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환과의 계위에 대해 온갖 계경 중에서는 여러 가지 갈래로 차별하여 설하고 있는데, 이제 다음으로 그것의 차별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환에는 중(中)ㆍ생(生)ㆍ유행(有行)과 무행(無行)의 반열반이 있으며 상류반(上流般)으로서 잡수(雜修)의 행자는 능히 색구경천으로 가서 반열반하는데 此中生有行 無行般涅槃 上流若雜修 能往色究竟
여기에는 전초(全超)ㆍ반초ㆍ변몰이 있으며 그 밖의 행자는 능히 유정천으로 가 반열반한다. 무색계로 가 반열반하는 불환에는 네 가지가 있고 여기(현신)에 머물면서 반열반하는 경우도 있다. 超半超遍歿 餘能往有頂 行無色有四 住此般涅槃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불환과의 성자를 모두 설하면 일곱 가지가 있다. 먼저 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불환과는 다섯 가지로 차별되니, 첫째는 중반열반(中般涅槃)이며, 둘째는 생반열반(生般涅槃)이며, 셋째는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이며, 넷째는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이며, 다섯째는 상류반열반(上流般涅槃)이다. 이러한 이(불환과)가 중간(中間, 즉 색계 중유)에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중반열반’이라 이름하였다. [그 밖의 차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이가 [색계에] 태어나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가 유행(가행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반열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가 무행에 의해(다시 말해 가행의 노력 없이) 반열반하기 때문에 ‘생반열반’ 등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나아가 이러한 이가 상지로 유전[上流]하여 반열반하기 때문에 ‘상류반열반’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즉 중반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어떤 보특가라가 생결(生結)에 대해서는 이미 비택멸을 획득하였으나 기결(起結)에 대해서는 비택멸을 획득하지 못하였을 경우,1) 그는 욕계에서 그를 핍박하고 어지럽히는 인연을 만나 그것에 의해 핍박되고 어지럽혀졌지만, 능히 스스로 그 밖의 다른 결(즉 기결)을 끊는 수승한 가행을 부지런히 닦게 된다. 그러다 가행이 아직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채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인연을 만나 마침내 목숨을 버리게 되면, 기결의 힘으로 말미암아 색계의 중유를 받게 되는데, 많은 괴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앞서 일으킨 도에 편승하여 증진함으로써 그 밖의 결을 끊고,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반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생반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어떤 보특가라가 일찍이 순기생업(順起生業, 중유와 생유에 수순하는 업)을 모두 지었고, 아울러 증장시켰을 경우, 욕계에서 몰하고 나서 색계의 생을 받게 되는데, 근수(勤修)와 속진(速進)의 도(道)를 갖추었기 때문에 태어나서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를 성취하며,2) 수명을 다하고서 바야흐로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즉 생반열반은 태어나서 바로 반열반에 드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여의열반(有餘依涅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니, 그는 목숨을 버리는데 자재(自在)함이 없기 때문이다. 유행반열반과 무행반열반이라는 말은 [이러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보특가라가 태어나 많은 시간을 거치고서 비로소 무학위를 성취하였을 경우, 그 중의 어떤 이는 용맹 정진하여 그렇게 되는 이도 있으며, 어떤 이는 품성이 완만(緩慢)하고 게으름에도 그렇게 되는 이가 있는데, 이를 순서대로 유행반과 무행반이라고 이름한다. 즉 만약 어떤 보특가라가 일찍이 욕계에서 쉼 없는 가행과 삼마지(三摩地)의 힘에 의해 5하분결을 끊고 불환과를 성취한 후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다시 앞에서 닦은 종류의 도를 더욱 부지런히 닦아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으면, 이를 유행반열반이라 이름하며, 무행반열반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다. 혹은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을 거치고 나서 고행(苦行)에 의지하여 그 밖의 나머지 결(結)로부터 해탈하는 불환을 유행반열반이라 이름하니, 그는 [색계에서] 수습(修習)한 공용(功用)의 도에 의해 반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이(즉 樂行에 의지하여 해탈하는 이)를 무행반열반이라고 이름한다.3) 어찌 중반이나 생반, 현반(現般)의 경우도 그렇다고 하지 않겠는가? 즉 [이 같은 반열반의] 의지(依止)가 된 행에도 역시 이러한 경우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유행반과 무행반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그러한 뜻은 비록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각기 차별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중반 등의 경우도 역시 고행(苦行)과 낙행(樂行)에 의지하여 그 밖의 나머지 결(結)로부터 해탈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각기 분위(分位)가 동일하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불공(不共)의 차별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유행반과 무행반)에는 이와 같은 분위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도가 동일하지 않음에 근거하여 그것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거늘, 어떻게 이것을 예로 삼아 그것(중반 등)도 동일하게 [유행반과 무행반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여기서 분별한 내용 중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인해 어떤 이는 “두 가지(유행반과 무행반)의 차별은 유위와 무위를 반연하는 성도에 의한 것으로, 그 순서대로 열반을 획득하기 때문이다”고 설하였는데,4) [여기에도] 역시 이와 동일한 과실(앞서 지적한 과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경주(經主)의 “[여기에는] 크나큰 허물이 있다”5)는 힐난에 대해서도 이미 잘 [회]통한 셈이니, 그러한 뜻이 비록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라도(다시 말해 중반 등의 경우에도 동등하게 유행반과 무행반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각기 차별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무행반을 먼저 설하는 경우도 있고,6) 또한 어떤 경에서는 유행반을 먼저 설하기도 하는데, [그것을 성취하는 데 걸리는] 시간상으로는 이미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경에 따라 설하더라도 어긋남이 없다. 그러나 유행반이 보다 존중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먼저 설한 것이다.7) [상류반열반의] ‘상류’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어떤 보특가라가 상지로 유행(流行)하며 더욱 증진함으로써 처음 태어난 곳이 아닌 곳에서 바로 원적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욕계에서 몰하여 색계로 가 태어나지만, 거기서는 능히 원적을 증득하지 못하며, 요컨대 보다 상지로 전생(轉生)하여 비로소 반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류반열반에는 두 가지 차별이 있으니, 원인과 결과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원인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이것의 원인이 되는 정려 상에 잡수(雜修)와 무잡수(無雜修)가 있기 때문이며, ‘결과에 차별이 있다’고 함은 색구경천(色究竟天)과 유정천(有頂天)이 [반열반에 드는] 가장 높은 곳[極處]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정려를 잡수하는 자라면 능히 색구경천으로 가서 비로소 반열반에 드는데, 잡수는 능히 정거천(淨居天)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8) 여기에는 다시 세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상지로 유전하는 데] 전초(全超)와 반초(半超)와 변몰(遍歿)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9) ‘전초’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색계 중의 어떤 한 처소에서 몰하고 나서 바로 색구경천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즉 그는 일찍이 욕계의 몸으로 있으면서 이미 네 종류의 정려를 모두 잡수하고서 어떤 인연을 만나 위의 세 정려에서 물러났지만, 초정려에 대한 애미(愛味)를 인연으로 하여 목숨을 마치고서 범중천처(색계 제1천)로 올라가 태어난다. 그리고 선세(先世)에 자주 익힌 세력에 의해 다시 제4정려를 능히 잡수하고, 그 곳으로부터 몰한 후 색구경천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색계 16천의 처소 중 첫 번째 처소(범중천)에서 몰하여 가장 마지막 처소에 태어나는 것으로,10) 중간의 모든 처소를 단박에 초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초’의 뜻이다. ‘반초’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색계의 첫 번째 천(天) 등으로부터 점차로 몰하여 [색구경천] 아래의 [정거천에 태어나] 중간천에 이르러 능히 1천처를 초월하여 바야흐로 색구경천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색계천을] 초월하기는 하지만 [16천] 전부를 초월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반초’의 뜻이다.11) ‘변몰’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색계에 대한 애미(愛味)가 많기 때문에 일체의 처소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그는 4정려 지(地)의 16천처 각각에 대해 다 하등(下等)의 애미를 갖고 있는데, 이것이 생을 초래하는 인연이 되어 범중천에서부터 각각의 처소에 한 번씩 태어났다가 몰한 후, 마침내 색구경천에 이르러 비로소 반열반에 들기 때문에 ‘변몰’ [즉 색계의 모든 처소에서 두루 몰하는 성자]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초정려 중의 대범(大梵)이 머무는 처소는 별도의 다른 처소가 아니라 바로 두 번째 처소인 범보천에 포섭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불환과의 성자는 이곳에서도 생을 받아야 하겠지만] 대범의 처소는 편벽된 견해[僻見]의 처소이기 때문에, [자신이] 유일한 도사(導師)라고 하기 때문에 필시 여기서 생을 받는 성자는 없으며,12) [이러한 점에서] 변몰과 반초는 마땅히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을 두 가지 상류반(잡수에 의해 색구경천으로 가 반열반하는 불환과 무잡수에 의해 유정천으로 가 반열반하는 불환) 중에서 잡수정려를 원인으로 하여 색구경천으로 가 반열반에 드는 [상류반]이라고 한다. 정려를 잡수(雜受)하는 일이 없는 그 밖의 행자는 능히 유정천(有頂天)으로 가 비로소 반열반에 들게 된다. 이를테면 그가 일찍이 무잡수의 정려를 행하였을지라도 온갖 선정(4정려를 말함)에 대한 애미(愛味)가 인연이 되어 여기(욕계)서 몰한 후 색계의 온갖 처소에 두루 태어나게 되는데, 오로지 5정거천(淨居天)만은 능히 갈 수 없다.13) 즉 색계에서 목숨을 마치고서 세 무색계에 순서대로 태어난 후 유정천에 태어나 비로소 반열반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상류반 중에서 전자는 바로 관행자(觀行者)이고, 후자는 바로 지행자(止行者)이니, 그들에게는 낙혜(樂慧)와 낙정(樂定)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4) 그리고 두 가지 상류반의 성자는 하지(색구경천이나 유정천 아래의 처소) 중에서 반열반을 획득한다고 하여도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이 색구경천이나 유정천에 간다고 말한 것은 가장 높은 처소[極處]에 의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불환과의 성자는 이미 태어난 곳에서 두 번째의 생을 받는 일이 없으니, 그는 태어난 곳에서 승진도(勝進道)를 추구할 수는 있어도 동등하거나 저열한 도는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욕계에서 몰하면 색계로 가 태어날 뿐이다. 그러나 중유 중에서 반열반하는 자의 경우, 색계에서 몰하고서 색계에 태어난 자가 아니니,15) 색계 중에는 재해(災害)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색계] 본유의 상태에 그 밖의 다른 장애의 인연이 있어 열반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중유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중유의 경우는 엷고 저열[薄劣]하지만, 본유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중반열반)가 만약 마땅히 상류반에도 소속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16) 중반과 상류반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결정코 [양자를] 차별할만한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이 말해야 한다. “오로지 욕계에서 몰하고서 색계 중유를 받아 바로 반열반할 때만 ‘중반’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색계에서 몰한 경우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어떠한 연유에서 아직 욕탐을 떠나지 못한 유학에는 중유 중에서 반열반하는 자가 없는 것인가? 욕계의 중유는 소의신이 미세하고 저열[微劣]하여 다수의 사업(事業)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본유의 상태로 머물더라도 욕계의 법에서 벗어나기 어렵거늘, 하물며 중유의 상태에서 능히 욕계를 초월하여 [그에] 상응하는 [사문]과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다수의 사업’이란 이를테면 3계를 초월하고, 두 종류의 번뇌(견ㆍ수소단)를 영원히 끊고 제거하며, 아울러 두ㆍ세 가지의 사문과를 증득하는 것을 말하는데, 중유의 상태로 머물 때에는 이와 같은 [사업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욕계의] ‘유’(중유)는 이전에 일찍이 9품으로 차별되는 번뇌의 대치를 자주 익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불환과 등은 [욕계] 중유신(中有身)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증상의 혹(惑, 욕계 제9품의 수혹)을 끊고서 증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3계의 염오를 떠나기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계의 중유는 능히 반열반할 수 없지만, 색계의 중유는 모든 점에서 이와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열반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지(地)의 중유가 반열반을 증득할 때에는 오로지 이러한 지 중에 존재하는 성도를 일으킬 뿐으로, 초정려지의 중유의 상태에서 반열반하는 자는 오로지 자지의 근본정려의 성도를 일으켜 현전시킬 뿐, 미지정이나 중간정를 일으키지 않으니, 현전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중유의 상태로 있을 때에는 소의신이 미세하고 저열하여, 요컨대 일으키기 쉬운 성도만을 바야흐로 능히 현전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불환을 일컬어 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자라고 한다. 무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자의 차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욕계에 있으면서 색계의 탐을 떠나게 되면 이로부터 목숨을 마치고서 무색계에 태어나게 되는데, 이 같은 이는 오로지 네 종류로 차별될 뿐이니, 이를테면 생반열반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7) 여기에 앞서 언급한 [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다섯 종류를 더하면 여섯 종류의 불환을 성취하게 된다. 다시 색계로도 가지 않고, 무색계로도 가지 않은 채 바로 여기(욕계)에 머물면서 능히 반열반하는 자가 있으니, 이를 현반열반(現般涅槃)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여기에 앞서 언급한 여섯 종류를 더하면 일곱 종류의 불환이 되는 것이다.
