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저 부처님[覺王]께서 큰 가르침의 뜻을 밝게 신칙하셨으므로 말법(末法)에 있는 비구들은 모름지기 4념처(念處)에서 도를 닦아야 하니, 그 뜻은 어떤 것인가? 【답】 이것은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최후에 드리워 보이신 것으로서 앞의 교의 자취[敎迹]를 총괄하여도 이 뜻과 같아지나니, 4념처 바로 이것은 종경(宗鏡)에서 밝힌 바 일체 중생의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이다. 경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묻는 바와 같아서 부처가 열반한 뒤에는 무엇에 의하여 머무르느냐 하면, 아난아, 4념처에 의하여 마음을 엄정히 하면서 머무를 것이니라. 몸의 성품과 모양이 허공과 같다고 관함을 신념처(身念處)라고 하고, 느낌은 안팎에도 있지 아니하고 중간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관함을 수념처(受念處)라고 하며, 마음은 이름만이 있을 뿐이요 이름이라는 성품조차도 여의었다고 관함을 심념처(心念處)라고 하고, 법은 착한 법도 얻지 못하고 착하지 않은 법도 얻지 못한다고 관함을 법념치(法念處)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일체 수행하는 이들이 이 4념처에 의하여 머물러야 하느니라’ ”고 하셨다. 또 이르되 “마치 국왕이 자기의 지경에 편안히 머물러 있으면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지고 만일 다른 지경에 있으면 뭇 고통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일체 중생들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자기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 안락을 얻게 되고 만일 다른 경계에 이르면 악마를 만나고 여러 가지 고뇌를 받나니, 자기 경계라 함은 4념처를 말하고 다른 경계라 함은 5욕(欲)을 말한다”고 했다. 『화수경(華手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발타바라(跋陀婆羅)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의 온갖 착한 사람들은 ≺우리들은 마땅히 4념처에 의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나니, 4념처라 함은 성인의 법 안에서의 온갖 모든 법을 모두 염처(念處)라고 한다. 왜냐하면 온갖 모든 법은 항상 제 성품에 머물러서 파괴됨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온갖 모든 법을 염처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곧 법 이것이 마음이요 마음 이것이 법이어서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거늘 어찌 파괴될 수 있겠는가. 만일 두 법이 있다면 서로가 파괴하게 되는 줄 알 것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동요함이 없는 처소를 얻은 이/언제나 처소 없는 데서 머무른다”고 했다. 동요함이 없는 처소라 함은 자기 마음의 경계이니 이 경계는 바로 처소가 없다. 마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이르되 “마음은 끝과 끝이 없고, 처소를 보지 못한다”고 함과 같다. 논석(論釋)에서 이르되 “마음은 끝과 끝이 없다고 함은,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마음의 체성은 두루하여 시방에 두루하기 때문에 끝이 없고[無邊] 3세(世)에 두루하기 때문에 끝이 없다[無際]. 비록 3세에 두루하기는 하나 예와 이제의 다름이 없고 비록 시방에 두루한다해도 이곳과 그곳이라는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처소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대법구다라니경(大法烥陀羅尼經)』에서 이르되 “대저 염처라고 하는 염(念)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이 염은 어기거나 다툼이 없어서 여법(如法)을 수순하고 평등에 향해 나아가며 삿된 생각을 멀리 여의고 옮아감과 모든 달라짐이 없으며 이 한 마음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정[不動定]에 드는 줄 알지니, 만일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염의 뜻이라고 하겠다”고 했다. 천태지자(天台智者) 같은 이도 진전(眞詮)을 널리 기술하여 대승ㆍ소승을 겸하여 넓히고 교와 관[敎觀]을 쌍으로 밝히면서 마지막에는 관심(觀心)의 논장(論章)만을 설명하였으니, 뜻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또한 조사(祖師) 마명(馬鳴)보살 같은 이도 경을 널리 해석하고 논을 지었으며 마지막에는 한 권의 간략한 논만을 지었으니, 그 이름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다. 그 논은, “마하연(摩訶衍)으로 대승의 신근(信根)을 일으키게 하면서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두 문을 세워 전체로는 한 마음[一心]임을 논하고 따로따로로는 체대(體大)와 용대(用大)를 열었다. 만일 이 마음의 큰 종지(宗旨)를 환히 알면 바로 이것이 온갖 중생으로서 대승의 신근을 일으킨 것이어니와, 만일 믿지 못하면 설령 한량없는 억 겁 동안을 지내면서 광대하게 수행한다 해도 조사와 부처의 바른 종(宗)에 들지 못하리니, 모두가 가명의 보살(假名菩薩)이다”라고 한 것이, 이 한 논(論)의 요긴한 뜻이다. 모든 부[諸部]의 광대한 글을 통틀어 포섭했고 근원으로써 흐름을 껴잡았거늘, 무엇이 다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역시 이는 모든 성인들이 지으신 큰 뜻이요 역시 이는 종경(宗鏡)이 본래 품은 생각이어서 이야말로 모든 부처가 알 바요 뭇 성현이 증득할 바며 뭇 대덕(大德)이 갖출 바요 만행(萬行)으로 넓힐 바며 묘한 뜻으로 설명할 바요 마지막으로 나아갈 바다. 이 4념처는 여덟 가지 뒤바뀜[八顚倒]을 깨뜨리는 것이니, 첫째는 깨끗하지 못한 것[不淨] 안에서 깨끗한 것[淨]이라고 생각하고, 둘째는 괴로운 것[苦] 안에서 즐거운 것[樂]이라고 생각하며, 셋째는 무상한 것[無常] 안에서 항상한 것[常]이라고 생각하고, 넷째는 나 없는 것[無我] 안에서 나[我]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은 외도와 범부의 네 가지 뒤바뀜[四倒]이다. 또 첫째는 깨끗한 것 안에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둘째는 즐거운 것 안에서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셋째는 항상한 것 안에서 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넷째는 나 안에서 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은 2승의 네 가지 뒤바뀜이다. 같이 합하면 여덟 가지 뒤바뀜이 되나니, 그러므로 4념처의 관(觀)을 닦아 여덟 가지 뒤바뀜을 깨뜨리는 것이요 그 가운데서 열반하게 된다. 이것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신 본래의 생각이요 마지막의 뜻[指歸]이면서 비밀장(秘密藏)의 속이니, 최후에 몸과 목숨을 놓아 버리는 데요 바로 종경의 큰 종지인 한 마음 법문에 해당한다. 『보행기(輔行器)』에서 이르되 “4념처의 관이란 낱낱의 염처에서 모두 다 먼저 공(空)과 가(假)를 밝히어 뒤바뀜을 부수고 다음에는 중도(中道)로써 비밀장을 결성(結成)하면, 나와 남이 다 함께 원만하고 뜻은 크고 작은 것을 겸한다. 다 함께 부순다고 함은 이미 중도로 비밀장을 나타냈기 때문에 4념처는 모두 다 뒤바뀜을 부수었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공에 즉하였기 때문에 항상하다[常]는 뒤바뀜을 부수었고 뜻은 작은 것을 겸하였으며, 가에 즉하였기 때문에 무상하다[無常]는 뒤바뀜을 부수었고 뜻은 큰 것을 겸하였으며, 중도는 바른 것이 되기 때문에 뜻은 크고 작은 것을 겸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니, 중에 즉하였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을 쌍으로 비추고 크고 작은 것을 쌍으로 부정한다. 