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_0237_a_01L어떠한 것을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라 이름합니까? 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ㆍ무상이숙(無想異熟)ㆍ명근(命根)ㆍ중동분(衆同分)ㆍ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無常)ㆍ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ㆍ이생성(異生性)ㆍ유전(流轉)ㆍ정이(定異)ㆍ상응(相應)ㆍ세속(勢速)ㆍ차제(次第)ㆍ시(時)ㆍ방(方)ㆍ수(數)ㆍ화합(和合) 따위를 가리킨다. 이 같은 심불상응행은 마땅히 오문(五門)으로 그 차별을 건립하는 것이니, 의처(依處)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자체적인 바탕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가립(假立)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작의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지(持)에 기인하기 때문이니, 두 가지 무심정(無心定)에서 5문이 구족된다. 무상천(無想天)의 이숙에서는 작의가 제외되나 나머지는 오직 초선과 제3선뿐이다. 어떠한 것이 ‘득(得)’입니까? 선법(善法)ㆍ불선법(不善法)ㆍ무기법(無記法)이 늘어나거나 또는 줄어든다고 가립(假立)하여 그 성취를 일으키는 것이다. 선법ㆍ불선법ㆍ무기법에서 늘어나거나 또는 줄어든다고 가립(假立)하여 획득이라 하는 것이다. 【釋】‘선법ㆍ불선법ㆍ무기법’이란 의처를 드러내는 것이고, ‘늘어나거나 또는 줄어든다는 것’은 그 자체적인 바탕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어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에 상품의 신(信) 따위를 ‘획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획득을 가립한다는 것’이란 가립을 드러내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밖의 다른 것에 있어서도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건립됨을 숙지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무상정(無想定)불상응행법’입니까? 변정천(遍淨天)의 욕을 이미 여의었으나 그 상계(上界)의 욕을 미처 여의지 못했기에 그 출리상(出離想)을 작의(作意) 심소법에 앞세우는 까닭이다. 그 불항행(不恒行)의 심ㆍ심소가 소멸되는 것을 가립하여 무상정이라 한다. 【釋】‘변정천의 욕을 이미 여읜 것’이란 이미 제3정려의 탐을 여읜 것이다. ‘그상계의 욕을 미처 여의지 못했다는 것’이란 제4정려 이상의 탐을 미처 여의지 못한 것이다. ‘그 출리상을 작의 심소법에 앞세운다는 것’이란 해탈상(解脫想)의 작의를 작전(作前)의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불항행’이란 전식(轉識)에 수렴하는 것이다. ‘소멸된다는 것’이란 정심에 끌려진 불항행이 현행해서 모든 심ㆍ심법이 잠시동안 의존하는 지위의 차별을 소멸시키는 것이니, 능히 소멸하는 까닭에 ‘소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멸진정(滅盡定)불상응행법’입니까? 무소유처의 욕을 이미 여의고서 유정천을 초월하되 그 잠식상(暫息想)을 작의심소법에 앞세우는 까닭이다. 모든 불항행의 심ㆍ심소와 항행(恒行)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심ㆍ심소가 소멸하는 것을 가립하여 멸진정이라 한다. 여기에서 그 상계의 욕을 미처 여의지 못한 것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유정천의 욕을 여읜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니, 아라한 따위도 역시 이 같은 정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釋】‘항행의 일부분’이란 염오의(染汚意)에 수렴된 것을 말한다. 어떠한 것이 ‘무상이숙(無想異熟)불상응행법’입니까? 무상(無想)의 유정천(有頂天)에 이미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불항행의 심ㆍ심소가 소멸하는 것을 가립하여 무상이숙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명근(命根)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衆同分)에 있어서 예전의 업에 감득(感得)하는 것이니, 그 머무는 때의 결정을 가립하여 수명이라 한다. 【釋】‘중동분’이란 일생 동안 여러 온이 상속하는 것이다. ‘머무는 때가 결정된다는 것’이란 시간적으로 제한받는 바가 평등하게 중동분에 처해서 언제나 안정되게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니, 백 년이나 천 년 동안 그 수명이 이어지는 것도 업에 인도된 공능의 차별에 연유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중동분(衆同分)불상응행법’입니까? 이러이러한 모든 유정들이 종류에 따라 그 자체가 서로 비슷한 것을 가립하여 중동분이라 한다. 【釋】‘종류에 따르는 것’이란 인간이나 천상 따위의 종류를 차별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란 동일한 종류의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생(生)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서의 제행에는 본시 금생의 유(有)가 없으나 가립하여 생이라 한다. 외부의 갖가지 색 따위도 역시 생겨나는 모양이 있는데, 어째서 중동분만을 거론합니까? 유정이 상속하는 것에서 ‘유위의 모양’을 건립하려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외부의 갖가지 색 따위의 유위의 모양은 그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에서 나타나 보이지만 내부적인 모든 행의 ‘유위의 모양’은 생ㆍ노 따위에서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노(老)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서 모든 행의 상속이 변이하는 것을 가립하여 늙는 것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주(住)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서 모든 행의 상속이 변하여 소멸되지 않는 것을 가립하여 머무는 것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무상(無常)불상응행법’입니까? 중동분에서 모든 행의 상속이 변이하는 것을 가립하여 무상이라 한다. 【釋】‘변이한다는 것’이란 수명을 마치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니, 여기에서 그 상속하는 지위에 의거하여 생 따위를 건립하는 것이지 찰나(刹那)에 의거하지 않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명신(名身)불상응행법’입니까? 제법의 자체적인 성품에 처해서 그 언설이 늘어나는 것을 가립하여 명신이라 한다. 【釋】‘자체적인 성품에 처해서 그 언설이 늘어난다는 것’이란 천상과 인간의 눈ㆍ귀 따위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구신(句身)불상응행법’입니까? 제법의 차별에 처해서 그 언설이 늘어나는 것을 가립하여 구신이라 한다. 