혹은 마땅히 전체적으로 설정하면 아홉 종류의 불환이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현반열반은 두 종류로 나누어지니, 첫째는 [임종하기] 이전의 단계에서 성지(聖旨)를 능히 잘 분별하여 [반열반하는] 것이며, 둘째는 임종할 때 비로소 능히 잘 분별하여 [반열반하는] 것이다. 상류반의 경우도 역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색계로 가 [반열반하는] 것이며, 둘째는 무색계로 가 [반열반하는] 것이다. 즉 [여기에] 앞의 네 가지(중반ㆍ생반ㆍ유행반ㆍ무행반)를 더하여 여덟 가지가 되며, 다시 전생(轉生)을 더하여 아홉 가지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전생’이란 이를테면 전생(前生)에 이미 예류과 혹은 일래과를 획득하고, 금생 중에 비로소 불환과를 획득한 이를 말한다. [이에 반해] ‘현반’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현세에 처음으로 성도를 획득하여 열반에 이른 자를 가리킨다. 혹은 불환과의 성자는 근기의 차별로 말미암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홉 종류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혹은 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다섯 종류의 불환 중에는 또 다른 갈래가 있어 아홉 종류로 나누어지기도 하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계로 가는 불환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세 가지를 각기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업과 번뇌와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와 아홉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行色界有九 謂三各分三 業惑根有殊 故成三九別
논하여 말하겠다. 즉 색계로 가서 [반열반하는] 다섯 종류의 불환을 전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정하여, 그것을 각기 세 종류로 나누었기 때문에 아홉 종류의 불환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중반과 생반과 상류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8) 이러한 세 가지 종류가 다시 어떻게 각기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것인가? 중반열반을 세 종류로 나눈다고 함은, 처음 일어나자마자[初起], 혹은 멀거나 가까운 당래에 태어날 처소에 이르러 반열반을 획득하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9) 생반열반을 세 종류로 나눈다고 함은, 태어나자마자[纔生], 혹은 [용맹 정진을] 행하거나[有行] 행하는 일이 없는[無行] 등의 차이가 있기 때문으로, 이들은 모두 [색계에] 태어나고 나서 반열반을 증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아울러 ‘생반’이라고도 이름한 것이다. 상류반열반을 세 종류로 나눈다고 함은, [상지로 유전하는 데] 전초(全超)와 반초(半超)와 변몰(遍沒)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 가지 종류(중반ㆍ생반ㆍ상류반)는 모두 다 신속하게[速], 신속하지 않게[非速], 오랜 시간을 지나[經久] 반열반을 획득하기 때문에(각각을 速般ㆍ非速般ㆍ經久般이라 함) 아홉 종류로 나누어지게 된 것으로,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아홉 종류의 불환은 업과 번뇌와 근기의 차별로 말미암아 신속하게, 신속하지 않게, 오랜 시간을 지나 반열반을 증득하는 등의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먼저 전체적으로 세 가지 종류가 된 것은 일찍이 집기(集起)시킨 순기업(順起業)과 순생업(順生業)과 순후업(順後業)의 차이 때문으로,20) 그 순서대로 하ㆍ중ㆍ상품의 번뇌가 현행하는 데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상ㆍ중ㆍ하품의 근기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종류는 각기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역시 또한 업과 번뇌와 근기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각각에 세 가지 차별을 갖게 된 것으로, 그래서 아홉 종류로 성립하게 된 것이다. 즉 첫 번째(중반)와 두 번째(생반)의 세 가지는 번뇌와 근기의 차별로 말미암아 각기 세 종류로 성립하게 된 것으로, 업의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뒤(상류반)의 세 가지는 역시 또한 순후수업(順後受業)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세 종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21) 그래서 [본송에서] 이와 같이 색계로 가는 불환은 “업과 번뇌와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와 아홉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만약 [불환과의 차별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여러 계경 중에서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7선사취(善士趣)가 있다”고만 설한 것인가?22) 게송으로 말하겠다.
7선사취를 설정하게 된 것은 상류반을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더라도 되돌아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立七善士趣 由上流無別 善惡行不行 有往無還故
논하여 말하겠다. 중반과 생반에 각기 세 가지(즉 속반ㆍ비속반ㆍ경구반)가 있고 상류반을 한가지로 삼았으니, 경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7선사취를 설정하였다. 어떠한 까닭에서 앞의 두 가지는 각기 세 가지로 나누었으면서, 세 번째 상류반은 오로지 한 가지로 설정한 것인가? 상지(上地)로 유행(流行)하기 때문에 ‘상류’라고 이름한 것으로, [상류반의 세 가지는] 이러한 뜻이 동일하기 때문에 다만 한가지로 설정하였다.23) 즉 앞의 두 가지 종류[의 세 가지]도 역시 그 뜻이 동일할지라도 거기서의 개별적인 상(즉 속반 등의 세 가지 상)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쉽게 알게 하기 위해 각기 세 가지로 나눈 것이다. 그러나 상류반에 존재하는 세 가지 상의 차별은 알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그것을 다시 별도로 건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는 앞의 두 가지(중반과 생반)의 차별은 오로지 그러한 방식[爾所]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각기 세 가지로 나눈 것이지만, 세 번째 상류반은 여러 종류로 차별되어 그 모두를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한 가지로 건립하였다. 이를테면 첫 번째 중반의 경우는 오로지 장차 생겨날 것[將生]으로 존재하면서 근기와 번뇌의 품류가 다르기 때문에 세 가지 종류로 나눈 것이며, 두 번째 생반의 경우는 오로지 이미 생겨난 것[已生]으로 존재하면서 역시 근기와 번뇌의 품류가 다르기 때문에 세 종류로 나눈 것이지만, 상류반의 경우는 장차 생겨날 것과 이미 생겨난 것 모두와 통한다. 그리고 장차 생겨날 상류반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정려의 잡수(雜修)와 무잡수(無雜修)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생겨난 상류반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상류반 중에서, 만약 무잡수라면 2계(界, 즉 색ㆍ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지만, 만약 잡수라면 오로지 1계(즉 색계)에서만 태어나게 된다.24) 그리고 1계에 태어나는 자도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지니, 전초와 반초와 변몰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반초 중에도 다수의 차별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상류반의 차별상은 실로 번잡하고 광대하여, 만약 그 하나하나에 대해 분별하고자 한다면 그 모두를 두루 다 분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상지로 유행하는 것’이라는] 동등한 뜻에 근거하여 그 모두를 상류반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중반과 생반의 단계에서는 차별되는 뜻이 적을 뿐더러 쉽게 나타낼 수 있고,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여섯 가지로 나누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러한 [중반과 생반] 각각에도 역시 동일한 뜻이 있을지라도 세 번째 [상류반]과 동등하며, 상류반 중에 비록 다른 뜻이 있을지라도 앞의 두 가지(중반와 생반)와 동등한 것으로,25) 서로의 그림자[影]를 나타내기 위해 오로지 일곱 가지만을 [선사취로] 설정하였다. 즉 오로지 이들만이 선사(善士)의 법이 아닌 욕탐과 진에 등을 이미 끊었으며, 아울러 무학의 대(大) 선사의 과위(즉 아라한과)에 지극히 근접하였기 때문에 경에서는 오로지 이들만을 ‘선사취’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렇지만] “예류과나 일래과의 성자는 어떤 경우라도 선사취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부처님께서도 역시 그들을 선사(善士)라고 말하였기 때문으로, 예컨대 계경에서 “무엇이 선사인가? 말하자면 유학의 정견(正見)을 성취한 자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유학의 정정(正定)을 성취한 자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26) 상계로 가는 것[往上]을 일컬어 ‘취(趣)’라고 하였다. 즉 상계의 사문과[上果]로 나아가거나 상계의 생[上生]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오로지 일곱 종류의 [불환]만을 [선사취로]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오로지 이러한 일곱 종류의 [불환은] 모두 다 능히 선을 행하고 불선을 행하지 않지만, 그 밖의 다른 [유학의 성자는] 그렇지 않다.27) 또한 오로지 이러한 일곱 종류의 [불환]만이 상계로 왕생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만, 그 밖의 다른 성자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만 이러한 [불환과에] 근거하여 선사취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온갖 성자의 계위에 있으면서 일찍이 생을 거친 자에게도 역시 이러한 따위의 차별의 상이 있는 것인가?28)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생을 거친 성자는 다른 계로 가 태어나지 않는데 이러한 자와 상계에 왕생한 성자에게는 연근(練根)과 물러남이 없다. 經欲界生聖 不往餘界生 此及往上生 無練根幷退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성자의 계위에 있으면서 욕계의 생을 거친 자라면 필시 색계나 무색계에 가 태어나지 않으니, 그는 불환과를 증득하고서 결정코 현신(現身)에서 반열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색계에서 생을 거친 성자라면 무색계에 상생(上生)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색계로 가 궁극적으로 유정천으로 가는 자가 그러하다].29) 그렇지만 천제석(天帝釋)은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일찍이 색구경(色究竟)이라고 이름하는 하늘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이후 물러나 떨어지게 되면 마땅히 그곳에 태어나리라.”30) 그는 대법(對法)의 상(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후’라는 말은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자재한 이숙이 최후의 변제(邊際)에 [이를 때’를 말하며], ‘물러나 떨어지게 되면’이라는 말은 이를테면 ‘그 후에 만약 아라한과를 획득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곳에 태어나리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원컨대 마땅히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색구경천에 태어나리라’는 사실을 말한다. 즉 제석천은 다섯 가지의 죽음의 상(相)을 반연하여 지극한 우수(憂愁)와 고수(苦受)를 낳았기 때문에 세존께 와 귀의하여 죽음의 상이 겨우 제거되자 바로 바로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기 위해, 또한 그 같은 말을 제지하여도 많은 이익이 없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이를 가로막지 않은 것이다.31) 즉 이같이 이미 욕계의 생을 거친 성자와, 이미 그곳(색계)으로부터 상계로 가서 태어난 모든 성자(색계의 경생성자)는 필시 근기를 단련[練根]하는 일도 없으며, 아울러 물러나는 일도 없다. 어떠한 연유에서 욕계의 생을 거친 성자와 상계에 태어난 성자도 근기를 단련하거나 물러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일찍이 생을 거친 성자는 자상속(自相續)에 성도(聖道)를 쌓아 지극히 견고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수승한 소의신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근기를 단련하거나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앞에서 상류반열반은 정려의 잡수(雜修)를 원인으로 하여 능히 색구경천으로 가서 [반열반한다고] 논설하였다. 그럴 경우 먼저 마땅히 어떠한 정려를 잡수해야 하며, 어떠한 상태에 의해 잡수가 성취되었음을 아는 것인가? 또한 어떠한 연유에서 정려를 잡수하게 된 것인가?32) 게송으로 말하겠다.
