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지혜(二智)와 아울러 그의 일과 즐거움(樂) 따위 행의 바뀌어 변함과 청하거나 청함이 없는데도 경을 말씀하심이며 열반에 두 가지가 있음이니라.
지혜에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바른 지혜(正智)와 둘째는 삿된 지혜(邪智)이다. 이 안에서, 바른 지혜는 일이 있음에 의하여 생기고 삿된 지혜 역시 그러하다. 비록 이 두 가지 지혜는 다 같이 일이 있음에 의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바른 지혜는 사실대로 일을 취하거니와 삿된 지혜는 사뙤게 분별하여 사실대로 일을 취하지 아니한다. 바른 가르침의 이치대로의 뜻 지음(如理作意)을 앞의 행(前行)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알 바의 경계(所知境)에서 바른 지혜가 나게 되며, 삿된 가르침의 이치가 아닌 뜻 지음을 앞의 행으로 삼음으로 알 바 경계에서 삿된 지혜가 생기게 된다. 바른 지혜가 나서 알 바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 경계에서 삿된 집착을 버리면바른 지혜가 일어날 뿐이니, 마치 캄캄한 속의 빛과 같아서 밝은 등불이 생길적에 이 빛깔을 무너뜨리지 아니하고 다만 환히 비출 뿐이다. 이 이치도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즐거운 느낌(樂受)에 따르는 모든 행과 무상한 모양(無常相)은 다 함께 상응하기 때문에 만약 괴로움의 자리(苦位)에 이르면 그때에는 손해와 괴로움이 들이닥친다(損惱迫迮)고 하며,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자리에 이르면 그때에는 바야흐로 행고(行苦)에서 괴로움이 들이 닥친다고 하며, 만약 그 자리에 이르지 아니하면 마침내 즐거운 느낌만이 따를 뿐이어서 다른 자리에 이름이 없어야 한다. 또 나고 늙는 따위의 법의 따르는 바 모든 행은 모두가 이는 괴로움이니, 그가 만약 질병의 자리에 이르면 손해의 괴로움이 들이닥친다고 하며, 만약 나는 괴로움(生苦) 따위의 괴로움의 자리에 이르면 괴로움이 들이 닥친다고 하며, 만약 그 자리에 이르지 아니하면 모든 행안에서 나는 따위의 괴로움의 원인이 붙쫓김을 받으면서도 결과의 자리에는 이르지 않았다. 또 본래 성품인 모든 행은 뭇 인연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자재할 수도 없고 주재한 것(宰主)도 없거니와 만약 주재한 이가 있다면 온갖 행은 비록 성품이 무상하다손 치더라도 좋아하는 바에 다라 유전하여 끊이지 않고 혹은 나게 하지 않기도 하리니, 더 자세한 설명은 죽음에까지 이른다. 다시 다음에 두 가지 계경(契經)이 있나니, 첫째는 청함으로 인하여 말씀하시며, 둘째는 청함으로 연유하지 않고 말씀하신다. (1)청함으로 인하여 말씀한다 함은 만약 푸드갈라로서 이 모든 행상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조복된 이가 있다고 하면, 그의 청함으로 인하여 그를 위하여 위와 같은 모든 행상의 가르침을 굴리신 것이다. (2)청함으로 연유하지 않고 말씀하신다 함은 저 많은 대중들 안에서 한량없는 문으로써 아름답고 미묘한 말씀을 하기도 하고, 혹은 큰 스승에게 가까이 머문 제자인 아아난타(阿難陀) 등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나니, 바른 법이 오래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다음에 세 가지 갈래로 말미암아 원만한 열반을 섭수하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가르침으로 말미암아서며, 둘째는 바르게 온갖 행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서며 셋째는 온갖 번뇌를 영원히 끊음으로 말미암아서다. 가르침에 따른다 함은 답하여 설명함(記說)과 가르쳐 경계함(敎誡)과 신통 변환(神變)의 포섭하는 바다. 여래는 그의 마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대로 스스로의 선정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의 행으로써 두루 다른 이 마음을 비추나니, 차츰차츰 몹시 오랫동안 사라지는 마음(久遠滅心)이며 간단 없이 사라지는 마음(無間滅心)이며, 현재의 반연할 바에서 구르는 마음이다. 선정으로부터 일어나신 뒤에는 선정안에서 느낀 바의 다른 이의 마음을 따라 기억하고 분별하고 생각하며, 그 느낀 바의 그대로 이와 같이 답하시나니, ‘그대는 이러한 마음이 있었나니, 몹시 오랫동안 사라진 것은 이와 같은 뜻(意)이었으며 현재의 것은 이 종류에 의거한 것이요, 찰나에 의거하지 않았느니라’고 하신다. 바로 이러한 말씀은 신통 변화를 의지로 삼기 때문에 그 세 가지 곳에서 가르쳐 경계하나니, 첫째는 행하는 곳(行處)의 현전한 경계에서 이치대로의 뜻 지음을 허락하고 이치대로가 아닌 뜻 지음을 막아 못하게 하며, 둘째는 머무르는 곳(住處)에서 바르지 않은 찾고 생각함(尋思)을 막아 못하게 하고 바르게 찾고 생각함을 허락하며, 셋째는 지관(止觀)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곳에서 아직 끊지 못한 모든 행을 끊게 함과 번뇌로 하여금 영원히 매임을 여의고서 열반을 증득하게 할 것을 허락한다. 이와 같이 널리 말하여 세 가지 못으로부터 모든 따르는 번뇌로 하여금 마음에서 깨끗하여질 수 있게 하나니, 행하는 곳과 머무는 곳과 의지하는 곳으로부터서다. 또 바르게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행을 자세히 살핌을 바르게 관찰한다고 한다. 온갖 모든 행에는 또 세가지 샘(三漏)이 있으며, 세 가지 샘을 우선으로 삼아 욕해(欲害)가 있으며, 욕해를 우선으로 삼아 찾고 생각함의 타듯하는 괴로움이 있으며, 찾고 생각함의 타듯하는 괴로움을 우선으로 삼아 추구하는 근심과 괴로움이 있나니, 이와 같은 모두를 영원히 끊기 때문에 온갖 번뇌를 영원히 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잘 해탈된 모양없는 즐거움 머무름(無相樂住)에 편안히 머물러서 공포가 없을 때를 현재 법 안에서 원만한 열반의 수(數)에 든다고 한다. 또 세 가지 법에 의하여 스스로의 이로움(自義)에 의지함을 귀의(歸依)에 머무른다고 하며, 다른 이익의 이로움(他義)에 의지함을 성(洲渚)에 머무른다고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첫째는 안의 이치대로의 뜻 지음을 우선으로 삼아 법과 법에 따라 수행함에 의하면, 둘째는 부처님이 말씀한 바 바른 법 들음에 의하며, 셋째는 바른 법에 친근하는 안의 착한 선비(善士)에 의하고 그의 바른 법 이외의 온갖 외도에 친근하는 모든 착한 선비가 아닌 이에게는 의하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법은 사람들 안에서 네 가지의 대부분이 짓게 되는 법임을 나타내 보인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세 가지 인연과 다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저 갈래(彼分)의 열반을 증득한 줄 알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 인연이냐 하면, 첫 번째 괴로움을 두루 알기 때문이며 둘째는 온갖 고행(苦行)에 따르는 모든 허물을 깊이 보기 때문이며, 셋째는 근심 따위의 온갖 괴로움을 뛰어나기 때문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모양이냐 하면, 첫째는 괴로움의 종류가 서로 관계하는 때에 근심 따위가 발생되는 줄 아나니, 이것을 그에 대한 자성을 두루 안다고 한다. 둘째는 종자가 있어서 그 법이 생기게 되는 줄 아나니, 이것을 그에 대한 원인 성품을 두루 안다고 한다. 셋째는 스스로의 행할 바와 알 바의 경계를 아나니 이것을 그에 대한 인연 성품을 두루 안다고 한다. 넷째는 내것과 나라는 집착은 모두 이는 뭇 괴로움의 모든 행이 따른다고 따라 살피나니, 이것을 그에 대한 행의 성품을 두루 안다고 한다. 다섯째는 삼세의 욕심 세계에 매인 바 모든 행의 허물을 따라 살피어 온갖 근심 등의 모든 괴로움을 잘 끊는다. 이 세 가지 인연과 다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저 갈래의 열반을 획득하는 줄 알아야 한다. 사랑할 만한 일이 무상하고 바뀌어 변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슬퍼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근심한다(愁)고 하며 그로 말미암아 말하면서 탄식하고 한숨을 쉬기 때문에 한탄한다(歎)고 하며, 이로 인하여 가슴을 붙들기 때문에 괴롭다(苦)고 하며, 속으로 원한을 품기 때문에 근심한다(憂)고 하며, 이로 인하여 헷갈리고 어지럽기 때문에 괴로워한다(惱)고 한다. 또 재보를 상실하거나 병 없던 친척 등의 일의 어느 하나가 앞에 나타나서 비로소 근심과 괴로움을 냄으로써 근심한다고 하며, 이에 의하기 때문에 다름에는 말을 내어 애달파하고 원망하면서 온 몸으로 타듯이 번거로와 함을 괴로움을 한탄하는 자리라고 하며, 이 한탄이 지나고 몸이 타듯 번거로운 뒤에 속은 타지마는 박은 고요하며 마음이 오히려 편안하지 아니함을 근심하는 자리라 하며 첫날을 지나고나서 혹은 이틀ㆍ사흘ㆍ닷새ㆍ열흘의 밤과 낮과 달 동안에 그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뜻이 오히려 편안하지 않음을 말하여 괴로워함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우다아나로 말하리라.
다툼(諍)과 싹(芽)과 소견의 큰 물들음(見大染)과 한 갈래(一趣)와 배움(學)과 네 가지 두려움(四悕)과 착한 말슴과 나쁜 말 안의 지난 세상 일을 기억함(宿住念)의 차별이다.
