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占察善惡業報經卷下

ABC_IT_K0421_T_002
013_0665_a_01L점찰선악업보경 하권
013_0665_a_01L占察善惡業報經卷下 出六根聚經中


천축삼장 보리등 한역
송성수 번역
김두재 개역
013_0665_a_02L天竺三藏菩提燈譯



그때에 견정신보살마하살이 지장보살마하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대승을 구하는 이에게 나아가는 방편을 열어 보이겠습니까?”
013_0665_a_03L爾時堅淨信菩薩摩訶薩問地藏菩薩摩訶薩言云何開示求向大乘者進趣方便
지장보살마하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만일 어떤 중생이 대승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응당 먼저 맨 처음에 실천해야 할 근본이 되는 업(業)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맨 처음에 실천해야 할 근본이 되는 업이란, 이른바 하나의 진실한 경계[一實境界]에 의지하여 신해(信解)를 닦는 것입니다. 신해의 힘이 늘어나고 자람으로 말미암아 신속하게 보살의 종자 성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013_0665_a_06L地藏菩薩摩訶薩言善男若有衆生欲向大乘者應當先知最初所行根本之業其最初所行根本業者所謂依止一實境界以修信因信解力增長故速疾得入菩薩種性
013_0665_b_01L하나의 진실한 경계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중생들 마음의 본바탕은 본래부터 여태까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어서 그 스스로의 성품은 청정한 것이며 장애가 없는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에 평등하고 두루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시방에 원만하여 구경(究竟)에는 하나의 형상으로서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변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것이어서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일체 중생들의 마음은 일체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의 마음과 일체 보살의 마음과 일체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다 똑 같아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더러워짐이 없는 적정(寂靜)한 진여(眞如)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마음에 분별이 일어나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환(幻)이 변화하는 것과 같아서 결정된 진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식(識)ㆍ수(受)ㆍ상(想)ㆍ행(行)이거나, 기억하여 생각하고 반연하여 생각한 것이거나, 깨달아 아는 것 등 가지가지의 심수(心數)29)는 푸른 것도 아니고 누런 것도 아니며, 붉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니며, 뒤섞인 빛깔도 아닙니다. 길고ㆍ짧고ㆍ모나고ㆍ둥글고ㆍ크거나 작은 것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시방의 허공이나 일체의 세계를 다하기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형상을 구한다 할지라도 어느 것 하나 구분하여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013_0665_a_11L所言一實境界者謂衆生心體從本已來不生不滅自性淸淨無障無㝵猶如虛空離分別故平等普遍無所不至圓滿十方究竟一相無二無別不變不異無增無減以一切衆生心一切聲聞辟支佛心一切菩薩一切諸佛心皆同不生不滅無染寂靜眞如相故所以者何一切有心起分別者猶如幻化無有定實所謂憶念緣慮覺知等種種心非靑非黃非赤非白亦非雜色有長短方圓大小乃至盡於十方虛空一切世界求心形狀無一區分可得者
다만 중생들이 밝은 지혜가 없고 어리석고 깜깜한 것만 훈습한 인연 때문에 허망한 경계를 나타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기억하거나 집착을 내는 것뿐입니다.
이른바 이 마음을 스스로 알 수 없으면서 망령되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집착하여 깨달아 안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나와 내 것이라고 헤아리지만, 실은 깨달아 아는 생각이랄 것조차도 없나니, 이 허망한 마음 때문에 필경에 본체가 없어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깨달아 알거나 분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알면 곧 시방 3세의 일체 경계는 차별할 모습이 없을 것이요, 일체의 법이 모두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분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는 제각기 같지 않거늘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억측하여 이것은 나요, 저것은 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법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도 없거니와 곧 차별도 없는 것인데, 오직 허망한 마음을 의지하여 안에 스스로 없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앞에 보이는 바깥 경계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허망하게 갖가지 법에 대한 생각을 내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저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옳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르다고 말하기도 하며, 곱다고 말하기도 하고 밉다고 말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한량없고 그지없이 많은 법에 대하여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만 합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다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근본으로 삼습니다.
013_0665_b_02L但以衆生無明癡闇熏習因現妄境界令生念著所謂此心不能自知妄自謂有起覺知想計我而實無有覺知之想以此妄心竟無體不可見故若無覺知能分別則無十方三世一切境界差別之以一切法皆不能自有但依妄心分別故有所謂一切境界各各不同自念爲有知此爲自知彼爲他是故一切法不能自有則無別異唯依妄心不知不了內自無故謂有前外境界妄生種種法想謂有謂無謂彼謂此謂是謂謂好謂惡乃至妄生無量無邊法當如是知一切諸法皆從妄想生妄心爲本
그러나 이 허망한 마음에는 스스로의 형상이 없기 때문에 또한 경계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앞의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하고 깨달아 알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 이 허망한 마음과 앞에 나타난 경계가 비록 함께 서로 의지하였다 하더라도 일어남에 있어서는 먼저와 나중이 없습니다. 이 허망한 마음은 일체 경계의 근원이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법계가 모두 하나의 형상이라는 이치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 무명(無明)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명의 힘의 원인을 의지하기 때문에 허망한 경계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고, 또한 무명이 없어짐을 의지하여 일체의 경계도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일체의 경계를 의지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경계에 무명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도 아니며, 경계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013_0665_b_16L然此妄心無自相故亦依境界而有所謂緣念覺知前境界故說名爲心又此妄心與前境界雖俱相依起無先後而此妄心能爲一切境界原主所以者何謂依妄心不了法界一相故說心有無明依無明力因故現妄境界亦依無明滅故一切境界滅非依一切境界自不了故說境界有無明亦非依境界故生於無明
013_0665_c_01L일체의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경계에 대하여 무명을 내시지 않기 때문에, 또 경계가 없어지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무명의 마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일체의 경계는 본래부터 여태까지 그 체성(體性)이 저절로 적멸하여 일찍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인하여 다만 모든 법은 마음을 의지하여 근본을 삼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모든 법은 다 마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치와 본체가 다르지 않고, 마음에 거두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법은 마음을 좇아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음과 더불어 형상을 지으며 화합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함께 일어나고 함께 없어지되 한가지로 머무름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경계는 다만 마음이 반연하는 바를 따라서 생각생각에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잠깐 동안 머무르는 것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013_0665_c_01L以一切諸佛於一切境界不生無明故又復不依境界滅故無明心滅以一切境界從本已來體性自滅未曾有因如此義是故但說一切諸法依心爲本當知一切諸法悉名爲心體不異爲心所攝故又一切諸法從心所起與心作相和合而有共生共滅同無有住以一切境界但隨心所緣念念相續故而得住持暫時爲
013_0666_a_01L이와 같이 말한 마음의 이치에는 두 가지 형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 형상인가?
