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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0_b_01L일승법계도원통기 하 ✽ 一乘法界圖圓通記 下㉯ 득익得益 단락의 문답 부분에 대한 해설두 번째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의심을 없애는 부분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앞의 질문과 대답을 이어서 한다.1)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성불成佛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煩惱未斷 不名成佛)”는 것은 실제로 갖추어 이야기하면 “번뇌가 끊어지지 않아서 복과 지혜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불成佛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煩惱未斷 福智未成 不名成佛)”는 것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이 성불成佛은 세 가지 덕을 갖추는 것이다.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애는 단덕斷德, 복을 갖추는 은덕恩德, 지혜를 갖추는 지덕智德이다.이 성불成佛의 뜻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장애를 끊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수생불(修生佛 : 수행을 통하여 새롭게 생겨난 부처)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만약 삼승의 형상에 따라 설명한다면 단덕은 법신이고, 지덕은 응신, 은덕은 화신이므로 법신은 본유(本有 :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고, 응신은 수생(修生: 수행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유와 수생을 함께 갖춘 것인데 어떻게 수생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일승)별교의 가르침에 의거한다면 어떻게 삼신의 형상을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따르기 힘들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이 성불에는 수생과 본유의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문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애 비로소 성불하는 것인데 어떻게 구래성불(舊來成佛 : 먼 옛날부터 부처가 되어 있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답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앴으므로 비로소 구래성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신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자의 질문) : 이미 먼 옛날부터(舊來) 깨달은 사람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깨달았음을 알지 못합니까?
(의상의 대답) : 어리석기 때문이다.
(제자의 질문) :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먼 옛날부터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의상의 대답) : 반대로 묻겠다. 꿈에서 본 호랑이는 단지 마음속의 호랑이인가?
(제자의 대답) : 단지 마음속의 호랑이입니다.
(의상의 질문) : 꿈을 꿀 때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무서워하다가 꿈을 깬 후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알게 되어 무서워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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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0_b_01L
004_0020_b_02L一乘法界圖圓通記卷下
004_0020_b_03L
004_0020_b_04L高麗國歸法寺
004_0020_b_05L圓通首座。均如說
004_0020_b_06L第二問答除疑中。有三重問答。皆躡
004_0020_b_07L跡起也。煩惱未斷不名成佛者。實具
004_0020_b_08L言者。煩惱未斷。福智未成。不名成
004_0020_b_09L佛。然今略也。此成佛中。三德具也。
004_0020_b_10L煩惱斷盡則斷德。福則恩德。智則智
004_0020_b_11L德也。此成佛義中。一云斷障所成故
004_0020_b_12L修生佛也。然此義難也。若隨三乘相
004_0020_b_13L說則斷德法身。智則應身。恩則化身
004_0020_b_14L故。法身是本有。應身是修生。然則
004_0020_b_15L本有修生具也。何唯修生耶。若約別
004_0020_b_16L敎說則豈可分三身相而說耶。是故難
004_0020_b_17L依也。今釋此成佛中。具足修生本有
004_0020_b_18L義也。問煩惱斷盡。方得成佛。何言
004_0020_b_19L久來成佛耶。答以煩惱斷盡。方得久
004_0020_b_20L來成佛耳。道身章云。旣久來覺者。由
004_0020_b_21L何不知自覺耶。答愚癡故。問旣愚癡
004_0020_b_22L者。何得久來覺。答反問夢所見虎。但
004_0020_b_23L心之虎耶。答是心之虎耳。問夢時。不
004_0020_b_24L知心之虎故畏。覺夢時。知心之虎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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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0_c_01L(제자의 대답) : 그렇습니다.
(의상의 질문) : 꿈을 깬 이후에 비로소 마음속의 호랑이였는가.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는가?
(제자의 대답) : 실제로 이야기한다면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다.
(의상의 질문) : 꿈을 꿀 때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몰랐는데 어떻게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인가?
(제자의 대답) : 그 사람이 비록 알지 못하였지만 실제로는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다.
(의상의 대답) : 그대가 이미 잘 이야기하였다. (비유의) 대상(法)도 또한 그러하다. 어리석은 사람이 미혹되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 이야기하면 본래부터 깨닫고 있으면서 단지 알지 못할 뿐이다.
옛날부터 깨달은 상태이지만 미혹되어서 알지 못하고 있다. 번뇌를 완전히 끊으면 비로소 옛날부터 깨달았던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번뇌를 끊었으므로 비로소 구래성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문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非初非中後 前中後取故)”라는 것은 수생의 번뇌를 끊는 것만을 이야기한 것인가, 아니면 본유의 번뇌를 끊는 뜻도 이야기한 것인가?답 어떤 사람은 수생의 끊음이라고 한다. 번뇌를 어떻게 끊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라는 것은 끊지 않음의 뜻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는 끊음의 뜻이다.문 질문이 번뇌를 끊는 것에 대한 것이므로 대답도 또한 수생의 끊음이어야 하지 않은가?답 대승에서 번뇌를 끊는 것은 연기의 본성과 같이 끊는 것이므로, 끊지 않는 것으로서 끊음을 삼는다. 그래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는 것은 끊지 않는 것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는 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질문하고 대답한 것이다. 여러 곳에서 9세멸九世滅과 비세멸非世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중 9세멸은 사멸(事滅 : 현상의 없어짐)이고, 비세멸은 이멸(理滅 : 근본적인 없어짐)이다. 『삼보장』에서 “세 번째로는 3시(三時 :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것에 막힘이 없이 3시를 이야기한다. 네 번째로는 3시에 막힘이 없이 3시가 아닌 것을 이야기한다. 경전에서 ‘겁劫이 비겁非劫에 들어가고, 비겁이 겁에 들어간다’고 이야기한 것 등과 같다.”2)고 하였는데, 비겁은 이치(理)이고 겁은 현상(事)이므로 “겁이 비겁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네 번째 문을 증명하였고, -
004_0020_c_01L不畏耶。答爾。問但覺夢後。方心之
004_0020_c_02L虎耶。從夢時來。是心之虎耶。答實
004_0020_c_03L言從夢時來。是心之虎。問夢時不知
004_0020_c_04L是心之虎。何得從夢時來。是心之虎
004_0020_c_05L耶。答彼雖不知。而實言從夢時來。是
004_0020_c_06L心之虎耳。答君已能說法中。亦然。愚
004_0020_c_07L者雖迷。實言舊覺。但不知耳已
上 從
004_0020_c_08L古是覺卷下第一張 迷故不知。煩
004_0020_c_09L惱永盡。方知舊覺。是故云煩惱斷故
004_0020_c_10L方得久來成佛也。非初非中後。前中
004_0020_c_11L後取故者。唯修生耶。亦是本有斷義
004_0020_c_12L耶。答一云修生斷。謂問云斷惑云何
004_0020_c_13L答此問云。非初非中後等。故修生斷
004_0020_c_14L也。今釋非初非中後者。不斷義。前
004_0020_c_15L中後取故者。斷義也。問問旣問於斷
004_0020_c_16L惑。答亦唯是修生斷耶。答大乘斷惑
004_0020_c_17L如緣起性。斷以不斷爲斷故。非初非
004_0020_c_18L中後者。不斷。前中後取故者。斷也。是
004_0020_c_19L故。如是問答也。諸處中九世滅及非
004_0020_c_20L世滅中。九世滅者。事滅。非世滅者
004_0020_c_21L理滅也。三寶章云。三不碍非三時而
004_0020_c_22L說三時。四不碍三時而說非三時。經
004_0020_c_23L中劫入非劫。非劫入劫等。准之已
上 非
004_0020_c_24L劫則理。劫則事。是故以劫入非劫。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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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1_a_01L“비겁이 겁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세 번째 문을 증명하였다. 이로 보건대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라는 것은 이치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는다.”는 것은 현상이다.법장의 『소疏』(『탐현기』)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글을 해석하는 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서로 바뀐다는 입장(相翻門)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서로 이어진다는 입장(相續門)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경우에는 시간적 차이가 없이 도지道智가 번뇌를 끊을 때에 지혜가 먼저 일어나고 번뇌가 뒤에 없어졌다고 보는가, 번뇌가 먼저 없어지고 지혜가 뒤에 생겨났다고 보는가, 아니면 동시에 일어났다고 보는가. 이 세 가지의 견해를 따를 경우 번뇌와 지혜 각각에 두 가지 잘못이 있어 끊음을 이룰 수 없다. 즉 지혜의 경우 스스로 무루無漏를 이룬다는 잘못(自成無漏過)과 번뇌를 없애지 못한다는 잘못(不能滅惑過)이 있고, 번뇌에는 스스로 없어진다는 잘못(自滅過)과 성도聖道를 막지 못한다는 잘못(不障聖道過)이 있게 된다. 세 가지 단계를 생각하는 것은 등불이 어둠을 없앨 때에 3시三時에 어둠을 없애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잡집론雜集論』3) 제4권에서 “어디로부터 끊을 수 있는가? 과거로부터 끊을 수 없다.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미래로부터 끊을 수 없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므로. 현재로부터 끊을 수 없다. 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여러 거칠고 무거운 번뇌로부터 끊을 수 있다.”고 하고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경전에서 비파사나는 번뇌를 깨뜨릴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뜻이다. 그러므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질문) : 『유식론唯識論』4)에서 “성도聖道가 드러남에 번뇌의 종자가 반드시 없어진다. 저울질할 때에 양쪽 끝이 동시에 (한쪽은) 오르고 (한쪽은)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면 곧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여기에서는 세 가지의 견해가 모두 잘못이라고 하는가?
(대답) :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세밀하게 살피면 그렇게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만약 동시라고 하면 지혜가 스스로 생겨날 때와 번뇌가 스스로 없어지는 때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니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린다(對治)고 할 수 있는가? 마치 동쪽 집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날 때 서쪽 집에서 여자 아이가 죽는 것이 비록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여도 아무런 관련이 없어서 상대하여 다스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질문) : 그렇다면 어떻게 끊는 것인가?
(대답) : 곧 이 세 가지의 견해에 의거하여서는 끊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끊음의 뜻이 이루어진다. -
004_0021_a_01L第四門。非劫入劫。證第三門。以此
004_0021_a_02L故知。非初中後者理。前中後取者事
004_0021_a_03L藏師疏第十云。釋此文有二門。一約
004_0021_a_04L相翻門。二約相續門。初中謂无間道
004_0021_a_05L智。正斷惑時。爲智先起。惑後滅耶。
004_0021_a_06L爲惑先滅。智後生耶。爲同時耶。此
004_0021_a_07L三時惑智。各有二失。故不成斷。謂
004_0021_a_08L智有自成無漏過。不能滅惑過。煩惱
004_0021_a_09L有自滅過。不障聖道過。於三位中思
004_0021_a_10L之。如燈破暗。三時不破。此亦如是
004_0021_a_11L如雜集論第四云。從何而得斷耶。不
004_0021_a_12L從過去。已滅无故。不從未來。以未
004_0021_a_13L生故。不從現在。道不俱故卷下第二
004_0021_a_14L張 然從諸煩惱麁重而得斷。乃至
004_0021_a_15L廣說。經云毗婆舍那。不能破煩惱等
004_0021_a_16L皆是此義。故云非初非中後也。問唯
004_0021_a_17L識論云。聖道現前。惑種必滅。如稱
004_0021_a_18L兩頭 1)仾昻時等。若據此說。卽是同
004_0021_a_19L時。如何此中。三時俱非。答麁說可
004_0021_a_20L爾。細尅實難。何者。若同時者。智自
004_0021_a_21L生時。惑自滅時。不相由故。何成對治
004_0021_a_22L如東家男生。西家女死。雖亦同時。然
004_0021_a_23L无相由。不成對治。問若爾。云何斷
004_0021_a_24L答卽此三時求斷。不得方成斷義。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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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1_b_01L이것이 끊지 않음의 끊음(不斷斷)이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취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의 세 시간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닌 때를 취하는 것으로서 세 가지 시간에서 세 가지 시간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색色 등의 곳에서 진공眞空을 취하는 것이 색 등이 별도로 단공斷空을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또한 그러하므로 끊음의 뜻을 잃지 않는다.
두 번째의 서로 이어진다는 입장(相續門)에 의거하는 방법은 여기에서 지혜가 생겨나고 없어질 때에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의 세 시간이 서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때에 분명하게 번뇌를 끊는지 생각해보면, (지혜가) 앞에 있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이미 없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뒤에 있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운데도 끊을 수 없다.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시간 모두에 끊음의 뜻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끊는 것인가. 『십지경론』에서 “불꽃이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만이 아니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모두 취하는 것과 같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오직 처음이나 오직 중간 등만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고 앞과 중간과 뒤가 서로 이어져서 취하여야 비로소 끊음의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 : 세 시간이 별도로 취하였을 때에 각기 끊음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들이 비록 합한다고 하여도 어떻게 끊음을 이룰 수 있는가?
(대답) : 어떤 사람이 세 시간을 별도로 취하여서는 각기 끊음을 이루지 못하지만 세 시간을 서로 연결하면 임시로 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는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는데,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세밀하게 살피면 그렇지 않다. 세 시간을 별도로 취하였을 때 각기 끊음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 세 시간을 모두 합한다고 해서 어떻게 끊음을 이룰 수 있겠는가. 모래 한 톨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많은 모래를 모아도 기름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여기에서 말하는 앞과 뒤는 잘못을 교정하기 위한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들이 이 지혜가 앞에 있을 때에도, 중간에 있을 때에도, 뒤에 있을 때에도 각기 번뇌를 끊을 수 없으므로 곧 성지聖智가 없다고 하는 악취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잘못을 교정하여 여기에서는 처음에서 처음이 아닌 것을 취하고, 중간에서 중간이 아닌 것을 취하며, 마지막도 마찬가지이므로 성지가 없다는 것과 다르며 악취공이 아니라고 하기 위하여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질문) : 여러 다른 곳에서는 성도聖道가 처음 생겨나면 -
004_0021_b_01L則不斷斷也。前中後取故者。謂前中
004_0021_b_02L後三時之中。取彼非初中後。非異三時
004_0021_b_03L取彼非三時也。如於色等處。取彼眞
004_0021_b_04L空。非異色等別取斷空。此亦如是故
004_0021_b_05L不失斷義。二約相續門者。謂此地智
004_0021_b_06L生滅。相續前中後三時。何時定能斷
004_0021_b_07L煩惱。唯前不能斷。已落謝故。唯後
004_0021_b_08L不能斷。以未起故。中亦不能斷。以不
004_0021_b_09L住故。是故三時。皆无斷義。若爾云
004_0021_b_10L何斷。論云如燈燄。非唯初中後。前
004_0021_b_11L中後取故。此則唯初唯中等不可斷。前
004_0021_b_12L中後相續取。可有斷義。問旣三時單
004_0021_b_13L取。各不成斷。縱此和合。豈成斷耶。
004_0021_b_14L答有人解云。三時別取。各不成斷。三
004_0021_b_15L時相續。假說爲斷。故云前中後取也。
004_0021_b_16L麁說可爾。細尅不然。以別取三時。各
004_0021_b_17L不成斷。摠此三時。豈成斷耶。如一
004_0021_b_18L沙无油多沙亦无。今釋此言前後者。是
004_0021_b_19L簡濫之言卷下第三張 何者。人謂此
004_0021_b_20L智前中後位。各不能斷。卽謂同於无
004_0021_b_21L聖智處惡取空也。故簡云。此於初上
004_0021_b_22L取。非初中上取。非中後亦爾。不同
004_0021_b_23L无智故。非惡取空。故云非初非中後。前
004_0021_b_24L中後取故。問餘處論說。聖道初起。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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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1_c_01L곧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여기에서는 처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가?
(대답) : 『비담毗曇』에 의하면 한 순간(一念)에 태울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 비로소 모두 없어지며, 번뇌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한 순간(一念)에 태울 수 없고 순간순간이 이어져야 비로소 없앨 수 있으며, 번뇌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대승 초교初敎에 의하면 첫 마음에도 끊을 수 있고, 중간과 마지막 마음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종교終敎에 의하면 연기의 본성과 같아서 (처음과 중간, 마지막의) 세 시간이 모두 끊을 수 없다. 곧 작용하지 않아야 연기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끊지 않음이 없다.5)
청량 징관의 다음과 같은 말씀6)도 현수 법장의 해석과 같다.
또한 지금 경론들이 반복하여 서로 그 의미를 완전하게 밝히고 있다. 만약 끊음을 정할 수 있다면 한 순간이면 족할 터인데 어찌 (처음, 중간, 마지막의) 세 마음을 말하겠는가. 이미 (세 마음을) 모두 취하여야 비로소 이룰 수 있다고 하였으니 무성無性이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없는 것이 무성이므로 비로소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끊음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인연이므로 무성이고, 무성이므로 인연이다. 만약 첫 순간(初念)에 끊을 수 있지만 마지막 순간(後念)에 비로소 완전하게 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비담』에서 한 순간 (一念)에 태울 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 비로소 모두 없어진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첫 순간만으로는 끊을 수 없고 중간 순간과 마지막 순간까지 쌓아져야 비로소 끊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성실론』에서 한 순간(一念)에 태울 수 없고 순간순간이 이어져야 비로소 없앨 수 있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종지를 잃지 않았으니 오히려 실교實敎에 통할 수 있다. 만약 원교에 의한다면 끊어지는 대상이 되는 번뇌는 하나가 미혹되면 모든 것이 미혹된다. 그러므로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을 끊으며, 끊음이 없고 끊지 않음이 없다.7)
서로 바뀐다는 것(相翻門)은 번뇌와 지혜가 서로 바뀐다는 것이고, 서로 이어진다(相續門)는 것은 단지 번뇌를 끊는 지혜(能斷智)의 생멸이 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이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끊으므로 ……”8)라고 한 것은 앞에서 3시 중의 끊음의 뜻을 밝혔으므로 이제 그 끊음의 모습(斷相)을 설명하는 것이다. 2승의 사람은 번뇌의 장애9)는 끊지만 소지所知의 장애10)는 끊지 않는다. 이미 남은 장애가 있으므로 허공과 같이 끊는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
004_0021_c_01L能滅惑。何故此中。乃云非初。答
004_0021_c_02L依毗曇。一念有燒。始終方盡。治結
004_0021_c_03L同然。依成實論。一念不燒。相續方
004_0021_c_04L盡。治結亦爾。若大乘初敎。初念亦斷。
004_0021_c_05L中後亦然。若依終敎。如緣起性。三
004_0021_c_06L時俱不能斷。則由不作緣起方成。故
004_0021_c_07L不无斷也已
上 淸涼云
云 同賢首釋。又今
004_0021_c_08L經論。反覆相成。謂若定斷者。一念
004_0021_c_09L便足。何假三心。旣並取方成。明知
004_0021_c_10L无性。无初中後。无初中後。是无性
004_0021_c_11L故。方得成於初中後斷。此則因緣故
004_0021_c_12L无性。无性故因緣也。若云初念則能
004_0021_c_13L斷。後念方究竟斷。不異毗曇。一念
004_0021_c_14L有燒。始終方盡。若云初念。獨不能
004_0021_c_15L斷。積至中後。方能斷者。不異成實。
004_0021_c_16L一念不燒。相續2)方然。勿失宗旨。上猶
004_0021_c_17L通實敎。若依圓敎。所斷之惑。一迷
004_0021_c_18L一切迷。故一斷一切斷。无斷无不斷
004_0021_c_19L已
上 相翻則惑智相翻。相續則唯能
004_0021_c_20L斷智。生滅相續也。云何斷。如
004_0021_c_21L虛空。如是斷故者。前明三時中斷義
004_0021_c_22L今辨斷相。如二乘人。唯斷煩惱
004_0021_c_23L不斷所知。旣有餘碍。不名如虛空斷
004_0021_c_24L「仾」作「伝」{乙}。「方」下有「盡」{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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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2_a_01L보살菩薩 경지에 있는 사람은 두 장애의 생사과환生死過患을 단박에 취하여 전체를 하나(一際)로 삼아, 한 순간에 그 하나를 단박에 바꾸어 버리므로, 허공과 같이 청정하다. 『화엄약책華嚴略策』11)에서 “번뇌는 본래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요, 진리에 미혹됨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미혹된 상태에서 돌이키지 못하니 번뇌가 더욱 많아져 끝이 없다. 하늘을 덮은 엷은 구름, 그 온 곳이 없지만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채우니 천지와 사방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다. 큰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홀연히 구름을 모두 걷어 내니 천 리千里에 한 점 구름 남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물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불보살의 방편 바람이 생겨나 번뇌에 근본이 없음을 비추니 본성의 허공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수많은 덕이 본래대로 원만하게 되었다. 8만 가지 고뇌(塵勞)가 모두 바라밀이고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번뇌(惑障)가 모두 진여이다. 눈의 티끌을 없애지 않으면 신기루 꽃(空花)이 혼란스럽게 휘날리지만 법의 눈을 맑게 하면 어떤 번뇌가 사라지지 않겠는가?”12)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이야기한 것이다.“그 실제의 도리에 있어서는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實相)은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 ……”13)라고 한 것은 번뇌에 쌓여 있는 속에서 하나의 존재도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끊음도 끊지 않음도 없다. 청정함 속에서 하나의 존재도 새로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부처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 것이 없다. 꿈속에서 본 것이 자기 마음이 그려낸 호랑이임에도 꿈속에서는 헛된 공포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것이 자기 마음속의 호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므로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들은 본래 부처이지만 단지 번뇌 망상의 꿈으로 인하여 자신이 먼 옛날부터(舊來) 부처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긴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자신이 부처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법계도』의 글에서 “꿈에서 깨어남과 꿈을 꾸는 것, 잠을 자는 것과 잠에서 깨어남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아서 부처가 됨과 되지 않음, 번뇌를 끊음과 끊지 않음의 차이가 생겨난다.(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라고 하였다.문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끊음과 끊지 않음과 『도신장』 중의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다른가?
(제자의 질문) : 어떤 곳에서는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고 하는데 전자가 옳으면 후자가 잘못된 것이고, 후자가 옳으면 전자가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습니까?
