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청허당집(淸虛堂集) / 淸虛堂集序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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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당집淸虛堂集
청허당집淸虛堂集 서문
청허당淸虛堂이 시적示寂한 지 20여 년 뒤에 그의 문도인 보진葆眞과 언기彦機와 쌍흘雙仡 등 여러 사문들이 그의 시문詩文 약간 질帙을 판각하여 장차 인행印行하려 하면서 그 서문을 써 달라고 나에게 찾아왔다. 이에 내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응대하였다.
“청허자淸虛子는 석가釋迦의 교도敎徒이다. 그런데 나는 바야흐로 향촌鄕村의 학당學堂에서 골몰하고 있어 언어와 문자가 서로 같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그 문집에 서문을 쓸 수 있겠는가. 만약 청허의 신령이 밝게 내려다본다면, 필시 그대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제자들이 내 마음을 찍지는 않고 내 말만 찍는가? 이것은 눈물과 가래의 찌꺼기일 뿐인데 어찌하여 찍는 것인가? 또 어찌하여 오줌과 같은 것을 가져다가 나의 금속정金粟頂1)을 더럽히려고 하는가?’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보진葆眞 등이 말하였다.
“우리 스님은 임제臨濟의 적종嫡宗이시다. 원元나라 말기에 석옥 화상石屋和尙이 고려의 태고 선사太古禪師에게 전하였고, 태고는 환암幻庵에게 전하였고, 환암은 귀곡龜谷에게 전하였고, 귀곡은 정심正心에게 전하였고,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전하였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였고,

007_0658_c_01L[淸虛堂集]

007_0658_c_02L1)淸虛堂集序 [1] [2]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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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_0658_c_04L
淸虗堂示寂之二十餘年其徒葆眞彥
007_0658_c_05L機䨥 [1] 仡等諸沙門刻其詩文若干帙
007_0658_c_06L將印布而徵其序引於植植漫應之曰
007_0658_c_07L淸虛子釋迦徒也余方汨沒村學言語
007_0658_c_08L文字不類若何而序其集設若淸虛
007_0658_c_09L一靈昭昭必喝爾等曰弟子不印吾心
007_0658_c_10L而印吾言且是涕沫之餘也奚其印
007_0658_c_11L又奚取溲勃而汚吾金粟頂云爾則何
007_0658_c_12L以哉眞等曰吾師臨濟之嫡宗也
007_0658_c_13L季有石屋和尙傳之高麗太古禪師
007_0658_c_14L古傳之幻庵幻庵傳之龜谷龜谷傳之
007_0658_c_15L正心正心傳之智嚴智嚴傳之靈觀
007_0658_c_16L{底}崇禎三年京畿道朔寧地龍腹寺刊七卷本
007_0658_c_17L(卷一∼三서울大學校所藏ㆍ卷四∼七東國大
007_0658_c_18L學校所藏ㆍ卷五∼七李丙疇所藏) {甲}刊年未詳
007_0658_c_19L二卷本(李丙疇所藏) {乙}刊年未詳二卷本(高麗
007_0658_c_20L大學校所藏) {丙}刊年未詳二卷本(東國大學校
007_0658_c_21L所藏) {丁}康熙五年桐裡山泰安寺開板二卷本
007_0658_c_22L(東國大學校所藏) {戊}刊年未詳妙香藏板四卷
007_0658_c_23L本(國立圖書館所藏) {己}刊年未詳妙香藏板四
007_0658_c_24L卷本(精神文化硏究院圖書館所藏) {庚}刊年未
007_0658_c_25L詳妙香藏板四卷本(東國大學校所藏) {辛}刊年
007_0658_c_26L未詳妙香藏板四卷本(國立圖書館所藏)李植
007_0658_c_27L序文無有{甲}{乙}{丙}{丁}{戊}{己}{庚}{辛}

