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4_0716_a_01L대지도론 제22권
014_0716_a_01L大智度論釋初品中八念義第三十六之餘卷二十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014_0716_a_02L 聖者龍樹造


36. 초품 중 팔념의 뜻을 풀이함②
014_0716_a_03L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譯

염법(念法)133)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바 그대로,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생각하기를 “이 법은 교묘하고 특출하여[巧出]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고 들끓는 번뇌[熱惱]도 없으며 때[時]를 기다리지 않고 능히 좋은 곳[善處]에 이르며 통달하여 걸림돌이 없다[通達無礙]”고 해야 한다.
014_0716_a_04L念法者如佛演說行者應念是法巧得今世果無熱惱不待時能到善通達無㝵
교묘하고 특출하다 함은, 두 가지 진리[二諦]가 서로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니, 이른바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134)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이도 파괴할 수 없고 어리석은 이도 다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법은 또한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여의나니, 이른바 5욕(欲)의 즐거움을 받는 것과 고행(苦行)을 받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나니, 항상함[常]과 단절됨[斷], 나[我]와 나 없음[無我], 존재함[有]과 존재하지 않음[無] 등의 이러한 두 가지 치우침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교묘하고 특출하다 한다. 모든 외도의 무리들은 자기의 법만을 귀히 여기고 다른 이의 법은 헐뜯고 천히 여기는 까닭에 교묘하거나 특출하지 못하다.
014_0716_a_07L巧出二諦不相違故所謂世諦第一義諦是智者不能壞者不起諍故是法亦離二邊所謂若受五欲樂若受苦行復離二邊若常若斷若我若無我若有若無如是等二邊不著是名巧出諸外道輩自貴其法毀賤他法故不能巧出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는다 함은, 애욕의 인연인 세간의 갖가지 괴로움을 여의고 삿된 소견의 인연인 갖가지 논의(論議)와 다툼을 여의어 몸과 마음에 안락함을 얻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014_0716_a_13L得今世離愛因緣世閒種種苦離邪見因緣種種論議鬪諍身心得安樂佛說

계율을 지키는 이는 편안하고 즐거우며
몸과 마음에는 들끓는 괴로움 없고
누워도 편안하고 깨어나도 편안하며
명성도 또한 멀리 들린다.
014_0716_a_16L持戒者安樂
身心不熱惱
臥安覺亦安
名聲亦遠聞
014_0716_b_01L
또 이 불법 가운데에서 인연(因緣)은 차츰차츰 그 결과를 내나니, 이른바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고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법에 기쁨이 생기며, 법에 기쁨이 생기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즐겁고 몸과 마음이 즐겁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기 때문에 여실히 알게 된다. 여실히 알기 때문에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기 때문에 탐욕을 여의며, 탐욕을 여의기 때문에 해탈을 얻고 해탈의 과보를 얻기 때문에 열반을 얻나니, 이것을 지금 세상의 과보를 얻는다고 한다.
014_0716_a_18L復次此佛法中因緣展轉生果所謂持戒淸淨故心不悔心不悔故生法歡法歡喜故身心快樂身心快樂故能攝心攝心故如實知如實知故得得厭故離欲離欲故得解脫得解脫果報得涅槃是名得今世果
외도의 법에는 공연히 괴로운 일만 하고 얻는 것은 없나니, 마치 염부(閻浮)135) 아라한이 도를 얻었을 때에 스스로 말한 것과 같다.
014_0716_b_02L外道法空行苦無所得如閻浮阿羅漢得道時自說

나는 옛날 외도가 되어서
55년 동안이나
다만 마른 쇠똥만을 먹으며
벌거숭이로 가시나무 위에 누워 있었네.
014_0716_b_04L我昔作外道
五十有五年
但食乾牛屎
裸形臥棘上

