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작법귀감(作法龜鑑) / 〔附錄〕

ABC_BJ_H0238_T_005

010_0606_b_16L
[부록]
간당론看堂論
간당看堂의 규범은 어떤 스님의 작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규범을 세운 본뜻도 과연 어떤 사업事業을 밝힌 것인지 모르겠다. 예전 총림(叢林 : 선방)에서 말하였다.

010_0606_b_16L1)〔附錄〕

010_0606_b_17L

010_0606_b_18L看堂論

010_0606_b_19L
看堂之䂓未知出於何師之手立䂓本
010_0606_b_20L果明何等事業乎古叢林云
看堂

010_0606_c_01L
“간당이란 묵언작법默言作法의 위의威儀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집을 살펴보아서 도적1)들로 하여금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간수看守하여 도둑들이 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10통統으로써 10악惡의 기관機關을 대치對治하는 것이니, 처음 3통은 그 몸이 짓는 세 가지 업인 살생殺生·도적질·음욕을 배대配對하여 몸을 금강金剛 唵(옴) 자로 관하며 상상하면 세 가지 허물이 곧 소멸되고, 중간에 1통은 그 입이 짓는 네 가지 업인 꾸밈말·거짓말·이간시키는 말·악한 말을 배대하여 말을 금강 阿(아) 자로 관하며 상상하면 네 가지 허물이 곧 소멸되며, 맨 마지막 3통은 그 뜻이 짓는 세 가지 업인 탐냄·성냄·어리석음을 배대하여 뜻을 금강 吽(훔) 자로 관하며 상상하면 세 가지 독毒이 곧 소멸된다. 선禪을 마칠 때에 3통을 치는 것은 그 능能과 소所를 타打하여 견해의 장애를 다스리는 것이다.
문 밖을 나갈 때 절을 세 번 하는 것은 불법을 보호하는 신장을 대신해서 대중들 앞에서 공경을 다하는 것이다. …운운…
이것이 바로 여러 곳 고금古今의 통론通論인데, 『삼문직지三門直指』에서는 또 달리 말하고 있으니, 취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평론: 먼저 7통統으로써 10악을 다스리게 되면 곧 악을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섭율의계攝律儀戒가 되고, 이미 10악을 다스렸으면 곧 그것은 10선이 되기 때문에 섭선법계攝善法戒가 된다. 그리하여 악을 끊어 버리고 선을 닦으면 두 가지가 합해져서 상相을 따르는 수행이 되고, 선을 마칠 때(放禪) 3통으로 견해의 장애를 다스리면 곧 상을 여의는 수행이 된다.
그러므로 하택荷澤이 “비록 온갖 행을 다 닦는다 하더라도 오직 무념無念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법으로써 자신을 닦는 것도 또한 남을 교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갖추는 것이 된다.
율의계로 법신의 단덕斷德을 이룩하고 선법계로 보신의 지덕智德을 이룩하며 섭생계로 화신의 은덕恩德을 이룩한다. 이미 성性을 닦아 둘 다 실천하였으면 나와 남이 다 같이 유익하게 된다. 그런즉 이것이 바로 최상승最上勝의 수행이다. 그러므로 선가禪家에서 날마다 행하는 상규常規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예전 덕 높으신 스님의 이 말씀이 실로 확실한 논리라 하겠다.

010_0606_c_01L默言作法之威儀看察自心堂使
010_0606_c_02L六賊不得入比如世人看守其堂使
010_0606_c_03L盜不得入也亦以十統對治十惡之機
010_0606_c_04L以初三統對其身三殺盜淫以身金
010_0606_c_05L字觀想三過即滅以中一統
010_0606_c_06L對其口四綺妄兩惡以語金剛
010_0606_c_07L觀想四過即滅以後三統對其意三貪
010_0606_c_08L嗔癡以意金剛字觀想三毒即滅
010_0606_c_09L以放禪時三統打其能所治解碍也
010_0606_c_10L門外三拜者代護法神大衆前致敬云
010_0606_c_11L此是諸方古今之通論而三門直指
010_0606_c_12L又有他說無足可取

010_0606_c_13L
評日先以七統治十惡則是斷惡故
010_0606_c_14L攝律儀戒旣治十惡則是十善故
010_0606_c_15L攝善法戒斷惡修善合爲隨相行
010_0606_c_16L禪三統治解碍則爲離相行也故荷澤
010_0606_c_17L雖備修萬行唯以無念爲宗以此
010_0606_c_18L自修亦以化人故亦具攝衆生戒也
010_0606_c_19L律儀戒成法身斷德善法戒成報身智
010_0606_c_20L攝生戒成化身恩德也旣修性雙行
010_0606_c_21L自他兼利則是爲最上乘行故以爲禪
010_0606_c_22L家日用之常䂓古德此說實爲確論也
010_0606_c_23L「附錄」二字編者補入

