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조당집소재순지화상설(祖堂集所載順之和尙說) / 祖堂集所載順之和尙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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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소재 순지화상설祖堂集所載順之和尙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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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1) 소재 순지화상설祖堂集所載順之和尙說1)
오관산 서운사2) 순지(五冠山 瑞雲寺 順之)
김귀주 (역)
총목차總目次
상을 그려서 법을 드러내 보이다(表相現法)
세 번의 성불론(三遍成佛篇)
 1. 이치를 증득한 성불(證理成佛)
 2. 수행이 원만한 성불(行滿成佛)
 3. 나타내 보이는 성불(示顯成佛)
삼편三篇
 제1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 第一
 제2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 第二
 제3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 第三
상을 그려서 법을 드러내 보이다(表相現法)
스님께서는 때때로 상을 그려 법을 표현하여, 진리를 증득함에 더디고 빠름이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중에는 네 개의 짝으로 된 여덟 개의 형상이 있다.

○ 이 상은 의지할 열반의 상(所依涅槃相) 또는 이치인 불성의 상(理佛性相)3)이라 하는데 중생이나 성자들이 모두 이 상에 의지한다. 상은 비록 다르지 않으나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기 때문에 범부도 있고 성자도 있다. 이 상을 아는 자를 성자라 하고, 이 상을 알지 못하는 자를 범부라 한다.
그래서 용수龍樹가 남인도에서 설법할 때 대중들에게 몸이 마치 둥근 달과 같은 기이한 형상을 나타내 보였는데 그 좌상에선 오직 설법만 들을 수 있을 뿐 그 형체는 볼 수 없었다.4) 대중 가운데 제바提婆5)라는 장자가 있었는데 그가 대중에게 물었다. “이 상서를 알겠는가?” 그러자 대중이 말하기를 “장자가 아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제바는 마음이 고요해졌으므로 상을 보고 묵묵히 깨닫고서 대중에게 말했다. “이 상서는 대사가 불성을 드러내 보인 것이고, 대사의 몸이 아닌 것은 형상 없는 삼매(無相三昧)이고, 보름달 같은 형상은 불성을 뜻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대사가 몸을 드러내고 그 자리에서 게송을 읊었다.

身現圓月相  몸이 보름달 형상을 나타냄은
以表諸佛體  모든 불성의 체를 표현코자 함이요
說法無其形  법을 설함에 형체가 없음은
用辯非聲色  말하는 것이 소리와 형색이 아니기 때문이라네

어떤 사람이 이 월륜상月輪相으로 물어 오면 원상 가운데 소 우牛 자를 써서 대답한다.


003_0762_c_01L[祖堂集所載順之和尙說]

003_0762_c_02L1)祖堂集所載順之和尙說 [1]

003_0762_c_03L

003_0762_c_04L五冠山瑞雲寺順之 [1]

003_0762_c_05L表相現法

003_0762_c_06L
師有時表相現法示徒證理遲疾此中
003_0762_c_07L四對八相

003_0762_c_08L
○此相者所依涅槃相亦名理佛性相
003_0762_c_09L與群生衆聖皆依此相相雖不異迷悟
003_0762_c_10L不同故有凡夫有聖謂識此相者名爲
003_0762_c_11L聖人迷此相者名爲凡流是故龍樹在
003_0762_c_12L南印土則爲說法對諸大衆而現異
003_0762_c_13L身如月輪當於坐上唯聞說法
003_0762_c_14L見其形彼衆之中有一長者名日提
003_0762_c_15L謂諸衆曰識此瑞不衆曰非其長
003_0762_c_16L聖誰能辯耶尒時提婆心根宿靜亦見
003_0762_c_17L相默然契會乃告衆曰今此瑞者師現
003_0762_c_18L佛性非師身者無相三昧形如滿月
003_0762_c_19L佛性之義語猶未訖師現本身座上
003_0762_c_20L偈曰身現圓月相以表諸佛體說法
003_0762_c_21L無其形用辯非聲色若有人將此月輪
003_0762_c_22L相來問相中心着牛字對也

003_0762_c_23L{底}祖堂集第二十卷「五冠山瑞雲寺順之和
003_0762_c_24L尙」條(高麗大藏經補遺板遠凾) 題名及撰者名
003_0762_c_25L補入{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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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 이 상은 소가 인초忍草6)를 먹는 상(牛食忍草相)7) 또는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루는 상(見性成佛相)이라 한다. 어째서인가?
경에 이르기를 “설산에 인욕이라 불리는 풀이 있는데 소가 그것을 먹으면 제호醍醐를 낸다.”8)라고 했고, 또 “중생이 대열반의 법을 듣거나 물어서 알게 되면 불성을 본다.”9)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풀은 묘한 법을 비유하고, 소는 뛰어난 근기를 비유하며, 제호는 부처를 비유함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소가 풀을 먹으면 제호를 내듯이 사람이 법을 알면 정각을 이룬다. 그러므로 소가 인초를 먹는 상이라고도 하고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상10)이라고도 한다.

○犇11) 이 상은 삼승인이 공을 구하는 상(三乘求空相)12)이다. 어째서인가?
삼승인이 진공眞空에 대해 들으면 ‘있다’는 마음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진공을 증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상 아래 소 우牛 자 셋을 쓴다. 만약 이 상으로 물어오면 점차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루는 상(漸次見性成佛相)13)으로 대답한다.

▼(○*牛) 이 상은 노지의 흰 소의 상(露地白牛相)이다. 노지란 부처의 경지, 또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이다. 흰 소는 법신을 아는 오묘한 지혜이다. 그런 까닭에 한 마리 소가 원상 안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어찌하여 월륜상月輪相 밑에 세 마리 소를 그려놓 고, 또 월륜상 가운데 ‘우牛’를 써서 대답하는가?
월륜상 아래 세 마리 소는 삼승을 나타내고, 월륜상 가운데 한 마리 소는 일승을 나타낸다. 그런 까닭에 권승權乘14)을 들어서 진실을 나타내어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대답한다.
앞에 월륜상 안에 ‘우牛’를 쓴 것은 ‘소가 인초를 먹는 상’이라 하더니, 무슨 까닭으로 다시 월륜상 안에 ‘우牛’를 쓰고 이것을 ‘노지의 흰 소의 상’이라고 하는가?
두 곳 다 똑같은 상에 똑같은 ‘우牛’인데 어째서 설명하는 글이 다른가?
설명하는 글은 다르지만 상과 소는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같은 상과 같은 소를 두 곳에서 각기 나타내는가?
상과 소는 다르지 않지만 성품을 봄에 더디고 빠름이 같지 않기 때문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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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此相者牛食忍草相亦名貝性成佛
003_0763_a_02L何以故經云雪山有草名爲忍辱
003_0763_a_03L牛若食者則出醍醐又云衆生若能聽
003_0763_a_04L受諮啓大涅槃則見佛性故當知草喩
003_0763_a_05L妙法牛喩頓機醍醐喩佛如是則牛
003_0763_a_06L若食草則出醍醐人若解法則成正覺
003_0763_a_07L故云牛食忍草相亦名見性成佛相也
003_0763_a_08L○犇此相者三乘求空相何以故
003_0763_a_09L乘人聞說眞空有心趣向未證入眞空
003_0763_a_10L故表圓相下畵三牛也若將此相來問
003_0763_a_11L以漸次見性成佛相對之

003_0763_a_12L
▼(○*牛)此相者露地白牛相謂露地者
003_0763_a_13L亦名第一義空白牛者諮法身之
003_0763_a_14L妙慧也是故表一牛入圓相也問何故
003_0763_a_15L月輪相不着三獸又月輪相中心着牛
003_0763_a_16L對之耶答月輪相下三獸是表三
003_0763_a_17L月輪相中心一牛是表一乘是故
003_0763_a_18L擧權乘來現實入證對之問向前已說
003_0763_a_19L月輪相中心着牛是牛食忍草相何故
003_0763_a_20L又言月輪相中心着牛者露地白牛相
003_0763_a_21L兩處皆是同相同牛何故說文不同
003_0763_a_22L答說文雖別相及牛則不異問若
003_0763_a_23L也不異何故兩處各現同相同牛耶
003_0763_a_24L雖相及牛則不異見性遲疾不同故

003_0763_b_01L곳에서 각기 같은 상과 같은 소를 나타낸 것이다.
성품을 봄에 더디고 빠름이 각기 다름을 논한다면, 인초를 먹는 소와 노지의 흰 소 중에 어떤 것이 더디고 어떤 것이 빠른가?
인초를 먹는 소는 화엄회상에서 단박에 진실한 성품을 보는 소를 밝힌 것이기 때문에 빠르고, 노지의 흰 소는 법화회상에서 삼승을 모아 일승으로 돌아가는 것15)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더디다. 그러므로 설명하는 글이 비록 다르긴 하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은 같다. 그런 까닭에 같은 상, 같은 소를 들어서 이치와 지혜가 다르지 않음을 밝힐 뿐 그 나온 곳이 전적으로 같다고 말하지 않는다.16)

牛○17) 이 상은 과에 계합하고 인을 닦는 상(契果修因相)이다. 어째서인가? 초발심주初發心住에서 비록 정각을 이루었으나 갖가지 행을 얻지 못했고, 부처와 동등한 지혜를 가졌으나 행이 부처의 지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상으로 나타내었다. 옛사람18)이 “여래가 행한 자취를 따라 밟는다.”19)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상이다. 어떤 사람이 이 상으로 물어오면 다시 월륜상 가운데 ‘만卍’을 써서 대답한다.

▼(○*卍) 이 상은 인도 원만하고 과도 원만한 상(因圓果滿相)이다.
어찌하여 월륜상 위에 ‘우牛’를 쓴 것으로 물어오면 월륜상 가운데 ‘만卍’을 써서 대답하는가?
월륜상 위에 ‘우牛’를 쓴 것은 과에 계합해서 인을 닦는 상이고, 월륜상 가운데 ‘만卍’을 쓴 것은 인도 원만하고 과도 원만한 상이다. 인을 들어서 물어 오는지라 과를 나타내어 대답한다.

○牛 이 상은 공을 구하여 부지런히 중행하는 상(求空精行相)이다.20) 왜냐하면 문 앞의 초암草庵에서 보살이 공을 구하기 때문이다. 경에 “삼아승기겁 동안 보살행을 닦으면서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한다.”21)라고 했으니 이렇게 구하는 마음을 쉬지 않는 까닭에 이 상으로 표현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상으로 물어 오면 월륜상 가운데 ‘왕王’을 써서 대답한다.

▼(○*王) 이 상은 실제實際22)를 점차 증득하는 상(漸證實際相)이다. 어째서인가? 어떤

003_0763_b_01L處各現同相同牛問若論見性遲疾各
003_0763_b_02L別者食忍草生與露地白牛誰遲誰
003_0763_b_03L疾耶答食忍草牛則明花嚴會中頓見
003_0763_b_04L實性之牛故疾露地白牛則明法華
003_0763_b_05L會中會三歸一牛1) [2] 是故說文雖則
003_0763_b_06L不同證理不異故擧同相同牛明理
003_0763_b_07L智不異不言來處全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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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此相者契果修因相何以故
003_0763_b_09L發心住雖成正覺而不㝵衆行慧等佛
003_0763_b_10L行不過位故表此相也古人云
003_0763_b_11L履踐如來所行之跡則此相也若有人
003_0763_b_12L將此相來問又作月輪相中心着卍字
003_0763_b_13L對之

003_0763_b_14L
▼(○*卍)此相者因圓果滿相也問何故月
003_0763_b_15L輪相上頭着牛字來月輪相中心着卍
003_0763_b_16L字對之答月輪相上頭着牛者契果
003_0763_b_17L修因相月輪相中心着卍字者因圓果
003_0763_b_18L滿相擧因來現果對之

003_0763_b_19L
○牛此相者求空精行相謂門前草庵
003_0763_b_20L菩薩求空故經云三僧祇修菩薩行
003_0763_b_21L忍能忍難行能行求心不歇故表此
003_0763_b_22L相也若有人將此相來問月輪相中心
003_0763_b_23L着王字對之

003_0763_b_24L
▼(○*王)此相者漸證實際相何以故若有

003_0763_c_01L보살이 여러 겁을 수행하여 네 가지 마적魔賊23)을 쳐부수고 비로소 무루진지無漏眞智를 얻어 불지佛地에 깨달아 들어갔다면 남은 습기習氣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거칠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성군聖君이 뭇 도적을 항복시켜 나라가 평안해지면 더 이상 도적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이 상으로 표현하였다.

