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勝思惟梵天所問經論卷第四

ABC_IT_K0562_T_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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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사유범천소문경론 제4권
015_0404_b_01L勝思惟梵天所問經論卷第四


천친보살 지음
015_0404_b_02L天親菩薩造
보리류지 한역
김 호성 번역
015_0404_b_03L後魏北印度三藏菩提流支譯



보살이 이와 같이 보살의 계위에 들어간 뒤 모든 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하여 마음에 유(有)를 낳기 때문에 모든 갈래의 중생을 거두어들이니, 이 때문에 그 다음에는 보살마하살이 자재한 마음으로 3유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공덕을 거두어들인다고 하는 것이니, 네 구절1)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자재력으로써 뛰어난 곳에 태어남을 거두니, 비록 그곳에 태어나더라도 그로부터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며, 오랜 시간 동안 태어난 곳을 거두어들이더라도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며, 저 번뇌ㆍ업 등의 다른 힘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뜻대로 자재하게 삶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모든 곳에 태어나지만 그곳에서 받는 갖가지의 모든 고뇌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언제나 모든 중생의 우두머리[上首]가 된다.
015_0404_b_04L菩薩如是入菩薩位已以爲利益一切衆生心生有故攝諸趣生是故次說菩薩摩訶薩以自在心生於三有是故名爲攝取功德四句示現以自在力攝勝處生雖生彼處而不爲彼之所染故以長遠時攝取生處不疲倦故以不爲彼煩惱業等他力而生自在如意攝取生故以諸菩薩一切處生不畏彼處所受種種諸苦惱故菩薩如是以爲利益一切衆生修行諸行常爲一切衆生上首
그러므로 다음에는 우두머리가 될 수 있고 대중을 통솔할 수 있으며 공덕을 갖출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열다섯 구절2)이 있어서 이와 같은 뜻을 나타내 보인다. 보살은 스스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의 법을 부지런히 배우고, 다른 사람을 가르쳐서 잘못이 없도록 하기 때문이며, 오랫동안 금계(禁戒)를 배워서 익히고 받아 지녀서 훼손하지 않으며 지키고 삼가는 것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015_0404_b_15L是故次說能爲上首能領大衆能辦功德有十五句示現此義菩薩自身如佛所說修行之法勤而學之教他無過故長遠時學習禁戒受持不毀守愼堅固故
015_0404_c_01L이와 같은 두 가지 공덕이 있어서 먼저와 나중에 스스로 잘 머무르기 때문에 대중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중생을 위해서 능히 우두머리가 되어 항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대중을 통솔할 수 있어서 모든 마군이 장애와 어려움을 만들지 못하니,모든 마업(魔業)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몸ㆍ말ㆍ뜻의 업을 보호하지 않아서 필경에 얻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그3) 잘못을 말해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렇게 매우 깊은 법을 나타내 보여서 질문의 어려움에 능히 답하여 겁내지 않기 때문이다. 법의 뛰어나고 교묘한 방편을 말하기 때문이며, 대중을 통솔하여 큰일을 행하게 하고 모든 행을 수행하여 자신의 선근을 물러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015_0404_b_20L以有如是二種功德於先後時自善住故以是義故能領大衆此義應知以爲衆生能作上首令降伏故以是菩薩能領大衆諸魔不能與作障難遠離一切諸魔業故以有不護身口意業畢竟得故不畏他人說其過故以其現見甚深之法能答問難不怯弱故以說法勝巧方便故以領大衆行於大事修行諸行不退自身善根分故
두 구절4)은 교화할 중생이 밝음에서 태어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교화할 수 있는 중생이 무명을 떠나기 때문에 능숙하게 인연을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례이니,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 중생이 수순하는 자도 있고 수순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마음이 견고하면 비록 서로 다르기도 하고 서로 다르지 않기도 하니, 모든 번뇌 등의 마음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중생에게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한 중생을 위해서 모든 갖가지 공덕을 성취하여 모든 공덕의 수(數)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도 다른 사람은 보은(報恩)의 장애를 짓지 아니하여 얽매임이 마음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모든 중생에게 대치법을 주기 때문이며, 비록 대중이 그를 에워싼다 할지라도 거만한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자리와 이타로써 모든 행을 수행함으로써 불법의 수행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불법 수행의 공덕을 이루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니, 스물아흡 구절5)이 이러한 뜻을 나타내 보인다.
015_0404_c_07L二句示現可化衆生生於明故可化衆生離無明故能作因緣如是次第此義應知以諸衆生有隨順者不隨順者而心堅固雖有相違有不相違諸煩惱等心不異故以於衆生無差別故爲彼衆生成就一切種種功德能受一切功德數故以作他恩他人不作報恩障縛不住心故以爲除滅一切諸使與諸衆生對治法故以其雖爲大衆圍遶而不高心故菩薩如是自利利他修行諸行以爲成就佛法修行是故次說爲成就佛法修行功德二十九句示現此義
015_0405_a_01L“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수미산과 같으니, 그는 견고하여서 움직일 수가 없다”6)라는 것은 모든 뛰어난 공덕과 무분별의 지혜에 의지함으로써 다른 7지(地) 등에서는 모든 분별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한 법에 의지함으로써 모든 성문과 벽지불의 염(念)은 능히 파괴하지 못하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내법(內法) 수행에 의지함으로써 불법에 어긋난다는 것은파괴할 수 없는 바로써 뛰어난 힘을 얻기 때문이며, 첫 번째의 매우 깊은 뜻인 법무아(法無我)에 들기 때문이며, 이 사람이 몸을 바꾸는 뛰어난 법을 얻어서 그 법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뛰어난 해탈을 얻어서 번뇌를 없애기 때문이다.
015_0404_c_19L知是人如須彌山以其堅固不可動以依一切諸勝功德無分別智七地等一切分別不能動故以依彼法一切聲聞辟支佛念不能破壞堅固故以依如來內法修行違佛法者所不能壞以得勝力故以入第一甚深之義法無我故以是人得轉身勝法依彼法故得勝解脫滅煩惱故
몸을 바꾸는 것과 몸을 얻은 것을 수행함에 의지하고 모든 종류의 모든 번뇌의 오염은 몸의 소멸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여래께서 계신 곳에서 언제나 정법을 들으며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實際)를 증득함으로써 다시 경계가 없고 증득할 수 있는 것을 아직 증득하지 아니하였으나 다시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중생을 위해서 정법을 연설하며 법륜을 굴리기 때문이다. 모든 상호를 장엄하여 그 몸이 좋아할 만한 것을 지니게 함이 마치 제석왕이 모든 중생의 좋아하는 것을 위하는 것과 같으니, 8지 중에서 열 가지 자재한 힘을 얻기 때문이다.
