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達磨法薀足論卷第十二

ABC_IT_K0945_T_012
024_1174_c_01L아비달마법온족론 제12권
024_1174_c_01L阿毘達磨法薀足論卷第十二


존자 대목건련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024_1174_c_02L尊者大目乾連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22. 연기품 ②
024_1174_c_04L緣起品第二十一之餘

어떤 것을 ‘명색(名色)을 반연하여 촉(觸)이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眼]과 빛깔[色]을 반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 생기는데 여기서 이 눈과 빛깔을 말하여 ‘색(色)’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을 바로 ‘명(名)’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명색을 반연하여 눈의 접촉[眼觸]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바로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나아가 뜻[意]과 법(法)을 반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이 생기는데 여기서 모든 의식이 인식하는 물질[色]을 말하여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바로 ‘명’이라 한다. 이와 같은 명색을 반연으로 삼아 뜻의 접촉[意觸]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명색에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4_c_05L云何名色緣觸謂眼及色爲緣生眼三和合故生觸此中眼及色名爲卽彼所生受想行識名爲名如是名色爲緣生眼觸是名名色爲緣觸至意及法爲緣生意識三和合故生此中諸意識所了色名爲色卽彼所生受想行識名爲名如是名色爲緣生意觸是名名色緣觸
또 『교회파륵루나경(敎誨頗勒窶那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파륵루나(頗勒窶那)야, 식(識)을 음식으로 삼기 때문에 후유(後有)를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 식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건달박(健達縛)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갈랄람(羯剌藍)의 자체(自體)와 화합하는 것이니, 이 갈랄람의 자체와 화합하는 것을 바로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그때에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非理作意]와 함께 생긴 명색을 반연하여 어머니의 태속에서 모든 접촉이 일어난다. 이것을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4_c_13L復次『敎誨頗勒寠那經』中佛作是說頗勒寠那識爲食故後有生起此識云何謂健達縛廣說乃至與羯剌藍自體和合此羯剌藍自體和合名爲色卽彼所生受想行識名爲名爾時非理作意俱生名色爲緣母胎藏中諸觸生起是名名色緣觸
024_1175_a_02L또 『교회사저경(敎誨莎底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세 가지 일이 화합하여 어머니의 태속으로 들어가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 식이 끊임없이 어머니의 태속으로 들어가 여기에 의탁하게 되는 태(胎)를 바로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명’이라 하는데 그때에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와 함께 생긴 명색을 반연으로 하여 어머니의 태속에서 모든 접촉이 일어난다. 이것을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4_c_20L復次『敎誨莎底經』中佛作是說三事和合入母胎藏廣說乃至此識無閒入母胎藏此所託胎名爲色卽彼所生受想行識名爲名爾時非理作意俱生名色爲緣母胎藏中諸觸生起是名名色緣六處
또 어떤 사람이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마음이 얽매었기 때문에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악행(惡行)을 짓게 된다. 여기서 몸과 말의 악행을 바로 ‘색’이라 하고 뜻의 악행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이 악행의 명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지옥에 떨어지며 모든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지옥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방생과 귀계(鬼界)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024_1175_a_04L有一類由貪瞋癡纏縛心故造身語意三種惡行此中身語惡行名爲色意惡行名爲名由此惡行名色爲緣身壞命終墮於地獄諸觸生起是名名色緣觸如說地獄傍生鬼界應知亦爾
또 어떤 사람이 사람의 세계[人趣]의 즐거움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며 이 희구로 인하여 사람의 세계를 받을 수 있는 몸과 말과 뜻의 묘행(妙行)을 짓게 된다. 여기서 몸과 말의 묘행을 바로 ‘색’이라 하고 뜻의 묘행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이 묘행의 명색을 반연으로 삼는 까닭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며 모든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명색에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사람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 내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024_1175_a_10L復有一類於人趣樂繫心希求因此希求造能感人趣身語意妙行此中身語妙行名爲色意妙行名爲由此妙行名色爲緣身壞命終生於人趣諸觸生起是名名色緣觸說人趣四大王衆天乃至他化自在天應知亦爾
또 어떤 사람이 범중천(梵衆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며 이 희구로 인하여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아서 욕(欲)과 악한 법을 여의고 나아가 초정려(初靜慮)를 두루 갖추어 머무르게 된다.
이 선정 속에서의 모든 몸의 율의[身律儀]ㆍ말의 율의[語律儀]ㆍ생활의 청정함[命淸淨]을 바로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이것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범중천들의 동분(同分) 속에 태어나며 모든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명색에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5_a_16L復有一類於梵衆天繫心悕求因此悕求勤修加行離欲惡不善法乃至初靜慮具足住於此定諸身律儀語律儀命淸淨名爲色卽彼所生受想行識名爲名由此爲身壞命終生梵衆天衆同分中諸觸生起是名名色緣觸
024_1175_b_02L범중천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범보천(梵輔天) 내지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에 있어서도 그 응해 옴에 따라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촉(觸)은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것은 이른바 명색(名色)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이 모양[相]에 의지한다면 명신(名身)을 시설하겠지만 이 모양이 만일 없다면 증어(增語)의 접촉[觸]을 시설할 수 있다 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024_1175_a_22L如說梵衆天梵輔天乃至非想非非想天隨其所應當知亦爾復次『大因緣經』中尊者慶喜問佛諸觸爲有緣不佛言有緣此謂名色廣說乃至若依止此相施設名身此相若無爲可施設增語觸不也世尊
“만일 이 모양에 의지한다면 색신(色身)을 시설하겠지만 이 모양이 만일 없다면 유대(有對)의 접촉[觸]을 시설할 수 있다 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명신이나 색신이 도무지 없다면 모든 접촉이 있다고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촉은 모두가 명색으로써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촉은 명색을 반연으로 삼고 명색을 의지[依]로 삼으며 명색을 건립(建立)으로 삼는 까닭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5_b_05L若依止此相施設色身此相若無爲可施設有對觸不不也世尊若名色身都無所有爲可施設有諸觸不不也世尊是故慶喜諸觸皆以名色爲緣是名名色緣觸如是諸觸名色爲緣名色爲依名色爲建立故起等起生等生聚集出現故名名色緣觸
어떤 것을 ‘6처(處)를 반연하여 촉(觸)이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觸]이 생기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또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이 가운데서는 눈을 안의 반연[內緣]으로 삼고 빛깔을 밖의 반연[外緣]으로 삼아 눈의 접촉[眼觸]이 생기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그리고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이 가운데서는 뜻을 안의 반연으로 삼고 법을 밖의 반연으로 삼아 뜻의 접촉[意觸]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5_b_12L云何六處緣觸謂眼及色爲緣生眼三和合故生觸乃至意及法爲緣生意識三和合故生觸是名六處緣復次眼及色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此中眼爲內緣色爲外緣生眼觸乃至意及法爲緣生意識三和合故生觸此中意爲內緣法爲外緣生意觸是名六處緣觸
또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서 눈의 접촉은 눈ㆍ빛깔ㆍ안식으로써 반연을 삼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빛깔을 반연으로 삼아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에서 뜻의 접촉은 뜻ㆍ법ㆍ의식으로써 반연을 삼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5_b_20L復次眼及色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此中眼以眼色眼識爲緣乃至意及法爲緣生意識三和合故生觸此中意觸以意法意識爲緣是名六處緣觸
024_1175_c_02L또 눈과 그리고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서의 눈과 빛깔과 안식은 모두 그것이 접촉은 아니요 세 가지가 화합함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접촉이 생기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서의 뜻과 법과 의식은 모두가 접촉은 아니요 세 가지가 화합함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접촉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촉은 6처를 반연으로 삼고 6처를 의지[依]로 삼으며 6처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5_b_24L次眼及色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此中眼眼識皆非是觸由三和合而有觸生乃至意及法爲緣生意三和合故生觸此中意意識皆非是觸由三和合而有觸生是名六處緣觸如是諸觸六處爲緣六處爲六處爲建立故起等起生等生集出現故名六處緣觸
어떤 것을 ‘촉(觸)을 반연하여 수(受)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觸]이 생기며 이 접촉을 반연으로 삼아 느낌[受]이 생기는 것이요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며 접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느낌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촉을 반연하여 느낌이 생긴다’고 한다.
