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 儒釋質疑論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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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질의론 하권(儒釋質疑論卷下)
서문序文
세상에 통하는 것은 하나의 도道이고, 변화를 지어내는 것은 하나의 기氣이며, 만물에 균등한 것은 하나의 이理이다. 그러나 얕고 깊음이 같지 않으므로 성인의 가르침이 세 가지가 있다. 불교에서는 진공眞空이라 하는데 성性의 체體를 들어 말하는 것이다. 노장사상에서는 곡신谷神이라 하는데 변화를 밝혀 말하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대본大本이라 하는데 사물에 의지하여 말하는 것이다.
지극히 커서 개별적 자아가 없고, 지극히 깊어서 억지로 함이 없고, 지극히 텅 비어 시작이 없고, 지극히 영묘하여 다함이 없으며, 온갖 묘함을 품고 고요하니 움직이지 않으나 삼재三才1)의 뿌리가 되고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진공이라 한다. 하나의 기가 성해져서 영묘함이 드러나고 조화의 조짐이 되니 아무것도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곡신이라 한다. 사물에는 근본과 지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사물을 탐구하여 앎에 이르면 만 가지 차별된 것들이 하나의 이치로 통한다. 그러므로 대본이라 한다.
삼교가 비록 다르지만 도는 하나이다. 비유하자면 나무를 심는 것과 같으니, 땅이 품어 키우는 것 같은 것을 진공이라 하고, 씨앗에서 싹이 나는 것 같은 것을 곡신이라 하며, 가지와 잎의 뿌리가 같은 것 같은 것을 대본이라 한다. 뿌리와 줄기가 서로 돕고 땅에서 배양하면 꽃과 열매가 번성하고 무성하여 봄이나 가을이나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삼교가 서로 의지하여 세상을 교화하여 이룬다면 저절로 음양이 어긋나지 않고 바람과 비가 때에 맞추게 되니, 사람과 신들이 기뻐하며 화합하여 백성들의 풍속이 나쁘지 않게 되고,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그 본분을 잃지 않으며, 물고기와 사슴과 곤충들이 각자 그 천성을 지킬 것이다. 이와 같으면 평화롭게 잘 다스려진 시대라 할 수 있다.
노장사상과 불교는 세상에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믿지 않는다. 이제 한 덩어리 뼈와 살로 이루어진 몸뚱어리 같은 것도 본성의 하늘에 근원을 두고 오행으로 바탕을 마련하여 아홉 개의 구멍을 열고 여섯 가지 식識을 갖춘 뒤에야 삼강三綱,2) 오상五常,3)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도리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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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_0265_a_02L儒釋質疑論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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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_0265_a_04L
通天下一道也工變化一氣也均萬物
007_0265_a_05L一理也然有淺奧之不同故聖人之敎
007_0265_a_06L處三焉釋曰眞空擧性體而言也
007_0265_a_07L曰谷神明變化而言也儒曰大本
007_0265_a_08L事物而言也至大無我至賾無爲
007_0265_a_09L虛無始至靈無竭包含衆妙寂然不
007_0265_a_10L爲三才之祖爲萬法之源故曰眞
007_0265_a_11L一氣盛矣靈妙發矣兆於造化
007_0265_a_12L能無物故曰谷神物有本末事有終
007_0265_a_13L格物致知萬殊一理故曰大本
007_0265_a_14L敎雖殊道則一也比猶種樹也如地
007_0265_a_15L含養之謂眞空如種生芽之謂谷神
007_0265_a_16L葉同根之謂大本根幹相資培養后土
007_0265_a_17L則有花實之繁茂而春秋不歉矣三敎
007_0265_a_18L相因而化成天下自然陰陽不忒
007_0265_a_19L雨順時人神悅和民俗不惡君臣上
007_0265_a_20L不失其分魚鹿昆虫各守其天
007_0265_a_21L是則可謂治平之世矣有謂佛老無益
007_0265_a_22L於世者吾不信也且如一塊骨肉之身
007_0265_a_23L原於性天質於五行開九竅具六識
007_0265_a_24L而後知有三綱五常君臣父子之道

007_0265_b_01L자신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 모두 이로부터 시작된다. 만일 바탕인 몸뚱이와 마음의 본성을 잃어버리고서 자신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고자 한다면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유교인이면서 노장을 배척하는 것은 꽃을 감상하면서 나무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노장사상가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나무를 키우면서도 뿌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화엄경』의 큰 가르침을 근본적인 가르침의 수레바퀴라고 하는 것은 좋이 그럴 만한 뜻이 있는 것인데, 멋대로 헐뜯고 물리치는 것은 나무를 심으면서 뿌리를 없애는 것이니 오래도록 무성하기를 바랄지라도 그럴 수 있겠는가?
과거에 세 명의 무武 자 들어가는 임금4) 이래로 불교를 헐뜯는 이가 왕조마다 한두 명씩 있었지만 발 돌릴 틈도 없이 화가 닥쳤으니 어찌 증험이 없다 하겠는가? 세간에서 죄 없는 사람을 멋대로 헐뜯는 것도 오히려 형벌의 화를 부르거늘 하물며 아무 까닭 없이 경박하게 큰 성인을 헐뜯는 일이겠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분께서 세상에 응하시는 것을 궁구해 보면, 본체는 진공이고 작용은 하늘과 땅이어서 때에 따라 변화하여 움직이는 것이 하늘ㆍ땅과 함께 흐른다. 그 가르침을 세우심은 만 곳의 나라에 봄이 찾아오고 천 곳의 나라에 비가 쏟아져서 하늘과 땅 어디나 똑같은 하나의 조화로운 기운이 가득한 것과 같지만, 중생들이 교화를 받아들임은 널리 무성한 풀과 나무 가운데 뿌리가 큰 것은 이를 얻어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은데 이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뿌리가 작은 것은 이를 얻어 작은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은데 이를 소승小乘5)이라 하며,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싹과 종자를 태워 버려서 영원히 생겨날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이를 천제闡提6)라 하니 스스로 포기하여 구할 수 없는 이들이다.7)
작은 소견이나마 간략하게 펼쳐 보자면,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아서 온 우주를 다 꿰뚫고 음양을 감싸 안으며, 본래 생겨나고 없어지거나 가고 오는 모습이 없다. 다만 자비가 광대하고 이루려는 서원이 크고 깊어서, 모든 중생들이 나고 죽는 흐름에 빠져 끝없이 윤회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모두 부처님의 경계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고자, 염부제에 성인의 조짐을 보여 주나라 소왕 계축년 7월 15일 한밤중에 저 높은 하늘에서 해로 변하여

007_0265_b_01L修身齊家治國平天下自是而漸矣
007_0265_b_02L喪其形質心性而欲修身齊家治國平
007_0265_b_03L天下其誰得乎儒而排老者賞花而
007_0265_b_04L不知有樹也老而排佛者養樹而不知
007_0265_b_05L有根也可謂智乎華嚴大敎謂之根本
007_0265_b_06L法輪良有旨也恣意毁斥者樹而撤
007_0265_b_07L根也雖欲久榮其可得乎自昔三武
007_0265_b_08L以降毁佛者代有一二人而禍不旋踵
007_0265_b_09L豈無驗歟世間無罪之人橫加毁謗
007_0265_b_10L尙招刑禍況無故輕薄以毁大聖人哉
007_0265_b_11L原夫大覺之應世也體則眞空用則乾
007_0265_b_12L機動變化與天地同流故其設敎
007_0265_b_13L如春行於萬國雨霈於千邦普天
007_0265_b_14L匝地同一和氣而衆生之受化如草
007_0265_b_15L本之敷榮大根者得之則成大樹是之
007_0265_b_16L謂大乘小根者得之則成小樹是之謂
007_0265_b_17L小乘不信不受者焦芽種子永不得
007_0265_b_18L是之謂闡提自暴自棄不可救者
007_0265_b_19L略陳管見佛眞法身猶若虛空
007_0265_b_20L綸八極包括二儀本無生滅去來之相
007_0265_b_21L但以慈悲廣大行願弘深哀見一切衆
007_0265_b_22L沉淪生死輪廻不已欲令悟入佛
007_0265_b_23L之境界將兆聖於閻浮於周昭癸丑七
007_0265_b_24L月十五日夜半從九天之上化日輪駕

007_0265_c_01L하얀 코끼리를 타고 왕궁으로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마야부인의 태 속에 들어갔다가 열 달이 다 찬 뒤 갑인년 4월 8일 어머니가 룸비니 동산을 거닐다가 무우수無憂樹를 잡자 다시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금빛 몸을 씻겨 주니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고서 “하늘 위에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라고 사자후를 하셨다.
열아홉 살에 출가하여 6년 동안 고행하고 서른 살에 도를 이루셨으며 79년 동안 세상에 머무르시면서 300차례 남짓의 법회에서 가르침을 설하시니 중생의 근기에 맞춘 가르침이 다 갖추어졌다.
위에서 보여 주신 일 하나 변화 하나가 중생을 위하여 법도를 만들고 본보기를 보이며 삼재가 하나의 도임을 보이지 않은 것이 없다.
7월 15일은 음기가 땅에서 생겨나고 양기는 밖에서 일어나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기 때문에 양을 타고 음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 높은 하늘은 장주가 말한 ‘큰 밝음의 위, 지극한 양의 근원’이다. 한밤중에는 하나의 기도 아직 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기와 양기가 아직 갈라지지 않고 맑고 흐린 기운이 아직 나뉘지 않았으니, 이른바 자시의 한가운데인 정위正位이다. 발하고 나서는 해로 변화하여 하얀 코끼리를 타고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간 것은, 해는 양기의 정수이고 하양은 치우친 위치로서 만 가지 형상이 있다. 코끼리는 위세가 충족되고 오른쪽 옆구리는 쇠에 속하는데 쇠의 빛깔은 하양을 취한다. 치우친 것을 타고 치우친 곳으로 들어간 것은 세상에 나투려는 것이다.
음의 영역에 들어가고 나서는 오히려 열 달을 머물러 있었으니 곧 오행의 낳고 이루는 수를 다 갖춘 것이다. 한 달에는 검정과 하양이 있어서 중기와 절기가 있는데, 더하고 빼서 20이 된다. 겁劫이 이루어질 때에도 이 수를 거치는데 이에 준한다. 긴 것을 겁이라 하고 짧은 것을 찰나라 하며 해와 달과 날이 차례로 오는데, 점차 쌓이는 것은 비록 다르지만 낳고 이루는 수는 같다.
4월은 여섯 양기가 이미 극에 이른 때로서 음을 가르고 양의 영역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오른쪽 옆구리로

007_0265_c_01L白象下降王宮從右脇而入摩耶胎藏
007_0265_c_02L十月旣滿於甲寅四月八日母遊毘藍
007_0265_c_03L攀無憂樹還從右脇而生九龍吐
007_0265_c_04L沐浴金𨈬左手指天右手指地
007_0265_c_05L行七步目顧四方作獅子吼天上天
007_0265_c_06L下唯我獨尊十九出家六年苦行
007_0265_c_07L十成道住世七十九年說法三百餘會
007_0265_c_08L而待衆生機備矣如上示現一機一變
007_0265_c_09L無非爲群生作則做介榜樣示三才一
007_0265_c_10L道也七月十五則陰生于地陽發于外
007_0265_c_11L天地位焉故可以乘陽而入於陰界也
007_0265_c_12L九天之上則莊周所謂大明之上至陽
007_0265_c_13L之源也當夜之半一氣未發故則陰
007_0265_c_14L陽未判淸濁未分所謂正位子之半也
007_0265_c_15L旣發而化日輪駕白象右脇而入則日
007_0265_c_16L者陽之精白者偏位有萬形像象者
007_0265_c_17L足威勢右脇屬金金色白取其乘偏
007_0265_c_18L入偏而將欲出現也旣入陰界猶有
007_0265_c_19L十月之停則五行生成之數備矣一月
007_0265_c_20L有黑白中節而成二十增减劫成之時
007_0265_c_21L亦經斯數盖准此也遠則言劫近則
007_0265_c_22L刹那而年月日次之積漸雖異而生
007_0265_c_23L成之數則同也四月六陽已極之時
007_0265_c_24L可以剖陰而出於陽界故還從右脇而

007_0266_a_01L나온 것이다.
움직인 것은 자정이고 태에 들어간 것은 축丑의 해이고 태어난 것은 인寅의 해인 것은 곧 하늘이 자子에서 열리고 땅이 축에서 열리고 사람이 인에서 태어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금빛 몸을 씻겨 준 것은 9는 양의 극수이고 물은 양기가 변한 것이니 이를 뿜어 씻겨 주어 음장陰藏의 기운을 씻어 낸 것이다.
몸이 순금 빛깔인 것은 노랑은 가운데에 있으면서 두루 응하여 정해진 방소가 없으니 모든 형기形氣가 있는 것들은 그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법이 이와 같다.
왼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을 걸은 것은 이십팔수二十八宿이니 이른바 하늘의 법도이다. 눈으로 사방을 돌아본 것은 가운데까지 합해서 오성五星이니 이른바 땅의 법도이다. 하늘의 법도와 땅의 법도를 자기 한 몸에 모두 모아 갖추니 마치 황하가 도圖를 내고 낙수가 서書를 내어 조화의 묘함이 그 사이에 다 갖추어 나타나듯이, 안팎과 하늘과 땅이 온전히 저것이고 온전히 이것이어서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 둘이 없고 다름이 없는 것이니, 하늘과 땅을 용으로 삼고 조화의 근원을 통어하는 이가 아니라면 이럴 수 있겠는가?
태어날 때에 사람에게 보여 준 이치가 깊다. 이는 실로 선천명세라 말할 수 있고 실로 큰 성인이라 말할 수 있으니, 복희씨나 대우大禹의 후천後天의 학學과 같지 않다. 그러니 홀로 존귀한 분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큰일의 인연을 한 생애에 다하셨으니, 진실로 탁월한 자가 있다면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을 것이니, 만년이 지난 뒤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다면 부처님께서 부처님이신 까닭을 바로 알고 단번에 초월하여 여래의 지위에 곧장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어찌 꼭 모습과 목소리를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근기의 사람은 얻기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자후를 내어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란 ‘너-나’의 ‘나’가 아니라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고 하나하나마다 완전히 이루어져 있는 것이니, 또한 사물과 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른바 사물을 탐구하여 머물 곳을 아는 것의 지극함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이

007_0266_a_01L得出現也動之子半處胎以丑示生
007_0266_a_02L以寅則天開於子地闢於丑人生於
007_0266_a_03L寅可知矣九龍吐水沐浴金𨈬九者
007_0266_a_04L陽之極數水者陽氣所化吐而浴之
007_0266_a_05L洗除陰藏之氣也身眞金色則黃色居
007_0266_a_06L普應無方凡有形氣者莫不承恩
007_0266_a_07L此非强爲法如是也左手指則天右手
007_0266_a_08L指則坤四方各七步則二十八宿所謂
007_0266_a_09L天經也目顧四方兼中則五星所謂
007_0266_a_10L地緯也天經地緯捴於一己如河之
007_0266_a_11L出圖洛之出書而造化之妙備現於
007_0266_a_12L其間內外乾坤全彼全此運動變化
007_0266_a_13L無二無別非以乾坤爲用統造化之
007_0266_a_14L原者其若是乎降誕之際示人之理
007_0266_a_15L深矣此則實謂先天命世實謂之大聖
007_0266_a_16L而非若1) [11] 皇大禹後天之學也非獨尊
007_0266_a_17L而何然則大事因緣盡於一期苟有
007_0266_a_18L卓越者目擊而道存雖降萬歲之下
007_0266_a_19L聞其風則便知佛之所以爲佛而一超直
007_0266_a_20L入如來之位矣何待於容聲乎然而此
007_0266_a_21L根人難得故不獲已而出獅子吼而曰
007_0266_a_22L唯我獨尊所謂我者非尒我之我
007_0266_a_23L人本具介介圓成亦何物我之有間哉
007_0266_a_24L所謂物格而知止之至也故古德有言

007_0266_b_01L말하기를 “처음 왕궁에 태어나실 때 근본적인 것을 보여 주셨고, 똑같이 일곱 걸음을 걸어 또한 거듭 펴셨으며,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켜도 이해하는 사람은 없고, 오직 우레 같은 소리만이 대천세계에 두루 울렸네.”라고 하였으니, 이런 옛 스님 같은 이는 그 가르침을 듣고서 이 도를 체득한 이라고 할 만하다.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어찌 여래만이 이 법을 가지고 있겠는가? 부처와 중생은 같은 하나의 법성으로서 인드라망의 그물에 꿰인 구슬처럼 서로 포섭하여 들어가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탄식하시며 “기이하구나!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갖추고 있는데, 그저 망상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하셨으며, 이에 법계의 본성에 맞추어 『대방광불화엄경』의 원돈의 가르침을 설하시어 훤하게 열어 드러내셨다.
그 제목을 보면 곧 경의 적확한 뜻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찰나 찰나 설하고, 티끌처럼 많은 수만큼 설하고, 정해진 때가 없이 설하고, 정해진 장소가 없이 설하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이 설하여서 그침이 없기 때문이다. 상부에 있는 열 개의 삼천대천세계의 티끌 수만큼의 게송과 하나의 사천하四天下8)의 티끌 수만큼 많은 품에서 설한 것은 어떤 법인가? 이 법이다. 그 당시에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처럼 큰 산 같은 근기를 지닌 이들은, 비유하자면 해가 먼저 높은 봉우리를 비추는 것처럼 보자마자 알았고, 이승二乘9)은 귀머거리나 벙어리처럼 그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왜인가? 원돈의 큰 법은 얕은 식견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장님이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해와 달의 허물이겠는가? 단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비방하니 이는 마치 작은 비둘기가 하늘 못을 비웃는 것과 같다.
만일 가없는 국토와 바다에서 자기와 남은 털끝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고 십세十世의 과거와 현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찰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세계의 티끌 수 또한 한량이 있는데 백성들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니 애달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각황께서 차마 말이 없을 수가 없어서, 밑으로 중ㆍ하의 사람들에게 거듭 펴시고자 비로법계의 몸을 나투어 보이시어, 보리도량에 앉아 한량없는 맑고 깨끗한 밝은 빛을 뿜어

007_0266_b_01L初誕王宮示本然同行七步又重宣
007_0266_b_02L指天指地無人會獨震雷音遍大千
007_0266_b_03L古德者可謂聞其風而體斯道矣如曰
007_0266_b_04L人人本具則何獨如來有是法哉佛與
007_0266_b_05L衆生同一法性如帝網珠互相攝入
007_0266_b_06L無有差別故世尊初成正覺嘆曰奇哉
007_0266_b_07L一切衆生具有如來智慧德相但以妄
007_0266_b_08L想執著而不證得於是稱法界性說大
007_0266_b_09L方廣佛華嚴經圓頓之敎洞然開顯
007_0266_b_10L其題目便見經之的旨所謂刹說塵說
007_0266_b_11L無時說無方說熾然說無間歇故上部
007_0266_b_12L有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偈一四天下
007_0266_b_13L微塵數品所說者何法耶曰此法也
007_0266_b_14L是之時若文殊普賢大山王機則見而
007_0266_b_15L知之譬如日出先照高峰而二乘在座
007_0266_b_16L如聾若啞何也圓頓大法非淺識之所
007_0266_b_17L能知是猶盲者不見日光豈日月之
007_0266_b_18L咎㦲非唯不知反生毁謗是猶鷽鳩
007_0266_b_19L之笑天池也若曰無邉刹海自他不隔
007_0266_b_20L於毫端十世古今始終不離於當念
007_0266_b_21L則世界微塵亦有限量矣百姓日用而
007_0266_b_22L不知可不悲乎於是覺皇不忍無言
007_0266_b_23L俯爲中下之士欲重宣示現毘盧法界
007_0266_b_24L之身坐菩提場中普放無量淸淨光明

007_0266_c_01L세간을 두루 비추셨으며, 보리도량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다시 보광명전에 나타나시고, 보리수 아래와 보광명전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다시 도리천궁으로 올라가셨으며, 차례로 올라가 유정천에 이르셨으니, 마치 하늘과 땅이 덮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다만 위신력을 뭇 보살들에게 더해 주시니 뭇 보살들이 부처님의 신통한 힘을 받아 저마다 법문을 설하여 수행하는 사람이 올라가는 단계를 열어 보였다. 이러한 온 누리 천백억 세계의 모든 법회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늘 부처님과 마주 보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마치 해가 하늘에 있으면 그 영상이 온갖 물에 다 비치는 것과 같다.
경에서 말하기를 “육체의 모습은 부처님이 아니고, 목소리 또한 그러하네. 또한 육체와 목소리를 떠나지 않고도, 부처님의 신통한 힘을 보네.”10)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을, 남김없이 알고자 한다면, 법계의 본성을 관찰해야 하리니,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네.”11)라고도 하였다. 이것이 『화엄경』이 근본이 되는 까닭으로, 시간에 빗대어 보면 해가 뜨는 때이다. 그다음 『법화경』은 정오에 빗댈 수 있고, 그다음 『열반경』은 해 질 녘이 된다. 이 세 경전은 그물을 들어 올리는 큰 벼리와 같고, 『아함경』ㆍ『방등경』ㆍ『반야경』ㆍ『능엄경』ㆍ『유마경』ㆍ『사익경』ㆍ『원각경』 등 뭇 경전과 널리 팔만의 법장에 이르는 경전들은 두루 그물눈이 되어, 삼계의 번뇌의 바다에 두루 펼쳐서 중생들을 걸러 건져 내어 함께 저 언덕에 오르게 하니, 훌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르침이 비록 많지만 그 요체를 잡아 보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일 뿐이다. 계율의 그릇이 원만히 이루어지는 것은 과거의 더러움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선정의 물이 맑게 고여 있는 것은 멈출 곳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지혜의 달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은 감응하여 마침내 통한다는 것을 말한다.
계율에는 간략히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죽이지 말라는 것이니 인仁의 단서를 여는 것이다. 둘째는 훔치지 말라는 것이니 의義의 단서를 여는 것이다. 셋째는 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니 예禮의 단서를 여는 것이다. 넷째는 망령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니 신信의 단서를 여는 것이다.

