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 / 一乘法界圖圓通記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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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법계도원통기 하 一乘法界圖圓通記 下
㉯ 득익得益 단락의 문답 부분에 대한 해설
두 번째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의심을 없애는 부분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앞의 질문과 대답을 이어서 한다.1)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성불成佛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煩惱未斷 不名成佛)”는 것은 실제로 갖추어 이야기하면 “번뇌가 끊어지지 않아서 복과 지혜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불成佛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煩惱未斷 福智未成 不名成佛)”는 것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이 성불成佛은 세 가지 덕을 갖추는 것이다.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애는 단덕斷德, 복을 갖추는 은덕恩德, 지혜를 갖추는 지덕智德이다.
이 성불成佛의 뜻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장애를 끊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수생불(修生佛 : 수행을 통하여 새롭게 생겨난 부처)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만약 삼승의 형상에 따라 설명한다면 단덕은 법신이고, 지덕은 응신, 은덕은 화신이므로 법신은 본유(本有 :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고, 응신은 수생(修生: 수행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유와 수생을 함께 갖춘 것인데 어떻게 수생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일승)별교의 가르침에 의거한다면 어떻게 삼신의 형상을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따르기 힘들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이 성불에는 수생과 본유의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애 비로소 성불하는 것인데 어떻게 구래성불(舊來成佛 : 먼 옛날부터 부처가 되어 있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앴으므로 비로소 구래성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신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자의 질문) : 이미 먼 옛날부터(舊來) 깨달은 사람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깨달았음을 알지 못합니까?
(의상의 대답) : 어리석기 때문이다.
(제자의 질문) :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먼 옛날부터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의상의 대답) : 반대로 묻겠다. 꿈에서 본 호랑이는 단지 마음속의 호랑이인가?
(제자의 대답) : 단지 마음속의 호랑이입니다.
(의상의 질문) : 꿈을 꿀 때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무서워하다가 꿈을 깬 후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알게 되어 무서워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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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0_b_02L一乘法界圖圓通記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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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0_b_04L高麗國歸法寺
004_0020_b_05L圓通首座均如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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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問答除疑中有三重問答皆躡
004_0020_b_07L跡起也煩惱未斷不名成佛者實具
004_0020_b_08L言者煩惱未斷福智未成不名成
004_0020_b_09L然今略也此成佛中三德具也
004_0020_b_10L煩惱斷盡則斷德福則恩德智則智
004_0020_b_11L德也此成佛義中一云斷障所成故
004_0020_b_12L修生佛也然此義難也若隨三乘相
004_0020_b_13L說則斷德法身智則應身恩則化身
004_0020_b_14L法身是本有應身是修生然則
004_0020_b_15L本有修生具也何唯修生耶若約別
004_0020_b_16L敎說則豈可分三身相而說耶是故難
004_0020_b_17L依也今釋此成佛中具足修生本有
004_0020_b_18L義也問煩惱斷盡方得成佛何言
004_0020_b_19L久來成佛耶答以煩惱斷盡方得久
004_0020_b_20L來成佛耳道身章云旣久來覺者
004_0020_b_21L何不知自覺耶答愚癡故問旣愚癡
004_0020_b_22L何得久來覺答反問夢所見虎
004_0020_b_23L心之虎耶答是心之虎耳問夢時
004_0020_b_24L知心之虎故畏覺夢時知心之虎故

004_0020_c_01L(제자의 대답) : 그렇습니다.
(의상의 질문) : 꿈을 깬 이후에 비로소 마음속의 호랑이였는가.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는가?
(제자의 대답) : 실제로 이야기한다면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다.
(의상의 질문) : 꿈을 꿀 때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몰랐는데 어떻게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인가?
(제자의 대답) : 그 사람이 비록 알지 못하였지만 실제로는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다.
(의상의 대답) : 그대가 이미 잘 이야기하였다. (비유의) 대상(法)도 또한 그러하다. 어리석은 사람이 미혹되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 이야기하면 본래부터 깨닫고 있으면서 단지 알지 못할 뿐이다.

옛날부터 깨달은 상태이지만 미혹되어서 알지 못하고 있다. 번뇌를 완전히 끊으면 비로소 옛날부터 깨달았던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번뇌를 끊었으므로 비로소 구래성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非初非中後 前中後取故)”라는 것은 수생의 번뇌를 끊는 것만을 이야기한 것인가, 아니면 본유의 번뇌를 끊는 뜻도 이야기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수생의 끊음이라고 한다. 번뇌를 어떻게 끊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라는 것은 끊지 않음의 뜻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는 끊음의 뜻이다.
질문이 번뇌를 끊는 것에 대한 것이므로 대답도 또한 수생의 끊음이어야 하지 않은가?
대승에서 번뇌를 끊는 것은 연기의 본성과 같이 끊는 것이므로, 끊지 않는 것으로서 끊음을 삼는다. 그래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는 것은 끊지 않는 것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는 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질문하고 대답한 것이다. 여러 곳에서 9세멸九世滅과 비세멸非世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중 9세멸은 사멸(事滅 : 현상의 없어짐)이고, 비세멸은 이멸(理滅 : 근본적인 없어짐)이다. 『삼보장』에서 “세 번째로는 3시(三時 :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것에 막힘이 없이 3시를 이야기한다. 네 번째로는 3시에 막힘이 없이 3시가 아닌 것을 이야기한다. 경전에서 ‘겁劫이 비겁非劫에 들어가고, 비겁이 겁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한 것 등과 같다.”2)고 하였는데, 비겁은 이치(理)이고 겁은 현상(事)이므로 “겁이 비겁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네 번째 문을 증명하였고,

004_0020_c_01L不畏耶答爾問但覺夢後方心之
004_0020_c_02L虎耶從夢時來是心之虎耶答實
004_0020_c_03L言從夢時來是心之虎問夢時不知
004_0020_c_04L是心之虎何得從夢時來是心之虎
004_0020_c_05L答彼雖不知而實言從夢時來
004_0020_c_06L心之虎耳答君已能說法中亦然
004_0020_c_07L者雖迷實言舊覺但不知耳

004_0020_c_08L古是覺卷下第一張 迷故不知
004_0020_c_09L惱永盡方知舊覺是故云煩惱斷故
004_0020_c_10L方得久來成佛也非初非中後前中
004_0020_c_11L後取故者唯修生耶亦是本有斷義
004_0020_c_12L答一云修生斷謂問云斷惑云何
004_0020_c_13L答此問云非初非中後等故修生斷
004_0020_c_14L今釋非初非中後者不斷義
004_0020_c_15L中後取故者斷義也問問旣問於斷
004_0020_c_16L答亦唯是修生斷耶答大乘斷惑
004_0020_c_17L如緣起性斷以不斷爲斷故非初非
004_0020_c_18L中後者不斷前中後取故者斷也
004_0020_c_19L如是問答也諸處中九世滅及非
004_0020_c_20L世滅中九世滅者事滅非世滅者
004_0020_c_21L理滅也三寶章云三不碍非三時而
004_0020_c_22L說三時四不碍三時而說非三時
004_0020_c_23L中劫入非劫非劫入劫等准之

004_0020_c_24L劫則理劫則事是故以劫入非劫

004_0021_a_01L“비겁이 겁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세 번째 문을 증명하였다. 이로 보건대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라는 것은 이치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는다.”는 것은 현상이다.
법장의 『소疏』(『탐현기』)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글을 해석하는 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서로 바뀐다는 입장(相翻門)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서로 이어진다는 입장(相續門)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경우에는 시간적 차이가 없이 도지道智가 번뇌를 끊을 때에 지혜가 먼저 일어나고 번뇌가 뒤에 없어졌다고 보는가, 번뇌가 먼저 없어지고 지혜가 뒤에 생겨났다고 보는가, 아니면 동시에 일어났다고 보는가. 이 세 가지의 견해를 따를 경우 번뇌와 지혜 각각에 두 가지 잘못이 있어 끊음을 이룰 수 없다. 즉 지혜의 경우 스스로 무루無漏를 이룬다는 잘못(自成無漏過)과 번뇌를 없애지 못한다는 잘못(不能滅惑過)이 있고, 번뇌에는 스스로 없어진다는 잘못(自滅過)과 성도聖道를 막지 못한다는 잘못(不障聖道過)이 있게 된다. 세 가지 단계를 생각하는 것은 등불이 어둠을 없앨 때에 3시三時에 어둠을 없애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잡집론雜集論』3) 제4권에서 “어디로부터 끊을 수 있는가? 과거로부터 끊을 수 없다.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미래로부터 끊을 수 없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므로. 현재로부터 끊을 수 없다. 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여러 거칠고 무거운 번뇌로부터 끊을 수 있다.”고 하고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경전에서 비파사나는 번뇌를 깨뜨릴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뜻이다. 그러므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질문) : 『유식론唯識論』4)에서 “성도聖道가 드러남에 번뇌의 종자가 반드시 없어진다. 저울질할 때에 양쪽 끝이 동시에 (한쪽은) 오르고 (한쪽은)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면 곧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여기에서는 세 가지의 견해가 모두 잘못이라고 하는가?
(대답) :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세밀하게 살피면 그렇게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만약 동시라고 하면 지혜가 스스로 생겨날 때와 번뇌가 스스로 없어지는 때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니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린다(對治)고 할 수 있는가? 마치 동쪽 집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날 때 서쪽 집에서 여자 아이가 죽는 것이 비록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여도 아무런 관련이 없어서 상대하여 다스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질문) : 그렇다면 어떻게 끊는 것인가?
(대답) : 곧 이 세 가지의 견해에 의거하여서는 끊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끊음의 뜻이 이루어진다.

004_0021_a_01L第四門非劫入劫證第三門以此
004_0021_a_02L故知非初中後者理前中後取者事
004_0021_a_03L藏師疏第十云釋此文有二門一約
004_0021_a_04L相翻門二約相續門初中謂无間道
004_0021_a_05L正斷惑時爲智先起惑後滅耶
004_0021_a_06L爲惑先滅智後生耶爲同時耶
004_0021_a_07L三時惑智各有二失故不成斷
004_0021_a_08L智有自成無漏過不能滅惑過煩惱
004_0021_a_09L有自滅過不障聖道過於三位中思
004_0021_a_10L如燈破暗三時不破此亦如是
004_0021_a_11L如雜集論第四云從何而得斷耶
004_0021_a_12L從過去已滅无故不從未來以未
004_0021_a_13L生故不從現在道不俱故卷下第二
004_0021_a_14L
然從諸煩惱麁重而得斷乃至
004_0021_a_15L廣說經云毗婆舍那不能破煩惱等
004_0021_a_16L皆是此義故云非初非中後也問唯
004_0021_a_17L識論云聖道現前惑種必滅如稱
004_0021_a_18L兩頭 1)仾昻時等若據此說卽是同
004_0021_a_19L如何此中三時俱非答麁說可
004_0021_a_20L細尅實難何者若同時者智自
004_0021_a_21L生時惑自滅時不相由故何成對治
004_0021_a_22L如東家男生西家女死雖亦同時
004_0021_a_23L无相由不成對治問若爾云何斷
004_0021_a_24L答卽此三時求斷不得方成斷義

004_0021_b_01L이것이 끊지 않음의 끊음(不斷斷)이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취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의 세 시간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닌 때를 취하는 것으로서 세 가지 시간에서 세 가지 시간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색色 등의 곳에서 진공眞空을 취하는 것이 색 등이 별도로 단공斷空을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또한 그러하므로 끊음의 뜻을 잃지 않는다.
두 번째의 서로 이어진다는 입장(相續門)에 의거하는 방법은 여기에서 지혜가 생겨나고 없어질 때에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의 세 시간이 서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때에 분명하게 번뇌를 끊는지 생각해보면, (지혜가) 앞에 있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이미 없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뒤에 있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운데도 끊을 수 없다.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시간 모두에 끊음의 뜻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끊는 것인가. 『십지경론』에서 “불꽃이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만이 아니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모두 취하는 것과 같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오직 처음이나 오직 중간 등만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고 앞과 중간과 뒤가 서로 이어져서 취하여야 비로소 끊음의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 : 세 시간이 별도로 취하였을 때에 각기 끊음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들이 비록 합한다고 하여도 어떻게 끊음을 이룰 수 있는가?
(대답) : 어떤 사람이 세 시간을 별도로 취하여서는 각기 끊음을 이루지 못하지만 세 시간을 서로 연결하면 임시로 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는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는데,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세밀하게 살피면 그렇지 않다. 세 시간을 별도로 취하였을 때 각기 끊음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 세 시간을 모두 합한다고 해서 어떻게 끊음을 이룰 수 있겠는가. 모래 한 톨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많은 모래를 모아도 기름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여기에서 말하는 앞과 뒤는 잘못을 교정하기 위한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들이 이 지혜가 앞에 있을 때에도, 중간에 있을 때에도, 뒤에 있을 때에도 각기 번뇌를 끊을 수 없으므로 곧 성지聖智가 없다고 하는 악취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잘못을 교정하여 여기에서는 처음에서 처음이 아닌 것을 취하고, 중간에서 중간이 아닌 것을 취하며, 마지막도 마찬가지이므로 성지가 없다는 것과 다르며 악취공이 아니라고 하기 위하여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질문) : 여러 다른 곳에서는 성도聖道가 처음 생겨나면

004_0021_b_01L則不斷斷也前中後取故者謂前中
004_0021_b_02L後三時之中取彼非初中後非異三時
004_0021_b_03L取彼非三時也如於色等處取彼眞
004_0021_b_04L非異色等別取斷空此亦如是故
004_0021_b_05L不失斷義二約相續門者謂此地智
004_0021_b_06L生滅相續前中後三時何時定能斷
004_0021_b_07L煩惱唯前不能斷已落謝故唯後
004_0021_b_08L不能斷以未起故中亦不能斷以不
004_0021_b_09L住故是故三時皆无斷義若爾云
004_0021_b_10L何斷論云如燈燄非唯初中後
004_0021_b_11L中後取故此則唯初唯中等不可斷
004_0021_b_12L中後相續取可有斷義問旣三時單
004_0021_b_13L各不成斷縱此和合豈成斷耶
004_0021_b_14L答有人解云三時別取各不成斷
004_0021_b_15L時相續假說爲斷故云前中後取也
004_0021_b_16L麁說可爾細尅不然以別取三時
004_0021_b_17L不成斷摠此三時豈成斷耶如一
004_0021_b_18L沙无油多沙亦无今釋此言前後者
004_0021_b_19L簡濫之言卷下第三張 何者人謂此
004_0021_b_20L智前中後位各不能斷卽謂同於无
004_0021_b_21L聖智處惡取空也故簡云此於初上
004_0021_b_22L非初中上取非中後亦爾不同
004_0021_b_23L无智故非惡取空故云非初非中後
004_0021_b_24L中後取故問餘處論說聖道初起

004_0021_c_01L곧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여기에서는 처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가?
(대답) : 『비담毗曇』에 의하면 한 순간(一念)에 태울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 비로소 모두 없어지며, 번뇌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한 순간(一念)에 태울 수 없고 순간순간이 이어져야 비로소 없앨 수 있으며, 번뇌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대승 초교初敎에 의하면 첫 마음에도 끊을 수 있고, 중간과 마지막 마음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종교終敎에 의하면 연기의 본성과 같아서 (처음과 중간, 마지막의) 세 시간이 모두 끊을 수 없다. 곧 작용하지 않아야 연기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끊지 않음이 없다.5)

청량 징관의 다음과 같은 말씀6)도 현수 법장의 해석과 같다.

또한 지금 경론들이 반복하여 서로 그 의미를 완전하게 밝히고 있다. 만약 끊음을 정할 수 있다면 한 순간이면 족할 터인데 어찌 (처음, 중간, 마지막의) 세 마음을 말하겠는가. 이미 (세 마음을) 모두 취하여야 비로소 이룰 수 있다고 하였으니 무성無性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없는 것이 무성이므로 비로소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끊음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인연이므로 무성이고, 무성이므로 인연이다. 만약 첫 순간(初念)에 끊을 수 있지만 마지막 순간(後念)에 비로소 완전하게 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비담』에서 한 순간 (一念)에 태울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 비로소 모두 없어진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첫 순간만으로는 끊을 수 없고 중간 순간과 마지막 순간까지 쌓아져야 비로소 끊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성실론』에서 한 순간(一念)에 태울 수 없고 순간순간이 이어져야 비로소 없앨 수 있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종지를 잃지 않았으니 오히려 실교實敎에 통할 수 있다. 만약 원교에 의한다면 끊어지는 대상이 되는 번뇌는 하나가 미혹되면 모든 것이 미혹된다. 그러므로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을 끊으며, 끊음이 없고 끊지 않음이 없다.7)

서로 바뀐다는 것(相翻門)은 번뇌와 지혜가 서로 바뀐다는 것이고, 서로 이어진다(相續門)는 것은 단지 번뇌를 끊는 지혜(能斷智)의 생멸이 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이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끊으므로 ……”8)라고 한 것은 앞에서 3시 중의 끊음의 뜻을 밝혔으므로 이제 그 끊음의 모습(斷相)을 설명하는 것이다. 2승의 사람은 번뇌의 장애9)는 끊지만 소지所知의 장애10)는 끊지 않는다. 이미 남은 장애가 있으므로 허공과 같이 끊는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004_0021_c_01L能滅惑何故此中乃云非初
004_0021_c_02L依毗曇一念有燒始終方盡治結
004_0021_c_03L同然依成實論一念不燒相續方
004_0021_c_04L治結亦爾若大乘初敎初念亦斷
004_0021_c_05L中後亦然若依終敎如緣起性
004_0021_c_06L時俱不能斷則由不作緣起方成
004_0021_c_07L不无斷也
淸涼
同賢首釋又今
004_0021_c_08L經論反覆相成謂若定斷者一念
004_0021_c_09L便足何假三心旣並取方成明知
004_0021_c_10L无性无初中後无初中後是无性
004_0021_c_11L方得成於初中後斷此則因緣故
004_0021_c_12L无性无性故因緣也若云初念則能
004_0021_c_13L後念方究竟斷不異毗曇一念
004_0021_c_14L有燒始終方盡若云初念獨不能
004_0021_c_15L積至中後方能斷者不異成實
004_0021_c_16L一念不燒相續2)方然勿失宗旨上猶
004_0021_c_17L通實敎若依圓敎所斷之惑一迷
004_0021_c_18L一切迷故一斷一切斷无斷无不斷
004_0021_c_19L
相翻則惑智相翻相續則唯能
004_0021_c_20L斷智生滅相續也云何斷
004_0021_c_21L虛空如是斷故者前明三時中斷義
004_0021_c_22L今辨斷相如二乘人唯斷煩惱
004_0021_c_23L不斷所知旣有餘碍不名如虛空斷
004_0021_c_24L「仾」作「伝」{乙}「方」下有「盡」{乙}

004_0022_a_01L보살菩薩 경지에 있는 사람은 두 장애의 생사과환生死過患을 단박에 취하여 전체를 하나(一際)로 삼아, 한 순간에 그 하나를 단박에 바꾸어 버리므로, 허공과 같이 청정하다. 『화엄약책華嚴略策』11)에서 “번뇌는 본래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요, 진리에 미혹됨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미혹된 상태에서 돌이키지 못하니 번뇌가 더욱 많아져 끝이 없다. 하늘을 덮은 엷은 구름, 그 온 곳이 없지만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채우니 천지와 사방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다. 큰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홀연히 구름을 모두 걷어 내니 천 리千里에 한 점 구름 남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물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불보살의 방편 바람이 생겨나 번뇌에 근본이 없음을 비추니 본성의 허공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수많은 덕이 본래대로 원만하게 되었다. 8만 가지 고뇌(塵勞)가 모두 바라밀이고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번뇌(惑障)가 모두 진여이다. 눈의 티끌을 없애지 않으면 신기루 꽃(空花)이 혼란스럽게 휘날리지만 법의 눈을 맑게 하면 어떤 번뇌가 사라지지 않겠는가?”12)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 실제의 도리에 있어서는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實相)은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 ……”13)라고 한 것은 번뇌에 쌓여 있는 속에서 하나의 존재도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끊음도 끊지 않음도 없다. 청정함 속에서 하나의 존재도 새로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부처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 것이 없다. 꿈속에서 본 것이 자기 마음이 그려낸 호랑이임에도 꿈속에서는 헛된 공포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것이 자기 마음속의 호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므로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들은 본래 부처이지만 단지 번뇌 망상의 꿈으로 인하여 자신이 먼 옛날부터(舊來) 부처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긴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자신이 부처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법계도』의 글에서 “꿈에서 깨어남과 꿈을 꾸는 것, 잠을 자는 것과 잠에서 깨어남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아서 부처가 됨과 되지 않음, 번뇌를 끊음과 끊지 않음의 차이가 생겨난다.(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라고 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끊음과 끊지 않음과 『도신장』 중의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다른가?

(제자의 질문) : 어떤 곳에서는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고 하는데 전자가 옳으면 후자가 잘못된 것이고, 후자가 옳으면 전자가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습니까?
(의상의 대답) : (부처의) 덕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처음부터 장애가 없었고,

004_0022_a_01L1)菩薩之人頓取二障等生死過患
004_0022_a_02L爲一際於一念中卷下第四張 頓翻彼
004_0022_a_03L際故如空淸淨也華嚴略策云惑本
004_0022_a_04L无從迷眞忽起迷而不返爛漫无涯
004_0022_a_05L若纎雲覆空其來无所須臾彌滿
004_0022_a_06L合暗然長風忽來倐然雲盡千里
004_0022_a_07L无點萬像歷然方便風生照惑无
004_0022_a_08L性空現現衆德本圓八萬塵勞
004_0022_a_09L皆波羅蜜恒沙惑障盡是眞如
004_0022_a_10L翳未除空花亂起但淨法眼何惑
004_0022_a_11L不銷
此之謂也其實道理諸法實
004_0022_a_12L相不增不減等者 2)煩惱法中不見一
004_0022_a_13L法減故約實道理无斷不斷淸淨
004_0022_a_14L法中不見一法增故約實道理
004_0022_a_15L成不成然夢中所見是自心虎
004_0022_a_16L睡眠緣妄生怖畏覺後方知是心之
004_0022_a_17L故不畏也如是衆生本來是佛
004_0022_a_18L只由煩惱妄想之夢所以不知自舊來
004_0022_a_19L覺大夢後方知自佛是故文云
004_0022_a_20L如覺夢睡悟不同故建立成不成斷
004_0022_a_21L不斷等也問今此斷不斷與道身章
004_0022_a_22L中有文云一斷一切斷有文云
004_0022_a_23L无所斷彼是則此非此是則彼非
004_0022_a_24L何會通答以德言之從始无障

004_0022_b_01L(중생의) 번뇌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모든 (부처의) 덕을 모두 가리었다. 만약 실제로 끊을 바가 없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미혹된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만약 끊을 바가 있다고 한다면 그 끊을 바는 어떤 것인가. (『십지경론』의) 글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3시를 구분하여서는 끊음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3시를 구분함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도리는 끊음과 끊지 않음에 있지 않다. 다만 근기에 따라서 끊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한 끊을 바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도신장』에서는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는 입장에 의거하여서는 “근기에 따라서 끊음을 이야기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는 입장에 의거하여서는 “또한 끊을 바가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지금 여기에서는 그와 달리 번뇌를 완전히 끊는 것을 끊음이라고 하고 번뇌를 완전히 끊지 않는 것을 끊지 않음이라고 한 것이므로 서로 다르다.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실제의 도리에 있어서는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實相)”이라는 것과 그 책(『도신장』)에서 “‘근기를 위하고자 한다(欲爲機)’는 것은 가르침을 찾아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으로 끊음과 끊지 않음이 서로 막힘이 없고 참된 모습(實相)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어떻게 다른가?
참된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설명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그 책(『도신장』)에서는 이미 번뇌를 끊은 이후의 단계에서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와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는 입장에 의거하여 막힘이 없는 참된 모습을 논하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는 “번뇌가 쌓여 있는 속에서 하나의 존재도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없으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끊음도 끊지 않음도 없고, 청정함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새로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없으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부처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 것이 없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남과 꿈을 꾸는 것, 잠을 자는 것과 잠에서 깨어남의 차이가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므로 단지 설명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책(『도신장』)에서 “끊음과 끊지 않음이 서로 막힘이 없고 완전한 모습(實相)”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다만 본유本有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미 “끊음과 끊지 않음이 서로 막힘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단지 본유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책에서 “만약 실제로 끊을 바가 없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미혹된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만약 끊을 바가 있다고 한다면 그 끊을 바는 어떤 것인가. (『십지경론』의) 글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3시를 구분하여서는

004_0022_b_01L惑望之覆无盡德若實无所斷
004_0022_b_02L故迷人未得若有所斷所斷是何
004_0022_b_03L云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三時之
004_0022_b_04L不得斷相而覺以去三時无障
004_0022_b_05L道理不在斷不斷中隨機言斷又无
004_0022_b_06L所斷
何別答彼則約前云一斷一
004_0022_b_07L切斷而云隨機言斷約前云實无所
004_0022_b_08L斷而云卷下第五張 又无斷也今此不
004_0022_b_09L煩惱永斷則是斷煩惱未斷則
004_0022_b_10L不斷故別也問今此其實道理諸法
004_0022_b_11L實相與彼章云欲爲機者尋敎證
004_0022_b_12L斷與无斷无碍實相何別
004_0022_b_13L實相則一能詮方便別謂彼則立在
004_0022_b_14L旣斷已去約一斷一切斷與實无所斷
004_0022_b_15L論其无碍之實相今此3)煩惱法中
004_0022_b_16L見一法減故其實道理无斷不斷
004_0022_b_17L淨法中不見一法增故其實道理
004_0022_b_18L成不成然而猶如覺夢睡悟不同故
004_0022_b_19L立成不成斷不斷等故但詮別耳問彼
004_0022_b_20L章斷與无斷无碍實相唯本有耶不耶
004_0022_b_21L答旣云斷與无斷无碍故不得言唯
004_0022_b_22L是本有彼云若實无所斷者何故迷
004_0022_b_23L人未得若有所斷所斷是何文云
004_0022_b_24L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者三時之中

004_0022_c_01L끊음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3시를 구분함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끊음은 끊을 바가 없다는 것과 떨어질 수 없다고 하고, 끊을 바가 없다는 것은 끊음과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동시同時로서 인연문에서 연(緣 :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수행하여 생겨난 지혜가 장애를 끊으려는 마음을 일으켜 과거의 시작도 없는 때를 돌이켜 보며 장애의 본체를 찾아볼 때에 끊을 수 있는 장애가 없는 것이 바로 “끊을 바가 없음”이고, 이와 같이 오늘 끊을 바가 없고 원래 부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순간의 수행하여 생겨난 지혜가 일어난 때문에 이와 같이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끊음”이다. 이와 같으므로 끊음은 끊을 바가 없음과 떨어지지 않고, 끊을 바가 없음은 끊음과 떨어지지 않아서 동시이고 선후가 없다.
「육상장六相章」14)의 “이 서까래가 없다고 해서 어찌 집이 아닌가? 서까래가 없는 집은 망가진 집일 뿐 온전한 집이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집은 하나의 서까래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서까래에 달려 있으므로 서까래가 바로 집임을 알 수 있다.”15)는 내용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인연의 집(因緣舍)16)이라고 하였지만 성기性起 스님은 “인연의 아버지17)가 변계의 아들18)을 가르치는 때이므로 실제로는 인연의 집이 아니다. 옛글(古辭)에 ‘이 집에는 세 가지의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집을 지으려고 서까래 등의 여러 구성 요소들을 모으는 때이다. 두 번째는 집을 다 지은 뒤에 여러 구성 요소들이 집을 이루게 되는 것을 보여 주는 때이다. 세 번째는 하나의 서까래를 집어내서 온전한 집과 망가진 집을 구별하여 그 하나의 서까래가 서까래가 되는 것(成椽)19)을 생각하는 단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세 번째 단계는 변계를 통하여 인연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인연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보여 주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만일 “인연을 보여 주는 방편의 단계”라고 한다면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이 하나의 서까래가 집을 이루는 서까래가 된 것이니

004_0022_c_01L不得斷相而覺以去三時无障

004_0022_c_02L言斷不離无所斷言无所斷不離於斷
004_0022_c_03L實則同時謂因緣門中緣前无法
004_0022_c_04L是故要得今我修生智起斷障之念退
004_0022_c_05L觀過去无始之際尋其障體更无可
004_0022_c_06L斷之障則无所斷如是今日覺无所
004_0022_c_07L4)无來是佛者良由一念修生智起
004_0022_c_08L故得如是卽是斷也是則斷不離於无
004_0022_c_09L所斷无所斷不離於斷一時无前後也
004_0022_c_10L六相章云无此椽時豈非舍耶
004_0022_c_11L但是破舍非好舍故知好舍全屬一椽
004_0022_c_12L旣屬一椽故知椽卽是舍
卷下第六
004_0022_c_13L
一云因緣舍性起德云因緣之
004_0022_c_14L誨遍計子之時故非實因緣舍
004_0022_c_15L辭云此舍有三位一欲作舍故
004_0022_c_16L椽等諸緣時二旣作舍已歷指諸緣
004_0022_c_17L成舍之義示之之時三取去一椽
004_0022_c_18L其好舍及與破舍覔此一椽成緣之
004_0022_c_19L此第三位者履於遍計示因緣
004_0022_c_20L之處故非實因緣正觀可云示因緣
004_0022_c_21L之方便然而若云示因緣之方便位
004_0022_c_22L則至此第三位方得此一椽是成舍
004_0022_c_23L「菩」作「善」{甲}「煩惱」作「菩薩」{乙}「煩
004_0022_c_24L惱」疑「菩薩」{乙}
「无」作「元」{甲}{乙}次同

004_0023_a_01L그렇다면 이것은 서까래의 자리가 이루어진 단계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서까래가 서까래가 된 때에 이 서까래가 어디서 왔는지 뒤돌아 찾아보면 산에 푸른 잎의 나무로 있을 때에 서까래가 아닌 것이 아니며, 새가 이 나무의 씨를 물어다 땅에 떨어뜨린 때에도 또한 서까래가 아닌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서까래는 서까래가 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지만 일단 서까래가 되었다면 집을 완성시키는 서까래이므로 이 서까래가 산에 나무로 있을 때에도 집을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만족시키고, 새가 씨를 물어다 땅에 떨어뜨렸을 때에도 또한 집을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만족시킨다. 이것이 곧 옛사람이 말한 바 “도끼를 메고 나무를 찍을 때에 집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며, 여러 글에서 이야기하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이루어지면 처음과 끝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종성장種性章」20)에서는 “성종성性種性은 본유(本有 :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고 습종성習種性은 수생(修生 : 닦음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즐겨 하는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릇 종성을 논하는 것은 인연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어찌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종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지금 성종성은 본유가 될 수 없다. 또 습종성은 수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법성法性 바깥에 수생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가 무엇이 더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21)고 하였다. 무릇 종성을 논하는 것은 인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므로 닦아서 부처를 이룬 곳에 의거하여 비로소 성종성性種性의 본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 만일 닦음의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습종성이 이루어질 때에 곧 성종성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법성의 바깥에 다시 수생이 없으므로 성종성과 습종성의 연기는 어떤 것이 먼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있는 것도 아니다(非初非中後).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내가 얻은 수생의 지혜는 인연에 의한 존재이므로 이 수생의 지혜를 얻은 이후에 비로소 시작도 없는 먼 과거로부터 끊어야 하는 장애가 없었고 본래 깨달음 상태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지혜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원래 깨달음이 아니었다.

