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發菩提心經論卷下

ABC_IT_K0624_T_002
017_0721_b_01L발보리심경론 하권
017_0721_b_01L發菩提心經論卷下


천친 지음
구마라집 한역
권오민 번역
017_0721_b_02L天親菩薩造
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譯


7. 비리야1)바라밀품(毘梨耶波羅蜜品)
017_0721_b_04L毘梨耶波羅蜜品第七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정진(精進)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정진으로서 만약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정진은 바로 보리의 도를 능히 장엄할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정진을 닦는 것이다.
017_0721_b_05L云何菩薩修行精進精進若爲自利他利及二俱利如是精進則能莊嚴菩提之道菩薩爲欲調伏衆生令離苦惱故修精進
즉 정진을 닦는 자는 일체의 시기에 항상 청정한 범행(梵行)을 부지런히 닦아 모으고 태만을 버려서 마음이 방일하지 않으며, 온갖 어려운 일이나 이롭지 않은 일에서도 마음은 항상 정근(精勤)하여 끝내 물러나지 않으니,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정진을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진을 닦기 때문에 세간과 출세간의 상품[上]의 미묘한 선법을 능히 증득하니, 이를 일러 ‘자리(自利)’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선을 닦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利他)’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보리의 정인(正因)으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얻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정진을 닦음으로 인해 수승하고 청정 미묘한 과보를 증득하고, 온갖 보살의 경지[地]를 초월하고 나아가 정각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되니,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017_0721_b_09L修精進者於一切時常勤修集淸淨梵行捨離怠慢心不放逸於諸艱難不饒益事心常精勤終不退沒是名菩薩初精進心精進故能得世閒出世閒上妙善法是名自利教化衆生令勤修善是名利他以己所修菩提正因化諸衆生令同己利是名俱利因修精進獲得轉勝淸淨妙果超越諸地乃至速成正覺是名莊嚴菩提之道
정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위없이 높은 도를 구하기 위해 일으키는 정진이며, 둘째는 온갖 괴로움을 없애 버리기를 널리 원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보살은 열 가지 생각[十念]을 성취함으로써 능히 발심하여 정진을 부지런히 실행하게 된다.
017_0721_b_18L精進有二一者爲求無上道故ㆍ二者廣欲拔濟衆苦而起精進菩薩成就十念能發心勤行精進
017_0721_c_01L무엇을 일컬어 열 가지 생각이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부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생각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법은 부사의(不思議)한 해탈로 이끄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승가는 청정하며 물듦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대자(大慈)를 행하여 중생을 편안하게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대비(大悲)를 행하여 온갖 괴로움을 없애 버리려고 생각하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정정취(正定聚)2)를 더욱 북돋아서 즐거이 선을 닦고자 생각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사정취(邪定聚)를 제거하여 근본으로 되돌아가고자 생각하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온갖 아귀가 겪는 배고프고 목마른 뜨거운 번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온갖 축생들이 오랫동안 받는 온갖 괴로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열 번째는 온갖 지옥에서 받는 태워지고 삶아지는 과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즉, 보살은 이와 같은 열 가지 생각을 사유하면서 ‘삼보(三寶)의 공덕을 나는 마땅히 닦고 쌓으리라’, ‘나는 마땅히 자비와 정정취에 부지런히 힘쓰리라’, ‘사정취의 중생과 삼악도의 괴로움을 나는 마땅히 제거하여 없애버리리라’고 하니, 이러한 사유에 전념해 흐트러지지 않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아 쉬는 일이 없는 것을 일컬어 능히 올바른 생각[正念]을 일으켜 정진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0721_b_21L云何十念一者念佛無量功德ㆍ二者念法不思議解脫ㆍ三者念僧淸淨無染ㆍ四者念行大慈安立衆生ㆍ五者念行大悲拔濟衆苦ㆍ六者念正定聚勸樂修善ㆍ七者念邪定聚拔令反本ㆍ八者念諸餓鬼飢渴熱惱ㆍ九者念諸畜生長受衆苦ㆍ十者念諸地獄備受燒煮菩薩如是思惟十三寶功德我當修集慈悲正定我當勸勵邪定衆生三惡道苦我當拔如是思惟專念不亂日夜勤修無有休廢是名能起正念精進
보살의 정진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이른바 4정근(正勤)의 도를 수행하는 것이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법을 막아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악법을 신속히 제거하여 끊는 것이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은 방편으로써 생겨나게 하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선법은 더욱 닦아 가득하게 증광(增廣)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사정근의 도를 닦아 쉬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정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지런한 정진은 일체의 온갖 번뇌의 세계를 능히 파괴해서 위없이 높은 보리의 올바른 인연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몸과 마음의 일체의 크나큰 괴로움을 능히 감수하면서도 온갖 중생들의 안립(安立)을 원하기 때문에 피곤해 하거나 싫증내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정진’이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악한 때[惡時]와 아첨이나 곡해, 그릇된 정진을 멀리 여의고서 올바른 정진만을 닦으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선정ㆍ지혜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닦고 믿으며, 짓기를 원하는 것은 이미 지었거나 마땅히 지을 것이며, 지극한 마음으로 항상 정진을 행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으며, 온갖 선법을 닦거나 온갖 괴로움을 없애 버릴 적에는 마치 머리가 타는 것을 구호(救護)하듯이 하면서도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정진’이라고 한다.
017_0721_c_10L菩薩精進復有四事所謂修行四正勤道生惡法遮令不起ㆍ已生惡法速令除斷ㆍ未生善法方便令生ㆍ已生善法修滿增廣菩薩如是修四正勤道而無休息是名精進是勤精進能壞一切諸煩惱界增長無上菩提正因薩若能受於一切身心大苦爲欲安立諸衆生故而不疲惓是名精進薩遠離惡時諂曲邪精進已修正精所謂修信ㆍ施ㆍ戒ㆍ忍ㆍ定ㆍ慧ㆍ慈悲喜捨欲作已作當作至心常行精進無悔於諸善法及拔濟衆苦如救頭然心不退沒是名精進
017_0722_a_01L보살은 또한 비록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을지라도 온갖 괴로움을 뽑아버리기 위해 정법을 구호할 때에는 마땅히 아껴야 하며, 위의(威儀)를 버리지 않고 항상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법을 닦을 때에는 마음에 나태한 게으름이 없으며, 신명을 상실할 때에도 법다움[如法]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리의 도를 닦는 보살이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나태한 자는 일시에 일체의 모든 이에게 능히 보시할 수 없으며, 능히 계를 지닐 수도 없고, 온갖 괴로움을 참을 수도 없으며, 정진을 부지런히 닦을 수도 없고, 마음을 다잡아 선정을 염(念)할 수도 없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육바라밀은 정진을 말미암아서 증장된다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보살마하살로서 정진이 탁월한 자라면 능히 신속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
017_0721_c_23L菩薩雖復不惜身然爲拔濟衆苦救護正法當應愛惜ㆍ不捨威儀常修善法修善法時心無懈怠失身命時不捨如法是名菩薩修菩提道勤行精進懈怠之人不能一時一切布施不能持戒ㆍ忍於衆苦ㆍ勤行精進ㆍ攝心念定ㆍ分別善惡故說言六波羅蜜因於精進而得增長若菩薩摩訶薩精進增上則能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보살이 대장엄을 발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대장엄을 발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용맹함과 강건함을 쌓아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온갖 선근을 닦아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며, 네 번째는 중생을 교화하려고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대장엄을 발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는가?
모든 생사를 마음으로 능히 참고 견딜 뿐 겁수(劫數)를 따지지 않으니, 무량(無量)하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那由他)의 항하사(恒河沙) 아승기겁(阿僧祇劫)3) 동안 불도를 성취해도 마음으로 고달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불해장엄정진(不懈莊嚴精進; 나태하지 않은 장엄의 정진)이라고 한다.
보살이 용맹함과 강건함을 쌓아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란, 삼천대천세계가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뵙기 위해, 법을 듣기 위해, 중생을 선법에 편안히 머물게 하기 위해, 요컨대 마땅히 이러한 불길로부터 지나가게 하기 위해, 중생을 조복하기 위해 마음이 능히 대비(大悲) 속에 편안히 잘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용건정진(勇健精進)이라고 한다.