또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으로서는 혹은 순락수(順樂受)이거나 혹은 순고수(順苦受)이거나 혹은 순불고불락수(順不苦不樂受)가 생기는데 순락수촉(順樂受觸)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즐거운 느낌[樂受]이 생기고 순고수촉(順苦受觸)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로운 느낌[苦受]이 생기며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 생기게 된다.
024_1175_c_09L云何觸緣受謂眼及色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觸爲緣生受乃至意及法爲緣生意識三和合故生觸爲緣故生受是名觸緣受復次眼及色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或順樂受或順苦受或順不苦不樂受樂受觸爲緣生樂受順苦受觸爲緣生苦受順不苦不樂受觸爲緣生不苦不樂受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혹은 순락수이기도 하고 혹은 순고수이기도 하며 혹은 순불고불락수이기도 하다. 순락수촉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즐거운 느낌이 생기고 순고수촉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로운 느낌이 생기며 순불고불락수촉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접촉을 반연하여 느낌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75_c_18L乃至意及法爲緣生意識三和合故生觸或順樂受或順苦受或順不苦不樂受順樂受觸爲緣生樂受順苦受觸爲緣生苦受順不苦不樂受觸爲緣生不苦不樂受是名觸緣受
024_1176_a_02L또 『계경(契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존자 경희(慶喜)가 구사라(瞿史羅) 장자(長者)에게 말하였다.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의 자체(自體)는 저마다 따로따로이어서 순락수(順樂受)로서는 두 가지를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나니, 순락수촉(順樂受觸)이라 하며 이 순락수촉을 반연으로 하여 즐거운 느낌이 생긴다. 순고수(順苦受)는 두 가지를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순고수촉(順苦受觸)이라 하며 이 순고수촉을 반연하여 괴로운 느낌이 생긴다.
024_1175_c_23L復次如契經說尊者慶喜告瞿史羅長者言眼界色界眼識界體各別順樂受二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名順樂受觸此順樂受觸爲緣生樂受順苦受二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名順苦受觸此順苦受觸爲緣生苦受
순불고불락수(順不苦不樂受)로서는 두 가지가 인연이 되어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나니 이를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이라 하며 이 순불고불락수촉을 반연으로 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나머지 다섯 가지 삼계(三界)에서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다.”
이것을 바로 ‘촉을 반연하여 수가 생긴다’고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느낌[受]은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024_1176_a_06L順不苦不樂受二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名順不苦不樂受觸此順不苦不樂受觸爲緣生不苦不樂受餘五三界廣說亦是名觸緣受復次『大因緣經』中尊者慶喜問佛諸受爲有緣不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것은 이른바 접촉[觸]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눈의 접촉[眼觸]이 없다면 눈의 접촉을 반연으로 하는 안[內]의 즐거운 느낌[樂受]과 괴로운 느낌[苦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내는 것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나아가 만일 뜻의 접촉[意觸]이 없다면 뜻의 접촉을 반연으로 하는 안의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내는 것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024_1176_a_11L佛言此緣謂觸廣說乃至若無眼觸有眼觸爲緣生內樂受苦受不苦不樂受不不也世尊乃至若無意觸有意觸爲緣生內樂受苦
“만일 전혀 접촉이 없다면 모든 느낌이 있는 것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느낌은 접촉으로 반연을 삼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것을 바로 ‘촉을 반연하여 수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느낌[受]은 접촉[觸]을 반연으로 삼고 접촉을 의지[依]로 삼으며 접촉을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촉을 반연하여 수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6_a_15L受不苦不樂受不不也世尊若全無觸爲可施設有諸受不不也世尊是故慶喜受無不以觸爲緣是名觸緣受如是諸受觸爲緣觸爲依觸爲建立故等起生等生聚集出現故名觸緣受
024_1176_b_02L어떤 것을 ‘수(受)를 반연하여 애(愛)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觸]이 생기며 접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느낌[受]이 생기고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욕망[愛]이 생긴다.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며 접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욕망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눈의 맛[眼味]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따르면서[隨順]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탐(貪)하고 평등하게 탐[等貪]하며, 가져 간직[執藏]하고 막아 수호[防護]하며, 굳게 집착하고[堅著] 애염(愛染)을 일으키는 것이다.
024_1176_a_20L云何受緣愛謂眼及色爲緣生眼識三和合故生觸觸爲緣故生受受爲緣故生愛乃至意及法爲緣生意識三和合故生觸觸爲緣故生受受爲緣生愛是名受緣愛復次眼味受爲緣故數復於眼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眼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나아가 뜻의 맛[意味]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취온경(取蘊經)』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물질의 맛[色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물질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味]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正慧]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물질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024_1176_b_05L乃至意味受爲緣故數復於意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意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是名受緣復次『取薀經』中佛作是說苾芻當我於色味已審尋思諸有於色已起味或今起味我以正慧審見審彼以色味受爲緣故數復於色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色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나아가 나는 의식의 맛[識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하여 모든 의식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의식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6_b_13L乃至我於識味以審尋思諸有於識或已起味或今起味我以正慧審見審知彼以識味受爲緣故數復於識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識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是名受緣愛
또 『취온경』에서 세존께서는 또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모든 물질[色]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물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물질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물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물질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024_1176_b_18L復次『取薀經』中世尊又說苾芻當知若諸色中都無味者有情不應於色起染以諸色中非都無味是故有情於色起染彼以色味受爲緣故數復於色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色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024_1176_c_02L나아가 만일 모든 의식[識]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의식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의식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의식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의식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6_b_24L乃至若諸識中都無味者有情不應於識起染以諸識中非都無味是故有情於識起染彼以識味受爲緣故數復於識隨順而住由隨順故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是名受緣愛
또 『육처경(六處經)』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눈의 맛[眼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눈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正慧]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눈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024_1176_c_06L復次『六處經』中佛作是說苾芻當知我於眼味審尋思諸有於眼或已起味或今起我以正慧審見審知彼以眼味受爲緣故數復於眼隨順而住由隨順數復於眼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나아가 나는 뜻의 맛[意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하여 모든 뜻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뜻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6_c_12L乃至我於意味已審尋思有於意或已起味或今起味我以正慧審見審知彼以意味受爲緣故復於意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意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名受緣愛
또 『육처경』에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모든 눈[眼]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눈 가운데에는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눈의 맛[眼味]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024_1176_c_17L復次『六處經』中世尊又說苾芻當知若諸眼中都無味者有情不應於眼起染以諸眼中非都無味是故有情於眼起染彼以眼味受爲緣故數復於眼隨順而住由隨順故復於眼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
024_1177_a_02L나아가 만일 모든 뜻[意]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뜻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뜻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뜻에 대하여 맛을 일으키며 그들은 뜻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6_c_23L乃至若諸意中都無味者有情不應於意起染以諸意中非都無味故有情於意起味彼以意味受爲緣數復於意隨順而住由隨順故復於意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是名受緣愛
또 『육처경』에서 세존께서는 다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빛깔의 맛[色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빛깔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그들은 빛깔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빛깔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빛깔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024_1177_a_05L復次『六處經』中世尊復說苾芻當知我於色味已審尋思諸有於色或已起味或今起味我以正慧審見審知彼以色味受爲緣故數復於色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色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나아가 나는 법의 맛[法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법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그들은 법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7_a_10L乃至我於法味已審尋思諸有於法或已起味或今起味我以正慧審見審知彼以法味受爲緣故數復於法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法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是名受緣
또 『육처경』에서 세존께서는 또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빛깔[色]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빛깔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빛깔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빛깔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빛깔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빛깔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빛깔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024_1177_a_16L復次『六處經』中世尊又說苾芻當若諸色中都無味者有情不應於色起染以諸色中非都無味是故有情於色起染彼以色味受爲緣故復於色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色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024_1177_b_02L나아가 만일 모든 법(法)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법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법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법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따르며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7_a_21L至若諸法中都無味者有情不應於法起染以諸法中非都無味是故有情於法起染彼以法味受爲緣故復於法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法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名受緣愛
또 부처님께서 대명이첩비(大名離帖毘)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대명(大名)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물질[色]이 한결같이 그것은 괴로운[苦] 것일 뿐이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고 즐거운 것이 따르지도 않으며 즐거운 느낌[樂受]이나 기쁜 느낌[喜受]이 얽혀 붙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마땅히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물질 가운데에 탐욕을 일으키거나 애염(愛染)을 일으키거나 번뇌에 얽매임이 없을 것이니라.
