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乘起信論一卷

ABC_IT_K0616_T_001
017_0614_a_01L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1권
017_0614_a_01L大乘起信論一卷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眞諦) 한역
김월운 번역
017_0614_a_02L馬鳴菩薩造
梁西印度三藏法師眞諦譯


끝없는 시방 세계에서
가장 수승한 업으로 두루 아시고
색(色)이 걸림 없이 자재하시며
세상을 구제하시는 대비하신 분과
017_0614_a_04L歸命盡十方
最勝業遍知
色無碍自在
救世大悲者

그리고 그 몸의 본체와 모습으로서
법성(法性)과 진여(眞如)의 바다인
무량한 공덕의 갈무리[無量功德藏]와
여실히 수행하시는 분들께 귀의하오니
017_0614_a_06L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중생들로 하여금
의심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 버리어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 일으켜서
불종자[佛種]가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옵니다.
017_0614_a_07L爲欲令衆生
除疑捨耶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논】어떤 법이 능히 마하연(摩訶衍:大乘)의 신근(信根)을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설(說)해야 한다. 설에는 다섯 부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017_0614_a_08L論曰有法能起摩訶衍信根是故應說有五分云何爲五一者因緣分二者立義分三者解釋分四者修行信心分五者勸修利益分
먼저 인연분(因緣分)을 설하겠다.
017_0614_a_12L初說因緣分
【문】어떤 인연이 있어 이 논(論)을 지었는가?
017_0614_a_13L問曰有何因緣而造此論
【답】이 인연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017_0614_a_14L 答曰因緣有八種云何爲八
첫째는 인연총상(因緣總相)이니, 이른바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究竟樂]을 얻게 하기 위할 뿐이요, 세간의 명리(名利)나 공경을 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다.
017_0614_a_15L一者因緣摠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得究竟非求世閒名利恭敬故
둘째는 여래(如來)의 근본되는 진리를 해석해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바르게 알아 틀림이 없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017_0614_a_17L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令諸衆生正解不謬故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마하연의 법을 감당하여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017_0614_a_19L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
넷째는 선근이 미약[微少]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닦아 익히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017_0614_a_20L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修習信心故
다섯째는 방편(方便)으로 나쁜 업장은 소멸하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는 법을 보여 주어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멀리 여의고 삿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017_0614_a_21L五者示方便消惡業障善護其心遠離癡慢出邪網故
017_0614_b_01L여섯째는 지(止)와 관(觀)을 닦아 익히는 길을 보여주어 범부와 이승(二乘)의 마음의 잘못에 떨어지는 것을 물리치게 해 주기 위한 까닭이다.
017_0614_b_01L六者爲示修習止觀治凡夫二乘心過故
일곱째는 전일(專一)하게 염하는 방편으로 부처님 앞에 태어나는 법을 보여 주어서 반드시 결정코 신심(信心)이 물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017_0614_b_02L七者爲示專念方便生於佛前必定不退信心故
여덟째는 이익됨을 보여 주어서 수행하기를 권하기 위한 까닭이니, 이와 같은 등등의 인연들이 있기에 이 논을 지었다.
017_0614_b_03L爲示利益勸修行故有如是等因所以造論
【문】 수다라(修多羅:經) 안에 이 법이 갖추어 있거늘, 어찌 거듭 설할 필요가 있는가?
017_0614_b_05L問曰修多羅中具有此何須重說
【답】수다라 안에 비록 이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생의 근(根)과 행(行)이 같지 않고,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연이 다르니,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중생들의 근기가 날카롭고 설하시는 분의 색(色)과 심(心)의 업도 수승하여 원음(圓音)이 한 번 연창(演暢)되면 각기 다른 무리들이 균등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017_0614_b_06L答曰修多羅中雖有此法以衆生根行不等受解緣別謂如來在世衆生利根能說之人色心業勝圓音一演異類等解則不須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혹 어떤 중생은 능히 자기의 힘으로 널리 듣고 깨달음을 얻는 이가 있을 것이며, 어떤 중생은 역시 자기의 힘으로 적게 듣고도 많이 깨닫는 이가 있을 것이고, 흑 어떤 중생은 스스로는 지혜의 힘이 없어서 자세한 논[廣論]을 인하여야 견해를 얻는 이도 있으며, 자연히 어떤 중생은 도리어 자세한 논의 많은 문장이 번거롭다 여기고, 총괄적[總持]이고도 적은 문장에 많은 이치를 포함하고 있음을 즐기어 견해를 얻는 이도 있을 것이다.
017_0614_b_10L若如來滅後或有衆生能以自力廣聞而取解者或有衆生亦以自力少聞而多解者或有衆生無自心力因於廣論而得解者自有衆生復以廣論文多爲煩心樂摠持少文而攝多義能取解者
이와 같이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끝없는 이치를 총망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을 설해야 한다.
017_0614_b_15L如是此論爲欲摠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應說此論
이미 인연분(因緣分)을 설했으니 다음은 입의분(立義分)을 설하겠다.
017_0614_b_16L已說因緣分次說立義分
마하연(摩訶衍)이란 총괄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4_b_18L摩訶衍者摠說有二種云何爲二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017_0614_b_19L二者
이른바 법이라 함은 중생의 마음[衆生心]을 이르니, 이 마음이 일체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의 이치를 드러내어 보이니, 무슨 까닭인가?
017_0614_b_20L所言法者謂衆生心心則攝一切世閒法出世閒法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何以故
이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모습[心眞如相]이 마하연의 본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요, 이 마음 그대로가 생멸의 인연상(因緣相)이니, 능히 마하연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017_0614_b_22L是心眞如卽示摩訶衍體故是心生滅因緣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
017_0614_c_01L이른바 의(義)라 함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체대(體大)이니, 일체법이 진여이며 평등하여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대(相大)이니, 여래장(如來藏)이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요,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셨던 바[所乘]이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모두 이 법을 타고서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 때문이다.
017_0614_c_01L所言義則有三種云何爲三一者體大一切法眞如平等不增減故二者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用大能生一切世閒出世閒善因果故一切諸佛本所乘故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했으니 다음은 해석분(解釋分)을 설하겠다.
017_0614_c_07L已說立義分次說解釋分
해석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017_0614_c_08L解釋分有三種云何爲三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요,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이요,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
017_0614_c_09L一者顯示正義二者對治邪執三者分別發趣道相
현시정의(顯示正義)에는 한마음인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4_c_11L顯示正義者依一心法有二種云何爲二
첫째는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마음 그대로가 생멸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문은 모두 제각기 일체법을 통틀어 포섭하니 이 이치는 어떠한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614_c_12L一者心眞如門二者生滅門是二種門皆各摠攝一切法此義云何以是二門不相離故
심진여(心眞如)라 함은 곧 한 법계를 크게 총괄한 모습인 법문의 바탕[一法界大總相法門體]이니, 이른바 심성(心性)은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나 만일 마음과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의 모습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모습[言說相]을 여의었으니 이름과 별명의 모습[名字相]을 여의었으며 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습[心緣相]을 여의었으니 끝내 평등하여 변함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는 것으로 오직 한마음[一心]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여(眞如)라 한다.
일체 언설(言說)은 거짓 이름일 뿐이요, 진실이 없으니 다만 망념(妄念)을 따를지언정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017_0614_c_14L心眞如者卽是一法界大摠相法門體謂心性不生不滅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若離妄念則無一切境界之相是故一切法從本已來離言說相離名字相離心緣相畢竟平等無有變異不可破壞唯是一心故名眞如以一切言說假名無實但隨妄念不可得故
017_0615_a_01L진여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상이 없으니, 이른바 언설의 극치일 뿐으로 말로 인해 말을 여의었지만 이 진여의 바탕[體]은 여윌 수가 없다. 일체법이 모두가 다 같이 진(眞)이기 때문이다. 또 세울 수도 없나니 일체법이 모두가 다 같이 여(如)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여라 한다.
017_0614_c_22L言眞如者亦無有相言說之極因言遣言此眞如體無有可遣以一切法悉皆眞故亦無可立以一切法皆同如故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名爲眞如
【문】만일 이런 이치라면 모든 중생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야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가?
017_0615_a_03L問曰如是義者諸衆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
【답】만일 일체법을 비록 설하나 설할 길이 없고 비록 생각하나 생각할 길이 없는 줄 알면 이를 수순한다 하고, 만일 생각마저 여의면 깨달아 들어간다 한다.
017_0615_a_05L答曰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雖念亦無能念可念是名隨順若離於念名爲得入
다시 다음에 진여라 하는 것을 언설(言說)에 의해 분별하면 두 가지 이치[義]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5_a_07L復次如者依言說分別有二種義云何爲
첫째는 여실히 공한 것[如實空]이니 끝까지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히 공하지 않은 것[如實不空]이니 자체에 무루(無漏)이며 본성적인 공덕이 구족하기 때문이다.
017_0615_a_09L一者如實空以能究竟顯實故如實不空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
이른바 여실공(如實空)이라 함은 본래부터 일체 물든 법[染法]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법의 차별된 모습을 여의어 허망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진여의 자성은 유상(有相)도 아니요, 무상(無相)도 아니요, 유상과 무상 모두가 아닌 것도 아니요, 유상과 무상 모두가 함께 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모습[一相]도 아니요, 차별된 모습[異相]도 아니요, 동일한 모습과 차별된 모습이 모두 아닌 것도 아니요, 동일한 모습과 차별된 모습이 모두 함께 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통틀어 말하자면, 일체 중생들인 망심(妄心)이 있으므로 생각마다 분별해서 모두가 서로 응하지 못하는 까닭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일 망심을 여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017_0615_a_11L所言空者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故謂離一切法差別之相以無虛妄心念故當知眞如自性有相非無相非非有相非非無相有無俱相非一相非異相非非一相非非異相非一異俱相乃至摠說一切衆生以有妄心念念分別皆不相應故說爲空若離妄心實無可空
이른바 여실불공(如實空)이라 함은 법의 바탕[體]이 공하여 맛(妄)이 없음을 이미 나타냈기 때문이다. 즉 진심(眞心)이 항상하고 변치 않아 맑은 법[淨法]을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不空)이라 한다. 또한 잡을 상(相)도 없나니, 그 까닭은 망념을 여읜 경계(境界)는 증득한 이라야 어울려 상응하기 때문이다.
017_0615_a_19L所言不空者已顯法體空無妄故卽是眞心常恒不變淨法滿足故名不空亦無有相可取以離念境界唯證相應故
심생멸(心生滅)이라 함은 여래장(如來藏)에 의한 까닭으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게 되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하는 것과 화합해서 같지도 않고[非一] 다르지도 않은[非異] 것을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한다.
017_0615_a_22L心生滅者依如來藏故有生滅心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名爲阿梨耶識
017_0615_b_01L이 식(識)에 두 가지 이치가 있어 능히 일체법을 거두어 모으고[攝受] 일체법을 내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5_b_01L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生一切法云何爲
첫째는 깨달음 쪽인 각의(覺義)요, 둘째는 미혹 쪽인 불각의(不覺義)이다. 이른바 각의라 함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윈 모습은 허공계(虛空界)와 동등하며,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 법계 그대로인 한 모습인지라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 한다.
