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환성시집(喚惺詩集) / 喚惺和尙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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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 화상 행장喚惺和尙行狀
무릇 행장이란 숨기기도 어렵고 기술하기도 어렵다. 왜 그런가. 살아서 현인이 아니었는데 죽은 뒤에 현인이라 일컬으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며, 살아서 도가 있었는데 돌아가신 뒤에 드러냄이 없으면 사람들의 꾸지람을 받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세상 사람들의 꾸지람과 비웃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사의 일생을 간략히 적어 본다.
화상의 휘는 지안志安이요, 자는 삼낙三諾이며, 호는 환성喚惺이고, 그 향정鄕井(고향)은 춘천春川이다. 속성은 정씨鄭氏로 강희康熙 갑진년(1664) 6월 10일에 태어나 옹정雍正 기유년(1729) 7월 7일에 입적하니, 동방에 몸을 응현해 예순여섯 번의 봄을 맞고 서방의 계를 받아 쉰한 번의 하안거를 보냈다.
15세에 출가하여 상봉霜峯65)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17세에 입학하여 월담月潭 화상의 법을 이어받았으니, 곧 청허淸虛66)의 5대 적손이다. 또 화엄종 모운 진언慕雲震言67) 화상에게 나아가 처음으로 그 당에 올랐는데, 그 모습이 위엄 있고 당당했으며, 그 목소리는 맑고 은은했다. 거처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가는 곳마다 법려法侶들이 문정門庭에 가득 찼으니, 교의敎義를 논하면 아득히 넓은 것이 만 이랑의 파란이 이는 듯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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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475_c_07L喚惺和尙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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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行狀者隱之之難述之之難
009_0475_c_09L生而不賢死而稱賢取人之笑
009_0475_c_10L寄而有道歸而無顯被人之譏
009_0475_c_11L以不畏世人之譏笑略記先師之始終
009_0475_c_12L和尙諱志安字三諾號曰喚惺
009_0475_c_13L井是春川俗姓乃鄭氏生於康熙甲
009_0475_c_14L辰六月初十日寂於雍正己酉七月初
009_0475_c_15L七日應東身者六十六春服西戒
009_0475_c_16L五十一夏三五歲出家受具於
009_0475_c_17L霜峯大師十七齒入學嗣法於月潭
009_0475_c_18L和尙即淸虛五世嫡孫也又叅華嚴
009_0475_c_19L宗慕雲震言和尙初升其堂也形氣
009_0475_c_20L威武聲韻淸遠居無㝎止到處法
009_0475_c_21L溢門盈庭論敎義則洋洋焉波瀾
009_0475_c_22L此小題名底本在於詩之末編者移置於此
009_0475_c_23L又「月」上底本有「右」編者除之
此小題名
009_0475_c_24L本在於詩之末編者移置於此又「月」上底本
009_0475_c_25L有「右」編者除之

009_0476_a_01L선지禪旨를 굴리면 높고 우뚝한 것이 천 길 절벽과 같았다. 지금 해내海內에 선을 희롱하고 교에 통달한 자들은 다 선사의 풍격이니, 이른바 전단栴檀을 옮겨 심으면 다른 물건에서도 같은 향기가 난다는 것이다.
안개와 노을을 밟으며 선禪을 닦은 곳과 법의 깃발을 세우고 교敎를 강講한 곳은, 곧 관동關東의 풍악산楓嶽山, 관북關北의 황룡산黃龍山, 춘천春州의 청평사淸平寺, 지평砥平의 용문사龍門寺,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 강릉江陵의 오대산五臺山, 안동安東의 태백산太白山,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공주公州의 계룡산鷄龍山, 상주尙州의 대승사大乘寺, 문경聞慶의 양산사陽山寺, 예천醴泉의 대곡사大谷寺, 청도淸道의 운문사雲門寺, 자인慈仁의 반룡사盤龍寺, 순흥順興의 부석사浮石寺, 성주星州의 쌍계사雙溪寺, 금산金山의 직지사直指寺, 산음山陰의 지곡사智谷寺 등이다. 나아가 호남의 크고 작은 명찰이 그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나 번거로움을 피해 기록하지 않는다. 이렇게 소요 자재하였으니, 온 천지가 하나의 큰 살림살이였다.