004_0023_a_01L之椽是則此是椽位得成之處然則若
004_0023_a_02L得此椽成椽之時退尋此椽在山
004_0023_a_03L靑葉木時无不是椽鳥含此木之種
004_0023_a_04L落地之時亦无不是椽是故此椽不
004_0023_a_05L成則已成則是成舍之椽故椽之爲
004_0023_a_06L山木之時滿足舍全全成鳥含種子
004_0023_a_07L落地之時亦得滿足舍全全成
004_0023_a_08L乃古人所云荷斧打木時滿足舍成
004_0023_a_09L卽是此義諸處文中不成則已
004_0023_a_10L成則離始終之義也種性章云性種
004_0023_a_11L性是本有習種性是修生此非佛法
004_0023_a_12L所樂何以故夫論種性者順因緣
004_0023_a_13L門說豈容不待因緣而說種性故
004_0023_a_14L性種性不得爲本有習種性不得
004_0023_a_15L爲修生何以故若法性外有修生
004_0023_a_16L緣起可增是故不得說修生故

004_0023_a_17L夫論種性順因緣門則約習成處
004_0023_a_18L說性種之本有若習因未成不得說
004_0023_a_19L是故習種性成時卽有性種故
004_0023_a_20L是法卷下第七張性以外更无修生
004_0023_a_21L習緣起非初非中後也今此亦爾
004_0023_a_22L今日我所得修生之智是因緣法故
004_0023_a_23L此修生之智以去方說從无始過去无
004_0023_a_24L障可斷 *无來是覺此智以前 *无非

004_0023_b_01L그러므로 끊음과 끊지 않음은 동시에 연기한다.
“어떤 사람”22)이란 3승의 사람이다.
“이치(理)와 현상(事)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23)이라고 한 것은 “고요하면서 항상 쓰임이 있고, 쓰임이 있으면서도 항상 고요하다.”는 것이 이치와 현상의 상즉(理事相卽)이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事事相卽)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3승에서는 이치와 이치의 상즉(理理相卽), 이치와 현상의 상즉(理事相卽), 현상과 이치의 상즉(事理相卽) 등 3구는 논하지만 현상과 현상의 상즉(事事相卽)은 논하지 못한다. 일승에서는 이들을 모두 다 논하므로 구별되는 것이다.
“만약 별교일승의 가르침에 의거하면 ……”24)이라고 한 것에서는 이치와 현상의 상즉(理事相卽)에서 다시 현상과 이치의 상즉(事理相卽)의 구절을 나누면 4구의 상즉을 모두 갖추게 된다.
“각각 상즉하지 않는다.(各各不相卽)”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중문 (中門 : 相入)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4구가 상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뒤에 이어서 “왜 그러한가 하면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何以故 中卽不同故)”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의 세 구절25)은 즉문(卽門 : 相卽)이고 “각각 상즉하지 않는다.(各各不相卽)”는 중문이라고 한다.
후자의 입장에서는 『삼보장』에서 “처음의 상즉하지 않는다는 것에 4구가 있다. 첫 번째는 두 가지 현상(事)이 상즉하지 않는다. 인연의 모습(緣相)으로 인해 현상이 서로 막히기 때문에. 두 번째는 두 가지 현상의 이치가 상즉하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세 번째는 이치가 현상과 상즉하지 않는다. 이치는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네 번째는 현상이 이치와 상즉하지 않는다. 현상은 움직여서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26) 두 번째의 상즉하는 것에 4구가 있다. 첫 번째는 현상이 이치와 상즉한다. 연기는 정해진 성격이 없기 때문에 ……”27)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여기에서 “각각 상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4구가 상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야기한다.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中卽不同故)”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즉문이기 때문에 이치와 이치의 상즉에서부터 각각 상즉하지 않는 것까지 이야기한 것이다. 만약 중문에 의거한다면 마땅히 이치와 이치의 상입相入, 현상과 현상의 상입, 각각 상입하지 않는 것까지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각각 상즉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번째 입장인 4구가 상즉하지 않는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은 일승에서 중문과 즉문을 논하는 것이 3승과 달라서

004_0023_b_01L是覺是故斷與不斷同時緣起也
004_0023_b_02L人者三乘人也理事相卽故有如是
004_0023_b_03L等者寂而常用用而常寂者是理事
004_0023_b_04L相卽非謂事事相卽云也三乘中
004_0023_b_05L論理理相卽理事相卽事理相卽等
004_0023_b_06L三句不得論事事相卽一乘中具論
004_0023_b_07L故別也若依別敎一乘等者於理事
004_0023_b_08L相卽中更開事理相卽句具說四句
004_0023_b_09L相卽也各各不相卽者一云中門
004_0023_b_10L云四句不相卽也初義者仍云何
004_0023_b_11L以故中卽不同故是故初三句者卽
004_0023_b_12L各各不相卽者中門也後義者
004_0023_b_13L寶章云初不卽中四句者一二事不
004_0023_b_14L相卽以緣相事碍故二二事之理
004_0023_b_15L相卽以无二故三理事不相卽
004_0023_b_16L理靜非動故等二相卽四句者一事
004_0023_b_17L卽理以緣起无性故
等故今此各
004_0023_b_18L各不相卽者四句不相卽也問中
004_0023_b_19L卽不同故者何耶答以是卽門故云
004_0023_b_20L理理相卽乃至各各不相卽若約中
004_0023_b_21L應云理理相入事事相入乃至
004_0023_b_22L各各不相入是故云中卽不同也今釋
004_0023_b_23L各各不相卽者同後師義四句不相卽
004_0023_b_24L中卽不同者一乘中論中卽不

004_0023_c_01L이치와 이치의 상즉과 상입, 현상과 현상의 상즉과 상입, 이치와 현상의 상즉과 상입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한 것은 3승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이다.
4구의 상즉은 법성융통문法性融通門과 연기상유문緣起相由門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는가?
두 문에 모두 통한다.
그렇다면 두 문에서 이치와 이치의 상즉과 현상과 현상의 상즉은 어떻게 다른가?
법성융통문에서는 의거하는 바(所依)인 이치가 막힘없이 통하므로 의거하고 있는(能依) 현상도 또한 이치를 따라서 막힘없이 통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티끌이 의거하는 바(所依)의 이치를 남김없이 포함할 때에 의거하는(能依) 여러 존재들이 의거하는 바의 이치를 따라서 하나의 티끌에 상즉하는 것이 현상과 현상의 상즉이다. 한편으로 의거하고 있는 여러 존재들이 의거하는 바인 이치를 따라서 막힘없이 통할 때에 이 존재와 저 존재의 이치들이 상즉하는 것이 이치와 이치의 상즉이다. 연기상유문에서는 하나가 없으면 전체도 없게 되고 전체가 없으면 하나도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와 전체가 서로 말미암아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현상과 현상의 상즉이다. 한편 현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치에도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이 현상과 현상의 차별되는 이치들이 상즉하는 것이 이치와 이치의 상즉이다.
이치와 이치의 상즉을 법성융통문에서 볼 수 있는가?
이치와 현상이 상즉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 중에서 “만약 오직 이치에만 의거하면 이치는 오직 하나의 맛(一味)이므로 상즉하고 상입할 수 없다. 만약 오직 현상에만 의거하면 서로 막히고 장애하므로 상즉하고 상입할 수 없다.(若唯約理 理唯一味 不可即入 若唯約事 互相障礙 不可即入)”28)고 하였으므로 이치와 현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현상의 차별을 따라서 이치도 차별이 있게 된다. 연기상유문에서도 또한 이치와 이치의 상즉을 이야기할 수 있다.
『유마경』의 「부사의품不思議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때에 장자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그대는 무량천만억 아승기의 국토를 돌아다녔는데 어느 부처님의 국토에

004_0023_c_01L同三乘卷下第八張理理卽入事事
004_0023_c_02L卽入理事卽入亦得是故云不同
004_0023_c_03L不同三乘也問四句相卽者法性
004_0023_c_04L融通門緣起相由門如何配耶
004_0023_c_05L二門通也問若爾二門中理理相
004_0023_c_06L與事事相卽何別答法性門中
004_0023_c_07L以所依之理融通故能依之事
004_0023_c_08L隨理融通是故一塵攝所依理
004_0023_c_09L不盡時能依諸法隨所依理卽於
004_0023_c_10L一塵者事事相卽也能依諸法
004_0023_c_11L所依理融通之時彼此之理相卽
004_0023_c_12L理理相卽也緣起相由門中
004_0023_c_13L无則多亦无多无則一亦无一多相
004_0023_c_14L由而得成立者事事相卽也以事差
004_0023_c_15L別故理亦差別以事事中差別之理
004_0023_c_16L相卽者理理相卽也問理理相卽
004_0023_c_17L可於法性門見耶答理事不卽之所以
004_0023_c_18L中云若唯約理理唯一味不可卽
004_0023_c_19L若唯約事互相障碍不可卽入
004_0023_c_20L
是故由理事不異隨事差別
004_0023_c_21L亦差別故緣起相由中亦得說理理
004_0023_c_22L相卽也問維摩經中不思議品云
004_0023_c_23L時長者維摩詰問文殊師利仁者遊
004_0023_c_24L於无量千萬億阿僧祗國何等佛土

004_0024_a_01L좋고 지극히 오묘한 사자좌(好上妙師子之座)29)가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문수사리는 ‘거사가 동쪽으로 36항하사의 국토를 지나면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이름이 수미상須彌相이며, 그곳에 계시는 부처님의 이름은 등왕燈王30)입니다. 지금 현재 그 부처님의 키는 8만 4천 유순由旬이고, 그 사자좌의 높이도 8만 4천 유순으로 대단히 엄숙하게 장엄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에31) 장자32)가 신통력을 드러내자 이때에 그 부처님이 높고 넓고 아름다운 3만 4천의 사자좌를 유마힐의 방으로 보내 주었다. ……사리불이 ‘거사여, 일찍이 없던 일입니다.33) 이와 같이 작은 방에 이렇게 크고 넓은 법좌들을 수용하는 것은’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3승의 경전에서도 현상과 현상의 막힘없음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법계도』에서) “이치와 현상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이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고 하는가?
「오교장」에서 “열 번째는 현상(事)의 다름이다. 즉 집, 숲, 땅, 산 등과 같은 현상이 모두 법문이 되니 혹은 행行 혹은 위位, 혹은 교敎 혹은 의義 등이 된다. ……34) 일체의 차별 있는 현상들이 인다라35)와 미세36)를 이루니 하나의 현상이 생겨남을 따라서 모두다 그와 같이 된다. 3승은 그렇지 않아서 다만 곧 공空이나 진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일승의 설명과 같지 않다. 또한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힘으로 잠깐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하여도 저 (일승과 같이) 존재들이 그러한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지 않다.”37)라고 하였으므로 앞에서 인용한 『유마경』의 내용은 단지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힘으로 잠시 드러내 보인 것일 뿐 존재들의 본래 그러한 상태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므로 (3승에서는 현상과 현상의 상즉의 뜻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유마경』에서는 이어서 “오직 사리불과 여러 불보살들은 불가사유不可思惟라는 이름의 해탈을 가지고 있는데, 보살들이 이 해탈에 머무르면 능히 수미산과 같이 높고 넓은 것을 겨자씨 속에 넣으면서도 양자의 크기를 줄이거나 늘리지 않을 수 있다. 수미산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4천왕과 도리천의 여러 천인天人들이 자신들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

004_0024_a_01L好上1)妙師子之座文殊師利言居士
004_0024_a_02L東方度三十六恒河沙國有世界
004_0024_a_03L須彌相其佛2)號燈王今現在彼佛
004_0024_a_04L身長八萬四千由旬其師子座高
004_0024_a_05L萬四千由旬嚴餙第3)4)者現
004_0024_a_06L神通力卽時彼佛遣三萬四千師子
004_0024_a_07L卷下第九張 高廣嚴淨來入維摩
004_0024_a_08L詰室乃至舍利弗言居士未曾
004_0024_a_09L有也如是小室乃容受此高廣之座
004_0024_a_10L
此是三乘經中盛談事事无碍
004_0024_a_11L云理事相卽故有如是義非謂事事
004_0024_a_12L相卽義耶答五敎章云十者事異
004_0024_a_13L隨有舍林地山等事皆是法門或是行
004_0024_a_14L或是位或敎義等
乃至一切差別
004_0024_a_15L事因陁羅微細成就隨一事起皆悉
004_0024_a_16L如是三乘則不爾但可說卽空卽如
004_0024_a_17L不同此也又若以神通不思議力
004_0024_a_18L容得暫現非是彼法自恒如是

004_0024_a_19L上所引經但是神力暫現非法自爾
004_0024_a_20L不相違故彼經次文云唯舍利
004_0024_a_21L諸佛菩薩有解脫名不可思5)
004_0024_a_22L若菩薩住是解脫能以須彌之高廣
004_0024_a_23L入芥子中无所增減須彌山王
004_0024_a_24L相如故而四王天忉利諸天不覺不

004_0024_b_01L오직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만이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현상과 현상의 상즉의 근거로 이야기되는) 열 가지 이유(十所以)38) 중의 생각하기 어려운 해탈(難思解脫)과 이 『유마경』의 내용은 어떻게 다른가?
3승에서는 신통력으로 잠시 드러낸 것으로서 실제의 모습(實德)이 아니지만 일승에서의 변화는 곧바로 실제의 모습(實德)으로서 다르다.“또한 이치(理)의 인다라와 현상(事)의 인다라 등의 법문을 모두 갖추고 있다.”39)에서 등等은 이치와 현상(理事)의 인다라와 현상과 이치(事理)의 인다라를 가리킨다.
“10불十佛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法界宅)”40)이라고 한 것과 관련하여 『법계도』의 앞부분에서 말한 “인因과 과果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法性家) 안의 진실한 덕용德用으로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41)고 했을 때의 법성의 집 및 인다라니의 집(因陀羅尼家), 미세의 집(微細家)과 여기에서 말한 법계의 집은 하나이다. 만약 앞에서 이야기한 법성중도法性中道가 오로지 내증內證이라고 한다면 이미 집에 돌아왔다(歸家)고 한 것은 본성을 깨달은 것이므로 법성과 돌아온 집은 서로 다르지 않아서 둘 다 내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증에서는 인다라를 논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집에 돌아왔다고 할 때의 집에 대해서는 법계다라니의 집, 인다라니의 집, 미세의 집 등으로 이야기하는가.42) 그러므로 10불十佛의 깨달음에 의거할 때에는 비록 내증이지만 이미 10불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이라고 하였으므로 보현보살의 경계에도 통하는 것이니 어찌 내증이기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법계의 집과 앞에서 이야기한 법성의 집은 서로 다르지 않아서 오로지 외화外化이며 나타나 있는 바(所現)인 내증과 막히지 않는 것이다.
『약소』(『수현기』)에서 “성인의 경지는 둘이니 곧 이치(理)와 인식(量)의 두 법이다. 이 둘에 각기 두 가지의 법인다라망 경계가 있으니 ‘이치 속의 인식(理中量)’과 ‘인식 속의 일부분(量中之一分)’이다.”43)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치 속의 인식’은 부처의 외향外向이고 ‘인식 속의 일부분’은 보현보살의 내향內向이므로 오직 부처의 외향과 보현보살의 내향에서 인다라를 이야기할 수 있다.

004_0024_b_01L知己之所入唯應度者乃見須彌入
004_0024_b_02L芥子中
是故爾也問十所以中
004_0024_b_03L思解脫與此何別答三乘之中
004_0024_b_04L力暫現非是實德若一乘中變化
004_0024_b_05L是實德故別也亦有具足理因陁6)羅及
004_0024_b_06L事因陁*羅等者等取理事因陁羅
004_0024_b_07L理因陁羅也十佛普賢法界宅者
004_0024_b_08L云因果二位法性家內眞實德用
004_0024_b_09L在中道之法性家及因陁羅尼家微細家
004_0024_b_10L與此法界宅一也若前之法性中道
004_0024_b_11L是內證者旣云歸家者證本性故
004_0024_b_12L法性卷下第一○張與歸家之家旣不
004_0024_b_13L別故並是內證耶然則內證中
004_0024_b_14L論因陁羅何故釋歸家之家云法界陁
004_0024_b_15L羅尼家因陁羅尼家微細家耶是故
004_0024_b_16L約十佛證邊雖是內證旣云十佛普
004_0024_b_17L賢法界宅則亦通普賢境界何唯內
004_0024_b_18L證耶是則此法界宅與前法性家
004_0024_b_19L別故正唯外化不碍所現內證也
004_0024_b_20L疏云聖境有二謂理量二法此二
004_0024_b_21L各有二法因陁羅網境界則理中量
004_0024_b_22L量中之一分耳
一云理中量者
004_0024_b_23L外向量中之一分者普賢內向故
004_0024_b_24L佛外向與普賢內向中得說因陁羅

004_0024_c_01L오직 부처의 내증에 의거하거나 보현보살의 외향에 의거하여서는 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이치와 인식의 두 법은 이치(理)의 인다라와 현상(事)의 인다라이고, ‘이치 속의 인식’은 이치와 현상(理事)의 인다라, ‘인식 속의 일부분’은 현상과 이치(事理)의 인다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4구의 인다라이다.
세 번째의 나머지 예를 든 부분44) 중에서 “역순逆順과 주반主伴이 서로 이루어 주는 등의 ……”라고 한 것은 앞에서 법계의 집에 이치와 현상의 인다라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서로 막힘없음을 밝히고 지금 나머지 역순 등을 드러낸 것이다. 역逆은 오열중비五熱衆鞞45)이고, 순順은 6바라밀의 바른 행동이다. “등”은 인법人法, 교의敎義 등의 10법과 동시구족문 등의 나머지 문들을 가리킨다.

나. 연기다라니의 대의大義 설명에 대한 해설
지금까지는 전체의 세 번째 단락인 석문(釋文 : 글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해석하는 것)에서 두 단으로 나눈 중의 첫 부분인 본문 내용을 곧바로 해석하는 부분이었다. 이 아래부터는 두 번째 부분인 다라니의 전체적 의미에 대한 료간(料簡 : 나누어 분석적으로 설명함)이다. 이 료간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의 “만약 (연기의 참된 모습의 다라니를) 보고자 하면 ……” 이하에서는 연기다라니의 뜻을 곧바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의 “묻는다. 초교初敎에서부터는 ……” 이하에서는 질문과 대답으로 삼승과 다른 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많은 내용을 설명하는 다른 책들에 미룬 것(推廣)이다.

가) 연기다라니의 뜻에 대한 직접적 설명에 대한 해설
첫 번째 곧바로 드러낸 부분은 다시 둘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다라니의 뜻을 곧바로 드러낸 것이고 아랫부분인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 이하는 앞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앞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는 수전법數錢法에 의거하여 다라니의 뜻을 드러내고 있고, 뒤의 “동전 중에서 ……” 이하에서는 비유를 통하여 수전법을 설명하고 있다. 앞의 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앞에서는 하나하나의 현상(一事)에 열 개의 동전이 갖추어져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고, 뒤의 “하나하나의 동전 중에 …… 그에 준해 알 수 있다.”에서는 하나하나의 동전에 모두 수전법을 해석하는 10현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가) 수전법數錢法 설명에 대한 해설
(다시 하나하나에 열이 갖추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앞부분은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앞부분은 전체 내용을 드러낸 것이고,

004_0024_c_01L唯約佛內證及普賢外向中不論也
004_0024_c_02L釋理量二法者理因陁羅及事因陁羅
004_0024_c_03L理中量者理事因陁羅量中之一分
004_0024_c_04L事理因陁羅是故此是四句因陁
004_0024_c_05L羅處也三例餘中逆順主伴相成等者
004_0024_c_06L前明法界宅中理事因陁羅具足自在
004_0024_c_07L今此例現所餘逆順等也逆則五熱衆
004_0024_c_08L順則六度正行也等者等取人
004_0024_c_09L法敎義與同時具足等所餘門法也
004_0024_c_10L來大段第三釋文下意有二段中初正
004_0024_c_11L釋文竟

004_0024_c_12L
自下第二料簡陁羅尼大義三初若欲
004_0024_c_13L觀下正現緣起陁羅尼義次問初敎
004_0024_c_14L以去下問答現示與三乘別三推
004_0024_c_15L初中亦二初正現陁羅尼意
004_0024_c_16L上來所明下結前也初中亦二先約
004_0024_c_17L數錢法現陁羅卷下第一一張尼意
004_0024_c_18L如錢中下擧喩例法初中二先現
004_0024_c_19L一一錢中具十无盡後一一錢中依下
004_0024_c_20L乃至准之可解者現前一一錢中
004_0024_c_21L具能釋十門也初中三先若欲下
004_0024_c_22L「妙」下經有「功德成就」{乙}「號」下經有「須
004_0024_c_23L彌」{乙}
「一」下經有「於是」{乙}「者」下經有
004_0024_c_24L「維摩詰」{乙}
「進」疑「惟」·或「議」{乙}「羅」
004_0024_c_25L下法界圖本文有「尼」次同

004_0025_a_01L그 다음의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 이하는 중문과 즉문을 따로 따로 해석한 것이며, 마지막의 “지금까지 설명한 오는 것과 가는 것 ……” 이하는 중문과 즉문의 두 문 전체에 대하여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의심을 없앤 것이다.

㉮ 수전법數錢法의 개요 설명에 대한 해설
첫 번째 (전체 내용을 드러낸) 부분46)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연기의 참된 모습(緣起實相)”은 내증이고, 수전법의 중문과 즉문은 내증을 드러내는 방편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중문이 곧 연기이고, 즉문이 곧 연기의 참된 모습으로서 모두 내증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연기의 참된 모습과 중문을 설명하고서 끝 부분에 “연기의 오묘한 이치(緣起妙理)”라고 하였고, 「의리장」에서는 “또한 현상(事)의 동전에 의거하여 저 일승 연기의 다함없는 다라니법을 비유한다.”47)고 하였으며, 또 『화엄종요華嚴宗要』48)에서는 “여기에서 설명하려는 바(所詮)인 보법普法을 밝히는 뜻은 …… 바로 이 화엄경이 설명하려는 바(所詮)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같은 뜻이다.
수전법의 비유는 누가 처음 창안한 것인가?
지엄이다. 『보법기普法記』49)에서 “수전법은 지엄 법사가 말씀하신 뜻이고, 의상 법사가 전해 온 말씀으로서 이 뜻을 생각하고 헤아려보니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에 지금 그것에 대하여 서술한다.”라고 하였고, 또 『화엄종요』에서는 “이 수전법의 방법은 지엄 법사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또한 도리가 있으므로 이제 그것을 택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전법이 지엄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법장과 징관, 신라에서는 의상과 원효가 세상에 이것을 유통시켰다.
동체同體와 이체異體는 수전법인가? 중문과 즉문은 수전법인가?
둘 다 그러하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동체와 이체, 중문과 즉문을 막론하고 만일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를 쓰면 수전법이고, 만약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를 쓰지 않으면 수전법이 아니다. 동체와 이체, 중문과 즉문에 대하여는 지엄 이전에 두순 화상 등이 또한 말씀하셨지만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에 의거하여서 연기법을 드러낸 것은 지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경전과 논서에서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004_0025_a_01L次此中有二下別釋中卽二門
004_0025_a_02L如上所說來去下通約二門問答除疑
004_0025_a_03L初中一云緣起實相者內證
004_0025_a_04L錢中卽者現內證之方便今釋中卽
004_0025_a_05L緣起卽是緣起實相非是內證
004_0025_a_06L故今此緣起實相與中門終云緣起妙
004_0025_a_07L義理章云且約事錢況彼一乘
004_0025_a_08L緣起无盡陁羅尼法華嚴宗要云
004_0025_a_09L明所詮普法義者乃至正是此經所詮
004_0025_a_10L之義
一義也問數錢之喩誰始
004_0025_a_11L出耶答儼師是也謂普法記云
004_0025_a_12L錢之法智儼法師所說之義義相法
004_0025_a_13L師所傳之辭思量此義有道理故
004_0025_a_14L須述也又宗要云此數錢門儼法
004_0025_a_15L師出亦有道理故今取之
故知
004_0025_a_16L數錢之法出自儼師而唐國則藏師
004_0025_a_17L與澄觀新羅則義相與元曉流通於
004_0025_a_18L世也問同異體是數錢之法耶中卽
004_0025_a_19L是數錢之法耶答如問二義今釋无
004_0025_a_20L問同異體與中卽若用數錢喩則數錢
004_0025_a_21L之法也若不用數錢處則非數錢也
004_0025_a_22L同異體中卽者儼師已前杜順和尙等
004_0025_a_23L亦說約數錢喩現緣起法則始自儼
004_0025_a_24L師故爾云也問經論中有說數錢耶

004_0025_b_01L
다만 논서에서 별시의취別時意趣를 해석하는 가운데에 “동전 한 개 …… 백 개, 천 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경전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그렇지만 연기법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방편이므로 취한 것이다.
수전법의 뛰어난 이점은 무엇인가?
『개종기開宗記』50)에서는 “수전법은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고 열반의 무애한 공덕(德)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수전법을 배우면 보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고 듣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므로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였다. 수전법을 배우면 자기 몸을 떠나지 않고서도 하나하나의 터럭 구멍에서 많은 부처님의 바다를 보고,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많은 부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머무르는 곳이 부처님의 법계임을 보고 또한 자기의 몸이 부처님 스스로의 몸이고, 자신의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임을 보게 되므로 열반의 무애한 공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연기관을 배우고, 보현행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수전법의 방법을 따라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계도』에서) “만일 연기 실상의 다라니 법을 보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수십전법數十錢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 중문中門과 즉문卽門의 설명에 대한 해설
(두 번째의 중문과 즉문을) 따로 해석하는 부분51) 중 앞의 구절은 중문과 즉문을 나열하였고, 그 뒤의 “첫 번째 문에 둘이 있는데, 첫 번째는 ……” 이하는 두 문 각각의 내용을 따로 해석한 것인데, 앞의 중문에 대해서는 먼저 오고 가는 뜻에 대하여 설명한 후 뒤의 “하나의 문에 10문을 완전하게 포섭하여 다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이하는 다함(盡)과 다하지 못함(不盡)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처음의 (중문과 즉문을 나열함과) 관련하여서 말한다.
여기에서 중문은 “위로 향하여 오고, 아래로 향하여 간다.(向上來向下去)”고 하고 즉문은 “위로 향하여 가고, 아래로 향하여 온다.(向上去向下來)”고 하였는데, 「의리장」에서는 이체의 중문에 대하여는 “위를 향하여 헤아리고, 아래를 향하여 헤아린다.(向上數向下數)”고 하고 즉문에 대하여는 “위를 항하여 가고, 아래를 향하여 온다.(向上去向下來)”고 하였고, 동체의 중문과 즉문에서 따로 위를 향함(向上)과 아래를 향함(向下), 오는 것(來)과 가는 것(去)의 뜻을 구별하지 않았다.52) 한편 지상(至相 : 지엄을 가리킴)의 『십현장』53)에서는 이체의 중문과 즉문에 대하여 모두

004_0025_b_01L答但論中釋別時卷下第一二張意趣
004_0025_b_02L中云一錢乃至百千等經則无文
004_0025_b_03L示緣起法最妙方便故取之也問此
004_0025_b_04L數錢法勝益云何答開宗記云
004_0025_b_05L錢法者治生死執著病之第一藥成涅
004_0025_b_06L1)盤无碍德之最勝詮也
若學數錢
004_0025_b_07L法者隨所見處竟无所著隨所聞
004_0025_b_08L遠離諸取故治生死執著病之第一
004_0025_b_09L藥也不離自身一一毛孔見諸佛海
004_0025_b_10L一一塵中見佛刹海見自所居
004_0025_b_11L佛法界亦見自身是佛自體亦見自
004_0025_b_12L心是佛智慧故云成涅槃无碍德之㝡
004_0025_b_13L勝詮也是故欲學緣起觀欲修普賢
004_0025_b_14L須依數錢之門乃可得也是故
004_0025_b_15L云若欲觀緣起實相陁羅尼法者先應
004_0025_b_16L學數十錢法也別釋中先列中卽
004_0025_b_17L二門後初門中有二一者下別釋
004_0025_b_18L二門也初中門中先辨來去之義
004_0025_b_19L問一門中攝十盡不下論盡不盡也
004_0025_b_20L初中問此中門云向上來向下去
004_0025_b_21L門云向上去向下來義理章異體中
004_0025_b_22L門云向上數向下數卽門云向上
004_0025_b_23L去向下來同體中卽二門不別向上
004_0025_b_24L向下來去之義至相十玄章異體中卽

004_0025_c_01L“위를 항하여 가고, 아래를 향하여 온다.(向上去向下來)”고 하였다.54) 이와 같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은 중문에서는 (다른 것들을) 가지고 가고, 가지고 오며, 즉문에서는 가고 오는 것이라고 한다. 즉 중문에서는 오는 문에서는 뒤의 아홉을 가지고 첫 번째로 오고, 가는 문에서는 앞의 아홉을 가지고 열 번째로 향하며, 즉문에서는 첫 번째가 두 번째와 일치하고, 첫 번째가 세 번째와 일치하고 …… 첫 번째가 열 번째와 일치하며, 열 번째가 아홉 번째와 일치하고, 열 번째가 여덟 번째와 일치하고 …… 이와 같이 열 번째가 첫 번째와 포섭된다(具).
10개의 동전에서의 오고 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중문의 10개의 동전에서 첫 번째는 오는 뜻은 있지만 가는 뜻은 없고, 열 번째는 가는 뜻은 있지만 오는 뜻은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오고 가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즉문의 10개의 동전에서 첫 번째는 가는 뜻은 있지만 오는 뜻은 없고, 열 번째는 오는 뜻은 있지만 가는 뜻은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오고 가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왜 그러한가?
중문에서는 첫 번째 동전에 뒤의 아홉 개가 와서 포섭될 뿐, 첫 번째 동전 앞에 첫 번째 동전으로 가서 포섭될 다른 동전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동전에는) 오는 뜻만 있고 가는 뜻은 없다. 열 번째 동전은 앞의 아홉 개의 동전이 가서 합쳐질 뿐, 열 번째의 동전 뒤에는 열 번째 동전으로 와서 포섭될 동전이 없으므로 (열 번째 동전에는) 오직 가는 뜻만 있고 오는 뜻은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그 앞의 동전들은 가서 포섭되고, 뒤의 동전들은 와서 포섭되므로 오는 뜻과 가는 뜻이 갖추어져 있다. 즉문에서의 첫 번째 동전은 두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동전과 일치되니 가는 것만 있고, 이 첫 번째의 동전 앞에는 와서 포섭될 다른 동전이 없으므로 (첫 번째의 동전에는) 가는 뜻만 있고 오는 뜻은 없다.