【釋】‘차별에 처해서 그 언설이 늘어난다는 것’이란 제행이 무상하기에 일체의 유정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문신(文身)불상응행법’입니까? 그 두 가지에 의지하는 각종 문자를 가립하여 문신이라 한다. 이 같은 ‘문’이란 그 두 가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또 나타내 드러낸다[顯]고도 이름하나니 능히 그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또 명자(名字)라고도 하니, 그 의미가 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그 두 가지에 의지하는 각종 문자’란 자체적인 성품이나 차별에 처해서 그 언설이 늘어나는 것에 의지하는 각종 문자 즉 아(■:a)ㆍ일(壹:i)ㆍ오(鄔:u) 따위이다. 또 자체적인 성품과 차별에 어우러진 이 두 가지의 언설이 일체를 모두 수렴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일체가 이 세 가지에 연유해서 그 뜻을 표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세 가지를 건립하여 명신ㆍ구신ㆍ문신으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 ‘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능히 그 두 가지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 ‘나타내 드러낸다’고도 이름하니 능히 이치를 내부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명자라고도 하니 그 의미가 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입니까? 눈의 경우처럼 그 ‘눈’이란 명칭은 달라질 수 있으니, 이 같은 이름 외에 다시 유조(有照)와 요도(了導) 따위의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를 수 있으므로, 저것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상(想)을 동일하게 표출하기 때문이다. 아( )ㆍ일(壹) 따위의 글자가 아ㆍ일 따위의 차별 이외의 것으로 벗어나지 않고 이 차별에 머물러 있어야만 이러한 뜻을 표출할 수가 있다. 따라서 글자로 인해 다른 것으로 이전되지 않는 것을 명자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釋】‘글자 때문에 이전되지 않는 것’이란 변하여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이생성(異生性)불상응행법’입니까? 성법(聖法)을 얻지 못한 것을 가립하여 이생성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유전(流轉)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을 가립하여 유전이라 한다. 그리하여 오직 상속이 끊어지지 않는 것에서 유전을 건립하는 것이지 찰라나 또는 간단(間斷)이 있는,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어떠한 것이 ‘정이(定異)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의 갖가지 차별을 가립하여 정이라 한다. 【釋】‘정이’란 인과의 갖가지 차별을 말하는 것으로, 가애과(可愛果)는 묘행(妙行)이 원인이 되고, 불가애과(不可愛果)는 악행(惡行)이 원인이 되는, 이와 같은 갖가지 인과가 전전(展轉)하는 차별이다. 어떠한 것이 ‘상응(相應)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서로 대칭되는 것을 가립하여 상응이라 한다. 【釋】‘인과가 서로 대칭된다는 것’이란 비록 그 종류가 다른 인과 과가 서로 순응하는 것도 서로 대칭한다고 이름한다. 예를 들어 보시 따위에 연유해서 부유해지는 것과도 같다. 어떠한 것이 ‘세속(勢速)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신속하게 유전하는 것을 가립하여 세속이라 한다. 어떠한 것이 ‘차제(次第)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하나하나 차례대로 유전하는 것을 가립하여 차제라고 한다. 【釋】‘하나하나씩 유전한다는 것’이란 함께 전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것이 ‘시(時)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상속하여 유전하는 것을 가립하여 시간이라고 한다. 어째서입니까? 유(有)에 연유해서 인과가 상속하여 전변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같은 인과가 이미 생겨났다가 이미 소멸하였다면, 이를 과거의 시간으로 건립하게 된다. 만약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면 미래의 시간으로 건립하고, 이미 생겨났으나 미처 소멸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시간으로 건립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방(方)불상응행법’입니까? 동ㆍ서ㆍ남ㆍ북과 네 간방[四維]과 상ㆍ하의 인과가 서로 차별적인 것을 방향이라고 임시로 설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 가지 방위에 인과가 두루하게 존재하는 것을 방향이라고 가설하기 때문이다. 【釋】여기에서는 오직 색법에 수렴되는 인과만을 해설하고 있음을 숙지해야 한다. 무색의 법도 처소마다 두루하게 존재해 있으나 그 공능이 없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수(數)불상응행법’입니까? 제행을 하나씩 하나씩 차별하는 것을 가립하여 수라고 한다. 【釋】‘하나씩 하나씩 차별한다는 것’이란 ‘1’이란 숫자 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2’나 ‘3’ 따위의 숫자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화합(和合)불상응행법’입니까? 인과가 중연(衆緣)에 의해 모여지는 것을 가립하여 화합이라 한다. 【釋】‘인과가 중연에 의해 모여지는 것’이란, 흡사 식법(識法)처럼 인과가 상속하되 거짓된 중연이 화합하여 모이는 것이니, 근(根)이 무너지지 않는 것에서 경계가 현전하여 이 같은 식이 생기면 작의가 바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모든 것도 그 이치에 따라 숙지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심불상응행법은 오직 분위차별(分位差別)에 근거해서 건립되기 때문에 모두가 가유(假有)임을 숙지해야 한다. 선법과 불선법 따위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분위차별은 한 종류만을 건립하고, 심ㆍ심법에 대한 분위차별은 세 종류를 건립하고, 주(住)에 대한 분위차별은 한 종류를 건립하고, 상사(相似)에 대한 분위차별은 한 종류를 건립하고, 상(想)에 대한 분위차별은 네 종류를 건립하고, 언설에 대한 분위차별은 세 종류를 건립하고, 부득(不得)에 대한 분위차별은 한 종류를 건립하고, 인과에 대한 분위차별은 그 밖의 다른 종류로써 건립한다. 여기서 ‘인과’란 일체의 유위법이 능히 그밖에 다른 것을 생기게 하는 까닭에 인이라 이름하고, 또 그 밖의 다른 것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떻게 식온(識蘊)을 건립한다고 말합니까?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차별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을 ‘마음’이라 합니까? 온ㆍ계ㆍ처의 습기(習氣)에서 일체종자(一切種子)를 훈습(薰習)하는 아뢰야식을 가리킨다. 