네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여래는 세간의 헷갈린 집착과는 함께 원망하거나 다투거나 하지 않거니와 그러나 저 세간에서는 삿된 분별을 일으켜 원망하고 다툰다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첫째는 도리의 이치를 널리 펴 말씀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진실한 이치를 널리 펴 말씀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이익되는 이치를 널리 펴 말씀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때로는 세상에 따라 굴리시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여래는 네 가지 도리에 의하여 바른 법을 널리 펴 말씀함은 앞에서와 같나니, 이른바 관대의 도리(觀待道理)와 작용의 도리(作用道理)와 인성의 도리(因成道理)와 법이의 도리(法爾道理)이다. 이로 말미암아서 여래를 법다운 말씀을 하는 이(法語者)라고 한다. 여래는 마침내 일부러 다른 이에게 가서 다툼 일으키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세간에서는 다른 이 이로움(他義) 어긴 것을 자신의 이로움(自義)으로 삼아 짐짓 쟁론(諍論)을 일으키거니와 여래는 온갖 다른 이 이로움을 바로 자신의 이로움으로 삼기 때문에 다투는 바가 없으시다. 오직 가엾이 여기어 그로 하여금 이로움을 얻게 하기 위하여 다른 이에게 가서 바른 법을 말씀하신 것인데, 모든 삿된 고집으로 어리석은 세간 사람이 뒤바뀌어서 망령되게 ‘자신의 이로움이다. 다른 이의 이로움이다’하여, 차별을 두기 때문에 ‘나와 다툰다’고 함만은 제외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여래를 도리로 말씀하신 이라고 하는 줄 알 것이다. 또 여래를 진실하게 말씀하는 이(眞實語者)라고 하나니, 만약 세간에서 모든 총명한 이가 다 같이 인정하여 ‘있다’고 하면, 여래도 거기에 역시 ‘있다’고 하시나니, 온갖 행은 모두가 이는 무상함에서이다. 만약 세간에서 모든 총명한 이가 다 같이 인정하여 ‘없다’고 하면, 여래도 거기에 역시 ‘없다’고 말씀하시나니, 온갖 행은 모두가 이는 항상 머무름에서이다. 또 여래를 이익되게 말씀하는 이(利益語者)라고 하시나니, 모든 세간의 눈먼 이들은 스스로 세상의 법을 분명히 알 수 없거니와 여래는 거기에 스스로 실제 평등학 깨달아서 그들을 위하여 열어 밝히신다. 또 여래는 때로는 세간에 따르며 굴리기도 하시나니, 아사라마등기1)(阿死羅摩登祇) 등이 적은 사업에 의하여 스스로 살아나아가는데,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큰 부자요 크게 재물이 있으며 아주 잘 먹는다는 명상(名想)을 가정으로 세운다. 마치 저 세간 사람이 명상을 가정으로 세우는 것처럼, 여래도 그에 따라 역시 그렇게 말씀하신다. 또 한 가지 일이 하나의 국토에서 명상을 가정으로 세우고 그와 다른 국토에서는 바로 이 일에 대하여 그와 다른 명상을 세우는 것처럼 여래도 그에 따라 역시 그렇게 말씀하신다. 만약 원한과 다툼을 품고서 원한과 다툼을 일으킨다면 도리로 말씀하는 이요, 진실하게 말씀하는 이요, 이익되게 말씀하는 이요, 세상에 따라 굴리시는 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네가지 인연을 갖춤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여래는 다툼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부처님, 세존은 자연히 해야 할 바의 이치를 자세히 살피어 비록 청하거나 물음이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실제 평등하게 깨달은 법을 드날리며, 알맞는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으로써 모든 법의 차별을 시설하고 세우시나니, 널리 설명하면 앞의 섭이문분(攝異門分)에서와 같다. 이러한지라. 평등하게 열어 보인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한 가지 인(一因)과 두 가지 연(二緣)은 뒤의 존재(後者)의 싹으로 하여금 생장할 수 있게 하나니, 다섯 가지 품류의 행 안에 번뇌의 종자에 붙따르는 의식(識)을 인이라 하고, 인과 비슷한 네 가지 식주(四識住)를 말하여 연이라고 한다. 또 희탐(喜貪)은 그 의식(識)을 불어나게 함을 말미암아 저 장차 생을 받을 여러 곳에서 결생(結生)이 상속하게 하므로 사트카아야를 얻게되니 역시 연이라고 한다. 이 안에서 어떠한 이는 네 가지 식주로 말미암아서와 섭수의 의지할 바로 말미암아서와 희탐으로 말미암아 현재 법 안에서 새롭고 새롭게 지어서 쌓고 더욱 자라게 하다가 그가 뒷날에 아라한을 이루고서도 의식의 종자가 모두 다 썩어서 온갖 존재(有)의 싹으로 하여금 영원히 생길 수 없게 한다. 또 어떠한 이는 온갖 속박을 갖추어 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고 열반을 좋아하며 두루 온갖 생을 받을 곳에 대하여 싫어하고 거역하는 생각을 일으키나니, 그는 속박을 갖추기 때문에 종자가 파괴되지 아니하고 식주(識住)가 어울리거나 모든 존재에서 싫어하고 거역하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희탐이 없으며, 그는 이와 같이 바른 행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현재 법 안에서 열반하여 내며 그 뒤의 존재의 싹 역시 생기게 되지 않는다. 또 어떠한 사람은 배울 것 있는 이 자리(學地)에 머물면서 불환과(不還果)를 얻고 생각 아님도 아닌 하늘(非想非非想處)의 모든 행만이 남아 있고 유정정(有頂定)을 완전히 갖추어 편안히 머무르며, 그의 의식의 종자는 아직도 모두가 없어져 다하지는 못하였으나 식주를 두루 부명히 알고 두루하게 통달한다. 그는 잊어버림의 뛰어난 힘 때문에 윗자리(上地)의 탐애는 아직은 조금 남거니와 이 불환과의 것은 장차 오는 세상의 아랫자리(下地)의 온갖 존재의 싹이 다시는 더 생기지 아니한다. 이것과 상반하면 온갖 뒤의 존재의 싹이 모두 생장하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섞여 물듦(雜染)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소견(見)의 섞어 물듦이며, 둘째는 그 나머지 번뇌(煩惱)의 섞여 물듦이다. (1)소견의 섞여 물듦이라 함은 모든 행에서 나와 내것을 헤아리며 사뙤게 집착하여 구르는 사트카아야 소견이다. 이 소견으로 말미암아 혹은 모든 행을 고집하여 그것을 실아(實我)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모든 행을 고집하여 실제의 내것으로 삼기도 한다. (2)다시 그 밖의 것이 있나니, 이거을 근본으로 삼아 그 이외의 모든 소견 갈래와 그 나머지의 탐냄 등의 모든 번뇌로서, 이것을 둘째의 섞여 물듦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소견의 섞여 물듦을 해탈할 때에는 역시 그 나머지에서도 마침내 해탈하거니와 그 밖의 섞여 물듦을 해탈하게 될 때에는 모든 소견의 섞여 물듦을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나는 이는 세간의 도(世間都)에 의하여 아무 것도 없는 하늘(無所有處)까지의 모든 탐욕을 떠나고 모든 아래 자리에서 그의 번뇌는 마음에 해탈할 수 있지마는 아직은 사트카아야 소견은 벗어나지 못하며, 이 소견으로 말미암아 아래와 윗자리에 있게 되는 모든 행의 섞여진 제 바탕에 대하여 차별을 살피지 않는지라 통틀어 나라고 헤아리기도 하고 혹은 내것이라 헤아리기도 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비록 유정천(有頂天)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오거니와 만약 이러한 온갖 제 바탕을 두루 알아서 괴로움으로 삼고 벗어난 세간의 도(出世間)로 말미암아 먼저 온갖 사트카아야 소견을 끊는다면 그 뒤에는 남은 바의 번뇌를 영원히 끊으며 이 인연으로 다시는 물러남이 없다. 이 때문에 소견의 섞여 물듦만이 바로 큰 섞여 물듦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세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도(道)를 한 갈래(一趣)라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범부 자리(異生地)에서 다섯 가지 행상으로서 모든 행의 다섯 가지 곳의 차별을 자세히 살피며 바로 이 자세히 살핌을 두 시기 동안에 닦고 다스리어 깨끗하게 하나니, 행(行)에서 배울 것 있는 이의 자리와 배울 것 없는 이의 자리(無學地)에 향한다. 