017_0615_b_03L一者覺義二者不覺義所言覺義謂心體離念離念相者等虛空界無所不遍法界一相卽是如來平等法身依此法身說名本覺
무슨 까닭인가? 본각의 이치는 시각(始覺)의 이치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니 그 까닭은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이치는 본각에 의거한 까닭에 불각(不覺)이 있고, 불각에 의거한 까닭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은 까닭에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017_0615_b_06L何以故覺義者對始覺義說以始覺者卽同本覺始覺義者依本覺故而有不覺依不覺故說有始覺又以覺心源故名究竟覺不覺心源故非究竟覺義云何
범부들은 앞생각에 악(惡)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능히 뒷생각을 그쳐 일어나지 않게 하나니, 비록 각(覺)이라 하지만 이것도 또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017_0615_b_11L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能止後念令其不起雖復名覺卽是不覺故
이승으로서 지혜롭게 관찰하는 이나 초발의(初發意) 보살들은 생각[念]의 다름[異]을 깨달아 생각에 다른 모습[異相]이 없어지니 거친 분별의 집착상[麤分別執着]을 버린 까닭에 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법신 지위의 보살[法身菩薩]들은 생각의 머묾[住]을 깨달아 생각에 머묾의 모습[住相]이 없고, 분별의 거친 생각[分別麤念相]을 여읜 까닭에 수분각(隨分覺)이라 한다. 보살의 지위가 다한 이는 방편을 만족히 하여 한 생각에 상응(相應)하므로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모습을 깨달았으나 처음이란 모습이 없다. 미세한 생각[微細念]을 멀리 여읜 까닭에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항상 머무르니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017_0615_b_13L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等覺於念異念無異相以捨麤分別執著相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於念住念無住相以離分別麤念相名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方便一念相應覺心初起心無初相以遠離微細念故得見心性心卽常住究竟覺
그러므로 수다라(修多羅)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중생이 능히 무념(無念)을 관한다면 부처님의 지혜로 향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
017_0615_b_20L是故修多羅說若有衆生能觀無念者則爲向佛智故
017_0615_c_01L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첫 모습[初相]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첫 모습을 안다고 한 것은 곧 무념(無念)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각(覺)이라 하지 않나니, 본래부터 생각생각에 이어져서 일찍이 생각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무명[無始無明]이라 한다.만일 무념을 얻은 이는 곧 마음의 상(相)인 생(生:생겨남)ㆍ주(住:머묾)ㆍ이(異:달라짐)ㆍ멸(滅:사라짐)들을 아나니, 무념으로써 동등하기 때문이다. 실제에는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나니 네 모습[四相]이 동시에 있는 것이어서 모두가 홀로 서지 못하나니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
017_0615_b_21L又心起者無有初相可知而言知初相者卽謂無念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說無始無明若得無念者則知心相生住異以無念等故而實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
다시 다음에 본각(本覺)이 염(染)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 모습을 내어 본각과 서로 여의지 않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혜가 항상 청절한 상[智淨相]이요, 둘째는 부사의하게 사업을 일으키는 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智淨相)이라 함은 말하자면 법력(法力)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하게 수행해서 방편이 만족해진 까닭에 아뢰야식인 화합식상(和合識相)을 깨뜨리고 상속하는 마음의 상[相續心相]을 멸하여 법신의 지혜의 순수하고 맑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017_0615_c_05L復次本覺隨染分別生二種相與彼本覺不相捨離云何爲二一者智淨相二者不思議業相智淨相者謂依法力熏習如實修行滿足方便故破和合識相滅相續心顯現法身智淳淨故
이 이치는 어떠한가? 일체 마음[心識]의 모습은 모두가 무명(無明)이니 무명의 모습은 본각의 성품[覺性]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무너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큰 바다의 물처럼 바람으로 인해서 파도가 일면 물과 바람이 서로 여의지 않으나 물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니 만일 바람이 그쳐 멸하면 움직이는 모습은 곧 멸하나 습성(濕性)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자성인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이 움직임으로 인해서 마음과 무명이 모두가 형상이 없어 서로 여의지 않으나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니, 만일 무명이 멸하면 상속심(相續心)도 멸하지만 지혜의 성품[智性]은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615_c_10L此義云何一切心識之相皆是無明無明之相不離覺性非可壞非不可壞如大海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水非動性若風止滅動相則滅濕性不壞故如是衆生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心與無明俱無形相不相捨而心非動性若無明滅相續則滅智性不壞故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 함은 지정상(智淨相)에 의하여 온갖 수승하고 묘한 경계를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모습은 항상 끊어짐이 없고 중생들이 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응하도록 갖가지 모습으로 시현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017_0615_c_18L不思議業相者以依智淨能作一切勝妙境界所謂無量功德之相常無斷絕隨衆生根自然相種種而見得利益故
다시 다음에 각의 바탕[體]과 모습[相]에는 네 가지의 큰 이치가 있어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淨鏡]과도 같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017_0615_c_21L復次覺體相者有四種大義與虛空等猶如淨云何爲四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일체 마음과 경계의 모습을 멀리 여의어 어떤 법도 나타날 것이 없는 상태로서 깨달아 비추는[覺照]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017_0615_c_23L一者如實空鏡遠離一切心境界相無法可現非覺照義故
017_0616_a_01L둘째는 원인으로서 훈습하는 경[因熏習鏡]이니, 이른바 여실히 공하지 않은 것[如實不空]이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아서 항상 머무는 일심(一心)이니, 일체 모든 법 그대로가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물든 법[染法]이 물들이지 못하는 바이니, 지혜의 바탕은 동요하지 않되 무루의 법을 구족히 갖추고서 중생들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017_0616_a_01L二者因熏習鏡謂如實不空一切世閒境界悉於中現不出不入不失不常住一心以一切法卽眞實性故又一切染法所不能染智體不動足無漏熏衆生故
셋째는 법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난 경[法出離鏡]이니, 이른바 공하지 않은 법이 번뇌애(煩惱礙)와 지애(智礙)를 벗어나고 화합된 모습[和合相]을 여의어서 순박하고 맑고 밝기 때문이다.
017_0616_a_06L三者法出離鏡不空法出煩惱碍智碍離和合相淨明故
넷째는 연으로서 훈습하는 경[緣熏習鏡]이니, 이른바 법출리(法出離)에 의한 까닭에 두루 중생들의 마음을 비추어서 그들로 하여금 선근을 닦게 하기 위하여 생각대로 시현하기 때문이다.
017_0616_a_08L四者緣熏習鏡謂依法出離遍照衆生之心令修善根隨念示現故
이른바 불각의 이치[不覺義]라 함은 말하자면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므로 불각심(不覺心)이 일어나서 생각[念]이 있게 되었으나 생각은 제 모습이 없는 것이어서 본각(本覺)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미흑한 사람이 바른 방향에 의지하여 미흑을 일으켰으나 만일 바른 방향을 벗어나면 미혹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017_0616_a_10L所言不覺義者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不覺心起而有其念念無自相不離本覺猶如迷人依方故迷若離於方則無有迷
중생도 그러하여서 각(覺)에 의지한 까닭에 미혹했으나 만일 각성(覺性)을 여의면 불각도 없는 것이다. 불각의 망상이 있기 때문에 능히 이름과 이치[名義]를 아는 것을 참된 각[眞覺]이라 하거니와 불각의 마음을 여의면 참된 각이라 할 제 모습도 없다.
017_0616_a_13L衆生亦爾依覺故迷若離覺性則無不覺以有不覺妄想心故能知名義爲說眞覺若離不覺之心則無眞覺自相可說
다시 다음에 불각에 의지한 까닭에 세 가지 상(相)이 생겨나서 그 뿌리인 불각과 서로 응하여 여의지 않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017_0616_a_16L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與彼不覺相應不離云何爲三
첫째는 무명의 활동인 상[無明業相]이니, 불각에 의한 까닭에 마음이 움직인 것을 업이라 하거니와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분별의 주체인 상[能見相]이니 움직임에 의만 까닭에 보거니와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견(見)도 없다. 셋째는 경계인 상[境界相]이니 능견상에 의한 까닭에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거니와 견(見 :能見)을 여의면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017_0616_a_18L一者無明業相以依不覺故心動說名爲業覺則不動則有苦果不離因故二者能見以依動故能見不動則無見三者境界相以依能見故境界妄現離見則無境界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 상이 생기나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017_0616_a_23L以有境界緣故復生六種云何爲六
017_0616_b_01L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경계에 의해서 마음을 일으켜 사량함[愛]과 사랑하지 않음을 분별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智相)에 의하는 까닭에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내고 생각[念]을 일으켜 서로 응함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함에 의하는 까닭에 경계를 반연하고 기억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무르고는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허망한 집착에 의하여 거짓 이름이나 말을 분별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에 의하여 이름을 찾아 집착하고는 갖가지 업을 짓기 때문이요,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에 의해 보를 받아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이 일체 물든 법을 내나니, 모든 물든 법은 모두가 불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017_0616_b_01L一者智相依於境界起分別愛與不愛故二者相續相於智故生其苦樂覺心起念相應不斷故三者執取相依於相續緣念境住持苦樂心起著故四者計名字依於妄執分別假名言相故五者起業相依於名字尋名取著造種種業故六者業繫苦相以依業受果不自在故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다시 다음에 각과 불각에 두 가지의 상이 있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6_b_10L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云何爲二
첫째는 같은 모습[同相]이요, 둘째는 다른 모습[異相]이다.
017_0616_b_11L一者同相二者異相
동상(同相)이라 함은 비유컨대 갖가지 질그릇은 모두가 동일한 미진(微塵)의 성질과 모습인 것같이 무루와 무명의 허깨비[幻] 같은 업은 모두가 다 같은 진여의 성질과 모습이다. 그러므로 수다라 속에서 이런 이치에 의거해 말씀하시되 “일체 중생은 본래부터 상주하여 열반에 들어갔으며 보리의 법은 닦을 수 있는 상(相)도 아니요, 지을 수 있는 상도 아니어서 끝내는 잡을 수도 없고 그 빛깔과 모습을 볼 수도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빛깔과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물듦을 따르는 허깨비 같은 업이 지은 것일 뿐이요, 이 지혜의 빛깔이 공하지 않은 성품인 것과는 같지 않나니, 지혜의 모습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017_0616_b_12L同相者譬如種種瓦器皆同微塵性相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皆同眞如性相是故修多羅中依於此眞如義故說一切衆生本來常住入於涅槃菩提之法非可修非可作相畢竟無得亦無色相可而有見色相者唯是隨染業幻所非是智色不空之性以智相無可見故
이상(異相)이라 함은 갖가지 질그릇이 각각 같지 않은 것같이, 무루와 무명이 물듦을 따라 허깨비같이 차별되며 성품이 물들어서 허깨비같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017_0616_b_20L異相者如種種瓦器各各不同如是無漏無明隨染幻差別性染幻差別故
다시 다음에 생멸하는 인연[生滅因緣]이라 함은 이른바 중생이 마음에 의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017_0616_b_22L復次生滅因緣者所謂衆生依心意識轉故此義云何
017_0616_c_01L아리야식(阿梨耶識)에 의하여 무명이 있어 모르는 결[不覺]에 일어나 능견(能見)이 되고 능현(能現)이 되며, 경계를 취해서 망념을 일으킴이 상속하기 때문에 의(意)라 한다.
017_0616_b_23L以依阿梨耶識說有無明不覺而起能見能現能取境界起念相續故說爲意
이 의(意)에 다섯 가지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017_0616_c_02L此意復有五種名云何爲五
첫째는 업식(業識)이라 이름하니 이른바 무명의 힘에 의해 불각(不覺)의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전식(轉識)이라 이름하니 움직이는 마음에 의해 능동적으로 사물을 분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나타난 모습인 현식(現識)이라 이름하니 이른바 일체경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밝은 거울에 사물의 상(像)이 나타나는 것같이 현식도 그러하여서 다섯 가지 티끌 경계가 마주해서 이르는 대로 즉시 나타나되 전후가 없으니 언제나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항상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017_0616_c_03L一者爲業識謂無明力不覺心動故二者名爲轉識依於動心能見相故三者名爲現識所謂能現一切境界猶如明鏡現於色像現識亦爾隨其五塵對至卽現無有前後以一切時任運而起常在前故
넷째는 지식(智識)이라 이름하니, 이른바 더럽거나 맑은 법을 분별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 이름하니, 생각과 서로 응하여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량없는 세상의 선하거나 악한 업을 잘 유지하여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현재와 미래의 괴롭거나 즐거운 과보를 성숙하게 하되 착오가 없기 때문이며, 현재에 이미 지난 일들을 갑자기 기억케 하거나 미래의 일을 모르는 사이에 허망하게 공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가 헛되고 거짓되어서 오직 마음으로 지은 바라 하노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六塵)의 경계도 없다.