다음 두 개의 짝24)으로 된 네 개의 상은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리킨 것이다.

牛▼(○*人) 이 상은 생각과 견해를 일으키는 가르침을 버리는 상(想解遣敎相)이다. 어떤 사람이 부처가 설한 평등한 일승법을 의지해 잘 연구하고 잘 해탈하여 실로 착오가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지理智를 알지 못하고 남의 말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이 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이 상으로 물어 오면 위의 ‘우牛’를 지운 것으로 대답한다.

▼(○*人) 이 상은 근본을 알아 근원으로 돌아가는 상(識本還源相)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마음을 돌이켜 공의 동굴에 머무르고 조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 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탁 트인 대지에 초연히 앉아 오음五陰을 알아서 열반에 든다.”25)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상이다.
어찌하여 위의 ‘우牛’는 버리고, 원상 가운데 ‘인人’은 버리지 않는가?
원상에 있는 ‘인人’은 이치와 지혜를 표현한 것이지만 위에 있는 ‘우牛’는 사람의 생각과 견해를 비유한다. 어떤 사람이 가르침에 의거해 삼장三藏의 교전을 분석한다고 하더라도 자신 안의 이지理智를 드러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다 생각이고 견해일 뿐이니, 생각과 견해가 생겨나지 않으면 이지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위의 ‘우牛’는 버리되 원상 안의 ‘인人’은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 이르기를 “그 병만 제거할 뿐 법은 제거하지 않는다.”26)라고 했다.
어찌하여 범부에게는 가르침에 의거해 법을 배우게 하지 않는가?
지혜로운 이라면 가르침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심식心識을 쓰는 범부는 가르침에 의거해 봤자 아무런 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부처님이 설한 삼장三藏 경전은

003_0763_c_01L菩薩經劫修行壞四魔賊始得無漏眞
003_0763_c_02L證入佛地更無餘習所2) [3] 似聖王
003_0763_c_03L降伏群賊國界安寧更無怨賊所怛
003_0763_c_04L故表此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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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下兩對四相遣虛指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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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人)此相者想解遣敎相謂若有人
003_0763_c_07L佛所說一乘普法善能討尋善能解脫
003_0763_c_08L實不錯謬而不了自已理智全依他人
003_0763_c_09L所說故表此相也若有人將此相來問
003_0763_c_10L則袪上頭牛字對之

003_0763_c_11L
▼(○*人)此相者識本還源相經云廻神住空
003_0763_c_12L降伏難調伏解脫魔所縛超然露
003_0763_c_13L地坐識陰般涅槃者卽此相也問何
003_0763_c_14L故袪上頭牛字不袪圓相中心人字耶
003_0763_c_15L答圓相中心人字者表理智上頭牛字
003_0763_c_16L者喩人想解若有人雖依敎分析三藏
003_0763_c_17L敎典而未顯自已理智者盡是想解
003_0763_c_18L想解不生則理智現前故袪上頭牛字
003_0763_c_19L不袪圓相中心人字是故經云但除其
003_0763_c_20L病而不除法問何故不許凡人依敎學
003_0763_c_21L法耶答若是智者依敎何用識心凡
003_0763_c_22L依敎無益問諸佛所說三藏經典
003_0763_c_23L「故」下疑脫「遲」 {編}「恒」疑「怚」{編}

003_0764_a_01L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가르침에 의거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에 의거해 생각과 견해를 일으키는 것을 허망하다고 할 뿐이다.27)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기를 “시방 여래의 12부경에 설해진 청정하고 오묘한 이치를 항하의 모래같이 많이 기억한다 하여도 단지 희론만 더할 뿐이다.”28)라고 하였으니, 가르침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과 견해는 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교종에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이는 모두 불과를 이룬다.”29)라 하고, 또 “터럭만 한 선善이라도 일으키면 부처의 경지에 머문다.”30)라고 하는가?
이는 가르침에 의거해 바로 깨달아서 이치와 지혜가 곧장 드러나 명료하게 되는 상근기를 기준한 것이다. 만약 가르침에 의거해서 깨닫지 못하고 생각과 견해를 일으키는 하근기를 기준하면 아무런 이익도 없다. 그러나 이 같은 하근기라도 가르침에 의거하여 종자를 훈습해 내세를 기약한다면 누가 득이 없다 하겠는가?
가르침을 듣기만 해도 모두 불과를 이루고, 터럭만 한 선을 일으켜도 부처의 경지에 머무는데 하물며 경론과 강설을 널리 배운 자이겠는가?
31)

▼(○*人)牛 이 상은 그림자를 머리로 잘못 아는 상(迷頭認影相)32)이다. 무슨 까닭인가?
어떤 사람은 자기 안의 부처와 정토33)를 알지 못하고 다른 곳에 부처와 정토가 있다고 하여 오직 정토에 태어나 부처님을 뵙고 법 듣기를 일심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선행을 닦고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고 또 정토의 명호와 모습을 그린다. 그런 까닭에 이 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공志公(誌公)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격이다.”34)라고 비웃어 말한 것이 바로 이 상이다. 어떤 사람이 이 상으로 물어 오면 원상 아래 있는 ‘우牛’를 지운 것으로 대답한다.

▼(○*人) 이 상은 그림자를 등지고 머리를 바로 아는 상(背影認頭相)이다.
무슨 까닭으로 아래 ‘우牛’는 없애고 원상 가운데 ‘인人’은 없애지 않는가?
중생들은 참 지혜가 열리지 않고 참된 공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오로지 딴 곳의 정토와 부처를 구하여 그 정토에 왕생해 부처를 뵙고 법을 들으려 한다. 그러나 중생이 빛을 돌려 지혜를 일으키고 참된 공을 깨닫는다면 자신 안의 부처와 정토가 일시에 가지런히 드러나 마음 밖의 정토와 부처를 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원상 가운데

003_0764_a_01L有所用不答不是不許依敎悟入
003_0764_a_02L敎想解祇是虛妄是故佛告阿難
003_0764_a_03L復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淸淨妙理如
003_0764_a_04L恒河沙只益戱論當知依敎想解無益
003_0764_a_05L問何故敎云聞佛敎者盡成聖果
003_0764_a_06L云一毫之善發跡駐佛答約上1) [4] 人依
003_0764_a_07L敎便悟直現理智決定明了若約下
003_0764_a_08L根依敎不悟想解無益此下根人依敎
003_0764_a_09L勳種待後世者誰言無益聞佛敎者
003_0764_a_10L盡成聖果一毫之善發跡駐佛何況
003_0764_a_11L廣學經論及講說者

003_0764_a_12L
▼(○*人)牛此相者迷頭認影相何以故
003_0764_a_13L有人不了自己佛及淨土信知他方佛
003_0764_a_14L淨土一心專求往生淨土見佛聞法故
003_0764_a_15L勤修善行念佛名號及淨土名相故表
003_0764_a_16L此相也志公笑云不解卽心卽佛
003_0764_a_17L似騎驢覓驢者卽此相也若有人將此
003_0764_a_18L相來問則袪圓相下牛字對之

003_0764_a_19L
▼(○*人)此相者背影認頭相問何故袪下頭
003_0764_a_20L牛字不袪圓相中心人字耶答衆生未
003_0764_a_21L發眞智未達眞空故專求他方淨土及
003_0764_a_22L往生淨土見佛聞法衆生若廻光發
003_0764_a_23L達得眞空自己佛及淨土2) [5] 時齊
003_0764_a_24L不求心外淨土佛故不袪圓相中心

003_0764_b_01L‘인人’은 없애지 않고 아래 ‘우牛’만 없앤 것이다.
무엇이 자신 안의 부처와 정토인가?
중생이 참 지혜를 일으키고 참 공을 깨닫는다면, 참 지혜 그대로 부처이고 참 공 그대로 정토이다. 이와 같이 체득한다면 어디에서 다시 딴 정토와 부처를 구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불성은 듣고 지니려 하면서 어찌하여 자신의 듣는 성품은 듣지 못하는가?(將聞持佛佛, 何不自聞聞?)”35)라고 했다.

이 다음에 다시 네 짝과 다섯 개의 상이 있다.

○ 이 상은 함을 들어 덮개를 찾는 상(擧函索蓋相) 또는 반달이 둥글기를 기다리는 상(半月待圓相)이라 한다. 어떤 사람이 이 상으로 물어 오면 반달을 더 붙여 대답한다. 질문은 함을 들어 덮개를 찾는 것이고 대답은 덮개로 함을 닫는 것이니, 함과 덮개가 서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보름달 형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원상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를 표현한다.

○ 이 상은 한 손에 옥을 쥐고 계합할 것을 찾는 상(把玉覓契相)이다. 어떤 사람이 이 상으로 물어 오면 원상 가운데 ‘아무개(某 ; 厶)’를 써서 대답한다. 이는 묻는 자가 옥을 한 손에 쥐고 계합할 것을 찾기 때문에 답하는 자는 그것이 옥임을 알아보고 바로 손을 쓴 것이다.

㋰ 이 상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계속해서 찾는 상(釣入索續相)이다. 어떤 사람이 이 상으로 물어 오면 ‘아무개(某 ; 厶)’ 옆에 ‘인亻’을 보태 써서 대답한다.36) 이는 질문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계속해서 찾는 것이기 때문에 답하는 자는 계속해서 보배 그릇을 이루어 준 것이다.

▼(○*佛) 이 상은 이미 보배 그릇을 이룬 상(已成寶器相)이다. 어떤 사람이 이 상으로 물어 오면 다시 원월상圓月相을 그리고 그 안에 ‘토土’를 써서 대답한다.

