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4_0683_b_01L대지도론 제19권
014_0683_b_01L大智度論釋初品中三十七品義第三十一卷第十九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014_0683_b_02L 龍樹菩薩造


31. 초품 중 삼십칠품(三十七品)의 뜻을 풀이함
014_0683_b_03L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奉 詔譯

【經】 보살마하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되 [머문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까닭에 4념처(念處)‧4정근(正勤)‧4여의족(如意足)‧5근(根)‧5력(力)‧7각분(覺分)‧8성도분(聖道分)을 구족한다.
014_0683_b_04L【經】
菩薩摩訶薩以不住法住般若波羅蜜中不生故應具足四念處四正懃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分八聖道
【論】 【문】 37품은 성문ㆍ벽지불의 도요, 6바라밀은 보살마하살의 도이거늘 무슨 까닭에 보살의 도에서 성문의 법을 말하는가?
014_0683_b_08L【論】
問曰三十七品是聲聞辟支佛道六波羅蜜是菩薩摩訶薩道何以故於菩薩道中說聲聞法
【답】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착한 법과 일체의 도를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일체의 착한 법과 일체의 도를 모두 배운다. 이른바 건혜지(乾慧地)1) 내지는 불지(佛地)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아홉 지위는 마땅히 배우지만[學] 증득하지는[證] 못한다. 불지는 배우기도 하고 증득하기도 한다.
014_0683_b_10L答曰菩薩摩訶薩應學一切善法一切道如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悉學一切善法一切道所謂乾慧地乃至佛地是九地應學而不取證地亦學亦證
또한 어디에서 37품이 성문과 벽지불만의 법이요, 보살의 도가 아니라 하였는가? 이 『반야바라밀경』의 「마하연품(摩詞衍品)」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4념처로부터 8성도분에 이르기까지를 말씀하셨으며, 이 마하연의 삼장 가운데에도 역시 37품이 오직 소승만의 법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014_0683_b_15L復次何處說三十七品但是聲聞辟支佛法非菩薩道是『般若波羅蜜摩ㆍ訶衍品』中佛說四念處乃至八聖道分是摩訶衍三藏中亦不說三十七品獨是小乘法
014_0683_c_01L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하신 까닭에 37품의 열반도(涅槃道)를 말씀하시어 중생들의 서원과 중생들의 인연에 따라 제각기 도를 얻게 하시니, 성문을 구하는 이는 성문의 도를 얻게 하고, 벽지불의 선근을 심은 이는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고, 불도를 구하는 이는 불도를 얻게 하여 그들의 본원(本願)과 근기의 날카롭고 둔함에 따라 크게 가엾이 여김이 있기도 하고 혹은 가엾이 여김이 없기도 하다.
비유하건대 용왕이 비를 내려 온 천하를 적실 때 비에는 차별이 없지만 큰 나무나 큰 풀은 뿌리가 큰 까닭에 많이 받고 작은 나무나 작은 풀은 뿌리가 작은 까닭에 적게 받는 것과 같다.
014_0683_b_19L佛以大慈故說三十七品涅槃道隨衆生願隨衆生因緣各得其道欲求聲聞人得聲聞道種辟支佛善根人得辟支佛道求佛道者得佛道隨其本願根利鈍有大悲無大悲譬如龍王降普雨天下雨無差別大樹大草大故多受小樹小草根小故少受
【문】 37품에 관해서는 어디에서도 비록 성문ㆍ벽지불만의 도이지 보살의 도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의미로써 추측하건대 보살은 오랫동안 생사에 머물러 다섯 길을 왕래하면서 신속히 열반을 취하지 않거늘 이 37품은 열반의 법만을 말하고 바라밀을 말하거나 대비를 말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014_0683_c_04L三十七品雖無處說獨是聲聞辟支佛道非菩薩道以義推之可知薩久住生死往來五道不疾取涅槃是三十七品但說涅槃法不說波羅亦不說大悲以是故知非菩薩道
【답】 보살이 비록 오랜 동안 생사에 머물지만, 마땅히 진실한 도와 진실치 않은 도를 알고 세간과 열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안 뒤에는 큰 서원을 세우되 “중생들은 가엾도다. 내가 마땅히 건져내서 무위의 경지로 데려가리라” 하고는 이러한 진실한 법으로 모든 바라밀을 행하여 능히 불도(佛道)에 이른다.
보살이 비록 이 법을 배우거나 알았더라도 아직 6바라밀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깨달음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유하건대 허공을 우러러 활을 쏠 때, 화살마다 서로 버티게 하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셨다.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의 화살로써 3해탈문(解脫門)의 허공에 쏘아올리고, 다시 방편의 화살로써 반야의 화살을 쏘아 올려서 열반의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하셨다.
014_0683_c_09L答曰菩薩雖久住生死中亦應知實非實道是世閒是涅槃知是已大願衆生可愍我當拔出著無爲處以是實法行諸波羅蜜能到佛道薩雖學雖知是法未具足六波羅蜜故不取證如佛說譬如仰射空中箭相柱不令落地菩薩摩訶薩亦如以般若波羅蜜箭射三解脫門空復以方便箭射般若箭令不墮涅槃地
014_0684_a_01L또한 그대가 말하듯이 보살이 오랜 동안 생사에 머물러 응당 몸과 마음의 갖가지 고뇌를 받아야 한다면, 만일 진실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그런 일을 참겠는가?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이 도품(道品)의 진실한 지혜를 구할 때, 반야바라밀의 힘으로써 능히 세간을 바꾸어 도과의 열반으로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계의 세간이 모두가 화합으로부터 생긴 까닭이다. 화합으로 생긴 것은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에 공하고, 공하기에 취할 수 없으니, 취할 수 없는 모습이 곧 열반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보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되 머문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까닭에 마땅히 4념처를 구족한다” 했다.
014_0683_c_19L復次若如汝所說菩薩久住生死中應受種種身心苦惱若不得實云何能忍是事以是故菩薩摩訶薩求是道品實智時以般若波羅蜜力故能轉世閒爲道果涅槃何以故三界世閒皆從和合生和合生者無有自性無自性故是則爲空空故不可取不可取相是涅槃以是故說菩薩摩訶薩不住法住般若波羅蜜中不生故應具足四念處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에서는 세간이 곧 열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가 모든 법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살의 법에서는 세간이 곧 열반이라 말하나니, 지혜가 모든 법에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도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물질[色]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며, 공이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공이니라”하셨다.
『중론(中論)』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014_0684_a_05L復次聲聞支佛法中不說世閒卽是涅槃何以智慧不深入諸法故菩薩法中世閒卽是涅槃智慧深入諸法故佛告須菩提色卽是空空卽是色識卽是空空卽是受卽是涅槃涅槃卽是空『中論』中亦說

열반이 세간과 다르지 않고
세간이 열반과 다르지 않으니
열반의 경계와 세간의 경계는
한 경계이어서 차이가 없다.
014_0684_a_11L涅槃不異世閒
世閒不異涅槃
涅槃際世閒際
一際無有異故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실상(實相)을 얻는 까닭에 세간을 싫어하지 않고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나니, 37품(品)이 진실한 지혜의 길이다.
014_0684_a_13L菩薩摩訶薩得是實相故不厭世閒不樂涅槃三十七品是實智之地
【문】 4념처만으로도 도를 갖추어 얻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37품을 말씀하셨는가?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간략히 말하기 위하여 4념처이고, 자세히 말하기 위하여 37품이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자세히 말해야 한다면 한량이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014_0684_a_15L四念處則能具足得道何以說三十七若汝以略說故四念處廣說故三十七此則不然何以故若廣應無
【답】 4념처가 구족되어 비록 능히 도를 얻지만, 또한 4정근(精勤) 등의 모든 법도 말해야 된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마음은 갖가지로 동일하지 않고 번뇌도 또한 갖가지이며, 원하는 바도 이해하는 바도 역시 갖가지이기 때문이다.
불법이 비록 하나의 진실, 하나의 모습이기는 하나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12부경(部經)2), 8만 4천의 법무더기[法聚]에 대해 이렇게 분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처음에 법륜(法輪)을 굴리실 때 4성제(聖諦)를 말씀하심으로써 족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다른 법이 필요하겠는가.
014_0684_a_19L答曰四念處雖具足能得道亦應說四正懃等諸法何以故衆生心種種不同結使亦種種所樂所解法亦種種佛法雖一實一相爲衆生故十二部經八萬四千法聚作是分別說若不爾初轉法輪說四諦則足不須餘法
014_0684_b_01L하지만 중생들이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에 집착되었기에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4성제를 말씀하시어 “몸과 마음 등의 모든 법은 모두가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다. 이 괴로움의 인연은 애착[愛] 등의 모든 번뇌에서 유래한다. 이 괴로움이 다한 곳을 열반이라 하며, 방편으로 열반에 이르니 이것을 일컬어 도라 한다” 하셨다.
014_0684_b_02L以有衆生厭苦著樂爲是衆生故說四諦身心等諸法皆是苦無有是苦因緣由愛等諸煩惱是苦所盡處名涅槃方便至涅槃是爲道
중생은 생각이 많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뒤바뀌었기에 이 몸ㆍ느낌ㆍ마음ㆍ법에 집착되어 삿된 행을 짓나니, 이런 사람을 위하는 까닭에 4념처를 설한다.
014_0684_b_05L衆生多念亂心顚倒故著此身法中作邪行爲是人故說四念處
이렇듯 갖가지 도법은 각각 중생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비유하건대 약사가 한 가지 약으로 뭇 병을 고칠 수 없으니, 병이 같지 않다면 약 또한 하나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의 마음의 병이 갖가지임을 따라서 뭇 약으로써 그것을 다스리신다.
014_0684_b_07L是等諸道法各各爲衆生說譬如藥師不得以一藥治衆病衆病不同亦不一佛亦如是隨衆生心病種種以衆藥治之
혹은 한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부처님께서 어떤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네 물건이 아니거든 가지지 말라.”
비구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어떻게 알았느냐?”
비구가 대답했다.
“모든 법이 내 것이 아니기에 가지지 말아야 하옵니다.”
014_0684_b_11L或說一法度衆生如佛告一比丘非汝物莫取比丘言知已世尊佛言云何知比丘言諸法非我不應取
혹은 두 가지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선정ㆍ지혜요, 혹은 세 가지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계율ㆍ선정ㆍ지혜요, 혹은 네 가지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니, 4념처이다.
014_0684_b_14L或以二法度衆生定及慧或以三法或以四法四念處
그러므로 비록 4념처로써 도를 얻을 수는 있으나, 다른 법의 행(行)이 다르고 분별하는 수량[多少]이 다르다면 관법 역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4정근 등 다른 법도 말해야 하는 것이다.
014_0684_b_15L是故四念處雖可得道餘法行異別多少異觀亦異以是故應說四正懃等諸餘法
또한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믿음의 힘이 크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일시에 37품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다른 법의 도문(道門)이나 10상(想) 등을 말하더라도 모두가 37품 가운데 포함된다. 이 37품의 뭇 약이 화합해서 일체 중생의 병을 치유하기에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니, 예컨대 부처님에게는 비록 한량없는 힘이 있으시나 다만 10력(力)만 말해도 중생을 제도하기에 족한 것이다.
014_0684_b_18L復次諸菩薩摩訶薩信力大爲度一切衆生故是中佛爲一時說三十七品若說異法道門十想等皆攝在三十七品中是三十七品衆藥和合足療一切衆生病是故不用多如佛雖有無量力但說十力於度衆生事足
014_0684_c_01L이 37품은 10법으로 근본을 삼는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곧 믿음[信]ㆍ계율[戒]ㆍ사유(思惟)ㆍ정진(精進)ㆍ기억[念]ㆍ선정[定]ㆍ지혜[慧]ㆍ제함[除]ㆍ기쁨[喜]ㆍ버림[捨]3)이다.
믿음이라 함은 신근(信根)과 신력(信力)이요, 계율이라 함은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이요, 정진이라 함은 4정근과 정진근(精進根)과 정진력(精進力)과 정진각지(精權覺支)와 정정진(正精進)이요, 기억이라 함은 염근(念根)과 염력(念力)과 염각지(念覺支)와 정념(正念)이요, 선정이라 함은 4여의족과 정근(定根)과 정력(定力)과 정각[定覺支]과 정정(正定)이요, 지혜라 함은 4념처(念處)와 혜근(慧根)과 혜력(慧力)과 택법각지(擇法覺支)와 정견(正見)이다.
014_0684_c_01L是三十七品十法爲根本何等十思惟精進信者信根信力戒者正語正業精進者四正懃精進根精進力進覺正精進念者念根念力念覺定者四如意足定根定力定覺慧者四念處慧根慧力擇法覺
이러한 모든 법의 생각[念]이 지혜에 수순해서 대상[緣] 가운데 머문다면, 이러한 때를 염처(念處)라 한다.
삿된 법을 깨뜨리고 바른 도 가운데에 행하는 까닭에 정근(正勤)이라 하고, 마음을 안온하게 대상 가운데서 거두는 까닭에 여의족(如意足)이라 하고, 부드러운 지혜를 마음으로 얻는 까닭에 근(根)이라 하고, 날카로운 지혜를 마음으로 얻는 까닭에 힘[力]이라 하고, 수도[修道位]의 작용인 까닭에 각(覺)이라 하고, 견도[見道位]의 작용이기 때문에 도(道)라 한다.
014_0684_c_08L是諸法念隨順智慧緣中止住時名念處破邪法正道中行故名正攝心安隱於緣中故名如意足智心得故名根利智心得故名力道用故名覺見道用故名道
【문】 도를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도를 행한 뒤에야 모든 착한 법을 얻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길을 간 뒤에야 갈 곳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제는 어찌하여 뒤바꿔 4념처를 먼저 말하고, 나중에 8정도(正道)를 말하는가?
014_0684_c_12L問曰先說道何以故行道然後得諸善法譬如人先行道然後得所至處今何以顚倒先說四念處後說八正道
【답】 뒤바뀌지 않았으니, 37품은 처음으로 도에 들고자 할 때의 이름이다. 마치 수행자가 스승에게 가서 도법(道法)을 듣는 것과도 같다. 먼저 기억하여 이 법을 간직하나니, 이때를 염처라 한다. 간직한 뒤에는 그 법 가운데서 과위를 구하는 까닭에 정진하나니, 이때를 정근이라 한다.
정진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한데 마음을 거두어 부드럽게 조절하는 까닭에 여의족이라 한다.
014_0684_c_15L不顚倒也三十七品是初欲入道時名字如行者到師所聽道法時用念持是法是時名念處持已從法中求果故精進行是時名正懃多精進故心散亂攝心調柔故名如意足
014_0685_a_01L마음이 길들여진 뒤에는 5근이 생겨난다. 모든 법의 실상은 매우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신근(信根) 때문에 능히 믿게 되니, 이를 신근(信根)이라 하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심으로 도를 구하니, 이를 정진근(精進根)이라 하고, 항상 불도(佛道)만을 생각하고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를 염근(念根)이라 하고, 항상 마음을 거두어 도에 두니, 이를 정근(定根)이라 하고, 4제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니, 이를 혜근(慧根)이라 한다.
014_0684_c_20L心調柔已生五根諸法實相甚深難信根故能信是名信根不惜身命一心求道是名精進根常念佛道念餘事是名念根常攝心在道是名定根觀四諦實相是名慧根
이 5근이 늘어나 능히 번뇌를 가리나니, 마치 큰 나무의 힘이 능히 홍수를 막는 것과 같다. 이 5근이 늘어나면 능히 깊은 법으로 옮겨 들어가나니, 이를 힘[力]이라 한다.
014_0685_a_02L是五根增長能遮煩惱如大樹力能遮水五根增長時能轉入深法是名爲力
힘을 얻은 뒤에는 도법(道法)을 분별하는데 세 부분이 있다. 택법각지[擇法覺]와 정진각지[精進覺]와 희각지(喜覺支) 등 이 세 법은 도를 행할 때에 마음이 침몰하면 제각지(除覺支)ㆍ정각지(定覺支)ㆍ사각지(捨覺支)를 일으키고, 다시 이 세 법은 도를 행할 때에 마음이 흔들리고 흩어지면 능히 거두어서 정ㆍ염각지를 두 곳에 있게 하며, 능히 착한 법을 모으고 악한 법을 막는다.
마치 문을 지키는 사람이 이익이 되는 이는 들어오게 하고, 이익이 없는 이는 막아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침몰할 때엔 염(念)의 세 가지 법을 일으키고, 마음이 산란할 때에는 염의 세 가지 법은 무각(無覺)과 실각(實覺)에 포섭된다.
이 일곱 가지로 능히 이르게 되기 때문에 부분[分]이라 한다.
014_0685_a_04L得力已分別道法有三分擇法覺進覺喜覺此三法行道時若心沒令起除覺定覺捨覺此三法若行道時心動散能攝令定念覺在二處集善法能遮惡法如守門人有利者令入無益者除卻若心沒時念三法若心散時念三法攝無覺實覺七事能到故名爲分
이 법을 얻어서 안온함이 구족한 뒤에는 열반의 무위성(無爲城)에 들고자 하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을 행하나니, 이때를 도라 한다.
014_0685_a_12L得是法安隱具足已欲入涅槃無爲城故行是諸法是時名爲道
【문】 무엇이 4념처인가?
問曰何等是四念處
【답】 신념처(身念處)와 수(受)ㆍ심(心)ㆍ법(法)의 염처이니, 이것이 4념처이다.
014_0685_a_14L身念處法念處是爲四念處
014_0685_b_01L네 가지 법을 네 종류로 관찰하니, 곧 몸이 부정하다고 관찰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찰하고,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찰한다.
이 네 가지 법이 각각 네 가지 법을 갖추고 있으나, 몸에서는 부정을 많이 관하고, 느낌에서는 괴로움을 많이 관하고, 마음에서는 무상함을 많이 관하고, 법에서는 나 없음을 많이 관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가 아직 도에 들지 않았을 때 이 네 가지 법에서 삿된 행을 하거나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한 법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며,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 무상함에 대하여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 나가 없는데 대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을 일으킨다.
이런 네 가지 뒤바뀜을 깨뜨리기 위한 까닭에 이 4념처를 말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신념처(身念處)를 말하고,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수념처(受念處)를 말하고,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심념처(心念處)를 말하고, 나가 있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법념처(法念處)를 말한다.
이런 까닭에 넷을 말하니, 이는 모자라지도 많지도 않은 것이다.
014_0685_a_15L觀四法四種觀身不淨觀受是苦心無常觀法無我是四法雖各有四身應多觀不淨受多觀苦心多觀無常法多觀無我何以故凡夫人未入道時是四法中邪行起四顚倒不淨法中淨顚倒苦中樂顚倒無常中常顚倒無我中我顚倒破是四顚倒故說是四念處破淨倒故說身念破樂倒故說受念處破常倒故說心念處破我倒故說法念處以是故說四不少不多
【문】 어찌하여야 이 4념처를 얻는가?
014_0685_b_03L問曰云何得是四念
【답】 수행자는 청정한 계에 의하여 일심으로 정진을 행해 몸의 다섯 가지 부정함을 관찰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태어나는 곳이 부정함[生處不淨]이요, 둘째는 종자가 부정함[種子不淨]이요, 셋째는 자성이 부정함[自性不淨]이요, 넷째는 자상이 부정함[自相不淨]이요, 다섯째는 끝까지 부정함[究竟不淨]이다.
014_0685_b_04L答曰行者依淨戒住一心行精進觀身五種不淨相何等五一者生處不淨二者種子不淨三者自性不淨四者自相不淨五者究竟不淨
무엇이 태어나는 곳이 부정한 것인가?
014_0685_b_07L云何名生處不淨
머리ㆍ발ㆍ배ㆍ등ㆍ옆구리ㆍ갈비 등 모든 부정한 물건이 화합된 것을 여자의 몸이라 하는데, 안으로는 생장(生藏)과 숙장(熟藏)과 오줌ㆍ똥 등 부정한 것이 있고, 밖으로는 번뇌와 업인연의 바람이 식의 종자[識種]를 불어 두 장[藏] 사이로 들어가서 8개월이나 9개월 동안 있게 하니, 마치 분뇨 구덩이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85_b_08L肋諸不淨物和合名爲女身內有生藏熟藏尿不淨外有煩惱業因緣風吹識種令入二藏中閒若八月若九月如在屎尿坑中如說