007_0659_a_01L영관은 우리 스님에게 전하였다. 지금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며 읊은 선송禪頌이 모두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문집의 서문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나는 그쪽의 학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어떻게 전해진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는 감히 서문을 쓸 수가 없다.”
보진 등이 말하였다.
“우리 스님은 일찍이 양종兩宗의 판사判事를 겸하고 팔방의 총림叢林을 총령總領하며 도량을 크게 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의 병석甁錫2)을 들고 남쪽으로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온 나라의 현경賢卿과 석유碩儒들이 모두 그 뜻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자 우리 스님이 비로소 서산西山에서 나와 군문軍門에 나아가서 승려들을 소집하고, 고제高弟인 유정惟政 등에게 당부하여 왜적을 막는 일을 돕게 하였으므로, 온 나라의 장상將相과 군민軍民들이 모두 그 공을 추앙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문집의 서문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이것은 대략적인 자취일 따름이니, 어떻게 정밀한 내용을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는 서문을 쓰기에 부족하다.”
보진 등이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조宣祖께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내교內敎(불교)를 억압하셨으므로, 우리들이 근근이 살아가며 청금靑衿(儒生)의 노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선묘宣廟께서 유독 우리 스님만은 돌보아주셨으니, 이는 일찍이 스님의 저술을 열람하고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통한 죄를 씻어 주고 후하게 대우하시는 한편, 친히 어필御筆을 내려 빛나게 장식해 주시면서 시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셨고, 또 특별히 선호禪號를 하사하며 홍자가사紅紫袈裟를 갖추어 착용하게 하셨다. 이는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혜이니, 우리 임금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문집의 서문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선묘宣廟께서 어찌 취한 바 없이 그렇게 하셨겠는가. 나도 일찍이 이 문집을 한번 보았는데, 마음속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의 말은 은연중에 현묘한 뜻에 계합되는 가운데, 성률聲律에 구애받지도 않고 배비排比(對句) 역시 잡되지 않으면서 의취意趣가 고매하고 기봉機鋒이 예리하였다. 요컨대 수불염퇴竪拂拈搥3)하는 그 위에서 얻은 것이니, 관휴貫休4)나 광선廣宣5)의 무리가 아침에 신음하고 저녁에 탄식하면서 소인騷人 묵객墨客의 시와 비교하여 자구字句나 뜯어고치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
옛사람은 반드시 먼저 실제 내용을 갖추고 나서 이것을 글로 발표하였다. 가령 풍아風雅(『詩經』)ㆍ전모典謨(『書經』)나

007_0659_a_01L靈觀傳之吾師今其叅話禪頌具在
007_0659_a_02L是而序其集可乎曰余不叅其學焉知
007_0659_a_03L其傳是不敢以序矣眞等曰吾師甞
007_0659_a_04L兼兩宗判事捴領八方叢林大開道塲
007_0659_a_05L旣而提一缻錫南入頭流不返由是一
007_0659_a_06L國賢卿碩儒皆高其志及壬辰之難
007_0659_a_07L吾師始出西山詣軍門召集緇流以付
007_0659_a_08L高弟惟政等助捍大冦由是一國將相
007_0659_a_09L兵民咸推其功以是而序其集可乎
007_0659_a_10L曰此其粗迹焉能盡其精不足以序矣
007_0659_a_11L眞等曰昔我宣祖崇儒統抑內敎
007_0659_a_12L徒厪厪從靑衿之隷役然宣廟獨眷顧
007_0659_a_13L吾師盖甞覽其著述而嘉其誠旣湔
007_0659_a_14L祓寃累而厚賫之矣又親灑翰墨
007_0659_a_15L加賁飾仍命賦詩而進之矣又特賜禪
007_0659_a_16L兼用紅紫袈裟具副焉此曠世異數
007_0659_a_17L即我聖人奚取焉以是而序其集可乎
007_0659_a_18L植起而曰宣廟豈無所取而然也
007_0659_a_19L吾甞一閱是集而有所感矣是其言也
007_0659_a_20L㝠着玄契不拘聲律不襍排比而意
007_0659_a_21L趣超邁機鋒迅利要於竪拂拈搥上得
007_0659_a_22L非若貫休廣宣軰朝吟暮唶以與
007_0659_a_23L騷人墨客較敲推而已也古之人必先
007_0659_a_24L有實而後發之爲文即如風雅典謨

