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 有明朝鮮國慈通弘濟尊者四溟 松雲大師石藏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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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 자통홍제존자 사명 송운 대사 석장 비명 병서
상교象敎34)가 동쪽으로 삼한三韓에 전해지고 나서 교敎와 율律을 아울러 제창하고 원圓과 점漸의 문이 나뉜 가운데, 수천 년 동안 가려伽黎(袈裟)를 입은 자들마다 자기들이 석가모니의 보배를 손에 넣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오직 목우牧牛(普照知訥)와 강월江月(普濟懶翁)이 홀로 황매黃梅(弘忍)의 종지宗旨를 얻어 울연蔚然히 선문禪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겸추鉗鎚를 한번 휘두르매 만인萬人이 모조리 쓰러졌다. 그리하여 열반묘심涅槃妙心과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청구靑丘의 땅에 은밀히 전해지게 되었으니, 어찌 기이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제普濟로부터 5대를 전하여 부용 영관芙蓉靈觀에 이르는데, 그때 청허淸虛 노사老師가 입실제자入室弟子를 칭하였다. 그는 혜관慧觀과 묘오妙悟의 경지에서 전배前輩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근대의 임제臨濟요, 조동曹洞이라고 칭할 만하였다. 그 뒤에 그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치문緇門에서는 사명 대사四溟大師를 성대히 추대하며 서산西山의 법통을 이을 만하다고 말을 하니, 어쩌면 그 말이 맞는 듯도 싶다.
대사의 이름은 유정惟政이고, 자字는 이환離幻이며, 사명四溟은 자호自號이다. 그의 선비先妣가 분만分娩하던 날에, 백운白雲에 올라타고서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을 데리고

008_0075_b_11L1)有明朝鮮國慈通弘濟尊者四溟
008_0075_b_12L松雲大師石藏碑銘并序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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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象敎之東被三韓也敎律並倡圓漸
008_0075_b_14L分門數千年來蒙伽黎者人人各自
008_0075_b_15L誇握牟尼之寶矣唯牧牛江月獨得黃
008_0075_b_16L梅宗旨蔚爲禪門之冠鉗鎚一震
008_0075_b_17L人皆廢俾涅槃妙心正法眼藏秘傳於
008_0075_b_18L靑丘之域豈不异哉普濟五傳爲芙
008_0075_b_19L蓉靈觀而淸虛老師稱入室弟子
008_0075_b_20L慧觀妙悟有出於前軰寔近代之臨濟
008_0075_b_21L曺洞也厥後嗣法者不無其人而緇
008_0075_b_22L門盛推四溟大師謂可繼西山之傳
008_0075_b_23L庶幾乎哉師名惟政字離幻四溟其
008_0075_b_24L自號也其先妣娩日夢駕白雲携黃

008_0075_c_01L만 길 높은 누대에 올라가니 신선 노인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었으므로 바로 땅에 이마를 대고 예배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깨고 나서 대사를 낳았다.
대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산처럼 우뚝하여 보통 아이와 같지 않았다. 조금 커서는 장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다른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서 노닐 때면, 혹 모래를 다져서 탑을 만들고 돌을 세워서 불상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혹 꽃을 꺾고 밤을 주워다가 공양供養을 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그물질하는 어떤 사람이 큰 자라를 잡아 가는 것을 보고는 모아 놓은 밤으로 그 값을 치르고서 못 속에 놓아주었는데, 이에 다른 아이들이 감복하여 모아 놓은 밤을 모두 대사의 앞에 갖다 놓자, 대사가 매우 균등하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빈손으로 마을로 돌아가니, 노인들이 이것을 보고서 기이하게 여겼다.
7세에 대사의 조부祖父가 역사를 가르쳐 주었는데, 대사가 묻기를, “학자學者의 업業은 귀한 것입니까, 천한 것입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니, 조부가 이르기를, “세간世間의 일 중에서 학문보다 귀한 것은 없다. 고금古今의 성현聖賢들도 모두 학문을 통해서 성취하였으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해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대사가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마음으로 업業을 한다면 귀하겠지만, 이를 어긴다면 천하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배우는 것을 보면, 사람을 해치는 설은 많고 사람을 좋게 만드는 교훈은 적으니, 어찌 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조부가 이르기를, “사람을 좋게 만들고 사람을 해치는 것은 공허한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마음이 착하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니, 너의 말이 지당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사는 힘껏 공부하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13세에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35)에게서 『맹자』를 배웠다. 어느 날 저녁에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세속의 학문은 비천하고 누추한 데다 세상 인연에 얽매여 번거로우니, 어찌 무루無漏의 학문을 배우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곧바로 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旨寺의 신묵 화상信默和尙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다. 『전등록傳燈錄』을 처음 보았으나 다 익히기도 전에 이미 심오한 뜻을 깨달았으므로, 여러 노숙老宿들이 모두 그에게 와서 모르는 것을 물어보았다.
신유년(1561, 명종 16)에 선과禪科에 급제하였다. 화려한 명성이 점차 드러나매, 당시의 학사學士 대부大夫와 시인詩人으로서, 가령 박사암朴思菴(朴淳)ㆍ이아계李鵝溪(李山海)ㆍ고제봉高霽峰(高敬命)ㆍ최가운崔駕運(崔慶昌)ㆍ허미숙許美淑ㆍ임자순林子順(林悌)ㆍ이익지李益之(李達)와 같은 사람들이