007_0266_c_01L遍照世間不動覺場而復現於普光明
007_0266_c_02L殿不離菩提樹下及普光明殿而復上
007_0266_c_03L昇忉利天宮次第而昇至于有頂
007_0266_c_04L乾坤之無不覆幬也但以威神加諸菩
007_0266_c_05L而諸大士承佛神力各說法門
007_0266_c_06L示行人昇進之階如是十方千百億世
007_0266_c_07L界一切衆會靡不自謂恒對於佛如日
007_0266_c_08L麗空而影含衆水矣經云色相非是佛
007_0266_c_09L音聲亦復然亦不離色聲見佛神通力
007_0266_c_10L又云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應觀法
007_0266_c_11L界性一切唯心造此華嚴之所以爲根
007_0266_c_12L本也 [3] 之於時則日出時也次有法
007_0266_c_13L花爲萬中次有涅槃爲日晡三經者
007_0266_c_14L如大綱之斯擧而阿含方等般若楞嚴
007_0266_c_15L維摩思益圓覺諸經廣而至於八萬法
007_0266_c_16L遍爲衆目遍張三界煩惱海上
007_0266_c_17L摝群生共登彼岸可不韙歟敎法雖
007_0266_c_18L而撮其樞要戒㝎慧而已戒器圓
007_0266_c_19L革其舊染之謂也㝎水凝淸知其
007_0266_c_20L所止之謂也慧月方現感而遂通之謂
007_0266_c_21L戒之略有五一曰不殺開仁之端
007_0266_c_22L二曰不盜開義之端也三曰不婬
007_0266_c_23L開禮之端也四曰不妄開信之端也
007_0266_c_24L「義」作「義」{甲}

007_0267_a_01L다섯째는 냄새나는 채소와 술을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것이니 지智의 단서를 여는 것이다. 그저 ‘오상이 인륜의 큰 도이다.’라고만 말할 뿐 단서를 열어 보여 주지 않는다면, 집을 아름답게 지어 놓고도 문을 만들어 놓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니,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12) 부처님의 다섯 가지 계율은 오상의 단서를 열어 보여서 어리석은 이들까지 모두 깨달아 들어가서,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이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기가 나뉜 뒤에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운 것이 사물인데, 만 가지로 서로 달라도 근본은 하나로 함께 묘하게 밝은 참된 성품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비록 종류는 서로 다를지라도 본성은 하나이다. 본성이 이미 하나이니 저들의 여러 가지 모습 모두 나의 하나의 본성의 작용이다. 마치 사람의 몸에 사지四肢가 있고, 사지에 다섯 손가락 발가락이 있는 것과 같아서 저것이 오히려 이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저것이다. 그러므로 몸이라는 것으로써 동등하게 생각하여 해치지 않고, 친척이라는 것으로써 동등하게 생각하여 죽이지 않는다. 손가락이 편안하면 사지도 편안하고, 사지가 편안하면 온몸이 편안하다. 손에서 시작하여 몸을 거두어들이고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데에 이르고, 마음을 잡는 데서부터 성품을 이루는 데까지 이르며, 큰 자비를 미루어 넓혀 은택이 온 누리를 덮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인仁이다. 도둑질을 끊고, 음란한 짓을 끊고, 망령된 짓을 막고, 술을 버리는 뜻도 모두 이와 같다.
유교인들은 죽이는 것에 대하여 “촘촘한 그물을 연못에 집어넣지 않으면 물고기와 자라가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게 된다.”13)라고 말하고,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두는 것이 도둑질을 가르친다.”14)라고 말하고, 음란한 짓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듯이 덕을 좋아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15)라고 말하니 어찌 금함이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얼음과 석탄처럼 서로 반대되는 까닭이다.
질의응답質疑應答
① 우주의 시작에 대한 설명이 유교와 불교가 다른 이유
묻겠다16) : 위에서 말한 삼재의 시작이 유학자들이 말하는 혼돈混沌과 반고盤古 등의 말과 같지 않은 것은 왜인가? 자세히 설명하여 남은 의심을 없애 주기 바란다.
답하겠다 : 삼재의 시작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니 어량語量17)에 의거하여 설명해 보겠다. 밖은 세계라 하고 안은 근신根身이라 하는데 모두 오행의 기를 받아

007_0267_a_01L五曰不茹葷飮酒開智之端也徒曰五
007_0267_a_02L常爲人倫之大道而不開端以示之
007_0267_a_03L如美宮室而不置門戶也其入之不亦
007_0267_a_04L難乎佛之五戒所以開示五常之端
007_0267_a_05L使其愚蒙皆可悟入自近而至遠也
007_0267_a_06L盖一氣旣分之後盈於天地之間者
007_0267_a_07L萬殊一本同出於妙明眞性之中
007_0267_a_08L則品類雖殊而性則一也性是旣一
007_0267_a_09L則彼之紛捴皆我一性之用如人之身
007_0267_a_10L有四肢肢有五指也彼猶此也此猶
007_0267_a_11L彼也故等之以身而不害等之以親而
007_0267_a_12L不殺指寧而肢頥肢頥而身穏矣
007_0267_a_13L手攝身而至於攝心自其撮心而至於
007_0267_a_14L成性推廣大慈而澤被大千此佛氏之
007_0267_a_15L仁也絕盜絕婬杜妄去酒意皆倣此
007_0267_a_16L儒者之於殺則曰數罟不入汚池魚鱉
007_0267_a_17L不可勝用也於盜則曰謾藏誨盜於婬
007_0267_a_18L則曰未見好德如好好色則何禁之有
007_0267_a_19L此所以氷煤而相反也

007_0267_a_20L
問上之所言三才之始與儒者之言
007_0267_a_21L混沌盤古等語不同何也請爲辨說
007_0267_a_22L以袪餘疑

007_0267_a_23L
曰三才之始余所未詳請依語量辨之
007_0267_a_24L外爲世界內爲根身皆禀於五行之氣

007_0267_b_01L모습을 이룬다. 비록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같지 않지만 이루어지고 부서지는 이치는 같다. 세계로 보면 이루어짐ㆍ머묾ㆍ부서짐ㆍ없어짐이 되고, 때로 보면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되며, 사람으로 보면 태어남ㆍ머묾ㆍ변함ㆍ사라짐이 되는데, 빙빙 돌며 왔다 갔다 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끝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나투어 계셨던 현겁賢劫18)은, 세상에서 네 철을 통틀어 한 해라고 하는 것처럼 이루어짐ㆍ머묾ㆍ부서짐ㆍ없어짐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겁 가운데 큰 것이다. 한 해에 네 철이 있는 것처럼 이 현겁 속에 이루어짐ㆍ머묾ㆍ부서짐ㆍ없어짐의 네 겁이 있는데, 겁 가운데 중간의 것이다. 때에 달이 있는 것처럼,19) 이 네 겁 속에 늘어나고 줄어드는 20개의 겁이 저마다 있는데, 겁 가운데 작은 것이다. 이른바 늘어나고 줄어든다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들어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목숨은 8만 4천 살부터 시작해서 100년마다 1년씩 줄어드는 것으로 정해져 있는데, 사람의 목숨이 열 살에 이르게 되면 하나의 줄어드는 겁이 된다. 열 살부터 또 100년마다 1년씩 늘어나는데, 다시 8만 4천 살로 늘어나면 하나의 늘어나는 겁이 된다. 마치 달에 처음 밝은 면이 생겨나면 점점 더 늘어나서 보름이 되면 가득 차는데 이를 흰 달이라고 하고, 처음 어두운 면이 생겨나면 점점 밝은 면이 줄어들어 그믐에 이르면 다 없어지는데 이를 검은 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찌 천도天道만 그러하겠는가? 무릇 두 기氣 사이에 있는 것20)들은 그 덜고 더함이 모두 이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옛 시에서 이르기를 “어찌하여 물고기의 뇌가 줄어드는가, 이는 달이 비어 가기 때문임을 알아라.”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무릇 음기와 양기가 덜고 더하는 것을 늘여서 겁으로 삼으면 늘어나는 겁과 줄어드는 겁이 있고, 줄여서 달로 삼으면 차는 것과 비는 것이 있으니, 차고 빈 것으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에 맞추어 보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검고 흰 두 달을 합하여 한 달이라고 한 것은 역수의 법칙이다. 이 예에 따르면 늘어나고 줄어드는 두 겁 또한 합하여 하나의 겁이 된다.
세계가 처음 이루어지는 것은, 큰비가 콸콸 흘러 바람 바퀴에 실려서 육합六合21)을 가득 채웠다가, 바람이 불어 점점 줄어들고

007_0267_b_01L乃得成形焉雖大小延促之不同而成
007_0267_b_02L壞之理則均也在世界爲成住壞空
007_0267_b_03L時爲春夏秋冬在人爲生住異滅循環
007_0267_b_04L徃復窮未來際而無有已焉者也佛以
007_0267_b_05L現在賢劫者捴成住壞空而言之如世
007_0267_b_06L之捴四時爲一年劫之大者也此賢劫
007_0267_b_07L有成住壞空四劫如年之有四時
007_0267_b_08L劫之中者也此四劫中各有二十增減
007_0267_b_09L如時之有月劫之小者也所謂增
007_0267_b_10L減者擧人壽而言之則人壽始自八萬
007_0267_b_11L四千歲百歲減一年爲㝎或至人壽十
007_0267_b_12L歲時爲一減劫從十歲又百歲增一
007_0267_b_13L還登八萬四千歲爲一增劫如月
007_0267_b_14L以才生明漸積而增至望則盈矣
007_0267_b_15L謂白月又以才生魄漸積而減至晦
007_0267_b_16L則盡矣謂之黑月豈特天道爲然哉
007_0267_b_17L凡處二氣之間者其損益無不皆然
007_0267_b_18L古詩云有何魚腦減知是月輪虛是也
007_0267_b_19L夫陰陽之爲損益延而爲劫則爲增減
007_0267_b_20L促而爲月則爲盈虧以盈虛配增減則
007_0267_b_21L不相忒矣合黑白二月而謂之一月者
007_0267_b_22L曆數之法也例是則增減二劫亦合而
007_0267_b_23L爲一劫矣盖世界之始成也大雨洪注
007_0267_b_24L載於風輪彌滿於六合之中風吹漸減

007_0267_c_01L차례로 물방울이 맺혀서,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이전 모습대로 세워지며, 이처럼 열 겁을 지난 뒤에 이루어지는데, 바로 사람이 태 속에서 열 달을 채운 뒤에 태어나는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오행이 낳고 이루는 것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른바 오행이라는 것은 하늘 1이 물을 낳고, 땅 6이 이를 이루어 주며, 땅 2가 불을 낳고 하늘 7이 이를 이루어 주며, 하늘 3이 나무를 낳고 땅 8이 이를 이루어 주며, 땅 4가 쇠를 낳고 하늘 9가 이를 이루어 주며, 하늘 5가 흙을 낳고 땅 10이 이를 이루어 주는데,22) 이것이 오행이 반드시 10이라는 숫자를 기다려서 안팎을 낳고 이루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까닭이다.
또 오행의 기는 밖으로 하면 사방에 자리하여 네 철에 유행하고, 안으로 하면 장기에 모여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드러난다. 나무는 동쪽에 자리하여 봄에 행하는데, 사람에게는 간이 되고 코로 숨을 쉬니, 발생을 주관하는 것이 이것이다. 불은 남쪽에 자리하여 여름에 행하는데, 사람에게는 심장이 되고 눈으로 보니, 기름을 주관하는 것이 이것이다. 쇠는 서쪽에 자리하여 가을에 행하는데, 사람에게는 허파가 되고 입에서 소리를 내니, 성숙을 주관하는 것이 이것이다. 물은 북쪽에 자리하여 겨울에 행하는데, 사람에게는 신장이 되고 귀로 들으니, 갈무리를 주관하는 것이 이것이다. 흙은 가운데 자리하여 네 철에 행하는데, 사람에게는 비장이 되고 몸으로 느끼니, 사물을 싣는 것을 주관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하늘은 하늘이 될 방도가 없고 땅은 땅이 될 방도가 없으며 사람은 사람이 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삼재의 시작은 모름지기 오행의 낳고 이룸이 갖추어지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육합이 자리를 잡고 형질이 갖추어진다.
다만 세계가 생겨나고 이루어지는 것은 겁으로써 하고, 사람이 생겨나고 이루어지는 것은 달로써 하니 이는 크고 작은 것의 등급이 있고 안팎이 나뉘는 것이다. 작고 안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또한 알고 있지만,

007_0267_c_01L次第結沫從上至下依舊建立迺經
007_0267_c_02L如是十劫而後成正與人之胞胎足滿
007_0267_c_03L十月而後生者是待五行生成之備也
007_0267_c_04L所謂五行者天一生水而地六成之
007_0267_c_05L二生火而天七成之天三生木而地八
007_0267_c_06L成之地四生金而天九成之天五生土
007_0267_c_07L而地十成之此五行之所以須十數
007_0267_c_08L生成於內外無小異焉者也且五行之
007_0267_c_09L氣者外之則位於四方而流行於四時
007_0267_c_10L內之則鍾於1) [12] 而開發於五根
007_0267_c_11L位東而行於春在人則爲肝而息於鼻
007_0267_c_12L主乎發生者是也火位南而行於夏
007_0267_c_13L人則爲心而視於目主乎長養者是也
007_0267_c_14L金位西而行於秋在人則爲肺而聲於
007_0267_c_15L主乎成熟者是也水位北而行於冬
007_0267_c_16L在人則爲腎而聽於耳主乎藏者是也
007_0267_c_17L土位中而行於四季在人則爲脾而覺
007_0267_c_18L觸於身主乎載物者是也闕一於此
007_0267_c_19L則天無以爲天地無以爲地人無以爲
007_0267_c_20L故三才之始也須待五行生成之備
007_0267_c_21L而六合位焉形質具焉但世界之生成
007_0267_c_22L以劫人之生成以月者大小之等也
007_0267_c_23L外之分也小而爲內者人亦得而知之
007_0267_c_24L「藏」通「臟」{編}

007_0268_a_01L크고 밖이 되는 것은 부처님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각황께서 이를 밝혀 가르치시어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무릇 근신과 세계는 안팎으로 하나의 기이고, 이루어지고 부서짐도 하나의 법도이다. 하나의 기를 밝혀서 둘이 아닌 데로 쫓아가고, 이루어지고 부서짐을 알아서 생겨남이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근원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혼돈과 반고 등의 말 같은 것은 그저 억측으로 상상해서 말한 것일 뿐, 부처님께서 참된 밝음과 묘한 지혜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지 않다.
② 하도와 낙서의 수가 성립된 원리
묻겠다 : 그대가 세계를 잡아다 몸에 짝지었는데 오행이 생겨나고 이루어지는 수가 부절을 맞추듯이 잘 들어맞으니 진실로 은미한 뜻을 얻은 듯하다. 세상에서는 복희씨 이후로 도를 역易에 담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하도와 낙서의 수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하늘 1에서 물이 생겨나는 등 오행이 생겨나고 ‘이루는 수’에 대해서는 그 수가 그런 까닭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만일 이에 실오라기 하나까지 다 보고 밝게 드러내어 어두운 이들도 모두 밝게 알게 한다면 또한 남을 위한다는 뜻에 더욱 좋지 않겠는가?
답하겠다 : 역이란 연기緣起23)이니, 본성적인 깨달음에 근원을 둔 것으로서 우리의 가르침과 서로 겉과 속을 이룬다. 이 또한 근원으로 돌아가 법에 들어가는 시작이 되는 문이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역의 도는 태극에 근원을 두는데, 태극은 또한 무극에 근본을 두고 있다. 무극이란 맑고 고요하고 텅 비고 밝으면서 우주를 다 품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부처님의 법신이 이것이다.
무극 가운데에서 극에 이르러 영묘靈妙함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태극이라 이른다. 태극이란 하나의 참됨을 품고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영묘함이 일어나면 하나의 기가 왕성해지는데 이를 태초太初라 하고, 기가 움직여 도는 것을 태시太始라 하며, 영묘하고 순수하고 참된 것을 태소太素라 한다. 두 가지 기가 갈라져 맑고 흐린 것이 나뉜 것을 양의兩儀24)라 하고, 맑아서 위로 올라가는 기를 양이라 하며, 흐려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음이라 하는데, 바로 부처님의

007_0268_a_01L大而爲外者除佛而無能知者焉故我
007_0268_a_02L覺皇明此以敎之得以會夫根身之與
007_0268_a_03L器界內外一氣也成壞一䂓也明一
007_0268_a_04L氣以趨乎不二知成壞以返乎無生
007_0268_a_05L之謂還源之敎也若其混沌盤古等語
007_0268_a_06L但以臆度想象而言之非若佛之眞明
007_0268_a_07L妙智貫通三世以言之也

007_0268_a_08L
曰爾之攬世界以配于身而五行生成
007_0268_a_09L之數若合符契誠若得於微旨者也
007_0268_a_10L世自羲皇以來寓道於易以示人者
007_0268_a_11L但本於河圖之數且由天一生水等五
007_0268_a_12L行生成之數而未有明夫其數之所以
007_0268_a_13L而如於是也視縷發明使夫冥者
007_0268_a_14L皆明則不亦益善乎爲人之意歟

007_0268_a_15L
曰易也者緣起原乎性覺之中盖與吾
007_0268_a_16L敎相爲表裏是亦還源入法之初門
007_0268_a_17L可不明也夫易之爲道原於大極而太
007_0268_a_18L極又本乎無極無極者湛寂虛明
007_0268_a_19L括十虛之謂也即佛之法身是也極乎
007_0268_a_20L無極之中靈妙將發謂之太極太極
007_0268_a_21L含畜一眞充塞六合之謂也靈妙
007_0268_a_22L發矣一氣盛矣謂之太初氣之轉旋
007_0268_a_23L謂之1) [13] 靈妙純眞謂之太素二氣
007_0268_a_24L判而淸濁分謂之兩儀氣淸而上者
007_0268_a_25L謂之陽氣濁而下者謂之陰即佛之

007_0268_b_01L보신이 이것이다.
음과 양이 저마다 열두 가지로 나뉘어 스물네 가지의 기가 되고, 이 스물네 가지의 기가 서로 엉키고 뒤섞여서 오행이 그 가운데에서 생겨난다. 마치 한 알의 씨앗처럼 처음에는 뒤섞여서 나누어지지 않은 듯하지만 온갖 묘함이 그 속에 모두 들어 있는데, 바로 법신으로 태극의 체體이다.
싹이 틀 때에 뿌리는 아래에 서리고 싹은 위로 돋는데, 바로 보신으로 양의의 상象이다. 위와 아래에서 뿌리와 가지가 나뉘고, 한 가지 모습의 기맥氣脈이 엇갈리고 섞여서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생겨나는데, 바로 부처님의 화신으로 조화의 작용이다.
스물네 가지의 기는 입춘立春ㆍ우수雨水ㆍ경칩驚蟄ㆍ춘분春分ㆍ청명淸明ㆍ곡우穀雨ㆍ입하立夏ㆍ소만小滿ㆍ망종芒種ㆍ하지夏至ㆍ소서小暑ㆍ대서大暑ㆍ입추立秋ㆍ처서處暑ㆍ백로白露ㆍ추분秋分ㆍ한로寒露ㆍ상강霜降ㆍ입동立冬ㆍ소설小雪ㆍ대설大雪ㆍ동지冬至ㆍ소한小寒ㆍ대한大寒이다.25) 이 기들이 엉키고 뒤섞여서 변화하여 생겨난 것이 물ㆍ불ㆍ나무ㆍ쇠ㆍ흙이다. 물은 1의 기로 생겨나므로 “하늘의 1이 물을 낳는다.”라고 하고, 불은 2의 기로 생겨나므로 “땅의 2가 불을 낳는다.”라고 하며, 나아가 흙은 5의 기로 생겨나므로 “하늘의 5가 흙을 낳는다.”라고 하기에 이른다. 성수成數라고 하는 것은 오행이 5인 흙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1인 물이 5를 얻으면 6이 되고, 2인 불이 5를 얻으면 7이 되며, 나아가 5인 흙이 5를 얻으면 10이 되는 데에 이른다. 흙이 바른 위치를 얻어 두루 응하여 특정한 방위가 없으며, 한가운데 자리에 있으면서 엉키고 뒤섞이게 하여 변화를 만들어 내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물ㆍ불ㆍ나무ㆍ쇠ㆍ흙은 스물네 가지의 기를 따르지만, 다시 나무ㆍ불ㆍ흙ㆍ쇠ㆍ물을 따라 기를 움직여 그 모습을 이루고, 모습으로 기를 운용하니, 모습과 기가 서로 짜여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다함이 없는 묘함이 나타난다.
그 의문에 대한 징험은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스물네 가지의 기가 구궁九宮에서 엉키고 뒤섞여서 오행을 낳고 ‘이루는 수’가 손바닥을 가리키듯 또렷하니, 복희씨ㆍ문왕26)ㆍ주공ㆍ공자 네

007_0268_b_01L報身是也陰陽各分二六爲二十四氣
007_0268_b_02L四六錯綜而五行生乎其中矣如有一
007_0268_b_03L顆種子初若混沌未分然衆妙捴在裏
007_0268_b_04L即法身太極之體也及其萌動也
007_0268_b_05L根盤于下芽屮于上即報身兩儀之象
007_0268_b_06L上下根枝分㨢一狀氣脉錯綜
007_0268_b_07L枝葉花果生焉即佛之化身造化之用
007_0268_b_08L二十四氣曰立春雨水驚蟄春分淸
007_0268_b_09L明糓雨立夏小滿芒種夏至小暑大暑立
007_0268_b_10L秋處暑白露秋分寒露霜降立冬小雪大
007_0268_b_11L雪冬至小寒大寒以是氣而錯綜化生
007_0268_b_12L曰水火木金土水以一氣生故曰
007_0268_b_13L天一生水火以二氣生故曰地二生火
007_0268_b_14L以至土以五氣生故曰天五生土其言
007_0268_b_15L成數者五行無不因於五土而成也
007_0268_b_16L一水得五則六二火得五則七以至五
007_0268_b_17L得五則十也此其所以土得正位
007_0268_b_18L普應無方居中宮而錯綜造化者也
007_0268_b_19L火木金土從二十四氣還從木火土金
007_0268_b_20L水行氣以成其形形以運其氣形氣
007_0268_b_21L相織而造化無窮之妙著矣唯質其疑
007_0268_b_22L可於圖上見之

007_0268_b_23L
此以二十四氣錯綜於九宮而五行生
007_0268_b_24L成之數了如指掌足以見羲文周孔四

007_0268_c_01L성인27)이 발휘한 것이 다 같이 하나의 마음에서 나왔음을 충분히 볼 수 있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낳고 낳는 묘한 이치 또한 나타나 있다. 역을 공부하는 이들이 마땅히 잘 참구하여 하나의 기가 아직 일어나기 이전으로 마음을 돌려 한번 보면 곧 자기의 태극을 볼 것이고, 자기의 태극을 보면 곧 자기의 하늘과 땅을 볼 것이며, 자기의 하늘과 땅을 보면 곧 자기의 조화를 볼 것이고, 자기의 조화를 보면 곧 하늘ㆍ땅과 나란히 설 수 있을 것이다.
또 말하기를 “모든 기의 운행은 반드시 삼후三侯에서 극에 이른다.”라고 하는데, 삼후라는 것은 5일이다. 낙서의 수가 가로 세로 합해서 모두 15가 되는 것은 다 기의 수이다. 3은 삼재三才이고 5는 오행이다. 이것이 곧 하나의 기가 조화를 갖추는 까닭이다.
기가 엉키고 뒤섞이는 것으로 보면 ‘입’ 자 들어가는 네 절기28)가 간방(동북)ㆍ손방(동남)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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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_0268_c_14L聖人之發揮同出一心造化生生之妙
007_0268_c_15L而亦現矣學易者宜善叅詳向一氣
007_0268_c_16L未發已前回光一覽便見自己太極
007_0268_c_17L見自己太極則便見自己乾坤見自己
007_0268_c_18L乾坤則便見自己造化見自己造化
007_0268_c_19L則可以與天地參矣又曰凡氣之運行
007_0268_c_20L必極於三侯三侯者五日也洛書之
007_0268_c_21L縱橫十五者皆氣之數也三爲三
007_0268_c_22L而五爲五行此則一氣之所以具造
007_0268_c_23L化也以氣之錯綜觀之四立居於艮巽
007_0268_c_24L「太」作「大」{甲}

007_0269_a_01L건방(서북)ㆍ곤방(서남) 네 귀퉁이의 자리에 있으면서 네 가지 가운데 절기29)와 합한다. 중기中氣30)는 모두 네 가지 바른 자리31)에 있으며 네 가지 마지막 절기32)와 이어진다. 역에서는 말하기를 “3과 5가 변화하여 그 수를 뒤섞는다. 그 변화에 통하면 온 세상의 문文을 이루고, 그 수를 극하면 온 세상의 상象을 정한다.”33)라고 하였으니 이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봄과 여름에 엉키고 뒤섞이는 것으로 보기를 들자면, 처서와 백로의 기는 이离(남, 여름)와 손巽(동남, 봄)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巳(동남)와 오午(남)는 쇠의 기운이 두려워하여 꺼리는 곳이기 때문에34) 움츠러들어 피하고 가운데로 들어가서 태兌(서)로 되돌아온다. 이것이 이의 불이 홀로 허명하고, 음기와 양기에 펼치고 움츠러듦이 있는 까닭이다. 건乾은 하늘인데 서북쪽에 치우쳐 자리 잡고, 손은 바람인데 홀로 동남쪽에 덜 차 있다. 치우쳤기 때문에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어 해와 달과 별들이 그쪽으로 나아가고, 덜 차 있기 때문에 땅은 동남쪽이 가득 차지 못하여 온갖 물길이 그쪽으로 돌아간다.35) 건곤에 모자람과 넘침이 있는 까닭이 이것이다. 펼치고 움츠러듦과 모자라고 넘침이 있기 때문에 서로 밀치고 흔들어서 변화가 끝이 없는데, 오행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이루어지고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변화하면서도 정순하다. 조화의 기관이 갖추어지고 건곤의 큰 작용이 나타나니, 이에 의지하여 따르면 인륜의 도가 다하게 된다.
삼재는 하나의 도이다. 물이 하늘의 1에서 생겨나지만 세 기36)가 솥발처럼 모인 것은 감坎이 1을 밟는 방위로서 세 기를 갖추어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흙이 네 개의 마지막 절기37)를 모아 가운데 자리에 있으면서 처서가 주가 되는 것은 가운데가 5 흙의 자리로서 1을 얻어 5가 되기 때문이다.38) 감에는 동지가 있으므로 양기를 회복할 수 있고,39) 이离에는 하지가 있으므로 음기를 만날 수 있다.40) 이것이 음기와 양기가 서로 뿌리가 되는 까닭이다.
여름의 기가 감으로 가면 대서가 되고, 겨울의 기가 이离로 가면 대한이 된다. 이것이 음기와 양기가 서로 이기는 까닭이다. 비와 이슬이 함께 거처하여 태兌의 못이 되고, 바람과 쇠가 서로 흔들어서 진震의 우레가 된다.

