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같이 스무 가지 수번뇌심소의 양상을 말하였다. 부정심소(不定心所)1)에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양상이 어떠한가? 게송(『삼십송』의 제1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17_0560_c_04L已說二十隨煩惱相。不定有四,其相云何?頌曰:
부정의 심소는 회(悔)ㆍ면(眠)ㆍ 심(尋)ㆍ사(伺)이니, 둘에 각각 둘이 있네.
017_0560_c_06L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논하여 말한다. 회(悔)ㆍ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선(善)과 잡염 등에 대해서 모두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촉(觸)심소 등이 반드시 심왕에 두루하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며, 욕(欲)심소 등이 반드시 모든 지위[地]에 두루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부정(不定)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2)
‘회(悔)심소’3)는 지은 것을 미워하는 것[惡作]을 말한다.4) 지은 업을 미워하여 후회함을 체성으로 하고, 사마타[止]를 애함을 업으로 한다. 이것은 곧 결과에 대해서 원인의 명칭을 가립한 것이다. 먼저 지은 업을 미워하고, 나중에 비로소 후회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하지 않은 것을 뉘우치는 것도 역시 오작(惡作)에 포함된다. 후회해서 말하는 것과 같이, 내가 이전에 이러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나의 오작(惡作)이라고 말한다.
‘면(眠)심소’5)는 수면(睡眠)을 말한다. 자재하지 못하며 어둡고 빼앗기게 함[令]을 체성으로 하고, 위빠사나[觀]를 장애함을 업으로 한다. 수면 상태에서는 몸으로 하여금 자재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매우 어둡고 용렬하게 하며, 하나의 문(門)에서만6) 전전하기 때문이다. 어둡다는 것은 선정에 들어 있는 것을 구분한다. 빼앗는다는 것은 깨어 있을 때를 구별한다. 하게 함[令]은 면(眠)심소가 자체ㆍ작용이 없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무심의 지위에 있어도 이 명칭을 가립한다.7) 다른 것과 같이, 덮고[蓋] 얽음[纏]으로써 심왕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 이 두 가지9)는 오직 치심소를 자체[體]로 한다. 수번뇌와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기10)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1) 그렇지 않다. 역시 선품(善品)에도 통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잡염법이라면 치심소를 자체로 하고, 청정법이라면 곧 무치(無癡)라고 말이다.
017_0561_a_01L논서에서는 잡염분에 의지해서 수번뇌와 치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고 말한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2) 이 견해도 역시 이치가 아니어야 하다. 무기(無記)는 치(癡)ㆍ무치(無癡)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오작(惡作)은 사(思)ㆍ혜(慧) 심소를 자체로 한다. 지은 업을 명료하게 생각해서 간택하기 때문이다. 면(眠)심소는 합하여 사(思)ㆍ상(想) 심소를 사용해서 자체로 삼는다. 갖가지 꿈의 경계에서의 모습들을 유지하고 표상하기 때문이다.
논서에서 둘 다 세속유라고 말하기13) 때문이다. 그것의 염오인 것은 치심소의 등류이다. 불신(不信) 등처럼, 치심소의 일부분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4) 그 견해도 이치가 역시 그렇지 않다. 사(思)ㆍ혜(慧)ㆍ상(想) 심소는 얽어매는[纏] 속성인 그것15)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16)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각기 별도로 자체가 있다. 나머지 심소와 행상(行相)이 다르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양상에 따라서 세속유라고 이름한다.
‘심(尋)심소’17)는 찾아 구하는 것[尋求]을 말한다. 심왕을 바쁘고 급하게 의식[意言]18)의 대상에 대해 두드러지게 전전하게 함을 체성으로 한다. ‘사(伺)심소’19)는 보면서 살피는 것[伺察]을 말한다. 심왕을 바쁘고 급하게 의식[意言]의 대상에 대해 미세하게 전전하게 함을 체성으로 한다. 이 둘은 모두 평안과 불안에 머무는 몸과 마음의 분위(分位)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으로 한다.20) 둘 다 사(思)ㆍ혜(慧) 심소의 일부분을 사용해서 자체로 삼는다. 의식의 대상에 대해서 깊이 헤아리지 않고21) 깊이 헤아리는22) 뜻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ㆍ혜 심소에서 떠나서는 심(尋)ㆍ사(伺)두 가지가 체의 종류의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삼십송』의 제14게송에서) “둘에 각각 둘이네”라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3) 심(尋)ㆍ사(伺) 심소에 각각 잡염과 청정의 두 종류의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4) 이 해석은 바른 논리가 아니다. 회ㆍ면 심소에도 역시 잡염과 청정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앞에서와 같이 모든 잡염의 심소에 번뇌ㆍ수번뇌심소의 속성이 있으며, 이 두 가지에25) 각각 불선과 무기가 있다. 혹은 다시 각각에 얽어맴[纏]과 수면이 있다고 말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26) 그 해석도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니다. 부정의 네 가지 심소의 뒷부분에 이러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둘[二]’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두 종류를 나타낸다. 하나는 회ㆍ면 심소이고, 다른 하나는 심ㆍ사 심소이다. 이 두 가지의 두 종류는 종류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둘이라는 말은 둘의 두 종류를 나타낸다.27)
017_0561_b_01L여기에 각각 두 가지가 있으니, 잡염과 잡염되지 않은 것이다. 선과 잡염이 각각 오직 하나인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오직 잡염인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다. 어떤 곳28)에서 역시 수번뇌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부정(不定)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둘에 각각 둘’이라는 말을 한다.29) 따라서 이 말을 시설한 것은 의미 깊게 사용함이 있다.
네 가지 중에서 심(尋)ㆍ사(伺) 심소는 반드시 가유(假有)이다. 사(思)ㆍ혜(慧) 심소와 합해서 이룬다는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말한 바이기 때문이다.회ㆍ면 심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역시 이것도 자체가 없는 존재이다. 『유가사지론』에서 세속유라고 말하기30)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1) 이 둘은 실물유(實物有)이다. 오직 나중의 두 가지만32)을 가유(假有)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속유라는 말은 다른 것33)의 양상에 따라서 말한 것이다.앞의 두 가지도 반드시 가유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또한 비유하면 내부세계의 종자는 실유(實有)이지만, 논서에서 역시 세속유라고 말한34) 바와 같기 때문이다.
네 가지 중에서 심ㆍ사 심소는 반드시 상응하지 않는다.35) 자체와 종류는 같고,36) 두드러짐과 미세함이 다르기 때문이다.37) 심ㆍ사 심소가 잡염이 있는 것과 잡염을 떠난 것에 의해서 유정이 머무는 세 가지 장소의 차이를 건립하며,38) 그것의 종자ㆍ현행이 있고 없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복잡하지 않다. (심ㆍ사 심소가) 모두 앞의 두 가지39)와 서로 상응함이 인정되고,40) 앞의 두 가지도 역시 서로 상응하는 뜻이 있다고 해야 한다. 네 가지 심소가 모두 제7식ㆍ제8식과는 함께하지 않는다.41) 그 뜻은 앞42)에서 말한 것과 같다. 회ㆍ면 심소는 오직 제6식과 함께한다. 5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43) 심ㆍ사 심소는 역시 5식과도 함께한다. 논서에서 5식에 심ㆍ사 심소가 있다고 말하기44) 때문이다. 또한 심ㆍ사 심소는 곧 일곱 가지 분별45)이라고 말하니,46) 형상이 있는 것 등이다. 『잡집론』에서 다시 자연히 일어나는 분별은 5식이라고 말하기47)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48) 심ㆍ사 심소도 오직 의식과 함께한다. 논서49)에서 심ㆍ사 등의 법은 모두 의식의 불공법(不共法)이라고50)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심ㆍ사 심소는 우수(憂受)ㆍ희수(喜受)와 상응할 뿐이라고 말하고, 일찍이 고수(苦受)ㆍ낙수(樂受)와 함께한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수(捨受)는 두루하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까닭으로 고수(苦受)ㆍ낙수(樂受)와 함께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초선천에서는 의식의 낙수가 있지만, 희수(喜受)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전체적으로 희수(喜受)라는 명칭을 말한다. 순전히 고통만 있는 곳에서는 의식의 고수(苦受)가 있지만, 우수(憂受)와 비슷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우수(憂受)라고 말한다.
017_0561_c_01L또한 심ㆍ사 심소는 명칭[名身] 등51)과 의미52)를 인식대상으로 한다고 말한다.53) 5식은 명칭 등과 뜻으로써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5식에 심ㆍ사 심소가 있다고 말한 것54)은 대부분 그것에 의거해서 일어나는 것을 나타내며, 그것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잡집론』에서 말하듯이55)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분별은 5식을 가리킨다는 것은 『유가사지론』에서 말한 분별과 뜻이 각기 다르다. 거기(『잡집론』)에서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곧 5식이라고 말하고, 『유가사지론』에서는 이것56)이 5식과 함께하는 분별의 의식과 상응하는 심ㆍ사 심소라고 한다. 따라서 그가 인용한 것은 증명이 되지 못한다. 이것에 의해 5식에서는 반드시 심ㆍ사 심소가 없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57) 오작(惡作)심소는 우수(憂受)ㆍ사수(捨受)와 상응한다. 오직 근심의 작용에서만 전전한다.58) 무기에 통하기 때문이다.59) 면(眠)심소는 희수(喜受)ㆍ우수(憂受)ㆍ사수(捨受)와 함께 일어난다. 작용이 기쁨ㆍ슬픔ㆍ기쁨도 슬픔도 아닌 것에 공통적으로 전전하기 때문이다. 심ㆍ사 심소는 우수ㆍ희수ㆍ사수ㆍ낙수와 상응한다. 초선천 중에서는 의식의 낙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회ㆍ면 심소는 다만 열 가지 선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된다.62) 이것은 오직 욕계에서만 있고, 경안(經安)에는 없기 때문이다. 심ㆍ사 심소는 열한 가지 선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된다. 초선천 중에서는 경안과 함께하기 때문이다.회(悔)심소는 다만 무명과 상응하는 것이 인정된다.63) 이것은 인식작용이 두드러지고, 탐심소 등은 미세하기 때문이다. 면ㆍ심ㆍ사 심소는 열 가지 번뇌의 심소와 함께한다. 이것과 그것은 전전하여 서로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회심소는 중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된다.64) 분(忿) 등의 열 가지는 아니다. 각기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면ㆍ심ㆍ사 심소는 스무 가지 수번뇌와 함께한다고 인정된다. 수면 등의 지위 중에서 모두 그것을65) 일으키기 때문이다.이 네 가지 심소는 모두 선 등 세 가지 성품과 통한다.66) 무기의 업에서도 역시 뉘우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처음의 두 가지67)는 오직 선천적으로 착한 성품[生得善]이다. (회심소는) 인식작용이 두드러지고 자신을 낮추며, (면심소는) 어둡고 빼앗기 때문이다. 뒤의 두 가지는 역시 가행선(加行善)에도 포함된다. 보고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 등에 심ㆍ사 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017_0562_a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처음의 둘도 역시 가행선이다. 문혜(聞慧)ㆍ사혜(思慧)의 지위 중에 회ㆍ면 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뒷부분의 셋은 모두 잡염과 청정의 무기68)에 통하다. 회심소는 잡염이 아니니, 이해가 두드러지고 맹렬하기 때문이다. 청정의 네 가지 무기 중에서 회심소는 가운데 두 가지이다.69) 인식작용이 두드러지고 맹렬하며, 선정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면심소에서는 네 번째 무기만을 제외한다. 선정에 이끌려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제6식의 이숙생의 심왕에도 역시 수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ㆍ사 심소는 첫 번째 것(이숙무기)만을 제외한다. 그것(이숙심)은 이해가 미세하고 열등해서 명칭 등과 의미를 심구ㆍ사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ㆍ면 심소는 오직 욕계에만 있다.70) 심ㆍ사 심소는 욕계와 초선천에 있다.다른 세계71)와 지위[地]72)의 법은 모두 승묘하고 적정하기 때문이다. 회ㆍ면 심소는 상부 지위[上地]에 있을 때는 반드시 일으키지 않는다. 심ㆍ사 심소는 상부 지위ㆍ하부 지위에 있으면서 역시 상부 지위ㆍ하부 지위의 것을 일으킨다. 하부 지위ㆍ상부 지위의 심ㆍ사 심소는 능히 상부 지위ㆍ하부 지위를 반연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회ㆍ면 심소는 상부 지위를 반연할 수 없다. (회심소는) 인식작용이 두드러지고 가까우며, (면심소는) 매우 어둡고 빼앗기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이 두 가지도 역시 상부 지위의 대상을 반연한다. 삿된 견해가 있는 자는 상부 지위의 선정을 닦는 것을 뉘우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는 능히 널리 바꾸어진 대상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회ㆍ면 심소는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한다.74) 또한 사견 등의 세력에 의해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75) 무루도에서 직접 이끌려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6) 또한 우근(憂根)이 깊이 해탈을 구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77) 만약 무학에서 이미 단멸되었기 때문에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것[非所斷]이라고 이름한다면, 곧 무학의 면(眠)심소도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것에 포함된다.