“나는 이와 같은 모진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침내 얻은 것이 없었다. 지금과 같지 못했으니, 나는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고 출가한지 3일만에 할 일을 다 마치고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에서는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받는 줄 알 것이다.
014_0716_b_06L我受如是辛苦竟無所得不如今得見佛聞法出家三日所作事辦得阿羅漢以是故知佛法得今世果
【문】 만일 부처님의 법에서는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는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들로서 얻지 못하는 이도 있는가?
014_0716_b_09L問曰若佛法得今世果何以故佛諸弟子有無所得者
【답】 수행하는 이가 능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차례로 수행한다면 그 과보를 얻지 못함이 없다. 마치 병든 사람이 용한 의사의 가르침대로 치료하는 법을 따른다면 그 병이 낫지 않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차례대로 행하지도 않는다면 계율을 깨뜨리고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얻는 것이 없을 뿐이요 법이 바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014_0716_b_11L答曰行者能如佛所說次第修行無不得報如病人隨良醫將和治法病無不差若不隨佛教不次第行破戒亂心故無所得非法不良也
또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 비록 열반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뒷세상에 복과 쾌락을 받게 되고 점차로 열반을 얻게 되리니, 끝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누구라도 출가하여 열반을 닦는다면 더디거나 빠르거나 간에 모두 열반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바와 같다.
014_0716_b_15L復次諸未得道者今世雖不得涅槃後世得受福樂漸次當得涅終不虛也如佛所說其有出家爲涅槃者若遲若疾皆當得涅槃
이와 같은 등으로 능히 지금 세상에서 과보를 얻게 된다.
014_0716_b_18L如是等能得今世果
014_0716_c_01L들끓는 괴로움이 없다 했는데, 들끓는 괴로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곧 몸의 괴로움[身惱]과 마음의 괴로움[心惱]이다. 몸의 괴로움이란 포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거나 고문(拷問)과 형벌 등을 받는 것이다. 마음의 괴로움이란 음욕과 성냄과 간탐과 질투 등의 인연 때문에 근심ㆍ걱정ㆍ두려움 등을 내는 것이다.
이 불법 중에서는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기 때문에 몸에는 이 포박이나 옥살이ㆍ고문ㆍ형벌 등의 괴로움이 없고, 마음에서도 5욕을 여의고 5개(蓋)를 제거하여 진실한 도를 얻기 때문에 이러한 음욕이나 성냄ㆍ간탐ㆍ질투ㆍ삿된 의심 등의 괴로움이 없나니,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들끓는 열(熱)이 없다.
014_0716_b_19L無熱惱熱惱有二身惱心惱身惱者繫縛牢獄拷掠刑戮等心惱者婬欲瞋恚慳貪嫉妒因緣故生憂愁怖畏等此佛法中戒淸淨故身無是繫縛牢獄拷掠戮等惱心離五欲除五蓋得實道故無是婬欲瞋恚慳貪嫉妒邪疑等惱無惱故無熱
또 무루(無漏)의 선정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 온몸에 두루 느끼기 때문에 모든 들끓는 열이 곧 제거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몹시 뜨겁고 답답할 적에 맑고 시원한 못 안에 들어가면 몸이 시원해지고 맑아지면서 다시는 뜨거운 괴로움이 없는 것과 같다.
014_0716_c_03L復次無漏禪定生喜樂遍身受故諸熱則除譬如人大熱悶得入淸涼池中冷然淸了無復熱惱
또 모든 번뇌는 소견에 속하고 애욕에 속하는 데, 이것을 뜨겁다 한다. 불법 중에는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들끓는 괴로움이 없다고 한다.
014_0716_c_05L復次諸煩惱若屬見若屬愛是名熱佛法中無此故無熱惱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함은, 불법에서는 때[時]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행하며 또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과를 준다. 외도의 법에서는 해가 나오지 않을 때에 법을 받고 해가 나온 때에는 법을 받지 않기도 하며, 혹은 해가 나온 때에 받고 해가 나오지 않은 때에는 받지 않기도 하며, 혹은 낮에 받고 밤에는 받지 않기도 하고 밤에 받고 낮에는 받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 법안에서는 받는 데에 때를 기다림이 없다.
8성도(聖道)를 닦으면 그에 따라 곧 열반을 얻는다. 마치 불이 땔나무를 만나면 곧 타오르는 것처럼 무루의 지혜가 생겼을 적에는 곧 모든 번뇌를 능히 태워버려 때를 기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014_0716_c_07L不待時佛法不待時而行亦不待時與果道法日未出時受法日出時不受法或有日出時受日未出不受有晝受夜不受有夜受晝不受佛法中無受待時隨修八聖道時便得涅槃譬如火得薪便然無漏智慧生時便能燒諸煩惱不待時也
【문】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때맞추어 먹는 약[時藥]과 때맞추어 입은 옷[時衣]과 때맞추어 먹는 음식[時食]이 있다. 만일 사람의 선근(善根)이 아직 익지 않았다면 때를 기다려 얻어야 하는데 어째서 때가 없다고 하는가?
014_0716_c_14L問曰如佛說有時時衣時食若人善根未熟待時當何以言無時
【답】 이때라는 것은 세속의 법을 따른 것이다. 부처님 법에 오래오래 머무르기 위해서는 때에 맞는 계율[時戒]을 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도를 닦아 열반과 모든 선정과 지혜와 미묘한 법을 얻기 위해서라면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외도의 법에서는 모두가 시절을 기다리지만 불법에서는 다만 인연이 두루 갖추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만일 비록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는다 하더라도 지혜가 아직 성취되지 못하면 도를 이루지 못한 것이고, 만일 지계와 선정과 지혜가 모두 성취되었으면 곧 결과를 얻은 것이므로 다시는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014_0716_c_16L答曰隨世俗法爲佛法久住故結時戒若爲修道得涅槃及諸禪定智慧微妙法不待時諸外道法皆待時節佛法但待因緣具足若雖持戒禪定而智慧未成不能成道若持戒禪定智慧皆成便得果不復待時
014_0717_a_01L또 오래오래 걸려서 결과를 얻는 것을 때라고 하며 즉시 얻어지는 것을 때라 하지는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물이 잘 드는 것은 한번 넣어도 이내 물이 드는 것처럼 마음이 깨끗한 사람도 그와 같아서 법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물이 들면서 법의 눈[法眼]이 깨끗하게 되나니, 이것을 바로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한다.
014_0716_c_22L復次久久得果名爲時卽得不名時譬如好染一入便成心淨人亦如是聞法卽染得法眼淨是名不待時
능히 좋은 곳에 이른다[到善處] 함은, 이 서른일곱 가지 무루의 도법[無漏道法]136)이 사람을 데리고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항하(恒河)로 들어가면 틀림없이 큰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모든 다른 외도의 법은 일체지(一切智)를 갖춘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다. 삿된 소견이 섞였기 때문에 나쁜 곳[惡處]에 이른다. 혹은 천상에 이르기도 하나 도로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된다. 이는 모두가 무상하기 때문에 좋은 곳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014_0717_a_02L能到善處是三十七無漏道法能將人到涅槃譬如入恒河必得至大海諸餘外道法一切智人所說邪見雜故將至惡處或時將至天上還墮受苦皆無常故名善處
【문】 데려갈 이가 없거늘 어떻게 좋은 곳으로 데려갈 수 있겠는가?
014_0717_a_07L問曰無有將去者云何得將至善處
【답】 비록 데려가는 이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법이 능히 모든 법을 데리고 간다.
무루의 선[無漏善]이 5중(衆)을 끊어 주나니, 5중 가운데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중생이라 하는데 이들을 데려가서 열반에 들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바람이 먼지를 불어버림과 같고 물이 풀을 떠내려가게 함과 같은 것이다. 비록 데리고 가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가는 일은 있는 것이다.
014_0717_a_08L答曰雖無將去者但諸法能將諸法去無漏善五衆斷五衆中强名衆生將去入涅槃如風吹塵如水漂草雖無將去者而可有去
또 인연(因緣)이 화합하여 짓는 것이 없다면 역시 데려가는 것이 없지만, 그 과보는 인연에 속하여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이것을 곧 간다[去]고 하는 것이다.
014_0717_a_11L復次因緣和合無有作亦無有將去者而果報屬因緣不得自在是卽名爲去
통달하여 걸림이 없다[通達無礙] 함은, 부처님의 법인(法印)137)을 얻기 때문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왕의 도장[王印]138)을 얻게 되면 어려운 것이 없는 것과 같다.
014_0717_a_13L通達無㝵得佛法印故通達無㝵如得王印則無所留難
【문】 어떤 것이 부처님의 법인인가?
014_0717_a_15L問曰何等是佛法
【답】 부처님의 법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온갖 유위법[有爲法]은 생각마다 나고 없어져 모두 무상(無常)한 것이고, 둘째는 온갖 법에는 나가 없는[無我] 것이며, 셋째는 고요한[寂滅] 열반139)이 그것이다.
014_0717_a_16L答曰佛法印有三種一者一切有爲法念念生滅皆無常二者一切法無我三者寂滅涅槃
수행하는 이는 삼계(三界)는 모두가 유위요 나고 없어짐을 안다. 조작된 법은 먼저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고 지금은 있지만 뒤에는 없으며, 생각마다 나고 없어지면서 계속 이어가되 서로 비슷하게 생겨나기 때문에 보고 알 수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흐르는 물과 등불의 불꽃과 길게 부는 바람과도 같으니, 서로 비슷하게 이어가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一]라고 여긴다. 중생은 무상한 법 가운데서 항상 뒤바뀐 채 생각하기 때문에 떠나가는 것을 항상 머문다고 여긴다. 이것을 온갖 만들어진 법[作法]의 무상함의 징표[無常印]이라 한다.
014_0717_a_18L行者知三界皆是有爲生滅作法先有今無今有後無念生滅相續相似生故可得見知流水燈焰長風相似相續故人以爲衆生於無常法中常顚倒故謂去者是常住是名一切作法無常印
014_0717_b_01L온갖 법에 나가 없다 함은, 모든 법은 그 안에 주(主)140)가 없고 짓는 이도 없으며,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며, 낳는[生] 이도 없고 업을 짓는 이도 없다. 온갖 법은 모두가 인연에 속한다.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자재(自在)하지 못하고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가 없으니, 그것은 나의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파아품(破我品)141)에서 말한 것과 같나니, 이것을 나 없음의 징표[無我印]라 한다.
014_0717_a_23L一切法無我諸法內無主無作者無知無生者無造業者一切法皆屬因屬因緣故不自在不自在故無我我相不可得故如「破我品」中說是名無我印
【문】 무엇 때문에 다만 만들어진 법은 무상하고 온갖 법에는 나가 없다 하는가?
014_0717_b_05L問曰何以故但作法無常一切法無我
【답】 조작되지 않는 법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지 않는다.
014_0717_b_06L答曰不作法無因無緣故生不滅不生不滅故不名爲無常
또 조작되지 않는 법에는 마음의 집착이나 뒤바뀐 생각을 내지 않나니, 그러므로 이것은 무상하다고 하지 않고 나 없다고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神)142)은 항상 두루 아는 모양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에는 나가 없다고 한다”고 했다.143)
014_0717_b_07L不作法中不生心著顚倒以是故不說是無常可說言無我有人說是常遍知相以是故說一切法中無
고요히 사라진다[寂滅] 함은 바로 그것이 열반이니, 3독(毒)과 3쇠(衰)의 불이 꺼지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寂滅印]144)라 한다.
014_0717_b_11L寂滅者是涅槃三毒三衰火滅故名「寂滅印」
【문】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 가운데는 무엇 때문에 다만 하나의 법뿐이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가?
014_0717_b_12L問曰寂滅印中何以但一不多說
【답】 첫 번째 징표[印]에서는 5중(衆)을 말했고, 두 번째 징표에서는 온갖 법에는 모두 나가 없다고 말했으며, 세 번째의 징표에서는 두 징표의 결과를 말한 것이니 이것을 고요히 사라짐의 징표라 한다.
014_0717_b_13L答曰初印中說五衆二印中說一切法皆無我第三印中說二印果是名寂滅印
온갖 만들어진 법이 무상하다면 곧 나의 것[我所]과 바깥의 5욕 등을 깨뜨리는 것이고, 만일 나 없다고 말하면 안의 나의 법[內我法]을 깨뜨리는 것이니, 나와 나의 것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것을 고요히 사라지는 열반이라 한다.
014_0717_b_15L一切作法無常破我所外五欲等若說無我破內我我所破故是名寂滅涅槃
수행하는 이가 조작되는 법은 무상하다고 관(觀)하면 곧 싫증을 내면서 세간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된다. 이미 괴로움을 싫어할 줄 알지만 집착을 일으켜 주체[主]를 관하면서 “내가 능히 이런 관(觀)을 짓는다”고 여기나니, 이 때문에 두 번째 법의 징표가 있는 것이다.
온갖 것에 나 없는 줄 알면 5중ㆍ12입(入)ㆍ18계(界)ㆍ12인연(因緣) 가운데서 안팎으로 분별하고 추구(推求)하면서 주인을 관한다 해도 얻을 수가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온갖 법에는 나라는 짓는 것[我作]이 없다.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쓸모없는 희론(戱論)도 짓지 않고 의지할 데도 없으며 다만 사라짐[滅]에 돌아갈 뿐이니, 이 때문에 고요히 사라진 열반의 징표를 말한다.
014_0717_b_17L行者觀作法無常便生厭厭世苦旣知厭苦著觀主謂能作是觀以是故有第二法印知一切無我於五衆十二入八界十二因緣中內外分別推求主不可得不可得故是一切法無我作如是知已不作戲論無所依止歸於滅以是故說寂滅涅槃印
014_0717_c_01L【문】 마하연(摩訶衍)에서는 모든 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 없음[無相]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어째서 이 무상한 것을 일컬어 법의 징표[法印]라 하는가? 이 두 법은 어떻게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닌가?
014_0717_c_01L問曰摩訶衍中說諸法不生不滅一相謂無相此中云何說一切有爲作法無常名爲法印二法云何不相違
【답】 무상함을 관하면 곧 그것이 공의 인연을 관하는 것이니, 마치 물질[色]이 생각마다 무상하다고 관하면 곧 공인 줄 알게 됨과 같다. 과거의 물질은 사라지고 무너져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色相)이 없고, 미래의 물질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조작도 없고 작용도 없어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으며, 현재의 물질도 역시 머무름[住]이 없어서 볼 수도 없고 분별하여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다. 색상이 없다면 그것은 곧 공이요 공이면 곧 남[生]도 없고 멸함[滅]도 없다. 남도 없고 멸함도 없음[不生不滅]과 나고 멸함[生滅]은 실로 하나이니, 설명에서 자세함과 간략함이 있을 뿐이다.
014_0717_c_04L觀無常卽是觀空因緣如觀色念念無常卽知爲空過去色滅壞不可見故無色相未來色不生無作無用不可見故無色相現在色亦無住可見不可分別知故無色相無色相卽是空空卽是無生無滅無生無滅及生滅其實是一說有廣略
【문】 과거와 미래의 물질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색상이 없지만 현재의 물질은 머무는 때를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색상이 없다고 말하는가?
014_0717_c_11L問曰過去未來色不可見故無色相現在色住時可見云何言無色相
【답】 현재의 물질도 역시 머무는 때가 없으니, 4념처(念處)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만약 법이 나중에 파괴되는 모양을 보인다면 마땅히 처음 생겼을 때부터 파괴될 모양이 있음을 알 것이다. 파괴가 미세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사람이 신을 신는 것과 같으니, 첫날 새 신발이어서 헌 곳이 없었다면 후일에도 마땅히 헐어 떨어짐이 없이 새 것이어야 하며, 만일 헐어 떨어짐이 없다면 이것은 항상한 것[常]이어야 한다.
항상한 것이기 때문에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죄도 없고 복도 없다면 곧 도속(道俗)의 법이 문란해질 것이다.
014_0717_c_13L現在色亦無住時如「四念處」中說若法後見壞相當知初生時壞相隨逐微細故不識如人著屐若初日新而無有故後應常新不應有故若無故應是常常故無罪無福無罪無福則道俗法亂
또 나고 멸하는 모양은 항상 조작된 법을 따르므로 머무는 때가 없다. 만일 머무는 때가 있다면 곧 나고 없어짐이 없으리니, 이 때문에 현재의 물질은 머무름이 없다. 머무는 중에는 역시 나고 없어짐이 없으니, 한 생각 가운데 머무르며 또한 이것은 유위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통달하여 걸림이 없다[通達無礙]고 한다.
014_0717_c_19L復次生滅相常隨作無有住時若有住時則無生滅是故現在色無有住住中亦無有生滅是一念中住亦是有爲法故是名達無㝵
이와 같이 법을 염하여야 한다.
如是應念法
014_0718_a_01L또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3장(藏)ㆍ12부(部)ㆍ8만 4천의 법문이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말씀한 법의 이치[法義]이니, 이른바 지계(持戒)ㆍ선정ㆍ지혜ㆍ8성도(聖道) 및 해탈의 결과인 열반 등이다.
수행하는 이는 먼저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을 염하여야 하고 다음에는 법의 이치를 염하여야 한다.
014_0717_c_23L復次法有二種一者佛所演說三藏十二部八萬四千法聚二者佛所說法義所謂持戒禪定智慧八聖道及解脫果涅槃等行者先當念佛所演說次當念法義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을 염한다 함은, 부처님의 말씀은 미묘(美妙)하고 모두 진실이어서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이다.
014_0718_a_04L念佛所演說者佛語美妙皆眞實大饒益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은 깊기도 하고 또한 얕기도 하다. 실상(實相)145)을 관하기 때문에 깊으며, 교묘한 말씀으로 일부러 얕게도 하셨으며 귀중한 말씀이라 과실이 없나니, 각각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연설한 것은 네 가지 곳[四處]에 머무르며 네 가지 공덕으로 장엄함이 있나니, 첫째는 지혜의 곳[慧處]이고, 둘째는 진리의 곳[諦處]이며, 셋째는 버림의 곳[捨處]이고, 넷째는 사라짐의 곳[滅處]이다.
014_0718_a_06L佛所演說亦深亦淺觀實相故深巧說故淺重語無失各各有義佛所演說住四處有四種功德莊慧處諦處捨處滅處
네 가지의 대답이 있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없나니, 첫째는 정답(定答)146)이요, 둘째는 해답(解答)147)이며, 셋째는 반문답(反問答)148)이요, 넷째는 치답(置答)149)이다.
014_0718_a_09L四種答故不可壞定答解答反問答置答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은 때로는 듣고 가로막기도 하고, 때로는 가로막으면서 듣기도 하며, 혹 듣기만 하고 가로막지 않기도 하고, 혹 가로막고 듣지 않기도 하나니, 이 네 가지 모두가 순종한 것이요 어긋남이 없다.
014_0718_a_11L佛所演說或時聽而遮或時遮而聽或聽而不遮或遮而不此四皆順從無違
부처님의 연설은 모든 법상(法相)을 얻은 까닭에 쓸모없는 이론이 없으며, 이치가 있는 말씀인 까닭에 있다 없다[有無] 하는 논리를 깨뜨린다.
014_0718_a_13L佛說得諸法相無戲論有義理說故破有無論