바로 이것이 여덟 가지 뒤바뀜을 쌍으로 비추고 쌍으로 부정한 것이요, 세 가지 이치[三諦]가 상즉(相卽)하여 겸하면서 앞뒤가 없고 부수되 차례가 없으며 이내 부수고 이내 세우며 이내 비추고 이내 부정한다. 네 그루는 무성하고 네 그루는 말랐다[四榮四枯]고 함은,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동쪽의 한 쌍(雙)은 항상함과 무상함에 비유되고 남쪽의 한 쌍은 즐거움과 즐거움이 없음에 비유되며 서쪽의 한 쌍은 나와 나 없음에 비유되고 북쪽의 한 쌍은 깨끗함과 깨끗하지 못함에 비유되나니, 4방에 각각 한 쌍씩이었기 때문에 쌍수(雙樹)라고 한다. 네 귀에는 모두가 다 한 나무는 마르고 한 나무는 무성하였으니, 무성한 나무는 항상함 등에 비유되고 마른 나무는 무상함 등에 비유된다. 여래는 그 안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두시고 누우셔서 열반에 드셨으니, 마른 것도 아니요 무성한 것도 아님을 표시하였다’고 했다. 무성함은 곧 가(假)를 표시하고 마름은 곧 공을 표시한 것이니, 바로 이것이 그 공ㆍ가ㆍ중의 사이에서 비밀장에 든 것이다. 뒷부분의 경에서 이르되 ‘동쪽의 한 쌍은 부처님 뒤에 있었고 서쪽의 한 쌍은 부처님 앞에 있었으며 남쪽의 한 쌍은 부처님 발에 있었고 북쪽의 한 쌍은 부처님 머리에 있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마자 동쪽과 서쪽의 두 쌍이 합하여 하나의 나무로 되고 남쪽과 북쪽의 두 쌍 역시 합하여 하나의 나무로 되어서 두 쪽 것이 합하여 모두 드리우면서 여래를 덮었는데, 그 나무들은 슬픈 빛을 띠면서 모두 다 하얗게 변하였다’고 했다. 항상함과 무상함 등은 둘이면서 곧 둘이 아니며, 항상함ㆍ즐거움ㆍ나ㆍ깨끗함이 법계를 두루 덮었기 때문에 둘이 합하여 드리우면서 여래를 덮은 것이니, 바로 이것이 여래께서 비밀장에 계합한 것이요 역시 이는 염처(念處)라 고요히 사라짐이 아님이 없다. 흰 것[白]은 바로 뭇 빛깔의 근본이요, 항상함 등은 근본과 일치되기 때문에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북쪽으로 머리를 둔다 함에는 『증일아함(增一阿含)』에서 이르되 ‘불법이 오랜 동안 북천(北天)에서 머무는 것을 표시한다’고 했다. 『장아함(長阿含)』의 제4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머리는 남쪽으로 두고 얼굴은 북쪽을 향하여 나타나게 하라≻’고 하셨으니, 그러면 불법이 오래 머물러서 소멸되지 않게 되거든, 하물며 열반하는 마지막에서 비밀장을 표시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일대(一代)의 교문(敎門)으로서 무릇 표시한 바들로는 글과 뜻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으로 쌍수(雙樹)보다 더 지나간 것이 없나니, 4념처로써 대승과 소승의 관행(觀行)의 첫 문을 삼게 된 이 때문으로도 그러하며 은근히 유촉(遺囑)한 뜻도 여기에 있다. 또 범부는, 몸은 깨끗한 것이라 여기고 느낌은 즐거운 것이라 말하며 마음 은 항상한 것이라 고집하고 법은 나라고 헤아릴 뿐이니, 이 네 가지 뒤바뀜으로 말미암아 탐애와 무명(無明)을 일으키면서 모든 행(行)이 있고 늙어 죽기에 이르며, 괴로움[苦]과 쌓임[集]이 왕성하여져서 8만 4천의 번뇌의 불이 5음(陰)의 집을 불사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4면이 한꺼번에 불길이 활활 인다”고 하였으니, 곧 네 가지 뒤바뀜에 비유했다. 만일 소승관(小乘觀)의 사람이면, 곧 몸은 깨끗하지 않는 것이라 관하여 깨끗한 것이라는 뒤바뀜을 부수고 느낌은 괴로운 것이라고 관하여 즐거운 것이라는 뒤바뀜을 부수며 마음은 무상한 것이라고 관하여 항상한 것이라는 뒤바뀜을 부수고 법은 내가 없는 것이라고 관하여 나라는 뒤바뀜을 부수나니, 이러하면 앞의 미혹된 마음의 뒤바뀜으로 말미암아 몸 이것은 항상하다ㆍ즐겁다ㆍ나다ㆍ깨끗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탐애의 모든 번뇌를 일으켰던 것이나, 이제는 이미 몸 이것은 깨끗하지도 않고 괴롭고 무상하고 나가 없는 것이라고 관하여 알았는지라 탐애의 무명ㆍ행(行)ㆍ식(識)을 일으키지도 않고 이에 늙어 죽음[老死]이 소멸되기에 이르러서 생사의 강물이 기울어지고 열반의 바다가 가득 차게 된다. 바로 이것이 다투어 함께 밀고 물리치며 불난 집에서 벗어나서 두려움이 없는 곳에 도달한 것이니, 이 인연을 위하여 소승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권하여 염처에 의하여 도를 닦게 한다. 대승의 4념처라 함은, 생사하는 5음의 몸이 마른 것도 아니고 무성한 것도 아니어서 곧 대적정(大寂定)이라고 관하게 된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한 ‘색해탈열반(色解脫涅槃)에서 식해탈열반(識解脫涅槃)까지’이니, 만일 이 염처의 관을 닦으면 바로 이것이 온갖 여섯 갈래[六道] 중생들을 관한 것이요 바로 이것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요 깨끗함의 대열반이라 부처의 지견(知見)을 두루 갖추어서 항상함[常]과 같은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원만한 믿음을 성취하게 된다. 경에서 이르되 “성(城) 중에서의 맨 아래 거지와 난승여래(難勝如來)에게 보시한 것은 평등하다”고 하였으니, 이렇다면 어찌 옳은 밭이요 그른 밭이며 보시해야 하고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염처의 관은 곧 평등한 종자이다. 만일 닦지 않으면 생사와 열반에 다름이 있고 범부와 성인에 다름이 있다고 보아 성인은 바로 공격할 밭이라 이내 숭앙하면서 보시하고 범부는 바로 가엾은 밭이라 싫어하고 천히 여기면서 보시하지 않게 되거니와, 만일 한 마음 평등한 법계의 법문에 들어가면 분별이 없다. 대저 4념처라 함은 염(念)은 곧 관하는 지혜[觀慧]의 마음이요 처(處)는 곧 지혜로 비추는 경계이니, 능소(能所)가 명합하여 이는 한 마음일 뿐이다. 이제 천태(天台)의 4념처의 관에 의지하여 4교(敎)의 4념처를 간략하게 밝히겠는데, 네 구절로 분별된다. 만일 괴로운 것도 아니요 즐거운 것도 아니라 하여 생멸하는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을 결성(結成)하며, 내지 나도 아니고 나 없음도 아니라 하여 나 없음을 결성하면, 이것은 삼장교(三藏敎)의 뜻이다. 만일 괴로운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니라 하여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을 결성하면, 통교(通敎)에 속한다. 『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되 “5수음(受陰)이 공하여 일어나는 바가 없음을 통달한다”고 한 것은 괴로운 것의 이치라 하여 수념처관(受念處觀)을 결성한다. 마치 대품(大品)에서의 부정관(不淨觀)과 같은 것은 마하연(摩訶衍)에서는 모두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마음으로써 물질[色]을 관하면서 생각하되 ‘나의 몸은 아직 이 법에 해탈하지 못했고 아직 삼계(三界)의 생멸을 면하지 못한지라 아직도 백천 번의 생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때문에 “아직 해탈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광승품(廣乘品)』을 인용하여 신념처관(身念處觀)을 결성하며,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관하는 이것이 무상한 것이라는 이치라 하여 심념처관(心念處觀)을 결성하면, 이것이 통교(通敎)의 뜻이다. 만일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 하여 항상하다는 것을 결성하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 하여 깨끗하다는 것을 결성하며, 괴로운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니라 하여 즐겁다는 것을 결성하고, 나와 나 없는 것도 아니라 하여 나라는 것을 결성하여 나에 즉하면, 별교(別敎)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며 깨끗한 것으로서 미혹을 끊되 따로따로 차례를 매기면서 증득함을 구하는 것이다. 