심ㆍ사 심소는 참다운 무루도78)가 아니지만, 능히 그것을 이끌고 그것에 따라서 이끌려 생겨나기 때문에,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 및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것에 공통적으로 포함된다.
017_0562_a_20L尋伺雖非眞無漏道,而能引彼,從彼引生故,通見、修,非所斷攝。
017_0562_b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심(尋)ㆍ사(伺) 심소는,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것은 다섯 가지 법79) 중에서 오직 분별에만 포함된다. 『유가사지론』에서 그것은 분별이라고 말하기80)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1) 이 두 가지는 역시 정지(正智)82)에 포함된다. 바른 사유83)는 무루라고 말하기84) 때문이다.그것(바른 사유)은 능히 심왕으로 하여금 찾아 구하는 것[尋求] 등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85) 또한 그것은 언설의 원인이라고 말하기86) 때문이다.
아직 궁극적으로 깨치지 못한 지위87)에서는 약(藥:能治)과 병(病:所治) 등에 대해서 능히 두루 알 수 없으므로, 후득지 속에서 타인을 위해 법을 말할 때에 반드시 심ㆍ사 심소에 의지한다. 부처님 지위의, 유위(有爲)에 의한 작용이 없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역시 무루에도 통한다.
【문】 이상과 같은 6위의 모든 심소법은 심왕(心王)의 자체를 떠나서 별도의 자성이 있는가, 아니면 심왕의 분위의 차이인가?91)
017_0562_b_08L如是六位諸心所法,爲離心體有別自性,爲卽是心分位差別?
【답】 설사 그렇다고 말하더라도 무슨 과실이 있는가?둘 다 과실이 있다. 만약 심왕의 자체에서 떠나서 별도로 자성이 있다고 말하면, 어째서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오직 식만이 있다고 말하는가?92) 또한 어째서 심왕이 멀리 홀로 작용한다고 말하고,93) 잡염법ㆍ청정법은 심왕에 의거한다고 하며,94) 유정은 6계95)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가?96)
『장엄론』에서 말하는 것을 또한 어떻게 회통하는가?97) 그것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17_0562_b_13L莊嚴論說復云何通?如彼頌言:
심왕이 둘로 사현(似現)한다고 인정된다. 이와 같이 탐(貪)심소 등으로 사현하고 혹은 신(信)심소 등으로 사현한다. 별도의 잡염ㆍ선(善)의 법은 없다.98)
017_0562_b_14L許心似二現 如是似貪等 或似於信等
無別染善法。
만약 이것이 심왕의 분위의 차이라고 말하면,99) 어째서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심왕과 상응한다고 말씀하는가?100) 다른 체성과 상응하고, 자성은 아니라고 말하기101) 때문이다. 또한 어째서 심왕과 심소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비유하면 태양과 빛과 같다고 말씀하는가?102) 또한 『유가사지론』에서 말하는 것을103) 어떻게 회통하는가? 거기서 심소는 곧 심왕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섯 종류104)의 자성이 있다고 말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분위로써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 과실이다. 인연이 차이가 없기 때문에105)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된다.
017_0562_b_21L五種性不成 分位差過失 因緣無別故
與聖教相違。
017_0562_c_01L 마땅히 심왕에서 떠나서 별도의 자성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심왕이 뛰어나기 때문106)에 오직 식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 심소는 심왕에 의지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107)으로 사현(似現)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심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식이나 심(心)이라는 말에는 역시 심소도 포함된다.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오직 식 등이라는 말과 그것으로 사현한다는 말은 모두 과실이 없다.
이것은 세속제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만약 승의제에 의거해서 말하면, 심왕과 심소는 별개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非難非卽]. 모든 식을 배대해서도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대승의 진제와 속제의 미묘한 도리라고 말한다.이상에서 6식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러면 현행하는 분위를 마땅히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게송(『삼십송』의 제15ㆍ16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식’은 앞부분의 다섯 전식을 말한다.114) 부류가 비슷하기 때문115)에 총체적으로 그것을 말한다. “연(緣)에 따라 일어난다”는 말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연(緣)이란 작의(作意)ㆍ감각기관ㆍ대상 등을 말한다. 5식은 안으로는 근본식에 의지하고, 밖으로는 작의ㆍ다섯 감각기관ㆍ대상 등의 여러 연(緣)의 화합에 따라서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에 의해서 혹은 함께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는다. 외부세계의 연(緣)이 화합하는 것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과 점차 이루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닷물의 파도가 연(緣)에 따라 많고 적음이 있음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법과 비유를 구체적으로 많이 말하는 것은 경전116)에서와 같다.
017_0563_a_01L다섯 전식은 인식작용[行相]이 두드러지고, 의지하는 갖가지 연(緣)을 때로는 거의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날 때는 적고,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다.117) 제6의식도 역시 두드러지게 작용하기는 하지만, 의지하는 연(緣)을 갖추지 못할 때가 없다. 거스르는 연[違緣]118)에 의거함으로써 어떤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7식과 제8식은 인식작용이 미세하고, 의지하는 여러 연(緣)이 언제나 있다.따라서 연(緣)으로서 장애하여 전체적으로 행하지 않게 하는 일이 없다.
또한 5식은 사려(思慮)할 수 없고,119) 오직 감각기관[外門]에서 전전하며, 일어날 때에는 여러 연(緣)에 의지한다. 따라서 작용이 중단될 때가 많고, 현행할 때는 적다. 제6의식은 스스로 사려할 수 있고, 내면과 외부의 감각기관에서 전전하며, 많은 연(緣)을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다섯 지위120)를 제외하면 항상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중단될 때는 적고 현행할 때가 많다. 이상에 의거해서 이것은 연(緣)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 다섯 지위란 무엇인가?121)【답】 무상천에 태어나는 등이다.무상천(無想天)122)은 그 선정을 닦아서 6식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想)심소를 싫어하는 힘에 의해 그 하늘에 태어난다.123) 항상 작용하지 않는124) 심왕ㆍ심소에 거스르는 상(想)을 멸함을 첫째로 삼기 때문에 무상천이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6전식이 거기서는 모두 단절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25) 그 하늘에는 항상 6식이 없다.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그곳에는 전식이 없다고 말하기126) 때문이다. 그곳에는 오직 물질적 요소[有色支]127)만이 있다고 말하기128) 때문이다. 또한 그곳은 제6의식이 작용하지 않는 지위[無心地]라고 말하기129)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30) 그 하늘에서 장차 목숨이 다하려는 지위에서는 반드시 전식을 일으킨 연후에 목숨이 다한다. 그곳에서는 반드시 하부 지위의 태어남을 촉진하는 애착을 일으킨다고 말하기131)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서 “후에 상(想)심소가 일어나고 나서 이 모든 유정이 그곳에서 목숨이 다한다”132)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전식이 없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133)은 오랜 기간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34) 태어날 때에도 역시 전식이 있다. 그곳의 중유(中有)135)에서는 반드시 태어남을 촉진하는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른 하늘의 본유(本有)136)의 초기와 같이, 반드시 전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서 말하기를 “만약 그곳에137) 태어날 때에는, 오직 (무심위에) 들어갈 때에만 (무상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그 상(想)심소가 일어날 때에는, 그곳에서 목숨이 다한다”138)고 하기 때문이다.
017_0563_b_01L이 말의 뜻이 나타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곳의 본유의 초기에는 이숙생의 전식이 잠시 일어나지만, 과거의 인연의 세력140)에 의해 나중에는 다시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에 의해 이숙무기의 분위의 차이를 이끌어낼 때, 무상정이라고 이름한다. 선(善)에 이끌려 생겨나므로 두 가지 선정을 선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다면 전식은 일체에 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어떻게 오직 선천적인 것만을 멸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곳의 초기의 지위에서는 전식이 잠시 일어난다.
그 하늘은 오직 제4선정에만 있다. 아래 지위141)에서는 상(想)심소가 두드러지게 작용하여 끊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부 지위142)에서는 상심소가 없는 이숙처가 없기 때문이다. 곧 무상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思)심소가 능히 그 하늘의 이숙과를 초감하기 때문이다.
제16게송에서 ‘및 무심의 두 선정’이란 무상정과 멸진정을 말한다.143) 둘 다 6식이 없기 때문에 무심정으로 이름한다. ‘무상정’은 어떤 범부가 변정천(遍淨天)144)까지의 탐욕을 조복하고 아직 상부 지위145)의 잡염을 조복하지 않으며, 출리상(出離想)의 작의(作意)심소를 우선으로 함으로써 항상 행하지 않는 심왕ㆍ심소를 멸하게 하고, 상을 멸하는 것을 첫째로 삼아 무상(無想)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며, 몸을 편안하고 조화롭게 하기 때문에 역시 선정이라고 이름한다.
이 선정을 닦고 익히는 데 품류(品類)를 구별하면 세 부류가 있다. 하품(下品)의 닦는 자는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는데, 재빨리 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할 수 없다. 나중에 그 하늘에 태어나서는 매우 빛나고 청정하다거나 형색이 광대하지도 않으며, 반드시 장차 중간에 일찍 죽는다. 중품의 닦는 자는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지는 않으며, 설사 퇴전한다 하더라도 재빨리 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한다. 나중에 그 하늘에 태어나서는 매우 빛나고 청정하며 형식이 광대하지만,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니다. 중간에 일찍 죽긴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
이 선정은 오직 제4선정에만 속하고 또한 오직 선(善)이다. 그곳에서 이끌려지기 때문에 하부 지위와 상부 지위에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네 가지 업146)에 있어서는 세 가지에 공통되고, 금생에 받는 업[順現受]을 제외한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47) 이 선정은 오직 욕계에서만 일어난다. 모든 외도가 설교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해하는 것이 매우 강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017_0563_c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48) 욕계에서 먼저 닦아 익힌 사람은 나중에 색계에 태어나서도 능히 이끌어 현전케 한다. 무상천을 제외하니, 구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想)심소를 싫어하고 그 결과를 기뻐하여 들어가기 때문에 오직 유루이고, 성인이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멸진정’은 어떤 무학149) 혹은 유학의 성인이 무소유처150)까지의 탐욕을 이미 조복하거나 혹은 떠난 것을 말한다. 상부 지위151)의 탐욕은 일정하지 않다. 상(想)을 멈추게[止息] 하는 미세한 심소152)를 우선으로 함으로써, 항상 작용하지 않는 것153)과 항상 작용하는 것154)의 염오의 심왕ㆍ심소를 멸하게 하므로 멸진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 몸을 평안하고 조화롭게 하기 때문에 역시 선정이라고 이름한다. 집중적으로 수(受)와 상(想)을 싫어함에 의거해서,155) 역시 그것156)을 멸하는 선정이라고 이름한다.
이 선정을 닦고 익히는 데 품류(品類)를 구별하면 세 부류가 있다. 하품의 닦는 자는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며, 재빨리 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할 수 없다. 중품의 닦는 자는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지는 않으며, 설사 퇴전한다 하더라도 재빨리 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할 수 있다. 상품의 닦는 자는 구경에 이르러 퇴전하지 않는다.
이 선정을 처음 닦는 사람은 반드시 유정천(有頂天)의 유관(遊觀)157)의 무루158)에 의지해서 가행으로 삼아 들어간다.159) 순차적인 선정160) 중에서 가장 나중에 머물기 때문이다.유정천에 속하긴 하지만 무루에 포함된다. 이 선정을 닦아서 이미 자재를 얻은 사람은 다른 지위161)의 심왕 이후에도 역시 현전할 수 있다.도제(道諦)에 속하지만 유학도 무학도 아닌 것[非學非無學]에 포함된다. 열반에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선정을 처음 일으키는 것은 오직 인간세상에서이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설법의 힘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고, 인간이 이해하는 것이 가장 강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두 가지 상계162)에서도 역시 현전할 수 있고,163) 『오타이경(鄔陀夷經)』이 이것의 진실한 증거 문장이며, 무색계도 역시 의성천(意成天)164)으로 이름하기 때문이다. 아직 장식(藏識)에 관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무색계에 태어나서는 이 선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색법과 심법이 없으므로 단멸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장식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그곳에 태어나서도 역시 현전할 수 있다. 장식이 있으므로 단멸되지 않는다고 알기 때문이다.