015_0405_a_04L以依修行轉身得身以一切種諸煩惱染依身滅故以於一切諸如來所常聞正法不厭足故以證實際更無境界未證可證更不求故以爲衆生演說正法轉法輪故以諸相好莊嚴其身住持可樂如帝釋王爲諸衆生之所樂故以得八地中十自在力故
두 구절7)이 9지(地) 중에 나타내 보이는 것은 요설변재의 설법에 의지하여 모든 중생과 정념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례로 말하는 것이라서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살의 제10지에서 법을 다스릴 수 있어서 선이 증장할 수 있기 때문이며, 다스려야 할 장애를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빠진다[溺]’는 것은 대치해야 할 법이라서 ‘빠진다’고 말한 것이니,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장소에 머무르기에 부처라고 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보살이 비록 장애가 있는 장소에 있지만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이러한 보살은 다른 지(地)에 머무르는 모든 보살들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견줄 바 없는 지위에 머물기에 보살은 평등하면서도 또한 다시 평등이 없고, 차별이 없으면서도 다시 차별이 있으니, 수다라(修多羅) 등의 법무아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깨달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015_0405_a_11L二句示現於九地中以依樂說辯才說法與諸衆生相應正念如次第說此義應知以於菩薩第十地中得能治法善增長故以得遠離所治障法所言弱者所對治法說名爲弱諸菩薩住如是處說名佛故以是菩薩雖有障地而無障故以是菩薩勝住餘地諸菩薩故以是菩薩無等地住菩薩平等又復無等無差別等復有差別說修多羅等法無我平等一味證故
015_0405_b_01L모든 보살이 그곳에 머물러서 다른 사람은 각관(覺觀)하거나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며, 요설(樂說)과 변설(辯說)로써 모든 비밀에 막히거나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다. 한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 여래와 한없이 많은 설법을능히 지니고 능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가지 않으면서 가자 즉시 그 다음에 문혜(聞慧)로 대법우(大法雨)를 받은 후에 여실한 깨달음으로 깨닫는 것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을 깨달아서 잘 따르며 올바로 들어가 모든 법을 꿰뚫기 때문이며, 중생의 8만 4천 가지의 모든 행문(行門)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그러한 행과 같아서 대치법을 주면서도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며, 보살이 비록 세간을 보면서도 세간을 떠나기 때문이며, 얻음과 잃음 등의 세간의 모든 법과, 미워하고 사랑하며 탐내고 성내는 모든 번뇌를 능히 증장하지 않기 때문이며, 보살이 얻음 등의 크게 이익 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모든 선근을 수행하여서 능히 소멸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015_0405_a_22L以諸菩薩住於彼處他不能以覺觀測量故以樂說辯說一切密無滯著故以於無量諸佛如來無量說法而能持能受故以不去而去次聞慧受大法雨後以如實覺入所覺故以覺彼法隨順正入徹諸法故以入衆生八萬四千諸行門故以如彼行與對治法不疲倦故以是菩薩雖見世閒而離世閒故以得失等世閒諸法憎愛貪恚諸使煩惱不能增長故以彼菩薩雖有得等大利益事而於修行諸善根分不能滅壞故
보살은 이와 같이 불법을 닦아 모으고 모든 행을 올바로 닦아서 그러한 뛰어난 과보를 얻는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과보를 얻는 공덕 스물여섯 구절8)을 말하여 이러한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아직 풀지 못한 성취에 의지하며, 색(色)의 성취에 의지하며, 업의 성취에 의지하고, 보살지(菩薩地)의 다함에 의지하여 구족하게 성취하며, 불지(佛地)의 다함에 들어감을 의지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례이니,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모든 지혜가 사랑하는 쾌적한 사랑을 얻을 것이다”9)라는 것은 이 보살이 여실히 진리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같은 반려가 되는 것은 공경심으로 사랑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법구(法句)에 의지하고 법상(法相)을 이해함에 의지하여 법이 중요한 줄을 알아서 공양하기 때문이니, 차례로 말하는 것과 같다.
015_0405_b_10L菩薩如是修集佛法正修諸行得彼彼勝果是故次說得果功德二十六示現此義依未解成就依色成就依業成就依菩薩地盡具足成就入佛地盡成就如是次第此義應知當知是人爲得快愛以諸黠慧之所愛者以是菩薩如實證諦是故爲彼同伴侶者之所恭敬心愛念故以依法句依解法相知彼法重而供養故如次第說
015_0405_c_01L불법을 존중하는 자가 능히 공양하기 때문이며, 중간인(中間人)에 의지하고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의지하다가 저 보살에게 크게 훌륭한 일이 있음을 보고서 보살에게 귀의하며 예배 등을 행하기 때문이며, 구경에 나아가 보살행을 닦음으로써 다른 모든 보살 역시 이 보살에 대하여 공양하기 때문이다. 다른 2승의 사람이 다시 나아갈지라도 2승도(乘道)를 얻게 되나니,이 보살은 뛰어난 공덕을 지녀서 그 2승의 사람을 위해서 이러한 공덕을 구하기 때문이며, 이 보살은 그러한 뛰어난 행에 의지하고 소승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의 성취로써 과보의 공덕상(功德相)을 얻는 것이다.
015_0405_b_20L以尊重佛法者能供養故以依中閒人以依不信佛法人見彼菩薩有大勝事歸依菩薩禮拜等故以進究竟修菩薩行餘諸菩薩於此菩薩亦供養故餘二乘人雖復進得彼二乘道以是菩薩有勝功德爲彼二乘人求此功德故以是菩薩依彼勝行不求小乘故此是心成就得果功德相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아첨하지 않나니, 오점(汚點)이나 아첨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10)라는 것은 세간 유위법상(有爲法相)의 모든 아첨과 굽힘을 떠나기 때문이며, 그것이 세간의 환희와 가고 옴과 앉고 누움 등의 모든 위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며, 오묘한 모습과 형상의 상하(上下)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위의가 갖추어짐으로써 모든 세간의 존중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몸에 32상(相)을 갖추기 때문이며, 그 보살이 80종호(種好)와 모든 갖가지 몸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이것이 색이 성취하는 과보를 얻는 공덕상이다.
015_0405_c_05L當知是人爲不諂曲以無點污諂曲法者以離世閒有爲法相諸諂曲故以其能生世閒歡喜去來坐臥諸威儀故以成就妙色形相上下故以威具足爲諸世閒生尊重故以身具足三十二相故以彼菩薩八十種好一切種種身顯現故此是色成就得果功德相
부처님과 법과 스님에 의지해 주지(住持)함으로서 업을 성취하여 과보를 얻는 공덕상이다.
015_0405_c_13L依佛法僧等住持業成就得果功德相
‘이 사람을 모든 부처님께서 보신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모두 현현(現見)하시기 때문이며, 곧 그 부처님의 모든 공덕 때문이며, 여실히 보기 때문이며, 여래의 법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한량없이 법을 증득하여 지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연(軟)ㆍ중(中)ㆍ상(上)으로써 법인(法忍)을 얻기 때문이다. 연인(軟忍)이라는 것은 7지 중의 하나이고, 중인(中忍)이라는 것은 8지와 9지의 하나이며, 상인(上忍)이라는 것은 제10지 중의 하나이다. 이는 보살의 지위가 다하여 구족하게 과보를 얻는 공덕상을 성취하는 것이다.
015_0405_c_15L是人諸佛見者以一切佛皆現見故卽是彼佛諸功德故如實見故以得現見如來法身故以得無量證法受位故以軟中上得法忍故言軟忍者於七地中言中忍者八九地中言上忍者第十地中此是菩薩地盡具足成就得果功德相
015_0406_a_01L‘이 사람은 도량을 만족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모든 공덕을 증득함으로써 모두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능히 뭇 마군을 항복하고……이 사람은 능히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한다”11)는 것은 마군를 항복하여 이와 같은 차례로 부처님께서는12) 중생을 이익되게 하시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이는 불지에 들어가서 과보를 얻는 공덕상을 성취하는 것이다.
