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살이 계행을 지니되 차라리 자신의 몸을 잃어버릴지언정 조그마한 계도 범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시라바라밀이다” 한다.
014_0633_c_06L答曰:有人言:菩薩持戒,寧自失身,不毀小戒,是爲尸羅波羅蜜。
앞의 『소타소마왕경(蘇陀蘇摩王經)』2)에 의하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금계(禁戒)를 온전히 지킨 이야기가 있다. 곧 보살은 전생에 힘센 독룡(毒龍)이었는데, 어떤 중생이 그 앞에 있으되 몸의 힘이 약한 자는 눈으로 쳐다만 보아도 곧 죽어버리고, 힘이 센 자는 정신이 돌아 죽어버렸다. 그 용이 일일계를 받고, 집을 떠나 고요를 구해 숲 속으로 들어가서 사유했는데, 너무 오래 앉아 있었기에 피로해져서 잠이 들었다. 용이란 잘 때에는 그 모습이 마치 뱀과 같고, 몸에 무늬가 있는데 7보의 빛깔로 뒤섞여 있다.
용은 생각했다. “내 힘이 자재하여서 이 나라를 뒤집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거늘 이 사람은 극히 작은 물건인데 어찌 나를 괴롭히는가. 내가 지금 계를 지키기 때문에 이 몸을 생각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만을 따라야 하리라.” 여기에서 스스로 참아 눈을 감고는 보지 않고, 기운을 막아 숨을 쉬지 않은 채 그 사람을 가엾이 여겼다. 계를 지키려는 까닭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껍질이 벗겨지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미 가죽을 잃고는 붉은 살이 땅에 놓였는데 때 마침 햇살이 몹시 뜨거워 땅 위를 꿈틀거리면서 큰물을 찾으려 했으나 작은 벌레들이 와서 그의 살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계행을 지니는 까닭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했다.
014_0634_a_01L“나는 지금 이 몸을 벌레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불도를 구하는 까닭이다. 지금 살로써 보시하여 그들의 몸을 살찌우게 해 주고, 나중에 성불하거든 다시 법으로 보시하여 그들의 마음을 이롭게 해 주리라.” 이렇게 맹세하자 몸이 마르고 목숨이 끊어져 둘째 하늘인 도리천에 태어났다.
보살이 계행을 지니되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결정코 후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를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014_0634_a_08L菩薩護戒,不惜身命,決定不悔,其事如是,是名尸羅波羅蜜。
또한 보살은 계를 지니고 불도를 위한 까닭에 이렇게 큰 서원을 세운다. “반드시 중생을 제도하리라. 금생이나 내생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으며, 좋은 이름이나 헛된 명예를 바라지 않으리라. 또한 스스로가 일찍 열반에 들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직 중생들이 긴 물결 속에 빠져 사랑에 속고 어리석음에 그르치는 까닭에 내가 마땅히 그들을 구제하여 피안에 이르게 하리라.” 한마음으로 계를 지니어 좋은 곳에 태어나며, 좋은 곳에 태어나는 까닭에 착한 사람을 만난다. 착한 사람을 만나는 까닭에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겨나는 까닭에 6바라밀을 행하게 되며, 6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불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계를 지키는 것을 일컬어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곧 보시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물보시[財施]요, 둘째는 법보시[法施]요, 셋째는 무외보시[無畏施]이다. 계행을 지니어 스스로를 단속하고 모든 중생의 재물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재물보시라 한다. 중생들이 보고는 그의 행을 흠모하거나 그들에게 법을 설해 주어 깨닫게 하거나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맑은 계행을 굳게 지니어 일체 중생을 위해 공양의 복밭이 되어 주고, 중생들로 하여금 무량의 복을 얻게 하리라’ 하나니, 이러한 갖가지는 법보시이다. 일체 중생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계행을 지니어 해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무외보시이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계행을 지니고, 이 지계의 과보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전륜성왕이 되거나 염부제의 왕이 되거나 혹은 천왕(天王)이 되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재물이 만족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리라. 그런 뒤에야 보리수 밑에 앉아서 마군을 항복받고, 마군을 무찔러 위없는 도를 이루고는 중생들을 위하여 청정한 법을 설해 주어 한량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늙음ㆍ앓음ㆍ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하리라.’
곧 계를 지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금 계를 지니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만약 계를 지니면서도 인욕이 없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비록 계를 파하지는 않았더라도 인욕하는 마음이 없기에 악도를 면치 못하리니, 어찌 분한 생각을 따라 스스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겠는가. 오직 마음 때문에 3악취(惡趣)에 든다. 그러므로 스스로 힘써서 부지런히 인욕을 닦아야 하리라.”
014_0634_c_01L또한 행자(行者)가 계행의 공덕을 견고히 하고자 한다면, 인욕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인욕은 큰 힘이 있어서 계행을 더욱 굳건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출가하여 모습이 속인과 다르거늘 어찌 마음을 방종히 하여 세상 사람들의 법과 같이 하겠는가. 마땅히 스스로 힘써서 참음으로써 마음을 조절하고, 몸과 입으로 참음으로써 마음으로도 역시 인욕을 얻어야 하리라. 만일 마음이 참지 못한다면 몸과 입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행자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인욕해 모든 분노와 원한을 끊어야 한다.