017_0564_a_01L반드시 3계의 견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을 끊어야 비로소 이 선정을 일으킨다. 범부는 유정천의 심왕ㆍ심소를 조복 단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165) 이 선정은 미묘하므로 반드시 아공ㆍ법공의 이치를 증득한다. 상응한 것에 따라서 후득지에 이끌려 일어나기 때문이다.166)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67) 아래 장소의 8지(地)168)의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 중에서 반드시 완전히 욕망을 끊고, 나머지를 조복하고 미혹을 단멸한 연후에 바야흐로 능히 처음으로 이 선정을 일으킨다. 욕계의 미혹의 종자는 두 가지 성품169)이 번잡해서 선정을 장애함이 강하기 때문이다. 오직 불환과(不還果)와 3승의 무학 및 여러 보살만이 이 선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상응한 바에 따라서 상부 지위의 8지(地)170)에 태어나서 모두 나중에 일어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71) 반드시 하부 지위의 4지(地)172)의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을 끊고, 다른 것을 조복하거나 혹은 단멸한 연후에 바야흐로 능히 처음에 이 선정을 일으킨다. 변이수(變異受)173)와 함께하는 번뇌의 종자는 선정을 장애함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응한 바에 따라서 상부 지위의 5(地)에 태어나서 모두 나중에 일으킬 수 있다.174)
【문】 만약 하부 지위의 미혹을 조복하여 능히 이 선정을 일으킨다고 말하면, 나중에 단멸하거나 퇴전하지 않고서 상부 지위에 태어나는 자는, 어떻게 상부 지위에 태어난 이후에 도리어 하부 지위의 미혹을 단멸한다고 하는가?175)
017_0564_a_11L若伏下惑能起此定,後不斷退生上地者,豈生上已卻斷下惑?
【답】 단멸한다고 말해도 역시 과실이 없다. 상부 지위에 태어나는 자가 하부 지위의 말나식과 함께 생겨나는 미혹을 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환과를 이룬 자는 다스리는 힘이 강하므로, 바로 태어남을 촉진하는 지위에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미혹의 종자에 의해 상부 지위에 태어남을 촉진한다. 조복된 미혹은 퇴전과 불퇴전이 있긴 하지만, 하부 지위를 조복하고 상부 지위에 태어나는 뜻은 없다. 따라서 상부 지위에 태어나서 도리어 하부 지위의 것(종자)을 단멸한다고 말하는 과실이 없다.176)
017_0564_b_01L만약 모든 보살에 있어서, 먼저 2승의 지위에서 멸진정을 증득한 후에 마음을 대상으로 전향한 자177)는 모든 지위178)에서 이 선정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179) 혹은 어떤 사람은 7지(地)의 만심(滿心)에 이르러 바야흐로 능히 영원히 모든 번뇌를 조복한다. 아직 욕계의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을 영원히 단멸하지는 않지만, 이미 단멸한 것처럼 능히 이 선정을 일으킨다. 논서180)에서 이미 원행지(遠行地)181)에 들어간 보살이 바야흐로 멸진정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초지(初地)에서부터 곧 능히 모든 번뇌를 영원히 조복하는 것이 아라한과 같으며, 그는 10지 가운데에서 모두 이 선정을 일으킨다. 경전182)에서 보살은 앞의 6지 가운데에서도 역시 능히 멸진정을 일으킨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제16게송에서) 의식이 작용하지 않는 지위[無心位]의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란, 어떤 매우 깊은 수면과 기절한 경우에는 6식을 모두 현행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매우 피곤한 것 등의 연(緣)에 이끌린 몸의 상태에서 6식에 거스르기 때문에 ‘매우 깊은 수면[極睡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수면의 시기에는 그것183)의 자체[體]가 없지만 그것에 의거하고 그것에 비슷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그 명칭을 말한다. 바람이나 열(熱) 등의 연(緣)에 이끌려진 몸의 상태에서 역시 6식에 거슬리기 때문에 ‘매우 깊이 기절함[極悶絶]’이라고 부른다. 혹은 이것184)은 모두 촉처(觸處)의 일부이다. 이러한 다섯 지위를 제외하면 의식은 항상 일어난다.185)
참으로 태어나고 죽을 때에도 역시 의식이 없는데, 어째서 다만 다섯 지위에서만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186)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87) 죽고 태어나는 경우는 (제16게송에서) ‘및[及]’, ‘와[與]’라는 말로써 나타낸다고 말한다.188)
017_0564_b_09L正死生時亦無意識,何故但說五位不行。有義死生,及與言顯。
그가 말하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189) 무슨 까닭인가? 다만 여섯 가지 시기만을 무심이라고 말하기190) 때문이다. 곧 앞의 다섯 지위와 무여의열반191)을 말한다. 마땅히 죽음과 태어남의 경우는 곧 기절하는 것에 포함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지극한 기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제16게송에서 ‘및[及]’, ‘와[與]’라는 말을 한 것은, 다섯 가지가 잡란이 없음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6식이 단절된 이후에 근본식 중의 자신의 종자에 의지해서 다시 일어남을 나타낸다. 이것에 의거해서 무여의열반에 들어가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192)
이상과 같으므로 8식은, 모든 유정에 있어서 제8식과 말나식의 둘은 항상 함께 전전한다.194) 제6식을 일으킬 때에는 곧 셋이 함께 전전한다. 나머지는 연(緣)의 화합에 따라서 하나로부터 다섯에 이르기까지를 일으킬 때에는, 곧 네 가지가 함께 전전하고 나아가 여덟 가지가 함께한다. 이것을 식이 함께 전전하는 뜻을 간략히 말한다고 한다.
017_0564_c_01L【문】 만약 하나의 유정에게 여러 식이 함께 전전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그를 하나의 유정이라고 말하겠는가?195) 만약 유정을 건립하는 것이 식의 많고 적음에 의지한다고 말하면, 그대가 말하는 무심위는 마땅히 유정이 아니어야 한다. 또한 다른 분위[他分]196)의 심왕이 현전하는 지위를 어떻게 자기 분위[自分]의 유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197)
【정의】 그런데 유정을 건립하는 것은 명근(命根)198) 혹은 이숙식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 모두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것199)은 모두 항상 오직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017_0564_c_02L然立有情,依命根數或異熟識,俱不違理。彼俱恒時唯有一故。
【문】 하나의 신체에는 오직 하나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있는데, 어떻게 동시에 여러 식이 전전할 수 있단 말인가?【답】 이미 이 하나가 여러 심소를 이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어째서 이것이 능히 여러 심왕을 이끈다고 인정하지 않는가? 또한 누가 결정적으로 이 등무간연이 오직 하나라고 말했는가? 여러 식이 함께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등무간연도 여러 가지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때에 여러 대상을 취하고자 할 때에는, 여러 대상이 현전하는데 어째서 단박에 취하지 않는가? 여러 감각기관과 대상 등이 화합하는 힘을 같이하는 것을, 식이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일어난다고 말함은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심소의 체성이 차별이 없지만,200) 부류가 다르면 여럿이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하면서, 어째서 심왕은 종류가 다른 것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가?
또한 비유하면 파도나 영상이 하나에 의지해서 여럿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201) 따라서 하나의 심왕에 의지해서 여러 식이 함께 전전한다. 또한 의식이 5식과 함께한다고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것(5식)의 인식대상[所緣]을 취하는 것이 명료하지 않아야 한다. 산란된 의식이 과거[久滅]를 반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문】 어째서 5식과 함께하는 것에는 오직 하나의 의식뿐인데, 색경(色境) 등에 대해서 하나 혹은 여럿을 취하는가?202)【답】 안식 등이 각기 자기 대상에 대해서 하나 혹은 여럿을 취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러하니 무슨 과실이 있는가? 상분과 견분은 모두 갖가지 양상이 있기 때문이다.203)
【문】 어째서 모든 식에 있어서 같은 종류는 함께하지 않는가?204)【답】 자기의 인식대상[所緣]을 요별할 수 있으면, 오직 하나만 요별할 수 있다. 다른 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017_0564_c_17L何故諸識同類不俱?於自所緣若可了者,一已能了。餘無用故。
【문】 만약 그렇다면 5식이 이미 자기의 대상을 요별하는데, 어째서 함께 의식을 일으켜서 요별하는 데 사용하는가?【답】 5식과 함께하는 의식[五俱意識]은 5식을 도와서 일어나게 하며, 오로지 5식의 대상을 요별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의식이 그것의 인식대상에 대해서 능히 명료하게 취하는 것이 안식 등과 다르다.따라서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의거해서 성스러운 가르침205)에서 그 의식을 유분별이라고 이름하고,206) 5식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는다.
017_0565_a_01L【문】 여러 식이 함께 전전(展轉)한다면 어째서 상응하지 않는가?【답】 대상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207) 설사 같은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이것과 그것이 의지처208)의 자체와 수(數)가 다르기209) 때문이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식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식의 차별상은 도리세속제에 의거한 것이며, 참다운 승의제는 아니다. 참다운 승의제 중에서는 마음을 표현하는 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게송(『입능가경』)에서 아래처럼 말씀한 바와 같다.
017_0565_a_08L如前所說識差別相,依理世俗,非眞勝義,眞勝義中心言絕故。如伽他說: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여덟 가지는 속제에 의거해서는 양상의 차이가 있고 진제에 의거해서는 양상의 차이가 없다. 작용[相]과 자체[所相]가 없기 때문이다.213)
017_0565_a_10L心意識八種 俗故相有別 眞故相無別
相所相無故。
이미 세 가지 능변식의 양상을 자체가 전변한 2분(分)의 의지처로 삼음을 자세히 분별하였다. 식이 어떻게 전변한 것에 의거해서214) 가정적으로 자아ㆍ법으로 말하고, 별도로 실유는 아니며, 따라서 일체는 오직 식만이 있다고 알아야 하는가?215) 게송(『삼십송』의 제1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식이216) 전변하여217) 분별[見分]과 분별되는 것[相分]이네. 이것에 의거해서 그것[實我ㆍ實法]은218)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체는 오직 식뿐이네.219)
017_0565_a_15L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논하여 말한다. ‘이 모든 식’이란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능변의 식 및 그것의 심소를 말한다. 모두 능히 전변하여 견분ㆍ상분으로 사현하므로 전변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220) 전변된 견분을 ‘분별’이라고 이름하니, 능히 모습을 취하기 때문이다. 전변된 상분을 ‘분별되는 것[所分別]’으로 이름하니, 견분에 취해지기 때문이다.221)
017_0565_b_01L이 바른 이치에 의거해서 그 실아(實我)ㆍ실법(實法)은 식이 전변된 것에서 떠나서는 모두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 능취와 소취에서 떠나서는 별도의 사물이 없기 때문이다. 실유로서 두 가지 양상222)에서 떠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위법ㆍ무위법223)은 실법(實法)이건 가법(假法)이건 간에 모두 식에서 떠나지 않는다. 『삼십송』의 제17게송에서 ‘오직[唯]’이라는 말은 식에서 떠난 실체의 사물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고, 식을 떠나지 않는 심소법 등은 아니다.
혹은 ‘전변’은 내부의 모든 식이 전환해서 자아와 법의 외부대상의 모습으로 사현하는 것을 말한다.224) 이 능전변을 ‘분별’이라고 이름하니, 허망분별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곧 3계의 심왕과 심소를 말한다. 이것의 집착된 대상을 ‘분별되는 것[所分別]’이라고 이름한다. 곧 망령되게 집착되는 실아(實我)ㆍ실법(實法)의 성(性)이다. 이 분별이 변하여 외부대상의 가아(假我)ㆍ가법(假法)의 양상으로 사현하기 때문에, 그 분별되는 것인 실아ㆍ실법의 체성은 결정적으로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앞225)에서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를 인용하여 이미 자세하게 논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모두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 허망분별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이다. ‘오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식에서 떠나지 않는 법이라면 부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참다운 공[眞空] 등도 역시 자성이 존재한다. 이상에 의거해서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극단을 멀리 떠나서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되고, 중도에 계합한다.226)
【문】 어떠한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의거해서 유식의 뜻이 성립되는가?227)【답】 어찌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由何教理唯識義成?豈不已說?
【문】 말하긴 했지만 알지 못하겠다. 다른 교의(敎義)를 논파함으로써 문득 자신의 교의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분명하게 이것(유식)을 성취하는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를 말해야 한다.경전228)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3계는 오직 마음뿐이라고 한다. 또한 인식대상[所緣]은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이라고 말씀한다.229) 또한 『능가경』에서 일체법은 모두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또한 유정은 마음에 따라서 잡염되거나 청정하다고 말씀한다.230)
또한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이 능히 따라서, 오직 식뿐이고 식과 독립적인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를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씀한다.231) 첫째는 서로 다른 식의 양상을 아는 지혜[相違識相智]이니, 한 장소에 대해서 아귀ㆍ사람ㆍ천인(天人) 등이 업의 차이에 따라 보는 것이 각기 다른 것을 말한다.232) 대상이 만일 참으로 존재한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셋째는 스스로 전도되지 않아야 함을 아는 지혜[自應無倒智]이다. 어리석은 범부의 지혜가 만약 실제의 대상을 얻는다면, 그는 자연히 전도되지 않아야 하고, 작용[功用]에 의하지 않고 해탈을 얻어야 한다.234)
017_0565_b_23L三自應無倒智,謂愚夫智若得實境,彼應自然成無顚倒,不由功用應得解脫。
017_0565_c_01L넷째는 다음 세 가지 지혜에 따라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隨三智轉智]이다.235) 하나는 자재자의 지혜에 따라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隨自在者智轉智]이다. 이미 마음의 자재함을 증득한 자236)가 욕구에 따라 땅 등을 변화시켜 모두 이룬다.237) 대상이 만약 실유라면 어떻게 전변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관찰자의 지혜에 따라서 전전하는 지혜[隨觀察者智轉智]이다. 뛰어난 선정을 증득해서 법관(法觀)을 닦는 자가 따라서 하나의 대상을 관찰할 때에 갖가지 모습이 현전한다.238) 대상이 만약 참되다면 어찌 마음에 따라서 전전하겠는가? 마지막 하나는 무분별지혜에 따라서 전전하는 지혜[隨無分別智轉智]이다. 진실을 증득한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때에는 모든 대상의 모습이 다 현전하지 않는다. 대상이 만약 참되다면 어찌 현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살의 이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자는 유식의 도리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깨달아 들어간다. 또한 게송(『후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017_0565_c_09L菩薩成就此四智者,於唯識理決定悟入。又伽他說: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인식대상은 모두 자성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일체가 오직 식만이 존재하고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한다.
