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루수(拘樓瘦)를 유행하실 때에 도읍인 검마슬담(劍磨瑟曇)에 머무셨다.
017_1252_b_08L一時,佛遊拘樓瘦,在劍磨瑟曇拘樓都邑。
그때 존자 아난은 한가히 홀로 지내면서 연좌(宴座)하여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연기(緣起)는 매우 기이하고 지극히 깊으며 이해하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관찰하여 본 바로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 이에 존자 아난은 저녁때 연좌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 한가히 홀로 있으면서 연좌하여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연기는 매우 기이하고 지극히 깊으며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관찰하여 본 바로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
017_1252_c_03L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이 연기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무슨 까닭인가?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이해하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아난아, 이 연기를 참답게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 중생들은 베틀이 서로 얽매는 것 같고 넝쿨풀이 어지러운 것 같으며 바쁘고 부산하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며 왔다 갔다 하면서 생사(生死)를 뛰어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난아, 그러므로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이해하기 또한 매우 어려운 줄 알아야 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 연(緣)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늙고 죽음에는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또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는 어떤 연(緣)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생(生)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생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생에도 역시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유(有)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유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유에도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유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수(受:取)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수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수에도 역시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수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애(愛)에 인연한다’하고 이렇게 대답하라. 아난아, 이것을 ‘애(愛)를 인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며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인연하여 노(老)ㆍ사(死)가 있으며 노ㆍ사를 인연하여 걱정[愁]과 슬픔[慼]이 있고 울음[啼哭]ㆍ걱정[憂]ㆍ괴로움[苦]ㆍ번민[懊惱]은 모두 노ㆍ사를 인연하여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苦陰)만 생긴다.
아난아, 생을 인연하여 노ㆍ사가 있으면 이것을 ‘생을 인연하여 노ㆍ사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생을 인연하여 노ㆍ사가 있다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생이 없다면 고기[魚]면 고기 종자[魚種], 새[鳥]면 새 종자[鳥種], 모기[蚊]면 모기 종자[蚊種], 용(龍)이면 용 종자[龍種], 신(神)이면 신 종자[神種], 귀신[鬼]이면 귀신 종자[鬼種], 하늘[天]이면 하늘 종자[天種], 사람[人]이면 사람 종자[人種] 등 아난아, 저마다의 중생들이 저마다의 처소[處]를 따라 생이 없을 것이다. 제각기 생이 없다면, 가령 생을 떠나더라도 노ㆍ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017_1253_a_03L아난아, 유(有)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면 이것을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유가 없으면 고기면 고기 종자, 새면 새 종자, 모기면 모기 종자, 용이면 용 종자, 신이면 신 종자, 귀신이면 귀신 종자, 하늘이면 하늘 종자, 사람이면 사람 종자 등 아난아, 저마다의 중생들이 저마다의 처소[處]를 따라 유가 없을 것이다. 제각기 유가 없다면 가령 유를 떠나더라도 마땅히 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난아, 수(受)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면 이것을 ‘수를 인연하여 유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른바 수를 인연하여 유가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수가 없어 제각기 수가 없다면, 가령 수를 떠나더라도 마땅히 다시 유가 있거나 유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아난아, 애를 인연하여 수(受)가 있으면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수가 있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른바 애(愛)를 인연하여 수가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애가 없어 제각기 애가 없다면, 가령 애를 떠나더라도 마땅히 다시 수가 있거나 수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017_1253_b_02L아난아, 이것을 애를 인연하여 구함[求]이 있고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利]이 있으며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分]이 있고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染欲]이 있으며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著]이 있고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慳]이 있으며 아낌을 인연하여 집[家]이 있고 집을 인연하여 지킴[守]이 있다고 말한다. 아난아,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몽둥이ㆍ싸움ㆍ아첨ㆍ속임ㆍ거짓말ㆍ이간하는 말이 있으며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苦陰)만 생긴다. 아난아, 만일 지킴이 없어 제각기 지킴이 없다면, 가령 지킴을 떠나더라도 마땅히 칼과 몽둥이ㆍ싸움ㆍ아첨ㆍ속임ㆍ거짓말ㆍ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칼과 몽둥이ㆍ싸움ㆍ아첨ㆍ속임ㆍ거짓말ㆍ이간하는 말과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는 원인[因], 성취[習], 근본[本], 인연[緣]은 곧 이 지킴[守]이다. 무슨 까닭인가?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몽둥이ㆍ싸움ㆍ아첨ㆍ속임ㆍ거짓말ㆍ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고음만 생긴다.