007_0269_a_01L乾坤四隅之位而四仲之節氣合焉
007_0269_a_02L氣皆位於四正而四季之節氣連焉
007_0269_a_03L曰三五以變錯綜其數通其變遂成天
007_0269_a_04L下之文極其數遂㝎天下之象非斯之
007_0269_a_05L謂歟以春夏錯綜例之則處暑白露之
007_0269_a_06L宜趍乎离巽而巳午金氣之所畏忌
007_0269_a_07L縮而避之入于中而返乎兌此离
007_0269_a_08L火之獨虛明而陰陽之所以有舒縮也
007_0269_a_09L乾爲天而偏位於西北巽爲風而獨闕
007_0269_a_10L於東南惟偏故天傾於西北而日月星
007_0269_a_11L辰就焉惟闕故地不滿東南而百川水
007_0269_a_12L潦歸焉此乾坤之所以有欠嬴也惟其
007_0269_a_13L有舒縮欠嬴故互相推盪變化以無窮
007_0269_a_14L五行以之而生成萬物以之而化醇
007_0269_a_15L化之機關備矣乾坤之大用著矣由是
007_0269_a_16L以資焉而人倫之道盡矣三才一道也
007_0269_a_17L水生於天一而三氣鼎聚者坎爲履一
007_0269_a_18L之方盖備三而歸一也土鐘四季之節
007_0269_a_19L位於中宮而處暑主焉者中爲五土
007_0269_a_20L之位盖得一而爲五也坎有冬至故能
007_0269_a_21L復陽离有夏至故能姤陰此陰陽之所
007_0269_a_22L以互根也夏氣適坎而爲大暑冬氣適
007_0269_a_23L离而爲大寒此陰陽之所以相勝也
007_0269_a_24L露共居而爲兌澤風金相盪而爲震雷

007_0269_b_01L이것이 봄과 가을이 만물을 낳고 이루는 까닭이다.
진은 춘분인데 이离 3이 숨고 나타나고, 태는 추분인데 감 6이 차고 이지러진다. 이는 동쪽과 서쪽이 해와 달을 운행시키는 까닭이다.
망종은 오午(남, 여름)로서 인寅(동북동, 봄)에 합하고, 경칩은 묘卯(동, 봄)로서 신申(서남서, 가을)에 합한다.41) 진辰과 술戌과 축丑과 미未는 흙에 속하여 여덟 방위에서 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진이 신과 자子와 합하고, 술이 인과 오와 합하고, 축이 사巳와 유酉와 합하고, 미未가 해亥와 묘와 합한다. 이를 일컬어 셋이 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합이 모퉁이에 속하므로42) 하늘과 땅이 그릇이 되는 것이 견고하고 오행의 교감이 밀접하다.
간艮과 곤坤과 건乾의 세 모퉁이로 예를 들자면, 백로는 유酉(서, 가을)로서 마땅히 손(남동)을 따라야 하는데 이를 등지고 태(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사(남남동)와 유가 마땅히 합해야 하지만 합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또 신과 유가 다섯 가지 떨어짐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과 유는 인과 묘의 상대인데 오로지 떨어지는 것만 담당하여, 신과 유의 기가 합하는 것은 모두 인과 묘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다섯 가지 합함을 살펴 알 수 있다.43)
또 문왕의 팔괘를 하도와 낙서를 참고하여 곱씹어 보면 건ㆍ감ㆍ간ㆍ진은 양이 되고 손ㆍ이ㆍ곤ㆍ태는 음이 된다. 음은 씨줄이고 양은 날줄이다. 날줄은 곧바르고 오로지 순종하며, 씨줄은 굽었고 순종과 거역을 겸한다. 하도의 1과 6은 물이 북쪽에 있는 것이고, 3과 8은 나무가 동쪽에 있는 것이고, 2와 7은 불이 남쪽에 있는 것이고, 5와 10은 흙이 가운데 있는 것이고, 4와 9는 쇠가 서쪽에 있는 것이다. 이는 왼쪽으로 돌며 생수가 된다. 낙서의 4와 9는 굴러서 남쪽이 되고 2와 7은 돌아서 서쪽이 되니 이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성수가 되는 것이다. 음의 방위는 서로 바뀌고 양의 방위는 본디 그대로이다. 이것이 날줄은 오직 순종하고 곧바르며, 씨줄은 거역과 순종을 겸한다는 것이다.
또 물과 나무라는 사물은 하늘을 아버지로 삼고 땅을 어머니로 삼아 이치의 순종함을 얻었기 때문에 동북쪽에 있으면서 양이 되고, 불과 쇠라는 사물은 땅에서 생겨나고 하늘에 의해 이루어져 이치의 거역함을 얻었기 때문에 서남에 속하여 음이 된다.

007_0269_b_01L此春秋之所以生成萬物也震爲春分
007_0269_b_02L而离三隱現焉兌爲秋分而坎六盈虧
007_0269_b_03L此東西之所以運行日月也芒種爲
007_0269_b_04L午而合乎寅驚蟄爲卯而合乎申辰戌
007_0269_b_05L丑未屬土而無有不合於八方故辰合
007_0269_b_06L申子戌合寅1) [14] 丑合巳酉未合亥卯
007_0269_b_07L此之謂三合以合屬隅而乾坤之爲器
007_0269_b_08L固矣五行之交感密矣以艮坤乾三隅
007_0269_b_09L例之則白露爲酉而當從乎巽背之而
007_0269_b_10L歸兌故曰巳酉當合而不合又以申
007_0269_b_11L酉爲五離者此也申酉爲寅卯之對
007_0269_b_12L獨專乎離則申酉之合氣皆尋乎寅卯
007_0269_b_13L而五合審矣又以文王八卦叅於圖書
007_0269_b_14L而玩之則乾坎艮震爲陽巽离坤兌爲
007_0269_b_15L陰者緯也陽者經也經直而惟
007_0269_b_16L緯曲而兼順逆河圖之一六水在北
007_0269_b_17L三八木在東二七火居南五十土居中
007_0269_b_18L四九金居西此左旋而爲生數洛書之
007_0269_b_19L四九轉爲南二七旋爲西此右旋而爲
007_0269_b_20L成數陰方互換而陽方自若也此經唯
007_0269_b_21L順直而緯兼逆順者也且水木之爲物
007_0269_b_22L以天爲父以地爲母得理之順故
007_0269_b_23L居東北而爲陽火金之爲物也以地爲
007_0269_b_24L以天爲成得理之逆故屬西南而

007_0269_c_01L음과 양이 거역하고 순종하는 이치가 이와 같을 뿐이다.
또한 낮은 양이 되고 밤은 음이 되는 경우, 낮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를 다 해서 하루가 되고, 밤은 자시에 꺾여 반으로 나뉘어서 이틀에 걸치게 되어, 자시 이후는 순종이고 자시 이전은 거역인데, 거역과 순종이 서로 짜인 뒤에야 조화와 문명의 고운 빛깔이 드러난다. 이는 하도와 낙서가 날줄과 씨줄이 되어 조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대개 하도와 낙서가 하도와 낙서가 된 것은 기氣일 따름인데, 기라는 것은 움직여 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움직이지만 그 근원으로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것이 삼재의 도이다. 인의 나무가 우수이므로 진에 모였다가 감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이는 봄의 작용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의 불은 소만이므로 이离로 달려갔다가 진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이는 더운 여름의 작용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의 쇠는 처서이므로 유로 들어갔다가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이는 가을의 작용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해의 물은 소설이므로 감으로 흘러들었다가 태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이는 겨울의 작용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낳고 이루는 힘을 드러내고, 조화의 공을 나타내어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이 진실로 하늘과 땅의 조화가 지닌 오묘함에 크게 합함이 있음을 이에서 대략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이 『주역』의 도에 합하는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만일 하늘ㆍ땅과 그 덕을 합하고, 해ㆍ달과 그 밝음을 합하고, 네 철과 그 질서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하고 흉함을 합하여 세상에서 지극히 정미하고 지극히 신묘하게 되고자 한다면 이 가르침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네 철은 생각이 없으면서도 오히려 그 근본을 잊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은 만물 가운데 영명한 존재인데 버릴 수 있겠는가?
이른바 근원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이란 정情을 돌이켜 성性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은

007_0269_c_01L爲陰陰陽逆順之理如是而已亦如
007_0269_c_02L晝爲陽夜爲陰而晝則盡日之出沒爲
007_0269_c_03L一日夜則折於子半分居二日子以後
007_0269_c_04L子以前逆逆順相梭而後造化文
007_0269_c_05L明之彩著焉此圖書之爲經緯而爲造
007_0269_c_06L化之原也盖圖書之爲圖書氣而已
007_0269_c_07L氣者運動不息之謂也動而莫不還其
007_0269_c_08L三才之道也寅木爲雨水則宜叢
007_0269_c_09L乎震而歸乎坎此春行之所以返本也
007_0269_c_10L巳火爲小滿則宜犇乎离而歸乎震
007_0269_c_11L炎行之所以返本也申金爲處暑則宜
007_0269_c_12L入於酉而歸乎中此秋行之所以返本
007_0269_c_13L亥水爲小雪則宜注乎坎而歸乎兌
007_0269_c_14L此冬行之所以返本也惟其能返本故
007_0269_c_15L顯生成之力呈造化之功天地位焉
007_0269_c_16L萬物育焉於焉盖見還源之敎誠有
007_0269_c_17L大合乎乾坤造化之妙者矣佛之三身
007_0269_c_18L而合於易道者良有以也如欲與天地
007_0269_c_19L合其德日月合其明四時合其序
007_0269_c_20L神合其吉凶而爲至精至神於天下者
007_0269_c_21L捨是敎奚以哉四時無思而尙不忘其
007_0269_c_22L況人爲萬物之靈而可遺之乎所謂
007_0269_c_23L還源之敎者反情而入於性者也性者
007_0269_c_24L「卯」疑「午」{編}

007_0270_a_01L근본이고 정은 지말이다. 성이라는 근본은 지극히 텅 비어 끝이 없으나 체성이 항상 존재하며, 지극히 영명하여 다함이 없으나 묘한 작용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이 있다. 체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티끌 수44)만큼 많은 겁에 걸쳐 변하지 않고, 묘한 작용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으므로 조화를 운용하여 다함이 없다. 이것이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정이 지말인 것은 참됨에서 등 돌리고 흘러넘쳐 어지러이 흔들려 멈춤이 없으며, 대상을 끌어들여 집착하는 모습으로 삼으니 뒤섞여 흐려서 깨끗하지 않다. 어지러이 흔들려 멈춤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고 사라짐이 서로 이어지고, 뒤섞여 흐려서 깨끗하지 않으므로 대상에 대한 욕심이 번갈아 가려 덮는다. 대상에 대한 욕심의 감응으로는 고뇌가 이를 잇고, 생겨나고 사라짐의 감응으로는 나고 죽음이 이에 응한다. 이것이 지말인 까닭이다. 그러니 정으로써 가르침을 삼는 것은 윤회의 길이 아니겠는가? 성으로써 가르침을 삼는 것은 나고 죽음을 벗어나는 길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성에 대해서는 유교와 노장사상에서 또한 말하지 않음이 없지만 말한 바가 지극하지 못하다. 지극한 것은 불교이다. 아직 지극하지 못하여 이미 사이가 있으니 도가 이에 따라 멀고 가까움이 있다. 가까운 것은 귀와 눈으로 듣고 보는 것에 제한된 도이니 세간의 도이다. 먼 것은 삼세三世45)를 꿰뚫고 시방을 다하는 도이다. 노장사상에서 “곡신谷神은 죽지 않으며, 현빈玄牝은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46)라고 한 것은 그 성을 말함이다. “도라고 하는 것은 아리아리하고 아득하고 흐릿한데 그 가운데 정미精微한 것이 있다.”47)라고 한 것은 그 마음을 말함이다. “하나를 품어 기를 오롯하게 한다.”48)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49) “억지로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린다.”50)라고 한 것은 그 도를 말함이다. 유교에서 “하늘의 명령을 성이라 하니 온갖 차별적인 것들의 하나의 근본이다.”51)라고 한 것은 그 성을 말함이다. “텅 비고 영명하여 어둡지 않으니 온갖 이치를 갖추어 모든 사태에 대응한다.”52)라고 한 것은 그 마음을 말함이다.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약하니, 마음을 정미하고 단일하게 하여 그 가운데를 꽉 잡으라.”53)라고 한 것은 그 도를 말함이다. 두 기 사이에 있는 것이 오직 기인데 그 기를 해칠 수 있겠는가?

007_0270_a_01L本而情者末也性之爲本也至虛無極
007_0270_a_02L而體性常住至靈無竭而妙用恒沙
007_0270_a_03L體性常住故亘塵劫而不變妙用恒沙
007_0270_a_04L運造化而無窮斯其所以爲本也
007_0270_a_05L情之爲末也背眞流蕩而紛擾不停
007_0270_a_06L吸塵爲相而渾濁不淨紛擾不停故
007_0270_a_07L生滅相續渾濁不淨故物欲交蔽
007_0270_a_08L欲之感苦惱繼之生滅之感生死應
007_0270_a_09L斯其所以爲末也以情爲敎者
007_0270_a_10L輪廻之道乎以性爲敎者其出生死之
007_0270_a_11L道乎心與性儒老亦莫不言之而其
007_0270_a_12L所言未至也至之者佛也未至旣有間
007_0270_a_13L而道隨有遠近也近也者限耳目所見
007_0270_a_14L聞之道也世道也遠也者貫三世盡
007_0270_a_15L十方之道也老曰谷神不死以玄牝爲
007_0270_a_16L天地之根者謂其性也其曰道之爲物
007_0270_a_17L惟恍惟惚窈兮㝠兮其中有精者
007_0270_a_18L其心也其曰抱一專氣知止不殆
007_0270_a_19L爲而成絕聖棄智者謂其道也儒曰
007_0270_a_20L天命之謂性萬殊之一本者語其性也
007_0270_a_21L其曰虛靈不昧具衆理而應萬事者
007_0270_a_22L其心也其曰人心惟危道心惟微
007_0270_a_23L精惟一允執厥中者語其道也居二
007_0270_a_24L氣之間者惟氣耳可以暴其氣乎

007_0270_b_01L만물에서 영명한 것은 오직 마음인데 그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하나의 기를 오롯하게 하면 어떠한 삿됨도 이를 해칠 수 없고, 하나의 마음을 닦으면 어떠한 욕망도 이를 공격할 수 없다. 이것은 노장사상과 유교의 두 가르침이 몸과 마음을 급하게 하여 세상에서 오래도록 유지되는 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성이란 하늘의 명령으로서의 성일 뿐이어서 불교에서 말하는 완전한 큰 깨달음의 성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육체와 함께 생겨났다 사라지는 마음이어서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54)로서 청정한 마음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도란 성에 따르는 것일 뿐이어서55) 불교에서 말하는 나고 죽음에서 벗어나 윤회를 면하는 묘한 도가 아니다.
큰 깨달음의 성은 이미 앞에서 밝힌 것과 같다. 이른바 진여로서 청정한 마음이란 큰 깨달음의 성 위에 있는 묘하게 밝은 참된 지혜로서 법계 어디에나 있는데, 깨달음의 성과 똑같이 맑고 항상 고요하며 큰 작용은 장소의 제한이 없다. 진여라고 한 것은 거짓되지 않고 변하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고, 청정이라고 한 것은 여섯 가지 인식의 대상56)에 물들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다. 영가永嘉가 말한 “마음의 거울 밝아 비춤에 걸림이 없고, 툭 틔어 또렷하게 온 우주를 두루 꿰뚫으니, 온갖 사물들이 빽빽하게 그림자처럼 비치는 가운데, 한 알갱이 원만한 빛 안팎이 따로 없네.”57)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부처님께서 세로로 과거 현재 미래를 다하시고, 가로로 시방에 두루 계시며, 밝기는 해와 달을 꿰뚫어 지나고, 덕은 하늘과 땅보다 뛰어나며, 공은 조화를 뛰어넘고, 크기는 태허太虛58)를 벗어나서 삼계에 있는 사생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는 까닭이 모두 이를 얻어서일 따름인데, 세간에서 성현이라고 하는 이들 가운데 누가 이를 얻어서 어깨를 나란히 하겠는가?
그러므로 감택闞澤이 오나라의 주인 손권孫權에게 말하기를 “공자와 노자의 두 가르침은 하늘을 본받아 작용을 정하였으므로 감히 하늘을 어기지 못합니다. 여러 부처님께서 시설한 가르침은 뭇 하늘 중생들이 받들어 행하여 감히 부처님을 어기지 못합니다. 이로써 관찰해 보면 같은 수준에서 비교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59)라고 하였는데 이는 올곧은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세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 육체를 벗고 뒤섞여 아득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역량이 보통을 넘어서는 사람이라면 단계를 거치지 않고

007_0270_b_01L萬物之靈者惟心耳可以汨於其心乎
007_0270_b_02L專一氣而群邪莫能殄修一心而衆欲
007_0270_b_03L莫能攻此二敎之急於身心而爲天下
007_0270_b_04L萬世之道也然其所謂性天命之性耳
007_0270_b_05L非佛之謂圓滿大覺之性也其所謂心
007_0270_b_06L肉團生滅之心耳非佛之謂眞如淸淨
007_0270_b_07L之心也其所謂道率性之道耳非佛
007_0270_b_08L之謂脫生死免輪廻之妙道也大覺之
007_0270_b_09L已如前析所謂眞如淸淨之心者
007_0270_b_10L大覺性上妙明眞智周亘法界與覺性
007_0270_b_11L湛然常寂大用無方其曰眞如者
007_0270_b_12L不妄不變之謂也其曰淸淨者不染六
007_0270_b_13L塵之謂也永嘉所謂心鏡明鑑無礙
007_0270_b_14L然瑩徹周沙界萬像森羅影現中一顆
007_0270_b_15L圓光非內外者是也佛之所以竪窮三
007_0270_b_16L橫遍十方明透日月德勝乾坤
007_0270_b_17L超造化量越大虛而爲三界四生慈父
007_0270_b_18L盖得諸此而已其所謂世間聖賢者
007_0270_b_19L誰得而比肩哉故闞澤之對吳主孫權
007_0270_b_20L即曰孔老二敎法天制用不敢違
007_0270_b_21L諸佛設敎諸天奉行不敢違佛
007_0270_b_22L此觀之得非比對明矣此直言也
007_0270_b_23L敎之所謂出世者非謂蛻其形骸入於
007_0270_b_24L混茫之謂也如有過量之人不歷階梯

007_0270_c_01L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가는데, 꿈에서 깨어나는 듯하고 연꽃이 피는 듯하며 구름을 걷어 내고 해와 달을 보는 듯하여 새것도 아니고 옛것도 아니며, 당당하게 홀로 드러나 누가 될 만한 형기의 몸과 마음이 없고, 쳐서 없애야 할 나고 죽는 윤회가 없다. 이것이 세상을 벗어나는 도가 되는 까닭이다.
아아, 중생들이 같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 이 같은 지혜 덕상을 모두 갖추고 있건만, 몸뚱이에 갇혀서 등지고 달리며 돌아올 줄을 모른 채 보고 인식하는 것 속에 빠져 있으니, 나무가 희준犧樽60)으로 다듬어져 푸르고 누렇게 모습이 바뀌는 것 같고, 흙이 물레에 실려 크고 작게 그 형체가 바뀌는 것 같다. 또한 바닷물을 길어 여러 그릇에 담고 흙탕물을 섞어 흔들어 대는 것 같아서, 그 혼탁함이 극에 이르고 그 본성을 잃어버림이 심하다.
그 본성을 잃어버리고 혼탁함 속에 빠져 있으므로 업의 바다에 물결이 드높아 삼악도三惡途61)가 오래도록 들끓으며 윤회가 그치지 않아서 나고 죽음이 끝이 없으니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각황께서 그러한 모습을 차마 앉아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큰 자비와 서원의 힘으로 노사나불의 보배로운 옷을 벗고 석가의 해지고 더러운 옷을 입고서, 청하지 않아도 오는 벗이 되어 뭇 세간에 들어가서, 먼저 깨달은 이로서 미혹한 무리를 두루 열어 이끄시며, 갖가지 신통과 갖가지 지혜와 갖가지 위엄 있는 빛과 갖가지 방편과 갖가지 말씀과 갖가지 법문으로 원인과 결과를 설하시고, 죄와 복을 설하시고, 선악에 따른 보응을 설하시고, 천당과 지옥을 설하시고, 부처님 나라와 중생 세계를 설하시고, 방편의 가르침과 참된 가르침을 설하시고, 점점 나아가는 가르침과 한꺼번에 드러나는 가르침을 설하시어, 바로 보여 주시고, 교묘하게 보여 주시고, 홑으로 보여 주시고, 겹쳐서 보여 주셨는데, 모두 중생들이 헛된 것을 돌이켜 참된 세계로 돌아가서 깨달음이라는 묘하게 장엄한 영역에 곧바로 이르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 가르침은 어둑한 데62)에도 통하고, 하늘과 땅을 꿰뚫어 지나며, 널리 대천세계에 미쳐서 사람들이 귀의하여 따르는 것이 바람에 눕는 풀과 같은데, 온갖 마귀들이 원망하면서도

007_0270_c_01L便登佛地者如睡夢覺如蓮花開
007_0270_c_02L披雲見其日月非新非舊獨露堂堂
007_0270_c_03L無有形氣身心之足累亦無有生死輪
007_0270_c_04L廻之可討玆其所以爲出世之道也
007_0270_c_05L生靈之同出一源也具有如是智惠
007_0270_c_06L德相而區爲形質背馳不返陷於見
007_0270_c_07L見識識之中如木之杍犧樽靑黃變其
007_0270_c_08L若土之載陶鈞大小易其形又如
007_0270_c_09L挹海貯於衆器泥之混之攪之動之
007_0270_c_10L其渾濁也極矣其失性也甚矣由其失
007_0270_c_11L而溺於渾濁故業海波騰三途長
007_0270_c_12L輪廻不息而生死無窮得不爲其
007_0270_c_13L傷心乎故我覺皇不忍坐視其然
007_0270_c_14L大慈悲誓願力故脫舍那珎御之服
007_0270_c_15L釋迦弊垢之衣作不請友入諸世間
007_0270_c_16L普以先覺開導迷倫以種種神通
007_0270_c_17L種智惠種種威光種種方便種種言
007_0270_c_18L種種法門說因說果說罪說福
007_0270_c_19L善惡說報應說天堂說地獄說佛刹說
007_0270_c_20L世界說權說實說漸說頓直示之
007_0270_c_21L示之單示之複示之皆欲含靈返妄
007_0270_c_22L歸眞直至菩提妙莊嚴域故其爲敎也
007_0270_c_23L通幽通㝠透天透地廣及于大千
007_0270_c_24L人之向化若偃風之草有衆魔怨而不

007_0271_a_01L막고 가리지 못하는 것은 그 진실함 때문이다. 만일 진실하지 않다면 우선 하늘이 싫어한 지가 오래되었을 터인데, 어찌 그 가르침과 그 도가 끊임없이 천고의 세월에 이어지고, 두루 시방에 퍼져 있으며, 하늘 중생과 용과 신과 귀신들이 흠모하여 떠받들지 않는 이가 없고, 보살과 성현들이 서로 갈마들며 널리 교화하게 하였겠는가? 이로써 논하자면 하늘이 싫어하지 않음이 확실하다. 만일 싫어하지 않는다면 없애고자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하늘이 싫어하지 않고 없애고자 하지 않으니, 이른바 ‘하늘과 땅의 조화와 크게 합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늘이 싫어하지 않는데 사람이 싫어한다고 해서 하늘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하늘이 없애지 않는데 사람이 없애려 한다고 해서 꼭 그럴 수 있겠는가? 이길 수 없고 그럴 수 없는데도 억지로 하려 한다면 (사태를) 헤아릴 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유교에서 닦는 것은 하늘의 마음이고, 따르는 것은 하늘의 성품이다. 하늘에 거스르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면 하늘의 마음에 합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늘에 등 돌리고 성인을 욕한다면 하늘의 성품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성품, 하늘의 마음에 합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유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군자들이 진실로 바른 마음, 진실한 뜻으로써 생각하여 치우침에 빠지지 않는다면 우리 성인(부처님)을 모멸할 수 없다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될 것이다.
③ 불교에서 천지의 운행을 설명하는 것이 역상과 다른 이유
묻겠다 : 그대가 오행이 생겨나게 이루는 수를 분석하고 이십사절기가 엉키고 뒤섞이는 근원을 파헤친 것이 이미 저처럼 정미하여 내가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들었으니 가르침에 보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와 달의 운행과 차고 빔과 춥고 더움에 대한 주장이 역상曆象과 같지 않은데,63)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답하겠다 :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내리심에 자기를 밝히는 것을 귀하게 여기셨다. 자기는 이치이다. 자기의 하늘과 땅의 조화와 밖의 하늘과 땅의 조화가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으며, 현상이건 이치건 모두 참된 영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훤히 밝히는 것, 이것이 묘한 뜻이다. 그래서 이전부터 영명한 바탕이 있는 사람은 한 번 듣고서 천 가지를

007_0271_a_01L能壅蔽者以其誠也如其不誠則天
007_0271_a_02L且厭之久矣安能俾諸其敎其道綿亘
007_0271_a_03L千古周匝十方天龍神鬼無不欽崇
007_0271_a_04L菩薩賢聖遆相弘化軄此論之天而
007_0271_a_05L不厭信矣如其不厭其不欲去必矣
007_0271_a_06L其不厭而不欲去是所謂大合乎乾坤
007_0271_a_07L造化者也天不厭而人厭之其能勝乎
007_0271_a_08L天不去而人去之其可必乎以不勝不
007_0271_a_09L必而强之可謂知量乎且儒之所修者
007_0271_a_10L天心也所率者天性也忤天而行其
007_0271_a_11L可謂合其天心乎反天而謗其聖
007_0271_a_12L可謂率其天性乎旣不率合乎天性天
007_0271_a_13L則亦將何以爲儒者㦲世之君子
007_0271_a_14L苟以正心誠意思之而不溺於偏儻
007_0271_a_15L信知吾聖之不可侮也

007_0271_a_16L
曰子之析五行生成之數源於二十四
007_0271_a_17L氣之錯綜旣如彼其精矣余得聞於未
007_0271_a_18L可謂有補於敎矣佛氏之言日月
007_0271_a_19L運行盈虛寒暑之說不同於曆象其故
007_0271_a_20L何歟

007_0271_a_21L
曰佛之垂敎也貴明乎自己自己者
007_0271_a_22L理也洞明自己乾坤造化與外乾坤造
007_0271_a_23L無二無別若事若理咸歸乎實際
007_0271_a_24L此爲妙旨也是以宿有靈骨者一聞千

