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9_0306_b_01L비바사론(鞞婆沙論) 제1권
029_0306_b_01L鞞婆沙論卷第一


시타반니(尸陀槃尼) 지음
승가발징(僧伽跋澄) 한역
029_0306_b_02L阿羅漢尸陁槃尼撰
符秦罽賓三藏僧伽跋澄譯


애락(愛樂)ㆍ각의(覺意)의 잎과
청정한 계율의 묘한 가지
비할 데 없는 서른두 가지의
기이한 모습과 화엄의 몸
가장 지혜로운 감로 열매와
견고한 정진근,
성스러운 진리를 구족한 나무이신
여래께 저는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029_0306_b_04L愛樂覺意葉
淸淨戒妙枝
無比三十二
奇相華嚴身
最智甘露果
堅固精進根
具足聖道樹
我頂禮如來

잘 결택하여 말씀하심은 비길 데 없으며
도를 증식시키는 무위의 성이며
공덕의 선인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니
탐애와 근심을 제거하고
생로병사를 여의어 안락하고
길이 욕애가 없게 하소서.
029_0306_b_07L善快說無比
息道無爲城
歸命功德仙
消除愛憂慼
離生老病死
安隱永無欲

위대한 선인께서 펴신 법에
제가 지금 머리 조아려 예배하오니
오묘한 계율은 높이 드러나 있어
우뚝한 산처럼 움직이지 않네.
029_0306_b_09L大仙所演法
我今稽首禮
妙戒高顯現
山嶽不移動

청정한 지혜의 법으로
해탈하신 위대한 모니여,
선(禪) 등의 총림의 나무와
신족의 돌[石] 가이없네.
029_0306_b_10L淸淨智慧法
解脫大牟尼
禪等叢林樹
神足石無邊
큰 설산에 성인의 무리가 있으니,
제가 이제 머리 조아려 예배합니다.
이렇게 머리 조아려 예배하니,
세간에서는 비길 데 없다고 일컫네.
029_0306_b_12L聖衆大雪山
我今稽首禮
如是稽首禮
世稱無有比
위대한 스승의 널리 펴신 가르침을
제가 이제 받들어 수지하고,
제가 정각의 말을 하니,
위없는 즐거움이 더욱 불어나네.
성스러운 무리들이 듣고자 하여
오롯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듣도다.
029_0306_b_13L大師廣演教
吾今奉受持
我說正覺語
增益無上樂
聖衆等欲聞
專心一意聽

1. 설아비담팔건도(說阿毘曇八犍度)
029_0306_b_15L鞞婆沙說阿毘曇八揵度

잡결사지행사대근정견가전연자가 선잡건도총서를 짓고 말하였다.
【문】누가 이 경을 지었는가?
【답】부처님이다.
029_0306_b_16L雜結使智行四大根定見迦旃延子造先雜揵度摠序曰
【문】어째서인가?
【답】매우 깊은 지혜와 미묘한 법성(法性)과 모든 지혜의 경계[界]이니 누가 이러한 경계를 소유하였겠는가? 다름 아닌 오직 부처님이다.
029_0306_b_17L問曰誰作此經
答曰
【문】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지었는가?
【답】존자 사리불(舍利弗)이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백 비구가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천인(天人)이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신(化神)이 물으니,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라고 하였다.
029_0306_b_18L何以故
答曰甚深智微妙法性一切智境界誰有此界無餘唯佛也
029_0306_c_01L【문】어째서인가?
【답】이 법은 마땅히 여실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설해져야 하는데,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세존께서 단정하고 매우 오묘한 모습으로 변화하셨으니, 높이 공경받고 기쁘게 할 만하였다.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두 손을 합장하고서 물으니,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이는 저 인연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029_0306_b_20L問曰若爾者云何
答曰尊者舍利弗問ㆍ佛答復有說五百比丘問ㆍ佛答復有說者諸天問ㆍ佛答復有說者化問ㆍ佛答
【문】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존자 가전연(迦旃延)이 이 경을 지었다고 말하였는가?
【답】저 존자가 외우고 익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여 가르쳐 주어 널리 베풀었다. 이 외우고 익히며 널리 베풀어 준 것을 ‘지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혹은 저 존자 가전연이 이 경을 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029_0306_c_01L何以故
答曰此法應爾如知應當說無能問彼時世尊化作化端正極妙ㆍ宗敬悅可剃除鬚髮被僧迦梨叉手而問世尊答如彼因緣經所說也
【문】누군가 ‘저 매우 깊은 지혜와 미묘한 법성(法性)과 모든 지혜의 경계와 같은 것을 소유하는가? 오직 부처님만이 소유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가 지을 수 있겠는가?
【답】저 존자가 본래 배움이 예리하여 서원하기를, “오천 분의 부처님에게서 아비담을 닦아, 내가 내세에 삼야삼불(三耶三佛)에게서 아비담의 문장을 시설하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미묘한 지혜로써 보고 나서, 이 경을 지었다.
029_0306_c_05L問曰爾者何以故說尊者迦旃延作此經
答曰彼尊者誦習ㆍ轉教他人廣施設此誦習廣施設謂之造也或曰彼尊者迦旃延作此經
【문】만약 그렇다면 부처님과 아비담(阿毘曇)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029_0306_c_09L問曰如甚深智微妙法性一切智境界誰有此界無餘唯佛云何彼作
答曰彼尊者本學利作誓願於五千佛修阿毘曇令我於當來三耶三佛施設阿毘曇章句故彼妙智觀已作此經
【답】저 부처님은 곳곳의 장소와 곳곳의 성에서 도를 말씀하셔서 여러 가지로 교화하였다. 저 존자 가전연자는 과거의 불법 가운데 서원과 지혜와 관찰로써 한결같이 간략하게 건도품(犍度品)을 지어 몇몇 장문(章門)을 세웠으니,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서로 비슷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잡건도(雜犍度)를 세웠다. 결을 말하여 결건도(結犍度)를 세웠고, 지를 말하여 지건도(智犍度)를 세웠고, 행을 말하여 행건도(行犍度)를 세웠고, 사대를 말하여 사대건도(四大犍度)를 세웠고, 근을 말하여 근건도(根犍度)를 세웠고, 정을 말하여 정건도(定犍度)를 세웠고, 견을 말하여 견건도(見犍度)를 세웠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법의 구절과 같았다.
029_0306_c_14L問曰若爾者佛ㆍ阿毘曇何者是
029_0307_a_01L 저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과거의 불법 가운데 서원과 지혜와 관찰로써 한결같이 대략 말하였으니, 무상게(無常偈)를 말하여 무상품(無常品)을 세우고, 나아가 범지를 말하여 범지품(梵志品)을 세운 것과 같다. 이것은 저 부처님이 곳곳의 장소와 곳곳의 성(城)에서 도를 말씀하셔서 여러 가지로 교화하신 것과 같다. 저 존자 가전연자는 과거 불법 가운데 서원과 지혜와 관찰로써 한결같이 간략하게 건도품을 지어 몇몇 장문을 세웠으니,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서로 비슷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잡건도(雜犍度)를 세웠으며, 견을 말하여 견건도를 세웠다. 다시 모든 불세존이 세상에 나오셔서 삼장(三藏)을 말씀하셨으니, 계경과 율과 아비담이다.
029_0306_c_15L答曰彼佛說道處方ㆍ處處城種種教化故彼尊者迦旃延子過去佛法中以願智觀一向作揵度品數立章門於中種種不相似立雜揵度說結立結揵度說智立智揵度說行立行揵度說四大立四大揵度說根立根揵度說定立定揵度說見立見揵度如佛說一切法
【문】계경과 율과 아비담은 어떻게 다른가? 어떤 사람은 차등이 없다고 말하니, 무슨 까닭인가?
029_0306_c_23L彼尊者曇摩多羅於過去佛法中願智觀一向略若說無常偈立無常品至說梵志立梵志品如是彼佛說道處處方ㆍ處處城種種教化故彼尊者迦旃延子過去佛法中以願智觀一向略作揵度品數立章門於中種種不相似立雜揵度說見立見揵度次一切佛世尊出世說三藏契經ㆍ律ㆍ阿毘曇
【답】하나의 지혜의 바다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차등이 없으며, 큰 자비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차등이 없으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차등이 없으며, 동일한 해탈문에 들어가기 때문에 다름이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등이 있으니, 계경은 여러 가지를 말하였고, 율은 계를 말하였고, 아비담은 모양을 말하였다.”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계경은 힘에 의지하고, 율은 큰 자비에 의지하고, 아비담은 두려움 없음에 의지한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계경은 증상의(增上意)를 말하였고 율은 증상계(增上戒)를 말하였고, 아비담은 증상혜(增上慧)를 말하였다.”고 하였다.
029_0307_a_08L問曰契經ㆍ律ㆍ阿毘曇何差別一說者無差別何以故
【문】만약 그렇다면, 계경도 증상계와 증상혜를 말하였으며, 율도 증상의와 증상혜를 말하였으며, 아비담도 증상의와 증상계를 말한 것이 되는데,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029_0307_a_09L答曰從一智海出故無差別大悲出故無差別饒益一切衆生故無差別入一解脫門故無差別或曰有差降契經說種律說戒ㆍ阿毘曇說相或曰契經依力ㆍ律依大悲ㆍ阿毘曇依無畏或曰經說增上意ㆍ律說增上戒ㆍ阿毘曇說增上慧
【답】만일 계경(契經)에서 증상계를 말하였다면 율(律)임을 알아야 하고, 증상혜를 말하였다면 아비담(阿毘曇)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율에서 증상의를 말하였다면 계경임을 알아야 하고, 증상혜를 말하였다면 아비담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아비담에서 증상의를 말하였다면 계경임을 알아야 하고, 증상계를 말하였다면 율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계경과 율과 아비담의 차이점이다.
029_0307_a_16L問曰若爾者契經亦說增上戒ㆍ增上慧律亦說增上意ㆍ增上慧毘曇亦說增上意ㆍ增上戒此何差別
029_0307_b_01L【문】무엇 때문에 경을 지은 사람이 이 경을 세웠는가?
029_0307_a_18L答曰若契經說增上戒者當知律說增上慧者當知阿毘曇如律說增上意者當知契經若說增上慧者知阿毘曇如阿毘曇說增上意者知契經若說增上戒當知律是爲契經ㆍ律ㆍ阿毘曇差別
【답】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한 것이니, 부지런한 사람ㆍ듣는 사람ㆍ받아들이는 사람ㆍ지니는 사람ㆍ생각하는 사람ㆍ헤아리는 사람ㆍ관찰하는 사람은 한량없이 맺은 악행이 잠간 동안에 없어진다. 혹은 다시 이것에 의지하여 법성을 헤아리게 하려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어두운 곳에 불을 밝혀 눈 있는 자로 하여금 색(色)을 보게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 경을 지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이 경을 세웠으니, 뜻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것에 의하여 법성을 헤아릴 것이다.
029_0307_b_01L問曰何以故彼作經者立此經
【문】불세존께서도 또한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십이부경(十二部經)』의 계경과 율과 아비담을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인가?
029_0307_b_02L答曰饒益他故勤者ㆍ聞者ㆍ受者ㆍ持者ㆍ思者ㆍ量者ㆍ觀者無量結惡行須臾除或復依此度法性譬如人欲益他故於闇冥處燃明有眼者令見色如是彼作經者饒益他故立此經若有意智者彼依此度法性
【답】가령 어떤 중생이 인(因)의 힘은 있으나 타력(他力)을 반연하지 않고서 깨우쳐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중생은 차등을 알지 못한다. 만일 타력을 반연하여 깨우쳐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중생은 차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 가운데 우발라(優鉢羅)와 발두마(鉢頭摩)와 구모두(拘牟頭)와 분타리(分陀利)와 같다. 연못 가운데 반드시 우발라와 내지 분타리 꽃이 있으나, 만일 아직 해가 빛을 방출하지 않아서 비추어 주지 않을 때면 꽃이 맺지 못하고, 피지 못하고, 향기를 내지 않는다. 만일 해가 빛을 방출하여 비추어 줄 때면 꽃이 맺고 피고 향기를 낸다.
029_0307_b_07L世尊亦饒益他故說十二部經契經ㆍ律ㆍ阿毘曇何以故
이와 같이 중생이 인(因)의 힘은 있으나 타력을 반연하지 않고서 깨우쳐 이해하면 이런 중생은 차등을 알지 못하고, 만일 타력을 반연하여 깨우쳐 이해하면 이런 중생은 차등이 있음을 안다. ‘맺음’은 믿음이고, ‘뜀’은 근(根)ㆍ력(力)ㆍ각(覺)ㆍ도(道)이고, ‘향기를 냄’은 계(戒)이다.
029_0307_b_09L答曰設衆生有因不緣他力而開解如是衆生不知差降如緣他力而開解如是衆生知有差降猶如此中優鉢羅ㆍ鉢頭摩ㆍ拘牟頭ㆍ分陁利池中必有優鉢羅至分陁利華如日天子未出光不照時不敷不舒不香如日天子出光照時華敷舒香
이것은 저 게송에서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029_0307_b_16L如是衆生因力不緣他力而開解如是衆生不知差降如緣他力而開解如是衆生知有差降根ㆍ力ㆍ覺ㆍ道也戒也