첫째는 마음 안의 형상[內相]이요, 둘째는 마음 바깥의 형상[外相]입니다. 마음 안의 형상에 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진실[眞]이요, 둘째는 허망[妄]입니다. 진실이라 함은 이른바 마음 바탕의 본래 형상은 여여(如如)하여 다르지 않고, 청정하고 원만하여 장애가 없으며, 미묘하고 은밀하여 보기 어렵습니다. 일체의 처소에 두루하여 항상 무너지지 않고, 일체의 법을 건립하고 나서 자라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허망이라 함은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고 깨달아 알아 반연하여 헤아리고 기억하는 등의 일이니, 비록 또 계속 이어져서 일체 가지가지 경계를 생기게 하는 것이나, 안은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어서 진실함이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바깥 형상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모든 법의 갖가지 경계 등이니, 생각하는 바를 따라 경계가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안의 마음과 바깥의 마음이 차별이 있는 걸로 아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안의 허망한 생각은 인(因)이 되고 체(體)가 되며, 밖의 허망한 생각은 과(果)가 되고 용(用)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이치를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모든 법은 다 마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013_0665_c_11L如是所說心義者有二種相何等爲二一者心內相二者心外相心內相者復有二種云何爲二一者眞二者所言眞者謂心體本相如如不異淸淨圓滿無障無㝵微密難見以遍一切處常恒不壞建立生長一切法所言妄者謂起念分別覺知緣慮憶想等事雖復相續能生一切種種境界而內虛僞無有眞實不可見故所言心外相者謂一切諸法種種境界等隨有所念境界現前故知有內心及外心差別如是當知內妄想者爲因爲體外妄相者爲果爲用依如此等義是故我說一切諸法悉名爲心
또 꼭 알아야만 합니다. 마음의 바깥 형상은 꿈에 보았던 여러 가지 경계가 오직 마음의 생각으로 지어진 것이니 진실로 바깥의 일은 없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도 모두 이와 같아서 모두 무명 의식에 의지하여 꿈에서 본 망상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013_0666_a_02L又復當知心外相者如夢所見種種境界唯心想作無實外事一切境界悉亦如是以皆依無明識夢所見妄想作故
또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안의 마음은 생각생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 경계와 조건의 대상인 일체의 경계도 마음을 따라서 생각생각에 머무르지 않나니, 이른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기 때문에 갖가지 법이 멸합니다. 마음이 생기고 사라지는 형상은 다만 명자(名字)만 있을 뿐이요, 실제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이 가서 경계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경계도 또한 와서 마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니, 비유하면 마치 거울 속의 형상이 옴이 없고 감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법에서 나고 없어지는 일정한 형상을 구하여도 마침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체의 법은 필경(畢竟)에는 그 본체가 없으며, 본래 항상 공한 것이어서 진실로 나고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은 진실로 나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일체의 경계에는 차별의 모습이 없으며, 고요하고 한맛이기 때문에 진여제일의제자성청정심(眞如第一義諦自性淸淨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자성이 청정한 마음은 담연(湛然)하고 원만하여 분별의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일체의 처소 어느 곳에서나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며,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은 일체의 법을 의지하여 지니며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013_0666_a_05L復次應知內心念念不住故所見所緣一切境界亦隨念念不住所謂心生故種種法生心滅故種種法滅而生滅相但有名實不可得以心不往至於境界界亦不來至於心如鏡中像無來無是故一切法求生滅定相了不可所謂一切法畢竟無體本來常空實不生滅故如是一切法實不生滅則無一切境界差別之相寂靜一名爲眞如第一義諦自性淸淨心彼自性淸淨心湛然圓滿以無分別相故無分別相者於一切處無所不無所不在者以能依持建立一切法故
또 그 마음을 여래장(如來藏)30)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불가사의하여 번뇌[漏] 없는 청정한 공덕의 업을 완전하게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끝없는 본제(本際)로부터 지금까지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으며, 자재하여 사라지지 않는 까닭에 일체에 변화로 나타나시고, 갖가지 공덕의 업은 항상 불타듯 왕성하여 일찍이 쉬어 그침이 없었으니, 이른바 일체 세계에 두루하여 모든 업을 지어 보이시며, 갖가지로 교화하여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013_0666_a_19L復次彼心名如來藏所謂具足無量無邊不可思議無漏淸淨功德之業以諸佛法身從無始本際來障無㝵自在不滅一切現化種種功恒常熾然未曾休息所謂遍一切世界皆示作業種種化益故
013_0666_b_01L한 부처님의 몸은 곧 바로 일체 부처님의 몸이며, 일체 부처님의 몸은 곧 바로 한 부처님의 몸이므로 온갖 작업도 모두 똑같이 하나이니, 이른바 분별하는 모습이 없고 피차(彼此)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평등하고 둘이 없어서 하나의 법성에 의지하여 짓는 업이 똑같나니, 자연 변화한 몸이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일체의 처소에 두루하고 원만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여러 중생들이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 것을 따라서 언제나 저들의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허공이 온갖 물질의 형상과 갖가지 형태의 종류들을 모조리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것처럼, 온갖 물질의 형상과 갖가지 형태의 종류들은 다 허공을 의지하여 존재하며, 건립되고 태어나 자라서 허공 속에 머무르고 허공에 거두어지는 대상이 되나니, 허공을 본체로 삼음으로써 허공의 분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013_0666_b_01L以一佛卽是一切諸佛身一切諸佛身是一佛身所有作業亦皆共一所謂無分別相不念彼此平等無二以依一法性而有作業同自然化體無別異故如是諸佛法身遍一切處圓滿不動故隨諸衆生死此生彼恒爲作譬如虛空悉能容受一切色像種形類以一切色像種種形類皆依虛空而有建立生長住虛空中爲虛空處所攝以虛空爲體無有能出虛空界分者
물질의 형상 가운데 허공의 경계는 헐리거나 없어지지 않지만, 물질의 형상이 마침내 무너질 때에는 도로 허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허공의 본래 경계는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도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들의 갖가지 과보(果報)를 모조리 용납하여 받아들입니다. 일체 중생들의 갖가지 과보는 모두 부처님의 법신에 의지하여서 존재하는 것이며, 건립되고 나서 자라나 법신 속에 머무르고 법신의 처소에 거두어지는 대상이 되나니, 법신을 본체로 삼음으로써 법신의 분계(分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013_0666_b_12L當知色像之中虛空之界不可毀滅色像終壞時還歸虛空虛空本界無增無減不動不變諸佛法身亦復如是悉能容受一切衆生種種果報以一切衆生種種果報依諸佛法身而有建立生長住法身爲法身處所攝以法身爲體無有能出法身界分者