무엇을 다섯 가지 행상으로 모든 행을 자세히 살핀다고 하느냐 하면, 첫째는 모든 행의 자성(自性)을 자세히 살피며, 둘째는 모든 행의 인연을 자세히 살피며, 셋째는 섞여 물듦의 인연을 자세히 살피며, 넷째는 맑고 깨끗함(淸淨)의 인연을 자세히 살피며, 다섯째는 맑고 깨끗함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범부의 자리에서 먼저 다섯 가지 곳에서의 교묘함을 얻고 나서 그 뒤에 배울 것 있는 이의 자리에서 바로 이러한 다섯 가지 곳을 다시 다섯 가지 차별된 행상으로써 자세하게 관찰하여 빠를 통혜(通慧)를 얻게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의 행상이냐 하면, (1)모든 행과 모든 행의 인연과 섞여 물듦의 인연과 맑고 깨끗함의 인연과 사라져 고요함(滅寂靜)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2)맑고 깨끗한 도에 향해 나아가 벗어나기 때문이며, (3)모든 행은 갖가지의 많은 성품이기 때문이며, (4)각각 제 종자로부터 생기는 바이기 때문이며, (5)각각 다른 인연을 기다려서 생기는 바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네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처소에서 두려움을 내어 장애가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첫째는 자리(位)에서 일으키며, 둘째는 이 법에 의하여 일으키며, 셋째는 그는 이렇게 일으키며, 넷째는 그의 행상이 생긴다. (1)자리에서 일으킨다 함은 성인 아닌 자리(非聖位)에서 모든 거룩한 진리(聖諦)를 일으키되 아직 교묘함을 얻지 못했으며, 또 이 성인 아님은 다섯 가지 처소에서도 역시 아직 교묘하지 못하다. (2)의하여 일으킨다 함은 모든 행에서 삿된 행상을 일으키되 나와 내것을 헤아리는 사트카아야 소견을 의지로 삼아 일으키게 된다. (3)이와 같이 일으킨다 함은 두 가지 모든 행이 변하여 무너지는 차별로 말미암아 일으키나니, 첫째는 다른 인연(異緣)이 변하여 무너짐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제 마음에 삿된 분별을 일으켜 변하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4)행상이 생긴다 함은 사랑하는 바가 미래에 장차 변하여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움의 행상을 내며 바로 변하여 무너짐에서 손해와 괴로워함의 행상을 내며, 사랑하는 바가 이미 변하여 무너진 것 안에서는 그것에 거듭 그리워하는 행상이 생김을 기뻐한다. 또 열반에 대하여 제 바탕이 영원히 변하여 무너짐을 분별하기 때문에 두려움의 행상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은 행상을 차별되게 구르는 때에 거룩한 가르침을 좋아함과 열반을 좋아함에서 장애가 된다. 또 두 가지 문으로 말미암아 반연할 바의 대경(所緣境)과 스스로의 행할 바의 처소에서 나의 내것의 집착을 차별되게 구른다. (1)추구(推求)하기 때문이요, (2)받아들이기 때문이니, 곧 소견과 느낌이다. 다시 다음에 세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착하게 법을 말하는 이(善說法者)와 나쁘게 법을 말하는 이(惡說法者)는 똑 같은 일 안에서 지난 세상의 일을 따라 기억하되 물들음과 깨끗함(染淨)에 차별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나쁘게 법을 말하는 이가 지난 세상의 일을 따라 기억함에는 저 모든 행의 제 모양과 공통한 모양을 사실대로 모르는지라 모든 행에 대하여 온전히 항상 헤아리기도 하고 혹은 일부분이 항상하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항상함이 아니라고 헤아리기도 하고 혹은 원인 없다고 헤아리기도 하거니와 착하게 법을 말하는 이의 지난 세상 일을 따라 기억함에는 사실대로 알기 때문에 삿된 분별이 없나니, 이것을 첫 번째의 두 기억의 차별이라고 한다. 또 나쁘게 법을 말한 이는 어떤 선정에 따라 의지하여 지난 세상의 일을 기억하면서도 이는 괴로움인 줄 사실대로 분명히 모르는지라 맛 사랑함(愛味)을 내며 맛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행을 깊이 그리워하고 미래의 행을 깊이 즐거워하고 현재의 행을 싫증 내어 떠나서 없애고자 함을 수행할 수 없거니와, 착하게 법을 말하는 이는 이것과는 반대인 줄 알지니, 이것을 두 번째의 두 기억의 차별이라 한다. 또 나쁘게 법을 말하는 이는 이와 같은 삿된 행의 네가지 섞여 물듦(四種雜染)에 섞여 물들었기 때문에 뒤의 존재를 받는다. 무엇이 네 가지의 섞여 물듦이냐 하면, 첫째는 업(業)의 섞여 물듦이요, 둘째는 소견과 젠 체하는 얽음(見我慢纏)의 섞여 물듦이요, 셋째는 애욕 얽음(愛纏)의 섞여 물듦이요, 넷째는 그 수면(隨眠)의 섞여 물듦이다. 모든 새로운 업을 짓고 자라게 하거나 모든 옛 업을 자주자주 접촉한 뒤에 변화시켜 뱉지 않으면, 이것을 업의 섞여 물듦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행을 사뙤게 분별하여 사트카아야 소견을 일으켜 다른 유정들에게 모든 사문ㆍ바라문들과 자기를 견주어 헤아리면서 자기가 보다 훌륭하다고 하거나 똑 같다고 하거나 보다 못났다고 하거나 하면 이것을 소견과 젠체하는 얽음의 섞여 물듦이라고 한다.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간에 일으키는 바 탐욕은 애욕의 행안에서 그의 모양을 알아야 되나니, 이것을 애욕 얽음의 섞여 물듦이라고 한다. 서로 계속되는 동안에 소견과 젠 체함과 애욕과의 세 가지 품류의 추중(推重)에 언제나 붙쫓기나니, 이것을 그 수면의 섞여 물듦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한데 포섭하여 두 가지로 삼나니 업과 번뇌이다. 번뇌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얽음(纏)과 수면(隨眠)이다. 모든 행 안에서 먼저 삿된 집착을 일으키고서 그 뒤에 탐착을 내나니, 이 두 가지의 뛰어난 힘 때문에 비록 또 그와 다른 번뇌의 섞여 물듦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것만을 취할 뿐이다. 그렇게 많은 번뇌가 모든 행 안에서 다른 것과 견주어 헤아리지 않고 스스로 삿된 고집을 일으키면 소견이라고 하거니와 다른 것과 견주어 헤아리면 젠 체함이라 한다. 이와 같은 삿된 고집은 바로 무명의 품류(無明品)이며 이것을 우선으로 삼아 탐착을 일으킴을 애욕의 품류(愛品)라고 한다. 이 두 가지 근본 번뇌로 말미암아 나고 죽는 가운데서 유전하되 끊이지 않거니와, 만약 착한 말씀의 법과 비나야 안에서 바르게 수행하는 이면 이와 같은 네 가지 섞여 물듦을 끓고 현재의 법 안에서 잘 열반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서 마지막의 원만한 열반에 머무르게 되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은 이면 오히려 저 갈래(彼分)의 열반에서조차 머무를 수 없거든 하물며 마지막(究竟)의 것이겠는가, 이것을 세 번째의 두 기억의 차별이라 한다. 또 이 안에서 소견과 젠 체함을 높이 본다(高視)고 하고, 애욕을 말하여 연기(烟)라고 한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모든 행 안에서 소견과 젠 체함에 가리워진 이면 그 성품이 나쁘고 하열한 모든 행의 체상(體相)을 사실대로 모르는지라 사람이며 하늘의 몸과 그 뭇 기구들에 대하여 ‘높고 훌륭하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저 두 가지를 말하여 높이 본다고 하며, 애욕은 마치 연기와 같아서 마음을 요란하게 하고 안온할 수 없게 하는지라 이 때문에 연기라고 한다. 다시 다음에 우다아나로 말하리라.
싫증 냄이 없음과 욕심이 없음과 어지러움이 업는 문답과 모양(相)과 장애와 희기함(希奇)과 원인이 없음(無因)과 헐뜯음과 순수하고 물이 듦(純染)은 함께 나중이니라.
두 가지 믿는 이(信者)가 있되, 믿는 이로서의 하는 일이 알맞지가 아니하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집에 있으면서 믿는 이이니, 그는 열반에 대하여 날카롭게 하려함(樂欲)에 편안히 머무르지 못하고 이 하려함으로써 의지할 바로 삼아 언제나 부지런히 모든 착한 법을 닦아 익히지 않는지라 현재 법 안에서는 열반하지 아니한다. 이것과 반대이면, 믿는 이로서의 하는 일에 알맞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안 법(內法) 안에서 요약하여 두 가지의 총명을 갖춘 이가 있다. 어떤 깨끗한 믿음 있는 이에게 혹시 외도들이 와서 청하여 묻는 때에는 어지러움이 없이 답하나니, 중도(中道)에 의하여서이다. 모든 행 안에서 생멸을 묻는 때에는 유정(有情)을 더하지도 아니하고 실제 일(實事)을 덜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행에 대한 나고 없어짐만을 벌여 세워 어지럽지 않게하면서 대답한다. 만약 유정에 남이 있고 없어짐이 있다고 세우면 이것을 첫째의 치우침이라 하나니, 더함의 치우침(增益邊)이다. 만약 나고 없어짐이 도무지 아무 것도 없다고 세우면 이것을 둘째의 치우침이라 하나니, 덜함의 치우침(損減邊)이다. 다만 모든 행에 대한 나고 없어짐을 벌여 세우는 이것만이 중도이어서 두 치우침을 멀리 여읨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만약 이와 같이 대답하면 잘한 대답(善記別)이라 하나니, 여래의 칭찬하는 바다. 혹은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무슨 인연 때문에 사문고 오타마(喬答摩)에게서 맑은 행(梵行)을 닦고 익히는가라’고 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앞에서와 같이 말하여야 한다. 더함과 덜함의 두 치우침을 멀리 여의고 중동 의하여 답함을 어지럽지 않은 답(不亂記)이라 한다. 만약 유정이 물듦과 깨끗함을 닦아 익힌다고 말하면 이것은 첫째의 치우침이니, 더함의 치우침이다. 만약 모두를 도무지 닦아 익힘이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둘째의 치우침이니, 덜함의 치우침이다. 만약 모든 행을 위하여 싫증 내어 여의고 없애고자 하여 닦아 익히면 이것은 중도로서 두 치우침을 멀리 여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이 답을 어지럽지 않은 답이라 하기도 하고, 잘한 답(善記)이라고도 한다. 이 대답이야말로 모든 부처님네가 찬탄하는 바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법(法)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함이 있음(有爲)이요, 둘째는 함이 없음(無爲)이다. 