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분별한 바와 같은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이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무엇이 앞에 생겨나고 무엇이 뒤에 생겨나는 것인가? 온갖 수면이 일어나는 것에는 일정한 순서가 없으니, 일체의 수면이 생겨난 이후에 일체의 수면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한 종류의 번뇌가 현행할 경우, 전후의 수면이 서로 견인하기 때문에 순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러한 어떤 한 종류에 근거하여 그 순서를 분별해 보면 [이러하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명과 의(疑)와 사견과 유신견과 변집견과 계금취와 견취와 탐(貪)과 만(慢)과 진(瞋)의 순서대로 앞의 것에 의해 뒤의 것이 인기되어 생겨난다. 無明疑邪身 邊見戒見取 貪慢瞋如次 由前引後生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번뇌가 차례대로 생겨난다고 할 때, 먼저 ‘무명’으로 말미암아 진리[諦]를 알지 못하여 고제 내지 도제를 관찰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4제를] 관찰할 만한 능력이 없기에 이미 [진리를] 들었음에도 바로 ‘괴로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괴로움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는 두 갈래의 유예(猶豫, 즉 의심)를 품게 된다. 만약 그때 사설(邪說)을 만나게 되면, 바로 ‘사견’을 낳아 ‘고제는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5]취온에 대해 ‘괴로움이 없다’고 이미 부정하였으니, 이로 인해 바로 ‘살가야견(薩迦耶見)’을 일으키고,1) 이에 따라 다시 자아는 단멸한다거나 상주한다고 주장하며(즉 변집견),2) 그 중의 하나의 극단에 집착하여 그것을 능정(能淨, 청정도를 말함)으로 간주한다(즉 계금취).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생각을 제일 뛰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즉 견취), 자기 견해의 공덕을 관찰하고 그것을 반연하여 ‘탐(貪)’을 일으키고, ‘이는 다른 견해보다 뛰어나다’고 뻐기면서 ‘만(慢)’을 낳고, [자신의 견해에] 어긋나는 다른 이가 일으킨 견해에 대해서는 ‘진(瞋)’을 낳으니, 이는 예컨대 자아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무아의 견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과 같다.3) 혹은 자신의 견해를 취사[선택]하는 상태에서는 필시 ‘진’을 일으켜 버려지는 견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4) 이는 어떤 부류에 근거하여 열 가지 수면이 서로 인기하며 현행하는 전후의 순서를 분별한 것이지만,5)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번뇌의 행상(行相)은 무변(無邊)이니, 그것이 근거하는 인연에 따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7. 번뇌의 생기인연
[그렇다면]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 인연에 의해서인가?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인연에는 다수의 종류가 있지만,6) 거친 것에 따라 수승한 것만 언급하면 오로지 세 가지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수면을 끊지 않았고 아울러 그에 따른 경계대상이 현전하며 비리(非理)의 작의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서이니 이것을 혹(惑)에 인연이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 由未斷隨眠 及隨應境現 非理作意起 說惑具因緣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가 일어난다. 바야흐로 장차 욕탐수면을 일으키려고 하는 때는 욕탐수면을 아직 끊지 않았고 아직 변지(遍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7) 욕탐에 수순하는 경계대상이 현전(現前)하였기 때문이며, 그것을 반연하는 비리(非理)의 작의(作意, 올바르지 못한 주의 경각)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밖의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것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욕탐수면을 아직 끊지 않았고 변지하지 못하였다’고 함은, 세 가지 인연 때문에 ‘아직 끊지 않았고 변지하지 못하였다’고 설한 것으로, 말하자면 ‘아직 끊어지지 않음[未斷]’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며, 대치도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진리의] 경계(즉 4제 16행상)를 아직 변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끊어짐[斷]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한을 갖는 끊어짐[有分斷]이며, 둘째는 분한을 갖지 않는 끊어짐[無分斷]이다. 그래서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아직 변지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설한 것으로, 이는 바로 ‘수면은 원인의 힘[因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다. ‘욕탐에 따른 경계대상이 현전하였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욕탐 전(纏)에 수순하는 실유의 경계대상이 존재하여, 만약 이것이 현전하는 경우 욕탐은 바로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수면은 경계대상의 힘[境界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다. ‘그것을 반연하는 비리의 작의가 일어났기 [때문에]’라고 함은, 이를테면 나무에 비유[如]되는 경계대상이 현전하고, 아울러 그것을 마찰시켜 불을 내려는 것에 비유되는 비리작의가 일어날 때, [비로소] 경계대상에 [비유되는] 나무를 문질러 욕탐에 [비유되는] 불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욕탐수면)서는 무엇을 비리작의라고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매우 좋은 옷을 입고, 꽃다발로 장엄하고, 향수를 바르고, 화장을 하고, 곱게 장식하여 아리따운 모습으로 나타난 여인에 대해 분취(糞聚)라고 생각해야 함에도 유정상(想)을 일으켜, 거기에 주지(住持)하려는 마음과 구기하는 전도된 경각(警覺)을 비리작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는 바로 ‘수면은 가행의 힘[加行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다. 만약 온갖 수면이 일어날 때 모두 이 같은 세 가지 인연을 갖추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라한에게 물러남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8) 아라한은 수면을 아직 끊지 못한 이가 아니다. 바야흐로 결정코 번뇌가 현전한다고 인정해야 비로소 ‘아라한에게도 물러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바야흐로 이전의 번뇌로부터 무간에 인기되어 생겨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아라한에게도 물러남이 있다고] 설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즉 번뇌가 생겨나는 데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기 때문으로, 첫째는 [이전의] 번뇌로부터 무간에 인기되어 생겨나는 것이고, 둘째는 [이전의] 번뇌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순간의] 그 밖의 다른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선ㆍ무기심과 무간에 번뇌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여기(아라한 有退論)서는 다음 [순간의] 그 밖의 다른 원인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과에서의] 물러남을 들어 [번뇌의 세 가지 인연을] 힐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은 여기서는 바야흐로 [세 가지] 인연을 모두 갖춘 번뇌에 근거하여 설하였지만, 원인의 힘과 가행의 힘을 갖지 않은 자도 실로 오로지 경계대상의 힘에만 의탁하여 번뇌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9)
Ⅳ. 온갖 번뇌에 관한 그 밖의 문제
1. 경에서 설한 번뇌의 여러 명칭
1) 총설
앞에서 논설한 수면과 아울러 그것에 수반되는 번뇌[伴]를 부처님께서는 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로 설하고 있다.10) ‘누(āśravā)’란 3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루(欲漏)이며, 둘째는 유루(有漏)이며, 셋째는 무명루(無明漏)이다. ‘폭류(ogha)’란 4폭류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폭류(欲瀑流)이며, 둘째는 유폭류(有瀑流)이며, 셋째는 견폭류(見瀑流)이며, 넷째는 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 ‘액(yoga)’이란 4액을 말하는 것으로, 폭류에서 설한 것과 같다. ‘취(upādāna)’란 4취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욕취(欲取)이며, 둘째는 견취(見取)이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이며,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11)
2) 3루(漏)
이와 같은 ‘누’ 등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를 제외한 것을 욕루라고 하며 유루는 상 2계의 번뇌로서 오로지 ‘치’를 제외한 것이다. 欲煩惱幷纏 除癡名欲漏 有漏上二界 唯煩惱除癡
즉 다 같이 무기성이고, 대치가 동일하며 선정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하나로 합한 것이며 무명은 모든 유(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따로이 하나의 ‘누’로 삼은 것이다.12) 同無記內門 定地故合一 無明諸有本 故別爲一漏
폭류와 액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지만 견(見)을 따로 건립한 것은 날카롭기 때문으로 견은 ‘머물게 한다’는 뜻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누’에서는 따로 독립시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瀑流軛亦然 別立見利故 見不順住故 非於漏獨立
욕액과 유액과 아울러 ‘치’와, ‘견’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을 ‘취’라고 이름하니 무명(즉 ‘치’)을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능히 집취(執取)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欲有軛幷癡 見分二名取 無明不別立 以非能取故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번뇌와 아울러 전(纏)에서 치(癡, 즉 무명)를 제외한 마흔한 가지의 법[物]을 모두 ‘욕루(欲漏)’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서른한 가지의 근본번뇌와 아울러 열 가지 ‘전’이 바로 그것이다.13) 색ㆍ무색계의 번뇌 중의 치(무명)를 제외한 쉰두 가지의 법을 모두 ‘유루(有漏)’라고 이름하니,14) 이를테면 상 2계의 근본번뇌로서 각기 스물여섯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색ㆍ무색계에도 비록 혼침(惛沈)과 도거(掉擧, 각기 10전의 하나)가 역시 또한 존재할지라도, 전(纏)은 계(界)에 근거하여 분별하지 않으니, 상계의 ‘전’은 그 수가 적을 뿐더러 자력으로 일어나는 것[自在轉]이 아니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오로지 [근본]번뇌만을 유루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의 경우도 역시 계에 근거하여 분별한다면, 유루는 쉰여섯 가지가 있게 된다. 그래서 『품류족론』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유루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색ㆍ무색의 2계에 계속되는 결(結)과 박(縛)과 수면과 수번뇌(隨煩惱)와 전(纏)이 바로 그것이다.”15) 어떠한 이유에서 상 2계의 수면을 합하여 하나의 유루로 설한 것인가? 다 같이 무기성이면서 대치가 동일하며, 선정[定地]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으로, [상 2계의 번뇌도] 역시 색(色)ㆍ성(聲)ㆍ촉(境)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오로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內門轉]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16) 그리고 그 뜻에 준하여 볼 때, 3계의 열다섯 가지의 무명이 무명루(無明漏)의 본질이 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본송에서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이것(즉 무명) 만을 따로 ‘누’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인가? 무명의 과실과 환란[過患]이 특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무명은] 그 자체만으로 능히 생사의 근본이 되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탐염(貪染)을 낳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도 같다.
