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 大覺國師外集卷第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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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외집 제13권大覺國師外集卷第十三

선봉사僊鳳寺 대각 국사 비문1)
임존林存 지음

상이 재위在位한 지 10년째 되는 대연헌大淵獻 장월壯月 7일2)에 상이 신 임존林存에게 명하여 해동천태시조海東天台始祖 대각 국사의 비명碑銘을 지으라고 하셨다. 이에 즉시 글을 올려 능력이 안 된다고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글을 짓는다.
일찍이 비로자나毘盧遮那의 화장세계華藏世界에 대해서 듣건대, 그 속에 현현顯現한 제불諸佛의 세계는 억겁億劫을 다하더라도 모두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직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만은 그 불佛이 비로자나毘盧遮那이고 보면, 이 비로자나의 법계法界 안에 있는 어떤 대천세계大千世界보다도 가장 친근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직접 출현하셨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3)
서천축西天竺의 나라는 여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구름이 크게 일면 두루 덮어 주고 비가 한 번 내리면 똑같이 적셔 주니, 그 은택을 받지 못하는 자가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신라新羅 때부터 대법大法이 동쪽으로 흘러와 전해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太祖께서 만세萬世의 기업을 처음 세우심에 미쳐 서천축국의 삼장三藏 법사 마후라摩睺羅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자진해서 건너왔으니, 이를 통해서 대법大法이 장차 흥기興起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더욱 원력願力에 의지해 신공神功을 달성해서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려고 불도佛道를 선양宣揚하는 것을 첫째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므로 5대代를 거쳐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선발된 명승名僧들이 바다를 건너 법을 구하곤 하였는데, 근기根機가 국한된 까닭에 겨우 한 종파宗派의 교리敎理만을 얻어 와서 그 문도門徒에게 전한 경우는 있었지만, 부처를 대신하여 세상에 나왔으면서도 오히려 도道를 묻는 것처럼 가탁假托하며 조사祖師의 가풍家風을 계승하고 대법륜大法輪을 굴린 경우는 마치 우담발화優曇鉢花가 피는 것처럼 어쩌다 한 번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국사는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서 모친은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諱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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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_0594_c_02L1)大覺國師外集卷第十三

004_0594_c_03L[僊鳳寺大覺國師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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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御宇十年歲在大淵獻壯月七日
004_0594_c_05L臣存撰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之碑銘
004_0594_c_06L卽其表辭以不能而不獲命敢再拜
004_0594_c_07L稽首而言曰嘗聞毗盧遮那華藏世界
004_0594_c_08L其中所顯諸佛世界窮劫不可說唯此
004_0594_c_09L娑婆世界其佛毗盧遮那則凡在大千
004_0594_c_10L世界者在毗盧遮那法中爲最親近
004_0594_c_11L況爲大因緣出顯於世西天竺國
004_0594_c_12L此不遠則大雲之遍覆一雨之同霑
004_0594_c_13L宜無不被者故自新羅大法東漸洎我
004_0594_c_14L太祖創萬世之業西天竺國三藏摩
004_0594_c_15L睺羅不召自來於是知大法之將興
004_0594_c_16L益憑願力耆定神功貽厥孫謨以弘揚
004_0594_c_17L佛道爲首務故涉五代及宋卷一
004_0594_c_18L三第一張
選名僧越海求法而機根所
004_0594_c_19L僅得其一宗之旨來傳於其徒者
004_0594_c_20L有矣至於代佛出世猶假問道繼祖家
004_0594_c_21L轉大法輪者如優曇花乃一得而
004_0594_c_22L見之師文祖第四子母仁睿太后
004_0594_c_23L林存撰僊鳳寺碑文自卷題至第二張末甲本
004_0594_c_24L冠註曰丁亥十月依金石總覽補缺方山學人柳
004_0594_c_25L壽焚香敬書

