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모든 가르침의 소전차별 ② 【記】 세 번째로 행위차별(行位差別)은 여러 교(敎) 중에 모두 세 가지 뜻으로써 간략히 제시되었는데, 첫째는 위상(位相)을 밝혔고, 둘째는 불퇴(不退)를 밝혔으며, 셋째는 행상(行相)을 밝혔다. 맨 처음 것은 소승에 의거하여 네 가지 위(位)가 있으니, 방편(方便)ㆍ견(見)ㆍ수(修)와 구경(究竟)이라 이른다. 또한 소승 12주(住)를 설하여 구경으로 삼고, 삼계의 9지(地)와 11지(地) 등을 설함에 이르러서는 넓게 설함이 소론(小論)과 같다. 둘째의 불퇴는 수행(修行)이 인위(因位)에 이르러서 불퇴를 얻기 때문이며, 그 행상 또한 여러 논(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 어떤 이유로 소승행위(小乘行位) 등의 상이 널리 드러나지 않는가? 【답】 이 중의 의미는 뜻의 차별로 가르침이 같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지만, 그러나 소승이 대승과 다른 것은 이치가 의심스러울 것이 없기 때문에 설함을 기다리지 않는다. 【釋】 세 번째로 행위차별은 앞의 종성차별(種性差別)과 차별이 있으니, 지금은 종(種)이 반드시 행을 일으키고 행은 반드시 위(位)를 이룸을 밝혔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온 것이다. 앞에서는 여러 교(敎)에 두루 통하여 셋째 장문(章門)을 연다. 뒤의 처음에서 ‘소승(小乘)에 의거함’ 이하는 따로 5교(敎)1)에 나아가서 세 가지 문(門)을 개별적으로 해석했는데, 이 가운데 5교가 곧 5단(段)이 된다. 처음의 소승 중에서는 먼저 개별적으로 세 가지 문을 해석하고, 뒤의 ‘물음’ 아래에서는 문답이다. 앞의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위상(位相) 중에 소승에 의지한 것이 4위(位)가 있으니, 소위 방편(方便)과 견(見)과 수(修) 및 구경(究竟)이다. 방편은 곧 7방편이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5정심관(停心觀)2)이 하나이고, 총상념처(摠相念處)와 별상념처(別相念處)가 각각 하나이고, 4선근(善根)3)이 하나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소위 몸과 마음이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으로 삼보와 4제(諦)의 명자(名字)를 믿는 위(位)이기 때문에 5정심관(停心觀)에 속하지 별위(別位)가 되지는 않는다. 총상념처라는 것은 자타(自他)의 몸이 심법(心法)을 받음을 통째로 관찰하기 때문이며, 별상념처란 것은 따로 자타의 몸이 심법을 받음을 통째로 관찰하기 때문에 각각 하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몸과 마음이 청정하다고 한 것이 하나이고, 5정심관도 하나이고, 총상념처와 별상념처를 합하여 하나이고, 4선근도 각각 하나라고 하기 때문에 일곱이라고 하였다. 몸과 마음이 청정하다고 한 것은 비로소 삼보와 4제(諦)의 명자를 믿게 되는 위(位)이기 때문에 외범(外凡)4)의 위(位)에 속할 수 없으며, 아직 관행(觀行)을 일으키지 못하였으므로 5정심관에 속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개별적으로 하나가 된다고 한다. 총상ㆍ별상념처는 비록 총(摠)과 별(別)이 같지 않더라도 몸이 심법을 얻음을 통째로 관찰하는 뜻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하였다. 5정심관이란 탐욕이 많은 자는 부정관(不淨觀)5)을 닦고, 미움과 분노가 많은 자는 자비관(慈悲觀)을 닦고, 어리석음이 많은 자는 연기관(緣起觀)을 닦고, 총체적으로 또는 세부적으로 사고함이 많은 자는 수식관(數息觀)을 닦고, 나를 잘못 나라고 함이 많은 자는 계차별관(界差別觀)을 닦는 것이다. 4념처(念處)는 몸의 청정치 못함을 관찰하고, 받음[受]은 괴로움이라고 관찰하고, 마음은 무상(無常)하다고 관찰하고, 법은 무아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수(修)와 구경(究竟)에 대해서는 『비담론(毗曇論)』6)에서 이렇게 말했다. “16심(心) 중에 앞의 열 다섯 가지를 견도(見道)라고 하고, 아래의 세 가지 과(果)를 수도(修道)라 하며, 나한과(羅漢果)를 구경도(究竟道)라고 한다.” 혹은 어떤 데7)에서는 “16심을 아울러서 견도라고 하고, 중간의 두 가지 과를 수도라 하며, 네 번째 과를 구경도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성교(聖敎)에서 설한 것은 이와 같지 않다. 16심은 욕계(欲界)의 4제 중에 고법인(苦法忍)ㆍ고법지(苦法智)ㆍ집법인(集法忍)ㆍ집법지(集法智)ㆍ멸법인(滅法忍)ㆍ멸법지(滅法智)ㆍ도법인(道法忍)ㆍ도법지(道法智)로서 각각 두 가지씩 있기 때문에 여덟 가지이고, 욕계 위 2계(界)의 4제중에 고류인(苦類忍)ㆍ고류지(苦類智)ㆍ집류인(集類忍)ㆍ집류지(集類智)ㆍ멸류인(滅類忍)ㆍ멸류지(滅類智)ㆍ도류인(道類忍)ㆍ도류지(道類智)가 있기 때문에 여덟 가지이다. 두 가지의 여덟 가지를 더하기 때문에 열 여섯 가지가 된다. 또한 소승의 12주(住)를 설하여 구경(究竟)이라고 한 것은 『비담론(毗曇論)』 제18에서 설한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12주만을 치우치게 잡아서 구경이라 하는가? 【답】 그것은 『유가(瑜伽)』에서 설한 것을 예로 삼기 때문에 그렇다. 그 논(論)8) 제4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살의 12주(住)는 그 순서를 좇아서 성문주(聲聞住)로 분류된다는 걸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은 스스로 종성주(種性住)이듯이 보살의 초주(初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의 정성이생(正性離生)9)에 취입(趣入)한 가행주(加行住)와 같이 보살의 두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이 이미 정성이생주(正性離生住)에 들어옴과 같이 보살의 세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이 이미 정성소애미(淨聖所愛味)를 증득하여 상루(上漏)를 다하기 때문에 증상계학주(增上戒學住)와 같이 보살의 네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이 증상계학(增上戒學)에 의거하여 증상심학주(增上心學住)를 이끌어 나타내듯이 보살의 다섯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이 얻은 바와 같이 여러 성스러운 깨달음을 얻는 지혜와 증상혜학주(增上慧學住)처럼 보살의 여섯ㆍ일곱ㆍ여덟 번째 주(住)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이 아는 바를 관찰한 무상삼마지가행주(無相三摩地加行住)처럼 보살의 아홉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의 성만무상주(成滿無相住)처럼 보살의 열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이 여기에서 나와서 해탈처주(解脫處住)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살의 열한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여러 성문이 일체상(一切相)을 갖춘 아라한주(阿羅漢住)처럼 보살의 열두 번째 주(住)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이를 풀어서 말하면, 유가(瑜伽)와 같은 것에는 소승 12주의 분류에 대비하여 대승의 12주를 나타내어 구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아비담론』과 『구사론(俱舍論)』에서도 소승의 12주를 구경으로 삼는다. 『선계경(善戒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문(聲聞)에 또한 12행(行)이 있다. 성문성(聲聞性)이 있는 것을 곧 초행(初行)이라 이름하며, 만약 제1법(法)을 얻으면 제2행(行)이라 이름하며, 고법인(苦法忍)을 얻으면 제3행이라 이름하며, 네 가지 신심(信心)을 얻고 계가 청정함을 얻으면 제4행이라 이름하며, 만약 계주(戒住)와 같은 법이 증장(增長)됨을 얻는다면 제5행이라 이름하며, 만약 4제를 관찰하면 제6행ㆍ제7행ㆍ제8행이라 이름하며, 무상(無相) 삼매를 닦아서 모으는 것을 제9행이라 이름하며, 세 가지 삼매10)를 모두 갖춘 성취를 제10행이라 이름하며, 해탈을 획득함을 제11행이라 이름하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제12행이라고 이름한다.” 『지지경(地持經)』에 설한 것에 의거하면, 난(煖)ㆍ정(頂)ㆍ인위(忍位)를 성문성(聲聞性)이라고 한 것은 초행(初行)이 되며, 제2행ㆍ제3행은 문장에 나타나므로 알 수 있다.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제4행이라 하는데, 네 가지의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보와 계(戒)를 믿는 것이 넷이 된다. 사다함향(斯陀含向)을 제5행이라 하는데, 앞의 계에 의지하여 법이 증장하기 때문이다. 사다함과(斯陀含果)ㆍ아나함향(阿那含向) 및 그것의 과를 제6행ㆍ제7행ㆍ제8행의 세 가지 행이라고 한다. 욕계의 미혹 중에 뒤의 네 품(品)은 미세하여 깨우치기 어려우니, 밝은 지혜로 4진제(眞諦)의 이치를 관찰해야 바야흐로 능히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아래의 세 가지는 바로 나한향(羅漢向)이다. 초선(初禪)에서 무소유(無所有)에 이르도록 싫어서 여의는 마음을 일으켜 그릇된 상(相)을 여읨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 한다. 신증아나함(身證阿那含)의 멸진정(滅盡定)은 아홉 번째 선정11) 가운데 상을 여읨이 가장 지극한 것을 구족삼매(具足三昧)라고 이름한다. 무루진지(無漏盡智)는 바야흐로 능히 비상(非想)의 번뇌를 다스리기 때문에 해탈을 얻은 아라한과라 이름하고서 제12행으로 삼는다. 삼계는 욕(欲)ㆍ색(色)ㆍ무색계(無色界)이다. 9지(地)는 욕계산지(欲界散地)12)가 하나이고, 네 가지 선(禪) 및 네 가지 공(空) 때문에 아홉이라 한다. 10지(地)13)는 초선과 2선(禪)의 중간에 중간선(中間禪)이 있기 때문에 열이 된다. 말하자면 초선(初禪)은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이고, 2선(禪)은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인데, 이 두 가지의 중간에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를 열어서 중간선이라고 한다. 11지(地)는 근분정(近分定)에 이르지 못한 정(定)을 더하였기 때문에 열 하나가 되니, 말하자면 욕계에 있으면서 아직 초선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또 근분정(近分定)이라 하는 것은 이를테면 초선의 근분방편(近分方便)이 되기 때문이다. ‘ 『소론(小論)』에 설한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아비담론』 제5와 『구사론』 제1814) 가운데 4위(位) 및 12주(住)의 뜻을 밝히고, 『구사론』 제21과15) 『비담론』 제16 가운데 9지를 밝히며, 제6은 11지를 밝힌다. “둘째로 불퇴(不退) 가운데 수행하여 인위(忍位)에 이르러서 불퇴를 얻는다”고 한 것은 혹 16심(心) 중의 고인(苦忍)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불성론(佛性論)』에서 “성문은 고인(苦忍) 이상을 좇아야 불성(佛性)을 얻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은 4선근(善根) 가운데 인위(忍位)이다. 즉 『불성론』은 대승 중에 2승(乘)을 기준으로 하여 불퇴를 밝히고, 지금은 소승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증험할 수 없다. 【문】 앞의 「종성장(種性章)」에는 “만약 소행(小行)을 되풀이 익혀서 인위에 이르면 성문성을 이룬다”고 말한다. 이를 풀어서 말하건대, 종성이 인위에 이르러서 바로 불퇴가 된다고 한다면, 행위(行位)는 마땅히 고인(苦忍)에 이르러서 불퇴를 얻는가? 【답】 「종성장」은 대승(大乘) 중에 2승(乘)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 장(章)에서 또 “만약 『구사론』에 의해서 순해탈분(順解脫分)16)의 선근위(善根位)를 얻으면 곧 성(性)이 있다고 설한 것”은 종(宗)을 기준으로 해서 밝힌 것이다. 만약 대승 중에 이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종성은 인위(忍位)가 이루어지고, 행위는 고인에 이르러서 바로 불퇴가 된다. 만약 소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종성은 해탈분으로 결정(決定)을 얻고, 행위는 곧 인위에 이르러서 불퇴를 얻게 된다.
【記】 초교(初敎)에 의하면, 또한 세 가지 의미가 나타난다. 첫째는 위상(位相)인데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법(愚法)의 2승을 인용하여 회심(廻心)하게 하기 때문에 회심교(廻心敎)를 베풀어 행하는 것이다. 또한 견(見)과 수(修) 등 네 가지 위(位)와 9지(地) 등의 이름은 소승과 같다. 혹은 다섯 위(位)를 세우는데, 소위 견도(見道) 이전의 7방편 속에서 앞의 3종(種)을 나누어 자량위(資糧位)로 삼는데 이는 먼 방편이 되기 때문이며, 뒤의 4선근(善根)을 가행위(加行位)로 삼는데 이는 가까운 방편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이름은 앞과 같다. 또한 건혜(乾慧) 등 10지를 설하는데, 제9를 보살지라 하고 제10을 불지라고 하는 것은 2승이 최상을 소망함이 부족하므로 점차적인 수행으로 불과(佛果)에 이르도록 인도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불계(佛界)가 10지의 밖에 있지 않고 지(地) 가운데에 함께 있는 것은 그들을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방편이 그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2승의 사람은 몸을 나타낸 데서 성과(聖果)를 얻기 때문에 뒤에 두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 위상(位相)과 행상(行相) 등은 널리 『유가』의 성문결택(聲聞決擇)과 『잡집론(雜集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 어찌하여 『유가』 등에서 밝힌 성문의 행상(行相)과 위상(位相)이 저 『비담(毗曇)』 등에서와 같지 않은가? 【답】 상(相)이 같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소승의 사람이 모든 법에 어리석어서 요설(了說)하지 못함을 드러내기 때문이고, 둘째는 방편이 점차로 대승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일 따름이니, 이 때문에 행(行)과 위(位) 등의 법을 밝힌 것은 모두 방편으로서 크게 순향(順向)하여 설했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법소승(愚法小乘)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므로 곧 삼승교(三乘敎) 가운데 성문승(聲聞乘)임을 알게 된다. 【釋】 시교(始敎)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數)를 든 것이고, 둘째의 초위(初位) 아래에서는 따로 해석한 것인데 그 중에 세 가지가 있다. 【문】 초위상(初位相) 중에 ‘세 가지가 있다’고 했지만 아래 문장에는 오직 두 가지 문(門)이 있다. 어떤 이유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였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래 문장의 직진(直進) 중에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약간 유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두 가지 뜻을 열고 회심(廻心)17)으로서 하나를 삼았기 때문에 세 가지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회심을 하나로 하고 직진을 또 하나로 하며, 영사(影似)를 하나로 하였기 때문에 세 가지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뒤의 것을 옳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보살로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3현(賢)ㆍ10지(地)의 지위로서 설하는 것을 직진이라고 하고, 이 3현ㆍ10지 가운데 견(見)ㆍ수(修) 등의 이름이 소승에 유사하므로 영사(影似)라고 이름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회심과 직진 두 가지로 하고, 영사를 따로 세워서 제3으로 하지 않았는가? 【답】 직진과 영사는 일성교(一聖敎)에 의지하기 때문에 해석 중에 합해 버리고 열지 않았다. 하나의 문장에 의지함에도 불구하고 보살의 3현ㆍ10지의 기세를 설한 것을 이름하여 직진이라고 하고, 견과 수 등의 이름으로서 조금 비슷하여도 영사라고 한다. 이 뜻이 구별되기 때문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견과 수 등의 네 가지 위’는 방편(方便)과 구경(究竟)을 고르게 취한다. ‘아울러 9지(地) 등’은 삼계ㆍ10지ㆍ11지 등을 고르게 취한다. ‘이름이 소승과 같다’는 것은 위(位)의 이름은 같지만, 소승위는 인공(人空)18) 중에 변별되고 회심위(廻心位)는 법공(法空)19) 중에 변별되기 때문에 같지 않다. ‘혹 5위(位)를 세운다’는 것은 『잡집론(雜集論)』 제18과 『유가론』 제64 중에서 말하였다. 5위는 방편도(方便道) 중에 자량(資糧)과 가행(加行)을 열었기 때문이다. ‘원방편(遠方便)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만약 먼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구경도(究竟道)를 조망해서 원근을 밝히고, 만약 가까운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견도를 조망해서 원근을 밝히게 된다는 말이다. ‘여명(餘名)이 앞과 같다’는 것은 견ㆍ수ㆍ구경의 이름이 앞의 소승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간혜(乾惠) 등 10지(地)를 설한 것’은 『대품(大品)』 및『대지도론(大智度論)』의 「등주품(燈炷品)」에서 설한 것이다. 곧 첫째는 간혜지(乾惠地), 둘째는 성지(性地), 셋째는 팔인지(八人地), 넷째는 견지(見地), 다섯째는 박지(薄地), 여섯째는 이욕지(離欲地), 일곱째는 이판지(已辦地), 여덟째는 벽지불지(辟支佛地), 아홉째는 보살지(菩薩地), 열째는 불지(佛地)이다. 【문】 간혜십지(乾惠十地)의 회심(廻心)과 삼계ㆍ9지ㆍ10지 등의 회심과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만약 일반적인 논의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법(愚法)을 피해서 불우위(不愚位) 및 보살위(菩薩位)에 이르게 하는 것은 같다. 만약 수증(隨增)을 기준으로 하면, 삼계와 9지 등은 우법을 피해서 불우법(不愚法)의 가르침에 이르게 되고, 간혜십지는 우법을 피해서 보살승(菩薩乘)의 가르침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문】 여러 가르침 중에 모두 실제로 간혜(乾惠)가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교를 가르치는 것의 맨 처음에 모두 실제로 간혜를 세웠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실제로 간혜는 오직 시교(始敎)의 맨 처음 회심교(廻心敎)를 기준으로 하여 세웠으나 기세는 여러 교에 통한다”고 하였다. 결언(決言)대덕20)이 말하기를, “이 두 가지 도리는 모두 장소(章疏)를 갖고 있어서 서로 다툴 수 없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또한 『법계초(法界抄)』 중의 두 가지 부차(復次)가 모인 것에 의거하였는데, 처음의 ‘부차(復次)’의 뜻은 증분십지(證分十地)에 의거하여 교분십지(敎分十地)를 일으키고, 교분십지에 의거하여 직진십지(直進十地)를 일으키며, 직진십지에 의거하여 간혜 등의 십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이 뜻에 의거한다면, 실제로 간혜는 시교(始敎)의 처음에 있게 되고, 그 간혜의 기세는 위의 여러 교에 통한다. 다음 ‘부차’의 뜻은 증분십지가 변한 것을 교분십지라고 부르고, 교분십지가 변한 것을 직진십지라고 부르며, 직진십지가 변한 것을 간혜십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마땅히 머물 곳에서 머문 간혜십지는 여러 교에 통하게 된다. 지금의 해석에서 실제로 간혜는 오직 시교의 처음에 있으나 그 기세는 여러 교에 통한다. 지금 이 문장 중에는 오직 시교의 회심(廻心)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인데, 뒤의 여러 교 중에는 이 위(位)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시교의 처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어떤 이유로 기세가 여러 교에 통하는가? 【답】 『공목(孔目)』의 「십지장(十地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셋째는 위(位)를 기준으로 한다. 처음의 환희지(歡喜地)에서 제3지(地)에 이르기까지는 곧 세간법(世間法)이고 상(相)은 삼계와 같다. 제4지에서 제7지에 이르기까지의 상은 번뇌가 없음[無漏]과 같으니, 세간신(世間身) 중에 그 3승의 번뇌를 없애는 것을 출세(出世)라고 한다. 제8지에서 제10지에 이르기까지는 출출세(出出世)라고 부르니 곧 성불함을 얻게 된다. 제8지는 법신(法身)을 이루고, 제9지는 응신(應身)을 이루며, 제10지는 화신(化身)21)을 이룬다.” 제4지ㆍ제5지ㆍ제6지는 2승, 제7지는 보살, 8지 이상은 3신불(身佛)이라는 것은 간혜십지 중에 앞의 여덟을 2승, 제9를 보살지(菩薩地), 제10을 불지(佛地)라고 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곧 간혜의 기세라고 한다. 또 말하였다. “제10지에서 따로 성불하게 되니, 마치 법보주라선지식(法寶周羅善知識) 중에 설한 바와 같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1승의 의미는 3승 및 소승 등을 이끌어서 아래의 위[下位] 및 아래의 신[下身] 중에서 동일하게 성불함을 얻기 때문이다.” 이 문장 또한 곧 간혜의 범위에 속한다. 【문】 보현이십이위(普賢二十二位)22) 중에 건혜십지는 돈교(頓敎)23)의 뒤에 나열되어 있고, 17문(門)24) 중에는 원교(圓敎)25)의 뒤에 나열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간혜십지는 아래를 돌이켜서 위로 향하게 하는 교(敎)이다. 그러므로 22위 중에서 돈교의 뒤, 원교 5위(位)의 앞에 나열된 것은 아래의 4교(敎)를 돌려서 원교일승(圓敎一乘)으로 향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17문중에 원교의 5위 뒤에 나열된 것은 보현아함(普賢阿含)을 피해서 보현증위(普賢證位)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곤란하다. 말하자면 17문중에는 간혜십지의 뒤에 “보살에 곧바로 나아가기 위해서 처음에는 10신(信)26)을 좇아서 10지(地)를 모두 닦고 뒤에 작불(作佛)을 얻는다. 혹은 처음의 일념(一念)에 정각함을 일문(一門)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 사람은 곧 간혜십지의 돌이킴인가, 아닌가? 만약 곧 간혜십지의 돌이킴이라면 어떤 이유로 간혜십지 뒤에 나열되었는가? 만약 돌이킨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로 원교의 5위(位)는 곧 간혜십지의 돌이킨 것이고, 3승과 직진은 곧 간혜십지의 돌이킨 것이 아닌가? 또한 하물며 초교의 회심(廻心) 중에 간혜(乾惠)를 세운 것이 원교를 통해 돌아가는 데 있어서랴? 이런 의미는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현위에는 우열이 없기 때문에 앞에 배열하거나 뒤에 배열해도 자유로워서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해석은 그럴 듯해 보여도 정밀함이나 오묘함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2처(處)는 모두 6도인과(道因果)를 처음으로 삼는가? 이 때문에 위를 나열하는 순서에 말미암지 않은 바가 없으니, 말하자면 22위 중에 앞의 열 여섯 위는 곧 3승이고, 원교의 5위(位)는 곧 1승이기 때문에 원교의 5위는 마지막에 있게 된다. 3승 중에 앞의 6문(門)은 곧 범부(凡夫), 다음의 4문(門)은 곧 소승, 그 다음의 2문은 회심, 그 다음의 4문은 대승, 그리고 간혜십지는 3승을 통섭하기 때문에 3승의 뒤에 배열되어 있다. 17문중에 앞에 10문을 세우고, 뒤에 7문을 세운다. 앞의 10문중에 6도인과(道因果)는 그 수가 많기 때문에 이로써 근본을 삼으며, 다음은 두 가지에 두 가지를 더한 4문[二對四門]으로서 앞의 6문에 더하여 열을 이루기 때문에 계속해서 뒤에 배열한다. 다음 7문중에 원교의 5위는 그 수가 역시 많으므로 이를 근본으로 하며, 다음에 각각의 2문을 들어서 앞의 다섯 가지를 더하여 일곱 가지를 이루기 때문에 간혜 및 직진위(直進位)를 뒤에 배열한다. 【문】 만약 위(位)의 순서를 배열하는 것을 말미암는다면, 보현위(普賢位) 중에 우열이 있는가? 【답】 우열은 없더라도 문을 이루는 순서는 뒤섞여 어지럽지 않아서 선교(善巧)27)로 배열하여 평등위(平等位)를 나타낸다. 【문】 엄공(儼公)은 “간혜십지를 배열함은 1승이 작용하는 바이고, 3승이 들어가는 바이다”고 말하였는데, 이 뜻은 무엇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1승[一乘父]28) 시교(始敎)의 처음에서 간혜십지를 나타냄은 곧 작은 것을 이끌어 큰 것으로 향하게 하는 방편이니, 이 때문에 1승이 작용하는 바라고 말한다. 그 10지(地) 중에 앞의 일곱은 곧 성문지(聲聞地), 여덟째는 곧 벽지불지(辟支佛地), 아홉째는 보살지(菩薩地), 열째는 곧 불지(佛地)이기 때문에 10지는 모두 3승을 거느리니, 이 때문에 3승이 들어가는 바이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 1승이 작용하는 바라고 하는 것은 앞의 해석과 같다. 3승이 들어가는 바라는 것은 곧 2승이 들어가는 바가 3승 대승(大乘)의 위(位)이기 때문에 3승이 들어가는 바라고 하며, 3승이 능히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2승을 이끌어 위[上]로 부족함을 조망해서 점점 수행하여 불과(佛果)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2승의 사람은 제4과(果)로서 구경(究竟)이 되기 때문에 위[上]를 기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 이 때문에 2승지(乘地) 위에 보살지 및 불지를 세워서 위를 조망하매 부족하다는 이해를 일으키게 하여서 위를 기뻐하는 마음을 발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승이 여러 법에 우매하여 요달해 설하지 못함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곧 소승의 위상(位相)이 인공(人空) 중에서 밝힌 바이기 때문에 불료설이고, 대승의 위상은 법공(法空) 중에서 밝힌 바이기 때문에 곧 이치를 다한 설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방편으로서 점점 대승으로 이끌어 향하기 때문에’라는 것은 대승으로 밝힌 바가 그들과 약간 다른 것이니, 소승의 습관을 버리고 대승으로 향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삼승교(三乘敎) 가운데 성문승(聲聞乘)이 된다’고 한 것은 곧 실성문장(實聲聞藏)이라고 한다.