존재하는 모든 악취와 이 세간과 저 세간은 모두 무명을 근본으로 삼고 탐욕에 의해 등기(等起)된 것이로다. 諸所有惡趣 此及他世間 皆無明爲根 貪欲所等起
지금 여기서는 오로지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백여덟 가지의 온갖 혹(惑)만을 ‘누’로 나타내어 논설하였을 뿐으로,17) 염오하지 않은 사(思) 등이나 한(恨) 등은 ‘누’에 포섭되지 않는다. 오로지 이같이 [수승한] 온갖 혹(즉 108번뇌)만이 유정을 계류(稽留)시켜 생사에 오래 머물게 하거나, 혹은 유정천(有頂天, 비상비비상처천을 말함)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생사 중에 유전하게 하므로18) 그 작용이 강력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의 번뇌에] 치우쳐 [‘누’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19)
3) 4폭류(瀑流)와 4액(軛)
폭류와 액의 본질은 ‘누’와 동일하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견(見)을 역시 따로 설정하였다. 즉 앞에서 언급한 ‘욕루’는 바로 욕폭류(欲瀑流)와 욕액(欲軛)에 해당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유루’는 바로 유폭류(欲瀑流)와 유액(有軛)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기서의 온갖 ‘견’을 [별도로] 떼어 내어 견폭류(見瀑流)와 견액(見軛)으로 삼았으니, 그 성질이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표탈(漂奪)과 화합(和合)과 의집(依執)이라는 뜻에서 ‘폭류’와 ‘액’과 ‘취’를 설정한 것으로,20) 단지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번뇌는 모두 서로를 자조(資助)하여 능히 [선품을] 씻어버리고[漂奪], [3계ㆍ4생ㆍ5취와] 화합시키며, [‘생’ 등에] 의지하고 집착[依執]하게 하듯이, 온갖 ‘견’도 역시 그러하다. 즉 온갖 ‘견’은 그 성질이 지극히 날카롭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번뇌와의 상호자조(도움)를 떠나서도 능히 [선품을] 씻어버리고, [3계ㆍ4생ㆍ5취와] 화합시키며, [‘생’ 등에] 의지하고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역시 [견]폭류와 [견]액과 [견]취로서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번뇌는 다 중생들로 하여금 염법(染法)[의 바다]를 떠돌게 하고 온갖 선품으로부터 떠나게 하게 하는데, 무해(無解, 즉 무명)와 사해(邪解, 즉 ‘견’)는 파도를 솟구치게 하고 중생을 표류시켜 선법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여기(폭류와 액)서 무명과 ‘견’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견루(見漏)는 별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머물게 하는 것’을 일러 ‘누(漏)’라고 이름하니, 뒤에서 논설하는 바와 같다.21) 그러나 ‘견’은 그러한 뜻에 수순하지 않을 뿐더러 의미상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생과 온갖 성자들로 하여금 다 같이 생사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누’라고 이름하였지만, 온갖 ‘견’은 어떠한 경우에도 성자들로 하여금 [생사에] 머물게 하는 공능을 갖지 않기에 [머물게 한다는] ‘누’의 뜻이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견루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22) 그러나 표탈(漂奪, 즉 폭류)과 화합(和合, 즉 ‘액’)과 의집(依執, 즉 ‘취’)의 뜻은 성자와 이생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뒤의 세 갈래(누를 제외한 폭류ㆍ액ㆍ취)에서는 모두 ‘견’을 따로 설정하였다. 이를테면 이러한 온갖 번뇌는 능히 이생을 [생사의 바다에] 떠돌게 하고 일체의 선품에서 떠나게 하는 일이 있지만, 온갖 성자는 그렇게 떠돌게 할 수 없다. 또한 떠돌게 하고서는 능히 온갖 이생의 종류들로 하여금 좋지 못한 계(界)와 취(趣)와 생(生)과 화합하게 하지만, 성자는 그렇게 화합하게 할 수는 없다. 또한 화합하고 나서 능히 온갖 이생의 종류들로 하여금 거기에 의지하고 집착하지 않게 하는 일이 없지만, 성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세 가지 갈래로 보건대, 이생은 성자의 경우와 다르며, 그 중에서도 특히 ‘견’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것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견(見)은 그 성질이 성급하고 날카롭기[躁利] 때문에 단독으로는 [생사의 바다에] 머물게 한다는 뜻으로 분별될 수 없다. 그래서 ‘누’의 갈래에서는 그 밖의 다른 번뇌와 더불어 설정된 것이다. 만약 그 밖의 다른 번뇌와 더불어 설정한다면, 머물게 하는 공능을 바로 갖게 되니, 이는 마치 코끼리 왕을 조련시키면서 그가 낳은 코끼리 새끼와 함께 묶어 두는 것과 같다.”23) 이상에서 스물아홉 가지의 법을 욕폭류(欲瀑流)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낸 셈이니, 이를테면 탐ㆍ진ㆍ만에 각기 다섯 종류가 있고, 의(疑)의 네 가지와 전(纏)의 열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24) 스물여덟 가지의 법을 유폭류(有瀑流)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색ㆍ무색계의] ‘탐’과 ‘만’의 각기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혼침(惛沈)과 도거(掉擧)를 더한다면, 서른두 가지가 될 것이니, 색ㆍ무색계에 각기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25) 서른여섯 가지의 법을 견폭류(見瀑流)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3계 중의 각기 12견이 바로 그것이다. 열다섯 가지의 법을 무명폭류(無明瀑流)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3계의 무명 각각에 5부(部)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4액(軛)은 4폭류와 동일하다.
4) 4취(取)
다시 4취(取)의 본질은 4액과 동일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욕취(欲取)와 아어취(我語取)에 각기 무명을 더한 것과, ‘견’을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은 것이 앞의 액(軛)의 경우와 다르다.26) 즉 앞의 욕액(欲軛)에 욕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네 가지의 법을 모두 욕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ㆍ진ㆍ만ㆍ무명의 각기 다섯 가지와, ‘의’의 네 가지와 아울러 10전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유액(有軛)에 상 2계의 무명을 더한 서른여덟 가지의 법을 모두 아어취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탐ㆍ만ㆍ무명의 각기 열 가지와, ‘의’의 여덟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혼침과 도거를 더한다면, 마흔 두 가지가 된다.27) 그리고 견액(見軛) 중의 계금취를 제외한 나머지 서른 가지의 법을 모두 견취(見取)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나머지 여섯 가지(3계의 견고ㆍ견도소단)의 법을 계금취(戒禁取)라고 이름하는데, 이것만이 홀로 성도(聖道)에 적대되는 원수가 되기 때문이며, 두 가지(즉 非因計因과 非道計道) 모두 출가와 재가의 무리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28) 어떠한 이유에서 무명을 별도의 ‘취’로 건립하지 않는 것인가? ‘능히 [온갖 존재(有)에] 집착[取]한다’는 뜻에 근거하여 ‘취’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지만, 모든 무명은 능히 집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알지 못하는 것[不了相]을 설하여 ‘무명’이라 이름한 것으로, 그것은 능히 집착하는 것이 아니니, 지극히 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만 다른 번뇌와 합쳐서 ‘취’로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2. 수면 등의 명의(名義)
이와 같이 수면과 아울러 전(纏)을 경에서 누ㆍ폭류ㆍ액ㆍ취라고 설한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면 등의 명칭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미세와 두 가지에서의 수증과 수축(隨逐)과 수박(隨縛)ㆍ 머묾과 유전ㆍ표탈ㆍ화합ㆍ의집(依執) 이것이 바로 수면 등의 뜻이다. 微細二隨增 隨逐與隨縛 住流漂合執 是隨眠等義
논하여 말하겠다. 근본번뇌(즉 10수면)가 현재전할 때 그 행상(行相)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미세(微細)’라고 이름한다.29) 그래서 성자인 아난타(阿難陀)도 “나는 지금 동일한 범행(梵行)에 대해 만심(慢心)을 일으키는지 일으키지 않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던 것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만수면의 행상이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도 만심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온갖 이생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그 밖의 다른 수면의 경우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1찰나의 극미에서도 역시 수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미세’라고 이름한다”고 해석하였다. ‘두 가지에서의 수증(隨增)’이란, 말하자면 [수면은] 능히 그것의 소연이나 상응하는 법에서 모두 수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번뇌가 소연과 상응법에서 수증하는 일이 있다는 것인가?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30) 혹은 원수가 해코지하려고 허물과 틈[瑕隙]을 살펴 구하듯이, 아울러 독(毒)을 관찰하듯이, 번뇌도 자신의 소연에서 수증하는 일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뜨거운 쇠 구슬이 능히 물을 뜨겁게 하듯이, 아울러 독과 접촉하듯이, 번뇌도 자신과 상응하는 법에서 수증하는 일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두 가지는 모두 유모가 아기로 하여금 [그녀에] 따라 성장하게 하며, 유모가 아기로 하여금 능히 성장하게 하는 동시에, 아울러 기예를 점차 쌓아가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소연과 상응법은 온갖 번뇌의 상속으로 하여금 증장하게 하며, 아울러 적집(積集)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다. ‘수축(隨逐)’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수면이] 무시(無始) 이래로 [유정의] 상속 중에서 [그것의] 득(得)을 일으켜 [유정을] 쫓아다니는 것[隨逐]을 말한다.31) ‘수박(隨縛)’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을 떠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니,32) 마치 사일열(四日熱)의 학질이나 서독(鼠毒)과도 같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수박이란 말하자면 획득되어 항상 수전(隨轉)하는 것으로, 마치 바다의 물고기[水行]가 공중을 나는 새[空行]의 그림자를 따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설한 온갖 인연으로 말미암아 열 가지 종류의 번뇌를 ‘수면(隨眠)’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훈사문(訓詞門)에 근거하여 이것의 명칭을 해석하면 [이러하다]. 즉 [수면은] 말하자면 ‘따라 유전하는 것[隨流]’으로, [유정의] 상속 중에서 잠자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서 ‘따라 유전한다’고 함은 소의신 중에 안주하여 증장하며 뒤섞여 머문다[惛滯]는 뜻이다. 혹은 ‘따라 두드러진 것[隨勝]’으로, [유정의] 상속 중에서 잠자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바로 참다운 이해[如實解]로 들어가는 상태를 혼미하게 한다는 뜻이다. 혹은 옥(獄) 중에서 오랫동안 쫓아다니며[隨逐] 유정류를 덮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탐 등의 열 가지만이 수면이고, 그 밖의 분(忿) 등은 수면이 아닌 것인가?33) 오로지 이러한 열 가지 종류만이 습기(習氣)가 견고할 뿐, ‘분’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수면은] 유정을 생사(生死)에 체류시켜 오래 머물게[住] 하거나, 혹은 유정천으로부터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생사 중에 유전(流轉)하게 하는 것으로,34) 그들의 상속은 6창문(瘡門, 즉 6근을 말함)에서 끝없이 허물[過]을 누설하기 때문에 [수면을] 일컬어 ‘누(āsrava)’라고 하였다. 또한 선품을 극심히 표탈(漂奪)시켜 버리기 때문에 ‘폭류(ogha)’라고 이름하였고, 유정을 [3]계ㆍ[5]취ㆍ[4]생과 화합시키기 때문에 ‘액(yoga)’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러한 [3계ㆍ5취ㆍ4생] 각각에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취(upādāna)’라고 이름하였다.
3. 번뇌의 그 밖의 명칭
1) 총론
이와 같이 수면과 아울러 전(纏)을 세존께서 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 등으로 설한 이유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번뇌의 명칭에는] 오로지 그러한 것만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시 그 밖의 다른 [명칭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結) 등의 차별로 말미암아 다시 다섯 종류가 있다고 설하였다. 有結等差別 復說有五種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번뇌에는 결(結, saṃyojana)ㆍ박(縛, bandhana)ㆍ수면(隨眠, anuśaya)ㆍ수번뇌(隨煩惱, upakleśa)ㆍ전(纏, paryavasthāna)이라는 뜻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다시 다섯 가지 종류로 설하고 있다.