이 안에서, 함이 있음은 바로 무상한 성품이어서 세 가지 함이 있음의 모양을 시설하게 되나니, 첫째는 남(生)이요 둘째는 없어짐(滅)이요, 셋째는 머물면서 달라지는 성품(住異性)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모양은 두 가지 행의 유전(流轉)에 의하여 벌여 세우나니, 첫째는 난 몸이 차츰차츰 유전함에 의하며, 둘째는 찰나마다 차츰차츰 유전함에 의한다. 처음의 유전함에 의한다 함은, 저 여러 유정들의 중동분(衆同分) 안에서 처음 나는 것을 남이라 하고, 마지막 없어짐을 없어짐이라 하고, 두 중간의 젖먹이 등의 자리에서 머물면서 달라지는 성품을 세우고 수명으로 머무르는 것까지를 머무름(住)이라 하며, 모든 자리가 뒤로 갈수록 바뀌고 변하여지는 차별을 머무르면서 달라지는 성품이라고 한다. 나중의 유전함에 의한다 함은 저 모든 행이 찰나찰나마다 새롭게 나는 것을 남이라 하고 나서 찰나 이후에 머무르지 아니함을 없어짐이라 하고, 난 찰나만이 머무르기 때문에 머무름이라 한다. 달라짐의 성품(異性)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달라지는 성질(異性)의 달라짐의 성품이요, 둘째는 바뀌어 변하는(轉變) 달라짐의 성품이다. 달라지는 성질의 달라짐의 성품이라 함은 모든 행이 비슷하게 계속되면서 구르는 것이며, 바뀌어 변하는 달라짐의 성품이라 함은 비슷하지 않게 계속되면서 구르는 것이다. 이 달라짐의 성품은 머무는 모양을 떠나서 그 밖에 따로 바탕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두 가지를 하나로 삼아 한 가지 모양으로 시설하였다. 이것과 반대이면 항상 머무르는 함이 없음의 세 가지 모양인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열반의 양식(涅槃資糧)을 닦고 쌓는데에 요약하여 세 가지 장애가 이나니, 첫째는 광대한 사업에 의하여 재보가 완전히 갖추어져서 방일을 많이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선지식이 방편으로 알아듣게 일러줌이 업는 거이며, 셋째는 아직 바른 법을 듣지 못하였고 아직 바른 법을 만나지 못하다가 갑자기 죽을 인연을 만나 때 아닐 적에 죽는 것이다. 이것과 반대면 장애 없는 것으로서 역시 세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성인들은 장차 죽으려 하는 때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의 성인으로서의 모양이 이나니 죽으려 할 적에 (1)모든 감관이 깨끗하여지며, (2)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는 것이다. 세 가지의 모양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은 과거 세상의 모든 성인들을 위하여 성인으로서의 성품(性聖)을 수기하셨고, 종성(種性)이 원만하기 때문에 물류(物類)만을 수기하셨다. 나는 이미 법과 법에 따름(法隨法)을 분명히 알았다. 함의 법이라 함은 바른 소견의 앞의 행인 거룩한 도이며, 법에 따른다 함은 저 법에 의하여 다른 이 음성을 듣고서 이치대로 뜻을 짓는 것이다. 또 나는 일찍이 바른 법의 의지할 바 곳(所依處)을 괴롭히거나 어지럽히지 않았다 함은 이런 이치를 위하여 여래는 타이르셨고 이런 이치를 위하여 널리 말씀한 바가 있나니, 내지 모든 샘(漏)으로 하여금 영원히 다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서 이미 샘을 다하게 되었다. 다시 다음에 모든 부처님 여래에게는 두 가지의 심히 희기한 법이 있나니, (1)아직 믿지 않은 이를 믿게 하고 이미 믿은 이면 더욱 더하게 하며, (2)빠르게 성인의 가르침에 깨달아 들 수 있게 하나니, 큰 스승의 모양의 가르침에 깨달아 들 수 있게 하나니, 큰 스승의 모양(大師相)과 혹은 가르침의 모양(法敎相)과 혹은 이미 첫째가는 덕 모양(第一德相)을 증득하여 널리 시방에서 아름다운 명예와 광대한 칭송이 두루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다. 또 원인 없다는 이론(無因論)과 나쁜 원인이란 이론(惡因論)의 설명을 제거시키고 온갖 바른 원인의 이론(正因論)의 설명을 껴잡아 들인다. 왜 그러냐 하면, 원인 없다는 이론과 나쁜 원인이란 이론을 설명함은 오히려 사람 하늘의 착한 갈래와 즐거운 해탈에 나아가려고 하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들의 훌륭한 알음(勝海)의 의지할 데도 아니거든 하물며 그 나머지이겠는가. 장차 나아가 들 바로서 바른 원인의 이론을 설명함은 그 모양이 그것과는 반대인 줄 알아야 한다. 큰 스승의 모양이라 함은 바가바안(薄伽梵)이야말로 이는 참된 여래로 공양 받을 만한이며, 바르고 평등하게 깨들으신이며, 내지 세존이시니, 자세한 해석은 앞의 섭이문분(攝異門分)에서와 같다. 가르침의 모양이라 함은 바른 법을 말씀하되 처음이나 중간 그리고 맨 나중도 잘하시나니, 더 자세한 설명은 역시 섭이문분에서와 같다. 첫째가는 덕 모양을 증득하셨다 함은, 온갖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 대하여 저절로 통달하고 현전에 평등하고 바르게 깨달으신 것이다(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이 안에서 욕심 세계를 이 세계라고 하고, 형상 세계ㆍ무형 세계를 다른 세계라 하며 현재와 과거의 두 세계가 따로따로이기 때문에 이것을 둘째의 차별인 줄 알아야 한다. 스승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기 때문에 저절로(自然)라고 하며, 여섯 가지 통혜(通慧)를 실제 얻은 바이기 때문에 증득하였다(作證)고 하며, 모든 유정에서 가장 첫째가기 때문에 원만하다고 하며, 이 첫째가는 성품을 저절로 알기 때문이고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열어 보인다(開示)고 한다. 다시 다음에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원인이 없다는 이론을 하는 이는 모든 행 안에서 원인이 없다 함을 고집하며 구르나니, 모든 행의 일어나는 인연과 없어져 다하는 인연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이 남(生)으로 말미암아 저 모든 행이 나고 이 없어짐(滅)으로 말미암아 저 모든 행이 업어지나니 이 두 가지 일을 증득하지 못하였다. 또 모든 행의 성품 모양을 증득하지 않고서 이러한 소견을 일으키고 이러한 이론을 세우되 ‘있는 것은 결정코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은 결정코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은 생길 수도 없고 있는 것은 없어질 수도 없다’라고 한다. 곧 이런 이론을 하는 이는 세 가지 자리 안에서 실제로 모든 해의 나고 없어짐을 증득하여 온갖 세간이 다 함께 분명히 통달할 바 굵고 얕은 현량(現量)을 헐뜯고 거역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실제 저 여러 찰제리 바라문 또는 폐사(吠舍)등의 집에 모든 남녀의 화합(和合)하는 인연을 보건대, 혹은 여덟 달을 지나서 혹은 아홉 달이 다되면 아들ㆍ딸을 낳으며, 이와 같이 낳은 뒤에는 혹은 어떤 무리는 그때에 수명이 다하여 일찍 죽기도 하며, 또 어떤 무리는 오래 살아가면서 지탱하되 혹은 괴롭고 혹은 즐겁고 혹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자리의 차별된 마음의 모든 마음 법이 모두가 이는 새로운 것이어서 옛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요약하여 두 가지의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헐뜯음이 있나니, 말만을 함과 설법을 하고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말 뿐이어서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헐뜯으면 그는 착하지 않은 선비의 법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을 얽매고 요란시킬 뿐이므로 이것은 자신을 헐뜯는다고 하나니, 훌륭하고 어질고 착한이가 아니다. 또는 설법을 하고 바른 행을 행하는 이는 비록 칭찬과 헐뜯음이 없다손 치더라도 이는 진실로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이다. 또 모든 여래는 바른 법을 널리 말씀하여 빨리 두 가지의 무지(無智)를 무너뜨려 없앴나니, 바르지 않은 법을 듣고서 훌륭한 알음 등을 내어 오랫동안에 쌓고 모은 견고한 무지와 오래 익히지는 않았으되 근자에 낸 무지이다. 다시 구생(俱生)으로 말미암아 착한 갈래에 나아갈 길을 분명히 모르고, 또한 현재 법의 열반에 나아갈 길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열한 가지 모양으로 모든 행을 통틀어 포섭하여 세워서 행으 무더기(行聚)로 삼는 줄 알아야 한다. 무더기라는 뜻을 바로 쌓임(蘊)의 뜻이다. 또 한결같이 섞여 물듦의 인연의 뛰어난 힘으로 말미암아 취온(取蘊)을 세우나니, 취온은 바로 샘이 있음(有漏)뿐인 줄 알아야 한다. 또 섞여 물듦과 맑고 깨끗함과의 인연의 두 가지 뛰어난 힘으로 말미암아 온 쌓임(總蘊)을 세우나니, 이 쌓임은 샘과 샘이 없음(漏無漏)에 다 통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세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모든 행안에서 번뇌가 일어나나니 (1)의지할 바(所依) 때문이요, (2)반연할 바(所緣) 때문이요, (3)돕는 짝(助伴)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우다아나로 말하리라.
욕심 적음(少欲)과 자성 등(自性等)과 답의 세가지(記三)와 비슷한 정법(似正法)과 의혹(疑)과 어리석음(癡)의 처소와 답하지 않음(不記)과 변하여 무너짐과 큰 스승의 답(不師記)와 세 가지 소견의 원만함(三見滿)과 외도의 어리석은 모양(外愚相) 등이니라.
