삼만육천게(三萬六千偈)를 해석해 마쳤다”고 한 것이다.
【문】 일곱 글자 중에서 무엇 때문에 화엄이라는 두 글자만을 치우치게 들었는가?
【답】 실제로는 갖추어 말한 것이지만, 다만 간략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화엄만을 치우쳐 든 것에서는 화(華)는 비유이고, 엄(嚴)은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글자는 법을 융섭(融攝)하여 남김이 없는 것이니, 이른바 제목 속에서 인법(人法)ㆍ체용(體用)ㆍ인과(因果) 등을 갖춘 것이다. 또한 사람으로써 법을 장엄하고 혹은 반대로 법으로써 사람을 장엄함이 마치 꽃으로 장엄한 것과 같으며, 체용(體用)과 인과(因果)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화엄만을 치우쳐 든 것이다.
두 번째의 「능석장(能釋章)」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일승(一乘) 속에서 5교(敎)를 나누어 교판(敎判)하였기 때문에 일승교분기(一乘敎分記)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곤란하니, 이른바 일승교분기라고만 말할 뿐 일승분교기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승교(一乘敎)에서 교(敎)와 종(宗)을 나누어 교판하였기 때문에 일승교분기라고 하였다.”
이것도 또한 곤란한 것이니, 이른바 중권의 제목에서 『화엄경중일승립교분제의기(華嚴經中一乘立敎分齊義記)』라고 한 것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은 중권의 제목에 준거해서 상ㆍ하 두 권의 조목을 해석하였으니, 이른바 교분기(敎分記)라고 말한 것에서 교(敎)는 교리를 세운 것이고, 분(分)은 분제(分齊)이다. 그러므로 일승(一乘)의 교분(敎分)을 세운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아래에서 해석한 것에 준거하여 일승교의분제의기(一乘敎義分齊義記)라고 할 수 있으니, 이른바 아래의 글에서 말하기를, “일승교의분제(一乘敎義分齊)는 열면 두 개의 문(門)이 된다”고 하였고, 이를 해석해서 말하기를, “일승교의분제는 제목(題目)을 분명하게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연의초(演義抄)』에서 말하기를, “만약 표현된 바의 법상(法相)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래는 세 번째는 표현된 바의 변이(辨異)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현수(賢首)의 교의분제는 제2권에서 자세하게 밝혔으며, 지금은 다만 간략하게 설하였다”고 하였으며, 이를 해석하기를, “현수(賢首)의 교의분제(敎義分齊) 제2권은 중권을 가리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 연의(演義)에서는 교(敎)를 간략히 하여 뜻을 보존하였고, 이제 이 제목 속에서는 교(敎)를 취하고 뜻을 간략히 하였다. 만약 뜻이 갖추어짐을 기준으로 한다면, 일승교의분제의기(一乘敎義分齊義記)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 글에서는 5교를 통틀어서 밝혔으니 일승삼승교분기(一乘三乘敎分記)라고 할 만한데, 무엇 때문에 오직 1승이라고만 말하였는가?
【답】 설한 것이 비록 5교를 갖추었으나, 선교(善巧)에는 둘이 없기 때문에 1승이라 말한 것이다. 아래의 글에서 “근본과 말단을 용융(鎔融)하되 오직 하나의 커다란 선교(善巧)”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을 말한 것이다.
1승을 설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동교(同敎)30)이고 두 번째는 별교(別敎)31)이다. 지금은 곧바로 두 종류의 1승을 통틀어 들었기 때문에 일승교분기(一乘敎分記)라고 말하였는데, 그 동교(同敎)에서는 모든 승(乘)을 통섭(統攝)하여 남김이 없다. 글의 일승교의분제(一乘敎義分齊)를 열면 두 개의 문(門)이 되니, 첫 번째는 별교(別敎)이고 두 번째는 동교(同敎)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을 말한 것이다.
지금의 해석은 비록 5교를 통틀어 나타내었으나 그 종지는 오직 일승원교(一乘圓敎)이다. 그러므로 그 종지를 따라서 일승교분기(一乘敎分記)라고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오직 별교일승(別敎一乘)이지 동교일승(同敎一乘)이 아닌 것이다.
‘3승과 소승의 뜻을 통틀어 나타내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일승교분기라고만 하는가’라고 논란한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로, “『아함경(阿含經)』 등에 의하여 소승교(小乘敎)를 세웠고,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에 의하여 시교(始敎)를 세웠고, 『승만경(勝鬘經)』 등에 의하여 종교(終敎)를 세웠으며, 『유마경』(維摩經)』 등에 의하여 돈교(頓敎)를 세웠으니, 그렇다면 소의(所依)의 근본 가르침은 마땅히 모든 경을 통틀어 든 것인데 어찌하여 오직 『화엄경』만을 들었는가?”라고 논란할 수 있다. 비록 모든 경전을 통틀어 의거하여 5교를 세웠다고 말하더라도 종지를 말하건대 오직 ‘화엄’이기 때문에 오직 화엄만을 든 것이니, 글에서는 비록 5교를 구현하고 있으나 그 말의 종지는 제5 원교일승(圓敎一乘)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지의 별교일승(別敎一乘)을 따라서 일승교분기(一乘敎分記)라고 말한 것이니, 그렇다면 글 속에서 “첫째는 별교이고 둘째는 동교이다”라고 말한 것은 권속을 동반하는 뜻 속에서 동교를 겸하여 열었을 뿐이지, 일승의 교의(敎義)라는 말이 동교(同敎)와 별교(別敎)를 모두 갖추었음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또 “근본과 말단을 용융(鎔融)함이 오직 하나의 커다란 선교법(善巧法)”이라는 것은 하나의 선교(善巧)를 이루는 때가 도리어 제5 원교(圓敎)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직 돈원일승(頓圓一乘)이지 5교의 1승을 갖춘 것이 아니다.
【문】 교(敎)를 나눈 것은 5교에 통하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일승교의(一乘敎義)의 분제(分齊)이기 때문이다.
의거한 곳과 서술한 자에서 경조서숭복사(京兆西崇福寺)라는 이름은 의거한 곳이며, 사문 법장(法藏)이 서술하였다는 것은 장주(章主)의 아름다운 호칭이다. 처음의 경조(京兆)는 전반적인 명칭이고, 서숭복사(西崇福寺)는 개별적인 명칭이다.
전반적인 명칭[通名]에서 경(京)은 높고 큰 것을 말한 것이며, 조(兆)는 많고 많은 것을 말한 것이다. 천자(天子)가 거처하는 곳은 높고 크며 인류(人類)가 많고 많기 때문에 경조(京兆)라고 한다.
개별적인 명칭[別名]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은 대원(大原) 천수(天水) 사람인데, 측천무후는 함형(咸亨) 원년(670)에 아버지를 대원군왕(大原君王)으로 봉하였고, 어머니는 대원왕비(大原王妃)로 봉하였다. 그리고 대원(大原)의 집을 희사(喜捨)하여 절로 삼았으며, 또한 장안(長安)의 서쪽과 낙양(洛陽)의 동쪽에 모두 절을 지어서 부모님이 태어난 곳을 공경하게 함과 아울러 대원사(大原寺)라고 이름하였다.32) 문명(文明) 원년(684)에 이르러서 측천무후가 천자로 즉위하여 천하를 다스릴 때 아버지를 위국왕(魏國王)으로 봉하였고 어머니는 영국부인(榮國夫人)으로 봉하였는데, 이때 절의 이름을 고쳐서 아울러 위국사(魏國寺)라고 하였다. 후에 동도승(東都僧) 법명(法明) 등이 표(表)를 올려서 사액(寺額)을 고치기를 청하자, 마침내 대신숭복사(大神崇福寺)라고 고쳤다가 나중에 신(神)의 글자만 빼고 대숭복사(大崇福寺)라고 불렀다. 지금 서(西)라고 말한 것은 동쪽과 북쪽에 있는 두 개의 숭복(崇福)과 구별한 것이다.
사(寺)는 범어(梵語)로 비아라(毗阿羅, vihāra)33)라고 하니, 중국말로는 유행처(遊行處)라고 말하는데, 지혜로운 이가 유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치처(治處)라고도 말하는데, 나쁜 종자를 다스려서 잘 거처하였기 때문이다. 가호(佳號)에서 사문(沙門)은 총(摠)이며 법장(法藏)은 별(別)이다. 총(摠)에서 범어로 갖추어 말하면 사가마나(沙伽摩那, śramaṇa)이니, 중국말로는 식악(息惡; 악을 쉼)이라 이르고, 또한 단악(斷惡; 악을 끊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출가(出家)하여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 사문이라 이름할 수 없고, 마음을 쉬어서 본원(本源)을 요달하였기 때문에 사문이라 이름한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러한 뜻이다.
별(別)에서 휘(諱)는 법장(法藏)이고 자(字)는 현수(賢首)이니, 속성(俗姓)은 강씨(康氏)이다. 칙명에 의한 호칭은 국일(國一) 법사라 하는데, 그의 작업한 바에 따라서 세상에서는 화엄(華嚴) 화상이라고 불렀다.
술(述)은 기술(記述)하되 창작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34) 대경(大經)인 『화엄경』에 의지하여 지엄(智儼)법사의 뜻을 크게 도왔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5. 경문에 들어가서 해석하다[入文解釋]

【釋】 다섯 번째, 경문에 들어가 해석하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서분(序分)이고, 두 번째 ‘일승(一乘)을 건립한다’ 아래는 정종분(正宗分)이며, 세 번째 끝 부분의 두 게송은 유통분(流通分)이다.
첫 번째, 본문[本]은 있으나 서(序)와 장주(章主)의 이름은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 서(序)는 장주(章主)가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초본(草本)과 연본(鍊本)이 있는데, 연본(鍊本)에서는 서(序)와 장주(章主)의 이름이 모두 있지만 초본(草本)에는 없다. 만약 장주(章主)가 지은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장주의 이름이 서(序)의 뒤에 있어야 한다. 이제 이미 이름이 서(序)의 처음에 있기 때문에 이 서(序)가 장주가 스스로 서술한 것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서(序)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었으니, 처음에는 교(敎)를 나누고 종(宗)을 연 까닭을 밝혔고, 뒤의 약제(略提) 이하에서는 강령을 들어 제시하였다. 처음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교(敎)는 근기 때문에 차별됨이고, 두 번째, 약불(若不) 아래에서는 나누지 않는 잘못을 나타내었고, 세 번째, 기직(豈直)의 아래에서는 나누는 이득을 나타내었다.
첫 번째에서 저[夫]라는 것은 이것[此]ㆍ저것[彼]ㆍ이에[乃]라는 뜻이다. 지금은 이에[乃]의 뜻을 따랐으니 말을 이끌어내는 실마리가 된다. 교부자분(敎不自分) 등은 교(敎)가 근기 때문에 차별됨을 들어서 종(宗)을 나누고 교(敎)를 세운 뜻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고금(古今)의 현자들이 교(敎)를 세운 것이 같지 않으니, 아래의 「서고금입교(敍古今立敎)」에서 밝히고자 한 것과 같다.
청량(淸凉, ?~839)이 말하였다.
“서역(西域)과 동하(東夏)의 홍천(洪闡)의 부류가 일대(一代)의 성언(聖言)에 대해서 종(宗)을 열어 교(敎)를 나누기도 했고 곧바로 경문(經文)을 해석하였으니, 모두 득실(得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누지 않은 뜻에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이(理)의 근본은 하나의 맛으로서 길은 다르나 돌아가는 곳은 같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하나의 소리[一音]가 널리 응함이 하나의 비처럼 두루 북돋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성인의 본래 뜻은 하나의 일을 위하기 때문이며, 네 번째는 하나 하나의 글에 따라서 많은 해석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다섯 번째는 많은 종류의 설법이 지류(支流)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뜻 때문에 나눌 수가 없다. 이를 나눈다면 유정[情]들로 하여금 이단(異端)을 끌어들여서 옳고 그름이 다투어 일어나게 하기 때문에 나누지 않는 것으로 이득을 삼은 것이다.
그 교(敎)를 나눈 것에도 또한 많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이(理)는 비록 한 가지 맛이나 표현[詮]에는 얕고 깊은 것이 있기 때문에 모름지기 그것을 나누어 권(權)과 실(實)을 알게 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는 불(佛)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하나의 소리[一音]이지만 근기의 차별에 따라서 교(敎)가 구별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본의(本意)를 아직 펴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의 뜻과 말에 따라서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말에는 전체적인 것[通]과 개별적인 것[別]이 있으니, 현실에 나아가 설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비록 권(權)과 실(實)을 나누었으나 모름지기 부처님의 뜻을 잘 이해해서 개현(開現)하였기 때문이다. 또 법왕(法王)의 비밀한 말씀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권(權)과 실(實)35)을 알지 못하고는 깊은 것을 얕게 여겨서 큰 이익을 잃게 되고, 얕은 것을 깊다고 여겨서 그 공(功)을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장엄(莊嚴)하여 깊게 하고 넓게 하였기 때문에 모든 성인의 가르침 속에서 스스로 나뉜 것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대보살(大菩薩)도 또한 가르침을 열었으니, 이러한 많은 뜻으로써 열면 얻는 것은 많으면서도 잃는 것은 적게 되고, 합하면 얻는 것은 적으면서도 잃는 것은 많게 된다.”
장주(章主)도 또한 이 교를 나누는 사람으로서 교(敎)와 종(宗)을 나누고자 하였기 때문에 “교(敎)는 스스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것에도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이(理)는 본래 하나의 맛이기 때문에 “교(敎)는 스스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며, 그러나 근기로 말미암아 교(敎)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기근에 따라 차이를 이룬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불(佛)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비[雨]이기 때문에 비록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는 않았으나 근기의 차별로 교(敎)를 구별하였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룬다”고 말한 것이다.
【문】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은 “도달한 상(相)이 가령 실(實)로 추궁한 것과 같아서 차별과 가지런함이 둘이 아니고 평등하고 똑같은 한 맛[一味]이어서 마침내 여지가 없을 터인데 무슨 다른 것이 있겠는가?”에 해당하고,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었다’는 것은, “다만 공용(功用)을 대치(對治)함이 균등하지 않기 때문에 근기(根器)에 따라서 그 얕고 깊은 것을 구별하여 말의 나뉨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한 것에 해당하는 것인가?
【답】 ‘평등하고 똑같은 한 가지 맛’이라고 한 것 등은 이(理)의 본원이 하나의 맛으로서 명언(名言)36)을 붙일 곳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이 가르침이 저절로 나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명언(名言)을 붙일 곳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과 여래께서 한 목소리로 설한 원교(圓敎)의 처소에 통하기 때문에 구별한 것이다.
【문】 만약 가르침이 저절로 나뉘지 않음이 원교에 통한다면 평등하고 똑같은 한 가지 맛도 또한 원교에 통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구별하는 것인가?
【답】 그거라면 평등하고 똑같은 한 가지 맛 등이 명언(名言)을 기다리지 않고 머묾도 없는 총상(摠相)의 처소인 것이다. ‘공용(功用)을 대치하는 것에서 말의 나뉨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 등은 명언(名言)의 처소를 대동한 것이니, 이제 이것은 말이 있는 것과 말이 없는 것에 통하는 것이다.
【문】 만약 원교가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 않는 곳에 해당한다고 말한다면, 아래의 4교(敎)는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었다’고 한 것에 해당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 『법계도(法界圖)』에서 ‘훌륭한 가르침에는 일정한 방법이 없으니 근기에 응(應)하고 병(病)을 따르는 것이라서 한결같지가 않다’고 하였다. 훌륭한 가르침[善敎]에는 일정한 방법이 없다는 것은 『화엄경』을 가리킨 것이고, 근기에 응하고 병을 따르는 것이라서 한결같지 않다는 것은 아래의 4교에 해당되는 것인데, 이제 이것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묻는 대로 또한 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었다는 것은 5교의 근기에 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가르침이 스스로로 나뉘지 않음이 원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었다는 것은 오직 아래의 4교이고,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었다는 것이 5교에 통하는 것이라면,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 않는 것은 오직 이(理)의 근본인 한 맛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평등하고 똑같은 한 가지 맛과 마땅히 구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원교는 어찌하여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 않음과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었다는 것에 통하였는가?
【답】 불(佛)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일음일미(一音一味)의 법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교(敎)는 스스로 나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근기의 차별을 기준으로 하면, 하나의 소리처럼 이해하는 자가 있기도 있고, 하나의 소리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자도 있기도 하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는’ 가운데 5교를 갖춘 것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 않음’과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루는’ 것이 하나의 양(量)이다. 아울러 지엄(智儼) 법사가 “수연(隨緣)의 설명은 법문(法門)이 한결같지 않으니, 다만 공용(功用)에 대치할 때의 균등치 않은 말을 가지고 세 가지로 나눈 것이다”라고 한 것에 해당한다.
【문】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 않음’은 명언(名言)을 기다리지 않는 부동처(不動處)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 차이를 이룬다’는 것과 구별되는 것인가?
【답】 ‘가르침이 스스로 나뉘지 않음’은 부동처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나뉜 교(敎)를 세워서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모든 교가 나뉘는 것이 스스로 나뉜 것이 아니라 다만 근기(根機)로 말미암아 차이를 이루었을 뿐이므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성인 말씀의 앞과 뒤 등’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앞이라면 가령 14일 동안 화엄(華嚴)을 설할 때와 같고, 뒤는 21일이 이미 지난 후에 나머지 소승과 3승 등의 법을 설할 때와 같으니, 이와 같이 차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해석은 앞의 때[時]에도 또한 소승과 3승을 설하였고, 뒤의 때[時]에도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차별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앞의 뜻과 같다면, 일음(一音)을 다르게 해석하는 뜻은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의 ‘나누지 않은 잘못’ 가운데서 모순(矛盾)은 이러하다. 초(楚) 나라 사람으로 창과 방패를 함께 파는 자가 있었는데, 창을 칭찬할 때에는 능히 열 겹의 방패를 뚫을 수 있다고 하였고, 방패를 칭찬할 때에는 창으로 찌르면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그것을 사려는 자가 말하기를, “내가 자네의 창을 사서 도리어 자네의 방패를 찌른다면 어찌 상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선 불성(佛性)을 기준으로 한 모든 성교(聖敎) 가운데서 어떤 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부처를 이룬다고 말하였고, 또 어떤 것은 5성(性)은 차별되기37) 때문에 반은 부처를 이루고 반은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며, 어떤 것은 모든 중생이 다 부처를 이룬다고 말하였고, 또 어떤 것은 중생의 불성은 유(有)를 여의기도 하고 무(無)를 여의기도 하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고, 또 어떤 것은 정(情)과 비정(非情)이 모두 부처를 이룬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회통해서 하나의 뜻으로 하면, 저 창과 방패와 같은 모순된 해석을 취할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교(敎)를 가르고 종(宗)을 열고 말하기를, “오직 한 사람만이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소승교(小乘敎)이고, 정(情)과 비정(非情)이 모두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원교(圓敎)이다”라고 하면, 그렇다면 각기 서로 어긋나지도 않고 모순되지도 않는다.
세 번째의 ‘교(敎)를 나누어 얻음’ 중에 대해서는 어찌 성교(聖敎)를 다르게 설하는 것만으로 교(敎)를 나누고 종(宗)을 열어서 회통(會通)하였겠는가? 또한 이 성스러운 가르침을 다르게 말하는 걸 말미암아서 뜻이 저절로 구별되었기 때문에 교가 스스로 나뉘었을 뿐이다.
두 번째38)의 ‘강령을 들어서 제시함’ 중에 대해서는 마치 갖옷의 옷깃을 들면 여러 털들이 따르고, 벼리[綱]를 들어서 다스리면 뭇 눈들이 바르게 되는 것39)과 같다. 만약 일승(一乘)의 건립 등 10문(門)의 강령(綱領)을 든다면, 그 가운데의 모든 뜻이 자연히 조화롭고 바르게 된다. ‘그 나머지 일체 등’이라는 것은 이 10문 이외에 인용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니, 모든 성교(聖敎)들을 이 5교(敎)의 궤(軌)에 준거해서 회통(會通)한 것이다.

【記】 지금 여래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일승교의(一乘敎義)를 열어서 해석하면 대략 열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일승(一乘)의 건립이고, 두 번째는 교의와 이익을 섭수하는[敎義攝益] 것이고, 세 번째는 고금에 가르침을 세우는[古今立敎] 것이고, 네 번째는 가르침을 나누어서 종지를 여는[分敎開宗] 것이고, 다섯 번째는 승(乘)과 가르침을 열고 합하는[乘敎開合] 것이고, 여섯 번째는 가르침을 일으킨 앞과 뒤[起敎前後]이고, 일곱 번째는 그 뜻을 결택하는[決擇其意] 것이고, 여덟 번째는 다른 상을 시설하는[施設異相] 것이고, 아홉 번째는 소전의 차별[所詮差別]이고, 열 번째는 의리의 분제[義理分齊]이다.
【釋】 큰 단락으로 두 번째 정종분(正宗分)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이름을 열거한 것이고, 다음 초명건립(初明建立)의 아래는 이름에 의거해서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처음에 세 가지가 있으니, 맨 먼저 바르게 이름을 열거하였고, 다음으로 1승을 건립하는 것이 제일임을 분명히 들었고, 끝으로 금장개(今將開) 아래는 10문이 되는 까닭을 연 것이다.
【문】 처음 ‘이름을 열거함’에 대해 묻는데, 이 10문을 기준으로 하여 능전(能詮)40)과 소전(所詮)41)을 나눈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의 여덟은 능전이고 아홉 번째는 소전이며, 열 번째는 의리(義理)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뒤의 두 가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앞의 여덟 개 문(門)이 아울러 능전이 되기는 곤란하다. 일승의 건립이라고 말한 것은 혜원(慧遠, 335~417)이 『대승의장(大乘義章)』42)에서 교취(敎聚)와 의취(義聚)로 세운 것이다. 의취 속에서 염취(染聚)와 정취(淨聚)로 나뉘고, 정취에 이르러서 1승(乘)을 논한 것이다. 교취는 능전이고 의취는 소전이니, 이 때문에 1승을 능전이라 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두 번째에서는 승(乘)을 기준으로 해서 교의(敎義)가 이익을 섭수함을 논하였고, 네 번째 문에서는 5교를 나누어서 10종(宗)을 세웠는데, 청량 법사는 소전(所詮)의 종취(宗趣) 가운데서 이 10종을 세웠다.43) 일곱 번째 문에서는 10근(根)을 건립하였고, 여덟 번째 문에서는 행(行)이 다르고 지위가 다른 것이 곧 「소전장(所詮章)」의 행과 지위의 차별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의 모든 뜻이 함께 능전이 되기에는 아주 곤란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해석은 처음 두 개의 문(門)에서 그 승(乘)의 수(數)를 논하였고, 다음 두 개의 문(門)에서는 가르침의 종지를 나누었으며, 또 다음 네 개의 문(門)에서는 승(乘)의 가르침을 합쳐서 밝혔고, 맨 나중 두 개의 문(門)에서는 승과 교를 나타낸 것이다.
【문】 본래 의리의 분제[義理分齊]가 아홉 번째에 있고, 소전(所詮)의 차별이 열 번째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이것은 후세의 사람이 고친 것이다. 후세 사람의 뜻은 이 의리(義理)로써 능전(能詮)과 소전(所詮)을 함께 아울렀기 때문에 아홉 번째에 두어서 앞뒤를 관통한 것이다.
【문】 후세의 사람은 누구인가?
【답】 의상(義湘) 화상이다. 장주(章主)가 의상 대덕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청컨대 상인(上人)께서는 숨겨진 것과 막힌 곳을 자세히 검토하여서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상 대덕은 진정(眞定)44)과 지통(智通)45)을 시켜서 그 숨겨진 것과 막힌 곳을 살피고는 고쳐서 바르게 정한 것이다.
지금의 해석은 모두 장주(章主)가 배열한 것인데, 이른바 이 글은 초본(草本)과 연본(鍊本)이 같지 않다. 의리(義理)를 아홉 번째로 한 것은 초본이고, 이와 반대로 한 것이 연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의리를 열 번째로 한 것이 연본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의리장(義理章)의 끝에 유통게(流通偈)가 있기 때문에 그런 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청량은 초(鈔)에서 “세 번째는 소전(所詮)을 기준으로 해서 차이를 밝힌 것이지만, 그러나 현수는 의리의 분제[義理分齊] 내의 제2권에서 폭넓게 밝혔기 때문에 지금은 다만 간략히 설한 것이다”고 말한 것이다.
【문】 10문(門)에는 정해진 차례가 있는가?
【답】 비록 정해진 차례는 없는데도 우선 차례를 만든 것은 여래가 하나의 큰 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한 까닭에 최초로 그것을 받아서 1승을 건립한 것이고, 아직 이 1승의 교의의 분제[敎義分齊]와 이익을 섭수하는 분제[攝益分齊]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의가 이익을 섭수하는[敎義攝益] 것으로써 받은 것이고, 이미 ‘교의가 이익을 섭수함’을 알아도 아직 고금(古今)의 모든 대덕들께서 교를 세운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금의 가르침을 세우는[古今立敎] 것을 서술함으로써 받은 것이고, ‘고금의 가르침을 세운’ 것이 이처럼 동일하지 않으므로 지금 가르침의 종지를 세운 것을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르침을 나누어 종(宗)을 여는’ 것으로써 받은 것이다. 승(乘)을 세우고 교(敎)를 나눈 것이 다만 이와 같을 뿐 다시 열고 합함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승과 교의 열고 합하는 것으로써 받은 것이다. 승과 교를 열면 무량한 차별이 되고, 합하면 1승과 3승이 둘이 아닌 것을 이미 알면서도, 아직은 1승과 3승의 가르침이 일어난 앞뒤[敎起前後]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르침이 일어난 앞뒤’로써 받는 것이다. 아직 앞뒤에서 말미암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뜻을 결택(決擇)함으로써 받은 것이며, 가르침이 일어난 앞뒤는 근기의 차별로 인한 것임을 이미 알았으나 아직 1승과 3승의 상(相)이 다르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상(相)을 시설함으로써 받은 것이다. 이미 1승과 3승이 설한 가르침이 상(相)을 달리 함을 알면서도 아직은 5교(敎)의 소전(所詮)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소전의 차별(所詮差別)로써 받은 것이며, 이미 능전과 소전의 차별을 알면서도 능전과 소전의 융회(融會)를 기준으로 한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리(義理)의 분제로써 받은 것이다.
세 번째 ‘십문소이’(十門所以)에서 금장개(今將開)에서부터 작십문(作十門)에 이르기까지는 10문(門)이 되는 까닭을 나타내었다.
【문】 이 글은 마땅히 이름을 열거한 것의 앞에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뒤에 있는가?
【답】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름을 열거한 것은 후세 사람이 고친 것이기 때문에 앞에 있다. 만약 장주(章主)가 배열하였다면 뒤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해석에서는 이름을 열거한 것도 또한 장주(章主)가 스스로 배열한 것이니, 앞에 배열하든 뒤에 배열하든 무방하기 때문에 다만 하나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또한 서분(序分)이 없는 초본(草本)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곤란함이 생기게 된 것이며, 만약 서분이 있는 연본(鍊本)에 의지하였다면 이러한 곤란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서분의 끝에서 말하기를, “10의(義)를 간략히 제시하여 터럭과 눈[毛目]46)을 거칠게 나열하였으니, 먼저 열 개의 문을 표시하였고, 다음에 그 이름을 열거하였으며, 뒤에서 금장개(今將開) 등을 말하여서 10문이 되는 까닭을 밝혔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차례가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대략 열 가지 뜻을 제시한다’[略制十義]고 말하였고, 또 금장개에서 약작십문(略作十門)에 이르기까지 말한 후에 이름을 열거한 것은 중언부언하는 잘못이 있다. 그러므로 이 열 개의 문을 건립한 까닭이 이름을 열거한 것의 다음에 있다는 것은 깊은 이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今]에 대해서 어떤 이는 “나머지 장소(章疏)를 지을 때와 간별하고 싶어서 지금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의 해석에서는 글을 써나가는 처음이기 때문에 ‘지금’이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문】 여기서 말하기를, “이제 장차 석가불(釋迦佛)의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열겠다”고 하였고, 『법계도[圖]』에서 말하기를,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이 섭수되어 있는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47)이 해인삼매로부터 무성히 출현한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대료간(大料簡) 능전교체(能詮敎體) 가운데 해인병현문(海印炳現門)에서는, “첫째, 과위(果位)를 기준으로 하면 앞의 차별과 같아서 다함 없는 교법(敎法)이 모두 여래의 해인정(海印定) 가운데 동시에 밝게 빛나면서 원만한 밝음을 나타내었다”고 말하였으며, 이 장(章)의 소의이(所依異)에서는 “이른바 이 일승교(一乘敎)가 일어남은 반드시 부처님의 해인정(海印定)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라서 부처님의 후득지(後得智)에 의거하는 3승의 설과는 같지 않다”고 하였으며, ‘가르침이 일어난 앞뒤’에서 법의 근본 가르침을 칭하는 가운데, “해인정(海印定) 속에서 십십(十十)의 법문(法門)을 동시에 연설하였다”고 하였고, 『융회장(融會章)』에서는, “1승의 동교와 별교의 교의는 해인정에 의거하여 일어나니, 보안(普眼)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여섯 처소의 해인(海印)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제 이곳의 십문소이(十門所以) 중에서 해인(海印)은 10문 가운데 5교(敎)와 10종(宗)을 갖추어 논하였고, 『법계도(法界圖)』는 가르침의 그물 가운데 굴곡(屈曲)의 삼승교(三乘敎)를 아울러 융섭(融攝)하였으며, 대료간은 과(果)의 해인(海印)을 기준으로 해서 앞의 5교의 능전교법(能詮敎法)을 밝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앞서와 같이 차별이 다함 없는 가르침이 해인정(海印定) 속에서 원만하고 밝게 현현한다”고 했으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은 세 해인은 넓은 의미로 설한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셋은 오직 화엄의 법만이 해인(海印)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좁은 의미로 설한 것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여섯 처소의 해인이 모두 하나의 뜻이니, 오직 『화엄경』의 법만 해인(海印)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 나머지 3승 등의 법은 모두 해인정의 밖에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다만 이제 해인삼매일승교의(海印三昧一乘敎義)를 열겠다고 말했지 일승교의(一乘敎義)와 삼승교의(三乘敎義)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계도[圖]』에서 말하기를, “석가여래의 교망(敎網)이 융섭(融攝)한 세 가지 세간은 해인삼매로부터 무성히 나타난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고, 나아가 폭넓은 의미로는 『화엄경』에서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제9 해인병현문(海印炳現門)에서 가깝게는 제7 사융상섭(事融相攝)과 제8 제망중중(帝網重重) 두 개의 문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앞서와 같이 차별이 다함 없는 교법’[如前差別無盡敎法] 등이라 말한 것이니, 이것은 앞의 여섯 가지 문 가운데에서 삼승교를 통틀어 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여기에서 열 개의 문[十門]은 5교와 10종을 아울러 논하였다. 그러므로 5교의 법은 모두 해인에 의거하는 것일 터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아니한가?
【답】 아래의 4교에 대하여 바야흐로 별교일승(別敎一乘)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3승의 다른 네 가지 교는 1승의 방편이고 권속(眷屬)이기 때문에 아울러 논하였을 뿐이고, 『법계도』의 글도 또한 이와 같이 옛날의 말을 모은 것이다.
지엄(智儼)이 말하기를, “오직 『화엄경』만이 해인에 의거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당시 지적국통(智積國統)이 이렇게 논란하였다.
“『대집경(大集經)』 14에서는 ‘염부제(閻浮提) 일체 중생의 몸과 외부 빛깔처럼 이런 것과 같은 빛깔은 바다 속에 모두 그림자를 나타내니, 이 때문에 큰 바다를 이름하여 인(印)이라고 한다.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대해인삼매(大海印三昧)를 얻고 나서는 이미 일체중생의 심행(心行)을 능히 분별하여 보고, 일체법문(一切法門)에서 모두 혜안(惠眼)을 얻으니, 이것이 보살이 해인삼매를 얻어서 일체중생의 심행(心行)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아래의 네 가지 교법(敎法)도 또한 해인정에 의거하여 일어났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지엄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해인에는 다섯 겹이 있다. 첫 번째는 삼대아승기겁(三大阿僧祇劫) 동안 대대로 수행한 제석(帝釋)이 법공수미산(法空須彌山) 정상에 올라가서 소지장(所知障)48)의 아수라(阿修羅)와 투쟁할 때에 3과(科)49)와 백법(百法)50)의 상(像)이 대원경지해(大圓鏡智海)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두 번째는 헤아릴 수 없는 겁(劫) 동안 대대로 수행한 제석(帝釋)이 본각수미산(本覺須彌山) 정상에 올라가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아수라(阿修羅)와 투쟁할 때에 항하의 모래와 같은 성품의 공덕상(功德像)이 일심진여해(一心眞如海)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세 번째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제석(帝釋)이 일행삼매(一行三昧)51)의 수미산 정상에 올라가서 망념(妄念)의 아수라(阿修羅)와 투쟁할 때에 무상무분별상(無相無分別相)의 상(像)이 불이실상해(不二實相海)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네 번째는 두 불세계미진수겁[二佛世界微塵數劫] 동안 대대로 닦은 제석이 총상(總相)의 수미산 정상에 올라가서 분별변계(分別遍計)의 아수라와 투쟁할 때에 열 종류의 보편적인 법의 상[普法像]이 세계해(世界海)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다섯 번째는 10불(佛)의 제석이 법성(法性)의 수미산 정상에 올라가서 무주실상(無住實相)의 아수라와 투쟁할 때에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의 상(像)이 국토해(國土海) 속에 나타난 해인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해인에서 앞의 세 가지는 시교(始敎)ㆍ종교(終敎)ㆍ돈교(頓敎)와 차례가 같고 뒤의 두 가지는 1승이니, 이것은 밖으로 교화하고 안으로 증명함[外化內證]52)과 같은 것이다.
해인병현문(海印炳現門)에는 인(因)이 있고 과(果)가 있다. 과(果)의 해인(海印)에서 1승의 두 가지를 나눈 것이 ▣▣▣.53) 여기에다 만약 인(因)의 해인(海印)을 간략히 한 것을 더하면 마땅히 여섯 종류가 있다.
보현(普賢)의 제석이 해행(解行)의 수미산 정상에 올라가서 백장(百障)의 아수라와 더불어 투쟁할 때에 다함이 없는 보법(普法)의 상(像)이 정광파리경(錠光破璃鏡)54)에 나타난 해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3승은 나누는 것을 따라서 해인을 논하였을 뿐이지만, 그러나 3승은 해인정(海印定)의 바깥을 말한 것이니, 1승의 해인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문】 세 가지의 해인은 과(果)의 해인을 기준으로 해서 논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1승에 더하여 인(因)의 해인을 논하였는가?
【답】 3교(敎)에서 아래 4교는 이 ▣. 이 경전은 돈교(頓敎)와 원교(圓敎)이기 때문에 이미 이 경전의 중간에서 돈(頓)의 인(因)과 원(圓)의 과(果)를 열었다. 아래 4교를 합하여 ▣▣. 이곳에서 인(因)의 해인을 열어서 논하였으니, 어찌 막힘이 있었겠는가? 이러한 여섯 종류로서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하권에 기준하면 아홉 종류의 해인이 있으니, 이른바 저 글( 『십구장원통기』 하권을 말함)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敎)와 의(義)의 두 가지에는 크게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상(像)을 잊은 해인은 의(義)이며, 상(像)을 나타낸 해인은 교(敎)이다. 두 번째, 상을 나타낸 해인은 의(義)이며, 부처님께서 바깥으로 향한 것은 교(敎)이다. 세 번째, 부처님께서 바깥으로 향한 것은 의이며, 보현(普賢)이 선정에 들어가서 관(觀)한 것은 교이다. 네 번째, 보현(普賢)이 선정에 들어가서 관한 것은 의이며, 선정에서 나와 마음속에 있는 것은 교이다. 다섯 번째 선정에서 나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의이며, 말에서 나타낸 것은 교이다.”
이처럼 서로 교와 의를 바라보면서 논하였기 때문에 다섯 종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펴서 논한다면 여섯 가지 종류이며, 앞의 3승과 세 가지의 해인을 아우르면 아홉 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또 소승(小乘)을 기준으로 하면 인공(人空)을 증득한 지혜를 해인이라 이름하였으니 열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다.
【문】 저 장(章)에서는 오직 상을 잊은 것과 상을 나타낸 것을 해인이라고 이름하였다. 무엇 때문에 뒤의 네 가지도 모두 해인이라고 이름하였는가?
【답】 『화엄경』의 법은 모두 선정에 들어간 상태에서 설한 것[定內說]이기 때문이고, 보현(普賢)의 언어에 나타난 것도 모두 선정에 들어간 상태에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 이제 이미 석가불(釋迦佛)의 해인삼매(海印三昧)55)라고 말한 것은 오직 과(果)의 해인인가?
【답】 인(因)의 해인을 기준으로 한 것이 있고, 과(果)의 해인을 기준으로 한 것이 있어서 이를 구별하여 논하였다는 뜻이다. 또 해인은 지혜(智惠)의 정심(定心)56)이기 때문에 불(佛)을 기준으로 한다면 온전히 불해인(佛海印)이며, 보살을 기준으로 한다면 온전히 보살해인(菩薩海印)이니, 그러므로 지금 이 해인도 또한 인(因)의 해인을 간략히 구별한 것은 아니다.
【문】 처음에서는 건립일승일(建立一乘一; 일승의 하나됨을 건립함)을 말하였고, 다음에서는 건립일승제일(建立一乘第一; 일승의 으뜸감을 건립함)을 말하였으며, 또 다음에서는 초명건립일승(初明建立一乘;처음으로 일승의 건립을 밝힘)을 말하였으니, 무엇 때문에 세 곳에서 거듭해서 말하였는가?
【답】 처음의 ‘건립일승일’은 열거한 이름이며, 다음의 ‘건립일승제일’은 분명하게 들은 것이며, 그 다음 ‘초명건립일승’이라고 말한 것은 이름에 의지하여 별도로 해석한 것이다. 『화엄전(華嚴傳)』에 준하면 마땅히 먼저 총체적으로 열 개의 문을 열거하였으며, 다음에서는 이 권에 해당하는 여덟 번째의 문을 열거하였고, 다음에서는 분명하게 들었고, 뒤에서는 개별적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같이 마땅히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것도 오히려 간략히 한 것이기 때문에 거듭 말하지 않는다.