004_0025_c_01L二門並云向上去向下來
如是非
004_0025_c_02L其義云何答一云中門云將去
004_0025_c_03L將來卽門云去也來也謂中門立
004_0025_c_04L在來門則將後九來趣第一立在去門
004_0025_c_05L則將前九去向第十也卽門中一卽二
004_0025_c_06L一卽三等如是第一卷下第一三張
004_0025_c_07L於第十十卽九十卽八等如是第
004_0025_c_08L具於一也問十錢中來去云何
004_0025_c_09L中門十錢初一有來義无去義第十
004_0025_c_10L有去義无來義向下門中反此中間
004_0025_c_11L諸錢具來去二義也卽門十錢初一
004_0025_c_12L有去義无來義第十有來義无去義
004_0025_c_13L下反此中間諸錢具來去二義也
004_0025_c_14L何故爾耶答中門初一中以後九來
004_0025_c_15L具耳初一之前更无餘錢將去
004_0025_c_16L於初一中故唯有來義无去義也
004_0025_c_17L十中以前九將去具耳第十以後
004_0025_c_18L无餘錢將來具於第十中故唯有去
004_0025_c_19L義无來義也向下反此中間諸錢
004_0025_c_20L則將去具後則將來具故來去二
004_0025_c_21L義具也卽門中初一者此一卽於第
004_0025_c_22L二乃至第十而去耳以此一之前无別
004_0025_c_23L餘錢可來具故唯有去義无來義
004_0025_c_24L「盤」音通「槃」{編}

004_0026_a_01L열 번째의 동전은 아홉 번째부터 첫 번째까지의 동전과 일치하니 오는 것만 있고, 이 열 번째의 동전 뒤에는 가서 일치할 수 있는 다른 동전이 없으므로 오직 오는 뜻만 있고 가는 뜻이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앞의 동전들이 와서 포섭되고, 뒤의 동전들로 가서 포섭되므로 오는 뜻과 가는 뜻이 갖추어져 있다.
그렇다면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오는 뜻과 가는 뜻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어째서 다 같이 위를 향하고(向上), 아래를 향한다(向下)고 하는가?
실제로는 이야기한 것처럼 오는 뜻과 가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첫 번째 동전에 오는 뜻만 있고 가는 뜻이 없으므로 그 첫 번째 동전에 의거하여 “위로 향하여 온다.”는 이름을 붙이고, 열 번째 동전에는 가는 뜻만 있고 오는 뜻이 없으므로 그 열 번째 동전을 따라서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이름 붙인다.

어떤 사람은 위를 향함과 아래를 향함, 오는 것과 가는 것의 뜻은 모두 헤아리는 주체(能數)인 마음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일 뿐 헤아림의 대상(所數)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열 번째에 있으면서 (하나의 현상에) 각기 10개의 동전을 갖추고 있는 10개의 동전을 헤아릴 때에는 첫 번째에서 열 번째로 헤아리는 것이 모두 나의 헤아리는 주체의 마음을 향하여 오는 것이므로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하고, 열 번째에서 첫 번째로 헤아리는 것은 나의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므로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만일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첫 번째 동전에 있으면서 10개의 동전을 헤아릴 때에는 열 번째에서 첫 번째로 헤아리는 것은 나의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을 향하여 오는 것이므로 “아래를 향하여 온다.”고 하고, 첫 번째에서 열 번째로 헤아리는 것은 나의 헤아림의 주체인 마음을 향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열 번째를 향하여 가는 것이므로 “위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중문에서는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열 번째에 있기 때문에 “위를 향하여 오고,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아래의 즉문과 지상(지엄) 스님의 『십현장』에서 이체의 중문과 즉문에 대해 모두 “위를 향하여 가고, 아래를 향하여 온다.”고 한 것은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첫 번째에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뒤의 입장에 대하여는 『법계도』의 뒷부분에서

004_0026_a_01L十錢卽於九八乃至第一而來耳此十
004_0026_a_02L之後无別餘錢可去卽故唯有來義
004_0026_a_03L无去義向下反此也中間諸錢
004_0026_a_04L則來具後則去具故來去二義具也
004_0026_a_05L問若爾中間諸錢具有來去二義
004_0026_a_06L故通云向上向下耶答約實則爾具來
004_0026_a_07L去義然初錢有來義无去義故
004_0026_a_08L初錢得向上來名第十有去義无來義
004_0026_a_09L從第十錢得向下去名也一云向
004_0026_a_10L上向下與來去二義者並約能數心云
004_0026_a_11L非約所數之法若能數之心
004_0026_a_12L在第十列各具十卷下第一四張之十
004_0026_a_13L門時從第一乃至第十列則皆向
004_0026_a_14L吾能數之心來故云向上來從第十
004_0026_a_15L乃至第一則背吾能數心1)故云
004_0026_a_16L向下去若能數之心立在初錢列十
004_0026_a_17L門時從第十乃至初一列則向吾能
004_0026_a_18L數心來故云向下來從初乃至第十
004_0026_a_19L則不向吾能數心來但向第十去
004_0026_a_20L故云向上去也是故今此中門則能
004_0026_a_21L數之心在第十故云向上來向下去也
004_0026_a_22L下卽門乃至至相十玄異體中卽二門並
004_0026_a_23L向上去向下來者能數之心
004_0026_a_24L於初一故爾也後義中下文云問如

004_0026_b_01L“지금까지 이야기한 가고 오는 뜻의 그 모습은 어떠한가? 스스로의 순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가고 온다.”고 하고, 청량이 “‘가고 오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가 전체에 들어가되 하나의 자리는 그대로 있고, 전체가 하나로 들어가지만 전체의 자리는 그대로 있는 것”55)이라고 하여 스스로의 위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그대로 있는 것, 서로 일치하고 들어가는 것을 오는 것과 가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오는 것과 가는 것을 오로지 헤아림의 주체인 마음에 의거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 까닭에 이 주장은 따르기 어렵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위를 향함”과 “아래를 향함”은 헤아림의 주체인 마음에 의거한 것이고, 오는 것과 가는 것은 헤아림의 대상에 의거한 것이다. 10개의 동전을 놓고서 첫 번째에서 열 번째로 헤아리면 “위를 향함”이고 열 번째에서 첫 번째로 헤아리면 “아래를 향함”이다. 포섭하는 주체 (能具)에 의거하면 오는 것이고, 포섭되는 대상(所具)에 의거하면 가는 것이다. 즉 첫 번째가 포섭하는 주체가 될 때에 그 뒤의 아홉으로 와서 포섭되는 것이므로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한다. 포섭되는 대상의 입장에서 포섭하는 주체를 대비시키면 뒤의 아홉이 첫 번째로 향하여 가서 포섭되는 것이므로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만약 열 번째를 포섭하는 주체로 하였을 때에는 앞의 아홉이 열 번째로 와서 포섭되는 것이므로 온다고 하고 포섭되는 대상의 입장에서 합치는 주체인 열 번째를 바라보면 앞의 아홉이 포섭되는 대상으로서 포섭하는 대상을 향하므로 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는 포섭하는 주체에 서서 온다고 하고 포섭되는 대상에 서서 간다고 한다. 청량이 “‘가고 오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가 전체에 들어가되 하나의 자리는 그대로 있고, 전체가 하나로 들어가지만 전체의 자리는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하나가 전체로 들어갈 때에 포섭하는 주체에 입각한 것을 온다고 하고, 포섭되는 대상에 입각한 것을 간다고 한 것이고, 전체가 하나로 들어갈 때에 하나가 포섭하는 주체가 되고 전체는 포섭되는 대상이 되므로 온다고 하였다. 만약 포섭되는 대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전체에 들어가고 전체가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가고 오는 뜻이다. 하나와 전체가 각각의 모습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으므로 오고 가는 것은 헤아림의 대상이 오고 가는 것이다.

004_0026_b_01L上所說去來義其相云何答自位不動
004_0026_b_02L而恒去來淸凉云去來不動者
004_0026_b_03L入多而一位存多入一而多位存

004_0026_b_04L位不動者存互相卽入者來去則何
004_0026_b_05L得云來之與去唯約能數之心耶
004_0026_b_06L故此義難也今釋向上向下者約能
004_0026_b_07L數之心來去者約所數法也於十錢
004_0026_b_08L從一至十列則向上從十至一列
004_0026_b_09L則向下約能具能具故云來約所具
004_0026_b_10L所具故云去謂一2)謂能具時以後
004_0026_b_11L九將來具故云向上來立在所具望
004_0026_b_12L於能具則後九去向初一中具故云
004_0026_b_13L向下去乃至若立在第十能具則前
004_0026_b_14L九向來第十具故云來以所具望能
004_0026_b_15L具第十則前九是所具而向去具故云
004_0026_b_16L是故於前中立在能具能具云來
004_0026_b_17L也來也立在所具所具云去也去卷下
004_0026_b_18L第一五張
淸涼云去來不動者
004_0026_b_19L入多而一位存多入一而多位存

004_0026_b_20L入多時立在能具則云來立在所具則
004_0026_b_21L云去多入一時一爲能具故多爲所
004_0026_b_22L具而來若立所具之邊則云去是故
004_0026_b_23L一入多多入一是去來義一多之不
004_0026_b_24L壞則不動義是則來去者所數法之

004_0026_c_01L
(중문에 대한 설명 중) 첫 번째의 오는 것과 가는 것의 뜻에 대하여 곧바로 설명하는 부분은 앞에서는 하나하나의 현상에 열 개의 동전이 포섭되어 있음을 곧바로 설명하고 있고, 뒤의 “이미 하나에 (10개가) 갖추어졌다.” 이하는 하나하나의 현상에 다함없이 포섭되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앞부분은 다시 둘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오는 것과 가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이고 뒤의 “이미 하나라고 하였는데 ……” 이하는 질문과 대답으로 의심을 없애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다시 둘로 이루어져 있으니, 앞부분에서는 오는 것과 가는 것에 대하여 곧바로 해석하고 있고, 뒤의 “이와 같이 오고 가며 살펴보면” 이하는 정리하는 것이다. 앞부분은 먼저 장문章門을 나열한 후, 뒤의 “위를 향하여 오는 것에 10가지가 있다.” 이하에서 두 문에 대하여 나누어 해석하고 있다. 앞부분인 장문章門을 나열하는 것에서는 반복하여 앞의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다.(一中十)”는 것을 가리켜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하였고, 반복하여 앞의 “열 번째에 첫 번째가 들어 있다.(十中一)”는 것을 가리켜 “아래를 향하여 온다.”고 한다.
위를 향함과 아래를 향함의 두 문에는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는데, 어찌하여 오는 것에 대한 문에는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다.(一中十)”고 하고, 가는 것에 대한 문에는 “열 번째가 첫 번째에 들어 있다.(十中一)”고 하는가?
두 문이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오는 것에 대한 문은 첫 번째로부터 이름을 얻은 것이므로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다.(一中十)”고 하였다. 가는 것에 대한 문도 또한 그러하다.
위를 향하여 오는 것과 아래를 향하여 가는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개종기』에서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향하는 것을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하고, 열반을 버리고 생사를 향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여실如實한 도리를 타고 와서(來) 정각을 이룬다.”거나 “잘 오신 이, 세존이시여!(善來世尊)” 등은 바로 이런 뜻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대연기법계의 역순을 두루 갖추고 자유로운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위를 향하고”, “아래를 향한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위를 향하여 온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10문이 있는데, 같지 않다.”는 것은 먼저 10문을 드러낸 것이고, 그 아래는 10문에 대한 해석이다. 해석에서는 먼저 하나의 문에 대하여 해석하였고, 뒤의 “나머지 문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하는 나머지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앞부분의 (먼저 10문을 드러낸 것은) 제대로 갖추어 이야기하면 마땅히 “첫 번째의 문에 10가지가 있다.”고 했어야 한다.
“첫 번째(一者)는 첫 번째(一)이다. 왜냐하면” 등은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동전에는 위전位錢, 체전體錢, 덕전德錢 등이 있다.

004_0026_c_01L來去也初正辨來去中先正辨一一
004_0026_c_02L錢中具十3)旣一門中具足下現一
004_0026_c_03L一錢中有無盡也初中亦二先釋來
004_0026_c_04L去二門後*旣云一者下問答除疑
004_0026_c_05L中亦二先正釋來去後如是往反勘
004_0026_c_06L下結初中先列章門後言向上來中
004_0026_c_07L有十下別釋二門初中牒前一中
004_0026_c_08L十云向上來牒前十中一云向下來也
004_0026_c_09L問向上向下二門中各具十門何故
004_0026_c_10L來門則云一中十去門則云十中一耶
004_0026_c_11L答二門各具十門然來門則從初門得
004_0026_c_12L故云一中十去門亦爾也問向
004_0026_c_13L上來向下去者表何義耶答開宗記
004_0026_c_14L捨生死向涅4)盤則向上來捨涅*盤
004_0026_c_15L向生死化衆生則向下去乘如實道
004_0026_c_16L來成正覺又善來世尊等是5)比義也
004_0026_c_17L今釋欲表大緣起法界具足逆順自在
004_0026_c_18L之義故云向上向下耳言向上來有
004_0026_c_19L十門不同者先標十門下釋釋中先
004_0026_c_20L釋一門後餘門亦如是等者例餘
004_0026_c_21L初中實具言則應云就第一門中有十
004_0026_c_22L一者一何以故等且略也錢中有
004_0026_c_23L「夫」作「去」{乙}「謂」作「爲」{乙}「旣」作
004_0026_c_24L「現」{乙}次同
「盤」音通「槃」{編}次同「比」
004_0026_c_25L作「此」{乙}

004_0027_a_01L처음의 “첫 번째(一者)”는 위전이고, 그 다음의 “첫 번째(一)”는 체전이며, 뒤의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一中二)”라는 것 등은 덕전이다.
“이것이 본수本數이다.”라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1이 본수인가 아니면 10이 본수인가?
전자이다.
(『화엄경』) 제4회 중의 정진림 보살精進林菩薩의 게송에 이르기를 “10진법의 수법에서 한 단위씩 늘려 가면 무량에 이르는 것과 같다. 수법에는 체성이 없지만 지혜가 있어서 그것을 구별한다.”고 하였으므로 10도 본수인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열 개의 수를 드러낼 때에는 1이 본수이고, 백과 천 등의 수를 드러낼 때에는 10이 본수이다. 경에서는 무량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므로 10도 본수가 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하나가 열을 갖추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므로 1을 본수로 삼는다.
“나머지에서 동전을 갖추고 있다.”56)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약 오는 다섯 번째 문에서라면 “첫 번째는 다섯 번째, 두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세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네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다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여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오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아홉 번째, 두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세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네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이런 식으로 아홉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열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가는 다섯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여섯 번째, 두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세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네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다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여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일곱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두 번째, 두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세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네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다섯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여섯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004_0027_a_01L錢有體錢有德卷下第一六張
004_0027_a_02L初云一者則位錢次云一則體錢
004_0027_a_03L至云一中二等則德錢也是本數者
004_0027_a_04L是本數耶十是本數耶答如前問第
004_0027_a_05L四會精進林菩薩偈云比如數法十
004_0027_a_06L一至無量數法无體性智慧故差別
004_0027_a_07L
則十並本數何不爾耶答現十
004_0027_a_08L1)▩時一是本數現百千時十是本
004_0027_a_09L數也經則欲現无2)▩故十並本數
004_0027_a_10L今此則欲現一之具十故擧一爲本數
004_0027_a_11L問例餘中具錢云何答一云 3)
004_0027_a_12L立在來第五門應云第一五第二五
004_0027_a_13L中一第三五中二第四五中三
004_0027_a_14L五五中四第六五中六乃至第十五
004_0027_a_15L中十也若立在來第九門應云第一
004_0027_a_16L第二九中一第三九中二第四
004_0027_a_17L九中三乃至第九九中八第十九中
004_0027_a_18L十也若立在去第五門應云第一六
004_0027_a_19L第二六中十第三六中九第四六中
004_0027_a_20L第五六中七第六六中五第七
004_0027_a_21L六中四乃至第十六中一也若立在
004_0027_a_22L去第九門應云第一二第二二中十
004_0027_a_23L第三二中九第四二中八第五二中
004_0027_a_24L第六二中六乃至第十二中一也

004_0027_b_01L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약 오는 다섯 번째 문에서라면 “첫 번째는 다섯 번째, 두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세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네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다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여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일곱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오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아홉 번째, 두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세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네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다섯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이런 식으로 아홉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열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오는 열 번째 문이라면 가는 첫 번째 문과 같으므로 “첫 번째는 열 번째, 두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세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네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다섯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여섯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일곱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다섯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여섯 번째, 두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세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네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다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여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일곱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일곱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두 번째, 두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세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네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여덟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아홉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열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열 번째 문이라면 오는 첫 번째 문과 같으므로 “첫 번째는 첫 번째, 두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세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네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것의 첫 번째와 오는 것의 마지막 동전을 갖추고 있는 것이 다르지 않고, 오는 것의 첫 번째와 가는 것의 마지막 동전을 갖추고 있는 것이 다르지 않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후자가 옳다.
중문에서 오는 것과 가는 것 두 문에 대한 해석을 매듭짓는 부분에서

004_0027_b_01L一云若立在來第五門應云第一五
004_0027_b_02L二五中四4)一五中三第四五中二
004_0027_b_03L第五五中一第六五中六第七五中
004_0027_b_04L乃至第十五中十也若立在來第
004_0027_b_05L九門應云第一九第二九中八
004_0027_b_06L三九中七第四九中六卷下第一七張
004_0027_b_07L第五九中五乃至第九九中一第十
004_0027_b_08L九中十也若立在第十門則與去
004_0027_b_09L第一門同故應云第一十第二十中
004_0027_b_10L第三十中八第四十中七第五
004_0027_b_11L十中六 5)十中五 6)十中四乃至第
004_0027_b_12L十十中一也若立在去第五門應云
004_0027_b_13L第一六第二六中七第三六中八
004_0027_b_14L四六中九第五六中十第六六中五
004_0027_b_15L第七六中四 7)六中三乃至第十六中
004_0027_b_16L一也若立在去第九門應云第一二
004_0027_b_17L第二二中三第三二中四第四二中
004_0027_b_18L乃至8)二中九 9)二中十第十二
004_0027_b_19L中一也若立在去第十門則與來第
004_0027_b_20L一門同故應云第一一第二一中二
004_0027_b_21L第三一中三第四一中四第五一中
004_0027_b_22L乃至第十一中十也是故去初與
004_0027_b_23L來終具錢不別來初與去終具錢
004_0027_b_24L不別也今釋存後義問中門釋來

004_0027_c_01L“이와 같이 오고 가며 살펴보면 곧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여러 동전들이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드러내었는데, 어찌하여 그 뒤에서 “처음(本)과 끝(末)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나머지 8개의 동전도 앞의 예와 같으니 가히 알 수 있다.”고 하는가?
매듭짓는 부분에서 “곧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은 앞에서 하나하나의 동전이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매듭지은 것이고, “처음과 끝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이라고 한 것은 처음과 끝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을 나머지 8개의 동전도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앞에서 이미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살피고서 “곧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가 10문을 갖추고 있는 뜻은 이미 다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제는 처음과 끝의 동전들을 나머지 동전들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이다.
무엇이 처음(本)이고 무엇이 끝(末)인가?
처음 동전은 바로 오는 것의 처음에 해당한다. 또한 이 처음에는 가는 것의 마지막도 해당한다. 끝 동전은 바로 가는 것의 처음에 해당한다. 또한 여기에는 오는 것의 마지막도 해당한다. 앞의 글에서는 단지 오는 것의 처음과 가는 것의 처음이 동전을 모두 갖추고 있는 모습만을 드러내었고 오는 것의 마지막과 가는 것의 마지막이 동전을 모두 갖추고 있는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다. 오는 것의 처음과 가는 것의 마지막을 합하여 처음으로 하고, 오는 것의 마지막과 가는 것의 처음을 합하여 끝으로 하고서 “처음과 끝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라고 하였으므로 오는 것의 처음과 가는 것의 마지막 동전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 같고, 오는 것의 마지막과 가는 것의 처음 동전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 같음을 알 수 있다.

004_0027_c_01L去二門竟云如是往反勘當卽知一一
004_0027_c_02L錢中具足十門
現諸門中各具十
004_0027_c_03L何故次云如本末兩錢中具足十
004_0027_c_04L餘八錢中准例可解
答結中
004_0027_c_05L10)卽知一一錢中具足十門者結前一
004_0027_c_06L一錢各具十如本末兩錢等者擧本
004_0027_c_07L末二錢具足十門例餘八錢亦具十
004_0027_c_08L謂前已勘當一一錢中具十之義
004_0027_c_09L而云卽知一一錢中具足十門則一
004_0027_c_10L一具十之義已盡現也是故今擧本末
004_0027_c_11L例餘具十也問何者是本何者
004_0027_c_12L是末卷下第一八張答本錢則正當
004_0027_c_13L來初亦此初中并見去終末錢正當
004_0027_c_14L去初亦於此中并見來終前文但辨
004_0027_c_15L於來初去初中具錢相現而不別現來
004_0027_c_16L終去終具錢之相以來初去終合爲本
004_0027_c_17L來終去初合爲末而云本末二錢具足
004_0027_c_18L十門等則知來初與去終具錢狀同
004_0027_c_19L終與去初具錢狀同故爾也

004_0027_c_20L▩疑「數」{乙}▩疑「盡」{編}「若」作「者」
004_0027_c_21L{甲}
「一」疑「三」{編}「十」上疑脫「第六」{編}
004_0027_c_22L
「十」上疑脫「第七」{編}「六」上疑脫「第八」
004_0027_c_23L{編}
「二」上疑脫「第八」{編}「二」上疑脫「第
004_0027_c_24L九」{編}
「即」法界圖本文作「當」

004_0028_a_01L
질문과 대답으로 의심을 없애는 부분5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른바 하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하나가 아니라 인연에 의하여 하나를 이룬 것이다. ( ……) 열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열이 아니라 인연에 의하여 열을 이룬 것이다.”라고 한 부분에서 중략된 부분을 갖춰서 이야기하면 “이미 열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열에 하나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고 나서 “열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열이 아니라 ……”가 이어져야 한다.
“모든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로서 정해진 스스로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한 것은 앞부분 모두에 대하여 스스로의 본성이 없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자재自在하지 않은 것은 곧 생겨나지만 생겨나지 않는 것(生不生)이다.”58)라는 것에서 연기에 의하여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생겨남이고, 연기에 스스로의 본성이 없는 것은 생겨나지 않음이다. 「의리장」에서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와 전체가 연기를 이루는가? 단지 본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와 전체가 연기를 이룰 수 있다.”59)고 하였으므로 본성이 없다는 것이 생겨나지 않음이고 하나와 전체가 연기를 이루는 것이 생겨남이다.
인용하여 증명하는 부분60)에서 “나는 곧 공空이라고 한다.”는 생겨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한다.”는 생겨남을 증명하는 것이며, “또한 중도의 뜻이다.”는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모두 통하는 중도의 뜻을 증명하는 것이다.
“서로 포용하여 막힘이 없고 그러면서도 동일한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앞에서 이야기한 “이른바 하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하나가 아니라 인연에 의하여 하나를 이룬 것이다. …… 스스로의 본성이 열이 아니라 ……”에 대하여 매듭짓는 부분이다.
“이미 하나의 문에 …… 무진無盡의 뜻이 있다.”는 이미 하나의 문에 열을 갖추고 있으면 하나가 곧 무진無盡의 본수本數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하나의 문에 무진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갖추는가(盡)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하는가(不盡). ……”라는 것은 앞에서 “하나의 문에 무진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법계의 존재들을 모두 다 포괄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하나의 문이 그러한 것처럼 나머지 문들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또한 다 포괄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므로 “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갖추는가,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하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대답의 뜻은 하나의 문에 법계의 모든 존재들을 다 포괄하고 있으므로 온전하게 다 갖추고 나머지 문들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 포괄하여 남김이 없지만 (모든 존재들을) 다 포괄하고 있는 나머지 문들은 하나의 문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므로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004_0028_a_01L
問答除疑中所言一者非自性一緣
004_0028_a_02L成故一乃至十者非自性十緣成故
004_0028_a_03L十者實則具擧云旣言十者何得十
004_0028_a_04L中有一耶乃至云十者非自性十等
004_0028_a_05L一切緣生法无有一法定有自性等
004_0028_a_06L通望前以現无自性義也不自在者
004_0028_a_07L卽生不生者緣起現前則生緣起无自
004_0028_a_08L性則不生也義理章云无自性者
004_0028_a_09L得一多緣起答只由无性得成一多
004_0028_a_10L緣起
无性義者不生一多緣起者
004_0028_a_11L生也引證中我說卽是空證不生義
004_0028_a_12L亦爲是假名證生義復是中道義
004_0028_a_13L通生不生中道義也當知至无碍者
004_0028_a_14L結前所言一者非自性一緣成故一
004_0028_a_15L至非自性十等也 1)旣一門至无盡義者
004_0028_a_16L旣得一門具十則一是現无盡之本數
004_0028_a_17L故云一門有无盡也問一門中攝十盡
004_0028_a_18L不等者前云明知一門中有无盡義
004_0028_a_19L法界之法旣已盡也然云如一門
004_0028_a_20L亦如是則亦有所未盡之法是故
004_0028_a_21L問云一門攝十盡卷下第一九張不盡
004_0028_a_22L如是問也答意者一門中盡攝
004_0028_a_23L法界一切諸法故云盡餘餘門亦如
004_0028_a_24L是攝盡无所遺也然而餘餘門盡