007_0659_b_01L공맹孔孟(공자와 맹자)의 훈계와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래로 구류九流 제자諸子나 소장蘇張(蘇秦과 張儀)의 변론과 신한申韓(申不害와 韓非子)의 논술 같은 것도 비록 성인聖人의 그것과 한가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모두 실제 내용이 있는 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청허자淸虛子로 말하면 한 시대 선문禪門의 종장宗匠으로서 자성自性을 보고 마음을 밝혀 오해悟解한 점이 있으니, 그 정영精英의 발로가 이와 같은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옛날 우리 주 부자朱夫子(朱熹)가 일찍이 고사古寺에서 노닐다가 여러 조사祖師들의 전기傳記를 보고는 그 괴위魁偉하고 웅걸雄傑한 것을 찬미하는 한편, 당시에 도학道學이 없는 관계로 불씨佛氏에게 끌려 다닌다고 애석하게 여겼으니, 이는 쇠세衰世를 탄식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선묘宣廟께서 청허자에게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 은미隱微한 뜻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우선 이렇게 써서 서론에 갈음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경오년(1630) 7월 15일에 덕수德水 이식李植 여고보汝固父는 쓰다.
내가 일찍부터 외람되나마 족적足跡을 남기는 것을 어렵게 여겨 시가지市街地에 출입하지 않았는데, 산인山人 납자衲子들이 그런 괴벽스러운 소문을 듣고서 왕왕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내가 미상불 그들을 맞아 함께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을 물어보면, 그들은 문득 서산西山이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그들은 서산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나서 얼굴도 접하지 못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道를 입으로만 읊조릴 뿐 제대로 논하지 못하면서도 그 도를 일컬을 때에는 또한 서산이야말로 우리 동방의 대종사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마음속으로 기망冀望하고 있던 차에, 하루는 그의 문도門徒인 보진葆眞과 언기彦機가 나를 찾아와서 서산의 유고遺稿라고 하며 간단히 서론 한마디를 써달라고 청하였다.
대저 석씨釋氏의 도는 적멸寂滅을 종지로 삼고 간이簡易함을 법도로 삼는다. 그런데 그의 유문遺文을 모아서 서문을 쓰고 후세에 전한다면, 그 자취를 너무 드러내는 것이니, 서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질質이 있으면 문文이 있는 것이고, 실實이 있으면 명名이 있는 법이다. 질과 문, 명과 실이 있으면 자취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으니,

007_0659_b_01L孔孟訓戒無論已下至九流諸方蘇張
007_0659_b_02L之辯申韓之術雖不足以一槩諸聖
007_0659_b_03L然皆所謂有實之文也矧惟淸虛子
007_0659_b_04L爲一代禪宗見性明心有所悟解
007_0659_b_05L其精英之發固如是矣昔吾朱夫子
007_0659_b_06L甞遊古寺見諸祖師傳神美其魁偉雄
007_0659_b_07L而惜其時無道學便被佛氏收拾
007_0659_b_08L去此衰世之歎也然則宣廟之眷眷於
007_0659_b_09L淸虛子安知其微旨不出於此歟
007_0659_b_10L書此弁其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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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禎庚吳中元德水李植汝固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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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_0659_b_1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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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余早叨貴足跡不出闤闠而山人衲
007_0659_b_15L徃徃逐臭而至未嘗不引與之談
007_0659_b_16L問其所宗師輒曰西山西山亡數十載
007_0659_b_17L不接其顏以命者哉誦其有道難之不
007_0659_b_18L名其道而亦輒曰西山吾東方之大
007_0659_b_19L宗師也余心冀之一日其徒葆眞彥機
007_0659_b_20L謂余以西山遺稿乞一言弁其簡淨
007_0659_b_21L釋氏之道以寂滅爲宗簡易爲律
007_0659_b_22L其遺文序而傳之其迹太著無乃爲
007_0659_b_23L西山之累乎有其質斯有其文
007_0659_b_24L其實斯有其名質文名實存而跡不