1) 일승(一乘)을 건립한 내용을 밝힘
【記】 처음에서는 1승을 건립한 것[建立一乘]을 밝혔다. 그러나 이 일승의 교의분제(敎義分齊)는 펼치면 두 개의 문(門)이 되니, 첫 번째는 별교(別敎)이고, 두 번째는 동교(同敎)이다.
처음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성해과분(性海果分)57)이니 이것은 설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교(敎)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바로 십불자경계(十佛自境界)이다. 그러므로 『십지론(十地論)』에서 인분(因分)58)은 설할 수 있지만 과분(果分)59)은 설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두 번째는 연기인분(緣起因分)60)이니 바로 보현경계(普賢境界)61)이다. 이 두 가지는 둘이 없어서 전체(全體)가 두루 거두니, 마치 물결과 물의 관계와 같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釋】 두 번째, ‘이름에 의거해서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이름을 분명하게 한 것이고, 나중은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가운데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 연차(然此)의 아래는 장(章)을 연 것이고, 두 번째 초중(初中)의 아래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며, 세 번째 여석승명(餘釋乘名) 아래는 폭넓게 해석한 것을 가리킨다.
처음의 개장(開章)에서 연차(然此)라는 것을 어떤 사람은 두 글자를 합하여 차(此)로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러므로 최광(崔光)이 『십지론(十地論)』의 서(序)에서 “이 『십지경(十地經)』”이라고 말한 것이니, 연(然)은 차(此)의 훈(訓)이기 때문에 지금은 합하여 차(此)라고 하였다.
지금 연(然)이라고 해석한 글자는 마땅히 교의분제(敎義分齊)의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것은 일승교의분제(一乘敎義分齊)이나 펼치면 두 개의 문이 된다”고 말한 것인데, 지금은 위에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아래 결택기의(決擇其意) 단(段)에서 “그러나[然] 모든 교의 전후차별(前後差別)은 알기 어려우니, 대략 열 개의 문으로써 그 뜻을 분별하였다”고 말했지만, 이것도 실제로는 “모든 교의 전후차별(前後差別)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然] 대략 열 개의 문으로써 그 뜻을 분별한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 모름지기 연(然)이라는 글자를 아래에 두고서 ‘그러나 펼치면 두 개의 문이 된다’고 말한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지금 이것은 별교일승(別敎一乘)만을 논하였기 때문에 “오직 1승만을 논하였는가?”라고 의심하여 말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별교일승만을 논하였으나 또한 동교일승(同敎一乘)도 아울러 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문】 이 1승이란 것은 어떠한 1승인가?
【답】 어떤 사람은 궁극적인 진실[窮實]이라고 말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동교와 별교를 갖춘 1승이라고 말하였다. 처음의 뜻은 일승의 교의분제(敎義分齊)는 펼치면 두 개의 문이 되니, 첫 번째는 별교(別敎)이고 두 번째는 동교(同敎)라고 하였다. 동교와 별교를 함께 밟는 것이 궁극적인 진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뒤의 뜻은 이미 ‘일승의 교의분제는 펼치면 두 개의 문이 되는데, 첫 번째는 별교이고 두 번째는 동교이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동교와 별교의 1승을 갖춘 것이다.
지금의 해석은 돈원(頓圓)의 1승이니, 『화엄경』은 돈원(頓圓)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분명히 “이제 장차 석가불의 해인 삼매와 일승의 교의를 열겠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오직 원돈의 1승일 뿐이다.
【문】 첫 번째는 별교이고 두 번째는 동교라는 것을 어떠한 분제(分齊)라고 할 수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동교와 별교의 두 가지 가르침은 일화(一化)62)에 모두 통한다”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인가? 별교에는 분상문(分相門)63)과 해섭문(該攝門)64)이 있는데, 분상문(分相門)에서 나뉘어진 3승이 아래의 4교이고, 능히 나누는 별교는 『화엄경』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섭문에서 3승이 곧 1승이라는 것은 1승이고, 1승이 곧 3승이라는 것은 아래의 4교이니, 따라서 분상문과 해섭문은 일화(一化)에 모두 통한다. 동교의 입장에서 모든 승(乘)을 나눈 동교는 일화에서 모든 승을 나눈 것이고, 근본과 말단을 융섭한 동교는 모든 승(乘)을 융섭하였으므로 이 동교는 일화에 통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동교와 별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답】 일화(一化)의 법이 근기를 따라 다른 것은65) 별교이고, 일화의 법이 선교(善巧)가 동일한 것은 동교이다. 지금의 해석에서 별교라는 것은 오직 돈원(頓圓)의 화엄일 뿐이고, 동교란 것은 오직 아래의 4교일 뿐이다.
【문】 앞에서 논한 것처럼 별교와 동교가 각각 일화에 통한다면 무엇 때문에 지금 ‘별교는 오직 화엄뿐이고 동교는 오직 아래의 4교뿐’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분상문(分相門)에서 3승을 아울러 논한 것은 별교일승이 3승과 구별됨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상대가 되는 3승을 아울러 든 것이지, 3승을 합하면 별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해섭문(該攝門)에서 ‘3승이 곧 1승’이라는 것이 바로 해섭문이며, ‘1승이 곧 3승’이라는 것은 다만 구절의 숫자를 상대해서 함께 논한 것일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별교는 오직 화엄일 뿐이다. 또 동교에서 모든 승(乘)을 나눈 것은 아래의 4교의 모든 승을 나눈 것이다. 근본과 말단을 융섭한 것은 이 모든 승을 융섭한 것이니, 이 때문에 동교는 오직 아래의 4교일 뿐이다.
【문】 모든 승을 나누어 동교 세 가지가 3승임을 밝히는 가운데에서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1승과 3승과 소승(小乘)의 분제(分齊)는 별교이다. 이런 뜻 때문에 『대지론(大智論)』에서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공(共)이고 두 번째는 불공(不共)이다’”라고 하여, 불공(不共)으로 1승을 증득하였고 공(共)으로 3승을 증득하였다. 이렇다면 동교는 일화에 통한다고 할 수 있는 데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이것은 다만 동교와 별교를 대상으로 삼아서 들었을 뿐이다.
【문】 만약 별교는 『화엄경』이고 동교는 아래의 4교라면 일승교의(一乘敎義)의 1승은 동교와 별교에 통하데, 무엇 때문에 오직 돈원(頓圓)의 1승이라고만 하는가?
【답】 동교를 같이 들어서 비로소 별교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니, 권속을 동반한다는 뜻에서 아울러 논하였을 뿐이다.
두 번째 상(相)에서 별교(別敎)에 나아가 해석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66) 처음은 이분무애(二分無碍)를 나타내었고, 그 다음 취보현문(就普賢門)의 아래는 인분(因分)을 폭넓게 해석하였다. 처음의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개별적인 해석이고, 둘째 차이무이(此二無二)의 아래는 총체적으로 융섭한 것이다.
【문】 개별적인 해석에서 처음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은 이 별교가 인과(因果)에 통하기 때문에 또한 두 가지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말하니, 과분(果分)도 별교이고 인분(因分)도 별교이기 때문이다. 지금 별교의 명칭을 해석하는 것은 오직 연기(緣起)의 인분(因分)으로부터 세웠을 뿐이나, 인분이 의거하는 것이 인분의 근원이기 때문에 성해(性海)를 아울러 들었을 뿐이다. 가령 「십현장(十玄章)」에서 말하기를, “법계(法界)의 연기(緣起)는 자재무궁(自在無窮)한데, 이제 중요한 문(門)으로 간략하게 융섭하면 두 가지가 된다. 첫 번째는 구경과증의(究竟果證義)이고, 두 번째는 연(緣)을 따라 인(因)을 기준해서 교(敎)와 의(義)를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법계연기(法界緣起)67)라는 말은 오직 ‘연을 따라 인(因)을 기준함’에 입각해서 세운 것이다. 소의(所依)의 뜻에서 구경과증(究竟果證)을 아울러 든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성해(性海)는 별교(別敎)라고 이름하지 않았는가?
【답】 글에서 말하기를, “교(敎)와 상응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기 때문이고, 또 근본과 말단을 융섭함 속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녹아 섞임[鎔融]으로 말미암아 네 가지의 구절이 있다. 혹은 오직 1승뿐이니 별교와 같은 것이며, 혹은 오직 3승뿐이니 3승 등과 같은 것으로 1승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혹은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하니 동교와 같은 것이며, 혹은 1승도 아니고 3승도 아니니 위의 과분(果分)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나누었기 때문에 성해(性海)는 별교가 아닌 줄을 아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법계연기(法界緣起)라는 말은 다만 연(緣)을 따른다는 측면에서 인(因)에 입각해 세웠는가?
【답】 이처럼 세운 것은 연을 따라서 인에 입각해 교를 분별하는 가운데 있는 논(論)이니 능석십문(能釋十門)이요, 소석십문(所釋十門)에서 결론지어 말하길, “이 위의 십문해석(十門解釋)과 위 본문의 10의(義)는 모두 다 동시에 회통하고 융합하여 하나의 법계연기구덕문(法界緣起具德門)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법계연기라는 말은 연(緣)을 따른다는 측면에서 인(因)에 입각해 세운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처음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앞의 1승에서는 펼치면 두 개의 문이 되고, 또한 별교에서도 두 개의 문을 열기 때문에 ‘또한’이라고 말하였을 뿐이지, 둘로 나눈 것이 모두 별교라고 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비록 1승에서 동교와 별교의 두 가지를 열었으나, 동교는 화엄일승(華嚴一乘)이 아닌 것과 같다. 이처럼 비록 별교에서 인분(因分)과 과분(果分)을 열었으나 과분은 별교일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과분(果分)이고 둘째는 인분(因分)이다. 첫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 ‘성해과분(性海果分)’의 아래는 법을 세웠고, 두 번째, ‘즉십불(卽十佛)’의 아래는 속해 있는 사람이고, 세 번째, ‘그러므로 『십지론(十地論)』’의 아래는 인용하여 증명한 것이다. 첫 번째 성해과분은 이름을 세운 것이고, ‘당시’(當是) 이하는 뜻을 세운 것이니, 그 가운데에서 이름을 세우고 질책하고 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용하여 증명함에 대해서 『십지론』에서는 “이 지(地)가 융섭한 것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인분(因分)이고 두 번째는 과분(果分)이다”라고 하였다.
【문】 인분으로 연기분(緣起分)을 증명하였고, 과분으로 성해(性海)를 증명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연기분의 뒤에 비로소 이 글을 인용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두 가지로 나누는 사이에서 인용하였는가?
【답】 ‘인용하여 증명하는’ 예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앞에서 인용하고서 뒤에서 증명하고, 또 어떤 경우는 뒤에서 인용하고서 앞에서 증명하며, 또 어떤 경우는 가운데에서 인용하고 전후(前後)에서 증명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원당증(圓當證)인가, 문사증(文似證)인가?
【답】 어떤 사람은 문사증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십지론』에서 말하기를, “이 지(地)가 융섭한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인분이고 두 번째는 과분이다”라고 하였으니, 인분은 교(敎)가 큰 것이고, 과분은 의(義)가 큰 것이다. 이 10지(地)가 융섭한 과분(果分)은 원래 내적으로 증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당(圓當)은 아니나 가설불가설(可說不可說)의 말이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인용하였을 뿐이다.
이제 원당증(圓當證)을 해석하겠다. 소위 이 지(地)가 융섭한 바의 인분과 과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실(實)에 나아가서 상(相)을 따르는 인분과 과분이고, 둘째는 증지방편(證智方便)의 인분과 과분이다. 지금 처음의 과분을 잡은 것은 내증(內證)이고, 인분은 외화(外化)의 뜻에서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두 인분의 앞의 과분에 대한 것은 두 가지의 연기인분(緣起因分)이 응당 설할 수 있는 뜻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교(敎)와 함께 서로 응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보현경계(普賢境界)이니, 이 때문에 논에서 이르기를 인분(因分)은 설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과분을 설할 때는 뜻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에 또한 생략하였을 뿐이다.
【문】 성해과분에서는 자경계(自境界)를 말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연기분(緣起分)에서는 자(自)를 말하지 않았는가?
【답】 성해과분은 오직 10불(佛)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자경계라고 말하였지만, 연기분(緣起分)의 법은 10불과 보현(普賢)이 함께 아는 것이기 때문에 자(自)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문(圖文)』의 「결증분(結證分)」에서는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증득한 지혜로 아는 것이지 여타의 경계가 아니다)이라고 말하였고, 「결연기분(結緣起分)」에서는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10불과 보현 대인의 경계)이라고 말한 것이다.
두 번째의 총융(總融)에서 물결은 연기(緣起)에 비유되고 물은 내증(內證)에 비유되지만, 물결은 온전히 물이고 물은 온전히 물결이 되기 때문에 인분은 온전히 과분이고 과분도 온전히 인분이니,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므로 하나를 들면 온전히 거두어지는 것이다.

【記】 보현문(普賢門)은 다시 두 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첫째는 분상문(分相門)이고 둘째는 해섭문(該攝門)이다. 분상문(分相門)은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서 3승과 구별된다. 『법화경』에서 집안에서 가리키는 문 바깥의 세 가지 수레68)를 가지고 여러 아들들을 유인하여 벗어나도록 한 일과 같은 것은 삼승교이며, 경계 밖의 맨 땅[露地]69)에서 소가 끄는 수레를 받았다는 것은 일승교이다. 그러나 1승과 3승의 차이는 모든 성교(聖敎) 속에서 대략 열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권교와 실교가 차별된다는 것이다[權實差別]. 세 가지 수레에서 소가 끄는 수레도 양이 끄는 수레나 사슴이 끄는 수레와 마찬가지로 권교(權敎)로써 여러 자식들을 유인하여 애써 벗어나도록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문 앞에 있는 세 가지 수레는 모두 방편문(方便門)을 연 것인데, 네거리에서 특별히 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받고서야 비로소 진실한 상(相)을 보인 것이다. 만약 저 세 가지 중에서도 소가 끄는 수레와 같은 것이 또한 실교(實敎)라면, 장자(長子)가 집안에서 여러 아들들을 유인할 때, 저 소가 끄는 수레를 가리킨 것이 다만 문 밖에 있었으니, 이것은 응당 나가기만 하면 곧바로 수레를 얻도록 한 것이다. 어찌 나간 후에 본래 가리킨 수레가 머물러 있는 곳에 이르렀으면서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찾는 것이겠는가? 또한 경계의 바깥에서 수레를 찾는 것이 단지 2승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경전에서는 저 소가 끄는 수레를 구하는 사람이 문 밖으로 나서자 곧바로 저 소가 끄는 수레를 얻었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저 앞에서 허락된 수레를 찾는 자가 다만 2승뿐이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모든 아들들이 나올 수 있어서 맨 땅에 이른 후에는 각자가 아버지에게 아뢰어 말하길, ‘아버지께서 앞에서 허락한 신기한 놀이 도구인 양이 끄는 수레[羊車]와 사슴이 끄는 수레[鹿車]와 소가 끄는 수레를 이때 주기를 원합니다’라고 설한 것이니, 이를 통해서 능히 세 가지 수레를 함께 찾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 수레는 저 3승이 구한 바의 과(果)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이는 원래의 의미로 표방한 취지이기 때문이다.
【문】 2승은 각자 소승과를 얻었는데, 무엇 때문에 경계 바깥에서 다시 찾는 것인가?
【답】 소승에 의하여 말한다면, 교(敎)가 있고 행과(行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승에 의하여 말하면, 옛날에는 가르침을 말한 바가 있어도 실제 행동의 과보는 없다고 하기 때문에 세 가지 수레는 헛되고 없는70)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자종(自宗)을 조망한다면 모두 함께 과(果)를 얻은 것이니, 만약 과를 얻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세간을 벗어났겠는가? 이제 함께 과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은 1승을 조망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실교(實敎)로써 권교(權敎)를 비춘다면 방편의 상(相)이 다하기 때문에 모두가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저 삼승의 사람을 돌이켜서 1승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대승도 또한 돌이킨다고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 소가 끄는 수레를 구하는 사람은 이미 경계 바깥을 벗어났으므로 범부와 같지 않으며,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를 구하지 않은 것이므로 2승과 같지 않으며, 아직도 맨 땅의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1승과도 같지 않다. 만약 저 세 가지 중의 대승이 아니라면 다시 어떠한 색깔의 사람이겠는가? 자위구경처(自位究竟處)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중에 모두 다 별교일승(別敎一乘)에 진입하는 것이다.
【문】 문 앞에 있는 세 종류의 수레는 실교(實敎)가 되는가? 아니면 실교가 아닌 것인가?
【답】 실교가 되기도 하고 실교가 아닌 것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방편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유인하여 벗어나게 했으니 실교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방편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또한 실교가 아니다. 이것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의 상(相)이기 때문이다.
【釋】 두 번째71)에서 폭넓게 인분을 해석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에서는 장을 열었고, 둘째, 분상자(分相者)의 아래에서는 개별적으로 해석하였다.
【문】 분상문(分相門)과 해섭문(該攝門)의 두 가지 문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분상문은 실제의 돈교[實際頓]이고, 해섭문은 수행 상(相)의 점교[修相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분상문은 실제의 돈교이고, 해섭문은 궁실의 원교[窮實圓]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분상문과 해섭문은 아울러 3교를 갖추었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분상문과 해섭문은 모두 실제의 돈교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분상문과 해섭문은 모두 방편을 모아서 회통하는 가운데 논한 것이라서 화엄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분상문과 해섭문은 오직 돈교와 원교[頓圓]에서만 논하였다”고 하였다.
처음의 뜻은 이미 글에서 “분상문은 별교일승(別敎一乘)이니 3승과 구별된다”고 말하였다. 제9근(根)에서 요긴한 점은 실제의 돈교이니, 저 글에서 말하기를, “본래 3승과 소승 등의 법을 설함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3승에서 간략히 한 것과 분상문은 같기 때문에 글에서 말하기를, “해섭(該攝)이라는 것은 일체삼승(一切三乘) 등의 법이 본래 모두 다 저 일승법(一乘法)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8근에서 요긴한 점은 수행의 상(相)인데, 저 글에서 말하기를, “저 3승 등의 법은 본래 별교일승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으니, 해섭문의 글과 구별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뜻에서 분상문이 실제(實際)라는 것은 이전의 스님들이 설한 것과 같다. 해섭문이 궁실(窮實)이라는 것은 제10근에서 중요한 것이 궁실이니, 저 글에서 말하기를, “위에서 모든 교를 보니 모두 다함이 없는 성해(性海)에서 연을 따라서 이룬 것이라 다시 다른 일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해섭문의 글과 구별되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세 번째 뜻에서 『화엄경』에서 3교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 경전이 3승과 구별된다는 것은 분상문이다. 법의 자체를 기준으로 하면 3승 등의 법을 남김 없이 융섭(融攝)하였으므로 이것이 해섭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3교를 갖추었다.
【문】 실제의 돈교에서 간략히 한 뜻이 있고, 수상(修相)과 궁실(窮實)에서 거두어들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상문은 실제(實際)이고, 해섭문은 수상(修相)과 궁실(窮實)이다. 그런데 어째서 분상문과 해섭문의 두 개의 문이 각각 3교를 갖추었는가?
【답】 실제의 돈교에서도 또한 거둔다는 뜻이 있고, 수상(修相)과 궁실(窮實)에서도 또한 간략히 한다는 뜻이 있다. 이른바 제9근에서 비록 3승과 소승 등의 뜻을 간략히 하였지만 6도(道)72)의 인과(因果)와 삼승소승(三乘小乘)을 묶어서 보현(普賢)의 22위(位)로 하였고, 또 5승(乘) 등의 법을 묶어서 10보현법(普賢法)으로 하였으니, 이 때문에 또한 거둔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제8근의 글에서 말하기를, “저 3승 등의 법은 본래 별교(別敎)와 다르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제10근의 글에서 말하기를, “위에서 모든 교를 보니 다함이 없는 성해(性海)에서 연(緣)을 따라서 이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모두 거둔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할 때에 3승과 구별되기 때문에 간략히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3승의 가르침은 간략히 한 뜻을 기준으로 해서 분상문이라 하였고, 거둔 뜻을 기준으로 해서는 해섭문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문 속에서 아울러 3승을 갖춘 것이다.
네 번째 뜻은 이미 글에서 “보현문(普賢門)에 다시 두 개의 문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보현(普賢)은 실제의 돈교이고, 이 중에서 두 개의 문을 나누었기 때문에 분상문과 해섭문은 모두 실제의 돈교이다. 보현 자체를 기준으로 하면 6도의 인과(因果) 등은 보현의 22위이다. 또 5승(乘)을 기준으로 해서 10보현법을 논하였기 때문에 해섭문의 뜻이며, 이와 같은 뜻은 3승과 구별되기 때문에 분상문이다. 그러므로 분상문의 해섭문이 되고, 해섭문의 분상문이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뜻은 「융회장(融會章)」에서 말하기를, “무릇 원만하게 통하는 법은 덕을 갖춘 것을 종(宗)으로 삼고 연기(緣起)와 이실(理實) 두 개의 문으로 취하여서 회통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두 개의 문이라는 것은 이른바 동교와 별교의 두 가지 교이다. 별교는 3승과 구별되기 때문에 『법화경』에서 말하기를, “삼계의 바깥에서 별도로 큰 소의 수레를 찾았다”고 하였으며, 동교는 경전에서 말하기를, “3승을 회통하여 1승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동교임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 별교는 분상문에 해당하고, 동교는 해섭문에 해당하니, 그러므로 분상문과 해섭문은 모두 방편을 취하여 회통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논한 것이다.
【문】 이미 글에서 말하기를, “보현문(普賢門)에는 다시 두 개의 문이 있으니, 첫째는 분상문이고, 둘째는 해섭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두 개의 문은 모두 별교인데, 어찌하여 방편을 취하여 회통하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곧바로 보현문을 열어서 두 개의 문으로 삼은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니, 이 보현문을 취하여 회통하고자 할 때에 방편(方便) 속에서 두 개의 문을 지었기 때문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 글에서 ‘원만히 통하는 법은 덕을 갖춘 것을 종(宗)으로 삼았다’는 것은 바로 『화엄경』으로서 이 화엄을 취하여 회통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동교와 별교의 교를 논하면서 『법화경』을 인용해서 증명하여 이루었다. 이 글에서도 또한 『법화경』을 인용해서 증명하여 이루었으니, 그러므로 분상문과 해섭문은 모두 방편을 취하여 회통하였으나 화엄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여섯 번째 뜻이 바르다고 할 것이니, 『화엄경』은 돈교와 원교의 별교이다. 이 경전을 3승에서 구별한 것이 분상문이고, 이 경의 법 자체를 기준으로 하면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해섭문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문은 돈교와 원교의 별교(別敎)를 아우른다. 앞에서 연기의 인분(因分)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보현경계(普賢境界)이니, 즉 보현문에 나아가 다시 두 개의 문을 만들어서 연기분(緣起分) 속에 돈교와 원교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융회장(融會章)」의 글에서는 어떻게 회통하였는가?
【답】 그 속의 별교(別敎)도 또한 돈교와 원교의 별교이다. 동교(同敎)도 또한 이 아래의 네 가지 교(敎)이다. 그 중에서 ‘덕을 갖춘 것을 종(宗)으로 삼아서 연기(緣起)와 이실(理實)의 두 개의 문으로 취하여 회통하였다’는 것은 이 가운데의 일승교의(一乘敎義)에서 두 개의 문으로 연다는 것에 해당한다.
【문】 실제(實際)에서 간략히 한 것이 있고, 궁실(窮實)에서 거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분상문은 실제이고, 해섭문은 궁실인데, 어떻게 두 개의 문이 각각 돈교와 원교를 갖추었는가?
【답】 앞에서 설한 것처럼 실제 가운데 거두는 것이 있고, 궁실 가운데 간략한 것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여러 곳의 글에서 돈교와 원교의 1승이 3승과 구별됨을 글로 증명해 보이고 뜻으로 증명하여 밝혔다. 글로 증명한 것은 「현수품(賢首品)」73)과 제9 지게(地偈)74)이고, 뜻으로 증명한 것은 십문십법(十門十法)이다. 그러므로 『수현소(搜玄疏)』 10현(玄)의 끝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의분제(敎義分齊)가 이것과 더불어 서로 응한다는 것은 원교(圓敎)와 돈교(頓敎)의 법문(法門)이다. 가령 모든 교의(敎義)가 이것과 더불어 서로 응하면서도 빠짐 없이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바로 3승의 점교(漸敎)가 융합하고 포섭하는 것이다.”
이미 뜻으로써 증명하여 돈원(頓圓)을 통틀어 증명하였으며, 뜻의 증명에 준하면 글의 증명도 또한 돈원을 갖추었으니, 이 분상문 가운데 이러한 두 개의 글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분상문에서도 돈원을 갖추었음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75)에서 별도로 해석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분상문을 해석한 것으로서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1승과 3승이 구별되는 것을 총괄적으로 표시하였고, 둘째는 1승과 3승이 차별되는 것을 따로 나타내었다.
첫째에서 질문한 것이다.
【문】 아래 권실(權實) 등의 모든 차별 가운데 『법화경』을 인용하였는데, 여기 총표(總標) 중에서도 또한 이 경전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답】 두 가지의 뜻을 회통하였다. 하나의 뜻은 아래의 개별적으로 나타냄 가운데 『법화경』에서 세 종류의 수레와 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로써 1승과 3승을 구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열 가지의 차별을 회통하였기 때문에 총표(總標) 속에서 이 글을 인용한 것이다.
또 하나의 뜻에서 장주(章主)와 법상인(法相人)이 1승과 3승을 다툰 것은 모두 이 글에 의지한 것이니, 이른바 법상인(法相人)은 “세 가지 가운데 소가 끄는 수레는 실교(實敎)이고 권교(權敎)는 아니라서 한 맛의 대승으로 교리를 판석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장주(章主)는 말하기를, “세 가지 가운데 소가 끄는 수레는 권교이고,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실교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다투는 것은 오직 이 경문뿐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인용하여 1승과 3승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둘째, ‘개별적으로 나타냄’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교를 인용하여 해석하고 완성하였으며, 두 번째, ‘기별교(其別敎)’ 아래는 뜻을 들어서 증명하여 이루었으며, 세 번째, ‘종무(縱無)’ 아래는 총체적으로 결론을 지었다. 첫 번째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장(章)을 열었고, 둘째, ‘일권실(一權實)’ 아래는 상(相)을 해석하였고, 셋째, ‘차상(此上)’ 아래에 앞의 것을 맺은 것이다.
【문】 이 10증(證)은 문사증(文似證)인가, 원당증(圓當證)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승의 경론을 인용하여 일곱 가지의 차별을 증명하였다면 문사증이고, 이 경전의 글을 인용하여 세 가지의 차별을 증명하면 원당증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은 모두 원당증이다. 이른바 『법화경』 가운데 때와 일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 있고, 뜻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 있으니, 때와 일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은 숙돈(熟頓)에 해당되고, 뜻의 높은 것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에는 동교와 별교 두 가지 교가 있다. 동교는 『화엄경』의 아래이고 네 가지 교[四敎]의 위이며, 별교는 『화엄경』과 둘이 아니다. 지금은 별교의 뜻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원당증인 것이다.
【문】 『법화경』이 많은 뜻을 갖추었음을 어떻게 아는가?
【답】 「덕량차별(德量差別)」에서 말하기를, “나에게는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보물로 장식한 큰 수레가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별교일승(別敎一乘)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것을 밝혔을 뿐이다. 「교의섭익(敎義攝益)」에서 “맨땅에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 스스로 교의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십십무진(十十無盡)하여 주체와 짝이 빠짐 없이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화엄경』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이러한 것이 별교일승 등에 해당한다는 것은 별교를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다. 또한 「덕량차별」에서 동교를 기준으로 해서 그 차이를 밝힌 『법화경』은 일곱째의 근(根)이 들어간 『법화경』이다. 교의섭익에서 말하기를, “경계 바깥에서 따로 부여한 큰 소 수레는 진실한 뜻을 보이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동교일승(同敎一乘)에 해당하며, 『법화경』에서 설함과 같다는 것 등은 동교를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다. 또한 대료간(大料簡)이 『법화경』과 『열반경』ㆍ『해심밀경(解深密經)』의 세 종류의 수레를 회통해서 구경(究竟)의 1승에 귀의하였다는 것은 지광(智光)법사의 제삼시법문(第三時法門)이니,76) 그러므로 이것은 때와 일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다.
【문】 때와 일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법화경』과 『승만경(勝鬘經)』ㆍ『능가경(楞伽經)』 등의 경전은 모두 하나로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법화경』에서는 뜻의 높음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 있는데, 나머지 경전에는 없는 것인가?
【답】 도리(道理)가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경전 등에는 권교(權敎)와 실교(實敎)가 있어서 모두 초시(初時)에 설한 것이지만 『법화경』은 40년 뒤에 설한 것이니, 이것은 3승을 돌이켜서 1승으로 들어간 가르침이다. 만약에 다만 옛날의 권교(權敎)만 돌이키고 옛날의 실교(實敎)는 돌이키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승만경 등과 더불어 하나로 헤아리게 되기 때문에 숙돈(熟頓)에 해당한다. 가령 승만경 등에 세 가지를 합한 가운데 소가 끄는 수레를 기준으로 한 것도 또한 모두 옛날의 실교(實敎)를 돌이켜서 맨땅에 돌아오도록 한 것이라서 숙돈(熟頓) 위에 있으므로 동교가 되며, 『화엄경』과 더불어 둘이 아니고 구별도 없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별교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뜻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 있으나, 나머지 경전에서는 오직 숙돈교(熟頓敎)에만 국한된 것이다.
【문】 만약 『법화경』이 후시(後時)에 말씀하신 것이라면, 3승을 돌이킬 때에 숙돈(熟頓)을 통틀어서 돌이켰기 때문에 뜻의 높은 것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경』은 최후에 사라쌍수의 나무숲[雙林]에서 설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뜻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이 있는 것인가?
【답】 『열반경』은 비록 나중에 설한 것이나 뜻을 기준으로 해서 교판한 것은 없다. 이른바 근기가 익은 성문[根熟聲聞]이라는 것은 오직 불성(佛性)만을 설할 뿐 대승으로 돌이키는 뜻은 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문】 지금 이것이 『법화경』 속에서 별교의 뜻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원당증(圓當證)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이미 글에서 말하기를, “분상문은 별교일승이니 3승과 구별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화엄의 별교일승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고자 하여 저 경전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두 번째로 상(相)을 해석한 것에서 열 개의 문(門)은 열 개의 단계가 된다.77) 처음 중에서 먼저는 명칭을 표방한 것이고, 다음은 상(相)을 해석한 것이고, 셋째는 먼저 정의(正義)를 세운 것이고 두 번째는 ‘약피’(若彼) 이하는 타(他)를 차단하고 자(自)를 나타낸 것이며, 세 번째는 문답으로 의문을 없앤 것이다.
처음에 세 가지 가운데 소가 끄는 수레도 또한 양이 끄는 수레 및 사슴이 끄는 수레와 같다는 것을 법상인(法相人)78)은 “세 가지 가운데 소가 끄는 수레가 바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이기 때문에 실교이고 권교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장주(章主) 등은 말하기를, “세 가지 가운데 소가 끄는 수레는 권교이고, 이 세 종류 외에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실교이다”라고 하였다.
세 종류의 수레를 3승에 비유한 것은 보살이 큰 자비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마치 소가 무거운 것을 지고 멀리까지 가서 능히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연각(緣覺)은 고요함을 좋아해서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으니, 마치 사슴이 산에 있으면서 사람과 가까이하지 않는 것과 같고, 성문(聲聞)은 스승을 의지하여 많은 사람들 속에 처하니, 마치 양이 사람을 의지하여 무리를 뒤쫓는 것과 같다.
또 양의 둔(鈍)함은 성문의 둔한 근기79)와 같으며, 사슴의 가볍고 빠른 것은 연각의 영리한 근기80)와 같고, 소의 큰 힘은 보살의 큰 자비81)와 같다. 또 양의 몸이 작은 것은 소승과 같고, 사슴이 다음으로 큰 것은 중승(中乘)에 비유되며, 소가 최고로 큰 것은 대승에 견줄 수 있다.
【문】 앞에 있는 세 종류의 수레를 모두 방편문으로 열었다고 한 것 등은 방편품(方便品)에서 “방편문을 연 것은 진실의 상을 보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 세 가지 수레를 나타낸 것을 인용하여 방편문을 열었기 때문에 권교(權敎)이며,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진실의 상을 보였기 때문에 실교(實敎)이다.
네거리 길을 법상인(法相人)은 4제(諦)라고 하였으니,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말하기를, “4제로써 의심을 끊은 것은 네거리가 사방으로 통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장주(章主)의 뜻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 가지의 좁은 길과 하나의 큰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삼승인(三乘人)은 삼승과(三乘果)를 얻었으나 그것이 실교가 아님을 알아서 다시 실교를 찾았기 때문에 이 중간을 잡아서 네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장주의 뜻 가운데 또한 4제(諦)가 있으니, 이른바 청량(淸凉:?~839)은 말하기를, “네거리 길[四衢道]은 4제이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타(他)를 막아서 자(自)를 나타내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바로 타(他)를 막았고, 둘째, ‘약망(若望)’의 아래는 집착을 항복 받도록 하였으며, 셋째, ‘위욕(爲欲)’의 아래는 3승을 돌이켜서 1승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처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외정(外情)을 막았고, 나머지 ‘역불(亦不)’ 아래는 구제하는 것을 막았다. 처음에서 장자(長者)는 부처님을 비유한 것이다.
이른바 장자(長者)라는 것은 세 가지 덕을 갖추어야 하니, 첫째는 덕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나이가 많아야 하며, 셋째는 대단히 부유해야 한다. 덕이 있는[有德]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혜가 있는 것이고, 둘째는 덕이 있는 것이며, 셋째는 맑고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에게 대비하여 보면, 지(智)는 반야(般若)이고, 덕은 법신(法身)이며, 청정(淸淨)은 해탈(解脫)이다. 또한 나이가 높은 것은 부처님의 수명의 양이 한이 없는 것이고, 대단히 부유한 것은 부처님의 여러 가지 공덕이다.
두 번째, 구제하는 것을 막은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바로 구제하는 것을 막았고, 다음의 ‘시고(是故)’ 이하에서는 인증(引證)하였으며, 마지막 ‘차중삼거(此中三車)’ 이하에서는 세 가지를 찾는 의미를 나타내었다.
취지를 표방하였다는 말은 아버지는 문 바깥의 세 가지 수레를 표방해서 가리켜 취향(趣向)하도록 하였으며, 아들은 문 바깥의 세 가지 수레를 표방하여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원래 의미하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모두 통한다.
두 번째에서 집착을 항복 받도록 한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뜻을 세웠고, 다음의 ‘약불(若不)’ 아래에서는 반대로 해석하였으며, 마지막 ‘금운(今云)’ 아래에서는 순서대로 해석하여 의심을 항복 받은 것이다. ‘문 바깥의 세 가지 수레를 얻었다는 것인가, 얻지 못했다는 것인가?’라는 말은 ‘만약에 얻었다면 어찌하여 다시 찾으며, 만약에 얻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삼계를 벗어나겠는가?’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도신장(道身章)』에서는 그 뜻을 이렇게 말하였다.
【문】 이미 세 가지 수레를 얻었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세 가지 수레를 들어서 찾는 것인가? 만약 세 가지 종류의 수레를 얻지 못했다면 세 가지 종류의 수레가 실교(實敎)가 아닌 것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답】 이미 세 가지 수레를 가리킨 곳에 도달하였으나 이곳이 실교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3승을 싫어하고 실교가 1승에 있기 때문에 권교(權敎)의 명칭을 들어서 권교의 실다움을 모색하는 것이다.”
세 번째에서 3승을 돌이켜 1승에 들어가도록 한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뜻을 세웠고, 다음의 ‘약불(若不)’의 아래는 반대로 해석하였으며, 마지막 ‘이지(以至)’의 아래에서는 순서대로 해석하였다.
이 가운데에서 대의(大義)는 아래의 근연수자(根緣受者)의 해석에 보인다. 어떤 사람은 “분상문은 동교(同敎)이다”라고 말하였지만,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스스로 구경의 지위에 이르렀기 때문에 뒤의 것은 모두 별교일승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분상문은 별교이다.
【문】 별교(別敎)라는 이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법화경』에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도 또한 별교이고, 이 가운데에서 분상문은 동교라고 말할 만한데, 무엇 때문에 『화엄경』만을 별교라고 이름하는가?
【답】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일승교의분제(一乘敎義分齊)를 열면 두 개의 문이 되는데 첫째는 별교이고 둘째는 동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가운데에 이르러서 다시 『법화경』을 별교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가 별교의 뜻이 된다고 하는 것은 『화엄경』과 더불어 둘이 아니고 구별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하였을 뿐이다.
세 번째에서 문답은 의심을 제거한 것이니, 답 중에서 먼저는 간략히 대답하였고, 다음으로는 거듭 따졌고, 나중에는 폭넓게 대답하였는데, 먼저 전체적으로 대답하였고, 다음은 개별적으로 대답하였으며, 나중은 전체적으로 결론을 맺었다.