008_0075_c_01L幘金人躋萬仞高臺則有仙老踞其上
008_0075_c_02L即頂禮覺而誕師生而聰頴嶷然不
008_0075_c_03L類常兒稍大不好弄偕羣童嬉游川上
008_0075_c_04L則或團沙爲塔竪石爲佛或採花拾栗
008_0075_c_05L爲蒲供一日見罟者或捉大鱉聚栗
008_0075_c_06L償之放諸淵中羣童感之咸以所收
008_0075_c_07L置師前師分餉甚均空手以歸鄕
008_0075_c_08L諸老見而異之七歲其王父誨以史
008_0075_c_09L問曰學者之業貴歟賤歟若貴則當
008_0075_c_10L學之不倦乎王父曰世間事無貴於
008_0075_c_11L古今聖賢皆由學就其敢忽諸
008_0075_c_12L若以聖賢之心爲業則貴矣違是則賤
008_0075_c_13L世所學多害人之說而少成人之訓
008_0075_c_14L槩可謂貴乎曰成人害人不在空言
008_0075_c_15L唯係心之善否汝言至哉師力學不懈
008_0075_c_16L十三學孟子於黃柳村汝獻一夕廢卷
008_0075_c_17L歎曰俗學賤陋世緣膠擾豈若學無
008_0075_c_18L漏之學乎即投黃嶽山直指寺禮信默
008_0075_c_19L和尙被剃初閱傳燈錄未熟已悟奧旨
008_0075_c_20L諸老宿皆就質焉辛酉中禪科華聞漸
008_0075_c_21L一時學士大夫詩人如朴思菴李鵝
008_0075_c_22L溪高霽峰崔駕運許美淑林子順李益之
008_0075_c_23L此碑銘底本在卷頭序文之下編者移置於
008_0075_c_24L此ㆍ無有{甲}{乙}{丙}{丁}

008_0076_a_01L모두 대사와 즐겁게 지내면서 시문을 주고받아 사림詞林에 전파되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미담으로 여겼다.
언젠가는 하곡荷谷(許篈)과 한문韓文(한퇴지의 시문) 중에서 가장 긴 글을 한 번 보고 외우기로 내기를 하였다. 그런데 대사가 착오 없이 암송을 하자, 하곡이 바로 손으로 쓴 사본寫本을 대사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기고봉奇高峯(奇大升)이 말하기를, “이런 것을 믿고서 자족自足한다면 학문이 분명히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허비한다면 애석한 일이다.”라고 하니, 대사가 송구한 심정으로 가르침을 받들고서 부지런히 힘쓰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소재穌齋(盧守愼) 상공에게서 사자四子를 배우고, 또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는데, 이로부터 문장이 날로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고 내전內典의 그 많은 글들도 모두 섭렵涉獵하였으므로, 방포方袍(袈裟)를 걸치고 축분竺墳(불전)을 익히려는 자들이 산문山門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을해년(1575, 선조 8)에 공문空門(불문)의 중망衆望에 의해 선종禪宗의 사찰을 주지住持하게 되었으나 이내 작별을 고하고는 석장錫杖을 떨치고 떠나서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청허淸虛의 좌하座下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노사老師가 심지心地를 일깨우며 곧바로 성종性宗을 가르쳐 주니, 대사가 당장에 크게 깨닫고는 즉시 쓸데없는 언어들을 쓸어버리고 노닥거리는 습관을 끊어 버렸다. 그리하여 종전에 시문으로 유희游戱하던 것들을 기어綺語라고 참회하고는 한결같이 안심安心과 정성定性에 뜻을 두어 3년 동안 고행한 끝에 그 정법正法을 모두 증득하였다.
무인년(1578, 선조 11)에 노사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고 풍악楓嶽으로 향하여 보덕사報德寺에서 세 철의 여름을 안거安居한 뒤에, 남쪽으로 팔공산八公山ㆍ청량산淸凉山ㆍ태백산太伯山 등 여러 산들을 유력遊歷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 19) 봄에 옥천沃川 산상山上의 동암東菴에 이르렀다. 어느 날 밤 소나기에 뜰에 피어 있던 꽃들이 모두 떨어지자, 대사가 홀연히 무상無常의 이치를 깨닫고서 문인門人을 불러 말하기를, “어제는 꽃이 피었는데, 오늘은 빈 가지만 남았다. 인간 세상이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도 이와 같다. 뜬 인생이 하루살이와 같은데, 광음光陰을 헛되이 보낸다면 실로 가련한 일이다. 그대들은 각기 영성靈性을 갖추고 있는데, 어찌하여 반조返照하여 일대사一大事를 끝마치려고 하지 않는가. 여래如來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꼭 밖으로 내달려 구하면서 세월을 허송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문도門徒를 해산하고 홀로 선실禪室에 들어가서 입을 다물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서 혹 열흘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엿보면 오뚝하니 움직이지 않는 것이 흡사 진흙으로 빚은 조각 같았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오대산五臺山 영감난야靈鑑蘭若에 주석住錫하였는데, 역옥逆獄(鄭汝立의 옥사)에 잘못 걸려들어