또한 이 계를 간략히 말하면 8만 가지요 자세히 말하면 한량이 없나니, 어찌 내가 이 한량없는 계법을 다 지니겠는가? 오직 인욕으로써 뭇 계법이 저절로 얻어진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왕에게서 형벌을 받는 것과 같으니, 왕은 죄인을 칼수레[刀車]에다 싣고 여섯 쪽에 날카로운 칼을 세우되 몸과 조그만치의 사이도 뜨지 않게 한 뒤에 험한 길을 분별없이 마구 달리게 한다. 이때에 몸을 잘 가눈다면 칼 때문에 몸을 상하지 않게 되나니, 이는 죽이되 죽지 않는 것이다. 계를 지니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계는 날카로운 칼날이요, 인욕은 몸을 지탱하는 것이니, 만약에 인욕하는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면 계율 역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비유하건대 노인이 밤길을 가는데 지팡이가 없으면 넘어지는 것과 같다. 인욕은 계행의 지팡이여서 사람을 부축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복락의 인연은 요동치 않는 것이다.3)
계를 지니는 사람은 방일(放逸)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부지런히 위없는 법을 닦아 익히며, 세간의 쾌락을 버리고 선한 도에 들어가 열반 구하기에 뜻을 두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며, 큰 마음으로 게을리 하지 않아 부처 구하는 것으로 본분을 삼는다. 이것을 일컬어 지계가 능히 정진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014_0635_a_01L또한 계를 지니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늙음ㆍ앓음ㆍ죽음의 과환을 싫어하고 정진할 마음을 내어 스스로 벗어나려 하고 남도 제도하려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야간(野干)4)이 숲 속에서 사자나 범ㆍ이리 등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남긴 고기를 얻어먹고 살아가는 것과 같으니, 간혹 헛탕을 치면 밤중에 성을 넘어 인가(人家) 깊숙이 들어가서 고기를 찾다가 얻지 못할 경우 으슥한 곳에서 잠시 잠에 들어 쉰다. 모르는 결에 새벽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갈피를 잡지 못한다. 달아나자니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 걱정이요, 머물러 있자니 죽음의 고통이 두렵다. 그는 문득 죽은 듯이 땅에 엎드려 있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보고는 “나는 야간의 귀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귀를 베어낸다. 이에 야간은 생각했다. ‘귀를 베이니 아프기는 하나 몸만은 보전케 하리라.’ 다시 어떤 사람이 “나는 야간의 꼬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꼬리를 베어 가니, 야간은 다시 생각했다. ‘꼬리를 베이니 아프기는 하나 아직은 작은 일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나는 야간의 어금니가 필요하다”라고 말하자, 야간은 속으로 생각했다. ‘베어가는 자가 점점 많아지니, 혹 나의 머리를 끊는 자가 있다면 살아날 길이 없다.’ 그리고는 곧 땅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지력을 다하여 트인 길을 찾아 용맹스럽게 빠져나가 겨우 살아났다. 수행자의 마음이 고난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도 이와 같나니, 늙음이 이르를 때엔 그래도 너그러워서 정성스럽게 결단을 내려 정진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그러하다가 죽음이 이르려 할 때에야 더 바랄 것이 없음을 알고는 문득 스스로 힘써서 과감하게 성의를 다하여 크게 정진을 닦아 죽음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계행을 지니는 법은 마치 활쏘기와 같아서 먼저 평평한 땅을 만나야 하나니, 땅이 평평하여야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어야 마음껏 활을 당기며, 마음껏 활을 당겨야 깊이 꽂히는 법이다. 계율은 평평한 땅이요, 안정된 마음[意]은 활이요, 힘껏 당기는 일은 정진이요, 화살은 지혜요, 도적은 무명이니, 만약에 능히 이와 같이 힘써 정진하면 반드시 큰 도에 이르러 중생을 제도하리라.
014_0635_b_01L또한 계를 지니는 사람은 능히 정진으로써 5정(情)을 스스로 제어하여 5욕을 받지 않나니, 마음이 흩어지면 거두어서 다시 돌아오게 한다. 이것이 곧 지계에 의해 능히 모든 감관을 잘 보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감관을 잘 보호하면 선정이 생기고, 선정이 생기면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기면 불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지계에서 비리야바라밀이 생겨난다고 한다.
곧 사람에게는 3업이 있으니, 만약에 몸과 입의 업이 선하다면, 뜻의 업도 자연히 선해진다. 예를 들어 굽은 풀이 마(麻) 가운데서 자라면 떠받혀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곧아지는 것과 같다. 지계의 힘은 능히 모든 번뇌[結使]를 약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능히 약하게 만드는 것인가? 만약에 계를 지니지 않는다면 성냄이 찾아왔을 때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욕망의 대상을 만나면 곧 음심이 드러난다. 만약에 계를 지닌다면 비록 미세한 성냄이 일어난다고 해도 살심(殺心)이 일어나지 않으며, 비록 음심이 있다고 해도 음사(陰事)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능히 모든 번뇌를 약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선정을 얻기 쉽다. 비유하건대 늙고 병들어 기운을 잃으면 죽음이 오기 쉽듯이 결사가 약해지는 까닭에 선정도 얻기 쉬운 것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쉬지 않고 항상 즐거움을 구한다. 수행자는 계를 지니어 세상의 복을 버리고 마음이 방일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선정을 얻기 쉬운 것이다.
014_0635_b_13L復次,人心未息,常求逸樂;行者持戒,棄捨世福,心不放逸,是故易得禪定。
또한 계를 지니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고, 6욕천에 태어나고, 색계에 이른다. 만약 물질의 모습[色相]을 파한다면, 무색계에 태어나게 된다. 계를 지니고 청정해 모든 결사를 끊는다면 아라한의 경지를 얻는다. 보리심[大心]으로 계를 지키고 중생을 연민한다면, 이것이 보살이다.
014_0635_c_01L이와 같은 종종의 인연이 있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선바라밀을 낳는다 하는 것이다.
014_0635_c_01L如是等種種因緣,是爲持戒生禪波羅蜜。
어떻게 지계로써 능히 지혜를 낳는가?
014_0635_c_02L云何持戒能生智慧?
계를 지니는 사람은 이 계의 모습이 어디에서 생기는가를 관찰하여 뭇 죄를 좇아 생겨남을 안다. 만일 뭇 죄가 없다면 계도 없다. 계의 모습도 이와 같아서 인연을 좇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집착을 낳는가? 비유하건대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비록 빛깔을 아름다우나 나온 곳은 깨끗하지 못하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깨달아 집착을 내지 않게 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반야바라밀을 낳는다 하는 것이다.
다시 계를 지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계를 지니는 것을 귀히 여기어 취하고 계를 파하는 것을 천히 여기어 버린다고 한다면, 만일 이런 마음이 있으면 반야에 응하지 못한다. 지혜로써 헤아려 마음으로 계를 집착하지 않고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반야바라밀을 낳는다는 것이다.’
다시 계를 지니지 않는 사람은 비록 날카로운 지혜가 있어도 세상의 갖가지 업무를 경영하면서 생업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지혜의 근기가 점점 둔해진다. 비유하건대 예리한 칼로 진흙을 가르면 마침내 무딘 칼이 되는 것과 같다. 만약에 출가해서 계를 지니고 세상일을 경영하지 않고 항상 모든 법의 참모습은 상이 없는 것임을 관찰한다면, 비록 먼저는 둔했으나 차츰차츰 날카로워진다.
다시 보살은 계를 지니어 그로써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우치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의 열반을 위하지 않는 까닭이며, 지계란 오로지 일체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불도를 얻기 위한 까닭이며, 그리고 일체의 불법을 얻기 위한 까닭에 이와 같은 모습을 이름하여 시바라밀이라 한다.
만일 5중이라면, 5중은 다섯이고 중생은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다섯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다섯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비유하건대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는 것과 같다. 곧 값이 다섯 필(匹)인 것을 한 필만 주고 취하려 한다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는 다섯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중은 한 중생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또한 5중은 생멸하여 항상된 모습이 없는데, 중생의 법은 전생으로부터 와서 내생에 이르며, 죄와 복을 삼계에서 받는다. 만일 5중이 곧 중생이라면, 마치 초목이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멸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죄나 속박은 없고 해탈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5중이 곧 중생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5중을 떠나서 중생이 있다면 마치 먼저 말하기를 “신(神)이 항상하고 두루한다”고 하는 가운데 그 이치가 어긋남과 같다.