부처님의 연설은 제일의(第一義)를 따르니 비록 세간의 법을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역시 허물이 없다. 두 가지 진리[二諦]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014_0718_a_14L演說隨順第一義雖說世閒法亦無與二諦不相違故
이익에 순응해 따르므로 청정한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묘한 말씀이 되고 청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쓰고 거친 말씀이 되나니, 아름다운 말씀과 쓴 말씀에서도 역시 죄과(罪過)가 없다.
부처님 말씀은 모두 선법(善法)을 따르지만 또한 선법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014_0718_a_16L隨順利益說淸淨人中爲美妙於不淨人中爲苦於美語苦語中亦無過罪佛語皆隨善法亦不著善法
비록 그것이 때가 낀 법이요 원수라 하더라도 역시 높은 체하지도 않고, 비록 갖가지로 꾸짖는 바가 있더라도 역시 꾸짖음의 죄는 없으며, 갖가지로 법을 찬탄한다 하더라도 역시 의지하는 바가 없다.
014_0718_a_19L雖是垢法怨家亦不以爲高雖種種有所訶亦無有訶罪雖種種讚法亦無所依止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에는 또한 더한 것도 없고 덜한 것도 없으며, 혹 간략하기도 하고 혹 자세하기도 하다.
014_0718_a_21L佛言說中亦無增無減或略或廣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은 처음도 착하며 오래오래 궁구하고 구할수록 역시 착하다.
부처님 말씀은 비록 많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천박하지 않다.
014_0718_a_22L佛語初久久硏求亦善佛語雖多義味不
비록 갖가지 말이 섞였다 하더라도 그 뜻은 어지럽지 않다.
雖種種雜語義亦不亂
014_0718_b_01L비록 사람의 마음을 끌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이 나지 않게 하고, 비록 기이하면서 높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역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거나 어렵게 하지 않다.
014_0718_b_01L雖能引人亦不令人生愛著雖殊異高顯不令人畏難
비록 두루 이르는 데가 있다 하더라도 범부 소인(小人)은 역시 이해할 수 없다.
014_0718_b_03L雖遍有所到凡小人亦不能解
부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갖가지의 희유한 일이 있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털이 곤두서게 하고 땀이 흐르게 하며 기(氣)가 온몸에 꽉 차면서 벌벌 떨리게 한다. 또한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싫어하는 소리가 시방에 가득 차게 하고 여섯 가지로 땅을 진동하게 하며, 또한 무시(無始) 이래로 세계에 대하여 굳게 집착하는 이로 하여금 잘 버리게 하고, 굳게 집착하지 않는 이는 매우 즐겁게 한다.
014_0718_b_04L佛語如是有種種希有事令人衣毛爲豎流汗氣滿身體戰懼亦能令諸天心厭聲滿十方六種動亦能令人於無始世界所堅著者能令捨所不堅著者能令樂
부처님의 말씀은 죄악을 지은 사람이 들으면 스스로 죄가 있기 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으로 몹시 괴로워하며, 착하게 한마음[一心]으로 정진하여 도(道)에 들어간 사람이 들으면 마치 감로(甘露)의 맛을 보는 것과 같아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역시 좋다.
014_0718_b_08L佛語惡人聞之自有罪故憂怖熱惱善一心精進入道人聞如服甘露味初亦中亦好後亦好
또 많이 모인 대중들 안에서 저마다 묻고자 할 때, 부처님은 하나의 말씀으로 대답하지만 각자가 이해하게 되므로 저마다 “부처님께서는 나 혼자만을 위하여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한다.
014_0718_b_11L復次多會衆中各各欲有所聞佛以一言答各各得解各自見佛獨爲我說
대중들 가운데 비록 멀거나 가까움이 있다 하더라도 듣는 이는 그 소리의 증감이 없고 삼천대천세계에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가득 찬다. 제도될 사람은 듣게 되고 제도되지 못할 사람은 듣지 못하게 되니, 비유하건대 마치 천둥소리가 땅을 진동한다 해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귀 밝은 이만이 알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718_b_13L於大衆中雖有遠聞者聲無增減滿三千大千世界乃至十方無量世界應度者聞不應度者不聞譬如雷霆振地聾者不聞聽者得悟
이와 같이 갖가지로 부처님의 말씀을 염하는 것이다.
如是種種念佛言語
어떤 것이 법의 이치[法義]150)인가? 곧 믿음[信]과 계율[戒]과 버림[捨]과 견문[聞]과 선정[定]과 지혜[慧] 등으로서 도(道)가 되는 것과 모든 착한 법과 세 가지의 법 도장[三法印]이니, 마치 통달(通達)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718_b_17L何等是法義慧等爲道諸善法及三法印如「通達」中說
014_0718_c_01L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하고 온갖 법에는 나가 없으며 고요히 사라진 열반을 바로 부처님 법의 이치라 한다. 이 세 가지 징표는 온갖 논의사(論議師)151)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비록 갖가지로 말한 바가 많이 있기는 하나 역시 모든 법의 성품[法性]을 바꿀 수 있는 이는 없나니, 마치 차가운 모양[冷相]은 바꾸어서 뜨겁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법의 성품은 무너뜨릴 수가 없다. 가령 사람이 허공에 상처를 낼 수 있다 해도 이 모든 법의 징표는 여법(如法)하여 무너뜨릴 수 없다.
성인은 이 세 가지 법의 모양을 알고는 온갖 삿된 소견에 의지해 저마다 다투고 있는 데서 벗어날 수 있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눈 있는 사람은 소경들이 갖가지 색상(色相)에 대하여 다투는 것을 보면 그들을 가엾이 여기면서 웃을 뿐 함께 거들며 다투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718_b_19L一切有爲法無常一切法無我寂滅涅槃是名佛法義是三印一切論議師所不能雖種種多有所說亦無能轉諸法性者如冷相無能轉令熱諸法性不可壞假使人能傷虛空是諸法印如法不可壞聖人知是三種法相於一切依止邪見各各鬪諍處得離譬如有目人見群盲諍種種色相愍而笑之不與共諍
【문】 부처님의 성문법에는 네 가지 진실함[實]이 있고 마하연(摩訶衍) 가운데는 한 가지 진실함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무엇 때문에 세 가지의 진실함을 말하는가?
014_0718_c_05L問曰佛說聲聞法有四種摩訶衍中有一實今何以故說三實
【답】 부처님께서 세 가지의 진실한 법 도장을 말씀하셨으나 자세히 설명하면 네 가지가 되며, 간략하게 설명하면 한 가지이다.
무상은 곧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도제(道諦)에 대한 말씀이고, 무아(無我)는 곧 온갖 법에 대한 말씀이며,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란 곧 멸제(盡諦)에 관한 말씀이다.
014_0718_c_06L答曰佛說三種實法印廣說則四種略說則一種無常卽是苦諦集諦說無我則一切法說寂滅涅槃卽是盡諦
또 유위의 법은 무상하고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기 때문에 모두가 인연에 속하고 자재함이 없으며, 자재함이 없기 때문에 나가 없다. 무상하고 나가 없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으며, 모양이 없어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그것이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 된다. 이 때문에 마하연의 법 가운데서는 비록 온갖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 한 모양, 이른바 무상(無相)을 말하지만 모양 없음이 곧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 된다.
014_0718_c_10L復次有爲法無常念念生滅皆屬因緣無有自在無有自在故無我無常無我無相故心不著無相不著故卽是寂滅涅槃以是故摩訶衍法中雖說一切法不生不滅一相謂無相無相卽寂滅涅槃
이 염법삼매(念法三昧)는 지혜를 반연하고 다함을 반연하며 모든 보살 및 벽지불의 공덕이다.
014_0718_c_15L是念法三昧緣智緣盡諸菩薩及辟支佛功德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을 염하는[念佛] 데에는 다만 부처님 몸 가운데 배울 것 없는[無學] 모든 공덕만을 반연하고, 염승삼매(念僧三昧)에서는 부처님 제자의 몸 가운데 모든 아직 배울 것이 있고[學], 더 배울 것이 없는[無學] 법을 반연하며, 나머지 착한 무루의 법은 모두가 염법삼매의 소연(所緣)이 되는가?
014_0718_c_16L何以故念佛但緣佛身中無學諸功德念僧三昧緣佛弟子身中諸學無學法餘殘善無漏法皆念法三昧所緣
【답】 가전연니자(迦栴延尼子)152)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答曰迦栴延尼子如是說
“마하연의 사람은 3세(世)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초발의(初發意)에서 법이 다함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짓는 공덕과 신통력은 모두 염불삼매의 소연이다.”
014_0718_c_20L摩訶衍人說三世十方諸佛及諸佛從初發意乃至法盡於其中閒所作功德神力皆是念佛三昧所緣
014_0719_a_01L또 부처님의 말씀이나 설하신 『법의경(法義經)』과 같은 데서는 “한 글귀와 한 게송에서부터 8만 4천의 법취(法聚)에 이르기까지 믿음ㆍ계율ㆍ버림ㆍ견문ㆍ선정ㆍ지혜 등의 모든 착한 법 내지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은 모두가 염법삼매의 소연이 된다.
014_0718_c_23L如佛所說及所說法義經從一句一偈乃至八萬四千法聚智慧等諸善乃至無餘涅槃皆是念法三昧所
모든 보살ㆍ벽지불ㆍ성문들 그리고 부처님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온갖 성인들과 모든 공덕은 바로 염승삼매의 소연이 된다”고 했다.
014_0719_a_04L諸菩薩辟支佛及聲聞衆除佛殘一切聖衆及諸功德是念僧三昧所緣
염승(念僧)이란 곧 부처님 제자들의 계율의 구족함과 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의 구족함을 염하는 것이니, 이 4쌍(雙) 8배(輩)153)는 마땅히 공양과 공경의 예를 받아야 하는, 곧 세간의 위 없는 복전이다.
014_0719_a_06L念僧者是佛弟子衆戒衆具足禪定衆智慧衆解脫衆解脫知見衆具足四雙八輩應受供養恭敬禮事是世閒無上福田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것과 같이 승가[僧]를 염해야 한다. 곧 성문승(聲聞僧)ㆍ벽지불승(辟支佛僧)ㆍ보살승(菩薩僧)의 공덕이니, 이 성승(聖僧)154)이 다섯 가지[五衆]를 두루 갖추는 일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719_a_09L行者應念如佛所讚僧若聲聞僧若辟支佛僧若菩薩僧功德是聖僧五衆具足如上說
【문】 먼저 이미 다섯 가지[五衆]로써 부처님을 찬탄했는데 어떻게 다시 다섯 가지로써 승가를 찬탄하는가?
014_0719_a_11L先已以五衆讚佛云何復以五衆讚
【답】 제자들이 얻는 다섯 가지에 따라 구족했음을 찬탄한 것이다. 구족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이 두루 갖추어짐[實具足]이요, 둘째는 이름이 두루 갖추어짐[名具足]이다.
마치 부처님의 제자로서 응당 얻어야 할 것을 다 얻어 칭찬을 받는다면 이것을 구족되었다고 부르고,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를 칭찬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구족되었다고 한다.
014_0719_a_13L答曰隨弟子所得五衆而讚具足具足有二種一者實具足二者名具如佛弟子所可應得者盡得而讚名名具足如佛所得而讚是名實具足
014_0719_b_01L또 외도의 출가한 무리나 재가의 무리와 차별을 짓기 위하여 이렇게 칭찬하는 것이다. 외도로서 집에 있는 무리이면 그 부귀와 호존(豪尊)과 세력을 칭찬하게 되고, 출가한 무리라면 그의 삿된 소견과 고행(苦行)과 염착(染著)과 지혜와 고집하는 이론[執論]과 다툼을 칭찬하게 된다.
승중(僧衆)을 염하는 가운데 혹 지계ㆍ선정ㆍ지혜가 있어도 적으면 칭찬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스스로 제자들의 온갖 공덕의 근본 주처(住處)인 계율이 두루 갖추어진 것과 해탈지견이 두루 갖추어진 것을 칭찬하신다.
이 계율에 머물러 동요하지 않으면서 선정의 활을 당겨 지혜의 화살을 쏘아 모든 번뇌의 도적을 깨뜨려 해탈을 얻고 이 해탈 가운데서 지견(知見)을 내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건장한 사람이 먼저 발을 안정하게 딛고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아 능히 원적을 쳐부수어 두 가지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니, 곧 왕에게서 죄를 면하고 진(陳)에 대한 어려움을 구해 주는 것과 같다. 이는 적을 똑똑히 알고 본 뒤에 무너뜨렸기에 마음에 환희가 생겨난다. 이 때문에 다섯 가지[五衆]로써 칭찬하는 것이다.
014_0719_a_16L復次爲欲異於外道出家衆在家衆作如是讚外道在家衆讚其富貴豪尊勢力出家衆讚其邪見苦行著智慧執論諍競念僧衆中或有持禪定智慧等少不足稱以是故佛自讚弟子衆一切功德根本住處衆具足乃至解脫知見衆具足住是戒衆中不傾動引禪定弓放智慧箭破諸煩惱賊得解脫於是解脫中生知見譬如健人先安足挽弓放箭破怨敵得出二怖免罪於王拔難於決了知見賊已破滅心生歡喜故以五衆讚
공양해야 한다[應供養] 함은, 다섯 가지 공덕이 두루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부귀와 호세(豪勢)가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청정한 계율ㆍ선정ㆍ지혜의 재물이 풍부하고 해탈ㆍ해탈지견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공양과 공경과 합장의 예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014_0719_b_06L應供養者五衆功德具足故如富貴豪勢之人人所宗敬弟子衆亦如是有淨戒禪定智慧財解脫解脫知見勢力故應供養恭敬合掌禮事
세간의 위없는 복전[世間無上福田]이라 했는데, 시주(施主)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가난한 이와 부자이다. 가난한 이는 예배하고 공경하고 영접하고 전송하면서 과보를 얻는다. 부자 역시 공경하고 예배하고 영접하고 전송하면서 한편 재물로써 공양하여 과보를 얻는다. 이 때문에 세간의 위없는 복전이라 한다.
014_0719_b_10L世閒無上福田者施主有二貧者富者貧者禮事恭敬迎送而得果報富者亦能恭敬禮事迎送又以財物供養而得果報是故名爲世閒無上福田
비유하건대 마치 좋은 밭을 갈고 다스려 때맞추어 씨를 뿌리고 물을 대어 흠씬 적셔 주면 수확을 많이 거두는 것처럼, 승가의 복전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의 쟁기로써 결사(結使)의 뿌리를 갈아 내고 4무량심(無量心)으로써 갈고 다스려 부드럽게 한 뒤에 모든 단월(檀越)155)이 신시(信施)의 씨를 뿌리고 염시(念施)와 공경의 청정한 마음의 물을 대면 금생 또는 후생에 한량없는 세간의 쾌락을 받고 3승(乘)의 과보를 얻게 된다.
014_0719_b_14L譬如良田耕治調柔以時下種漑灌豐渥所獲必多衆僧福田亦復如是以智慧犂耕出結使根四無量心磨治調柔諸檀越下信施穀子漑以念施恭敬淸淨心水若今若後世得無量世閒樂及得三乘
마치 박구라(薄拘羅)156) 비구와 같은 이는 비바시불(鞞婆尸佛) 때 하리륵(呵梨勒)157) 열매 하나를 스님들에게 공양하였는데 91겁 동안을 천상과 인간에서 복락의 과보를 받으며 항상 질병이 없다가 지금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만나서 출가하여 번뇌가 다하고 아라한을 얻었다.
014_0719_b_20L如薄拘羅比丘鞞婆尸佛時以一呵梨勒果供養衆僧九十一劫天上人中受福樂果常無疾病今値釋迦牟尼佛出家漏盡得阿羅漢
014_0719_c_01L또 사문 이십억이(億耳)158)와 같은 이는 비바시불 때 한 방사(房舍)를 만들어서 물건을 땅에다 깔고 스님들에게 공양하였는데 91겁 동안을 천상과 인간에서 복락의 과보를 얻었다. 그는 발로 땅을 밟지 않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발 아래에 길이 두 치[寸] 되는 털이 나서 부드럽고 정갈하며 보기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보고 기뻐하면서 20억 냥의 금을 주었는데,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고는 아라한을 얻고 모든 제자들 가운데서 정진이 첫째였다.
014_0719_b_23L如沙門二十億鞞婆尸佛時作一房舍以物覆地供養衆僧九十一劫天上人中受福樂果足不蹈地生時足下毛長二寸柔軟淨好父見歡喜與二十億兩金見佛聞法得阿羅漢於諸弟子中精進第一
이와 같이 적은 보시로써도 큰 과보를 얻는다. 그러므로 세간의 위없는 복전이라 한다.
014_0719_c_06L如是等少施得大果報是故名世閒無上福田
승가[僧] 중에 4쌍(雙) 8배(輩)가 있다 했는데, 부처님께서 세간의 위없는 복전을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여덟 부류의 성인이 있기 때문에 위없는 복전이라 하신 것이다.
014_0719_c_07L僧中有四雙八輩者佛所以說世閒無上福田有此八輩聖人故名無上福田
【문】 부처님께서 급고독(給孤獨) 거사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세간의 복전으로서 공양을 받을 만한 이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배울 것이 있는 이[學人]159)나 배울 것 없는 이[無學人]160)이다. 배울 것이 있는 이에게 18계위, 배울 것 없는 이에게 9계위가 있다 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여덟 가지만을 말하는가?
014_0719_c_09L問曰如佛告給孤獨居士世閒福田應供養者有二種若學人若無學人學人十八無學人有九今此中何以故但說八
【답】 거기서는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에 18계위 및 9계위이나, 이제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8계위이다. 그곳의 27계위의 성인은 여기의 8계위에 모두 포섭된다.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은 혹 향수다원(向須陀洹)에 포섭되기도 하고 혹 향사다함(向斯陀含)에 포섭되기도 하며 혹 향아나함(向阿那含)에 포섭되기도 한다. 가가(家家)161)는 향사다함에 포섭되고 일종(一種)162)은 향아나함에 포섭되며 5종의 아나함은 향아라한에 포섭된다.
신행과 법행이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가면 신해탈견득(信解脫見得)이라 한다. 이 신해탈견득은 15계위의 배울 것 있는 이에 포섭되며 9종의 복전(福田)은 아라한에 포섭된다.
014_0719_c_13L答曰彼廣說故十八及九今此略說故八彼二十七聖人此八皆攝信行法行或向須陁洹攝或向斯陁含攝或向阿那含攝家家向斯陁含攝一種向阿那含攝五種阿那含向阿羅漢攝信行法行入思惟道名信解脫是信解脫見得十五學人攝九種福阿羅漢攝
014_0720_a_01L또 수행하는 이는 승가를 염해야 한다. 승가(僧)는 바로 내가 열반으로 나아가는 참된 벗이니, 하나의 계율과 하나의 소견이라도 이와 같이 마땅히 기뻐하여 일심으로 공경하고 순종해서 어김이 없어야 한다. 나는 이미 갖가지 악(惡)과 처자와 노비며 인민들을 벗으로 삼고 있으니, 이들은 3악도(惡道)에 들게 하는 벗이었지만 이제는 성인의 벗을 얻었으므로 편안하고 고요히 열반에 이를 것이다.
부처님은 마치 의왕(醫王)과 같고 법은 마치 좋은 약과 같으며 승가는 마치 병든 이를 돌보는 사람과 같나니 우리는 마땅히 청정한 지계와 바른 억념을 얻어야만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한 법의 약을 우리는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승가는 바로 나의 모든 번뇌의 병[結病]을 끊어 주는 한 인연이어서 이른바 병든 이를 돌보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승가를 염해야 한다.
014_0719_c_20L復次行者應念僧僧是我趣涅槃之眞伴一戒一見如是應歡喜一心恭敬順從無違我先伴種種衆惡妻子奴婢人民等是入三惡道伴今得聖人伴安隱至涅槃佛如醫王法如良僧如瞻病人我當淸淨持戒正憶如佛所說法藥我當順從僧是我斷諸結病中一因緣所謂瞻病人故當念僧
또 승가에는 한량없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두루 갖춘 이가 있으므로 그 덕은 측량할 수 없다.
014_0720_a_06L復次僧有無量戒禪定慧等具足其德不可測量
마치 어느 부귀한 장자(長者)와 같은 이는 승가를 믿고 좋아했는데, 승가의 집사(執事)에게 아뢰되 “저는 차례로 스님들을 청하여 저의 집에서 공양토록 하겠습니다”고 했다. 그리하여 날마다 차례로 청(請)하여 이윽고 사미(沙彌)에까지 이르렀으나 집사는 사미163)에 관한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014_0720_a_07L如一富貴長者信樂僧白僧執事我次第請僧於舍食日日次請乃至沙彌執事不聽沙彌受請
그러자, 사미들이 묻기를 “무슨 뜻으로 사미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014_0720_a_10L諸沙彌言以何意故不聽沙彌
대답하기를 “단월(檀越)164)이 젊은이 청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答言以檀越不喜請年少故
게송으로 말했다.
014_0720_a_11L便說偈言