【記】 두 번째는 교의차별(敎義差別)이다. 이 중에서 문 앞에 있는 소가 끄는 수레는 또한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처럼 다만 그 명칭이 있는 것인데, 1승으로 조망하면 모두 교(敎)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교문(敎門)으로서 삼계의 고통을 벗어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교(敎)로 말한 것이 다만 2승을 잡았을 뿐이라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전에서 간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 소가 끄는 수레를 구하는 사람도 교를 찾아서 뜻에 이르는 것은 역시 2승과 마찬가지로 모두 얻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소명차별(所明差別)이다. 저 1승의 다스림은 앞서 경계 안에서 허락한 세 종류 수레가 아니다. 이 때문에 경계 밖의 네거리 길에서 모든 아들들에게 주었을 때 모두가 본래 바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말하기를, “이 때에 모든 아들들은 각각 큰 수레를 타고 일찍이 없었던 것을 얻었지만 본래 소망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본래 소망한 바가 아니라는 말을 다만 2승을 잡아서 한 것이라고 설해서는 안되니, 경전에 간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성인의 말씀은 실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교문(敎門)의 안에서 허락된 바를 지금은 모두 얻지 못했던 것이며, 맨땅에 있는 소가 끄는 수레는 본래 원하고 바랬던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지금 그것을 얻었다고 함은 본래 바라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덕량차별(德量差別)이다. 소위 집안에서 바깥을 가리켜 말할 때 다만 소가 끄는 수레만을 말하고 나머지 덕은 말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맨땅에서 주어진 일곱 가지 보물로 장식한 큰 수레이다. 소위 보배그물과 보배방울 등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로 장엄한다는 것은 몸이 덕을 갖춘 것이다. 또 저것은 다만 소를 말하고 나머지 상은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흰 소가 살찌고 건강할 뿐만 아니라 힘이 세어서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다”고 말한 것 등은 그 쓰임[用]이 특별히 뛰어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많은 여러 손님들을 따르면서 모시고 호위한다”고 한 것 등은 권속(眷屬)82)을 행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의 상이 다른 것은 모두 동교일승을 잡아서 차이를 밝혔을 뿐이다.
또 저 세 가지 소가 끄는 수레는 오직 하나뿐인데, 이는 저 종(宗)으로써 하나의 상(相)의 방편을 밝혔을 뿐 주인과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라면 그렇지 않다. 주인과 짝이 두루 갖추어졌고 덕을 융섭한 것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 때문에 경전에서 말하기를, “나에게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보물로 장식한 큰 수레가 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다. 이 헤아릴 수 없는 보배수레는 꼭 한 대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1승의 다함이 없는 교의(敎義)를 드러낸 것이다. 이 뜻은 폭넓게 해설한 것이 마치 『화엄경』과 같았으니, 이것은 별교일승을 잡아서 차이를 밝혔을 뿐이다.
【釋】 두 번째의 교의차별(敎義差別)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이름을 들었고, 나중에는 상을 해석하였는데 그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의(自義)를 세웠고, 둘째는 증거를 인용했고, 셋째는 타자의 뜻을 막았다.
세 번째의 소기차별(所期差別)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이름을 들었고, 다음에는 상(相)을 해석하였는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에서는 뜻을 세웠고, 둘째에서는 증거를 내세웠으며, 셋째에서는 타자를 막았고, 넷째, ‘양이(良以)’ 아래에서는 비본소망(非本所望)의 글귀를 해석하였다.
처음 이름을 든 것에서 세 종류의 수레는 기약한 것이고,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기약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소기(所期; 기약한 바)와 비소기(非所期;기약한 바가 아님)의 차별(差別)을 말해야 할 것이나 우선 생략하였다.
네 번째의 덕량차별(德量差別)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이름을 들었고, 다음에는 상(相)을 해석하였는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동교 가운데 보배방울이라는 것은 4변(辯)83)을 비유한 것이며, 몸이 덕을 갖추었다는 것은 6도(度)84)의 온갖 행과 4섭(攝)85)과 4무량(無量)86) 등을 갖춘 것이다. 나머지 상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소가 덕을 갖추지 못함을 말한 것이며, 앞에서 나머지의 덕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레가 덕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흰 소는 평등에 비유되니, 대혜(大惠)는 이른바 6도(度)의 온갖 행을 운행해서 과처(果處)에 이른 까닭이다. 권속을 행하는 것은 단도(檀度)87)등의 행(行)이다. 이 평등과 차이의 상은 모두 동교(同敎)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등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등(等)은 앞의 모든 차별을 고르게 취하였기 때문이니, 앞의 세 가지 차별은 모두 동교의 분상문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다만 이 가운데에서 체(體)에 덕을 갖춘 것과 특별히 뛰어난 작용과 권속을 행한 것을 동등하게 취하였다.
【문】 앞의 모든 차별에서 인용한 경전의 글과 동교의 단락에서 인용한 것들은 한 가지 종류의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이며, 별교의 단락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나에게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보물로 장식한 큰 수레가 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다”는 글을 인용하였으니, 그러므로 앞의 차별은 모두 동교인데 무엇 때문에 별교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그 수레가 높고 넓으며 많은 보물로 장엄(莊嚴)되었다는 등의 글을 보면 오직 한 수레의 장엄만을 설하였으니, 이것은 동교이다. 가령 하나의 수레를 들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를 말하였다면 곧 별교이다. 그러므로 앞의 세 가지 차별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를 기준으로 하였으니, 모두 별교의 분상문이다.
【문】 이곳에서 동교는 어떻게 헤아린 것인가?
【답】 이것은 흐르는 바를 밝힌 것이다.
【문】 이것은 때와 일의 『법화(法華)』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흐르는 바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법화를 동교(同敎)라고 한 것은 다분히 흐르는 바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별교의 분상문을 논할 때에 함께 동교의 분상문을 논하였는가?
【답】 다만 겸하여 논하였을 뿐이다. 예를 들면 해섭문(該攝門)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不異]을 바로 논하면서도 하나가 아닌 것[不一]을 겸하여 논하였다. 또 3승의 동교에서는 동교를 바르게 논하면서도 아울러 동일한 바의 별교(別敎)를 논하였다. 다음의 별교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먼저 1승과 3승의 구별을 나타내었고, 다음에는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며, 마지막 ‘무량보(無量寶)’ 아래는 해석한 것이다.
【문】 『법화경』의 많은 뜻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흐르는 바의 동교로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실교(實敎)가 되고, 때와 일을 기준으로 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권교(權敎)가 된다. 또 『화엄경』과 둘이 아닌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실교가 되고, 흐르는 바의 동교로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권교가 된다. 이와 같이 권교와 실교를 논할 수 있는 것인가?
【답】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권교와 실교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널빤지가 물이 높으면 널빤지도 높고 물이 낮으면 널빤지 또한 낮은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모여 있는 세 가지 수레가 낮으면 능히 모이게 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 또한 낮고, 모여 있는 세 가지 수레가 높으면 모이게 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 또한 높을 뿐이니, 이 때문에 옛날에 말씀하신 것에는 권교와 실교가 있었던 것이다. 『법화경』은 최후에 설한 것으로 3승을 돌이켜서 1승으로 들어가게 한 교이니, 따라서 만약 초교(初敎)의 권교만을 돌이키고 숙돈(熟頓)의 실교를 돌이키지 않았다면 『능가경(楞伽經)』 등의 경전과 하나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숙돈종(熟頓宗)에 해당한다. 만약 『능가경』 등 숙돈의 실교(實敎)를 아울러 돌이켰다면, 이는 흐르는 바를 밝힌 동교(同敎)이기 때문에 네 가지 가르침 위에 세운 것이다. 마치 해가 뜰 때에 먼저 높은 산을 비추고, 해가 질 때에도 도리어 높은 산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부처님께서는 처음 성도(成道)하였을 때도 대산왕(大山王)의 근기를 위해서 『화엄경』을 설하시고, 최후에도 또한 대산왕의 근기[機]를 위해서 『법화경』을 설하셨으니, 이와 같이 보면 『화엄경』과 더불어 곧 하나의 양(量)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가 비록 많은 뜻을 갖추었으나, 이것은 실교일 뿐 권교가 아니라서 돌이킨 것도 아니다.

【記】 다섯 번째는 기위차별(寄位差別)이다. 『본업경』(本業經)』ㆍ『인왕경』(仁王經)』 및 『지론(地論)』ㆍ양(梁)의 『섭대승론[攝論]』 등은 모두 초지(初地)ㆍ2지ㆍ3지를 세간(世間)88)에 의탁한 것이고, 4지에서 7지에 이른 것은 출세간(出世間)89)에 의탁한 것이며, 8지 이상은 출출세간(出出世間)에 의탁한 것이다. 출세간에서 4지(地)와 5지는 성문법(聲聞法)에 의탁한 것이고, 6지는 연각법(緣覺法)에 의탁한 것이며, 7지는 보살법(菩薩法)에 의탁한 것이고, 8지 이상은 일승법(一乘法)에 의탁한 것이다. ‘만약 대승이 이 1승이라면’ 이란 것은 7지는 마땅히 출출세(出出世)이어야 하며, 또 1승은 8지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법화경』 속의 삼승인(三乘人)은 마땅히 세 가지의 수레를 구하는 것이며, 나가서 문 바깥에 이른 자는 곧 3승이 모두 출세(出世)로서 스스로 구경(究竟)에 위치함이니, 곧 이 가운데의 4지에서 7지에 이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네거리에서 따로 준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라는 것은 출세(出世)의 위에 있기 때문에 출출세(出出世)의 일승법(一乘法)이니, 즉 이 속의 8지 이상은 일승법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양섭론』에서 말하기를, “이승의 선(善)을 출세(出世)라고 이름하고, 8지 이상으로부터 불지(佛地)까지를 출출세(出出世)라 이름한다”고 말했는가? 이미 3승은 출세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설할 수 있는가?
【답】 이미 4지와 5지의 두 지(地)를 성문이라 하고, 제6지는 연각이라 하고, 8지 이후는 출출세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제7지는 어떠한 사람이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이승의 선을 출세라고 이름한다’고 말한 것은 대승과 소승의 2승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문과 연각을 모두 소승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2승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이니, 아래에서 갖추어 설한 것과 같다.
여섯 번째는 부촉차별(付囑差別)이다. 가령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미래세의 선남자와 선여인으로서 여래의 지혜를 믿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이 『법화경』을 설해서 듣고 알게 해야 하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터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어떤 중생이 믿어서 지니지 않으면 마땅히 여래의 나머지 깊은 법 속에서 가르침을 보여서 이롭고 기쁘게 해야 한다.90) 자네들이 만약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곧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나머지 깊은 법’은 곧 대승이니, 1승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나머지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또 소승은 아니므로 깊다고 일컫는 것이다. 또한 저 소승으로써 나머지 깊은 법이라 한다고 설하지 말아야 하나니, 『법화경』에서는 바르게 소승을 타파했는데 어찌 그것을 깊다고 칭찬하였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마땅히 알라. 『법화경』의 별다른 의미는 바로 1승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촉(付囑)91)을 지은 것이다.”
일곱 번째는 근연수자차별(根緣受者差別)이다. 가령 이 경전의 「성기품」(性起品)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무량억 나유타겁 동안 6바라밀(波羅蜜)을 행하여 도품(道品)92)의 선근(善根)을 닦고 익혔다. 그러나 아직 이 경전을 듣지 않았거나, 또는 비록 들었어도 받아 지니지도 않고 따르거나 믿지도 않는다면, 이런 무리들은 오히려 거짓 이름의 보살이 된다.”
해석하여 말한다.
“이것은 삼승보살근(三乘菩薩根)이 익숙하지 않음을 밝혔기 때문에 비록 이와 같은 수많은 겁의 수행을 거쳤더라도 이 일승경(一乘經)을 믿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자가 그런 사람이니, 이것이 앞의 『법화경』 안의 ‘나머지 깊은 법에서 가르침을 보이고 이롭고 기쁘게 하여야 하는 자’이다. 이는 일승구경법(一乘究竟法)으로써 조망한 것이기 때문에 저것을 거짓 이름으로 삼는다고 설했지만, 그러나 자종(自宗)을 조망하면 또한 진실이다. 이 글의 의미는 화엄이 별교일승임을 밝힌 것이라서 저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여덟 번째는 믿기 어려운 것93)과 믿기 쉬운 것의 차별이다. 가령 이 경전의 「현수품(賢首品)」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일체 세계의 무리를 지은 생류(生類) 중에서 성문승(聲聞乘)을 구하고자 함이 적고, 연각을 구하는 것은 더욱 더 적으며, 대승을 구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94) 그러나 대승을 구하기는 오히려 쉽지만 능히 이 법을 믿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해석하여 말한다.
“이 품(品)에서 신위(信位)의 종심(終心)이 일체위(一切位) 및 성불(成佛)의 일을 융섭하고 이미 3승을 초월하였음을 바르게 밝혔지만 믿고 지님을 어렵게 여길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3승을 들어서 대비하고 결말을 지은 것이다.”
【釋】 다섯 번째의 기위차별(寄位差別)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이름을 들었고, 다음에는 상(相)을 해석한 것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인용해 증명함 중에서는 『섭론(攝論)』 등이란 것은 『화엄경』 및 『장엄론(莊嚴論)』을 고르게 취한 것이다.
【문】 「소전장(所詮章)」에 나오는 ‘수행하는 몸이 열 개의 문(門)에 기대(寄對)함’ 중의 제4문에서 말하기를, “7지(地) 이후는 나한에 의지하는 것과 같고, 8지 이후는 보살위(菩薩位)이니, 『인왕경』(仁王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제5문에서 말하기를, “초지(初地)에서부터 6지까지는 세간과 2승에 의지하지만, 7지 이후는 보살위(菩薩位)에 의지하니, 『본업경』(本業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상은 오직 삼승교(三乘敎)를 기준으로 해서 설하였는데, 아직 일승법이 나뉘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왕경』에서 7지는 오히려 2승이고 8지 이후는 보살이다”라고 하였다.
또 『본업경』에서는 다만 7지 이후가 보살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승과 3승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두 경전 가운데 세운 뜻이 어긋나는데, 무엇을 회통하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인왕경』과 『본업경』은 많은 뜻을 갖추었으므로 우선 한쪽을 따라 인용하였을 뿐이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십지론(十地論)』에 두 가지의 뜻이 있는 것과 같으니, 첫째는 초지(初地)95)에 입과(入過)하는 가운데 이미 세간(世間)과 2승을 넘어선 것이고, 둘째는 7지에 이르러 바야흐로 2승을 넘어선 것이다. 「소전장」의 ‘소의신(所依身)이 제7문에 기대함’ 가운데서는 초의(初義)를 인용하였고, 여기에서는 후의(後義)를 인용하였으니, 『십지론(十地論)』처럼 한 것이다.
『인왕경』과 『본업경』 등도 또한 많은 뜻을 갖추었으니, 「소전장」의 기혹현위십팔문(寄惑現位十八門)의 제10문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왕경』에서 설한 것은 앞의 3지가 삼계의 색번뇌(色煩惱)를 끊었으며, 4ㆍ5ㆍ6지(地)에서는 삼계의 심번뇌(心煩惱)를 끊었고, 7ㆍ8ㆍ9지에서는 삼계의 색습번뇌(色習煩惱)를 끊었으며, 10지 및 불지(佛地)에서는 삼계의 심습번뇌(心習煩惱)를 끊었다.”
해석하여 말하면, “7지 이후는 보살위(菩薩位)이니, 앞보다 점차 세밀해졌기 때문에 색심(色心)96)의 습기(習氣)97)를 멸한 것에 의지하여 저 지위를 나타내었다”고 하였으니, 이 뜻은 물은 사람이 인용한 제4문의 뜻과는 다르고 제5문인 『본업경』의 뜻과는 같다. 그러므로 『인왕경』에서는 많은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7지는 보살승(菩薩乘)에 의지한 것이고 8지 이상은 1승에 의지한 뜻 또한 포함하고 있으니, 『본업경』의 예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문】 화엄일승(華嚴一乘)은 3승 가운데 5승에 배당되고 10지의 8지 이상에 배당되는 문이니, 그렇다면 능히 1승(乘)에 배당되는 것을 따랐는데도 또한 화엄일승지(華嚴一乘地)라고 할 수 있는가?
【답】 그렇다. 종교(終敎)의 불과(佛果)도 아울러 7지의 삼승보살위(三乘菩薩位)에서 아울러 포섭되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아래의 3승을 화엄 이전의 7지에 배당할 때에 이전의 7지는 능히 3승에 배당되는 것을 따랐으니, 또한 삼승지(三乘地)가 되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문】 만약 그렇다면 8지 이상은 별도로 1승의 증득(證得)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되는가?
【답】 배당된 10지가 비록 화엄이지만, 그러나 인천(人天)의 삼승(三乘)은 이전의 7지에 의지하였고, 일승보살(一乘菩薩)은 8지 이상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능히 증득을 이루는 것이다.
【문】 『인왕경』과 『본업경』의 8지 이상에서 배당된 1승은 다만 화엄일승(華嚴一乘)인가, 또한 숙돈일승(熟頓一乘)인가?
【답】 비록 숙돈교(熟頓敎)에서 여래장일승(如來藏一乘)의 뜻을 갖추고 있더라도 지금은 원만함을 잡아서 마땅히 증득의 뜻을 이루기 때문에 오직 화엄뿐이다.
두 번째, ‘약대승(若大乘)’ 이하는 타자를 막는 뜻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바르게 다른 것을 막은 것이고, 둘째 ‘시고(是故)’에서부터 ‘일승법(一乘法)’에 이르기까지는 앞의 것에 이어서 합쳐 해석하였다. 앞에서 네 가지 차별을 말한 것98)은 『법화경』을 인용하였고, 이 글에 이른 것은 나머지의 성교(聖敎)를 인용하였으니, 그러므로 앞의 네 가지 차별을 계속하고자 하여 다시 『법화경』으로 합쳐 해석함으로써 이 가운데 분상문은 다만 일종의 별교일승(別敎一乘)을 나타낸 것이다. 세 번째는 ‘문약(問若)’ 이하는 문답으로 의심을 제거한 것이다.
여섯 번째는 부촉차별(付囑差別)이다.
【문】 앞의 네 가지 차별은 모두 『법화경』을 인용하였으며, 지금 이것도 또한 『법화경』을 인용하였다면, 하나의 부류가 되기 때문에 마땅히 제5에 있어야 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제5에서는 다른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지위에 기댐을 밝혀 마쳤고, 또 『법화경』을 인용하여 이 부촉(付囑)을 밝힌 것은 제6이 되는 것인가?
【답】 중요하게 부촉한 것으로 제6을 삼은 것은 뒤의 세 가지 차별을 연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니, 이른바 제7 차별에서 『화엄경』 가명(假名) 보살의 글을 인용하여 “이것을 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앞의 『법화경』 안의 나머지 깊은 법 속에서 가르침을 보이셔서 이롭고 기쁘게 하셨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법화경』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하려는 것은 『화엄경』의 가명(假名) 보살에 연결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제5 차별에서는 다른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지위에 의지한 것을 증명하여 이루었으니, 이에 지위에 의지한 것으로써 앞의 네 가지 차별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법화경』에서 나오는 문 앞에 있는 세 종류의 수레는 제7지에 배당되고,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8지의 뜻에 배당되니, 이와 같이 앞의 네 단락을 합하여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다섯 가지 차별의(差別義)는 모두 『법화경』이며, 또 『법화경』으로써 『화엄경』을 연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부촉을 제6으로 삼은 것이다.
【문】 가령 지위에 의지한 것을 제6에 두고 제7문(門)에 이르러서는 또한 마땅히 얻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 행하는 사람은 앞의 지위에 의지함 속에서 제7지의 사람이다. 무엇 때문에 모름지기 부촉을 제6으로 삼아서 나중과 연결하게 된 것인가?
【답】 제7 단계에서는 이 경전의 명칭이 가명 보살의 글임을 믿지 않은 것이 『법화경』에서 어떤 중생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요컨대 부촉으로써 나중의 3승과 연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에서 연결하고 뒤에서 매듭을 지은 것은 열 개의 차별에서 밝힌 바가 모두 일승이라면 곧 화엄이고, 3승이라면 아래의 네 가지 교[四敎]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근연수자차별(根緣受者差別)이다. 삼승 근기의 인연이 되어 받았다는 것과 일승 근기의 인연이 되어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1승과 3승이 차별된다.
【문】 가명 보살은 오직 초교(初敎)일 뿐인가, 아니면 숙돈(熟頓)을 통틀은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직 초교(初敎)이다”라고 하였으니, 「성기품소(性起品疏)」에서 “가명 보살은 다만 권교(權敎)에 의하여 수행하였으며, 아직은 1승의 실제 수행을 터득하지 못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곳에서 말하기를, “초교는 권교가 되고, 숙돈(熟頓)은 실교(實敎)가 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문】 권교와 실교라는 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권실차별(權實差別)에서는 네 가지 교를 통틀어서 기준으로 한 것을 권교라고 하였고, 오직 화엄만을 기준으로 한 것을 실교라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오직 초교만을 권교라고 하는 것인가?
【답】 앞의 여섯 가지 차별은 동교(同敎)의 분상문이고,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아홉 번째의 세 가지는 『화엄경』에서 인용하였기 때문에 별교(別敎)의 분상문이 된다. 그러므로 권실차별에서도 또한 초교는 권교가 되고 숙돈은 실교가 된다.
【문】 앞의 여섯 가지는 동교이고, 다음의 세 가지는 별교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아래에서 말하기를, “이 글의 뜻은 화엄이 별교일승(別敎一乘)이라서 저것과 같지 않음을 밝혔다”고 하였다. 만약 앞의 차별이 아울러 별교라면, 앞의 차별 속에서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별교분상(別敎分相)의 초문(初門)이기 때문에 저 앞의 여섯 가지 차별의 동교분상(同敎分相)과는 같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미 이 차별은 별교의 분상문이기 때문에 3승의 갈래를 나뉘어서 아래의 네 가지 교를 통틀은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답】 비록 별교를 기준으로 하였으나, 만약 갈래로 나누었디면 오직 초교(初敎)와 같고, 만약 숙돈(熟頓)이라면 이 별교를 조망하면서 동교로 삼았기 때문에 나눈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명이 아니다.
【문】 동교에서 나눈 것이 이미 초교라면, 별교에서 나눈 것은 마땅히 숙돈을 통틀은 것인가?
【답】 분상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갈래가 다른 분상문과 전체가 다른 분상문이다. 일종의 초교에서 바라보면, 동교는 갈래가 다른 것이고 별교는 전체가 다른 것일 뿐이다.
【문】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답】 제10의 차별도 또한 동교의 분상문이니,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을 인용하면서 해석하기를, “이 글은 본말(本末)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것을 나누었다”고 하였다. 또 아래의 글에서는 앞의 별교의 세 가지 차별을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그 별교일승에서 밝힌 행위인과(行位因果) 등의 상(相)이 저 3승의 분제(分齊)를 시설한 것과 더불어 완전히 구별되어서 같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갈래의 다름과 전체의 다름을 증명하는 글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전체적으로 취하는 가운데 3승은 가명이 되니, 이른바 아직 이 경전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통틀어 취하여서 가명 보살이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이다.
【문】 소(疏)에서 말하기를, “다만 권교(權敎)에 의지하여 수행하고 아직 1승의 실제 수행은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여러 곳의 글에서 초교를 권교라고 한 곳이 많으니, 이것은 오직 초교를 가명으로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통틀어서 기준으로 함 속에서는 3승인 것인가?
【답】 다만 권교에 의지하였다는 말도 또한 아래의 네 가지 교를 통틀은 것이니, 이른바 권교를 지키는 것이 기(器)가 아님은 통틀어 기준으로 함 속의 3승이기 때문이다. 『지귀장(旨歸章)』의 「권속경(眷屬經)」에서 말하기를, “나머지 일체 권교(權敎)와 같이 3승ㆍ소승 등의 경전은 이미 시방에 가지런히 설함을 통틀어 매듭지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된 불경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경전 이외에서 통틀어 취한 것을 일체 권교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승이 모두 가명임을 아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숙돈(熟頓)의 불과(佛果)99)도 또한 가명인가?
【답】 그렇다. 권실차별(權實差別)에서 말하기를, “자종(自宗)의 구경처(究竟處)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중에 모두 별교일승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통틀었음을 아는 것이다.
【문】 『성기소』(性起疏)에서 말하기를, “‘이것들은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어떤 지위에 해당하는 보살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글에서는 바르게 판단할 것이 없으나, 그 겁의 수에 준거하면 10천(千)은 이미 지났으나 승기(僧祇:아승기)는 아직 가득 차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이것은 3현위(賢位)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글은 무엇을 회통한 것인가?
【답】 다만 타자(他者)의 뜻에 따라서 교판을 지었을 뿐이다. 장주(章主)의 참뜻은 숙돈극과(熟頓極果)의 사람을 통틀어 취하여 가명 보살이라고 한 것이다.
고사(古辭)에 의하면, 장주는 대료간(大料間)에서 3승의 지극한 과보로도 이 경전을 믿지 않으니 이 또한 가명의 뜻이라고 밝혔다. 세속의 뛰어난 덕과 복례사(復禮師)100) 등이 문득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황제에게 상주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무상세존(無上世尊)은 3대겁(大劫) 동안 온갖 행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크게 깨닫는 지위까지 올랐으니, 위없는 최상이요 하늘 중에 하늘인데 법장(法藏)은 억지로 가명보살이라 하니, 이 법사의 죄가 심하여 적다고 할 수 없어서 국법으로 다스려야만 합니다. 어명으로 조서를 내려서 강남으로 물리치십시오”라고 하였다. 실차난타삼장(實叉難陀三藏)이 중국에 다다르자 복례는 실차난타삼장과 함께 80권경(卷經)을 번역하였는데, 현수품(賢首品)의 신만성불(信滿成佛)101)에 이르러서는 능히 번역하지 못하였다. 천자(天子)는 복례에게 조서를 내려서 법장 화상과 함께 번역하도록 하였는데, 복례가 사사로이 장주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만약 3승의 지극한 과도 가명의 뜻이라고 고쳐 세운다면, 함께 대경(大經)을 번역하여 옛날에 빠진 것을 보충하자”고 하였다. 장주는 다른 사람들의 비방을 쉬게 하고 싶어서, 또 대경(大經)을 잘못 번역하여 후세 사람들을 오도할까 염려되어서 드디어 요간(料簡)을 비밀리 숨기고102) 『강목장(綱目章)』을 지어서 『탐현기(探玄記)』에 두었다가 요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의상 대덕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청하건대 상인(上人)103)께서는 잘못된 것을 자세히 검토하시고 세상에 유통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의상 대덕은 진정(眞定)과 지통(智通) 등에게 명하여 이 글을 익히도록 하였다. 이 때에 의적(義寂)대사104) 등이 법상종(法相宗)으로부터 의상에게로 왔는데, 일찍이 의상 화상의 극과(極果)105)와 회심(廻心)106)의 뜻을 믿지 않았다. 『성기소』(性起疏)에서, “십천(十千)이 이미 지났으나 승기(僧祇)는 아직 차지 않았으니, 마땅히 이것은 3현위의 사람이다”라는 글을 보고는 화상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소(疏)의 글도 이와 같습니다. 원컨대 화상께서는 지금 이후로는 이러한 뜻이 행하여지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의상 대덕은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말을 따랐을 뿐이다. 법사의 뜻은 멀고도 멀다”고 하였다. 때문에 분황사(芬皇寺)의 순범사(純梵師)를 보내어 장주에게 물으니, 장주는 대료간(大料簡)을 보내었다. 의적 대사 등은 이 글을 본 후에야 그 의심을 해결하였다.
【문】 대료간에서 어느 글이 극과(極果)를 돌이킨 곳인가?
【답】 인용하는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저 교(敎)에서 항포(行布)107)의 10지(地)를 갖추어 점차로 불과(佛果)에 이르러서 저 근기(根器)를 크게 양성하여 성숙하도록 힘썼다. 극도로 느리다는 것은 겁수(劫數)에 이르러서야 결정코 믿어 들어간다는 것이며, 그처럼 빠르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문】 이 글은 옳다고 할 만한데 무엇 때문에 수권비기(守權非器)에서 말하기를, “삼승공교(三乘共敎)의 모든 보살들은 자종(自宗)을 따라서 수행하였으나 아직도 초아승기(初阿僧祇)를 채우지 못하여 이러한 기(器)가 아니다”라고 한 글과 『성기소』에서 말하기를, “10천은 이미 지났으나 승기는 아직도 채우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이는 3현위의 사람이다”라고 한 글은 같은 것인가?
【답】 그렇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요간』에서 기(器)가 아니라고 한 글과 『성기소』는 모두 1승과 3승을 화합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관석(觀釋)에서 말하기를, “비기(非器)의 글은 그 빠른 것을 기준으로 하였고, 행하는 바의 글은 그것이 극도로 느린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아울러 참뜻임을 아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인용하는 가운데 장차비기(將此非器)는 “삼승공교(三乘共敎)에서부터 또한 이 기(器)가 아니다”라는 뜻을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저 지(地) 이전에 그러한 겁수(劫數)를 지나서 반드시 믿고 받아들인다면, 곧 지상(地上)의 두 종(宗)이 구별되지 않음을 아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 믿는 것에는 10지가 없는가?
【답】 “저 교에서 항포(行布)의 10지를 갖추어 점차로 불과에 이르러서 저 근기를 크게 양성하여 성숙되도록 힘쓴 것이다. 극도로 느리다는 것은 이 겁수에 이르러서야 결정코 믿고 들어간다는 것이며, 그처럼 빠르다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대답이 의미하는 것은 인용하는 글 속에서 극도로 느리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 겁수에 이르러서야 결정코 믿고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비기(非器)의 글이며, 그처럼 빠르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아직 승기가 가득 차지 않아서 이 기(器)가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가득 차면 곧 기(器)이기 때문에 “그처럼 빠르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아직 가득 차지 않았다면 기(器)가 아니며, 이미 가득 찼다면 기가 된다’는 것은 『성기소』에서 마땅히 이는 3현위의 사람이라고 한 것과 같다. 어째서 비기(非器)의 글에서 ‘그처럼 빠르다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라고 하였는가?
【답】 저 『성기소』에서 말하기를, “10천이 이미 지났으나 승기는 아직 차지도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이것은 3현위의 사람이다.
【문】 다시 어떠한 위(位)에 이르러야 능히 이것을 믿는 것인가?
【답】 ”궁극적으로 이러한 지위에 다다르면 결정코 믿고 들어가는 것이니, 이 일승법은 끝내 지(地)를 증득함이 없는데도 이를 믿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끝내 지(地)를 증득함이 없다는 것 등은 궁극적으로 지(地) 이상에 이르면 결정코 믿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는 화회(和會)108)의 뜻이다. 그러나 비기(非器)의 글 가운데 ‘그처럼 빠르다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다.
【문】 ‘마땅히 이는 3현(賢)이다’ 라는 등은 어느 교의 3현인가?
【답】 종교(終敎)의 3현이니, 이른바 종교의 지(地) 이전의 일체 근성(根性)은 각각 차별되지만, 지(地) 이상에 이르면 발심이 동등하고[發心等], 수행이 동등하고[修行等], 이익이 동등하고[利益等], 안락이 동등한[安樂等] 것이다. 그래서 1승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면, “3승 가운데 설령 과위(果位)에 이른다고 해도 오히려 이루는 것[成]과 이루지 못하는 것[不成] 및 심식(心識) 등에 자타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지(地) 이전의 근성(根性)이 차별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뜻을 기준으로 해서 ‘마땅히 이것은 3현위의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1승과 3승을 융화해서 회통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도신장(道身章)』을 말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두 개의 종[二宗]에서 지(地) 이상은 한 가지인가?
【답】 그렇지 않다. 10지를 세우기 위해서는 근기를 오래 길러서 이 겁수를 경과하여 반드시 1승을 믿어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10천은 이미 지났고 승기는 아직도 차지 않았으니, 마땅히 이는 3현위의 사람이다’라고 했는가?
【답】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으니 1승과 3승을 융화하여 회통해서 논했을 뿐이다. 삼승위(三乘位)에 부쳐서 일승위(一乘位)를 밝힌 것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견문위(見聞位)109)로서 10신(信)110)에 해당하며, 둘째는 해행위(解行位)111)로서 3현(賢)에 해당하며, 셋째는 증입위(證入位)로서 10지에 해당한다. 만약 다만 일승위로만 말한다면, 처음에 1승을 보고 들은 것은 결정코 믿음의 처음에 있는 것이요, 만약 다만 삼승위로써 말한다면, 어떤 경우는 믿음의 처음에 보고 들음이 있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경우는 3현위라 할 것이며, 또 어떤 경우는 초지(初地), 2지, 나아가 극과(極果) 속의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말한 바가 마땅히 3현위의 사람이다’라는 것은 3승과 1승을 합하여 논하였을 뿐이다. 글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억나유타 겁 동안 6도(度)를 닦았기 때문에 곧 믿음의 처음인 범(凡)은 아닌 것이다. 또 지(地) 이상은 과(果)로써 증위(證位)에 배당되기 때문에 아직 보고 듣지 못한 사람은 모름지기 지(地)에 오르게 할 수가 없으며 3현의 인위(因位)에서 끝내 보고 듣게 하였을 뿐이다. 실제로 3승의 극과(極果)는 3현위에 있다. 또 비록 3현이라 말하였으나 끝내 실제로는 믿음의 처음이니, 처음으로 1승을 보고들은 것이 믿음의 처음에 배당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말하면, 곧바로 1승으로써 말한 것은 비로소 1승을 믿는 것을 믿음의 처음에 배당했기 때문에 믿음의 처음을 범(凡)이라고 판별하면 무량억 나유타 겁 동안에 6도를 닦았다는 글과 위배된다. 만약 3승의 지위를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비록 6도를 닦음이 오래 되었으나 아직 보고 듣지 못한 사람은 모름지기 지(地)에 오르게 할 수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이것은 10지의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1승과 3승을 치우치게 거론하고 싶지 않아서 “마땅히 이것은 3현위의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1승과 3승을 융화해서 회통한 뜻이다.
【문】 이 글의 의미는 『화엄경』이 별교일승(別敎一乘)이라서 저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거늘, 어째서 이 가운데 이러한 말이 치우쳐 있는가?
【답】 도리(道理)가 있다. 이른바 나머지의 차별 가운데 1승과 3승의 차별은 글에 저절로 나타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이것이 3승이다, 1승이다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우치게 이 말을 들었던 것이지 앞의 여섯 가지 차별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동교(同敎)이기 때문에 저것을 조망하면서 저것과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이니, 제8 차별(差別)에서 가히 볼 수 있는 것이다.