014_0636_a_22L若離五衆有衆生,如先說神常遍中已破。
014_0636_b_01L또한 5중을 여의었다면 나라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터인데, 만일 5중을 여의고도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상견[常]에 떨어지는 것이요, 상에 빠지면 생도 없고 사도 없을 것이다.그것은 왜냐하면 생이란 ‘전에는 없던 것이 이제 있는 것’이요, 사란 ‘이미 생한 것이 멸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중생이 항상하다면 다섯 길[五道] 가운데 두루 차 있어야 한다. 먼저부터 이미 항상 있거늘 어찌 이제 다시 와서 태어나는 것인가. 만일 생이 없다면 곧 죽음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문】 결정코 중생이 있거늘, 무슨 까닭으로 없다 하는가? 5중의 인연으로 중생의 법이 있는 것은 마치 다섯 손가락의 인연으로 주먹의 법이 생기는 것과 같다.
014_0636_b_05L問曰:定有衆生,何以故言無?五衆因緣,有衆生法;譬如五指因緣,拳法生。
014_0636_c_01L【답】 그 말은 옳지 못하다. 만일 5중의 인연으로 중생의 법이 있다고 한다면, 5중을 제하고 달리 중생의 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눈으로 스스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법을 알거니와 공하여 나라는 법이 없으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다시 중생이라 할 것이 없다. 외도의 무리들은 뒤바뀐 소견 때문에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이 중생이라 하고, 나아가서는 뜻으로 법을 아는 것이 중생이라 하고 또한 능히 기억하거나 고락을 받는 것이 중생이다’ 한다. 다만 이런 소견을 내는 중생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장로 대덕 비구의 경우와 같으니, 사람들은 그를 아라한이라 하여 많은 공양거리를 바쳤다. 나중에 그가 병들어 죽으니, 제자들은 공양을 잃을 것을 걱정하여 밤에 몰래 시신을 몰래 들어내어 장사지내고, 그가 누웠던 자리에 이부자리와 베개를 두어 마치 그 스승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 혹 사람들이 문법을 하며 “스승이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어오면 제자들은 말하기를 “그대는 저 침상에 있는 이부자리와 베개가 보이지 않으시오?”라고 했다. 어리석은 이들은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스승께서 앓아 누우셨다’ 하면서 크게 공양을 바치고 돌아갔다. 이렇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지혜로운 이가 와서 묻거늘 제자들은 전과 같이 대답했더니,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나는 이부자리ㆍ베개ㆍ침상ㆍ옷자락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그리고는 이불을 들치고 찾으니, 결국 사람은 없었다.
여섯 가지 일[六事]의 모습을 제하면 달리 나와 남은 없으며, 아는 자와 보는 자도 역시 이와 같다.
또한 만일 그대의 말과 같이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중생은 응당 5음을 내야 하고, 5음은 중생을 내지 말아야 한다. 지금 5음의 인연 때문에 중생이란 이름이 생겼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을 좇아서 진실을 구한다. 이런 까닭에 중생은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생이 없다면 죽이는 죄도 없을 것이요, 죽이는 죄가 없기 때문에 또한 계를 지니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죄와 죄 아님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시라바라밀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014_0636_c_16L以是故言“於罪、不罪不可得故,應具足尸羅波羅蜜”。
24. 초품 중 찬제바라밀의 뜻을 풀이함
014_0636_c_18L 大智度論釋初品中羼提波羅蜜義第二十四
【經】 마음이 요동치 않는 까닭에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구족한다.
014_0636_c_19L 【經】 “心不動故,應具足羼提波羅蜜。”
【論】 【문】 무엇을 찬제(羼提)5)라 하는가?
014_0636_c_20L【論】 問曰:云何名羼提?
【답】 찬제는 진나라에서는 인욕(忍辱)이라 한다.
答曰:羼提,秦言“忍辱”。
014_0637_a_01L인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생인(生忍)과 법인(法忍)이다. 보살은 생인을 행해 무량의 복덕을 얻고, 법인을 행해 무량의 지혜를 얻는다. 복덕과 지혜, 두 가지를 구족하는 까닭에 원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있다. 마치 사람이 눈과 발이 있으면 뜻하는 대로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보살이 혹은 거친 말과 매도하는 말을 만나고, 혹은 폭력을 당한다고 해도 사유를 통해 죄와 복의 인연을 알고, 모든 법의 안팎이 끝내 공하여 나와 내 것이 없다고 하고, 세 가지 법인[三法印]으로 모든 법을 대조[印]하기 때문에 비록 힘으로 능히 당할 수 있으나 악심을 내지 않고 거친 말을 하는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때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6)이 생하는 것을 일컬어 인(忍)이라 한다. 이 참음의 특성[法]을 얻는 까닭에 인의 지혜 역시 견고해진다. 마치 채색으로 그림을 그릴 때 아교를 섞으면 견고하게 붙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착한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거친 것과 섬세한 것이다. 거친 것을 인욕이라 하고 섬세한 것을 선정이라 한다. 아직 선정을 얻지 못했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능히 뭇 악을 차단한다면 이를 인욕이라 하고, 마음이 선정을 얻어 뭇 악을 짓지 않음을 즐긴다면, 이것을 선정이라 한다.
이 인욕은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이어서 마음과 서로 응하여 마음 따라 움직이며, 업도 아니요 업보도 아니건만 업행을 따른다.”
014_0637_a_11L是忍,是心數法,與心相應,隨心行。非業,非業報,隨業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세계에 속한다” 한다.
有人言:“二界繫。”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단지 욕계(欲界)에만 속하거나 혹은 속하지 않는다. 색계에는 참아야 할 바깥경계의 악이 없기 때문이다” 한다.
014_0637_a_13L有人言:“但欲界繫,或不繫。色界無外惡可忍故。”
나아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 범부와 성인이 모두 얻기 때문이다”
014_0637_a_15L亦有漏、亦無漏,凡夫、聖人俱得故。
혹은 “내 마음과 남의 마음의 착하지 못한 법을 막기 때문에 일컬어 선(善)이라 한다.
障“己心、他心不善法”,故名爲善。
선한 까닭에 혹은 사유로써 끊기도 하고, 혹은 끊지 않기도 한다” 한다.
014_0637_a_16L善故,或思惟斷,或不斷。
이러한 갖가지를 아비담에서 자세히 분별했다.
014_0637_a_17L如是等種種,阿毘曇廣分別。
【문】 무엇을 생인이라 하는가?