또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이름하고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은 모든 습기를 축적시키기 때문이다. 【釋】‘습기’란 온 따위의 변행(遍行)에 연유하여 그들의 종자를 모두 증익시키는 것이다. ‘일체종자식’이란 온 따위의 제법 종자를 능히 생기게 해서 축적시키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란 제법의 종자를 능히 거두어 저장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유정이 이를 취하여 자아로 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숙식’이란 예전의 업에 생겨난 것이다. ‘아타나식’이란 능히 되풀이해서 그 생겨난 것을 상속하는 것이다. 여러 근 따위를 지속시켜 무너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또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체법의 습기를 능히 축적시키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지하게 됩니까? 만약 이 같은 식이 없다면, 집수(執受)ㆍ최초(最初)ㆍ명료(明了)ㆍ종자(種子)ㆍ업(業)ㆍ신수(身受)ㆍ무심정(無心定)ㆍ명종(命終)의 생겨남조차 없게 되기에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 【釋】이 가타(伽陀)의 풀이는 섭결택분(攝決擇分)의 해설처럼 그 여덟 가지 모양에 연유해서 아뢰야식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케 되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을 여의고서는, 집수에 의지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최초로 생겨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명료하게 생겨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종자의 바탕이 되는 성품도 그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업의 바탕이 되는 체성도 그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신수(身受)의 바탕이 되는 성품도 그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무심정에 처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명종위(命終位) 이후의 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집수에 의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까? 다섯 가지 인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아뢰야식이 선행하는 원인이 되어 안식 따위에 감득해서 전식(轉識)을 현현하는 연에서 인이 발동되는 것이니, 근과 경에 처한 작의의 힘 때문에 모든 전식이 생겨난다고 해설하는 것이니 그 자세한 설명을 ‘첫 번째 원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6식신(識身)이 선과 악을 취득하는 것이 ‘두 번째 원인’이고, 또 6식신이 한 종류의 이숙무기(異熟無記)의 성품에 수렴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세 번째 원인’이 된다. 또 6식신이 각각 별도로 전의하되 그 의지하는 것에 순응해서 그와 같은 식이 생겨나는 때에, 즉시 그와 같은 식에 상응해서 그 의지하는 바를 집착하고 그 밖의 다른 것을 집수(執受)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설사 그 집수를 허용하더라도 도리에 맞지 않으니 이는 식을 여윈 까닭이다. 이것이 ‘네 번째 원인’이다. 또 그 의지하는 바를 되풀이해서 집수한다는 것도 착오이니, 왜냐하면 그들의 안식(眼識)에 연유해서 일시에 전향하지 않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식도 마찬가지이니 이것이 ‘다섯 번째 원인’이다. 어떻게 최초로 생겨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까? 그릇된 힐난[誤難]을 예로 들자면, “만약 아뢰야식이 있다고 하게 되면, 마땅히 하나의 유정 내에서 두 개의 식이 함께 일어나야 하리라”고 힐난하는 경우, 이 같은 상대방에게는 “그대는 허물이 아닌 것에서 허물이라는 생각을 망녕되게 내는구나. 어떻게 두 개의 식이 한꺼번에 전향하겠는가?”고 일러줘야 한다. 왜냐하면 마치 유일법(有一法)처럼 시간적으로 동일한 때에 보고자 하는 작용과 나아가 그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식에 따른다고 하는 경우, ‘최초로 생기한다는 것’ 자체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때의 작의에는 차별이 없기에, 근과 경계가 무너지지 않고 현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슨 인연으로 식이 함께 전행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명료(明了)의 생기(生起)가 불가능합니까? 만약 식이 구생(俱生)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되면, 안식 따위의 식과 하나의 경계에 함께 행사되는 명료의식(明了意識)도 불가능하다. 어째서입니까? 이러한 때에 예전에 지각했던 경계에 대한 기억에 부수되기 때문이다. 이때 의식에서 불명료가 생겨나는 것이니, 현실적 경계에서 생겨나는 의식이 아니다. 이와 같이 불명료한 모양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여러 식이 함께 전향하는 것임을 믿거나, 또는 저러한 제6의식에는 명료의 성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어째서 종자의 바탕이 되는 성품은 그 성립이 불가능합니까? 여섯 가지 전식신(轉識身)이 제각기 틀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여섯 가지 전식은 선(善)의 무간(無間)에서 간단없이 불선한 성품이 생겨나는 것이고, 불선(不善)의 무간에서 선한 성품이 생겨나는 것이고, 이 같은 두 가지의 무간에서 무기의 성품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계의 무간에서 중계(中界)가 생겨나고, 중계의 무간에서 묘계(妙界)가 생겨나고, 묘계의 무간은 하지에 이르러 생겨난다. 유루의 무간에서 무루가 생겨나고, 무루의 무간에서 유루가 생겨나고, 세간의 무간에서 출세가 생겨나고, 출세의 무간에서 세간이 생겨난다. 이 같은 모양의 인식이 존자의 바탕에 해당하지 않아야만 도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또 마음의 상속이 오랜 시간동안 끊어지더라도 그 오랜 유전(流轉) 자체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식이 종자를 지속시킨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어떠한 업의 쓰임새가 성립 불가에 해당합니까? 만약 모든 식이 동시에 생기하지 않는다면, 업의 쓰임새가 함께 전향한다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업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요별외기(了別外器)ㆍ요별의지(了別依止)ㆍ능요별아(能了別我)ㆍ요별경계(了別境界)를 말한다. 