이 몸은 냄새 나고 더러운 것
꽃 사이에서 난 것도 아니요
첨복(瞭舊)4)에서 난 것도 아니며
보배산[寶山]에서 난 것도 아니네.
014_0685_b_12L是身爲臭穢
不從花閒生
亦不從瞻蔔
又不出寶山

이것을 태어나는 곳이 부정하다 한다.
014_0685_b_14L是名生處不淨
종자가 부정하다 함은 부모가 망상과 삿된 생각[邪憶念]의 바람이 음욕의 불에 분 까닭에 피와 골수가 흐르고 열이 변하여 정자[精]가 되었는데, 숙업행의 인연인 식의 종자는 붉은 정[赤精]과 흰 정[白精] 사이에 머무르니, 이를 몸의 종자라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85_b_15L種子不淨者父母以妄想邪憶念風吹婬欲火故血髓膏熱變爲精宿業行因緣識種子在赤白精中住是名身種子如說

이 몸의 종자는 부정한 것이니
별달리 묘한 보물이 아니네.
맑고 깨끗함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오직 요도(尿道)를 따라 나온 것일 뿐이네.
014_0685_b_18L是身種不淨
非餘妙寶物
不由淨白生
但從尿道出

이를 종자가 부정하다 한다.
014_0685_b_20L是名種子不淨
014_0685_c_01L자성이 부정하다 함은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얇은 가죽으로 덮였고, 그 속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찬 것을 말한다. 의복으로 장식하고 목욕시키고 꽃과 향으로 치장하며, 최상의 반찬과 온갖 맛난 음식을 먹이나 하룻밤 사이에 모두가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설사 하늘의 옷을 입히거나 하늘의 음식을 먹이더라도 몸의 성질 때문에 역시 더러워질 것이거늘 하물며 인간의 의식(衣食)이겠는가.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85_b_21L自性不淨者從足至四邊薄皮其中所有不淨充滿以衣服澡浴花香食以上饌衆味餚經宿之閒皆爲不淨假令衣以天食以天食以身性故亦爲不淨況人衣食如說

흙ㆍ물ㆍ불ㆍ바람의 성질은
부정한 것 없앨 수 있으나
바닷물 다하도록 이 몸 씻어도
향기롭고 맑게 하지는 못하리.
014_0685_c_03L地水火風質
能變除不淨
傾海洗此身
不能令香潔

이것이 자성이 부정한 것이다.
014_0685_c_05L是名自性不淨
자상의 부정함이라 함은 이 몸의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내리니, 눈에서는 눈곱과 눈물이 흐르고, 귀에서는 귀지가 나오고, 코에서는 콧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배설기관에서는 항상 똥오줌이 흘러나오고, 모든 털구멍에서는 땀이 흘러 부정하다.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85_c_06L自相不淨者是身九孔常流不淨眼流眵耳出結聹中涕流口出涎吐廁道水道常出屎尿及諸毛孔汗流不淨如說

갖가지 더러운 물건이
몸 안에 가득하여
항상 쉬지 않고 흘러나오니
새는 주머니에 물건을 담은 듯하네.
014_0685_c_09L種種不淨物
充滿於身內
常流出不止
如漏囊盛物

이것이 자상의 부정이다.
014_0685_c_11L是名自相不淨
끝까지 부정하다 함은 이 몸을 불에 던지면 재[灰]가 되고, 벌레가 먹으면 똥[尿]이 되고, 땅에 묻으면 썩어서 흙이 되고, 물에 두면 불어터지거나 혹은 물벌레에게 먹힌다.
일체의 시체 가운데서는 인간의 몸이 가장 부정하다. 부정한 법에 대하여는 9상(相)5) 가운데 자세히 설명하리라.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85_c_12L究竟不淨者是身若投火則爲灰若虫食則爲屎在地則腐壞爲土在水則胮脹爛壞或爲水虫所食一切死屍中人身最不淨淨法九相中當廣說如說

이 몸을 자세히 관찰하니
마침내는 무덤으로 돌아가네.
힘들여 모셔도 돌아오지 않으니
은혜를 저버리기 소인(小人)과 같도다.
014_0685_c_16L審諦觀此身
終必歸死處
難御無反復
背恩如小人

이것이 끝까지 부정한 것이다.
014_0685_c_18L是名究竟不淨
또한 이 몸이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 이 몸이 가까이했던 곳이나 몸을 두었던 곳은 모두가 부정하다. 예컨대 향기롭고 아름답고 깨끗하던 물도 백 가닥의 개울을 따라 바다로 들어가면 짜고 쓴 맛으로 변하듯이 이 몸에 먹었던 갖가지 맛난 맛과 좋은 빛과 좋은 향기와 부드러운 반찬들도 배라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이 몸은 이와 같이 생겨날 때부터 종극에 이르기까지 항상 부정한 것이 있으니, 몹시 싫증날 일이다.
014_0685_c_19L復次是身生時死時所近身物所安身處皆爲不淨如香美淨水隨百川流旣入大海變成醎身所食噉種種美味好色好香滑上饌入腹海中變成不淨是身如是從生至終常有不淨甚可患厭
014_0686_a_01L수행자들은 생각하라. 이 몸이 부정하건만 조그만치의 항상함이 있으면 조금 나은 것 같다가 다시 무상해진다.
014_0686_a_01L者思惟是身雖復不淨若少有常者猶差而復無常
또한 부정하고 무상하건만 조그만치의 즐거움만 있으면 조금 나은 것 같다가 다시 매우 괴로워진다.
이 몸은 뭇 고통이 생기는 곳이니, 마치 물이 땅에서 나고, 바람이 허공에서 나오고, 불이 나무로 인하여 생기는 것과 같다. 이 몸도 그와 같아서 안팎의 괴로움은 모두 몸에서 나온다.
안의 괴로움이란 늙음ㆍ앓음ㆍ죽음 등이요, 밖의 괴로움이란 폭력[刀杖]ㆍ추위ㆍ더위ㆍ주림ㆍ목마름 등을 말한다.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014_0686_a_03L雖復不淨無常有少樂者猶差而復大苦是身是衆苦生如水從地生風從空出火因木有是身如是內外諸苦皆從身出內苦名老死等外苦名刀杖寒熱飢渴等有此身故有是苦
【문】 몸은 괴로운 성품일 뿐 아니라 몸으로 인하여 즐거움도 있다. 만약에 몸이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5욕을 누가 누리겠는가?
014_0686_a_08L問曰身非但是苦性亦從身有樂若令無身隨意五誰當受者
【답】 4성제(聖諦)의 괴로움을 성인은 실로 괴로운 것인 줄 알지만 우매한 범부는 즐겁다 한다. 성인은 실로 의지할 만하거니와 어리석은 이는 미혹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
이 몸은 실로 괴롭거늘 큰 괴로움이 그쳤으므로 작은 괴로움을 즐겁다 여긴다. 예컨대 죽임을 당하게 된 사람이 형벌로 목숨을 대신하게 되면 몹시 기뻐하는 것과 같다. 형벌이 실로 괴롭거늘 죽음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즐겁다고 여기는 것이다.
014_0686_a_10L答曰四聖諦苦聖人知實是苦愚夫謂之爲樂聖實可依惑宜棄是身實苦以止大苦故以小苦爲樂譬如應死之人得刑罰代命甚大歡喜罰實爲苦以代死故謂之爲樂
또한 새로운 괴로움은 즐겁고 묵은 괴로움은 고통스럽나니, 마치 처음 앓았을 때엔 즐겁다가 오래 되면 곧 괴로움이 일어나고, 처음으로 다니거나 앉거나 누었을 때는 즐겁다가 오래되면 역시 괴로운 것과 같다.
구부리고 펴고 숙이고 우러르고 바로 보고 곁눈으로 보고 헐떡이고 숨을 쉴 때에도 괴로움은 항상 몸을 따르니, 처음 태에 들어 출생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즐거울 때가 없다.
014_0686_a_15L復次新苦爲樂故苦爲苦如初坐時樂久則生苦初行臥亦樂亦爲苦屈申俯仰視眴喘息苦常隨從初受胎出生至死無有樂時
014_0686_b_01L만일 그대가 음욕을 느낌으로써 즐겁다 한다면 음욕의 법이 중해진 까닭에 밖의 여색을 구하니, 얻어지는 것이 많을수록 병은 더욱 중해질 것이다. 마치 소양병을 근심해 불을 쏘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불에 쪼여서 긁으면 당시에는 조금 즐거운 듯하나 이내 큰 아픔이 더욱 깊어지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작은 쾌락도 역시 병의 인연으로 있는 것이지 실제로 즐거운 것이 아니다. 병 없는 사람이 그를 본다면 가엾다는 생각을 내듯이 음욕을 여읜 사람이 음욕에 빠진 이를 관찰하는 것 역시 이와 같아서 이 어리석은 자가 음욕의 불에 타서 많은 고통 받음을 가엾이 여긴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 몸의 괴로운 모습과 괴로움의 원인을 안다.
수행자는 오직 몸은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로운 물건인 줄을 알지만, 부득이 하여 그것을 양육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부모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포악하더라도 자기가 낳았기 때문에 반드시 잘 양육해 길러주는 것과 같다.
014_0686_a_18L汝以受婬欲爲樂婬病重故求外女得之愈多患至愈重如患疥病火揩炙當時小樂大痛轉深如是小亦是病因緣故有非是實樂無病觀之爲生慈愍離欲之人觀婬欲者亦復如是愍此狂惑爲欲火所燒受多苦如是等種種因緣知身苦相苦因行者知身但是不淨無常苦物不得已而養育之譬如父母生子復弊暴以從己生故要當養育成就
몸은 진실로 나가 없나니, 왜냐하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중풍 병에 걸린 사람은 구부리거나 쳐들거나 가거나 오지 못하며, 목병을 앓는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몸은 자유롭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다가 써야 하는데 몸은 그렇지 못하다.
자재롭지 못한 까닭에 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014_0686_b_05L身實無我何以故不自在故譬如病風之人不能俯仰行來病咽塞者能語言以是故知身不自在如人有隨意取用身不得爾不自在故知無我
수행자는 이 몸이 이렇게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고 사유한다. 이러한 한량없는 허물이 있으니, 이러한 갖가지 방법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을 신념처라 한다.
014_0686_b_10L行者思惟是身如是不淨無我有如是等無量過惡是等種種觀身是名身念處
이 신념처를 얻은 뒤에는 다시 생각한다.
‘중생은 무슨 까닭에 이 몸에 탐착하는가? 곧 즐거운 느낌 때문이니, 왜냐하면 안의 6정(情)과 밖의 6진(塵)의 화합을 따르는 까닭에 6식을 내고, 6식 가운데 세 가지 느낌[三受]을 내나니, 곧 괴로운 느낌[苦受]ㆍ즐거운 느낌[樂受]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다.’
이 즐거운 느낌은 일체 중생이 바라는 바이고, 괴로운 느낌은 일체 중생이 바라지 않는 바이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86_b_12L得是身念處觀已復思惟衆生以何因緣故貪著此身樂受故所以者何從內六外六塵和合故生六種識六種識中生三種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是樂受一切衆生所欲苦受一切衆生所不欲不苦不樂受不取不棄如說