(의상의 대답) : (부처의) 덕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처음부터 장애가 없었고, -
004_0022_a_01L1)菩薩之人。頓取二障等生死過患。摠
004_0022_a_02L爲一際。於一念中卷下第四張 頓翻彼
004_0022_a_03L際故。如空淸淨也。華嚴略策云。惑本
004_0022_a_04L无從。迷眞忽起。迷而不返。爛漫无涯
004_0022_a_05L若纎雲覆空。其來无所。須臾彌滿。六
004_0022_a_06L合暗然。長風忽來。倐然雲盡。千里
004_0022_a_07L无點。萬像歷然。方便風生。照惑无
004_0022_a_08L本。性空現現。衆德本圓。八萬塵勞
004_0022_a_09L皆波羅蜜。恒沙惑障。盡是眞如。眼
004_0022_a_10L翳未除。空花亂起。但淨法眼。何惑
004_0022_a_11L不銷已
上 此之謂也。其實道理諸法實
004_0022_a_12L相不增不減等者 2)煩惱法中。不見一
004_0022_a_13L法減故。約實道理。无斷不斷。淸淨
004_0022_a_14L法中。不見一法增故。約實道理。无
004_0022_a_15L成不成。然夢中所見。是自心虎。由
004_0022_a_16L睡眠緣。妄生怖畏。覺後方知是心之
004_0022_a_17L虎。故不畏也。如是衆生。本來是佛。
004_0022_a_18L只由煩惱妄想之夢。所以不知自舊來
004_0022_a_19L佛。覺大夢後。方知自佛。是故文云。猶
004_0022_a_20L如覺夢。睡悟不同。故建立成不成斷
004_0022_a_21L不斷等也。問今此斷不斷。與道身章
004_0022_a_22L中有文云。一斷一切斷。有文云。實
004_0022_a_23L无所斷。彼是則此非。此是則彼非。云
004_0022_a_24L何會通。答以德言之。從始无障。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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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2_b_01L(중생의) 번뇌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모든 (부처의) 덕을 모두 가리었다. 만약 실제로 끊을 바가 없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미혹된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만약 끊을 바가 있다고 한다면 그 끊을 바는 어떤 것인가. (『십지경론』의) 글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3시를 구분하여서는 끊음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3시를 구분함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도리는 끊음과 끊지 않음에 있지 않다. 다만 근기에 따라서 끊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한 끊을 바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답 『도신장』에서는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는 입장에 의거하여서는 “근기에 따라서 끊음을 이야기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는 입장에 의거하여서는 “또한 끊을 바가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지금 여기에서는 그와 달리 번뇌를 완전히 끊는 것을 끊음이라고 하고 번뇌를 완전히 끊지 않는 것을 끊지 않음이라고 한 것이므로 서로 다르다.문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실제의 도리에 있어서는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實相)”이라는 것과 그 책(『도신장』)에서 “‘근기를 위하고자 한다(欲爲機)’는 것은 가르침을 찾아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으로 끊음과 끊지 않음이 서로 막힘이 없고 참된 모습(實相)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어떻게 다른가?답 참된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설명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그 책(『도신장』)에서는 이미 번뇌를 끊은 이후의 단계에서 “하나를 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와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는 입장에 의거하여 막힘이 없는 참된 모습을 논하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는 “번뇌가 쌓여 있는 속에서 하나의 존재도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없으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끊음도 끊지 않음도 없고, 청정함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새로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없으므로 실제의 도리에 의거하면 부처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 것이 없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남과 꿈을 꾸는 것, 잠을 자는 것과 잠에서 깨어남의 차이가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므로 단지 설명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문 그 책(『도신장』)에서 “끊음과 끊지 않음이 서로 막힘이 없고 완전한 모습(實相)”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다만 본유本有인가 그렇지 않은가?답 이미 “끊음과 끊지 않음이 서로 막힘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단지 본유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책에서 “만약 실제로 끊을 바가 없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미혹된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만약 끊을 바가 있다고 한다면 그 끊을 바는 어떤 것인가. (『십지경론』의) 글에서 ‘처음도 아니고, 중간이나 마지막도 아니다.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3시를 구분하여서는 -
004_0022_b_01L惑望之。覆无盡德。若實无所斷。何
004_0022_b_02L故迷人未得。若有所斷。所斷是何。文
004_0022_b_03L云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三時之
004_0022_b_04L中。不得斷相而覺。以去三時。无障
004_0022_b_05L道理。不在斷不斷中隨機言斷。又无
004_0022_b_06L所斷已
上 何別。答彼則約前云一斷一
004_0022_b_07L切斷而云。隨機言斷。約前云實无所
004_0022_b_08L斷而云卷下第五張 又无斷也。今此不
004_0022_b_09L爾。煩惱永斷則是斷。煩惱未斷則
004_0022_b_10L不斷故別也。問今此其實道理諸法
004_0022_b_11L實相。與彼章云。欲爲機者。尋敎證
004_0022_b_12L入。斷與无斷。无碍實相。何別。答
004_0022_b_13L實相則一。能詮方便別。謂彼則立在
004_0022_b_14L旣斷已去。約一斷一切斷。與實无所斷
004_0022_b_15L論其无碍之實相。今此3)煩惱法中。不
004_0022_b_16L見一法減故。其實道理。无斷不斷。淸
004_0022_b_17L淨法中。不見一法增故。其實道理。无
004_0022_b_18L成不成。然而猶如覺夢睡悟不同故。建
004_0022_b_19L立成不成斷不斷等故。但詮別耳。問彼
004_0022_b_20L章斷與无斷无碍實相。唯本有耶不耶。
004_0022_b_21L答旣云。斷與无斷无碍故。不得言唯
004_0022_b_22L是本有。彼云若實无所斷者。何故迷
004_0022_b_23L人未得。若有所斷。所斷是何。文云
004_0022_b_24L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者。三時之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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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2_c_01L끊음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3시를 구분함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끊음은 끊을 바가 없다는 것과 떨어질 수 없다고 하고, 끊을 바가 없다는 것은 끊음과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동시同時로서 인연문에서 연(緣 :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수행하여 생겨난 지혜가 장애를 끊으려는 마음을 일으켜 과거의 시작도 없는 때를 돌이켜 보며 장애의 본체를 찾아볼 때에 끊을 수 있는 장애가 없는 것이 바로 “끊을 바가 없음”이고, 이와 같이 오늘 끊을 바가 없고 원래 부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순간의 수행하여 생겨난 지혜가 일어난 때문에 이와 같이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끊음”이다. 이와 같으므로 끊음은 끊을 바가 없음과 떨어지지 않고, 끊을 바가 없음은 끊음과 떨어지지 않아서 동시이고 선후가 없다.「육상장六相章」14)의 “이 서까래가 없다고 해서 어찌 집이 아닌가? 서까래가 없는 집은 망가진 집일 뿐 온전한 집이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집은 하나의 서까래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서까래에 달려 있으므로 서까래가 바로 집임을 알 수 있다.”15)는 내용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인연의 집(因緣舍)16)이라고 하였지만 성기性起 스님은 “인연의 아버지17)가 변계의 아들18)을 가르치는 때이므로 실제로는 인연의 집이 아니다. 옛글(古辭)에 ‘이 집에는 세 가지의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집을 지으려고 서까래 등의 여러 구성 요소들을 모으는 때이다. 두 번째는 집을 다 지은 뒤에 여러 구성 요소들이 집을 이루게 되는 것을 보여 주는 때이다. 세 번째는 하나의 서까래를 집어내서 온전한 집과 망가진 집을 구별하여 그 하나의 서까래가 서까래가 되는 것(成椽)19)을 생각하는 단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세 번째 단계는 변계를 통하여 인연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인연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보여 주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그렇지만 만일 “인연을 보여 주는 방편의 단계”라고 한다면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이 하나의 서까래가 집을 이루는 서까래가 된 것이니 -
004_0022_c_01L不得斷相而覺。以去三時无障已
上 則
004_0022_c_02L言斷不離无所斷。言无所斷不離於斷
004_0022_c_03L故。實則同時。謂因緣門中。緣前无法
004_0022_c_04L是故要得今我修生智。起斷障之念。退
004_0022_c_05L觀過去无始之際。尋其障體。更无可
004_0022_c_06L斷之障。則无所斷。如是今日覺无所
004_0022_c_07L斷 4)无來是佛者。良由一念修生智起
004_0022_c_08L故得如是卽是斷也。是則斷不離於无
004_0022_c_09L所斷。无所斷不離於斷。一時无前後也。
004_0022_c_10L六相章云。无此椽時。豈非舍耶。答
004_0022_c_11L但是破舍非好舍故。知好舍全屬一椽
004_0022_c_12L旣屬一椽故。知椽卽是舍已
上卷下第六
004_0022_c_13L張者。一云因緣舍性起德云。因緣之
004_0022_c_14L父。誨遍計子之時故。非實因緣舍。古
004_0022_c_15L辭云。此舍有三位。一欲作舍故。集
004_0022_c_16L椽等諸緣時。二旣作舍已。歷指諸緣
004_0022_c_17L成舍之義。示之之時。三取去一椽。徵
004_0022_c_18L其好舍及與破舍。覔此一椽。成緣之
004_0022_c_19L時。此第三位者。履於遍計。示因緣
004_0022_c_20L之處故。非實因緣正觀。可云示因緣
004_0022_c_21L之方便。然而若云。示因緣之方便位
004_0022_c_22L則至此第三位。方得此一椽。是成舍
004_0022_c_23L「菩」作「善」{甲}。「煩惱」作「菩薩」{乙}。「煩
004_0022_c_24L惱」疑「菩薩」{乙}。「无」作「元」{甲}{乙}次同。
-
004_0023_a_01L그렇다면 이것은 서까래의 자리가 이루어진 단계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서까래가 서까래가 된 때에 이 서까래가 어디서 왔는지 뒤돌아 찾아보면 산에 푸른 잎의 나무로 있을 때에 서까래가 아닌 것이 아니며, 새가 이 나무의 씨를 물어다 땅에 떨어뜨린 때에도 또한 서까래가 아닌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서까래는 서까래가 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지만 일단 서까래가 되었다면 집을 완성시키는 서까래이므로 이 서까래가 산에 나무로 있을 때에도 집을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만족시키고, 새가 씨를 물어다 땅에 떨어뜨렸을 때에도 또한 집을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만족시킨다. 이것이 곧 옛사람이 말한 바 “도끼를 메고 나무를 찍을 때에 집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며, 여러 글에서 이야기하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이루어지면 처음과 끝을 벗어난다.”는 뜻이다.「종성장種性章」20)에서는 “성종성性種性은 본유(本有 :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고 습종성習種性은 수생(修生 : 닦음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즐겨 하는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릇 종성을 논하는 것은 인연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어찌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종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지금 성종성은 본유가 될 수 없다. 또 습종성은 수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법성法性 바깥에 수생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가 무엇이 더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21)고 하였다. 무릇 종성을 논하는 것은 인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므로 닦아서 부처를 이룬 곳에 의거하여 비로소 성종성性種性의 본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 만일 닦음의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습종성이 이루어질 때에 곧 성종성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법성의 바깥에 다시 수생이 없으므로 성종성과 습종성의 연기는 어떤 것이 먼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있는 것도 아니다(非初非中後).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내가 얻은 수생의 지혜는 인연에 의한 존재이므로 이 수생의 지혜를 얻은 이후에 비로소 시작도 없는 먼 과거로부터 끊어야 하는 장애가 없었고 본래 깨달음 상태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지혜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원래 깨달음이 아니었다. -
004_0023_a_01L之椽。是則此是椽位得成之處。然則若
004_0023_a_02L得此椽。成椽之時。退尋此椽。在山
004_0023_a_03L靑葉木時。无不是椽。鳥含此木之種
004_0023_a_04L落地之時。亦无不是椽。是故此椽不
004_0023_a_05L成則已。成則是成舍之椽故。椽之爲
004_0023_a_06L山木之時。滿足舍全全成。鳥含種子
004_0023_a_07L落地之時。亦得滿足舍全全成。此
004_0023_a_08L乃古人所云。荷斧打木時。滿足舍成
004_0023_a_09L者。卽是此義。諸處文中。不成則已
004_0023_a_10L成則離始終之義也。種性章云。性種
004_0023_a_11L性是本有。習種性是修生。此非佛法
004_0023_a_12L所樂。何以故。夫論種性者。順因緣
004_0023_a_13L門說。豈容不待因緣。而說種性故。今
004_0023_a_14L性種性。不得爲本有。習種性。不得
004_0023_a_15L爲修生。何以故。若法性外。有修生
004_0023_a_16L者。緣起可增。是故不得說修生故已
上。
004_0023_a_17L夫論種性順因緣門。則約習成處。方
004_0023_a_18L說性種之本有。若習因未成。不得說
004_0023_a_19L也。是故習種性成時。卽有性種故。如
004_0023_a_20L是法卷下第七張性以外。更无修生。性
004_0023_a_21L習緣起。非初非中後也。今此亦爾
004_0023_a_22L今日我所得修生之智。是因緣法故。得
004_0023_a_23L此修生之智以去。方說從无始過去无
004_0023_a_24L障可斷 *无來是覺。此智以前 *无非
-
004_0023_b_01L그러므로 끊음과 끊지 않음은 동시에 연기한다.“어떤 사람”22)이란 3승의 사람이다.“이치(理)와 현상(事)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23)이라고 한 것은 “고요하면서 항상 쓰임이 있고, 쓰임이 있으면서도 항상 고요하다.”는 것이 이치와 현상의 상즉(理事相卽)이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事事相卽)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3승에서는 이치와 이치의 상즉(理理相卽), 이치와 현상의 상즉(理事相卽), 현상과 이치의 상즉(事理相卽) 등 3구는 논하지만 현상과 현상의 상즉(事事相卽)은 논하지 못한다. 일승에서는 이들을 모두 다 논하므로 구별되는 것이다.“만약 별교일승의 가르침에 의거하면 ……”24)이라고 한 것에서는 이치와 현상의 상즉(理事相卽)에서 다시 현상과 이치의 상즉(事理相卽)의 구절을 나누면 4구의 상즉을 모두 갖추게 된다.“각각 상즉하지 않는다.(各各不相卽)”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중문 (中門 : 相入)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4구가 상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전자의 입장에서는 뒤에 이어서 “왜 그러한가 하면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何以故 中卽不同故)”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의 세 구절25)은 즉문(卽門 : 相卽)이고 “각각 상즉하지 않는다.(各各不相卽)”는 중문이라고 한다.후자의 입장에서는 『삼보장』에서 “처음의 상즉하지 않는다는 것에 4구가 있다. 첫 번째는 두 가지 현상(事)이 상즉하지 않는다. 인연의 모습(緣相)으로 인해 현상이 서로 막히기 때문에. 두 번째는 두 가지 현상의 이치가 상즉하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세 번째는 이치가 현상과 상즉하지 않는다. 이치는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네 번째는 현상이 이치와 상즉하지 않는다. 현상은 움직여서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26) 두 번째의 상즉하는 것에 4구가 있다. 첫 번째는 현상이 이치와 상즉한다. 연기는 정해진 성격이 없기 때문에 ……”27)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여기에서 “각각 상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4구가 상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야기한다.문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中卽不同故)”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답 이것은 즉문이기 때문에 이치와 이치의 상즉에서부터 각각 상즉하지 않는 것까지 이야기한 것이다. 만약 중문에 의거한다면 마땅히 이치와 이치의 상입相入, 현상과 현상의 상입, 각각 상입하지 않는 것까지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각각 상즉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번째 입장인 4구가 상즉하지 않는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중문과 즉문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은 일승에서 중문과 즉문을 논하는 것이 3승과 달라서 -
004_0023_b_01L是覺。是故斷與不斷。同時緣起也。有
004_0023_b_02L人者。三乘人也。理事相卽故有如是
004_0023_b_03L等者。寂而常用用而常寂者。是理事
004_0023_b_04L相卽。非謂事事相卽云也。三乘中。但
004_0023_b_05L論理理相卽。理事相卽。事理相卽等
004_0023_b_06L三句。不得論事事相卽。一乘中具論
004_0023_b_07L故別也。若依別敎一乘等者。於理事
004_0023_b_08L相卽中。更開事理相卽句。具說四句
004_0023_b_09L相卽也。各各不相卽者。一云中門。一
004_0023_b_10L云四句。不相卽也。初義者。仍云何
004_0023_b_11L以故。中卽不同故。是故初三句者卽
004_0023_b_12L門。各各不相卽者中門也。後義者。三
004_0023_b_13L寶章云。初不卽中四句者。一二事不
004_0023_b_14L相卽。以緣相事碍故。二二事之理。不
004_0023_b_15L相卽。以无二故。三理事不相卽。以
004_0023_b_16L理靜非動故等。二相卽四句者。一事
004_0023_b_17L卽理。以緣起无性故已
上等故。今此各
004_0023_b_18L各不相卽者。四句不相卽也。問中
004_0023_b_19L卽不同故者。何耶。答以是卽門故云
004_0023_b_20L理理相卽。乃至各各不相卽。若約中
004_0023_b_21L門。應云理理相入。事事相入。乃至
004_0023_b_22L各各不相入。是故云中卽不同也。今釋
004_0023_b_23L各各不相卽者。同後師義四句不相卽
004_0023_b_24L也。中卽不同者。一乘中論中。卽不
-
004_0023_c_01L이치와 이치의 상즉과 상입, 현상과 현상의 상즉과 상입, 이치와 현상의 상즉과 상입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같지 않다.”고 한 것은 3승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이다.문 4구의 상즉은 법성융통문法性融通門과 연기상유문緣起相由門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는가?답 두 문에 모두 통한다.문 그렇다면 두 문에서 이치와 이치의 상즉과 현상과 현상의 상즉은 어떻게 다른가?답 법성융통문에서는 의거하는 바(所依)인 이치가 막힘없이 통하므로 의거하고 있는(能依) 현상도 또한 이치를 따라서 막힘없이 통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티끌이 의거하는 바(所依)의 이치를 남김없이 포함할 때에 의거하는(能依) 여러 존재들이 의거하는 바의 이치를 따라서 하나의 티끌에 상즉하는 것이 현상과 현상의 상즉이다. 한편으로 의거하고 있는 여러 존재들이 의거하는 바인 이치를 따라서 막힘없이 통할 때에 이 존재와 저 존재의 이치들이 상즉하는 것이 이치와 이치의 상즉이다. 연기상유문에서는 하나가 없으면 전체도 없게 되고 전체가 없으면 하나도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와 전체가 서로 말미암아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현상과 현상의 상즉이다. 한편 현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치에도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이 현상과 현상의 차별되는 이치들이 상즉하는 것이 이치와 이치의 상즉이다.문 이치와 이치의 상즉을 법성융통문에서 볼 수 있는가?답 이치와 현상이 상즉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 중에서 “만약 오직 이치에만 의거하면 이치는 오직 하나의 맛(一味)이므로 상즉하고 상입할 수 없다. 만약 오직 현상에만 의거하면 서로 막히고 장애하므로 상즉하고 상입할 수 없다.(若唯約理 理唯一味 不可即入 若唯約事 互相障礙 不可即入)”28)고 하였으므로 이치와 현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현상의 차별을 따라서 이치도 차별이 있게 된다. 연기상유문에서도 또한 이치와 이치의 상즉을 이야기할 수 있다.문 『유마경』의 「부사의품不思議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때에 장자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그대는 무량천만억 아승기의 국토를 돌아다녔는데 어느 부처님의 국토에 -
004_0023_c_01L同三乘卷下第八張故。理理卽入。事事
004_0023_c_02L卽入。理事卽入亦得。是故云不同
004_0023_c_03L者。不同三乘也。問四句相卽者。法性
004_0023_c_04L融通門。緣起相由門。如何配耶。答
004_0023_c_05L二門通也。問若爾。二門中。理理相
004_0023_c_06L卽。與事事相卽。何別。答法性門中
004_0023_c_07L以所依之理融通故。能依之事。亦
004_0023_c_08L隨理融通。是故一塵。攝所依理。无
004_0023_c_09L不盡時。能依諸法。隨所依理。卽於
004_0023_c_10L一塵者。事事相卽也。能依諸法。隨
004_0023_c_11L所依理。融通之時。彼此之理相卽
004_0023_c_12L者。理理相卽也。緣起相由門中。一
004_0023_c_13L无則多亦无。多无則一亦无。一多相
004_0023_c_14L由而得成立者。事事相卽也。以事差
004_0023_c_15L別故。理亦差別。以事事中差別之理
004_0023_c_16L相卽者。理理相卽也。問理理相卽
004_0023_c_17L可於法性門見耶。答理事不卽之所以
004_0023_c_18L中云。若唯約理。理唯一味。不可卽
004_0023_c_19L入。若唯約事。互相障碍。不可卽入
004_0023_c_20L已
上 是故由理事不異。隨事差別。理
004_0023_c_21L亦差別故。緣起相由中。亦得說理理
004_0023_c_22L相卽也。問維摩經中。不思議品云。爾
004_0023_c_23L時長者維摩詰。問文殊師利。仁者遊
004_0023_c_24L於无量千萬億阿僧祗國。何等佛土。有
-
004_0024_a_01L좋고 지극히 오묘한 사자좌(好上妙師子之座)29)가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문수사리는 ‘거사가 동쪽으로 36항하사의 국토를 지나면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이름이 수미상須彌相이며, 그곳에 계시는 부처님의 이름은 등왕燈王30)입니다. 지금 현재 그 부처님의 키는 8만 4천 유순由旬이고, 그 사자좌의 높이도 8만 4천 유순으로 대단히 엄숙하게 장엄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에31) 장자32)가 신통력을 드러내자 이때에 그 부처님이 높고 넓고 아름다운 3만 4천의 사자좌를 유마힐의 방으로 보내 주었다. ……사리불이 ‘거사여, 일찍이 없던 일입니다.33) 이와 같이 작은 방에 이렇게 크고 넓은 법좌들을 수용하는 것은’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3승의 경전에서도 현상과 현상의 막힘없음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법계도』에서) “이치와 현상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이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고 하는가?답 「오교장」에서 “열 번째는 현상(事)의 다름이다. 즉 집, 숲, 땅, 산 등과 같은 현상이 모두 법문이 되니 혹은 행行 혹은 위位, 혹은 교敎 혹은 의義 등이 된다. ……34) 일체의 차별 있는 현상들이 인다라35)와 미세36)를 이루니 하나의 현상이 생겨남을 따라서 모두다 그와 같이 된다. 3승은 그렇지 않아서 다만 곧 공空이나 진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일승의 설명과 같지 않다. 또한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힘으로 잠깐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하여도 저 (일승과 같이) 존재들이 그러한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지 않다.”37)라고 하였으므로 앞에서 인용한 『유마경』의 내용은 단지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힘으로 잠시 드러내 보인 것일 뿐 존재들의 본래 그러한 상태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므로 (3승에서는 현상과 현상의 상즉의 뜻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유마경』에서는 이어서 “오직 사리불과 여러 불보살들은 불가사유不可思惟라는 이름의 해탈을 가지고 있는데, 보살들이 이 해탈에 머무르면 능히 수미산과 같이 높고 넓은 것을 겨자씨 속에 넣으면서도 양자의 크기를 줄이거나 늘리지 않을 수 있다. 수미산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4천왕과 도리천의 여러 천인天人들이 자신들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 -
004_0024_a_01L好上1)妙師子之座。文殊師利言。居士
004_0024_a_02L東方。度三十六恒河沙國。有世界。名
004_0024_a_03L須彌相。其佛2)號燈王。今現在彼佛
004_0024_a_04L身長。八萬四千由旬。其師子座高。八
004_0024_a_05L萬四千由旬。嚴餙第3)一。長4)者現
004_0024_a_06L神通力。卽時彼佛。遣三萬四千師子
004_0024_a_07L座卷下第九張 高廣嚴淨。來入維摩
004_0024_a_08L詰室。乃至舍利弗言。居士。未曾
004_0024_a_09L有也。如是小室。乃容受此高廣之座
004_0024_a_10L已
上 此是三乘經中盛談事事无碍。何
004_0024_a_11L云理事相卽。故有如是義。非謂事事
004_0024_a_12L相卽義耶。答五敎章云。十者事異。謂
004_0024_a_13L隨有舍林地山等事。皆是法門。或是行
004_0024_a_14L或是位。或敎義等云
云 乃至一切差別
004_0024_a_15L事因陁羅微細成就。隨一事起。皆悉
004_0024_a_16L如是。三乘則不爾。但可說卽空卽如
004_0024_a_17L等。不同此也。又若以神通不思議力
004_0024_a_18L容得暫現。非是彼法。自恒如是已
上 則
004_0024_a_19L上所引經。但是神力暫現。非法自爾
004_0024_a_20L故。不相違故。彼經次文云。唯舍利
004_0024_a_21L弗。諸佛菩薩。有解脫名不可思5)進
004_0024_a_22L若菩薩。住是解脫。能以須彌之高廣
004_0024_a_23L入芥子中。无所增減。須彌山王。本
004_0024_a_24L相如故。而四王天忉利諸天。不覺不
-
004_0024_b_01L오직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만이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까닭이다.문 (현상과 현상의 상즉의 근거로 이야기되는) 열 가지 이유(十所以)38) 중의 생각하기 어려운 해탈(難思解脫)과 이 『유마경』의 내용은 어떻게 다른가?답 3승에서는 신통력으로 잠시 드러낸 것으로서 실제의 모습(實德)이 아니지만 일승에서의 변화는 곧바로 실제의 모습(實德)으로서 다르다.“또한 이치(理)의 인다라와 현상(事)의 인다라 등의 법문을 모두 갖추고 있다.”39)에서 등等은 이치와 현상(理事)의 인다라와 현상과 이치(事理)의 인다라를 가리킨다.“10불十佛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法界宅)”40)이라고 한 것과 관련하여 『법계도』의 앞부분에서 말한 “인因과 과果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法性家) 안의 진실한 덕용德用으로서 성품이 중도에 있다.”41)고 했을 때의 법성의 집 및 인다라니의 집(因陀羅尼家), 미세의 집(微細家)과 여기에서 말한 법계의 집은 하나이다. 만약 앞에서 이야기한 법성중도法性中道가 오로지 내증內證이라고 한다면 이미 집에 돌아왔다(歸家)고 한 것은 본성을 깨달은 것이므로 법성과 돌아온 집은 서로 다르지 않아서 둘 다 내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증에서는 인다라를 논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집에 돌아왔다고 할 때의 집에 대해서는 법계다라니의 집, 인다라니의 집, 미세의 집 등으로 이야기하는가.42) 그러므로 10불十佛의 깨달음에 의거할 때에는 비록 내증이지만 이미 10불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이라고 하였으므로 보현보살의 경계에도 통하는 것이니 어찌 내증이기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법계의 집과 앞에서 이야기한 법성의 집은 서로 다르지 않아서 오로지 외화外化이며 나타나 있는 바(所現)인 내증과 막히지 않는 것이다.『약소』(『수현기』)에서 “성인의 경지는 둘이니 곧 이치(理)와 인식(量)의 두 법이다. 이 둘에 각기 두 가지의 법인다라망 경계가 있으니 ‘이치 속의 인식(理中量)’과 ‘인식 속의 일부분(量中之一分)’이다.”43)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치 속의 인식’은 부처의 외향外向이고 ‘인식 속의 일부분’은 보현보살의 내향內向이므로 오직 부처의 외향과 보현보살의 내향에서 인다라를 이야기할 수 있다. -
004_0024_b_01L知己之所入。唯應度者。乃見須彌入
004_0024_b_02L芥子中已
上 是故爾也。問十所以中。難
004_0024_b_03L思解脫。與此何別。答三乘之中。神
004_0024_b_04L力暫現。非是實德。若一乘中變化。卽
004_0024_b_05L是實德故別也。亦有具足理因陁6)羅及
004_0024_b_06L事因陁*羅等者。等取理事因陁羅。事
004_0024_b_07L理因陁羅也。十佛普賢法界宅者。前
004_0024_b_08L云因果二位。法性家內。眞實德用。性
004_0024_b_09L在中道之法性家及因陁羅尼家微細家
004_0024_b_10L與此法界宅一也。若前之法性中道。唯
004_0024_b_11L是內證者。旣云歸家者。證本性故。則
004_0024_b_12L法性卷下第一○張與歸家之家。旣不
004_0024_b_13L別故。並是內證耶。然則內證中。不
004_0024_b_14L論因陁羅。何故釋歸家之家。云法界陁
004_0024_b_15L羅尼家。因陁羅尼家微細家耶。是故
004_0024_b_16L約十佛證邊。雖是內證。旣云十佛普
004_0024_b_17L賢法界宅。則亦通普賢境界。何唯內
004_0024_b_18L證耶。是則此法界宅。與前法性家。不
004_0024_b_19L別故。正唯外化。不碍所現內證也。略
004_0024_b_20L疏云。聖境有二。謂理量二法。此二
004_0024_b_21L各有二法因陁羅網境界。則理中量。及
004_0024_b_22L量中之一分耳已
上 一云理中量者。佛
004_0024_b_23L外向。量中之一分者。普賢內向故。唯
004_0024_b_24L佛外向。與普賢內向中得說因陁羅。若
-
004_0024_c_01L오직 부처의 내증에 의거하거나 보현보살의 외향에 의거하여서는 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이치와 인식의 두 법은 이치(理)의 인다라와 현상(事)의 인다라이고, ‘이치 속의 인식’은 이치와 현상(理事)의 인다라, ‘인식 속의 일부분’은 현상과 이치(事理)의 인다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4구의 인다라이다.세 번째의 나머지 예를 든 부분44) 중에서 “역순逆順과 주반主伴이 서로 이루어 주는 등의 ……”라고 한 것은 앞에서 법계의 집에 이치와 현상의 인다라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서로 막힘없음을 밝히고 지금 나머지 역순 등을 드러낸 것이다. 역逆은 오열중비五熱衆鞞45)이고, 순順은 6바라밀의 바른 행동이다. “등”은 인법人法, 교의敎義 등의 10법과 동시구족문 등의 나머지 문들을 가리킨다.
나. 연기다라니의 대의大義 설명에 대한 해설지금까지는 전체의 세 번째 단락인 석문(釋文 : 글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해석하는 것)에서 두 단으로 나눈 중의 첫 부분인 본문 내용을 곧바로 해석하는 부분이었다. 이 아래부터는 두 번째 부분인 다라니의 전체적 의미에 대한 료간(料簡 : 나누어 분석적으로 설명함)이다. 이 료간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의 “만약 (연기의 참된 모습의 다라니를) 보고자 하면 ……” 이하에서는 연기다라니의 뜻을 곧바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의 “묻는다. 초교初敎에서부터는 ……” 이하에서는 질문과 대답으로 삼승과 다른 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많은 내용을 설명하는 다른 책들에 미룬 것(推廣)이다.
가) 연기다라니의 뜻에 대한 직접적 설명에 대한 해설첫 번째 곧바로 드러낸 부분은 다시 둘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다라니의 뜻을 곧바로 드러낸 것이고 아랫부분인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 이하는 앞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앞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는 수전법數錢法에 의거하여 다라니의 뜻을 드러내고 있고, 뒤의 “동전 중에서 ……” 이하에서는 비유를 통하여 수전법을 설명하고 있다. 앞의 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앞에서는 하나하나의 현상(一事)에 열 개의 동전이 갖추어져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고, 뒤의 “하나하나의 동전 중에 …… 그에 준해 알 수 있다.”에서는 하나하나의 동전에 모두 수전법을 해석하는 10현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가) 수전법數錢法 설명에 대한 해설(다시 하나하나에 열이 갖추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앞부분은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앞부분은 전체 내용을 드러낸 것이고, -
004_0024_c_01L唯約佛內證。及普賢外向中不論也。今
004_0024_c_02L釋理量二法者。理因陁羅及事因陁羅
004_0024_c_03L理中量者。理事因陁羅。量中之一分
004_0024_c_04L者。事理因陁羅。是故此是四句因陁
004_0024_c_05L羅處也。三例餘中逆順主伴相成等者
004_0024_c_06L前明法界宅中。理事因陁羅具足自在
004_0024_c_07L今此例現所餘逆順等也。逆則五熱衆
004_0024_c_08L鞞。順則六度正行也。等者。等取人
004_0024_c_09L法敎義與同時具足等所餘門法也。上
004_0024_c_10L來大段第三釋文下。意有二段中初正
004_0024_c_11L釋文竟。
004_0024_c_12L自下第二料簡陁羅尼大義三。初若欲
004_0024_c_13L觀下。正現緣起陁羅尼義。次問初敎
004_0024_c_14L以去下。問答現示。與三乘別。三推
004_0024_c_15L廣。初中亦二。初正現陁羅尼意。後
004_0024_c_16L上來所明下。結前也。初中亦二。先約
004_0024_c_17L數錢法現陁羅卷下第一一張尼意。後
004_0024_c_18L如錢中下。擧喩例法。初中二。先現
004_0024_c_19L一一錢中具十无盡。後一一錢中依下
004_0024_c_20L乃至准之可解者。現前一一錢中。皆
004_0024_c_21L具能釋十門也。初中三。先若欲下。摠
004_0024_c_22L「妙」下經有「功德成就」{乙}。「號」下經有「須
004_0024_c_23L彌」{乙}。「一」下經有「於是」{乙}。「者」下經有
004_0024_c_24L「維摩詰」{乙}。「進」疑「惟」·或「議」{乙}。「羅」
004_0024_c_25L下法界圖本文有「尼」次同。
-
004_0025_a_01L그 다음의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 이하는 중문과 즉문을 따로 따로 해석한 것이며, 마지막의 “지금까지 설명한 오는 것과 가는 것 ……” 이하는 중문과 즉문의 두 문 전체에 대하여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의심을 없앤 것이다.