【記】 둘째로 직진인(直進人)이 위상(位相)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보살 10지(地)의 차별을 설한다. 또한 10지의 설로써 견(見)과 수(修)로 삼고, 지(地) 이전을 통틀어서 대승(大乘) 12주(住)의 뜻을 삼는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소승과 영사(影似)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 지(地) 이전에 40심(心)이 있어서 저 10신(信)으로 위(位)를 이루기 때문이고, 소승도(小乘道)인 앞의 4방편(方便)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의 『섭론(攝論)』에 이르기를, “마치 수다원도(須陀洹道)의 이전에 4위(位)가 있는 것과 같으니 소위 난정인세제일법(頂忍世第一法)이고, 보살지 이전의 4위 또한 이와 같아서 소위 10신(信)ㆍ10해(解)ㆍ10행(行)ㆍ10회향(廻向)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한 회심교(廻心敎)와 유사하기 때문에 신(信) 등의 4위(位)로 자량위(資糧位)를 삼고, 10회향 뒤에 따로 4선근(善根)을 세워서 가행위(加行位)로 삼는다. 견(見) 등은 앞과 같다. 【문】 어떤 이유로 이 교에 세운 명수(名數)가 다분히 소승 등과 영사(影似)하게 되는가? 【답】 방편을 따라 영사(影似)함으로서 그들을 수승한 방편이 있는 데로 이끌기 때문이다. 만약 완전히 그들과 다르다면 믿고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고, 만약 완전히 그들과 같다면 인도한다고 이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문】 만약 2승을 이끈다면 어떻게 반드시 그와 유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만약 직진(直進)이라면 어찌하여 저 소승과 일부러 유사하려고 하는 것인가? 【답】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소승과 점점 유사해진다. 첫째는 시교(始敎) 속에서 곧바로 나아가는 사람은 근기가 거칠고 얕기 때문에 대승의 심오한 법을 모두 받기 어렵다. 이 때문에 위(位) 등의 법상(法相)을 보인 것 역시 소승과 유사하나 의리는 구별된다. 둘째로 무릇 대승으로써 소승과 비슷하게 설하는 것은 모두 두 가지 뜻에 통한다. 하나는 소승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고 둘은 얕은 근기를 위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것을 설하여서 시교로 삼는다. ‘곧 어떤 뜻인가’ 등은 유가설에서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어떻게 이미 보특가라상(補特伽羅相)을 성취하였는가? 소위 여러 성문(聲聞)이 먼저 여러 선법(善法)을 꿰뚫어 익혔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에 하품의 성숙(成熟)에 안주하면, 이때 문득 하품의 욕락(欲樂)이 있어서 하품의 가행(加行)을 하여도 오히려 악도에 태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현재의 법에서는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하지 못하고, 현재의 법에서는 열반을 얻지 못한다. 만약에 중품의 성숙에 안주하면, 문득 중품의 욕락이 있지만 중품의 가행으로 악도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재의 법에서 사문과를 증득하지만 현재의 법에서 열반을 얻지는 못한다. 만약에 상품의 성숙에 안주하면, 문득 상품의 욕락이 있지만 상품의 가행으로 악도 속에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현재의 법에서 사문과를 증득하고, 곧 현재의 법에서 열반을 얻는다. 성문(聲聞)에서 설한 것처럼 독각(獨覺)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성문과 더불어 종성(種性)이 같닥 말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보살의 지위에서도 2승과 닮게 하기 위해서 또한 이처럼 세 가지 성취(成就)를 세운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이르기를, “만약 모든 보살이 승해행지(勝解行地)에 머문다면 그것을 하품의 성취라 이름하고, 만약 정승의락지(淨勝意樂地)에 머물면 그것을 이름하여 중품의 성취라 이름하고, 만약 타결정구경지(墮決定究竟地)에 머물면 그것을 상품의 성취라 이름한다. 만약 보살이 하품의 성숙에 머물면 악도로 가는 것과 같으니, 그리하여 제일무수대겁(第一無數大劫)을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머지 2대겁(大劫)은 2성취(成就)에 배당된다. 이와 같은 문장의 종류는 그 예가 하나가 아니니, 모두 위의 뜻을 갖추었으므로 이에 준하여 알 수 있다. 【釋】 둘째로 직진 중에서 먼저는 확실히 위상을 나타내고, 다음의 ‘묻기를 어떤 이유로’의 아래는 문답으로써 의심을 제거하였다. 【문】 ‘보살10지(菩薩十地)의 차별을 설한 것’은 어떤 이유로 3현(賢)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10지를 거론할 때 3현은 곧 방편이고, 이 때문에 남긴 바가 없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십지를 믿기 때문에 10신(信)이라고 이름하고, 10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10해(解)라고 하며, 행(行)과 회향(廻向)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은 성교(聖敎)와 같지 않으니, 오직 10지를 설한 것만 있기도 하고 통괄해서 3현과 10지를 설한 것도 있기도 하다. 지금은 오직 10지를 설한 성교만을 좇는다. ‘12주(住)’는 첫째 종성주(種性住), 둘째 승해행주(勝解行住), 셋째 극환희주(極歡喜住), 넷째 증상계주(增上戒住), 다섯째 증상심주(增上心住), 여섯째 각분상응증상혜주(覺分相應增上慧住), 일곱째 체관증상혜주(諦觀增上慧住), 여덟째 연기증상혜주(緣起增上慧住), 아홉째 유가행유공용무상주(有加行有功用無相住), 열째 무가행무공용무상주(無加行無功用無相住), 열한째 무애해주(無礙解住), 열두째 최상보살주(最上菩薩住)이다. ‘소승을 좇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10지 중에 견(見)과 수(修)를 나눈 것이 소승에서 견과 수를 나눈 것과 유사하고, 12주의 뜻도 또한 소승의 12주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양의 『섭론(攝論)』에 이르기를, “수다원(須陀洹) 등은 제11권 「수시장(修時章)」의 문장이고, 4선근으로서 지(地) 이전29)에 40심(心)을 배열하였다”고 설한 것은 이 논으로 증명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3현을 자량위(資糧位)라고 하고, 10회향(廻向) 뒤에 4선근을 세워서 가행위(加行位)라고 한다”고 말하였으니, 곧 『유가(瑜伽)』와 『잡집론』 등으로서 증명된다. 장주(章主:法藏)의 뜻은 4선근으로서 지(地) 이전의 4위(位)에 짝지움이 이승견도(二乘見道) 앞에 4방편(方便) 있음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3현 다음에 4선근을 세운 것은 회심교(廻心敎) 중에 자량(資糧)과 가행을 나눔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를 아울러서 성교(聖敎)라고 한다면 다툼이 일 수 없다. 또한 장주의 「회향품소(廻向品疏)」에서 말하였다. “제4정위(第四定位)는 해행위(解行位)30)가 끝나서 제일승기(第一僧祗)가 만족됨에 해당한다. 『불성론(佛性論)』에 의하면, ‘이 위가 구족되면 곧 불퇴위(不退位)31)라고 부르게 된다’고 하였으며, 『유가론(瑜伽論)』에 의하면, ‘이 가운데 오히려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고 하였으며, ‘이는 오히려 자량위에 속한다. 회향 뒤에 따로 4선근을 설해서 가행이라고 하기 때문이다’고 설한 것도 있으며, ‘이들은 두 위에 통한다. 제10회향(第十廻向) 중에서 가행을 섭(攝)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설도 있으며, ‘이들은 총괄하여 가행이 된다. 주심이환(住心已還)은 앞의 2선근(善根)의 지위에 속하고, 만심이환(滿心已還)은 뒤의 2선근의 지위에 속하기 때문이다’고 한 설도 있다. 위에서부터 총괄해서 초교(初敎)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 이 세 가지 설을 인용하여 따로 가려서 뽑았는데, 이 때문에 장주는 많은 뜻을 나타내었다. 또한 원효공[曉公]32)의 「일도장(一道章)」33)에서 말했다. “위에서 설한 4선근은 여러 위(位) 중에 어디에 배당되었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난(煖)은 10해(解)에 거하고, 정(頂)은 10행(行)에 있으며, 순제인법(順諦忍法)은 10회향에 해당하며, 세제일법(世第一法)은 최후념(最後念)이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4선근(善根)은 이미 제일무수대겁(第一無數大劫)을 초월하고, 초지(初地)의 근방편(近方便)에 들어가고자 하는데, 이 때문에 모두 제10회향의 승진분(勝進分) 중에 있는 까닭을 알 수 있다. 『대법론(對法論)』에서 설한 바와 같이, 방편도(方便道)이고 자량도(資糧道)가 아니니, 말하자면 자량도를 모아서 쌓은 것은 순결택분(順決澤分)의 선근이고, 난정인세제일법(頂忍世第一法)을 말한다’고 말하였다. 두 스님의 설은 각기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만약 대위(大位)로 판단한다면 앞의 설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습론(拾論)으로 수문(修門)에 섞임이 없다면 또한 뒤의 설과 같다. 그것을 자세히 논하면, 상사(相似)34)의 공덕은 3현위(賢位)에서 4관(觀)을 통틀어 융섭한다. 『본업경』(本業經)』에 말했듯이, 다음 10행심(行心)으로 관찰한 법은 모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스스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기 때문에 소위 4정근(正勤)이라고 하며, 둘째로 자신에게 큰 힘이 있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소위 4여의족(如意足)이라고 한다. 나아가 일곱째로 4무애지(無碍智)를 얻기 때문에 소위 5선근(善根)ㆍ지관(止觀)ㆍ난관(觀)ㆍ정관(頂觀)ㆍ인관(忍觀)ㆍ삼계공제일관(三界空第一觀)이라고 한다.” 장주(章主)가 만약 자세히 상사공덕(相似功德)의 논함을 기준으로 한다면, 또한 3현위(賢位) 중에 각기 4선근(善根)35)의 뜻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이미 『본업경』에서 설한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회심교에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잡집론』과 『유식론』 등에 밝혀져 있다. 【문】 문답은 세 가지가 있다. 처음의 문답은 가히 알 수 있고, 다음의 문답 중에 ‘근기가 얕다’고 한 것과 앞의 ‘근기가 거칠고 얕다’고 한 것과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다름이 없다. 말하자면 처음의 해석은 오직 직진이 거칠고 얕기 때문에 2승과 유사하고, 뒤의 해석은 단지 직진인(直進人)이 거칠고 얕아서 소승과 유사할 뿐 아니라, 또한 소승을 인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소승과 비슷해야 한다. 이 때문에 앞의 직진도 또한 근기가 얕다고 하기 때문에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근기가 얕음은 점차로 깨닫는 사람인 까닭에 앞의 직진과는 같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은 뒤의 뜻에 따른다. 처음 해석의 뜻은 직진인(直進人)이 거칠고 얕기 때문에 소승과 비슷해야 하는 것이고, 뒤의 해석의 뜻은 아래를 이끌고자 하였기 때문에 소승과 비슷한 것을 따른다. 무릇 아래를 이끈다는 뜻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법(愚法)을 이끌어 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회심(廻心)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소승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우법을 이끄는 것이며, ‘근기가 얕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회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뒤의 해석의 두 가지 뜻은 아래를 이끌어 올린다는 뜻과 동일하기 때문에 합해서 하나로 삼는 것이며, 만약 구별해서 연다면 곧 셋이 된다. 【문】 “또한 회심교와 유사하기 때문에 신(信) 등의 4위(位)를 자량위(資糧位)라고 한다”고 말한 것은 곧 근기가 얕음을 이끌어 내는 의미이며, “이들 또한 소승도(小乘道) 앞의 4방편(方便)과 유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곧 우법(愚法)을 이끌어 내는 의미가 되는가? 【답】 앞의 여러 설 중에는 모두 세 가지 뜻을 갖추고 있어서 나누어 배치할 수 없다. 세 번째 문답 중에 ‘즉 어떤 뜻’은 물음이 되고, ‘유가(瑜伽)와 같음’ 아래는 답이 된다. 답 중에 먼저 성교(聖敎)를 인용하고, 뒤의 ‘모두 위의 뜻을 구현한다’ 아래는 결론을 이루었다. 앞의 것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앞에는 『유가론』을 인용하고 뒤의 ‘이와 같음’ 이하는 예를 든 것이다. 앞의 것 중에서는 먼저 소승과 유사한 것을 인용하였으며, 뒤의 ‘보살에서’ 아래에서는 능히 대승과 유사하다. 원효의 「일도장(一道章)」에 이르기를, “하품성취(下品成就)는 곧 난법(煖法)이라고 하고, 중품성취(中品成就)는 정법(頂法)을 말하고, 상품성취(上品成就)는 인법(忍法)을 이른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난법은 악취(惡趣)36) 등을 여의는 것을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본래 상품의 선근에서 취입(趣入)한다면 비로소 하품의 순해탈분(順解脫分)에 들어가는데, 그 때에는 다시 악취에 갈 수 없다. 본래 중하품(中下品)의 선근에서 취입하는 것은 이미 취입하더라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며, 『유가』에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3성취(成就)의 의미는 이 문장 중에 나타난다. 이 스님의 뜻은, 난위(煖位)면 곧 물러나고, 인(忍)에 이른다면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중하의 선근이 점차로 취입(趣入)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본래 상품 선근(善根)의 사람은 비로소 순해탈분에 들어서므로 불퇴라고 한다. 【문】 중품의 성취는 악취(惡趣)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구사론(俱舍論)』에서 “인(忍)은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곧 중품성취는 인법에 해당한다. 어떤 이유로 중품이 정(頂)에 해당하는가? 【답】 그 정위(頂位) 중에서는 처음의 마음은 물러남이 있지만 원만하면 곧 불퇴이고, 인법은 처음과 끝이 모두 불퇴이다. 지금 중품성취는 곧 정위가 원만하기 때문에 악취(惡趣)에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에서 이미 온갖 선법(善法)을 익숙히 익혔다”고 한 것은 순해탈분의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법에서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하는 것이 아닌” 것은 현재의 법 중에서 초과(初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법 중에 유여(有餘)와 무여(無餘)의 두 열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현재의 법 중에서 사문과를 증득한다”는 것은 아래의 3과(果)를 얻었기 때문이며, ‘상품성취’는 현재의 법 중에서 제4과(果)를 얻고 두 가지 열반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문】 이미 다음 글에 능히 대승과 유사하다고 한 것 중에서 3성취(成就)로서 3승기(僧祗)를 배대하였다면, 곧 성문승(聲聞乘) 중에도 이와 같이 배열하여야 한다. 어떤 이유로 견도(見道) 이전에 3성취(成就)를 세우는가? 【답】 수행시분(修行時分)에 이르기를, “상근(上根)은 소위 불(佛)의 정(定)이 3승기겁을 채운 것이다”고 하였다. 소승 중에는 단지 능화(能化)37)보살 중에서만 3승기를 분별하는데, 성문(聲聞) 중에는 3승기가 없기 때문이다. 【문】 만약 능화 보살을 기준으로 한다면, 3승기로서 3성취(成就)에 견줄 수 있는가? 【답】 3승기를 설하였더라도 오히려 견도(見道)의 앞에 있다. ‘삼승기로서 유루의 4바라밀을 닦을 때’와 ‘백 겁으로 상호업(相好業)을 닦을 때’가 모두 견도의 앞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능히 대승과 유사한 것 중에 『유가』를 인용하여 7지(地)의 명칭으로서 3성취(成就)를 나타내는데, 7지는 종성지(種性地)ㆍ승해행지(勝解行地)38)ㆍ정승의락지(淨勝意樂地)ㆍ행정행지(行正行地)ㆍ결정지(決定地)ㆍ결정행지(決定行地)ㆍ도구경지(到究竟地)이다. 종성지는 곧 종성위(種性位)이니, 이 때문에 3성취 중에 융섭되지 않는다. 승해행지는 곧 하품성취이고, 정승의락지는 곧 초지(初地), 행정행지는 곧 2지(地)에서 7지에 이르는 것으로 합하여 중품성취가 된다. 지금은 앞을 들고 뒤를 겸하기 때문에 정승의락지라고 말한다. 결정지는 곧 8지, 결정행지는 곧 9지, 도구경지는 곧 제10지이니, 이 셋을 합해서 상품성취라고 한다. 지금은 전후를 들고 중간을 겸하기 때문에 타결정구경지(墮決定究竟地)에 있다고 말한다. ‘모두 위의 뜻을 갖춘 걸 준거해서 알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앞의 첫째는 소승을 이끌기 때문이고, 둘째는 근기가 얕기 때문이라는 두 뜻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은 통괄해서 위의 세 가지 뜻을 갖추었다.
【記】 둘째로 불퇴위(不退位)는 『불성론(佛性論)』에 의거하면, ‘성문(聲聞)이 고인(苦忍)에 이르고, 연각(緣覺)이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고, 보살이 10회향에 이르면 모두 불퇴이다’라고 한다. 이 가운데 성문과 연각이 우법(愚法)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따라서 이는 시교 중에 3승인(三乘人)이다. 또한 보살의 지(地) 이전의 총설을 퇴(退)라고 할 수 있으니 여러 악취(惡趣)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유가(瑜伽)』에서 말하기를, “가령 여러 보살(菩薩)이 승해행지(勝解行地)에 머문다면 역시 악취(惡趣)에 이르게 되니, 그리하여 제1무수대겁(無數大劫)을 다하는 것이다”고 한 것 등이다. 셋째로 위(位) 중에 행상차별(行相差別)을 밝힌 것에 대해서 가령 『유가』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승해행주의 보살이 전변할 때에 어떤 행(行)이고 어떤 상(相)인가? 어떤 때에는 총명한 지혜를 구족하니, 여러 법을 능히 받아서 능히 지니고 의미를 능히 깨달아 들어간다. 혹은 일시에 능히 이렇게 하지 못하고, 혹은 일시에 억념(憶念)을 구족하고, 혹은 일시에 다 잊어버린 부류가 되기도 한다. 모든 중생을 능히 조복받는 방편을 아직은 다 알지 못하고, 스스로의 불법에 대해서도 선교방편을 참답게 이끌어내는 것을 아직은 다 알지 못한다. 남을 위하여 설법을 해서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에 힘써 노력해서 바꾸는데, 힘써 노력해서 바꾸기 때문에 능히 여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헛되이 버리는 것이 마치 어둠 속에서 쏜 것 같아서 적중하기도 하고 적중하지 못하니, 이는 욕망에 따라서 이루기 때문이다. 혹은 일시에 대보리를 이미 발심했는데도 나중에 물러나서 버리는데, 이는 내면의 의락(意樂)을 말미암기 때문에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싶은 것이며, 사념의 선택을 말미암기 때문에 남을 즐겁게 하고 싶은 것이다. 혹은 일시에 깊고 큰 교법을 설함을 듣고서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주저하고 의심한다. 이와 같은 종류를 승해행주라고 한다.” 이를 해석하기를, “12주 중에서 제이주행상(第二住行相)이니, 그 첫 번 째 종성주(種性住)의 행상(行相)은 더욱 열등한 것이다. 그리고 지(地) 이후의 행상(行相)은 모두 앞에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釋】 둘째로 불퇴를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문】 2승(乘)이 종성(種性)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째서 인위(忍位)와 같아서 불퇴를 얻고, 행위(行位)를 기준으로 한다면 성문(聲聞)이 고인(苦忍)에 이르고, 연각(緣覺)이 세제일법(世第一法)39)에 이르러서 불퇴를 얻는 것인가? 【답】 성정(性定) 이전에는 종(種)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일위(一位)와 함께 결정을 얻는다. 성정 다음에는 연각이 날카롭기 때문에 세간법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성문(聲聞)은 무디기 때문에 고인(苦忍)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문】 ”또한 보살지(菩薩地) 앞에 총괄해서 퇴(退)라고 설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앞의 『불성론』과는 어떻게 만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유가론』은 대비(大悲)에 근거하기 때문에 오히려 악취(惡趣)에 태어나며, 『불성론』은 자행(自行)을 의지하기 때문에 10회향(廻向)에 이르러 곧 불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성론』은 회향이 가득할 때를 불퇴의 때로 기준 삼기 때문이고, 『유가론』은 만심(滿心) 이전에 퇴(退)의 때가 있음을 기준 삼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논설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문】 “또한 보살지의 앞을 총괄해서 퇴(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앞의 『불성론』의 말을 바꾼 것이다. 따라서 따로 해석할 수 있는데, 어째서 다른 뜻이 없다고 하는가? 【답】 『불성론』에 이르기를, “보살은 10회향에 이르러서 모두 불퇴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사람들이 잘못 알아서 회향의 종심(終心)40) 이전을 모두 불퇴라고 생각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만심(滿心) 이전에 모두 퇴(退)의 뜻이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또한 같을 수 있다고 말한다. 셋째로 행상(行相)41)을 밝히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유가론』을 인용하여 해행주행상(解行住行相)을 변별하고, 뒤의 ‘풀어서 말하기를’ 아래에서는 보기를 두었다. 인증에서는 먼저 묻고, 뒤의 ‘혹은 때의’ 아래에서는 대답이다. 대답에 세 가지가 있으니, 우선은 3혜(慧)를 기준으로 하여 얻음과 얻지 못함을 말하며, 둘째로 ‘여러 중생에 있어서’의 아래에서는 두 가지 이로움을 기준으로 하여 앎과 알지 못함을 밝히며, 셋째로 ‘문설심심(聞說甚深)’의 아래에서는 법을 들고 의문을 갖는다. 처음의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은 문혜(聞惠)와 사혜(思惠)를 기준으로 하여 얻음과 얻지 못함을 밝히고, 뒤의 ‘혹은 일시에 있어서’의 아래에서는 수혜(修惠)에 의거하여 얻음과 얻지 못함을 밝힌다. 앞의 것 중에 우선은 문(聞)과 사(思)를 얻음을 말하며, 뒤의 ‘이와 같은 것을 능히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얻지 못함을 나타낸다. 앞의 것 중에 ‘총혜(聰惠)을 구족하고’는 통틀어 두 가지 혜(惠)를 얻는 것이며, ‘능히 받고 능히 지니고’는 곧 문혜를 얻는 것이며, ‘그 의미와 이치에 있어서’는 곧 사혜를 얻는 것이다. 둘째로 수혜에 근거한 것 중에서 ‘생각을 구족한다’는 것은 곧 수혜를 얻는 것이며, ‘망류(忘類)에서 이룬다’는 곧 수혜를 얻지 못함을 말한다. 본론(本論)에서 말하였다. “승해행주보살(勝解行住菩薩)에 세 가지 잃은 것이 있다. 첫째는 경계(境界)에서 뜻할 수 있고 뜻할 수 없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중에 일시에 그 마음이 뒤바뀌기도 해서 정념(正念)을 망실(忘失)한 것이다. 둘째로 생명을 받은 그 몸 속에서 이미 생명을 받고 나서는 전생(前生)을 망실한 것이다. 셋째로 수지(受持)한 온갖 법을 오래 일으키고 오래 설하여서 일시에 망실한 바가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세 곳에서 망실(忘失)의 염(念)이 있다.” 이 세 가지 잃음을 기준으로 하여 논(論) 가운데 이르기를, “망념류(忘念類)를 이룬다”고 하였으나 이 인용문은 염(念)자를 생략하였다. 둘째, 두 가지 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알고 알지 못함을 밝힌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알지 못함을 밝히고, 다음 ‘의요(意樂)로 말미암아’의 아래에서는 앎을 밝힌다. 앞의 것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히 표함이고, 둘째, ‘여실(如實)’의 아래에서는 자세히 밝힌 것이다. 그 중에서 앞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어떤 때는 헛되이 버린다’는 것은 논에서 “어떤 때는 헛되이 버리고, 어떤 때는 헛되이 버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인데, 지금 이것은 단지 한 쪽만을 인용하였을 뿐이다. 나중의 ‘혹은 일시에 대보리에 있어서’의 아래에서는 자신을 이익 되게 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중에 어떤 본은 이 문장을 과(科)로 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러 중생’에서 ‘또한 아직 여실히 알지 못한다’에 이르기까지는 두 가지 이로움의 방편을 알지 못함을 밝힌 것이며, ‘선교방편(善巧方便)을 인용하여 밝힌다’에서 ‘욕심을 좇아서 이루기 때문에’에 이르기까지는 다른 사람을 이익 되게 하는 방편을 알지 못함을 늘려서 해석한 것이며, ‘혹은 일시(一時)에 있어서’에서 ‘그러므로 뒤에 물러나 집착을 버림’에 이르기까지는 자신을 이롭게 하는 방편을 알지 못함을 늘려서 해석한 것이다.” 둘째로 앎을 변별함 중에서 ‘의요(意樂)를 말미암기 때문에’ 등은 비록 다시 물러나서 버린다 하더라도 의요가 있기 때문이며, 또 보리(菩提)에 취구(趣求)해서 깊고 큰 교법(敎法)을 구하기 때문이다. ‘사택(思擇)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등은 비록 힘써 전환하더라도 사량으로 결택(決擇)해 남을 위해 설법함으로서 즐거이 구함을 권유(勸誘)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법을 듣고서 의문을 갖는 것 중에 ‘깊고 큰 교법(法敎)’을 어떤 사람은 “종교(終敎)이고, 진여여래장법(眞如如來藏法)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초교(初敎)이고, 두 가지 공(空)으로 진여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초ㆍ종의 두 교(敎)를 묻지 않고 대승의 깊은 법을 통틀어 기준으로 하였다. ‘유예(猶豫)’라는 것은 짐승의 이름이다. 이 짐승은 음식을 먹을 때 사람이 자기를 다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나무에 올라가 조망한 뒤에 아래로 내려와서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記】 만약 종교에 의거하면, 보살 10지(地)의 차별을 설하고, 또한 견(見)과 수(修)의 이름은 설하지 않는다. 또한 지(地) 이전에 다만 3현(賢)이 있는데, 그것은 신(信)이 행(行)이고 위(位)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 아직 불퇴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아직 주(住)에 오르기 전에 이 10심(心)이 있으므로 위(位)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처음 범부지(凡夫地)에서부터 불보살을 만나 올바른 교법 속에서 일념의 믿음을 일으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는 것은 사람뿐이니, 이때를 주(住) 이전의 신상(信相) 보살로 이름하고, 또한 가명(假名) 보살이나 명자(名字)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이 사람이 대략 10심(心)을 수행하는데, 이른바 신진(信進) 등이다”고 했으니, 자세히는 그 경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인왕경(仁王經)』에 이르기를, “습인(習忍) 이전에 10선을 행하는 보살은 나아감도 있고 물러남도 있는데, 마치 가벼운 털이 동서로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다” 등으로 말했는데, 이런 수행이 10천 겁을 거쳐서 10주위(住位)에 들어가 바야흐로 불퇴를 얻기 때문이다. 10주의 처음은 곧 그 아래의 2승지(乘地)로 물러나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여러 악취(惡趣)와 범지(凡地)에서이겠는가. 『본업경』에서 10주(住)의 제6심(心)에 물러남이 있다고 설한 것은, 기신론 속에서 그 문장을 퇴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하듯이, 게으르고 느린 자로 하여금 그 마음을 채찍질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보살이 발심주(發心住)에 들어가면 곧 불퇴를 얻는 것이다. 그 행상(行相)을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3현(賢)의 초위(初位)에서 작은 분수의 법신(法身)을 보는데, 능히 시방세계에서 8상(相)으로 도를 이루고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 또한 원력(願力)으로 자재(自在)롭게 몸을 받는 것은 또한 업(業)의 묶임이 아니며, 또 삼매(三昧)에 의거해서 작은 분수의 보신불(報身佛)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 수행한 바가 모두 진성(眞性)을 익혀서 순응하니, 소위 법성체(法性體)에 인색함과 탐욕이 없어서 단바라밀(檀波羅蜜) 등을 수순하면서 수행함을 아는 것이다.” 자세히는 경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양의 『섭론(攝論)』 중에서 “10신(信)은 범부(凡夫) 보살이라 이름하고, 10해(解)는 성인(聖人) 보살이라고 이름한다”고 하며, 지(地) 이상의 행상(行相)의 지위는 앞의 배가 됨을 준거하여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 행상의 지위는 앞서의 시교(始敎)와는 깊고 얕은 상의 차별이 드러나는 것이다. 【문】 이 교는 어째서 2승(乘)을 퉁틀어 이끌지 않는가? 어떤 이유로 행상의 지위가 소승설(小乘說)과 유사하지 않는가? 【답】 이후의 일체 교는 모두 깊고 뛰어나므로 2승을 이끄는 것 또한 순수하고 성숙하고 높고 뛰어난 근기이기 때문에 그와 유사함을 빌리지 않은 것이다. 만약 돈교에 의지하면, 일체 행상의 지위는 모두 설할 수 없으니,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이며, 만약 행위차별(行位差別) 등의 상(相)을 본다면 곧 뒤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말에 의거하여 나타낸다면, 『능가경(楞伽經)』에서 “초지는 8지(地)이며, 나아가 소유한 바 없음을 말한 것인데 무슨 차제(次第) 등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사익경(思益經)』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모든 법의 바른 본성을 배워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설한대로 수행한다면 1지(地)로부터 1지에 이르지 않으며, 만약 1지로부터 1지에 이르지 않으면 이 사람은 생사나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런 것 등이다. 【釋】 셋째로 종교(終敎)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바르게 나타냄이요, 나중은 문답이다. 앞의 것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 가지 문[三門]을 말하며, 둘째로 ‘이 때문에 마땅히 안다’의 아래에서는 시교(始敎)를 간별하였다. 앞의 것 가운데 세 가지는 먼저 위상(位相)을 밝히며, 다음의 ‘이에 있어서 수행한다는 것’의 아래에서는 불퇴를 밝히며, 마지막으로 ‘그 행상(行相)’의 아래에서는 행상을 말한다. 앞의 것 가운데 ‘또한 보살 10지(地)의 차별을 설함’은 앞의 초교의 직진위(直進位)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또한 ‘견과 수 등의 이름으로써 설하지 않는다’는 것은 종교에서 시설하였더라도 또한 초지를 견도(見道)라고 하고 2지 다음부터를 수도(修道)라고 한 뜻이 있다. 그러나 초교의 견ㆍ수의 위를 나누어서 두 가지 장애를 끊은 것과는 같지 않으며, 또한 자량(資粮)ㆍ가행(加行)ㆍ견(見)ㆍ수(修) 등의 이름으로써 5위(位)를 나눈 뜻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이를 뿐이다. ‘또한 지(地) 이전에 있어서는 단지 3현(賢) 등이 있을 뿐’은 앞의 시교(始敎)가 소승의 견도(見道)의 앞에 4방편이 있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10신(信)도 또한 위가 된다. 지금 이 교(敎) 중에는 점점 깊고 세밀하기 때문에 소승을 인용한 뜻은 없으니, 그러므로 10신은 단지 이를 행하되 아직 위를 이루지 못하고 오직 3현이 있을 뿐이다. 끌어서 증명한 것 중에 세 군데의 문장을 인용한 것은 모두 10신이 위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둘째로 불퇴(不退) 중에서 먼저는 불퇴를 정한 것이고, 다음의 ‘『본업경』에 시설한’의 아래에서는 어긋남을 회통하였다. 먼저의 것 가운데 ‘10주위(住位)에 들어서서 불퇴를 얻는 것’은 앞의 시교 중에서 종성(種性)은 신만(信滿)에 이르고, 행위(行位)는 회향(廻向)에 이르러 불퇴를 얻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 교 중에는 종성과 행위가 함께 신만(信滿)에서 비로소 불퇴를 얻게 된다. 다음으로 어긋남을 회통함 중에서 『본업경』에서는 “정목천자(淨目天子)ㆍ법재왕(法財王)ㆍ사리불 등은 제7주(住)에 들어서고자 하지만, 나쁜 인연에 놓여 있기 때문에 물러나서 범부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논(論)42) 의 문장을 인용하여 스스로 밝힌다. 셋째로 행상 중에 ‘소분(小分)이 법신(法身)을 보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장주(章主)의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십해보살(十解菩薩)은 이 관문(觀門)에 의거하여 법신(法身)을 보았기 때문에 소분견(小分見)이라고 말한다. 또한 인공문(人空門)에 의거하여 법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해석은 두 가지 공(空)을 묻지 않았으니, 지(地) 이전이 다만 위(位)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뒤의 해석은 10주위(住位) 중에 인공의 방편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원력(願力)으로서’라고 한 것은 지상(地上)에서 간별할 수 있으니, 분단신(分段身)43)을 받아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또한 업에 묶인 것이 아니다’는 범부를 간별한 것이다. ‘또한 삼매에 의해서’는 시교(始敎)가 지(地) 이상에서 바로 보신(報身)을 보고 지(地) 이전에서 삼매력(三昧力)에 의하여 보신을 본다는 것이다. ‘그 닦아 행하는 것이 모두 진성(眞性)을 따른다’는 것은 장주[法藏]의 말이고, ‘위지(謂知)’ 이하는 『기신론』의 문장이다. 【문】 【답】 중에서 ‘이 뒤의 여러 교’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직 종교(終敎) 내의 여러 교일 뿐이다. 이를테면 돈원(頓圓) 중에는 소승을 이끄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여러 교라고 하는가? 【답】 종교를 따른 것 가운데 『열반경(涅槃經)』과 『대품경(大品經)』을 회심설(廻心說)이라고 하고, 『유마경』(維摩經)』와 『사익경(思益經)』 등을 직진설(直進說)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은 종교 이상의 세 가지 교44)이다. ‘높고 수승한 근기’란 종교에서 설한 것으로 소승을 이끄는 뜻이 있지만, 이끄는 근기가 순수하고 익숙하며 높고 뛰어나기 때문에 소승과 닮은 것은 빌리지 않는다. 【문】 실제로 성문장(聲聞藏)이라 함은 시교(始敎)에 해당하고, 거짓으로 성문장을 세움은 종교(終敎)에 해당하는가? 【답】 그렇다. 【문】 가립(假立)과 영사(影似)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영사는 소승 중에서는 견과 수 및 12주(住)를 나누고, 보살위(菩薩位) 중에서는 그와 닮고자 하니, 따라서 견ㆍ수의 2도(道)와 12주를 나누기 때문에 영사라고 말한다. 가립은 보살위 중에서는 실제로 이와 같은 것이 없으나, 4제(諦)와 도품(道品)45) 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설하기 때문에 가립이라고 한다. 『요간(料簡)』 가운데 가립(假立)의 문장에서 이르기를, “성문(聲聞)의 회심(廻心)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승(勝)이요 다른 하나는 열(劣)이다. 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에 대승에 들어가서 이 장(藏)을 빌리지 않는 것이며, 열은 오히려 대승을 두려워하기에 그 명수(名數)46)와 동일하게 신(信)을 받음을 쉽게 하고자 하니, 이 때문에 이 문(門)을 세운다”고 하였다. 지금은 이것은 높고 수승한 근기 중에 저 승렬(勝劣)의 두 사람을 융섭한 것이다. 【문】 그 수승한 사람을 높고 뛰어나다고 하지만 열등한 사람을 어째서 높고 수승한 근기라고 하는가? 【답】 지금은 시교(始敎)에서 인용한 사람에 대비하기 위해서 모두 높고 수승하다고 부른다. 넷째로 돈교(頓敎) 중에서 ‘일념불생(一念不生)’에 대해서 『연의(演義)』에서는 “마음이 일어나면 곧 망(妄)이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부처이다. 마음이 일어난다고 말한 것은 단지 다른 마음이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보리ㆍ열반ㆍ관심(觀心)ㆍ견성(見性)의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또한 마음을 낳는다고 말하고 아울러 망상(妄想)이라고 한다. 망상이 모두 고요해지면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앞에 나타난 것을 고요히 비춘다면 어찌 불(佛)이라고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으니, 바로 이 뜻이다. 만약 아래 시분(時分)의 단락에서 “일념(一念)은 곧 무념(無念)이다”라고 말한 것에 의한다면, 곧 이 단락의 일념도 또한 무념의 일념인 까닭에 『연의』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아래의 단락은 곧 세시(世時)로 기준을 삼기 때문에 구별되며, 이 단락은 『연의』의 뜻과 같다.