세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여래의 마음은 욕심 적은 머무름(少欲住) 안에 드나니, 첫째는 그 때의 교화할 일의 마지막으로 말미암아 현법락주(現法樂住)에 편안히 머무르려고 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제자가 바른 행의 문(正行門)에서 깊이 싫증 냄을 말미암아서며, 셋째는 언제나 즐거이 많은 사업을 영위하는 교화할 바 유정을 교화하고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또 앞의 설명에서와 같이 여래의 고요한 하늘 머무름(寂靜天住)에 드는 온갖 인연은 이 안에서도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교화할 바 이들에게는 요약하여 세 가지의 조복할 바 성품이 있나니, 첫째는 어리석고 방일한 성품이며, 둘째는 극히 하열한 마음의 성품이며, 셋째는 바른 행을 닦는 성품이다. 다시 다음에 네 가지의 모양으로 말미암아 네 가지 처소에서 공경함의 머무름(恭敬住)을 내어 빨리 위없음(無上)을 증득하나니, 첫째는 얻어야 할 바에 대하여 맹렬하게 즐거이 하려함을 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얻는 방편인 법과 법에 따라 수행함에 대하여 맹렬하게 좋아함을 내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스승에 대하여 맹렬하게 사랑과 공경을 내기 때문이요, 넷째는 말씀한 바 법에 대하여 맹렬하게 깨끗한 믿음을 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세 가지의 위없음이 있나니, 미묘한 지혜(妙智)의 위없음과 바른 행(正行)의 위없음과 해탈(解脫)의 위없음이다. (1)미묘한 지혜의 위없음이라 함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와 배울 것 없는 이의 정견지(正見智)이다. (2)바른 행의 위없음이라 함은 낙속통행(樂速通行)이다. (3)해탈의 위없음이라 함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不動心)의 해탈이다. 이 안에서는 통틀어 지단(智斷)의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설명한 줄 알 것이다. 배울 것 있는 이의 미묘한 지혜와 바른 행과 해탈은 위없음이라 이름할 수 없나니, 아직도 위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아라한의 행은 다 낙속통행이라 하게 되는 줄 알지니, 온갖 추중(推重)이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이요, 온갖 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보리 갈래(菩提分)에 의하여 모든 행을 선택하기 때문에 두 때(二時)의 안에서 네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사실대로 사트카아야 소견을 두루 알며, 바로 두 때에 끊임없이 모든 샘(漏)이 영원히 다하여짐을 증득한다. 무엇이 두 때냐 하면, 첫째는 범부 자리(異生地)에 있음이요, 둘째는 견도 자리(見地)에 있음이다. 무엇이 네 가지의 모양이냐 하면 첫째는 자성(自性) 때문이며, 둘째는 처소(處所) 때문이며, 셋째는 함께 일어남(等起) 때문이며, 넷째는 결과(果) 때문이다. 자성 때문이라 함은, 모든 행의 자성의 사트카아야 소견과 다섯 가지의 행이니, 그는 헤아려 나라는 하기도 하고, 혹은 내것이라 하기도 한다. 처소 때문이라 함은, 반연할 바 대경(所緣經)이다. 함께 일어남 때문이라 함은, 소견의 고집(見取)에 포섭된 무명의 닿임(無明觸)이 느낌을 내어 반연으로 하는 욕망(愛)이다. 여기에는 다시 다섯 가지의 인연이 일어나는 차례가 있다. 요소(界)의 갖가지 성품을 반연으로 하여 닿임의 갖가지 성품을 내며, 닿임의 갖가지 성품을 반연으로 하여 느낌(受)의 갖가지 성품을 내며, 느낌의 갖가지 성품을 반연으로 하여 욕망으 갖가지 성품을 내며 욕망의 갖가지 성품을 반연으로 하여 잡음(取)의 갖가지 성품을 내나니, 대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은 바탕이 반드시 무상하다. 결과 때문이라 함은 세 때에 사트카아야 소견으로 장애가 되나니, 첫째는 나 없음(無我)의 체찰법인(諦察法忍)에 의하는 때요, 둘째는 현관(現觀)하는 때요, 셋째는 아라한이 되는 때이다. 이 안에서 어느 때는 저 수면(隨眠)의 사트카아야 소견의 뛰어난 힘으로 말미암아 미혹이 있고 의심이 있거니와 많이 닦아 익히는 체찰법인의 인연 때문에 비록 의혹은 조금 제거된다고는 하나 체현관(諦現觀)을 닦고 익히는 때에 의요(意樂)로 말미암아 열반에 대하여 ‘나는 장차 없으리라’고 함을 두려워하며, 이 수면의 사트카아야 소견의 뛰어난 힘 때문에 모든 행 안에서 삿된 분별을 일으키어, ‘나는 당연히 끊어져야 하고, 나는 당연히 무너져야 하며, 나는 당연히 없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열반에 대하여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과 아무것도 없다는 소견을 낸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열반에서 그 마음이 물러나서 나아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때에 비록 이 허물에 좇아 그의 마음을 깨끗이 닦고 또 거룩한 진리에서 이미 현체(現諦)를 얻었다손 쳐도 그러나 ‘나는 체현체를 잘 증득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 뽐냄에 대한 수면 때문에 오히려 아직도 여읠 수 없다. 또 때때로 기억을 잊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나를 살피면서 뽐냄을 일으키며, 이 뽐냄의 얽음(慢纏)으로 인하여 차별하면서 구르되, ‘나는 보다 훌륭하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똑 같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보다 못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의 두 자리에서는 수면의 힘으로 말미암아 장애가 되고, 셋째의 자리에서는 습기(習氣)의 힘으로 말미암아 장애가 된다. 또 세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행이 생장하나니 첫째는 지난 세상의 업과 번뇌의 힘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서원한 힘으로 말미암아서요, 셋째는 현재의 뭇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서다. 범부 자리에서 두루 알기 때문에 견도 자리 안에서는 끊임없이 견도에서 끊을 바 모든 샘이 영원히 다하게 되며, 견도 자리 안에서 두루 알기 때문에 다음에는 남은 맺음(結)을 끊어서 아라한이 되어 끊임없이 모든 샘이 영원히 다함을 증득한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모든 행 안에서 이치대로 문답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첫째는 자성(自性) 때문이요, 둘째는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의 근본 때문이요, 셋째는 환멸 때문이요, 넷째는 유전때문이요, 다섯째는 유전과 환멸의 방편 때문이다. 자성 때문이라 함은,빛깔(色) 따위의 다섯 가지, 자성인 줄 알아야 한다. 유전과 환멸의 근본 땜문이라 함은 욕심(欲)이니, 착한 법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샘이 영원히 다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이 욕심을 환멸의 근본이라고 한다. 만약 이 욕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장차 인간 안의 하류가 되겠으며, 내지 장차 범중천(梵衆天)들의 중동분(衆同分) 안에 나겠다’라고 원하면서, 이 마음에 친근하고 닦아 익히며 많이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나게 되나니, 이 때문에 이 욕심을 유전의 근본이라고 한다. 환멸 때문이라 함은, 모든 행 안에서 탐내어 취함(貪取)만을 끊어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행에 나아가 이것이 취함의 성품(取性)이라 하면 없앨 수 없어야 하나니, 아라한도 오히려 모든 행은 현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행과 다르게 취함의 성품이 있다고 하면 이는 함이 없음(無爲)이어야 하고 함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또한 없앨 수 없나니, 이 때문에 취함의 성품은 이는 모든 일부만의 포섭하는 바다. 바로 이 일부는 이미 끊어져 없어지게 되어 마침내 행하지 않기 때문에 환멸하여야 한다. 유전 때문이라 함은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뒤의 존재(後有)의 원인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품류(品類)의 차별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현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뒤의 존재의 원인이라 함은 어떤 사람이 장차 오는 세상을 원하고 좋아하여 모든 업을 지으면서 생각하기를, ‘원컨대, 저는 오는 세상에 장차 이 행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뒤의 존재의 모든 행의 내는 원인을 이끌면서 현재의 것을 이끌지 아니하고 그는 현재에서 이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행은 두 가지가 있을 뿐이라고 시설한다. 품류의 차별이라 함은 열한 가지 모든 행의 품류이니,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현재의 원인이라 함은 짓는 바 물질은 네 가지 원소(四大種)로 인하여 느낌 등의 마음 법은 닿임으로써 반연을 삼으며 있는 바 모든 알음(識)은 이름과 물질(名色)을 반연으로 삼는다. 유전의 방편이라 함은 사트카아야 소견을 의지할 바로 삼기 때문에 모든 행 안에서 젠 체함과 모든 맛 사랑함(愛味)과 나와 내것이라는 소견을 낸다. 환멸의 방편이라 함은, 모든 해에서 젠 체함을 멀리 여읨과 허물을 보며, 아울러 그것에서 벗어나는지라 나와 내것이 없다. 또 유전의 방편이라 함은 무명의 욕망 품류(無明愛品)이니, 그 알맞음에 따라서 그의 모양을 알아야 한다. 환멸의 방편이라 함은 그것의 다스림(對治)이다. 또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슬기롭지 않은 성문 제자들은 큰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어 나쁜 소견 안에 떨어지며, 혹은 언설을 일으킨다. 