【記】 아홉 번째는 약기현리차별(約機顯理差別)이다. 이 경전의 제9지(地) 처음 게송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생의 근기가 하열해서
그 마음이 싫증에 빠졌다면
성문도(聲聞道)를 보여서
뭇 고통 벗어나게 하고

만일 어떤 중생이
근기가 조금이라도 밝고 예리해서
인연법을 좋아한다면
벽지불(辟支佛)을 설하고

만일 근기가 밝고 예리해서
큰 자비심이 있고
모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면
보살도를 설하고

만일 위없는 마음이 있어서
결정코 큰 일[大事]을 좋아하면
불신(佛身)을 현시해서
다함이 없는 부처님의 법을 설한다”

해석하여 말한다.
“이것은 일승 법문의 주인과 짝이 모두 갖추어졌음을 밝혔기 때문에 다함이 없는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니, 3승의 일상(一相)112)과 일적(一寂) 등의 법과는 같지 않다. 이 지(地)에서 대법사가 되어 설법(說法)의 의궤(儀軌)를 밝혔으니, 따라서 1승과 3승의 글 뜻이 차별됨을 열어서 보인[開示]113) 것이다.
열 번째는 본말개합차별(本末開合差別)이다. 가령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문법(聲聞法)ㆍ벽지불법(辟支佛法)ㆍ보살법(菩薩法)과 불법(佛法) 등 일체의 모든 법은 다 비로자나(毗盧遮那)의 지장대해(智藏大海)로 흘러 들어간다.”
이 글은 본말분이(本末分異)를 잡은 것이니, 즉 회말귀본(會末歸本)으로써 1승과 3승의 차별을 드러내었을 뿐이다.
이상의 열 가지 증거는 충분히 귀경(龜鏡:귀감)이 된다. 이 별교일승(別敎一乘)이 밝히고 있는 수행의 지위나 인과(因果) 등의 모양[相]은 저 삼승교에서 시설한 분제(分齊)와는 완전히 구별되어서 같지 않다. 넓게는 경문(經文)에 있지만 대략적으로는 아래에서 변별한 것과 같다. 설사 가르침의 증명은 없더라도 그 뜻의 차이에 의거해서 오히려 종(宗)을 나눈 것인데, 하물며 성교(聖敎)의 구름이 펼쳐지면서 찬연히 눈에 넘치는 것이리오. 그러나 수주(守株)114)의 무리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심하게 마음이 놀라니 슬프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아직 듣지 못했던 경을 듣고 의심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고 하였다.
【釋】 아홉 번째는 약기현리차별(約機現理差別)이다. 우선 처음 게송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중생의 근기가 낮고 열등하여 그 마음이 싫증에 빠졌다”는 것은 기(機)를 기준으로 하여 보인 것이며, “성문도(聲聞道)로 중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는 것은 이치를 나타낸 것이다. 나머지의 게송도 또한 이러하니, 처음의 세 게송은 점교삼승(漸敎三乘)이고 네 번째 게송은 돈원일승(頓圓一乘)이다. 그러므로 여러 곳에서 3승 이외에 별도로 1승이 있음을 밝혔으니, 뜻 속의 글로 증명한 것이라면 이 네 가지 게송과 현수품(賢首品)의 게송을 인용하였고, 뜻으로 한 증명이라면 십문십법(十門十法)을 인용하였다. 『수현(搜玄)』과 『법계도[圖]』의 글에서는 십문십법(十門十法)을 설명하고 나서 결론지어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교의분제(敎義分齊)가 이것과 더불어 서로 응하면서 갖추어졌다는 것은 돈교(頓敎) 및 원교(圓敎)의 두 교가 융섭한 것이며, 서로 응하면서 모두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삼승점교(三乘漸敎)가 융섭한 것이다.”
이것은 점교삼승(漸敎三乘) 이외에 따로 돈원일승의 뜻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글의 증명에서 제4행의 게송은 또한 돈교와 원교를 통틀어 증명한 것이다.
【문】 『약소(略疏)』의 처음에서 말하기를, “두 번째 돈교에서 융섭하였다”고 한 것은 제9지의 4행의 게송 가운데 네 번째 게송을 증명한 것인데, 어째서 지금은 돈교와 원교를 통틀어 증명하였다고 하는가?
【답】 돈교(頓敎)의 증명 속에서 비록 이 글을 인용하였으나, 3승 외에 따로 돈교와 원교의 증명을 밝힌 것이 있을 뿐 이것 외에는 다시없기 때문에 통틀어 증명하였음을 아는 것이다.
【문】 제3 원교(圓敎)에서 “원교가 있는 것을 아는 까닭은 아래의 글과 같으니, 대해(大海)로 인하여 십보산(十寶山)115)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으며, 다시 이 글로써 원교를 증명하였기 때문에 저 게송이 오직 돈교를 증명하였음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통틀었다고 말하는가?
【답】 제4게로써 3승 이외에 별도로 돈교와 원교가 있음을 증명하였으니, 그 쓰임새가 대해(大海)로 인한 등과 같아서 원교 속의 불사(佛事)를 만족한 뜻과 맛을 증명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대해십산(大海十山)이 원교 속의 뜻과 맛을 증명하였음을 어떻게 아는가?
【답】 ”마치 대해(大海)로 인하여 십보산이 있는 것처럼 불지(佛地)로 인하여 10지가 있으니, 하나 하나의 산 아래에 모두 대해(大海)가 있고, 하나 하나의 땅[地]에 모두 불과(佛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가령 지지(地地)를 얻으면 모두 불과가 있으니, 마땅히 알아라, 진진(塵塵)에도 또한 불과가 있느니라. 만약 진진을 얻으면 모두 불과가 있으니, 마땅히 알아라, 물물(物物)마다 모두 불사(佛事)를 만족하느니라.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 글을 인용하였을 뿐이다.
【문】 처음 3행의 게송에서 증명한 3승은 어떠한 3승인가?
【답】 지효삼승(地爻三乘)이다. 고사(古辭)에 의하면, 신림(神琳)대덕116)이 아직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는 말하기를, “공화삼승(空畵三乘)이다”라고 하다가 대당(大唐)에 들어간 이후에는 “지화삼승(地畵三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돈교와 원교 이하의 3승을 증명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네 번째 게송으로 돈교와 원교를 증명할 때에 구절을 나누어 증명하였는가?
【답】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한다. 이른바 처음 두 개의 구절은 돈교를 증명하였고, 뒤의 두 개의 구절은 원교를 증명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해석에서는 통틀어 증명한 것이다.
열 번째는 본말차별(本末差別)이다. 근[本]과 말(末)을 기준으로 해서 어떤 때는 열고 어떤 때는 합하여서 1승과 3승이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었다. 소유성문(所有聲聞) 등이란 것은 말(末)이고, 여시일체(如是一切) 등이란 것은 본(本)이다.
【문】 열면 1승과 3승으로 각각 구별되고, 합하면 1승과 3승이 둘이 아닌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말단이 연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3승이며, 근본이 합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1승이다. 그러므로 소유성문법(所有聲聞法) 등은 연 것이자 말단이기 때문에 3승을 증명한 것이고, 여시일체제법(如是一切諸法) 등은 합한 것이자 근본이기 때문에 1승을 증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열면 1승과 3승으로 다르게 되고, 합하면 1승과 3승이 둘이 아니나, 오직 글을 여는 가운데서 1승과 3승을 구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여는데 나아간 글은 어떻게 구별하였는가?
【답】 소유성문법(所有聲聞法)ㆍ벽지불법(辟支佛法)ㆍ보살법(菩薩法)은 3승이고 모든 부처님의 법은 1승이다.
【문】 3승에서 인과(因果)를 갖추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든 법은 3승을 통틀었다고 할 만한데, 어째서 오직 1승이라고만 말하는가?
【답】 이전의 차별에서 보살도(菩薩道)를 설하는 것으로써 3승을 증명하였고, 다함없는 불법(佛法)을 설하는 것으로써 1승을 증명하였다. 이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보살법은 숙돈(熟頓)을 증명하였고, 모든 부처님의 법은 오직 1승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근본 경전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이 일어났을 뿐이다. 만약 저 경전을 검토해 보면 이곳에서 인용한 것은 오직 글을 열기 위한 것이니, 이른바 『대승동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해묘심지(海妙深持) 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2승의 해탈과 여러 불(佛)의 해탈은 어떻게 다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문과 벽지불의 해탈은 저 강물과 같고 여래의 해탈은 큰 바닷물과 같다.’
해묘심지 보살이 또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모든 크고 작은 강은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문법ㆍ벽지불법ㆍ보살법과 모든 부처님의 법은 다 비로자나 지장대해(毗盧遮那智藏大海)로 흘러 들어간다.’”
처음의 ‘부차’(復次)에서는 강을 2승에 비유하였고, 바닷물은 숙돈(熟頓)과 1승에 합하여 비유하였으니, 이것은 합한 문장이다. 뒤의 ‘부차’(復次)에서는 숙돈을 능히 흐르는 것이라 하여 따로 지장대해(智藏大海)를 열어서 흘러 들어간 것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열어 놓은 문장이다. 열어 놓은 글에서 1승과 3승의 분상(分相)한 뜻을 분명히 나타내었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글에서 말하기를, “이 글이 본말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것을 나누었다고 말한 것은 오직 전개한 글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합한 문장에 대하여서 이러한 글[此文]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합한 글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답】 합한 글에서 숙돈과 1승을 합하여 비유하였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았다. 연[開] 글에서는 성문법에서부터 모든 불법은 3승이고, 지장대해(智藏大海)는 1승이라고 했으므로 이 글을 인용하여서 1승과 3승이 구별됨을 밝혔다.
【문】 만약 오직 연 글만을 인용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열고 합하였다고 말하는가?
【답】 사실은 오직 열었을 뿐이다. 다만 이 말이 대비가 되기 때문에 열고 합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문】 『대승동성경』은 3승인데, 무엇 때문에 지장대해를 별교일승(別敎一乘)이라 하였는가?
【답】 비록 3승이지만 다음에 『화엄경』의 일로 설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문】 지엄(智儼)은 부사의품(不思議品) 소(疏)에서 말하기를, “또 『대승동성경』 중에서는 부처님에게 10가지 지(地)가 있다고 하였으니, 첫 번째는 심심난지광명지덕지(甚深難知廣明智德地)라 이름하고, 나아가 열 번째는 비로자나지해장지(毗盧遮那智海藏地)라고 이름하니, 이것은 마땅히 3승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비로자나지장대해는 3승인데 어째서 별교(別敎)라고 말하는가?
【답】 그것과는 다르다. 이른바 앞에서 성문십지(聲聞十地)ㆍ벽지불십지(辟支佛十地)ㆍ보살십지(菩薩十地)ㆍ제불십지(諸佛十地) 등을 밝힌 것은 능히 흐른 것이 되고, 따로 비로자나지장대해를 연 것은 흘러 들어간 곳이 된다. 그 비로자나지해장지(毗盧遮那智海藏地)는 능히 흐른 것이고 제불십지 가운데 제10지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부처님의 모든 법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앞에서 이미 회말귀본(會末歸本)이라 말한 것은 다만 1승이다. 무엇 때문에 1승과 3승으로 구별하였는가?
【답】 능히 흘러 들어가는 낮고 열등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비록 회말귀본이지만 능히 1승과 3승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앞을 결론지은 것에서 귀경(龜鏡:귀감)이라 한 것은 길흉을 점쳐서 아름다움과 보기 흉함의 거울로 삼는 까닭이다.
두 번째에서 의증(義證)117)은 그 뜻이 다른 것을 기준으로 해서 1승과 3승의 구별을 밝혔다. 인과 등은 나머지 8대법(對法)과 10현문(玄門)118)을 고르게 취하였다. 대략 아래에서와 같이 밝혔다는 것은 아래의 시설이상(施設異相)과 소전장(所詮章) 및 십현장(十玄章) 등을 가리킨 것이다.

【記】 두 번째는 해섭문(該攝門)이라는 것이다. 일체 삼승(三乘) 등은 본래 모두 일승법이다. 어째서인가? 3승으로써 1승을 조망하면 두 개의 문이 있기 때문이니, 소위 다른 것도 아닌[不異] 문과 동일한 것도 아닌[不一] 문이다. 처음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3승이 1승에 즉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 1승이 3승에 즉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문】 처음의 문에 의거해서 3승이 1승에 즉한다면, 저 3승이 존재하는 것인지 허물어지는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오직 일승뿐이며, 만약 허물어지는 것이라면 저 삼승의 근기는 다시 어떤 법에 의하여서 능히 향상의 수행을 얻겠는가?
【답】 네 가지의 구절이 있다. 첫째에서는 즉일(卽一; 일승에 즉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허물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며, 둘째에서는 즉일을 말미암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에 구애되지 않으며, 셋째에서는 즉일을 말미암기 때문에 허물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며, 넷째에서는 즉일을 말미암기 때문에 존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처음의 두 가지 뜻을 말미암아서 3승의 근기는 의지하는 바를 얻는 것이고, 뒤의 두 가지 뜻을 말미암아서 3승의 근기는 1승에 들어가는 것이니, 네 가지의 구로 말미암은 것이 모두 즉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1승이 있을 뿐 다시 나머지는 없는 것이다.
둘째에서 1승은 3승에 즉함으로써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에는 은현(隱顯; 숨거나 드러남)의 네 개 구절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것을 뒤집어서 생각하라. 따라서 오직 3승이 있을 뿐 다시 1승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래의 동교 속에서 변별한 것과 같다.
둘째에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1승에 즉하는 3승이라는 것과 위의 3승에 즉하는 1승이라는 것이 동일한 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허물어지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으면서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또 여기서 하나가 아닌[不一] 것은 위의 분상문(分相門)이며, 여기서 다르지 않다[不異]는 것은 해섭문(該攝門)이다.
【釋】 두 번째 해섭문 가운데 앞에서는 1승과 3승이 차별되는 상(相)을 밝혔다. 상(相)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그렇긴 하지만, 법 자체를 기준으로 하면 원교에 통섭되어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다음에 오는 것이다. 청량은 그의 소(疏)에서 말하기를, “그와 같은 백천(百川)은 대해(大海)를 융섭하지 못하지만, 대해는 반드시 백천을 융섭한다. 비록 백천을 융섭하더라도 한결같은 짠맛이기 때문에 한 방울을 따르더라도 백천과는 다르다. 앞의 네 가지 교[四敎]는 원교를 융섭하지 못하였으나, 원교는 반드시 네 가지 교를 융섭하였으며, 비록 네 가지 교를 융섭하였지만 원교로써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10선(善)119)과 5계(戒)도 또한 원교에 융섭되어 오히려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것이 아닌데, 하물며 처음과 두 번째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곳에서도 또한 마찬가지다. 체(體)를 기준으로 해서 법을 융섭하면 아래의 네 가지 교도 모두 원교라서 해섭문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3승을 융섭한 원교는 도리어 3승과 구별되므로 분상문이라고 이름한다.
【문】 무엇 때문에 분상문의 열 개의 문은 모두 성교(聖敎)만을 인용하고, 해섭문을 인용한 것은 없는 것인가?
【답】 분상문은 법상인(法相人)에 대하여 1승과 3승을 구별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모름지기 성교를 인용하여 저 의심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섭문에서 곧바로 법체(法體)를 기준으로 해서 해섭문을 밝혔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표제한 것이고, 다음은 따진 것이며, 마지막은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문】 표제 중에서 ‘본래가 다 저 일승법이다’라는 것은 어떠한 1승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동교일승(同敎一乘)이다”라고 하였지만 지금의 해석에서는 별교(別敎)이니, 이른바 앞에서 3승 이외에 따로 별교 1승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앞의 1승을 조망하면서 저 1승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런 줄 아는 것이다.
【문】 두 번째의 따지는 것 중에서는 어찌하여 앞에서는 3승 이외에 1승이 있기 때문에 1승과 3승이 차별된다고 말하고, 이곳에서는 일체 삼승 등의 법이 본래 모두 일승법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답】 이와 같이 밝혔다. 답변 중에서 ‘3승에서 1승을 조망하여 두 가지 문이 있기 때문에 이른바 다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다’는 것은 3승으로 1승을 조망하여도 다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은 것이다. 앞에서는 동일하지 않은 뜻을 기준으로 해서 1승과 3승의 차별을 밝혔고, 여기서는 다르지 않다는 뜻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3승은 1승이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뜻은 바로 해섭문인 까닭에 이곳에서는 다르지 않음을 바로 논하였고, 따지는 것 속에서는 분상의(分相義)를 들어서 질문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답에서는 모두 한결같지 않음을 들었을 뿐이니,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를 들어서 이름을 열거하였고, 둘째, ‘초불(初不)’ 이하에서는 두 개의 문을 바로 해석하였으며, 셋째, ‘우차(又此)’ 이하에서는 두 개의 문으로 나누었다. 둘째의 해석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는 다르지 않음을 해석하였고, 뒤의 ‘이불(二不)’ 이하에서는 동일하지 않음을 해석하였다. 다르지 않은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두 개의 문을 열어서 해석하였고, 다음의 ‘문약(問若)’ 이하에서는 문답으로 의심을 제거하였다.
【문】 처음에 나오는 다르지 않은 것의 두 개의 문은 모두 해섭문인가?
【답】 3승이 곧 1승이라는 구절을 해섭문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의 짝이 되는 까닭에 1승이 곧 3승이라고 아울러 논하였을 뿐이다. 이른바 앞의 표제에서 일러 말하기를, “일체의 삼승은 본래 모두 저 1승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문답에서 ‘감추거나 나타내는 네 개의 구절은 도리어 위의 것을 헤아렸다’는 것은 앞서의 존재하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네 구절로 지었다면 옳다고 말한 것이다.
【문】 뒤의 문에서 1승이 곧 3승이라는 것에 의거하였다는 것은 아직 저 1승의 나타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타내었다면 어떻게 오직 3승이며, 감추었다면 저 1승의 근기는 다시 어떤 법에 의지하여 능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답】 네 개의 구절이 있다. 첫 번째에서는 3승에 나아간 것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감춰짐을 기다리지 않았고, 두 번째에서는 3승에 나아간 것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나타남을 장애하지 않았고, 세 번째에서는 3승에 나아간 것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감추지 않은 것이 없었고, 네 번째에서는 3승에 나아간 것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나타낼 만한 것이 없었다. 처음 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1승의 근기는 의지처를 얻었고, 뒤의 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3승의 근기는 의지처를 얻었으며, 또 3승은 1승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니 아울러 얻은 것이다. 네 가지 구절은 모두 3승에 나아간 것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오직 3승만이 있고 다시 나머지는 없는 것이다.
【문】 이것은 아래의 동교(同敎)에서 밝힌 것과 같다는 것에서 해섭문은 별교(別敎)인데 무엇 때문에 동교를 가리켰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직 네 개의 구절에 감추거나 나타낸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을 가리켰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존재하거나 허물어지거나 감추거나 나타낸 갖가지 종류의 네 가지 구절을 통틀어서 기준으로 한 것을 가리켰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나중의 설이 바르다고 보니, 이른바 1승이 곧 3승이고 3승이 곧 1승이라는 궤칙(軌則)이 본말을 융섭하는 가운데 권교(權敎)를 없애서 실교(實敎)에 귀의하고 실교를 잡아서 권교를 이룬 것과 같기 때문에 가리켰을 뿐이지, 해섭문이 바로 동교(同敎)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두 번째의 불일(不一)에서 동일하지 않음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다르지 않음을 밝혔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음[不一]을 들어서 다르지 않음[不異]을 나타낸 것이니, 그러므로 분상문의 해섭문이고 해섭문의 분상문이다.
【문】 두 번째120) ‘두 개의 문을 나누어 배당함’ 중에서 만약 앞에서 유래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분상문이고 다르지 않다는 것은 해섭문이라면, 어째서 또한[又]121)이라고 말하는가?
【답】 앞에서는 곧바로 동일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을 논하였으나, 분상문과 해섭문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합하여 결론을 맺었을 뿐이다.