017_0616_c_09L四者名爲智識謂分別染淨法故五者名爲相續識以念相應不斷故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之業令不失故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無差違故能令現在已經之事忽然而念未來之事不覺妄是故三界虛僞唯心所作離心則無六塵境界
이 이치는 어떠한가? 일체법 모두가 마음에서 일어나고 망념에서 생긴 것이므로 모든 분별은 곧 자기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기에 어떤 형상도 가히 얻을 수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모두가 중생의 무명과 망심에 의하여 지탱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마치 거울 속의 상(像)과 같아서 어떤 실체도 얻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이 허망할 따름이니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하기 때문이다.
017_0616_c_16L此義云何以一切法皆從心起妄念而生一切分別卽分別自心心不見心無相可得當知世閒一切境界皆依衆生無明妄心而得住持是故一切法如鏡中像無體可唯心虛妄以心生則種種法生滅則種種法滅故
017_0617_a_01L다시 다음에 의식(意識)이라 함은 곧 상속식(相續識)이니 모든 범부가 집착함이 더욱 깊어져서 아(我)와 아소(我所)를 헤아려 갖가지로 허망하게 집착하여 사물을 따라 반연하여 육진을 분별하므로 의식이라 한다. 또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하며, 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하니 이 식이 견번뇌(見煩惱)와 애번뇌(愛煩惱)에 의하여 자라나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017_0616_c_22L復次言意識者卽此相續識依諸凡夫取著轉深計我我所種種妄執隨事攀緣分別六塵名爲意識亦名分離識又復說名分別事識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일어나는 식(識)은 범부가 능히 알 바가 아니며 이승의 지혜로도 깨달을 바가 아니니, 이른바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으로 발심하고 관찰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했더라도 적은 부분만을 알 뿐이요,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더라도 다 알지는 못하고 오직 부처님만이 끝까지 아신다. 무슨 까닭인가?
017_0617_a_04L依無明熏習所起識者非凡夫能亦非二乘智慧所覺謂依菩薩初正信發心觀察若證法身得少分乃至菩薩究竟地不能知盡唯佛窮了何以故
이 마음은 본래부터 제 성품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게 되어 무명에 물들고는 물든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물든 마음이 있다 해도 역시 항상 변치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치는 부처님만이 능히 아신다. 이른 바 심성은 항상 망념이 없는 까닭에 변치 않는다 하고, 한 법계를 깨닫지 못하므로 마음과 서로 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017_0617_a_08L是心從本已來自性淸淨而有無明爲無明所染有其染心雖有染心而常恒不變是故此義唯佛能知所謂心性常無念故名爲不以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念起名爲無明
물든 마음[染心]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017_0617_a_13L染心者有六種云何爲六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의 해탈과 신상응지(信相應地)에 의하여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에서 방편을 닦고 배운 힘에 의하여 차츰 버리다가 정심지(淨心地)를 얻고서야 끝까지 여의기 때문이요, 셋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하여 차츰 여의다가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 끝까지 여의기 때문이요, 넷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해서 능히 여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에 의하여 능히 여의기 때문이요,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의 마지막 지위에 의하여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서야 능히 여의기 때문이다.
017_0617_a_14L一者執相應染依二乘解脫及信相應地遠離故二者不斷相應染依信相應地修學方便漸漸能捨淨心地究竟離故三者分別智相應依具戒地漸離乃至無相方便地究竟離故四者現色不相應染依色自在地能離故五者能見心不相應依心自在地能離故六者根本業不相應染依菩薩盡地得入如來地能離故
017_0617_b_01L한 법계를 깨닫지 못한다는 이치는 신상응지로부터 관찰하고 배우고 끊어서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서 분(分)에 따라 여의다가 여래의 지위에 이르러서야 능히 끝까지 여의기 때문이다. 서로 호응하는[相應] 이치는 이른바 마음[心]과 생각[念]과 법(法)의 다른 것이 물들고 깨끗함에 의하되 지혜의 모습[知相]과 반연의 모습[緣相]이 같기 때문이요, 서로 호응하지 않는 이치라 함은 마음 그대로가 불각인지라 항상 다름과 차이가 없으니 지혜의 모습과 반연의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017_0617_a_23L不了一法界義者從信相應地觀察學斷入淨心地隨分得離至如來地能究竟離故言相應義者謂心念法異依染淨差別而知相緣相同故不相應義者謂卽心不覺常無別異不同知相緣相故
또 물든 마음인 염심의 이치[染心義]라 함은 번뇌애(煩惱礙)라 이름하니, 능히 진여의 근본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요, 무명(無明)의 이치라 함은 지애(智礙)라 이름하니, 능히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물든 마음에 의하여 능히 보고 능히 나타나며 허망하게 경계를 취하면서 평등한 성품을 어기기 때문이며, 일체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습이 없되 무명 때문에 깨닫지 못해서 망령되이 법과 어기기 때문에 세간의 일체 경계를 수순하면서 갖가지로 아는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017_0617_b_05L又染心義名爲煩惱碍能障眞如根本智故無明義者名爲智碍能障世閒自然業智故此義云何以依染心能見妄取境界違平等性故以一切法常靜無有起相無明不覺妄與法違不能得隨順世閒一切境界種種智故
다시 다음에 생멸의 모습[生滅相]을 분별하건대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7_b_12L復次分別生滅相者有二種云何爲二
첫째는 추(麤)이니,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세(細)이니,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617_b_13L一者與心相應故二者與心不相應故
또 추 중의 추[麤中之麤]는 범부의 경계요, 추중의 세[麤中之細]와 세 중의 추[細中之麤]는 보살의 경계요, 세 중의 세[細中之細]는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있으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 함은 불각의 이치이기 때문이요, 연에 의한다 함은 허망하게 경계를 이루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이 멸하면 연이 멸하나니, 인이 멸하는 까닭에 불상응심이 멸하고 연이 멸하는 까닭에 상응심이 멸하는 것이다.
017_0617_b_14L又麤中之麤凡夫境界麤中之細及細中之麤菩薩境細中之細是佛境界此二種生滅依於無明熏習而有所謂依因依緣依因者不覺義故依緣者妄作境界義故若因滅則緣滅因滅故不相應心滅緣滅故相應心滅
【문】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어찌 상속하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찌 글까지 멸한다고 하는가?
017_0617_b_20L問曰若心滅者云何相續若相續者云何說究竟滅
017_0617_c_01L【답】 이른바 멸한다 함은 오직 마음의 겉모습이 멸하는 것일 뿐, 마음의 실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니, 마치 바람은 물에 의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물이 멸한다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서 의지할 바가 없어지거니와 물이 멸하지 않으므로 바람의 모습이 상속하고 오직 바람이 멸하는 까닭에 움직이는 모습도 따라서 멸할지언정 물이 멸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도 그와 같아서 마음의 바탕을 의지하여 움직이나니, 만일 마음의 바탕이 멸한다면 중생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어지겠지만 바탕이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상속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어리석음이 멸하는 까닭에 마음의 모습도 따라서 멸할지언정 마음이나 지혜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017_0617_b_22L答曰所言滅者唯心相滅心體滅如風依水而有動相若水滅則風相斷絕無所依止以水不滅風相相續唯風滅故動相隨滅非是水滅無明亦爾依心體而動若心體則衆生斷絕無所依止以體不滅心得相續唯癡滅故心相隨滅非心智滅
다시 다음에 네 가지 법이 훈습(熏習)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물든 법과 맑은 법이 일어나기를 끊이지 않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017_0617_c_06L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法淨法起不斷絕云何爲四
첫째는 맑은 법인 정법(淨法)으로서 진여(眞如)라 하고, 둘째는 온갖 물듦의 원인으로서 무명(無明)이라 하고, 셋째는 허망한 마음으로서 업식(業識)이라 하고, 넷째는 허망한 경계로서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017_0617_c_07L一者名爲眞如二者一切染因名爲無三者妄心名爲業識四者妄境界所謂六塵
훈습의 정의는 마치 세간에서 의복에 실로 향기가 없으나 어떤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는 까닭에 향기가 있는 것같이, 이 법 또한 마찬가지로 진여의 맑은 법은 실로 물듦이 없으나 오직 무명으로써 훈습한 까닭에 물든 모습이 있고, 무명의 물든 법은 실로 맑은 업이 없으나 오직 진여로써 훈습하는 까닭에 맑은 작용[淨用]이 있다.
017_0617_c_10L熏習義者如世閒衣服實無於香若人以香而熏習故則有香此亦如是眞如淨法實無於染以無明而熏習故則有染相無明染法實無淨業但以眞如而熏習故則有淨用
어떻게 훈습하여 물든 법이 일어나 끊이지 않는가?
云何熏習起染法不斷
이른바 진여의 법에 의하는 까닭에 무명이 있고, 무명의 물든 법의 인(因)이 있는 까닭에 진여를 훈습하고 훈습했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한 마음이 있으므로 무명을 훈습해서 진여의 법을 알지 못하게 하는 까닭에 불각(不覺)의 생각이 일어나서 허망한 경계[妄境界]를 나타내고, 허망한 경계가 있으므로 물든 법의 연이 되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을 훈습해서 그로 하여금 생각하고 집작하고 갖가지 업을 지어 온갖 몸과 마음의 고통들을 받게 한다.
017_0617_c_15L所謂以依眞如法故有於無明以有無明染法因故卽熏習眞如以熏習故則有妄心以有妄心卽熏習無明不了眞如法故不覺念起現妄境界以有妄境界染法緣故卽熏習妄心令其念著造種種業受於一切身心等苦
이 허망한 경계의 훈습[妄境界熏習]이라는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7_c_21L此妄境界熏習義則有二種云何爲
첫째는 망념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念熏習]이요, 둘째는 집착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取熏習]이다.
017_0617_c_23L一者增長念熏習二者增長取熏
허망한 마음의 훈습[妄心熏習]이라는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妄心熏習義則有二種云何爲二
017_0618_a_01L첫째는 업식이 근본이 되는 훈습[業識根本熏習]이니,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받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분별사식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범부들로 하여금 업에 얽매이는 고통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017_0618_a_01L一者業識根本熏習能受阿羅漢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二者增長分別事識熏習能受凡夫業繫苦故
무명의 훈습[無明熏習]이라는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8_a_04L無明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첫째는 근본훈습(根本熏習)이니 능히 업식(業識)을 성취시키는 뜻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무명에 의해서 일어난 견과 애의 훈습[所起見愛熏習]이니 분별사식을 성취시키는 뜻이기 때문이다.
017_0618_a_05L一者根本熏習以能成就業識義故二者所起見愛熏習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
어떻게 훈습하여 맑은 법이 일어나 끊이지 않는가?
云何熏習起淨法不斷
이른바 진여의 법이 있는 까닭에 능히 무명을 훈습하고,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허망한 마음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기어 구하게 된다. 이렇듯 허망한 마음이 싫어하고 구하는 인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해서 스스로가 자기의 성품을 믿고,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인 것이어서 눈앞의 경계가 없는 것임을 알고는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눈앞의 경계가 없는 것임을 여실히 아는 까닭에 갖가지 방편으로 수순하는 행을 일으켜 취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영원한 겁 동안 훈습하는 힘 때문에 무명이 멸한다. 무명이 멸하는 까닭에 마음의 일어남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도 따라서 멸하고, 인과 연이 모두 멸하는 까닭에 마음의 모습이 모두 다함으로써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룬다.