007_0659_c_01L이것이 이른바 ‘속에 차 있으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積於中。 發於外。)’6)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유문을 모아 서문을 써서 후세에 전하는 것이 어찌 서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되겠는가.
유고遺稿 중에 삼몽록三夢錄이 있는데, 이는 대개 생멸生滅을 꿈으로 여긴 것이다. 서산이 저술한 것은 바로 꿈속의 말이요, 이것을 모아 서론을 써서 전하는 것도 결국에는 꿈과 허깨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꿈속에서 또 그 자취를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꿈속의 꿈이 아니겠는가. 서산 같은 이는 태어나기를 기다려서 있게 되는 것도 아니요, 죽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서산의 혼령이 있다면 나의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로써 서문에 갈음한다.
숭정崇禎 경오년(1630) 9월에 낙옹樂翁은 쓰다.

007_0659_c_01L得不著所謂積於中發於外也集而序
007_0659_c_02L而傳之者何累於西山也稿中有三夢
007_0659_c_03L蓋以生滅爲夢也其所著即夢中
007_0659_c_04L集而序而傳之者亦終歸於夢幻爾
007_0659_c_05L余從夢中論其迹者庸非夢中夢耶
007_0659_c_06L若西山者不待生而存不隨死而亡
007_0659_c_07L西山有知余之斯言無亦當其意否
007_0659_c_08L是爲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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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禎庚午抄 [2] 樂翁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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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금속정金粟頂 : 불정佛頂, 즉 불정대佛頂臺를 가리킨다. 금속은 유마 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이었다는 금속여래金粟如來의 준말로, 불佛을 뜻한다.
  2. 2)병석甁錫 : 승려의 필수품인 병발甁鉢과 석장錫杖을 가리킨다.
  3. 3)수불염퇴竪拂拈搥 : 불자拂子, 즉 총채를 곧추세우고 몽둥이질을 한다는 말로, 선문禪門에서 학인學人을 제접提接할 때 방편으로 쓰는 일종의 선기禪機이다.
  4. 4)관휴貫休 : 오대五代 전촉前蜀의 승려로,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능했다. 그의 필체를 세상에서 강체姜體라고 불렀다. 그는 속성이 강씨姜氏이다. 선월 대사禪月大師와 득득 화상得得和尙이라는 별호別號가 있으며, 『서옥집西嶽集』과 『선월집禪月集』이 전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7권에 〈고의古意〉라는 제목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5. 5)광선廣宣 :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장안長安의 안국사安國寺 홍루원紅樓院에 거하면서 활약한 시승詩僧이다. 문집에 『홍루집紅樓集』이 있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백낙천시집白樂天詩集』 권15에 〈광선 스님이 나에게 응제시를 보여 주기에(廣宣上人以應制詩見示)〉가 있고, 한유韓愈의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0에 〈광선 스님이 자주 찾아오기에(廣宣上人頻見過)〉가 있다.
  6. 6)속에 차~되는 것 : 참고로 『대학장구大學章句』 6장에 같은 뜻의 “誠於中。 形於外。”라는 말이 나온다.
  1. 1){底}崇禎三年。京畿道朔寧地龍腹寺刊七卷本(卷一∼三서울大學校所藏ㆍ卷四∼七東國大學校所藏ㆍ卷五∼七李丙疇所藏) {甲}刊年未詳二卷本(李丙疇所藏) {乙}刊年未詳二卷本(高麗大學校所藏) {丙}刊年未詳二卷本(東國大學校所藏) {丁}康熙五年桐裡山泰安寺開板二卷本(東國大學校所藏) {戊}刊年未詳妙香藏板四卷本(國立圖書館所藏) {己}刊年未詳妙香藏板四卷本(精神文化硏究院圖書館所藏) {庚}刊年未詳妙香藏板四卷本(東國大學校所藏) {辛}刊年未詳妙香藏板四卷本(國立圖書館所藏)。李植序文無有{甲}{乙}{丙}{丁}{戊}{己}{庚}{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