악을 짓는 이나 출가한 이나
하늘 무리나 인간이나 벌레들이나
일체 시방의 5도 가운데 모두가
즐거움을 좋아하고 괴로움을 싫어하지 않는 이 없네.
014_0686_b_18L若作惡人及出家
諸天世人及蠕動
一切十方五道中
無不好樂而惡苦

미치고 뒤바뀌고 어리석어서
열반의 항상한 즐거움 알지 못하네.
014_0686_b_20L狂惑顚倒無智故
不知涅槃常樂處

수행자는 이 즐거운 느낌을 관찰하여 실제로 그것을 안다면, 즐거움은 없고 오로지 뭇 고통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즐거움이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뒤바뀜이 없어야 하거늘 일체 세간의 즐거운 느낌은 모두 뒤바뀜으로부터 생겨나 진실됨이 없기 때문이다.
014_0686_b_21L行者觀是樂受以實知之無有樂也但有衆苦何以故樂名實樂無有顚一切世閒樂受皆從顚倒生無有實者
014_0686_c_01L또한 이 즐거운 느낌으로는 아무리 즐거움을 구하여도 큰 고통을 받기만 한다.
이런 게송이 있다.
014_0686_c_02L復次是樂受雖欲求樂能得大如說

어떤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 폭풍을 만나면
파도가 솟구쳐 마치 흑산(黑山)과 같고,
어떤 사람이 큰 싸움터에 들어가면
매우 험하고 거친 길을 지나야 하리.
014_0686_c_03L若人入海遭惡風
海浪崛起如黑山
若入大陣鬪戰中
經大險道惡山閒