004_0028_b_01L
지금 여기(『법계도』)에서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과 장공(藏公 : 법장)의 『십현장』에서 “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포섭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온전하게 다 포섭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에 열을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한 것이고, 열에 하나를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하지 못한 것이다.”61)라고 한 것은 같은 뜻인가?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르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처음은 다르지만 끝은 같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고 한다.
첫 번째 입장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 견해에 의하면 여기에서 “다른 현상(異事)도 같음(同)에 준한다.”고 하였으므로 앞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은 모두 동체同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체異體를 이야기한 것이므로 이체의 현상(異體之事)도 동체에 준한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여기에서는 동체에 의거하였는데, 법장은 이체의 중문中門에서 이야기한 것이므로 다르다. 둘째 견해에 의하면 한 종류의 10지가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지地에 각기 10지가 갖춰져 있을 때에 첫 번째 지(初地)인 환희지는 하나의 현상(一事)이고 그 뒤의 여러 지에 갖춰져 있는 환희지들은 하나(一)와 여럿(多)을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지인 이구지離垢地는 다른 현상(異事)이고 앞과 뒤의 여러 지에 갖춰져 있는 이구지들은 다른 현상으로서 하나(一)와 여럿(多)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환희지를 부를 때에 뒤의 여러 지들에 있는 환희지들이 함께 “환희지”라고 외친다. 이구지를 부를 때에는 앞과 뒤의 여러 지에 있는 이구지들이 함께 “이구지”라고 외친다. 이것이 의상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의 뜻이다. 법장의 뜻은 첫 번째 지를 부를 때에 두 번째의 이구지부터 열 번째의 법운지까지가 각각 자신들의 이름을 외친다는 것이다. 『십구장』에서 “오늘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든 이름들이 모두 하나의 이름에 들어 있다. 듣는 것을 논할 때에 하나의 이름을 들으면 모든 이름을 그대로 듣는 것이다. 만약 중생의 이름만을 듣고 부처와 보살의 이름들을 듣지 않으면 다섯 가지 잘못이 있게 된다. 곧 첫째 바르게 믿지 않음,

004_0028_b_01L是一門之所攝故云不盡也問今此
004_0028_b_02L盡不盡與藏公十玄章云問一門中攝
004_0028_b_03L十盡不答盡不盡何以故一中十故
004_0028_b_04L十中一故不盡
一義耶答一
004_0028_b_05L云始終並別一云始別終同一云詮
004_0028_b_06L別意同也第一義中亦有二義
004_0028_b_07L義者此中云異事亦准同則前之盡
004_0028_b_08L不盡皆約同體說是故例異體
004_0028_b_09L云以異體之事准於同體也如是此
004_0028_b_10L旣約同體而藏師則異體中門說
004_0028_b_11L故別也第二義者約一種十地
004_0028_b_12L一地中各具十地初地之歡2)十者
004_0028_b_13L一事也後諸地之所具歡喜者辨一
004_0028_b_14L多也 3)難垢地者異事也前後諸
004_0028_b_15L地所具離垢者以異事辨一多也
004_0028_b_16L故呼初歡喜時後諸地中歡喜歡喜
004_0028_b_17L一時口許也呼離垢時前後諸地中
004_0028_b_18L離垢離垢一時口許也是則相大德
004_0028_b_19L盡不盡義也藏師義者呼初地時
004_0028_b_20L二離垢乃至第十法雲各各自名口
004_0028_b_21L許也十句章云今日呼一名時
004_0028_b_22L4)皆直是一名論聞者時聞一
004_0028_b_23L名字於一切名直聞也若聞凡名
004_0028_b_24L佛菩薩等者則有五種過謂一不正

004_0028_c_01L둘째 용맹함에서 물러서는 것, 셋째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 넷째 부처님을 헐뜯는 것, 다섯째 법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하나를 부를 때에 모든 것이 외치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법장의 뜻으로서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둘째는 의상의 뜻으로서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다 같이 하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62)라고 하였다. 이를 해석하여 “상대덕(相大德 : 의상)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은 10개의 10층탑을 나열하고서 첫째 탑의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나머지 아홉 개 탑의 첫 번째 층들이 ‘첫 번째 층’이라고 동시에 외치고, 첫째 탑의 두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나머지 아홉 개 탑의 두 번째 층들이 ‘두 번째 층’이라고 외친다는 뜻으로서 이것은 횡진법계橫盡法界이다. 장공(藏公 : 법장)의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가 각기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뜻은 한 개의 10층탑을 세우고서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나는 첫 번째 층이다’ …… ‘나는 열 번째 층이다’라고 각기 스스로의 이름을 외친다는 뜻으로서 이것은 수진법계竪盡法界이다.”63)라고 하였다.
두 번째 입장은 『십구장』에서 “첫 번째의 법장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고, 두 번째 의상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오로지64)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65)라고 하였으므로 처음은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그 책의 다음 부분에서 “어째서 열이 모두 하나의 이름을 외친다는 뜻이 법장의 뜻과 같게 되는가? 각각 스스로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아야 비로소 한꺼번에 열이 모두 하나의 이름을 외칠 수 있다. 하나의 연기법에 이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는데 (의상과 법장은) 서로 한 가지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뜻은 같다.”고 하였으므로 끝은 같다.

004_0028_c_01L二退勇猛三誑他四謗佛
004_0028_c_02L輕法也呼一時一切口許有二義
004_0028_c_03L者藏師卷下第二○張 呼一名時一切
004_0028_c_04L各各自名口許二者相師呼一名時一
004_0028_c_05L切共一名口許
解云相大德盡不盡
004_0028_c_06L如列十座十層塔呼第一塔初層時
004_0028_c_07L餘九塔初層初層一時口許呼初塔
004_0028_c_08L第二層時餘九塔第二第二層亦皆
004_0028_c_09L口許之義是橫盡法界義也藏公呼
004_0028_c_10L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者如立一
004_0028_c_11L座十層塔纔呼初層時我是第一層
004_0028_c_12L乃至我是第十層各以自名口許義故
004_0028_c_13L竪盡法界也第二義者十句章云
004_0028_c_14L藏師呼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
004_0028_c_15L相師呼一名時一切5)唯以一名口許

004_0028_c_16L故始別也彼章次下文問何故
004_0028_c_17L皆一名口許義與藏師義同耶
004_0028_c_18L各各自位不動方呼一時得6)十口許
004_0028_c_19L7)一緣起法中具此二義互擧一
004_0028_c_20L邊現故意致齊同也
故終同也
004_0028_c_21L「旣」法界圖本文作「現」「十」作「喜」{甲}·
004_0028_c_22L疑「喜」{乙}
「難」作「離」{甲}·疑「離」{乙}「名」
004_0028_c_23L經作「稱」{乙}
「唯」疑「共」{乙}「十」下疑有
004_0028_c_24L「皆一名」{乙}
「一」上疑有「以」{乙}

004_0029_a_01L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 그리고 10지·10탑의 비유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두 분은 모두 한 종류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였으므로 하나의 10층탑으로 비유한다면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층들이 “첫 번째 층”이라고 외치는 것이 의상의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뜻이고,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층들이 모두 자기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법장의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뜻이다. 10지에 의거하여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두 스님의 뜻은 횡(橫)이라고 하면 모두 횡이고 수(竪)라고 하면 모두 수이다.
그렇지만 두 스님의 뜻은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완전히 같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스님 모두 오는 첫 번째 동전이 열 개의 동전을 모두 포섭하는 것을 “온전하게 다 갖춤(盡)”이라고 하고 나머지 동전들이 모두 포섭하는 것은 첫 번째가 포섭하는 것이 아니므로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不盡)”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두 스님은 모두 같은 뜻이다.
『십구장』에서 “법장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이와 같이 서로 다른데 어째서 같다고 하는가?
고전古傳은 지금 질문한 것과 같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법장은 “첫 번째는 비유로 보여 주는 것으로서 수십전법數十錢法과 같다. 10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완전한 수로 하여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66)라고 하였고, 지금 이 책에서는 “만약 연기 실상의 다라니법을 보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수십전법을 배워야 한다. 이른바 동전을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하여 두 스님이 모두 한 종류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여서 논하고 있으므로 다르지 않다.
『십구장』에서 “법장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의상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라고 한 것을 표현이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십구장』은 옛 말씀(古辭)으로 다르게 회통할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이 『십구장』의 내용은 따르기 힘들다. 의상이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004_0029_a_01L相師橫盡法界藏師竪盡法界及十
004_0029_a_02L地十塔之喩云何別耶答二公並
004_0029_a_03L約一種十錢論故約一種十層塔呼初
004_0029_a_04L層時第二第三等亦以初層口許者
004_0029_a_05L相德一名口許義呼初層時並以第
004_0029_a_06L二第三等自名口許者藏師自名口許
004_0029_a_07L義也約十地亦爾是故二師橫則並
004_0029_a_08L竪則並竪也然二師之義詮別而
004_0029_a_09L意致全同也何者二師並約來初一
004_0029_a_10L錢攝十盡則盡餘門之攝法盡則非是
004_0029_a_11L初一之盡故爲不盡是故二師
004_0029_a_12L下第二一張
並一義也問十句章云
004_0029_a_13L藏師呼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

004_0029_a_14L如是各別何云一耶答古傳如問
004_0029_a_15L此意難也何者藏師云初喩示者
004_0029_a_16L如數十錢法所以說十者欲應圓數
004_0029_a_17L現无盡故1)比云若欲觀緣起實相
004_0029_a_18L陁羅尼法者先應學數十錢法所謂
004_0029_a_19L一錢乃至十錢
二師並約一種十錢
004_0029_a_20L故不別也問十句章云藏師呼
004_0029_a_21L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相德呼
004_0029_a_22L一名時一切2)唯一名口許
則可云
004_0029_a_23L詮別耶答十句章則是古辭故无
004_0029_a_24L別會然此十句章難者相德呼一時

004_0029_b_01L모두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것은 앞에서 처음 (하나의 동전이 열 개의) 동전을 갖출 때에도 또한 그렇게 외쳤다는 것인가, 아니면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을 논함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렇게 외쳤다는 것인가? 만약 앞에서 동전을 갖출 때에도 그렇게 외쳤다고 한다면 법장의 “하나에 열이 있고, 열에 하나가 있다.” 등의 뜻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법장은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고 의상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을 논함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렇게 외쳤다고 한다면 지금 이 책에서 “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갖추는가(盡)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하는가(不盡). ……”라고 한 것은 앞에서 논한 이미 이루어진 문에 대한 문답일 것이다. 어떻게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을 논하는 곳에 이르러 외침을 논할 수 있는가. 또한 “법장은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고 의상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고 하는 것에서 그 열 개의 위치에 의거하여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모두 첫 번째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하나의 이름(一名)으로 외치는 것이고,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각기 두 번째, 세 번째라는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스스로의 이름(自名)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위치만이 아니라 금·은·구리·철·기와·나무 등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여서 첫 번째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모두 금동전이라고 외치는 것이 하나의 이름(一名)으로 외치는 것이고, 첫 번째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일 후자라고 한다면 법장이 “하나에 열을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한 것이고, 열에 하나를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하지 못한 것이다.”고 한 것은 위치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이고 금속에 은·구리 등을 포섭한다는 뜻이 아닌데 어떻게 첫 번째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비록 한 종류의 열 개의 금으로 만든 동전에 의거하여서 각기 스스로의 자리를 정하여서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되었을 때에 같은 종류의 금으로 만든 동전이기 때문에 하나에 열을 포섭하고 열에 하나를 포섭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004_0029_b_01L一切唯一名口許者從前始具錢時
004_0029_b_02L口許耶要至盡不盡論時方得口許
004_0029_b_03L若前之具錢時亦得口許者
004_0029_b_04L藏師一中十十中一等義不別
004_0029_b_05L云藏師一切自名口許相德一切一名
004_0029_b_06L口許耶若要至盡不盡論時方得口許
004_0029_b_07L今云一門中攝十盡不等者
004_0029_b_08L前所論旣成之門而問答也何得云至
004_0029_b_09L於盡不盡論中論口許耶又藏師一
004_0029_b_10L切自名口許相德一切一名口許義者
004_0029_b_11L則約其十位呼第一時第二第三等
004_0029_b_12L並以第一名口許者一名口許義呼第
004_0029_b_13L一時餘二三等並以第二第三等自
004_0029_b_14L名口許者自名口許耶非唯約位
004_0029_b_15L約金銀銅鐵瓦木等十錢呼初金錢時
004_0029_b_16L銀銅鐵等錢並以金錢卷下第二二張
004_0029_b_17L口許者一名口許呼初金錢時
004_0029_b_18L銅鐵等錢自名口許者自名口許耶
004_0029_b_19L若如後者藏師一中十盡十中一不
004_0029_b_20L則約位而說非約金中攝銀銅等
004_0029_b_21L義說何故云呼初金錢時銀銅鐵等
004_0029_b_22L以自名口許義耶又雖約一種十箇
004_0029_b_23L金錢各受自位爲第二第三等
004_0029_b_24L一種金錢亦得云一中十十中一

004_0029_c_01L어떻게 하나에 열을 포섭하고 열에 하나를 포섭하는 것이 곧바로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만약 자리에 의거하여서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의상의 뜻이라고 한다면 의상 또한 (오는 문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졌으므로. …… 열 번째는 하나에 열이 들어 있다.”라 하고 가는 문은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였지 “하나에 하나가 들었고, 열에 열이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모든 자리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의상의 뜻이라고 하는가? 또한 “하나의 현상 (一事)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므로 온전하게 다 포섭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같은 하나가 열 개 있다면 비록 같은 하나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현상에 들어 있는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므로 첫 번째의 하나, 두 번째의 하나 …… 열 번째의 하나가 되어 이와 같이 각기 스스로의 자리를 갖게 되어 하나에 들어 있는 열(一中十), 열에 들어 있는 하나(十中一)라고 한다. 어떻게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모두가 다 같이 첫 번째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의상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와 같으므로 이 내용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영관靈觀67) 대덕이 말하기를 “의상도 모두가 하나의 이름을 외친다는 것과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을 외친다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법장도 그러하였다. 즉 의상의 뜻 중에서 ‘하나의 현상에 들어 있는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여럿이다’는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하나의 현상이므로 곧 하나이다’는 모두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법장의 뜻 중에서 「육상장」에서 ‘나머지 들보와 기와 등이 모두 곧바로 서까래이다’라고 한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십현장』에서 ‘하나에 들어 있는 열, 열에 들어 있는 하나’라고 한 것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사나품소』68)에서 ‘전체가 상즉하지만 스스로의 자리는 그대로이다’69)라고 하였는데, ‘전체가 상즉’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004_0029_c_01L故云一中十十中一故卽是呼金
004_0029_c_02L錢時餘銀銅鐵等錢並以自名口許
004_0029_c_03L義耶又約位呼第一時第二第三等
004_0029_c_04L並以一名口許是相德義則相德亦
004_0029_c_05L一者一緣成故乃至第十一中十
004_0029_c_06L去門反此也不云一中一十中
004_0029_c_07L何故云諸位並以一名口許者
004_0029_c_08L相德義又以一事辨一多故則盡

004_0029_c_09L若云是一一之十則雖是一一然一
004_0029_c_10L事中一多義不相是則第一一第二
004_0029_c_11L乃至第十一如是各受自位故
004_0029_c_12L是一中十十中一何得云呼第一名
004_0029_c_13L一切並第一名口許是相德義耶
004_0029_c_14L是故此義難也問若爾難者如何見
004_0029_c_15L答靈觀大德云相大德亦一切
004_0029_c_16L一名口許一切自名口許二義具也
004_0029_c_17L藏師亦爾謂相德義中一事中一多
004_0029_c_18L不相是卽多者一切自名口許也
004_0029_c_19L一事故卽是一者一切一名口許也
004_0029_c_20L師義中六相章云餘栿瓦等並卽椽者
004_0029_c_21L一名口許也十玄章一卷下第二三張
004_0029_c_22L中十十中一者自名口許也舍那
004_0029_c_23L品疏云全體相卽而自位存
全體
004_0029_c_24L「比」作「此」{甲}{乙}「唯」作「共」{乙}

004_0030_a_01L‘스스로의 자리는 그대로’라는 것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
「육상장」의 내용은 상즉의 뜻일 뿐으로 시방세계가 곧 하나의 티끌과 상즉한다는 것이다. 대들보나 기와 등이 하나의 서까래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십현장』의)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고 열 번째에 첫 번째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단지 자리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만약 존재 자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같은 존재의 이름인지 다른 존재의 이름인지 말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글을 인용하여서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쳤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나품소』의 내용은 이 역시 상즉으로서 모두가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하나하나의 존재에 의거하여도 “전체가 상즉하지만 스스로의 자리는 남아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가 상즉”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스스로의 자리는 남아 있”는 것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와 같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법장과 의상 두 스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두 스님의 뜻은 논하는 대상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즉 두 스님이 모두 10개의 금으로 만든 동전에 의거하였을 때에는 두 스님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이야기하고, 두 스님이 금·은·구리·철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동전에 의거하여서 말씀하실 때에는 두 스님 모두 각기 스스로의 이름을 외친다고 하신다. 만약 10보법에 의거한다면 사람 10명에 의거하여서 상즉과 상입을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고, 사람(人)·대상(法), 가르침(敎)·뜻(義) 등의 여러 법에 의거하여서 상즉과 상입을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두 스님이 단지 사람에 의거하여서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사람(人)·대상(法)·가르침 (敎)·뜻(義) 등을 모두 포괄하여서 말씀하실 때에는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의상이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으므로 완전히 다 포괄한다.(盡)”고 한 것은 단지 하나하나의 법에 의거하여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다 포괄한다고 한 것이므로 곧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어째서 논하는 대상에 따라서 두 가지 뜻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으므로 완전히 다 포괄한다.(盡)”는 것은 하나의 문을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고, 여러 가지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여럿이라고 한 것이지

004_0030_a_01L相卽者一名口許自位存者自名
004_0030_a_02L口許也然此義亦難也謂六相章文
004_0030_a_03L相卽義耳如十方卽一塵等
004_0030_a_04L謂栿瓦等爲一椽也一中十十中一者
004_0030_a_05L但約位言耳若約法名則難可言一
004_0030_a_06L法名異法名是故引此而立一切自名
004_0030_a_07L口許者難也舍那品疏文者此亦相
004_0030_a_08L卽耳非謂一切全爲一名也雖約一
004_0030_a_09L一之法亦云全體相卽而自位存
004_0030_a_10L故全體相卽爲一名口許自位存
004_0030_a_11L自名口許者難也問如是難也
004_0030_a_12L則二師口許如何見耶答二師之義
004_0030_a_13L隨所論法見也謂二師並約十箇金錢
004_0030_a_14L則二師並一名口許二師並約金銀銅
004_0030_a_15L鐵等雜錢而說則二師並各各自名口
004_0030_a_16L若約十普法則約人人之十
004_0030_a_17L卽入亦得約人法敎義等諸法辨卽
004_0030_a_18L入亦得是故二師唯約人人而說
004_0030_a_19L一名口許通約人法敎義等而說
004_0030_a_20L自名口許也問相德云以一事辨一
004_0030_a_21L多故盡者只是約一一之法辨一多
004_0030_a_22L故云盡則是一名口許耳何云隨於所
004_0030_a_23L論之法分二義耶答以一事辨一多
004_0030_a_24L以是一門故云一事也所具種

004_0030_b_01L하나하나의 법에 의거하여 논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현상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책에서 “완전히 다 포괄함과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함(盡不盡)”을 이야기한 것은 오는 것의 첫 번째에서 열을 모두 포섭하는 것을 “완전히 다 포괄한다.”고 하고 다른 문에는 완전하게 다 포섭되지 못하여서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앞에서 “하나의 문에 열 개의 문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할 때의 하나의 문은 오는 것의 첫 번째인가, 동시에 가는 것의 마지막이기도 한가라고 물었을 때 후자와 같다고 대답하였는데, 그렇다면 하나의 문에 열을 포섭한 것이 완전히 다 포괄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 하나의 문은) 오는 것의 첫 번째와 가는 것의 마지막 모두를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오는 것의 첫 번째라고 하는가?
앞에서는 오는 것의 첫 번째와 가는 것의 마지막을 함께 들었지만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다 포괄하는 것과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하는 것을 논할 때에는 오직 하나의 문만을 들었다.
갖춰져 있는 것은 아홉인데 어째서 열을 모두 포섭하고 있다고 하는가?
포함하는 주체와 포함되는 대상들을 모두 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을 완전하게 포섭하였다는 것은 오직 포함하는 주체인 첫 번째의 완전하게 포섭함과 포섭하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포함되는 여럿의 완전하게 포섭됨과 포섭되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질문한 두 가지 뜻과 같으며 두 가지 뜻이 모두 갖춰져 있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포함되는 여럿의 완전하게 포섭됨과 포섭되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에서 “하나의 문에 무진의 뜻이 있음을 분명히 안다.”고 하였으므로 법계의 존재들이 이미 완전하게 포섭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하나의 문과 마찬가지로 다른 문들도 이와 같다.”고 하였으므로 온전하게 포섭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때문에 “하나의 문에 열을 다 완전하게 포섭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고 질문한 것이므로 포함되는 대상의 완전하게 포섭됨과 포섭되지 못함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으므로 완전히 다 포괄한다.(盡)”는 것은 하나의 문이므로 “하나의 현상으로”라고 하였다. 앞의 하나의 일을 가리켜서 하나라 하였고, 열 번째까지이므로 여럿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하였다.
“다른 현상(異事)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므로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한다.(不盡)”는 것은 오는 것의 뒤의 아홉 가지 다른 현상에서 각기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문에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하나의 현상(一事)에서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곧 여럿이고 하나의 현상이므로 곧 하나이다.”라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004_0030_b_01L故云多也非是約一一法論
004_0030_b_02L云一事也今此盡不盡者來初一中
004_0030_b_03L攝十則盡餘門所攝則卷下第二四張
004_0030_b_04L不盡故云不盡也問前云旣一門中
004_0030_b_05L具足十門之一門唯是來初耶亦兼
004_0030_b_06L去終耶答如後問若爾則一門中攝
004_0030_b_07L十盡不者亦含有來初去終何故云
004_0030_b_08L來一門耶答前則合擧來初去終
004_0030_b_09L此盡不盡中唯擧一門也問所具則
004_0030_b_10L何云攝十盡耶答并擧能所具故
004_0030_b_11L爾也問若爾攝十盡者唯能具一
004_0030_b_12L之盡不盡耶所具多之盡不盡耶
004_0030_b_13L如問二義亦二義具也今釋所具多之
004_0030_b_14L盡不盡也謂前云1)2)知一3)門有无
004_0030_b_15L盡義則明法界之法旣已攝盡
004_0030_b_16L云如一門餘亦如是則似有未盡之法
004_0030_b_17L是故因此問云一門中攝十盡不
004_0030_b_18L知所具之盡不盡也以一事辨一多故
004_0030_b_19L盡者是一門故云以一事牒前一事
004_0030_b_20L故云一乃至第十故云多是故云
004_0030_b_21L辨一多也以異事辨一多故不盡者
004_0030_b_22L以來後九之異事中各辨一多者
004_0030_b_23L是初一門之所能盡故云不盡也
004_0030_b_24L一事中一多義不相是則多一事故

004_0030_c_01L
어떤 사람은 앞에서는 동교에서의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한 것이고, 이 부분은 별교에서의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다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 가운데에서 완전하게 포괄함과 그렇지 못함을 논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앞의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한 것에서 어떤 것이 하나이고 어떤 것이 여럿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설명하여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곧 여럿이고 ……”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앞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할 때의 하나와 여럿은 “하나의 현상에서의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때의 하나와 여럿과 어떻게 다른가?
표현이 다를 뿐이다. 앞에서는 앞의 하나의 현상을 가리켜서 하나라 하고, 열 모두를 가리켜서 여럿이라고 하였다. 뒤에서의 하나는 앞과 같으므로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였고, 이 하나의 문에 있는 하나와 나머지 아홉을 모두 가리켰으므로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여럿”은 앞의 “완전히 다 포괄한다.”고 할 때 가리킨 여럿이다.
“다시 말한다.(又云)”고 한 것으로 보아 앞의 완전히 다 포괄함 중에서 다시 완전히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을 논한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앞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하고 다시 그 “하나와 여럿”에 대하여 해석하는 것이므로 “다시”라고 한 것이다.
“4구四句로 잘못을 막고(護過), 틀린 것을 배제하고(去非), 덕을 드러낸다.(顯德)”에 대하여 말한다.

어떤 사람은 셋으로 나누어 해석한 것으로 첫 번째는 잘못을 막고, 두 번째는 틀린 것을 배제하며, 세 번째는 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의리장」의 3성의三性義70)의 내용에 준한다면 잘못을 막는 것은 분별하여 집착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71) 틀린 것을 배제하는 것은 집착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며,72) 덕을 드러내는 것은 그 뜻을 드러내 보이는 것73)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막고 틀린 것을 배제하는 것과 덕을 드러내는 것의 두 부분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후자의 뜻을 따른다.
4구에 대해 「의리장」에 의하면 오로지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에 대하여만 논할 수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의 4구와 하나와 여럿의 4구를 다 포괄할 수 있다.

004_0030_c_01L是一者一云前則同敎中盡不盡
004_0030_c_02L此則別敎中盡不盡一云更於盡中
004_0030_c_03L盡不盡今釋前云以一事辨一多中
004_0030_c_04L未知何者是一何者是多故今此釋
004_0030_c_05L一事中一多義不相是
等也
004_0030_c_06L前云以一事辨一多之一多與一事中
004_0030_c_07L一多義不相是之一多何別答詮
004_0030_c_08L別耳前中牒前一卷下第二五張
004_0030_c_09L云一通擧十故云多也後中一者
004_0030_c_10L同前故云一事通擧此一門內一之
004_0030_c_11L與九故云一多義不相是也卽多者
004_0030_c_12L前盡中所擧之多也問又云者似於
004_0030_c_13L前之盡中更論盡不盡耶答不爾
004_0030_c_14L云以一事辨一多更釋此一多故言
004_0030_c_15L又也四句護過4)5)現德者
004_0030_c_16L云作三重釋也一護過二去非
004_0030_c_17L現德准義理章三性義文故護過者
004_0030_c_18L護分別執也去非者示執之失也
004_0030_c_19L德者現示其義也一云護過去非及
004_0030_c_20L現德故二也今釋取後義也四句中
004_0030_c_21L准義理章唯約盡不盡論也今此則
004_0030_c_22L可具盡不盡四句一多四句也一多
004_0030_c_23L「明」下有「中」{乙}「知」作「智」{乙}「門」
004_0030_c_24L疑「中」{乙}
「去」疑「失」{乙}「現」疑「離」{乙}

004_0031_a_01L하나와 여럿의 4구를 “틀린 것을 배제하는” 입장에서 논하면 “하나인가, 아니다.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여럿인가, 아니다. 하나의 현상이므로. 하나이면서 여럿인가, 아니다. 두 가지 성질이 없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가, 아니다.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가 된다. “덕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논하면 “하나인가, 그렇다. 하나의 일이므로. 여럿인가, 그렇다.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여럿인가, 그렇다.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가, 그렇다. 두 가지 성질이 없으므로.”가 된다.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의 4구를 “틀린 것을 배제하는” 입장에서 논하면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가, 아니다.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기도 하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기도 하는가, 아니다. 두 가지 성질이 없으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가, 아니다.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가 된다. “덕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논하면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가, 그렇다.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가, 그렇다.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기도 하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기도 하는가, 그렇다.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가, 그렇다. 두 가지 성질이 없으므로.”가 된다. 이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3성의에 준하면 셋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는데 어째서 둘로 나누어 해석하는가?
잘못을 막는 것이 곧 틀린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뜻이 아니다. 또한 그 책(「의리장」)에서는 집착의 잘못을 드러낸다고 하고 틀린 것을 배제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 책에 준할 수 없다.
“다른 현상(異事)도 준하여 같다.”는 것은 앞에 준하여서 “다른 현상으로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는 것의 하나와 여럿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른 현상에서의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여럿이고 하나인 것이 하나이다. 이와 같이 준하여 같다.”고 하여야 한다. 이 말에 의거하면 앞의 4구의 “틀린 것을 배제하고 덕을 드러낸다.……”는 하나와 여럿의 4구가 된다.