【記】 만약 원교(圓敎)에 의거하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전에 여러 교(敎)가 밝힌 행위를 융섭하는 것인데, 이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별교에 의거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지위에 의탁해서 드러남을 잡은 것이니, 소위 10신(信)으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를 일컫는 것인데, 6위(位)가 같지 않지만 하나의 지위를 얻는데 따라서 일체 지위를 얻는다. 【문】 어떤 이유인가? 【답】 이 6상(相)으로 거둠을 말미암기 때문이며, 주반(主伴)이기 때문이며, 상입(相入)하기 때문이며, 상즉(相卽)하기 때문이며, 원만히 융합하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1지(地)에서 일체의 여러 지(地)의 공덕(功德)을 두루 융섭한다”고 하고 있으니, 따라서 경전 속에서 “10신(信)의 만심승진분(滿心勝進分) 위에서 일체의 지위 및 불지를 얻는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일이다. 또한 여러 지위 및 불지 등이 상즉(相卽)하는 등이기 때문에 인과는 둘이 아니고 처음과 끝이 막힘이 없으니, 하나 하나의 지위가 바로 보살이고 바로 부처라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둘째로 보(報)를 잡아서 위상을 밝힌 것은 단지 3생(生)이 있다. 첫째는 견문위(見聞位)를 이루는 것으로서 무진법문(無盡法門)을 보고 들어서 금강의 종자 등을 이루는 것을 말하니, 「성기품」(性起品)에 설한 것과 같다. 둘째는 해행위(解行位)를 이루는 것으로서 도솔천자(兜率天子) 등이 악도(惡道)로부터 나오고 나서는 하나의 생(生)에 이구삼매(離垢三昧) 이전을 얻고 10지의 무생법인(無生法忍)과 10안(眼)ㆍ10이(耳) 등의 경계를 얻은 것이니, 자세히는 「소상품(小相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가령 선재(善財)가 처음 10신으로부터 10지에 이르기까지 선지식의 처소에서 일생(一生)의 일신(一身) 위에 이러한 보현의 모든 행위(行位)를 다 갖춘다는 것도 역시 이 의미이다. 셋째는 증과해위(證果海位)로서 미륵(彌勒)이 선재에게 말하기를, “내가 장차 정각을 이룰 때 그대는 나를 보리라”라고 한 것이니, 이것 등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인과의 전후를 잡아서 2위(位)로 나누었기 때문이니, 따라서 전위(前位)는 단지 인(因)이 원만하고 과(果)는 뒤의 위에 있으므로 마땅히 나를 볼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釋】 다섯째로 원교(圓敎) 중에서 첫째로 동교(同敎)라고 한 것은 바로 아래의 4교(敎)이고 섭방편(攝方便)이 된다. 원교는 별교(別敎)로부터 이름 붙였으나 권속(眷屬)의 뜻 안에서는 동교를 아울러 말하였다. 둘째로 별교에 의거한 것 중에서는 먼저 요간(料簡)47) 하였고, 다음에 글을 풀이하였다. 요간은 앞에 표시해서 “여러 교 중에서 모두 세 가지 뜻으로 대략 나타냈다. 첫째는 위상(位相)을, 둘째로 불퇴(不退)를, 셋째로 행상(行相)을 밝힌다”고 말한 것이다. 이 별교 중에 ‘기위(寄位)를 기준으로 함’은 곧 위상이고, ‘보(報)를 기준으로 함’은 곧 불퇴이며, ‘행(行)을 기준으로 함’은 곧 행상이라고 한 것이다. 【문】 어떤 이유로 앞에서는 ‘불퇴’라고 말하고, 지금은 ‘보(報)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하는가? 【답】 별교일승에서 불퇴의 지위는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쳐서 ‘보를 기준으로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별교에 두 가지 문(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초위(初位)를 얻을 때 곧 후위(後位)를 얻는 것으로서 만약 뒤를 얻지 못한다면 앞도 또한 얻을 수 없게 되니,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하나의 위(位)를 얻어서 곧 불퇴를 얻기 때문에 하나의 위(位)로 결정할 수 없다. 또 하나는 그 삼승숙교(三乘熟敎)에 의지하여 신만(信滿)으로 불퇴할 즈음에 일승(一乘)을 나타낸다는 것이니,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신만(信滿)에 이르러서는 단지 불퇴뿐만 아니라 이내 성불한다. 이 때문에 불퇴의 지위는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에는 고쳐서 ‘보(報)를 기준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문】 이 세 가지 문(門)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기위(寄位)는 곧 수상(修相)48)이고, 뒤의 두 가지 문은 돈원(頓圓)에 통한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문에 얕고 깊음이 없다”고 하였다. 앞의 뜻은 삼승위(三乘位)에 의지해 1승의 자덕(自德)을 나타내기 때문에 별교가 되지는 않고 수상이 된다. 보문(報門)에 의거하는 중에 선재(善財)와 천자(天子) 등의 일승행(一乘行)을 인용한 것은, ‘해행(解行)’이49) 곧 실제돈(實際頓)이고, ‘증과해(證果海)’가 곧 궁실원(窮實圓)임을 말한다. ‘행을 기준으로 하여 위(位)를 밝힌다’고 한 것과 아래의 ‘별교(別敎)는 위에 의거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또한 돈원(頓圓)이다. 이 중에 ‘기위(寄位)’와 아래의 문상(門相), 법체(法體)50)의 두 선교방편은 아울러 수상(修相)이다. 말하자면 이 중에 “처음 10신(信)에서부터 이내 불지(佛地)의 6위(位)에 이르기까지 같지 않다”고 한 것은 ‘상(相)을 기준으로 하여 문(門)에 나아가는 문’에 해당하며, “1위(位)를 얻어서 일체위(一切位)를 얻는다”고 한 것은 곧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법에 이르는 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 가지 문의 해석은 모두 얕고 깊음이 없어서 돈원별교(頓圓別敎)의 뜻에 해당한다. 【문】 기위문(寄位門)은 삼승위(三乘位)에 의지하여 1승 자체의 덕을 나타내기 때문에 가령 원융(圓融)이 있더라도 위가 원융한 것은 응당 수상(修相)이 된다. 그 행(行)이 원융하다면 돈원(頓圓)이 되는데, 무슨 연유로 그렇게 부르지 않는가? 【답】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어려운 점은 앞의 여러 교 중에 밝힌 위상(位相)은 얕고 낮으며, 그 행상(行相)과 불퇴(不退)는 깊고 뛰어난 것이 된다. 저것이 이미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서는 왜 그렇다고 말했는가? 또한 “정위(正爲)”에서 “만약 보문(普門)에 의한다면, 1위(位)는 일체위(一切位)이고, 1운(運)은 일체운(一切運)임을 부사의승(不思議乘)이라고 한다. 이 승(乘)에 오르는 자는 10신(信)이 마음에 가득차서 6위(位)를 얻는다”고 말한다. 만약 위(位)가 원융함이 수상이라면, 올바로 하는 바[正所爲]는 곧 수상(修相)인가? 또한 ‘불공교(不共敎)의 보살장(菩薩藏)’을 해석하여 “1위는 곧 일체위이고, 1행(一行)이 일체행(一切行)이다”고 말하는 것은, 일위가 일체위임은 곧 수상이고, 1행이 일체행임은 곧 돈원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하물며 3교(敎)라는 것은 아래의 4교(敎)를 수상점(修相漸)이라고 부르고, 『화엄경』을 이름하여 돈원(頓圓)이라고 하니, 어째서 이 경의 기위(寄位)의 뜻을 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 때문에 이 경은 3교(敎) 중에서 오직 돈원이고, 5교 안에서는 다섯 번째의 원(圓)이다. 이 중에 이르러서 위상(位相)을 취하는 것을 기위(寄位)라고 하고, 위(位)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행위를 취함을 약행(約行)이라고 하며, 그 생보(生報)를 취함을 약보(約報)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뜻을 갖춘 것을 지금은 돈원일승(頓圓一乘)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세 가지 문에는 얕고 깊은 차이가 없게 된다. 【문】 교기소인(敎起所因)의 10문(門)의 위(位)를 나타내는 단락 중에 차제항포문(次第行布門)과 원융상섭문(圓融相攝門)이 있다. 또한 성항(成行)의 단락 중에 갑자기 다항(多行)을 이룬 것이 있고, 빠짐없이 여러 항을 이룬 것도 있다. 또한 종취(宗趣)의 법계와 인과의 상을 나누어 나타내어 보인 것 중에는 무등위(無等位)와 무등행(無等行)이 있으며, 또 경의 제목을 해석한 것 중에는 10대(大) 중에는 위대(位大)와 행대(行大)가 있다. 이들 여러 문장에서 행(行)과 위(位)는 하나가 아니니, 지금 이 세 가지 문은 어떻게 융섭하는가? 【답】 교기소인(敎起所因) 중 현위(現位)와 종취 중의 무등위(無等位), 10대 중의 위대(位大) 등은 모두 이 가운데 기위(寄位)에 해당한다. 3처(處) 가운데 행은 모두 약행(約行)에 해당한다. 【문】 「십행품(十行品)」소에서 4구(句)로써 변별하여 말했다. “오직 비위행(比位行)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왕(仁王)』과 『본업경』(本業經)』에서 말한 내용과 같으며, 오직 자체행(自體行)만을 밝힌다면 「보현행품(普賢行品)」과 같다. 자체행으로서 위를 따라서 설한다면, 장행(長行)으로 설한 것과 같다. 위상을 모으고 융섭하여 자체의 원융행(圓融行)을 따른다면, 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 4구(句)로써 세 가지 문에 배열하면 어떻게 되는가? 【답】 오직 행과 위를 대비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 이것은 융섭하지 않으며, 오직 자체로 보현행(普賢行)을 밝힌다면 곧 행을 기준으로 위(位)를 밝히는 것에 해당한다. 그 뒤의 두 구(句)는 행과 위를 갖추었기 때문에 위로써 행을 따른다면 약행문(約行門)에 해당하고, 행으로써 위를 따른다면 기위문(寄位門)에 해당한다. 【문】 「사나품(舍那品)」 소(疏)에서 말했다. “뜻이 위아래의 경문(經文)에 의거하는 것으로 세 종류의 성불(成佛)이 있다. 첫째는 지위를 기준으로 한다. 6상(相)을 방편으로 한다면, 10신종심(信終心)의 승진분(勝進分)의 뒤에 나아가고, 10해(解)의 초위(初位)에 들어가서 곧 성불하게 된다. 이것은 곧 삼승종교(三乘終敎)의 불퇴위(不退位)이기 때문에 6상(相)을 융섭(融攝)한다면, 여러 위(位)를 갖추어 불과(佛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행을 기준으로 한다. 총체적으로 위(位)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자분(自分)과 승진(勝進)만으로 구경(究竟)이라 하여서 불과에 이른다. 셋째는 이치를 기준으로 한다. 곧 일체 중생이 이미 구경을 이루어서 다시 새로이 성립하지 않으니, 나머지 상이 모두 다하였기 때문이다.” 저 세 가지 성불로써 여기의 세 가지 문에 준하면 어떤가? 【답】 여기서는 이(理)를 기준으로 한 것이 없고, 저기에서는 보(報)를 기준으로 한 것이 없어서 서로 빠져 있다. 행(行)을 기준으로 하고 위(位)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두 처(處)가 같은 것이다. 석문(釋文)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3문(門)을 따로 하였고, 다음은 문답하는 것이다. 앞의 기위(寄位)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처음 ‘이 일’에 이르기까지는 중문(中門)이고, ‘우이제위(又以諸位)’의 아래는 즉문(卽門)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앞은 탄 바의 법[所乘法]이고, 뒤는 능히 탄 사람[能乘人]이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은 먼저 원융과 항포(行布)51)를 묻지 않고, 모두 6위(位)가 같지 않음을 거론한다. 다음 ‘수득(隨得)’의 아래로는 상섭분제(相攝分齊)를 나타내는데, 그 중 초(初)에서 ‘제지공덕(諸地功德)’에 이르기까지는 총괄해서 상섭(相攝)을 나타내고, 다음의 ‘시고경중(是故經中)’의 아래로는 구별해서 상섭을 나타낸다. 앞의 것 가운데 먼저는 뜻으로서 나타내고, 뒤의 ‘경(經)에서 말하기를‘ 아래는 포섭하여 밝힌다. 앞의 것 가운데 입(立)ㆍ책(嘖)ㆍ답(答)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답한 것에는 5구(句)가 있다. 처음 구절은 6상(相)을, 다음의 세 구는 10현(玄) 가운데 대략 3문(門)을 거론하며, 마지막 한 구는 위의 두 번째와 통한다. 끌어서 증명한 것 중에는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의 보살덕(菩薩德)을 찬탄하는 문장이 있다. 【문】 지엄은 이렇게 말했다. “1지(地)에 있으면서 널리 일체 여러 지(地)의 공덕을 융섭하는 자는 행상(行相) 순서에 나아가 끝내 궁실(窮實)의 자체에 이르게 된다. 요점을 논한 것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始)이기 때문에 능히 후(後)를 일으키고 끝내는 만족하게 되므로 융섭한다고 한다. 둘째는 비록 초시(初始)라고 하더라도 능히 여러 지(地)가 행하는 행(行)을 행하며, 여러 법은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융섭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행을 이룬 것은 단지 자분(自分)의 지위에 있으면서 상하와 우열(優劣)과 밝고 어둠이 달라진다. 셋째는 단지 초시(初始)가 곧 일체 여러 지의 공덕을 융섭하기 때문에 융섭한다고 이름한다. 넷째는 초후(初後)이기 때문에 융섭한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초시는 곧바로 종(終)이 되기 때문에 융섭한다고 이름한다.” 이 네 가지 해석에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앞의 두 가지는 3승을 해석하고, 뒤의 두 가지는 1승을 해석한다. 1승의 두 가지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앞은 곧 밖으로 교화함이요, 뒤는 곧 안으로 증득함52)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앞은 실제(實際)³이고, 뒤는 궁실(窮實)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 앞은 곧 중문(中門)이고, 뒤는 곧 즉문(卽門)이다.53) 장주(章主:法藏)의 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홉째로 섭위(攝位)의 공덕을 이루는데,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앞의 여러 행(行)을 융섭하여 신(信) 등 5위(位)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요, 다음은 1위(位)에 있으면서 앞뒤의 일체위(一切位)를 융섭함이다. 여기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상입(相入)을 기준으로 하고, 둘째는 상즉(相卽)을 기준으로 해서 융섭함을 밝힌 것이다.” 장주(章主)가 즉(卽)과 입(入) 두 가지 문으로 해석한 것은 지엄의 뒤의 두 해석을 따른 것이니, 이 때문에 앞은 중문(中門)이고 뒤는 즉문(卽門)임을 아는 것이다. 따로 상섭(相攝)을 말하는 것에 나아가서 먼저 신만(信滿)으로 일체 위(位)를 융섭함을 밝히고, 다음 ‘우이제위(又以諸位)’의 아래에서는 뒤의 일체위에서 각각의 일체위를 융섭함을 나타내고 있다. ‘상즉등(相卽等)’은 여러 나머지 문을 골고루 취하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위(位)가 곧 보살, 부처이다”라는 것은 「현수품(賢首品)」 소(疏)에 이르기를, “만약 일승원교(一乘圓敎) 중에서 실제로 위(位)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종교(終敎)의 위상(位相)에 의거해 이를 분별한다. 신만불퇴(信滿不退)의 때에 저 보현법계(普賢法界)의 행덕(行德)을 얻고 인과를 갖추어 융섭하여서 원융무애(圓融無礙)함을 밝힌다. 만약 인문(因門)으로서 취한다면 항상 보살이고, 만약 과문(果門)으로서 취한다면 항상 부처가 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뜻이다. 【문】 지위마다 모두 만족한 것은 과(果)의 작용이고, 또한 인(因)의 작용이다. 만약 보살로서 취한다면 인과의 두 가지 작용은 보살이고, 만약 과문으로서 취한다면 인과의 두 가지 작용은 부처가 되는가? 인의 작용을 따른다면 항상 보살이고, 과의 작용을 따른다면 항상 부처가 되는가? 【답】 뒤에 나오는 신수(神秀)법사의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에서 말한 것과 같으니, 다음과 같다. “지금 이 뜻을 말함에 대략 네 개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유인문(唯因門)이다. 비롯함이 없는 때부터 미래의 끝을 다하도록 항상 보살로서 만행을 닦으니, 이 때문에 순수하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해서 휴식이 없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 하나의 행에서 구경(究竟)이 없기 때문이요, 중생이 다할 수 없는 까닭으로 성불은 없다. 문수를 여러 부처의 스승이라고 하고, 마야를 여러 부처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이는 함께 인문(因門)의 융섭하고 화합한 데에 머문 것이다. 둘째로 유과문(唯果門)이다. 앞뒤의 때를 다하여 항상 부처가 되니, 무엇 때문인가? 덕상(德相)이 온전하고 진실해서 시수(時數)에 떨어지지 않으니 진극(盡極)이 없기 때문이며, 그리고 교화하고 제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역인역과문(亦因亦果門)이다. 소위 발심(發心)과 성정각(成正覺)이 있으니, 모든 때에 생각마다 발심하고 생각마다 성불하기 때문이다. 넷째로 비인비과문(非因非果門)이다. 소위 마음은 발심할 수 없고 부처는 이루어질 수 없어서 진법계(眞法界) 중에 두 가지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문】 장주(章主)의 소(疏)에서 말했다. “해인병현문(海印炳現門)에 또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과위(果位)를 기준으로 하니, 아래 문장에 이르기를, ‘일체가 모두 나타나서 나머지가 없으니 해인삼매의 세력 때문이다’고 하였다. 둘째는 인위(因位)를 기준으로 하니, 10신(信)까지 나아가 처(處)에 가득하고 보현위(普賢位) 중에도 또한 정(定)이 있으니, 「현수품(賢首品)」에서 설한 내용과 같다.” 그렇다면 과(果)를 기준으로 한다면 해인 중에 오직 과의 작용이 나타나고, 인(因)을 기준으로 한다면 해인 중에 오직 인의 작용만이 나타나는가? 【답】 해인정(海印定)은 일체(一體)이지 둘이 아니다. 만약 부처로서 취하면 과해인(果海印)이고, 만약 보살로서 취하면 인해인(因海印)이다. 그 과해인 중에 인의 작용을 나타내고, 그 인해인 중에 또한 과의 작용을 나타내니, 마치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하나의 거울[一鏡]을 대하는 듯하다. 제자로서 말하면 제자의 거울이고, 만약 스승으로서 말하면 스승의 거울이니, 마땅히 알라, 이 가운데의 도리가 그런 것이니라. ”둘째로 보(報)를 기준으로 하여 위(位)를 밝힘에 다만 세 가지 생(生)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다; 【문】 바른 가르침[正說] 가운데 오직 해행(解行)을 이루고, 남겨진 가르침[遺敎]으로도 견문(見聞)을 이룰 수 있는가? 바른 가르침 가운데에도 또한 견문인(見聞人)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의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뒤의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남겨진 가르침은 견문과 해행을 모두 이루며 정설(正說)도 또한 그렇다”고 하였다. 【문】 앞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겸위(兼爲)54)로 말하자면, “유법(遺法) 중에서 이 무진법(無盡法)을 보고 듣고 믿고 향하는 것이 금강종(金剛種)을 이룬다고 한다”고 하는데, 정설(正說)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견문은 오직 남겨진 가르침에만 있으며, 정위(正爲) 중에 다만 올바른 설명만을 인용하여 해행(解行)을 이룬 자는 선재(善財) 등과 같음을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해행은 오직 바르게 말한 것임을 알라. 【문】 문장에 “ 「성기품(性起品)」에서 설한 바와 같다”고 말한 것은 견문성기(見聞性起)를 가리키는데, 지엄이 해석하여 이르기를, “우선은 현재의 체익(體益)을 밝혔고, ‘약유득경권(若有得經卷)’의 아래에서는 미래의 주지하는 작용을 밝혔다”고 하였다. 현재의 체익은 곧 바른 가르침[正說]인데, 어째서 견문이 오직 남겨진 가르침[遺敎]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가? 【답】 두 가지 뜻으로 통한다. 이를테면 현재의 체익(體益)은 곧 해행생(解行生)의 견문이지 식종(植種)의 견문은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다. 또한 “현재의 체익”은 남겨진 법[遺法]이니, 말하자면 남겨진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불상과 경전을 쳐다보고 선근을 심기 때문에 현재의 체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찍이 불상과 경전이 있는 곳을 보고 금강(金剛)의 종자를 심기 때문에 미래의 주지하는 작용이라고 이름한다. 【문】 뒤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견문성기(見聞性起) 중에 현재(現在)의 체익(體益)은 바른 가르침[正說]의 견문이고 미래의 주지하는 작용은 남겨진 가르침의 견문이기 때문에 견문은 남겨진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 모두에 통하는 것이다. 남겨진 법 중에서 해행을 이룬다고 한 것은 문장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오직 바른 가르침일 뿐이다. 【문】 견문이 이미 통하고 해행도 또한 마찬가지라면, 무슨 연유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답】 그것은 바른 가르침일 때 오히려 견문(見聞)만을 이루는 이익이 있는데, 무슨 연유로 남겨진 가르침으로 해행을 이룰 수 있겠는가? 지금의 해석에서는 세 번째 뜻을 올바르다고 하니, 「성기품(性起品)」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불자(佛子)여, 이 경전은 일체 중생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니, 오직 여래법왕(如來法王)의 진자(眞子)가 여러 여래 종성가(種性)의 집안을 따라서 태어나는 것만 제외한다. 만약 이와 같은 부처님의 진자(眞子)가 없다면 이 경전은 곧 없어진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일체의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은 이 경을 듣지 않는데, 하물며 어찌 받아 지니겠는가?” 여러 여래 종성의 집안을 따라서 태어난 진불자(眞佛子)는 곧 해행인(解行人)이다. 이 사람이 수지(受持)하고 글로 쓴 것이 곧 유법(遺法)이니, 이 때문에 유법이 해행을 이룸을 알 수 있다. 【문】 대기(大機)55)는 항상 간단(間斷)이 없음을 감응하기 때문에 해행을 이룬 날에 곧 여래를 보는데, 제이칠일의 돈설(頓說)의 법[儀]을 어째서 남겨진 법이라고 하는가? 【답】 이미 해행(解行)을 이룬 날이라면 그대가 논란한 바와 같다. 그러나 견문의 남겨진 법으로 언전(言詮)을 삼아서 해행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법화경』에서 “미래세에서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으로 여래의 지혜를 믿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를 위하여 이 『법화경』을 연설하고 문지(聞知)를 얻게 하니, 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혜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또한 유교(遺敎) 중의 해행(解行)이다. 【문】 “둘째 해행위(解行位)56)에서 소위 ”도솔천자(兜率天子) 등이 악도(惡道)로부터 나온 후에 일생에 이구삼매(離垢三昧)의 앞에 이른다”고 한 것은 천자(天子)가 해행을 이룬 것이 지옥을 나오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늘에 태어나면 바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의 것과 같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뒤의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10안(眼)에 상(相)이 있고 체(體)가 있다. 상의 10안은 옥중(獄中)에서 이루고, 체의 10안은 천상(天上)에서 이룬다”고 하였다. 이 해석은 두 번째 스님의 설이 글의 의미에 합당하기 때문에 올바른 것이다. 이를테면 전대덕(傳大德)의 기(記)에 이르기를, “문장에 합당한 것은 경문(經文)에 합당하고, 또한 장소(章疏)에도 합당하다”고 하였다. “경문에 합당하다”고 말한 것은 하늘에 태어난 이후에 공중의 소리로 경계한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노사나(盧舍那)보살을 찾아뵙고 공경히 예배해야 한다. 5욕(欲)을 집착하다가 여러 선근(善根)을 막지 말 것이며, 나아가 천자(天子)에게도 권하여 말하라. 이 때문에 여러 천자는 마땅히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57)을 발하여 뜻을 청정하게 함으로서 위의계(威儀戒)에 머물고, 일체의 업장(業障)ㆍ번뇌장(煩惱障)ㆍ보장(報障)ㆍ사견장(邪見障)을 뉘우친다. 법계(法界) 허공계(虛空界)로써 신(身)ㆍ구(口)ㆍ의(意) 3업을 착하게 하고, 중생계 등의 몸과 중생계 등의 머리, 중생계 등의 혀로써 네 가지 장애를 뉘우치며, 나아가 이르기를, ‘그때 여러 천자는 널리 보현회향선근(普賢廻向善根)을 듣고서 모두 10지(地)를 얻어서 제력(諸力)으로 장엄(莊嚴)하고 삼매를 구족해서 모두 성취한다’고 하였다.” 이미 천상에 태어나서 허공 소리의 가르침[敎誡]을 입은 뒤에야 비로소 10지 등을 얻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늘에 태어나서 바로 해행(解行)을 이룬다는 것이 경문(經文)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지옥에서 이미 해행을 이루었다면 해행인(解行人)은 마땅히 5욕(欲)의 즐거움을 집착하지 않았을 터이니, 어찌 다시 허공 소리가 천자에 권“5욕을 집착하지 말라”고 권하겠으며, 어찌 다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도록 권하겠는가? ‘장소(章疏)에 합당하다’고 말한 것은 소(疏)에서 “일광(一光)을 내어서 10세계(世界)의 미진수의 찰토를 비춤에 지옥 중생은 모두 하늘에서 태어나고 10안이(眼耳) 등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 것이며, 문(文)에서 “‘넷째, 이시(爾時)’의 아래에서는 당기천자(當機天子)58)를 이익 되게 함으로써 보현오위(普賢五位)가 대선교법(大善巧法)을 서로 융섭하기 때문에 지옥을 나온 뒤에 이 보법(普法)을 듣고는 곧 10지를 얻어서 3승의 점차적인 것과 가르침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고 한 것이며, 『공목(孔目)』에 이르기를, “만약 보현해행(普賢解行)의 의지하는 몸을 증득한다면 악도(惡道)에서 나와서 하늘에 태어나고, 어려움이 없는 몸을 얻어서 보현해행법(普賢解行法)을 이룬다”고 한 것이며, 『지귀장(旨歸章)』에 이르기를, “지옥에서 겨우 나와서 이 보법(普法)을 듣는다면, 곧 10지를 얻음은 이 법이 깊이 이익됨을 밝힌 것이다”고 한 것이다. 이들 문장은 모두 천상(天上)에 태어나서 이 보법을 들은 뒤에 비로소 보현해행(普賢解行)을 이룬다고 말한 것이니, 지옥을 나오지 않고 이익을 얻는다는 문장은 전혀 없다. 따라서 하늘에 태어나서 비로소 해행을 이룬다는 것은 여러 문장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라. ‘뜻에 합당하다’고 말한 것은 법문이 광대하여 받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니, 행이 이루어지는 곳에 어찌 간별함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22위(位)와 17문(門)은 6도(道)를 기준으로 하여 보현성불위(普賢成佛位)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면, 가장 극도로 괴로운 곳이고 고통을 받는 것이 간단이 없으니, 어떻게 그 중에서 해행(解行)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지옥을 나오지 않고서 해행을 이루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는 걸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정원(貞元)의 『본경(本經)』에서 보안(普眼)장자가 말하기를, “보살이 처음에 보리(菩提)를 배워 닦을 때 병듦이 최대의 장애라고 한 것을 마땅히 알라. 만약 여러 중생의 몸에 질병이 있다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니, 어찌 능히 여러 바라밀(波羅蜜)을 닦고 익히겠는가? 이 때문에 보살이 보리를 닦을 때는 우선 몸에 있는 병을 치료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몸에 질병이 있다면 여러 보살행에 장애가 되는데, 하물며 지옥의 극심한 고통 속에 있으면서 어찌 능히 보현행(普賢行)을 닦을 수 있겠는가? 【문】 1승 중에서 장애를 끊는 것은 곧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기고, 행을 이루는 것은 하나를 이루면 일체의 것을 이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통을 없앨 때 갑자기 모든 장애를 없애고 문득 해행(解行)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답】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짐은 천상(天上)에서 태어난 후에 허공 소리의 설을 듣고서 갑자기 큰마음을 내는 것인데, 이는 찰나에 10지를 성취하는 이익일 뿐이지 지옥 중에서 약간의 이익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고통을 멸할 때에 갑자기 여러 장애를 멸하게 된다면, 허공 소리가 어찌 다시 과오를 뉘우치라고 권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천상에서 허공 소리로 과오를 뉘우치라고 설법함을 들을 때는 바로 여러 미혹과 장애를 한 번에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문】 지옥에 있으면서 소상광(小相光)을 만났을 때 단박에 보현해행(普賢解行)을 이룰 수 없다가 하늘에 태어나서 비로소 이룬 것은 소상광명(小相光明)의 수승한 힘의 작용이 없는 것인데, 이는 큰 잘못인가? 【답】 하늘에 태어난 뒤에 이룬 여러 행(行)은 모두 소상광명력(小相光明力)인데, 어째서 수승한 힘이 없다고 하는가? 가령 논란한 것처럼 소상광력(小相光力)이 오직 지옥에서 멈추고 천상(天上)에는 미치지 않는다면, 소상광력은 좁고 적게 되어버려서 허물은 그대에게 있다. 마치 『소(疏)』에서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10지를 얻는 것’에 삼중의 이로움이 있다. 첫째는 불광(佛光)이 널리 여러 천자(天子)를 비추어서 10지를 얻게 함을 밝힌 것이며, 둘째는 천자의 땀구멍에서 나온 향과 꽃, 덮개가 다시 중생을 이익 되게 해서 윤왕(輪王)과 또한 십지를 얻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윤왕이 빛을 내어서 나머지 중생을 비추어서 또한 10지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 3위(位)는 모두 가지런히 동등해서 동시에 단박에 성취하니, 각 진수(塵數)의 많은 종류도 이것으로써 물리치고 밀어내므로 총체적으로 여래의 일소상(一小相) 중의 일광명력(一光明力)이다.” 삼중의 이로움이 모두 소상광명력(小相光明力)이니, 어찌 광력(光力)으로 하여금 지옥에 국한되어 있게 하면서 갑자기 이 논란을 마련하겠는가? 【문】 간략히 표한 경(經) 문장에서 말했다. “고통을 없애서 저 중생의 열 가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등 여러 근(根)의 행업(行業)을 모두 청정케 하려고 일체 중생은 이미 광명을 보고 나서 큰 환희심을 일으킨다. 그리고 목숨이 끊어져서는 모두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난다.” 이 경문(經文)에 의하면, 지옥에 있으면서 10안(眼)을 청정케 한 뒤에 목숨을 마치면 천상(天上)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어째서 천상에 태어나서 비로소 10안(眼)의 이로움을 얻는다고 말하는가? 【답】 옛날에 이 문장을 회통하여 말하기를, “‘명종(命終)’이라는 말은 앞의 ‘멸제고통(滅除苦痛)’의 말에 덧붙인 것이다. 10안(眼)의 이익은 천상에 태어나서 비로소 이룬다”고 하였다. 【문】 어째서 앞을 덧붙여야만 하는가? 【답】 경문의 순서를 걸어 잠그기 위해서이다. 지금 그것을 다시 해석하건대, 스스로 경문의 의취(意趣)59)에 미혹했기 때문에 이러한 의심을 초래한 것이다. 