㊏ 이 상은 도장을 찍듯 현묘한 종지를 전하는 상(玄印旨相)이다. 앞에 나타난 여러 형상을 멀리 초월하고 교의敎意 범주에는 속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은 이 같은 경지를 눈앞에서 보여 주어도 전혀 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털끝만치 어긋나도 하늘과 땅처럼 멀어진다.”라고 했다. 그러나 현묘하게 아는 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상을 알겠는가?
만약 ‘그 사람’이라면 종자기鍾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가락을 듣듯이,37)

003_0764_b_01L人字袪下牛字也問如何是自己佛及
003_0764_b_02L自己淨土答衆生若發眞智達得眞空
003_0764_b_03L卽眞智是佛空是淨土若能如是體會
003_0764_b_04L何處更求他方淨土及佛也是故經云
003_0764_b_05L將聞持佛佛何不自聞聞

003_0764_b_06L
又此下四對五相

003_0764_b_07L
○此相者擧凾索蓋相亦名半月待圓
003_0764_b_08L若有人將此相來問更添半月對之
003_0764_b_09L此則問者擧凾索盖答者將盖着凾
003_0764_b_10L凾盖相稱故已現圓月相也圓相則表
003_0764_b_11L諸佛體也

003_0764_b_12L
○此相者把玉覓契相若有人將此相
003_0764_b_13L來問圓月中心着某對之此則問者把
003_0764_b_14L玉覓契故答者識珠便下手

003_0764_b_15L
㋰此相者釣入索續相若有人將此相
003_0764_b_16L來問某字邊添着人字對之此則問
003_0764_b_17L者釣入索續故答續成寶器也

003_0764_b_18L
▼(○*佛)此相者已成寶器相若有人將此相
003_0764_b_19L來問又作圓月相中心着土字對之

003_0764_b_20L
㊏此相者玄印旨相逈然超前現衆相
003_0764_b_21L更不屬敎意所攝若有人似个對面付
003_0764_b_22L然不見故三祖云毫釐有錯天地
003_0764_b_23L玄隔 [2] 然不無玄會之誰能識此相也
003_0764_b_24L若是其人見而諳會如子期聽百牙之

003_0764_c_01L제바가 용수의 월륜상을 보듯이, 보자마자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파인곡巴人曲을 하는 자가 백설곡白雪曲을 듣듯이,38) 사리불이 유마의 법회에 들어가듯이, 마주보면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근기가 영리한 후학이라면 이것을 가지고 닭이 알을 품을 때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서 깨고 나오듯 단번에 깨닫겠지만, 성정이 둔한 자라면 맹인이 물체를 볼 때 점점 더 잘못 아는 것처럼 배워도 깨닫기 어려울 것이다.

세 번의 성불론(三遍成佛篇)
스님께서는 때때로 세 가지 성불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취지에서 하신 말씀이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이치를 증득한 성불(證理成佛)이고, 둘째는 수행이 원만한 성불(行滿成佛)이며, 셋째는 나타내 보이는 성불(示顯成佛)이다.

1. 이치를 증득한 성불(證理成佛)
이치를 증득한 성불은 선지식의 말끝에서 자기 마음 근원에 본래 한 물건도 없음을 언뜻 돌이켜 성불하는는 것인데, 만행을 닦아 점차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치를 증득한 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처음 발심할 때 바로 정각을 이룬다.”39)라고 하였고, 또 옛사람(永明延壽)이 “불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돌이키면 된다.”40)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 이치를 증득한 성불에서, 체성을 말하면 한 물건도 없지만 삼신三身을 통틀어 논하면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없지 않다. 비록 세 사람이 있다고 하나 여기서는 특히 성품을 보아 부처 이루는 쪽을 논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는 공功이 문수에게 있다. 그래서 옛사람(李通玄)이 “문수는 모든 부처님들의 어머니이다.”41)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이 문수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문수를 참된 지혜(實智)42)라 일컫는다. 모든 부처님이 이 참된 지혜로 보리를 증득했으므로 문수를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한 것이다.

2. 수행이 원만한 성불(行滿成佛)
수행이 원만한 성불은 비록 이미 진리를 끝까지 알았지만 보현의 행원을 따라 보살의 단계를 거치면서 널리 보살도를 닦아서 수행이 고루 갖추어지고 지혜와 자비가 원만해지기 때문에 수행이 원만한 성불이라 한다. 그래서 옛사람이

003_0764_c_01L提婆見龍樹之相不是其人對面不
003_0764_c_02L似巴人聞白雪之歌鶖子入淨名之
003_0764_c_03L假使後學根機玄利將是則頓曉
003_0764_c_04L如鷄把卵啐啄同時相性遲鈍者學而
003_0764_c_05L難曉似盲人相色而轉錯耳

003_0764_c_06L三遍成佛會

003_0764_c_07L
師有時說三遍成佛篇於中有三意云
003_0764_c_08L何爲三一者證理成佛二者行滿成佛
003_0764_c_09L三者示顯成佛

003_0764_c_10L
言證理成佛者知識言下廻光返照
003_0764_c_11L己心原本無一物便是成佛不從萬行
003_0764_c_12L漸漸而證故云證理成佛是故經云
003_0764_c_13L初發心時便成正覺又古人云佛道不
003_0764_c_14L廻心卽是卽此義也此證理成佛
003_0764_c_15L若說體性都無一物通論三身
003_0764_c_16L無一佛二菩薩雖有三人而今見性成
003_0764_c_17L故得成佛功在文殊故古人云
003_0764_c_18L殊是諸佛母所謂諸佛從文殊生故言
003_0764_c_19L文殊者卽實智也一切諸佛因其實
003_0764_c_20L智而證菩提是故文殊是諸佛母耳

003_0764_c_21L
言行滿成佛者雖已窮其眞理而順普
003_0764_c_22L賢行願 [3] 位廣修菩薩之道所行周俻
003_0764_c_23L悲智圓滿故云行滿成佛也故古人云
003_0764_c_24L「恨」疑「根」 {編}▣疑「一」 {編}

003_0765_a_01L“가다가 이른 곳이 본래 왔던 그 자리이다.”4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이 두루 갖추어지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본래 그 자리란 바로 이치이니 수행이 원만한 성불에서 증득한 이치는 앞에서 말한 이치를 증득한 성불에서 증득한 이치와 다르지 않다. 이치는 다르지 않지만 수행이라는 원인으로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수행이 원만한 성불이라 한다.
이 수행이 원만한 성불의 과덕果德을 말하면 오직 보현행으로써 불도를 이루는 것뿐이나 삼신三身을 논하면 여기에도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있다. 비록 세 사람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수행이 쌓여서 부처를 이룬다는 쪽으로 논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는 공功이 보현에게 있다. 그래서 옛사람이 “보현은 부처님들의 아버지이다.”44)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이 보현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보현을 만행萬行이라 한다.45) 모든 부처님이 만행에 의해 보리를 증득했으므로 보현을 모든 부처님의 아버지라고 한 것이다.

한 부처와 두 보살에서, 비로자나는 이치이고 문수는 지혜이며 보현은 행을 뜻하는데, 이 이치와 지혜와 행은 세 사람이 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수가 없다. 또 한 부처와 두 보살은 서로가 주인도 되고 손님도 되니 위 없는 본체에서는 비로자나가 주인이고, 성품을 보는 지혜의 공덕에서는 문수가 주인이며, 만행의 복력福力에서는 보현이 주인이 된다. 그런 까닭에 이통현李通玄이 “일체 부처님은 모두 문수와 보현 두 보살로서 부처와 보리를 이룬다.”46)라고 했고, 또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들의 작은아들과 큰아들이다.”47)라고 했다. 그러므로 세 사람이 서로 주인도 되고 손님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나타내 보이는 성불(示顯成佛)
나타내 보이는 성불은 앞의 이치를 증득한 성불과 수행이 원만한 성불이 스스로의 행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중생을 위해 부처를 이루는, 여덟 가지 모습으로 성도成道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여덟 가지 모습이란 도솔천에서 내려오고,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고, 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도를 이루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 여덟 가지이다. 그래서 나타내 보이는 성불이라 하는 것이니, 이 여덟 가지 모습의 성도는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일 뿐

003_0765_a_01L行到處卽是從來處是故明知所行已
003_0765_a_02L還至本處本處者卽理也此行滿
003_0765_a_03L成佛所證之理不異於前證理成佛之
003_0765_a_04L理雖不異行因至果故云行滿成
003_0765_a_05L佛也此行滿成佛中若擧果德但以
003_0765_a_06L普賢行成佛道論三身亦有一佛二菩
003_0765_a_07L雖有三人而今別取行滿成佛
003_0765_a_08L得成佛功在普賢故古人云普賢是諸
003_0765_a_09L佛父也所謂諸佛從普賢生故言普賢
003_0765_a_10L者卽萬行也一切諸佛因其萬行而證
003_0765_a_11L菩提是故普賢是諸佛父耳

003_0765_a_12L
言一佛二菩薩者遮那是理文殊是智
003_0765_a_13L普賢是行此理智行三人同體故一不
003_0765_a_14L可捨也又一佛二菩薩互爲主伴以本
003_0765_a_15L體無上遮那爲主以見性智功文殊爲
003_0765_a_16L以萬行福力普賢爲主是故李玄通
003_0765_a_17L一切諸佛皆以文殊普腎二大士成
003_0765_a_18L佛菩提也又云文殊普賢爲諸佛作少
003_0765_a_19L男長子故知三人互爲主伴耳

003_0765_a_20L
言示顯成佛者如前證理行滿自行成
003_0765_a_21L佛已畢今爲衆生示顯成佛八相成道
003_0765_a_22L言八相者從兜率天退入胎住胎出
003_0765_a_23L胎出家成道轉法輪入涅槃等八相成佛
003_0765_a_24L故云示顯成佛當知八相成道是報化

003_0765_b_01L진신眞身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 “여래께서는 세상에 나오시지도 않았고, 열반에 드신 일도 없지만 본원의 힘으로 자재한 법을 나타내 보인다.”48)라고 했는데, 이 경은 보신불과 화신불을 통해서 진불眞佛을 가리킨 것이다. 또 경에서 “내가 성불한 뒤로 한량없는 아승기겁이 지났다.”49)라고 하였으니, 석가여래께서 한량없는 겁 이전에 이미 행이 원만한 대각을 이루었으나 중생을 위해서 정각 이루심을 이제야 나타내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이 석가는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 가운데 네 번째 부처님이시다. 과거 장엄겁莊嚴劫 중의 천 부처님과 현재 현겁 중의 천 부처님과 미래 성수겁星宿劫 중의 천 부처님 등 이와 같은 3겁 중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 뭇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고, 차례로 수기를 전함에 털끝만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경전을 즐겨 보고 옛 자취를 거슬러 추적해 한 사람이 성불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면 세 번의 성불을 알 수 있다. 부처를 이루고자 연마하는 자에게 바라노니, 방편을 간략히 살펴보았으면 이제는 마치 사람이 길을 갈 때 지금 사람과 옛날 사람이 같은 길로 다니듯이 먼저 부처와 나중 부처가 다 같은 이 길이었음을 스스로 생각하라. 그래서 이를 기록한다.

삼편三篇50)
스님께서는 때때로 삼편을 설하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진리를 단박에 증득하는 돈증실제頓證實際이고, 둘째는 삼승을 돌이켜 진리를 증득하는 회점증실제廻漸證實際이며, 셋째는 단계적으로 진리를 증득하는 점증실제漸證實際이다.