㉮ 수전법數錢法의 개요 설명에 대한 해설첫 번째 (전체 내용을 드러낸) 부분46)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연기의 참된 모습(緣起實相)”은 내증이고, 수전법의 중문과 즉문은 내증을 드러내는 방편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중문이 곧 연기이고, 즉문이 곧 연기의 참된 모습으로서 모두 내증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연기의 참된 모습과 중문을 설명하고서 끝 부분에 “연기의 오묘한 이치(緣起妙理)”라고 하였고, 「의리장」에서는 “또한 현상(事)의 동전에 의거하여 저 일승 연기의 다함없는 다라니법을 비유한다.”47)고 하였으며, 또 『화엄종요華嚴宗要』48)에서는 “여기에서 설명하려는 바(所詮)인 보법普法을 밝히는 뜻은 …… 바로 이 화엄경이 설명하려는 바(所詮)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같은 뜻이다.문 수전법의 비유는 누가 처음 창안한 것인가?답 지엄이다. 『보법기普法記』49)에서 “수전법은 지엄 법사가 말씀하신 뜻이고, 의상 법사가 전해 온 말씀으로서 이 뜻을 생각하고 헤아려보니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에 지금 그것에 대하여 서술한다.”라고 하였고, 또 『화엄종요』에서는 “이 수전법의 방법은 지엄 법사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또한 도리가 있으므로 이제 그것을 택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전법이 지엄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법장과 징관, 신라에서는 의상과 원효가 세상에 이것을 유통시켰다.문 동체同體와 이체異體는 수전법인가? 중문과 즉문은 수전법인가?답 둘 다 그러하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동체와 이체, 중문과 즉문을 막론하고 만일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를 쓰면 수전법이고, 만약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를 쓰지 않으면 수전법이 아니다. 동체와 이체, 중문과 즉문에 대하여는 지엄 이전에 두순 화상 등이 또한 말씀하셨지만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에 의거하여서 연기법을 드러낸 것은 지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문 경전과 논서에서 동전을 헤아리는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
004_0025_a_01L標。次此中有二下。別釋中卽二門。後
004_0025_a_02L如上所說來去下。通約二門問答除疑
004_0025_a_03L也。初中一云緣起實相者。內證。數
004_0025_a_04L錢中卽者。現內證之方便。今釋中卽
004_0025_a_05L緣起。卽是緣起實相。非是內證。是
004_0025_a_06L故今此緣起實相與中門。終云緣起妙
004_0025_a_07L理。義理章云。且約事錢。況彼一乘
004_0025_a_08L緣起无盡陁羅尼法。華嚴宗要云。此
004_0025_a_09L明所詮普法義者。乃至正是此經所詮
004_0025_a_10L之義已
上 一義也。問數錢之喩。誰始
004_0025_a_11L出耶。答儼師是也。謂普法記云。數
004_0025_a_12L錢之法。智儼法師所說之義。義相法
004_0025_a_13L師所傳之辭。思量此義。有道理故。今
004_0025_a_14L須述也。又宗要云。此數錢門。儼法
004_0025_a_15L師出。亦有道理。故今取之已
上 故知
004_0025_a_16L數錢之法。出自儼師。而唐國則藏師
004_0025_a_17L與澄觀。新羅則義相與元曉。流通於
004_0025_a_18L世也。問同異體是數錢之法耶。中卽
004_0025_a_19L是數錢之法耶。答如問二義。今釋无
004_0025_a_20L問同異體與中卽。若用數錢喩則數錢
004_0025_a_21L之法也。若不用數錢處。則非數錢也。
004_0025_a_22L同異體中卽者。儼師已前。杜順和尙等
004_0025_a_23L亦說。約數錢喩。現緣起法。則始自儼
004_0025_a_24L師故爾云也。問經論中。有說數錢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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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5_b_01L답 다만 논서에서 별시의취別時意趣를 해석하는 가운데에 “동전 한 개 …… 백 개, 천 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경전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그렇지만 연기법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방편이므로 취한 것이다.문 수전법의 뛰어난 이점은 무엇인가?답 『개종기開宗記』50)에서는 “수전법은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고 열반의 무애한 공덕(德)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수전법을 배우면 보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고 듣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므로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였다. 수전법을 배우면 자기 몸을 떠나지 않고서도 하나하나의 터럭 구멍에서 많은 부처님의 바다를 보고,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많은 부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머무르는 곳이 부처님의 법계임을 보고 또한 자기의 몸이 부처님 스스로의 몸이고, 자신의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임을 보게 되므로 열반의 무애한 공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연기관을 배우고, 보현행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수전법의 방법을 따라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계도』에서) “만일 연기 실상의 다라니 법을 보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수십전법數十錢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 중문中門과 즉문卽門의 설명에 대한 해설(두 번째의 중문과 즉문을) 따로 해석하는 부분51) 중 앞의 구절은 중문과 즉문을 나열하였고, 그 뒤의 “첫 번째 문에 둘이 있는데, 첫 번째는 ……” 이하는 두 문 각각의 내용을 따로 해석한 것인데, 앞의 중문에 대해서는 먼저 오고 가는 뜻에 대하여 설명한 후 뒤의 “하나의 문에 10문을 완전하게 포섭하여 다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이하는 다함(盡)과 다하지 못함(不盡)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처음의 (중문과 즉문을 나열함과) 관련하여서 말한다.문 여기에서 중문은 “위로 향하여 오고, 아래로 향하여 간다.(向上來向下去)”고 하고 즉문은 “위로 향하여 가고, 아래로 향하여 온다.(向上去向下來)”고 하였는데, 「의리장」에서는 이체의 중문에 대하여는 “위를 향하여 헤아리고, 아래를 향하여 헤아린다.(向上數向下數)”고 하고 즉문에 대하여는 “위를 항하여 가고, 아래를 향하여 온다.(向上去向下來)”고 하였고, 동체의 중문과 즉문에서 따로 위를 향함(向上)과 아래를 향함(向下), 오는 것(來)과 가는 것(去)의 뜻을 구별하지 않았다.52) 한편 지상(至相 : 지엄을 가리킴)의 『십현장』53)에서는 이체의 중문과 즉문에 대하여 모두 -
004_0025_b_01L答但論中。釋別時卷下第一二張意趣
004_0025_b_02L中云。一錢乃至百千等經則无文。然
004_0025_b_03L示緣起法最妙方便。故取之也。問此
004_0025_b_04L數錢法。勝益云何。答開宗記云。數
004_0025_b_05L錢法者。治生死執著病之第一藥。成涅
004_0025_b_06L1)盤无碍德之最勝詮也已
上 若學數錢
004_0025_b_07L法者。隨所見處。竟无所著。隨所聞
004_0025_b_08L處。遠離諸取故。治生死執著病之第一
004_0025_b_09L藥也。不離自身。一一毛孔。見諸佛海
004_0025_b_10L一一塵中。見佛刹海。見自所居。是
004_0025_b_11L佛法界。亦見自身是佛自體。亦見自
004_0025_b_12L心是佛智慧。故云成涅槃无碍德之㝡
004_0025_b_13L勝詮也。是故欲學緣起觀。欲修普賢
004_0025_b_14L行。須依數錢之門。乃可得也。是故
004_0025_b_15L云若欲觀緣起實相陁羅尼法者。先應
004_0025_b_16L學數十錢法也。別釋中。先列中卽
004_0025_b_17L二門。後初門中有二。一者下。別釋
004_0025_b_18L二門也。初中門中。先辨來去之義。後
004_0025_b_19L問一門中。攝十盡不下。論盡不盡也。
004_0025_b_20L初中問此中門云。向上來向下去。卽
004_0025_b_21L門云。向上去向下來。義理章異體中
004_0025_b_22L門云。向上數向下數。卽門云。向上
004_0025_b_23L去向下來。同體中卽二門。不別向上
004_0025_b_24L向下來去之義。至相十玄章異體中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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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5_c_01L“위를 항하여 가고, 아래를 향하여 온다.(向上去向下來)”고 하였다.54) 이와 같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답 어떤 사람은 중문에서는 (다른 것들을) 가지고 가고, 가지고 오며, 즉문에서는 가고 오는 것이라고 한다. 즉 중문에서는 오는 문에서는 뒤의 아홉을 가지고 첫 번째로 오고, 가는 문에서는 앞의 아홉을 가지고 열 번째로 향하며, 즉문에서는 첫 번째가 두 번째와 일치하고, 첫 번째가 세 번째와 일치하고 …… 첫 번째가 열 번째와 일치하며, 열 번째가 아홉 번째와 일치하고, 열 번째가 여덟 번째와 일치하고 …… 이와 같이 열 번째가 첫 번째와 포섭된다(具).문 10개의 동전에서의 오고 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답 중문의 10개의 동전에서 첫 번째는 오는 뜻은 있지만 가는 뜻은 없고, 열 번째는 가는 뜻은 있지만 오는 뜻은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오고 가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즉문의 10개의 동전에서 첫 번째는 가는 뜻은 있지만 오는 뜻은 없고, 열 번째는 오는 뜻은 있지만 가는 뜻은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오고 가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문 왜 그러한가?답 중문에서는 첫 번째 동전에 뒤의 아홉 개가 와서 포섭될 뿐, 첫 번째 동전 앞에 첫 번째 동전으로 가서 포섭될 다른 동전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동전에는) 오는 뜻만 있고 가는 뜻은 없다. 열 번째 동전은 앞의 아홉 개의 동전이 가서 합쳐질 뿐, 열 번째의 동전 뒤에는 열 번째 동전으로 와서 포섭될 동전이 없으므로 (열 번째 동전에는) 오직 가는 뜻만 있고 오는 뜻은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그 앞의 동전들은 가서 포섭되고, 뒤의 동전들은 와서 포섭되므로 오는 뜻과 가는 뜻이 갖추어져 있다. 즉문에서의 첫 번째 동전은 두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동전과 일치되니 가는 것만 있고, 이 첫 번째의 동전 앞에는 와서 포섭될 다른 동전이 없으므로 (첫 번째의 동전에는) 가는 뜻만 있고 오는 뜻은 없다. -
004_0025_c_01L二門。並云向上去向下來已
上 如是非
004_0025_c_02L一。其義云何。答一云中門云。將去
004_0025_c_03L將來。卽門云。去也來也。謂中門立
004_0025_c_04L在來門。則將後九來趣。第一立在去門
004_0025_c_05L則將前九去向第十也。卽門中一卽二
004_0025_c_06L一卽三等。如是第一卷下第一三張 卽
004_0025_c_07L於第十。十卽九十卽八等。如是第
004_0025_c_08L十。具於一也。問十錢中來去云何。答
004_0025_c_09L中門十錢。初一有來義无去義。第十
004_0025_c_10L有去義无來義。向下門中反此。中間
004_0025_c_11L諸錢。具來去二義也。卽門十錢。初一
004_0025_c_12L有去義无來義。第十有來義无去義。向
004_0025_c_13L下反此。中間諸錢。具來去二義也。問
004_0025_c_14L何故爾耶。答中門初一中。以後九來
004_0025_c_15L具耳。初一之前。更无餘錢將去。具
004_0025_c_16L於初一中故。唯有來義无去義也。第
004_0025_c_17L十中以前九將去具耳。第十以後。更
004_0025_c_18L无餘錢將來。具於第十中故。唯有去
004_0025_c_19L義无來義也。向下反此。中間諸錢。前
004_0025_c_20L則將去具。後則將來具。故來去二
004_0025_c_21L義具也。卽門中初一者。此一卽於第
004_0025_c_22L二乃至第十而去耳。以此一之前无別
004_0025_c_23L餘錢可來具故。唯有去義无來義。第
004_0025_c_24L「盤」音通「槃」{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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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6_a_01L열 번째의 동전은 아홉 번째부터 첫 번째까지의 동전과 일치하니 오는 것만 있고, 이 열 번째의 동전 뒤에는 가서 일치할 수 있는 다른 동전이 없으므로 오직 오는 뜻만 있고 가는 뜻이 없다. 향하문은 이와 반대이다.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앞의 동전들이 와서 포섭되고, 뒤의 동전들로 가서 포섭되므로 오는 뜻과 가는 뜻이 갖추어져 있다.문 그렇다면 중간의 나머지 동전들은 오는 뜻과 가는 뜻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어째서 다 같이 위를 향하고(向上), 아래를 향한다(向下)고 하는가?답 실제로는 이야기한 것처럼 오는 뜻과 가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첫 번째 동전에 오는 뜻만 있고 가는 뜻이 없으므로 그 첫 번째 동전에 의거하여 “위로 향하여 온다.”는 이름을 붙이고, 열 번째 동전에는 가는 뜻만 있고 오는 뜻이 없으므로 그 열 번째 동전을 따라서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이름 붙인다.
어떤 사람은 위를 향함과 아래를 향함, 오는 것과 가는 것의 뜻은 모두 헤아리는 주체(能數)인 마음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일 뿐 헤아림의 대상(所數)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열 번째에 있으면서 (하나의 현상에) 각기 10개의 동전을 갖추고 있는 10개의 동전을 헤아릴 때에는 첫 번째에서 열 번째로 헤아리는 것이 모두 나의 헤아리는 주체의 마음을 향하여 오는 것이므로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하고, 열 번째에서 첫 번째로 헤아리는 것은 나의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므로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만일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첫 번째 동전에 있으면서 10개의 동전을 헤아릴 때에는 열 번째에서 첫 번째로 헤아리는 것은 나의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을 향하여 오는 것이므로 “아래를 향하여 온다.”고 하고, 첫 번째에서 열 번째로 헤아리는 것은 나의 헤아림의 주체인 마음을 향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열 번째를 향하여 가는 것이므로 “위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중문에서는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열 번째에 있기 때문에 “위를 향하여 오고,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아래의 즉문과 지상(지엄) 스님의 『십현장』에서 이체의 중문과 즉문에 대해 모두 “위를 향하여 가고, 아래를 향하여 온다.”고 한 것은 헤아리는 주체인 마음이 첫 번째에 있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뒤의 입장에 대하여는 『법계도』의 뒷부분에서 -
004_0026_a_01L十錢卽於九八乃至第一而來耳。此十
004_0026_a_02L之後无別。餘錢可去卽故。唯有來義
004_0026_a_03L无去義。向下反此也。中間諸錢。前
004_0026_a_04L則來具。後則去具故。來去二義具也。
004_0026_a_05L問若爾。中間諸錢。具有來去二義。何
004_0026_a_06L故通云向上向下耶。答約實則爾具來
004_0026_a_07L去義。然初錢有來義无去義故。約
004_0026_a_08L初錢得向上來名。第十有去義无來義
004_0026_a_09L故。從第十錢。得向下去名也。一云向
004_0026_a_10L上向下與來去二義者。並約能數心云
004_0026_a_11L耳。非約所數之法。若能數之心。立
004_0026_a_12L在第十列。各具十卷下第一四張之十
004_0026_a_13L門時。從第一乃至第十列。則皆向
004_0026_a_14L吾能數之心來。故云向上來。從第十
004_0026_a_15L乃至第一。則背吾能數心1)夫。故云
004_0026_a_16L向下去。若能數之心。立在初錢列十
004_0026_a_17L門時。從第十乃至初一列。則向吾能
004_0026_a_18L數心來。故云向下來。從初乃至第十
004_0026_a_19L列。則不向吾能數心來。但向第十去
004_0026_a_20L故云向上去也。是故今此中門。則能
004_0026_a_21L數之心在第十。故云向上來向下去也。
004_0026_a_22L下卽門乃至至相十玄異體中卽二門並
004_0026_a_23L云。向上去向下來者。能數之心。在
004_0026_a_24L於初一故爾也。後義中下文云。問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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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6_b_01L“지금까지 이야기한 가고 오는 뜻의 그 모습은 어떠한가? 스스로의 순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항상 가고 온다.”고 하고, 청량이 “‘가고 오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가 전체에 들어가되 하나의 자리는 그대로 있고, 전체가 하나로 들어가지만 전체의 자리는 그대로 있는 것”55)이라고 하여 스스로의 위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그대로 있는 것, 서로 일치하고 들어가는 것을 오는 것과 가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오는 것과 가는 것을 오로지 헤아림의 주체인 마음에 의거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 까닭에 이 주장은 따르기 어렵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위를 향함”과 “아래를 향함”은 헤아림의 주체인 마음에 의거한 것이고, 오는 것과 가는 것은 헤아림의 대상에 의거한 것이다. 10개의 동전을 놓고서 첫 번째에서 열 번째로 헤아리면 “위를 향함”이고 열 번째에서 첫 번째로 헤아리면 “아래를 향함”이다. 포섭하는 주체 (能具)에 의거하면 오는 것이고, 포섭되는 대상(所具)에 의거하면 가는 것이다. 즉 첫 번째가 포섭하는 주체가 될 때에 그 뒤의 아홉으로 와서 포섭되는 것이므로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한다. 포섭되는 대상의 입장에서 포섭하는 주체를 대비시키면 뒤의 아홉이 첫 번째로 향하여 가서 포섭되는 것이므로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만약 열 번째를 포섭하는 주체로 하였을 때에는 앞의 아홉이 열 번째로 와서 포섭되는 것이므로 온다고 하고 포섭되는 대상의 입장에서 합치는 주체인 열 번째를 바라보면 앞의 아홉이 포섭되는 대상으로서 포섭하는 대상을 향하므로 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는 포섭하는 주체에 서서 온다고 하고 포섭되는 대상에 서서 간다고 한다. 청량이 “‘가고 오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가 전체에 들어가되 하나의 자리는 그대로 있고, 전체가 하나로 들어가지만 전체의 자리는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하나가 전체로 들어갈 때에 포섭하는 주체에 입각한 것을 온다고 하고, 포섭되는 대상에 입각한 것을 간다고 한 것이고, 전체가 하나로 들어갈 때에 하나가 포섭하는 주체가 되고 전체는 포섭되는 대상이 되므로 온다고 하였다. 만약 포섭되는 대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전체에 들어가고 전체가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가고 오는 뜻이다. 하나와 전체가 각각의 모습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으므로 오고 가는 것은 헤아림의 대상이 오고 가는 것이다. -
004_0026_b_01L上所說去來義其相云何。答自位不動
004_0026_b_02L而恒去來。淸凉云。去來不動者。一
004_0026_b_03L入多而一位存。多入一而多位存已
上 自
004_0026_b_04L位不動者存。互相卽入者來去。則何
004_0026_b_05L得云來之與去。唯約能數之心耶。是
004_0026_b_06L故此義難也。今釋向上向下者。約能
004_0026_b_07L數之心來去者。約所數法也。於十錢
004_0026_b_08L中。從一至十列則向上。從十至一列
004_0026_b_09L則向下。約能具能具故云來。約所具
004_0026_b_10L所具故云去。謂一2)謂能具時。以後
004_0026_b_11L九將來具。故云向上來。立在所具望
004_0026_b_12L於能具。則後九去向初一中具。故云
004_0026_b_13L向下去。乃至若立在第十能具。則前
004_0026_b_14L九向來第十具。故云來。以所具望能
004_0026_b_15L具第十。則前九是所具而向去具。故云
004_0026_b_16L去。是故於前中立在能具。能具云來
004_0026_b_17L也來也。立在所具。所具云去也去卷下
004_0026_b_18L第一五張也。淸涼云。去來不動者。一
004_0026_b_19L入多而一位存。多入一而多位存已
上 一
004_0026_b_20L入多時。立在能具則云來。立在所具則
004_0026_b_21L云去。多入一時。一爲能具故。多爲所
004_0026_b_22L具而來。若立所具之邊則云去。是故
004_0026_b_23L一入多多入一。是去來義。一多之不
004_0026_b_24L壞則不動義。是則來去者。所數法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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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6_c_01L(중문에 대한 설명 중) 첫 번째의 오는 것과 가는 것의 뜻에 대하여 곧바로 설명하는 부분은 앞에서는 하나하나의 현상에 열 개의 동전이 포섭되어 있음을 곧바로 설명하고 있고, 뒤의 “이미 하나에 (10개가) 갖추어졌다.” 이하는 하나하나의 현상에 다함없이 포섭되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앞부분은 다시 둘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오는 것과 가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이고 뒤의 “이미 하나라고 하였는데 ……” 이하는 질문과 대답으로 의심을 없애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은 다시 둘로 이루어져 있으니, 앞부분에서는 오는 것과 가는 것에 대하여 곧바로 해석하고 있고, 뒤의 “이와 같이 오고 가며 살펴보면” 이하는 정리하는 것이다. 앞부분은 먼저 장문章門을 나열한 후, 뒤의 “위를 향하여 오는 것에 10가지가 있다.” 이하에서 두 문에 대하여 나누어 해석하고 있다. 앞부분인 장문章門을 나열하는 것에서는 반복하여 앞의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다.(一中十)”는 것을 가리켜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하였고, 반복하여 앞의 “열 번째에 첫 번째가 들어 있다.(十中一)”는 것을 가리켜 “아래를 향하여 온다.”고 한다.문 위를 향함과 아래를 향함의 두 문에는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는데, 어찌하여 오는 것에 대한 문에는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다.(一中十)”고 하고, 가는 것에 대한 문에는 “열 번째가 첫 번째에 들어 있다.(十中一)”고 하는가?답 두 문이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오는 것에 대한 문은 첫 번째로부터 이름을 얻은 것이므로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다.(一中十)”고 하였다. 가는 것에 대한 문도 또한 그러하다.문 위를 향하여 오는 것과 아래를 향하여 가는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답 『개종기』에서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향하는 것을 위를 향하여 온다고 하고, 열반을 버리고 생사를 향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한다. “여실如實한 도리를 타고 와서(來) 정각을 이룬다.”거나 “잘 오신 이, 세존이시여!(善來世尊)” 등은 바로 이런 뜻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대연기법계의 역순을 두루 갖추고 자유로운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위를 향하고”, “아래를 향한다.”고 말하였을 뿐이다.“위를 향하여 온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10문이 있는데, 같지 않다.”는 것은 먼저 10문을 드러낸 것이고, 그 아래는 10문에 대한 해석이다. 해석에서는 먼저 하나의 문에 대하여 해석하였고, 뒤의 “나머지 문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하는 나머지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앞부분의 (먼저 10문을 드러낸 것은) 제대로 갖추어 이야기하면 마땅히 “첫 번째의 문에 10가지가 있다.”고 했어야 한다.“첫 번째(一者)는 첫 번째(一)이다. 왜냐하면” 등은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동전에는 위전位錢, 체전體錢, 덕전德錢 등이 있다. -
004_0026_c_01L來去也。初正辨來去中。先正辨一一
004_0026_c_02L錢中具十。後3)旣一門中具足下。現一
004_0026_c_03L一錢中有無盡也。初中亦二。先釋來
004_0026_c_04L去二門。後*旣云一者下。問答除疑。初
004_0026_c_05L中亦二。先正釋來去。後如是往反勘
004_0026_c_06L下結。初中先列章門。後言向上來中
004_0026_c_07L有十下。別釋二門。初中牒前一中
004_0026_c_08L十云向上來。牒前十中一云向下來也。
004_0026_c_09L問向上向下二門中。各具十門。何故
004_0026_c_10L來門則云一中十。去門則云十中一耶。
004_0026_c_11L答二門各具十門。然來門則從初門得
004_0026_c_12L名。故云一中十。去門亦爾也。問向
004_0026_c_13L上來向下去者。表何義耶。答開宗記
004_0026_c_14L云。捨生死向涅4)盤則向上來。捨涅*盤
004_0026_c_15L向生死。化衆生則向下去。乘如實道
004_0026_c_16L來成正覺。又善來世尊等是5)比義也。
004_0026_c_17L今釋。欲表大緣起法界具足逆順自在
004_0026_c_18L之義。故云向上向下耳。言向上來有
004_0026_c_19L十門不同者。先標十門下釋。釋中先
004_0026_c_20L釋一門。後餘門亦如是等者。例餘
004_0026_c_21L初中實具言。則應云就第一門中有十
004_0026_c_22L一者一。何以故。等且略也。錢中有
004_0026_c_23L「夫」作「去」{乙}。「謂」作「爲」{乙}。「旣」作
004_0026_c_24L「現」{乙}次同。「盤」音通「槃」{編}次同。「比」
004_0026_c_25L作「此」{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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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7_a_01L처음의 “첫 번째(一者)”는 위전이고, 그 다음의 “첫 번째(一)”는 체전이며, 뒤의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一中二)”라는 것 등은 덕전이다.“이것이 본수本數이다.”라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문 1이 본수인가 아니면 10이 본수인가?답 전자이다.문 (『화엄경』) 제4회 중의 정진림 보살精進林菩薩의 게송에 이르기를 “10진법의 수법에서 한 단위씩 늘려 가면 무량에 이르는 것과 같다. 수법에는 체성이 없지만 지혜가 있어서 그것을 구별한다.”고 하였으므로 10도 본수인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답 열 개의 수를 드러낼 때에는 1이 본수이고, 백과 천 등의 수를 드러낼 때에는 10이 본수이다. 경에서는 무량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므로 10도 본수가 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하나가 열을 갖추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므로 1을 본수로 삼는다.문 “나머지에서 동전을 갖추고 있다.”56)는 것은 무엇인가?답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약 오는 다섯 번째 문에서라면 “첫 번째는 다섯 번째, 두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세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네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다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여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오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아홉 번째, 두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세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네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이런 식으로 아홉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열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가는 다섯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여섯 번째, 두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세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네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다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여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일곱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두 번째, 두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세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네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다섯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여섯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
004_0027_a_01L位。錢有體錢有德卷下第一六張錢。謂
004_0027_a_02L初云一者則位錢。次云一則體錢。乃
004_0027_a_03L至云一中二等則德錢也。是本數者。一
004_0027_a_04L是本數耶。十是本數耶。答如前問第
004_0027_a_05L四會精進林菩薩偈云。比如數法十。增
004_0027_a_06L一至無量。數法无體性。智慧故差別
004_0027_a_07L已
上 則十並本數。何不爾耶。答現十
004_0027_a_08L1)▩時。一是本數。現百千時。十是本
004_0027_a_09L數也。經則欲現无2)▩故。十並本數
004_0027_a_10L今此則欲現一之具十故。擧一爲本數
004_0027_a_11L也。問例餘中具錢云何。答一云 3)若
004_0027_a_12L立在來第五門。應云第一五。第二五
004_0027_a_13L中一。第三五中二。第四五中三。第
004_0027_a_14L五五中四。第六五中六。乃至第十五
004_0027_a_15L中十也。若立在來第九門。應云第一
004_0027_a_16L九。第二九中一。第三九中二。第四
004_0027_a_17L九中三。乃至第九九中八。第十九中
004_0027_a_18L十也。若立在去第五門。應云第一六
004_0027_a_19L第二六中十。第三六中九。第四六中
004_0027_a_20L八。第五六中七。第六六中五。第七
004_0027_a_21L六中四。乃至第十六中一也。若立在
004_0027_a_22L去第九門。應云第一二。第二二中十
004_0027_a_23L第三二中九。第四二中八。第五二中
004_0027_a_24L七。第六二中六。乃至第十二中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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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7_b_01L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약 오는 다섯 번째 문에서라면 “첫 번째는 다섯 번째, 두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세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네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다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여섯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일곱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다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오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아홉 번째, 두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세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네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다섯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이런 식으로 아홉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열 번째는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만약 오는 열 번째 문이라면 가는 첫 번째 문과 같으므로 “첫 번째는 열 번째, 두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세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네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다섯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여섯 번째, 여섯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일곱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열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다섯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여섯 번째, 두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일곱 번째, 세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여덟 번째, 네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다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여섯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일곱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일곱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여섯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아홉 번째 문이라면 “첫 번째는 두 번째, 두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세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네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여덟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아홉 번째, 아홉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 열 번째는 두 번째에 들어 있는 첫 번째”이다. 만약 가는 열 번째 문이라면 오는 첫 번째 문과 같으므로 “첫 번째는 첫 번째, 두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두 번째, 세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세 번째, 네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다섯 번째, 이런 식으로 열 번째는 첫 번째에 들어 있는 열 번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것의 첫 번째와 오는 것의 마지막 동전을 갖추고 있는 것이 다르지 않고, 오는 것의 첫 번째와 가는 것의 마지막 동전을 갖추고 있는 것이 다르지 않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후자가 옳다.문 중문에서 오는 것과 가는 것 두 문에 대한 해석을 매듭짓는 부분에서 -
004_0027_b_01L一云若立在來第五門。應云第一五。第
004_0027_b_02L二五中四。第4)一五中三。第四五中二
004_0027_b_03L第五五中一。第六五中六。第七五中
004_0027_b_04L七。乃至第十五中十也。若立在來第
004_0027_b_05L九門。應云第一九。第二九中八。第
004_0027_b_06L三九中七。第四九中六卷下第一七張
004_0027_b_07L第五九中五。乃至第九九中一。第十
004_0027_b_08L九中十也。若立在第十門。則與去
004_0027_b_09L第一門同故。應云第一十。第二十中
004_0027_b_10L九。第三十中八。第四十中七。第五
004_0027_b_11L十中六 5)十中五 6)十中四。乃至第
004_0027_b_12L十十中一也。若立在去第五門。應云
004_0027_b_13L第一六。第二六中七。第三六中八。第
004_0027_b_14L四六中九。第五六中十。第六六中五。
004_0027_b_15L第七六中四 7)六中三。乃至第十六中
004_0027_b_16L一也。若立在去第九門。應云第一二。
004_0027_b_17L第二二中三。第三二中四。第四二中
004_0027_b_18L五。乃至8)二中九 9)二中十。第十二
004_0027_b_19L中一也。若立在去第十門。則與來第
004_0027_b_20L一門同故。應云第一一。第二一中二。
004_0027_b_21L第三一中三。第四一中四。第五一中
004_0027_b_22L五。乃至第十一中十也。是故去初與
004_0027_b_23L來終。具錢不別。來初與去終。具錢
004_0027_b_24L不別也。今釋存後義。問中門釋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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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7_c_01L“이와 같이 오고 가며 살펴보면 곧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여러 동전들이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드러내었는데, 어찌하여 그 뒤에서 “처음(本)과 끝(末)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나머지 8개의 동전도 앞의 예와 같으니 가히 알 수 있다.”고 하는가?답 매듭짓는 부분에서 “곧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은 앞에서 하나하나의 동전이 각기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매듭지은 것이고, “처음과 끝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이라고 한 것은 처음과 끝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을 나머지 8개의 동전도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앞에서 이미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살피고서 “곧 하나하나의 동전에 10문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가 10문을 갖추고 있는 뜻은 이미 다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제는 처음과 끝의 동전들을 나머지 동전들이 10문을 갖추고 있는 것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이다.문 무엇이 처음(本)이고 무엇이 끝(末)인가?답 처음 동전은 바로 오는 것의 처음에 해당한다. 또한 이 처음에는 가는 것의 마지막도 해당한다. 끝 동전은 바로 가는 것의 처음에 해당한다. 또한 여기에는 오는 것의 마지막도 해당한다. 앞의 글에서는 단지 오는 것의 처음과 가는 것의 처음이 동전을 모두 갖추고 있는 모습만을 드러내었고 오는 것의 마지막과 가는 것의 마지막이 동전을 모두 갖추고 있는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다. 오는 것의 처음과 가는 것의 마지막을 합하여 처음으로 하고, 오는 것의 마지막과 가는 것의 처음을 합하여 끝으로 하고서 “처음과 끝의 두 동전이 10문을 갖추고 ……”라고 하였으므로 오는 것의 처음과 가는 것의 마지막 동전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 같고, 오는 것의 마지막과 가는 것의 처음 동전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 같음을 알 수 있다. -
004_0027_c_01L去二門。竟云如是往反勘當卽知一一
004_0027_c_02L錢中具足十門已
上 現諸門中。各具十
004_0027_c_03L門。何故次云如本末兩錢中。具足十
004_0027_c_04L門。餘八錢中准例可解已
上耶。答結中
004_0027_c_05L10)卽知一一錢中具足十門者。結前一
004_0027_c_06L一錢。各具十如本末兩錢等者。擧本
004_0027_c_07L末二錢具足十門。例餘八錢。亦具十
004_0027_c_08L也。謂前已勘當一一錢中。具十之義
004_0027_c_09L而云卽知一一錢中。具足十門。則一
004_0027_c_10L一具十之義已盡現也。是故今擧本末
004_0027_c_11L錢。例餘具十也。問何者是本。何者
004_0027_c_12L是末卷下第一八張耶。答本錢則正當
004_0027_c_13L來初。亦此初中并見去終。末錢正當
004_0027_c_14L去初。亦於此中。并見來終。前文但辨
004_0027_c_15L於來初去初中。具錢相現而不別。現來
004_0027_c_16L終去終具錢之相。以來初去終合爲本
004_0027_c_17L來終去初合爲末。而云本末二錢具足
004_0027_c_18L十門等。則知來初與去終具錢狀同。來
004_0027_c_19L終與去初具錢狀同故爾也。
004_0027_c_20L▩疑「數」{乙}。▩疑「盡」{編}。「若」作「者」
004_0027_c_21L{甲}。「一」疑「三」{編}。「十」上疑脫「第六」{編}。
004_0027_c_22L「十」上疑脫「第七」{編}。「六」上疑脫「第八」
004_0027_c_23L{編}。「二」上疑脫「第八」{編}。「二」上疑脫「第