2) 9결(結)
바야흐로 ‘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은 아홉 가지로서, 법[物]과 ‘취’가 동등하여 견(見)과 취(取)의 두 ‘결’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結九物取等 立見取二結
[또한] 두 가지는 오로지 불선이며 아울러 자력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전(纏) 가운데 오로지 질(嫉)과 간(慳)만을 두 가지 ‘결’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由二唯不善 及自在起故 纏中唯嫉慳 建立爲二結
혹은 두 가지는 자주 현행하기 때문이며 비천함과 가난함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두루 수번뇌[隨惑]를 현기하기 때문이며 두 부류의 유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或二數行故 爲賤貧因故 遍顯隨惑故 惱亂二部故
논하여 말하겠다. 결(結)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애결(愛結)이며, 둘째는 에결(恚結)이며, 셋째는 만결(慢結)이며, 넷째는 무명결(無明結)이며, 다섯째는 견결(見結)이며, 여섯째는 취결(取結)이며, 일곱째는 의결(疑結)이며, 여덟째는 질결(嫉結)이며, 아홉째는 간결(慳結)이다.35) 이러한 아홉 종류의 번뇌는 경계대상에 대해, 생에 대해 계박(繫縛)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결’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계경에서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눈[眼]이 색을 계박하는 것도 아니고, 색이 눈을 계박하는 것도 아니다. 계박하는 것은 말하자면 바로 그 가운데 존재하는 욕탐이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온갖 어리석은 범부와 [성법(聖法)을] 들은 일이 없는 무문(無聞)의 이생은 ‘결’에 계박되었기 때문에 태어나고, ‘결’에 계박되었기 때문에 죽으며, ‘결’의 계박으로 말미암아 이 세간에서 저 세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이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온갖 유정들은 온갖 다양한 괴로움과 화합하게 된다. 그래서 ‘결’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으로, 이는 바로 온갖 고뇌(苦惱)의 안족처(安足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애결(愛結)이란, 이를테면 3계의 탐(貪)으로, 이는 소의와 소연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어긋나는 생각[違想]이나 떠나려고 하는 생각[別離欲]에 섭수되는 행 중에서 마음으로 하여금 미워하고 등지게 하는 것을 일컬어 에결(恚結)이라고 한다. 만결(慢結)이란, 이를테면 7만으로, 앞에서 이미 해석한 바와 같다.36) 무명결(無明結)이란, 이를테면 3계의 무지로서, 이는 소의에 근거한 것이지 소연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온갖 무루법은 계(界)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으로, 무명 역시 그것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37) 견결(見結)이란, 이를테면 세 가지 견(見, 유신ㆍ변집ㆍ사견)을 말하며, 취결(取結)이란 이를테면 두 가지 취(取, 견취ㆍ계금취)를 말한다. 어떠한 이유에서 세 가지의 ‘견’을 견결(見結)로 별도로 설정하였으며, 두 가지의 ‘취’를 별도로 설정하여 취결(取結)로 삼은 것인가? 세 가지 ‘견’과 두 가지 ‘취’는 법[物, 번뇌의 수]과 취(取)가 동등하기 때문이다.38) 즉 그 같은 세 가지 ‘견’에는 열여덟 가지의 법이 있으며, 두 가지 ‘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법(번뇌의 수)이 동등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같이 ‘법이 동등하다’고 설할 경우, 의미상 어떤 유익함이 있는 것인가? ‘결’의 뜻 중에 유익함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을 설하면 [이러하다]. 즉 탐ㆍ진 등과 같은 번뇌는 각기 독립적으로 하나의 ‘결’을 성취할 수 있지만, 세 가지 ‘견’과 두 가지 ‘취’는 각기 열여덟 가지의 법이 화합하여 각기 하나의 ‘결’을 성취하기 때문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탐ㆍ진 등과 마찬가지로 5견(見)도 각기 하나의 ‘결’이 된다고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과 ‘취’의 경우, 각기 열여덟 가지 법이 다 같이 하나의 ‘결’로 설정될 때 비로소 탐(즉 애) 등의 ‘결’과 대적(상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유신견ㆍ변집견ㆍ견취에도 열여덟 가지의 법이 있고, 계금취ㆍ사견도 열여덟 가지로서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어찌 [이 또한] 법(번뇌의 수)이 동등하다고 하지 않겠는가?39) 그렇지는 않으니, 본[송]에서의 해석이야말로 그 이치가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취(取)가 동등하기 때문이다. 즉 세 가지 견(見)은 다 같이 취해지는 것[所取]이고, 두 가지 취(取)는 다 같이 능히 취하는 것[能取]으로서, [양자는] 취해지는 것과 능히 취하는 것으로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행(諸行)을 자아[我]로(즉 유신견), 단멸ㆍ상주하는 것으로 계탁하며(즉 변집견), 혹은 [제행을]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즉 사견). 그런 후에 두 가지의 ‘취’를 일으켜 [앞의] ‘견’을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집착하고(즉 견취), 혹은 청정도라고 집착하는 것으로(즉 계금취), [세 가지 ‘견’과 두 가지 ‘취’는] 서로 잡란되지 않기 때문에 본[송]에서의 해석을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견결과 취결은 각기] 법과 [‘견’과 ‘취’라는] 말이 동등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40)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존재[有]와 재물에 탐착하는 경우 그러한 것에 대한 계박의 작용이 두드러진 것이 견결이며, 만약 열반의 즐거움에 탐착하는 경우라면, 그것에 대한 계박의 작용이 두드러진 것이 취결이다”라고 하였다. 의결(疑結)이란, 말하자면 4제(諦)에 대해 의심하는 것[猶豫]으로, 이는 혜(慧)와는 다른 별도의 법체로서 존재한다.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지 않게 하는 것[不喜]을 설하여 ‘질결(嫉結)’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는 진(瞋)과는 다른 별도의 법체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질’은 다른 이의 영화(榮華)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아끼고 집착[悋著]하게 하는 것을 설하여 ‘간결(慳結)’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이유에서 [10]전(纏) 가운데 ‘질’과 ‘간’의 두 종류만을 ‘결’로서 설정하고, 그 밖의 다른 전은 ‘결’로 설정하지 않는 것인가?41) 만약 8전을 설정하는 경우라면, 마땅히 “이 두 가지는 오로지 불선이며, 자력으로 일어나는 자재기(自在起)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를테면 오로지 이러한 두 가지 ‘전’만이 양쪽의 뜻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그 밖의 다른 여섯 가지 ‘전’ 중의 그 어떤 것도 양쪽의 뜻을 갖춘 것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이 두 가지 ‘전’만을 ‘결’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즉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는 비록 오로지 불선이지만 자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회(悔, 즉 악작)는 자력으로 일어나지만 오로지 불선만이 아니며, 그 밖의 ‘전’은 두 가지의 뜻을 모두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10전을 설정하는 경우라면,42) 마땅히 “오로지 ‘질’과 ‘간’ 두 가지는 그 허물이 특히 더 무겁기 때문에 10전 중의 이 두 가지만을 ‘결’로 설정하였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즉 이 두 종류는 자주 현행하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욕계 인취나 천취 중에 태어나면 이러한 ‘질’과 ‘간’이 자주 현기(現起)하는 것이다.43) 또한 이 두 가지는 능히 비천함과 가난함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44) 즉 비록 [욕계] 선취(善趣, 인취와 천취) 중에 태어날지라도 많은 이가 비천함과 가난함이라는 무거운 고통의 멍에에 시달리게 되는데, 현견하건대 어떠한 이도 비천함이나 온갖 재물에 핍박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에 지극히 가까워지는 것도 역시 경애(敬愛)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는 수번뇌(隨煩惱)를 두루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수번뇌에는 모두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근심과 함께 일어나는 것[戚俱行]이며, 둘째는 기쁨과 함께 일어나는 것[歡俱行]이니, ‘질’과 ‘간’은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상을 두루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는 능히 두 부류의 무리들을 뇌란(惱亂)시키기 때문이다. 즉 재가중(衆)들은 재산과 지위에 대한 ‘질’과 ‘간’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뇌란되며, 만약 출가중이라면 교(敎)와 행(行)에 대한 ‘질’과 ‘간’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뇌란되는 것이다. 혹은 천중(天衆)과 아소낙(阿素洛)의 무리를 능히 뇌란시키니, 이를테면 색(色)과 맛[味]으로 인해 서로가 지극히 뇌란되는 것이다.45) 혹은 이것은 능히 인ㆍ천의 두 무리를 뇌란시키니, 세존께서 교시가(憍尸迦)에게 “질결과 간결로 말미암아 인ㆍ천이 뇌란된다”고 말한 바와 같다. 혹은 이 두 가지는 능히 자타(自他)의 무리를 뇌란시키니, 이를테면 ‘질’로 말미암아 다른 무리들을 뇌란시키고, 안으로 ‘간’을 품으므로 말미암아 자신의 무리들을 뇌란시키게 된다. 그래서 10전 가운데 이 두 가지만을 ‘결’로서 설정하게 된 것이다.
3) 5하분결(下分結)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차별문(門)에 근거하여 ‘결’이라고 하는 말로써 다섯 종류의 번뇌가 있음을 설하였다.46) 게송으로 말하겠다.
또한 5순하분결(順下分結)이라는 것이 있으니 두 가지에 의해 욕계를 초월하지 못하고 세 가지에 의해 다시 하계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갈래[門]와 근본[根]에 포섭되기 때문에 세 가지이다. 又五順下分 由二不超欲 由三復還下 攝門根故三
혹은 다른 곳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도에 미혹하고 아울러 도에 대한 의심이 해탈로 나아가는 것을 능히 장애하니 그래서 오로지 세 가지를 끊으라고 설한 것이다. 或不欲發趣 迷道及疑道 能障趣解脫 故唯說斷三
논하여 말하겠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유신견과 계금취와 의(疑)와 욕탐(欲貪)과 진에(瞋恚)가 바로 그것으로, 이와 같은 다섯 종류는 능히 하분(下分)의 법에 수순하여 증익[順益]되기 때문에 ‘하분[결]’이라 이름하였다.47) 그런데 하분의 법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하계로서 욕계를 말하며, 둘째는 하계의 유정으로서 온갖 이생을 말한다. 즉 [온갖 이생이] 비록 성법을 획득하였을지라도 하분의 계(즉 욕계)를 능히 초월하지 못하는 것은 욕탐과 진에라는 두 가지 결(結)에 의해 계박되어 있기 때문이며, 비록 욕탐을 떠났을지라도 하계의 유정을 능히 초월하지 못하는 것은 유신견ㆍ계금취ㆍ의결에 의해 계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유정은 욕계의 감옥 중에 머무는 것으로, 욕탐과 진에는 마치 감옥을 지키는 옥졸과도 같으니, 그들의 단속으로 말미암아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유신견 등의 세 가지는 순라군과 같으니, 설혹 어떤 방편으로 욕계의 감옥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그러한 세 가지 번뇌에 붙잡혀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순하분결에는 오로지 다섯 가지만이 있게 된 것으로, “이미 진리[諦]를 관찰한 자(즉 견도위에 이른 자)도 욕탐과 진에로 말미암아 하계를 초월하지 못한다”고 하는 그러한 뜻도 가히 그럴 수 있으니, 이는 다만 욕계계(繫)이기 때문이다. 욕탐을 떠났을지라도 견소단의 일체의 번뇌가 모두 하분의 유정을 초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세존께서는 오로지 세 종류만을 설한 것인가?48) 비록 이러한 책망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불세존께서는 간략히 갈래[門]와 근본[根]에 포섭시켜 바야흐로 세 가지 종류만을 설한 것이다. 여기서 ‘갈래에 포섭된다’고 함은, 견소단의 번뇌의 유형에는 모두 세 가지가 있으니, 오로지 1부(部)인 것과 2부에 통하는 것과 4부 모두에 통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종류만을 설하면 그러한 세 갈래의 종류를 포섭하여 그 모두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49) ‘근본에 포섭된다’고 함은, 유신견 등의 세 가지는 바로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번뇌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즉 변집견ㆍ견취ㆍ사견은 순서대로 유신견ㆍ계금취ㆍ의라는 세 종류의 수승한 근본에 따라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 종류의 번뇌를 그러한 세 가지 근본에 포섭시켜 설한 것이다.50) 그래서 순하분결에는 오로지 이 같은 다섯 가지만이 있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예류과를 획득한 모든 이는 여섯 가지 번뇌를 끊었음에도, [계경에서는] 어떠한 연유에서 단지 3결만을 끊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51) 이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갈래[門]와 근본[根]에 포섭되기 때문으로, 비록 단지 한 가지만을 [끊었다고 설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2부(部)와 통한다. 다시 말해 그 같은 상(相, 즉 유신견ㆍ계금취ㆍ疑의 所斷의 상)을 언급함으로써 그러한 [소단의] 실체[體, 각각의 개별적인 번뇌]를 나타낸 것으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번뇌를] 그 같은 세 가지 갈래에 포섭시켜 설하게 된 것이다.52) 혹은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다른 지방으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세 가지의 장애가 있다. 첫째는 출발하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이를테면 이곳과 다른 지방의 공덕(좋은 점)과 과실(나쁜 점)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거두어 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올바른 길[正道]에 미혹한 것으로, 이를테면 비록 다른 지방으로 출발하고자 하였을지라도 잘못된 길[邪道]에 의지함으로써 그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는 올바른 길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두 길 모두에 사람이 자주 다니는 것을 보고, 이 길이 그곳으로 나아가는 바른 길인지 바른 길이 아닌지 도무지 알지 못하여 마음에 의혹[猶豫]을 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해탈로 나아가는 자에게도 이와 서로 유사한 세 가지의 장애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유신견으로 말미암아 온(蘊)과 열반에 대해 자아와 [자아가] 끊어진 것[斷]이라고 주장하여 공덕과 과실로 관찰하였기 때문에 해탈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53) 비록 해탈로 추구할지라도 계금취로 말미암아 올바른 길에 미혹하여 세간도(世間道)에 의지함으로써 헛되이 쓰디쓴 고통만을 경험할 뿐 끝내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며, 의(疑)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온갖 삿된 도[邪道]를 닦는 것을 보고서 올바른 도에 대해 이것이 해탈로 나아가는 바른 길인지 바른 길이 아닌지 스스로 능히 잘 관찰하지 못하여 마음에 의혹을 품는 것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예류(預流)는 이처럼 해탈로 나아갈 때의 장애를 영원히 끊었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세 가지 번뇌(유신견ㆍ계금취ㆍ의)만을 끊었다고 설한 것이다. 비록 [제]행(諸行)이 상주하는 것이라고 관찰할지라도(즉 변집견) 역시 해탈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며, 세간도가 뛰어난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즉 견취)도 역시 올바른 도에 미혹하여 그것을 상실한 것이며, 성도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즉 사견) 역시 올바른 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앞의 세 가지(유신견ㆍ계금취ㆍ의)는 뒤의 세 가지(변집견ㆍ견취ㆍ사견)의 근본이 되니, 뒤의 세 가지는 반드시 앞의 세 가지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근본에 지말을 포섭시켜 언급한 것으로, 그래서 단지 앞의 세 가지만을 설하였던 것이다.