제1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 第一51)
넓은 광야에 해통該通이라는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대중에게 말하기를 “만약 어떤 중생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하고 삼계를 헤매면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지혜로운 사람에게 참 가르침을 듣고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닫는다면 곧 정각을 이루게 된다. 이는 단계적인 차제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단박에 증득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경에 ‘설산에 인욕이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그것을 먹으면 제호를 낸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003_0765_b_01L非眞是故經云如來不出世亦無有
003_0765_b_02L涅槃以本願力故示顯自在法此經
003_0765_b_03L報化佛中指眞佛也又經云吾從成佛
003_0765_b_04L已來經無量阿僧祇劫故知釋迦如來
003_0765_b_05L無量劫前已成行滿大覺而爲衆生故
003_0765_b_06L示顯始成正覺今此釋迦是賢劫千佛
003_0765_b_07L1) [6] 中第四佛也過去莊嚴劫中一千佛
003_0765_b_08L現在賢劫中一千佛未來星宿劫中一
003_0765_b_09L千佛如是三劫中一切諸佛出現於世
003_0765_b_10L攝化群生相傳授記分毫不錯矣
003_0765_b_11L看敎典推尋古跡通觀一人成佛方樣
003_0765_b_12L應知三遍成佛耳伏請欲磨佛位者
003_0765_b_13L看筌蹄却自思惟前佛後佛皆同此路
003_0765_b_14L如人行路新舊同轍故記而之也

003_0765_b_15L三篇

003_0765_b_16L
師有時說三篇於中有三意第一頓證
003_0765_b_17L實際篇第二廻漸證實際篇第三漸證
003_0765_b_18L實際篇

003_0765_b_19L
廣野中有一仙人名曰該通爲大衆說
003_0765_b_20L若有衆生無始已來不悟性地輪廻
003_0765_b_21L三界隨緣受報忽遇智者演說眞敎
003_0765_b_22L頓悟性地便成正覺不依漸次故名
003_0765_b_23L爲頓證實際是故經云雪山有草
003_0765_b_24L曰忍辱牛若食者卽出醍醐是其意

003_0765_c_01L
대중 가운데 지통智通52)이라는 은자隱者가 선인에게 물었다. “뭇 중생에게 원래부터 성품의 바탕이 있다는 것을 진실로 압니다. 또 일체지자一切智者(부처)의 참 가르침이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참 가르침을 같이 듣고도 깨닫고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릅니까?”
선인이 은자에게 말했다. “비록 중생은 원래부터 성품이 청정하고 뚜렷이 밝은 본체를 가지고 있지만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좇아 많은 겁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별별 몸을 받아서 근성의 예리함과 둔함이 같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참 가르침을 같이 듣고도 깨닫고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르니,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참 가르침을 잘못 설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경에 ‘마치 밝은 해를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지혜의 마음이 없는 이는 끝내 모든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53)라고 한 것이다.”

은자가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고명하신 가르침을 자세히 살피고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니 ‘지혜로운 사람의 설법이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닌데 깨닫고 깨닫지 못함은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원래부터 각기 다른 것이라면, 설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선인이 은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 그대를 위해 말해 주리라. 지혜로운 사람도 원래부터 깨달은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사람도 영원히 미혹한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홀연히 참된 법을 깨달을 수 있으니 지혜로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참된 가르침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겠으며, 만약 참된 가르침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예리함과 아둔함을 가리겠는가? 그런 까닭에 그 중생이 근기가 아둔한 자라면 재차 참된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할 것이고, 그 중생이 근기가 예리한 자라면 참 가르침을 듣고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달을 것이다. 그런 이가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의 차이는 없어도 근기에 예리함과 아둔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만 위해 설법하지 않는 것은 마치 어미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아서 뭇 알들을 모두 품 밖으로 내보내도 부화할 알은 내보내지 않는다. 이는 어미 닭이 뭇 알들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부화할 알만 사랑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품 밖으로 내보내고 내보내지 않는 것은 알의 성품에 있는 것이지

003_0765_c_01L衆中有一隱士名曰智通啓仙人
003_0765_c_02L信知群品自有性地又一切智者演
003_0765_c_03L說眞敎不爲一人何以故同聞眞敎
003_0765_c_04L悟與不悟各各不同仙人告隱士言
003_0765_c_05L生雖有自性淸淨圓明之體背本逐末
003_0765_c_06L多劫多時受別異身根性利鈍不等故
003_0765_c_07L同聞眞敎悟與不悟各各不同不是智
003_0765_c_08L者說眞敎禍故經云猶如明淨曰 [4] 瞽者
003_0765_c_09L眞能見無有智慧心終不能見隱士啓
003_0765_c_10L仙人曰諦觀高指且尋來言智者說
003_0765_c_11L法不爲一人悟與不悟唯在愚智然則
003_0765_c_12L愚智本來各各不同說法有何所用
003_0765_c_13L人告隱士言汝今諦聽吾爲汝說
003_0765_c_14L人不是本悟愚人不是長迷愚人忽悟
003_0765_c_15L眞說智人不是外來若也不用眞敎愚
003_0765_c_16L爭成智人若也不用眞敎何處辯得利
003_0765_c_17L是故衆生若是根鈍者再聞眞敎
003_0765_c_18L不曉性地衆生若是利根者忽聞眞敎
003_0765_c_19L頓曉性地便是智人也何處愚智有隔
003_0765_c_20L是故當知凡聖不隔根有利鈍智者
003_0765_c_21L說法亦不爲一人猶如母鷄抱卵衆卵
003_0765_c_22L皆發 [5] 窼不發可卽母鷄唯不愛衆卵
003_0765_c_23L愛贊窼是則發與不發唯在卵性
003_0765_c_24L▣疑「之」 {編}

003_0766_a_01L어미 닭이 알을 잘못 품은 것이 아니다. 일체지자도 이와 같아서 널리 대중을 위해 참 가르침을 설하지만 근기가 예리한 자는 단박에 깨닫고, 근기가 아둔한 자는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근기가 예리한 자만을 좋아하고 근기가 아둔한 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깨닫고 깨닫지 못함이 근성에 있는 것이지 지혜로운 자의 설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경에 ‘들은 모든 법은 다른 것을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54)라고 했으니, 방편에 의지해 지혜로운 자가 항상 묘한 법을 설하지만 깨닫고 깨닫지 못함은 학인에게 달린 것이지 지혜로운 자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은자가 물었다. “근기가 예리한 중생이라면 문득 참 가르침을 듣고 말끝에 지혜가 생겨나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닫는다 하셨는데, 이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는 지혜를 비추는 문수이다.”
은자가 물었다. “문수의 지혜 비춤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문수의 지혜 비춤은 성품의 바탕에 있다.”
은자가 물었다. “지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지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은자가 물었다. “지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지혜 비춤은 증득하는 사람이고, 성품의 바탕은 증득할 법이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의 차이가 없지 않다. 그래서 옛사람이 ‘이 지각없는 반야로 저 형상 없는 진제를 증득한다.’55)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와 성품은 같지 않다. 한편 증득하는 지혜 비춤은 지각이 없고, 증득할 성품의 바탕은 체가 없어서 주체와 대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옛사람이 ‘지혜로 참 경지를 다 궁구하면 주체와 대상 모두 사라진다.’56)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지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다르지 않다.”

은자 지통이 선인의 말을 듣고 고명한 가르침을 받들어 단박에 의심을 해결했다. 이때 해통 선인이 대중에게 말했다. “먼저는 지통에게 견성에 대해 말했는데, 만약 중행衆行을 논하면 꼭 이렇지는 않다.”
대중 가운데 행통行通이라는 유자遊子가 선인에게 물었다. “견성은 그렇고,

003_0766_a_01L是母鷄抱卵之禍一切智者亦復如是
003_0766_a_02L廣爲大衆演說眞敎根利者頓曉根鈍
003_0766_a_03L者不曉可則智者唯愛利根不愛鈍根
003_0766_a_04L是卽曉與不曉唯在根性不是智者說
003_0766_a_05L敎之禍是故經云所有聞法不由他悟
003_0766_a_06L然卽知假方便智者常說妙法悟與不
003_0766_a_07L此在學人不在智者隱士問曰
003_0766_a_08L生若是利根忽聞眞敎言下慧發
003_0766_a_09L悟性地此是何人仙人答日此是智
003_0766_a_10L照文殊隱士問曰文殊智照在何處
003_0766_a_11L仙人答曰文殊智照是在性1) [7] 隱士
003_0766_a_12L問曰2)照智與性地同異若何仙人答
003_0766_a_13L智照與性地不同不異隱士問曰
003_0766_a_14L智照 [8] 與性地不同不異其義如何仙人
003_0766_a_15L答曰智照是能證之人性地是所證之
003_0766_a_16L故不無能所是故古人云以此無
003_0766_a_17L知之般若證彼無相之眞諦故智與性
003_0766_a_18L不同又能證智照無知所證性地無體
003_0766_a_19L不有能所是故古人云智窮眞際
003_0766_a_20L所兩亡故智照與性地不異3) [9] 隱士
003_0766_a_21L智通聞仙人說奉契高指頓決疑網也
003_0766_a_22L于時該通仙人爲大衆說先爲智通已
003_0766_a_23L說見性若論衆行不必如此此衆中
003_0766_a_24L有遊子名曰行通啓仙人曰見性如此

003_0766_b_01L중행은 어떠합니까?”
선인이 유자에게 말했다. “어떤 중생이 참 가르침을 듣고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본 다음,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와 이타의 자비행을 실천하기 때문에 중행이라 한다.”

유자가 선인에게 물었다. “저희가 선인께 참 가르침을 듣고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닫는 것이 지혜 비춤의 문수라고 설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인의 말씀을 듣자 하니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닫고서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와 이타의 자비행을 실천하기 때문에 중행이라 한다고 하셨는데, 이 행을 실천하는 행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 행을 실천하는 자는 계위에 의탁하는(寄位) 보현이다.”
유자가 물었다. “보현보살은 어느 계위에 의탁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인因의 오위五位에 의탁해서 과의 계위(果位)에 이른다.57) 비록 이 계위에 있으나 이 계위에 머물지 않고 중행을 실천할 때 세 등급의 보현이 있게 된다.”
유자가 물었다. “인위에서 과위에 이르는 세 등급의 보현이란 어떤 것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첫째는 속박을 벗어난 보현(出纏普賢)이고, 둘째는 속박에 들어간 보현(入纏普賢)이며, 셋째는 과를 얻은 뒤의 보현(果後普賢)이다.”
유자가 물었다. “이 세 보현에서 그 우열의 등급은 어떠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 세 등급의 보현은 우열의 등급이 같지 않다. 속박을 벗어난 보현(出纏普賢)이란 성품을 본 뒤 중행을 실천할 때 눈앞의 온갖 경계를 대면해 깜박 일어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마음의 근원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허깨비 같은 경계에 걸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옛사람이 ‘끊어야 할 장애가 없지 않고, 끊는 지혜 또한 있다.’58)라고 한 것이다.”
유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옛사람이 ‘증득하는 지혜가 일어나면 끊어야 할 장애는 완전히 없어진다.’59)라고 하신 뜻은 어떠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증득하는 지혜가 일어나면 끊어야 할 장애는 완전히 없어진다고 한 것은 문수의 단혹斷惑이다. 어째서인가? 문수가 성품과 마주할 때 본체 중에는 다른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끊어야 장애가 없지 않고

003_0766_b_01L衆行若何仙人告遊子言若有衆生忽
003_0766_b_02L聞眞敎頓見性地不住此處隨緣行
003_0766_b_03L自利利他悲智故名爲衆行遊子啓仙
003_0766_b_04L人曰我等曾聞仙人演說法忽聞眞敎
003_0766_b_05L頓悟性地名爲智照又殊今承仙人說
003_0766_b_06L頓悟性地不住此處隨緣行自利利他
003_0766_b_07L悲智故名爲衆行行此行者此是何人
003_0766_b_08L仙人答曰行此行者寄位普賢遊子問
003_0766_b_09L普賢大士寄何等位仙人答言
003_0766_b_10L因五位乃至果位雖寄此位不住此位
003_0766_b_11L衆行行時三等普賢遊子問曰寄位於
003_0766_b_12L因位乃至果位何等名爲三等普賢
003_0766_b_13L人答曰一者出纒普賢二者入纒普賢
003_0766_b_14L三者果後普賢遊子問曰此三普賢勝
003_0766_b_15L劣等級其義如何仙人答言此三普
003_0766_b_16L賢勝劣等級其義不同謂所言出纒普
003_0766_b_17L賢者見性之後行於衆行對前萬境
003_0766_b_18L不無瞥起之心已達心源不滯幻化之
003_0766_b_19L故古人云不無所斷之障還有能
003_0766_b_20L斷之智遊子問曰古人云若發能證
003_0766_b_21L之智全無所斷之障其義如何仙人
003_0766_b_22L答曰若發能證之智全無所斷之鄣者
003_0766_b_23L此是文殊斷惑何以故文殊當性之時
003_0766_b_24L軆中不有異相故今言不無所斷之障