010_0607_a_01L
그러나 이 말이 정녕 규범을 만든 본사本師의 논리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아마도 후세 사람의 추론追論인 듯하다. 이제 내 어리석은 소견으로 헤아려 보건대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미 10통으로 10악을 다스린다고 하였는데, 몸과 뜻이 짓는 업이 각각 3씩 되기 때문에 모두 3통으로 친다면, 입은 4가지 허물을 짓는데 어찌하여 1통만 친단 말인가? 또 3학學은 원래 교가敎家의 사업事業인데 어찌하여 말없이 수행하는 선실禪室에서 사용하는 일용日用의 상규常規로 적용한단 말인가?
더구나 왜 저 계戒에 대해서만 밝히고 정定과 혜慧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가? 이치로 보면 전혀 비슷하지도 않으니, 그런 까닭에 목우자牧牛子는 ‘정혜결사定慧結社’라고 말하였고, 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작은 노고를 그만두지 않고 감히 삼처전심三處傳心2)과 오파분방五派分芳의 격외선格外禪의 뜻을 가지고 사물에 붙여 그 뜻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대개 화살 하나가 중간 1통은 곧 여래선如來禪이니 즉 3구 중에 본분本分 1구이다. 세 관문을 깨뜨리니, 처음 3통은 곧 의리선義理禪으로서 이치와 일이 서로 막혀 떨어진 3구이다. 화살이 날아간 길이 분명하구나. 뒤의 3통은 곧 조사선이니 삼요三要이다. 그러니 어찌 규범을 만든 사람의 본래의 뜻이라 하겠는가? 이 두 구의 게송은 말후구(末後句 : 선의 마지막 관문)를 구족具足하고 있으니, 선문禪門의 어구語句들을 남김없이 다 꾸려서 바로 말이 없는 선을 닦는 방의 체식體式에 합한다고 하겠다. 그러니 어찌 도를 깨닫지 못하겠는가?
대혜大慧가 이르기를 “최후의 궁극적 진리는 표거標舉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의리선의 3구 하늘을 덮고 여래선의 1구 땅을 덮으며, 소리를 덮고 형상을 덮는다조사선 3요.”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님과 천하의 납승衲僧들이 매일 수용하는 행리처行李處를 몽땅 흔들어 뒤엎어서 여러 사람들의 면전面前에서 단번에 놓아 버리고, 밤낮으로 희롱해 가고 희롱해 와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에 끌어당겨서 취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일찍이 시험 삼아 논하건대 ‘간看’이란 ‘참구參究하다’라는 의미이니, 마음을 참구하고 말을 참구한다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이는 곧 광명을 돌이켜 되돌려 비춘다는 의미이지 검사하고 살펴서 도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를 말한 것이 아니다. ‘당堂’이란 자신의 심당心堂이니 특별히 기둥 네 개를 세우고 서로서로 얽어매어 지탱하게 하는 것은

010_0607_a_01L然未知此說正是立䂓本帥之所論耶
010_0607_a_02L恐是後人之追論也今以愚意料量
010_0607_a_03L有未洽處旣以十統治十惡則身意各
010_0607_a_04L三故皆以三統打之口有四過何以
010_0607_a_05L一統打之乎且三學元是敎家之事業
010_0607_a_06L那可以爲默言禪室之日用常䂓又況
010_0607_a_07L但明其戒而未及定慧者乎理似不然
010_0607_a_08L故牧牛子但名定慧結社而不言其戒
010_0607_a_09L

010_0607_a_10L
故今不措眉毛敢以三處傳心五派分
010_0607_a_11L芳之格外禪旨寄顯其意大抵一鏃
010_0607_a_12L中一統即如來禪
三句之本分一句
破三關初三統即義理禪
理事隔別三句

010_0607_a_13L分明箭後路後三統即祖
師禪三要
豈非立䂓之本
010_0607_a_14L意乎此兩句偈具足末後句故禪門
010_0607_a_15L語句括盡無餘正合於默言禪室之體
010_0607_a_16L式也豈不見道大慧云末後一句子
010_0607_a_17L
聲前露裸裸義理禪
三句
盖天如來禪
一句
盖地
010_0607_a_18L盖聲盖色祖師禪
三要
然則十方諸佛歷代
010_0607_a_19L祖師天下衲僧每日受用之行李處
010_0607_a_20L盡底掀翻頓放諸人面前晝三夜三
010_0607_a_21L弄來弄去要使諸人立地搆取也試甞
010_0607_a_22L論之看者叅究之義如看心看話之
010_0607_a_23L例故乃回光返照之義非謂伺察標盜
010_0607_a_24L堂者自心堂特立四柱而互相維