수염과 머리칼이 눈과 같이 희고
이는 빠지고 피부는 쭈그러지고
구부정하게 걷고 형체가 파리한
이런 이를 청하기 좋아해서라네.
014_0720_a_12L鬚髮白如雪
齒落皮肉皺
僂步形體羸
樂請如是輩

사미들은 모두가 큰 아라한들이었는데 마치 사자(師子)의 머리를 때리는 것 같은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014_0720_a_14L諸沙彌等皆是大阿羅漢如打師子欻然從坐起而說偈言

단월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
형체만 보고 덕(德)은 취하지 않으니
나이 젊은이들의 모습은 버리고
늙어 야위고 검은 이들만 취하는구나.
014_0720_a_16L檀越無智人
見形不取德
捨是少年相
但取老瘦黑

웃어른과 늙은이의 모습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러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14_0720_a_18L上尊耆年相者如佛說偈

이른바 장로(長老)의 모습이란
반드시 나이가 늙어서도 아니요
야윈 데다 수염과 머리칼이 희거나
헛되이 늙어 속에 덕이 없는 자가 아니다.
014_0720_a_19L所謂長老相
不必以年耆
形瘦鬚髮白
空老內無德

죄와 복의 과보를 능히 버리고
정진하면서 범행(梵行)을 수행하며
이미 온갖 법을 여읜 이라야
이런 이를 장로라 한다네.
014_0720_a_21L能捨罪福果
精進行梵行
已離一切法
是名爲長老

이때에 모든 사미들은 다시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앉아서 볼 수만 없다. 이 단월은 승가의 좋고 나쁨을 헤아리고 있으니 말이다”고 하며 다시 게송으로 말했다.
014_0720_a_22L是時諸沙彌復作是念我等不應坐觀此檀越品量僧好惡卽復說偈
014_0720_b_01L
찬탄하거나 꾸짖거나 간에
우리들의 마음은 한결같지만
이 사람은 불법을 헐뜯고 있으니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없구나.
014_0720_b_01L讚歎呵罵中
我等心雖一
是人毀佛法
不應不教誨

마땅히 빨리 그의 집으로 가서
법으로써 그에게 가르쳐 주리니
우리들이 그를 제도하지 않으면
이야말로 중생들을 버리는 것이 된다.
014_0720_b_03L當疾到其舍
以法教語之
我等不度者
是則爲棄物

그리고는 즉시 모든 사미들은 스스로 그의 몸을 변화하여 모두 늙은이가 되었다. 수염과 머리칼은 눈과 같이 희고 긴 눈썹은 드리워져 눈을 가렸으며 주름살은 마치 물결과 같고 등골은 굽어서 활과 같았다.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가서 차례대로 청을 받았는데 온몸을 모두 벌벌 떨면서 불안한 것이 마치 사시나무가 바람을 따라 흔들림과 같았다.
014_0720_b_04L卽時諸沙彌自變其身皆成老年髮白如雪秀眉垂覆眼皮皺如波浪其脊曲如弓兩手負杖行次第而受擧身皆振掉行止不自安譬如白楊樹隨風而動搖
단월은 이들을 보고 기뻐하면서 맞아들여 앉게 했다.
그런데 앉자마자 도로 다시 젊은이의 몸으로 변하였다.
014_0720_b_09L檀越見此輩歡喜迎入坐坐已須臾頃還復年少形
그 단월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014_0720_b_10L越驚怖言

이렇게 나이 많은 늙은 모습이
도로 변하여 젊은 몸이 되었는데
마치 젊어지는 약 먹은 것 같으니
이런 일이 어찌하여 일어납니까.
014_0720_b_11L如是耆老相
還變成少身
如服還年藥
是事何由然

모든 사미들이 말했다.
014_0720_b_13L諸沙彌言
“당신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비인(非人)이 아닙니다. 당신은 스님들을 헤아리려 하니, 이런 일이야말로 몹시 언짢은 일입니다.
014_0720_b_14L汝莫生疑畏我等非非人汝欲平量僧是事甚可傷
우리들은 당신을 가엾이 여겨 일부러 그렇게 변화했던 것이니, 당신은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아셔야 합니다” 하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014_0720_b_15L我等相憐故現如是化汝當深識之聖衆不可量如說

비유하건대 마치 모기의 부리로써
오히려 바다 밑을 측량할 수 있어도
온갖 하늘과 사람으로서
승가[僧]를 헤아릴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014_0720_b_17L譬如以蚊嘴
猶可測海底
一切天與人
無能量僧者

승가는 공덕의 귀함으로써도
오히려 분별하지 않는 것인데
당신은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써
모든 대덕(大德)을 헤아렸습니다.
014_0720_b_19L僧以功德貴
猶尚不分別
而汝以年歲
稱量諸大德

크고 작음은 지혜에서 나오고
늙고 젊음에서 나오지 않으니
014_0720_b_20L大小生於智
不在於老少

지혜 있는 이가 부지런히 정진하면
비록 젊더라도 이는 늙은이요
게으르며 지혜가 없으면
비록 늙더라도 이는 젊은이입니다.
014_0720_b_21L有智懃精進
雖少而是老
懈怠無智慧
雖老而是少

“당신은 지금 승가를 헤아리고 있었으니, 이야말로 큰 실수입니다. 마치 한 손가락으로 큰 바다 밑을 측량하여 알려고 했으니, 지혜로운 이의 웃음거리입니다.
014_0720_b_22L汝今平量僧是則爲大失如欲以一指測知大海底爲智者之所笑
014_0720_c_01L당신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비록 작다 하더라도 업신여길 수 없다는 네 가지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태자(太子)는 비록 작다 하더라도 장차 국왕이 될 것이므로 이는 업신여길 수 없고, 독사의 새끼는 비록 작다 하더라도 그 독은 사람을 죽일 수 있으므로 역시 업신여길 수 없으며, 작은 불은 비록 미미하다 하더라도 산과 들을 태울 수 있으므로 또 업신여길 수 없고, 사미(沙彌)는 비록 어리다 하더라도 거룩한 신통을 얻을 것이므로 가장 업신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014_0720_c_01L汝不聞佛說四事雖小而不可輕太子雖當爲國王是不可輕蛇子雖小能殺人亦不可輕小火雖微能燒山又不可輕也沙彌雖小得聖神通最不可輕
또 네 가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암라 열매[菴羅果]는 여물지 않았으면서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익었으면서 여물지 않은 것 같기도 하며, 여물지 않았으면서 여물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익었으면서 익은 것 같기도 한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도 역시 그와 같아서 거룩한 공덕을 성취했으면서도 위의(威儀)와 언어(言語)는 착한 사람 같지 않은 이가 있고 위의와 언어는 착한 사람 같으면서도 거룩한 공덕은 성취하지 못한 이가 있으며, 위의와 언어는 착한 사람 같지 않으면서 거룩한 공덕도 아직 성취 못한 이가 있고 위의와 언어는 착한 사람 같으면서 거룩한 공덕도 성취하는 이가 있습니다.
014_0720_c_06L又有四種人如菴羅果而似熟熟而似生生而似生熟而似佛弟子亦如是有聖功德成就威儀語言不似善人有威儀語言似善人而聖功德不成就有威儀語言不似善人聖功德未成就有威儀言似善人而聖功德成就
당신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 승가를 저울질하려 하는지요? 당신이 만일 승가를 헐뜯고자 한다면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헐뜯는 것이라 당신이야말로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추궁할 수는 없고 앞으로는 착한 마음으로 모든 의심이나 뉘우침을 제거하고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014_0720_c_12L汝云何不念是言而欲稱量於僧汝若欲毀僧是則爲自毀汝爲大失己過事不可方來善心除去諸疑悔聽我所說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고
위의로써도 알기 어려우며
성바지[族姓]로써도 헤아릴 수 없고
많은 견문[多聞]으로써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위덕(威德)으로써도 헤아릴 수 없고
늙은 나이로써도 알지 못하며
엄숙한 용모로도 헤아릴 수 없고
말재주로써도 알지 못합니다.
014_0720_c_15L聖衆不可量
難以威儀知
不可以族姓
亦不以多聞
亦不以威德
又不以耆年
亦不以嚴容
復不以辯言

성인들은 큰 바다의 물이요
공덕 때문에 심히 깊습니다.
014_0720_c_18L聖衆大海水
功德故甚深

부처님은 온갖 일로써 승가를 찬탄하셨으며
보시함이 적더라도 많은 과보를 얻습니다.이 셋째 보배[第三寶]의 명성 멀리 들리나니
이 때문에 승가에게 공양해야 합니다.
014_0720_c_19L佛以百事讚是僧
施之雖少得報多
是第三寶聲遠聞
以是故應供養僧

늙고 젊음으로 분별해도 안 되고
견문(見聞)과 명암(明闇)으로도 분별하지 마십시오.마치 사람이 숲을 구경할 제
이란(伊蘭)ㆍ첨복(瞻蔔)ㆍ살라(薩羅)를 분별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014_0720_c_21L不應分別是老少
多知少聞及明闇
如人觀林不分別
伊蘭瞻蔔及薩羅

그대 승가를 염하건대 이처럼 해야 하나니
어리석음으로써 성인을 분별하지 마십시오.
014_0720_c_23L汝欲念僧當如是
不應以愚分別聖
014_0721_a_01L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출가할 때에
납의(納衣)의 값어치는 10만금(萬金)이었으나
걸인의 하천한 옷을 만들려고
낡은 것을 구하자 얻지 못했습니다.
014_0721_a_01L摩訶迦葉出家時
納衣價直十萬金
欲作乞人下賤服
更求麤弊不能得

성인들의 승가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맨 아래의 작은 복전[小福田]을 구하여도
베푼 것보다 10만 배의 과보를 받나니
그만 못한 것[不如]을 구하면 얻을 수 없습니다.
014_0721_a_03L聖衆僧中亦如是
求索最下小福田
能報施者十萬倍
更求不如不可得

뭇 승가는 큰 바닷물이요
결성된 계율[結戒]은 그 물가이니
만일 계율을 깨뜨린 이 있으면
끝내 승의 범주[僧數]에 들지 못함은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의 물이
시체와 함께 묵지 않는 것 같습니다.
014_0721_a_05L衆僧大海水
結戒爲畔際
若有破戒者
終不在僧數
譬如大海水
不共死屍宿

그 단월은 이런 일을 듣고 또 이런 신통력을 보고서 몸이 놀라서 털이 곤두서므로 합장하고 모든 사미들에게 아뢰기를 “모든 성인들이시여, 저는 이제 참회합니다. 저는 범부라 마음에 항상 죄를 품었었습니다. 저에게는 조그만 의심이 있으니 이제 청하며 묻고자 합니다”고 하며 게송으로 말했다.
014_0721_a_07L檀越聞是事見是神通力身驚毛豎合掌白諸沙彌言諸聖人我今懺悔我是凡夫人心常懷罪我有少疑欲請問而說偈言

대덕이시여, 이미 지난 날 품었던 의심인데
저는 이제야 만나게 되었으니
만일 다시 묻지 아니한다면
어리석음 중에서도 큰 어리석음이겠습니다.
014_0721_a_11L大德已過疑
我今得遭遇
若復不諮問
則是愚中愚

모든 사미들이 말하기를 “그대는 묻고 싶으시면 물으십시오. 우리는 들은 바로써 대답하겠습니다”고 하였다.
014_0721_a_13L諸沙彌言汝欲問者便問我當以所聞答
단월은 묻기를 “불보(佛寶) 가운데 믿는 마음이 청정하고 승보(僧寶) 가운데 믿는 마음이 청정하면 그 어느 것의 복이 더 뛰어납니까”라고 했다.
014_0721_a_15L檀越問言於佛寶中信心淸淨於僧寶中信心淸淨何者福勝
사미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승보와 불보에 많고 적음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어느 때에 사바제(舍婆提)에서 걸식을 하실 적에 바라타서(婆羅埵逝)165)라는 성을 가진 바라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주 그의 집으로 가셔서 걸식을 하자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문이 무엇 때문에 자주 오는 것일까. 마치 그에게 빚을 진 것과도 같구나’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014_0721_a_16L答曰我等初不見僧寶佛寶有增減何以佛一時舍婆提乞食有一婆羅門姓婆羅埵逝佛數數到其家乞食作是念是沙門何以來數數如負其佛時說偈

때맞추어 비가 자주 내리면
오곡(五穀)이 잘 여물며
복의 업을 자주 닦으면
자주 그 과보를 받는다.
014_0721_a_21L時雨數數墮
五穀數數成
數數修福業
數數受果報