017_0565_c_10L心、意、識所緣, 皆非離自性 故我說一切
唯有識無餘。
이들 성스러운 가르침의 진실한 증거 문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통적으로 인정되는[極成] 안식 등239)은 5식의 하나를 따르는 것[隨一]이기 때문에, 나머지240)와 같이 직접 자신에서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색경(色境) 등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241) 나머지 식도 식이기 때문에, 안식 등처럼 역시 직접 자신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체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242) 이것의 친소연(親所緣)은 반드시 이것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의 능연과 같이, 두 가지243)의 하나를 따르는 것[隨一]이기 때문이다.244) 소연(所緣)의 법이기 때문에, 상응법처럼 결정적으로 심왕과 심소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245) 이들 바른 논리의 진실한 증거 문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유식의 도리에 대해서 깊이 믿어 받아들여야 한다.
자아와 법은 실재[有]가 아니고 공(空)과 식은 비실재[無]가 아니며, 실재를 떠나고 비실재를 떠나기 때문에 중도에 계합한다.246)미륵보살이 이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은 두 게송을 말씀하셨다.247)
017_0565_c_19L我法非有,空識非無,離有離無,故契中道。慈尊依此說二頌言:
허망분별248)은 실재[有]이다. 이것에 있어서 두 가지249)는 모두 비실재[無]이다. 이것(허망분별) 중에서는 오직 공이 있고 그것(공성)에 있어서도 역시 이것(허망분별)이 있다.
017_0565_c_21L虛妄分別有 於此二都無 此中唯有空
於彼亦有此。
그러므로 일체법은 공도 아니고250) 불공(不空)도 아니라고251) 말한다. 가유(假有)252)와 비실재[無]253) 및 실재[有]254)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중도에 계합한다고 말한다.255)
017_0565_c_23L 故說一切法 非空非不空
有無及有故 是則契中道。
017_0566_a_01L
이 게송은 또한 잡염분의 의타기성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진실로써 말하면 역시 청정분의 의타기성에도 있다.
017_0566_a_01L此頌且依染依他說,理實亦有淨分依他。
【문】 만약 오직 내부의 식뿐으로서 외부대상에 사현해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세간의 유정과 무생물을 보는 데 장소, 시간, 유정의 신체, 외계대상의 작용의 일정함과 일정하지 않는 데서 전전한다고 말하는가?256)【답】 꿈속의 대상 등과 같다고 한다. 마땅히 이러한 의문을 해설해야 한다.
【문】 무엇에 연(緣)하여 세존께서 12처로 말씀하셨는가?257)【답】 식이 전변한 것에 의거해서이고, 별도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공의 이치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62법을 말씀하셨다. 단견(斷見)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상속하는 유정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법공의 이치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다시 오직 식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외부대상도 역시 실유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문】 어째서인가?【답】 집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이 전변된 것에 의거해서 망령되게 집착된 실법을 이치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법공(法空)이라고 말한다. 언어를 떠난 바른 지혜의 증득된 유식성이 없기 때문에 법공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이 식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득 세속제가 없게 된다. 세속제가 없기 때문에 진제도 역시 없어야 한다. 진제와 속제는 서로 의지해서 건립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악취공(惡取空)이며,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치료할 수 없는 자라고 한다.마땅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일체법은 공ㆍ불공(不空)이 있으며, 이에 의거해서 미륵보살께서 앞의 두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 만약 모든 물질계[色處]가 역시 식으로써 자체[體]로 삼는다고 말하면, 무엇에 반연하여 물질의 모습으로 사현하고, 한 종류로 견고하게 상속해서 유전하는가?260)【답】 명언훈습의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261) 잡염과 청정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262)이 만약 없다면 마땅히 전도됨이 없어야 하고, 그러면 문득 잡염도 없고 역시 청정법도 없게 된다. 따라서 모든 식이 역시 색법으로 사현한다.263) 게송(『대승장엄경론』)에서 아래처럼 말한 것과 같다.
잡란264)의 형상265) 및 잡란의 자체266)를 색식(色識:상분) 및 색식이 아닌 것[非色識:견분 등]으로 인정해야 한다. 만약 (잡란의 형상이) 없다면 나머지 다른 것267)도 역시 없어야 한다.268)
017_0566_a_20L亂相及亂體 應許爲色識 及與非色識
若無餘亦無。
017_0566_b_01L 【문】 색경(色境) 등 외부대상을 분명히 현재에 깨닫고 현량으로 인식하는데, 어째서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가?269)【답】 현량으로 깨달을 때는, 집착해서 외부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후의 의식이 분별하여 망령되게 외부대상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따라서 현량의 대상은 자신의 상분이고, 식이 전변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실재[有]라고 말한다. 의식이 집착한 외부의 실재의 색경 등은 망령되게 실재라고 계탁한 것이므로 그것을 비실재[無]라고 말한다. 또한 색경 등의 대상은 색경이 아니면서 색경으로 사현한 것이고, 외부대상이 아니면서 외부대상으로 사현한 것이다. 꿈속의 인식대상처럼 집착해서 이것은 실재이고 외부의 색경이라고 할 수 없다.
【문】 만약 깨어 있을 때의 색경은 모두 꿈속의 대상처럼 식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꿈에서 깨어나서 그것은 오직 마음뿐이라고 아는 것과 같아야 한다. 어째서 깨어 있을 때에 자신의 색경에 대해서 오직 식뿐이라고 알지 못하는가?270)【답】 꿈이 깨지 않았을 때에는 스스로 알 수 없고, 반드시 깨어났을 때에 비로소 능히 따라서 깨닫는 것과 같이 깨어 있을 때의 대상의 색법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직 참다운 깨달음271)이 아닌 지위에서는 스스로 알 수 없다.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에 역시 능히 따라서 깨닫는다. 참다운 깨달음을 얻지 않은 때에는 항상 꿈속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으므로, 부처님께서 생사의 긴 밤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에 의해 아직 색경은 오직 식뿐이라고 알지 못한다.
【문】 외부의 색경은 참으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부 식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어째서 자신의 인식대상이 아닌가?272)【답】 누가 다른 사람의 마음은 자기 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는가? 다만 그것은 친소연(親所緣)이라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식이 일어날 때에는 참된 작용이 없어서, 손 등이 직접 외부 물건을 집거나,273) 태양 등이 빛을 펼쳐서 직접 외부대상을 비추는 것274)과 같지는 않다. 다만 거울 등처럼 외부대상에 사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요별한다고 이름하며, 직접 요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요별되는 것은 자신이 전변된 것이다.275) 따라서 경전에서 말씀하기를 “작은 법이라도 능히 나머지 다른 법276)을 취하는 것은 없다. 다만 식이 일어날 때에 그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그 사물을 취한다고 이름한다”277)고 한다. 타인의 마음을 반연한다고 말하는278) 것과 같이 색경 등도 역시 그러하다.
【문】 이미 다른 대상이 있는데, 어째서 유식이라고 이름하는가?279)【답】 기이하도다. 굳게 집착해서 닿는 곳마다 의심을 내는구나. 어째서 유식의 가르침이 다만 나 한 사람의 식만을 말하는 것인가?
017_0566_b_21L旣有異境,何名唯識?奇哉!固執!觸處生疑,豈唯識教但說一識?
017_0566_c_01L【문】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인가?【답】 그대는 마땅히 진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만약 오직 한 사람의 식뿐이라면 어떻게 시방에 범부와 성인, 존귀함과 비천함, 원인과 결과 등의 차이가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위해서 법을 설하며, 무슨 법을 어떻게 구하겠는가? 따라서 유식이라는 말에는 심오한 의미[意趣]가 있다. 식(識)이라는 말은 전체적으로 모든 유정에 각기 8식, 6위의 심소, 전변된 상분ㆍ견분 분위의 차별 및 그것의 공한 이치에서 드러나는 진여가 있음을 나타낸다. 식의 자상이기 때문이고, 식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두 가지280)가 전변된 것이기 때문이고, 세 가지281)의 분위이기 때문이며, 네 가지282)의 참다운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은 모두 식에서 떠나지 않으며, 총체적으로 식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
‘오직[唯]’이라는 말은, 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집착하듯이 반드시 모든 식에서 떠나서 참으로 색법 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한다. 만약 이와 같이 유식의 가르침의 취지를 아는 사람은, 문득 능히 전도됨이 없이 자량(資糧)283)을 잘 비축하여 속히 법공의 이치에 들어가서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유정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을 구해준다.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악취공자는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위배되므로 능히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일체가 오직 식뿐이라고 믿어야 한다.284)
【문】 만약 오직 식뿐이고 전혀 외부대상이 없다고 말하면, 무엇에 의거해서 갖가지 분별을 일으키는가?285)게송(『삼십송』의 제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17_0566_c_12L若唯有識,都無外緣,由何而生種種分別?頌曰:
일체종자식이 이렇게 저렇게 전변함에 의거해서 전전하는 세력 때문에 이러저러한 분별286)이 생겨난다네.287)
017_0566_c_13L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논하여 말한다. ‘일체종자식’이란 근본식 중에서 능히 자기 결과를 일으키는 특수한 정신적인 힘[功能差別]을 말한다. 이것이 등류과288)ㆍ이숙과289)ㆍ사용과(士用果)290)ㆍ증상과291)를 일으키기 때문에 일체종자라고 이름한다.계박을 떠난 증과를 제외하는 것292)은 종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증득할 수 있지만 종자의 결과는 아니다. 반드시 일어나서 도(道)293)로써 번뇌[結]를 단멸하여 증득하기 때문이다. 전전하는 뜻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294) 여기서는 능히 분별을 일으키는 종자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종자)은 식으로써 자체로 삼기 때문에 식이라는 명칭을 건립한다. 종자는 근본식에서 떠나서 별도의 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종자식이라는 두 단어로 된 용어는 종자식이 아닌 것을 가려낸다. 식으로서 종자가 아닌 것295)과 종자로서 식이 아닌 것296)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종자식이라는 말은 근본식 중의 종자를 나타내고, 종자를 지니는 식(제8식)은 아니다. 나중에 마땅히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017_0567_a_01L이 식 중의 종자가 나머지 다른 연(緣)297)에 도움받기 때문에 문득 “이렇게 저렇게 전변한다.” 생겨나는 지위로부터 전전하여 성숙한 때에 이르기까지298) 전변하는 종자가 많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거듭해서 ‘이렇게[如是]’라고 말한다. 일체 종자에 세 가지 훈습,299) 공상과 불공상(不共相) 등의 식의 종자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전하는 세력’이란 여덟 가지 현행식과 그것의 상응법(심소) 및 상분과 견분 등을 말한다. 그것이 모두 서로 돕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현행식 등을 총체적으로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허망분별로써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분별의 종류300)가 많기 때문에 ‘이러저러한[彼彼]’이라고 말한다.
이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301) 외부대상은 실재하지 않지만, 근본식 중에서 모든 일체 종자가 전변하는 차별에 의거한다. 그리고 여덟 가지 현행식 등이 전전하는 세력으로써, 그들 분별이 역시 생겨날 수 있다. 어째서 외부대상을 의지해서 비로소 분별을 일으킨다고 말하는가? 모든 청정법이 일어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302) 청정한 종자와 현행을 연(緣)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 앞에서 말했듯이 종자와 현행을 연(緣)으로 하여 분별을 일으킨다면, 이것의 연(緣)과 생겨나는 양상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303)【답】 연(緣)에 다시 네 가지가 있다.첫째는 인연(因緣)이니, 유위법이 직접 자기 결과를 판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의 자체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자이고, 다른 하나는 현행이다. 종자는 근본식 중의 선ㆍ잡염ㆍ무기(無記) 및 여러 세계[界]와 지위[地] 등의 특수한 정신적인 세력[功能差別]을 말한다. 능히 다음의 자기 부류의 세력을 이끌고, 동시에 자기 부류의 현행과를 일으킨다.304) 이것(종자)은 오직 그것305)에 배대해서만 인연의 성품이 된다. 현행306)은 7전식과 그것의 상응법 및 전변된 견분과 상분, 세 가지 성품, 세계와 지위 등을 말한다. 부처님 지위의 선(善)과 매우 미약한 무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근본식에 훈습하여 자기 부류의 종자를 일으킨다. 이것307)은 오직 그것308)에 배대해서만 인연의 성품이 된다.