004_0031_a_01L四句中去非則云一耶不也一事
004_0031_a_02L中一多義不相是故多耶不也
004_0031_a_03L事故亦一亦多耶不也無二性故
004_0031_a_04L一非多耶不也具德故現德則云
004_0031_a_05L一耶是也一事故多耶是也
004_0031_a_06L多義不相是故亦一亦多耶是也
004_0031_a_07L德故非一非多耶是也无二性故
004_0031_a_08L盡不盡四句中去非則云盡耶不也
004_0031_a_09L以異事辨一多故不盡耶不也以一
004_0031_a_10L事辨一多故亦盡亦不盡耶不也
004_0031_a_11L无二性故非盡非不盡耶不也具德
004_0031_a_12L故現德則云盡耶是也以一事辨
004_0031_a_13L一多故不盡耶是也以異事辨一
004_0031_a_14L多故亦盡亦不盡耶是也具德故
004_0031_a_15L非盡非不盡耶是也无二性故
004_0031_a_16L是說也問准三性卷下第二六張義則
004_0031_a_17L可作三重別釋何故作二重釋耶答護
004_0031_a_18L過者卽是去非耳非是別義又彼
004_0031_a_19L旣云示執之失不云去非故不可准
004_0031_a_20L彼也異事准同者准前而釋以異
004_0031_a_21L事辨一多之一多也則應云異事中一
004_0031_a_22L多義不相是則多一事故則是一
004_0031_a_23L是准同也若准此辭則前之四句去
004_0031_a_24L非現德等
可是一多四句也

004_0031_b_01L
“하여야 함(須)은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뜻이다.”라는 것은 그렇게 되어야 할 곳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여러 현상들에서도 예에 준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은 오는 것의 뒤의 9문과 가는 것의 10문에서도 앞에 준하여서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하는 것을 드러내었다. 오는 것의 두 번째 문에서는 “두 번째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고, 서로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하고, 세 번째 문에서는 “세 번째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고, 서로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하여야 하며, 이런 식으로 열 번째 문에서는 “열 번째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고, 서로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하여야 한다. 가는 문은 이와 반대이다.
여러 문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왜 “두 번째의 현상(二事)”, “세 번째의 현상(三事)” 등으로 이야기하는가?
당체當體에 의거하면 모두 하나이므로 하나와 여럿이라고 하고, 또 하나의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문을 구별하려는 것이므로 “두 번째의 현상(二事)”, “세 번째의 현상(三事)” 등으로 이야기한다.
두 번째인 상즉문은 둘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곧바로 해석하는 것이고 뒤의 “이상의 많은 문들 ……” 이하는 동시와 전후의 뜻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앞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은 곧바로 해석하는 것이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하는 매듭짓는 것이다.
하나가 열에 상즉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가 열(여럿)과 상즉할 때에 하나가 유有이고 여럿이 공空이며, 여럿이 현상과 상즉할 때 여럿이 유有이고 하나가 공空인가, 아니면 이와 반대인가?
질문한 두 가지 뜻 모두와 같다. 어떤 사람은 상즉하기 이전의 공과 유와 상즉한 이후의 공과 유, 두 가지의 뜻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가 여럿과 상즉하고, 여럿이 하나와 상즉한다. 여럿의 유의 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의리장」의 동체同體 상즉문(卽門)에 대한 설명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열과 상즉한다. …… 그러므로 열이 곧 하나이다.”라 하고 가는 문에서는 “첫 번째는 열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열은 하나와 상즉한다. …… 그러므로 첫 번째의 하나가 곧 열이다.”74)라고 하였는데, 하나의 유의 문에서는 처음에 하나가 열과 상즉한다고 내세우고(標) 마지막에서는 열이 하나와 상즉한다고 말한다.

004_0031_b_01L者緣成義者須處中所須也別別諸
004_0031_b_02L事准例如是者例現來後九門與去十
004_0031_b_03L門中准前論盡不盡之義也謂立在
004_0031_b_04L來第二門應云以二事辨一多故盡
004_0031_b_05L異事辨一多故不盡也第三門應云
004_0031_b_06L三事辨一多故盡以異事辨一多故不
004_0031_b_07L盡也乃至第十門應云以十事辨一多
004_0031_b_08L故盡以異事
去門反此問諸
004_0031_b_09L門中可云以一事辨一多何云以二事
004_0031_b_10L三事等耶答約當體則並是一故云
004_0031_b_11L一多亦云一事等然欲簡別餘門
004_0031_b_12L云二事三事等也第二門中有二
004_0031_b_13L正釋後如上多門下問答同時前後
004_0031_b_14L義也初中亦二先正釋後當知下
004_0031_b_15L結也一卽十者問一卽十時一有多
004_0031_b_16L多卽一時多有一空耶反此耶
004_0031_b_17L如問二義一云具卽以前空有卽以
004_0031_b_18L後空有之二義也今釋一有門中
004_0031_b_19L卽多多卽一多有門中亦爾也謂義理
004_0031_b_20L章同體卽門云一者一何以故
004_0031_b_21L成故卷下第二七張 一卽十乃至云此
004_0031_b_22L十卽是一也去門中云一者十
004_0031_b_23L以故緣成故十卽一乃至是故初
004_0031_b_24L一卽是十也
一有門中標云一卽十

004_0031_c_01L여럿의 유의 문에서는 처음에 열이 하나와 상즉한다고 말하고 뒤에서 하나가 열과 상즉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는 이루는 주체(能成)이고 여럿은 이루어지는 대상(所成)인가, 아니면 이와 반대인가?
어떤 사람은 전자라 하고, 어떤 사람은 후자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었다고 한다. 첫 번째 입장은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가 유체有體로서 여럿을 이루기 때문이다. 『료간』75)에서 “하나의 연은 능히 일으키고 능히 이루며, 많은 연들은 일으켜지고 이루어진다.”76)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는 유체이고, 여럿은 무체無體이다. 여래장의 체가 6도를 능히 이루는 것이지, 여래장이 6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는 유체로서 이루는 주체이고 여럿은 무체로서 이루어지는 대상이 된다.
두 번째 입장은 하나의 유有의 문에서 현상이 덕을 갖추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여럿을 포괄하여 하나가 덕을 갖추는 것을 이루는 것이므로 하나는 이루어지는 대상이고 여럿이 이루는 주체이다. 「광명각품소」77)에서 “만약 하나가 없으면 모든 연緣들이 스스로의 체體를 온전히 잃는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하나가 없을 때에 여럿이 이뤄지지 않고, 이뤄지지 않으면 연緣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하나를 없애면 모든 것이 없게 된다.”78)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세 번째 입장을 취한다. 「의리장」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열과 상즉한다.”고 한 것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의 경우 여기의 하나는 많은 연을 모아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하나는 이루어진 대상이고 여럿이 이루는 주체이다. 그 다음에 “하나가 열과 상즉한다. 왜 그러한가. 하나가 없으면 열이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하나를 얻어야만 비로소 열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가 이루는 주체가 되고 열은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유의 문에서는 하나가 이루는 주체이고 여럿이 이루어지는 대상이면서 또한 그와 반대가 되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004_0031_c_01L終云十卽一多有門中標云十卽一
004_0031_c_02L下云一卽十故爾也問一有門中
004_0031_c_03L爲能成多爲所成耶反此耶答一
004_0031_c_04L云如初一云如後一云具二義
004_0031_c_05L義者一有門中一是有體能成於多
004_0031_c_06L料簡云一緣能起能成多緣是
004_0031_c_07L所起所成是故一有體多无體也
004_0031_c_08L來藏體能成六道非如來藏爲六道所
004_0031_c_09L如是一有門中一有體爲能成
004_0031_c_10L无體爲所成也次義者一有門中見
004_0031_c_11L一具德是故攝多成一具德是故一
004_0031_c_12L爲所成多爲能成也光覺品疏云
004_0031_c_13L无一卽一切緣全失自體何以故
004_0031_c_14L无一時多无所成无所成故不是緣
004_0031_c_15L是故有一卽有一切却一卽却一
004_0031_c_16L
故爾也今釋取第三義義理章
004_0031_c_17L一者一何以故緣成故
004_0031_c_18L卽十
一者一何以故緣成故者
004_0031_c_19L此一摠攬多緣而成故一爲所成
004_0031_c_20L爲能成也次云一卽十何以故
004_0031_c_21L无一十卽不成故
要須得一方
004_0031_c_22L十得成故一爲能成多爲所成也
004_0031_c_23L故一有門中一能成多所成又反此
004_0031_c_24L二義具也

004_0032_a_01L
(상즉문의) 질문과 대답을 통하여 의심을 제거하는 부분79)에 대하여 말한다.
어찌하여 중문中門의 마지막에서는 완전히 다 포괄함(盡)과 다 포괄하지 못함(不盡)을 논하고 즉문卽門의 마지막에서는 동시에 원만함(圓)과 원만하지 못함(不圓)을 논하는가?
옛글(古辭)에서 “대력大力과 인연因緣의 뜻을 얻는지 못 얻는지 알기 위하여 중문의 마지막에서는 완전히 다 포괄함(盡)과 다 포괄하지 못함(不盡)을 논하고, 유체有體와 무체無體의 뜻을 얻는지 못 얻는지 알기 위하여 즉문卽門의 마지막에서는 동시에 원만함(圓)과 원만하지 못함(不圓)을 논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즉문은 법성法性의 인연에 의거하여서 그 하나와 여럿의 당체當體가 상즉함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동시에 원만함과 원만하지 못함을 논하기에 편리하고, 중문은 그 체의 힘(力)과 쓰임(用)에 의거하여서 그 유력有力과 무력無力이 서로 포섭하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실제로는 서로 바꾸어 논하여도 또한 지장이 없다.
“곧 동시에 원만하기도 하고, 곧 앞뒤가 있기도 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어떤 사람은 하나의 문에서 법계의 존재들을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은 동시에 원만하고, 다른 문에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은 앞뒤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별도로 유통되고 있는 지상(至相 : 지엄)의 『십현장』 1권―혹은 지엄이 쓴 것이 아니라고도 하지만―에서 “만약 하나와 여럿이 연緣을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것은 동시인 것인가 앞뒤가 있는 것인가? 연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늘 동시이면서 앞뒤가 있다. 그 까닭은 하나가 열에 상즉하고 열이 하나에 상즉하므로 늘 동시이고, 위를 향하여 가고(向上去), 아래를 향하여 오므로(向下來) 늘 앞뒤가 있다.”80)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책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하나가 열에 상즉하고 열이 하나에 상즉하므로 동시에 원만하고, 오고 가는 뜻이 있으므로 앞뒤가 있는 것이다. 「의리장」에서는 “곧 동시에 원만하고 곧 앞뒤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법성法性의 연기는 역逆과 순順을 모두 갖추고 동체同體로서 어긋나지 않으며 체體의 작용(用)이 자유로와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81)라고 하였는데, 역逆과 순順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은 앞뒤가 있는 것이고, 동체同體로서 어긋나지 않는 것은 동시에 원만한 것이다. 그리고 체體의 작용(用)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다는 것은 앞의 둘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래를 향하는 것(向下)은 역逆이고 위를 향하는 것(向上)은 순順이므로

004_0032_a_01L
問答除疑中問何故中門終論盡不
004_0032_a_02L卽門終論圓不圓耶答古辭
004_0032_a_03L欲試於大力卷下第二八張緣之
004_0032_a_04L得耶不得耶故中門終論盡不盡
004_0032_a_05L欲試於有體无體之義得耶不得耶
004_0032_a_06L卽門終論圓不圓也今釋卽門者
004_0032_a_07L法性之因緣見其一多當體相卽
004_0032_a_08L故便於圓不圓中門者約其體上力用
004_0032_a_09L見其有力无力相攝之義是故便於盡
004_0032_a_10L不盡故爾耳實則1)玄論亦不碍也
004_0032_a_11L卽圓卽前後者云何答一云一門中
004_0032_a_12L盡法界之法則圓不攝餘門之攝盡則
004_0032_a_13L前後也今釋有至相十玄章一卷別行
004_0032_a_14L或云非至相所述彼文云若一多要待
004_0032_a_15L緣成者爲是同時爲有前後答緣
004_0032_a_16L成故常同時而先後所以然者
004_0032_a_17L卽十十卽一故常同時向上去向下來
004_0032_a_18L故常前後
今此亦爾一卽十十卽
004_0032_a_19L一故卽圓來去義故卽前後也
004_0032_a_20L理章云卽圓卽前後何以故由此
004_0032_a_21L法性緣起具足逆順同體不違體用
004_0032_a_22L自在无障碍故
具足逆順者前後
004_0032_a_23L體不違者圓也體用自在无障碍者
004_0032_a_24L通望前二也是故向下則逆向上則

004_0032_b_01L역逆과 순順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은 앞의 『십현장』의 “위를 향하여 가고(向上去), 아래를 향하여 오므로(向下來) 늘 앞뒤가 있다.”는 뜻이다. 동체同體로서 어긋나지 않는 것은 동시에 동체同體라는 뜻이므로 앞의 『십현장』의 “하나가 열에 상즉하고 열이 하나에 상즉하므로 늘 동시”라는 뜻이다.
(수전법으로 다함이 없음≺無盡≻을 보여 주는 부분의) 세 번째의 질문과 대답으로 의심을 없애는 부분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서 항상 오고 간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중문中門은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 문이고 즉문卽門은 자리가 움직이는 문인데 어째서 이와 같이 말하는가?
중문과 즉문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은 여기에서 말하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과 다르므로 잘못된 것이 없다. 즉 지금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근본을 향한다는(向本) 뜻으로서 법성法性의 스스로의 자리가 원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 법성의 연에 따르는(隨緣) 뜻에 의거하여 오고 감과 중(中 : 상입), 즉(卽 : 상즉)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법성이 이루는 인연법 중에서 즉문은 인연의 당체當體가 온전하게 상즉하는 것으로서 여럿이 하나와 상즉할 때에 여럿의 자리는 없어지고 하나에 일치되므로 자리가 움직이는 문이다. 중문은 인연의 힘과 작용이 서로 포섭하고 들어가는 것으로서 하나가 여럿을 포섭할 때에 여럿은 스스로의 자리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하나에 들어가므로 자리를 움직이지 않는 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르다.
“이른바 다르다는 뜻”은 한 종류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할 때에 차별적 인식을 가진 사람(遍計之人)은 이 동전들이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 열 개의 동전 중의 첫 번째 동전은 두 번째나 세 번째 동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삼승의 사람은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일부 알지만 인因은 직접적이고 연緣은 간접적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진실 그대로의 인연을 알지 못한다. 일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과 연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것이 없다는 궁극적인 진실 그대로의 인연의 뜻을 알게 된다. 이 인연에 힘이 있어 결과(果)를 생겨나게 하는 뜻이 곧 연기가 눈앞에 드러나는 것(緣起現前)이고, 정해진 성품이 없어 공空하고 평등한 뜻이 연기에 정해진 성품이 없다는 것(緣起無性)이며, 공空과 유有가 막힘이 없다는 뜻이 성기性起이다.

004_0032_b_01L順故具足逆順者彼十玄中向上去
004_0032_b_02L向下來故常前後義也同體不違者
004_0032_b_03L同時同體義故彼十玄中一卽十十
004_0032_b_04L卽一故常同時義也

004_0032_b_05L
三問答除疑中自位不動而恒來去者
004_0032_b_06L中門是位不動門卽門是位動門
004_0032_b_07L故爾云耶答中卽之動不動與此
004_0032_b_08L中動不動別故卷下第二九張難也
004_0032_b_09L謂今此則不動者向本義故以法性自
004_0032_b_10L位元不動故云不動約此之隨緣
004_0032_b_11L故云來去中卽義者就法性所成
004_0032_b_12L因緣法中卽門者因緣當體全全相
004_0032_b_13L多卽一時多位泯而卽於一
004_0032_b_14L云位動門中門者因緣力用互相攝
004_0032_b_15L一攝多時多位不壞而入於一
004_0032_b_16L故云位不動門故別也所謂別義者
004_0032_b_17L此一種十錢遍計之人不知此錢因
004_0032_b_18L緣所成故見此十錢第一非第二非第
004_0032_b_19L三等三乘之人分知因緣所成之義
004_0032_b_20L然有因親緣疎之病而未能知如實因
004_0032_b_21L至於一乘方得因緣无親疎究竟
004_0032_b_22L如實因緣之義然此因緣有力生果義
004_0032_b_23L則緣起現前也无性空平等義則緣
004_0032_b_24L起无性也空有无碍義則性起也

004_0032_c_01L이 인연에 정해진 성품이 없어 공空하고 평등하다는 뜻에 의거하여 “연기는 성품에 따라 분별이 없어서 상즉하고 상융(相融 : 상입의 뜻)하여 평등한 뜻을 드러내니 제일의(第一義 : 眞諦)를 바르게 따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공과 유가 막힘이 없다는 뜻에 의거하여서 “(세제世諦를 따라 관하여) 제일의제로 들어간다.”82)고 말하였다.
“같음(同)의 뜻은 앞의 용수의 해석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하였던 (『중론』의)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 ……”의 구절로서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의 막힘이 없는 중도를 이야기한 것을 가리킨다.
“하나하나의 동전을 ……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열 개의 동전을 동시문으로 보면 (서로를) 모두 갖추고 있는 열 개의 동전이고, 인다라문으로 보면 인다라처럼 (서로 갖추고 있는 것을 다시 서로 갖추고 있는) 열 개의 동전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회전문(唯心廻轉善成門) 등이 있다.

(나) 보법普法의 설명에 대한 해설
(연기다라니의 뜻을 드러내는 것 중에서) 두 번째의 비유를 들어서 법을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열 개의 동전으로 10보법普法을 비유하고 있다. 수전법의 뜻에서 연에 의하여 생겨나는 여러 존재들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끝내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미혹된 사람은 변계遍計에 의해 나타난 사물을 고집하여 연기의 법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을 드러내는 사유(事由 : 逗遛의 번역)가 전혀 다르다는 뜻을 다시 수전법에 의하여 보이고 있다.
다라니를 드러내는 것에 곧바로 의거한 부분83)은 (『화엄경』) 「현수품」에서 “보살은 생사에 대하여 처음 발심할 때에 한결같이 깨달음을 구하니 마음이 견고하여 움직일 수 없다. 그 한 마음의 공덕은 깊고 넓음이 끝이 없어서 여래가 나누어 말씀하셔도 한 겁이 다할 때까지 마칠 수 없다. 하물며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겁 동안 여러 바라밀을 모두 갖추어 닦아 온 여러 단계의 보살들의 공덕과 수행에 있어서이리오! 시방세계의 모든 여래들이 그의 무한한 공덕을 말하고자 하여도 또한 모두 다 말할 수 없도다. 지금 내가 보살의 공덕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하니 마치 새가 허공의 일부만을 지나가는 것과 같고 대지의 작은 티끌과도 같다.”84)는 내용이다.
여래가 어찌하여서 보살의 공덕을 모두 다 찬탄할 수 없는가?

004_0032_c_01L此因緣无性空平等義云緣起者
004_0032_c_02L性无分別相卽相融現平等義正順第
004_0032_c_03L一義也約空有无碍云入第一義諦
004_0032_c_04L同義如前龍樹釋者指前因緣所
004_0032_c_05L生法等生不生无碍中道也就一一
004_0032_c_06L錢至可解者約此十錢以同時門見
004_0032_c_07L則具足具足之十錢以因陁羅門見
004_0032_c_08L則因陁羅因陁羅之十錢也如是等
004_0032_c_09L廻轉也二擧喩現法中以十錢喩十
004_0032_c_10L普法也現數錢意中緣生諸法无自
004_0032_c_11L性故終不可得而迷者執遍計物
004_0032_c_12L迷緣起法是故現法逗遛全別之義
004_0032_c_13L依數錢卷下第三○張指示也直約現
004_0032_c_14L陁羅尼中賢首品云菩薩於生死
004_0032_c_15L㝡初發心時一向求菩提堅固不可
004_0032_c_16L彼一念功德深廣无邊際如來
004_0032_c_17L分別說窮劫猶不盡何况於无量
004_0032_c_18L數无邊劫具足修諸度諸地功德行
004_0032_c_19L十方世界中一切諸如來說彼功德雲
004_0032_c_20L亦不能究竟今我說菩薩功德中少
004_0032_c_21L如鳥履虛空如地一微塵

004_0032_c_22L如來何故不能盡歎菩薩德耶答一云
004_0032_c_23L「玄」作「」{甲}·作「互」{乙}

004_0033_a_01L
어떤 사람은 보살은 일승이고 부처는 삼승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총상은 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별상은 다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보살의 공덕은 끝이 있음(盡)과 끝이 없음(不盡)을 갖추고 있으므로 끝이 있음에 대해서는 다 찬탄할 수 있고 끝이 없음에 대해서는 다 찬탄할 수 없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부처와 보살은 모두 일승이지만 보살의 공덕이 법성法性의 근원의 끝까지 다 이르는 것이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 다 찬탄한다면 법성에 끝남이 있는 것이 되므로 큰 잘못이 되기 때문에. 지금 해석해 보건대 마지막 해석이 맞다. 즉 『4권소』85)에서 “부처는 행덕의 방편의 보상報相이고 법은 체실體實의 보편普遍으로서, 서로 일치하지 않아서 따로 논한다. 그러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공덕의 법은 부처가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성性과 상相이 상주하는 법성에 일치하기 때문에 능히 다 찬탄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가 방편의 보상이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과거의 부처님은 닦아 이루어 열반에 드셨고, 뒤의 부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방편의 보상에 머무르신다. 법은 체실體實의 보편普遍이므로 과거의 부처님이 발심하고 공덕을 쌓아서 부처가 될 수 있었고, 뒤의 부처님들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의 공덕은 부처가 있음과 없음에 관계없이 성性과 상相이 상주한다. 그러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
“지금 내가 보살의 공덕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한다.”고 하였는데 이 일부분은 다 찬탄할 수 있는가?
(『화엄경』) 「발심공덕품」에서 “불자佛子여, 비록 어떤 사람이 있어 동방 아승기세계의 중생들에게 모든 즐거움의 도구를 한 겁 동안 공양하고 나서 5계를 청정하게 닦으라고 가르치고, 남쪽과 서쪽과 북쪽 사방과 상·하의 세계의 중생들에게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면, 불자佛子여 그대의 생각에 어떠한가? 그 사람의 공덕이 많은가 그렇지 않은가? 제석帝釋이 ‘불자여, 여러 부처님들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공덕을 능히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004_0033_a_01L菩薩則一乘佛則三乘故一云摠相
004_0033_a_02L則盡別相則不盡一云菩薩功德
004_0033_a_03L盡不盡二義故盡邊則盡歎不盡邊
004_0033_a_04L則不盡歎一云佛與菩薩俱是一乘
004_0033_a_05L然菩薩功德究竟盡於法性源底
004_0033_a_06L故不能盡歎若盡歎者法性有盡故
004_0033_a_07L是大過也今釋存後義謂四卷疏
004_0033_a_08L中云佛是行德方便報相法是體實
004_0033_a_09L普遍不稱別論故云不盡
此功德
004_0033_a_10L稱同於有佛无佛性相常住之法性
004_0033_a_11L是故不能盡歎也問佛是方便報相
004_0033_a_12L不能盡歎者云何答前佛修成入
004_0033_a_13L於涅1)後佛亦爾故云住於方便
004_0033_a_14L報相法則體實普2)遍故前佛履於
004_0033_a_15L發心功德而得成佛後佛亦爾故此
004_0033_a_16L功德有佛无佛性相常住是故
004_0033_a_17L不能盡歎也問今我說菩薩功德中少
004_0033_a_18L則此之少分可盡歎耶答發心功德
004_0033_a_19L品云佛子假使有人供養東方阿
004_0033_a_20L僧祗世界衆生卷下第三一張 一切樂
004_0033_a_21L乃至一劫然後敎令淨修五戒
004_0033_a_22L南西北方四維上下亦復如是佛子
004_0033_a_23L於意云何彼人功德寧爲多不
004_0033_a_24L釋言佛子除諸如來其餘一切不

004_0033_b_01L법혜法惠보살이 제석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처음 발심한 보살의 공덕을 백으로 나눈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공덕은 그 백으로 나누어진 것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천으로 나누고, 백천으로 나누고, 억으로 나누고, 백억으로 나누고, 천억으로 나누고, 백천억으로 나누고, 백나유타로 나누고, 천나유타로 나누고, 헤아릴 수 없이 큰 수로, 비유할 수 없이 큰 수로,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눈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공덕은 그렇게 나누어진 것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소』86)에서는 “다만 전체에 비교하여 같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누었을 때 그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는가? 이 처음 발심한 공덕은 법계와 같아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눈 것의 한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법계에 두루 미친다. 양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 비할 수 없는 것이다.”8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다 찬탄할 수 없다.
『화엄경』에서 “이때 하늘의 제석이 법혜보살에게 아뢰었다. ‘불자佛子여, 처음 발심한 보살은 어떠한 공덕장功德藏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법혜보살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그 경지는 매우 깊어서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말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받아 갖추어 말씀드립니다.’”88)라고 하였는데, 비록 일부분이라도 다 찬탄할 수 없다면 왜 이 경전에서는 갖추어 말한다고 한 것인가?
갖추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만 다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갖추어 이야기한다는 것일 뿐이고 그 공덕을 다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전의 앞부분에서 여러 가지 공덕을 많이 이야기하고서 그것들을 저 처음 발심한 보살의 공덕에 대비하여서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눈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공덕은 그렇게 나누어진 것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보살의 공덕장을 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갖추어 이야기한다고 하였다. 다만 다 이야기할 수 없는 뜻을 갖추어 말한다는 것일 뿐이다.
영관靈觀 스님은 “(『법계도』의) ‘처음 발심한 보살의 한 순간의 공덕을 다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동전과 같다.