만약 경문을 없애면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왜 그런가? 경에 “ 10세계미진수찰(世界微塵數刹)을 널리 비추고 저곳을 두루 비추면, 지옥 중생이 고통을 없애서 중생의 열 가지 안이비설신의를 모두 다 청정케 한다”고 말한 것은 광명(光明)에 수승한 힘이 있음을 들어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10안(眼) 등 광대(廣大)한 이로움을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다음으로 “저 여러 중생은 광명을 보고 나서 모두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 목숨을 마치고 나서는 모두 도솔천(兜率天) 위에 태어난다”고 말한 것은 교화를 받은 것이 수승한 빛의 힘을 말미암음을 나타내며, 나중에 천상(天上)에 태어난 것은 이와 같이 문장이 소실된 것이다. 10안(眼)을 청정케 하는 것은 천상에서 얻는 수승한 이익을 들어서 광명의 공능(功能)을 나타낸 것이지 천자가 목숨을 마치기 전에 약간의 이로움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만약 이 문장을 기준으로 하여 목숨을 마치기 전에 10안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무엇 때문에 『소(疏)』를 쓴 이는 이 문장을 판석하여 “고통을 여의고 하늘에 태어나서 안락행(安樂行)을 이룬다”고 말하는가? 바로 하늘에 태어나야 바야흐로 해행을 이룬다는 걸 알 수 있다. 【문】 『소(疏)』에서 “첫째 고통을 여의어서 안락행(安樂行)을 이루며, 둘째 ‘하늘에 태어나서’의 아래로는 천락(天樂)을 집착하지 않고 요익행(饒益行)을 이루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10안(眼)과 10이(耳)의 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안락행이 된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안락행은 오직 천락(天樂)을 얻음을 기준으로 할 뿐이지 10안을 얻음이 안락행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0안과 10이 등의 큰 이로움은 설사 안락행의 단락 속에 있더라도 실제를 기준으로 논한다면 허공 소리를 들은 뒤에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요익행(饒益行)일 뿐이지 안락행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안락행의 단락에서 이러한 이로움을 밝혔는가? 【답】 광명의 수승한 힘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요익행을 들어서 그것을 나타낸다. 이는 안락행에 속하지는 않는다. 【문】 무엇으로써 10안과 10이의 이익이 허공 소리를 들은 뒤에 얻은 것임을 알 수 있는가? 【답】 『지통기(智通記)』에 “지옥인(地獄人) 등은 광명을 받고서 도솔천에 태어나고, 허공 소리를 듣고서 10안과 10이 등의 큰 공덕을 얻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10안과 10이 등의 청정을 안락행(安樂行)이라고 하니,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안락행이라고 하겠는가? 【문】 10안과 10이의 청정은 허공 소리를 들은 뒤에 얻은 것이라고 하는가? 【답】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곧 요익행(饒益行)이다. 어떤 이유로 굳이 안락행이라고 말하는가? 【답】 요익행 중에는 다익(多益)을 갖추어 포함하고 있으므로 요익행이 융섭하지 않는 바가 없다. 지금 10안과 10를 성취하는 뜻을 거론하여 광명의 수승한 힘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를 안락행이라고 한다. 【문】 어떻게 요익행 중에 많은 이로움이 포함되었음을 아는가? 【답】 요익행(饒益行)의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여러 천자는 보현(普賢)이 선근(善根)을 회향함을 자세히 듣고 모두 10지의 제력장엄(諸力莊嚴)을 얻고 삼매를 구족해서 모두 다 중생계(衆生界) 등의 착한 신구의(身口意)를 성취하고, 그리고 일체의 장애를 없애고서 모두 청정을 얻는다. 즉 백천만억 나유타에 걸친 불찰미진수(佛刹微塵數)의 칠보연화(七寶蓮華)의 하나 하나의 꽃 위에 보살이 모두 결가부좌를 하고 큰 광명을 내는 것을 보고, 여러 보살은 하나 하나의 형상의 호(好)를 따라서 중생계 등에 광명을 발한다. 저 광명 속에서 중생계 등을 보니, 여러 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한 채 응하는 바를 따라서 제도하시고 설법하시는데도 오히려 능히 이구삼매(離垢三昧)60)의 소분(小分)을 볼 수 없다.” 또 『소(疏)』에 해석하여 이르기를, “첫째는 득위익(得位益), 둘째는 성행익(成行益), 셋째는 승보익(勝報益), 넷째는 멸장익(滅障益), 다섯째는 견불익(見佛益), 여섯째는 결익분제(結益分齊)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경(經)과 소에 준거하여 이를 볼 수 있다. 또한 『지귀장(旨歸章)』 중에 속증익(速證益)ㆍ멸장익(滅障益)ㆍ전리익(轉利益) 등은 모두 요익행(饒益行)의 문장이니, 이 때문에 요익(饒益) 중에 다세(多勢)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아직 모르겠는데 요익행은 무엇을 좇아서 이름을 붙였는가? 【답】 장주는 「십행품(十行品)」 속에서 요익행의 이름을 해석하기를, “깨끗한 3취(聚)61)를 지니고서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견주어 보면, 이것은 단지 기(機)에 당하여 이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로움이 일체로 전환되어서 널리 자신과 남을 이익 되게 하고 삼중돈(三重頓)을 이루기 때문에 요익행이라고 이름하게 된다. 【문】 10안익(眼益) 또한 요익행 중에서 융섭하는 바라고 한다면, 10안을 청정케 하려는 이로움도 또한 요익행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답】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요익의 명칭은 자신과 남의 이익을 통틀어서 이름을 얻은 것이라서 10안의 이익에 그치지 않는다. 어찌하여 오직 기(機)에 당하여 10안을 청정케 하는 것만을 요익행이라고 하겠는가? 【문】 10안의 이익과 10이의 이익은 요익행 중에서 어떤 이익이 융섭하는 바인가? 【답】 기(機) 당한 이익 중에 요익행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득위익(得位益), 둘째는 성행익(成行益), 셋째는 승보익(勝報益) 등이다. 지금은 승보익을 취하는데, 말하자면 ‘중생계 등의 착한 신구의(身口意)’라고 말한 것은 곧 10안(眼)과 10이(耳)가 청정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 어떤 이유로 치우치게 승보익(勝報益)을 거론해서 광명의 수승한 힘을 나타내는가? 【답】 수승한 과보를 이미 얻어서 바로 나머지의 여러 행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옥의 괴로운 과보를 뒤집기 때문에 치우치게 거론하였을 뿐이다. 【문】 소에 이르기를, “첫째로 고통을 여의고 하늘에 태어나서 안락행(安樂行)을 이루게 하며, 둘째로 ‘이미 하늘에 태어났다’의 이하에서는 천락(天樂)을 집착하지 않고서 요익행(饒益行)을 이루게 하는데, 앞의 것은 신광익(身光益)이고 뒤의 것은 공성익(空聲益)이다”라고 하였다. 안락행은 곧 신광익인가? 【답】 그렇다. 【문】 10안(眼)의 청정익(淸淨益)은 실제로 허공 소리를 들은 뒤에 얻는 바인데, 어떤 이유로 이것을 신광익이라고 하는가? 【답】 허공 소리를 들은 뒤에 얻는 바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이를 거론하여 신광력(身光力)을 나타내기 때문에 신광익(身光益)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의 이익이라고 하더라도 신광(身光)을 따른 것의 주변에서 얻은 바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것은 신광익이며, 이미 허공 소리를 들은 것의 주변에서 얻은 바를 기준으로 한다면 공성익(空聲益)이다. 이 때문에 하나의 이익이라고 하더라도 이름을 얻은 것은 구별된다. 【문】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이 삼중익(三重益)은 모두 소상광명력(小相光明力)인데, 어떤 이유로 오직 10안익(眼益)만을 기준으로 해서 신광익(身光益)이라고 하는가? 【답】 실제로 총괄해서는 신광력(身光力)이고, 또한 공성익(空聲益)과 통한다. 지금은 경문(經文)에 나타난 상(相)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오직 10안(眼)으로만 기준으로 해서 신광익이라고 한다. 【문】 『소』에 이르기를, “두번째, 자세히 변별함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광명이 악도(惡道)를 구제하는 것을 넓히고, 둘째는 앞의 소리가 천처(天處)를 이롭게 하는 것을 넓힌다”고 하였다. 어떤 이유로 “앞의 안락행을 넓혔다”고 말하지 않고 “앞의 광명이 악도를 구제하는 것을 넓힌다”고 말하고, “앞의 요익행(饒益行)을 넓힌다”고 말하지 않고 “앞의 소리가 천처(天處)를 더욱 이롭게 한다”고 말하는가? 【답】 자세히 변별함의 단락 가운데 신광익(身光益)을 넓힌다는 것에 “열 가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모두 청정하다”는 문장이 없기 때문에 안락행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안락과 요익의 말은 사라지고 신광(身光)과 공성(空聲)의 해석만이 남게 되니, 이 때문에 10안익(眼益)이 곧 안락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간략히 표함[略標]이 증가하여 자세히 변별함[廣辨]이 되었는데, 어떤 이유로 간략히 표함에는 10안청정(眼淸淨)의 문장이 있고 자세히 변별함 중에는 없는가? 【답】 간략히 표함 속에서는 소상광명(小相光明)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10안청정의 말을 들어서 그것을 나타내고, 자세히 변별함 속에서는 바로 천자가 이익을 얻는 순서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자가 하늘에 태어나기 전에는 능히 10안(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신광익(身光益)을 넓혀 분별하는 것 중에는 10안청정(眼淸淨)의 뜻을 나타내지 않는다. 【문】 「입법계품(入法界品)」소(疏)에서 이르기를, “처음으로써 끝을 융섭하니, 위의 「발심품(發心品)」 및 「소상품(小相品)」에서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소상품」 중에 지옥을 처음으로 하고 천상(天上)을 끝으로 융섭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지옥에서 곧 해행(解行)을 이룰 뿐이다. 어떤 이유로 하늘에 태어나서 바로 이루는가? 【답】 발심(發心)을 처음으로 하고 10지(地)를 끝으로 융섭할 뿐이다. 지옥을 처음으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 소리가 천자(天子)를 권하여 말하기를, “이 때문에 여러 천자들은 응당 신속히 아뇩보리심(阿耨菩提心)을 내야 한다”고 하였으니, 곧 천자가 허공 소리를 힘입어서 발심할 때 10지를 얻기 때문에 “처음으로써 끝을 융섭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 『소』에 이르기를, “욕계(欲界)에서 이미 초선(初禪)을 얻었다면, 몸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천락(天樂)을 얻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은 광명(光明)을 만나서 갑자기 10지의 몸을 얻고, 오히려 본신(本身)의 육안(肉眼)은 변하지 않았으나 넓게 봄을 얻게 되니 곧 법력(法力)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 문장을 기준하면, 지옥의 본신(本身)을 바꾸지 않고서 10안(眼)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답】 이 문장은 이익을 굴리는[轉利] 천자와 중생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것은 인천(人天)의 몸이기 때문에 지옥신(地獄身)과 같이 분류할 수 없다. 【문】 경에 이르기를, “이 법을 설할 때, 백천만억 나유타의 불찰미진수(佛刹微塵數)의 여러 세계 중에서 도솔천자는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62)을 얻으며, 무량무변(無量無邊) 불가사의의 욕계에서 여러 천자는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며, 6욕천(欲天)63) 중에서 모든 천녀(天女)는 여자의 몸을 버리고 남자가 되어 물러서지 않는 보리심을 얻는다”고 하였다. 『소』에 풀어서 말하기를, “‘이 법을 설할 때’의 아래로 법을 듣는 이로움을 얻는 것을 밝힌 것인데, 그 중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머지 도솔천자(兜率天子)가 인익(忍益)을 얻은 것이니, 이는 초지(初地)에 해당하기도 하고 혹은 8지(地)에 해당하기도 한다. 둘째로 6욕천자(欲天子)의 심익(心益)을 발한 것이고, 셋째는 천녀익(天女益)이다. 이 두 가지(둘째와 셋째)는 지(地) 이전의 이익이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들 여러 이익은 1승이 되는가, 3승이 되는가? 【답】 3승(乘)의 이익이다. 만약 1승(一乘)의 이익이라면, 일득(一得)이 일체득(一切得)인데 어찌 다만 지(地) 이전을 얻고 지(地) 이상을 얻지 못하겠는가? 또한 발심익 이로움만을 얻을 뿐이고 증험이 되지는 못하겠는가? 또한 제4당기(第四當機)에서는 “보현오위상(普賢五位相)이 대선교법(大善巧法)을 융섭한다”고 말하지 나머지 이익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데, 이는 보현익(普賢益)이다. 이 때문에 앞의 세 가지가 3승의 이익임을 알 수 있다. 【문】 어떤 이유에서 함께 사나(舍那)64)의 광명(光明)을 입고 똑같이 보법(普法)을 듣고서도 3승의 이로움을 얻는가? 【답】 경에 이르기를, “그 중에 하나를 청정공덕(淸淨功德)이라고 부른다. 널리 60억 나유타 동안 불찰미진수의 세계를 비추고, 중생의 경계를 따르며, 선근을 심는 걸 따르고, 중생의 뜻을 따르며, 나아가 널리 아비지옥(阿鼻地獄)을 비추고, 그 중에 중생의 목숨을 마치면 모두 도솔천상(兜率天上)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소』에 이르기를, “‘선근을 심는 걸 따른다’고 한 것은 그 숙세(宿世)의 종자가 어떤 승(乘)의 선근이든 따른다”고 한 것이니, 이 문장의 뜻은 만약 3승의 선근을 심었다면 3승의 이로움을 얻고, 만약 1승의 선근을 심었다면 1승의 이로움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광명이 이미 그렇고 천성(天聲)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비록 부처님의 광명을 입고 천성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3승의 이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이치로서는 의심할 바 없다. 【문】 광명이 지옥을 비출 때 불광력(佛光力)이 크기 때문에 아직 선근을 심지 않은 사람도 또한 지옥을 나와서 천상(天上)에 태어날 수 있는가? 【답】 그렇지는 않다. 『지통기(智通記)』에 이르기를, “‘만약 실제로 악업(惡業)을 받은 자라면 범부위(凡夫位)에서 스스로 만든 업이므로 지옥의 고통을 받더라도 불광이 크기 때문에 벗어나게 하지만, 대덕(大德)에게 어떤 허물이 있어서 감히 대인(大人)65)들을 물리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벗어나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데도 그 속에 일정 기한만 존재하는 자이니, 반드시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벗어나서 존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선근을 심은 사람은 벗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 『소』에 이르기를, “나머지 이익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내지 아비등(阿鼻等)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한다. 이 아래의 문장에서는 단지 저 지옥을 비추어서 도솔천에 태어나는 하나의 이익을 설하였기 때문에 나머지를 초월하게 된다”고 하였다. 나머지 이익이란 무엇인가? 【답】 중생의 경계에 따르고 선근을 심는 정도에 따르는 것이니, 두루 비출 때에 모두 이로움을 얻게 하려고 해도 지금은 다만 하나의 이로움을 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변의 논의는 그치고 본문을 해석한다; ‘이구삼매(離垢三昧)의 앞’은 비록 많은 설이 있으나, 곧 과(果)이므로 처음의 이구(離垢)이다. 이 중의 3생(生)과 『의리장(義理章)』에 나온 3생과는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같은 점은 두 곳의 3생이 외화(外化)이기 때문이며, 다른 점은 후자의 문장은 인과전후(因果前後)의 뜻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인과전후를 기준으로 하여 2위(位)를 나누었다”고 말하며, 전자의 문장은 인과동시(因果同時)의 뜻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인과동체(因果同體)이고 하나의 연기를 이룬다”고 말하고 또한 ‘일념성불(一念成佛)’이라고 한다. 【문】 어떤 이유로 제3생(生)의 과(果)는 외화(外化)인가? 【답】 전자의 문장에 이르기를, “‘어째서 10신종심(信終心)으로 부처가 되고 과보를 얻는 법을 말하는가?’라고 하였는데, 대답 속에서 10신종심(信終心)의 과(果)를 덧붙여 말하였다. ‘지금 작불(作佛)이라고 말한 것은 곧 제3생에 이르러서 저 구경(究竟)의 자재하고 원융한 과보를 얻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외화(外化)임을 알게 된다. 【문】 그 문장에 이미 “이는 증득의 경계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곧 내증(內證)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답】 “증험의 경계이기 때문에 불가설이다”라고 한 것은 “위의 과해(果海)가 인연을 떠나서 상(相)을 말할 수 없다”는 말로 대답한 것이지, 이것이 곧 제3생(生)을 맺은 것은 아니다. 【문】 “인과동체(因果同體)이고 하나의 연기를 이룬다”는 것은 제2생(生)의 해행인(解行因)과 제3생(生)의 과(果)가 동체(同體)라는 것인가? 【답】 그렇다. 또한 ‘인과동체이고 하나의 연기를 이룬다’는 것은 곳에 따라서 논한 것이기 때문에 해행심(解行心) 중에서 이 도리(道理)를 말하고, 증과해심(證果海心) 중에서도 또한 이를 논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해행생(解行生) 중에 성불(成佛)이 있는가? 【답】 성불은 곧 증과해(證果海)이기 때문에 해행(解行)은 아니다. 이 때문에 인과상즉(因果相卽) 인과동체(因果同體)라는 것은 설사 돈문(頓門)에 이 뜻을 논하였어도 제3생(生)에서 바야흐로 성불을 얻는다. 【문】 해행생(解行生) 중에 또한 인과동체(因果同體) 시종상섭(始終相攝)을 논한 뜻은 『의리장(義理章)』 중에서는 인과동체(因果同體) 시종상즉(始終相卽)을 논한 뜻으로서 이내 “10신종심(信終心)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실제의 돈[實際頓] 중에 이미 인과동체 시종상즉을 논한 뜻이 어째서 해행생(解行生)으로 성불하는 것이 아닌가? 【답】 단지 10신(信)을 내지 않고서 이룰 수 있기 때문에 10신종심(信終心)으로 부처가 되는 뜻을 인용하고, 원돈(圓頓)의 도리(道理)에 통함을 증명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부처가 되는 일은 요체가 제3생(生)에 있지 해행(解行)66)에는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문장에서 이르기를, “‘어떤 이유로 10신종심으로 부처가 되어서 과(果)를 얻는 법을 말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말한 부처를 짓는 자는 단지 첫 견문(初見聞) 이후로부터 나아가 제2생(生)에 이르기까지 곧 해행(解行)을 이루는 것이고, 해행종심(解行終心)으로 인위가 궁만(窮滿)한 자는 제3생(生)에서 곧 구경이 자재하고 원융한 과보를 얻는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그 부처가 되는 뜻은 곧 제3생임을 알 수 있다. 【문】 인과동체(因果同體)의 과보와 제3생의 과보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과체(果體)에는 구별이 없다. 그러나 해행생인(解行生人)이 비록 인과동체를 안다 하더라도 이는 부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니, 부처를 이루는 뜻은 제3생에 있다. 오히려 범부 중생은 여러 불(佛)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분수를 따라 믿고 이해하였으니, 범신(凡身)을 옮기지 않더라도 곧 불신(佛身)인 것이다. 그러나 증과(證果)의 뜻을 열지 않은 것이라서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다. 【문】 “해행종심(解行終心)으로 인위가 궁만(窮滿)한 자는 제3생에서 구경의 자재하고 원융한 과를 얻는다”는 것은 인위의 즈음과 과를 얻는 즈음이 동시라고 할 수 있는가? 【답】 그렇다. 인(因)이 원만한 때가 곧 과를 얻는 때이니, 이 때문에 『지통기(智通記)』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문】 ‘선재(善財)가 지식(知識)을 만났을 때 들었던 법문은 모두 들은 것처럼 증득하였는가, 아니면 이미 듣고 나서 뒤에 수행하여 얻었는가?’ 【답】 ‘들은 바의 법문을 따라서 바로 증득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미 법을 얻은 인연의 문답 중에는 과거 무량겁에 여러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묻고 공양 올리는 등 여러 행을 닦은 뒤에야 비로소 이 법문을 얻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선재는 지금 단지 설한 법문만을 들었을 뿐이지 무량겁의 행(行)을 수행하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바로 얻게 되었는가?’ 【답】 ‘이미 이 법문을 얻었다면 곧 법성(法性)에 들어간 것이다. 법성에 들어가면, 자신과 남이 둘이 아니고 3세(世)에 전후가 없다. 이 때문에 선지식이 얻은 인과(因果)는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67) 법문이 곧 선재가 스스로 행해서 이룬 것이기 때문에 얻은 법문을 따라서 인과전후의 법이 모두 스스로 행해서 법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줄 아는 것이다. 【문】 선지식의 법문은 오직 인을 얻었다는 일뿐이거늘, 어째서 이를 과보를 증득하였다고 하는가? 【답】 여러 지식(知識)이 얻은 법문은 여러 부처님의 마음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문】 ‘단지 하나의 인(因)을 닦을 뿐인데, 어째서 원만한 과를 얻는가?’ 【답】 ‘원만한 인이 만약 이루어지면 원만한 과가 아님이 없으니, 과가 원만하지 않은 것은 원만한 인이 아닌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가령 여러 지식(知識)은 어째서 원만한 인이 아니고 과는 어째서 원만하지 않은가?’ 【답】 ‘항상 원만하니, 일체불은 곧 심불(心佛)이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일체불은 곧 남이 이룬 것이니 스스로는 어째서 이루지 못하는가?’ 【답】 ‘부처를 여의고는 스스로가 없기 때문에 항상 이루며, 법아(法我)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문】 ‘이 몸 속에서 여러 견(見)을 없애버려야 성불을 얻을 수 있는가?’ 【답】 ‘만약 견(見)을 없앤다면, 과해(果海)를 궁진(窮盡)하기 때문에 곧 성불할 수 있다.’ 【문】 ‘이 몸은 어떠한가?’ 【답】 ‘몸에 별상(別相)은 없으니, 저 근본 부처의 몸으로써 자신의 상(相)을 삼는다. 이 몸은 곧 보살섭생신(菩薩攝生身)으로서 항상 인(因)이고 항상 과(果)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 ‘앞의 신[前信] 중의 뜻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앞은 일념의 원만한 신이니, 이는 초주종심(初住終心)이기 때문에 같지 않을 뿐이다.’” 곧 선재동자가 믿음이 원만한 즈음에 문수(文殊)를 만났을 때 바로 법성(法性)에 들어가서 자타무차별(自他無差別)의 법문을 얻고, 자신의 마음이 곧 불신(佛身)의 마음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모든 부처가 이루어질 때 선재도 또한 성불하고, 지식이 수행할 때 선재도 또한 수행한다. 따라서 인(因)을 기준으로 한다면 항상 보살이고, 과(果)를 기준으로 한다면 항상 부처가 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3생(生)을 일으키는가? 【답】 실제로는 동시에 얻는다. 다만 3생의 설명을 만들고, 이에 의탁해서 나타낼 뿐이다. 이 때문에 『지통기』68)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답】 ‘견문(見聞) 등 3위(位)는 보법(普法)의 정위(正位)69)가 되는가?’ 【문】 ‘그렇지 않다. 단지 3승위(乘位)를 따라서 이 설(說)을 만들었을 뿐이니, 만약 보법의 정위라면 지위가 없으며 지위 아님도 없다. 일체의 6도(道)와 삼계, 일체의 법계법문(法界法門)은 모두 보법위(普法位)이니, 1위가 일체위이고 일체위가 곧 1위라고 한 것 등이다. 위법문(位法門)처럼 모든 교의(敎義)70)의 법문도 마찬가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보법(普法) 중에는 무엇을 시작이라고 하는가?’ 【답】 ‘하나의 법문(法門)을 얻음을 시작이라고 하는데, 이는 끝과 분별(分別)이 없는 시작이다.’” 이처럼 단지 3승의 3승기(乘祇)를 따라서 3생을 설명할 뿐이며, 보법의 정위(正位)는 위(位)로써 위(位)에 나아가고 불위(不位)로써 불위에 나아가기 때문에 3생에 전후가 없다. 셋째로 증과(證果) 중에서 “내가 미래에 정각을 이루려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소(疏)』에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내가 미래에 성불하여도 또한 화엄을 설할 것이니, 그때에도 문수(文殊)와 선재(善財)가 말한 법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내가 성불할 때 네가 문수와 함께 와서 나를 돕고 법화(法化)를 선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니, 말하자면 선재가 어떤 이유로 불회(佛會)에서 단지 여러 지식(知識)을 구하고 불(佛)을 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선재의 이 생(生)은 인을 닦는 몸으로 아직 과(果)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처님 처소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뒤의 해석이 이 문장에 합당하다.
【記】 셋째로 행을 기준으로 하여 위(位)를 밝힌 것은 오직 두 가지가 있으니,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이라고 한다. 이는 앞의 여러 위(位)의 해행문(解行門)과도 통하고 득법분제(得法分齊)의 처소에서 설한 것에도 미치는데, 보장엄(普莊嚴)동자 등과 같다. 그 몸은 세계성(世界性) 등에 있는 것보다 위의 처소에서 머물고 있는데, 응당 백정보망전륜왕(白淨寶網轉輪王)의 지위로서 보견육안(普見肉眼)을 얻어 10불찰미진수세계해(佛刹微塵數世界海) 등을 본다. 만약 삼승(三乘)의 육안(肉眼)이라면 곧 이와 같지 않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 “육안은 오직 삼천세계 안의 일을 보느니, 만약 삼천세계 밖을 본다면 어찌 천안(天眼)을 써서 하겠는가?”라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같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는 능히 일념 속에서 불가설 불가설의 중생을 교화하여 일시에 모두 이구삼매(離垢三昧) 앞에 이르게 하니, 나머지 염념(念念) 속에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 복분(福分)은 하나의 정광파리경(定光頗璃鏡)에 감응해서 10불찰미진수 세계 등을 비추는데, 이는 앞의 3생 중에 해행위(解行位) 안의 행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인문(因門)을 잡아서 펴기 때문이다. 만약 신만(信滿)을 잡는다면, 위(位)를 얻고 나서 행용(行用)을 일으킨 바가 모두 법계에 두루한다. 가령 경전에서는 능히 한 손으로 대천계(大千界)를 덮기도 하고, 손으로 공구(供具)를 내서 허공법계(虛空法界)와 똑같게 해서 한없는 여러 부처님을 일시에 공양하고 큰 불사를 일으켜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등 설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신위경문(信位經文)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이르기를, “1세계(一世界)도 떠나지 않고 1좌처(一坐處)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능히 일체 무량신(一切無量身)의 행하는 바를 나타내며, 또한 일념 속에서 시방세계가 일시에 성불하여 법륜을 굴린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저 삼승분제(三乘分齊)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이유인가? 3승의 행위(行位)는 신해(信解)를 잡고 있는 아함문(阿含門) 속에서 이와 같이 설하기 때문이다. 【釋】 셋째로 행을 기준으로 해서 밝힌 것 중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약표(略標)이고, 둘째로 ‘보장엄(普莊嚴)’ 아래에서는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중에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이다”라고 한 것은 비록 많은 설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해석에서는 인(因)을 이룸을 자분이라고 하고 과(果)를 취함을 승진이라고 한다. ‘통전제위해행(通前諸位解行) 등’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해행’은 제2생(生)이고, ‘득법(得法)’은 증과(證果)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해행생에 정해행(正解行)이 있고, 해행극(解行極)이 있다. 지금의 ‘해행’은 곧 정해행이고 득법은 해행극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 ‘앞의 여러 위(位)’라고 한 것은 약보문(約報門) 및 기위문(寄位門)을 모두 거론한 것이다. ‘해행’은 약보문 안의 해행을 취한 것이며, ‘득법’은 앞의 기위(寄位) 중에서 10신만심(信滿心)이 승진분(勝進分)의 득법이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해행과 득법은 곧 일량(一量)이 된다. 둘째로 자세히 해석함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앞의 ‘해행(解行)’을 해석한 것이고, 다음의 ‘약약신만(若約信滿)’의 아래에서는 앞의 ‘득법(得法)’을 해석한 것이다. 앞의 것 중에서 먼저는 바로 말하였고, 다음으로 ‘당지(當知)’ 아래에서는 해행에 결속(結屬)하였다. 앞의 바로 말한 것 중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의(所依)의 몸을 밝혔고, 둘째로 ‘또한 그는’ 아래로는 이용(利用)을 말하였으며, 셋째로 ‘그 복(福)은’의 아래로는 복분(福分)을 드러내었다. 앞의 것 중에서 첫째는 사람을 지목하였고, 둘째로 ‘그 신(身)은’ 아래로는 보(報)를 나타내었다. 사람을 지목한 것 중에서 ‘보장엄동자’는 선재 및 천자(天子)를 같이 취하였고, 보를 드러낸 것 중에서 먼저는 총체적으로 수승한 보(報)를 거론하고, 다음의 ‘득보견(得普見)’ 아래에서는 따로 육안(肉眼)을 말하였다. 앞의 것 중에서 소주처(所住處)와 능의위(能依位)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대지도론』71)이란 것은 제 39권이다. 둘째, ‘득법’을 해석한 것 중에서 앞에서는 자의(自意)로써 해석하였고, 다음에는 인증하였고, 뒤의 ‘이 때문에’ 아래에서는 그 분제(分齊)를 구별하였다. 인증한 것 중에서 앞의 것은 「현수품(賢首品)」의 수출광공삼매(手出廣供三昧)의 문장이고, 다음은 「현수」와 「발심(發心)」의 두 품(品)의 문장과 유사하다. 하지만 전체가 같지 않으니, 마땅히 의미로써 인용하였을 뿐이다. 마지막은 「현수품」의 원명해인삼매(圓明海印三昧)의 문장이다. 【문】 제2생(生)으로 이룬 행은 신만(信滿)으로 이룬 것에 해당하지 않는가? 【답】 해행으로 이룬 것은 신만득위(信滿得位) 때 이룬 것이다. 그러나 3생(生)은 따로 신만에 의탁한 것이 없다. 지금의 득법은 따로 신만(信滿)에 의탁한 문장이기 때문에 ‘약약신만득위(若約信滿得位) 등’이라고 말한다.