017_0722_a_09L菩薩發大莊嚴而起精進復有四事一者發大莊嚴ㆍ二者積集勇健ㆍ三者修諸善根ㆍ四者教化衆生云何菩薩發大莊嚴諸生死心能堪忍不計劫數於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恒河沙阿僧祇劫當成佛道心不疲倦是名不懈莊嚴精進菩薩積集勇健而起精進若三千大千世界滿中盛火爲見佛故ㆍ爲聞法故ㆍ爲安止衆生於善法故要當從是火中而過爲調伏衆生善安止於大悲中是名勇健精進
017_0722_b_01L보살이 선근을 닦아 익혀서 정진을 일으키는 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선근을 일으킨 것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廻向)하듯이 일체지(一切智)의 성취를 원하였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수습선근정진(修習善根精進)이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려고 정진을 일으킨다. 즉 중생의 성품은 가늠하거나 계교할 수 없어서 무량하고 가없는 허공계와도 같다. 따라서 보살은 ‘나는 마땅히 그들을 남김없이 제도하리라’고 서원을 세워서 교화하고 제도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정진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교화정진(敎化精進)이라고 한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보살은 도(道)를 돕는 공덕을 닦아서 위없이 높은 지혜를 돕고, 불법을 닦아 모아서 정진을 일으킨다.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으며, 보살마하살이 대장엄을 발하여 행하는 정진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다. 그렇지만 보살마하살은 정진을 수행하면서 욕망을 여의는 마음이 없으니, 온갖 괴로움을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리야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017_0722_a_20L薩修習善根而起精進如所發起一切善根悉以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欲成就一切智故是名修習善根精進菩薩教化衆生而起精進衆生之性不可稱計無量無邊同虛空界菩薩立誓我當度之無有遺餘爲欲化度勤行精進是名教化精進取要言之菩薩修助道功德助無上智慧修集佛法而起精進諸佛功德無量無邊菩薩摩訶薩發大莊嚴所行精進亦復如是無量無邊菩薩摩訶薩修行精進無離欲心拔衆苦故是則具足毘梨耶波羅蜜

8. 선나바라밀품(禪那波羅蜜品)4)
017_0722_b_10L發菩提心經論禪那波羅蜜品第八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선정(禪定)을 닦아 익힌다고 하는가?
선정으로서 만약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선정은 능히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선정을 닦는 것이다.
즉 선정을 닦는 자는 그 마음을 능히 잘 다잡아서 일체의 어지러운 생각이 멋대로 간여하지 않게 하고, 가거나 머물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생각을 집중하여 앞(이를테면 코끝)에 두고, 백골ㆍ정수리ㆍ등뼈ㆍ팔뚝ㆍ갈비뼈ㆍ엉덩이 뼈ㆍ정강이ㆍ복사뼈를 역순(逆順)으로 관찰하면서 안반(安般)의 숨을 헤아리니,5)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선정을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정을 닦기 때문에 모든 악을 감수하지 않고 마음은 항상 기뻐 즐거워하게 되니, 이를 일러 ‘자리’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념(正念)을 닦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청정한 삼매로써 악의 각(覺:尋의 구역)과 관(觀:伺의 구역)을 여의며,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선정을 닦음으로 인해 8해탈(解脫)6) 그리고 수릉엄금강삼매의 수릉엄이란 sramgama(신역은 首楞伽摩로 健相ㆍ健行ㆍ一切事竟으로 번역됨)의 음사로서,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삼매의 명칭이다. 즉 건상이라 함은 부처님의 공덕은 견고하여 온갖 마군이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일체사경이란 부처님 공덕의 구경을 말한다.
내지 수릉엄7)금강삼매(首楞嚴金剛三昧)를 획득하게 되니,8)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017_0722_b_11L云何菩薩修習禪定禪定若爲自利他利及二俱利如是禪定則能莊嚴菩提之道菩薩爲欲調伏衆生令離苦惱故修禪定修禪定者善攝其心一切亂想不令妄干行住坐臥係念在前逆順觀察髑髏項脊ㆍ臂肘胸脅ㆍ髖髀脛踝安般數息是名菩薩初修定心修禪定故不受衆惡心常悅樂是名自利教化衆生令修正念是名利他以己所修淸淨三昧離惡覺觀化諸衆生令同己利是名俱利因修禪定獲得八解乃至首楞嚴金剛三是名莊嚴菩提之道
017_0722_c_01L선정은 세 가지 법에 의해 생겨난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한 것인가?
첫째는 문혜(聞慧)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둘째는 사혜(思慧)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고, 셋째는 수혜(修慧)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이러한 세 가지 법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일체의 삼매를 낳는 것이다.
017_0722_c_01L禪定由三法云何爲三一從聞慧ㆍ二從思慧ㆍ三從修慧從是三法漸漸而生一切三
무엇을 문혜라고 하는가?
들은 법대로 마음으로 항상 애호하고 즐기면서도 다시 ‘무애해탈(無礙解脫) 등의 모든 부처님의 법은 요컨대 많이 들음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법을 구하는 일체의 시기에 더욱더 정근(精勤)하게 되며, 밤낮으로 항상 즐거이 법을 듣고서 싫어하거나 만족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문혜’라고 한다.
017_0722_c_04L云何聞慧如所聞法心常愛樂作是念無㝵解脫等諸佛法要因多聞而得成就作是念已於一切求法時轉加精勤日夜常樂聽法無有厭是名聞慧
무엇을 사혜라고 하는가?
일체의 유위법을 실상대로 사념하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른바 유위법은 무상이며, 고(苦)이며, 공(空)이며, 무아이며, 부정(不淨)해서 생각 생각에 생멸하여 오래지 않아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들의 근심과 슬픔과 고뇌는 증오와 애착에 의해 계박된 것이지만, 다만 탐욕과 미워함과 어리석음의 불길로 태워져서 후세에 고뇌의 큰 덩어리를 증장하더라도 실다운 자성이 없어서 마치 환화(幻化)와 같다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는 일체 유위법에 대해 바로 염리(厭離)를 낳아 더욱더 정근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나아간다. 그리고 여래의 지혜는 사의(思議)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크나큰 세력이 있고, 그보다 능히 수승한 것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고, 안온한 크나큰 도성[大城:대각의 경지를 말함]에 능히 이르러 다시는 돌아 나오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고뇌를 겪고 있는 중생을 능히 구제하였다고 사유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알아보고서[知見] 유위법이 헤아릴 수 없는 고뇌임을 관찰하면, 그 지향(志向)이 위없이 높은 대승으로 나아가 구하기를 염원하니, 이것을 일러 ‘사혜’라고 한다.
017_0722_c_08L云何思慧思念觀察一切有爲法如實相所謂無常苦空無我不淨念念生滅不久敗壞而諸衆生憂悲苦惱憎愛所繫但爲貪恚癡火所然增長後世苦惱大聚無有實性猶如幻化見如是已於一切有爲法卽生厭離轉加精勤趣佛智慧思惟如來智慧不可思議不可稱量有大勢力無能勝者能至無畏安隱大城不復轉還能救無量苦惱衆生是知見佛無量智見有爲法無量苦志願進求無上大乘是名思慧
017_0723_a_01L무엇을 수혜라고 하는가?
골관(骨觀:백골관 즉 부정관을 말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의 선정을 모두 ‘수혜’라고 이름한다. 즉 욕계의 불선법을 여의어서 유각유관(有覺有觀)의 이생희락(離生喜樂)만으로도 초선(初禪)9)에 들어간다.
다시 ‘각’과 ‘관’을 멸해서 청정심 한 곳에 들면, 무각무관(無覺無觀)의 정생희락(定生喜樂)으로 제2선에 들어간다. 다시 ‘희(喜)’를 여의었기 때문에 ‘사(捨)’를 행해서 마음은 안락한 지혜의 몸이 낙(樂)을 받는 걸 생각[念]하니, 모든 현성(賢聖)은 ‘능히 버림[能捨]’을 능히 설하여 항상 ‘낙’을 받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제3선에 들어간다. 다시 ‘고’를 끊고 ‘낙’을 끊었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우(憂)ㆍ희(喜)를 멸하였기 때문에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捨)를 행하여 청정만을 생각함으로써 제4선10)에 들어간다.
017_0722_c_19L何修慧從初骨觀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皆名修慧離欲不善法ㆍ有覺有觀ㆍ離生喜樂入初禪滅覺觀內淸淨心一處ㆍ無覺無觀ㆍ定生喜樂入二禪離喜故行捨ㆍ心念安慧ㆍ身受樂ㆍ諸賢聖能說能捨常念受樂入三禪苦斷樂故ㆍ先滅憂喜故不苦不樂行捨念淨入四禪
또한 다시 일체의 색상(色相)을 지나 일체의 대상[有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차별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무변허공(無邊虛空)을 하니, 즉각 허공무색정처(虛空無色定處, 신역의 空無邊處)에 들어가 일체의 허공의 상을 지나친다. 또한 다시 가없는 식[無邊識]을 아니 즉각 무색식정처(無色識定處, 신역의 識無邊處)에 들어가 일체의 식의 상을 지나치고, 다시 무소유를 아니 즉각 무소유무색정처(無所有無色定處)에 들어가 일체의 무소유처를 지나치고,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안온을 아니 즉각 바로 무색비유상비무상처(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선정에서는 다만 제법의 행(行)을 수순하기 때문에 거기에 즐거이 집착하지 않으며, 무상승(無上乘:대승)을 추구하여 가장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수혜’라고 한다.