003_0766_c_01L끊는 지혜 또한 있다고 한 것은 보현의 단혹이다. 무슨 까닭인가? 보현이 계위를 밟아 올라갈 때 미혹을 끊는 쪽과 덕을 이루는 쪽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룸이 같지 않다. 이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룸을 알지 못하면,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이치를 두고 다투게 된다.”
유자가 물었다. “문수의 단혹이 이와 같다는 것은 이미 알았습니다. 만약 보현의 단혹을 논한다면 그것은 현행現行을 끊는 것입니까, 습기習氣를 끊는 것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보현의 지위에서 말하면 현행의 번뇌가 전혀 없다. 보현이 계위에 의탁해 미혹을 끊는 것은 습기번뇌이다.”
유자가 물었다. “현행과 습기가 어떤 것이기에 보현에게는 현행의 번뇌가 전혀 없고 오직 습기의 장애만 있는 것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범부가 경계를 만나 마음을 일으킬 때 앞뒤 경계를 알지 못하여 업을 짓는 것이 바로 현행이고, 지혜로운 자가 경계를 만나 마음을 일으킴에 있어 경계가 허깨비인 줄 알아서 앞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습기이다. 그러므로 이 보현은 성품을 본 뒤 중행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행 번뇌는 전혀 없고 오직 습기의 장애만 있는 것이다. 만약 끊어야 할 습기가 없다면 참기 어려운 일을 참을 필요가 왜 있으며, 만약 자비와 지혜로 성불할 것이 없다면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할 필요가 왜 있겠는가? 비록 자비와 지혜를 실천하지만 이 두 항목이 짓는 것은 모두 본체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행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所作皆依性  짓는 것은 모두 성품에 의지해
修成功德林  공덕의 숲을 닦아 이루니
終無取寂意  끝내는 적멸로 나아갈 뜻이 없고
唯有濟群心  오직 중생을 제도할 마음뿐이다
行悲悲廣大  자비를 실천하니 자비가 광대해지고
用智智能深  지혜를 쓰니 지혜가 깊어진다
利他兼自利  이타와 자리를 겸하는 일을
小聖詎能任  작은 성인이 어찌 감당하겠는가60)

라고 했으니, 속박에서 벗어난 보현의 중행과 자비와 지혜는 본체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보현의 중행을 더 자세히 말하면 항포行布와 원융圓融이 함께 나타나고, 번뇌 끊음과 덕을 이룸이 모두 갖추어지고, 자리와 이타를 같이 닦고, 지혜와 자비가 나란히 이루어진다. 행을 말하면 큰 작용을 일으키니 일어나면 반드시 온전한 참이요, 행상을 말하면

003_0766_c_01L還有能斷之智此是普賢斷惑何以故
003_0766_c_02L普賢歷位之時不無斷惑成德故是故
003_0766_c_03L兩人斷惑成德不同不會兩人斷惑成
003_0766_c_04L德相諍斷惑成德之義遊子問曰已知
003_0766_c_05L文殊斷惑如此若論普賢斷惑斷現行
003_0766_c_06L斷習氣耶仙人荅言若言普賢位
003_0766_c_07L中全無現行煩惱普賢寄位斷惑此是
003_0766_c_08L習氣煩惱遊子問現行與習氣如何
003_0766_c_09L普賢全無現行之惑唯有習氣之障
003_0766_c_10L人荅言凡夫對境起心不識前境後境
003_0766_c_11L作業卽是現行智者對境起心知境
003_0766_c_12L虛幻不滯前境習氣故是普賢是見性
003_0766_c_13L之後行行之人故全無現行之惑唯有
003_0766_c_14L習氣之障若無習氣可斷何用難忍能
003_0766_c_15L若無悲智成佛何用艱行能行
003_0766_c_16L行悲智二門所作依軆成行是故古人
003_0766_c_17L所作皆依性修成功德林終無取寂
003_0766_c_18L唯有濟群心行悲悲廣大用智
003_0766_c_19L能深利他兼自利少聖詎能任然卽知
003_0766_c_20L出纒普賢衆行悲智而依軆修行又細
003_0766_c_21L說普賢衆行卽行布圓融齊現斷惑成
003_0766_c_22L德俱有自利利他雙修智門悲門並成
003_0766_c_23L言行也繁興大用起必全眞言行相也
003_0766_c_24L「之」疑「地」 {編}「照智」疑倒{編}「照」疑
003_0766_c_25L剩{編}

003_0767_a_01L계위에 의지해 번뇌를 끊음이 없지 않으니 계위가 높아지면 습기는 차츰 얇아지고, 행이 넓어지면 자비와 지혜는 더욱 깊어져서 십주十住에서 십지十地에 이르면 출전보리出纏菩提가 원만해진 것이다.

속박에 들어간 보현(入纏普賢)이란 일체중생에 대해 동류대비同類大悲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앞서 출전보현出纏普賢의 계위에서는 자비와 지혜를 널리 행하여 자리와 이타를 실천하는 까닭에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공功이 없지 않다. 그러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룬 공으로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만, 번뇌를 벗어난 고뇌 없는 곳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생육취四生六趣에 널리 대비를 실천하고 함께 끊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므로 ‘번뇌에 들어간 보현’이라 한다. 이처럼 입전入纏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덕과 앞의 출전出纏하여 행을 이루는 공功, 두 마음의 공덕이 평등하기 때문에 등각이라 하고,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기 때문에 등각이라 하며, 출전과 입전을 취하지 않고 대지와 대비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묘각이라 한다. 비록 자비와 지혜, 출전과 입전을 취하지 않으나 과덕果德을 논하면 취하지 않는 행이 없고 거두지 않는 계위가 없다.

과를 얻은 뒤의 보현(果後普賢)이란 변행삼매遍行三昧이다. 말하자면 묘각의 계위에서 비록 출전의 대지와 대비를 취하지 않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되돌아서 출전․입전의 대지와 대비를 향하여 모든 계위에서 역․순․종․횡으로 동류同類와 동심同心이 된다. 또한 어느 일정한 계위를 고수하지 않고 인연 따라 돌면서 널리 대비를 짓고, 모든 종류에서 어떠한 계위도 받지 않으며, 짓고 받는 것에서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까닭에 과를 얻은 뒤의 보현이라 한다. 만약 이 사람의 해행을 굳이 무엇이라 규정하려 한다면 이 사람의 행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 등급의 보현은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실천한 행이다. 그 행의 우열에 의거해 크게 두 등급의 보현으로 나눈 것이다. 한 사람이란

003_0767_a_01L不無依位斷惑位高則習氣漸薄行廣
003_0767_a_02L則悲智增深從十住乃至十地出纒菩
003_0767_a_03L提已滿也

003_0767_a_04L
所言入纒普賢者一切群品中同類大
003_0767_a_05L是前出纒普賢位中廣行悲智
003_0767_a_06L自利利他行故不無斷惑成德之功
003_0767_a_07L斷惑成德之功出纒已滿而不信出纒
003_0767_a_08L無患之處故於四生六趣廣行大悲
003_0767_a_09L斷化物之名入纒普賢以此入纒化物
003_0767_a_10L之德與前出纒成行之功二心功齊平
003_0767_a_11L故名爲等覺悲智圓滿故名爲等覺
003_0767_a_12L不取出纒入纒不取大智大悲故名爲
003_0767_a_13L妙覺雖不取悲智出纒入纒若論果德
003_0767_a_14L無行不取無位不收也

003_0767_a_15L
所言果後普賢者遍行三昧是也謂妙
003_0767_a_16L覺位中雖不取出纒大智大悲而不住
003_0767_a_17L還向出纒入纒大智大悲逆順蹤橫
003_0767_a_18L於諸位中同類同心亦不定守1) [10]
003_0767_a_19L隨緣任運廣作大悲於諸類中何位定
003_0767_a_20L不受於能作能受不作不受故名爲果
003_0767_a_21L後普賢也若定取此人解行者未會此
003_0767_a_22L人行處也

003_0767_a_23L
所言三等普賢者不是三人一人行行
003_0767_a_24L依行勝劣大義二等普賢也所言一人

003_0767_b_01L처음 단박에 진리를 증득할 때의 문수요, 지금 인연 따라 행을 실천할 때의 보현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 한다. 이는 안으로 증득함과 밖으로 교화함을 통틀어 취한 것이다. 만약 안으로 증득함과 밖으로 교화함이 다르기 때문에 문수와 보현 두 사람이 되고, 증득하는 주체와 증득되는 대상과 중행이 전부 같지 않다고 하면 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화엄의 뜻에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화엄경』 제목에서 말하는 대방광大方廣은 설해진 법이어서 비로자나이고, 불佛이란 증득하는 사람이어서 문수이며, 화엄花嚴이란 연을 따르는 행이어서 보현이니 곧 한 부처에 두 보살로서 세 사람이 된다. 만약 보현행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라면 먼저 진리를 궁구하고, 그런 뒤에 연을 따라 행을 실천해야 한다. 즉, 지금의 행과 옛사람의 자취가 서로 상응하는 것이 마치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들었는데 문 밖에 나가 맞춰 보니 바퀴와 딱 맞는 것과 같다.”
제2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 第二
이때 해통선인이 대중을 위해 설법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하고 삼계를 윤회하다가 삼승의 점교를 듣고 삼승법과 삼계의 고뇌를 깨달으니 이 때문에 삼승의 사람이 있게 된다. 이들이 참된 가르침을 듣고서 마음을 돌이켜 묘한 지혜를 이루어 진리를 증득하기 때문에 ‘점교를 돌이켜 실제를 증득한다.’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이 ‘문 앞의 세 수레는 방편이고, 노지의 흰 소야말로 진실한 증득을 밝힌 것이다.’61)라고 했으니 바로 이 뜻이다.”
은자 지통이 선인에게 물었다. “이 회점증실제를 얻은 사람과 저 돈증실제를 얻은 사람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비록 먼저는 삼승에 떨어졌으나 삼승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온 곳이 아득히 달라도 지금은 점교에서 마음을 돌이켜 진리를 증득했으므로 돈증실제를 얻은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옛사람이 ‘백 줄기 개울이 바다로 돌아가면 백 줄기 개울의 이름이 없어지듯, 삼승이

003_0767_b_01L初頓證實際之時卽文殊今隨緣
003_0767_b_02L行行之時卽普賢故名爲一人也
003_0767_b_03L是通取內證外化也若以內證外化不
003_0767_b_04L同故文殊普賢兩人若以通取能證所
003_0767_b_05L證及衆行不同卽爲三人也此大敎意
003_0767_b_06L說也謂大經題云大方廣者所說之法
003_0767_b_07L故卽遮那是也佛者能證之人也故卽
003_0767_b_08L文殊是也花嚴者隨緣之行故普賢是
003_0767_b_09L此且一佛二菩薩卽爲三人也若欲
003_0767_b_10L修行普賢行者先窮眞理隨緣行行
003_0767_b_11L卽今行與古跡相應如似閇門造車出
003_0767_b_12L門合轍耳

003_0767_b_13L
廻漸證實際篇第二時該通仙人爲大
003_0767_b_14L衆說法若有衆生無始已來不悟性地
003_0767_b_15L輪廻三界聞三乘漸敎悟三乘法三界
003_0767_b_16L故有三乘人此忽聞眞敎廻成妙
003_0767_b_17L窮證實際故名爲廻漸證實際也
003_0767_b_18L是故古人云門前三駕車是權乘露地
003_0767_b_19L白牛方明實證卽其意也隱士智通啓
003_0767_b_20L仙人曰此廻漸證實際之者與彼頓證
003_0767_b_21L實際之人同異如何仙人答曰雖先已
003_0767_b_22L落三乘不在三乘故來處玄殊而今廻
003_0767_b_23L漸證實際故與彼頓證實際者不異
003_0767_b_24L故古人云百川歸大海無百川名三乘

003_0767_c_01L일승으로 돌아가면 삼승이란 이름이 없어진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점증실제를 얻은 사람과 돈증실제를 얻은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점증실제와 돈증실제가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인연을 따르는 마음을 스스로 돌이켜 진리를 비추어라.”