015_0405_c_22L是人滿足道場者以證一切種一切功德皆滿足故是人能降伏衆魔至是人能作佛所作事者以降伏魔如是次第依作衆生利益應知此是入佛地成就得果功德相
‘놀라지 않는다’ 등에서 어떤 것을 놀람이라 하는가? 심오한 법을 듣고서 도와 다르다고 하기 때문에 놀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놀람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증가하고 상속하고 단절되지 않는 것을 증상경(增上驚)이라고 하고, 놀라서 단절되지 않고 집착에 상응하는 것을 ‘상상경(上上驚)’이라고 한다. 놀람과 두려움 속에 떨어지기 때문이며, 놀람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차례로 그 사람은 놀라지도 않고, 증상경도 아니며, 상상경도 아니게 되는데,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저 공덕이 오히려 다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말한 것과 같은 수행에 의지하여 일곱 가지 공덕의 갖가지 차별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015_0406_a_04L不驚等者云何爲驚以聞深法謂爲異道故名爲驚因彼驚故轉更增上相續不斷名增上驚驚不斷絕相應執著名上上驚以墮驚怖中故以在驚怖故以怖無物故如是次第彼人不驚不增上驚不上上驚此義應知說彼功德猶不可盡者依如說修行七種功德種種差別不可數故
‘부처님의 보리’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으니, 보리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는 두 구절은 출세간의 지혜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출세간의 지혜에 의지하여 지혜의 경계를 얻는 것이니, 다른 세간의 지혜로는 그러한 경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능히 믿는다’는 것은 취함에 의지하여 수지ㆍ독송ㆍ해설하고 능히 스스로 법에 따름으로써 말씀한 대로 수행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여실히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지혜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믿고 취하여 수지하고 독송하며 해설하는 등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니, 이는 일체지(一切智)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015_0406_a_12L佛菩提者如先所說以彼菩提難可知故難見難覺二句示現以出世閒智出世閒智得智境界餘世閒智則不能知彼境界故言能信者依取受持讀誦解釋能自隨法如說修行爲令他知故名爲信所謂令他如實修行巧方便智此義應知信取受持讀誦說等所有功德不可稱量以是一切智境界故
015_0406_b_01L다음에는 범천이 저 모두 갖추어진 지혜를 다 알 수 없음에 의지하는 것이니, 경에서 “그때 여래께서 승사유대범천에게 말씀하시기를, ‘범천이여, 그대는 저 모든 보살마하살의 색과 공덕을 조금 알아서 찬탄하는 정도이다’”13)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는 어떠한 뜻에 의지하는가? 찬탄에 의지하고 공덕에 의지하고 일[事]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차례로 매우 깊은 뜻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뜻 가운데, 구절 가운데, 글자 가운데에서 매우 심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가 나아간 곳을 알며 깊은 뜻을 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이는 어떠한 뜻에서인가?
015_0406_a_21L次依梵天不能盡知彼具足智如經爾時如來告勝思惟大梵天言梵天汝少分知彼諸菩薩摩訶薩色及功德而讚歎之此依何義以依讚歎以依功德以依於事如是次第依甚深義說謂於義中句中字中甚深應示現知彼進趣去處知深意故以何義
‘깊은 뜻을 안다’는 것은 법을 말씀하시는 주체께서 설법하신 의미를 알기 때문이며, 헤아림과 상응하는 법에 의지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앞뒤의 뜻과 법이 상응함을 아는 것이다. 이는 문자의 뜻을 그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뜻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올바른 물음에 의지하고 올바른 말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다섯 가지 힘[力]의 수행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곧 다섯 가지 힘의 언어를 요설(樂說)이라 하나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섯 가지 힘이라는 것에서 무엇을 힘이라 하는가? 네 종류의 힘과 상응하기 때문이니 무엇이 네 종류인가?
015_0406_b_06L知深意者知能說者說法意示現依量相應法故前後義法相應知以不隨順文字義故以依於義不依字故以依正問依正語故以五種力修行說故是故卽說五力言語名爲樂說此義應知此五力者云何名力以有四種力相應故何等爲四
첫째는 부처님의 지으시는 힘에 머무르는 것이며, 둘째는 모든 외도의 힘을 항복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능히 모든 마군의 업을 알고 나서 그러한 힘을 멀리 여읠 수 있는 것이며, 넷째는 3승(乘)이 필경에 취하는 힘이니, 저 법 중에서 하나하나와 상응한다. 저 법에 의지함으로써 여래는 능히 설법하며 잘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힘이란 다섯 가지의 심심(甚深:깊고 깊음)에 의지하여 말하는 것이니 어떤 것들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 모습[相]에 의지하는 심심이다. 둘째 뜻에 의지하는 심심이다. 셋째 시간과 장소에 의지하는 심심이다. 넷째 나아감에 의지하는 심심이다. 다섯째 언제나 법을 말하여 수순함에 의지하는 심심이니, 이와 같은 차례이다.
015_0406_b_12L一者住持佛所作力二者降伏一切諸外道力三者能知一切魔業知已則能遠離彼力四者三乘畢竟取力於彼法中一一相應以依彼法如來能說善相應故此五力者依五甚深何等爲五一者依相甚深二者依意甚深三者依時處甚深四者依進取甚深五者依常說法隨順甚深是次第
015_0406_c_01L모습에 의지하는 심심14)은, 모든 법이 3세에 똑같이 달라서 서로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 등의 법은 네 가지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현실[事]에 의지하여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대대치(對對治)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세제(世諦)의 뜻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며,넷째는 나아가는 승(乘)의 차별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니, 이 뜻은 무엇인가? 현실에 의지해서 말한다는 것은 3세의 일을 일컫는 것인데, 3세의 사상법(事相法)을 말하기 때문이다. 3세의 일이라는 것은 과거ㆍ미래ㆍ현재로서 이를 3세라고 부르는 것이니, 여래의 장애가 없는 지혜에 의지하여 3세의 일을 말하는 것을 3세라고 한다.
015_0406_b_21L依相甚深者一切諸法三世等差別相難覺故過去等法依四種說一者依事說二者依對對治說三者依世諦義說四者依進取乘差別說此義云何依事說者謂三世事以說三世事相法故三世事者所謂過去未來現在卽此名爲說三世記以依如來無障㝵智說三世事名三世記
대대치에 의지하여 말한다는 것은 다스려야 할 번뇌의 물듦[煩惱染]과 다스리는 법의 청정이다. 또 저 번뇌에는 두 가지 차별이 있으니 선(善)과 불선(不善)의 차별이며, 선법에도 역시 두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차별이다. 세간에도 다시 두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차별이며, 유루에도 역시 두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유과(有過)와 무과(無過)의 차별이다. 무과에도 역시 두 가지 차별이 있으니 유위와 무위의 차별이다.15) 세제의 뜻에 의지해서 말한다는 것은 임시적인 이름[假名]이나 명칭[名字]에 의지해서 나와 중생들의 차별을 말하기 때문이다.
015_0406_c_06L依對對治說者所治煩惱染能治法淸淨又彼煩惱二種差別謂善不善差別善法亦有二種差別謂世閒出世閒差別世閒復有二種差別謂有漏漏差別有漏亦有二種差別謂有過無過差別無過亦有二種差別謂有無爲差別依世諦義說者依假名名字說我衆生等差別相故
나아가는 승(乘)의 차별에 의지해서 말한다는 것은 제일의(第一義)를 얻어서 진여의 바른 지혜를 증득하고 청정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차례로 증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간의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 세간의 사람이 나아가는 것은 곧 세간의 2승이 다른 지위의 깨닫는 법을 포섭하여 취하는 것으로서 열반을 삼아서 적멸제(寂滅際)의 열반을 취하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마하살은 두 곳16)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015_0406_c_14L依進取乘差別說者得第一義證眞如正智依淸淨故如次第證如是進取世閒涅槃此明何義世閒之人所進取者卽是世閒二乘攝取異地證法以爲涅槃以取寂滅際涅槃故諸菩薩摩訶薩不住二處故
015_0407_a_01L그러한 첫 번째 힘17)에 의지하여 집착하지 않음과 과실이 없음을 말하기 때문에 환(幻) 등의 비유를 말하는데, 이는 어떠한 뜻을 밝히는 것인가? 허깨비로 만든 코끼리 등의 신체는 모두 성취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언어로 말하는 모든 존재의 색(色) 등의 신체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며, 꿈속에서 꿈으로 보고 수용하는 갖가지 경계와 같아서그러한 꿈속에서는 갖가지 경계가 뒤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언설(言說)을 보면 말하는18) 법의 의미[法義]는 법을 받아들이는 즐거움[法樂門]이니, 오직 허망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아리와 같은 언어가 있으므로 몸이 허공중에 있어도 머무르는 곳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을 말하는 언어와 음성은 제일의제 중에서 머무는 것 없이 잘 머무는 것이 마치 저 그림자가 나타나지만 오직 모습뿐인 것과 같다. 비록 갖가지의 모습과 형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형상 등과 그러한 법체[法體]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015_0406_c_20L爲彼初力說不執著無過失故說幻等喩此明何義如幻所作象等身體皆不成就如是言語所說諸法色等身體不成就故如夢中夢見受用種種境界而彼夢中種種境界顚倒故見如是言說所用法義受法樂門惟是虛妄分別故有如彼響聲言語說身虛空中閒而無住處如是說法言語音聲第一義諦中無住善住故如彼影現見唯相雖見有色種種形而諸形相共彼法體非是相應
그 법에 의지하여 잘 따르면서 이러한 언어를 살리는 것이다. 모든 법을 말하는 것도 역시 오직 모습일 뿐이며, 비록 갖가지 이름의 차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름이 함께 말하는 법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한 법에 의지하여 상(相)을 잘 따르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도장으로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아서 두 번째의 도장을 보고 나면 모든 도장의 체(體)가 전변하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언어를 이와 같이 보고 모든 법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언어로 말미암아 색 등의 뜻이 다른 모습[異相]을 차별하더라도 모든 언어는 법의(法義)에 있지 않고 이와 같이 듣기 때문이다.