004_0033_b_01L能稱量彼人功德法惠菩薩語帝釋
004_0033_b_02L佛子初發心菩薩功德之藏
004_0033_b_03L彼人功德不及其一千分百千
004_0033_b_04L分億分百億分千億分百千億分百那由
004_0033_b_05L他分千那由他分乃至不可數不可比喩
004_0033_b_06L不可說分彼人功德不及其一等

004_0033_b_07L疏云只可全比不等豈可不可說
004_0033_b_08L不同一分耶答此發心功德則同
004_0033_b_09L法界不可分析故縱不可說分中一
004_0033_b_10L亦遍法界无問多少皆无比也
004_0033_b_11L
則雖是少分亦不盡也

004_0033_b_12L
問經云爾時天帝釋白法惠菩薩言
004_0033_b_13L佛子初發心菩薩爲成就幾功德藏
004_0033_b_14L法惠答言佛子是處甚深難知難
004_0033_b_15L信難解難說難通達難分別雖然我
004_0033_b_16L當承佛神力具足演說
雖是少分
004_0033_b_17L旣其不能盡歎何故此云具足說耶
004_0033_b_18L答具足說者但具足演說不盡之意耳
004_0033_b_19L非謂盡說彼功德也何者前經廣
004_0033_b_20L說種種功德以此對彼菩薩功德而云
004_0033_b_21L乃至不可說分彼人功德不及其一
004_0033_b_22L
故知非謂菩薩功德之藏可盡說
004_0033_b_23L云具足說但具足說不盡之義耳
004_0033_b_24L觀德云初發心菩薩一念功德不可

004_0033_c_01L왜냐하면 첫 번째 문에 의거하여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는 첫 번째 문(初門)의 동체同體이고, ‘하물며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시간 동안 여러 바라밀을 모두 갖추어 닦아온) 여러 단계의 보살들의 공덕이라는 것은 두 번째 이후의 동전들과 같다. 왜냐하면 다른 문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는 두 번째 문(第二門)의 동체同體이며, ‘처음 발심할 때 곧바로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의 동전과 상즉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行의 체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는 이체異體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문에 의거하여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는 첫 번째 문에 갖추어진 덕이고, ‘두 번째 이후의 동전들과 같다. 왜냐하면 다른 문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는 두 번째 이후의 여러 문에 갖추어진 덕이며,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의 동전과 상즉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여기에서 나열한 동전에 의거하여 첫 번째의 동전이 열 번째의 동전과 상즉하기 때문에 이체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동체와 이체를 막론하고 “첫 번째 문에 의거하여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낸다.”는 것은 첫 번째 문의 다함이 없음을 가리킨 것이고, “두 번째 이후의 동전들 ……”은 두 번째 이후의 여러 문들이며,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 동전에 상즉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에서는 다만 첫 번째 문과 다른 문들의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 갖춰져 있는 덕에 대하여는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는 첫 번째 문에 갖춰져 있는 다함이 없는 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행行의 체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처음 발심하는 것이 모든 수행의 근본이므로 이 마음에서 곧바로 정각을 이룬다. 그러므로 행行의 체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였다. 믿음을 채워서 성불하는 사람은 행동이 진실되다(行實).”89)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깊게 보아야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글에 의거하여 드러난 바를 따져보면 앞에서는 첫 번째 문에 다함이 없이 갖춰져 있는 법의 당체當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므로 비유(能況)로서 이야기하면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 동전과 상즉하고, 비유하고자 하는 바(所況)로 이야기하면 처음 발심할 때에 곧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004_0033_c_01L盡者如第一錢何以故約一門
004_0033_c_02L卷下第三二張現无盡故者初門同體
004_0033_c_03L何況於无量諸地功德者如第二
004_0033_c_04L錢已去何以故約異門說故者第二門
004_0033_c_05L同體也初發心時便成正覺者如一
004_0033_c_06L錢卽十故何以故約行體說故者
004_0033_c_07L體也何者約一門現无盡者是第
004_0033_c_08L一門內具之德也如第二錢已去何以
004_0033_c_09L故約異門說故者第二已去諸門內具
004_0033_c_10L之德也如一錢卽十故者約此列
004_0033_c_11L錢而云第一錢卽第十錢故異體也
004_0033_c_12L今釋无問同異體約一門現无盡者
004_0033_c_13L門无盡也第二錢已去等者第二已
004_0033_c_14L去諸門也一錢卽十者前但現一門
004_0033_c_15L與異門之无盡不辨所具之德故今此
004_0033_c_16L欲現初一門所具无盡之德故爾也
004_0033_c_17L行體說故者一云初發心是萬行之
004_0033_c_18L本故於此心便成正覺是故約行體
004_0033_c_19L說也信滿成佛者行實也如是深
004_0033_c_20L見也今釋約文現相者初約一門現
004_0033_c_21L无盡之所具法中當體而說也是故約
004_0033_c_22L能況則一錢卽十錢約所況則初發心
004_0033_c_23L「盤」音通「槃」{編}「遍」作「通」{甲}

004_0034_a_01L
“어찌하여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함께 두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한다.”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다르다. 아랫부분에서 “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한다.”고 한 것은 머리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고, 지금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함께 둔다.”는 것은 머리와 다리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어찌하여 같은 곳에 다리와 머리를 나란히 하는가?”라고 말하였어야 한다.
“두류逗留”라는 것은 일이 말미암는 것(事由)이다.
“아야阿耶”는 아버지이다.
“모습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에 믿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드러난 모습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에 낮은 근기의 믿음을 냄으로 머리와 다리가 각기 다르다는 등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원교 일승 ……”에서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한 순간이 곧 9세世를 포괄한다. 옛글(古辭)에서 “한 살 먹은 어머니가 50년 동안 임신하여 51살의 사나이를 낳았다.”90)고 하였는데, 한 살짜리 어머니는 처음 발심한 것이고, 50년 동안 임신한 것은 수행의 50단계이며, 51살의 사나이를 낳았다는 것은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의 불과佛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의 “모습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에 상대되고, “도리에 의거하여 말한다.”는 것은 앞의 “믿는 마음을 낸다.”는 것에 상대된다.
“하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라는 것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고, 같다는 것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가?
서로 바꾸어 말하여도 가능하다. 다만 모습이 늘어나는 순서대로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즉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몸이라는 것이 하나여서 분별이 없는 뜻이므로 “하나라는 것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는 뜻”이라고 하였다. 같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조화하여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저것과 같고 저것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이것과 같다는 것이므로 “같다는 것은 머무르지 않는 뜻”이라고 하였다.
“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는 것은 머리를 들면 옆에 다리가 없고, 다리를 들면 옆에 머리가 없어서 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91)
“경전에 이르기를 ……”에 대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앞의 “고요함과 쓰임이 하나의 모습(寂用一相)” 중의 고요함(寂)을 증명하고,

004_0034_a_01L時便成正覺如是見也 1)何故同處並
004_0034_a_02L頭脚耶者與同處並頭何別答別
004_0034_a_03L云同處並頭者齊頭之義也今同處
004_0034_a_04L並頭脚者頭與脚並處之義也實則
004_0034_a_05L應云何故同處頭脚並頭耶逗遛者
004_0034_a_06L事由也阿耶者父也約相說故生信
004_0034_a_07L心故者約現相說故生劣機之信故說
004_0034_a_08L頭脚各別等也卷下第三三張 圓敎一
004_0034_a_09L乘等者兒生一念卽該九世也
004_0034_a_10L辭一年母懷五十年生五十一年大丈
004_0034_a_11L夫也一年母者初發心也  懷五十
004_0034_a_12L年者攝五十位也生五十一年大丈
004_0034_a_13L夫者成等妙二覺果也由緣成故者
004_0034_a_14L對前約相說也約道理說者對前生
004_0034_a_15L信心也一者何義答一者一无分別義
004_0034_a_16L等者亦得云一者不住義同者一无
004_0034_a_17L分別義耶答互言亦得但從增相云
004_0034_a_18L謂諸法之一體者是一无分別義
004_0034_a_19L故云一者一无分別義也同者
004_0034_a_20L彼和同義故此無自性同於彼
004_0034_a_21L无自性同於此故云同者不住義也
004_0034_a_22L同處並頭者不相知義者擧頭則傍无
004_0034_a_23L擧足則傍无頭故云不相知也
004_0034_a_24L云等者不生不滅則證前寂用一相之

004_0034_b_01L“인연에 의하여 있다.”는 것은 쓰임(用)을 증명한다.
“6상六相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에 대하여 말한다.
지금 이 책에서는 “이 6상이라는 용어가 법성의 집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고 다라니 창고를 열 수 있는 좋은 열쇠이다.”라 하고 「육상장」에서는 “4구四句와 6상이 모두 법에 들어가는 방편”92)이라고 하였다. 6상 이외에 별도로 들어가는 곳이 있는가, 아니면 6상이 곧바로 들어가는 법성인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들어가는 곳은 증분이고 6상은 연기분이므로 6상은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뜻은 6상의 연기가 곧 법성의 집이고 다라니 창고로서 별도의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견해도 타당하고, 6상 이외에 별도로 들어가는 곳이 있다고 하는 것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방편에는 무주방편無主方便, 발취방편發趣方便, 집성방편集成方便의 셋이 있기 때문이다. 발취방편은 가행加行 방편으로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일곱 가지 방편이다. 그러므로 방편 외에 별도의 들어갈 곳이 있다. 집성방편은 여러 가르침을 교묘하게 모아 이룬 것으로서 곧 6상 방편이다. 6상이 곧 법이므로 따로 들어갈 곳이 없다.
두 번째 뜻에서 6상은 무엇에 해당하고, 들어갈 곳은 무엇에 해당하는가?
6상은 해행解行의 인因이고 법성의 집과 다라니 창고는 과해果海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법계도』 중에서 “망상을 쉬지 않으면(叵息妄想)”부터 “자량資糧을 얻는다.”까지는 수행의 방편이고, “다라니의 다함이 없는 보배로”부터 “참된 보배 전각을 장엄한다.”까지는 수행으로 얻는 이익이다. 이것들은 궁실窮實로서 이 책의 내용에 의거하면 법성의 집이다. “집에 돌아가 분수에 맞게 ……”라고 한 것은 이에 의거하면 돌아갈 법성의 집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곧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 장엄한 참된 보배 전각이다. 『법계도』의 글에서 이 집을 해석하여 또한 “법계다라니의 집 및 인다라의 집, 미세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004_0034_b_01L寂也因緣而有則證前用也六相如
004_0034_b_02L上等者今此云此語欲入法性家要門
004_0034_b_03L開陁羅尼藏好鑰匙六相章云四句
004_0034_b_04L與六相俱爲入法方便
六相外別
004_0034_b_05L有所入耶六相卽是所入法性耶
004_0034_b_06L二義也初義者所入則是證分
004_0034_b_07L相則是緣起分故云入法之方便也
004_0034_b_08L義者六相緣起卽是法性家陁羅尼
004_0034_b_09L无別所入然後義亦得六相外
004_0034_b_10L別有所入亦得也謂方便中有无住
004_0034_b_11L方便發趣方便集成方便三也
004_0034_b_12L趣方便者加行方便故入見道之七方
004_0034_b_13L便也是故方便卷下第三四張外別有
004_0034_b_14L所入集成方便者諸法巧相集成者
004_0034_b_15L六相方便故六相卽法无別所入也
004_0034_b_16L後義中六相當何所入當何耶
004_0034_b_17L六相則解行因也法性家陁羅尼藏者
004_0034_b_18L證果海之法也從叵息妄想至得資粮
004_0034_b_19L是修行方便也以陁羅尼乃至實寶
004_0034_b_20L殿者是則修行所得之益也此則窮
004_0034_b_21L實也約此云法性家也歸家隨分

004_0034_b_22L中約此云所歸法性家也此卽是以陁
004_0034_b_23L羅尼无盡寶之所莊嚴實寶殿也文中
004_0034_b_24L釋此家亦名法界陁羅尼家及因陁羅

004_0034_c_01L이는 불과佛果를 만족하여서 법성의 집에 들어가 다라니 창고를 열어 법성의 집을 장엄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두 과해果海를 깨달은 곳에 의거하여서 법성의 집, 다라니 창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6상은 여기에 들어가는 방편이다. 그래서 해행解行의 인因으로 본다.
그것은 실제돈實際頓에서는 인다라나 미세를 말하지 않기 때문인가?
돈(頓 : 실제돈)과 원(圓 : 궁실원)에서는 모두 10문과 10법을 갖추고 있다. 글93)에서 “일승법의 뜻은 출출세出出世에서 깨닫는 것으로 나머지 때에는 그것을 보고(見) 듣고(聞) 생각하여(比) 이해하고(解) 수행한다 (行).”94)고 하였다. 그러므로 실제돈에서도 또한 인다라를 갖추고 있다. 지금 여기(『법계도』)에서는 궁실원에 의거하여 법성의 집, 인다라니의 집, 미세의 집이라고 하였다.
6상이 궁실에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한다면 궁실에서는 6상을 쓰지 않는가?
실제돈에서 이미 6상을 갖추고 있는데 어찌하여 궁실원에서 쓰지 않겠는가. 또한 해행인解行因에서 6상의 눈을 뜨고 궁실에 들어가는 뜻에 의거하여서 6상을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하였다. 즉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거쳐야 하므로 집과 문을 상대하여서 “법성의 집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라고 하였다. 보배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하므로 창고와 열쇠를 상대하여서 “다라니 창고를 여는 좋은 열쇠”라고 하였다.
(연기다라니의 뜻을 드러내는 부분 중) 뒷부분은 앞의 내용을 매듭짓는 것이다. 그중에 “위에서 밝힌 연기법”이라고 한 것은 앞의 “만약 연기의 실상을 보고자 하면 ……” 이하에서 밝힌 뜻을 모두 매듭짓는 것이다.
위에서 밝힌 것은 모두 일승의 연기다라니법이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뜻을 모두 종합하여 매듭짓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오직 앞의 “만약 연기의 실상을 보고자 하면 ……” 이하의 뜻만을 매듭짓는다고 하는가?

004_0034_c_01L尼家微細家者是乃以果滿故入法
004_0034_c_02L性家開陁羅尼藏莊嚴法性家之義也
004_0034_c_03L此皆約證果海處云法性家陁羅尼藏
004_0034_c_04L六相者入此之方便也是故解行
004_0034_c_05L因中見也問若爾實際頓中不說
004_0034_c_06L因陁羅微細故爾云耶答頓圓中並具
004_0034_c_07L十門十法文云一乘法義出出世證餘
004_0034_c_08L時見聞及比解行是故頓中亦具
004_0034_c_09L因陁羅也今此且約窮實爲法性家因
004_0034_c_10L陁羅尼家微細家也問六相是入窮實
004_0034_c_11L之方便則窮實中不用六相耶答實
004_0034_c_12L際頓中旣具六相豈於窮實圓中而不
004_0034_c_13L用耶且約解行因中開六相眼
004_0034_c_14L窮實之義而云六相入法之方便也
004_0034_c_15L欲入家中要從門戶是故家與門
004_0034_c_16L對而云入法性家要門欲開寶藏
004_0034_c_17L須鑰匙是故藏與卷下第三五張匙相
004_0034_c_18L云開陁羅尼藏好鑰匙也後結
004_0034_c_19L前中上來所2)明緣起法者通結前若
004_0034_c_20L欲觀緣起實相以下所明義也問上來
004_0034_c_21L所明並是一乘緣起陁羅尼法故
004_0034_c_22L云通結前來所說之義何云唯結前若
004_0034_c_23L「何」下法界圖本文有「以」·加「以」{乙}「明」
004_0034_c_24L下法界圖本文有「者唯頭示一乘陀羅尼大」

004_0035_a_01L
앞에서 밝힌 것으로 연기다라니법이 아닌 것이 없지만 앞부분에서는 단지 「법계도인」의 내용만 해석하고 연기다라니의 뜻에 대해서는 해석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이르러 자세하게 해석하였으므로, 앞의 “만약 연기의 실상을 보고자 하면 ……” 이하의 뜻을 매듭짓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법계도인」의 내용을 해석하는 부분을 끝내면서 “연기다라니의 뜻은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고 하였다.
“또한 일승의 막힘없는 말솜씨(辯才)95)를 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된 것(所說)인 연기법을 매듭지었으므로 지금 여기에서는 이야기하는(能說) 말솜씨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이다.
앞부분은 3승에도 함께 적용되는 뜻이고 지금 여기에서는 일승의 막힘없는 말솜씨를 논하는 것이므로 3승의 분제分齊가 아니라는 뜻에서 “또한 …… 볼 수도 있다.”라고 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앞에서는 이야기된 것(所說)인 연기법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여기에서는 이야기하는(能說) 말솜씨가 3승의 분제分齊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나) 일승一乘과 삼승三乘의 다라니의 차이 설명에 대한 해설
(연기다라니대의의 료간 중) 두 번째의 질문과 대답으로 일승과 3승의 차별을 드러내 보이는 부분에는 세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있다. 첫 번째는 잘못을 고치는 것(簡濫)이고, 두 번째는 경전으로 증명하는 것(敎證)이고, 세 번째는 뜻으로 증명하는 것(義證)이다.
첫 번째 질문과 대답에서 “여러 존재들이 곧 공空이다.”는 것은 대승시교이고, “여러 존재들이 곧 진여이다.”는 것은 대승종교이다.
두 번째 질문과 대답에서 “원교 일승의 분제分齊”라고 이야기한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실제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실제돈과 궁실원을 갖춘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입장은 제5 원교의 실제돈이라는 것으로, (『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 분상문分相門96)과 해섭문該攝門97)은 실제돈에 해당하고, 그 분상문에서 경전의 증명으로 (『화엄경』) 「현수품」과 (「십지품」)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는데,98) 지금 여기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이다.99) 또한 『현담』100)의 돈교에 대한 설명에서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고, 원교에 대한 설명에서 지영상분地影像分101)의 “대해大海로 인하여 10보산十寶山 있는 것과 같이(如因大海有十寶山)”라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법계도』의 뒷부분의 뜻으로 증명하는 부분(義證)에서 “만약 교敎와 의義의 분제分齊가 이와 상응하면 곧 일승원교 및 돈교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므로, 이 경전으로 증명하는 부분(敎證)의 원교 또한 돈교와 원교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10문과 10법은 돈교와 원교에 모두 해당하므로 상응하고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은 돈교와 원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004_0035_a_01L欲觀緣起實相以下義耶答前之所明
004_0035_a_02L无不是陁羅尼法然前中但釋印文
004_0035_a_03L釋緣起陁羅尼義至此廣釋故知結
004_0035_a_04L前若欲觀以下義也是故釋印文竟而
004_0035_a_05L云陁羅尼義如下釋也亦可論一乘无
004_0035_a_06L碍辯1)才者前結所說緣起法今此
004_0035_a_07L增釋能說辨才也問前則共三乘義
004_0035_a_08L此論一乘无碍辨才非是三乘分齊義
004_0035_a_09L故云亦可何不爾耶答不爾前辨
004_0035_a_10L所說法今辨能說之非三乘分齊耳
004_0035_a_11L二問答現示一三差別中有三問
004_0035_a_12L初簡濫次敎證後義證也
004_0035_a_13L中諸法卽空者始敎諸法卽如者
004_0035_a_14L敎也次問答中言圓敎一乘分齊者
004_0035_a_15L一云實際頓一云具頓圓也初義者
004_0035_a_16L第五圓敎之實際頓也謂分相該攝是
004_0035_a_17L實際頓而分相證中引賢首品及第九
004_0035_a_18L地偈今此亦爾也玄談中頓敎中引
004_0035_a_19L第九地偈圓敎中引地影像分如因
004_0035_a_20L大海有十寶山文故知爾也問下引義
004_0035_a_21L證中云若敎義分齊與此相應卽是一
004_0035_a_22L乘圓敎及頓敎攝
則敎證中圓敎
004_0035_a_23L具含頓圓耶答十門十法通於
004_0035_a_24L下第三六張
頓圓故云相應具足者

004_0035_b_01L제5 원교는 바로 실제돈이다. 아래에서는 다만 “일승과 3승의 분제의 다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만 하고 원교의 이름은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승에는 돈교와 원교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부분에서는 “스스로 3승 이외에 별도로 원교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하여서 원교를 따로 들고 있다. 그러므로 원교는 실제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바로 오직 실제돈이지만 겸하여 궁실원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제5 원교에도 실제돈과 궁실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분상문分相門과 해섭문該攝門에서도 또한 실제돈과 궁실원을 갖추고 있다. 『법계도』 아랫부분인 뜻으로 증명하는 부분(義證)에서 “상응하고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은 돈교와 원교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므로 경전으로 증명하는 이 부분(敎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담』에서 두 번째 돈교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였으므로 지금 여기의 원교도 오직 실제돈에 해당하지 않는가?
이것은 앞에서 (점교, 돈교, 원교의) 문을 나열한 것 중의 두 번째이므로 돈교에 해당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3승 이외에 돈교와 원교가 있음을 증명할 때에 다른 글을 인용한 곳이 없으므로 이 글 역시 돈교와 원교를 아울러 증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교에 대한 증명에서는 이미 “대해大海로 인하여 10보산十寶山이 있는 것과 같이(如因大海有十寶山)”라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제9지의 게송은 오직 돈교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는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여서 3승 이외에 따로 돈교와 원교가 있음을 증명하였고, 뒤에서는 “대해大海로 인하여 ……”의 글을 인용하여 앞의 제9지의 게송이 세 번째 원교의 뜻을 아울러 증명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므로 앞과는 다르다. 즉 “대해大海로 인하여 10보산十寶山이 있는” 것과 같이 부처의 지혜로 인하여 보살의 10지十地가 있다. 하나하나의 산 아래에 모두 큰 바다가 있고 하나하나의 보살지에 모두 불과佛果가 있다. 이와 같이 이미 하나하나의 보살지에 모두 불과가 있으므로 하나하나의 티끌에 모두 불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하나하나의 티끌에 모두 불과가 있음을 깨달으면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부처님의 일을 만족시키게 된다.

004_0035_b_01L頓圓攝也第五圓則正實際頓也
004_0035_b_02L故下文但云一乘三乘分齊別義
004_0035_b_03L何得知而不擧圓敎之名故知一乘中
004_0035_b_04L具頓圓也今此云所以得知自三乘
004_0035_b_05L別有圓敎如是別擧圓敎是故
004_0035_b_06L知實際頓也今釋正唯頓兼具圓是故
004_0035_b_07L第五圓中具含頓圓分相該攝中
004_0035_b_08L具頓圓下義證中云相應具足者
004_0035_b_09L圓攝此敎證中亦爾也問玄談中
004_0035_b_10L第二頓敎攝引第九地偈則今圓敎亦
004_0035_b_11L唯實際頓耶答以是前列門之第二
004_0035_b_12L云頓敎攝耳然三乘外別有頓圓之
004_0035_b_13L證中无有引他文處故知此文
004_0035_b_14L通證頓圓也問圓敎證中旣引如因大
004_0035_b_15L海有十寶山之文則第九地偈唯證頓
004_0035_b_16L答前則引第九地偈證成三乘外別
004_0035_b_17L有頓圓後則引如因大海文證成前
004_0035_b_18L第九地偈通證之第三圓敎中義味也
004_0035_b_19L是故與前別也謂如因大海有十寶山
004_0035_b_20L因於佛智而有十地一一山下皆有
004_0035_b_21L大海一一地中皆有佛果如是旣
004_0035_b_22L得一一地中皆有佛果則知一一塵
004_0035_b_23L皆有佛果若得一一塵中皆有
004_0035_b_24L佛果則隨所擧擧皆是滿足佛事也

004_0035_c_01L이와 같은 원교의 뜻을 증명하고자 하여 이 지영상분地影像分의 글을 또 다시 인용한 것일 뿐이다. 『제9지게송소』102)에서 “성문·연각·점오·돈오가 넷이 되고, 또 일승과 3승이 넷이 된다.”103)고 하였는데, 일승과 3승이 넷이 될 때의 일승은 실제돈과 궁실원을 갖추고 있고, 성문·연각·점오·돈오가 넷이 될 때의 돈은 오직 실제이다. 『현담』에서는 이 두 가지 해석 모두에 의거하여서 “이 글을 증명으로 하여 일승, 돈교, 삼승의 차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승에는 돈교와 원교를 갖추고 있고, 돈교는 오직 실제이다. 이 책에 인용되고 있는 「현수품」의 내용은 이 3승에서 “대승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3승 외에 별도로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별교일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교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 이 게송을 인용하면서 “믿기 어려움과 믿기 쉬움의 차별(難信易信差別)”이라고 이름하고 있는 것은 3승의 대승은 믿기 쉽고 별교일승은 믿기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제9지의 4개의 게송104) 중에서 앞의 셋은 3승을 증명하는 것이고 마지막 게송은 일승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세 게송이 증명하는 3승은 지쌍(地㕛) 3승105)인가, 문상門相 3승106)인가?
옛글(古辭)에서 신림덕神林德이 당나라에 가기 이전에는 문상 3승이라고 했었는데 당나라에 들어갔다 돌아온 뒤에는 지쌍 3승이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지만 옛글(古辭)이 그러하므로 지금은 지쌍 (3승)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어떻게 지쌍이라고 하는가?
비록이 『화엄경』에서 이야기한 3승이지만 그러나 대비하여 별교일승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므로 하(4교의) 3승이다.
네 번째 게송 전체가 실제돈과 궁실원을 증명하는가 아니면 구절을 나누어서 증명하는가?
비록 구절을 나누어서 증명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전체가 함께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만약 위없는 마음이 있어(若有無上心)”라는 것은 실제돈과 궁실원의 근기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고,

004_0035_c_01L欲證此義味故更引此地影像文耳
004_0035_c_02L九地偈疏云聲聞緣覺漸悟頓悟爲四
004_0035_c_03L又一乘三乘爲四
一乘三乘爲四之
004_0035_c_04L一乘中卷下第三七張頓圓聲聞緣
004_0035_c_05L漸頓爲四之中頓唯實際也
004_0035_c_06L談通約此上二釋云以此文證得知
004_0035_c_07L一乘頓敎三乘差別也是故一乘中
004_0035_c_08L具頓圓頓敎中唯實際也此中引賢首
004_0035_c_09L品者以此三乘之求大乘猶爲易之
004_0035_c_10L得知三外別有能信是法甚爲難
004_0035_c_11L之別敎一乘也五敎章中引此偈名爲
004_0035_c_12L難信易信差別者現三乘大乘之易信
004_0035_c_13L而別敎一乘之難信故也第九地四偈
004_0035_c_14L初三偈證三乘第四偈證一乘也
004_0035_c_15L問初三偈三乘者地㕛三乘耶門相
004_0035_c_16L三乘耶答古辭神林德未往大唐時云
004_0035_c_17L門相三乘入唐還新羅云地㕛三乘
004_0035_c_18L一云反此古辭則爾今釋地㕛也
004_0035_c_19L問此是華嚴經中之所參說何故云地
004_0035_c_20L㕛耶答雖是此經所說三乘然對比
004_0035_c_21L以現別敎一乘故下三乘也問以第
004_0035_c_22L四偈通證頓圓耶分句證耶答雖有
004_0035_c_23L分句證義今釋通證也若有无上心
004_0035_c_24L「才」法界圖本文作「大體」

004_0036_a_01L“다함이 없는 불법을 이야기한다.(說無盡佛法)”는 것도 실제돈과 궁실원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절을 나누어 증명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인의 말씀이 손바닥의 밝은 구슬과 같으니 놀라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앞에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가리킨다.
세 번째 질문과 대답 중에서, “일승과 3승의 분제分齊가 다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말한 것과 관련하여 말한다.
앞에서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하여 일승과 3승의 차이를 이미 설명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이와 같이 묻는 것인가?
뜻을 인용하여 증명하기 위하여서 이와 같이 하였다. 『법계도』의 서문에서 “이치와 가르침에 의거하여 간략히 반시盤詩를 지었다.”고 하였는데, 이치는 뜻의 이치(義理)이고 가르침은 경전의 말씀(聖敎)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나서 이제 다음으로 뜻을 인용하여 증명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화엄일승교의분제장』) 분상문의 마지막에서 “그 별교일승에서 밝히고 있는 행行·위位·인因·과果 등의 모습이 저 3승에서 제시하는 분제分齊와 완전히 달라서 같지 않음은 널리 경전의 내용에 자세하지만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비록 경전의 증명이 없다고 하여도 그 뜻의 이치(義理)에 의거하여 그 주장하는 바(宗)를 구분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경전의 내용이 어두운 구름을 가르듯 밝게 보여 주고 있음이리오.”107)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하였고 다음으로 뜻을 인용하여 증명함으로써 일승과 3승을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과 대답 중) 대답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또한 10문에 의지하면 곧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제목(標)이고, 다음의 “첫 번째 동시구족상응문 ……” 이하는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뒤의 “이와 같은 10문을 모두 갖추고 원만한 것은 ……” 이하는 자세한 내용은 다른 책들에 있다고 미룬 것이다.
첫 번째 제목(標) 부분에서, “또한 10문에 의지하면”이라고 한 것은 「오교장」의 ‘시설이상施設異相’108)에서 10가지의 차이에 의거하여 일승과 3승을 구별하고 있고,109) 『5권소』110)에서 천왕天王의 법에 의거하여 일승과 3승을 구별하고 있는데,111) 여기에서도 해석하는(能釋) 10문에 의거하여 일승과 3승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 개별적 해석에서는 먼저 10문에 대하여 설명하고 뒤의 “이상의 10현문은 ……” 이하에서는 일승과 3승의 가르침의 분제分齊를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의 10문에 대한 설명 중)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 문이 총總이고, 뒤의 9문은 별別이라고 하는데, 『료간』(『탐현기』)의 ‘동이원비同異圓備’112)에서 앞에서 설명한 9문을 모두 총괄하여 동시구족同時具足이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004_0036_a_01L通擧頓圓根說无盡佛法中
004_0036_a_02L通擧頓圓故知不分句證也聖言如
004_0036_a_03L掌明珠不須驚恠者指前所引經文也
004_0036_a_04L三問答中言問一乘三乘分齊別義等
004_0036_a_05L前引敎證旣辨一三之別何故
004_0036_a_06L今此如是問耶答欲引義證故爾也
004_0036_a_07L序云依理據敎略制盤詩
理則義
004_0036_a_08L敎則聖敎是故旣引聖敎之證
004_0036_a_09L次欲引義證故爾云也分相卷下第三
004_0036_a_10L八張
終云其別敎一乘所有行位因果
004_0036_a_11L等相與彼三乘設敎分齊全別不同
004_0036_a_12L廣在經文略如下辨縱无敎證依彼
004_0036_a_13L義異尙須分宗況聖敎雲披煥然溢目
004_0036_a_14L
今此亦爾前引敎證次引義證
004_0036_a_15L以別一三也答中有三先且依十門
004_0036_a_16L卽知者標次一同時具足下別釋
004_0036_a_17L如是十門具足圓等者推廣也初中
004_0036_a_18L且依十門者五敎章施設異相中約十
004_0036_a_19L辨一三別五卷疏中約天王法
004_0036_a_20L一三別此中約其能釋十門故云且
004_0036_a_21L別釋中先辨十門後上十1)門玄
004_0036_a_22L等者簡敎分齊初中同時具足相應
004_0036_a_23L門者一云此門是摠 2)后九是別料簡
004_0036_a_24L同異圓備中摠攝前九門同時具足故