만일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면서 더러움과 깨끗함을 쌍으로 비추고, 괴로운 것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니라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쌍으로 비추며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면서 항상함과 무상함을 쌍으로 비추고, 나도 아니고 나 없음도 아니라면서 나와나 없음을 쌍으로 비추면, 원교(圓敎)를 결성하여 원만한 마음으로 닦아 익히되 번뇌를 끊지 않으면서도 열반에 든다. 또 앞에 3교의 장교ㆍ통교ㆍ별교 등은 여기서는 유용한 바가 아니므로 간략하게 인용하였거니와, 이제 거듭 원교에 대한 4념처의 4문헌을 널리 인용하여 후학들의 믿음을 조성시키겠다. 4념처관(念處觀)에서 이르되 “4념처라 함은 염(念) 이것은 진리를 관하는 지혜이다”라고 했다. 『대론(大論)』에서 이르되 “염은 생각하는 지혜[想智]이니, 모두가 하나의 법이로되 이름만이 다르다. 처음에 마음에 기록하여 둠을 염(念)이라 하고, 다음에 행위를 익힘을 생각[想]이라 하며, 나중에 이룩하여 마침을 지혜[智]라고 한다. 처(處)라 함은 경계이다. 모두가 살바야(薩婆若)를 여의지 않나니, 능관(能觀)의 지혜로 비추면서 항상 고요함을 염이라 하고 소관(所觀)의 경계로 고요하면서 항상 비춤을 처라고 한다. 경계가 고요하면 지혜 또한 고요하고 지혜로 비추면 경계 또한 비춘지라 한 모양이면서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서 한 모양이니, 바로 이것이 실상(實相)이요 실상 이것이 곧 일실(一實)의 진리이므로 허공불성(虛空佛性)이라고도 이름하고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이름 한다. 이와 같은 경계와 지혜는 둘이 없으면서 다름이 없고 여여(如如)한 경계이면서 그대로 여여한 지혜이며 지혜가 이는 곧 경계이니, 지혜 및 지혜와 처[智處]를 말함은 모두 반야(般若)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예(例)로서 이르되 “처(處) 및 처와 지혜[處智]를 말함을 소제(所諦)라고 한다. 이것은 경계가 아닌 경계인데도 경계라 말하고 지혜가 아닌 지혜인데도 지혜라고 이름 하나니, 마음이 고요한 삼매[心寂三昧]라고 하고 물질이고요한[色寂] 삼매라고도 하며, 또한 이는 마음을 밝히는[明心] 삼매라고 하고 또한 이는 물질을 밝히는[明物] 삼매라고 한다”고 했다. 『청관음경(請觀音經)』에서 이르되 “몸에서 큰 지혜의 광명이 나옴이 마치 자금산(紫金山)을 태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광명이란 바로 이는 지혜이다”라고 했다.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이르되 “불가사의한 지혜와 경계를 불가사의한 지혜로 비춘다”고 했다. 이 모든 경은 모두가 염(念)이 바로 처(處)일 뿐이요 처가 바로 염일 뿐임을 밝힌 것이니, 물질과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이면서 둘이 아니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둘이라는 이름을 붙여 말할 뿐이다. 이렇게 관하는 지혜로 다만 중생의 한 생각의 무명의 마음만을 관하면 이 마음이 바로 이는 법성(法性)이어서 인연으로 생기게 되는 바가 공에 즉하고 가(假)에 즉하고 중(中)에 즉한지라 1심(心)이 3심(心)이요 3심이 1심이니, 이 관 또한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고 이 경계 또한 일원제(一圓諦)라고 한다. 1제(諦)가 3제(諦)요 3제가 1제라, 모든 부처는 이 한 큰일의 인연을 위하여 세간에 출현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知見)이 열리게 하려 하셨으니, 모든 부처의 세간에 출현한 일이 옳은 것이로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왕도(王道)가 평탄하도다”고 했고,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이르되 “크고 곧은 길을 가는 것은 지체되는 재앙이 없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두루 갖춘 도(道)를 비록 3지(智)라고 말하기는 하나 그 실은 하나의 마음이니, 사람에게 말하면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짐짓 세 가지라 말한다”고 했다. 만일 교도(敎道)로써 말하게 된다면 끊을 바의 번뇌가 마치 대지(大地)를 뒤집으면 강물과 바다가 다 함께 엎어지고 큰 나무가 무너지면 뿌리와 가지가 다 거꾸로 되는 것처럼, 이 지혜로써 미혹을 끊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전체거나 따로따로의 티끌과 무명이 한꺼번에 청정하여지고 한량없는 공덕과 모든 바라밀과 만행과 법문이 두루 갖추어져 줄어듦이 없으며 불법의 비밀장이 모두 다 앞에 나타난다.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르되 “모든 법이 비록 공하기는 하나 한 마음은 만행을 두루 갖춘다”고 했고,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발심(發心)은 마침내 둘이면서 다르지 않다”고 했으며,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근본과 끝이 마지막에는 평등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묘하게 깨달은[妙覺] 평등한 도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지혜는 곧 법계 마음의 신령한 근원이요 3세(世) 모든 부처의 위없는 법의 어머니이니 법이 항상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 또한 항상하고 즐거움ㆍ나ㆍ깨끗함 역시 그와 같으므로 보배 처소[寶所]라고도 하고 또한 비밀광[秘藏]이라고도 한다. 부처와 온갖 중생들이 하나로 돌아갈 것이로되, 앞의 3장교(藏敎)는 좁고 험한 길이라 나란히 갈 수가 없고, 통교(通敎)는 같이 받아 행하고 같이 드는지라 들음이 깊을 수가 없으며, 별교(別敎)는 일일이 구별되어 먼 데를 돌아서 가는지라 이내 도달할 수가 없다. 여기의 이 염처는 광활하기 마치 허공과 같고, 끝없는 데까지 끝으로 함은 마치 곧은 줄이 곧장 서쪽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원교(圓敎)의 4념처라고 할 뿐이다. 장형(張衡)이 말하되 “나는 곤계(鵾鷄)도 우러러보면서 미치지 못하거든, 하물며 고지새와 참새이겠는가”라고 했다. 앞의 3교(敎)의 염처로서는 미칠 수 없는 바요, 원교의 염처만이 외로이 날아 홀로 옮아가며 빨간 하늘을 침범한 줄 알지니, 위없고 견줄 데 없으며 견줄 데 없으면서 같다. 세로로는 이보다 높은 일산[蓋]이 없기 때문에 위없다[無上]고 하고, 가로로는 짝할 예(例)가 없기 때문에 견줄 데 없다[無等]고 하며,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와 평등하므로 견줄 데 없으면서 같다고 한다. 거듭 이 이치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금 천친(天親)의 『유식론(唯識論)』을 의지하겠다. 이 하나의 식(識)뿐이로되, 다시 분별하는 식[分別識]과 분별이 없는 식[無分別識]이 있다. 분별하는 식이란 이것은 식별하는 식이요 분별이 없다 함은 진경(塵境)과 같은 식이니, 온갖 법계에 있는 바의 병(甁)ㆍ옷ㆍ탈 것 등으로서 모두가 분별이 없는 식이다. 용수(龍樹)가 이르되 “4념처는 곧 마하연(摩訶衍)이요 마하연 그대로가 4념처이다”라고 했다. 온갖 법이 신념처(身念處)로 나아가면 바로 이것은 하나의 성품이며, 물질[色]은 분별이 있는 물질[有分別識]과 분별이 없는 물질[無分別色]이다. 분별이 있는 물질이란 마치 ‘광명’을 말하는 것과 같아서 바로 지혜 그것이요, 분별이 없는 물질이란 바로 이 법계에서 4대(大)로 이루어지는 물질이니, 모두가 분별이 없는 따위이다. 이 물질과 마음은 둘이 없되 그것이 이미 두 식(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라 이것 역시 두 물질이라는 설명을 하게 된다. 