무엇이 두 가지 인연이냐 하면, 첫째는 세속의 진리(世俗諦)에 어리석으며, 둘째는 으뜸가는 진리(勝義諦)에 어리석은 것이다. 이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서 한결같이 세속의 진리의 도리에 어기기만 하고, 한결같이 으뜸가는 진리의 도리에 어기기만 하여 행의 유전에 대하여 바르게 생각하지 아니한다. 다시 다음에 세 가지의 곳에서는 오직 성인만이 그 좋아하는 바에 따라 사실대로 답하는 것이요 모든 범부들은 그러지 못하나니, 다른 이로부터 들은 것만은 제외한다. 모든 행 안의 나와 내것이라는 소견의 나는 사실대로가 아니거늘, 만약 그것을 의지로 삼아 젠 체함을 두어 구른다면 그는 비록 이미 끊었다 하더라도 이 젠 체함은 모두가 아직 끊어지지 못했으며, 만약 일으키는 의지가 없이 젠 체함이 끊어지지 않으면 예전대로 현행한다. 이 안에서는 두 가지의 젠 체함을 알아야 하리니, 첫째는 모든 행에 집착하여 현행하며, 둘째는 기억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현행한다. 이 안의 집착하여 현행하는 젠 체함은 성인에게는 이미 끊어져서 다시는 현행하지 않거니와, 둘째의 젠 체함은 수면으로 말미암아서 사트카아야 소견이 비록 영원히 끊어졌다 하더라도 성인의 도에서 아직 잘 닦기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어나서 현행한다. 사트카아야 소견은 습기만으로 있어서 언제나 붙따르는 바라 기억하지 않을 때에는 젠 체함의 의지할 바가 되어 주어 잠깐 현행하게 하나니, 이 때문에 이 뽐냄 역시 아직 끊어지지 못했을뿐더러 현행하게 된다고 한다. 또 모든 성인들은 모든 행에서 제 모양을 생각하여 오히려 젠 체함으로 하여금 다시 현행하지 않게 하거든, 하물며 공통의 모양을 살펴봄이겠는가. 만약 가정의 법에서 뜻을 짓고 생각하여 바른 기억에 머무르는 이라면 또한 젠 체함으로 하여금 현행할 수 없게 하거니와 만약 가정의 법에서 뜻을 짓고 생각하여 바른 기억에 머무르지 아니하면 그 때에는 젠 체함이 잠시 현행하게 된다. 만약 모든 범부들이면 비록 모든 행에서 공통한 모양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젠 체함 때문에 어지러운 마음이 계속되거든 하물며 다른 자리에 머무름이겠는가. 또 사트카아야 소견은 성인으로 상속하는 동안에는 수면과 얽음(纏)의 모두는 이미 끊어져 다하였거니와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자리(學位) 안에서는 습기가 붙따라서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못하는지라 젠 체함의 수면은 얽음과 함께 모두 아직 끊어지지 못한다. 또 나라는 욕심을 헤아리는 이는 바로 이는 젠 체함의 얽음에 속한 줄 알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욕심에서나 선정에서 모든 맛 사랑함 때문에 빠져 떠내려가는 이는 이 욕심의 문에 의하여 모든 젠 체함의 얽음이 자주자주 나타나고 일어난다. 아직 끊지 못했다 함은 수면으로 말미암아서이며, 아직 두루 알지 못했다 함은 저 얽음으로 말미암아서 그는 그때에 기억을 잊기 때문이며, 아직 없어지지 못했다 함은 비록 이 얽음에서 잠시 멀리 여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윽고 다시 현행한다는 것이며, 아직 뱉지 못했다 함은 저 수면을 아직 영원히 뽑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말은 행(梵行)을 같이하는 이는 그와 다른 맑은 행을 같이하는 이에게 요약하여 두 가지의 위문함(慰問)이 있나니, 첫째는 병고(病苦)를 위문하며 둘째는 안락함(安樂)을 위문한다. (1)병고를 위문한다 함은 그에게 묻기를 ‘앓고 있는 병이 어찌 참을 만합니까’라고 하나니, ‘기식(氣息)에 옹색함이 없느냐’의 물음이다. ‘버틸 수 있읍니까’락 함은, ‘괴로운 느낌이 더하지는 않는다.’ ‘끊임없는 것은 아닌가.’‘심려를 어기지는 않는가.’‘몸을 억누르지는 않는가.’‘혹은 몸을 억누른 것이 풀리게 되었는가.’라고 하는 위문이다. 안락함을 위문한다 함은, 어떤 사람이 묻는 바에 따라 ‘질병은 없는가’라고 함을 말한다. 이것은 ‘걸린 병에게 괴로워 하지 않는가’의 위문이다. ‘괴로와함이 적는가’라고 함은, 이것은 ‘바깥의 모든 재앙 때문에 시달리지는 않는가’의 위문이다. ‘기거(起居)가 가쁜한가’라고 하는 이것은 ‘밤의 잠이 편안하였던가.’‘들은 음식이 소화는 잘되었는가’라는 위문이며, ‘즐거웠는가’라고 하느 이것은 ‘죄없는 닿임(觸)에 머무를 수 있었는가’라는 위문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차별된 언사는 성문지(聲聞地)의 ‘마시고 먹고 함에 분량을 알라’라고 하는 것 안에서의 해석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위문은 네 가지 자리 안에 있나니, 첫째는 안의 시달려 괴로와하는 갈래요, 둘째는 바깥의 시달려 괴로와하는 갈래요, 셋째는 밤에 머무르는 갈래요, 넷째는 낮에 머무르는 갈래이다. 다시 다음에 ‘모든 아라한은 현재 법 안에서 음식물에 대하여 쌓임(五蘊)과 계(十八界)와 처(十二處) 등을 업신여긴다’고 말하거니와, 따름과 따르지 아니함(順不順)을 사실대로 모르고서 ‘아라한은 따르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따르지 않는다의 이것은 이치대로가 아닌 허망한 분별이니, 아라한이 현재 법에서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저 음식물에 대하여 쌓임과 계와 처 등을 업신여긴다는 것이 현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아라한들은 죽은 뒤에는 모든 행을 따르지도 아니하고 분명히 집착하지도 않나니 이 때문에 세존은 말씀하시되, ‘아라한은 바로 따르지 않는 이 아니라’고 하셨거니와, 결정코 비밀한 말씀이시다. 이것은 바로 비슷한 정법(似正法)의 소견인 줄 알아야 한다. 두 가지 이치의 세력을 반연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 맑은 행을 같이하는 이거나 혹은 큰 성문을 이와 같이 생기는 바 비슷한 정법의 소견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극히 공력을 쓰나니, (1)그 사람으로 하여금 혹은 스스로가 자세히 말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보이어 이 인연을 말미암아 극히 아래 갈래(下趣)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2)혹은 여래의 거룩한 가르침을 사랑하고 공경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비슷한 정법의 소견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으로 하여금 빠르게 숨어 없어지지 않게 된다. 다시 두 가지 원인이 있어서 이와 같은 비슷한 정법의 소견을 내나니, 첫째는 안의 사트카아야 소견을 아직은 영원히 끊지 못해서며, 둘째는 이것에 의하여 망령되이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의 사람(士夫)을 헤아린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인을 끊기 위하여 두 가지의 바른 법을 설명함으로써 다스림을 삼나니, 모든 행에서 차례로 (1)무상함과 (2)나없음을 널리 말한다. 네 글귀 안에서 유전과 환멸의 사람을 추구하건대 도무지 있을 수 없나니, 함이 있음(有爲)에 의하거나 혹은 함이 없음(無爲)에 의한다. 성문과 독각과 부처님, 세존은 나를 설명하되 여래(如來)라고 한다. 이 나는 두 가지의 가정으로 세운 것인 줄 알아야 하나니, 남은 의지가 있는(有餘依) 안에서는 함이 있음을 가정으로 세우고 남은 의지가 없는(無餘依) 안에서는 함이 없음을 가정으로 세운다. 만약 으뜸가는 이치(勝義)에 의한다면 함이 있음이 아니고, 함이 없음이 아니며, 함이 없음도 아니고 함이 있음도 아니다. 이러한 바른 법의 가르침을 설명함으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모양에서 깨달아 앎이 나는 때에는 비슷한 정법의 소견이 영원히 끊어진 줄 알아야 한다. 아라한은 (1)의지(依)의 포섭하는 바에서 사라져 무너지는 법이기 때문에 무상임을 깨달아 알며, (2)현재법 안에서 늙고 병듦 따위의 뭇 괴로움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이는 괴로움임을 깨달아 알며, (3)저절로 사라짐과, (4)끊어짐의 경계(斷界)와 (5)여읨의 경계(離界)와 (6)사라짐의 경계(滅界)에서 사라짐과 고요함과 맑고 깨끗함 및 영원히 업어짐을 깨달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바르게 깨달아 아는 이면 바로 아라한이리라 하여 뛰어난 체함(增上慢)과 함께 행하여지는 망령된 생각조차 오히려 있게 되지 않거든, 하물며 이와 같이 그가 죽은 뒤에 따른다 따르지 않는다의 쓸모 없는 이론에 집착함이겠는가. 아직 사트카아야 소견을 끊지 못하면 두 가지 허물이 있는 줄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해되고 괴로움이 있는 모든 행에서 나와 내것을 집착하나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사에 헤매는 큰 고통을 받는다. 둘째는 현재 법에서 위없는 거룩한 지혜의 목숨 뿌리(聖慧命根)를 장애하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스스로가 원수를 해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알고서 그의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먼저 그와 친하게 되어 뜻대로의 일로써 실제 받드는 때에 그 원수가 친하여 졌음을 알고 나서는 문득 그의 생명을 해치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범부도 그와 같아서 원수와 비슷한 사트카아야 소견이 장차 괴로움과 해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사랑의 속박(愛縛)을 일으켜 뜻에 맞는 행으로써 실제 받드나니, 이와 같은 어리석은 범부들은 해가 되는 사트카아야 소견에서 공덕만을 볼 뿐 허물을 보지 않고서 간절하게 친하여 붙좇으며, 친하며 붙좇은 뒤에는 아직 물러나게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지혜의 목숨 뿌리를 손해시킨다고 한다. 다시 다음에 모든 외도의 무리는 안(內)의 법과 계율과의 두 가지 처소에 의혹하고 어리석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부처님 세존은 있다(有)는 소견과 없다(無有)는 소견을 비방하면서도 제자의 죽은 뒤에 하나는 태어남이 있다고 답하고 하나는 태어남이 없다고 답한다. 