제8심품은 소훈처[所熏]가 없기 때문이고, 의지처(심왕)를 가려내어 심소가 홀로 능훈(能熏)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매우 미세하고309) 원만하기310) 때문에 종자를 훈습하지 않는다.311) 현행의 같은 부류가 전전하여 서로 배대해도 모두 인연이 아니다. 자기 종자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312)
017_0567_b_01L모든 다른 부류를 전전하여 서로 배대해도 역시 인연이 아니다. 직접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 말하기를 “다른 부류ㆍ같은 부류의 현행을 전전해서 서로 배대하여 인연으로 삼는다”313)고 한 것은, 가설이거나314) 혹은 근거에 따른 방편문315)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곳316)에서 오직 종자만을 인연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은 두드러지게 뛰어난 것에 의지해서 말한 것이지,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전식과 아뢰야식은 전전하여 서로 배대해서 인연이 된다고 말하기317) 때문이다.
둘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318)이니, 여덟 가지 현행식과 그것의 심소법이 이전 찰나에 멸한 것이다. 나중에 자기 부류의 바로 다음 찰나에 평등하게 열어 이끌어서 그것을 반드시 생겨나게 함을 말한다. 같은 부류의 많은 종자는 동시에 전전하기 때문에, 불상응행법처럼 이 연(緣)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의해서 8식도 서로 연(緣)으로 삼지 않는다.
심소와 심왕은 항상 함께 전전하지만, 상응하기 때문에 화합해서 하나인 것과 비슷하다. 분리해서 다른 것으로 시설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등무간연이 될 수 있다. 무여의열반에 들어가려는 마음은 매우 미세하고 약하므로 열고 이끄는[開導] 작용이 없다. 또한 장차 등무간의 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 연(緣)이 아니다.
【문】 그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답】 논서319)에 진실한 말씀이 있다. 만약 이 식 등의 다음 찰나에 그 식 등이 결정적으로 생겨난다면, 곧 이것은 그것의 등무간연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곧 이 뜻에 의거해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아타나식은 3계ㆍ9지에서 모두 서로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 인정된다. 하부 지위[下地]와 상부 지위[上地]에서 죽고 태어날 때에 서로 열고 이끌기 때문이다. (제8식의) 유루의 다음 찰나에 무루가 생겨나는 일은 있지만, 무루가 반드시 유루를 일으키는 일은 없다. 대원경지는 일어나고 나서 반드시 단절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선(善)과 무기를 서로 배대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017_0567_c_01L【문】 이것은 어떤 세계 이후에 (제8식의) 무루를 이끌어 내는가?320)【답】 색계로부터이거나, 혹은 욕계 이후이다. 모든 범부로서 부처님의 증과를 구하는 자321)는 반드시 색계 이후에 무루를 이끌어 낸다. 그는 반드시 정거천(淨居天)322)의 대자재천궁323)에 태어나 살면서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2승(乘)으로서 대보리에 나아가는 자324)는 반드시 욕계 이후에 무루를 이끌어 낸다. 대보리에 나아가서 몸을 머무는 것은 오직 욕계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대자재천궁에 머물면서 비로소 성불할 수 있지만, 본래의 원력에 의해 머무는 생신(生身)은 욕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25) 색계에서도 역시 성문으로서 대승에 나아가서 본래 원력에 의해 몸을 머무는 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모두 위배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문의 제8의 무루식은 색계의 마음 이후에도 역시 현전할 수 있다. 그러나 5정거천에는 대보리에 전향해서 나아가는 자가 없다. 경전326)에서 거기서는 대보리심을 일으킨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7전식도 3계ㆍ9지에서 역시 서로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 인정된다. 제8식이 태어나는 곳에 따라서 계박되기 때문이다. 유루ㆍ무루도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이 인정된다. 10지의 단계 중에서 서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선ㆍ무기를 서로 배대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무기327) 중에서 잡염328)과 잡염되지 않은 것329)도 역시 서로 열고 이끈다. 아공의 이치를 체득한 바른 지혜와 증과[果]가330)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의 지위 중에서 서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욕계와 색계의 유루만이 무루와 서로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무색계는 아니다. 10지 가운데에 있는 보살은 그곳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6전식은 3계ㆍ9지에서 유루ㆍ무루ㆍ선ㆍ불선 등이 각각 서로 등무간연으로 되는 것이 인정된다. 태어남을 촉진하는 지위 등에서 다시 서로 이끌기 때문이다. 처음에 무루331)를 일으키는 것은 오직 색계 이후이다. 결택분의 선(善)332)은 오직 색계뿐이기 때문이다. 안식ㆍ이식ㆍ신식(身識)은 두 가지 세계[二界]와 두 가지 지위[二地]333)에서, 비식과 설식은 한 세계[一界]와 하나의 지위[一地]334)에서 자기 부류가 서로 등무간연이 된다. 선(善) 등을 서로 배대해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568_a_01L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35) 5식(識)도 유루와 무루의 자기 부류가 서로 등무간연이 된다. 아직 성불하지 않았을 때에는 서로 일으키는 것이 인정되기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36) 무루는 유루 이후에 일어난다. 무루 이후에 유루를 일으키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무루의 5식은 부처님이 아니면 없기 때문이고,337) 그 다섯 감각기관이 반드시 유루이기 때문이며,338) 이것은 이숙식의 상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유루이고,339) 공통되지 않으며,340) 반드시 함께하고,341) 대상을 같이하는342) 감각기관이 무루의식을 일으킨다는 것에 바른 논리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343)는 대상에 대해서 밝고 어두움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는 소연연(所緣緣)이니, 존재하는 법[有法]344)이 자기 모습을 띠는 심왕, 혹은 상응법(심소)의 사려된 것345)과 의지된 것346)을 말한다. 이것의 자체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친소연연(親所緣緣)이고, 다른 하나는 소소연연(疎所緣緣)이다. 만약 능연(能緣)과 자체가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서 견분 등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이라면, 그것은 친소연연(親所緣緣)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능연과 자체가 서로 떨어지긴 하지만, 본질로 삼아 능히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알라. 그것은 소소연연(疎所緣緣)이다. 친소연연은 능연에 모두 있다. 내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에서 떠나서는 반드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소연연은 능연에 혹은 있기도 하다. 외부의 사려된 것과 의탁된 것에서 떠나서 역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347)
제8식의 심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48) 오직 친소연연만이 있다. 업과 종자[因]의 세력에 따라 자연적으로 변현하기 때문이다.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49) (친소연연이 있고) 역시 반드시 소소연연도 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제8식이 변현한 것에 의지하여, 본질로서 스스로 바야흐로 변현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50) 두 견해가 모두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한다. 자신ㆍ타인의 신체ㆍ국토를 서로 수용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제8식이 전변한 것을 자신의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351) 자기 종자를 타인에 대해서 수용하는 논리가 없고, 타인이 이것을 변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은 종자가 모두 평등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352)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 심품의 소소연연은 일체의 지위 중에서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다.
전5식(前五識)의 심품은 전의를 이루지 못한 지위에서는 두드러지고 둔하며 미약하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의 본질에 의지한다. 따라서 (친소연연이 있고) 역시 반드시 소소연연도 있다. 이미 전의를 이룬 지위에서는 이것은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와 미래 등을 반연하는 데는 외부의 본질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증상연(增上緣)이니, 만약 존재하는 법이 뛰어난 세력이 있어서 능히 다른 법에 대해서 혹은 수순하고 혹은 거스르는[違逆] 것을 말한다. 앞의 세 가지 연(緣)도 증상(增上)이긴 하지만, 지금의 네 번째는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취한다. 모든 연(緣)의 차별된 양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 수순과 거스름의 작용은 네 곳에서 전전한다. 생겨나고, 머물고, 이루고, 얻는 네 가지 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증상연의 작용은 일에 따라서 많지만, 뛰어나게 나타나는 것은 오직 스물두 가지이니, 곧 스물두 가지 근[二十二根]353)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앞의 다섯 감각기관은 근본식 등이 전변된 안근 등의 승의근[淨色]으로써 자성으로 삼는다. 남근ㆍ여근의 두 가지 근(根)은 신근(身根)에 포함되기 때문에, 곧 그것의 일부분으로써 자성으로 삼는다. 명근(命根)은 다만 근본식의 직접적인 종자의 분위에 의거하여 가립하고, 별도로 자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의근은 전체적으로 8식으로써 자성으로 삼는다. 5수근(受根)은 상응하는 것처럼 각자의 감수작용[受]으로써 자성으로 삼는다. 신근(信根) 등 5근은 곧 신(信)심소 등과 선(善)의 염(念)심소 등으로써 자성으로 삼는다.
4성제를 아직 알지 못하나 장차 알게 되는 지위에 있는 근[未知當知根]354)의 자체의 분위에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근본위이니, 견도에 있으며 다음 찰나를 제외하는 곳으로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장차 알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가행위이니, 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를 말한다. 가까이 능히 근본위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량위이다. 좇아서 4성제의 현관(現觀)을 증득하기 위해서 결정적인 뛰어난 선법(善法)의 욕구355)를 일으키고, 나아가 아직 순결택분356)에서 선근을 얻지 못함에 이르기까지를 자량위라고 이름한다. 능히 멀리 근본위를 돕기 때문이다.
017_0568_c_01L이 세 가지 지위에서 신근 등 5근과 의근(意根)ㆍ희근(喜根)ㆍ낙근(樂根)ㆍ사근(捨根)으로써 이 근(根)의 자성으로 삼는다. 가행위 등 (자량위)의 지위에서는 이후의 뛰어난 법에 대해서 증득하려고 추구하여 근심하므로 역시 우근(憂根)도 있지만, 진정한 선근이 아니기 때문에 (『유가사지론』 등에서)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앞의 세 가지 무색계에서 이 근(根)357)이 있다는 것358)은 뛰어난 견도359)에서 곁으로 닦아 얻는 것360)이 있기 때문이다.혹은 2승의 지위로부터 대승으로 전향해서 나아가는 자가 법공을 증득하기 위해 10지(地) 이전에서 역시 9지(地)에 포함되는 아공의 무루를 일으킨다. 그것을 모두 보살의 이 근(根)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보살의 견도에서도 역시 이 근(根)이 있다. (『유가론』 제57권에서) 다만 10지 이전만을 말한 것은 시기를 포착한 것이기 때문이다.361)처음에 견도의 최후 찰나로부터 나아가 금강유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근(信根) 등 무루의 아홉 가지 근[九根]362)은, 모두 미오인과(迷悟因果)의 도리를 이미 아는 근[已知根]363)의 속성이다.364) 아직 욕망을 떠나지 못한 자는 상부 지위[上地]의 해탈에 대해서 증득하고자 추구하여 근심하므로 역시 우근(憂根)도 있지만, 진정한 선근은 아니기 때문에 (『유가론』 등에서)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모든 무학위에서의 무루의 9근은 일체가 모두 갖춘 것을 아는 근[具知根]365)의 속성이다.366) 유정천(有頂天)에서는 유관(遊觀)의 무루가 있지만, 밝고 예리하지 않아서 뒷부분의 세 가지 근(根)이 아니다.22근의 자성은 이상과 같다. 나머지 모든 부문의 뜻은 논서367)와 같이 알아야 한다.
2)부정심소라는 명칭을 건립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에 해당되는 심소들은 3성(性:선ㆍ악ㆍ무기) 중에서 그 성품이 일정하지 않고, 3계(界) 중에서 일어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며, 모든 식과 상응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심소(不定心所)라고 이름한다.
3)회(悔, kaukṛtya)심소는 ‘뉘우침’, ‘후회’, 즉 이전에 지은 업을 후회하고 싫어하는 심리작용이다. 오작(惡作)이라고도 한다. 뉘우쳐서 행동을 선(善), 수행으로 가게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선행(善行)을 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을 더욱 괴롭힌다.
4)다음에 별도로 부정심소의 자체[體]를 설명한다.
5)면(眠, middha, nidra)심소는 ‘수면(睡眠)’, 즉 숙면의 상태로 유도하는 심소이다. 일단 숙면 상태가 되면 면(眠)심소는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다. 수면은 신체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암매(闇昧)하게 만들어서,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된다. 적당한 수면은 체력을 충전하여 활달하게 하지만, 지나친 잠은 무기력하게 만든다.
6)오직 하나의 의식(意識)에만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7)세간과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무심위(無心位)를 수면(睡眠)으로 이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가립(假立)이고 실제의 수면은 별도로 존재한다. 이것은 심왕을 덮고 얽어매기[蓋纏] 때문이다. 덮고 얽어매는 것은 반드시 심소법으로서 자체[體]가 없는 법이 아니다.