【記】 두 번째의 동교(同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서는 모든 승(乘)을 나누었고122), 뒤에서는 본말(本末)을 융회(融會)하였다.
처음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에서는 1승을 밝혔는데 일곱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법상(法相)이 서로 뒤섞인 것을 잡아서 1승을 밝혔으니, 가령 3승 속에서도 인다라망(因陀羅網)123)과 미세(微細) 등의 일을 설함이 있지만 주인과 짝은 갖추지는 못하였으며, 또한 화장세계(華藏世界)124)를 설하긴 했지만 열 가지 등급을 설하지는 않고 있다. 또 한편 1승에 또한 삼승(三乘)의 법상(法相) 등이 있으니, 소위 10안(眼) 속에 또한 5안125)을 갖추고 있고 10통(通) 속에 또한 6통126) 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뜻과 이치는 모두 구별된다. 이것이 바로 1승은 3승에 드리웠으며 3승은 1승에 참여한 것이니, 이는 두 개의 종(宗)이 서로 접하여 연결되고 이끌어 융섭함으로서 근(根), 욕(欲), 성(性)을 이루어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방편을 융섭함을 잡은 것이니, 소위 저 3승 등의 법들은 총체적으로 일승방편(一乘方便)이 되기 때문에 모두 1승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경전에서, “온갖 짓는 바가 있음은 모두 일대사(一大事)127)를 위한 것이다” 등등이라 말한 것이다.
세 번째는 흘러나온 곳[所流]를 잡아서 밝힌 것이니, 3승은 다 1승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자네들이 행한 것은 보살도(菩薩道)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경전에서 말하기를, “비니(毗尼)128)는 대승이다”라고 한 것이다.
네 번째는 수승한 문(門)을 잡은 것이니, 곧 삼승 속의 대승을 1승으로 삼는 것이다. 별교를 조망하면 비록 권교(權敎)와 실교(實敎)는 차이가 있더라도 똑같이 보살이 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오직 이 하나의 것만 실(實)이며 나머지 두 개는 참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지식(止息)129)이기 때문에 이승이라고 설한다”고 하였다. 이 글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 만약 위의 별교(別敎)를 조망한다면 나머지 두 가지는 대승과 소승의 2승이다. 성문(聲聞) 등은 영리하고 둔함이 비록 다르더라도 똑같이 소승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며, 1승을 열어서 3승으로 달리하기 때문이다. 만약 동교를 조망하면 성문 등은 이승이 되는 것이고, 또 대승을 융섭하여 일승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가르침의 일이 깊고 세밀함을 잡은 것이니, 경전에서 말하기를, “나는 항상 영산(靈山)에 있다”고 한 것들이다.
여섯 번째는 여덟 가지 뜻의 의취(意趣)를 잡은 것이니, 『섭론(攝論)』에 의하고 『화엄오십요문답』에서 변별한 것과 같다.
일곱 번째는 열 가지 뜻의 방편을 잡은 것이니, 『공목장』(孔目章)에서 설한 것과 같다. 위의 여러 뜻에 의거하면, 곧 3승 등을 아울러 1승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모두 본종(本宗)을 따라서 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과 짝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동교이지 별교는 아니다.
두 번째, 2승을 밝힌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에서는 1승과 3승을 2승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소위 경전에서 “네거리에서 준 것”과 “문 앞에 있는 세 종류의 수레”와 같은 것이다. 이 중에서 법에 어리석은 사람을 합하여 회심(迴心)과 함께 한 것은 모두 소승이기 때문에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두 번째에서는 대승과 소승이 2승이 된다. 이것은 1승을 합해서 3승과 함께 한 것인데, 법에 어리석은 사람을 열어서 회심과 달리한 것이다. 세 번째에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2승이 되는데, 이것은 법에 어리석은 사람과 회심에 통하는 것이다. 또 처음은 1승을 잡은 것이고, 다음은 3승을 잡은 것이며, 뒤에서는 소승을 잡은 것이니, 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釋】 동교(同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수를 열거해서 이름을 나열한 것이고, 두 번째, ‘초중(初中)’ 아래에서는 별도로 해석하였는데 두 개의 단락이 있다.
처음에서 모든 승을 나누었다는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數)를 연 것이고, 둘째, ‘일명(一明)’ 이하에서는 상(相)을 해석하였으며, 셋째, ‘경운(經云)’ 이하에서는 증거를 제시하였으며, 넷째, ‘상래(上來)’ 이하에서는 전체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의 상(相)을 해석함 속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1승을 밝히는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1승 가운데에서 3승과 1승이 수를 연 것을 밝혔고, 두 번째, ‘초약(初約)’ 아래에서는 개별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세 번째, ‘의상(依上)’ 아래에서는 전체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둘째의 다른 해석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문】 모든 곳의 방편승(方便乘)에서 유목방편(流目方便)을 열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는 다만 소류방편(所流方便)을 밝히고 소목(所目)을 밝히지는 않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상(法相)이 서로 섞인 것은 모두 동교(同敎)에서 논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뛰어난 문에서 모두 논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해섭문은 소목(所目)이기 때문에 이것은 밝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 나중에 설한 것이 문상(文相)에 합치되니, 이른바 제8근(根)이 바로 소목(所目)이라는 것은 해섭문의 문상(文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교의섭익(敎義攝益)의 3승의 세 구절에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모두 교(敎)와 의(義)가 아니라고 하니, 별교일승(別敎一乘)을 기준으로 해서 설한 것이 그 소목(所目)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소목이 된다는 것은 3승이 곧 1승이라는 뜻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해섭문의 별교이다.
【문】 소목이 별교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보법장(普法章)」에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것은 글의 첫머리에서 아래 글의 소목의 뜻을 요간(料簡)130) 한 것이니, 10법(法)이 있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0보법(普法)을 세우는 때는 표제를 소목이라고 하였다. 또 「법수장(法數章)」에서 말하기를, “다함이 없는 법의 수[法數]와 나머지 승수(乘數)가 있는 것은 모두 1승(乘)의 소목이니, 이것이 바로 1승이 똑같이 해인정(海印定) 속에 있으면서 이루어짐을 말미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문】 『법계도(法界圖)』에서 말하기를, “방편일승(方便一乘)을 기준으로 해서 설하면 5승은 전체적으로 이 1승의 포섭에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일승소류(一乘所流)ㆍ일승소목(一乘所目)ㆍ일승방편(一乘方便)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일승삼승의장(一乘三乘義章)에서 말하기를, “횡(橫)으로 방편에 의지해서 나아간 법문에서 유목방편(流目方便)을 논하였다”고 하였으니, 소목이 『화엄경』이라면 방편일승도 또한 이 경전인가?
【답】 3승의 법은 본래 『화엄경』에서의 소목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방편에서 모두 소목을 논하였을 뿐이지 소목은 방편승(方便乘)이 아니다. 『십구장(十句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무생불법(無生佛法)이 지위에 의지해서 오르내린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내증(內證)하신 해인정(海印定)을 무생불법(無生佛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기연(機緣)이 되는 보현(普賢)보살은 무생무명처(無生無名處)에서 정(定)에서 나와 갖가지 이름을 제목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소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소목에서 기연(機緣)의 마음에 따른 뛰어남ㆍ하열함ㆍ존귀함ㆍ비천함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지위에 의지해서 오르내린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은 실제로 소목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는 이름을 좇지 않고 무주(無住)131)라고 이름한 뜻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없다[無名]고 한 것이다. 참된 근원은 법성(法性)이니 원융(圓融)을 증분(證分)한 것이다.”
즉 보현(普賢)이 무생무명처(無生無名處)에서 정(定)을 나온 소목법(所目法)이기 때문에 소목은 별교이다.
【문】 앞에서 이미 중생은 실제로 소목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도 또한 이 경전의 근기인가?
【답】 ”부처님께서는 이름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증분처(證分處)”까지는 증분(證分)이다. “보현(普賢)이 정(定)에서 나와”에서부터 “이러하기 때문에 소목(所目)이라고 한다”까지는 말을 일으켜서 좇았으니 연기분(緣起分)이니, 이 때문에 이것은 별교(別敎)이다.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의 아래는 네 가지 교[四敎]이다.
【문】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가 실제로 소목의 법에 집착하였는가?
【답】 그렇다. 그러나 사실 집착한 것은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니, 이는 아래의 네 가지 교이다. 그러므로 『지통기(智通記)』에서 말하기를, “또 소(疏)에서 글을 해석한 것은 앞에서 여덟 가지 교를 기준으로 해서 서로 완성하였다”고 한 것이다.
【문】 3교를 기준으로 해서 3교의 차례를 밝혔다는 뜻은 무엇인가?
【답】 큰 뜻은 이 경전 안에서 일체(一切)의 교(敎)와 의(義) 등을 융섭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니, 이른바 부처님께서 비로소 2주일 동안 보리수(菩提樹)에서 대인(大人)132)에게 임하여 큰 법(法)을 설하실 때에 일체 허공계와 일체 미진(微塵) 미진처(微塵處)와 일체의 10세(世), 9세, 전후시(前後時) 속에서 일체의 오승삼승(五乘三乘)과 일승무량승(一乘無量乘)의 근기[機] 중에 단박에 응하셔서 일체 법문(法門)을 설하신 것이다. 임한 근기의 중생은 각각 마땅함을 따라서 듣고 이해하고 행하고 증득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체 교의 등은 십십법문(十十法門)은 단박에 동시에 대기인(大機人)에게 나타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법문의 보고 듣고 이해하고 행하고 증득하는[見聞解行證] 것은 일처(一處)가 일체처(一切處)이고 일시(一時)가 일체시(一切時)이고 일근(一根)이 일체근(一切根)이고 일행(一行)이 일체행(一處行)이라서 돈돈(頓頓)의 수행과 나아가 삼계육도(三界六道)와 4생(生)133) 등의 인과법(因果法)은 모두 남김없이 이 경전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선정 안에서 설한 법은 스스로의 근기를 따랐지만, 각각은 마땅함을 따라서 듣고 이해하고 행하고 증득하므로 이것은 선정의 바깥이기 때문에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는 아래의 네 가지 교이다.
【문】 『십구장』에서 말하기를, “소목은 방편의 시작과 끝을 통틀었으나 소류(所流)는 방편이 바로 중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답】 『십구장』에서 말하기를, “처음으로 믿을 때에는 무생불법(無生佛法)에서 갖가지 이름으로 제목을 하니, 이 때문에 방편의 처음에 통한다. 소목에서 소유한 법을 실제로 증득할 때는 오직 무주(無住)의 뜻이라서 실제의 이름과 다름이 없는 것을 소목이라고 이름한다. 이처럼 소목은 실제가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방편의 끝에 통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방편의 시종(始終)과 방편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시종은 곧 이 경전이고, 방편은 곧 아래의 네 가지 교이기 때문에 구별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소목이 방편의 시종에 통한다고 하는가?
【답】 길을 가는 사람이 처음 출발한 곳과 마침내 다다른 곳이 같은 길이 아닌데도 길의 시종이라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이는 방편의 시종이다. 이 무생무명처(無生無名處)와 머묾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시종은 이 경전이며, 소류(所流)는 방편으로서 곧 중간이다.
【문】 처음으로 믿을 때라는 것은 화엄을 믿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이른바 소목 가운데 비로소 진실을 잡은 때가 비로소 믿는 것이 된다. 의상 화상은 말하기를, “삼승법은 믿음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지엄대사는 말하기를, “점교(漸敎)로서 믿음이 생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아래의 네 가지 교이다.
하나의 법상(法相)이 서로 참여하는 동교(同敎)에서 묻는다.
【문】 하나의 법상이 서로 참여한다고 이름한 것은 1승을 3승에 드리워서 뜻을 얻은 것인가? 아니면 3승을 1승에 참여해서 뜻을 얻은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중의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앞의 글에서 ‘1승에 또한 3승의 법상(法相) 등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의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3승이 1승에 참여한 뜻인데 이는 바로 별교(別敎)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에서 법상이 서로 참여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뜻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 동교일승(同敎一乘)이라는 것은 1승에서 3승에 드리웠다는 뜻으로 이름을 얻었으니, 이른바 ‘3승 중에서 또한 인다라미세(因陀羅微細) 등을 설하였으나 주인과 짝을 갖추지 못했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동교일승(同敎一乘)은 아래로부터 참여한 뜻으로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은 1승에도 또한 3승의 법상이 있으니, 이른바 ‘10안(眼)에도 또한 5안(眼)이 있고 나아가 뜻과 이치가 모두 구별된다’고 한 것과 같다. 앞에서 이미 뜻과 이치는 모두 구별된다고 말하였으니, 위에서 참여한 뜻은 별교이지 동교는 아니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으니, 앞에서는 이름을 들었고, 두 번째 ‘위여(謂如)’ 아래에서는 상(相)을 해석하였으며, 세 번째, ‘차즉(此卽)’ 아래에서는 결론을 맺었고, 네 번째, ‘시즉(是卽)’ 아래에서는 그 이유이다. 또한 ‘인다라미세를 설한 것이 있다’는 것은 『유마경』(維摩經)』에서, “거사(居士)의 집은 3만 4천의 사자좌(師子座)를 수용하니, 높이가 8만 4천 유순이다”라고 한 것 등 때문이다. 또한 화장세계(華藏世界)를 설하였다는 것은 『범망경(梵網經)』에서 연화대장세계(蓮華臺藏世界)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뜻과 이치가 모두 구별된다는 것은 비록 5안(眼)이지만 10안중의 5안이요, 비록 6통(通)이지만 10통 중의 6통이기 때문에 3승의 5안이나 6통과는 구별된다.
두 번째는 방편을 융섭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1승이 된다는 것은 별교이며, 모두 1승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은 동교이다. 여러 곳의 글에서 말하기를, “일승소목(一乘所目)ㆍ일승소류(一乘所流)ㆍ일승방편(一乘方便)이기 때문에 1승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는데, 일승소목ㆍ일승소류ㆍ일승방편의 1승은 별교일승이며, 명칭에 즉해서 1승이라 한 것은 동교일승(同敎一乘)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아래 네 가지 교의 법은 전체적으로 화엄일승(華嚴一乘)의 방편이기 때문에 모두 1승이라고 이름한다. 경전에서 말하였다는 것은 『법화경』의 방편품이다.
【문】 이 경전의 글로는 어느 1승을 증명하였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증명함은 모두 1승을 이름한 것이니, 이른바 법화경은 동교(同敎)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전체적으로 1승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1승이니, 이른바 “모두 일대사(一大事)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별교일승의 일대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초의(初義)는 무엇을 회통하여 말한 것인가?
【답】 『법화경』에서 많은 뜻을 갖추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별교일승의 뜻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온갖 지은 바가 있음이 모두 일대사가 된다는 것은 제7근(根) 가운데 모든 닦은 것과 더불어 모두 1승으로 회향하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청량 국사 징관(澄觀)은 불분오의(不分五義)의 세 번째에서 말하기를, “원래 성인의 본래 의도는 일대사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화엄별교(華嚴別敎)를 증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세 번째는 소류(所流)의 밝힘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경전에서 말하였다는 것은 『법화경』(法華經)』의 「약초유품(藥草喩品)」이며, 또 경전에서 말하였다는 것은 『승만경(勝鬘經)』이다. 여등(汝等)이라는 것은 성문(聲聞)을 말하고, 비니(毗尼)는 소승의 계율이다.
【문】 지금 3승은 1승으로부터 흐른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글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소승은 대승(大乘)으로부터 흘렀기 때문에, “자네들이 행한 것은 보살도(菩薩道)이다”라고 하였고, 또 “비니(毗尼)는 대승이다”라고 하였다. 이 예에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대승은 1승으로부터 흘렀기 때문에 대승이 곧 1승인 것이며,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면서 증명한 것이다.
네 번째는 뛰어난 문에 나아간 것이다. 별교에서 조망한 것에 비록 권교와 실교의 다른 것이 있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동교에서 삼승 속의 대승은 권교가 되고,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실교가 되므로 권교와 실교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뜻은 권교의 뜻이니, 앞에서와 같이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별교일승에서 합하였으므로 권교와 실교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의 뜻에서는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삼승의 대승에 합하였고, 뒤의 뜻에서는 별교일승에 합하였다. ‘경운(經云)’ 및 ‘우운(又云)’ 등은 『법화경』의 「방편품」이다.
다섯 번째는 교사심세(敎事深細)이다. 경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는 것은 『법화경』의 「수량품(壽量品)」이다. 「소전장(所詮章)」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석가모니의 보토(報土)가 영축산(靈鷲山)에 있다고 설하였으니, 가령 『법화경』에서, ‘나는 항상 영산(靈山)에 있다’고 말한 것 등이다. 법화론주(法華論主)는 보신보리(報身菩提)라고 해석하였으니, 이것은 일승동교(一乘同敎)를 기준으로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법화에서도 또한 1승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그 처소가 교(敎)를 따랐으므로 물듦에 즉해서 청정함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법화를 설하는 곳이 곧바로 실교(實敎)가 되는 것이다.”
영산(靈山)은 물든 국토이지만 물듦에 즉해서 청정함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인천(人天)은 겁(劫)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지만, 나의 국토는 항상 편안하고 안온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가르침은 이미 깊고 세밀하고, 처소도 또한 교를 따라서 깊고 세밀하기 때문에 교사심세(敎事深細)라고 말하였으니, 사(事)는 처(處)와 같다.
여섯 번째는 여덟 가지 뜻[義]의 의취(意趣)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섭론(攝論)의 송(頌)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부류를 이끌어 포섭하고 남은 것을 임의로 지니는 것은 부정종성(不定種性)134)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 때문에 1승법과 무아와 해탈 등을 설하였다. 따라서 성품[性]이 똑같이 두 가지의 뜻을 얻지 못하였으니, 기꺼이 교화하는 모든 부처님께서 1승을 설하셨다.”
『화엄오십요문답(華嚴五十要問答)』에서 밝힌 것과 같다는 것은 그 속에서 “또 1승이라는 말과 글자는 몇 개의 뜻이 있기 때문에 설한 것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여덟 가지의 의미로 설한 것이 있다”고 한 것이다. 첫 번째는 부정기성(不定機性)의 성문이 인(因)과 과(果)를 통하였기 때문에 1승을 설하였다. 두 번째는 부정성(不定性)의 보살을 정(定)해서 소승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그 법에 의거하면 진여(眞如)가 바로 1승이니, 모든 승(乘)이 다 진여에 의지하여 체(體)로써 상(相)을 융섭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무아(無我) 등에 의거하면 나와 남의 이치가 없어서 이미 법에 통한 것이니, 대승과 소승이 함께 무아의 이치에 의지하여 통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해탈 등에 의거한 것이니, 대승과 소승의 모든 승(乘)이 번뇌장(煩惱障)을 벗어나서 통하였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성(性)이 같지 않은 것에 의거하면, 성문신(聲聞身) 속에서 먼저 보살종성(菩薩種性)을 닦고 뒤에 성문(聲聞)에 들어가니, 성(性)이 두 곳에 통하는 것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두 가지의 의미를 터득한 것에 의거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처음의 두 가지 의미란 것은 부처님의 뜻이 일체 유정(有情)을 거두어 함께 자체(自體)의 의요(意樂)를 얻도록 하고자 함이니, ‘내가 이미 부처가 되었듯이 저들도 또한 부처를 이루리라’는 것이 이 의요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 자체라는 것은 법성(法性)을 자체로 삼은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이 먼저 저 성문을 위하여 수기(授記)하신 것은 성문의 평등한 의요(意樂)를 발하고자 한 것이니, ‘우리들은 부처님과 더불어 평등하며 다를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뜻을 위해서 모든 성문 등에게 평등하게 수기해 주셨으니, 부처의 평등이라는 의미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뜻이란 ‘일언(一言)’ 이하에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 번째, 진실로 성문을 융섭한 것은 자체의 의요를 좇아서이고, 두 번째, 진실로 보살이라는 이름은 성문과 같고 보살이 교화로 성문이 된 것이다. ‘일수기(一授記)’ 아래는 두 가지의 뜻을 갖추고 있으니, 하나의 수기의요(授記意樂)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교화하는 의미에 의거하면, 부처는 성문을 위하여 성문불(聲聞佛)이 되시니, 성문과 같이 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성문행(聲聞行)을 닦게 하려는 까닭이다. 소승의 부처와 같음을 나타낸 것은 지엽적인 것을 거두어서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나의 이 몸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1승인데, 능연(能緣)의 교화하는 마음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1승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의 의미를 기준으로 해서 성문승을 개괄하면 본래 하나인데, 오직 성문인이 자법(自法)을 깨닫지 못하고서 말에 다른 뜻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니, 어리석게 성문승에 머물러서 어리석음을 따르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 꾸짖는 것이다. 지금 1승이 구하는 것이란 이러한 병통에 의거하여 구별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십의방편(十義方便)을 기준으로 한 가운데 『공목장』(孔目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승의(一乘義)는 나누어서 구별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올바른 승(乘)이고 두 번째는 방편승(方便乘)이다. 올바른 승은 『화엄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방편승은 나누어 구별하면 열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삼보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니, 불보(佛寶)는 1승이고 법보(法寶)와 승보(僧寶)는 3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부처님은 다함이 없는 것과 같으나, 법보와 승보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4제(諦)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니, 멸제(滅諦)는 1승이고 3제(諦)는 3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멸제(滅諦)는 다함이 없으나, 3제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2제(諦)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니, 제일의제(第一義諦)는 1승이고 세제(世諦)는 3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제일의는 다함이 없는 것과 같으나 세제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허물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니, 두려움이 없는 것은 곧 1승이고 두려움이 있는 것은 곧 3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여래장(如來藏) 등에 의지하면135) 허물이 없는 것이 곧 다함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6식(識) 및 심법지(心法智)의 일곱 가지 법이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음이 온갖 고통을 심지 않고 고통을 싫어해서 열반을 즐겨 구하는 것이 아니니, 이 속제(俗諦)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인연에 의지할 뿐 자재(自在)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인(人) 및 지(智)에 대하여 분별함이다. 세 종류 사람이 있어서 세 종류의 지(智)를 이루니, 세 종류의 지(智)라는 것은 첫째,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매우 깊은 법(法)을 성취하면 지혜가 제일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둘째,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수순법(隨順法)을 성취하면 지혜가 두 번째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셋째,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모든 깊은 법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세존에게 미룬다면, 나의 경계가 아니고 오직 부처님께서 아는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사람이다. 앞의 한 사람은 1승지(一乘智)이고 뒤의 두 사람은 3승지이다. 무엇 때문인가? 앞에서 첫 번째의 지혜는 증득한 지혜로서 동등하게 다함이 없기 때문이요, 뒤의 두 가지 지혜는 진실한 법을 아직 증득하지 못하여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승만경(勝鬘經)』에 의하여 설한 것이다.
여섯 번째는 이해한 바에 대한 것이다. 법의 허망함을 깨달아서 진실의 무분별에 계합한 것은 글귀에 따라서 뜻을 해석하면 삼승법이고, 법의 허망함을 깨달아서 진실의 무분별에 계합하면 일승법이다. 무엇 때문인가? 무분별에 계합하는 것이 동등하게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글귀를 따라서 취한 것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능가경(楞伽經)』의 뜻에 의지하여 설하였다.
일곱 번째는 1승ㆍ3승ㆍ소승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니, 1승은 1승이고 3승 등은 3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1승은 곧 다함이 없으며, 3승은 곧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대승ㆍ중승ㆍ소승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니, 대승은 곧바로 1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대승은 존귀하며 뛰어남이 다함이 없으며, 중승과 소승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가령 경전에서는 3승을 회통해서 1승에 귀일한다[會三歸一]고 한 것과 같다.
아홉 번째는 세간(世間)ㆍ출세간(出世間)ㆍ출출세간(出出世間)에 대하여 분별한 것이니, 출출세간은 곧바로 1승이고 나머지는 3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출출세간은 뛰어나서 다함이 없는 것과 같으며, 나머지 두 가지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법화경』의 계외로지(界外露地)에서 별도로 수레를 찾았다는 것이 곧 그 일이다.
열 번째는 비유에 대하여 분별하였으니, 왕의 상투 중에서 명주(明珠) 및 대왕(大王) 등은 곧 1승이고, 보주(寶珠)를 매단 자네의 옷 속 및 빈궁한 아들 등은 곧 3승이다. 무엇 때문인가? 상투의 구슬은 왕이 매우 깊은 곳에 감추었기 때문이고, 나머지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화경』의 설에 의지하였다.
위에서부터 밝힌 것은 『권속경(眷屬經)』 중에서 원만히 통하여 다함이 없는 법장(法藏)의 일승교의(一乘敎義)를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방편처(方便處)에서 1승의 이름을 보임으로서 들어가려는 자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도록 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은 설을 지었다.
세 번째, ‘전체적으로 결론을 지음’ 중에서 위의 모든 뜻에 의지하였다고 하는 것 등은 위에서 인용한 성교(聖敎)를 찾는 것이니, 모두 3승이기 때문에 본종(本宗)을 따라서 정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두 번째에서 2승을 밝혔다는 것 등은 1승을 열어서 2승이라 하였고, 2승을 열어서 3승이라 하고 나아가 무량승(無量乘)에 이르는 것이다. 숫자로는 하나로부터 여섯에 이르렀으나136) 뜻으로는 넓고 좁은 것이 없다.
【문】 2승ㆍ3승ㆍ4승과 5승 등에서 각각 1승을 밝힌 것은 어떠한 1승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별교일승(別敎一乘)이니, 이른바 모든 승을 나누어서 본말을 융섭하여 각각 다섯 가지 교에 통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모든 승을 나누어 본말을 융섭한 것으로서 오직 아래의 네 가지 교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동교일승이다. 3승을 밝힌 것에서 1승과 3승, 소승의 1승은 오직 화엄일승(華嚴一乘)이고, 나머지는 모두 동교(同敎)이다.
【문】 어리석은 법에 합해져서 마음을 돌이킨 것은 모두 소승이라서 세 가지가 있을 뿐이라는 것은 2승을 밝힌 것인데, 무엇 때문에 결론에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문 앞에 있는 세 가지의 수레를 기준으로 하면 세 가지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또 처음에는 1승을 기준으로 하였고, 다음에는 3승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뒤에서는 소승을 기준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문】 처음 단락에 또한 3승이 있고 다음 단락에 또한 소승이 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답】 처음 단락에 비록 3승이 있으나 오직 1승을 종(宗)으로 하였고, 다음 단락에 비록 소승이 있으나 오직 3승을 취하여 종(宗)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記】 세 번째에서는 3승에도 세 종류가 있음을 밝힌다. 첫 번째에서는 1승ㆍ3승ㆍ소승을 3승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법의 본말(本末)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므로 위에서는 1승을 열었고 아래에서는 법에 어리석음을 열었기 때문에 삼승이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 법에 어리석은 2승이 유인된 여러 아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이므로 3승 외에 따로 소승이 있음을 아는 것이며, 또 세 가지 수레로 여러 아들을 유인하였으므로 소승 외에 따로 3승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세 사람이 모두 노지(露地)로 나오고 나서도 다시 따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받았으니, 이 때문에 3승 외에 따로 1승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문】 법에 어리석은 2승이 유인된 아들 속에 있다는 걸 어떻게 능히 아는가?
【답】 저 법에 어리석은 2승은 대승종교(大乘終敎) 이상을 잡고 나서는 함께 구경(究竟)에서는 삼계를 벗어난다고 이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가? 사람으로써 집착하고 있는 번뇌를 아직 영원히 끊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며, 다만 능히 꺾어서 항복137)시킨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미륵소문경론(彌勒所問經論)』에서 말하기를, “일체(一切)의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사람은 능히 참된 4무량(無量)을 닦지 못하고 능히 구경(究竟)으로 모든 번뇌를 끊지 못하니, 단지 일체의 번뇌를 꺾어 항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경전에서 말하기를, “자네들이 얻은 열반은 참된 멸도(滅度)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경전에서 말하기를, “이 법을 믿지 않으면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기를, “아라한 등의 과(果)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아라한의 참된 뜻은 대승에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로 인해 대승에서는 반드시 세 가지를 갖춘 것이다. 그러므로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에서 말하기를, “이와 같은 대승에는 또한 3승이 있으니, 그것을 삼장(三藏)이라 한다. 즉 성문장(聲聞藏)ㆍ연각장(緣覺藏)ㆍ보살장(菩薩藏)이니, 오직 대승 속에서만 이 삼장이 있으며 나머지 2승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입대승론(入大乘論)』에서도 또한 이 설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대문 밖의 세 가지 수레는 법에 어리석은 2승과 통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법화경(法華經)』은 소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유가(瑜伽)의 『성문결택론(聲聞決擇論)』 및 『잡집론(雜集論)』 등의 논(論)에서 성문 등 교(敎)의 행위과(行位果) 및 단혹분제(斷惑分齊)를 밝힌 것과 『파사론(婆沙論)』ㆍ 『구사론(俱舍論)』 등과 같지 않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1승ㆍ3승ㆍ소승이 분제(分齊)가 다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공(共)이고 둘째는 불공(不共)이다. 공(共)이라고 말한 것은 『마하연경(摩訶衍經)』 및 나머지 『방등경(方等經)』을 말하는데, 모든 성문에게 공통으로 설한 것을 많이 모았기 때문이며, 불공(不共)은 『부사의경(不思議經)』과 같은 것인데 성문과 더불어 공통으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에서 『부사의경(不思議經)』이라고 한 것은 그 논(論)에서 스스로 화엄을 가리킨 것인데, 오직 별교일승(別敎一乘)을 설하였기 때문에 불공(不共)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뜻에 준해서 알 수 있는 것으로는 가령 『사아함경(四阿含經)』도 불공(不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오직 법에 어리석은 2승의 가르침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대품등경(大品等經)』은 3승의 중생을 모두 모아서[共集] 삼승법(三乘法)을 통틀어 설하였고 3승의 이익을 갖추어 획득하였기 때문에 공(共)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대승에 통하는 소승은 법에 어리석은 2승이 아니며, 소승에 통하는 대승도 1승이 아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뜻에 의하였기 때문에 양(梁)의 『섭론(攝論)』에서 말하기를, “잘 성립한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소승이고 두 번째는 3승이며 세 번째는 1승이다. 세 번째가 최고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잘 성립하였다고 이름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일이다. 만약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등을 말로 설할 때에 한 목소리를 다르게 이해하여 소승과를 얻었기 때문에 3승이 있다고 한다면, 화엄을 설할 때에 어찌 다르게 이해하여 소승과를 얻지 않았겠는가? 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등을 설할 때에 어찌 다르게 이해하여 대승과를 얻지 않았겠는가? 이 때문에 3종(宗)의 명칭이 각각 구별된다는 이치를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승ㆍ중승ㆍ소승이 3승이 된다. 이것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 번째는 1승을 융섭한 것이 대승과 같고 법에 어리석은 2승을 합한 것이 소승과 같았기 때문에 오직 세 가지가 있는 것이다. 교리(敎理)를 알 수 있다는 것은 1승을 잡아서 밝힌 것이다. 두 번째는 대승에 스스로 3승이 있으니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세 번째는 소승에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소승의 논에 스스로 성문법(聲聞法)ㆍ연각법(緣覺法) 및 불법(佛法)이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법은 다만 자비와 사랑의 행 등으로서 2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세 번째에서 3승을 밝힌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이름을 표제하였고, 다음으로 일자(一者)의 아래에 상(相)을 해석하였는데, 세 가지가 있다. 처음에서는 1승ㆍ3승ㆍ소승을 3승이라고 하였고, 다음에서는 대승ㆍ중승ㆍ소승을 3승이라고 하였고, 뒤에서는 소승에 스스로 3승이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서 개별적으로 나눈 1승ㆍ3승ㆍ소승이다.
【문】 여기에서 1승은 어떠한 1승인가?
【답】 별교일승(別敎一乘)이다.
【문】 여기에서 동교(同敎)를 바로 밝혔는데 어떻게 별교(別敎)라고 말하는가?
【답】 다만 겸하여 밝혔을 뿐이다. 분상문(分相門)과 같은 것은 바로 별교를 밝혔으나, 덕량차별(德量差別)에서 겸하여 동교(同敎)의 분상문을 밝혔는데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다.
【문】 겸하여 별교(別敎)를 밝혔음을 어떻게 아는가?
【답】 여기에서 『지론(智論)』의 공(共)ㆍ불공(不共)의 두 가지 반야를 인용하였는데, 불공(不共)으로써 별교를 증득하였고 공(共)으로써 동교를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또 양의 『섭론(攝論)』에서 잘 세웠다는 1승 또한 화엄일승(華嚴一乘)이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앞뒤 여러 문(門)의 1승도 또한 별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답】 만약 그렇다면 곤란한 점은 동교가 응당 1승이 아닌 것인가? 그러나 1승의 이름으로 통하였기 때문에 앞뒤 여러 문의 1승은 오직 동교일 뿐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 속의 1승도 또한 마땅히 동교인가?
【답】 이 단락 아래에서 “두 번째는 대승ㆍ중승ㆍ소승이 3승이 되니, 여기에 세 가지의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앞뒤 여러 문에서 밝힌 세 가지 뜻의 처음 문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1승ㆍ3승ㆍ소승을 3승이라고 이름한 것은 나머지 문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의 1승은 바로 별교이다. 그러므로 이 문에서 바야흐로 이르기를 “이것은 법의 본말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다”라고 하였으니, 근본적인 것은 별교일승이고 지엽적인 것은 하교삼승(下敎三乘)이기 때문에 그런 줄을 아는 것이다. ‘법의 본말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뒤의 여러 문에 각각 1승이 있으나 이 속에 치우쳐서 바야흐로 이러한 말이 있는 것이니, 이 가운데 1승이 바로 별교임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1승을 열었고 아래에서 어리석은 법을 열었다’는 것은 이제 앞 단락을 열어서 1승과 합하면 3승의 1승과 같고, 어리석은 법과 합하면 마음을 돌이킨 어리석은 법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승을 밝힌 단락은 처음의 문에서 비록 1승을 열었으나 어리석은 법과 합해서 마음을 돌이킴과 같음을 2승으로 삼은 것이요, 다음 문에서 비록 어리석은 법을 열었으나 마음을 돌이킴과 달라서 1승과 합하여 3승과 같음을 2승으로 삼은 것이요, 지금 이 문에서는 1승을 열어서 3승과 다름은 어리석은 법을 연 것이 마음을 돌이킨 것과 다르기 때문에 “위에서 1승 등을 열었다”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앞에서 1승에 합치하여 3승과 같아진 1승을 열었다면, 지금 이 1승도 또한 마땅히 동교인데 무엇 때문에 별교라고 말하는가?
【답】 일종의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동교를 기준으로 해서 보고, 별교를 기준으로 해서 보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문소이(問所以)’ 이하는 우법이승(愚法二乘)이 인용된 뜻에 있음을 나타내었으니, 묻고 대답한 것이 그대로 2승이 된다. 답 중에서 ‘먼저 저 어리석은 법으로써 절복(折伏)에 이르렀을 뿐이다’라고 한 것은 스스로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나타낸 것이다. 나중의 ‘시고미륵(是故彌勒)’ 아래는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증명한 것이다.
【문】 저 어리석은 법으로써 대승종교(大乘終敎) 이후를 기준으로 하면 모두 구경(究竟)으로 삼계를 벗어났다고 이름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만약에 초교(初敎)를 기준으로 하면 2승도 또한 삼계를 벗어난 것인가?
【답】 그렇다. 「소전장(所詮章)」에서 말하기를, “아래가 위와 같으니, 또한 2승도 미혹된 장애를 완전히 끊고 소지장(所知章)을 나누어 끊음을 인정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초교도 삼계를 벗어난 것을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 세 가지 종류의 수레는 모두 초교를 아우른 것이 아닌가?
【답】 통틀고 간략함 속의 3승이 세 종류의 수레가 되기 때문에 초교 또한 세 종류의 수레 가운데에 아울러 있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초교도 또한 어리석은 법을 행하는 2승이 삼계를 벗어난 것을 인정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수레에 아울러 있는 것인가?
【답】 세 종류의 수레는 비록 통틀어서 3승 속에 있으나, 지금은 하나의 대승의 의설(義說)에 합함을 기준으로 설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소전장(所詮章)」에서 말하기를, “또한 옳다고 할 수 있으니, 앞에서는 3승 가운데 성문을 기준으로 하였고, 여기서는 어리석은 법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하나의 대승의 뜻에 합치됨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세 번째, ‘시고대승(是故大乘)’ 아래는 대승 가운데 3승을 갖추었음을 나타내었다.
네 번째, “그러므로 마땅히 1승임을 알라”에서부터 “그 일에 즉해서”에 이르기까지는 앞의 것으로 인하여 1승ㆍ3승ㆍ소승의 구별을 나타내었다.
다섯 번째, ‘약언설대품(若言說大品)’ 아래는 다른 사람이 세운 것을 막아서 3종(宗)이 구별됨을 나타내었다. 어떤 사람이 해석하여 말하기를, “『대품경(大品經)』에 3승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목소리를 다르게 이해해서 소승과를 얻은 것일 뿐이니, 아함이승(阿含二乘)과 더불어 이것은 일종의 2승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뜻을 막기 위하여 “만약 대품 등의 경전을 말로써 설할 때”에서부터 “대승과(大乘果)를 얻는 것인가?”에 이르기까지를 말한 것이다.
【문】 만약 화엄을 말로써 설할 때에 다르게 이해하여 소승과를 얻은 자가 있지 않다고 한다면, 『화엄경』의 소목법(所目法) 가운데에서는 각각의 근기에 따라서 어떤 이는 소승으로 이해하고 어떤 이는 3승으로 이해하니, 어찌 다르게 이해하여 소승과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답】 뜻이 다르다. 소목(所目)의 뜻은 2주일 동안 동시에 5승ㆍ3승ㆍ무량승의 법을 갖추어 설하였으나, 소승 등은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각각 이해한 것에 집착하니 이것이 아래의 네 가지 교요, 큰 근기의 사람은 이와 같이 다함이 없는 법을 단박에 깨달으니 이것은 『화엄경』이다. 이 때문에 뜻이 다른 것이다.
두 번째는 대승과 중승과 소승이 3승이 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138)
첫째는 1승과 합하여 3승과 같아지고 어리석은 법과 합하여 마음을 돌이킨 것과 같아진 것을 3승이라 하며, 둘째는 대승 속에 스스로 3승이 있는 것이며, 셋째는 소승 속에 또한 3승이 있는 것이다. 처음에서 어리석은 법과 합하여 소승과 같아졌기 때문에 오직 3승이라는 것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를 갖추어서 말한다면 응당 “어리석은 법과 합한 것이 마음을 돌이킨 것과 같아져서 모두 성문과 연각이 되기 때문에 오직 3승일 뿐이다”라고 해야 한다.
교리(敎理)를 알 수 있다고 한 것에서 교는 성교(聖敎)이고, 이(理)는 도리(道理)이다. 모든 성교(聖敎)에서 대승ㆍ중승ㆍ소승 및 보살ㆍ연각ㆍ성문을 많이 설한 것이 이처럼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은 1승을 기준으로 해서 밝힌 것이다.
【문】 이 중에서 1승을 융섭하여 대승과 같아졌다는 뜻은 앞의 두 번째에서 2승을 밝히는 가운데 이르길, “1승과 합하여 3승과 같아졌다는 뜻이니, 동일해서 구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앞에서는 3승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여기에서는 1승을 기준으로 밝혔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앞에서는 처음의 문에서 1승을 기준으로 해서 밝혔다는 것을 대(對)하였기 때문에 3승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말하는 것이요, 여기에서는 뒤의 대승에 스스로 3승이 있고 소승에 또한 3승이 있다고 말한 것에 대(對)가 되기 때문에 1승을 기준으로 해서 밝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 여기에서 또한 처음 단락의 첫 번째에서 1승과 3승과 소승을 3승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에 대한 것은 여기에서 3승을 기준으로 해서 밝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1승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처음 문의 1승은 별교일승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세 가지 뜻을 기준으로 해서 3승을 논한 처음의 문[初門]이니, 곧 이것은 동교일승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에서 대승에 스스로 3승이 있다는 것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앞에서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을 인용하여 대승에서 3승을 갖춘 것을 밝혔기 때문에 그곳을 가리킨 것이다.
세 번째에서는 소승에 또한 3승이 있다고 하였다.
【문】 이 단락은 바로 두 번째의 대승과 중승과 소승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다는 것의 제3문(門)일 뿐인데, 앞에서 이르기를 “세 번째로 3승을 밝힌 것에 또한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한 것의 제3문은 무엇인가?
【답】 이 단락은 두 가지 면을 기준으로 해서 본 것이니, 이른바 세 번째로 3승을 밝힌 것에 또한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한 것을 멀리 조망하면서 제3문으로 삼았으며, 두 번째로 대승과 중승과 소승이 3승이 되니 여기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을 가깝게 조망하면서 또한 제3문이라고 하였다.

【記】 네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4승이라 하는데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에서는 1승과 3승이 4승이 된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1승을 연 것이 3승과 달라서 두 가지를 합하여 성문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1승ㆍ3승ㆍ소승ㆍ인천(人天)을 4승이 된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전체적으로 열었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에서는 3승과 인천이 4승이 된다고 말한 것인데, 위의 것을 준하여 알 수 있다.
다섯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5승이 되는데 또한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에서는 1승ㆍ3승ㆍ소승이 5승이 된다고 말하였고, 두 번째에서는 3승ㆍ인(人)ㆍ천(天)이 5승이 된다고 말하였고, 세 번째에서는 불승(佛乘)과 더불어 2승ㆍ천(天) 및 범(梵)이 또한 5승이 된다고 말하였으니, 모두 준하여 해석하면 알 수 있다.
여섯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무량승(無量乘)이라고 하는데, 소위 일체 법문(一切法門)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서 말하기를, “하나의 세계에서 1승을 설함을 듣는 것이니, 그것은 2ㆍ3ㆍ4ㆍ5승에서부터 무량승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상으로 승(乘)의 분류하는 일을 마친다.
【釋】 네 번째 어떤 사람은 4승이 된다고 한 것에서 1승이 3승과 다름을 열었다는 것은 앞의 3승이 대승의 1승과 같고 3승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성문(聲聞)을 합하였다는 것은 갖추어 말하면 마땅히 두 개의 성문과 연각을 합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린의 뿔에 대하여 독각(獨覺)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성문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모두 성문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열어 보인 것이라 함은 나머지 문을 열어서 3승의 1승 및 어리석은 법을 합한 것이고, 여기다 인천(人天)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문】 2승을 밝히면서 처음에서는 1승을 기준으로 하였고, 다음에서는 3승을 기준으로 했으며, 3승을 밝히면서 처음에서는 1승을 기준으로 하였고, 다음에서는 3승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5승을 밝히면서도 또한 이러하였다. 그렇다면 4승에서 제2문도 또한 3승인가?
【답】 전후의 문에 준하면 3승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에서 아울러 1승을 밝혔고 3승에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열어 보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의 것을 준하면 알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소승을 기준으로 한 것 속에서 이르기를 “소승을 논한 것에 스스로 성문법(聲聞法)ㆍ연각법(緣覺法)과 모든 불법(佛法)의 3승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다섯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5승(乘)이 된다고 하였다.
【문】 3승과 인천(人天)이 5승이 된다는 것은 앞에서 3승과 인천이 4승이 된다는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구별된다. 이른바 앞에서는 이것은 소승 속의 3승이라 한 것이고, 여기서는 앞의 1승과 3승이 4승이 된다는 3승에다가 인천을 더하였기 때문에 5승이 된다.
부처님과 2승과 하늘 및 범(梵)이 5승이 된다는 것은 『승만경(勝鬘經)』에 의지해서 말하면, “모든 하늘 및 범승(梵乘)ㆍ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제불여래승(諸佛如來乘)이니 나는 이와 같이 승(乘)을 설한다”고 한 것이다.
세 번째, 증거를 인용한 것 중에서 하나의 세계에서 1승을 설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일승동교(一乘同敎)를 증명한 것이다. 혹은 2ㆍ3ㆍ4ㆍ5승이라고 한 것 등은 다음에서와 같이 증명한 것이라고 하였다.

【記】 두 번째, 본말을 융섭하였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모든 승(乘)을 회통하고 융섭해서 둘이 아닌 동일법계(同一法界)라는 걸 설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 번째는 민권귀실문(泯權歸實門)으로서 일승교이고, 두 번째는 남실성권문(攬實成權門)으로서 삼승교 등이다. 처음에서는 권교(權敎)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멸하기 때문에 3승이 곧바로 1승이면서도 3승을 장애하지 않으며, 뒤에서는 실교(實敎)와 다르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권교이기 때문에 1승이 곧바로 3승이면서도 1승을 장애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1승과 3승은 서로 융섭하여 그 체(體)에 둘이 없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두 개의 문이 모두 가지런한 것인데, 어떻게 다시 권교와 실교를 설하는 것인가?
【답】 의문(義門)이 다르기 때문에 권교와 실교는 항상 존재한다. 이치가 두루 통하기 때문에 전체(全體)에는 둘이 없는 것이니, 어째서 그런가? 권교가 일어난 것은 반드시 한결같이 실교에 의지한 것이니, 이 때문에 실교를 근거로 하면 실교는 잃어버린 것이 없다. 실교가 나타내는 것이 반드시 한결같이 권교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권교를 없애면 권교는 서지 못한다. 이 때문에 3승은 곧 1승이니, 비록 존립과 무너짐을 갖추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다함이 있으며, 1승이 곧 3승이니, 비록 감춤과 나타남이 갖추어졌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항상 다함이 없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용융(鎔融)에는 네 글귀가 있다. 첫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오직 1승이니 별교(別敎)와 같다고 말하였고, 두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오직 3승뿐이니 3승 등의 교와 같아서 1승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세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하니 동교와 같다고 하였고, 네 번째에서 어떤 사람은 1승도 아니고 3승도 아니어서 위에서 말한 과해(果海)와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네 가지 뜻 속에서 1승의 문에 따르는 것은 모두 법체(法體)를 온전히 거두었으며, 이 때문에 모든 승(乘)은 어떤 때는 존립하고 어떤 때는 허물어지면서도 서로 구애되지 않은 것이다. 미루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으니, 나머지 승(乘)을 해석하고 체(體)를 밝히는 것 등은 아울러 따로 설한 것과 같다.
이상으로 일승의 건립을 밝힌 것을 마친다.