또 으뜸가는 이치의 항상 머무름의 나(常住之我)는 현재 법에서나 장차 오는 세상에서나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세상에는 세 스승이 있으며 현전에서 인정할 수 있나니, 첫째는 항상하다고 논하는 이(常論者)요, 둘째는 아주 없다고 논하는 이(斷論者)요, 셋째는 여래(如來)이다. 여기에 의혹하고 어리석은 이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나니, 앞의 비슷한 정법의 소견과 같은 줄 알 것이다. 두 가지 가르침(法敎)으로 이 원인을 끊는 것 역시 앞의 설명과 같은 두 가지 인연을 말미암는다. 곧 여기에 말한 바 나없음의 법 성품은 저 모든 외도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나니, 이 자성은 분명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며 비록 이 모습은 분명히 알기 쉽다고는 하나 그 모습은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안에서는 거짓이 없는 이치요 스스로가 증득할 바의 이치요 이는 특수한 이치이므로 저 자성은 깨달아 들기 어렵다. 곧, 이 자성은 바탕이 이는 매우 깊고 매우 깊은 것 같이 나타나나니,이 때문에 거짓이 없는 이치라고 한다. 또 이 자성은 안에서 보기도 어렵고 다른 이의 말소리를 따라 역시 깨달아 알기도 어렵나니, 이 때문에 스스로가 증득할 바라고 한다. 또 이 자성은 찾아 생각함으로 찾아 생각할 바가 아니고 헤아리는 이의 행할 바 경계가 아니니, 이 때문에 이는 특수한 이치라고 한다. 또 이 법은 미묘하고 자세하여서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가 안에서 증득할 바이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차별들은 앞의 섭이문분(攝異門分)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온갖 여래께서 말씀한 바 이치의 지혜를 모두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가르침의 지혜(敎智)요, 둘째는 증득함의 지혜(證智)이다. (1)가르침의 지혜라 함은, 모든 범부의 듣고ㆍ생각하고ㆍ닦아서 이루는 바 지혜이다. (2)증득함의 지혜라 함은 배울 것 이는 이와 배울 것 없는 이의 지혜 및 뒤에 얻는 바의 모든 세간의 지혜이다. 이 안에서 범부는 온갖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 이치를 모두 분명히 알 수 없고 또한 뽐냄(慢)에 대하여도 이것이 뽐냄이라고 깨달아 살피지 않을뿐더러 아직 끊을 수도 없으며 만약 배울 것 있는 이(有學)라면 나라는 소견의 온갖 이치 안의 것을 모두 분명히 모르고 또 뽐냄에 대하여는 이것은 뽐냄이라고 깨달아 살피면서도 아직 끊을 수 없거니와 만약 배울 것 없는 이(無學)들이면 온갖 것을 다 한다. 다시 다음에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세속의 진리에 으뜸가는 진리를 모두 사실대로 아시는지라 바르게 살피어 저 두 가지의 도리를 다하시지 않는다. 만약 답한다면 이치 없음(無義)을 이끌기 때문에 답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멸도 후의 있다ㆍ없다ㆍ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는 것도 없는것도 아니다 함에 대하여 만약 여래면 이와 같은 지견(智見)을 우선하여 답하지 않거니와, 무지한 이는 스스로가 망령된 소견과 함께 행하여지는 무지(無智)의 성품을 드러내는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요약하여 두 가지의 변하여 무너짐(變壞)이 있는 줄 알아야 하리니, 첫째는 모든 행이 쇠퇴하고 늙는 변하여 무너짐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나이 백 20이어서 그의 형용이 쇠로함과 같나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늙고 병든다(身老者)고 한다. 둘째는 마음의 근심으로 변하여 무너짐이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늙고 병든다(心老病)고 한다. 첫 번째의 변하여 무너짐은 어리석은 이거나 지혜로운 이거나 간에 모두가 그 안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아니한다. 두 번째의 변하여 무너짐은 지혜로운 이는 그 안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거니와 어리석은 이들은 그렇지는 못하다. 또 어리석은 범부들은 만약 몸이 늙고 병들면 그 마음은 결정코 따라서 늙고 병들거니와 지혜 있는 이는 몸은 비록 늙고 병든다손 치더라도 마음은 자재로와서 늙고 병듦에 따르지 않는 줄 알아야 하리니, 이것을 이 안의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별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법을 잘 취하는 이는 듣고 생각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잘 생각하는 이는 닦음의 지혜(修慧)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는 있는 바 성품 그대로(如所有性)이기 때문이며, 잘 통달한 이는 있는 바 성품을 다함(盡所有性) 때문이다. 두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인 제자들은 바르게 청하여 묻고 큰 스승은 잘 대답하시나니, 모든 고집(取)의 끊음(斷)과 두루 앎(遍知)에 대한 이론이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이 모든 고집의 끊음과 두루 앎에 대한 이론이며, 둘째는 이 모든 고집의 끊음과 두루 앎을 위한 이론이다. 이 안에서, (1)온갖 행의 끊음과 두루 앎에 대하여 이론함은, 이른바 여래(如來)인 줄 알아야 한다. (2)또 이 모든 고집을 만약 아직 끊지 못하면서 따라 살피면 거기에는 세 가지의 허물이 있거니와 만약 이미 끊어 없애서 따라 살핀다면 거기에는 세 가지의 공덕이 있다. 첫째는 모든 행 안에서 나는 바 모든 고집의 행이 만약 변하여 무너지면 근심 따위가 생기나니, 이것을 첫째의 허물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하리니, 이미 모든 행의 변하여 무너짐의 하는 일을 만났다. 둘째는 모든 행 안에서 나는 바의 모든 고집은 이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착하지 않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네 가지 괴로움에 머무른다. 첫 번째는 장차 앞에 나타날 이웃에서 일어나는 바요, 두 번째는 바로 앞에 나타난 현재에서 일어나는 바요, 세 번째는 다른 이의 핍박의 뛰어남에서 일어나는 바요, 네 번째는 자기의 섞여 물듦이 뛰어남에서 일어나는 바이니, 이것을 둘째의 허물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셋째는 바로 이와 같은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사랑하고 익힘이 원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져서 죽은 뒤에는 나쁜 갈래에 가나니, 이것을 셋째의 허물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것과 반대이면, 모든 고집을 끊고 따라 살핌에 있어서의 세가지 공덕인 훌륭한 이익이니, 알맞는 대로 알아야 한다. 다시 다음에 요약하여 세가지의 성인(聖者)이 있어서 세가지 소견(見)이 원만하여 세가지 고통을 뛰어나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세가지의 성인이 되느냐 하면 첫째는 바른 소견을 두루 갖추었음이니, 뒤바뀜이 없이 법나없음(法無我)의 지혜(忍)에서 범부의 지위에 머무는 이이다. 둘째는 이미 거룩한 진리를 보았고 이미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나아가 들었고 이미 현관(現觀)에 들었고 이미 과위에 이르게 된 배울 것 있는 이의 지위에 머무는 이이다. 셋째는 이미 최후의 마지막이며 첫째가는 아라한 과위를 얻어서 배울 것 없는 이의 지위에 머무는 이이다. 무엇을 세가지의 소견이 원만하다 하느냐 하면, 첫째는 처음 성인으로서의 따르는 샘이 없음(無漏)과 샘이 있음(有漏)의 소견이 원만하며, 둘째는 아직은 아주 깨끗하여지지 못한 샘이 없음의 소견이 원만하며, 셋째는 아주 맑고 깨끗한 샘이 없음의 소견이 원만한 것이다. 이 세가지의 원만함은 세가지의 푸드갈라를 설명함에 의한다면 그의 차례대로이니,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세가지의 고통을 뛰어난다 하느냐 하면, 첫째 소견의 원만함은 외도의 나라는 소견의 어김과 다툼(違諍)으로부터 나는 바의 뭇 고통을 뛰어나며, 둘째 소견의 원만함은 온갖 나쁜 갈래의 뭇 고통을 뛰어나며 셋째 소견의 원만함은 온갖 뒤의 존재의 뭇 고통을 뛰어난다. 이 안에서 (1)무엇을 모든 외도의 나라는 소견의 어김과 다툼으로부터 나는 바의 뭇 고통이라 하느냐 하면, 이 바른 법과 비나야 이외에 있는 바 세간의 갖가지 다른 도(異道)는 사트카아야 소견을 근본으로 삼아서 나는 바 온갖 뒤바뀐 소견 갈래(見趣)인 이와 같은 모두를 통틀어서 나라는 소견이라 하나니, 나라고 논하는 이의 나라는 이론과 상응한 온갖 소견 갈래인 혹은 온갖 것이 항상하다고 논하는 이(一切常論者)와 혹은 일부만이 항상하다고 논하는 이(一分常論者)와 혹은 원인이 없다고 논하는 이(無因論者)와 혹은 끝이 있고 없다고 논하는 이(邊無變論者)와 혹은 아주 없어진다고 논하는 이(斷滅論者)거나 혹은 현재 법이 열반이라고 논하는 이(現法涅槃論者)의 그 이론과 상응한 온갖 소견 갈래이다. 혹은 유정이라 논하는 이(有情論者)의 그 이론과 상응한 온갖 소견 갈래이니, 모든 삿된 소견으로 온갖 바꿔나기(化生)의 유정을 없다고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비방한다. 혹은 생명이라 논하는 이(命論者)의 그 이론과, 상응한 온갖 소견 갈래이니, 생명이라 논하는 이는 몸에 붙었다 하기도 하고 혹은 몸과는 다르다고 하는 따위의 헤아림이다. 혹은 길상이라 논하는 이(吉祥論者)의 그 이론과 상응한 온갖 소견 갈래이니, 삼라(參羅)와 역산(歷算)과 복서(卜筮)를 살펴보는 갖가지 삿된 이론으로서 망령되이 주문을 외고 불에 제사지낸다는 등은 사랑한 바 경계를 얻고 길상이 생기며 옳지 않음을 끊는다고 헤아린다. 또 상(相)을 보고서 상서롭고 상서롭지 않다고 헤아린다. 그것은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스무 구절(二十句)의 사트카아야 소견을 의지할 바로 삼아 과거와 미래를 망령되이 헤아리는 예순 두 가지의 모든 나쁜 갈래를 일으키며 통틀어 모두를 비방하는 삿된 소견을 일으킨다. 