014_0637_a_18L問曰:云何名生忍?
【답】 두 종류의 중생이 보살에게 오나니, 첫째는 공경하고 공양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화내어 꾸짖고 때리기 위해서이다. 이때 보살은 그 마음을 능히 참아서 공경하고 공양하는 중생이라고 애착하지 않으며, 해[惡]를 가하는 중생이라고 화를 내거나 하지 않나니, 이것을 일컬어 생인이라 한다.
014_0637_b_01L【답】 두 가지 번뇌[結使]가 있으니, 첫째는 애착에 속하는 번뇌요, 둘째는 성냄에 속하는 번뇌이다. 비록 공경ㆍ공양은 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하여금 애착케 하나니, 이를 부드러운 도적[軟賊]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에 대해 스스로 잘 참아서 집착하지 말고 애착하지도 말아야 한다.
곧 그 덧없음을 관찰하여 이것이 곧 번뇌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양(利養)이라는 종기가 깊어짐은 마치 가죽을 뚫고 살에 이르고, 살을 뚫고 뼈에 이르며, 뼈를 뚫고 골수에 이르는 것과 같다. 사람이 이양에 집착되면 지계(持戒)의 가죽을 부수고, 선정의 살을 끊고, 지혜의 뼈를 깨뜨리며, 미묘한 선심(善心)의 골수를 잃는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가비라바국(迦毘羅婆國)7)으로 유행하셨을 때, 1250인의 비구와 함께하시니, 모두가 범지(梵志)의 몸으로서 불[火]을 공양하는 까닭에 형색이 초췌했으며, 음식을 끊고 고행하는 까닭에 몸이 여위고 피부는 검었다. 이에 정반왕은 생각했다. “내 아들의 시종들이 비록 마음이 깨끗하고 청결하나 모두가 용모가 모자라니, 나는 가문이 번성하고 자손이 많은 집을 골라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을 내게 하여 불제자로 만들어야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는 온 나라에 칙령을 내려 “여러 석가족이나 귀족의 자제 가운데 공고에 맞는 사람을 간택해서 모두 출가케 하라” 했다. 이때 곡반왕(穀飯王)8)의 아들인 제바달다(提婆達多)9)가 출가하여 도를 배워 6만의 가르침[法聚]을 외우고 부지런히 수행해 12년을 채웠다.
014_0637_c_01L그 뒤 공양의 이로움을 얻기 위해 부처님께 와서 신통 배우기를 구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담(憍曇)10)아, 너는 5음의 무상함을 관찰하면 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신통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더 이상 신통 얻는 법을 자세히 말씀하시지는 않으시니, 그는 나와서 사리불과 목건련 및 5백 명의 아라한을 구했으나, 아무도 신통 얻는 법을 말해 주지 않은 채 다만 말하기를 “그대가 5음의 무상함을 관찰하기만 하면 도를 얻고 신통도 얻을 것이다” 했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여 슬피 울면서 아난에게 가서 신통 얻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난은 아직 타심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형을 공경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그는 신통 얻는 법을 얻은 뒤에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오래지 않아 5신통을 얻었다.
5신통을 얻고는 생각했다. “누가 나의 단월이 되어주겠는가? 아사세(阿閣世)11) 왕자는 대왕의 상호가 있으니, 그와 친해져야 되겠다.” 그리고는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음식을 취하고, 다시 울단월(鬱旦越)에 들러 저절로 생긴 쌀[粳米]을 구하고, 다시 염부숲에 들러 염부 열매를 따 가지고 와서는 아사세 장자에게 주었다. 어느 때는 스스로의 그 몸을 변화하여 코끼리ㆍ말보배가 되어 그의 마음을 현혹시켰으며, 혹은 어린아기가 되어 그의 무릎에 앉기도 했는데, 왕자는 안고 입을 맞추거나 핥아 줄 때면 가끔 자기의 이름을 말해서 태자로 하여금 알게 하며, 갖가지 변태를 부려 그 마음을 흔들었다.
제바달다는 많은 공양은 얻었으나 무리가 적은 것을 섭섭해 하면서 생각했다. “나에게는 서른 가지 상호가 있으니, 부처님과는 불과 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제자가 모이지 않기 때문인데 만일 대중이 둘러싸 준다면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승단을 깨뜨려 5백 명의 제자를 얻었으나 사리불과 목건련이 다시 이들을 설법하고 교화하여 승단은 재차 화합하게 되었다.
제바달다는 몸에 서른 가지 거룩한 모습이 있으되 그 마음을 항복시키지 못하여 공양 때문에 큰 죄를 짓고 산 채로 지옥에 들어갔다.
014_0638_a_04L提婆達多身有三十相,而不能忍伏其心,爲供養利故,而作大罪,生入地獄。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양은 깊은 종기이어서 가죽을 뚫고 골수에 이른다” 하였으니, 마땅히 나에게 공양하는 사람을 애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014_0638_a_06L以是故言利養瘡深,破皮至髓,應當除卻愛供養人心。
이것을 일컬어 ‘보살은 참는 마음으로 공경하고 공양하는 사람에게 애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014_0638_a_07L是爲菩薩忍,心不愛著供養、恭敬人。
또한 공양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전생의 인연과 복덕 때문이요, 둘째는 금생의 공덕으로서 계행ㆍ선정ㆍ지혜를 닦기 때문에 남에게 공경과 공양을 받는 것이요, 셋째는 허망하고 거짓되게 속여 속에는 진실한 덕이 없으면서도 겉으로 청백한 체하여, 그로써 당시의 사람들을 홀려 공양을 얻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공양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전생의 인연으로 부지런히 복을 닦았기 때문에 이제 공양을 받는 것이라면 이는 자신이 부지런히 닦아 얻었을 뿐인데, 어찌 이에 대해 과시를 하겠는가. 마치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것과 같으니, 스스로 노력해 얻었을 뿐이거늘 어찌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사유해 그 마음을 굴복시킨다면 집착하거나 교만하지 않게 된다.
014_0638_b_01L만약에 금생의 공덕으로 공양을 얻었다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지혜로써 모든 법의 실다운 모습을 알고 혹은 번뇌를 능히 끊었다. 이런 공덕 때문에 이 사람들이 공양하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사유해 그 마음을 굴복시킨다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는다. 이는 실로 공덕을 좋아할 뿐 나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계빈(罽賓)16)의 어떤 삼장(三藏) 비구가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고 왕사(王寺)로 갔는데, 때마침 절에 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들어가려 했으나 문지기는 그의 의복이 남루한 것을 보고 문을 막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으나 의복이 누추하기 때문에 번번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므로 방편을 써서 좋은 의복을 빌려 입고 오니, 문지기는 막지 않고 들여보내 주었다. 모임에 이르러 자리에 않자 갖가지 음식이 나왔는데, 그는 먼저 음식을 옷에 부어 버렸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무슨 이유로 그러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나는 요즘 이곳에 자주 왔으나 번번이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이 옷 덕분에 들어와서 여기에 앉아 이렇게 좋은 갖가지 음식을 얻게 되었으니, 실로 이 옷 때문에 얻은 것이요. 그래서 그것을 먼저 옷에다 부어 주는 것이요.” 수행자는 수행의 공덕과 지계와 지혜 때문에 공양을 얻거든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공덕을 위한 일이요, 나를 위함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능히 스스로 마음을 굴복시킨다면 이를 일컬어 인욕[忍]이라 한다.