008_0076_a_01L之軰咸與之驩唱和詩翰傳播詞林
008_0076_a_02L人以爲美談甞與荷谷約一覽韓文最
008_0076_a_03L鉅篇誦之不錯荷谷亟以手寫本償之
008_0076_a_04L奇高峰曰恃此自足則學必不進
008_0076_a_05L惜虛費枉功矣師竦神受敎勤苦不少
008_0076_a_06L因受四子於穌齋相又學李杜詩
008_0076_a_07L自是文章日益進而內典千凾亦盡涉
008_0076_a_08L方袍習笁墳者雲集山門矣乙亥
008_0076_a_09L歲以空門衆望住持禪宗告辤拂錫
008_0076_a_10L而去入妙香山始受益於淸虛座下
008_0076_a_11L師提醒心地直授性宗師言下大悟
008_0076_a_12L卽掃薙群言斷除閑習從前游戱詞家
008_0076_a_13L懺爲綺語一志於安心㝎性苦行三載
008_0076_a_14L盡得其正法戊寅別老師向楓嶽結三
008_0076_a_15L夏於報德寺南遊八公山淸凉大伯諸
008_0076_a_16L丙戌春到沃川山上東菴一夜驟雨
008_0076_a_17L庭花盡落師忽悟無常招門人語之曰
008_0076_a_18L昨日開花今日空枝人世變滅亦復
008_0076_a_19L如是浮生若蜉蝣而虛度光陰實爲
008_0076_a_20L矜悶汝等各具靈性盍反求之以了一
008_0076_a_21L大事乎如來在我肚裏何必走外求
008_0076_a_22L而蹉過日時耶卽散門徒獨入禪室
008_0076_a_23L杜口結跏或旬日不出窺之則兀若塑
008_0076_a_24L己丑住五臺山靈鑑蘭若誤絓逆獄

008_0076_b_01L강릉부江陵府에 구금拘禁되었으나, 유사儒士들이 대사의 억울함을 변호해 주어 석방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풍악楓嶽에서 노닐며 또 여름 세 철을 안거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 여름에 왜적倭賊이 영동嶺東에 침입하여 유점사楡岾寺까지 몰려왔다. 이때 혹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길잡이 노릇을 한다.”라고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왜적이라면 글로 타이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이 있으면 잘 일러서 깨우칠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10여 명의 문도를 이끌고 곧장 산문山門으로 들어가니 왜적들이 문도를 모두 결박하였다. 대사가 홀로 중당中堂에 이르니, 왜적의 두목이 대사가 비범한 것을 알고는 빈주賓主의 예禮로 대하면서 문도를 풀어 주었다. 대사가 글로 써서 문답을 하니 왜적들이 공경하며 심복하고는 깊은 산속을 가리키며 보내 주었다.
대사가 문도에게 말하기를, “여래如來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원래 중생을 구호救護하기 위해서이다. 이 왜적들이 기세가 등등하니 함부로 인명人命을 해칠까 두렵다. 내가 응당 가서 이 미친 왜적들을 타일러 흉봉凶鋒을 거두도록 할 것이니, 그러면 자비慈悲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석장錫杖을 날려 고성高城으로 들어가니, 적장賊將 세 사람이 모두 대사를 예우禮遇하였다. 대사가 글로 문답하며 살생殺生을 좋아하지 말라고 타이르니, 적장 세 사람이 모두 손을 모으고 훈계를 받아들였으며, 3일 동안이나 대사를 머물게 하여 대접을 하고는 성 밖에 나와서 전송하기까지 하였다. 아홉 고을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대개 대사의 공이었다.
선묘宣廟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자, 불의不義에 항거하여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승려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국토에 태어나 거하면서 숨 쉬고 밥 먹고 여유 있게 지내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조그마한 것도 모두가 임금님 덕분이다. 이렇게 어렵고 위태한 때를 만나서 어떻게 차마 가만히 앉아서 볼 수만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즉시 수백 명의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급히 순안順安으로 달려가니, 그때 모인 대중이 수천 명을 헤아렸다.
이때에 청허 대사淸虛大師는 제도諸道의 승병을 총섭摠攝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았으나, 노쇠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는 대사를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대사가 마침내 대중大衆을 거느리고 체찰사體察使 유공柳公 성룡成龍을 따르며 중국 장수와 협동하여, 이듬해 정월에 평양平壞을 깨뜨리고 행장行長을 달아나게 하였다. 그리고는 도원수都元帥 권공權公 율慄을 따라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의령宜寧에 주둔하며 죽이고 노획鹵獲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상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당상의 직계職階를 제수除授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 27) 봄에 총병 유정摠兵劉綎이 대사에게 부산의 왜영倭營으로 들어가서 청정淸正을 타이르도록 부탁하였으므로 모두 세 차례 왕복하며 모두 요령 있게 처리하였다.