갑진년(1724) 봄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법회를 개설하였을 때는 법중法衆이 천백여 명이나 되어 영산회상과 비슷하고 기원정사를 방불케 하였다. 그 도를 높이 받들고 그 덕을 우러렀으니, 대중의 입이 바로 비碑라, 어찌 붓에 있겠는가? 아, 그 신령스러운 마음과 신묘한 법체를 우러를 수는 있었지만 엿볼 수는 없었고, 그 바다 같은 법과 지혜의 근원을 경험할 수는 있었지만 헤아릴 수는 없었다.
신비한 행적이 많지만 간단히 네 가지만 거론해 보자면, 한라산漢羅山(漢拏山)에 입적을 예언한 비기秘記가 있었던 것, 청평사淸平寺에 “다시 온다.”라는 참언讖言이 있었던 것, 폭우 속에서 두 번이나 죽을 곳을 면한 것, 꿈속에서 여러 구의 시를 얻은 것 등이다. 이른바 재계齋戒하고 백 일 만에 여러 구의 시를 얻었는데, “수미산을 걸머지고 큰 바다를 건널 수 있으니, 큰 교화의 문을 열어 수풀 속으로 들어가라.(擔得須彌渡大海。 大施門開草裡行。)”라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이 시를 준 사람이 자신을 근 노사勤老師라 칭하였으니, 그는 곧 나옹 혜근懶翁惠勤68) 스님이다. 이 시의 의미는 큰 법을 짊어지고 모든 미혹한 중생을 두루 교화한다는 조짐으로서

009_0476_a_01L萬頃轉禪旨則嶷嶷然崖岸千尋
009_0476_a_02L今海內弄禪通敎者乃師之風也
009_0476_a_03L謂栴檀移植異物同熏也躡烟霞
009_0476_a_04L禪之所建法幢講敎之處則關東之
009_0476_a_05L楓嶽關北之黃龍春州之淸平
009_0476_a_06L平之龍門廣州之淸溪江陵之五臺
009_0476_a_07L安東之太白報恩之俗離公州之鷄
009_0476_a_08L尙州之大乘聞慶之陽山醴泉之
009_0476_a_09L大谷淸道之雲門慈仁之盤龍
009_0476_a_10L興之浮石星州之雙溪金山之直指
009_0476_a_11L山陰之智谷至於湖南大小名刹
009_0476_a_12L非所化之處故避煩不錄焉逍遙然
009_0476_a_13L天地間一大閑話計也甲辰春
009_0476_a_14L山寺設華嚴會則法衆千又百餘也
009_0476_a_15L俙焉靈山髣髴焉祗園尊其道
009_0476_a_16L其德衆口是碑豈在筆乎於戱
009_0476_a_17L靈臺神宇可仰而不可窺法海智源
009_0476_a_18L可涉而不可測靈跡雖多略擧四種
009_0476_a_19L漢羅山上有入寂之秘淸平寺裏有
009_0476_a_20L重來之讖雨中免二死之地夢裡得
009_0476_a_21L數句之詩謂設齋百日得詩數句
009_0476_a_22L擔得須彌渡大海大施門開草裡行
009_0476_a_23L中贈詩者自稱曰勤老師是懶翁惠勤
009_0476_a_24L詩意則荷擔大法普化羣迷之兆

009_0476_b_01L이것이 그 첫 번째이다.
정유년(1717) 7월에는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주석하고 있었다. 큰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갑자기 고향으로 길을 재촉해 마을의 어느 집에 이르게 되었는데, 집도 넓고 사람도 후하여 유숙할 만하였다. 하지만 스님은 다시 인근의 오막살이로 찾아갔으니, 겨우 몸을 허락할 정도의 집이었다. 그날 밤 그 절과 그 집은 물에 잠겨 죽은 사람이 20여 명이나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두 번이나 죽을 곳을 면한 것은 실로 하늘이 돕고 신이 보호한 것이니, 이것이 그 두 번째이다.