017_0618_a_08L所謂以有眞如法故能熏習無明以熏習因緣力故則令妄心厭生死苦樂求涅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卽熏習眞如自信己性知心妄動無前境界修遠離法以如實知無前境界故種方便起隨順行不取不念乃至久遠熏習力故無明則滅以無明滅故心無有起以無起故境界隨滅以因緣俱滅故心相皆盡名得涅槃成自然業
망심훈습(妄心熏習)의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妄心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들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해서 자기의 힘에 따라 차츰차츰 위없는 도[無上道]로 향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함이 용맹해서 속히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017_0618_a_18L一者分別事識熏習依諸凡夫二乘人等厭生死苦隨力所能以漸趣向無上道故二者意熏習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
진여훈습(眞如熏習)의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8_a_22L眞如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첫째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요, 둘째는 용훈습(用熏習)이다.
017_0618_a_23L一者自體相熏習用熏習
017_0618_b_01L자체상훈습이라 함은 끝없는 예부터 무루의 법을 갖추고 있으므로 부사의한 업을 골고루 갖추어서 경계의 성품을 일으킨다. 이런 두 가지 이치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힘이 있는 까닭에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바라고 구하여 자기 몸 안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어 발심하고 수행하게 한다.
017_0618_b_01L自體相熏習者從無始世具無漏法備有不思議業作境界之性依此二義恒常熏習以有力故能令衆生厭生死苦樂求涅槃自信己身有眞如法發心修行
【문】만일 그렇다면 일체 중생이 모두가 진여를 가지고 있으니, 똑같이 모두가 훈습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믿음 있는 이와 믿음 없는 이가 있어 한량없이 앞뒤로 차별되는가? 모두가 동시에 스스로 진여의 법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균등하게 열반에 들어야 할 것이다.
017_0618_b_05L問曰如是義者一切衆生悉有眞如等皆熏習云何有信無信無量前後差別皆應一時自知有眞如法勤修方便等入涅槃
【답】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한량없고 끝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그 성품이 차별되어서 두텁고 왔음이 같지 않은 까닭에 항하사[恒沙] 수효를 지나는 번뇌가 무명에 의해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我見)과 애염(愛染)의 번뇌가 무명에 의해 차별을 일으킨다. 이러한 일체 번뇌는 무명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서 앞뒤로 무량하게 차별이 있지만 오직 여래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017_0618_b_09L答曰眞如本一而有無量無邊無明從本已來自性差別厚薄不同故過恒沙等上煩惱依無明起差別我見愛染煩惱依無明起差如是一切煩惱依於無明所起後無量差別唯如來能知故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은 인(因)과 연(緣)이 있으니, 인과 연이 구족하여야 이룰 수 있다. 마치 나무속의 불의 성질[火性]은 곧 불의 직접적 원인[正因]이기는 하나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않으면 저절로 불이 나서 나무를 태울 수 없듯이, 중생도 그러하여서 비록 바른 원인[正因]으로서 훈습해 주는 힘이 있어도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이나 선지식들이 연(緣)이 되어 주는 계기를 만나지 못하면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바깥 연[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에서 맑은 법이 훈습해 주는 힘이 없으면 역시 마침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해서 열반을 즐겨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017_0618_b_14L又諸佛法有因有緣因緣具足乃得成辦木中火性是火正因若無人知不假方便能自燒木無有是處衆生亦爾雖有正因熏習之力若不値遇諸佛善知識等以之爲緣能自斷煩惱入涅槃者則無是處若雖有外緣之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亦不能究竟厭生死苦樂求涅槃
017_0618_c_01L만일 인과 연이 구족한 이, 즉 스스로에게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의 자비로운 가호가 계신다면 그 까닭에 능히 괴로움을 싫어할 마음이 생기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힌다.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해진 까닭에 부처님들과 보살들의 보이심[示]ㆍ가르치심[敎]ㆍ이롭게 하심[利]ㆍ기쁘게 하심[喜]을 만나 비로소 능히 길을 떠나 열반도(涅槃道)로 향하는 것이다.
017_0618_b_22L若因緣具足者所謂自有熏習之力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能起厭苦之心信有涅槃修習善根以修善根成熟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乃能進向涅槃道
용훈습(用熏習)이라 함은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니 이 외연에는 한량없는 이치가 있는데 간략히 두 가지를 말하리라.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8_c_04L用熏習者卽是衆生外緣之力如是外緣有無量義略說二云何爲二
첫째는 차별되게 응해 주는 연[差別緣]이요, 둘째는 평등하게 응해 주는 연[平等緣]이다.
017_0618_c_06L一者差別緣二者平等
차별연이라 함은 이 사람이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들에 의하여 처음 발심하여 도를 구하기 시작함으로부터 부처를 이루기까지 그 사이에 뵙거나 생각하면 혹은 권속이나 부모나 모든 친척이 되어 주며, 흑은 시종[給使]이 되어 주고, 흑은 친한 벗이 되어 주며, 혹은 원수가 되어 주고, 혹은 사섭(四攝)을 일으키며, 나아가서는 일체 지을 수 있는 한량없는 행과 연으로 대비로써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서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보거나 듣는 이가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017_0618_c_07L差別緣者此人依於諸佛菩薩等從初發意始求道時乃至得佛於中若見若念或爲眷屬父母諸親或爲給使或爲知友或爲怨家或起四攝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以起大悲熏習之力能令衆生增長善根若見若聞得利益故
이 연(緣)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8_c_13L此緣有二種云何爲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속히 제도를 얻기 때문이요,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랜만에야 제도를 얻기 때문이다.
017_0618_c_14L一者近緣速得度故二者遠緣遠得度故
이 가깝고 먼 두 가지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8_c_15L是近遠二緣分別復有二云何爲二
첫째는 행을 증장시키는 연[增長行緣]이요, 둘째는 도를 받아들이는 연[修道緣]이다.
017_0618_c_16L一者增長行緣二者道緣
평등연(平等緣)이라 함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모두가 일체 중생 제도키를 원하여 자연스럽게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않되 동체지(同體智)의 힘 때문에 보고 들음에 따라 업 짓는 모습을 나투나니, 이른바 중생이 삼매에 의해서야 비로소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뵙게 되기 때문이다.
017_0618_c_17L平等緣者一切諸佛菩薩皆願度脫一切衆生自然熏習恒常不捨以同體智力故隨應見聞而現作業所謂衆生依於三昧乃得平等見諸佛故
이 체와 용의 훈습[體用熏習]을 분별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8_c_21L此體用熏習分別復有二種何爲二
017_0619_a_01L첫째는 상응하지 못하는 것[未相應]이니, 이른바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 보살들이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하는 믿음의 힘 때문에 수행을 하기는 하나 분별없는 마음과 본체와는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재한 업으로 수행함이 용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미 상응한 것[已相應]이니, 이른바 법신 보살이 분별없는 마음을 얻어 부처님들의 지혜의 응[智用]과 상응하나니, 오직 법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행해서 진여를 훈습라고 무명을 멸하기 때문이다.
017_0618_c_22L一者未相應謂凡夫二乘發意菩薩等以意意識熏習依信力故而能修行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已相應謂法身菩薩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唯依法力自然修熏習眞如滅無明故
다시 다음에 물든 법은 끝없는 예부터 훈습하기를 끊이지 않다가 부처의 경지를 얻기에 이르면 그 뒤에 끊어짐이 있고, 맑은 법의 훈습은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세가 다하기에 이르나니, 이 이치는 어떠한가? 진여의 법이 항살 훈습하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이 멸하고 법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용(用)을 일으켜 훈습하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다.
017_0619_a_05L復次染法從無始已來熏習不斷乃至得佛後則有斷淨法熏習則無有斷盡於未此義云何以眞如法常熏習故心則滅法身顯現起用熏習故無有斷
다시 다음에 진여자체상(眞如自體相)이라 함은 일체 범부ㆍ성문ㆍ연각ㆍ보살과 모든 부처님들은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는 것이다. 앞 시각에 생겨난 것도 아니고 뒤 시각에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끝내 항상한 것이다. 본래부터 자기 성품에 일체 공덕을 만족한 것이니 이른바 자기 본체에 큰 지혜가 빛나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이치이기 때문이며, 자성의 청정한 마음인 이치이기 때문이며, 항상함[常]ㆍ즐거움[樂]ㆍ자재함[我]ㆍ맑음[淨]의 이치이기 때문이며, 청량하여 변치 않고 자재한 이치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항하사 수보다 더 많은 여의지 않고, 끊이지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부사의한 불법을 구족하였고, 나아가서는 만족해서 모자라는 것이 없는 이치이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는 여래 법신(如來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017_0619_a_10L復次眞如自體相者一切凡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非前際生非後際滅畢竟常恒從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眞實識知義故自性淸淨心義故樂我淨義故淸涼不變自在義故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思議佛法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名爲如來藏亦名如來法身
【문】 위에서 말하기를 진여는 그 본체가 평등하여 일체 모습을 여의었다 하였거늘, 어찌하여 다시 말하기를 본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하는가?
017_0619_a_19L問曰上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
【답】 비록 실제로 이러한 갖가지 공덕의 이치는 있으나 차별된 모습이 없기에 동등한 한맛[一味]으로서 오직 하나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는 어떠한가? 분별이 없으며, 분별의 모습도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이 없다.
017_0619_a_21L答曰實有此諸功德義而無差別之相同一味唯一眞如此義云何以無分別離分別相是故無二
017_0619_b_01L다시 무슨 이치에 의하여 차별을 말하는가? 업식(業識)에 의하여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017_0619_b_01L復以何義得說差別以依業識生滅相示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은 본래부터 마음뿐[唯心]이어서 실제에는 생각이 없으나 허망한 마음이 있어서 모르는 결에 생각이 일어나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이라 말하거니와, 심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큰 지혜의 광명[大智慧光明]의 이치이기 때문이며, 마음에 견(見:본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게 되고 심성이 견을 여의면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기 때문이며,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고, 자재함이 없는 것이며 항상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아(我)도 아니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뜨겁고 번거롭고 변하고 쇠퇴해서 자재하지 못하며 나아가서는 항하사 수보다 많은 허망한 이치가 있게 된다.
017_0619_b_02L此云何以一切法本來唯心實無於念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無心性不起卽是大智慧光明義故若心起見則有不見之相心性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若心有動非眞識知無有自性非常非樂非我非淨熱惱衰變則不自在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
이런 이치에 맞서기 때문에 심성에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사 수보다 많은 모든 맑은 공덕의 모습과 이치가 드러난다. 만일 마음에 일어남이 있고서 다시 눈앞의 법을 생각할 것이 있다고 여긴다면 모자라는 바가 있거니와 이러한 맑은 법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일심(一心)인지라 다시 더 생각할 바가 없다. 그러므로 만족한 것을 이름하여 법신여래의 장[法身如來之藏]이라 한다.
017_0619_b_10L對此義故心性無動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若心有起更見前法可念者則有所少如是淨法無量功德卽是一心更無所念是故滿足名爲法身如來之藏
다시 다음에 진여의 용[眞如用]이라 함은 이른바 모든 불ㆍ여래께서 본시 인행지(因行地)에 계실 적에 대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으시고 중생들을 거두어 교화하시려고 큰 서원을 세우셨다. 그리고는 온 중생계를 다 제도하시려 하되 겁의 수를 한정하시지도 않고 미래제(未來際)가 다하여 일체 중생을 취하시는 것이 자기의 몸과 같이 하시므로 중생이란 상도 칠하시지 않는 것이다.