【記】 【문】 앞의 종교(終敎) 중에서 불퇴의 위(位)에도 이와 같은 8상(相) 등의 쓰임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와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이 위(位)에서 성불을 보일 때 나중의 모든 위에서 모두 자재(自在)롭지 못해서 아직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단지 그 해당되는 위(位)에서 잠깐 교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쪽은 그렇지 않으니, 초위(初位) 중에서 이 작용을 일으킬 때 나중의 모든 위(位)에서 동시에 일어나서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실다운 행(行)이기 때문이며, 6위(位)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문】 뜻이 이미 같지 않다면 어떤 이유로 한 종류이며, 똑같이 신만승진분(信滿勝進分上) 위에서 작용을 일으키는가? 【답】 방편으로 이 일승신만성불(一乘信滿成佛)을 나타내서 신수(信受)를 쉽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저 교에서 우선 이 설을 말한 것이다. 【문】 1위(位) 중에 일체의 지위가 있고 신만심(信滿心)이 곧 불(佛)을 얻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다시 뒤의 여러 위(位)를 설해야 하는가? 【답】 뒤의 모든 위가 곧 초위 속의 일체임을 설한 것이니, 앞의 것처럼 뒤의 것도 마찬가지다. 【문】 만약 처음의 위가 뒤의 위를 갖추었다면, 초위를 얻는 것이 곧 뒤의 위를 얻는 것이니, 또한 뒤의 위도 앞의 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뒤의 위를 얻지 못하였다면 당연히 앞의 위도 얻지 못한 것인가? 【답】 실제로 그렇다. 단지 앞의 위를 얻으면 뒤의 위를 얻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니, 따라서 아직 뒤의 위를 얻지 못하였다면 앞의 위를 얻지 못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여러 위의 차례를 얻음을 설하는가? 【답】 이 경전 중에 여러 위를 안립하는 데에 두 가지 선교방편이 있다. 하나는 상취문(相就門)을 잡아서 지위의 앞뒤를 나누어 3승을 함께 기탁해서 방편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니, 이는 동교(同敎)이다. 둘째로는 체취법(體就法)을 잡은 것이다. 앞뒤로 상입(相入)하고 원융자재(圓融自在)함이 저 3승(乘)과는 다르니, 이는 별교(別敎)이다. 단지 문을 옮기지 않고서도 항상 상즉(相卽)하고, 즉(卽)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항상 전후이니, 이 때문에 두 의미가 융통(融通)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초문이 곧 일체’라는 것인데, 어찌하여 신위초심(信位初心)에서 바로 얻음을 설하지 않고 만심(滿心) 등을 설하는가? 【답】 만약 별교(別敎)로 인한 것이 위(位)에 의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은 3승의 종교위(終敎位)에 기탁해 설한 것이다. 즉 그 교 속에서 신(信)이 원만하고 퇴전함이 없이 바로 지위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이제 곧 저 지위에 들어간 처소에서 일시에 일체 전후의 여러 위(位)의 행상(行相)을 얻었음을 기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信)의 초심(初心)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니, 아직은 불퇴를 얻지 못하고 위상(位相)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행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응당 주(住)의 위(位)에서 성불(成佛)이라고 말하여야 하는데, 어째서 신만이라 이름하는가? 【답】 신(信)을 말미암아서 이루기 때문에 이는 행불(行佛)이지 위불(位佛)은 아니다. 나머지 의미도 이에 준한다. 【釋】 둘째로 문답 중에 일곱 겹이 있다. 처음의 문답 중에는 대답의 문장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저것은 자재(自在)하지 않으나 이것은 곧 자재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저것은 아직 얻지 못하였지만 이것은 이미 얻었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저것은 잠깐 변화[化]를 일으켰으나 이것은 실행하기 때문이며, 넷째로는 저것은 단지 당위(當位)뿐일지라도 이것은 6위(位)를 총괄하기 때문이다. 고사(古辭)에서 신림(神琳)대덕72)이 이르기를, “신만성불(信滿成佛)73)은 곧 동상관불(同相觀佛)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어떤 때는 “총상관불(摠相觀佛)이다”라고도 말하였다. 이 두 가지 말은 어떤 장소(章疏)에 의거하였는가? 또한 이 속의 뜻은 어떤 관(觀)에 해당하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 『문답(問答)』 중 구자인문(九字印文)에 이르기를, ‘만약 5위(位)74) 및 9위(位)를 갖추어서 성불하면, 곧 일승원교섭(一乘圓敎攝)이다. 왜냐하면 교의(敎義)를 구족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소승불(小乘佛)과 3승불(乘佛)은 모두 아함불(阿含佛)이고, 1승불은 곧 의불(義佛)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5위와 9위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곧 총상관불이며, ‘소승불과 3승불은 모두 아함불이고 1승불은 의불이다’라고 한 것은 동상관불이다. 지금 이 장(章)의 문장은 동상관불에 해당한다. 문장에서 ‘3승의 행위(行位)는 신해(信解)를 기준으로 해서 아함문 가운데 이 설(說)을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3승(乘)에 대비하였기 때문이다. 곧 『문답』 중에 ‘소승불과 3승불이 아함불이고, 1승불은 곧 의불이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동상관불이 된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여러 곳에서 신만불(信滿佛)을 논할 때 모두 「현수품(賢首品)」에 나오는 “혹은 찰토(刹土)75)는 있어도 부처가 없다면, 그것에 정각(正覺)의 현성(現成)을 제시하는” 문장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이 하나의 문장에는 두 가지 관(觀)을 포함한다. 이 때문에 ‘만약 5위(位) 및 9위(位)를 갖추어서 성불한다’고 한 것과 ‘1승불은 의불(義佛)이다’라는 것 등의 두 불 가운데 모두 두 가지 관(觀)을 갖추게 된다. 말하자면 신만성불(信滿成佛)은 6상(相)을 갖추었기 때문이다.76) 【문】 총상관불(摠相觀佛) 및 동상관불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이룬 과보만을 취하여 6상(相)을 쓰는 것인가? 실천해 나간 인(因)을 통틀어 취하여 6상을 쓰는 것인가? 【답】 후자와 같다. 【문】 어떤 뜻을 기준으로 해서 총상관불 및 동상관불이라고 하는가? 【답】 신만성불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신만위(信滿位)가 법계를 함융(含融)하여 성불하는 뜻은 곧 총상관불이다. 둘째로 신만위는 곧 성불(成佛)의 일연(一緣)이니, 이 때문에 신만이 이룬 성불은 곧 동상관불이다. 【문】 두 관불(觀佛)은 3생(生) 중 어디에 배열되었는가? 【답】 모두 제3생에 해당한다. 【문】 총상관불은 과해(果海)를 증득한 불(佛)이기 때문에 위의 뜻일 수 있다. 그러나 동상관불은 신만이 과를 이룬 힘의 평등한 뜻이기 때문에 이는 신(信) 가운데 둘려진 과(果)라서 해행(解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과해를 증득한다”고 말하는가? 【답】 신(信)에 성과력(成果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信) 중에서 제3생과(生果)를 대동한다. 만약 “신(信) 중에 대동한 과(果)이기 때문에 해행(解行)이다”라고 말한다면, 의상대덕이 “총상(摠相)의 뜻은 원교(圓敎)에 해당하고, 별상(別相)의 뜻은 3승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 뜻으로써 6상(相)을 일으킨다면, 3승 등의 법(法)도 원교를 이룰 것이니, 그 힘이 가지런히 동등하기 때문에 ‘동상(同相)’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총상의 뜻은 원교에 해당한다’의 원교와 ‘동상의 3승이 대동한 원교’인데, 이 두 가지 원교에 얕고 깊음이 있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두 관(觀)의 성불에는 얕고 깊음이 없다고 한다. 【문】 『고사(古辭)』에는 6상(相)으로써 뒤에 세 가지 관(觀)을 배열하여 “동이상(同異相)은 곧 인연관(因緣觀)이고, 성괴상(成壞相)은 곧 연기관(緣起觀)이고, 총별상(摠別相)은 곧 성기관(性起觀)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세 가지 관에는 얕고 깊음이 있는데, 어째서 동상관불과 총상관불을 모두 한 종류로서 궁실(窮實)이라고 말하는가? 【답】 6상(相)으로써 나눈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와 궁실도 각각 세 가지 관(觀)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궁실 중에 세 가지 관을 갖춘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리고 동상관불은 곧 궁실원(窮實圓)이기 때문에 틀리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현(普賢)의 원만한 인(因)에 인의 6의(義)를 갖추었는데, 6의 중에서 ‘부자불타(不自不他)’는 곧 인연관(因緣觀)이고, ‘불공생(不共生)’은 곧 연기관(緣起觀)이고, ‘비무인생(非無因生)’은 곧 성기관(性起觀)이다. 이미 보현(普賢)의 원만한 인은 이 세 가지 관(觀)을 갖추었기 때문에 얻은 궁실과(窮實果) 속에서도 또한 세 가지 관을 포함하고 있다. 【문】 실제돈(實際頓)을 세우는 가운데 궁실법(窮實法)을 기준으로 하여 6상(相)을 필수로 할 때, 궁실법은 곧 실제돈법(實際頓法)을 이루는가? 궁실(窮實)을 세우는 가운데 실제돈법을 기준으로 하여 6상을 필수로 할 때 실제돈법은 곧 궁실을 이루는가? 비록 능히 필수로 하는 마음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법위(法位)77)는 움직이지 않는가? 【답】 후자의 설과 같다. 【문】 이미 돈(頓) 중에서 6상을 필수로 하였기 때문에 가령 과법(果法)을 기준으로 한다면, 돈인(頓因)을 이룰 수 있으며, 이미 원(圓) 중에서 6상을 필수로 하였기 때문에 가령 인법(因法)을 기준으로 한다면 원만한 과보를 이룰 수 있다. 어째서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답】 능히 필수로 하는 마음에 인과(因果)의 구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돈인원과(頓因圓果)하는 사람은 인과(因果)의 두 법(法)을 통틀어 알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한 법은 움직이지 않는다. 【문】 변계사(遍計舍)를 기준으로 해서 6상을 논할 때, 변계사는 곧 인연을 이루어 연기사(緣起舍)를 이룬다. 이를 예로써 들면, 돈원법(頓圓法)도 또한 마땅히 그러한가? 【답】 예로 들 수 없다. 이를테면 변계인(遍計人)은 6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6상을 쓸 때 변계법(遍計法)은 곧 인연연기법(因緣緣起法)이다. 지금 돈원(頓圓)한 사람은 6상지(相智)로써 인과법(因果法)을 통틀어 안다. 따라서 각각 부동(不動)하므로 예시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논란한 자는 범부가 10불(佛)78)을 기준으로 하여 6상을 사용할 때 10불이 곧 범부를 이룬다고 하겠는가? 또한 돈원인(頓圓人)이 변계법(遍計法)을 설할 때 변계법이 곧 연기를 이루겠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과법(因果法)은 곧 움직이지 않는다. 제2의 문답 중에서 대답의 뜻이 만약 교를 설한 순서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이 경이 초시(初時)에 설한 것이기 때문에 일승성불이 앞에서 설하여졌다. 그런데 지금은 취입(趣入)의 순서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교(敎) 가운데 우선 이 설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문】 제5의 문답 중에서 이 물음과 앞의 “어찌 모름지기 다시 뒤의 여러 위(位)를 설하는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앞 질문의 의미에 차례를 물은 것이 없다. 만약 초위(初位)에서 후위(後位)를 갖춘다면, 어째서 모름지기 다시 뒤의 여러 위(位)를 말했겠는가? 이 질문의 의미는 ‘만약 여러 위가 앞머리를 같게 하기 때문에 앞을 얻는 것이 곧 뒤를 얻는 것이 된다면, 어떤 이유로 그 순서와 차례가 있는가’라는 것이니, 이와 같이 구별될 뿐이다. 대답의 의미는 ‘상취문(相就門)을 기준으로 하는’ 선교(善巧)로써 차례를 이룬다는 뜻이며, 그리고 ‘체취법(體就法)을 기준으로 하는’ 선교(善巧)로써 여러 위가 앞머리를 같게 이루었다는 뜻이다. 【문】 이 두 가지 선교는 8회(會)에서 통하는가? 【답】 만약 문상(門相)을 기준으로 한다면 차별인과(差別因果)에 해당한다. 만약 이러한 궤범으로 8회를 거친다면 그 뜻을 얻을 수 있다. 【문】 제6의 문답 중에서, “만약 자별교(自別敎)라면 위(位)에 의거해서 이루지 못한다”고 한 것은 「사나품(舍那品)」의 “행성불(行成佛)을 기준으로 하면 모두 위에 의거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십행품(十行品)」의 네 개의 구 중에 “둘째로 오직 보현차제행(普賢次第行)을 밝히는 것은 「보현행품(普賢行品)」과 같다. 그러므로 위(位)에 의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는 어떤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사나품」 중에는 오직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에 의거하여 이루기 때문에 ‘위(位)에 의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보현행품」에서는 오직 자체행을 설하였기 때문에 “위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위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만약 자체별교(自體別敎)를 기준으로 한다면, 곧 행(行)과 위(位)를 묻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3승종교(乘終敎)의 신만불퇴(信滿不退)하는 성불(成佛)의 위(位)에 의지하지 않는다. 【문】 만약 그렇다면 3승위상에 의탁하는 것은 자별교(自別敎)의 밖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답】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자별교 중에는 단계의 점차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위상(位相)이 없다. 그런데 3승계급위상에 의탁해서 1승계급위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밖은 아니다. 【문】 만약 그렇다면, 자별교를 기준으로 하면 10신초심(信初心)에서도 또한 성불할 수 있는가? 【답】 그렇다. 1승 중에 처음 얻을 때 곧 뒤를 얻고, 뒤를 얻지 않을 때는 처음도 또한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별교(自別敎)라면 곧 신(信)의 초심(初心)에서 성불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화엄경』 중에 설한 위상(位相)은 3문(門)으로서 말한다. 첫째는 상(相)을 기준으로 하여 상(相)을 논한 문인데, 위(位)의 전후를 나누어서 3승에 동일하게 붙인 것이 이것이다. 둘째는 상을 기준으로 하여 실(實)을 논한 문인데, 3승종교(乘終敎)에 의탁해서 신만불퇴의 때에 불(佛)을 이루어 원만한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실(實)79)을 기준으로 하여 실을 논한 문인데, 이미 자별교(自別敎)에 계급이 없기 때문에 10신초심(信初心)도 성불할 수 있고 3도위(途位)도 또한 성불할 수 있으니, 보현22위 17문을 밝힌 것이 이것이다. 앞의 것이 문상(門相)의 동교(同敎), 다음 것이 법체(法體)80)의 별교(別敎), 마지막 것이 자체(自體)의 별교(別敎)이다. 【문】 10신초심(信初心)으로도 또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선재가 문수를 만나기 전에 성불함을 말하는가? 【답】 문수를 만났을 때 바로 성불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문수를 만나서 법을 얻었을 때는 곧 신만(信滿)이 되니, 이는 곧 이 종(宗)이 신만에 이르러서 바로 성불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신만초심으로도 또한 성불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답】 일승종(一乘宗)과 같은 것은 처음을 얻지 못할 때 또한 뒤를 얻지 못하고, 만약 처음을 얻을 때면 곧 뒤를 얻기 때문에 아직 문수를 만나지 못하여 법문을 얻지 못했을 때 초심(初心)도 또한 얻지 못한다. 문수를 만나서 법문을 얻을 때는 바로 10신초심(信初心)을 얻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서 신(信)의 초심(初心)으로 성불함을 또한 얻고 제2심(心)으로 성불하는 것도 또한 얻으므로 필요에 따라 자재(自在)하다고 말한다. 문수를 만나서 법을 얻었을 때를 신만(信滿)이라고 한 것은 3승종교의 불퇴위(不退位)81)에 의탁하였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실(實)를 기준으로 실(實)을 논한 문(門)은 곧 신초성불(信初成佛)에 해당하고, 상(相)을 기준으로 하여 실(實)을 논한 문은 곧 신만성불(信滿成佛)에 해당한다. 그래서 『도신장(道身章)』에 이르기를, “이미 1위(位)를 의거하여 여러 위(位)를 모두 융섭한다면, 처음은 곧 끝이고, 끝은 곧 처음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이와 같다면 신(信)의 초심(初心)은 5승(乘)을 갖추어 배열하고, 나아가 제10심(心)ㆍ해(解)ㆍ행(行)ㆍ회(廻)의 마음마음 중에 모두 각기 5승을 배열해도 또한 얻게 된다. 『지통기(智通記)』에서 “보법(普法)의 정위(正位)는 위(位)가 없기 때문에 위가 아닌 것도 없다. 일체 육도삼계(六道三界)와 일체 법계법문(法界法門)은 모두 보법정위이다”라고 말한 것은 대개 이 뜻이다. 제7 문답 중에서 ‘이는 행불(行佛)이고 위불(位佛)은 아니다’라는 것은 신만(信滿)과 주초(住初)가 실(實)을 기준으로 하면 둘이 아님을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상(相)을 설하여 별(別)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머지는 이에 의거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은 ‘인용하지 않은’ 여러 성교(聖敎)를 가리킨다.
【記】 제4 수행시분(修行時分)인데, 만약 소승(小乘)을 의거하면 저절로 세 사람이 있다. 하근(下根)이란 것은 소위 모든 성문(聲聞) 중에서 지극히 빨리 3생(生)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첫째 생(生)에서는 해탈분(解脫分)을 심는 것이요, 둘째 생에서는 결택분(決擇分)을 수순하는 것이요, 셋째 생에서는 누진(漏盡)으로 과(果)를 얻는 것인데, 가장 느린 것은 60겁을 거쳐야 한다. 중근(中根)은 소위 독각인(獨覺人)으로서 가장 빨리는 4생에 과(果)를 얻으며, 가장 느리면 백 겁을 지낸다. 상근(上根)은 부처로서 결정코 삼승기겁(三僧祇劫)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 겁수(劫數)는 수화(水火) 등의 1겁을 취하여 일수(一數)로 삼으며, 열 개를 하나로 합하여 제2수(數)로 삼으며, 이와 같이 계속하여 제60에 이르러 1아승기로 삼는다. 이와 같이 하여 3아승기(阿僧祇)를 헤아린다. 【문】 어떤 이유로 하근(下根)이 돌이켜 지나가는 시간은 적고, 상근(上根) 등은 시간이 많은가? 【답】 능히 많은 시간 동안 근행(根行) 등을 수련하는 것을 어려움으로 여겼기 때문에 많은 것이다. 또한 『바사(婆娑)』 등에 의거하면, 보살성불(菩薩成佛)에는 두 가지 신(身)이 있으니, 하나는 법신(法身)이요 다른 하나는 생신(生身)이다. 법신은 계와 정과 혜 등 5분(分)을 말하는데, 이 법신을 닦는 데에 구체적으로 네 때[時]가 있다. 첫째는 3아승기겁 동안 유루(有漏)의 사바라밀(四波羅蜜)을 닦는 시기이고, 둘째로 백 겁 동안 상호(相好)의 업(業)을 닦는 시기요, 셋째로 출가고행(出家苦行)하면서 선정(禪定)을 닦는 기간이요, 넷째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시기이다. 생신이란 단지 백 겁 동안 상호의 업을 닦을 때 최후의 몸으로서 가야성(伽耶城) 정반왕가(淨飯王家)에 보신(報身)을 받고 태어나 마가타국(摩伽陀國)에서 각도(覺道)에 오르는 것이다. 나머지도 설한 것과 같다. 【釋】 제4 수행시분(修行時分) 중에서 앞에서는 행(行)과 위(位)를 밝히는 데 그쳤고, 지금은 수행시겁(修行時劫)을 밝히기 때문에 다음에 오게 된다. 이 중에서 먼저는 이름을 붙이고, 뒤에서는 상(相)을 해석한 것이다. 그 중에서 5교(敎)를 곧 5단(段)이라고 한다. 소승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3근(根)을 기준으로 하여 때[時]가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로 ‘우의(又依)’의 아래에서는 따로 불신(佛身)을 기준으로 하여 때가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앞의 것 중에서 먼저는 3근(根)을 따로 말하고, 그 다음은 문답이다. 앞의 것 중에서 ‘제3생(生)에서 누진득과(漏盡得果)한다’는 것은 4과(果)82)를 통틀어 얻는 것이며, ‘해탈분(解脫分)을 심었다’는 것은 선근을 심은 위(位)이기 때문에 ‘종(種)’이라고 말하며, ‘결택분(決擇分)을 닦는다’는 것은 가행위(加行位)의 중에서 수행정진(修行精進)하기 때문에 ‘수(修)’라고 말하게 된다. ‘독각인(獨覺人)은 지극히 빨리 4생(生)83)에서 과보를 얻는다’는 것은 앞의 성문인(聲聞人)이 일생 중에 결택분을 닦기 때문에 3생이라고 하였는데, 독각인은 2생에서 바로 순결택분(順決擇分)을 닦기 때문에 4생(生)이라고 한다. 【문】 어떤 이유로 성문(聲聞)은 근기가 둔하여 일생 동안 닦고, 독각은 근기가 날카로워서 그렇게 하지 않는가?84) 【답】 성문은 스승에 의지하는데, 독각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기 때문이다. 『중변론원효소(中邊論元曉疏)』8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보살이 된 사람은 닦은 바가 무량하여 삼무수(三無數)를 거치니, 이 일은 그럴 수 있다. 중하(中下)의 2승은 자도(自度)를 가지런히 구하니, 이치에 응당 수승한 자는 빨리 이루고 하열한 자는 늦게 건너갈 뿐이거늘, 어떤 이유에서 독각은 극히 빨라서 4생(生)이 미치지 못하고, 성문은 가장 빨라서 3생인가? 또한 인각유독각(麟角喩獨覺)은 백 겁이고, 바라밀성문(波羅蜜聲聞)은 육십 겁인가? 【답】 하열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여 마음이 급해서 곧바로 자도(自度)를 구하기 때문에 적은 생(生)을 거친다. 수승한 근기의 사람은 두려워하는 마음에 차이가 적고 겸하여 구제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다생(多生)을 거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성문(聲聞)은 생사를 두려워하고 싫어해서 중생의 공(空) 및 4진제(眞諦)를 듣는다. 마치 포위된 사슴이 이미 독화살을 맞아서 한결같이 벗어나기만을 구하여 다시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벽지불은 비록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싫어하지만 오히려 조금이라도 깊고 깊은 인연을 관찰할 수 있고, 또한 조금이라도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비유한다면 무소가 포위 상태에서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능히 그 자식을 돌보면서 사랑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비록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싫어하더라도, 능히 여러 법의 실상을 관하여 궁극적으로 12인연에 깊숙이 들어가서 법공(法空)86)을 통달하고 무량법성(無量法性)에 들어간다. 비유한다면 상왕(象王)이 사냥꾼의 포위 안에 있으면서 비록 독화살을 맞더라도 사냥꾼을 돌아보는데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자신에게 딸린 무리들을 거느리고 편안히 걸어가면서 떠나가는 것과 같다. 이 중에서 무소의 뿔에 대한 비유를 기준으로 한다면, 한결같이 성문(聲聞)보다 수승하다고 설한다. 만약 부행독각(部行獨覺)으로 바라밀성문을 바라본다면 서로 수승함과 하열함이 있다.” ‘물과 불 등의 1겁을 취하여 1수(數)라고 한다’는 것을 3세(世)를 기준으로 한다면, 3대겁(大劫)은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ㆍ현재현겁(現在賢劫)ㆍ미래성수겁(未來星宿劫)이다. 이 3겁 중에 각기 4겁이 있어서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이라고 이르며, 이 4겁 중에 각기 스무 가지가 있어서 합하여 80겁이 있으며, 이 80겁을 합하여 1현겁(賢劫)을 이룬다. 장엄(莊嚴)ㆍ성수(星宿)도 또한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구체적으로 80겁의 1겁을 취하여 1수(數)라고 하고, ‘열 개를 하나로 합하여 제2수(數)라고 한다’라고 한다. 【문】 성(成)과 괴(壞)의 4겁 중에 각기 20겁을 갖추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답】 주겁(住劫)을 기준으로 한다면, 최초의 1겁은 오직 줄어들 뿐이고 증가하는 것은 없으며, 최후의 1겁은 오직 증가할 뿐이고 줄어드는 것은 없다. 중간의 열 여덟은 각기 증가하거나 줄어드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열 아홉의 증감이 20겁이 되니, 이것을 주겁(住劫)이라고 이름한다. 성(成)ㆍ괴(壞)ㆍ공(空)의 겁도 주겁의 양에 준하기 때문에 각기 20겁이 있다. 【문】 성겁(成劫)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성겁 중에 20겁이 있다. 처음의 1겁 중에 기세간(器世間)87)을 이루고, 뒤의 19겁에서 중생세간(衆生世間)88)을 이룬다. 기세간의 지거(地居)는 곧 아래에서 위에 이르러서 이루고, 공거(空居)는 곧 위에서 아래에 이르러서 이룬다. 중생 세간이라면 처음 하나의 유정(有情)이 극광정(極光淨)에서 없어지면서 대범처(大梵處)에서 태어나 대범왕(大梵王)89)이 되고, 뒤의 여러 유정(有情)도 또한 그곳에서 없어지면서 범보(梵輔)90)에 태어나는 자도 있고 범중(梵衆)91)에 태어나는 자도 있고 타화천궁(他化天宮)92)에 태어나는 자도 있고, 점차 아래로 여러 천인취(天人趣) 내지 지옥에 태어난다. 법(法)이 그러해서 뒤에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가장 먼저 이루어진다. 【문】 주겁(住劫)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겁의 처음에 사람의 수명은 무량(無量)하나 점차로 줄어들어서 8만 4천93)에 이르기 전을 모두 취하여 성겁(成劫)이라고 한다. 8만 4천 세(歲)에서 백 년에 1년씩을 줄어들어서 궁극적으로 10년에 이르는 것을 주(住)라 하는데, 초겁(初劫)이기 때문에 이때는 오직 줄어들 뿐으로 증가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이때부터 점차 증가하여 8만 4천에 이르고, 또 이때부터 점차 줄어들어서 10년에 이르니, 이처럼 일증일감(一增一減)을 주(住)라고 이름한다. 두 번 째도 이와 같아서 중간에 열 여덟이 각기 증가하고 줄어들고 하는데, 제20겁에 처음으로 10년에서 점차 증가하여 8만 4천에 이르는 것을 주(住)라고 이름하며, 제20겁이기 때문에 오직 증가할 뿐이고 줄어드는 것은 없다. 그러나 처음에 줄어들고 나중에 증가함 중의 열 여덟은 소위 초겁(初劫)에서는 오직 줄어들 뿐이지만 중생의 복은 후해서 그 줄어듬이 곧 늦는 것이며, 후겁(後劫)에서는 오직 증가할 뿐이나 중생의 복은 적어서 그 늘어남이 곧 늦는 것이니, 따라서 증감을 더불어 갖춘 나머지 겁도 가지런히 동등하다. 【문】 괴겁(壞劫)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앞의 19겁에 유정이 점차 무너지고, 제20겁에서 기세간이 무너진다. 한 편이 무너질 때, 다른 편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편의 인천보(人天報)가 아직 다하지 않은 자는 다른 편의 인천(人天) 속에 태어나며, 지옥보(地獄報)가 이미 다한 자는 다른 편의 인천 및 나머지 세계[趣]에 태어나게 되며, 보(報)가 아직 다하지 않은 자는 다른 편의 지옥에 떨어지니, 이와 같이 점차 줄어들어서 중생이 이미 비게 되면 큰 재앙이 장차 일어난다고 한다.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나와서 연못의 물이 마르고 초목(草木)은 타서 말라죽으며, 다음으로 세 개의 해가 나와서 강물이 모두 마르고 큰 바다는 3분의 1이 없어지며, 다음으로 네 개, 다섯 개 내지 일곱 개의 해가 나란히 나와서 대지와 산ㆍ바다와 수미산과 큰 바다는 모두 화합하여 녹고 말며, 불이 틈도 없이 밝게 일어나서 맹렬한 불꽃이 위로 오르면서 곧바로 초선(初禪)에 이른다. 그때 삼천(三千)은 모두 다 멸진(滅盡)한다. 이와 같이 일곱 번의 화재를 거친 뒤에야 1수(水)가 있으니, 수재(水災)가 일어날 때는 제3선(禪)에서 뜨거운 잿빛 물을 비로 내리고, 또한 아래의 수륜(水輪)에서 물이 내뿜어져 세계를 침몰시킨다고 한다. 위로 올라가 2선(禪)에 이르면 모두 다 똑같이 무너지는데, 2선의 수명인 8대겁(大劫)을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앞에서와 같이 일곱 번의 불 뒤에 한 번의 수재(水災)가 있다. 이와 같이 무릇 칠칠(七七:49일)의 불과 일칠(一七:7일)의 물을 거쳐서 오십 육이 된 뒤에 또한 일칠(一七)의 화재가 있고, 그 후에 1풍(風)이 있다. 풍재(風災)가 일어날 때 아래의 바람 바퀴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일어나서 세계를 불어 무너뜨리는데, 위로 올라가 3선(禪)에 이르러서 동시에 무너진다.94) 이 때문에 팔칠(八七)의 불과 일칠(一七)의 물, 최후의 1풍(風)을 합하여 64겁이 되니, 이는 3선(禪)의 수명이 64대겁(大劫)이기 때문이다. 【문】 이 64겁에 각기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이 있는가? 【답】 그렇다. 원공(遠公)의 「십삼주장(十三住章)」에 이르기를, “1현겁(賢劫)의 64겁을 대겁(大劫)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처럼 1현겁 중에 성ㆍ주ㆍ괴ㆍ공을 갖추었으니, 무릇 삼재(三災)를 거쳐서 64겁을 갖춘다. 이를테면 불은 초선(初禪ㆍ劫禪)에 미치고, 물은 2선(禪)에 미치고, 바람은 3선(禪)에 미친다. 초선의 수명이 1성수(成壽)의 양이 되기 때문에 한 번의 화재로써 없어지며, 2선의 수명은 8대겁(大劫)의 양이 되기 때문에 초선의 일곱 번의 이루고 무너짐 이후에 한 번의 수재로써 없어지며, 3선의 수명은 64대겁의 양이 되기 때문에 초선의 예순 세 번의 이루고 무너짐 이후에 한 번의 바람이 일어나서 3선을 무너뜨리니, 이 때문에 64겁은 3선(禪)의 수명을 따른다. 따라서 지금 ‘물불의 1겁을 취하여 1수(數)라고 한다’고 말한 것은 한 번의 수재와 한 번의 화재가 모두 성ㆍ주ㆍ괴ㆍ공을 갖추었기 때문에 물불 1겁을 취하여 1수라고 하게 된 것이다. 무릇 괴겁(壞劫) 때 한 명의 스승도 없이 스스로 깨우친 사람이 있어서 외치기를, “초선의 안락(安樂)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듣는 자는 모두 초선에서 태어나며, 또한 이르기를, “2선(禪)의 안락이다”라고 하면 곧 모두 2선(禪)에서 태어나게 된다. 【문】 소삼재(少三災)는 무엇을 말하는가? 【답】 『대법론(對法論)』 제6에 이르기를, “또한 세 종류의 소겁(少劫)이 있으니, 이른바 기근(饑饉)과 질역(疾疫)과 도병(刀兵)이다”라고 하였다. 주(住)의 20감겁(減劫)에 매번 소삼재(小三災)가 일어난 것이 있다. 이를테면 처음에 사람의 수명 8만 4천 세로부터 백 년에 1년씩 주는데, 30년에 이르러서 기근이 일어나고 7년 7월 7일 7야(夜)에 그친다. 이때 사람의 신장은 4척에 불과하다. 금옥(金玉)과 형향(馨香), 5미(味)가 없고, 사람은 탐욕이 많아서 항상 10악(惡)을 행하니, 만약 한 사람이 선(善)을 생각해도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깔본다. 천룡(天龍)이 분노하여 단비를 내리게 하지 않아서 백곡(百穀)은 씨가 끊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굶는데, 단지 먹지 못하는 열매와 겨와 쭉정이만이 있어서 목숨을 연명하며, 나아가 죽은 자를 함께 먹고 골(骨)을 취하여 즙을 내어 마신다. 혹은 적은 먹거리를 얻음에도 점을 쳐서 생각하고 먹으며, 만약 한 알의 쌀과 보리와 조를 얻으면 그것을 마니주(摩尼珠)처럼 귀중히 여겨서 상자에 숨겨두고서 수호한다. 이때 남주(南洲)에는 오직 1만 인이 있을 뿐이다. 허공에서 현성(賢聖)이 고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싫어함을 일으키지 않는가?”라고 하거늘, 이 소리를 듣고서 삼보를 생각한다면 천룡(天龍)은 비를 내리고 기근은 약해지면서 그치며, 수명은 증가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점차 많아진다. 사람의 수명이 20세 때 질병이 일어나서 7월 7일 7야에 그친다. 이때 사람의 신장이 큰 자는 3척이고 작은 자는 2척 5촌(寸)인데, 박복하기 때문에 비법(非法)이 많이 행해지고 사람 아닌 것의 희롱거리가 된다. 질병이 유행하고 서로 치고 회초리를 때리며, 그 마음을 혼란케 해서 그 정신을 접하며, 죽여서 버리려고 하니 사람 목숨이 끝나면서 구하기가 어렵다. 남주(南洲)에 역시 1만 명이 있을 뿐이라서 앞에서 고한 것과 같으니, 이 말을 듣고 나서 함께 환염(患厭)을 일으키고 나서야 질병이 그친다. 사람의 수명이 10세 때 도병(刀兵)이 일어나서 7일 7야에 그친다. 이때 사람의 신장이 큰 사람은 1척 5촌이고 중간인 자는 1척 2촌이고, 작은 사람은 1척이다. 진귀한 보물과 돈은 모두 써서 없어지고, 땅은 좁고 강은 넓어져서 모두 하수구에 묻힌다. 각기 난폭하고 날카로운 살해의 마음을 일으키므로 초목과 와석(瓦石)을 가지고서 모두 도검(刀劍)을 만들고, 다시 서로 잔인하게 해치고 죽여서 죽은 자의 상(喪)으로 대략 다한다. 【문】 어떤 겁 중에서 천 불(佛)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겁(成劫)에서 또한 부처가 출현한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주겁(住劫)에서 바로 나온다. 한편으로 현겁천불(賢劫千佛)을 기준으로 하면, 주(住)의 20겁의 제1에서 제5에서는 모두 부처가 나오지 않으며, 제6 감겁(減劫)에서 사람의 수명이 6만 세 때 구류손불(拘留孫佛)95)이 나오며, 제7 감겁의 4만 세 때 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96) 이 나오며, 1만 세 때 가섭불(迦葉佛)이 나오며, 제9 감겁(減劫)에서 사람의 수명이 백 세 때 석가모니불이 나온다. 또 어떤 문장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3불(佛)97) 은 함께 제9겁에서 나오며, 제10 감겁의 8만 세 때 미륵불(彌勒佛)이 나오며, 다음 4겁 중에서는 불(佛)이 나오지 않는다. 제15 감겁의 9백 세 때 9백94불(佛)이 나오고, 또 다음 4겁에서는 불(佛)이 나오지 않는다. 제20증(增)에 누지불(樓至佛)98)이 나온다. 구체적으로는 원공(遠公)의 별장(別章)과 같다.” 첫째로 문답 중에서 ‘어떤 이유로 하근(下根)’ 등은 성문(聲聞)이 하근이 되고 불(佛)을 상근(上根)이라고 하는 것이지, 성문의 더딘 것을 상근(上根)이라 하고 빠른 것을 하근(下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근(上根)’ 등은 중근(中根)의 독각(獨覺)도 평등하게 취한다. 둘째로는 따로 불신(佛身)을 기준으로 하여 시간이 다름을 나타낸다. 이 중에 ‘계(戒) 등의 5분(分)’은 정(定)과 혜(慧)와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평등히 취한다. ‘3승기겁으로 유루(有漏)의 4바라밀(波羅蜜)을 닦는다’는 것은 선(禪)과 혜(慧)를 없애기 때문에 넷이라고 한다. 『구사송(俱舍頌)』에 말하기를, “단지 자비로 보시한다고 하고, 몸을 나누어 밝혀서 성냄이 없다고 하고, 불사불(弗沙佛)을 찬탄한다고 하고, 다음으로는 무상보리(無上菩提)99)와 6바라밀다(波羅蜜多)라 하니, 이와 같은 4위(位)에서 하나라고 하고 둘이라고 한다. 또한 하나라고 하고 둘이라고 함이 다음과 같이 원만함을 닦는다”고 하였다. 이를 해석해서 말하기를, ‘자비로 보시한다’는 것은 보시이고, ‘피석(被析)’은 계(戒)이고, ‘마음에 성냄이 없다’고 한 것은 인(忍)이고, ‘불사불(弗沙佛)을 찬탄한다’는 것은 정진(精進)이고, ‘다음으로는 무상보리이다’는 선(禪)과 반야(般若)이다. 이 중에 선(禪)은 제3시(時)에 해당하고, 반야는 제4시(時)에 해당한다.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룰 때’는 2승위(乘位)에 의하면 견도(見道)의 양(量)이니, 그러므로 앞의 3시(時)는 견도 앞의 방편위(方便位)에 해당한다. ‘생신(生身)은 단지 백 겁으로 상호업(相好業)을 닦는다’고 한 것은 4바라밀과 선정(禪定)을 닦을 때 이는 법신인(法身因)이기 때문에 생신 중에서는 취하지 못하게 된다. 【문】 어떤 이유로 불사불(弗沙佛)을 찬탄함을 정진이라고 하는가? 【답】 한 발을 들어서 7일 7야를 지내자, 게송으로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천지(天地)[천상천하(天上天下)이다]에도, 이 계(界)에도, 다문실(多聞室)[곧 비사문(毗沙門)의 궁(宮)을 여기에서는 다문실이라고 한다]에도, 서궁(逝宮)[대범천왕(大梵天王)의 궁이다. 외도(外道)는 그것을 상(常)이라고 주장하나 불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서궁이라 부른다]에도, 천처(天處)[곧 여러 천처이다]에도, 시방[시방세계에 비슷한 불(佛)은 있지 않다]에도 없다. 장부우왕(丈夫牛王)의 대사문(大沙門)[곧 불(佛)이다]은 땅과 산림을 찾아 두루하여도 동등한 것이 없다[땅을 찾고, 산림을 뒤져도 두루 불(佛)과 동등한 것이 없다].” 이 한 게송으로 불(佛)을 찬양해서 문득 9겁을 초월하여 제91겁에서 깨달음[正覺]을 이루니, 어찌 정진(精進)이 아니겠는가? ‘나머지는 그것에서 설한 것과 같다’는 것은 『구사론』을 지적한다.