007_0271_b_01L깨달아 의심의 장애를 한꺼번에 잊게 된다. 가운데나 아래의 근기인 사람들은 손가락64)을 붙잡고 힘쓰니 옳다 그르다 따지는 일이 벌 떼처럼 일어난다.
부처님께서 이미 세계를 몸이라는 그릇에 비유하셨으니 세우신 모든 것들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없다. 경에서 “수미산은 땅에서 나온 부분과 땅속에 들어가 있는 부분의 양이 똑같이 8만 4천 유순으로 나뉘어 하늘과 땅이 된다.”라고 말한 것은, 사람의 허리 위와 허리 아래처럼 그 세력이 똑같이 나뉘어 위는 양이 되고 아래는 음이 되는 것이다.
수미산 꼭대기는 도리천인데 제석천이 그 안에 머물고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차례로 그 아래에 있는 것은, 사람의 머리뼈가 몸의 꼭대기가 되어 귀 밝고 눈 밝은 뭇 감각기관들이 얼굴에 모여 있는 것과 같다.
해와 달은 눈을 말한다. 네 대륙은 사방의 세계이다. 사람이 보는 것은 남쪽은 온전하지만 북쪽은 모자람이 있고 동쪽과 서쪽은 반으로 나뉘므로, 해와 달의 운행에서 동쪽 대륙을 비추는 것은 아침부터 오시까지이고 서쪽 대륙을 비추는 것은 오시부터 저녁까지이며 남쪽 대륙을 비추는 것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체이다. 북쪽 대륙은 밝은 빛이 미치지 않는다.
동쪽에서는 해 뜨는 시간을 아침으로 삼고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을 저녁으로 삼아서 낮의 뒷부분이 빠졌고, 서쪽은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을 아침으로 삼고 해가 지는 시간을 저녁으로 삼아서 낮의 앞부분이 모자라서, 방위가 치우치고 땅이 후미지며 햇빛이 온전하게 비추지 않는데,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세상에 응하여 나오지 않으신 까닭이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또 (해와 달이) 수미산을 둥글게 돈다는 말이 평상시에 보는 뜨고 지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여 의심하는데, 이는 또한 그 까닭을 모르는 것이다.
이른바 안으로는 눈이 되고 밖으로는 해와 달이 되는 것은 모두 기氣인데, 앞에서 말한 움직여 쉬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 하늘에 있으면 해와 달이 되어 세계를 둥그렇게 돌며, 사람에게 있으면 눈이 되어 또한 동그랗게 움직여 쉬지 않는데, 고양이의 눈동자가 때에 맞추어 빙 돌아 잠시도 쉬지 않는 것65)과 같다. 옛 시에서

007_0271_b_01L疑礙頓忘中下之機執指施功
007_0271_b_02L非蜂起佛旣以世界方之於身器
007_0271_b_03L凡所建立無不相若者經言須彌山
007_0271_b_04L出地入地其量均爲八萬四千由旬
007_0271_b_05L分爲天地者若人之腰上腰下其勢等
007_0271_b_06L上爲陽而下爲陰也須彌山頂爲忉
007_0271_b_07L利天帝釋主 [4] 其中而日月星辰次居
007_0271_b_08L其下者若人之頭顱爲形質之首
007_0271_b_09L聰明諸根會居面部也日月者眼目
007_0271_b_10L之謂也四洲者四方之世界也凡人
007_0271_b_11L之所視南全北闕而東西分其半故
007_0271_b_12L日月之行東洲之所照者自朝止於午
007_0271_b_13L西洲之所照者自午止於暮而南洲之
007_0271_b_14L照則全也若其北洲則光明不及也
007_0271_b_15L以日出爲朝日中爲暮而闕後日之分
007_0271_b_16L西以日中爲朝日沒爲暮而欠初日之
007_0271_b_17L方偏地僻光照不全此佛之所以
007_0271_b_18L不於此而應世也世人又以環遶須彌
007_0271_b_19L之語與平常所見出沒不同而疑之
007_0271_b_20L亦不知其所以然也夫所謂內爲眼目
007_0271_b_21L外爲日月者皆氣而已前所謂運動不
007_0271_b_22L息者是也在天爲日月而環遶於世界
007_0271_b_23L在人爲眼目而亦環轉不息且如㹨兒
007_0271_b_24L眼中之精隨時廻轉無暫休息古詩

007_0271_c_01L“고양이의 눈66) 안에 12시를 정하면, 자시ㆍ오시에는 늘어뜨린 바늘 같고 묘시ㆍ유시에는 동그랗고, 진시ㆍ술시ㆍ축시ㆍ미시에는 달걀 같고, 인시ㆍ신시ㆍ사시ㆍ해시에는 감씨 같네.”67)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또 고양이는 만물 가운데 하나의 미혹된 존재인데, 고양이가 그럴 수 있다면 다른 존재들이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다만 나머지 존재들은 보이지 않게 이동하지만 이것은 드러나게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또한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음기ㆍ양기와 오행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도가 말에게서 드러나고 낙서가 거북에게서 나타난 것을 통해 또한 볼 수 있다.
이미 만물에게 눈이 되니 아침에는 눈을 떠서 깨어나고 저녁에는 눈을 감고 자며, 자면 어둡고 깨면 밝은 것이 이치이다. 해와 달이 하늘에 있으면서 동쪽에서 떠오르면 밝고 서쪽으로 지면 어두운 것과 안팎으로 운행하는 것이 조금도 차이 나거나 어그러짐이 없으니 또한 어찌 의심하여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또 경에서 말한 수미산이라는 것은 세계를 포괄하여 말한 것이다. 남섬부주는 배이고 동쪽과 서쪽은 옆구리이니 가로로 세로로 말하는 것마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저 세로만 붙잡은 채 가로에는 어두워서 (해와 달이) 둥그렇게 돈다는 것을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것이 어찌 잘못이 아닐 수 있겠는가?
차고 비고 춥고 덥고 한 까닭은 음기와 양기가 서로 빼앗아서 해와 달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에 덜하고 더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수미산의 모습은 북쪽은 넓고 남쪽은 좁은데, 사람 얼굴의 모습이 이것이다. 이른바 빼앗는다는 것은 겨울의 기운이 북쪽에서 왕성해지면 해의 길이 남쪽으로 달아나기 때문에 해의 운행이 짧아져서 차가운 기운이 성하게 되는데, 대한의 기가 이离로 가니 양기가 그치는 것이다. 여름의 기운이 이离에서 왕성해지면 해의 길이 북으로 치달리기 때문에 해의 운행이 길어져서 더운 기운이 극에 이르는데, 대서의 기가 감坎으로 가니 음기가 숨는 것이다. 봄ㆍ가을의 기는 이를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
이른바 나아가고 물러남이라는 것은, 해는 양기의 정수이고 달은 음기의 정수인데,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달의 운행이 해에서 물러나므로, 점점 물러날수록 점점 차서 보름에 이르면 극에 이른다.

007_0271_c_01L [5] 兒眼裏㝎周天子午垂針卯酉圓
007_0271_c_02L辰戌丑未如雞卵寅申巳亥柿核然
007_0271_c_03L可證矣猫且萬物之一迷物耳猫而爲
007_0271_c_04L然則餘物豈不然耶但餘皆密移而爲
007_0271_c_05L此顯耳亦猶物之在天地無不具於陰
007_0271_c_06L陽五行而圖顯於馬書現於龜亦可
007_0271_c_07L見也旣萬物而爲眼目也朝則開眼而
007_0271_c_08L暮則合眼而寢寢而昧覺而明
007_0271_c_09L與日月之在天東昇而明西沒而
007_0271_c_10L內外運行無小差忒亦何疑恠之
007_0271_c_11L有哉又經所言須彌者括世界而言之
007_0271_c_12L南贍爲腹東西爲脇則橫論竪論
007_0271_c_13L無不可者徒執其竪而昧其橫以環遶
007_0271_c_14L爲誕者得非謬乎若其盈虛寒暑之
007_0271_c_15L故以陰陽之相奪日月之進退有損益
007_0271_c_16L而然也夫須彌之形北廣南俠人面
007_0271_c_17L之相是也所謂奪者冬氣自北而旺也
007_0271_c_18L日道犇南故日行短寒氣盛焉盖大
007_0271_c_19L寒之氣適离而陽氣休息也夏氣自离
007_0271_c_20L而旺也日道馳北故日行長暑氣極
007_0271_c_21L盖大暑之氣適坎而陰氣潜藏也
007_0271_c_22L春秋之氣推此而可知也所謂進退者
007_0271_c_23L日爲陽之精月爲陰之精自朔至望
007_0271_c_24L月行退於日故漸退而漸盈至望則極

007_0272_a_01L보름 뒤로 그믐까지는 달의 운행이 해에 가까워지므로, 점점 가까워질수록 점점 줄어들어 그믐에 이르면 다하게 된다. 얼음이 불에서 멀리 있으면 온전하고 가까이 있으면 녹아 버리는 것과 같으니, 바로 이 이치이다.
차고 비고 덜고 더하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존재하고 없어지는 이치는 한때도 그치거나 쉬지 않으니, 하늘의 도가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이 또한 부지런하지 않은가? 사람이 이에 어두우니 어리석음이 또한 심하다.
또 일식과 월식이 아수라가 가로막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세간의 역수의 법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의심하는데, 이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묘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것은 음기와 양기가 부딪히고 윽박질러서 서로 화합하며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수라는 위세가 사납고 겸손하지 않아 다투는 것을 뜻하는 이름이다. 부딪히고 윽박질러서 따르지 않는 것이 아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가령 세상에서 덕과 의가 종잡을 수가 없고 외설스러우며 부끄러움이 없는 이를 ‘사람의 얼굴을 한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추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해와 달에 일식과 월식이 있는 것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데, 아수라가 제석천과 권력을 다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부처님께서 보이신 것은 그 뜻이 은미하다. 이것이 이른바 저쪽(불교 이외의 가르침)은 그 드러난 자취를 연구하고 이쪽(불교)은 그 본성을 밝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④ 삼세의 인과응보
묻겠다 : 위에서 증명한 것은 믿을 만하다. 유교에서는 불교의 삼세인과와 죄와 복의 응보의 교설을 터무니없다고 여겨 믿지 않는데, 무슨 증거로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가?
답하겠다 : 삼세의 인과와 죄와 복에 응보가 있다는 것은 하늘의 도가 저절로 그러한 정해진 이치로서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하니, 이에 부처님께서 이를 밝혀 깨우쳐 주신 것일 뿐이다. 유교인들 또한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그저 그 말이 아직 지극하지 못할 뿐이다.
응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복과 징벌을 말한다. 죄와 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선과 악을 말한다. 이는 유교의 황극皇極68)의 조화에서도 분명하다. 다만

007_0272_a_01L自望後至晦月行近於日故漸近而
007_0272_a_02L漸虧至晦則盡矣且如氷之與火遠則
007_0272_a_03L近則融即其理也夫盈虛損益進退
007_0272_a_04L存亡之理無一時而廢息天道之示人
007_0272_a_05L不亦勤乎人而昧此愚亦甚矣又以日
007_0272_a_06L月蝕爲脩羅之所障者不合世間歷數
007_0272_a_07L之法而疑之是亦不知佛敎之妙旨者
007_0272_a_08L且日月之爲蝕也陰陽激薄不相和
007_0272_a_09L順而然也脩羅者威猛不遜鬪諍之名
007_0272_a_10L激薄不順者不謂之脩羅而謂之誰
007_0272_a_11L如世之不測德義而猥▼(犭+枼)無恥者
007_0272_a_12L之人面之畜不其醜歟又況日月之有
007_0272_a_13L君弱臣强之致然其不類乎脩羅之
007_0272_a_14L與帝釋爭權耶佛之所示其旨微矣
007_0272_a_15L不此之所謂彼攻其迹而此明其性者也

007_0272_a_16L
曰上之所證則信矣儒以佛敎三世因
007_0272_a_17L果罪福報應之說爲誕而不信何證而
007_0272_a_18L知其然也

007_0272_a_19L
曰三世之爲因果罪福之有報應是乃
007_0272_a_20L天道自然之㝎理皎若靑天白日
007_0272_a_21L人自不察佛迺明而諭之耳儒者亦
007_0272_a_22L豈不言乎但言之有未至也報應者
007_0272_a_23L福極 [6] 之謂也罪福者何善惡之謂
007_0272_a_24L此則明乎儒氏之皇極造化矣

007_0272_b_01L유교의 말은 삼세에 미치지 못하는데, 아직 지극하지 못한 까닭이 이것이다.
만일 정신이 한 생애에만 그치고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면 단견斷見69)이다. 이는 낳고 낳는 이치에 어두운 것이다. 사람은 항상 사람이고 축생은 항상 축생이라고 한다면 상견常見70)이다. 이는 음양으로 변화하는 이치에 어두운 것이다. 단견과 상견, 이 두 견해는 부처님께서 꾸짖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삼세인과의 가르침으로 세간의 사람들을 열어 깨우쳐 주셨는데, 크고 작은 사물의 이치가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삼세라고 하는 것은 낮과 밤의 도리이다. 낮이 반쯤 되어 음기가 이미 정오에 싹트지만 아직 밤은 오지 않은 세 시진時辰,71) 이것을 일러 인因이라 한다. 어두워지고 나면 음기의 과果가 이른다. 밤이 반쯤 되어 양기가 이미 자정에 싹트지만 아직 낮은 되지 않은 세 시진,72) 이것을 일러 인이라 한다. 날이 밝고 나면 양기의 과가 이른다. 이렇듯 음양과 낮밤이 인과를 벗어나지 못하니, 그 가운데 있는 사물들이 어찌 홀로 인과가 없겠는가? 음양과 낮밤이 끝없이 오고 가게 하는 것은 원기元氣가 주인이다. 삼세의 만물이 끊임없이 낳고 낳게 하는 것은 정신이 주인이다. 정신이 오음五陰73)에 깃들이는 것은 사람이 집에 깃들이는 것과 같아서 오래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어찌 의심이 있겠는가? 또한 양호羊祜가 일찍이 이씨의 아들이었고,74) 태백太白이 뒤에 공보功輔의 몸이 되었으니,75) 이 또한 증험할 수 있다.
이른바 인과라고 하는 것은 콩을 심으면 콩을 얻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봄에 한 알의 곡식을 심으면 가을에 만 알의 곡식을 얻는다.”라고 하는데, 사람이 살면서 선하거나 악한 일을 하면 과보가 이처럼 되돌아온다. 또 “전생의 원인을 알고 싶으면 이생에서 받은 것이 그것이고, 내생의 과보를 알고 싶으면 이생에서 짓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가령 백천 겁이 지나도 지은 업은 사라지지 않아서, 인연이 만날 때에 과보를 다시 자기가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007_0272_b_01L儒者之言不及乎三世此其所以未至
007_0272_b_02L若言精神止一生而殄滅者斷見
007_0272_b_03L是昧生生之理也人恒爲人畜恒
007_0272_b_04L爲畜者常見也是昧陰陽變易之理也
007_0272_b_05L斷常二見佛之所訶也佛以三世因果
007_0272_b_06L之說開諭世間而巨細事物之理
007_0272_b_07L不皆然所謂三世者晝夜之道也
007_0272_b_08L之將半也陰氣已萌于午中然夜猶未
007_0272_b_09L至者三時是之謂因也旣昏則陰之果
007_0272_b_10L至矣夜之將半也陽氣已萌于子中
007_0272_b_11L然晝猶未至者三時是之謂因也旣曉
007_0272_b_12L則陽之果至矣且陰陽晝夜而不出乎
007_0272_b_13L因果則中而爲物者果獨無之乎使
007_0272_b_14L陰陽晝夜而徃復無窮者元氣爲之主
007_0272_b_15L使三世萬物而生生不絶者精神
007_0272_b_16L爲之主也精神之處五陰猶人之處屋
007_0272_b_17L宅耳棄故趣新何疑之有哉且如羊
007_0272_b_18L [7] 曾爲李氏之子太白後爲功輔之身
007_0272_b_19L斯亦可證矣所謂因果者種菽得菽
007_0272_b_20L種麥得麥之謂也故曰春種一粒粟
007_0272_b_21L收萬顆子人生爲善惡果報還如此
007_0272_b_22L又曰欲知前世因今生受者是欲知未
007_0272_b_23L來果今生作者是又曰假使百千劫
007_0272_b_24L所作業不亡因緣會遇時果報還自受

007_0272_c_01L이는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보이실 때에 인과를 먼저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이, 귀한 이, 영화로운 이, 부유한 이는 전생에 열심히 살았음을 다행스럽게 여겨 더욱 닦는 데로 나아가고, 가난한 이, 병든 이, 낮은 이, 괴로운 이는 전생의 잘못을 뉘우치고 날마다 선으로 옮아가서 원망하는 마음을 그치고 멋대로 악을 행하는 마음을 없애는데, 이것이 백성들이 변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유교에서 이를 터무니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이치를 자세히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황극의 도리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세상의 일로써 이를 징험해 보겠다. 세상에서 잘 다스려진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삼대인데, 삼대의 조짐은 당요唐堯76) 우순虞舜77) 임금 때 일어났는데, 이는 이른바 원인이다. 삼대는 하와 상과 주이고, 삼대의 임금은 우禹임금78)과 탕왕湯王79)과 문왕ㆍ무왕80)이다. 탕왕의 선조는 설契81)이고, 문왕과 무왕의 선조는 후직后稷82)인데 모두 우임금, 익益,83) 고요皐陶84)와 더불어 요임금과 순임금에게 신하가 되어 이 백성들에게 덕을 떨쳤다. 그들이 직분에 충실한 것은 끝과 시작이 같지 않지만 공을 이룬 일의 효과는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다. 일이란 드러난 자취이고 효과는 과보이다. 자취가 그 시대에 이미 월등하였음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지만 과보는 그 뒤에 오는 것이니 끝은 예측할 수 없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세상을 다스림에 사방을 보는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말을 듣는 귀를 밝게 하며, 세상에 어질고 뛰어난 이들을 등용하여 그 재능을 헤아리고 그 덕을 살펴, 저마다 일을 맡겨서 세상의 일을 다스려 이루게 하였다. 우임금에게 “가서 삼가라.(徃欽)”라고 한 것85)은 홍수의 재난을 다스리게 한 것이고, 익이 불을 관장하게 한 것은 짐승과 뱀 등의 해로움을 쫓아내게 한 것이고, 고요에게 명하여 사사士師로 삼은 것은 형벌을 주관하게 한 것이고, 설에게 명하여 사도로 삼은 것은 인륜으로써 가르치게 한 것이고, 후직에게 책무를 맡긴 것은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다. 기夔86)의 전악典樂과 수倕87)의 공工과 희화羲和88)가 해와 달과 별들을 본뜬 것이 하나같이 모두 성인이 다스리던 시대에 들어맞으니, 모두 현명한 보필자로서 한 시대에 같은 반열에 서서 세상을 같이 근심하였다.

007_0272_c_01L是佛之示敎先乎因果也故尊者貴者
007_0272_c_02L榮者富者自幸其前烈而益進乎修
007_0272_c_03L貧者病者賤者苦者自悔其前非而日
007_0272_c_04L遷乎善息尤怨之心滅縱惡之情
007_0272_c_05L民之所以於變也儒之以是爲誕者
007_0272_c_06L惟不詳其佛理而不知皇極之道者矣
007_0272_c_07L請以世事質之世之稱善治者三代也
007_0272_c_08L而三代之兆起於唐虞之際是其所謂
007_0272_c_09L因也三代者夏也商也周也三代之
007_0272_c_10L君者禹也湯也文武也湯之祖曰契
007_0272_c_11L文武之祖曰后稷皆與禹益臯陶爲臣
007_0272_c_12L於堯舜而振德於斯民其勤於職分
007_0272_c_13L則末始不同而功業之效則末始不異
007_0272_c_14L業者迹而效者報也迹過於當時
007_0272_c_15L則人所共知而報來於其後則末者不
007_0272_c_16L測也盖堯舜之治天下也明四目達四
007_0272_c_17L擧天下之賢俊量其才能審其德
007_0272_c_18L各受其務以化成天下使禹徃欽
007_0272_c_19L治洪水之災也使益掌火者驅禽
007_0272_c_20L虵之害也命臯陶爲士師則主於刑罰
007_0272_c_21L命契爲司徒則敎以人倫責后稷者
007_0272_c_22L稼穡之功也若蘷之典樂倕之工
007_0272_c_23L和之象日月星辰一皆盡節於聖世
007_0272_c_24L是賢輔也同列一世也共憂天下也

007_0273_a_01L그러나 그 효과는 꺾인 듯 버려진 듯 죽은 듯 막힌 것도 있고, 젖은 듯 큰 듯 나아가듯 이룬 것도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맡은 임무에 무겁고 가벼움이 있고 한 일에 좋고 나쁨이 있는데, 어둑어둑한 가운데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에 세상의 급박한 어려움과 위기를 해결하고 백성들에게 만세에 걸친 이익을 베푼 것은 우임금의 공이 최고였다. 명교明敎는 성현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니, 설의 공이 그다음이었다. 심고 거두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니 후직의 공이 다시 그다음이었다. 이는 덕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을 집행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도끼이고, 산림과 천택川澤을 관리하는 이가 필요한 것은 활과 화살이다. 이는 위세라고 할 수 있으나 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위세와 덕에 대해 백성들이 사랑하거나 두려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두려워하면 달아나고 사랑하면 좇아오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이다. 백성들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다. 만승천자의 존귀함과 온 세상의 부유함과 억조의 신하와 백성들을 삼대의 임금들에게는 주지만 익과 고요에게는 줄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니 덕을 닦은 과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유교에서도 또한 “선조 때 일찍이 백성들에게 공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과보를 받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른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공于公이 문을 높이고89) 왕씨가 마당에 회화나무를 심으니90) 뒤에 반드시 취한 바가 있어서 신표를 맞추듯 분명하게 들어맞았는데, 이는 또한 어찌 된 일인가?
맹자가 말하기를 활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하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하고, 방패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하며, 무당과 관 짜는 사람 또한 그러하므로 기술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일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막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밝고 밝은 것이 위에 있으면서 사람에게 있는 선과 악에 대해 화와 복으로 호응하는데, 아래로 어리석은 이들의 작은 생각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빠뜨리거나 새는 것이 없어서, 마치 진秦나라의 거울91)을 마주 보고 예쁘고 미운 것을 변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만 연업緣業이 무르익는 것이 늦어서 응보가 오는 것은 시간의 차이가 있게 된다.