004_0595_a_01L석후釋煦이고, 자字는 의천義天이다. 이성二聖이 국사와 일찍이 숙세夙世의 인연을 심은 까닭에 이때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묘하게 계합된 것이다.
국사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점이 있었으며, 차츰 자라나면서 품행과 기예가 의젓하여 성인成人과 같았다. 나이 11세에 문종文宗의 평소의 뜻을 받들어 경덕 국사景德國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된 뒤에 현수賢首의 교관敎觀을 수업하였다. 경덕이 죽자 그 문도門徒와 함께 강학講學을 멈추지 않았다. 또 제종諸宗의 학자들을 널리 모아 서로 더불어 강론講論하였는데, 체득한 경지가 워낙 탁월해서 어떤 노사老師나 숙덕宿德도 미치지 못하였다.
문종 23년(1069)에 우세祐世의 호號를 내리고, 승통僧統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때에 국사는 ‘장래에 도량道場에 앉아서 사자후獅子吼를 발하며 백천百千의 법문法門을 연설하여 인천人天의 셀 수 없는 중생들을 제도濟度하려면, 자신이 터득한 것을 남에게 질정質正하여 세상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구법求法하겠다고 청하였는데, 문종이 마음속으로는 허락하였으나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다. 선종宣宗이 즉위한 뒤에도 누차 청하여 마지않았는데, 선종이 이 일을 어렵게 여겨 신하들의 의견에 부치자, 모두 “임금의 아우가 된 중한 신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숙종肅宗이 번저蕃邸에 있던 어느 날 국사가 함께 태후를 뵙고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뢰었다.
“천태종의 삼관三觀은 최상最上의 진승眞乘인데, 이 땅에는 그 종문宗門이 아직도 수립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매우 애석한 일이기에 신이 나름대로 여기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태후가 깊은 관심을 보이며 기뻐하였고, 숙종도 외호外護가 되겠다고 서원誓願하였다.
선종 3년4)에 국사가 때가 이른 것을 알고 다시 구법求法하겠다고 청하였다. 비록 신하들의 의논에 저지되기는 하였으나, 선종과 태후는 들어주려고 하는 것 같았기에 배 타고 떠날 계획을 호연浩然히 결정하고는, 4월 8일에 마침내 해양海洋을 횡단하였다.
처음 밀주密州 경계에 도착했을 적에 철종哲宗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는 경사京師의 계성원啓聖院에 국사를 맞아들이게 하였으며, 수공전垂拱殿에 친히 나아가 접견하는 등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국사가 명덕明德들을 두루 찾아보고 싶다고 청하자, 이에 화엄華嚴 법사 유성有誠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별원別院에 와서 머물며 국사를 따라 노닐게 하였다.
대저 성인聖人은 자기 몸을 굽혀 남의 장점을 겸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004_0595_a_01L釋煦字義天二聖與師夙植夙緣
004_0595_a_02L契壹時師生而有異稍長行藝儼若
004_0595_a_03L成人年十一承文祖宿志投景德國
004_0595_a_04L師剃度受賢首敎觀景德卒與其徒講
004_0595_a_05L學不止又廣會諸宗學者相與講論
004_0595_a_06L凡有所得卓爾非凡老師宿德之跂及
004_0595_a_07L文祖二十三年賜號祐世授職爲僧統
004_0595_a_08L於是擬於方來欲坐道場發師子吼
004_0595_a_09L說百千法門度人天無量之衆則將以
004_0595_a_10L己之所得者質之於人以取信於時
004_0595_a_11L嘗請入宋求法文祖心許未降指揮
004_0595_a_12L洎宣祖卽位屢請不已宣祖難之
004_0595_a_13L於群臣咸以爲大弟之重不宜越海
004_0595_a_14L肅祖在蕃邸卷一三第二張嘗一日同
004_0595_a_15L謁大后偶語及1) [142] 天台三觀最上
004_0595_a_16L眞乘此土宗門未立甚可惜也臣竊
004_0595_a_17L有志爲大后深垂隨喜肅祖亦願爲
004_0595_a_18L外護宣祖三年師知時至更請求法
004_0595_a_19L雖羣議沮之二聖似欲從之於是浩
004_0595_a_20L然決乘桴之計四月八日絕海洋初抵
004_0595_a_21L密州界哲宗聞之迎置京師啓聖院
004_0595_a_22L御垂拱殿迎見禮遇備至師請遍叅名
004_0595_a_23L於是詔華嚴法師有誠2) [143] [107] 止別院
004_0595_a_24L使與遊處相從夫聖人不憚屈己以兼