만일 물질과 마음으로 상대한다면 물질을 여의면 마음이 없고 마음을 여의면 물질이 없으며, 만일 이 분별하는 물질과 분별이 없는 물질을 지을 수 없다 하면 어떻게 분별하는 식과 분별이 없는 식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원교로 말하면 역시 물질일 뿐이요 소리일 뿐이거니와, 만일 합쳐서 논한다면 낱낱의 법이 모두 법계에 두루 갖추어져서 모든 법이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般若)도 평등하며 안에서 비춤[內照]이 이미 평등한지라 바깥의 변화[外化] 또한 평등하나니, 바로 이것이 4수(隨)의 사물을 따르는 것이로되 정(情)에는 어려움과 쉬움이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 ‘온갖 법은 나란히 공이거늘, 어찌 다시 열 가지 비유[十喩]를 써야 되는가?’ 대답했다. ‘공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이해하기 어려운 공[難解空]이요 둘째는 이해하기 쉬운 공[易解空]이다. 열 가지 비유는 바로 이해하기 쉬운 공이다’ ”라고 했다. 이제 이해하기 쉬운 공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공에 비유하듯 유식(唯識)의 뜻 역시 그와 같다. 다만 유식에만 결부시키면, 온갖 법문을 갖추면서 중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깥 물질[外色]에 많이 집착함이요, 둘째는 안의 식[內識]에 적게 집착한 것이니, 마치 위의 세계[上界]에서도 안의 식에 많이 집착하고 아래의 두 세계[下二界]에서는 바깥 물질에 집착함이 많고 안의 식에 집착함은 적은 것과 같다. 마치 학문(學問)하는 사람이 바깥의 이해를 많이 얻게 됨과 같다. 만일 『유식론』에서 보면 바깥을 부수고 안을 향하면서 관(觀)으로 하여금 명백하게 한다. 법계의 법은 모두가 이 하나의 식(識)이라 식이 공하면 10법계(法界)도 공하고 식이 가(假)면 10법계도 가요 식이 중(中)이면 10법계 역시 중이어서 오로지 안의 마음으로써 온갖 법을 부수나니, 만일 바깥으로 10법계를 관하면 이내 안의 마음임을 보게 된다. 물질이거나 식은 모두가 식일 뿐이요 식이거나 물질은 모두가 물질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비록 물질과 마음이라는 두 이름을 설명했기는 하나 실은 한 생각인 무명의 법성[一念無明法性]일 뿐이니, 10법계 바로 이것은 불가사의요 한 마음은 온갖 것을 갖추고 있되 인연으로 나게 되는 법의 한 구절을, 한 생각인 무명의 법성 마음이라고 한다. 만일 네 구절을 하나의 게송으로 만들어 자세히 말한다면, “곧 인연으로 나게 되는 마음은/공에 즉하고 가에 즉하고 중에 즉한다”고 하리라. 그러므로 『반야경(般若經)』에서 이르되 “네 글귀로 된 하나의 게송을 받아 지녀도 시방의 허공과 더불어 평등하다”고 했으며,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한 게송을 듣기만 해도 역시 보리(菩提)와 함께 수기(授記)하나니, 한 글귀 또한 그러하다면 세 글귀 역시 그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다만 이 한 마음이 곧 불가사의함을 관할 뿐이어도 10법계는 항상 앞에 나타나며 심지법문(心地法問)에 들기 때문에, 고요한 도량에서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몸은 8회(會)에 나타난다. 다만 이 한 글귀뿐이나 이 한 글귀 안에는 한량없음이 있고 한량없음 가운데는 한 글귀뿐이니, 이것이 불가사의한 까닭이 된다. 마치 마음처럼 모든 부처도 그러하고 부처처럼 중생도 그러하나니, 마음과 부처 및 중생의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모든 부처의 해탈은 중생의 마음속에서 구하고 중생의 마음 또한 모든 부처의 해탈 안에서 구해야 하나니, 비로소 이 반야가 마지막에는 평등하여진다. 아직 분명히 모르면 온갖 법은 바르고 온갖 법은 삿되나니,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으면 곧 온갖 법이 바르고 만일 마음으로 분별하면 온갖 법은 삿되다.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킴이 곧 어리석음이요 생각이 없음이 곧 열반이다. 이 불가사의는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희거나 모나거나 둥글거나 길거나 짧은 것이 아니요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마지막에는 고요히 사라졌다. 마음만으로 알아야 되고 입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만일 인연이 있다면 좋은 방편이거니와 4실단(悉檀)으로써도 역시 설명할 수는 없다. 중생은 한량없는 겁 동안 제 성품의 마음이 번뇌에게 물듦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물들게 되었음을 분명히 알기 어렵다. 미망(迷妄)을 물듦이라 하거니와 물들면 이내 마음이 덮여서 깨끗한 성품을 보지 못하나니, 오랜 동안 생사에 있으면서 근본을 돌이켜 근원에 돌아갈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근원은 실로 알기 어려워서 2승조차도 아직 그 이름을 듣지 못했거든, 하물며 범부이겠는가. 이제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습인(習因)을 지음은 마치 대통불(大通佛) 때에 매었던 구슬이 석가(釋迦) 때에 와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 것과 같나니, 이 종자는 점차로 습인을 쌓은 뒤에 음향과 빛을 만나 이 종자가 발생되듯 범부를 굴려서 성인에 들되 점차로 공덕을 쌓아 대비의 마음을 두루 갖추게 된다. 모두는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명이 법성을 덮어서 10법계의 5음(陰)을 내어 거듭 미혹함이 쌓이고 겹치겠거니와, 만일 뛰어나고 깨치면 2승의 5음, 내지 불음(不陰)이 일어난다. 『화엄경(華嚴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마음은 솜씨가 빼어난 화가와도 같아 갖가지 5음(陰)을 만들어내니 일체의 세간 가운데 마음으로 짓지 않는 것이 없노라”라고 하였다. 온갖 음은 단지 마음으로 지어낸 것이다. 무명을 관하면 마음은 끝내 얻을 것이 없지만 능히 10법계의 5음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불가사의이다. 『법화경』에서 “한 생각으로 꿈꾸는 마음이 원인을 지어 결과를 얻음은 한 생각의 잠자는 속에 있다”고 함과 같다. 무명의 마음과 법계의 성품이 합하면 한량없는 번뇌가 일어나나니, 이 번뇌를 찾으면 곧 법성을 얻는다. 【문】 별교와 원교에서도 다 같이 이 비유를 드는데 어떻게 다른가? 【답】 별교에서는 뜨고 성기거니와 원교에서는 한 생각으로 갖추나니, 마치 겨자씨가 수미산을 포함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불가사의라고 한다. 한 티끌 속에 대천(大千)의 경책이 있는데 지혜로운 사람이 티끌을 열어서 경책을 내오나니, 이 한 생각의 무명의 마음은 번뇌의 법도 있고 지혜의 법도 있어서 번뇌라는 이 나쁜 티끌ㆍ착한 티끌ㆍ무기(無記)의 티끌에서 법신과 반야와 해탈을 열어 내온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이와 같이 성품과 모양이 평등하고 1법계(法界)ㆍ10법계ㆍ백천의 법계가 마침내는 모두 평등하다”라고 했다. 이제 이 무명의 마음을 살피건대 무엇으로부터 생겼는가? 무명으로부터인가, 법성으로부터인가, 두 가지 모두 함께의 것인가, 두 가지 다 여읨의 것인가, 자기거나 남이거나 네 가지 모두가 얻을 수 없음을 공의 해탈문[空解脫門]이라고 한다. 다만 관하는 마음의 성품만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함께한 것인가, 두 가지 다 여읨의 것인가,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며 네 가지 뒤바뀜[四倒]으로도 얻을 수 없음을 형상 없음의 해탈문[無相解脫門]이라고 한다. 다만 이 심성(心性)만은 진여인 것인가, 인연인 것인가, 두 가지 모두 다 함께의 것인가, 두 가지 다 여읨의 것인가, 네 글귀로 지을 바가 아님을 지음 없음의 해탈문[無作解脫門]이라고 한다. 생김이 없으면서 생긴다고 말하는 이것이 10법계의 성품과 모양이다. 무명의 성품 바로 이것이 진실한 성품[實性]이며, 또한 무명 이것이 곧 밝음[明]이라고 말하되 밝음 역시 얻을 수 없나니, 이것이 둘이 없는 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이 된다. 다만 중생이 미혹하고 뒤바뀌어서 마음의 마음 없음[無心]을 보지 못할 뿐이니, 밝음으로 무명을 이루는 것도 그러하다. 