즉 보살은 바로 이러한 문혜ㆍ사혜ㆍ수혜에 따라 정근하고 마음을 다잡아서 통명(通明) 삼매인 선나바라밀을 능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017_0723_a_04L過一切色相ㆍ滅一切有對相不念一切別異相故知無邊虛卽入虛空無色定處過一切虛空知無邊識卽入無色識定處過一切識相知無所有卽入無所有無色定處過一切無所有處知非有想非無想安隱卽入無色非有想非無想但隨順諸法行故而不樂著求無上乘成最正覺是名修慧菩薩從是聞思修慧精勤攝心則能成就通ㆍ明ㆍ三昧ㆍ禪那波羅蜜
017_0723_b_01L또한 보살이 선정을 닦는 데에는 다시 열 가지의 행이 있으니, 이는 성문이나 벽지불과 공통된 것이 아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여래의 온갖 선정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선정에 탐닉하지 않으니, 물든 마음을 버리고 여의어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온갖 신통을 갖추게 되니, 중생들의 온갖 마음의 작용을 알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온갖 마음을 알게 되니, 일체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해탈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대비를 행하게 되니, 모든 중생의 번뇌와 결(結)을 끊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선정과 온갖 삼매를 닦을 때에는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능히 잘 아니,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항상 자재를 획득하니, 일체의 모든 선법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그 마음이 적멸하니, 이승(二乘)의 온갖 선정과 삼매보다 수승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항상 지혜에 들게 되니, 모든 세간을 지나 피안에 이르기 때문이다. 열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능히 정법을 흥성시키니, 삼보를 계승하고 융성시켜 단절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보살의 선정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선정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다시 보살은 일체 중생의 번뇌심을 알기 위해 선정을 닦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선정의 법을 닦고 쌓아서 마음이 거기에 머물도록 조성(助成)하는 것이니, 이러한 선정을 평등심에 머물게 하는 것을 일컬어 ‘정(定, sampatti:혹은 等至)’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따위의 ‘정’은 바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작(無作)에서 동등한 것이다. 또한 공ㆍ무상ㆍ무원ㆍ무작의 동등함은 바로 중생의 동등함이며, 중생의 동등함은 바로 모든 법의 동등함이니, 이와 같은 동등함에 들어가는 것을 일컬어 ‘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723_a_14L復次菩薩修定復有十法行不與聲聞辟支佛共何等十一者修定無有吾我具足如來諸禪定故二者修定不味不著捨離染心不求己樂故者修定具諸通業爲知衆生諸心行四者修定爲知衆心度脫一切諸衆生故五者修定行於大悲斷諸衆生煩惱結故六者修定諸禪三昧善知入出過於三界故七者修定常得自具足一切諸善法故八者修定其心寂滅勝於二乘諸禪三昧故九者修定常入智慧過諸世閒到彼岸故十者修定能興正法紹隆三寶使不斷絕故如是定者不與聲聞辟支佛復次爲知一切衆生煩惱心故故修集諸禪定法助成住心令此禪定住平等心是名爲定如是等定等於空ㆍ無相ㆍ無願無作空無相無願無作等者則衆生等衆生等者則諸法等ㆍ入如是等是名爲定
또한 다시 보살이 비록 세속의 행을 따를지라도 세속과 뒤섞이지 않으며, 세속의 여덟 가지 법11)을 버리고 일체의 결(結)을 소멸하며, 번잡함을 멀리 떠나 홀로 있는 곳[獨處]을 즐긴다. 즉 보살은 이와 같은 선정을 수행함으로써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르며 세간에서 짓는 것을 여의는 것이다.

또한 다시 그것은 보살이 선정을 닦아 온갖 신통(神通)과 지(智)와 방편과 혜(慧)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017_0723_b_11L復次菩薩雖隨世行不雜於世捨世八法滅一切結遠離憒鬧樂於獨處菩薩如是修行禪定心安止住離世所作復次菩薩修定具諸通智方便慧故
무엇을 일컬어 ‘신통’이라 하였으며, 무엇을 일컬어 ‘지’라고 한 것인가?
만약 색상을 보거나, 혹은 음성을 듣거나, 혹은 다른 이의 마음을 알거나, 혹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혹은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능히 두루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을 일컬어 ‘신통’이라 한다.12) 혹은 색이 바로 법성(法性)임을 알고 음성이 마음의 작용임을 이해해서 성상(性相)이 적멸하고 삼세가 평등하여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허공의 상(相)과 똑같아서 멸진(滅盡)을 증득하지 못함을 안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라고 한다.
017_0723_b_15L云何爲通云何爲智若見色相ㆍ若聞音聲ㆍ若知他心ㆍ若念過去ㆍ若能遍至諸佛世界是名爲通若知色卽法性解了音聲心行性相寂滅三世平等知諸佛界同虛空相而不證滅盡是名爲
017_0723_c_01L무엇을 일컬어 ‘방편’이라 하였으며, 무엇을 일컬어 ‘혜’라고 한 것인가?
선정에 들어갈 때 대자비를 낳아 서원을 버리지 않으며, 마음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관찰하여 보리의 도량(道場)을 장엄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방편’이라고 한다. 또한 그 마음이 영원히 적멸하여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어서 모든 법의 본성이 동란(動亂)하지 않음을 사유하며,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허공과 동일하다고 보아서 장엄되어진 것(보리의 도량)이 적멸과 똑같음을 관찰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혜’라고 한다.
이상의 행을 일컬어 보살이 선정의 ‘신통’과 ‘지’와 ‘방편’과 ‘혜’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네 가지를 차별하여 함께 행할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보살마하살은 선정을 수행할 때 그 밖의 다른 악한 마음이 없으니, 그것은 부동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선나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017_0723_b_21L云何方便云何爲慧入禪定時生大慈悲不捨誓願心如金剛觀諸佛世界莊嚴菩提道場是名方便其心永寂無我無衆生思惟諸法本性不見諸佛界同於虛空觀所莊嚴同於寂滅是名爲慧是名菩薩修行禪通智方便慧故差別四事俱行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菩薩摩訶薩修行禪定無餘惡心以不動法故是則具足禪那波羅蜜

9.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蜜品)
017_0723_c_07L發菩提心經論般若波羅蜜品第九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지혜를 닦아 익힌다고 하는가?
지혜로서 만약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지혜는 능히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지혜를 닦는 것이다.
즉 지혜를 닦는 자는 일체 세간의 일을 모두 배우면서 탐ㆍ진ㆍ치를 버리며,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일체의 중생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이롭게 하고, 항상 그들을 구제하기를 염원해서 장차 도사(導師)가 되기를 바라며, 정도(正道)와 사도(邪道)와 선악의 과보를 능히 잘 분별하니,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지혜를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를 닦기 때문에 무명을 멀리 여의어서 번뇌장(煩惱障)과 지혜장(智慧障)을 제거하게 되니, 이를 일러 ‘자리’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번뇌의 조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위없이 높은 보리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지혜를 닦음으로 인해 초지(初地) 내지 살바야지(薩婆若智)를 획득하게 되니,13)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017_0723_c_08L云何菩薩修習智慧智慧若爲自利他利及二俱利如是智慧則能莊嚴菩提之道菩薩爲欲調伏衆生令離苦惱故修智慧修智慧者悉學一切世閒之事捨貪瞋癡ㆍ建立慈心憐愍饒益一切衆生常念拔濟爲作將導能分別說正道邪道及善惡報是名菩薩初智慧心修智慧故遠離無明除煩惱障及智慧障是名自利教化衆生令得調伏是名利他以己所修無上菩提化諸衆生令同己利是名俱利因修智慧獲得初地乃至薩婆若智是名莊嚴菩提之道
017_0724_a_01L보살이 지혜를 수행하는 데에는 스무 가지의 마음이 있어 점진적으로 능히 이를 건립한다.
무엇을 스무 가지라고 한 것인가?
마땅히 좋은 친구와 가까이하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교만을 버리고 여의어서 불방일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가르침에 수순하여 즐거이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법을 듣고 선(善)한 사유를 싫어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네 가지 범행[四梵行]을 행하여 정지(正智)를 닦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14) 부정(不淨)의 행을 관하여 그것을 싫어하고 여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네 가지 진제(眞諦)와 열여섯 가지 성도(聖道)를 관찰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15) 12인연을 관하여 명혜(明慧)를 닦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온갖 바라밀을 듣고 그것을 닦고 쌓으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무상ㆍ고ㆍ무아를 관하여 적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공ㆍ무상ㆍ무원ㆍ무작을 관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음(陰:蘊의 구역어로서 5온)과 계(界:18계)와 입(入:處의 구역어로서 12처)에 허물과 우환이 많다고 관찰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번뇌를 항복시켜 그것이 반려가 아니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온갖 선법을 지켜 그것을 자신의 반려로 삼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악법을 억제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끊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정법을 수습하여 그것을 늘리고 키우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비록 이승(二乘)을 닦을지라도 항상 그것을 버리고 여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보살장(菩薩藏)을 듣고 그것을 즐거이 봉행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자리와 이타에 수순하여 온갖 선업을 증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진실행을 수지하여 일체의 불법(佛法)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017_0723_c_21L菩薩修行智慧有二十心能漸建立何謂二十當發善欲親近善友心ㆍ捨離憍慢不放逸心隨順教誨樂聽法心ㆍ聞法無厭善思惟心ㆍ行四梵行修正智心ㆍ觀不淨行生厭離心ㆍ觀四眞諦十六聖心ㆍ觀十二因緣修明慧心ㆍ聞諸波羅蜜念欲修集心ㆍ觀無常苦無我寂滅心ㆍ觀空無相無願無作心ㆍ觀陰界入多過患心ㆍ降伏煩惱非伴侶心ㆍ護諸善法自伴侶心ㆍ抑制惡法令除斷心ㆍ修習正法令增廣心ㆍ雖修二乘常捨離心ㆍ聞菩薩藏樂奉行心ㆍ自利利他隨順增進諸善業心ㆍ持眞實行求一切佛法心
또한 다시 보살이 지혜를 수행하는 데에는 다시 열 가지의 선사유(善思惟)의 마음이 있으니, 이는 성문이나 벽지불과는 공통되지 않은 사유이다.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정혜(定慧)의 근본을 분별함을 사유하며, 단(斷)ㆍ상(常)의 두 변(邊)을 버리지 않음을 사유하고, 인연에 의해 제법이 생기하는 것을 사유하며, 중생과 아(我)와 인(人)과 수명(壽命)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사유하고,16) 삼세 중 과거ㆍ미래에 걸쳐 지속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하며, 발하고 행함[發行]이 없는데도 인과를 끊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고, 법은 공한데도 선을 심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상(無相)인데도 중생 제도를 그만두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고, 무원(無願)인데도 보리를 구하는 일을 여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작(無作)인데도 과보를 받는 몸[受身]을 드러내어 버리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보살에게는 다시 열두 가지의 법문에 잘 들어감[善入法門]이 있다.