017_0619_b_15L復次眞如用者所謂諸佛如來本在因地發大慈悲修諸波羅蜜化衆生立大誓願盡欲度脫等衆生亦不限劫數盡於未來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而亦不取衆生相
이 이치는 어떠한가?
017_0619_b_19L以何義
이른바 일체 중생과 자기의 몸이 진여 위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여실히 아시기 때문이다.
017_0619_b_20L謂如實知一切衆生及與己身眞如平等無別異故
이러한 큰 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거해 없애고 본래의 법신에 자연스럽게 부사의한 업의 갖가지 용(用)이 있어 진여와 동등해서 일체 처소에 두루했음을 보되 또한 용의 모습[用相]에 집착하지도 않으신다. 무슨 까닭인가?
017_0619_b_21L以有如是大方便智除滅無明見本法身自然而有不思議業種種之用卽與眞如等遍一切處又亦無有用相可得何以
017_0619_c_01L이른바 모든 불ㆍ여래는 오직 법신이며 지혜 모습의 몸[智相之身]인지라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세속제(世俗諦)의 경계가 없고 모든 동작[施作]을 여의어 중생이 보고 들으면 이익을 얻는 쪽을 따르기 때문에 웅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619_c_02L謂諸佛如來唯是法身智相之身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離於施作但隨衆生見聞得益故說爲用
이 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017_0619_c_04L用有二種云何爲二
첫째는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바를 이름하여 응신(應身)이라 하나니, 전식(轉識)이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외부로부터 온다고 여기고 색의 갈피[色分齊]를 취하나니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업식에 의하는 모든 보살들이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구경지(究竟地)에 이르기까지의 마음으로 보는 바를 보신(報身)이라 하나니, 몸에는 무량한 색이 있고 색에는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는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도 한량없고 갖가지 장엄이 있어서 어디에나 시현하되 가없어서 끝까지 다할 수가 없다. 분제(分齊)의 모습을 여의어서 감응하시는 바에 따라 항상 능히 제자리에 머무르되 훼손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가 모든 바라밀 등의 무루의 행과 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바이니, 무량한 즐거운 모습을 구족했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 하는 것이다.
017_0619_c_05L一者依分別事凡夫二乘心所見者名爲應身不知轉識現故見從外來取色分齊不能盡知故二者依於業識謂諸菩薩從初發意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名爲報身身有無量色色有無量相相有無量好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隨所示現卽無有邊不可窮盡離分齊相隨其所應常能住持不毀不失如是功德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及不思議熏之所成具足無量樂相故說爲報身
또 범부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추색(麤色)이니, 육도(六道) 중생들의 보는 바가 제각기 같지 않음에 따라 갖가지로 다른 종류의 즐겁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한다.
017_0619_c_16L又爲凡夫所見者是其麤色隨於六道各見不同種種異類非受樂相故說爲應身
017_0620_a_01L다시 다음에 초발의 보살들이 보는 바는 진여의 법을 깊이 믿음으로써 조금만 보나니 저 색과 상의 장엄 등의 일은 가고 옴이 없고 분제(分齊)를 여의었으므로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났을 뿐, 진여를 여의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은 스스로 분별하나니, 아직 법신의 지위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면 보는 바가 더욱 미묘하여 그 용이 더욱 수승할 것이요, 보살의 지위가 다한 데 이르면 보는 다가 궁극에 이를 것이요, 만일 업식을 여의면 본다는 모습[見相]이 없으리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쪽저쪽의 색상으로는 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017_0619_c_19L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深信眞如法故少分而見知彼色相莊嚴等事無來無去離於分齊唯依心現不離眞如然此菩薩猶自分別以未入法身位故若得淨心所見微妙其用轉勝乃至菩薩地盡見之究若離業識則無見相以諸佛法身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문】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내는가?
017_0620_a_03L問曰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云何能現色相
【답】 이 법신은 곧 색의 바탕이기 때문에 능히 색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닌지라 색의 성품이 곧 지혜인 까닭에 색의 본체가 형상이 없음을 지혜의 몸[智身]이라 하고, 지혜의 성품이 곧 색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했다 한다.
017_0620_a_05L答曰卽此法身是色體能現於色所謂從本已來色心不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說名智以智性卽色故說名法身遍一切
나타난 색도 분제(分齊)가 없어서 마음을 따라 시방 세계에서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報身)과 무량한 장엄으로 나투어 보이되 각기 차별되어 모두가 분제가 없으므로 서로 방해하지도 않는다. 이는 마음이나 식의 분별로는 알 바가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용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017_0620_a_09L所現之色無有分齊隨心能示十方世界無量菩薩無量報身無量莊嚴各各差別皆無分齊而不相妨此非心識分別能知以眞如自在用義故
다시 다음에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가는 법을 드러내어 보이리니,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과 마음을 추구하는 일이다. 육진(六塵)의 경계는 끝내 생각이 없고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에 구하여도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미혹한 까닭에 동(東)을 서(西)라고 해도 실제로 본래의 방위는 바뀌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무명으로 미흑한 까닭에 마음을 생각이라 여기나 실제로 마음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일 관찰해서 마음에 생각이 없는 줄 깨달으면 곧 수순하여 진여의 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017_0620_a_13L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六塵境界畢竟無念以心無形相十方求之終不可得如人迷故謂東爲西方實不轉衆生亦爾無明迷故謂心爲念心實不動若能觀察知心無念卽得隨順入眞如門故
대치사집(對治邪執)이라 함은 모든 삿된 집착은 모두가 ‘나’라는 소견[我見]에 의한 것이니, 만일 ‘나’를 여의면 삿된 집착이 없어진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아견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요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017_0620_a_19L對治邪執者切邪執皆依我見若離於我則無邪是我見有二種云何爲二一者我見二者法我見
인아견이라 함은 모든 범부에 의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하나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017_0620_a_22L人我見者依諸凡夫說有五種云何爲五
017_0620_b_01L첫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여래의 법신은 필경에 적막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 한 것을 듣고도 집착을 깨뜨려 주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허공이 곧 여래의 성품이라 하나니, 어떻게 대치(對治:물리침)할 것인가?
017_0620_a_23L一者聞修多羅說如來法身畢竟寂寞猶如虛空以不知爲破著故卽謂虛空是如來云何對治
허공의 모습은 허망한 법인지라 본체가 없어서 실답지 않으나 색을 상대하는 까닭에 이러한 볼 수 있는 모습[可見相]이 있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한다. 그리하여 일체 색법은 본래 마음인지라 실로 바깥 색이 없고 만일 색이 없다면 허공의 모습도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체 경계는 오직 마음뿐이건마는 허망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일 마음의 허망한 움직임을 여의면 오직 하나의 참마음뿐이어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이를 여래의 광대한 본성지혜[性智]의 마지막 이치[究竟義]라 이르나니, 허공의 모습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017_0620_b_03L明虛空相是其妄法無不實以對色故有是可見相令心生滅以一切色法本來是心實無外若無色者則無虛空之相所謂一切境界唯心妄起故有若心離於妄動則一切境界滅唯一眞心無所不此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如虛空相故
둘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세간의 모든 법이 끝내는 바탕이 공하며, 나아가 열반이나 진여의 법까지도 역시 끝내 공이니, 본래부터 저절로 공하여 일체 상을 여의었다” 한 것을 듣고도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여와 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뿐이라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진여ㆍ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않음을 밝히니, 무량만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017_0620_b_10L二者聞修多羅說世閒諸法畢竟體空乃至涅槃眞如之法亦畢竟空從本已來自空離一切相以不知爲破著故卽謂眞如涅槃之性唯是其空云何對治明眞如法身自體不空具足無量性功德故
셋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여래장(如來藏)은 늘고 줄어듦이 없어서 자체에 일체 공덕이 되는 법을 갖추고 있다” 한 것을 듣고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장에는 색ㆍ심 등 모든 법의 제 모습이 차별되게 존재한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직 진여에 의해 설한 까닭이며, 생멸의 물든 이치를 인하여 시현(示現)해서 차별되었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017_0620_b_15L三者聞修多羅說如來之藏無有增減備一切功德之法以不解故卽謂如來之藏有色心法自相差別云何對以唯依眞如義說故因生滅染義示現說差別故
넷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일체 세간의 생사와 물든 법이 모두가 여래장에 의해서 있는 것이므로 일체 모든 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 한 것을 듣고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이 구족해 있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017_0620_b_20L四者聞修多羅說一切世間生死染法皆依如來藏而有一切諸法不離眞如以不解故謂如來藏自體具有一切世閒生死等法云何對治
017_0620_c_01L여래장이 본래부터 항하사 수보다 많은 등의 모든 맑은 공덕이 있어 여의지도 않고 끊이지도 않아서 진여와 다르지 않은 이치만이 있기 때문이며, 항하사 수보다 많은 등의 모든 번뇌와 물든 법은 오직 허망으로 있는지라 성품이 본래 없는 것이어서 끝없는 옛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하지 못한 까닭임을 밝힌다. 만일 여래장의 본체에 허망한 법이 있는데 그를 증득해 알면 영원히 쉬게 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017_0620_c_01L以如來藏從本已來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不離不斷不異眞如義故以過恒沙等煩惱染法是妄有性自本無從無始世來未曾與如來藏相應故若如來藏體有妄而使證會永息妄者則無是處故
다섯째는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여래장에 의거한 까닭에 생사가 있고, 여래장에 의거한 까닭에 열반을 얻는다” 한 것을 듣고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중생이 시초[始]가 있다 하고, 시초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여래가 얻은 열반도 끝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여래장이 전제(前際)가 없는 까닭에 무명도 또한 시초가 없다고 말한다. 만일 삼계 밖에 다시 어떤 중생에게 비로소 일어남이 있다면 이는 곧 외도(外道) 경전의 말일 것이다. 또 여래장에는 후제(後際)가 없으니 모든 부처님께서 얻은 열반도 상응하여 후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017_0620_c_06L五者聞修多羅說依如來藏故有生依如來藏故得涅槃以不解故衆生有始以見始故復謂如來所得涅槃有其終盡還作衆生云何對治以如來藏無前際故無明之相亦無有始若說三界外更有衆生始起者卽是外道經說又如來藏無有後際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則無後際
법아견(法我見)이라 함은 둔근(鈍根)인 이승에 의한 까닭에 여래께서 인무아(人無我)만 설해 주셨으나, 그 설이 완벽한 구경은 아니므로 오음(陰)의 생멸하는 법이 있다고 여기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허망하게 열반을 취하려 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오음법은 제 성품이 생하지도 않고 멸함도 없어서 본래부터 열반이기 때문이다.
017_0620_c_15L法我見者依二乘鈍根故如來但爲說人無我以說不究竟見有五陰生滅之法怖畏生死妄取涅槃云何對治以五陰法自性不生則無有滅本來涅槃故
017_0621_a_01L다시 다음에 끝까지 허망한 집착을 여읜다 함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물든 법과 맑은 법이 모두가 서로 기다렸을 뿐 설할 만한 제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본래부터 색도 심도 아니며, 지혜도 식도 아니며, 있음도 없음도 아니어서 끝내 설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언설(言說)이 있는 까닭은 마땅히 여래의 선교방편으로 언설을 빌려 중생을 인도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본뜻은 모두가 다 상념을 여의고 진여에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해서 진실한 지혜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017_0620_c_19L復次究竟離妄執者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無有自相可說是故一切法從本已來非色非非智非識非有非無畢竟不可說而有言說者當知如來善巧方便假以言說引導衆生其旨趣者皆爲離念歸於眞如以念一切法令心生滅不入實智故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라 함은 이른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도에 일체 보살이 발심 수행해서 향해 나아가는 이치이다. 간략히 말하면 발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017_0621_a_03L分別發趣道相者一切諸佛所證之道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略說發心有三種何爲三
첫째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셋째는 증발심(證發心)이다.