은자 지통이 참된 설법을 듣고도 묵묵히 아무 말이 없었다. 이때 유자 행통이 선인에게 물었다. “저희가 일찍이 ‘어떤 중생이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닫고서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인연 따라 행을 실천하는 것을 중행이라 하고, 이 행을 실천하는 자가 보현이다.’라고 하신 선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 이 회점증실제 후에도 중행을 실천하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중행을 실천하는 자가 없지 않다. 어째서인가? 회점증실제란 노지의 흰 소이기 때문이다. 흰 소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노지에 머물지 않는 까닭에 중행을 실천하는 자가 없지 않다. ‘노지의 흰 소’에서 노지는 증득할 법이어서 비로자나이고, 흰 소는 증득하는 사람이어서 문수이며, 흰 소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때문에 보현인데, 이 보현의 행이 바로 중행이다. 두 편의 대략적 뜻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 스스로 잘 관찰하여 같고 다름을 판단하여라.”
제3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 第三
이때 해통선인이 대중을 위해 설법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하여 삼계를 윤회하면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점교를 듣고 점차 믿음과 이해가 생겨나 인육위因六位에 의탁해 삼아승기겁 동안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여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면 비로소 무루의 참 지혜를 얻고

003_0767_c_01L歸一乘無三乘名也然卽知此廻漸證
003_0767_c_02L實際之人與彼頓證之人不異也莫愁
003_0767_c_03L廻漸與頓證同異自廻隨緣之心還照
003_0767_c_04L實際之理也隱士智通奉領眞說寂然
003_0767_c_05L無言也

003_0767_c_06L
于時遊子行通啓仙人曰我等曾聞仙
003_0767_c_07L人演說若有衆生頓證悟性地不住此
003_0767_c_08L隨緣行行名爲衆行行此行者
003_0767_c_09L爲普賢今此廻漸證實之後有人行衆
003_0767_c_10L行耶無人行衆行耶仙人答曰不無
003_0767_c_11L行衆行者所以者何廻漸證實者
003_0767_c_12L露地白牛故白牛運轉不住露地故不
003_0767_c_13L無行衆行人所言露地白牛者露地是
003_0767_c_14L所證之法故卽遮那是也白牛是能證
003_0767_c_15L之人故卽是文殊是也白牛運轉不住
003_0767_c_16L此處故卽普賢是也普賢所行卽是衆
003_0767_c_17L行也二篇大意如此汝自諦觀同異自
003_0767_c_18L看耳

003_0767_c_19L
漸證實際篇第三時談 [6] 通仙人爲大衆
003_0767_c_20L若有衆生無始已來不悟性地
003_0767_c_21L廻三界隨緣受報忽聞漸敎信解漸
003_0767_c_22L發寄目 [7] 六位經三祇劫難忍能忍
003_0767_c_23L行能行斷惑成德始得無漏眞智
003_0767_c_24L▣疑「一」{編}

003_0768_a_01L법신이 드러난다. 그런 까닭에 ‘실제를 점차적으로 증득한다.’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이 ‘신근信根이 한 생각을 낳으면 모든 부처님이 다 아신다. 오늘 인因을 닦으면 미래에 과果를 증득하리니 삼아승기겁 동안 육바라밀을 오래 베풀어 무루의 종자를 훈습해야만 비로소 부사의不思議라 한다.’62)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때 은자 지통이 선인에게 물었다. “여기 이 점증실제를 얻은 사람과 돈증실제를 얻은 사람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인이 은자에게 말했다. “비록 점․돈이 다르다 하나 마침내 하나로 돌아간다. 어째서인가? 작은 하천이 바다로 돌아가면 온전히 한맛이 되듯이, 점점 이해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두 가닥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점․돈이 비록 다르나 근원으로 돌아가면 둘이 아니다.”

은자 지통이 선인의 가르침을 듣고 다른 견해를 내지 않고 물러나 묵묵히 있었다. 이때 유자 행통이 선인에게 물었다. “전편에서 돈증실제 이후에 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선인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편에서는 점증실제를 얻은 사람에 대해 밝히셨는데, 점증실제 이후에도 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비록 행을 하는 일이 없지 않으나 그 행은 앞에서 밝힌 것과 다르다. 앞에서는 돈증실제 이후 계위에 따라 행을 할 때 출전과 입전, 나아가 과果後후 등 3등급의 보현행이 있었던 반면, 여기 이 점증실제 편의 뜻은 점교의 방편에 의지해 삼아승기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야 비로소 무루의 참 지혜를 얻는데, 이 무루의 참 지혜가 법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점증실제라고 한다. 따라서 점증실제 이후 비록 행을 실천함이 없지 않으나 계위의 등급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까닭에 전편에서 밝힌 것과는 다르다.”

유자가 물었다. “앞의 두 편에서는 증득하는 사람, 증득할 법, 나아가 인연 따라 행을 하는 사람에 각각 다 이름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편에도

003_0768_a_01L現法身故名爲漸證實際也是故古人
003_0768_a_02L信根生一念諸佛盡應知修因於
003_0768_a_03L此曰 [8] 證果未來時 [9] 大僧祇劫六度
003_0768_a_04L久安施薰成無漏種方號不思議
003_0768_a_05L其意也時隱士智通啓仙人曰今此漸
003_0768_a_06L證實際之人頓悟實際之人同異如何
003_0768_a_07L仙人告隱士言雖漸頓不同而終歸一
003_0768_a_08L所以者何小川歸海全同一味漸解
003_0768_a_09L歸源豈有兩般也是故漸頓雖異歸源
003_0768_a_10L無二耳隱士智通奉仙人敎不生異解
003_0768_a_11L退身默然也

003_0768_a_12L
于時遊子行通啓仙人曰於前篇中
003_0768_a_13L聞仙人說頓證實際後有行人此篇所
003_0768_a_14L明漸證實際之者漸證實際已後有行
003_0768_a_15L人耶仙人答曰雖不無行行不同前
003_0768_a_16L篇所明者頓證實際已後隨位行時
003_0768_a_17L出纒入纒乃至果後三等普賢行今此
003_0768_a_18L漸證實際篇意者依漸敎方便經三僧
003_0768_a_19L修菩薩行始得無漏眞智以此無
003_0768_a_20L漏眞智露現法身故名爲漸證實際
003_0768_a_21L漸證實際已後雖不無行行而全依位
003_0768_a_22L等級故是故不同前篇所明也遊子問
003_0768_a_23L曾聞前兩篇中俱明能證之人所證
003_0768_a_24L之法乃至隨緣行人各各有名此篇

003_0768_b_01L증득하는 사람, 증득할 법, 인연 따라 행을 하는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까?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인이 대답했다. “증득하는 사람, 증득할 법, 인연 따라 행을 하는 사람의 이름이 없지 않다. 말하자면 증득하는 사람은 무루의 참 지혜라 보신불이라 하고, 증득할 법은 곧 실제實際이니 법신불이라 하며, 행을 하는 사람은 무루의 참 지혜를 갖춘 사람이 과위를 고수하지 않고 인연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행을 하는 사람, 또는 화신불이라 한다.”