이 같은 네 종류의 식이 요별하는 업은 매 찰나마다 모두 현전하는 것이 가능하니, 하나의 식ㆍ하나의 찰나 가운데 이 같은 업의 쓰임새가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든 식은 구기(俱起)하는 것이다. 어째서 신수(身受)의 바탕되는 성품은 성립 불가에 해당합니까? 마치 유일처럼 이치에 맞게 사고하기도 하고 이치에 어긋나게 사고하기도 하고 사유하지 않기도 하고 다시 추리하기도 한다. 만약 마음이 정에 들었거나 정에 들지 않았거나 신수에서 생기는 하나이거나 매우 많거나 한 것은 아니다.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이 같은 신수가 어찌 생겨날 수 있겠는가? 이미 신수가 성립 가능하니 반드시 아뢰야식은 존재하는 것이다. 어떠한 처소에서 무심정이 성립하지 못하게 됩니까? 세존께서 “무상정 및 멸진정에 들어가더라도, 이때 식이 신체를 여의는 것이 아님을 숙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이러한 때 식이 마땅히 신체를 여의게 되리라. 식이 만약 신체를 여의게 되면, 바로 명근을 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정에 처한다 이를 수 있겠는가? 어째서 명근이 다하면 식이 성립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명근이 끝나는 때에 임해서 점차로 그 의지하던 신체를 여의게 되는 것이다. 차가운 촉감이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일어나면 그 사람의 의식이 남아있는 때에 전향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오직 아뢰야식만이 신체를 집지해서 그 신체의 분에 부수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약 이 같은 신체를 버리게 되면, 차가운 촉감이 일어나 신체의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의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명근이 다하는 때의 식은 성립할 수가 없다. 어떠한 것을 ‘의(意)’라고 합니까? 일체 시(時)에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연하여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는 것으로 그 성품을 이루는 것이다. 네 가지 번뇌와 항상 상응하는 것이니, 아견(我見)ㆍ아애(我愛)ㆍ아만(我慢)ㆍ무명(無明)을 가리켜 이 의(意)가 변행(遍行)한다고 한다. 일체의 선ㆍ불선ㆍ무기의 자리[位]에서 오직 성도(聖道)가 현전하는 것이 제외된, 멸진정(滅盡定)이나 무학지(無學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또 6식(識)은 그 식의 소멸이 간단없기에 의(意)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소연에 연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이치의 해석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상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생기하는 때에 기인하기 때문이니, 의식에서 현료(顯了)케 된다. 어떠한 것이 ‘성도가 현전한 무염오의 의(意)’입니까? 승의지(勝義智)에 연유해서 아견(我見)이 현행하는 것과는 극히 상반되는 것이니, 성도(聖道)를 마친 다음에 아뢰야식에서 다시 후득지가 현기(顯起)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지위에서 영원히 끊지 못했기 때문이고 멸진정은 무상정(無想定)을 희망해서 지극히 적정한 까닭에 이 같은 염오의가 현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釋】‘소멸이 간단없기에 의라고 하는 것’이란 그 지각에 따르는 것에 연유해서 간단없이 지각하는 이치가 ‘의’의 이치이다. 여기서는 그 표면에 드러난 모양을 해설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식’입니까? 육식신(六識身) 즉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안식’입니까? 안근이 색을 연하는 것에 의지해서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이식’입니까? 이근이 소리를 연하는 것에 의지해서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비식’입니까? 비근이 향기를 연하는 것에 의지해서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설식’입니까? 설근이 맛을 연하는 것에 의지해서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신식’입니까? 신근이 감촉을 연하는 것에 의지해서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어떠한 것이 ‘의식’입니까? 의근이 그 법을 연하는 것에 의지해서 구별하여 아는 것이 그 성품이다. 여기에서 그 소의(所依)에 기인하기 때문에, 소연(所緣)에 기인하기 때문에, 자체적인 성품[自性]에 기인하기 때문에 식을 건립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어떻게 ‘계’를 건립하게 됩니까? 색온이 곧 식계이니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의 계와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계 및 법계의 일부분[一分]이 이에 해당한다. 【釋】수온ㆍ상온ㆍ행온은 바로 법계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식온에는 7식계가 있으니, 안식계ㆍ이식계ㆍ비식계ㆍ설식계ㆍ신식계ㆍ의식계의 6식계와 의계(意界)이다. 어째서 계(界)와 처(處)의 건립에 별도의 모양이 없습니까? 온의 건립에서 이미 해설한 대로 안 따위가 각각 별도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러 온 가운데에서 출계(出界)를 건립하고 여러 계 가운데에서 출처(出處)를 건립하는 것이다. 어떻게 계법(界法)은 ‘온’에 소속되지 않습니까? 법계 내의 모든 것이 무위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무위법에는 다시 여덟 종류가 있으니, 선법진여(善法眞如)ㆍ불선법진여(不善法眞如)ㆍ무기법진여(無記法眞如)ㆍ허공(虛空)ㆍ비택멸(非擇滅)ㆍ택멸(擇滅)ㆍ부동멸(不動滅)ㆍ상수멸(想受滅)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건립된 여덟 가지 무위 중에도 소의의 차별이 있음을 숙지해야 한다. 진여의 가립을 분석하면 세 종류가 있으니 그 자체적인 성품에 연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법진여’란 어떠한 것입니까? 무아(無我)의성품이니공성(空性)ㆍ무상(無常)ㆍ실제(實際)ㆍ승의(勝義)ㆍ법계(法界)라고도 이름한다. 어째서 ‘진여’를 진여라고 이름합니까? 그 자체적인 성품이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釋】일체의 시분에서도 그 무아의 실다운 성품은 전향되지 않는 까닭에 ‘변이하지 않는다’고 해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무아의 성품임을 숙지해야 하니, 두 가지의 아(我)를 여읜 까닭이다.1) 어째서 다시 ‘공성’이라 이름합니까? 일체의 잡염에 천류(遷流)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왜냐하면 이것을 연하는 것에 기인해서 능히 일체의 모든 잡염사(雜染事)를 모두 공적(空寂)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또 어떠한 때에 잡염이 있다고 설명하더라도 이는 단지 객진번뇌(客塵煩惱)에 염오된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어떠한 것을 이름하여 ‘객진의 염오’라고 합니까?