015_0407_a_08L依彼法隨順而生如是言語說一切法亦唯是相雖有種種名字差別諸名字共所說法非是相應而依彼法隨順相故如以衆印印於泥等見第二印而諸印體不轉不入而如是見如是言語說於諸法雖因言語聞色等義差別異相而諸言語不在法義而如是聞故
저 아지랑이가 실제로는 수신(水身)이 없으면서 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언어도 모든 법을 말할 때 말한 것과 같은 모든 법의 체상은 없으면서도 그러한 갖가지 종류의 법을 보기 때문이다. 저 허공과 같이 본래 나지도 않으며 소멸하지도 않으니, 비록 언어로써 허공을 말한다고 해도 그러한 허공은 말할 만한 본체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로 법의를 말하면 제일의제도 말할 만한 본체가 없기 때문이니, 모든 법에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언어가 없으므로 이와 같이 법을 말하지만 법을 설함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법을 설하는 것이 환(幻) 등과 같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허깨비 등의 비유19)로써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015_0407_a_16L如彼陽焰實無水身而亦見水如是言語說於諸法無如所說諸法體相而亦見彼種種諸法如彼虛空本來不生本來不滅以言語說於虛空而彼虛空無體可如是言語說於法義第一義諦無可說體故以一切法無彼言語可以說故如是說法無一說法以彼說法如幻等故故以幻等譬喩示現
015_0407_b_01L이와 같이 언어에 집착하지 않고 법의 뜻을 설하며, 걸림 없는 지혜와 요설변재를 얻는 것을 이익이라고 부르나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가? 모든 언어의 법이 법계의 말을 여의지 않으며 법계의 말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모든 설법의 색 등을 차별하는 것은 법계를 여의는 것이 아니니, 법계의 화합을 말하기 때문이며, 색 등 모든 법의 차별을 말하여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407_b_01L如是不著言說法義得無障㝵智樂說辯才是名利益此義應知此明何一切言語法不離法界說不差別法界說此以何義一切說法色等差別不離法界以說法界和合故以說色等諸法差別而不執著故
뜻의 심심에 의지한다20)는 것은 여래의 여섯 가지 비밀스러운 뜻에 의지해서 여래께 매우 깊은 뜻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어떤 것을 여섯 가지의 비밀스러운 뜻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생각의 비밀스러운 뜻[念密意]이며, 둘째는 말하지 않는 비밀스런 뜻[無說密意]이고, 셋째는 대대치의 비밀스런 뜻[對對治密意]이며, 넷째는 법의 비밀스런 뜻[法密意]이고, 다섯째는 마음의 비밀스러운 뜻[心密意]이며, 여섯째는 글자를 전변하는 비밀스런 뜻(字轉密意) 등이다. “범천아, 여래는 혹은 염법을 말하기도 하고 정법을 말하기도 한다”21) 등은 생각의 비밀스런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뜻인가? 번뇌에 물든 법의 체(體)를 보지 않기 때문이며, 청정한 법의 체를 굳게 집착하기 때문이며, 물듦으로써 물들고 깨끗함의 체가 없음을 올바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015_0407_b_07L依意甚深者以依如來六種密意知如來有甚深意此義應知何等名爲六種密意一者念密意二者無說密意三者對對治密意四者法密意五者心密意六者字轉密意梵天來或染法說淨此示現念密意以何義以不見煩惱染法體故以堅執著淨法體故以染正念染淨無體故
015_0407_c_01L동요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염법(染法)의 체상(體相)이기 때문이며, 마음으로 동요하고 집착하는 것은 이것이 정법(淨法)의 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염법이 비록 바른 생각은 아니지만 염법은 염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를 여래의 염밀의(念密意)라고 한다. “다시 범천아, 나는 보시에 의존하여 곧 열반을 나타내 보인다” 등은 말하지 않는 비밀스런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어떤 뜻인가? 부처님께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시고도 모든 법을 말씀하시니, 모든 법에 이와 같은 힘이 없어서 능히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변화해 가지만 아법(我法)은 체가 없으므로 변화해 갈 한 법도 없는 것이다.이러한 까닭으로 다른 세상으로 변화해 갈 한 터럭만큼의 법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설(施設)에 의지하여 열반을 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여래의 말하지 않는 비밀스런 뜻이라고 부른다.
015_0407_b_16L以不搖動執著此是染法體相故心搖動執著此是淨法體相故以彼染法雖非正念而彼染法不成染法是名如來念密意復次梵天我依布施卽示涅槃此示現無說密意此以何義以佛無起心而說諸法一切法無如是力能從此世轉至彼我法無體是故無有一法可轉是義故無一毫法轉至異世是故依施說得涅槃無有是處是名如來無說密意
지계 내지 반야로써 열반을 나타내 보이니, 이는 어떤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가? 이는 대대치(對對治)의 비밀스런 뜻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계율 등이 다스려야 할 법을 끊음으로써 바라밀락행(波羅蜜樂行)의 행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지계 등을 말함을 열반이라고 이름하는데, 계율을 깨뜨리는 번뇌가 되는 몸ㆍ말ㆍ뜻 등을 일으키는 것을 끊음으로써 악행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여읨으로써 그러한 마음에 의지하여 해를 끼치는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다시 인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게으름을 여의고 언제나 정진을 닦아야 선을 증장시키고 악행을 없애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선이 증장되지 않고 악행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며, 각관(覺觀)이 없기 때문이다.
015_0407_c_04L持戒乃至般若以示現涅槃此明何此明對對治密意此以何義以斷戒等所治之法依波羅蜜樂行行故說持戒等名爲涅槃以斷能起破戒煩惱身口意等不行惡行故以離一切殺害等心依彼害心空故以不復生忍辱心故以離懈怠常修精進爲增長善爲滅惡行無如是心爲善不增長惡行不滅無如是心故又復更無搖動心故以無覺觀故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모든 흔들리는 마음을 여의기 때문이고 산란심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보이는 바의 경계를 떠났으므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이미 마음을 얻었다는 것은 얻은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한다. 법을 보지 않으므로 이것을 여래의 대대치의 비밀스런 뜻이라고 부른다.
015_0407_c_14L此以何義以離一切搖動心故以無分別散亂心故以離一切所見境界是故不生我已得心以無所得而名爲得以不見法故是名如來對對治密意
015_0408_a_01L“탐욕은 실제의 법성(法性)에는 욕심내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어리석음은 실제의 법성에는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이다”22)라는 것은 진여를 여의고는 탐욕 등과 실제 등이 없으므로 법의 비밀스러운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어떤 뜻을 밝히고자 하는가? “실제의 법성에는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이다”23)라고 한 이것은 법의 비밀스런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진여를 여읨으로써 탐욕 등과 실제 등은 말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 여래 법의 비밀스러운 뜻이라고 한다.“세간은 열반에 물러남도 없고 태어남도 없기 때문이다……허망은 진실한 언어로 증상만(增上慢)의 사람을 위하기 때문이다”24)라는 것은 마음의 비밀스런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뜻에서인가?