4) 5상분결(上分結)
부처님께서는 또 다른 경에서 “순하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상분(順上分)에도 역시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54) 게송으로 말하겠다. 순상분에도 역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색ㆍ무색계의 두 가지 탐과 도거ㆍ만ㆍ무명이 바로 그것으로 상계를 초월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順上分亦五 色無色二貪 掉擧慢無明 令不超上故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다섯 종류의 법체는 여덟 가지이니, 도거 등의 세 가지도 역시 계(界)에 따른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55) 오로지 수소단의 번뇌를 ‘순상분’이라 이름한 것으로, 상분(上分, 즉 상계와 상계의 유정)에 수순하여 증익되기 때문에 ‘순상분결’이라고 이름하였다. 요컨대 견소단을 끊어야 그것은 비로소 현행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번뇌는] 견소단의 혹(惑)이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그것을 능히 자조(資助)하여 하분(下分)에 따라 증익하게 하기 때문으로, 요컨대 견소단의 혹을 영원히 끊어야 비로소 현행하는 것을 ‘순상분결’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여기서 이미 색ㆍ무색계의 탐과 ‘순상’이라는 말에 대해 논설하였으니, 도거 등도 역시 색ㆍ무색계의 번뇌로서 욕계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품류족론』에서도 이미 이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법(結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9결이다. 결이 아닌 법[非結法]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9결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이다.”56) 이에 따라 도거 한 종류의 경우, 일부는 바로 ‘결’이니, [상]2계에 계속(繫屬)되는 도거가 바로 그것이며, 일부는 ‘결’이 아니니, 욕계에 계속되는 도거가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57) [여기서] 일부가 바로 ‘결’이라고 함은 성자의 도거를 말하며, 일부가 ‘결’이 아니라고 함은 이생의 도거를 말한다. 즉 [도거는] 어떤 상태에서는 바로 ‘결’이 되니, 이미 욕탐을 떠난 상태의 도거가 그러하며, 어떤 상태에서는 ‘결’이 되지 않으니,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상태의 도거가 그러하다. 이처럼 도거는 그 차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품류족론』에서 ‘결’이라고는 설하지 않았지만, 삼마지(三摩地)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순상분 중에서는 ‘결’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58)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순상분결 중에 혼침(惛沈)을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것은 등지(等持, 즉 삼마지)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9)
5) 3박(縛)
‘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박(縛)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박(縛)은 세 가지로, 3수(受)에 의한 것이다. 縛三由三受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계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縛)’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이는 바로 능히 이염(離染)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는 뜻이다. ‘결’과 ‘박’의 두 가지 상(相)은 [사실상] 어떠한 차별도 없지만, 본모(本母, matṛka, 논장의 일종)에 근거하여 ‘박’에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한 것으로, 첫째는 탐박(貪縛)이며, 둘째는 진박(瞋縛)이며, 셋째는 치박(癡縛)이다. 그리고 그 밖의 온갖 ‘결’은 품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중에 포섭된다. 즉 5견과 의결은 ‘치’와 품류가 동일하고, 만결과 간결의 두 가지는 ‘탐’과 품류가 동일하며, 질결은 ‘진’과 품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 모두는 3박에 포섭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진리를 관찰한 자(다시 말해 이미 견도위에 든 자)가 그 밖의 마땅히 지어야 할 바를 현시하기 위해 세 가지 ‘박’을 설한 것으로, 그것은 모두 6신식(身識)을 계박하여 생사의 감옥 중에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지나치게 각혜(覺慧)가 열등한 자를 위해 거친 상의 번뇌를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단지 세 가지 ‘박’만을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박’은 3수(受)의 세력에 따라 인기되기 때문에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한 것이다. 즉 탐박은 대부분 자상속(自相續)의 낙수(樂受)에서 소연과 상응의 두 종류로 수증하지만, 일부는 역시 자상속의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에서, 자ㆍ타상속의 고수에서, 그리고 타상속의 낙수와 사수(捨受)에서 오로지 소연의 한 종류로 수증하는 경우도 있다. 진박 역시 대부분 자상속의 고수(苦受)에서 소연과 상응의 두 종류로 수증하지만, 일부는 역시 자상속의 불고불락수에서, 자ㆍ타상속의 낙수와, 타상속의 고수와 사수에서 오로지 소연의 한 종류로 수증하는 경우도 있다. 치박도 역시 대부분 자상속의 사수(捨受)에서 소연과 상응의 두 종류로 수증하지만, 일부는 역시 자상속의 낙수와 고수에서, 타상속의 일체의 수(受)에서 오로지 소연수증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대부분에 해당하는 이치에 근거하여 ‘3수에 따라 3박을 설정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60) 이염(離染)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을 설하여 ‘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종류의 탐 등이 이염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현행하는 [탐 등]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이가 세 가지 박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필경 이염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6) 수면(隨眠)
‘박’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수면(隨眠)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면은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61) 隨眠前已說
논하여 말하겠다. 수면에는 여섯 가지, 혹은 일곱 가지, 혹은 열 가지, 혹은 아흔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
7) 수번뇌(隨煩惱)
7-1) 총설
수면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수번뇌(隨煩惱)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번뇌는 이 밖의 나머지 염오한 심소의 행온(行蘊)이다. 隨煩惱此餘 染心所行蘊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유정을 어지럽히는 것[擾亂]이기 때문에 ‘번뇌’라고 이름하였는데, 바로 이 같은 온갖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수번뇌(隨煩惱)’라고 하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62) 어떤 옛 논사[古師]는 “만약 원만한(완전한) 번뇌의 상을 갖추지 않은 법을 일컬어 ‘수번뇌’라고 이름하니, 달이 원만하지 않은 것을 ‘수월(隨月)’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온갖 수면을 일컬어 ‘번뇌’라고 하였지만, 이 역시 수번뇌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는 바로 원만한 번뇌의 품류이기 때문으로,63)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온갖 번뇌는 결(結)ㆍ박(縛)ㆍ수면ㆍ수번뇌ㆍ전(纏)의 뜻을 갖는다고 논설하였던 것이다.64) 그러나 이 밖의 다른 염오한 심소의 행온은 [이러한] 번뇌에 따라 일어나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수번뇌’라고만 이름할 뿐 ‘번뇌’라고는 이름하지 않으니, 원만한 번뇌의 상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다. 수번뇌라는 말은 몇 가지의 법을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설하였기 때문에 다수의 법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분발(憤發)하는 것과 참지 않는 것[不忍]과 험악한 말을 일으키는 것[起惡言]이 바로 그러한 것들로서,65) 세존께서 바라문에게 “스물한 가지의 온갖 수번뇌가 있어 능히 마음을 뇌란시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 이에 대해서는 뒤(즉 ‘10纏’과 ‘6煩惱垢’)에서 마땅히 간략히 분별하리라.