귀한 장자(長者)도 신분을 낮추어
소인들을 가까이함은 색욕 때문이니
이러한 갖가지 큰 고통들은
모두가 쾌락에 집착하는 탐심 때문이네.
014_0686_c_05L豪貴長者降屈身
親近小人爲色欲
如是種種大苦事
皆爲著樂貪心故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은 능히 갖가지 괴로움을 낸다는 것을 안다.
014_0686_c_07L以是故知樂受能生種種苦
또한 부처님께서 세 가지 느낌에 비록 즐거운 느낌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즐거움이 적은 까닭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한 말[斗]이나 되는 꿀도 강에 던져지면 꿀의 기운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014_0686_c_08L復次佛說三種受有樂受樂少故名爲苦如一斗蜜投之大河則失氣味
【문】 만약에 세간의 즐거움이 뒤바뀐 인연 때문에 괴롭다면 성인들의 선정은 무루의 즐거움을 내니, 마땅히 실다운 즐거움이어야 하리라. 왜냐하면 이 즐거움은 어리석은 뒤바뀜에서 생겨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찌 괴로움이라 하는가?
014_0686_c_10L問曰若世閒樂顚倒因緣故苦諸聖人禪定生無漏樂應是實樂何以故此樂不從愚癡顚倒有故此云何是苦
【답】 이것은 괴로움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무상한 것이 곧 괴로움이라 하셨지만, 유루의 법이기 때문에 괴롭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범부들은 유루의 법에 대하여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유루의 법은 무상하여 잃어지고 무너지는 까닭에 괴로움을 내거니와 무루의 법은 마음으로 집착할 수 없기에 비록 무상하더라도 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등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번뇌[結使]가 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014_0686_c_13L非是苦也雖佛說無常卽是苦有漏法故說苦何以故凡夫人於有漏法中心著以有漏法無常失壞故生苦無漏法心不著故雖無常不能生憂悲苦惱等故不名爲苦亦諸使不使故
만일 무루의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도제(道諦)를 따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리니, 고제(苦諦)에 속하기 때문이다.
014_0686_c_19L復次若無漏樂是苦者佛不別說道諦苦諦攝故
【문】 두 가지의 즐거움이 있으니, 유루의 즐거움과 무루의 즐거움이다. 유루의 즐거움은 하천하고 추악하며, 무루의 즐거움은 높고 묘하다. 그런데 왜 하천한 즐거움에는 집착을 내면서 상묘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집착을 내지 않는가? 상묘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집착을 내야 하나니, 마치 금ㆍ은 등 보물은 탐착도 더 무거우리니, 어찌 초목과 같으랴.
014_0686_c_20L問曰有二種樂有漏樂無漏樂有漏樂下賤弊惡漏樂上妙何以故於下賤樂中生著上妙樂中而不生著上妙樂中生著應多如金銀寶物貪著應重豈同草
014_0687_a_01L【답】 무루의 즐거움은 높고 묘하며 지혜도 많다. 지혜가 많으므로 능히 이런 집착을 여읜다. 유루의 즐거움에는 애욕 등의 번뇌[結使]가 많으니, 애욕은 집착의 근본이 된다. 하지만 진실한 지혜로는 능히 여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집착되지 않는 것이다.
014_0687_a_02L答曰無漏樂上妙而智慧多智慧多故能離此著有漏樂中愛等結使愛爲著本實智慧能離以是故不
또한 무루의 지혜는 항상 일체의 무상을 관찰하나니, 무상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애욕 등 모든 번뇌를 내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양이 호랑이 곁에 있으면 아무리 좋은 풀과 맛있는 물을 얻더라도 살이 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들 역시 비록 무루의 즐거움을 받으나 무상과 공을 관찰하기 때문에 염착의 때[脂]를 일으키지 않는다.
014_0687_a_05L復次無漏智慧常觀一切無常無常故不生愛等諸結使譬如羊近於虎雖得好草美水而不能肥如是諸聖人雖受無漏樂無常空觀故生染著脂
또한 무루의 즐거움은 세 가지 삼매와 열여섯 가지 거룩한 행상[十六聖行]6)을 여의지 않으며, 항상 중생상(衆生相)이 없다. 만일 중생상이 있다면 집착하는 마음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무루의 즐거움이 비록 가장 묘하더라도 집착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014_0687_a_09L復次無漏樂不離三三昧十六聖行常無衆生相若有衆生相則生著心以是故無漏樂雖復上妙而不生著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괴롭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다고 관찰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여 무너지는 모습이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다면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는 욕심의 집착을 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는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는 우치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것이 수념처(受念處)이다.
014_0687_a_12L如是種種因緣觀世閒樂受是苦觀苦受如箭不苦不樂受觀無常壞敗相如是則樂受中不生欲苦受中不生恚不苦不樂受中不生愚癡是名受念處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쾌락 때문에 몸을 탐내거니와 누가 이 즐거움을 느끼는가’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마음을 따라 느낀다는 것을 안다. 중생들의 마음은 사리분별을 못하고 뒤바뀐 까닭에 이 즐거움을 느낀다.
014_0687_a_16L行者思惟以樂故貪身誰受是樂思惟已知從心受衆生心狂顚倒故而受此樂
하지만 이 마음은 무상하게 생멸하는 모습이어서 잠시도 머물지 않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자가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사람들은 뒤바뀐 까닭에 즐거운 느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욕망을 느끼려 할 때의 마음과 즐거움이 생길 때의 마음은 달라져서 각각 서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마음이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겠는가?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은 잠깐 머물렀다가 급히 지나가기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014_0687_a_18L當觀是心無常生滅相一念不住無可受樂人以顚倒故謂得受樂何以故初欲受樂時心生異樂生時心異各各不相云何言心受樂過去心已滅故不受未來心不生故不受樂現在心一念住疾故不覺受樂
014_0687_b_01L【문】 과거와 미래는 당연히 즐거움을 느끼지 않겠지만 현재의 마음이 잠시 머무를 때엔 마땅히 즐거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하기를 “느끼지 않는다” 하는가?
014_0687_b_01L問曰過去未來不應受樂現在心一念住時應受樂云何言不受
【답】 내가 이미 말하기를 “급히 지나가기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했다.
014_0687_b_03L答曰我已說去疾故覺受樂
또한 모든 법은 덧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머물 겨를이 없다. 만일 마음의 첫 생각이 머무른다면 제2의 생각도 머무르리니, 그렇다면 항상 머무는 것이어서 멸하는 모습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일체 유위법의 세 가지 모습[三相]의 머무름[住] 가운데도 멸하는 모습이 있다” 하셨다. 만일 멸함이 없다면 유위의 법이라 할 수 없다.
014_0687_b_04L復次諸法無常相故無住時若心一念住第二念時亦應住是爲常住無有滅相如佛說一切有爲法三相住中亦有滅相若無滅者不應是有爲相
또한 어떤 법이 나중에 멸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이미 멸함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새 옷을 입은 것과 같으니, 처음 입은 날에는 헐지 않으며, 둘째 날에도 헐은 줄 모른다. 이렇게 해서 10년이 되도록 항상 새로워서 헐지 않은 듯하나 실은 이미 헌 것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새것일 때에 약간 헌 기분이 함께했거늘 깨닫지 못한 채 헌 것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은 머무는 시간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머무를 때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오. 만일 머무름이 없는데 즐거움을 느낀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014_0687_b_08L復次若法後有滅當知初已有滅譬如人著新衣初著日若不第二日亦不應故如是乃至十歲應常新不應故而實已故當知與新俱有微故不覺故事已成方乃覺知以是故知諸法無有住時云何心住時得受樂若無住而受樂是事不然
그러므로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자가 있을 수 없건만 세속의 법에 따라 온갖 마음으로 상속하기 때문에 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느낀다고 이르는 줄 알라.
014_0687_b_14L以是故知無有實受樂者但世俗法以諸心相續故謂爲一相受樂
【문】 어찌하여야 일체의 유위법이 무상한 줄을 아는가?
014_0687_b_16L問曰云何當知一切有爲法無常
【답】 내가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이제 다시 대답하리라. 이 유위의 법은 일체가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먼저는 없다가 이제 있으며, 지금 있다가 나중에 없어지기에 무상하다.
014_0687_b_17L答曰先已說今當更答是有爲法一切屬因緣故無常先無今有故今有後無故無常
또한 무상한 모습은 항상 유위의 법을 따르며, 유위의 법은 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모든 유위의 법은 서로 침범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014_0687_b_20L復次無常相常隨逐有爲法有爲法無有增損故一切有爲法相侵剋故無常
014_0687_c_01L또한 유위의 법에는 두 가지 늙음이 항상 뒤를 따르나니, 첫째는 장차 늙는 것이요, 둘째는 무너져 늙는 것이다.
두 가지 죽음을 항상 따르나니, 첫째는 스스로 죽는 것이요, 둘째는 남이 죽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유위의 법은 무상한 줄을 알 수 있다.
014_0687_b_22L復次有爲法有二種老常隨逐故一者將老二者壞老二種死常隨逐故一者自死二者他殺以是故知一切有爲法皆無常
유위의 법 가운데서 마음의 무상함은 가장 알기 쉬우니,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범부들은 가끔 몸이 무상한 줄은 아나, 마음이 무상한 줄은 알지 못한다. 가령 어떤 범부는 ‘몸은 항상하다’고 말하면서 더욱이 마음을 항상한 것으로 삼는데, 이는 큰 미혹이다. 왜냐하면 몸은 10년 또는 20년 동안 머무를 수 있지만, 이 마음은 일월(日月)과 시각[時頃]으로 잠깐 잠깐 지나가 생하고 멸함이 각각 다르고, 생각 생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생하려 하니 벌써 생과는 달라졌고, 멸하려 하니 벌써 멸과는 달라지니, 마치 환술과 같아 진실한 모습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
014_0687_c_02L於有爲法中心無常最易得如佛說凡夫人或時知身無常而不能知心無常若凡夫言身有常猶差以心爲常是大惑何以故身住或十歲二十歲心日月時頃須臾過去生滅各異念不停欲生異生欲滅異滅如幻事實相不可得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마음이 무상한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념처(心念處)이다.
014_0687_c_09L如是無量因緣故知心無常是名心念處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이 마음은 누구에게 속했으며, 누가 이 마음을 부리는가?’ 한다. 이렇게 관찰하고는 주재자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일체의 법은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자재(自在)하지 못하고, 자재하지 못하기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에 나가 없다. 나가 없다면 누가 이 마음을 부릴 수 있겠는가?
014_0687_c_10L行者思惟是心屬誰使是心觀已不見有主一切法因緣和合故不自在不自在故無自無自性故無我若無我誰當使是
【문】 응당 나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능히 몸을 부리니, 역시 나가 있어서 능히 마음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국왕이 장수를 부리고, 장수는 병사를 부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당 나가 있어서 마음을 부리고, 마음이 있어 몸을 부리게 되는 것이니, 5욕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까닭이다.
014_0687_c_14L問曰應有我何以故心能使身應有我能使心譬如國主使將將使如是應有我使心有心使身爲受五欲樂故
또한 제각기 나의 마음이 있는 까닭에 실제로 나가 있는 줄 안다. 만일 몸에 대해 마음이 뒤바뀌어 나로 착각하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에 남의 몸에 대하여는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가?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제각기 나가 있는 줄 안다.
014_0687_c_17L復次各各有我心故知實有我若但有身心顚倒故計我者以故不他身中起我以是相故知各各有我
【답】 만일 마음이 몸을 부리고 나가 있어 마음을 부린다면, 응당 다시 나를 부리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다시 나를 부리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끝도 없다.7)
또한 나를 부리는 자가 다시 있다면 두 개체의 정신이 있을 것이요, 만일 다시 나가 없고 나가 마음을 부릴 뿐이라면 또한 마음만이 몸을 부려야 할 것이다.
014_0687_c_20L答曰若心使身有我使心應更有使我者若更有使我者是則無窮又更有使我者則有兩神若更無我但我能使心亦應但心能使身
014_0688_a_01L만일 그대가 마음을 정신에 속한다고 한다면, 마음을 제하면 정신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만일 아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능히 마음을 부리겠는가? 만일 정신에 앎의 모습이 있다면 어찌 마음을 필요로 하겠는가?
014_0687_c_23L若汝以心屬神除心則神無所知若無所知云何能使心若神有知相復何用心
이런 까닭에 마음만이 의식의 모습이어서 스스로 능히 몸을 부리는 것이요, 정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치 불의 성질이란 능히 물건을 태우는 것이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688_a_03L以是故知但心是識相故自能使不待神也如火性能燒物不假於
【문】 불에는 비록 태우는 힘이 있기는 하나 사람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마음에 비록 의식의 모습이 있으나 정신이 아니면 부리지 못할 것이다.
014_0688_a_05L問曰火雖有燒力非人不用心雖有識相非神不使
【답】 모든 법은 모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정신은 모습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그대가 비록 숨의 출입이나 고ㆍ낙 등을 느끼는 것으로 정신의 모습이라 여기려 하나 이는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호흡의 출입 등은 몸의 모습이요, 고와 낙을 느끼는 것은 마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몸과 마음의 모습을 정신의 모습이라 하겠는가?
014_0688_a_06L答曰諸法有相故是神無相故無汝雖欲以氣息出苦樂等爲神相是事不然何以故出入息等是身相受苦樂等是心相云何以身心爲神相
또한 때로는 불 스스로가 능히 태워서 사람을 기다리지 않거늘 다만 이름을 붙이기 위하여 사람이 태운다고 말한다는 것이니, 그대의 논리는 틀렸다. 왜냐하면 정신이 곧 사람이니, 사람으로 사람을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014_0688_a_10L復次或時火自能燒不待於人但以名故名爲人汝論墮負處何以故神則是人應以人喩人
또한 그대가 말하기를 “나라는 마음이 저마다 있으므로 실제로 나가 있는 줄로 안다. 다만 몸과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나라고 계교한다고 한다면 어째서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가?” 한다. 하지만 그대는 나 있음과 나 없음의 이치도 알지 못한 채 “어째서 남의 몸에 대하여는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가?”라며 묻는구나. 내 몸이나 남의 몸이 모두가 나로부터 있는 것이나 나라는 것은 역시 얻을 수 없다. 물질적 모습인지 혹은 비물질적 모습인지, 항상한지 혹은 무상한지, 끝이 있는지 혹은 끝이 없는지, 가는 자가 있는지 혹은 가는 자가 없는지, 아는 자가 있는지 혹은 아는 자가 없는지, 짓는 자가 있는지 혹은 짓는 자가 없는지, 자재로운 자인지 혹은 자재치 못한 자인지 등 이렇듯 갖가지에서 나란 모습을 얻을 수 없으니, 앞의 「아문품(我聞品)」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4_0688_a_13L又復汝言各各有我心知實有我若但有身心顚倒故計我者何以不他身中起我汝於有我無我未了而問何以不他身中起我自身他身皆從我有我亦不可得色相若無色相若常無常有邊無邊有去者不去者有知者不知者有作無作者有自在者不自在者如是等我相皆不可得如上「我聞品」中說