004_0595_b_01L그러므로 공자孔子도 장홍萇弘과 사양師襄과 노담老聃과 담자郯子의 무리를 스승으로 섬겼던 것이다.5) 처음에 국사가 밀주密州에서 경사京師로 가는 동안 한 가지 법이라도 알고 한 가지 행실이라도 지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두루 찾아 자문咨問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는데, 여기 경사에 와서도 굳이 청하며 제자의 예禮로써 배알拜謁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에 오고 가며 현수賢首와 천태天台 교판敎判의 같고 다른 점과 양종兩宗의 오묘한 뜻을 문답하며 그 설을 곡진하게 파악하였다.
뒷날 상국사相國寺에 가서 원조 선사圓照禪師 종본宗本을 참례參禮하니, 원조가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하고는 게송을 설하였다.
“어떤 분이 만 리 멀리 바다를 건너 진리 위해 몸을 잊고 선재동자 본받았나. 염부6)에선 이런 일 참으로 보기 드문데 불 속에서 우담발화가 활짝 피어났네.”
또 흥국사興國寺에 가서 서천西天의 삼장법사 천길상天吉祥을 참례하고 서천의 일을 매우 상세히 물어보았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조정에 글을 올려 항주杭州 화엄 좌주華嚴座主 정원淨源의 강하講下에서 수업하여 평소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청하니, 조칙詔勅을 내려 그대로 들어주고,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차견差遣하여 동행하게 하였다.
금산金山에 들러 불인 선사佛印禪師 요원了元을 참알參謁하였는데, 이는 세상에 매우 드문 만남으로서 마치 부자夫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났을 때에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도가 있음을 안 것7)과 같았다.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원공源公 법사를 참알하였다. 법사가 국사의 법기法器가 비범함을 알고는 서로 만난 것이 늦은 것을 한탄하면서 도를 전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또 여항餘杭(항주)의 산수山水로 말하면 천하의 으뜸이 되기 때문에 제종諸宗의 원로 가운데 세상을 버리고 이곳에서 편히 지내는 이들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많았다. 그들이 국사가 애정을 끊고 권세를 잊은 채 만 리 멀리 구법求法하는 것을 보고는, 비록 도와 덕을 쌓아 간직하고서 입을 다물고 전하지 않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들이 품고 있던 보배를 다 기울여 국사에게 내어 주려고 줄지어 나왔으므로 제종諸宗의 법의法義를 여기에서 많이 터득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해에 선종宣宗이 모후母后의 뜻을 개진하며 국사의 환국還國을 표문으로 요청하니, 황제가 마침내 조서詔書를 내려 대궐에 와서 하직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국사가 길에 오를 즈음에 자변慈辯 대사 종간從諫이 시 한 수를 지어 주고, 또 수로手爐와 여의如意8)를 증정하였다. 국사는 본국에 있을 때 자변의 고의高誼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들어 왔다.

004_0595_b_01L人之善故孔子師萇弘師襄老聃郯子
004_0595_b_02L之徒3) [144] [108] 密州指京聞有知一法持弌 [109]
004_0595_b_03L行者無不遍致咨問及此固請以弟
004_0595_b_04L子之禮致謁是日往返問答賢首天台
004_0595_b_05L判敎同異及兩宗幽眇之義曲盡其說
004_0595_b_06L後日詣相國寺叅圓炤禪師宗本圓炤
004_0595_b_07L昇堂說法繼而說偈云誰人萬里洪波
004_0595_b_08L爲法忘軀効善財想得卷一三第三
004_0595_b_09L
閻浮應罕有優曇花向火中開
004_0595_b_10L詣興國寺叅西天三藏天吉祥問西天
004_0595_b_11L事甚祥閱月上章請往杭州華嚴座主
004_0595_b_12L淨源講下受業以▣ [110] 素志詔從之差主
004_0595_b_13L客員外郎楊傑伴行過金山謁佛印禪
004_0595_b_14L師了元稀世之遇如夫子見溫伯雪子
004_0595_b_15L目擊而道存到杭州叅源公法師法師
004_0595_b_16L見法器非常恨相逢之晚以傳道爲事
004_0595_b_17L且餘杭山水甲於天下諸宗之老
004_0595_b_18L [111] 宴坐者視天下爲多見師割愛忘勢
004_0595_b_19L萬里求法則雖積道藏德膠其口而不
004_0595_b_20L傳者猶且倒廩傾困 [112] 羅列而進故諸
004_0595_b_21L宗法義多得於此越明年宣祖述母
004_0595_b_22L后意表請遣師還國遂詔到闕辭還
004_0595_b_23L師欲登道慈辯大師從諫著詩一首
004_0595_b_24L手爐如意師在本國聳聞慈辯高誼之