008_0076_b_01L拘于江陵府儒士軰訟其寃得釋庚寅
008_0076_b_02L遊楓嶽又結三夏壬辰夏倭賊䦨入嶺
008_0076_b_03L至楡岾寺時或云我人爲導師曰
008_0076_b_04L若賊難以書諭倘有我人則亦可譬解
008_0076_b_05L率十餘徒直入山門賊悉縛之獨師
008_0076_b_06L至中堂則頭倭知其非常待以賓主
008_0076_b_07L解其徒師書以徃復諸倭敬服指送
008_0076_b_08L山深處師語門徒曰如來出世元爲
008_0076_b_09L救護衆生此賊張甚恐肆殘害吾當
008_0076_b_10L徃諭狂賊俾戢凶鋒則庶不負慈悲敎
008_0076_b_11L即飛錫入高城則賊將三人俱加
008_0076_b_12L禮遇師以書勸其勿嗜殺則三將皆拱
008_0076_b_13L手受戒挽三日設供出城祖之九郡之
008_0076_b_14L得免虔劉者盖師功也宣廟西幸
008_0076_b_15L義慷慨語諸僧曰我等生居國土
008_0076_b_16L食優游閱有年紀者秋毫皆上力也
008_0076_b_17L値此艱危其忍坐視即募數百僧
008_0076_b_18L赴順安則諸義僧皆來會有衆數千矣
008_0076_b_19L時淸虛以朝命總攝諸道僧兵辤以耗
008_0076_b_20L師自代遂統大衆從體察使柳公成
008_0076_b_21L脇同天將明年正月破平壤走行
008_0076_b_22L因隨都元帥權公慄下嶺南駐扎
008_0076_b_23L宜寧頗多殺獲上嘉之授堂上階
008_0076_b_24L午春劉總兵綎命師入釜營諭淸正

008_0076_c_01L청정이 묻기를,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라고 하니, 대사가 그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기를,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라고 하였다. 청정이 다시 묻기를, “그것이 무슨 말인가?”라고 하자, 대사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니, 청정이 놀라면서 탄복하였다.
상이 대사를 궁중으로 불러들이고는 평생의 일을 자세히 묻고 나서 하교下敎하기를, “옛날에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는 모두 산인山人의 신분으로 남다른 공훈을 세워서 후세에 그 명성을 전하였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그대가 만약 머리를 기르고 세상에 나온다면, 응당 백 리의 땅을 위임할 것이요, 삼군三軍을 통솔하는 명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니, 대사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상이 무고武庫의 갑옷과 병장기를 대사에게 지급하게 하였다.
대사가 영남嶺南으로 돌아와서 군병軍兵을 주둔하고 초격抄擊하는 한편, 용기龍起ㆍ팔공八公ㆍ금오金烏 등 여러 산성山城을 잇따라 수축修築하여 우뚝하게 보장保障이 되게 하고, 각처의 방어시설을 엄히 정돈하였다. 그런 뒤에 즉시 인수印綬와 전마戰馬를 반납하고 척적尺籍(軍籍)을 비국備局에 바치고는 소장疏章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돈유敦諭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정유년(1597, 선조 30) 겨울에 제독 마귀提督麻貴를 따라 도산島山에 들어가고, 무술년(1598, 선조 31)에 또 유 제독劉提督을 따라 예교曳橋에 들어가서 모두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 전후前後에 걸쳐 4천여 석石의 군량을 비축하였고, 병기와 갑옷도 만萬으로 헤아렸다. 상이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부산성釜山城을 쌓고 내은산內隱山으로 돌아갔다.
계묘년(1603, 선조 36)에 명을 받고 서울에 왔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갔다. 여러 왜인倭人들이 말하기를, “이 이가 보배를 말했다는 화상和尙인가?”라고 하였다. 대마도對馬島에서 일본의 서울에 가니, 여러 대수大帥들이 모두 신심信心을 내어 약속을 받아들였다. 승려들이 사슴 떼처럼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자, 대사가 일일이 가르쳐서 미혹迷惑을 깨우쳐 주니, 모두 머리를 땅에 대고 예배하며 부처님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대사가 가강家康을 만나게 되어서는, “양국兩國의 생령生靈들이 오래도록 도탄塗炭에 빠졌으므로 내가 널리 구제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하였는데, 가강도 불교에 귀의한 자였으므로, 대사의 말을 듣고는 신심을 내어 부처님처럼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협약을 제대로 맺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포로로 잡혀간 남녀 1천5백 명을 한꺼번에 데려오면서, 스스로 곡식을 마련하여 그들을 먹이며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008_0076_c_01L凡三返盡得其要領正問朝鮮有寶乎
008_0076_c_02L師應聲對曰無有寶在日本何謂也
008_0076_c_03L曰方今我國以若頭視寶是在日本也
008_0076_c_04L正乃驚歎上招詣內闥備問平生
008_0076_c_05L敎曰昔劉秉忠姚廣孝俱以山人
008_0076_c_06L立殊勳名流後世今國勢如此爾若
008_0076_c_07L長髮則當任之百里之寄授以三軍之
008_0076_c_08L命矣師謝不敢而退上以武庫鎧仗給
008_0076_c_09L師返嶺南留兵抄擊連築龍起八
008_0076_c_10L公金烏諸山城屹爲保障各飾儲胥然
008_0076_c_11L即上印綬戰馬以尺籍納于備局
008_0076_c_12L抗章乞閑朝廷敦諭不許丁酉冬從麻
008_0076_c_13L提督貴入島山戊戌又從劉提督
008_0076_c_14L曳橋皆有首功前後備餉四千餘石
008_0076_c_15L器甲萬計上嘉之特階嘉善授同知
008_0076_c_16L中樞府事辛丑築釜山還內隱山
008_0076_c_17L卯承命來京甲辰奉國書徃日本諸倭
008_0076_c_18L相謂曰此說寶和尙耶自馬島抵其都
008_0076_c_19L諸大帥皆信受約束緇流麋至願受敎
008_0076_c_20L師一一指迷即皆頂禮稱佛及見家康
008_0076_c_21L備言兩國生靈久陷塗炭吾因普濟
008_0076_c_22L而來康亦歸心釋敎者聞而發信心
008_0076_c_23L敬之如佛克成和好而歸因括回被擄
008_0076_c_24L男女一千五百自備糓餔之還渡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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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1605, 선조 38)에 복명復命하였다. 상이 그 공로를 가상하게 여겨,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더하고, 어마御馬와 저사紵絲의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이때 청허淸虛는 이미 시적示寂한 뒤였다. 대사는 바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그 영탑影塔에 예배하고 그대로 보현사普賢寺에서 복제服制를 마쳤다.
병오년(1606, 선조 39) 봄에 영선군營繕軍을 거느리고 법궁法宮(대궐의 正殿)의 공사에 나아갔으며, 삼강동三江洞에 초막을 지었다. 정미년(1607, 선조 40) 가을에 은퇴를 청하고 치악산雉岳山으로 돌아왔다.
무신년(1608, 선조 41)에 선묘宣廟의 휘음諱音(訃音)을 듣고 서울에 가서 배곡拜哭하였는데, 그로 인해 병을 얻어 매우 괴로워하였다. 금상今上이 서쪽 변방에서 호인胡人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려 했으나, 명에 응하지 못한 채 가야산伽耶山에 들어가 조리調理하니, 상이 누차 어약御藥을 하사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 2) 가을에 상이 염려하여 서울에 와서 치료받게 할 목적으로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돈유敦諭하며 상경하도록 하였다. 8월 26일에 대사가 불도佛徒들을 크게 모아 놓고 고하기를, “사대四大가 가합假合한 이 몸이 이제 진원眞源으로 돌아가려 한다. 어찌 번거롭게 왕래하여 이 허깨비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해야 하겠는가. 내가 이제 입멸入滅하여 자연의 변화에 따르려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가부좌跏趺坐한 자세로 유연悠然히 서거逝去하였다.
11월 20일에 문도門徒가 유골遺骨을 받들어 사원의 서쪽 기슭에서 다비茶毗를 행하니,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치고 날아가는 새들이 놀라서 지저귀었다. 이에 정수리의 구슬 하나를 모셔다 석종石鍾을 만들어 봉안하고 그곳에 솔도파窣堵波(탑)를 세웠다.
대사의 속성俗姓은 임씨任氏이니, 풍천豊川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대구大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밀양密陽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학幼學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은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는데, 수성이 달성 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어 갑진년(1544, 중종 39)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다.
대사는 세수 67세를 향유하였고, 법랍은 55년이었다. 사시私謚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36)이다.
대사가 젊은 날에 많이 저술한 것이 우리 중씨仲氏 하곡荷谷에게 있었는데, 병화兵火로 없어지고 말았다. 문인門人이 세상에 전송傳誦되는 것들을 모아 일곱 권으로 만들어서 전하게 되었는데, 아는 자는 그 청섬淸贍한 맛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대사는 말세末世의 시끄러운 시대에 태어나