【釋】 두 번째에서 본말을 융섭한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은 바르게 해석한 것[正釋]이니 본말동교(本末同敎)를 융섭하였고, 두 번째 ‘문약(問若)’ 아래는 문답을 통하여 의심을 제거하였고, 세 번째 ‘유차(由此)’ 아래는 구절의 수를 요간(料簡)139) 하였다.
처음의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장(章)의 문을 열었고, 다음, ‘초즉(初卽)’ 아래에서는 그것의 장애 없음을 나타내었다. 처음에서 “이러한 동교(同敎)의 모든 승(乘)은 융섭하고 회통해서 둘이 없는 동일한 법계(法界)이다”라는 것은 앞에서 모든 승(乘)을 나눈 동교를 융섭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근본적인 것은 화엄이고, 지엽적인 것은 하교(下敎)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해석으로는 네 가지 교 이상을 기준으로 하면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근본적인 것이 되고, 세 가지의 수레는 지엽적인 것이 되니, 앞에서 나눈 모든 승(乘)을 융섭한 동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문답에서 물은 뜻은 3승이 곧 1승이나 3승을 장애하지 않고, 1승이 곧 3승이나 1승을 장애하지 않아서 두 문을 모두 가지런히 하였기 때문에 권교는 권교를 아우르고 실교는 실교를 아우르는데 어째서 3승은 권교이고 1승은 실교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대답 속에서는 먼저 바르고 간략하게 답하였고, 다음에서는 증거를 들었고, 나중의 ‘위권(謂權)’ 아래는 자세히 대답한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 뒤의 물음에 대답하였고, 뒤에서는 앞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자세하게 대답함’ 중에서 ‘권기(權起)’에서부터 ‘실부실(實不失)’에 이르기까지는 열등함이 일어난 것이 반드시 수승함에 의지하였기 때문이요, ‘실현(實現)’에서부터 ‘권불립(權不立)’에 이르기까지는 수승하게 나타남이 반드시 열등함에 의지하지는 않기 때문이요, ‘시고(是故)’에서부터 ‘필유진(必有盡)’에 이르기까지는 수승하게 일어남이 반드시 열등함을 빌리지는 않기 때문에 다함이 있는 것이며, ‘일승즉삼(一乘卽三)’에서부터 ‘항무진(恒無盡)’에 이르기까지는 열등함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수승함을 빌리기 때문에 다함이 없는 것이다.
존괴(存壞)라는 것은 해섭문(該攝門)의 네 글귀에 준해서 말한 것이니, 1승은 곧 1승에 즉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허물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나아가 네 글귀는 1승에 즉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간직할 수 없는 것이다.
숨고 드러남[隱現]이란 1승이 3승에 즉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숨음[隱]을 기다리지 않고, 네 글귀는 3승에 즉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나타날 수 없는 것 등이다.
세 번째, 구절의 수를 요간(料簡)한 것 중에서 어떤 사람은 오직 1승뿐이라고 말한 것 등은 분상문(分相門)과 해섭문의 별교를 가리킨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오직 3승이라고 한 것 등은 분상문의 3승 및 해섭문의 1승이 곧 3승인 것을 가리킨 구절이다. 또 어떤 사람이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은 모든 승을 나눈 것의 1승과 3승을 가리킨 것이다.
【문】 동교(同敎)란 것이 장(章)의 처음에서 “첫 번째는 별교이고 두 번째는 동교이다”라고 말한 동교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같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광의(廣義)와 협의(狹義)가 있다고 한다. 처음의 뜻이란 것은 그 장(章)의 처음에서 동교를 간략하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나중의 뜻이란 것은 앞서의 동교이니, 아래의 네 가지 교를 통틀어서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 중의 동교란 『법화경』의 3승을 회통해서 1승에 돌아가도록 한 것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도신장(道申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 동교는 어떠한 뜻인가?
【답】 3승을 돌이켜서 1승에 돌아가도록 한 것이니, 이것이 이 경전의 종(宗)이기 때문에 동교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3승을 합한 것은 동교의 뜻일 뿐이다. 만약 1승의 방편에 들어간 것으로 동교의 뜻으로 삼는 것이라면, 다만 이 경전만이 아니라 이전과 이전의 모든 교에서도 이것은 동교라고 하였다. 장(章)의 처음에 나온 동교는 일승의 방편에 들어간 동교이니, 이 때문에 모든 교에 통하는 것이다. 이 중의 동교란 3승을 돌이켜서 1승에 돌아가도록 한 동교이기 때문에 구별된다.
【문】 이러한 뜻 속에서 모든 승을 나눈 3승이란 것은 혹시 오직 3승의 구절 속에서만 보이는 것인가?
【답】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분상문의 3승이니, 또한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3승 속에서 보인 것인가?
【답】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오직 3승뿐이라고 하는가? 가령 3승 등이 1승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이 동교와 같다고 하는 것인가?
【답】 성교(聖敎)는 구별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른바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고 말한 것은 오직 3승을 설할 뿐 1승을 설하지 않은 것이고, 혹은 성인의 가르침이 1승과 3승을 갖추어 설한 것이니,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오직 3승뿐이라고 한 것이며, ‘가령 3승 등’이란 것은 오직 삼승성교(三乘聖敎)를 설하는데 따라서 말한 것이다. 또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이 동교와 같다는 것은 『법화경』에서 1승과 3승을 갖추어 설하는데 따라서 말한 것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어떤 사람이 오직 3승뿐이라고 한 것 등’은 분상문의 3승 및 해섭문 중의 1승이 곧 3승인 것의 3승과 모든 승을 나눈 가운데의 3승을 가리킨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하다고 한 것 등’은 본말을 융섭하는 가운데 1승과 3승을 가리킨 것이요, 모든 승을 나눈 1승도 또한 1승 속에 속함을 보는 것이다.
【문】 일곱 번째의 뜻에서 동교일승(同敎一乘)은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을 어떻게 준거한 것인가?
【답】 소류(所流)를 밝힌 것과 방편을 융섭한 것에서는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하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소류의 동교 중에서 그 들어가는 것과 돌이키는 것을 구별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이다. 방편을 융섭한 문장에서 말하기를, “전체적으로는 1승의 방편이 되기 때문에 모두 1승이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또한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 속에서 보인다.
【문】 소류를 밝힌 것 및 방편을 융섭한 것은 아래의 네 가지 교를 통틀어 기준으로 삼아서 “곧 1승이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법화경』의 3승을 돌이켜 1승에 돌아가도록 한 것에 해당하는가?
【답】 아래 네 가지 교의 법은 일승소류(一乘所流)ㆍ일승소목(一乘所目)ㆍ일승방편(一乘方便)이기 때문에 곧 1승이니, 이 때문에 소류와 방편은 네 가지 교에 통한다. 그러나 경문의 증거로 미루어 보면 『법화경』에 의지할 필요가 있으니, ‘자네들이 행한 것은 보살도(菩薩道)이다’라는 글이다. 그러므로 소류와 방편은 도리어 3승을 돌이켜 1승에 돌아가도록 하는 뜻이기 때문에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에 해당한다. 이것은 앞의 두 가지 뜻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먼저 “일승교의분제(一乘敎義分齊)를 열면 두 개의 문의 동교가 된다”고 한 것은 방편을 융섭한 것 및 나머지 문을 회통하였기 때문에 광의(廣義)이고, 혹은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함이 동교와 같다는 것은 소류의 법화일승(法華一乘)이기 때문에 협의(狹義)이다.
【문】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을 아는 이유도 아울러 1승인가?
【답】 교의섭익(敎義攝益)에서 말하기를, “세 번째에서 문 앞에 있는 세 종류의 수레는 방편교를 연 것이 되고, 경계 밖에서 따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받은 것은 진실의 뜻을 보인 것이니, 이것은 동교일승(同敎一乘)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법화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교(敎)와 의(義)를 통틀어 기준으로 삼아서 동교일승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도 아울러 1승이다.
【문】 오직 진실의 뜻을 보인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이르기를 “이것은 동교일승에 해당된다”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회통하였는가?
【답】 앞에서 이미 말하기를, “맨땅의 소가 끄는 수레에는 저절로 교(敎)와 의(義)가 있으니 별교일승(別敎一乘)에 해당하고, 문 앞에 있는 세 가지 수레에는 스스로 교(敎)와 의(義)가 있으니 삼승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따로 두 개의 종(宗)을 밝혔기 때문에 3승을 돌이켜 1승에 돌아가도록 한 뜻을 기준으로 삼아서 문 앞에 있는 세 가지 수레를 교(敎)라 하였고,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의(義)라 하였다. 그러나 결론에서 이것은 동교일승(同敎一乘)에 해당된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1승과 3승도 아울러 1승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또한 1승이라고 한 것은 아래의 승교개합(乘敎開合)에서 말하기를, “두 번째에서 교(敎)로써 승(乘)을 융섭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1승으로서 교(敎)를 따라 다섯 가지가 있고, 나아가 또 하나는 동교일승의 일승이다”라고 말한 1승이다. 또한 3승이라는 것은 두 번째로 3승을 밝힌 것에 또 다섯 가지가 있고 나아가 다섯 가지 동교 속에 세 가지가 있는 것이라서 처음과 끝이 함께 동일하니, ‘자네들이 행한 것은 보살도(菩薩道)이다’라고 한 것의 3승이다. 그러므로 1승이기도 하고 3승이기도 한 것이 동교와 같다는 것은 소류의 동교일승인 것이다.
【문】 모든 승을 나눈 것 가운데의 3승과 분상문의 3승은 구별된다. 어째서 모든 승을 나눈 것의 3승이 “어떤 사람은 오직 3승이다”라는 구절에 속한다고 하는가?
【답】 분상문의 3승(乘)과 승을 나눈 3승은 다만 한 종류일 뿐이지만, 그러나 별교에 대비하였기 때문에 분상문의 3승이 된다. 이 3승이 동교임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승을 나눈 3승(乘)이 될 뿐이지 실제로는 1승이다.
【문】 두 번째로 2승을 밝히는 가운데 맨땅에 있는 소가 끄는 수레는 1승이 되고 문 앞에 있는 세 가지 수레는 3승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여기에서는 모두 동교일승(同敎一乘)이라고 하였는가?
【답】 한 가지 종류의 법화(法華)로 많은 뜻을 보였으니, 이른바 맨땅에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는 저절로 교(敎)와 의(義)가 있으니, 이른바 십십(十十)으로 다함 없이 주인과 짝이 구족한 것은 『화엄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두 번째 문 앞에 있는 세 종류의 수레에는 저절로 교(敎)와 의(義)가 있으니, 이른바 경계 안에서 교(敎)를 보인 것이 나오게 되어서 의(義)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별교(別敎)로서 화엄과 둘이 아니며, 문 앞에 있는 세 가지 수레는 아래의 네 가지 교이다. 덕량차별(德量差別)에서 동교를 기준으로 다른 뜻을 밝혔다고 한 것은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네 가지 교의 위에서 세운 것이고, 문 앞에 있는 세 가지 수레는 아래의 3승인 것이다. 문 앞에 있는 세 가지 수레는 방편교를 연 것이 되고, 경계 밖에서 따로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얻은 것은 진실한 뜻을 보인 것이 되니, 이것이 동교일승(同敎一乘)에 해당되는 것은 세 가지 수레와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가 모두 동교일승(同敎一乘)인 것이다. 그러므로 2승에서 밝힌 뜻과 덕량차별에서 동교를 기준으로 해서 밝힌 것은 같기 때문에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네 가지 교의 위에 세운 것이고, 세 가지 종류의 수레는 아래의 3승이다.
그러므로 모든 승(乘)은 간직되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한다는 것 등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직 본말(本末)을 융합하고 포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네 글귀에 통한다. 나머지 승(乘)의 이름과 체(體)를 해석한 것 등은 모두 따로 설한 것과 같다는 것은 혜원(慧遠:335~417)의 「별장(別章)」을 가리킨 것이니, 이른바 그 글의 일승장(一乘章)에서 일승의 이름을 해석한 것은 모두 체(體)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현덕(現德)140) 5년(958) 기미(己未) 8월에 마하갑수(摩訶岬藪)141)에서 『오교장(五敎章)』을 익힐 때에 기록하였다. 설법한 사람은 백운방(白雲房) 균여(均如) 대덕이고, 중부(重副)는 법응(法膺)법사이며, 기록한 사람은 개태사(開泰寺)의 이원(理原)법사이다. 개태사의 교장(敎藏)에 보관하였다.
현덕 7년(960) 경신(庚申)142) 여름, 강의할 때에 설한 것은 「소전장(所詮章)」의 기록이다. 설법의 주인은 균여대사승(均如大師僧)이고, 기록한 사람은 혜장(惠藏)법사이다. 개태사의 교장(敎藏)에 보관하였다.
법수사(法水寺)에 보관되어 있는 중권(中卷)에서는 방언(方言)을 해석한 것을 삭제하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오관산(五冠山) 마하갑사(摩訶岬寺)의 사문인 균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설법의 자리를 맡아서 대략의 해석을 피력하였다.
준풍(峻豊, 960~936) 3년(962) 임술(壬戌)에 균여 대덕은 법왕사(法王寺)에서 오랫동안 강설하였다. 대사께서 때때로 설한 것을 「의리장(義理章)」에 기록하였으니, 기록한 사람은 혜장법사이다. 옹희(雍熙, 984~987) 4년(987) 정해(丁亥) 4월 날짜에 마침내 베껴서 개태사의 교장에 보관하였다.
또 책에서 말하기를, “준풍 3년 임술에 경도(京都)의 법왕사에서 균여대대덕이 여름에 강의할 때에 설한 것을 아래의 권장(卷章)에 기록하였다. 부사(副師)는 심융(心融)법사이고, 중부사(重副師)는 승표(僧標)법사이며, 기록한 사람은 승약(僧)법사이다”라고 하였다. 중희(重熙)145) 11년(1042) 임오(壬午) 10월 날짜에 마침내 베껴서 광교사(光敎寺)의 교장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것은 본래 화상이 강의한 『교분기(敎分記)』 중에서 균여성사(均如聖師)께서 전한 옛 뜻의 여러 본을 표기(標記)한 것이다. 모두 책이 떨어져 나가고 흩어져서 아직 완전한 판본을 얻지 못하였으며, 또 기록한 사람의 재주 있음과 없음으로 말미암아 취하고 버림에 같지 않기 때문에 여러 판본에 많은 차별이 있게 되었다. 지금 이것을 기록함은 후학들에게 원래 기원한 것을 갖추어 알게 하려 했을 뿐이다.
047_0161_a_01L釋華嚴教分記圓通鈔卷第一高麗國歸法寺主圓通首座 均如 說將釋此文略作五門一弁章主因緣行狀二弁造文因緣及次第三弁宗趣四釋章名五入文解釋初因緣者具如閻朝隱所撰碑崔致遠所述傳故略也二造文因緣及次第中二初弁因緣後弁次第初中亦二一摠弁二別弁弁中二#初報先恩中初近報師恩故謂如寄相德書云以和尚章疏義豐文簡致令後人多難趣入是以謹錄和尚微言妙旨勒成義記已上造諸章疏廣演師義是報恩故後遠報佛恩故謂探玄記歸敬請加偈云傳燈報佛恩故如大集經云假使頂戴經塵劫身爲牀座滿三千若不傳法利群生畢竟無能報佛恩故唯自利利他如說修行爲報佛恩耳二利今後者請加偈云廣益於自他故二就別弁中花嚴傳云華嚴綱目一卷華嚴玄義章一卷嚴教分記三卷右竝大章疏之外隨人所問隨意而說錄以成卷已上此乃造比文別因緣也問隨人所問者誰所問耶法相人問也謂法相人判華嚴經及餘大乘俱爲一味大乘故章主則教中分五宗中開十以第五圓教第十圓明具德宗攝此經也時法相人難徵此義隨問而荅勒成卷軸也弁次第如別第三弁宗趣者荅他問爲宗開海印爲趣不此二爲宗現性海爲趣又宗如上令後學善解一乘教義爲趣又分五教開十宗爲宗令入一致一味無二之處爲趣第四題名二初正題名二所依處及述者名初中二一所依本教二能釋章名初中一云華嚴一乘是所依本教教分記是能釋章名一云華嚴是所依本教一乘下能釋章名初義者華嚴一乘簡下謂簡法花一乘及深密一乘等也教分記簡上謂簡證分也若簡證分者何故下文幷論性海果分與究竟果證耶荅是教分所依故幷擧耳一乘法界啚者一乘是所依本教法界啚者能釋章名今此亦爾也後意者經題之中無一乘言故乘言屬能釋也例如華嚴探玄記華嚴旨歸章等唯取華爲所依也今釋從後義中卷題云華嚴經中一乘立教分齊義記以中字隔能所依故也若爾一乘法界啚者何是所依何是能依耶但約能依立名耳彼文下云一乘法界啚合詩一印依華嚴經及十地論表圓教宗要故爾也是故凡諸章疏得名不同或但約能釋或通約能所釋如是非一以述者之善巧不同故也就所依本教中德於經題中立三種名一者大方廣華嚴毘盧遮那所說經二者大方廣華嚴普賢艹艹所說經三者大方廣華嚴諸艹艹修行經已上未知此三種名依何章疏立耶荅搜玄疏云今此通說教興所爲有十義一成佛本願故名諸佛本願經以此准之二成艹艹本願故可知三利益時機故可知已上依此三義立此三名章主本疏教起所因云二願力故者謂是如來本願力故經云盧舍那佛神力故一切剎中轉法輪又云普賢艹艹願音聲遍滿一切世界海已上依此立初二經名依機感叚立第三名也綱目章云願力故者化主助化及所化此三位中各有願力可知已上此亦所依也問章疏云願力何故古云所說耶舍那及普賢說華嚴者由過去願力故所化衆生依而修行亦由過去願力故章疏約過去言願力古人約現在云所說及修行故不相違也何故一經作此三名耶諸經得名體式不同#或有約人或有約法或有約喩或人法雙題或法喩齊擧就約法中亦有不同或約果法如涅槃經或約因法如十住經或約體如般若經或約用如神足經就約人中亦有不同或約能說如無盡意艹艹所說經或約請人如思益梵王所問經等今此華嚴一經人法雙題法喩齊擧具體具用有因有果理盡義圓謂大方廣佛是法華嚴是喩就法中佛字是人大方廣是法於中大是體方廣是用或佛是果華嚴是因故無不周備然就人中佛卽是果濫於餘經故簡餘經古人加辭言毘盧遮那所說經約助化言普賢艹艹所說經約所化言諸艹艹修行經也問以三經准三教云一云如次准也一云三經各具三教也一云唯頓圓中立三經也初義者初經是果故窮實次經者普賢艹艹對能化雖是助化若對善財卽爲能化說頓法輪故是實際也後經者修因契果生解分云幷說所修五位之圓因成十身之滿果令諸艹艹解此義相已上欲令下位人生信趣進之義故是修相也次義者華嚴經中具窮實實際修相之三教故從化主及助化與所化立三經故一經具三教也今釋從第三謂此經是三教中圓二教五教中第五圓攝故此三經唯頓圓也古人云由此經中具三教故修相之漸通盡此經實際之頓亦盡此經已上則此經中可具三教何不爾耶荅雖有其義然下四教是修相漸華嚴經唯頓圓故也然華嚴經爲後三根而起故第八根所對是修相故此經可具三教此經雖爲後三根起而第八根入此經時與第九根竝依實際頓故不依修相唯依頓圓耳謂第八根文云三乘根不定故堪可進入別教一乘已上故也問一乘了義實說有三一方便修相對治門二實際緣起門三窮實法界門已上一乘了義是華嚴經故此經中可具三教何不爾耶一乘了雖是華嚴而於伴眷屬義中幷論修相耳旨敀章立異設等十經大料簡中立恒本等七經此竝所依耶略本經是所依耶如問二義問何故恒本經等爲所依耶旨敀章云問准此所說說華嚴會摠無了時何容有此一部經教爲下劣衆生於無盡說中略取此等結集流通故有此一部令其見聞方便引入無際限中如觀牖隙見無際空當知此中道理亦爾觀此一部見無邊法海文復卽此一部是無邊劫海之說以結通文無分際故一說卽是一切說故已上淸涼疏展演無窮叚云初於最淸淨法界分爲理智二門理開體用爲大方廣智開因果卽佛華嚴展此目以爲初會云云又展此會以成后八又展此九會周遍十方云云卷攝相盡叚云以從後漸卷乃至不出九會九會不離初會初會不離摠題摠題不出理智云云名之爲淸淨法界是以極從無盡乃至一字無字皆攝盡華嚴性海無有遺餘已上是故恒本等通爲所依也今釋唯略本經爲所依也問若爾旨敀與淸涼文如何會耶荅彼章意者見略本時義通異設同說等耳如觀牗隙見無際空如是依略本經故異設同說等亦通所依展卷難思之義亦如是會也若不依略本無由得曉如是之義故知唯略本所依也是故二十卷疏終云上來略本三萬六千偈釋竟已上於七字中何故偏擧華嚴二字耶實則具云但存略故爾然偏擧者華是喩嚴是摠故此二字攝法無遺於題中具有人法體用因果等且以人嚴法或反此如華之嚴體用因果亦爾故偏擧也第二能釋章中一云一乘之分判五教故云一乘教分記然此釋難也謂唯言一乘教分記不言一乘分教記故一云一乘教中分判教宗故云一乘教分記此亦難也謂違於中卷題中華嚴經中一乘立教分齊義記故今釋准中卷題釋上下二卷之目謂教分記者教則立教分則分齊故可言立一乘教分之記不准下釋可言一乘教義分齊義記謂下文云一乘教義分齊開爲二門解云一乘教義分齊者牒題目故也是故演義抄云約所詮法相者下第三約所詮弁異然賢首義分齊內二卷廣明今但略說解云賢首義分齊第二卷者指中卷也彼演義中略教存義今此題中取教略義若約義具應云一乘教義分齊義記也文中通明五教可言一乘三乘教分記何故唯言一乘耶有說雖具五教善巧無二故一乘下文云本末鎔融唯一大善巧者卽其事也有說一乘有一者同教二者別教今卽通擧二種一乘故云一乘教分記也其同教中通攝諸乘無所遺也文云一乘教義分齊開爲二門一別教二同教者卽其事也今釋雖通現五教其所宗唯一乘圓教故從其所宗云一乘教分記是故唯是別教一乘非是同教一乘也若難云通現三乘小乘之義故唯言一乘教分記耶者應反難云依阿含經等立小乘教依深密經等立始教依勝鬘經等立終教依維摩經等立頓教然則所依本教應通擧諸經何故唯擧華嚴經耶若言雖通依諸經以立五教然語所宗唯是華嚴故唯擧華嚴者中雖具現五教而語所宗欲現第五圓教一乘故從其所宗別教一乘言一乘教分記也是則文云一別教二同教者伴眷屬義中兼開同教耳非謂一乘教義之言具同別也又本末鎔融唯一大善巧法者成一善巧時還當於第五圓教故唯頓圓一乘非是具五教之一乘也教分者通於五教耶不爾以是一乘教分齊故也就所依處及述者中京兆西崇福寺者所依處也沙門法藏述者章主佳初中京兆者通名西崇福寺者別名也通名中京者高也大也兆者衆也多也天子所居高大人類衆多故京兆也別名中則天之父武士彠者大原天水人也則天於咸亨元年封父爲大原郡王封母爲大原王妃遂於大原捨家爲寺亦於西之長安東之洛陽皆置寺爲敬生處竝以大原名之至文明元年則天臨御封父爲魏國王封母爲榮國夫人乃改寺號竝爲魏國寺也後東都僧法明等上表請改寺額遂竝改爲大神崇福寺後略神字號大崇福寺今云西者簡東北二崇福故寺者梵云毘阿羅此云遊行處以智人所遊行處故又云治處以治惡種善處故佳號中沙門者摠法藏者別也摠中梵語具云沙伽摩那此云息惡亦云斷惡是故涅槃經云出家惱他人不名爲沙門息心達本源故名爲沙門是義也別中諱法藏字賢首俗姓康氏勅號國一法師從所業則世號華嚴和尚也述者而不作義也依於大經扶洪儼師之義故爾也 第五入文解釋三一序分二建立一乘下正宗三末後二偈流通也初中有本無序及章主名故或謂此序非章主所述然有草本有鍊本則具有序及章主名草本則無也若非章主所述章主之名宜在序後今旣在序初故知此序乃章主自述明 序中分二初明分教開宗之所以后略提下擧領提綱初中三初教由機差二若不下現不分失三豈直下現分之初中夫者此也彼也乃也今從乃訓發語之端也不自分等者擧教由機差以現分宗立教之義然古今諸賢立教不同如下敍古今立教中弁淸涼云西域東夏洪闡之流於一代聖言或開宗分教或直釋經文以皆含得失故耳且不分之意略有五焉一則理本一味殊途同敀故二一音普應一雨普滋故三原聖本意爲一事故四隨一一文衆解不同故五多種說法成枝流故以斯五意故不可分分乃令情搆異端是非競作故不分爲得其分教者有多意一理雖一味詮有淺深故須分之使知權實二約佛雖則一音就機差而教別三本意未申隨他意語而有異四言有通別就現說故五雖分權實須善會佛意有開現故又王之密語所爲別故不識權實以深爲淺失於大利以淺爲深虛其功故莊嚴聖教令深廣故諸聖教中自有分故諸大艹艹亦開教故以斯多義開則得多而失少合則得少而失多已上章主亦是分教之家欲分教宗故云教不自分務機成異此有二義理本一味故云教不自分而由機教別故云務機成異也不約佛則雖是一音一雨故教不自分而機差教別故云務機成異也教不自分者當於至相如窮之以實趣齊莫二等同一味究竟無餘何殊之有務機成異者當於但以對治功用不等故隨根器別其淺深言分有三耶等同一味等者是理本一味不待名言之處今此教不自分者通於不待名言之處及與如來一音所說圓教之處故別也若教不自分通圓教則等同一味亦通圓教何云別耶彼則等同一味等是不待名言無住摠相處也對治功用言分有三等是帶名言處也今此通於言無言也若言圓教當於教不自分之處則下四教當於務機成異耶荅一云法界啚云善教無方應機隨病非一已上善教無方是華嚴經應機隨病非一是下四教今此亦爾故如問亦得一云務機成異通五教機也若教不自分圓教者務機成異則唯下四教若務機成異通五教者不自分唯約理本一味故與等同一味宜無別也何故圓教通於教不自分及務機成異耶約佛則唯說一音一味法故云教不不自分若約機差別或有如一音而解者或有不得如一音而解者故務機成異中具五教也今釋教不自分與務機成異一量竝當於儼師所云隨緣之說法門非一但以對治功用不等言分有三也教不自分約不待名言不動處故與務機成異別耶教不自分非約不動處也立在己分之教云所以諸教之分非是自分只由根機而成異耳故非別也聖說前後等者一云前則如第二七日說華嚴時后則如第三七日已去說餘小乘三乘等法時如是差別也今釋前時亦說小乘三乘后時亦爾故云差別若如前義則一音異解之義難成也第二不分失中矛盾者楚人有雙賣矛盾者歎矛則云能穿十重之盾歎盾則云矛剌不入買者云我買汝矛還剌汝盾豈不傷哉如是且約佛性諸聖教中或說唯一人成佛或說五性差別故半成半不成或說一切衆生竝皆成佛或說衆生佛性離有離無故不可說或說情與非情竝皆成佛若會爲一義如彼矛盾無由取釋若剖教開宗云唯一人成佛者小乘教乃至情與非情竝皆成佛者是圓教則各不相違成矛盾也第三分教得中豈直聖教異說從此分教宗而會通耶抑亦由茲聖教異說義自別故教自分耳第二擧領提綱中猶如裘擧領而群毛順綱提綱而衆目正若擧建立一乘等十門之綱領則其中諸義自然和正也餘一切等者此十門外有所不引諸聖教等准此五教之軌而會通也 大叚第二正宗分中二初列名後初明建立下依名別釋初中三先正列名次建立一乘第一者牒擧後今將開下開十門所以也初列名中問約此十門分能所詮云何一云前八能詮第九所詮第十義理也然後二可爾前之八門竝爲能詮難也謂建立一乘者遠公於大乘義立教聚義聚於義聚中分染聚淨聚至淨聚中論一乘教聚是能詮義聚是所詮是故一乘爲能詮者難也第二約乘論教義之攝益第四門中分五教立十宗而淸涼師於所詮宗趣中立此十宗第七門中建立十根第八門中行異位異卽所詮章行位差別也以此等諸義竝爲能詮最爲難也今釋初二門中論其乘數次二門中分其教宗四門中合弁乘教後之二門現也有本義理分齊九所詮差別十者何耶此是後人所治也後人意者以此義理雙踏所詮故置於第九貫前後也後人誰耶相和尚也謂章主寄相德書云請上人詳檢臧否幸垂箴誨故德令眞定智通勘其臧否而治定也今釋竝章主所列也此文有草本鍊本不同義理爲九者是草本反此者鍊本故爾也何知義理爲十者是鍊本耶義理章末有流通偈故知爾也是故淸涼抄云第三約所詮弁異然賢首義分齊內第二卷廣明今但略說已上也問十門有定次第耶雖無定次第且作次第者如來爲一大事因緣出現於世故最初受之以建立一乘未知此一乘教義攝益分齊云何故受之以教義攝益已知教義攝益未知古今諸德立教云何故受之以敍古今立教古今立教如是不未知今則立幾教宗故受之以分教開宗立乘分教但如是耳更無開合耶故受之以乘教開合已知乘教開則無量差別合則一三無二未知三教起前後云何故受之以教起前後未知前後所由云何故受之以決擇其意已知教起前後因機差別未知一三異相云何故受之以施設異相已知一三說教異相未知五教所詮云何故受之以所詮差別已知能詮所詮差別約能所詮融會云何故受之以義理分齊也第三十門所以中今將開至作十門者十門之所以也此文宜在列名之前何故在後耶故一云列名是後人所治故在前也若章主列則在於後今釋列名亦是章主自列以前列後列無所防故且從一義耳文依無序草本故作此難若依有序鍊本無此難也旣序去云略提十義毛目粗陳先標十門次列其後云今將開等弁十門之所以是故有次第也旣云略提十義又云今將開乃至略作十門然後列名則有重言失故此所以在列名後甚有理也今者有云欲簡造餘章疏之時故云今也今釋以起辭之初故云今耳此云今將開釋迦佛海印三昧啚云欲表釋迦如來教綱所攝三種世間從海印三昧繁出現現大料簡能詮教體中海印炳現門云一約果位如前差別無盡教法是如來海印定中同時炳然圓明現現此章所依異中云謂此一乘教起要依佛海印定起不同三乘依佛後得智說教起前後稱法本教中云於海印定中同時演說十十法融會章云一乘同別教義依海印定起普眼所知六處海印何別一云今此十門所以中海印者十門中具論五教十宗故法界啚則於教綱中幷攝屈曲三乘教故大料簡則約果海印前明五教能詮教法仍云如前差別無盡教法海印定中圓明現現故起故廣也餘三唯華嚴法依海印起故狹也今釋六處海中竝一義也唯華嚴經法依海印起餘三乘等法竝是定外謂此中但云今將開海印三昧一乘教義不云一乘三乘教義故啚云欲表釋迦如來乃至廣如華嚴經說故#炳現門中近牒第七事融相攝第八帝網重重二門故云如 前差別等非是通擧前六門中三乘教故問此中十門幷謂五教十宗故五教之法通依海印何不爾耶以對下四教方現別教一乘義故以一乘之方便眷屬故幷論耳法界啚文亦同此會古辭儼公云唯華嚴經依海印起也時有智積國統難云大集經十四云如閻浮提一切衆生身及外色如是等色海中皆現影故名大海爲印菩薩亦復如是得大海印三昧已能分別見一切衆生心行於一切法門皆得惠眼是爲艹艹得海印三昧見一切衆生心行經四教法亦決海印定起何故不爾耶儼公荅云海印一有三十門僧祇劫歷修之帝釋升法空須彌山頂與所知障阿修羅門諍之時科百法像現於大圓鏡智海中之海印者不可計數劫歷脩之帝釋升本覺須彌山頂與根本無明阿脩羅鬪諍之時恒沙性功德像現一心眞如海中之海印三者一念不生之帝釋升一行三昧須彌山頂與妄念阿脩羅鬪諍之時無相無分別相像現不二實相海中之海印者二佛世界微塵數劫歷修之帝釋升摠相須彌山頂與分別遍計阿脩羅鬪諍之時十普法像現世界海中之海印者十佛之帝釋升法性須彌山頂與無住實相阿脩羅鬪諍之時三種世間像現國土海中之海印已上此五海印中前三如次始終頓三後二一乘如次外說內證也海印炳現門中有因有果於果海中分一兼二於此若加因海印應有六重賢之實釋升能解行須彌山頂與百障阿脩羅鬪之時無盡竝法像現錠光破 爾鏡中之海印也此義三乘時分論海印已而言三乘是定外者一乘海印故三海印約果論何故一乘加論曰海印耶荅於三教中下四教是此經是頓圓故旣此經中間頓因圓果合下四教教此中開論因海印豈有㝵也以此六重准十句章有九重海印謂彼文云教義二大有五重一忘像海印是義現像海印是教二現像海印是義佛外向是教 三佛外向是義普賢入定觀是教四普賢入定觀是義定在心是教五出定在心中是義語言中現是教已上如是互望論教義故有此五重若開論則六已法許前三乘三海印卽有九重又約小乘證人空智名爲海印卽有十重也彼章唯忘像現像名爲海印何故云 俱名海印耶華嚴經法竝定內說故乃至普賢語言中現亦皆是定內故也問今旣言釋迦佛海印三昧則唯果海印耶荅有約因海印約果海印別論之義又海印者是智惠定心故若約佛則全佛海印若約艹艹則全艹艹海印故今此海印亦不簡於因也初云建立一乘一次云建立一乘第一又次云初明建立一乘者已上何故三處重言耶荅初建立一乘一者列名也次建立一乘第一者牒擧也又次云初明建立一乘者名別釋也准華嚴傳應先摠列十門次列當此卷之八門次牒擧後別釋如是應有四重此猶略故不是重言也 第二依名別釋中二初牒名後別釋此中三初此下開章二初中下釋相三餘釋乘名下指廣初中此者一云二字合云此也故崔光十地論序云然十地經已上然者此訓故今合爲此也今釋然字宜在教義分下應云此一乘教義分齊然開爲二門今在上耳例如下決擇其意叚中云然諸教前後差別難知略以十門分別其義已上此亦實云諸教前後差別難知然略以十門分別其義故此亦爾也何知須以然字置下云然開爲二門耶今此正論別教一乘故疑云唯論一乘耶雖此正論別教一乘然亦幷論同教一乘故爾此一乘者何一乘耶一云窮實一云具同別一乘也初義者一乘教義分齊開爲二門一別教二同教已上雙踏同別是窮實故爾也後義 者旣云一乘教義分開爲二門一別教二同教故具同別之一乘也今釋頓圓一乘也以華嚴經不出頓圓故也旣牒前今將開釋迦佛海印三昧一乘教義云故所現唯是頓圓一乘也一別教二同教者分齊云何一云同別二教竝通一化何者別教中有分相該攝分相之所分三乘是下四教能分之別教是華嚴經故又該攝中三卽一者是一乘一卽三是下四教是故分相該攝竝通一化也就同教中分諸乘同教者分一化諸乘融本末同教者融此諸乘故同教通一化也若爾同別云何異耶一化之法隨機別者是別教一化之法同一善巧者是同教也今釋別教者唯頓圓華嚴同教者唯下四教也如前所論別同教各通一化何故今云別教唯華嚴同教唯是下四教耶分相中幷論三乘者欲現別教一乘別於三乘故幷擧所對三乘非謂三乘合爲別教又該攝中三卽一者是該攝一卽三者但句數相對幷論耳是故別教唯華嚴也又同教中分諸乘者分下四教諸乘也融本末者融此諸乘也是故同教唯下四教也分諸乘同教三明三乘中云是故當知一乘三乘小乘分齊別也由此義故大智論云般若波羅密有二種一共二不共已上以不共訂一以共訂三乘是則同教可通一化何不爾耶此但擧所同別教耳若別教是此經同教是下四教則一乘教義之一乘通於同別何云唯頓圓一乘耶荅幷擧同教方現別教故於伴眷屬義中幷論耳 第二釋相中就別教二現二分無礙二就普賢門下廣釋因分初中二一別釋二此二無二下摠融別釋中初中亦二者以此別教通於因果故云亦二耶一云爾也謂果分別教因分別教故也今釋別教之名唯從緣起因分立也然因分所依因分之源故幷擧性海耳如十玄章云法界緣起乃自在無窮今以要門略攝爲二一究竟果訂義二隨緣約因弁教義已上界緣起之言唯約隨緣約因立也於所依義中幷擧究竟果訂此亦爾也何故性海不名別教耶文云不與教相應故不融本末中云由此鎔融有其四句或唯一乘如別教或唯三乘如三乘等以不知一故或亦一亦三如同教或非一非三如上果分已上如是分故是知性海非別教也何故法界緣起之言但約隨緣約因立耶立在隨緣約因弁教之中論能釋十門所釋十法已結云此上十門解釋及上本文十義皆悉同時會融成一法界緣起具德門已上是故法界緣起之言從隨緣約因立也問若爾何言初中亦二耶前一乘中開爲二門又於別教開二門故云亦耳非謂二分皆別教故也例如雖於一乘開同別二教然同教不是華嚴一乘如是雖於別教開因果二分果分非是別教一乘故也此中二一果分二因分初中三初性海果分下立法二卽十佛下屬人三故地論下引訂初中性海果分者立名當是下立義中立嘖荅可知引訂中地論云是地所攝有二種因分二果分已上問以因分訂緣起分以果分訂性海故宜於緣起分後方引此文何於二分之間引耶引訂之例不定或前引而訂後或後引而訂前或中引而訂前後故爾也圓當訂耶文似訂耶一云文似訂也謂論云是地所攝有二種一因分二果分已上因分是教大果分是義大此十地所攝之果分元非內訂故非圓當而可說不可說之言相似故引耳今釋圓當訂也謂是地所攝因分果分二重一就實隨相因分果分二訂智方便因分果分也今約初重之果分是內訂因分是外化之義引故爾也二因分中對前果分可云二緣起因分當是可說義何以故與教相應卽普賢境界也故論云因分可說也然說果分時義已現且略耳性海果分中言自境界何故緣起分中不言自性海果分唯十佛所知故云自境界緣起分法十佛普賢共所知故不云自也是故啚文結訂分云訂智所知非余境緣起分云十佛普賢大人境也二摠融中波喩緣起水喩內訂而波全爲水水全爲波故因分全果分果分全因分二而無擧一全收也 第二廣釋因分中二一開章二分相者下別釋初中問分相該攝二門何別荅一云分相是實際頓該攝是修相漸一云分相是實際頓該攝是窮實圓一云分相該攝竝具三教一云分相該攝竝實際頓一云分相該攝竝於取會方便中所論不及華嚴一云分相該攝唯頓圓中論也初義者旣文云分相者此別教一乘別於三乘已上九根所領是實際頓而彼文云本來不見說三乘小乘等已上簡於三乘與分相同故文云該攝者一切三乘等法本來悉是彼一乘法已上第八根所領是修相而彼文云 