은밀하게 덮인 집의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비록 색은 있으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같네.
029_0307_b_19L如彼偈所說

이와 같이 어떤
지혜 없는 사람은
법의 선악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네.
029_0307_b_20L如蓋屋密
而入闇中
雖有此色
眼所不睹

밝음이 있고 색이 있어야
법의 선악을
눈으로 볼 수 있고
들어서 알 수도 있네.
029_0307_b_22L如是有一
無智之人
不聞不知
法之善惡
029_0307_c_01L
법을 듣고 알 수 있고,
악을 듣고 행하지 않으며,
듣고서 옳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듣고서 멸에 이를 수 있네.
029_0307_b_23L有明有色
而眼得見
聞已能知
法之善惡

이와 같은 것을 다른 계경『잡아함』에 나옴.에서는 “어질고 성스러운 제자가 일심으로 법을 듣고서 이때 다섯 가지 번뇌를 없애고 칠각의(七覺意)를 원만히 닦았다.”라고 말하였으며, 이와 같은 것을 다른 계경증일에 나옴.에서는 “하나의 인과 두 연(緣)이 등견(等見)에서 나오니, 다른 것으로부터 안의 정사유(正思惟)를 듣는다.”라고 말하였고, 이와 같은 것을 다른 계경증일의 사법설에서는 “네 가지 법이 있어서 사람을 이익되게 하니,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고 하는가?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것과 선법을 듣고 안으로 바르게 사유하는 것과 차법(次法)과 향법(向法)이다.”라고 하였다.
029_0307_c_01L聞法能知
聞惡不作
聞除非義
聞得至滅
불세존께서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십이부경』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가 이 경을 지은 것은 다른 사람을 이익되게 하려고 이 경을 세운 것이다. 혹은 세 가지 일 때문이니, 지혜를 불어나게 하는 것과 뜻을 펴는 것과 인(人)의 헤아림을 여의는 것이다.
029_0307_c_03L如是餘契經所說出『雜阿含』賢聖弟子一心聽法當爾時滅五蓋具滿修七覺如是餘契經說出『增一』一因二緣發於等見從他聞內正思惟如是餘契經『增一』四法說有四法饒益人云何爲四近善知識ㆍ聽善法ㆍ內正思惟ㆍ次法向
‘지혜를 불어나게 한다.’는 것은 안팎의 법을 다 외워도 지혜를 불어나게 할 수 없으니, 아비담과 같다.
029_0307_c_10L如佛世尊饒益他故說『十二部經』如是彼作經者饒益他故立此經以三事故增益智故ㆍ開意故ㆍ離計人
‘뜻을 편다.’는 것은 중생의 뜻이 수면(睡眠)과 알지 못함에 있으니, 무엇이 기계일체변사(己界一切遍使)며, 무엇이 비기계일체변사며, 무엇이 기지일체변사(己地一切遍使)며, 무엇이 비기지일체변사며, 무엇이 기계연(己界緣)이며, 무엇이 비기계연이며, 무엇이 기지연(己地緣)이며, 무엇이 비기지연이며, 무엇이 유루연이며, 무엇이 무루연이며, 무엇이 유위연이며, 무엇이 무위연인가?
029_0307_c_13L增益智者盡誦內外法無能益智如阿毘曇也
무엇을 ‘포섭한다.’고 하며, 무엇을 ‘상응한다.’고 하며, 무엇을 ‘성취한다.’고 하며, 무엇을 ‘성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무엇을 ‘인’이라고 하며, 무엇을 ‘연’이라고 하는가? 만일 이 뜻이 바뀌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헤아리지 않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듣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재한 몸을 보아 증득할 수 있으니, 어떤 힘을 말미암는가 하면, 오직 아비담이다.
029_0307_c_14L開意者衆生意在睡眠不知何者己界一切遍使何者非己界一切遍使何者己地一切遍使者非己地一切遍使何者己界緣者非己界緣何者己地緣何者非己地何者有漏緣何者無漏緣何者有爲緣何者無爲緣
029_0308_a_01L ‘인(人)의 헤아림을 여읜다.’는 것은 이러한 아비담의 앞뒤 구절을 외우는 것이니, 어째서인가? 이러한 4구(句)는 인을 헤아림을 말하지 않고, 모든 것 가운데 무아행(無我行)과 비중생(非衆生)과 비명(非命)과 비장양(非長養)과 비사공정취(非士空淨聚)를 말한다.
029_0307_c_20L云何攝云何相應云何成就云何不成就云何因云何若此意轉不由他度ㆍ不由他聞見自在身作證由何力唯阿毘曇也
세 가지 일인 ‘지혜가 불어남’, ‘뜻을 폄’, ‘인의 헤아림을 여읨’ 때문에 이 경을 지은 것인데 혹은 무명(無明)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마치 연등이 어둠을 제거하고 밝음을 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비담의 연등(燃燈)이 무명을 제거하여 지혜의 밝음을 내니, 이것이 무명의 어둠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029_0307_c_23L離計人者誦爾所阿毘曇前句後何如是四句不說計人一切中說無我非衆生ㆍ非命ㆍ非長養ㆍ非士空淨聚
혹은 무아(無我)의 형상을 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거울을 잘 갈아 다스려 놓아 그 형상을 자세히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비담의 거울도 잘 알아차려 무아의 형상을 자세히 보니, 이것이 무아의 형상을 보는 것이 된다.
029_0308_a_04L以三事益智開意離計人故作此或曰壞無明故猶如燃燈除去闇冥而生明如是阿毘曇燈除無明生慧明是爲壞無明闇故
혹은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배에 의지하여 많은 중생들이 편안히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비담의 배에 의지하여 무수한 중생들이 편안히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니, 이것이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이 된다.
029_0308_a_07L或曰見無我像故如鏡極磨治諦見其像如是阿毘曇鏡極了覺知諦見無我像是爲見無我像故
혹은 계경(契經)을 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손으로 등을 잡고 이러저러한 물체를 보고서 미혹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아비담을 잡고서 이러저러한 계경에 대해서 미혹되지 않으니, 이것이 계경을 보게 하려고 이 경을 세운 것이 된다.
029_0308_a_10L或曰渡生死河故如依舩百衆生千衆生安隱渡河如是依阿毘曇舩已無數那術衆生安隱渡生死河是爲渡生死河故
【문】무엇이 아비담의 성질인가?
【답】무루의 혜(慧)와 근(根)이다. 저 동등한 성품을 포섭하기 때문이며, 1계(界)ㆍ1입(入)ㆍ1음(陰)과 소소입(少所入)과 방편과 상응과 공유(共有)를 포섭하기 때문이며, 3계와 2입과 5음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3계는 의계와 법계(法界)와 의식계(意識界)이고, 2입은 의입과 법입이고, 5음은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음이다.
029_0308_a_13L或曰見契經故如人手執燈見彼彼色不迷惑如是慧者執阿毘曇已於彼彼契經不迷惑是爲見契經故立此經
029_0308_b_01L【문】만약 그렇다면 아비담 무루혜근(無漏慧根)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 경을 무엇 때문에 아비담이라고 했는가?
【답】이 아비담을 갖추었으므로 아비담이라고 하니, 다른 것을 갖추었으면 갖춘 것으로써 이름을 삼는 것과 같다. 즐거움을 갖추었으면 즐거움[樂]으로써 이름을 삼으니,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29_0308_a_16L問曰何者阿毘曇性
答曰無漏慧根也彼同性故攝一界一入一陰少所入及方便及相應及共有攝三界二入五三界者意界ㆍ法界ㆍ意識界二入者意入ㆍ法入五陰者色ㆍ痛ㆍ想ㆍ行ㆍ識陰

그는 음식을 모으는 것을 즐겨하고,
즐겨 옷을 지니고
즐겨 걸으며
산의 토굴 사이에 의지한다.
029_0308_a_21L若爾者阿毘曇無漏慧根此經何故名阿毘曇
答曰此阿毘曇具名阿毘曇如餘具以具爲名ㆍ樂具樂爲名如所說偈

더러움[垢]을 갖추면 더러움으로써 이름을 삼으니, 저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029_0308_b_02L彼樂摶食
樂爲持衣
樂爲行步
依山窟閒

여자는 범행을 더럽히고
여자는 세간에 속박된다.
고행(苦行)과 범행(梵行)으로
이를 씻으려 하되 물이 없다.
029_0308_b_04L垢具垢爲名如彼偈說