015_0407_c_18L貪欲是實際法性無欲相故乃至愚癡是實際法性無癡離於眞如貪等實際等無故示現法密意此明何義實際法性無癡相故此示現法密意此以何義以離眞如貪等實際等無法可說故此義應知是名如來法密世閒是涅槃無退無生故乃至虛妄是實語爲增上慢人故此示現心密意此以何義
세간이 본래 생기는 것도 아니고 본래 없어지는 것도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곧 열반이다. 열반과 열반의 신체에 집착해서 이처럼 상(相)을 취하는 것은 이 마음의 허물이 곧 세간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언어[實言語]’라는 것은 언어로 말하는 차원을 의지하는 것이다. 만약 이 실제를 본다면 곧 허망한 것이다. ‘허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만에 가득한 사람의 허망분별로 실다움을 삼아서 실상의 모습을 취하려 하지만 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여래의 마음의 비밀스런 뜻이라고 한다. “다시 범천이여, 여래는 뜻을 따르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상변(常邊)을 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25) 등은 글자를 전변하는 비밀스런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015_0408_a_04L以解世閒本來不生本來不滅卽是涅槃執著涅槃涅槃身體如是取相以此心過卽是世閒實言語者依言語說門若見是實卽是虛妄言虛妄者是我慢人虛妄分別以之爲實取於實相而不實故名如來心密意復次梵天如來以隨意故或自說言我是說常邊者示現字轉密意此以何義
열반 등은 항상하는 법이기 때문이며, 번뇌 등의 모든 염법을 말하기 때문이며, 탐욕 등의 모든 번뇌를 끊기 때문이며, 악행을 지음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며, 몸 등의 업이 있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모든 희론(戲論)과 사견(邪見)을 보기 때문이며, 일체지(一切智)가 다른 인연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는 열반의 법계를 깨닫기 때문이며, 업과 번뇌에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갈래 중에서 태어나면서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며, 마침내 애욕의 업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며, 삼계에 머무르지도 않고 삼계에 속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에서, “그래서 여래께서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없다”26)고 한 것과 같으니,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015_0408_a_12L以說涅槃等是常法故以說煩惱等諸染法故以說斷貪等諸使煩惱故以說無有惡行作故以說無有身等業故以見一切戲論諸邪見故以一切智不隨他因緣故以證無爲涅槃法界故不依業煩惱一切趣中生無生縛故以得畢竟斷愛業故以不住三界不屬三界故如經而如來無有如此諸事故此以何義
015_0408_b_01L이는 여래께서 항상하다는 입장과 무상하다는 입장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모든 일들이 없다’고 말한 것은 불법 중에서는 이와 같은 말이 없으며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범천이여, 마땅히 알아라. 이는 여래께서 뜻을 따르는 일이 된다.어떤 뜻에 의지하여 교만한 중생이 아만을 버릴 수 있는가?”27)라는 것은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 곧 앞에서 말한 법 중에서 다른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름과 같다고 집착하며 뜻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015_0408_a_21L此以如來依常邊等無常等見故又言無有如此諸事者以佛法中無如是說如是所說不可見故梵天當知是爲如來隨意以依何意憍慢衆生能捨我慢此明何卽於向來所說法中示現異義執如名義亦如是故
“범천이여, 만약 보살이 여래께서 뜻28)에 따라서 방편으로 말씀하시는 줄을 안다”29)는 것은 이와 같이 명칭과 의미[名義]에 집착함을 여읨에 의지하는 것이니,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법을 말하는 중에 두 가지의 행이 있으니, 첫째는 자행(字行)이고 둘째는 의행(義行)이다.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가? 이와 같은 이름과 문자는 뜻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뜻은 이름과 문자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이는 여래의 매우 깊은 뜻이다. 이와 같은 깊은 뜻에 의지하여 선교방편의 모습과 문자와 뜻의 행지(行智)를 이와 같이 잘 아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이러한 행을 보살이 나아가는데 여의(如意)한 행을 하는 것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015_0408_b_04L梵天若菩薩知如來隨行方便說依離如是名義執著次下復說此以何義以說法中有二種行一者字行二者義行此明何義如是名字於義中行如是義於名字中行此是如來甚深之意依此深意如是善知巧方便相字義行智應知此行卽名爲行菩薩進取如意行故
그렇게 말한 매우 깊은 뜻은 선교방편으로 모든 법을 모으기 때문이니, 곧 모든 말하는 갖가지의 법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능히 모든 부처님의 모든 설법과 언어와 음성에 대하여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함은 모든 중생이 갖가지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러한 방편에 의지하면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과 출현하시지 않음을 듣는 것은 이상(異相)을 달리함으로써 저처럼 세상에 출현하심과 출현하시지 않음 등을 낱낱이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선교방편으로 집착함이 없이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법을 믿어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015_0408_b_12L如彼所說甚深之意善巧方便集諸法故則能善知一切所說種種諸法是故菩薩能於諸佛一切說法言語音聲不驚不怖應如是知以諸衆生隨種種心是故菩薩依彼方便則能信受聞佛出世不出世等以異異相如彼出世不出世等一一示現不執不著以巧方便令彼衆生信入諸法故
015_0408_c_01L교화할 중생의 몸이 순수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저 중생의 몸으로 하여금 순수하고 성숙해지도록 하기 때문에 낮은 법을 말하는 것이다. 즐거움에 의지하여 즐거움을 보이는 것은 몸이 즐거움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때문이니, 몸이 순수하고 성숙해지면 깊은 법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례로 시간에 의지하여 법을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어떻게 알 것인가? 먼저 중생을 위해서 거칠고 낮은 법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인과를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관(觀)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업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교화의 방편으로 중생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수행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수행의 과보를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015_0408_b_20L以可化衆生身不淳熟令彼衆生身淳熟故爲說淺法依樂示樂爲身受樂身淳熟故爲說深法是故次第依時說法此義應知應云何知先爲衆生說麤淺法此明何義攝取因果故攝取彼觀故攝取彼業故教化方便攝取衆生故攝取修行故攝取修行果故
‘보시는 큰 부(富)를 얻게 하며…… 지혜는 모든 번뇌를 버리게 한다’30)까지는 선법의 수행에 의지하여 인과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인욕으로써 대(對)를 삼아 누추함을 대치하니, 인욕으로 환희심을 낼 수 있기 때문이며, 인욕으로 단정함의 원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문혜 등으로 모든 행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지혜의 원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며, 고고(苦苦)의 인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여실한 관찰로써 모든 번뇌를 떠날 수 있으니, 모든 번뇌의 원인이 흩어지고 없어져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문혜의 행이 선법의 관을 닦는 것이니, 어떤 것이 관의 인인가?
015_0408_c_04L布施得大富乃至慧捨諸煩惱者依善法修行攝取因果以忍爲對對治醜陋以忍能生歡喜心故以忍能作端正因故以聞慧等勤修諸行能作智因故以過苦苦因故以慧如實觀能離諸煩惱以諸煩惱因散滅不集故又此聞慧行修善法觀何者是觀因
많은 문혜로써 그러한 관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저 관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몸 등의 행을 닦아서 10선업도(善業道)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열 가지 업에 의지해서 천상과 인간 중에 거두어 들여져서 모든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업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한량없는데, 업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중생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에 교화의 방편으로써 중생을 거두어들이고 중생의 순수하고 성숙한 방편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사마타(奢摩他)에 의지함으로써 모든 선법을 수행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마타는 비파사나 수행을 얻기’31) 때문에 수행을 거두어들이는 것이고, 3승에 의지하여 3승의 열반을 얻기 때문에 수행의 과보를 얻는 것이다. 걸식을 거두어 들여서 욕망을 적게 하고 두타행을 하는 것 등은 모든 중생을 위해서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짓게 하기 때문이며, 법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중생으로 하여금 잘 따라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015_0408_c_11L以多聞慧爲攝彼觀故攝取彼觀也修行身等行取十善業道依十種業攝取天人中成就諸功德故攝取彼業也無量攝取業憐愍衆生故以教化方便攝取衆生也攝取衆生淳熟方便以依止奢摩他修行一切善法是故奢摩他得毘婆舍那修行故攝取修行也依三乘得三乘涅槃故攝取修行果以攝取乞丐少欲頭陁等爲諸衆生少作利益故不能說法故爲令衆生隨順入故
015_0409_a_01L여래께서 이와 같이 낮은 법을 말한 뒤에 바야흐로 깊은 법을 말한 것이니, 이는 무슨 뜻을 밝히는 것인가? 거칠고 낮은 법을 말하여 인과를 밝히는 것은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교화해야 할 중생을 위해서이니, 스스로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인과의 일을 밝히는 것이다. 중생은 행위의 주체[能作]와 행위의 대상[所作]과 아상 등의 견해를 거두어들이니,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인과를 밝힌 뒤에 그 다음으로 대치법의 대치하는 주체와 대치되는 대상을 말하셔서 자신이 그러한 삿된 소견을 여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여래께서 실로 아ㆍ중생ㆍ수명 및 장부(丈夫)32) 등을 얻지 않기 때문이니, 이러한 뜻은 어째서인가?