이와 같이 세 종류17)의 공양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도 내지 말고 교만한 생각도 갖지 않는다면 이것을 생인이라 한다.
014_0638_b_13L如是於三種供養人中,心不愛著,亦不自高,是名生忍。
【문】 사람이 도를 얻기 전에 의식(衣食)이 급하거늘 나에게 공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능히 참아 그 마음이 베푸는 이에게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014_0638_b_14L問曰:人未得道,衣食爲急,云何方便能得忍,心不著、不愛給施之人?
014_0638_c_01L【답】 지혜의 힘으로 무상한 모습ㆍ괴로운 모습ㆍ나 없는 모습을 관하여 마음으로 항상 싫어한다. 마치 죄인이 형벌을 당하기 직전 아무리 맛난 음식이 앞에 있고 가족들이 권하더라도 죽음을 근심하기 때문에 맛난 음식을 먹더라도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행자 역시 이와 같으니, 항상 무상한 모습ㆍ괴로운 모습을 관한다면, 비록 공양을 얻을지라도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슴이 호랑이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풀과 맑은 물을 얻어먹는다고 해도 마음에 염착이 없는 것과 같으니, 수행자 역시 그와 같아서 ‘항상 무상의 범에게 쫓기어 쉴 틈이 없다’고 사유해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비록 맛난 음식을 얻더라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공양하는 사람에 대해 그 마음이 스스로 인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인이 와서 오락으로써 보살을 유혹하려 하거든, 이때 스스로 마음을 굴복시키고 참아서 욕망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014_0638_c_03L復次,若有女人來欲娛樂,誑惑菩薩,菩薩是時當自伏心,忍不令起。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 앉아계실 때 마왕(魔王)이 근심이 되어 세 딸[王女]을 보냈으니, 첫째는 낙견(樂見)이요, 둘째는 열피(悅彼)요, 셋째는 갈애(渴愛)였다. 그들은 와서 몸을 나타내어 갖가지 교태를 부리면서 보살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 보살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잠시도 눈을 주지 않으셨다. 이에 세 여자들은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아 좋아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젊은이를 좋아하거나 혹은 중년에 애착하며, 키가 큰 이를 좋아하거나 혹은 키가 작은이를 좋아하며, 피부가 희거나 혹은 검은 사람을 좋아한다. 이렇듯 갖가지로 좋아함이 다르다.’ 이때 세 여인은 각각 5백 명의 미녀로 변화했는데, 하나하나의 변화한 여자는 다시 한량없는 교태를 나타내며 숲에서 나왔으니, 마치 먹구름에서 잠시 번개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혹은 눈썹을 드날리거나 눈길을 주거나 어리광을 부리거나 눈을 가늘게 떠 홀리며, 갖가지 풍악을 울리는 등 온갖 교태를 부리면서 보살에게 다가와서 교태로운 몸으로 보살에게 접촉하려 했다. 이때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18)가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꾸짖었다. “이 분이 누구이신데 너희들이 감히 음탕한 교태로 접근하려 하느냐.” 그리고 밀적은 게송으로써 그들을 꾸짖었다.
014_0639_a_01L보살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부정하고 더럽도다. 물러가 헛되이 말을 걸지 말라.” 이때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14_0639_a_01L菩薩言:“汝等不淨,臭穢可惡。去!勿妄談!”菩薩是時,卽說偈言:
이 몸은 더러움의 숲 부정하고 부패한 무더기이니 실로 걸어다니는 뒷간이라 하리니 무엇이 즐거울 게 있으랴.
014_0639_a_03L是身爲穢藪, 不淨物腐積, 是實爲行廁,
何足以樂意。
여자들은 이 게송을 듣고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우리들이 청정한 하늘의 몸임을 모르는 채 이런 게송을 읊고 있구나.’ 그리고는 곧 몸을 변하여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 찬란한 빛으로 숲을 비추고 하늘의 기악을 연주하며 보살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몸이 이러하거늘 어찌 꾸짖을 수 있습니까?”
하늘나라 동산 숲에 7보의 연꽃 피는 연못가에서 하늘사람이 서로 어울려 즐기나 잃을 때가 되면 너희들 스스로 알리라.
014_0639_a_10L諸天園林中, 七寶蓮華池, 天人相娛樂,
失時汝自知。
이때 무상이 나타나면 하늘의 즐거움 모두 고(苦)가 되니 그대들은 마땅히 욕락을 싫어하고 바르고 참된 도를 사랑해야 하리라.
014_0639_a_12L是時見無常, 天上樂皆苦,
汝當厭欲樂, 愛樂正眞道。
여자들이 이 게송을 듣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큰 지혜가 한량이 없다. 하늘의 즐거움이 청정하거늘 오히려 그 삿됨을 알고 있으니, 당할 수가 없도다.” 그리고는 즉시 사라졌다. 보살은 이와 같이 음욕의 즐거움을 관찰하고는 스스로 마음을 제어하고 인내해 요동치 않는 것이다.
014_0639_b_01L또한 보살은 음욕의 갖가지 부정(不淨)을 이렇게 관찰한다. “모든 쇠퇴함[衰] 가운데서 여자의 쇠퇴함이 가장 무겁다. 칼ㆍ불ㆍ우레ㆍ번개ㆍ벼락ㆍ원수ㆍ독사 따위는 오히려 잠시라도 가까이할 수 있으나 여자의 간탐ㆍ질투ㆍ성냄ㆍ아첨ㆍ추태ㆍ싸움ㆍ탐욕ㆍ시기 등은 가까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자는 소인인지라 마음이 얕고 지혜가 얇아서 음욕만이 눈에 뜨이고, 부귀ㆍ지덕ㆍ명예는 보지 않으며, 오로지 음욕만을 행하여 남의 선근을 깨뜨린다. 결박ㆍ칼ㆍ우리ㆍ감옥이 벗어나기 어렵다 하나 오히려 풀기 쉽거니와 여자의 사슬이 사람을 결박함은 물듦이 굳고 뿌리가 깊어서 지혜 없는 자가 빠지면 벗어날 수가 없다.”