024_1177_b_04L復次佛爲大名離呫毘說大名當知若色一向是苦非樂非樂所隨非樂喜受之所纏執應無有情爲求樂故於諸色中起貪起染煩惱纏縛
대명아, 물질은 한결같이 괴로운 것만이 아니어서 그것에는 역시 즐겁기도 하고 즐거운 것이 따르기도 하며 즐거운 느낌이나 기쁜 느낌이 얽혀 붙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물질 가운데서 탐욕을 일으키고 애염을 일으키며 번뇌에 얽매임이 있는 것이요 그들은 물질의 맛[色味]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수순하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키느니라.
024_1177_b_08L大名以色非一向苦彼亦是樂是樂所隨是樂喜受之所纏執故有有情爲求樂故於諸色中起貪起染煩惱纏縛彼以色味受爲緣故數復於色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色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나아가 만일 의식[識]이 한결같이 그것은 괴로운 것일 뿐이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고 즐거운 것이 따르지도 않으며 즐거운 느낌이나 기쁜 느낌이 얽혀 붙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마땅히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의식 가운데서 탐욕을 일으키거나 애염을 일으키거나 번뇌에 얽매임이 없을 것이니라.
024_1177_b_13L乃至若識一向是苦非樂非樂所隨非樂喜受之所纏執應無有情爲求樂故於諸色中起貪起染煩惱纏縛
대명아, 의식은 한결같이 괴로운 것만이 아니어서 그것에는 역시 즐겁기도 하고 즐거운 것이 따르기도 하며 즐거운 느낌이나 기쁜 느낌이 얽혀 붙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의식 가운데서 탐욕을 일으키고 애염을 일으키며 번뇌에 얽매임이 있는 것이요 그들은 의식의 맛[識味]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키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7_b_16L大名以識非一向苦彼亦是樂是樂所隨是樂喜受之所纏執故有有情爲求樂故於諸識中起貪起染煩惱纏縛彼以識味受爲緣故數復於識隨順而住由隨順故數復於識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是名受緣愛
024_1177_c_02L또 『만월경(滿月經)』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물질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즐거움이 일어나고 기쁨이 생기는 것을 바로 물질의 맛[色味]이라 하는데, 그들은 물질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024_1177_b_22L次『滿月經』中佛作是說苾芻當知爲緣故起樂生喜是名色味彼以色受爲緣故數復於色隨順而住隨順故數復於色起貪等貪執藏防護堅著愛染
나아가 의식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즐거움이 일어나고 기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의식의 맛[識味]이라 하는데, 그들은 의식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7_c_04L乃至識爲緣故起樂生是名識味彼以識味受爲緣故復於識隨順而住由隨順故起貪等執藏防護堅著愛染是名受緣愛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부처님은 경희(慶喜)에게 말씀하셨다.
“애욕[愛]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구함[求]이 있고 구함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얻음[得]이 있으며 얻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쌓임[集]이 있고 쌓임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집착[著]이 있으며 집착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탐냄[貪]이 있고 탐냄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간탐[慳]이 있으며 간탐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섭수(攝受)가 있고 섭수를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방호(防護)가 있나니, 방호로 인하여 짐짓 칼과 무기 등을 가지고서 싸우고 다투고 아첨하고 속이면서 한량없는 종류의 악한 법[惡不善法]을 내느니라.”
024_1177_c_07L復次『大因緣經』中佛告慶喜愛爲緣故求求爲緣故得得爲緣故集集爲緣故著著爲緣故貪貪爲緣故慳爲緣故攝受攝受爲緣故防護因防護故執持刀仗鬪訟諍競諂詐虛誑生無量種惡不善法
부처님께서 다시 경희에게 말씀하셨다.
“칼과 무기 등을 가지고서 싸우고 다투고 아첨하고 속이면서 한량없는 종류의 악한 법을 내는 것은 모두 방호(防護)가 인(因)이 되고 방호가 연(緣)이 되어서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이니, 방호가 만일 없다면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
아난타(阿難陀)가 말하였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024_1177_c_13L佛告慶喜執持刀仗鬪訟諍競諂詐虛誑生無量種惡不善法皆因防護防護爲緣有如是事防護若無有此事不阿難陁曰不也世尊
“그러므로 칼과 무기 등을 가지는 일은 바로 방호(防護)를 유서(由緖)를 삼고 방호를 원인[因]으로 삼으며 방호를 쌓임[集]으로 삼고 방호를 반연[緣]으로 삼아서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은 방호는 섭수(攝受)가 인(因)이 되고 섭수를 연(緣)으로 삼아 방호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섭수가 만일 없다면 방호가 생기게 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024_1177_c_17L是故執持刀仗等事防護爲由緖防護爲因防護爲集防護爲緣而得生起如是防護因於攝受受爲緣而有防護攝受若無有防護不也世尊
“그러므로 방호는 섭수를 유서로 삼고 섭수를 원인으로 삼으며 섭수를 쌓임으로 삼고 섭수를 반연으로 삼아 생기게 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와 같은 모든 구함[求]은 모두 애욕[愛]이 인이 되고 애욕을 연으로 삼으면서 모든 구함이 있는 것이니, 이 애욕이 만일 없다면 구함이 있게 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024_1177_c_21L是故防護攝受爲由緖攝受爲因攝受爲集攝受爲緣而得生廣說乃至如是諸求皆因於愛愛爲緣故而有諸求此愛若無爲有求不世尊
024_1178_a_02L“그러므로 모든 구함은 애욕을 유서로 삼고 애욕을 원인으로 삼으며 애욕을 쌓임으로 삼고 애욕을 반연으로 삼아서 생기게 되느니라.