015_0408_c_22L如來如是說淺法已然後方乃爲說深法此明何義說麤淺法明因果根不熟可化衆生自心覺知明因果事衆生攝取能作所作我等相見故如來明因果已次說對治能治所示現自身離彼邪見如來實不得衆生壽命及丈夫等故此義云何
아ㆍ중생ㆍ수명ㆍ장부의 뜻이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음을 그렇게 알아야 하니, 저 대치하는 주체와 대치되는 대상의 인과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의 과보를 의지하여 따름을 간략히 말하는 것은 보시 등을 보지 않고 과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아끼고 탐하는 것 등을 보지 않고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이며, 대치하는 주체와 대치되는 대상의 수행법을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며, 저 세간의 과보를 여의고 열반의 과보를 얻는다는 유무(有無)의 법상(法相)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015_0409_a_06L有我衆生壽命丈夫義如先說應如是知以不見彼能治所治因果法故略說依隨世閒果報以不見施等受果報故以不見慳等不受果報故得遠離能治所治修行法故以不見彼離世閒果得涅槃果有無法相故
“범천이여, 여래는 언제나 중생을 위해서 법을 말씀하시며, 모든 중생들은 여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실히 수행하며 부지런히 모든 행을 닦는 것이다. 어떤 뜻을 위해 수행해서 저 행을 부지런히 행하며, 나아가 열반을 얻지도 않으며 열반을 보지도 않는가?”33)라고 한 것은 어떠한 뜻을 밝히는 것인가? 낮은 법을 말하면 중생이 모든 법상을 보고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출세간의 과보를 수행하며 그러한 과보를 보지 않는 것이다. 여래는 이와 같은 설법이 세간의 원인임을 나타내 보이시는데, 여기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부처님의 설법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근본이라서 선법을 잘 따르는 것이다.
015_0409_a_12L梵天如來常爲衆生說法而諸衆生依如來教如所說法如實修行勤修諸行爲何義修行勤行彼行乃至不得涅槃不見涅槃此明何義如淺說衆生攝取見諸法相如是修行出世閒果不見彼果如來示現如是說法是世閒因此有何義依佛說法而修行者此是根本隨順善法
015_0409_b_01L‘모든 행을 닦는다’는 것은 해석이니, 법을 얻지 않음에 의지하고 법을 보지 않음에 의지하여 차례로 말하기 때문이다. ‘법을 얻지 않는다’는 것은 지혜로 관찰하여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몸으로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묘법을 거두어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그러한 얕은 설법과 깊은 설법은 중생으로 하여금 저 깊고 얕은 두 가지의 법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법상에 들어감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이는 어떤 뜻에서인가? ‘법에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은 네 가지의 들어감[入]에 의지하는 것이니, 교화해야 할 중생을 위하여 해탈을 나타내 보여서 그러한 법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15_0409_a_20L修諸行此是解釋以依不得法依不見法次第說故不得法者以慧觀察不能得故不見法者以身不能證涅槃故爲令衆生攝取妙法者此明何義淺說法及深說法爲令衆生入彼深淺二種法故以爲示現入法相故以何義令入法者依四種入爲可化衆生示現解脫令證彼法此義應知
‘네 가지의 들어감’이라는 것은 상(相)ㆍ행(行)ㆍ설(說)ㆍ득(得)이니, 눈 등의 모든 감각기관이 아와 아소를 떠나서 체의 두 가지 상이 공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을 이해하면 거짓으로 해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상입(相入)’이라고 한다. 눈 등의 상에 의지하여 해탈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때문에 해탈에 들어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공한 모습 중에서 올바른 행을 닦으므로 해탈하는 모습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속이지 않는 것과 속이는 것이 서로 다른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행입(行入)의 닦음을 의지하여 모든 중생이 해탈상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ㆍ행의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업번뇌(業煩惱)의 물듦과 태어남 등의 물듦 등을 대치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공문(空門) 등은 어떤 뜻을 밝히는가?
015_0409_b_05L四種入者眼等諸根離我我所體二相空故解彼相已則不能得入解脫故名相入依眼等相能入解脫是故說爲入解脫相如是彼空相中修正行故得入解脫相所不誑與誑相違以是義故依修行入諸衆生入解脫相是故依此相行二示現對治業煩惱染及生等染等門者此明何義
015_0409_c_01L대치해야 할 견(見)ㆍ상(相)ㆍ원(願)의 물듦과 업번뇌의 물듦과 태어남 등의 물듦을 대치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가? 공ㆍ무상ㆍ무원의 문 등이 업의 물듦과 번뇌의 물듦을 대치하며34), ‘불행문(不行門)’으로써 생사를 대치하기 때문에 태어남의 물듦을 대치하는 것이다. ‘불생불멸문(不生不滅門)’은 어떤 뜻을 밝히는가? 곧 저 태어남의 물듦과 중간의 차별을 대치하는 법이기 때문에 저 대치되는 바는 다시 대치하게 되니, ‘온 곳도 없으며 가는 곳도 없는 문’으로써 다시 대치가 있다. ‘물러나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문’35)으로써 해탈상에 들어가는 것은 그와 같은 차례이다. ‘자성이 청정하여 고요한 문’은 어떤 뜻을 밝히는가? 저 법이 물러남으로써 자성이 적정하기 때문이니, 어떤 뜻을 나타내 보이는가? 저 물듦이 모두 적정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자성이 적정하다고 말하는가?성품의 청정함에 의지해서 설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015_0409_b_14L對治所治見相願染業煩惱染及生等染對治法故明何義以空無相無願等門對治業染及煩惱染以不行門對生死故治生染不生不滅門此明何義卽彼生染中閒差別對治法故卽彼所治復有對治以無所從來無所至去門復有對治以不退不去門入解脫相如彼次第自性淸淨方靖門者此明何義以彼法退自性寂靜故示現何示現彼染一切寂靜故以何故說自性寂靜以依性淨說法入故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다시 범천이여, 여래는 모든 이름[名字]에서 이러한 해탈문을 나타낸다”36)고 말하는데, 이는 어떠한 뜻에서인가? 번갈아 함께 해도 상응함이 없기 때문이다. ‘자성이 굳기 때문이다’는 어떤 뜻에서인가? 다른 법과 달리함으로써 다른 이름을 달리 말하며, 모든 이름의 앞 글자와 뒤 글자가 서로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차별이 있으니, 언어와 뜻이 서로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어떤 뜻을 밝히는가? 모든 법을 말하는 데에 그러한 언어가 없이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이름의 법상이 없음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말한 뒤에 모든 언어와 이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여래께서 해탈의 인이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 진실한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실하고도 올바른 설법에 의지한 뒤에는 어떻게 해탈을 얻는가?