또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왕이 또 병이 들었는데 의사가 왕의 병환을 점쳐 보자 반드시 우유를 먹어야 했다”고 했다. ‘왕’이란 여덟 가지로 뒤바뀐 중생이요, ‘그 후 병이 들었다’함은 처음의 뒤바뀜은 조복하였으나 뒤의 뒤바뀜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서’라고 한다. ‘반드시 우유를 먹어야 했다’함은 네 가지 무성한[四榮] 재주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니, 이야말로 여기서의 염처의 뜻일 뿐이다. 또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독을 북에다 바르고 대중 가운데서 치자 가까이 있는 이는 죽고 멀리 있는 이는 아직 죽지 않았으나 그 뒤에 독 묻은 북을 치자 가까이 있는 이나 멀리 있는 이가 다 같이 죽었다”고 함과 같다. 처음에 바른 것은 네 그루의 마름[四枯]으로서 마름의 분한과 형단[分段]에만 그쳤기 때문에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하고, 지금 바른 것은 네 나무의 무성함이어서 무명의 뿌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이나 멀리 있는 이가 다 같이 죽었다’고 한 것이니, 역시 지금의 4념처의 뜻이다. 또 이르되 “마치 새가 조롱에서 나와 겨우 그물을 떠나게 되자마자 여기의 두 새들은 높이 날아 멀리 가서 떠나고 머무름이 자재함과 같다”고 했나니, 이야말로 여기서의 4념처의 뜻이다. 또 이르되 “처음 마른 나무는 생사라 불법을 비추어 밝힐 수 없고 중생을 깨우칠 수도 없나니, 불법에서 공부가 없고 중생에게 이익이 없기 때문에 ‘마른 쌍수[枯雙樹]’라고 한다”고 했나니, 여기서의 원교는 불법을 드러내고 크게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대저 마음이 있는 이면 모두가 장차는 부처가 될 것이니, 8천의 성문(聲聞)도 불성을 보게 됨은 마치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저장하는 것과 같아서 큰 열매를 이룩하기 때문에 ‘무성한 네 가지 장엄한 쌍수[四榮莊嚴雙樹]’라고 한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술지게미 보리 가루를 먹게 하지 않고 희생(犧牲)의 소와는 같이 한 떼가 되지 않으며 높은 언덕에도 있지 않고 습기 있는 데로도 내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습기 있는 데로 내려오지 않는다’고 함은 범부의 삿된 네 가지 뒤바뀜[四倒]이요, ‘높은 언덕’이라 함은 치우치게 굽은 네 가지 뒤바뀜이며, ‘술지게미’는 바로 어리석은 것이요, ‘보리 가루’는 바로 성을 내는 것이며 ‘희생이 될 소’라고 함은 바로 탐욕인 것이니, 중앙 언덕을 선택하여 그 아들을 편안히 있게 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바로 곧장 방편을 버리면서 위없는 도를 말할 뿐이다”라고 했다. 또 모든 불법은 오래 오래한 뒤에는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진실이라 함은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며 삿됨도 없고 치우침도 없으며 간사함도 없고 뒤바뀜도 없는 그것이다. 슬프다. 못난 장부야. 옛날에 매달은 구슬을 보였는데도 아니 갔다 왔다 하고 있으니, 보배는 가까운 데에 있다. 그러므로 근본으로부터 자취를 드리워 법신과 함께 권속이 되어서 실(實)을 숨기고 권(權)을 드날리며 뽐냄을 감추고 하심(下心)을 베풀면서 같이 중생을 교화하고 바른 도를 열어 보이며 안으로는 숨기고 밖으로는 나타내어 열고 드러내면서 묘함을 얻어 들게 하나니, 이야말로 여기의 4념처이다. 4라고 함은 불가사의한 수(數)이다. 하나가 곧 한량없음이요 한량없음이 곧 하나이며 하나하나 모두가 법계이니, 세 가지 이치[三諦]가 두루 갖추고 온갖 법을 포섭하며 법계 밖을 벗어나서는 다시는 법이 없고 법계에는 법계가 없되 법계를 완전히 갖추었으며 비록 법이 없다고는 하나 모든 법을 두루 갖추었으니, 이것이 불가사의한 수이다. 화엄 안에서 이르되 “하나의 작은 티끌에는 온갖 티끌과 온갖 법이 갖추어져 있고 한 생각에는 온갖 생각과 온갖 법이 갖추어져 있나니, 티끌 바로 이것이 물질[色]이요 생각 이것이 곧 마음이어서 물질과 마음이 곧 염처라는 딴 이름일 뿐이다”고 하였다. 『대품반야경』에서 “4념처는 곧 마하연(摩訶衍)이고, 마하연은 곧 4념처란 1념처와 함께 3념처가 둘이 없고 차별이 없으니, 온갖 법은 4념처에 나아가고 이 나아감도 염처에 지나지 않아서 오히려 얻을 수가 없거늘, 어떻게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음이 있다 해야 되겠는가.” 이것 또한 불가사의하다는 뜻과 동일하다. 『보현관경(普賢觀經)』에서 이르되 “마음을 관하되 마음이 없고 법이 법에 머무르지 않음을 큰 참회[大懺悔]라고 한다”고 했다. 마음을 관함에서 이미 그렇다면 물질을 관함에도 역시 그렇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불성이란 또한 하나요 하나도 아니며 하나가 아니면서 하나가 아님도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하나다’함은 온갖 중생들이 모두가 1승이기 때문이요, ‘하나도 아니다’라고 함은 3승을 말하였기 때문이며, ‘하나가 아니면서 하나가 아님도 아니다’라고 함은 수(數)와 수가 아닌 것으로는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4라는 수에서는 결정될 수 없는 것이 바로 불가사의한 4이다. 내지 만일 종경(宗鏡) 중의 4념처에 의하지 않고 도를 수행하면 설령 지해(智解)가 있다 하여도 그 수행은 모두 외도를 이룬다. 그런 까닭에 이르되 “만일 염혜(念慧)가 없으면 온갖 수행하는 법은 모두가 불법이 아니며 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 헛되이 머리를 깎았으니 마치 놓아 먹이는 이[放牧者]와 같고 공연히 물든 옷을 입었으니 마치 나무 끝에 단 당기와 같으며, 비록 바리와 석장(錫杖)을 갖고 있기는 하나 마치 병든 이가 기구를 빌려 있는 것과 같고 비록 경전을 읽고 외우더라도 마치 소경이 시(詩)를 읊는 것과 같으며, 아무리 또 예배를 한다 하더라도 마치 디딜방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같고 비록 다시 일으키고 짓는다 해도 중매쟁이가 남에게 고용되어 제 자랑을 하는 것과 같으며, 나무를 심어 사고팔고 하면서 생사에 침륜하고 누에고치가 스스로 얽어매어 벗어날 기약이 없으며, 몸과 생명과 재산을 버려도 보시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요 바라밀이 아니다. 비록 또 계율을 지닌다 하더라도 닭과 개를 면치 못하고 아무리 정진을 한다 해도 정진에 뛰어남이 없다. 비록 또 좌선을 하기는 하나 마치 나무 그루터기와 같고, 비록 잘 안다 해도 미치광이의 지혜라 언제나 이 언덕에만 있고 저 언덕에는 이르지 못한다. 욕망[愛]의 소견을 항복받지 못하고 잡음[取]의 모양을 부수지 못하며 도품(道品)에 들을 수 없는지라 성현의 지위가 아니며, 네 그루의 마른 나무[四枯樹]를 이루지 못한지라 바라밀이 아니다. 왜냐하면 염혜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염혜로는 삿된 도를 쳐부수고 바른 법을 나타낼 수가 있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옛 의사가 준 우유약이 실로 그것이 독이었음은 마치 나무를 파먹던 벌레가 우연히 글자를 만들었으나 그 벌레는 그것이 글자인가 글자 아닌가를 모르는 것과 같거니와, 다시 어떤 새로운 의사가 먼 지방에서 와서 여덟 가지 의술에 환히 밝았으니, 네 그루의 마른 나무와 네 그루의 무성한 나무이니라”고 했다. 새로운 네 그루의 마른 나무로써 그 옛날의 우유를 부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큰 불이 사면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여덟 가지 의술로 여덟 가지 뒤바뀜의 잘못 든 길을 부수고 한 마음의 묘한 문으로 1승의 종지(種智)에 들어간다. 【문】 이 평등한 법성과 1승의 묘한 마음은 일체 중생과 성문ㆍ연각ㆍ보살이며 모든 부처가 모두 다 같이 받아 있거늘, 어떻게 이생(異生)의 경계 등에서는 이 하나의 신령한 성품이 생각생각마다 윤회에 처해 있고 성문승(聲聞乘)에서는 다 같은 하나의 법 안인데도 이 일을 얻지 못하는가? 