004_0027_c_24L九」{編}。「即」法界圖本文作「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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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8_a_01L질문과 대답으로 의심을 없애는 부분5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른바 하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하나가 아니라 인연에 의하여 하나를 이룬 것이다. ( ……) 열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열이 아니라 인연에 의하여 열을 이룬 것이다.”라고 한 부분에서 중략된 부분을 갖춰서 이야기하면 “이미 열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열에 하나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고 나서 “열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열이 아니라 ……”가 이어져야 한다.“모든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로서 정해진 스스로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한 것은 앞부분 모두에 대하여 스스로의 본성이 없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자재自在하지 않은 것은 곧 생겨나지만 생겨나지 않는 것(生不生)이다.”58)라는 것에서 연기에 의하여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생겨남이고, 연기에 스스로의 본성이 없는 것은 생겨나지 않음이다. 「의리장」에서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와 전체가 연기를 이루는가? 단지 본성이 없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와 전체가 연기를 이룰 수 있다.”59)고 하였으므로 본성이 없다는 것이 생겨나지 않음이고 하나와 전체가 연기를 이루는 것이 생겨남이다.인용하여 증명하는 부분60)에서 “나는 곧 공空이라고 한다.”는 생겨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한다.”는 생겨남을 증명하는 것이며, “또한 중도의 뜻이다.”는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모두 통하는 중도의 뜻을 증명하는 것이다.“서로 포용하여 막힘이 없고 그러면서도 동일한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앞에서 이야기한 “이른바 하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이 하나가 아니라 인연에 의하여 하나를 이룬 것이다. …… 스스로의 본성이 열이 아니라 ……”에 대하여 매듭짓는 부분이다.“이미 하나의 문에 …… 무진無盡의 뜻이 있다.”는 이미 하나의 문에 열을 갖추고 있으면 하나가 곧 무진無盡의 본수本數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하나의 문에 무진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갖추는가(盡)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하는가(不盡). ……”라는 것은 앞에서 “하나의 문에 무진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법계의 존재들을 모두 다 포괄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하나의 문이 그러한 것처럼 나머지 문들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한 것은 또한 다 포괄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므로 “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갖추는가,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하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대답의 뜻은 하나의 문에 법계의 모든 존재들을 다 포괄하고 있으므로 온전하게 다 갖추고 나머지 문들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 포괄하여 남김이 없지만 (모든 존재들을) 다 포괄하고 있는 나머지 문들은 하나의 문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므로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
004_0028_a_01L問答除疑中。所言一者。非自性一緣
004_0028_a_02L成故一。乃至十者。非自性十緣成故
004_0028_a_03L十者。實則具擧云。旣言十者。何得十
004_0028_a_04L中有一耶。乃至云十者。非自性十等
004_0028_a_05L也。一切緣生法无有一法定有自性等
004_0028_a_06L者。通望前以現无自性義也。不自在者
004_0028_a_07L卽生不生者。緣起現前則生緣起。无自
004_0028_a_08L性則不生也。義理章云。无自性者。何
004_0028_a_09L得一多緣起。答只由无性。得成一多
004_0028_a_10L緣起已
上 无性義者不生。一多緣起者
004_0028_a_11L生也。引證中我說卽是空。證不生義
004_0028_a_12L亦爲是假名。證生義。復是中道義。證
004_0028_a_13L通生不生中道義也。當知至无碍者
004_0028_a_14L結前所言一者非自性一。緣成故一。乃
004_0028_a_15L至非自性十等也 1)旣一門至无盡義者
004_0028_a_16L旣得一門具十。則一是現无盡之本數
004_0028_a_17L故云一門有无盡也。問一門中攝十盡
004_0028_a_18L不等者。前云明知一門中有无盡義。則
004_0028_a_19L法界之法旣已盡也。然云如一門。餘
004_0028_a_20L亦如是。則亦有所未盡之法。是故
004_0028_a_21L問云。一門攝十盡卷下第一九張不盡
004_0028_a_22L耶。如是問也。答意者。一門中盡攝
004_0028_a_23L法界一切諸法。故云盡。餘餘門亦如
004_0028_a_24L是攝盡无所遺也。然而餘餘門盡。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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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8_b_01L문 지금 여기(『법계도』)에서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과 장공(藏公 : 법장)의 『십현장』에서 “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포섭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온전하게 다 포섭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에 열을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한 것이고, 열에 하나를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하지 못한 것이다.”61)라고 한 것은 같은 뜻인가?답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르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처음은 다르지만 끝은 같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고 한다.첫 번째 입장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 견해에 의하면 여기에서 “다른 현상(異事)도 같음(同)에 준한다.”고 하였으므로 앞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은 모두 동체同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체異體를 이야기한 것이므로 이체의 현상(異體之事)도 동체에 준한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여기에서는 동체에 의거하였는데, 법장은 이체의 중문中門에서 이야기한 것이므로 다르다. 둘째 견해에 의하면 한 종류의 10지가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지地에 각기 10지가 갖춰져 있을 때에 첫 번째 지(初地)인 환희지는 하나의 현상(一事)이고 그 뒤의 여러 지에 갖춰져 있는 환희지들은 하나(一)와 여럿(多)을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지인 이구지離垢地는 다른 현상(異事)이고 앞과 뒤의 여러 지에 갖춰져 있는 이구지들은 다른 현상으로서 하나(一)와 여럿(多)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환희지를 부를 때에 뒤의 여러 지들에 있는 환희지들이 함께 “환희지”라고 외친다. 이구지를 부를 때에는 앞과 뒤의 여러 지에 있는 이구지들이 함께 “이구지”라고 외친다. 이것이 의상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의 뜻이다. 법장의 뜻은 첫 번째 지를 부를 때에 두 번째의 이구지부터 열 번째의 법운지까지가 각각 자신들의 이름을 외친다는 것이다. 『십구장』에서 “오늘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든 이름들이 모두 하나의 이름에 들어 있다. 듣는 것을 논할 때에 하나의 이름을 들으면 모든 이름을 그대로 듣는 것이다. 만약 중생의 이름만을 듣고 부처와 보살의 이름들을 듣지 않으면 다섯 가지 잘못이 있게 된다. 곧 첫째 바르게 믿지 않음, -
004_0028_b_01L是一門之所攝。故云不盡也。問今此
004_0028_b_02L盡不盡與藏公十玄章云。問一門中攝
004_0028_b_03L十盡不。答盡不盡。何以故。一中十故
004_0028_b_04L盡。十中一故不盡已
上 一義耶。答一
004_0028_b_05L云始終並別。一云始別終同。一云詮
004_0028_b_06L別意同也。第一義中。亦有二義。初
004_0028_b_07L義者。此中云異事亦准同。則前之盡
004_0028_b_08L不盡。皆約同體說。是故例異體。故
004_0028_b_09L云以異體之事。准於同體也。如是此
004_0028_b_10L中。旣約同體。而藏師則異體中門說
004_0028_b_11L故別也。第二義者。約一種十地。一
004_0028_b_12L一地中。各具十地。初地之歡2)十者
004_0028_b_13L一事也。後諸地之所具歡喜者。辨一
004_0028_b_14L多也 3)難垢地者。異事也。前後諸
004_0028_b_15L地所具離垢者。以異事辨一多也。是
004_0028_b_16L故呼初歡喜時。後諸地中歡喜。歡喜
004_0028_b_17L一時口許也。呼離垢時。前後諸地中
004_0028_b_18L離垢。離垢一時口許也。是則相大德
004_0028_b_19L盡不盡義也。藏師義者。呼初地時。第
004_0028_b_20L二離垢。乃至第十法雲。各各自名口
004_0028_b_21L許也。十句章云。今日呼一名時。一
004_0028_b_22L切4)名。皆直是一名。論聞者時聞一
004_0028_b_23L名字。於一切名直聞也。若聞凡名。非
004_0028_b_24L佛菩薩等者。則有五種過。謂一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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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8_c_01L둘째 용맹함에서 물러서는 것, 셋째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 넷째 부처님을 헐뜯는 것, 다섯째 법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하나를 부를 때에 모든 것이 외치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법장의 뜻으로서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둘째는 의상의 뜻으로서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다 같이 하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62)라고 하였다. 이를 해석하여 “상대덕(相大德 : 의상)의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은 10개의 10층탑을 나열하고서 첫째 탑의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나머지 아홉 개 탑의 첫 번째 층들이 ‘첫 번째 층’이라고 동시에 외치고, 첫째 탑의 두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나머지 아홉 개 탑의 두 번째 층들이 ‘두 번째 층’이라고 외친다는 뜻으로서 이것은 횡진법계橫盡法界이다. 장공(藏公 : 법장)의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가 각기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뜻은 한 개의 10층탑을 세우고서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나는 첫 번째 층이다’ …… ‘나는 열 번째 층이다’라고 각기 스스로의 이름을 외친다는 뜻으로서 이것은 수진법계竪盡法界이다.”63)라고 하였다.두 번째 입장은 『십구장』에서 “첫 번째의 법장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고, 두 번째 의상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오로지64)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65)라고 하였으므로 처음은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그 책의 다음 부분에서 “어째서 열이 모두 하나의 이름을 외친다는 뜻이 법장의 뜻과 같게 되는가? 각각 스스로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아야 비로소 한꺼번에 열이 모두 하나의 이름을 외칠 수 있다. 하나의 연기법에 이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는데 (의상과 법장은) 서로 한 가지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뜻은 같다.”고 하였으므로 끝은 같다. -
004_0028_c_01L信。二退勇猛。三誑他。四謗佛。五
004_0028_c_02L輕法也。呼一時一切口許有二義。一
004_0028_c_03L者藏師卷下第二○張 呼一名時一切
004_0028_c_04L各各自名口許。二者相師呼一名時一
004_0028_c_05L切共一名口許已
上 解云相大德盡不盡
004_0028_c_06L者。如列十座十層塔。呼第一塔初層時
004_0028_c_07L餘九塔初層。初層一時口許。呼初塔
004_0028_c_08L第二層時。餘九塔第二。第二層亦皆
004_0028_c_09L口許之義。是橫盡法界義也。藏公呼
004_0028_c_10L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者。如立一
004_0028_c_11L座十層塔。纔呼初層時。我是第一層
004_0028_c_12L乃至我是第十層。各以自名口許義故
004_0028_c_13L竪盡法界也。第二義者。十句章云。一
004_0028_c_14L藏師呼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二
004_0028_c_15L相師呼一名時。一切5)唯以一名口許已
上
004_0028_c_16L故始別也。彼章次下文。問何故。十
004_0028_c_17L皆一名口許義。與藏師義同耶。答
004_0028_c_18L各各自位不動。方呼一時得6)十口許
004_0028_c_19L也 7)一緣起法中。具此二義。互擧一
004_0028_c_20L邊現故。意致齊同也已
上 故終同也。問
004_0028_c_21L「旣」法界圖本文作「現」。「十」作「喜」{甲}·
004_0028_c_22L疑「喜」{乙}。「難」作「離」{甲}·疑「離」{乙}。「名」
004_0028_c_23L經作「稱」{乙}。「唯」疑「共」{乙}。「十」下疑有
004_0028_c_24L「皆一名」{乙}。「一」上疑有「以」{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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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9_a_01L문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 그리고 10지·10탑의 비유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답 두 분은 모두 한 종류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였으므로 하나의 10층탑으로 비유한다면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층들이 “첫 번째 층”이라고 외치는 것이 의상의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뜻이고, 첫 번째 층을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층들이 모두 자기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법장의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뜻이다. 10지에 의거하여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두 스님의 뜻은 횡(橫)이라고 하면 모두 횡이고 수(竪)라고 하면 모두 수이다.그렇지만 두 스님의 뜻은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완전히 같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스님 모두 오는 첫 번째 동전이 열 개의 동전을 모두 포섭하는 것을 “온전하게 다 갖춤(盡)”이라고 하고 나머지 동전들이 모두 포섭하는 것은 첫 번째가 포섭하는 것이 아니므로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不盡)”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두 스님은 모두 같은 뜻이다.문 『십구장』에서 “법장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이와 같이 서로 다른데 어째서 같다고 하는가?답 고전古傳은 지금 질문한 것과 같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법장은 “첫 번째는 비유로 보여 주는 것으로서 수십전법數十錢法과 같다. 10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완전한 수로 하여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66)라고 하였고, 지금 이 책에서는 “만약 연기 실상의 다라니법을 보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수십전법을 배워야 한다. 이른바 동전을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헤아리는 것이다.”라고 하여 두 스님이 모두 한 종류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여서 논하고 있으므로 다르지 않다.문 『십구장』에서 “법장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의상은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모두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라고 한 것을 표현이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답 『십구장』은 옛 말씀(古辭)으로 다르게 회통할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이 『십구장』의 내용은 따르기 힘들다. 의상이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 -
004_0029_a_01L相師橫盡法界。藏師竪盡法界。及十
004_0029_a_02L地十塔之喩。云何別耶。答二公並
004_0029_a_03L約一種十錢論故。約一種十層塔呼初
004_0029_a_04L層時。第二第三等。亦以初層口許者
004_0029_a_05L相德一名口許義。呼初層時。並以第
004_0029_a_06L二第三等自名口許者。藏師自名口許
004_0029_a_07L義也。約十地亦爾。是故二師橫則並
004_0029_a_08L橫。竪則並竪也。然二師之義詮別而
004_0029_a_09L意致全同也。何者。二師並約來初一
004_0029_a_10L錢攝十盡則盡。餘門之攝法盡則非是
004_0029_a_11L初一之盡。故爲不盡。是故二師卷
004_0029_a_12L下第二一張 並一義也。問十句章云
004_0029_a_13L藏師呼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云
云。
004_0029_a_14L如是各別。何云一耶。答古傳如問。然
004_0029_a_15L此意難也。何者。藏師云。初喩示者
004_0029_a_16L如數十錢法。所以說十者。欲應圓數
004_0029_a_17L現无盡故。今1)比云若欲觀緣起實相
004_0029_a_18L陁羅尼法者。先應學數十錢法。所謂
004_0029_a_19L一錢乃至十錢已
上 二師並約一種十錢
004_0029_a_20L論。故不別也。問十句章云。藏師呼
004_0029_a_21L一名時。一切各各自名口許。相德呼
004_0029_a_22L一名時。一切2)唯一名口許已
上 則可云
004_0029_a_23L詮別耶。答十句章。則是古辭。故无
004_0029_a_24L別會。然此十句章難者。相德呼一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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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9_b_01L모두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는 것은 앞에서 처음 (하나의 동전이 열 개의) 동전을 갖출 때에도 또한 그렇게 외쳤다는 것인가, 아니면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을 논함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렇게 외쳤다는 것인가? 만약 앞에서 동전을 갖출 때에도 그렇게 외쳤다고 한다면 법장의 “하나에 열이 있고, 열에 하나가 있다.” 등의 뜻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법장은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고 의상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을 논함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렇게 외쳤다고 한다면 지금 이 책에서 “하나의 문에 열을 온전하게 다 갖추는가(盡)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하는가(不盡). ……”라고 한 것은 앞에서 논한 이미 이루어진 문에 대한 문답일 것이다. 어떻게 “온전하게 다 갖춤과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을 논하는 곳에 이르러 외침을 논할 수 있는가. 또한 “법장은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고 의상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친다.”고 하는 것에서 그 열 개의 위치에 의거하여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모두 첫 번째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하나의 이름(一名)으로 외치는 것이고,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각기 두 번째, 세 번째라는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스스로의 이름(自名)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위치만이 아니라 금·은·구리·철·기와·나무 등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여서 첫 번째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모두 금동전이라고 외치는 것이 하나의 이름(一名)으로 외치는 것이고, 첫 번째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일 후자라고 한다면 법장이 “하나에 열을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한 것이고, 열에 하나를 포함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섭하지 못한 것이다.”고 한 것은 위치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이고 금속에 은·구리 등을 포섭한다는 뜻이 아닌데 어떻게 첫 번째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비록 한 종류의 열 개의 금으로 만든 동전에 의거하여서 각기 스스로의 자리를 정하여서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되었을 때에 같은 종류의 금으로 만든 동전이기 때문에 하나에 열을 포섭하고 열에 하나를 포섭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004_0029_b_01L一切唯一名口許者。從前始具錢時。亦
004_0029_b_02L口許耶。要至盡不盡論時。方得口許
004_0029_b_03L耶。若前之具錢時。亦得口許者。與
004_0029_b_04L藏師一中十。十中一等義。不別。何
004_0029_b_05L云藏師一切自名口許。相德一切一名
004_0029_b_06L口許耶。若要至盡不盡論時。方得口許
004_0029_b_07L者。今云一門中。攝十盡不等者。因
004_0029_b_08L前所論旣成之門而問答也。何得云至
004_0029_b_09L於盡不盡論中。論口許耶。又藏師一
004_0029_b_10L切自名口許。相德一切一名口許義者
004_0029_b_11L則約其十位。呼第一時。第二第三等
004_0029_b_12L並以第一名口許者。一名口許義。呼第
004_0029_b_13L一時。餘二三等。並以第二第三等自
004_0029_b_14L名口許者。自名口許耶。非唯約位。若
004_0029_b_15L約金銀銅鐵瓦木等十錢。呼初金錢時
004_0029_b_16L銀銅鐵等錢。並以金錢卷下第二二張
004_0029_b_17L口許者。一名口許。呼初金錢時。銀
004_0029_b_18L銅鐵等錢。自名口許者。自名口許耶。
004_0029_b_19L若如後者。藏師一中十盡。十中一不
004_0029_b_20L盡。則約位而說。非約金中攝銀銅等
004_0029_b_21L義說。何故云呼初金錢時銀銅鐵等。並
004_0029_b_22L以自名口許義耶。又雖約一種。十箇
004_0029_b_23L金錢。各受自位。爲第二第三等。則
004_0029_b_24L一種金錢。亦得云一中十。十中一。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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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29_c_01L어떻게 하나에 열을 포섭하고 열에 하나를 포섭하는 것이 곧바로 금으로 된 동전을 부를 때에 은·구리·철 등의 동전들이 모두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만약 자리에 의거하여서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의상의 뜻이라고 한다면 의상 또한 (오는 문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졌으므로. …… 열 번째는 하나에 열이 들어 있다.”라 하고 가는 문은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였지 “하나에 하나가 들었고, 열에 열이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모든 자리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의상의 뜻이라고 하는가? 또한 “하나의 현상 (一事)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므로 온전하게 다 포섭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같은 하나가 열 개 있다면 비록 같은 하나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현상에 들어 있는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므로 첫 번째의 하나, 두 번째의 하나 …… 열 번째의 하나가 되어 이와 같이 각기 스스로의 자리를 갖게 되어 하나에 들어 있는 열(一中十), 열에 들어 있는 하나(十中一)라고 한다. 어떻게 첫 번째를 부를 때에 모두가 다 같이 첫 번째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의상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와 같으므로 이 내용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문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답 영관靈觀67) 대덕이 말하기를 “의상도 모두가 하나의 이름을 외친다는 것과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을 외친다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법장도 그러하였다. 즉 의상의 뜻 중에서 ‘하나의 현상에 들어 있는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여럿이다’는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하나의 현상이므로 곧 하나이다’는 모두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법장의 뜻 중에서 「육상장」에서 ‘나머지 들보와 기와 등이 모두 곧바로 서까래이다’라고 한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십현장』에서 ‘하나에 들어 있는 열, 열에 들어 있는 하나’라고 한 것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사나품소』68)에서 ‘전체가 상즉하지만 스스로의 자리는 그대로이다’69)라고 하였는데, ‘전체가 상즉’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
004_0029_c_01L故云一中十。十中一故。卽是呼金
004_0029_c_02L錢時。餘銀銅鐵等錢。並以自名口許
004_0029_c_03L義耶。又約位呼第一時。第二第三等
004_0029_c_04L並以一名口許。是相德義。則相德亦
004_0029_c_05L云。一者一緣成故。乃至第十一中十
004_0029_c_06L也。去門反此也。不云一中一。十中
004_0029_c_07L十。何故云諸位並以一名口許者。是
004_0029_c_08L相德義。又以一事辨一多故則盡已
上者
004_0029_c_09L若云是一一之十。則雖是一一。然一
004_0029_c_10L事中一多義。不相是則第一一。第二
004_0029_c_11L一。乃至第十一。如是各受自位故。亦
004_0029_c_12L是一中十。十中一。何得云呼第一名
004_0029_c_13L時。一切並第一名口許。是相德義耶。
004_0029_c_14L是故此義難也。問若爾。難者如何見
004_0029_c_15L耶。答靈觀大德云。相大德。亦一切
004_0029_c_16L一名口許。一切自名口許。二義具也。
004_0029_c_17L藏師亦爾。謂相德義中。一事中一多
004_0029_c_18L義。不相是卽多者。一切自名口許也。
004_0029_c_19L一事故卽是一者。一切一名口許也。藏
004_0029_c_20L師義中六相章云。餘栿瓦等並卽椽者
004_0029_c_21L一名口許也。十玄章一卷下第二三張
004_0029_c_22L中十。十中一者。自名口許也。舍那
004_0029_c_23L品疏云。全體相卽而自位存已
上 全體
004_0029_c_24L「比」作「此」{甲}{乙}。「唯」作「共」{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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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0_a_01L‘스스로의 자리는 그대로’라는 것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육상장」의 내용은 상즉의 뜻일 뿐으로 시방세계가 곧 하나의 티끌과 상즉한다는 것이다. 대들보나 기와 등이 하나의 서까래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십현장』의) “첫 번째에 열 번째가 들어 있고 열 번째에 첫 번째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단지 자리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만약 존재 자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같은 존재의 이름인지 다른 존재의 이름인지 말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글을 인용하여서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쳤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나품소』의 내용은 이 역시 상즉으로서 모두가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하나하나의 존재에 의거하여도 “전체가 상즉하지만 스스로의 자리는 남아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가 상즉”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스스로의 자리는 남아 있”는 것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문 이와 같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법장과 의상 두 스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답 두 스님의 뜻은 논하는 대상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즉 두 스님이 모두 10개의 금으로 만든 동전에 의거하였을 때에는 두 스님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을 이야기하고, 두 스님이 금·은·구리·철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동전에 의거하여서 말씀하실 때에는 두 스님 모두 각기 스스로의 이름을 외친다고 하신다. 만약 10보법에 의거한다면 사람 10명에 의거하여서 상즉과 상입을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고, 사람(人)·대상(法), 가르침(敎)·뜻(義) 등의 여러 법에 의거하여서 상즉과 상입을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두 스님이 단지 사람에 의거하여서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고, 사람(人)·대상(法)·가르침 (敎)·뜻(義) 등을 모두 포괄하여서 말씀하실 때에는 스스로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문 의상이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으므로 완전히 다 포괄한다.(盡)”고 한 것은 단지 하나하나의 법에 의거하여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다 포괄한다고 한 것이므로 곧 하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어째서 논하는 대상에 따라서 두 가지 뜻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답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으므로 완전히 다 포괄한다.(盡)”는 것은 하나의 문을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고, 여러 가지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여럿이라고 한 것이지 -
004_0030_a_01L相卽者。一名口許。自位存者。自名
004_0030_a_02L口許也。然此義亦難也。謂六相章文
004_0030_a_03L者。相卽義耳。如十方卽一塵等。非
004_0030_a_04L謂栿瓦等爲一椽也。一中十十中一者
004_0030_a_05L但約位言耳。若約法名則難。可言一
004_0030_a_06L法名異法名。是故引此而立一切自名
004_0030_a_07L口許者難也。舍那品疏文者。此亦相
004_0030_a_08L卽耳。非謂一切全爲一名也。雖約一
004_0030_a_09L一之法。亦云全體相卽而自位存。是
004_0030_a_10L故全體相卽。爲一名口許自位存。爲
004_0030_a_11L自名口許者難也。問如是難也。然
004_0030_a_12L則二師口許。如何見耶。答二師之義
004_0030_a_13L隨所論法見也。謂二師並約十箇金錢
004_0030_a_14L則二師並一名口許。二師並約金銀銅
004_0030_a_15L鐵等雜錢而說。則二師並各各自名口
004_0030_a_16L許。若約十普法。則約人人之十。辨
004_0030_a_17L卽入亦得。約人法敎義等諸法。辨卽
004_0030_a_18L入亦得。是故二師。唯約人人而說。則
004_0030_a_19L一名口許。通約人法敎義等而說。則
004_0030_a_20L自名口許也。問相德云。以一事辨一
004_0030_a_21L多故盡者。只是約一一之法。辨一多
004_0030_a_22L故云盡則是一名口許耳。何云隨於所
004_0030_a_23L論之法。分二義耶。答以一事辨一多
004_0030_a_24L者。以是一門。故云一事也。所具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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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0_b_01L하나하나의 법에 의거하여 논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현상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책에서 “완전히 다 포괄함과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함(盡不盡)”을 이야기한 것은 오는 것의 첫 번째에서 열을 모두 포섭하는 것을 “완전히 다 포괄한다.”고 하고 다른 문에는 완전하게 다 포섭되지 못하여서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문 앞에서 “하나의 문에 열 개의 문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할 때의 하나의 문은 오는 것의 첫 번째인가, 동시에 가는 것의 마지막이기도 한가라고 물었을 때 후자와 같다고 대답하였는데, 그렇다면 하나의 문에 열을 포섭한 것이 완전히 다 포괄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 하나의 문은) 오는 것의 첫 번째와 가는 것의 마지막 모두를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오는 것의 첫 번째라고 하는가?답 앞에서는 오는 것의 첫 번째와 가는 것의 마지막을 함께 들었지만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다 포괄하는 것과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하는 것을 논할 때에는 오직 하나의 문만을 들었다.문 갖춰져 있는 것은 아홉인데 어째서 열을 모두 포섭하고 있다고 하는가?답 포함하는 주체와 포함되는 대상들을 모두 합하였기 때문이다.문 그렇다면 열을 완전하게 포섭하였다는 것은 오직 포함하는 주체인 첫 번째의 완전하게 포섭함과 포섭하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포함되는 여럿의 완전하게 포섭됨과 포섭되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인가?답 질문한 두 가지 뜻과 같으며 두 가지 뜻이 모두 갖춰져 있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포함되는 여럿의 완전하게 포섭됨과 포섭되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에서 “하나의 문에 무진의 뜻이 있음을 분명히 안다.”고 하였으므로 법계의 존재들이 이미 완전하게 포섭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하나의 문과 마찬가지로 다른 문들도 이와 같다.”고 하였으므로 온전하게 포섭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때문에 “하나의 문에 열을 다 완전하게 포섭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고 질문한 것이므로 포함되는 대상의 완전하게 포섭됨과 포섭되지 못함인 것을 알 수 있다.“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였으므로 완전히 다 포괄한다.(盡)”는 것은 하나의 문이므로 “하나의 현상으로”라고 하였다. 앞의 하나의 일을 가리켜서 하나라 하였고, 열 번째까지이므로 여럿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하였다.“다른 현상(異事)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므로 완전히 다 포괄하지 못한다.(不盡)”는 것은 오는 것의 뒤의 아홉 가지 다른 현상에서 각기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문에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한다.“또한 하나의 현상(一事)에서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곧 여럿이고 하나의 현상이므로 곧 하나이다.”라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
004_0030_b_01L種。故云多也。非是約一一法論。故
004_0030_b_02L云一事也。今此盡不盡者。來初一中
004_0030_b_03L攝十則盡。餘門所攝則卷下第二四張
004_0030_b_04L不盡。故云不盡也。問前云旣一門中
004_0030_b_05L具足十門之一門。唯是來初耶。亦兼
004_0030_b_06L去終耶。答如後問。若爾則一門中攝
004_0030_b_07L十盡不者。亦含有來初去終。何故云
004_0030_b_08L來一門耶。答前則合擧來初去終。今
004_0030_b_09L此盡不盡中。唯擧一門也。問所具則
004_0030_b_10L九。何云攝十盡耶。答并擧能所具故
004_0030_b_11L爾也。問若爾。攝十盡者。唯能具一
004_0030_b_12L之盡不盡耶。所具多之盡不盡耶。答
004_0030_b_13L如問二義。亦二義具也。今釋所具多之
004_0030_b_14L盡不盡也。謂前云1)明2)知一3)門有无
004_0030_b_15L盡義。則明法界之法。旣已攝盡。然
004_0030_b_16L云如一門餘亦如是。則似有未盡之法
004_0030_b_17L是故因此問云。一門中攝十盡不。故
004_0030_b_18L知所具之盡不盡也。以一事辨一多故
004_0030_b_19L盡者。是一門。故云以一事。牒前一事
004_0030_b_20L故云一。乃至第十。故云多。是故云
004_0030_b_21L辨一多也。以異事辨一多。故不盡者
004_0030_b_22L以來後九之異事中。各辨一多者。非
004_0030_b_23L是初一門之所能盡。故云不盡也。又
004_0030_b_24L一事中一多義。不相是則多一事故。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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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0_c_01L어떤 사람은 앞에서는 동교에서의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한 것이고, 이 부분은 별교에서의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다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 가운데에서 완전하게 포괄함과 그렇지 못함을 논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앞의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한 것에서 어떤 것이 하나이고 어떤 것이 여럿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설명하여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곧 여럿이고 ……”라고 이야기한 것이다.문 앞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할 때의 하나와 여럿은 “하나의 현상에서의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때의 하나와 여럿과 어떻게 다른가?답 표현이 다를 뿐이다. 앞에서는 앞의 하나의 현상을 가리켜서 하나라 하고, 열 모두를 가리켜서 여럿이라고 하였다. 뒤에서의 하나는 앞과 같으므로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였고, 이 하나의 문에 있는 하나와 나머지 아홉을 모두 가리켰으므로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여럿”은 앞의 “완전히 다 포괄한다.”고 할 때 가리킨 여럿이다.문 “다시 말한다.(又云)”고 한 것으로 보아 앞의 완전히 다 포괄함 중에서 다시 완전히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을 논한 것 같지 않은가?답 그렇지 않다. 앞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한다.”고 하고 다시 그 “하나와 여럿”에 대하여 해석하는 것이므로 “다시”라고 한 것이다.“4구四句로 잘못을 막고(護過), 틀린 것을 배제하고(去非), 덕을 드러낸다.(顯德)”에 대하여 말한다.