경희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애욕[愛]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욕애(欲愛)요, 둘째는 유애(有愛)이니라. 이 두 가지 애욕은 느낌[受]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이니, 느낌이 만일 없다면 두 가지 애욕도 또한 없느니라.”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애욕은 느낌을 반연[緣]으로 삼고 느낌을 의지[依]로 삼으며 느낌을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수(受)를 반연하여 애(愛)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8_a_02L是故諸求愛爲由緖愛爲其因愛爲其集愛爲其緣而得生起慶喜當知愛有二種一者欲愛二者有愛此二種愛依受而有受若無者二愛亦無是名受緣愛如是諸愛受爲緣受爲依受爲建立故起等起生等生聚集出現故名受緣愛
어떤 것을 ‘애(愛)를 반연하여 취(取)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른바 그것이 처음 생긴 것을 애라 하고 그 애가 더욱 왕성해진 자리를 달리 말하여 취라 한다.
그것은 또 어떤 것인가? 마치 어떤 사람이 모든 욕심의 경계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관찰하여 욕탐(欲貪)의 번뇌[纏]를 일으키고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욱 발달한 것[增上]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猛利]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圓滿]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愛)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取)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8_a_08L云何愛緣取謂彼初生說名爲愛增盛位轉名爲取此復如何謂如有於諸欲境繫心觀察起欲貪纏從此纏復起餘纏增上轉增上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愛後所起纏轉名爲取是名愛緣
또 어떤 사람이 모든 형상[色] 있는 경계나 혹은 형상 없는[無色] 경계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관찰하면서 색탐(色貪)의 번뇌[纏]나 혹은 무색탐(無色貪)의 번뇌를 일으키고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욱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앞에서 일으켰던 번뇌를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8_a_15L復如有一於諸色境或無色境心觀察起色貪纏或無色貪纏彼從此纏復起餘纏增上轉增上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後所起纏轉名爲取是名愛緣取
024_1178_b_02L또 『험갱경(險坑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너희 필추들을 위하여 널리 펴 설하여서 모든 온(蘊)의 법요(法要)를 간택하나니, 이른바 4념주(念住)와 4정승(正勝)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등각지(等覺支)와 8지성도(支聖道)이니라.
이와 같이 널리 연설하면서 모든 온의 법요를 간택할 적에 어리석은 생각을 품은 어떤 사람은 내가 설한 것에 대하여 날카롭게 신애(信愛)와 공경(恭敬)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그는 더디게 무상루진(無上漏盡)을 증득할 것이요 다시 어느 한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은 내가 설한 것에 대하여 날카롭게 신애와 공경에 머무르므로 그는 속히 위없는 누진을 증득할 것이니라.
024_1178_a_19L復次『險坑經』中佛作是說吾爲汝等諸苾芻衆宣說簡擇諸薀法要謂四念四正勝四神足五根五力七等覺八支聖道如是宣說簡擇諸薀正法要時而有一類懷愚癡者於我所說不住猛利信愛恭敬彼遲證得無上漏盡復有一類懷聰睿者於我所說能住猛利信愛恭敬彼速證得無上漏盡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설한 색온(色蘊)의 법 가운데서 나[我]를 평등하게 따라 관[等隨觀]한다. 이 능히 관하는 행[能觀行]은 무엇으로써 반연[緣]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集]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無明觸]으로 생긴 모든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아 애욕[愛]을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긴 행[所生行]은 그것으로써 반연을 삼고 그것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그것의 종류로서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024_1178_b_05L復有一類於我所說色薀法中等隨觀我此能觀行以誰爲緣誰爲集是誰種類從誰而生謂無明觸所生諸受爲緣生愛此所生行以彼爲緣用彼爲集是彼種類從彼而
이 능히 생긴[能生] 욕망은 무엇으로써 반연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으로 생긴 모든 느낌[受]이니, 이것으로 생긴 욕망은 느낌으로써 반연을 삼고 느낌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느낌의 종류로서 느낌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이 능히 생긴 느낌은 무엇으로부터 반연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觸]이니, 이것으로 생긴 느낌은 접촉으로써 반연을 삼고 접촉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접촉의 종류로서 접촉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024_1178_b_10L此能生愛以誰爲緣用誰爲集誰種類從誰而生謂無明觸所生諸此所生愛以受爲緣用受爲集受種類從受而生此能生受以誰爲用誰爲集是誰種類從誰而生無明觸此所生受以觸爲緣用觸爲是觸種類從觸而生
이 능히 생긴 접촉은 무엇으로써 반연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6처(處)이니, 이것으로 생긴 접촉은 6처로써 반연을 삼고 6처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6처의 종류로서 6처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이와 같은 6처는 무상하고 유위(有爲)이며 이것은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가지 연[衆緣]으로부터 생긴 것이니, 이와 같은 접촉[觸]ㆍ느낌[受]ㆍ애욕[愛]과 능히 관하는 행[能觀行]도 역시 무상하고 유위이며 이것은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가지 연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고 하셨다.
024_1178_b_16L此能生觸誰爲緣用誰爲集是誰種類從誰而謂六處此所生觸以六處爲緣六處爲集是六處種類從六處而生如是六處無常有爲是所造作從衆緣生如是觸能觀行亦無常有是所造作從衆緣生
024_1178_c_02L이 물질[色]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면서 나라고 집작하는 것은 바로 유신견(有身見)으로 현재 일으키는 번뇌[纏]이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한 것이니, 앞에서 일으킨 번뇌를 애욕[愛]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取)라 한다.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기다’고 한다.
024_1178_b_22L此等隨觀色爲我者是有身見現所起纏彼從此復起餘纏增上轉增上猛利轉猛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愛後所起纏轉名爲取是名愛緣取
어떤 이는 물질에 대하여 나[我]를 평등하게 따라 관[等隨觀]하지 않고 나에게 모든 물질이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고, 어떤 이는 나에게 모든 물질이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물질 그것은 내 것[我所]이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며, 어떤 이는 물질이 내 것임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나는 물질 안에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
어떤 이는 나는 물질 안에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 바로 나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고, 어떤 이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바로 나임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나에게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며, 어떤 이는 나에게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은 내 것이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
024_1178_c_03L不於色等隨觀我而等隨觀我有諸色有不等隨觀我有諸色而等隨觀色是我所有不等隨觀色是我所而等隨觀我在色中有不等隨觀我在色中而等隨觀受想行識爲我有不等隨觀受想行識爲我而等隨觀我有受想行識有不等隨觀我有受想行識而等隨觀受想行識是我所
어떤 이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내 것임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나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 안에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고, 어떤 이는 나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 안에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의혹(疑惑)을 일으키며, 어떤 이는 의혹을 일으키지 않고 유견(有見:常見)과 무유견(無有見:斷見)을 일으키고, 어떤 이는 유견과 무유견을 일으키지 않고 아만(我慢)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을 평등하게 따라 관함으로 말미암아 아만을 일으킨다.
024_1178_c_11L不等隨觀受想行識是我所而等隨觀我在受想行識中有不等隨觀我在受想行識中而起疑惑有不起疑惑而起有見無有見有不起有見有見而不離我慢故由等隨觀我及我所而起我慢
이 아만의 행(行)은 무엇으로써 반연[緣]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集]을 삼으며 이것이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觸]으로 생긴 모든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아 애욕[愛]을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긴 행(行)은 그것으로써 반연을 삼고 그것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이 그것의 종류로서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와 같은 6처(處)는 무상하고 유위(有爲)이며 이것은 바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연[衆緣]으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하셨다.