004_0595_c_01L그래서 항주에 와서 자변에게 천태天台 일종一宗의 경론을 강론해 달라고 특별히 청하여 매번 주객主客(楊傑) 및 여러 제자들과 청강聽講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부촉한 것이었다.
국사가 경사京師에 오니, 황제가 또 수공전垂拱殿에 나와서 맞으며 접견하였다. 며칠 머물다가 마침내 다시 입궐入闕하여 하직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항주에 도착하니 원공源公 법사가 날마다 화엄華嚴의 대의大義를 강론하였으며, 강론이 끝나자 수로手爐와 불자拂子를 증정하여 법을 전하는 표신表信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천태산天台山에 가서 지자智者 대사의 부도浮圖를 참배하고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하며 일렀다.
“일찍이 듣건대, 대사께서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관敎觀을 가지고 동쪽에 전해진 일대一代의 불언佛言을 판석判釋하여 모두 극진하지 않음이 없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본국에도 옛날에 제관諦觀 법사라는 분이 그 교관敎觀을 전했었는데, 지금은 이를 익히는 전통이 오래전에 끊어졌습니다. 이에 내가 발분發憤하여 한 몸을 잊고 스승을 찾아 도를 물었는바, 지금 이미 전당 자변錢塘慈辯 법사의 강하講下에서 교관을 이어받았으니, 뒷날 본국에 돌아가면 목숨을 다하여 전하며 드날리겠습니다.”
명주明州에 도착해서는 아육왕산阿育王山의 광리선사廣利禪寺에 가서 대각 선사大覺禪師 회련懷璉을 배알하였다. 그는 인종仁宗 황제가 특히 중히 여기며 복전福田으로 삼던 분으로, 지금 그곳에 돌아와서 노년老年을 보내고 있었다. 국사가 이르자 법좌法座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본래의 뜻에 매우 계합契合하였다.
배를 띄워 본국의 경계에 도달한 뒤에 표문을 올려 제멋대로 길을 떠난 죄를 청하니, 상이 조서詔書를 내려 크게 포장褒獎을 가하고 환영하며 위무慰撫하였으니, 그 예모禮貌의 성대함을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국사가 송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한 것은 두루 참방參訪하고 문답問答하며 마음속에 기억해 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국사는 또 그곳에서 경서經書를 구해 왔는데, 거의 대부분이 본조本朝에 일찍이 유행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송나라에서 귀국할 즈음에 주객主客(양걸)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제공諸公에게 일렀다.
“예로부터 바다를 건너 구법求法한 성현聖賢이 많이 있지만, 어찌 승통이 한 번 중국에 와서 천태天台·현수賢首(화엄)·남산南山(율종)·자은慈恩(법상종)·조계曹溪(선종)·서천범학西天梵學 등을 한꺼번에 전해 받은 것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법을 홍포弘布하는 대보살大菩薩의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004_0595_c_01L曰之 [113] 旣至杭特請慈辯講天台一宗
004_0595_c_02L經論每與主客及諸弟子聽受故今有
004_0595_c_03L是付囑旣抵京卷一三第四張皇帝
004_0595_c_04L又御垂拱殿迎見留數日遂復入辭
004_0595_c_05L到杭州源公法師 [114] 講華嚴大義講畢
004_0595_c_06L贈以爐拂以爲付法之信次詣天台山
004_0595_c_07L謁智者大師浮圖述發願文誓於塔前
004_0595_c_08L甞聞大師以五時八敎判釋東流
004_0595_c_09L一代聖言罄無不盡本國古有諦觀者
004_0595_c_10L傳得敎觀今承習久絕予發憤忘身
004_0595_c_11L師問道今已錢塘慈辯講下承禀敎觀
004_0595_c_12L他日還鄕盡命傳揚及到明州往育
004_0595_c_13L王廣利寺謁大覺禪師懷璉仁宗尤重
004_0595_c_14L此老以爲福曰 [115] 今歸老於此屬師至
004_0595_c_15L堂說法甚契本來旣浮杯達國界上表
004_0595_c_16L4) [145] 擅行之罪廻詔大加褒5) [146] [116] 迎致撫
004_0595_c_17L禮貌之盛 [117] 不勝言師之往求法
004_0595_c_18L止遍叅歷問記在靈府其所求來經書
004_0595_c_19L大半本朝所未甞行者臨行主客謂諸
004_0595_c_20L禪講諸公曰自古聖賢越海求法者多
004_0595_c_21L豈如僧統一來上國所有天台賢首
004_0595_c_22L南山慈恩曺溪卷一三第五張西天梵學
004_0595_c_23L一時傳了眞弘法大菩薩之行者
004_0595_c_24L▣疑「之」{編}▣疑「素」{編}▣疑「曰」{編}
004_0595_c_25L
▣疑「乞」{編}▣疑「裘」{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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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실 그대로 표현한 말일 뿐, 결코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옛날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온 뒤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雅와 송頌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9) 마찬가지로 국사가 송나라에서 본국에 돌아온 뒤에야 제종諸宗의 교학敎學이 각각 올바름을 얻게 되었다. 더구나 천태天台 일종一宗으로 말하면, 제관諦觀과 지종智宗 등이 혹 물길을 열기도 하였지만, 이 땅에 아직 그 종문宗門이 수립되지 않아서 이미 오래전에 학자가 단절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법화경』에 이르기를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이 세상에 출현하여 사제四諦와 십이인연十二因緣과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설하였다.”10)라고 하였다. 또 부처가 사리불舍利弗에게 고하기를 “여래는 단지 일불승一佛乘으로만 하기 때문에 중생을 위해 설법할 때에도 이승二乘이나 삼승三乘과 같은 다른 승은 있지 않다.”11)라고 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도 삼회三會의 원묘圓妙한 일법一法을 만나 요달了達하는 그 관법觀法이 이미 『영락경瓔珞經』에 갖추어져 있고, 공관空觀과 가관假觀의 개념 및 중도관中道觀의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대해서 보처補處 대사가 금구金口를 직접 받들었다.
여래가 입멸入滅하고 5백 년이 지나 이단異端이 일제히 일어나자, 용수龍樹보살이 『지도론智度論』을 지어 중도中道를 밝혔다. 그러므로 형계荊溪가 이르기를 “또 더군다나 삼관三觀으로 말하면 본종本宗의 영락瓔珞이요, 일가一家의 교문敎門으로서 멀리 불경佛經으로부터 품수稟受하여 『법화경』을 종골宗骨로 삼고, 『지도론』을 지남指南으로 삼음에랴.”12)라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용수龍樹로부터 형계荊溪에 이르기까지 9세世의 조사祖師13)를 거쳐 그 교관敎觀이 중국에서 크게 행해졌는데, 쓸쓸하게도 4백여 년 동안이나 이 땅에 그 종교宗敎가 수립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여래의 유지遺旨가 오래도록 침묵을 지킨 것은 뭔가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국사가 큰 임무를 수행할 걸출한 재질을 가지고, 제종諸宗의 학술에 모두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자기의 임무로 삼겠다고 자처한 것은 현수賢首와 천태天台의 양종兩宗에 있었으니, 그러고 보면 그 시절時節의 인연因緣을 제대로 만났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구법求法하고 돌아온 초기에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뢴 것이다.
“만 리의 홍파洪波를 건너 1백 성城의 선우善友14)를 방문하였는데, 이와 같이 참된 가르침을 빠짐없이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성상의 위엄 덕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은慈恩·현수賢首와