004_0036_b_01L어떤 사람은 10문이 모두 서로 총이 될 수 있고 별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십현장』에서 “그런데 이 10문은 하나의 문마다 곧 나머지 문들을 포섭하므로 모두 다 온전하게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113)고 이야기한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강목장』에서 동시문을 해석할 때 총과 별 두 가지 뜻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하나로 결정할 수 없다.
“동시同時”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해인시海印時라 하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 미시未時 등 어떤 것을 따라서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두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십현장』에서 “이것은 해인삼매에 의거하여 분명하게(炳然) 동시에 드러내어 이루었다.”114)고 하였으므로 오직 해인시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
여러 존재가 모두 갖추어져서 상응하는 것은 바로 해인정을 얻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으면 시간과 존재는 나의 움직임을 따라서 상응하고 모두 갖추어지는 것이므로 의거하는 것마다 동시이다.
“인人·법法, 이理·사事 ……”는 『대료간』, 『지귀장』, 「의리장」 등에서는 모두 10쌍의 대립항(對)으로 법을 구별하고 있는데115) 지금 여기에서는 단지 5쌍의 대립항 10개의 법法만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마도 『보법장』116)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10쌍의 대립항으로 법을 구별하는 것 중에서 앞의 5쌍의 대립항 10개의 법을 취한 것으로 뒤의 5쌍의 대립항은 인人·법法을 나눈 것이므로 비록 5쌍의 대립항이지만 또한 빠뜨린 것이 없다.
“문門”은 큰 지혜(通智)가 지나다닌다(遊履)는 뜻이다.
“상응하여 앞뒤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10법이 시간과 더불어 상응하여 앞뒤가 없다는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이 10보법이 하나하나의 법을 따라서 서로 알지 못한다(不相知)는 뜻이라고 한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의 인다라망은 여기 말로는 “하늘 임금 (天主)의 그물”로서 각 그물코에 있는 구슬들이 서로에 비추어지고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으로서 일승의 연기법이 거듭하여 계속되는(重重) 것과 같다. 『십구장』에서 “안으로 향하여 중심을 찾으니 들어갈수록 바깥이고, 바깥을 향하여 끝을 찾으니 나갈수록 안이다.”라고 하였는데, 존귀한 집에서는 여러 겹의 담장을 쌓아 두기 때문에 처음 하나의 담장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이 집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004_0036_b_01L知爾也一云互論摠別十玄章云
004_0036_b_02L此十門隨一門中卽攝餘門无不
004_0036_b_03L皆盡
故知爾也今釋綱目章中
004_0036_b_04L同時門具摠別二義故不可局定也
004_0036_b_05L時者一云海印時一云午時未時等
004_0036_b_06L隨何云也今釋具前二義問十玄章
004_0036_b_07L此依海印三昧炳然同時現現成矣

004_0036_b_08L則唯約海印時耶答諸法之具足相應
004_0036_b_09L正在得海印之念然得如是時法
004_0036_b_10L則隨我所擧相應具足故約約同時也
004_0036_b_11L人法理事等者大料簡 3)指歸章
004_0036_b_12L理章等並十對辨法也今此唯立五對
004_0036_b_13L十法盖從普法章故爾也取彼十
004_0036_b_14L對辨法中卷下第三九張前五對十法
004_0036_b_15L以後五對於人法中之所開故
004_0036_b_16L是五對亦无所闕也門者通智
004_0036_b_17L遊履義也相應4)无前後者一云十
004_0036_b_18L與時相應无前後也一云此十普
004_0036_b_19L隨一一法不相知義也因陁羅
004_0036_b_20L網境界門者此云能天主網珠珠交
004_0036_b_21L影互相映現同於一乘緣起法之重重
004_0036_b_22L十句章云向內尋心入入猶外
004_0036_b_23L向外尋邊出出猶內
比如尊貴之
004_0036_b_24L多重築垣初入一垣謂爲是舍

004_0036_c_01L다시 또 하나의 담장이 나타나고 이렇게 거듭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들어갈수록 바깥”이라고 하고, 처음 하나의 담장을 벗어나면 ‘이제 나왔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또 하나의 담장이 나타나고 이렇게 거듭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나갈수록 안”이라고 한 것이다.
다른 문들도 또한 증지證智117)의 경계인데 어째서 오직 이 문에만 경계라고 하였는가?
물어본 것과 같이 다른 문들도 모두 증지의 경계이다. 그렇지만 『십지론』에서 “제망(帝網 : 인다라망)의 차별은 진실된 뜻의 모습이고, 진실된 뜻의 모습은 증지證智의 경계이다.”118)라고 하였다. 이 『십지론』의 내용을 따라서 문의 이름을 세운 것일 뿐이다.
“여기에 앞의 10문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한 종류의 10법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10법을 가리키는가?
두 가지 뜻이 모두 맞다. 비록 10문이 각기 갖추고 있지만 “앞의 10문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한 종류라고 하여도 되고, 연기법은 필요한 곳이 무엇이든 따라서 새롭게 문을 만들지만 섞이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어도 된다. 만약 오직 한 종류라고 하면 어떻게 10문·100문·1,000문 등을 이룰 수 있겠는가?
“비유를 따라 다를 뿐이다.”라는 것은 만약 존재(法)를 따라서 다른 것이라면 “거듭하여 계속됨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첫 번째의 동시구족상응문에는 이와 같은 말이 없는가?
첫 번째 문은 다른 문과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뒤의 문들과 대비하여 구분한다면 “앞뒤가 없음을 따라 다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는 그것에 준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는 10법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10문을 설명하였는데, 다시 나머지 법들에 의거하여 10문을 논할 때에는 그에 준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미 동시문에서 이와 같이 10법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밝혔으므로 다른 문에 의거할 때에는 “인법人法인다라, 교의敎義인다라, ……,” “인법人法상즉,

004_0036_c_01L更有一垣如是重重故云入入猶外
004_0036_c_02L初出一垣謂爲已出更有一垣
004_0036_c_03L是重重故云出出猶內也 5)問餘門亦
004_0036_c_04L是證智境界何唯此門云境界耶
004_0036_c_05L如所問義並是證境然地論云
004_0036_c_06L網差別者眞實義相眞實義相者
004_0036_c_07L智境界
且依論文立門名耳此中
004_0036_c_08L具前十門者問一種十法耶異異十
004_0036_c_09L法耶答二義也雖十門各具旣云
004_0036_c_10L具前十門故一種亦得以緣起法
004_0036_c_11L何須處新新而起門不雜故異異亦
004_0036_c_12L得也若唯一種何成十門百門千門
004_0036_c_13L等耶從喩異耳者若從法異者
004_0036_c_14L云從重重異耳問何故初門无此辭
004_0036_c_15L答以是初門无所簡之餘門故爾
004_0036_c_16L若對後門簡者應云從无前後異
004_0036_c_17L餘可准之者一云今此約十法辨
004_0036_c_18L十門如是轉約餘法論十門准之也
004_0036_c_19L云旣明同時門中十法具足
004_0036_c_20L下第四○張
是約餘門者應云人法因
004_0036_c_21L陁羅敎義因陁羅等人法相卽
004_0036_c_22L「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后」作「戶」
004_0036_c_23L{甲}
「指」疑「旨」{編}「无」下法界圖本文有
004_0036_c_24L「有」
「問」作「門」{甲}

004_0037_a_01L교의敎義상즉, ……” 등으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나머지는 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십현장』에서는 10문에 대하여 각기 경전(聖敎)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인용하지 않았으므로 나머지는 그에 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마지막 견해를 따른다. 『십현장』에서는 각 문마다 경전을 인용하였는데 “나머지는 그것에 준한다.”는 이 말이 없고, 『약소』(『수현기』)의 앞부분119)과 이 책에서는 경전을 인용하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그것에 준한다.”는 이 말이 있으므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약소』에는 각 문마다 모두 이 말을 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오직 두 번째 인다라망경계문과 열 번째 탁사현법생해문에서만 이야기하고 있는가?
『약소』에서 모두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각 문들이 모두 경전을 인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간략함을 따라서 두 곳에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그와 같음을 보인 것이다.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現俱成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감춤(隱)과 드러남(現)이 비밀스럽게 함께 이루어지는 뜻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비밀의 숨음(隱)과 드러난 것의 드러남(現)이 함께 이루어지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십현장』에서 “하나의 티끌에서 정수(正受 : 삼매)에 들어가 모든 티끌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나고, 모든 티끌에서 정수(正受 : 삼매)에 들어가 하나의 머리털의 끝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나니 이와 같이 자유롭게 여기에서 감추고 저기에서 드러나며 정수正受에 들어가고 삼매로부터 일어남이 동시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120)고 하였으므로 첫 번째 해석이 타당하고, 『금사자장』에서 “감춤(隱)은 비밀이고, 드러남(現)은 드러내는 것”121)이라고 하였으므로 두 번째 해석도 타당하다.
“연緣을 따라 다를 뿐이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수연(須緣 : 앞으로 갖추어야 할 연)이라고 하지만 지금 해석해 보건대 기연(機緣 : 이미 갖추어진 연)이다. 『십현장』에서 “이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시방세계에 연緣이 있으므로 오고 가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미세는 포함하는 것(能含)이고, 상용은 포함되는 것(所含)이며, 안립은 둘 다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료간』(『탐현기』)에서 “이문異門으로 동체同體의 상입相入의 뜻을 포섭하므로 미세문을 드러낸다.”고 하였으니 이체異體의 미세한 하나의 티끌이 동체同體의 상용하는 존재들을 포섭하여 미세문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미세는 포함되는 것(所含)이고,

004_0037_a_01L義相卽等故云餘可准也一云十玄
004_0037_a_02L章十門各引聖敎爲證今此不引
004_0037_a_03L云餘可准之今釋取後義以十玄則
004_0037_a_04L各引聖敎而无此辭略疏初及此中不
004_0037_a_05L引聖敎而有此辭故知爾也問何故
004_0037_a_06L疏中門門具有此辭今此唯於第二
004_0037_a_07L第十門中擧耶答疏中具擧者門門
004_0037_a_08L應引聖敎故爾也今此從簡且擧二
004_0037_a_09L處例餘也秘密隱1)現門者一云隱
004_0037_a_10L之與現秘密俱成也一云秘密之隱與
004_0037_a_11L現了之現俱成也今釋二義具也
004_0037_a_12L玄章云於一微塵入正受一切微塵三
004_0037_a_13L昧起一切微塵入正受一毛端頭三
004_0037_a_14L昧起如是自在此隱彼現正受及起
004_0037_a_15L同時秘密成矣
則初義可得
004_0037_a_16L師子章云隱則秘密現則現2)

004_0037_a_17L後義可得也從緣異耳者一云須緣
004_0037_a_18L今釋機緣也十玄章引此經云十方世
004_0037_a_19L界有緣故往反出入度衆生故知爾也
004_0037_a_20L微細相容安立者一云微細則則能含
004_0037_a_21L相容則所含安立則通能所二也
004_0037_a_22L簡云以異門攝同體中相入義現微
004_0037_a_23L細門
以異體之微細一塵攝同體
004_0037_a_24L相容之法成微細門故爾也一云微

004_0037_b_01L상용은 포함하는 것(能含)이며, 안安은 세우는 방식이고, 립立은 세워지는 것으로서 그 미세한 법을 받아들여 편안하게 세웠다는 뜻이라고 한다.
“일다상용문一多相容門”이란 하나(一)와 여럿(多)이 서로 받아들이고 포섭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하나에 미세한 여러 존재(法)들을 포함하여 분명히(炳然) 안립安立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징관의 『연의초』에서 “유리병에 많은 겨자씨를 담아 두니 병을 통해서 뚜렷이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런데 미세에는 모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포함되는 것(所含)의 미세로서 겨자씨〔와 병의 관계와 같다. 하나의 터럭 구멍은 여러 세계를 다 받아들이지만 그 여러 세계들은 하나의 터럭 구멍을 다 채우지 못할 때, 터럭 구멍은 본래의 모습(性)과 일치하는 것으로 겨자씨를 담고 있는 유리〕병과 같고, 여러 세계들은 외형(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겨자씨와 같다.122) 두 번째는 포함하는 것(能含)의 미세로서 한 티끌이나 한 올의 머리카락이 능히 포함하는 것이니 아래에서 인용하여 증명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알기 어려움(難知)의 미세로서 크지 않은 조그만 티끌이 작지 않은 이 세상을 능히 포용한다는 것으로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나가 여럿을 능히 포함하는 것을 곧 상용相容이라 하고, 각 존재가 모두 그러한 것을 상용이라고 하며, 하나와 여럿이 부서지지 않는 것을 안립安立이라고 한다.”123)고 하였으므로 세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모습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는 것은 분명하고(炳然) 가지런하게 드러난 모습을 가리킨다. 『십현장』(『화엄일승십현문』)의 미세문에서 “이것은 모습(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조그만 티끌은 곧 작은 모습이고 무량한 부처님의 국토와 수미산, 금강산 등은 곧 큰 모습이다. 다만 연기의 참된 덕으로서 작은 모습과 큰 모습이 서로를 포용하니 천인天人들이 신통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편안하게 자리잡는다(安立).”124)고 하였다.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에 대하여 『십현장』(『화엄일승십현문』)에서 “이와 같이 10세世는 연기의 힘에 의하여 상즉하고 상입하지만 3세世를 잃지 않는다. 10세世는 비록 동시이지만 10세世를 잃지 않는다.”125)고 한다.
이 9세世126)를 모아서 하나의 순간을 이루면 이 종합적인 하나의 순간도 하나의 존재(法)를 따로따로 성립하게 하는가?
그렇다. 전체와 개별이 같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아니다.“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은 (『화엄경』) 「십장품十藏品」127)의 시장施藏, 계장戒藏 등의 문에 의거한 것이다. 그래서 “문門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004_0037_b_01L細則所含相容則能含安則能安
004_0037_b_02L則所立容其微細之法安立也一多相
004_0037_b_03L3)容門者一之與多卷下第四一
004_0037_b_04L
相容攝此則一中含攝微細之多
004_0037_b_05L炳然安立也今釋觀師演義云
004_0037_b_06L瑠璃甁盛多芥子隔甁頓見然微
004_0037_b_07L細言摠有三義一所含微細猶如芥
004_0037_b_08L甁刹約存相如芥子在內二約能含
004_0037_b_09L微細以一塵一毛卽能含故如下引證
004_0037_b_10L三約難知微細微塵不大而刹不小
004_0037_b_11L而能廣容卽難知義一能含多
004_0037_b_12L曰相容法法皆爾故曰相容一多
004_0037_b_13L不壞故曰安立
故具三義也
004_0037_b_14L相異耳者炳然齊現之相也十玄章
004_0037_b_15L微細門云此就相說如一微塵
004_0037_b_16L卽小相无量佛國須彌金剛山等
004_0037_b_17L是大相直以緣起實4)致使相容
004_0037_b_18L非天人所作故安立也十世隔法異成
004_0037_b_19L門者十玄5)章云如是十世以緣
004_0037_b_20L起力故相卽復相入而不失三世
004_0037_b_21L世雖同時而不失十世
問摠此九世
004_0037_b_22L以成一念則以摠一念亦令隔法耶
004_0037_b_23L爾也以摠之與別不同故无難也
004_0037_b_24L諸藏純6)雜門者此約十藏品施藏戒

004_0037_c_01L
“일다상용문一多相容門”에 대하여 『십구장』에서 “미세상용문과 일다상용문이 어떻게 다른가? 신림이 답하였다. 서로 받아들이는 것은 둘 다 같다. 무슨 인因으로 서로 받아들이는가를 말하기 위하여 하나와 여럿이 서로 받아들인다(一多相容)고 하였고, 서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떠한가를 말하기 위하여 미세하게 받아들인다(微細相容)고 하였다.”128) 어떤 존재(法)와 어떤 존재(法)가 서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하나(一)와 여럿(多)이 서로 받아들이고, 또 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미세하여 알기 어렵다.
“이치(理)를 따라서 다르다.”는 것은 상입문은 인과도리因果道理의 문이라는 것이다. 연기를 이루는 주체인 인因 외에 이루어지는 과법果法이 있기 때문에. “이치(理)를 따른다.”고 할 때의 이치는 인과도리因果道理의 이치(理)를 가리킨다.
“쓰임(用)을 따라서 다르다.”는 것은 상즉문은 덕용자재德用自在의 문이라는 것이다. 인연의 당체當體는 곧 공空이고 곧 인因이고 곧 과果로서 인因 외에 이루어지는 과果를 설정하지 않고 인이 곧 과가 되기 때문이다. “쓰임(用)을 따른다.”고 할 때의 쓰임은 덕용자재德用自在의 쓰임(用)을 가리킨다.
“또한 성품에 의할 수 있다.”의 성품은 무주無住의 법성法性을 가리킨다.
다른 문에서는 무주의 법성에 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무주의 법성에 의한다고 하면 여러 문이 모두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문에 편중된(偏增) 의미가 없지 않다. 옛글(古辭)에서 “무주의 법성에 대하여 세 문에 멀고(遠), 가깝고(近), 곧바로(卽)의 세 가지 뜻이 있다. 중문(中門 : 상입문)은 그 체體의 쓰임에 의거하여 이루는 것(能成)과 이루어지는 것(所成)을 구별하므로 먼 문(遠門)이라 부르고, 즉문(卽門 : 상즉문)은 모두 법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인연의 체가 온전하게 상즉하므로 가까운 문(近門)이라 부르며, 주반문主伴門은 일으키지 않으면서

004_0037_c_01L藏等門故云從門異耳一多相*容
004_0037_c_02L門者十句章云問微細相容與一
004_0037_c_03L多相容何別林德答相容齊同何因
004_0037_c_04L相容則有一多相容也相容之貌如何
004_0037_c_05L則有微細相容也
何法與何法相容
004_0037_c_06L則一之與多相容也又此相容之
004_0037_c_07L微細難知也從理異者入門則
004_0037_c_08L因果道理門也謂能成因外有所成
004_0037_c_09L卷下第四二張法故從理者因果
004_0037_c_10L道理之理也從用異者卽門則德
004_0037_c_11L用自在門也謂因緣當體卽空卽因
004_0037_c_12L卽果因外不立所成之果以因卽果
004_0037_c_13L故也從用者德用自在之用也亦可
004_0037_c_14L依性者无住法性也問餘門不依无
004_0037_c_15L住法性故不擧此辭耶答若言依无
004_0037_c_16L住法性則諸門皆爾然非无偏增之義
004_0037_c_17L故爾也謂古辭云望於无住法性
004_0037_c_18L三門有遠近卽之三義謂中門者
004_0037_c_19L其體上之用辨能所成故名爲遠門
004_0037_c_20L卽門者全法性所成因緣之體全全
004_0037_c_21L相卽故名近門主伴門者不起之
004_0037_c_22L「現」下法界圖本文有「俱成」「了」作「著」
004_0037_c_23L{乙}
「容」下法界圖本文有「不同」次同「德」
004_0037_c_24L下疑有「無碍自在」{乙}
「章」下疑脫「門」{乙}
004_0037_c_25L
「雜」下法界圖本文有「具德」

004_0038_a_01L다른 모습을 일으키는 존재들 중에서 앞에 일어나는 것을 주主로 하고 뒤에 일어나는 것을 반伴으로 하니 곧 일으키지 않는 법으로서 곧바로의 문(卽門)이라고 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따라서 다르다.”는 것에서 의탁된 현상(所託之事)이란 곧 드러나 있는 것이므로, 오직 지혜만이 알 수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위의 10개의 현문玄門은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10문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해석해 보건대 10문과 3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교敎와 의義의 분제分齊가 ……”는 실제로는 (교·의만이 아니라 나머지 8가지를 포함한) 10보법을 모두 들어야 하지만 임시로 첫 번째 한 쌍의 대립항을 들어서 뒤의 것들도 그러함을 보인 것이다.
“이것(10현문)과 상응하는 것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것(與此相應而不具足)”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비록 10현문과 상응하지만 만약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으면 3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만약 3승의 가르침으로서 이 10현문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만약 이 10현문과 상응하는 뜻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으면 3승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129) “온전히 갖춘다. (具足)”는 말이 없었으므로 지금 이 부분에서도 그러하여야 한다. 다만 10현문의 법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이야기한 것이다.

다) 관련 문헌들에 대한 해설
(연기다라니대의의 료간 중) 세 번째 자세한 설명에 미루는 부분과 관련하여 말한다.
지엄의 『행장록』에서는 “『화엄경소』(『수현기』) 5권, 『공목장』 4권, 『화엄오십요문답』 2권, 『입법계품초』 1권”이라고 하여 숫자의 많고 적은 순서에 따라 나열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는 직접적인 것부터 간접적인 것의 차례대로 나열하였다. 즉 『화엄경』은 이 『법계도』가 의거하는 근본 가르침 (本敎)이므로 가장 앞에 두었고, 논은 지어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므로 그 다음에 두었으며, 소는 경전과 논서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 다음에 두었다. 『입법계품초』는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고 「입법계품」 하나의 품을 해석한 것이지만 경전의 차례에 어긋나지 않게 해석한 것이므로 그 다음에 두었다. 『공목장』은 비록 경전의 내용을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화엄경』 8회會와 품品의 순서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 각 장章의 순서를 세웠으므로 그 다음에 두었고, 『화엄오십요문답』은 경전의 순서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경전 중의 중요한 뜻에 대하여 질문하고 대답한 것이므로 가장 뒤에 두었다.
3) 이 책의 제목과 의거하는 경론에 대한 해설
(『법계도』 본문 해석의 마지막 부분인) 제목과 의거하는 바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일승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은 제목이고,

004_0038_a_01L起別相法中先擧爲主後擧爲伴
004_0038_a_02L卽不起法故名卽門
故爾也從智
004_0038_a_03L異者所託之事卽是所現者
004_0038_a_04L智所知故爾也上十1)門玄並皆別異者
004_0038_a_05L一云十門之別異也今釋十門與三乘
004_0038_a_06L別異也若敎義分齊者實則具擧十
004_0038_a_07L普法然且擧初一對例於後也與此
004_0038_a_08L相應而不具足者一云雖與玄門相應
004_0038_a_09L若不具足則三乘也今釋若是三乘中
004_0038_a_10L於此玄門與之相應无有是
004_0038_a_11L是故應云若不具足與此玄門相
004_0038_a_12L應之義則三乘攝也前中亦无具足
004_0038_a_13L之辭今此亦爾但約與門法不相應
004_0038_a_14L義說故爾也三推廣中儼師行狀錄
004_0038_a_15L中云疏五卷孔目四卷問答二卷抄一
004_0038_a_16L卷者從數多少次第列也今此從
004_0038_a_17L親疎次卷下第四三張第列也謂經是
004_0038_a_18L所依本敎故在㝡初造論釋經故次之
004_0038_a_19L疏通經論故次之鈔非通釋但釋法
004_0038_a_20L界一品然不違經文次第而釋故次之
004_0038_a_21L孔目雖不依經而釋然不違於八會品
004_0038_a_22L次立其章門故次之問答則旣不依經
004_0038_a_23L文次第但擧經中要義而問答故
004_0038_a_24L在後也後現題名及所依中一乘法

004_0038_b_01L“『화엄경』 및 『십지론』”은 의거하는 바 근본 가르침이다.
4) 보충 설명을 위한 문답들에 대한 해설
마지막 부분의 여러 질문과 대답 중에서 말한다.
“연緣은 어디에서 오는가? ……”의 내용은 『유마경』의 뜻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그 경전의 「관중생품觀衆生品」에 문수보살이 유마힐 거사와 주고받는 여러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질문) : 번뇌를 없애려고 하면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대답) : 마땅히 바른 마음으로 수행하여야 합니다.
(질문) : 어떻게 하여야 바른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까?
(대답) : 마땅히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으로 수행하여야 합니다.
(질문) : 어떠한 존재(法)가 생겨나지 않고, 어떠한 존재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대답) : 착하지 않은 것은 생겨나지 않고, 착한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질문) :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몸이 근본입니다.
(질문) : 몸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탐욕이 근본입니다.
(질문) : 탐욕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누어 구별하는 것(虛妄分別)이 근본입니다.
(질문)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누어 구별하는 것(虛妄分別)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전도顚倒된 생각이 근본입니다.
(질문) : 전도顚倒된 생각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이 근본입니다.
(질문) :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은 근본이 없습니다. 문수사리여,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의 근본으로부터 모든 존재(法)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뜻을 취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3승에 의거한 것이고, 지금은 일승의 무주無住의 법성法性에 의거한 것이므로 서로 다르다.
“여여如如는 어디에 있는가? 여여는 스스로의 법성에 있다.”는 것은 부처의 있음과 없음에 관계없이 본성(性)과 모습(相)이 항상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무주無住의 법성法性을 가리켜서 스스로의 법성이라고 한 것이다.
3. 「유통분」에 대한 해설
(전체의) 세 번째 부분인 「유통분」에 대하여 말한다.
「유통분」에는 서원하는 「유통분」(誓願流通)과 내용을 정리하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유통분」(結屬流通)이 있는데, 지금 이 책의 「유통분」은 서원하는 「유통분」이다. 『기신론』에서 “여러 부처님들의 매우 깊고 넓고 큰 뜻을 내가 지금 분수껏 총지摠持에 따라 이야기하였다. 이 법성과 같은 공덕을 회향하여 모든 중생계에 널리 이익되기를 바랍니다.”130)라고 한 것도 서원하는 「유통분」이다.
서원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수행하기 전의 서원, 수행한 후의 서원, 수행과 동시에 하는 서원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서원은 수행한 후의 서원이다.

004_0038_b_01L界圖合詩一印者題名華嚴經及十
004_0038_b_02L地論者所依本敎也後雜段問答
004_0038_b_03L緣從何處來等者據維摩經義
004_0038_b_04L說也彼經觀衆生品文殊問維摩詰
004_0038_b_05L有多重問答其中云欲除煩惱
004_0038_b_06L何所行答當行正念又問云何行於
004_0038_b_07L正念當行不生不滅又問何法不生
004_0038_b_08L何法不滅答不善不生善法不滅
004_0038_b_09L問善不善孰爲本答身爲本又身孰
004_0038_b_10L爲本答貪欲爲本又問貪欲孰爲本
004_0038_b_11L答虛妄分別爲本又問虛妄分別孰爲
004_0038_b_12L答顚倒想爲本又問顚倒想孰爲
004_0038_b_13L答无住爲本又問无住孰爲本
004_0038_b_14L无住卽无本文殊師利從无住本
004_0038_b_15L一切法
意取彼也然彼約三乘
004_0038_b_16L約一乘无住法性故別也如如在何
004_0038_b_17L處如如在自法性者約有佛无佛性相
004_0038_b_18L常住之无住法性云自法性也
004_0038_b_19L三流通中有誓願流通與結屬流通
004_0038_b_20L此誓願也起信論云諸佛甚深廣大
004_0038_b_21L我今隨分摠持說廻此功德如法
004_0038_b_22L卷下第四四張普利一切衆生界
004_0038_b_23L亦誓願流通也誓願中有三謂行
004_0038_b_24L前願行後願行俱願今此則行後願也

004_0038_c_01L그러므로 서원과 회향이 하나의 뜻이다. 앞에서는 회향할 선근공덕을 이야기하고, 뒤에서는 중생 등 회향할 대상을 이야기하였다. 곧 중생衆生회향과 보리菩提회향이다. 실제實際회향은 생략하였다.131)
일승법계도원통기 (하)
간행 발문
이 글 중의 “소목所目”의 뜻과 “하나의 이름(一名)으로 외친다.”, “스스로의 이름(自名)으로 외친다.” 등에 관한 뜻들을 『십구장원통기』 등과 대조하면 크게 같지 않은 곳이 있다. 성사(聖師 : 균여)가 세운 이론이 때에 따라 달라졌던 것인지, 아니면 기록하는 사람의 취사선택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감히 자세히 결정하지 못하고 뒷날에 부처와 조사의 본의를 얻는 사람이 나와서 구별하기를 기대한다.
『법계도』는 의상義相 조사께서 일승의 오묘한 뜻을 서술하신 것으로, 30구의 게송을 포함하고 있다. 그윽한 관문을 여는 신령한 열쇠이고 법의 바다의 근원이다. 옛날에 원통수좌 균여 대사께서 마하갑수摩訶岬藪의 백운방白雲房에 머무셨는데, 광종光宗 무오년(958년, 광종 9) 7월에 『법계도』의 글을 풀어서 말씀하셨다. 그때 부사副師는 영안靈眼 법사이고, 중부重副는 법응法凝 법사이시며, 기록한 사람은 국현國賢 법사이셨다. 그 후 신축년(1001년) 7월 일에 금생사金生寺의 주지인 법사 법진法璡이 그 말씀을 기록하여 사찰의 대장大藏에 넣어 두었다.
뒤에 상주尙州 승장사勝長寺의 현여玄如 법사가 비마라방장毗摩邏方丈의 문장文莊 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책에 의거하여 2권으로 번역하고 “혜보惠保”라고 이름 붙였으니 바로 이 책이었다. 흥교사興敎寺 학인 혜보惠保가 베껴 적은 것이었다. 현여 법사는 균여 대사의 강의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번역에 착오가 있었다. 임인년132)에 금생사 주지인 수좌首座 인원印元이 사찰의 옛 문헌들 중에서 법진 법사가 베꼈던 이 책의 방언본方言本 1권을 찾아내어 후학들에게 유통시켰다.
반룡사盤龍寺 비구 일당日幢이 두 책을 자세히 대조하여 상·하권으로 만들고 제목을 ‘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라고 하였다. 그 후 이 책이 전해져서 가르침의 요체가 되니 학자들이 다투어 찾았다. 그렇지만 단지 사본寫本만 있고 판본板本이 없어서

004_0038_c_01L則願與廻向是一義也初擧所廻善
004_0038_c_02L後衆生等擧所廻處卽是衆生廻向
004_0038_c_03L與菩提廻向也實際則略也

004_0038_c_04L
一乘法界圖圓通記卷下卷下第四五張

004_0038_c_05L
004_0038_c_06L
此記中所目義與一名自名口許義等
004_0038_c_07L2)句圓通記等大有不同則聖師所立
004_0038_c_08L之義隨時差別耶記者之取捨有不同
004_0038_c_09L未敢詳定待後得佛祖本意者辨也
004_0038_c_10L法界圖者義相祖師所述一乘妙旨包含
004_0038_c_11L三十句偈玄關之靈鑰法海之宗源
004_0038_c_12L圓通首座均如大師住摩訶岬藪白雲房
004_0038_c_13L以光宗朝戊午七月演說圖文副師靈
004_0038_c_14L眼法師重副法凝法師記者國賢法師
004_0038_c_15L越辛丑七月日 金生寺住持法師法璡
004_0038_c_16L記其所說寫入大藏後有尙州勝長寺玄
004_0038_c_17L如法師依毗摩邏方丈文莊師藏本
004_0038_c_18L爲二卷名爲惠保即此記也盖興敎
004_0038_c_19L寺學人惠保展轉記耳以玄如法師未
004_0038_c_20L見均如大師廣說故譯有差舛壬寅歲
004_0038_c_21L金生寺住持首座印元於古藏搜得法
004_0038_c_22L璡法師所寫此記方言本一卷流傳後進
004_0038_c_23L盤龍社比丘日幢詳校二本爲上下卷
004_0038_c_24L目爲法界圖圓通記厥後此記傳爲法
004_0038_c_25L學者競欲索焉而徒有寫本訖無板
004_0038_c_26L「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句」下疑脫
004_0038_c_27L「章」{編}

004_0039_a_01L널리 유통되지 못하니 혹 오래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지금 본강本講 사리闍梨133)로 흥왕사興王寺 교학敎學134)이고 해인사海印寺 주지이신 승통僧統 천기天其 스님께서 화엄華嚴 종파의 여러 스님들과 함께 이 책을 자세히 고치시고 3권으로 나누신 후 임금님의 명령을 받들어 목판에 새겨 널리 유포시키니 복을 받듦에 끝이 없을 것이다.
지원至元 24년(1287년, 충렬왕 13년) 정해년 5월 일전前 총랑摠郞 김훤 용회金晅用晦135)가 발문을 짓고,금성사金城寺 주지인 삼중 대사三重大師 영담永曇이 쓴다.