먼저 제4정려를 잡수해야 하는데 일 찰나에 의해 잡수를 성취하며 생을 받고 현법의 즐거움을 위해 아울러 번뇌로 인한 물러남을 막기 위해서이다. 先雜修第四 成由一念雜 爲受生現樂 及遮煩惱退
논하여 말하겠다. 4정려를 잡수하려고 하는 모든 이는 반드시 먼저 제4정려를 잡수해야 하니, 그러한 등지(等持)가 가장 잘 감당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며, 온갖 낙행(樂行) 중에서 그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기 때문이다.33) 이를테면 그러한 정려에 [잡수를] 가장 잘 감당할만한 공능이 존재하니, 그것이 현전할 때 소의지(所依止) 자체의 세력이 증장되어 광대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제4정려)에 근거하여 정려를 잡수하였다면, 그 후 비록 퇴실(退失)할지라도 그 밖의 다른 천(天) 중에 태어난다. 그리고 이전에 그것을 잡수하였던 힘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것에 근거하여 정려를 잡수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이치로 말미암아 제4정려가 온갖 낙행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의 경안락(輕安樂)이야말로 가장 최고[極上]로 미묘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정려를 능히 섞어 훈수(熏修)할 수 있는 것인가? [정려를 잡수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온갖 성자뿐이다.34) 즉 유학과 무학 모두와 통하지만, 유학위의 경우는 오로지 신해(信解)와 견지(見至)와 통할 뿐이며, 무학위의 경우에는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 모두와 통한다.35) [이들은] 반드시 먼저 [욕계 인취(人趣) 중의] 세 주(洲)에서 정려를 잡수하며, [그 후] 물러나 색계에 태어나더라도 역시 능히 [앞에서와 같이] 잡수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어찌 온갖 정려를 잡수하는 자는 필시 일찍이 세 정려의 탐(貪)을 떠났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들이] 정려를 잡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견지(見至)이면서 상류반을 성취하는 경우와 통한다. 이를테면 요컨대 인간(人間)[의 취(趣)]에서 선정을 잡수한 후 세 선정에서 물러나 범중천(梵衆天, 초정려 제1천)에 태어나면, 거기서 다시 반드시 세 선정의 염오를 떠나야 비로소 능히 잡수의 정려를 거듭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몰하여 [범보천에 태어나고] 나아가 정거천(淨居天, 제4정려의 뒤의 5천)에 태어날 때 비로소 상류반이라 이름하니,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 모든 견지에 이와 같은 이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는 이염(離染)에서 필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그가 이전부터 견지의 근기[根, 즉 종성]로 머물렀다는 것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일찍이 신해의 종성(種性)으로 머물면서 정려를 잡수한 연후에 퇴실하면, 그는 그 후 다시 퇴실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바로 근기를 닦고 단련[修練]하여 견지의 종성을 성취하고, 욕계로부터 몰하여 색계 중에 태어나면 앞에서 [닦은 잡수에] 편승하여 다시 능히 정려를 잡수한다. 따라서 여섯 종성(즉 시해탈과 불시해탈)도 다 상지로 유행하며 반열반[上流般]하는 것이다. [정려를] 잡수할 때에는 어떠한 방편(절차)을 지어야 하는 것인가? 그는 반드시 먼저 제4정려에 들어야 하는데, 그때 다 찰나[多念]의 무루가 상속하여 현전하고, 이로부터 다 찰나의 유루가 인기되어 낳아지며, 그 후 다시 다 찰나의 무루가 현전한다. 이와 같이 반복하다가 그 후 점차로 찰나가 감소하여 마침내 최후로 두 찰나의 무루가 현전하고, 다음으로 두 찰나의 유루가 인기되어 현전하며, 이와 무간에 다시 두 찰나의 무루를 낳을 때 ‘잡수정려의 가행(加行)이 원만하게 성취되었다[成滿]’고 말한다. 이로부터 이후는 공력(功力, 노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任運] [이루어지는데], 오로지 일 찰나의 무루로부터 일 찰나의 유루가 인기되어 현전하며, 이와 무간에 다시 일 찰나의 무루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이 유루가 중간의 찰나가 되고, 그 전후 찰나에 무루가 섞여있기 때문에 [이를] ‘잡수정려의 근본(根本)이 원만하게 성취되었다[圓成]’고 말하는 것이다.36) 이와 같이 제4정려를 잡수하고 나서 이러한 세력에 편승하여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또한 능히 아래 세 정려를 잡수하게 되는 것이다. 잡수정려는 5온을 본질로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온갖 세속지(즉 유루)를 네 가지 법지(法智)와 네 가지 유지(類智)의 여덟 지(즉 무루)와 섞어 닦는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온갖 세속지는 오로지 고류지와 집류지와 섞어 닦을 뿐이니, 그 같은 두 가지 [무루지]는 능히 이것(세속지)을 반연하여 경계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수의 무루지가 현전하여 [세속지와] 섞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럴 경우 “이것(세속지)이 그것(무루지)에 섞여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자재한 정려의 잡수는 마땅히 원만하게 성취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즉 이것(세속지)이 그 밖의 멸ㆍ도의 법지와 유지에는 따르지 않고 [다만] 고ㆍ집의 법지와 무간에 생겨나고 아울러 무간에 그러한 온갖 지(智)를 낳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려를 잡수하는 것은 간략히 말해 세 가지 인연 때문으로, 첫째는 생을 받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현법의 즐거움[現樂]을 위해서이며, 셋째는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를테면 불환과 중의 견지(見至, 즉 이근자)가 정려를 잡수하는 것은 앞의 두 가지 인연 때문으로, 첫째는 생을 받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현법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생을 받기 위해 [정려를 잡수하는] 자는 수승한 생(즉 5淨居天)을 희구하니, 이를테면 [다른 이와] 함께 태어나는 것[共生]을 싫어하고 함께 태어나지 않는 것[不共]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법의 즐거움을 위해 [정려를 잡수하는] 자는 수승한 선정을 흔락(欣樂)하니, 이를테면 세속의 선정은 소의신을 자조(資助)하는 가장 뛰어난 것일 뿐더러 이에 따라 능히 현법의 즐거움에 머물게 되는 것으로, 앞뒤의 무루[정]은 그것에 보조적으로 수반[助伴]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불환과 중의] 신해(信解, 즉 둔근자)의 경우라면, 앞의 두 가지 인연 때문에, 그리고 또한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려를 잡수한다]. 즉 둔근자가 청정한 등지(等持)를 방호(防護)하는 방편으로 [앞뒤로] 두 [찰나의] 무루[정]을 일으키는 것은 미상응(味相應)의 등지를 더욱 멀어지게 하여 청정한 선정이 염오[染, 즉 미상응의 등지]의 등무간연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37) 아라한 중의 불시해탈(不時解脫, 즉 이근자)은 다만 현법의 즐거움을 위해 정려를 잡수할 뿐이며, 시해탈(時解脫, 즉 둔근자)은 현법의 즐거움을 위해, 또한 역시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려를 잡수하는 것이다].
만약 정려를 잡수하는 것이 [수승한 생인]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정거천으로 오로지 다섯 처소만이 있는 것인가?38) 게송으로 말하겠다.