이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모든 법이 화합의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나라고 이름 지을 만한 실제의 법이 없다고 관찰하니, 이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
014_0688_a_21L如是等種種因緣觀諸法和合因緣無有實法有我是名法念處
이 4념처에 세 종류가 있으니, 성념처(性念處)ㆍ공념처(共念處)ㆍ연념처(緣念處)이다.
014_0688_a_23L是四念處有三種性念處共念處緣念處
014_0688_b_01L무엇이 성념처인가? 몸을 관찰하는 지혜를 신념처(身念處)라 하고, 모든 느낌을 관찰하는 지혜를 수념처(受念處)라 하고, 모든 마음을 관찰하는 지혜를 심념처(心念處)라 하고, 모든 법을 관찰하는 지혜를 법념처(法念處)라 하나니, 이것이 성념처이다.
014_0688_a_24L云何爲性念處觀身智慧是身念處觀諸受智慧是名受念處觀諸心智是名心念處觀諸法智慧是名法念處是爲性念處
무엇이 공념처인가? 몸을 으뜸으로 하여 인연으로 생기는 도법이 유루인가, 혹은 무루인가를 관찰하는 것이 신념처(身念處)이다.
느낌ㆍ마음ㆍ법을 으뜸으로 하여 인연으로 생기는 도법이 유루인가 혹은 무루인가 관찰하는 것을 수심법(受心法)의 염처(念處)라 한다. 이것이 공념처이다.
014_0688_b_04L云何名共念處觀身爲首因緣生道若有漏若無漏是身念處觀受觀心觀法爲首因緣生道若有漏若無漏是名受法念處爲共念處
무엇이 연념처(緣念處)인가? 모든 색법(色法), 이른바 10입(入)과 법입(法入) 중 일부분을 신념처라 하며, 여섯 가지 느낌, 즉 눈의 닿임으로 생긴 느낌과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닿임으로 생긴 느낌을 수념처라 하며, 6식인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의식을 심념처라 하며, 생각[想衆]과 지어감[行衆]과 세 가지 무위(無爲)를 법념처라 한다. 이것이 연념처이다.
014_0688_b_08L云何爲緣念處一切色法所謂十入及法入少分是名身念處六種受眼觸生受觸生是名受念處六種識眼識意識是名心念處想衆行衆及三無爲是名法念處是名緣念處
이 성념처는 지혜의 성품이기 때문에 모양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대할 수도 없다.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다. 유루에는 과보가 있고 무루에는 과보가 없거니와 모두가 유위의 인연으로 생기어 3세(世)에 속하고, 이름에 속하며, 바깥 경계[外入]에 속한다.
지혜로써 관찰하여 유루는 끊어지는 것임을 알고 무루는 끊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며, 유루는 끊을 수 있는 줄 알고 무루는 끊을 수 없음을 안다.
이 닦아야 할 법은 곧 무구[無垢]이니, 결과이기도 하고 결과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체는 느낄 수 있는 법이 아니고 4대(大)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위[上]가 있는 법이자 유루의 염처(念處)이니, 여기에 무루의 염처가 있다.
이것은 모두 서로 대응하는 원인이 있다.
014_0688_b_13L是性念處智慧性故無色不可見無對有漏或無漏有漏有報無漏無報有爲因緣生三世攝名攝外入攝慧知有漏是斷知無漏非斷知有漏是可斷無漏非可斷是修法是無垢果亦有果一切非受法非四大造上法有漏念處是有無漏念處是非皆是相應因
4념처는 여섯 종류의 선(善) 가운데서 한 가지인 행중선(行衆善)의 일부를 포섭하고, 행중선의 일부는 4념처를 포섭한다.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는 번뇌[漏] 사이에서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014_0688_b_21L四念處攝六種善中一種行衆善分行衆善分攝四念處不善無記漏中不相攝
014_0688_c_01L혹은 4념처가 유루 아닌 것도 있고, 혹은 유루이면서 4념처 아닌 것도 있으며, 혹은 4념처가 유루인 것도 있고, 혹은 4념처가 아니면서 또한 유루가 아닌 것도 있다.
4념처가 유루 아닌 것이라 함은 무루의 성품인 4념처요, 유루이면서 4념처 아니라 함은 유루의 성품인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유루의 부분이요, 4념처이면서 유루의 법이기도 하다 함은 유루의 성품인 4념처요, 4념처도 아니고 유루의 법도 아니라 함은 무루의 성품인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무루의 법을 말한다.
014_0688_b_23L或有四念處非有漏或有漏非四念處或有四念處亦有漏或非四念處亦非有漏四念處非有漏者是無漏性四念處有漏非四念處者除有漏性四念處餘殘有漏分四念處亦有漏法者漏性四念處非四念處非有漏法者除無漏性四念處餘殘無漏法
무루의 네 구절도 또한 이와 같다.
014_0688_c_07L無漏四句亦如是
공념처(共念處)라 함은 이 공념처 가운데 몸과 입의 업은 색(色)이고 나머지는 색이 아니니, 일체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다. 혹은 유루이고 혹은 무루이나 모두가 유위이다.
유루의 염처는 과보가 있고, 무루의 염처는 과보가 없다. 인연으로 생겨난 법으로서 3세에 속한다. 몸과 입의 업은 색에 포섭되고 나머지는 명칭에 포섭되며, 마음ㆍ뜻ㆍ의식은 내입(內入)에 포섭되고 나머지는 외입(外入)에 포섭된다.
지혜로써 유루가 끊어짐을 알며, 무루는 끊어지지 않음을 안다. 또한 유루는 끊을 수 있고 무루는 끓을 수 없음을 아나니, 모두가 닦을 법[修法]으로 모두가 때 없음[無垢]이다. 이는 결과이자 또한 결과를 소유하기도 한다.
일체가 느낌의 법[受法]은 아니니, 몸과 입의 업은 4대로 지어진 것이요, 나머지는 4대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모두가 위가 있는 법으로서 유루의 염처가 된다.
여기에 무루의 염처가 있으니, 이것은 몸과 입의 업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이 있는 것은 아니고, 서로 응하는 인이 아니며, 나머지는 서로 응하는 인이다.
014_0688_c_08L共念處是共念處中身口業是爲色餘殘非色一切不可皆無對或有漏或無漏皆有爲漏念處有報無漏念處無報因緣生三世攝口業色攝餘殘名攝心意內入攝餘殘外入攝以慧知有漏是斷知無漏非斷知有漏可斷無漏非可斷皆修法皆無垢是果亦有果一切非受法口業是四大造餘殘非四大造皆有上法有漏念處是有無漏念處是非有口業及心不相應諸行是非相應因餘殘是相應因
5선분(善分)은 4념처를 포섭하고, 4념처는 또한 5선분을 포섭하거니와 나머지는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는 누법(漏法)에 속하지 않는다.
014_0688_c_19L五善分攝四念處四念處亦攝五善餘殘不相攝不善無記漏法不攝
014_0689_a_01L혹은 4념처가 유루가 아닌 것도 있고, 혹은 유루이면서 4념처가 아닌 것도 있으며, 혹은 4념처가 유루이기도 한 것도 있고, 혹은 4념처도 아니고 유루도 아닌 것이 있다.
4념처가 유루가 아닌 것이라 함은 무루의 4념처를 이르는 말이요, 유루이면서 4념처가 아니라 함은 유루의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유루의 법이요, 4념처가 유루이기도 하다 함은 유루의 4념처요, 4념처도 아니요 유루도 아니라 함은 허공, 수연진(數緣盡)과 비수연진(非數緣盡)이다.
014_0688_c_21L或有四念處非有漏或有漏非四念或有四念處亦有漏或非四念處亦非有漏有四念處非有漏者無漏四念處有漏非四念處者除有漏四念處餘殘有漏法有四念處亦有漏者有漏四念處非四念處非有漏者數緣盡非數緣盡
혹은 4념처가 무루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면서 4념처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4념처가 무루이기도 하고, 혹은 4념처가 아니기도 하고 무루가 아니기도 하다.
혹은 4념처가 무루이기도 하다 함은 유루의 4념처요, 무루이면서 4념처가 아니라 함은 세 가지 무위법이요, 4념처가 또한 무위법이라 함은 무루의 4념처를 말한다.
4념처도 아니고 무루도 아니라 함은 유루의 4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유루법을 말한다.
014_0689_a_05L或有四念處非無漏或有無漏非四念處或有四念處亦無漏或非四念處非無漏有四念處非無漏者有漏四念處有無漏非四念處者三無爲法有四念處亦無漏者無漏四念處非四念處非無漏者除有漏四念處餘殘有漏法
이것이 연념처이다.
연념처(緣念處) 가운데 한 염처는 색(色)이며 세 염처는 색이 아니다.
세 가지는 볼 수 없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볼 수 있는 것이란 1입(入)이요, 볼 수 없는 것이란 9입 및 나머지 1입의 일부분[少分]이다.
세 가지는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대할 수 있는 것은 10입이며, 대할 수 없는 것은 나머지 1입의 일부분이다.
014_0689_a_11L緣念處緣念處中一念處是色三念處非色三不可見一當分別身念處有可見有不可見可見者一入不可見者九入及一入少分三無對一當分別身念處有對十入無對一入少
신념처에서 유루는 10입과 1입의 일부분이요, 무루는 1입의 일부분이다.
014_0689_a_17L身念處有漏十入及一入少分一入少分
수념처에서 유루의 의근(意根)과 상응하는 것은 유루요, 무루의 의근과 상응하는 것은 무루이다.
014_0689_a_18L受念處有漏意相應有漏無漏意相應是無漏
심념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014_0689_a_19L心念處亦如是
법념처에서 유루의 상온[衆]과 행온은 유루요, 무루의 상온과 행온과 무위법은 무루이다.
014_0689_a_20L法念處有漏想衆行衆是有漏無漏想衆行衆及無爲法是無漏
세 가지 무위가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상온과 행온은 유위요, 세 가지 무위법은 무위이다.
014_0689_a_21L是有爲一當分別法念處想衆行衆是有爲三無爲法是無爲
014_0689_b_01L착하지 못한 신념처와 착한 유루의 신념처는 과보가 있고, 무기의 신념처와 무루는 보가 없다. 수념처ㆍ심념처ㆍ법념처 역시 그와 같다.
014_0689_a_23L不善身念處及善有漏身念處是有報無記身念處及無漏是無報受念處心念處法念處亦如是
셋은 인연에서 생긴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유위는 인연에서 생기고, 무위는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014_0689_b_03L三從因緣生一當分別法念處有爲從因緣生無爲不從因緣生
셋은 3세(世)에 포섭된다. 마땅히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유위는 3세에 포섭되고, 무위는 3세에 포섭되지 않는다.
014_0689_b_05L三三世攝一當分別法念處有爲是三世攝無爲非三世攝
한 염처는 색(色)에 포섭되고, 셋은 명(名)에 포섭된다.
014_0689_b_06L一念處攝色三攝名
한 염처는 내입(內入)에 포섭되고 수념처와 법념처는 외입(外入)에 포섭된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는 내입에 포섭되기도 하고 외입(外入)에 포섭되기도 한다.
다섯 가지 내입은 내입에 포섭되고, 다섯 가지 외입 및 나머지 일입의 일부분은 외입에 포섭된다.
014_0689_b_07L一念處內入攝受念法念處外入攝一當分別身念處或內入攝或外入攝五內入是內入五外入及一入少分是外入攝
지혜로써 아나니, 유루는 단견(斷見)이고 무루는 단견이 아니며, 유루는 끊을 수 있고 무루는 끊을 수 없는 것이다.
014_0689_b_10L慧知有漏者是斷見無漏者非斷有漏者可斷無漏者非可斷
닦는 법[修]을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선(善)은 마땅히 닦아야 하고,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는 닦지 말아야 한다. 수념처ㆍ심념처 역시 그와 같다.
법념처에서 유위의 착한 법은 닦아야 하고, 불선과 무기와 수연진(數緣盡)8)은 닦지 말아야 한다.
014_0689_b_12L修當分別身念處應修不善及無記應修心念處亦如是法念處有爲善法應修不善及無記及數緣盡應修
때[垢]를 분별하건대, 신념처가 숨어 없어지는 것은 때요, 숨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때가 아니다. 수ㆍ심ㆍ법의 염처 역시 그와 같다.
014_0689_b_16L垢當分別身念處隱沒是垢隱沒非垢法念處亦如是
3념처는 결과[果]이면서 또한 과보를 지니는 것이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는 혹은 결과이면서 결과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결과이면서 결과를 가지기도 하고, 혹은 결과이기도 하고 결과를 가지지 않기도 한 것이 있다.
수연진은 결과이면서 결과를 가지지 않은 것이요, 유위의 법념처는 결과이면서 결과를 가지기도 한 것이요, 허공과 비수연진(非數緣盡)9)은 결과도 아니면서 결과를 가지지도 않은 것이다.
014_0689_b_17L三念處是果亦有果一當分別法念處果非有果或果亦有果或非果非有數緣盡是果非有果有爲法念處是果亦有果虛空非數緣盡是非果非有果
세 가지 불수(不受)를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몸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수(受)이고, 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은 불수(不受)이다.
014_0689_b_22L三不受一當分別身念處身數是受不墮身數非受
014_0689_c_01L세 가지가 4대로 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신념처에서 9입과 2입의 일부는 4대로 지어진 것이고, 1입의 일부는 4대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014_0689_b_23L三非四大一當分別身念處九入及二入少四大造一入少分非四大造
세 염처에 위가 있다. 일단 분별하건대, 법념처에서 유위, 허공과 비수연진은 위가 있고, 열반은 위가 없다.
014_0689_c_02L三念處有上一當分別法念處有爲及虛非數緣盡是有上涅槃是無上
4념처는 혹은 유루이면서 유(有)이고, 무루이면서 비유(非有)이다.
014_0689_c_04L念處若有漏是有若無漏是非有
2념처는 상응하는 인[相應因]이요 1념처는 상응하지 않는 인[不相應因]임을 일단 분별하건대, 수념처와 심념처는 상응하는 인이요, 신념처는 상응하지 않는 인이다.
법념처에서 상온 및 상응하는 행온은 상응하는 인이요, 나머지는 상응하지 않는 인이다.
014_0689_c_05L念處相應因一念處不相應因一當分別受念處心念處相應因身念處不相應因法念處想衆及相應行衆是相應因餘殘是不相應因
4념처의 부분이 여섯 가지 선법(善法)을 포섭하고, 여섯 가지 선법이 또한 4념처분을 포섭한다. 불선분(不善分)ㆍ무기분(無記分)도 그와 같아서 종류에 따라 서로 포섭한다.
014_0689_c_09L四念處分攝六善法六善法亦攝四念處分善分無記分亦如是隨種相攝
세 가지 누(漏)가 1념처분에 포섭되고, 1념처분이 다시 세 가지 누에 포섭되며, 유루가 4념처분에 포섭되고, 4념처분이 다시 유루에 포섭되며, 무루가 4념처분에 포섭되고, 4념처분이 다시 무루에 포섭된다.
014_0689_c_11L三漏攝一念處分一念處分亦攝三漏漏攝四念處分四念處分亦攝有漏無漏攝四念處分四念處分亦攝無
이러한 이치들은 「천난품(千難品)」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如是等義「千難」中廣說
【문】 무엇을 안의 몸이라 하며, 무엇을 밖의 몸이라 하는가? 안팎의 몸은 말할 때 이미 다 포섭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안팎의 몸의 관법을 말하는가?
014_0689_c_15L問曰何等爲內身何等爲外身如內身外身皆已攝盡何以復說內外身觀
【답】 안이란 자기의 몸이요, 밖이란 남의 몸이다.
014_0689_c_17L答曰名自身外名他身
자기의 몸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몸 안의 부정함이요, 둘째는 몸 밖의 가죽ㆍ털ㆍ손발톱ㆍ머리카락 등이다.
014_0689_c_18L自身有二種一者 身內不淨二者身外皮髮等
또한 수행자는 시체가 부풀어 터진 것을 보면 그 모습을 취하여 자신을 관찰하기를 “자신의 몸도 그러한 모습이고 그러할 것이니, 나는 이러한 법을 아직 여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의 죽은 시체는 밖의 몸이요, 수행자의 몸은 안의 몸이다.
수행자가 가끔 단정한 여자를 보고 마음이 집착되면 즉시에 그 몸이 더러운 것이라고 관찰하나니, 이것이 밖의 몸이요, 자신의 몸도 역시 그러하리라고 관찰하는 것은 안의 몸이다.
014_0689_c_19L行者觀死屍胮取是相觀身亦如是相如是事我未離此法死屍是外身行者身是內身如行者或時見端政女人心著卽時觀其身不淨是爲外自知我身亦爾是爲內
014_0690_a_01L또한 눈[眼] 등 다섯 감관[情]은 안의 몸이요, 색 등 5진(塵)는 밖의 몸이며, 4대는 안의 몸이요, 4대로 지어진 색은 밖의 몸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자리는 안의 몸이요,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곳은 밖의 몸이며, 자기의 몸과 눈 등 모든 감관은 안의 몸이요, 처자ㆍ재보ㆍ전답ㆍ주택 등 사용되는 물건들은 밖의 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물질의 법[色法]이 모두 신념처이기 때문이다.
014_0690_a_01L復次眼等五情爲內身色等五塵爲外身四大爲內身四大造色爲外身覺苦樂處爲內身不覺苦樂處爲外自身及眼等諸根是爲內身妻子財寶田宅所用之物是爲外身所以者何一切色法盡是身念處故
수행자는 이 안의 몸에서 깨끗하고 항상하고 나 있고 즐거움을 구하되 자세히 구하여도 도무지 얻지 못하니, 먼저 말한 관법에서와 같다.
안으로 관찰하여 얻을 수 없으니 행여 밖에 있을까 한다. 왜냐하면 밖의 물건은 중생들의 집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밖의 몸을 관찰할 때에도 얻을 수 없다.
014_0690_a_07L行者求是內身有淨審悉求之都不可得如先說觀法內觀不得或當有耶何以故外物是一切衆生著處外身觀時亦不可得
그러므로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안으로 관찰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밖에 혹 있을까’ 하여 밖으로 관하나 역시 얻지 못한다.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잘못 관찰했다면 이제 다시 안팎을 통틀어 관찰하리라’ 한다.
안을 관찰하고 밖을 관찰하는 것은 별상(別相)이요, 동시에 함께 관찰하는 것은 총상(總相)이다.
014_0690_a_11L復作是念我內觀不得外或有耶外觀亦復不自念我或誤錯今當摠觀內外觀外是爲別相一時俱觀是爲摠
총관과 별관으로도 모두 얻을 수 없으면 관할 바가 이미 끝난 것이다.
摠觀別觀了不可得所觀已竟
【문】 신념처로 안팎을 얻어야 한다면, 모든 감각[受]은 외입에 속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안의 느낌[內受]과 밖의 느낌[外受]을 분별하는가?
014_0690_a_15L身念處可得內外諸受是外入攝云何分別有內受外受
【답】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느낌[受]이 있음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이다. 몸의 느낌은 밖이요, 마음의 느낌은 안이다.
또한 다섯 의식[識]과 상응하는 느낌은 밖이요, 제6 의식과 상응하는 것은 안이다.