자주 태어나는 법을 받기 때문에
자주 죽음을 받게 되나니
성인의 법을 자주 닦아 이루면
그 누가 자주 나고 또 죽겠느냐.
014_0721_a_23L數數受生法
故受數數死
聖法數數成
誰數數生死
014_0721_b_01L
바라문은 이 게송을 듣고 나서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큰 성인이시구나. 나의 마음을 자세히 알고 계시니 말이다’고 하고는 부끄러워하면서 발우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가득히 담아다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014_0721_b_01L婆羅門聞是偈已作是念佛大聖人具知我心慚愧取鉢入舍盛滿美食以奉上佛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고 말씀하시되 ‘내가 게송을 말한 까닭에 이 음식을 얻은 것이므로 나는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014_0721_b_04L佛不受作是言我爲說偈故得此食我不食也
바라문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음식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014_0721_b_05L婆羅門言是食當與誰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나는 하늘과 사람으로서 이 밥을 소화할 수 있는 이를 보지 못하노라. 그대가 가지고 가서 풀이 적은 땅이나 벌레 없는 물속에다 놓아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014_0721_b_06L佛言我不見天及人能消是食者汝持去置少草地若無虫水中
그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밥을 가져다 벌레 없는 물속에다 놓아두었습니다. 그러자 물이 곧 크게 끓어오르고 연기와 불이 함께 나오는 것이 마치 이글거리는 큰 쇳덩이를 던져 넣은 것 같았습니다.
014_0721_b_07L卽如佛教持食著無虫水中水卽大煙火俱出如投大熱鐵
바라문은 그것을 보고 놀라 두려워하면서 ‘전에 없던 일이로다. 음식 속에서까지 신력(神力)이 이러하다니’라고 하였습니다.
014_0721_b_09L婆羅門見驚怖言未曾有也乃至食中神力如是
도로 부처님께로 와서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출가하여 계(戒) 받기를 구하였습니다.
014_0721_b_11L還到佛所頭面禮佛足懺悔出家受戒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어서 오너라’고 하시니, 즉시 수염과 머리칼이 저절로 떨어지고 곧 사문이 되었으며 점점 번뇌를 끊고 아라한의 도를 얻었습니다.
014_0721_b_12L佛言善來卽時鬚髮自墮便成沙門漸漸斷結得阿羅漢道
또 마하교담미(摩訶憍曇彌)166)가 있었는데 금빛으로 된 상하의 보배 옷을 부처님께 바치자 부처님은 뭇 대중이 수용할 수 있음을 아시고 교담미에게 말씀하시되 ‘이 위아래 옷을 대중 승가에게 가져다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불보와 승보의 복은 많고 적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014_0721_b_13L有摩訶憍曇彌以金色上下寶衣奉佛知衆僧堪能受用告憍曇彌此上下衣與衆僧以是故知佛寶福無多少
단월이 말하기를 ‘만일 부처님께 보시할 것을 스님이 능히 소화하고 받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바라타서 바라문의 밥은 스님네로 하여금 먹게 하지 않았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014_0721_b_17L檀越言若爲佛布施能消能受何以故婆羅埵逝婆羅門佛不教令僧食
모든 사미들은 대답하기를 ‘스님들의 큰 힘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밥이 물속에 있으면서 큰 신력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면 스님들의 힘이 큰 줄을 모를 것이고, 만일 부처님께 보시한 물건을 스님들이 받을 수 있다면 곧 스님들의 힘이 큰 줄 아는 것입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약사(藥師)가 독약을 시험하려고 먼저 닭에게 주어서 닭이 먹고 즉시 죽은 뒤에 자신이 먹는다면 약사의 위력이 더욱 큰 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단월은 다음과 같이 아셔야 합니다.”
014_0721_b_19L諸沙彌答言爲顯僧大力故若不見食在水中有大神力無以知僧力爲大若爲佛施物僧得受便知僧力爲大譬如藥師欲試毒藥先以與鷄鷄卽時死然後自服乃知藥師威力爲大是故檀越當知
014_0721_c_01L
사람이 부처님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또한 승가를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리.
분별이 있어서는 안 되나니
똑같이 다 보배[寶]이기 때문이라네.
014_0721_c_01L若人愛敬佛
亦當愛敬僧
不當有分別
同皆爲寶故

그때에 단월은 이런 일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저 아무개는 오늘부터 만일 승의 범주[僧數]에 드는 이가 있으면 작은 이거나 큰 이거나 간에 일심으로 믿고 공경하면서 감히 분별하지 않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014_0721_c_03L爾時檀越聞說是事歡喜言我某甲從今日若有入僧數中若小若大心信敬不敢分別
사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으로 위없는 복전을 믿고 공경하시니, 오래지 않아 도를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014_0721_c_06L諸沙彌言汝心信敬無上福田不久當得道何以故

많은 견문과 계율을 지니고
지혜와 선정 두루 갖춘 이면
모두가 승가의 수효에 들어감이
온갖 물이 바다로 돌아감과 같나니,
014_0721_c_07L多聞及持戒
智慧禪定者
皆入僧數中
如萬川歸海

비유하건대 마치 온갖 약초(藥草)가
설산(雪山)에 의지하고
백곡(百穀)과 여러 초목도
모두 땅에 의지하듯이
온갖 모든 착한 사람들은
모두 승가의 범주 안에 있다네.
014_0721_c_09L譬如衆藥草
依止於雪山
百穀諸草木
皆依止於地
一切諸善人
皆在僧數中

또한 그대들은 일찍이 부처님께서 장귀신장군(長鬼神將軍)167)에게 아니로타(阿泥盧陀)168)와 난제(難提)169)와 가시미라(迦翅彌羅)170)의 이 세 선남자(善男子)를 칭찬하신 것을 듣지 않으셨는지요? 곧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만일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들이 일심으로 이 셋의 선남자를 염하면 오랜 세월 동안 한량없는 이익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일로 봐서도 갑절 더 승가를 믿고 염해야 합니다.
이 세 사람은 승가라 하지 않았으면서도 부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염하면 이러한 과보가 있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일심으로 청정하게 승가를 염함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단월은 힘이 닿는 대로 승가의 이름을 염해야 합니다.
이러한 게송이 있습니다.”
014_0721_c_11L復次汝等曾聞佛爲長鬼神將軍讚三善男子阿泥盧陁難提迦翅彌羅佛言若一切世閒天及人一心念三善男子長夜得無量利益以是事倍當信敬僧是三人不名僧佛說念三人有如是果報何況一心淸淨念是故檀越當任力念僧名如說偈

이 모든 성인들은
뛰어나고 용맹한 군사가 되어
마왕 적군을 꺾어 멸하나니
이 벗으로 열반에 이른다네.
014_0721_c_18L是諸聖人衆
則爲雄猛軍
摧滅魔王賊
是伴至涅槃