008_0077_a_01L巳復命上嘉其勞就加嘉義階賜御
008_0077_a_02L馬紵絲表裏以獎之時淸虛已示寂
008_0077_a_03L師便入妙香山禮其影塔仍守制普賢
008_0077_a_04L丙午春領營繕軍赴法宮役結茅
008_0077_a_05L三江洞丁未秋乞骸還雉岳山戊申
008_0077_a_06L聞宣廟諱音抵洛拜哭因得病甚苦
008_0077_a_07L今上欲令備胡西陲不獲應命入伽耶
008_0077_a_08L山調治上屢賜御藥庚戌秋上念之
008_0077_a_09L欲其就醫京山令方伯敦遣八月二十
008_0077_a_10L六日師大會諸禪那告曰四大假合
008_0077_a_11L今將返眞何用屑屑往來勞此幻軀
008_0077_a_12L吾將入滅以順大化也遂趺座悠然而
008_0077_a_13L十一月二十日門徒昇蛻骨茶毘
008_0077_a_14L於寺之西麓祥光燭天飛鳥驚噪
008_0077_a_15L是輦頂珠一具鑿石鍾藏之堵坡
008_0077_a_16L於其地云師俗姓任氏豊川望族也
008_0077_a_17L曾大父孝昆文科官掌樂院正曾守大
008_0077_a_18L因以家密陽生幼學宗元宗元生
008_0077_a_19L校生守成娵達城徐氏以嘉靖甲辰十
008_0077_a_20L月十七日生師享世壽六十七而法臘
008_0077_a_21L五十五私謚曰慈通弘濟尊者師少日
008_0077_a_22L多所著述在我仲氏荷谷所失於兵火
008_0077_a_23L門人裒其傳誦者爲七卷以傳知者賞
008_0077_a_24L其淸贍云嗚呼師之生當俶擾之代