12입의 인연으로 생긴 모든 느낌에서 안의 6입의 영역[分]에 생긴 느낌은 안이요, 밖의 6입의 영역에 생긴 모든 느낌은 밖이며, 거친 느낌은 밖이요, 미세한 느낌은 안의 것이다.
014_0690_a_17L答曰佛說有二種受身受心受身受是外心受是復有五識相應受是外意識相應受是內十二入因緣故諸受生內六入分生受是爲內外六入分生受是爲外麤受是爲外細受是爲內
014_0690_b_01L두 가지 괴로움이 있으니, 안의 괴로움[內苦]과 밖의 괴로움[外苦]이다.
안의 괴로움에 두 종류가 있으니,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이다. 몸의 괴로움이란, 몸이나 머리의 통증 등 404종의 병으로서 이것을 몸의 괴로움이라 한다. 마음의 괴로움이란, 근심ㆍ걱정ㆍ성냄ㆍ두려움ㆍ질투ㆍ의심 등이니, 이런 것들이 마음의 괴로움이다. 이 두 가지 괴로움이 합쳐서 안의 괴로움이 된다.
밖의 괴로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왕[王者]ㆍ자신을 압도하는 자ㆍ악적ㆍ사자ㆍ호랑이ㆍ독사 등이 핍박해서 해치는 일이요, 둘째는 바람ㆍ비ㆍ추위ㆍ더위ㆍ우레ㆍ번개ㆍ벼락 등이니, 이 두 가지 괴로움을 밖의 느낌이라 한다.
즐거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역시 이와 같다.
014_0690_a_22L二種內苦外苦內苦有二種身苦心苦身苦者身痛頭痛等四百四種病爲身苦心苦者嫉妒是等是爲心苦二苦和合是爲內苦外苦有二種一者王者勝己惡賊虎狼蚖蛇等逼害二者風雨寒熱雷電礕礰等是二種苦名爲外受樂受不苦不樂受亦如是
또한 안의 법을 반연하는 것을 안의 느낌이라 하고, 밖의 법을 반연하는 것을 밖의 느낌이라 한다.
014_0690_b_07L復次緣內法爲內受緣外法是爲外受
또한 108가지 느낌을 안의 느낌이라 하고, 나머지는 밖의 느낌이라 한다.
014_0690_b_08L復次一百八受是爲內受餘殘是外受
【문】 마음은 내입에 속하거늘 어찌하여 밖의 마음을 관하라 하는가?
014_0690_b_09L問曰是內入攝云何言觀外心
【답】 마음이 비록 내입에 속하기는 하나 밖의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밖의 마음이라 하고, 안의 마음을 반연하기 때문에 안의 마음이라 한다. 의식은 안의 마음이요, 5식은 밖의 마음이다.
마음을 거두어 선에 드는 것은 안의 마음이요, 산란한 마음은 밖의 마음이다. 안의 5개(蓋)와 안의 7각지[覺]에 상응하는 마음은 안의 마음이요, 밖의 5개와 밖의 7각지에 상응하는 마음은 밖의 마음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안팎을 분별하나니, 이것이 안팎의 마음이다.
014_0690_b_10L答曰心雖內入攝緣外法故名爲外心緣內法故是爲內心意識是內心五識是外攝心入禪是內心散亂心是外心內五蓋內七覺相應心是爲內心五蓋外七覺相應心是爲外心如是等種種分別內是爲內外心
【문】 법념처는 외입에 속하거늘 어찌하여 안의 법을 관찰한다 하는가?
014_0690_b_16L問曰法念處是外入攝云何言觀內法
【답】 느낌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에서 능히 안의 법을 반연하는 마음에 속하는 법은 안의 법이요, 밖의 법을 반연하는 마음에 속하는 법 및 무위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은 밖의 법이 된다.
014_0690_b_17L除受餘心數法能緣內法心數法是內法緣外法心數法及無爲心不相應行是爲外法
또한 의식으로 반연하는 법을 안의 법이라 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연에 의하여 의식이 난다” 하셨다. 여기에서 느낌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속하는 법은 안의 법이요, 그 밖의 심불상응행과 무위의 법은 밖의 법이다.
014_0690_b_20L復次意識所緣法是名爲法如佛所說依緣生意識中除受餘心數法是爲內法餘心不相應行及無爲法是爲外法
4정근(正勤)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성정근(性正勤)이요, 둘째는 공정근(共正勤)이다.
014_0690_b_23L四正懃有二種一者性正懃二者共正懃
014_0690_c_01L성정근이라 함은 도를 위하는 까닭에 네 가지 정진이 있으니, 곧 두 가지 착하지 못한 법을 막고, 두 가지 착한 법을 모으는 것이다.
014_0690_c_01L正懃者爲道故四種精進遮二種不善法集二種善法
4념처의 관법을 행할 때에 게으른 마음이 생기면 5개(蓋) 등의 번뇌가 마음을 덮고, 다섯 가지 믿음 등 선근을 여읜다. 이때 착하지 못한 법이 이미 생겼거든 끊기 위해서, 아직 생기지 않았거든 생기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한다. 믿음 등 선근이 아직 생기지 않았거든 생기게 하기 위해서, 이미 생겼거든 더욱 늘어나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한다. 정진의 법이 4념처에 많이 있기 때문에 정근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014_0690_c_03L四念處觀時若有懈怠心五蓋等諸煩惱覆心離五種信等善根時不善法若已生爲斷故未生不令生故懃精進信等善根未生爲生故已生爲增長故懃精進進法於四念處多故得名正懃
【문】 무슨 까닭에 일곱 종류의 법 가운데서 이 네 가지를 정근이라 하고, 나중의 여덟 가지는 정도(正道)라 하면서 나머지의 것은 정(正)이라 부르지 않는가?
014_0690_c_08L問曰何以故於七種法中此四名正懃八名正道餘者不名
【답】 네 가지 정진은 마음이 용맹하게 발동(發動)하여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정근이라 하고, 도취(道趣)의 법을 행하는 까닭에 삿된 법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여 정도라 한다.
014_0690_c_10L答曰四種精心勇發動畏錯誤故言正懃行道趣法故畏墮邪法故言正道
성(性)이란 네 가지 정진의 성품이요, 공(共)이란 네 가지 정진의 성품을 으뜸으로 삼은 인이연으로 생한 도이다.
014_0690_c_12L性者四種精進性共者四種精進性爲首因緣生道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 색이거나 혹은 무색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4_0690_c_13L若有漏若無漏若有色若無色如上
4정근을 행할 때에 마음이 조금 산란해지는데, 선정으로 마음을 거두기 때문에 여의족(如意足)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좋은 음식에 소금이 적으면 맛이 없다가 소금을 넣으면 맛이 구족해져 뜻에 맞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사람이 두 다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곁들여 좋은 말이나 좋은 수레를 얻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듯이, 수행자 역시 이와 같아서 4념처의 진실한 지혜와 4정근 가운데 정정진을 얻으면 정진하는 까닭에 지혜가 더욱 많아진다. 이에 정의 힘이 조금 약해도 네 가지 선정을 얻어 마음을 거두기 때문에 지혜와 선정의 힘이 균등해져서 원하는 일을 모두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여의족이라 한다.
014_0690_c_15L行四正懃時心小散故以定攝心故名如意足譬如美食少鹽則無味得鹽則味足如意又如人有二足得好馬好車如意所至行者如是得四念處實智慧四正懃中正精進進故智慧增多定力小弱得四種定攝心故定力等所願皆得故名如意足
【문】 4념처와 4정근에도 이미 선정이 있거늘 어찌하여 여의족이라 하지 않는가?
014_0690_c_22L問曰四念處四正懃中已有定何以故不名如意足
【답】 거기에도 비록 정이 있기는 하나 지혜와 정진의 힘만 많고 선정의 힘은 약하기 때문에 수행자는 뜻하는 대로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
014_0690_c_23L答曰彼雖有定智慧精進力多定力弱故行者不得如意願
014_0691_a_01L네 가지 선정이라 함은 욕(欲)10)이 주가 되어 선정을 얻고, 정진(精進)11)이 주가 되어 선정을 얻는다. 다시 선정의 인연으로 도가 생겨나니,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의 마음12)이 주가 되어 선정을 얻고, 사유(思惟)13)가 주가 되어 선정을 얻는다.
선정의 인연으로 도가 생겨나니, 유루이거나 혹은 무루의 착한 5중(衆)과 함께하는 것을 공여의라 하고, 욕(欲)ㆍ주(主)ㆍ등(等)의 네 가지 선정을 성여의라 한다.
014_0691_a_02L四種定者欲爲主得定精進爲主得定定因緣生道若有漏若無心爲主得定思惟爲主得定定因緣生道若有漏若無漏共善五衆爲共如意欲主等四種定名爲性如
4정근ㆍ4여의족은 성념처와 공념처 가운데에서 자세히 분별해 설명하는 바와 같다.
014_0691_a_07L四正懃四如意足如性念處共念處中廣分別說
5근(根)이라 했는데, 도(道)와 조도(助道)의 착한 법을 믿으니, 이를 신근(信根)이라 한다. 수행자가 이 도와 조도법을 행할 때에 부지런히 구하여 쉬지 않는 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 하며, 도와 조도법만을 생각할 뿐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을 염근(念根)이라 하며, 일심으로 생각해 흩어지지 않는 것을 정근(定根)이라 하며, 도와 조도법을 위하여 무상 등의 열여섯 가지 행(行)을 관찰하는 것을 혜근(慧根)이라 한다.
014_0691_a_08L五根者信道及助道善法是名信根行者行是道助道法時懃求不息是名精進根念道及助道法更無他念是名念根一心念不散名定根爲道及助道法觀無常等十六行是名慧根
이 5근이 자라나서 번뇌에 파괴되지 않는 것을 역(力)이라 하나니, 5근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14_0691_a_13L是五根增長不爲煩惱所壞是名爲力如五根中說
이 5근ㆍ5력은 행온[行衆]에 속하여 항상 함께 서로 응하나니, 심행(心行)ㆍ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을 따르며, 마음과 함께 생겨나고 마음과 함께 머무르며 마음과 함께 사라진다. 만일 이런 법이 있으면 반드시 바른 선정에 들고, 이런 법이 없다면 반드시 삿된 선정에 든다.
014_0691_a_14L是五五力行衆中攝常共相應隨心行心數法共心生共心住共心滅若有是法心墮正定若無是法心墮邪定
7각지의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4_0691_a_17L如先說義
【문】 앞에서 뜻을 설명하기는 했으나 아비담의 가르침으로 설명한 것은 아니다.
014_0691_a_18L問曰先雖說義非以阿毘曇法說
014_0691_b_01L【답】 그렇다면 이제 마땅히 설명하리라. 4념처는 그 의미가 곧 7각분(覺分)이니, 무색이고, 볼 수 없고, 대할 수 없고, 무루이고, 유위이고, 인연으로 생긴 것이고, 삼계에 속하고, 이름에 속하고, 외입(外入)에 속한다.
지혜로써 견해를 끊는 것이 아니며,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닦는 법은 때[垢] 없는 법이 된다.
이는 과위이며, 또한 결과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느낌의 법이 아니며, 4대(大)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위가 있는 법도 아니며, 상응하는 인[相應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두 선분[二善分]14)은 7각분에 포섭되고, 7각분은 두 선분에 포섭되나, 불선(不善)과 무기법(無記法)과 유루법(有漏法)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루의 두 부분[二分]이 7각분을 포섭하고, 7각분이 무루의 두 부분을 포섭하나니, 이러한 갖가지는 「천난품(千難品)」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다.
014_0691_a_19L答曰今當更說如四念處是七覺分無色不可見無對無漏有爲因緣生三世攝名攝外入攝非斷見不可斷修法無垢法是果亦有果非受法非四大造有上法相應因二善分攝七覺分七覺分攝二善分不善無記有漏法不相無漏二分攝七覺分七覺分攝無漏二分如是等種種如「千難」中廣說
8성도분(聖道分)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4_0691_b_04L八聖道分如先說
정견(正見)이 곧 지혜[慧]이다. 이는 4념처와 혜근(慧根)과 혜력(慧力)과 택법각분(擇法覺分)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4_0691_b_05L正見是智慧如四念慧根慧力擇法覺中說
정사유(正思惟)는 4제를 관찰할 때에 무루의 마음에 상응하며, 사유가 발동하여 지각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014_0691_b_06L正思惟四諦時無漏心相應思惟動發覺知籌量
정방편(正方便)은 4정근과 정진근과 정진력과 정진각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14_0691_b_08L正方便如四正懃精進根精進精進覺中說
정념(正念)은 염근(念根)과 염력(念力)과 염각분(念覺分)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14_0691_b_09L正念如念根念力覺中說
정정(正定)은 여의족(如意足)과 정근(定根)과 정력(定力)과 정각분[定覺]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014_0691_b_10L正定如如意足定根定力覺中說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을 이제부터 설명하리라.
正語正業正命今當說
이들은 네 가지 삿된 생활[邪命]을 제거하여 구업(口業)을 다스려서, 무루의 지혜로 그 밖의 삿된 구업을 제거하고 버리며 여읜 것을 정어(正語)라고 한다. 정업(正業)도 또한 이와 같다. 다섯 가지 삿된 생활을 무루의 지혜로써 제거해 버리고 여의는 것을 정명이라 한다.
014_0691_b_11L除四種邪命攝口業以無漏智慧除餘口邪業是名正語正業亦如是種邪命以無漏智慧除是爲正
【문】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삿된 생활인가?
問曰何等是五種邪命
【답】 첫째는 수행자가 이양을 위하여 거짓으로 특이한 모습을 꾸며 나타내는 것이요, 둘째는 이양을 위하여 자기의 공덕을 선전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양을 위하여 길흉을 점쳐 남에게 말해 주는 것이요, 넷째는 이양을 위하여 높은 소리로 다투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이양을 위하여 이미 얻은 공양을 자랑삼아 이야기해서 남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014_0691_b_15L答曰一者若行者爲利養故詐現異相奇特二者爲利養故自說功德三者爲利養故相吉凶爲人說四者爲利養故高聲現威令人畏敬五者爲利養故稱說所得供養以動人心
곧 삿된 인연으로 살아가는 까닭에 사명(邪命)이라 한다.
014_0691_b_20L邪因緣活命故是爲邪命
이 8정도에 세 구분이 있다. 세 가지는 계의 구분[戒分]이요, 세 가지는 선정의 구분(定分)이요, 두 가지는 지혜의 구분[慧分]이다.
014_0691_b_21L是八正道有三分三種爲戒分三種爲定分二種爲慧分
014_0691_c_01L지혜의 구분과 선정의 구분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으며, 이제 계의 구분에 대하여 설명하리라.
계의 구분은 곧 물질의 성품ㆍ볼 수 없음ㆍ대할 수 없음ㆍ무루ㆍ유위ㆍ인연생ㆍ3세(世)에 속하고 물질에 속한다.
이름에 속하거나 외입(外入)에 속하지 않으며, 견해를 끊거나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지혜로써 안다.
법을 닦음은 때[垢] 없는 법이다. 이는 과위[果]이며 또한 결과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느낌의 법이 아니고, 4대로 지어진 것ㆍ위가 있는 법ㆍ 상응하는 인(因)이 아니다.
한 선분[一善分]으로 세 정[三正]15)을 포섭하고, 세 정으로 한 선분을 포섭하며,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와 누(漏)와 유루(有漏)는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루의 한 법이 세 정을 포섭하고, 세 정이 또한 무루의 한 법을 포섭하나니, 이렇게 갖가지로 분별함은 아비담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691_b_22L慧分定分分別如先說戒分今當說戒分是色性不可見無對無漏有爲無報因緣生三世攝色攝非名攝外入攝慧知非斷見不可斷修法無垢法果亦有果非受法四大造有上法有法相應因一善分攝三正三正攝一善分不善無記有漏不相攝漏一法攝三正三正亦攝無漏一法如是等種種分別如『阿毘曇』廣說
이 37품은 초선의 경지[初禪地]에 빠짐없이 있고, 아직 이르지 않은 지위에는 36품이 있으니, 희각지(喜覺支)를 제한다.
제2선에도 36품이 있으니, 정행(正行)을 제한다.
선의 중간인 제3선과 제4선에는 35품이 있으니, 희각지와 정행을 제한다.
3무색정에는 32품이 있으니, 희각지와 정행과 정어와 정업과 정명을 제한다.
유정(有頂)에는 22품이 있으니, 7각지와 8성도분을 제한다.
욕계 중의 22품 역시 이와 같다.
014_0691_c_08L三十七品初禪地具有未到地中三十六除喜覺第二禪中亦三十六正行禪中閒第三第四禪三十五喜覺除正行三無色定中三十二喜覺正行正語正業正命有頂中二十二除七覺分八聖道分欲界中二十二亦如是
이것이 성문의 법에서 분별한 이치이다.
是爲聲聞法中分別義
【문】 마하연에서 말하는 37품의 이치는 어떠한가?
014_0691_c_15L問曰摩訶衍所說三十七品義云何
014_0692_a_01L【답】 보살마하살은 4념처를 행하여 이 안몸을 관찰하되 “무상하고 괴롭기가 마치 병 같고 종기 같다. 고깃덩어리는 썩고 문들어지며 더러운 것이 가득하여 아홉 구멍에서 흘러나오니, 이는 다니는 변소[行廁]이다”라고 본다.
이와 같이 몸은 나쁜 것만이 드러나서 하나도 깨끗한 곳이 없거늘 뼈가 버티고 살로 덮이고 힘줄이 얽히고 가죽으로 싸여 있다고 관찰한다.
몸은 또한 전생의 유루업의 인연으로 받은 것으로, 금생에 목욕과 꽃ㆍ향ㆍ의복ㆍ음식ㆍ와구ㆍ약품 등으로 이루어진 바이다. 마치 수레에 두 바퀴가 있어 소가 끄는 힘 때문에 능히 목적지에 이르듯이, 두 세상의 인연으로 몸이란 수레가 이루어지고, 의식의 소에 끌리어 두루 왕래한다.
이 몸은 4대가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마치 물거품 덩어리와 같아 허망하여 견고함이 없다.
이 몸은 무상하여 오래되면 반드시 무너진다. 이 몸의 모습은 몸 안에서도 얻을 수 없고, 밖에 있지도 않고 중간에 있지도 않다. 몸 스스로는 느끼지도 못하니, 지각도 없고 작용도 없음이 마치 담장이나 기와쪽 같다.
이 몸에는 일정한 몸의 모습도 없고, 이 몸을 만든 이도 없고, 또한 만들게 하는 자도 없으니, 이 몸은 과거[先際]나 미래[後際]나 현재[中際]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8만 털구멍마다의 벌레와 한량없는 질병과 주림ㆍ목마름ㆍ추위ㆍ더위ㆍ형벌 등이 항상 이 몸을 괴롭힌다.
014_0691_c_16L答曰菩薩摩訶薩行四念處觀是內身無常如病如癰焰聚敗壞不淨充滿九孔流出是爲行廁如是觀身惡露無一淨處骨幹肉塗筋纏皮裹先世受有漏業因緣今世沐浴華香衣服臥具醫藥等所成如車有兩輪力牽故能有所至二世因緣以成身識牛所牽周旋往反是身四大和合造如水沫聚虛無堅固是身無久必破壞是身相身中不可得不在外亦不在中閒身不自覺無知無作如牆壁瓦石是身中無定身無有作是身者亦無使作者是身先際後際中際皆不可得八萬戶虫無量諸病及諸飢渴寒熱刑殘等惱此身