7-2) 10전(纏)
전(纏)과 번뇌구(煩惱垢)에 포섭되는 것에 대해 바야흐로 먼저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纏)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참ㆍ무괴ㆍ 질(嫉)ㆍ간(慳)ㆍ회(悔)ㆍ수면(睡眠), 그리고 도거ㆍ혼침이 바로 그것이다. 혹은 분(忿)과 부(覆)를 더한 열 가지이다. 纏八無慚愧 嫉慳幷悔眠 及掉擧惛沈 或十加忿覆
무참과 ‘간’과 도거는 모두 탐(貪)에서 생겨난 것이며 무괴와 수면과 혼침은 무명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無慚慳掉擧 皆從貪所生 無愧眠惛沈 從無明所起
‘질’과 ‘분’은 진(瞋)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고 ‘회’는 의(疑)에서, ‘부’에 대해서는 여러 쟁론이 있다. 嫉忿從瞋起 悔從疑覆諍
논하여 말하겠다. 근본번뇌를 역시 ‘전’이라고도 이름하니, 경에서 “욕탐의 전을 연(緣)으로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66)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탐 등을 원만한 번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모든 논자(論者)들은 온갖 수면(즉 근본번뇌)을 떠나 [그 밖의] 수승한 것에 근거하여 ‘전(纏)’을 설하였는데, 어떤 이는 여기에 여덟 가지가 있다고 하고, 혹은 어떤 이는 열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즉 『품류족론』에서는 8전이 있다고 설하고 있지만,67) 비바사종(毘婆沙宗)에서는 ‘전’에 열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68) 이를테면 앞의 여덟 가지에 다시 분(忿)과 부(覆)을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종류는 함식(含識, 유정을 말함)을 계박하여 생사의 감옥에 가두기 때문에 ‘전’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이러한 열 가지가 원인이 되어 온갖 악행을 일으키며, 악취(惡趣)에 갇히게 되기 때문에 ‘전’이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서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질(嫉)과 간(慳), 그리고 회(悔)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69) 마음으로 하여금 흐리멍덩[昧略]하게 하고, 혼침과 상응하며, 능히 몸을 집지(執持)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면(眠)’ 즉 수면(睡眠)의 특상이다. 수면은 혼침과 상응하지 않는 경우도 역시 있지만,70) 여기서는 오로지 ‘전’[의 하나]로 분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 수면의 세 가지 상을 한꺼번에 설한 것은, 이러한 세 가지 특상과 수면의 뜻이 서로 부합하기 때문이다.71) 자신이나 친구의 손해와 원수의 이익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으로, 진에가 선행함으로써 마음이 분발(憤發)하게 되는 것을 ‘분(忿)’이라고 이름한다.72)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처(處)와 비처(非處) 즉 옳고 그름을 어기고 거역함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되돌아보는 일이 없이 일어나게 하는 힘, 내지는 마음으로 하여금 분발(憤發)하게 하는 자상(子上, 의미불명)을 일컬어 ‘분’이라 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하는 것을 설하여 ‘부(覆)’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죄’란 이를테면 꾸짖을 만한 것으로, 바로 시라(尸羅, 계율)와 궤칙(軌則), 그리고 온갖 청정한 명[淨命]을 허물고 범하는 것을 말하며, ‘감추려고 함’은 바로 죄를 은닉하고자 하는 욕망을 원인으로 한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시 해석하여 말하기를, “[있으면서도] 없는 체[捫拭]하는 것을 ‘부’라고 한다. 이를테면 안으로는 악을 품었으면서도 밖으로는 품지 않은 체하는 것을 말하니, 이는 바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앞에서 “만약 법으로서 번뇌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면, 바야흐로 수번뇌라는 명칭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논설하였다.73) 그렇다면 이 중의 어떠한 법이 어떠한 번뇌로부터 일어나는 것인가? 무참과 ‘간(慳)’과 도거는 바로 탐(貪)의 등류(等流)이니, 요컨대 탐을 직접적인 원인[近因]으로 삼을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괴와 수면과 혼침은 바로 무명의 등류이니, 이는 무명의 상과 지극히 서로 인접한 것이기 때문이다. ‘질(嫉)’과 ‘분(忿)’은 바로 진(瞋)의 등류이니, 이러한 법의 상은 ‘진’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회(悔)’는 바로 의(疑)의 등류이니, 유예(猶豫)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부(覆)’의 경우, 어떤 이는 바로 탐의 등류라고 설하였고, 어떤 이는 바로 무명의 등류라고 설하였으며, 어떤 이는 양자 모두의 등류라고 설하였으니, 지식이 있는 모든 이는 애(愛, 즉 탐)로 인해 그것을 낳기 때문이며, 무지한 자는 치(癡, 즉 무명)로 인해 그것을 낳기 때문이다.74) 바로 이 같은 상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이 칭예(稱譽)와 이양(利養)과 공경(恭敬)에 집착하거나, 악행에 의해 초래되는 당래의 과보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의 죄를 은닉하려고 하는 원인으로, 이는 ‘애’와 무명 두 가지의 등류과이다. 이에 따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 같은 은닉의] 법을 설하여 ‘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처럼 열 가지 종류의 ‘전’은 모두 번뇌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번뇌의 등류이기 때문에 ‘수번뇌’라고 이름한 것이다.
7-3) 6번뇌구(煩惱垢)
그 밖의 [수번뇌인] 번뇌구(煩惱垢)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번뇌구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뇌(惱)ㆍ 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가 그것이다. 煩惱垢六惱 害恨諂誑憍
‘광’과 ‘교’는 탐(貪)에서 생겨난 것이고 ‘해’와 ‘한’은 진(瞋)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며 ‘뇌’는 견취로부터 일어난 것이고 ‘첨’은 온갖 견(見)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誑憍從貪生 害恨從瞋起 惱從見取起 諂從諸見生
논하여 말하겠다. 허물어 버릴만한 일[可毁事]에 대해 결정적이고도 견고히 집착하여 버리기 어렵게 하는 원인을 일컬어 ‘뇌(惱, pradāśa)’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법이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러한 법을 지닌 자는] 인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75) 여기서 ‘집착’은 악[심]에 의한 집착이다. 다른 유정에 대해 전혀 되돌아보지 않는 것은 아니나 거듭 섭수(攝受)하는 것처럼 하면서 괴롭히고 손해를 끼치는 일[惱損]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장애하며 괴롭히는 것을 일컬어 ‘해(害, vihiṁsā)’라고 한다.76)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상[非愛相]에 대해 기억에 따라 분별[隨念分別]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으로, ‘분(忿, 10전의 하나)’에서 상속된 후기(後起)의 마음이 원한을 맺는 것을 일컬어 ‘한(恨, upanāha)’이라고 한다.77) 자신의 마음을 방편으로 숨기고 교활한 모략으로써 다른 이의 마음을 유혹하여 실제의 앎과는 어긋나게 하는 마음의 왜곡[心曲]을 일컬어 ‘첨(諂, māyā)’이라고 한다.78) 먼저 명리(名利) 등에 대해 탐하였기 때문에 다른 이로 하여금 미혹되게 하고자 거짓을 나타내는 원인으로서, 올바른 결정[正定]과 어긋나게 하는 마음의 험악함[心險]을 일컬어 ‘광(誑, śāṭhya)’이라고 한다.79) 그리고 마음의 험악함(즉 誑)과 마음의 왜곡(즉 諂)의 차별상은 [이러하다]. [전자는 험악한] 길과 같고, [후자는 구불구불한] 지팡이와 같은 것으로, [전자가] 다른 이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에 대한 것이고, [전자가] ‘탐’에 의한 것이라면, 후자는 ‘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80) ‘교(憍, mada)’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널리 분별한 바와 같다.81)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탐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자신의 젊음과 무병(無病)과 나이 등 온갖 흥(興)하고 성(盛)한 것을 믿어 마음이 오만해지는 것을 ‘교’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말하기를, “먼저 자상속 중의 흥성한 제행(예컨대 건강ㆍ재산ㆍ지위 등)에 탐착하여,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면서 마음이 스스로를 믿고 거들먹거리는 것[擧恃]을 일컬어 ‘교’라고 하는데, 다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는 점에서 만(慢)과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82)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종류는 번뇌(즉 근본수면)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더럽고[穢汚] 그 상이 거칠기 때문에 ‘번뇌구’라고 이름하였다. 즉 이러한 여섯 가지 종류의 번뇌구 중에서 ‘광’과 ‘교’는 바로 ‘탐’의 등류이며, ‘해’와 ‘한’은 바로 ‘진’의 등류이며, ‘뇌’는 바로 견취의 등류이다. 그리고 ‘첨’은 바로 온갖 ‘견’의 등류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아곡(阿曲)이란 온갖 악견을 말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첨’은 결정코 바로 온갖 ‘견’의 등류인 것이다. 즉 이러한 여섯 가지 [번뇌구] 역시 번뇌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전’과 마찬가지로 역시 ‘수번뇌’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8) 수번뇌의 제문분별(諸門分別)
8-1) 견ㆍ수소단 분별
온갖 ‘전’과 번뇌구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그것의 단대치(斷對治)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전’과 번뇌구 중의 어떤 것이 어떠한 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 가운데 무참ㆍ무괴와 수면과 혼침ㆍ도거는 견ㆍ수소단이며 그 밖의 나머지와 번뇌구는 자력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이다. 纏無慚愧眠 惛掉見修斷 餘及煩惱垢 自在故唯修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10전 가운데 무참과 무괴는 일체의 불선심과 통하여 그것과 함께 하고, 수면(睡眠)은 욕계와 통하여 [욕계] 중의 일체의 의식과 함께 일어나며, 혼침과 도거는 일체의 염오심과 통하여 그것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는 모두 견소단과 수소단에 통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인 질ㆍ간ㆍ회ㆍ분ㆍ부와 아울러 번뇌구는 자력으로 일어나는 이른바 ‘자재기(自在起)’이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이다. 즉 오로지 타력(他力)에 의해 일어나는 수소단의 무명과 상응하기 때문에 ‘자재기’라고 이름한 것으로,83) 자력으로 일어나는 ‘전’이나 번뇌구와 상응하며 존재하는 무명은 오로지 수소단이기 때문이다.
8-2) 불선ㆍ무기분별
이러한 온갖 ‘전’과 번뇌구 중의 어떤 것이 어떠한 성질[性]과 통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세 가지는 두 가지의 성질이고 그 밖의 것은 악이며, 상계의 것은 모두 무기이다. 欲三二餘惡 上界皆無記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수면과 혼침ㆍ도거의 세 가지는 모두 불선과 무기의 두 가지 성질과 통하며, 그 밖의 일체의 수번뇌 즉 욕계계인 일곱 가지 ‘전’과 6번뇌구는 모두 불선이다. 상 2계 중에 상응하는 바에 따라 존재하는 일체의 수번뇌는 오로지 무기성에 포섭되니, 첨ㆍ광ㆍ교ㆍ혼침ㆍ도거가 바로 그것이다.
8-3) 계계(界繫) 분별
이러한 온갖 ‘전’과 번뇌구 중의 어떤 것이 어떠한 계(界)에 계속(繫屬)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첨’과 ‘광’은 욕계와 초정려에 존재하고 세 가지는 3계에, 그 밖의 것은 욕계에 존재한다. 諂誑欲初定 三三界餘欲
논하여 말하겠다. ‘첨’과 ‘광’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만 존재한다. 범세(梵世, 즉 초정려)에 ‘첨’과 ‘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대범왕은 자신의 사정을 숨기고 [아는 체하는] 상을 나타내어 마승(馬勝) 필추를 속여 미혹시켰기 때문이다.84) 전하여 듣기에, 이는 오로지 이생에게만 일어나는 것으로서, 성자에게도 역시 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혼침과 도거와 교(憍)의 세 가지는 다 같이 3계에 계속되는 것이며, 그 밖의 일체의 수번뇌는 모두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한다. 즉 열여섯 가지(10전과 6구) 중 다섯 가지(첨ㆍ광ㆍ혼침ㆍ도거ㆍ교)는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고, 그 밖의 열한 가지는 오로지 욕계계(繫)인 것이다.
4. 일체 번뇌와 6식(識)의 상응관계
앞서 분별한 수면과 수번뇌 중에서 오로지 의지(意地, 즉 제6의식계)에만 의지하여서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이고, 6식지(識地)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소단과 만(慢)과 수면(睡眠)과 자력으로 일어나는 수번뇌는 모두 오로지 의지(意地)에서만 일어나며 그 밖의 것은 모두 6식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見所斷慢眠 自在隨煩惱 皆唯意地起 餘通依六識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견소단과, 수소단인 ‘만’과 수면, 수번뇌 중의 자력으로 일어나는 자재기(自在起)의 번뇌(즉 질ㆍ간ㆍ회ㆍ분ㆍ부와 6번뇌구), 이와 같은 세 종류의 번뇌는 모두 의식(意識)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이 같은 온갖 번뇌와 수번뇌는] 5식신(識身)에 의지하여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85) 그 밖의 일체의 번뇌는 모두 6식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즉 수소단 중의 탐ㆍ진ㆍ무명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온갖 수번뇌, 이를테면 무참ㆍ무괴ㆍ혼침ㆍ도거, 그리고 그 밖의 대번뇌지법에 포섭되는 수번뇌, 즉 방일ㆍ해태ㆍ불신(不信)은 모두 6식신에 의지해야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86) 이치상으로 마땅히 모든 수번뇌에 대해서도 설해 보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거칠게 나타나는 것에 근거하여 논설하였다.