부림[使]을 갖추었으면 부림을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비구가 색에 부림을 당하여 색에 애착한다. 만일 비구가 부림을 당하면 저것이 곧 애착이 되고, 만일 애착하면 애착은 이미 마구니[魔]에게 결박된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탐욕[欲]을 갖추었으면 탐욕을 이름으로 삼으니, 저 계경에서 “오욕의 공덕은 세간의 애욕[愛]과 즐거움[樂]의 망념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구(鉤)를 갖추었으면 구를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오욕의 공덕은 여러 마구니의 갈고리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029_0308_b_05L女垢梵行
女縛世間
苦行梵行
此洗無水
박(縛)을 갖추었으면 박을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비구가 색을 받아들이면 마구니에게 결박이 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구니를 여윌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행(行)을 갖추었으면 행을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이 여섯 가지 미세한 것이 본행의 과보에 미끌어져 들어간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과보[報]를 갖춘 것은 과보를 이름으로 삼으니, 계경에서 “모든 현인이 그가 한 번 베푼 과보로 일곱 번 청상에 태어나 천왕이 되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왕이 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029_0308_b_07L使具使爲名如契經所說出『雜阿含』比丘色所使愛色比丘所使彼卽是愛若愛愛已爲魔所縛欲具欲爲名彼契經說同上五欲功德世間愛樂念具鉤爲名如契經所說同上五欲功德是魔魔鉤
이와 같이 아비담을 갖춘 것도 아비담을 이름으로 삼는데, 다만 아비담의 성품은 무루의 지혜와 근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이 귀신이 긴 밤에 아첨함이 없고, 거짓 없이 곧바로 묻는 일을 시설한 것은 다 알고자 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할 뜻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법다운 일이니, 내가 차라리 매우 길은 아비담을 그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029_0308_b_13L縛具縛爲名如契經所說同上比丘受色爲魔所縛不受者爲離魔具行爲名如契經所說同上此六細滑入本行報報具報爲名如契經所說出『中阿含』諸賢彼一施報七生天上爲天王七生人爲人王
029_0308_c_01L【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바로 무루의 혜와 근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범마바라문(梵摩婆羅門)은 긴 밤에 아첨함이 없고, 거짓 없이 곧바로 묻는 일을 시설한 것은 다 알고자 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할 뜻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법다운 일이니, 내가 차라리 매우 길은 아비담을 그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위와 같음.
029_0308_b_18L如此中餘具餘爲名如是阿毘曇具名阿毘曇但阿毘曇無漏慧根是如佛契經說此鬼長夜無諛諂ㆍ無幻質直設問事者盡欲知故無觸嬈意此亦如法我寧可以甚深阿毘曇授之出『中阿含』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곧 무루의 혜(慧)와 근(根)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이학(異學) 수발(須跋)은 아첨함이 없고, 거짓 없이 곧바로 묻는 일을 시설한 것은 다 알고자 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할 뜻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법다운 일이니, 내가 차라리 매우 깊은 아비담을 그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029_0308_b_23L問曰此中云何說甚深阿毘曇
答曰卽是無漏慧根如佛契經說梵摩婆羅門長夜無諛諂ㆍ無幻質直設問者盡欲知故無觸嬈意此亦如法我寧可以甚深阿毘曇授之同上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곧 무루의 혜와 근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아난아, 연기(緣起)는 매우 깊고, 명(明) 또한 매우 깊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029_0308_c_05L問曰此中云何說甚深阿毘曇
答曰卽是無漏慧根如佛契經異學須跋無諛諂ㆍ無幻質直設問事者盡欲知故無觸嬈意此亦如法我寧可以甚深阿毘曇授之出『雜阿含』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인(因)과 연(緣)이 매우 깊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이 곳은 매우 깊으니, 이처럼 경의 연기 이것 또한 매우 깊다. 이른바 모든 생사를 버리고 여의어서 애착이 다하고 욕심이 없어진 멸진의 열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029_0308_c_09L問曰此中云何說甚深阿毘曇
答曰卽是無漏慧根如佛契經說阿難緣起甚明亦甚深出『中阿含』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인과 연이니, 인과 연으로 버리고 여읜 것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계경에서 “모든 법은 매우 깊기 때문에 보기 어려우며, 보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029_0308_c_12L問曰此中云何說甚深
答曰此中說因及緣甚深如佛契經說此處甚深如此經緣起此亦極甚深所謂捨離一切生死ㆍ愛盡ㆍ無欲ㆍ滅盡ㆍ涅槃出『雜阿含』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모든 법이 매우 깊음을 말하였으니, 이는 부처님이 계경에서 “무슨 까닭에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은 눈이 멀어 볼 수 없는가? 매우 깊은 아비담을 논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중아함에 나옴.
029_0308_c_16L問曰此中云何說甚
答曰此中因及緣因及緣捨離說甚深如佛契經說一切法甚深故難難見故甚深出『雜阿含』
029_0309_a_01L【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은 아비담’이라고 말하는가?
【답】뜻이 생기는 것이니, 이는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선니(先尼)야, 나의 법은 매우 깊어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살펴 행하지 않으면 너는 저 법을 찾을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마치 네가 긴 밤에 달리 보고, 달리 참으며, 달리 바라고, 달리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029_0308_c_19L問曰此中云何說甚深
答曰此中說一切法甚深如佛契經說何故汝愚人盲無目論甚深阿毘曇出『中阿含』
【문】이 가운데 무엇을 ‘매우 깊음’이라고 말하는가?
【답】이 가운데 공삼매(空三昧)가 매우 깊다고 말하였다.
029_0308_c_22L問曰此中云何說甚深阿毘曇
答曰意生也如佛契經說先尼我法甚深難見難覺非察行汝不審彼法何以故如汝長夜異見異忍ㆍ異欲異樂出『雜阿含』
【문】어째서인가?
【답】공무아(空無我)인데 저 이학은 아가 있다고 헤아려서, 저것이 다만 아비담의 성품인 무루의 혜와 근임을 살펴 알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모든 세간에서 닦는 혜가 깨끗하지 못하다. 안반념(安般念)과 의지(意止)와 난(暖)과 정(頂)과 인(忍)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의 모든 것이 아비담으로 이름을 얻게 되니,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思)와 혜의 작용으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끊고 어리석음의 종자와 연이어 일어나는 어리석음을 없애 법 가운데에서 전도되지 않고 행하게 된다. 이것 또한 모든 것이 아비담으로 이름을 얻는다. 그로 말미암아서 모든 중생이 얻은 과보로 선혜(善慧)를 듣고 그가 이 12부경에 대해서 듣고 수지하고 사유하고 헤아려 이 모든 아비담을 관찰하여 이름을 얻는다. 비록 이러함이 있으나 단지 아비담의 성품은 무루의 혜와 근 뿐이다.
029_0309_a_03L問曰此中云何說甚深
此中說空三昧甚深
【문】아비담에는 어떤 문구의 뜻이 있는가?
029_0309_a_04L何以故
答曰無我彼異學計有我不審知彼但阿毘曇性無漏慧根由彼故諸世間所修慧不淨ㆍ安般念ㆍ意止ㆍ暖來ㆍ頂ㆍ忍ㆍ世間第一法一切阿毘曇得名由彼故諸思慧用斷諸法自相及共相ㆍ壞愚種及緣愚於法中不顚倒行此亦一切阿毘曇得名由彼故諸生所得報聞善慧彼於此十二部聞受持思惟稱量觀此一切阿毘曇得名雖有是但阿毘曇性無漏慧根
【답】존자 바수밀(婆須蜜)은 “이것은 구경지(究竟智)며, 이것은 단지(斷智)며, 이것은 제일의지(第一義智)며, 이것은 무기지(無欺智)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거듭 말하기를, “어떤 법보다도 위에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 유학(有學)의 자상ㆍ공상 같은 것은 그가 그 힘을 다하더라도 이길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어떤 법보다도 위에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029_0309_a_14L問曰阿毘曇有何句義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말하기를, “모든 존귀하신 분의 염오나 청정이나 속박되거나 풀려나거나 생사윤회하거나 벗어나는 것을 법이라고 한다. 이를 따르기 때문에 명신(名身)과 구신(句身)과 미신(味身)과 차제(次第)와 엄치(嚴治)와 안처(安處)와 조작(造作)을 아비담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029_0309_a_15L尊者婆須蜜說曰此究竟智ㆍ此斷智ㆍ此第一義智ㆍ此無欺智謂阿毘曇重說曰此無非法在上謂阿毘曇若有學自相共相彼盡其力不能勝以是故無非法在上是謂阿毘曇
029_0309_b_01L 존자 구사(瞿沙)는 말하기를, “육도[諸趣]에서 해탈하여 지혜를 구할 때에도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 이른바 이것은 고와 고의 원인이며, 이것은 도와 도의 과보이니, 이것이 도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애도(無礙道)며, 해탈도며, 증익도(增益道)니, 이것은 이 과보를 향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육도에서 해탈하여 지혜를 구할 때에도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09_a_20L尊者曇摩多羅說曰諸尊染污淸淨縛解輪轉出要謂之法也從此故名身句身味身次第嚴治安處造是謂阿毘曇
담무덕(曇無德)이 말하기를, “이 법은 비할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029_0309_a_23L尊者瞿沙說曰諸趣解脫當求智時未顯示顯示是謂阿毘曇所謂此苦ㆍ苦因ㆍ此道ㆍ道果是求道ㆍ此無㝵道ㆍ解脫道是增益道ㆍ是向是果是故說諸趣解脫當求智時顯示顯示是謂阿毘曇曇無德說曰此法無比是謂阿毘曇
【문】여기에는 어떤 비할 바 없는 것이 있는가?
029_0309_b_06L問曰此有何無比
【답】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答曰如所說偈

지혜가 세간의 묘함이 되어
지극한 곳에 나아갈 수 있다.
능히 등정지(等正智)를 써서
생노병사가 없어지네.
029_0309_b_07L智爲世間妙
能趣有所至
能用等正智
生老病死盡