아난아, 욕애(欲愛)와 유애(有愛) 이 두 법은 각(覺)을 인(因)하고 각을 연(緣)하여 오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각에 연(緣)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각에도 연이 있다’라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각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갱락(更樂)을 인연한다’라고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갱락을 인연하여 각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눈[眼]의 갱락이 없어 제각기 눈의 갱락이 없다면, 가령 눈의 갱락을 떠나더라도 눈의 갱락을 인연하여 생기는 낙각(樂覺)ㆍ고각(苦覺)ㆍ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도 연(緣)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갱락에도 연이 있다’라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갱락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명색(名色)을 인연한다’라고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명색을 인연하여 갱락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행하는 바와 연하는 바에 명신(名身)이 있다. 이 행을 떠나고 이 연을 떠나더라도 상대가 있는 갱락[有對更樂]이 있겠는가?”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명색에도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명색에도 연이 있다’라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명색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식(識)을 인연한다’라고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른바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식이 어머니 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 몸을 이루는 명색이 있겠는가?”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식에도 연이 있는가?’라고 묻거든 마땅히 ‘식에도 역시 연이 있다’라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마땅히 ‘명색을 인연한다’라고 대답하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식이 명색을 얻지 못하고 만일 식이 명색에 서지도[立]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식은 과연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괴로움이 있겠는가?”
017_1254_c_02L“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식의 원인, 식의 성취, 식의 근본, 식의 인연은 곧 이 명색이다.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여 곧 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것을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또한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을 보태고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하고 전하고 전하여 설명하며 주장할 만한 것이 있게 되니, 그것은 곧 ‘식과 명색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神)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神)이라 보고 어떤 사람은 각을 신이라 보지 않으면서 신(神)은 능히 깨닫고 또 신법(神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본다. 또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이라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3각(覺) 곧 낙각(樂覺)ㆍ고각(苦覺)ㆍ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이 있는데, 너는 이 3각에서 어느 각을 신이라고 보는가?’하고 물어야 한다. 아난아, 마땅히 다시 그에게 말해야 한다. 만일 낙각을 깨닫는다면 그때 그는 2각 곧 고각ㆍ불고불락각이 멸하고 오직 낙각만을 깨달을 것이다. 낙각은 무상(無常)의 법이며 괴로움[苦]의 법이며 멸하는[滅] 법이니, 만일 낙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만일 다시 1각 곧 고각이 있으면, 그는 그때에는 2각 곧 낙각ㆍ불고불락각이 멸하고 다만 고각만을 깨닫는다. 고각은 무상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하는 법이니, 만일 고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017_1255_a_03L 아난아, 만일 다시 1각 곧 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이 있으면, 그때 그는 2각 곧 낙각ㆍ고각이 멸하고 다만 불고불락각만을 깨닫는다. 불고불락각은 무상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하는 법이다. 만일 불고불락각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그가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고서도 마땅히 다시 각을 신이라고 보겠는가?”
“아난아, 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기만 한다면 다시는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지 못할 것이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각을 신이라고 보지 않으면서, 신(神)은 능히 깨닫고 신법(神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하기를 ‘네게 만일 각이 없다면 깨달을 수가 없어 응당 이것은 내 소유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아난아, 그가 다시 이렇게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도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난아,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보거든 마땅히 그에게 말하기를 ‘네게 만일 각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신이 각을 떠나면 응당 신은 청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아난아, 그가 다시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017_1255_b_02L“아난아, 그러므로 그는 응당 이와 같이 ‘각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각(覺)을 신(神)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보지 않은 뒤에는 곧 이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는 받아들이지 않은 뒤에는 곧 피로해하지 않으며 피로해하지 않은 뒤에는 곧 열반에 든다. 그래서 ‘내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아난아, 이것이 거듭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하고 전하고 전하여 설명하며 주장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곧 받아들임[所受]이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이렇게 바르게 해탈하면 그는 다시 여래는 마침이 있다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없다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있으면서 마침이 없다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있는 것도 마침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는 일이 없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 것이라 고 하는가?”