004_0039_a_01L本故未得廣流或恐不壽傳今坐講
004_0039_a_02L闍梨興王寺敎學海印寺住持僧統天其
004_0039_a_03L與業內諸德詳定此記分爲三卷奉承
004_0039_a_04L上制彫板廣布奉福無窮者

004_0039_a_05L
至元二十四年丁亥五月
004_0039_a_06L前摠郞金晅用晦跋

004_0039_a_07L
金城寺住持三重大師永曇書大藏都
004_0039_a_08L監開板
  1. 1) 『법계도』 중의 다음 부분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問 具縛有情 未斷煩惱 未成福智 以何義故 舊來成佛也 答 煩惱未斷 不名成佛 煩惱斷盡 福智成竟 自此已去 名爲舊來成佛 問 斷惑云何 答 如地論說 非初非中後 前中後取故 云何斷 如虛空 如是斷故 未斷已還 不名為斷 現斷已去 名爲舊來斷也 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等 其實道理諸法實相 不增不減 本來不動 是故經言 菩薩法中 不見一法減 清淨法中 不見一法增 是其事也 有人說言 如是等經文 約即理說 非即事說 若約三乘方便教門 合有此義 若依一乘如實教門 不盡其理 理事然 一無分別 體用圓融 常在中道 自事以外 何處得理 問 三乘教中 亦有寂而常用 用而常寂 如是等義 何故上言偏即理門 不即事中不自在也 答 理事相即故 有如是義 非謂事事相即 何以故 三乘教中 欲治分別病 會事入理爲宗故 若依別教一乘 理理相即亦得 事事相即亦得 理事相即亦得 各各不相即亦得 何以故 中即不同故 亦有具足理因陀羅尼 及事因陀羅尼等法門故 十佛普賢法界宅中 有如是等無障礙法界法門 極自在故 其餘逆順主伴相成等法門 准例相攝 隨義消息.”
  2. 2)『삼보장』(T45, 618b).
  3. 3)『잡집론雜集論』 : 『대승아비달마잡집론』.
  4. 4) 『유식론唯識論』 : 『성유식론成唯識論』. 다만 『탐현기』에 인용된 내용은 『성유식론』 원문(T31, 52b)의 내용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5. 5)『탐현기』(T35, 296c~297b).
  6. 6)『화엄경소』의 내용이다.
  7. 7)『화엄경소』(T35, 752c~753a).
  8. 8) 『법계도』 중의 “云何斷 如虛空 如是斷故 未斷已還 不名為斷 現斷已去 名為舊來斷也 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等” 부분이다.
  9. 9)번뇌煩惱의 장애 : 번뇌장煩惱障.
  10. 10)소지所知의 장애 : 소지장所知障. 중생이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 인해 알아야 할 경계에 미혹하게 되는 장애를 말한다.
  11. 11)『화엄약책華嚴略策』 : 징관의 저술.
  12. 12)『화엄약책華嚴略策』(T36, 705a).
  13. 13)『법계도』 중의 “其實道理諸法實相 不增不減 本來不動 是故經言 煩惱法中 不見一法減 清淨法中 不見一法增 是其事也” 부분이다.
  14. 14) 「육상장六相章」 :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중의 「의리분제장義理分齊章」의 육상원융의六相圓融義 부분을 가리킨다.
  15. 15)『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8a).
  16. 16) 인연의 집(因緣舍) : 존재들의 관계를 인연因緣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파악된 집. 신라 화엄교학가들은 존재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입장을 변계遍計-인연因緣-연기緣起-성기性起-무주無住 등으로 구분하였다.
  17. 17)인연의 아버지 : 존재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입장.
  18. 18)변계의 아들 : 각각의 존재를 다른 존재와 관계없는 독자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
  19. 19) 서까래가 되는 것(成椽) : 원문에는 “成緣”으로 되어 있지만 아랫부분의 내용을 고려할 때 “成椽”의 오자誤字로 생각된다.
  20. 20) 「종성장種性章」 : 지엄智儼의 『공목장』 권2의 「제3회십주품내본분수종성장第三會十住品內本分首種性章」을 가리킨다.
  21. 21)『공목장』(T45, 549c~550a).
  22. 22) 『법계도』 중의 “有人說言 如是等經文 約即理說 非即事說 若約三乘方便教門 合有此義 若依一乘如實教門 不盡其理 理事然 一無分別 體用圓融 常在中道 自事以外 何處得理” 부분에 보이는 “有人”을 가리킨다.
  23. 23) 『법계도』 중의 “問 三乘教中 亦有寂而常用 用而常寂 如是等義 何故上言偏即理門 不即事中不自在也 答 理事相即故 有如是義 非謂事事相即 何以故 三乘教中 欲治分別病 會事入理為宗故”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24. 24) 『법계도』 중의 “若依別教一乘 理理相即亦得 事事相即亦得 理事相即亦得 各各不相即亦得 何以故 中即不同故”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25. 25)세 구절이란, “理理相卽, 事事相卽, 理事相卽”을 가리킨다.
  26. 26) 네 번째는 현상이 이치와 상즉하지 않는다. 현상은 움직여서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四事理不相即 以事動非靜故) : 『삼보장』의 원문과 비교할 때 『법계도원통기』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27. 27)『삼보장』(T45, 625b).
  28. 28) 징관澄觀의 『화엄경소』 권2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若唯約事則互相礙不可即入 若唯約理則唯一味無可即入. T35, 517a). 하지만 두 구절의 순서가 다르고 글자에도 차이가 있어 均如가 여기에서 인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9. 29)좋고 지극히 오묘한 사자좌(好上妙師子之座) : 『유마경』 원문에는 “好上妙功德成就師子之座”라고 되어 있다.
  30. 30)등왕燈王 : 『유마경』 원문에는 “수미등왕須彌燈王”이라고 되어 있다.
  31. 31)이때에 : 『유마경』 원문에 있는 “於是”가 『법계도원통기』에는 생략되어 있다.
  32. 32)장자長者 : 『유마경』 원문에는 “長者 維摩詰”이라고 되어 있다.
  33. 33)『유마경』(T14, 546ab).
  34. 34)『화엄교의일승분제장』 원문에 있는 “而不壞其事 仍一一塵中 皆具足”이 생략되었다.
  35. 35)인다라 : 인다라망경계문을 의미한다.
  36. 36)미세 : 미세상용안립문을 의미한다.
  37. 37)법장의 『화엄교의일승분제장』 중 일승과 삼승의 차이점을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시설이상施設相異」 중의 내용이다(T45, 484b).
  38. 38) 『탐현기』(T35, 124a), “問有何因緣令此諸法得有如是混融無礙 答因緣無量難可具陳 略提十類釋此無礙 一緣起相由故 二法性融通故 三各唯心現故 四如幻不實故 五大小無定故 六無限因生故 七果德圓極故 八勝通自在故 九三昧大用故 十難思解脫故.” ; 『화엄경소수소연의초』 권9(T36, 68c), “疏 五圓教等者 義廣理深 非略可盡 故彰其宏奧 別立一門 然在立教之終 故須略舉 言十十法門者 一一法門 一一法中 多明十故 十身十忍十眼十通十種玄門 出十所以表義無盡 彰異餘宗 故文文之中多皆十句 一一十句 六相圓融方顯教圓 廣如下辯 如經宗辯者 即是第六宗趣門也.”
  39. 39)『법계도』 중의 “亦有具足理因陀羅尼 及事因陀羅尼等法門故”를 가리킨다.
  40. 40)『법계도』 중의 “十佛普賢法界宅中 有如是等無障礙法界法門 極自在故”를 가리킨다.
  41. 41) 『법계도』 중에서 자상字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중의 “何故始終兩字 安置當中 表因果兩位 法性家內 真實德用 性在中道故”이다.
  42. 42) 『법계도』 중의 “歸家者 證本性故 家者何義 陰覆義 住處義故 所謂法性真空 覺者所住 故名為宅 大悲善巧蔭覆眾生 名曰為舍 此義在三乘 一乘方究竟 何以故 應法界故 所謂法界陀羅尼家 及因陀羅家 微細家等 此是聖者所依住故 名曰為家” 부분을 가리킨다.
  43. 43)『수현기』(T35, 19a).
  44. 44)『법계도』 중의 “其餘逆順主半相成等法門 准例相攝 隨義消息”을 가리킨다.
  45. 45)오열중비五熱衆鞞 : 오열五熱은 사방과 머리 위에 뜨거운 열을 두고서 고행하는 것으로 외도外道의 수행을 의미한다.
  46. 46) 『법계도』 중의 “若欲觀緣起實相陀羅尼法者 先應覺數十錢法 所謂一錢乃至十錢 所以說十者 欲顯無量故” 부분이다.
  47. 47)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c). 원문에서는 “이치를 드러내는 현상의 동전에 의거하여 저 일승 연기의 다함없는 다라니법을 비유한다.(約現理事錢中 況彼一乘緣起無盡陀羅尼法)”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48. 48)『화엄종요華嚴宗要』 : 원효가 『화엄경』의 중심 내용을 정리한 저술.
  49. 49)『보법기普法記』 : 원효의 저술.
  50. 50)『개종기開宗記』 : 신라 화엄학자인 연기緣起의 저술.
  51. 51) 『법계도』 중의 다음 부분이다. “此中有二 一者 一中十 十中一 二者 一即十 十即一 初門中有二 一者向上來 二者向下去 言向上來中 有十門不同 一者一 何以故 緣成故 即是本數 乃至十者一中十 何以故 若無一十即不成 仍十非一故 餘門亦如是 准例可知 言向下去中 亦有十門 一者十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十中一 何以故 若無十 一即不成 仍一非十故 餘亦如是 如是往反勘當 即知 一一錢中 具足十門 如本末兩錢中具足十門 餘八錢中 准例可解 問 旣言一者 何得一中名為十也 答 大緣起陀羅尼法若無一 一切即不成 定知如是其相 如所言一者 非自性一緣成故一 乃至十者 非自性十 緣成故十 一切緣生法 無有一法定相有性 無自性故 即不自在者 即生不生生 不生生者 即是不住義 不住義者 即是中道 道義者 即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亦說為是假名 亦是中道義 即其義也 中道義者 是無分別義 無分別法不守自性故 隨緣無盡 亦是不住 是故當知 一中十 十中一 相容無礙 仍不相是 現一門中具足十門 故明中智 一門中有無盡義 如一門 餘亦如是 問 一門中攝十盡不 答 盡不盡 所以者何 須盡即盡 須不盡即不盡故 其義云何 以一事辨一多故即盡 以異事辨一多故即不盡 文一事中一多義不相是 即是多 一事故即是一 四句 護過去非顯德 准之可解 異事亦准同 問 須何義 答 須者緣成義 何以故 因緣法一不差故 別別諸事門中 准例如是 緣起妙理 應如是可知故 第一門訖 第二門 此中二門 一者向上去之 二者向下來 初門中十門不同 一者一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一即十 何以故 若無一 十即不成故 緣成故 第二門中亦有十門 一者十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 十即一 若無十 一即不成故 餘者准例 以此義故 當知一一錢中 具足十門 問 如上多門一時俱圓耶 前後不同耶 答 即圓即前後不同 何故如是 須圓即圓 須前後即前後 何以故 法性家內德用 自在無障礙故 由緣成故 皆得如是.”
  52. 52)『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b~504a)에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53. 53)지상至相의 『십현장十玄章』 : 지엄至儼의 저술로 전해지는 『화엄일승십현문華嚴一乘十玄門』을 가리킨다.
  54. 54)『화엄일승십현문』(T45, 514b)에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55. 55)『화엄경수소연의초』(T36, 231b)의 내용이다.
  56. 56) 『법계도』 중의 “(向上來中) 餘門亦如是 准例可知 …… (向下去中) 餘亦如是 如是往反勘當 即知 一一錢中 具足十門 如本末兩錢中具足十門 餘八錢中 准例可解” 부분을 가리킨다.
  57. 57) 『법계도』 중의 “問 旣言一者 何得一中名為十也 答 大緣起陀羅尼法若無一 一切即不成 定知如是其相 如所言一者 非自性一緣成故一 乃至十者 非自性十 緣成故十 一切緣生法 無有一法定相有性 無自性故 即不自在者 即生不生生 不生生者 即是不住義 不住義者 即是中道 道義者 即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亦說為是假名 亦是中道義 即其義也 中道義者 是無分別義 無分別法不守自性故 隨緣無盡 亦是不住 是故當知 一中十 十中一 相容無礙 仍不相是 現一門中具足十門 故明中智 一門中有無盡義 如一門 餘亦如是 問 一門中攝十盡不 答 盡不盡 所以者何 須盡即盡 須不盡即不盡故 其義云何 以一事辨一多故即盡 以異事辨一多故即不盡 文一事中一多義不相是 即是多 一事故即是一 四句護過去非顯德 准之可解 異事亦准同 問 須何義 答 須者緣成義 何以故 因緣法一不差故 別別諸事門中 准例如是 緣起妙理 應如是可知故 第一門訖” 부분이다.
  58. 58) 『법계도』 원문에는 “卽不自在者 卽生不生生”으로 뒤에 “生”이 하나 더 있다. “자재하지 않은 것은 (곧) 생겨나지만 생겨나지 않는 생겨남이다.”의 의미로 해석된다.
  59. 59)『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
  60. 60) 『법계도』 중의 “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亦說為是假名 亦是中道義 即其義也” 부분이다.
  61. 61)『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
  62. 62)『십구장원통기』(H4, 49a).
  63. 63)『십구장원통기』에 비슷한 내용이 인용되고 있다(H4, 50a).
  64. 64)오로지(唯) : 『십구장』 본문에서는 “다 같이(共)”라고 하였다.
  65. 65)『십구장원통기』(H4, 49a).
  66. 66)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중 「의리분제」의 ‘十玄緣起無礙義’ 중의 내용이다(T45, 503b).
  67. 67)영관靈觀 : 의상의 제자. 구체적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68. 68)『사나품소』 : 『탐현기』 중의 『화엄경』 「사나품」을 해석한 부분.
  69. 69)『탐현기』(T35, 160a).
  70. 70)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의리분제문」 중의 3성동이의三性同異義 부분을 가리킨다.
  71. 71)3성三性 각각에 대해 有無四句를 통해 오해를 막는 부분을 가리킨다(T45, 499c~ 500a).
  72. 72) 3성三性 각각에 대해 有나 無 등으로 집착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들을 지적하는 부분을 가리킨다(T45, 500a~501b).
  73. 73)3성三性 각각에 대해 진실한 뜻을 드러내는 부분을 가리킨다(T45, 501b~c).
  74. 74)『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bc).
  75. 75) 『료간』 : 『탐현기』의 「제구현의리분제第九顯義理分齊」 중의 이체상즉의異體相即義에 대한 설명 부분으로 본문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66쪽 주 82 참조.
  76. 76)『탐현기』(T35, 124b).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는 유체이고, 여럿은 무체無體이다. 여래장의 체가 6도를 능히 이루는 것이지, 여래장이 6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는 유체로서 이루는 주체이고 여럿은 무체로서 이루어지는 대상이 된다.
  77. 77) 「광명각품소光明覺品疏」 : 『탐현기』 중의 『화엄경』 「광명각품」에 대한 해석 부분. 『법계도원통기』의 원문에는 「광각품소光覺品疏」라고 하였다.
  78. 78)『탐현기』(T35, 173a).
  79. 79) 앞의 단락 구분에서는 질문과 대답(問答)이라고만 하고 의심을 제거한다(除疑)는 말은 하지 않았다.
  80. 80)『화엄일승십현문』(T45, 514c).
  81. 81)『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a).
  82. 82)『법계도』 중의 “是故經云 隨順觀世諦 卽入第一義諦” 부분을 가리킨다.
  83. 83)『법계도』 중의 “經云 初發心菩薩 一念功德不可盡者” 부분을 가리킨다.
  84. 84)60권본 『화엄경』(T9, 432c).
  85. 85) 『4권소』 : 미상. 내용상 『화엄경』을 주석한 『화엄경소』인데, 현재 알려진 『화엄경』 주석서 중 4권으로 되어 있는 것은 혜광慧光의 『약소略疏』뿐이다.
  86. 86)『소』 : 『탐현기』의 해당 부분에 대한 주석을 가리킨다.
  87. 87)『탐현기』(T35, 205c).
  88. 88)60권본 『화엄경』(T9, 449c).
  89. 89)행동이 진실되다(行實) : 『법계도기총수록』에 수록된 「대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信滿成佛 是行佛”(T45, 762b)이라고 하여 “行實” 대신 “行佛”이라고 하고 있다. 이를 따를 경우 위의 문장은 “믿음을 채워서 성불하는 사람은 수행으로 이룬 부처이다.”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90. 90)『법계도기총수록』에 수록된 「대기大記」의 내용과 일치한다(T45, 762b).
  91. 91) 『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된 「대기」에 이와 비슷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T45, 762c).
  92. 92)『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a).
  93. 93)글(文) : 『공목장』의 「융회삼승결현명일승지묘취融會三乘決顯明一乘之妙趣」 중의 내용이다.
  94. 94)『공목장』(T45, 586b).
  95. 95)변재辯才 : 『법계도』 원문에는 “辨大體”로 되어 있다. 이 경우는 “일승의 무애를 논함으로써 大體를 설명한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96. 96)분상문分相門 : 일승이 삼승과 다른 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97. 97)해섭문該攝門 : 일승이 삼승을 포괄하는 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98. 98)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첫 번째 장인 「건립일승建立一乘」의 분상문分相門 중 “難信易信差別”에서 『화엄경』 「현수품」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고 있고, 이어서 ‘約機顯理差別’에서는 「십지품」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T45, 478b).
  99. 99) 『법계도』에서는 “經云” 이하에서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분상문分相門 중에 인용되어 있는 『화엄경』 「현수품」의 내용과 「십지품」 제9지의 게송을 구분하지 않고 이어서 인용하고 있다.
  100. 100) 『현담』 : 『수현기』 앞부분의 『화엄경』에 대한 개설적 설명을 가리킨다. 『수현기』는 「一歎聖臨機德量由致」·「二明藏攝分齊」·「三辨教下所詮宗趣及能詮教體」·「四釋經題目」·「五分文解釋」 등 5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앞의 네 단락이 『현담』에 해당한다.
  101. 101)지영상분地影像分 : 『화엄경』 「십지품」 중의 십지十地에 대한 설명 중의 한 단락을 가리킨다(인용된 내용은 T9, 575a). 『십지경론』에서는 십지의 내용을 방편작만족지분方便作滿足地分·득삼매만족분得三昧滿足分·득수위분得受位分·입대진분入大盡分·지석명분地釋名分·신통력무상유상분神通力無上有上分·지영상분地影像分·지이익분地利益分 등 8단락으로 구분하였다(T26, 913c).
  102. 102)『제9지게송소』 : 『수현기』 중의 「십지품」 제9지 게송에 대한 주석 부분이다.
  103. 103)『수현기』(T35, 72a). 문장의 표현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104. 104)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78b), “①若衆生下劣 其心厭沒者 示以聲聞道 令出于衆苦 ②若復有衆生 諸根小明利 樂於因緣法 為說辟支佛 ③若人根明利 有大慈悲心 饒益諸衆生 為說菩薩道 ④若有無上心 決定樂大事 為示於佛身 說無盡佛法.” 여기서 인용한 게송은 『화엄경』 「십지품」 중 제9지에 나오는 게송이다.
  105. 105)지쌍(地㕛) 3승 : 하4교의 3승으로 추정된다.
  106. 106)문상門相 3승 : 『화엄경』의 3승.
  107. 107)『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78b).
  108. 108)시설이상施設異相 :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중의 여덟 번째 부분이다.
  109. 109)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시설이상」에서는 시이時異·처이處異·주이主異·중이衆異·소의이所依異·설이說異·위이位異·행이行異·법문이法門異·사이事異 등 일승과 3승의 차이 10가지를 한다.
  110. 110)『5권소』 : 지엄의 『화엄경』 주석서인 『수현기』를 가리킨다.
  111. 111)『수현기』(T35, 15b).
  112. 112) 동이원비同異圓備 : 『탐현기』에서 일승의 무애無礙를 설명하는 10가지 이론 중 연기상유緣起相由의 내용으로, 동체同體와 이체異體를 나누어 연기상유를 설명한 것을 종합하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113. 113)『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7ab).
  114. 114)『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5a).
  115. 115) 『탐현기』와 『지귀장』에서는 一教義, 二理事, 三境智, 四行位, 五因果, 六依正, 七體用, 八人法, 九逆順, 十應感 등의 10대對를 들고 있고(T35, 123b; T45, 594a), 『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는 一教義, 二理事, 三解行, 四因果, 五人法, 六分齊境位, 七師弟法智, 八主伴依正, 九隨其根欲示現, 十逆順體用自在 등의 10대對를 들고 있다(T45, 505a).
  116. 116) 『보법장普法章』 : 미상. 이름으로 볼 때 현재 전해지지 않는 원효元曉의 『보법기普法記』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117. 117)증지證智 : 참된 지혜를 깨달음, 혹은 참된 지혜를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118. 118) 『십지경론』(T26, 139c). 이 책에서 인용한 문장은 『십지경론』 원문(帝網差別者 眞實義相故 如業幻作故 …… 眞實義相者 唯智能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19. 119)『수현기』(T35, 15b).
  120. 120)『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6b).
  121. 121) 『금사자장운간류해金師子章雲間類解』(T45, 665c). 이는 정원淨源이 법장의 『금사자장』에 대해 주석한 문헌이다.
  122. 122) 『연의초』의 원문은 “所含微細 猶如芥瓶 以毛孔能受彼諸剎 諸剎不能遍毛孔故 以毛據稱性 即如瑠璃之瓶 剎約存相 故如芥子在內”인데 밑줄 그은 부분(해석문의 〔 〕 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필사상 누락된 것으로 생각된다.
  123. 123)『연의초』(T36, 79b).
  124. 124)『화엄일승십현문』(T45, 516c).
  125. 125)『화엄일승십현문』(T45, 517a).
  126. 126)구세九世 : 과거·현재·미래의 3세世에 각각 다시 과거·현재·미래를 상정한 9차원의 시간.
  127. 127) 「십장품十藏品」 : 『화엄경』의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을 가리킨다. 『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된 『대기』에서는 “諸藏純雜具德者 依十無盡藏品立也”라고 한다.
  128. 128)『십구장원통기』(H4, 67bc).
  129. 129)『법계도』 중의 “若教義分齊 與此相應者 即是一乘圓教及頓教攝” 부분을 가리킨다.
  130. 130)『대승기신론』(T32, 583b). 이는 『대승기신론』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게송이다.
  131. 131) 『법계도』 회향문 중 “以斯善根”은 보리회향에, “廻施一切衆生”은 중생회향에 해당하는데, 실제회향에 해당하는 구절은 없다는 뜻이다.
  132. 132)임인년 : 1062년, 1122년, 1182년, 1242년의 가능성이 있다.
  133. 133)사리闍梨 : 승려의 높임말인 ācarya의 음역어音譯語로 화상和尙의 뜻이다.
  134. 134)흥왕사興王寺 교학敎學 : 흥왕사에서 경전을 강의하는 역할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135. 135)김훤 용회金晅用晦 : 김훤金晅(1234~1304년)은 충렬왕 때에 활약한 인물로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선사 제6대 사주인 원감 국사圓鑑國師 충지의 문집에도 여러 곳에 그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用晦는 그의 자字이다.
  1. 1)「仾」作「伝」{乙}。
  2. 2)「方」下有「盡」{乙}。
  3. 1)「菩」作「善」{甲}。
  4. 2)「煩惱」作「菩薩」{乙}。
  5. 3)「煩惱」疑「菩薩」{乙}。
  6. 4)「无」作「元」{甲}{乙}次同。
  7. 1)「妙」下經有「功德成就」{乙}。
  8. 2)「號」下經有「須彌」{乙}。
  9. 3)「一」下經有「於是」{乙}。
  10. 4)「者」下經有「維摩詰」{乙}。
  11. 5)「進」疑「惟」·或「議」{乙}。
  12. 6)「羅」下法界圖本文有「尼」次同。
  13. 1)「盤」音通「槃」{編}。
  14. 1)「夫」作「去」{乙}。
  15. 2)「謂」作「爲」{乙}。
  16. 3)「旣」作「現」{乙}次同。
  17. 4)「盤」音通「槃」{編}次同。
  18. 5)「比」作「此」{乙}。
  19. 1)▩疑「數」{乙}。
  20. 2)▩疑「盡」{編}。
  21. 3)「若」作「者」{甲}。
  22. 4)「一」疑「三」{編}。
  23. 5)「十」上疑脫「第六」{編}。
  24. 6)「十」上疑脫「第七」{編}。
  25. 7)「六」上疑脫「第八」{編}。
  26. 8)「二」上疑脫「第八」{編}。
  27. 9)「二」上疑脫「第九」{編}。
  28. 10)「即」法界圖本文作「當」。
  29. 1)「旣」法界圖本文作「現」。
  30. 2)「十」作「喜」{甲}·疑「喜」{乙}。
  31. 3)「難」作「離」{甲}·疑「離」{乙}。
  32. 4)「名」經作「稱」{乙}。
  33. 5)「唯」疑「共」{乙}。
  34. 6)「十」下疑有「皆一名」{乙}。
  35. 7)「一」上疑有「以」{乙}。
  36. 1)「比」作「此」{甲}{乙}。
  37. 2)「唯」作「共」{乙}。
  38. 1)「明」下有「中」{乙}。
  39. 2)「知」作「智」{乙}。
  40. 3)「門」疑「中」{乙}。
  41. 4)「去」疑「失」{乙}。
  42. 5)「現」疑「離」{乙}。
  43. 1)「玄」作「」{甲}·作「互」{乙}。
  44. 1)「盤」音通「槃」{編}。
  45. 2)「遍」作「通」{甲}。
  46. 1)「何」下法界圖本文有「以」·加「以」{乙}。
  47. 2)「明」下法界圖本文有「者唯頭示一乘陀羅尼大」。
  48. 1)「才」法界圖本文作「大體」。
  49. 1)「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
  50. 2)「后」作「戶」{甲}。
  51. 3)「指」疑「旨」{編}。
  52. 4)「无」下法界圖本文有「有」。
  53. 5)「問」作「門」{甲}。
  54. 1)「現」下法界圖本文有「俱成」。
  55. 2)「了」作「著」{乙}。
  56. 3)「容」下法界圖本文有「不同」次同。
  57. 4)「德」下疑有「無碍自在」{乙}。
  58. 5)「章」下疑脫「門」{乙}。
  59. 6)「雜」下法界圖本文有「具德」。
  60. 1)「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
  61. 2)「句」下疑脫「章」{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