청평사는 고려 초 서천西天의 박달다 존자博達多尊者가 창건한 절이다. 허물어져 황망한 폐허가 되었었는데, 화상이 지팡이 하나만 들고 이곳에 이르자 온갖 폐단이 모두 개선되었다. 그 절 정문 밖에 쌍연雙淵이라는 연못이 있었으니, 그것은 존자가 판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그곳을 다시 파다가 한 조각의 부서진 비석을 얻게 되었는데, 그 비문에 “유충관부천리래儒衷冠婦千里來”라는 참언이 있었다. 이를 해석하는 사람이 “‘유儒’는 곧 선비(士)요, ‘충衷’은 곧 마음(心)이며, ‘관부冠婦’는 곧 여자가 삿갓을 쓴 것으로서 안安 자요, ‘천리千里’는 곧 중重 자이니, 이것을 합해서 말하면 ‘지안이 다시 온다(志安重來)’라는 참언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존자가 미리 예언한 것이리라. 이것이 그 세 번째이다.
한라도漢羅島(제주도)에 불상이 있는데, 그 등에 “세 분의 성인이 입적하는 곳(三聖入寂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저 중국의 정법보살正法菩薩이 그곳에서 열반하였고, 백 년 뒤에 다시 동국東國의 허응虛應69) 대사가 그곳에서 입적하였으며, 그 뒤 우리 화상이 그곳에서 입적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한 일이다. 입적하던 날 산이 울고 바다가 들끓어 사흘 동안 그치지 않았고, 운구를 옮기던 날 저녁에는 하늘과 땅에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 며칠 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네 번째이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이적은 온 세상의 승려와 속인들이 환히 아는 사실이니,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람들의 꾸지람을 받을 것이다. 만일 교묘한 말로 거짓을 꾸민 것이라면 이른바 살아서는 현자가 아니었는데

009_0476_b_01L此其一也丁酉七月金剛山正陽寺
009_0476_b_02L留瓶錫矣日當大雨忽促鄕路
009_0476_b_03L到洞家則家廣人厚可宜留宿
009_0476_b_04L更尋隣近斗屋僅容身矣其夜厥寺
009_0476_b_05L厥家爲水所溺死者二十餘也
009_0476_b_06L一夜之間避二死之地天實佑之
009_0476_b_07L亦護之此其二也淸平寺即高麗
009_0476_b_08L初西天愽達多尊者所創也廢爲荒墟
009_0476_b_09L和尙一笻來到百廢俱興正門外有
009_0476_b_10L雙淵乃尊者之所鑿也使人改鑿
009_0476_b_11L得一片斷碑碑有讖曰儒衷冠婦千
009_0476_b_12L里來解者曰儒即士也衷即
009_0476_b_13L心也冠婦即女之戴冠安字也
009_0476_b_14L里即重字也合而言之則志安重
009_0476_b_15L來之讖也盖尊者之所可讖乎此其
009_0476_b_16L三也漢羅島有佛其背刻云三聖
009_0476_b_17L入寂處盖中國正法菩薩湼槃於斯
009_0476_b_18L百年後東國虛應大師入滅於斯
009_0476_b_19L後我和尙又寂於斯奇乎奇乎
009_0476_b_20L哉異哉入寂之辰山鳴海沸三日
009_0476_b_21L不絕易簀之夕天祥地瑞數日無
009_0476_b_22L此其四也上來四種異蹟擧世
009_0476_b_23L緇俗洞知無以章顯於世則必取人
009_0476_b_24L之譏也若巧言飾非則所謂生而不

009_0476_c_01L죽어서 현자라 일컫는 것이니,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뿐만 아니라 또한 선사께도 누를 끼치는 짓이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아, 오래도록 양의 창자 같은 세상길을 밟으며 태평소 소리 같은 인정을 살피지 못해 남의 함정에 떨어져 저 외로운 섬으로 유배되었던 것은, 인욕 선인忍辱仙人이 가리왕歌利王에게 그리되고,70) 사자 존자師子尊者가 계빈왕罽賓王에게 그리된 것71)과 같으니, 다 묵은 빚을 갚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화상에게 있어서도 그 해가 없었는데, 그 자손에게 어찌 한이 있겠는가?