5. 일체 번뇌와 5수근(受根)의 상응관계
1) 근본번뇌와 5수근의 상응관계
다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은 낙(樂) 등의 5수근(受根)과87) 지금 여기서 분별한 일체의 번뇌와 수번뇌 중에서, 어떠한 번뇌가 어떠한 근과 상응하는 것인가? 여기서 마땅히 온갖 [근본]번뇌와의 상응관계에 대해 먼저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온갖 번뇌 가운데 ‘탐’은 희(喜)ㆍ낙수(樂受)와 상응하고 ‘진’은 우(憂)ㆍ고수(苦受)와, ‘치’는 모두와 사견은 우ㆍ희수와 상응한다. 欲界諸煩惱 貪喜樂相應 瞋憂苦癡遍 邪見憂及喜
의(疑)는 우수와, 그 밖의 다섯 가지는 희수와 일체의 번뇌는 사수(捨受)와 상응하며 상지의 번뇌는 모두 각기 대응하는 바에 따라 자식(自識)의 온갖 수(受)와 두루 상응한다. 疑憂餘五喜 一切捨相應 上地皆隨應 遍自識諸受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온갖 번뇌 중에서 탐(貪)은 희수(喜受)와 낙수(樂受)와 상응하니, 기쁨에서 일어나고[歡行轉], 6식과 두루 [관계하기] 때문이다.88) 진(瞋)은 우수(憂受)와 고수(苦受)와 상응하니, 근심에서 일어나고[慼行轉], 6식과 두루 [관계하기] 때문이다. 무명은 앞의 네 가지의 수와 두루 상응하니,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고, 6식과 두루 [관계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번뇌와도 두루 상응하기 때문이다. 사견은 우수와 희수 모두와 상응하니,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意地, 제6의식)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사견은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난다는 것인가?]89) 순서대로 일찍이 죄업과 복업을 지었기 때문이다.90) 의(疑)는 우수와 상응하니, 근심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意地)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즉 유예(猶豫, 불결정의 망설임)를 품은 자는 결정적으로 알기를 희구하여 마음이 수척해지기 때문이다. [사견을 제외한] 그 밖의 4견(유신견ㆍ변집견ㆍ계금취ㆍ견취)과 만(慢)은 희수와 상응하니, 기쁨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제 전체적으로 논설[通說]해보면, [일체의 번뇌는] 모두 사수(捨受)와 상응하니,91) 사수는 치(癡, 즉 무명)에 의해 수증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치’는 모든 번뇌와 두루 상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번뇌가 상속하여 구경(究竟)에 이를 때, 경계가 멀어지고 그것을 취하는 것도 느려져 처중(處中, 不苦不樂)의 욕을 일으키다가 점차 쇠미하여 상속이 끊어지는 것이니, 그때 번뇌는 사수와 서로 수순(隨順)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는 모두 사수와 상응하는 것이다. 어찌 사근(捨根)을 기쁨도 아니고 근심도 아닌 것[非歡非戚]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상응한다는 것인가? 처중(處中), 즉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업을 짓는 사람의 경우처럼, [사근 역시] 함께 한다고 하여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92) 욕계의 번뇌가 이미 그러하다면, 상지(上地)의 경우는 어떠한가? 상지의 번뇌는 모두 각기 대응하는 바에 따라 자지(自地)의 자식(自識)과 구기하는 온갖 수(受)와 두루 상응한다. 이를테면 만약 어떤 지(地) 중에 네 가지 식(識)이 존재할 경우, 그러한 각각의 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각기 자식의 온갖 ‘수’와 두루 상응한다.93) 또한 만약 온갖 지 중에 오로지 의식만이 존재할 경우, 그러한 의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의식과 [구기한] 온갖 ‘수’와 두루 상응한다. 그리고 상계의 온갖 지 중에는 식(識)의 많고 적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초정려에는 네 가지의 식이 존재하며, 그 밖의 지(地)에는 한 가지(즉 의식) 만이 존재한다. 또한 수(受)에도 많고 적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초정려ㆍ제2ㆍ제3ㆍ제4정려 등에는 순서대로 희ㆍ낙ㆍ사수와, 희ㆍ사수와, 낙ㆍ사수와, 오로지 사수만이 존재한다.94) 따라서 온갖 지(地) 중에 존재하는 번뇌는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그 지의 식과 [구기하는] ‘수’와 상응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두 가지 의(疑, 상계와 욕계의 ‘의’)는 다 같이 결정짓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상계의 그것은 희ㆍ낙수와 상응할 수 있는 반면, 욕계의 ‘의’는 희수와 구기하지 않는 것인가? 이욕지(離欲地)에 존재하는 온갖 번뇌는 비록 결정짓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근심이 아니니, 비록 의심의 그물[疑網]을 품었을지라도 정의적인 즐거움[情怡]를 폐(廢)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95) 이는 마치 인간이 애호할 만한 물건을 추구하여 획득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록 힘들고 피곤한 일이 많을지라도 즐거움의 생각[樂想]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색계에서도 역시 의심을 품는 일이 있을지라도 의심하는 중에 선한 품류의 생각을 낳는다. 그래서 그것은 희ㆍ낙수와 상응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진리[諦]를 부정함에 따라 ‘유신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5취온 중의 괴로움의 이치가 없다고 부정하여 ‘이것(5취온)은 바로 나[我]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9권, 고려장27, p.604중; 대정장29, p.107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932)
2)“이러한 유신견으로부터 ‘변집견’을 인기하여 낳게 되니, 이를테면 자아에 근거하여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을 주장하기 때문이다.”(『구사론』, 앞의 책)
3)이상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와 같다. 무명―의(疑)―사견―살가야견(즉 유신견)―변집견―계금취―견취―탐(貪)―만(慢)―진(瞋).
4)이는, 예컨대 견제소단(見諦所斷)의 탐 등을 낳을 때에도 자상속의 견(見)을 소연의 경계로 삼듯이 ‘진’을 일으키는 것도 사기(捨棄)되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이설로서, 『구사론』에서는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전하고 있다.
5)『순정리론』(제53권)에서는 앞서 언급한 유형 이외 유신견―변집견, 단견의 변집견―사견―견취, 상견의 변집견―계금취―의(疑)―탐(貪)―만(慢)―진(瞋)―무명의 순으로 일어나는 유형과, 무명―의(疑)―유신견―변집견(상주의 변집견)―계금취, 변집견(단멸의 변집견)―사견―견취―탐(貪)―만(慢)―진(瞋)의 순으로 일어나는 유형을 더 전하고 있다.
6)『순정리론』(제53권)에서는 번뇌생기의 인연으로서 동분(同分)ㆍ부락(富樂)ㆍ방역(方域)ㆍ사론(邪論)ㆍ과문(寡聞)ㆍ많은 잠ㆍ즐거움ㆍ음식ㆍ나이ㆍ소의신의 경계ㆍ습관ㆍ시간 등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비둘기와 원앙은 탐(貪)이 강성하고, 독사나 전갈은 진에(瞋恚)가 드세며, 남방에 태어난 이는 대체로 탐이 강성하고, 북방에 태어난 이는 진에가 드세며, 병서(兵書)를 익힘으로써 진에가, 창가론을 들음으로써 욕탐이, 외도서(外道書)를 배움으로써 우치가 더욱 치성하다는 것이다.
7)고법지인(苦法智忍) 내지 도류지인(道類智忍)의 무간도에 의해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고법지 내지 도류지의 해탈도에 의해 아직 택멸이계의 득이 증득되지 않은 것을 말함. 변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28권에서 상론함.
8)아라한은 3계의 일체의 견ㆍ수소단의 수면을 모두 끊고 변지(遍知)하였기 때문에 번뇌생기의 세 가지 인연(원인ㆍ경계ㆍ가행의 힘)이 충족되지 않아 더 이상 물러남이 없어야 할 것이지만, 유부에서는 ‘아라한 유퇴론(有退論)’을 주장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3권에서 상론한다)
9)아라한과에서 물러나는 이라 할지라도 그는 이미 일체의 번뇌를 끊고 변지하였으며, 비리의 작의도 없기 때문에, 다만 잠깐 나타난 경계대상에 미혹하여, 다시 말해 오로지 경계대상의 힘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일으킬 뿐이라는 뜻.
10)이를테면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대정장2, p.127상);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衆集經)』(대정장1, p.50이하). 여기서 ‘그것에 수반되는 번뇌’란 수번뇌(隨煩惱)를 말하는 것으로, 『구사론』(제20권, 고려장27, p.604하; 대정장29, p.107중; 권오민 역, p.934)에서는 ‘전(纏)’이라고 하였다.(본송 참조) ‘전’이란 근본수면으로부터 파생된 지말번뇌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 혹은 惡作)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의 열 가지가 있다.(후설)
11)이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누’란 6근으로부터 누출되어 유정을 생사에 머물게 하고, 유전시킨다는 뜻이며, ‘폭류’는 홍수가 모든 것을 씻어버리듯이 유정의 선품을 표탈(漂奪)한다는 뜻이며, ‘액’은 소를 멍에에 속박시키듯이 유정을 괴로움의 존재인 5취 등과 화합ㆍ속박시킨다는 뜻이며, ‘취’는 유정으로 하여금 5취 등에 의지하고 집착[依執]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 번뇌의 의미에 대해서는 후설하는 ‘수면 등의 명의(名義)’ 참조.
12)『구사론본송』의 제1구는 “다 같이 무기성이고, 내면에서 생겨나고(同無記內門)”이다. 이는 곧 상 2계의 수면을 합하여 유루(有漏, 무루에 대응하는 유루가 아니라 욕루에 대응하는 유루임)로 설하게 된 이유를 밝힌 송문으로, 그곳의 번뇌도 외면[外門]의 색(色)ㆍ성(聲)ㆍ촉경(觸境)을 반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다 같이 무기성이고 대치가 동일하며”로 개작한 것이다.
13)욕계의 서른두 가지 견소단 중 4제소단의 무명 네 가지를 제외한 스물여덟 가지와, 무명을 제외한 수소단 세 가지에 10전을 더하여 마흔한 가지가 된다. 무명을 제외한 이유는 무명루를 따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문에서는 ‘법’이 ‘물(物)’로 되어 있으나, 이는 유자성의 개별적 실체[別實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하 ‘법’으로 번역한다.
14)상2계의 견ㆍ수소단의 번뇌에서 각기 5부의 무명을 제외한 스물여섯 가지를 합하여 쉰두 가지가 된다. 여기서 유루(bhāva-āśarvā)는 욕루에 대응하는 말로서, 무루에 대응하는 유루(sāśarvā)와는 다르다.
15)『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 p.717중). 여기서 ‘결’이란 9결 중 무명결과, 상계에 존재하지 않는 에(恚)ㆍ질(嫉)ㆍ간(慳)을 제외한 애(愛)ㆍ만(慢)ㆍ의(疑)ㆍ견(見)ㆍ취(取)의 5결을 말하며, ‘박’이란 3박 중 상계에 존재하지 않는 진박(瞋縛)과, 별도로 건립하는 무명박을 제외한 탐박(貪縛) 한 가지를 말하며, ‘수면’은 10수면 중 진(瞋)과 무명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를 말하며, 근본번뇌에 수반되는 ‘수번뇌’란 대번뇌지법의 여섯 가지에서 무명을 제외한 방일ㆍ해태ㆍ불신ㆍ혼침ㆍ도거와 첨(諂)ㆍ광(誑)ㆍ교(憍)의 세 가지 소번뇌지법 등 여덟 가지를 말하며, ‘전’이란 10전 중 상 2계에 존재하는 혼침과 도거 두 가지를 말한다. 결(結)ㆍ박(縛)ㆍ수번뇌 등의 제 번뇌에 대해서는 후술함.
16)주12) 참조.