010_0607_b_01L자성自性의 미묘한 마음에 4구가 상즉相卽하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서 떠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4면이 마치 청량淸凉한 못과 같아서 누구나 다 들어가도 되는 것이다.
따로 두 개의 시렁을 시설하되 그것이 움직일 수 있게 한 것은 자기 마음에 본래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이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활발발活潑潑한 모습이다. 이미 기機와 용用의 3요要를 갖추었으면 3구句와 3현玄도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마다 본래부터 말후구가 있다는 의미이다.
특별하게 10개의 채찍(十鞭)3)을 갖춘 것은 제3구인 의리선 3구와 제2구인 여래선 3현과 제1구인 조사선 3요, 그리고 각 구절 위의 1규竅에 비교한 것이니, 그런 까닭에 말후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堂 위의 말후구는 자성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10개의 채찍인 말후구는 오늘 새로 훈습熏習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6조祖가 “성품이 아무리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해도 반드시 새로 훈습해야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대개 모든 중생들은 자기 성품의 미묘한 마음에 4구가 서로 이어져서 온갖 그른 것이 다 끊어진다. 그러므로 본래 3구·3현·3요·4빈주賓主·4조용照用·4할喝·8방棒 등 다함이 없는 성품의 덕과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미묘한 작용이 갖추어져 있건만, 모든 사람들은 제 스스로 어두워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옛날 덕이 높으신 스님이 이런 법칙을 거기에 비교하여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보고 취해서 부처님과 조사들과 함께 동일하게 수용하게 한 것이다.
맨 먼저 사미沙彌가 밖에 나가 간당看堂을 정처正處에 안치하고 죽비 삼성三聲을 친다. 그것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방석을 펴고 청하여 선지식善知識과 서로 만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음에 입승立繩이 역시 죽비 세 번을 쳐서 소리를 내는데, 그것은 서로 만나 보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이니, 곧 원만하게 통한 넓은 문을 8글자로 타개打開해서 여러 지방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접대하는 모양이다.
다음에 입승이 주장자拄杖子를 세워 두는데, 그것은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수용한 말후 1구를 마주 보면서 제시提示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이미 교화하는 문에 나아가서 방패와 창을 시설하였으니, 그렇다면 진흙탕에 빠져서 흙탕물투성이가 되는 것을 면할 길이 없다.

010_0607_b_01L持者以表自性妙心四句相即去離
010_0607_b_02L不得故四面如淸凉池皆可入也
010_0607_b_03L設二架於堂上使其活動者以表自心
010_0607_b_04L本具大機大用而活潑潑地也
010_0607_b_05L具機用三要則三句三玄亦在其中故
010_0607_b_06L以表人人心上本有末後句也特具十
010_0607_b_07L鞭者以擬第三句義理禪三句第二句
010_0607_b_08L如來禪三玄第一句祖師禪三要及句
010_0607_b_09L上一竅故亦爲末後句也然則堂上末
010_0607_b_10L後句表自性本有十鞭末後句表今日
010_0607_b_11L新熏也故六祖云性雖本有必借新
010_0607_b_12L盖一切衆生自性妙心四句相即
010_0607_b_13L百非都絕故本具三句三玄三要四賓
010_0607_b_14L主四照用四喝八棒等無盡性德難思
010_0607_b_15L妙用而諸人自昧故古德擬設此䂓
010_0607_b_16L令人各自看取而與佛祖同一受用也
010_0607_b_17L初沙彌出看堂安正處打竹篦三聲者
010_0607_b_18L以表學者自遠而來展坐具而請
010_0607_b_19L知識相見之㨾子也次立繩亦打三聲
010_0607_b_20L許與相見即圓通普門八字打開
010_0607_b_21L接待方來之㨾子也

010_0607_b_22L
次立繩因卓拄杖者佛祖受用之末後
010_0607_b_23L一句覿面提示也何以知之旣是出
010_0607_b_24L來化門施設干戈則未免拖泥帶水