004_0596_a_01L眞實義諦非溢美之言也昔孔子
004_0596_a_02L衛返魯然後樂正雅頌各得其所
004_0596_a_03L師自宋返國然後諸宗之敎各得其正
004_0596_a_04L況天台一宗雖或濫觴於諦觀智宗軰
004_0596_a_05L而此土未立其宗學者久絕法華經
004_0596_a_06L日月燈明佛出顯於世說四諦十
004_0596_a_07L二因緣六波羅密佛告舍利弗如來但
004_0596_a_08L以一佛乘故爲衆生說法無有餘乘
004_0596_a_09L若二若三然不離此座値了之三會
004_0596_a_10L之圓妙一法其觀已備於纓珞空假
004_0596_a_11L名及中道第一義諦補處大士金口
004_0596_a_12L親承如來滅後五百餘年異端並作
004_0596_a_13L龍樹菩薩作智度論發明中道故荊
004_0596_a_14L谿云況復三觀本宗纓珞一家敎門
004_0596_a_15L遠禀佛經以法華爲宗骨以智論爲指
004_0596_a_16L自龍樹至荊谿世歷九祖其敎大
004_0596_a_17L行於中國寥寥四百餘年此土未立宗
004_0596_a_18L何哉蓋如來久默遺旨卷一三
004_0596_a_19L第六張
將有待師以命世大任之才
004_0596_a_20L於諸宗之學靡不刳心而其自許以
004_0596_a_21L爲己任者在於賢首天台兩宗者當其
004_0596_a_22L時節因緣故其求法初還所上表云
004_0596_a_23L涉萬里之洪波叅百城之善友備尋眞
004_0596_a_24L全賴聖威以至慈恩賢首之宗