또 지혜는 모든 법보다 뛰어나니, “오묘하고 성스러운 불제자가 지혜의 칼로 모든 결박된 번뇌[使]를 끊고, 괴로움의 올가미를 거듭 쳐서 끊고 거듭 쳐서 손상시킨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잡아함에 나옴. 이 때문에 “이 법은 비할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029_0309_b_09L復次慧過一切法上如所說諸妙聖弟以慧刀斷一切結縛使惱纏重斷打重打割剝出『雜阿含』以是故說此法無比是謂阿毘曇
비바사바제(鞞婆闍婆提)가 말하기를, “이 법은 밝아서 비출 수 있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세간에는 밝기가 지혜와 같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으며위와 같음, 또 “모든 밝음이 있는 것에서 지혜의 밝음이 제일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위와 같음. 그러므로 “이 법은 밝아서 비출 수 있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제(舍提)는 말하기를, “없애지 못한 것을 없앨 수 있으며, 간택하지 못한 것을 간택할 수 있으니, 이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029_0309_b_13L鞞婆闍婆提說曰此法明能照是謂阿毘曇如所說世間無有明與慧等同上復如所說諸所有明慧明說第一同上是故說此法明能照謂阿毘曇舍提說曰未盡能盡ㆍ未擇能擇是謂阿毘曇
【문】어떤 것을 없애는가?
【답】번뇌와 괴로움이다.
029_0309_b_18L問曰何所盡
答曰結縛使惱纏也
【문】어떤 것을 간택하는가?
【답】계와 입과 음과 연기다. 그러므로 ‘없애지 못한 것을 없앨 수 있고, 간택하지 못한 것을 간택할 수 있으니. 이를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유자는 말하기를, “법과 차법(次法)이 향하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029_0309_b_19L問曰何所擇
答曰入陰緣起是故說未盡能盡未擇能是謂阿毘曇譬喩者說曰法次法向是謂阿毘曇
029_0309_c_01L【문】무엇을 법과 차법이라고 하는가?
【답】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열반은 제일의법이니, 저것 다음에 다시 어떤 법이 있는가?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방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과 차법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존자 바발금(婆跋芩)은 말하기를, “증상의 사(事)와 증상의 전(轉)이기 때문이니, 이를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최상장(最上長)과 증상장(增上長), 최상만(最上慢)과 증상만(增上慢)’이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 또한 이와 같다아비담의 서문을 마치다.
029_0309_b_22L問曰云何法次法
答曰契經說涅槃第一義法彼次更有何謂聖八道也是故說法次法是謂阿毘曇尊者婆跋芩說曰增上事ㆍ增上轉故是謂阿毘曇如所說最上長增上長ㆍ最上慢ㆍ增上慢此亦爾序阿毘曇竟也
【문】3결(結), 3불선근(不善根), 3유루(有漏), 4류(流), 4액(軛), 4수(受), 4박(縛), 5개(蓋), 5결(結), 5하결(下結), 5상결(上結), 5견(見), 6신애(身愛), 7사(使), 9결(結), 98사(使)가 있다. 이 모든 부처님의 계경에서는 5결과 98사를 제외시켰다. 5결을 제외시키고 나서 마땅히 5상결을 세우니, 무슨 까닭인가?
【답】저것은 부처님의 계경에서 제외한 98사니, 이미 세운 바가 없다.
029_0309_c_04L三結ㆍ三不善根ㆍ三有漏ㆍ四流ㆍ四軛ㆍ四受ㆍ四縛五蓋ㆍ五結ㆍ五下結ㆍ五上結ㆍ五見六身愛七使九結九十八使此一切佛契經除五結ㆍ九十八使除五結已立五上結何以故
答曰彼是佛契經除九十八使已無所立
【문】무슨 까닭인가?
029_0309_c_10L問曰何以故
【답】존자 담무다라는 “아비담을 네 아함(阿鋡)의 계경 등에서 다하여 그 가운데서 관찰하였으니, 부처님의 계경에서 그것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계경이 아니니, 이러므로 마땅히 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09_c_11L答曰尊者曇無多羅盡以阿毘曇於四阿鋡契經等觀於中非佛契經捨之此非佛契經是故應捨之
【문】혹자가 말하기를, “이 5결은 장에서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029_0309_c_13L或曰此五結於章不應捨何以故
【답】이것은 부처님의 계경인 『증일아함』의 5법 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다. 저 경을 지은 자가 원(願)과 지(智)와 관(觀)을 이미 이 아비담의 장에 세웠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부(無量部)가 오래 전에 없어졌다.
029_0309_c_14L答曰此佛說契經『增一阿鋡』五法中於久時已來亡失彼作經者願智觀已立此阿毘曇章佛說無量部久時亡失
어떤 이는 말하기를, “『증일아함』에서는 1법으로부터 백법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1법으로부터 10법에 이른다. 이 1법도 대부분 없어져서 남아 있지 않으니, 10법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029_0309_c_17L說者『增一阿鋡』從一法至百法今從一法至十法於此一多有失不存如是至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존자 사나바(舍那婆)아라한은 기바(耆婆)의 논사다. 그가 반열반(般涅槃)한 곧 그 날에 칠십천생경(七十千生經)을 잃어버렸으니, 아비담 중에 십천경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이후로 불법이 다시 행하여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029_0309_c_20L復說尊者舍那婆阿羅漢是耆婆彼般涅槃日卽彼日亡失七十千生阿毘曇中亡失十千經從是以來佛法不復行
029_0310_a_01L 이와 같이 이 무량부가 오래 전에 없어져 버렸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계경에서 말한 5결(結)은 『증일아함』의 5법 중에서는 오래 전에 없어졌으므로 저 경을 지은 자가 서원과 지혜와 관한을 이 아비담의 장에 세운 것이다.
029_0309_c_23L如是此無量部久時亡如是佛契經說五結『一增阿含』於五法中久時亡失彼作經者願智觀立此阿毘曇章
【문】98사(使)는 부처님의 계경이 아닌데, 어째서 이 장에서는 버리지 않는가?
【답】이 모든 것은 계경의 뜻이고, 계경에서 모은 것이고, 계경의 말이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7사(使)와 분별계(分別界)와 분별종(分別種)과 분별행(分別行)을 포함하여 곧 91사가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두 부처님의 계경이 아니니, 모두 장 가운데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029_0310_a_03L問曰九十八使非佛契經何以故於此章不捨
答曰一切是契經義ㆍ契經採ㆍ契經說佛契經中說七使分別ㆍ界分別ㆍ種分別行攝已便有九十一使或曰俱非佛契於章中俱不應捨
【문】5결은 부처님의 계경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 장에서는 버리지 않았는가?
【답】저 경을 지은 자의 의도일 뿐이다. 이는 마치 내가 따로 일체변결을 말하고, 따로 비일체변결(非一切遍結)을 말하고, 따로 일체변과 비일체변을 말한 것과 같다. 그가 일체변결을 따로 말한 것은 3결과 같고, 비일체변을 따로 말한 것은 5결과 같고, 일체변과 비일체변을 따로 말한 것은 9결과 같다. 이러므로 저 경을 지은 자의 의도일 뿐이니, 3결에서 98사에 이른다.
029_0310_a_08L問曰五結非佛契經於此章中何以不捨
答曰彼作經者意欲爾如我別說一切遍結ㆍ別說非一切遍ㆍ別說一切遍非一切遍彼別說一切遍結如三結ㆍ別說非一切遍如五結ㆍ別說一切遍非一切遍如九結是故彼作經者意欲爾三結至九十八使
【문】무엇 때문에 장을 지었는가?
【답】문을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장이 없이 문을 세울 수 없으니, 손으로써 허공을 장엄할 수 없다.
029_0310_a_15L問曰何以故作章
答曰爲立門故不可以無章而得立門可以手莊虛空
【문】어느 곳이 장엄할 만한가?
問曰何處可莊
【답】장엄할 만한 곳을 장엄하니, 이와 같이 장이 없이 문을 세울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장(章)이 없이 공허한 논의를 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음(陰)ㆍ품수(品數)를 잘 짓고, 장을 잘 지으며, 문(門)을 잘 세운다. 백천 가운데 하나를 잘 지니는 것도 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어찌 모아 놓은 것을 산만하게 풀어 흐트려 놓는 자 중에 누구인들 지닐 수 있겠는가? 이것을 오래 머물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0_a_17L答曰莊可莊處如是不可以無章而得立或曰莫令無章空論也或曰以久住故如此陰品數善造ㆍ善作章ㆍ善立百千中可一能得持亦有不者況散解亂合聚誰能得持是謂以久住故
029_0310_b_01L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스스로 혼란한 지견이 나타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경을 지음에 혼란한 지견이 있었다면 저 경도 혼란될 것이니, 이로써 알 수 있다. 저 경을 지은 자가 혼란한 지견이 없이 이 경을 지어 착하고 바른 것을 혼란시킴이 없으니, 이것을 스스로 혼란한 지견이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장을 지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0_a_23L或曰自無亂知見現故若有作經亂知見者彼經亦亂以此可知作經者無亂知見結作此經不亂善是謂自無亂知見現故作章
【문】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계경에서 장을 지음을 세웠는가?
【답】부처님 계경의 무량한 뜻을 나다내려고 한 것이니, 이 외부(外部)는 뜻이 적거나 뜻이 없다. 뜻이 적은 것은 라마나(羅摩那)의 십이천(十二千) 장과 이(二) 구절의 뜻을 외우니, 라마나파 장자 사타저파라미(私陁去波羅彌)를 다시 데리고 온 것이다. 뜻이 없는 것은 한 여자 때문에 18해(姟)의 중생을 죽였으니, 철성(鐵城)에 가득한 풀과 같다. 외부는 이와 같이 뜻이 적거나 뜻이 없다.
029_0310_b_03L問曰何以故佛契經立作章
答曰欲現佛契經無量義故此外部少義ㆍ無義義者誦羅摩那十二千章二句義摩泥將私陁去波羅彌還將來無義以一女故殺十八姟衆生如鐵城滿中草外部如是少義ㆍ無義
【문】부처님의 계경은 어떠한가?
029_0310_b_09L問曰契經云何
【답】한없는 뜻이 있으며, 끝없는 맛이 있다. 이는 마치 큰 바다가 한없이 매우 깊으며 매우 넓고 같이 없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의 계경도 이와 같다. 한없는 뜻과 끝없는 맛이라는 것은 존자 사리불(舍利弗)이, 이와 같이 백천 나술수(百千那術數)로 백천 경을 지어도 저 지혜를 다하여 머물 수 없으나, 부처님의 계경의 이 구의 뜻으로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데 이른다고 한 것에 비교되니, 이를 일러 ‘부처님 계경의 무량한 뜻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다.
029_0310_b_10L答曰無量義ㆍ無邊味如大海無量甚深極廣無邊佛契經亦如無量義無邊味者如尊者舍利弗如是百千那術數作百千經盡彼智住不可得佛契經二句義至底度彼岸是謂佛契經現無量義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물음을 용인하니 계경을 나타낸다고 답한 것이다. 이 외부는 물음을 용인하지 않고 답 또한 용인하지 않는데, 이는 마치 원숭이가 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거듭 치는 것을 음인하지 않으니, 절구공이로 쳐서 곧 해산시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이 외부는 물음을 용인하지 않고 답 또한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묻는 일은 이미 절구공이로 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029_0310_b_15L或曰忍問答現契經故此外部問亦不忍ㆍ答亦不忍猶如獼猴子亦不忍擣ㆍ不忍重擣以杵擣便解散如是此外部問亦不忍ㆍ答亦不忍問事已如被杵