5품을 잡수(雜修)함으로 말미암아 [수승한] 생에 5정거천이 있는 것이다. 由雜修五品 生有五淨居
논하여 말하겠다. 제4정려를 섞어 훈수(熏修)하는 것에 다섯 품류가 있기 때문에 정거천에도 오로지 다섯 처소만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다섯 품류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정려의 잡수에] 하품ㆍ중품ㆍ상품ㆍ상승품(上勝品)ㆍ상극품(上極品)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하품은 세 찰나의 마음[三心]이 현전하여 바로 원만하게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이를테면 첫 찰나에는 무루심을 일으키고, 다음 찰나에는 유루심을 일으키며, 다시 무루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 중품은 여섯 찰나의 마음이 현전할 때 비로소 원만하게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이를테면 두 찰나의 유루심이 네 찰나 무루심과 섞여 수습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밖의 품류도 순서대로 아홉 찰나, 열두 찰나, 열다섯 찰나의 마음이 상응하는 바대로 현전할 때 비로소 원만하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39) 이와 같이 다섯 품류의 잡수를 원인으로 하여 순서대로 능히 5정거천의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이와 같은 열다섯 찰나의 유루와 무루의 마음은 모두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것을 지금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설하였다. “앞의 다섯 찰나의 무루심은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것을 지금 획득하는 것이지만, 그 밖의 열 찰나의 마음(다섯 찰나의 유루심와 다섯 찰나의 무루심)은 모두 일찍이 획득하였던 마음이다. 즉 앞의 다섯 찰나가 현전할 때 이미 미래의 것도 닦았기 때문으로, 어떤 이는 [그것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결정코 잡수를 원만하게 성취하지만, 어떤 이는 요컨대 [그것을] 자주 일으켜야 비로소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 유여사는 [정거천에 다섯 처소만이 있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하였다. “신(信) 등의 5근이 차례로 증상됨으로 말미암아 다섯 정거천을 초래하게 된다. 이를테면 혹 어떤 때에는 신근(信根)이 증상되어 정려를 잡수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나아가 혜근(慧根)이 증상되어 정려를 잡수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이러한 차별에 따라 다섯 정거천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40) 온갖 정거천을 초래하는 것은 업력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잡수의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업력이라고 한다면, 정려를 잡수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며, 만약 잡수의 힘이라고 한다면, 『품류족론』에서 설한 바에 위배될 것이니, 그 논에서 “정려를 잡수하고, 아울러 업[력]으로 말미암아 정거천에 태어나지만, [정거로서] 존재하는 모든 [천]처 등은 이생법(異生法)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업력이 정거천을 초래한다. 그렇지만 정려를 잡수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은 아니니,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사(思)가 현전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유여사는 [이같이] 말하였다. “[정거천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잡수의 힘이다. 그렇더라도『품류족론』의 글귀에 위배되지 않으니, 그 논에서 먼저 ‘선정을 잡수하는 것’에 대해 설한 것은 먼저 그러한 선정에 들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며, 다음으로 다시 ‘아울러 업[력]으로 말미암아 정거천에 태어난다’고 설한 것은, 그 후 그것의 힘에 의해 정거천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여기(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에는 결정코 두 가지의 힘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그 중 하나라도 결여할 경우, 그곳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유루의 업력만이 그것(정거천)의 이숙을 초래할 뿐 무루의 업력은 초래하지 않으니, [무루는] 유(有)를 사기(捨棄)하고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다.”41)
경에서는 불환과를 설하여 신증(身證)이라고 이름하기도 하였다.42) 어떤 뛰어난 공덕에 근거하여 ‘신증’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정(滅定)을 획득한 불환과는 이름을 바꾸어 ‘신증’이라 한다. 得滅定不還 轉名爲身證
논하여 말하겠다. 멸진정(滅盡定)의 득(得)이 생겨난 것을 일컬어 ‘멸정을 획득하였다’고 한 것으로, 불환과의 성자로서 만약 소의신 중에 멸진정의 ‘득’이 생겨난 자이면,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身證)이라고 한다. 즉 불환과의 성자가 소의신에 의거하여 열반과 유사한 법(즉 멸진정)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신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그를 설하여 다만 신증(身證)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소의신에 의지하여 생겨났기 때문이다.43) 그리고 소의신과 구생(俱生)하는 [멸진정의] ‘득’의 세력으로 인해 그것(멸진정)이 이미 멸한 상태(즉 出定位)에서도 그것을 획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치상으로 본다면 실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즉 그는 멸진정으로부터 일어나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유식신(有識身)의 적정(寂靜)을 획득하고서 ‘이 같은 멸진정이야말로 최고의 적정으로 열반과 지극히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하여 소의신의 적정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신증’이라 이름하게 된 것으로, [멸진정의] 획득과 아울러 [출정 후 멸진정을 반연하여 일어난] 지(智)가 현전함으로 말미암아 소의신의 적정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44) 여기서 말하자면, 그는 멸진정으로부터 일어난 상태에서 비록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유식신(有識身)의 적정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오로지 그러한 상태만을 바야흐로 ‘신증’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선후(先後, 멸진정에서 출정하기 전이나 출정한 후)의 두 때를 모두 [‘신증’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설혹 멸진정을 반연하는 지(智)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득’의 세력으로 인해 ‘신증’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설한 것이 이치상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변(後邊, 멸진정으로부터 출정한 상태)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라면, 오로지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는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이라 한다”고 말해야 한다.45) 이치상 실로 신증은 8해탈을 모두 갖추지 않은 일이 없을 뿐더러 소의신에 의해 [이를] 증득하여 머무니, 멸진정은 그 밖의 다른 해탈(아래 일곱 해탈)을 방편[門]으로 삼아야 들 수 있기 때문이다.46) 따라서 멸진정을 획득할 때에는 결정코 그 밖의 다른 해탈도 역시 획득하였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계경에서 “멸진정에 들 때에는 먼저 언행(言行)을 멸(滅)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 어떠한 연유에서 부처님께서는 유학의 복전을 설하면서 신증의 불환은 그러한 [유학의] 수(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인가?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장자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복전(福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학이며, 둘째는 무학이다. 다시 유학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고, 무학은 오로지 아홉 가지뿐이다. 무엇을 일컬어 열여덟 가지의 유학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예류향ㆍ예류과ㆍ일래향ㆍ일래과ㆍ불환향ㆍ불환과ㆍ아라한향ㆍ수신행ㆍ수법행ㆍ신해ㆍ견지ㆍ가가ㆍ일간ㆍ중반ㆍ생반ㆍ유행반ㆍ무행반ㆍ상류반을 말하니, 이것을 바로 열여덟 가지의 유학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아홉 종류의 무학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퇴법(退法)ㆍ사법(思法)ㆍ호법(護法)ㆍ안주법(安住法)ㆍ감달법(堪達法)ㆍ부동법(不動法)ㆍ불퇴법(不退法)ㆍ혜(慧)해탈ㆍ구(俱)해탈을 말하니, 이것을 바로 아홉 동류의 무학이라고 한다.”47) 이치상으로는 역시 마땅히 설했어야 하였다. 그럼에도 설하지 않은 것은 부처님께서 유학과 무학에는 [번뇌의] 끊어짐[斷]과 근기에 따른 수승함이 있다고 관찰하였기 때문으로, 능히 수승한 과보(즉 택멸)를 낳는 이를 일컬어 ‘복전(福田)’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온갖 불환과에 의해 획득된 멸진정은 바로 유루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본질[自性]이 해탈이기 때문에 청정한 것이라고 이름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뿐더러,48) 그것의 소의신에는 여전히 번뇌가 남아있어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속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청정한 것이라고 이름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성취한 이에 근거하여서는 유학의 복전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무학위 중에서의 유루의 공덕은 비록 그 자체의 본질은 해탈에 포함되지 않을지라도 상속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청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역시 능히 수승한 과보(應果 즉 아라한과)를 낳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정과 근기의 차별에 근거하여 아홉 가지 응과(應果)를 모두 ‘복전’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유학으로 설정할 만한 근거[依因]가 없기 때문에 신증을 유학의 수(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49) 무엇을 유학으로 설정할만한 근거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무루의 3학(學)과 아울러 [그것의] 과보[果]이지만, 멸진정은 [3]학도 아니거니와 역시 [3]학의 과보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신증)을 성취한 이에 근거하여서는 유학을 차별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50)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불환과의 계위를 [설하는] 중에서는 [그 밖의 유학과] 어떠한 차이도 없이 [유학의] 갈래에 근거하여 은밀히 신증을 설하였으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오로지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는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이라 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다시 분별하게 될 것이다.51) 만약 신증을 [이와] 아울러 다른 갈래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말한 바도 질문에 잘 된 대답이 아니라고 해야 하니, [아래] 세 무색정의 해탈 역시 무루와 통하기 때문이다.52)
불환과의 대체적인 차별 상(相)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러나 보다 자세하게 분석한다면 그 수는 수천 가지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는 바야흐로 색계로 가는 다섯 종류(중반ㆍ생반ㆍ유행반ㆍ무행반ㆍ상류반)를 온갖 지(地) 등의 다섯 갈래[門]에 근거하여 분별해 보기로 한다.53) 이를테면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지(地)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스무 가지가 되니, [4]정려지 중에 각각 다섯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종성(種性)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서른 가지가 되니, 여섯 종성 중에 각각 다섯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54)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태어나는 곳[生處]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여든 가지가 되니, [색계] 16천처 중에 각각 다섯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종성과 근기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아흔 가지가 되니, 이를테면 퇴법의 종성에 하ㆍ중ㆍ상품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수는 열다섯 가지가 되며, 나아가 부동법의 종성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지(地)와 종성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백 스무 가지가 되니, 이를테면 [4]정려지 중에 각각 서른 가지(6종성 각각에 존재하는 5종 불환)가 있기 때문이다.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지’와 종성과 근기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3백 예순 가지가 되니, 이를테면 [4]정려지 중에 각각 아흔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55)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태어나는 곳과 종성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4백 여든 가지가 되니, 이를테면 16천처 중에 각기 서른 가지(6종성 각각에 존재하는 5종 불환)가 있기 때문이다.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태어나는 곳과 종성과 근기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천 4백 마흔 가지가 되니, 이를테면 16천처 중에 각기 아흔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56) 다섯 종류의 불환과를 이염처(離染處)와 종성과 근기에 근거하여 [설정하는] 경우, 그 수는 모두 1만 2천 9백 예순 가지의 불환과로서 차별되니,57) 이를테면 이염의 9품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으로, 여기에 앞의 천 4백 마흔 가지를 곱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불환) 향(向)ㆍ과(果)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네 번째(아라한) 향ㆍ과에 대해 건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계의 수혹 중에서 초정려의 1품 내지 유정지의 8품을 끊은 이를 모두 아라한향이라고 한다. 上界修惑中 斷初定一品 至有頂八品 皆阿羅漢向