008_0077_b_01L융마戎馬 사이에 시달리면서 국가를 위해 강한 왜적을 막다 보니, 법실法室을 선양宣揚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는 미처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대사를 아는 정도가 얕은 자들은 혹 뱃사공 노릇을 하는 데에는 뜻을 두지 않고 그저 세상을 구하기에 급급했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마군魔軍을 소탕하여 환난을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그 집안의 공덕임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유마힐維摩詰은 아무 말 없이 곧장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갔으니, 또 무엇하러 시끄럽게 잔소리를 늘어놓겠는가.
나는 비록 유가儒家에 속한 사람이긴 하지만, 대사와 제형弟兄의 교분이 있기 때문에 대사를 가장 잘 알고 있다. 한번 물어보노니, 오늘날 세상에서 목우牧牛와 강월江月의 도맥道脈을 이을 사람으로, 우리 대사를 제외한다면 또 누가 있겠는가. 뒤에 반드시 분변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붙인다.

維薄伽梵        생각건대 박가범薄伽梵37)
倡法竺乾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제창한 뒤로
涅槃妙心        열반의 묘한 그 마음이
燈以燈傳        등燈에서 등으로 전해졌네38)
眞丹之東        진단眞丹39)의 동쪽 나라인
逖我三韓        우리 삼한三韓까지 멀리 왔나니
疇承永明        누가 영명永明을 이었는가 하면
江月獨圓        강월江月이 홀로 둥글었다네40)
嗣其末照        그 마지막 빛을 이은 이들 중에서
西山最先        서산西山이 누구보다도 앞장섰나니
慧炬晨朗        지혜의 횃불을 새벽에 밝히고
智鏡宵懸        예지叡智의 거울을 밤중에 걸었다네
于于上足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其指百千        백과 천으로 헤아렸는데
只詡鍾峰        오직 헌걸찬 우리 종봉鍾峰41)
能筏迷川        미혹의 냇물의 뗏목이 되었다네
鍾峰之敎        종봉의 교화로 말하면
廣濟無邊        가없이 널리 구제하였나니
備修衆善        선이란 선은 모두 닦으면서
不染群緣        세상 인연에 물들지 않았다네
卷而懷之        거두어 속에다 감추어 두면42)
甁鉢蕭然        병발甁鉢43)로 소연히 지내었고
出而用之        꺼내어 그것을 쓰게 되면
旄戟在前        깃발과 창이 앞에 있었다네
摧魔拔苦        악마를 꺾고 고통에서 꺼내 주어
邦賴不瘨        국가가 그 덕분에 병들지 않았는데
獸袍金章        수포獸袍44)와 황금 인장을 내렸어도
寵若浮烟        그 총애를 뜬구름처럼 여겼다네
茫茫苦海        아득히 고해 속으로
東浸夷亶        동쪽 이단夷亶45)이 가라앉자
泛我慈航        우리 자비의 배를 띄워서
格彼苗頑        저 완악한 오랑캐를 감화시켰다네
環觀卉服        둘러서서 바라보는 훼복卉服46)들은
如渴赴泉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하였나니
跪奉約束        꿇어앉아 약속을 받들게 하여
王略克宣        왕의 법도를 제대로 선포하였다네
國難甫野        국난이 수습의 기미를 보이자
歸興愈翩        돌아가고픈 마음 더욱 설레어
思乞幻軀        허깨비 몸 은퇴를 청하면서
以養殘年        여생을 요양할까 생각하였다네
法宮董旅        법궁法宮의 공사를 감독하다가
因疢就便        몸이 병든 것을 좋은 핑계로
優游紺宇        절간에 물러나 한가히 노닐며
偃息靑蓮        모두 내려놓고 편히 쉬었다네
庶享大耋        부디 오래도록 장수를 누리면서

008_0077_b_01L偪側戎馬間與國家捍强賊其於宣揚
008_0077_b_02L法室振刷迷徒盖未之暇淺之乎知
008_0077_b_03L師者或病其乏津筏而徒區區救世爲
008_0077_b_04L夫豈知誅魔濟難是渠家功德而摩
008_0077_b_05L詰無言直入不二法門又奚用嘵嘵立
008_0077_b_06L訓乎不佞雖儒家者流以弟兄之交
008_0077_b_07L知師最深試問今世續牧牛江月之道
008_0077_b_08L脈者捨吾師其誰後必有辨之者
008_0077_b_09L係之以銘曰

008_0077_b_10L
維薄伽梵倡法笁乾涅槃妙心

008_0077_b_11L燈以燈傳眞丹之東逖我三韓

008_0077_b_12L疇承永明江月獨圓嗣其末照

008_0077_b_13L西山最先慧炬晨朗智鏡霄 [59]