【문】부처님의 계경은 어떠한가?
問曰佛契經云何
【답】바라나의(波羅奈衣)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절구공이로 치는 것을 용인하고 거듭 치는 것도 용인하니, 치고 거듭 쳐서 물건이 유연해진다. 부처님의 계경도 이와 같아서 묻는 것도 용인하고 답하는 것도 용인하며, 물음과 같고 답과 같다. 계색(戒色)이 더욱 좋아지고, 공덕이 유연해지니, 이러므로 물음과 답을 용인하여 부처님의 계경을 나타낸다.
029_0310_b_20L答曰如成就波羅捺衣杵擣亦忍ㆍ重擣亦忍擣重擣益有色柔軟佛契經亦如是問亦忍ㆍ答亦忍如問如答戒色益好功德柔是故忍問答現佛契經故
029_0310_c_01L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의 계경은 오묘함을 열어 보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계경을 말씀하셨다. 다음의 이 세 가지 일은 덮으면 오묘하고 열면 오묘하지 않다. 무엇이 셋인가? 무명과 바라문의 말과 여자이다. 세 가지 일은 열면 오모하고 덮으면 오묘하지 않다. 무엇이 셋인가? 밝은 때와 달과 부처님이다잡아함에 나옴. 이것을 부처님 계경은 오묘함을 열어 보이는 것이라고 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계경에서 장을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0_c_01L或曰契經開示妙故佛說契經此三事覆則妙ㆍ開則不妙云何三無明者ㆍ婆羅門語ㆍ女三事開則妙ㆍ覆則不妙云何明ㆍ日月ㆍ佛語出『雜阿含』是謂佛契經開示妙故佛契經作章
【문】무엇 때문에 먼저 장을 짓고 뒤에 문을 세웠는가?
029_0310_c_06L問曰何以故先作章後立門
【답】땅을 다스리는 법이기 때문이니, 사람이 나무를 심고자 할 때 먼저 그 땅을 다스린 다음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사람도 이와 같으니, 땅을 다스리는 법은 먼저 장을 짓는 것에 해당하고, 나무를 심는 법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
029_0310_c_07L答曰治地法故如人欲種樹先治其地然後種樹彼作經者亦如是治地法先作章種樹法後立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초의 법 때문이니, 사람이 집을 지을 때 그 사람이 먼저 기초를 만든 다음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사람도 이와 같으니, 기초의 법은 먼저 장을 지은 것에 해당하고, 집을 세우는 법은 뒤에 문을 세운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0_c_10L或曰基法故如人作舍彼先作基然後立舍彼作經者亦如是基法故先作章立舍法後立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무를 본뜨는 법이기 때문이니, 조각가와 조각의 제자가 먼저 본을 다스린 다음에 마디를 세우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것도 이와 같으니, 나무에 본을 뜨는 것은 먼저 장을 지음에 해당하고, 마디를 만드는 법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0_c_12L或曰木摸法如像師像師弟子前治摸然後立枝彼作經亦如是木摸治法前作章枝節法後立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림 그리는 법이기 때문이니, 화가와 화가의 제자가 먼저 본뜬 다음에 색칠을 하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본뜨는 법은 먼저 장을 짓는 것에 해당하고, 색칠을 하는 것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0_c_15L或曰畫法故如畫師畫弟子先摸然後傅釆彼作經者亦如是摸法者先作章傅釆法後立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발을 만드는 법이기 때문이니, 저 가발 만드는 사람과 그 제자가 먼저 실을 꼰 다음에 여러 가지 술을 맺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실을 꼬는 것은 먼저 장을 짓는 것에 해당하고, 가발을 맺는 것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0_c_17L或曰綖法故如彼巧鬘師鬘弟子前繩綖已然後結種種華鬘彼作經者亦如是綖法前作章鬘法後立門
029_0311_a_01L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존귀한 법을 나타내는 불세존도 다시 그러하니, 분별법을 말씀하신 것은 세존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이고, 비구인에게 6계취(界聚)와 6경(更)과 4처첫째는 진제처(眞諦處)고, 둘째는 시처(施處)고, 셋째는 혜처(慧處)고, 넷째는 식처(識處)이다와 18의행(意行)이 있은 다음에 분별하였으니, 이것이 비구의 6계와 6경과 4처와 18의행이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법을 말한 것은 먼저 장을 지은 것에 해당하고, 법을 분별한 것은 뒤에 문을 세운 것에 해당한다. 이것이 존귀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0_c_20L或曰現尊法佛世尊亦復爾說分別法尊前說比丘人有六界聚ㆍ六更ㆍ四處一眞諦處ㆍ二施處ㆍ三慧處ㆍ四息處也ㆍ十八意行然後分別爲比丘六界ㆍ六更ㆍ四處ㆍ十八意行彼作經者亦如是說法者前作章分別法者後立門是謂現尊法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함을 나타내는 법이기 때문이니, 저 수행하는 이가 먼저 사대로써 색을 만들어 장을 지은 다음에 저 색이 미세하게 깨뜨려지는 것과 같다. 저 경을 지은 자도 이와 같으니, 4대(大)로 색을 만드는 법은 먼저 장을 지음에 해당하고, 색을 깨뜨리는 것은 뒤에 문을 세우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은 수행을 나타내는 법을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1_a_03L或曰現修行法故如彼修行前以四大造色作章然後彼色微細破散彼作經者亦如四大造色法前作章破散色法然後立門是謂現修法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논의를 나타내는 법이기 때문이니, 이 논의의 법은 먼저 묻고 뒤에 답하였다. 이것은 논의를 나타내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장을 짓고 뒤에 문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1_a_07L或曰現論法此論之法前問後答是故現論法是謂彼作經者先作章後立門
【문】무엇 때문에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나아가 뒤에 98사를 세웠는가?
029_0311_a_09L問曰何以彼作經先立三結後立至九十八使
【답】앞에서 이미 아비담을 말하고 모습을 말하였으니, 마땅히 아비담의 모습을 구해야지 차제를 찾아서는 안 되고, 계경에서 마땅히 차제를 구해야 된다. 무엇 때문인가? 이 꿈의 차제는 이 품을 말한 것이고, 율은 처음과 끝을 말하였으니, 마땅히 처음과 끝을 구해야 한다.
029_0311_a_11L答曰前已說阿毘曇說相當求阿毘曇相不應索次第契經當求次何以故此品次第說此品律說本當求本末
이 뜻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겼는가? 다만 아비담의 보습을 말한 것에서는 아비담의 모습을 구해야 하고, 차제를 구해서는 안 된다. 다시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나아가 뒤에 내지 98사를 세웠으나, 다만 아비담이 흐트러진 것이 많아 어지러이 모아 놓은 것이니, 누가 차제를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아비담에서 모습을 말하였으면 모습을 구해야 되지 차제를 구해서는 안 되니, 앞뒤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029_0311_a_14L此義由何生但阿毘曇說相當求阿毘曇相不應求次第復次可說所以彼作經先立三結ㆍ後立至九十八使但阿毘曇多破散亂合聚能盡說次第但阿毘曇說相當求相應求次第前後無在
존자 바사(婆奢)가 말하기를, “모든 의심나는 법은 어긋나지 않으니, 만약 먼저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을 세우고 사람은 뒤에 98사를 세우면 저것에도 마땅히 이러한 의심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나는 법은 어긋나지 않으며, 앞뒤가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029_0311_a_19L尊者婆奢說曰一切疑法不違若先立三不善根立至九十八使彼亦當有此疑是故一切疑法不違前後無在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경을 지은 자의 의도일 뿐이다. 이는 마치 내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나아가 뒤에 98사를 세운 것과 같으니, 이러한 까닭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1_a_22L或曰彼作經者意欲爾如我先立三結後立至九十八使以是故爾
029_0311_b_01L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증익의 법이기 때문에 먼저 세 가지를 나타내고, 뒤에 4ㆍ5ㆍ6ㆍ7ㆍ98사를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증익의 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1_b_01L或曰增益法故現三後四五六七九ㆍ九十八使是故增益法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례로 네 사문의 과보를 세우기 때문이다. 3결이 영원히 없어지면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세우게 되니, 그러므로 그가 앞에서 세 가지 불선근을 세운 것이다. 나머지가 다 없어지면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세우고, 영원히 없어지면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세우니, 이러므로 여기에서 차제로 세운 것이다. 저 세 가지 유루(有漏)가 영원히 없어지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세우니, 이러므로 그가 뒤에 모든 유(流)ㆍ액(扼)ㆍ수(受) 내지 98사를 세운 것이다. 이 모든 자세한 설명에는 누루(漏漏)가 있고 차등[差降]이 있고, 누증(漏增)이 있다. 이 세 가지 유루를 유ㆍ액ㆍ수 내지 98사라고 한다. 이러므로 차제로 네 사문의 과보를 세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1_b_03L或曰次第立四沙門果故結永盡立須陁洹果是故彼前立三不善根餘盡立斯陁含果永盡立阿那含果是故此次立彼三有漏永盡立阿羅漢果是故彼後諸流ㆍ扼ㆍ受乃至九十八使此一切廣說有漏ㆍ漏有差降ㆍ有漏增此三有漏謂是流ㆍ扼ㆍ受至九十八使是故次第立四沙門果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차제로 결수(結樹)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 결수는 먼저 세 가지를 나타내고, 뒤에 4ㆍ5ㆍ6ㆍ7ㆍ9ㆍ98사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저 경을 지은 자가 먼저 3결을 세우고, 뒤에 98사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
029_0311_b_10L或曰次第立結樹故此是結樹前現後四五六七九ㆍ九十八使是故彼作經者先立三結後立至九十八使廣說章處盡