彼三乘等法本來不異別教一乘已上與該攝文無別故也第二義者分相是實際者如前師說該攝是窮實者第十根所領窮實而彼文云見上諸教竝是無盡性海隨緣所成更無異事已上與該攝文無別故也第三義者華嚴經中具三教此經之與三乘別者分相也約法體則三乘等法無所遺是該攝故是故此經具三教也實際頓中有所簡義修相窮實有所收義故分相是實際該攝是修相窮實何故分相該攝二門各具三教耶實際頓中亦有收義修相窮實亦有簡義謂第九根中雖有簡三乘小乘等義而六道因果三乘小乘束爲普賢二十二位又五乘等法束爲十普法故亦有收義第八根文云彼三乘等法本來不異別教第十根文云見上諸教竝是無盡性海隨緣所成已上故皆有收義如是解時別於三乘有簡義也故此三教約所簡義爲分相約所收義爲該攝二門中竝具三教也第四義者旣文云就普賢門中復作二普賢是實際頓此中分二門故分相該攝竝實際頓也普賢自體則六道因果等是普賢二十二位又約五乘論十普法故是該攝義如是之義別於三乘故是分相也是故分相之該攝該攝之分相也第五義者融會章云夫圓通之法以具德爲宗緣起理實用二門取會其二門者所謂同別二教也別教別於三乘故法華經云三界外別索大牛之車故也同教者經云會三敀一故知同也已上彼之別教則當此分相同教則當此該攝是故分相該攝竝約取會方便論也旣文云就普賢門中復作二門一分相二該攝已上是則二門竝是別教何云取會方便耶非謂直於普賢門中開爲二門欲取會此普賢門時於方便中作二門故不違也彼文圓通之法以具德爲宗是華嚴經欲取會此華嚴故論同別教而引法花訂成中亦引法華訂成是故分相該攝竝是取會方便不及華嚴也今釋以第六義爲正華嚴經是頓圓別教此經之別於三乘是分相此經之約法體則無不包含是該攝是故二門竝頓圓別教也謂因前緣起因分則普賢境界卽云就普賢門中復作二門而緣起分中具頓圓故爾也融會章文云何會耶彼中別教亦是頓圓別教同教亦是下四教也彼中具德爲宗緣起理實用二門取會者當於此中一乘教義開爲二門也實際有所簡窮實有所收故分相則實際該攝則窮實何故二門各具頓圓耶如前中說實際中有所收窮實中有所簡故無難也謂諸處文中明頓圓一乘別於三引文訂及義訂文訂者賢首品及第九地偈是也義訂者十門十法是也故搜玄疏十玄終云若教義分齊與此相應者圓教及頓教法門若諸教義與此相應#而不具足者卽是三乘漸教所攝已上旣以義訂通訂頓圓淮此義訂則文訂亦具頓圓而此分相門中引此二文故知分相具頓圓二別釋中一釋分相亦二一摠標一三之別二別現一三差初中問下權實等諸差別中引法#華經而此摠中亦引此經者何耶二義會也一義下別現中以一種法華中三車與大白牛車以別一是故法華通十差別故摠標中引此文也一義此章主與法相人爭一三者皆依此文謂法相人云三中牛車是實非權判爲一味大乘此章主云三中牛車權大白牛車是實如是所諍唯此經文故先引之摠弁一三也二別現中一引教釋成二其別教下擧義訂成三縱無下摠結也初中三一開章二一權實下釋相三此上下結初中問此十訂文似訂耶圓當訂耶荅一云引三乘經論訂七差別則文似訂也引此經文訂三差別則圓當訂也釋竝圓當訂也謂法華中有約時事判有約義判約時事則當於熟頓若約義高判則有同別二教同教則是華嚴之下四教之上別教則與華嚴無二也今約別教義故圓當訂也何知法華具此多義德量差別中云我有如是七寶大車其數無量此約別教一乘以明異耳教義攝益云如露地牛車自有教義謂十十無盡主伴具足如華嚴經此當別教一乘等者此約別教判也又德量差別中此約同教明異之法華第七根所入之法華教義攝益云界外別授大牛之爲示眞實義此當同教一乘如法華經說等約同教判也又大料簡以法華涅槃會深密之三車敀究竟之一乘者是智光師第三時法門故此約時事判也約時事見則法華與勝鬘楞伽等經竝爲一量何故法華有約義高判而餘經無耶有道理也謂餘經等有權有實竝初時說法華乃四十年後所說是迴三入一之教也若約但迴昔權不迴昔實則與勝鬘等爲一量故當熟頓也若約以勝鬘等合三中牛亦幷迴昔實令敀露地則在熟頓上爲同教也若約與華嚴經無二無別則名別教也是故法花有約義判餘經唯局熟頓教也若法華是後時說迴三乘時通迴熟頓故有約義高則涅槃是最後時雙林所說故亦有約義判耶涅槃雖是後時所說無約義判也謂爲根熟聲聞唯說佛性不說迴大之義故爾也何知今此引法華中別教義故是圓當訂耶旣文云分相者此別教一乘別於三乘已上此是華嚴別教一乘而欲訂此引彼經故爾也 二釋相中十門卽爲十叚初中先標名次釋相中三立正義二若彼下遮他現自三問荅除疑初中以三中牛車同羊鹿者法相人云三中牛車卽是大白牛車故是實非權章主等云三中牛車是權此三之外大白牛車是實也所以三車喩三乘者艹艹大悲利物如牛負重致遠能益於人緣覺樂寂無師自悟如鹿在山不近於人聲聞依師處衆如羊依人逐類不羊之鈍如聲聞鈍根鹿之輕捷如緣覺利根牛之大力艹艹大悲又羊之身小同於小乘鹿之次大喩於中乘牛之最比於大乘也臨門三車俱是開方便門等者方便品云開方便門示眞實相已上引此以現三車開方便門故權大白牛示眞實相故實也四衢道者法相人云四諦也長阿含經以四諦斷惑如四衢之通達也章主義中一云三小逕大路也謂三乘人得三乘果知其不實更索實故約此中間爲四衢也然章主義中亦四諦也謂淸涼云四衢道者是四諦也二遮他現自中三初正遮他二若望下遣伏執三爲欲下迴三入一也初中二先遮外情後亦不下遮救初中長者喩佛謂長者具三德一有德二年高三巨富有德中三一有智二有德三淸淨無染以此合佛者智則般若則法身淸淨則解脫不年高則佛壽量無限巨富則佛種種功德也二遮救中三先正遮救二是故下引訂三此中三車下現索三意言標趣者父則標門外三車指令趣向子標門外三車望而趣進故元意之言通於父子也二遣伏執中三一立義二若不下反釋三今云下順釋伏疑云門外三車得耶不得耶若得則如何更索若不得則如何出三界遣義可知此則道身云問旣得三車何更擧三車而索不得三車何現三車非實耶已到指三車處而知此處非實嫌三之實在於一乘故擧權名索權之實已上卽此義也三迴三一中三一立義二若不下反釋三以至下順釋此中大義見下根緣受者釋也或云分相是同教也然旣云以至自位究竟處故後皆進入別教一乘是故分相是別教也別教之名不定法華之大白牛車亦是別教此中分相可云同教何故華嚴偏名別教耶前旣云一乘教義分齊開爲二一別教二同教至於此中更以法華爲別教者難也又大白牛車有爲別教之義與華嚴無二無別故引之耳三問荅除荅中先略荅次重嘖後廣荅中先摠荅次別荅後摠結二教義差別中二先擧名後釋相中三一立自義二引訂三遮他義也三所期差別中二先擧名二釋相中四一立義二引訂三他四良以下釋非本所望句也初擧名中三車所期大白牛車非所期故應言所期非所期差別且略也四德量差別中二先擧名二釋相中二一同教中寶鈴者喩四辯也體具德者具六度萬行四攝四無量等也不云餘相者謂牛之不具德前之不云餘德者車之不具德也白牛喩平等大惠運六度萬行至果處故也行眷屬者檀度等行也此等異相竝約同教等者一云等者等取前諸差別故前三差別竝同教分相也今釋但等取此中體具德用殊勝行眷屬也前諸差別所引經文與此同教叚中所引等是一種大白牛至別教段方引我有如是七寶大車其數無量之文故前差別竝是同教何云別教耶見此其車高廣衆寶莊嚴等文唯說一車之莊嚴則是同教縱擧一車若言無量中一者卽別教也故前三差別皆約無量中之一故竝是別教之分相也此中同教是何量耶是所流弁也可云是時事之法華何云所流耶以法花爲同教者多是約所流也何故論別教分相時幷論同教分相耶但兼論耳如該攝中正論不異兼論不一又三乘同教中正論同教幷論所同之別教也次別教中三先現一三之別二引訂三無量寶下釋也若法華約多義見則以所流同教大白牛車爲實時事之大白牛車爲權不與華嚴無二之大白牛車爲實所流同教大白牛車爲權如是論權實耶大白牛車唯是一故可展轉論權實也猶如浮海之板水高則板亦高水下則板亦如是所會三車下則能會大白牛車亦下所會三車高則能會大白牛車亦高耳是故昔時所說有權有實法華是最後所說迴三入一教故若但迴初教之權不迴熟頓之實則與楞伽等經爲一量故當熟頓宗若竝迴楞伽等熟頓之實則是所流弁同教故立於四教之上也猶如日出先照高山亦於沒時還照高山佛初成道爲大山王機說華嚴經最後亦爲大山王機說法華經如是見則與華嚴經卽爲一量是故大白牛車雖具多義是實非權非所迴也五寄位差別中二一擧名二釋相中三一引訂中攝論等者等取華嚴及莊嚴論也所詮章修行之身十門寄對中第四門云七地已還寄同羅漢八地已去是艹艹如仁王經說不第五門云初地至六地寄世間二乘七地已去艹艹位如本業經說上來唯約三乘教說以未分出一乘法故其仁王經七地以還是二乘八地以去是艹艹又本業經但云七地以去是艹艹然不分一三故此二經違於此中所立之義云何會耶彼仁王本業經中具多義故且從一邊引耳謂例如十地論有二義一者初地八過之中已過世間二乘二者至七地方過二乘所詮章所依身寄對第七門中引初義此中引後義如地論爾其仁王本業等亦具多義也所詮章寄惑現位十八門中第十門云仁王經說前之三地斷三界中色煩惱四六地斷三界中心煩惱七九地斷三界中色習煩惱十地及佛地斷三界中心習煩惱解云至七地已去是艹艹位漸細於前故寄滅於色心習氣以現彼已上此義異於問家所引第四門義同於第五門本業經義是故仁王經具多義故七地寄艹艹乘八地已上寄一乘之義亦含有也本業經例知以華嚴一乘配於三乘中五乘配門十地之八地已上然則隨能配一乘亦爲華嚴一乘地耶爾也終教佛果竝攝在七地三乘艹艹位中故也問若爾以下三乘配於華嚴前七地時前之七地隨能配三乘亦爲三乘地耶不爾若爾八地已上別有一乘之訂不成耶所配十地雖是華嚴然人天三乘寄前七地一乘艹艹寄八地上故能成訂也問仁王本業八地已上所配一乘但是華嚴一乘耶亦是熟頓一乘耶雖則具有熟頓教中如來藏一乘之義今約圓當成訂之義故唯華嚴也二若大乘下遮他義一正遮他二故至一乘法也者連前合釋謂前四差別引法華經至此門中引餘聖教故欲使鉤連前四差別更以法花合釋以現此中相只是一種別教一乘也三問若下問荅除疑六付囑差別中問前四差別皆引法華今此亦引法華則是一類故宜在第何故第五引異聖教弁寄位竟不引法華明此付囑爲第六耶要以付囑爲第六者欲使連於後三差別故第七差別引華嚴經假名艹艹之文而云是行人當知是前法華經內餘深法中示教利喜者是也已上欲以法華不信受者連於華嚴假名艹艹故爾也第五差別引異聖教訂成寄位仍以寄位欲使連前四差別故更以法華臨門三車第七地大白牛車配八地上之義如是合釋前四叚故是故前之五差別義皆是法華又以法華欲連華嚴故以付囑爲第六也縱以寄位置於第六至第七門亦應得云當知是行人是前寄位中七地人也何故須以付囑爲第六方得連後耶荅第七叚中不信此經名爲假名艹艹之文與法華經若有衆生不信受者同故要以付囑連後三也如是鉤前結後者欲現十差別中所明皆是一乘則華嚴三則下四教也七根緣受者差別中有爲三乘根緣受者有爲一乘根緣而受者故一三差別也問假名艹艹唯初教耶通熟頓耶一云唯初教謂性起品疏云假名艹艹者但依權教修行未得一乘實行已上故爾也又諸處云初教爲權熟頓爲實故也權實之言不定故權實差別中通約四教爲權唯約華嚴爲實何故唯初教爲權前六差別是同教分相七九三引華嚴故是別教分相是故權實差別亦以初教爲權熟頓爲實也何知前六同教次三別教耶下云此文意明華嚴是別教一乘不同彼也已上若前差別竝是別教前差別中可有此言然此差是別教分相之初門故不同於彼前六差別同教分相是云也若爾旣此差別是別教分相故所分三乘通下四教何不爾耶雖約別教若所分則唯是初教若熟頓則此別教爲同教故非所分也故非假名問同教所分旣是初則別教所分應通熟頓耶分相有二謂分異之分相全異之分相望於一種初教同教則分異別教則全異耳何知爾耶第十差別亦是同教分相引大乘同性經而釋云此文約本末分異又此下文望前別教三差別云其別教一乘所明行位因果等相與彼三乘施設分齊全別不同已上此是分異全異之訂文也今釋摠取中三乘爲假名也謂通取末入此經之際名爲假名艹艹故也問疏云但依權教修行未得一乘實行已上諸處文中多以初教爲權是則唯以初教爲假名何故通約中三乘耶但依權教之言亦通下四教也謂守權非器通約中三乘故旨歸章眷屬經中云如餘一切權教三乘小乘等經旣無結通十方齊說故非主經已上此經以外通取名爲一切權教故知中三皆是假名若爾熟頓佛果亦假名耶爾也謂權實差別云以至自宗究竟處故後皆進入別教一乘已上故知通也問性起疏云此等不信是何位艹艹荅文無正斷准其劫數十千已過僧祇未滿應是三賢位人已上此文何會耶荅但隨他意作是判耳章主實意通取熟頓極果之人爲假名艹艹也古辭章主大料簡中明三乘極果不信此經亦是假名之義俗勝德復禮師等便懷嫌嫉奏云臣聞無上世尊三大劫中勤修萬行登大覺位無上之上天中之天法藏抑挫爲假名艹艹此法師罪甚是不少國法可理御勅擯於江南及實叉難陁三藏至復禮與三藏翻八十卷經至賢首品滿成佛之處未能翻譯天子勅復禮與法藏和尚譯也復禮與章主云汝若改立三乘極果亦是假名之義則同譯大經以補舊闕章主欲息他人之謗又恐錯翻大經以誤後人遂隱秘料簡造綱目章附於探玄替爲料簡相德云請上人詳檢臧否流通於世於是相德命眞定智通等令習此文時義寂師等從法相來曾不信和尚極果迴心之義及見性起疏中#十千已過僧祇未滿應是三賢位人之文白和尚言疏文如是願和尚自今已後使不行此義相德云此必隨他語耳法師之意遠則遠矣仍遣芬皇寺純梵師問於章主章主送此大料簡義寂師等及見此文然後決其疑也大料簡中何文是迴極果處耶引爲中云於彼教中具有行布十地漸次乃至佛果長養彼根器務令成熟極遲之者至此劫數定當信入如其疾者是則不定已上也問此文可爾何故守權非器云三乘共教諸艹艹等隨自宗修行未滿初阿僧祇亦非此器之文與性起疏云十千已過僧祇未滿應是三賢位人之文同耶然故或謂料簡非器之文與性起疏竝是一三和會處也然觀釋云非器之文約其疾者所爲之文約其極遲已上故知竝是實意也是故於引爲中將此非器云三乘共教乃至亦非此器之義云問若彼地前過彼劫數必信受者卽知地上二宗不別彼所信無十地耶於彼教中具有行布十地#漸次乃至佛長養彼根器務令成熟極遲之者至此劫數定當信入如其疾者是則不定已上此荅意者引爲文中約極遲者故云至此劫數定當信入非器之文約其疾者故云末滿僧祇非此器耳滿則是器故云如其疾者是則不定也若未滿則非器已滿則爲器者與性起疏應是三賢位人同也何故非器之文是如其疾者是則不定之義耶彼性起疏云十千已過僧祇未滿應是三賢位人更至何位卽能信此荅極至此位必定信入此一乘法終無訂地而不信此已上終無訂地等者極至地上必定信故是和會義非器文中約其疾者是則不定之義故別也應是三賢者何教三賢耶終教三賢也謂終教地前一切根性各各差別至於地上發心等修行等利益等安樂而約一乘義云三乘之中設至果位尚有成與不成及心識等自他差別故與地前根性差別同也約此義云應是三賢位人也一三和會者云何道申章云若爾二宗地上一耶不爾爲立十地長養根器經此劫必信一乘問若爾何云十千已過僧祇未滿應是三賢位人耶此有深意一三和會以論耳寄三乘位弁一乘位有三一見聞位當十信二解行位當三賢三訂入位當十若伹以一乘位言始見聞一乘定在信初若但以三乘位或在信初見聞或三賢位或初地二地乃至或極果中不定所言應是三賢位人者三與一合論耳文云艹艹億那由他劫修六度故卽非信初凡不地上是果以配訂位故未見聞人不須令上登地三賢因位終令見聞耳三乘極果在此三賢位又雖云三賢終實是信初始見聞一乘配信初故已上解云直以一乘言始信一乘配信初故判爲信初凡者違於無量億那由他劫修六度之文約三乘位言雖久修六度而未見聞人不須令上登地故是十地人也是故不欲偏擧一三而云應是三賢位人此是一三和會義也此文意明華嚴是別教一乘同彼也者何故此中偏有此言耶有道理也謂餘差別中三之別於文自現而此文中不言此是三乘此是一乘偏擧此言也非謂前六差別是同教故望彼而云不同彼也第八差別可見第九約機現理差別中且約初偈若衆生下劣其心厭沒者是約機示以聲聞道令出於衆苦是現理也餘偈亦爾初三偈是漸教三乘第四偈是頓圓一乘是故諸處明三乘以外別有一乘義中文訂則引此四偈及賢首品偈也義訂則引十門十法也提玄及啚文說十門十法已結云若諸教義分齊與此相應而具足者頓及圓二教所攝相應而不具足者三乘漸教所攝已上此是漸三乘以外別有頓圓一乘之義訂也是故當知文訂中第四行偈亦通訂頓圓也問略疏初云第二頓教攝者云云以第九地四行偈第四偈訂也何故今云通訂頓圓耶頓教訂中雖引此文然三乘外別有頓圓之明訂此外更無故知通訂也第三圓教中云所以知有圓教者如下文如因大海十寶山已上更以此文以訂圓教故知彼偈唯訂頓教何云通耶用第四偈訂三乘外別有頓圓用如因大海等訂圓教中滿足佛事之義味故爾也何知以大海十山訂圓中義味耶因大海有十寶山因於佛智而有十地如一一山下悉有大海地中皆有佛果已上若得地地皆有佛果當知塵塵亦有佛果若得塵塵皆有佛果當知物物皆滿足佛事也欲現此意故引此文耳問初三行偈所訂三乘何三乘耶荅地㕛三乘也古辭琳德未入唐時云空畫三乘入大唐來云地畫三乘也已上謂訂頓圓以下三乘故爾也問用第四偈訂頓圓時分句訂耶一云爾也謂初二句訂頓後二句訂圓也今釋通訂也第十本末差別中約本與末或開或合以現一三之別也所有聲聞等者末也如是一切等者本也開則一三各別合三無二耶一云未之與開不殊故三乘本之與合不殊故一是故所有聲聞法等者是開是木故訂三乘也如是一切諸法等者是合是本故訂一乘也一云開則一三成異合則一無二唯開文中三別也就開文如何別耶所有聲聞法辟攴佛法艹艹法者三乘諸佛法者一乘也問三乘中具因果諸佛法者可通三乘何云唯一乘耶前差別中以爲說艹艹道訂三乘以說無盡佛法訂一乘此亦如是艹艹法者訂熟頓也諸佛法者唯一乘也今釋不見本經故起此諍耳檢彼經此中所引唯是開文謂經云海妙深持艹艹復問佛言世尊二乘解脫諸佛解脫此彼何異佛言云云乃至聲聞辟攴佛解脫如彼河水如來解脫如大海水海妙深持艹艹復問世尊諸大少河流入海否佛言云云乃至所有聲聞法辟攴佛法艹艹法諸佛法皆悉流入毘盧遮那智藏大海已上復次中以河喩二乘以海水合喩熟頓與一乘此是合文後復次中以熟頓爲能流別開智藏大海爲所流入此是開文也此開文中一乘三乘分相之義明現故引也是故文云#此文約本末分異者唯引開文故對彼合文云此文也何故不引合文耶合文中熟頓與一乘合喩故不引也文中聲聞法乃至諸佛法是三乘智藏大海者是一乘故此文以明一乘三乘之別也若唯引開文何云開合耶實則唯開但是語對故云開合也大乘同性經是三乘何故以智藏大海爲別教一乘耶雖是三乘而將去華嚴經事說故爾也問儼公不思議品疏云又大乘同性經中佛有十種地云云名甚深難知廣明智德地乃至十名毘盧遮那智海藏地乃至此應三乘爾已上則毘盧遮那智藏大海者是三乘何云別教耶荅異也謂前明聲聞十地辟攴佛十地艹艹十地諸佛十地等以爲能流別開毘盧遮那智藏大海爲所流入其毘盧遮那智海藏地者是能流諸佛十地中第十地故當於此中諸佛法故爾也旣云會末敀本但是一乘何故一乘三乘別耶所以能流入者以是劣法故爾也是故雖會末敀本而能成一三之別也三結前中亀鏡者所以卜吉凶鑑姸媸也第二義訂者約其義異以明一三之別也因果等者等取餘八對法及十玄門也略如下弁者指下施設異相及所詮章十玄章等也第二該攝中前明一三差別之相約相雖爾若約法體則於圓教中統攝無遺欲現此義故次來也淸涼疏云其猶百川不攝大海大海必攝百川雖攝百川同一鹹味故隨一滴迥異百川前之四教不攝於圓圓必攝四雖攝於四圓以貫之故十善五戒亦圓教攝尚非三四況初二耶已上此中亦爾約體攝法則下之四悉是圓教名爲該攝攝三之圓還與三別名爲分相也何故分相十門皆引聖教該攝則無耶分相者對法相人令別一三故須引教決彼疑也此該攝中直約法體以明該攝故不引也此中三初標次嘖後廣釋標中問本來悉是一乘法者何一乘耶一云同教一乘今釋別教也謂前明三乘以外別有別教一乘望前一乘云彼一乘故知爾也二嘖中何故前云三外有一故三差別至此則云一切三乘等法本來悉是彼一乘法耶如是徵也荅中三乘望一乘有二門故謂不異不一者以三乘望一乘有不異不一前約不一義明一三之此約不異義故云三乘卽是彼一乘也是故不異之義是該攝故此中正論不異而於嘖中擧分相義作問是故荅中幷擧不一耳此中三一開數別名二初不下正釋二門三又此下分配二門二釋中二先不異後二不下不一不異中二先開釋二門二問若下問荅除疑初中問不異之二門竝該攝耶荅正以三卽一句爲該攝然是語對故#幷論一卽三耳謂前標云一切三乘本來悉是彼一乘故爾也問荅中隱現四句反上思之者准前存壞作四句則應云問若據後門卽三者未知彼一爲現爲隱若現如何唯三若隱彼一乘更依何法而得進修荅有四句一由卽二故不待隱二由卽三故不㝵現三由卽三故無不隱四由卽三故無可現由初二義故一乘機得有所依由後二義故三乘機得有所依又三乘依一乘成也竝得也由四句俱卽三故是故唯有三乘無餘也此如下同教中弁者該攝是別教何故指同教一云唯約隱現四句指也一云通約存壞隱現二重四句指也今釋後說爲正謂一卽三三卽一之軌同於融本末中泯權敀實攬實成權故指耳非謂該攝是同教也二不一中不壞不一而明不異者擧不一現不異也是故分相之該攝該攝之分相也二分配二門中問若前來不一是分相不異是該攝者何言又耶前則直論不一不異而不分配分相該攝故此合結耳 同教中二一擧數列名二初中下別釋有二叚初分諸乘中四一開數二一明下釋相三經云下引訂四上來下摠結二釋相中六一明一乘中三一開數二初約下別釋三依上下摠結二別釋中七問諸處方便乘中開流目方便故此中但明所流方便不明所目耶一云法相交參同教中論也一云就勝門中幷論也一云該攝卽是所目故此不明也今釋後說合於文相謂第八根是所目而與該攝文相不異故也又教義攝益三乘三句中云或俱非教義約別教一乘說爲彼所目故已上爲彼所目者是三卽一義故是該攝別教何知所目是別教耶普法章云如是我聞首料簡下文所目之義約有十法已上立十普法之時標云所目又法數章所有無盡法數及餘乘數皆一乘所目卽是一乘由同在海印定中成故已上故得知也問法界啚云若約方便一乘說五乘摠是入一乘攝何以故以一乘所流一乘所目一乘方便故不一乘乘義章於橫依方便進趣法門中論流目方便已上若所目是華嚴經者方便一乘亦此經耶欲現彼三乘之法本華嚴經中所目故於方便中幷論所目耳所目非是方便乘也故十句章云無生佛法寄位升沈者佛內訂海印定名無生佛法乃至然爲機緣普賢艹艹出定於無生無名處以種種名題目是故云所目於此所目中隨機緣心勝劣尊㝵差別故云寄位升沈也衆生實執所目故云執名之徒佛不隨名訂名無住義故云無名眞源卽是法性圓融訂分也已上普賢出定於無生無名處中所目法故所目是別教也問旣云衆生實執所目故云執名之徒則執名之徒亦此經機耶佛不隨名乃至訂分處者是訂分也普賢出定乃至是故云所目者是起言以去緣起分故是別教也執名之徒者下四教執名之徒實執所目法耶爾也然實執則謬解故下四教也是故智通記云又疏中釋文前約八教互成約三弁三次第意何荅大意者爲現此經內一切教義等無不攝故謂佛始第二七日道樹中臨大人說大法時一切虛空界一切微塵微塵處一切十世九世前後時中一切五乘三乘乘無量乘機中頓應說一切法門所臨機衆生各各隨應聞解行訂如是一切教義等十十法門頓同時現現大機人如是法門見聞解行訂一處一切處中一時一切時中一根一切根一行一切行頓頓修行乃至三界六道四生等因果法皆無所殘此經內在已上如是定內所說之法隨自根器各各隨應聞解行訂則是定外故執名之徒下四教也十句章云所目者通方便始終所流者方便是中間者何耶彼章文始信時中於無生佛法以種種名題目是故通方便始所目中所有法實得訂時唯是無住義無異實名名爲所目所目者無實也是故通方便終也已上故爾也問方便始終與方便何別始終卽是此經方便卽是下四教故別也若爾何云所目通方便始終耶猶行路人初發之處終至之處不是路也而云路之始終如是此方便之始終是無生無名處及無住義故始終則此經也所流者是方便卽是中間也始信時者信華嚴耶不爾謂於所目中執實時爲始信也謂相和尚云三乘法者生信心故又儼師漸以生信者是下四教也一法相交參同教中問法相交參名者從一乘垂於三乘之義得耶從三乘參於一乘之義得耶一云如後謂旣文云一乘中亦有三乘法相等故也如前謂三乘參於一乘之義此是別教故也今釋法相交參從二義得名同教一乘者從一乘垂於三乘之義得名也如三乘中亦有說因陁羅微細等而主伴不具己上是故同教一乘者從下參之義得名也或一乘中亦有三乘法相謂如十眼中亦有五眼乃至而義理皆別已上旣云義理皆別上參之義是別非同此中四先擧名二謂如下釋相三此卽下結四是則下所以也亦有說因陁羅微細者維摩經說居士之室容三萬四千師子座高八萬四子由旬等故也亦說華藏世界者梵網經中說蓮華臺藏世界故也義理皆別者雖是五眼是十眼中五眼雖是六通是十通之六通故與三乘五眼六通別也二約攝方便中摠爲一乘者是別教皆名一乘者是同教也諸處文云一乘所目一乘所流一乘方便故卽名一乘已上一乘所目一乘所流一乘方便之一乘者別教一乘也卽名一乘者是同教一乘故也今此亦爾下四教法摠爲華嚴一乘之方便故皆名一乘也經云者法華經方便品也以此經文訂何一乘一云訂皆名一乘也謂法華是同教故也今釋訂於摠爲一乘之一乘也謂皆爲一大事故者別教一乘之一大事故爾也若爾初義云何會耶以法華中具多義故約別教一乘之義故不違也謂諸有所作皆爲一大事者與第七根中諸有所修皆迴向一乘同故也淸涼不分五義第三六原聖本意爲一事故者此亦訂華嚴別教故爾三約所流弁中經云者法華藥草喩品又經云者鬘經也汝等者謂聲聞也毘尼者小乘律也今弁三從一乘流而引此二文者何耶小乘從大乘流故云汝等所行是艹艹道又毘尼者卽大乘也例此當知大乘從一乘流大乘卽一乘也如是展轉訂也四就勝門中以望別雖權實有異等者有二義一義於同教中以三中大乘爲權以大白牛車爲實而云權實有異一義權義如前以大白牛車合別教一乘而云權實有異初義則大白牛車合三中大乘也後義則合別教一乘也經云及又云等者法華經方便品也五教事深細中如經云者法華壽量品也所詮章云或說釋迦報土在靈鷲山如法華經云我常在靈山等法華論主釋爲報身菩提也當知此約一乘同教何以故法華中亦現一乘故其處隨教卽染歸淨故說法華處卽爲實也已上靈山則染土而卽染敀淨故云人天見劫壞我土常安穩教旣深細處亦隨教深細故云教事深細事猶處也六約八義意趣中攝論頌曰爲引攝一及任持所餘由不定種性是故說一乘法無我解脫等性不同得二意樂化諸佛說一乘如問荅中弁者彼云又一乘語字幾意故說荅有八義說一爲不定機性聲聞通因及果故說一乘二爲欲定彼不定性艹艹令不入小乘故三據其法眞如是一諸乘皆依眞如以體攝相故四據無我等無人我理旣是通法大小共據無我理通故五據解脫等大小諸乘脫頓惱障通故六據性不同聲聞身中先修艹艹種性後入聲聞約性二處是通故七據得二意此有兩二意初二意者佛意欲攝一切有情得同自體意樂我旣成佛彼亦成佛據此意樂故自體者法性爲自體第二佛先爲彼聲聞授記欲發聲聞平等意樂義等與佛平等無二佛爲此意與諸聲聞等皆授記佛等意故第二義者於一言下有二義一實聲聞攝從自體意樂二有實艹艹名同聲聞及艹艹化爲聲聞於一授記下具有二義據一授記意樂故八據爲化意佛爲聲聞作聲聞佛所以同彼聲聞者欲令彼修聲聞行故現同小佛欲攝末敀本道我此身卽是一乘據能緣化心故說一乘約此八意括聲聞乘本來是一唯聲聞人不了自法謂言有別意愚住聲聞乘從彼愚故諸佛所呵今一乘所救者據此病別也七約十義方便孔目章云一乘義者分別有二一者正乘二者方便乘乘者如華嚴經說方便乘者分別有十一對三寶分別佛寶是一乘法僧是三乘何以故佛同無盡故法僧不定二對四諦分別滅諦是一乘三諦是三乘何以故滅諦同無盡故諦則不定三對二諦分別第一義諦是一乘世諦是三乘何以故第一義同無盡故世諦則不定四對過分別無恐怖卽是一乘有恐怖者卽是三乘何以故如來藏等依則無過卽同無盡故六識及心法智此之七法剎那不住種衆苦不得厭苦樂求涅槃由是俗諦故依緣不自在五對人及智分別有三種人成三種智三種智者一若善男子善女人成就甚深法智以爲第一人二若男子女人成就隨順法智爲第二人三若男子女人於諸深法不自了知仰推世尊非我境界唯佛所知是第三人前之一人是一乘智之兩人是三乘智何以故前弟一智是訂智同無盡故之二智未訂實法是不定故此依勝鬘經說六對所解了法虛妄契實無分別隨文解義是三乘法知法虛妄契實無分是一乘法何以故契無分別同無盡故隨文取者是則不定此依楞伽經義說七對一乘三乘小乘分別一乘是一乘三乘等是三乘何以故一乘卽無盡故三乘卽不定八對大乘中小乘分別大乘卽是一乘何以故大乘尊上卽無盡故中乘小乘卽不定如經會三敀一故九對世間出世間出出世間分別出出世間卽是一乘餘則三乘何以故出出世間勝同無盡故餘二則不定如法花經界外露地別索車者卽是其事十對比喩分別如王髻中明珠及大王等卽是一乘寶珠繫汝衣及窮子等卽是三乘何以故髻珠王秘甚深故餘則不定此依法華說上來所弁於眷屬經中欲現圓通無盡法藏一乘教義故於方便之處示一乘名令進入者易得解故作如是已上三摠結中依上諸義等者尋上所引聖教竝是三乘故云隨本宗定故云云二明二乘等者開一乘爲二乘開二乘爲三乘乃至無量乘數則從一至六義則無寬狹也問二乘三乘四五乘等中各艹艹一乘者何一乘耶一云別教一乘謂分諸乘融本末各通五教也今釋分諸乘融本末唯約下四教故同教一乘也弁三乘中一乘三乘小乘之一乘唯華嚴一乘餘竝同教也合愚法同迴心俱是小乘故有三耳此弁二乘何故結云有三耶約臨門三車云有三耳#又初約一乘次約三乘後約小乘者初叚亦有三乘次叚亦有小乘何故爾云耶初叚雖有三乘唯以一乘爲宗次叚雖有小乘唯取三乘爲宗故爾也三明三乘中二初標名次一者下釋相中三初一乘三乘小乘爲三次大乘中小乘爲三後小乘中自有三乘初中五初別分一乘三乘小乘也此中一乘何一乘耶別教一乘也此中正明同教何云別教耶但兼弁耳如分相者正弁別教而德量差別中兼弁同教分相此亦爾也何知兼弁別教耶此中引智論共不共二般若以不共訂別教以共訂同教故也不梁論善成立之一乘亦華嚴一乘故也若爾前後諸門之一乘亦可別教耶若爾難者同教應非一乘耶然一乘名通故前後諸門之一乘唯同教耳若爾此中一乘亦應同教此叚下云二者大乘中乘小乘爲三此有三義者當於前後諸門所明三義之初門也是故一者一乘三乘小乘名爲三乘者餘門所無故此一乘是別教也是故此門方云此爲現法本末故 本則別教一乘末則下教三乘故知爾也爲現法本末故者前後諸門各有一乘而偏於此中方有此言者爲現此中一乘是別教故也上開一乘下開愚法者今開前叚合一同三之一乘及合愚法同迴心之愚法故也是故明二乘叚初門中雖開一乘而合愚法同迴心以爲二乘次門中雖開愚法異迴心而合一同三以爲二乘此門中開一異三開愚法異迴心故云上開一乘等也若開前合一同三之一乘則今此一乘亦應同教何故云別教耶種大白牛車約同教見約別教見故不違也第二問所以下現愚法二乘在所引之意問荅卽爲二荅中先以彼愚法至折伏而已者約自意現也后是故彌勒下引聖教訂也以彼愚法約大乘終教以去竝不名究竟出三界者若約初教則二乘亦出三界耶爾也謂所詮章云以下同上亦許二乘全斷惑障分斷所知障已上是知初教許出三界也問三車中不幷初教通約中三乘爲三車故初教亦幷在三車中也若爾初教亦許愚法二乘出三界也何故幷在三車中耶三車雖通中三乘今則約合一大乘義說故爾也是故所詮章云亦可前約三乘中聲聞此約愚法故不同也已上此亦約合一大乘義也 第三是故#大乘下現大乘中具三乘也第四是故當和一乘至卽其事也因前以現一乘三小乘別第五若言說大品下遮他所立現三宗別有人解云大品經中有三乘者一音異解得小果耳而與阿含二乘是一種二乘也爲遮此意云若言說大品等時乃至得大果耶若言說華嚴時無有異解得小果者於華嚴經所目法中各隨根器有解小乘有解三乘則豈非異解得小果耶義別也所目義者第二七日同時具說五乘三乘無量乘法而小乘等隨自根器各執所解則是下四教大機之人頓領如此無盡之法則是華嚴經故義別也二者大乘中乘小乘爲三中三初合一同三合愚法同迴心爲三乘二大乘中自有三乘三小乘中亦有三乘初中合愚法同小乘故唯三也者言略也具則應言合愚法同迴心俱是聲聞緣覺故唯三耳教理可知者教則聖教理則道理諸聖教中多說大乘中乘小乘及艹艹緣覺聲聞如此非一故也此約一乘弁者問此中融一乘同大乘之意前二明二乘中云合一同三之意一而無別何故前云約三乘此云約一乘弁耶前對初門之約一乘弁故云約三乘此對後大乘中自有三小乘中亦有三故云約一乘弁也此中亦對初叚一一乘三乘小乘名爲三乘則可云此約三乘弁何故云約一乘初門之一乘是別教一乘故非此所要此門正是約三義論三乘之初門卽是同教一乘故云爾也二者大乘中自有三乘如上說有前引普超三昧經明大乘中具三乘故指彼處也三者小乘亦有三者問此叚是二者大乘中乘小乘此有三義之第三門耳前云三明三乘亦有三種之第三門是何荅此叚約二面見也遠望三明三乘亦有三種爲第三門近望二者大乘中乘小乘爲三乘此有三義亦爲第三門也四者或爲四乘中開一異三者前三乘中同大之一異三乘故合二聲聞者具則應言合二聲緣覺而對麟角喩獨覺故被聲教者竝屬聲聞故云爾此摠開也者開餘門之合三之一及與愚法又加人天故也弁二乘中初約一乘次約三乘弁三乘中初約一乘次約三乘弁五乘中亦爾然則此四乘中第二門亦三乘耶准前後門可云三乘而此門中幷弁一乘非偏三乘故云摠開也准上可知者指前約小乘中云如小論中自有聲聞法緣覺法諸佛法之三乘也五者或爲五乘中三乘人天爲五者與前三乘人天爲四何別別也謂前是小乘中三乘此則於前一乘三乘爲四之三乘加人天故五也佛與二乘天及梵爲五者依勝鬘經云諸天及梵乘聲聞緣覺乘諸佛如來乘我說如是乘已上三引訂中於一世界中聞說一乘音者訂一乘同教或二五等者如次訂也 第二融本末中三初正釋融本末同教二問若下問荅除疑三由此下句數料簡初中二初開章門初卽下現其無㝵初中此同教諸乘會融無二同一法界融前分諸乘同教也一云本則華嚴末則下教也今釋約四教已上大白牛車爲本三車爲末以融前所分諸乘同教故也二問荅中問意者三卽一而不㝵三一卽三而不㝵一二門俱齊故權則竝權實則竝實何故三乘是權一乘是實耶如是問也荅中先正略荅次徵後謂權下廣荅初中先荅後問後荅前廣荅中權起至實不失者劣起必賴於勝故實現至權不立者勝現不必賴於劣故是故至必有盡者勝起不必借於劣故有盡也一乘卽三至恒無盡者劣起必借於勝故無盡也存壞者准該攝四句而言者一由卽一故不待壞乃至四由卽一故無可存隱現者一由卽三故不待隱乃至四由卽三故無可現等也三句數料簡中有云或唯一等者指分相該攝別教也或唯三等者分相三乘及該攝之一卽三句也或亦一亦三者指分諸乘之一三乘也同教者問與章初云一別教二同教之同教何別一云同也一云有寬狹也初義者牒彼章初同教云故後義者同教者通約下四教此中同教者約法華會三敀一故不同也道申章云同教者何義荅迴三敀一是此經宗故名同也合三是同義耳若入一乘之方便爲同義者非但此經前前諸教皆是同教已上章初同教者入一乘方便之同教也故通諸教此中同教迴三敀#一之同教故別也此義中分諸乘之三乘者或唯三句見耶爾也若爾分相三乘不於亦一亦三之三乘中見耶爾也若爾何故或唯三如三乘等以不知一故或亦一亦如同教耶聖教別故爾也謂有聖教唯說三乘不說一乘或有聖教具說一是故或唯三如三乘等者從唯說三乘聖教云也或亦一亦三如同教者從法華具說一三云也今釋或唯三等者指分相三乘及該欇中一卽三之三乘與分諸乘中三乘也或亦一亦三等者指融本末中一乘三乘也分諸乘之一乘屬亦一中見也七義同教一乘於亦一亦三中如何准耶所流弁攝方便云亦一亦三謂於所流同教中欲別其所入所迴云亦一亦三也攝方便文云摠爲一乘方便故皆名一乘者不於亦一亦三中見也所流及攝方便者通約下四教云卽是一乘何故當於法華中迴三敀一耶下四教法是一乘所流一乘所目一乘方便故卽是一乘是故所流方便通於四教然而若推文訂要依法華汝等所行是艹艹道之文故所流方便還是迴三敀一義故當於亦一亦三也由是前二義中一乘教義分齊開爲二門之同教者通於攝方便及餘門寬或亦一亦三如同教者是所流法華一乘故狹也所以知亦一亦三者竝一乘耶教義攝益云三臨門三車爲開方便教界外別授大白牛車爲示眞實義此當同教一乘如法花經說已上通約教義云同教一乘故亦一亦三竝一乘也問此唯約示眞實義云此當同教一乘何故通耶荅前旣云露地牛車自有教義此當別教一乘臨門三車自有教義此當三乘如是別弁二宗仍約迴三敀一之義以臨門三車爲教大白牛車爲義而結云此當同教一乘是故一三竝一乘也或亦一者下乘教開合云二以教攝乘者有二初一乘隨教有五乃至二同教一乘之一乘也亦三者二明三乘亦五乃至五同教中始終俱同汝等所行是艹艹道之三乘也是故亦一亦三如同教者所流同教一乘也分諸乘中三乘與分相三乘別何故以分諸乘之三乘屬於或唯三句耶分相三乘分乘三乘是一種然對別教故爲分相三乘現此三乘是同教故爲分乘三乘耳實是一也二明二乘中露地牛車爲一乘臨門三車爲三乘何故此中竝爲同教一乘耶一種法華以多義見也謂露地牛車自有教義謂十十無盡主伴具足如華嚴經說二臨門三車自有教義謂界內示教得出爲義是見時大白牛車是別教與華嚴無二臨門三車是下四教也若德量差別中約同教弁異義者大白牛車立在四教上臨門三車下三乘也若臨門三車爲開方便教界外別授大白牛車爲示眞實義此當同教一乘者三車與大白牛車竝同教一乘也是故弁二乘中義與德量差別中約同教弁同故大白牛車則立在四教之上三車則下三乘也 是故諸乘或存或壞等者一云唯是融本末也今釋通於四句也餘釋乘名體等竝如別說者指遠公別章謂彼文一乘章中一乘名幷出體故也 圓通鈔卷第一終 三十五卜現德五年己未八月日摩訶岬藪五教章習時記說主白雲房均如大大德重副法膺法師記者開泰寺理原法師 開泰寺教藏付現德七年庚申夏講時所說所詮章記 說主均如大師僧 記者惠藏法師 開泰寺教藏付法水寺藏中卷削方言釋記云云冠山摩訶岬寺沙門均如輒任法筵粗申鄙釋峻豐三年壬戍均如大德於法王寺長講說師時所說義理章記 記者惠藏法師 雍熙四年丁亥四月日竟寫開泰寺教藏入又本云峻豐三年壬戍於京都法王寺均如大大德夏講時所說下卷章記 副師心融法師 重副師僧標法師記者僧逽法師重熙十一年壬午十月日竟寫入光教寺教藏此是 本講和尚所得教分記均如聖師所傳古義諸本標記也皆落簡殘編未得具本不由記者有巧拙取捨有不同故使諸本有多差別也今錄于此欲使後來備知源起耳
  1. 1)장주(章主)는 법장(法藏)화상(643~712)을 말한다. 법장의 저술에 대해서는 염조은(閻朝隱)이 지은 비(碑)와 최치원(崔致遠:857~?)이 지은 전(傳)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아래의 주를 참고할 것).
  2. 2)수문작석(隨文作釋:글의 구성을 따라서 해석하는 것)과 같은 말이니, 경론(經論)의 문구를 따라 차례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3. 3)비서소감(秘書少監)인 염조은이 지은 『대당대천복사고대덕강장법사지비(大唐大薦福寺故大德康藏法師之碑)』를 말한다.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50, p.280 중 참고. 大正新修大藏經을 다음부터는 大正藏이라고 줄여서 표시하기로 한다.
  4. 4)최치원이 지은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을 말한다(大正藏50, p.282 하 참고).
  5. 5)현수 법장(賢首法藏)이 의상(義湘, 625~702)에게 전한 편지는 「현수국사기해동서(賢首國師寄海東書)」인데 『원종문류(圓宗文類)』 제22권에 실려 있거니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제4권 「의상전교(義湘傳敎)」에도 실려 있다.
  6. 6)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로 화엄종에 속한다. 호는 운화(雲華) 또는 지상(至相)존자이다. 속성은 조(趙)씨로서 천수(天水) 사람이다. 12세에 두순(杜順: 557~ 640)의 문하에 들어가 14세에 출가하였다. 법상(法常)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우고 법림(法琳)에게 가서 연구에 전력하였다. 지정(智正)에게 화엄경을 배우다가 별교일승(別敎一乘)의 깊은 뜻을 깨닫고, 지정(智正)의 뒤를 이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있으면서 화엄종을 드날렸다.
  7. 7)천태종(天台宗)에서는 만유(萬有)를 통틀어 삼천(三千)이라 하였다. 지옥ㆍ아귀(餓鬼)ㆍ축생ㆍ아수라(阿修羅)ㆍ인간ㆍ천상(天上)ㆍ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ㆍ불(佛)을 10계(界)라 하고, 이러한 것이 서로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 이치에 의하여 10계가 10계를 갖추었으므로 100계가 되고, 100계마다 성(性)ㆍ상(相)ㆍ체(體)ㆍ역(力)ㆍ작(作)ㆍ인(因)ㆍ연(緣)ㆍ과(果)ㆍ보(報)ㆍ본말구경(本末究竟)의 10여시(如是)의 뜻이 있으므로 1천 여시(如是)가 되고, 다시 1천 여시에 삼종세간(三種世間)을 곱하여 삼천이 된다고 하였다.
  8. 8)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수양을 주로 하는 것은 자리(自利)이며, 다른 이의 이익을 목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이타(利他)이다. 이것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이 닦는 행(行)과 단지 자리(自利)만을 행하는 소승인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행이 다름을 구별한 것이다. 이러한 자리와 이타를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한 이를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9. 9)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균여(均如, 923~973)는 『오교장원통초(五敎章圓通鈔)』에서 고법상인(古法相人) 또는 신법상인(新法相人)이라고 구별하여 사용하였는데,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0. 10)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말ㆍ행동ㆍ생각 등으로 악업을 짓고, 그 업인(業因)으로 인하여 가게 되는 국토를 말한다.
  11. 11)진여(眞如)의 이성(理性)이 넓고 깊은 것을 바다에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12. 12)화엄경에서 불교 교리의 얕고 깊음에 따라 우열을 판단하는 것인데, 5교는 교상(敎相)의 분류로서 소승교(小乘敎)ㆍ대승시교(大乘始敎)ㆍ종교(終敎)ㆍ돈교(頓敎)ㆍ원교(圓敎)를 말한다.
  13. 13)화엄종에서 불교 교리의 얕고 깊음에 따라 우열을 판단하는 것인데, 10종은 종의(宗義)의 구분으로서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ㆍ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ㆍ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ㆍ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ㆍ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ㆍ제법단명종(諸法但明宗)ㆍ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ㆍ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ㆍ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ㆍ원명구덕종(圓明俱德宗)을 말한다.
  14. 14)이 기문(記文)은 고려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에서 축장경(縮藏經)에 있는 것을 보입한 것인데 역자도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그대로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15. 15)화엄종(華嚴宗)에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만유제법(萬有諸法)의 본성(本性)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어 끝이 없다는 것을 성해(性海)라 하며, 이러한 절대의 경지는 깨달음을 증득한 사람[果人]만이 아는 분제(分齊)이므로 과분(果分)이라고 한다.
  16. 16)의지할 것에 대하여 능히 의지하는 당체(當體)를 말한다.
  17. 17)의뢰하는 것에 대하여 의뢰할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18. 18)선하고 공교하게 중생의 근기에 맞도록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쓰는 것을말한다.
  19. 19)시(時)는 때ㆍ시기ㆍ시대를 말하며, 기(機)는 근기(根機)의 종류와 중생의 근기를 말한다.
  20. 20)중생의 근기가 부처의 교화를 받아들임을 말한다.
  21. 21)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으로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이라고도 한다.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망명(網明)과 사익범천 등을 위하여 온갖 존재하고 있는 모든 법[萬有諸法]이 공적(空寂)한 이유를 설명한 경전이다.
  22. 22)이것은 뒤에서 의논하여 밝힐 것인데, 지엄(智儼, 600~668)의 『수현소(搜玄疏)』 제1권 상(大正藏35, p.13 하 참고)에 보이는 것으로 점교(漸敎)ㆍ돈교(頓敎)ㆍ원교(圓敎)의 세 가지를 말한다. 이러한 3교는 본래 광통(光統)율사 혜광(慧光)의 교판(敎判)에 있었던 것을 지엄이 취하여 자신의 이론에 도입한 것이다.