【답】 마치 노란 돌 속의 금은 복덕이라는 화롯불의 인연으로 성취되되 만일 대복(大福)을 지닌 사람은 금을 얻고 중복(中福)을 지닌 사람은 은(銀)을 얻으며 하복(下福)을 지닌 사람은 동(銅)을 얻게 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러하여 범부는 번뇌의 무명만을 얻고 성문은 무상한 생멸만을 증득할 뿐이며 부처와 보살만이 마지막의 항상한 열반을 즐긴다. 마치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되 “마치 등불을 켜는 그릇이 금이면 노란 빛이 나고 동이면 붉은 빛이 나서 그 빛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등불에는 차별이 없는 것처럼, 법계 또한 그러하여 모든 부처가 켜면 지혜 광명이 그지없고 성문이 켜면 지혜 광명이 끝이 있다. 그러나 법계의 성품은 실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또한 마음이라는 한 법은 미묘하고 그윽하여 지견에는 얕고 깊음이 있고 지혜에는 낫고 못함으로 나누어지나니 모름지기 널리 배워서 법의 근원에 이르러야 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 익히고 배우지 않으면 이것을 환히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외서(外書)에서 이르되 “옥(玉)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모른다”고 했다. 다만 지조와 절개만을 굳건히 하면서 항상 듣지 못한 것을 들으면 쪼여 닦이면서 관(觀)의 힘은 더욱 깊어지고 갈고 익혀져서 행(行)의 문은 더욱 청정해지리니, 언제나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도업(道業)이 항상 새롭고 요행으로 얻은 경사라는 마음을 품으면 끝내 물러나지 않으리라. 그런 까닭에 『화엄경(華嚴經)』에서 이르되 “보살은 밤낮으로 법을 듣고 법을 기뻐하며 법을 좋아하고 법에 의지하며 법에 따르고 법을 이해하며 법을 순종하고 법에 이르며 법에 머무르고 법을 수행하기만 원하나니, 보살은 이와 같이 부지런히 불법을 구하면서 모든 진보와 재물에 모두 인색함이 없어서 소유한 물건이라 보지도 않고 중하게 여기는 것도 없으며 다만 불법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만을 내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안팎의 재물에 대하여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두 보시하나니, 공경하는 것마다 능히 행하지 않음이 없고 교만한 것마다 능히 버리지 않음이 없으며 받들어 섬기는 것마다 능히 행하지 않음이 없고 애써 수고하는 것마다 능히 받지 않음이 없다. 만일 아직 듣지 못했던 법을 한 글귀라도 들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값진 보배를 다 얻은 것보다 낫게 여기고, 만일 아직 듣지 못했던 바른 법을 한 게송이라도 들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얻은 것보다 낫게 여기며, 만일 아직 듣지 못했던 한 게송의 법을 얻어서 보살행을 청정하게 할 수 있으면 제석(帝釋)과 범왕(梵王)의 지위를 얻어서 한량없는 백천 겁(劫) 동안 머무르는 것보다 낫게 여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한 글귀의 법이 있어서 보살행을 청정하게 할 수 있는데, 그대가 만일 큰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몹시 큰 고통을 받을 수 있다면 일러 주리라’고 하면, 보살은 그때 생각하기를 ‘내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한 글귀 법으로 보살행을 청정하게 할 수 있다면, 마치 삼천대천세계가 큰 불에 가득 찬 속에서도 오히려 범천 위에서 몸을 아래로 던져 몸소 받아 가지려 하겠거든 하물며 조그마한 불구덩이에 들어갈 수 없겠느냐. 그리고 나는 이제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온갖 지옥의 뭇 고통도 받아야 되겠거든 하물며 인간 속의 여러 조그마한 괴로움이겠느냐’고 한다. 보살은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며 불법을 구하고 들은 대로 수행할 것을 자세히 살피다가, 이 보살이 법을 듣고 나면 조용한 데서 마음을 거두고 편안히 머무르면서 생각하기를 ‘말씀대로 수행해야 불법을 얻는 것이요, 입으로만 말한다 하여 청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고 했다. 또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지혜 바다 넓어서 헤아리기 어렵거늘 측량하지도 않고 도리어 헐뜯으면 소가 마신 물은 우유가 되거니와 뱀이 마신 물은 독이 되느니라.
지혜로운 배움은 보리(菩提)를 이루고 어리석은 배움은 생사가 되나니 이와 같이 하면서 분명히 알지 못하면 이것은 배움이 적은 허물일세.
『대열반경(大涅槃經)』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혹 어떤 이는 감로(甘露)를 먹고 목숨을 잃으면서 일찍 죽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감로를 먹고 수명을 더 오래 늘리기도 하네.
어떤 이는 독을 먹고 살아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독을 먹고 죽기도 하나니 거리낌이 없는 지혜가 감로라 이른바 대승의 경전이니라.
이와 같은 대승의 경전을 독이 섞인 약이라고 이름하기도 함은 마치 소(酥)와 제호(醍醐)며 빙사탕(氷砂糖)들이 먹고 소화되면 약이 되거니와 소화되지 않으면 독이 됨과 같네.
방등(方等) 또한 그와 같아서 지혜로운 이에게는 감로가 되거니와 어리석은 이는 불성을 모르는지라 그를 먹으면 독이 되느니라.
또 마치 나무 속에 있는 불의 성질과 우유 속의 타락의 성질은 그 인연을 모두 갖추지 못하면 역시 없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처럼, 중생의 불성도 역시 그러하여 배우지 않고 모른다고 해서 성불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이르되 “지장(地藏)보살이 말하였다. ‘존자여, 진실이 아닌 것이 있음은 마치 아지랑이와 물과 같다고 알고 실로 없는 것이 아님은 마치 불의 성질이 생기는 것과 같다고 알면, 이렇게 관하는 이는 이 사람이 지혜로운 것인가’ ”라고 함과 같다. 논석(論釋)에서 이르되 “마치 경에서 이르되, ‘만일 법은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마치 아지랑이와 물이라고 하는 미혹함과 같고, 만일 법은 없는 것이라고 보면 마치 소경은 해가 없다고 하는 뒤바뀜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실로 없는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니,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이치는 마치 불의 성질[火性]이 생기는 것과 같다. 마치 나무 속에는 불의 성질이 있거니와 분석하면서 구하게 되면 불의 모양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실은 없는 것도 아니니, 나무 속의 불 성질은 비벼대면서 구하게 되면 불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과 같다. 한 마음 역시 그러하여 모든 모양으로 분석하면 심성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실로 없는 것은 아니니, 모든 법 속에서 마음으로 도를 닦으면서 구하게 되면 한 마음은 나타나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중생의 경계 안에서는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안으로는 5음(陰)에게 묶이고 밖으로는 6진(塵)에게 묶이어서 부딪치는 것마다 경계를 나타내고 눈여겨 보면서 망정(妄情)을 냄은 마치 파리가 어디서나 모두 앉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보는 것은 빛깔의 지경에서 뛰어나지 못하고 듣는 것은 소리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마치 그물에 걸린 고기와 같고 시장에 갇힌 까마귀와 같다. 나아감과 물러섬이 다 함께 막힘은 마치 숫양이 울타리를 받는 것과 같고, 놀라고 두려워서 나란히 지저귐은 마치 집을 천막에다 짓고 사는 제비 새끼들과 같다. 