008_0077_b_14L于于上足其指百千只詡鍾峰

008_0077_b_15L能筏迷川鍾峰之敎廣濟無邊

008_0077_b_16L備修衆善不染羣緣卷而懷之

008_0077_b_17L瓶鉢蕭然出而用之旄戟在前

008_0077_b_18L摧魔拔苦邦賴不瘨獸袍金章

008_0077_b_19L寵若浮烟茫茫苦海東浸夷亶

008_0077_b_20L泛我慈航格彼1) [24] 環觀卉服

008_0077_b_21L如渴赴泉跪奉約束王略克宣

008_0077_b_22L國難甫野歸興愈翩思乞幻軀

008_0077_b_23L以養殘年法宮董旅因疢就便

008_0077_b_24L優游紺宇偃息靑蓮庶享大耋

008_0077_c_01L益演重玄        더욱 중현重玄47)을 연설하길 기대했는데
云胡雙樹        어찌하여 쌍수雙樹48)에 뜻하지 않게
遽集人天        인천人天의 대중이 모여들었는가
嶽摧檀特        단특檀特의 산악49)이 무너지고
河涸泥連        니련泥連의 강물50)이 메말랐나니
瓊毫閟彩        백호白毫는 빛을 감추고
金相失姸        금불상은 미소를 잃었도다
寂滅爲樂        적멸이 낙이라 하더라도
昧者涕漣        모르는 자는 눈물을 흘리나니
烝哉梵徒        신실한 우리 불교 신도들이
募化繒錢        비단과 돈을 모금하였다네
塔廟以報        탑과 사당 세워 보답하나니
師恩佛恩        스승님과 부처님 은혜
虹流之隩        가야산 홍류동 물굽이에
象設興焉        상설象設51)을 일으켰다네
願力所弘        원력이 하 크기도 하니
銷劫不騫        겁이 다한들 없어지리오
謳頌勿替        찬송하는 노래 그치지 않으매
琬琰斯鐫        비석에 이를 글로 새겼다네
頭陀微笑        두타頭陀는 빙긋 미소짓고
摩詰無言        마힐摩詰은 말이 없었나니
立訓顯化        가르치고 교화하는 두 가지는
二俱蹄筌        모두가 제전蹄筌52)일 뿐이로세
無諍三昧        무쟁삼매無諍三昧53)를 얻었는지라
可實可權        실實과 권權54)이 모두 가하니
明明日月        해와 달처럼 밝고 밝아서
萬古長鮮        만고토록 길이 빛나리로다