004_0596_b_01L태령台嶺(천태)·남산南山의 종지宗旨에 이르기까지 외람되게 향로香爐와 불자拂子를 전수받고 과분하게 기구箕裘15)를 잇게 되었습니다.”
이에 도를 함께 홍포弘布할 인재를 모집하니, 덕린德麟·익종翼宗·경란景蘭·연묘連妙 등이 각각 자기 문도를 이끌고 제자의 반열에 참여하였다.태후太后가 예전에 대원大願을 세웠던 대로 가람伽藍을 건립하여 천태종의 교문敎門을 크게 떨치려고 하면서 그 사원의 이름을 국청國淸으로 정하였는데, 그 대원을 이루기 전에 선가仙駕가 그만 하늘에 오르고 말았다.
이에 숙종肅宗이 그 일을 이어 경영하고 완공한 뒤에 국사에게 조서를 내려 주지住持를 겸하게 하였으며, 법가法駕가 친림親臨한 가운데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하였다.
이때에 일종一宗의 학자와 제종諸宗의 석덕碩德이 무려 수천백 인이나 그 풍도風度를 듣고 다투어 모여들었다. 국사가 법좌法座에 올라 해조음海潮音을 떨치면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종一宗(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연설하니, 무상無上의 근기根機를 소유한 자들이 많이 중도中道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숙종肅宗이 또 예전에 대원大願을 세웠던 대로 지금의 이른바 천수사天壽寺를 창건하여 교관敎觀을 받들려고 하였으나 공사를 마치지 못한 채 용의 수레가 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16) 이에 예종睿宗이 부왕父王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숙종의 대원을 크게 이룸으로써 길이 삼한三韓을 보우保佑하게 되었다.
지금 사방에 병란兵亂이 일어나서 창생蒼生이 도탄塗炭에 떨어졌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여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사방의 경내에 들리고 있다. 그리하여 남정네는 들판에서 밭을 갈고 아낙네는 집안에서 길쌈을 하면서 부富와 수壽를 누리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만 될 일이겠는가.
아, 부처가 입멸入滅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때를 당하여 국사가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멀리 법보法寶를 구하여 후세에 무궁히 전해 주었음은 물론이요, 태후太后와 숙종肅宗과 예종睿宗 그리고 금상今上(仁宗)이 지성至誠에서 우러나와 기쁜 마음으로 외호外護하며 그 뜻과 그 일을 제대로 계승하여 묘법妙法이 상주常住하게 함으로써 제불諸佛이 호념護念해 주고 제천諸天이 옹위擁衛해 준 덕분이 아니겠는가.
국사가 입적入寂하자 추증追贈하여 국사國師에 책봉하고, 시호諡號를 대각大覺으로 정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이 대각이라는 두 글자로 국사의 호를 삼으려 하자, 국사가 간곡히 사양하며 아뢰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을 상징하는데, 어떻게 감히 외람되게 차지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유사有司에게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다시 이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004_0596_b_01L嶺南山之旨濫傳爐拂謬事箕裘於是
004_0596_b_02L募可與弘道者德麟翼宗景蘭連妙
004_0596_b_03L率其徒齒於弟子大后尋舊大願
004_0596_b_04L起伽藍弘揚宗敎定其號曰國淸
004_0596_b_05L願未集僊駕上天肅祖繼而經營
004_0596_b_06L旣畢詔師兼住法駕親臨落成一宗
004_0596_b_07L學者及諸宗碩德無慮數千百人聞風
004_0596_b_08L競會師昇座振海潮音演未曾有一
004_0596_b_09L宗妙義無上根機多得中道無生法
004_0596_b_10L肅祖又尋大願欲創今所謂天壽
004_0596_b_11L以奉敎觀經始未畢龍馭遺弓
004_0596_b_12L考肯堂而肅祖之願大成以永庇于三
004_0596_b_13L且今者四方卷一三第七張兵動
004_0596_b_14L生墮於塗炭唯此海內晏然無虞
004_0596_b_15L鳴狗吠達乎四境男耕於野女織于
004_0596_b_16L不失其富壽此豈人力哉國師
004_0596_b_17L當去佛旣遠之後不惜身命遠求法寶
004_0596_b_18L傳之無窮而大后肅宗睿考洎今上
004_0596_b_19L發自至誠隨喜外護繼志述事使妙
004_0596_b_20L法常住而爲諸佛之所護念爲諸天之
004_0596_b_21L所權衛之力也耶師卒贈册爲國師
004_0596_b_22L謚曰大覺先是肅祖欲以二字爲師
004_0596_b_23L之號懇讓曰大覺佛之德何敢濫而
004_0596_b_24L據焉卒不受及是使有司議謚復不出