013_0666_c_01L일체 중생들의 몸 안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도 헐리거나 사라지지 않지만, 만일 번뇌가 끊어져 무너질 때에는 도로 법신에 돌아갑니다. 법신의 본래 경계는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다만 끝없는 세상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무명의 마음과 함께한 어리석고 어두운 인연을 훈습하여 온 힘 때문에 허망한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허망한 경계를 의지하여 훈습한 인연 때문에 망상과 서로 호응하는 마음을 일으켜 나니 내 것이니 하고 헤아리면서 온갖 업을 짓고 모아서 나고 죽음의 고통을 받는 것이니, 저 법신을 설명하여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중생 중에 법신에 훈습되어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번뇌는 점차로 엷어지고 세간을 싫어하며 열반의 도를 구할 것이요, 하나의 진실한 경계를 믿고 귀의하여 6바라밀 등 온갖 보리분법(菩提分法)31)을 닦는 이를 보살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은 보살 중에 일체의 선한 법을 수행하여 만족하며, 구경(究竟)에는 무명의 수면(睡眠)을 여읜 이를 이름을 바꾸어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중생ㆍ보살ㆍ부처님 등은 다만 세간에서 임시로 붙인 이름과 언설(言說)에 의지한 것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으나, 법신의 본체는 끝내 평등하여 다른 모습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013_0666_b_19L當知一切衆生身諸佛法身亦不可毀滅若煩惱斷壞時還歸法身而法身本界無增無不動不變但從無始世來與無明心俱癡闇因緣熏習力故現妄境界依妄境界熏習因緣故起妄想相應心計我我所造集諸業受生死苦說彼法身名爲衆生若如是衆生中法身熏習而有力者煩惱漸薄能厭世閒求涅槃道信歸一實修六波羅蜜等一切菩提分法名爲菩薩若如是菩薩中修行一切善法滿足究竟得離無明睡轉名爲佛當知如是衆生菩薩但依世閒假名言說故有差別法身之體畢竟平等無有異相
선남자여, 이상이 하나의 진실한 경계[一實境界]의 이치를 간략히 해설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의 진실한 경계에 의지하여 신해(信解)를 닦고자 하는 사람은 응당 두 가지 도를 관하는 법[觀道]을 배워 익혀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첫째는 유심식관(唯心識觀)이요, 둘째는 진여실관(眞如實觀)입니다. 유심식관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이른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몸과 입과 뜻이 짓는 온갖 업을 따라 모두 자세히 관찰해서 오직 이 마음인 줄로 알아야 하며, 나아가서는 일체의 경계에 대하여 만일 마음이 생각에 머무르면 반드시 모두 살펴 알아서 마음으로 하여금 무기(無記)32)에 반연하여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생각 사이에 있어 마땅히 모두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니, 마음이 반연하여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 도리어 마음으로 하여금 그 생각을 따르고 쫓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게 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속마음에 스스로 생각이 일어나는 줄을 아는 것은 일체의 경계에 대하여 생각이 있고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속마음에 스스로 길고ㆍ짧고ㆍ좋아하고ㆍ미워하고ㆍ옳고ㆍ그르고ㆍ얻고ㆍ잃고ㆍ손해를 보고ㆍ이익을 보고ㆍ있고ㆍ없는 것이라는 등의 소견과 한량없이 많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내었다 하더라도 일체의 경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이 있어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013_0666_c_10L善男是名略說一實境界義若欲依一實境界修信解者應當學習二種觀何等爲二一者唯心識觀二者眞如實觀學惟心識觀者所謂於一切時一切處隨身口意所有作業悉當觀察知唯是心乃至一切境界若心住念皆當察勿令使心無記攀緣不自覺知於念念閒悉應觀察隨心有所緣念還當使心隨逐彼念令心自知知己內心自生想念非一切境有念有分別也所謂內心自生長好惡是非得失衰利有無等見量諸想而一切境界未曾有想於分別
013_0667_a_01L일체의 경계는 저절로 분별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곧 스스로는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고, 미운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일체의 형상을 여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직 마음의 생각에서 날 뿐이니, 만일 마음을 여의게 되면 곧 하나의 법과 하나의 생각도 스스로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속마음을 지키고 기억하는 것은 오직 허망한 생각이요 진실한 경계가 없는 것인 줄 마땅히 알아서 쉬어 버리거나 그만두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을 유심식관을 닦아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마음은 무기(無記)이어서 자기 마음의 생각인 줄로 알지 못하는 이는 곧 앞의 경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유심식관이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013_0666_c_24L當知一切境界自無分別想卽自非長非短非好非惡乃至非有非無離一切相如是觀察一切法唯心想生若使離心則無一法一想而能自見有差別也常應如是守記內心知唯妄念無實境界勿令休廢是名修學唯心識觀若心無記不知自心念者卽謂有前境界不名唯心識觀
또 속마음을 지키고 기억하는 이는 곧 탐내는 생각ㆍ성내는 생각ㆍ어리석고 삿된 소견의 생각을 알며, 선을 알고, 선하지 않음을 알며, 무기를 알고, 마음의 근심과 여러 가지 모든 고통을 알 것입니다.
또 앉았을 때에 마음이 반연하는 것을 따라 생각생각마다 오직 마음에서 나고 없어지는 것이라고 자세히 살펴 알아야 할 것이니, 비유하면 물의 흐름과 등의 불꽃이 잠시라도 머무르지 않는 것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색적삼매(色寂三昧)를 얻는 것이니, 이 삼매를 얻고 나면 그 다음에 당연히 사마타관심(奢摩他觀心)법을 믿고, 비바사나관심(毗婆舍那觀心)법을 믿고 배워 익혀야만 합니다.
013_0667_a_08L又守記內心者則知貪想瞋想及愚癡邪見想知善知不善知無記知心勞慮種種諸苦若於坐時隨心所緣念念觀知唯心生滅譬如水流燈炎無暫時住從是當得色寂三昧得此三昧已次應學習信奢摩他觀及信毘婆舍那觀心
사마타관심법을 믿고 익힌다는 것은 볼 수 없는 속마음의 형상을 생각하는 것이니, 원만하여 움직이지 않고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본래의 성품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아니하여 분별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비바사나관심법을 믿고 익힌다는 것은 안팎의 물질을 생각하고 보는 것이니, 마음을 따라 나고 마음을 따라 없어지며, 나아가서는 생각을 익혀서 부처님의 색신을 볼 적에도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따라 나고 마음을 따라 없어지는 것은 허깨비와 같고 변화와 같은 것이며,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거울 속에 나타나는 형상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도 아니고 마음을 여읜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조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013_0667_a_14L習信奢摩他觀心者思惟內心不可見相圓滿不無來無去本性不生離分別故信毘婆舍那觀心者想見內外色心生隨心滅乃至習想見佛色身復如是隨心生隨心滅如幻如化水中月如鏡中像非心不離心非來非不來非去非不去非生非不生作非不作
013_0667_b_01L선남자여, 만일 이 두 가지 관심을 믿고 익히는 사람은 속히 1승(乘)의 도에 나아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심식관(唯心識觀)은 최상지혜(最上智慧)의 문이라고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그 마음으로 하여금 용맹하고 영리하여 신해(信解)의 힘을 기르고, 빨리 공의 이치에 들어가서 위없는 큰 보리의 마음을 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진여실관(眞如實觀)을 배워 익히는 사람은 마음의 성품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데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일체 분별하는 생각을 영원히 여의어 점점 공처(空處)ㆍ식처(識處)ㆍ무소처(無少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등의 정경계(定境界)의 형상을 지나서 상사공삼매(相似空三昧)를 얻을 것이니, 상사공삼매를 얻었을 때에는 식(識)ㆍ상(想)ㆍ수(受)ㆍ행(行)의 거친 분별의 형상은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013_0667_a_22L善男子若能習信此二觀心者速得趣會一乘之道當知如是唯心識觀名爲最上智慧之門所謂能令其心猛利長信解力疾入空義得發無上大菩提心故若學習眞如實觀者思惟心性無生無滅不住見聞覺知永離一切分別之想漸漸能過空處識處無少處非想非非想處定境界相得相似空三昧得相似空三昧時識想麤分別相不現在前