017_0724_a_12L復次菩薩修行智慧復有十法善思惟心不與聲聞辟支佛共何謂爲十思惟分別定慧根本ㆍ思惟不捨斷常二邊ㆍ思惟因緣生起諸法ㆍ思惟無衆生我人壽命ㆍ思惟無三世去來住法ㆍ思惟無發行而不斷因果ㆍ思惟法空而殖善不懈ㆍ思惟無相而度衆生不廢ㆍ思惟無願而求菩提不離ㆍ思惟無作而現受身不捨復次薩復有十二善入法門
017_0724_b_01L무엇을 일컬어 열두 가지라고 하는가?
공(空) 등의 삼매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며, 온갖 선의 삼매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선의 생겨남[禪生]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온갖 신통지[通智]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무루법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며, 내관법(內觀法)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결정법(열반)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고, 일체 중생이 공적(空寂)하다고 관(觀)하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대자(大慈)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일체 중생은 무아라고 관하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대비를 버리지 않는 것이고, 온갖 악취(惡趣)에 태어나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비업(非業)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이욕(離欲)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이욕법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고, 욕락하는 바를 버리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법락(法樂)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일체 희론의 온갖 지각[覺]을 버리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방편으로서의 온갖 관찰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유위법에 허물과 우환이 많다는 생각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유위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무위법은 청정하여 멀리 여의었다는 생각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무위법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보살은 일체의 법문에 잘 들어감을 닦아서 즉각 삼세가 공이고 무소유임을 능히 잘 이해하니, 이러한 관찰은 삼세가 공임을 관찰하는 지혜의 힘 때문이다.
017_0724_a_21L何謂十二入空等三昧而不取證ㆍ善入諸禪三昧而不隨禪生ㆍ善入諸通智而不證無漏法ㆍ善入內觀法而不證決定ㆍ善入觀一切衆生空寂而不捨大慈ㆍ善入觀一切衆生無我而不捨大悲ㆍ善入生諸惡趣而非業故生ㆍ善入離欲而不證離欲法ㆍ善入捨所欲樂而不捨法樂ㆍ善入捨一切戲論諸覺而不捨方便諸觀ㆍ善入思量有爲法多過患而不捨有爲ㆍ善入無爲法淸淨遠離而不住無爲菩薩能修一切善入法門卽能善解三世空無所有若作是觀觀三世空智慧力故
그리고 만약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심으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위없이 높은 보리로 회향하였다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삼세의 방편을 능히 잘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다시 비록 과거의 멸진한 법이나 미래의 이르지 않을 법에 대해 관찰하였을지라도 항상 선한 정진을 닦는데 게으르지 않으며, 또한 미래법이 비록 출생함이 없는 것임을 관찰하였을지라도 정진을 버리지 않고 보리로 향하기를 원하며, 또한 현재법이 비록 생각 생각에 소멸하는 것임을 관찰하였을지라도 그 마음은 망실됨이 없이 보리로 나아가는 것,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삼세의 방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 이미 멸했으며 미래에 아직 이르지 않고 현재에 머물지 않으니, 이와 같이 마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고 산괴(散壞)함을 관찰하였을지라도 항상 선근(善根)을 버리지 않고 쌓아서 보리법을 돕는다.
017_0724_b_11L若於三世諸佛所種無量功德悉以迴向無上菩提是名菩薩善觀三世方便復次雖見過去盡法不至未來而常修善精進不懈觀未來法雖無生出不捨精進願向菩提觀現在法雖念念滅其心不忘發趣菩提是名菩薩觀三世方便過去已滅ㆍ未來未至ㆍ現在不雖如是觀心心數法生滅散壞常不捨聚集善根助菩提法是名菩薩觀三世方便
017_0724_c_01L또한 다시 보살은 일체의 선과 불선, 아(我)와 무아, 실(實)과 부실(不實), 공(空)과 불공(不空), 세제(世諦)와 진제(眞諦), 정정(正定)과 사정(邪定), 유위와 무위, 유루와 무루, 흑법(黑法; 악법)과 백법(白法; 선법), 생사와 열반을 관찰해서 법계(法界)의 성품이 일상(一相)이자 무상(無相)이라 하듯이 이 중에 무상이라고 이름지을 만한 법도 없고 또한 무상이라고 여길만한 어떤 법도 없다면, 이를 일컬어 일체법인(一切法印)으로 파괴할 수 없는 ‘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 중에는 역시 인상(印相)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진실된 지혜의 방편인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것을 배우고, 마땅히 이와 같은 것을 행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행하는 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보살마하살의 지혜를 수행하는 마음에는 행한 바가 없으니, 이는 바로 법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를 구족하는 것이다.
017_0724_b_21L復次菩薩觀一切善不善ㆍ我無我ㆍ實不實ㆍ空不空ㆍ世諦眞諦ㆍ正定邪定ㆍ有爲無爲ㆍ有漏無漏ㆍ黑法白法ㆍ生死涅槃如法界性一相無此中無法可名無相亦無有法以爲無相是則名爲一切法印不可壞於是印中亦無印相是名眞實智慧方便般若波羅蜜發菩提心菩薩摩訶薩應如是學ㆍ應如是行如是行者卽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菩薩摩訶薩修行智慧心無所行法性淨是則具足般若波羅蜜

10. 여실법문품(如實法門品)
017_0724_c_09L發菩提心經論如實法門品第十
017_0725_a_01L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 육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일곱 가지의 법을 여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일곱 가지 법인가?
첫 번째는 악지식(惡知識)을 여의는 것이니, 여기서 악지식이란 이른바 사람들로 하여금 지극한 믿음과 크나큰 욕망과 뛰어난 정진을 버리게 하고 온갖 잡행(雜行)을 쌓도록 하는 자를 말한다. 두 번째는 여색과 탐욕, 기호에 대한 욕망, 세상 사람과 익숙해서 함께 집착함을 여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릇된 지각[惡覺]을 여의는 것이니, 이는 스스로 겉모습을 관찰하면서 탐내고 애착하고 아끼고 중시해서 참으로 오래 지닐 만한 것이라고 집착해 수호함을 여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진에(瞋恚)와 난폭하고 방자함[暴慢]과 질투ㆍ시기를 여의는 것이니, 이는 쟁론이나 송사를 일으켜 착한 마음을 괴란(壞亂)시키는 것을 여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방일ㆍ교만ㆍ해태를 여의는 것이니, 이는 곧 스스로 사소한 선(善)에 우쭐대며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을 여의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외도의 논서나 세속의 글과 노래, 꾸며낸 언사를 여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가 아니라면 마땅히 찬송(讚誦)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마땅히 사견과 악견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일곱 가지의 법은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하는 것이니, 여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 외에 더 이상 불도(佛道)를 깊이 장애하는 다른 어떤 법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설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멀리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위없이 높은 보리를 신속히 획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일곱 가지의 법을 닦아야 할 것이다.
017_0724_c_10L若善男子善女人修習六波羅蜜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應離七法何等爲七一者離惡知識惡知識者所謂教人捨離上信ㆍ上欲ㆍ上精進衆雜行二者離於女色ㆍ貪著嗜欲ㆍ狎習世人而與執事三者離於惡覺觀形容貪惜愛重染著守護謂可久四者離於瞋恚暴慢嫉忌興起諍訟壞亂善心五者離於放逸憍慢懈自恃小善輕蔑於人六者離於外道書論及世俗文頌綺飾言辭非佛所說不應讚誦七者不應親近邪見惡見如是七法所應遠離如來說言:不見更有餘法深障佛道如此七法是故菩薩應當遠離若欲疾得無上菩提當修七法
무엇이 일곱 가지의 법인가?