010_0607_c_01L그런 까닭에 임제臨濟의 3구 가운데 제3구는 다만 새로 훈습하는 의리선義理禪이다. 그러나 원래 이것은 하나의 주장자이기 때문에 제2구를 갖추고 있으니, 이는 곧 새로 훈습하여 본분本分의 여래선을 밝히는 것이요, 또 주장자가 비록 하나이긴 하지만, 그 또한 동쪽을 가리키거나 큰 작용(大用) 서쪽을 가리킨 것큰 기미(大機)이므로 제1구를 갖추었으니 3요의 조사선을 구족하였다 할 것이다. 또 이 주장자를 다만 주장자라고만 한다면, 그런 까닭에 역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위로 향한 한 구멍(向上一竅)을 갖춘 것이니, 어찌 말후구를 몽땅 흔들어 뒤집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사람들도 또한 주장자를 세운다. 이것은 말후구이니 사람마다 분상(分上 : 본래의 타고난 성질)에서 각자 원만하게 성취한다. 그렇게 되면 비단 화상만이 독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회상의 모든 사람들도 각각 수용할 수 있는 분한이 있다는 말이니, 이는 이른바 ‘사자의 굴속에는 다른 짐승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처음에 사미가 간당을 3통統 친다. 다른 사람이 남긴 자취에 걸려서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인정하여, 마주치고서도 지나쳐 버리고 말기 때문에, 제3구인 의리선 3구를 자기가 해야 할 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3구를 천득薦得하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3처의 종지宗旨를 참구參究하지도 못하고 부처님과 조사님의 서자(孽子)가 되고 마나니 이는 곧 하택의 종지宗旨이다.
다음에 입승이 주장자 한 번을 들었다 놓나니, 그것은 한 자루 주장자를 거듭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제2구로서 방편에 나아가 실상을 밝히는 살인도殺人刀의 여래선이다. 그러므로 화살 하나로 과녁 세 개를 부수는 것이니, 이는 곧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준 소식이다. 그런 까닭에 고봉高峰 화상이 주장자로 책상을 한 번 내리치고 말하기를 “의기意氣가 있을 때에 의기를 보태라.”고 한 것이다.
다음에 사미가 또 간당 1통統을 치나니, 그것은 비로소 살인도의 의미를 깨달아 안 것이다. 제2구를 천득하면 사람과 하늘의 스승도 될 능력이 있는 것이므로 비로소 부처님과 조사님의 적자嫡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조동종曹洞宗과 위앙종潙仰宗과 법안종法眼宗 3가의 종지이다.

010_0607_c_01L故爲臨濟三句中第三句但新熏之義
010_0607_c_02L理禪然元是一條拄杖故具第二句
010_0607_c_03L即新熏明本分之如來禪又此拄杖
010_0607_c_04L是一條亦能指東
畫西
具第一
010_0607_c_05L具足三要之祖師禪也又此拄杖
010_0607_c_06L但喚作拄杖故亦具山山水水之向上
010_0607_c_07L一竅也豈非末後句盡底掀翻也諸人
010_0607_c_08L亦卓拄杖者此末後句人人分上
010_0607_c_09L自圓成則非但和尙獨自受用一會諸
010_0607_c_10L亦各受用有分之意此所謂獅子窟
010_0607_c_11L中無異獸也

010_0607_c_12L
初沙彌打三統者滯他施跡認他光影
010_0607_c_13L當面蹉過故以第三句義理禪三句承
010_0607_c_14L當也此是第三句薦得自救不了者故
010_0607_c_15L未叅三處宗旨而爲佛祖之孽子即荷
010_0607_c_16L澤宗旨也

010_0607_c_17L
次立繩卓一下者重示一條拄杖則是
010_0607_c_18L第二句即權明實之殺人刀如來禪故
010_0607_c_19L爲一鏃破三關即多子塔前分半座消
010_0607_c_20L息也故高峯卓一下云有意氣時添意
010_0607_c_21L次沙彌又打一統者方始會得殺人
010_0607_c_22L是爲第二句薦得堪爲人天師者故
010_0607_c_23L方爲佛祖之嫡子即曺洞僞仰法眼三
010_0607_c_24L家宗旨也