이를 좇아 닦고 배워서 선지식과 크게 자비한 이를 위하여 지켜 보호하고 기르나니, 그런 까닭에 모든 장애를 여의고 부지런히 닦아 폐지하지 않으면 차차로 심적삼매(心寂三昧)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이 삼매를 얻으면 곧 다시 일행(一行)삼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행삼매에 들어간 뒤에는 부처님을 수 없이 뵈올 것이요, 깊고 넓은 수행의 마음을 내어 현신위(賢信位)에 머무를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사마타와 비바사나, 이 두 가지 관하는 방법을 결정코 믿고 깨달아서 결정코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닦고 배운 바 세간의 모든 선(禪) 삼매의 업을 따라 좋아하거나 집착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체의 선한 바탕인 보리분법을 두루 닦아 나고 죽고 하는 속에 있으면서도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2승(乘)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가지 관하는 마음을 익히고 향하여 의지하는 가장 미묘하고 좋은 방편은 온갖 지혜가 의지하는 바이며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013_0667_b_09L從此修學爲善知識大慈悲者守護長養是故離諸障㝵勤修不廢展轉能入心寂三昧得是三昧已復能入一行三昧入是一行三昧已見佛無數發深廣行心住堅信位謂於奢摩他毘婆舍那二種觀道決定信解能決定向隨所修學世閒諸禪三昧之業無所樂著乃至遍修一切善根菩提分法於生死中無所怯畏不樂二乘以依能習向二觀心最妙巧便衆智所依行根本故
013_0667_c_01L또 위와 같은 신해를 닦아 배우는 사람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첫째는 영리한 근기요, 둘째는 둔한 근기입니다. 저 영리한 근기를 지닌 사람은 먼저 이미 일체의 바깥 모든 경계는 오직 마음이 짓는 것으로서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이니, 진실하지 못한 것이어서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정코 의심을 품지 않아서 음개(陰蓋)의 번뇌가 경미(輕微)하고 산란한 마음이 적을 것이니, 이런 사람들은 곧 진여실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저 둔한 근기를 지닌 사람은 먼저 일체의 바깥 모든 경계는 다 오직 이 마음이 짓는 것으로서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들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두텁고, 개장(蓋障)의 번뇌가 자주 일어나서 마음을 조복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는 먼저 유심식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013_0667_b_19L復次修學如上信解者人有二種何等爲一者利根二者鈍根其利根者已能知一切外諸境界唯心所作誑不實如夢如幻等決定無有疑慮陰蓋輕微散亂心少如是等人卽應學習眞如實觀其鈍根者先未能知一切外諸境界悉唯是心虛誑不實染著情厚蓋障數起心難調伏當先學唯心識觀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이와 같은 신해를 배운다 하더라도 선한 바탕의 업이 엷고 진취할 능력이 없어서 모든 나쁜 번뇌를 점차로 굴복시킬 수 없으면, 그의 마음은 늘 의심하고 겁을 내며 두려워하여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지고 여덟 가지 어려운 곳에 태어날 것이며, 항상 부처님과 보살 등을 만나서 공양하지 못하고 바른 법을 듣고 받을 수 없을까 두려워할 것이요, 보리의 믿음을 성취하기 어려울까 두려워할 것이니, 이와 같은 의심과 두려움, 그리고 갖가지 장애가 있는 사람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언제나 부지런히 나의 명호를 외우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한 마음[一心]을 얻으면 선한 바탕이 더욱 자라나서 그 마음이 맹렬하고 영리해질 것입니다. 나의 법신과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을 관찰하되 자신의 법신은 본체와 성품이 평등하여 둘이 없고 차별이 없는 것이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공덕이 원만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귀의할 만한 것이라고 관(觀)해야 합니다.
013_0667_c_05L若人雖學如是信而善根業薄未能進趣諸惡煩惱不得漸伏其心疑怯畏墮三惡道八難處畏不常値佛菩薩等不得供養聽受正法畏菩提信難可成就如此疑怖及種種障㝵等者應於一切時一切處常勤誦念我之名字得一心善根增長其意猛利當觀我法身及一切諸佛法身與己自身性平等無二無別不生不滅常樂我功德圓滿是可歸依
013_0668_a_01L또 자기의 몸과 마음의 형상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며, 나라할 것도 없는 것이요, 깨끗하지 못한 것이며, 허깨비와 같은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싫어해서 여의어야 할 것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은 관법(觀法)을 닦아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속히 청정한 믿음의 마음을 얻게 되어 모든 장애는 점점 덜어지고 줄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나의 이름을 들어서 배워 익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요, 또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배워 익힐 수 있는 사람이며, 지극한 마음을 배워 나를 예배하고 공양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극한 마음을 배워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요, 심오한 대승(大乘) 경전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며, 대승의 심오한 경전을 지녀서 베껴 쓰고 공양하고 공경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할 것입니다. 심오한 대승 경전을 받아 지녀 읽고 외움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요, 삿된 소견을 멀리 여의고 심오하고 바른 이치에서 훼방에 빠지지 않음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며, 구경(究竟)의 매우 심오한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 신해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모든 죄와 장애를 없앨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며, 한량없이 많은 공덕 덩어리를 얻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013_0667_c_15L又復觀察己身心相無常無我不淨如幻如化是可厭離若能修學如是觀者速得增長淨信之心所有諸障漸漸損減何以故此人名爲學習聞我名者能學習聞十方諸佛名者名爲學至心禮拜供養我者亦能學至心禮拜供養十方諸佛者名爲學聞大乘深經者名爲學執持書寫供養恭敬大乘深經者名爲學受持讀誦大乘深經者名爲學遠離邪見於深正義中不墮謗者名爲於究竟甚深第一實義中學信解者名爲能除諸罪障者名爲當得無量功德聚者
이 사람은 몸을 버린 뒤에는 마침내 나쁜 세계나 여덟 가지 어려운 일이 있는 곳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바른 법을 듣고 익히며 믿어서 닦아 실천할 것입니다.
또한 서원을 따라 다른 지방에 있는 청정한 부처님의 국토에 가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013_0668_a_05L此人捨身終不墮惡道八難之處還聞正法信修行亦能隨願往生他方淨佛國土
또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지방의 현재 청정한 국토에 태어나려고 하면, 응당 그 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의 명호를 따라 뜻을 오로지하여 외우거나 기억하며, 한 마음으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합니다.
위와 같이 관찰하는 사람은 결정코 그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에 태어나게 되고, 선한 바탕은 더욱 늘어나고 자라서 빠르게 물러나지 않는 경지를 얻을 것입니다.
위와 같이 일심으로 생각을 잡아매어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법신을 생각하면, 일체의 선한 바탕 가운데에서 그 업은 가장 훌륭한 것인 줄로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013_0668_a_07L復次若人欲生他方現在淨佛國者當隨彼世界佛之名字專意誦念心不亂如上觀察者決定得生彼佛淨國善根增長速獲不退當知如上一心係念思惟諸佛平等法身一切善根中其業最勝
그것은 이른바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사람은 점점 일행삼매를 향하여 갈 것이요, 만일 일행삼매에 도달한 사람이면, 곧 넓고 크고 미묘한 행의 마음을 이룩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과 가장 비슷한 경지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니, 나의 명호를 듣고 또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들으며 지극한 마음으로 나를 예배하고 공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극한 마음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며 공양하기 때문이요, 대승의 심오한 경전을 들었기 때문이며, 심오한 대승 경전을 지니고 베껴 쓰고 공양하며 공경한 때문이요, 심오한 대승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 때문이며, 구경의 매우 심오한 제일실의(第一實義) 가운데 있으면서 두려움을 내지 않고, 비방을 멀리 여의고 바른 소견을 얻어 믿고 알 수 있기 때문이요, 결정코 모든 죄와 장애를 없앴기 때문이며, 한량없이 많은 공덕의 덩어리를 현재 증득한 때문입니다.