024_1178_c_17L此我慢行以誰爲緣用誰爲集是誰種類從誰而生謂無明觸所生諸受爲緣生愛此所生行以彼爲緣用彼爲集是彼種類從彼而生廣說乃至如是六處無常有爲是所造作從衆緣生
024_1179_a_02L이와 같이 촉ㆍ수ㆍ애ㆍ아만ㆍ행 또한 무상이고 유위이며 바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연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은 아만은 곧 유신견(有身見)으로 일으킨 만(慢)의 번뇌[纏]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말하여 애(愛)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取)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8_c_22L如是觸亦無常有爲是所造作從衆緣如是我慢是有身見所起慢纏從此纏復起餘纏增上轉增上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愛後所起纏轉名爲取是名愛緣
또 ‘세간은 항상 있다’거나 혹은 ‘무상하다’거나 혹은 ‘항상 있기도 하고 또한 무상하기도 하다’거나 혹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기도 하고, ‘세간은 끝이 있다’거나 혹은 ‘끝이 없다’거나 혹은 ‘끝이 있기도 하고 또한 끝이 없기도 하다’거나 혹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기도 하며, ‘목숨[命]은 곧 몸이다’라고 고집하기도 하고 ‘목숨은 몸과 다르다’고 고집하기도 하며, ‘여래가 돌아가신 뒤에 계신다’거나 혹은 ‘계시지 않는다’거나 혹은 ‘계시기도 하고 또한 계시지 않기도 하다’거나 혹은 ‘계시는 것도 아니고 계시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
024_1179_a_05L復次有執世閒常或無常或亦常亦無常或非常非無常執世閒有邊或無邊或亦有邊亦無邊或非有邊非無邊執命者卽身執命者異身執如來死後是有或非有或亦有亦非有或非有非非有
이것은 모두가 변집견(邊執見)으로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런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욱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말하여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9_a_10L皆是邊執見現所起彼從此纏復起餘纏增上轉增上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愛後所起纏轉名爲取是名愛緣取
또 ‘세존은 여래(如來)ㆍ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이 아니며 나아가 천인사(天人師)가 아니다’라고 고집하거나 ‘부처님의 바른 법은 착한 말씀[善說]도, 현재 보는[現見] 것도 아니며 나아가 지혜로운 이가 안으로 증하는[智者內證]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거나 ‘부처님의 제자는 묘행(妙行)을 두루 갖춘 이도 아니고 나아가 수법행(隨法行)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거나 혹은 ‘괴로움[苦]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集]도 없으며 괴로움의 소멸[滅]도 없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도 없다’라고 고집하거나 혹은 ‘온갖 행[一切行]은 무상도 아니요 온갖 법[一切法]은 무아(無我)도 아니며 열반은 적정(寂靜)도 아니다’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
024_1179_a_14L復次有執世尊非如來等覺乃至非天人師執佛正法非善現見乃至非智者內證執佛弟子非具足妙行乃至非隨法行或執無苦無集無滅無道或執無一切行無無一切法無我無涅槃寂靜
이런 것은 모두가 사견(邪見)으로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세간은 항상[常]한 것이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미혹한 것이고 잘못이다’라고 하거나 혹은 ‘이것은 바로 무상한 것이요 나아가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 계신 것도 아니고 계시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미혹한 것이요 잘못이다’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
024_1179_a_19L皆是邪見現所起纏彼從此纏復起餘纏增上轉增上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愛後所起纏名爲取是名愛緣取復次有執世閒是常此實餘迷謬或是無常乃至如來死後非有非非有此實餘迷謬
024_1179_b_02L이런 것은 모두가 견취(見取)로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한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계취(戒取)를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금취(禁取)를 일으키기도 하며 혹은 계금취(戒禁取)를 일으키기도 하나니 이른바 ‘이 계와 이 금과 이 계금은 청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며 벗어나게 하여 고락(苦樂)을 초월하며 고락을 초월하는 곳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024_1179_b_02L是見取現所起纏彼從此纏復起餘增上轉增上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愛後所起纏轉名爲取是名愛緣取復次有起戒或起禁取或起戒禁取謂此戒此禁此戒禁能淸淨能解脫能出離超苦樂至超苦樂處
이런 것은 모두가 계금취(戒禁取)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키면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세존께 대해서도 ‘그 분이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신가,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아니신가?’ 나아가 ‘그 분이 천인사이신가, 천인사가 아니신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024_1179_b_09L皆是戒禁取現所起纏彼從此纏復起餘纏增上轉增上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纏說名爲愛後所起纏轉名爲取是名愛緣取復次有於世尊而起猶爲是如來應正等覺爲非如來應正等覺乃至爲是天人師爲非天人
부처님의 바른 법에 대해서도 ‘이 법은 착한 말씀이고 현재 보는 것인가, 착한 말씀이나 현재 보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이것을 지혜로운 이는 안으로 증하는 것인가, 지혜로운 이가 안으로 증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부처님의 제자에 대해서도 ‘이 분들은 묘행을 두루 갖춘 것인가, 묘행을 두루 갖춘 것이 아닌가?’ 나아가 ‘이들은 수법행(隨法行)인가, 수법행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024_1179_b_16L於佛正法而起猶預爲是善說現爲非善說現見乃至爲是智者內爲非智者內證於佛弟子而起猶爲是具足妙行爲非具足妙行至爲是隨法行爲非隨法行
4성제(聖諦)에 대해서도 ‘이것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이 아닌가?’ 나아가 ‘이것이 도(道)인가, 도가 아닌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3법인(法印)에 대해서도 ‘온갖 행은 무상한 것인가, 온갖 행은 무상하지 않은 것인가? 온갖 법은 나가 없는[無我] 것인가, 온갖 법은 나 없는 것이 아닌가? 열반은 고요한 것인가, 열반은 고요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024_1179_b_20L於四聖諦而起猶預爲是苦爲非苦乃至爲是道爲非道於三法印而起猶預一切行旡常爲非一切行無常爲一切法無我爲非一切法無我爲涅槃寂靜爲非涅槃寂靜
024_1179_c_02L이런 것을 모두는 의심[疑]으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에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9_c_02L此皆是疑現所起纏彼從此纏復起餘纏增上轉增猛利轉猛利圓滿轉圓滿前所起說名爲愛後所起纏轉名爲取名愛緣取
또 온갖 4취(取)는 모두가 애욕[愛]으로써 반연을 삼고 애욕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애욕의 종류로서 애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 취인가? 첫째는 욕취(欲取)요, 둘째는 견취(見取)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요,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
어떤 것을 욕취(欲取)라 하는가? 이른바 욕계에 매인[欲界繫] 모든 소견[見]을 제외한 그 밖의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이니, 이것을 바로 욕취라 한다.
024_1179_c_06L復次一切四取皆以愛爲用愛爲集是愛種類從愛而生等四取欲取見取戒禁取我語取云何欲取謂欲界繫除諸見餘結縛隨眠隨煩惱纏是名欲取
어떤 것을 견취(見取)라 하는가? 이른바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 소견을 바로 견취라 한다.
어떤 것을 계금취(戒禁取)라 하는가? 이른바 어떤 사람이 계(戒)를 취하고 금(禁)을 취하며 계금(戒禁)을 취해서 ‘청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며 벗어나게 하면서 고락(苦樂)을 초월할 수 있고 고락을 초월하는 데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계금취라 한다.