010_0608_a_01L
다음에는 입승이 주장자 한 번을 들었다 놓는데, 이것은 동쪽을 가리키거나 서쪽을 가리키는 주장자를 앞에 드러낸 것이니, 곧 제1구인 3요의 활인검을 구족한 조사선이다. 화살이 날아간 길이 분명해지는 것으로서 곧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뽑아 든 소식이다. 그런 까닭에 고봉 화상이 다시 주장자로 책상을 한 번 내리치고 “풍류가 없는 곳에 또한 풍류가 있구나.”라고 말한 것이다.
다음에 사미가 또다시 간당 3통을 치는데, 이것은 활인검을 깨달아 안 것이다.
다음에 간당살을 엇갈려 놓은 다음 물러나 3배의 예를 올리는데, 이것은 위에서 두 차례나 주장자로 책상을 내리치되 앞과 뒤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니련선하(泥蓮河) 옆에서 널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여서 살殺과 활活을 일시에 보여준 소식을 철저하게 깨닫고 바로 가섭이 부처님 발에 세 번 절한 것과 혜가慧可가 나와서 절을 세 번 하고 골수骨髓를 얻은 시절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 까닭에 조용동시照用同時4)라 하겠다. 이는 바로 한산寒山이 손뼉을 치자 습득拾得이 깔깔대고 웃은 진리이다. 이것은 제1구를 천득薦得하면 바로 부처님과 조사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부처님과 조사의 적자가 되나니, 곧 임제와 운문雲門 2가의 종지이다.
다음에 사미가 제자리에 다시 앉아서 죽비를 세 번 쳐서 소리를 내나니, 그것은 ‘조용동시’의 이치에 대하여 깨달은 것을 가지고 스승 앞에 아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에 입승이 역시 죽비를 세 번 쳐서 소리를 내나니, 그것은 입에 가득히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에 사미가 본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그것은 위에서 깨달은 3구의 소식이 다만 오늘 전해 받은 조용동시가 아직은 특별히 두각頭角5)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퇴보退步했다가 다시 본자리에 돌아와 앉아서 다리를 뻗고 잠을 자고 소요逍遙하면서 세월만 보내는 것이다.
이는 본색本色 납자衲子의 몸가짐이니, 바로 본분이 조照와 용用을 동시에 하지 못할 때의 소식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한가한 도인道人의 경계이다. 이는 한산과 습득이 머리 병을 앓아 물러나 달아난 처지와 같은 경우이니, 이는 정녕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요, 또한 모든 사람들의 자기 분상의 일이다.
때와 장소가 같지 않고 입승의 지시도 없는 것은 곧 일천 성인이 전하지 않은 위를 향한 한 길이다.

010_0608_a_01L
次立繩又卓一下者進顯指東畫西底
010_0608_a_02L拄杖則是第一句具足三要之活人劒
010_0608_a_03L祖師禪故爲分明箭後路即靈山會上
010_0608_a_04L擧拈花消息也故高峯又卓一下云
010_0608_a_05L風流處也風流次沙彌亦打三統者
010_0608_a_06L能會得活人劒也次以鞭交互出禮三
010_0608_a_07L拜者以上兩度卓一下一時無前後故
010_0608_a_08L又能徹悟泥蓮河側槨示雙趺之殺活齊
010_0608_a_09L示消息也正同迦葉三拜佛足及與慧
010_0608_a_10L可出禮三拜而得髓之時節故爲照用
010_0608_a_11L同時正是塞山撫掌拾得呵呵處也
010_0608_a_12L是爲第一句薦得堪爲佛祖師者故
010_0608_a_13L爲佛祖之嫡子即臨濟雲門二家宗旨
010_0608_a_14L次打竹篦三聲者以其所悟之照用
010_0608_a_15L同時呈似師前立繩亦打三聲者滿
010_0608_a_16L口許他也

010_0608_a_17L
次沙彌依位而還坐本處者上來會得
010_0608_a_18L三句消息但是今日傳授之照用同時
010_0608_a_19L則猶未脫特地之頭角故更能退步
010_0608_a_20L還坐本處伸脚打眠逍遙度日方是
010_0608_a_21L本色衲子之體態是爲本分照用不同
010_0608_a_22L時消息無爲無事閒道人境界故寒山
010_0608_a_23L拾得疾首而退走處正是佛祖安身立
010_0608_a_24L命處亦是諸人自己分上事也此不同
010_0608_a_25L時處無立繩指示者是千聖不傳之向