014_0692_b_01L보살마하살은 몸에 대하여 이같이 관찰하고는 나의 몸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며, 자유롭지 못하여 스스로 짓거나 짓는 자가 있어 이 몸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몸의 모습은 공하여 허망한 인연으로부터 생겼고, 이 몸은 거짓으로 존재하며, 본업의 인연에 속함을 안다.
보살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의 모습은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다. 몸을 두루 관찰하건대 이 몸은 나 없고, 나 없기에 공하고, 공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기에 원(願)을 짓지 않는다.’
이렇게 관찰한다면 작위 없는 지혜의 문[無作智門]에 들어가 몸이 무작(無作)임을 알게 된다.
무작이란 다만 모든 법이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이 모든 인연이 이 몸을 짓는 자이면서 또한 허망한 전도 때문에 존재하나니, 이 인연 가운데는 또한 인연의 모습이 없으며, 이 인연에 의해 생한 것에도 또한 생하는 모습이 없다.
이와 같이 사유한다면 이 몸은 본래부터 나는 모습이 없음을 아나니, 이 몸은 무상(無相)이며 잡을 수 없다.
무생이기에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기에 무생이거늘 오직 어리석은 범부인 까닭에 일컬어 몸이라 함을 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모든 물들은 욕망[染欲]과 집착심을 여의고 항상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몸을 두루 살피니, 이와 같음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014_0692_a_09L菩薩摩訶薩觀身如是知非我身亦非他有不得自在有作及所不作是身身相空從虛妄因緣生身假有屬本業因緣菩薩自念我不應惜身命何以故是身相不合不散不來不去不生不滅不依猗循身觀是身無我無我所故空空故無男女等諸相無相故不作願如是觀者得入無作智門知身無作無作者但從諸法因緣和合生是諸因緣作是身者亦從虛妄顚倒故有是因緣中亦無因緣相是因緣生亦無生相如是思知是身從本以來無有生相知是身無相無可取無生故無相無相故無生但誑凡夫故名爲身菩薩如是觀身實相時離諸染欲著心常繫念在身循身觀如是名爲菩薩身念處
밖의 몸을 관찰하고 안팎의 몸을 관찰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014_0692_b_02L觀外身觀內外身亦如是
보살은 어떻게 모든 느낌을 관찰하는가?
014_0692_b_03L菩薩云何觀諸受
곧 안의 느낌을 관찰하건대, 이 느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혹은 괴롭고 혹은 즐겁고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이 모든 느낌은 온 자리도 없고, 멸하여 이르는 곳도 없다. 오직 허망하게 전도된 망상에서 생겼으며, 이의 과보는 전생의 업과 인연에 속한다.
이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느낌을 구하되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지도 않으니, 이 모든 느낌은 공하여 나 없고 내 것[我所] 없으며, 무상하고 무너지는 법임을 안다.
이 3세의 모든 느낌이 공ㆍ무상ㆍ무작임을 관찰하고는 해탈문(解脫門)에 들어간다.
또한 모든 느낌의 생멸을 관찰하여 모든 느낌은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도 아나니, 이와 같이 해서 불생문(不生門)에 들어간다.
모든 느낌이 불생임을 아는 까닭에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으므로 불생이다.
이와 같이 알고 나서 마음을 대상에 묶어둔다면, 괴로움ㆍ즐거움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 있을지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도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써 모든 느낌을 관찰하니, 이것이 수념처이다.
014_0692_b_04L觀內受是受有三種若苦若不苦不樂是諸受無所從來無所至但從虛誑顚倒妄想生是報屬先世業因緣是菩薩如是求諸不在過去不在未來不在現在是諸受空無我無我所無常破壞法觀是三世諸受空無相無作入解脫亦觀諸受生滅亦知諸受不合不散不生不滅如是入不生門知諸受不生故無相無相故不生如是知已心緣中若有苦不苦不樂來心不受不著不作依止如是等因緣觀諸是名受念處
밖의 느낌을 관찰하고, 안팎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014_0692_b_16L觀外受觀內外受亦如是
보살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관찰하는가?
菩薩云何觀心念處
014_0692_c_01L곧 보살이 안의 마음을 관찰하건대, 이 안 마음에 세 가지 모습이 있으니, 생(生)ㆍ주(住)ㆍ멸(滅)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멸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인연이 화합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일정한 실제 모습이 없고, 실제의 생ㆍ주ㆍ멸도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성품 없고 모습 없으며, 또한 내는 이도 없고 나게 하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고, 안으로는 뒤바뀐 생각[心想]이 생멸하고 상속하기 때문에 억지로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실로 마음의 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항상 깨끗한 모습이거늘 객진번뇌[客煩惱]16)의 모습에 집착되기 때문에 부정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가 알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의 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이나 지말에 진실한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모든 법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지나간 시간ㆍ다가올 시간ㆍ현재의 시간도 없으며, 빛 없고 형상 없고 대할 수도 없다. 다만 뒤바뀐 허망에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나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무상하고 진실됨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수순하는 관법’이라 한다.
마음의 모습이 무생임을 알면 무생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성품이 없고, 모습이 없는 까닭이다.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아나니,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도 실제로 생멸하는 법을 얻거나 더럽고 깨끗함을 분별치 않으나 마음의 청정을 얻는다. 이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객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안의 마음을 관찰하고, 밖의 마음을 관찰한다.
안팎의 마음을 관찰함도 또한 이와 같다.
014_0692_b_17L菩薩觀內是內心有三相作是念心無所從來滅亦無所至但從內外因緣和合生是心無有定實相亦無實生亦不在過去未來現在世是心不在內不在外不在中閒心亦無性無相亦無生者無使生者外有種種雜六塵因緣內有顚倒心相生滅相續故强名爲心如是心中實心相不可得是心性不生不滅是淨相客煩惱相著故名爲不淨心心不自知何以故是心心相空故心本末無有實法是心與諸法無合無散亦無前際後際中際無色無形無對但顚倒虛誑生是心空無我我所無常無實是名隨順心觀知心相無生入無生法中何以故是心無無性無相智者能知智者雖觀是心生滅相亦不得實生滅法不分別垢淨而得心淸淨以是心淸淨故爲客煩惱所染如是等觀內心觀外觀內外心亦如是
보살은 어떻게 법념처(法念處)를 관찰하는가?
014_0692_c_15L菩薩云何觀法念處
곧 일체법을 관찰하건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고, 중간에 있지도 않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있지도 않거늘 오직 인연이 화합한 것으로 허망한 견해에서 생겨나 실제로 정해진 것이 없다. 이 법이 누구의 법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곧 모든 법 가운데에서 법의 모습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어떤 법이 합하거나 흩어지는 일은 없다. 일체법이 존재하지 않음이 마치 허공과 같고, 일체법이 거짓됨이 마치 허깨비 같으니, 모든 법은 성품은 깨끗해서 서로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은 받아들임이 없으니, 모든 느낌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알 수가 없으니,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거짓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어떤 법이 같은 모습[一相]이라거나 혹은ㆍ다른 모습[異相]임을 보지 않아 일체법은 공하고 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014_0692_c_16L觀一切法不在內不在外不在中閒不過去未來現在世中但從因緣和合妄見生無有實定無有是法是誰法諸法中法相不可得亦無法若合若散一切法無所有如虛空切法虛誑如幻諸法性淨不相污染諸法無所受諸受無所有故諸法無所知心心數法虛誑故如是觀時見有法若一相若異相觀一切法空無我
014_0693_a_01L이때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니, 이것이 진실한 공이다. 진실한 공인 까닭에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는 까닭에 지음이 없고, 지음이 없는 까닭에 법이 일어나거나 혹은 멸하거나 머무름을 보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문에 들어간다.
이때 비록 모든 법의 생멸을 관찰하나 또한 무상문(無相門)에도 들어가나니, 왜냐하면 일체법이 모든 모습을 여읨은 지혜로운 이라야 깨닫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마음을 대상 가운데 묶어두어 모든 법의 모습을 수순하되 몸ㆍ느낌ㆍ마음ㆍ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 네 가지 법이 처할 바가 없는 줄 안다. 이것이 안의 법념처이다.
014_0693_a_02L是時作是念一切諸法因緣生無有自性是爲實空實空故無有無有相故無作無作故不見法若生若滅住是智慧中入無生法忍門爾時雖觀諸法生滅亦入無相門以故一切法離諸相智者之所解是觀時繫心緣中隨順諸法相不念知是四法無處所是爲內法念處
밖의 법념처와 안팎의 법념처 역시 이와 같다.
014_0693_a_10L外法念處內外法念處亦如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도 이와 같이 분별하나니, 공하여 처할 바가 없음을 관찰해야 한다.
014_0693_a_11L四正懃四如意足亦如是應分別觀空無處所
어떤 것이 보살이 5근(根)을 행하는 것인가?
云何爲菩薩所行五根
곧 보살마하살이 5근을 관찰하여 5근을 닦는 것이다.
014_0693_a_12L菩薩摩訶薩觀五根修五根
014_0693_b_01L신근(信根)이라 함은 일체법이 인연에서 생겨나, 뒤바뀐 망견의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마치 불을 돌리는 바퀴[旋火輪] 같고 꿈 같고 허깨비 같은 줄 믿으며, 모든 법은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나가 없으며, 질병 같고 종기 같고 가시(刺) 같아서 불행하게 변하고 무너진다고 믿는다.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어서 마치 빈주먹으로 어린애를 속이는 것과 같다고 믿는다.
모든 법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있지 않고 온 곳도 없으며, 멸하여 이르는 곳이 없다고 믿는다.
모든 법은 공하고 모습이 없고, 지음이 없고,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지음 없고, 모양 없다고 믿으며, 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을 믿는다.
이러한 신근을 얻는 까닭에 다시는 물러서지 않나니, 신근으로 으뜸을 삼아 지계에 잘 머무르고, 지계에 머무르고 나서는 신심이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일심으로 업과 과보에 의함을 믿고 모든 사견을 여의어 다시는 다른 말을 믿지 않으며, 오직 불법만을 받아들이고 중승(衆僧)을 믿으며, 진실한 도에 머물러서 곧은 마음으로 유연하게 참아내며, 통달하고 걸림 없어 동요치 않고 무너지지 않아 힘의 자재로움을 얻는다.
이것이 신근이다.
014_0693_a_13L信根者信一切法從因緣生顚倒妄見心生如旋火輪如夢如幻信諸法不淨無我如病如癰如刺災變敗壞信諸法無所有如空拳誑小兒信諸法不在過去不在未來不在現在所從來滅無所至信諸法空無相不生不滅無信相無相而信持戒禪定智慧解脫解脫知見得是信根不復退轉以信根爲首善住持戒住持戒已信心不動不轉一心信依業果報離諸邪見更不信餘語但受佛法信衆僧住實道中直心柔軟能通達無㝵不動不壞得力自在名信根
정진근이라 함은 밤과 낮으로 항상 정진하여 5개(蓋)를 제거해 5근(根)을 잘 지키는 것이다. 또한 깊은 경법을 얻고자 하고 알고자 하고 행하고자 하고 외우고자 하고 읽고자 하며, 나아가 듣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착하지 못한 법이 일어나거든 신속히 멸하게 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겨나지 못하게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모든 착한 법은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더욱 늘어나게 한다.
또한 착하지 못한 법을 싫어하지 않고, 착한 법을 사랑하지도 않아서 평등한 정진을 얻으며, 곧장 전진하여 물러나지 않아서 바른 정진을 얻어 집중된 마음[定心]인 까닭에 일컬어 정진근이라 한다.
014_0693_b_04L精進根者晝夜常行精進卻五蓋攝護五根諸深經法欲得欲行欲誦欲讀乃至欲聞若諸不善惡法起令疾滅未生者令不生生諸善法令生已生令增廣亦不惡不善法亦不愛善法得等精進直進不轉得正精進定心故名爲精進根
염근(念根)이라 함은 보살이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여 보시ㆍ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을 갖추고자 하고, 몸ㆍ입ㆍ뜻의 업을 맑히고자 하며, 모든 법의 나고 멸하고 머무르고 달라짐을 지혜 가운데서 항상 일심으로 생각하며, 일심으로 고ㆍ집ㆍ멸ㆍ도를 생각하며, 일심으로 생각해 근ㆍ력ㆍ각지ㆍ도ㆍ선정ㆍ해탈ㆍ생멸ㆍ출입을 분별하며, 일심으로 모든 법의 불생ㆍ불멸ㆍ무작(無作)ㆍ무설(無說)을 생각하며, 무생지혜(無生智慧)를 얻어 모든 불법을 구족하려는 까닭에 일심으로 생각하며, 성문ㆍ벽지불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도록 항상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은 심히 깊고 청정한 관행(觀行)을 얻는 까닭에 이 같은 자재한 생각[念]을 얻으니, 이것이 염근이다.
014_0693_b_10L念根者菩薩常一心念欲具足布施持戒禪定智慧解脫欲淨身口意業諸法生滅住異智中常一心念一心念苦一心念分別根禪定解脫生滅入出一心念諸法不生不滅無作無說爲得無生智慧足諸佛法故一心念不令聲聞辟支佛心得入常念不忘如是諸法甚深淸淨觀行得故得如是自在念是名念根
014_0693_c_01L정근(定根)이라 함은 보살이 선정의 모습을 잘 알아서 능히 갖가지 선정을 내고, 분명하게 선정의 문호를 알며, 선정에 들고 선정에 머물고 선정에서 나오기를 잘 알며, 선정에 대하여 집착하거나 맛들이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대상할 바[所緣]와 대상을 깰 바[壞緣]를 잘 알아서 모든 선정에 자재하게 노닐며, 또한 대상없는 선정도 잘 알며, 남의 말을 따르지 않고 선정만을 따르지도 않아서 행함에 자재롭고 출입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정근이라 한다.
014_0693_b_20L定根者菩薩善取定相能生種種禪定了了知定門善知入定善知住定善知出定於定不著不味不作依止善知所緣善知壞緣自在遊戲諸禪定亦知無緣定不隨他語不專隨禪定行自在出入無㝵是名爲定
혜근(慧根)이라 함은 보살이 괴로움을 다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 지혜로써 모든 법을 여의고 열반을 이룬다. 곧 지혜로써 일체의 삼계는 무상하며 3쇠(衰)17)ㆍ3독(毒)의 불에 탄다고 관찰하니, 이렇게 관하고는 삼계 안에서 지혜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일체의 삼계를 도리어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으로 삼아 일심으로 불법을 구하기를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한다.
이 보살의 지혜는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으며, 삼계에서 의지하는 바가 없어 생각을 따라 일어나는 5욕에서 마음은 늘 떠나 있나니, 이 혜근의 힘 때문에 한량없는 공덕을 쌓아 모은다.
모든 법의 실상에 예리하게 들어가 장애 없고 어려움 없으며, 세간에 대해서 근심하는 일 없고, 열반에 대해서 기뻐하는 일 없나니, 자재로운 지혜를 얻는 까닭에 혜근이라 한다.
014_0693_c_03L慧根者菩薩爲盡苦聖智慧成就是智慧爲離諸法爲涅槃以智慧觀一切三界無常爲三衰三毒火所燒觀已於三界中智慧亦不著一切三轉爲空無相無作解脫門一心爲求佛法如救頭然是菩薩智慧無能壞於三界無所依於隨意五欲中心常離之慧根力故積聚無量功德於諸法實相利入無疑無難於世閒無憂於涅槃無喜得自在智慧故名爲慧