1) 삼결처(三結處)
029_0311_b_14L鞞婆沙三結處第一

3결(結)은 신견(身見)과 계도(戒盜)와 의(疑)다.
029_0311_b_15L三結身見ㆍ戒盜ㆍ疑
【문】3결에는 어떤 성질이 있는가?
【답】신견은 삼계에 한 가지씩 있으므로 세 가지다. 계도는 삼계에 두 가지씩 있으므로 여섯 가지다. 의는 삼계에 네 가지씩 있으므로 열두 가지다. 이 스물한 가지가 3결의 성질이며, 이 3결의 성질은 이미 여러 모양의 몸에 있는 자연스런 것이다. 성품을 말하였으니, 행을 말하겠다.
029_0311_b_16L問曰三結有何性
答曰身見者三界有一種此三種盜者三界有二種此六種疑者三界有四種此十二種此二十一種是三結性此三結性已種相身所有自然說性已當說行
【문】어째서 결이라고 말하였으며, 결의 뜻은 무엇인가?
【답】‘묶는다.’는 뜻이 ‘결’의 뜻이며, ‘고통에 매어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며, ‘잡다한 독’의 뜻이 ‘결’의 뜻이다. ‘묶는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는 것은 ‘묶는다.’는 것이 ‘결’이며, ‘결’이 ‘묶는다.’는 것이다.
029_0311_b_21L何以說結結義云何
答曰縛義是結義ㆍ苦繫義是結義ㆍ雜毒義是結義縛義是結義者縛是結ㆍ結是縛
【문】어떻게 아는가?
云何知
029_0311_c_01L【답】계경에 있다. 저 계경에서 “존자 사리불이 존자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현자 구치라여, 눈이 색(色)에 매어 있습니까, 색이 눈에 매어 있습니까?’
029_0311_c_01L答曰有契經彼契經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絺羅何賢者拘絺羅眼繫色耶色繫眼耶
‘존자 사리불이여, 눈이 색에 매인 것이 아니며, 색이 눈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뜻[意]과 법(法)에 이르기까지도 뜻이 법에 매인 것이 아니며, 법이 뜻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음란함이나 욕애(欲愛) 같은 것이 저기에 매인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비유하자면 두 마리 소가 있는데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흰 소로서, 하나는 멍에에 하나는 가슴걸이에 매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검은 소가 흰 소를 매고 있고 흰 소가 검은 소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저것은 똑같이 말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현자 구치라여.’
029_0311_c_03L答曰尊者舍利弗不眼繫色ㆍ不色繫至意法不意繫法ㆍ不法繫意但此中若婬若欲是彼繫也尊者舍利弗譬如二牛一黑一白一軛一鞅縛繫尊者舍利弗若有作是說黑牛繫白牛ㆍ白牛繫黑牛尊者舍利弗彼爲等說不答曰不也賢者拘絺羅
‘어째서 그렇습니까?’
‘현자 구치라여, 검은 소가 흰 소를 매고 있는 것이 아니며, 흰 소가 검은 소를 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멍에와 가슴걸이에 매여 있는 것이 그가 매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눈이 색에 매인 것이 아니며, 색이 눈에 매인 것이 아니며, 뜻이 법에 이르러서도 뜻이 법에 매인 것이 아니며, 법이 뜻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음란함과 욕애 같은 것이 저것을 얽매고 있는 것입니다.’『잡아함』에 나옴”라고 하였다. 이것을 ‘묶는다.’는 것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029_0311_c_10L何以故賢者拘絺羅非黑牛繫白牛ㆍ非白牛繫黑牛但以軛鞅繫是彼繫如是尊者舍利弗不眼繫色ㆍ不色繫眼意法不意繫法ㆍ不法繫意但此中若婬若欲是彼繫出『雜阿含』是謂縛義是結
‘고통에 매여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욕계의 겉은 욕계의 중생이 욕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고, 색계의 결은 색계의 중생이 색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고, 무색계의 결은 무색계의 중생이 무색계 중의 고통에 매인 것이다. 모든 욕계의 결은 저것이 매여 있는 모양이니, 고통 가운데 매여 즐거움이 아닌 것이다. 모든 색ㆍ무색계의 결은 저것이 매여 있는 모양이니, 고통 가운데 매여 즐거움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고통에 매여 있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029_0311_c_16L苦繫義是結義者欲界結欲界衆生欲界中苦繫色界結色界衆生色界中苦繫無色界結無色界衆生無色界中苦繫諸欲界結彼是繫相苦中非是樂諸色無色界結彼是繫繫苦中非是樂是謂苦繫義是結
029_0312_a_01L ‘잡다한 독의 뜻이 결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매우 오묘한 생처(生處)와 세속의 정수(正受)는 해탈과 같아서 모든 것에 들어가고 저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는 것을 제거하고 번뇌의 잡다한 독을 맺음을 제거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매우 오묘한 음식에 들어 있는 잡다한 독과 같아서, 지혜로운 자는 잡다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매우 묘한 생처와 세속의 정수에서 저 성인이 번뇌의 잡다한 독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이 ‘매여 있다.’의 뜻이 ‘묶여 있다.’의 뜻이며, ‘고통에 매인다.’의 뜻이 ‘견’의 뜻이며, ‘잡다한 독’의 뜻이 ‘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계경에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須陀洹)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29_0311_c_22L雜毒義是結義者極妙生處世俗正受如解脫除入一切入彼聖所除結雜毒故如極妙食雜毒慧者能以雜毒故如是極妙生處世俗正彼聖能除結雜毒故是謂繫義是縛義ㆍ苦繫義是結義ㆍ雜毒義是結如佛契經說三結盡須陁洹
【문】아비담에서는 여든여덟 가지의 견도에서 끊는 번뇌[見所斷]가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였으니 화지(華池)의 비유와 같고, 계경에서는 한량없는 괴로움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였는데잡아함에 나옴, 어째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하는가?
029_0312_a_05L問曰如阿毘曇所說八十八見所斷盡陁洹如華池喩契經所說無量苦盡須陁洹出『雜阿含』何以故說三結盡須陁洹
【답】이것은 세존께서 달리 말씀이 계셨으니 말을 생략하여 그 말을 행하도록 하게 하려는 것이며, 세존께서 교화하려고 한 것이다.
029_0312_a_08L答曰是世尊餘言略言ㆍ欲令行言尊爲教化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 때문이며, 권속 때문이며, 근기 때문이며, 교화 때문이니, 저 교화받는 자를 위하여 이러한 일을 분별하여 말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2_a_10L或曰爲人故ㆍ爲眷屬故ㆍ爲器故ㆍ爲教化故彼受化者能辯說爾所事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교화하기 위한 것이니, 의사의 치료가 병든 사람을 위하는 것과 같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하여 병의 근원을 자세히 알아서 병에 따라 약을 투여하는데, 병의 차도 없음을 염려하여 줄이지도 않고 그 공의 덜음을 염려하여 불리지도 않으니, 중도에 처하여 병을 차도있게 한다. 불세존께서 말씀하신 것도 다 교화하려는 것이니, 저 세존께서 교화받는 자를 위하여 몸을 알고 번뇌를 알고 나서 도(道)의 약을 투여하신다. 번뇌의 병이 없어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줄여서 설하지도 않고 그 공의 덜음을 염려하여 불려서 설하지도 않으니, 중도에 처하여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
029_0312_a_12L或曰佛世尊所說盡爲教化如醫療治盡爲病人故彼醫爲病者審知病根而說隨病投藥不說減少恐病不差亦不說增恐捐其功中而說欲令病差如佛世尊所說爲教化故彼世尊爲受化者知身知使已爲投道藥亦不減說恐結病不亦不說增恐捐其功處中而說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끌어 교화에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고, 일을 쉽게 행하게 하려는 것이고, 손수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2_a_19L誘進教化故ㆍ事易行故ㆍ手扶佐故
029_0312_b_01L이 중에 마땅히 발기자(跋耆子)의 비유를 말하겠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발기자라고 하는 비구가 있는데, 세존의 사문이 되었다. 세존께서 점차로 250계(戒)를 시설하셨는데 그가 듣고서 싫어하여 세존께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250계를 시설하셔서 보름마다 점차로 족성자(族姓子)로 하여금 배우게 하시지만 저는 이러한 계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029_0312_a_20L此中應說跋耆子喩有說者有比丘名跋耆子於世尊境作沙門世尊爲漸漸設出二百五十戒彼聞已厭世尊所說世尊設出二百五十戒月次來令族姓子學唯世尊我不能行爾所戒
그러자 세존께서 거칠지 않은 말로 권하는 것을 좋게 여기시어, ‘선하고 선하구나. 발기자여, 너 발기자는 삼계를 행할 수 있으니, 증상계(增上戒)와 증상의(增上意)와 증상혜(增上慧)를 행하겠느냐, 행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셨다.
029_0312_b_03L世尊善不麤言勸善哉跋耆子汝跋耆子能行三戒增上戒ㆍ增上意ㆍ增上慧不
그가 듣고서 곧 기뻐 뛰며 ‘내가 이 삼계를 잘 행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선서시여, 제가 마땅히 열심히 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 그가 삼계를 배울 때에 점차로 모든 계의 바다[戒海]를 배웠다.
029_0312_b_05L彼聞已便踊躍作是我能善行此三戒彼說曰唯世尊當學善逝我當燃熾行彼學三戒時漸漸學一切戒海
만일 세존께서 이와 같이 교화하시려고 ‘여든여덟 가지 견도에서 끊어지는 번뇌가 수다원이 되며, 한량없는 괴로움이 없어지면 수다원이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가 듣고서 싫어하여,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산을 깨뜨릴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나무뿌리를 뽐을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강물을 건널 수 있으며, 누가 이 여든여덟 가지의 괴로움의 바다를 마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029_0312_b_08L若世尊如是爲教化八十八見斷盡須陁洹ㆍ無量苦盡須陁洹彼聞已厭誰能破此八十八苦山誰能拔此八十八苦樹根誰能度此八十八苦河誰能竭此八十八苦海
이는 부처님의 계경에서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 된다는 말을 저 교화를 받는 자가 듣고서 곧 ‘내가 이 3결을 잘 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그가 3결을 굽을 때에 모든 견소단의 결이 점점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이끌어 교화에 나아가게 하며, 일을 쉽게 행하게 하며, 손수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발기자의 비유를 말하였다율에 나옴.”
029_0312_b_13L如佛契經說三結盡須陁洹受化者聞已便欲我能善斷此三結彼斷三結時漸漸一切見斷結盡謂誘進教化故ㆍ事易行故ㆍ手扶佐故此中說跋耆子喩出律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겁고 과다한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2_b_17L或曰盛患重過多苦
【문】신견(身見)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신견은 62견의 근원이고, 견은 결의 근원이고, 결은 행의 근원이고, 행은 과보의 근원이니, 모든 세간은 과보에 의지한다. 과보에 의지하고 나서 생사 가운데에서 선법에 나아가기도 하고, 불선법에 나아가기도 하고, 무기법에 나아가기도 한다.
029_0312_b_18L問曰身見有何盛患
答曰身見六十二見根見是結根結是行根行是報根一切世閒依報依報已生死趣善法ㆍ趣不善法ㆍ趣無記法
【문】계도(戒盜)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계도 가운데에서 모든 고의 행위를 낸다.
029_0312_b_21L問曰戒盜有何盛患
答曰戒盜中生諸苦行
029_0312_c_01L【문】의(疑)에 어떤 큰 근심이 있는가?
【답】과거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미래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현재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여 머뭇거리며, 안에서 의심하여 머뭇거린다. 이것은 어떤 것이며, 이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 중생이 어떤 곳으로부터 와서 어떤 곳에 이르며, 무엇을 원인으로 삼고 무엇을 소유하는가? 이것을 큰 근심과 무겁고 큰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덕(功德)의 적[怨家]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2_b_22L問曰疑有何盛患
答曰爲過去故疑猶豫ㆍ爲當來故疑猶豫ㆍ爲現在故疑猶豫於內中疑猶豫此云何何謂此此衆生從何所來當何所至何因是謂盛患重過多苦或曰功德怨家故
【문】무엇이 공덕인가?
【답】수다원과다.
問曰云何功德
答曰須陁洹果
【문】그는 어째서 적을 가까이하여 친하지 않는가?
029_0312_c_05L彼何近不親怨家
【답】3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다원과를 증득할 때 장애를 만들어 문에 들어가게 하지 않고, 문을 지키는 사람처럼 머물러 있다.”라고 하였다.
029_0312_c_06L答曰三結是或曰謂須陁洹果證時而爲作㝵不令入門住如守門人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해탈문(解脫門)과 서로 어긋나니, 저 신견은 공정(空定)과 서로 어긋나며, 계도(戒盜)는 무원과 서로 어긋나며, 의(疑)는 무상(無相)과 서로 어긋난다. 이것을 삼해탈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2_c_08L或曰謂三解脫門相違彼身見空定相違戒盜無願相無相相違是謂三解脫門相違以是故爾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하여 남김 없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또한 비슷한 신견이 있어서 괴로움을 얻으니,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029_0312_c_11L或曰謂盡無餘乃至阿羅漢亦有相似身見得苦未知智永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비슷한 것이 있다. 이는 저 아라한이 ‘이것은 나의 의발(衣鉢)이며, 이것은 나의 제자인 사미며, 이것은 나의 집이며, 이것은 나의 나라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아(我)가 있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도는 도를 얻었으나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029_0312_c_13L彼已盡已知乃至阿羅漢亦有相如彼阿羅漢作是念是我衣鉢ㆍ是我弟子沙彌ㆍ是我舍ㆍ是我園似如有戒盜得道未知智永盡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이는 저 아라한이 걸식을 행하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길거리에 앉아 사문의 열두 가지 청정한 행을 받는 것과 같다. 청정한 행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도를 얻었으나, 아직 알아서 영구히 다한 것은 아니다.
029_0312_c_16L彼已盡已乃至阿羅漢亦有相似如彼阿羅漢行乞食ㆍ糞掃衣ㆍ露坐受沙門十二淨行似如淨行得道未知永盡
그가 이미 다하고 이미 알았으나, 아라한에 이르더라도 역시 비슷한 것이 있다. 저 아라한이 두 길을 보고서 의심하여 ‘이것은 옳은 길인가? 그른 길인가?’라고 하며, 두 옷을 보고 의심하여 ‘이것이 나의 옷인가? 나의 옷이 아닌가?’라고 하며, 멀리서 보고서 의심하여 ‘이것은 여자인가 남자인가’라고 한다.
029_0312_c_19L已盡已知乃至阿羅漢亦有相似阿羅漢見二道而疑此是道非道耶見二衣而疑是我衣耶非我衣耶見已而疑是男耶是女耶