007_0273_a_01L然及其效也有摧如棄如死如而沮之
007_0273_a_02L有濡如賁如晉如而翼之者其故何
007_0273_a_03L得非軄任之有重輕行業之有臧否
007_0273_a_04L而㝠㝠之中有不可欺者而然歟當是
007_0273_a_05L時也救天下倉卒之艱危惠生民萬世
007_0273_a_06L之利澤者禹之功極矣名敎者聖賢
007_0273_a_07L之所重契之功次矣稼穡者生民之
007_0273_a_08L本原則后稷之功又其次矣是則謂
007_0273_a_09L之德也刑之所用者鈇鉞虞之所用
007_0273_a_10L弓矢是則謂之威而不可謂之德也
007_0273_a_11L威德之間生靈之愛懼如何懼之則走
007_0273_a_12L愛之則趨民之心也民之心即天心
007_0273_a_13L玆其以萬乘之尊四海之富億兆
007_0273_a_14L之臣民付之三代之君而益與臯陶
007_0273_a_15L所不能與也修德之報可謂無乎
007_0273_a_16L者亦曰先世甞有功德於民故報之如
007_0273_a_17L此直言也不然則于公之崇閥閱
007_0273_a_18L王氏之植庭槐取必於後若合符契
007_0273_a_19L此又何歟孟子曰矢人猶恐不傷人
007_0273_a_20L凾人猶恐傷人巫匠亦然故術不可不
007_0273_a_21L此杜漸之言也且昭昭之在上也
007_0273_a_22L在人之善惡應之以禍福下至愚夫念
007_0273_a_23L慮之微無小遺漏如對秦鏡辨妍蚩
007_0273_a_24L但遲其緣業之熟報應之來至於隔

007_0273_b_01L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살피지 않고서, 오늘 하나의 덕을 닦고 하나의 선을 행하였는데 현생의 과보가 아직 없으면, 곧 이를 들어 말하면서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믿지 않으며, 금세 토라져서 도리어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면서 선한 것을 버리고 악한 것을 멋대로 행하니, 어찌 함께 지극한 덕의 문에 오를 수 있겠는가?
무릇 응보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멀고 가까움이 같지 않은데, 가깝게는 몇 시간이나 며칠 사이에 있기도 하고, 멀게는 티끌 수처럼 오랜 겁이 지난 뒤로 미루어지기도 한다. 이는 행위에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고 원인에 느슨하고 급함의 차이가 있어서, 이에 응하는 것이 저마다 그 종류에 따르기 때문이다.
예의와 겸양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면 다른 사람도 예로써 대하고, 나쁜 말로써 다른 사람을 욕하면 다른 사람 또한 욕하는데, 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과응보이다. 옷을 입으면 따뜻하고 밥을 먹으면 배부르며, 거꾸로 하면 배고프고 추운데, 이는 하루의 인과응보이다. 봄에 밭 갈아 가을에 거두어들이며, 여름에 뽕잎으로 누에를 쳐서 겨울에 옷을 짜는데, 이는 한 해에 할 일의 인과응보이다. 오늘 심어서 내일 거두기를 바란다면 그럴 수 있겠는가? 나무가 우거진 다음에 그늘을 드리우고, 열매가 맺힌 다음에 맛볼 수 있는데, 이는 여러 해에 계속 이어지는 인과응보이다. 조상들이 닦고 자손들이 받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로부터 나아가 보면 끝없는 먼 겁이 지난 뒤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이 이에 어두워서 미혹됨 또한 지극하다.
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마치 네 철과 같다. 되풀이해서 나오고 사라지는 것은 해와 달과 같다. 가령 『역易』에서 음기와 양기를 논할 때 양기와 음기라고 하지 않고 음기와 양기라고 하는 것은 음기가 되고 난 뒤에 되돌아 변하여 양기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귀라고 하지 않고 귀신이라고 하는 것은 굽힌 뒤에 다시 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음기와 양기가 만나고 회복되는 필연적인 이치로서 두 기 사이에 가득 찬 것 또한 모두 그러하다.
또 조상의 정신이 저곳에서 사라졌다가 이곳에서 나오고, 앞에는 빠뜨렸다가 뒤에는 받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물며 사람이 가족이 되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모이고 은혜로 서로 맺어져

007_0273_b_01L而人自不察今其修一德行一善
007_0273_b_02L未有現報即以說者爲誕而不信
007_0273_b_03L悻然反悔其所爲善者棄而惡者肆焉
007_0273_b_04L烏可與登至德之門乎夫報應反身
007_0273_b_05L近之不齊近在乎時日之間遠推乎塵
007_0273_b_06L劫之外者是則業有大小之不等因有
007_0273_b_07L緩急之有殊而應之各從其類也以禮
007_0273_b_08L讓從人則人亦禮之以惡口罵人
007_0273_b_09L人亦罵之此目擊之因果也衣則溫食
007_0273_b_10L則飽反是則飢且寒此一日之因果也
007_0273_b_11L春耕而秋收夏桑而冬襦此歲功之因
007_0273_b_12L果也今日而蒔之明日而穫之其可
007_0273_b_13L得乎樹茂而後蔭之果結而後嘗之
007_0273_b_14L此繼世之因果也祖宗而修之子孫而
007_0273_b_15L受之不亦宜乎由是而徃無窮遠劫
007_0273_b_16L之外莫不皆然人而昧之惑亦至矣
007_0273_b_17L且生老病死猶夫四時也循環出沒
007_0273_b_18L猶夫日月也如易之論陰陽不曰陽陰
007_0273_b_19L而曰陰陽者言旣陰而旋變爲陽也
007_0273_b_20L曰神鬼而曰鬼神者言旣屈而復致乎
007_0273_b_21L伸也此迺陰陽姤復必然之理盈乎
007_0273_b_22L二氣之間者皆然也抑又安知祖宗精
007_0273_b_23L沒於彼而出此遺於前而受於後哉
007_0273_b_24L矧人之爲族也愛以相聚恩以相結

007_0273_c_01L여섯 부류를 거치면서도 떠나지 않고, 티끌 수만큼 많은 겁을 지나면서도 풀어지지 않음이 분명하다면 그 정신이 올 때 어찌 자기의 골육을 버리고 다른 성에게 가겠는가? 그러므로 자손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덕 닦는 일을 앞세워야 하고, 자신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또한 덕 닦는 일을 급하게 해야 한다.
덕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우大禹와 직稷과 설契이 한 것이 그것으로, 유교의 인仁과 서恕이고, 불교의 대비大悲이다. 사람들에게 이로움과 은택을 베풀고 세상의 급하고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
그러나 하나라의 복은 걸왕桀王에게서 쪼개지고, 은나라의 복은 주왕紂王에게서 그쳤다. 이는 화와 복이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 하늘의 운수가 그렇게 시킨 것인가? 상을 받을 이가 뒤에 있고 천명을 내린 지가 이미 오래되니, 하늘의 뜻에 준거하여 헤아리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라가 400년 동안 왕 노릇을 하였고, 은나라가 600년 동안 왕 노릇을 하였으며, 주나라가 세상을 가진 것은 800년 남짓이니, 이 또한 먼저 온 것은 촉박하고 뒤에 온 것은 늘어나는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빨리 과보를 얻어서 일찍 영화롭고자 하는 이는 이를 경계 삼을 만하고, 나아갈 줄만 알고 겸손할 줄을 모르는 이는 이를 거울로 삼을 만하다.
또 선을 행한 과보를 이미 자기에게서 찾았다면 악을 행한 과보가 어찌 다른 사람에게 가겠는가? 인과응보가 서로 잘못될 수 없는 까닭이 이것이다.
『역』에서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고, 선하지 않음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92)라고 하였고, 또 “선이 쌓이지 않으면 이름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고, 악이 쌓이지 않으면 몸을 파멸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소인들은 작은 선이 이롭지 않다고 여겨서 하지 않으며, 작은 악이 잘못될 것이 없다고 여겨서 없애지 않으나, 악이 쌓이면 가릴 수 없고 죄가 커지면 풀 수 없다.”93)라고 하였다. 진실되도다, 이 말이여!
선이 쌓이면 크게는 성인이 되고,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며, 다음으로는 현인이 되고 큰 재상이 되며, 또 그다음으로는 또한 부유하고 귀하다는 아름다운 명성을 잃지 않아서 온 세상 사람과 후세의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함께 칭송하니

007_0273_c_01L經六趣而不離歷塵劫而不觧固也則
007_0273_c_02L其精神之來豈捨自己之骨肉而適于
007_0273_c_03L他姓哉故欲厚子孫者必先乎修德
007_0273_c_04L欲厚自己者亦急乎修德修德者何
007_0273_c_05L若大禹稷契之所爲者是也儒之仁恕
007_0273_c_06L佛之大悲也凡有利澤於人而救
007_0273_c_07L物之急難者皆是也然夏之祚析於桀
007_0273_c_08L殷之祚弭於紂此則禍福之不常歟
007_0273_c_09L運之使然歟豈非當賞者在後錫命者
007_0273_c_10L已久而天意有準量歟夏之王四百
007_0273_c_11L殷之王六百周之有天下也八百餘年
007_0273_c_12L亦豈非先者促而後者延乎欲速報而
007_0273_c_13L早榮者于斯乎可戒矣知晉而不知
007_0273_c_14L謙者于斯乎可鑑矣且爲善之報
007_0273_c_15L尋乎自己則爲惡之報豈適于他人哉
007_0273_c_16L玆其所以因果報應之不可以相賺也
007_0273_c_17L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積不善之家
007_0273_c_18L必有餘殃又曰善不積不足以成名
007_0273_c_19L惡不積不足以滅身小人以小善爲
007_0273_c_20L無益而不爲也以小惡爲無傷而不去
007_0273_c_21L惡積而不可掩罪大而不可解
007_0273_c_22L哉是言也夫善之積也大則爲聖
007_0273_c_23L天下之君次則爲賢爲巨相又其次則
007_0273_c_24L亦不失富貴之令名天下後世共稱其

007_0274_a_01L경사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악이 쌓여서 가릴 수 없게 되면 반드시 감옥에 갇혀서 크게는 뭇 저잣거리에 버려지고94) 작게는 먼 곳으로 던져져서95) 온 세상 사람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함께 원망하니 재앙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유교에서 말하는 현세의 인과응보이다. 이를 미루어 끝없는 데까지 이르니 이치에 잘못이 없어서 네 철이 있는 것처럼 진실한데, 부처님께서 보이신 가르침이 어찌 터무니없는 것이겠는가?
⑤ 악에 대한 인과응보
묻겠다 : 위에서 밝힌 것은 선을 쌓았을 때의 인과일 뿐 악을 행하였을 때의 응보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않았는데, 이어서 밝혀 주어 뒤에 오는 어리석은 선비들을 깨우쳐 주면 교리가 더욱 자세하게 갖추어지지 않겠는가?
답하겠다 : 사려 깊도다, 질문이여! 내가 또한 말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들추니 내 마음을 잘 헤아렸다고 할 만하다.
선은 덕을 쌓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악은 음적陰賊96)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음적이란 무엇인가? 귀역鬼蜮97)을 일컫는다. 귀역이 사람은 해치지만 으슥한 곳에 숨어 있어서 사람들이 또렷하게 알지 못한다. 헐뜯는 것 또한 비슷하기 때문에 음적이라고 말한다.
음적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승냥이나 호랑이보다 더 사납고 뱀이나 도마뱀보다 더 끔찍하고 칼이나 도끼보다 더 날카롭고 짐새의 독보다 더 흉악하다. 대개 승냥이나 호랑이의 사나움은 함정을 파서 대비할 수 있고 뱀이나 도마뱀의 끔찍함은 막대기나 회초리로 다스릴 수 있고 칼이나 도끼가 비록 날카로워도 갑옷과 투구로 막을 수 있고 짐새의 독이 비록 흉악하여도 조심하면 피할 수 있지만 음적의 해침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 네 가지의 흉악하고 사나움보다 더 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냥이나 호랑이의 해침은 산이나 숲에 있지만 음적의 해침은 노닐며 즐기는 데서 나오고, 뱀이나 도마뱀의 해침은 풀밭이나 습지에 있지만 음적의 해침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데서 일어나고, 칼이나 도끼의 해침은 자기 몸에서 그치지만 음적의 해침은 가족에게 미치고, 짐새의 독의 해침은 오로지 몸에만 있지만 음적의 해침은 그 체體98)를 해치니

007_0274_a_01L可不謂之有慶乎惡積而不掩也
007_0274_a_02L必陷於囹圄大則棄諸市小則投遠方
007_0274_a_03L天下後世共怨之可不謂之有殃乎
007_0274_a_04L此則儒者現世之因果也推此以至於
007_0274_a_05L無窮而理之不謬也信若四時佛之
007_0274_a_06L示敎其可誕乎

007_0274_a_07L
曰上之所明是徒積善之因果而未有
007_0274_a_08L明夫爲惡之報應續而明之以曉後來
007_0274_a_09L之蒙士不於敎理尤詳備歟

007_0274_a_10L
曰審哉問也余亦欲言而未求其端
007_0274_a_11L子發之可謂忖度乎余心矣夫善莫善
007_0274_a_12L乎積德惡莫惡乎陰賊陰賊者何
007_0274_a_13L蜮之謂也鬼蜮之害人而在於幽隱
007_0274_a_14L而人不顯知讒謗者似之故謂之陰賊
007_0274_a_15L夫陰賊之害人也暴於豺虎慘於虵蝎
007_0274_a_16L利於刀斧凶於鴆毒盖豺虎之暴
007_0274_a_17L阱以備之虵蝎之慘杖椘以制之
007_0274_a_18L斧雖利1) [15] 以防之鴆毒雖凶謹愼
007_0274_a_19L以避之陰賊之害無地而可逃得非
007_0274_a_20L甚於四者之凶暴乎豺虎之害在於山
007_0274_a_21L而陰賊之害出於遊宴虵蝎之害
007_0274_a_22L在於草澤而陰賊之害起於談笑
007_0274_a_23L斧之害止其身而陰賊之害及於族
007_0274_a_24L鴆毒之害全在其身而陰賊之害

007_0274_b_01L네 가지의 재앙보다 더 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부터 지금까지 음적에게 해침을 당한 선량한 이들을 이루 다 셀 수가 없는데, 온 세상 사람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였다. 해치는 이는 이를 다행으로 여기고 함정에 빠진 이는 이를 괴로워하며, 괴로워하는 이는 그 삶을 해치고 다행으로 여기는 이는 그 세력을 더 성대하게 한다. 그 세력을 성대하게 하고 난 뒤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듯이 음적을 뛰어난 술법으로 삼아서 쉴 줄을 모른다. 아아, 이는 진실로 “너에게 나간 것이 너에게 돌아오는 것이다.”99)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니, 그 후환을 어찌할 것인가?
또 뱀이나 호랑이의 해로움은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미워하여 그들을 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만, 음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도리어 뱀이나 호랑이와는 같지 않으니,100)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이 또한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이다. 예컨대 당나라의 이임보李林甫101)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때 괴단槐壇에서 한 도사를 만났는데, 경계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이름은 이미 신선의 명단에 올라 있으니, 신선이 되어 대낮에 하늘로 올라가지102) 않는다. 또한 반드시 20년 동안 태평성대의 재상이 될 것이다. 뒷날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 절실하게 내 말을 기억하여 함부로 음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자, 이임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귀하게 된 뒤에는 이를 다시 기억하지 못한 채 오로지 총애만 믿고 해치는 일을 많이 저지른 지가 오래되었다. 다시 꿈에서 도사가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내 말을 잊었는가? 이제 결국 죄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맡은 관리103)가 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귀에는 오로지 휙휙대는 바람과 물소리만 들렸다.
도착하고 난 뒤에는 장엄하게 꾸민 부서府署를 보았는데, 휘장과 탁상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니 혼자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바로 여기에 머물게 한다면 또한 본디 나쁘지 않다.”라고 하였다. 도사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는 바로 비늘이나 껍데기가 있는 수중생물들이 머무는 곳으로, 이곳의 괴로운 일은 가장 끔찍하고 독하다. 그런데도 그대는 오히려 나쁘지 않다고 여기니, 어떻게 된 뒤에야 나쁘다고 말하려는가?”라고 하였다. 이임보가 놀라서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났다. 이는 선량한 사람들을 음적한 것 때문에 수중생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다.104)
후대에 이르러 한 유생이 밭두둑 위를 지나다가 농삿소 한 마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았다.

007_0274_b_01L其體得非甚於四者之爲灾乎古今良
007_0274_b_02L爲陰賊所害者不可勝數而天下
007_0274_b_03L後世共悲之賊者幸之陷者苦之
007_0274_b_04L者殘其生幸者熾其勢旣熾其勢也
007_0274_b_05L憧憧然以陰賊爲勝術而不知休嗚呼
007_0274_b_06L是誠不知出爾而反乎爾者也其如後
007_0274_b_07L患何且虵虎之爲害也人皆疾而惡之
007_0274_b_08L猶恨不得而攻之陰賊之爲人而反爲
007_0274_b_09L虵虎之不若則天之施罰也亦豈不然
007_0274_b_10L天人之際一也如唐之李林甫
007_0274_b_11L顯時在槐壇遇一道士戒曰君名
007_0274_b_12L列仙籍縱不白日上昇亦必爲二十年
007_0274_b_13L大平宰相異日事權在手切記吾言
007_0274_b_14L不得妄有陰賊林甫諾之旣貴不復
007_0274_b_15L憶記一味恃寵多所賊害久之復夢
007_0274_b_16L道士責曰君豈忘吾言乎今果獲罪矣
007_0274_b_17L於是命吏引入一處耳中唯聞蕭蕭風
007_0274_b_18L水聲旣至則見府署嚴飾帳榻華侈
007_0274_b_19L私自喜曰正令居此亦自不惡道士
007_0274_b_20L歎曰此迺鱗介之所居其間苦事
007_0274_b_21L爲慘毒君尙以爲不惡欲如何而後謂
007_0274_b_22L之惡乎林甫駭然汗洽而寤此以陰賊
007_0274_b_23L良善而將生水族者也至于後季
007_0274_b_24L一儒生過於壠上見一農牛遇震而

007_0274_c_01L이에 그 뿔에다 써서 질책하기를 “옛적 사람 세상에서 오역죄五逆罪105)를 저지른 이가 아니라면, 무슨 인연으로 밭두둑 위에 농삿소가 되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자 벼락이 곧바로 쳐서 또 그 뿔에 써서 답하기를 “세 번의 생애는 창기가 되고 아홉 번의 생애는 소가 되니, 이는 당나라의 이임보이네.”라고 하였다. 이는 생애를 거듭하며 소로 태어나서 매번 천벌을 받았다는 것이니, 음적의 과보가 이에 응한 것이다.
어찌 꼭 이임보만 그러하겠는가? 삼대 이후 진나라ㆍ한나라 이래로 음적하는 신하가 없는 때가 없어서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집안을 망하게 하고 후세까지 해독을 끼쳐서, 뒤에 이를 듣는 이들은 분연히 그의 악을 비난하고 그의 망함을 기뻐하며 한 번 죽는 것으로는 충분히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고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진실로 온 세상 모든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놀라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뒤에 이러한 국면을 맞은 이들이 눈을 흘기며 그 행적을 바꾸려 하지 않고 도리어 저 술법을 스승으로 삼아 마음에 새기고 해치기를 좋아한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복수하려는 마음이 공정함을 가리고 이익을 도모하는 마음이 의로움을 가라앉히며, 다투고 시샘하고 꺼리는 일이 마음의 술법에 번갈아 횡행하여 못난 마음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살아서는 나라 법률의 엄한 형벌에 빠져서 그 집안을 망하게 하고 그 가족을 멸절시키며, 죽어서는 여러 생애 동안 주륙을 당하고 여러 부류를 거치며 혹독한 괴로움을 받는다. 설령 한 시대의 간웅의 계책일 뿐이라 하여도 오래도록 이러한 근심을 주니 애달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허문규許文䂓 같은 이는 붙잡혀서 명부에 이르러 착한 일을 한 기록을 살펴보니 일찍이 한 사람을 살려 준 적이 있어서 살날을 12년 더 늘리고 돌아왔다. 명부를 나선 뒤에 멀리 문이 하나 보이는데 매우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허문규가 관리에게 물으니, 관리가 말하기를 “여기는 모두 지옥이다. 세간에 있을 때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헐뜯고 선량한 사람들을 훼방하여 망치면서 언제나 음해를 일삼던 사람들은 죽고 난 뒤에 높고 낮고를 따지지 않고 모두 이 지옥으로 들어가서

007_0274_c_01L迺書其角而責之曰不向人間五逆
007_0274_c_02L何緣壠上打農牛旣而雷電驟至
007_0274_c_03L又書其角而答曰三世娼兒九世牛
007_0274_c_04L是唐家李林甫此則世世爲牛而每被
007_0274_c_05L天罰者也陰賊之報于是乎應矣
007_0274_c_06L特林甫爲然哉自三代之後秦漢以來
007_0274_c_07L陰賊之臣無世無之危其國喪其家
007_0274_c_08L流毒於後世而後之聞者莫不奮然
007_0274_c_09L罵其惡而喜其亡不以一死爲足償
007_0274_c_10L可謂受罰於天下萬世之人也是亦足
007_0274_c_11L爲可驚而後之當是局者盻盻然不改
007_0274_c_12L其轍反以彼術爲師刻於心而樂其賊
007_0274_c_13L此無他私讎之念弊於公圖利之
007_0274_c_14L汨於義爭競妬忌交橫心術而不
007_0274_c_15L肖之心無所不至矣斯人也生則陷王
007_0274_c_16L2)法之 [16] 嚴刑亡其家而滅其族死則受
007_0274_c_17L多生之誅戮歷諸趣而受椘毒縱一期
007_0274_c_18L奸雄之計永貽厥患可不悲歟又如
007_0274_c_19L許文䂓被攝至㝠司考其善簿以曾
007_0274_c_20L活一人得延一紀而還旣出望見一門
007_0274_c_21L守衛甚嚴許以問吏吏曰此都獄也
007_0274_c_22L但在世間讒譛忠良毁敗善類常行
007_0274_c_23L陰害之人死後無問尊卑皆入此獄受
007_0274_c_24L「胄」作「胃」{甲}「法之…夙喪(次頁上段十
007_0274_c_25L九行)」缺落{甲}

007_0275_a_01L한량없는 죄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자면 음사陰司106)가 이 무리들을 다스리는 것이 또한 매우 혹독한데, 비유를 들어 풀어 보겠다. 밭에 곡식이 있는데 강아지풀 같은 것이 해치고, 채소밭에 채소가 있는데 잡초가 막는다면 곡식 농사 짓는 이나 채소 농사 짓는 이가 밭이나 채소밭을 다스릴 때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그 채소와 곡식을 기르고 해치고 막는 것을 없애는 것이 곡식 농사 짓는 이나 채소 농사 짓는 이의 직분이다.
하물며 현명하고 어진 이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여 거처하는 곳마다 잘 다스리지 않음이 없는 것이 어찌 밭과 채소밭에 채소와 곡식이 있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음적이 세상을 해쳐서 거처하는 곳마다 어지럽히지 않음이 없는 것이 어찌 밭과 채소밭에 잡초와 강아지풀이 있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또 하물며 하늘이 덮고 있는 것107)을 김매고 다스리는 것이 이 둘108)보다 더 사려 깊은데 어찌 이른바 아름답게 하는 것을 없애고 도리어 해롭게 하는 것을 심겠는가? 위에서 말한 저잣거리에서 형벌을 받고 짐승에게 벼락이 내리고 저승에서 괴로움을 받는 것은 진실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⑥ 선과 악에 대한 보응
묻겠다 : 그대의 말은 진실로 나를 격동시킨다. 그러나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어찌 이런 것에서 그치겠는가?
답하겠다 :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이는 유교의 아성亞聖109)이다.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아는 이는 불교를 배우는 이들 가운데 높은 근기의 사람이다. 위에서 논한 것은 선과 악의 큰 벼리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선으로써 선한 것은 아무리 작아도 버릴 수 없고, 악으로써 악한 것은 아무리 작아도 취할 수 없으니 또한 이것이 몸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며 업을 닦고 덕을 증진하는110) 하나의 실마리이다.
가령 『응험록應驗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근세에 어떤 사람이 어버이를 일찍 여의고 오직 숙부만 있었는데, 숙부에게는 일곱의 자식이 있었다. 관례를 치르게 되자 숙부가 조카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하고 호적을 나누어야겠다.’111)라고 하니, 조카가 ‘재산은 어떻게 처분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숙부가 ‘둘로 나누겠다.’라고 하니, 조카가 ‘여덟으로 나누고 모든 형제들에게 골고루 주어서 다 같이 하나씩 차지하는 것이 옳습니다. 둘로 나눈다면 진실로 차마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숙부가 굳게 사양하였지만 조카가 강하게 우겨서 마침내 여덟으로 나누어 가졌다.

007_0275_a_01L罪無量以此觀之陰司之治是輩
007_0275_a_02L已酷矣請以喩解之田有穀而莨莠害
007_0275_a_03L園有蔬而蕪穢塞之則農圃之治田
007_0275_a_04L斯二者何擇焉養其蔬穀而除其
007_0275_a_05L害塞者農圃之軄也況賢善之美天下
007_0275_a_06L隨所處而無不治不啻若田園之有蔬
007_0275_a_07L穀也陰賊之害天下隨所處而無不亂
007_0275_a_08L不啻若田園之有蕪穢莨莠也又況天
007_0275_a_09L之鋤治乎所覆也其審愈於斯二者
007_0275_a_10L得獨殲其所謂美者反植其所謂害者
007_0275_a_11L上之所謂刑於市震於畜而苦於陰
007_0275_a_12L誠不得已也

007_0275_a_13L
曰子之言誠激我矣然爲善爲惡
007_0275_a_14L止如是而已哉曰聞一知十儒家之亞
007_0275_a_15L聖也一聞千悟學佛之上根也上之
007_0275_a_16L所論善惡之魁綱也由是而推之
007_0275_a_17L善之爲善雖微而不可遺惡之爲惡
007_0275_a_18L雖小而不可取亦是立身揚名修進之
007_0275_a_19L一端也如應驗錄云近世有人夙喪
007_0275_a_20L父母唯叔父存焉叔有七子及冠
007_0275_a_21L謂姪曰吾當與汝析籍姪曰如何處其
007_0275_a_22L產業叔曰分之爲二姪曰可爲八分
007_0275_a_23L與諸兄弟共一分若分爲二誠不忍
007_0275_a_24L叔固辭姪强之遂作八分分之

007_0275_b_01L열일곱 살이 되자 천거에 참여하기 위해112) 서울로 들어갔다. 그때 같은 객관에 묵은 사람이 스물 남짓이었는데, 어떤 술사가 있어 이들을 두루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남궁南宮113)에 높이 급제할 사람은 오직 이 소년이다.’라고 하였다. 과거 보러 온 선비들이 모두 술사를 비난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잘못을 저지르는가? 우리들은 모두 뛰어난 글솜씨를 지니고 오래도록 과거장을 거쳤는데 어찌 젖비린내 나는 한 아이만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술사가 말하기를 ‘문장은 내가 알 바 아니다. 다만 이 소년은 얼굴에 음덕의 기운이 가득하니 반드시 선을 쌓아서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할 때가 되니 과연 혼자만 명성을 이루었고 나머지는 모두 낙방하였다.”
겸양으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또 하물며 송효宋效는 개미를 구해 주고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두씨는 사람을 살려 주고 과거에 급제하였으며,114) 꾀꼬리를 구해 주고 대대로 관직을 누리고, 흰 거북을 놓아주고 양자강에서 목숨을 살렸으니, 선이 비록 작을지라도 버릴 수 있겠는가?
또 가령 옛적에 어떤 벼슬아치 한 사람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시찰하였는데 지나는 절들마다 하나같이 어지러웠다. 어떤 원院에 이르니 말끔하게 소제하였고, 목욕물을 찾으니 말소리에 응하여 “목욕물이 마련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달을 넘겨 다시 가 보았는데 또한 앞서와 같아서, 벼슬아치가 찬탄하며 상을 주었다. 뒷날 다시 왔는데 이에 어지러운 모습이 보이고, 목욕물을 찾았으나 한참 시간이 지나도 얻을 수가 없었다. 벼슬아치가 성내며 주지승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전에는 그토록 근면하였는데 오늘은 왜 이처럼 게을러졌는가?”라고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옛날 나리께서 오실 때에는 제가 미리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신비한 사람이 ‘내일 상공이 올 것이니 있을 곳을 물 뿌려 비질하고,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오늘 나리께서 오실 때에는 제가 꿈을 꾸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지러운 것이지 감히 게을리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벼슬아치가 그 신비한 사람의 모습을 물어보니 곧 본청의 토지신이었다. 이에 곧바로 승려의 말을 취하여 관아로 돌아가 상제에게 아뢰는 문장을 갖추었는데, “제게 과연 상공의 지위가 있다고 한다면, 세 번째에는 어찌하여 알리지 않았습니까?115) 제게 결국 없다면, 신이 저를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문장을 아직 아뢰기 전에 갑자기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그 신이 말하기를 “신선계의 기록을 가만히 살펴보고서 나리에게 상공의 분수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기록에 의거해서