【記】 만약 시교(始敎)에 의거한다면, 수행하여 성불하는 것은 반드시 3승기를 거치는데, 다만 이 겁수(劫數)는 소승과는 같지 않다. 수화(水火) 등 대겁을 취하여 수가 백천(百千)에 이르고, 수가 다시 백천에 이르러 1구지(俱祗)가 됨을 제1수(數)라고 하고, 수가 구지에서 다시 구지에 이른 것은 제2수가 된다. 순서가 이와 같아서 소수(所數) 등의 수로서 제1백에 이른 것을 1아승기라고 하니, 이는 곧 10대겁수(大劫數) 중의 제1수이다. 이 수에 의거하여 3아승기를 채운다. 그리하여 이 시교 속에서는 석가신(釋迦身)에 나아가 뜻을 분별하는데, 이는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내가 일찍이 보정불(寶頂佛)이 있는 곳에 가서 제1 아승기겁을 채웠고, 연등불(燃燈佛)이 있는 곳에서 제2 아승기겁을 채웠으며, 가섭불(迦葉佛)이 있는 곳에서 제3 아승기겁을 채웠다. 그리고 내가 일찍이 석가불이 있는 곳에 가서 비로소 아뇩보리심(阿耨菩提心)을 내었다.” 또한 『본업경(本業經)』에 의지하여 보면, “또한 백 겁 동안 상호(相好)의 업을 닦는다 해도, 단지 이는 변화(變化)일 뿐이지 실제 수행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또 하나의 게송으로서 불사불(弗沙佛)을 읊고 나서 곧 9겁을 뛰어넘었어 다만 91겁에 곧 성불하였다. 【문】 3무수겁(無數劫)으로 여러 실행(實行)을 닦았다면 응당 보신(報身)을 이룰 텐데, 어떤 이유로 여기서는 화신(化身)에 나아가 설하는가? 【답】 이 시교는 하근기에 나아감을 말미암기 때문이며 2승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몸은 그들이 알아보는 바이기 때문이며 권교(權敎)이기 때문에 이런 설을 하는 것이다. 【釋】 시교(始敎)에 나아간 것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3승기의 의미를 밝혔고, 둘째는 석가신(釋迦身) 중에 3기(祇)를 나눈 뜻을 밝혔고, 셋째는 문답이다. 앞의 것 중에 ‘물과 불의 대겁(大劫)을 취한다’는 것은 소승설(小乘說)과 같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단지 이 겁수(劫數)가 소승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가? 【답】 소승 중에서는 수화(水火) 등의 1겁을 취하여 1수(數)라고 하고, 열 개의 겁 하나를 제2수(數)라고 한다. 이것을 세어서 십(十)에 이른 것을 백(百)이라고 하고, 십백(十百)을 천(千)이라고 하고, 십천(十千)을 만(萬)이라고 하고, 십만(十萬)을 낙차(洛叉)라고 하고, 나아가 제60을 1아승기라고 한다. 이 시교(始敎) 중의 수법(數法)은 문장과 같으니, 이 때문에 수화(水火)의 겁(劫)을 취한 의미는 소승과 같아도 수법은 크게 구별되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말한다. ‘소수(所數)가 능수(能數)와 동등하다’는 것은 구리(俱梨)에서 구리(俱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앞의 구리는 곧 능수(能數)이고 뒤의 구리는 곧 소수이다. 나머지 수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이 곧 10대수(大數) 중의 제1수이다’는 것은 「아승기품(阿僧祇品)」의 10대수이다. 다음으로 불신(佛身)을 기준으로 하여 3기(祇)를 나눈 것 중에서 ‘교(敎)가 석가신(釋迦身)에 나아감으로써 이 뜻을 나눈다’고 한 것은 이 교가 불보신(佛報身)도 또한 3기(祇)로 닦아 이른다는 뜻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또한 소승과 같다는 것은 오직 석가신(釋迦身)에 나아가서 3승기를 나누기 때문에 ‘인하여’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답】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중에서는 오직 석가신(釋迦身)에 나아가서 3승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구사송(俱舍頌)』에 이르기를, “3무수겁(無數劫)에서 각기 7만(萬)을 공양하고, 또한 차례대로 오(五)와 육(六)과 칠(七)의 천불(千佛)을 공양한다. 3무수겁이 가득 찰 때는 역순으로 승관(勝觀)과 연등(然燈)과 보계(寶髻)의 불(佛)을 만나는데, 처음은 석가모니이다”라고 하였다. 이 게송의 의미는, 초승기겁(初僧祇劫)에서 7만 5천 불(佛)을 만나고, 제2승기에서 7만 6천 불(佛)을 만나고, 제3승기에서 7만 7천 불(佛)을 만난다는 것이다. ‘역차봉승관(逆次逢勝觀)’은 제3승기가 가득 차서 승관(勝觀)을 만나고, 제2승기가 가득 차서 연등불을 만나고, 초승기가 가득 차서 보계불(寶髻佛)을 만나고, 최초로는 석가불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소승이라서 이 교와 같기 때문에 인용했을 뿐이다. ‘곧 9겁을 초월한다’는 것 등에 대해서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문】 보살이 얼마의 시간 동안 32상(相)을 심는가? 【답】 가장 느리게는 백 겁이고, 가장 빠르게는 91겁이다. 석가모니보살은 91겁에서 32상을 닦으니, 가령 경(經)에서는 ‘과거에는 불(佛)을 불사(弗沙)라고 하였다. 때에 두 보살이 있어서 하나를 석가모니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를 미륵(彌勒)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며, 나아가 이르기를, ‘불사불(弗沙佛)은 석가로 하여금 빨리 성불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설산(雪山)에 올라가 화정(火定)에 들어갔다. 이때 석가는 외도선인(外道仙人)이 되어 산 위에서 약(藥)을 채집하였는데, 불사불이 화정에 들어가서 광명을 내는 것을 보고는 환희하고 공경하고 믿으면서 한 다리로 발돋움해서 섰으며, 또 손을 맞잡고 일심(一心)으로 불(佛)을 보았다. 그리고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7일 7야를 보내면서 한 게송으로 찬양하였다. ‘천상천하에 부처님만한 분은 없으니 시방세계에 비교할 것이 없으며, 세간(世間)100)에 소유한 것을 모두 보아도 일체가 부처님만한 분은 없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9겁을 초월하고 91겁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것은 『구사론』의 저사불(底沙佛)101)과 같다. 셋째로 문답 중에서 물은 뜻이란 3승기겁으로 수행해서 성불하면 보신(報身)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째서 오직 화신(化身)일 뿐인가라는 것이다. 대답의 의미는 알 수 있다.
【記】 만약 종교(終敎)에 의거하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3아승기를 정함이다. 하나의 방향으로 화의(化儀)를 잡기 때문에, 또한 이 교 속에서 실행(實行)을 닦기 때문에 실제로 보신(報身)을 이루지만 교화를 잡아서 설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법화경』에 이르기를, “내가 실제로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無量無邊)한 백천만억 아승기겁을 거쳤다”고 하였으며, 또한 경에 이르기를, “내가 연등불의 처소에서 수기(授記)를 얻었다”고 하였으니 모두 방편의 분별이기 때문이다. 또한 백 겁 동안 상호의 업(相好業)을 닦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소승 속에서는 지분(智分)을 치우쳐서 닦지 복분(福分)을 닦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불에 임할 때 다시 백 겁 동안 따로 그 업을 닦는 것이다. 시교(始敎) 중에서 그들을 인도함이 그들의 설한 바와 같으니, 이것이 바로 교화이다. 그리고 종교(終敎) 속에서는 실제 수행을 논한다. 초발의(初發意)부터 복과 지혜를 모두 닦기 때문에 성불할 때 따로 닦음이 없다. 둘째는 3아승기의 닦음을 결정하지 않는 것인데,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불계 이외의 나머지 잡류세계(雜類世界)로 통하기 때문이니, 『승천왕경(勝天王經)』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로 불공덕(佛功德)의 한량없음에 의거하기 때문이니, 『보운경(寶雲經)』에서 “선남자여, 보살이 능히 여래경계(如來境界)를 사의(思議)하지 못하고, 여래경계는 사량(思量)할 수 없다. 단지 천근(淺近)의 중생을 위해서 3승기 동안 닦고 익혀서 얻는 것이라고 설하지만, 보살이 실제로 발심(發心)한 이후로는 그 수(數)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풀어서 말하기를, ”이 중의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겁이란 뜻이지 단지 셋만이 아니다. 【문】 어떤 이유로 앞의 교에서는 3승기를 정하는데, 이 교에서는 정(定)과 부정(不定)이 있는가? 【답】 앞에서 교가 생겨서 이 교가 성숙한 것이므로 방편이 점점 저 3승을 권하여 1승으로 향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러한 설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돈교(頓敎)에 의거하면 일체시분(一切時分)이 모두 불가설이니, 단지 일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일념은 곧 무념(無念)이고, 시(時)는 곧 무시(無時)이다. 나머지는 이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원교(圓敎)에 의거하면 일체시분은 모두 부정이다. 어떤 이유인가? 여러 겁이 상입(相入)하기 때문이고, 상즉(相卽)하기 때문이고, 일체 인타라(因陀羅) 등의 모든 세계에 통틀어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각각 처소에 따라서 혹은 일념이나 혹은 무량겁(無量劫) 등이지만 시법(時法)을 어기지는 않는다. 나머지는 이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釋】 종교(終敎)에 나아가면, 처음에는 정(定)과 부정(不定)을 나타내고, 다음으로는 문답이다. 처음의 ‘정(定)의 3기(祇)’ 중에서는 첫째는 정현(正現)을, 둘째로 ‘법화(法花)’의 아래에서는 인증(引證)과 함께 회위(會違)를, 셋째로 ‘우역(又亦)’의 아래에서는 따로 상호업(相好業)을 닦음이 없음을 나타낸다. 앞의 것 중에 ‘한편으로 화의(化儀)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만약 시방으로 요약하면, 곧 부정승기(不定僧祇)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敎) 중에는’이라고 한 것은 시교(始敎)를 간별한 것이니, 석가신(釋迦身)에 나아가서 3기를 나누었다. 둘째로 인증(引證)과 회위(會違) 중에서 만약 인증을 기준으로 하면, 『법화경』은 「수량품(壽量品)」의 문장이다. ‘또한 이르기를, 내가 연등불이 있는 곳에서 수기를 얻었다’고 한 것은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이 중간에서 내가 연등불102) 등에게 설한다’와 또 다시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이니, 이와 같이 모두 방편으로서 분별한다”고 하였는데, 경전 중에서 수기의 일이 없고 이 중에서 열반에 들어가는 일이 없으니, 뜻으로서 인용한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는 보신(報身)의 실성(實成)을 증험하는 것이지 정(定)의 3기를 증험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회위(會違)를 기준으로 한다면, 『기신론』의 정삼승기(定三僧祇)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 “혹 지(地)를 초월하여 속히 정각(正覺)을 이룸을 보인 것은 겁 많고 나약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며, 혹 우리가 무량아승기겁에서 마땅히 불도를 이루었다고 설한 것은 나태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니, 능히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의 불가사의(不可思議)임을 보인다. 그런데도 실제로 보살종성(菩薩種性)은 그 근기가 동등하고, 발심(發心)도 동등하고, 증득한 것도 또한 동등하여 초과(超過)하는 법이 없다. 일체 보살은 모두 3승기를 거친다.” 이를 해석하여 말하였다. “이 문장의 의미는 일체 보살은 반드시 3기를 거치고 나머지 여러 종류의 설은 모두 방편이라는 것이니, 그렇다면 곧 회위(會違)이지 증험은 아니다. ‘모두 방편으로써 분별한다’는 것은 이미 경전 중에 이 문장이 있기 때문에 경문(經文)으로도 얻게 된다고 한 것이다. 또한 『기신론』의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속성(速成)과 무량겁성(無量劫成)은 모두 방편이니, 이 때문에 이 뜻을 기준으로 해서 “장주의 말도 또한 얻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잡류세계(雜類世界)’는 동류(同類)와 이류(異類)를 묻지 않고 사바(沙婆) 세계 밖을 통틀어 잡아서 말한 것이다. 『승천왕경(勝天王經)』은 7권본(卷本) 제6권의 문장이고, 『보운경(寶雲經)』은 제6권의 문장이다. 돈교 중의 ‘일념불생(一念不生)’ 등은 이성(理性)을 일념(一念)으로 삼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청량(淸凉:澄觀)이 말하기를, “곧 마음의 근본이 불체(佛體)이니,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중생(衆生)이라고 하며, 일념망심(一念妄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불(佛)이라고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를 풀어서 말하기를, “이것은 망념(妄念)을 일념으로 삼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장주도 또한 망념이 일념이 된다고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 중에서는 시겁(時劫)을 기준으로 설하였기 때문에, “일념이란 무념이다”라고 말하였으니, 두 승려의 뜻을 구별할 수 있다. 원교 중에서 ‘여러 겁(劫)이 상입상즉(相入相卽)한 때문에’라고 한 것은 가령 하나의 세계(世界)를 기준으로 할 때 상입상즉하기 때문에 부정(不定)이니, 하나를 기다려서 하나에 나아가고 무량(無量)을 기다려서 무량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해통일체(該通一切)’ 등은 ‘하물며 다시 일체인다라세계(一切因陀羅世界)에 통하겠는가’이고, ‘시법(時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장단(長短)의 본위(本位)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 뜻은 오직 알뿐이다’는 것은 인용하지 않은 여러 성교(聖敎)를 가리킨다.
【記】 제5 수행소의신(修行所依身)은 만약 소승에 의거하면 단지 분단신(分段身)으로서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고, 부처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는 실제 보신이지 화신은 아니다. 만약 시교 중의 회심성문(廻心聲聞)이라면, 또한 분단을 설해서 구경위에 이르고 불신(佛身)도 또한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는 화신이지 실제 보신은 아니다. 만약 직진(直進) 중에 의거하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위에 의탁해서 10지 속에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데, 공용(功用)과 무공용(無功用), 거칠음과 세밀함[麤細]이라는 두 지위의 차별상이 있기 때문이다. 즉 7지까지는 이미 분단(分段)이 있다고 8지 이상에는 변역(變易)이 있다고 말한다. 둘째로 실제의 보신[實報]에 나아가면 곧 분단신이 금강(金剛) 이르러서 돌이킨다고 설하는 것이니, 10지 속에서 번뇌장(煩惱障)의 종자가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못하고 남아있는 채로 금강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미 혹장(惑障)이 있다면 어찌 분단의 몸을 받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십지경(十地經)』에 이르기를, “10지까지는 중음(中陰)이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문】 8지 이상의 모든 보살은 번뇌장을 영원히 조복하여 행하지 않아서 무루(無漏)의 지과(智果)가 항상 상속하기 때문에 아라한과 같은 것이다. 이미 현행(現行)의 미혹이 없는데, 어찌하여 다시 분단신을 얻을 수 있는가? 【답】 만약 범부라면 미혹의 윤생업(潤生業)을 나타내서 생을 받지만, 성인은 그렇지 않으니, 다만 미혹의 종자를 남겨서 그것을 사용하여 생을 받는다. 이 때문에 『잡집론(雜集論)』에 이르기를, “일체 성인은 모두 수면력(隨眠力) 때문에 생을 맺는 것이 상속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양의 『섭론(攝論)』에 이르기를, “범부와 다르기 때문에 영원히 위의 마음[上心]을 조복하고, 2승과 다르기 때문에 그 종자를 남긴다”고 하였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성인은 생을 받지만 윤생업을 나타내지 않고, 다시 종자를 남기고 있으니 어찌 분단신을 받을 수 없겠는가? 만약 8지 이상은 지장(智障)을 연(緣)으로 삼아서 변역(變易)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남겨둔 미혹의 종자는 곧 쓸모가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제8지의 처음에 영구히 일체의 번뇌 종자를 없애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이미 그렇지 않으니, 이쪽이 어찌 그렇다고 하겠는가? 만약 회향보리성문(廻向菩提聲聞)을 잡는다면, 이미 번뇌를 끊는 것은 그가 곧 소지장(所知障)으로써 변역신을 받을 수 있어서 모든 위(位)에 통하는 것이다.” 【釋】 제5의 ‘수행소의신(修行所依身)’은 앞에서 시분(時分)을 밝혔지만,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때에 의거하여 수행신(修行身)이 있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다음에 왔다. 처음의 소승(小乘) 중의 소승열반(小乘涅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여(有餘)이니 남은 몸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무여(無餘)이니 남은 몸의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여를 기준으로 해서 ‘구경위(究竟位)’로 삼았으며, ‘불(佛)도 또한 똑같이 그렇다’고 한 것은 소화(所化)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문】 분단(分段)과 변역(變易)103)의 뜻은 어떻게 말하는가? 【답】 6도(道)와 삼계의 과보(果報)가 구분되어 다르기 때문에 분단(分段)이라고 말한다. 지(地) 이상의 무루오온(無漏五蘊)은 점차로 증승(增勝)하고, 열(劣)을 바꾸어 승(勝)을 이루고, 승으로써 열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변역(變易)이라고 말한다. 둘째로 시교 중에 첫째는 회심(廻心)이고, 둘째는 직진(直進)이다. 그 중에서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가(假)와 실(實)의 두 문(門)을 열어서 종(宗)을 세운 것이며, 나머지는 문답이다. 앞의 것 중에 초문(初門)은 곧 십문가기(十門假寄) 중에 제4문(門)이다. ‘7지이환(地以還)에는 분단(分段)이 있고, 8지 이상에는 변역(變易)이 있다’고 했는데, 『심밀경(深密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남자여,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반수면(害伴隨眠)이니, 이를테면 앞의 5지에서이다. 왜냐하면 선남자여, 함께 생기지 않은 여러 현행번뇌(現行煩惱)가 바로 함께 생기는 번뇌이니, 현행(現行)하면서 짝을 돕는 것은 이때에는 영원히 다시 있지 않기 때문에 해반수면(害伴隨眠)이라고 이름한다. 둘째는 영렬수면(嬴劣隨眠)이다. 이를테면 제6, 제7지(地) 중에서 미세현행(微細現行)이니, 조복한 바를 닦으면 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미세수면(微細隨眠)으로서 8지 이상이다. 이때부터는 일체 번뇌가 다시는 현행하지 않으니, 오직 소지장(所知障)만으로 의지(依止)를 삼기 때문이다.” 또 『인왕경(仁王經)』 중에 ‘8지 이상에 변역(變易)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문장에 의거하여 가기(假寄)를 세우게 된다. 【문】 엄사[智儼]의 「입법계품초(入法界品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교(敎) 안에 22무명(無明)ㆍ11추중(麤重)의 보(報)가 있는데,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 보(報)가 분단(分段)이라면 곧 회심(廻心)과 직진(直進)의 초의(初義)이고, 만약 보(報)가 변역(變易)이라면 곧 회심과 직진의 종의(終義)이다. 왜냐하면 22무명(無明)은 견수(見修)로 끊음과 동일하지 않고 또 초회심복(初廻心伏)과도 동일하지 않고, 또 종교복멸(終敎伏滅)과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의(初義)’는 무엇이고, ‘종의(終義)’는 무엇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초(抄)의 문장은 이 중에 가기문(假寄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소위 ‘만약 보(報)가 분단(分段)이라면 곧 회심과 직진의 초의이다’라고 한 것은 ‘7지이환(地以還)에 분단이 있는 것에 해당하며, ‘만약 보가 변역이면 곧 회심과 직진의 종의이다’라고 한 것은 ‘8지 이상에 변역이 있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석에서 초의(初義)는 곧 초교(初敎)이고 종의(終義)는 곧 종교(終敎)이니, 이 때문에 초의 문장의 의미는 『심밀경(深密經)』ㆍ 『금광명경(金光明經)』ㆍ양의 『섭론(攝論)』ㆍ 『유가론(瑜伽論)』ㆍ 『유식(唯識)』 등에서 각기 22무명(無明)과 11추중(麤重)을 설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교(敎)에 동일하게 22무명을 설했다고 하더라도, 만약 보(報)가 분단이면 곧 초교이고, 만약 보가 변역이면 곧 종교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22무명과 11추중은 시종 두 교에 통하는데, 어떤 이유로 『공목(孔目)』에서는 22무명과 11추중을 열거하면서 “이 두 문(門)의 번뇌는 초교의 직진(直進)에 국한한다”고 말하였는가? 【답】 22무명은 곧 『심밀경(深密經)』의 설이고, 그 경(經)은 초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목장(孔目章)』 속에서는 그 본교(本敎)를 정하기 때문에 ‘초교’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양의 『섭론(攝論)』 등에서는 그 경 속의 22무명을 변역의 보에 의탁해서 나타냈으므로 응당 종교(終敎)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원공(遠公)104)의 『십지론(十地論)』에서 10장(障)을 해석하여 이르기를, “논주(論主)는 어떤 문장에 의거하여 10장을 세웠는가? 논주는 『상속해탈경(相續解脫經)』의 22우치(愚癡)105)의 문장을 가지고서 10장을 세웠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자면 『상속해탈경』은 『심밀경』의 동본이역(同本異譯)이기 때문에 그렇게 됨을 알 수 있다. 【문】 『초문(抄文)』에서 ‘22무명은 견수(見修)로 끊는 것과 같지 않고, 또 초회심복(初廻心伏)과도 동일하지 않고, 또 종교복멸(終敎伏滅)과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22무명을 끊은 뜻은 소승(小乘)의 견(見)과 수(修)를 나누어서 미혹을 끊음과 같지 않기 때문에 ‘견수(見修)로 끊음과 같지 않다’고 말하고, 또 초교(初敎)의 행실(行實)과 같지 않기 때문에 ‘초회심복(初廻心伏)과 같지 않다’고 말하고, 또 종교(終敎)의 행실과 같지 않기 때문에 ‘종교복멸(終敎伏滅)과도 같지 않다’고 말한다.” 소위 초교의 행실 중에서 2장(障)의 분별은 지(地) 이전을 일으켜 현행(現行)을 조복시키고, 초지(初地)에 종자를 끊는 구생번뇌(俱生煩惱)는 10지 중에서 점차 현행을 조복시키고, 금강위(金剛位)에 이르러서 종자를 끊는다. 그러나 22무명(無明)은 그렇지 않으니, 하나 하나의 무명은 현행과 종자를 갖추기 때문에 시교(始敎)의 행실(行實)과는 같지 않다. 종교의 행실 중에서는 정사(正使)와 습기(習氣)를 나누어서 초지에 사종(使種)을 끊고 2지 이후부터는 습기를 정화한다. 그러나 22무명은 그렇지 않으니, 정사와 습기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종교(終敎)의 행실과는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해석에서 ‘견수로 끊음과 같지 않고, 초회심복과 같지 않다’는 것은 앞의 뜻과 같으며, ‘종교복멸(終敎伏滅)과 같지 않다’는 것은 종교(終敎)의 지(地) 이전의 복멸(伏滅)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22무명은 오직 종교의 지(地) 이상에서 끊기 때문에 지(地) 이전의 복멸(伏滅)과는 같지 않다. 【문】 어떤 이유에서 종교(終敎)의 지(地) 이상에서 끊음과 같은가? 【답】 법상사(法常師)의 『섭대승장(攝大乘章)』에서 이렇게 말했다. “셋째로 단위분제(斷位分齊)를 밝히는 것이다. 이 22무명 안에서 앞의 두 가지 무명은 정사(正使) 및 잔기(殘氣)에 통하고 견수(見修)를 끊음에도 통한다. 그 가운데에서 정사는 견도(見道)를 끊음이고, 잔기는 수도(修道)를 끊음이고, 뒤의 20무명은 모두 수도(修道)를 끊음이다. 정사(正使)에 나아간 중에서 상심(上心)은 지(地) 이전의 가행지(加行智)이고, 종자(種子)를 끊음은 견도(見道)의 끊음이다. 곧 초지(初地)에서 진여관(眞如觀)으로 들어가 아직 나오지 않은 이후를 견도(見道)106)라고 이름하며, 관(觀)을 나온 이후는 곧 수도(修道)107) 에 속한다. 잔기 중 상심(上心)은 수도위(修道位)의 가행지(加行智)에서, 종자를 끊는 것은 수도위의 정체지(正體智)에서 없어진다.” 엄사[智儼] 및 장주(章主)가 종교(終敎)에서 장애를 끊은 뜻은 법상사(法常師)와 같다. 22무명도 또한 정사와 잔기로 나누어져 끊기 때문에 똑같이 종교의 지 이상에서 끊는 것임을 알게 된다. 【문】 만약 ‘초회심복과 같지 않다’는 것이 초교의 행실과 같지 않다면, ‘만약 보(報)가 분단(分段)이라면 회심과 직진의 초의(初義)이다’는 초교의 행실이 아닌가? 【답】 초교에 나아간 것 중에 22무명은 모두 현행과 종자를 갖추고 지(地)를 따라서 따로 끊는다. 비록 구생(俱生)과 분별의 행실을 끊은 것과는 같지 않더라도 분단으로서 금강위(金剛位)에 이르는 것은 곧 이 교(敎)의 실제 뜻이기 때문에 모두 행실이다. 『십주경(十住經)』은 제9권 「도지품(道智品)」인데, 그 문장에 이르기를, “또한 저 중음(中陰)108)의 형질(形質)이 일주지(一住地)로부터 10지 등에 이른 것을 다시 보았다”고 하였다. 지금은 그 문장을 인용했는데, ‘중음’은 분단의 보(報)이자 태어남을 구하는 방편이니, 중음이 있기 때문에 분단의 보를 받게 된다. 【문】 『공목(孔目)』의 「생조림장(生稠林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 반역생사(反易生死)109)는 무루(無漏)인데, 어떤 이유로 생조림(生稠林)에 들어가서 융섭하는가? 【답】 반역생사는 본교(本敎)의 흥의(興意)로서 불법(佛法)이 점점 심원(深遠)해짐을 나타내고, 장차 반역생사가 분단(分段)의 뒤에 있어서 그 종교(終敎)가 점차로 심원(深遠)해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실제에 근거하여 그것을 논한다면, 반역생사는 단지 분단의 미세한 모습이므로 그런 이유를 알 수 있다. 중음(中陰)을 본(本)으로 세운 것은 분단신(分段身)110)으로서 생(生)을 구하는 방편이기 때문에 중음(中陰)을 세운 것이다. 가령 『십주경(十住經)』에서는 ‘중음신(中陰身)이 열반에 이르고 보리(菩提) 또한 중음이 있으니, 단지 미세하고 점차 심원해짐은 오직 부처의 경계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문증(文證)에 의거하여 반역생사는 단지 분단의 미세한 모습으로서 변역이 됨을 알아야 한다.” 지금 문장의 의미와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답】 그 중에서는 분단의 미세함을 반역이라고 하기 때문에 중음(中陰)은 변역(變易)에 통한다. 지금 이 문장의 뜻은 중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분단이 있음을 증명하니, 이 때문에 구별된다. 둘째로 문답 중에는 두 겹이 있다. 앞의 문답 중에서 물음의 뜻은 유식(唯識)의 뜻을 지닌 물음이니, 말하자면 논(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11장(障)은 두 가지 장애를 융섭한 바이니, 번뇌장(煩惱章) 속의 견소단종(見所斷種)은 극희지(極喜地)에서 견도(見道)로 처음으로 그 장애를 끊되 지(地) 이전에 현기(現起)한 것은 이미 조복된 것이다. 수소단종(修所斷種)은 금강유정(金剛喩定)이 현재 앞에 있을 때 일체(一切)의 돈(頓)으로 그 장애를 끊되 현기한 것은 지(地) 이전에 점차 조복되고, 초지 이상에서는 능히 돈(頓)으로 모두 조복함으로서 아라한처럼 영원히 행하지 않게 한 것이다. 고의력(故意力)을 말미암아서 앞의 7지 중에서는 비록 잠시 현기하더라도 잃게 되지는 않으며, 8지 이상에서는 필경 행하지 않는다. 소지장(所知障) 중에서는 견소단종(見所斷種)을 극희지(極喜地)에서 견도(見道)로 처음으로 그 장애를 끊되 현기한 것은 지(地) 이전에서 이미 조복되었고, 수소단종은 10지 중에서 점차로 끊어 없애고 금강유정이 현재 앞에 있을 때 바야흐로 그 장애를 영원히 모두 끊되 현기한 것을 지(地) 이전에서 점차 조복시키고, 나아가 십지로써 바야흐로 영원히 모두 조복시킨다. 8지 이상에 6식(識)을 갖춘 것은 다시 현행(現行)하지 않으니, 무루의 관심(觀心) 및 과(果)가 상속(相續)하여 능히 그것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제7을 갖춘 것은 오히려 현행(現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법공(法空)의 지과(智果)111)가 일어난 위(位)는 바야흐로 조복된다.” 그 번뇌장(煩惱障)은 8지 이상에서는 모두 현행하지 않으며, 그 소지장(所知障)이 제7을 갖춘 것은 오히려 현행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그 논의 뜻을 갖고 질문을 일으켜서 ‘8지 이상에는 번뇌가 영원히 조복받아 행해지지 않는다’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루(無漏)의 지과(智果)는 항상 상속(相續)함으로’라고 한 것에서 무루지(無漏智)는 인공(人空)112)의 무루지이고 과(果)는 인공(人空)의 후득(後得) 및 멸진정(滅盡定)113)의 과이다. 이를테면 의식(意識) 중에서 인공정체지(人空正體智)를 일으킬 때 2식(識)의 3집(執)은 영구히 종식되고, 법공정체지(法空正體智)를 일으킬 때 2식의 4집(執)은 영구히 종식된다. 말하자면 인공무루지(人空無漏智)를 일으킬 때 인집(人執)은 바로 다스려지기 때문에 영구히 종식되고, 법집(法執)은 바로 다스려지지 않더라도 1식(識) 중에서 혹(惑)과 혜(慧)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종식된다. 말나(末那)의 인집(人執)은 식(識)과는 같지 않으나 바로 대치(對治)되기 때문에 능히 영구히 종식된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을 일으키는 가운데 인공정체(人空正體)의 때는 2식의 3집이 종식되어서 행하지 않으며, 의식을 일으키는 중에 법공정체(法空正體)의 때는 의식의 법집(法執)이 바로 다스려지기 때문에 영구히 종식된다. 인집(人執)은 바로 다스려지지 않아도 1식 중에서 혜(慧)와 혹(惑)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일어나지 않으며, 말나(末那)의 법집(法執)은 식(識)과 동일하지 않더라도 바로 다스려지기 때문에 종식되어 일어나지 않으며, 말나의 인집(人執)은 식(識)이 비록 동일하지 않고, 또한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법공지승(法空智勝)이기 때문에 종식되어 행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의식(意識)을 일으키는 중에 법공지(法空智)의 때에는 2식 중의 4집을 영구히 종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앞의 7지(地) 중에는 인공(人空)의 무루지(無漏智)로 간단(間斷)이 있기 때문에 번뇌장(煩惱障)이 때때로 나타나 일어나며, 8지 이상에서는 인공의 무루지가 상속(相續)하여 간단이 없고 후득(後得)과 멸정(滅定)의 과(果)도 또한 상속이기 때문에 2식의 3집은 다시 현행하지 않는다. 만약 법공의 지(智)와 과(果)를 기준으로 하면 간단이 있기 때문에 오직 말나의 법집(法執)만이 있다. 이것을 인연으로 삼는다면 응당 반역(反易)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이유로 다시 분단신(分段身)을 받는가? 질문의 뜻은 이와 같다. 대답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답(正答)이고, 둘째로 ‘약언8지(若言八地)’의 아래에서는 반징(反徵)하고, 셋째로 ‘약약회(若約廻)’의 아래에서는 집착을 버려서 조복한다. 정답 중에서 먼저는 자의(自意)로써 답하고, 다음 『잡집(雜集)』의 아래에서는 인증(引證)한다. ‘수면(隨眠)’은 종자이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인용하여 종자를 머무르게 함으로서 생(生)을 받는 뜻을 증명한다. 양의 『섭론(攝論)』이란 이 문장이 지(地) 이전에 종자를 머물게 한 뜻과 합하기 때문에 종교(終敎)의 뜻이 되는데, 지금은 성인(聖人)이 분단신(分段身)을 얻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인용하였다. 둘째로 반징(反徵) 중에서 ‘저기서 이미 그렇지 않은데 어째서 여기서 그렇다고 말하는가?’라는 것은 8지의 초(初)에서 영구히 일체번뇌(一切煩惱)의 종자를 해(害)하는 뜻이 이미 그렇지 않다면, 8지 이상을 반역신(反易身)으로 받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셋째로 ‘집착을 버려서 조복한다’ 중에서는 “만약 분단신(分段身)으로서 금강(金剛)에 이른다면, 초교(初敎) 중에는 반역(反易)의 뜻은 결코 없는가?”라고 의심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 ‘만약 회향보리(廻向菩提)의 성문을 기준으로 한다’고 말한 것은 또한 반역신(反易身)을 받은 것이고, ‘소지장(所知障)으로서 반역신을 받고, 여러 위(位)에 통한다’고 한 것은 증수(增壽)의 반역을 기준으로 한다. 이를테면 부정종성(不定種性)114)의 성문(聲聞)이 마음을 돌이키고자 한 것은 비록 실제로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방(房)에서 멸도(滅度)의 상(相)을 보이지만 수명(壽命)을 손상치는 않으니, 다른 세계에 가서 반역신을 받고 보살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초교(初敎) 중에 이미 무여(無餘)에 들어가서 신지(身智)가 함께 없어지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켜서 반역신을 얻지 못하고, 유여인(有餘人)은 바야흐로 마음을 돌이키기 때문에 그렇다.