017_0621_a_06L一者信成就發心二者解行發心三者證發心
신성취발심이라 함은 어떤 사람이 어떤 행을 닦아야 믿음[信]이 성취되어 능히 발심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른바 부정취(不定聚) 중생이 선근을 훈습한 힘이 있음을 의하는 까닭에 업의 과보를 믿어 능히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수행하여 일만 겁을 지나면 신심이 성취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그들로 하여금 발심케 하는 것이다. 혹은 대비심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바른 법이 멸하고자 함을 인하여 법을 보호하려는 인연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
017_0621_a_07L信成就發心者何等人修何等行得信成就堪能發所謂依不定聚衆生有熏習善根力故信業果報能起十善厭生死苦欲求無上菩提得値諸佛親承供養修行信心經一萬劫信心成就故佛菩薩敎令發心或以大悲故能自發心或因正法欲滅以護法因緣自發心
이와 같이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이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서 끝내는 물러나지 않게 되나니, 이를 일러 여래의 종자 속에 머물러서 바른 인[正因]에 서로 응한다 한다.
017_0621_a_15L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正定聚畢竟不退名住如來種中正因相應
017_0621_b_01L만일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약하여 여러 겁 이래로 번뇌가 두터우면 비록 부처님을 만나서 공양을 올린다 해도 겨우 인간과 하늘의 종자를 일으키거나, 혹은 이승의 종자를 일으키면 설사 대승을 구하는 이가 있더라도 근기가 안정되지 않나니, 혹 전진해 나아가고 흑 후퇴하기도 하는 것이다. 혹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 해도 일만 겁을 지나기도 전에 도중에서 인연을 만나 발심하는 이도 있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색상(色相)을 보고 발심하는 이도 있고, 혹은 스님들에게 공양 올림을 인하여 발심하는 이도 있으며, 흑은 이승의 가르침을 인하여 발심하는 이도 있고, 혹은 남에게 배워서 발심하는 이도 있으나, 이러한 발심들은 모두가 안정되지 못한 까닭에 나쁜 인연을 만나면 간혹 물러나서 이승의 경지에 떨어지기도 한다.
017_0621_a_17L若有衆生善根微少久遠已來煩惱深厚雖値於佛亦得供養起人天種子或起二乘種子設有求大乘者根則不定若進若退或有供養諸佛未經一萬劫於中遇緣亦有發心所謂見佛色相而發其心或因供養衆僧而發其心或因二乘之人敎令發心或學他發心如是等發心悉皆不定遇惡因緣或便退失墮二乘地
다시 다음에 신성취발심이라 함은 어떤 마음을 일으키는가? 간략히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017_0621_b_03L復次信成就發心者發何等略說有三種云何爲三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의 법을 똑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일체 모든 선행을 즐기어 닦기 때문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건져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017_0621_b_04L一者直心正念眞如法故二者深心樂集一切諸善行故三者大悲心欲拔一切衆生苦故
【문】위에서 말하기를 법계가 한 모습이요, 부처의 본체는 둘이 없다 하였거늘 어찌하여 진여만을 생각케 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고 배우는 것에 의해야 한다 하는가?
017_0621_b_07L問曰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何故不唯念眞如復假求學諸善之行
【답】 비유하건대 큰 마니(摩尼)의 바탕이 밝고 맑으나 광석의 티가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본성을 알고는 있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로 갈고 닦지 않으면 마침내 밝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의 진여법도 바탕과 성품은 비고 맑으나 한량없는 번뇌와 때가 있을 때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인 줄은 알고 있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로 훈수(熏修)하지 않으면 그 또한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때가 한량이 없어 온갖 법에 두루하므로 일체 선행을 닦아서 대치해야 되기 때문이며,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 선법을 수행하면 자연히 진여의 법에 돌아가 수순하기 때문이다.
017_0621_b_09L答曰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而有鑛穢之垢若人雖念寶性不以方便種種磨治終無得淨如是衆生眞如之法體性空淨而有無量煩惱染垢若人雖念眞如不以方便種種熏修亦無得淨以垢無量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以爲對治若人修行一切善法自然歸順眞如法故
방편(方便)에 대하여 간략히 말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017_0621_b_16L略說方便有四種云何爲四
첫째는 모든 행의 근본이 되는 방편[行根本方便]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제 성품이 생함이 없어서 망견을 여읜 것으로 관하고 생사에 머무르지 않으며 일체법은 인연이 화합해서 업과(業果)가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관하고 대비를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기 위하여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법성은 원래 머묾이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017_0621_b_17L一者根本方便謂觀一切法自性無生於妄見不住生死觀一切法因緣和業果不失起於大悲修諸福德化衆生不住涅槃以隨順法性無住
둘째는 악을 그치게 하는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니, 이른바 부끄러움을 알고 허물을 뉘우쳐서 능히 일체 악한 법을 그치게 해 더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법성은 모든 허물을 여의었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017_0621_b_22L二者能止方便謂慚愧悔過能止一切惡法不令增長以隨順法性離諸過故
017_0621_c_01L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자라나게 하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니, 이른바 삼보께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고 수희(隨喜)하며, 모든 부처님께 권하고 청하는 일이다. 삼보께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순박하고 두터운 까닭에 믿음이 늘어나면 비로소 능히 위없는 도에 뜻을 두어 구하게 된다. 또 불ㆍ법ㆍ승의 힘으로 가호하심을 받기 때문에 능히 업장을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나니, 법성이 어리석은 장애를 여의었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017_0621_c_01L三者發起善根增長方便勤供養禮拜三寶讚歎隨喜勸請諸以愛敬三寶淳厚心故信得增長乃能志求無上之道又因佛法僧力所護故能消業障善根不退以隨順法性離癡障故
넷째는 큰 서원이 평등한 방편[大願平等方便]이니, 이른바 원을 세우되 “미래세상이 다하기까지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고 제도하여 그들 모두로 하여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리라” 하는 것이니, 법성의 끊임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 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며 둘이 없으니 너[彼]와 나[此]를 생각지 않으면 끝내 적멸하기 때문이다.
017_0621_c_06L四者大願平等方便所謂發願盡於未來化度一切衆生使無有餘皆令究竟無餘涅槃以隨順法性無斷絕故法性廣大遍一切衆生平等無二不念彼此究竟寂滅
보살이 이렇게 발심하기 때문에 조금만큼의 법신을 볼 수 있으며, 법신을 본 까닭에 그 원력에 따라 능히 팔상(八相)을 나투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에서 물러나고,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며, 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성도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법신이라 이름하지 않나니, 그 까닭은 과거 무량한 세상에서부터 유루의 업을 끊어 다하지 못한 까닭에 태어나는 곳마다 약간의 괴로움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에 얽매인 괴로움[業繫苦]은 아니니, 큰 서원이 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017_0621_c_11L菩薩發是心故則得少分見於法以見法身故隨其願力能現八種利益衆生所謂從兜率天退入胎出胎出家成道轉法輪入於涅槃然是菩薩未名法身以其過去無量世來有漏之業未能決斷隨其所生與微苦相應亦非業繫以有大願自在力故
수다라 가운데에서 간혹 말씀하시기를 “악취(惡趣)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고 한 것은 실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초발심 보살이 바른 지위에 들지 못하고 게으른 이들이 겁을 내기 때문에 용맹해지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또 이 보살들이 한 번 발심한 뒤에는 겁내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 끝내 이승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한량없는 아승기겁에 어려운 행을 부지런히 행하여야 비로소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듣더라도 겁내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원래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017_0621_c_18L如修多羅中或說有退墮惡趣者非其實退但爲初學菩薩未入正位而懈怠者恐怖令使勇猛故是菩薩一發心後遠離怯弱畢竟不畏墮二乘地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勤苦難行乃得涅槃亦不怯弱信知一切法從本已來自涅槃故
017_0622_a_01L해행발심(解行發心)이라 함은 더욱 수승한 경지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일으킨 뒤로 첫째 아승기겁이 차려고 하는 까닭에 진여의 법 안에서 깊은 견해가 현전하고 수행한 바가 상(相)을 여의게 되나니, 법성 자체에는 간탐(慳貪)이 없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수행한다.
017_0622_a_01L行發心者當知轉勝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於眞如法中深解現前所修離相以知法性體無慳貪故隨順修行檀波羅蜜
법성에는 물듦이 없고 오욕(五欲)의 허물을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에는 괴로움이 없고 성냄과 번뇌를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에는 몸과 마음의 모습이 없고 게으름을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비리야바리밀(毘梨耶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본체에 어지러움이 없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선바라밀(禪波羅蜜)을 수행한다. 법성은 본체가 밝아서 무명을 여의었음을 아는 까닭에 이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행한다.
017_0622_a_06L以知法性無染離五欲過故隨順修行尸波羅蜜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隨順修行羼提波羅蜜知法性無身心相離懈怠故隨順修行毘梨耶波羅蜜以知法性常定無亂故隨順修行禪波羅蜜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隨順修行般若波羅蜜
증발심(證發心)이라 함은 정심지(淨心地:第一地)로부터 보살의 구경지(究竟地:第十地)에 이르기까지에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함이니,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라 하나 이를 증득하는 이에게는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의 지혜일뿐이므로 법신이라 한다.
017_0622_a_13L證發心者從淨心地乃至菩薩究竟地證何境界所謂眞如以依轉識說爲境界而此證者無有境界眞如智名爲法身
이 보살이 한 생각 사이에 능히 시방의 끝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들께 공양하고 법륜 굴리기를 청하되 오직 중생을 깨우치고 인도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함일 뿐이요, 문자에 의하지 않는다.
017_0622_a_16L是菩薩於一念頃能至十方無餘世界供養諸佛請轉法輪唯爲開導利益衆生不依文字
017_0622_b_01L흑 지위를 초월하여 속히 정각을 이루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겁 많고 나약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요, 혹 말하기를 “나는 무량한 아승기겁을 지나고서야 불도를 이루었다”고 함은 게으른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능히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시현함이 불가사의하나 실제에 있어 보살은 종자 성품[種性]과 근(根)이 동등하고 발심이 동등하며 증득한 내용도 동등하여 그 이상 넘어서는 법이 없다. 모든 보살은 모두 삼 아승기겁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의 세계는 동일하지 않아서 보는 이와 듣는 이의 근기ㆍ욕망ㆍ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행하는 곳에 차별이 있는 것같이 시현하신다.
017_0622_a_18L或示超地速成正覺以爲怯弱衆生或說我於無量阿僧祇劫當成佛以爲懈慢衆生故能示如是無數方便不可思議而實菩薩種性根等發心則等所證亦等無有超過之法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隨衆生世界不同所見所聞根欲性故示所行亦有差別
또 이 보살이 발심하는 모습에는 세 종류의 미세한 마음의 모습이 있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017_0622_b_03L又是菩薩發心相者有三種心微細之相云何爲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스럽게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이다.
017_0622_b_05L一者眞心無分別故二者方便心自然遍行利益衆生故三者業識心細起滅故
또 이 보살의 공덕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일체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시현한다. 이른바 한 생각에 서로 응하는 지혜[一念相應慧곳]로써 무명을 활짝 끊어 다한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나니, 자연스럽게 부사의한 업이 생겨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017_0622_b_07L又是菩薩功德成滿於色究竟處示一切世閒最高大身謂以一念相應慧無明頓盡名一切種智自然而有不思議業能現十方利益衆生
【문】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고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고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마음씨의 차별도 무변하다. 이와 같이 경계는 그 분제를 가릴 수 없어 알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만일 무명이 끊어지면 마음[心想]도 없어질 것이거늘 어찌 능히 분명히 분별할 수 있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는가?