013_0668_a_13L所謂勤修習者漸能向一行三昧若到一行三昧者則成廣大微妙行心名得相似無生法忍以能得聞我名字故亦能得聞十方諸佛名字故以能至心禮拜供養我故亦能至心禮拜供養十方諸佛以能得聞大乘深經故能執持書供養恭敬大乘深經故能受持讀誦大乘深經故能於究竟甚深第一實義中不生怖畏遠離誹謗得正見能信解故決定除滅諸罪障故證無量功德聚故
013_0668_b_01L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른바 분별이 없는 보리(菩提)의 마음과 고요한 지혜가 나타나서 방편의 일과 가지가지의 서원, 그리고 수행을 일으켜 내기 때문이요, 나의 명호를 듣는 사람은 이른바 결정코 이익이 되는 행을 믿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일체에 능력이 있는 이는 다 물러남이 없는 1승(乘)의 인(因)을 얻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마음이 잡되고 혼란하거나 더러우면, 비록 나의 명호를 부른다 하더라도 듣지 못할 것이요, 결정코 신해를 낼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세간의 선한 과보만을 얻게 되며, 크고 깊고 미묘한 이익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마음이 뒤섞이고 혼란스럽거나 더러우면, 그 닦은 일체 선을 따라 모두 깊고 큰 이익은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013_0668_b_01L所以者何謂無分別菩提心寂靜智現起發方便業種願行故能聞我名者謂得決定信利益行故乃至一切所能者皆得不退一乘因故若雜亂垢心雖復稱誦我之名字而不名爲聞以不能生決定信解但獲世閒善報不得廣大深妙利益如是雜亂垢心隨其所修一切諸善皆不能得深大利益
선남자여,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위와 같이 부지런한 마음으로 무상선(無相禪)을 닦아 배우는 사람이라면 오래지 않아 깊고 큰 이익을 얻어 점차로 부처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013_0668_b_09L善男子當知如上勤心修學無相禪者不久能獲深大利益漸次作佛
깊고 큰 이익이란 이른바 견고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가서 신인(信忍)33)을 성취하기 때문이요, 견고한 법의 자리에 들어가서 순인(順忍)34)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바르고 참된 자리에 들어가서 무생인(無生忍)35)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또 신인을 성취한다는 것은 여래의 종성(種性)36)을 짓기 때문이요, 순인을 성취한다는 것은 여래의 행을 이해하기 때문이며, 무생인을 성취한다는 것은 여래의 업을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013_0668_b_11L深大利益所謂得入堅信之位成就信忍故入堅法位成就順忍故入正眞位就無生忍故又成就信忍者能作如來種性故成就順忍者能解如來行成就無生忍者得如來業故
013_0668_c_01L점차로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간략히 해설하여 네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신만법(信滿法)으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37) 이른바 종성지(種性地)에 의하여 결정코 모든 법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청정하고 평등하여 바라고 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해만법(解滿法)으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38) 이른바 해행지(解行地)에 의하여 심오한 법의 성품을 이해하고, 여래의 업은 조작함이 없고 지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이 두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마음에 두려워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증만법(證滿法)으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39) 이른바 정심지(淨心地)에 의지하여 분별이 없는 고요한 법의 지혜와 부사의(不思議)한 자연의 업을 얻어 구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일체 공덕의 행(行)이 만족하기 때문에40)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구경의 보살지(菩薩地)에 의하여 일체의 모든 장애와 무명의 꿈을 없애서 다한 때문입니다.
013_0668_b_16L漸次作佛者略說有四種何等爲四一者信滿法故作佛所謂依種性地決定信諸法不生不滅淸淨平等無可願求故二者解滿法故作佛所謂依解行地深解法性知如來業無造無作於生死涅槃不起二想心無所怖故三者證滿法故作佛所謂依淨心地以得無分別寂靜法智及不思議自然之業無求想故四者一切功德行滿足故作佛所謂依究竟菩薩地除一切諸障無明夢盡故
또 만일 세간의 유상선(有相禪)을 닦아 배우는 이에게도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 세 가지인가?
첫째는 방편과 신해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모든 선삼매(禪三昧)의 공덕을 탐내고 받아서 교만한 생각을 냄으로 선에 얽매어서 되돌아가 세간을 구하는 것이요, 둘째는 방편과 신해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선(禪)을 의지하여 치우치게 싫어하고 여의려는 행을 일으켜 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겁내어 2승(乘)에 되돌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방편과 신해하는 힘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하나의 진실한 경계에 의지하여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 이 두 가지를 관하는 방법을 익히고 가까이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의 생각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믿고 이해하여 비록 세간의 모든 선의 공덕을 얻었다 하더라도 굳이 집착하지 않으며, 다시 되돌아가 3유(有:삼계)의 과보를 구하지 않으며, 또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믿고 알기 때문에 또한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서 되돌아가 2승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013_0668_c_04L復次當知若修學世閒有相禪者有三種何等爲三一者無方便信解力故貪受諸禪三昧功德而生憍慢爲禪所縛退求世閒二者無方便信解力故禪發起偏厭離行怖怯生死退墮二三者有方便信解力所謂依止一實境界習近奢摩他毘婆舍那二種觀道故能信解一切法唯心想生夢如幻等雖獲世閒諸禪功德而不堅著不復退求三有之果又信知生死卽涅槃故亦不怖怯退求二乘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선의 삼매법을 닦아 배우는 사람은 열 가지 차례로 나아가는 상(相)의 문은 선정의 업을 구족하게 섭취(攝取)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성취하고 서로 호응하여 어긋나거나 잘못되지 않게 함이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013_0668_c_15L是修學一切諸禪三昧法者當知有十種次第相門具足攝取禪定之業能令學者成就相應不錯不謬
013_0669_a_01L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생각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방편으로 삼는 상(相)이요, 둘째는 경계에 머무르고자 하는 상이며, 셋째는 경계에 처음으로 머물러 분명하고 똑똑하게 나아감을 알고 들어옴을 아는 상이요, 넷째는 경계에 잘 머물러 견고함을 얻는 상이며, 다섯째는 지은 일을 생각하며 방편과 용맹으로 한층 더 진취하기를 구하는 상입니다.