사미들은 단월을 위하여 갖가지로 승가의 거룩한 공덕을 말해 주었다. 단월은 듣고 나서 크건 작건 온 집안이 모두 4제(諦)를 보고는 수다원(須陀洹)의 도를 얻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마땅히 일심으로 승가를 염해야 한다.
014_0721_c_20L諸沙彌爲檀越種種說僧聖功德越聞已擧家大小皆見四諦得須陁洹道以是因緣故應當一心念僧
014_0722_a_01L염계(念戒)라고 했는데, 계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곧 유루의 계[有漏戒]171)와 무루의 계[無漏戒]172)이다. 유루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율의계(律儀戒)173)며, 둘째는 정공계(定共戒)174)이다.
014_0721_c_23L戒者戒有二種有漏戒無漏戒有漏復有二種一者律儀戒二者定共戒
수행하는 이는 처음 배울 때 이 세 가지의 계율을 염하며, 이 세 가지를 배운 뒤에는 다만 무루의 계만을 염한다.
014_0722_a_02L者初學念是三種戒學三種已但念無漏戒
이 율의계는 능히 모든 악(惡)을 제 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며, 마르고 썩고 꺾이어 줄어들게 한다. 선정과 계율은 능히 모든 번뇌를 차단하나니, 왜냐하면 안[內]의 즐거움을 얻은 까닭에 세간의 쾌락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루의 계는 능히 모든 악과 번뇌의 근본을 뽑아버린다.
014_0722_a_04L是律儀戒能令諸惡不得自枯朽折減禪定戒能遮諸煩惱以故得內樂故不求世閒樂無漏戒能拔諸惡煩惱斷根本故
【문】 어떻게 계율을 염해야 하는가?
014_0722_a_07L問曰云何念
【답】 먼저 염승(念僧)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부처님은 마치 의왕(醫王)175)과 같고 법은 좋은 약과 같으며, 승가는 병든 이를 돌보는 사람과 같고 계율은 약을 먹을 때의 금기(禁忌)와 같다.
수행하는 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일 금기를 따르지 않는다면 3보(寶)가 나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또 마치 길잡이와 같아서 좋은 길을 지시해 주는데도 길을 가는 이가 따르지 않는다면 길잡이에게는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계율을 염해야 하리라”고 한다.
014_0722_a_08L答曰如先說念僧中佛如醫王如良藥僧如瞻病人戒如服藥禁忌行者自念我若不隨禁忌三寶於我爲無所益又如導師指示好道行者不用導師無咎以是故我應念戒
또 이 계율은 온갖 착한 법이 머무르는 곳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백곡과 약나무가 땅에 의지하여 나는 것처럼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면 모든 깊은 선정과 참 모습[實相]의 지혜를 생장시켜 준다. 또한 이것은 출가한 사람의 첫 문이요 온갖 출가한 사람이 의지할 곳이며 열반에 이르는 첫째 인연이다.
마치 “계율을 지니기 때문에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고 나아가 해탈과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014_0722_a_12L復次是戒一切善法之所住處譬如百穀藥木依地而生持戒淸淨能生長諸深禪定實相智慧亦是出家人之初門一切出家人之所依仗到涅槃之初因緣如說持戒故心不悔至得解脫涅槃
수행하는 이는 청정한 계율을 염하나니, 곧 이지러지지 않는 계율[不缺戒]과 깨지지 않는 계율[不破戒]과 뚫리지 않는 계율[不穿戒 ]과 섞이지 않는 계율[不雜戒]과 자재로운 계율[自在戒]과 집착하지 않는 계율[不著戒]과 지혜 있는 이가 칭찬하는 계율[智者所讚戒]이 그것이다.
014_0722_a_18L行者念淸淨戒不缺不破戒不穿戒不雜戒自在戒著戒智者所讚戒
모든 허물과 틈이 없으므로 청정한 계율이라 한다.
014_0722_a_20L無諸瑕隙名爲淸淨戒
어떤 것을 이지러지지 않는 계율[不缺戒]이라 하는가? 곧 다섯 가지 계율[五衆戒] 중에서 네 가지 중한 계율[四重戒]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중한 것을 범하면 이것을 이지러졌다[缺犯] 하고 그 밖의 죄는 바로 깨뜨렸다[破]고 한다.
또 몸의 죄[身罪]는 이지러졌다 하고 입의 죄[口罪]는 깨뜨렸다 하며, 또 큰 죄는 이지러졌다 하고 작은 죄는 깨뜨렸다고 한다.
014_0722_a_21L云何名不缺戒五衆戒中除四重戒犯諸餘重者是名犯餘罪是復次身罪名口罪名復次大罪名小罪名
014_0722_b_01L착한 마음으로 열반에 회향(廻向)하여 번뇌[結使]의 갖가지 나쁜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뚫리지 않는 계율[不穿戒]이라 한다.
014_0722_b_01L善心迴向涅槃不令結使種種惡覺觀得入是名穿
열반과 세간의 이 두 곳을 향하면 이것을 섞여 따르는 계율[雜隨戒]이라 한다.
爲涅槃爲世閒向二處是名爲
바깥 대상[外緣]을 따르지 않고 마치 자재한 사람처럼 매인 데가 없이 이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애욕의 번뇌에 구속 받지 않으면 이것을 자재한 계율[自在戒]이라 한다.
014_0722_b_03L隨戒不隨外緣如自在人無所繫屬持是淨戒不爲愛結所拘是爲自在
계율에 대하여 탐애와 교만 등의 모든 번뇌를 내지 않고, 계율의 참 모습[實相]을 알면서도 계율을 취하지도 않아야 한다. 만일 이 계율을 취한다면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옥살이를 하면서 차꼬176)와 수갑을 차고 구속되어 있다가 비록 사면(赦免)을 받아 풀려났다 하더라도 다시 쇠로 된 수갑을 차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은애(恩愛)의 번뇌에 매여 있는 것이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고 비록 출가했다 하더라도 금계(禁戒)에 애착을 두면 마치 쇠로 된 수갑을 차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계율은 곧 무루(無漏)의 인연이라는 것을 알아 집착을 내지 않으면 그것이 곧 해탈이어서 속박됨이 없나니, 이것을 집착하지 않는 계율[不著戒]이라 한다.
014_0722_b_06L於戒不生愛慢等諸結使知戒實亦不取是戒若取是戒譬如人在囹圄桎梏所拘雖得蒙赦而復爲金鎖所繫人爲恩愛煩惱所繫如在牢雖得出家愛著禁戒如著金鎖者若知戒是無漏因緣而不生著則解脫無所繫縛是名不著戒
모든 부처님ㆍ보살ㆍ벽지불ㆍ성문에게 칭찬받는 계율이 있으니, 만일 이 계율을 행하고 이 계율을 수용한다면 이것을 지혜 있는 이가 칭찬하는 계율[智所讚戒]이라 한다.
014_0722_b_12L諸佛菩薩辟支佛及聲聞所讚戒若行是用是戒是名智所讚戒
외도의 계율이란 소의 계[牛戒]177)ㆍ사슴의 계[鹿戒]178)ㆍ개의 계[犬戒]179)ㆍ나찰귀의 계[羅刹鬼戒]180)ㆍ벙어리의 계[啞戒]181)ㆍ귀머거리의 계[聾戒]182) 등이니, 이와 같은 계율은 지혜 있는 이의 칭찬을 받지 못하며 헛되이 고생만 하고 착한 과보가 없다.
014_0722_b_14L外道戒者牛戒鹿戒狗戒羅剎鬼戒啞戒聾戒如是等戒智所不讚唐苦無善報
또 지혜 있는 이에게 칭찬을 받는다 함은, 세 가지 계율 가운데서 무루의 계[無漏戒]에 대해 깨뜨리지 않고 무너뜨리지도 않으면서 이 계율에 의거하여 진실한 지혜를 얻으면 이것이 바로 성인들이 칭찬하는 계율이다.
무루의 계율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바른 말[正語]과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의 세 가지 업이다. 이 뜻은 8성도(聖道) 중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이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해야 하리라.
014_0722_b_16L智所讚者於三種戒中無漏戒不破不壞依此戒得實智慧是聖所讚無漏戒有三種如佛說正語正業正命是三業義如八聖道中說是中應廣說
【문】 만일 지계(持戒)가 선정의 인연이고 선정이 지혜의 인연이라면, 8성도 중에서 무엇 때문에 지혜를 맨 앞에다 두고 계율은 중간에 두었으며 선정은 뒤에다 두었는가?
014_0722_b_21L問曰若持戒是禪定因緣定是智慧因緣八聖道中何以慧在戒在中定在後
014_0722_c_01L【답】 길을 가는 법은 마땅히 먼저 눈으로 그 길을 본 뒤에 가야 하고, 갈 때에는 정성을 다해야 하며, 정성을 다하면서 갈 때에는 항상 길잡이가 가르쳐 준 대로 갈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는 일심으로 길을 걸어가되 길이 아닌 데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014_0722_b_23L答曰行路之法先以眼見道而後行行時當精懃懃行時常念如導師所教念已一心進路不順非道
바른 소견[正見]도 역시 그와 같아서 먼저 바른 지혜로써 관한다면 5수중(受衆)은 모두가 괴로운 것이니 이것을 괴로움[苦]이라 하고, 괴로움은 애욕 등의 모든 번뇌가 화합하여 생기므로 이것을 쌓임[集]이라 하며, 애욕 등의 번뇌가 사라지면 이것을 열반이라 하고, 이러한 여덟 갈래[八分]를 관하면 도(道)라고 하나니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때에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세간은 허망하므로 마땅히 버려야 하고 열반은 진실한 법이므로 취해야 한다” 함을 알면서 쾌히 이 일을 결정하는 것을 바른 소견이라 한다.
014_0722_c_03L正見亦如是先以正智慧觀五受衆皆苦是名苦苦從愛等諸結使和合生是名集愛等結使是名涅槃如是等觀八分名爲道是名正見行者是時心定知世閒虛妄可捨涅槃實法可取決定是事名正見
이런 일을 지견(知見)하는 마음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하거나 아직 행하지 못한 채 생각하고 헤아려서 바른 소견을 발동시켜 힘을 얻게 하는 것을 바른 사유[正思惟]라 한다.
014_0722_c_09L知見是事心力未大未能發行思惟籌量發動正見令得力是名正思惟
지혜가 이미 일어났고 말로써 펴려고 하기 때문에 다음에는 바른 말[正語]이며,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이다.
014_0722_c_11L智慧旣發欲以言宣故次正語正業正命戒
계율을 행할 때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고 색정(色定)ㆍ무색정(色無色定)에 머무르지 않게 하면 이것을 바른 방편[正方便]이라 한다.
014_0722_c_12L行時精進不懈不令住無色定中是名正方便
이 바른 소견으로써 4제(諦)를 관하며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않으면서 “온갖 번뇌는 바로 도적이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 바른 소견 등은 바로 나의 참된 벗이니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하나니, 이것을 바른 기억[正念]이라 한다.
014_0722_c_13L用是正見觀四諦常念不忘一切煩惱是賊應當捨正見等是我眞伴應當隨名正念
4제 안에서 마음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않고 색정ㆍ무색정으로 향하지 않게 하면서 일심으로 열반으로 향하면 이것을 바른 선정[正定]이라 한다.
014_0722_c_16L於四諦中攝心不散不令向無色定中一心向涅槃是名正定
처음에 착한 유루[善有漏]를 얻으면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183) 중의 이치라 하는데 차례로 더욱 나아가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마음이 무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빨리 하나의 마음속에 갖추어지면 앞뒤와 분별과 차례가 없게 된다.
014_0722_c_17L是初得善有漏名爲煖法頂法忍法中義次第增進後心入無漏心中疾一心中具無有前後分別次第
바른 소견은 바른 생각ㆍ바른 방편ㆍ바른 기억ㆍ바른 선정과 상응하며 세 가지의 계율[三種戒]은 이 다섯 갈래[五分]를 따라 행해진다.
014_0722_c_20L正見相應正思惟正方便正念正定三種戒隨是分分行
014_0723_a_01L바른 소견[正見]은 좋고 추함[好醜]을 분별하면서 이익을 일[事]로 삼고, 바른 사유[正思惟]는 바른 소견이 발동하는 것을 일로 삼으며, 바른 말[正語] 등은 이 지혜와 모든 공덕을 지니면서 흩어지거나 잃지 않게 하고, 바른 방편[正方便]은 채찍질을 하여 빨리 나가면서 쉬지 않게 하며, 바른 기억[正念]은 일곱 가지 일[七事]을 행해야 할 이가 기억하면서 잊지 않게 하고, 바른 선정[正定]은 마음이 청정하여 흐리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게 하면서 바른 소견으로 하여금 일곱 가지 갈래를 이룰 수 있게 하나니, 마치 바람이 없는 방안에 등을 켜면 곧 그 광명이 환히 비추는 것과 같다.
014_0722_c_22L正見分別好醜利益爲事正思惟發動正見爲事語等持是智慧諸功德不令散失方便驅策令速進不息正念七事所應行者憶而不忘正定令心淸淨不亂令正見七分得成如無風房中燈則照明了了
이와 같이 무루의 계율은 8성도 안에 있으며 또한 지혜 있는 이의 칭찬을 받게 된다.
014_0723_a_05L如是無漏戒在八聖道中亦爲智者所讚
【문】 무루의 계는 마땅히 지혜 있는 이의 칭찬을 받아야겠지만 유루의 계율[有漏戒]은 무엇으로써 칭찬하겠는가?
014_0723_a_06L問曰無漏戒應爲智者所讚有漏戒何以讚
【답】 유루의 계율은 무루의 계율과 비슷하며 무루에 따라 똑같이 인연을 행하나니, 이 때문에 지혜 있는 이는 이 둘을 합쳐서 칭찬한다. 마치 도적 중의 한 사람이 그곳을 배반하고 나에게로 돌아와 귀순하는 것과 같으니, 그가 비록 도적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나에게로 왔으므로 나는 그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들을 쳐부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모든 번뇌의 도적이 삼계(三界)의 성(城) 안에 머물러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루의 계율의 선근(善根)과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184)은 다른 유루의 법과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가 수용(受用)하여 이 인연 때문에 모든 번뇌의 도적을 물리치고 고법인(苦法忍)인 무루의 법재(法財)를 얻나니, 이 때문에 지혜 있는 이가 칭찬하게 된다.
014_0723_a_07L答曰有漏戒似無漏隨無漏同行因緣故智者合讚如賊中有人叛來歸我彼雖是賊今來向我我當內之可以破賊何可不念諸煩惱賊在三界城中住有漏戒善根若煖法頂法忍法世閒第一法與餘有漏法異故行者受用以是因緣故破諸結使賊得苦法忍無漏法財以是故智者所讚
이것을 염계(念戒)185)라 한다.
014_0723_a_15L名念戒
염사(念捨)186)라 함은, 두 가지의 버림[捨]이 있나니, 첫째는 보시의 버림[施捨]이고, 둘째는 모든 번뇌를 버림[捨諸煩惱]이 그것이다.
보시의 버림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재물의 보시[財施]요, 둘째는 법의 보시[法施]이다. 이 세 가지의 버림이 화합하는 것을 일컬어 버림이라 한다.
014_0723_a_16L念捨有二種捨一者捨諸煩惱施捨有二種一者財施法施三種捨和合名爲捨
014_0723_b_01L재물의 보시는 바로 온갖 착한 법의 근본이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가 생각하기를 “위의 네 가지 염[四念]의 인연 때문에 번뇌의 병이 낫게 된다. 이제 어떠한 인연으로 이 네 가지 염을 얻을까”라고 하나니, 이것은 전생이나 지금 세상에서 3보(寶)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시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은 비롯함이 없는 세계에서 3보에 대한 보시를 몰랐기 때문에 복이 모두 다하여 없어졌지만 이 3보에는 한량없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시도 역시 다하지 않고 반드시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014_0723_a_18L財施是一切善法根本故行者作是念上四念因緣故得差煩惱病今以何因緣故得是四念則是先世今世於三寶中少有布施因緣故所以者何衆生於無始世界中不知於三寶中布施福皆盡滅是三寶有無量法是故施亦不盡必得涅槃
또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처음 발심할 때에 모두가 적건 많건 간에 보시로써 인연을 삼으셨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시는 바로 처음 도를 돕는[助道] 인연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014_0723_b_02L復次過去諸佛初發心時皆以少多布施爲因緣佛說是布施是初助道因緣
또 사람의 목숨은 무상하고 재물은 번개와 같다. 설령 사람이 구걸하지 않아도 오히려 먼저 주어야 하거늘 하물며 구걸하는데도 주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도를 돕는 인연을 지어야 한다.
014_0723_b_04L復次命無常財物如電若人不乞猶尚應何況乞而不施以是應施作助道因緣
또 재물 이것은 갖가지 번뇌와 죄업(罪業)의 인연이고, 지계와 선정과 지혜와 갖가지 착한 법은 바로 열반의 인연이다. 이 때문에 재물은 오히려 스스로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좋은 복전 안인데 어찌 베풀지 않겠는가.
014_0723_b_07L復次財物是種種煩惱罪業因若持戒禪定智慧種種善法是涅槃因緣以是故財物尚應自棄何況好福田中而不布施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두 사람의 형제와 같다. 그들은 각각 10근(斤)씩의 금을 지고 길을 가는데 그 길에는 다른 일행이 없었다. 형은 생각하기를 “내가 왜 아우를 죽이고 금을 다 빼앗지 않는 것일까. 이 넓은 길에서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란 없다”고 했다. 아우도 역시 “형을 죽이고 금을 다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제가 저마다 나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과 보는 눈짓이 달랐으므로 형과 아우는 이내 스스로 깨닫고서 도리어 뉘우치는 마음을 내며 “우리들은 사람이 아니다.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형제로 태어났으면서 조그마한 금 때문에 악심을 일으키고 있다니”라고 했다.
형제가 깊은 물가에 이르자 형은 금을 물속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아우가 말하기를 “참으로 잘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아우도 이내 금을 물속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형도 말하기를 “참으로 잘했도다” 했다. 그리고는 형제가 서로 “무엇 때문에 잘했다고 했는가?”라고 물었고, 저마다 대답하기를 “나는 이 금 때문에 착하지 않은 마음을 내어 한 사람을 죽이려 했었는데 이제 그것을 다 버렸기에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했으니, 두 사람의 말이 같았던 것이다.
014_0723_b_10L譬如有兄弟二人各擔十斤金行道中更無餘伴兄作是念我何以不殺弟取金此曠路中人無知者弟復生念欲殺兄取金弟各有惡心語言視瞻皆異兄弟卽自還生悔心我等非人與禽獸何異同生兄弟而爲少金故而生惡心弟共至深水邊兄以金投著水中善哉善哉弟尋復棄金水中兄復善哉善哉兄弟更互相問何以故言善哉各相答言我以此金故生不善欲相危害今得棄之故言善哉辭各爾
그러므로 재물은 악한 마음의 인연이 됨을 아나니, 언제나 스스로 버려야 한다. 그러니 하물며 보시를 하면 큰 복을 얻게 되거늘 어찌 보시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게송이 있다.
014_0723_b_22L以是故知財爲惡心因緣應自捨何況施得大福而不施如說
014_0723_c_01L
보시는 보배 광[寶藏]이라 하고
또한 착하고 친한 벗이라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가 이익되며
이를 파괴할 수 있는 이가 없다.
014_0723_b_23L施名行寶藏
亦爲善親友
終始相利益
無有能壞者

보시는 좋고 촘촘한 우산이 되어
굶주림과 갈증의 비를 막아 주며
보시는 단단하고 견고한 배가 되어
가난[貧窮]의 바다를 건너게 한다.
014_0723_c_02L施爲好密蓋
能遮飢渴雨
施爲堅牢船
能度貧窮海

인색함은 흉하고 쇠(衰)한 모양이라
그 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나
보시의 물로써 그것을 씻어버리면
곧 복과 이익이 생겨난다.
014_0723_c_03L慳爲凶衰相
爲之生憂畏
洗之以施水
則爲生福利

인색하여 옷과 음식을 아까워하면
종신토록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나니
비록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빈곤한 이와 다름이 없다.
014_0723_c_04L慳惜不衣食
終身無歡樂
雖云有財物
與貧困無異

인색한 사람이 사는 집은
비유하건대 마치 무덤과 같나니
구하는 이는 멀리서 그를 피하며
끝내 그곳으로 향하는 이가 없다.
014_0723_c_06L慳人之室宅
譬如丘塚墓
求者遠避之
終無有向者

이와 같이 간탐을 부리는 사람은
지혜 있는 이가 꺼리나니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더라도
죽은 이와 다름이 없다.
014_0723_c_07L如是慳貪人
智者所擯棄
命氣雖未盡
與死等無異

인색한 사람은 복과 지혜가 없어
보시에 대한 굳은 약속도 없다가
죽음의 구덩이에 떨어지려 할 적에
아까운 마음에 한탄하며 후회한다.
014_0723_c_08L慳人無福慧
於施無堅要
臨當墮死坑
戀惜生懊恨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 가야 하고
근심과 후회의 불이 몸을 태우리니
涕泣當獨去
憂悔火燒身

보시하기 좋아한 이는 편안해서
끝내 이러한 고통은 없다.
014_0723_c_10L好施者安樂
終無有是苦

사람으로서 보시를 닦은 이는
이름이 시방에 가득히 차고
지혜로운 이의 애경(愛敬)을 받으며
대중에 들어가도 두려워함이 없고
목숨을 마치면 천상에 나며
오랜 뒤엔 반드시 열반을 얻는다.
014_0723_c_11L人修布施者
名聞滿十方
智者所愛敬
入衆無所畏
命終生天上
久必得涅槃