010_0608_b_01L그런 까닭에 다만 수행하는 사람이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저 속에 이르러서는 3처에서 전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말라. 다섯 계파(五派)가 다만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선을 마칠 때(放禪時)에 입승立繩이 먼저 죽비를 세 번 쳐서 소리를 내나니, 그것은 혹 어떤 사람이라도 잘 참구하지 않고, 다만 본분이 같지 않은 때에 처해서 새로 훈습하는 동시同時를 매각昧却6)할까 염려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시同時의 소식에 대하여 거듭 밝혀 잊지 않게 한 것이니, 대개 부동시不同時는 아무리 최상의 원극圓極이라 하더라도 다만 앉는 데에만 집착해서 동시를 매각하면 축생畜生은 영원히 축생으로 남고 아귀餓鬼는 영원히 아귀가 되어서 다시는 한 사람도 참 마음을 발하여 근원자리로 돌아가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기어이 동시가 아닌 데에 사무쳐 이르렀다 해도 또한 동시를 매각한 소식은 아니니, 이것은 닦아 증득함이 없는 가운데 닦아 증득함이 있는 것이며, 방편方便이 없는 가운데 방편이 있는 것이며, 전해 받은 것이 없는 가운데 전해 받은 것이 있나니, 그러므로 구경究竟에는 완전하게 다 좋고 다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어 사미가 간당을 3통 치나니, 그것은 필경에 꼭 해야 할 참다운 뜻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마조馬祖가 말한 “오랑캐의 난리가 있은 후 전해 받음이 없음 30년 동안 일찍이 염장鹽醬이 없었던 일은 없었노라.전해 받음”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어서 사미는 죽비를 세 번 쳐서 소리를 내나니, 그것은 이치에 대하여 깨달은 것을 가지고 스승 앞에 아뢰는 것이다.
입승도 역시 죽비를 세 번 쳐서 소리를 내나니, 그것은 입에 가득히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후구란 곧 의리선을 새로 훈습하는 곳에서 격외선의 본분을 가르쳐 보이면 곧 새로운 근본을 구족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후구가 원만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곧바로 본분을 거론하면 그것을 최초구最初句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이 하루 동안(六時)의 작법은 곧 말후구를 네 번 거듭해서 밝힌 것이다. 육시六時 가운데 향을 사르고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잠자리에 들 때 치는 종(開寢)과 잠자리에서 깨어나게 할 때 치는 종(起寢)은 밤 3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체體이고, 석종釋鐘과 재齋를 전후前後해서 치는 종은 낮 3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용用이 된다.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것에서부터 재전齋前까지는 밖을 향하여 종을 치는 것이므로 출타出打라 이름하나니,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 치는 종은 곧 체이고, 석종과 재전에 치는 종은 바로 용이다. 그러므로 곧 체에 즉한 용(即體之用)이 되나니 이것은 곧 대용으로 딱 끊어 버리는 것(大用直截)이요,

010_0608_b_01L上一路故但學者自肯自悟也到遮
010_0608_b_02L莫道三處傳五派但有名

010_0608_b_03L
放禪時立繩先打竹篦三聲者或恐有
010_0608_b_04L人不善叅究但坐本分不同時昧却新
010_0608_b_05L熏同時故重明同時消息不可忘也
010_0608_b_06L盖不同時雖最圓極若但坐着而昧
010_0608_b_07L却同時則畜生永作畜生餓鬼永作餓
010_0608_b_08L更無一人發眞歸源矣是故直須徹
010_0608_b_09L到不同時亦不昧却同時消息是爲無
010_0608_b_10L修證中有修證無方便中有方便無傳
010_0608_b_11L授中有傳授故方能究竟盡善盡美也
010_0608_b_12L次沙彌打三統者畢竟承當其旨也
010_0608_b_13L是馬祖所謂自從胡亂後無傳
三十年少
010_0608_b_14L鹽醬不得
之消息也仍打竹篦三聲
010_0608_b_15L以其悟處呈似也立繩又打三聲者
010_0608_b_16L亦滿口許他也盖末後句者即於義理
010_0608_b_17L禪新熏處指示格外禪本分則新本具
010_0608_b_18L故云末後句圓成也若直擧本分
010_0608_b_19L則名最初句也

010_0608_b_20L
今此六時作法乃四重明末後句六時
010_0608_b_21L焚修開起寢爲夜三故體也釋與
010_0608_b_22L齋前後爲晝三故用也自起寢至齋前
010_0608_b_23L向外打之故名出打起寢是體釋與齋
010_0608_b_24L前是用故爲即體之用即大用直截也