017_1255_c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소색(少色)을 신(神)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지만 무량색(無量色)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소색(少色)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지만 소무색(少無色)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으며 또한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지만 무량무색(無量無色)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소색(少色)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지만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무량색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무량색(無量色)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017_1256_a_02L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는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지만 소무색(少無色)을 신(神)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지금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소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고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으며 또한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도 않지만, 무량무색(無量無色)을 신(神)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면 그는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무량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고 하며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한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고 한다.
017_1256_b_03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소무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량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소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소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색을 신이라 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는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무량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색을 신이라 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는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소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소무색을 신이라 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는다.
017_1256_c_02L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무량무색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주장하고 또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무량무색을 신이라 하지 않고 견해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지도 않는다. 아난아,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1257_a_03L다시 아난아, 7식주(識住)와 2처(處)가 있다. 어떤 것을 7식주라고 하는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有色衆生]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인간과 욕계천(欲界天)이다. 이것을 제1식주(識住)라고 한다. 다시 또 아난아,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초선천(初禪天)에 태어나 요절하지 않고 사는 범천(梵天)을 말한다. 이것을 제2식주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황욱천(晃昱天)이다. 이것을 제3식주라고 한다. 또 아난아,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변정천(遍淨天)이다. 이것을 제4식주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색(色)이라는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여 약간의 생각도 없어, 무량공처(無量空處)인 이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이다. 이것을 제5식주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무량공처(無量空處)를 벗어나 무량식처(無量識處)인 이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이다. 이것을 제6식주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무량식처를 벗어나 무소유처(無所有處)인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다. 이것을 제7식주라고 한다.
아난아, 어떤 것을 2처(處)라고 하는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생각[想]도 없고 감각[覺]도 없으니, 무상천(無想天)이다. 이것을 제1처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색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나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인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이것을 제2처라고 한다.
아난아, 제1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인간과 욕계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識住)를 알고 식주의 성취[習]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난아, 제2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초선천(初禪天)에 태어나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사는 범천(梵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난아, 제3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황욱천(晃昱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017_1257_b_03L“아난아, 제4식주라는 것은 어떤 색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변정천(遍淨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난아, 제5식주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색(色)이란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여 약간의 생각도 없으면, 무량공처(無量空處)인데 이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난아, 제6식주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무량공처(無量空處)를 벗어나면 무량식처(無量識處)인데, 이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난아, 제7식주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무량식처(無量識處)를 벗어나면 무소유처(無所有處)인데,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식주를 알고 식주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식주를 좋아하고 그 식주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017_1257_c_03L“아난아, 제1처라는 것은 색이 있는 중생으로서 생각[想]도 없고 감각[覺]도 없는 것이니, 곧 무상천(無想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처(處)를 알고 그 처의 성취를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처를 좋아하고 그 처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난아, 제2처라는 것은 색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벗어나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인데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곳을 알고 그곳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처를 좋아하고 그 처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017_1258_a_02L아난아, 8해탈(解脫)이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색(色)을 색(色)으로 관찰하니, 이것을 제1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안으로 색상(色想)이 없이 밖으로 색을 관찰하니, 이것을 제2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정해탈(淨解脫)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3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색상(色想)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는 무량공처, 이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4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무량공처(無量空處)를 벗어난 무량식처(無量識處), 이 무량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5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무량식처를 벗어난 무소유처(無所有處), 이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6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 이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7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다음에는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벗어나 상(想)과 지(知)가 멸한 해탈(解脫)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고 지혜로 모든 누진지(漏盡知)를 관하여 아는데 이것을 제8해탈이라고 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저 7식주와 2처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알고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증득하고 또 이 8해탈을 순역(順逆)으로 해서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며 또한 지혜로 관찰하여 모든 번뇌를 다한다면 그를 비구 아라하라 하고 구해탈(俱解脫)이라고 부른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루수(拘樓瘦)를 유행하실 때에 도읍인 검마슬담(檢磨瑟曇)에 머무셨다.