007_0275_b_01L十七歲預薦入京師時同舘者二十
007_0275_b_02L餘輩有術士徧示之曰南宮高第
007_0275_b_03L此少年諸貢士咸斥術者曰汝何謬耶
007_0275_b_04L吾等皆大手筆久歷場屋豈不如一乳
007_0275_b_05L臭兒術者曰文章非我所知但此少年
007_0275_b_06L滿面陰德之氣必積善之所致及放牓
007_0275_b_07L果獨成名餘皆下第此謙之所以受益
007_0275_b_08L又況宋效救螘預狀元之選竇氏
007_0275_b_09L活人得折桂之榮救黃雀而官爲累世
007_0275_b_10L放白龜而命活長江善雖微而其可遺
007_0275_b_11L又如昔有一尉巡歷經由寺宇
007_0275_b_12L皆狼籍到一院見屏除潔淨索浴
007_0275_b_13L聲應云湯辨矣踰月再到亦如前尉嗟
007_0275_b_14L賞之後日復來迺見狼籍索湯移時
007_0275_b_15L莫得1)嗔叱 [17] 主院僧曰向來其謹如
007_0275_b_16L今來何其慢如此僧曰昔尉之來
007_0275_b_17L某預得夢白衣神人報曰明日相公至
007_0275_b_18L洒掃所在與辨湯水今日尉來某不
007_0275_b_19L得夢所以狼籍非敢怠也尉問其神狀
007_0275_b_20L迺本廳土地之神即取僧詞歸廨具章
007_0275_b_21L奏上帝曰以某果有相位則第三廻
007_0275_b_22L何不亦報某若果無則神不合誣我惑
007_0275_b_23L章未奏遽就眠且夢其神曰窃窺
007_0275_b_24L上界錄籍知尉有相公分也故按籍以

007_0275_c_01L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 근래에 법을 굽혀 죄 없는 보통 사람을 때려죽이게 하였기 때문에 음덕이 손상되어서 기록을 관리하는 이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이미 상공의 지위를 지워 버렸습니다. 마땅히 잘 살펴서 괜히 나에게 죄를 씌우면서 아뢰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가득 차서 도리어 손해를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또 하물며 은혜를 잊고 저민 고기를 받아먹어 두 팔이 떨어진 것도 곰이 팔을 자른 것이 아닌데, 의리를 등지고 살아 있는 것을 죽이니 창자와 위가 함께 무너진 것이 어찌 사슴이 한 일이겠는가? 이는 모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감응이다. 나락 다섯 알을 훔쳐서 한 생애 동안 소가 되고, 열 냥의 금을 받아서 여러 해 동안 복록이 끊어졌으니 악이 비록 작을지라도 멋대로 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부유하고 귀한 지위에 있는 이들이 분수가 정해진 것이라고 여기며 의리를 따르지 않는 것은 화와 복이 마음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 오래도록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⑦ 불교의 시식施食과 신주가지법神呪加持法에서3, 7, 7×7의 수로 한정하는 이유
묻겠다 : 불교에서 음식을 베풀 때 “일곱 알로 온 누리에 두루 베푼다.”116)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일의 이치로 보아 터무니없으며, 더욱이 유교인들은 감히 믿을 수 없다. 또한 신주가지법神呪加持法을 행하면서는 반드시 세 번, 일곱 번, 마흔아홉 번으로 한도를 삼는 것은 또 왜 그러한가?
답하겠다 : 줄여서 3인 것은 삼재三才의 수이다. 삼재가 갖추어지면 만물이 생겨난다. 이것은 작은 변화이다. 중간으로 하여 7로 하는 것은 칠요七曜의 수이다. 칠요가 갖추어지면 변화가 생겨난다. 이것은 중간의 변화이다. 다 갖추어서 49로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수이다.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으면 조화가 끝이 없다. 이것은 큰 변화이다.
또 하늘과 땅의 수는 55인데 5를 빼는 것은 그 아버지를 높이는 것이고, 1을 비우는 것은 그 임금을 높이는 것이다. 49의 수로 변화가 끝이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의 큰 작용인데, 바로 부처님의 묘한 작용이다. 위에서 말한 본체가 바로 태극이고 작용이 바로 하늘과 땅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하늘이 이를 얻어서

007_0275_c_01L尉近領枉法戕殺平人損陰德而
007_0275_c_02L司錄籍者禀天命已削去相位幸宜
007_0275_c_03L見察勿徒罪我而事章奏此滿之所以
007_0275_c_04L招損也又況忘恩受臠而雙臂落非熊
007_0275_c_05L之所斫也背義殘生而膓肚俱崩豈鹿
007_0275_c_06L之所爲哉是皆㝠㝠感應之必然竊粟
007_0275_c_07L五粒而爲牛一世受金十兩而絶祿多
007_0275_c_08L惡雖小而其可縱乎世之處富貴之
007_0275_c_09L地者便謂分㝎不循義理殊不知禍
007_0275_c_10L福隨心變易難保久長嗚呼可不愼歟

007_0275_c_11L
曰佛敎之施食七粒遍十方之語事理
007_0275_c_12L荒唐尤爲儒者之不敢信也又以神呪
007_0275_c_13L加持法事者亦必以三遍七遍七七遍
007_0275_c_14L爲限者此又何歟

007_0275_c_15L
曰略而三者三才之數也三才具而萬
007_0275_c_16L物生此小變也中而爲七者七曜之
007_0275_c_17L數也七曜具而變化生焉此中變也
007_0275_c_18L備而爲七七者天地之數也天地位而
007_0275_c_19L造化無窮此大變也且天地之數
007_0275_c_20L十有五而除其五者尊其父也虛其一
007_0275_c_21L尊其君也四十九數而變化無窮者
007_0275_c_22L乾坤之大用也即佛之妙用也上之所
007_0275_c_23L謂體則2) [18] 用則乾坤者是也天得之
007_0275_c_24L「嗔叱」作「眞化」{甲}「太」作「大」{甲}

007_0276_a_01L빽빽한 모든 변화가 끝이 없고, 땅이 이를 얻어서 만물의 변화가 끝이 없고, 성인117)이 이를 얻어서 『역』의 도의 변화가 끝이 없고, 뭇 부처님께서 이를 써서 신통한 변화가 끝이 없고, 주문을 지닌 이는 이를 얻어서 가지加持118)의 변화가 끝이 없으니, 주체는 비록 다르지만 큰 작용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작게는 일곱 알의 미미한 데에 이르고 크게는 49휘에 이르기까지, 사물을 만드는 원리를 타고 변화하며 마음의 헤아림에 호응하여 끝이 없어서 온 누리 모든 부류의 중생들 앞에 두루 퍼지니, 배고픈 이는 배부르게 되고, 굶주린 이는 먹게 되고, 목마른 이는 마시게 되고, 헐벗은 이는 입게 되고, 힘든 이는 쉬게 되고, 괴로운 이는 (괴로움이) 그치게 된다. 불교도들의 큰 베풂이 허공계를 다하고 온 법계에 두루 미쳐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다.
중생에게 베푸는 것이 이미 저와 같은데, 여러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 또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로 인해 생겨나는 공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선근을 이어받으면 어떤 죄인들 없애지 못하고 어떤 복인들 낳지 못하고 어떤 것을 구한들 마치지 못하고 어떤 것을 바란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로써 (저승으로) 가는 이를 천도하면 가는 이가 맑게 (극락이나 하늘로) 올라가고, 이로써 살아 있는 이를 보호하면 살아 있는 이들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되고, 이로써 복을 구하면 복의 바다가 더욱 깊어지고, 이로써 목숨을 구하면 목숨의 산이 더욱 높아진다. 이 또한 선한 일에 복을 주는 자연의 이치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늘에 칠정七政119)이 있는 것은 하늘이 이 수를 쓴 것이고, 땅에 일곱 귀신이 있는 것은 땅이 이 수를 쓴 것이고, 부처님께 일곱 분의 부처님이 계신 것은 부처님께서 이 수를 쓰신 것이며, 주문을 일곱 번 쓰는 것 또한 이 수에 맞춘 것이다. 이는 곧 온 세상에 크게 통하는 수이고 변화의 기틀이니 어찌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⑧ 염주가 108개로 이루어진 이유
묻겠다 : 세상에서 정토 신앙을 닦는 이들은 그 부처님께 절하면서 반드시 열 가지 모습을 나누고 열 가지 이름을 읊으며 염주로 세는데, 염주의 수가 반드시 108에 그치는 그 이치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가르침이 드러난 모습이

007_0276_a_01L而森羅之變化無窮地得之而萬物之
007_0276_a_02L變化無窮聖人得之而易道之變化無
007_0276_a_03L諸佛用之而神通之變化無窮持呪
007_0276_a_04L者得之而加持之變化無窮主者雖殊
007_0276_a_05L而大用則一也故小至七粒之微大至
007_0276_a_06L七七之斛乘造物而變化應心量而無
007_0276_a_07L普遍十方諸趣群生之前而飢者
007_0276_a_08L得飽餓者得食渴者得飮裸者得衣
007_0276_a_09L勞者得歇苦者得息此佛氏之大施
007_0276_a_10L盡虛空遍法界而無所不至也施衆生
007_0276_a_11L旣如彼也供養諸佛者亦豈異於
007_0276_a_12L斯乎所生功德可勝量㦲承此善根則
007_0276_a_13L何罪而不滅何福而不生何求而不遂
007_0276_a_14L何願而不成故以是薦徃則徃者淸昇
007_0276_a_15L以是保生則生者康寧以是求福則福
007_0276_a_16L海彌深以是求壽則壽山增峻此亦福
007_0276_a_17L自然之理無足恠也天有七政者
007_0276_a_18L天用是數也地有七鬼者地用是數也
007_0276_a_19L佛有七佛者佛用是數也呪用七遍者
007_0276_a_20L亦合是數也是迺天下大通之數變化
007_0276_a_21L之機何異之有㦲

007_0276_a_22L
問世之修淨土者禮其佛而須分其十
007_0276_a_23L誦其十號而以數珠計之數珠之
007_0276_a_24L須止於百八其理何歟何敎迹之

007_0276_b_01L이처럼 번거로운가?
답하겠다 : 그렇지 않다. 마음은 만 가지 모습의 모범이니, 깃 달린 것이나 털 난 것이나 비늘 있는 것이나 껍데기 있는 것이나 몸을 옆으로 하는 것120)이나 (몸을) 세운 것121)이나 날아다니는 것이나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모두 마음에서 그 형체를 받지 않는 것이 없는데, 진실로 하늘과 땅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이 선하고 악하고 삿되고 바르고 물들고 깨끗하고 좋고 추악한 것 등 갖가지 연이 되는 행위에 따라 온갖 종류의 모습과 빛깔이 저마다 그 부류에 따라 호응한다. 이것이 네 가지 중생122)과 아홉 가지 중생,123) 범부와 성인이 나뉘는 까닭이다.
이미 마음이 모범이 되어 만물에게 모습과 빛깔을 명하니, 마음이 부처에게 있으면 반드시 부처님의 모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보존하고 눈으로 보고 절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그 상호를 분명하게 보고 그 모범을 자세하게 밝혀서, 장래에 부처가 되어 얻게 될 상호의 바른 원인을 삼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일 만들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물며 마음이 정토에 있으면 마음의 땅 또한 스스로 깨끗해지고, 마음이 부처에게 있으면 마음의 부처가 스스로 나타나서, 저곳과 이곳의 부처와 땅이 하나로 녹아들어 둘이 없게 되고 정토의 일이 이루어지게 되며, 이와 거꾸로 하면 삼계에서 과보를 낳는 원인인 행위가 되어 나고 죽는 윤회에서 해탈할 길이 없다. 경에서 말하기를 “남자를 좋아하면 남자가 되고, 여자를 좋아하면 여자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또한 이 때문이다.
또 염주로 세면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 또한 부처님의 방편이니, 일에 나아가 그 이치를 밝혀서 배우는 이들이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삼계는 하늘 중생과 지옥 중생과 아귀와 축생과 아수라와 사람의 부류이다. 그 높고 낮은 품류는 108등급에 이르기까지 많이 있는데, 하나의 마음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음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 또한 차별이 있다. 마음은 원인이고 만들어진 것은 결과이다. 108개의 구슬은 마음속에 있는 108가지 번뇌를 가리킨다. 구슬은 서로 다른 것이고, 끈은 습기習氣의 끈이다. 마음의 번뇌가 서로 이어지는 것은 모두 습기의 끈으로 말미암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빙빙 돌아

007_0276_b_01L若是其煩乎

007_0276_b_02L
曰不然也心者萬形之模範羽毛鱗
007_0276_b_03L橫竪飛沉無不受形於其心固非
007_0276_b_04L天地使之爲然故隨其心之善惡邪正
007_0276_b_05L染淨好醜種種緣業而形色萬品各以
007_0276_b_06L其類應之此四生九類凡聖之所以分
007_0276_b_07L旣心爲模範而命形色於萬品也
007_0276_b_08L存乎佛則爲佛之模範必矣故心存目
007_0276_b_09L禮念之間分明其相好細詳其模
007_0276_b_10L而欲作將來成佛相好之正因也
007_0276_b_11L好事而爲之哉況心存乎淨土而心土
007_0276_b_12L自淨心存乎佛而心佛自現彼此佛土
007_0276_b_13L融乎無二而淨土之業成矣反是則
007_0276_b_14L爲三界之業因生死之輪廻無由解脫
007_0276_b_15L經云樂男即爲男樂女即爲女
007_0276_b_16L由是也又以數珠計誦佛號者是亦
007_0276_b_17L佛之方便即事而明其理使其學者
007_0276_b_18L自近而至遠也夫世之所謂三界者
007_0276_b_19L獄鬼畜修羅人道也其品之高下至有
007_0276_b_20L一百八級之多無不因於一心而所造
007_0276_b_21L心有差別故所造亦差別心者因
007_0276_b_22L而所造者果也百八珠者指心中百八
007_0276_b_23L煩惱也珠者殊也繩者習繩也心中
007_0276_b_24L煩惱相續者盖因習繩而不失也環轉

007_0276_c_01L끝이 없는 것은 윤회가 그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염주를 지녀서 마음이 어둡지 않게 하여, 백팔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없애게 하셨다. 하나같이 염불로써 다스리고, 염주를 빙빙 돌리며 잡된 마음이 없게 하면 이른바 번뇌라고 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변하는 것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아서 삼계에서 원인이 되는 행위가 저절로 없어지고 깨달음의 묘한 과보를 그날로 이룰 수 있다.
부처님께서 염불에 힘쓰게 하신 것은, 이 한 번의 과보124)가 끝난 뒤에 내 마음의 바람이 저 부처님의 서원의 힘과 서로 젖어들어 바람을 탄 가벼운 날개나 물 흐름을 탄 한 척 돛배처럼 순식간에 곧바로 갈 것에 의심이 없으니,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깊고 묘하고 자세히 다 갖추어져 있음이 이와 같으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⑨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
묻겠다 : 그대가 증명하고 보여 준 가르침은 매우 자세하여 진실로 높일 만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워야 이를 수 있겠는가?
답하겠다 : 도는 땅과 같아서 가면 갈수록 더욱 멀어진다. 도는 바다와 같아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그 (들어가는) 문을 찾는 것은 계율, 선정, 지혜에서 시작한다. 계율이란 무엇인가? 도적을 붙잡는 것을 말한다. 선정이란 무엇인가? 도적을 묶는 것을 말한다. 지혜란 무엇인가? 도적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붙잡고서 묶지 않으면 도망가게 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묶고서 죽이지 않으면 시샘과 의심으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다 마친 뒤에야 비로소 대장부가 할 일을 다 마치게 된다.
또한 하물며 (중생의) 의식意識이 법신을 해치고 혜명慧命을 죽이는 것이 도적보다 더욱 심해서 오랜 겁에 걸친 어려움과 괴로움은 참으로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만일 이 세 가지로써 징계하고 제어하고 끊지 않으면 이른바 법신과 혜명이 온전할 수가 없으므로, 계율의 그릇이 원만히 이루어지고, 선정의 물이 흔들림 없고 맑으며, 지혜의 달이 비로소 나타나면 도를 닦는 공이 여기에서 드러날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순서가 본디 이와 같다.
계율을 그릇이라고 한 것은 세 가지 행위를 말한다.

007_0276_c_01L無窮者表輪廻之不息也故佛令其持
007_0276_c_02L是珠而不昧伐其百八煩惱之起一以
007_0276_c_03L念佛制之循環往復無雜用心則其
007_0276_c_04L所謂煩惱者變成菩提猶若反掌
007_0276_c_05L界業因自消而菩提妙果日就佛之勉
007_0276_c_06L盡此一報之後吾之心願與彼佛
007_0276_c_07L之願力相涵如乘風之逸翮順水之孤
007_0276_c_08L斯須之頃直往無疑誰得而沮之
007_0276_c_09L佛之爲敎深妙而詳悉如此可不
007_0276_c_10L勉乎

007_0276_c_11L
曰爾證示之敎甚詳誠可尙也則學之
007_0276_c_12L若爲其有至㦲

007_0276_c_13L
曰道如地愈行而愈遠道如海愈入
007_0276_c_14L而愈深然求其門者自戒㝎惠始
007_0276_c_15L者何捉賊之謂也㝎者何縛賊之謂
007_0276_c_16L惠者何殺賊之謂也捉而不縛
007_0276_c_17L或失於逋逃縛而不殺則或困於猜嫌
007_0276_c_18L能盡三者而後丈夫之能事畢矣且況
007_0276_c_19L意識之戕法身殺慧命尤甚於賊而多
007_0276_c_20L劫艱辛眞所致也若不以斯三者
007_0276_c_21L之制之斷之則所謂法身慧命無得而
007_0276_c_22L全故戒器圓成㝎水凝淸慧月方現
007_0276_c_23L而修道之功於是著矣學佛之序
007_0276_c_24L如是也以戒而謂之器者言乎三業也

007_0277_a_01L세 가지 행위란 몸과 입과 마음이다. 몸이 하나의 그릇이고 입이 하나의 그릇이고 마음 또한 그릇이다. 세간에서 이 그릇을 쓰는데,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시샘과 어리석음과 오만함 등의 번뇌의 행위이고, 몸에 담아 두는 것은 죽이고 훔치고 사음하는 행위이고, 입에 담아 두었다가 퍼뜨리는 것은 번지르르한 말, 거짓된 말, 이간질하는 말, 욕하는 말이고, 빨아들이는 것은 냄새나는 채소와 술과 중생의 살이다. 이것들은 윤회의 근원이고 온갖 괴로움의 근본이다.
비유하자면 그릇에 먼지와 똥 같은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있는데, 만일 씻어 없애지 않고 먹을거리를 담아 둔다면, 얼음이나 눈이 비록 깨끗하다 하여도 뒤섞여 혼탁해져서 물로 씻어 내는 공이 나타날 길이 없고, 음식이 비록 훌륭해도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이 배어들어서 공양하거나 제사상에 올려 흠향케 하는 데 쓸 수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참회로써 재로 닦아 내듯이 문질러 없애고, 깨끗한 마음을 물로 삼고 진실된 마음을 수건으로 삼으며, 서원으로 완전하고 굳건하게 하여, 그릇에 담긴 것은 물건마다 맑고 깨끗하고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은 법마다 번뇌가 없게 된 까닭이다.
선정을 물이라고 한 것은 하나에 멈추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물과 같아서 치고 흩뿌리면 그 작용이 흩어지고, 그치게 하고 멈추게 하면 그 작용이 온전하다. 온전하면 맑고 고요하여 하늘의 마음에 도장 찍히듯 들어맞게 되고, 움직여 물결이 일면 비친 그림자들이 흐릿하고 어지럽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한 찰나로 만 년을 삼아 잡되게 마음 쓰는 일이 없어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밖의 대상들이 침범할 수 없고, 이에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지혜를 달이라고 한 것은 바른 깨달음을 말한다. 한밤중에 높이 떠올라 치우침과 바름을 묘하게 겸하였음을 말한다. 사람들이 삼계에서 오래도록 잠들어 지혜의 눈이 없는 것을 일컬어 빛이 없이 깜깜한 한밤중이라고 한다. 태어나도 오는 줄을 모르고 죽어도 가는 줄을 모르며 가시덤불 속을 내달리면서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중생의 모습이다. 지혜의 눈을 밝게 뜨면

007_0277_a_01L三業者身口意也身爲一器口爲一
007_0277_a_02L而意根亦器也夫世俗之用是器也
007_0277_a_03L貯於意者爲貪嗔嫉妬癡慢等煩惱之
007_0277_a_04L貯於身者殺生偸盜邪淫之業
007_0277_a_05L於口而揚者綺妄兩舌惡口吸者
007_0277_a_06L酒衆生之肉此輪廻之源而衆苦之本
007_0277_a_07L比之則如器之有塵糞衆穢也若不
007_0277_a_08L洗除而貯於食物1) [19] 雪雖淨而混
007_0277_a_09L於渾濁無以呈漑滌之功肴饍雖美
007_0277_a_10L而熏於臭穢無以供養薦享之用此佛
007_0277_a_11L之所以懺以去之悔以灰之淨心以水
007_0277_a_12L誠心以巾之誓以完之願以固之
007_0277_a_13L而盛乎器者物物淸淨納乎中者
007_0277_a_14L法無漏矣以㝎而謂之水者言乎止一
007_0277_a_15L心猶水也皷之渙之其用即散
007_0277_a_16L之止之其用即全全而澄湛則印契
007_0277_a_17L乎天心動而波興則昏迷乎影像
007_0277_a_18L佛之所以一念萬年無雜用心而外塵
007_0277_a_19L之擾無得而侵本地風光于斯乎發
007_0277_a_20L現矣以慧而謂之月者言乎正覺也
007_0277_a_21L昇乎夜半妙兼偏正之謂也夫人之長
007_0277_a_22L眠三界無有智眼者是謂無明暗黑大
007_0277_a_23L夜也生不知來死不知去奔馳榛棘
007_0277_a_24L未識道路者衆生之態也慧眼開明則

007_0277_b_01L바른 길이 앞에 있다. 이른바 깜깜한 한밤중이란 도리어 바른 자리가 되는 것이니, 어두움은 밝음을 떠나지 않고 밝음은 어두움을 떠나지 않아서, 막고 비추는 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본래의 도이다. “보살의 맑고 시원한 달, 언제나 법성의 허공에 노니니, 중생의 마음의 물이 깨끗해지면, 깨달음이 그림자처럼 그 안에 비치리.”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세 가지 배움이 서로 기대면서 도를 배우는 시작과 끝이 되는 까닭이다.
또한 선정이 없는 지혜를 말하자면 그 지혜는 미친 것이고, 지혜가 없는 선정을 말하자면 그 선정은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은 선정은 근원이 없기 때문에 말라 없어져 버릴 것이니 이른바 그림자가 비치는 물이 아니다. 미친 지혜는 멋대로 날아다니는 살별 같은 것이니 이른바 본성의 공적한 달이 아니다. 어리석음과 미침은 이보다 더 심한 병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들은 이들을 동등하게 지니는 것을 절묘하게 해야 한다. 만일 동등하게 지닌다면 마치 수레에 두 바퀴가 있고, 새에게 두 날개가 있어서 허공을 날고 땅에 굴러가는 데 자유롭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는 불교를 공부하는 지름길이다.
⑩ 참화參話와 정혜定慧의 차이
묻겠다 : 지금 불교를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화두를 참구하는 것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방편을 삼는데,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는 논변은 어찌하여 이와 다른가?
답하겠다 : 이는 서로 다르지 않다. 결과로는 선정ㆍ지혜라 하고, 원인으로는 지관止觀125)이라 한다. 지관이란 참화參話126)의 방법이다. 참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만을 드는 것을 첫걸음으로 하고, 전체를 드는 것을 자량資糧127)으로 삼는다. 자량은 걸음의 바탕이 되고, 걸음은 자량의 공효가 된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진 뒤에야 비로소 이를 곳에 이를 수 있다. 하나만을 드는 것은 하나로써 모든 것을 제어하는 것을 말하니 지止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체를 드는 것은 의심을 일으켜서 참구하는 것을 말하니 관觀을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만을 드는 것을 통해서 움직이지 않음이라는 궁극에 이르면 이것이 선정이다. 전체를 드는 것을 통해서 훤하니 크게 깨달으면 이것이 지혜이다. 이름은 다르더라도 뜻은 하나이니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⑪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의 바르고 그릇됨을 가리는 방법
묻겠다 : 부처님께서 도를 배우는 이들에게 경계하며 말씀하시기를 “털끝만 한 것에서 어긋나고, 한순간에 잘못된다.”128)라고 하셨는데,

007_0277_b_01L正路在前夫所謂黑暗大夜者反爲正
007_0277_b_02L暗不離明明不離暗遮照同時本
007_0277_b_03L之道也如云菩薩淸凉月常遊法性空
007_0277_b_04L衆生心水淨菩提影現中非是之謂歟
007_0277_b_05L此三學之所以相須而爲學道之終始也
007_0277_b_06L又況無㝎之慧其慧即狂無慧之㝎
007_0277_b_07L其㝎即癡癡㝎則無源死涸耳非所謂
007_0277_b_08L影現之水也狂慧則飛流彗孛耳非所
007_0277_b_09L謂性空之月也癡之與狂病莫甚焉
007_0277_b_10L故學者之於斯等持爲妙若能等持則
007_0277_b_11L如車之具二輪如鳥之有兩翼飛空運
007_0277_b_12L無不自由是學佛者之捿徑也