뭇 법 가운데서 여자의 법이 가장 무거우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게송을 말씀하셨다.
차라리 달구어진 무쇠로 눈 속을 휘저을지언정 흩어진 마음으로 헛되이 여색을 살피지 말아라.
014_0639_b_02L寧以赤鐵, 宛轉眼中, 不以散心,
邪視女色。
웃음을 머금고 맵시를 부리며 교만하고 다시 수줍어하고 곁눈질하면서 눈알을 굴리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양을 부린다.
014_0639_b_04L含笑作姿, 憍慢羞恥,
迴面攝眼, 美言妒瞋。
걸음걸이는 요염하여 사람을 홀리고 음욕의 그물을 널리 펴서 사람을 모두 걸려들게 한다.
014_0639_b_05L行步妖穢,
以惑於人, 婬羅彌網, 人皆沒身。
앉고 눕고 다니고 설 때 두리번거리며 교태를 부리면 지혜 얕은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마음이 취하게 된다.
014_0639_b_06L坐臥行立, 迴眄巧媚, 薄智愚人,
爲之心醉。
검을 쥐고 달려드는 적군은 차라리 이길 수 있을지언정 여인이라는 도적이 사람을 해하는 일이야 막아낼 도리가 없다.
014_0639_b_08L執劍向敵, 是猶可勝,
女賊害人, 是不可禁。
독을 품은 독사는 차라리 잡을 수 있겠지만 여자의 정이 사람을 홀리는 것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
014_0639_b_09L蚖蛇含毒,
猶可手捉, 女情惑人, 是不可觸。
지혜로운 사람은 보지 말아야 하나니 만일 보고자 한다면 어머니나 누이같이 여기라.
014_0639_b_10L有智之人, 所應不視, 若欲觀之,
當如母姊。
자세히 관찰해 보라. 부정물(不淨物)의 쌓임이니 음욕의 불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 때문에 타게 되리라.
014_0639_b_12L諦視觀之, 不淨塡積,
婬火不除, 爲之燒滅。
또한 여자란 공경을 받게 되면 남편으로 하여금 우쭐하게 만들고, 공경을 받지 못하면 남편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든다. 여자는 항상 이렇게 번뇌ㆍ근심ㆍ두려움을 사람들에게 끼치거늘 어떻게 가까이하겠는가. 친하고 좋아하던 이들이 등지고 갈라섬은 여자의 죄요, 남의 잘못[惡]을 교묘히 살핌은 여자의 지혜이다. 큰 불이 사람을 태우는 것은 오히려 가까이할 수 있고, 형체 없는 맑은 바람은 오히려 잡을 수 있고, 독을 머금은 독사는 오히려 건드릴 수 있지만 여자의 마음은 진실로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여자란 부귀ㆍ단정ㆍ명예ㆍ지덕ㆍ종족ㆍ기예ㆍ말재주ㆍ친분ㆍ사랑 등은 보지 않아 도무지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음욕만을 보기 때문이다. 마치 교룡(蛟龍)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오직 사람 죽이기만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또한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근심ㆍ걱정ㆍ초췌함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재산을 넉넉히 부양하고 공경해 받들어 주면 그 교만과 사치가 억제하기 어렵다.
왕녀는 때가 되자 부왕에게 말했다. “저에게 불길한 조짐이 있으니, 부득이 천상 앞에 나아가서 복을 빌어야 되겠습니다.”
014_0639_c_20L王女至時,白其父王:“我有不吉,須至天祠以求吉福。”
왕은 “좋다”고 말했다.
王言:“大善!”
곧 수레 5백 대를 장엄시켜 천사까지 데려다 주게 했다. 천사에 이르자 모든 시종들에게 명해 문을 경계로 멈춰 서게 하고는 혼자서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014_0639_c_21L卽嚴車五百乘,出至天祠;旣到,勅諸從者齊門而止,獨入天祠。
014_0640_a_01L이때 천신(天神)은 생각하기를 ‘이 일은 옳지 못하다. 왕은 인간세상의 주인인데 이 천한 백성이 왕녀를 욕되게 하게 할 수는 없다’ 하고는 곧 그 아들을 홀려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왕녀가 들어와서 보니 그가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흔들었으나 깨지 않기에 10만 냥어치나 되는 영락(瓔珞)을 그에게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그녀가 떠난 뒤에 깨어나서 보니, 영락이 목에 걸려 있었다. 곁의 사람들에게 물어보고서야 왕녀가 왔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을 통하려던 원[情願]을 이루지 못한 채 근심하고 괴로워하더니 음욕의 불에 복받쳐 죽었다. 이런 예로 보아도 여자의 마음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음욕만을 쫓는다는 것을 알겠다.
곧 응당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모든 중생은 죄지은 인연이 있어서 서로 침해한다. 나 또한 지금 시달림을 받는 것도 전생의 행위[本行]의 인연일 것이다. 비록 금생에 지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내가 전생에 저지른 나쁜 갚음을 받는 것이니, 의당 달게 받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빚을 지는 것과도 같으니, 빚 주인이 달라고 하면 응당 기쁜 마음으로 갚을지언정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수행자는 항상 자애로운 마음을 써야 하며, 아무리 번뇌와 어지러움이 몸에 닥치더라도 반드시 참고 견디어야 한다.
014_0640_a_17L復次,行者常行慈心,雖有惱亂逼身,必能忍受。
014_0640_b_01L예컨대 찬제(羼提)22) 선인이 큰 숲에서 인욕을 닦고 자비를 행하는데, 이때에 가리왕(迦利王)이 채녀(採女)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놀았다. 음식을 먹고는 왕이 잠시 잠든 사이에 궁녀들이 꽃나무 사이로 구경을 다니다가 이 선인을 보자 공경하여 절을 하고 한쪽에 섰다. 선인은 채녀들에게 자비와 인욕을 찬양하며 말해 주었는데, 그 음성이 아름답고도 미묘하여 듣는 이가 싫증이 나지 않아 오랫동안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가리왕이 깨어나 보니 궁녀들이 보이지 않았기에 칼을 뽑아들고 자취를 찾아 쫓아가 그녀들이 선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교만과 질투가 복받쳤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며 칼을 뽑아 겨누고서 물었다. “너는 무엇 하는 자이냐?”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그대를 시험해 보리라. 이 칼로 네 귀를 베고, 코를 자르고, 손발을 끊겠다. 그래도 성을 내지 않는다면 그대가 인욕을 닦는다고 알겠노라.”
014_0640_b_04L王言:“我今試汝,當以利劍截汝耳鼻,斬汝手足,若不瞋者,知汝修忍!”
선인이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014_0640_b_06L仙人言:“任意!”
왕은 곧 칼을 들어 그의 귀와 코를 베어내고 손발을 끊고 나서 물었다. “이래도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느냐?”