여섯째는 점점 조순(調順)함을 얻어 마음에 맞아 기뻐하고 좋아하며, 의심을 없애고 믿고 이해하여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는 상이요, 일곱째는 능히 승진도(勝進道)를 얻어서 뜻을 오로지하는 이는 조금 서로 호응하여 이익을 깨달아 아는 상이며, 여덟째는 한층 더 닦고 더욱더 밝혀서 익히는 바가 견고해지면 뛰어난 공덕을 얻어 대치(對治)하여 성취하는 상이요, 아홉째는 마음의 생각으로 인해서 짓는 것이 있음을 따라 밖으로 공덕을 나타내고 마음대로 서로 호응하여 어긋나지도 않고 잘못되지도 않는 상이며, 열째는 만일 다시 특이하게 닦아 앞에서 얻은 바에 의지하여 방편을 일으키고 차례로 성취하여 마음을 따라 나고 들어가 초월하여 자재하는 상이니, 이것이 열 가지 차례로 나아가는 상의 문으로서 선의 업을 거두어 닦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013_0668_c_18L何等爲十一者攝念方便相二者欲住境界相三者初住境界分明了了知出知入相四者善住境界得堅固相所作思惟方便勇猛轉求進趣相六者漸得調順稱心喜樂除疑信自安慰相七者剋獲勝進意所專少分相應覺知利益相八者轉修增明所習堅固得勝功德對治成就九者隨心有所念作外現功德意相應不錯不謬相十者若更異修依前所得而起方便次第成就出入隨心超越自在相是名十種次第相攝修禪定之業
그때 견정신보살마하살은 지장보살마하살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어떻게 심오한 법을 그렇게도 잘 설명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겁이 많고 나약함을 여읠 수 있게 하십니까?”
013_0669_a_08L爾時堅淨信菩薩摩訶薩問地藏菩薩摩訶薩言汝云何巧說深法能令衆生得離怯弱
지장보살마하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처음에 배우는 사람이 뜻을 내어 대승을 향하여 구하였으되 아직도 믿는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위없는 도인 매우 심오한 법에 대하여 의심하고 겁을 낸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나는 항상 방편으로써 진실한 뜻을 펴서 나타내어 편안히 위안하고 겁약함을 여의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나를 잘 위안하고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편안히 위안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둔한 근기이며 소심(小心)한 중생들은 위없는 도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미묘함을 듣고, 마음에 비록 탐내고 좋아하여 마음을 내어 원하고 향한다 하더라도 다시 생각하기를 ‘위없는 도를 구하는 이는 반드시 넓고 극진한 공을 쌓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열심히 실천하며, 자기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며, 생사의 가운데에서 여러 겁 동안 애써 노력하고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013_0669_a_11L地藏菩薩摩訶薩言善男子當知初學發意求向大乘得信心者於無上道甚深之法喜生疑怯我常以方便宣顯實義而安慰令離怯弱是故號我爲善安慰說云何安慰所謂鈍根小心衆生無上道最勝最妙意雖貪樂發心願而復思念求無上道者要須積功廣極難行苦行自度度他劫數長遠於生死中久受勤苦方乃得獲
013_0669_b_01L이런 까닭에 겁내고 나약한 마음을 내는 것이니, 나는 곧 그를 위하여 진실한 이치를 연설할 것입니다. 이른바 ‘일체의 모든 법은 본래의 성품이 저절로 공한 것이어서 필경에는 나라고 할 것이 없으며,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으며,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고 이르는 것도 없으며, 방소도 없고 과거ㆍ현재ㆍ미래도 없으며, 나아가서는 그를 위하여 18공(空)41)에 이르기까지도 없고 생사와 열반과 일체의 법은 결정되고 진실한 형상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할 것이며, 또 그를 위하여 ‘일체의 법은 허깨비와 같고 변화와 같으며, 물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으며, 건달바성(乾闥婆城)42)과 같고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이슬과 같고 등불과 같으며, 눈이 피로해서 생기는 현상과 같고 꿈과 같으며, 번갯불과 같고 구름과 같으며, 번뇌와 생사는 그 성품이 매우 미약하여 사라지기가 쉬운 것이며, 또 번뇌와 생사는 필경에 본체가 없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본래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진실로 다시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제 품성은 적정(寂靜)하여 그것이 곧 바로 열반이다’라고 연설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소견을 깨뜨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착하는 생각을 덜어버리기 때문에 겁을 내고 나약함을 여읠 수 있는 것입니다.
013_0669_a_20L以是之故心生怯弱我卽爲說眞實之義所謂一切諸法本性自空畢竟無我無作無受無自無他無行無到無有方所亦無過去現在未來乃至爲說十八空等無有生死涅槃一切諸法定實之相而可得者又復爲說一切諸法如幻如化如水中月如鏡中像如乾闥婆城如空谷響如陽焰如泡如露如燈如目如夢如電如雲惱生死性甚微弱易可令滅又煩惱生死畢竟無體求不可得本來不生實更無滅自性寂靜卽是涅槃如此所說能破一切諸見損自身心執著想故得離怯弱
다시 어떤 중생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겁을 내고 나약해지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안다는 것은 이른바 여래는 저 하나의 진실한 경계[一實境界]를 보셨기 때문에 구경에는 나고ㆍ늙고ㆍ병들고ㆍ죽음, 그리고 온갖 악한 법을 여읠 수 있었고, 저 법신은 항상 청량(淸凉)하고 변하여 달라지지 않는다는 등의 한량없이 많은 공덕 덩어리를 증득하셨습니다.
또 분명하게 깨달아서 일체 중생들의 몸속에도 모두가 이와 같이 진실하고 미묘하며 청정한 공덕이 있으나 무명(無明)의 어두움과 더러움에 덮여져서 긴 밤에 항상 나고ㆍ죽고ㆍ병들고ㆍ죽는 한량없이 많은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을 보십니다.
여래는 크게 인자하고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수많은 고통을 여의고 똑같이 법신인 제일의(第一義) 즐거움을 얻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저 법신은 바로 분별이 없고 생각을 여읜 법입니다. 오직 허망한 알음알이의 생각을 없애고, 생각하고 집착함을 일으키지 않아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거늘, 다만 일체 중생들은 늘 분별하기를 좋아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며 뒤바뀐 망상(妄想) 때문에 생사를 받는 것입니다.