007_0277_b_13L
曰今之學佛者必以叅話爲入道之方
007_0277_b_14L便㝎惠之論何異於是乎

007_0277_b_15L
曰不異也在果則謂之㝎惠在因則謂
007_0277_b_16L之止觀止觀者迺叅話之法也叅話
007_0277_b_17L以單提爲初步以全提爲資粮
007_0277_b_18L爲步之資步爲粮之效二者備而後
007_0277_b_19L能至乎其所至矣單提者以一制萬之
007_0277_b_20L謂也非止之謂乎全提者起疑叅究
007_0277_b_21L之謂也非觀之謂乎由單提而極於不
007_0277_b_22L動則㝎也由全提而豁然大悟則慧也
007_0277_b_23L名雖殊而義則一也夫何異之有哉

007_0277_b_24L
曰佛之戒學道則曰差之毫釐失之須

007_0277_c_01L이는 불교를 배우는 이들의 큰 요체이다. 지금의 선사들은 대부분이 “내가 불법을 깨달았다.”라고 하는데, 바라건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삿되고 바름을 변별할 수 있는가?
답하겠다 : 슬기롭도다, 이 질문이여! 이는 진실로 배우는 이들의 지침이다. 말하기를 “우리 종문宗門(선종)의 법은 가섭迦葉에게 따로 전한 데129)에서 시작한 뒤로 등불과 등불이 서로 이어 타오르고 깨달음의 인가印可와 인가가 서로 전해져 28대를 거친 뒤에,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중국에 와서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그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였고, 육조대사(혜능) 이후로 오파五派130)로 나뉘었는데, 파는 비록 같지 않지만 도는 하나이다.”라고 한다.
이 도의 전승은 마치 물이나 불을 주는 것과 같아서 그 사람을 얻으면 전하지만 그 사람을 얻지 못하면 그친다. 비록 아비 자식과 같이 가깝고 오랜 벗처럼 친밀하며 신통과 삼매를 갖추고 덕이 넓고 행위가 높다고 하여도, 으뜸가는 바른 눈을 갖추지 못하였으면 모두 아랫자리로 물리는 것은, 그 도가 가장 존귀하고 가장 묘하며 크게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어서 함부로 주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니, 생선 눈알과 밝은 구슬처럼 본디 서로 헛갈릴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서로 헛갈린다면 세상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눈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사들이 인가하여 법을 전할 때 반드시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도를 배우는 이들은 스승을 찾고 도를 구하여 천리만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강과 바다를 건너고 산과 내를 넘어 핏줄이 분명한 밝은 눈의 종사를 분명하게 택하여 예를 올리고 스승으로 삼아 법을 위하여 몸을 잊고서 묻고 두드리고 참구하고 청하였으며, 진실로 이로운 한마디 말을 얻으면 나고 죽는 뿌리를 결연히 끊어 버렸다.
그러므로 대혜大慧 선사131)가 말하기를 “계율을 수미산처럼 많이 범할지언정 삿된 스승이 하나의 삿된 생각이라도 훈습케 하지 말라. 만일 겨자씨만큼이라도 생각 속에 들어오면 기름이 국수에 들어간 것처럼 끝내 나가게 할 수 없다.”132)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니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위음왕불威音王佛133)의 뒤로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친 이는 자연히 외도外道134)이다. 그러므로

007_0277_c_01L是學佛者之大要今之禪師太多
007_0277_c_02L皆曰我會佛法欲如何而辨其邪正耶
007_0277_c_03L曰睿哉斯問也是誠學者之指南也
007_0277_c_04L我宗門之法始自迦葉別傳之後燈燈
007_0277_c_05L續熖印印相傳歷二十八代達摩大
007_0277_c_06L士東來此土直指人心見性成佛自六
007_0277_c_07L祖而下分爲五派派雖不同道則一
007_0277_c_08L夫是道之相傳也如水火之相與也
007_0277_c_09L得其人則傳不得其人則止雖父子之
007_0277_c_10L交舊之密神通三昧德廣行高者
007_0277_c_11L若不具頂門正眼則皆退下風者以其
007_0277_c_12L道之最尊最妙大公無私不堪妄授而
007_0277_c_13L魚目明珠固不可以相賺也苟或相賺
007_0277_c_14L則不唯瞎却天下人眼目亦自爲無眼
007_0277_c_15L此祖印之傳必待其人也故古之學道
007_0277_c_16L之士尋師訪道不遠千里萬里遊江
007_0277_c_17L海涉山川必須決擇明眼宗師血脉端
007_0277_c_18L的者投禮爲師爲法忘𨈬咨扣叅請
007_0277_c_19L苟得一言之益決斷生死之根故大惠
007_0277_c_20L禪師云寧可破戒如須彌山不令邪師
007_0277_c_21L熏一邪念如芥子許在情識中如油
007_0277_c_22L入麵永不可出是也可不察歟又況威
007_0277_c_23L音王之後無師自悟者天然外道
007_0277_c_24L「氷」作「水」{甲}

007_0278_a_01L대도를 꿰뚫어 깨친 이는 반드시 종장宗匠에게 물어 삿되고 바름을 결택하여 인가를 받은 뒤에 비로소 크게 입을 열어 크게 말하고, 강령을 들어 사방에서 온 수행자들을 제접하여 사람과 하늘의 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아직 그렇지 못하여 비록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하여도 또한 아직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은 삿되고 바름을 아직 결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에서 스스로 종장이라고 하는 이가 없는 것은 억지로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 법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지금 선사라고 칭하는 이들은 조사의 명령을 숨긴 채 그저 입과 귀로 배운 것을 가지고 겉모양에만 의지하여 고양이만 그리고 있으면서,135) 멋대로 도를 어지럽히면서 ‘선을 말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를 일컬어 ‘큰 지혜를 비방함’이라 하고 또한 일컬어 ‘무간지옥無間地獄136)에 떨어질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⑫ 풍수지리에 근거한 비보사찰의 옳고 그름
묻겠다 : 지금 그대가 가르침을 증험한 것은 잘 갖추어졌으니, 이를 써서 윤회를 벗어나고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배움은 가능하겠지만, 그 도와 그 가르침이 어찌 땅의 이치에 관여하겠는가?
앞 왕조(고려)의 왕씨가 나라를 세워서는 그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그 재물을 쓰게 하여, 나라에 폐해를 일으키면서 곳곳에 수천 수백의 절들을 세우고 비보사찰이라 하였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불교 안에 이러한 이치가 있는가?
답하겠다 : 진실로 그러한 이치가 있다. 부처님께서 펴신 가르침에는 지극한 따뜻함이 있어 사랑할 만하고, 지극한 선이 있어 드러낼 만하고, 지극한 영험이 있어 두려워할 만하고, 지극한 신통함이 있어 공경할 만하고, 지극한 묘함이 있어서 멋대로 할 수 없고, 지극한 밝음이 있어서 속일 수 없다. 이를 일컬어 삼계의 각황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 명령이 이르는 곳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이나137) 모두 복종하니 누가 감히 업신여기는 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이 경이나 네 구절의 게송 등이 있는 곳은 모든 세간의 하늘 중생과 사람과 아수라 모두가 부처님의 탑묘처럼 마땅히 공양하며 절하고 돌고 온갖 꽃과 향을 그곳에 흩뿌리리라.”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의 묘함은

007_0278_a_01L悟徹大道者必須質之宗匠決擇邪正
007_0278_a_02L承受印可而後可以開大口說大話
007_0278_a_03L綱擧令接引方來爲人天之眼目也
007_0278_a_04L如其未然雖或自有悟門亦未敢發於
007_0278_a_05L口外者以其未決邪正也天下古今
007_0278_a_06L無有自許底宗師不是强爲法如是故
007_0278_a_07L今之稱禪師者潜行祖令徒以口
007_0278_a_08L耳之學依㨾畵猫兒恣意亂道謂之
007_0278_a_09L說禪未知其何謂也是謂之謗大般若
007_0278_a_10L亦謂之墮無間業嗚呼可不懼歟

007_0278_a_11L
曰今爾之證敎也備矣用是而爲超脫
007_0278_a_12L輪廻見性成佛之學則可矣其道其敎
007_0278_a_13L何預於地理而前朝王氏之創業也
007_0278_a_14L其民費其財作蔽於國家區區立數千
007_0278_a_15L百之伽籃號爲裨補其故何歟佛敎
007_0278_a_16L之中有如是之理乎

007_0278_a_17L
曰誠有是理也佛之爲法也有至慈可
007_0278_a_18L有至善可旌有至靈可威有至神
007_0278_a_19L可敬有至妙而不可慢有至明而不可
007_0278_a_20L是謂三界覺皇之敎其令所至
007_0278_a_21L明服從誰敢有侮焉者故經云隨說是
007_0278_a_22L乃至四句偈等一切世間天人阿修
007_0278_a_23L羅皆應供養如佛塔廟作禮圍繞
007_0278_a_24L諸花香而散其處是也故其法之妙

007_0278_b_01L베풀어 안 되는 곳이 없으니, 약에 비유한다면 만 가지 병에 듣는 영단靈丹138)과 같기 때문에 또한 부처님을 위대한 의사의 왕(大醫王)이라고도 부른다. 이로써 몸을 다스리면 재액과 병이 없어지고, 이로써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가 없어지고, 이로써 산과 내와 땅을 다스리면 흉하고 해로운 것이 변하여 길하고 이롭게 된다. 그러니 비보사찰을 세우는 것이 어찌 근거가 없는 것이겠는가?
또 쑥은 세상의 훌륭한 약이지만, 병이 없는 이는 더러운 흙처럼 여겨서 비록 집 뜰에 있어도 캐는 일이 없다. 하지만 병이 있는 이라면 그렇지 않아서, 훌륭한 의사를 만나 뜸을 뜨면 오래된 병이 단번에 낫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빨라서, 비록 만금이 중하다고 하여도 이에 견줄 수가 없는 것은 그 효과가 신통한 효험이 있기 때문이다.
중원 지역이 제하諸夏139)로 나뉘어 있는데 그 땅이 평탄하다. 요임금 때에는 홍수의 재해가 있자 신묘한 우임금이 다스렸는데, 저마다 땅의 이치에 알맞게 좇았으니 어찌 흉하고 나쁜 해로움이 있었겠는가?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뭇 산들이 그 험준함을 자랑하고 뭇 물길들이 그 내달림을 다투어, 용과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듯한 것도 있고, 날짐승이나 들짐승이 날고 달리는 듯한 것도 있고, 저곳으로부터 와서 공격하는 것도 있고, 근원을 떠나 등지고 도망가는 것도 있고, 근원을 지나쳐서 제어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조그맣게 잘려서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 갖추어 서술하기도 어려운데, 동쪽 군에 이로운 것이 서쪽 마을에 해가 되는 경우도 있고, 남쪽 읍에 좋은 것이 북쪽 현에 흉한 경우도 있다.
산이 높이 솟은 것은 바꿀 수 없고 물이 멋대로 내달리는 것은 막을 수 없는데, 비유하자면 병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사물이 태어날 때 이 산과 내의 기운을 감득한 이는 그 마음과 그 기세가 서로 비슷하지 않은 경우가 없는데, 사람의 마음이 합하지 않으면 이에 따라 구역이 나뉘어 구한九韓이 되기도 하고 삼한三韓이 되기도 하여, 서로 침략하고 정벌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도적들이 멋대로 날뛰어도 금하고 제어할 수 없었으니 다 유래가 있는 것이다.
전 왕조의 왕씨가

007_0278_b_01L無施不可比之藥則萬應靈丹也故佛
007_0278_b_02L亦號大醫王以之治身則灾病消以之
007_0278_b_03L治心則煩惱亡以之治山川土地則㐫
007_0278_b_04L害變爲吉利裨補之設豈無稽哉
007_0278_b_05L艾者爲世之良藥無病者見之如糞
007_0278_b_06L雖在家園無事於採也若有病者
007_0278_b_07L則不然得善醫者而灸之則沉痾之頓
007_0278_b_08L捷於影響雖有萬金之重無得而
007_0278_b_09L比焉者以其效之有神驗也盖中原之
007_0278_b_10L分諸夏也其地平坦當堯之時洪水
007_0278_b_11L爲灾神禹治之各順地理之宜安有
007_0278_b_12L㐫咎之害哉我國則不然群山競其險
007_0278_b_13L衆水爭其犇或有如龍如虎之相鬪者
007_0278_b_14L或有如禽如獸之飛走者或有自彼而
007_0278_b_15L來攻者或有離源而背走者或有過元
007_0278_b_16L而難制者或有斷微而不及者如斯等
007_0278_b_17L難可具述利於東郡者或有害於
007_0278_b_18L西鄕吉於南邑者或有㐫於北縣
007_0278_b_19L之峻峙不可轉也水之犇放不可遏也
007_0278_b_20L比則多病之人也故人物之生感是山
007_0278_b_21L川之氣者其心其勢無不相類人心
007_0278_b_22L不合區域隨分或作九韓或作三韓
007_0278_b_23L互相侵伐兵革不息盜賊橫行無能
007_0278_b_24L禁制者有自來矣粤有前朝王氏之統

007_0278_c_01L통합할 때에는 다행스럽게도 성모聖母와 도선道詵이 남긴 당부를 받들어 달게 받으니,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현명한 이가 이끄는 듯하였다. 짐짓 불법을 쑥으로 삼아서 산과 내의 아프고 가려운 곳에 의술을 베풀어 모자란 것은 메워 주고, 지나친 것은 억누르고, 달리는 것은 멈추게 하고, 등 돌린 것은 부르고, 해치는 것은 막고, 다투는 것은 금하고, 좋은 것은 심고, 길한 것은 드날려서 비보사찰로 지은 것이 삼천에 이르고 선원을 지은 것이 오백을 채우니 산과 내의 병과 허물이 숨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비보는 병을 치료한다는 말이고, 선종 사찰은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말이다. 병이 없고 마음이 편안한 것은 백성들의 복이고 나라의 이익이다. 그러므로 도적들이 없어지고 백성들의 마음이 화합하고 순종하여 삼한의 안이 뒤섞여 하나의 집안이 되니, 왕업을 일으키는 것이 물동이를 세우듯 하고,140) 나라의 복이 500년에 이르도록 이어졌다. 이는 삼보라는 의학의 쑥을 잘 사용한 효험이다.
병이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갑자기 약을 없애면 나라의 땅의 강녕함을 보존하지 못할까 나는 두렵다. 이것이 비보사찰을 세우는 일을 우리나라에서 없앨 수 없는 까닭이다. 만일 “이전의 왕들이 태평하게 다스리는 정치를 알지 못하여 헛되이 아무 이익도 없는 일로 나라를 번거롭게 하였는데, 우선 없애고 나서 좋고 나쁨을 관찰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한다면, 병든 이가 의사의 치료를 꺼리면서 “이 의사는 헛되이 효과도 없는 약을 써서 나를 괴롭히니, 우선 없애고 나서 병이 낫는지 어떤지를 관찰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급한 위험에 닥쳐서 후회한들 미칠 수 있겠는가?
뒤에 임금이 되어 앞선 왕의 나라를 지키는 이가 앞선 왕의 법도를 없애지 않고 예전 그대로 하는 정치는 믿어 펼쳤기 때문에 유신의 명을 이룰 수 있었는데, 이는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는 것이고 억조의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이다. 『상서尙書』에서 말하기를 “은나라의 거울이 멀지 않으니 하나라 임금의 시대에 있었다.”141)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가깝다.
『유석질의론』 끝

007_0278_c_01L合也幸承聖母道詵之遺囑甘受洞中
007_0278_c_02L如哲之指揮假以佛法爲艾而醫之於
007_0278_c_03L山川痛痒之地缺者補之過者抑之
007_0278_c_04L走者止之背者招之賊者防之爭者
007_0278_c_05L禁之善者樹之吉者揚之裨補之設
007_0278_c_06L至於三千禪院之作盈於五百而山
007_0278_c_07L川病咎無不潜伏裨補者療病之謂
007_0278_c_08L禪刹者靜心之謂也無病而心安
007_0278_c_09L生民之福而國家之利也故盜賊潜消
007_0278_c_10L民心和順三韓之內混爲一家王業
007_0278_c_11L之興若建瓴然國祚之長至於半千
007_0278_c_12L此善三寶醫艾之效驗也余恐病未弭
007_0278_c_13L而藥遽去則國土之康寧不可保也
007_0278_c_14L其所以裨補之設在我國而不可廢也
007_0278_c_15L若曰先王不知治平之政妄爲無益之
007_0278_c_16L以煩家國不如姑去之以觀其吉
007_0278_c_17L何異乎病者之忌其醫療曰是醫
007_0278_c_18L妄用無效之藥以殘吾生不如姑去之
007_0278_c_19L以觀其痊否歟及其危沒而悔之何及
007_0278_c_20L後之人君守是先王之器者不廢先王
007_0278_c_21L之法允敷仍舊之故克就惟新之命
007_0278_c_22L此一人之有慶兆民之所賴也書曰殷
007_0278_c_23L鑑不遠在夏后之世近矣

007_0278_c_24L
儒釋質疑卷終

007_0279_a_01L법사 묵신.
박시형, 박유정, 천비, 옥섬, 능회, 윤매, 자훈, 혜욱, 법정, 박영종, 천집, 성월, 육해, 정행, 지보, 윤호, 맹걸, 사보, 천리, 세륜, 세린, 원형, 순기, 미건, 유륜, 삼월, 지전, 신휘, 지승, 계묵, 혜호, 사익, 인전, 도연, 김언보, 숭묵, 정숙손, 철우, 숭은, 신은, 배석동, 서윤치, 조승, 춘이, 계금, 지우, 이배, 김환, 선민, 조보석, 돌덕, 낵덕, 계안, 현수, 지정, 정희, 혜순, 우비, 한신충, 상오, 오중동, 옥련, 도문, 선근, 각심, 두리동, 오승하, 혜명, 사휘, 혜암, 육행, 법희, 법사 인천, 영수, 석웅.
간수刊手 신미. 연판鍊板 혜윤.
공양주供養主 요원, 설준. 화사化士 담화.
가정 16년 정유년(1537)에 간행함.

007_0279_a_01L
法師默信

007_0279_a_02L朴時亨朴有井千非 [8] 能會閏梅
007_0279_a_03L字薰惠旭法淨朴英宗天緝性月
007_0279_a_04L正行至寶閏湖孟傑泗寶千里
007_0279_a_05L世輪世轔元亨舜基美健有輪森月
007_0279_a_06L智全信輝智承戒默惠浩思益印全
007_0279_a_07L道衍金彥輔崇默鄭叔孫哲牛崇隱
007_0279_a_08L信誾裴石同徐允致祖承春伊戒今
007_0279_a_09L智牛李培金煥禪敏曺寶石乭德▼(內+ㄱ)
007_0279_a_10L戒安賢首智正正熈惠淳牛鼻
007_0279_a_11L韓信忠尙悟吳仲同玉連道文善根
007_0279_a_12L覺心豆里同吳承夏惠明思暉惠岩
007_0279_a_13L六行法熈法師印泉靈修釋雄刊手
007_0279_a_14L信眉鍊板惠允供養主了圓雪峻化士
007_0279_a_15L曇華

007_0279_a_16L
1)嘉靖十六年丁酉歲 [20]