014_0640_b_07L王卽拔劍截其耳鼻,斬其手足,而問之言:“汝心動不?”
선인이 대답했다. “나는 자비와 인욕을 닦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014_0640_b_08L答言:“我修慈忍,心不動也”
왕이 다시 말했다. “네 한 몸만이 남아 있어 아무런 세력도 없거늘 아무리 입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해도 누가 그 말을 믿겠느냐.”
014_0640_b_09L王言:“汝一身在此,無有勢力,雖口言不動,誰當信者?”
이때 선인은 발원을 했다. “내가 실로 자비와 인욕을 닦았다면, 피가 젖이 되게 해 주옵소서.”
014_0640_b_10L是時仙人卽作誓言:“若我實修慈忍,血當爲乳!”卽時血變爲乳。
그러자 즉시에 피가 젖으로 변했다. 이에 왕은 크게 놀라며 채녀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014_0640_b_12L王大驚喜,將諸婇女而去。
이때 숲 속에 있던 용신이 이 선인을 위해 천둥ㆍ벼락을 내리니, 왕은 그 독해(毒害)를 입고는 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죽어버리고 말았다.
014_0640_b_13L是時林中龍神,爲此仙人雷電、霹靂,王被毒害,沒不還宮。
그러므로 말하기를 “번거로운 가운데서 능히 인욕을 행한다” 하는 것이다.
014_0640_b_14L以是故言“於惱亂中能行忍辱”。
또한 보살은 자애의 마음을 닦고 행하는데, 일체 중생은 항상 뭇 고통이 있으니, 태내에 있을 때엔 옹색해서 온갖 고통을 받고 나올 때엔 옹색함에 눌리어 뼈와 살이 부서지는 듯하고, 찬바람이 몸에 닿는 고통이 칼로 베이는 것보다 심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고통 가운데서 태어나는 고통이 가장 무겁다” 하셨다. 이와 같이 늙음ㆍ앓음ㆍ죽음의 고통과 갖가지 고액이 있으니, 어찌 수행자가 다시 그들에게 고통을 보태어 주랴. 이는 종기에다 다시 칼을 대어 흠집을 내는 것이다.
014_0640_c_01L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항상 생사의 흐름을 따를 것이 아니라. 마땅히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서 그 근원을 다하여 열반[泥洹]의 길에 이르리라. 일체의 범부들은 침해를 당하면 곧 화를 내고, 이익을 만나면 곧 기뻐하며, 두려운 곳에서는 곧 겁을 먹는다. 하지만 나는 보살이거니 그들과 같을 수는 없도다.
비록 아직 번뇌의 씨앗을 다 끊지는 못했으나 스스로 억제하여 인욕을 닦되 해치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공경과 공양을 하더라도 기뻐하지 않으며, 뭇 고통과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오직 중생들을 위하여 큰 자비심을 일으키리라.”
또한 보살은 어떤 중생이 와서 괴롭히거든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나의 친구이며 나의 스승이다” 하고는 더욱 친애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그가 온갖 괴로움을 가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나는 인욕의 행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나의 친한 친구이며 또한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명심해야 하나니,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은 시작이 없고 세계는 한계가 없으니, 5도(道)를 오가며 끝없이 헤맨다. 나도 일찍이 중생들의 부모 형제가 되었고, 중생들도 나의 부모형제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러하리라” 하셨다.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삿된 마음으로 성내고 해하려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중생들 가운데는 부처의 종자가 매우 많으니, 내가 화를 내어 그들을 대한다면 이는 곧 부처님께 화를 내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부처님께 화를 낸다면 이미 끝난 것이다. 말씀하셨듯이 비둘기도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지금은 비록 새이지만 가벼이 할 수 없다.’
014_0641_a_01L 다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연민[悲]을 행해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한다. 성냄은 모든 선근을 멸하고 모든 것을 독으로 해치거늘 내 어찌 이 중한 죄를 범하겠는가. 만일 화를 낸다면 스스로 즐거움과 이익을 잃어버리니, 어떻게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겠는가.’
또한 불보살들은 대비(大悲)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니 성을 낸다면 대비를 멸하는 독이 되고 마니, 특히나 안 될 일이다. 만일 대비의 근본을 무너뜨린다면 어찌 보살이라 하며, 보살이 어디로부터 나오랴. 그러므로 인욕을 닦아야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온갖 성냄의 고통[瞋惱]을 가하더라도 그 공덕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이 중생이 비록 한 가지 죄가 있으나 달리 묘한 여러 공덕들이 있을 것이니, 그 공덕 때문이라도 그에게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욕하거나 때리더라도 그것은 나를 다듬는 것이 된다. 마치 금쟁이가 금을 정련하면 티는 불을 따라 없어지고 순금만 남는 것과 같다. 이 또한 이와 같으니, 내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전생의 인연 때문이니, 이제 마땅히 그것을 갚아야 한다. 화를 내지 말고 인욕을 닦으리라.’
또한 보살은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마치 갓난아기같이 여기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염부제 사람들은 근심 걱정은 많고 즐거운 날이 없으므로 혹 와서 꾸짖고 모함하거나 혹은 중상을 가해 스스로 즐거워한다면, 이 즐거움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네 마음대로 꾸짖으라. 왜냐하면 내가 본래 발심한 것은 중생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느니라.’
‘세간의 중생들은 항상 모든 병고에 시달리고, 또한 항상 죽음의 도적이 그를 쫓아 엿보니, 마치 원수가 항상 안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찌 착한 사람으로서 사랑하여 가엾이 여기지 않겠는가.’ ‘고통을 주고자 하나 고통이 그에게 미치기 전에 먼저 내가 해를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저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인욕을 닦아야 한다.
014_0641_b_01L또한 마땅히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성냄은 그 허물이 가장 깊어서 삼독 가운데서 이보다 깊은 것이 없다. 98사(使)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견고하고, 모든 마음의 법 가운데 가장 고치기 어렵다. 성내는 사람은 착한 것도 모르고, 착하지 않은 것도 모르며, 죄와 복도 관찰하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도 알지 못한 채 스스로 억념하지도 못하다가 스스로 악도에 떨어진다. 착한 말을 망실하고 명예를 아끼지 않으며, 남의 괴로움을 모르고 자기의 몸과 마음이 피로하고 지치는 줄도 모른 채 성냄에 지혜의 눈을 가려 오로지 남을 괴롭히는 짓만을 한다.’ 어떤 5통선인(通仙人)이 화를 냈기 때문에 비록 청정한 행을 닦았으나 한 나라 사람을 다 죽이기를 마치 전다라와 같이 했다.