017_1258_a_12L一時,佛遊拘樓瘦,在劍磨瑟曇拘樓都邑。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을 깨끗하게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제도하며 고뇌를 없애고 슬픔을 끊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도(道)가 있으니, 곧 4념처(念處)이다. 과거의 모든 여래(如來)ㆍ무소착(無所着)ㆍ등정각(等正覺)께서는 모두 5개(蓋)1)와 마음의 번뇌[心穢]와 지혜의 미약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4념처에 바르게 머무르고, 7각지(覺支)를 닦아 위없는 정진의 깨달음(無上正盡之覺)을 얻으셨다. 또 미래의 모든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께서도 다 5개와 마음의 번뇌[心穢]와 지혜의 미약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4념처에 바르게 머무르고, 7각지를 닦아 위없는 정진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의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으로서 나도 또한 5개와 마음의 번뇌[心穢]와 지혜의 미약함을 끊고 마음을 세워 4념처에 바르게 머무르고 7각지를 닦아 위없는 정진의 깨달음을 깨닫게 되었다.
017_1258_b_02L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身]을 몸 그대로 관하는 염처(念處)이고 이와 같이 각(覺)을 각(覺) 그대로 관하며 마음[心]을 마음 그대로 관하고 법(法)을 법 그대로 관하는 염처이다. 어떤 것을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염처라고 하는가? 비구는 다니면[行] 다니는 줄을 알고 머물면[住] 머무는 줄을 알며 앉으면[坐] 앉은 줄 알고 누우면[臥] 누운 줄 알며 자면 자는 줄 알고 깨면 깬 줄 알며 자다 깨면 자다 깨는 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內身]을 몸[身]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外身]을 몸 그대로 관하여서, 생각을 몸에 두어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明]이 있고 통달함[達]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들고 남[出入]을 바르게 알고 굽히고 펴거나 낮추고 우러르는 것을 분별하고 잘 관하여 몸가짐과 거동에 질서가 있고, 승가리(僧伽梨)와 옷과 발우를 잘 지니고 다니고 머물거나 앉고 눕거나 자고 깨거나 말하고 침묵하는 것을 다 바르게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서, 생각을 몸에 두어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1258_c_03L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이 생기면 착한 법[善法]의 생각으로써 다스려 끊고 없애 그치게 하니, 마치 목수나 목수의 제자가 먹줄을 나무에 튀기고 나서 곧 날카로운 도끼로 쪼아 곧게 다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악하고 착하지 않은 생각이 생기면 착한 법의 생각으로써 다스려 끊고 없애 그치게 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서, 생각을 몸에 두어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잇몸 천장에 붙인 채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려서 다스려 끊고 없애 그치게 하니, 마치 두 역사(力士)가 나약한 한 사람을 붙잡고 곳곳으로 끌고 다니며 마음대로 두드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잇몸 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려서 다스려 끊고 없애 그치게 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고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들숨[入息]을 생각하되 곧 들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고 날숨[出息]을 생각하되 곧 날숨을 생각하는 줄을 알며 들숨이 길면 곧 들숨이 긴 줄을 알고 날숨이 길면 곧 날숨이 긴 줄을 알며 들숨이 짧으면 곧 들숨이 짧은 줄을 알고 날숨이 짧으면 곧 날숨이 짧은 줄을 알며 온몸으로 숨을 들이쉬는 것을 배우고 온몸으로 숨을 내쉬는 것을 배우며 몸의 행[身行]을 그치고 숨 들이쉬는 법을 배우고 입의 행[口行]을 그치고 숨 내쉬는 법을 배운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가 욕망을 여의고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으로 몸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게 하면, 욕망을 여의고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은 온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목욕하는 도구를 만드는 어떤 사람이 그릇에 가루비누[澡豆]를 담아 물과 섞어서 덩어리로 만든 것을 물에 가져다 담그면 그 물이 윤택해지는데 두루 충만하여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욕망을 여의고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으로 몸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게 하면, 욕망을 여의고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은 온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하다.