015_0409_c_02L是以次言復次梵天如來於一切名字示是解脫門如是等此以何義以有遞共無相應故自性頑故此以何義依異異法說異異名字以諸名字前字後字不相到故復有差別以言語義不相到故如是說者爲明何義說諸法無彼言語可以說故依無言語名字法相如是說已示現一切言語名字如來說名爲解脫因故此明何義說實諦故依彼如實正說法已云何得解脫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범천이여, 여래께서 법을 말씀하시는 데에는 염법이 없다”37)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 몸을 순수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낮게 법을 말한 뒤에 잘 따름으로써 모든 번뇌를 끊고, 염법 등의 인(因)은 법문에 들어감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말한 모든 법 가운데에서 해탈문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뜻을 나타내 보이는가? 열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뜻을 나타내 보이는가? 진리를 본 수행자의 나머지 번뇌는 수행자가 저 번뇌를 여의고 해탈을 얻음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015_0409_c_13L是故次言梵天如來說法無有法染此明何義爲身淳熟淺說法已以爲隨順斷諸煩惱染法等因依入法門故言一切所說法中示解脫門此示現何義示現涅槃故示現何義見諦學人餘殘煩惱示現學人離彼煩惱得解脫故
015_0410_a_01L진실한 진리를 보지 못한 자는 그러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법의 평등한 진여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방편으로 법을 말하고 열반을 나타내 보이는 것에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알아야 하리라. 대비가 그 첫째이니, 필경에 저 대치의 대상이 되는 법을 대치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종류의 대비심을 말하니,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 모든 대치되는 법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모든 습기(習氣)와 번뇌를 여읨으로써여래의 몸을 얻기 때문이며, 일체 종자[一切種]를 얻기 때문이다. 간략히 네 가지 대비의 마음에 의지하여 말한다면, 첫째는 상응함을 멀리 여의는 대비심이며, 둘째는 상응하는 대비심이며, 셋째는 이른바 마음의 대비심을 말하고, 넷째는 수행하는 대비심이다. 상응함을 멀리 여의는 것은 식(識)으로 식을 여읨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아(我) 등의 마음이 상응함을 보기 때문이니, 이는 어떤 뜻을 나타내는 것인가?
015_0409_c_19L未見實諦爲令彼人入一切法平等眞如便說法示現涅槃有二種義應知大一者畢竟治彼所治之法二者謂一切種大悲之心此明何義遠離一切所治之法及離一切習氣煩惱得如來身故以得一切種故略依四種大悲心說一者遠離相應大悲之二者相應大悲之心三者謂心大悲之心四者修行大悲之心遠離相應者以識離識不相應故以見我等心相應故此示何義
상응함을 멀리 여의는 대비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상응하는 대비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러한 차례로 ‘모든 존재는 아가 없고, 나아가 모든 존재는 장부가 없다’라고 하게 된다. 인무아(人無我)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있지 않음을 말하며, 법무아(法無我)에 의지하여 그러한 두 가지, 즉 인무아의 모습과 법무아의 모습을 말하여 ‘머무름이 없다’고 한다. ‘머무름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본체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알아야만 하리라.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
015_0410_a_07L示現遠離相應大悲之心示現相應大悲之心如是次第一切法無我乃至一切法無丈依人無我說一切法無所有依法無我說卽彼二種人無我相法無我相名爲無住言無住者以不執著諸法體故是以不住一切諸法應如是此明何義
‘머무른다’는 것은 모든 감각기관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의 문에 의지하여 그곳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머무름이 없다면 돌아갈 곳도 없으니, 돌아갈 곳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감이 있겠는가? 삼계에 돌아가기 때문이며, 6도에 돌아가기 때문이며, 그러한 입(入)에 의지하여 몸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그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이며, 그곳에서 언제나 깊이 가라앉기 때문이다. ‘깊이 가라앉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와 아소 때문이니, 그곳에서 몸이 태어나기 때문이며, 아심(我心)을 내므로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015_0410_a_14L所言住者住諸入故我見愛門住彼處故夫無住者則無歸處無歸處者云何有歸歸三界故歸六道故以依彼入攝取身故依彼生故以於彼處常沈沒故言沈沒者我我所故以彼彼處生於身故以生我心故有生故
015_0410_b_01L돌아갈 곳이 없는 것은 아상(我想)이 없기 때문이며, 아상이 없는 것은 아소가 없는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은 아상에 집착하는 것이며, 아상에 집착하는 것은 아소가 있는 것이다. 아소에 집착하는 것은 모든 법의 평등을 이미 공유하고 있는데도 모든 중생들이 ‘나는 증상(增上)한다’라고 스스로 허망하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가?이른바 현실[事]과 섭취와 집착에 의지하는 것이다.
015_0410_a_20L無歸處者則無我想無我想者則無我所有歸處者則著我想著我者則有我所著我所者法平等旣共有之而諸衆生虛妄分別我是增上故此明何義所謂依事攝取執著
현실에 의지한다는 것은 밭에 의지하고 집에 의지하며 원림(園林) 등에 의지하는 것이며, 부모 및 처자식 등에 의지하는 것이며, 의복과 음식과 침구 등에 의지하는 것이다. 섭취에 의지한다는 것은 모든 수용하는 현실을 거두어 취한다는 것이다. 집착에 의지한다는 것은 집착하여 자기의 소유로 삼는 것이니, 밭이나 집을 내가 따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처럼 생에 집착하고 생에서 물러남에 집착하는 것이다. 생에 집착한다는 것은 스스로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다. 집착하기 때문에 업 번뇌의 물듦이 증가하고 두루 가득 차게 되니, 오고 감에 번뇌를 내어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 얽어매는 것에 의지하여 물듦과 물들여지는 바를 따르게 되는데, 이 뜻은 어떤가?
015_0410_b_02L言依事者依田依宅依園林等依於父母及妻子等依衣服飮食及臥具等依攝取者攝取一切受用之事依執著者執著以爲自己所以田宅等我別有故如是著生於退生言著生者自於此處自異處以取著故業煩惱染增上遍滿去生染滿時處故依貪瞋癡三種所纏染隨所染此義云何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물듦과 물들여지는 바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뜻에서인가? 두 가지의 이름은 근본 물듦[根本染]에 의지하여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과거세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와 현세에서 내세를 향해서 가는 것을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나타내 보이면서 세세생생토록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으며 행하는 것이 있으니, 중생이 이와 같이 태어나 단절하지 않고 구르면서 윤회해 가는 것이다. 갖가지 기술을 배우고 갖가지 업을 배우며 장부는 상(相)에 힘써서 모든 유위의 희론의 법집(法集)을 지으며 경계를 얻고 경계를 수용한다.
015_0410_b_10L貪瞋癡染隨所染者以何義故二種名說依根本謂過去世來至此世從此世中向彼世去以爲上首故如是說如是示世世生生相續不斷有所爲作生如是生不斷絕輪轉彼彼學種種術學種種業丈夫力相作諸有爲戲論之法集得境界受用境界
중생은 이와 같이 허망하게 분별하며,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세속 사람의 분(分)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다시 출가의 분수에 의지함이 있으니, 이른바 외도 등의 사견의 상(相)과 사견의 상원(相願)을 말한다.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가? ‘사견’이라고 하는 것은 아 등을 보는 것을 말하며, ‘상’이라고 함은 그러한 뜻의 모습을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이른바 ‘원’은 마음으로 언제나 즐거이 구하는 것이다. 세간 등을 낳는 것은 곧 앞에서 말했던 비심(悲心)을 멀리 여읨과 비심을 멀리 여의지 않는 것으로서 마음과 비심을 나타내 보임이니, 이러한 뜻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015_0410_b_17L衆生如是虛妄分別如是一切依俗人分義應知又復次有依出家分謂外道等邪見之相邪見相願此明何義邪見者謂見我等所言相者虛妄分別彼彼義相所言願者心常樂求生世閒等卽此上說遠離悲心不遠離悲心示現心悲心此義應知
015_0410_c_01L그러한 비심을 멀리 여읨과 멀리 여의지 않음을 위해서 법을 말하여 수행하는 것이니, 욕망으로 구함에 의지하며, 있음으로 구함에 의지하며, 범행으로 구함에 의지하는 것이다. 모든 잘못된 도(道)는 그러한 대치의 대상과 대치의 주체가 되는 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비심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어떤 뜻을 밝히는 것인가? 욕망으로 구함에 의지하여 전도된 도라는 것은 거두어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서로 함께 투쟁하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을 위해서 스스로 부모 및 처자식 등이 함께 서로 투쟁하고 분노에 의지하여 서로 허물을 내세우니, 이와 같은 차례가 있음으로 구함에 의지하여 전도된 도는 전도됨에 상응하는 것이다.