007_0279_a_17L甲本刊記如下「大施主崔元濕連非大施主▣
007_0279_a_18L從華兩主吳莫孫兩主李豆智兩主旕分里
007_0279_a_19L枝碩兩主金銀兩主鄭元弼兩主朴弼終兩主
007_0279_a_20L朴希連兩主金万壽兩主持音尙均比丘法雲
007_0279_a_21L李淑景莫之戒仅▣▣甘大木彐心刊字
007_0279_a_22L祖英德▣供養主印冏幹善道人化士敬心
007_0279_a_23L曆壬午五月日龍仁地瑞鳳寺開板」
  1. 1)삼재三才 : 하늘과 땅과 사람을 가리킨다. 『周易』 「說卦」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늘의 도를 세우니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우니 부드러움과 강함이라 하고, 사람의 도를 세우니 인과 의라 한다. 삼재를 다 아울러서 두 배로 하므로 역易에서는 여섯 획으로 괘가 이루어진다.(是以立天之道曰陰與陽。立地之道曰柔與剛。立人之道曰仁與義。兼三才而兩之。故易六畫而成卦。)”
  2. 2)삼강三綱 : 유교에서 제정한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의 도덕적 질서로서,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비는 자식의 벼리가 되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벼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수평적인 질서가 아니라 상하 차등적인 질서로서 각각 임금, 아비, 지아비를 상대적으로 높이고 있다.
  3. 3)오상五常 : 유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떳떳한 덕으로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4. 4)세 명의~들어가는 임금 : 중국에서 불교를 탄압하였던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북주의 무제武帝, 당나라의 무종武宗을 말한다. 중국 불교의 역사에서 이 세 임금과 후주의 세종世宗이 유독 강하게 불교를 탄압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일으킨 불교 탄압을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라 부른다.
  5. 5)소승小乘 : 작은 수레라는 뜻으로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승불교인들이 그 이전의 불교 전통에 대하여 붙인 이름으로,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할 뿐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지가 없다 하여 이렇게 불렀다. 이처럼 소승이라는 이름은 객관적인 명칭도 아니고 스스로 붙인 이름도 아니며, 대승불교인들이 일방적으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지녔다고 보기 어려우며, ‘소승’이라고 불리는 전통이 모두 이기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과거의 문헌 속에서 사용된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오늘날까지 소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6. 6)천제闡提 : 일천제一闡提라고도 하며, 욕망이 지나치게 강하여 수행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현상적인 상태에 대해 붙인 이름이지 그 사람의 본질이 일천제인 것은 아니다.
  7. 7)만일 이 구절이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불교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일천제라는 이름이 그 사람의 현상적인 상태에 대해 붙인 이름일 뿐 그 사람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욕망에 빠져 있을 때에는 일천제로서 당연히 성불할 수 없을 것이지만, 이를 반성하고 욕망을 제어하며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면 그는 더 이상 일천제가 아니기 때문에 분명코 수행에 따라 성불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천제를 그 존재에 대한 결정적 성품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불교의 인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으로서 결코 불교적인 주장이라 할 수 없다.
  8. 8)사천하四天下 : 사주四洲라고도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사방의 세계, 곧 남쪽의 섬부주贍部洲, 동쪽의 승신주勝神洲, 서쪽의 우타주牛陀洲, 북쪽의 구로주俱盧洲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9. 9)이승二乘 :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을 말한다. 성문은 본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을 가리키며, 연각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홀로 깨친 사람을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는 성문이나 연각이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할 뿐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는 소홀하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을 소승이승小乘二乘이라고 불렀다.
  10. 10)『大方廣佛華嚴經』 권6.
  11. 11)『大方廣佛華嚴經』 권19.
  12. 12)불교의 오계五戒와 유교의 오상五常을 짝지어 일치시키는 것은 북위 때인 460년 무렵에 담정曇靖이라는 승려가 위작한 『提謂波利經』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로 천태 지의天台智顗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과 안지추顔之推 같은 유학자들도 이를 인정하였으며, 조선 초에 활동한 기화己和도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방식이 오계가 곧 오상이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여기에서는 오계가 오상의 단서를 여는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기존의 관점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단순한 방식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성리학 전반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다섯 가지 덕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본다. 따라서 오상은 덕성德性이다. 그런데 불교의 오계는 덕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이다. 기존의 방식대로 오계가 바로 오상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덕성’을 ‘행위’와 동일하게 본 것이기 때문에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처럼 오계가 오상의 단서를 여는 것, 곧 덕을 이루어 가는 혹은 덕을 실천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따라서 지은이는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이해를 갖추고 덕성과 행위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 13)『孟子』 「梁惠王 上」 .
  14. 14)『周易』 「繫辭 上」 .
  15. 15)『論語』 「子罕」 .
  16. 16)묻겠다 : 원문은 ‘曰’이지만 문맥에 따라 ‘묻겠다’, ‘답하겠다’로 번역하였다.
  17. 17)어량語量 : 지식의 근거가 되는 말이라는 뜻으로, 말로 표현된 주장이나 가르침을 가리킨다.
  18. 18)현겁賢劫 : ⓢ bhadrakapa를 의역한 것으로, 석가모니를 비롯한 1천의 부처가 세상에 나오는 현재의 겁을 가리킨다. 과거의 겁인 장엄겁莊嚴劫, 미래의 겁인 성수겁星宿劫과 더불어 삼대겁三大劫이라고 한다.
  19. 19)한 해에 열두 달이 있는 것을 말한다.
  20. 20)양기와 음기를 받아 생겨난 것들을 말한다.
  21. 21)육합六合 : 육허六虛라고도 한다. 하늘ㆍ땅ㆍ동쪽ㆍ서쪽ㆍ남쪽ㆍ북쪽을 말하며 온 누리를 가리킨다.
  22. 22)이는 송나라 소옹邵雍의 상수학에 따른 것이다. 소옹의 상수학은 하도와 낙서를 도형화圖形化한 것으로, 이에 따르면 하도는 기수奇數를 양점陽點으로, 우수偶數를 음점陰點으로 해서 1~10의 모두 55점을 사방과 중앙에 배치한 도상圖象이다. 즉 북방에는 1점과 6점, 남방에는 2점과 7점, 동방에는 3점과 8점, 서방에는 4점과 9점, 그리고 중앙에 5점과 10점을 이중으로 배치하였다. 이 가운데 1~5를 낳는 수(生數), 6~10을 이루는 수(成數)라고 하였다. 낙서는 기수인 1점을 북방에, 3점을 동방에, 5점을 중앙에, 7점을 서방에, 9점을 남방에 배치하고, 우수인 2점은 서남방에, 4점은 동남방에, 6점은 서북방에, 8점은 동북방에 배치하였다.
  23. 23)연기緣起 : 불교의 근본 가르침으로서 인연因緣이라고도 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 가는데, 그 변화는 우연적이거나 운명적인 것도 아니고, 하나의 원인에 의해 그 결과가 결정되는 결정론적 인과율에 따르는 것도 아니며, 원인(因)과 그것을 둘러싼 여러 가지 조건(緣)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과(果)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처럼 연기의 이법은 객관적이고 영원하며 어떠한 예외도 없는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조건성을 그 내용으로 한다.
  24. 24)양의兩儀 : 음과 양의 두 기氣를 말한다.
  25. 25)곧 이십사절기이다.
  26. 26)문왕文王 : 주 왕조 건립에 기반을 닦은 인물로, 아들 무왕 때에 이르러 마침내 은 왕조를 무너뜨리고 주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무왕과 함께 성인으로 칭송받는다.
  27. 27)전설에 따르면 복희씨가 괘卦를 만들고 문왕이 괘사卦辭를 짓고 주공이 효사爻辭를 짓고 공자가 십익十翼을 지었다고 한다.
  28. 28)네 철의 여섯 절기에서 첫 번째인 입춘ㆍ입하ㆍ입추ㆍ입동을 말한다.
  29. 29)네 철의 여섯 절기에서 네 번째이며 뒤의 세 절기의 시작인 춘분ㆍ하지ㆍ추분ㆍ동지를 말한다.
  30. 30)중기中氣 : 이십사절기를 열두 달로 나누어 한 달에 두 절기씩 맞춘 뒤 앞의 것을 ‘절기節氣’, 뒤의 것을 ‘중기’라고 하였는데, 입춘ㆍ경칩ㆍ청명ㆍ입하ㆍ망종ㆍ소서ㆍ입추ㆍ백로ㆍ한로ㆍ입동ㆍ대설ㆍ소한은 절기가 되고, 우수ㆍ춘분ㆍ곡우ㆍ소만ㆍ하지ㆍ대서ㆍ처서ㆍ추분ㆍ상강ㆍ소설ㆍ동지ㆍ대한은 중기가 된다.
  31. 31)동ㆍ서ㆍ남ㆍ북에 해당하는 진방ㆍ태방ㆍ이방ㆍ감방을 말한다.
  32. 32)네 철의 여섯 절기에서 여섯 번째이며 끝인 곡우ㆍ대서ㆍ상강ㆍ대한을 말한다.
  33. 33)『周易』 「繫辭 上」 .
  34. 34)오행의 상극으로 보면 불이 쇠를 이기기 때문에 쇠의 기운이 강한 가을의 절기인 처서와 백로는 불의 방위인 남방을 꺼린다는 뜻이다.
  35. 35)이는 중국의 지형으로 설명한 것이다. 중국의 지형은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줄기가 동쪽 황해로 흘러든다.
  36. 36)세 기 : 우수ㆍ대서ㆍ동지를 말한다.
  37. 37)청명은 봄, 소서는 여름, 한로는 가을, 소한은 겨울의 마지막 절기이다.
  38. 38)네 개의 절기에 중기인 처서 하나를 더하였다는 뜻이다.
  39. 39)동지의 복復괘는 다섯 개의 음 아래에 하나의 양이 있는데, 이는 굳센 양기가 돌아온다는 뜻이다.
  40. 40)하지의 구姤괘는 다섯 개의 양 아래에 하나의 음이 있는데, 하나의 부드러운 음기가 다섯의 강한 양기를 만난다는 뜻이다.
  41. 41)이 부분은 오류가 있다. 도표에서 경칩은 입동ㆍ동지와 함께 있는데 이는 겨울이고 북쪽이다.
  42. 42)진ㆍ술ㆍ축ㆍ미는 모두 간방이다.
  43. 43)『欽定協紀辨方書』의 「五合五離」 편에 “다섯 가지 합함과 다섯 가지 떨어짐이 『의례속술義例俗術』에 보이는데, 또한 갑인ㆍ을묘에는 해와 달이 합하고, 병인ㆍ정묘에는 음과 양이 합하고, 무인ㆍ기묘에는 사람들이 합하고, 경인ㆍ신묘에는 쇠와 돌이 합하고, 임인ㆍ계묘에는 물줄기들이 합하며, 갑신ㆍ을유에는 해와 달이 떨어지고, 병신ㆍ정유에는 음과 양이 떨어지고, 무신ㆍ기유에는 사람들이 떨어지고, 경신ㆍ신유에는 쇠와 돌이 떨어지고, 임신ㆍ계유에는 물줄기들이 떨어진다(甲寅乙卯爲日月合。丙寅丁卯爲陰陽合。戊寅己卯爲人民合。庚寅辛卯爲金石合。壬寅癸卯爲江河合。甲申乙酉爲日月離。丙申丁酉爲陰陽離。戊申己酉爲人民離。庚申辛酉爲金石離。壬申癸酉爲江河籬。)고 한다. 오행으로 이름을 세우는 것이 다섯 가지 합함과 다섯 가지 떨어짐의 본래 뜻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갑을은 왜 해와 달이고 병정은 왜 음과 양인지 모두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세속에서 이를 따라 무인ㆍ기묘를 크게 길하다 여기고, 무신ㆍ기유를 크게 흉하다 여기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견강부회하는 것의 해로움이 이치로 따져 보면 거의 다 이와 같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인과 묘는 다섯 가지 합함이 되고, 신과 유는 다섯 가지 떨어짐이 된다.
  44. 44)티끌 수 : 온 우주를 부수어 티끌로 만들었을 때의 숫자를 말하는 것으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나타낸다.
  45. 45)삼세三世 :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46. 46)『老子』 6장. 전문은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谷神不死。是謂玄牝。玄牝之門。是謂天地根。)”이다.
  47. 47)『老子』 21장. 전문은 “도라는 것은 아리아리하다. 아리아리한데 그 가운데 모습이 있다. 아리아리한데 그 가운데 사물이 있다. 아득하고 흐릿한데 그 가운데 정미한 것이 있고, 그 가운데 믿을 만한 것이 있다.(道之爲物。惟恍惟惚。惚兮恍兮。其中有象。恍兮惚兮。其中有物。窈兮冥兮。其中有精。其中有信。)”이다.
  48. 48)『老子』 10장. 전문은 “하나를 품어 기를 오롯하게 하는 것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다.(抱一。能無離乎專氣。)”이다.
  49. 49)『老子』 32장. 전문은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知止。可以不殆。)”이다.
  50. 50)『老子』 19장.
  51. 51)“하늘의 명령을 성이라 한다.”라는 말은 「中庸章句」 1장에 나오지만 구절 전체는 분명한 출처가 없다. “온갖 차별적인 것들의 근본이다.”라는 표현은 『性理大全』 「性理二」 ‘氣質之性’ 편에 “천지의 성(天地之性)은 태극의 본연의 묘함이고, 온갖 차별적인 것들의 하나의 근본이다.”라는 주자朱子의 말이 실려 있지만, 『性理大全』이 조선에 들어와 유통된 시기를 고려해 보면 저자가 이를 보았는지는 의문이다. 역자가 생각하기에, 저자가 『四書集註』의 『論語』 「里仁」이나 「中庸章句」 제29장의 주석 등에 보이는 ‘온갖 차별적인 것들의 근본’이라는 표현으로 『四書集註』에 실린 「中庸章句」 의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간략하게 정리한 뒤 『中庸』 본문과 합쳐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52. 52)『四書集註』 「大學章句」 경1장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의 ‘明德’에 대한 주석.
  53. 53)『尙書』 「虞書」 ‘大禹謨’.
  54. 54)진여眞如 : 존재의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55. 55)「中庸章句」 1장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한다.(率性之謂道)”라는 구절이 있다.
  56. 56)여섯 가지 인식의 대상 : 눈의 대상 모양, 귀의 대상 소리, 코의 대상 냄새, 혀의 대상 맛, 몸뚱이 살갗의 대상 닿음, 정신의 대상 법을 말한다.
  57. 57)영가 현각永嘉玄覺의 ≺證道歌≻.
  58. 58)태허太虛 : 온 우주를 말한다.
  59. 59)『佛祖統紀』ㆍ『佛祖歷代通載』ㆍ『廣弘明集』 등 많은 중국 불교 문헌에 실려 있는데 원문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60. 60)희준犧樽 : 옛날 중국의 술 단지인데 제사에서 희생으로 바치는 소의 모양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술 단지 옆면에 소 그림을 그렸다고도 한다.
  61. 61)삼악도三惡途 : 윤회하는 여섯 부류의 중생 가운데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 지옥 중생, 아귀, 축생의 세 가지 부류를 가리킨다.
  62. 62)어둑한 데 : 저승이나 귀신들의 세계를 가리킨다.
  63. 63)불교에서 말하는 천문 현상에 대한 설명이 중국 고대의 전통적인 주장과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64. 64)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말하며 특히 언어적인 가르침을 가리킨다.
  65. 65)고양이의 눈동자가 시간에 따라 모습이 바뀐다는 말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易經存疑』 「繫辭下傳」 제2장에는 “고양이 눈 속의 검은 눈동자가 하루 12시에 따라 변한다.(猫兒眼中黑睛一日隨十二時改變)”라는 구절이 있다.
  66. 66)이때의 ‘고양이의 눈’은 실제 고양이의 눈이 아니라 ‘묘아안석猫兒眼石’ 또는 ‘묘아안’으로 불리는 광물을 말한다. 이 광물은 고양이의 눈처럼 시간에 따라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변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67. 67)이는 옛날 중국의 여러 문헌에 실려 있는데 비유하는 물건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易經存疑』 「繫辭下傳」 제2장에서는 “자시ㆍ오시에는 실 같고 묘시ㆍ유시에는 동그랗고, 인시ㆍ신시ㆍ사시ㆍ해시에는 대추 씨 같고, 진시ㆍ술시ㆍ축시ㆍ미시에는 온전한 은행 같네.(子午線兮卯酉圓。寅申巳亥如棗核。辰戌丑未杏仁全。)”라고 하였다.
  68. 68)황극皇極 : 하늘이나 황제의 지위를 말하기도 하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정中正의 도를 말하기도 한다.
  69. 69)단견斷見 : 단멸론斷滅論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발생하던 무렵 인도에서 일단의 자유사상가들이 제기하였던 인간관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 영원한 자아가 없기 때문에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 뿐 윤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윤회에 기반한 업의 법칙과 도덕률 등을 부정하여 도덕적 무정부주의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석가모니는 단견과 상견을 모두 비판하고 단상중도斷常中道의 새로운 인간론을 제시하였다.
  70. 70)상견常見 : 상주론常住論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발생하던 무렵 인도에서 우파니샤드의 요가 수행자들이 제기하였던 인간관으로서 현상적인 자아의 내면에 인과의 흐름 속에 들어가지 않는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 영원한 자아가 곧 우주의 자아인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전개하였다. 석가모니는 단견과 더불어 상견도 잘못된 인간관으로 비판하고 단상중도의 새로운 인간론을 제시하였다.
  71. 71)미시未時, 신시申時, 유시酉時를 말한다.
  72. 72)축시丑時, 인시寅時, 묘시卯時를 말한다.
  73. 73)오음五陰 : 불교에서 말하는바 중생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 감각 작용, 표상 작용, 경향성, 의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서 오온五蘊이라고도 한다.
  74. 74)『佛祖統紀』ㆍ『佛祖歷代通載』ㆍ『鐔津文集』 등에 나온다.
  75. 75)『鐔津文集』 「送郭公甫朝奉詩敘」 에는 곽공보郭公甫가 글과 시를 잘 지어서 매성유梅聖俞ㆍ장표민章表民 같은 이들이 이태백이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겼다는 말이 나오는데, 북송의 관료이자 시인인 곽정상郭正祥(1035~1113)을 말한다. 자가 공보功甫인데 ‘功輔’로 기록된 경우도 많다. 호는 사공산인謝公山人ㆍ취인거사醉引居士ㆍ정공거사淨空居士 등 여러 가지이다. 여러 선사들과 주고받은 대화가 선종 문헌들에 실려 있으며, “관료의 몸을 나투어 불사를 일으켰으니, 욕망 속에 있으면서도 욕망이 없고, 티끌 속에 있으면서도 티끌에 물들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라는 말이 『禪林寶訓音義』에 실려 있다. 시풍이 자유분방하여 이태백과 매우 닮았다는 평이 있으며, 저서로 『靑山集』이 있다.
  76. 76)당요唐堯 : 요임금을 말한다. 제곡帝嚳의 아들로서 성은 이기伊祁(또는 伊耆)이고 이름은 방훈放勳이다. 처음에는 도陶에 봉해졌다가 다시 당唐에 봉해졌기 때문에 도당씨陶唐氏라고도 한다. 당요도 여기에서 나온 이름이다. 아들 단주丹朱가 못났다 하여 순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77. 77)우순虞舜 : 순임금을 말한다. 성은 요姚이고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먼저 우虞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우순虞舜이라 칭한다. 요임금의 두 딸과 결혼한 뒤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78. 78)우禹임금 :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인 하夏 왕조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순임금 때 홍수를 잘 다스려 나라를 구하였으며, 그 공으로 순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아 나라 이름을 ‘하’로 정하고 중국 전역을 9주州로 나누어 공부貢賦를 정하였다고 한다.
  79. 79)탕왕湯王 : 성탕成湯 또는 태을太乙이라고도 한다. 하 왕조를 멸망시키고 은殷 왕조를 세운 인물로서 전설상에서는 신화적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한다.
  80. 80)문왕ㆍ무왕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은 왕조를 무너뜨리고 주周 왕조를 세운 사람은 무왕이지만 문왕이 그 바탕을 이룩하였으므로 문왕과 무왕을 합하여 한 명의 왕처럼 부르기도 한다.
  81. 81)설契 : 전설상 상商나라의 선조로 일컬어진다. 제곡의 아들로서 순임금 때 우가 치수하는 것을 도운 공로로 사도司徒로 임명되고 상商 땅에 봉해졌다.
  82. 82)후직后稷 : 전설상 주나라의 선조로 일컬어진다. 전설에 따르면 어머니 강원姜嫄이 천제天帝의 발자국을 밟고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버리고 기르지 않았으므로 기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순임금이 농사를 관장하는 관리로 임명하여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게 하였으며 그 공으로 ‘후직’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83. 83)익益 : 백익伯益을 말한다. 전설에 따르면 백익은 우가 치수하는 것을 도와 공을 세웠으며, 우임금이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이를 피하여 기산의 북쪽으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84. 84)고요皐陶 : 전설상의 인물로 순임금 때 사법관의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85. 85)『尙書』 「虞書」 .
  86. 86)기夔 : 전설상의 인물로 순임금 때 음악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자 이것으로 처음 악곡을 지었다고 한다.
  87. 87)수倕 : 전설상의 인물로 기술이 뛰어나서 요임금 때 공사工師의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문헌에 따라 황제 때 인물로 보기도 한다.
  88. 88)희화羲和 : 희씨羲氏와 화씨和氏를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찍이 요임금이 희중羲仲ㆍ희숙羲叔 형제와 화중和仲ㆍ화숙和叔 형제에게 명하여 사방으로 나누어 나아가 하늘의 모습을 살펴 역법을 제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해 수레를 모는 신이나 해의 어머니라는 설화도 있으며, 해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89. 89)서한의 승상 우정국于定國의 아버지인 우공于公이 무너진 마을의 문을 수리한 뒤, 작은 문을 키워서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의 높은 덮개도 지날 수 있게 하였으니 자손 가운데 반드시 크게 될 이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아들 우정국이 승상이 되었다는 고사가 『漢書』에 실려 있다.
  90. 90)북송 때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낸 왕우王祐(923~986)가 마당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세 아들 가운데 삼공三公이 될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둘째 아들 왕단王旦이 승상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91. 91)진秦나라의 거울(秦鏡) : ‘진경秦鏡’은 진감秦鑑ㆍ방경方鏡ㆍ함양경咸陽鏡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며, 중국의 진시황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네모난 거울이다. 이에 비추면 사람 몸의 오장육부도 볼 수 있고, 사람 마음의 옳고 그름도 가릴 수 있었다고 한다.
  92. 92)『周易』 「坤卦 文言」 .
  93. 93)『周易』 「繫辭下傳」 제5장.
  94. 94)처형당하여 시체가 버려진다는 뜻이다.
  95. 95)멀리 귀양을 간다는 뜻이다.
  96. 96)음적陰賊 : 숨어서 몰래 해친다는 뜻이다.
  97. 97)귀역鬼蜮 : 귀신을 뜻하는 귀鬼와 물여우를 뜻하는 역蜮을 함께 칭하는 말이다. 『詩經』 「小雅」 ≺何人斯≻의 “귀신이 되고 물여우가 되니 얻을 수 없다.(爲鬼爲蜮。則不可得。)”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귀와 역은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해치는 요괴인데, 뒤에는 마음을 험악하게 써서 몰래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소인배들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98. 98)체體 : 맥락으로 볼 때 육체와 대비되는 마음 또는 덕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99. 99)『孟子』 「梁惠王 下」 . 원문은 “出乎爾者反乎爾者也。”이다.
  100. 100)사람들이 음적에 대해서는 뱀이나 호랑이처럼 싫어하고 미워하여 치고자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01. 101)이임보李林甫(?~752) : 당나라 현종 후기의 재상으로서, 고조(李淵)의 사촌 동생인 장평왕長平王 이숙량李叔良의 증손이다. 19년 동안 재상을 지내고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으나 사후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관조차 서민용의 작은 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음험하고 책략이 많아서 “입에는 꿀, 배 속에는 칼(口蜜腹劍)”이라는 평을 받았다.
  102. 102)대낮에 하늘로 올라가지(白日昇天) : 도교에서는 사람이 도를 닦아 얻은 뒤에는 대낮에 하늘로 날아올라 신선이 된다고 말한다. 진晉나라 때 갈홍葛洪이 지은 『神仙傳』 「陰長生」 에는 “뒤에 평도산 동쪽에서 대낮에 하늘로 올라가 사라졌다.(後於平都山東白日昇天而去)”라는 말이 있고, 『魏書』 「釋老志」 에는 “그 가르침은 모두 삿된 얽매임을 깨끗하게 없애고 마음과 정신을 눈처럼 깨끗하게 씻으며, 행위를 쌓고 공을 세우고 덕을 쌓고 선을 키우며 나아가 대낮에 하늘로 올라가는 데에까지 이른다.(其爲敎也。咸蠲去邪累。澡雪心神。積行樹功。累德增善。乃至白日昇天。)”라는 말이 있다.
  103. 103)명을 맡은 관리(命吏) : ‘명리命吏’는 명을 받은 관리나 조정의 관리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저승의 관리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알맞다.
  104. 104)이임보의 이 일화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李林甫外傳』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05. 105)오역죄五逆罪 :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부르는 다섯 가지 큰 죄를 말한다. 『阿闍世王問五逆經』에서는 “오역죄가 있으니 만일 족성의 남자나 여자가 이 다섯 가지 구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다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 어머니를 죽이는 것, 아라한을 해치는 것, 뭇 승려들과 싸우는 것, 여래 계신 곳에 대해 악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有五逆罪。若族姓子。族姓女爲是五不救罪。必入地獄無疑。云何爲五。謂殺父。殺母。害阿羅漢。鬪亂衆僧。起惡意於如來所。)”라고 하였다. 또 『觀無量壽經』에서는 “어떤 중생이 선하지 못한 업을 지어 오역죄나 십악을 저지르고 뭇 선하지 못한 것을 갖춘다면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악업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다.(或有衆生作不善業。五逆十惡。具諸不善。如此愚人以惡業故。應墮惡道。)”라고 하였다.
  106. 106)음사陰司 : 저승을 다스리는 기관을 말한다.
  107. 107)하늘이 덮고 있는 것은 하늘 아래 모든 존재를 말한다.
  108. 108)곡식 농사 짓는 이와 채소 농사 짓는 이를 말한다.
  109. 109)공자의 제자인 안연顏淵을 말한다.
  110. 110)업을 닦고 덕을 증진하는(修進) : ‘수진修進’은 덕을 증진하고 업을 닦는다는 뜻의 ‘진덕수업進德修業’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111. 111)관례를 행하여 어른이 되었으므로 독립하여 분가시킨다는 뜻이다.
  112. 112)관리를 뽑는 과거 시험을 보러 갔다는 뜻으로 보인다.
  113. 113)남궁南宮 : 예부회시禮部會試 곧 진사고시進士考試를 말한다.
  114. 114)과거에 급제하였으며(折桂) : ‘절계折桂’는 계수나무 숲에서 가지 하나를 꺾는다는 뜻으로서,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115. 115)그가 처음 두 번 절에 갔을 때에는 그를 ‘상공’이라고 부르며 올 것을 알려 주었는데 세 번째 갔을 때는 ‘상공’이라는 말로써 알려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116. 116)≺出生偈≻의 세 번째 구절이다. 전체는 다음과 같다. “너희 귀신의 무리여, 내가 이제 너희에게 음식을 베푼다, 일곱 알로 온 누리에 두루 베푸니, 모든 귀신들은 함께하라.(汝等鬼神衆。我今施汝供。七粒遍十方。一切鬼神共。)”
  117. 117)하도와 낙서에 기반하여 주역을 만들고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복희씨를 비롯한 중국의 성인들을 말한다.
  118. 118)가지加持 : 부처의 큰 자비가 중생들에게 입혀지고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119. 119)칠정七政 : 칠요七曜와 같은 말로서 하늘에서 빛나는 일곱 가지 사물인 해ㆍ달ㆍ금성ㆍ목성ㆍ수성ㆍ화성ㆍ토성을 말한다. 이 밖에 하늘ㆍ땅ㆍ사람ㆍ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북두칠성의 일곱 별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120. 120)몸을 옆으로 하는 것 :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보통의 짐승들을 말한다.
  121. 121)몸을 세운 것 : 두 발로 서서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122. 122)네 가지 중생 : 태어나는 방식에 따라 중생을 분류한 것으로, 태에서 나는 것, 알에서 나는 것, 습기에서 나는 것, 변화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123. 123)아홉 가지 중생 : 앞의 네 가지 중생에다 형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과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 중생을 더한 것이다.
  124. 124)이 한 번의 과보 : 현생에서 과보를 받아 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125. 125)지관止觀 : 불교의 수행법 가운데 하나로서, 산란한 마음의 작용을 멈추고(止)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觀)을 말한다.
  126. 126)참화參話 :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선종의 간화선看話禪을 말한다.
  127. 127)자량資糧 : 의지할 식량이라는 뜻으로서 수행의 바탕이 되는 것을 말한다.
  128. 128)『四十二章經』.
  129. 129)선종의 설화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대중에게 설법을 할 때에 단지 연꽃 한 송이만을 가만히 들어 올리자 다른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것으로서 경전에서 문자로 전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한다.
  130. 130)오파五派 : 혜능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남종선은 뒤에 임제종臨濟宗ㆍ법안종法眼宗ㆍ위앙종潙仰宗ㆍ조동종曹洞宗ㆍ운문종雲門宗의 다섯 파로 나뉘었는데 이를 가리킨다.
  131. 131)대혜大慧 선사(1089~1163) : 송나라 때의 고승으로서 법명은 종고宗杲이다. 기존의 선수행법과 당시에 유행하던 묵조선默照禪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일상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하여 새로운 선법을 열었다.
  132. 132)『大慧語錄』 「答李參政別紙」 . 대혜 자신의 말이 아니고 ‘선성先聖’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133. 133)위음왕불威音王佛 : 『法華經』에서 말하는 최초로 깨달은 부처이다.
  134. 134)외도外道 : 불교 전통에 속하지 않는 수행자와 사상가들을 말한다.
  135. 135)그려야 할 호랑이는 정작 그리지 못하고 고양이만 그리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136. 136)무간지옥無間地獄 : 여덟 가지 뜨거운 지옥 가운데 하나로서, 괴로움이 잠시 멈추는 사이도 없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부모나 아라한을 죽이거나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부처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탑이나 절을 파괴하는 이들이 죽고 나서 이곳에 떨어진다고 한다.
  137. 137)보이지 않는 세계와 밝게 드러난 세계, 저승과 이승을 말한다.
  138. 138)영단靈丹 : 고대에 도사들이 연성하던 단약의 일종으로서 온갖 병을 다 낫게 하고 불로장생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139. 139)제하諸夏 : 중국을 가리킨다. 주나라 때에는 봉건제를 채택하여 제후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 각자 다스리게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140. 140)지붕 위에 물동이를 거꾸로 세우면 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려 막힘이 없다는 뜻이다.
  141. 141)이 구절은 『詩經』 「大雅」 ≺蕩≻에 나온다. 저자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1. 1)「義」作「義」{甲}。
  2. 1)「藏」通「臟」{編}。
  3. 1)「太」作「大」{甲}。
  4. 1)「卯」疑「午」{編}。
  5. 1)「胄」作「胃」{甲}。
  6. 2)「法之…夙喪(次頁上段十九行)」缺落{甲}。
  7. 1)「嗔叱」作「眞化」{甲}。
  8. 2)「太」作「大」{甲}。
  9. 1)「氷」作「水」{甲}。
  10. 1)甲本刊記如下「大施主崔元濕。連非。大施主▣從華兩主。吳莫孫兩主。李豆智兩主。旕分里。朴枝碩兩主。金銀兩主。鄭元弼兩主。朴弼終兩主。朴希連兩主。金万壽兩主。持音尙均。比丘法雲。李淑景。莫之。戒仅。莫。▣▣甘。大木彐心。刊字。祖英。德▣。供養主印冏。幹善道人化士敬心。萬曆壬午五月日。龍仁地瑞鳳寺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