014_0694_a_01L보살이 이 5근(根)을 얻으면 중생들의 모든 근기의 모습을 잘 아나니, 욕망에 물든 중생의 근기를 알고, 욕망을 여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내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냄을 여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어리석은 중생의 근기를 알고, 어리석음을 여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악도(惡道)에 떨어지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인간세상에 나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천상에 나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상ㆍ중ㆍ하의 중생의 근기를 알며, 죄지은 중생의 근기를 알며, 죄 없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거슬리고 순종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항상 태어날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선근이 두터운 중생과 얕은 중생의 근기를 알며, 바르게 집중됐거나 삿되게 집중됐거나 집중되지 못한 중생의 근기를 알며, 가벼이 날뛰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지중(持重)한 중생의 근기를 알며, 간탐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능히 버리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공경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공경치 않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계행이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못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내거나 인욕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정진하거나 게으름 피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마음이 산란하거나 섭수된 중생의 근기를 알며, 우치하거나 지혜로운 중생의 근기를 알며, 두려움이 있거나 두려움이 없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잘난 체하거나 잘난 체하지 않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바른 도와 삿된 도의 중생의 근기를 알며, 감관을 지키거나 감관을 지키지 않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성문을 구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벽지불을 구하는 중생의 근기를 알며, 불도를 구하는 중생의 근기를 아나니, 중생의 근기를 아는 가운데 자재한 방편의 힘을 얻는 까닭에 일컬어 근기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014_0693_c_13L菩薩得是五根善知衆生諸根相知染欲衆生根知離欲衆生根知瞋恚衆生根亦知離瞋恚衆生根知愚癡衆生根亦知離愚癡衆生根知欲墮惡道衆生根知欲生人中衆生根知欲生天上衆生根知鈍衆生根利衆生根知上下衆生根知罪衆生根知無罪衆生根知逆順衆生根知常生欲界色界無色界衆生根厚善根薄善根衆生根知正定邪定不定衆生根知輕躁衆生根知持重衆生根知慳貪衆生根知能捨衆生知恭敬衆生根知不恭敬衆生根知淨戒不淨戒衆生根知瞋恚忍辱衆生根知精進懈怠衆生根知亂心攝心愚癡智慧衆生根知無畏有畏衆生根知增上慢不增上慢衆生根知正道邪道衆生根知守根不守根衆生根知求聲聞衆生根知求辟支佛衆生根知求佛道衆生根於知衆生根中得自在方便力故名爲知根
보살이 이 5근을 행하고 증장시켜 능히 번뇌를 깨뜨리고 중생을 제도하며 무생법인을 얻나니, 이를 다섯 가지 힘[五力]이라 한다.
014_0694_a_10L薩行是五根增長能破煩惱度衆生得無生法忍是名五力
또한 하늘ㆍ마ㆍ외도가 능히 방해하거나 부수지 못하니, 이것을 힘이라 한다.
014_0694_a_12L復次天魔 道不能沮壞是名爲力
7각분(覺分)이라 함은 보살이 일체법에 대해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을 염각분(念覺分)이라 하고, 일체법 가운데 착한 법ㆍ나쁜 법ㆍ무기의 법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을 택법각분(擇法覺分)이라 하고, 삼계에 들지 않고서 모든 계의 모습을 파괴하는 것을 정진각분(精進覺分)이라 하고, 일체의 만들어진 법에 대하여 즐기어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 근심과 기쁨의 모습이 무너진 까닭에 희각분(壽覺分)이라 하고, 일체법 가운데 마음의 대상을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으므로 제각분(除覺分)이라 하고, 일체법은 항상 안정된 모습이어서 어지러운 것도 흩어진 것도 아니라고 아는 것을 정각분(定覺分)이라 하고, 일체법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으며 또한 이러한 버리는 마음[捨心]조차 보지 않는다면 이를 사각분(捨覺分)이라 한다.
보살이 7각분의 공함을 관찰함은 이와 같다.
014_0694_a_13L七覺分者薩於一切法不憶不念是名念覺分一切法中求索善法不善法無記法不可得是名擇法覺分不入三界壞諸界相是名精進覺分於一切作法不生著樂憂喜相壞故是名喜覺於一切法中除心緣不可得故名除覺分知一切法常定相不亂不是名定覺分於一切法不著不依亦不見是捨心是名捨覺分菩薩觀七覺分空如是
【문】 이 7각분은 어째서 간략하게 설명하는가?
014_0694_a_23L問曰此七覺分何以略說
014_0694_b_01L【답】 7각분 가운데서 염ㆍ혜ㆍ정진ㆍ정은 위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나머지 세 각분을 설명하리라.
보살은 이 희각분을 행할 때에 이 희(喜)가 진실이 아닌 줄 관한다. 왜냐하면 이 희는 인연으로부터 생겨난 작법(作法)이고, 존재의 법[有法]이며, 무상한 법이며, 집착할 만한 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집착이 일어나면 이것은 무상한 모습이고, 변하고 무너져 버려 곧 근심을 일으키게 된다.
범부들은 뒤바뀌었기 때문에 마음이 집착한다.
만일 모든 법이 실제로 공한 줄로 알면 이때에 뉘우치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헛된 것을 받고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암흑 속에서 기갈에 시달리다 더러운 것을 먹었는데 낮에 보고서야 잘못되었음을 아는 것과 같도다.’
만일 이와 같이 관찰하면 진실한 지혜 가운데에서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참기쁨(眞喜)이다.
014_0694_b_01L答曰七覺分中念精進上已廣說三覺今當說菩薩行喜覺觀是喜非實何以故是喜從因緣作法有法無常法可著法若生著是無常相變壞則生憂凡夫人以顚倒故心著若知諸法實空是時心悔我則受虛誑如人闇中飢渴所逼不淨物晝日觀知乃覺其非若如是於實智慧中生喜是爲眞喜
이러한 참기쁨을 얻고는 먼저는 몸의 거칢[身麤]을 제거하고, 다음에는 마음의 거칢을 제거한다. 그러고 나서는 일체의 법상을 제하고 쾌락이 몸과 마음에 두루함을 얻게 되나니, 이것이 제각분이다.
014_0694_b_09L得是眞喜先除身麤次除心麤然後除一切法相得快樂遍身心中是爲除覺
이미 희각분과 제각분을 얻고는 모든 관행(觀行)을 버리나니, 이른바 무상관ㆍ고관(苦觀)ㆍ공관(空觀)ㆍ무아관(無我觀)ㆍ생멸관(生滅觀)ㆍ불생불멸관(不生不滅觀)ㆍ유관(有觀)ㆍ무관(無觀)ㆍ비유비무관(非有非無觀)이다. 이러한 희론을 모두 버리나니, 왜냐하면 모습 없고, 반연 없고, 지음 없고, 희론 없어서 항상 적멸한 것이 참된 법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버림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문득 모든 다툼이 있게 된다. 만일 유를 진실이라 한다면 무를 헛되다 하고, 무를 진실이라 한다면 유를 헛되다 하며, 비유ㆍ비무를 진실이라 하면 유무를 헛되다 하며, 진실에다 애착을 내고 헛된 데는 성을 내어 근심과 기쁨의 영역을 일으키거늘 어찌 버리지 않으리오.
이와 같이 해서 희각분과 제각분과 사각분을 얻으면 7각분이 구족히 만족해진다.
014_0694_b_12L旣得喜捨諸觀行所謂無常觀苦觀空無我觀生滅觀不生不滅觀有觀無觀非有非無觀如是等戲論盡捨何以故無相無緣無作無戲論常寂滅是實法相若不行捨便有諸若以爲實則以爲虛若以爲實則以爲虛若以非有非無則以有無爲虛於實愛著於虛恚生憂喜處云何不捨得如是喜七覺分則具足滿
8성도분이라 했는데, 정견(正見)ㆍ정방편(正方便)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으니, 이제 정사유(正思惟)만을 말하리라.
014_0694_b_21L八聖道分者正方便正念正定上已說正思惟今當說
014_0694_c_01L보살은 모든 법이 공하여 얻을 바 없음에 머무른다. 이러한 정견 가운데서 정사유의 모습을 관찰하여 모든 사유는 모두가 삿된 사유임을 안다. 나아가 열반을 사유하고 부처를 사유함도 또한 이와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체의 사유의 분별을 끊는 것을 정사유라 하기 때문이다. 사유와 분별은 모두가 진실치 못하고 거짓되고 뒤바뀐 것을 따르기 때문에 있을 뿐으로 분별ㆍ사유의 모습이란 모두 없는 것이다.
보살은 이처럼 바른 사유 가운데 머물러서 바르거나 삿됨을 보지 않고 모든 사유와 분별을 초월하나니, 이것이 정사유이다.
일체의 사유와 분별은 모두가 평등하며, 평등하기 때문에 마음이 집착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일컬어 보살의 정사유의 모습이라 한다.
014_0694_b_23L菩薩於諸法空無所得住如是正見中觀正思惟相知一切思惟皆是邪思惟乃至思惟涅槃思惟佛皆亦如是何以故斷一切思惟分別是名正思惟諸思惟分別皆從不實虛誑顚倒故有分別思惟相皆無薩住如是正思惟中不見是正是邪過諸思惟分別是爲正思惟一切思惟分別皆悉平等悉平等故心不著如是等名爲菩薩正思惟相
정어(正語)라 했는데, 보살은 일체의 말이란 모두가 허망하고 진실치 못하고 뒤바뀐 것을 따라 모습을 취하고 분별해서 생겨나는 것임을 안다. 이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말[語]에는 말의 모습이 없어서 일체의 구업(口業)이 멸하고 모든 말의 진실한 모습을 아는 이것이 정어이다. 이러한 말은 모두가 온 곳도 없고, 사라져도 가는 곳도 없다.’
이러한 보살이 정어의 법을 행해 말한다면, 이는 모두 실상 가운데 머물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이 정어에 머무르면 청정한 구업을 짓고 일체의 언어의 실상을 알며, 비록 말하는 바가 있으나 삿된 말에 떨어지지 않는다” 했다.
014_0694_c_09L正語者菩薩知一切語皆從虛妄不實顚倒取相分別生是時菩薩作是念語中無語相一切口業滅知諸語實相爲正語是諸語皆無所從來滅亦無所去是菩薩行正語法諸有所語皆住實相中說以是故諸經說菩薩住正語中能作淸淨口業知一切語言眞雖有所說不墮邪語
정업(正業)이라고 했는데, 보살은 일체의 업은 삿된 모습이고 허망하고 진실이 없으며, 모두가 짓는 모습이 없음을 안다. 왜냐하면 어떤 업도 정해진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4_0694_c_17L正業者菩薩知一切業邪相虛妄無實皆無作相何以故無有一業可得定相
【문】 만일 일체의 업이 모두 공하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시 등은 착한 업이고, 살생 등은 나쁜 업이고, 그 밖의 동작은 무기업이다” 하셨는가?
014_0694_c_19L問曰一切業皆空云何佛說布施等是善殺害等是不善業餘事動作是無記業
014_0695_a_01L【답】 모든 업 가운데는 하나조차 없거늘 어찌 셋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행하는 때[時]가 이미 지났으면 지난 업은 없는 것이요, 아직 이르지 않았더라도 역시 지난 업은 없는 것이요, 현재 지나가고 있는 때에도 역시 지난 업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난 업은 없는 것이다.
014_0694_c_22L答曰諸業中尚無有一何況有三以故如行時已過則無去業未至亦無去業現在去時亦無去業以是故無去業
【문】 이미 지난 곳에는 없어야 되고, 아직 이르지 않은 곳 역시 없어야 되겠지만, 지금 지나가는 곳이라면 마땅히 지나는 업이 있어야만 되지 않겠는가?
014_0695_a_03L問曰已過處則應無未至處亦應無今去處應是有去
【답】 지금 지나가는 곳에도 역시 지난 업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지난 업을 제하고는 지금 지나는 곳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지난 업을 제하고도 지금 지나가는 곳을 얻을 수 있다면, 여기에 마땅히 ‘간다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서 지금의 가는 곳을 제하면 곧 가는 업도 없고, 가는 업을 제하면 곧 지금의 간다는 것도 없다.
이들은 서로 간에 반연하는 까닭에 지금의 가는 곳에 감이 있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014_0695_a_04L答曰今去處亦無去何以故除去業今去處不可得若除去業今去處可得者是中應有去而不然除今去處則無去業除去業則無今去處是相與共緣故不得但言今去處有去
또한 지금의 가는 곳에 지난 업이 있다면 지난 업을 떠나서 마땅히 지금 가는 곳이 있어야 하고, 지금의 가는 곳을 떠나서 마땅히 지난 업이 있어야 한다.
014_0695_a_09L復次若今去處有去業離去業應當有今去處今去處應當有去業
【문】 만일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다는 것인가?
014_0695_a_11L問曰若爾者何咎
【답】 한때에 두 가지 가는 업[去業]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가지 지난 업이 있다면, 두 가지 가는 이[去者]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는 이를 제하고는 감도 없고, 가는 이를 제하고는 지금의 가는 곳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가는 곳이 없는 까닭에 가는 이도 없다.
014_0695_a_12L答曰一時有二去業故若有二去業則有二去者何以故除去者則無去若除去者今去處不可得無今去處故亦無去者
또한 가지 않는 이 역시 가지 않는 까닭에 가는 업이 없나니, 만약에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를 제하면 셋째의 가는 이는 없다.
014_0695_a_15L復次不去者亦不故無去業若除去者不去者更無第三去者
【문】 가지 않는 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은 그럴 수 있겠지만, 가는 이야 어찌하여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014_0695_a_17L問曰不去者不去應爾者何以故言不去
【답】 지난 업을 제하고는 가는 이는 얻을 수 없고, 가는 이를 제하고서는 지난 업도 얻을 수 없다.
014_0695_a_18L答曰除去業去者不可得除去者去業不可得
이처럼 일체의 업이 공한 것을 정업이라 한다.
보살들은 일체의 업의 평등에 들어가서 삿된 업으로써 악을 이루지 않고, 바른 업으로써 선을 이루지도 않는다. 곧 짓는 바가 없어서 바른 업도 짓지 않고 삿된 업도 짓지 않는다. 이것을 진실한 지혜라 하니, 이것이 곧 정업이다.
014_0695_a_19L如是等一切業空是名正業諸菩薩入一切諸業平等不以邪業爲惡不以正業爲善無所作不作正業不作邪業是名實智慧卽是正業
014_0695_b_01L또한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에서 바름도 없고 삿됨도 없으니, 여실하게 모든 업을 알며, 여실하게 알고 난 뒤에는 짓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다.
이 같은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바른 업만 있고 삿된 업은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의 정업이라 한다.
014_0695_a_23L復次諸法等中無正無邪如實知諸業如實知已不造不如是智人常有正業無邪業是名爲菩薩正業
정명(正命)이라 했는데, 보살은 일체의 생활수단이 모두 바르고 삿되지 않으며, 희론 아닌 지혜에 머물러서 정명을 취하지도 않고 삿된 생활 방법을 버리지도 않는다. 또한 바른 법에 머무르지도 않고 삿된 법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항상 청정한 지혜에 머물러서 평등한 정명에 들어간다. 곧 정명과 사명을 보지 않으니, 이처럼 진실한 지혜를 행하므로 정명이라 한다.
014_0695_b_03L正命者一切資生活命之具悉正不邪住不戲論智中不取正命不捨邪命亦不住正法中亦不住邪法中常住淸淨智中入平等正不見命不見非命行如是實智慧以是故名正命
만일 보살마하살이 능히 37품을 관한다면 성문ㆍ벽지불의 경지를 초월하게 되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점차로 일체종지를 성취하게 된다.
014_0695_b_08L若菩薩摩訶薩能觀是三十七品得過聲聞辟支佛地菩薩位中漸漸得成一切種智
大智度論卷第十九
庚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범어로는 tarka-bhūmi.
  2. 2)범어로는 dvādaśāńga-dharmapravacana.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12분교(分敎) 혹은 12분성교(分聖敎)라고도 한다. 전승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경(經, sūtra):산문형식의 경설. ②중송(重頌, geya):산문형식에 교설에 운문의 게송을 붙여 그 내용을 거듭 나타낸 형식. ③기별(記別, vyākaraṇa):문답체에 의한 교설. ④게(偈, gāthā):산문이 없이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교설. ⑤자설(自說, udāna):감흥에 겨워 스스로 설하신 교설. ⑥여시어(如是語, ityuktaka):‘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교설. ⑦본생(本生, jātaka):부처님의 전생이야기. ⑧방광(方廣, vaipulya):제자들이 환희를 거듭하면서 질문을 거듭해 가는 일존의 교리문답. ⑨미증유법(未曾有法, adbhutadharma):부처님 및 불제자들의 뛰어난 덕상을 찬탄하는 교설. ⑩인연(因緣, nidāna):경과 율들이 설해지게 된 배경이나 이유에 대한 설명. ⑪비유(譬喩, avādana):주로 부처님 이외의 인물들에 대한 전생이야기. ⑫논의(論議, upadeśa):부처님이나 불제자들이 간략한 경설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3. 3)제각지(除覺支)ㆍ정각지(定覺支)ㆍ사각지(捨覺支)이다.
  4. 4)범어로는 campaka.
  5. 5)9상(想)이라고도 한다. 탐심과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시신을 관찰하는 아홉 가지 관상법을 말한다.
  6. 6)범어로는 ṣodaṡa-ākāra.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제를 관찰하는 법을 말한다. 16행상(行相)이라고도 한다.
  7. 7)몸을 부리는 내가 있고 다시 그 나를 부리는 나가 있다면, 바로 이 나를 부리는 제 삼의 나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끝없이 주재자로서의 나가 필요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8. 8)범어로는 pratisaṁkhyā-nirodha. 신역어로 택멸(擇滅)이라고도 한다.
  9. 9)범어로는 apratisaṁkhyā-nirodha. 비택멸(非擇滅)이라도 한다.
  10. 10)4여의족 가운데 욕신족(欲神足)을 말한다.
  11. 11)4여의족 가운데 근신족(勤神足)을 말한다.
  12. 12)4여의족 가운데 심신족(心神足)을 말한다.
  13. 13)4여의족 가운데 관신족(觀神足)을 말한다.
  14. 14)4정근의 둘을 말한다.
  15. 15)정어ㆍ정업ㆍ정명이다.
  16. 16)범어로는 āgantukakleśa. ‘객진(āgantuka)과도 같은 번뇌’라는 뜻이다.
  17. 17)3독(毒)의 이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