017_0622_b_11L問曰虛空無邊故世界無邊世界無邊故衆生無邊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如是境界不可分齊難知難解若無明斷無有心想云何能了名一切種智
【답】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一心)인지라 생각을 여의었건만 중생이 허망하게 경계를 보는 까닭에 마음에 분제(分齊)가 있게 되었고, 허망하게 생각을 일으켜서 법성에 부합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능히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불ㆍ여래께서는 보는 상[見想]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으시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모든 법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자체가 일체 허망한 법을 훤하게 비추어 큰 지혜의 작용이 생겨서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알아들을 만한 능력에 따라 갖가지 법과 이치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한다.
017_0622_b_15L答曰一切境界本來一心離於想念以衆生妄見境界故心有分齊以妄起想念不稱法性故不能決了諸佛如來離於見想無所不遍心眞實故卽是諸法之性自體顯照一切妄法有大智用無量方便隨諸衆生所應得解皆能開示種種法義是故得名一切種智
017_0622_c_01L【문】모든 부처님께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능히 온갖 곳에 나타나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면 만약 일체 중생은 그 몸을 보거나 신통 변화를 보거나 그 말씀을 듣고서 이익을 얻지 못하는 이가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세간에는 말은 무리가 보지 못하는가?
017_0622_b_22L又問曰若諸佛有自然業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一切衆生若見其身若睹神變若聞其說無不得利云何世閒多不能見
【답】모든 불ㆍ여래의 법신은 평등하여 일체 처소에 두루하시지만 작의(作意)가 없는 까닭에 자연이라 말할 뿐이며 중생의 마음에 의해 나타날 뿐이다. 중생의 마음이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티가 있으면 그림자가 나타나지 못하는 것같이 중생도 마음에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7_0622_c_03L答曰諸佛如來法身平等遍一切處無有作意故而說自然但依衆生心現衆生心者猶如於鏡鏡若有垢色像不現如是衆生心若有垢法身不現故
이미 해석분을 설했으니 다음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하겠다.
017_0622_c_07L已說解釋分次說修行信心分
여기서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에 의하기 때문에 신심(信心)을 수행하는 법을 설한다.
017_0622_c_08L是中依未入正定衆生故說修行信
어떤 것들이 신심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何等信心云何修行
간략히 신심을 설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017_0622_c_10L略說信心有四種云何爲四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信根本]이니, 이른바 진여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부처님께 무량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信佛有無量功德]이니 이른바 항상 친히 가까이할 것을 생각하여 공양하고 공경하며,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를 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것[信法有大利益]이니, 이른바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승가가 능히 바르게 수행해서 나와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믿는 것[信僧能正修行]이니 항상 즐거이 모든 보살들을 친히 가까이해서 여실한 행을 배우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017_0622_c_11L一者信根本所謂樂念眞如法故二者信佛有無量功德常念親近供養恭敬發起善根願求一切智故三者信法有大利益常念修行諸波羅蜜故四者信僧能正修行自利利他常樂親近諸菩薩衆學如實行故
수행에는 다섯 문(門)이 있어서 능히 믿음을 성취하나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017_0622_c_17L修行有五門能成此信云何爲五
첫째는 시문(施門)이요, 둘째는 계문(戒門)이요, 셋째는 인문(忍門)이요, 넷째는 진문(進門)이요, 다섯째는 지 관문(止觀門)이다.
017_0622_c_18L一者施門二者戒門三者忍門四者進門五者止觀門
어떻게 시문을 수행하는가?
017_0622_c_19L云何修行施門
017_0623_a_01L만일 일체 중생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거든 능력에 따라 재물을 베풀어 주어 스스로의 간탐을 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며, 만일 액난과 공포에 시달림을 당한 이를 보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무외(無畏)를 베풀어 주며, 만일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아는 힘에 따라 방편으로 설해 주되 명리(名利)나 공경을 탐내지 않고 오직 자리이타(自利利他)만을 생각하나니,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017_0622_c_20L若見一切來求索者所有財物隨力施與以自捨慳貪令彼歡若見厄難恐怖危逼隨己堪任施與無畏若有衆生來求法者隨己能解方便爲說不應貪求名利恭敬念自利利他迴向菩提故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017_0623_a_02L云何修行戒門
이른바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어(妄語)ㆍ기어(綺語)를 범하지 않으며, 탐(貪)ㆍ질(嫉)ㆍ기(欺)ㆍ사(詐)ㆍ첨(諂)ㆍ곡(曲)ㆍ진(瞋)ㆍ에(恚)ㆍ사견(邪見)을 여의는 것이다. 만일 출가한 이라면 번뇌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소욕지족(少欲知足)ㆍ두타(頭陀) 등의 행을 닦아야 한다. 나아가 작은 죄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어 참회하고 고치고 뉘우쳐서 여래의 계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남의 비방과 혐의도 잘 막아야 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망령되이 죄와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017_0623_a_03L所謂不殺不盜不婬不兩舌惡口不妄言不綺語遠離貪嫉欺詐諂曲瞋恚邪見若出家者爲折伏煩惱故亦應遠離憒鬧常處寂靜修習少欲知足頭陁等行乃至小罪心生怖畏慚愧改悔不得輕於如來所制禁戒當護譏嫌不令衆生妄起過罪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云何修行忍門
이른바 남이 주는 고통을 잘 참아서 보복할 마음을 품지 않으며, 또 이(利)ㆍ쇠(衰)ㆍ훼(毁)ㆍ예(譽)ㆍ칭(稱)ㆍ(譏)ㆍ고(苦)ㆍ낙(樂) 등의 법도 참기 때문이다.
017_0623_a_10L所謂應忍他人之心不懷報亦當忍於利樂等法故
어떻게 진문(進門)을 닦는가?
云何修行進門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뜻 세움이 굳고 강하여 겁내는 마음을 멀리 여의며, 과거 끝없는 옛부터 온갖 몸과 마음의 고통을 헛되이 받아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서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으로 고통을 여읜다.
017_0623_a_12L所謂於諸善事心不懈退立志堅强遠離怯弱當念過去久遠已來虛受一切身心大苦無有利益是故應勤修諸功德自利利他速離衆苦
다시 또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을 수행한다 때도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은 까닭에 삿된 마(魔)와 모든 귀신에게 시달림을 받거나 흑은 세간의 업무 때문에 갖가지로 끄달리거나 혹은 병고에 시달리거나 하는 등 이러한 갖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용맹하게 정진하되 밤ㆍ낮 여섯 때로 모든 부처님에 예배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권청(勸請)하고 수희(隨喜)하여 보리에 회향(廻向)하되 항상 쉬지 않아야 한다. 모든 장애를 면하고 선근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017_0623_a_16L復次人雖修行信心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爲魔邪諸鬼之所惱亂或爲世閒事務種種牽纏或爲病苦所惱有如是等衆多障碍是故應當勇猛精勤晝夜六時禮拜諸佛誠心懺悔勸請隨喜迴向菩提常不休廢得免諸障善根增長故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017_0623_a_23L云何修行止觀門
017_0623_b_01L이른바 지(止)라 함은 모든 경계의 모습을 그쳐 쉬게 하는 것이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의 이치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관(觀)이라 함은 인연생멸의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니 비발사나관(毘鉢舍那觀)의 이치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017_0623_b_01L所言止者謂止一切境界相順奢摩他觀義故所言觀者謂分別因緣生滅相隨順毘鉢舍那觀義故
어떻게 수순하는가?
017_0623_b_03L云何隨順
이 두 가지 이치를 차츰차츰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않게 하면 두 가지가 쌍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017_0623_b_04L以此二義漸漸修習不相捨離雙現前故
만일 지(止)를 닦으려는 이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하고 호흡[氣息]을 의지하지도 않으며, 몸 형태[形色]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허공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체 생각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제거하되 제거했다는 생각도 제거할지니, 일체법은 본래 생각 없음[無想]이어서 잠시도 생하지 않고 잠시도 멸하지 알기 때문이다. 또 바깥 경계를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따라 주다가 나중에 마음으로 마음을 제거하겠다고 생각하지도 말지니, 만일 마음이 흩어지거든 곧 거두어다가 바른 생각[正念]에 머물게 해야 한다.
017_0623_b_05L若修止者住於靜處端坐正意不依氣息不依形色不依於空不依地水火風乃至不依見聞覺知一切諸想隨念皆除亦遣除想以一切法本來無相念念不生念念不滅亦不得隨心外念境界後以心除心心若馳散卽當攝來住於正念
이 바른 생각이란 곧 마음뿐이어서 바깥 경계가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제 모습이 없어서 잠시도 그 모습을 얻을 수가 없다.
만일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하거나 나아갔다 멈추거나 할 적에 무엇인가를 하게 되거든 모든 시각에 항상 방편을 기억하여 수순하고 또 관찰해야 한다. 오래 익히어 순박하고 두텁게 익어지면 그 마음이 머무르게 되리니 그 마음이 머무른 까닭에 차츰 용맹스럽고 날카로워져서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 번뇌를 깊이 조복시키고 신심이 늘어나서 속히 불퇴전(不退轉)의 지위를 얻을 것이다. 다만 의혹하고 믿지 않고 비방하고 죄와 업장이 무겁고 교만스럽고 게으름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이런 사람은 능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017_0623_b_11L是正念者當知唯心無外境界卽復此心亦無自相念念不可得若從坐起去來進止有所施作於一切時常念方便隨順觀察久習淳熟其心得以心住故漸漸猛利隨順得入眞如三昧深伏煩惱信心增長速成不退唯除疑惑不信誹謗重罪業障懈怠如是等人所不能入
다시 다음에 이 삼매에 의하는 까닭에 법계가 한 모습임을 알게 되나니, 이른바 일체 부처님들의 법신은 중생들의 몸과 평등하여 둘이 없으므로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017_0623_b_19L復次依如是三昧故則知法界一相謂一切諸佛法身與衆生身平等無二名一行三昧
017_0623_c_01L진여는 모든 삼매의 근본이니, 어떤 사람이 이를 수행하면 차츰차츰 무량한 삼매가 생긴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중생에게 선근의 힘이 없으면 곧 모든 마근과 외도와 귀신에게 홀림을 받나니 흑은 앉은 자리에 형상을 나타내어 겁나게 하거나 흑은 단정한 남녀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거니와 오직 마음일 뿐임을 생각하면 그 경계가 곧 사라져서 마침내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017_0623_b_22L當知眞如是三昧根本若人修行漸漸能生無量三昧或有衆生無善根力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若於坐中現形恐怖或現端正男女等相當念唯心境界則滅終不爲惱
혹은 하늘 무리의 형상이나 보살의 형상을 나타내며, 혹은 여래의 형상이 상호가 구족하게 나타나되 때로는 다라니(陀羅尼)를 설하며 혹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 등을 설하며, 혹은 평등ㆍ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원(無怨)ㆍ무친(無親)ㆍ무인(無因)ㆍ무과(無果)이어서 끝내 공적한 것이 참 열반이라고도 설한다.
017_0623_c_04L或現天像菩薩像亦作如來像相好具足若說陁羅尼若說布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或說平無相無願無怨無親無因無果畢竟空寂是眞涅槃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간 숙명(宿命)을 알게 하며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며, 타심지(他心智)를 얻어서 말솜씨가 걸림 없게도 한다. 다시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리에 탐착케 하거나,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화를 내거나 기뻐하게 하는 등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흑은 인자함과 사랑하는 마음이 많게 하며, 많이 자고, 많은 병으로써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한다.