015_0410_c_01L爲彼遠不遠離心說法修行依於欲求於有求依梵行求諸顚倒道爲彼所治能治法故是以次說修行悲心明何義依於欲求顚倒道者以攝取故遞共鬪諍爲諸欲故自於父母及妻子等共相鬪諍依於恚恨競訟等如是次第依於有求顚倒道者倒相應
범천 등을 구하는 것은 상견(常見)의 전도이니, 전도되어서 집착하므로 전도라고 한다. 전도된 자를 위해서 전도된 도를 여의고 전도되지 않은 도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며, 또 있음으로 구함에 의지하여 전도된 도란 진실하지도 못한 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그러한 진실하지 못한 도에 머물러 있는 중생을 교화하여 얻기 어려운 진실한 도에 들어가도록 하려 하기 때문이다.
015_0410_c_09L求梵天等常見顚倒顚倒取故故名顚倒爲顚倒者離顚倒道得入於非顚倒道又依有求顚倒道者住於異道爲教化彼異道衆生令入實道不可得故
범행에 의지하여 전도된 도를 구한다는 것은 대략 세 종류이다. 구하지 않는 것과 삿되게 구하는 것과 낮게 구하는 것이니, 이들은 다시 어떤 뜻인가? 모든 세간이 자재하지 않은 허물과 사명(邪命)의 허물ㆍ친한 모습을 지어야 하는 허물인 모든 번뇌의 물듦ㆍ업고(業苦)의 물듦은 속인의 즐거운 집[家]을 본받은 것이니, 이 때문에 중생은 범행을 구하지 않는다.
015_0410_c_13L依梵行求顚倒道略有三種所謂不求邪求下求復何義一切世閒不自在過及邪命過作親相過諸煩惱染業苦染法人樂家是故衆生不求梵行
015_0411_a_01L‘범행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해탈의 도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아낌ㆍ아끼고 누름ㆍ빼앗는 행ㆍ탐내는 행ㆍ속이는 행ㆍ게으름ㆍ습기(習氣)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차례로 하나하나 뽑아버려도 만족해 할 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을 영위해 가는데 법에 걸맞지 않게 구하기 때문이다. 보시 등은 만족하지 못한 중생에게 행하는 것인데, ‘언제나 재물ㆍ집ㆍ처자식ㆍ사랑을 위해서 종이 된다’38)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자재하지 못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태롭고 부서지기 쉬우며 견고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견고하다는 생각을 내는 것’39)은 항상하지 못하는 생활도구 등에 대하여항상하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다. ‘공양ㆍ공경’은 어떤 뜻을 위해서인가?
015_0410_c_17L不求梵行者不求解脫道故此所謂慳及慳壓沒行貪行誑行懈怠習氣如是次第一一拔濟不知厭足奪他財物者以自資生非法求故施等不足衆生常爲財物屋宅妻子恩愛而作僮僕示現彼心不自在故於此危脆無堅之物生堅固想者以於無常資生等中生常想故供養恭敬者此爲何義
음식으로 얽매어서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비록 이는 선지식이라고 하지만 이는 중생의 악지식이다’라는 것은 원수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사명(邪命)으로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은 되[斗]나 말[秤] 등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 가운데에서 부지런히 모든 행을 닦으면 바야흐로 결국에는 능히 대보리를 얻게 되는데도 저 중생들은 게으름을 피워서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기 때문이다.
015_0411_a_02L爲飮食所縛不成就故衆生雖謂是善知識而是衆生惡知識者示現怨家故邪命自活者以斗秤等欺誑他一切法中勤修諸行方能畢竟得大菩提而彼衆生懈怠疲倦故
성인의 가장 뛰어난 해탈처(解脫處)는 전도된 원인에 의지하여 수행해서 얻는 것은 아니며, 모든 중생이 삿된 범행으로 구하는 것은 전도된 원인에 의지하여 모든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이 바로 외도의 해탈을 구하여 그러한 삿된 도가 행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그가 성인의 해탈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최상의 대승이며 걸림 없는…… 등을 버린다’40)는 것은 그가 하열한 범행을 구하기 때문이다. 위없는 제일의 대승을 버린다는 것은 하열한 소승법을 구하기 때문이다.
015_0411_a_07L聖人最勝解脫處者非顚倒因修行者得而諸衆生求邪梵行依顚倒因而修諸行所應得者是人乃求外道解脫爲令不行彼邪道故何以故以彼不得聖人解脫故衆生棄捨最上大乘無㝵等者以彼求於下梵行故捨於無上第一大乘而求下分小乘法故
勝思惟梵天所問經論卷第四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p.70b.
  2. 2)p.70b.
  3. 3)신수대장경의 주(T.1532.26, p.351)에서는 ‘기(其)’를 ‘아(我)’로 보고 있다.
  4. 4)p.70b.
  5. 5)p.70b.-c.
  6. 6)p.70b.
  7. 7)p.70c.
  8. 8)p.70c-71a.
  9. 9)p.70c.
  10. 10)p.71a.
  11. 11)p.71a.
  12. 12)신수대장경의 주[T.1532.26, p.352.]에 의해서 ‘의(依)’를 ‘불(佛)’로 바꾸어서 옮긴다.
  13. 13)p.71c.
  14. 14)다섯 가지 심심 중의 첫째다.
  15. 15)이상이 상에 의지하는 심심의 네 가지 중 둘째다.
  16. 16)세간과 열반이다.
  17. 17)여래의 다섯 가지 힘의 행지(行智) 중 첫 번째인 언어설법(言語說法)을 의미한다(p.71b).
  18. 18)신수대장경의 주(T.1532.26, p.352)에 따라서, ‘용(用)’을 ‘설(說)’로 바꾸어 옮긴다.
  19. 19)이상은 언어를 환ㆍ꿈ㆍ메아리ㆍ그림자ㆍ아지랑이 등으로 비유하였다. 이는 『금강경』의 여섯 가지 비유가 생각되거니와, 언어와 법에 상응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20. 20)다섯 가지 심신 중의 둘째다.
  21. 21)p.71b-c.
  22. 22)p.71c.
  23. 23)p.71c.
  24. 24)p.71c.
  25. 25)p.71c.
  26. 26)p.71c.
  27. 27)p.71c.
  28. 28)신수대장경의 주(T.1532.26, p.353)에 따라서 ‘행(行)’을 ‘의(意)’로 바꾸어 옮긴다.
  29. 29)p.71c.
  30. 30)p.72a.
  31. 31)p.72a. 사마타는 śmatha의 음역이며 뜻은 그치다[止]이다. 비파사나는 vipaśyanā의 음역이며 뜻으로는 관(觀)이 된다. 이들은 각기 정(定)과 혜(慧)의 원인이다.
  32. 32)장부는 Puruṣa전의 역어. 사부(士夫)라고도 번역된다. 이는 모두 『금강경』에 나오는 4상과 상응한다.
  33. 33)p.72b.
  34. 34)공문은 견을 대치하고, 무상문은 상을 대치하며, 무원문은 원을 대치한다.
  35. 35)경에서는 ‘불퇴불생문’이다(p.72b.).
  36. 36)p.72b.
  37. 37)p.72b.
  38. 38)p.73a.
  39. 39)p.73a.
  40. 40)‘법ㆍ뛰어난 열반법’이 생략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