  23. 23)능히 남을 교도(敎導)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교화자(敎化者)로서, 부처님은 능화(能化)이고, 중생은 소화(所化)에 해당한다. 승속(僧俗)으로 말하면 승려는 능화이고, 중생은 소화에 해당한다.
  24. 24)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이것은 온갖 법의 끝간 곳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진여의 실리(實理)를 증득하여 그 궁극에 이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25. 25)유위(有位)와 무위(無位)의 일체제법(一切諸法)을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을 말하니, 색법(色法)ㆍ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ㆍ불상응법(不相應法)ㆍ무위법(無爲法)이 있다.
  26. 26)5교(敎)인 소승교(小乘敎)ㆍ대승시교(大乘始敎)ㆍ종교(終敎)ㆍ돈교(頓敎)ㆍ원교(圓敎)에서 돈교를 제외한 네 가지 교를 말하는 것이다.
  27. 27)『오교장』 제7 결택전후의(決擇前後意)에서 기근(機根)을 열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의 제8ㆍ제9ㆍ제10(大正藏45, p.483 중~하 참고)의 3근(根)을 가리키는 것이다.
  28. 28)『화엄경지귀』 「제2 설경시(說經時)」(大正藏45, p.590 하 참고)에서는 열 종류의 법을 설한 것을 열거하고 문답한 내용을 인용하였다.
  29. 29)곧 분위차별(分位差別)이니, 차별한 범위 또는 차별하여 갈라 놓은 것을 말한다.
  30. 30)동교일승(同敎一乘)이란 화엄경에서 말한 것으로 삼승교(三乘敎)도 일승교(一乘敎)와 마침내 모두 같다고 하는 것이다. 3승은 그 말한 것이 1승과 많이 다르지만 실상은 1승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모두 1승에서 나뉜 것이므로, 3승의 법문을 수행하여도 돌아갈 곳은 1승이다. 이와 같이 1승은 3승이 되고, 3승은 1승이 되어서 3승과 1승이 서로 융통하므로 동교일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31. 31)별교일승(別敎一乘)이란 화엄종에서 말하는 것으로, 일승교는 삼승교와 아주 딴판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원융상즉(圓融相卽)을 말한 법문은 삼승교에서는 밝히지 못하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그대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 교의(敎義)의 입각지(立脚地)는 3승과는 천지현격(天地懸隔)하므로 『화엄경』의 법문을 별교일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32. 32)태원사(太原寺)의 창건에 대해서는 염조은(閻朝隱)의 비문(大正藏50, p.280 중 참고)에 보이고 있다. 그리고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大正藏50, p.281 중 참고)에서는 법장의 나이 28세이던 함형 원년에 측천무후가 집을 희사하여 태원사(太原寺)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33. 33)비하라(毘訶羅)ㆍ비하라(鼻訶羅)라고도 쓰며, 주처(住處)ㆍ유행처(遊行處)ㆍ정사(精舍)ㆍ승방(僧坊)이라 번역된다. 승려들이 사는 곳으로 절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사(寺)를 해석한 아래의 부분은 징관의 『행원품소(行願品疏)』에 대해서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주석한 『화엄경행원품소초(華嚴經行願品疏鈔)』 제1권의 서두에서 인용한 것이다.
  34. 34)『논어(論語)』 제7 「술이(述而)」 편에서 “자왈(子曰) 술이부작(述而不作) 신이호고(信而好古) 절비어아노팽(竊比於我老彭)”이라고 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제로 인용한 것은 종밀(宗密)의 『화엄경행원품소초』 제1권에서이다.
  35. 35)그때 그때 근기에 알맞도록 가설(假說)한 방편을 권(權)이라 하고, 수단이 아니고 가설이 아닌 구경불변하는 진실을 실(實)이라 한다. 이 둘은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권교(權敎)와 실교(實敎), 권지(權智)와 실지(實智), 권경(權經)과 실경(實經) 등이라 한다. 권실(權實)이라고만 하면 흔히 권교(權敎)와 실교(實敎)의 약칭으로 사용된다.
  36. 36)명언종자(名言種子)ㆍ명언습기(名言濕氣)ㆍ명언훈습(名言薰習)ㆍ등류습기(等流濕氣)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온갖 법을 낳는 직접 인연이 되는 종자로 명언(名言)에 따라 훈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명언종자라 한다. 이것을 명언이라 함은 심(心)과 심소(心所)가 경계를 반연하여 나타내는 것이 마치 이름이 법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므로 비유하여 명언(名言)이라고 하는 것이다.
  37. 37)유식종(唯識宗)에서는 중생의 성품에 본래 선천적으로 보살정성(菩薩定性)ㆍ연각정성(緣覺定性)ㆍ성문정성(聲聞定性)ㆍ삼승부정성(三乘不定性)ㆍ무성유정(無性有定)의 5종 차별이 있다고 하였다.
  38. 38)서분에 둘이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39. 39)그물을 짤 때 벼리를 제대로 다스려 놓으면 그물코들이 따라서 잘 짜여진다는 말이다.
  40. 40)말로써 나타낼 의리에 대하여 능히 나타내는 문구나 언어를 말한다.
  41. 41)나타낼 대상이란 뜻으로, 경문은 능전이고 소전은 경문으로 나타내는 문구 속의 뜻을 말한다.
  42. 42)이 책(大正藏44, p.465 상 참고)에서는 교취(敎聚)ㆍ의취(義聚)ㆍ염취(染聚)ㆍ정취(淨聚)ㆍ잡취(雜聚)의 다섯 가지 취(聚)의 대강을 서술하고 있다.
  43. 43)징관(澄觀)은 『화엄경소(華嚴經疏)』 제3권(大正藏35, p.520 상 참고)의 제6 종취통별(宗趣通別)의 항목에서 10종(宗)을 설명하였다. 법장(法藏)이 『탐현기』에서 교판(敎判)을 논하면서 제3 입교차별(立敎差別)에서 10종을 나타낸 것(大正藏35, p.116 중 참고)을 청량국사 징관은 종취론(宗趣論)으로 취급하고 있다.
  44. 44)의상의 제자로서, 『송고승전』에 기록된 전기에는 지통(智通)ㆍ표훈(表訓)ㆍ범체(梵體)ㆍ도신(道身) 등 네 명의 이름을 들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오진(悟眞)ㆍ지통(智通)ㆍ표훈(表訓)ㆍ진정(眞定)ㆍ진장(眞藏)ㆍ도융(道融)ㆍ양원(良圓)ㆍ상원(相源)ㆍ능인(能仁)ㆍ의적(義寂)의 10대덕(大德)이 나오고 있다. 진정(眞定)의 전기는 『삼국유사』 제5권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에 나오고 있다.
  45. 45)그는 의상이 화엄경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서 『추동기(錐洞記)』 2권을 지었다. 지통에 관한 전기는 『삼국유사』 제5권 「낭지승운(朗智乘雲)」에 실려 있다.
  46. 46)갖옷의 터럭과 그물의 눈이라는 의미로 “벼리와 옷깃을 잡으면 터럭[毛]과 눈[目]이 정돈된다”는 포박자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47. 47)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인 기세간(器世間), 일체중생이 살고 있는 중생세간(衆生世間), 모든 부처들을 의미하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세 가지 세간을 말한다.
  48. 48)이것은 지장(智障)이라고도 한다. 탐욕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 등의 번뇌가 소지(所知)의 진상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므로 이들 번뇌를 소지장(所智障)이라 하며, 진지(眞智)가 발현함을 장애하는 점에서 지장(智障)이라고 한다.
  49. 49)5온(蘊)ㆍ12처(處)ㆍ18계(界)를 말한다. 이것은 일체만법(一切萬法)을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50. 50)유식종(唯識宗)에서 우주와 인생을 설명하기 위하여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을 백 가지 요소로 분석한 것을 말한다.
  51. 51)일상삼매(一相三昧)ㆍ일상장엄삼매(一相莊嚴三昧)라고도 한다. 전 우주의 온갖 물심(物心)의 현상은 평등하고, 한 모양인 것을 관(觀)하는 삼매를 말한다.
  52. 52)자내증(自內證)이라고도 하니 자기 마음 속에서 증득한 진리로 불(佛)ㆍ보살(菩薩)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53. 53)▣로 표시한 것은 글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어서 번역이 불가능하므로 위와 같이 표시한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이 표시하기로 한다.
  54. 54)『총수록(叢髓錄)』 상권의 1(大正藏45, p.728 중 참고)의 관석(觀釋)에서 인용한 것에서는 여래장경(如來藏鏡)ㆍ정광파리경(錠光破璃鏡)ㆍ해인경(海印鏡)이라는 세 가지 종류의 경(鏡)을 들고 있다. 그리고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하권에서도 관석을 인용한 것이 보인다.
  55. 55)해인정(海印定)이라고도 한다. 『화엄경』을 설하려고 할 때에 부처님께서 드신 선정(禪定)의 이름이다.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바닷물에 비치는 것과 같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정심(定心) 가운데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법이 명랑하게 나타나므로 해인정이라고 한다.
  56. 56)그때 그때 변하여 옮겨 가는 산란한 마음을 산심(散心)이라 함에 대하여 의식(意識)을 통일하여 한 곳에 집중하는 마음을 정심(定心)이라고 한다.
  57. 57)화엄종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만유제법(萬有諸法)의 본성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어 끝이 없는 것을 성해(性海)라 하며, 이런 절대의 경지는 깨달음을 증(證)한 사람[果人]만이 아는 분제(分齊)이므로 과분(果分)이라고 한다.
  58. 58)인분(因分)은 인위(因位)의 분제(分齊)로서 과분(果分)에 반대되는 말이다. 화엄종의 이상불(理想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경계는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는 것인데, 지금 그 상태를 불도(佛道) 수행(修行)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59. 59)과분(果分)은 불과(佛果)의 분제(分齊)라는 뜻이다. 화엄종의 이상불(理想佛)인 비로자나불이 깨달은 법은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뻗쳐 깊고 넓기가 바다와 같으므로 성해(性海)라 하였으며, 이 과분(果分)의 법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알 뿐이고, 부처님 아닌 이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 표시할 수도 없으므로 불가설(不可說)이라고 한다.
  60. 60)줄여서 인분(因分)이라고도 한다. 화엄종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계의 모양은 부처님 이외의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의 윤곽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대로 말하여 나타낸 것을 연기인분(緣起因分)이라고 한다.
  61. 61)널리 원융한 교(敎)를 신수(信受)하는 이가 깨닫는 경지를 말한다.
  62. 62)일대의 교화를 말한 것이니, 곧 법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63. 63)절대인 하나에 뭉치지 않고 각각 다른 것에 제각기 이름을 붙여서 상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법장은 화엄오교장에서 3승과 1승, 방편과 진실의 상(相)을 나눈 것을 분상문(分相門)이라고 하였다.
  64. 64)차별적인 형형색색의 것을 절대유일한 것으로 통틀어서 융섭하는 것을 의미하니, 1승 안에서 3승을 포섭하였다는 의미이다.
  65. 65)부처님께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법을 설한 교설(敎說)을 말한다.
  66. 66)의명별석(依名別釋)에서 별석(別釋)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두 번째이다.
  67. 67)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 또는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도 한다. 법계 곧 우주만유를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학설이다.
  68. 68)『법화경』 「비유품(比喩品)」에서 말한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를 말한다. 이것은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이 받는 교(敎)를 비유한 것이다.
  69. 69)아무 것도 덮인 것이 없는 드러난 땅을 의미한다. 『법화경』 「비유품」에 장자의 아들들이 불붙는 집에서 뛰쳐나와 드러난 땅에 앉아서 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보았다는 비유가 있다. 이는 드러난 땅으로써 계외(界外)의 편안한 곳을 비유한 것이다.
  70. 70)온갖 사물에 낱낱의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말한다.
  71. 71)석상(釋相)에 둘이 있는데, 첫째는 이분무애(二分無碍)이고, 둘째는 광석인분(廣釋因分)이다.
  72. 72)중생이 업인(業因)에 따라서 윤회하는 길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지옥도(地獄道)ㆍ아귀도(餓鬼道)ㆍ축생도(畜生道)ㆍ아수라도(阿修羅道)ㆍ인간도(人間道)ㆍ천상도(天上道)가 있다.
  73. 73)건립일승분상문(建立一乘分相門)의 팔난신이신차별(八難信易信差別)(p.478 중 참고)에서 인용한 현수품(賢首品)의 게(偈)이다. 이것은 『화엄경』의 본문(大正藏9, p.441 상 참고)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74. 74)건립일승분상문의 구약기현리차별(九約機顯理差別)(p.478 중 참고)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 제9 선혜지(善慧地)에 있는 게(偈)와 『화엄경』 제26권(大正藏9, p.567 하 참고)에서 무량불법(無量佛法)과 무진불법(無盡佛法)을 인용하고 있다.
  75. 75)별교(別敎)의 광석인분(廣釋因分)에 둘이 있는데, 첫째는 장을 연 것[開章]이고, 둘째가 별도로 해석한 것[別釋]이다.
  76. 76)지광(智光)이 소승(小乘)ㆍ법상대승(法相大乘)ㆍ무상대승(無上大乘)으로 삼시교판(三時敎判)한 것( 『탐현기』 제1권, 大正藏35, p.112 상~중 참고)을 가리킨다.
  77. 77)분상문(分相門)에서 해석한 10문(門)을 『오교장』의 본문에서는 제성교중략유십설(諸聖敎中略有十說)(p.477 상~중)이라고 하였다.
  78. 78)여기에서 말한 법상인(法相人)은 자은(慈恩)대사 규기(窺基, 632~682)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의 내용은 『법화현찬(法華玄贊)』 제5권의 끝(大正藏35, p.750 하 참고)에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 또 세 종류의 수레라 말한 것은 길장(吉藏, 549~623)의 『법화현론(法華玄論)』 제4권(大正藏35, p.394 중 참고) 및 제6권(p.408 상 참고)에 있는 내용을 말한다.
  79. 79)우둔한 근기를 말하는 것으로 덕행이 예민하지 못한 이를 말한다.
  80. 80)재능이 예리한 사람으로서 지능(智能)이 총명한 근기를 말한다.
  81. 81)범어로 Mahakaruna이다. 남의 괴로움을 보고 가엾게 여겨 구제하려는 마음을 비(悲)라 하며, 불보살의 비심(悲心)은 깊고 크므로 큰 자비[大悲]라 한다.
  82. 82)이 글은 「방편품(方便品)」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법화경(法華經)』 제4권 「법사품(法師品)」(大正藏9, p.31 하 참고)에 있는 내용이다.
  83. 83)4무애변(無碍辯)을 말하며 4무애지(無碍智)ㆍ4무애해(無碍解)라고도 한다. 마음의 방면으로는 지(智) 또는 해(解)라 하고, 입의 방면으로는 변(辯)이라 한다. 여기에는 법(法)무애ㆍ의(義)무애ㆍ사(思)무애ㆍ요설(樂說)무애가 있다.
  84. 84)보살이 수행하는 여섯 가지 덕목으로서 보시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를 말한다.
  85. 85)고통 세계의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이 중생을 불도에 이끌어 들이기 위한 네 가지 방법을 말한다. 이것에는 보시섭(布施攝)ㆍ애어섭(愛語攝)ㆍ이행섭(利行攝)ㆍ동사섭(同事攝)이 있다.
  86. 86)부처가 한없는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의 네 가지를 말한다. 이것에는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無量心)이 있다.
  87. 87)단(檀)은 범어 단나(dana)의 준말로 보시(布施)라 번역되고, 도(度)는 범어 바라밀(paramita)의 번역이다. 곧 원어와 번역한 말을 함께 든 것으로, 이것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말하는 것이다.
  88. 88)세(世)는 천류(遷流)ㆍ격별(隔別)의 뜻이 있고, 간(間)은 간차(間差)의 뜻이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三世)로 천류(遷流)하면서도 갖가지의 모든 법은 서로 차별하여 섞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세간으로 나누기도 하고 삼종세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89. 89)생멸 변화하는 혼미한 세계를 벗어나 해탈경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또는 세속의 일을 세간(世間), 불법(佛法)의 일을 출세간(出世間)이라고도 한다.
  90. 90)이것은 설법의 네 가지 종류인 시교리희(示敎利喜)를 말한다. 시(示)는 법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며, 교(敎)는 가르쳐서 알게 하는 것을 말하며, 이(利)는 교도(敎導)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하며, 희(喜)는 행하는 것을 보고, 찬탄하여 기쁘게 하는 것을 말한다.
  91. 91)부촉(付囑)이라고도 쓴다. 다른 이에게 부탁하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신 뒤에 청중 가운데서 어떠한 이를 가려내어 그 법의 유통을 부탁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92. 92)도분(道分) 또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고도 하는데 도(道)의 품류(品類)를 말한다.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는 여러 가지 수양법으로서 여기에는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地)ㆍ8정도(正道)의 서른일곱 종류가 있다.
  93. 93)세간 일반 사람의 상식으로는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깊고 미묘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94. 94)고맙고도 드물게 있는 것이란 뜻이다. 즉 아주 드물고 진귀한 것으로 그와 같은 예가 없는 것을 말한다.
  95. 95)보살이 수행하는 계단인 52위 가운데에서 10지위의 첫 계단인 환희지(歡喜地)를 말한다.
  96. 96)물질과 정신을 말한다. 모든 법에 있어서는 색심(色心)이라 하고, 중생에 있어서는 심신(心身)이라 한다.
  97. 97)번뇌의 체(體)를 정사(正使)라 하는 것에 대하여 습관으로 남아 있던 버릇 같은 것은 습기(習氣)라 한다.
  98. 98)『오교장』 제1권 건립일승(建立一乘)에서 권실차별(權實差別)ㆍ교의차별(敎義差別)ㆍ소기차별(所其差別)ㆍ덕량차별(德量差別)의 네 가지 차별을 말한다.
  99. 99)수행한 인(因)으로 말미암아 도달하는 부처님의 지위를 말한다.
  100. 100)대흥선사(大興善寺)의 복례(復禮)를 말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제17권, 大正藏50, p.812 하 참고). 복례(復禮)는 지파가라(地婆訶羅)를 도와서 법장(法藏)과 함께 진역(晉譯) 『화엄경』을 번역하였다.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가 이르자 다시 법장과 함께 80권 『화엄경』을 번역하는 데 참가하였다. 복례와 실차난타가 말한 것을 소개한 것이 글에 보인다.
  101. 101)화엄종에서 보살수행의 계위(階位)를 52위(位)로 세우는 가운데에서 처음 10신위(信位)의 최후 만심(滿心)에서 성불함을 말한다. 이것은 화엄종의 독특한 해석으로 차례를 거치지 않고 일위즉일체위(一位卽一切位)라고 보는 견지에서 하는 말이다.
  102. 102)미묘하여 알기 어려운 진리로서 숨어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103. 103)지혜와 덕을 겸비한 스님을 존경해서 부르는 호칭이다.
  104. 104)『영초록(永超錄)』에서는 의적(義寂)의 저작으로 『성유식론미상결(成唯識論未詳決)』 세 권을 들고 있다. 선주(善珠)의 『유식의등증명기(唯識義燈增明記)』에서 인용한 도증(道證)의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의 서문(大正藏65, p.342 상~중 참고)에서도 의적이 이 책을 저술하였음이 보인다.
  105. 105)구극(究極)의 증과(證果)라는 뜻이다. 대승의 불과(佛果)와 소승의 무학과(無學果)와 같이 지극 구경의 과(果)를 가리킨다. 무상열반의 극과라고도 한다.
  106. 106)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회심향대(廻心向大)ㆍ회대입일(廻大入一)과 같은 뜻으로 3승의 마음을 돌이켜서 1승에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107. 107)『화엄경』에서 수행하는 계급에 따라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 등을 세우고 이 차례대로 지나서 마지막의 이상경(理想境)인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보는 관찰 방법을 말한다.
  108. 108)회통(會通)이라는 것과 뜻이 같다. 경(經)과 논(論)에 서로 어긋나 맞지 않는 글과 뜻이 있을 때에 그 가운데에서 서로 맞추어 일치하는 점을 발견해내는 것을 말한다.
  109. 109)견문생(見聞生)이라고도 한다. 과거세에 노사나불을 친견하고, 보현보살의 법문을 들어 미래에 부처될 종자를 얻는 자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숙선(宿善)에 달려 있다.
  110. 110)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 52위 가운데에서 처음의 10위로 부처님의 교법을 믿어 의심이 없는 지위를 말한다. 즉 신심(信心)ㆍ염심(念心)ㆍ정진심(精進心)ㆍ혜심(慧心)ㆍ정심(定心)ㆍ불퇴심(不退心)ㆍ호법심(護法心)ㆍ회향심(廻向心)ㆍ계심(戒心)ㆍ원심(願心)을 말한다.
  111. 111)해행생(解行生)이라고도 한다. 금생에서 『화엄경』을 믿고, 원해(圓解)를 내어 원행(圓行)을 닦는 지위로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의 5위(位)가 여기에 해당한다.
  112. 112)다른 것을 배척하고,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수론(數論) 외도가 일체 만법은 오직 일원(一元)에서 생긴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13. 113)개(開)는 개제(開除)라는 뜻으로 미정(迷情)을 깨뜨리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보이는 것을 말하며, 시(示)는 현시(顯示)라는 뜻으로 번뇌가 사라지고 지혜가 나타나 우주의 만덕이 밝게 나타나 보임을 말한다.
  114. 114)구습(舊習)을 고수하여 변통(變通)할 줄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115. 115)다음과 같은 열 가지의 산을 말한다. 첫째 온갖 약초가 모여 있는 설산(雪山), 둘째 온갖 향이 나는 향산(香山), 셋째 온갖 꽃이 나는 가리라산(軻梨羅山), 넷째 5신통(神通)의 선인이 사는 선성산(仙聖山), 다섯째 야차(夜叉)가 사는 유건타라산(由乾陀羅山), 여섯째 온갖 과일이 나는 마이산(馬耳山), 일곱째 용이 사는 니진타라산(尼盡陀羅山), 여덟째 자재자(自在者)가 사는 작가라산(斫迦羅山), 아홉째 아수라(阿修羅)가 사는 숙혜산(宿慧山), 열째 온갖 천자(天子)가 모여 사는 수미산(須彌山)이다.
  116. 116)『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의 발문(跋文)에서 신림(神琳)의 계보는 의상(義湘)→법융(法融)→신림(神琳)의 차례이니 의상의 법손(法孫)이라 할 수 있다. 일설에는 『십구장(十句章)』의 저자라고도 한다.
  117. 117)분상문(分相門)의 별현에 셋이 있는데 그 두 번째이다.
  118. 118)화엄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교의(敎義)로 구족하게는 십현연기무애법문(十玄緣起無碍法門)이라고 한다. 10은 만수(滿數)이고, 현은 심현(深玄)의 뜻이며, 문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문이란 뜻이다. 화엄종에서는 온갖 법이 낱낱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고, 낱낱이 하나를 취하면 어느 것이든지 모두 전일(全一)의 관계가 있는 것을 열 가지 부문으로 관찰하여 말하는 것을 10현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신(新)ㆍ구(舊)의 구별이 있는데, 지엄(智儼)이 세운 것을 구십현(舊十玄)이라 하고 현수 법장(賢首法藏)이 『오교장』에서 이것을 계승하여 『탐현기』 제1권에 표시한 것을 신십현(新十玄)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둘째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셋째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넷째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다섯째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여섯째 비밀은현구족문(秘密隱顯具足門), 일곱째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 여덟째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아홉째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 열째 탁사현법생해문(托事顯法生解門)의 열 가지이다.
  119. 119)10선도(善道) 또는 10선계(善戒)라고도 한다. 동작(動作)ㆍ어언(語言)ㆍ의념(意念)으로 10악을 범하지 않게 하고자 만들어 놓은 계(戒)를 말한다. 여기에는 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淫)ㆍ불망어(不妄語)ㆍ불양설(不兩說)ㆍ불악구(不惡口)ㆍ불기어(不綺語)ㆍ불탐욕(不貪欲)ㆍ부진에(不瞋恚)ㆍ불사견(不邪見) 등이 있다.
  120. 120)이것은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121. 121)이 부분은 『오교장』 제1권(大正藏45, p.478 하 참고)에서 “또한 여기에서 불일(不一)은 뒤의 분상문(分相門)이고, 여기에서 불이(不異)는 해섭문(該攝門)이다”라고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122. 122)모든 승을 나누었다는 것은 동교일승(同敎一乘) 자체에 1승ㆍ2승ㆍ3승 등의 여러 교(敎)가 있는 것을 보인 법문을 말한다.
  123. 123)제망(帝網)이라고도 하는데, 제석천(帝釋天)에 있는 보배그물을 가리킨다. 낱낱 그물 코마다 보주(寶珠)를 달았고, 그 보주의 한 개 한 개마다 각각 다른 낱낱 보주의 영상(影像)을 나타내고, 그 한 보주의 안에 나타나는 일체 보주의 영상마다 또 다른 일체 보주의 영상이 나타나서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엄에서는 이것을 일(一)과 다(多)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였다고 말하는 적당한 전례로 드는 경우가 많다.
  124. 124)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줄인 이름이다. 또는 화장계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의 진신(眞身)인 비로자나불의 정토를 말한다.
  125. 125)모든 법의 사(事)와 이(理)를 관조하는 다섯 가지 눈을 말하니, 곧 육안(肉眼)ㆍ천안(天眼)ㆍ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이 있다.
  126. 126)6종신통력(種神通力)ㆍ6신통(神通)이라고도 하는 여섯 가지의 신통력으로 부사의한 공덕작용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신족통(神足通)ㆍ누진통(漏盡通)이 그것이다.
  127. 127)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말하는 것으로 지극히 중대한 인연이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심은 대승ㆍ중승ㆍ소승ㆍ권교ㆍ실교와 종종 차별한 기류(機類)를 인도하여 법화경에서 말한 일불승(一佛乘)의 교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일대사인연이다.
  128. 128)범어로 vinaya로서 비내야(毗奈耶)ㆍ비나야(鼻那耶, 毘那耶)라고도 쓰며 제복(制伏)ㆍ조복(調伏)ㆍ선치(善治)ㆍ멸(滅)ㆍ율(律)이라 번역된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율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129. 129)지(止)는 범어(梵語)로 samatha라고 하며 적정(寂靜)이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사념망상(邪念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을 말한다.
  130. 130)해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의리를 분별하여 간택(簡擇)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131. 131)자성(自性)을 가지지 않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연(緣)을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서 만유(萬有)의 근본이 된다.
  132. 132)전륜성왕(轉輪聖王)이나 불(佛)ㆍ보살을 말한다.
  133. 133)생물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이 있다.
  134. 134)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의 3승 종자를 구비한 것이어서 성문이 될지, 연각이 될지, 보살이 될지 아무 데도 결정되지 않은 기류(機類)를 말한다.
  135. 135)『공목장』의 원문에는 “여여래장등(如如來藏等)”(大正藏45, p.538 상 참고)이라고 되어 있다.
  136. 136)동교일승(同敎一乘)을 설명할 때에 1승ㆍ2승ㆍ3승ㆍ4승ㆍ5승ㆍ무량승(無量乘)의 여섯 가지 문을 열어서 논한 것을 가리킨다.
  137. 137)여기에는 기를 꺾어 복종시킨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의미는 부처님의 법을 설교하여 악한 법을 꺾어버리고 정법(正法)을 따르게 한다는 것이다.
  138. 138)대승(大乘)ㆍ중승(中乘)ㆍ소승(小乘)의 말이 처음 보이는 곳은 정영사(淨影寺) 혜원(慧遠, 335~417)의 『대승의장(大乘義章)』 제14권 「삼승공지의(三乘共地義)」(大正藏44, p.755 중~하 참고)이다.
  139. 139)해석을 말하는 것으로 의리를 분별하여 간택을 더하는 것이다. 특히 문답을 세워서 해석하는 것을 문답요간(問答料簡)이라고 한다.
  140. 140)후주(後周) 세종(世宗)의 연호로서 현덕(顯德)이 옳다. 현덕 5년은 무오(戊午)이므로 여기에서 말한 기미(己未)는 6년에 해당한다.
  141. 141)균여는 광종(光宗) 9년(958)에 오관산(五冠山) 마하갑사(摩訶岬寺)의 백운방(白雲房)에 주석(住錫)하면서 『법계도기(法界圖記)』를 강설(講說)했다. 천기(天其)의 『일승법계도원통기후기(一乘法界圖圓通記後記)』 하의 45엽좌(葉左)가 참고된다.
  142. 142)송태조(宋太祖) 건륭(建隆) 원년에 해당한다.
  143. 936)143)고려 광종(光宗, 949~975) 때의 연호이다.
  144. 987)144)송태조(宋太祖)의 연호이다.
  145. 145)요(遼) 흥종(興宗, 1032~1055)의 연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