어떤 사람은 셋으로 나누어 해석한 것으로 첫 번째는 잘못을 막고, 두 번째는 틀린 것을 배제하며, 세 번째는 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의리장」의 3성의三性義70)의 내용에 준한다면 잘못을 막는 것은 분별하여 집착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71) 틀린 것을 배제하는 것은 집착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며,72) 덕을 드러내는 것은 그 뜻을 드러내 보이는 것73)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막고 틀린 것을 배제하는 것과 덕을 드러내는 것의 두 부분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후자의 뜻을 따른다.4구에 대해 「의리장」에 의하면 오로지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에 대하여만 논할 수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의 4구와 하나와 여럿의 4구를 다 포괄할 수 있다. -
004_0030_c_01L是一者。一云前則同敎中盡不盡。今
004_0030_c_02L此則別敎中盡不盡。一云更於盡中。論
004_0030_c_03L盡不盡。今釋前云。以一事辨一多中
004_0030_c_04L未知何者是一。何者是多。故今此釋
004_0030_c_05L云。一事中一多義不相是云
云等也。問
004_0030_c_06L前云以一事辨一多之一多。與一事中
004_0030_c_07L一多義。不相是之一多。何別。答詮
004_0030_c_08L別耳。前中牒前一卷下第二五張事。故
004_0030_c_09L云一。通擧十。故云多也。後中一者
004_0030_c_10L同前。故云一事。通擧此一門內一之
004_0030_c_11L與九。故云一多義不相是也。卽多者
004_0030_c_12L前盡中所擧之多也。問又云者。似於
004_0030_c_13L前之盡中。更論盡不盡耶。答不爾。前
004_0030_c_14L云以一事辨一多。更釋此一多。故言
004_0030_c_15L又也。四句護過4)去。非5)現德者。一
004_0030_c_16L云作三重釋也。一護過。二去非。三
004_0030_c_17L現德。准義理章三性義文故。護過者。
004_0030_c_18L護分別執也。去非者。示執之失也。現
004_0030_c_19L德者。現示其義也。一云護過去非及
004_0030_c_20L現德故二也。今釋取後義也。四句中
004_0030_c_21L准義理章。唯約盡不盡論也。今此則
004_0030_c_22L可具盡不盡四句。一多四句也。一多
004_0030_c_23L「明」下有「中」{乙}。「知」作「智」{乙}。「門」
004_0030_c_24L疑「中」{乙}。「去」疑「失」{乙}。「現」疑「離」{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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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1_a_01L하나와 여럿의 4구를 “틀린 것을 배제하는” 입장에서 논하면 “하나인가, 아니다.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여럿인가, 아니다. 하나의 현상이므로. 하나이면서 여럿인가, 아니다. 두 가지 성질이 없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가, 아니다.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가 된다. “덕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논하면 “하나인가, 그렇다. 하나의 일이므로. 여럿인가, 그렇다.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여럿인가, 그렇다.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가, 그렇다. 두 가지 성질이 없으므로.”가 된다.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그렇지 않음의 4구를 “틀린 것을 배제하는” 입장에서 논하면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가, 아니다.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기도 하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기도 하는가, 아니다. 두 가지 성질이 없으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가, 아니다.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가 된다. “덕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논하면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가, 그렇다. 하나의 현상에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가, 그렇다.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기도 하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기도 하는가, 그렇다.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가, 그렇다. 두 가지 성질이 없으므로.”가 된다. 이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문 3성의에 준하면 셋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는데 어째서 둘로 나누어 해석하는가?답 잘못을 막는 것이 곧 틀린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뜻이 아니다. 또한 그 책(「의리장」)에서는 집착의 잘못을 드러낸다고 하고 틀린 것을 배제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 책에 준할 수 없다.“다른 현상(異事)도 준하여 같다.”는 것은 앞에 준하여서 “다른 현상으로서 하나와 여럿을 설명”하는 것의 하나와 여럿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른 현상에서의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여럿이고 하나인 것이 하나이다. 이와 같이 준하여 같다.”고 하여야 한다. 이 말에 의거하면 앞의 4구의 “틀린 것을 배제하고 덕을 드러낸다.……”는 하나와 여럿의 4구가 된다. -
004_0031_a_01L四句中去非。則云一耶。不也。一事
004_0031_a_02L中一多義不相是故。多耶。不也。一
004_0031_a_03L事故亦一亦多耶。不也。無二性故。非
004_0031_a_04L一非多耶。不也。具德故。現德則云
004_0031_a_05L一耶。是也。一事故多耶。是也。一
004_0031_a_06L多義不相是故。亦一亦多耶。是也。具
004_0031_a_07L德故。非一非多耶。是也。无二性故
004_0031_a_08L盡不盡四句中去非。則云盡耶。不也。
004_0031_a_09L以異事辨一多故。不盡耶。不也。以一
004_0031_a_10L事辨一多故。亦盡亦不盡耶。不也。
004_0031_a_11L无二性故。非盡非不盡耶。不也。具德
004_0031_a_12L故現德。則云盡耶。是也。以一事辨
004_0031_a_13L一多故。不盡耶。是也。以異事辨一
004_0031_a_14L多故。亦盡亦不盡耶。是也。具德故
004_0031_a_15L非盡非不盡耶。是也。无二性故。如
004_0031_a_16L是說也。問准三性卷下第二六張義則
004_0031_a_17L可作三重別釋。何故作二重釋耶。答護
004_0031_a_18L過者。卽是去非耳。非是別義。又彼
004_0031_a_19L旣云示執之失。不云去非故。不可准
004_0031_a_20L彼也。異事准同者。准前而釋。以異
004_0031_a_21L事辨一多之一多也。則應云異事中一
004_0031_a_22L多義。不相是則多一事故則是一。如
004_0031_a_23L是准同也。若准此辭。則前之四句去
004_0031_a_24L非現德等云
云者。可是一多四句也。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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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1_b_01L“하여야 함(須)은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뜻이다.”라는 것은 그렇게 되어야 할 곳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서로 다른 여러 현상들에서도 예에 준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은 오는 것의 뒤의 9문과 가는 것의 10문에서도 앞에 준하여서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하는 것을 드러내었다. 오는 것의 두 번째 문에서는 “두 번째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고, 서로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하고, 세 번째 문에서는 “세 번째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고, 서로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하여야 하며, 이런 식으로 열 번째 문에서는 “열 번째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포괄하고, 서로 다른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다 포괄하지 못한다.”고 하여야 한다. 가는 문은 이와 반대이다.문 여러 문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하나와 여럿을 분별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왜 “두 번째의 현상(二事)”, “세 번째의 현상(三事)” 등으로 이야기하는가?답 당체當體에 의거하면 모두 하나이므로 하나와 여럿이라고 하고, 또 하나의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문을 구별하려는 것이므로 “두 번째의 현상(二事)”, “세 번째의 현상(三事)” 등으로 이야기한다.두 번째인 상즉문은 둘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곧바로 해석하는 것이고 뒤의 “이상의 많은 문들 ……” 이하는 동시와 전후의 뜻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앞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은 곧바로 해석하는 것이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하는 매듭짓는 것이다.하나가 열에 상즉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문 하나가 열(여럿)과 상즉할 때에 하나가 유有이고 여럿이 공空이며, 여럿이 현상과 상즉할 때 여럿이 유有이고 하나가 공空인가, 아니면 이와 반대인가?답 질문한 두 가지 뜻 모두와 같다. 어떤 사람은 상즉하기 이전의 공과 유와 상즉한 이후의 공과 유, 두 가지의 뜻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가 여럿과 상즉하고, 여럿이 하나와 상즉한다. 여럿의 유의 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의리장」의 동체同體 상즉문(卽門)에 대한 설명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열과 상즉한다. …… 그러므로 열이 곧 하나이다.”라 하고 가는 문에서는 “첫 번째는 열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열은 하나와 상즉한다. …… 그러므로 첫 번째의 하나가 곧 열이다.”74)라고 하였는데, 하나의 유의 문에서는 처음에 하나가 열과 상즉한다고 내세우고(標) 마지막에서는 열이 하나와 상즉한다고 말한다. -
004_0031_b_01L者緣成義者。須處中所須也。別別諸
004_0031_b_02L事准例如是者。例現來後九門與去十
004_0031_b_03L門中。准前論盡不盡之義也。謂立在
004_0031_b_04L來第二門應云。以二事辨一多故盡。以
004_0031_b_05L異事辨一多故不盡也。第三門應云。以
004_0031_b_06L三事辨一多故盡。以異事辨一多故不
004_0031_b_07L盡也。乃至第十門應云。以十事辨一多
004_0031_b_08L故盡。以異事云
云也。去門反此。問諸
004_0031_b_09L門中可云以一事辨一多。何云以二事
004_0031_b_10L三事等耶。答約當體則並是一。故云
004_0031_b_11L一多。亦云一事等。然欲簡別餘門。故
004_0031_b_12L云二事三事等也。第二門中有二。先
004_0031_b_13L正釋。後如上多門下。問答同時前後
004_0031_b_14L義也。初中亦二。先正釋。後當知下
004_0031_b_15L結也。一卽十者。問一卽十時。一有多
004_0031_b_16L空。多卽一時。多有一空耶。反此耶。答
004_0031_b_17L如問二義。一云具卽以前空有。卽以
004_0031_b_18L後空有之二義也。今釋一有門中。一
004_0031_b_19L卽多多卽一。多有門中亦爾也。謂義理
004_0031_b_20L章同體卽門云。一者一。何以故。緣
004_0031_b_21L成故卷下第二七張 一卽十乃至云此
004_0031_b_22L十卽是一也。去門中云。一者十。何
004_0031_b_23L以故。緣成故。十卽一。乃至是故初
004_0031_b_24L一卽是十也已
上 一有門中標云一卽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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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1_c_01L여럿의 유의 문에서는 처음에 열이 하나와 상즉한다고 말하고 뒤에서 하나가 열과 상즉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문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는 이루는 주체(能成)이고 여럿은 이루어지는 대상(所成)인가, 아니면 이와 반대인가?답 어떤 사람은 전자라 하고, 어떤 사람은 후자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었다고 한다. 첫 번째 입장은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가 유체有體로서 여럿을 이루기 때문이다. 『료간』75)에서 “하나의 연은 능히 일으키고 능히 이루며, 많은 연들은 일으켜지고 이루어진다.”76)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는 유체이고, 여럿은 무체無體이다. 여래장의 체가 6도를 능히 이루는 것이지, 여래장이 6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는 유체로서 이루는 주체이고 여럿은 무체로서 이루어지는 대상이 된다.두 번째 입장은 하나의 유有의 문에서 현상이 덕을 갖추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여럿을 포괄하여 하나가 덕을 갖추는 것을 이루는 것이므로 하나는 이루어지는 대상이고 여럿이 이루는 주체이다. 「광명각품소」77)에서 “만약 하나가 없으면 모든 연緣들이 스스로의 체體를 온전히 잃는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하나가 없을 때에 여럿이 이뤄지지 않고, 이뤄지지 않으면 연緣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하나를 없애면 모든 것이 없게 된다.”78)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세 번째 입장을 취한다. 「의리장」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열과 상즉한다.”고 한 것에서 “첫 번째는 하나이다. 왜 그러한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의 경우 여기의 하나는 많은 연을 모아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하나는 이루어진 대상이고 여럿이 이루는 주체이다. 그 다음에 “하나가 열과 상즉한다. 왜 그러한가. 하나가 없으면 열이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하나를 얻어야만 비로소 열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가 이루는 주체가 되고 열은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유의 문에서는 하나가 이루는 주체이고 여럿이 이루어지는 대상이면서 또한 그와 반대가 되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
004_0031_c_01L終云十卽一。多有門中。標云十卽一
004_0031_c_02L下云一卽十故爾也。問一有門中。一
004_0031_c_03L爲能成。多爲所成耶。反此耶。答一
004_0031_c_04L云如初。一云如後。一云具二義。初
004_0031_c_05L義者一有門中。一是有體。能成於多
004_0031_c_06L故。料簡云。一緣能起能成。多緣是
004_0031_c_07L所起所成。是故一有體多无體也。如
004_0031_c_08L來藏體能成六道。非如來藏爲六道所
004_0031_c_09L成。如是一有門中。一有體爲能成。多
004_0031_c_10L无體爲所成也。次義者。一有門中見
004_0031_c_11L一具德。是故攝多成一具德。是故一
004_0031_c_12L爲所成。多爲能成也。光覺品疏云。若
004_0031_c_13L无一卽一切緣。全失自體。何以故。以
004_0031_c_14L无一時多无所成。无所成故。不是緣
004_0031_c_15L也。是故有一卽有一切。却一卽却一
004_0031_c_16L切已
上故爾也。今釋取第三義。義理章
004_0031_c_17L云。一者一。何以故。緣成故。一
004_0031_c_18L卽十已
上 一者一。何以故。緣成故者
004_0031_c_19L此一摠攬多緣而成故。一爲所成。多
004_0031_c_20L爲能成也。次云一卽十。何以故。若
004_0031_c_21L无一十。卽不成故已
上者。要須得一方
004_0031_c_22L十得成故。一爲能成。多爲所成也。是
004_0031_c_23L故一有門中。一能成多所成。又反此
004_0031_c_24L二義具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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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2_a_01L(상즉문의) 질문과 대답을 통하여 의심을 제거하는 부분79)에 대하여 말한다.문 어찌하여 중문中門의 마지막에서는 완전히 다 포괄함(盡)과 다 포괄하지 못함(不盡)을 논하고 즉문卽門의 마지막에서는 동시에 원만함(圓)과 원만하지 못함(不圓)을 논하는가?답 옛글(古辭)에서 “대력大力과 인연因緣의 뜻을 얻는지 못 얻는지 알기 위하여 중문의 마지막에서는 완전히 다 포괄함(盡)과 다 포괄하지 못함(不盡)을 논하고, 유체有體와 무체無體의 뜻을 얻는지 못 얻는지 알기 위하여 즉문卽門의 마지막에서는 동시에 원만함(圓)과 원만하지 못함(不圓)을 논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즉문은 법성法性의 인연에 의거하여서 그 하나와 여럿의 당체當體가 상즉함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동시에 원만함과 원만하지 못함을 논하기에 편리하고, 중문은 그 체의 힘(力)과 쓰임(用)에 의거하여서 그 유력有力과 무력無力이 서로 포섭하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완전하게 다 포괄함과 다 포괄하지 못함을 논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실제로는 서로 바꾸어 논하여도 또한 지장이 없다.문 “곧 동시에 원만하기도 하고, 곧 앞뒤가 있기도 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답 어떤 사람은 하나의 문에서 법계의 존재들을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은 동시에 원만하고, 다른 문에서 완전하게 다 포괄하는 것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은 앞뒤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별도로 유통되고 있는 지상(至相 : 지엄)의 『십현장』 1권―혹은 지엄이 쓴 것이 아니라고도 하지만―에서 “만약 하나와 여럿이 연緣을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것은 동시인 것인가 앞뒤가 있는 것인가? 연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늘 동시이면서 앞뒤가 있다. 그 까닭은 하나가 열에 상즉하고 열이 하나에 상즉하므로 늘 동시이고, 위를 향하여 가고(向上去), 아래를 향하여 오므로(向下來) 늘 앞뒤가 있다.”80)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책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하나가 열에 상즉하고 열이 하나에 상즉하므로 동시에 원만하고, 오고 가는 뜻이 있으므로 앞뒤가 있는 것이다. 「의리장」에서는 “곧 동시에 원만하고 곧 앞뒤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법성法性의 연기는 역逆과 순順을 모두 갖추고 동체同體로서 어긋나지 않으며 체體의 작용(用)이 자유로와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81)라고 하였는데, 역逆과 순順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은 앞뒤가 있는 것이고, 동체同體로서 어긋나지 않는 것은 동시에 원만한 것이다. 그리고 체體의 작용(用)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다는 것은 앞의 둘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래를 향하는 것(向下)은 역逆이고 위를 향하는 것(向上)은 순順이므로 -
004_0032_a_01L問答除疑中。問何故中門。終論盡不
004_0032_a_02L盡。卽門。終論圓不圓耶。答古辭
004_0032_a_03L云。欲試於大力。因卷下第二八張緣之
004_0032_a_04L義。得耶不得耶。故中門終論盡不盡
004_0032_a_05L欲試於有體无體之義。得耶不得耶。故
004_0032_a_06L卽門終論圓不圓也。今釋卽門者。約
004_0032_a_07L法性之因緣。見其一多當體相卽。是
004_0032_a_08L故便於圓不圓中門者。約其體上力用
004_0032_a_09L見其有力无力相攝之義。是故便於盡
004_0032_a_10L不盡故爾耳。實則1)玄論亦不碍也。問
004_0032_a_11L卽圓卽前後者云何。答一云一門中。攝
004_0032_a_12L盡法界之法則圓。不攝餘門之攝盡則
004_0032_a_13L前後也。今釋有至相十玄章一卷別行
004_0032_a_14L或云非至相所述。彼文云若一多要待
004_0032_a_15L緣成者。爲是同時。爲有前後。答緣
004_0032_a_16L成故。常同時而先後。所以然者。一
004_0032_a_17L卽十十卽一故。常同時向上去向下來
004_0032_a_18L故常前後已
上 今此亦爾。一卽十十卽
004_0032_a_19L一故。卽圓來去義故。卽前後也。義
004_0032_a_20L理章云。卽圓卽前後。何以故。由此
004_0032_a_21L法性緣起。具足逆順。同體不違。體用
004_0032_a_22L自在无障碍故已
上 具足逆順者前後。同
004_0032_a_23L體不違者圓也。體用自在无障碍者
004_0032_a_24L通望前二也。是故向下則逆。向上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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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2_b_01L역逆과 순順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은 앞의 『십현장』의 “위를 향하여 가고(向上去), 아래를 향하여 오므로(向下來) 늘 앞뒤가 있다.”는 뜻이다. 동체同體로서 어긋나지 않는 것은 동시에 동체同體라는 뜻이므로 앞의 『십현장』의 “하나가 열에 상즉하고 열이 하나에 상즉하므로 늘 동시”라는 뜻이다.(수전법으로 다함이 없음≺無盡≻을 보여 주는 부분의) 세 번째의 질문과 대답으로 의심을 없애는 부분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서 항상 오고 간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문 중문中門은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 문이고 즉문卽門은 자리가 움직이는 문인데 어째서 이와 같이 말하는가?답 중문과 즉문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은 여기에서 말하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과 다르므로 잘못된 것이 없다. 즉 지금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근본을 향한다는(向本) 뜻으로서 법성法性의 스스로의 자리가 원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 법성의 연에 따르는(隨緣) 뜻에 의거하여 오고 감과 중(中 : 상입), 즉(卽 : 상즉)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법성이 이루는 인연법 중에서 즉문은 인연의 당체當體가 온전하게 상즉하는 것으로서 여럿이 하나와 상즉할 때에 여럿의 자리는 없어지고 하나에 일치되므로 자리가 움직이는 문이다. 중문은 인연의 힘과 작용이 서로 포섭하고 들어가는 것으로서 하나가 여럿을 포섭할 때에 여럿은 스스로의 자리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하나에 들어가므로 자리를 움직이지 않는 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르다.“이른바 다르다는 뜻”은 한 종류의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할 때에 차별적 인식을 가진 사람(遍計之人)은 이 동전들이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 열 개의 동전 중의 첫 번째 동전은 두 번째나 세 번째 동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삼승의 사람은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일부 알지만 인因은 직접적이고 연緣은 간접적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진실 그대로의 인연을 알지 못한다. 일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과 연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것이 없다는 궁극적인 진실 그대로의 인연의 뜻을 알게 된다. 이 인연에 힘이 있어 결과(果)를 생겨나게 하는 뜻이 곧 연기가 눈앞에 드러나는 것(緣起現前)이고, 정해진 성품이 없어 공空하고 평등한 뜻이 연기에 정해진 성품이 없다는 것(緣起無性)이며, 공空과 유有가 막힘이 없다는 뜻이 성기性起이다. -
004_0032_b_01L順故。具足逆順者。彼十玄中向上去
004_0032_b_02L向下來故。常前後義也。同體不違者
004_0032_b_03L同時同體義故。彼十玄中。一卽十十
004_0032_b_04L卽一故。常同時義也。
004_0032_b_05L三問答除疑中。自位不動而恒來去者
004_0032_b_06L中門是位不動門。卽門是位動門。何
004_0032_b_07L故爾云耶。答中卽之動不動。與此
004_0032_b_08L中動不動別故。无卷下第二九張難也。
004_0032_b_09L謂今此則不動者。向本義故。以法性自
004_0032_b_10L位元不動。故云不動。約此之隨緣
004_0032_b_11L義。故云來去。中卽義者。就法性所成
004_0032_b_12L因緣法中。卽門者。因緣當體全全相
004_0032_b_13L卽。多卽一時。多位泯而卽於一。故
004_0032_b_14L云位動門。中門者。因緣力用。互相攝
004_0032_b_15L入。一攝多時。多位不壞。而入於一
004_0032_b_16L故云位不動門故別也。所謂別義者。約
004_0032_b_17L此一種十錢。遍計之人。不知此錢因
004_0032_b_18L緣所成故。見此十錢第一非第二非第
004_0032_b_19L三等。三乘之人。分知因緣所成之義
004_0032_b_20L然有因親緣疎之病。而未能知如實因
004_0032_b_21L緣。至於一乘。方得因緣无親疎究竟
004_0032_b_22L如實因緣之義。然此因緣有力生果義
004_0032_b_23L則緣起現前也。无性空平等義。則緣
004_0032_b_24L起无性也。空有无碍義。則性起也。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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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2_c_01L이 인연에 정해진 성품이 없어 공空하고 평등하다는 뜻에 의거하여 “연기는 성품에 따라 분별이 없어서 상즉하고 상융(相融 : 상입의 뜻)하여 평등한 뜻을 드러내니 제일의(第一義 : 眞諦)를 바르게 따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공과 유가 막힘이 없다는 뜻에 의거하여서 “(세제世諦를 따라 관하여) 제일의제로 들어간다.”82)고 말하였다.“같음(同)의 뜻은 앞의 용수의 해석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하였던 (『중론』의)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 ……”의 구절로서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의 막힘이 없는 중도를 이야기한 것을 가리킨다.“하나하나의 동전을 ……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열 개의 동전을 동시문으로 보면 (서로를) 모두 갖추고 있는 열 개의 동전이고, 인다라문으로 보면 인다라처럼 (서로 갖추고 있는 것을 다시 서로 갖추고 있는) 열 개의 동전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회전문(唯心廻轉善成門) 등이 있다.
(나) 보법普法의 설명에 대한 해설(연기다라니의 뜻을 드러내는 것 중에서) 두 번째의 비유를 들어서 법을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열 개의 동전으로 10보법普法을 비유하고 있다. 수전법의 뜻에서 연에 의하여 생겨나는 여러 존재들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끝내 얻을 수 없음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미혹된 사람은 변계遍計에 의해 나타난 사물을 고집하여 연기의 법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을 드러내는 사유(事由 : 逗遛의 번역)가 전혀 다르다는 뜻을 다시 수전법에 의하여 보이고 있다.다라니를 드러내는 것에 곧바로 의거한 부분83)은 (『화엄경』) 「현수품」에서 “보살은 생사에 대하여 처음 발심할 때에 한결같이 깨달음을 구하니 마음이 견고하여 움직일 수 없다. 그 한 마음의 공덕은 깊고 넓음이 끝이 없어서 여래가 나누어 말씀하셔도 한 겁이 다할 때까지 마칠 수 없다. 하물며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겁 동안 여러 바라밀을 모두 갖추어 닦아 온 여러 단계의 보살들의 공덕과 수행에 있어서이리오! 시방세계의 모든 여래들이 그의 무한한 공덕을 말하고자 하여도 또한 모두 다 말할 수 없도다. 지금 내가 보살의 공덕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하니 마치 새가 허공의 일부만을 지나가는 것과 같고 대지의 작은 티끌과도 같다.”84)는 내용이다.문 여래가 어찌하여서 보살의 공덕을 모두 다 찬탄할 수 없는가? -
004_0032_c_01L此因緣无性空平等義。云緣起者。順
004_0032_c_02L性无分別相卽相融。現平等義。正順第
004_0032_c_03L一義也。約空有无碍云。入第一義諦
004_0032_c_04L也。同義如前龍樹釋者。指前因緣所
004_0032_c_05L生法等。生不生无碍中道也。就一一
004_0032_c_06L錢至可解者。約此十錢。以同時門見
004_0032_c_07L則具足。具足之十錢。以因陁羅門見
004_0032_c_08L則因陁羅。因陁羅之十錢也。如是等
004_0032_c_09L廻轉也。二擧喩現法中。以十錢喩十
004_0032_c_10L普法也。現數錢意中緣生諸法。无自
004_0032_c_11L性故。終不可得。而迷者。執遍計物
004_0032_c_12L迷緣起法。是故現法逗遛全別之義。且
004_0032_c_13L依數錢卷下第三○張指示也。直約現
004_0032_c_14L陁羅尼中。賢首品云。菩薩於生死
004_0032_c_15L㝡初發心時。一向求菩提。堅固不可
004_0032_c_16L動。彼一念功德。深廣无邊際。如來
004_0032_c_17L分別說。窮劫猶不盡。何况於无量。无
004_0032_c_18L數无邊劫。具足修諸度。諸地功德行。
004_0032_c_19L十方世界中。一切諸如來。說彼功德雲。
004_0032_c_20L亦不能究竟。今我說菩薩。功德中少
004_0032_c_21L分。如鳥履虛空。如地一微塵已
上 問
004_0032_c_22L如來何故不能盡歎菩薩德耶。答一云
004_0032_c_23L「玄」作「」{甲}·作「互」{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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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3_a_01L답 어떤 사람은 보살은 일승이고 부처는 삼승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총상은 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별상은 다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보살의 공덕은 끝이 있음(盡)과 끝이 없음(不盡)을 갖추고 있으므로 끝이 있음에 대해서는 다 찬탄할 수 있고 끝이 없음에 대해서는 다 찬탄할 수 없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부처와 보살은 모두 일승이지만 보살의 공덕이 법성法性의 근원의 끝까지 다 이르는 것이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 다 찬탄한다면 법성에 끝남이 있는 것이 되므로 큰 잘못이 되기 때문에. 지금 해석해 보건대 마지막 해석이 맞다. 즉 『4권소』85)에서 “부처는 행덕의 방편의 보상報相이고 법은 체실體實의 보편普遍으로서, 서로 일치하지 않아서 따로 논한다. 그러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공덕의 법은 부처가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성性과 상相이 상주하는 법성에 일치하기 때문에 능히 다 찬탄할 수 없는 것이다.문 부처가 방편의 보상이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답 과거의 부처님은 닦아 이루어 열반에 드셨고, 뒤의 부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방편의 보상에 머무르신다. 법은 체실體實의 보편普遍이므로 과거의 부처님이 발심하고 공덕을 쌓아서 부처가 될 수 있었고, 뒤의 부처님들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의 공덕은 부처가 있음과 없음에 관계없이 성性과 상相이 상주한다. 그러므로 다 찬탄할 수 없다.문 “지금 내가 보살의 공덕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한다.”고 하였는데 이 일부분은 다 찬탄할 수 있는가?답 (『화엄경』) 「발심공덕품」에서 “불자佛子여, 비록 어떤 사람이 있어 동방 아승기세계의 중생들에게 모든 즐거움의 도구를 한 겁 동안 공양하고 나서 5계를 청정하게 닦으라고 가르치고, 남쪽과 서쪽과 북쪽 사방과 상·하의 세계의 중생들에게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면, 불자佛子여 그대의 생각에 어떠한가? 그 사람의 공덕이 많은가 그렇지 않은가? 제석帝釋이 ‘불자여, 여러 부처님들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공덕을 능히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
004_0033_a_01L菩薩則一乘。佛則三乘故。一云摠相
004_0033_a_02L則盡。別相則不盡。一云菩薩功德。具
004_0033_a_03L盡不盡二義故。盡邊則盡歎。不盡邊
004_0033_a_04L則不盡歎。一云佛與菩薩。俱是一乘
004_0033_a_05L然菩薩功德。究竟盡於法性源底。是
004_0033_a_06L故不能盡歎。若盡歎者。法性有盡故
004_0033_a_07L是大過也。今釋存後義。謂四卷疏
004_0033_a_08L中云。佛是行德方便報相。法是體實
004_0033_a_09L普遍。不稱別論。故云不盡已
上 此功德
004_0033_a_10L法。稱同於有佛无佛性相常住之法性
004_0033_a_11L是故不能盡歎也。問佛是方便報相
004_0033_a_12L不能盡歎者。云何。答前佛修成入
004_0033_a_13L於涅1)盤。後佛亦爾。故云住於方便
004_0033_a_14L報相。法則體實普2)遍故。前佛履於
004_0033_a_15L發心功德而得成佛。後佛亦爾。故此
004_0033_a_16L功德。有佛无佛。性相常住。是故
004_0033_a_17L不能盡歎也。問今我說菩薩功德中少
004_0033_a_18L分。則此之少分可盡歎耶。答發心功德
004_0033_a_19L品云。佛子假使有人。供養東方阿
004_0033_a_20L僧祗世界衆生卷下第三一張 一切樂
004_0033_a_21L具。乃至一劫。然後敎令淨修五戒
004_0033_a_22L南西北方四維上下。亦復如是。佛子
004_0033_a_23L於意云何。彼人功德。寧爲多不。帝