017_0623_c_08L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亦知未來之事得他心智辯才無碍能令衆生貪著世閒名利之事又令使人數瞋數喜性無常准或多慈愛多睡多病其心懈怠
흑은 갑자기 정진할 마음을 일으켰다가 나중에 곧 늦추거나 멈추게 하며, 혹은 믿지 못하는 마음을 내어 의심과 걱정이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업을 닦게 하며, 흑은 세상사에 집착되어 갖가지로 끄달리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삼매의 비슷한 적은 부분을 얻게도 하나니, 모두가 외도들이 얻는 바로서 진정한 삼매가 아니다.
017_0623_c_12L或卒起精進後便休廢生於不信多疑多或捨本勝行更修雜業若著世事種種牽纏亦能使人得諸三昧少分相似皆是外道所得非眞三昧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 이틀 사흘 내지 칠 일까지 선정 속에 머무르게 하며, 자연스럽게 향기롭고 맛난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즐거워져 시장하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게 하여 다른 이들이 이를 부러워하게 한다.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에 한계[分齊]가 없어 때로는 많이 먹고 때로는 조금 먹게 하며, 얼굴빛이 자유로이 달라지게 한다.
017_0623_c_16L或復令人若一日若二日若三日乃至七日住於定中得自然香美飮食身心適悅不飢不渴使人愛著或亦令人食無分齊乍多乍少顏色變異
이런 이유 때문에 행자들은 항상 지혜롭게 관찰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행[正念行]을 부지런히 닦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능히 모든 업장을 멀리 여윌 것이다.
017_0623_c_20L以是義故行者常應智慧觀察勿令此心墮於邪網當勤正念不取不著則能遠離是諸業障
017_0624_a_01L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외도의 삼매는 모두가 견(見)과 애(愛)와 아만(我慢)을 여의지 못한 것이다.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탐내기 때문이니, 진정한 삼매는 본다는 상에도 머물지 않고 얻는다는 상에도 머물지 않으며, 선정에서 나온 뒤까지도 게으름이 없어서 모든 번뇌가 차츰 미약하고 얇아지게 된다.
017_0623_c_23L應知外道所有三昧皆不離見愛我慢之心貪著世閒名利恭敬故眞如三昧者不住見相住得相乃至出定亦無懈慢所有煩惱漸漸微薄
만약 모든 범부로서 이 삼매법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의 종자성품에 들 수 있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그 까닭은 세간의 모든 선과 삼매를 닦으면 대개 맛[味]에 집착을 일으켜 아견(我見)에 의해서 삼계에 얽매이므로 외도와 같아지나니, 만일 선지식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외도의 소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017_0624_a_04L若諸凡夫不習此三昧得入如來種性無有是處以修世閒諸禪三昧多起味著依於我見繫屬三界與外道共若離善知識所護則起外道見故
다시 다음에 부지런히 마음을 전일케 해서 이 삼매를 닦고 배우는 이는 현세 동안에 열 가지 이익을 얻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017_0624_a_08L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現世當得十種利益何爲十
첫째는 항상 시방의 여러 부처님과 보살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온갖 악마와 악귀가 두렵게 하지 못하고, 셋째는 아흔다섯 가지의 외도와 귀신 등이 능히 흘리지 못하고, 넷째는 매우 깊은 법을 비방한 죄를 멀리 여의어 무거운 죄와 업장이 점점 얇아지고, 다섯째는 온갖 의흑과 모든 나쁜 지식을 소멸하고, 여섯째는 모든 여래의 경계에 대하여 믿음이 늘어나고, 일곱째는 근심과 뉘우침을 멀리 여의어 생사 속에서도 용맹스럽게 겁내지 않게 되고, 여덟째는 마음이 부드럽고 교만을 버리어 타인의 시달림을 받지 않고, 아홉째는 비록 선정은 얻지 못했으나 모든 시각과 모든 경계에서 능히 번뇌를 줄여 세간 일을 즐기지 않게 되고, 열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바깥 반연과 일체 음성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017_0624_a_10L一者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二者不爲諸魔惡鬼所能恐三者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四者遠離誹謗甚深之法重罪業障漸漸微薄五者滅一切疑惡覺觀六者於如來境界信得增長七者遠離憂悔於生死中勇猛不怯八者其心柔和捨於憍慢不爲他人所惱九者雖未得定於一切時一切境界處則能減損煩惱不樂世閒若得三昧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다시 다음에 어떤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혹 게으름을 일으키고 선한 일 닦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대비(大悲)를 멀리 여읜다. 이런 까닭에 관(觀)을 닦아야 한다.
017_0624_a_21L復次若人唯修於止則心沈沒或起懈怠不樂衆善遠離大悲是故修觀
017_0624_b_01L관을 닦는 이는 관하기를 “일체 세간의 유위의 법은 오래 머무는 것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해 무너지며, 일체 마음씨는 생각생각에 생멸한다. 그러므로 괴로움[苦]이다”라고 해야 하나니, 과거에 생각하던 모든 법의 황홀함이 꿈같다고 관하며, 현재에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갯빛 같다고 관하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이 황홀히 일어난다고 관하며, 세간의 일체 몸은 모두가 다 청정하지 않은 것이며 여러 가지로 더럽고 오염되어 하나도 즐거울 만한 것이 없다고 관해야 한다.
017_0624_a_23L修習觀者當觀一切世閒有爲之法無得久停須臾變壞一切心行念念生滅以是故苦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應觀世閒一切有身悉皆不淨種種穢污無一可樂
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일체 중생은 끝없는 옛적부터 모두가 무명에 훈습된 까닭에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탐으로써 이미 일체 몸과 마음의 온갖 큰 고통을 받는 것이다. 현재에도 무량한 핍박이 있으며 미래의 괴로울 일도 한량이 없어서 버리기도 여의기도 어렵거늘 그런 줄을 깨닫지도 못하니, 중생은 이와 같이 가여워해야 한다.
017_0624_b_06L如是當念一切衆生從無始世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已受一切身心大苦現在卽有無量逼迫來所苦亦無分齊難捨難離而不覺衆生如是甚爲可愍
이렇게 생각하고는 곧 용맹스럽고도 큰 서원을 세우되 ‘내 마음에 분별을 여읜 까닭에 시방에 두루하도록 일체 모든 착한 공덕을 수행하고 미래가 다하도록 무량한 방편으로 일체 괴로움 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열반의 제일가는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라고 해야 한다.
017_0624_b_11L作此思惟應勇猛立大誓願願令我心離分別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其未來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衆生令得涅槃第一義樂
이러한 원을 세운 까닭에 모든 때와 모든 처소에서 모든 선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닦아 배우기를 버리지 않고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만 앉아서 지(止)를 전념할 때만은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 시각에는 지어야 할 일과 짓지 말아야 할 일을 관찰해야 한다.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일어날 때 모두 지(止)와 관(觀)을 함께 행하여야 한다.
017_0624_b_15L以起如是願故於一切時一切處所有衆善已堪能不捨修學心無懈怠唯除坐時專念於止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若行若住若臥若起皆應止觀俱行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원래 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다시 인연이 화합하는 선과 악의 업과 고(苦)와 낙(樂)의 과보는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비록 인연이 화합하는 선과 악의 업보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다시 그 성품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017_0624_b_20L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而復卽念因緣和合善惡之業苦樂等報不失不壞雖念因緣善惡業報而亦卽念性不可得
017_0624_c_01L만일 지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머물러 집착하는 허물을 물리치고, 이승의 겁내는 소견을 능히 버릴 수 있다. 만일 관을 닦으면 이승이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좁고 열등한 마음의 허물을 물리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는 허물을 멀리 여읜다. 이런 까닭에 이 지와 관 두 문은 서로 도우면서 여의지 않나니, 만일 지와 관을 갖추지 못하면 보리의 도에 들 수 없는 것이다.
017_0624_b_23L若修止者對治凡夫住著世間能捨二乘怯弱之見若修觀者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遠離凡夫不修善根以此義故是止觀二門共相助成不相捨離止觀不具則無能入菩提之道
다시 다음에 중생이 처음으로 이 법을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 많고 약한 이는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 걱정하기를 ‘모든 부처님을 항상 만나서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 것이며, 끝내 신심을 성취하지도 못하리라’ 하여 물러서려고 한다. 이런 이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께서는 수승한 방편이 있으시나니 이른바 전일한 뜻으로 염불하는 것이다. 이 인연으로 원에 따라 다른 불국토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뵈옵고 영원히 나쁜 갈래를 여윌 수 있다.
017_0624_c_05L復次衆生初學是法欲求正信其心怯弱以住於此娑婆世界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懼謂信心難可成就意欲退者當知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謂以專意念佛因緣隨願得生他方佛土常見於佛永離惡道
예컨대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전일하게 염하고, 그렇게 닦은 선근을 회향하여 그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곧 왕생 (往生)함을 얻으리니, 항상 부처님을 뵙는 까닭에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리라” 하셨다. 만일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해서 항상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끝내 왕생하여 바른 선정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017_0624_c_11L如修多羅說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陁佛所修善根迴向願求生彼世界卽得往生常見佛故終無有退若觀彼佛眞如法身常勤修習畢竟得生住正定故
이미 수행신심분을 설했으니 다음에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설하겠다.
017_0624_c_16L已說修行信心分次說勸修利益分
017_0625_a_01L이러한 마하연(摩訶衍:大乘)인 부처님들의 비밀하신 법장[秘藏]을 내가 이미 총괄해서 설했다.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하여 바른 믿음을 내어 비방할 마음을 멀리 여의고 대승의 도에 들고자 한다면 이 논을 받아 지녀서 생각하고 닦아 익히면 마침내는 위없는 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법을 듣고 겁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결정코 부처님 종자를 계승하여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수기를 받을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다시 어떤 사람이 잠깐 사이[一食之頃]에 이 법을 생각한 것만 못하나니, 앞의 공덕을 넘어서는 것은 비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017_0624_c_17L如是摩訶衍諸佛秘藏我已摠說有衆生欲於如來甚深境界得生正遠離誹謗入大乘道當持此論思量修習究竟能至無上之道若人聞是法已不生怯弱當知此人定紹佛必爲諸佛之所授記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令行十不如有人於一食頃正思此法前功德不可爲喩
다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논을 받아 지녀 관찰하고 수행하되 하루 낮 하룻밤을 하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다 말할 수 없다. 가령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겁 동안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역시 다하지 못하리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말하자면 법성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공덕도 끝이 없다.
017_0625_a_03L復次若人受持此論觀察修行若一日一夜所有功德無量無邊不可得說假令十方一切諸佛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歎其功德亦不能盡何以故謂法性功德無有盡故此人功德亦復如是無有邊際
만일 어떤 중생이 이 논에 대하여 훼방하거나 믿지 않으면 그가 얻는 죄보(罪報)는 한량없이 겁이 지나도록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다만 신앙(信仰)할지언정 비방하거나 헐뜯지 말아야 하나니, 자신도 깊이 해롭고 남들도 해쳐서 마침내는 모든 삼보의 종자를 끊기 때문이다. 일체 여래께서는 모두 이 법에 의하여 열반을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도 이를 수행함으로 인해서 부처님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017_0625_a_09L其有衆生於此論中毀謗不信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以深自害亦害他人斷絕一切三寶之種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槃故一切菩薩因之修行入佛智故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하여 맑은 믿음을 얻었으며 현재의 보살도 지금 이 법에 의해서 맑은 믿음을 얻으며, 미래의 보살도 이 법에 의해서 맑은 믿음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부지런히 닦아 배워야 한다.
017_0625_a_14L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是故衆生應勤修學

모든 부처님들의 매우 깊고 광대한 진리를
내 이제 부분에 따라 총지(摠持)하고 설하였으니,
이 공덕이 법성과 같아지도록 회향하여
일체 중생의 세계를 두루 이익되게 하여지이다.
017_0625_a_17L諸佛甚深廣大義
我今隨分摠持說
迴此功德如法性
普利一切衆生界
大乘起信論一卷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