첫 번째, 보살은 마땅히 선지식(善知識)과 가까이해야 할 것이니, 여기서 선지식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 혹은 성문들로서 보살로 하여금 깊은 법장(法藏)인 온갖 바라밀에 능히 머물게 하는 이도 역시 보살의 선지식이다. 두 번째, 보살은 마땅히 출가(出家)와 가까이하고 응당 아란야(阿蘭若, aranya:寂靜)의 법과 가까이해야 하며, 여색이나 온갖 기호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일을 추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보살은 마땅히 ‘겉모습은 마치 분토(糞土)와 같은 것으로 다만 더러움과 냄새만이 치성할 뿐이며, 바람ㆍ추위ㆍ더위ㆍ피로서 탐착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관찰해야 할 것이며, 날마다 죽음에 대해 널리 염리(厭離)할 것을 생각하면서 정근ㆍ수도해야 한다. 네 번째, 보살은 마땅히 항상 화합ㆍ인내ㆍ유순ㆍ공경을 행해야 할 것이며, 또한 다른 이를 부지런히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욕 중에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 보살은 마땅히 정진을 닦아 쌓고 항상 참괴(慚愧)를 내어서 스승을 존경하고 받들며, 궁핍하고 하열한 이를 불쌍히 여기며, 재앙과 괴로움을 당한 이를 보면 몸으로 그를 대신해야 한다. 여섯 번째, 보살은 마땅히 방등(方等)인 대승의 온갖 보살장[藏]을 닦아 익히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수지하고 독송해야 할 것이다. 일곱 번째, 보살은 마땅히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가까이하면서 닦아 익혀야 할 것이니, 그것은 이른바 실상(實相)은 일상(一相)이자 무상(無相)이라는 것이다. 만약 모든 보살이 위없이 높은 보리를 신속하게 증득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법과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다.
017_0725_a_03L何謂爲七一者菩薩當親近善知識善知識者所謂諸佛及諸菩薩若聲聞人能令菩薩住深法藏諸波羅蜜亦是菩薩善知識也二者菩薩應當親近出家亦當親近阿蘭若法離於女色及諸嗜欲不與世人而共從事三者菩薩應當自觀形如糞土但盛臭穢風寒熱血無可貪著日當就死宜思厭離精勤修道四者菩薩應當常行和忍恭敬柔順亦勸化他人令住忍中五者菩薩應當修集精進常生慚愧敬奉師長憐愍窮下見厄苦者以身代之六者菩薩應當修習方等大乘諸菩薩藏所讚法受持讀誦七者菩薩應當親近修習第一義諦所謂實相一相無若諸菩薩欲疾逮得無上菩提應當親近如是七法
017_0725_b_01L또 다시 만약에 어떤 이가 무량의 아승기겁 동안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고 쌓아서 얻은 바가 있기 때문에 보리심을 발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러한 이는 생사를 여의지도 못하고 보리로 향하지도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앋은 바가 있는 마음과 아울러 온갖 취득한 견해[見], 즉 음(陰)ㆍ계(界)ㆍ입(入)의 견해와 아견(我見)ㆍ인견(人見)ㆍ중생견(衆生見)ㆍ수명견(壽命見)과 자ㆍ비ㆍ희ㆍ사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 등에 대한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불(佛)ㆍ법(法)ㆍ승(僧)에 대한 견해와 열반에 대한 견해이니, 이와 같은 유소득의 견해[有所得見]는 바로 집착의 마음이며, 집착을 이름하여 사견(邪見)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사견을 갖은 이는 삼계를 윤회하면서 출요(出要열반)를 영원히 여의는데, 이러한 견해에 대해 집착하는 이도 마찬가지라서 출요를 영원히 여의어서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어떤 이가 보리심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 마음이 공상(空相)임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017_0725_a_20L復次若人發菩提心以有所得故於無量阿僧祇劫修集慈悲喜捨ㆍ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當知是人不離生死ㆍ不向菩提何以故有所得心及諸得見ㆍ陰界入見ㆍ我見人見衆生見壽命見ㆍ慈悲喜捨施戒忍進定智等見取要言佛法僧見及涅槃見如是有所得見卽是執著心執著者是名邪見以者何邪見之人輪轉三界永離出是執著者亦復如是永離出要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若人發菩提心應當觀察是心空相
어떠한 것이 바로 이 마음이며, 무엇을 공상이라 하는가?
마음[心]이란 이름하여 의식이니 바로 식음(識陰)ㆍ의입(意入)ㆍ의계(意界)를 말한다. 그리고 마음이 공상이라고 함은 마음에는 마음의 상(相)도 없고 짓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마음의 상은 공(空)해서 짓는 자도 없으며 짓게 하는 자도 없다. 만약 짓는 자가 없다고 한다면 짓는 상[作相]도 없을 것이니,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법을 요해(了解)하였다면 일체법에 대해 집착함이 없을 것이다. 나아가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온갖 선악에 대해 알지라도 과보가 없을 것이며, 수습(修習)한 ‘자(慈)’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아(我)’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수습한 ‘비(悲)’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중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수습한 ‘희(喜)’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수명’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습한 ‘사(捨)’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인(人)’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비록 보시를 행하였을지라도 시물(施物)에 대한 견해(집착)가 없을 것이며, 비록 지계를 행하였을지라도 청정한 마음에 대한 견해가 없을 것이며, 비록 인욕을 행하였을지라도 중생에 대한 견해가 없을 것이며, 비록 정진을 행하였을지라도 욕망을 여읜 마음이 없을 것이며, 비록 선정을 행하였을지라도 악을 제거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비록 지혜를 행하였을지라도 마음에 행한 바가 없을 것이다.
017_0725_b_09L何等是心云何空相心名意識卽是識陰ㆍ意入ㆍ意界心空相者心無心相亦無作何以故是心相空無有作者ㆍ無使作者若無作者則無作相若菩薩解了如是法者於一切法卽無執著執著故於諸善惡解無果報於所習慈了無有我於所習悲了無衆生所習喜了無有命於所習捨了無有雖行布施不見施物雖行持戒不見淨心雖行忍辱不見衆生雖行精進無離欲心雖行禪定無除惡心行智慧心無所行
017_0725_c_01L말하자면 일체의 인연에서 모두 지혜를 낳지만, 그렇더라도 지혜에 집착하지 않으며, 지혜를 증득하지 않으며, 지혜에 대한 견해가 없다. 즉 수행자는 이와 같이 지혜를 수행하지만 닦은 바도 없고 또한 닦지 않은 바도 없다. 그럼에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6도(6바라밀)를 나타내 행하여서 내적으로 청정하다. 수행자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능히 잘 닦으면 한 찰나에 심은 선근의 복덕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고 가없으니, 백천만 억의 아승기겁으로도 그것을 다할 수 없어서 자연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017_0725_b_21L於一切緣皆是智而不著智慧ㆍ不得智慧ㆍ不見智慧行者如是修行智慧而無所修亦無不修爲化衆生現行六度而內淸淨行者如是善修其心於一念頃所種善根福德果報無量無邊百千萬億阿僧祇劫不可窮盡自然得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

11. 공무상품(空無相品)
017_0725_c_05L發菩提心經論空無相品第十一

옛날 한때 부처님께서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에 머물러 계셨는데, 많은 대중들과 헤아릴 수 없는 집회에 함께 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정법을 널리 선포하시면서 모든 대중들에게 이렇게 고하셨다.
“제법은 성품이 없어서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다[無所有]는 여래의 설법은 일체의 세간이 참으로 믿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색(色)의 속박도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해탈도 없으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속박도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해탈도 없기 때문이다.”
017_0725_c_06L往昔一時佛在迦蘭陁竹林與諸大衆無量集會爾時世尊斑宣正法諸大衆:如來所說諸法無性ㆍ空無所一切世閒所難信解何以故色無縛無解受想行識無縛無解
즉, 색은 무상(無相)으로서 온갖 상을 여읜 것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으로서 온갖 상을 여읜 것이며, 색은 무념(無念)으로서 온갖 생각을 여읜 것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념으로서 온갖 생각을 여읜 것이며,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도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것을 취하는 일도 없고 버리는 일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청정함도 없으며,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으며, 향하는 일도 없고 등지는 일도 없으며, 어두움도 없고 밝음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차안(此岸)도 없고 피안(彼岸)도 없으며, 그 중간으로 유전하는 일[中流]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속박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속박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다. 공을 무상이라고도 이름하고 무상 역시 공이니, 이것을 일컬어 ‘공’이라고 한다. 또한 공을 무념이라고도 이름하고 무념 역시 공이니, 이것을 일컬어 ‘공’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이라는 생각 역시 공이니, 이것을 일컬어 ‘공’이라고 한다. 공 속에서는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나아가 공상(空相)도 역시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한 것이다.