029_0313_a_01L 아라한이 이정(理定)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다원이 다하였는데, 하물며 아라한이겠는가? 이 때문에 3결이 없어진 것이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2_c_23L莫作是念阿羅漢不盡此理定須陁洹已盡阿羅漢以是故說三結盡須陁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현문(現門)과 현략(現略)과 현도(現度)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 혹은 한 가지, 두 가지, 네 가지가 있다. 저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한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두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비록 나머지 다른 두 결로서 얻을 만한 두 가지가 없으나, 저 계도의 두 가지와 그와 상응하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 의는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네 가지를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3_a_02L此現門ㆍ現略ㆍ現度若有見斷結者一種二種四種彼身見已說當知已說一種戒盜已說當知已說二種無餘二結可得二種當知卽彼戒盜二種及彼相應法疑已說當知已說四種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혹은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이 있다.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기계일체변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도와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기계일체변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3_a_08L或曰若有見斷結者或己界一切遍ㆍ或非己界一切遍身見已說知已說己界一切遍戒盜ㆍ疑已說知非己界一切遍
【문】무엇 때문에 첫째로 기계일체변(己界一切遍)과 둘째로 비기계일체변(非己界一切遍)을 말하였는가?
029_0313_a_11L問曰何以故說一已界一切遍ㆍ二非己界一切遍
【답】저 비기계일체변의 결에 유루연(有漏緣)과 혹은 무루연(無漏緣)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유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무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기지일체변(己地一切遍)과 비기지일체변, 기계연(己界緣)과 비기계연, 기지연(己地緣)과 비기지연도 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029_0313_a_12L答曰彼有非己界一切遍結或有漏緣ㆍ或無漏緣彼身見戒盜已說當知已說有漏緣疑已說當知已說無漏緣己界一切遍非己界一切遍如是己地一切遍非己地一切遍ㆍ己界緣非己界緣ㆍ己地緣非己地緣盡當知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 혹은 유루연과 무루연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유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무루연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029_0313_a_18L有見斷結者或有漏緣ㆍ或無漏緣身見ㆍ戒盜已說當知已說有漏緣疑已當知已說無漏緣
【문】무엇 때문에 두 번째로 유루연과 첫 번째로 무루연을 말하였는가?
029_0313_a_21L問曰何以故二有漏緣ㆍ一無漏緣
029_0313_b_01L【문】유루연의 결에는 혹은 기계일체변과 비기계일체변이 있다. 저 신견을 이미 말하였으니, 이미 기계일체변을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계와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기계일체변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유루연ㆍ무루연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다툼과 다툼이 없음, 세간과 출세간, 머무름과 머무르지 않음, 의욕과 불의욕도 모두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029_0313_a_22L答曰若有有漏緣結者或己界一切遍ㆍ非己界一切遍彼身見已說當知已說己界一切遍戒盜ㆍ疑已說當知已說非己界一切如有漏緣無漏緣如是諍不諍ㆍ世間出世間ㆍ住不住ㆍ依欲不依欲盡當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혹은 유위연(有爲緣)과 무위연(無爲緣)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유위연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무위연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유위연ㆍ무위연처럼 이와 같이 유상연(有常緣)과 무상연(無常緣)이 있으며, 유항연(有恒緣)과 무항연(無恒緣), 유주연(有住緣)과 무주연(無住緣)도 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029_0313_b_05L若有見斷結者或有爲緣ㆍ或無爲彼身見ㆍ戒盜已說當知已說有爲疑已說當知已說無爲緣如有爲緣無爲緣如是有常緣無常緣ㆍ有恒緣無恒緣ㆍ有住緣不住緣盡當知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묵은 견성(見性)과 비견성(非見性)이 있다. 저 신견과 계도를 이미 말하였으니, 견성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하며, 의심을 이미 말하였으니, 비견성을 이미 말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견성ㆍ비견성처럼 이와 같이 관찰함과 관찰하지 않음, 행함과 행하지 않음, 굳게 지님과 굳게 지니지 않음, 구함과 구하지 않음, 바뀜과 바뀌지 않음도 모두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이러므로 현문(現門)과 현략(現略)과 현도(現度)를 말한다고 한 것이며, 이 때문에 3결이 없어지면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b_09L若有見斷結者或見性ㆍ非見性身見ㆍ戒盜已說當知已說見性疑已當知已說非見性如見性非見性是觀不觀ㆍ行非行ㆍ堅持不堅持ㆍ求不求ㆍ轉不轉盡當知是故說現門ㆍ現略ㆍ現度以是故說三結盡須陁洹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인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인가? 만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면 마땅히 제8이 수다원일 것이다. 제8이라는 것은 믿음을 견고히 하고 법을 견고히 하여 저 도를 비로소 얻은 것이니, 믿음을 견고히 하는 도[堅信道]와 법을 견고히 하는 도[堅法道]다.
029_0313_b_15L問曰始得道是須陁洹耶爲始得果是須陁洹耶若始得道是須陁洹者應第八是須陁洹第八者堅信堅法彼始得道堅信道ㆍ堅法道
만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면, 저것은 마땅히 곱절의 탐욕[倍欲]이 없어진 것과 애욕이 없어진 것이 수다원일 것이다. 그가 처음 얻은 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는 이러한 논의를 만들 뿐이니 설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라고 한다.
029_0313_b_19L若始得果是須陁洹者彼應倍欲盡欲愛盡是須陁彼始得果斯陁含果ㆍ阿那含果作此論已說曰始得道是須陁洹
【문】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제8이 수다원일 것이니, 그가 처음 얻은 도는 견신도와 견법도다.
029_0313_b_22L問曰爾者應第八是須陁洹彼始得道信道ㆍ堅法道
029_0313_c_01L【답】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도를 처음 얻고 도에 들어가서 그가 믿음을 견고히 하고 법을 견고히 한 것이다. 비록 도를 처음 얻었지만 과(果)에 처음 들어가는 것이 된다.
029_0313_c_01L答曰始得道是須陁始道入道彼堅信堅法雖始得道是始入苦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를 처음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 만일 견도에서 끊는 결이 영구히 없어져서 인(忍)과 서로 어긋남을 이미 안다면, 이미 없어지고 이미 알아서 삿된 견해가 영구히 끊어진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03L或曰始得道是須陁洹見斷結永盡已知ㆍ忍相違已盡已知耶見永斷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인상(人想)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인상을 말하기 때문이며, 인법(人法)을 시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05L或曰始得道是須陁洹想人故ㆍ可說人故ㆍ施設人法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도를 사유(思惟)하기 때문이며, 과보가 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며, 도는 아직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06L或曰始得道是須陁洹思惟道故ㆍ果攝道故ㆍ道未知智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세 가지 일을 얻는데 처하면 아직 도를 얻은 것이 아니고, 도를 버려야 결이 다하여 일미(一味)를 얻게 된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08L或曰始得道是須陁若處得三事未曾得道ㆍ捨曾道ㆍ結盡得一味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다섯 가지 일을 얻는데 처하면 아직 도를 얻은 것이 아니다. 도를 버려야 결이 다하여 일미를 얻게 되니, 여덟 가지 지혜를 얻어 일시에 16행(行)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10L或曰始得道是須陁洹處得五事未曾得道ㆍ捨曾道ㆍ結盡得一味ㆍ得八智ㆍ一時修十六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얼은 것이 수다원이니, 생겨남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12L或曰始得道是須陁洹可有生更有說者始得果是須陁洹
【문】만약 그렇다면 곱절로 탐욕이 없어진 것과 욕애가 없어진 것은 마땅히 수다원일 것이니, 저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일 것이다.
029_0313_c_14L問曰若爾者倍欲盡欲愛盡應是須陁洹彼始得果斯陁含果ㆍ阿那含果
【답】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최초의 해탈이기 때문이며, 최초의 제도이기 때문이며, 최초의 머문 과보이기 때문이다.
029_0313_c_16L答曰始得果是須陁洹最初解脫故ㆍ最初度故ㆍ最初住果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차제 때문이며, 함께 매여 있기 때문이며, 차제를 뛰어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17L或曰始得果是須陁洹次第故ㆍ具縛故ㆍ不越次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4향(向)과 4주과(住果)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19L或曰始得果是須陁洹四向四住果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4쌍(雙)과 8배(輩)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20L或曰始得果是須陁四雙八輩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나머지를 아직 얻지 못하여 더욱 수행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를 아직 얻지 못하여 더욱 수행한다는 것은 세간의 도는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도 과보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21L或曰始得果是須陁餘未得增行故餘未得增行者閒道未有所盡而得果
029_0314_a_01L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차등이 없기 때문이다. 차등이 없다는 것은 역시 위의 세간의 도와 같이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도 과보를 얻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3_c_23L或曰始得果是須陁洹無差降故無差降者亦如上世間道未有所盡而得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니, 만일 과보와 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지(地)도 무너지지 않는다. 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한결같이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고, 지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에 의지하여 다르지 않은 것을 얻는 것이고, 아라한과라는 것은 비록 도가 무너지지 아니하여 한결같이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지만, 저 지가 무너져서 9무루지에 의지하여 얻는 것이다.
029_0314_a_02L或曰得果是須陁洹若果道不壞地亦不道不壞者一向無漏道得果地不壞者依未來得非餘阿羅漢果者道不壞一向無漏道得果然彼地壞依九無漏地得
사다함과라는 것은 비록 의지가 무너지지 아니하여 미래에 의하여 다르지 않은 것을 얻더라도, 저 도가 무너져서 세간의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다.
029_0314_a_07L斯陁含果者雖地不依未來得非餘然彼道壞世間無漏道得果
아나함과라는 것은 도(道)도 무너지고, 지도 무너지는 것이다. 도가 무너진다는 것은 세간의 무루도로써 과보를 얻는 것이고, 지가 무너진다는 것은 6지에 의하여 얻는 것이다.
029_0314_a_09L阿那含果者道亦壞ㆍ地亦道壞者世間無漏道得果地壞者依六地得
이 수다원의 과보는 무너지지 않고, 지도 무너지지 않으니, 이 때문에 처음 과보를 얻은 것이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4_a_11L此須陁洹果道亦不壞地亦不壞以是故始得果是須陁洹
다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도를 얻은 것도 수다원이 아니며, 처음 과보를 얻은 것도 수다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029_0314_a_12L有說者:亦不始得道是須陁洹亦不始得果是須陁洹
【문】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답】저것은 수다원과를 말미암기 때문이며, 이 수다원은 법 때문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약탕(藥湯)이 약 때문에 약탕이라고 하며, 소(酥) 때문에 소병(酥甁)이라고 하며, 꿀 때문에 꿀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것은 수다원과를 말미암기 때문이며, 이 수다원은 법을 말미암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니, 약탕과 같다. 수다원이라는 것은 팔성도(八聖道)라는 물에 그가 들어가니, 이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
029_0314_a_14L問曰若爾者爲云
答曰由彼須陁洹果故是須陁洹法故名爲人如藥湯由藥故名爲藥湯由酥故名爲酥甁由蜜故名爲蜜甁如是彼由須陁洹果故是須陁洹法故名爲人如藥湯也須陁洹者聖道名爲水是彼入以是故名須陁
029_0314_b_01L【문】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 같은 이도 성도의 물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처음 일어나 이름을 받는 것은 처음의 방편도(方便道)이니, 이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 것이다.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 악법(惡法)에 떨어지지 않는 자는 끝내 삼악취(三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
029_0314_a_21L問曰如斯陁含ㆍ阿那含ㆍ阿羅漢入聖道水彼何以故不名爲須陁洹
始起受名ㆍ始方便度以是故名須陁洹非斯陁含ㆍ阿那含ㆍ阿羅漢不墮惡法者終不墮三惡趣
【문】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 같은 이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수다원만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머지는 말하지 않았는가?
【답】각각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수다원은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차등이고, 사다함은 한 번 왕래하는 것이 차등이고, 아나함은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차등이고, 아라한은 다시 유(有)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차등이다. 이것이 “각각의 차등 때문에 수다원 하나만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고,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029_0314_b_02L問曰如斯陁含ㆍ阿那含ㆍ阿羅漢亦不墮惡法何以故但說須陁洹不墮惡法而非餘
各各有差降故此須陁洹不墮惡法是差降斯陁含一往來是差降那含不還欲界是差降阿羅漢更不還有是差降是謂各各差降故一須陁洹名不墮惡法非斯陁含ㆍ阿那含ㆍ阿羅漢
【문】범부(凡夫)도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성인이 악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는가?
029_0314_b_10L問曰如凡夫人亦不墮惡法何以故說聖人不墮惡法