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종자를 뽑아내지 않은 것에 연유하는 것이다. 【釋】의타성(依他性)과 심(心)의 두 가지 행을 서로 전의시키는 비법한 성품의 마음이기에, 제법의 법상과 자체적인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시 ‘무상’이라 이름합니까? 일체의 모양이 모두 적멸하기 때문이다. 【釋】‘일체의 모양’이란 색ㆍ수 따위 내지는 보리를 말한다. 모든 희론되어지는 바가 진여의 성품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양이 적멸해지는 까닭에 ‘무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다시 ‘실제’라고 이름합니까? 전도됨이 없이 소연하는 성품을 가리킨다. 【釋】실제의 ‘실’이란 전도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같이 구경에 처하는 까닭에 ‘실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아의 성품을 투과하면 다시 구할 바가 없는 까닭이다. 어째서 다시 ‘승의’라고 이름합니까? 가장 수승한 성지(聖智)가 행해지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시 ‘법계’라 이름합니까? 모든 성문과 독각 및 모든 부처님께서 그 묘법을 소의(所依)하시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선법진여와 마찬가지로 불선법진여와 무기법진여도 이러함을 숙지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허공’입니까? 색이 없는 성품을 가리킨다. 일체의 조작된 업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색이 없는 성품이란 단지 색에 반대되는 것으로 성품이나 모양이 없는 법의 의식경계를 ‘허공’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의식 경계’란 법계에 수렴되기 때문에 단지 색에 반대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별도의 수 따위이기에 진여(眞如)ㆍ택멸(擇滅)ㆍ비택멸(非擇滅)ㆍ무상성 따위를 공유한다. 비록 토끼 뿔 따위도 역시 성품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제법과 반대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오직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다 또 토끼 뿔 따위는 색에 반대되지도 않고 수 따위의 제법과 공유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단지 색과 반대되는 것만이 성품이 없는 모양이고 별도의 수 따위이기에 ‘색이 없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 따위는 그 자체적으로 성품이 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성품이 없는 모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비택멸’입니까? 이것이 소멸해도 이계(離繫)하지 못하는 것이니, 영원히 해가 없는 수면(隨眠)인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택멸’입니까? 이것이 소멸하게 되면 바로 이계하는 것이니, 영원히 해가 되는 수면인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부동’입니까? 변정천의 욕을 이미 여의었으나, 미처 상계(上界)의 욕을 여의지 못하고 단지 괴로움과 즐거움이 소멸한 무위법이다. 어떠한 것이 ‘상수멸’입니까? 무소유처의 욕을 이미 여의었으되 잠식상(暫息想)을 작의심소법에 앞세우는 까닭에, 모든 불항행의 심ㆍ심소와 항행(恒行)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심ㆍ심법이 소멸한 무위법이다. 【釋】여기에서 두 가지의 응단법(應斷法)이 있음을 숙지해야 한다. 여러 번뇌 및 이것에 의존하는 수(受)이다. ‘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변이수(變異受)와 불변이수(不變異受)가 있다. 그 차례에 따라 고(苦)ㆍ낙(樂)ㆍ비고락(非苦樂)도 번뇌단(煩惱斷)임을 숙지해야 한다. 두 가지 수단(受斷)의 택멸을 건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차례에 따라 부동(不動)과 상수멸(想受滅)을 건립하게 된다. ‘번뇌단’이란 이 같은 품의 추중(麤重)을 제거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전의이다. ‘수단’이란 이것을 제거하고서 정의 장애를 능히 대치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전의이다. 그리하여 제2정려를 얻는 때에, 비록 고멸제(苦滅諦)을 증득하였더라도 무위를 건립하지는 못하니, 변이수를 끊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또 5종색이나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 및 여기서 해설한 여덟 가지 무위법을 총괄적으로 법계라고 이름한다. 어떻게 ‘처’를 건립한다고 합니까? 10색계가 바로 10색처(色處)이고, 7식계가 바로 7식처이고, 법계가 바로 법처이다. 이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모든 온ㆍ계ㆍ처가 3법에 소속되는 것으로, 바로 색온ㆍ법계ㆍ의처이다. 색온에 연유해서 10색계를 수렴하고, 법계는 바로 법계를 수렴하고, 의처는 7식계를 수렴하게 된다. 이리하여 3법으로 일체법을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온ㆍ계ㆍ처를 건립하였으니, 이제는 이 같은 이치에 편승하여 다시 분별을 세우고자 한다. 안근ㆍ이근ㆍ비근은 각각 두 개씩 있는데도, 어째서 21계를 건립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이 바로 두 개씩 있으나 그 계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왜냐하면 그 모양이 서로 비슷해서 안근의 모양을 갖춘 까닭이다. 또 그 이루는 바도 서로 비슷해서 안경에 갖춰져 있고 안식도 하나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근과 비근도 그 이치에 따라서 숙지해야 한다. 신체를 단정하게 하고자 각각 두 개씩 생겨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에 두 개씩 분포되어야 신체가 단정해지기 때문이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 하나하나의 문에 의지해서 안식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두 가지에 함께 의존해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두 가지에 의지해서 생겨나기에 취하는 것이 명료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입니까? 만약 두 눈을 모두 떠서 색을 취하는 것이 하나의 눈만 뜨는 것보다 명료하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방 하나에 두 개의 등잔을 켜서 함께 빛을 발하게 하는 편이 그 비추는 바가 지극히 명료해지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이 하나의 빛이 발하되 두 개의 등잔에 의지하여 전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도리도 이러함을 숙지해야 한다. 