17)이에 따라 3루에 포섭되는 98수면과 10전을 일반적으로 ‘108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18)본권 주 34)의 본문 참조.
19)앞서 인용한 『품류족론』에서는 무명을 제외한 욕계의 ‘8결’ 내지 ‘10전’을 욕루라 하고, 상계의 ‘결’ 내지 ‘전’을 유루라고 하였는데, 이 모두에 포섭되는 것만 ‘누’라고 한다면, 10전은 결ㆍ박ㆍ수면 등에 포섭되지 않아 욕루와 유루의 수(數)는 앞서 언급한 것보다 적을 것이며, 그 중 한 가지만 갖춘 것도 ‘누’라고 한다면 뇌(惱)ㆍ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 등의 번뇌구(수번뇌) 등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 수는 훨씬 많아진다. 본 논설은 이 같은 난문(難問)에 대한 해명이다.
20)후설하는 ‘수면 등의 명의(名義)’를 참조할 것.
21)상동.
22)즉 성자는 유신견 등의 염오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견루(見漏)를 설정할 경우 그것은 다만 이생 범부에게만 적용되는 불완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염오견은 이생범부는 생사에 머물게 할지라도 성자는 머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누’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뜻.
23)어미 코끼리(즉 ‘견’)는 홀로 있으면 날뛰기 때문에 조련하기가 어려우며, 새끼 코끼리(다른 번뇌)들과 함께 묶어 둘 때 비로소 한곳에 머물러 조련할 수 있게 된다.
24)즉 마흔한 가지 욕루 중에서 견고소단의 5견과 견집ㆍ견멸소단의 사견과 견취, 그리고 견도소단의 계금취ㆍ사견ㆍ견취 등 도합 열두 가지의 ‘견’을 따로 떼어 내어 견폭류로 삼았기 때문에 욕폭류에는 스물아홉 가지가 있는 것이다.
25)앞서 색ㆍ무색계에도 비록 혼침과 도거가 존재할지라도, 전(纏)은 계(界)에 근거하여 분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를 분별할 경우, 서른두 가지이다. 참고로 『순정리론』(제53권)에는 이 문구가 결여되어 있다.
26)4취와 4액은 그 본질이 동일하지만 설정하는 방법이 약간 다르다. 즉 욕취는 욕액의 스물여덟 가지에 욕계 5부(部)의 무명을 합한 서른네 가지, 아어취는 유액의 스물여덟 가지에 색ㆍ무색계 각각의 5부 무명을 합한 서른여덟 가지, 그리고 견액을 견취와 계금취로 나눈 것이 바로 4취이다.
27)『순정리론』(제53권)에는 이 문구가 결여되어 있다.(주25) 참조)
28)이는 계금취를 별도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밝힌 것으로, 계금취는 수론(數論, 상캬) 학파 등에서 주장하는 프라크리트와 푸루샤의 식별지는 참된 해탈도가 아님에도 해탈도라고 간주하는 것이며, 물이나 불에 뛰어드는 것이 생천의 도가 아님에도 생천의 도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본론 제25권 ‘5견’ 참조.)
29)수면의 원어 anu-śaya의 anu를 미세[微, aṇu]의 뜻으로 이해하여 이같이 해석한 것이다.
30)본론 제26권 ‘상응수증과 소연수증’에서 논설하였다.
31)“‘수축’이라는 말은 이를테면 [수면의] 득(得)을 일으켜 항상 유정을 쫓아다니면서 과환(過患)이 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제29권, 고려장27, p.605하; 대정장29, p.108상; 권오민 역, p.941)
32)“가행을 지어 그것(수면)을 생겨나지 않게 하더라도, 혹은 애써 노력하여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지라도 자꾸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수박(隨縛)’이라고 한다.”(『구사론』 제20권, 앞의 책)
33)‘분(忿)’은 수번뇌인 10전의 하나.(후술)
34)‘누’의 원어 ā-srava는 ā-sru(유출ㆍ유동하다)라는 동사의 파생어이지만, 여기서는 이와 유사한 √ās(앉다)의 사역어 āsayati(머물게 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한 ‘유전시키는 것’이라는 말은 ā-sru의 사역어 āsravayati(=āsrāvayati)에 근거한 해석이다.
35)이러한 온갖 번뇌는 생에 대해 계박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혹은 온갖 유정으로 하여금 괴로움과 화합하게 하기 때문에 ‘결’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애결은 3계의 탐(貪)을 말하며, 에결은 욕계의 진(瞋), 만결은 3계의 만(慢), 무명결은 3계의 무명, 견결은 3계의 유신ㆍ변집ㆍ사견, 취결은 3계의 견취ㆍ계금취, 의결은 3계의 의(疑), 질결과 간결은 10전(纏) 중 욕계의 질ㆍ간을 말한다.(후술)
36)본론 제25권 ‘7만과 9만’을 참조할 것.
37)다시 말해 무명 역시 온갖 무루법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에는 더 이상 어떠한 계(界)에도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소의에 근거하여 ‘3계의 무지’라고 설하였다는 뜻.
38)즉 5견 중 3견을 견결(見結)로, 2취를 취결(取結)로 따로 설정한 것은 양자의 수가 같으며,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로서 각기 동등하기 때문이다. 즉 견결의 경우, 유신견ㆍ변집견은 오로지 3계의 견고소단이며, 사견은 3계의 견4제소단이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가 있으며, 취결의 경우 계금취는 오로지 3계의 견고ㆍ견도소단이며, 견취는 3계의 견4제소단이기 때문에 역시 열여덟 가지가 있다. 또한 견취와 계금취는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을 뛰어난 것이라 집착하고 청정도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전자는 능취로서 동등하고 후자는 소취로서 동등하다. 그래서 각각을 취결과 견결로 독립시켜 9결의 하나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후술)
39)즉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과 견취ㆍ계금취가 각기 열여덟 가지로서 동등하기 때문에 각각을 견결(見結)과 취결(取結)로 설정한 것이라면, 유신견ㆍ변집견ㆍ견취와 계금취ㆍ사견으로 조합(組合)하는 경우에도 각기 열여덟 가지 법으로 동등하기 때문에 이 역시 각각을 견결과 취결로 설정해야 할 것이라는 힐난.
40)세 가지 견결(見結)과 두 가지 취결(取結)은 각기 열여덟 가지 법이 하나의 ‘결’로 설정된 것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은 ‘견’이라는 말로서 동등하며, 견취와 계금취는 ‘취’라는 말로서 동등하다는 뜻.
41)전(纏)에는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 혹은 惡作)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의 8전과 여기에 분(忿)ㆍ부(覆)을 더한 10전이 있다.(후술)
42)10전의 경우, 8전에 더해진 분(忿)ㆍ부(覆)도 오로지 불선이고 자력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앞에서와 같은 이유는 인정될 수 없다.
43)『순정리론』(제54권)에서는, “결(結)을 갖든 갖지 않든 ‘질’과 ‘간’이 인천(人天)을 뇌란시킨다”는 경설의 이유로서 ‘그것이 욕계 인취와 천취 중에 자주 현행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44)‘질’은 비천함의 원인이 되고 ‘간’은 가난함의 원인이 된다.
45)천중(天衆)은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아소낙 즉 아수라는 여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천중은 맛있는 것에 인색[慳]하고 여색에 대해 질투[嫉]하며, 아수라는 여색에 인색하고 맛있는 것에 대해 질투한다.
47)여기서 ‘하분의 법’(『구사론』에서는 ‘下分界’)이란 욕계의 법을 말한다. 이에 반해 상 2계의 법을 상분(上分)의 법이라 하며, 이러한 상분의 법에 수순하는 번뇌를 순상분결(順上分結)이라 한다.(次項 참조)
48)다시 말해 “욕탐을 떠났을지라도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5견과 疑)가 하분의 유정을 초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유신ㆍ계금취ㆍ의의 세 가지만을 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49)이러한 여섯 가지 근본번뇌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은 오로지 견고소단이고, 계금취는 견고ㆍ견도소단이며, ‘의’와 견취ㆍ사견은 견4제소단이기 때문에, 오로지 유신ㆍ계금ㆍ의의 3결을 설하게 되면 앞의 세 갈래[門]의 모든 번뇌를 포섭하게 된다는 뜻. 다시 말해 3결만 끊게 되면 앞의 세 갈래의 모든 번뇌를 끊게 된다.
50)즉 변집견은 유신견에, 견취는 계금취에, 사견은 ‘의’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생기의 근본이 되는 능생의 3결만 설하면 소생의 세 가지도 역시 설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
51)즉 예류과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견혹(見惑)인 5견과 의(疑)의 여섯 가지 근본번뇌를 끊지 않으면 안 되는데, 예컨대 『잡아함경』 제29권 제797경(대정장2, p.205하)에서 “유신ㆍ계금취ㆍ의의 3결을 끊음으로써 예류과가 될 수 있다”고 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뜻.
52)주49) 참조.
53)5온을 자아라고 주장[執我]하는 유신견으로 말미암아 열반을 자아의 단멸로 여겨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유신견에 의해 자아를 공덕으로, 자아의 단멸(즉 열반)을 과실로 여긴다는 뜻.
54)『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대정장1, p.51중).
55)5순상분결은 오로지 수소단의 번뇌로서 유정을 색ㆍ무색계에 계박시켜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색탐ㆍ무색탐ㆍ도거ㆍ만ㆍ무명결을 말한다. 도거ㆍ만ㆍ무명도 상 2계의 결이므로 사실상 순상분결은 여덟 가지이지만, 탐만을 계(界)에 따라 둘로 나눈 것은 그것의 과실이 특히 크기 때문이다.
56)『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 p.715하; 한글대장경117, p.132).
57)즉 9결 중에는 도거가 결여되어 있지만, 5상분결 중의 하나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욕계계의 도거는 ‘결’이 아니지만, 색ㆍ무색계의 도거는 ‘결’이 된다는 뜻.
58)이상은 ‘9결에는 도거가 포함되지 않는데, 어떻게 순상분결에는 그것이 포함되는 것인가?’에 대한 해명이다. 즉 욕계 이생의 도거는 생을 계박시키는 공능이 없기 때문에 9결 중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삼매의 상태인 색ㆍ무색계에서의 도거는 삼매를 어지럽혀 생을 계박시키기 때문에 순상분결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59)도거는 상 2계의 삼매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순상분결에 포함시켰지만, 혼침은 등지 즉 삼매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60)즉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 탐ㆍ진ㆍ치의 3박은 순서대로 자상속의 낙ㆍ고ㆍ사수에 따라 수증하기 때문에 ‘박’에 세 가지를 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 같은 유여사의 설은 『구사론』(제21권, 고려장27, p.607중; 대정장29, p.109중; 권오민 역, p.951)상에서 정설로 언급되고 있다.
61)이는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 등 다섯 가지 번뇌의 이명(異名) 중 세 번째 수면에 관한 본송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본론 제25권에서 6수면ㆍ7수면ㆍ10수면ㆍ98수면으로 분류하여 상세히 설명하였지만, 논의의 체재 상 다시 언급한 것이다.
62)『구사론』(고려장27, p.607중; 대정장29, p.109중; 권오민 역, p.952)에서는 본론과는 반대로 먼저 “이러한 온갖 번뇌(즉 수면)도 역시 수번뇌라고 이름하니,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 따라 뇌란(惱亂)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후 계속하여 “또한 이것과는 다른 온갖 번뇌로서 염오한 심소의 행온에 포섭되는 것이 있으니,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수번뇌(隨煩惱)라고 이름한다. 즉 이것은 근본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번뇌’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고 논설하고 있다. 차주(次註) 참조.