어떤 것을 아어취(我語取)라 하는가? 이른바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매인 모든 소견을 제외한 그 밖의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이니, 이것을 바로 아어취라 한다.
024_1179_c_10L何見取謂有身見邊執見邪見見取如是四見是名見取云何戒禁取有一類取戒取禁取戒禁爲能淸淨能解脫能出離能超苦樂至超苦樂是名戒禁取云何我語取謂色無色界繫除諸見餘結縛隨眠隨煩惱是名我語取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취(取)는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 반연은 이른바 애(愛)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전혀 애가 없다면 모든 취가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취는 모두가 애로써 그의 반연으로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취는 애를 반연으로 삼고 애를 의지[依]로 삼으며 애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79_c_17L復次『大因緣經』中尊者慶喜問佛諸取爲有緣不佛言此緣謂愛廣說乃至若全無愛可施設有諸取不不也世尊是故慶諸取皆以愛爲其緣是名愛緣取如是諸取愛爲緣愛爲依愛爲建立起等起生等生聚集出現故名愛緣取
024_1180_a_02L어떤 것을 ‘취(取)에 반연하여 유(有)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른바 취를 반연으로 삼아서 많은 유를 시설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부처님은 혹은 삼계(三界)와 5온(蘊)을 말씀하여 유라 하기도 하고, 혹은 후유(後有)를 받게 하는 업(業)을 말씀하여 유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생분오온(生分五蘊)을 말씀하여 유라 하기도 한다.
어떤 것을 ‘삼계와 5온을 말씀하여 유라 한다’고 하는가? 마치 3유(有)를 말하는 것과 같나니, 이른바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이다.
024_1179_c_24L云何取緣有謂取爲緣施設多有佛或說三界五薀名有或說能感後有業名有或說生分五薀名有云何說三界五薀名有如說三有謂欲有色有無色有
어떤 것을 ‘후유를 받게 하는 업을 말씀하여 유라 한다’고 하는가? 마치 세존께서 아난타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업으로서 후유(後有)를 받게 할 수 있는 것이면 유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생분오온(生分五蘊)을 말씀하여 유라 한다’고 하는가? 마치 세존께서 파륵루나(頗勒窶那)에게 말씀하시되 “식(識)을 음식으로 삼기 때문에 후유가 생긴다”고 하신 것과 같다.
024_1180_a_06L云何說能感後有業名如世尊告阿難陁言若業能感後有名有云何說生分五薀名有如世尊告頗勒寠那識爲食故後有生起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유(有)는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것이 반연하는 것은 이른바 취(取)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전혀 취가 없다면 모든 유가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유는 모두가 취로써 그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취를 반연하여 유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80_a_09L復次『大因緣經』中尊者慶喜問佛有爲有緣不佛言有緣此緣謂取說乃至若全無取爲可施設有諸有不也世尊是故慶喜諸有皆以取爲其緣是名取緣有如是諸有取爲取爲依取爲建立故起等起生等聚集出現故名取緣有
이와 같이 모든 유(有)는 취를 반연으로 삼고 취를 의지[依]로 삼으며 취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취를 반연하여 유가 있다’고 한다.
024_1180_a_16L云何有緣生謂有一類由貪瞋癡纏縛心故造身語意三種惡行此三惡說名業有由此因緣身壞命終墮於地獄於彼諸生等生趣入出現界得處得諸薀生命根起說名生此生緣有故起是名有緣生如說地傍生鬼界應知亦爾
어떤 것을 ‘유(有)를 반연하여 생(生)이 있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마음이 얽매었기 때문에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악행(惡行)을 짓게 된다. 이 세 가지 악행을 업유(業有)라 하나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生] 평등하게 나며[等生], 나아가 들고[趣入] 출현(出現)하며, 온(蘊)을 얻고 계(界)를 얻으며, 처(處)를 얻고 모든 온(蘊)이 생기며, 목숨[命根]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고 한다. 이 생은 곧 유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있다’고 한다.
지옥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방생(傍生)과 귀계(鬼界)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024_1180_a_23L復有一類人趣樂繫心希求彼作是念願我當生人趣同分與諸人衆同受快樂此希求造能感人趣身語意妙行三妙行說名業有由此因緣身壞命終生於人趣衆同分中於彼諸生等生乃至命根起說名生此生緣有故是名有緣生
024_1180_b_02L또 어떤 사람은 사람의 세계[人趣]의 즐거움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장차 사람 세계의 동분(同分)에 태어나서 모든 사람들과 같이 쾌락을 받게 해 주소서’라고 하며, 이런 희구로 인하여 사람의 세계를 받을 수 있는 몸과 말과 뜻의 묘행(妙行)을 짓게 된다.
이 세 가지 묘행을 말하여 업유(業有)라 하며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사람의 세계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한다. 이 생은 유(有)에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있다’고 한다.
024_1180_b_07L如說人趣四大王衆天乃至他化自在天應知亦爾復有一類於梵衆天繫心希求彼作是念願我當生梵衆天衆同分中因此希求勤脩加行離欲惡不善法有尋有離生喜樂初靜慮具足住
사람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 내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범중천(梵衆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저는 장차 범중천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하소서’라고 한다. 이런 희구로 인하여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아서 욕(欲)과 악한 법을 여의고 거친 생각[尋]도 있고 세밀한 생각[伺]도 있으며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이 있으면서 초정려(初靜慮)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
024_1180_b_12L於此定諸身律儀語律儀命淸淨說名業由此因緣身壞命終生梵衆天衆同分中於彼諸生等生乃至命根起說名生此生緣有故起是名有緣生如說梵衆天梵輔天乃至廣果天應知亦爾
이 선정 속에서 모든 몸의 율의[身律儀]ㆍ말의 율의[語律儀]ㆍ생활의 청정함[命淸淨]을 바로 업유라 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범중천의 동분 속에 나게 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이라 한다. 이 생은 유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범중천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범보천(梵輔天) 내지 광과천(廣果天)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024_1180_b_18L復有一類於無想天繫心希彼作是念願我當生無想天衆同分中因此希求勤脩加行思惟諸想是麤苦障思惟無想是靜妙離由此思惟能滅諸想安住無想彼諸想滅住無想時名無想定入此定時諸身律儀語律儀命淸淨說名業有
또 어떤 사람은 무상천(無想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장차 무상천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하소서’라고 한다. 이런 희구로 인하여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모든 생각[想]은 거칠고[麤] 괴롭고[苦] 막힌다[障]’고 사유(思惟)하고 ‘생각이 없는[無想] 것은 공하고[空] 고요하고[靜] 미묘하고[妙]ㆍ여읜다[離]’고 사유한다.
이런 사유로 말미암아 모든 생각을 없애고 생각이 없는 데에 편안히 머무르며 그는 모든 생각을 없애고 생각이 없는 데에 머무를 때를 무상정(無想定)이라 하며 이 선정에 들어간 때의 몸의 율의와 말의 율의와 생활의 청정함을 바로 업유라 한다.
024_1180_b_24L由此因緣身壞命終生無想天衆同分中於彼諸生等生乃至命根起說名生此生緣有故起是名有緣生復有一於空無邊處天繫心希求彼作是願我當生空無邊處天衆同分中因此希求勤脩加行超諸色想滅有對想不思惟種種想入無邊空空無邊處具足住
024_1180_c_02L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무상천의 동분 속에 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한다. 이 생은 유(有)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장차 공무변처천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해 주소서’라고 한다.