017_1259_a_02L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가 선정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으로 몸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게 하면, 선정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은 온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산의 샘물이 청정하여 흐리지 않고 충만하게 흘러 넘쳐 사방의 물이 흘러들어갈 길이 없으면, 곧 그 샘 밑바닥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물은 밖으로 흘러 넘쳐 산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되 두루 충만하여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선정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으로 몸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게 하면, 선정에서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은 온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가 기쁨[喜]이 없는 데서 생겨난 즐거움[樂]으로 몸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게 하면, 기쁨이 없는 데서 생겨난 즐거움은 온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푸른 연꽃이나 붉고 빨갛고 흰 연꽃이 물에서 나고 물에서 자라 물밑에 있으면, 그 뿌리와 줄기와 꽃과 잎은 모두 촉촉하고 윤택하며 두루 충만하게 되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기쁨이 없는 데서 생겨난 즐거움으로 몸을 적시고 윤택하게 하며 두루 충만하게 하면, 기쁨이 없는데서 생겨난 즐거움은 온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1259_b_03L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가 이 몸속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뜻을 터득하여 두루 충만하게 성취하여 노닐면, 청정한 마음은 온몸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마치 어떤 사람이 7주(肘)나 8주 되는 옷을 입으면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그 몸을 감싸지 못하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청정한 마음이 온몸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게 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광명상(光明想)을 생각하여 잘 받아 지니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하여 앞에서와 같이 뒤에서도 또한 그러하고 뒤에서와 같이 앞에서도 또한 그러하며, 낮과 같이 밤에도 그러하고 밤과 같이 낮에도 그러하며, 아래서와 같이 위에서도 그러하고 위에서와 같이 아래서도 그러하다. 이렇게 뒤바뀌지 않고 마음에 얽매임 없이 광명심을 닦으면 마음은 끝내 어둠에 덮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관찰하는 모습[觀相]을 잘 받아들이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하는데, 마치 어떤 사람이 앉아서 누운 사람을 관찰하고 누워서 앉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관찰하는 모습을 잘 받아들이고 생각한 바를 잘 기억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1259_c_02L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가 이 몸은 어디 있거나 좋거나 밉거나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온갖 더러운 것으로 충만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내 이 몸 가운데에는 머리털ㆍ털ㆍ손톱ㆍ이ㆍ추하고 곱고 엷은 살갗ㆍ가죽ㆍ살ㆍ힘줄ㆍ뼈ㆍ심장ㆍ콩팥ㆍ간ㆍ허파ㆍ큰창자ㆍ작은창자ㆍ지라ㆍ밥통ㆍ똥ㆍ골ㆍ뇌수[腦根]ㆍ눈곱ㆍ땀ㆍ눈물ㆍ가래침ㆍ고름ㆍ피ㆍ기름ㆍ골수ㆍ침ㆍ쓸개ㆍ오줌이 있다.’ 마치 그릇에 몇 가지 종자(種子)를 담은 것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은 다 분명히 본다. 곧 벼나 조의 종자나 갓ㆍ무ㆍ겨자의 종자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은 어디 있거나 좋고 밉거나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더러운 것이 충만해 있다고 관찰한다. ‘내 이 몸 가운데에는 머리털ㆍ털ㆍ손톱ㆍ이ㆍ추하고 곱고 엷은 살갗ㆍ가죽ㆍ살ㆍ힘줄ㆍ뼈ㆍ심장ㆍ콩팥ㆍ간ㆍ허파ㆍ큰창자ㆍ작은창자ㆍ지라ㆍ밥통ㆍ똥ㆍ골ㆍ뇌수ㆍ눈곱ㆍ땀ㆍ눈물ㆍ가래침ㆍ고름ㆍ피ㆍ기름ㆍ골수ㆍ침ㆍ쓸개ㆍ오줌이 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가 몸에 있는 모든 경계를 관찰하는 것이다. ‘내 몸에는 흙의 요소[地界]ㆍ물의 요소[水界]ㆍ불의 요소[火界]ㆍ바람의 요소[風界]ㆍ허공의 요소[空界]ㆍ의식의 요소[識界]가 있다.’ 마치 백정이 소를 잡아 껍질을 벗겨 땅에 펴고 그것을 여섯 동강으로 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있는 모든 경계를 관찰한다. ‘내 몸에는 흙의 요소ㆍ물의 요소ㆍ불의 요소ㆍ바람의 요소ㆍ허공의 요소ㆍ의식의 요소가 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가 저 송장이 하루ㆍ이틀 혹은 엿새나 이레가 되어 까마귀나 솔개[鵄]에게 쪼이고 승냥이나 이리에게 먹히며 불에 타고 땅에 묻혀 다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한 뒤에는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하니 끝내 벗어날 길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1260_a_03L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해골이 푸른빛으로 썩어 문드러지고 반쯤 남은 뼈 사슬이 땅에 뒹구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관찰한 뒤에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하니 끝내 벗어날 길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이 