003_0768_b_01L中還有能證所證及隨緣行人名耶
003_0768_b_02L有指出仙人答曰不無能證所證及隨
003_0768_b_03L緣行人名也謂能證之人者卽是無漏
003_0768_b_04L眞智亦報身佛是也所證之法者卽是
003_0768_b_05L實際亦名法身佛是也行之人卽是無
003_0768_b_06L漏眞智不守果位隨緣利物名爲行人
003_0768_b_07L亦名化身佛是也
  1. 1)조당집祖堂集 : 민영규閔泳珪 「影印 祖堂集引」(『趙明基博士華甲紀念佛敎史學論叢』, 중앙도서관출판사) p.9에 의하면 호적胡適은 성등省僜을 『祖堂集』의 저자라고 하는 데 반해, 민영규는 성등이 만년에 정靜․균筠 두 선승에게 맡겨 『祖堂集』을 편찬하였기 때문에 정․균을 『祖堂集』의 저자로 보았다. 김두진은 그의 저서 『고려전기 교종과 선종의 교섭사상사』 p.23에서 『祖堂集』이 오직 우리나라에만 전한다는 점과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종이 모두 실려 있다는 점, 그리고 순지에 대해 중국 어느 선사보다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을 들어 『祖堂集』은 고려 사람이 저술했다고 한다.
  2. 2)서운사瑞雲寺 : 송악군 여단월인 원창왕후元昌王后와 그의 아들 위무대왕威武大王이 오관산 용엄사龍嚴寺를 시주하여 순지가 주석하면서 서운사로 개칭하였다.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고려편1 참조.
  3. 3)이치인 불성의 상(理佛性相) : 순지의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 중 증리성불證理成佛을 말한다. ‘증리성불이란 어떤 이가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빛을 돌이켜 자신의 마음의 근원에 원래 일물一物도 없음을 비추어 본다면 그것이 바로 성불이라는 것이다. 만행을 좇아 차츰 이룬 것이 아니므로 이치를 증득해 부처를 이룬 것(證理成佛)이라 한다.(言證理成佛者, 知識言下, 廻光返照, 自己心源, 本無一物, 便是成佛.)’ 『祖堂集』 권20 「順之傳」(K45, 357b) 참조. 또 『金剛頂瑜珈中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論』(T32, 574b)에는 ‘법계를 깨닫고 성품의 지혜를 체득하여 비로자나불을 이루는 것을 증리證理(證法界體性智, 成毘羅遮那佛, 名爲證理.)’라 하였다. 따라서 증리는 본래의 성품을 바로 깨달아 부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妙法蓮華經玄讚』(T34, 713a)에는 ‘『涅槃經』과 『勝鬘經』에서 대체로 법신진리불성法身眞理佛性을 일승一乘이라 한다.(涅槃勝鬘中, 多以法身眞理佛性名爲一乘.)’고 하였고, 『華嚴經探玄記』(T35, 110c)에도 진리불성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이불성理佛性은 진리불의 성품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일승과 연결된다.
  4. 4)『景德傳燈錄』 권1(T51, 210a), “第十四祖龍樹尊者者, 西天竺國人也. …… 尊者後於座上現自在身如滿月輪, 一切衆唯聞法音, 不覩師相, 彼衆中有長子, 名迦那提婆, 謂衆曰…….” 이와 비슷한 행문은 『五燈會元』 권1(T80, 35a), 『敎外別傳』(T84, 714c), 『指月錄』(T83, 439c), 『禪祖正脈』(T85, 381b), 『八十八祖道影傳贊』(T86, 622c), 『祖庭指南』(T87, 161c), 『佛祖綱目』(T85, 578c) 등에서도 볼 수 있다.
  5. 5)제바提婆 : 서천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를 말한다. 남천축국 사람으로 용수의 법을 이었다. 후에 상족제자 나후라다羅候羅多에게 법안法眼을 전했다. 『五燈會元』 권1(T80, 35b), “十五祖, 迦那提婆尊者, 南天竺國人也. 姓毘舍羅, 初求福業, 兼樂辯論. 後謁龍樹大士, 將及門. …… 乃告上足羅候羅多而傳法眼. 偈曰, 本對傳法人, 爲說解脫理, 於法實無證, 無終亦無始. 祖說偈已, 入奮迅定, 身放八光而歸寂滅.”
  6. 6)인초忍草 : 비니초毘尼草(肥膩草), 또는 인욕초忍辱草라고도 한다. 히말라야에서 자생하는데 소가 그 풀을 먹으면 제호醍醐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大般涅槃經』 권27(T12, 538c)에 “忍辱草名大涅槃.”이라 했고, 『永嘉玄覺和尙證道歌』(T48, 396c)에는 “雪山肥膩更無雜, 純出醍醐我常納.”이라 하고 이를 해석하는 『證道歌註』(T65, 461c)에는 “雪山喩一眞境界, 香草喩圓修正道, …… 醍醐喩一乘上味.”라 했다. 따라서 인초는 묘법을 상징하며 이 묘법을 닦아 정각을 이룬다.
  7. 7)인초忍草를 먹는 상(牛食忍草相) : 앞의 소의열반상所依涅槃相이 부처를 의미한다면 우식인초상牛食忍草相은 상근기가 묘법을 듣고 단박에 성불의 길에 나아가는 것으로 ○의 대상對相이 된다. 즉, 이체적理體的 측면에서 수행적修行的 측면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8. 8)『大般涅槃經』 권27(T12, 538c) 참조.
  9. 9)위와 같다.
  10. 10)순지는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에서 “중생이 무시이래로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하다가 갑자기 지혜로운 자를 만나 진실한 가르침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깨달아 정각을 이루는데, 이를 점차로 하지 않기 때문에 돈증실제頓證實際라 한다.”라고 하였다. 『祖堂集』 권20(K45, 358a) 참조. 이렇게 볼 때 설산의 인초를 소가 먹으면 제호를 낸다고 한 경의 말은 순지가 말하는 돈증실제의 의미이므로 우식인초상을 ‘삼편성불론’에 보이는 돈증실제와 연결시킬 수 있다.
  11. 11)『祖堂集』 권20(K45, 356b)에 의하면, 월륜상 아래의 세 마리 소는 삼승을 표현한 것이라 했다.
  12. 12)삼승인이 공을 구하는 상(三乘求空相) : 『妙法蓮華經』 권2 「譬喩品」(T9, 145a)에 의하면, ‘부처는 방편의 힘으로 일불승을 삼승으로 나누어 설했다(舍利佛, 以是因緣, 當知諸佛方便力故, 於一乘佛分別說三乘.)’고 하였다 따라서 법은 일승이지만 근기에 따라 일승․삼승의 차이가 있고, 이 상은 삼승의 근기에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13. 13)점차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루는 상(漸次見性成佛相) : 소의열반상의 대상인 우식인초상이 돈오의 경지라면, 삼승구공상三乘俱空相의 대상인 노지백우상露地白牛相은 점오의 경지이다. 다시 말해 노지백우상은 점차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는 상(漸次見性成佛相)으로 ‘삼편성불론’의 회점증실제廻漸證實際와 통한다. 원문에 의하면 고인古人이 문 앞에 둔 세 가지 수레는 방편에 불과하며 노지백우가 바로 진실을 밝혀 증입한 것으로 회점증실제의 의미라 했다. 『祖堂集』 권20(K45, 359b) 참조.
  14. 14)권승權乘 :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일시적인 방편으로 설한 가르침.
  15. 15)한두기韓斗基, 『韓國禪思想硏究』(일지사, p.204)에 우식인초상은 선적禪的인 일우一牛로서 화엄의 문수․보현의 보살행에서 도입하고, 노지백우상은 교적敎的인 일우로서 법화의 백우일승白牛一乘에서 도입한 것이라 했다.
  16. 16)우식인초상은 화엄회상에서의 돈오의 경지이기 때문에 근기의 깨달음이 빠르고, 노지백우는 법화회상에서의 점오의 경지라 삼승이 일승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근기의 깨달음이 더디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같지만, 근기의 빠르고 더딤은 각기 화엄과 법화라는 두 회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나온 곳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17. 17)4대8상四對八相 가운데 위에서 설명한 4상이 깨달음에 대해 논한 것이라면, 여기부터의 4상은 깨달은 후의 중행衆行에 대한 설명이다.
  18. 18)여기서 옛사람이란 경조京兆 대천복사大薦福寺 홍변 선사弘辯禪師를 가리킨다. 『五燈會元』(T80, 99c), 『五燈嚴統』(T80, 652c), 『禪宗正脈』(T85, 410b), “帝曰, 禪師旣會祖意, 還禮佛轉經否?
    對曰, …… 然依佛戒修身, 參尋知識, 漸修萬行, 履踐如來所行之跡.”
  19. 19)『維摩詰所說經』(T14, 556a)에 나오는 말로서 『維摩義記』에서는 ‘십지十地에서 얻는 이익(履踐如來所行之跡, 是十地上所得益也.)’이라 해석했다. 따라서 이 상은 깨달은 후에 닦는 중행과 연결된다.
  20. 20)보살이 세 가지 해탈문, 즉 공해탈空解脫․무상해탈無相解脫․무원해탈無願解脫을 닦는 단계이다. 즉, 제법의 연기성緣起性을 관하여 자성의 공함을 보고 자타自他나 수자壽者, 작자作者의 상이 없음을 깨달아 대비행을 하는 보살 수행의 단계이다. 『成唯識論』(T31, 51a)에 ‘제6현전지란 연기지緣起智에 머물러 무분별의 가장 수승한 반야를 눈앞에 드러나게 하는 단계(第六現前地, 住緣起智, 引無分別最勝般若令現前故)’라 했다. 또 『佛說十地經』(T10, 552b)에는 ‘보살이 제5지에서 수행한 도가 원만하여 제6지로 나아가려 하면 열 가지 행상으로 12연기를 관하고 반야바라밀을 성취한다. 나도 없고 수명도 없다 함은 보특가라가 없다는 뜻인데, 그 자성이 공적하기 때문이다. 작자와 수자를 여읜다 함은 연기를 관하기 때문이다.(爾時金剛藏菩薩, 告衆菩薩言, 唯諸佛子, 若是菩薩, 第五地中所修之道, 善圓滿已, 欲入菩薩第六地者, …… 菩薩以十種行相觀此緣起, 由以無我無壽命者, 無數取趣自性空寂, 離作者受者, 觀緣起故.)’라고 했다. 따라서 이 단계는 제6현전지와 연결되고 보살 중행을 나타낸 것이다.
  21. 21)이 말의 출처가 어떤 경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大方廣佛華嚴經』(T10, 792c)에 ‘모든 보살의 행은 행하기 어려운 행을 하고 참기 어려운 행을 한다(諸菩薩行, 難行能行, 難忍能忍.)’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 부분은 보살의 수행을 나타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2. 22)실제實際 : 진실제극眞實際極의 뜻으로 『大智度論』(T9, 370a)에는 ‘실제를 법성의 증득(實際者, 以法性爲實證故爲際.)’으로 보았다. 선가에서는 대체로 차별 망상이 단절된 평등일여平等一如의 세계, 진실 구경의 경지를 나타낸다. 화엄교학의 삼교판, 즉 수상점修相漸․실제돈實際頓․궁실원窮實圓 가운데 궁실과 실제를 지엄智儼은 『搜玄記』 권하에서 자체自體 개념을 통해 구분하였는데, 실제 개념의 설명어인 자체인행自體因行을 보살의 실천에 배대하였다. 『法界圖』에서 의상義湘은 실제돈을 제5 원교일승으로 보았다. 즉, 5교판에서는 제5 원교가 삼교판의 실제돈이 된다. 균여는 돈점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을 궁실원으로 보아 제5 원교로 보았다. 김천학, 『균여화엄사상연구』(은정불교문화진흥원, p.52-80) 참조. 순지는 이 단계를 ‘점증실제상漸證實際相’이라 표현하고 화엄교학에서 말하는 실제돈과 연결시킨 것 같다.
  23. 23)네 가지 마적魔賊 : 중생을 괴롭히고 수행을 방해하는 온마蘊魔․번뇌마煩惱魔․사마死魔․천자마天子魔. 수행을 방해하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마왕과 그 권속을 말한다.
  24. 24)김두진, 『고려전기 교종과 선종의 교섭사상사 연구』(한국불교학 연구총서68, 신라불교편, 선종1) p.39에서 4대8상은 불성을 논한 것이고, 2대4상은 신라 하대의 선사들이 추구한 조사선과 연결되며 개인주의적인 사상 경향을 지녔다고 했다. 또 『祖堂集』 원문에서 2대4상을 ‘견허지실遣虛指實’이라 한 것은, 순지가 교학을 버리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자는 선종으로 귀의한 것이라 했다.
  25. 25)『金剛三昧經』(T9, 368b). 『金剛三昧經論』(T34, 980b)에 의하면, ‘불경에 의지해 그 심신을 돌이켜 인상人相․법상法相을 버리고 이공二空의 이치에 머물기 때문에 ‘회신주공굴廻神住空窟’이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자마자 도리에 수순하기 때문에 뛰어난 공능을 갖지만, 번뇌는 무시이래로 도리에 거슬리기 때문에 대적할 수 없으므로 조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항복난조복降伏難調伏’이라 했다. 그리고 이처럼 지전地前에서 이장二障을 제거해서 복도伏道로써 단도위斷道位에 들어가 점차로 종자를 없애다가 영원히 없어진 때 네 가지 마魔를 멀리 여의기 때문에 ‘해탈마소박解脫魔所縛’이라 했고, 유루有漏의 오음취락五陰聚落을 뛰어넘어 도량에 앉아 무상각無上覺을 얻기 때문에 ‘초연노지좌超然露地坐’라 하며, 무상각으로 대열반을 증득해 무각無覺을 깨달아 여러 식에 모두 들어가기 때문에 ‘식음반열반識陰般涅槃’이라 한다(依佛經迴其心神, 遣人法相, 住二空理, 故言迴神住空窟. 此心方起而順道理, 故有勝能. 彼惑無始而逆道理故不能敵, 故言降伏難調伏. 是明地前伏除二障, 由是伏道入斷道位, 漸拔種子乃至永盡, 永盡之時遠離四魔, 故言解脫魔所縛, 次明降伏所得勝利, 勝利有二, 謂菩提果及與果果. 菩提果者, 超出有漏五陰聚落坐於道場得無上覺, 故言超然露地坐, 以無上覺, 證大涅槃, 覺知無覺諸識皆入, 故言識陰般涅槃.)’라고 했다.