이러한 갖가지로 간탐을 꾸짖고 보시를 찬탄하나니, 이것을 바로 재물의 보시를 염한다고 하는 것이다.
014_0723_c_13L如是等種種訶慳貪讚布施是名念財施
어떻게 법의 보시를 염하는가?
云何念法施
곧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법의 보시는 이로움이 심히 크다. 법을 보시하는 인연 때문에 온갖 부처님의 제자들이 도를 얻는다”고 한다.
014_0723_c_15L行者作是念法施利益甚大法施因緣故一切佛弟子等得道
또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보시 가운데서 법의 보시가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재물 보시의 과보는 한량이 있지만 법의 보시는 과보가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재물의 보시는 욕계(欲界)의 과보이지만 법의 보시는 삼계(三界)의 과보요 또한 삼계를 벗어나는 과보이다.
만일 명예와 재물의 이익과 세력을 구하지 않고 다만 부처님 도를 배우기 위하여 넓고 큰 자비로써 중생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제도한다면 이것을 청정한 법의 보시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시장에서 장사하는 법과 같게 된다.
014_0723_c_17L復次佛說二種施中法施爲第一何以故財施果報有量法施果報無量財施欲界報法施三界報出三界報若不求名聞財利力勢爲學佛道弘大慈悲度衆生生是名淸淨法施若不爾者爲如市易法
또 재물의 보시는 많이 베풀수록 재물이 줄어들지만 법의 보시는 많이 베풀수록 법이 더욱 늘어난다.
014_0723_c_23L復次財施施多財物減少法施施多法更增益
014_0724_a_01L재물의 보시는 바로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쓰던 오래된 법이지만, 법의 보시는 성인의 법에서 처음 오는 것이라 아직 얻지 못했으므로 새로운 법이라 한다.
014_0724_a_01L財施是無量世中舊法施聖法初來未得名爲新法
재물의 보시는 다만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운 등의 괴로움만을 구제할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98종류의 모든 번뇌의 병을 제거할 수 있다.
014_0724_a_02L施但能捄諸飢渴寒熱等病法施能除九十八諸煩惱等病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재물의 보시와 법의 보시를 분별하나니,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법의 보시를 염해야[念法施] 한다.
014_0724_a_04L如是等種種因緣分別財施法施行者應念法施
【문】 어떤 것이 법의 보시인가?
014_0724_a_05L問曰何等是法施
【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부경(部經)187)을 청정한 마음으로 복덕을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을 바로 법의 보시라 한다.
또 신통의 힘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도(道)를 얻게 함이 있으면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마치 『망명보살경(網明菩薩經)』188)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서 도를 얻는다든가 천상에 태어난다면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였기 때문에 역시 법의 보시라 한다.
014_0724_a_06L答曰佛所說十二部經淸淨心爲福德與他說是名法復有以神通力令人得道亦名法如『網明菩薩經』中說有人見佛光明得道者生天者如是等口雖不說令他得法故亦名法施
이 법의 보시에서는 마땅히 중생의 심성에 번뇌의 많고 적음과 지혜의 예리함과 둔함을 관하여 그들에게 각자 이익이 되는 바를 좇아 법을 설해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병을 따라 약을 먹게 하면 이익이 있는 것과 같다.
014_0724_a_11L是法施應觀衆生心性煩惱多少智慧利鈍應隨所利益而爲說法譬如隨病服藥則有
어떤 이는 음욕이 많고, 어떤 이는 성을 많이 내고, 어떤 이는 어리석음이 많다. 어떤 이는 두 가지가 섞여 있으며, 어떤 이는 세 가지가 섞여 있기도 하다. 음욕이 많으면 그를 위하여 부정관(不淨觀)을 말해 주고, 성을 잘 내는 이면 그를 위하여 인자한 마음[慈心]을 말해 주며, 어리석음이 많은 이면 그를 위하여 깊은 인연(因緣)을 말해 준다. 두 가지가 뒤섞인 이면 두 가지의 관을 다 말해 주며, 세 가지가 뒤섞인 이면 세 가지의 관을 다 말해 준다.
만일 사람이 병을 알지 못하고 잘못 약을 주게 되면 병이 더욱 악화된다.
014_0724_a_14L有婬欲重有瞋恚重有愚癡重兩兩雜三三雜婬重者爲說不淨觀瞋重者爲說慈心癡重者爲說深因兩雜者說兩觀三雜者說三觀人不知病相錯投藥者病則爲增
014_0724_b_01L만일 중생의 모양에 집착한 이면 그를 위해 단지 5중(衆)만이 있고 그 안에는 나[我]가 없다고 말해 주고, 만일 중생의 모양이 없다고 말하는 이면 곧 그를 위해 5중이 상속하고 있음을 말해 주니 단멸론[斷滅]189)에 떨어뜨리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다. 부귀와 쾌락을 구하는 이면 그를 위하여 보시를 말해 주고, 천상에 나기를 바라는 이면 그를 위하여 계율 지닐 것을 말해 준다.
인간 세계에서 가난을 겪음이 많은 이면 그를 위하여 천상의 일을 말해 주고, 괴로움을 겪으면서 집에 있는 이면 그를 위하여 출가하는 법을 말해 주며, 돈과 재산에 집착하여 집에서 사는 이면 그를 위하여 재가(在家)의 5계법(戒法)을 말해 주고, 만일 세간을 좋아하지 않는 이면 그를 위하여 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열반(涅槃)의 세 가지 법의 징표[法印]를 말해 준다.
014_0724_a_18L著衆生相者爲說但有五衆此中無我若言無衆生相者卽爲說五衆相續有不令墮斷滅故求富樂者爲說布施欲生天者爲說持戒人中多所貧乏爲說天上事惱患居家者爲說出家法著錢財居家者爲說在家五戒若不樂世閒爲說三法印無常涅槃
곧 경법에 의지하고 따르면서 스스로 도리를 연설하고 비유와 장엄으로 법을 보시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말해 준다.
014_0724_b_03L依隨經法自演作義理譬喩莊嚴法施爲衆生說
이와 같은 갖가지 이로움 때문에 마땅히 법의 보시를 염해야 한다.
014_0724_b_04L如是等種種利益當念法施
번뇌를 버린다[捨煩惱] 함은 3결(結) 내지 98사(使) 등을 모두 끊어 없애는 것이니, 이것을 버린다[捨]고 한다.
이러한 법을 버림을 염하는 것은 마치 독사를 버리는 것과 같고 마치 차꼬와 수갑[桎梏]을 버리는 것 같아서 안온함과 기쁨을 얻게 된다.
014_0724_b_05L捨煩惱者三結乃至九十八使等皆斷除卻是名爲捨念捨是如捨毒蛇如捨桎梏得安隱歡喜
번뇌를 버리는 염은 또한 염법(念法) 중에 들어간다.
014_0724_b_07L復次念捨煩惱亦入念法中
【문】 만일 염법 중에 든다면 지금 무엇 때문에 다시 설명하는가?
014_0724_b_08L問曰入念法中今何以更說
【답】 모든 번뇌를 버린다는 이 법은 미묘하고 얻기 어려우며 위없고 한량없나니, 이 때문에 다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014_0724_b_09L答曰捨諸煩是法微妙難得無上無量是故更別說
또 염법(念法)과 염사(念捨)는 다르다. 염법은 부처님 법이 미묘하여 모든 법 중에서 으뜸감을 염하는 것이고, 염사는 모든 번뇌의 죄악을 염하면서 그것을 버리는 것을 쾌락으로 삼는다. 그 행상(行相)이 구별되나니 이것이 다르다.
014_0724_b_11L復次念法與念捨異念法念佛法微妙諸法中第一念捨念諸煩惱罪惡捨之爲快行相別是爲異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수행하는 이는 버림[捨]을 염해야 한다.
014_0724_b_13L如是等種種因緣行者當念捨
염사란 처음 선지(禪智)를 배우는 가운데 증상만(增上慢)190)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게끔 하는 것이다.
014_0724_b_14L念捨者初學禪智中畏生增上慢
염천(念天)191)이란 사천왕천(四天王天)에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014_0724_b_15L念天四天王天乃至他化自在天
【문】 부처님의 제자는 마땅히 일심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염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하늘[天]을 염하는가?
014_0724_b_16L問曰弟子應一心念佛及佛法何以念天
【답】 보시한 업의 인연과 과보 때문에 천상의 부귀와 즐거움을 누리는 것임을 알 수 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하늘을 염한다.
014_0724_b_17L答曰知布施業因緣果報故受天上富樂以是因緣故念天
014_0724_c_01L또 이 여덟 가지 염[八念]을 부처님께서 스스로 인연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을 염하는 이는 마땅히 생각하기를 ‘사천왕천이 있는데 이 하늘은 다섯 가지 착한 법[五善法]의 인연 때문에 그 안에 태어난 것이다. 즉 죄와 복[罪福]을 믿고 계율을 받아 지녔으며, 착한 법[善法]을 듣고 보시(布施)를 닦았으며 지혜(智慧)를 배운 것이다. 나에게도 역시 이 다섯 가지 법이 있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 때문에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하늘들은 이 다섯 가지 법 때문에 부귀와 쾌락이 있는 곳에 태어났으니, 나에게도 역시 이것이 있으므로 내가 그곳에 태어나고자 하면 역시 태어날 수도 있지만 나는 하늘의 복은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한다. 타화자재천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724_b_19L復次是八念佛自說因緣念天者應作是念有四天王天是天五善法因緣故生彼中信罪福受持戒聞善法修布施學智我亦有是五法以是故歡喜以是五法故生富樂處我亦有是欲生彼亦可得生我以天福無常故不受乃至他化自在天亦如是
【문】 삼계(三界) 중에는 청정한 하늘이 많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욕천(欲天) 만을 염하는 것인가?
014_0724_c_03L問曰三界中淸淨天多何以故但念欲天
【답】 성문의 법 중에서는 욕계천을 염할 것을 말씀하셨고, 마하연(摩訶衍) 중에서는 온갖 삼계의 하늘을 염할 것을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이가 아직 도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혹 마음으로 인간의 5욕락에 집착하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하늘을 염하라 하신 것이다.
만일 능히 음욕을 끊는다면 위의 두 세계[二界]192)의 하늘에 태어나지만, 만일 음욕을 끊지 못했다면 곧 6욕천(欲天)193)에 태어나나니, 이 안에는 묘하고 미세하며 청정한 5욕이 있다. 부처님은 비록 사람들이 다시 태어날 때에 5욕을 받게 하고 싶지는 않으나 어떤 중생은 열반에 들기에 적당하지 않는 이도 있으므로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하늘을 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국왕의 아들이 높고 위험한 곳에 서 있어서 구호할 수도 없는데, 그가 스스로 땅에 떨어지려 하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서 두꺼운 솜이불을 깔아 놓아 떨어져도 죽지 않고 땅에 약간만 부딪치게 만드는 것과 같다.
014_0724_c_04L答曰聲聞法中說念欲界天摩訶衍中說念一切三界天行者未得道時或心著人閒五欲以是故佛說念天若能斷婬欲則生上二界天中若不能斷婬欲卽生六欲天中是中有妙細淸淨五欲佛雖不欲令人更生受五有衆生不任入涅槃爲是衆生故說念天如國王子在高危處立不可捄護欲自投地王使人敷厚緜褥則不死差於墮地故
또 네 가지 하늘이 있나니, 명천(名天)194)과 생천(生天)195)과 정천(淨天)196)과 생정천(生淨天)197)이 그것이다.
014_0724_c_14L復次有四種天名天生天淨天生淨天
명천이라 함은 마치 지금의 국왕을 천자(天子)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014_0724_c_15L名天者如今國王名天子
생천이라 함은 사천왕천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까지이다.
014_0724_c_16L生天者從四天王乃至非有想非無想天
정천이라 함은 인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성인들을 말한다.
014_0724_c_17L淨天者人中生諸聖人
생정천이라 함은 삼계의 하늘 가운데 태어난 모든 성인들로서 이른바 수다원(須陀洹)과 가가(家家)와 사다함(斯陀含)과 일종(一種)이니, 혹은 천상에서 아나함(阿那含)과 아라한의 도를 얻기도 한다. 생정천은 색계(色界)에서는 5종의 아나함이 있는데 이 세간에는 돌아오지 않고 곧 그곳에서 아라한이 된다. 무색계(無色界) 안에서는 1종의 아나함이 색계를 여의고 무색계에 태어나서 이 안에서 무루의 도를 닦고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이다.
014_0724_c_18L生淨天者三界天中生諸聖人所謂須陁洹家家斯陁含一種或於天上得阿那含阿羅漢道生淨天界中有五種阿那含不還是閒卽於彼得阿羅漢無色界中一種阿那含離色界生無色界是中修無漏道阿羅漢入涅槃
014_0725_a_01L이 두 가지의 하늘인 생천과 생정천을 염하니, 이와 같은 하늘을 염하는 것을 바로 염천(念天)이라 한다.
014_0725_a_01L念是二種天生天淨天如是等天是名念天
염안나반나(念安那般那)198)라 함은, 마치 『선경(禪經)』 중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014_0725_a_02L念安那般如『禪經』中說
염사(念死)라 함은 두 가지 죽음이 있나니, 첫째는 저절로 죽는 것[自死]이고, 둘째는 다른 인연으로 죽는 것[他因緣死]이다. 이 두 가지 죽음에 대하여 수행하는 이는 항상 염해야 하나니, 이 몸은 설령 다른 이가 죽이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저절로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유위(有爲)의 법에서는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사이에도 불사를 믿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이 몸은 온갖 시간 안에서도 모두 죽어가고 있고 늙기까지 기다리지 않나니, 이 갖가지의 근심스럽고 괴롭고 흉하고 쇠한 몸을 믿고서 안온하게 죽지 않으리라고 희망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마음은 어리석은 사람이 내는 것이다.
몸 속에는 4대(大)가 저마다 서로 해치고 있나니, 마치 사람이 독사가 든 상자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안온하기를 바라겠는가. 내쉰 숨을 도로 들이쉴 것을 보장하거나 들이쉰 숨을 도로 내쉴 것을 보장하거나 잠을 자면서 다시 깨날 것을 보장하기란 모두 어렵다. 왜냐하면 이 몸의 안팎에는 원한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송이 있다.
014_0725_a_03L念死有二種死一者自死二者他因緣死是二種死行者常念是身若他不殺必當自死如是有爲法中不應彈指頃生信不死心是身一切時中皆有死不待老不應恃是種種憂惱凶衰身生心望安隱不死是心癡人所生身中四大各各相害如人持毒蛇篋云何智人以爲安隱若出氣保當還入入息保睡眠保復得還覺是皆難必何以是身內外多怨故如說

태(胎) 안에서 죽기도 하고
태어날 때에 죽기도 하며
한창 나이에 죽기도 하고
다 늙어서 죽기도 한다.
014_0725_a_13L或有胎中死
或有生時死
或年壯時死
或老至時死

또한 마치 과일이 익어갈 때에
갖가지 인연으로 떨어짐과 같다.
亦如果熟時
種種因緣墮

이 죽음이란 나쁜 도적을
면하고 여의기를 구해야 하나
014_0725_a_15L當求免離此
死怨之惡賊

이 도적은 신용하기 어려우며
버리는 때에 곧 안온해진다.
014_0725_a_16L是賊難可信
時捨則安隱

가령 큰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
위덕과 힘이 위없다 해도
앞도 없고 또한 뒤도 없으며
지금에도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없다.
014_0725_a_17L假使大智人
威德力無上
無前亦無後
於今無脫者

교묘한 말에도 용서함이 없고
청하고 구하여도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막으면서 겨루는 곳에서도
이를 면할 수 있는 이는 없다.또한 청정한 계율을 지니면서
정진해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014_0725_a_19L亦無巧辭謝
無請求得脫
亦無捍挌處
可以得免者
亦非持淨戒
精進可以脫