【記】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성교(聖敎)에서는 8지 이상은 오직 소지장(所知障)으로만 의지(依止)가 되어서 변역신을 받는다고 설하는가? 【답】 이것은 2승에 의탁하여 상대함으로서 그 우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 이 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의탁은 여러 성교에 의지한다면, 지위를 잡는 것이 같지 않으니 대체로 10문(門)으로 변별한다. 첫째로 나한(羅漢)은 곧 불과 같아서 다시 지위를 나눌 수 없다. 가령 율(律) 속에서 “부처가 5인(人)을 제도하고 나서 부처와 통틀어 여섯 나한(然羅漢)이 이 세간(世間)에 나왔다”고 설한 것과 같으며, 또한 자리를 함께 한 것 등이다. 이것은 소승교(小乘敎)를 잡아서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둘째도 역시 불지(佛地)에서 나한이 갈라져 나왔다는 것이니, 『대법론(對法論)』에서 “보리를 얻을 때 문득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고 단박에 나한과 여래를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속에서 비록 번뇌가 끝까지 다함을 잡아서 아라한이라 이름을 짓더라도 또한 여러 성문(聲聞)의 마음에 수승한 욕락(欲樂)을 내게 하기 때문에 불과(佛果)에 의탁해서 대소(大小)를 나누는 것이다. 셋째로 제10지는 아라한이라고 부르는데, 불지(佛地)는 그것을 초과(超過)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다. 가령 『열반경』 속에서 사의(四依)를 설하면서 “아라한은 제10지에 머문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은 인(因)에 의탁해서 과(果)를 달리하기 때문에 대소를 나눈 것이다. 이 위의 2문(門)은 시교 중에서 2승을 돌이키는 가르침을 잡아서 설한다. 넷째로 7지(地)까지는 똑같이 나한에 의탁하고 8지 이후는 보살 지위에 의탁하는데, 가령 『인왕경』에서 “원행지(遠行地) 보살은 삼계에서 익힌 인과의 업을 조복받고 오직 후신위(後身位)에서만 멸할 뿐 제7지 아라한위(阿羅漢位)에 머문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은 인(因) 속에 자재(自在)한 것과 아직 자재하지 못한 지위에 의탁해서 대소를 나눈다. 이는 시교의 직진(直進)을 잡아서 설한 것인데, 이 속에서 이미 성문에 의탁해 7지에 이르기 때문에 번뇌장 및 분단신은 함께 이 위에 이르고, 8지 이후는 보살에 의탁한다. 수행의 지위가 이전보다 수승하니, 이 때문에 오직 저 소지장과 변역신이 있을 뿐이다. 【釋】 제2의 문답 가운데 문의(問意)란 것은 『심밀경』 제4에서 “셋째로 미세수면(微細隨眠)인데, 말하자면 8지 이상이다. 이 이후로는 일체 번뇌가 다시는 현행하지 않고, 오직 소지장만을 의지하게 된다”라고 하고, 『인왕경』115) 중에서 “8지 이상은 반역신(反易身)을 받는다”라고 했으니, 이와 같은 여러 성교(聖敎)의 문장을 잡는다면 8지 이상은 응당히 반역을 받을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문의(問意)는 이와 같은데, 이것과 앞의 물음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앞의 문의(問意)는 8지 이후는 일체 번뇌가 다시는 현행하지 않는데, 어떤 이유로 분단신(分段身)116)을 받는가라는 것이며, 여기의 문의(問意)는 ‘≺성교(聖敎)에서 나타내고 있는 8지 이상은 소지장으로 의지를 삼아서 반역신을 받는다는 문장≻을 어떻게 회통하는가‘이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대답 중에서 첫째는 대략적으로 답한 것이며, 둘째, ‘연차(然此)’ 이하는 자세히 답한 것이고, 셋째, ‘유유여시(由有如是)’ 이하는 결말을 지은 것이다. 자세한 답 중에서는 먼저는 수(數)를 거론하였으니, 10문(門) 중에서 제4문(門)으로 앞의 물음에 올바르게 답한 것이며, 뒤의 ‘일설(一說)’의 아래에서는 개별적으로 해석하였다.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 중에서 10문 차제(十門次第)는 만약 교문(敎門)을 잡으면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이르면서 열거한 것이고, 만약 위(位)를 잡으면 다분히 위에서 아래로 이르면서 열거한 것이다. 초문(初門) 중에서 ‘5인(人)을 제도한다’는 것은 첫째로 구린(拘隣), 둘째로 알비(頞鞞), 또는 마성발제(馬星拔提)라고 말하며, 셋째로 마하남(摩訶男), 넷째로 십력가섭(十力迦葉), 다섯째로 구리대자(拘利大子) 등이다. 둘째는 모친(母親)이고, 셋째는 부친(父親)이다. ‘부처를 통틀어서 여섯 나한(羅漢)이 있다’는 것은 소승 중에서는 불(佛)도 또한 인공문(人空門)에 의지하여 성불하기 때문이다. 제2문(門) 중에서 ‘또한 불지(佛地)에서 나한을 나누어 낸다’는 것은 불(佛)은 두 장애를 통틀어 끊어서 성불하여도 번뇌장을 끊는 세력을 잡아서 나한(羅漢)을 나누어 내기 때문이다. 『대법론(對法論)』이란 제14이다. ‘또한 여러 성문(聲聞)의 마음에 수승한 욕락(勝欲樂)을 낳는다’는 등은 불지(佛地)에서 나한을 나누어 내는 것이 저 나한과 동일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서 여러 성문으로 하여금 수승한 욕락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제3문 중에서 ‘가령 『열반경』에서 설한 4의(依)’라는 것은 제5권 「여래성품(如來性品)」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것과 같다. “네 종류의 사람이 능히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정행(正行)을 건립한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번뇌(煩惱)의 성품을 갖추는데, 이것을 제1이라고 부른다. 수다원인(須陀洹人)과 사다함인(斯陀含人)을 제2라고 부르고, 아나함인(阿那含人)을 제3이라고 부르고, 아라한인(阿羅漢人)을 제4라고 부른다. 이 네 종류의 사람은 세상에 출현하여 능히 세간을 이익되게 하고 세상을 연민(憐愍)함으로서 세간의 의지처가 되어 인천(人天)을 안락하게 한다.” 『혜원소(慧遠疏)』에서 풀어서 말하였다. “초의(初依)는 3현위(賢位)에 있으니, 『인왕경(仁王經)』 중에서는 ‘습종성(習種性) 이상은 바야흐로 법사(法師)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경(經) 중에서는 ‘이를 범부(凡夫)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이 사람은 아직 견수(見修)로 끊을 일체 번뇌를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번뇌(煩惱)의 성품을 갖추었다고 이름한 것이다.” 제2의(依)는 10지 중 앞의 7지에 있다. 【문】 이 중에서 두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여 배열하는가? 【답】 처음에 환희지(歡喜地)를 극하는 것을 수다원(須陀洹)이라고 하니, 최초로 역류도(逆流道)를 예비하기 때문이다. 2지 이상을 사다함(斯陀含)이라고 부르는데, 삼계의 보(報)를 받아서 자주 왕래하기 때문이다. 제3의(依)란 것은 8ㆍ9지에 있으니, 가령 경전 속에서 “만약 받은 몸[所受身]에 팔만호충(八萬戶虫)이 있다면 옳지 않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아나함은 무엇을 말한다고 하는가? 이 사람은 불환(不還)이니, 위에서 설했듯이 과환(過患)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생각하여 말하기를, “8지 이상은 반역신을 받으니, 다시 돌아와서 계내(界內)의 육신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8지 이상은 긴 시간 동안 관(觀)에 들었으니, 다시 돌아와서 일체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뜻을 말미암아서 아나함이라고 부른다. 제4의(依)란 것은 제10지에 있으니, 경에 이르기를, “제4인(人)은 모든 번뇌를 끊고 무거운 짐을 버리며, 나아가 제10지에 머문다”고 하였다. 생각하여 말하기를, “영구히 번뇌를 끊어서 인공(人空)으로 변제(邊際)를 이해한 것이 아라한과 같으니, 이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상의 2문(門)은 시교 중에서 2승(乘)의 가르침을 돌이키는 것을 잡아서 설하였다’는 것은 회심(廻心)의 뜻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삼계9지(三界九地) 등을 잡아서 회심으로 삼은 뜻이 있기도 하고, 혹은 보살위(菩薩位) 및 불지(佛地)에서 나한을 나누어 내는 것을 회심으로 삼는 뜻도 있기도 해서 이렇게 같지 않은 것이다. 제4문(門) 중에서 ‘가령 『인왕경(仁王經)』에서’는 다음과 같다; 【문】 저 문장에서 “현달(玄達) 보살은 10아승기겁 동안 무생법락인(無生法樂忍)을 닦고, 나아가 제10지의 아라한범천위(阿羅漢梵天位)에 머문다”고 하였다. 본경(本經)에서는 ‘현달(玄達)’이라고 말하였는데 지금은 ‘원달(遠達)’이라고 말하고, 본경에서는 ‘제10지’라고 말하였는데 지금은 ‘제7지’라고 말하니, 어째서 말한 것이 같지 않은가? 【답】 현(玄)은 원(遠)의 뜻이 있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 【문】 대현[太賢]의 『인왕경고적(仁王經古迹)』에 이르기를, “13주(住)는 10지를 열로 보고, 지(地) 이전에서 종성(種性)과 해행(解行)을 열어서 둘이라고 하고, 불과(佛果)를 하나로 삼기 때문에 13주(住)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제7지는 13주에서는 제9주이거늘, 어떤 이유로 제10이라고 하는가? 【답】 해행지(解行地) 중에서 자량(資粮)과 가행(加行)을 열어서 둘로 삼았기 때문에 제7로을 제10이라고 한 것이다.
【記】 다섯째로 초지, 2지, 3지가 똑같이 세간(世間)에 의탁하는데, 세간의 4선(四禪) 등을 얻기 때문이다. 4지는 수다원 등에 의탁하는데, 도품(道品)을 얻기 때문이며, 처음으로 세간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5지는 성문의 나한(聲聞羅漢)에 의탁하는데, 4제법(四諦法)을 얻기 때문이다. 6지는 벽지불에 의탁하는데, 12연생법(緣生法)을 얻기 때문이다. 7지 이상은 보살에 의탁하는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기 때문이다. 이는 『본업경』에 설한 바와 같다. 이상은 오직 3승의 교설을 잡았을 뿐이니, 아직 1승법을 나누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섯 째로 세간(世間)과 2승(乘)은 앞서와 똑같이 6지에 이르며, 제7지는 3승 보살에 의탁하는데 자재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8지 이후는 일승법에 의탁하는데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다. 가령 『양섭론』에 설한 바처럼, 1승ㆍ3승 등의 분상(分相)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일곱 째는 초지(初地) 속에서 이미 세간과 2승을 초과했기 때문인데, 『지론(智論)』 등에 설한 바처럼 3승 중의 비증분제설(比證分齊說)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여덟 째, 지(地) 이전의 3현위(賢位)에서 이미 2승의 지위를 초과하였으니, 『기신론』에서 설한 것이나 또한 『인왕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습종성(習種性) 중에 열 가지 마음이 있으며, 이미 2승의 일체 선지(善地)를 초과한 것이니, 이것은 종교의 불퇴(不退)를 잡아서 설한 것이다. 아홉 째, 신만심(信滿心) 뒤에 일체 소승ㆍ3승 등을 초과한다. 「현수품(賢首品)」에 설한 바와 같은데, 이는 1승을 잡아서 설한 것이다. 열 번째, 처음 범부지(凡夫地)에서 발심(發心)을 일으킬 때 2승을 초과하는데, 가령 『지론』에서 “나한(羅漢)의 비구가 사미(沙彌)의 발심(發心)을 알아서 미루어 앞에 둔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은 1승과 3승을 통틀어서 설한 것이다. 이처럼 기대(寄對)의 법문(法門)이 있기 때문에 여러 설의 전후를 이에 준거하여 아는 것이다. 【釋】 제5문(門) 중에서 ‘이상은 오직 삼승교를 기준으로 할 뿐이다’고 한 것은 제6문의 1승과 3승도 상(相)을 나누어서 설한 것을 대비(對比)했기 때문이다. 제6문은 앞의 7지 중에 기대(寄對)한 것이 앞서의 문(門)과 더불어 같지만, 그러나 ‘일승(一乘)을 나누어 낸다’는 뜻은 앞과 다르기 때문에 따로 세우게 되었다. ‘가령 양의 『섭론(攝論)』에서’ 등은 제15권에서 “출출세(出出世)의 선법공능(善法功能)의 소생(所生)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를 풀어서 말하면 “2승의 선(善)을 출세(出世)라고 말하고, 8지 이상에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를 출출세법(出出世法)이라고 부른다”고 한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장주의 뜻은 ‘2승의 선을 출세라고 부른다’는 것은 대ㆍ소 2승(二乘)을 잡았기 때문에 4ㆍ5ㆍ6지(地)와 2승(乘)을 합하여 소승이라고 말한 것이고, 또 7지 보살을 대승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2승의 선’이라고 말하고, 8지 이상을 1승이라고 한 것이다. ‘등(等)’ 자(字)는 『장엄론(莊嚴論)』을 동등하게 취한 것이다. 【문】 ‘1승과 3승도 상(相)을 나누어서 설하였다’고 한 것은 어떤 1승을 말하는가? 【답】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를테면 여래장일승(如來藏一乘)과 화엄일승(華嚴一乘)이다. 【문】 『인왕경』ㆍ 『본업경』 중에서 8지 이상을 1승으로 배열한 문장은 없는데, 어찌하여 상권의 기위차별(寄位差別)에서 “ 『본업경』ㆍ 『인왕경』 및 『지론』ㆍ『양섭론』 등에서와 같이 8지 이상을 출출세간에 의탁한다”고 말하는가? 【답】 『인왕경』과 『본업경』에서는 8지 이상을 1승으로 배열한 문장이 없다고 하더라도 모두 똑같이 앞의 7지 속에서 3승을 기탁하기 때문에 장주가 같은 형세를 취하여 『지론』과 『섭론』을 합하여 한 가지 뜻으로 삼은 것이다. 【문】 『인왕경』에서는 제7지가 나한(羅漢)에 의탁한다고 하였더라도, 다시 4ㆍ5ㆍ6지는 2승이고 제7지가 보살이라는 문장은 없다. 어떤 이유로 합하여 한 가지 뜻이라고 하는가? 【답】 『인왕경』에도 또한 4ㆍ5ㆍ6지는 2승이고 제7지는 보살이라는 뜻이 있다. 이를테면 하단혹(下斷惑)에서 “십(十)에는 또한 10지에서 지(地)의 모습을 구별하여 세간(世間)ㆍ2승ㆍ보살의 3위(位)의 차별로 기탁해 나타낸 것이니, 이 때문에 『인왕경』에서 ‘앞의 3지에서는 삼계 중의 색번뇌(色煩惱)를 끊고, 4ㆍ5ㆍ6지에서는 삼계 중의 심번뇌(心煩惱)를 끊고, 7ㆍ8ㆍ9지에서는 삼계 중의 색습번뇌(色習煩惱)를 끊는다’고 설하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런 줄을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8 기문(寄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4장(障)117)에 기탁해서 4위(位)를 나타내는데, 이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정사(正使)를 잡아서 지(地) 이전의 4위(位)ㆍ4행(行)ㆍ4인(因)ㆍ4보(報)를 기탁해 나타내고, 나아가 위의 뜻은 자세히는 『무상의경(無上依經)』ㆍ 『본업경(本業經)』ㆍ 『불성론(佛性論)』ㆍ 『보성론(寶性論)』ㆍ양의 『섭론(攝論)』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를 해석하면, “ 『본업경』은 오직 사륜왕보(四輪王報)를 설할 뿐이어서 4장(障)ㆍ4덕(德)118)ㆍ4행(行)을 배열함은 없다. 그러나 하나의 세력과 같기 때문에 합하여 1문(一門)이라고 한다. 기위차별(寄位差別)의 뜻도 또한 마찬가지다. 제7문 중에서 ‘ 『지론(地論)』 등과 같다’고 한 것은 제2권이다. 【문】 앞의 교문(敎門)을 잡아서 말하면 얕음에서 깊음으로 이르는데, 이 문(門)과 앞의 제6문은 어떠한 깊이와 수승함이 있는가? 【답】 다분히 말을 쫓을 뿐이다. 제8문 중에서 ‘가령 위의 『기신론』’이라고 한 것은 「행위장(行位章)」의 종교(終敎) 중에서 인용한 바이기 때문에 ‘위에’라고 말한 것이다. 【문】 제10문 중에서 ‘이것은 1승 및 3승을 통틀어서 설했다’고 한 것은 어떤 1승을 말하는가? 【답】 화엄일승(華嚴一乘)이다. 발심(發心) 중에서 일승불과(一乘佛果)를 소망하여 발심하고, 삼승불과(三乘佛果)를 소망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그렇다. 【문】 만약 그렇다면 『지론(智論)』에 있는 사미(沙彌)의 발심(發心)은 1승에 통하는가? 【답】 그것은 삼승발심(三乘發心)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승불과(一乘佛果)를 소망해서 발심할 때는 곧 2승을 지나치는 것이 말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1승’이라고 말한다. 【문】 ‘초발심(初發心)이 곧 2승을 지나친다’는 것과 전문(前文) 중에서 신만(信滿)으로 소승삼승(小乘三乘)을 지나친다고 한 것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답】 구별된다. 신만(信滿)이 지나친다는 것은 일체의 행한 바가 모두 초과한 것이며, ‘처음 발심(發心)할 때 2승을 지나친다’는 것은 일체의 행한 바가 아직 초과하지 않았더라도 소망(所望)은 수승하기 때문에 ‘지나친다’고 말한다. ‘ 『지론(智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는 것은 『지론』 권78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6신통 아라한이 한 사미에게 의발(衣鉢)을 지니게 하고 길을 따르면서 했던 일과 같다. 사미는 ‘나는 마땅히 어떠한 승(乘)으로써 열반에 들어야 할까?’라고 사유한 뒤에 곧 발심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은 세상에서 존귀하시며[世尊] 가장 미묘하신 분이니, 나는 마땅히 불승(佛乘)으로써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하였다. 스승이 그 생각을 알고 즉각 의발을 취하여 스스로 짊어진 뒤에 사미를 밀어서 앞에 있게 하였다. 사미가 다시 ‘불도(佛道)는 너무 어렵고, 오래도록 생사에 머물면서 무량한 고통을 받으니, 소승으로써 빨리 열반에 들어야겠다’라고 사유하자, 스승은 다시 의발을 사미에게 주어 짊어지게 하고는 뒤에서 따라오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사미는 스승에게 말하기를, ‘스님은 나이가 연로하였는데도 하시는 일이 마치 아이가 노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앞에 있게 하고, 이후에는 저를 뒤에 있게 하시니, 어째서 그렇게 급합니까?’라고 하였다. 스승은 답하기를, ‘너는 초발심(初發心)으로서 불(佛)이 되려고 생각하는데, 그 마음은 귀중한 것이어서 곧 내 스승의 도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모든 벽지불조차 오히려 공양해야 하거늘 하물며 아라한이겠는가? 이 때문에 너를 밀어 나의 앞에서 가게 한 것이다. 그런데 네 마음은 오히려 후회하면서 작은 과보를 취하고자 했으니, 그렇다면 아직 너를 얻지 못한 것이므로 나와는 아주 멀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사미는 크게 깨우쳐서 대승에 머물렀다.” ‘유유여시(由有如是)’ 등은 앞의 뜻을 맺은 것이다.
【記】 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 권제3 만약 종교에 의지하면, 지(地) 이전에는 미혹을 남겨둔 채 분단신(分段身)을 받아서 초지(初地) 중에 여러 번뇌의 종자를 영원히 끊으며, 또한 분별(分別)과 구생(俱生)을 나누지 않고, 소지장(所知障) 속에서 또한 일분(一分)의 추품(麤品)의 정사(正使)도 끊어버린다. 이 때문에 지(地) 위에서 변역신을 받아 금강위(金剛位)에 이르니, 나머지 뜻은 아래 단혹(斷惑) 중에서 설한 바와 같다. 【문】 만약 지(地) 위에다 번뇌를 남겨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대비(大悲)의 동사(同事)로 중생을 섭화(攝化)하겠는가? 【답】 지(地) 이전과 시교 중에는 원력(願力)과 지력(智力)이 뒤지기 때문에 번뇌를 남겨두어서 원력을 도와 생을 받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원력과 지혜가 수승하기 때문에 자재롭게 함께 태어나는 것이다. 【문】 설한 것처럼 8지까지의 보살은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비가 늘어나는[悲增上] 것이고 둘째는 지혜가 늘어나는[智增上] 것이니, 자비심이 늘어나는 것은 미혹을 남겨서 분단신을 받기 때문이고, 지혜가 늘어난 것은 미혹을 조복하여 변역신을 받기 때문이다. 이 뜻은 어떤 것인가? 【답】 그렇게 설한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비가 늘어났다면 그 지혜는 반드시 열등할 것이고, 열등한 지혜로 자비를 인도한다면 그 자비는 응당 견(見)을 막을 것이니, 견(見)을 막는 자비를 어찌 늘어난다고 이름하겠는가? 설사 자비와 지혜가 균등하다 해도 오히려 자비가 늘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하물며 열등한 지혜로 자비를 이끌어 나간다면, 어찌 늘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지혜가 늘어났다면 그 자비는 반드시 열등한 것이고, 열등한 자비로 지혜를 인도한다면 지혜는 응당 적멸에 막히게 되는데, 적멸에 막히는 지혜를 어찌 늘어난다고 하겠는가? 모든 보살이 처음부터 죽 범부나 소승과는 다르기 때문에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하여 생각 생각마다 쌍(雙)으로 닦아나가니,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증가하거나 감소한다고 설하겠는가? 마땅히 알라. 이것은 시교와 종교의 두 가르침이 거칠고 미세함이 서로 다름을 말미암기 때문에 두 가지 생사가 있는 것이지, 자비와 지혜가 서로 늘어남을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 지혜가 늘어났다고 말한다면, 이는 소승의 습(習)이 있어서 온갖 번뇌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영구히 조복받는 것은 만약 지(地) 이전이라면 아직 진여(眞如)를 증험하지 못한 것이니, 본습(本習)을 잡아서는 이러한 부류를 용납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순숙(純熟)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지 이상은 행해(行解)가 순숙(純熟)해서 동증(同證)ㆍ동행(同行)ㆍ동수(同修)ㆍ동단(同斷)하는 것이니, 어찌 이와 같은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기신론』에 이르기를, “지(地) 위의 보살은 종성(種性)과 발심(發心)과 수행(修行)이 모두 차별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 교 중에서 지(地) 위의 변역신은 위(位)에 의탁해서 같지 않은데, 여기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또한 아래에서 지적한 것과 같다. 만약 돈교(頓敎)에 의거하면 일체 행의 위(位)는 이미 불가설이니, 의거한 바의 몸도 또한 이에 준하여 안다. 자세한 내용은 『대반야경(大般若經)』의 「나가실리분(那伽室利分)」과 같다. 【釋】 종교(終敎)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른 뜻을 거론하여 종(宗)을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문답이고, 셋째, ‘또한 이 교’의 아래에서는 지위에 의탁해서 같지 않음을 나타낸다. 첫째 중에서 먼저는 올바른 해석이고, 나중의 ‘나머지[餘] 뜻’ 이하는 미루어서 자세히 한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지(地) 이전의 분단(分段)을 나타내고, 나중의 ‘어초지(於初地)’ 이하에서는 지(地) 위의 반역(反易)을 나타낸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번뇌장(煩惱障)의 종자를 끊은 것을 나타내고, 둘째로 ‘어지장(於智障)’ 이하는 소지장(所知障)을 끊은 것을 나타내고, 셋째로 ‘이 때문에’ 이하는 바로 반역(反易)을 나타낸다. 【문】 지금은 의거한 바의 몸을 밝히는데, 어떤 이유로 단혹(斷惑)을 밝히는 것인가? 【답】 두 장애의 종자를 끊고서 바야흐로 반역(反易)을 받기 때문에 단장(斷障)의 뜻을 들어서 의거한 바의 보(報)를 나타낼 뿐이다. 이 때문에 이 교분(敎分)은 정사(正使) 및 습기(習氣) 등에서 지(地) 이전에서는 사(使)가 나타남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는 종자를 끊고, 2지 이후로는 습기를 정화하기 때문에 지(地) 위에서 반역(反易)을 받는다. ‘지장(智障) 중에서 또 일분(一分)의 추품(麤品)의 정사(正使)를 단절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종교(終敎) 중에 나아가면 시(始)도 있고 종(終)도 있다. 만약 시(始)를 잡으면, 지(地) 이전에서는 나타난 것을 조복하고, 초지(初地)에서는 종자를 끊으며, 2지 이후에서는 습기를 정화한다. 만약 종(終)을 잡으면, 근본무명(根本無明)119)을 열어서 10분(分)이라 하고, 지지(地地) 중에서 각기 1분(分)을 끊는다. 지금은 종(終)의 뜻을 잡았기 때문에 십지(十地)에서 각기 일분을 끊는다. 그러므로 ‘일분(一分)의 추(麤)를 끊는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의 해석은 그렇지 않다. 혹장(惑障)의 번뇌 종자는 초지(初地)에서 이미 다하였고, 소지장(所知障)의 종자 역시 초지에서 끊어졌다. 이 때문에 ‘지장(智障) 중에 또한 일분 추품의 정사를 끊는다’고 말한 것이다. 【문】 문장 중에서는 초지에서 일분의 추품을 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째서 또한 초지에서 끊는다고 말하는가? 【답】 앞에서 ‘초지에서 영구히 일체 번뇌의 사종(使種)을 끊는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다시 ‘초지에서’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문답 중에서 첫째는 문답을 나타낸 것이고, 다음의 문답 중에서 ‘보살은 대략 두 종류가 있다’고 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 『지론(智論)』 제38에 이르기를, ‘보살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비심(慈悲心)이 많아서 중생을 위하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부처님의 공덕을 많이 모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그 문장을 인용하여 묻는 것이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법상가(法相家)의 뜻을 가지고 물은 것이다. 이를테면 법상인(法相人)120)이 이르기를, “8지 이상은 한결같이 반역(反易)한다. 8지 이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자비가 늘어나는 사람121)은 분단을 얻고, 지혜가 늘어나는 사람은 반역(反易)을 얻는다”고 하였다. 대답 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른 의미를 차단하고, 둘째로 ‘당지유차(當知由此)’ 이하는 바른 뜻을 나타내고, 셋째로 ‘약언(若言)’ 이하는 따로 지혜의 늘어남을 들어서 허(許)와 불허(不許)를 나타낸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총체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다음에 따진 것이고, 나중은 개별적으로 논란한 것이다. 이 중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남의 뜻을 따라서 논란함이요, 나중의 ‘이제보살(以諸菩薩)’ 이하는 정의(正意)를 들어서 논란한 것이다. 처음 중에서 먼저는 자비가 늘어남을 논란한 것이고, 나중은 지혜가 늘어남을 논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자비의 늘어남122)에 준거한다면, 비록 지혜와 자비가 똑같이 균등하다고 말할 수 있더라도 오히려 지혜의 늘어남이라고 부르지 못하는데, 하물며 열등한 자비가 지혜를 인도한다고 해서 증상(增上; 늘어남)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셋째로 허(許)와 불허(不許) 중에서 먼저는 허의 뜻을 나타내고, 다음의 ‘초지 이상’ 아래에서는 불허의 뜻을 나타낸다. 처음 중에서 ‘본습(本習)을 잡으면 이런 부류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등은 『공목일승삼승의장(孔目一乘三乘義章)』에서 “만약 교위(敎位)에 나아간다면 앞의 뜻과 같지 않다. 초지 이전에 분단사(分段死)가 있으며, 먼저 무루(無漏)를 얻는 자는 겸하여 반역사(反易死)가 있다”고 한 것이 곧 그 일이다. 【문】 앞의 초교(初敎)에서 이르기를, “만약 보리를 회향(廻向)하는 것을 잡는다면, 성문(聲聞)으로서 이미 번뇌장을 끊은 자는 소지장(所知障)으로 반역신(反易身)을 받아서 모든 위(位)를 통틀을 수 있다”고 하였다. 풀어서 말하면, 이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초교 중에서 보리를 회향한 성문은 지헤가 늘어나고, 직왕 보살(直往菩薩)은 자비가 늘어나는 것인가? 【답】 보리를 회향하는 성문은 지혜가 늘어나는 것이니, 이 뜻은 인정할 수 있다. 가령 초교를 잡는다면, 이미 “모든 보살이 처음부터 죽 범부나 소승과는 다르기 때문에 자비와 지혜가 서로 인도해서 생각 생각마다 쌍으로 닦는다”고 말한 것이니, 그렇다면 자비와 지혜가 편협하게 늘어나는[增上]123) 것이 아니다. 【문】 앞에서 무루(無漏)를 얻은 2승인(乘人)이 대승에 회향한 것은 지(地)이전에 반역(反易)을 받은 자가 지(地) 이전에서 영구히 미혹의 종자를 끊는다고 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고 하였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이 뜻은 잘못이다. 이를테면 이 문장에서 이미 말하기를, “만약 저 지혜가 늘어난 자라면 소승의 습(習)이 있어서 모든 번뇌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구히 조복한다” 등이라 말하였는데, 영원히 조복을 말미암기 때문에 반역을 받을 따름이지 종자를 끊은 것은 아니다. 【문】 직진(直進) 보살과 점오(漸悟) 보살124)은 똑같이 지(地) 이전에서 그 현행을 조복하거늘, 어떤 이유로 직진은 분단(分段)을 받고 점오는 반역(反易)을 얻는가? 【답】 직진 보살은 소승(小乘)의 습(習)이 없어서 번뇌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점차 조복해서 분단을 받는다. 점오 보살은 소승의 습이 있어서 모든 번뇌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단박에 조복해서 반역을 받는다. 【문】 모든 회심인(廻心人)은 모두 지(地) 이전에서 반역을 받는가? 【답】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 승위(乘位)에서 무루(無漏)를 얻고, 그런 뒤에 회향하여 대승에 들어간 자는 지(地) 이전에서 반역을 받는다. 그 승위에서 아직 무루를 얻지 못하여 회향하여 대승에 들어간 것은 직진과 똑같이 분단을 받는다. ‘『기신론』’이란 발심을 증거한 문장이다. 셋째로 기위부동(寄位不同) 중에서 ‘또한 아래에 지적한 것과 같다’고 한 것은 하단혹(下斷惑) 중에 임시로 기탁한 제8문(門)을 가리킨다. 돈교(頓敎)에 나아가서 ‘나가실리(那伽室利)’라고 한 것은 한역하면 용길상(龍吉祥)이라고 한다.