004_0596_c_01L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터를 잡고 장사지내려고 하다가 석곽石槨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영공이 빼앗아 여기에 묻힐 것이다.”라는 명銘이 새겨져 있었으니, 그러고 보면 영공이 영공이라는 시호諡號를 받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고 하겠다.17)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지금 국사의 대각이라는 시호도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고 하겠다.
또 국사가 구법求法을 하며 항주杭州에 있을 적에 주객主客(楊傑)이 말하였다.
“전일에 잣죽을 주셨을 때에 마침 정자사淨慈寺(永明寺)의 종본宗本 장로長老가 찾아왔기에 함께 죽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송구스러워하면서 ‘내가 몇 년 전 용산사龍山寺에 묵을 적에 꿈에 한 신인神人이 죽 한 사발을 주기에 물어보았더니, 동방東方의 부동불국不動佛國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이 죽이 꿈속에서 본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국사가 증득證得한 지견知見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였고 보면,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역시 이와 같았다고 하겠다.
대선사大禪師 순선順善과 선사禪師 교웅敎雄·유정流情은 모두 국사의 법손法孫이다. 이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 종문宗門이 이 땅에서 행해지지 못하다가 국사가 처음 창도唱導하여 애써 창립創立하는 시운時運을 맞이하였으니, 이는 달마達摩 대사가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始祖가 된 것과 같다. 지금 비를 세워서 그 일을 기록하지 않으면 후세에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그 말씀을 위에 주달奏達하였으니, 이는 세상에서 덕을 높이고 도를 즐거워하며18) 유덕遺德을 빛나게 드날리려는 뜻에 계합하는 것이었다. 이에 왕명을 내려 남숭산南崇山 선봉사僊鳳寺에 비를 세우고 법손法孫이 서로 이어 주지住持하며 그 유교遺敎를 선양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欲說法空     공관空觀으로만 설하려 하면
則不可測     제대로 살필 수 없나니
空卽是色     공이 곧 색인 까닭이요
欲執假名     가관假觀으로만 파악하려 하면
亦豈可窮     또 궁구할 수가 없나니
色則是空     색이 곧 공인 까닭이다.
行如是觀     이와 같이 관할 줄 알면
名爲中道     그 이름이 바로 중도요
循而發之     이에 따라 드러내 밝히면
圓覺普炤     원각이 두루 비추리니
三世諸佛     시방 삼세 모든 부처님이
由此塗出     이 길을 통해 나왔느니라.
大覺西遊     대각 국사가 서쪽에 가서
敎觀東流     교관을 동쪽에 전했는지라
是故詔立     임금님이 명하여 세웠나니

004_0596_c_01L二字昔靈公死卜葬沙丘得石槨
004_0596_c_02L銘曰靈公奪而理 [118] 則夫靈公之爲靈
004_0596_c_03L公也久矣以是觀之今師之爲大覺
004_0596_c_04L已久矣而又師求法在杭州主客曰
004_0596_c_05L日惠松子粥時有淨慈本長老至遂與
004_0596_c_06L [119] 長老悚然曰予數年前宿龍山寺
004_0596_c_07L夢有神人與一椀粥問之曰從東方不
004_0596_c_08L動佛國來卷一三第八張日之粥
004_0596_c_09L異夢中所見夫師之所證知見皆不
004_0596_c_10L可思議境界則其所顯於寧 [120] 亦復如
004_0596_c_11L是也大禪師順善禪師敎雄流情皆師
004_0596_c_12L之法孫相謂曰我之宗門此土未行
004_0596_c_13L遇師首唱而力創如達摩大士爲震旦
004_0596_c_14L禪那始祖今未有碑記其事後世其有
004_0596_c_15L所歸1) [147] [121] 一達其語契世尊德樂道
004_0596_c_16L欲光揚遺德之意詔碑於南崇山寺
004_0596_c_17L傳法孫相續而住勿絕傳揚其遺
004_0596_c_18L
銘曰

004_0596_c_19L
欲說法空則不可測空卽是色

004_0596_c_20L欲執假名亦豈可窮色則是空

004_0596_c_21L行如是觀名爲中道循而發之

004_0596_c_22L圓覺普炤三世諸佛由此塗出

004_0596_c_23L大覺西遊敎觀東流是故詔立

004_0596_c_24L▣疑「咎」{編}

004_0597_a_01L始祖之碑     우리 천태 시조의 비여
嵩山高高     높고 높은 숭산과 함께
碑與山宜     이 비석 영원하리로다.