017_0725_c_11L色無相離諸相受想行識無相離諸相色無念離諸念受想行識無念離諸念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亦復如無取無捨ㆍ無垢無淨ㆍ無去無來ㆍ無向無背ㆍ無闇無明ㆍ無癡無慧非此岸ㆍ非彼岸ㆍ非中流是名無縛無縛故空空名無相無相亦空是名爲空空名無念無念亦空是名爲空空念亦空是名爲空空中無善無惡乃至亦無空相是故名空
017_0726_a_01L보살이 만약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성품이 이와 같다고 안다면 즉시 취착(取著)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법인(法忍)’17)이라고 한다. 보살은 바로 이와 같은 인(忍) 때문에 수기(授記)의 인(忍)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모든 불자(佛子)들이여, 이는 비유하자면 보살이 허공을 우러러 써서 여래의 십이부경(十二部經)을 모두 서사(書寫)한 것과 같다.18) 헤아릴 수 없는 겁을 지나 불법이 이미 멸해서 법을 구하는 이들도 보고 들은 바가 없었고 중생들은 전도되어 가없는 악을 짓게 되었을 때 다른 지방의 청정한 지혜를 지닌 자가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서 널리 불법을 구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러 허공 중에 쓰인 글자를 보고 문자의 획이 분명하여 바로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독송ㆍ수지하고 설한 바대로 행하였고 널리 분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였다. 다시 말해 이같이 허공을 쓴 자는 허공의 글자[空字]를 알아채서 사람들이 사의(思議)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널리 전하여 수습ㆍ수지하게 함으로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계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던 것이다.
017_0725_c_21L菩薩若如是知陰ㆍ界ㆍ入性卽不取著是名法忍菩薩如是忍故得授記忍諸佛子譬如菩薩仰書虛空悉寫如來十二部經經無量劫佛法已滅求法之人無所見聞生顚倒造惡無邊復有他方淨智慧憐愍衆生廣求佛法行到於此見空中字文畫分明卽便識之讀誦受持如所說行廣演分別利益衆生書空者ㆍ識空字人可思議不而得宣傳修習受持引導衆生令離繫縛
모든 불자들이여,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과거세 시절 보리의 도를 구할 적에 삼십삼억 구만 팔천의 온갖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다 전륜성왕이 되어서 일체의 오락 기구로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 무리에게 공양하였지만 얻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수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다시 팔만 사천억 구만의 벽지불을 만나서 역시 네 가지 일[四事]19)로 그 형체가 다하도록 공양하였으며, 그렇게 한 그 이후 다시 620만 12601분의 부처님을 만났는데, 그 때에도 모두 전륜성왕이 되어서 일체의 오락 기구를 그 형체가 다하도록 공양하였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이후에는 칠보(七寶)의 탑을 세워 사리(舍利)를 공양하였고, 그 후 부처님께서 출세하실 적에는 받들어 영접하면서 정법륜(正法輪)을 굴릴 것을 권청하였다. 이와 같이 백천만 억의 온갖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이 모든 여래께서는 다 공법(空法) 중에서 온갖 법의 상을 설하셨으나 이미 얻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역시 또한 수기를 얻지 못하였다.
017_0726_a_08L佛子如來說言過去世時求菩提道得値三十三億九萬八千諸佛爾時皆爲轉輪聖王以一切樂具供養諸佛及弟子衆以有所得故不得授記於後復値八萬四千億九萬辟支佛亦以四事盡形供養過是以後復値六百二十萬一千二百六十一佛時皆爲轉輪聖王以一切樂具盡形供養諸佛滅後起七寶塔供養舍利後佛出世奉迎勸請轉正法輪供養如是百千萬億諸佛是諸如來皆於空法中說諸法相以有所得故亦不得授記
017_0726_b_01L그러다가 마침내 연등불(然燈佛)께서 흥기하심을 만날 수 있었으니,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듣자 바로 일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였으며, 이 무생법인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수기를 증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등의 여래께서는 공법 중에서 온갖 법의 상을 설하여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중생을 제도하였지만 결코 설한 바가 없고 또한 제도한 바도 없었다. 또한 모니(牟尼) 세존께서도 세간에 나오시어 공법 중에 문자가 있음을 설해서 가르침의 이익과 기쁨을 보여 널리 수행(受行)을 얻게 하였지만 가르쳐 보인 바도 없고 수행(受行)도 역시 없었다.
017_0726_a_21L如是展轉乃至得値然燈佛見佛聞法卽得一切無生法忍是忍已乃得授記然燈如來於空法中說諸法相度脫無量百千衆生無所說亦無所度牟尼世尊興出於於空法中說有文字示教利喜普得受行而無所示亦無受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러한 법성의 상은 다 공이라서 서사(書寫)하는 자도 공이고 알아채는 자도 공이며, 설하는 자도 공이고 이해하는 자도 역시 공이다. 그것들은 본래부터 공으로서 미래도 역시 공이고 현재도 역시 공이다. 그럼에도 모든 보살은 만선(萬善)의 방편력을 쌓았기 때문에 정근할 때 게으르지 않고 공덕의 성취가 원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었다. 이는 실로 대단히 어렵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즉 무법(無法) 중에서 온갖 법의 상을 설하였으며, 무득(無得) 중에서 유득(有得)의 법을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일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로서 헤아릴 수 없는 지혜에 의해서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뿐이지 사량(思量)으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 마음을 낸 보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보리를 우러러 공경하고 사랑하고 즐기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점차 능히 그것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017_0726_b_04L當知是法性相盡空書者亦空ㆍ識者亦空ㆍ說者亦空ㆍ解者亦空從本來空ㆍ未來亦空ㆍ現在亦空而諸菩薩積集萬善方便力故精勤不懈功德成滿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此實甚難不可思於無法中說諸法相於無得中說有得法如此之事諸佛境界以無量智乃可得解非是思量所能得知發意菩薩誠心敬仰愛樂菩提信佛語故漸能得入
무엇을 일컬어 믿음[信]이라고 한 것인가?
4제(諦)를 믿고 관찰하여 온갖 번뇌와 망견(妄見)의 결박을 제거함으로써 아라한을 증득하는 것이고, 12인연을 믿고 관찰하여 무명에 의해 일어난 온갖 행을 소멸하고 제거함으로써 벽지불을 증득하는 것이며, 4무량심과 육바라밀을 믿고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니, 이것을 신인(信忍)이라고 한다.20)
그러나 중생은 시작도 없는 생사 중에서 상(相)을 취하는데 집착하여 법성을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먼저 자신의 오음(五陰)이 가명(假名)의 중생이라서 이 가운데에는 ‘나’도 없고 중생도 없다고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017_0726_b_14L云何爲信信觀四諦除諸煩惱妄見結縛得阿羅漢信觀十二因緣滅除無明生起諸行得辟支佛信修四無量心ㆍ六波羅蜜得耨多羅三藐三菩提是名信忍衆生於無始生死取相執著不見法性先觀察自身五陰假名衆生是中無我無有衆生
017_0726_c_01L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나’가 존재한다면 나는 마땅히 자재(自在)해야 하겠지만, 모든 중생은 항상 생ㆍ노ㆍ병ㆍ사에 의해 침해당하여 자재를 획득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무아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무아는 바로 짓는 자가 없는 것이고 짓는 자가 없음은 또한 받는 자가 없는 것이라서 법성의 청정이 여실히 상주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관찰하더라도 아직은 구경에 이를 수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순인(順忍)21)이라고 한다. 즉 보살은 순인을 닦아 믿고 나서 오래지 않아 최상의 법인(法忍:무생법인)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017_0726_b_21L何以故若有我者我應自在而諸衆生常爲生老病死之所侵害不得自在當知無我無我卽無作者無作者亦無受者法性淸淨如實常住如是觀察未能究竟是名順菩薩修信順忍已不久當成最上法忍

12. 공덕지품(功德持品)
017_0726_c_04L發菩提心經論功德持品第十二

보살은 무상(無相)을 닦는 마음을 구족했을지라도 마음은 일찍이 그러한 지은 업[作業]에 머무는 일이 없으며, 보살은 모든 업의 상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업을 짓는다. 즉, 선근을 닦고 보리를 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위(有爲)를 버리지 않으며, 모든 중생들을 위해 대비를 닦고자 하였기 때문에 무위(無爲)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참되고 미묘한 지혜를 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생사를 버리지 않으며, 가없는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보살마하살이 깊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0726_c_05L菩薩具足修無相心而心未曾住於作業是菩薩於諸業相知而故作修善根求菩提故不捨有爲爲諸衆生修大悲故不住無爲爲一切佛眞妙智故不捨生死爲度無邊衆生令無餘故不住涅槃是名菩薩摩訶薩深心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
017_0727_a_01L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은 열 가지의 법을 성취하여 위없이 높은 보리에서 끝내 물러나지 않는다.