하나하나의 근문(根門)에서 갖가지 경계가 모두 그 앞에 드러나 있는 경우, 이같이 많은 경계가 많은 식으로 인해서 순서대로 일어납니까? 아니면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까? 식은 오직 한 가지이기 때문에 갖가지 행상이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만약 여러 가지 단식(段食)이 설근과 합쳐지는 때에도 신식과 설식의 두 가지 근이 언제나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또 소리가 사이사이 단절되더라도 이는 다른 처소에서 전전하여 생겨나고 상속되어 그 밖의 다른 방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등잔을 켜서 원래 자리에 놓아 두면 일순간에 그 세력에 따라 광명을 두루 발하는 것처럼 소리가 순식간에 두루 퍼지는 이치도 이와 같다. 어째서 근처에 장애가 있는 소리는 들어도 명료하지 않습니까? 소리는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장애를 만나면, 가늘어지거나 멀어지거나 희미해지거나 적어지는 경우가 발생하는 까닭에 명료하지 못한 것이다. 6식(識) 중에서는 몇 종류의 분별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의 의식이 세 가지 분별에 연유하는 까닭에 분별이 있다. ‘세 가지 분별’이란 자성분별(自性分別)ㆍ수념분별(隨念分別)ㆍ계탁분별(計度分別)을 말한다. 【釋】‘자성분별’이란 현재 감수(感受)되는 제행에 대한 그 자체적인 모양인 행의 분별이다. ‘수념분별’이란 예전에 감수된 제행에 대한 추억을 행하는 분별이다. ‘계탁분별’이란 나고 죽는 것과 같이 현재의 직접 볼 수 없는 일에 대한 그 행을 생각으로 그려보는 분별이다. 또 일곱 종류의 분별이 있으니, 소연에 대한 이문분별(異門分別)ㆍ유상분별(有相分別)ㆍ무상분별(無相分別)ㆍ심구분별(尋求分別)ㆍ사찰분별(伺察分別)ㆍ염오분별(染汚分別)ㆍ불염오분별(不染汚分別)이 있다. 처음의 ‘이문분별’이란 5식신(識身)이 그 소연하는 모양과 다른 것이 없는 분별이니 자체적인 경계에서 경계에 자유로이 전향하기 때문이다. ‘유상분별’이란 자성분별과 수념분별의 두 가지 분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과거나 현재의 경계에서 갖가지 모양을 취하기 때문이다. ‘무상분별’이란 미래의 경계를 기꺼이 구하는 행의 분별이다. 그밖에 나머지 분별들은 모두가 ‘계탁분별’을 써서 자체적인 성품을 삼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계탁하는 까닭이니, 혹 때에 따라 심구(尋求)하거나 때에 따라 사찰(伺察)하거나 때에 따라 염오(染汚)하거나 불염오(不染汚)하는 갖가지 분별을 내는 것이다. 만약 색 따위를 요별하는 까닭에 ‘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단지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을 ‘식’이라 이름하고 색 따위를 ‘식’이라 이름하지 않습니까? 안 따위의 다섯 가지에 의거한 해석에서 도리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지 색 따위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근 내에서 행해지는 식인 까닭에 ‘안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안처에 의지해서 인식되는 바가 생겨나기 때문이고, 또 안근의 존재에 연유해서 식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안근이 있는 경우 안식이 반드시 생겨난다고 하면, 장님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암흑 속에서도 능히 사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안근에서 발휘되는 식인 까닭에 ‘안식’이라 이름하고 안근의 변이에 따라 식도 변이하는 것이니, 색에는 변화하는 것이 없지만 식에는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황달병에 안근이 손상된 경우 청색 따위의 색이 모두 노랗게 보이는 경우와도 같다. 또 안근에 속하는 식인 까닭에 ‘안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식종자(識種子)가 안근에 부수되는 것에 연유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안근을 보조하는 식인 까닭에 ‘안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그것을 줄이거나 늘리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근이 식과 합쳐진 것에 연유하여 그 접수한 바가 근을 줄이거나 늘리는 것이지 경계에 연유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안근에 다다르는 식인 까닭에 ‘안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모두 유정수(有情數)에 수렴되기 때문이나 색은 그렇지도 못하고 결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안식이 이러한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식도 이와 같다. 안근으로 인해서 색을 보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식 따위로 인해서 보게 됩니까? 안근으로 색을 보는 것도 아니고 또한 식 따위로 색을 보는 것도 아니니 일체법은 그 작용이 없는 까닭이다. 유(有)의 화합에 연유하는 것이니, 이를 가립하여 ‘본다’고 하는 것이다. 또 여섯 가지 모양에 연유해서 안근이 색을 보는 것 가운데에서 가장 수승하게 되는 것이지 식 따위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안근이 여러 가지 색을 보게 된다고 해설하는 것이다. 【釋】어떠한 것이 그 여섯 가지 모양인가 하면, 첫 번째가 생인(生因)에 연유하는 것이니, 안근이 능히 그들 안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의처(依處)에 연유하는 것이니, 그 보는 작용이 안근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동요되어 전향하는 것이 없음에 연유하는 것이니, 안근은 항상 한 가지 종류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자유롭게 전향하는 것이니, 연이 결합하여 염념(念念)이 생겨나는 것이 대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그 꾸미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니, 이 같은 장엄에 연유해서 그 소의가 되는 신근을 전향시키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성스러운 가르침에 연유하는 것이니, 경전의 말씀처럼 안근이 능히 색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설한 여섯 가지 모양은 색 따위에서는 모두 불가능한 것이다. ‘식이 동요하여 전향한다는 것’이란 여러 종류의 차별이 일어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어째서 무위법을 계와 처에 건립하고 온에는 건립하지 않습니까? 온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색 따위의 제법에는 가고 오는 것 따위의 온갖 차별이 존재하기에 이를 총괄하거나 간략히 해서 그 축적된 것을 해설하여 ‘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釋】‘축적된 이치’란 바로 온의 이치이니, 상주하는 법에는 이 같은 이치가 없다. 