그리고 제9품의 무간도를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 하며 번뇌 멸진의 ‘득’과 구행하는 진지(盡智)로써 무학의 응과(應果)를 성취한다. 第九無間道 名金剛喩定 盡得俱盡智 成無學應果
논하여 말하겠다. 불환과의 성자가 증진하여 색계와 무색계의 수소단의 혹(惑)을 끊을 때, 먼저 초정려의 1품(상상품)의 혹을 끊고, 이로부터 나아가 마지막으로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의 8품(하중품)의 혹을 끊을 경우,58) 그 명칭이 바뀌어 ‘아라한향’이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설해진 아라한향 중에서 유정지의 혹을 끊는 제9품의 무간도(無間道)를 역시 또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이러한 선정은 견고하고 예리하기가 금강석과 같아서 이것에 의해 능히 파괴되지 않는 어떠한 수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정지 제9품 이하의 번뇌는] 앞에서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에, 일체의 혹을 파괴하지는 않을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일체의 번뇌를 능히 파괴하는 공능을 갖고 있다.59) 다시 말해 이것은 이미 가장 미세한 품류의 혹도 능히 없앤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무간도 중에서 오로지 이러한 찰나의 [도]만을 극상품(極上品)이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그래서 [금강유정은] 일체의 수면을 능히 영원히 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비록 견도 중에도 역시 유정지의 번뇌를 능히 끊는 무루의 대치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그러한 [견소단의] 9품의 혹은 1품으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러한 번뇌의 세력은 미약하고 저열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견도는 이미 미열한 혹을 대치하는 도였기에, 일체의 수면을 능히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일체의 수면을 능히 파괴하는] 공능을 갖는 것이라면, 무엇이 장애하여 파괴하지 못하는 것인가? 따라서 그것(유정지의 견혹을 끊는 무루도)을 금강유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온갖 수면 중에서 무사혹(無事惑)은 쉽게 끊어지기에60) 견도로써 그것(유정지의 번뇌)을 대치하더라도 ‘극상품’이 이름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유정지의 번뇌를 끊는 견도를] 금강유정이라는 명칭으로는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밝힌 금강유정은 일체의 유사혹(有事惑) 중에서 최후의 품류이자 지극히 끊기 어려운 미미(微微)한 품류의 번뇌를 능히 대치하기 때문에 일체의 수면을 능히 파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이러한 [선정의] 힘에 의해 능히 일 찰나 동안에 일체 혹이 끊어짐으로써 무루의 이계득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논설되는 금강유정은 오로지 여섯 지(智) 중의 한가지와 상응할 뿐이니, 이를테면 네 가지 유지(類智)와 멸법지(滅法智)와 도법지(道法智)가 바로 그것이다. 즉 4성제를 반연하는 16행상은 모두 9지(地)에 근거하여 [생겨난다는] 사실이 뜻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의 차별에도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설한 것이다.61) 먼저 미지정(未至定)에 포섭되는 것에는 쉰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ㆍ집류지는 유정지의 고ㆍ집제를 관찰하여 비상(非常) 등과 인(因) 등의 행상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여덟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며, 멸ㆍ도법지는 욕계의 멸ㆍ도제를 관찰하여 멸(滅)ㆍ정(靜) 등[의 행상]과 도(道) 등의 행상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역시 여덟 가지의 차별을 성취한다. 멸류지는 8지(地, 4정려와 4무색정)의 멸제 각각을 개별적으로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滅ㆍ靜ㆍ妙ㆍ離)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서른두 가지를 성취하며, 도류지는 8지의 도제를 모두 총체적으로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道ㆍ如ㆍ行ㆍ出)을 조작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네 가지의 차별을 성취하니, 8지의 번뇌를 대치하는 유지품(類智品)의 도는 동류(同類)로서 서로의 원인이 되어 필시 그 모두를 반연하기 때문이다.62) 즉 멸류지는 오로지 [각각을] 별도로 반연하지만 도류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수면품」에서 이미 모두 성립시켰다.63) 이처럼 미지정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 쉰두 가지가 있듯이, 정려중간과 4정려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공무변처(空無邊處)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스물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쉰두 가지 중에서] 멸ㆍ도의 법지품 여덟 가지를 제외하고, 아울러 아래 네 [정려]지(地)의 멸제 각각의 네 행상(滅ㆍ靜ㆍ妙ㆍ離)에 대한 관찰을 제외한 것과 상응하는 [금강유정이] 바로 그것이니, 무색계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에는 필시 법지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울러 하지(즉 4정려)의 멸제를 반연하는 유지품(즉 멸류지)도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의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이치상 어긋남이 없으니, 도제는 [8지의] 총연(總緣)이 된다고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경우는 앞의 경우(미지정)와 동일하기 때문에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스물여덟 가지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식무변처(識無邊處)에 포섭되는 것에는 스물네 가지가 있으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것에는 오로지 스무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앞의 [공무변처의 스물여덟 가지에서] 다시 하지의 멸성제의 경계인 네 행상과 여덟 행상에 대한 관찰을 제외한 것으로, 그 순서에 따라 앞의 경우에 준하여 마땅히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64) 그런데 여러 유정들 중에는 3무색정의 단계[地]에도 하지의 멸제를 반연하는 유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앞에서 말한 것(28가지)에 열여섯 가지(4정려지 각각의 멸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것)를 더한 것이 존재하고, 식무변처의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것(24가지)에서 스무 가지(4정려지와 공무변처의 멸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것)를 더한 것이 존재하며, 무소유처의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것(20가지)에 스물네 가지(4정려지와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의 멸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것)를 더한 것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설하면, 무색정의 단계에 근거하는 금강유정에는 일흔 두 종류가 존재한다.65) 혹은 다시 백서른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66)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도류지(道類智)의 품류는 8지(상2계)의 도제에 대해서도 역시 각기 별도로 관찰하기 때문에 앞의 6지(미지정ㆍ중려중간ㆍ4정려)에 각각 여든 가지가 존재하고,67) 공무변처에는 오로지 마흔 가지가 존재하며, 식무변처에는 서른두 가지가, 무소유처에는 스물네 가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멸류지의 품류는 8지의 멸제에 대해 개별적으로 관찰[別觀]하는 경우도 있고 전체적으로 관찰[總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앞의 6지 중에 각각 백예순네 가지가 존재하며,68) 공무변처에는 오로지 쉰두 가지가 존재하고, 식무변처에는 서른여섯 가지가, 무소유처에 스물네 가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도류지 반드시 [8지의 도제를] 전체적으로 반연[總緣]하지만, 멸류지는 개별적으로 반연한다”고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기 때문이다.69) 그리고 존자 묘음(妙音)은 이와 같이 설하였다. “금강유정에는 모두 열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정지(有頂地)의 견ㆍ수소단의 혹을 끊는 무간도에 포섭되는 열세 찰나가 바로 그것이다.”70) 그러나 이 역시 옳지 않으니, [견혹을 끊는 고ㆍ집ㆍ멸ㆍ도의] 네 가지 유지인(類智忍)과 [수혹을 끊는]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즉 하하품에서 상중품)는 극상품(極上品, 즉 상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정(금강유정)은, 이미 유정지(有頂地) 제9품의 혹(惑)을 능히 끊었으므로 이러한 ‘번뇌 멸진[惑盡]’의 득(得)과 구행(俱行)하는 진지(盡智)를 능히 이끌어내어 일어나게 한다.71) 즉 금강유정은 바로 이러한 단혹(斷惑) 중의 최후의 무간도이며, [이러한 도에 의해] 생겨난 진지는 바로 단혹 중의 해탈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정에 의해 인기된 진지는 제9품의 번뇌 멸진의 ‘득’과 구행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이러한 ‘멸진[盡]’이라는 말은 일체의 [번뇌의] 멸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제9품이나 그 밖의 혹에 대해 모두 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멸진’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즉 금강유정은 온갖 번뇌 멸진의 ‘득’과 구행하는 진지를 능히 이끌어내어 일어나게 하였으며, 이것은 일체의 번뇌 멸진의 ‘득’과 최초로 구생(俱生)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72)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번뇌가 멸진하여 소의신 중에 이것이 최초로 생겨났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하였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은 진지가 이미 생겨난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바로 무학(無學)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하니, 이미 무학의 응과법(應果法)을 획득하였기 때문으로,73) 또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해 마땅히 닦아야 할 학(學)이 여기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학’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74) 어찌 무학 역시 별도의 다른 과위[別果]를 희구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학의 성자도 역시 근기를 바꾸기[轉根] 때문이다.75)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이러한 [무학의] 단계에서는 일찍이 유학이 별도의 다른 과위를 희구하여 획득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류과는 일래과 등이 아니며, 그 후 일래과 등을 획득하였을 때 예류과 등의 명칭을 버리고 일래과 등이라는 명칭을 얻듯이, [그들은] 모두 별도의 과위를 버리고서 별도의 다른 과위의 명칭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 경우(무학의 아라한)는 그렇지 않다. 퇴법(退法)은 사법(思法) 등이 아니며, 그 후 사법 등을 획득하였을 때 비록 퇴법 등의 명칭을 버리고 사법 등의 명칭을 획득할지라도 [그들이] 별도의 과위를 버리고서 별도의 다른 과위의 명칭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니, 전자든 후자든 모두 아라한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앞의 과위를 버리고 별도의 다른 과위를 획득할 때, 앞의 과위의 명칭을 버리고 별도의 다른 과위의 명칭을 획득한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마땅히 배워야 할 별도의 과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학’이라 이름한 것으로, 앞의 해석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즉 향[도](向道)를 행하는 앞의 과위에 머무는 자가 별도의 다른 명칭의 과위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뜻이 없는 것이다.76)
진지(盡智)가 이미 생겨난 단계에 이르렀을 때 바로 무학의 아라한과를 성취한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이러한 뜻에 준하여 진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인 앞의 일곱 성자를 모두 ‘유학’이라고 이름하니, [그들은] 별도의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학(學)을 수습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성자의] 본성의 상태[本性位]에 머무는 이거늘, 어찌 유학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배우려는 뜻[學意]이 아직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학법(學法)의 ‘득’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이다.77)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무학을 아라한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온갖 자리(自利)의 행과, 학(學)을 수습하는 것이 이미 성취되어 [이제] 오로지 마땅히 다른 이에게 이익 되는 일만을 행하기 때문이니, 예컨대 계경에서 “스스로를 조복(調伏)시키지 않고서 능히 다른 이를 조복시키는 이 같은 일은 어디에도 없다”고 설한 바와 같다. 혹은 세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이생(異生)과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이 바로 그들이다. [이 중의] 이생은 비록 계ㆍ정ㆍ혜의 3[학]을 배웠을지라도 여전히 능히 진리[諦]를 참답게 관찰하지 못할 뿐더러 바른 학[正學]을 버리고 삿된 학[邪學]을 짓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유학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온갖 유정으로서 이미 능히 진리를 참답게 관찰하고 바른 학에서 물러남이 없는 이를 ‘유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세존께서는 유학자(有學者)에 대한 결정적인 뜻을 나타내기 위해 ‘학’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여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부처님이 담파(憺怕)에게 “마땅히 배워야 할 바를 배워라. 마땅히 배워야 할 바를 배우는 이, 나는 오로지 이러한 자만을 설하여 유학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78) 그리고 계ㆍ정ㆍ혜의 3[학]을 이미 잘 배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모든 이를 ‘무학’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들은 바로 일체의 유학과 이생으로부터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하기 때문에 ‘응공(應供, 즉 아라한)’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계ㆍ정ㆍ혜 세 가지에 대해 만약 이미 잘 닦고 배웠다면 필경 근심의 때[憂垢]를 여의었을 것이니 세간의 복전(福田)이 되기 충분하다네.