만일 경계[塵] 이것이 식(識)인 줄 알고 사물은 이 마음일 뿐인 줄 분명히 알면, 길고 짧음에 구애 받지 않거늘 어찌 크고 작은 것에 굴림을 받겠는가. 곧 인연을 따르고 자취에 응(應)하며 느낌에 나아가고 근기를 따르며 도량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몸은 법계에 나누어져 있으며 언제나 여기에 있는데도 항상 거기에 있고 방소에 살지 않으면서도 방소를 떠나지 않는다. 이 종문(宗門)에 들어가면 광대하기가 이와 같아서 차별된 자취에 계합하고 평등한 근원에 사무침은, 마치 금강산(金剛山)이 순전히 금빛을 나타냄과 같고 마치 사자의 왕이 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음과 같다. 마치 마리산(麻梨山) 안에서는 모두 전단(栴檀)만이 나옴과 같고 마치 첨복림(瞻蔔林) 안에서는 향기만이 자오록함과 같으며, 마치 수미산(須彌山) 남쪽에는 잡된 형상이 나타나지 않음과 같고 마치 금사(金砂)의 큰 강물에는 다시는 구부러진 데가 없음과 같으며, 마치 금강으로 된 도끼의 힘은 견주려 하는 데마다 모두 쓸데없음과 같고 마치 가림이 없는 햇빛은 다다른 데마다 다 같이 밝은 것과 같다. 마치 「입법계품(入法界品)」 중의 서다림(逝多林) 속에서 나타난 바 경계에 대한 게송에서 이르되 “너는 이 서다림을 관찰해야 하리니/부처님 위신(威神)의 넓고 끝이 없음으로/온갖 장엄을 모두 나투어 보여/시방의 법계가 모두 충만했음을. 시방의 온갖 모든 국토는/그지없는 품류들로 크게 장엄되어/그 자리 등의 경계 안에서/색상이 분명하게 모두가 나타났네”라고 함과 같다. 마치 자행 동녀(慈行童女)가 “비로자나장전(毘盧遮那藏殿) 안의 낱낱의 벽 속과 낱낱의 기둥 속과 낱낱의 거울 속과 낱낱의 모양 속과 낱낱의 형상 속과 낱낱의 마니보(摩尼寶) 속과 낱낱의 꾸미개 속과 낱낱의 금 방울 속과 낱낱의 보배나무 속과 낱낱의 보배 형상 속과 낱낱의 보배 영락 속에서는, 모두 법계의 일체 여래가 처음 발심하여 보살행을 닦는 데서부터 큰 서원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공덕이 두루 갖추어지고 등정각을 이룩해서 묘한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드신 것들 까지 보였나니, 이와 같은 영상(影像)이 모두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음은 마치 깨끗한 물속에 허공의 해와 달ㆍ별들의 뭇 형상들이 널리 보인 것과 같았다”고 함과 같다. 또 마치 법보계 장자(法寶髻長者) 집 안의 보살의 한량없는 복덕 보배 광의 해탈문[福德寶藏解脫門]을 얻은지라 그 집은 넓고 커서 10층(層)에 8문(門)이 있었는데, 선재(善財)가 들어가자마자 차례로 살펴보매 “맨 아래 층에서는 모든 음식들을 보시하고, 제2층에서는 모든 보배 옷을 보시하며, 제3층에서는 온갖 보배 꾸미개를 보시하는 것이 보이고, 내지 제10층에서는 일체 여래가 그 안에 가득히 차서 처음 발심하여 보살행을 닦는 것으로부터 생사를 뛰어나고 큰 서원과 신통력이 원만히 이룩되어 부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도량에 모인 대중들에게 바른 법륜을 굴리며 중생을 조박하는 등의 이러한 모든 것이 다 분명하게 보였다”고 함과 같다. 해석하여 보자. 서다림의 끝이 없다는 것과 비로자나장전에서 나타난 것과 보계 장자 집의 넓고 크다는 등의 모두는 바로 불가사의한 마음이 원융하게 거두되 장애가 없다는 것이다. 10층은 10바라밀이요 8문은 8정도분(正道分)이며, 내지 온갖 장엄된 기구 안에서 불사(佛事)를 나투어 보임은 모두가 1심(心) 법문이니, 체성과 작용이 두루하여 겹겹으로 도(道)를 나타내고 하나하나 종(宗)을 제시한다. 그것에 어두운 이는 깨치지 못했고 밝지 못하며, 그것에 집착한 이는 반연이 되고 대경(對境)이 된다. 마치 소경이 보지 못한다 하여 5색(色)의 무늬가 없는 것이 아님과 같다. 마치 귀머거리가 듣지 않는다 하여 어찌 5음(音)의 음향이 끊어지겠는가? 또 마치 서다림 속의 성문들이 알지 못하고 항하수 속의 아귀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제 업(業)이 막은 바요 법이 숨거나 감춘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제 권하노니, 아직 살피지 못한 사람은 보고 듣고서 곧장 들어가되, 마치 골짜기 안에 들리는 메아리는 끝내 다른 음성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거울 속에 보인 형상은 다른 이의 바탕이 아님과 같은 줄 분명하게 증험해야 하리니, 스스로가 사량(思量)을 끊으면 현재 증득됨이 의심 없으리라. 다시 누구가 앞이요 뒤이기에 성인됨이 멀다 하겠으며, 이를 체달하면 이내 신령[神]이거니 도(道)인들 멀겠는가? 부딪치는 일마다 진실이리라. 【문】 이미 참 마음으로 종(宗)을 삼고 근본[本]을 삼았으니, 어떻게 그 공능(功能)이 잔잔하면서 항상 머무름이 미래 세상까지 다한다 함을 밝힐 것인가? 【답】 이 마음의 법은 묘하기 때문에 신령 그대로라 측량할 수도 없으며 의지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예도 지금도 아니다. 다만 이것은 있는데도 보고 들을 수 없을 뿐이요 이것이 한결같이 비고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지없는 미묘한 작용이 쌓여 아주 없지도 아니하고 항상 하지도 아니하며 측량하지 못할 영통(靈通)이 갖추어져 숨은 것도 아니고 나타난 것도 아니다. 고덕(古德)이 이르되 “비록 열반이 영원히 고요하다 하더라도 지혜의 본체는 없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가지고 미래 세상까지 다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마음의 신령은 범부와 성인의 근본이어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끊어짐이 없는 줄 알 것이니, 모든 부처는 언제나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고 조사(祖師)는 적실하게 이 종(宗)을 가리킬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야말로 모양 없는 진여(眞如)이거니 진여가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함이 없는 도이거늘 도가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마치 깊숙한 골짜기에 바람이 계속되면서 작은 소리가 끊이지 않음과 같고 마치 큰 종의 음향이 두드림을 따르면서 맑은 여운이 항상 생기는 것과 같다.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되 “도(道)에는 뿌리[根]가 없되 신령하게 비추면서 언제나 존재할 뿐이요 도에는 바탕[體]이 없되 미묘하여 한결같이 참될 뿐이며, 도에는 일[事]이 없되 예와 이제에 똑같이 귀히 여길 뿐이고 도에는 마음[心]이 없되 만물에는 원만하게 구비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대저 뿌리가 있으면 머무름이 있고 머무르면 이내 캄캄한 방에 들어서 마치 바늘로 뚫어도 하늘은 보이지 않고 바늘을 주워도 땅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요, 뿌리가 없다면 머무름이 없음은 마치 햇빛ㆍ달빛이 비추면 갖가지 빛깔을 보게 됨과 같으리니, 이에 신령하게 비추면서 언제나 존재한다. 대저 바탕이 있으면 서로 다른 질애(質礙)요 바탕이 없으면 한 성품으로 항상 통하리니, 이에 미묘하여 한결같이 참이다. 대저 일이 있으면 모양에 국집(局執)한 바 되거니와 일이 없으면 마음자리가 탄연(坦然)해지리니, 이에 예와 이제에 똑같이 귀히 여긴다. 대저 마음이 있으면 분별하며 각각 취할 것이요 마음이 없으면 역순(逆順)이 같은 데로 돌아가리니, 이에 만물에 원만하게 갖추어진다. 이미 이 항상 머무는 종체(宗體)를 통달한지라 저절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부처되는 이에 휴식하지 않으리니, 바로 이것이 불덕(佛德)이요 보현(普賢)이며 순전히 이는 다른 이를 이롭게 하되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는 그지없는 행이다. 그런 까닭에, 『보성론(寶性論)』에서 저절로 부처되는 일에 휴식하지 않는다는 게송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의 체성은 마치 거울의 형상과 같고 마치 저 유리(瑠璃)로 된 땅과 같으며 또 소리가 없지도 아니함은 마치 하늘의 묘한 법북[法鼓]과 같네.
법 일[法事]을 짓지 않음도 아님은 마치 저 큰 구름과 비가 이익을 짓지 않음이 없어서 갖가지의 모든 종자가 나지 않음도 아님과 같네.