004_0033_a_24L釋言。佛子。除諸如來。其餘一切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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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3_b_01L법혜法惠보살이 제석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처음 발심한 보살의 공덕을 백으로 나눈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공덕은 그 백으로 나누어진 것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천으로 나누고, 백천으로 나누고, 억으로 나누고, 백억으로 나누고, 천억으로 나누고, 백천억으로 나누고, 백나유타로 나누고, 천나유타로 나누고, 헤아릴 수 없이 큰 수로, 비유할 수 없이 큰 수로,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눈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공덕은 그렇게 나누어진 것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소』86)에서는 “다만 전체에 비교하여 같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누었을 때 그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는가? 이 처음 발심한 공덕은 법계와 같아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눈 것의 한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법계에 두루 미친다. 양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 비할 수 없는 것이다.”8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다 찬탄할 수 없다.문 『화엄경』에서 “이때 하늘의 제석이 법혜보살에게 아뢰었다. ‘불자佛子여, 처음 발심한 보살은 어떠한 공덕장功德藏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법혜보살이 대답하였다. ‘불자여, 그 경지는 매우 깊어서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말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받아 갖추어 말씀드립니다.’”88)라고 하였는데, 비록 일부분이라도 다 찬탄할 수 없다면 왜 이 경전에서는 갖추어 말한다고 한 것인가?답 갖추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만 다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갖추어 이야기한다는 것일 뿐이고 그 공덕을 다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전의 앞부분에서 여러 가지 공덕을 많이 이야기하고서 그것들을 저 처음 발심한 보살의 공덕에 대비하여서 “말할 수 없이 큰 수로 나눈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공덕은 그렇게 나누어진 것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보살의 공덕장을 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갖추어 이야기한다고 하였다. 다만 다 이야기할 수 없는 뜻을 갖추어 말한다는 것일 뿐이다.영관靈觀 스님은 “(『법계도』의) ‘처음 발심한 보살의 한 순간의 공덕을 다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동전과 같다. -
004_0033_b_01L能稱量彼人功德。法惠菩薩。語帝釋
004_0033_b_02L言。佛子。初發心菩薩功德之藏。百
004_0033_b_03L分。彼人功德。不及其一。千分百千
004_0033_b_04L分億分百億分千億分百千億分百那由
004_0033_b_05L他分千那由他分乃至不可數不可比喩
004_0033_b_06L不可說分。彼人功德。不及其一等已
上
004_0033_b_07L疏云。只可全比不等。豈可不可說
004_0033_b_08L分。不同一分耶。答此發心功德則同
004_0033_b_09L法界。不可分析故。縱不可說分中一
004_0033_b_10L分。亦遍法界。无問多少。皆无比也。
004_0033_b_11L已
上 則雖是少分。亦不盡也。
004_0033_b_12L問經云。爾時天帝釋。白法惠菩薩言
004_0033_b_13L佛子。初發心菩薩。爲成就幾功德藏
004_0033_b_14L法惠答言。佛子。是處甚深。難知難
004_0033_b_15L信難解難說。難通達難分別。雖然我
004_0033_b_16L當承佛神力。具足演說已
上 雖是少分
004_0033_b_17L旣其不能盡歎。何故此云具足說耶。
004_0033_b_18L答具足說者。但具足演說不盡之意耳
004_0033_b_19L非謂盡說彼功德也。何者。前經廣
004_0033_b_20L說種種功德。以此對彼菩薩功德而云
004_0033_b_21L乃至不可說分。彼人功德。不及其一
004_0033_b_22L已
上 故知非謂菩薩功德之藏可盡說。故
004_0033_b_23L云具足說。但具足說不盡之義耳。靈
004_0033_b_24L觀德云。初發心菩薩一念功德。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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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3_c_01L왜냐하면 첫 번째 문에 의거하여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는 첫 번째 문(初門)의 동체同體이고, ‘하물며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시간 동안 여러 바라밀을 모두 갖추어 닦아온) 여러 단계의 보살들의 공덕이라는 것은 두 번째 이후의 동전들과 같다. 왜냐하면 다른 문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는 두 번째 문(第二門)의 동체同體이며, ‘처음 발심할 때 곧바로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의 동전과 상즉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行의 체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는 이체異體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문에 의거하여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는 첫 번째 문에 갖추어진 덕이고, ‘두 번째 이후의 동전들과 같다. 왜냐하면 다른 문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는 두 번째 이후의 여러 문에 갖추어진 덕이며,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의 동전과 상즉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여기에서 나열한 동전에 의거하여 첫 번째의 동전이 열 번째의 동전과 상즉하기 때문에 이체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동체와 이체를 막론하고 “첫 번째 문에 의거하여 다함이 없음(無盡)을 드러낸다.”는 것은 첫 번째 문의 다함이 없음을 가리킨 것이고, “두 번째 이후의 동전들 ……”은 두 번째 이후의 여러 문들이며,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 동전에 상즉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에서는 다만 첫 번째 문과 다른 문들의 다함이 없음을 드러내고 갖춰져 있는 덕에 대하여는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는 첫 번째 문에 갖춰져 있는 다함이 없는 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행行의 체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처음 발심하는 것이 모든 수행의 근본이므로 이 마음에서 곧바로 정각을 이룬다. 그러므로 행行의 체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였다. 믿음을 채워서 성불하는 사람은 행동이 진실되다(行實).”89)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깊게 보아야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글에 의거하여 드러난 바를 따져보면 앞에서는 첫 번째 문에 다함이 없이 갖춰져 있는 법의 당체當體에 의거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므로 비유(能況)로서 이야기하면 첫 번째 동전이 열 번째 동전과 상즉하고, 비유하고자 하는 바(所況)로 이야기하면 처음 발심할 때에 곧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
004_0033_c_01L盡者。如第一錢。何以故。約一門
004_0033_c_02L卷下第三二張現无盡故者。初門同體
004_0033_c_03L也。何況於无量諸地功德者。如第二
004_0033_c_04L錢已去何以故約異門說故者。第二門
004_0033_c_05L同體也。初發心時便成正覺者。如一
004_0033_c_06L錢卽十故。何以故。約行體說故者。異
004_0033_c_07L體也。何者。約一門現无盡者。是第
004_0033_c_08L一門內具之德也。如第二錢已去何以
004_0033_c_09L故約異門說故者。第二已去諸門內具
004_0033_c_10L之德也。如一錢卽十故者。約此列
004_0033_c_11L錢而云。第一錢。卽第十錢故異體也。
004_0033_c_12L今釋无問同異體。約一門現无盡者。一
004_0033_c_13L門无盡也。第二錢已去等者。第二已
004_0033_c_14L去諸門也。一錢卽十者。前但現一門
004_0033_c_15L與異門之无盡。不辨所具之德故。今此
004_0033_c_16L欲現初一門所具无盡之德故爾也。約
004_0033_c_17L行體說故者。一云初發心。是萬行之
004_0033_c_18L本故。於此心便成正覺。是故約行體
004_0033_c_19L說也。信滿成佛者。行實也。如是深
004_0033_c_20L見也。今釋約文現相者。初約一門現
004_0033_c_21L无盡之所具法中當體而說也。是故約
004_0033_c_22L能況則一錢卽十錢。約所況則初發心
004_0033_c_23L「盤」音通「槃」{編}。「遍」作「通」{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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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4_a_01L“어찌하여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함께 두는가?”에 대하여 말한다.문 “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한다.”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답 다르다. 아랫부분에서 “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한다.”고 한 것은 머리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고, 지금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함께 둔다.”는 것은 머리와 다리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어찌하여 같은 곳에 다리와 머리를 나란히 하는가?”라고 말하였어야 한다.“두류逗留”라는 것은 일이 말미암는 것(事由)이다.“아야阿耶”는 아버지이다.“모습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에 믿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드러난 모습에 의거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에 낮은 근기의 믿음을 냄으로 머리와 다리가 각기 다르다는 등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원교 일승 ……”에서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한 순간이 곧 9세世를 포괄한다. 옛글(古辭)에서 “한 살 먹은 어머니가 50년 동안 임신하여 51살의 사나이를 낳았다.”90)고 하였는데, 한 살짜리 어머니는 처음 발심한 것이고, 50년 동안 임신한 것은 수행의 50단계이며, 51살의 사나이를 낳았다는 것은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의 불과佛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인연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의 “모습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에 상대되고, “도리에 의거하여 말한다.”는 것은 앞의 “믿는 마음을 낸다.”는 것에 상대된다.“하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라는 것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에 대하여 말한다.문 “하나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고, 같다는 것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가?답 서로 바꾸어 말하여도 가능하다. 다만 모습이 늘어나는 순서대로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즉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몸이라는 것이 하나여서 분별이 없는 뜻이므로 “하나라는 것은 하나여서 분별이 없는 뜻”이라고 하였다. 같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조화하여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저것과 같고 저것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이것과 같다는 것이므로 “같다는 것은 머무르지 않는 뜻”이라고 하였다.“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는 것은 머리를 들면 옆에 다리가 없고, 다리를 들면 옆에 머리가 없어서 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91)“경전에 이르기를 ……”에 대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앞의 “고요함과 쓰임이 하나의 모습(寂用一相)” 중의 고요함(寂)을 증명하고, -
004_0034_a_01L時便成正覺。如是見也 1)何故同處並
004_0034_a_02L頭脚耶者。與同處並頭何別。答別。下
004_0034_a_03L云同處並頭者。齊頭之義也。今同處
004_0034_a_04L並頭脚者。頭與脚並處之義也。實則
004_0034_a_05L應云。何故同處頭脚並頭耶。逗遛者
004_0034_a_06L事由也。阿耶者父也。約相說故生信
004_0034_a_07L心故者。約現相說故生劣機之信。故說
004_0034_a_08L頭脚各別等也卷下第三三張 圓敎一
004_0034_a_09L乘等者。兒生一念。卽該九世也。古
004_0034_a_10L辭一年母懷五十年。生五十一年大丈
004_0034_a_11L夫也。一年母者。初發心也 懷五十
004_0034_a_12L年者。攝五十位也。生五十一年大丈
004_0034_a_13L夫者。成等妙二覺果也。由緣成故者。
004_0034_a_14L對前約相說也。約道理說者。對前生
004_0034_a_15L信心也。一者何義答一者一无分別義
004_0034_a_16L等者。亦得云一者不住義。同者一无
004_0034_a_17L分別義耶。答互言亦得。但從增相云
004_0034_a_18L耳。謂諸法之一體者。是一无分別義
004_0034_a_19L故云一者。一无分別義也。同者。此
004_0034_a_20L彼和同義故。此無自性。同於彼。彼
004_0034_a_21L无自性。同於此。故云同者不住義也。
004_0034_a_22L同處並頭者不相知義者。擧頭則傍无
004_0034_a_23L足。擧足則傍无頭。故云不相知也。經
004_0034_a_24L云等者。不生不滅則證前寂用一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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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4_b_01L“인연에 의하여 있다.”는 것은 쓰임(用)을 증명한다.“6상六相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에 대하여 말한다.문 지금 이 책에서는 “이 6상이라는 용어가 법성의 집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고 다라니 창고를 열 수 있는 좋은 열쇠이다.”라 하고 「육상장」에서는 “4구四句와 6상이 모두 법에 들어가는 방편”92)이라고 하였다. 6상 이외에 별도로 들어가는 곳이 있는가, 아니면 6상이 곧바로 들어가는 법성인가?답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들어가는 곳은 증분이고 6상은 연기분이므로 6상은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뜻은 6상의 연기가 곧 법성의 집이고 다라니 창고로서 별도의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견해도 타당하고, 6상 이외에 별도로 들어가는 곳이 있다고 하는 것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방편에는 무주방편無主方便, 발취방편發趣方便, 집성방편集成方便의 셋이 있기 때문이다. 발취방편은 가행加行 방편으로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일곱 가지 방편이다. 그러므로 방편 외에 별도의 들어갈 곳이 있다. 집성방편은 여러 가르침을 교묘하게 모아 이룬 것으로서 곧 6상 방편이다. 6상이 곧 법이므로 따로 들어갈 곳이 없다.문 두 번째 뜻에서 6상은 무엇에 해당하고, 들어갈 곳은 무엇에 해당하는가?답 6상은 해행解行의 인因이고 법성의 집과 다라니 창고는 과해果海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법계도』 중에서 “망상을 쉬지 않으면(叵息妄想)”부터 “자량資糧을 얻는다.”까지는 수행의 방편이고, “다라니의 다함이 없는 보배로”부터 “참된 보배 전각을 장엄한다.”까지는 수행으로 얻는 이익이다. 이것들은 궁실窮實로서 이 책의 내용에 의거하면 법성의 집이다. “집에 돌아가 분수에 맞게 ……”라고 한 것은 이에 의거하면 돌아갈 법성의 집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곧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 장엄한 참된 보배 전각이다. 『법계도』의 글에서 이 집을 해석하여 또한 “법계다라니의 집 및 인다라의 집, 미세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
004_0034_b_01L寂也。因緣而有則證前用也。六相如
004_0034_b_02L上等者。今此云此語欲入法性家要門
004_0034_b_03L開陁羅尼藏好鑰匙。六相章云。四句
004_0034_b_04L與六相。俱爲入法方便已
上 六相外別
004_0034_b_05L有所入耶。六相卽是所入法性耶。答
004_0034_b_06L二義也。初義者。所入則是證分。六
004_0034_b_07L相則是緣起分。故云入法之方便也。後
004_0034_b_08L義者。六相緣起。卽是法性家陁羅尼
004_0034_b_09L藏。无別所入。然後義亦得。六相外
004_0034_b_10L別有所入亦得也。謂方便中。有无住
004_0034_b_11L方便。發趣方便。集成方便三也。發
004_0034_b_12L趣方便者。加行方便故。入見道之七方
004_0034_b_13L便也。是故方便卷下第三四張外別有
004_0034_b_14L所入集成方便者。諸法巧相集成者。是
004_0034_b_15L六相方便故。六相卽法无別所入也。問
004_0034_b_16L後義中。六相當何。所入當何耶。答
004_0034_b_17L六相則解行因也。法性家陁羅尼藏者。
004_0034_b_18L證果海之法也。從叵息妄想至得資粮
004_0034_b_19L者。是修行方便也。以陁羅尼乃至實寶
004_0034_b_20L殿者。是則修行所得之益也。此則窮
004_0034_b_21L實也。約此云法性家也。歸家隨分云
云
004_0034_b_22L中約此云所歸法性家也。此卽是以陁
004_0034_b_23L羅尼无盡寶之所莊嚴實寶殿也。文中
004_0034_b_24L釋此家。亦名法界陁羅尼家及因陁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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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4_c_01L이는 불과佛果를 만족하여서 법성의 집에 들어가 다라니 창고를 열어 법성의 집을 장엄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두 과해果海를 깨달은 곳에 의거하여서 법성의 집, 다라니 창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6상은 여기에 들어가는 방편이다. 그래서 해행解行의 인因으로 본다.문 그것은 실제돈實際頓에서는 인다라나 미세를 말하지 않기 때문인가?답 돈(頓 : 실제돈)과 원(圓 : 궁실원)에서는 모두 10문과 10법을 갖추고 있다. 글93)에서 “일승법의 뜻은 출출세出出世에서 깨닫는 것으로 나머지 때에는 그것을 보고(見) 듣고(聞) 생각하여(比) 이해하고(解) 수행한다 (行).”94)고 하였다. 그러므로 실제돈에서도 또한 인다라를 갖추고 있다. 지금 여기(『법계도』)에서는 궁실원에 의거하여 법성의 집, 인다라니의 집, 미세의 집이라고 하였다.문 6상이 궁실에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한다면 궁실에서는 6상을 쓰지 않는가?답 실제돈에서 이미 6상을 갖추고 있는데 어찌하여 궁실원에서 쓰지 않겠는가. 또한 해행인解行因에서 6상의 눈을 뜨고 궁실에 들어가는 뜻에 의거하여서 6상을 법에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하였다. 즉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거쳐야 하므로 집과 문을 상대하여서 “법성의 집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라고 하였다. 보배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하므로 창고와 열쇠를 상대하여서 “다라니 창고를 여는 좋은 열쇠”라고 하였다.(연기다라니의 뜻을 드러내는 부분 중) 뒷부분은 앞의 내용을 매듭짓는 것이다. 그중에 “위에서 밝힌 연기법”이라고 한 것은 앞의 “만약 연기의 실상을 보고자 하면 ……” 이하에서 밝힌 뜻을 모두 매듭짓는 것이다.문 위에서 밝힌 것은 모두 일승의 연기다라니법이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뜻을 모두 종합하여 매듭짓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오직 앞의 “만약 연기의 실상을 보고자 하면 ……” 이하의 뜻만을 매듭짓는다고 하는가? -
004_0034_c_01L尼家微細家者。是乃以果滿故。入法
004_0034_c_02L性家開陁羅尼藏。莊嚴法性家之義也。
004_0034_c_03L此皆約證果海處云。法性家陁羅尼藏
004_0034_c_04L故。六相者入此之方便也。是故解行
004_0034_c_05L因中見也。問若爾實際頓中。不說
004_0034_c_06L因陁羅微細故爾云耶。答頓圓中並具
004_0034_c_07L十門十法。文云一乘法義出出世證餘
004_0034_c_08L時見聞及比解行。是故頓中。亦具
004_0034_c_09L因陁羅也。今此且約窮實爲法性家因
004_0034_c_10L陁羅尼家微細家也。問六相是入窮實
004_0034_c_11L之方便。則窮實中不用六相耶。答實
004_0034_c_12L際頓中旣具六相。豈於窮實圓中而不
004_0034_c_13L用耶。且約解行因中。開六相眼。入
004_0034_c_14L窮實之義而云六相入法之方便也。謂
004_0034_c_15L欲入家中。要從門戶。是故家與門。相
004_0034_c_16L對而云。入法性家要門。欲開寶藏。要
004_0034_c_17L須鑰匙。是故藏與卷下第三五張匙相
004_0034_c_18L對。云開陁羅尼藏好鑰匙也。後結
004_0034_c_19L前中上來所2)明緣起法者。通結前若
004_0034_c_20L欲觀緣起實相以下所明義也。問上來
004_0034_c_21L所明。並是一乘緣起陁羅尼法故。可
004_0034_c_22L云通結前來所說之義。何云唯結前若
004_0034_c_23L「何」下法界圖本文有「以」·加「以」{乙}。「明」
004_0034_c_24L下法界圖本文有「者唯頭示一乘陀羅尼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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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5_a_01L답 앞에서 밝힌 것으로 연기다라니법이 아닌 것이 없지만 앞부분에서는 단지 「법계도인」의 내용만 해석하고 연기다라니의 뜻에 대해서는 해석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이르러 자세하게 해석하였으므로, 앞의 “만약 연기의 실상을 보고자 하면 ……” 이하의 뜻을 매듭짓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법계도인」의 내용을 해석하는 부분을 끝내면서 “연기다라니의 뜻은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고 하였다.“또한 일승의 막힘없는 말솜씨(辯才)95)를 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된 것(所說)인 연기법을 매듭지었으므로 지금 여기에서는 이야기하는(能說) 말솜씨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이다.문 앞부분은 3승에도 함께 적용되는 뜻이고 지금 여기에서는 일승의 막힘없는 말솜씨를 논하는 것이므로 3승의 분제分齊가 아니라는 뜻에서 “또한 …… 볼 수도 있다.”라고 했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답 그렇지 않다. 앞에서는 이야기된 것(所說)인 연기법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여기에서는 이야기하는(能說) 말솜씨가 3승의 분제分齊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나) 일승一乘과 삼승三乘의 다라니의 차이 설명에 대한 해설(연기다라니대의의 료간 중) 두 번째의 질문과 대답으로 일승과 3승의 차별을 드러내 보이는 부분에는 세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있다. 첫 번째는 잘못을 고치는 것(簡濫)이고, 두 번째는 경전으로 증명하는 것(敎證)이고, 세 번째는 뜻으로 증명하는 것(義證)이다.첫 번째 질문과 대답에서 “여러 존재들이 곧 공空이다.”는 것은 대승시교이고, “여러 존재들이 곧 진여이다.”는 것은 대승종교이다.두 번째 질문과 대답에서 “원교 일승의 분제分齊”라고 이야기한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실제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실제돈과 궁실원을 갖춘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입장은 제5 원교의 실제돈이라는 것으로, (『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 분상문分相門96)과 해섭문該攝門97)은 실제돈에 해당하고, 그 분상문에서 경전의 증명으로 (『화엄경』) 「현수품」과 (「십지품」)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는데,98) 지금 여기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이다.99) 또한 『현담』100)의 돈교에 대한 설명에서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고, 원교에 대한 설명에서 지영상분地影像分101)의 “대해大海로 인하여 10보산十寶山 있는 것과 같이(如因大海有十寶山)”라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문 『법계도』의 뒷부분의 뜻으로 증명하는 부분(義證)에서 “만약 교敎와 의義의 분제分齊가 이와 상응하면 곧 일승원교 및 돈교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므로, 이 경전으로 증명하는 부분(敎證)의 원교 또한 돈교와 원교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답 10문과 10법은 돈교와 원교에 모두 해당하므로 상응하고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은 돈교와 원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
004_0035_a_01L欲觀緣起實相以下義耶。答前之所明
004_0035_a_02L无不是陁羅尼法。然前中但釋印文。不
004_0035_a_03L釋緣起陁羅尼義。至此廣釋故。知結
004_0035_a_04L前若欲觀以下義也。是故釋印文竟而
004_0035_a_05L云陁羅尼義如下釋也。亦可論一乘无
004_0035_a_06L碍辯1)才者。前結所說緣起法。今此
004_0035_a_07L增釋能說辨才也。問前則共三乘義。今
004_0035_a_08L此論一乘无碍辨才。非是三乘分齊義
004_0035_a_09L故云亦可。何不爾耶。答不爾。前辨
004_0035_a_10L所說法。今辨能說之非三乘分齊耳。第
004_0035_a_11L二問答。現示一三差別中。有三問
004_0035_a_12L答。初簡濫。次敎證。後義證也。初
004_0035_a_13L中諸法卽空者。始敎。諸法卽如者。終
004_0035_a_14L敎也。次問答中。言圓敎一乘分齊者
004_0035_a_15L一云實際頓。一云具頓圓也。初義者
004_0035_a_16L第五圓敎之實際頓也。謂分相該攝是
004_0035_a_17L實際頓。而分相證中。引賢首品及第九
004_0035_a_18L地偈。今此亦爾也。玄談中頓敎中引
004_0035_a_19L第九地偈。圓敎中引地影像分。如因
004_0035_a_20L大海有十寶山文故知爾也。問下引義
004_0035_a_21L證中云。若敎義分齊與此相應。卽是一
004_0035_a_22L乘圓敎及頓敎攝已
上 則敎證中圓敎。亦
004_0035_a_23L具含頓圓耶。答十門十法。通於卷
004_0035_a_24L下第三六張頓圓。故云相應。具足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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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5_b_01L제5 원교는 바로 실제돈이다. 아래에서는 다만 “일승과 3승의 분제의 다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만 하고 원교의 이름은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승에는 돈교와 원교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부분에서는 “스스로 3승 이외에 별도로 원교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하여서 원교를 따로 들고 있다. 그러므로 원교는 실제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바로 오직 실제돈이지만 겸하여 궁실원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제5 원교에도 실제돈과 궁실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분상문分相門과 해섭문該攝門에서도 또한 실제돈과 궁실원을 갖추고 있다. 『법계도』 아랫부분인 뜻으로 증명하는 부분(義證)에서 “상응하고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은 돈교와 원교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므로 경전으로 증명하는 이 부분(敎證)에서도 마찬가지이다.문 『현담』에서 두 번째 돈교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였으므로 지금 여기의 원교도 오직 실제돈에 해당하지 않는가?답 이것은 앞에서 (점교, 돈교, 원교의) 문을 나열한 것 중의 두 번째이므로 돈교에 해당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3승 이외에 돈교와 원교가 있음을 증명할 때에 다른 글을 인용한 곳이 없으므로 이 글 역시 돈교와 원교를 아울러 증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문 원교에 대한 증명에서는 이미 “대해大海로 인하여 10보산十寶山이 있는 것과 같이(如因大海有十寶山)”라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제9지의 게송은 오직 돈교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답 앞에서는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여서 3승 이외에 따로 돈교와 원교가 있음을 증명하였고, 뒤에서는 “대해大海로 인하여 ……”의 글을 인용하여 앞의 제9지의 게송이 세 번째 원교의 뜻을 아울러 증명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므로 앞과는 다르다. 즉 “대해大海로 인하여 10보산十寶山이 있는” 것과 같이 부처의 지혜로 인하여 보살의 10지十地가 있다. 하나하나의 산 아래에 모두 큰 바다가 있고 하나하나의 보살지에 모두 불과佛果가 있다. 이와 같이 이미 하나하나의 보살지에 모두 불과가 있으므로 하나하나의 티끌에 모두 불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하나하나의 티끌에 모두 불과가 있음을 깨달으면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부처님의 일을 만족시키게 된다. -
004_0035_b_01L頓圓攝也。第五圓則正實際頓也。是
004_0035_b_02L故下文。但云一乘三乘分齊別義。因
004_0035_b_03L何得知而不擧圓敎之名。故知一乘中
004_0035_b_04L具頓圓也。今此云。所以得知自三乘
004_0035_b_05L外。別有圓敎。如是別擧圓敎。是故
004_0035_b_06L知實際頓也。今釋正唯頓兼具圓。是故
004_0035_b_07L第五圓中具含頓圓。分相該攝中。亦
004_0035_b_08L具頓圓。下義證中云。相應具足者。頓
004_0035_b_09L圓攝。此敎證中亦爾也。問玄談中。言
004_0035_b_10L第二頓敎攝引第九地偈。則今圓敎亦
004_0035_b_11L唯實際頓耶。答以是前列門之第二。故
004_0035_b_12L云頓敎攝耳。然三乘外。別有頓圓之
004_0035_b_13L證中。无有引他文處。故知此文。亦
004_0035_b_14L通證頓圓也。問圓敎證中。旣引如因大
004_0035_b_15L海有十寶山之文。則第九地偈唯證頓
004_0035_b_16L耶。答前則引第九地偈。證成三乘外別
004_0035_b_17L有頓圓。後則引如因大海文。證成前
004_0035_b_18L第九地偈。通證之第三圓敎中義味也。
004_0035_b_19L是故與前別也。謂如因大海有十寶山
004_0035_b_20L因於佛智而有十地。一一山下。皆有
004_0035_b_21L大海。一一地中。皆有佛果。如是旣
004_0035_b_22L得一一地中。皆有佛果。則知一一塵
004_0035_b_23L中。皆有佛果。若得一一塵中。皆有
004_0035_b_24L佛果。則隨所擧。擧皆是滿足佛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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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5_c_01L이와 같은 원교의 뜻을 증명하고자 하여 이 지영상분地影像分의 글을 또 다시 인용한 것일 뿐이다. 『제9지게송소』102)에서 “성문·연각·점오·돈오가 넷이 되고, 또 일승과 3승이 넷이 된다.”103)고 하였는데, 일승과 3승이 넷이 될 때의 일승은 실제돈과 궁실원을 갖추고 있고, 성문·연각·점오·돈오가 넷이 될 때의 돈은 오직 실제이다. 『현담』에서는 이 두 가지 해석 모두에 의거하여서 “이 글을 증명으로 하여 일승, 돈교, 삼승의 차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승에는 돈교와 원교를 갖추고 있고, 돈교는 오직 실제이다. 이 책에 인용되고 있는 「현수품」의 내용은 이 3승에서 “대승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3승 외에 별도로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별교일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교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 이 게송을 인용하면서 “믿기 어려움과 믿기 쉬움의 차별(難信易信差別)”이라고 이름하고 있는 것은 3승의 대승은 믿기 쉽고 별교일승은 믿기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제9지의 4개의 게송104) 중에서 앞의 셋은 3승을 증명하는 것이고 마지막 게송은 일승을 증명하는 것이다.문 앞의 세 게송이 증명하는 3승은 지쌍(地㕛) 3승105)인가, 문상門相 3승106)인가?답 옛글(古辭)에서 신림덕神林德이 당나라에 가기 이전에는 문상 3승이라고 했었는데 당나라에 들어갔다 돌아온 뒤에는 지쌍 3승이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와 반대로 이야기하지만 옛글(古辭)이 그러하므로 지금은 지쌍 (3승)으로 해석한다.문 이것은 『화엄경』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어떻게 지쌍이라고 하는가?답 비록이 『화엄경』에서 이야기한 3승이지만 그러나 대비하여 별교일승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므로 하(4교의) 3승이다.문 네 번째 게송 전체가 실제돈과 궁실원을 증명하는가 아니면 구절을 나누어서 증명하는가?답 비록 구절을 나누어서 증명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전체가 함께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만약 위없는 마음이 있어(若有無上心)”라는 것은 실제돈과 궁실원의 근기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고, -
004_0035_c_01L欲證此義味故。更引此地影像文耳。第
004_0035_c_02L九地偈疏云。聲聞緣覺漸悟頓悟爲四
004_0035_c_03L又一乘三乘爲四已
上 一乘三乘爲四之
004_0035_c_04L一乘中。具卷下第三七張頓圓聲聞緣
004_0035_c_05L覺。漸頓爲四之中。頓唯實際也。玄
004_0035_c_06L談通約此上二釋云。以此文證。得知
004_0035_c_07L一乘頓敎。三乘差別也。是故一乘中
004_0035_c_08L具頓圓。頓敎中唯實際也。此中引賢首
004_0035_c_09L品者。以此三乘之求大乘。猶爲易之
004_0035_c_10L文。得知三外。別有能信。是法甚爲難
004_0035_c_11L之別敎一乘也。五敎章中引此偈。名爲
004_0035_c_12L難信易信差別者。現三乘大乘之易信
004_0035_c_13L而別敎一乘之難信故也。第九地四偈
004_0035_c_14L中。初三偈證三乘。第四偈證一乘也。
004_0035_c_15L問初三偈三乘者。地㕛三乘耶。門相
004_0035_c_16L三乘耶。答古辭神林德。未往大唐時云