【記】 만약 원교(圓敎)에 의거하면 변역(變易)을 설하지 않으며, 단지 분단신(分段身)이 십지(十地)의 이구정(離垢定) 앞까지 이른다. 그 위(位)에 이르러서는 보견(普見)의 육안(肉眼)을 얻기 때문에 분단임을 안다. 또한 선재(善財) 등도 분단신으로서 인위(因位)를 궁진(窮盡)했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문】 어떤 이유로 이 중에 변역을 설하지 않는가? 【답】 가령 세계성(世界性) 이상의 몸은 너무나 지극히 미세해서 모든 천(天)을 초과하므로 응당 변역과 같은 것인데, 단지 이 교에서는 생사(生死)를 거치고 미세한 상(相)으로 나누지 않고 총체적으로 허물과 근심에 나아가서 일제(一際)로 삼는다. 그리하여 신만(信滿)에 이른 뒤에 단박에 그 일제(一際)를 뒤집기 때문에 설하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는 이에 준하여 알 수 있다. 【釋】 원교에 나아감 중에서 ‘반역을 설하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동교(同敎)를 잡으면 원교(圓敎)에도 또한 반역(反易)이 있다. 지금은 별교(別敎)를 잡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십행품(十行品)」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1승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만약 섭방편(攝方便)이라면 지(地) 이전과 지(地) 위에 모두 반역이 있으니, 하나 하나의 위(位)가 마지막에는 불지(佛地)에 이르기 때문이다. 만약 자별교(自別敎)에 나아간다면, 이는 분단이다.” ‘하나 하나의 위가 마지막에는 불지(佛地)에 이르기 때문에’라는 것은 이 경 중에서는 하나 하나의 위가 원만히 부처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동교(同敎)를 잡아서 반역이 있게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하나 하나의 위가 원만히 부처를 성취한다는 뜻은 별교의 뜻인데, 어째서 이를 동교라고 말하는가? 【답】 동교라고 말한 것은 닦은 모습이 원융하기 때문이므로 다르지 않다. 지금의 해석에서는 『화엄경』의 안에 반역을 설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교 중에는 반역이 없다. 「십행품(十行品)」소의 섭방편(攝方便)이란 곧 아래의 4교이다. 【문】 만약 섭방편이 아래의 4교라면, 어떤 이유로 하나 하나의 위(位)가 마지막에 불지(佛地)에 이르는가? 【답】 회심(廻心)과 직진(直進) 두 위(位)의 마지막에 모두 성불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信) 등 하나 하나의 위(位)가 마지막에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만약 직진(直進)을 잡는다면 지(地) 이전은 분단이고 지(地) 위는 반역이며, 만약 회심을 잡는다면 지(地) 이전에도 또한 반역이 있다. 두 사람을 합쳐서 취하기 때문에 ‘지(地) 이전과 지(地) 위에 모두 반역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회심위(廻心位)의 끝에 곧 성불이 있고 직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하나 하나의 위가 마지막에 불지에 이른다’고 말한 것이다. ‘생사의 거칠고 미세한 모습을 나누지 못했다’고 한 것에서 거친 것은 곧 분단이고 미세한 것은 곧 반역이다. 이미 거칠고 미세함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반역을 설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준거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오교(五敎)』 중에 인용하지 않은 모든 나머지 성교(聖敎) 등은 준거하여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 소전장(所詮章)의 해석은 개태사(開泰寺) 고장(古藏) 중의 방언본(方言本)에는 ‘현덕(現德) 7년 경신(庚申, 960) 하절(夏節)에 균여대사가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사(副師)는 심융(心融)법사요, 기자(記者)는 혜장(惠藏)법사이다’라고 하였다. 가야산 법수사(法水寺) 고장의 삭방언본(削方言本)125)에는 ‘오관산(五冠山)의 마하갑사(摩訶岬寺) 사문 균여(均如)가 갑자기 법연(法筵)을 맡아서 조악하게 해석을 편다’고 하였다. 지금은 법수사본(法水寺本)에 의거하여 간행 유포한다.126)
1)『화엄경』에서 불교교리의 얕고 깊음에 따라 우열을 판단하는 것인데, 5교는 교상(敎相)의 분류로서 소승교(小乘敎)ㆍ대승시교(大乘始敎)ㆍ종교(終敎)ㆍ돈교(頓敎)ㆍ원교(圓敎)를 말한다.
2)5도관문(度觀門)ㆍ5도문(度門)ㆍ5문선(門禪)ㆍ5관(觀)ㆍ5문(門)ㆍ5념(念)이라고도 하며, 마음의 다섯 가지 허물을 정지시키는 다섯 가지의 관법(觀法)을 말한다. 곧 부정관(不淨觀)ㆍ자비관(慈悲觀)ㆍ인연관(因緣觀)ㆍ계분별관(界分別觀)ㆍ수식관(數息觀)으로, 계분별관 대신 관불관(觀佛觀)이 포함되기도 한다.
3)4선근위(善根位)ㆍ4가행위(加行位)라고도 한다. 보살의 계위(階位)인 5위 중 두번째.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世第一)의 4위는 10회향(廻向)의 지위가 원만하여 다음 통달위(通達位)에 이르기 위하여 특히 애써서 수행하는 자리로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도 한다.
6)『비담론』은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大正藏권28)을 가리킨다고 생각되지만, 이하의 문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권34 「사건도인품(使犍度人品)」 제3(大正藏권28, p.250 상)에 견도중15심(見道中十五心) 등이 있고, 권35 앞에 4사문과(沙門果)(大正藏권28, p.252 상)를 논하고 있을 뿐이다. 『구사론』 권23(大正藏권29, p.122 상)에는 16심중에 앞의 15가 나오고, 제16심을 수도(修道)라고 규정하였다.
7)이 경전이 무엇을 인용하였는가는 알 수 없다. 유식(唯識)에는 16심임을 견도(見道)라고 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권9(大正藏권31, p.51 상),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권5(大正藏권31, p.682 하) 등을 참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맥(文脈)을 살펴서 『비담론(毘曇論)』 중의 이설(異說)을 취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8)『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참조. 권21 이하의 성문지(聲聞地)는 확실하게 여기에 열거하고 있는 12주(住)의 순서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견도위(見道位)를 말한다. 정성은 열반ㆍ성도(聖道) 등의 성이 꼭 바르고 그릇됨이 없는 것이며, 생은 번뇌를 가리킨다.
10)공삼매(空三昧)ㆍ무상삼매(無相三昧)ㆍ무원삼매(無願三昧)를 가리킨다.
11)초선(初禪)에서 일어나 차례로 제2선(禪)에 들어가고, 나머지 마음으로 하여금 들지 못하게 하면서 차례차례로 멸진정에 드는 것을 말한다.
12)욕계(欲界)를 말한다.
13)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位) 가운데에서 제41위로부터 50위까지를 말한다. 이 10위는 불지(佛地)를 생성하고, 능히 주지(住持)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하고 이익케 하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가 만물을 싣고 이를 윤익(潤益)함과 같으므로 지(地)라 이름한다. 이러한 10지에는 환희지(歡喜地)ㆍ이구지(離垢地)ㆍ발광지(發光地)ㆍ염혜지(焰慧地)ㆍ난승지(難勝地)ㆍ현전지(現前地)ㆍ원행지(遠行地)ㆍ부동지(不動地)ㆍ선혜지(善慧地)ㆍ법운지(法雲地)가 있다.
1814)현장의 번역에는 「분별업품(分別業品)」 제4의 ⑥이라 되어 있고, 진제의 번역에는 「분별성도과인품(分別聖道果人品)」이라 되어 있고, 4위(位)에 대해서 『오교장』에는 “앞은 소승에 의하여 4위(位)가 있다. 이를테면 방편(方便)과 견(見)과 수(修)와 구경(究竟)이다”라고 하여 진제의 한역에 해당된다고 보여지지만, 구체적인 예는 찾기 어렵다. 12주(住)도 마찬가지이다.
15)현장의 한역에는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제5의 3이라고 되어 있고, 진제의 한역에는 「분별삼마발제품(分別三摩跋提品)」이라고 되어 있는데, 9지(地)가 종변지(種遍知)의 것이라면, 현장 역에 해당하는지 짐작할 수 없다.
16)3현위(賢位)를 말한다. 해탈은 열반, 분은 인(因)이라는 뜻이다. 3승(乘)의 3현위는 열반에 순응하여 해탈하기 위한 인이 된다는 뜻이다.
17)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마음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회심향대(廻心向大)ㆍ회대입일(廻大入一)과 같은 뜻으로 3승의 마음을 고쳐서 1승에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18)나라는 견해[我見]에 의해 인식되고, 집착된 남과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공(我空)이라고도 한다.
19)색(色)ㆍ심(心)의 모든 법인 만유는 모두 인연이 모여 생기는 비실재적인 존재로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만유의 체(體)가 공무(空無)한 것을 말한다.
20)865년 전후 사이에 실재했던 인물로, 「화엄사사적(華嚴寺事跡)」에 보인다. 또한 「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에도 결언대덕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결언대덕은 북악부석사계(北岳浮石寺系)의 법손(法孫)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교분기원통초』 권2ㆍ3ㆍ4ㆍ5ㆍ6 등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교리에 대한 식견이 상당히 깊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1)변화신(變化身)이라는 뜻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스스로 변현(變現)하시어 중생의 모양이 되는 것을 말한다.
25)원만한 교법이라는 뜻으로, 『화엄경』에 “원만인연수다라(圓滿因緣修多羅)” 또는 “원만경”이라는 말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으로 불교를 비판하여 승렬(勝劣) 천심(淺深)을 정하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을 삼고 점(漸)ㆍ돈(頓)ㆍ원(圓)의 3교(敎)를 세웠다. 『화엄경』을 원교(圓敎)라 한 것은 북위(北魏)의 혜광(慧光)이 처음이다. 그후에는 천태(天台)의 4교(敎), 화엄의 5시(時), 도선(道宣)의 교판에 이 명목을 사용하여 자기가 가장 믿는 경전을 원교에 배당하였다.
26)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 52위 중에서 처음의 10위(位)를 말한다. 여기에는 신심(信心)ㆍ염심(念心)ㆍ정진심(精進心)ㆍ혜심(慧心)ㆍ정심(定心)ㆍ불퇴심(不退心)ㆍ호법심(護法心)ㆍ회향심(廻向心)ㆍ계심(戒心)ㆍ원심(願心) 등이 있다.
27)선권곡교(善權曲巧)라는 뜻으로 선하고 공교하게 동작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실 적에 그 근기에 맞추어 수단 방법을 쓰는 것이 공교롭고 묘한 것을 선교(善巧)라고 한다.
28)부(父)는 의미 없이 쓰인 것이다.
29)보살 수행의 계위인 52위에서 10지(地) 이전의 10회향(廻向)ㆍ10행(行)ㆍ10주(住)ㆍ10신(信) 등을 말한다.
30)해행생(解行生)이라고도 한다. 금생(今生)에 『화엄경』을 믿고, 원해(圓解)를 내어 원행(圓行)을 닦는 지위로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의 5위(位)가 여기에 해당한다.
31)한 번 도달한 수행의 계단으로부터 뒤로 물러나거나 수행을 퇴폐하는 일이 없는 지위를 말한다.
32)원효(元曉)를 가리킨다.
33)이것은 『화엄종장소병인명록(華嚴宗章疏幷因明錄)』(大正藏권55, p.1134 중)ㆍ 『동역전등목록(東域傳燈目錄)』(大正藏권55, p.1161 하), 『의천록(義天錄)』(大正藏권55, p.1167 상) 등에 수록되어 있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34)불ㆍ보살 계위(階位)의 이름을 말한다.
35)4선근위(善根位)ㆍ4가행위(加行位)라고도 한다. 보살의 계위(階位)인 5위 중 두 번째.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世第一)의 4위는 10회향의 지위가 원만하여 다음 통달위(通達位)에 이르기 위하여 특히 애써서 수행하는 자리로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도 한다.
36)산스크리트는 Durgati. 아파가야지(阿波伽耶底)라고 음역. 악한 짓이 원인이 되어 태어나는 곳을 말한다. 3악취ㆍ4악취ㆍ5악취ㆍ6악취로 분별된다.
37)능히 남을 교도(敎導)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교화자(敎化者)로서 부처님은 능화(能化)이고, 중생은 소화(所化)에 해당한다. 승속(僧俗)으로 말하면 승려는 능화이고, 중생은 소화에 해당한다.
38)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을 말한다.
39)4선근(善根)의 하나. 소승(小乘)의 말로서 세(世)는 세간, 곧 유루법(有漏法)을 말한다. 이 지위에서 일어나는 선근은 유루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다.
40)제10신(信)의 위(位)를 말한다.
41)행상(行相)에 대해서는 소승과 대승에서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소승에서는 주관의 인식 대상, 곧 객관의 사물이 주관인 마음 위에 비친 영상(影像)을 행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주관의 인지(認知)하는 작용을 말하니, 곧 마음에 비친 객관의 영상을 인식하는 주관의 작용을 행상이라고 한다.
42)『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大正藏권31, p.580 중~하). 균여(均如)는 전통적인 해석을 따라서 『기신론』의 이 부분을 『영락본업경』의 것을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 망월신형(望月信亨)은 『영락본업경』이 위경(僞經)이라고 지적하고, 이 경에 기초한 것으로서 『기신론』의 중국찬술설의 한 증거로 삼았지만, 『기신론』이 반드시 『영락본업경』을 기본으로 삼았다고 볼 수 없다고도 한다.
43)삼계(三界)ㆍ6도(道)의 중생들이 업인(業因)에 의해 받은 육신을 말한다.
44)교(敎)를 설하는 방법이나 교의 내용 등에 따라서 경전을 세 가지로 구별하는 방법을 말한다. 설하는 방법에 따라서 돈교(頓敎)ㆍ점교(漸敎)ㆍ부정교(不定敎) 등으로 분류된다. 또는 북위(北魏)의 혜광(慧光)이 설한 것으로 점교ㆍ돈교ㆍ원교(圓敎)의 셋으로 나누기도 한다.
45)도품(道品)은 도분(道分) 또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고도 하는데 도(道)의 품류(品類)를 말한다.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는 여러 가지 수양법으로서 여기에는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의 서른 일곱 종류가 있다.
46)삼계(三界)ㆍ4제(諦) 등과 같이 숫자로 표시한 교의상의 명칭을 말한다.
47)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의리를 분별하여 간택(簡擇)을 더하는 것으로서 문답을 세워서 해석하는 것을 문답료간(問答料簡)이라고 한다.
48)이하의 수상점(首相漸)ㆍ실제돈(實際頓)ㆍ궁실원(窮實圓)ㆍ삼교분별(三敎分別)은 지엄(智儼)의 『수현기(搜玄記)』 권1(大正藏권35, p.15 하)에 근거한 논의로, 『교분기원통초』에 많이 인용되었다.
49)지해(知解)와 수행(修行)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불교의 인식적인 부분, 즉 수행하는 사람이 지력(智力)에 의하여 이론교의(理論敎義)를 요해(了解)하는 것을 해(解) 또는 해문(解門)이라고 하고 실천적 부분, 즉 그 요해(了解)한 것을 몸소 실천에 옮기는 것을 행(行) 또는 행문(行門)이라고 한다.
50)모든 법의 체성(體性)이라는 뜻으로서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실체를 말한다.
51)『화엄경』에서 수행하는 계급에 따라 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 등을 세우고 이 차례대로 지나서 마지막의 이상경(理想境)인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보는 관찰방법을 말한다.
52)자내증(自內證)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자기 마음 속에서 증득한 진리를 불보살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53)진여법성(眞如法性)을 말한다. 이는 온갖 법의 끝간 곳이므로 실제라고 한다. 또한 진여의 실리(實理)를 증득하여 그 궁극(窮極)에 이르므로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54)『탐현기』 권1(大正藏권35, p.117 상~하)에서 제2현소위(顯所爲) 중에 정위(正爲)ㆍ겸위(兼爲)ㆍ인위(引爲)ㆍ전위(轉爲)ㆍ원위(遠爲) 등이 있다고 하고, 아래의 인용된 것처럼 설명하였다.
55)대승법을 들을 만한 근기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56)해행생(解行生)이라고도 한다. 금생(今生)에서 『화엄경』을 믿고, 원만히 이해하여 원만한 수행을 닦는 지위로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의 5위(位)가 여기에 해당한다.
57)범어로 Anuttarasamyaksambodhi라고 하는데, 줄여서 아뇩삼보리(阿耨三菩提)ㆍ아뇩보리(阿耨菩提)라고도 한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ㆍ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번역하니, 불과(佛果)의 지혜를 말한다. 아뇩다라는 무상(無上), 삼먁삼보리는 정변지(正遍智) 또는 정등정각(正等正覺)이라고 번역하니, 앞의 것은 구역(舊譯)에 해당하고 뒤의 것은 신역(新譯)에 해당한다. 그냥 줄여서 정각(正覺)이라고도 하니, 범부가 불각(不覺)인 데 대하여 미혹한 경계를 여의고 각지(覺智)가 원만하여 일체의 진상을 모두 아는 부처님의 위없이 수승한 경지를 말한다.
58)숙세(宿世)에 심은 덕본(德本)에 따라서 지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자리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법을 듣고 도를 깨닫는 천자를 말하는 듯하다.
59)취(趣)는 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말과 행동과 생각 등으로 악업을 짓고, 그 업인(業因)으로 인하여 가게 되는 국토를 말한다.
60)이구(離垢)는 번뇌의 때를 여읜다는 말이다.
61)사람의 성질을 세 가지로 나눈 것을 말한다. 향상 진전하여 반드시 성불할 종류인 정정취(正定聚), 성불할 만한 소질이 없어 더욱 타락하여 가는 종류인 사정취(邪定聚), 인연이 있으면 성불할 수 있고 인연이 없으면 혼미할 수도 있어 한 가지로써 향상과 타락의 결정이 없는 종류인 부정취(不定聚) 등이다.
62)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진여(眞如) 법성(法性)을 인지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보살이 초지(初地)나 7ㆍ8ㆍ9지에서 얻는 깨달음이다. 혹은 희인(喜忍)ㆍ오인(悟忍)ㆍ신인(信忍)이라고 이름하는 위(位)를 말한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로 결정된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것은 생즉무생(生卽無生)의 왕생을 인득(忍得)한 것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이 자리는 10신위(信位) 중에 있다.
63)삼계 중 욕계에 딸린 여섯 가지의 하늘. 사왕천(四王天)ㆍ도리천(忉利天)ㆍ야마천(夜摩天)ㆍ도솔천(兜率天)ㆍ화락천(化樂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말한다.
64)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약칭이다.
65)전륜성왕(轉輪聖王)이나 불(佛)ㆍ보살을 말한다.
66)지해(知解)와 수행(修行)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불교의 인식적(認識的) 부문, 곧 수행하는 사람이 지력(智力)에 의하여 이론교의(理論敎義)를 요해(了解)하는 것을 해(解), 또는 해문(解門)이라 한다. 실천적 부문, 곧 그 요해한 것을 몸소 실천에 옮기는 것을 행, 또는 행문(行門)이라고 한다. 이 둘은 수행하는 이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므로 옛부터 해를 눈에, 행을 발에 비유하였다.
67)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수양을 주로 하는 것은 자리(自利)이며,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은 이타(利他)이다. 이것은 대승(大乘) 보살이 닦는 행(行)과 자리(自利)만을 행하는 소승인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행이 다름을 구별한 것이다. 이러한 자리와 이타를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한 이를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68)현존하지 않는다. 균여(均如)의 『석화엄지귀장원통기(釋華嚴旨歸章圓通記)』 하권에도 같은 부분이 인용되었지만 다음과 같이 자구(字句)가 다소 차이가 있다. 곧 원문 그대로를 기록하면 “智通記云 見聞等三位 普法正位耶 答但從三乘作是說耳 若普法正位 無位無不位 一切六道三戒法界法門 皆無不普法正位 又一位一切位 如位法門 一切敎義等法門皆爾 問若爾 普法中以何爲始乎 答得一法門爲始 此卽與終無分別始也”라 하였다.
69)열반을 증득하는 지위. 성문(聲聞)이 무위열반(無爲涅槃)을 증득하는 것을 정위에 든다고 한다. 곧 소승의 열반이다.
70)교와 의란 뜻으로, 언어와 문자로써 말한 것은 교(敎)이고, 그 안에 포함된 의리는 의(義)이다.
71)의지할 바에 대하여 능히 의지하는 당체(當體)를 말한다.
72)임덕(林德)이라고도 한다. 곧 겸전무웅(鎌田茂雄)은 이를 임덕으로 보고 있다( 『석화엄교분기원통초의 주석적 연구』 4, 『동양문화연구소기요(東洋文化硏究所紀要)』 102, 1987, 동경대 동양문화연구소, p.147 주 314)
73)화엄종에서 보살수행의 계위(階位)를 52위(位)로 세우는 가운데에서 처음 10신위(信位)의 최후 만심(滿心)에서 성불함을 말한다. 이것은 화엄종의 독특한 해석으로 차례를 거치지 않고 일위즉일체위(一位卽一切位)라고 보는 견지에서 하는 말이다.
74)『공목장』권1, 천왕찬불설게초수현교분제의(天王讚佛說偈初首顯敎分齊義)에 “의교유오위차별부동(依敎有五位差別不同)”(大正藏권45, p.537 상)이라고 하였고, 그 5위는 소승위(小乘位)ㆍ초교위(初敎位)ㆍ숙교위(熟敎位)ㆍ돈교위(頓敎位)ㆍ원교위(圓敎位)의 다섯을 지목한다.
75)찰(刹)은 법어 찰다라의 준말이고, 토(土)는 그것의 번역이다. 이것은 범어와 한문을 아울러 쓴 것으로 국토란 뜻이 있다.
76)화엄종에서 만유의 모든 법에 낱낱이 여섯 가지의 모양이 있음을 말한 것을 가리킨다. 곧 총상(摠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 등이다.
77)진여(眞如)의 다른 이름이다. 진여는 만유제법(萬有諸法)이 안주(安住)하는 위(位)이므로 법위(法位)라고 한다.
78)지엄(智儼)이 지은 『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 제2권에 있다. 해경(解境)의 10불은 보살이 진지(眞智)로써 관할 때 법계(法界)가 모두 불(佛)이므로, 이를 나눈 것이다. 또 행경(行境)의 10불은 수행을 완성한 뒤 얻은 부처의 경계를 열 가지로 나눈 것이다.
79)그때 그때 근기에 알맞도록 가설한 방편을 권(權)이라 하고, 수단이 아니고 가설이 아닌 구경불변하는 진실을 실(實)이라 한다. 이 둘은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권교(權敎)와 실교(實敎), 권지(權智)와 실지(實智), 권경(權經)과 실경(實經) 등이라 한다. 권실(權實)이라고만 하면 흔히 권교(權敎)와 실교(實敎)의 약칭으로 사용된다.
80)모든 법의 체성(體性)이라는 뜻으로서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실체를 말한다.
81)한 번 도달한 수행의 계단으로부터 뒤로 물러나거나, 수행을 폐퇴하는 일이 없는 그러한 지위를 말한다.
82)소승 증과(證果)의 4계위(階位). 과는 무루지(無漏智)가 생기는 지위인데, 4과는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ㆍ아라한과를 말한다.
83)생물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식을 말하는 것이니,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이 있다.
84)본문의 문답과 유사한 내용이 『대승의장(大乘義章)』 현성의(賢聖義) 권17(大正藏권44, p.807 하)에 보인다.
85)원효(元曉)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는 현재 제3권만이 현존하지만, 현존 부분 중에는 균여가 인용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86)색(色)ㆍ심(心)의 모든 법인 만유는 모두 인연이 모여 생기는 비실재적인 존재로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만유의 체(體)가 공무(空無)한 것을 말한다.
87)세 가지 세간(世間)의 하나. 중생을 수용하는 세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하(山河)와 대지(大地) 등의 세계를 말한다.
88)세 가지 세간의 하나. 부처 이외의 모든 중생은 5온(蘊)으로 이루어져 함께 살면서 인간ㆍ천상ㆍ지옥 등으로 각각 차별되어 있으므로 이를 중생세간이라고 한다.
89)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제3. 초선천의 주체인 대범천왕(大梵天王)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90)범보천(梵輔天). 색계 초선천에 세 가지 하늘이 있는데, 그 가운데 셋째 하늘을 가리킨다. 이 하늘의 천중(天衆)들은 모두 색계 초선천의 주인 대범천왕(大梵天王)을 돕고 있는 신하들로서 천왕이 어디를 갈 때엔 반드시 이 천중들이 앞에 가면서 천왕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한다.
91)깨끗한 행을 하는 무리, 곧 승려를 말한다.
92)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말한다. 6욕천(欲天)의 하나로 욕계(欲界)의 가장 높은 데에 있는 하늘이며, 욕계천(欲界天)의 임금인 마왕(魔王)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 하늘은 남이 변해 나타나는 낙사(樂事)를 자유로이 자기의 쾌락으로 삼기 때문에 타화자재천이라고 한다.
93)여기에는 8만 4천 세이라고 되어 있지만, 『구사론』(大正藏권29, p.63 상)과 『유가사지론』 권2(大正藏권30, p.285 하) 등에는 8만 세라고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그리고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大正藏권1, p.2 상)에는 비바시 때의 사람의 수명은 8만 4천이라 하였고, 또한 『대지도론』 권3(大正藏권25, p.79 상)에는 후인의 수명은 8만 4천 세라고 하였다.
94)3재(災)의 순서에 대해서는 『구사론』 권12 「분별세품」(大正藏권29, p.67 상) 참조.
95)과거 7불의 하나이자 현겁천불(賢劫千佛)의 제1불(佛). 인간의 수명이 4만 세 때에 안화성(安和城)에서 태어나 시리수(尸利樹) 아래에서 성불하였다.
96)과거 7불의 하나이자 현겁천불의 제2불(佛). 오잠바라(烏暫婆羅) 나무 아래에서 성도하였다.
97)법신ㆍ보신ㆍ응신 또는 화신의 3신불(身佛)을 말한다.
98)현겁천불 중에서 맨 나중의 불(佛).
99)다섯 가지 보리의 하나. 불과(佛果)에 이른 지혜를 다섯 가지로 나눈 중에서 보살이 등각(等覺)과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서 온갖 번뇌를 끊어 없애고 불과원만(佛果圓滿)한 증오를 이룬 것을 말한다.
100)세간(世間)에서 세(世)는 천류(遷流)와 격별(隔別)의 뜻이 있고, 간(間)은 간차(間差)의 뜻이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世)로 천류(遷流)하는 바가 되면서도, 가지가지의 모든 법은 서로 차별하여 섞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2세간(世間)으로 나누기도 하고 세 가지 세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101)석가모니불이 미륵과 함께 이 부처의 회상(會上)에서 불도를 수행하였는데, 석존은 7일 7야 동안 이 부처의 존안을 우러르면서 그를 찬양하였다. 그 공덕으로 미륵보다 9겁을 빠르게 성불하였다고 한다.
102)정광불(錠光佛)의 번역 이름. 석존이 전세(前世)에 보살로 있을 때 이 부처에게서 “미래세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한다.
103)변은 형체와 모양이 아주 다른 물건처럼 되는 것이고, 역은 다른 물건으로 대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젊은이가 변하여 주름잡힌 노인이 되고, 어린이가 자라나 청년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104)혜원(慧遠)을 가리키는 듯하다.
105)3독(毒)의 하나로 사상(事象)에 의혹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106)온갖 지식으로 잘못 아는 소견을 여읜 자리. 곧 소승에서는 3현(賢)과 4선근(善根)의 수행을 마치고 세제일위(世第一位)의 직후 무루(無漏)의 지혜를 일으켜 16심(心)으로써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4제(諦)의 이치를 관찰하고 지식으로 잘못된 소견을 여의어 처음으로 성자(聖者)라고 칭하는 위를 말한다
107)3도(道)의 하나. 견도위(見道位)에서 온갖 지적(智的)인 미(迷)를 벗어나고, 다음에 정(情)과 의(意)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수양을 쌓는 기간을 말한다.
108)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아 날 때까지인 49일까지를 가리킨다. 극히 선하거나, 극히 악한 업을 지은 사람은 죽으면서 곧 다음 생을 받으므로 중음이 없지만, 보통으로는 이 중음으로 있을 동안에 다음 생의 과보(果報)가 결정된다고 한다.
109)삼계에 생사(生死)하는 몸을 여읜 뒤로 성불하기까지의 성자가 받는 삼계 밖의 생사를 말한다.
110)삼계ㆍ6도(道)의 중생들이 업인(業因)에 의해 받은 육신을 말한다.
111)보리(菩提)를 말한다. 보리는 불지(佛智), 곧 부처의 각오(覺悟)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수행의 결과로 얻는 것이다.
112)아견(我見)에 의해 인식되고, 집착된 인아(人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아공(我空)이라고도 한다.
113)대승에서는 24불상응법(不相應法)의 하나. 소승에서는 14불상응법의 하나. 또는 2무심정(無心定)의 하나. 성자(聖者)가 모든 심상(心想)을 죄다 없애고 적정(寂靜)하기를 바라며 닦는 선정을 가리킨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것은 유루정(有漏定)이고, 대승의 보살이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이다.
114)성문ㆍ연각ㆍ보살의 3승 종자를 구비하고 있어서 성문이 될는지, 연각이 될는지, 보살이 될는지 아무 데도 결정되지 않은 기류(機類)를 말한다.
115)구마라집 역(譯), 『인왕반야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蜜經)』에는 해당하는 문장이 없다.
116)삼계ㆍ6도(道)의 중생들이 업인(業因)에 의해 받은 육신을 말한다.
117)중생이 닦는 행법(行法)에 장애되는 네 가지. 혹장(惑障)ㆍ업장(業障)ㆍ보장(報障)ㆍ견장(見障) 등이다.
118)대승의 대열반(大涅槃)에 갖추어 있는 네 가지 덕.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 등이다.
119)진여(眞如)의 실성을 알지 못하는 불각(不覺) 미망(迷妄)의 마음을 말한다.
120)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균여는 『오교장원통초(五敎章圓通鈔)』에서 고법상인(古法相人) 또는 신법상인(新法相人)이라고 구별하여 사용하였는데,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21)자비의 늘어남은 남을 이롭게 하기를 본원으로 하고 자비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생사하는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속히 성불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122)전후의 문맥을 볼 때 비(悲)는 아니고 지(智)이다.
123)증진(增進)ㆍ증가(增加)와 같다. 더 늘어남, 또는 발달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힘을 주어 증진하게 함을 말한다.
124)유식종(唯識宗)에서 말하는 5성(性) 가운데 부정성인(不定性人). 이는 끝없는 옛날부터 3승 무루(無漏)의 종자를 제8아뢰야식 가운데 갖추었으므로 먼저 성문ㆍ연각의 증과(證果)를 얻고, 다시 회심하여 보살의 행위(行位)에 드는 것을 말한다.
125)아마도 법수사본을 제외한 다른 본은 방언으로 적혀 있었던 듯하다. 이것이 언제 가야산의 법수사 교장(敎藏)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기자(記者)가 누구인지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 본은 아마도 고려 후기까지 유행되고 있었으며, 천기(天其)가 『교분기원통초(敎分記圓通鈔)』를 작성할 때에 꼭 이 본(本)에 의거한 것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대본(臺本)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金杜珍, 『균여화엄사상연구(均如華嚴思想硏究)』, 1983, 일조각, pp.36~37
126)주기(註記)한 『한국불교전서』 권4의 원문은 『화엄교분기(華嚴敎分記)』의 본문을 이 책의 해당 주석 사이에 보충한 것으로 저술의 이해에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