무엇을 일컬어 열 가지 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보살이 위없이 높은 보리의 마음을 깊이 일으켜서 중생도 발심(發心)하도록 교화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항상 즐거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자신이 가진 진귀한 것으로써 보시하고 공양하여 선근을 깊이 심는 것이고, 세 번째는 법을 구하기 위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법사(法師)에게 공양하고 법을 듣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며, 네 번째는 만약 비구의 승단이 둘로 깨어져서 서로 쟁송(諍訟)을 일으키고 서로가 서로에게 과오를 범하는 것을 볼 경우 부지런히 방편을 구하여 그들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만약 국토의 사악함이 두드러져 불법(佛法)을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될 경우 부처님의 설(說)을 독송하거나 나아가 한 가지 게송이라도 독송하여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함으로서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마음으로 법을 지키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두려워하고 고뇌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을 구호하기 위해 무외(無畏)로써 보시하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부지런히 수행을 일으킬 때 이와 같은 따위의 방등(方等) 대승의 매우 깊고도 심오한 경법(經法)인 온갖 보살장(菩薩藏)을 구하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이러한 법을 획득하고 나서 수지ㆍ독송하여 거기서 설한 바대로 행하고 설한 바대로 머무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스스로 법에 머물고 또한 능히 권유하고 인도해서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며, 열 번째는 법 가운데 들어간 후에 능히 해설해서 가르침의 이익과 즐거움을 보여 중생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보살은 바로 이러한 열 가지 법을 성취하므로 위없이 높은 보리에서 끝내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017_0726_c_12L諸佛菩薩成就十法終不退失無上菩何謂爲十一者菩薩深發無上菩提之心教化衆生亦令發心二者常樂見佛以己所珍奉施供養深種善三者爲求法故以尊敬心供養法聽法無厭四者若見比丘僧壞爲二部互起諍訟共相過惡勤求方便令其和合五者若見國土邪惡增上ㆍ佛法欲壞能讀誦說乃至一偈令法不絕專心護法不惜身命六者見諸衆生恐畏苦惱爲作救護施以無畏七者發勤修行求如是等方等大乘甚深經法諸菩薩藏八者得是法已受持讀誦如所說行ㆍ如所說住九者自住於法亦能勸導令多衆生入是法中十者入法中已能爲解說示教利喜開悟衆生菩薩成就如是十法於無上菩提終不退失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이 경전(발보리심경)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전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니, 이른바 일체 대자비의 종자를 능히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경전은 속박되어 있는 중생을 능히 깨달음으로 인도해서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이 경전은 능히 보리로 향하려고 하는 자들을 위해서 생인(生因)을 짓는 것이며, 또한 이 경전은 일체 보살의 무동(無動)의 행을 능히 성취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 경전은 능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호념(護念)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위없이 높은 보리를 부지런히 닦아 쌓으려는 자라면 마땅히 이와 같은 경전을 널리 유포하여 염부제(閻浮提)에서 단절되지 않게 함으로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이 경전을 들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이러한 경을 듣는 자가 있다면, 그러한 모든 이들은 모두 다 커다란 불가사의 대지혜취(大智慧聚)를 증득할 것인데, 그것의 복덕과 과보는 참으로 칭하여 헤아릴 수 없다.
017_0727_a_07L菩薩應當如是修行此經如是經典不可思議謂能生一切大慈悲種是經能開悟引導具縛衆生令其發心是經能爲向菩提者而作生因是經能成一切菩薩無動之行是經能爲過去未來現在諸佛之所護念若有善男子善女人欲勤修集無上菩提當廣宣流布如是經典於閻浮提使不斷絕無量無邊衆生得聞是經若有善男子善女人聞是經者是諸人等悉得猛利不可思議大智慧聚不可稱量福德果報
017_0727_b_01L어째서 그러한가?
이 경전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청정한 혜안(慧眼)을 능히 열어 주는 것이며, 부처님의 종자[佛種]를 상속하여 능히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헤아릴 수 없는 고뇌의 중생을 능히 구제하는 것이며, 일체의 무명의 어리석음[癡闇]을 능히 비추는 것이고, 네 가지 마(魔)22)와 마에 의한 온갖 업[魔業]을 능히 깨뜨리는 것이며, 일체 외도의 사견을 능히 허무는 것이고, 일체 번뇌의 크나큰 불을 능히 소멸하는 것이며, 인연에 의해 생기한 온갖 행을 능히 소진시키는 것이고, 간탐(慳貪)ㆍ파괴ㆍ진에ㆍ해태ㆍ난의(亂意)ㆍ우치 등의 여섯 가지 극히 위중한 병을 능히 단절하는 것이며, 업장(業障)ㆍ보장(報障)ㆍ법장(法障)ㆍ번뇌장ㆍ제견장(諸見障)ㆍ무명장(無明障)ㆍ지장(智障)ㆍ습장(習障)을 능히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이 경전은 능히 일체의 악법을 소멸하여 남김이 없게 하는 것이며, 능히 일체의 선법을 타오르게 하여 더욱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이러한 경을 듣고 나서 기뻐하고 사랑하고 즐기면서 희유(稀有)의 마음을 일으키는 이가 있다면, 이러한 이는 이미 일찍이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부처님들께 공양하여 깊이 선근을 심은 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17_0727_a_19L所以者何是經能開無量淸淨慧眼能令佛種相續不斷能救無量苦惱衆生能照一切無明癡闇能破四魔及諸魔業能壞一切外道邪見能滅一切煩惱大火能消因緣生起諸行能斷慳貪ㆍ破戒ㆍ瞋恚ㆍ懈怠ㆍ亂意ㆍ愚癡六極重病能除業障ㆍ報障ㆍ法障ㆍ煩惱障ㆍ諸見障ㆍ無明障ㆍ智障ㆍ習障取要言之此經能令一切惡法消滅無餘能令一切善法熾然增長若有善男子善女人聞是經已歡喜愛樂生希有心當知是人已曾供養無量諸佛深種善根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경은 바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행하셨던 바이니,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이러한 경을 듣고서 마땅히 스스로 즐거워하며 크나큰 좋은 이익[善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베끼고 독송하는 자가 있다면, 이러한 이가 획득하는 복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7_0727_b_08L所以者何此經是三世諸佛之所履行是故行者得聞是經當自慶幸獲大善利若有書寫讀誦此經當知此人所獲福報無量無邊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경의 소연(所緣)이 가없기 때문이며, 헤아릴 수 없는 대서원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일체의 중생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위없이 높은 보리를 장엄하기 때문이니, 획득된 복의 과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한량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능히 그 뜻[義趣]을 알아서 설한 대로 수행한다면, 그 복의 과보는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 아승기겁 동안 다함없는 지혜로 설한다 해도 역시 능히 다할 수 없을 것이다.
017_0727_b_12L所以者何此經所緣無邊故興發無量大誓願故攝受一切諸衆生故莊嚴無上大菩提故所獲福報亦復如是無有限量若能解其義趣如說修行一切諸佛於阿僧祇劫無盡智說其福報亦不能盡
017_0727_c_01L또한 어떤 법사가 이 경을 설하였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경을 설한 곳에 탑을 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진실한 정법이 출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경이 국토ㆍ성읍(城邑)ㆍ취락ㆍ사묘(寺廟)ㆍ정사(精舍)에 따라 존재하는 경우,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속에 바로 법신이 있으리라. 혹은 어떤 사람이 향화ㆍ기락(伎樂)ㆍ현회(懸繪, 그림을 내거는 것)ㆍ번기[幡]ㆍ일산ㆍ가패(歌唄:노래)로써 공양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공경하였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사람은 이미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받았을 터인데 하물며 경을 구족하게 수지한 자이겠는가? 이 모든 이들은 공덕과 지혜의 장엄을 성취하여 미래세에 마땅히 수기를 획득할 것이며, 결정코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017_0727_b_17L若有法師說是經處當知是中便應起塔以故是眞實正法所出生處故是經隨在國土城邑聚落寺廟精舍當知是中卽有法身若人供養香花伎樂ㆍ懸繒幡蓋ㆍ歌唄讚歎ㆍ合掌恭敬當知是人已紹佛種況復具足受持經者是諸人等成就功德智慧莊嚴於未來世當得授記決定當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發菩提心經論卷下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정진의 뜻으로, 심신을 북돋우어 앞뒤의 다섯 가지 바라밀을 쉼없이 닦는 것을 말한다.
  2. 2)삼정취(三定聚, 혹은 三聚正定聚ㆍ邪定聚ㆍ不定聚)의 하나로, 정정취란 항상 정진하여 결국 성불할 종류의 유정을 말하고, 또한 사정취란 타락하여 성불할 수 없는 종류의 유정을 말하며, 부정취는 향상과 타락이 결정되어 있지 않아 인연을 만날 경우에만 성불할 수 있는 종류의 유정을 말한다.