한평생의 사적이 별처럼 무성하지만 깨알 같은 재주로는 그림자 같은 행적을 기록하기 어려워 그 만분의 일이나마 간략히 거론하여 삼가 행장으로 삼는다.
숭정崇禎 기원후 두 번째 경오년(1750, 영조 26) 봄에 문인 해원 삼가 짓다.

009_0476_c_01L死而稱賢者也非直取笑於世人
009_0476_c_02L亦乃帶累於先師可不畏㦲
009_0476_c_03L蹈羊膓世路不察虎角人情落他
009_0476_c_04L陷機謫彼孤島者忍辱之於歌利
009_0476_c_05L子之於罽賓皆償宿債則於和尙
009_0476_c_06L無其害於兒孫何有其恨凡時順間
009_0476_c_07L事蹟星繁聊以麻才難記影行略擧
009_0476_c_08L萬一謹爲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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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禎紀元後再庚午門人海源
009_0476_c_10L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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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65)상봉霜峯 : 정원淨源(1621~1709)의 법호. 속성은 김씨, 영변 출신이다. 선천善天에게서 구족계를 받았고, 완월玩月·추형秋馨에게 경과 논을 배웠으며, 30세에 풍담楓潭의 법을 이었다. 그 뒤로 여러 곳을 편력하며 선지식을 참례하고 강의하였다. 해인사에서 『열반경』 등 3백여 부의 경전에 토를 달았고, 봉암사에서는 『도서』와 『절요』에 과문科文을 나누었으며, 특히 『화엄경』에 정통하였다. 숙종 35년 지평 용문사에서 나이 83세, 법랍 64년으로 입적하였다.
  2. 66)청허淸虛 : 휴정休靜(1520~1604)의 법호. 속성은 최씨崔氏, 자는 현응玄應, 안주安州 출신이다. 묘향산에 오래 주석해 서산 대사西山大師라 칭한다.
  3. 67)모운 진언慕雲震言(1622~1703) : 진양 사람. 어려서 출가하여 의열義悅의 제자가 되었다. 당대의 고승인 벽암 각성碧巖覺性의 지도를 받았고, 수십 년 동안 가야산, 황악산, 팔공산 등지에서 수행했으며, 만년에는 『화엄경』에 심취하였다. 저술로는 『대방광불화엄경칠처구회품목지도』가 있다. 대사가 직지사直指寺에서 강석을 펴고 있을 때 지안이 참학하였는데, 그 그릇됨을 간파하고는 강석을 물려주고 은거했다고 전한다.
  4. 68)나옹 혜근懶翁惠勤(1320~1376) : 고려의 명승으로 이름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당호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속성은 아씨牙氏며, 영해寧海 출신이다.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了然에게 출가하였고, 원나라 북경北京에서 지공指空을 뵙고 깨달은 바 있었다. 다시 남쪽으로 가 평산 처림平山處林에게서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지공의 법의와 불자를 전해 받았다. 1371년 왕사가 되었고, 회암사를 크게 중건하였으며, 여주 신륵사에서 나이 57세, 법랍 38년으로 입적하였다.
  5. 69)허응虛應(?~1565) : 법명은 보우普雨, 호는 허응 또는 나암懶庵이라 하였다. 명종의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할 때 강원 감사의 천거로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승과僧科를 회복하고,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부여해 불교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참소로 1565년(명종 20)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목사 변협에게 피살되었다.
  6. 70)인욕 선인忍辱仙人이 가리왕歌利王에게 그리되고 : 석가모니부처님이 전생에 인욕 선인이었을 때, 가리왕이 칼로 인욕 선인의 몸을 갈가리 베어 죽였다는 고사가 있다.
  7. 71)사자 존자師子尊者가~그리된 것 : 서천 제24조인 사자 존자는 외도의 모함으로 계빈왕에게 살해당하였다.
  1. 1)此小題名。底本在於詩之末。編者移置於此。又「月」上底本有「右」編者除之。
  2. 2)此小題名。底本在於詩之末。編者移置於此。又「月」上底本有「右」編者除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