마치 범천(梵天)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순수하고 좋지 아니함도 않음 같고 마치 저 큰 태양의 바퀴가 모든 어둠 부수지 않음이 없음 같네.
마치 저 여의보주(如意寶珠)는 희유하지 않음이 없음과 같고 마치 저 소리로 울리는 메아리는 인연으로 이룩되지 않음이 아님 같네.
마치 저 허공이 온갖 중생들의 의지가 되어 주지 않음이 아님 같고 마치 저 대지(大地)가 온갖 물건들을 머물러 지니지 않음도 아니며
저 대지에 의하여 모든 세간의 갖가지 보리(菩提)와 세간을 벗어나는 묘한 법에 의하여 모든 깨끗한 업[白業]과 모든 선(禪)이며 4무량(無量)과 4공정(空定)을 성취하느니라.
모든 여래는 저절로 모든 세간에 항상 머무르면서 이러한 모든 업(業)이 있으시니 온갖 것은 앞과 뒤가 아닌지라 이렇게 미묘한 업을 짓는다.
『무생의(無生義)』에서 이르되 “만일 묘하고 신령함이 없이 한결같이 비고 고요하기만 하면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여 법을 설하고 사람들을 제도함이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본래 자리[本地]는 미묘하고 신령함이 있어서 텅 비지도 않았고 끊어지지도 않았는 줄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지 사자후(師子吼)께서 말씀하되,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이름한다”고 하셨다. 제일의공은 지혜(智慧)라고 하나니, 지혜 바로 이것이 미묘하고 신령하기 때문에 원인이 사라졌다[因滅]고 한다. 이 빛깔[色]은 항상 머무름의 해탈의 빛깔[常住解脫色]을 획득하나니, 그러므로 중간에 함유한 묘한 빛깔과 같은 5음(陰)은 항상 머무르면서 동요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신불멸편(神不滅篇)에서 이르되 “대저 정신[神]이란 무엇인가. 정묘함이 지극하면서 신령스런 것이다. 정묘함이 지극하다면 불뚝한 형상으로서는 헤아릴 바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묘한 물건[妙物]이라고 말씀했다. 비록 으뜸가는 지혜가 있다 해도 오히려 결정지울 수가 없나니, 그 바탕의 모양은 그 그윽한 이치[幽致]를 다하였다. 정신[神]이라 함은, 원만하게 응(應)하되 주인이 없고 묘함이 극진하되 이름이 없으며 사물을 느끼면서 움직이고 수(數)를 가자하여 행해진다. 사물을 느끼면서도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사물이 변화하는 데도 소멸되지 않고 수를 가자(假藉)하면서도 수가 아니기 때문에 수가 다하는데도 끝나지 않는다. 정(情)이 있으면 사물을 느낄 수가 있고 식(識)이 있으면 수를 구할 수 있다. 수에는 상세함과 소략함[精麤]이 있기 때문에 그 성질은 각각 다르고, 지혜에는 밝음과 어둠[明昩]이 있기 때문에 그의 비춤은 동일하지 않다. 이로써 미루어 논하건대, 곧 변화[化]는 정(情)으로써 느끼고 정신은 변화로써 전하며, 정은 변화의 어머니가 되고 정신은 정의 근본이 된다. 정에는 사물에 계합하는 도(道)가 있고 정신에는 옮음에 명합하는 공(功)이 있나니, 깨쳐 사무치기만 하면 근본에 돌아가고 도리에 미혹되면 사물을 따를 뿐이다. 내지 혹은 하나의 변화에서 모이고 흩어지면서 정신의 도[神道]를 생각하지 않고 묘한 물건의 신령함이 있는데도 상세함과 소략함으로 다함을 동일하게 여기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마치 불이 땔나무에 전해짐과 같고 마치 정신이 몸에 전해짐과 같다. 깊이 미혹된 이는 몸이 한 생(生)에서 썩어 다한 것으로 보아 문득 정신과 정(情)이 다 같이 상실된 것으로 여기나니, 마치 불이 하나의 나무에서만 끝나는 것으로 보아 끝내 이것에서 다할 뿐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인연이 물러가고 몸은 마르되 참 신령한 것[眞靈]은 떨어지지 않나니, 마치 땔나무가 다하면 불은 꺼지되 불 성질은 늘 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인연은 비록 금생(今生)에서는 소멸된다 하더라도 저 인연은 다시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반야음(般若吟)에서 이르되 “온 몸 뼈는 무너져 흩어진다 하더라도/한 물건은 길이길이 신령하느니라”고 했으니, 참 마음은 잔잔하여 항상 머무른다 하겠다. 마치 『화엄경』에서 이르되 “온갖 허환한 마음으로 반연한 바 법은 한량없는 줄 알기 때문이다. 불자여, 마치 여의주(如意珠)가 구함이 있는 대로 온갖 모두를 얻고 구하는 이가 그지없어도 뜻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여의주의 세력은 끝내 모자라거나 그치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러하여 이 삼매에 들어가면 마음은 요술과 같아서 온갖 모든 법의 경계를 내어 두루하고 그지없으면서도 모자라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 줄을 안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보현(普賢)의 걸림이 없는 행의 지혜를 성취하여 한량없고 광대한 허환한 경계를 관찰함이 마치 영상(影像)에 늘거나 줆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불자여, 마치 범부가 저마다 따로따로 마음을 내되 이미 내었고 현재 내고 있고 장차 낼 것이 끝도 끝도 없으며 아주 없는 것도 없고 다함도 없으며 그 마음은 흐르고 옮겨가면서 계속 끊어지지 않고 불가사의한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러하여 이 보환문삼매(普幻門三昧)에 들어가면 끝도 없고 끝도 없으며 측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보현보살은 보환문의 한량없는 법을 환히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마치 난타마나사 용왕(難他摩那斯龍王)과 그 밖의 큰 용들이 비를 내릴 적에는 빗방울이 마치 수레 굴대만큼 하여 끝도 없고 끝도 없으며, 비록 이와 같은 비와 구름이 끝내 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로 이것이 모든 용의 지음이 없는 경계[無作境界]인 것과 같으니라”고 함과 같다. 또 이르되 “한 생각 동안에 온갖 마음과 마음이 아닌[非心] 자리의 경계의 광[藏]을 모두 아나니, 마음이 아닌 곳에서 마음 내는 것을 보이면서 언어를 여의고 지혜에 편히 머무르며 모든 보살이 행한 바의 행을 같이하고 자재한 힘으로써 부처되는 도를 보이되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언제나 휴식이 없으며, 온갖 세간과 중생과 겁(劫)의 수는 허망한 생각과 말로 이룩된 바이므로 신통과 서원의 힘으로 모두 잘 나투어 보인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온갖 마음과 마음 아닌 자리의 경계의 광을 모두 안다’ 함은, 식(識)이 경계에서 행해짐을 마음이라 하고 지혜가 경계에서 행해짐을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 때문에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모양[知]을 얻는 것은 식이요, 모양을 얻지 못한 것은 지혜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보살은 허망한 인연을 따르면서 세간법을 버리지 않고 방편 가운데서 모두 잘 나투어 보이되, 증겁(增劫)ㆍ감겁(減劫)을 따르면서 길고 짧은 인연에 맡기고 큰 서원의 바람을 타고서 계속 끊이지 않으며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함에 휴식이 없다. 마치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되 “11지(地)의 등각위(等覺位)보살은 큰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세속에 나아가 중생 제도하는 문을 수행하고 스스로 세간을 벗어난 도[出世道]가 원만했음을 표시하면서 다시는 해탈을 구하거나 물듦을 여읜다거나 청정함을 여읜다고 하는 마음이 없다. 다만 법성(法性)의 배를 타고 큰 자비의 돛을 펴며 큰 지혜로써 뱃사공을 삼아 본래 서원의 바람을 따르며 모든 바라밀을 찬양하는 그물로 언제나 나고 죽는 바다에 노닐면서 온갖 중생들로서 집착이 있는 고기를 걸러 내어 의지함이 없는 넓은 광명의 언덕에 편안히 놓아두며, 언제나 온갖 곡두[幻]를 내면서 만행(萬行)의 공덕인 장애 없는 보배 당[無礙寶堂]에 머무를 뿐이니, 아래서와 같은 자씨(慈氏)가 살고 있는 누각이 그것이다”라고 함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