무엇을 어김과 다툼으로부터 나는 바의 뭇 고통이라 하느냐 하면, 그것은 차츰차츰 소견의 욕심과 서로 어긋나면서 서로가 쟁론(諍論)을 일으키어, 갖가지의 마음에 근심하고 괴로워는 고통과 깊이 사랑하여 간직하는 고통과 서로가 훌륭하다거나 못하다는 고통과 굳이 집착하는 고통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안에서 만약 다른 이가 훌륭한 바면 곧 근심하고 괴로워하나니, 이것을 첫째의 고통이라 한다. 만약 다른 이보다 훌륭하면 마침내 방편을 쓰면서 자신의 소견 품류로 하여금 더욱 더 왕성하게 하고 다른 이의 소견 품류로 하여금 점차로 숨어 어둡게 하며, 자기 소견만이 깨끗한 것이요, 다른 이 소견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삿된 소견에 집착하여 깊이 사랑하며 간직하나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바르지 않는 찾고 생각함(尋思)을 내며 갖가지의 고요하지 않은 뜻을 일으켜 그 마음을 손해되게 함을 둘째의 고통이라 한다. 삿된 소견을 사랑하고 간직하는 뛰어난 힘 때문에 다른 이와 자기를 헤아리면서 ‘자기가 보다 훌륭하다’하고 혹은 ‘똑 같다’하기도 하고, 혹은 ‘보다 못하다’함으로 인하여 스스로가 높은 체하며 다른 이를 업신여기나니, 이것을 셋째의 서로가 훌륭하다거나 못하다는 고통이라 한다. 그는 이것에 의한 까닭에 이끗을 추구하는 괴로움에게 접촉 당하며, 무릇 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가 괴롭힘과 어지러움을 이루어 다른 이 이론을 힐책하고, 자기 이론을 위하여 다른 이의 힐난을 벗어나나니, 이것을 넷째의 굳이 집착하는 고통이라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소견의 어김과 다툼으로부터 나는 바의 뭇 고통이라 한다. 안 법(內法)의 범부는 상등 품류의 나없음의 훌륭한 알음에 편안히 머물러서, 이미 이러한 뭇 고통을 끊은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장차 오는 세상에 대한 의요(意樂)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따위의 나쁜 소견 갈래를 없애 보낼 만하나니, 이 때문에 만약 처음 소견의 원만함에 머무르면 능히 첫째의 고통을 뛰어난다. 또 이 첫째의 소견의 원만함에 의하여 친근하고 닦아 익히고 극히 많이 닦아 익히어 안의 모든 행에서 법지(法智)를 내고 나타나 보이지 않은 데서 유지(類智)를 내고 나타나 보이지 않은 데서 유지(類智)를 내어서는 한데 포섭하여 하나의 무더기로 삼고서 다른 것을 반연하지 않는 지혜로써 현관(現觀)에 드나니 무상한 행이거나 혹은 그 어느 하나의 다른 행으로써 그는 그때에 그에 따라 둘째의 소견의 원만함을 증득하여 둘째의 고통을 뛰어난다. 그는 여기에 머무른 뒤에 먼저 얻었던 바 그대로의 일곱 가지 깨달음 갈래법(七覺分法)에 친근하고 닦아 익히고 극히 많이 닦아 익히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네 가지 업(業) 등의 섞여 물듦을 끊고 그에 따라 맨 나중의 소견의 원만함을 증득하여 뒤의 존재의 고통을 뛰어난다. 이 안에서 첫째의 푸드갈라는 아직도 두 가지 고통을 남기고 현재의 의지할 바(所依) 몸의 고통을 남기면, 둘째의 푸드갈라는 한 고통과 의지인 몸의 고통만을 남기거니와 셋째의 푸드갈라는 온갖 고통이 끊어지고 다만 의지인 몸의 고통만이 잠시 남아 있게 되나니, 비유하면 허깨비(幻化)와 같다. 또 분별하는 사트카아야 소견에 의하여 스무 구절을 세우되 구생(俱生)에 의하지 아니하며, 또 안 법을 지닌 이는 이와 같은 행이 없고 변처정(遍處定)에 의하되, 자리(地)를 곧 나로 삼고 나가 곧 이는 자리이니, 더 자세한 설명을 모두 알아야 되리라. 다시 다음에 모든 외도의 무리에는 요약하여 다섯 가지의 어리석은 범부 모양(愚夫相)이 있나니, 그 모양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은 범부의 수에 떨어진다. 모든 외도들은 성품됨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조차 오히려 총명하고 지혜로운 체함을 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총명하거나 지혜롭지 않은 이이겠는가. 이것을 첫 번째의 어리석은 범부 모양이라 한다. 모든 외도들은 많은 이가 이끗과 공경을 탐내고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찬양하고 다른 이를 헐뜯나니, 이것을 두 번째의 어리석은 범부 모양이라 한다. 또 모든 외도들은 모든 성인이 그를 위하여 바른 법ㆍ바른 가르침ㆍ바른 경계를 말하면 바로 거역하면서 꾸짖고 헐뜯나니, 이것을 세 번째의 어리석은 범부 모양이라 한다. 또 모든 외도들은 기뻐하면서 스스로가 비슷한 정법의 이론(似正法論)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열어 보이나니, 이것을 넷째의 어리석은 범부 모양이라 한다. 또 모든 외도들은 비록 여래와 여래의 제자에게 항복 당하면서 또한 여래의 말씀한 바 법과 계율이 이는 참되고 착한 말씀인 줄도 알고 자기들의 법과 계율은 이는 망령되고 나쁜 설명인 줄 알기는 하나 젠 체함의 뛰어난 힘으로 말미암아 도무지 믿어 받지 아니하며 내지 쌓임(集)의 인연으로 자세히 살피지 않나니, 이것을 다섯 번째의 어리석은 범부 모양이라 한다. 다시 다음에 여래는 여섯 갈래를 성취한지라 간단없이 논하는 사자왕(無間論師子王)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 무엇이 여섯 가지냐 하면, 이른바 (1)맨 처음에 외도로서 이론에 적이 되는 이(敵論者)에게 나아가 그 온갖 이들을 마음대로 묻되 무릇 일으키는 바의 이론은 쟁론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모든 유정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그가 아직 믿지 못한 이면 그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하고 만약 이미 믿음이면 갑절 더 믿게 하는 것만은 제외한다. 또 (2)이론을 일으킬 때에는 모든 감관이 고요하여서 형색에 변함이 없을뿐더러 두려워하는 습기(習氣)가 붙따름이 없다. 또 (3)마침내 모든 하늘과 세간에게 승복당하지 아니하고 온갖 세간의 이론에 대적할 이가 없으며, 흩뜰어뜨리어 한 번 뒤지고 설명하여 한 번 뒤칠 뿐으로 모두를 꺾고 누른다. 또, (4)모든 세간에서 극히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거나 극히 두려움이 없는 이도 만약 여래와 함께 이론을 일으킬 때에는 있던 바의 변재가 모두 다 어눌해지고 뛰어난 두려움이 몸과 마음을 핍박하며 온갖 술수의 거짓된 언론을 모두 베풀 수가 없게 된다. 또, (5)온갖 동일한 모임 자리에 있는 대중들은 모두가 부처님에게 다른 이보다 훌륭하다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저 외도로서 이론에 대적한 이에게는 다른 이가 이긴다는 마음을 일으킨다. 또, (6)부처님ㆍ세존의 언사는 위엄 있고 엄숙하거니와 그 이론에 적이 되는 이의 내는 바 언사는 위엄과 엄숙함이 없다. 다시 다음에 두 가지의 이론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나가 있다는 이론(有我論)이요, 둘째는 나가 없다는 이론(無我論)이다. 나가 없다는 이론은 힘이 있되, 나가 있다는 이론은 힘이 없다. 나가 있다고 논하는 이는 언제나 나가 없다고 논하는 이에게 굴복되거니와 논하는 이로서 그 힘이 미약한 이만은 제외한다. 무엇을 나가 있다고 논하는 이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이 이와 같은 소견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을 세우되 빛깔 따위의 행에서 세워 나로 삼나니, ‘나에게는 행이 있고 행은 바로 내것이며, 나는 행 안에 있어서 흐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두루 뼈마디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빛깔 따위의 모든 행의 성품인 나는 모든 행의 밭에 의하여 복과 복 아님을 내며, 이로 인하여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아니한 과보를 받아들이나니, 비유하면 농부가 좋은 밭에 의지하여 농업을 영위하며 그리고 약초를 심고 숲이 우거진 것과 같다. 이것을 나라는 이론이라 한다. 무엇을 나가 없다고 논하는 이라 하느냐 하면,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나를 깨뜨리는 이론이요, 둘째는 나 없음을 세우는 것이다. 나를 깨뜨리는 이론이라 함은, 만약 실아(實我)는 작용이 있고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모든 결과 업 안에서 자재함을 얻는다고 하면, 여기의 나는 항시 즐거움을 기뻐하고 괴로움을 싫어하나니, 이 때문에 여기의 나는 복만을 내어야 하고 복 아님을 내지 않아야 한다. 또, 나의 작용이 언제나 앞에 나타나 있으면 안팎의 모든 해이 만약 변하여 달라지는 때에는 조심ㆍ걱정ㆍ슬픔ㆍ한탄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또, 나가 이는 항상하다고 하면 깨달음으로써 우선이 되어 무릇 일으키는 바는 언제나 따라 구르면서 변하거나 바뀌어짐이 없어야 하는데도 그러나 그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것을 나가 있다는 이론을 깨뜨린다고 한다. 나없음을 세운다 함은 온갖 행은 뭇 인연으로부터 나는지라 만약 복의 인연을 만나면 복이 곧 생기고 이것과 반대면 복 아닌 것이 생긴다. 이것이 반연이 됨으로 말미암아 온갖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를 초래하고 뭇 인연에 의하기 때문에 모두가 이는 무상하며 다만 이와 같은 인과에 포섭된 모든 행의 유전에서만이 나 따위를 가정으로 세우거니와 만약 으뜸가는 이치에 의한다면 온갖 모든 법의 모두가 나 없음 따위이니, 이와 같은 것을 나가 없다는 이론을 세운다고 한다. 다시 다음에 다섯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배울 것 있는 이(有學)와 배울 것 없는 이(無學)의 두 가지가 차별된다. (1)모든 배울 것 없는 이가 성취한 바의 지혜를 위가 없음이라 하거니와 온갖 배울 것 있는 이가 성취한 바 지혜를 위가 있음이라 한다. 지혜에서 위가 없음이 그러한 것처럼, (2)바른 행과 (3)해탈의 위가 없음에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4)모든 배울 것 없는 이는 아주 청정한 모든 거룩한 지혜 눈(慧眼)으로써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자세히 살피거니와 배울 것 있는 이는 그렇지 아니하다. 또, (5)모든 배울 것이 없는 이는 아주 원만한 뒤바뀜이 없는 행으로써 여래를 받들어 섬기거니와 배울 것 있는 이는 그렇지 않나니, 이것을 다섯 가지 모양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