죽음의 도적은 사정이 없어서
오는 때엔 그를 피할 곳이 없다.
死賊無憐愍
來時無避處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는 무상하고 위태롭고 연약한 목숨에 대하여 믿으면서 살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014_0725_a_21L是故行者不應於無常危脆命中而信望活
마치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위하여 죽음의 모습[死相]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199)
한 비구가 가사를 한쪽 어깨에 걷어 올리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능히 이 죽음의 모습을 닦고 있습니다.”
014_0725_a_23L如佛爲比丘說死相義有一比丘偏袒白佛我能修是死相
014_0725_b_01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닦고 있느냐?”
014_0725_b_01L佛言汝云何修
그 비구가 대답했다.
“저는 7년을 더 살게 될 것을 바라지 않나이다.”
比丘言我不望過七歲活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방일하면서 죽음의 형상을 닦고 있구나.”
014_0725_b_02L佛言汝爲放逸修死相
또 어떤 비구는 “저는 7개월을 더 살게 될 것을 바라지 않나이다”고 했고, 또 어떤 비구는 “7일”이라 말하고, 또 어떤 비구들은 “6일, 5일, 4일, 3일, 2일 1일을 더 살게 될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014_0725_b_03L有比丘言不望過七月活有比丘言七日有言一日活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들도 모두가 방일하게 죽음의 형상을 닦고 있다”고 하셨다.
또 어떤 비구는 “아침부터 밥 때까지”라고 말했다.
014_0725_b_05L佛言汝等皆是放逸修死相有言從旦至食時
또 어떤 비구는 “한 식경(食頃)까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014_0725_b_06L有言一食頃
부처님께서는 “너희들도 역시 방일하게 죽음의 형상을 닦고 있다”고 하셨다.
014_0725_b_07L佛言汝等亦是放逸修死
어느 한 비구가 가사를 한 어깨에 메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저는 내쉰 숨을 도로 들이 쉬게 될 것을 바라지 않고 들이쉰 숨을 도로 내쉬게 될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014_0725_b_08L一比丘偏袒白佛我於出氣不望於入氣不望出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참으로 이야말로 죽음의 모양을 닦는 것이요 방일하지 않는 것이니라. 비구여, 온갖 유위의 법은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져 머무를 때가 심히 적나니, 그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지혜 없이 수행하는 이를 속이느니라”고 하셨다.
014_0725_b_09L佛言是眞修死相爲不放逸比丘一切有爲法念念生住時甚少其猶如幻欺誑無智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죽음의 모양을 염하는 것이다.
014_0725_b_11L者如是等種種因緣念死相
【문】 법은 바로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거늘 무엇 때문에 염불(念佛)이 앞에 있으며 이 여덟 가지 염[八念]은 그 다음 차례로 되어 있는가?
014_0725_b_12L問曰是三世諸佛師何以故念佛在前八念云何有次第
014_0725_c_01L【답】 이 법이 비록 시방과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은 이 법을 연출할 수 있고 그 공이 크시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설산(雪山) 중에는 보배산이 있고 이 보배산 꼭대기에는 여의보주(如意寶珠)200)와 갖가지의 보물이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올라가다가 혹 그 중도에서 돌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가까이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한 큰 덕이 있는 국왕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어 그들을 위하여 큰 사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인민들은 크건 작건 심지어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산을 올라갈 수 있었으므로 마음대로 여의주 등의 갖가지 보물을 가지고 온 것과 같다.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세간의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보배산은 96종의 이도(異道)로서는 모두 얻지 못하며 나아가 범천왕(梵天王)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한다 해도 역시 구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는가.
부처님은 큰 자비로써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6바라밀(波羅密)을 구족하고 온갖 지혜방편을 얻어 12부경(部經)ㆍ8만 4천의 법 무더기 사다리를 말씀하셨으니, 아야교진여(阿若憍陣如)와 사리불(舍利佛)과 목건련(目揵連)과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일곱 살 사미인 소마(蘇摩)201)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무루의 법인 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의 실상을 얻은 것이다.
이 실상이 비록 미묘하다 하더라도 온갖 중생은 모두가 부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얻게 되나니, 이 때문에 염불이 앞에 있고 그 다음에 법을 염[念法]하고 그 다음에 승가를 염[念僧]하는 것이다. 승가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번째이며 그 밖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승가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일컬어 보배[寶]라 한다.
인간 안에서의 보배는 바로 부처님이고 96종의 도법(道法) 안에서의 보배는 바로 부처님의 법이며 온갖 무리 안에서의 보배는 바로 승가이다.
014_0725_b_14L答曰是法雖是十方三世諸佛師佛能演出是法其功大故譬如雪山中有寶山寶山頂有如意寶珠種種寶物多有人欲上有半道還者有近而還者有一大德國王憐愍衆生爲作大梯人民大小乃至七歲小兒皆得上山隨意取如意珠等種種寶物佛亦如是世閒諸法實相寶山九十六種異道皆不能乃至梵天王求諸法實相亦不能何況餘人佛以大慈悲憐愍衆生具足六波羅蜜得一切智慧方便說十二部經八萬四千法聚梯阿若憍陳如舍利弗目揵連摩訶迦葉至七歲沙彌蘇摩等皆得諸無漏法實相實相雖微妙一切衆生皆蒙佛恩故得以是故念佛在前次第念次第念僧僧隨佛語能解法故第三餘人不能解僧能得解以是故稱爲人中寶者是佛九十六種道法中寶者是佛法一切衆中寶者是僧
또 부처님의 인연 때문에 법이 세간에 출현했고 법의 인연 때문에 승가가 있다.
014_0725_c_11L以佛因緣故法出世閒以法因緣故有僧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나는 어떻게 법보(法寶)를 얻어야 하는가”고 한다. 법보는 승가[僧數] 안에서 얻어지므로 마땅히 온갖 거칠고 세밀한 몸과 입의 나쁜 업[身口惡業]을 제거해야 된다.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 지계(持戒)를 말씀하신 것이다.
014_0725_c_13L行者念我云何當得法寶,得在僧數中當除卻一切麤細身口惡是故次第說持戒
또 어떻게 분별하여 7중(衆)이 있느냐 하면, 계율이 있기 때문이다.
014_0725_c_15L復次云何分別有七衆以有戒故
마음의 악(惡)을 제거하려 하고, 간탐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버림을 염하며, 받는 이로 하여금 쾌락을 얻게 하려는 까닭에 성냄[瞋恚]을 깨뜨리고, 복의 과보를 얻을 것을 믿는 까닭에 삿된 소견을 깨뜨린다.
014_0725_c_16L欲除心惡破慳貪故念捨,欲令受者得樂故破瞋恚福得果報故破邪見
지계와 보시의 법 안에 머무르면 곧 10선도(善道)에 머물게 되어 10불선도를 여의게 된다.
열 가지 착한 길에는 두 가지 과보가 있나니, 만일 으뜸으로 수행한 이면 정천(淨天)에 태어나게 되고, 중간 정도 수행한 이면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계율과 보시의 다음에 하늘을 염하는 것이다.
014_0725_c_18L住持戒布施法中,則爲住十善道中離十不善道善道有二種果若上行者得淨天中生中行得生天以是故,戒施次第念天
선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두 가지의 하늘에 태어나게 되어 모든 삿된 생각[覺]을 없애고 다만 착한 법만을 쌓아 마음을 한 곳에 거두나니, 이 때문에 하늘을 염하고 다음으로 안나반나(安那般那)를 염한다.
014_0725_c_21L行禪定故得二種天滅諸惡覺但集善法,攝心一處是故念天次第念安那般那
014_0726_a_01L안나반나를 염하면 능히 모든 삿된 생각을 없애버림이 마치 비가 먼지를 가라앉히는 것과 같다. 들숨[入息]ㆍ날숨[出息]을 보면서 몸의 위태함과 연약함을 알고, 숨을 들이쉬고 내쉼으로 말미암아 이 몸이 존립하게 된다. 이 때문에 들숨ㆍ날숨을 염하며[念入出息], 그 다음에는 죽음을 염한다[念死].
014_0726_a_01L念安那般那能滅諸惡覺如雨淹塵見息出入,知身危脆由息入出,身得存立是故念入出息次第念死
또 수행하는 이는 간혹 일곱 가지의 염[七念]이 있음을 믿고 이 공덕에 집착하면서 게으른 마음을 내기도 한다. 이때에는 마땅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일이 항상 앞에 있는데 어떻게 게으르게 이 법애(法愛)에 집착하겠는가.
마치 아나율(阿那律)202)이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실 때에 말한 게송과 같다.
014_0726_a_03L復次行者或時恃有七念著此功德懈怠心生,是時當念死死事常在前云何當懈怠著此法愛如阿那律,佛滅度時說

유위의 법은 마치 구름과 같나니
지혜로운 이는 믿지 말아야 한다.
무상(無常)이라는 금강(金剛)이 와서
성주산왕(聖主山王)203)을 깨뜨리는구나.
014_0726_a_07L有爲法如雲
智者不應信
無常金剛來
破聖主山王

이것을 여덟 가지 염[八念]의 차례라고 한다.
014_0726_a_09L是名八念次第
【문】 이것은 성문의 여덟 가지 염을 설명한 것인데, 그렇다면 보살의 여덟 가지 염과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014_0726_a_10L問曰是說聲聞八念菩薩八念有何差別
【답】 성문은 자기 몸을 위하는 까닭이고 보살은 일체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며, 성문은 오직 늙고 병들고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까닭이고 보살은 온갖 공덕을 구족하기 위한 까닭이니, 여기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014_0726_a_11L答曰聲聞爲身菩薩爲一切衆生故聲聞但爲脫老死故菩薩爲遍具一切智功德故是爲差別
또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역시 말씀하시면서 사리불에게 “보살마하살은 머무르지 않는[不住] 법으로써204)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물러 단바라밀을 구족해야 하며, 나아가 여덟 가지 염에 이르기까지를 구족해야 하나니, 얻을 수 없기[不可得] 때문이다”고 하셨다.
처음에 머물지 않음[不住]이 있고 나중에 얻을 수 없음이 있으니, 이 두 가지 징표로써 다른 것이다. 머물지 않는 일과 얻을 수 없는 일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단주(丹註):8념이 끝나다.]
014_0726_a_14L復次佛是中亦說告舍利弗菩薩摩訶薩以不住法住般若波羅蜜中,應具足檀波羅蜜乃至應具足八念,不可得故初有不住後有不可得以此二印以是故異不住不可得義,如先說丹注云八念竟
大智度論卷第二十二
庚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33)범어로는 dharmānusmṛti.
  2. 134)범어로는 paramārthasatya.
  3. 135)범어로는 Jambuka.
  4. 136)곧 37조도법(助道法, saptatriṁśad anāsravā bodhipākṣikadharmāḥ)을 말한다.
  5. 137)범어로는 dharmamudrā.
  6. 138)범어로는 rājamudrā.
  7. 139)범어로는 śāntaṁ nirvāṇam.
  8. 140)주제자(主宰者, īśvara, svāmin)를 말한다.
  9. 141)범어로는 ātmapratiṣedhaprakaraṇa.
  10. 142)범어로는 ātman, puruṣa. 상주불변한 나를 가리킨다.
  11. 143)곧 실아(ātman)라면 두루 아는 것을 그 특징으로 삼지만, 실제로는 영원하고 두루 아는 존재란 없으므로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12. 144)범어로는 śāntamudrā.
  13. 145)범어로는 bhūtalakṣaṇa.
  14. 146)범어로는 praśnavyākaraṇa.
  15. 147)범어로는 vibhajya vyākaraṇam.
  16. 148)범어로는 paripṛcchāvyākaraṇam.
  17. 149)범어로는 sthāpanīya vyākaraṇam.
  18. 150)범어로는 dharmārtha.
  19. 151)범어로는 upadeśācārya.
  20. 152)범어로는 Kātyāyanīputra.
  21. 153)이른바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의 4향(向)과 이 네 계위의 관인 4과(果)를 말한다.
  22. 154)범어로는 āryasaṁgha.
  23. 155)범어로는 dānapati. 베푸는 이[施主]를 말한다.
  24. 156)범어 Bakkula의 음역어.
  25. 157)범어로는 harītakī. 일종의 과실이다.
  26. 158)범어로는 Koṭīviṁśa.
  27. 159)유학(有學, śaikṣa)이란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상태로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고인(苦忍)에서 아라한과에 이르기 직전의 3과(果) 4향(向)의 7종의 학인을 말한다.
  28. 160)무학(無學, aśaikṣa)이란 아라한과에 도달한 자를 말한다. 곧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성자의 경지이다.
  29. 161)범어로는 Kulaṁkula.
  30. 162)범어로는 Ekavīcika.
  31. 163)범어로는 śrāmaṇera.
  32. 164)범어로는 dānapati. 시주(施主)를 말한다.
  33. 165)범어로는 Bhāradvāja.
  34. 166)범어로는 Mahāgautamī.
  35. 167)범어로는 Dīrgha yakṣasenānī.
  36. 168)범어로는 Aniruddha.
  37. 169)범어로는 Nandika.
  38. 170)범어로는 Kimbila.
  39. 171)범어로는 sāsravaśīla.
  40. 172)범어로는 anāsravaśīla.
  41. 173)범어로는 saṁvaraśīla.
  42. 174)범어로는 śamādhisahāgataśīla. 곧 선정과 함께 수반되는 계를 말한다.
  43. 175)범어로는 vaidyarāja.
  44. 176)발을 묶는 형틀을 말한다.
  45. 177)범어로는 gośīla.
  46. 178)범어로는 mṛgaśīla.
  47. 179)범어로는 kukkuraśīla.
  48. 180)범어로는 rākṣasaśīla.
  49. 181)범어로는 mūkaśīla.
  50. 182)범어로는 badhiraśīla.
  51. 183)범어로는 각각 난법(煖法, uṣmagata-dharma)ㆍ정법(頂法, mūrdhan-dharma)ㆍ인법(忍法, kṣānti-dharma)
  52. 184)범어로는 laukikāgradharma.
  53. 185)범어로는 śīlānusmṛti.
  54. 186)범어로는 tyāgānusmṛti.
  55. 187)범어로는 dvādaśāṅgabuddhavacana.
  56. 188)범어로는 Jālinīprabha-bodhisattvasūtra or Viśeṣacintibrahmaparipṛcchā.
  57. 189)범어로는 uccheda-vāda. 상견(常見)에 반대되는 견해.
  58. 190)범어로는 abhimāna.
  59. 191)범어로는 devatānusmṛti.
  60. 192)곧 색계(rūpadhatu)와 무색계(ārūpyadhātu)의 두 세계이다.
  61. 193)욕계에 있는 여섯 욕망의 하늘(kāma-loka)을 말한다.
  62. 194)범어로는 saṁmatideva.
  63. 195)범어로는 upapattideva.
  64. 196)범어로는 viśuddhideva.
  65. 197)범어로는 upapatti-viśuddhadeva.
  66. 198)범어로는 ānāpānānusmṛti.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67. 199)범어로는 Maraṇasmṛtisūtra.
  68. 200)범어로는 cintāmaṇiratna.
  69. 201)범어로는 Sumana.
  70. 202)범어로는 Aniruddha.
  71. 203)범어로는 ārṣa. 세존을 가리킨다.
  72. 204)곧 머물지 않는 노력으로써(asthānayoge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