010_0608_c_01L재후齋後에 치는 종으로부터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 치는 종까지는 안을 향하여 치는 종이므로 입타入打라 이름하나니, 재후에 치는 종은 곧 용이요, 향을 사르고 수행하다가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 치는 종은 곧 체이다. 그러므로 용에 즉한 체(即用之體)가 되나니 이것은 곧 큰 기틀은 두루 응하는 것(大機圓應)이며, 밤과 낮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서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기 때문에 기틀과 활용을 똑같이 보인 것이다.
이미 3요를 갖추었으니, 그러면 3현과 4조용照用 등이 원만하게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제1구는 잡화 가게(雜貨鋪)인 조사선이다. 이는 이미 교화의 문에 와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 만나 보았기 때문에 제3구인 새로 훈습하는 의리선이 되고, 또 방편에 즉卽하여 실상을 밝히기 때문에 제2구인 진금眞金 점포의 여래선이 된다.
그런 까닭에 이 육시六時의 출입出入이 합해져서 말후구가 되는 것을 염송拈頌으로 희롱할 여지가 없다. 또 출타出打를 할 때의 10통統 중에 처음 3통은 의리선 3구를 의미하고 중간 1통은 여래선 1구를 의미하며 마지막 3통은 조사선 3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또한 말후구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입타入打할 때에 10통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이 또한 말후구가 된다.
또 매 통마다 각각 10번씩 치는 것도 또한 말후구를 나타낸 것이니, 처음 세 망치를 다르게 구별해서 치는 것은 의리선 격별隔別 3구요, 중간 여섯 망치를 자웅雌雄으로 치는 것은 한 번은 치켜들고 한 번은 억누르며, 불고 치는 것이 걸림 없이 자재自在하니, 곧 제1구 3요로서 제2구 3현도 역시 그 가운데 있어서 법의 본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요, 마지막 한 번 치는 것은 곧 제1구인 위를 향한 한 구멍(第一句向上一竅)으로서 제2구인 위로 향한 것(第二句向上)도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육시六時의 염롱拈弄이 도합 네 번 거듭 말후구를 밝힌 것이다.
그러한즉 처음 3통을 치는 것은 비록 3구라 하나 매 통마다 각각 구句와 현玄과 요要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중간 1통은 비록 1구라고 말하지만 역시 구句·현玄·요要를 갖추었기 때문에 다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뒤의 3통은 비록 3요要를 말한 것이라고 하지만 매 통마다 각각 구·현·요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010_0608_c_01L自齋後至開寢向內打之故名入打齋
010_0608_c_02L後是用梵修起寢是體故爲即用之體
010_0608_c_03L即大機圓應也晝夜回互無頭無尾
010_0608_c_04L故即機用齊示也旣具三要則三玄四
010_0608_c_05L照用等無不圓具故爲第一句雜貨鋪
010_0608_c_06L祖師禪此旣出來化門師資相見
010_0608_c_07L爲第三句但新熏義理禪又即權明實
010_0608_c_08L故爲第二句眞金鋪如來禪也故此六
010_0608_c_09L時出入合爲末後句無餘拈弄也又出
010_0608_c_10L打時十統中初三統義理禪三句
010_0608_c_11L一統如來禪一句後三統祖師禪三
010_0608_c_12L要故亦具末後句也入打時十統亦
010_0608_c_13L然故又爲末後句也又每統各十打
010_0608_c_14L亦表末後句謂初三槌別別打者表義
010_0608_c_15L理禪隔別三句中六槌雌雄打者擡搦
010_0608_c_16L吹拍無碍自在即第一句三要而第
010_0608_c_17L二句三玄亦在其中以法體無別故
010_0608_c_18L終一打者即第一句向上一竅而第二
010_0608_c_19L句向上亦在其中也故六時拈弄
010_0608_c_20L爲四重明末後句也

010_0608_c_21L
然則初三統雖云三句而每統各具句
010_0608_c_22L玄要故更無餘事中一統雖云一句
010_0608_c_23L而亦具句玄要故更無餘事後三統
010_0608_c_24L雖云三要而每統各具句玄要故更無

010_0609_a_01L곧바로 아래에는 근본과 끝도 없고 깊고 얕음도 없으며, 앞과 뒤도 없고 솜씨 좋고 솜씨 없음도 없다. 마치 신변神變과 같아서 판정을 내릴 수 없으니 필경畢竟에 무엇을 가지고 3요를 지을 것이며, 무엇을 가지고 3현을 지을 것이며, 무엇을 가지고 3구를 지을 것인가? 비록 3구와 3현과 3요는 필경에는 명연冥然하여 다 하나의 기틀이 됨을 알지라도 이것은 바로 일체 중생의 열뇌熱惱의 바닷속에 시원한 법의 깃발이다.
이 깃발을 세운 것이 마치 도독고塗毒鼓와 같아서 그 북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다 죽나니, 이것이 바로 임제종臨濟宗에서 설법을 하는 표준이다. 그렇다면 어찌 구와 현과 요의 심천深淺과 본말本末을 헤아려 결정하고 계교計較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임제臨濟가 시중示衆하여 “종승宗乘에 대하여 예를 들어 제창하면 1구句 안에 반드시 3현玄을 갖추어야 하고, 1현玄 속에 반드시 3요要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심천과 본말로 분별하는 것은 근기가 영리하고 아둔함을 따라 어찌할 방법이 없다.
이로써 관찰하건대 지금 이 간당의 법규는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님들이 자재하게 수용하여 실천한 것이며, 네 가지로 태어나는 여섯 갈래 세계의 준동함령(蠢動含靈 :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본래부터 저절로 원만하게 성취된 말후구를 염송으로 희롱할 여지가 없다.
근기가 영리한 사람은 제1구 조사선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할 것(徹悟)이요, 그 다음에는 제2구 여래선을 깨달아야 할 것(悟得)이며, 그 다음에는 제3구 의리선을 깨달아 들어가야 할 것(悟入)이니, 비록 저 무명無明이 두텁고 무거워서 종인지 신랑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라 하더라도 날마다 일어나서 보고 듣고 훈습하면 반야의 정인正因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 깃발을 세운 것이 마치 도독고와 같아서 그 북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다 죽는 경우와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 덕 높으신 스님이 노파심이 절박해서 임제종 설법의 표준을 묘사해 내서 선방에서 날마다 사용하는 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산야山野에서 보아 터득할 일이다. 진실로 그렇지 못하면 행여 눈 밝은 이가 있거든 나에게 보여 달라. 이 규범을 만든 본사가 논한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감히 얕은 소견으로 이렇게 벌여 놓았는데