16)이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삼지작법(三支作法)의 인명논리를 세울 수 있다. (宗) 잡염의 회(悔)ㆍ면(眼) 심소는 사(思)ㆍ혜(慧)ㆍ상(想)이 아니어야 한다. (因) 이것은 얽어매는 것[纏]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喻) 무참(無慚심)소 등과 같이. (宗) 청정의 회ㆍ면 심소도 역시 사(思)ㆍ혜(慧)ㆍ상(想)이 아니어야 한다. (因) 이것은 회ㆍ면 심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喩) 잡염의 회ㆍ면 심소와 같이.
17)심(尋, vitarka)심소는 ‘심구(尋求)’, 즉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심구하는 심리작용이다.
18)의언(意言, manojalpa)은 의지(意地)의 심사(尋思) 또는 제6의식을 의미한다. 의언(意言)의 대상[境]은 제6의식의 인식대상[所緣境]으로서 일체법을 가리킨다.
19)사(伺, vicāra)심소는 ‘사찰(伺察)’, 즉 대상의 뜻과 이치를 세밀하게 분별하여 사찰한다. 이로써 몸과 마음의 평안 또는 불안이 있게 된다.
20)심(尋)ㆍ사(伺) 심소는 몸과 마음이 평안할 때에는 천천히 느린 것을 업으로 하고, 불안할 때에는 바쁘고 급한 것을 업으로 한다.
21)심(尋)심소를 가리킨다.
22)사(伺)심소를 말한다.
23)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24)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25)번뇌와 수번뇌심소를 말한다.
26)안혜(安慧)의 견해이며, 이것으로써 정의(正義)로 삼는다.
27)『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제7권 본에 의하면, 이 두 가지의 두 종류에 대해서 열 가지 의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회(悔)ㆍ면(眠)은 오직 욕계뿐이고, 심(尋)ㆍ사(伺) 심소는 초선(初禪)에도 통한다. ②회ㆍ면 심소는 자체가 별도로 있고, 심ㆍ사 심소는 사(思)ㆍ혜(慧) 심소에 의지한다. ③회ㆍ면 심소는 실유(實有)이고, 심ㆍ사 심소는 가유(假有)이다. ④심ㆍ사 심소는 색계의 제4선정을 증득하여 단멸하고, 회심소는 분리단(分離斷)이며, 면심소는 아라한에서 영원히 단멸한다. ⑤제2선정을 얻으면 하부 지위[下地]의 심ㆍ사 심소를 일으키고, 상부 지위[上地]는 반드시 욕계의 회ㆍ면 심소를 일으키지 않는다. ⑥심ㆍ사 심소는 선지(禪支)이고, 회ㆍ면 심소는 그렇지 않다. ⑦회ㆍ면 심소는 덮고 얽어매는 것[蓋纏]이며, 심ㆍ사 심소는 그렇지 않다. ⑧심ㆍ사 심소는 언어의 작용이고, 회ㆍ면은 그렇지 않다. ⑨심ㆍ사 심소는 선정과 산란의 지위에 모두 있고, 회ㆍ면은 오직 산란의 지위에만 있다. ⑩심ㆍ사 심소는 유루와 무루에 통하고, 회ㆍ면은 오직 유루이다.
29)『유식삼십송』의 제14게송에서 “둘에 각각 둘이 있네[二各二]”라는 설명을 시설한 이유를 밝힌다. 그것에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두 가지의 두 종류는 잡염ㆍ잡염되지 않음의 양쪽에 통한다. 이것은 선심소는 오직 선(善)이고, 번뇌ㆍ수번뇌심소는 오직 잡염뿐으로서, 잡염ㆍ선(善)에 통하지 않는 것과 다른 것임을 나타낸다. 둘째, 분(忿) 등 오직 잡염의 심소를 가려내기 위함이다. 그것은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부정심소의 네 가지를 말하고 수번뇌심소라고 하기 때문에, 수번뇌심소처럼 이것이 오직 잡염뿐인가라고 생각할까 염려되어 이 말을 시설한다. 셋째, 이 두 가지의 두 종류는 그 성품이 일정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105)오직 식(識)뿐으로서 심소(心所)가 없다고 말하면, 어떤 차이의 인연이 있어서 하나의 식에 많은 인식작용[行相]이 있고 분위(分位)가 다르게 되겠는가라는 의미이다.
106)심왕과 심소의 관계에서 전자가 주체가 되고, 의지처이며, 인식작용이 총체적이고, 항상 결정적이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이름한다.
107)심소(心所)를 말한다.
108)3능변식을 설명하는 9의(義) 중에 소의문(所依門)이다.
109)9의(義) 중에 구불구전문(俱不俱轉門)이다. 본문에서 ‘5식’만을 들었는데, 사실 제6의식은 5식 중의 1식이라도 일어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동시에 구기(俱起)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안식이 생기하려면 9연(緣:공간ㆍ빛ㆍ根ㆍ境ㆍ作意ㆍ제6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ㆍ종자)을 필요로 한다. 이 식은 빛을 제외한 공간ㆍ감관ㆍ대상ㆍ작의 등 8연을 필요로 한다. 비식ㆍ설식ㆍ신식은 공간과 빛을 제외한 감관ㆍ대상ㆍ작의 등 7연을 필요로 한다.
110)9의(義) 중에 기멸분위문(起滅分位門)이다. 제6의식이 5위무심(位無心)을 제외하고 항상 일어나는 이유는 연(緣)을 가자(假藉)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①부정심소인 심(尋)ㆍ사(伺)와 상응하기 때문에 스스로 능히 사려할 수 있음. ②타(他)에 이끌려서 생기하지 않고 스스로 생기함. ③내(內)ㆍ외문전(外門轉)의 식(識), 즉 외계의 두드러진 구체적 사물[麤事]에 대해서도 일어나지만, 또한 내계의 세사(細事:心法ㆍ理性)에 대해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緣)이 구족되는 일이 용이하므로 간단(間斷)하는 일이 매우 적어서 거의 항시(恒時)에 현기(現起)한다. 다만 오위무심이라 하여 무상천에 태어남, 무상정ㆍ멸진정ㆍ극수면(極睡眠)ㆍ극민절(極悶絶)의 경우에는 제6의식이 생기하지 않는다.
111)다음에 6식(識)의 의지처[所依]를 밝힌다[六識所依門].
112)현행 제8식의 6식 모두의 의지처이므로 공통적인 의지처[共依]라고 한다.
113)직접적인 의지처[親依]는 공통되지 않는 의지처[不共依]라는 의미로서 종자의 근본식을 가리킨다. 6식은 각각의 자기 종자를 그 친인연(親因緣)으로 한다.
114)5식이 연(緣)에 따라 함께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음을 밝힌다[俱不俱門].
115)5식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 같이 감각기관에 의지한다. 둘째, 물질계의 대상을 인식대상으로 한다. 셋째, 오직 현재법을 인식대상으로 한다. 5식은 과거와 미래의 법을 인식대상으로 할 수 없다. 넷째, 현량지(現量知)이다. 5식은 비량(比量) 등의 작용이 없다. 다섯째, 잠시 중단됨이 있다.
135)중유(中有)는 죽은 뒤로부터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사이, 즉 사유(死有)와 생유(生有)의 중간의 생존상태이다.
136)생을 받은 뒤에 죽을 때까지의 사이, 즉 생유(生有)와 사유(死有)의 중간의 생존상태이다. 참고로 말하면 여기서 유(有)는 bhava의 번역어로서 중생의 생존을 말한다. 중생이 미혹의 생사세계를 윤회하는 한 기간의 생존상태를 4분(分)하여 생유(生有:각각의 세계에 생을 받는 托胎ㆍ結生의 한 찰나), 본유, 사유(死有:임종할 찰나), 중유의 4유(有)라고 한다.
137)색계 제4선천을 가리킨다.
138)『유가사지론』 제12권(『고려대장경』 15, p.622中:『대정장』 30, p.340下). 본문의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무상천에 태어날 때에는 무심위에 들어갈 때만 심왕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무심위에 들어 있지 않을 때에는 심왕을 일으킨다. 이것은 태어나는 최초이므로, 생(生)의 최초에는 전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죽을 때에는 심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142)색계 제4선천 중의 다섯 가지 정거천(淨居天:無煩天ㆍ無熱天ㆍ善現天ㆍ善見天ㆍ色究竟天)과 무색계를 말한다.
143)다음에 두 가지 무심정을 해설한다.
144)색계 제3선천의 제3천이다. 이 하늘은 맑고 깨끗하며 쾌락이 가득 찼다는 뜻으로 변정천이라고 이름한다.
145)제4선정 이상을 가리킨다.
146)네 가지 업은 순현수업(順現受業)ㆍ순생수업(順生受業)ㆍ순후수업(順後受業)ㆍ부정수업(不定受業)이다.
147)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148)호법의 정의이다.
149)무학(無學)은 구해탈(俱解脫)을 이룬 사람, 즉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떠나서 지혜와 선정에 있어서 자재를 얻은 아라한을 말한다.
150)무소유처(無所有處)는 무색계 4천 가운데의 제3천이다.
151)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색계의 제4천으로서 3계의 맨 위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152)2승(乘)은 6식의 유루의 사려(思慮)함을 싫어하거나 혹은 무루심이 두드러지게 작용하는 것을 관찰한다. 보살은 또한 무심적정의 열반에 비슷한 공덕을 발생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으킨다.
153)전6식(前六識)을 가리킨다.
154)제7식을 말한다.
155)특히 강하게 싫어하는 것에 의거해서 멸수상정(滅受想定)으로 이름하며, 사실은 다른 심왕과 심소도 멸한다.
156)수(受)ㆍ상(想) 심소이다. 멸진정을 멸수상정이라고도 한다.
157)무분별지(無分別智)를 가행심(加行心)으로 하는 것을 가려내어[簡] 유관(遊觀)이라고 말한다.
158)유관무루(遊觀無漏)는 미혹을 단멸하지 않고, 진리를 관찰하지 않는 후득지(後得智)를 말한다.
159)아홉 가지 순차적인 선정 중에서 차례로 들어가는 수행자가 초선(初禪)부터 점진적으로 승진해 들어가서, 제8유정유관무루(有頂遊觀無漏)로부터 제9멸진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유관무루로써 가행(加行)을 삼는다고 한다.
160)아홉 가지 순차적인 선정[九次第定], 즉 색계의 4선(禪), 네 가지 무색정[四無色定:空無邊處定ㆍ識無邊處定ㆍ無所有處定ㆍ非想非非想處定]ㆍ멸진정을 말한다.
161)하부 지위[下地]의 7지(地)이다.
162)색계와 무색계이다.
163)나중에는 욕계에서 일어나고, 반드시 불환과(不還果) 등을 얻기 때문이다.
164)색계와 무색계의 하늘은 의사(意思)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의성천(意成天)이라고 한다.
165)범부는 유정천(有頂天)의 견소단(見所斷)의 심왕ㆍ심소를 복멸(伏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부 지위의 8지(地)의 견혹(見惑)을 모두 조복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오직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만을 말하는가 하면, 이것이 최후로 반드시 복단(伏斷)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66)2승(乘)이 이 선정에 들어갈 때에는 오직 아공(我空)을 증득하는 후득지(後得智)로써 이끌려 일어난다. 보살과 부처님이 들어갈 때에는 아공ㆍ법공의 후득지로써 모두 이끌려 일어날 수 있다.
167)다음에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修惑]에 관한 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168)욕계로부터 무소유처정까지이다.
169)불선과 유부무기를 말한다.
170)색계의 네 가지 선정[四禪]과 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四無色定]을 말한다.
171)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172)욕계와 색계의 제3선천까지의 4지(地)이다.
173)고락(苦樂) 등의 수(受)를 말한다.
174)색계의 제3선천 이하의 미혹은 이미 조복되기 때문에, 그곳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175)무루(無漏)로써 그 종자를 단멸하지 않고, 또한 퇴전하여 그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상(想)심소가 작용하지 않는 지위[非想地]에 태어나는 사람이 그곳에 태어나서 도리어 제4선천 등의 미혹을 단멸하겠는가라고 묻는다.
176)이미 조복하긴 하지만 오히려 종자가 있어서 상부 지위[上地]에 태어남을 장애하므로, 그곳에 태어나는 뜻이 없다. 하부 지위[下地]의 종자를 단멸하고 나서 상부 지위[上地]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곳에 태어나서 다시 도리어 하부 지위[下地]의 종자를 단멸한다고 말하는 과실이 없다는 의미이다.
186)다음에 무심의 5위(位)를 요간(料簡)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태어나고 죽는 경우를 묻는다.
187)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188)이 견해에 의하면, 무심위(無心位)는 5위(位), 죽음의 순간[死位], 태어나는 순간[生位]의 7위가 된다. 다만, 『삼십송』의 제16게송에서 죽음과 태어남의 두 가지 위(位)를 말하지 않은 것은 게송 중의 ‘및[及]’과 ‘와[與]’의 두 글자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191)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이숙(異熟)의 괴로움의 과보인 5온화합의 신체까지 모두 멸하며, 이제는 의지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
192)무여의열반에 들어가는 지위를 말하지 않는 이유를 밝힌다.