그렇다면 학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유학의 성자가 획득한 무루의 유위법을 말한다. 무학법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무학의 성자가 획득한 무루의 유위법을 말한다. 그러나 [열반 등의] 온갖 무위법은 비록 무루일지라도 유학법이나 무학법이라고는 이름하지 않으니, [그들에게] 획득된 것이라면 이생 등의 소의신에도 역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며, 만약 획득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유학과 무학에게 계속(繫屬)되지 않기 때문이다.79) 이와 같은 유학과 무학의 성자에는 모두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보특가라가 성취되는데, 향을 행하는 자[行向]와 과위에 머무는 자[住果]에 각기 네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80) 그러나 명칭상으로는 비록 여덟 가지가 있을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오로지 네 가지 과위에 머무는 자와 초과향(初果向, 즉 예류향)의 다섯 가지만이 있을 뿐이니, 뒤의 세 가지 과위의 향(向)은 앞의 과위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점차적으로 과위를 획득하는 자(즉 次第證)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며, 만약 배리욕(倍離欲)과 전리욕(全離欲)의 성자라면 견도위 중에 머물 때 일래과향과 불환과향이라고 이름하지만, 앞의 과위(즉 예류과와 일래과)에 포섭되지 않는다.81) 어떠한 까닭에서 진지는 오로지 무학에 [포섭된다는] 것인가? 유학의 성자도 역시 “나는 이미 지옥 등을 영원히 다하였다”고 스스로 알기 때문에 [유학에도 포섭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번뇌] 멸진의 득(得)과 구행하는 것을 바야흐로 진지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82) 즉 예류과 등의 계위에는 여전히 번뇌가 남아있어 이미 [번뇌] 멸진의 ‘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역시 또한 진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계경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온갖 유학의 성자는 8지(支)를 성취하지만, 만약 10지를 성취한 이라면 아라한이라 이름한다.”8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존자 사리자(舍利子)는 대장자(大長者) 급고독(給孤獨)에게 “그대는 이미 정지(正智)와 정해탈(正解脫)을 모두 성취하였다”고 말한 것인가? [이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으니, 그가 능히 온갖 악취로 나아가는 사지(邪智)와 사해탈(邪解脫)을 성취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참된 대치도를 밀의(密意)로서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유학은 10지(支)를 성취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 무지(無智)가 남아있기 때문에 마음이 완전하게[善]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8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경에서는 “온갖 유정으로서 불정증(佛證淨)을 성취하는 자는 모두 다 이미 정견(正見)을 획득한 자이며, 내지는 이미 정해탈을 획득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 견(見, 즉 성제현관)이 원만한 자에 대해 이와 같이 설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어긋남도 과실도 없다.85) 그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모든 유학의 성자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지와 정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는 [정지와 정해탈의] 갈래를 설정하지 않는다”고만 설하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갈래를 설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86)
1)생결은 생유(生有)를 낳는 번뇌, 기결은 중유를 일으키는 번뇌. ‘기(起)’는 중유의 이명(異名)이다. 본론 제30권 ‘중유의 다섯 이명’ 참조.
2)‘근수’는 근면한 정진(精進), ‘속진의 도’는 더 이상의 노력을 필요치 않는 도이다.
3)“유행반열반이란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 가행을 멈추지 않고 많은 공용(功用, 즉 노력)에 의해 비로소 반열반하는 불환을 말하니, 이것에는 오로지 근수(勤修)만이 존재할 뿐 속진의 도가 없기 때문이다. 무행반열반이란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가행을 게을리 하고 많은 공용을 닦지 않더라도 바로 반열반하는 불환을 말하니, 근수와 속진의 도를 모두 결여하였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29상중; 대정장29,p.124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084)
4)이는, 유위법을 반연하는 무루성도에 의해 반열반하는 것이 유행반, 무위법을 반연하는 성도에 의해 반열반하는 것이 무행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중반열반도 유위법과 무위법을 반연하여 무루의 성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 역시 유행반ㆍ무행반이라고 해야 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참고로 이 같은 有爲緣道와 無爲緣道에 의한 반열반 설은 『대비바사론』 제174권(대정장29,p.875상; 한글대장경124, p.547-8)에 『집이문족론』의 인용으로 설해지고 있다.
6)『잡아함경』제29권 제821경(대정장2,p.211상). 여기서는 5하분결을 끊음으로써 중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생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무행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유행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상류반열반을 획득하니, 이것을 증상의 혜학(慧學)이라 한다고 설하고 있다.
7)이에 반해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빠르며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열반도인 무행반을 보다 상위로 간주하고 있다. “계경 중에서는 무행반열반을 먼저 설하고 그 뒤에 유행반열반을 설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순서가 이치에 상응하니, 빠르게 나아가는 속진도(速進道)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 무행과 유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무행은] 공용(功用)에 의하지 않고 획득되는 것이고, [유행은] 공용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광(普光)과 법보(法寶)는 다 같이 이를 경부(經部)의 해석으로 판석하고 있다. 즉 유부에서는 빠르지는 않지만 많은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유행반을 무행반보다 상위에 두고 있지만, 경량부에서는 빠를 뿐더러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열반인 무행반을 보다 상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8)잡수란 두 찰나의 무루정려 중간에 유루정려를 닦는 것으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설함. 곧 잡수의 정려는 능히 5정거천(淨居天, 즉 無繁ㆍ無熱ㆍ善現ㆍ善見ㆍ色究竟의 5천을 말함)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에 색구경천에서 반열반하는 것이다.
9)‘전초’란 색계 중의 어떤 한 천처(天處)에서 몰하고 나서 바로 단박에 모든 천처를 초월하여 색구경천으로 가는 것을 말하며, ‘반초’란 모든 천처를 초월하지 않고 중간천 내지는 아래 정거천에 이르러 하나의 천처를 초월하여 색구경천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변몰’은 색계에 대한 애미(愛味)가 많아 모든 천처에 한번씩 태어난 후 색구경천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후술)
10)색계가 17천이 아니라 16천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주12) 참조.
11)즉 범중천에서 몰하여 색구경천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14천이 있는데, 반초는 바로 1천(그럴 경우 색계 15생) 내지 13천(그럴 경우 색계 3생)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곧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대범천을 하나의 천처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16천이라 한 것이다.(次註참조)
12)가습미라 비바사사는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 대범천을 제외한 색계 16천설을 주장하는 것이다.(본론 제21권 ‘외국사와 상좌의 색계 17천설 비판’ 참조) 즉 색계에 대범천이 존재한다면 불환의 성자는 이곳에서도 생을 받아야 하겠지만, 범중천의 주인인 대범천은 스스로를 일체 세간의 원인이라고 하는 계금취견을 일으키고, 또한 자신이 일체 세간의 유일한 구세주(生主)라는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불환의 변몰성자는 그곳에 태어나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색계의 별도의 처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13)색계 5정거천은 바로 잡수정려에 의해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후술)
14)두 가지 상류반 중에서 잡수에 의해 색구경천에서 반열반하는 자는 관행자로서 관(觀)이 뛰어나고, 무잡수에 의해 유정천에서 반열반하는 자는 지행자로서 지(止)가 뛰어나니, 전자는 혜(慧)를 즐기는 자이고, 후자는 정(定)을 즐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15)다시 말해 “색계에서 몰하고서 색계에 태어난 자는 중유 중에서 반열반하지 않으니.”
16)색계에서 몰하여 색계에 태어나 반열반하는 상류반에도 중유에서 반열반하는 중반열반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힐난이다.
17)무색계에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색계의 반열반 중에 중반열반을 제외한 네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18)5종불환 가운데 유행반과 무행반은 생반열반에 포섭된다.
19)참고로 『구사론』 제24권(고려장27,p.630상; 대정장29,p.125상; 권오민 역,p.1089)에서는 “중반열반은 [중유에서] 신속하게 반열반[速般]을 획득하고, 얼마동안 머문 후 반열반[非速般]을 획득하고, 오랜 시간 지난 후 반열반[經久般]을 획득하는 세 종류로 나누어지니, 세 가지 불꽃의 비유(제64권 주31 참조)로써 나타낸 바와 같기 때문이다”고 논설하고 있다.
20)순기의 ‘기’는 중유의 다른 이름. 즉 순기업은 중반을, 다음 생에 결과를 낳는 순생업은 생반을, 다음 생 이후에 결과를 낳는 순후업은 상류반을 인기한다. 다음의 번뇌와 근기의 경우도 이에 준하여 해석할 것.
21)즉 중반과 생반을 각기 시간적으로 나눈 세 종류는 하ㆍ중ㆍ상품의 번뇌와 상ㆍ중ㆍ하품의 근기의 차별에 의한 것이고, 상류반을 전초ㆍ반초ㆍ변몰의 세 종류로 나눈 것은 번뇌와 근기, 그리고 순후수업의 차별에 따른 것이다.
22)『중아함경』 제2권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p.427). 7선사취란 중반과 생반의 각기 세 종류와 상류반의 불환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이미 욕계의 번뇌를 끊어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선사취’이다.
23)중반과 생반는 각기 세 가지로 나누면서 어째서 상류반은 한가지로 설정한 것인가 하면, 전초(全超)든 반초(半超)든 변몰(徧歿)이든 상류반의 세 가지는 다 같이 상지로 유행(流行)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24)잡수(雜修)는 무루와 유루의 선정을 섞어 닦는 것이며, 무잡수(無雜修)는 오로지 무루의 선정만을 닦는 것으로서(후술), 잡수에 의해서는 오로지 색계에 태어나 상지(上地)로 유행하다 색구경천에서 반열반에 들고, 무잡수에 의해서는 색계에 태어나 상지로 유행하다 무색계 유정천(有頂天)에서 반열반에 든다.