004_0035_c_17L門相三乘。入唐還新羅云。地㕛三乘
004_0035_c_18L也。一云反此古辭則爾。今釋地㕛也。
004_0035_c_19L問此是華嚴經中之所參說。何故云地
004_0035_c_20L㕛耶。答雖是此經所說三乘。然對比
004_0035_c_21L以現別敎一乘。故下三乘也。問以第
004_0035_c_22L四偈通證頓圓耶。分句證耶。答雖有
004_0035_c_23L分句證義。今釋通證也。若有无上心
004_0035_c_24L「才」法界圖本文作「大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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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6_a_01L“다함이 없는 불법을 이야기한다.(說無盡佛法)”는 것도 실제돈과 궁실원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절을 나누어 증명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성인의 말씀이 손바닥의 밝은 구슬과 같으니 놀라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앞에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가리킨다.세 번째 질문과 대답 중에서, “일승과 3승의 분제分齊가 다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말한 것과 관련하여 말한다.문 앞에서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하여 일승과 3승의 차이를 이미 설명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이와 같이 묻는 것인가?답 뜻을 인용하여 증명하기 위하여서 이와 같이 하였다. 『법계도』의 서문에서 “이치와 가르침에 의거하여 간략히 반시盤詩를 지었다.”고 하였는데, 이치는 뜻의 이치(義理)이고 가르침은 경전의 말씀(聖敎)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나서 이제 다음으로 뜻을 인용하여 증명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화엄일승교의분제장』) 분상문의 마지막에서 “그 별교일승에서 밝히고 있는 행行·위位·인因·과果 등의 모습이 저 3승에서 제시하는 분제分齊와 완전히 달라서 같지 않음은 널리 경전의 내용에 자세하지만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비록 경전의 증명이 없다고 하여도 그 뜻의 이치(義理)에 의거하여 그 주장하는 바(宗)를 구분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경전의 내용이 어두운 구름을 가르듯 밝게 보여 주고 있음이리오.”107)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하였고 다음으로 뜻을 인용하여 증명함으로써 일승과 3승을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다.(세 번째 질문과 대답 중) 대답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또한 10문에 의지하면 곧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제목(標)이고, 다음의 “첫 번째 동시구족상응문 ……” 이하는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뒤의 “이와 같은 10문을 모두 갖추고 원만한 것은 ……” 이하는 자세한 내용은 다른 책들에 있다고 미룬 것이다.첫 번째 제목(標) 부분에서, “또한 10문에 의지하면”이라고 한 것은 「오교장」의 ‘시설이상施設異相’108)에서 10가지의 차이에 의거하여 일승과 3승을 구별하고 있고,109) 『5권소』110)에서 천왕天王의 법에 의거하여 일승과 3승을 구별하고 있는데,111) 여기에서도 해석하는(能釋) 10문에 의거하여 일승과 3승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이라고 하였다.두 번째 개별적 해석에서는 먼저 10문에 대하여 설명하고 뒤의 “이상의 10현문은 ……” 이하에서는 일승과 3승의 가르침의 분제分齊를 구분하고 있다.(첫 번째의 10문에 대한 설명 중)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 문이 총總이고, 뒤의 9문은 별別이라고 하는데, 『료간』(『탐현기』)의 ‘동이원비同異圓備’112)에서 앞에서 설명한 9문을 모두 총괄하여 동시구족同時具足이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
004_0036_a_01L中。通擧頓圓根。說无盡佛法中。亦
004_0036_a_02L通擧頓圓。故知不分句證也。聖言如
004_0036_a_03L掌明珠不須驚恠者。指前所引經文也。
004_0036_a_04L三問答中。言問一乘三乘分齊別義等
004_0036_a_05L者。前引敎證。旣辨一三之別。何故
004_0036_a_06L今此如是問耶。答欲引義證故爾也。謂
004_0036_a_07L序云依理據敎。略制盤詩已
上 理則義
004_0036_a_08L理。敎則聖敎。是故旣引聖敎之證。今
004_0036_a_09L次欲引義證故爾云也。分相卷下第三
004_0036_a_10L八張終云。其別敎一乘所有行位因果
004_0036_a_11L等相。與彼三乘設敎分齊。全別不同
004_0036_a_12L廣在經文。略如下辨。縱无敎證。依彼
004_0036_a_13L義異尙須分宗。況聖敎雲披煥然溢目
004_0036_a_14L矣已
上 今此亦爾。前引敎證。次引義證
004_0036_a_15L以別一三也。答中有三。先且依十門
004_0036_a_16L卽知者標。次一同時具足下。別釋。後
004_0036_a_17L如是十門具足圓等者。推廣也。初中
004_0036_a_18L且依十門者。五敎章施設異相中約十
004_0036_a_19L門。辨一三別。五卷疏中約天王法。辨
004_0036_a_20L一三別。此中約其能釋十門。故云且
004_0036_a_21L也。別釋中先辨十門。後上十1)門玄
004_0036_a_22L等者。簡敎分齊。初中同時具足相應
004_0036_a_23L門者。一云此門是摠 2)后九是別。料簡
004_0036_a_24L同異。圓備中摠攝前九門同時具足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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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6_b_01L어떤 사람은 10문이 모두 서로 총이 될 수 있고 별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십현장』에서 “그런데 이 10문은 하나의 문마다 곧 나머지 문들을 포섭하므로 모두 다 온전하게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113)고 이야기한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강목장』에서 동시문을 해석할 때 총과 별 두 가지 뜻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하나로 결정할 수 없다.“동시同時”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해인시海印時라 하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 미시未時 등 어떤 것을 따라서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두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문 『십현장』에서 “이것은 해인삼매에 의거하여 분명하게(炳然) 동시에 드러내어 이루었다.”114)고 하였으므로 오직 해인시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답 여러 존재가 모두 갖추어져서 상응하는 것은 바로 해인정을 얻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으면 시간과 존재는 나의 움직임을 따라서 상응하고 모두 갖추어지는 것이므로 의거하는 것마다 동시이다.“인人·법法, 이理·사事 ……”는 『대료간』, 『지귀장』, 「의리장」 등에서는 모두 10쌍의 대립항(對)으로 법을 구별하고 있는데115) 지금 여기에서는 단지 5쌍의 대립항 10개의 법法만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마도 『보법장』116)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10쌍의 대립항으로 법을 구별하는 것 중에서 앞의 5쌍의 대립항 10개의 법을 취한 것으로 뒤의 5쌍의 대립항은 인人·법法을 나눈 것이므로 비록 5쌍의 대립항이지만 또한 빠뜨린 것이 없다.“문門”은 큰 지혜(通智)가 지나다닌다(遊履)는 뜻이다.“상응하여 앞뒤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10법이 시간과 더불어 상응하여 앞뒤가 없다는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이 10보법이 하나하나의 법을 따라서 서로 알지 못한다(不相知)는 뜻이라고 한다.“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의 인다라망은 여기 말로는 “하늘 임금 (天主)의 그물”로서 각 그물코에 있는 구슬들이 서로에 비추어지고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으로서 일승의 연기법이 거듭하여 계속되는(重重) 것과 같다. 『십구장』에서 “안으로 향하여 중심을 찾으니 들어갈수록 바깥이고, 바깥을 향하여 끝을 찾으니 나갈수록 안이다.”라고 하였는데, 존귀한 집에서는 여러 겹의 담장을 쌓아 두기 때문에 처음 하나의 담장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이 집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
004_0036_b_01L知爾也。一云。互論摠別。十玄章云。然
004_0036_b_02L此十門。隨一門中。卽攝餘門。无不
004_0036_b_03L皆盡已
上故知爾也。今釋綱目章中。釋
004_0036_b_04L同時門具摠別二義故。不可局定也。同
004_0036_b_05L時者。一云海印時。一云午時未時等
004_0036_b_06L隨何云也。今釋具前二義。問十玄章
004_0036_b_07L云。此依海印三昧炳然同時現現成矣已
上。
004_0036_b_08L則唯約海印時耶。答諸法之具足相應
004_0036_b_09L者。正在得海印之念。然得如是時法
004_0036_b_10L則隨我所擧相應具足故。約約同時也。
004_0036_b_11L人法理事等者。大料簡 3)指歸章。義
004_0036_b_12L理章等。並十對辨法也。今此唯立五對
004_0036_b_13L十法。盖從普法章故爾也。取彼十
004_0036_b_14L對辨法中卷下第三九張前五對。十法
004_0036_b_15L以後五對。於人法中之所開故。雖
004_0036_b_16L是五對。亦无所闕也。門者。通智
004_0036_b_17L遊履義也。相應4)无前後者。一云十
004_0036_b_18L法。與時相應无前後也。一云此十普
004_0036_b_19L法。隨一一法。不相知義也。因陁羅
004_0036_b_20L網境界門者。此云能天主網。珠珠交
004_0036_b_21L影互相映現。同於一乘緣起法之重重
004_0036_b_22L也。十句章云。向內尋心。入入猶外
004_0036_b_23L向外尋邊。出出猶內已
上 比如尊貴之
004_0036_b_24L家。多重築垣。初入一垣。謂爲是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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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6_c_01L다시 또 하나의 담장이 나타나고 이렇게 거듭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들어갈수록 바깥”이라고 하고, 처음 하나의 담장을 벗어나면 ‘이제 나왔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또 하나의 담장이 나타나고 이렇게 거듭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나갈수록 안”이라고 한 것이다.문 다른 문들도 또한 증지證智117)의 경계인데 어째서 오직 이 문에만 경계라고 하였는가?답 물어본 것과 같이 다른 문들도 모두 증지의 경계이다. 그렇지만 『십지론』에서 “제망(帝網 : 인다라망)의 차별은 진실된 뜻의 모습이고, 진실된 뜻의 모습은 증지證智의 경계이다.”118)라고 하였다. 이 『십지론』의 내용을 따라서 문의 이름을 세운 것일 뿐이다.“여기에 앞의 10문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문 한 종류의 10법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10법을 가리키는가?답 두 가지 뜻이 모두 맞다. 비록 10문이 각기 갖추고 있지만 “앞의 10문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한 종류라고 하여도 되고, 연기법은 필요한 곳이 무엇이든 따라서 새롭게 문을 만들지만 섞이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어도 된다. 만약 오직 한 종류라고 하면 어떻게 10문·100문·1,000문 등을 이룰 수 있겠는가?“비유를 따라 다를 뿐이다.”라는 것은 만약 존재(法)를 따라서 다른 것이라면 “거듭하여 계속됨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문 어째서 첫 번째의 동시구족상응문에는 이와 같은 말이 없는가?답 첫 번째 문은 다른 문과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뒤의 문들과 대비하여 구분한다면 “앞뒤가 없음을 따라 다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나머지는 그것에 준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는 10법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10문을 설명하였는데, 다시 나머지 법들에 의거하여 10문을 논할 때에는 그에 준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미 동시문에서 이와 같이 10법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밝혔으므로 다른 문에 의거할 때에는 “인법人法인다라, 교의敎義인다라, ……,” “인법人法상즉, -
004_0036_c_01L更有一垣。如是重重。故云入入猶外
004_0036_c_02L初出一垣。謂爲已出。更有一垣。如
004_0036_c_03L是重重。故云出出猶內也 5)問餘門亦
004_0036_c_04L是證智境界。何唯此門云境界耶。答
004_0036_c_05L如所問義。並是證境。然地論云。帝
004_0036_c_06L網差別者。眞實義相。眞實義相者。證
004_0036_c_07L智境界已
上 且依論文立門名耳。此中
004_0036_c_08L具前十門者。問一種十法耶。異異十
004_0036_c_09L法耶。答二義也。雖十門各具。旣云
004_0036_c_10L具前十門故。一種亦得。以緣起法。隨
004_0036_c_11L何須處。新新而起門不雜故。異異亦
004_0036_c_12L得也。若唯一種。何成十門百門千門
004_0036_c_13L等耶。從喩異耳者。若從法異者。應
004_0036_c_14L云從重重異耳。問何故。初門无此辭
004_0036_c_15L耶。答以是初門。无所簡之餘門故爾
004_0036_c_16L也。若對後門簡者。應云從无前後異
004_0036_c_17L耳。餘可准之者。一云今此約十法辨
004_0036_c_18L十門。如是轉約餘法論十門准之也。一
004_0036_c_19L云旣明同時門中。十法具足。如卷
004_0036_c_20L下第四○張是約餘門者。應云人法因
004_0036_c_21L陁羅敎義。因陁羅等。人法相卽。敎
004_0036_c_22L「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后」作「戶」
004_0036_c_23L{甲}。「指」疑「旨」{編}。「无」下法界圖本文有
004_0036_c_24L「有」。「問」作「門」{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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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7_a_01L교의敎義상즉, ……” 등으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나머지는 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십현장』에서는 10문에 대하여 각기 경전(聖敎)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인용하지 않았으므로 나머지는 그에 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마지막 견해를 따른다. 『십현장』에서는 각 문마다 경전을 인용하였는데 “나머지는 그것에 준한다.”는 이 말이 없고, 『약소』(『수현기』)의 앞부분119)과 이 책에서는 경전을 인용하지 않았는데 “나머지는 그것에 준한다.”는 이 말이 있으므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문 어째서 『약소』에는 각 문마다 모두 이 말을 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오직 두 번째 인다라망경계문과 열 번째 탁사현법생해문에서만 이야기하고 있는가?답 『약소』에서 모두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각 문들이 모두 경전을 인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간략함을 따라서 두 곳에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그와 같음을 보인 것이다.“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現俱成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감춤(隱)과 드러남(現)이 비밀스럽게 함께 이루어지는 뜻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비밀의 숨음(隱)과 드러난 것의 드러남(現)이 함께 이루어지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십현장』에서 “하나의 티끌에서 정수(正受 : 삼매)에 들어가 모든 티끌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나고, 모든 티끌에서 정수(正受 : 삼매)에 들어가 하나의 머리털의 끝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나니 이와 같이 자유롭게 여기에서 감추고 저기에서 드러나며 정수正受에 들어가고 삼매로부터 일어남이 동시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120)고 하였으므로 첫 번째 해석이 타당하고, 『금사자장』에서 “감춤(隱)은 비밀이고, 드러남(現)은 드러내는 것”121)이라고 하였으므로 두 번째 해석도 타당하다.“연緣을 따라 다를 뿐이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수연(須緣 : 앞으로 갖추어야 할 연)이라고 하지만 지금 해석해 보건대 기연(機緣 : 이미 갖추어진 연)이다. 『십현장』에서 “이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시방세계에 연緣이 있으므로 오고 가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미세는 포함하는 것(能含)이고, 상용은 포함되는 것(所含)이며, 안립은 둘 다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료간』(『탐현기』)에서 “이문異門으로 동체同體의 상입相入의 뜻을 포섭하므로 미세문을 드러낸다.”고 하였으니 이체異體의 미세한 하나의 티끌이 동체同體의 상용하는 존재들을 포섭하여 미세문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미세는 포함되는 것(所含)이고, -
004_0037_a_01L義相卽等。故云餘可准也。一云十玄
004_0037_a_02L章十門。各引聖敎爲證。今此不引。故
004_0037_a_03L云餘可准之。今釋取後義。以十玄則
004_0037_a_04L各引聖敎而无此辭。略疏初及此中不
004_0037_a_05L引聖敎而有此辭。故知爾也。問何故
004_0037_a_06L疏中。門門具有此辭。今此唯於第二
004_0037_a_07L第十門中擧耶。答疏中具擧者。門門
004_0037_a_08L應引聖敎故爾也。今此從簡。且擧二
004_0037_a_09L處例餘也。秘密隱1)現門者。一云隱
004_0037_a_10L之與現秘密俱成也。一云秘密之隱與
004_0037_a_11L現了之現俱成也。今釋二義具也。十
004_0037_a_12L玄章云。於一微塵。入正受一切微塵三
004_0037_a_13L昧起。一切微塵。入正受一毛端頭三
004_0037_a_14L昧起。如是自在。此隱彼現正受及起
004_0037_a_15L定。同時秘密成矣已
上 則初義可得。金
004_0037_a_16L師子章云。隱則秘密。現則現2)了已
上 則
004_0037_a_17L後義可得也。從緣異耳者。一云須緣
004_0037_a_18L今釋機緣也。十玄章引此經云。十方世
004_0037_a_19L界有緣故。往反出入。度衆生故知爾也。
004_0037_a_20L微細相容安立者。一云微細則則能含
004_0037_a_21L相容則所含。安立則通能所二也。料
004_0037_a_22L簡云。以異門攝同體中相入義。現微
004_0037_a_23L細門已
上 以異體之微細一塵。攝同體
004_0037_a_24L相容之法。成微細門故爾也。一云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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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7_b_01L상용은 포함하는 것(能含)이며, 안安은 세우는 방식이고, 립立은 세워지는 것으로서 그 미세한 법을 받아들여 편안하게 세웠다는 뜻이라고 한다.“일다상용문一多相容門”이란 하나(一)와 여럿(多)이 서로 받아들이고 포섭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하나에 미세한 여러 존재(法)들을 포함하여 분명히(炳然) 안립安立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징관의 『연의초』에서 “유리병에 많은 겨자씨를 담아 두니 병을 통해서 뚜렷이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런데 미세에는 모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포함되는 것(所含)의 미세로서 겨자씨〔와 병의 관계와 같다. 하나의 터럭 구멍은 여러 세계를 다 받아들이지만 그 여러 세계들은 하나의 터럭 구멍을 다 채우지 못할 때, 터럭 구멍은 본래의 모습(性)과 일치하는 것으로 겨자씨를 담고 있는 유리〕병과 같고, 여러 세계들은 외형(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겨자씨와 같다.122) 두 번째는 포함하는 것(能含)의 미세로서 한 티끌이나 한 올의 머리카락이 능히 포함하는 것이니 아래에서 인용하여 증명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알기 어려움(難知)의 미세로서 크지 않은 조그만 티끌이 작지 않은 이 세상을 능히 포용한다는 것으로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나가 여럿을 능히 포함하는 것을 곧 상용相容이라 하고, 각 존재가 모두 그러한 것을 상용이라고 하며, 하나와 여럿이 부서지지 않는 것을 안립安立이라고 한다.”123)고 하였으므로 세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다.“모습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는 것은 분명하고(炳然) 가지런하게 드러난 모습을 가리킨다. 『십현장』(『화엄일승십현문』)의 미세문에서 “이것은 모습(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조그만 티끌은 곧 작은 모습이고 무량한 부처님의 국토와 수미산, 금강산 등은 곧 큰 모습이다. 다만 연기의 참된 덕으로서 작은 모습과 큰 모습이 서로를 포용하니 천인天人들이 신통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편안하게 자리잡는다(安立).”124)고 하였다.“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에 대하여 『십현장』(『화엄일승십현문』)에서 “이와 같이 10세世는 연기의 힘에 의하여 상즉하고 상입하지만 3세世를 잃지 않는다. 10세世는 비록 동시이지만 10세世를 잃지 않는다.”125)고 한다.문 이 9세世126)를 모아서 하나의 순간을 이루면 이 종합적인 하나의 순간도 하나의 존재(法)를 따로따로 성립하게 하는가?답 그렇다. 전체와 개별이 같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아니다.“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은 (『화엄경』) 「십장품十藏品」127)의 시장施藏, 계장戒藏 등의 문에 의거한 것이다. 그래서 “문門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
004_0037_b_01L細則所含。相容則能含。安則能安。立
004_0037_b_02L則所立。容其微細之法安立也。一多相
004_0037_b_03L3)容門者。一之與多。互卷下第四一
004_0037_b_04L張相容攝。此則一中含攝微細之多
004_0037_b_05L法。炳然安立也。今釋觀師演義云。如
004_0037_b_06L瑠璃甁。盛多芥子。隔甁頓見。然微
004_0037_b_07L細言摠有三義。一所含微細。猶如芥
004_0037_b_08L甁刹。約存相如芥子在內。二約能含
004_0037_b_09L微細。以一塵一毛。卽能含故如下引證
004_0037_b_10L三約難知微細。微塵不大。而刹不小。
004_0037_b_11L而能廣容。卽難知義。一能含多。卽
004_0037_b_12L曰相容。法法皆爾。故曰相容。一多
004_0037_b_13L不壞。故曰安立已
上 故具三義也。從
004_0037_b_14L相異耳者。炳然齊現之相也。十玄章
004_0037_b_15L微細門云。此就相說。如一微塵。此
004_0037_b_16L卽小相。无量佛國。須彌金剛山等。卽
004_0037_b_17L是大相。直以緣起實4)德。致使相容
004_0037_b_18L非天人所作故安立也。十世隔法異成
004_0037_b_19L門者。十玄5)章云。如是十世。以緣
004_0037_b_20L起力故。相卽復相入而不失三世。十
004_0037_b_21L世雖同時而不失十世已
上 問摠此九世
004_0037_b_22L以成一念則以摠一念。亦令隔法耶。答
004_0037_b_23L爾也。以摠之與別不同故。无難也。
004_0037_b_24L諸藏純6)雜門者。此約十藏品施藏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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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7_c_01L“일다상용문一多相容門”에 대하여 『십구장』에서 “미세상용문과 일다상용문이 어떻게 다른가? 신림이 답하였다. 서로 받아들이는 것은 둘 다 같다. 무슨 인因으로 서로 받아들이는가를 말하기 위하여 하나와 여럿이 서로 받아들인다(一多相容)고 하였고, 서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떠한가를 말하기 위하여 미세하게 받아들인다(微細相容)고 하였다.”128) 어떤 존재(法)와 어떤 존재(法)가 서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하나(一)와 여럿(多)이 서로 받아들이고, 또 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미세하여 알기 어렵다.“이치(理)를 따라서 다르다.”는 것은 상입문은 인과도리因果道理의 문이라는 것이다. 연기를 이루는 주체인 인因 외에 이루어지는 과법果法이 있기 때문에. “이치(理)를 따른다.”고 할 때의 이치는 인과도리因果道理의 이치(理)를 가리킨다.“쓰임(用)을 따라서 다르다.”는 것은 상즉문은 덕용자재德用自在의 문이라는 것이다. 인연의 당체當體는 곧 공空이고 곧 인因이고 곧 과果로서 인因 외에 이루어지는 과果를 설정하지 않고 인이 곧 과가 되기 때문이다. “쓰임(用)을 따른다.”고 할 때의 쓰임은 덕용자재德用自在의 쓰임(用)을 가리킨다.“또한 성품에 의할 수 있다.”의 성품은 무주無住의 법성法性을 가리킨다.문 다른 문에서는 무주의 법성에 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답 만약 무주의 법성에 의한다고 하면 여러 문이 모두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문에 편중된(偏增) 의미가 없지 않다. 옛글(古辭)에서 “무주의 법성에 대하여 세 문에 멀고(遠), 가깝고(近), 곧바로(卽)의 세 가지 뜻이 있다. 중문(中門 : 상입문)은 그 체體의 쓰임에 의거하여 이루는 것(能成)과 이루어지는 것(所成)을 구별하므로 먼 문(遠門)이라 부르고, 즉문(卽門 : 상즉문)은 모두 법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인연의 체가 온전하게 상즉하므로 가까운 문(近門)이라 부르며, 주반문主伴門은 일으키지 않으면서 -
004_0037_c_01L藏等門。故云從門異耳。一多相*容
004_0037_c_02L門者。十句章云。問微細相容。與一
004_0037_c_03L多相容。何別。林德答相容齊同。何因
004_0037_c_04L相容則有一多相容也。相容之貌。如何
004_0037_c_05L則有微細相容也已
上 何法與何法相容
004_0037_c_06L耶。則一之與多相容也。又此相容之
004_0037_c_07L貌。微細難知也。從理異者。入門則
004_0037_c_08L因果道理門也。謂能成因外。有所成
004_0037_c_09L果卷下第四二張法故。從理者。因果
004_0037_c_10L道理之理也。從用異者。卽門則德
004_0037_c_11L用自在門也。謂因緣當體。卽空卽因
004_0037_c_12L卽果。因外不立所成之果。以因卽果
004_0037_c_13L故也。從用者。德用自在之用也。亦可
004_0037_c_14L依性者。无住法性也。問餘門不依无
004_0037_c_15L住法性故。不擧此辭耶。答若言依无
004_0037_c_16L住法性則諸門皆爾。然非无偏增之義
004_0037_c_17L故爾也。謂古辭云。望於无住法性。於
004_0037_c_18L三門有遠近卽之三義。謂中門者。約
004_0037_c_19L其體上之用。辨能所成故。名爲遠門
004_0037_c_20L卽門者。全法性所成因緣之體。全全
004_0037_c_21L相卽。故名近門。主伴門者。不起之
004_0037_c_22L「現」下法界圖本文有「俱成」。「了」作「著」
004_0037_c_23L{乙}。「容」下法界圖本文有「不同」次同。「德」
004_0037_c_24L下疑有「無碍自在」{乙}。「章」下疑脫「門」{乙}。
004_0037_c_25L「雜」下法界圖本文有「具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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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8_a_01L다른 모습을 일으키는 존재들 중에서 앞에 일어나는 것을 주主로 하고 뒤에 일어나는 것을 반伴으로 하니 곧 일으키지 않는 법으로서 곧바로의 문(卽門)이라고 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지혜를 따라서 다르다.”는 것에서 의탁된 현상(所託之事)이란 곧 드러나 있는 것이므로, 오직 지혜만이 알 수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위의 10개의 현문玄門은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10문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해석해 보건대 10문과 3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만약 교敎와 의義의 분제分齊가 ……”는 실제로는 (교·의만이 아니라 나머지 8가지를 포함한) 10보법을 모두 들어야 하지만 임시로 첫 번째 한 쌍의 대립항을 들어서 뒤의 것들도 그러함을 보인 것이다.“이것(10현문)과 상응하는 것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것(與此相應而不具足)”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비록 10현문과 상응하지만 만약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으면 3승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 해석해 보건대 만약 3승의 가르침으로서 이 10현문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만약 이 10현문과 상응하는 뜻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으면 3승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129) “온전히 갖춘다. (具足)”는 말이 없었으므로 지금 이 부분에서도 그러하여야 한다. 다만 10현문의 법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이야기한 것이다.
다) 관련 문헌들에 대한 해설(연기다라니대의의 료간 중) 세 번째 자세한 설명에 미루는 부분과 관련하여 말한다.지엄의 『행장록』에서는 “『화엄경소』(『수현기』) 5권, 『공목장』 4권, 『화엄오십요문답』 2권, 『입법계품초』 1권”이라고 하여 숫자의 많고 적은 순서에 따라 나열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는 직접적인 것부터 간접적인 것의 차례대로 나열하였다. 즉 『화엄경』은 이 『법계도』가 의거하는 근본 가르침 (本敎)이므로 가장 앞에 두었고, 논은 지어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므로 그 다음에 두었으며, 소는 경전과 논서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 다음에 두었다. 『입법계품초』는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고 「입법계품」 하나의 품을 해석한 것이지만 경전의 차례에 어긋나지 않게 해석한 것이므로 그 다음에 두었다. 『공목장』은 비록 경전의 내용을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화엄경』 8회會와 품品의 순서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 각 장章의 순서를 세웠으므로 그 다음에 두었고, 『화엄오십요문답』은 경전의 순서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경전 중의 중요한 뜻에 대하여 질문하고 대답한 것이므로 가장 뒤에 두었다.3) 이 책의 제목과 의거하는 경론에 대한 해설(『법계도』 본문 해석의 마지막 부분인) 제목과 의거하는 바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일승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은 제목이고, -
004_0038_a_01L起別相法中。先擧爲主。後擧爲伴。
004_0038_a_02L卽不起法。故名卽門已
上故爾也。從智
004_0038_a_03L異者。所託之事。卽是所現者。唯
004_0038_a_04L智所知故爾也。上十1)門玄並皆別異者。
004_0038_a_05L一云十門之別異也。今釋十門與三乘
004_0038_a_06L別異也。若敎義分齊者。實則具擧十
004_0038_a_07L普法。然且擧初一對。例於後也。與此
004_0038_a_08L相應而不具足者。一云雖與玄門相應
004_0038_a_09L若不具足則三乘也。今釋若是三乘中
004_0038_a_10L法。於此玄門。與之相應。无有是
004_0038_a_11L理。是故。應云若不具足與此玄門相
004_0038_a_12L應之義。則三乘攝也。前中亦无具足
004_0038_a_13L之辭。今此亦爾。但約與門法不相應
004_0038_a_14L義說故爾也。三推廣中。儼師行狀錄
004_0038_a_15L中云。疏五卷孔目四卷問答二卷抄一
004_0038_a_16L卷者。從數多少次第列也。今此從
004_0038_a_17L親疎次卷下第四三張第列也。謂經是
004_0038_a_18L所依本敎故在㝡初。造論釋經故次之
004_0038_a_19L疏通經論故次之。鈔非通釋。但釋法
004_0038_a_20L界一品。然不違經文次第而釋故次之
004_0038_a_21L孔目雖不依經而釋。然不違於八會品
004_0038_a_22L次立其章門故次之。問答則旣不依經
004_0038_a_23L文次第。但擧經中要義而問答故。㝡
004_0038_a_24L在後也。後現題名及所依中。一乘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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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8_b_01L“『화엄경』 및 『십지론』”은 의거하는 바 근본 가르침이다.4) 보충 설명을 위한 문답들에 대한 해설마지막 부분의 여러 질문과 대답 중에서 말한다.“연緣은 어디에서 오는가? ……”의 내용은 『유마경』의 뜻에 의거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그 경전의 「관중생품觀衆生品」에 문수보살이 유마힐 거사와 주고받는 여러 차례의 질문과 대답이 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질문) : 번뇌를 없애려고 하면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대답) : 마땅히 바른 마음으로 수행하여야 합니다.
(질문) : 어떻게 하여야 바른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까?
(대답) : 마땅히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으로 수행하여야 합니다.
(질문) : 어떠한 존재(法)가 생겨나지 않고, 어떠한 존재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대답) : 착하지 않은 것은 생겨나지 않고, 착한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질문) :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몸이 근본입니다.
(질문) : 몸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탐욕이 근본입니다.
(질문) : 탐욕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누어 구별하는 것(虛妄分別)이 근본입니다.
(질문)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누어 구별하는 것(虛妄分別)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전도顚倒된 생각이 근본입니다.
(질문) : 전도顚倒된 생각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이 근본입니다.