그리하여 무위법은 온에 수렴되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이와 같은 법을 온ㆍ계ㆍ처의 문차별(門差別)로써 해설하는 것입니까? 교화 받는 유정을 자세하고 간략한 문에서 선교(善巧)가 생겨나게 하려는 것이다. 【釋】왜냐하면 온의 문 가운데에서는 색과 식을 간략하게 해설하고 계의 문과 처의 문에서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열일곱 가지를 자세히 해설하는 것이다. 또 온의 문에서는 수온ㆍ상온ㆍ행온 따위를 자세히 해설하고 계의 문과 처의 문에서는 이를 하나의 법계와 법처로 간략하게 해설한다. 또 온 가운데에서는 단지 유위법의 모양에 대한 해설을 건립하고, 계의 문에서는 능취와 소취 및 그 체성을 취하는 모양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건립하게 된다. 처의 문에서는 오직 능취와 소취만에 대한 해설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오직 취생문(聚生門)을 외부적으로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미 부차적으로 편승되는 이치를 따져 보았으니, 지금은 본문을 풀이하기로 한다. 안근과 안계에 대해 설명한 것처럼, 만약 안근이 있으면 안계도 있어야 합니까? 안계가 있게 되면 안근도 있게 됩니까? 혹 안근만이 있고 안계가 없는 것을 ‘아라한 최후의 안근’이라고 말한다. ‘혹 안계는 있으나 안근이 없는 것’이란 난각(卵㲉)의 갈라람(羯邏藍)에 처한 때나 알부타(頞部陀)에 처한 때나 폐시(閉尸)에 처한 때처럼 모태 속에 있어서 미처 안근을 얻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가령 있었다가 잃게 되거나, 만약 무색계의 이생(異生)이 안근의 인(因)을 가지고 있거나, ‘혹 안계도 있고 안근도 있는 것’이란 그 밖의 다른 지위라고 말한다. ‘혹 안근도 없고 안계도 없는 것’이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계에 이미 들어간 것과 여러 성자(聖者)가 무색계에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안근이 안계와 함께 하는 경우처럼, 이근ㆍ비근ㆍ설근도 이계ㆍ비계ㆍ설계를 동반하면서 그 처소에 따라 소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釋】‘아라한 최후의 안근’이란, 열반에 들어가는 때의 마지막 찰나를 가리킨다. 이때의 안근에는 안계도 없고 그 밖의 다른 안근의 인도 없기 때문이다. ‘무색계의 이생이 안근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타락하여 물러남에 따라 유색계에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아뢰야식이 안종자(眼種子)를 지속시키는 것에서 안근이 반드시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고, 또 그곳에 태어난 여러 성인들이 다시 물러서지 않는 까닭에 안계가 없게 된다. ‘신계는 있으나 신근이 없다는 것’이란 오직 무색계에 태어난 이생만을 가리킨다. 그들은 오직 신근의 원인만 있기 때문에 난각 따위에 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반드시 신근이 있는 까닭에, 만약 신근이 무너져 없어지면 수명 또한 다하게 된다. 의근과 의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만약 의근이 있으면 의계도 있어야 합니까? 의계가 있게 되면 의근도 있어야 합니까? 혹 의근만이 있고 의계가 없는 것을 ‘아라한 최후의 의근’이라고 말한다. 【釋】‘혹 의계는 있으나 의근이 없다는 것’은 멸진정에 처한 사람이 의근의 원인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혹 의근도 있고 의계도 있다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지위를 가리킨다. 또 ‘의근도 없고 의계도 없다는 것’이란 무여의열반의 계에 이미 들어간 것을 가리킨다. ‘오직 의계는 있으나 의근이 없는 것’이란 무상정에 들어가지 못한 때문이니 그들에게 염오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지위(地位)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경우, 즉시 그 같은 지위에 해당하는 안근으로 그 같은 지위에 있는 색을 볼 수 있습니까? 그 같은 지위에 해당하는 안근을 써서 다시 그 같은 지위에 있는 색이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지위의 색을 보게 된다는 것은, 만약 욕계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경우, 욕계에 미치는 안근으로 욕계(欲界)의 색을 보거나 색계에 미치는 안근으로 색계(色界)의 색을 보거나 상지(上地)에 해당하는 안근을 써서 하지(下地)의 색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안근으로 색을 상대하는 것처럼 이근으로 소리를 상대하는 것도 욕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와 같고 색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와 같다. 【釋】‘태어난다는 것’이란 처음 생을 받는 때이고, ‘자라난다는 것’이란 후천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욕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 즉시 욕계에 미치는 비근ㆍ설근ㆍ신근으로 다시 욕계에 미치는 향기ㆍ미각ㆍ감촉을 냄새 맡고 맛보고 지각하게 된다. 만약 색계에서 태어나 자라난 경우에는 즉시 색계에 미치는 신근으로 자신이 태어난 지위의 감촉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그 세계 자체가 정(定)으로 이루어져 향기와 미각이 없고 단식(段食)에 대한 탐욕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도리에 연유해서 색계에는 비식과 설식이 없다. 만약 욕계에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 즉시 욕계에 미치는 의근으로 색계의 법과 무루법을 요지하게 된다. 욕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것처럼 색계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도 이와 같다. 만약 무색계에 태어나 자라나는 경우 무색계에 미치는 의근으로 무색계에 미치는 자신이 태어난 지위에 존재하는 법과 무루법을 알게 된다. 【釋】‘무색계에 미치는 의근으로 무색계에 미치는 자신이 태어난 지위의 법과 무루법을 인식한다는 것’이란 성제자(聖弟子)에 근거해서 해설한 것이다. 만약 외도나 이생인 경우에는 오직 자신이 태어난 지위의 법만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법에 머문다는 것’이란 예전에 법을 듣고 훈습(薰習)된 힘에 연유해서 상지(上地)를 연하여 그러한 것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무루의 의근으로 삼계(三界)의 법과 무루법을 안다면, 어째서 모든 온에 이와 같은 차례가 있어야 합니까? 식에 연유하여 머물기 때문에 네 종류의 식주처(識住處)와 그 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전자는 후자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그 색의 상으로 접수하기 때문이고, 그 접수받는 대로 요지(了知)하기 때문이고, 그 요지하는 대로 사(思)를 이루기 때문이고, 사를 이루는 대로 각각의 처소에 따라 구별하여 알기 때문이다. 