010_0609_a_01L餘事直下無本末無深淺無背面
010_0609_a_02L巧拙如同神變定當不得畢竟喚什
010_0609_a_03L麽作三要喚什麽作三玄喚什麽作三
010_0609_a_04L句也須知三句三玄要畢竟冥然揔一
010_0609_a_05L此是一切衆生熱惱海中淸凉法幢
010_0609_a_06L此幢之立如塗毒鼓檛之則聞者
010_0609_a_07L皆死此是臨濟宗說法之標準則何以
010_0609_a_08L句玄要深淺本末擬議計較哉故臨濟
010_0609_a_09L示衆云大凡擧唱宗乘一句中須具三
010_0609_a_10L一玄中須具三要然則以深淺本末
010_0609_a_11L分別者隨機利鈍事不獲已也以此
010_0609_a_12L觀之今此看堂之䂓十方諸佛歷代
010_0609_a_13L祖師自在受用之行履處四生六趣
010_0609_a_14L蠢動含靈本自圓成之末後句無餘拈
010_0609_a_15L弄也機之利者可以徹悟第一句祖師
010_0609_a_16L其次悟得第二句如來禪又其次悟
010_0609_a_17L入第三句義理禪雖其無明厚重奴郞
010_0609_a_18L不辨者亦能逐日起來見聞熏習
010_0609_a_19L得般若之正因也故云此幢之立如塗
010_0609_a_20L毒鼓檛之則聞者皆死故古德老婆心
010_0609_a_21L措出臨濟宗說法之標準以爲禪室
010_0609_a_22L中日用之常䂓也此是山野所見得處
010_0609_a_23L苟謂不然幸明眼示我未見立䂓本師
010_0609_a_24L之所論故敢以淺見伊麽差排而若

010_0609_b_01L만약 본제本制를 얻어서 서로 비추어 보면, 결단코 배나 채우는 음식과 같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장님이 땅을 두드리며 가는 격이 된지라, 비웃음을 당할 처지에 오를 것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대청大淸 도광道光 7년(1827년) 정해丁亥 봄 전라도 장성부 백양산 운문암雲門庵 개간開刊

010_0609_b_01L得本制相照則決未免奉腹之需然旣
010_0609_b_02L以盲杖摘埴一上見笑安足辭也

010_0609_b_03L
010_0609_b_04L
大淸道光七年丁亥春全羅道長城府白
010_0609_b_05L羊山雲門庵開1)

010_0609_b_06L此下有「作法龜鑑下終」編者除之
  1. 1)도적 : 눈·귀·코·혀·몸·뜻 등 여섯 가지 번뇌의 도적을 말한다.
  2. 2)삼처전심三處傳心 : 선종에서 말하는 세존이 세 곳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것. ①영산회상의 염화미소拈花微笑. ②다자탑多子塔 터에서 자리를 나눈 것. ③쌍림雙林의 관棺 속에서 발을 내민 것.
  3. 3) 10개의 채찍(十鞭) : 간당틀을 치는 간당살(선채)을 가는 대나무 가지 다섯 개씩 모아 한 끝을 얽어 만드는데, 두 개를 만들기 때문에 10개의 채찍이 되는 것이다.
  4. 4)조용동시照用同時 : ‘조照’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를 살피는 상황이고, ‘용用’이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대응하는 움직임이니 그것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것.
  5. 5) 두각頭角 : 짐승의 뿔. 또 호각虎角·토각兎角의 뜻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없어도 좋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6. 6)매각昧却 : 안목이 없어서 사리를 밝게 보지 못함.
  1. 1)「附錄」二字。編者補入。
  2. 1)此下有「作法龜鑑下終」編者除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