25)원문은 ‘雖彼一一亦有同義, 而等第三. 於上流中雖有異義, 而等前二.’ 즉 중반과 생반의 세 가지도 각기 색계 중유의 상태에서 반열반하고 색계에 태어나 반열반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상류반에 수많은 차별적인 뜻도 결국 이 같은 점에서 중반이나 생반과 동등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7선사취는 말하자면 색계에 태어나 반열반하는 불환과를 일곱 유형으로 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을 선사취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함.
26)『중아함경』 제2권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p.427상) 참조. 유학의 정견이란 4제를 관하여 고(苦)ㆍ비아(非我) 등의 행상을 관한 자로서, 견도 고법지인 이후의 성자를 말한다.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0중하; 대정장29,p.125중; 권오민 역,p.1092)에 의하면, 중반ㆍ생반ㆍ상류반 이외의 다른 모든 유학도 더 이상 살생ㆍ투도ㆍ사음ㆍ망어ㆍ음주를 짓지 않는 율의를 획득하였으며, 견소단의 불선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선사’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오로지 선만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뛰어난 원인에 의거하여 상계로 간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들만을 선사취로 설정하였다.(후술)
27)예류과나 일래과의 성자도 선업을 행하지만 불선심으로써 비범행 등을 지어 욕계에 태어난다는 점에서 범부와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불환의 성자는 선행을 행하면서 불선심으로써 행하는 비범행 등을 떠났고, 또한 욕계를 초월하여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선사취’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28)일찍이 생을 거친 성자, 즉 경생(經生)의 성자란 타계에 가지 않고 항상 어떤 1계에서 태어나고 죽은 자를 말하는데, 이러한 경생의 성자가 불환과를 획득할 경우에도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중반ㆍ생반ㆍ상류반의 구별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29)『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0하; 대정장29,p.125중; 권오민 역,p.1093)에 따라 보충하였다. 즉 욕계에서만 생을 거친 자는 욕계의 열등함과 더러움만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상계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여 상계로 가지 않고 반열반하지만, 색계의 경생의 성자는 색계의 선미(善美)함을 알았기 때문에 무색계로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30)『중아함경』 제33권 「석문경(釋問經)」(대정장1,p.638상). “나는 여기서 목숨을 마친 뒤 인간으로 태어나--지혜[智]를 배워 만약 지혜를 획득하면 바로 구경지(究竟智, 즉 아라한)를 획득하고 구경변(究竟邊)을 획득하겠지만, 지혜를 배워 만약 지혜를 획득하고서 구경지를 획득하지 못하면 색구경천이라 이름하는 최상의 묘천(妙天)에 태어나리니, 대선인(大仙人)이시여, 원컨대 응당 아나함(阿那含, 즉 불환과)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대선인이시여, 나는 이제 결정코 수타원(須陀洹, 즉 예류과)을 획득하였습니다.(역자 抄譯)” 즉 천제석이 천 중에서 수타원을 획득하고서 인간으로 태어나 반열반한다고 말한 것은 성자로서 경생(經生)하는 자를 나타내며, 죽어 색구경천에 태어난다고 말한 것은 상계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므로, 이는 곧 욕계의 경생의 성자도 상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이설(異說)의 경증이다. 이하 이는 올바른 경증이 아님을 해명한다.
31)『대비바사론』 제53권(대정장27,p.277하; 한글대장경120,p.73) 참조. 즉 “천제석이 욕계 경생의 성자는 상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그같이 말한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그 같은 그릇된 앎이 도에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꾸짖어 제지하지 않으신 것이며, 또한 훗날 스스로 법성을 알게 될 때 부끄러워할까 염려하여 일부러 꾸짖지 않으신 것이다.”
32)무루와 유루의 정려를 번갈아 가며 닦는 것을 잡수(雜修)라고 하는데, 이는 오로지 욕계를 떠난 성자 즉 불환과 아라한만이 닦는 선정이다. 즉 그들은 지금 바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정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거기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유루와 무루의 정려를 섞어 닦는 것이다. 혹은 불환과의 경우 5정거천에 태어나기 위해 잡수하기도 하는데, 무루법에 의해서는 그러한 존재가 초래되지 않기 때문이다.(후술)
33)낙행이란 지관(止觀)이 균등하게 일어나 심사(尋伺) 등의 동란이 없어 목적한 바를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도를 말한다. 본론 제71권의 ‘4통행(通行)’ 중 ‘낙통행’을 참조바람.
34)“온갖 정려를 잡수하는 자는 바로 아라한이나 혹은 불환이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1상; 대정장29,p.125하; 권오민 역,p.1095). 욕계를 떠나지 못한 미이욕(未離欲) 성자는 근본정에 들 수 없으며, 이욕(離欲)의 이생(異生)은 비록 근본정에 들 수 있을지라도 무루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
35)시해탈이란 적당한 시기를 만나야 비로소 해탈하는 아라한으로, 여기에는 퇴법(退法) 등의 다섯 종류가 있으며, 불시해탈이란 어느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해탈할 수 있는 부동법의 아라한을 말한다.(본론 제66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36)“앞의 두 찰나는 무간도와 유사하고 세 번째 찰나는 해탈도와 유사하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1상; 대정장29,p.125하; 권오민 역,p.1096) 즉 앞의 유루와 무루의 두 찰나에서 불염무치(不染無癡)의 정장(定障)을 멸하고, 무루의 제3찰나에서 그것의 불성취를 획득한다.
37)미상응의 등지 즉 미정(味定, 정려에 대한 집착)은 애탐과 상응하는 등지로서, 전 찰나의 청정한 등지[淨等持]에 미착(味着)하는 등지.(본론 제77권 ‘8등지와 味ㆍ淨ㆍ무루등지’ 참조) 이는 곧 어떤 과위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인연이 되는 것으로, 둔근자는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앞의 두 이유와 아울러 역시 또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려를 잡수한다.
38)5정거천이란 색계 제4정려에 포섭되는 무번(無煩)ㆍ무열(無熱)ㆍ선현(善現)ㆍ선견(善見)ㆍ색구경천(色究竟天)으로, 불환과의 성자가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5나함천(那含天)’이라고도 한다.
39)상품의 잡수는 앞(중품)의 여섯 찰나를 가행으로 삼아 여기에 세 찰나를 더한 것이며, 나아가 극상품은 앞의 열두 찰나의 마음을 가행으로 삼아 세 찰나의 잡수를 더한 것이다. 즉 하품인 세 찰나의 잡수에 의해 무번천에, 중품인 여섯 찰나의 잡수에 의해 무열천에, 상품인 아홉 찰나의 잡수에 의해 선현천에, 상승품인 열두 찰나의 잡수에 의해 선견천에, 상극품인 열다섯 찰나의 잡수에 의해 색구경천에 태어나 반열반하게 된다. 즉 무루법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5정거천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유루법을 도와 그것으로 하여금 초래하게 하는 것으로, 무루법은 유(有)를 버리고 등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유루의 업력만이 그것(정거)의 이숙을 초래할 수 있다.(후술)
40)『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중; 대정장29,p.126상; 권오민 역,p.1098)에는 첫 문장만 인용되고 있는데, 칭우(稱友)에 의하면 이는 대덕 실리라다(室利羅多)의 설로서,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무루근이 증상하여 정려를 잡수하면 무번천 내지 색구경천에 태어나게 된다는 뜻이다.
41)양 설에 대한 중현의 뜻은 이러하다. “온갖 정거천을 초래하게 된 것은 잡수의 힘에 의해서이며, 역시 또한 업력에 의해서이니, 서로가 자조(資助)하였기 때문이다.”(『현종론』 제31권, 고려장28,p.229하; 대정장29,p.929하)
42)『중아함경』 제51권 「아습패경(阿濕貝經)」(대정장1,p.751중하).
43)신증(kāyasākṣin)이란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의 성자를 별도로 일컫는 명칭으로, 멸진정은 심식(心識)이 멸한 상태이므로 심식이 존재하지 않는 소의신을 근거로 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심증’이라 하지 않고 ‘신증’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44)『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1하; 대정장29,p.126상; 권오민 역,p.1098-1099) 즉 신증이란 불환과의 성자가 멸진정에 머물 때의 명칭이 아니라 출정(出定)하여 심식이 존재하는 소의신[有識身]에 일찍이 획득된 적이 없었던 적정을 증득하였을 때의 명칭이라는 뜻이다. 보광(普光)에 의하면 이는 구사논주 세친이 경부(經部)의 해석을 서술한 것으로, 멸진정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멸정 중 세심(細心)’ 내지 색심호훈설(色心互熏說)을 주장하는 경량부(본론 제13권 참조)로서는 멸진정이 무식(無識)의 소의신에 근거한다는 유부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출정위(出定位)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45)앞에서 설한대로 유부의 정의(正義)는 현재 상속신 중에 멸진정이 증득된 상태에 근거하여 “불환과의 성자로서 만약 소의신 중에 멸진정의 ‘득’이 생겨난 자이면,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身證)이라고 한다”는 것이지만, 그러한 상태는 심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멸진정으로부터 출관한 상태(즉 後邊)에 근거하여 말해야 한다고 하는 경우에도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는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이라 한다”고 해야지 경주의 말처럼 오로지 출관하여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유식신(有識身)의 적정(寂靜)에 대해 ‘신증’이라는 명칭을 설정해서는 출관 전의 상태를 지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46)8해탈(혹은 背捨)이란 선정을 통해 성취하는 공덕으로, 부정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내적인 색상(色想)에 대한 탐심에서 벗어나고(제1해탈) 이를 보다 견고히 하며,(제2해탈) 청정한 색을 관찰하여 청정한 해탈을 증득하고(제3해탈) 아래 세 무색정에서 벗어나고(제4-제7해탈), 일체의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멸진정 혹은 滅受想定, 제8해탈)을 말함. 본론 제80권에서 상론함.
47)『중아함경』 제30권 「복전경(福田經)」(대정장1,p.616상) 참조. 이상의 유ㆍ무학을 27현성(賢聖)이라 한다. 참고로 현존의 「복전경」에서는 신해(信解)를 신해탈(信解脫), 견지(見至)를 견도(見到), 일간(一間)을 일종(一種)으로 번역하였으며, 아라한향 대신 신증을 열거하고 있다.