【釋】‘그 색의 모양에 따라 접수받는다는 것’이란 낙ㆍ수 따위의 근과 경의 두 가지 힘에 순종하는 것에 기인해서 낙과 수 따위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 접수받는 대로’란 여러 가지 모양을 취하기 때문이고, ‘요지하는 대로 사를 이루는 것’이란 그 생각한 바에 따라 여러 업을 조작하는 것이고, ’이루는 대로 각각의 처소에 따라 구별하여 안다는 것’이란 그 업을 이루는 바에 그 경계 가운데에서 식이 전변하는 것이다. 또 ‘그 염오(染汚)와 청정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만약 이 같은 처소에서 염정(染淨)을 일으키거나 그 접수받는 것에 연유해서 모양을 취하고 조작하는 것이다. ‘염오의 청정’이란 소염오(所染汚)이거나 소청정(所淸淨)이니, 모두 이 같은 이치에 연유해서 온의 차례를 해설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처에 의지해서 염정을 일으킨다는 것’이란 근을 갖춘 신체에 의지하는 것이다. ‘만약 접수받는 것에 연유해서’란 유염(有染)과 무염(無染) 따위에 연유해서 받는다는 것이기에 그 차례에 따라 염오가 청정한 것이다. ‘만약 모양을 취하는 것에 연유해서 조작한다는 것’이란 여리(如理)하거나 여리하지 못한 것에 연유해서 전향하기 때문이니, 그 차례에 따라 염오와 청정이 있는 것이다. ‘소염오나 소청정’이란 심법 가운데에서 그 추중이 있고 없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째서 여러 계에 이와 같은 차례가 있는 것입니까? 세간사(世間事)의 차별에 따라 유전되기 때문이다. 【釋】‘세간사의 차별에 따라 유전된다는 것’은 모든 세간의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서로 만나고 나면 다시 서로간에 인사를 하게 되고 인사를 하고 나서야 목욕을 하고 향을 바르고 화관을 쓰게 된다. 그 다음에 갖가지 좋은 음식을 대접받게 되고 그 다음에 갖가지 이부자리와 시녀를 대접받게 되는 것처럼, 이 같은 연후에야 의계가 여러 처로 분별되는 것이다. 내계(內界)에도 차례가 있는 까닭에 외계를 건립하게 되고, 또 이 같은 차례에 따라서 식계를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계(界)의 차례가 이러한 것 같이 처(處)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온의 이치’는 무엇입니까? 모든 소유색(所有色)을 말하는 것이니, 과거이거나 현재이거나 미래이거나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추색[麤]이거나 세색[細]이거나 열악하거나 수승하거나 멀거나 가까운 것이 이것에 해당한다. 이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총괄해서 일색온(一色蘊)이라 해설하는 것은 ‘축적된다는 이치’ 때문이니, 마치 재화가 쌓인 것과도 같다. 이같이 해서 식온에 이르기까지 열한 종류의 애착에 의지하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온은 소의처가 되는 까닭에 색 따위의 법에서 과거 따위의 차별을 건립하게 된다. 【釋】‘열한 종류의 애착’이란 고련애(顧憐愛)ㆍ희망애(希望愛)ㆍ집착애(執着愛)ㆍ내아애(內我愛)ㆍ경계애(境界愛)ㆍ욕애(欲愛)ㆍ정애(定愛)ㆍ악행고애(惡行苦愛)ㆍ묘행락애(妙行樂愛)ㆍ원애(遠愛)ㆍ근애(近愛)이다. 이 같은 애착의 소연경에 연유해서 그 차례에 따라 과거 따위의 갖가지 차별을 건립하는 것이다. 또 유(有)의 차별이 있으니, 이생(已生)과 미생(未生)을 차별하는 것이고, 능취와 소취를 차별하는 것이고, 외문(外門)과 내문(內門)을 차별하는 것이고, 염오와 불염오를 차별하는 것이고 근애와 원애를 차별하는 것이다.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색 따위의 제법에서의 과거 따위의 차별을 건립하게 된다. ‘이생’이란 과거와 현재이고, ‘미생’이란 미래이고, ‘외문’이란 부정지(不定地)이고, ‘내문’이란 여러 정지(定地)이니, 그 밖의 다른 구절은 쉽게 이해할 수 있기에 다시 분별하지 않겠다. 또 그 고통스러운 모양이 광대한 까닭에 ‘온’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마치 커다란 재목이 쌓여 있는 것[蘊]처럼 색 따위에 의지하여 생 따위의 광대한 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계경(契經)의 말씀대로 순대중고온(純大衆苦蘊)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또 잡염(雜染)이라는 무거운 짐을 매게 되는 까닭에 ‘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마치 어깨에 짐을 매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잡염이라는 무거운 짐을 매는 것’이란 번뇌 따위의 여러 가지 잡염의 법이 색 따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신체에 비유되는 세간의 일부분으로 짐을 매는 것과 같기에, 이 같은 일부분을 지칭하여 ‘짐을 맨 어깨’라고도 이름하고 ‘온’이라고도 이름하니 색 따위도 이와 같다. 능히 잡염의 짐을 짊어지게 되는 까닭에 이를 이름하여 ‘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의 이치’는 무엇입니까? 일체법의 종자라는 이치이다. 아뢰야식 내에 있는 제법의 종자를 해설하여 ‘계’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계는 ‘인(因)의 이치’에 해당한다. 또 능히 지속시키는[能持] 자체적인 모양의 이치가 ‘계의 이치’이기도 하고, 또 인과를 능히 지속시키는 성품의 이치가 ‘계의 이치’이기도 하다. 【釋】‘인과를 능히 지속시키는 이치’란 18계 가운데에서의 근과 경의 여러 계 및 육식계(六識界)를 말하는 것으로, 그 차례에 따라서 일체법의 차별을 거두어 지속시키는 차별적인 이치가 ‘계의 이치’이다. ‘일체법의 차별을 거두어 지속시키는 것’이란 모든 경전에서 설명되는 지(地) 따위의 여러 계 및 그 밖의 다른 계를 말하는 것이니,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18계에 수렴되는 것이다. ‘처’의 이치는 무엇입니까? 식(識)이 자라나고 태어나는 문(門)의 이치가 바로 처의 이치이니, 그 종자의 이치를 숙지해야만 한다. 마치 부처님 말씀처럼 색(色)은 물을 끓일 때 거품이 일어 모이는 것과 같고, 수(受)는 물거품이 떠 있는 것과 같고, 상(想)은 아지랑이 같고, 행(行)은 파초와 같고, 식(識)은 환상 같은 것이다. 어떠한 이치에서 색온은 물을 끓일 때, 거품이 일어 모이는 것과 같다고 하며, 수온은 물거품이 떠있는 것과 같다고 하며, 상온은 아지랑이와 같다고 하며, 행온은 파초와 같다고 하며, 식온은 환상과도 같다고 합니까? 무아(無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청정함을 여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소미(少味:八味)가 없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견고하거나 실답지 않은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멀리 여의지 못하고 허망해서 견고하거나 실답지 못한 이치를 말한다. 【釋】이 경전에서 설명되는 모든 구의(句義)는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의 네 가지 전도(顚倒)를 대치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차례에 따라 무아 따위에 관한 모든 구절의 차별을 해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