008_0077_c_01L益演重玄云胡雙樹遽集人天

008_0077_c_02L嶽摧檀特河涸泥連瓊毫閟彩

008_0077_c_03L金相失姸寂滅爲樂昧者涕漣

008_0077_c_04L烝哉梵徒募化繒錢塔廟以報

008_0077_c_05L師恩佛恩虹流之隩象設興焉

008_0077_c_06L願力所弘銷劫不騫謳頌勿替

008_0077_c_07L琬琰斯鐫頭陁微笑摩詰無言

008_0077_c_08L立訓顯化二俱蹄筌無諍三昧

008_0077_c_09L可實可權明明日月萬古長鮮
  1. 34)상교象敎 : 불교를 가리킨다.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 제자들이 그를 흠모한 나머지 나무를 깎아 부처의 형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가르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2. 35)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 황희 정승의 5세손이다. 그는 은퇴 후 영동 황간에 송안정送雁亭을 짓고 독서와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아마도 달성에 외가를 둔 소년 시절의 대사가 이 무렵 그의 문하로 들어가 글을 배운 것 같다.
  3. 36)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이 시호는 허균이 지은 것이다. 사명당이 입적한 지 3년째 되는 1612년에 영당을 짓고 문집을 간행하며 석장비를 세우는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이 중 문집의 서문과 비문의 찬술을 부탁받은 허균이 비문을 지으면서 사명당과 같은 위인의 비문에 마땅히 시호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옛날의 시호는 덕이 높은 분이면 개인이 지어 바치는 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자기가 사시私諡를 짓기로 하고 시호에 주를 붙이는 형식의 글을 지었다.
    시호 : 조선국 선종 제14대 직전 서산청허부종수교보제등계의 입실전법제자 사명자통홍제존자(朝鮮國禪宗第十四代直傳西山淸虛扶宗樹敎普濟登階入室傳法弟子 四溟慈通弘濟尊者).
    “위는 송운 노사의 시호이다. 말법을 붙들어 구한 것을 자慈라 하고, 한 교에 구애되지 아니함을 통通이라 하며, 은택이 많은 백성들에게 끼친 것을 홍弘이라 하고, 그 공이 (국토를) 거듭 회복한 것을 제濟라 하니, 이것이 (시호를 내려)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임자년 2월 2일 교산.”
  4. 37)박가범薄伽梵 : 석가모니에 대한 존칭이다. 여래십호如來十號의 하나인 bhagavat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바가바婆伽婆라고도 하며, 이를 의역意譯하여 세존世尊 혹은 유덕有德이라고 한다.
  5. 38)열반의 묘한~등으로 전해졌네 : 석존 입멸 후에 마하가섭摩訶迦葉으로부터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기까지 전등傳燈의 계보系譜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6. 39)진단眞丹 : 고대 인도에서 중국을 부른 칭호이다. ⓢ cīna-sthāna의 음역音譯으로, 진단震旦ㆍ신단神丹ㆍ진단眞旦ㆍ진단振旦ㆍ진단振丹ㆍ전단旃丹ㆍ지난指難ㆍ지난脂難이라고도 하였으며, 약칭略稱 cīna의 음역으로, 지나支那ㆍ치나致那ㆍ지나指那ㆍ지나止那ㆍ지나脂那라고도 하였다.
  7. 40)누가 영명永明을~홀로 둥글었다네 : 허균은 이 명銘에서도 서산西山이 영명永明과 강월江月의 법맥을 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바로 위에 나오는 해안海眼의 ‘송운대사행적松雲大師行蹟’에서 신랄하게 반박하고 있다. 참고로 허균은 ‘청허당집서문淸虛堂集序文’에서도 이 주장을 똑같이 반복하며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 계보를 밝히고 있는데,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흥미로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영명은 송나라 법안종法眼宗의 제3조 영명 연수永明延壽 선사를 가리키고, 강월은 강월헌江月軒의 준말로 고려 말의 보제 나옹普濟懶翁을 가리킨다.
  8. 41)종봉鍾峯 : 사명당의 별호이다.
  9. 42)거두어 속에다 감추어 두면 : 참고로 공자가 위衛나라 거백옥蘧伯玉을 군자라고 칭찬하면서 “나라에 도가 행해지면 벼슬을 하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자기의 마음을 거두어서 속에다 감추어 둘 줄을 안다.(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라고 말한 내용이 『論語』 「衛靈公」에 나온다.
  10. 43)병발甁鉢 : 물을 담는 정병淨甁과 밥을 담는 발우鉢盂를 말하는데, 석장錫杖과 함께 승려의 필수품으로 꼽힌다.
  11. 44)수포獸袍 : 수금獸錦의 도포라는 뜻으로, 금수禽獸의 무늬를 수놓아 화려하게 직조織造한 비단옷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의 시에 “천자의 배 젓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하고, 수금의 도포를 새로 하사받았다네.(龍舟移棹晩。 獸錦奪袍新。)”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集』 권8 〈寄李十二白二十韻〉.
  12. 45)夷亶 : 이주夷洲와 단주亶洲, 혹은 이주夷州와 단주亶州의 병칭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단주는 단주澶州 혹은 단주澶洲라고도 한다. 『後漢書』 「東夷傳」 〈倭〉에 “또 이주夷洲와 단주澶洲가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복徐福으로 하여금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서 봉래蓬萊의 신선을 찾도록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서복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이 섬에 머물러 대대로 살면서 수만의 가호를 이루었다.(又有夷洲及澶洲。 傳言秦始皇遣方士徐福將童男女數千人入海。 求蓬萊神仙不得。 徐福畏誅不敢還。 遂止此洲。 世世相承。 有數萬家。)”라는 기록이 있다.
  13. 46)훼복卉服 : 섬 오랑캐가 입는 갈포葛布의 복장이라는 뜻으로, 일본을 가리킨다. 『書經』 「禹貢」에 “섬 오랑캐는 훼복을 공물로 바친다.(島夷卉服)”라는 말이 나온다.
  14. 47)중현重玄 : 거듭 현묘하다는 말로, 심오한 도의 세계를 가리킨다. 『道德經』 1장의 “현묘하고 현묘하니 모든 오묘함의 문이로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15. 48)쌍수雙樹 :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입멸했던 장소에 서 있었던 나무 이름인데, 사찰 경내에 있는 거목을 비유하기도 한다.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16. 49)단특檀特의 산악 : 단특산檀特山, 즉 석가모니가 전세에 수대나 태자須大拏太子의 신분으로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고행을 했다는 산 이름이다. 단타산檀陀山ㆍ단나가산檀拏迦山ㆍ탄택가산彈宅迦山 혹은 대택산大澤山으로 칭하기도 한다.
  17. 50)니련泥連의 강물 : 니련선하尼連禪河를 말한다. 석존이 출가한 뒤에 이 강가에서 고요히 앉아 사유하며 6년 동안 고행하다가 나중에 고행을 버리고 이 강물에 목욕하여 몸을 정결히 한 뒤에 목우녀牧牛女 난다바라難陀波羅, 즉 미가彌迦의 유미乳糜 공양을 받고 체력을 회복하여 이 강물 대안對岸의 필바라수畢波羅樹, 즉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한다.
  18. 51)상설象設 : 원래는 불상佛像을 말하는데, 보통 초상화를 봉안한 사당을 가리키게 되었다.
  19. 52)제전蹄筌 : 토끼 잡는 그물과 물고기 잡는 통발이라는 뜻으로, 보통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위한 경론의 언어 문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전제筌蹄라고도 한다. 『莊子』 「外物」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기 마련이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말이라는 것도 가슴속의 뜻을 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 그 속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내가 어떻게 말을 잊어버린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말을 해 볼 수 있을까.(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免。 得免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而與之言哉。)”라는 내용이 나온다.
  20. 53)무쟁삼매無諍三昧 : 공空의 이치에 투철하기 때문에 가可와 불가不可가 없어서 타인과 아예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라는 말인데, 부처의 제자 중에 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보리須菩提가 가장 수승하게 이 경지를 증득했다고 한다.
  21. 54)실實과 권權 : 실은 진실眞實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일승一乘을 가리키고, 권은 방편方便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삼승三乘을 가리킨다.
  1. 1)此碑銘。底本在卷頭序文之下。編者移置於此ㆍ無有{甲}{乙}{丙}{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