193)멸진정ㆍ수면ㆍ기절한 경우를 가리킨다.
194)이하 세 가지 능변식(能變識)을 요간(料簡)한다[三能變分別]. 먼저 8식이 함께 전전하는 관계를 밝힌다.
195)예를 들면, 욕계에서 제6식이 색계의 선정을 일으킬 때, 만약 식(識)에 의해서 유정을 판별한다면 이것은 항상 색계의 유정으로서, 욕계의 유정으로 말해서는 안 되잖겠는가라고 반대로 질문한다.
196)설일체유부에서 비판하기를, 유정에서 정(情)이란 식(識)을 의미하고, 여러 식의 자체(自體)가 있다면 많은 유정이지, 하나의 유정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라고 묻는다.
197)상부 지위의 다른 세계 분위[界分]나 다른 무루 분위[無漏分]를 말한다.
198)명근(命根)을 소승에서는 실유(實有)로 말하지만, 대승에서는 그것을 종자에서 가립하여 말한다.
199)명근이나 이숙식을 가리킨다.
200)심소법은 모두 심왕에 소속된 법으로서 동일한 능연(能緣)의 체성임을 말한다.
201)하나의 바다나 거울에 의해 많은 파도나 영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202)비판하여 묻기를, 5식과 함께하는 의식[五俱意識]은 오직 하나뿐인데, 어떻게 그것이 색경(色境) 등 여러 대상을 취하는가라고 말한다.
203)견분(見分)이 하나 또는 여럿인 것은 인식대상[所緣境]이 하나 또는 여럿인 것에 의한다. 예를 들면 안식 앞에 꽃ㆍ나무ㆍ나비 등 여러 대상이 동시에 있을 때는 동시에 그들 여러 대상을 취한다. 견분이 그 상분(相分)의 수(數)에 응하여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의식이 여러 대상을 취하는 데 아무 자질이 없게 된다고 답변한다.
204)예를 들면 안식이 한 찰나에 둘ㆍ셋ㆍ넷 등 여러 안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여러 식이 함께 일어남을 인정한다면, 같은 종류의 식이 여럿이 함께 일어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고 묻는다.
215)유식상(唯識相)을 밝히는 세 가지 큰 분단[大段] 중에서 이상 능변식의 양상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마치고, 이하 식전변(識轉變)에 의거해서 가아(假我)와 가법(假法)을 건립하는 일단(一段)이다. 먼저 “그것은 식이 전변한 것에 의거한다[彼依識所變]”는 문구를 자세히 해설한다.
218)심외(心外)에 실존한다고 망집(妄執)되는 아(我)ㆍ법(法)을 가리킨다. 범부나 외도가 집착하듯이, 심외에 아ㆍ법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견분ㆍ상분 위에 가립된 것일 뿐이다.
219)유식(唯識)의 이치를 판별한다.
220)먼저 안혜와 호법의 해설을 서술한다. 그런데 안혜와 호법은 다 같이 식(識)의 자체분으로부터 견분과 상분을 변현한다고 설명하면서도, 2분(分)의 가실(假實) 문제에 있어서는 입장을 달리한다. 즉 안혜에 의하면, 그 전변된 견분과 상분은 변계소집성으로서 자체[體]가 없는 법이고, 다만 의타기성의 유(有)처럼 사현할 뿐이며, 자체분만이 의타기성으로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중기 유식학파의 두 가지 사조(思潮) 중에서 무상유식론(無相唯識論, nir-kra-vijnavda)의 입장으로서, 식의 표상화 작용 그 자체를 궁극적으로 소멸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표상은 인식의 본질이 아니라 허망한 것으로서, 사량 분별을 떠난 인식의 본질은 형상이 없는 ‘비춤 그 자체’, ‘순수한 조출성(照出性)’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유방법은 중관학파와 비슷하다. 이에 반하여 호법은 견분과 상분을 의타기성의 자체가 있는 법으로 설명한다. 식의 자체분이 전변하여 의타기성의 2분(分)을 현현하고 그것이 변계소집의 아(我)ㆍ법(法)에 비슷하므로 여기에 아(我)ㆍ법(法)의 모습을 가립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 skra-vijnavda)의 입장으로서, 식상(識上)의 형상은 의타기성으로서,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인식상황 속의 형상은 진실성을 인정한 이유는 유식학의 심식론을 인식논리[因明]로써 설명하고 증명함으로써, 깨달음의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221)이 부분에서 세친(世親)이 식전변설을 수립한 의도가 잘 나타난다. 그는 식전변설의 체계 속에 인식성립의 역학적 구조를 담고 싶었다. 식의 본래의 기능은 분별, 즉 대상 인식작용이다. 종래의 ‘식=분별’에 세친은 분별하게 되는 원리로서 전변의 개념을 도입하여 ‘식=전변=분별’로 설명하였다. 식전변(識轉變)은 단순히 아뢰야식의 종자로부터 7식과 현상적 존재가 생겨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변의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능변식(8식과 이에 수반되는 심소)이 견분[能取相]과 상분[所取相]을 변현시키는 것이다.
222)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말한다.
223)유위법은 식이 전변된 것[識所變]을 가리키고, 무위법은 식의 체성(體性)을 말한다.
224)다음은 난타(難陀)의 견해이다.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그는 이분가(二分家)로서 자체분(自體分)을 건립하지 않고, 견분의 식이 의타기(依他起)의 상분을 전변하여 아(我)ㆍ법(法)의 외부대상의 모습으로 사현한다고 말한다. 다만 견분과 상분이 다 같이 의타기법(依他起法)이긴 하지만, 가실(假實)의 차이가 있어서 견분은 참다운 것[實]이고, 변현된 상분은 허망한 것[假]이다. 상분도 역시 참다운 것이라고 하면, 곧 유식(唯識)의 의리(義理)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25)본 논서 제1권ㆍ제2권에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을 논파하였다.
226)다음에 총체적으로 결론 맺는다. 마음에서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법[心外法]이란 없기 때문에 증익(增益)의 극단을 부정한다. 허망한 마음이 존재하므로 손감(損減)의 극단을 막는다. 그리하여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되고 중도에 계합된다.
227)이하 아홉 가지 문답으로써 만유유식(萬有唯識)의 도리를 자세히 해설한다[九難義].
228)『십지경(十地經)』 제8권 등.
229)『해심밀경』 제3권, 『유가사지론』 제77권. 능연(能緣)의 견분과 소연(所緣)의 상분은 모두 자체분이 현현된 것임을 나타냄으로써 만법유식(萬法唯識)ㆍ심외무법(心外無法)의 취지를 서술한다.
231)『아비달마경』에 나오는 문장이다.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4권에 인용되어 있다.
232)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가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예를 들면 같은 물[水]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물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본다. 천인(天人)은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기 다르게 인식한다.
233)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234)공용(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처럼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을 이루게 될 것이다.
235)만약 인식대상이 실재한다면 다음 세 가지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는데, 현실적으로 이들 세 가지 사실이 일어나므로 인식대상은 실재하지 않음을 논증한다.
236)8지(地) 이상의 보살이다.
237)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또는 모래를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238)지관(止觀)을 닦는 요가 수행자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239)공통적으로 인정되는[極成] 안식 등이란, 공통적으로 인정되지 않는[不極成] 유법(有法)을 가려내기[簡] 위해서 붙인 것이다. 즉 대승의 다른 학파에서 주장하는 부처님의 안식 등, 소승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비무루(非無漏)의 안식 등과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의 불선(不善)의 안식 등을 가려낸다. 그것들은 자타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自他極成]이 아니기 때문이다.
240)5식 중에서 안식을 제외한 나머지 4식을 말한다.
241)이상 6경(經)을 인용하여 증명했다. 다음에 바른 논리[正理]로써 만법유식(萬法唯識)의 뜻을 논증한다. 네 가지 입량(立量)을 열거하는데, 먼저 첫 번째 비량(比量)을 삼지작법(三支作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공통적으로 인정되는[極成] 안식 등은 직접 자신에게서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색경 등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 (因) 5식 중의 하나를 따르는[隨一] 데 포함되기 때문이다. (喩) 나머지 4식과 같이.
242)두 번째 비량(比量)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나머지 식도 역시 직접 자신에게서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 (因) 이것은 식(識)이기 때문이다. (喩) 안식 등과 같이.
243)견분과 상분을 말한다.
244)세 번째 비량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6식의 친소연(親所緣)은 반드시 6식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因) 견분과 상분 중의 하나를 따르는 것[隨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喩) 그 능연(能緣)의 견분 등과 같이.
245)네 번째 비량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宗) 6식의 친소연은 반드시 자신의 능연(能緣)인 심왕과 심소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因) 이것은 인식대상[所緣]의 법이기 때문이다. (喩) 상응법과 같이.
246)다음에 총체적인 결론으로서 위에서 밝힌 것을 논증한다. 먼저 바른 논리로써 증명하는데, 자아와 법은 변계소집성이고, 공(空)은 원성실성이며, 식(識)은 의타기성이다. 따라서 이것은 삼성대망(三性對望)하여 중도의 뜻을 나타낸다.
247)다음에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으로써 증명한다. 아래 게송은 『변중변론(辯中邊論)』 제1권에서 미륵보살이 말씀한 것이다.
248)3계의 의타기성의 허망분별심을 말한다.
249)소취(所取)와 능취(能取) 또는 자아와 법을 말한다.
250)공성(空性)과 허망한 마음[妄心]이 있으므로 공空이 아니다.
251)능취와 소취 또는 자아와 법이 없기 때문에 불공(不空)도 아니다.
252)허망분별, 즉 의타기성의 가유(假有)를 말한다.
253)2취(取), 즉 변계소집성의 실무(實無)를 가리킨다.
254)원성실성의 실재[實有]를 말한다. 또는 허망분별 중에서 공성이 있고[妄中有空], 공성에 대해서 허망분별이 있음[空中有妄]을 나타낸다.
255)따라서 오로지 공(空)만을 주장하는 중관학파의 청변(淸辯) 등과 같지 않고, 또한 오로지 실유(實有)를 말하는 소승과 같지 않으며, 참으로 중도에 계합함을 말한다.
256)다음에 만약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면 세간의 일과 어긋난다고 비판하는 것에 답변하는 것으로써 논증한다[第二世事乖宗難].
257)다음에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답변함으로써 논증한다[第三聖敎相違難]. 만약 마음 밖에 색경(色境) 등의 참다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존께서 어떻게 12처(處)가 있다고 말씀하셨는가라고 비판하여 묻는다.
258)여기서 유식성(唯識性)은 의타기법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고, 원성실성의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259)비판하여 묻기를, 법집(法執)을 없애서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유식의 가르침을 말한다면, 그 유식성 자체도 역시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畢竟空無]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第四唯識成空難].
260)다음에 외부대상[色境]의 모습은 마음이 아니지 않겠느냐고 비판하여 묻는다[第五 色相非心難].
261)아득한 옛적부터 허망분별의 훈습력에 의해서, 상주하고 항상하며 변하지 않는 색경(色境)의 모습이라고 집착한다. 이러한 훈습에 의해 한 종류의 견고한 색경의 모습으로 사현한 것이지, 마음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대상[實境]은 아니다.
262)색경(色境) 등 외부대상을 가리킨다.
263)색경(色境) 등으로부터 잡염ㆍ청정법의 의지처로 된다. 왜냐하면 욕계와 색계의 유정이 아득한 옛적부터 색경 등에 미혹되게 집착함으로써 전도(顚倒)된 망심(妄心)을 일으키고, 그것에 의해 번뇌ㆍ업ㆍ생(生)의 잡염을 일으켜 생사에서 윤회한다. 만약 색경 등이 없다면, 전도된 망심도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잡염이 없으면, 청정법도 있지 않아야 한다.
264)잡란[亂]은 심왕 등을 말한다. 허망하고 전도됨[妄倒]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269)외부대상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는데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비판하여 묻는다[第六 現量爲宗難]. 즉 색경(色境) 등 다섯 가지 외부대상은 5식의 현량으로써 분명히 깨달아 알고, 현량으로 인식하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서 조금도 오류가 없다. 만약 외부대상이 실유(實有)가 아니라면, 현량으로써 반연하여 색경 등이라는 인식을 일으킬 수 없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270)꿈과 깨었을 때의 차이점을 들어 비판하여 묻는다[第七夢覺相違難].
271)참다운 깨달음[眞覺]은 무루의 참다운 지혜를 말한다.
272)마음 밖의 실재 대상인 타인의 마음을 인식하는 경우를 들어 비판한다[第八外取他心難]. 즉 외계의 색경(色境) 등은 실체가 없고 내부의 식이 전변된 것이지만, 타인의 심식은 자기 마음에서 떠나서 외부에 그 자체가 있다. 만약 마음 밖의 실재의 대상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타인의 마음은 자신의 인식대상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타심지(他心智) 같은 것은 타인의 마음을 반연해야 하며, 그렇다면 이것은 마음 밖의 실재의 대상을 반연하는 것으로서,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되지 않아야 하지 않느냐고 비판하여 묻는다.