  3. 3)나유타(nayuta)는 수량의 단위로서, 이설이 많으나 구사론 12권에 의하면 10의 12승이라 하며, 항하사는 항하의 모래, 아승기겁(asamkhyeya\kalpa, 혹은 無數劫)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시간으로, 구사론에 의하면 10의 60승이라 하며, 여기서 이 모든 술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4. 4)선나바라밀(dhyna\pramita)의 선나는 선정(禪定)의 뜻으로, 사유수(思惟修)라고도 번역하며, 신역에서는 정려(靜慮)로 번역한다. 즉 지혜를 사유함에 있어 마음이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5. 5)이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持息念, 혹은 數息觀)에 대한 설명이다. 부정관은 탐욕이 많은 중생이 그 몸의 부정한 모습을 관찰하여 탐욕심을 정지시키려는 관법으로, 이를테면 요가의 초보자는 자신이 아끼는 신체 한 부위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것이 부패하여 백골이 드러나고 점차 몸 전체, 나아가 가족ㆍ마을ㆍ나라ㆍ대지에 가득 찬 백골을 관찰하고, 다시 되돌아 자신의 신체 일부를 관찰한다. 그러나 요가에 익숙한 이는 복숭아 뼈를 제거하고 점차 나머지 뼈를 제거하고, 마침내 머리 반쪽의 뼈마저 제거한 다음 그 반쪽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리고 이미 사유를 초월한 요가행자는 그 같은 반쪽의 뼈마저 제거하고 오로지 미간에 의식을 집중할 때 부정관은 성취된다. 그리고 지식념(혹은 안반념, na\apnasati, 혹은 阿那阿波那念)이란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헤아려 산란심을 정지시키려는 관법이다. 즉 호흡의 완급ㆍ잡란이 심신을 산란시키므로 이것의 조절을 통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는 것이다.
  6. 6)8해탈(혹은 背捨)이란 삼계의 번뇌를 버리고 그것의 계박에서 해탈하는 여덟 종류의 선정을 말한다. 첫째,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色想)이 있어 이러한 탐심을 없애기 위하여 부정(不淨)한 푸르죽죽한 어혈 등의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둘째,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은 없지만 이를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 부정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셋째,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청정한 색을 관찰하여 탐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해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해탈이 관행자의 몸에 증득되어[身作證] 구족ㆍ원만하게 되는 것. 넷째~일곱째, 각기 하지의 탐에서 해탈한 무색정의 공무변처ㆍ식무변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 신작증구족주. 여덟째, 멸수상정해탈신작증구족주(滅受想定身作證具足住)멸진정으로, 수ㆍ상 등의 마음을 싫어하여 무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 것이다.
  7. 7)색계 네 정려 중의 첫 단계로서 각(신역의 尋)ㆍ관(신역의 伺)ㆍ희ㆍ낙만이 작용하는 선정이다.
  8. 8)내등정(심ㆍ사의 동요를 떠난 청정한 믿음)과 희ㆍ낙ㆍ등지를 본질로 하는 선정이다.
  9. 9)행사(行捨)ㆍ정념(正念)ㆍ정혜(正慧)ㆍ수락(受樂)ㆍ등지를 본질로 하는 선정이다.
  10. 10)행사청정(行捨淸淨)ㆍ염청정(念淸淨)ㆍ비고락수(非苦樂受)ㆍ등지를 본질로 한다.
  11. 11)세간이 좋아하여 따르고, 싫어하여 배척함으로써 능히 사람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는 것으로, 이익[利]ㆍ명예[譽]ㆍ칭찬[稱]ㆍ즐거움[樂]과 쇠망[衰]ㆍ훼손[毁]ㆍ나무람[譏]ㆍ괴로움[苦]을 말하며, 혹은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와 색ㆍ향ㆍ미ㆍ촉의 4미(微)를 말한다. 즉 사람의 몸은 4대의 일시적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4대 역시 4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총칭하여 여덟 가지 법이라고 하였다.
  12. 12)순서대로 천안통(멀리 떨어져 있거나 미세한 색상을 보는 것)ㆍ천이통(멀리 떨어져 있거나 미세한 소리를 듣는 것)ㆍ타심통ㆍ숙명통ㆍ누진통(漏盡通:번뇌를 모두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13. 13)초지는 보살10지 중의 첫 번째 단계이며, 살바야지(혹은 薩伐若ㆍ薩婆若那, sarvaj:一切智)는 열 번째 단계이다. 보살의 10지에는 3승에 공통하는 10지(乾慧地ㆍ性地ㆍ八忍地ㆍ見地ㆍ簿地ㆍ離欲地ㆍ已辦地ㆍ支佛地ㆍ菩薩地ㆍ佛地)와 대승보살의 10지(歡喜地ㆍ離垢地ㆍ發光地ㆍ焰慧地ㆍ難勝地ㆍ現前地ㆍ遠行地ㆍ不動地ㆍ善慧地ㆍ法雲地)가 있는데, 여기서의 10지는 본 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볼 때 전자로 생각된다.
  14. 14)자ㆍ비ㆍ희ㆍ사의 4무량심을 말하며, 이러한 네 마음은 범천에게 생겨나는 행업이기 때문에 범행이라 하였다.
  15. 15)사성제와 사제의 진리성인 고제(苦諦)의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 집제(集諦)의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 멸제(滅諦)의 멸(滅)ㆍ정(淨)ㆍ묘(妙)ㆍ리(離), 도제(道諦)의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의 16행상을 말하였다.
  16. 16)중생(sattva)ㆍ아(tman)ㆍ인(pudgala)ㆍ수명(jva)은 바로 금강경에서의 4상(想)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다 같이 경험과 윤회의 형이상학적 주체를 의미한다. 즉 자아를 지닌 중생은 현세에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존재하며, 나아가 그것은 윤회의 주체(푸드가라)로서 내세로 전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네 가지 개념은 유기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이다.
  17. 17)법인의 인은 인허(忍許)의 뜻으로, 즉 지금까지 믿기 어렵던 이치를 잘 받아들여 번뇌가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소승에서는 사제의 이치를 관하여 인가하는 것(苦法忍 내지 道法忍)이지만, 대승 보살도에서는 초지 혹은 7지ㆍ8지ㆍ9지의 단계에서 바로 이 같은 무상ㆍ무념ㆍ무생의 법을 인가하여 신수(信受)하는 것(이를 무생법인이라 함)을 말한다.
  18. 18)12부경이란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그 성격과 형식에 따라 열두 가지로 나눈 것으로, 숫타(sutta:契經, 석존의 가르침을 간결하게 정리한 산문체의 경전)ㆍ게야(geyya:應頌 또는 重頌, 숫타의 내용을 시로 반복한 형식)ㆍ베야카라나(veyykarana:記說, 간결한 문답형식)ㆍ가타(gth:시구의 형식)ㆍ우다나(udna:自說 또는 感興語, 감흥적으로 설한 시)ㆍ아티붓타카(itivuttaka:如是語, 게야의 특수한 형식, 혹은 本事, 불제자의 과거세 이야기)ㆍ자타카(jtaka:本生, 석존의 전생담)ㆍ베달라(vedalla:方廣, 중층적인 교리문답)ㆍ앗부타담마(abbutadhamma:未曾有法, 희유한 공덕에 관한 이야기)ㆍ니다나(nidna:因緣, 계율 조문의 성립 사정에 관한 이야기)ㆍ아바다나(avadna:譬喩, 인과응보와 관련된 불제자의 과거세 이야기)ㆍ우파데샤(upades´a:論議, 교리의 해석) 등을 말한다.
  19. 19)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탕약, 혹은 의복ㆍ음식ㆍ산화(散華)ㆍ태우는 향[燒香], 혹은 방사(房舍)ㆍ음식ㆍ의복ㆍ산화ㆍ태우는 향 등을 말한다.
  20. 20)6인(信忍ㆍ法忍ㆍ修忍ㆍ正忍ㆍ無垢忍ㆍ一切智忍)의 하나일 경우, 별교(別敎)의 보살이 10주위(住位)에서 공관을 닦아 일체법이 공적하다고 믿어 인가하는 것이며, 혹은 5인(伏忍ㆍ信忍ㆍ順忍ㆍ無生忍ㆍ寂滅忍)의 하나일 경우, 관하는 마음이 진전되어 증득할 법을 믿고 의심치 않는 초지ㆍ2지ㆍ3지의 보살위를 말한다.
  21. 21)5인의 세 번째 단계로서, 신인에 의해 보다 수승한 지혜를 연마하여 다음의 단계인 무생인(無生忍)의 증과(證果)에 수순하는 4ㆍ5ㆍ6지의 보살을 말하며, 혹은 10인(音響忍ㆍ順忍ㆍ無生忍ㆍ如幻忍ㆍ如焰忍ㆍ如夢忍ㆍ如響忍ㆍ如影忍ㆍ如化忍ㆍ如空忍)의 하나로서 지혜로 온갖 법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진리에 수순하는 것이고, 혹은 3인(音響忍ㆍ柔順忍ㆍ無生法忍)의 하나이다. 지혜의 마음은 유순하여 능히 진리에 수순하기 때문에 유순인이며, 본 논에서는 신인ㆍ수인ㆍ무생법인 등의 3인을 설하고 있다.
  22. 22)능탈명(能奪命)ㆍ장애ㆍ요란(擾亂)ㆍ파괴 등으로도 번역된다. 인명을 해치고 좋은 일을 장애하는 것으로, 번뇌마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자재천마(自在天魔) 등이 그것이다. 즉, 탐 등의 번뇌는 능히 심신을 뇌란하며, 색 등의 오온은 능히 여러 가지의 고뇌를 낳고, 죽음은 능히 사람의 목숨을 끊으며, 자재천의 마왕은 능히 인간의 착한 일을 장애하기 때문에 각각 마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