013_0669_b_11L復有衆生不解如來言說旨意故而生怯弱當知如來言說旨意者所謂如來見彼一實境界究竟得離生老病死衆惡之法彼法身常恒淸涼不變異等無量功德聚復能了了見一切衆生身中有如是眞實微妙淸淨功德而爲無明闇染之所覆障長夜恒受生老病死無量衆苦如來於此起大慈悲意欲令使一切衆生離於衆苦同獲法身第一義樂而彼法身是無分別離念之法唯有能滅虛妄識想不起念乃所應得但一切衆生常樂分別取著諸法以顚倒妄想故而受生死
013_0669_c_01L그런 까닭에 여래는 저들을 위하여 저들로 하여금 분별하고 집착하는 생각을 여의게 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일체 세간의 법은 필경엔 그 바탕이 공하여 존재하는 것이 없고, 더 나아가서는 일체 출세간(出世間)의 법도 또한 필경에는 그 바탕이 공한 것이어서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연설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18공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은 모두가 보리의 바탕을 여의지 않은 것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니, 보리의 바탕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있고 없음을 다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며,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같은 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고 다름을 다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필경에는 하나의 형상도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일체의 형상을 여의었다는 것은 이른바 언설에 의지하여 집착할 수 없는 것이니, 보리의 법 안에서는 언설을 받아들이는 이가 없고 언설을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으로 기억하여 아는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보리의 법 안에는 취하는 사람도 취할 것도 없으며, 자기랄 것도 없고 남이랄 것도 없으며, 분별의 형상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분별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허망한 거짓이며 서로 호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013_0669_c_01L是故如來爲欲令彼離於分別執著想故說一切世閒法畢竟體空無所乃至一切出世閒法亦畢竟體空無所有若廣說者如十八空如是顯示一切諸法皆不離菩提體菩提體非有非無非非有非非無非有無非一非異非非一非非異非一異俱乃至畢竟無有一相而可得者以離一切相故離一切相者所謂不可依言說取以菩提法中無有受言說者及無能言說者故又不可依心念知以菩提法中無有能取可取無自無離分別想故若有分別想者則爲虛僞不名相應
이와 같은 등의 해설은 아둔한 근기를 지닌 중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른바 위없는 도와 여래의 법신은 오직 공의 법으로서 한결같이 필경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아무 것도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마음은 겁을 내거나 나약해져서 얻을 것이 없는 속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거나, 혹은 아주 끊어져서 없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내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드는 것이라는 소견을 지으며, 더욱더 비방을 일으켜서 자기를 업신여기고 남도 업신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곧 그를 위하여, ‘여래의 법신은 제 성품이 공한 것이 아니요, 진실한 바탕이 있는 것이며, 한량없이 많은 청정한 공업(功業)을 완전하게 갖추어 있는 것이다.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지금까지 저절로 원만한 것으로서 닦아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지어서 된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들의 몸속에도 모두가 다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으며,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는 것이다’라고 해설해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설은 겁을 내거나 나약해지는 것을 없앨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위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013_0669_c_15L如是等說鈍根衆生不能解者謂無上道如來法身但唯空法一向畢竟而無所有其心怯弱畏墮無所得中或生斷滅想作增減轉起誹謗自輕輕他我卽爲說如來法身自性不空有眞實體具足無量淸淨功業從無始世來自然圓滿非修非作乃至一切衆生身中亦皆具足不變不異無增無減如是等說能除怯弱是名安慰
013_0670_a_01L또 미련하고 어리석어 굳게 집착하는 중생은 이와 같은 해설을 듣고서도 또한 겁을 내거나 나약해질 것입니다. 여래의 법신은 본래 만족한 것으로서 닦아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지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는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얻을 대상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켜 겁을 내거나 나약해지는 것이며, 혹은 자연 그대로라고 헤아려 삿되고 뒤바뀐 소견에 떨어지는 것이니, 나는 곧 그를 위하여 ‘일체의 선한 법을 수행하여 더욱 늘리고 길러서 만족하게 되면, 여래의 색신을 내어 한량없이 많은 공덕과 청정한 과보를 얻을 것이다’라고 설명해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겁을 내거나 나약해지는 것을 여의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위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매우 심오한 이치는 진실과 서로 호응하여 모든 허물이 없는 것이니, 서로 어긋나는 설명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013_0670_a_01L又復愚癡堅執衆生聞如是等說亦生怯弱以取如來法身本來滿足非修非作相故無所得想而生怯弱或計自然墮邪倒見我卽爲說修行一切善法增長滿足生如來色身得無量功德淸淨果報如此等說令離怯弱是爲安慰而我所說甚深之義眞實相應無有諸過以離相違說故
어떻게 서로 어긋남을 여읜 상인 줄 아는가?
이른바 여래의 법신 안에는 비록 다시 언설의 경계도 없고 마음의 생각을 여읜 것이며,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한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일체의 상까지도 없고 언설에 의지하여 보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간 일반의 진리는 환술로 변화한 인연으로서 임시로 이름 붙인 법 속에서 서로 기다리고 서로 마주하는 데 의거하여 곧 방편을 나타내 보여 주면서 해설해야만 합니다.
그 법신의 자성은 진실로 분별이 없으며, 제 형상도 여의었고 남의 형상도 여의었으며, 공한 것도 없고 공이 아닌 것도 없으며, 나아가 일체의 형상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그 법의 본체는 필경공(畢竟空)43)이요, 존재하는 것이 없어서 마음으로 분별하는 상념(想念)을 여의면 하나의 형상 없는 것이건만 스스로 보거나 스스로 안 것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까닭에 공의 이치는 결정코 진실과 서로 호응하여 그릇되지 않는 것입니다.
013_0670_a_09L云何知離相違相所謂如來法身中雖復無有言說境離心想念非空非不空乃至無一切相不可依言說示而據世諦幻化因緣假名法中相待相對則可方便顯示而說以彼法身性實無分別自相離他相無空無不空乃至遠離一切諸相故說彼法體爲畢竟空所有以離心分別想念則盡無一相而能自見自知爲有是故空義決定眞實相應不謬
또 저 공의 이치 속에는 분별하는 부질없는 생각의 마음을 여의었기 때문에 곧 필경에는 하나의 형상도 없어서 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오직 진실만이 있기 때문에 곧 공이 아닌 것이니, 이른바 알음알이로 생각하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에 일체의 거짓 형상이 없으며, 필경에는 항상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또 원래의 한 형상까지도 무너뜨려야 하거나 없애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013_0670_a_19L復次卽彼空義中以離分別妄想心念故則盡畢竟無有一相而可空者以唯有眞實故卽爲不空所謂離識想無有一切虛僞之相畢竟常恒不變不異以更元一相可壞可滅離增減故
013_0670_b_01L또 저 분별이 없는 실체의 곳에는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지금까지 한량없이 많은 공덕과 자연의 업을 갖추어서 성취하여 서로 호응하면서 여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기 때문에 공이 아니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체의 공덕 덩어리에 대하여 일체 중생들은 비록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다만 무명의 눈가림에 덮여 장애하기 때문에 알거나 보지 못하고, 능히 공덕의 이익을 얻을 수 없으므로 없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법의 본체를 보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지니고 있는 모든 공덕의 이익이 되는 업은 저 중생들이 받아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저기에 속한 것이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두루 일체의 선한 법 닦음을 의지하여, 모든 장애를 대치(對治)하고 저 법신을 본 연후에야 비로소 공덕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선한 법을 닦아야 여래의 색신과 지신(智身)을 낸다고 말합니다.
013_0670_a_24L又彼無分別實體之處從無始世來具無量功德自然之業成就相應離不脫故說爲不空如是實體功德之聚一切衆生雖復有之但爲無明曀覆障故而不知見不能剋獲功德利益與無莫異說名未有以不知見彼法體故所有功德利益之業非彼衆生所能受用不名屬彼唯依遍修一切善法對治諸障見彼法身然後剋獲功德利益是故說修一切善法生如來色身智身
선남자여, 내가 말한 바 매우 심오한 이치야말로 결정코 진실하여 서로 어긋나는 허물을 여읜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013_0670_b_11L善男子如我所說甚深之義決定眞實離相違過當如是知
그때 지장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뛰어난 방편과 심오하고 긴요한 법문을 설할 때에 십만억 중생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내어 견신위(堅信位)에 머물렀으며, 또 9만 8천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었고, 일체 대중들은 저마다 하늘의 향과 꽃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을 공양하고 지장보살마하살을 공양하였다.
013_0670_b_12L爾時地藏菩薩摩訶薩說如此等殊勝方便深要法門時有十萬億衆生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住堅信復有九萬八千菩薩得無生法忍一切大衆各以天香花供養於佛供養地藏菩薩摩訶薩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각각 이 법문을 받아 지니고, 머무르는 곳을 따라 널리 유포하게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법문은 만나기도 매우 어렵거니와 크게 유익하게 하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저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듣고, 또 그가 말하는 것을 믿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속히 모든 장애를 떠나 빠르게 위없는 도[無上道]에 이르게 되리라.”