(질문) :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대답) :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은 근본이 없습니다. 문수사리여,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의 근본으로부터 모든 존재(法)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뜻을 취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3승에 의거한 것이고, 지금은 일승의 무주無住의 법성法性에 의거한 것이므로 서로 다르다.“여여如如는 어디에 있는가? 여여는 스스로의 법성에 있다.”는 것은 부처의 있음과 없음에 관계없이 본성(性)과 모습(相)이 항상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무주無住의 법성法性을 가리켜서 스스로의 법성이라고 한 것이다.3. 「유통분」에 대한 해설(전체의) 세 번째 부분인 「유통분」에 대하여 말한다.「유통분」에는 서원하는 「유통분」(誓願流通)과 내용을 정리하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유통분」(結屬流通)이 있는데, 지금 이 책의 「유통분」은 서원하는 「유통분」이다. 『기신론』에서 “여러 부처님들의 매우 깊고 넓고 큰 뜻을 내가 지금 분수껏 총지摠持에 따라 이야기하였다. 이 법성과 같은 공덕을 회향하여 모든 중생계에 널리 이익되기를 바랍니다.”130)라고 한 것도 서원하는 「유통분」이다.서원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수행하기 전의 서원, 수행한 후의 서원, 수행과 동시에 하는 서원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서원은 수행한 후의 서원이다. -
004_0038_b_01L界圖合詩一印者。題名。華嚴經及十
004_0038_b_02L地論者。所依本敎也。後雜段問答
004_0038_b_03L中。緣從何處來等者。據維摩經義
004_0038_b_04L說也。彼經觀衆生品。文殊問維摩詰
004_0038_b_05L有多重問答。其中云。欲除煩惱。當
004_0038_b_06L何所行。答當行正念。又問云何行於
004_0038_b_07L正念。當行不生不滅。又問何法不生
004_0038_b_08L何法不滅。答不善不生。善法不滅。又
004_0038_b_09L問善不善孰爲本。答身爲本。又身孰
004_0038_b_10L爲本。答貪欲爲本。又問貪欲孰爲本
004_0038_b_11L答虛妄分別爲本。又問虛妄分別孰爲
004_0038_b_12L本。答顚倒想爲本。又問顚倒想孰爲
004_0038_b_13L本。答无住爲本。又問无住孰爲本。答
004_0038_b_14L无住卽无本。文殊師利。從无住本。立
004_0038_b_15L一切法已
上 意取彼也。然彼約三乘。今
004_0038_b_16L約一乘。无住法性故別也。如如在何
004_0038_b_17L處如如在自法性者。約有佛无佛性相
004_0038_b_18L常住之无住。法性云自法性也。
004_0038_b_19L三流通中。有誓願流通與結屬流通。今
004_0038_b_20L此誓願也。起信論云。諸佛甚深廣大
004_0038_b_21L義。我今隨分摠持說。廻此功德如法
004_0038_b_22L卷下第四四張性。普利一切衆生界。此
004_0038_b_23L亦誓願流通也。誓願中有三。謂行
004_0038_b_24L前願行後願行俱願。今此則行後願也。
-
004_0038_c_01L그러므로 서원과 회향이 하나의 뜻이다. 앞에서는 회향할 선근공덕을 이야기하고, 뒤에서는 중생 등 회향할 대상을 이야기하였다. 곧 중생衆生회향과 보리菩提회향이다. 실제實際회향은 생략하였다.131)일승법계도원통기 (하)간행 발문이 글 중의 “소목所目”의 뜻과 “하나의 이름(一名)으로 외친다.”, “스스로의 이름(自名)으로 외친다.” 등에 관한 뜻들을 『십구장원통기』 등과 대조하면 크게 같지 않은 곳이 있다. 성사(聖師 : 균여)가 세운 이론이 때에 따라 달라졌던 것인지, 아니면 기록하는 사람의 취사선택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감히 자세히 결정하지 못하고 뒷날에 부처와 조사의 본의를 얻는 사람이 나와서 구별하기를 기대한다.『법계도』는 의상義相 조사께서 일승의 오묘한 뜻을 서술하신 것으로, 30구의 게송을 포함하고 있다. 그윽한 관문을 여는 신령한 열쇠이고 법의 바다의 근원이다. 옛날에 원통수좌 균여 대사께서 마하갑수摩訶岬藪의 백운방白雲房에 머무셨는데, 광종光宗 무오년(958년, 광종 9) 7월에 『법계도』의 글을 풀어서 말씀하셨다. 그때 부사副師는 영안靈眼 법사이고, 중부重副는 법응法凝 법사이시며, 기록한 사람은 국현國賢 법사이셨다. 그 후 신축년(1001년) 7월 일에 금생사金生寺의 주지인 법사 법진法璡이 그 말씀을 기록하여 사찰의 대장大藏에 넣어 두었다.뒤에 상주尙州 승장사勝長寺의 현여玄如 법사가 비마라방장毗摩邏方丈의 문장文莊 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책에 의거하여 2권으로 번역하고 “혜보惠保”라고 이름 붙였으니 바로 이 책이었다. 흥교사興敎寺 학인 혜보惠保가 베껴 적은 것이었다. 현여 법사는 균여 대사의 강의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번역에 착오가 있었다. 임인년132)에 금생사 주지인 수좌首座 인원印元이 사찰의 옛 문헌들 중에서 법진 법사가 베꼈던 이 책의 방언본方言本 1권을 찾아내어 후학들에게 유통시켰다.반룡사盤龍寺 비구 일당日幢이 두 책을 자세히 대조하여 상·하권으로 만들고 제목을 ‘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라고 하였다. 그 후 이 책이 전해져서 가르침의 요체가 되니 학자들이 다투어 찾았다. 그렇지만 단지 사본寫本만 있고 판본板本이 없어서 -
004_0038_c_01L則願與廻向。是一義也。初擧所廻善
004_0038_c_02L後衆生等。擧所廻處。卽是衆生廻向
004_0038_c_03L與菩提廻向也。實際則略也。
004_0038_c_04L一乘法界圖圓通記卷下卷下第四五張。
004_0038_c_05L
004_0038_c_06L此記中所目義與一名自名口許義等。准
004_0038_c_07L十 2)句圓通記等。大有不同則聖師所立
004_0038_c_08L之義。隨時差別耶。記者之取捨。有不同
004_0038_c_09L耶。未敢詳定。待後得佛祖本意者辨也。
004_0038_c_10L法界圖者。義相祖師所述一乘妙旨包含
004_0038_c_11L三十句偈。玄關之靈鑰。法海之宗源。昔
004_0038_c_12L圓通首座均如大師。住摩訶岬藪白雲房
004_0038_c_13L以光宗朝戊午七月。演說圖文。副師靈
004_0038_c_14L眼法師。重副法凝法師。記者國賢法師
004_0038_c_15L越辛丑七月。日 金生寺住持法師法璡
004_0038_c_16L記其所說。寫入大藏。後有尙州勝長寺玄
004_0038_c_17L如法師。依毗摩邏方丈文莊師藏本。譯
004_0038_c_18L爲二卷。名爲惠保。即此記也。盖興敎
004_0038_c_19L寺學人惠保。展轉記耳。以玄如法師未
004_0038_c_20L見均如大師廣說故。譯有差舛。壬寅歲
004_0038_c_21L金生寺住持首座印元。於古藏。搜得法
004_0038_c_22L璡法師所寫此記方言本一卷。流傳後進
004_0038_c_23L盤龍社比丘日幢。詳校二本。爲上下卷
004_0038_c_24L目爲法界圖圓通記。厥後此記。傳爲法
004_0038_c_25L要。學者競欲索焉而徒有寫本。訖無板
004_0038_c_26L「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句」下疑脫
004_0038_c_27L「章」{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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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039_a_01L널리 유통되지 못하니 혹 오래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지금 본강本講 사리闍梨133)로 흥왕사興王寺 교학敎學134)이고 해인사海印寺 주지이신 승통僧統 천기天其 스님께서 화엄華嚴 종파의 여러 스님들과 함께 이 책을 자세히 고치시고 3권으로 나누신 후 임금님의 명령을 받들어 목판에 새겨 널리 유포시키니 복을 받듦에 끝이 없을 것이다.지원至元 24년(1287년, 충렬왕 13년) 정해년 5월 일전前 총랑摠郞 김훤 용회金晅用晦135)가 발문을 짓고,금성사金城寺 주지인 삼중 대사三重大師 영담永曇이 쓴다. -
004_0039_a_01L本故。未得廣流。或恐不壽傳。今坐講
004_0039_a_02L闍梨興王寺敎學。海印寺住持僧統天其
004_0039_a_03L與業內諸德。詳定此記。分爲三卷。奉承
004_0039_a_04L上制。彫板廣布。奉福無窮者。
004_0039_a_05L至元二十四年。丁亥五月。日。
004_0039_a_06L前摠郞金晅用晦跋。
004_0039_a_07L金城寺住持三重大師永曇書。大藏都
004_0039_a_08L監開板。
- 1) 『법계도』 중의 다음 부분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問 具縛有情 未斷煩惱 未成福智 以何義故 舊來成佛也 答 煩惱未斷 不名成佛 煩惱斷盡 福智成竟 自此已去 名爲舊來成佛 問 斷惑云何 答 如地論說 非初非中後 前中後取故 云何斷 如虛空 如是斷故 未斷已還 不名為斷 現斷已去 名爲舊來斷也 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等 其實道理諸法實相 不增不減 本來不動 是故經言 菩薩法中 不見一法減 清淨法中 不見一法增 是其事也 有人說言 如是等經文 約即理說 非即事說 若約三乘方便教門 合有此義 若依一乘如實教門 不盡其理 理事然 一無分別 體用圓融 常在中道 自事以外 何處得理 問 三乘教中 亦有寂而常用 用而常寂 如是等義 何故上言偏即理門 不即事中不自在也 答 理事相即故 有如是義 非謂事事相即 何以故 三乘教中 欲治分別病 會事入理爲宗故 若依別教一乘 理理相即亦得 事事相即亦得 理事相即亦得 各各不相即亦得 何以故 中即不同故 亦有具足理因陀羅尼 及事因陀羅尼等法門故 十佛普賢法界宅中 有如是等無障礙法界法門 極自在故 其餘逆順主伴相成等法門 准例相攝 隨義消息.”
- 2)『삼보장』(T45, 618b).
- 3)『잡집론雜集論』 : 『대승아비달마잡집론』.
- 4) 『유식론唯識論』 : 『성유식론成唯識論』. 다만 『탐현기』에 인용된 내용은 『성유식론』 원문(T31, 52b)의 내용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 5)『탐현기』(T35, 296c~297b).
- 6)『화엄경소』의 내용이다.
- 7)『화엄경소』(T35, 752c~753a).
- 8) 『법계도』 중의 “云何斷 如虛空 如是斷故 未斷已還 不名為斷 現斷已去 名為舊來斷也 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等” 부분이다.
- 9)번뇌煩惱의 장애 : 번뇌장煩惱障.
- 10)소지所知의 장애 : 소지장所知障. 중생이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 인해 알아야 할 경계에 미혹하게 되는 장애를 말한다.
- 11)『화엄약책華嚴略策』 : 징관의 저술.
- 12)『화엄약책華嚴略策』(T36, 705a).
- 13)『법계도』 중의 “其實道理諸法實相 不增不減 本來不動 是故經言 煩惱法中 不見一法減 清淨法中 不見一法增 是其事也” 부분이다.
- 14) 「육상장六相章」 :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중의 「의리분제장義理分齊章」의 육상원융의六相圓融義 부분을 가리킨다.
- 15)『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8a).
- 16) 인연의 집(因緣舍) : 존재들의 관계를 인연因緣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파악된 집. 신라 화엄교학가들은 존재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입장을 변계遍計-인연因緣-연기緣起-성기性起-무주無住 등으로 구분하였다.
- 17)인연의 아버지 : 존재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입장.
- 18)변계의 아들 : 각각의 존재를 다른 존재와 관계없는 독자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
- 19) 서까래가 되는 것(成椽) : 원문에는 “成緣”으로 되어 있지만 아랫부분의 내용을 고려할 때 “成椽”의 오자誤字로 생각된다.
- 20) 「종성장種性章」 : 지엄智儼의 『공목장』 권2의 「제3회십주품내본분수종성장第三會十住品內本分首種性章」을 가리킨다.
- 21)『공목장』(T45, 549c~550a).
- 22) 『법계도』 중의 “有人說言 如是等經文 約即理說 非即事說 若約三乘方便教門 合有此義 若依一乘如實教門 不盡其理 理事然 一無分別 體用圓融 常在中道 自事以外 何處得理” 부분에 보이는 “有人”을 가리킨다.
- 23) 『법계도』 중의 “問 三乘教中 亦有寂而常用 用而常寂 如是等義 何故上言偏即理門 不即事中不自在也 答 理事相即故 有如是義 非謂事事相即 何以故 三乘教中 欲治分別病 會事入理為宗故”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 24) 『법계도』 중의 “若依別教一乘 理理相即亦得 事事相即亦得 理事相即亦得 各各不相即亦得 何以故 中即不同故”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 25)세 구절이란, “理理相卽, 事事相卽, 理事相卽”을 가리킨다.
- 26) 네 번째는 현상이 이치와 상즉하지 않는다. 현상은 움직여서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四事理不相即 以事動非靜故) : 『삼보장』의 원문과 비교할 때 『법계도원통기』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 27)『삼보장』(T45, 625b).
- 28) 징관澄觀의 『화엄경소』 권2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若唯約事則互相礙不可即入 若唯約理則唯一味無可即入. T35, 517a). 하지만 두 구절의 순서가 다르고 글자에도 차이가 있어 均如가 여기에서 인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 29)좋고 지극히 오묘한 사자좌(好上妙師子之座) : 『유마경』 원문에는 “好上妙功德成就師子之座”라고 되어 있다.
- 30)등왕燈王 : 『유마경』 원문에는 “수미등왕須彌燈王”이라고 되어 있다.
- 31)이때에 : 『유마경』 원문에 있는 “於是”가 『법계도원통기』에는 생략되어 있다.
- 32)장자長者 : 『유마경』 원문에는 “長者 維摩詰”이라고 되어 있다.
- 33)『유마경』(T14, 546ab).
- 34)『화엄교의일승분제장』 원문에 있는 “而不壞其事 仍一一塵中 皆具足”이 생략되었다.
- 35)인다라 : 인다라망경계문을 의미한다.
- 36)미세 : 미세상용안립문을 의미한다.
- 37)법장의 『화엄교의일승분제장』 중 일승과 삼승의 차이점을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시설이상施設相異」 중의 내용이다(T45, 484b).
- 38) 『탐현기』(T35, 124a), “問有何因緣令此諸法得有如是混融無礙 答因緣無量難可具陳 略提十類釋此無礙 一緣起相由故 二法性融通故 三各唯心現故 四如幻不實故 五大小無定故 六無限因生故 七果德圓極故 八勝通自在故 九三昧大用故 十難思解脫故.” ; 『화엄경소수소연의초』 권9(T36, 68c), “疏 五圓教等者 義廣理深 非略可盡 故彰其宏奧 別立一門 然在立教之終 故須略舉 言十十法門者 一一法門 一一法中 多明十故 十身十忍十眼十通十種玄門 出十所以表義無盡 彰異餘宗 故文文之中多皆十句 一一十句 六相圓融方顯教圓 廣如下辯 如經宗辯者 即是第六宗趣門也.”
- 39)『법계도』 중의 “亦有具足理因陀羅尼 及事因陀羅尼等法門故”를 가리킨다.
- 40)『법계도』 중의 “十佛普賢法界宅中 有如是等無障礙法界法門 極自在故”를 가리킨다.
- 41) 『법계도』 중에서 자상字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중의 “何故始終兩字 安置當中 表因果兩位 法性家內 真實德用 性在中道故”이다.
- 42) 『법계도』 중의 “歸家者 證本性故 家者何義 陰覆義 住處義故 所謂法性真空 覺者所住 故名為宅 大悲善巧蔭覆眾生 名曰為舍 此義在三乘 一乘方究竟 何以故 應法界故 所謂法界陀羅尼家 及因陀羅家 微細家等 此是聖者所依住故 名曰為家” 부분을 가리킨다.
- 43)『수현기』(T35, 19a).
- 44)『법계도』 중의 “其餘逆順主半相成等法門 准例相攝 隨義消息”을 가리킨다.
- 45)오열중비五熱衆鞞 : 오열五熱은 사방과 머리 위에 뜨거운 열을 두고서 고행하는 것으로 외도外道의 수행을 의미한다.
- 46) 『법계도』 중의 “若欲觀緣起實相陀羅尼法者 先應覺數十錢法 所謂一錢乃至十錢 所以說十者 欲顯無量故” 부분이다.
- 47)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c). 원문에서는 “이치를 드러내는 현상의 동전에 의거하여 저 일승 연기의 다함없는 다라니법을 비유한다.(約現理事錢中 況彼一乘緣起無盡陀羅尼法)”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 48)『화엄종요華嚴宗要』 : 원효가 『화엄경』의 중심 내용을 정리한 저술.
- 49)『보법기普法記』 : 원효의 저술.
- 50)『개종기開宗記』 : 신라 화엄학자인 연기緣起의 저술.
- 51) 『법계도』 중의 다음 부분이다. “此中有二 一者 一中十 十中一 二者 一即十 十即一 初門中有二 一者向上來 二者向下去 言向上來中 有十門不同 一者一 何以故 緣成故 即是本數 乃至十者一中十 何以故 若無一十即不成 仍十非一故 餘門亦如是 准例可知 言向下去中 亦有十門 一者十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十中一 何以故 若無十 一即不成 仍一非十故 餘亦如是 如是往反勘當 即知 一一錢中 具足十門 如本末兩錢中具足十門 餘八錢中 准例可解 問 旣言一者 何得一中名為十也 答 大緣起陀羅尼法若無一 一切即不成 定知如是其相 如所言一者 非自性一緣成故一 乃至十者 非自性十 緣成故十 一切緣生法 無有一法定相有性 無自性故 即不自在者 即生不生生 不生生者 即是不住義 不住義者 即是中道 道義者 即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亦說為是假名 亦是中道義 即其義也 中道義者 是無分別義 無分別法不守自性故 隨緣無盡 亦是不住 是故當知 一中十 十中一 相容無礙 仍不相是 現一門中具足十門 故明中智 一門中有無盡義 如一門 餘亦如是 問 一門中攝十盡不 答 盡不盡 所以者何 須盡即盡 須不盡即不盡故 其義云何 以一事辨一多故即盡 以異事辨一多故即不盡 文一事中一多義不相是 即是多 一事故即是一 四句 護過去非顯德 准之可解 異事亦准同 問 須何義 答 須者緣成義 何以故 因緣法一不差故 別別諸事門中 准例如是 緣起妙理 應如是可知故 第一門訖 第二門 此中二門 一者向上去之 二者向下來 初門中十門不同 一者一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一即十 何以故 若無一 十即不成故 緣成故 第二門中亦有十門 一者十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 十即一 若無十 一即不成故 餘者准例 以此義故 當知一一錢中 具足十門 問 如上多門一時俱圓耶 前後不同耶 答 即圓即前後不同 何故如是 須圓即圓 須前後即前後 何以故 法性家內德用 自在無障礙故 由緣成故 皆得如是.”
- 52)『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b~504a)에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 53)지상至相의 『십현장十玄章』 : 지엄至儼의 저술로 전해지는 『화엄일승십현문華嚴一乘十玄門』을 가리킨다.
- 54)『화엄일승십현문』(T45, 514b)에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 55)『화엄경수소연의초』(T36, 231b)의 내용이다.
- 56) 『법계도』 중의 “(向上來中) 餘門亦如是 准例可知 …… (向下去中) 餘亦如是 如是往反勘當 即知 一一錢中 具足十門 如本末兩錢中具足十門 餘八錢中 准例可解” 부분을 가리킨다.
- 57) 『법계도』 중의 “問 旣言一者 何得一中名為十也 答 大緣起陀羅尼法若無一 一切即不成 定知如是其相 如所言一者 非自性一緣成故一 乃至十者 非自性十 緣成故十 一切緣生法 無有一法定相有性 無自性故 即不自在者 即生不生生 不生生者 即是不住義 不住義者 即是中道 道義者 即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亦說為是假名 亦是中道義 即其義也 中道義者 是無分別義 無分別法不守自性故 隨緣無盡 亦是不住 是故當知 一中十 十中一 相容無礙 仍不相是 現一門中具足十門 故明中智 一門中有無盡義 如一門 餘亦如是 問 一門中攝十盡不 答 盡不盡 所以者何 須盡即盡 須不盡即不盡故 其義云何 以一事辨一多故即盡 以異事辨一多故即不盡 文一事中一多義不相是 即是多 一事故即是一 四句護過去非顯德 准之可解 異事亦准同 問 須何義 答 須者緣成義 何以故 因緣法一不差故 別別諸事門中 准例如是 緣起妙理 應如是可知故 第一門訖” 부분이다.
- 58) 『법계도』 원문에는 “卽不自在者 卽生不生生”으로 뒤에 “生”이 하나 더 있다. “자재하지 않은 것은 (곧) 생겨나지만 생겨나지 않는 생겨남이다.”의 의미로 해석된다.
- 59)『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
- 60) 『법계도』 중의 “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亦說為是假名 亦是中道義 即其義也” 부분이다.
- 61)『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
- 62)『십구장원통기』(H4, 49a).
- 63)『십구장원통기』에 비슷한 내용이 인용되고 있다(H4, 50a).
- 64)오로지(唯) : 『십구장』 본문에서는 “다 같이(共)”라고 하였다.
- 65)『십구장원통기』(H4, 49a).
- 66)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중 「의리분제」의 ‘十玄緣起無礙義’ 중의 내용이다(T45, 503b).
- 67)영관靈觀 : 의상의 제자. 구체적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 68)『사나품소』 : 『탐현기』 중의 『화엄경』 「사나품」을 해석한 부분.
- 69)『탐현기』(T35, 160a).
- 70)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의리분제문」 중의 3성동이의三性同異義 부분을 가리킨다.
- 71)3성三性 각각에 대해 有無四句를 통해 오해를 막는 부분을 가리킨다(T45, 499c~ 500a).
- 72) 3성三性 각각에 대해 有나 無 등으로 집착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들을 지적하는 부분을 가리킨다(T45, 500a~501b).
- 73)3성三性 각각에 대해 진실한 뜻을 드러내는 부분을 가리킨다(T45, 501b~c).
- 74)『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bc).
- 75) 『료간』 : 『탐현기』의 「제구현의리분제第九顯義理分齊」 중의 이체상즉의異體相即義에 대한 설명 부분으로 본문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66쪽 주 82 참조.
- 76)『탐현기』(T35, 124b).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는 유체이고, 여럿은 무체無體이다. 여래장의 체가 6도를 능히 이루는 것이지, 여래장이 6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유의 문에서 하나는 유체로서 이루는 주체이고 여럿은 무체로서 이루어지는 대상이 된다.
- 77) 「광명각품소光明覺品疏」 : 『탐현기』 중의 『화엄경』 「광명각품」에 대한 해석 부분. 『법계도원통기』의 원문에는 「광각품소光覺品疏」라고 하였다.
- 78)『탐현기』(T35, 173a).
- 79) 앞의 단락 구분에서는 질문과 대답(問答)이라고만 하고 의심을 제거한다(除疑)는 말은 하지 않았다.
- 80)『화엄일승십현문』(T45, 514c).
- 81)『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a).
- 82)『법계도』 중의 “是故經云 隨順觀世諦 卽入第一義諦” 부분을 가리킨다.
- 83)『법계도』 중의 “經云 初發心菩薩 一念功德不可盡者” 부분을 가리킨다.
- 84)60권본 『화엄경』(T9, 432c).
- 85) 『4권소』 : 미상. 내용상 『화엄경』을 주석한 『화엄경소』인데, 현재 알려진 『화엄경』 주석서 중 4권으로 되어 있는 것은 혜광慧光의 『약소略疏』뿐이다.
- 86)『소』 : 『탐현기』의 해당 부분에 대한 주석을 가리킨다.
- 87)『탐현기』(T35, 205c).
- 88)60권본 『화엄경』(T9, 449c).
- 89)행동이 진실되다(行實) : 『법계도기총수록』에 수록된 「대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信滿成佛 是行佛”(T45, 762b)이라고 하여 “行實” 대신 “行佛”이라고 하고 있다. 이를 따를 경우 위의 문장은 “믿음을 채워서 성불하는 사람은 수행으로 이룬 부처이다.”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 90)『법계도기총수록』에 수록된 「대기大記」의 내용과 일치한다(T45, 762b).
- 91) 『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된 「대기」에 이와 비슷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T45, 762c).
- 92)『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a).
- 93)글(文) : 『공목장』의 「융회삼승결현명일승지묘취融會三乘決顯明一乘之妙趣」 중의 내용이다.
- 94)『공목장』(T45, 586b).
- 95)변재辯才 : 『법계도』 원문에는 “辨大體”로 되어 있다. 이 경우는 “일승의 무애를 논함으로써 大體를 설명한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96)분상문分相門 : 일승이 삼승과 다른 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 97)해섭문該攝門 : 일승이 삼승을 포괄하는 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 98)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첫 번째 장인 「건립일승建立一乘」의 분상문分相門 중 “難信易信差別”에서 『화엄경』 「현수품」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고 있고, 이어서 ‘約機顯理差別’에서는 「십지품」 제9지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T45, 478b).
- 99) 『법계도』에서는 “經云” 이하에서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분상문分相門 중에 인용되어 있는 『화엄경』 「현수품」의 내용과 「십지품」 제9지의 게송을 구분하지 않고 이어서 인용하고 있다.
- 100) 『현담』 : 『수현기』 앞부분의 『화엄경』에 대한 개설적 설명을 가리킨다. 『수현기』는 「一歎聖臨機德量由致」·「二明藏攝分齊」·「三辨教下所詮宗趣及能詮教體」·「四釋經題目」·「五分文解釋」 등 5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앞의 네 단락이 『현담』에 해당한다.
- 101)지영상분地影像分 : 『화엄경』 「십지품」 중의 십지十地에 대한 설명 중의 한 단락을 가리킨다(인용된 내용은 T9, 575a). 『십지경론』에서는 십지의 내용을 방편작만족지분方便作滿足地分·득삼매만족분得三昧滿足分·득수위분得受位分·입대진분入大盡分·지석명분地釋名分·신통력무상유상분神通力無上有上分·지영상분地影像分·지이익분地利益分 등 8단락으로 구분하였다(T26, 913c).
- 102)『제9지게송소』 : 『수현기』 중의 「십지품」 제9지 게송에 대한 주석 부분이다.
- 103)『수현기』(T35, 72a). 문장의 표현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 104)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78b), “①若衆生下劣 其心厭沒者 示以聲聞道 令出于衆苦 ②若復有衆生 諸根小明利 樂於因緣法 為說辟支佛 ③若人根明利 有大慈悲心 饒益諸衆生 為說菩薩道 ④若有無上心 決定樂大事 為示於佛身 說無盡佛法.” 여기서 인용한 게송은 『화엄경』 「십지품」 중 제9지에 나오는 게송이다.
- 105)지쌍(地㕛) 3승 : 하4교의 3승으로 추정된다.
- 106)문상門相 3승 : 『화엄경』의 3승.
- 107)『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78b).
- 108)시설이상施設異相 : 『화엄일승교의분제장』 중의 여덟 번째 부분이다.
- 109)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의 「시설이상」에서는 시이時異·처이處異·주이主異·중이衆異·소의이所依異·설이說異·위이位異·행이行異·법문이法門異·사이事異 등 일승과 3승의 차이 10가지를 한다.
- 110)『5권소』 : 지엄의 『화엄경』 주석서인 『수현기』를 가리킨다.
- 111)『수현기』(T35, 15b).
- 112) 동이원비同異圓備 : 『탐현기』에서 일승의 무애無礙를 설명하는 10가지 이론 중 연기상유緣起相由의 내용으로, 동체同體와 이체異體를 나누어 연기상유를 설명한 것을 종합하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 113)『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7ab).
- 114)『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5a).
- 115) 『탐현기』와 『지귀장』에서는 一教義, 二理事, 三境智, 四行位, 五因果, 六依正, 七體用, 八人法, 九逆順, 十應感 등의 10대對를 들고 있고(T35, 123b; T45, 594a), 『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는 一教義, 二理事, 三解行, 四因果, 五人法, 六分齊境位, 七師弟法智, 八主伴依正, 九隨其根欲示現, 十逆順體用自在 등의 10대對를 들고 있다(T45, 505a).
- 116) 『보법장普法章』 : 미상. 이름으로 볼 때 현재 전해지지 않는 원효元曉의 『보법기普法記』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 117)증지證智 : 참된 지혜를 깨달음, 혹은 참된 지혜를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 118) 『십지경론』(T26, 139c). 이 책에서 인용한 문장은 『십지경론』 원문(帝網差別者 眞實義相故 如業幻作故 …… 眞實義相者 唯智能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 119)『수현기』(T35, 15b).
- 120)『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6b).
- 121) 『금사자장운간류해金師子章雲間類解』(T45, 665c). 이는 정원淨源이 법장의 『금사자장』에 대해 주석한 문헌이다.
- 122) 『연의초』의 원문은 “所含微細 猶如芥瓶 以毛孔能受彼諸剎 諸剎不能遍毛孔故 以毛據稱性 即如瑠璃之瓶 剎約存相 故如芥子在內”인데 밑줄 그은 부분(해석문의 〔 〕 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필사상 누락된 것으로 생각된다.
- 123)『연의초』(T36, 79b).
- 124)『화엄일승십현문』(T45, 516c).
- 125)『화엄일승십현문』(T45, 517a).
- 126)구세九世 : 과거·현재·미래의 3세世에 각각 다시 과거·현재·미래를 상정한 9차원의 시간.
- 127) 「십장품十藏品」 : 『화엄경』의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을 가리킨다. 『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된 『대기』에서는 “諸藏純雜具德者 依十無盡藏品立也”라고 한다.
- 128)『십구장원통기』(H4, 67bc).
- 129)『법계도』 중의 “若教義分齊 與此相應者 即是一乘圓教及頓教攝” 부분을 가리킨다.
- 130)『대승기신론』(T32, 583b). 이는 『대승기신론』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게송이다.
- 131) 『법계도』 회향문 중 “以斯善根”은 보리회향에, “廻施一切衆生”은 중생회향에 해당하는데, 실제회향에 해당하는 구절은 없다는 뜻이다.
- 132)임인년 : 1062년, 1122년, 1182년, 1242년의 가능성이 있다.
- 133)사리闍梨 : 승려의 높임말인 ācarya의 음역어音譯語로 화상和尙의 뜻이다.
- 134)흥왕사興王寺 교학敎學 : 흥왕사에서 경전을 강의하는 역할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 135)김훤 용회金晅用晦 : 김훤金晅(1234~1304년)은 충렬왕 때에 활약한 인물로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선사 제6대 사주인 원감 국사圓鑑國師 충지의 문집에도 여러 곳에 그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用晦는 그의 자字이다.
- 1)「仾」作「伝」{乙}。
- 2)「方」下有「盡」{乙}。
- 1)「菩」作「善」{甲}。
- 2)「煩惱」作「菩薩」{乙}。
- 3)「煩惱」疑「菩薩」{乙}。
- 4)「无」作「元」{甲}{乙}次同。
- 1)「妙」下經有「功德成就」{乙}。
- 2)「號」下經有「須彌」{乙}。
- 3)「一」下經有「於是」{乙}。
- 4)「者」下經有「維摩詰」{乙}。
- 5)「進」疑「惟」·或「議」{乙}。
- 6)「羅」下法界圖本文有「尼」次同。
- 1)「盤」音通「槃」{編}。
- 1)「夫」作「去」{乙}。
- 2)「謂」作「爲」{乙}。
- 3)「旣」作「現」{乙}次同。
- 4)「盤」音通「槃」{編}次同。
- 5)「比」作「此」{乙}。
- 1)▩疑「數」{乙}。
- 2)▩疑「盡」{編}。
- 3)「若」作「者」{甲}。
- 4)「一」疑「三」{編}。
- 5)「十」上疑脫「第六」{編}。
- 6)「十」上疑脫「第七」{編}。
- 7)「六」上疑脫「第八」{編}。
- 8)「二」上疑脫「第八」{編}。
- 9)「二」上疑脫「第九」{編}。
- 10)「即」法界圖本文作「當」。
- 1)「旣」法界圖本文作「現」。
- 2)「十」作「喜」{甲}·疑「喜」{乙}。
- 3)「難」作「離」{甲}·疑「離」{乙}。
- 4)「名」經作「稱」{乙}。
- 5)「唯」疑「共」{乙}。
- 6)「十」下疑有「皆一名」{乙}。
- 7)「一」上疑有「以」{乙}。
- 1)「比」作「此」{甲}{乙}。
- 2)「唯」作「共」{乙}。
- 1)「明」下有「中」{乙}。
- 2)「知」作「智」{乙}。
- 3)「門」疑「中」{乙}。
- 4)「去」疑「失」{乙}。
- 5)「現」疑「離」{乙}。
- 1)「玄」作「」{甲}·作「互」{乙}。
- 1)「盤」音通「槃」{編}。
- 2)「遍」作「通」{甲}。
- 1)「何」下法界圖本文有「以」·加「以」{乙}。
- 2)「明」下法界圖本文有「者唯頭示一乘陀羅尼大」。
- 1)「才」法界圖本文作「大體」。
- 1)「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
- 2)「后」作「戶」{甲}。
- 3)「指」疑「旨」{編}。
- 4)「无」下法界圖本文有「有」。
- 5)「問」作「門」{甲}。
- 1)「現」下法界圖本文有「俱成」。
- 2)「了」作「著」{乙}。
- 3)「容」下法界圖本文有「不同」次同。
- 4)「德」下疑有「無碍自在」{乙}。
- 5)「章」下疑脫「門」{乙}。
- 6)「雜」下法界圖本文有「具德」。
- 1)「門玄」法界圖本文作「玄門」。
- 2)「句」下疑脫「章」{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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