대각국사외집 제13권大覺國師外集卷第十三

004_0597_a_01L始祖之碑嵩山高高碑與山冝

004_0597_a_02L大覺國師外集卷第1)十三
004_0597_a_03L卷一三第九張

004_0597_a_04L「十三」下有卷十四自一至三張然字體磨滅
004_0597_a_05L甚以不能讀故不錄{編}
  1. 1)선봉사僊鳳寺 대각 국사 비문 : 대본에는 제목과 지은이가 없으나, 편집자의 주를 참고하여 이렇게 제목과 지은이를 붙였다.
  2. 2)상이 …… 7일 : 고려 17대 왕인 인종仁宗 9년(1131) 신해년辛亥年 8월 7일이라는 말이다. 대연헌大淵獻은 고갑자古甲子의 십이지十二支 중 해亥를 말하고, 장월壯月은 8월의 별칭이다. 인종은 임인년(1122) 4월에 즉위하였으니, 즉위년까지 합치면 재위 10년이 되는 셈이다. 의천은 인종에게 종조부從祖父가 된다.
  3. 3)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 무엇하겠는가 : 비로자나불이 직접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석가불로 화현化現하여 이 사바세계에 내려왔으니, 더욱 친근할 수밖에 더 있느냐는 말이다. 부처가 자신의 지견知見을 열어서 중생을 인도하고(開), 이승二乘과 부처의 법신法身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보여 주고(示), 이승二乘을 이끌어 일불승一佛乘을 깨닫게 하고(悟), 궁극적으로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入), 이 네 가지 큰 목적, 즉 일대사一大事를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말이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 보인다.
  4. 4)선종 3년 : 엄밀히 말하면 선종 2년(1085)이 맞다. 임존은 즉위년까지 포함해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5. 5)그러므로 …… 것이다 :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에 “성인은 일정한 스승이 없다. 공자는 담자와 장홍과 사양과 노담을 스승으로 삼았다.(聖人無常師。孔子師郯子萇弘師襄老聃。)”라는 말이 나온다. 담자郯子는 춘추시대 담나라 군주로, 공자가 그에게 관직제도를 물어서 배운 사실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17년에 나온다. 또 공자가 장홍萇弘에게 악樂을 배우고, 사양師襄에게 금琴을 배우고, 노담老聃에게 예禮를 물었다는 내용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인다.
  6. 6)염부 : 염부제閻浮提의 준말로, 원래는 인도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염부주閻浮洲 혹은 섬부주贍部洲라고 한다.
  7. 7)부자夫子가 …… 안 것 :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나오는 고사이다.
  8. 8)수로手爐와 여의如意 : 불교 의식을 행할 때의 법구法具이다.
  9. 9)공자孔子가 …… 되었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吾自衛反魯樂正。雅頌各得其所。)”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10. 10)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이 …… 설하였다 :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권1에, 일월등명여래日月燈明如來가 성문聲聞을 위해 사제와 십이인연을 강설하고, 보살을 위해 육도무극六度無極, 즉 육바라밀을 강설한 내용이 나온다.
  11. 11)여래는 …… 않다 :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 나온다.
  12. 12)또 더군다나 …… 삼음에랴 : 형계 담연荊溪湛然이 지은 『지관의례止觀義例』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임존이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관三觀은 천태 지자天台智者 대사가 세운 천태삼관天台三觀으로, 가관假觀·공관空觀·중관中觀을 가리킨다.
  13. 13)9세世의 조사祖師 : 천태 9조, 즉 용수龍樹·혜문慧文·혜사慧思·지의智顗·관정灌頂·지위智威·혜위慧威·현랑玄朗·담연湛然을 말한다.
  14. 14)1백 성城의 선우善友 :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도 순례를 인용한 것이다.
  15. 15)기구箕裘 :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16. 16)용의 …… 말았다 : 숙종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 정호鼎湖에서 솥을 만들어 연단鍊丹을 하다가 그 일을 끝내고서 용을 타고 승천昇天할 적에 신하와 후궁後宮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활을 안고 부르짖으면서 울었다고 하여 그 활을 오호궁嗚呼弓이라고 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
  17. 17)옛날 …… 하겠다 :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장사지내려고 땅을 팠더니 석곽石槨 하나가 나왔는데, 그 석곽에 “이 자손은 의지할 수가 없다. 영공이라는 임금이 빼앗아 여기에 묻힐 것이다.(不馮其子。靈公奪而埋之。)”라는 명銘이 이미 새겨져 있었으니, “영공이 영공이라는 시호를 받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夫靈公之爲靈也久矣)”라는 이야기가 『장자』 「칙양則陽」에 나온다.
  18. 18)덕을 …… 즐거워하며 : 참고로 『맹자』 「공손추公孫丑 하」에 “덕을 높이고 도를 즐거워하는 것을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더불어 뜻 있는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其尊德樂道。不如是。不足與有爲也。)”라는 말이 나온다.
  1. 1)林存撰。僊鳳寺碑文自卷題至第二張末。甲本冠註曰。丁亥十月依金石總覽補缺。方山學人柳壽焚香敬書。
  2. 1)▣疑「之」{編}。
  3. 2)▣疑「素」{編}。
  4. 3)▣疑「曰」{編}。
  5. 4)▣疑「乞」{編}。
  6. 5)▣疑「裘」{編}。
  7. 1)▣疑「咎」{編}。
  8. 1)「十三」下有卷十四。自一至三張。然字體磨滅甚以不能讀。故不錄{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