48)멸진정은 유소연법(有所緣法, 즉 심ㆍ심소)을 싫어하여 등진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지만(8해탈 중의 제8해탈), 청정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50)다시 말해 “유학의 여덟 가지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즉 유학은 무루의 3학(계ㆍ정ㆍ혜)과 그에 따른 택멸의 수승한 과보를 갖는다. 그런데 신증불환의 경우 그가 획득한 멸진정은 유루이기 때문에 무루의 3학이 아니며, 유위이기 때문에 이계과(離繫果)가 아니다. 그래서 유학의 범주에서 제외한 것이다.
51)본론 제70권(‘원만한 유학과 무학의 조건’)에 의하면, 멸진정 자체만으로는 원만한 유학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근기, 혹은 근기와 과보와 함께할 때 비로소 원만한 유학의 조건이 된다. 예컨대 견지(見至)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의 신증(身證)은 근기[根]와 과보[果]와 선정[定]을 갖추었기 때문에 ‘원만한 유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선정 혹은 근기와 선정만을 갖춘 이를 ‘원만한 유학’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다. 즉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 신증을 18유학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다만 선정(즉 멸진정)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고, 지금 본 절에서 불환과에 ‘신증’을 포함시켜 설한 것은 과보(즉 불환과)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신증은 유위인 멸진정의 획득여부에 따른 분별이기 때문에 18유학 중 불환과에 포함되지만, 신해와 견지 등은 근기에 따른 분별이기 때문에 불환과와는 별도로 헤아렸다는 것이다.
52)신증 역시 무루의 성법을 증득한 자이기에 유학의 수(數)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8해탈 중 아래 세 무색정의 해탈을 성취한 이도 역시 무루의 성법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유학의 수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뜻인가?
53)여기서 다섯 갈래는 지(地)ㆍ종성ㆍ생처(生處)ㆍ근기ㆍ이염처(離染處).
54)여기서 6종성이란 5종 불환이 반열반하게 될 때 획득하게 되는 아라한의 여섯 종류. 즉 퇴법ㆍ사법ㆍ호법ㆍ안주법ㆍ감달법ㆍ부동법의 종성을 말함.(본론 제67권 ‘아라한의 6종성’ 참조)
55)여기서 ‘아흔 가지’는 6종성 각각에 존재하는 하ㆍ중ㆍ상품의 5종 불환이다.
56)상동.
57)원문은 ‘總成一萬一千九白六十不還差別.’로 되어 있지만,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2상); 『현종론』(제31권, 고려장28,p.230중)과 다른 판본에 따라, 혹은 실제 계산상 ‘一萬二千九白六十’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8)그러나 엄격히 말해 실제로는 유정지 제9품(하하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까지를 아라한향이라고 한다.(후술)
59)유정지 이하의 번뇌는 앞에서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금강유정에 의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사실상 일체의 번뇌를 끊는 공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의 선정과 상응하는 무간도는 일체의 무간도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금강’에 비유한 것이다.
60)여기서 무사혹(無事惑)은 실체(事, dravya)로서의 경계대상을 갖지 않는 견혹, 다음의 유사혹(有事惑)은 실체로서의 경계대상을 갖는 수혹. 예컨대 유신견의 경계대상인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탐 등의 경계대상인 색 등은 실유의 법이다.
61)“금강유정에도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유정지 제9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는 모두 9지(地)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2상; 대정장29,p.126중하; 권오민 역,p.1102) 즉 금강유정은 미지ㆍ중간ㆍ4정려ㆍ아래 3무색 등의 무루정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법ㆍ유지(智), 고(苦)ㆍ공(空) 등의 행상, 소연이 되는 4제 등의 차별에 따라 동일지(地)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이하 이에 대해 상론한다.
62)상2계의 8지를 능히 대치하는 도류지는 서로 동류인이 되기 때문에 8지의 도제를 반연할 때에는, 그것을 별연(別緣)으로 삼지 않고 총연(總緣)으로 삼아 관찰한다. 그래서 그 때의 행상은 단지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 네 가지뿐이다.
63)본론 제48권 ‘무루연혹의 계지(界地) 관계’:동 주39) 참조.
64)즉 식무변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앞의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스물여덟 가지 금강유정 중에서 공무변처의 멸제를 반연하는 멸류지의 네 행상을 제외한 스물네 가지가 존재하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다시 식무변처의 스물네 가지 중에서 식무변처의 멸제를 반연하는 멸류지의 네 행상을 제외한 스무 가지가 있다.
65)이는 앞에서 설한 유부 정설(正說)에 따른 경우이다.
66)이는 뒤에 설한 “3무색정의 단계[地]에도 하지의 멸제를 반연하는 유지(類智)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따른 경우이다.
67)앞서 유부 정설로 언급된 쉰두 가지에, 8지 각각의 도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서른두 가지 중 총관(總觀)의 네 가지를 제외한 스물여덟 가지를 더한 것이다.
68)이 계산은 매우 복잡한데, 『대비바사론』 제28권(대정장27,p.143하-144상중)에 의하면, 여기서 총관은 2지, 3지, 4지, 5지, 6지, 7지, 8지의 총관이다. 즉 초정려와 제2정려, 제2정려와 제3정려, 나아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7총관 스물여덟 가지, 초정려와 제2ㆍ제3정려, 나아가 식무변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지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6총관 스물네 가지, 초ㆍ제2ㆍ제3ㆍ제4정려, 제2ㆍ제3ㆍ제4ㆍ공무변처, 나아가 공ㆍ식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의 5총관의 스무 가지, 초정려 내지 공무변처, 제2정려 내지 식무변처, 나아가 제4정려 내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4총관 열여섯 가지, 초정려 내지 식무변처, 제2정려 내지 무소유처, 제3정려 내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3총관 열두 가지, 초정려 내지 무소유처, 제2정려 내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2총관 여덟 가지, 그리고 4정려와 4무색정의 멸제 네 행상을 총관하는 네 가지, 도합 백열두 가지를 앞서 유부 정설로서 언급한 쉰두 가지에 더한 것이다. 참고로 『대비바사론』에서는 이 설을 여시설자(如是說者)의 말로 전하고 있다.
69)주63)의 본문 참조.
70)즉 무색계에 계속(繫屬)되는 견고소단 내지 견도소단의 혹(惑)을 끊는 고류지인 내지 도류지인과, 유정지 9품의 수혹을 끊는 무간도이다.
71)‘번뇌의 멸진[盡]’이란 택멸을 말하며, 진지란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다’, ‘나는 이미 집(集)을 끊었다’, ‘나는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다’, ‘나는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스스로 아는 것을 말한다. 본론 「지품(智品)」 제73권 ‘진지와 무생지의 차별’ 참조.
72)유정지 제9품의 해탈도는 모든 누(漏)의 단진(斷盡)의 득, 즉 3계 9지의 일체의 번뇌를 단진하여 획득하는 택멸의 ‘득’과 구생하는 최초의 법이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한 것으로, 그 밖의 무생지(無生智)나 무학의 정견과 같은 것은 비록 모든 누의 단진의 ‘득’과 구생할지라도 최초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진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73)여기서 ‘응과’는 응공(應供)의 과(果), 즉 아라한과를 말한다. 아라한은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이[應供]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학(無學, aśaikṣa)’이다.
74)이에 대해 진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자(예류향 내지 아라한향)는 또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해 부지런히 학을 수습하기 때문에 유학(有學, śaikṣa)이라 한다. 즉 예류ㆍ일래ㆍ불환의 성자가 자신의 과위에 머물며, 물러나지도 않고 승과도로 나아가지도 않는 상태(본성, prakṛti)로 머무르는 것은, 마치 길가든 행인이 잠시 쉬는 것과 같아서 표면적으로는 평온할지라도 더욱 증진하려는 의업이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배우려는 의지[學意]가 충만 되지 않아 학(계ㆍ정ㆍ혜학)의 ‘득’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을 ‘유학’이라 이름한 것이다.(후술)
75)무학의 성자에는 근기에 따른 6종성이 있다.(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76)이를테면 예류과 등에 머무는 자는 일래과향 등을 행하여 예류과 등과는 다른 명칭의 일래과 등을 추구하지만, 아라한과에 머무는 이는 더 이상 또 다른 향ㆍ과를 추구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77)즉 예류ㆍ일래ㆍ불환의 성자가 물러나지도 않고 승과도로 나아가지도 않는 본성(prakṛti)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마치 행인이 잠시 쉬는 것과 같아서 표면적으로는 평온할지라도 더욱 증진하려는 의업이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아가 배우려는 계ㆍ정ㆍ혜법의 득(得)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에 ‘유학’이라 이름하였다는 뜻이다.
79)택멸(열반)ㆍ비택멸ㆍ허공 등의 무위법은 비록 무루일지라도 유학법이나 무학법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학과 무학이 획득한 택멸열반의 무위법은 이생도 역시 유류의 세속도(즉 6行觀, 후술)로써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획득하는 일이 없는 비택멸과 허공은 그들에게 계속(繫屬)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무루의 유위법 즉 성도(聖道)만이 유학과 무학의 법이다.
81)유루의 세속도로써 욕계 6품 또는 9품의 수혹 등을 떠난 초월증자가 견도에 들 때는 예류과와 일래과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것의 향도는 그 같은 앞의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과는 별도의 존재로서 일래향(배리욕)ㆍ불환향(전리욕)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본론 제64권 ‘견도위의 성자’ 참조)
82)주72)의 본문 참조.
83)『중아함경』 제49권 「성도경(聖道經)」(대정장1,p.736중), ‘學者成就八支, 漏盡阿羅漢成就十支.’ 여기서 8지(支)란 8성도지를 말하며, 10지란 여기에 정해탈(正解脫)과 정지(正智, 유위와 무위의 두 해탈을 아는 진지와 무생지)를 더한 것을 말한다. ‘정해탈과 정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함.
84)“유학위 중에는 여전히 계박이 남아 있어 아직 [완전하게]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해탈(正解脫)의 갈래[支]가 없는 것으로, 약간의 계박을 떠났다고 해서 해탈자(解脫者)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해탈의 체성[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지(解脫智, 즉 正智)도 설정할 수 없다.”(본론 제72권 ‘무학의 정해탈과 정지’ 참조)
85)불증정(佛證淨)은 4증정(불ㆍ법ㆍ승ㆍ聖戒증정)의 하나로, 도제(道諦)를 현관할 때 획득된다. 본론 제72권 ‘4증정’ 참조.
86)즉 그들(유학)에게는 진지(盡智)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론 제72권 ‘무학의 정해탈과 정지’에서도 설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상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