013_0670_b_18L爾時佛告諸大衆言汝等各各應當受持此法門隨所住處廣令流布所以者何如此法門甚爲難値能大利益若人得聞彼地藏菩薩摩訶薩名號及信其所說者當知是人速能得離一切所有諸障㝵事疾至無上道
013_0670_c_01L이에 대중들이 모두 똑같이 말하였다.
“저희들이 받아 지녀서 세간에 널리 퍼뜨려 감히 저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겠나이다.”
013_0670_c_01L於是大衆皆同發言我當受持流布世閒不敢令
그때 견정신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말씀은 육근취수다라(六根聚修多羅) 중에서 무슨 법문이라고 이름을 붙여야만 하겠습니까? 이 법이야말로 참되고 요긴한 것입니다. 제가 받아 지녀서 미래 세계의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다 들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013_0670_c_03L爾時堅淨信菩薩摩訶薩白佛言世尊如是所說六根聚修多羅中何法門此法眞要我當受持令未來普皆得聞
부처님께서 견정신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이 법문의 이름은 ‘점찰선악업보(点察善惡業報)’이며, 또한 ‘소제제장증장정신(消除諸障增長淨信)’이며, ‘개시구향대승자진취방편현출심심구경실의(開示求向大乘者進趣方便顯出甚深究竟實義)’이며, 또한 ‘선안위설영리겁약속입견신결정법문(善安慰說令離怯弱速入堅信決定法門)’이니, 이와 같은 명의(名義)에 의지하여 그대들은 받아 지닐지니라.”
013_0670_c_06L佛告堅淨信菩薩摩訶薩言此法門名爲『占察善惡業報』名『消除諸障增長淨信』亦名『開示求向大乘者進趣方便顯出甚深究竟實義』亦名『善安慰說令離怯弱速入堅信決定法門』依如是名義汝當受
부처님께서 이 법문의 이름을 말씀하여 마치시자, 일체의 대중들은 모두 기뻐하며 믿어 받고 받들어 행하였다.
013_0670_c_12L佛說此法門名已一切衆會悉皆歡喜信受奉行
占察善惡業報經卷下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29)심소(心所)의 다른 이름이며, 심소유법(心所有法)의 준말. 의식 작용의 본체를 심왕(心王)이라 하고 객관 대상을 인식할 때에, 그 일반상(一般相:總相)을 인식하는 심왕의 종속으로 일어나는 정신 작용. 구사종에서는 46법, 유식종에서는 51법을 세운다.
  2. 30)미계(迷界)에 있는 진여(眞如). 미계의 사물은 모두 진여에 섭수되었으므로 여래장이라 한다. 진여가 바뀌어 미계의 사물이 된 때는 그 본성인 여래의 덕이 번뇌 망상에 덮이게 된 점으로 여래장이라 한다. 또 미계의 진여는 그 덕이 숨겨져 있을지언정,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고 중생이 여래의 성덕(性德)을 합장(合藏)하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한다. 이것은 장(藏)에 대하여 소섭(所攝)ㆍ음부(陰覆)ㆍ능섭(能攝)의 세 뜻으로 설명한다.
  3. 31)37조도품(助道品)을 말한다.
  4. 32)범어 avyakita. 3성(性)의 하나. 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다 같이 선악의 결과를 끌어올 능력이 없으면서도 수행을 방해하는 유부(有覆)무기와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무기가 있다.
  5. 33)①3인(忍)의 하나. 아미타불을 염(念)하여 구원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②5인의 하나. 무루의 진지(眞智)가 일어나는 동시에 3보(寶)를 믿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6. 34)유순인(柔順忍)의 준말. ①3인(忍)의 하나. 천태종에서 세운 통교(通敎) 10지(地)인 3승 공(共) 10지(地)의 제2 성지(性地)에 주하는 보살. 일체 중생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제근(諸根)을 조복(調伏)하며, 6도(度)를 행하여 일체사(一切事) 가운데서 복(福)ㆍ혜(慧)를 완전히 하므로 유순인이라 한다. ②3인(忍)의 하나. 혜심(慧心)이 유순하여 진리에 수순하는 지위. ③보살 수행의 계위(階位)를 5인(忍)으로 나눈 중의 제3. 4지(地)ㆍ5지ㆍ6지의 보살.
  7. 35)무생법인(無生法忍)의 줄임말.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 법공지(法空智). 무생법인을 법공지라고 하는 데 대하여, 무생인은 인공지(人空智)를 뜻한다. 즉 아견(我見)에 의해 인식되는 인아(人我)는 모두 공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는 지혜.
  8. 36)불종성(佛種性)을 말한다.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부처 될 성품.
  9. 37)①화엄종에서 보살 수행의 계위를 52위(位)로 세운 가운데, 처음 10신위(信位)의 최후 만심(滿心)에서 성불함을 말한다. 이것은 화엄종의 독특한 해석, 차례를 거치지 않고 일위즉일체위(一位卽一切位)라고 보는 견지에서 하는 말. ②4만성불(滿成佛)의 하나. 종성지(種性地)에서 온갖 법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치를 믿고, 평등을 관하여 필경에 구할 것 없는 지위.
  10. 38)4만성불의 하나. 해행지(解行地)에 의하여 법성(法性)을 깊이 깨닫고 생사의 생각과 열반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무서운 마음, 좋아하는 마음도 내지 않는 것.
  11. 39)4만성불의 하나. 보살이 수행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어 부사의(不思議)한 불과(佛果)를 얻는 것.
  12. 40)4만성불의 하나. 등각보살지(等覺菩薩地)에서 능히 일체의 혹장(惑障)을 없애고 허망한 무명(無明)이 다함을 말한다.
  13. 41)범어 aṣṭādaśaśnyat. 공(空)을 본체와 작용으로 관찰한 것. ①내공(內空). ②외공(外空). ③내외공(內外空). ④공공(空空). ⑤대공(大空). ⑥제일의공(第一義空). ⑦유위공(有爲空). ⑧무위공(無爲空). ⑨필경공(畢竟空). 무시공(無始空). 산공(散空). 성공(性空). 자상공(自相空). 제법공(諸法空). 불가득공(不可得空). 무법공(無法空). 유법공(有法空).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대품반야경』 제3권, 『대집경』 제54권에 있다.
  14. 42)범어 gandharva-nagara. 또는 건달바성(乾達婆城)ㆍ건달박성(犍達縛城)ㆍ헌달박성(巘達縛城)이라고도 하며, 번역하여 심향성(尋香城)이라고 한다. 실체는 없이 공중에 나타나는 성곽. 바다 위나 사막 또는 열대 지방에 있는 벌판의 상공(上空)에서 공기의 밀도와 광선의 굴절작용으로 일어나는 신기루(蜃氣樓)ㆍ해시(海市). 이것을 건달바성이라 함은, 건달바는 항상 천상에 있다는 데서 생긴 것. 또는 서역에서 악사(樂師)를 건달바라 부르고, 그 악사는 환술로써 교묘하게 누각을 나타내어 사람에게 보임으로 이와 같이 부른다.
  15. 43)18공의 하나. 불교에서 허망한 견해를 깨뜨리기 위하여 이상(理想)을 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공은 유(有)에 상대하는 단공(單空)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상대적인 공을 다시 공한 절대 부정의 공. 이 일체의 공까지도 공하였다는 것을 필경공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