가죽과 살과 피가 분리되어 오직 힘줄만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관찰한 뒤에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하니 끝내 벗어날 길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뼈마디가 분리되어 여러 곳에 흩어져 발 뼈ㆍ장딴지 뼈ㆍ넓적다리뼈ㆍ허리뼈ㆍ등뼈ㆍ어깨뼈ㆍ목뼈ㆍ머리뼈들이 제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관찰한 뒤에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역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하니 끝내 벗어날 길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는 것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몸의 뼈가 마치 소라[螺]처럼 희고 집비둘기처럼 푸르며 피를 칠한 것처럼 붉고 썩어 문드러지고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관찰한 뒤에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이 몸도 역시 이와 같아서 이 법이 함께하니 끝내 벗어날 길이 없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몸 그대로 관하고 바깥 몸을 몸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몸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비구ㆍ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면 이것을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염처(念處)라고 한다.
017_1260_b_02L어떤 것을 각(覺)을 각(覺) 그대로 관하는 염처라고 하는가? 비구는 즐거운 감각을 깨달을 땐 곧 즐거운 감각을 깨닫는 줄 알고 괴로운 감각을 깨달을 땐 곧 괴로운 감각을 깨닫는 줄 알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깨달을 땐 곧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깨닫는 줄 안다. 즐거운 몸[樂身]ㆍ괴로운 몸[苦身]ㆍ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몸[不苦不樂身]과 즐거운 마음[樂心]ㆍ괴로운 마음[苦心]ㆍ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마음[不苦不樂心]과 좋아하는 음식[樂食]ㆍ괴로운 음식[苦食]ㆍ괴롭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음식[不苦不樂食]과 즐거운 무식[樂無食]ㆍ괴로운 무식[苦無食]ㆍ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무식[不苦不樂無食]과 즐거운 욕심ㆍ 괴로운 욕심ㆍ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욕심과 즐거운 무욕각[樂無欲覺]ㆍ괴로운 무욕각[苦無欲覺]도 또한 그러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무욕각을 깨달을 땐 곧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무욕각을 깨닫는 줄을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의 각[內覺]을 각 그대로 관하고 바깥 각[外覺]을 각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각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각을 각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비구ㆍ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각을 각 그대로 관하면 이것을 각을 각 그대로 관하는 염처라고 한다.
어떤 것을 마음[心]을 마음 그대로 관하는 염처라고 하는가? 비구는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음을 사실 그대로 알며 성냄[恚]이 있고 성냄이 없는 것과 어리석음[癡]이 있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과 더러움[穢]이 있고 더러움이 없는 것과 모임이 있고 흩어짐이 있는 것과 낮춤이 있고 높임이 있는 것과 작음이 있고 큼이 있는 것과 닦고[修] 닦지 않음과 정[定]하고 정하지 않은 것도 그러하며,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 해탈하지 않은 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해탈한 마음이 있으면 해탈한 마음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 마음[內心]을 마음 그대로 관하고 바깥 마음[外心]을 마음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마음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마음을 마음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어떤 비구ㆍ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마음 그대로 관하면 이것을 마음을 마음 그대로 관하는 염처라고 한다.
017_1260_c_02L어떤 것을 법(法)을 법 그대로 관하는 염처라고 하는가? 눈은 색을 연(緣)하여 안의 번뇌[內結]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안에 진실로 번뇌[結]가 없으면 안에 번뇌가 없음을 사실 그대로 알며 만약 아직 생기지 않은 안의 번뇌가 생기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안의 번뇌가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도 또한 그러하며 뜻은 법을 연하여 안의 번뇌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진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안에 진실로 번뇌가 없으면 안에 번뇌가 없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안의 번뇌가 생기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안의 번뇌가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의 법을 법 그대로 관하고 바깥의 법을 법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법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하니 곧 안의 6처(處)이다.