【답】저 범부는 일정하지 않아 악법에 떨어지기도 하고 악법에 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이 성인은 한결같이 악법에 떨어지지 않으니 어느 한 성인도 악법에 떨어지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성인은 악법에 떨어지지 않으나 범부는 그렇지 않다. 정(定)이라는 것은 바른 선정에 나아가 머물기 때문에 정이라고 한 것이니, 마땅히 수다원은 반열반(般涅槃)의 변역(變易)에 정(定)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각(正覺)에 나아간다고 한 것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각이라고 한 것이며, 저 사람이 이것에 의하여 향함이 있고, 나아감이 있고, 좋아함이 있고, 촉구함이 있으니, 이 때문에 정각의 극칠환유(極七還有)에 나아간다고 말한 것이다.
029_0314_b_11L答曰彼非或墮惡法ㆍ或不墮惡法此聖人一向不墮惡法無有一聖人墮惡法彼非定以是故聖人不墮惡法非凡夫人定者聚正定住故名爲定當言須陁洹定般涅槃變易故趣正覺者盡智ㆍ無生智謂之覺彼人依此有向有趣ㆍ有樂有欲是故說趣正覺極七還有者
【문】이와 같은 극십사환유(極十四還有)와 극이십팔환유(極二十八還有)는 만일 본유의 수를 취한다면 천상의 본유(本有) 일곱과 인간의 본유 일곱으로 십사이며, 만일 본유와 중음(中陰)의 수를 취한다면 천상의 본유 일곱과 중음 일곱, 인간의 본유 일곱과 중음 일곱으로 이십팔인데, 무엇 때문에 극칠환유가 수다원이라고 말하였는가?
029_0314_b_19L問曰如此極十四還有ㆍ極二十八還有若取本有數者天上本有七ㆍ人間七此十四若取本有ㆍ中陰數天上本有七ㆍ中陰七人閒本有七ㆍ中陰七是二十八何以故說極七還有是須陁洹
029_0314_c_01L【답】법이 마땅히 일곱 가지이므로 일곱을 넘지 않으며, 하나하나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극칠환유는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만일 천상은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며, 인간은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라면 저 모두는 일곱을 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존께서 “극칠환유는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029_0314_c_01L答曰法應七故不過七一趣故世尊說極七還有是須陁洹若天上本有七ㆍ中陰七人閒本有七ㆍ中陰七彼一切皆不過七以是故世尊說極七還有須陁洹
이는 다른 계경에서 “사성제는 3전(轉) 12행(行)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는 3전ㆍ12행이 아니라 12전ㆍ48행이어야 하지만, 다만 3전ㆍ12법이기 때문에 3전ㆍ12행을 지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진리를 관찰하기 때문에 세존께서 사성제는 3전ㆍ12행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다른 계경에서 “비구는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세 가지의 뜻을 잘 관찰하니, 속히 이 법 가운데 번뇌가 다하게 된다.”라고 한 것과 같다.
029_0314_c_05L如餘契經說四聖諦三轉十二行此不應三轉十二應十二轉有四十八行但三轉十二法故不過三轉十二行觀一一諦世尊說四聖諦三轉十二行如餘契經說比丘七處善觀三種義速於此法中得漏盡
그런데 여기서 일곱 군데라고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35처선(處善)이 있다고 해야 하며, 또한 무량처선(無量處善)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다만 7법이기 때문에 7관(觀)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음(陰)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세 가지를 잘 관찰하니, 속히 이 법 가운데에서 번뇌가 다하게 된다.”라고 하셨다.
029_0314_c_11L此不應七處若應有三十五處善亦有無量處善但七法故不過七觀一一陰故世尊說比丘七處善觀三種速於此法中得漏盡
다른 계경에서 “비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법을 말하겠다. 두 가지의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매끄러움의 뜻과 법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12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62가 있어야 한다. 다만 이 법이기 때문에 이관(二觀)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입(入)이기 때문이며, 눈과 색이기 때문이며, 내지 뜻과 법이기 때문이다.
029_0314_c_14L如餘契經說比丘我當爲說法謂有二及色耳聲ㆍ鼻香ㆍ舌味ㆍ身細滑ㆍ意法此不應一二應有六二但二法故過二觀一一入故眼及色故乃至意及法故.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법을 말하겠으니, 두 가지가 있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천상의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며, 인간의 본유가 일곱이고 중음이 일곱이지만 모두 일곱을 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취이기 때문이며, 천취(天趣)이기 때문이며, 인취(人趣)이기 때문이며, 중음이 일급이기 때문이며, 본유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하나하나의 취이기 때문에 세존께서 ‘극칠환유(極七還有)가 수다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029_0314_c_19L世尊說比丘我當爲說法謂有二也如是若天上本有七ㆍ中陰七人間本有七ㆍ中陰七一切不過七一趣故天趣故ㆍ人趣故ㆍ中陰故七本有七是故一一趣故世尊說極七還有是須陁洹
029_0315_a_01L【문】무엇 때문에 수다원은 극칠환유이며, 또한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가?
029_0315_a_01L問曰何以故須陁洹極七還有亦不增減
【답】바사가 말하기를, “모든 의심은 법과 어긋나지 않으니, 혹은 증가하고 혹은 감소하는 것은 그 또한 이러한 의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은 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5_a_02L婆奢說曰一切有疑法不違若增若減者彼亦當有此是故說一切疑法不違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제보인(齊報因)이기 때문이다. 저 제보인과 마찬가지로 제보과(齊報果)도 마땅히 그러하다. 이러므로 그가 제보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5_a_04L或曰彼齊報因故如彼齊報因齊報果應是故說是彼齊報因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행의 힘 때문에 수다원이 7유(有)에 나고 성도의 힘 때문에 8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칠보사(七步蛇)에게 물리면 그가 사대(四大)의 힘 때문에 일곱 걸음을 갈 수 있으나, 독의 힘 때문에 여덟 걸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도 수행 때문에 7유에 나지만 성도의 힘 때문에 8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것은 사람이 전에 먹은 음식 때문에 목숨이 7일에까지 이르나 음식의 힘이 다하기 때문에 8일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도 수행 때문에 7유에 나지만 수행이 다하여 8에 이르지는 못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5_a_06L或曰行力故須陁洹生七有聖道力故不至八人爲七步蛇所螫彼以四大力故能行七步毒力故不至八如是須陁洹行故生七有聖道力故不至八如人前食故命至七日食勢盡不至八如是須陁洹本行故生七有行盡不至八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증상인(增上忍)에 머물 때에 욕계의 7생과 색ㆍ무색계의 하나하나의 처(處)와 하나하나의 생(生)을 없애고, 다른 모든 나고 얻는 비수연(非數緣)이 다한다. 만일 나고 얻는 비수연이 다하면, 이 생이 마침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029_0315_a_13L或曰彼住增上忍時除欲七生色無色界一一處一一生餘一切生得非數緣盡若生得非數緣盡此生至竟不現在前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칠생처(七生處)이기 때문이니, 생처에 난다는 것은 욕계의 여섯과 천상 및 인간이다. 마땅히 이 가운데 수다원이 나니, 이 때문에 칠생처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5_a_16L或曰七生處故生生處者欲界六天及此中須陁洹應生是故七生處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8생(生)은 공허하니 성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수다원이 8유(有)에 이른다면, 저 진리를 보는 것은 이미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과보를 얻는 것도 이미 과보를 얻는 것이 아니고, 등행도 이미 등행(等行)이 아니고, 성인을 얻음도 이미 범부가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이 허물이 있게 된다. 이러므로 수다원은 8유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029_0315_a_18L或曰彼八生空無聖道故若須陁洹至八有者彼見諦已爲非見諦ㆍ得果已爲非得果ㆍ等行已爲非等行得聖人已爲是凡人無說有咎以是故須陁洹不至八有
029_0315_b_01L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간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간 가운데 나타나는 일이라는 것은 7세까지를 가깝다고 하니 만일 8세에 이르면 가깝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수다원이 8유에까지 이른다고 한다면, 항하사(恒河沙)의 불법 가운데 멀리 떨어져 그와 가깝지 아니하여 말할 것도 없이 허물이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수다원은 8유에 이르지 않는다.
029_0315_a_23L或曰世間中現事故間中現事者至七世名爲親若至八非親如是若須陁洹至八於恒沙佛法中遠離他不親無說有咎以是故須陁洹不至八
만일 수다원이 천상의 7생과 인간의 7생을 궁극적으로 채운다면 저 가운데에서 수다원은 차등이 있어 일곱 번 천상에 나고, 인간에 여섯, 천상에 여섯, 인간에 다섯, 천상에 다섯, 인간에 넷, 천강에 넷, 인간에 셋, 천상에 셋, 인간에 둘, 천상에 둘, 인간에 한 번 태어난다고 말할 것이다. 다만 수다원은 천상의 일곱과 인간의 일곱을 궁극적으로 채우니, 저 가운데에서 극칠생유가 수다원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029_0315_b_04L若須陁洹極滿天上七ㆍ生人間七彼中說是但須陁洹有差降七生天上人間六ㆍ天上六人間五ㆍ天上五人間四ㆍ天上四人間三ㆍ天上三人間二ㆍ天上二人間一但須陁洹極滿天上七ㆍ人間七彼中說是若極七生有是須陁洹
【문】저 일곱은 어느 곳에서 가득 차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몸이 수다원의 과보를 얻으면 저 몸은 일곱 가운데에서 찬다.”라고 하였는데 혹은 수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수를 말하지 않기도 한다. 수를 말한다는 것은, 만일 천상에서 과보를 얻으면 인간에서 반열반(槃涅槃)하고, 인간에서 과보를 얻으면 천상에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수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일 천상에서 과보를 얻으면 천상에서 반열반하고, 인간에서 과보를 얻으면 인간에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몸 가운데 수다원의 과보를 얻으면 저 몸은 일곱 가운데에서 헤아리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029_0315_b_10L問曰彼七何處滿或有說者若身得須陁洹果彼身於七中或有說數ㆍ或有不說數謂有說數者若天上得果人間般涅槃ㆍ人間得果天上般涅槃謂有不說數者天上得果天上般涅槃ㆍ人間得果人間般涅槃如是說者若身中得須陁洹果彼身於七中不數何以故
【답】만일 저 몸 가운데 수다원의 과보를 얻는다면 서 몸은 중음(中陰)의 범부일 때이고, 만일 이 몸이 일곱 가운데 수라면 27이 있어야 하지 28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시설하여 말한 것과 서로 어긋나니, 그가 말한 것은 28유다. 후유(後有)에 왕생하여 뒤에 후득신(後得身)에 의시하여 무루도를 얻어 나머지 번뇌를 다 없앤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것이니, 저 몸은 일곱 가운데서는 헤아리지 않는다.
029_0315_b_17L答曰若彼身中得須陁洹果者彼身中陰凡夫時若此身於七中數者應有二十七不應二十八若爾者與『施設』所說相違彼所說彼二十八有往生後有後依後得身得無漏道用盡餘結無說有咎是彼身於七中不數
029_0315_c_01L【문】극칠생유가 수다원이라면 6생 중에서 성도가 바로 나타나는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가? 만일 바로 나타난다면 무엇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가? 만일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 뜻에는 마땅히 성도가 없을 것이다. 이 논을 지은 뒤 어떤 이는 바로 나타난다고 말하였다.
029_0315_b_23L問曰極七生有須陁洹於六生中聖道現在前不現在前耶若現在前者何以不般涅槃若不現在前者彼意應無聖作此論已有一說者現在前
무엇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가?
【답】저의 수행이 세간의 수행을 즐기는 힘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다.
029_0315_c_04L問曰何以不般涅槃
答曰彼行樂世閒力故不般涅槃
【문】극칠생유(極七生有)의 수다원이 일곱을 마지막으로 채우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때 그가 흰 옷을 입고 반열반한 것은 어째서인가?
029_0315_c_06L問曰極七生有須陁極滿七佛未出世彼爲白衣般涅爲云何
【답】그렇지 않다. 그가 반드시 출가하여 반열반한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오백 명의 벽지불(辟支不)이 선인(仙人)의 굴에 머물러 본래 다 성문(聲聞)이 되었다. 이러므로 극칠생유라고 하였다. 천상과 인간에 일곱 번 태어난다는 것은 천상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인간으로부터 천상에 이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동산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모임으로부터 모임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또한 이와 같이 천상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고, 인간으로부터 천상에 이르니, 이 때문에 일곱이라고 말한 것이다. 천상과 인간에 왕생(往生)한다는 것은. ‘왕’은 중음이고, ‘생’은 본유다. 이 때문에 왕생하여 고변(苦邊)을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029_0315_c_08L答曰不然彼定出家般涅彼如是若五百若千辟支佛住仙人窟中本盡爲聲聞是故說極七生有七生天上人閒者從天至人ㆍ從人至天如人從園至園ㆍ從節會至節彼亦如是從天至人ㆍ從人至天故說七天人往生者往謂中陰ㆍ生謂本有是故說往生信苦邊者
【문】고변이라는 것은 가운데라고 말해야 하는가, 밖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만일 고의 가운데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고변이 없을 것이고, 고의 밖이라고 말한다면 세간에 나타나는 일과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마치 금으로 만든 산가지[籌]가 처음도 금이고, 가운데도 금이고, 뒤도 금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다원은 처음도 고이고, 가운데도 고이며, 뒤도 고이니, 어떻게 고변이 있겠는가? 이 논을 지은 뒤 어떤 이는 아라한의 최후음(最後陰)이 고변이라고 말하였으며, 어떤 이는 멸진하여 열반하는 것이 고변이라고 말하였다.
029_0315_c_15L問曰苦邊者當言中ㆍ當言外若言苦中無苦邊若苦外者世間現事云何通金籌初亦金ㆍ中亦金ㆍ後亦金如是須陁洹初亦苦ㆍ中亦苦ㆍ後亦苦云何有苦邊作此論已有一說者阿羅漢最後陰是苦邊或有說者滅盡涅槃是苦邊
029_0316_a_01L만일 아라한의 최후음이 고변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고변이 있는가?
【답】이와 같이 고변이 있으니, 다시 고를 받지 않고, 다시 고를 맺지 않으며, 다시 고의 인연을 깃지 않는 것을 말한다.
029_0315_c_22L問曰若阿羅漢最後陰是苦邊云何有苦邊
答曰如是有苦邊更不受苦ㆍ更不結著苦ㆍ更不與苦作
【문】만일 멸진하여 열반하는 것이 고변이라고 한다면, 비유가 어떻게 통하겠는가?
【답】이것이 반드시 통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또한 계경(契經)이 아니며, 율(律)이 아니며, 아비담이 아니니, 세간의 비유로써 현성의 말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세간의 일이 다르고 현성의 일이 다르다. 고변을 지은 것은, 고는 오성음(五盛陰)을 말하고, 저 변은 최변(最邊)과 후변(後邊)이다. 이러므로 고변을 짓는다고 말한 것이다. 3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
029_0316_a_02L問曰若滅盡涅槃是苦邊者譬喩云何通
答曰此不必通此亦非契經ㆍ非律ㆍ非阿毘曇不可以世間喩壞賢聖語世間事異ㆍ賢聖事異作苦邊者苦謂之五盛陰彼是邊ㆍ最邊ㆍ後邊故說作苦邊廣說三結處盡
鞞婆沙論卷第一
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