  26. 26)『維摩詰所說經』(T14, 544b). 『註維摩詰經』(T38, 377b)에 ‘미혹을 조복하여 제거하는 것이지 법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調伏除其所惑之有, 不除法有.)’라고 했다. 『維摩義記』(T38, 470c)에는 ‘중생을 교화함에 오직 가르침으로써 그 마음병을 없애기만 할 뿐 법을 없앨 필요는 없다. 법에는 망령됨과 진실됨이 있는데 망정妄情이 취한 유무법을 망령됨이라 하고, 진실한 법체를 논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 끊을 필요가 없다. 망령된 정유情有만 없애면 망령된 법은 없으므로 달리 끊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법을 제거하지 않는다.(知化衆生但須教其斷除心病, 不須除法. 何故而然?
    法有眞妄, 佛性是眞, 妄情所取, 有無法說以爲妄, 若論眞法體當非過, 不須治斷. 妄法情有, 除情彼無, 不勞別斷, 故不除法.)’라고 했다. 또 『淨名玄論』(T38, 855a)에는 ‘병의 본래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없앨 것이 없으나 다만 망정에 준하여 말하기 때문에 없앤다고 한다.’라고 했다.
  27. 27)김두진, 『고려전기 교종과 선종의 교섭사상사 연구』, 한국불교학 연구총서68, 신라불교편, 선종1, p.41에서 교학에 대한 부정은 경전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不是不許依敎悟入 依敎想解祗是虛妄”이란 구절을 증빙으로 들었다. 김두진은 이 문단을 “소용없는 것이며 교학에 의해 깨닫게 해서도 안 된다. 교학에 의한 상해는 허망할 뿐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不是不許依敎悟入’을 ‘不是 不許依敎悟入’로 끊어 읽은 것이다. 순지는 한결같이 의교상해依敎想解의 무익만을 주장한 것이지 교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28. 28)『首楞嚴經』 권4(T19, 121c).
  29. 29)이와 동일한 구절은 찾을 수 없고, 다만 『法華玄義』(T34, 568c), “衆生福德利根, 故聞說敎法, 得成聖果.”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30. 30)『淨名經關中釋抄』 「菩薩品」(T85, 52a).
  31. 31)순지의 선 사상은 한결같이 깨달음의 더딤과 빠름이라는 이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학을 보는 그의 시각에서도 상근기와 하근기라는 이원론적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즉, 빠름은 돈오, 상근기의 ‘의교변오依敎便悟 직현이지直現理智’와 연결되고 더딤은 점수, 하근기의 ‘훈종대후세薰種待後世’와 연결된다.
  32. 32)그림자를 머리로 잘못 아는 상(迷頭認影相) : 연야다演若多가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머리가 없어진 줄로 착각하여 미쳐 날뛰었다는 일화를 들어, 허망한 것을 실제로 착각하는 중생의 망상을 지적한 것이다. 『首楞嚴經』 권10(T19, 154b), “佛告阿難, 精眞妙明本覺圓淨, 非留死生及諸塵垢乃至虛空, 皆因妄想之所生起, 斯元本覺妙明眞精, 妄以發生諸器世間, 如演若多迷頭認影.”
  33. 33)자기 안의 부처와 정토 : 자기 안의 부처와 정토란 자기가 곧 부처이며 정토라는 뜻이다. 따라서 ‘미두인영상迷頭認影相’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마음을 돌이켜 자기를 깨닫는 것이 바로 ‘배영인두상背影認頭相’인데, 이는 ‘미두인영상’의 대상對相이 된다.
  34. 34)『景德傳燈錄』 「梁寶誌和尙大乘讚十首」(T51, 449b).
  35. 35)『首楞嚴經』 권6(T19, 129c). 장수 자선長水子璿의 『首楞嚴義疏注經』(T39, 911a)에는 ‘세간에서 소리를 따라 상을 듣고 불법을 지닌다면 차라리 자기의 듣는 성품을 반조하여 참 삼매를 이루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문문聞聞이라 한다.(若將世間隨聲聞相持佛法 不如返照自己聞性成眞三昧故云聞聞)’고 했다. 따라서 두 불佛 자 중 앞의 불은 부처로, 뒤의 불은 소리를 좇는 불법으로 해석되고, 앞의 문聞 자는 동사로, 뒤의 문 자는 듣는 성품으로 해석된다. 계환戒環의 『楞嚴經要解』(X11, 837b)에는 ‘불불佛佛’을 부처의 불성으로, ‘문문聞聞’을 자기의 듣는 성품으로 해석하였다. “佛佛謂佛之佛性也, 聞聞謂我之聞性也. 阿難護持諸佛祕藏, 而空畜多聞, 不能反悟, 故責其空持佛佛不自聞聞. 意使從聞思修入三摩地者, 務在反聞自性也.”
  36. 36)厶 옆에 亻을 붙이면 仏, 즉 佛이 되어, 함께해서 보배 그릇을 이루어 준다(共成寶器)고 한 것과 연결된다.
  37. 37)『呂氏春秋』, 『列子』 「湯問篇」에 나오는 내용으로(두 사서史書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다.) 종자기鐘子期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현 중국 호북성湖北省 한양漢陽) 사람이라 한다. 우연히 한강漢江 강가에서 유백아兪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는 “우뚝하기가 마치 높은 산과 같고 출렁거리기가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라고 감탄했다.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지우知友가 되었는데, 종자기가 죽은 뒤 백아는 세상에 지음知音이 없음을 한탄하여 평생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38. 38)양춘陽春․백설白雪과 하리下俚․파인巴人 등은 모두 초나라 노래의 곡명이다. 양춘․백설은 우아한 노래이고, 하리․파인은 통속적인 노래이다. 『楚辭』 ‘송옥답초왕문宋玉答楚王問’에 의하면, 초 양왕襄王이 송옥에게 무슨 은덕이 있느냐고 묻고는 어찌하여 백성들이 선생을 칭찬하지 않느냐고 하니, 송옥이 “어떤 객이 초나라 영郢에서 처음엔 하리와 파인을 부르니 이에 화음하는 백성이 수천 명이었습니다. 이어 양아陽阿와 해로薤露를 부르니 화음하는 백성은 수백 명이었고, 그다음 양춘과 백설을 부르니 화음하는 백성은 불과 십여 명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이 고사에서, 고상한 곡에는 화음하는 이가 적다(高曲和寡)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파인은 변방 민족이 즐겨 부르던 통속적 노래라는 의미도 있다.
  39. 39)『華嚴經』 「梵行品」(T9, 449a).
  40. 40)『宗鏡錄』(T48, 543a).
  41. 41)『新華嚴經論』 권8(T36, 767b).
  42. 42)법신의 근본지를 말한다. 『新華嚴經論』 권3(T36, 738c)에 의하면 ‘문수는 불법신의 근본지(以文殊爲佛法身根本智.)’라고 했다.
  43. 43)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김두진, 「了悟禪師 順之의 禪思想」(『歷史學報』 제65집) p.86에서 행만성불行滿成佛의 수행이 돈오 후의 자리이타를 위한 중행衆行과 성격이 달라서, 그것은 불도를 깨치기 위한 수행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행문에서 말하는 행도처行到處는 행만성불에서 깨달은 이치를 의미하고, 종래처從來處는 증리성불證理成佛, 즉 초발심에서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행만성불은 돈오의 차원에서 수행하는 돈오점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44. 44)이 말을 어디서 인용했는지 찾을 수 없다. 『新華嚴經論』 권3(T36, 739a)에는 ‘문수․보현이 다 제불의 어머니(文殊普賢爲一切諸佛之母)’라 표현하였고, 『首愣嚴疏注經』(T39, 928b)에서는 ‘불은 권權과 실實 두 가지 지혜를 부모로 하는데 지도智度를 보살의 어머니로, 방편을 아버지로 한다.(以佛權實二智爲父母, 故維摩云, 智度菩薩母, 方便以爲父.)’라고 했다. 지도는 실지實智로서 단혹증리斷惑證理의 지혜를 말하고, 방편은 권지權智로서 증리성불 이후의 자비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상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45. 45)보현을 만행萬行이라 한다 : 보현이 만행으로 상징된 것은 『新華嚴經論』(T36, 780b)에서 그 방증을 찾을 수 있다. 경론에 따르면 ‘고금의 모든 부처님이 함께 만행의 대비와 대지를 수행하고 오위五位에 따라 자리이타의 10바라밀과 4섭법, 4무량심을 닦아 나아가는 등 보현의 도를 항상 행한다.(古今諸佛共行萬行大悲大智, 隨五位中, 進修自利利他, 十婆羅蜜四攝四無量等之常行普賢之道.)’고 했다.
  46. 46)이통현의 『新華嚴經論』에서 이 행문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권3(T36-738c)에 ‘문수를 법신의 근본지, 보현을 차별지의 행덕으로 상정해서 모든 부처가 이에 의지해 대보리의 극과를 이룬다(文殊成讚法身本智, 普賢成其差別智之行德, 一切諸佛, 皆依此二尊者以爲師範, 而能成就大菩提之極果.)는 행문이 있다.
  47. 47)위의 책, 같은 쪽, “或說普賢爲長子, 爲建行成滿衆生故, 或說文殊爲小男, 爲盧遮創始發心證法身本智佛性之首.”
  48. 48)『華嚴經』 권14 「兜率天宮菩薩雲集讚佛品」(T9, 485c).
  49. 49)『法華經』 권6 「如來壽量品」(T9, 42b)에는 “如是我從成佛已來, 甚大久遠, 壽命無量阿僧祗劫, 常住不滅.”이라 되어 있다. ‘我從成佛已來’에 대해 『法華義記』(T33, 595b)에는 ‘明權智時節’이라 주석하고, 『新華嚴經論』(T36, 757a)에서는 ‘廻三乘就實而論’이라 해석하고 있다.
  50. 50)삼편三篇 : 앞의 삼편성불론이 이론적 차원이라면, 이 삼편은 깨달음의 방법과 중생 교화의 실천적 차원이다. 정성본, 「順之의 五冠山 禪門과 潙仰宗의 禪風」 『新羅禪宗硏究』(민족사, 1995), p.233.
  51. 51)이 소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52. 52)지통智通 : 여기서 말하는 지통이 의상의 10대 제자 지통과 동일 인물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의상에게서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 지통은 의상의 실천 수행적 특성을 이어받은 화엄행자였다. 지통이 소백산 추동錐洞 90일 법회에서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것이 『錐洞記』 2편이나 현존하지 않는다. 지통의 행적은 균여의 『釋華嚴旨歸章圓通鈔』, 『三國遺事』 「朗智乘雲普賢樹」 조條에 나와 있고, 그의 화엄 사상은 균여의 저술에 20여 차례, 『叢髓錄』에 3회 인용되어 있으므로 단편이나마 그의 화엄교학을 엿볼 수 있다.
  53. 53)『華嚴經』 권16(T9, 81c).
  54. 54)『華嚴經』 「十住品」(T9, 444c), “有所聞法, 卽自開解, 不由他悟.”
  55. 55)승조僧肇의 『肇論』(T45, 153b)에 “是以聖人以無知之般若, 照彼無相之眞諦.”라는 구절이 있다.
  56. 56)징관澄觀의 『華嚴經疏』(T35, 503c)에서 인용한 것이다.
  57. 57)고려대장경본에는 “寄因五位, 乃至果位.”에서 ‘乃’가 ‘不’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인위因位에 의탁하지만 불과佛果에 이르지 않고 중행을 닦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58. 58)출처를 알 수 없다. 다만 “能證之智”와 “所斷之障”이 함께 사용된 경우는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疏』(T33, 505a)의 “若前四種, 由此地中, 能證之智, 所斷之障.”밖에 없다.
  59. 59)출처를 알 수 없다.
  60. 60)부대사傅大士의 『梁朝傅大士頌金剛經』(T85, 6a).
  61. 61)이통현의 『新華嚴經論』(T36, 727c), “以法華經會三乘權學來歸佛乘實法界故, 門前三駕且受權乘, 露地白牛方明實德.”
  62. 62)부대사의 『梁朝傅大士頌金剛經』(T85, 2c).
  1. 1){底}祖堂集。第二十卷。「五冠山瑞雲寺順之和尙」條(高麗大藏經補遺板遠凾) 題名及撰者名補入{編}。
  2. 1)「故」下疑脫「遲」 {編}。
  3. 2)「恒」疑「怚」{編}。
  4. 1)「恨」疑「根」 {編}。
  5. 2)▣疑「一」 {編}。
  6. 1)▣疑「之」 {編}。
  7. 1)「之」疑「地」 {編}。
  8. 2)「照智」疑倒{編}。
  9. 3)「照」疑剩{編}。
  10. 1)▣疑「一」{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