이런 희구로 인하여 가행을 부지런히 닦아서 모든 물질에 대한 생각[色想]을 초월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없애며 갖가지 생각[種種想]을 사유하지 않고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 공무변처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
024_1180_c_09L於此定中諸思等思現前等思已思當思思性思類造心意說名業有由此因緣身壞命終生空無邊處衆同分中於彼諸生等生乃至命根起說名生此生緣有故起是名有緣生如說空無邊處乃至非想非非想處應知亦爾
이 선정 속에서의 모든 사(思)와 평등한 사[等思]와 현전의 평등한 사[現前等思]와 이사(已思)와 당사(當思)와 사의 성품[思性]과 사의 종류[思類]와 마음과 뜻에서 짓는 업[造心意業]을 바로 업유라 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공무변처천의 동분 속에 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한다. 이 생은 유(有)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공무변처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024_1180_c_15L復次『大因緣經』中尊者慶喜問佛諸生爲有緣不佛言有緣此緣謂有廣說乃至若無業有魚鳥蛇蝎那伽藥叉部多食香諸天人等無足二足多足異類彼彼有情於彼彼聚生等生等爲得有不不也世尊若全無有爲可施設有諸生不不也世尊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생(生)은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 반연은 이른바 유(有)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업유(業有)가 없다면 고기ㆍ새ㆍ배ㆍ전갈ㆍ나가(那伽)ㆍ약차(藥叉)ㆍ부다(部多)ㆍ식향(食香)과 모든 하늘ㆍ사람들이며 발이 없는 것, 두 발, 여러 발의 다른 종류의 여러 유정들이 저 여러 무더기에 나고 평등하게 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전혀 유(有)가 없다면 모든 생(生)이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024_1180_c_22L是故慶喜諸生皆以有爲其緣是名有緣生如是諸生爲緣有爲依有爲建立故起等起等生聚集出現故名有緣生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생(生)은 모두가 유(有)로써 그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생은 유를 반연으로 삼고 유를 의지[依]로 삼으며 유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024_1181_a_02L云何生緣老死謂彼彼有情卽於彼彼有情聚中諸生等生趣入出現界得處得諸薀生命根起說名生髮落髮白皮緩面皺身曲背僂喘息逾急扶扙而行肢體班黑衰退闇鈍根熟變壞諸行故敗朽壞羸損說名彼彼有情卽於彼彼諸有情聚轉壞沒退失別離壽暖識滅命根不諸薀破壞夭喪殞逝說名死如是老死緣生故起是名生緣老死
024_1181_a_02L어떤 것을 ‘생(生)을 반연하여 노사(老死)가 생긴다’고 하는가? 저 여러 유정들이 곧 저 여러 유정들의 무더기 속에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들고 출현하며, 온(蘊)을 얻고 계(界)를 얻으며, 처(處)를 얻고 모든 온(蘊)이 생기며,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하고 머리칼이 빠지고 머리칼이 희게 되며 가죽이 느슨해지고 얼굴이 쭈그러지며 몸이 굽고 허리가 굽어지며 숨을 헐떡거리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온몸에 반점과 검은 점이 생기고 쇠약해지고 암둔해지며 감관이 원숙해지면서 변하고 파괴되며 모든 행이 오래되어 헐고 무너지고 파리해지는 것을 노(老)라 하며, 저 여러 유정들이 곧 저 여러 유정의 무더기에서 이전하고 파괴되고 물러나고 이별하게 되며 수명[壽]과 따뜻함[暖]과 의식[識]이 소멸하고 목숨[命根]이 옮아가며 모든 온(蘊)이 파괴되고 일찍 죽거나 늙어서 죽는 것을 바로 사(死)라 한다. 이와 같은 노사는 생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곧 ‘생을 반연하여 노사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81_a_12L復次『大因緣經』中尊者慶喜問佛老死爲有緣不佛言有緣此緣謂生廣說乃至若無有生魚鳥蛇蝎那伽藥叉食香諸天人等無足二足多足異彼彼有情於彼彼聚所有老死得有不不也世尊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노사(老死)는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 반연은 이른바 생(生)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생(生)이 없다면 고기ㆍ새ㆍ뱀ㆍ전갈ㆍ나가ㆍ약차ㆍ부다ㆍ식향과 모든 하늘ㆍ사람들이며 발이 없는 것, 두 발, 여러 발의 다른 종류의 저 여러 유정들이 저 여러 무더기에서 있게 되는 노사(老死)가 있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024_1181_a_18L若全無生爲可施設有老死不不也世尊是故慶喜死皆以生爲其緣是名生緣老死是老死生爲緣生爲依生爲建立故起等起生等生聚集出現故名生緣老死
“만일 전혀 생이 없다면 노사가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노사는 모두가 생으로써 그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생을 반연하여 노사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노사는 생을 반연으로 삼고 생을 의지[依]로 삼으며 생을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생을 반연하여 노사가 생긴다’고 한다.
024_1181_a_23L云何發生愁歎苦憂擾惱謂有一類或因父母兄弟姊妹師友死故或因親族滅亡都盡或因財位一切喪失便發自身猛利剛獷切心奪命辛楚苦受彼於爾時心熱等熱內熱遍熱便發於愁已愁當愁心中愁箭說名
024_1181_b_02L어떤 것을 ‘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요뇌(擾惱)가 발생한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혹은 부모ㆍ형제ㆍ자매나 스승이나 벗의 죽음으로 인하여, 혹은 친족이 멸망하고 모두 없어짐으로 인하여, 혹은 재산이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됨으로 인하여 곧 자기의 몸에 날카롭고 사납고 심장이 끊어지고 목숨을 잃을 듯한 모진 괴로운 느낌[苦受]이 일어나는데, 그는 그때에 마음이 애타고 평등하게 애타며 속으로 애타고 두루 애타면서 곧 근심[愁]하고 이미 근심하였고 장차 근심할 것이며 마음속에서 근심의 화살이 일어나는 것을 바로 수(愁)라고 한다.
024_1181_b_07L復有一類或因父母兄弟姊妹師友死等便發自身猛利剛獷切心奪命辛楚苦受彼於爾時心熱等熱熱遍熱便發於愁已愁當愁心中愁由此緣故而傷歎言苦哉苦哉父我母廣說乃至我財我位如何一旦忽至於此其中所有傷怨言詞種種語業說名歎
또 어떤 사람이 혹은 부모ㆍ형제ㆍ자매나 스승이나 벗의 죽음 등으로 인하여 곧 자기의 몸에 날카롭고 매우 사납게 심장이 끊어지고 목숨을 잃는 듯한 모진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는 그때에 마음이 애타고 평등하게 애타며 속으로 애타고 두루 애타면서 곧 근심하고 이미 근심하였고 장차 근심할 것이며 마음속에서 근심의 화살이 일어나게 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괴롭고도 괴롭구나. 나의 아버님과 나의 어머님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나의 재산과 나의 지위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고 한다. 그러할 때에 생기는 모두를 슬퍼해서 원망하는 언사나 갖가지 어업(語業)을 바로 탄(歎)이라 한다.
024_1181_b_14L五識相應不平等受說名苦意識相應不平等受說名憂諸心擾惱已擾惱當擾惱擾惱性惱類說名擾惱於老死位發生如是種種愁歎苦憂擾惱云何如是便集純大苦薀謂於如是老死位中積集一類大災大撗具過患衆苦薀聚
5식(識)과 상응하는 평등하지 않은 느낌[不平等受]을 말하여 고(苦)라 한다.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평등하지 않은 느낌을 바로 우(愚)라고 한다.