또 비구가 법을 법 그대로 관하는 것은 비구는 안에 진실로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안에 진실로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음을 사실 그대로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욕심이 생기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욕심이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성냄[瞋恚]ㆍ수면[睡眠]ㆍ들뜸[掉悔]도 역시 그러하며, 안에 진실로 의심이 있으면 의심이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안에 진실로 의심이 없으면 의심이 없음을 사실 그대로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의심이 생기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의심이 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의 법을 법 그대로 관하고 바깥 법을 법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법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고 하니, 곧 5개(蓋)이다.
017_1261_a_02L또 비구가 법을 법 그대로 관하는 것은 비구는 안에 진실로 염각지(念覺支)가 있으면 염각지가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안에 진실로 염각지가 없으면 염각지가 없음을 사실 그대로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염각지가 생기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염각지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또 쇠퇴하지도 않고 더욱 닦아 더하고 넓어지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와 같이 택법(擇法)ㆍ정진(精進)ㆍ기쁨[喜]ㆍ쉼[息]ㆍ정(定)도 그러하며 비구는 안에 진실로 사각지(捨覺支)가 있으면 사각지가 있음을 사실 그대로 알고 안에 진실로 사각지가 없으면 사각지가 없음을 사실 그대로 알며 만일 아직 생기지 않은 사각지가 생기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고 만일 이미 생긴 사각지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고 더욱 닦아 더하고 넓어지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이렇게 비구는 안의 법을 법 그대로 관하고 바깥 법을 법 그대로 관하여, 생각을 법에 두어서 앎이 있고 봄이 있으며 밝음이 있고 통달함이 있다. 이것을 비구가 법을 법 그대로 관하는 것이라 하니, 곧 7각지(覺支)이다. 만일 어떤 비구ㆍ비구니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법을 법 그대로 관하면 이것을 법을 법 그대로 관하는 염처라고 한다.
017_1261_b_03L만일 어떤 비구ㆍ비구니가 7년 동안 마음을 세워 바르게 4념처(念處)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2과(果)를 얻을 것이니, 현법(現法)에서 구경(究竟)의 지혜를 얻거나 혹은 남음[餘]이 있으면 아나함(阿那含)을 얻을 것이다. 7년ㆍ6년ㆍ5년ㆍ4년ㆍ3년ㆍ2년ㆍ1년은 그만두고 만일 어떤 비구ㆍ비구니가 7개월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4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2과(果)를 얻을 것이니, 현재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혹은 남음이 있으면 아나함을 얻을 것이다. 7개월ㆍ6개월ㆍ5개월ㆍ4개월ㆍ3개월ㆍ2개월ㆍ1개월은 그만두고, 어떤 비구ㆍ비구니가 이레 낮ㆍ 이레 밤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4념처에 머무르면 그는 반드시 2과(果)를 얻을 것이니, 현법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혹은 남음이 있으면 아나함을 얻을 것이다. 이레 낮ㆍ이레 밤이나 6ㆍ5ㆍ4ㆍ3ㆍ2일은 그만두고 하루 낮ㆍ하룻밤도 그만두고, 만일 어떤 비구ㆍ비구니가 잠깐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바르게 4념처에 머물러 아침에 이렇게 행하면 저녁에는 반드시 승진(昇進)하게 될 것이며 저녁에 이렇게 행하면 아침에는 반드시 승진하게 될 것이다.”
1)범어로는 pañca āvaraṇāni이며, 5장(障)이라고도 한다. 사람의 심성(心性)을 장애하여 선법(善法)을 낼 수 없게 하는 5법(法)을 말함. 첫째 탐욕개(貪欲蓋)로서 5욕(欲)에 집착하기 때문에 심성을 장애하는 것이다. 둘째 진에개(瞋恚蓋)로서 성냄 때문에 심성을 장애하는 것이다. 셋째 수면개(睡眠蓋)로서 마음이 흐려지고 몸이 둔해짐으로 인하여 심성을 장애하는 것이다. 넷째 조희개(調戱蓋)로서 마음이 들뜨고 희동함 때문에 심성을 장해하는 것이다. 다섯째 의개(疑蓋)로서 결연한 의지가 미약하여 법에 후퇴함으로써 심성을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