또한 화를 내는 사람은 마치 삵과 같아서 함께 머물기 어려우며, 마치 악성 종기와도 같아서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무너진다. 화를 내는 사람은 마치 독사와도 같아서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며, 화를 쌓은 사람은 악심이 점점 커져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러 아비도 죽이고 임금도 죽이며 악의를 품은 채 부처님께 향한다.
【답】 만일 소인들이 가벼이 여겨 ‘겁낸다’고 하는 까닭에 참지 않으려 한다면 참지 않는 죄는 이보다 심하다.
014_0641_c_07L答曰:若以小人輕慢,謂爲怖畏而欲不忍,不忍之罪甚於此也!
왜냐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은 현성의 착한 이들이 가벼이 여기시고, 인욕하는 사람은 소인들이 가벼이 여기나니, 그렇다면 두 가지 가벼이 여김 가운데서 차라리 어리석은 자에게 업신여김을 받을지언정 성현들의 천대를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에 업신여기고, 성현은 천히 여길만한 것을 천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인욕을 닦아야 한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금생에 나를 괴롭히고 욕보이며, 이익을 빼앗고, 업신여기고, 꾸짖고, 속박하더라도 우선은 참아야 한다. 만일 내가 참지 못한다면 지옥에 떨어져서 무쇠기둥ㆍ무쇠담ㆍ뜨거운 땅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리니, 태우고 삶고 굽는 등 고통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리라.’ 소인들은 지혜가 없어서 비록 보잘것없는 것도 귀하게 여기며, 참지 못하여 위맹을 부려서 비록 상쾌한 일이나 천하게 여긴다. 그러기에 보살은 인욕해야 하는 것이다.
014_0642_a_01L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처음 발심해 중생들의 마음의 병을 다스려 주고자 맹세했거늘 어찌 그들 때문에 자신이 병들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인욕해야 하리라.’
마치 약사(藥師)가 모든 병을 고치는 것과 같으니, 귀신이 붙어 미친병이 들어 칼을 뽑아들고, 헐뜯으며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해도 의원은 귀신의 병인 줄 알기 때문에 오직 고쳐 주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는다. 보살 역시 이와 같아서 만약 어떤 중생이 화를 내어 꾸짖으면 그 화를 내는 자가 번뇌의 병에 끄달리고 미친 마음에 시달린 줄을 잘 알아 방편으로 고쳐줄지언정 싫어함이 없다.
또한 보살은 일체를 기르고 사랑하기를 마치 아들과 같이 하나니, 어떤 중생이 보살에게 화를 내며 괴롭힐지라도 보살은 가엾이 여기어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는다. 마치 인자한 아버지가 자손을 어루만져 기르지만 자손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기에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하며, 공경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르더라도 그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음을 가엾이 여기어 더욱 사랑하며 설사 허물이 있더라도 성내거나 꾸짖지 않는다. 보살의 인욕도 이와 같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나에게 화를 내고 괴롭히더라도 나는 인욕해야 하리라. 만일 내가 참지 않으면 금생에 후회하고 나중에 지옥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요, 만일 축생이 되면 독한 용이나 뱀ㆍ사자ㆍ범ㆍ이리 따위가 될 것이요, 만일 아귀가 되면 입에서 불이 나올 것이니, 마치 사람이 불에 데며, 데일 때는 차라리 조금 아프지만 나중에 더욱 아파지는 것과 같으리라.’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 무리[衆生數]요, 둘째는 중생 아닌 무리[非衆生數]이다. 나는 처음 발심해 모든 중생을 위하리라고 맹세했다. 만일 중생 아닌 무리, 즉 산과 돌ㆍ나무ㆍ들ㆍ바람ㆍ추위ㆍ서늘함ㆍ더위ㆍ물ㆍ비 따위가 침노해 오더라도 오직 피하려 할 뿐 처음부터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중생들은 내가 위해야 할 대상이다. 나를 해친다고 해도 나는 마땅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거늘 어찌 화를 내리오.’
014_0642_b_01L또한 보살은 여러 겁 이전부터 인연이 화합하여 거짓으로 사람이라 했을 뿐 실로 사람이라 할 법이 없음을 안다. 그러니 누가 감히 꾸짖을 수 있겠는가. 오직 뼈ㆍ피ㆍ가죽ㆍ살이 있을 뿐이다. 마치 벽돌을 쌓은 것과 같으며, 마치 나무로 만든 인형[木人]의 기관이 움직여 가고 오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음을 안다면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자신이 화를 낸다면 이는 어리석은 짓으로, 스스로 죄와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인욕을 닦아야 한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에 한량없으며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께서 보살도를 닦으실 때에 모두가 먼저 생인(生忍)을 행하시고 나중에 법인(法忍)을 수행하셨다. 나도 이제 불도를 배우려 한다면 의당 부처님들이 행하신 법과 같이 할지언정 화를 내어 악마의 법과 같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1)범어로는 śīla-pāramita. 계를 지니어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2)범어로는 Sutasomarājasūtra.
3)복락의 인연 때문에 요동치 않는다.
4)여우[狐]의 일종이다.
5)범어로는 kṣānti. 찬제(羼提)란 참고 감내함을 뜻한다.
6)범어로는 caitasika-dharma. 신역어는 심소법(心所法). 심수(caitasika)란, ‘마음에 속하는 것’이란 뜻으로 ‘마음에 속하는 작용’ 나아가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작용’을 가리킨다.
7)범어로는 Kapilasastu.
8)범어로는 Dronodana.
9)범어로는 Devadatta.
10)범어로는 Gautama. 데바닷따의 성(性)이다.
11)범어로는 Ajātaśatru.
12)범어로는 Guhyakavajrapāṇi,
13)범어로는 vajrayudha. ‘결코 부서지는 일 없는 방망이’를 의미한다. 이 금강저(金剛杵)를 지니고 바즈라빠니(vajra-pāṇi, 執金剛)가 항상 부처님을 그 곁에서 수호한다고 한다.
14)범어로는 Utpalavarṇā.
15)범어로는 Pūrāna. 육사 외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견(空見)에 집착했다고 한다.
16)범어로는 Kaśmīr. 현재 북인도의 까슈미르 지역을 말한다.
17)의ㆍ식ㆍ주의 셋을 말한다.
18)인왕(仁王)이라고도 한다.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야차. 28부중 가운데 하나. 인도에서는 나형, 중앙아시아 동부에서는 무장을 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으며, 진나라 말로는 절문 좌우에 안치되어 사원을 지키는 수문존(守門尊)이 되고 있다. 이 금강역사를 안치하는 문을 ‘인왕문(仁王門)’이라 부른다.
19)범어로는 Vāsu.
20)범어로는 Kumuda. ‘지희화(地喜花)’라 의역한다. 혹은 ‘아직 개화되지 않은 연꽃’을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