모든 마음이 어지럽고[擾] 괴로운[惱] 것과 이미 어지럽고 괴로웠던 것과 장차 어지럽고 괴로울 것과 어지럽고 괴로운 성품[擾惱性]과 어지럽고 괴로운 종류를 말하여 요뇌(擾惱)라 한다.
노사(老死)의 자리에서 이와 같은 갖가지 수ㆍ탄ㆍ고ㆍ우ㆍ요뇌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이와 같이 해서 곧 순전하고 큰 고온[純大苦蘊]이 쌓인다’고 하는가? 이른바 이와 같은 노사(老死)의 자리 속에서 한 종류의 큰 재앙[大災], 큰 횡액 거리[大橫具], 큰 근심더미[大過患衆], 고온 덩어리[苦蘊聚]가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024_1181_b_21L復次無明苦薀爲緣起行苦薀行苦薀爲緣起識苦薀苦薀爲緣起名色苦薀名色苦薀爲起六處苦薀六處苦薀爲緣起觸苦薀觸苦薀爲緣起受苦薀受苦薀爲緣起愛苦薀愛苦薀爲緣起取苦取苦薀爲緣起有苦薀有苦薀爲起生苦薀生苦薀爲緣起老死苦由老死故發生種種愁歎苦憂擾惱苦薀故摠說言如是便集純大苦薀
024_1181_c_02L또 무명(無明)의 고온(苦蘊)을 반연으로 하여 행(行)의 고온이 일어나고, 행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식(識)의 고온이 일어나며, 식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명색(名色)의 고온이 일어나고, 명색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6처(處)의 고온이 일어나며, 6처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촉(觸)의 고온이 일어나고, 촉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수(受)의 고온이 일어나며, 수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애(愛)의 고온이 일어나고, 애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취(取)의 고온이 일어나며, 취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유(有)의 고온이 일어나고, 유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생(生)의 고온이 일어나며, 생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노사(老死)의 고온이 일어나고, 이 노사로 말미암아 갖가지 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요뇌(擾惱)의 고온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통틀어 ‘이와 같이 하면서 곧 순전하고 큰 고온이 쌓인다’고 말한다.
024_1181_c_08L說一切有部法薀足論卷第十二


법온족론 후서(後序)
024_1181_c_09L法薀足論後序


정매(精邁)지음송성수 번역
024_1181_c_10L沙門 靖邁 製


법온족론은 아비달마의 권여(權輿:始作)요 일체유부(一切有部)의 홍원(洪源)이다. 최상의 계위(階位)인 등각(等覺)이 집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신비한 발이 되는 것으로서 마하목건련이 지은 것이다.
육통(六通:六神通)의 오묘한 지혜를 밝게 나타내었고 삼달(三達: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달함)의 밝은 지혜를 분석하였으니 대천세계에 금고(金鼓)를 친 것이요 백억 중생에게 옥라(玉螺)를 불어준 것이다. 법장의 바다에서 기묘하고 볼 만한 것을 취해온 것이요 교법의 산에서 훌륭한 보배를 모아놓은 것으로서 천경(天鏡)을 항상 달아놓은 것과 같으며 법당(法幢)을 영원히 세운 것과 같다. 많은 삿된 무리들로 하여금 변두리에서 바라보다가 멈추게 하고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자 이 논을 지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백여 년이 된 지금 오분(五分)을 거듭 열어준 것이요 십여 개의 다른 논리를 풀어 밝힌 것이다.
024_1181_c_11L法薀足論者蓋阿毘達磨之權輿切有部之洪源也無上等覺入室之神足摩訶目乾連之所製矣鏡六通之妙慧晢三達之智明桴金鼓於大聲玉螺於百億摘藏海之奇玩敎山之勝珍欲使天鏡常懸法幢永衆邪息蕃蘺之望諸子騁遊戲之而爲此論也是以佛泥越後百有餘年疊啓五分之殊解開二九之異
024_1182_a_02L비록 각각 연성(連城)의 귀함을 내세워 모두 승(乘)을 비추는 보배라고 일컫지만 오직 일체 유부만이 우뚝하여 멀리 빼어났으니 마치 묘고산(妙高山)이 큰 바다 속에 우뚝 솟아있는 듯하며 밝은 달이 많은 별 속에 유난히 밝은 것과 같으니 어찌 그 근본이 크고 기반이 영원하다 하지 않으리.
지극함이 마치 여덟 가지 건도[度]가 발지(發智)의 도량에서 무휘(騖徽)하는 것과 같으며, 오백 나한이 넓은 설법의 동산에 치예(馳譽)한 것과 같다. 이것은 모두 연파(涓波)를 취하고 이 편옥(片玉)을 나누어서 마침내 군부(群部)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 천구(天衢)에 접하여 발걸음을 폈으니 이는 곧 곤륜산 꼭대기에 오른 자는 반드시 모든 산에 대하여 겸손하고[培塿], 넓은 바다에서 노닌 자는 또한 작은 여울물까지도 수용[塘]함이 진실로 그러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024_1181_c_20L雖各擅連城之貴俱稱照乘之珍一切有部卓乎迥秀若妙高之處宏猶朗月之冠衆星者豈不以本弘基永者歟至如八種揵度鶩徽於發智之場五百應眞馳譽於廣說之苑斯皆挹此涓波分斯片玉遂得駕群部而高蹈接天衢而布武是知登崑閬者必培塿於衆山游溟渤者亦㘭塘於群澍諒其然矣
더구나 이치에 순정(順正)해서 의심을 분석하고 진종(眞宗)을 드러내서 의혹을 밝힘에 있어서는 이 이륜(彛倫)을 거울삼고 이 홍범(洪範)을 귀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기덕(耆德) 바수(婆藪)로 하여금 우리의 여러 어진 이에게 굴복하게 하고 상좌(上坐) 유종(幽宗)이 큰 진리를 이기지 못함을 볼 수 있다. 제명을 아비달마라 한 것은 이장(二藏)을 형상해서 특수한 것을 간택했기 때문이요 일체 유부(有部)라는 것은 십칠을 대(對)하여 다름[異]을 표(標)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법온족론은 이 논의 뛰어난 이름을 나타낸 것이니 능히 자성(自性)의 궤범(軌範)을 가졌으므로 법이라 칭하였고 법이 쌓이고 모아졌으므로 온이라 하였다. 이 논은 종법(宗法)을 거두고 스물한 가지 항목을 모아놓았는데 모두 대법(對法)으로 더불어 의지하였으므로 이름하여 족(足)이라 하였다.
당 현경(顯慶) 4년(659) 9월 14일 조서를 받들어 대자은사(大慈恩寺) 홍법원(弘法苑)에서 번역을 마치다.
대자은사 사문 석광필(釋光筆)이 정매(靖邁)에게 받아서 문장을 꾸몄다.
024_1182_a_06L矧乎順正理以析疑顯眞宗以副惑莫不鏡此彝倫鑑斯洪範故使耆德婆藪屈我衆賢上坐幽宗見負弘致者也題稱阿毘達磨者形二藏以簡殊也一切有部對十七以標異也法薀足者顯此論之勝名也能持自性軌範稱法有積集崇聚爲薀此論攸宗法聚三皆與對法爲依故目之爲足三藏玄奘法師以 皇唐顯慶四年九月十四日奉 詔於大慈恩寺弘法苑譯訖大慈恩寺沙門釋光筆受靖邁飾文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