273)정량부(正量部)를 논파한다. 그들은 상분(相分)을 건립하지 않기 때문에 심왕과 심소법이 직접 대상을 취하는 것이, 마치 손[手] 등으로 외부 사물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하므로 여기서 그것을 논파한다.
274)승론(勝論) 학파를 논파한다. 그들은 안식이 일어날 때 빛을 펴서 직접 눈앞의 대상을 비추는 것이, 마치 해와 달 등이 빛을 펴서 직접 외부대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므로 여기서 논파한다.
275)타인의 마음은 능히 자기 식[自識]의 인식대상이 되므로,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타인의 마음으로써 친소연연(親所緣緣:상분)으로 삼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것을 소소연연(疎所緣緣:본질)으로 한다. 자기 마음 위에 그 영상인 상분을 현현하여, 그것으로써 친소연연으로 반연할 뿐이므로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된다고 논증한다.
279)타인의 마음 등 다른 대상이 있으므로 유식(唯識)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第九異境非唯難]. 즉 친소연연(親所緣緣:상분)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 밖에 타인의 마음이라는 다른 대상[異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유식이 아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280)심왕과 심소를 가리킨다.
281)심왕과 심소 및 색법을 말한다.
282)심왕ㆍ심소ㆍ색법ㆍ불상응행법이다.
283)복덕과 지혜를 말한다.
284)총체적으로 결론 맺으면서 믿을 것을 권한다.
285)이하 식이 전변된 것[識所變]에 의거해서 가아가법(假我假法)을 건립하는 두 가지 큰 분단[大段] 중에서 두 번째이다. 여러 외인들의 비판을 해석하여, 『삼십송』 제1게송의 “자아와 법을 가설함으로 인하여 (자아ㆍ법의) 갖가지 모습들이 생겨난다[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는 문구를 자세하게 해설한다. 먼저 심법(心法)이 일어나는 연유를 밝힌다.
286)8식의 심왕과 그것에 상응하는 심소를 가리킨다. 허망분별로써 자성을 삼는 유루법(有漏法)이다.
287)심법(心法)이 생기하는 연유를 밝힌다. 심왕ㆍ심소는 반드시 그 소연(所緣)에 의탁해서 생기한다. 그런데 과연 내심(內心)만 있고 외경(外境)이 없다면 심왕ㆍ심소는 무엇을 말미암아서 생기할 수 있는가라는 힐난(詰難)에 대해서 심법이 생기하는 연유를 설명한다. 허망분별의 생기에는 내심의 종자ㆍ현행을 인(因)으로 삼고 연(緣)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심외(心外)에 실경(實境)이 없을지라도 그 생기(生起)에는 지장이 없다.
288)등류과(等流果)는 첫째,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즉 종자가 전후 찰나에 자류상생(自類相生)하는 것이다. 둘째,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을 말한다. 그 현행은 종자의 동류(同類)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자가 동류인(同類因)이 되어 종자와 현행의 등류과(等流果)를 일으킨다.
289)선ㆍ악의 업종자가 무기(無記)의 현행의 과보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290)작의(作意) 종자가 이른바 종자경각(種子警覺)으로서 현행법을 일으키는 경우 사용과(士用果)를 얻는다. 사용은 사부(士夫)의 작용이라는 뜻으로서, 사람의 노력에 의해 어떤 사업을 성공하는 것처럼, 상응인(相應因)ㆍ구유인(俱有因)의 작용에 의해 얻은 결과를 사용과라고 한다.
291)어떤 유위법이 생겨날 때에, 자기 이외의 법이 직접적으로 힘을 주거나 또는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도와주는 관계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곧 다른 것이 능작인(能作因)이 되어 그 증상력(增上力)에 의해 생긴 결과이다. 예를 들면, 제7식의 종자를 구유의(俱有依)로 하여 제8식의 현행을 생겨나게 할 때, 곧 증상과를 얻는 것이다.
292)계박을 떠난 증과[離繼果]란, 무루성도(無漏聖道)의 지혜의 힘으로써 번뇌의 계박을 떠나고 끊은[離繼] 데서 나타나는 열반의 진리를 가리켜서 말하기 때문에 종자생(種子生)이 아니므로 제외한다.
293)무루의 뛰어난 도[無漏勝道]이다.
294)종자로부터 지혜가 생겨나게 하고, 지혜가 미혹을 끊어 열반[離繼果]을 증득한다. 이와 같이 종자로부터 직접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지혜를 격(隔)하여 전전하여 생겨나게 하므로, 게송에서의 일체종자식에 의거한다는 말에는 상관이 없음을 밝힌다.
295)현행식(現行識)을 말한다. 이것은 내부의 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96)외부의 곡식[外種] 등을 가리킨다. 이것은 식의 자체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297)네 가지 연[四緣] 중에서 인연(因緣)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연(緣)을 말한다. 다만 심법을 일으키는 것은 세 가지 연이고, 색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오직 증상연(增上緣)뿐이다.
298)미숙(未熟)의 견인인(牽引因)의 지위로부터 이숙(已熟)의 생기인(生起因)의 지위에 이른다.
299)명언훈습(名言熏習)ㆍ아집훈습(我執熏習)ㆍ유지훈습(有支熏習)을 말한다. 명언훈습은 언어를 사용한 개념적인 사고(思考)에 의해 이식되는 것이다. 아집훈습은 자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견해[我見]에 의해 훈습되는 것이다. 유지훈습은 3유(有:三界)에서 생사윤회하게 만드는 훈습을 말한다.
300)자체분ㆍ견분ㆍ상분 등을 말한다.
301)총체적으로 게송의 의미를 결론 맺는다.
302)다음에 예(例)하여 청정법을 일으키는 것을 밝힌다.
303)이하 게송의 뜻을 자세하게 해설한다. 먼저 네 가지 연(緣)을 설명한다[四緣義].
304)종자생종자의 이시인과(異時因果)와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동시인과(同時因果)의 두 가지가 있다.
305)자기 부류의 종자 및 자기의 현행에 배대해서만 인연(因緣)이 된다.
306)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경우를 말하며, 현행은 능훈의 현행이다.
307)능훈(能熏)의 현행을 말한다.
308)소훈(所熏)의 종자를 가리킨다.
309)인위(因位) 중의 제8식과 6식 중의 이숙의 심왕은 매우 미세하여 능훈이 아니다.
310)불과(佛果)의 제8식은 매우 원만하여 종자를 훈습하지 않는다.
311)만약 제8식은 스스로 소훈처(所熏處)로서, 다시 자신의 소훈처가 없으므로 능훈(能熏)이 아니라고 말하면, 제8식과 함께하는 심소(心所)로써 능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심에 대한 답변이다.
312)무슨 까닭으로 현행의 같은 부류가 이전 찰나의 것을 이후 찰나의 것에 배대하여 소승의 동류인(同類因)과 같이 인연이 아니라고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318)심왕과 심소법이 전념(前念)에서 후념(後念)으로 전전할 때에, 이전 찰나에 멸한 마음이 길을 열어 뒤에 생기는 마음을 끌어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전념과 후념의 심왕과 심소의 수(數)는 같지 않더라도, 그 주체는 앞뒤가 평등하여 하나이므로 등(等)이라고 하고, 후념은 전념과의 사이에 설사 얼마의 시간이 경과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마음이 그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고 곧 생겨나므로 무간(無間)이라고 한다. 등무간연은 심왕ㆍ심소법에만 국한되고 다른 법에는 통하지 않으며, 또한 아라한이 열반에 들려는 최후심(最後心)의 심왕ㆍ심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마음의 작용은 반드시 이 관계를 갖는다.
320)제8식에 있어서 유루(有漏)가 무루를 생겨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세계의 유루 이후에 무루를 생겨나게 하는가라고 외인(外人)이 묻는다.
321)돈오(頓悟)의 보살을 가리킨다.
322)색계 제4선천의 9천(天) 중 위의 5천, 즉 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견천(善見天)ㆍ선현천(善現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을 말한다. 여기는 성자가 태어나는 곳으로서, 아래 4천의 외도가 태어나는 곳과는 크게 다르며, 그것을 5정거천(淨居天)이라고 이름한다.
323)색계의 정상에 있는 궁전으로서, 외도들이 제사 드리는 대자재천이 여기에 머문다. 또한 제10지 보살이 장차 성불하려고 할 때에, 이곳에서 정토(淨土)를 변현하여 시방(十方)의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관정(灌頂)을 받는다고 한다.
324)점오(漸悟)의 보살을 말한다.
325)호법의 정의이다.
326)『대반야경』 제129권.
327)유부무기(有覆無記)를 말한다.
328)아집(我執)의 제7식 또는 유부무기(有覆無記)를 말한다.
329)법집(法執) 또는 이숙식(異熟識)의 무부무기(無覆無記)를 가리킨다.
330)후득지(後得智)와 그것에 이끌려진 멸진정을 말한다.
331)무루의 묘관찰지(妙觀察智)이다.
332)세제일법(世第一法)을 가리킨다.
333)욕계와 색계 초선천(初禪天)이다.
334)욕계의 일지(一地)를 말한다.
335)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36)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37)성소작지(成所作智)는 오직 불과(佛果)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338)어째서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오직 불과(佛果)에서만 일어나는가 하면, 그 5식의 의지처인 5근(根)은 반드시 유루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유루인가 하면, 이것은 이숙식의 상분에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39)무루의 감각기관을 가려낸다[簡].
340)유루의 제8식을 가려낸다. 이것은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무루식의 의지처도 되므로 제외한다.
341)등무간연(等無間緣)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등무간연의 감각기관은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생겨나므로 유루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47)소소연연(疎所緣緣)은 능연의 법에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한다. 이것은 마음 밖의 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실아(實我)를 집착하는 것 등은 본질이 없지만, 그 법에서 떠나서 마음이 역시 일어나는 것과 같다.
348)다음에 8식(識)에 있어서 친소연연과 소소연연의 유무(有無)를 판별한다. 먼저 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49)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50)호법의 정의이다.
351)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논파한다.
352)제2사(第二師)의 견해를 논파한다.
353)일체법 중에서 작용이 가장 뛰어난 스물두 가지 법을 선택하여 22근(根)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근(根)은 최승(最勝)ㆍ자재ㆍ증상(增上)의 뜻으로서, 작용이 우수한 것을 말한다. 이에 6근(인식기관)ㆍ남근(男根)ㆍ여근(女根)ㆍ명근(命根)ㆍ5수근(受根)ㆍ5선근(善根)ㆍ3무루근(無漏根)이 있다.
354)세 가지 무루근[三無漏根:未知當知根ㆍ已知根ㆍ具知根] 중의 하나이다. 견도위(見道位)에서 일어나는 의(意)ㆍ낙(樂)ㆍ희(喜)ㆍ사(捨)ㆍ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아홉 가지 근(根)을 말한다. 16심(心) 중에서 앞의 15심은 견도에, 제16심은 수도(修道)에 포함된다. 견도위의 수행자는 일찍이 알지 못하던 4성제(聖諦)의 진리를 다음 생각인 제16심에서 온전하게 아는 위치에 있으므로, 이 지위에 있는 자가 가진 9근을 이렇게 이름한다.
355)여섯 가지 현관(現觀) 중에서 신현관(信現觀)을 말한다.
356)네 가지 선근(善根), 즉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357)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을 가리킨다.
358)『유가사지론』 제57권(『고려대장경』 15, p.1025中:『대정장』 30, p.618中)에 나온다.
359)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를 말한다.
360)상견도(相見道)이다.
361)보살의 3근(根)이란, 10지(地) 이전의 승해행지(勝解行地:十住ㆍ十行ㆍ十廻向)에서 제1근(根)을 건립하고, 10지에서 제2근을, 불지(佛地)에서 제3근을 건립한다. 이 의혹을 풀어 주기 위해서 보살의 견도에서도 역시 이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이 있지만, 오직 승해행지만을 말한 것은, 견도 중에서는 시기를 포착한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363)이지근(已知根)은 세 가지 무루근 중의 하나이다. 수도(修道)에서 일어나는 의(意)ㆍ낙수(樂受)ㆍ희수(喜受)ㆍ사수(捨受)ㆍ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아홉 가지 근(根)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지혜로써 미(迷)ㆍ오(悟)ㆍ인(因)ㆍ과(果)의 도리를 다 아는 것이다.
364)이미 4성제의 도리를 아는 지위의 근[已知根]의 자체[體]를 밝힌다.
365)구지근(具知根)은 세 가지 무루근(無漏根) 중의 하나로서 아라한의 무루지(無漏智)를 말한다. 닦을 것을 모두 닦고, 끊을 번뇌도 이미 끊어 다시는 닦을 것이 없다고 아는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