63)즉 앞에서 밝힌 근본번뇌인 6수면 내지 98수면도 역시 수번뇌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뜻. 그러나 이 경우는 마음에 따라 뇌란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번뇌’이며, 그 밖의 다른 번뇌는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수번뇌’이다.
64)본절(‘번뇌의 그 밖의 명칭’) ‘총론’ 참조.
65)이 세 가지는 『법온족론』 제9권 「잡사품」(대정장26, p.494하; 한글대장경115, p.597)에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진(瞋)ㆍ치(癡)ㆍ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비만(卑慢)ㆍ사만(慢邪)ㆍ교(憍)ㆍ방일(放逸)ㆍ오(傲)ㆍ분발(憤發)ㆍ교망(矯妄)ㆍ궤사(詭詐)ㆍ현상(現相)ㆍ격마(激磨)ㆍ이리구리(以利求利)ㆍ악욕(惡欲)ㆍ대욕(大欲)ㆍ현욕(顯欲)ㆍ불희족(不喜足)ㆍ불공경ㆍ기악언(起惡言)ㆍ낙악우(樂惡友)ㆍ불인(不忍)ㆍ탐기(耽嗜)ㆍ변탐기(遍耽嗜)ㆍ염탐(染貪)ㆍ비법탐(非法貪)ㆍ착탐(著貪)ㆍ악탐(惡貪)ㆍ유신견ㆍ유견(有見)ㆍ무유견(無有見)ㆍ탐욕ㆍ진에ㆍ혼침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악작(惡作)ㆍ의(疑)ㆍ몽궤(瞢憒)ㆍ불락(不樂)ㆍ빈신(頻申)ㆍ흠거(欠㰦)ㆍ식부조성(食不調性)ㆍ심매열성(心昧劣性)ㆍ종종상(種種想)ㆍ부작의(不作意)ㆍ추중(麤重)ㆍ저돌(觝突)ㆍ도철(饕餮, 음식을 탐하는 것)ㆍ불화연성(不和輭性)ㆍ불조유성(不調柔性)ㆍ불순동류(不順同類)ㆍ욕심(欲尋)ㆍ에심(恚尋)ㆍ해심(害尋)ㆍ친리심(親里尋)ㆍ국토심(國土尋)ㆍ생사심(生死尋)ㆍ능멸심(凌蔑尋)ㆍ가족심(假族尋)ㆍ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요(擾)ㆍ뇌(惱)가 언급되고 있다. 참고로 『구사론』(고려장27, p.67하)에서는 “수번뇌의 상을 널리 열거할 경우, 「잡사품(雜事品)」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하여 『법온족론』의 이 대목을 바로 인용하고 있다.
66)『잡아함경』 제35권 제977경(대정장2, p.253상), ‘시바여, 다섯 가지 인(因)과 다섯 가지 연(緣)으로 인해 심법에 우고(憂苦)가 생기니, 이를테면 욕탐전을 인으로 하고 욕탐전을 연으로 하여 심법에 우고가 생기며…….’
69)무참과 무괴는 본론 제6권 ‘대불선지법’에서, ‘질’과 ‘간’은 ‘소번뇌지법’에서, ‘회’는 후회의 악작으로 ‘욕계 제 심소의 구생관계’(본론 제6권 주18 참조)에서, 도거와 혼침은 ‘대번뇌지법’에서 상술하였다. 다만 ‘질’과 ‘간’의 경우에는 그곳에서도 역시 수번뇌를 논설하면서 해석할 것이라고 하여 뒤로 미루고 있다. “‘질(嫉)’이란 타인의 온갖 흥하고 성한 일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하며, ‘간(慳)’이란 재시(財施)ㆍ법시(法施)의 교시(巧施, 타인에게 보시하여 이익을 주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인색하여 집착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 p.607하; 대정장29, p.109중; 권오민 역, p.954)
70)이를테면 잠(수면)은 몽롱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쾌한 것도 있다.
71)참고로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세 가지 특상 중의 ‘혼침과 상응하며’를 제외한 두 가지 특상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반드시 혼침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前註 참조)
72)6수면 중의 진(瞋)이 유정을 미워하여 해치려 하는 것이고, 6번뇌구 중의 해(害)가 핍박하고 응징하려는 것이라면, ‘분’은 이 같은 두 가지 이외의 분발심(憤發心) 즉 격분하는 것을 말한다. “진(瞋)과 해(害)를 제외한 것으로서, 유정과 비유정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분발(憤發)하게 하는 것을 설하여 ‘분(忿)’이라고 이름한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 p.607하; 대정장29, p.109중; 권오민 역, p.955)
73)주62) 참조.
74)즉 학자나 관리와 같이 지식이 있는 자는 명리의 탐욕 때문에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하며, 무지한 자는 참회할 줄 몰라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것이다.
75)“‘뇌’란 이를테면 온갖 나쁜 일[罪事]에 대해 견고히 집착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참다운 충고[諫]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다.”(『구사론』 제21권, 고려장27, p.608상; 대정장29, p.109하; 권오민 역, p.956)
76)“‘해’란 이를테면 다른 유정에 대해 능히 핍박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에 의해 능히 때리고 꾸짖는 등의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구사론』, 앞의 책)
77)“‘한’이란 이를테면 ‘분(忿)’의 소연에 대해 자주자주 생각하여 원한을 품어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앞의 책) 참고로 한(恨)과 분(忿)의 차이는 이러하다. “예컨대 벚나무 껍질에 붙은 불처럼 그 상은 맹리(猛利)하지만 지속하는 세력이 약한 것을 ‘분’이라 하며, 겨울 방의 열기처럼 그 상은 경미하지만 지속하는 세력이 강한 것을 ‘한’이라고 한다.”(『순정리론』 제54권)
78)“‘첨’이란 이를테면 마음의 아곡(阿曲, 아첨과 왜곡)을 말하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스스로를 참답게 드러내지 않게 되며, 혹은 [남의 허물을] 바로 잡아 다스리지 않게 되며, 혹은 방편을 설(設)하여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게 되는 것이다.”(『구사론』, 앞의 책)
79)“‘광’이란 이를테면 다른 이를 미혹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구사론』, 앞의 책)
80)“즉 험한 길은 유정이 다른 처소로 나아가려고 할 때 능히 손해가 되고 장애가 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행자가 열반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마음이 ‘광(誑)’과 함께 하는 경우 능히 손해가 되고 장애가 되며, 구불구불한 지팡이는 비록 그 뿌리를 잘랐을지라도 빽빽한 숲에서 끌어내기가 어렵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결여되고 아첨의 왜곡[諂曲]을 가진 자는 비록 방편으로써 욕계의 뿌리를 잘랐을지라도 다시금 인접(引接)하여 생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한 다른 이를 홀려 미혹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 ‘광’이라고 하였고,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것을 일컬어 ‘첨’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광’은 ‘탐’의 등류이고, ‘첨’은 온갖 ‘견’의 등류이다.”(『순정리론』 제54권)
81)본론 제6권 ‘만(慢)과 교(憍)’에서 분별하였다.
82)‘만’이란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이의 덕을 차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믿고 거들먹거리며 다른 이를 능멸하는 것을 ‘만’이라 한다.(前註 참조)
83)여기서 타력에 의해 일어나는 무명이란 ‘질’ 등에 의해 인기되는 상응무명을 말한다. 다시 말해 ‘질’ 등에 의해 인기된 무명은 타력기(他力起)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명을 인기한 ‘질’ 등은 비록 무명과 상응할지라도 ‘자재기’인 것이다.
84)『정법념경(正法念經)』 제33권(대정장17, p.193)에서 설하기를, “첨(諂)과 곡(曲, 즉 誑)은 욕계와 범천에 두루 미친다”고 하였으며, 그 이상에는 상하 존비(尊卑)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첨’과 ‘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초정려에 ‘첨(아첨)’과 ‘광(속임수)’이 존재한다고 한 사연은 『장아함경』 제16권 『견고경(堅固經)』(대정장1, p.102상); 『대비바사론』 제129권(대정장27, p.670하); 『구사론』 제4권(고려장27, p.481중; 대정장29, p.20하; 권오민 역, p.179~180)에 실려 있다. 즉 대범왕이 자신의 범중(梵衆)에 머물고 있다가 문득 마승(馬勝)비구로부터 ‘이러한 4대종은 응당 어떠한 상태에서 멸진하여 남음이 없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범왕은 남김없이 소멸한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로 교란(憍亂)되어 “나는 이러한 범중 가운데 바로 대범(大梵)이며, 바로 자재(自在, Īśvara, 세간의 지배자)이며, 바로 작자(作者, kartṛ)이며, 바로 화자(化者, nirmātṛ)이며, 바로 양자(養者, poṣa, 세간의 양육자)이며, 바로 일체의 아버지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나서 범왕은 마승비구를 밖으로 불러내어 부끄럽다고 아첨하여 말하고서는 돌아가 부처님께 물어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첨’과 ‘광’이 제2정려 이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6권 ‘색ㆍ무색계 제심소의 구생관계’에서도 언급하였다.
85)이러한 번뇌와 수번뇌는 모두 외계와의 교섭 없이 내적인 의식작용으로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외연(外緣)에 근거하는 5식신에 의지하여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86)이러한 온갖 번뇌와 수번뇌는 제6의식의 작용일 뿐만 아니라 전5식과도 연관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6식신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87)‘앞서 분별한 낙(樂) 등 5수근(受根)’이라 함은 고(苦)ㆍ낙(樂)ㆍ희(喜)ㆍ우(憂)ㆍ사근(捨根)으로, 본론 제5권 ‘제근 각각에 대한 해명’에서 논설하였다.
88)탐수면은 기쁨[歡]을 특징으로 할 뿐더러 심신 모두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신수(身受)인 낙수와도 통하며, 심수(心受)인 희수와도 통하는 것이다.
89)『순정리론』(제55권)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90)먼저 죄업을 짓고 난 후 사견을 일으켜 인과의 존재를 부정할 때에는 죄업을 지었어도 고과(苦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때의 사견은 기쁨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먼저 복업을 짓고 난 후 사견을 일으켜 인과의 존재를 부정할 때에는 애써 노력하여도 복과(福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때의 사견은 근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91)앞에서는 욕계 수면 각각의 기쁨[歡行]과 근심[慼行]의 차이에 따른 네 가지 수(受)와의 상응관계에 대해 밝혔다면, 본 단에서는 욕계의 모든 수면이 공통적으로 상응하는 사수(捨受)와의 관계에 대해 논설한다.
92)원문은 ‘如處中人, 俱無違故’. 다시 말해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처중(處中)의 업을 짓는 사람도 율의나 불율의를 짓는 것처럼, 사근 역시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함께 한다고 하여도 어긋남이 없다는 뜻.
93)이는 이를테면 색계 초정려지의 경우로서, 거기에는 단식성(段食性)의 향ㆍ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18계의] 3계 繫屬관계 분별’을 참조할 것) 이ㆍ설식을 제외한 안ㆍ이ㆍ신ㆍ의식만이 존재한다. 이 경우 안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안식과 상응하는 낙ㆍ사수와 상응하며, 내지는 의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의식과 상응하는 희ㆍ사수와 상응한다.
94)온갖 지(地)의 식(識)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18계의] 3계의 계속관계 분별’에서, 수(受)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본론 제5권 ‘[22근의] 3계계(界繫)분별’에서 논설하였다.
95)원문에는 ‘폐’가 아니라 ‘치(癡)’로 되어 있지만, 『순정리론』(제55권)과 다른 판본에 따라 ‘폐’로 교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